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제25회녹색순례
순례를시작하며
‘엄마,나낳았을때세상은어땠어?’
제25회녹색순례대장배선영
수원대,한신대근처만지나면최루탄연기가매캐했다고합니다.무섭진 않았냐고물으니“그냥내할일하느라바빴지.무서울짓을안하면뭐가 무서워.”
저는1987년6월에태어났습니다.음력생일은5월18일입니다.
공교롭지요.이날짜들이갖는무거운의미에대해알게되었을때,‘나는 역사적인날에태어났네’생각하며은근히기뻤습니다 민주주의와항쟁의
역사를배운날에는집에돌아와엄마아빠에게그엄혹한시절에뭘 했느냐고묻고는작게나마라도국가폭력에저항했노라는답을듣고 싶었습니다.철도없이그랬습니다.
지극히평범한소시민인부모님은당시수원에서작은복덕방을운영하며 생계를위해고군분투중이었지요.국가를겨냥해짱돌을던지거나도망치는
학생을숨겨주었다는답은끝내듣지못했어요.폭거에항의하는사람과 침묵하는사람,고개를돌리는사람은어떻게다를까.부정의를마주쳤을때
비겁해지지않으려면어떻게해야할까.부모로부터끝내기대했던답을 듣지못한저는사는동안내내생존과실존을저울질하곤했습니다. 풋내나는반골기질로쉽게그리생각했습니다.
작년12월,‘123계엄사태’가터졌을때,저는뉴스보도를보는것조차 버거워이불속에숨었습니다.믿기지않는계엄의장면은공포그 자체였습니다.강렬한분노도느꼈지만,그보다부피가큰두려움에 짓눌렸습니다.‘일단짐을싸서피신해야할까?이시간에강아지를데리고 어디로?’라는생각뿐이었으니까요.언제나실존을더앞세워살아야한다며 떠들고는정작이렇게생존을끌어안고쉽게놓지못합니다.저는그시각, 4
두려움을무릅쓰고국회로뛰쳐나간동료활동가들과시민들에게빚을 졌습니다.
그빚뿐일리가요.부모님이‘무서울짓’을안한대가로진빚,저는그빚을 밑천으로자랐을겁니다.그래서다시,제가태어난해와날의무게를지긋이 가늠해봅니다.5월의광주에서민중이보여준절절한용기와연대는국지적 역사가아니라민주주의의뿌리가되어이땅깊이자리잡았고,그정신은
87년6월항쟁으로되살아났습니다.국가의거대한폭력을똑바로마주하며 민주주의를지키기위해맹렬히목청을높인그정신이결국2024년12월의
국회앞으로시민들을모았습니다.소설가한강의말처럼과거가현재를 돕고,죽은자가산자를구한것이지요.
그날,그정신이짓밟혔다면지금의우리가누리는당연함이존재하지 않았을겁니다.그리고‘123계엄사태’는,그당연함이얼마나어렵게
만들어진민주주의로지탱되고있었는지를체감케했습니다.민주주의는 결코완성형의제도일수없으며,그끝을알수없는과정으로만존재한다는 걸다시배웠습니다.
우리는광주로갑니다.우리가짊어진귀하디귀한빛마저잃을뻔한아찔한 겨울을뒤로하고빛고을의봄으로,그위대한계절로,그아픈흔적을온 발걸음으로마주하러갑니다.이걸음이언젠가다시만날세계의 누군가에게용기의씨앗이되길바랍니다.우리의빚이유산이되기를 바랍니다.민주주의를다시만나며,생명의길을걸읍시다.
녹색순례의의미
순례자의마음으로떠나는녹색순례
녹색순례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자연과 온몸으로 소통하기 위해
나서는 길 떠남이다. 1998년부터 해마다 봄이 되면 녹색연합 활동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배낭을 메고 온 몸을 자연에 의지한 채 열흘간 도보 순례를
떠났다.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된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며,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이 땅의 아픈 곳 ,그신음소리를들으며
상처난곳을치유하기위해고민하고또행동했다.
녹색순례는 온전하게 자연을 만나는 시간이었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하는
시간이자, 공동체의 중요성도 깨닫게해주었다 그러나또다른불편한진실,
우리 땅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사람뿐 아니라 자연도 상처를
받고 있다는 슬픈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이파괴된곳을만나면우리
몸과 마음이 함께 아프고, 자연 그대로 살아있는 곳선가슴이열리고다리에
힘이 붙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람과 자연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그래서함께아프고함께기쁘다는것을녹색순례를통해배웠다.
사랑할때, 그 자체를 온전하게 경험하지 않고 어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녹색순례는 이 땅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알아야할가장근원의무언가를가슴깊은곳에전해주었다.
발이 부르트고, 발바닥의 물집이 터지고, 다리가 저려오는 힘든 길을 누군가는 '고행의 길' 이라고 했고,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마저 비운 채 걷는 이 길을 '성찰의 길' 이라도 했다. 또 그 길에서 환경운동가의 길을 걷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날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녹색순례는 이 땅의 '생명과 평화'에 대한 희망을찾아떠나는일이 될것이다.
