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리 보고서(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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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孝)가 살아 있는 황산리 고창문화연구회 유점동 1. 황산리 마을의 유래 황산은 마한시대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모이부곡(牟伊部曲)에 속하였고, 백제시대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지역에 속한 마을이었다. 신라 경덕왕 16년부터 고창현에 속하였 다. 황산리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가의 특정한 역을 부담하는 행정구역인 남조향지역이었 다. 조선초기까지 남조향(南調鄕)은 고사면(古沙面)으로 바뀌면서 황산리도 고사면에 속하였 다. 1914년 이전까지 황산은 고창현 고사면에 속했다. 1914년 이후 고창현과 무장현 및 흥 덕현의 세 현을 합쳐 고창군으로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고창현 고사면과 수곡면을 합쳐 고창군 고수면이 되었다. 이때 황산리(黃山里)는 고사면의 예지리(禮支里), 황산리(黃山里)와 수곡면(水谷面)의 평지리(平支里) 각 일부를 합쳐 황산리로 통합하여 확대되었다. 황산리(黃 山里)의 법정리명은 황산리(黃山里)이며, 황산리에 속한 행정리로는 황산(黃山), 평촌(평촌), 예촌(禮村) 등이 있다. 자연취락으로는 황산, 평촌, 공판장, 예지터, 서당동(書堂洞), 황상 등 이 있다.

2. 황산리의 자연환경과 지명 황산리는 원래 고사면(古沙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부군폐합령에 의하여 고수면 8개 법 정리 중, 평촌과 예지터를 포함 황산리가 되었다. 고창의 주산(主山)이면서 노령산맥의 맹주 (盟主)인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려온 신산 (神山)이다. 옛 이름은 반등산 또는 방등산이였으나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방장산으로 개명되 었다. 방장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북쪽으로 고부 두승산까지, 남쪽으로는 해남 두륜산까지 이어진다. 남쪽으로 흐르던 산줄기는 중간 중간 작은 산줄기들을 뱉어 내는데 문수산(옛 이 름 鷲嶺山)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서북쪽으로 기복을 계속하면서 십 여리로 뻗어 만든 곳이 황산(황산등, 황산치)이다. 노령산맥 산줄기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고수천으로 모이고 고수천은 평촌 앞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와 사동 쪽 여러 골짜기에서 모인 물과 합수하여 예지천를 이룬다. 예 지천은 예지터 앞으로 흘러 고수천과 합류하고 탑거리를 지나 황산 앞들의 충적지를 만들고 주진천에 합수하여 흐른다. 누렁산(黃山) : 황산리에 있는 산의 명칭. 등거리 : 예지 앞 등성이 아래 있는 논. 마평 : 모릿들. 모릿들 : 마평이라 부르며 예지 앞에 있는 넓은 들. 백일홍도(百日紅島) : 황산 아래 있는 들. 전에는 섬이어서 죄인들이 귀양살이를 하였음. 서당동(書堂洞) : 황산 뒤에 있는 마을. 서당이 있었다고 함. 예지(禮智) : 황산 남쪽에 있는 마을. 풍암(豊岩) : 황산 서쪽 줄기 아래에 있는 큰 바위. 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음. 풍암정(豊岩亭) : 풍암 옆에 있는 정자. 조선조 말엽 무송당(撫松堂) 안방성(安邦成)을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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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그의 후손이 세움.

