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ing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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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의 해 2014 지 은 이 문경규 펴 낸 곳 영상복음미디어 초판 1쇄 2014년 9월 1일 주

소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78

화 02) 730-7673

출판등록 제 300-2009-107호 I S B N 978-89-94945-37-8


우리가

7의 봉인을

알면

주의 재림을 볼 수 있다



시작하는 글 /10

제1장/ 일곱 수의 봉인 1. 창세기와 7의 수 /13 2. 계시록과 7의 봉인 /22 3. 7의 일반적 의미 /23 4. 7의 깊은 의미들 /26

제2장/ 아담의 구원의 수 1. 성경의 7진법 /31 2. 아담의 수 /32 3. 아담의 존재의 목적 /37 4. 타락 전 아담의 구원 /36 5. 타락 후 바싸르가 된 아담 /37 6. 아담의 구원의 수 /39

제3장/ 구원의 3단계 1. 방주의 3의 구원 /46 2. 에녹의 3의 구원 /47 3. 구원의 3일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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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아브라함의 세 구원 1. 아브라함의 세 후사 /61 2. 아브라함의 세 믿음 /64 3. 아브라함의 세 의 /66

제5장/ 멜기세덱의 봉인 1. 성경의 두 복 /73 2. 복의 근원 아브라함 /74 3. 멜기세덱의 등장 /76 4. 아브라함과의 만남 /79 5. 축복의 비밀 /81 6. 멜기세댁의 3의 복음 /86

제6장/ 브엘세바의 승리 1. 브엘세바의 뜻 /94 2. 브엘세바 사건의 배경 /95 3. 아비멜렉의 방문 /99 4. 브엘세바의 비밀 /102 5. 우물과 에셀나무 /109 6. 영원하신 하나님 /111 7. 승리의 십일조 /114

제7장/ 3과 7의 봉인 1. 이삭의 생애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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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땅에 거하라 /130 3. 일곱의 우물 /131 4. 승리의 우물 /133 5. 구원의 3과 7 /135 6. 구원의 1, 3, 7 /144

제8장/ 구원의 7천년 1. 창조의 7과 3 /148 2. 구원의 7천년 /150 3. 바싸르의 4천년 /152 4. 네페쉬의 2천년 /155 5. 왕의 7천년 /161 6. 신랑의 7천년 /163 7. 성막의 7천년 /165

제9장/ 7일의 아침 1. 저녁과 아침의 원리 /169 2. 저녁과 아침의 구원 /170 3. 저녁과 아침의 은혜 /172 4. 저녁과 아침의 창조 /174 5. 저녁과 아침의 안식 /179 6. 제 7일의 아침 /177 7. 구원의 아침 /181 8. 복음 중의 복음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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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성도의 아침 1. 저녁의 교회 /191 2. 저녁의 성도 /192 3. 아브라함의 아침 /195 4. 야곱의 아침 /198 5. 아침의 할례 /200 6. 아침의 복음 /202

제11장/ 재림의 기초와 본질 1. 요셉과 재림 /207 2. 예수의 원림 /207 3. 재림의 본질 /212 4. 구름과 재림 /213 5. 초림과 재림의 차이 /222 6. 재림의 목적 /225 7. 개인의 재림 /227 8. 역사의 재림 /229

제12장/ 대환난의 비밀 1. 전무후무한 대환난 /234 2. 요셉의 환난 /235 3. 말씀의 환난 /24 4. 짐승의 카톨릭 /244 5. 과부의 개신교 /246 6. 대환난의 실체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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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2014년의 재림 1. 재림의 봉인 /251 2. 바로의 꿈 /252 3. 7풍 7흉의 영적 의미 /254 4. 1과 4의 영적 의미 /257 5. 예수의 14 /261 6. 왕같은 제사장 /265 7. 5의 은혜 /268 8. 왕의 장막절 /274 9. 2014년의 재림 /277

제14장/ 재림 그 이후 1. 7의 복음 /289 2. 이스라엘의 회복 /296 3. 재림과 심판의 역사 /301 4. 치료의 역사 /304 5. 종말의 엘리야 /306 6. 종말의 요단강 /312 마치는 글 /318 부록-일곱 수의 요약/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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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글

2014년 올해, 주님이 재림하신다. 올해 2014년은 이 땅의 교 회가 지난 2천여년간 기다려 온 주의 재림이 현실화하는 역 사적인 해가 된다.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2014년이 재림의 해라는 사실을 믿 지 못할 것이다. 무슨 천지개벽의 징조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종말의 대재앙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무슨 재림이 있겠느냐 고 할 것이다.