녹색순례정신
땅위를걷는사람,사티쉬쿠마르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다가 신문의 어느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90 세의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핵반대 시위를 하다가 투옥되었다는 글이었습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90 세에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 동료인 프라바커 메논과 의논하여 핵강대국들의 수도인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까지
평화행진을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에게는 우리가 도우러 간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나는 매우 늙었으니 빨리 걸으라" 라고
답장해주었습니다 -'사티쉬쿠마르'의인터뷰중에서
사티쉬 쿠마르 (Satish Kumar)는 인도의농가에서태어났다.그가태어났을
때, 마을의 한 점성가는 그의 인생은 끝없는 여행이 될 것이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맞았다. 아홉살 때 쿠마르는
모든 친지들과 접촉을 끊고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한 채 , 9년간 자이나교
승려가 되어 인도를 걸어서 횡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세상과
단절이 그의 영성을 더욱 깊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종단을 떠났지만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인도의
토지개혁 운동에 참가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불가촉천민들에게도 땅을 나누어줄 것을 부유한 지주들에게 요구했다. 그의 걷기는 거기서 멈추지않았다.여러해뒤그는핵무기에반대하기위해돈한 푼없이인도에서모스크바,파리,런던그리고워싱턴까지걸었다.
아마 우리 중 누군가도 쿠마르가 러셀의
고민이 무르익을 무렵 우리는 자연스럽게 녹색 순례를 계획하게 되었고,
짐을꾸려환경현장으로길을떠났다.녹색순례는그렇게시작되었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까? 벽돌 한 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한 장을 놓았던 겁니다. 다른방법이없습니다.내가핵무기에반대해서
평화행진을 하면서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까지 걸어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었던 겁니다. 자이나교를 떠난 후
나는 비노바 바베와 같이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간디와 함께 일했던
분으로 간디의 정신적인 후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로 가장 빈곤한
계층, 즉 하리잔 (불가족천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기위한 토지개혁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곳곳을 걸어다니면서 하리잔과
지주들에게 땅도 공기나 해, 물과 같이 신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들 (그는 '흙의아들들'이라고불렀습니다)은땅에대한권리가있다고말했습니다.
그는 "나의 위는 무척 작지만 가난한자들의위는매우크다."고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끈질기고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노바 바베는 1955년에 토지개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1985년까지
30년동안땅없는이들에게땅을찾아주려고온인도를걸어다녔습니다.
땅 위를 걸어가면 나무, 강, 나비, 딱정벌레 같은 자연과 아주 가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나는
내 두 다리가 내 신체에서 가장 창조적인 부분이고, 걷기가 에너지의 가장 창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자연의
아름다움, 즉 생명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비폭력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비방이나 지름길은 없습니다.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린 작업입니다.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합니다. 자비심도 필요합니다. 참을
성과 자비심은 비폭력의 두 가지 덕목입니다. 문화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하나의 운동, 하나의 큰 대화의 일부이기때문입니다."
-녹색평론53호,사티쉬쿠마르와데릭젠슨의대담
녹색순례역사
● 제1회1998년‘생명과조화의땅갯벌을살리자,강화도갯벌에서
새만금까지’
● 제2회1999년‘송전탑과핵발전소,환경파괴현장을가다’
● 제3회2000년‘지구를위해,갯벌을위해,땅끝에서새만금까지’
● 제4회2001년‘생명과평화의DMZ’
● 제5회2002년‘빼앗긴들에생명의씨앗을,미군기지를가다’
● 제6회2003년‘낙동강,생명의물줄기를따라서’
● 제7회2004년‘백두대간,공존을꿈꾸다’
● 제8회2005년‘천성산,생명의속도로가라’
● 제9회2006년‘지리산,길에서길을묻다’
● 제10회2007년‘제주도,강방왕고라줍서’
● 제11회2008년‘경부운하반대,그대로흐르게하라’
● 제12회2009년‘울진,생명의품에들다’
● 제13회2010년‘무진장,경계를넘나들다’
● 제14회2011년‘너의길을만들어라’
● 제15회2012년‘자연의봄,나를보고당신을봅니다’
● 제16회2013년‘너와나사이의비무장지대’
● 제17회2014년‘강이바라는바다,강이그리는바다,강강순례’
● 제18회2015년‘좋아서걷는순례’
● 제19회2016년‘그렇게모두설악이된다’
● 제20회2017년‘오키나와,평화나와’
● 제21회2018년‘동백꽃,다시핀다’
● 제22회2019년‘걷고,걷자’
● 제23회2023년‘우리가몰랐던이야기’
● 제24회2024년‘설악은포기하지않는다’
● 제25회2025년‘다시만난민주주의,생명의길을걷다’
녹색순례노래/함께부를노래
노래1.임을위한행진곡
사랑도명예도이름도남김없이 한평생나가자던뜨거운맹세 동지는간데없고깃발만나부껴 새날이올때까지흔들리지말자
세월은흘러가도산천은안다 깨어나서외치는뜨거운함성 앞서서나가니 산자여따르라 앞서서나가니산자여따르라
노래2.천리길
동산에아침햇살구름뚫고솟아와
새하얀접시꽃잎위에눈부시게빛나고
발아래는구름바다천리를뻗었나
산아래마을들아밤새잘들잤느냐
나뭇잎이스쳐가네물방울이날으네
발목에엉킨칡넝쿨우리갈길막아도
노루사슴뛰어간다머리위엔종달새
수풀저편논두렁엔아기염소가노닌다
가자천리길굽이굽이쳐가자
흙먼지모두마시면서내땅에내가간다
노래3.밥노래
밥은하늘입니다
하늘은혼자못가지듯이 밥은서로서로나누어먹습니다
녹색순례지침
순례원칙
● 녹색순례는걷는것이기본이다.차는되도록적게타고,될수있는한 모두걷는다
● 녹색순례는하루8시간가까이걷는다.지구별을두발로걸으며, 자연의경이로움과상처입은생명까지온몸으로느껴본다.