3. 황산리의 자연취락 1) 황산 방장산에서 뻗은 산줄기는 남쪽으로 향하여 달려가다가 문수산 (鷲嶺山)을 지나면서 여러 산줄기로 갈라져 발달하였다. 이곳에서 여러 갈래 나누어진 작은 산줄기들이 다시 발달하다 가 그 중 하나의 줄기가 황산(黃山峙 또는 黃山등)을 이룬다. 마을이름이 황산인 이유는 산 에 나무를 심어도 병충해 등으로 잘 살지 않아 민둥산인 독산(禿山)으로 변해버려 황산(黃 山)이라 했다는 유래가 있으나, 산에 있는 큰 바위 풍암(豊巖)의 이름을 지은 안처사(安處 士) 무송공(撫松公)에 대한 조선 고종조의 기록에 의하면, 부모의 산소를 산등어리 동서에 모시고 소나무 씨를 구해 심어서 정성으로 잘 가꾸어 청산(靑山)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황산에 처음 거주를 시작한 사람들은 남평 문씨였으나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 았다. 안초(安招)가 전라관찰사 시절 참관으로 있던 고창윤씨(모양윤씨) 윤호(尹瑚)를 찾아 고창을 방문했다. 그 후 윤호와 친분을 맺게 되고 이를 계기로 윤씨의 딸을 자부로 맞게 된 다. 관련 기록이 서로 달라 정확한 입향 년도는 알 수 없으나 죽산 안씨 기록에 의하면 1481년(성종12) 아들 자전이 처가인 고창과 연고를 맺어 처음 예지터에 자리 잡아 살다가 고수 연동과 해리 칠곡 및 고수 황산으로 자리를 옮김 것으로 되어 있다. 죽산 안씨(竹山安 氏)가 입촌 하면서 안씨(安氏) 문중이 융성하여 자손이 많이 늘어나 죽산 안씨 집성촌 화 된 황산은 원래 50~60호의 제법 큰 마을였으나,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대다수 농촌마을 의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노인들만 남은 40여 호 의 작은 마을이 되어 버렸다. 황산은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300m 위치한다. 2) 예촌 예촌의 본래 이름은 예지터(禮智)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할 당시 예지의 지혜지(智)자가 가지지(支)자로 바뀐 것은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의 일환이라 사료되고, 1990년에 이 르러서는 행정리명 '예지리'와 중복 된다는 이유로 예촌(禮村)으로 개정되었다. 이는 담당자 가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마을이름까지 바뀌게 되는 결과로 나타난 듯하다. 예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행정기관에서나 사용할 뿐 마을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타지인들까지도 예지 터라 부르고 있다. 예(禮)의 사전적 의미는 풍속이나 습관으로 형성된 행위의 준칙, 도덕, 규범 등 각종예절이 라 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예(禮)자의 시(示)는 신 (神)에서, 풍(豊)은 그릇에 곡식을 담은모양이라 풀이하여 신에 대한 제사의례였음을 알려준 다. 그리고 [예기(禮記)]에 "예란 친한 것과 소원한 것을 정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해결하며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히는 것"이라 기록하여 보다 넓은 의미로 발전 되었다. 지(智) 또한 오상(五常, 仁義禮智信) 중의 한 가지 덕목으로 사상가마다 해석이 분 분하지만 슬기와 지혜를 상징하는 선비의식의 바탕이다. 이와 같이 마을이름에까지 예와 지 를 붙인 예지터 사람들은 예절 속의 사회규범을 잘 지키고 슬기롭고 지혜로운 행동을 바랐 던 선비정신의 이상향으로 마을을 만들고자 했고, 마을 자체도 유교를 숭상하는 가운데 예 를 기리고 행하는 전통의 터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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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터는 성종조에 죽산 안씨(竹山安氏)가 설기한 마을이라 전해지고 있어도 마을에 고인 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형성여부는 알 수 없을지라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 아온 곳임을 짐작케 한다. 마을의 위치는 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300m거리에 있지만 예 지터에 속한 공판동에 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3) 평촌 평촌이란 마을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 되었는 지도 밝혀진바 없다. 이름 그대로 평안한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있고, 구 면사무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막집 마당에 수령이 수 백 년인 팽나무가 서있었던 것으 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마을의 위치는 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500m거리에 있다. 4) 문화마을 농어촌생활환경개선사업은 정부의 농촌근대화정책과 새마을운동 환경개선사업 등으로 이미 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농업은 국내외적으로 큰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도농 간의 발전 격차에 의한 농촌인구의 과도한 도시이동 내지는 농촌지역의 과소화, 노령 화가 심화되어 농촌경제의 쇠퇴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UR협상은 농사물시장의 개방을 불 가피하게 만들었으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농업의 생산성재고는 발등의 불처럼 시급한 과 제로 떠올랐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1990년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1994년 [농어촌정비 법]으로 일원화 될 때까지 농어촌지역의 개발사업을 추진할 법적 근거는 마련되었다. 문화마을은 이러한 농어촌지역 생활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기 시작 했고, 고수의 문화마을도 1996년6월에 평촌과 예지터 사이 들(野)을 개발하여 33,000㎡의 주택지를 마 련, 56가구의 대지와 도로, 상하수도, 마을회관, 놀이터 등의 편의시설을 18억 원의 사업비 를 투입 조성하여 오지의 농민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 문화마을 조성은 어찌된 일인지 1회 성으로 그치고 말아 아쉬움이 남는다. 마을의 위치는 예지터와 평촌의 사이에 위치해 있고 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500m거리에 있다. 5) 공판동 '농산물공동판매제도'(共賣制)란 조선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 가운데 소작료이외의 나머지 모두를 지정된 장소에서만 팔 것을 강요한 제도로써 일본인 자본가들이 싸게 사 갈 수 있도 록 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공매제는 수매, 관리, 도정을 위한 공판장(共販場)을 필요로 하게 되고 운영을 위한 관리인도 있어야 했다. 원래 예촌의 공판동은 몇 가구가 살고 있었 을 뿐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으나 그 곳은 만석꾼이 나는 자리라, 전하여 인구(人口)에 회자 (膾炙)되었는바, 그 말을 증명하듯 많은 벼 가마니와 곡물들이 쌓이는 공판장이 들어섰다. 일제치하에서 관리를 맡은 이면우(李冕雨)씨가 관리를 위한 집을 지으려 기초를 닦고 골재 를 올린 뒤 상량을 올리려고 하면 밤마다 도깨비가 나타나 상량을 들어서 내팽개치는 통에 완성할 수가 없어서 소피도 뿌리고 매물죽도 끓여 대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도깨비를 달랜 뒤 완공하였다고 한다. 일제와 한국전쟁의 격변 속에서 공판제도는 지속되었고 공판장도 더불어 존속되어 오다가 1967년 농업협동조합이 만들어져 그 관리가 넘겨지기 전까지 숱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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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다만 공동판매가 아니라 정부에서 수매한 농산물을 저장, 도정하는 기능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공판동이란 마을은 공판장에서 품삯 일을 하러 모여든 사람들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농협 과 우체국이 들어서고 면사무소가 이전되는 등 명실공이 만석꾼의 터가 되었음은 물론 행정 의 중심지가 되었고 현재는 예지터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3. 마을을 빛낸 사람들-황산리 출신만 기록해주세요. 1) 황산 (1) 안자전(安子詮 1461~1489) 호조참판 안초(安초)의 아들 육형제 중 막내이고 휘는 자전(子詮)이며 시조 방준(邦俊)의 18세손이다. 