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바이블아카데미<교회와 신앙의 이정표, 이근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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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회적, 영적 가치 한국교회 12처 이야기 02 발도 - 츠빙글리 개혁신앙의 뿌리 (1) 03 칼뱅 - 웨슬리 개혁신앙의 뿌리 (2) 교회와 신앙의 이정표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회적, 영적 가치 01 한국교회 12처 이야기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후 2장 14절, 새번역)

01 새문안교회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제물포 도착, 한글 마가복음(이수정역) 소지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7년 9월 설립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

* 최초 개신교회는 소래교회(1883.5.16 황해도 장연), 자생적, 동학군 피신처 역할도

언더우드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사역, 함께 교회와 학교, 병원 설립, 경신학교와 정신여고, 협성신학교(현 감신대) 세우고 한영사전 편찬, YMCA 창립. 31년간 한국사회 개화와 혁신에 기여하였다.

김규식 장로

언더우드의 양아들(비서), 프린스턴대에서 독립운동하려고 귀국,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 사무총장, 부주석, 좌우합작운동, 한국전쟁에서 납북

서상륜 장로

만주에서 로스목사와 한글성서 번역, 한국 첫 개신교 소래교회 세움

서경조 목사 한국인 최초 7인 목사, 새문안교회 협동목사로 교회발전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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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85주년 기념교회당(1972년)

고종의 손자(영친왕 아들) 이 구(MIT 출신) 설계, 단순미, 한국정서가 담긴 풍취

필자 인생의 그루터기, <시대의 횃불> 새문안대학생회 민주화운동사 (2017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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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2처 이야기
수요바이블아카데미 6 새문안교회 현 교회당(2018년)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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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7년 10월에 설립

아펜젤러

배제학당(1885년) 설립, 성경번역 사업주도, 우리나라 독립에 큰 관심

1902년 탄 배가 어청도에서 충돌하여 침몰할 때, 조선 여학생 구조하다 순직

손정도 목사

교회가 부흥할 때 사임하고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길림성에서 교회세우고 동포 돌볼 때, 김일성이 찾아옴(아버지 김형직 유언)

만주군벌에 의해 옥살이하던 김일성 구함(<세기와 더불어>에 “애국자, 생명은인”)

* 김일성- 외조부 강돈욱 목사는 칠골교회 등에서 시무 ,어머니 강반석의 오빠는 강진석 목사, 강돈욱 목사의 육촌동생 강량욱 목사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1대 위원장, 강영섭 목사(3대)에 이어 아들 강명철 목사가 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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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교회당(1897)

한국 최초의 고딕양식, 마당에 아펜젤러와 최병헌 목사 흉상(최초 한국인 담임목사)

현순 목사 독립운동과 하와이 선교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장로(3.1운동 33인), 유관순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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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승동교회

사무엘 무어(모삼열) 선교사가 1893년 설립

백정 박성춘이 콜레라로 죽어갈 때 무어의 부탁으로 고종 주치의 애비슨이 고침

이에 교회출석하고 계급타파에 앞장, 만민공동회 연사 1911년 승동교회 초대 장로

양반 교인들이 따로 앞자리를 마련해 달라할 때 모삼열 선교사 일갈 “ 예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

교회는 신분 위세를 부리는 곳이 아닙니다.”

양반들은 안동교회 설립(1909년)

박서양

박성춘 아들, 세브란스에서 한인 최초의 양의사, 만주 독립단체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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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승동교회 전도사 5년간 시무, 고향 양평에 교회 겸 광동학교 설립 학생 김용기 장로, 신학공부하러 간 중국에서 독립운동 매진,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
여운형
수요바이블아카데미 10 골곡의 역사 현장 1940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신학대학원)가 승동교회에서 개교 1959년 WCC 가입문제로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할 때, 승동교회는 합동총회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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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상동교회

월리엄 스크랜튼 선교사가 1888에 설립

<상동파> 독립운동 주도

안창호, 신채호, 주시경, 구연영,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이준, 이시영, 전덕기 목사

등으로 구성, 1905년 을사늑약 무효 상소문, 을사오적 암살모의, 헤이그 밀사 파송, 항일비밀경사 신민회 조직

전덕기 목사

1906년 6대 목사, 독립운동 지도, 노방전도, 방치된 주검 장례, 한글보급운동,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모진 고문, 2년간 투병하다 1914년 3월 별세

장례식에 애국지사, 빈민, 장사꾼, 천민, 기생 등으로 상여행렬이 10리 밖까지...

일제가 묘지 유해를 화장, 한강에 뿌린 까닭에 교회 박물관에 석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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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금산교회

테이트 선교사가 1905년 전북 김제에서 설립

조덕삼

큰 부자로 선교사의 희생정신과 용기에 감동하여 예배처소 내주었다.

아들과 떠돌이 머슴 이자익이 같이 공부하고 신앙생활하도록 배려하였다.