하지만 본서가 증거하는 말씀을 본다면 과연 2014년이 재림 의 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서나 계시록을 통하여 재림의 때와 시기를 해 석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재림을 해석하는 중대한 말 씀이 창세기 안에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안에는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한 말씀 뿐만아니라 대환난에 대한 비 밀까지 모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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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창세기에 나타난 재림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가장 먼 저 7의 수(數)에 대한 봉인을 열어야 한다. 창세기에 증거된 7 의 수는 신비하고 비밀한 수요, 깊은 봉인의 수다. 하나님께 서는 이 7이라는 수 안에 주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중대한 비 밀들을 모두 감추어 놓으셨다. 따라서 창세기에 있는 7의 의 미를 푸는 것이야말로 바로 종말의 비밀을 푸는 것이요, 재림 의 비밀을 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특히 올해에 창세기에 감추인 7의 봉 인이 열리도록 허락하셨다. 이 7의 비밀과 봉인이 열리며 그 내용이 알려지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 7의 수가 열리고 알 려지는 그 때가 바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인 것이다.

이 해에 7의 봉인이 열리고 하늘의 일곱 말씀이 울려 퍼지 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2014년 9월 1일 문 경규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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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일곱 수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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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세기와 7의 수

1) 창1:1절의 7단어

성경에는 여러 수들이 있는데 그 중에 7의 수는 하나님의 비 밀과 봉인의 수다. 만일 우리가 이 봉인의 수 7을 이해하게 되 면 우리는 하늘의 빛을 보며 그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성경이 증거하는 수 7은 지혜와 능력이 있고, 우 리를 온전한 자로 서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비밀과 힘을 가 진 수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계시록이며 두 번째로 많은 곳이 창세기다. 계시록에는 약 59회 나타나 있고 창세기는 36회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에는 일곱과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창1:1절은 일곱 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되어 있다.“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는 말씀 은“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뵈에트 하아레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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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다. 하나님이 이렇게 성경의 첫 말씀을 일곱 단어로 표 현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뜻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성 경 전체를 일곱이라는 수를 통하여 이끌고 계심을 보여주는 의도가 있다.

2) 창조의 7일

하나님은 태초에 7일 동안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의 창조가 제 7일에 모두 마쳤기 때문에 7이 중요하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이 점은 거꾸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곧 창조가 7 일이어서 7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7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 님이 처음부터 7을 염두에 두고 7일 동안 창조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를 행하실 때 굳이 하루라는 날짜가 필요치 않다. 더군다나 7일이라는 긴 날짜도 필요 없다. 하나님은 원 하기만 하면 한 순간에 모든 창조를 할 수 있고 또는 하루에 모든 창조를 마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날짜를 세 며 7일이 되어서야 모든 창조를 마치신다. 이는 하나님이 창 조의 일곱 날을 통해 7이라는 수를 부각시키고 강조하려는 뜻 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나님은 많고 많은 수 중에서 하 필 7의 수를 정하시고 창조의 날들을 7의 수에 맞추어 진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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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고 창조의 비밀이며 7 의 비밀이다. 7의 비밀은 크고 신비롭다. 이 수는 하나님의 깊 은 지혜를 감추고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포괄하는 신 령한 수에 해당한다.

이 비밀의 수 7을 풀기 위해 먼저 창세기에 나타난 7에 관한 말씀들을 좀 더 살펴 보자.

3) 창세기의 7의인

창세기를 보면 총 7명의 의인이 등장한다. 히브리서는 히11 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할 때 창세기에 나오는 일곱 사 람을 기록한다. 아벨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 삭, 야곱, 요셉, 이렇게 일곱 사람이다.(히11:4~22)

그러면 히브리서는 왜 창세기에 기록된 의인을 일곱 사람으 로 소개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창세기에 기록된 의인의 수를 세어보니 일곱 사람이기 때문에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 님께서는 7이라는 수가 중요한 비밀의 수이므로 의도적으로 일곱 사람을 택하고 일곱 의인을 보여 주시며 7의 수를 강조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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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담의 7대 손 에녹

창5:21절 이하에는 에녹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나타난다. 에녹은 특별한 의인이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300년 동 안 동행하며 의인의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림을 받는 자가 되었다.

유다서 1:14절은 에녹을 소개할 때“아담의 칠 세 손 에녹”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 에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에녹 이 어찌어찌 태어나다 보니 아담의 7대 손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뜻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아담의 7대 손 에녹을 택하시고 그를 이끌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며 또한 하늘로 데려가셨다.

