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Vietnam 2018 Vol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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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Essay

어머님의 기력이 쇠잔하여 어머님 스스로 객담을 뱉어내지 못하셨다. 병원에서는 객담을 제거 할 수 있는 간병 인을 구해야 일반병실로 옮길 수 있다고 하였다. 일반병실로 옮긴 후에 그런 간병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간병인을 구하지 못하면 일반병실로 옮길 수 없다는 말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어머님을 치료하기엔 부족하 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딸이 간호사로 근무하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기 위해서는 담당 교수님의 입원장이 필요하였다. 나는 세브란스 병원의 많은 교수님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부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요일이었다. 무작정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만날 수 있는 몇 명의 교수님을 만났다. 역시 특별히 뚜렷한 치료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연로하신 어머님을 특정과로 입원시키기 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정의학과 강희철 교수님께서 상황을 듣고 선뜻 입원장을 써주셨다. 정말로 고마웠다. 그 다음 날 곧바로 간병인을 구하여 세브란스병원 일반병실로 입원하셨다. 첫 날은 1인실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소시민인 나로서는 하루에 50만원씩 하는 1인실 입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다음 날 2인 실로 옮겼다. 중환자실은 벗어났지만 어머님 상태는 여전히 위중하였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여 호흡을 하셔 야 했고, 높은 폐렴수치, 간기능 악화, 혈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 낮은 헤모글로빈 수치, 폐기종, 부정맥 등 모두 비정상적이었다. 간호사인 딸이 수시로 어머님의 검사 기록을 보고 그 상태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담당 교수님은 어머 님을 병전 상태로 돌려놓는 것을 치료의 목표로 삼는다고 하셨다. 반신반의하였지만 참으로 고마웠다. 사실 어 머님 호흡 상태는 여전히 거칠었고 가족과 약간의 대화는 나누었지만 매우 힘들어 하셨다. 아주 힘이 드셨을 때는 "나를 보내 달라!"라고 까지 하셨다. 지난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병원에서 오후 근무를 마친 딸이 할머니 병실을 방문하여 모니터 수치를 보고 전화가 왔다. 할머니 모니터 수치가 이상하다고 하였다. 가족 모두 어머니 병실에 모였다. 모니터의 수치가 정 말로 이상했다. 심장박동 수가 200까지 치솟고 혈압도 200까지 올라갔다. 어머님의 호흡은 매우 거칠었다. 암 센터 병동 간호사로 근무하는 딸이 할머니가 매우 위중한 상태라고 직감했었다. 임종하는 환자를 많이 보아 온 딸이기에 할머니가 그런 임종 직전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 래서 나에게 "할머니 너무 힘들어 하시니깐 진정제라도 놓아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나는 차마 그러 기는 싫었다.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인가?"라는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눈앞을 가렸다. 더 잘해드리지 못한 후 회스러운 마음! 이대로 영원한 이별이라는 절박한 마음! 참으로 힘든 순간이었다. 가족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어머님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긴급히 당직의사를 불러 부정맥을 치료하는 약물을 주사해 달라고 하였고, 그런 후에야 어머 님은 다소 안정을 찾으셨다. 그날이 공휴일인 관계로 어머님 옆 침상이 비어 있었다. 그래서 딸에게 "내일 네가 쉬는 날이니 오늘 밤에 할머니 간호를 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결혼한 딸도 흔쾌히 수락하였다. 간호사인 딸 이 한 숨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면서 할머니를 간호했었다. 간호에 전문지식이 있는 딸이 할머니 상태를 잘 파 악하여 밤새도록 할머니를 간호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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