● 녹색순례는자연과하나되는곳에서시작된다.자연에미치는영향을 줄이기위해소박한생활을한다.
● 녹색순례는함께하는순례이다.나보다옆사람을먼저생각하고 동료의어려움을함께나눈다
● 녹색순례는짐은최대한가법고단촐하게챙긴다
● 녹색순례는자연으로돌아가는음식을먹는다 일회용품이나인스턴트 음식은지양한다.
식사지침
● 모둠별로돌아가며전체순례단의식사를준비한다.
● 밥먹기에앞서자연에게고마운마음을갖는다.
● 인원에맞는알맞은식사를준비하며,음식을남기지않는다.
도보와생활지침
● 녹색순례의주제와의미를충분히이해한다.
● 일어나는시간과잠자는시간을반드시지킨다.
● 출발전·후체조에참여한다.
● 일정대로출발시간과도착시간을지킨다.
● 순례도중개인행동은하지않는다.
● 폭이좁은도로를걸을때는안전에신경쓴다.
● 순례기간중합성세제와일회용품을쓰지않는다.
● 쓰레기와양과부피를최대한줄인다.
제25회녹색순례모둠
기획단소개
● 대장:배선영
● 부대장:박수완
● 기획단:김원호,서재철,임성희,진예원
● 지원팀:박은정,임태영
모둠소개
1모둠 서해 최황김정현임성희정규석
백운경윤형서
2모둠 이숲 노수진김다정소하연박은정 박은빈
박미선박주희 장덕표김두석
김원호황인철
김건윤윤두나
박발진
3모둠 박상욱
김세영진예원서재철 배선영 임태영
4모둠 오송이 신지선이다솜박항주배채은 박수완
김선아강명수
권혜나김영선 황일수
김소미박수홍 송송이정진욱
제24회녹색순례일정과코스
일자 코스
1일차 4/16(수)
2일차 4/17(목)
3일차
4/18(금)
4일차
4/19(토)
국립5 18민주묘지(발대식/참배)→
전남대정문→광주역광장사적→5.18최초
발포지→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 도청ㆍ5.18민주광장→숙소(16.9km)
호랑가시나무언덕게스트하우스→ 지산유원지→무등산평두메습지→ 바람재→ 증심사→배고픈다리일대→ 숙소(18 8km)
장록교집결(광주광역시광산구평동로 1105) →장록습지→장록습지주차장→ (버스로여수이동)→ 오동도
여순사건기념관→숙소(6km)
여수썬비치펜션→한화여수공장14연대 주둔지→안심산→상관마을→숙소 (19km)
5일차 4/20(일)
가사리생태교육관→바둑산앞길→ 와온마을회관(16.1km)
6일차 4/21(월)
7일차 4/22(화)
와온마을회관→순천왜성→세풍습지→ 우두마을회관민간인학살터→서울대 남부학술림추산시험장(33km)
숙소 프로그램
호랑가시
나무언덕
게스트
하우스
호랑가시
나무언덕
게스트
하우스
여수
썬비치
발대식
민주주의 백일장
무등산행
평두메 습지설명
펜션 모둠활동 및소개
장록습지 설명
여수 가사리 생태 교육관
와온 마을회관
서울대 남부학술 림추산 시험장
여순항쟁 이야기
정지아 작가와의 대화
소회나눔
서울대남부학술림추산시험장→ 순천역(버스이동) - 해단식
1980년5월18일부터27일까지,전라남도광주한복판에서대한민국국군이 시민들을무차별적으로학살한사건 씻을수없는양민학살이자,한국 민주주의를위한성스러운저항의시작이었다 12·12군사쿠데타로등장한
신군부는김대중선생과민주인사들을내란음모로몰아체포하고비상계엄을
전국으로확대하면서민중의분노를촉발했다.광주민중항쟁은1979년
부마항쟁으로부터시작된유신체제붕괴의연장선이자,민중의거대한민주화 요구였다.이를무력으로억누르려한하나회의쿠데타가결국광주학살로이어진 것이다.