하나님은 무언의 메시지를 증거하기 위해 아담의 7대 손 에 녹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것은 아담의 때로부터 어느 특정한 때 즉 7이라는 수의 때가 찼을 때 이 땅에 에녹에게 허락하신 바와 같은 하늘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 님께서는 에녹을 통해 7의 수에 담긴 은혜를 간접적으로 증 거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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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삭의 7우물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 있을 때 땅에 있는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이 마를 것이라 하셨다. 그러면서“내 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 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하셨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늘의 샘물이 됨을 증거하셨다.

성경에서 예수가 하늘의 샘물인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 물이 이삭이다. 이삭은 이 땅에 오신 초림 예수를 가장 잘 상 징한다. 그런데 창세기에 기록된 이삭의 삶을 살펴 보면 딱히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혹은 아들 야곱에 대한 기록에는 수많은 사건과 말씀들이 있지만 이삭 에 대한 내용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삭은 그의 삶에서 중요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다. 성경은 이삭을 우물 파는 사람으로 소개하며, 그의 생애를 우 물 파는 생애로 보여준다. 창26장에 보면 이삭이 우물을 파는 사건들이 나오는데 그가 7개의 우물을 파는 것이 나타난다. 이삭 당시에 그 척박한 땅에서 우물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힘 든 일이었다.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우물을 발견하기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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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로 우물 파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삭은 남들이 하나도 얻기 어려운 우물을 일곱이나 발견해서 파고 있다. 그가 이렇게 많은 7의 우물을 판 것은 무 엇 때문일까. 이 역시 7이라는 수에 중요한 의미가 있고 비밀 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7개의 우물을 파도록 하 셨다. 특히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하늘의 우물이신 예수를 보 여주기 위해 7개의 우물을 파게 하셨다.

6) 아브라함의 7양

순서가 바뀌었지만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생애에도 7 과 관련된 말씀이 있다. 창2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왕 아비멜렉과 우물을 사이에 두고 화친의 언약을 맺는 사건이 나온다. 그 때 아브라함은 난데없이 아비멜렉에게 양 7마리 를 내어 준다. 그리고 그 우물의 이름을‘브엘세바’ 라고 이름 붙인다.

‘브엘’ 의 뜻은 우물이며‘세바’ 는 일곱이라는 뜻이다. 그래 서 브엘세바의 뜻은‘7우물’ 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아 브라함은 이삭이 7우물을 파기 전에 이미 7우물이라는 단어 를 사용하고 또한 7양을 통해 7우물에 대한 증거를 삼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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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창21:30) 이 브엘세바의 우물과 7마리의 양 역시 우리에 게 7의 비밀을 증거하기 위한 말씀에 해당한다.

7) 요셉의 7풍 7흉

창세기에서 7의 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 바로 요셉의 생 애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그 안에 7이라는 수가 자그만치 27 회나 등장한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요셉만큼 7이라는 수가 많이 기록된 인물이 없을 정도다. 그럼 왜 요셉의 생애에 7이 라는 수가 그리 많은 걸까. 그것은 요셉이 종말에 나타날 재 림 예수를 상징하며 그 종말의 때에 7의 비밀이 충만하게 나 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두 인물이 있다. 예수의 초림 을 상징하는 이삭이 있고 그의 재림을 보여주는 요셉이 있다. 먼저 이삭은 이 땅에 희생제물로 오신 어린 양 에수를 상징하 며 그리고 요셉은 온 천하를 다스리는 왕으로 오실 재림 예수 를 상징한다.

요셉이 재림 예수를 상징하는 것은 그의 이름에도 쉽게 나 타난다. 요셉의 이름의 뜻은“아들을 한 번 더 주소서” 라는 뜻이다. 이는 그 어머니 라헬이 요셉을 낳을 때 붙여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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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라헬은 요셉을 낳은 후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며“여호 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창30:24) 고 하였다.

하나님은 요셉을 재림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로 택하셨다. 그 래서 그의 이름이“아들을 한 번 더 주소서” 라는 뜻을 갖도록 하셨다. 말하자면 요셉의 이름에는 하나님이 아들을 한 번 더 주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을 더 다듬으면 ‘다시 오는 아들’ ,‘두 번째 오는 아들’ 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이 다시 보내는 아들, 두 번째 보내는 아들이 누구인 가. 그 분은 다름 아닌 재림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요셉은 바로 이 재림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이기에 그의 생 애에 7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많이 등장한다. 특히 요셉은 바 로왕의 꿈을 해몽하면서 7의 영적 의미를 풀어 준다.(창41:1 이하) 바로의 꿈에 등장하는 7암소, 7이삭의 의미가 각각 7년 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예고하는 꿈인 것을 설명한다.