아버지 안초가 전라관찰사를 지낼 때 인연을 맺은 판관, 지평 등의 관직을 지 낸 고창윤씨(모양윤씨) 윤호(尹瑚)의 사위(壻郞)가 되어 성종조에 고수면 예지터에 입향, 아 들 삼형제를 두었다. 공은 지조가 굳고 청렴결백하며 학문이 깊었지만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 은거 유유자적하였으나 조정에서 그의 학문을 인정하고 행실을 높이 평가하여 사과(司果)의 직을 내렸다. 예지터에서 면학(勉學)에 몰두하던 공은 1489년(성종20)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니 후손들이 애석해 했다. 큰아들 열(悅)은 예지터와 황산에, 둘째아들 회(恢)는 해리 칠곡 등지에, 셋째아들 성(性)은 연동과 무장에 각각 세거하여 오늘에 이른 다. (2) 안정(安貞) 안초(安招)의 후손으로 고창의 입향조(入鄕祖) 자전(子詮)의 증손이다. 용모가 크고 용기가 뛰어난 공은 뜻한바 있어 붓을 던지고 무예와 병서에 심취하여 무과에 급제하게 되고 선전 관과 의금부도사를 거쳐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움으로서 품계(品階)가 선 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하인 십 여 명을 데리고 먼저 의병을 이르킨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을 찾아가 함께 싸우게 되었는데, 병법에 능한 공은 고경 명부대의 제반군무를 맡아보면서 열심히 적과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칠 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왜적이 물러간 뒤 시신을 거두어 하나의 무덤 을 만드니 이를 금산 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이라 하며, 공의 아들이 혼령을 불러 황산등에 장례하고 위폐는 벽산사에 모셔져 있다. (벽산사지 참조) 울산인 경암 김노수(蔚山人 敬菴 金魯洙)가 공의 절개와 의리를 담은 글이 있어 기록한다. 저 금산 골짜기를 우러러보니 순절한 금산 칠백의총이 높이 솟아있구나 살았을 때 이미 의리가 같았으니 죽은 뒤 같은 한 무덤 속에 서로 같이 있는 것이 마땅 하도다 공은 이미 영혼을 불러서 옛날 고향산으로 돌아가 장례 모시였네 늠름한 의(義)와 열(烈)은 해와 별같이 선명하도다 비석에 이 사실을 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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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천만년의 긴 세월에 아름답게 그 이름을 전하고자 함이라. (3) 안진(安晋 1586~1637) 의사 안진(義士 安晋)은 죽산 안씨 시조 방준(邦俊)의 23세손이고 고창에 터를 잡은 사과 공 자전의 5세손이며 취령처사 복(鷲嶺處士 福)의 손자이다. 자는 퇴보(退甫)이며 호는 송강 (松崗)인데 1586년(선조19)에 태어나 1637년 5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일찍이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하고 동기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기개가 높 고 절개가 굳음은 물론 의분을 참지 못하는 대장부였다. 1799년에 기록된 고정헌(高廷憲)의 [호남절의록]에 의하면, 안진은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성제 신응순(省齋 辛應純) 등과 함께 각 마을에 격문을 보내 동지들을 모으 고 군량미를 운반 하는 등 의거에 적극 참여 하였다. 1627년(인조5) 이괄의 잔당들의 꼬드 김과 명(明)과의 전쟁 관계 등을 고려한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던 '정묘호란'에서는 사계 김 장생(沙溪 金長生)에게 발탁되어 유철견, 김여성 등과 힘을 합해 싸웠으나 '강화 화의'가 성 립되자 왕세자를 호종하다 여산에서 돌아 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서 조정이 굴 욕적으로 항복 하는 것을 본 안진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문불출하며 울분을 삼켰다. 공의 지조와 절개를 숭모(崇慕)한 고을 유림들이 뜻을 모아 '벽산사'에 위폐를 모시고 매년 향사 를 시행하고 있다. (4) 그 외의 고창 죽산인(竹山人) 가) 안초(安招, 1420~1483)~세종실록, 성종실록 자는 자이(自邇), 지고성군사(知高城郡事) 계인(系仁)의 아들이다. 1441(세종23) 생원시에 합격한 뒤 144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박사(博士)를 거쳐 1456년(세조2)에 이조좌랑으로 좌익원종공신 (左翼原從功臣)이 되고 이조정랑, 경기도암행어사를 역임했다. 1457년 전라감찰사로 잠깐 외직에 머물다가 이듬해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었고 1476년(성종7) 행안동부 사, 동지중추부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전라감찰사로 있을 때 아들 자전의 배필을 고창윤씨(모양윤씨) 집안에서 맞아들여 자전이 고창에 세거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나) 안순서(安順瑞, 1511~1556) 조선중기 직언 상소가로 유명하다. 순서(順瑞)는 초명이고 본명은 중부(重富), 자는 천여(天 與), 호는 취암(就庵)이다. 중종6년 고수면 연동에서 영문(泳文)의 아들로 태어난 공은 파조 (派祖) 안자전(安子詮)이 고창윤씨(모양윤씨) 윤호(尹瑚)의 서랑(壻郞)이 되어 고창과 인연을 맺은 후에 자리를 잡은 죽산인이다. 공은 안자전의 삼남 안성(安惺)의 현손으로써 성품이 영민하고 기질이 강개했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문명이 높았으나 사상과 철학을 학 문에서 찾지 못하고 고민하며 방황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무장 덕산리(德山里)에 우거를 마련한 뒤 정자를 짓고 도학(道學)을 강론함과 아울러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명종11년(1556) 조정에서 직언을 널리 구하자 그는 상소를 통해 당시의 사회적 폐습을 극 언으로 통렬히 비판했다. 권력의 유지를 위한 정쟁과 무고의 결과를 예로 들면서 "모두 죄 없이 죽고 가산을 몰수당하는 것을 어찌 하늘이 모르겠는가. 잘못한자는 반드시 천벌을 받 을 것이며 근래에 별고가 잦은 재변도 이런 폐단이다."라고 일갈했다. 공의 충언은 간인(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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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들의 빌미가 되었으니 감사가 그를 가두고 죄상을 엮어 상소를 올림에, 역적으로 몰려 어명으로 나포해서 국문을 거쳐 참형을 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해 가솔들은 풍지박산을 면치 못했다. 선조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제청으로 유관복관 될시 공도 신원이 복원되었으 며 공의 행거는 고창출신 선비 중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수록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공의 직계후손들은 무장 덕산, 공음 송운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다) 안중섭(安중섭, 1808~1883) 조선 후기의 유생으로 자는 순화(舜華) 호는 연상(蓮上)이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다. 1880년(고종17)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로 급제한, 학행으로 이름 이 알려진 선비다. 유고 연상집(蓮上集)은 1905년(광무9) 8권3책 목활자로 간행되었는데 송 사 기우만(松沙 寄宇萬)이 서문을 쓰고 문인 정규삼(鄭奎三)이 발문을 썼다. (5) 외손 김영원(外孫 金永元) 김영원 교수는 1920년 신림면 자포리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황산 외가에 서 생활했다. 일찍 향학열에 눈뜬 그는 약관에도 미치지 못한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구주 복강고등학교(九州福岡高等學校)를 졸업하고 구주제국대학 법학부(九州帝國大學 法學部)에서 수학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귀국 후 조선대학교 법학과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56 년 조선대학교 사학부 교수로 자리 잡았다. 그 뒤 조선대학교 박물관장, 도서관장, 국사연구 원 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호남지방의 실증사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세계 최초 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이순신장군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나대용이 만들었다는 주장을 처 음 주장함으로서 사학계에 충격을 준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는 명실공이 향토사학의 권위자 로서

