황산리 보고서(수정)

Page 7

5. 마을의 문화유산 1) 효자각과 정려비(孝子閣과 旌閭碑) : 안건(竹山 安氏 安建)의 효행을 기리는 정자인데, 본시 효도는 인륜의 근본으로 특히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의 효에 대한 인식은 높아서 멀리 삼국시대부터 대를 이어 장려하고 실행해 왔으며 충효가 높아 임금의 인정을 받으면 가문의 영광을 넘어 마을과 고을의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안건은 1747년 영조임금 때,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무송(撫松) 안방성(安邦成)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엄한 훈도 하에 평소 부모에 극진히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도 각별 했다. 모친이 득병하여 위독한 상태에 놓이자 세 동생과 함께 돌아가면서 손가락의 피를 먹여드림 으로서 생명을 회생 시켰다. 그 뒤 자식들의 간절한 염원도 보람 없이 결국 돌아가시니 고 수면 말치에 산소를 모시고 십리 먼 곳임을 아랑곳 하지 않고 삭망(朔望)으로 제례를 다 하 였다. 먼 길이라서 묘소 가는 길옆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항상 쉬어가곤 했는데 현지사람들이 쉬어가는 그 곳을 성휴(省休, 살피고 쉬는 곳)라 불렀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 는 호랑이와 표범이 매일 번갈아서 묘소를 지키고 있었다하니 공의 효행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고, 부친에 대한 효행도 모친의 경우와 같이 지극정성을 다 하였다고 전한다. 공은 나 라에 충성심도 높아서 1800년(경신) 정조임금의 국상이 나자 동산에 단(壇)을 설치하고 북 쪽을 바라보며 슬피 곡을 한 뒤 삭망(朔望) 3년제(祭)를 지냈다. 사람들은 공이 설치한 단 (壇)을 일러 망곡단(望哭壇)이라 불렀고 황산등의 최고 봉우리에 단(壇)의 유적과 내용을 새 긴 비가 서있다. 공은 1830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서거(逝去)후 57년이 지나, 전라도 유생들 이 임금에게 공의 효행을 알리고 예조에서 확인 하였으며 전라관찰사도 상소로서 알린바, 고종이 효자, 충신, 열녀, 의사를 배출한 가문에 성은을 내리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통운대 부 호조좌랑(通訓大夫 戶曹佐郞)을 추서 하였다. 공의 충효는 일시적으로 이행된 것이 아니 라 여러 선조들의 효행을 이어 가르침 받은 바 크고, 공의 어진 품성과 충성심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본보기로, 그의 후손들도 이에 따라 효성을 실천하는 가문이 되었음은 '뿌리가 깊 으면 멀리 흐른다'는 근심유원(根深流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2) 오괴정(五槐亭) : 오괴정은 예촌 앞을 흐르는 예지천(禮智川)반석위에 세워진 정자다. 노령산맥 골짜기마다에서 시작된 물이 모여 고수천(古水川)을 만들고 사동 앞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과 고수천의 지류가 합하여 예지천을 이룬다. 냇가에 큰 반석(盤石)이 있고 주변 의 경관이 수려하여 죽산 안씨 선조들이 유람하던 장소였으며 지리가(地理家)들이 '인걸이 사는 영험한 곳'이라 인정할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죽산인 사과공

자전(司果公 子詮)이 터를 잡고 처사공(處士公)의 형제 흥(興)과 식(植)이

느티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느티나무를 심은 까닭은 은행나무와 더불어 오래 사는 나무 이고 빨리 자라며 뿌리가 무성하고 줄기와 잎이 밀집되어 그늘은 시원하고 바람은 맑아, 마 을 어귀에 많이 심는 정자나무로써 억센 줄기는 강한 의지를, 고루 퍼진 가지는 조화된 질 서를, 단정한 잎들은 예의를 나타내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옛사람 왕진(王晉)이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놓고 후손 중에 삼정승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고사도 있음으로 후손들이 재관 (財官)의 덕을 입기를 바라고 나무가 의미하는 의지, 질서, 예의, 의리 등을 잘 지키며 살기

- 7 -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