요셉은 7의 해석을 통해 앞으로 애굽 땅에 7년의 풍년과 7 년의 흉년이 올 것을 예언하며 그 일을 관리하는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와 같은 요셉과 7에 관련된 사건들은 그저 지나간 애굽 시대의 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재림 예수와 7의 사건들에 대한 계시와 표징으로 등장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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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임을 주의해야 한다. 그만큼 7이라는 수 안에는 재림 예수 와 관련된 큰 비밀이 감추어 있다.

8) 기타 구약의 7

하나님은 창세기 외에도 구약의 여러 곳에서 7의 수에 대해 말씀하신다. 7의 비밀이 워낙 크고 엄청나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는 7의 수를 계속 말씀하신다. 레위기에서는 속죄의 피 를 뿌릴 때 7번 뿌릴 것을 말씀하고 민수기에서는 짐승을 제 물로 바칠 때 7마리를 바치라고 명하는 기록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성막에 있는 등대는 7등잔으로 되어 있고, 여호수아가 여리 고를 무너뜨릴 때는 제사장 7인이 7개의 양각나팔을 불며 7 일 동안 성을 돌다가 제 7일에는 7바퀴를 돌았다. 또 문둥병 이 걸린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 물에 7번 잠김으로 나음을 얻 었고 또한 하나님의 절기는 7절기로 정해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7번 단련한 은과 같고(시12:6), 지혜는 그 집을 지을 때 7기둥을 다듬고(잠9:1),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고치실 때 햇빛은 7배나 되어 7날의 빛과 같으며(사30:26), 스 가랴는 온 땅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 7이 있다고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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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슥4:10)

이와 같이 성경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 7이라는 수들은 그저 임의로 기록된 수가 아니다. 하나님께는 이 7의 수가 매우 중 요하기에 성경의 여러 곳에 7이 기록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2. 계시록과 7의 봉인

성경에서 7의 수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계시록이다. 계 시록에는 7에 관련된 많은 말씀들이 존재한다. 7교회부터 시 작해서 7촛대, 7영, 7별, 7사자, 7인, 7나팔, 7대접, 7머리 등 7과 관련된 말씀들이 너무도 많다.

또한 계시록 10장에 보면 일곱 우레가 발하는 사건이 나온 다. 하늘에서 들리는 일곱 우레의 소리를 듣고 요한이 그것을 기록하려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일곱 우레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계10:4) 한다.

일곱 우레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일 곱 말씀을 뜻한다. 그 일곱 우레의 내용이 알려지면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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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비밀이 이 땅에 전파된다. 더불어 창조의 7일로부터 감취어 온 7의 비밀이 이 땅에 알려지며 7의 일들이 완전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7의 비밀을 보여줄 때가 되지 않 았기에 일곱 우레가 발한 것을 기록하지 말며 그것을 덮으라 하셨다. 그것을 열지 못하게 하며 알려지지 않도록 봉하셨다. 이 7의 비밀은 때가 차기 전에 아무도 볼 수 없고 열 수 없는 하늘의 봉인이기 때문이다.

3. 7의 일반적 의미

하나님의 비밀의 수 7을 이해하려면 먼저 7에 담긴 기본적 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기본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 한 지침이 되는 말씀이 창2:2~3절이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 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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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더라” (창2:2~3) 이 말씀 안에는 7에 대한 기본적 의미들이 잘 담겨 있는데 그 의미는 대략 5가지로 볼 수 있다.

1) 완성수 7

창세기 기자는 2:2절 앞부분에서 창조의 모든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쳤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의 7일에 모 든 일을 마치며 그 날을 완성의 날로 말씀하셨다. 따라서 7의 수는 모든 일을 마치고 끝내는‘완성수’ 로 볼 수 있다.

2) 안식수 7

2:3절 후반부에는“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이 이를 때 모든 일을 마쳤기에 안식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일곱째 날을 정하여 그 날에 안식에 들어가셨다. 이는 7의 수에 안식의 의미가 있으며 7의 수가‘안식수’임을 나타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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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룩수 7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 다. 하나님은 창조의 다른 날들은 거룩하게 하실 수 없다. 그 날들은 완성의 날도 안식의 날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7의 날에만 안식하시기 때문에 7의 날에이 이를 때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거룩하다고 선포하셨다. 따라서 7에 는 거룩의 의미가 있으며 7의 수는‘거룩수’ 가 된다.

4) 복의 수 7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 날에 복을 주셨 다. 하나님은 동물들과 인간을 창조하시며 복을 준 적은 있으 나 창조의 날에 복을 주신 일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 의 제 7일을 구분하여 그 날에 복을 주셨다. 그래서 7의 날은 복의 날이며 7은‘복의 수’ 가 될 수 있다.