비극은광주도심의옛전남도청분수대광장과전남대학교일대에서시작됐다.
신군부가동원한군이박정희사망이후유신독재를청산하고민주화를염원하던 시민들을향해발포했고,공수부대(특전사)는중학생부터노인까지무차별적으로
폭력을행사하며무고한생명을앗아갔다 이에분노한시민들은자발적으로
시민군을조직해도시의치안과질서를유지하며군사독재에맞서싸웠다 2018년공개된미국국무부비밀문서에따르면,광주진압작전을최종적으로
승인한책임자는당시보안사령관이었던전두환이었다.
5월27일,전두환이이끄는신군부는특전사최정예부대를동원해시민군과
시민들을또다시잔혹하게진압했다.이열흘간의항쟁으로166명이사망하고, 54명이행방불명되었으며,부상자와후유증으로인한사망자까지포함해 3,000명이넘는인명피해가발생했다.이는명백히평화적집회를향한군의
발포이며,이에시민들이맞선정당한저항의역사다.항쟁의주요지역은광주시 전역,특히금남로,충장로,옛전남도청과전남대학교일대였으며,오늘날에는 국립5·18민주묘지가그역사를기리는상징적공간으로자리잡고있다
광주민중항쟁은1992년까지금기와침묵속에봉인되었고,광주와전남 시민들에게는깊은상처와한으로남았다.1996년전두환·노태우의체포와사법적
단죄를계기로,이항쟁은대한민국전체가공유해야할민주주의의역사로새롭게 각인되었다.노태우정부까지는진실이철저히은폐되었고,정부차원의진상 조사나보상은이루어지지않았다.그탓에1993년이전까지시민사회는사망자를
2,000명가량으로추정하기도했다.이는진실을은폐한결과,실체를파악하려는 노력속에서나온수치였다.
이항쟁을계기로한국시민들은미국의실체와한미관계를새롭게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후미국은'은인'으로여겨졌지만,광주항쟁당시한국군의 이동과작전을승인한책임이미국에도있었기때문이다.
이러한인식전환은1980년대중반부터학생과지식인사이에서반미운동으로
확산되었고,1986년이후대중운동으로발전했다.
1980년대민주화운동에참여한학생·청년의절반이상이광주민중항쟁의충격을
계기로거리로나섰다.광주에서흘린피는서울,부산등전국의거리와교정, 감옥까지민주주의를향한희생으로이어졌다.광주항쟁의실체를알게된수많은 학생들이학업을포기하고투쟁에나섰고,체포와구금도마다하지않았다.
광주민중항쟁은광주·전남도민들에게는영원한아픔이자자긍심이다 동시에, 한국민주주의의상징이자살아있는역사로서보존되고있다 정부는항쟁을
민주주의를위한시민저항으로공식인정하고,법정기념일제정,희생자보상, 국립묘지지정,교과서수록등제도적조치를시행해왔다.
하지만광주민중항쟁은여전히완결되지않은역사다.국가폭력의주체였던 국군은아직광주시민과희생자에게공식적으로사과한바없다.국방부와 특전사는국립5
18민주묘지에대한참배조차하지않았고,부대차원의추모 행사나정훈교육도이뤄지지않고있다.항쟁의진정한마무리는가해당사자인 국군지휘부와특전사가광주를방문하고희생자에게사과하며,다시는같은일이
반복되지않도록정기적인현장교육과추모를제도화하는데서시작되어야한다.
여순항쟁
여순민중항쟁은1948년10월여수와순천에서일어난민중항쟁이다.
10월19일여수주둔국군(조선국방경비대)제14연대장병들이일으킨군사
봉기가시작이었다.여수주둔14연대병사들이이승만정부의‘제주4.3사건을 진압하라’라는출동명령을거부하고봉기를일으킨것이도화선이되었다.
14연대의봉기는여수와순천의시민들이동참하면서항쟁의불길은전라남도 남부도시로퍼져갔다
14연대의봉기가성냥불이라면,항쟁의불길의연료와연소물질은미군정과 이승만정부의실정과학정이었다.실정은‘쌀배급’으로상징되는배고픔과 경제란이다.학정은미군정의점령군방식의통치와이어진이승만의친일경찰 중심의통치였다.이승만은친일경찰을정부치안의중추로등용하고군대도 일본군장교들을중심으로꾸려가면서통치했다.
