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노조 소식지 제6호] 함께 버텨온 우리에게 궁금하다 : 잘들 지내나요? 잘 만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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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이의 말

우리의 소식지는

출판노동자들은 출간 일정 에 맞춰 책을 만듭니다.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간을 계산해서 꼭 출간해야 하는 날짜를 정하는 것이죠. 이 출간 일정이라는 것이 가끔 참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꼭 이 날짜 까지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그래야 책을 팔 수 있다고 하는데 상황에 맞게 연기하면 책을 팔 수 없나? 이렇게 불안정하고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인쇄를 해도 되나? 야근 수당이 없는 게 당연한 업계이 니 매일 야근을 하고 주말에 출근하고 집에 일을 싸들고 가면서까지 출간 일정에 맞춰 책을 만드는 것도 당연한 건가?

지금은 어렴풋이 왜 그들이 그런 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책을 만들 라고 성화였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해를 할 수 있다고 해

서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원래 이 소식지는 3개월에 한 번 만들어

1년에 4개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나름 그렇게 잘 해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다 보니 꼭 3개월에 한 번, 1년에 4 개를 만들 이유가 있나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가 없었습 니다. 더 중요한 건 평소에도 출간 일정에 맞춰 책을 만드느라 허덕 이는 우리가, 또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처럼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5개의 소식지를 만들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소식지는 구성원의 호흡에 맞춰 좀 더 천천히, 기 존에 만들었던 것보다 더 이상한 형식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지

금 보시는 이 소식지가 우리의 마지막 소식지일 수도 있고요. 무엇 보다 보시는 분들에게는 알찬, 만드는 우리에게는 즐거운 소식지였 으면 합니다.

이 소식지가 계속되는 동안만큼은 움츠러들지 않는 목소리를 싣겠 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즐거운 방식으로요.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 소식지 2020년 6월 제6호

함께 버텨온 우리에게 궁금하다 : 잘들 지내나요? 잘 만들고 있나요?

함께 만든 사람들 편집 연우 김달 영화 디자인 강준선 나영선

서울경기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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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자와의 인터뷰

세 번째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가 IT 업계로 이직한

편집자를 만나다

지금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하고 계신가요?

웹툰, 웹소설 등의 웹콘텐츠들을 갈무리해서 종이책으로 만드는 일 을 하고 있습니다. 책을 직접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콘텐츠를 출판사 에 연결해서 진행하는 일이에요. 이 회사에서는 없던 직무여서, 지금 은 혼자 일하는 상태예요.

전직하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지인분이 제안을 주셨어요. 예전부터 출판 말고 다른 업계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 큰 규모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있었는데, 제 그런 생각을 알고 계셨던 분의 추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일의 만족도는 어떠신가요? 모르겠어요. 그런데 최근에 책을 오랜만에 편집했거든요?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긋지긋한데 재밌긴 재밌다’는 생 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편집자 겸 관리자로서의 일을 해요. 책을 실질 적으로 만드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조금 맡기고 그 사람이 잘 만드는 지, 일정과 단가는 어떻게 협의할 건지 그런 것을 진행하고 있어요. 출판-IT 업계로의 이직 사례가 종종 있는데, 두 영역 간의 연계성이 있 는 걸까요?

제가 느끼기에 편집자의 장점은 추상적인 콘텐츠를 현실화해내는 역 량이에요. 출판사에 있을 땐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편집자가 없는 환 경에 오니까 그 장점이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교정교열 능력 도 의외로 IT 업계, 플랫폼 업계에서 필요한 역량 같아요. 출판편집자 들에게는 기본 소양이니까 우리는 여기에 가치를 두지 않는데, 외부 에서는 장인의 기술처럼 보는 것 같아요. 의외로 여기가 구인난이에 요. 웹 콘텐츠 시장이 지금 막 커지고 있는데, 그 규모에 비해서 실제 로 콘텐츠를 생산해낼 컨트롤러가 적어요. 출판 편집자 중에 자신이 엔터테인먼트적 콘텐츠에 관심이 많다고 느끼는 분들은 이쪽으로 잘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아보니 좋았던 출판계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성향이 편집자들과 있을 때 편한 스타일이에요. 말도 더