1907년 장로선거에서 주인 조덕삼이 아닌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됨.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은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열의가 훨씬 높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유광학교 건립(1906년), 큰아들 조영호가 후임교장맡고 북간도에서 독립운동

금산교회 교인들과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

이자익 목사

금산교회 2대 목사, 1924년 총회장, 1947년, 1948년 총회장에 추대됨

대전신학교 설립(1952년), 신망이 컸던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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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바이블아카데미 14 ㄱ자형 교회당 중심에 강대상, 남자와 여자 교인석 분리(중간에 휘장), 출입문도 양쪽 유교문화와 대립하지 않고 토착화한 전형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의 참화에도 보존된 것은 좌익계 청년들이 ‘우리 교회’라고 지켰던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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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진천성당

1907년 거니 선교사(한국명 김우일)가 충북 진천에 설립

충북 최초 성공회 건축물

대한성공회 아더 터너 주교의 선교관

1) 현실문제에 관심 2) 불의와 싸우는 항일운동 3) 기복신앙 배제 4) 자치와 자립

2002년 성당을 해체하여 현재 위치로 복원

애인병원

강화도에서 의료선교하던 아더 로우스 부부가 진천에 세운 병원으로

뛰어난 의술로 전국에서 많은 병자들이 내왕하였다.

한 때는 재적 교인인 3천명, 큰 가마솥 5개로 밥을 지어 의병들도 접대

1912년 신명학교 건립, 헤이그밀사사건의 주역 이상설 선생 등을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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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성당

동서건축의 융합, 외부는 전통사찰 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기와의 팔작지붕의 한옥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 회중석과 측랑, 장엄하고 높은 창, 백두산 전나무

새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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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광주양림교회

유진 벨 선교사가 1904년 설립

1953년, 1959년 교단 분열로 같은 이름의 예장통합, 예장 합동, 기장

최흥종 목사

한센병자의 아버지, 3.1운동 주도로 옥살이

조아라 장로

광주 YWCA, 5.18민주화운동 수습대책위원으로 옥살이

정율성 선생

항일투쟁하며 작곡활동, 중국 3대 음악가

김현승 시인

고독의 시인, 부친 김창국 목사는 양림교회 담임목사로 25년 시무

서서평(엘리자벳 쉐핑)

한일장신대 설립, 여전도회 조직, 대한 간호협회 창립, 영양실조로 별세, 남루한 침실에 반쪽 담요와 동전 몇 개, 강냉이 한줌이 전부

광주 최초의 시민장에 수많은 한센병자와 빈민들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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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존재 지금은 연합찬양예배와 강단을 교류하고 함께 양림동 선교사 묘역을 돌본다. 양림동에 ‘최후의만찬-양림’ 대리석 부조물에 지역이 낳은 대표적 인물 12명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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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2처 이야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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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교회

유학자 조동규 장로

조선독립의 열망으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아담손 선교사, “조선 사람 100만이 믿으면 자동으로 독립할 것이요”

논을 헌납하고 기와를 헌물하여 교회를 건축하였다.

아들 조용석은 와세다대학 시절, 1919년 동경 YMCA에서 2.8독립선언서 낭독

창신학교 설립해 초대교장, 3.1운동 주도, 신사참배와 성경교육금지에 저항, 폐교

이태준 순국열사

선교사 통해 세브란스 입학, 안창호 선생에게 감화되어 의사가 된 후 중국으로 망명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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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권유로 몽골에 병원 ‘동의의국’ 개원-독립운동 거점, 임시정부 군의관, 국왕 주치의, 전염병 퇴치에 공헌하여 최고훈장 받음 의열단 김원봉 단장에게 폭탄제조 기술자 헝가리인 마쟈르를 소개, 김상옥 열사 레닌정부의 상해임시정부 지원 금괴를 운반하다가 일본군에 피살(38세) 몽골 울란바토르에 ‘이태준기념공원’ 1897년 앤드류 아담손 선교사 창립, 경남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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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처 이야기
수요바이블아카데미 22 09 봉화척곡교회 (경북 봉화)
김종숙이 세운 한국인 토착교회 언더우드
믿음으로 낙향
‘명동서숙’ 건립, 북간도로 독립자금 전달 지역의 독립투사들은 척곡교회를 주요 회합장소로 사용, 주재소 습격 미음(ㅁ)자 예배당 독특한 건축양식, 남녀 출입문, 뒷문은 독립운동가 피신용도 예장통합 한국기독교사적 제3호 지정 2011년 교회보관 기록물 경북 문화제 자료로 지정
1909년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직 내던진
선교사의 “야소교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할 수 있다.”는
1907년

한국교회 12처 이야기

10 강화중앙교회

1900년, 평신도(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들이 앞장서서 세움 일자 돌림!!

예수 안에서 한 가족, 한 형제임을 결의한 것 전통적인 가문과 족보를 극복

잠두의숙 설립 나중에 합일초등학교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

이동휘 전도사

1902년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 대한제국 군부에 회의감으로 지휘관직 반납

1904년 민족지도자 양성하려고 보창학교 설립, 72학교 세움(32개는 교회 안에)

1907년 의병운동참여로 서울에서 감옥살이, 105인 사건으로 유배당하였다.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실한 전도사로 활동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 민족운동

* 정진호 교수, <여명, 혁명 그리고 운명>(1,2)

조봉암 선생

1919년 3.1운동 참여(강화도에서 1만여명이 참여),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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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2년 수료, 공산주의 노선으로 독립운동하였다.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 30% 지지,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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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은 2000년에 건립한 노트르담성당풍

한국교회 12처 이야기

11 제주 모슬포교회

1909년 이기풍 목사가 설립

2대 윤식명 담임목사는 독립군자금 모금으로 10월 징역형

제주 최초의 남녀공학이던 ‘광선의숙’은 민족교육을 담당하였다.