10월19일부터11월하순까지여수순천구례등으로번져간민중들의저항을 이승만정부는국군과경찰등을동원하여대규모양민학살로진압했다.1948년 11월당시전남도보건후생당국의피해조사에는전남동부지역6개시군에서
2천633명이사망하고825명이행방불명된것으로파악한다 군인약180명경찰 74명이사망으로되어있다
그러나여수순천보성구례를비롯한전라남도동부시군에선여순사건의 희생자를약1만명이상으로언급하기도한다.특히구례지역사회의주민들은 최근까지여순항쟁으로군경토벌군에의해희생된양민들이약3천명이상이라 말한다.
48년확인한3500여명사망자/행방불명자와는별도로봉기에가담한장병
2800명은대부분처형되었다.14연대를비롯한국군장병들은48년말까지2천 8백명은생포되어재판에넘겨졌다.49년1월10일까지진행된군사재판에서
410명에게사형이선고된뒤바로집행되었다 568명은종신형으로대전교도소 등지에분산수감된다 기타병사들은10년이상중형을받고수감되었다 그러나 수감자들은한국전쟁이터지면서전부총살당했다.
여순항쟁이제주4.3항쟁에비해진행경과가짧았음에도대량의양민학살이 이루어진것은이승만정부수립출범2개월후에벌어진민중들의저항이큰 이유였다
특히이승만정권은여순주민들의저항에일본강점기만주에서
독립군을토벌하던만주군출신의군지휘관을토벌권의지휘부에배치했다
이들은만주에서중국인과조선족저항세력을토벌학살하던방식을그대로
적용하여‘가담에의심이되는일체의주민들을현장에서즉결처형’하는방식으로
진압했다.
당시정보통신이발달하지않았고사건이발생하면서여수순천을비롯한전남
동부6개시군을계엄지구와같은군이통제하는위수지역으로설정하면서군대가 무법천지로양민들을학살한것이다.여순항쟁은한국현대사에서국가폭력에 의해빚어진대량학살사건중2000년이전까지제대로알려지지않았다.
사건의명칭도‘여순사건’‘여순반란사건’,‘여순군인폭동’,‘여순병란’, ‘여순봉기’,‘여순항쟁’등여러명칭이있다 사건을보는시선과관점에따라
나뉜다.정부차원의공식적인사건에대한조사와실체를규명하는작업이없었던 결과였다.최근여순항쟁에대한특별법이만들어지면서진상이드러나고있다.
48년이승만정부수립2개월만에일어난민중들의저항에정권의충격은컸고 무자비한양민학살로대응했다.이사건을계기로대한민국은국가보안법과
계엄법이만들어지고본격적인반공국가의길로접어들었다.
이승만은여수순천을계기로반공국가건설을명분으로한장기집권을위해
사회를재조직하고자하였다.국군내좌익세력을척결하는‘숙군’으로삼아반공 군대로정화하려했고,경찰은인력을증가하여국민의생활속에파고들게 하였다 교육계도좌익교사와학생을축출하도록조직하고,학도호국단을
결성하여군사훈련을일상화하였다 그결과1948년「국가보안법」,1949년「 계엄법」을제정하였다.“대한민국의모든권력은국민에게서나온다.”라는 주권재민의헌법적가치가통치권자의권력에의해침해되고억압되는반민주주의 악법으로활용되었다.
‘여수·순천10.19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따르면,여순사건은
정부수립초기단계에여수에서주둔하고있던일부군인들이제주4.3사건진압 명령을거부한사건으로,전남,전북,경남일부지역에서발생한무력충돌과진압 과정에서다수민간인이희생당했다
올해8월말기준위원회에희생자신고
접수된건은모두7,465건에이른다
여순항쟁을거치면서이승만정부는계엄령을법제화했다.그리고한국전쟁
과정에서계엄령은전시대응뿐만아니라독재정권유지를위해수시로 발동되었다.그리고박정희와전두환군사독재시대에도계엄령은수시로독재 정권의유지를위해악용되었다.정부수립후11차례계엄령중헌법과법률에서
정한절차를준수한경우는많지않았다.대부분권력을강화하기위한수단으로 계엄령을발동했다.
1일차<항쟁은그렇게시작되었다>
● 날짜:4/16(수)
● 코스:국립5.18민주묘지(발대식/관람)→전남대정문광주518사적비 →광주역광장사적비→5.18최초발포지→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옛전남도청ㆍ5.18민주광장
● 프로그램:발대식,민주주의백일장
● 숙소:호랑가시나무언덕게스트하우스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은1980년5월18일부터27일까지열흘동안전두환등 반란군부(신군부)세력의권력찬탈과학살만행에저항했던시민들의 정의로운항쟁입니다.5·18민주화운동은반란군부의무자비한총칼아래 막을내렸지만,전국민들은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피해자보상, 기념사업을줄기차게요구했습니다.마침내5·18민주화운동은승리의
역사로부활해전두환등반란군부세력의단죄와함께2011년5월,전 인류가보존하고기억할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등재되었습니다 ( ) 불의한국가권력이국민의존엄성을유린하고권리를짓밟을때,그것이
얼마나비극적이고반인권적인가를적나라게보여준사건입니다.(5·18
민주화운동기록관자료집)
최초발포지_시민들에게겨눈총부리
시민의 항거는 금남로와 충장로 등 도심에서 뿐만 아니라 광주 전역의 주요 장소들에서 일어났다. 계엄군은 시민의 집결과 항거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해 장갑차와 M16 등으로 무장한 채 도심 이곳저곳을
순찰했다. 그러다가 5월 19일 계엄군이 최초로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후 4시 50분경 제11공수여단 제63대대 작전장교(대위)가 이끌던
장갑차가 계림동 광주고등학교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광주고등학교 방향으로 이동하는 장갑차를 포위하여
진행을 방해했다. 당황한 장갑차 운전병은 가로수를 추돌했고, 앞바퀴
구동축이 보도난간에 부딪히면서 시동이 멈췄다. 그러자 시민들에게 감시경을파손당한장갑차는진퇴양난의상태가되었다.