잘 통하고 관심사나 개그 코드도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재밌는 경험이 있는데, 지금 다니는 회사에 문학 출판사에 계 셨던 분이 계시거든요. 만나자마자 동족을 만난 느낌이었어 요. 특유의 편안한 옷차림, 에코백, 그리고 말투! 약간 부드럽 고, 덜 공격적인 말투요. 그리고 어디서 듣기로는 편집자들은 대개 ‘기승전결’로 말을 한대요. 근데 제가 있는 업계에서는

‘결’부터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뭔가 제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지겨워할 것 같고 그랬어요. (웃음) 돌아보면 출판계

동료들이 많이 생각나요. 그리고 저는 종이책 만드는 일 자체 가 즐거웠어요.

다시 돌아봐도 최악이었던 출판계의 특징이 있을까요?

출판계의 특징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임금

체불 같은 걸 당한 적은 없거든요? 그런데 외주비가 너무 안 나갔어요. 그리고 단가가 너무 안 오르지 않아요? 그런 걸 생 각하면 좀 막막해요. 출판편집자로 일할 때는 제가 언젠가 외 주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외주 단가를 생각하면 외주자로 일할 엄두를 내기 어려웠어요. 그리고 자 잘한 실수들로 인해 크리티컬한 타격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요. 나의 인격을 재확인해야 한다는 게 싫었어요. 특히 오탈 자 부분에서요.

IT 업계가 출판계보다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이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직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근데 저 는 이상문학상 사태 보면서 출판계 자체가 부끄러웠거든요. 출

판계는 의미와 권위 같은 게 중요하잖아요. 문학상을 수상하

면 작가들에게 상금으로 100~200만 원 준다면서요. 그건 돈

의 액수가 아니라 그 상을 받는 권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거잖아 요. 그런데 IT 업계는 정말 매출로만 환원하며 커가는 산업이거 든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데서 오는 생계와 의미 사이의 괴리 가 좀 덜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전반적으로 한국 기업을 신뢰 하지 않아요. 대체로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이직하신 곳의 연봉과 복지는 어떤가요?

연봉은 이직하면서 많이 올렸어요. 내심 줄이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아

무 말도 없었어요. 연봉도 연봉인데 누릴 수 있는 복지도 많고 다양해

서 놀랐어요. 예를 들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건강검진 받을 때 개인이

추가 비용을 내고 받아야 하는 것들도 회사에서 보장해준다든가, 실 비보험을 제공한다든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이자를 어느 정도 지원해준다든가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 외에도 회사 자체에 유치원 이 있고, 생일 연차와 본인이 지정하는 기념일 연차가 있어요. 이런 복

지가 있다는 게 직원에게 굉장히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는 것 같아요. 돌아보면 출판사에서는 이런 복지가 드물어서 노동자로서 소속감이 덜 생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좀 충격적이었던 것이, 판교도 IT쪽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산업도시고 파주도 출판노동자들이 모인 산업도시인데 두 도시의 기반 시설 차이가 크다는 것이었어요. 매출이나 소비 규모가

다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파주 출판도시에는 지하철도 없고 버스 도 달랑 몇 대 있고 병원이나 약국, 은행을 찾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판 교에는 은행, 카페, 병원이 다양하게 정말 많아요. 교통도 편리하고요. 그걸 보고 어떻게 이렇게 큰 격차가 생길 수 있는지 많이 놀랐어요.

‘마지막 직업이라는 확신’ 같은 것들이 생기셨나요? 저는 제게 그 런 확신이 늘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도 없어요. 늘 조금 마음이 들떠 있는데, 안정감을 느끼고 싶 어요. 저는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면 일이 100 퍼센트 익숙해지 는 데까지는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거든요? 그전 까지는 100 퍼센트가 아니라 조금씩 차오르잖아요. 그런데 1년 정도 지나면 내가 기획한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들이 오죠 여기가 마지막 직장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일단 이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제가 뿌리는 씨앗들을 거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직무가 기존에 있던 직무가 아니어서요. 이걸 두고 그만둬버 리면 제 뒤에 올 사람이 다 수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출판계에 있을 때도 늘 그런 확신이 부족했어요. 성향 문제일 수 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출판계가 그런 비전을 못 주는 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출판계뿐 아니라 지금 한국의 기업 대부분 이 못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80~90년대에는 ‘네가 기업에 충성을 다하면 정년까지 다닐 수 있어’라는 믿음이 통용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노동자로서 마음이 붕 뜨기 쉽고 젊었을 때 고생만 하고 인생이 끝날 것 같다는 불안감도 많은 것 같아요. 출판계도 그런 상황의 대표적인 업종 같고요. 게다가 출판계는 연봉이 적으니까 그만