제주 4·3 발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촉발된 국가폭력이라는 게

남한의 공식적 입장.

3만여명이 사상, 특히 서북청년단은 ‘악의 그림자’로 집단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은 북에 대한 증오를 제주도민에게 투사하여 자신들이 북한에서 당한 일에 복수

를 하려 했다. 가혹한 복수가 애먼 주민들에 대한 끔찍한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영락교회가 관여한 서북청년단에 대한 이미지로 제주도에서 개신교회 교세 약세

조남수 목사

서귀포 경찰서 문형순 서장에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제주도민 다 죽겠어요.

백성 없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겁니까?” 라고 설득하여 중재(자수)운동 전개하였다.

150여회 강연, 약 3000명 자수, 극결 처형 앞둔 20명이 구출되었다.

교회 근처에 두 사람의 공덕비가 나란히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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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2처 이야기

12 명동교회

1909년 김약연 선생이 북간도 명동촌에 세운 교회

명동촌은 1899년 김약연, 문병규, 남종구 등 6가족 141명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 기 위해 함경도에서 계획적으로 집단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1901년 서당 ‘규암재’ 설립하여 서전서숙으로 발전하고 1909년 명동학교 가 되었다. 명동학교에 초빙받은 정재면 선생은 성경공부와 예배 요구, 유악자들이 며 칠간 회의 끝에 접수하여 기독교 학교가 되었다.

1910년 이동휘 전도사의 사경회로 명동여학교 건립

김약연 선생 (간도의 대통령)

1913년에 ‘간민회’ 조직, 1919년 3월 13일, 3만여명이 만세운동

1920년 일제 보벌대는 명동학교 불태우고, 1925년 폐쇄되자 은진중학교와 통합

1928년 평양신학 공부 후 목사안수 받고, 명동교회에 부임(1930년)

당시 14살이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규암에게『맹자』와 성서 등을 배웠다.

1938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고의 이사장으로 취임

규암은 말이 아니라, 삶 자체를 통해 모범을 보였다. 교장이면서도 1천 평쯤 되는 밭농

사를 손수 지었고 거름을 직접 등에 지고 다니면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농군들과 함께

밤새워 타작을 했다.

1942년 10월, 74세로 운명하며 유언, “나의 행동이 나의 유산이다.”

북간도는 기장의 뿌리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정대위, 김재준, 강원용, 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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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02 발도-츠빙글리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01 피에르 발도 (1140-1205)

피에르 발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12세기에 활동했다. 프랑스 리옹 출신, 맘몬에 사로잡힌 교회를 비판하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였다. 부유한 상인으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모습을 보여줬고,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 났다. 이들을 ‘발도파’라 불렀다.

발도는 자국어로 성서를 번역한 최초의 인물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오로지 라틴어 불가타성서만 고집하고, 라틴어 이외 다른 언어로 성

서를 번역하는 일을 이단적 행위로 정죄하였다. 평범한 백성들은 라틴어를 읽지도 이해하지

도 못했다. 심지어 일부 신부조차도...... 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든지 읽을 수 있어야 주님

의 뜻대로 살 수도 있다고 믿었기에, 프랑스 남부 방언으로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

발도는 교회의 안일과 향락에 대한 비판

누구든지(평신도) 성서를 읽고 가르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발도파의 주장은 로마가

톨릭의 교권주의자들에게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는 제4차 라테란교회회의에서 발도파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그때부터 발도파에 대한 모진 박해

가 이어졌다. 발도파는 박해를 피해 알프스 산악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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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31 독일 보름스에 있는 ‘종교개혁자 기념공원’의 동상 동상에 해어진 옷과 구멍 난 신발... 전대도, 두 벌 옷도, 여유분의 신발도 없이 주님을 위한 가난을 스스로 택했던 발도의 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발도파는 복음을 뒷전으로 제쳐두 고 탐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당시의 로마교회에게 너무나 불편하고 성가신 존재였다.
수요바이블아카데미 32 메랭돌 산성 프랑스 남쪽 뤼베롱 산악지역에 위치 작은 마을의 산성. 1545년 4월, 왕의 군대에 의해 발도파 교인이 피신했던 메랭돌 마을이 불타고 파괴되었 고, 최소 3,000명 이상이 학살당하였다. 1978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서 온 발도의 후 예들이 이 현장에 발도파 기념 명판을 게시한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통해 그들은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성서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굳게 붙들고 800년을 버텨온 것이

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 ‘토레펠리체’의 해발 1000m 알프스

산맥 남쪽 산악 지대에 숨어 지냈다. 1655년 4월 부활절, 토레펠리체를 비롯한 피에몬테

주의 발도파 신자 수천 명이 끔찍하게 죽임당한 ‘피의 부활절 학살’이 벌어졌다.