제자들과 모든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는 훌륭한 사학자이며 황산과 관련된 인물이

다. 2) 예지터 (1) 김노수(金魯洙 1878~1956)) 김노수는 일제강점기 한학자요 역사학자로서 자는 광언(光彦), 호는 경암(敬菴)이며 본관 은 울산이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에서 태어났으나 7세 때 고창 고수로 이사하였고 만 년에는 부안(扶安)으로 옮겨 살았다. 고수 평촌으로 이사 온 경암의 아버지는 평천정사(平川 精舍)지어 아들이 공부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였고, 처음 계서 유락연(溪西 柳樂淵)에 게 사사받은 뒤,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瑄)의 문인이 되어 일 년에 3개월씩 7년간 옥천 스 승에게 가서 유숙하면서 수학 하였다. 그런 다음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도서관에서 한국사(韓國史)를 연구하였는데 성리학(性理學)이 주전공이다. 경암은 시문에 능하고 배일사상이 투철하여 을사조약과 경술국치에 시문으로 통분을 달랬 었고, 이와 같은 배일사상은 일제에 의하여 8개월간의 옥고를 치루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경암집(敬菴集) 등 10여 책 42 여권에 이른다. 경암은 평촌에서 예지터로 옮겨 살면서 각 문중의 비석, 건물의 현판, 정(亭)과 누각(樓閣) 의 게시물 등에 글을 지어 써주었다. 지금도 각 문중의 중요기록에 경암의 글이 많이 남아 있으며, 예지터 옛 거주지에 경암의 일대를 담은 비석이 서있다. 2) 김이수(金二洙) ~ 자료 김영자에게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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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을의 문화유산 1) 효자각과 정려비(孝子閣과 旌閭碑) : 안건(竹山 安氏 安建)의 효행을 기리는 정자인데, 본시 효도는 인륜의 근본으로 특히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의 효에 대한 인식은 높아서 멀리 삼국시대부터 대를 이어 장려하고 실행해 왔으며 충효가 높아 임금의 인정을 받으면 가문의 영광을 넘어 마을과 고을의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안건은 1747년 영조임금 때,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무송(撫松) 안방성(安邦成)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엄한 훈도 하에 평소 부모에 극진히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도 각별 했다. 모친이 득병하여 위독한 상태에 놓이자 세 동생과 함께 돌아가면서 손가락의 피를 먹여드림 으로서 생명을 회생 시켰다. 그 뒤 자식들의 간절한 염원도 보람 없이 결국 돌아가시니 고 수면 말치에 산소를 모시고 십리 먼 곳임을 아랑곳 하지 않고 삭망(朔望)으로 제례를 다 하 였다. 먼 길이라서 묘소 가는 길옆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항상 쉬어가곤 했는데 현지사람들이 쉬어가는 그 곳을 성휴(省休, 살피고 쉬는 곳)라 불렀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 는 호랑이와 표범이 매일 번갈아서 묘소를 지키고 있었다하니 공의 효행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고, 부친에 대한 효행도 모친의 경우와 같이 지극정성을 다 하였다고 전한다. 공은 나 라에 충성심도 높아서 1800년(경신) 정조임금의 국상이 나자 동산에 단(壇)을 설치하고 북 쪽을 바라보며 슬피 곡을 한 뒤 삭망(朔望) 3년제(祭)를 지냈다. 사람들은 공이 설치한 단 (壇)을 일러 망곡단(望哭壇)이라 불렀고 황산등의 최고 봉우리에 단(壇)의 유적과 내용을 새 긴 비가 서있다. 공은 1830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서거(逝去)후 57년이 지나, 전라도 유생들 이 임금에게 공의 효행을 알리고 예조에서 확인 하였으며 전라관찰사도 상소로서 알린바, 고종이 효자, 충신, 열녀, 의사를 배출한 가문에 성은을 내리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통운대 부 호조좌랑(通訓大夫 戶曹佐郞)을 추서 하였다. 공의 충효는 일시적으로 이행된 것이 아니 라 여러 선조들의 효행을 이어 가르침 받은 바 크고, 공의 어진 품성과 충성심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본보기로, 그의 후손들도 이에 따라 효성을 실천하는 가문이 되었음은 '뿌리가 깊 으면 멀리 흐른다'는 근심유원(根深流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2) 오괴정(五槐亭) : 오괴정은 예촌 앞을 흐르는 예지천(禮智川)반석위에 세워진 정자다. 노령산맥 골짜기마다에서 시작된 물이 모여 고수천(古水川)을 만들고 사동 앞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과 고수천의 지류가 합하여 예지천을 이룬다. 냇가에 큰 반석(盤石)이 있고 주변 의 경관이 수려하여 죽산 안씨 선조들이 유람하던 장소였으며 지리가(地理家)들이 '인걸이 사는 영험한 곳'이라 인정할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죽산인 사과공