두고 싶어지는 마음이 되기까지 허들이 좀 더 낮은 것 같아요. 지금 제작하시는 콘텐츠들이 출판사에서 만드시던 책보다 좀 더 넓게 가닿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지금 하고 있는 게 웹툰, 웹소설 쪽인데 이 건 확실히 팬들이 사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책이라는 게 긴 시간 계속 팔리는 거잖아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사람 손에 계 속 닿는 사물이고 상품인데, 제가 지금 만드는 콘텐츠는 너무 팬 덤을 저격하는 용도여서 굿즈 같은 개념으로 느껴져요. 근데 앞 으로 그런 의미를 지니는 책들의 파이가 점점 커진다는 생각은 들거든요? 그렇지만 넓게, 대중적으로 간다는 느낌은 아니에 요. 판매 사이즈가 더 큰 것도 아니고요. 물론 대박 작품이 나오 면 어마어마하게 팔

리지만 그건 출판계도 마찬가지니까요.

지금 성현 님께 책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요.

이직 전에 만들던 분야의 책들은 확실히 좀 더 편하게 즐길 수 있 게 됐어요. 어차피 제가 만들 게 아닌 거니까요. 그리고 지금 만 드는 책들을 포함하는 의미로서는, 웹콘텐츠가 사실 정제되지 않은 게 정말 많거든요? 그래서 잘 갈무리된 책을 보면 그 자체 로 좀 위로가 되고 기분 좋아지는 게 있어요. 문장만 해도 작가 가 애써서 몇 번을 고치고, 편집자가 또 몇 번을 다듬고 한 걸 디 자이너가 잘 앉혀가지고 보는 거랑, 그런 과정이 생략된 콘텐츠 를 보는 건 다른 것 같아요.

인터뷰어: 김달 인터뷰이: 김성현(편집자

편집자와의 인터뷰 4년 차 편집자가 9년 차 편집자를 만나다

현재 어떤 책을 만들고 계세요? 출판편집자로서 얼마 동안 어떻게 일해왔는지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 편집자로 일 하고 있습니다. 영화 일을 7년쯤 하다가 출판편집자로 전 업한 지 10년쯤 되나 봐요. 영화사도 출판사도 사업자등록 상 업태가 ‘제조/서비스’인데요, 그래서 제 정체성을 소개

할 때 ‘콘텐츠 제조/서비스 노동자’라고 말하곤 합니다.

3~4년 일을 해보니 만들고 싶은 책의 상이 조금 구체적으로 잡히긴 하 는데, 그걸 실현할 수 있는 곳, 내게 지속 가능한 회사가 어디인지는 알 듯 모를 듯해요 . 이직 등 일터를 택해야 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하셨나 요? 경력이 쌓여가면서 판단 기준에 변화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제가 ‘계속’ ‘오래’ 일하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한 국에서 특히 결혼과 출산 가능성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여성이 한 분야의 노동자로 자리 잡는 과정과도 연관이 있겠고, 게다가 저는 전공은 국어국문학이지만 다른 분야에서 옮겨 왔기 때문에, 내가 ‘계 속’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어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이별’ ‘이직’에 능하지 못한 편인데요. 처음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에 가입했을 때 제가 첫 출판사를 3년 반 다녔다니까 “오래 다녔네요!” 하는 반응들을 보여서 놀랐어요. 그 반응 때문에, 옮겨야 겠다 싶을 때 빨리빨리 결정해 단행한 것 같아요. (웃음) 하다 보니 오 래전의 내가 왜 좋은 기회에,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리를 옮기지 않았 나 후회할 지경에 이르렀고 (웃음) 이직은 하고 싶은 일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추려는 시도이자 도전일 수 있잖아요. 책 만드는 과 정이 곧 나를 훈련하는 과정이고 노동자로서 내 포트폴리오를 만드