개혁신앙의 뿌리 (1) 33 발도파 학교 발도파가 자녀들을 복음으로 가르치기 위해 해발 1000m 산악 지대에 세운 학교. 자녀들을 바른 신앙으로 가르치지 못하면 신앙의 대가 끊어질 것임을 알았기에, 그토록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최우선 관심을 두었다. 교육을
수요바이블아카데미 34 동굴교회 입구 발도파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산 속에 있는 동굴교회의 입구. 입구는 아래 왼쪽아래,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좁은 공간이다.
개혁신앙의 뿌리 (1) 35 동굴교회 입구 발도파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산 속에 있는 동굴교회의 입구. 입구는 아래 왼쪽아래,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좁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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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발도파 교회

이탈리아 북부 토레펠리체에 있는 알프스 산맥의 해발 1,000m에 있는 교회

교회 출입문 위에 빛을 밝히는 촛대와 “빛이 어둠에 비췹니다.”(Lux Lucet in Tenebris)라는 발

도파의 모토가 적혀 있다. 발도파는 캄캄한 세상 안에서 복음의 빛으로 살기를 소원한 사 람들이었다.

발도파는 1848년에 비로소 종교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1853년 토리노에 발도

파의 교회가 세워졌다. 오늘날 발도파 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WCRC), 세계감리교연합 (WMC),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한 회원 교단으로서 이탈리아에 25,000명, 아르헨티

나와 우루과이 등에 15,000명의 교인들이 있다. 교세는 작지만 그 영향력으로 보자면 종교 개혁운동의 선구자요, 고난 가운데서도 담대한 신앙으로 세상을 이긴 이들이다.

2015년 6월 2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 교 회를 방문하여 용서를 구하며 사과하고 화해를 청하였다. 이날 만남이 끝날 때, 발도파는 프란치스

코 교황에게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 한 권을 선물로 줬다. 성서번역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어 엄청

난 박해를 받은 것을 상기한 것이다. 토리노는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버지와 조부모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영성의 뿌리는 발도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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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얀 후스 (1371-1415)

후스는 루터보다 한 세기 먼저 태어나 로마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다 화형당하였다.

작은 마을(후시네츠)에서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을 거들면서 성장했다.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학장을 지냈다.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1320-1384)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로마가톨릭교회가 근본으로부터 개

혁되어야 한다는 확신하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기초 교황이 아니

라 그리스도임을 역설하였다. 지금도 체코는 후스의 순교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후스의 정신은 종교개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18년, 루터교회와 장로교회, 체코개혁교회가 연합하여 체코형제복음교단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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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39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한복판에 있는 동상 순교 500주년이던 1915년 7월 6일 공개된 작품으로 체코의 고난당하는 민중들 사 이에 우뚝
“서로
서 있는 모습에서 체코 민족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기념조형물의 전면 아래에는 후스 가 콘스탄츠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적힌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

프라하 베들레헴채플

1402년 베들레헴채플 설교자로 임명되어 10여 년 동안 3,000번 이상 설교하였다.

후스는 라틴어가 아닌 민중들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설교, 체코어로 기도하고, 함께 체코어로 찬 양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성찬에서 빵만 나누어 주는 것을 비판하고, 빵과 함께 포도주를 분배하였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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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후스가 갇혔던 감옥

콘스탄츠공의회가 열렸던 건물 한 귀퉁이 공간이 후스가 갇혔던 곳이다.

후스의 개혁운동이 점차 확산되자 로마가톨릭교회는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교황

과 황제가 1414년 콘스탄츠공의회로 그를 소환하며 목숨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

지만, 그 앞에 나서는 일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후스는 진리를 증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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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얻기 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콘스탄츠로 향했다. 그러나 약속을 어기고 감옥에 가두었 고 1415년 7월 6일에 화형당했다. 지금 여기는 보덴호수를 전경으로 하는 고급스러운 호 텔로 사용되고 있다.

감옥의 후스

저서<교회>에 실린 후스의 기도

“전능하신 주님,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당신 안에서 오늘을

걷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겸손, 가난, 순결, 성실, 인내로 머리이신 당신을 닮고자 애쓰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사단의 길은 활짝 열려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걸어갑니다. 주님, 당신

의 연역한 양떼를 도우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 세상 끝날까지 좁은 길로 당신

만 따라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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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석(記念石)

후스 유골은 라인강에 뿌려졌고, 그가 화형당한 곳에 세워졌다. 그의 순교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일명 ‘후스의 돌’ 죽임을 당한 날짜가 적혀 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후스 기념비와 박 물관이 있다. “나는 한 마리의 거위(후스 hosa)구이가 되지만 100년 후에는 백조로 부활할 것이다.”

후스의 말대로 1519년 마르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후스가 옳았다”고 외쳤다.

개혁신앙의 뿌리 (1) 43

타보르 시청사와 얀 지스카 광장

체코 남부의 작은 도시인 타보르(Tábor)는 후스파 저항운동의 근거지였고, 지스카는 후스

파 지도자로 로마가톨릭교회에 맞서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애꾸눈 장군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변화산이 다볼산으로

추측하는데, 타보르(Tabor)는 교회와 현실사회의

변화를 열망망하는 후스파의 꿈과 비전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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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마르틴 루터 (1483~

1546)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 교회에 끼친 루터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루터는 독일의 자부심이

다. 보름스의 ‘종교개혁자 기념공원’의 동상의 한가운데 루터가 우뚝 서 있고, 그를 둘러싸

고 발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가 있다. 전세계 루터교인은 독일, 북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7,200만명 (장로교인 1,800만)

(1) 45
개혁신앙의 뿌리
수요바이블아카데미 46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2017년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새로 건축한 건물을 옛 수도원과 연결.
이 수도원에서 살았다. 1990년에 수도원 옛 건물에서 일박하고 아침에 둘러보다가 루터가 읽으며 메모했던 성경 을 보고 감격한 기억이 난다. 이곳은 루터가 ‘어떻게 해야 나의 양심이 죄로 인한 고통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안고 영적 불안과 고민을 하며 몸부림쳤던 곳이다.
루터는 1505년부터 1511년 에르푸르트의

개혁신앙의 뿌리 (1)

비텐베르크성교회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게시한 성처럼 웅장한 건축물.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킨 현장으로, 교회 입구 옆의 청동문 전면

에 루터의 95개 논제가 조각되어 있다. 루터는 95개 논제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공로 부

적이었던 면벌부(免罰符)를 비판하고 교회갱신을 촉구하였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공로

를 쌓아 벌을 면제받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된 것임을 천명하였다.

