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고요하고 바르고 둥근 마음을 찾아가는 _ 수양 전문지
법문을 읽고
心靜之安 先見之覺 이 세상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 가운데에 시간(時間)이란 것이 있다.
ISSN 1228-1212
시간이 흘러옴에는‘누구에게는 보다 빨리, 또 누구에게는 보다 더디게—’라는 것이 없는 것 이다. 바꿔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아직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완전무결한 처녀지 적인 새로운 시간’속으로 다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로운 시간 속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것을 미리 안다는 선견(先見)이 우 리들에게는 가능할 것인가? 그런데, 그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생겨나는 일들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잖은가 한다. 그 하나는 현재의 일의 결과로서 그 새로운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이 생겨나는 일인 것이다. 모든 일이 순간순간 맞는 그 시간은 새로운 것일지라도, 그 일 자체는 시간적으로 계류(繫 留)되면서 원인과 결과가 차원적으로 발전 생성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앞에서 든 전자의 경우에서는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리(推理)와 판단(判斷)이라는 형태로 선견이 가능 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서는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자기 내면을 통한 영감 적(괈感的)이고 계시적(啓示的)인 형태로 가능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하튼, 선견(先見)을 가능케 하는 데는 전후자에 공통으로 인간이 지켜야 할 필수 불가결 의 요건이 있잖은가 한다. 그것은 그 선견(先見)의 주체인 인간의 주관(主觀)이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의 해답은 성훈 그대로“심정지안(心靜之安)”이라 믿고 있다.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한 가운데서의 정확한 추리와 판단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러한 상태 하에서는 그것이 흐려지기 쉽고, 왜곡되기 쉬운 것이다. 인간의 마음의 천성(天性— 善)에로의 승화는 곧 심정(心靜)과 심안(心安)에서 가능한 것이라 보면, 정(靜)과 안(安)의 반 대의 극(極)이 되는 동요와 불안에서는 그 영감과 계시를 또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심정(心靜)·심안(心安)에서 선견(先見)의 각(覺)을 얻었다면, 거기서 또 지켜야 할 일이 있을 것으로 안다. 추리와 판단에서의 각(覺)이 사욕에 홀린, 분수에 넘치는 일에는 쓰이 지 않도록 해야 되고, 영감과 계시에서의 각(覺)을 잘못 써 천기(天機—天理)를 거스르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을 행사하는 이가 그 법을 도로 범하는 그런 잘못은 생기 지 않도록 하기 위함에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대구원
D도생〈성덕도보〉제35호(1967. 4. 1)에서 격월간 성덕의 빛 / 聖紀62年 2013년 5월 1일 발행
Vol.193 / 2013
05+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