계엄군은 장갑차를 탈출하려 했으나, 일부만 성공하고 나머지는 다시 장갑차로 들어갔다. 시민들이 장갑차를 압박하자 위기감을 느낀 계엄군이
발포했다. 처음에는 공포탄을 쏘았으나, 다음에는 실제 사격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영찬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의 총상을 당했다. 김영찬은 공중보건의 정은택과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 외과병원에서 응급처지를 받고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장갑차는 실탄 발포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망쳤는데, 제11공수여단은 이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은폐했다. 계엄사와
보안대는 발포사건을유언비어로규정하고,관련자에대한조사를시도했다. 그래서 5·18민중항쟁에서 발생한 최초의 발포는 공식화되지 않았고,한동안
시민들의전언으로회자되었다.(518기념재단)
녹색연합배제1회민주주의백일장패들릿들어가기 ��
2일차<보호지역을지나배고픈다리를건너>
● 날짜:4/17(목)
● 코스:호랑가시나무언덕게스트하우스→지산유원지→무등산 평두메습지→바람재→증심사→배고픈다리일대
● 프로그램:평두메습지설명,무등산행
● 숙소:호랑가시나무게스트하우스
무등산국립공원
무등산국립공원광주·전남의진산(鎭山)이자호남정맥의중심산줄기로 2013년3월,우리나라의21번째국립공원으로지정되었다.전체면적은 75.425㎢이다.해발1,187m의무등산은‘비할데없이높고큰산’또는 ‘등급을매길수없을정도의고귀한산’이라는의미를지니고있다.
최고봉인천왕봉을중심으로서석대·입석대·광석대등수직절리상의암석이 석책을두른듯치솟아장관을이룬다.(주상절리:고온의용암이분출후 지표에냉각되는과정에서수축하여다각형의돌기둥이갈라지며형성된 각이진기둥)봄에는진달래,여름에는참나리,가을에는단풍과억새,
겨울에는설경등사계절생태경관이뚜렷하며,멸종위기야생생물 수달·하늘다람쥐·으름난초등이멸종위기야생생물26종을포함하여총 4,77종의생물종이서식하는우수한생태계를자랑한다.
(무등산국립공원홈페이지)
평두메습지
2020년무등산국립공원국립공원특별보호구역으로지정되었다. 희귀식물(낙지다리,벗풀,개대황)과멸종위기야생동물(수달,담비,삵, 팔색조),천연기념물(소쩍새,솔부엉이,원앙)등이서식하고있고786종의 생물이서식하는등생물다양성이풍부한곳이다.특히큰산개구리의집단 서식지로우리나라에서확인되는양서류20종가운데도롱뇽,두꺼비, 무당개구리등8종이집단서식하고있다.2021년진행한훼손지복원사업이 한국산지보전협회가주최한전국산림생태복원기술대전에서우수상을받는 등생태복원의우수한사례로주목받고있다.광주전남녹색연합을비롯여러
단체및무등산국립공원공단은람사르습지로지정할것을요구하는활동을 전개했고,2024년5월,람사르습지로등록되었다.지형.지질학적으로
희귀하고독특한습지유형이거나생물서식처로서의보전가치가높아 국제적으로도보전이필요한지역이란점을람사르사무국에서도인정한
셈이다.(광주전남녹색연합,환경부보도자료)
배고픈다리
“여기있던배고픈다리(현홍림교)일대는5.18광주민중항쟁이치열하던 5월21일,시민군이시내중심가에서계엄군을물리친후모범적으로지역
방위를했던곳이다.조선대학교뒷산으로퇴각한계엄군이다시시내로 진출할것에대비,그날해질무렵부터이지역예비군등젊은이들이주축이 되어시민군을편성하고이다리를중심으로방어망을구축하여물샐틈없는 경계를폈다.22일자정무렵에는인근숙실마을에서내려오던계엄군과
30여분간총격전을벌여그들을물리치기도했다.주민들은밥을지어오고
담배와음료수를가져다주는등시민군과한덩어리가되어이곳을지켰다.”