는 과정이기도 하다면, 회사를 내 노동의 협업자로 설정할 수 있고요. 아무래도 싫거나 불편하거나 내 영혼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떠나 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떠나고 나면 그 일터가 준 긍정적인 영향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이더 라고요. 이직을 실패의 경험이라 여기지 않고, 거기서 뭐가 안 맞았고 뭐를 배웠는지 새 이력서에 그대로 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 포기한 것과 취한 것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것이 어 떤 책을 만들어 얼마나 흥행에 성공했는가보다 더 좋은 경험의 증명 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면접은 ‘서로 보는’ 과정이니까요. 회사는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니 분명히 좋은 점 한 가지는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일터에서는 동료들과 맺는 관계에 만 족하고 있어요. 개개인의 장기와 잘하는 영역을 보면서 배우기도 하 고요. 특히나 작은 출판사의 경우 만약 관리자의 역량이나 리더십에 치중한 나머지, 동료들끼리 연결되는 지점이 적어진다면 좋지 않다 는 생각을 하거든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도 중요해요. 저의 경우 미 취학 어린이와 살고 있어서 집과 거리가 먼 출판사는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못 간다고 말해왔어요. 그리고 너무 정해진 틀대로 책을 만드 는 곳보다 편집자 개인이 자발적으로 일을 꾸릴 수 있고, 책마다 다른 아이디어를 시도해볼 여지가 있는 환경이 맞는 것 같아요. 단행본 출판은 흔히 디지털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인쇄매체 중에서도 제작 과정의 호흡이 긴 편이라고 하잖아요.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과 공력이 들어서 어떤 이슈나 의제에 빠르게 개입하기는 비교적 어렵다 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만들 때 이런 특성에 어떻게 접근하시나요?

저는 책 만드는/책 나오는 호흡이 길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영 화 일을 해서 더 그럴 텐데, 협업 규모나 공정의 변수가 편집자 개인 이 관리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출판이 좋거든요. 종 종 제게 영화와 출판 가운데 뭐가 더 나은지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애매하게 답하기는 하는데 (웃음) 짧은 호흡을 출판의 장점으로 꼽아 요. 영화는 5~6년에서 많게는 10년을 준비하다가도 엎어지는 경우 도 허다하고, 너무 많은 인생이 영화 한 편으로 출렁거리는 것에 비해 책은 그렇지는 않죠 대개 출판사가 편집자 한 명에게 바라는 출간 종수는 두세 달에 1종 꼴인데, 솔직히 편집자 입장에서 긴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보통 기획이 이뤄지고 집필/번역과 편집 과정을 거쳐 책이 나오려면 최소 1~2년이 필요하잖아요. 여러 개의 씨앗을 사방팔방에 뿌려놓 고 들어오는 대로 차근차근 책으로 거둬낼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면, 갓 입사하거나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편집자가 두세 달에 1종을 자기 기획으로 책을 내기는 어렵겠죠 시의적 이슈에 대해 발 빠르게 ‘첫 책’을 내는 것만이 좋다는 생각은 안 하려고 노력해요. 늦었다 싶을 때가 ‘제때’가 되는 경험도 많이 했 고요. 《배틀그라운드》 같은 책이 그 예인데, 원하던 시점보다 출간이 늦어져 아쉬웠지만, 지금 유효하고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으로 열 심히 알렸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여부 판결 일정이 잡혔고 전후로 책이 세상에 쓰일 수 있었어요.