자전(司果公 子詮)이 터를 잡고 처사공(處士公)의 형제 흥(興)과 식(植)이

느티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느티나무를 심은 까닭은 은행나무와 더불어 오래 사는 나무 이고 빨리 자라며 뿌리가 무성하고 줄기와 잎이 밀집되어 그늘은 시원하고 바람은 맑아, 마 을 어귀에 많이 심는 정자나무로써 억센 줄기는 강한 의지를, 고루 퍼진 가지는 조화된 질 서를, 단정한 잎들은 예의를 나타내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옛사람 왕진(王晉)이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놓고 후손 중에 삼정승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고사도 있음으로 후손들이 재관 (財官)의 덕을 입기를 바라고 나무가 의미하는 의지, 질서, 예의, 의리 등을 잘 지키며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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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모양현지(牟陽縣誌)에 의하면 나무가 심어진 100년 뒤 국태(國台)형제가 정자를 지었는데 선조의 뜻을 받들어 이름을 오괴정(五槐亭)이라 하였다. 방장산과 문수산(취령산) 등의 산봉 우리와 앞으로 보이는 증산봉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고 예지천의 맑은 물이 뜰에 이르러 작은 못이 되어 잠깐 멈췄다 다시 흐른다. 울창한 숲 사이에 서있는 늠름한 느티나무는 원 래 다섯 그루였으나 세월의 부침에 따라 두 그루는 죽고 세 그루만 남아있어도 여전히 사철 내내 아름다운 경관은 퇴색되지 않고 청량한 기운까지 가득하니 가히 선경이라 해도 좋은 곳이다. 오괴정에 팔경(八景)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방장제월(方丈霽月) ; 비 갠 뒤 방장산의 달은 밝은데 취령숙운(鷲嶺宿雲) ; 푸른 취령산(문수산)에 구름이 잔다 증봉청람(甑峰晴嵐) ; 증산 봉우리에 산바람 맑고 고성낙조(古城落照) ; 고성 산줄기위에 노을이 진다 평교목적(平郊牧笛) ; 넓은 들판에 목동의 피리소리 한사원종(寒寺遠鐘) ; 외로운 절간에서 쇠종이 운다 사야도화(四野稻花) ; 앞 들 가득히 나락 꽃 피는구나 천가취인(天家炊絪) ;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 피어오른다 본래 세워진 정자는 풍화에 무너지고 1571년(신미, 선조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다.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고즈넉이 서있는 오괴정은 선비들의 시연장소로, 마을의 모임장소로, 또는 풍류와 휴식을 위한 중요한 장소로, 오백년 풍상을 이고 여기에 자리 잡 았다. 이곳에서 놀다보면 세월의 흐름도 나이를 먹어감도 잊은 채 세사의 시름을 떨칠 수 있다. 가는 세월을 누가 잡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하천정비로 인해 예지천의 물길이 바뀌 어 연못의 물은 마르고 연(蓮)도 죽었으며 못 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섬에 백일홍만 혼자남 아 꽃을 피운다. 광산인(光山人) 춘강 김영태(春岡 金永台)가 오괴정의 풍광을 노래한 시가 있어 소개한다. 오괴정 운(五槐亭 韻) 小樓獨持立天基 좁은 땅에 작은 누각 뛰어나게 지었네 石上靑槐栽幾時 돌위에 느티나무 심은 지 몇 해나 되는고 三伏盛炎誰說酷 삼복더위 혹심하다 누가 말했던가 五株蕃樹己多枝 다섯 느티나무 가지 많이 늘어졌네 半畝淸潭一鑑水 반묘의 맑은 못 거울같이 물이 맑고 千年明月又長期 천년의 밝은 달은 더욱 오래 비치네 世世相傳后孫事 대대로 서로전함은 후손의 일이려니 誠心守重莫爲遲 정성으로 지켜서 오래오래 유지하세 3) 풍암정(豊巖亭) : 황산은 노령산맥에서 뻗어 온 산줄기가 끊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龍 이 머리를 쳐드는 것 같은 지세다. 용의 이마 부위에 해당하는 위치에 3~4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큰 바위가 용의 관처럼 이마부분에 존재한다. 서남쪽으로 여러 산봉우리가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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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고수천과 예지천이 흐르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들 가운데 작은 언덕은 섬처럼 보이 는데 목 백일홍이 심어져 있어 풍광과 전망이 아름답다. 이 바위의 이름을 지은 분은 안처사 무송(安處士 撫松)으로 평소 부모에 효심이 정심하였 던 안처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뒷산에 묘소를 마련한 뒤 묘소관리에 힘을 쏟았다. 그는 묘소주변 산에 소나무 씨를 뿌리고 정성으로 가꾸어 푸르게 하였으나 고종17년 병진(丙辰) 봄에 가뭄이 극심하고 송충이까지 극성을 부려서 소나무가 죽어가므로, 안처사가 안타까움 에 나무를 보듬고 울고 있자, 갈 까마귀 떼가 나타나 송충이를 잡아먹었다는 설화는 안처사 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 했다 할 것이다. 