예배당 설교단 바로 아래의 루터 무덤과 평생 동지 멜란히톤 무덤이 나란히 있다. 아내들

은 다른 곳에 무덤이 있고, 둘이 나란히 묻혀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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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만으로 어떤 관계의 동역자였는지 알게 해 준다. 성교회 둥근 형태의 탑의 꼭대기에 독일어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 기가 되십니다.”가 있다. 루터가 지은 찬송가 585장의 가사이다.

보름스대성당

1521년 1월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황제 카를5세로부터 제국의회가 열리고

있는 보름스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고, 1521년 4월 18일 황제와 제국 앞에서 입장 철 회를 요구받았다.이 자리에서 루터는 이렇게 고백하며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수요바이블아카데미 48

개혁신앙의 뿌리 (1)

바르트부르크성 루터의 방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교황과 황제 모두에게 버림받은 위험천만한 처지였다. 다행히 비텐

베르크의 영주 현자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루터는 학창시절을 보냈던 아이제나흐의 산

위에 있는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루터는 1521년 5월부터 1522년 3월까

지 이 건물의 2층 작은 방에 숨어 지내면서, 고뇌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길

이 옳은 방향인지를 물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9월성경’ 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근대 독일어 형성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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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시립교회

루터가 목회한 교회로 성교회보다 훨씬 먼저 13세기 말에 건립되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라

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복음을 설교하였고, 빵만 아니라 포도주까지 베푸는 성찬을 행하였다. 비텐

베르크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펼치며 자신의 모든 곳을 쏟아부은 도시로 ‘루터의 도시’라

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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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시립교회 내부

비텐베르크 시립교회는 종교개혁의 모태교회이다. 교회 내부에 있는 제단화는 루터의

절친이었던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父子)의 작품으로 루터의 신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개혁신앙의 네 가지 핵심 요소를 담고 있다. 복음설교 위에 세례, 성찬, 공적 고백의 성례가

있음을 말해준다. 상단의 3개 패널에는 유아세례를 베푸는 멜란히톤, 성찬을 받는 루터, 공 적 고백을 듣는 부겐하겐이 그려져 있고, 하단 중앙 패널에는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 루 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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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져 있다. 설교자 루터는 손가락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회중도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복음의 본질이며 우리 신앙의 중심인 점을 강조한다.

루터의 참나무

1520년 12월 1일, 이른 아침에 루터는 동료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파문을 위협하는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파문칙서)를 불태웠다. “네가 주님의 거룩한 자(그리스도)를 기만했기 때문

에,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너를 영원히 불에 살라버린다.” 이 엘스터

성문 앞은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병균을 박멸하기 위해 물품들을 태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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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였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이 사건은 유럽전역에 종교혁명을 일으키는 신호탄이 되었다.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참나무’(The Luther Oak)를 심었는데, 지금의 이 나무 는 1830년에 심은 것이다.

개혁신앙의 뿌리 (1)

훌드리히 츠빙글리 (1484-1531)

루터와 함께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개혁가이다. 12년간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로서 사역하다가 1519년 취리히 그로스민스터교회로 부임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개혁정신은 하인리히 불링거, 장 칼뱅과 같은 스위스 종교개

혁자들에게로 전해졌고 지금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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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뮌스터교회

츠빙글리 개혁의 요람이었던 그로스뮌스터교회.

여기서 츠빙글리는 로마가톨릭이나 루터와는 분명하게 다른 ‘연속적 강해설교’를 시작했 고, 목회자 성경연구모임인 ‘예언모임’(prophezei)을 인도했고, 루터성경(1534)보다 앞서

독일어 취리히성경(1531)을 펴냈고, 세례와 성찬을 포함한 예배개혁를 이루어냈다.

오늘날의 개혁교회 전통의 근간이 이곳에서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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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55 취리히 시청사 이곳에서 1523년 1월과 10월 로마가톨릭교회 측과 츠빙글리와 그 동료들이 수백 명의 청 중 앞에서 공개논쟁이 벌어졌다. 1522년 사순절에 몇몇 사람이 소시지를 먹은 것이 알려 지자 로마교회 측에서는 사순절 육식금지 전통을 어긴 것이라며 처벌을 주장했고, 츠빙글 리는 그 전통이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또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자유가 있 다며 반박하였다. 공개논쟁이 시작되자 츠빙글리는 단지 육식 금지 전통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때 제시된 것이 츠빙글리의 개혁 청사 진인 「67개 논제」로 포괄적 개혁을 추구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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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1)

취리히의 바서교회(Wasserkirche) 앞에 세워진 츠빙글리의 동상 (1885년)

오른손에 성경을 들고 가슴에 대고 있고, 왼손으로 칼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이다.