‘기획/기획서’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 교정교열 등과 달리 기획 안을 발전시키고 저자를 섭외하는 능력은 어떤 상사와, 어떤 회사에서 일하냐에 따라 너무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요즘에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와 함께 책을 ‘쓰고 싶게’ 만드는 것이 기획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예전에는 주로 그럴싸한 기획서

를 양식에 맞게 써서 출판사에 제안하고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 필자 에게 연락하는 과정이었다면, 점차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나 어떤 글 이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기획이 늘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는가에서 출발하는 게 진행하기에도 수월하거든요. 원고의 교정교열은 외주 편집자에게 맡기고 소속 편집자가 기획에 집중하는 출판사에서는 신문, 잡지, SNS 등에서 좋은 글 한 편을 찾 거나 만나면, ‘바로’라고 할 만큼 빠르게 필자에게 책 작업을 제안하 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해야 기획과 출간의 일정한 속도 를 맞출 수 있는 거죠. 필자 입장에서도 먼저 연락이 닿은 곳과 계약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자의 다음 글들을 지켜보거나 숙고할 시 간을 가지기가 점점 어려워요. ‘속도전’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습니 다. 그래서 아이템 자체가 신박하다는 판단이 들면 승부수를 던질 필 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신속하게 저자와의 약속을 잡는 거죠 물론 충분히 리서치를 해서 필진과 목차, 구성을 촘촘히 짠 기획안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다만 원고는 결국 필자의 손끝에서 나오기에, 절대 처음 기획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과 보여주기식으로 그럴 듯하게 쓴 기획서가 들인 공에 비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 어요. 그리고 결정권이 있는 발행인이나 상사가 아주 뛰어난 기획편 집자라서 가이드를 해줄 수 있으면 그래도 안정적이겠지만, 하나의 ‘탁월한’ 기획서만으로 계약과 출간을 성사시키기 어려울 때도 있겠 지요. 출판사마다 예산 규모와 제작 여건이 다르고, 내용적으로 잘할 수 있는 책이 다르기도 하고요.

여러 일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 편집자에게 디폴트 같습니다. 아직도 능숙하지 않아서인지 교정지를 집에 싸들고 가거나, 아니면 저자 연 락, 참고 자료 조사 등을 휴일에 하게 되고요. 경력이 더 쌓이면 숙련도 가 높아지고 교정지 들고 퇴근하는 횟수에도 변화가 생길까요? 편집 일 자체가 멀티플레이를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편집자의 직무 수행에 기본적으로 숙련도나 경력이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보 다는 편집자의 우선순위나 지향, 성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의 업무는 거기 들이는 시간이나 공력이 반드시 숙련도와 같 이 움직이지 않잖아요. 가령 보도자료를 10년 가까이 써왔지만 그렇 게 쉬워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더라고요. 저는 보도자료란 ‘밤을 꼬박 내줘야 나오는 것’이라고 정리했어요. (웃음) 보도자료를 쓰는 속도가 반드시 숙련도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죠. 편집자나 관리자가 보도자 료의 완성도에 대한 기준이 낮거나 보도자료를 덜 중요하게 여길 수 도 있으니까요.

또 교정교열을 예로 들면, 경력 많은 편집자가 독자에게 와닿지 않을

부분을 쉽게 넘어가게 해서 되레 가독성이나 글 본래의 맛을 떨어뜨 릴 수 있고요. 정형화된 규칙에 안정적으로 맞출 수 있다고 해서 늘 더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한 번 더 본 원고가 더 나은 결과물로 이어지는 측면은 분명하죠. 이 럴 때 숙련도보다 편집자에게 확보된 시간이나 편집자 개인의 성향 이 더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기술적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그 차 이가 성격이 각기 다른 책의 편집에 걸리는 시간을 일정하게 줄이는 요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집에 교정지 를 안 가져가게 되는 시기나 방법이란 없는 것 같다? (웃음) 교정지를 싸들고 가야 퇴근을 할 수 있는 편집자는 못 보더라도 집에 가져갔다 그대로 가져오고, 6시 ‘땡’ 할 때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이 다음 날 출 근할 수 있는 생의 동력이 되는 편집자는 어쩌다 교정지를 가져가도 지하철 같은 데 두고 내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편집 일이 지속 가능해지기 위해서 가져야 할 태도나 생각

에 대해 들려주신다면요?