안처사는 자주 성묘하면서 길목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휴식하고 사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위에 앉아 앞에 넓은 들이 있고 멀리 산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맑은 시내가 흐 르는 풍경을 보면서 풍년을 기원하게 되었고, 들의 풍요로 집안을 살찌우고 산의 정기를 받 아 문장을 창성케 함을 염원하게 되어 바위의 이름을 풍암(豊巖)이라 이름 하였다. 바위의 생성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불변성과 영원성을 봐서 이 바위도 우주의 생성 과 더불어 생긴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는바, 수 천 만년을 지나도록 이름이 없다가 안처사 에 의하여 이름이 지여진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증손 홍수(弘壽)와 고손 석필(錫馝)이 철종13년 임술(壬戌), 바위 동쪽 편에 정자를 지어 풍암정(豊巖亭)이라 이름 하고 기문(記文)을 새겨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으니 안처사의 효심은 대를 이어 내려와 아들과 손자, 증손, 고손 모두 효심이 깊었다 한다. 정자를 짓고 뿌듯한 마음과 선조를 추모 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망실 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고손 석필이 자작한 시가 있다 뫼 뿌리는 층층이 높으나 그 그친 곳은 저 바라보이는 남쪽이로세 바위마다 전해오는 발자취를 우러러 여러 가지로 상상하여 보는구나 소나무에 무송(撫松)이라 걸고 남겨보려고 그 소나무 자꾸만 어루만져보네 풍암(豊巖)이라는 높은 이름과 함께 야담(野談)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네 8월에 피는 벼꽃은 가을비 내릴 때 노랗게 익고 마을의 노적가리는 저녁노을을 머금었네 풍년가의 한 곡조는 강호에서 멀리 신나게 들려오는데 나라를 근심하는 평생의 뜻을 기억하리라 4) 만회당(晩悔堂) : 만회당은 죽산인 안영선(安영善 1824~19030)과 관련이 있다. 안영 선의 자는 명서(明瑞) 호는 만회(晩悔)다. 학문과 휴식을 위하고 만년(晩年)을 자연과 벗하 고자 그의 가옥 오리감나무 옆에 공부방과 대청을 초가로 마련하였다. 세월이 흐르며 원래 의 초가가 쓰러지니 집은 헐어내고 목재만 추려 감나무 밑에 보관하였다. 그 후 195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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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들이 뜻을 모아 망북단(望北壇)이 있는 봉우리 아래 되도록 옛 모습을 살려 기와로 다시 지었다.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인가와 떨어져 찾는 사람들이 없이 한산하자 1989년 후손들이 다시 모금하여 마을 입구 풍암정 아래에 대청마루 2칸과 기와지붕을 얹어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 다. 만회당 아래 길가에 시정을 짓고 만회당은 양반들의 휴식장소로, 아래 시정은 일꾼들의 휴식장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동 건물에 망북단기(望北壇記)가 게시되어 있다. 망북단 또는 망곡단(望北壇 望哭壇)은 효자 안건(安建)의 충심을 나타내는 장소로서 황산의 최고봉에 유 적이 남아 있고 이를 기리는 비가 있다. 5) 추원재(追遠齋) : 입향조 사과공의 제례를 위해 공이 입향 한지 500여년이 흐른 뒤 1941년(계미) 사과공의 묘소 아래 지어졌다. 세월의 부침에 따라 비바람에 제실의 일부가 부서지고 무너져 대종중의 결의를 거쳐, 2000년 재실을 중수하고 돌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추모비를 세우는 등 7000여 만 원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인 공사를 시행함으로서 면모가 일 신 되었다. 이곳에서 매년 음 10월5일 시제행사를 치룬다. 6) 고인돌 유적 : 예지터의 고인돌은 원래 12기였던 것이 문화재 관리소홀로지금은 예지 터마을 뒤쪽에 1개, 오괴정 뒤 구릉의 정상 대나무 숲속에 2기가 남아 있다. 7) 탑거리 : 탑 거리는 황산마을과 옛 공판장 사이에 있는 곳으로 탑이 있고 느티나무 두 그루와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지만 탑은 없어지고 느티나무와 죽어가는 자귀나무만 남아 있 다. 풍수학에서 기(氣)의 흐름이 약하거나 액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비보(裨輔)를 설 치하는 경우가 있다. 비보는 주로 탑이나 거북과 해태 등의 석조물을 만들어 새우기도 하고 나무를 심기도 하며 숲을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 중 어느 한 곳이 약하면 비보를 새워 보충하는 것으로 황산 앞들의 탑과 나무도 그런 비보(裨輔)의 역 할일 것으로 믿어진다. 정월 보름 마을 굿을 칠 때도 탑 거리에서 성근지게 액막이 굿판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 한다 하겠다. 황산은 시내를 끼고 있지 않아 대부분을 우물 에 의존함에 따라, 옛 시절 탑거리의 맑은 물은 아낙네들의 빨래터와 김장용 채소를 씻는 곳으로 사용 하였다. 8) 공동우물 : 황산마을의 공동우물은 죽산 안씨가 고수에 터를 잡은 시기와 거의 같다고 하는데 4~5백년의 오랜 세월을 마을 사람들의 얘기 터로, 식수원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마을의 역사라 할 만 하다. 우물 옆에 사과공의 17세손 시인 안재운이 고향을 사랑하고 그 리며 세운 애향시비가 서있다. 황산마을