교회(성경)와 국가(칼)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바르게 세우기를 열망했던 츠빙글리의

개혁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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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표현하고 있다. 1838년 츠빙글리가 숨을 거둔 현장에 세워진 기념비 1531년 10월 11일 카펠 평원에서 군사들을 돌보던 츠빙글리가 적에게 사로잡혀 47세의 나 이로 죽음을 맞았다. 그는 “그들이 내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내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라는 말 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몸은 네 토막으로 찢겨져 화형에 처해졌고 불에 탄 재 는 돼지의 재와 뒤섞여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수요바이블아카데미 58 불링거 입상 그로스민스터교회 벽에 있는 하인리히 불링거의 입상. 그는 츠빙글리를 이어받아 44년 동안 여기서 목회하며 개혁교회 기틀을 다졌다.
개혁신앙의 뿌리 (2) 03 칼뱅 - 웨슬리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01 장 칼뱅 (1509-1564)

칼뱅은 1536년 3월 바젤에서『기독교강요』를 출판하였다(27세).

『기독교강요』는 필립 멜란히톤의『신학총론』과 함께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교과

서로 자리매김 되었다. 27살의 청년 칼뱅이 쓴『기독교강요』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고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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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2) 61 프랑스 누아용(Noyon)에 있는 칼뱅의 생가 칼뱅은 14살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여기서 살면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사역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하였다. 이 생가는 지금은 칼뱅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칼뱅의 주저인『기독교강요』초판(1536) 등이 보관되어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 피난민 교회였던 방패교회(Église du Bouclier)

칼뱅은 당시 제네바의 개혁자 기욤 파렐의 강권에 따라 1536년 여름 제네바의 교회개혁 운동 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제네바 토착세력과 갈등하다 1538년 4월 제네바에서 추방당했고, 1538년 9월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였다. 방패교회의 첫 목회자로서 1538-41년간 사역하면서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의 교육자로,『기독교강요』2판(1539)과『로마서 주석』(1540)

을 집필한 신학자로, 이들레트 드 뷔르라는 여성과 결혼한 남편으로, 여러 도시에서 열린 로

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화에 참여한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의 고백대로 칼뱅은

여기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보냈다.

소박하고 검소한 예배당이 인상적이다. 설교대 제일 위에는 “당신들의 주인은 오직 한분이며, 당신들은 모두 형제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며, 우리

는 동등한 형제자매라는 개혁교회(프로테스탄트)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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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의 목회자로, 개혁자로, 교육자로서 살았다.

칼뱅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신앙고백서, 교리문답서, 예배예식서, 교회헌법을 제시하였

고, 제네바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목회자와 평신도 동수로 구성된 치리기구인 ‘콩시스투아 르’를 만들었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종합구빈원’과 ‘프랑스기금’을 설치하였고,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해 ‘제네바아카데미’를 설립함으로써 명실상부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

에 합당한 도시로 만들었다.

개혁신앙의 뿌리 (2) 63 칼뱅이 23년간 사역했던 제네바 생피에르 교회. ‘성 베드로’를 기념하는 교회로 1232년 완공되었다. 1538년 4월 제네바를 떠났던 칼뱅이 기 욤 파렐과 마르틴 부처의 강권에 3년 7개월 만인 1541년 9월 생피에르 교회의 목회자로 귀환 하고, 1564년 5월 27일 숨을 거둘 때까지

제네바 바스티용 공원에 있는 종교개혁기념조형물의 일부

이 조형물은 칼뱅 탄생 400주년이자 제네바아카데미 설립 350주년인 1909년 착공하여 1917

년 완성한 길이 100m, 높이 10m의 거대한 기념비 한복판에는 네 명의 개혁자- 파렐, 칼뱅, 베

즈, 녹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네 사람 아래에는 ‘IHΣ’라는 모노그램은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

도(ΙΗΣΟΓΣ ΧΡΙΣΤΟΣ)를 뜻하는 단어의 앞 세 글자를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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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의 쁠랭빨래 공립묘지에 있는 묘지

프랑스인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자로 산 칼뱅의 무덤은 일반인들과 같이 묻혀 있는 자

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칼뱅과 녹스 같은 개혁자들은 자신을 기념하는 무엇이 남아있기를

원치 않았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지 행여 사람에게 돌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로마가톨릭의 구태인 성인숭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707호라는 표지판이 있고, 나중에 세운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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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존 녹스 (1513-1572)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로 흔히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린다. 녹스는 칼뱅과 함께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펼치다가 1559년 고국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서 1560년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종교개혁 정신을 담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장로

교회 정치원리를 표명한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를 의회에 제출하였다. 의회가 받아들 임으로써 스코틀랜드는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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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2) 67 에든버러대학교 신학부 교정에 있는 녹스의 동상 왼손으로 성경을 들고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하늘에 향해 들고 있는 강직한 예언자의 모습으 로 서 있다. 그의 개혁정신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녹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나팔 수라고 생각하고 언제 어디서든 복음을 가감 없이 소리 높이 외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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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순교자 기념비

해밀턴(Patrick Hamilton)과 위샤트(George Washart)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1842년 설립

한 기념탑.