어디에도 없는 훌륭한 책, 잘나가는 ‘극강’의 책을 만들겠

다고 마음먹는 것만큼 편집 일을 재미없게 하고, 편집자를

외롭게 하는 것이 없다고 느껴요. 같은 저자, 같은 주제의

책이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는 점을 먼

저 독자로서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다음에 나는 어떤 책

을 만들지 고민해야 일이 즐겁고, 회사 안팎의 업계 동료들

과 즐겁게 책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조에 가 입하세요! 네?) 편집자들끼리 서로 책을 사주면서 . 저는

책을 만들수록 책을 설명하고 홍보하는 미사여구가 다 맞 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면서도, ‘남의 책’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한 독자로 지내고 있습니다. 업계 동료들이 만든 책을 열심히 구매하면서요. 그러니 출판노동자 여러분이 제가 편집한 책도 사주시고 관대하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웃음)

인터뷰어: 영화 인터뷰이: 강소영(후마니타스 편집자)

디자이너와의

인터뷰 4년 차 편집자가 10년 차 디자이너를 만나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인하우스에서 8년 동안 일했고, 지금은 퇴사한 상태입니다. 프리랜

서로 일할지, 다시 회사에 입사할지 고민하는 중이에요. 당분간은 외 주 일을 해볼 생각이에요. 다시 입사한다면 지금까지 만들어보지 못 한 분야의 책을 만드는 곳에 가고 싶어요. 실용서 같은 책이요!

8년이나 다니신 회사를 그만둔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쌓이고 쌓였던 거 같아요. 마지막에 체력이 바닥이 났었어요. 작은 스트레스에도 예민해졌죠. 기혼자인 데, 윗선에서 임신했냐는 둥 은연중에 부담을 주는 게 느껴지기도 했 어요. 올 것이 왔구나, 했죠 편집자, 마케터, 사장 등, 표지에 대한 의견이 모두 다를 경우 디자이너 로서 다른 직무자와 맞춰가는 노하우가 있으실까요?

저는 시안을 만들기 전에 각 팀과 얘기를 정말 많이 했어요. 심하다

싶을 정도로요. 담당 편집자한테 가장 자주 찾아갔어요. 책 내용에 대 해서도 물어보고, 편집자가 뭘 원하는지 끌어내려고 자주 대화했어 요. 마케터에게도 시안에 쓰려는 그림이나 사진을 미리 보여줘서 피 드백을 받았어요. 책 홍보 방안, 판매 사이즈까지 미리 물어봤고요. 이런 다양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시안을 만들면 모든 사람들의 의견 이 다른 점이 그래도 줄어들더라고요.

음,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의 견에 다 맞추는 건 불가능해요. 그 렇게 하려다가 스트레스가 폭발할 거예요. 왜 이런 디자인이 나왔는지 나만의 기준을 갖추고 주장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해요!

출판 디자이너로 일하시면서 언제 가장 힘드셨나요?

제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채택이 안 되면 그냥 아쉬움이 남는 정도로 끝나는데, 사장님의 입김으로 폰트나 배치가 완전히 망가지는 경우가 있었어요. 부끄러울 정도로 결과 물이 달라지기도 했어요. 그럼 책이 나왔을 때 쳐다보기도 싫어요. 이때 정말 아쉽죠 그리고 빨리하고 있는데 더 빨리해야 할 때. 모든 일이 속 도전이었거든요. 당연히 시간이 있을수록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데, 짧은 시간에 좋은 디자인을 내놓으라고 하니 정 말 힘들죠 또 회사는 시간 내에 해내면 얘가 하네? 다음에 또 시켜야지, 하죠 어떤 편집자, 어떤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기 좋다고 느끼 셨나요?(어떻게 발주해주는 게 좋으신가요? 구체적으로 정해주 는 것? 혹은 디자이너에게 모두 맡기는 것?)

전 디자이너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방법은 최악이라고 생 각해요. 함께 오래 일해서 신뢰가 백 퍼센트 쌓이지 않은 이상 디자이너 혼자 좋은 디자인을 도출하기란 거의 불가 능하죠. 결과물이 나왔을 때 완전히 갈아엎어야 할 위험성 도 있고요.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의견을 전 달해주고 책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편집자와 일 하기 좋아요. 달력, 포스터, 앨범 커버, 그림, 참고도서 등 원하는 느낌을 직접 보여주면 감을 잡는 데 도움이 돼요. 시안 중 하나로 도출할 수 있으니까요.