글 : 안재운

오백년된 우리 마을 살기좋은 황산마을 뒷산은

병풍이요 앞개울은 놀이터라

뒷산에

올라가서 병정놀이 진돌이등

탁그레

감풍정은 아낙네의 빠래터라

봄이오면 풍암정에 느티나무 새싹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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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동네주민 모두나와 피서하고 장자보들 배바위들 바라보니 시원하네 가을이면 벼이삭들 황금빛이 아름답다 무넘등을 넘어가면 고수초등 학교가고 무넘등

무넘등

물이넘어 온다네

고수다리 맑은물에 빨가벗고 수영하고 솔솔부는 바람등은 언제든지 시원해라 지나가는 길손이여 피곤하면 쉬어가고 목마르면 물을먹고 편안하게 쉬어가소 살고있는 형제들아 제할일을 열심하여 대대손손 우리마을 영원토록 지켜가세 9) 구면사무소 : 행정구역 변천 속에 고수면이 탄생되어 고수면사무소를 평촌에 건립하였 는데, 평촌은 고수 행정의 중심지이자 면소재지가 되었다. 옛 면사무소건물은 2대에 걸친 도예가 나희술의 공방을 겸한 작품전시실이 자리 잡았다. 10) 물레방앗간 : 평촌의 물레방아는 고수천을 막아서 자귀보(짜구보)를 만들어 수로를 건설하고, 농사철에는 농사에도 이용 했으나 이 물은 대부분 물레방아를 돌리는데 사용하였 다. 인근의 몇 마을이 곡식을 찧는데 이용하였다. 11) 빨래터와 느티나무 : 평촌 마을 앞, 항상 물이 흐르는 물레방아 수로 변에 반석을 여 러 장 깔아서 공동 빨래터로 사용하였다. 빨래터 옆에 느티나무가 할머니의 등처럼 구부러 져 있었다. 느티나무는 1982년 9월 20일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가 2009년 4월 20일 해 제가 되었다. 고수면 황산리 115번지로 수령은 250여년 되었다고 한다. 12) 보리마당 (들 마당) : 황산과 예지터의 보리마당(들마당)은 마을 공터에 만들어졌었고 평촌의 보리마당은 모정 옆 공터에 만들어져, 수 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 사이사이에 보리노 적가리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예지터의 보리마당은 집이 들어섰으며 평촌의 보리마당은 느티나무도 다 베어지고 겨우 두 그루만 남아있으며, 사람들의 노래와 웃음소리도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버려진 땅이 되어 버렸다. 13) 지정여관 : 지정여관은 국가기관에서 지정하여 주로 손님접대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조 선의 객사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숙식을 같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주막을 겸하 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구 면사무소 옆에 있었던 지정여관은 마당에 수 백 년 수령의 팽나 무가 서있었다. 특이하게 일제시대 에는 일본군 1개 소대가 주둔하여 숙식을 제공받았고 6.25사변 중에도 인민군소대가 주둔했었다. 지정여관에 주둔했던 일본 군인들이 공출(供出) 을 받았는지 돈을 주고 샀는지 알 수 없으나, 닭을 한 마리 구해서 죽이지 않고 산채로 털 을 다 뽑았다가 놓쳤다. 닭은 털이 뽑힌 채 한사코 도망을 치고 한국말이 서툴러서 당황한 일본 군인들이 마을사람에게 "꼬꼬가 우와개(윗옷)를 벗고 도망갔는데 보았느냐?"고 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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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4) 주막터 : 지금은 없어져 옛 명성만 남았지만 물레방앗간 옆에 있었던 평촌의 주막은 인근 주민들의 웃음과 한숨이 있었고 솔솔 풍기는 국밥 냄새는 배고픈 사람들의 선망의 대 상이기도 했다. 15) 황산리 도요지 : 고수면 황산리 산5-5

6. 마을의 전설과 이야기 1) 연꽃방죽(쟁침재) : '연꽃 방죽'은 효심에서 만들어진 연못이다. 안씨의 입향조 사과 공 (司果 公)의 묘지에 물이 비치면 좋겠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후손들이 일제의 어두운 시절 임에도 불구하고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연(蓮)을 심었다. 연(蓮)은 우리의 조상들이 선비 의 품성을 지니고 있다하여 좋아하던 꽃인바, 연이 심어지지 않은 작은 못까지 '연못'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황산의 연꽃 방죽은 경관 좋은 곳에 자리하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 아름다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맡으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길옆을 지나 면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꽃을 볼 수 있어 유명한 곳이다. 2) 강변(뒷 갱변) : 고수천가 모래둥치에 누가 심은 줄도 모르는 이태리포플러 여러 그루 가 하늘을 찌를 듯 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원산인 포플러는 미국산 미루나무와 유럽 양버들의 잡종으로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심어지기 시작했는지 찾을 수 없 고 강변의 포플러도 그 수령은 알 수 없지만 큰 키에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베 어져 없어지고 고수교회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3) 물냉기 등(무름 등 또는 무넘 등, 황산) : 물냉기 등은 고수 초등학교 로 등교하는 학생 들의 지름길에 있는데 황산자락에서 뻗은 산줄기가 예지터로 향하는 중간 언덕이다. 어른들 의 말에 의하면 옛 이름도 '물냉기 등'(무름 등)이라 하였고 실재로 물이 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물이 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름으로 내려오다가 조산저수지가 생기고, 저수지의 물 길이 물냉기 등을 거치므로 하여 명실공이 제 이름을 찾은 것으로 옛 이름이 사실화 되었다 할 수 있다. 풍수지리학에 수절령(水絶嶺) 도불령(道不嶺)(??)이라고 '물이 재를 넘으면 맥이 끊기고 도로가 재를 넘으면 맥이 끊기지 않는다'했다. 그런데 조산저수지 수로가 평촌과 예 지터 옆을 통과하여 황산 앞을 가로질러 매바우들로 흘러가니 이 수로로 인하여 각 마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4) 섬백섬 (황산) : '섬백 섬'은 들 가운데 섬처럼 보이는 둔덕으로 목 백일홍이 심어져 있 었다고 한다.