해밀턴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학생으로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고 돌아와 루터주의 사상

을 전파하다가 로마가톨릭교회에 체포되어 1528년 2월, 공개 화형당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

혁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그의 나이 고작 24세였다.

위사트는 스위스에서 개혁전통을 배우고 돌아와 종교개혁 사상을 가르치다가 역시 로마가톨 릭교회에 의해 1546년 33세의 나이로 화형대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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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녹스는 에든버러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자기
북쪽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사람, 해밀턴과 위샤트를 만났다. 녹스가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것도 위샤트의 영향이다.
수요바이블아카데미 70 세인트자일스교회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 있는 존 녹스 개혁운동의 심장, 세계 장로교회의 모교회 녹스는 1559년부터 1572년 죽기까지 이곳에서 복음의 나팔을 불어대며, 종교개혁운동을 강력 하게 펼쳤다. 녹스는 메리 여왕 앞에서도 조금의 망설임이나 물러섬 없이 개혁의 나팔을 불었다.
개혁신앙의 뿌리 (2) 71 주차장 묘지 세인트자일스교회 주차장 23번으로 노란색 표시된 부분이 녹스의 무덤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자의 무덤이 초라하기만 하다. 1572년 11월 임종을 앞둔 녹스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취한 일이 없고, 인 간을 만족시키고자 애쓴 적도 없고, 나 개인이나 다른 이들의 정욕을 만족시킨 일도 없으며, 단지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여 내가 감독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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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바이블아카데미

개혁신앙의 뿌리 (2)

녹스 채플

제네바 생피에르교회당 옆에 있는 녹스 채플

여기는 원래 칼뱅 강당으로 칼뱅이 성경을 가르치던 곳인데, 녹스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잉글랜드

와 스코틀랜드에서 피난 온 피난민들과 함께 예배드렸다. 그래서 칼뱅 강당을 ‘녹스 채플’이라 부 르기도 한다.

1546년 시민들은 위사트를 화형시킨 대주교 데이비드 비튼이 거주하던 세인트앤드류성에 침 입하여 살해, 포위된 시민들에 녹스가 가담하였다가 프랑스 지원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자 붙

잡혀 1년 7개월동안 노예생활을 하였다. 갤리선에서 풀려난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프

로테스탄트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잉글랜드에서 사역하다가 로마가톨릭 군주 메리 튜

더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자 또다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55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의 피난민 교회를 맡아 목회 활동을 하다가 1556년 스위스의 제네바로 향했다. 녹스는 1556년부터 1559년까지 제네바에서 칼뱅의 동역자로 교회개혁운동에 헌신하였다.

3년 남짓 제네바 체류는 녹스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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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필립 슈페너 (1635-1705)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혁교회가 점차 순수한 신앙이 화석화된 교리로 변해갔고 개혁의

열정은 광신으로 대체되었을 때, 제2의 종교개혁을 표방하며 나선 인물이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페너는 저서『경건한 열망』에서 종교개혁운동의 완성을 제안하

였고 이 책이 출간된 1675년을 경건주의의 시작으로 본다.

* 경건주의의 가치

신앙의 내적 경험과 행위 중심으로 신앙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당시 개혁신앙이 “이신칭의”에 매 몰되어가는 현상에 대한 반성이다. 신앙으로 개인을 변화시킴으로 교회와 사회, 전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 는 역동적인 경건이었다. 독일 여성신학자인 도로테 죌레(D. Seolle)는 자신을 ‘경건주의자’라고 고백하며 경건주의적 사고를 가질 때, 신학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개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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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2)
스트라스부르대학
슈페너가 공부했고 또 가르쳤던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신학부 건물. 그는 이곳에서 1653년 철학 석사학위를, 1664년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수요바이블아카데미 76 바울교회 슈페너가 20년 동안(1666-86) 목회했던 프랑크푸르트의 바울교회. 여기서 어떻게 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1670년 ‘경건모 임’(collegium pietatis)을 조직하고 새로운 경건 운동과 성경 연구를 통한 교회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다.

친첸도르프 생가

헤른후트에 있는 1721년 세워진 생가

이 집은 친첸도르프(Nikolaus von Zinzendorf, 1700-60)의 생애와 사역을 소개하는 작은 박물

관이 되었다. 그에 의해 독일 경건주의운동은 새롭게 꽃 피웠다.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외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그녀는 슈페너와 경건주의 운동의 적극적

지지자였으며, 자국어 성경 번역을 추진하고, 소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등 종교

와 사회의 개혁자였다. 슈페너가 친첸도르프의 대부가 된 것도 외할머니 덕분이었다.

친첸도르프는 경건주의의 요람이었던 할레에서 아우구스트 프랑케로부터 감화를 받고, 1716 년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뿐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

스,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신앙 전통을 접하며 에큐메니칼 정신의 소유자로서 실천자였 다. 교파의 연대를 통해 세상과 인간의 평화를 추구하였고, 이 에큐메니칼 정신은 헤른후트 형 제교회에 반영되었으며, 다양한 신학과 교파들이 친첸도르프를 중심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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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헤른후트교회

1722년 친첸도르프는 모라비아 형제들을 만났다. 이들은 얀 후스의 후예로 모라비아와 보헤

미아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친첸도르프는 작센에 있는 자신의 영지 에 이들을 받아들여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를 만들어 경건주의를 실험하였다.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헤른후트는 곧 박해받는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

는 피난처가 되었다.