디자인 영감은 어떤 식으로 얻으시나요?

그러게요. 도대체 영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직도 저도 그게 궁 금해요. (웃음) 딱 꼬집어 이렇게 영감을 얻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네 요. 원고를 읽는 게 가장 좋을 텐데, 회사에서는 편집자가 한 달에 한

권을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에 속도를 내느라 제가 원고 내용을 다 파 악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래도 답은 원고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책 을 가장 잘 아는 편집자랑 자주 만나서 대화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됐어 요. 얘기하다 보면 그래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게 생각이 나더 라고요.

디자이너님의 3-5년 차는 어떠셨나요?

3년 차에 엉망이었어요. 이직 생각이 간절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신입도 아니니 누군가의 터치가 참 불쾌하고 힘들었거든요. 내 디자 인에 감히?! 하는 생각을 저도 감히 했었죠. 근데 연차가 쌓이면서 디 자인에 토를 다는 사람들도 이 업계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고, 자신 만의 노하우가 쌓인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들의 안 목을 인정하고 나니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으려고 마음을 열게 됐 어요. 연차가 쌓이면서 회사에서도 저에 대한 신뢰가 쌓여서 편해지 는 것도 있었어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많으신가요? 그럴 때 특별히 하신 일이 있을 까요?

그럼요. 자주 있죠. 주로 옆에 있는 디자이너와 얘기를 나눠요. 그리

고 안 풀릴 때 저는 야근을 하지 않습니다. (웃음) 칼퇴를 하고 일에서

멀어지려고 해요. TV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요. 그러고 나서 아침 에 딱 모니터에 앉으면 신기하게 새로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컨디션

을 좋게 하는 것! 이게 중요한 것 같아요.

디자인이 책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책은 하나의 상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디자인보다는 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은 부수적인 거라고 말하 면 될까요?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내용이 좋지 않으면 시간이 지난 후에 책은 잊히잖아요. 책의 내용이 좋을 때, 디자인이 좋은 것도 빛이 나는 것 같아요.

디자인이 꼭 책의 내용과 상관이 없어도 될까요? 편집자인

저는 디자인이 꼭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거 든요. 디자이너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막연한 대답일 수 있지만, 전 ‘느낌’인 것 같아요. 그러니

까, 내용과 상관없이 디자인에 책의 느낌이 반영되어 있다면 전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내용에 등장하지 않은 사물 이 은유적으로 텍스트를 표현한다면 훌륭한 표지죠. 오히려

내용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표지는 재미없지 않을까요?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다고 느낄 때가 있다면요?

지금까지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전 디자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공 부했지만 책이 좋아서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서점에서 내가 작업한 책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볼 때 이 일 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사소하지만, 이 사소한 기쁨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네요. 그리고 막히던 시안이 갑자기 풀려서 이거다! 싶을 때. 엉킨 실타래가 풀리면서 결과물이 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요. 정말 힘들었지만 매 순간 즐 거웠죠

힘들어하는 3-5년 차 디자이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 까요?

경력 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걸 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직접 경험해봐 야 내가 잘하는 디자인이 뭔지 알 수 있거든요. 결국 출판디자

이너의 종착역은 프리랜서일 가능성이 높아요. 회사에서 다양 한 걸 경험해봐야 프리랜서가 되었을 때 좀 더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어요. 분야가 한정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기회가 확실히 좁아지더라고요. 그리고 ‘힘든 점이 있으면 말해도 괜찮다’고 꼭 조언해주고 싶 어요. 저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삭혔거든요. 그나 마 동료들한테 불만을 털어놓거나 했죠. 그런데 지금은 회사에 얘기해도 되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문제 를 해결해줄 수 있는 대상한테 문제를 얘기해도 괜찮아요. 저도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남한테 이야기하라는 게 우습기도 하지 만요. 회사에서 퇴사하기 전에, 3년 차 동료가 감정을 섞지 않고 잘못된 부분을 상사에게 말하고 실제로 개선이 되는 걸 보고 참 놀랐던 적이 있어요. 일단 말해야 위에서도 아는구나, 하고 그 때 깨달았어요.

좋아하는 표지 디자인이 있으신가요?