농지정리의 여파로 인해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고

수의 낮은 지역은 옛날에 바다였다고 하며 몇 가지 그럴듯한 이야기도 있다. 물넘기 등의 저수지 수로를 파다가 조개껍질과 정치망용 말뚝을 발견 했고, 광산김씨(光山金氏) 제각이 있는 전불 뒷산 중턱에 '빌 바위'(별 바위) 또는 '배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바, 배 정 박을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 흔적이 남아 있으며, 문수산 정상부근 장성과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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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지점에 '청어 바위'라는 바위가 있고, 연동 뒤편의 '대추나무골'은 항로를 지나던 대추를 실은 배가 이곳에서 전복되는 바람에 그 씨앗이 발아되어 많은 대추나무를 자라게 했고 그 이유로 동네 이름을 지었다는 등이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 들이다. 그 외에도 고창의 낮은 지역이 바다였다는 설을 뒷 밭침 하는 것들은 아산 반암 뒷산 중턱에 '선(船)바위'가 있고 해리 경수산 정상 부근에 '배맨바위'가 있다. 방장산의 '벽오봉'도 오동나무를 실고 가던 배 가 뒤집히면서 오동씨가 떨어져 이름 하였다고 한다. '섬백 섬'도 바다와 연관 지어 진 환상 의 섬으로서 조선 예종임금 때 귀양살이용 섬으로 지정 되었다는 설이 '작전도본'에 기록 되 었었다고 전해진다. 5) 솔대거리 (예지터) : 솔대거리는 마을 앞 천변을 따라 나있는 길을 말한다. 솔대는 솟대 또는 당간지주의 잘못된 표기인지 알 수 없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축 하하기 위해 깃발을 세운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7. 민간신앙과 민속 및 마을조직 1) 황산의 당산은 마을 서쪽 입구에 선돌로 있었으나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지금은 없 어지고 어른들의 기억에 의하면 당산 굿을 치면서 남녀 간의 줄다리기와 당산 줄 감기는 하 였어도 제례는 시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지터는 오괴정 옆 큰 나무를 당산으로 하고 깨끗 한 사람을 골라 제주로 삼아 당산제를 모셨다고 마을주민이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확실 치는 않다. 2) 향약 마을의 상부상조를 위하고 위친과 침목을 위한 마을계가 각 마을마다 있었지만 기록도 전 해오는 얘기도 알 수 없다. 다만 황산에 '상부(相扶)계와 황산약(黃山約)이 있었다. 황산약의 계칙과 회원명단 등이 6.25사변 전까지 당시의 동계장(洞契長) 안남연(安南淵)씨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으나 전쟁의 와중에 소실되었다. 3) 민속 정월 열나흘부터 시작되는 농악, 백중날 세벌메기가 끝나고 '들 독 들기' '술멕이' 또는 황 소를 탈 상 일꾼을 뽑는 행사, 추석의 행사 등 대게 남쪽에서 행하는 민속놀이가 여기에서 도 비슷하게 행해졌다. 그중 황산에서 마을 굿을 정월 14일부터 말일까지 계속 쳤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이 특이하다. 4) 경우회 고수면 황산리 49 회장 안세환 8. 마을의 기관과 시설 : 학교, 보육시설, 요양원, 교회, 절, 모정, 회관 정부양곡보관창고 : 고수단위농협 : 농업기술센터 : 도정공장 : 평촌제분공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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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새마을회관 : 황산새마을회관 : 황산모정 : 황산두부공장 : 평촌모정 : 고수우체국 :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264-4번지, 개국일 1965. 12. 20 :

전북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고수초병설유치원

:

고수면 황산리

269-4

215

고수초등학교 :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215번지 고수초등학교는 1934년 6월1일 개교했으니 어느덧 8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때는 학생 수가 수 백 명이 있었을 정도로 제법 큰 교세를 자랑하였으나 지금은 전교생이 60여 명 뿐 인 소규모 학교로 전락하였다. 고수교회 : 고수면 황산리 153번지, 담임목사 김성수, 대한예수교장로회

황산리의

인구변화, 성씨별 분포 등을 조사하셔서 추가해 주세

요.

7. 황산리에 위치한 기관과 시설(2011.7.1현재, 공음예시 ) 1) 마을 이장 마

원칠암

김 도 식

011-9868-7793

용산

김 영 철

011-411-7300

산정

김 영 철

011-411-7300

신평(상평)

최 경 연

010-3166-7075

신평(하평)

정 금 석

010-9855-4527

갑촌, 연동

양 종 탁

010-5507-6663

원동

김 진 식

011-656-7114

3) 인구와 성씨 : 인구, 호구, 성씨, 마을명 원칠암 용산 산정 신평(상평) 신평(하평) 갑촌, 연동 원동

1950

1960

197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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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2000

2010


4) 황산리의 성씨별 현황(남성을 중심으로 한 성씨 조사입니다.) 성씨

마을 황산

김 함 진

해 평 주 현

김 이 강 씨

씨 씨 씨 12 12 2 3

씨 1

씨 3

씨 4

씨 3

씨 1

씨 1

씨 1

씨 2

씨 3

씨 1

씨 1

씨 1

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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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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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1

도움주신분 관련자료 : 참고문헌의 연도와 저자 등을 정확하게 해주세요. 이기화((72세, 전 문화원장) 안균환, 안두환, 안재운, 안주태, 이상용, 최병일, 이창범, 나종남, 안재연, 고수면사무소 직원들 제씨 『고창의 정자문화』고창문화원, 2010.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고창의 숨결』고창문화원, ????. 『고창의 맥』고창문화원, ????. 『고창의 충의사』고창문화원, ????.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부안군지』부안군지편찬위원회, ????. 『모양현지』고창문화원, ????. 『죽산안씨 대동보』?????, ????. 『벽산사지』????, ????. 『삼국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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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문

화 1

51

2

25 5


『주역(역경)』????, ????. 『設文解字』????, ????. 『예기』????, ????. 『設文解字』????, ????. 『열하일기』박지원, ????. 『設文解字』????, ????. 『세설신어』정민, ????. 『일제의 농업정책과 미곡저장장려정책』전강수, ????. 『조선농업발달사』한국농업정책학회, 권원달, ????. 『한국농경50년사』, ????. 『전라문화의 맥과 전라북도 인물』, ????. 『농촌생활환경개선과 그 개선방향』김철규, ????. 『농촌생활환경정비정책의 전개과정과 그 동인』이병기,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성종실록 http://www.doopedia.co.kr/index.do 네이버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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