백수인(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이사장,조선대학교교수)는특이한이름을
지닌이다리는무등산국립공원증심사로가는초입,증심천을건너는 조그만다리로,예전다리를허물고2000년대초에새로운다리를완공후 ‘무지개뜨는다리’라는한자이름인홍림교로명칭을바꿨으나많은
광주사람들은아직도배고픈다리로부르고있다고말한다.지면보다약간 꺼져있는모습을자신들의배고픈처지와동일시했다고한다.무등산에서
등에나뭇짐을가득지고내려오며이다리를건너는허기진사람들의마음을 볼수있으며,배고픔을견디며살았던선조들의역사가들어있다고말하며 고유어이름을버리고홍림교라는이름을붙인것에대한안타까움을토로한
바있다.(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이달의칼럼6월호/백수인)
3일차<무등에서장록까지,그리고여수로>
● 날짜:4/18(금)
● 코스: 장록교집결(광주광역시광산구평동로1105) →장록습지→
장록습지주차장→(버스로여수이동)→ 엑스포공원→오동도
여순사건기념관
● 프로그램:모둠활동,장록습지설명
● 숙소:여수썬비치펜션
장록습지
영산강의제1지류인황룡강의하류끝자락에위치하는하천습지로2020년 국가습지보호지역으로지정되었고,국내첫도심속국가습지로
의미부여되고있다.
황룡대교아래에서시작해송정교를지나영산강 본류로합류하는약8km구간,유역면적3.06㎢규모이다.멸종위기종인 수달,삵,새호리기,흰목물떼새를비롯하여829종의생물종이서식하는 것으로확인되고있다.(두산백과)
여순사건기념관
여수시동백꽃섬오동도에여순사건의진실을알리기위해기념관을짓고 2021년10월19일문을열었다.2021년여순사건특별법이제정된것을 기념하기위해여수세계박람회유치기념관안에설치했다.‘여순사건의기억 1948.10.19’부조조형물과<손가락총>이있다.이승만정부가14연대 봉기를진압하고여수,순천시민들을상대로부역자를색출하는과정에서 손가락총이등장하는데,국가폭력앞에잔인한죽음을맞이한실제상황을
바탕으로사실에입각해연극으로기획한작품속손가락총을조형물로 구현하고있다(손가락총연극기사중발췌).‘여순사건대작’,여순항쟁 발발에서부터특별법이제정되기까지역사적인순간들을담은영상관이 있다.
4일차<부당한명령에는항거한다>
● 날짜:4/19(토)
● 코스:여수썬비치펜션→한화여수공장14연대주둔지→안심산→ 상관마을
● 프로그램:여수항쟁강의
● 숙소:여수가사리생태교육관
14연대주둔지
여순10.19항쟁발발지.제주4.3항쟁진압명령을받은여수14연대가 우리국민을죽이는부당한명령이라는이유로항명,봉기하며회식중이던
장교들을사살하면서시작되었다.14연대주둔지는현재한화여수공장내에 있다.이들은여수지역에<애국인민에게호소함>이란벽보를붙이고,1) 동족상잔결사반대2)미군즉시철퇴“우리는제주도애국인민을무차별 학살하기위하여우리들을출동시키려는작전에조선사람의아들로서조선 동포를학살하는것을거부하고조선인민의복지를위하여총 궐기하였다”고하였다.14연대는경찰교전후순천으로이동해진압군과
교전을벌이게된다.14연대가떠난후민간인학살이자행되었는데,이승만
정부의군경진압과정및‘협력자’색출과정에서관련없는주민들다수가 운동장등에수용되고야산으로끌려가살해되기도했다.
지난3월27일,광주지방법원순천지원법정에서는여순사건관련재심 판결이있었다.
"피고인들은1948년10월경여수14연대군인들에게가담,협조했다는 이유로제대로된재판절차없이즉시사형또는호송수감되었다가사형된 사람들입니다.…미군정시기포고령제2호에적용받은것인데포고령
제2호는포괄적이고추상적이라국민들이무슨뜻인지판단하기어려웠을 것이며,현대의법치주의와대한민국헌법에위배됩니다.…청구인들은 모두희생자의유족들입니다.어린아이만남겨놓고젊은부부가잡혀가 희생된경우도있습니다.…반세기가지나정부의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부모와가족이그렇게희생되었다는사실을알게돼길고어려운과정을 거쳐이법정에서셨습니다.재심청구인들이겪었을고통을우리재판부가 가늠하기어렵습니다.사법부는진심으로마음깊은곳에서위로의말씀을 드립니다."망000무죄,,망000무죄…
5일차<우리가이어쓰는해방일지>
● 날짜:4/20(일)
● 코스:여수가사리생태교육관→바둑산앞길→와온마을회관
● 프로그램:<아버지의해방일지>,<빨치산의딸>정지아작가와의 대화
● 숙소:와온마을회관
아버지의해방일지
와온공원에서우리는정지아작가로부터아버지의해방일지를듣는다. “…세번째는‘나’와아버지의이야기다.『아버지의해방일지』의가장큰 줄기는‘빨치산의딸’로힘들게살아온딸이아버지를이해하는과정이다.