저는 디자이너 가필드 님의 표지들을 좋아해요. 화려하진 않은 데 속이 꽉 차 있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후가공도 거의 안 쓰는데 정갈하고 품위가 있더라고요. 후가공을 안 하고 그 정도

의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대가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인터뷰어: 연우 인터뷰이: 디자이너O(북 디자이너)

도서정가제의 ‘정가’를 찾습니다

도서정가제에 대해 출판노동자는 어떤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업계의 엇갈린 시각만큼 어렵고 복잡하게 다 가오는 사안이다. 출판노동자는 출판사의 이익에 복무하 면서도 한편으로 임금을 놓고 회사와 협상해야 하며, 동 시에 책을 구매하는 소비자라는 다면적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의 ‘정가’를 책정하려면 생산에 투입되는 전체

비용을 항목에 따라 세분화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을 예로

들면 고정비(기획/편집비, 디자인/조판비, 마케팅비, 번역비, 선인세, 일반관리비 등)와 변동비(지류비, 유통/물류비, 인쇄/ 제작비 등)로 구분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출판사 대부분

은 신간의 정가를 세밀한 과정을 거쳐 책정하지 않는다.

정가 책정 프로세스가 있는 곳도 손익분기를 내려고 비용 을 편의적으로 구분할 뿐이다. 총생산비에서 노동 기여도 를 포함해 모든 지표가 정량적으로 측정돼야 비로소 ‘정 가를 책정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구조 다. 바로 여기서 도정제를 바라보는 출판노동자의 고민이 생긴다. 책 한 권의 생산 과정에서 나의 기여도는 정확히 얼마이며 또 이윤이 발생했을 때 내가 받을 수 있는 몫은 얼마인가. 이 단계부터 엄밀해져야 제대로 된 도서‘정가’ 제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알 수 없으니 도정제가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게 당연하다.

도정제는 결국 유통 구조(이익 배분) 문제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서 점에서 30~40퍼센트의 이윤을 가져가면, 나머지 60~70퍼센트에 서 출판사, 인쇄소, 물류/운송사 등의 지분을 나누고, 그 안에서 다 시 인건비를 포함한 여러 부대 비용을 배분한다. 제도를 갖춘 곳은 이익 분배율의 기준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는 어림짐작으 로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 개인의 몫은 얼마인지 신경 쓰지 않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낀다. 이 밖에도 생산/유통/소유 구조가 완 전히 다른 전자책 시장에서의 제도 적용 방식 온라인 유통사의 중 고서점 정책, 대형 유통사 위주의 과도한 공급률 할인 등 도정제를 둘러싼 문제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얽히고설킨다.

제도 개정에 관해 곳곳에서 토론이 진행됐으나, 적절한 합의안을 도출하기보다는 서로 의견 차를 확인하는 데 머 무른 모양새다. 헌법재판소에서도 도정제의 위헌 여부를 두고 심리를 진행한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2019년 말 “완전 도서정가제는 검토할 계획이 없고, 의견 수렴을 통 해 현행 제도를 점차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출판문화산 업진흥원에서는 도서 판매량, 재고, 신간 정보 등을 통합 적으로 관리하는 ‘출판유통통합시스템’을 구축해서 올 하 반기부터 운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목할 만한 일이나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책과사회연구소 백원근 소장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독립 서점이 500여 곳 생겨났으며, 도정제 인프라가 상당히 작 용했다” 프랑스, 독일, 일본처럼 완전 도정제를 시행하는 나라에서는 책을 단순히 상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무차별 적인 시장경쟁에서 보호해야 할 ‘지식 공공재’라고 여기기 때문에 출판시장에 공적 인프라를 투입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원론적이라 할지라도) ‘출판생 태계 다양성 보호와 유통 질서 확립’이라는 제도의 취지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출판노동자, 저자, 출판사, 유통사와 도매상, 지역 독립서점, 독자 모두를 위한 길임 을 인식하고 알리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갈 필요를 느낀다. 우리 출판노동자가 출판생태계를 작동하게 하는 핵심 구 성원이며, 다양성을 위한 연대가 출판노동의 가치를 제대 로 세우는 방식임을 확인할 기회가 아닐까. 조합원 오창록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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