슈페너가 이상으로 삼았던 교회론인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헤른후트교회를 통하여 실현되

었는데, 교회에 많은 소그룹을 두어 참된 교회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18세기 개신교 선교의 요람이자 본부였다. 친첸도르프는 평신도 선교사

제도를 헤른후트교회에 도입했으며, 이들의 열정으로 1930년까지 교회는 3,000명의 선교사

들을 파견하였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모라비아 형제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헤른후트 공동체에는 “로중”(Losungen)이란 말씀묵상집이 있는데, 로중은 군사 용어로 ‘암 구호’를 뜻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필수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로중은 1731년부터 거의 300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매일의 삶을 지탱하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국내에도 2009년부터 로중이 우리말로 번

역 소개되고 있다. 로중은 6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100개국 이상에 전해져 200만 명 이

상이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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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2) 79 헤른후트 예배당의 외부와 내부의 모습이다.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가 모라비아 형제단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04 존 웨슬리 (1703-1791)

복음전도자, 사회운동가, 교회개혁자, 부흥사, 신학자!!

웨슬리는 감리교 창시자로 이 많은 호칭대로 살았다.

웨슬리는 1735년 10월, 미국의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가던 중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모라비아 교도들의 확신에 찬 신앙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결정적인 회심도 1738

년 5월 런던에서 있었던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임에서였다.

회심 기념비에는 웨슬리의 그날 일기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저녁에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

다. 그때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 그가 그리스

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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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웨슬리 생가

웨슬리가 부모와 19명의 형제자매와 더불어 생활한 ‘옛 목사관’(Old Rectory)으로 지금은

존 웨슬리 박물관으로 운용되고 있다.

1709년 2월에 발생한 화재에서 그는 창밖으로 꺼내어져 살아났다. 그때 어머니 수산나는 웨

슬리를 보며 “하나님이 장차 이 아이를 영혼의 불쏘시개로 사용하시려고 구해주신 것이다.”

라고 말했고, 웨슬리는 이후 평생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 같

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728년 성공회 사제로 안수받은 후 동생 찰스 웨슬리가 시작한 ‘신성클럽’(Holy Club)의 지

도자로서 성경을 읽고 기도와 금식에 힘쓰며 사회적 약자를 방문하고 돕는 일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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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런던에 있는 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웨슬리는 1735년 10월, 미국의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가던 중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모

라비아 교도들의 확신에 찬 신앙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결정적인 회심도 1738년 5월

런던에서 있었던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임에서였다.

회심 기념비에는 웨슬리의 그날 일기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저녁에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 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

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기념비가 불꽃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도 웨슬리의 이 고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회심의 장소 는 감리교회가 탄생한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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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 5월에 영국 브리스톨에 세워진 첫 감리교회인 ‘뉴룸’(New Room)에 있는 존 웨슬리

기마상이다. 브리스톨은 1740년대와 1750년대 존 웨슬리의 복음 사역의 근거지였다. 그

1739년 3월 28일 편지에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복음을

수요바이블아카데미 84 기마상
실제 52년 동안 말을 타고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전도하느라고 총 334,672km를 다녔다.
즐겨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게 전도한다는 것은 바른 일이며, 또 나의 고귀한 책임이기 때문에 어떤 곳이든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이후 웨슬리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려는 듯 순회 설교자의 삶을 살았다.

야외설교단

첫 야외설교지였던 영국 브리스틀의 한함마운트 언덕(Hanham Mount)의 설교단

노동자들과 약자들을 상대로 설교했던 곳인데 지금은 주택들로 둘러싸여 있다. 단상에는 이 말씀이 새겨져있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

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

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사 52:7)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백명, 많게는 1만 5천명이 몰려왔다고 한다. 여기에서 영적각성운동

이 시작되었다. 설교단 바닥에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웨슬리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 다음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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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돈 사용의 3대 원리로 "열심히 벌어라, 열심히 저축하라, 열심히 주어라"를 강조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을 사용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을 열심히 하라는 것으로 건

전한 직업과 근면한 노동을 강조했다.

당시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온갖 경제적 불의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인클로저(enclosure)로 인해 땅을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와 날품팔이 도시빈민이 되었고

이로 인해 발생한 주거 문제와 노동문제, 건강 문제 등은 끔찍하였다. 이에 웨슬리는 고통당하

는 도시 빈민과 노동자, 광부, 농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희년운동을 했다. 노동

영역을 기독교 윤리를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영역으로 보았고 노사관계도 윤리적인 관계로 보 았다. 웨슬리는 빈곤의 원인이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악하고 악마적인 거짓말이라

고 반박하면서, 가난과 실업은 사회적 불평등 체제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빈

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용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와 감리교회는 영국 노동자들의 끔찍한 상황을 보고 노동운동을 세계 최초로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조

합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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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채플

웨슬리의 런던 선교 본거지였던 곳.

이곳은 웨슬리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1778년 새롭게 건축하였고, 1779년

이곳에서 영국 감리교회 최초의 연회가 개최되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한 손에 성경, 다른 손은

축복하는 웨슬리의 동상이 있다. 동상 받침대에는 ‘온 세계가 나의 교구입니다.’라는 그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이 웨슬리 채플 지하에는 1984년 개관한 ‘감리교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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