사회주의자이고혁명전사였기에생활력은없었고,그런주제에“보증을 서”(57면)주는일도마다하지않았기에늘가난했던집안형편은전부 아버지탓이었다.시도때도없이아버지가늘어놓는장광설은지금 현실과는맞지않았고,그런만큼‘나’는아버지가있는고향을떠나고 싶어했다.그런데아버지의죽음이후‘나’는내가알던아버지의얼굴이
아주일부였음을깨닫는다.아버지의합리적이고현실적인면들이밝혀지고, 사람들을감화시킨담대한모습들도드러난다.무엇보다내가잊고있었던, ‘나’를사랑했던순간순간들이떠오른다.마침내‘나’는아버지의유골을 손에들고,아버지를가장아버지다운방식으로보낼한가지결심을한다.”
(출판사서평중에서발췌)
6일차<민주주의순례는그렇게이어진다>
● 날짜:4/21(월)
● 코스:와온마을회관→순천왜성→세풍습지→우두마을회관 민간인학살터
● 프로그램:순례소회나눔
● 숙소:서울대남부학술림추산시험장
우두마을민간인학살터
우두마을(광양읍구산리576일원)은소가엎드린모양의지형중머리에 해당된다고하여붙여진이름이다.광양읍에서봉강으로올라가는입구에
위치해있다.이우두마을당산나무앞도로변개울가에서민간인학살이 자행되었다.
빨치산과토벌군과의격전이벌어지던시기였다.1949년9월17일, 광양경찰서경찰은주민약40명을광양읍사무소광장앞에집합시킨후 우두마을(쇠머리)로데려와집단사살했다.가장낮은지형에사람들을
4열로세워놓고,당산나무쪽에서총살했다고전해지고있다.당숙이
입산했다는이유로,그조카의친구라는이유로희생되기도했다.트럭 1대에20명씩2대에실려온사람들이우두머리벌판에서사살되는현장을 목격했다는증언도있다.
세풍습지
세풍습지인근에서멸종위기보호종인고니,흑두루미,큰기러기등 먹이활동을하는것들이관찰되는곳이다.전남녹색연합은광양시에
세풍습지를국가습지목록에등록하여관리될수있도록사계절조사및대책 마련을요구해왔다.하지만광양시는농어촌공사에서조유지라는이유로
습지로승격할수없다는답변이후아직까지이렇다할대책을마련하지
못하고있다.(조유지:농업생산기반시설로우수기등강우시수시로 강제배수를하고,기능유지를위해준설및보수해야하는시설)
광양시세풍리일대가농사기반이아닌개발중심으로바뀌고있고, 송전선로개발과산단개발등이이루어지고있는추세에서세풍습지또한 언제든지위협받을수있는위치에있다.이에전남녹색연합은멸종위기종을 포함한다양한생물이서식하고있는세풍습지를비롯,광양의동·서천을 시민들과조사하기위해지역청소년,시민들을대상으로‘새친구
모니터링단’을모집하여사계절시민조사를이어가고있다.(전남녹색연합)
순천왜성
전라남도순천시해룡면신성리에있는낮은구릉지대에내·외성2중으로
돌로쌓아만든성이다.1597년정유재란때왜장소서행이일본군의호남 공격을위한전진기지겸최후방어기지로삼기위하여쌓은왜성이다.
순천왜성은왜교또는예교(曳橋)라하며일본사람들은순천성이라부르고
있고,1997년1월1일국가사적제49호에서해제되기전까지는‘승주 신성리성’으로불려왔다.성벽은외성3첩과내성3첩으로쌓았는데내성만
그흔적이분명하고외성은분명치않으며,성주위에는연못을둘러판
흔적이남아있다.이성은1598년조선과명나라의연합군과소서행장이 이끄는왜군사이에최대의결전이벌어진곳이며,충무공이순신장군이 소서행장을노량앞바다로유인하여대승을거둔유서깊은곳이기도하다.
(위키백과에소개된현지안내문발췌)
나의순례일지:6일차
나의순례일지:7일차/순례를마치며
고마운분들
보이는곳에서,보이지않는곳에서순례단을도와준많은분들이계셔서 녹색순례를진행할수있었습니다.고맙습니다.
- 브라이언임팩트재단
- 환경운동연합에코생활협동조합
- 개인후원자:김두석,김영선,김태완,박수완,박발진,윤정숙,장덕표
녹색연합발간번호(01-24-04-01)
제25회녹색순례다시만난민주주의,생명의길을걷다
펴낸이:우경선
펴낸곳:녹색연합
펴낸날:2025년4월
기획및편집:제25회녹색순례기획단 배선영,박수완,김원호,박은정, 서재철,임성희,임태영,진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