5) 완전수 7

이와 같이 7의 수는 완성수, 안식수, 거룩수, 복의 수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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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7보다 거룩하고 복된 수는 없다. 7은 하나님의 수이며 성경이 감추고 있는 봉인의 수다. 성경에서 7만큼 충만하고 완전한 수가 없으니 7은 또한 완전의 의미를 갖는‘완전수’ 에 해당한다.

4. 7의 깊은 의미들

창조는 1일에 시작하여 제 7일에 이르러 끝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런데 창조의 1일의 관점에서만 보면 창조가 어떻 게 진행되며 어떻게 끝날지 혹은 창조의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 전혀 알길이 없다. 둘째날 셋째날도 마찬가지로 창조의 결과가 어떠할지 알지 못한다. 창조는 마지막 7일이 되는 날 에만 결과를 알 수 있고 그 실체를 목격할 수 있다.

1) 7은 온전히 아는 것

여기에 바로 7의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님은 7의 수를 완성 의 수로 정하셨기에 다른 날이 아닌 7의 날에 이르러 창조의 모든 실체들을 드러내고 완전케 하신다. 그래서 7일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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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창조를 보는 것은 창조 전체를 보는 것이요 창조의 과정 과 결과를 모두 아는 것이니 창조 전체를 온전하게 아는 것과 같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진리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 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절기를 몇 절기만 배우고 만 다면 우리는 절기를 온전하게 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마 지막 7절기인 장막절의 내용까지 모두 배우고 이해한다면 성 경의 절기를 온전히 아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7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 리에 대해 그 전체와 결론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만일 1~6까지의 의미에 대해서 잘 안다 해도 7의 수 준과 의미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안다 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성경의 진리에도 이해의 단계가 있 으니 1을 아는 것이 초보의 단계라면 7을 아는 것은 모든 진 리를 아는 온전한 단계라 할 수 있다.

2) 7은 종말을 아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볼 때는 다른 날이 아닌 7일의 관 점에서 창조 전체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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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를 7일의 수준으로 본다고 해도 창조만 보아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전체 내용을 이해해야 한 다. 말하자면 창조 뿐만아니라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말 씀을 7의 수준으로 보고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7의 수준으로 성경을 알고 소화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우며 거의 불가능하다.

성경 전체를 7의 단계로 아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 곧 종말의 때가 되어야 한다. 종말의 때가 되어 봉인의 말씀 이 풀리면 그 때는 성경 전체를 온전하게 알 수 있다. 이렇게 종말에 나타나는 봉인의 말씀을 통해 성경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 바로 7의 수준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다.

3) 7은 봉인을 아는 것

우리는 흔히 종말적 예언서나 계시록이 봉인의 말씀인 줄 알지만 사실은 태초의 창조와 창세기 안에도 봉인된 말씀들 이 많이 있다. 또한 일반적인 성경에도 봉인은 여기 저기 숨 겨 있다. 봉인의 가장 흔한 예는 숫자다. 성경의 숫자들은 사 실상 대부분 봉인들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부활 후의 예수 님을 만나는 가운데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다. 153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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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물고기 수가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수 는 종말이 되어야 겨우 풀 수 있는 봉인된 말씀의 수다.(이 153에 대한 해석은 뒤에서 다룰 것이다.)

성경에는 153 외에도 숫자와 관련된 말씀이 대단히 많다. 하 지만 우리는 아직 그 수의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수와 관계된 말씀들을 올바로 풀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말씀을 아무리 잘 안다 해도 성경의 수의 봉인을 열 지 못하면 우리는 성경을 온전한 의미 곧 7의 의미로 알 수 없 다. 성경을 7의 의미로 안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다. 성경에 있는 종말과 봉인의 말씀을 풀어 온전히 아는 것이 곧 7을 아 는 것이니 7을 안다는 것은 모든 말씀을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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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아담의 구원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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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의 7진법

현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의 체계는 10진법이 다. 과거에는 5진법이나 6진법도 있었으나 그 효율성과 통일 성 때문에 현대 사회는 10진법을 수의 체계로 사용한다. 반면 에 우리가 자주 접하는 컴퓨터는 0과 1을 기본으로 하는 2진 법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성경에도 수의 체계가 있는 걸까. 성경에도 수의 체계가 있다. 성경은 특별히 7진법을 사용한 다. 성경은 7의 수의 체계를 통해 진리를 설명하며 7위 수로 써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창조의 수가 7이고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구원의 수도 7이며 종말의 수 역시 7이다. 계시록에서 그토록 많은 7의 수가 등장하는 것은 종말의 수 역시 7이 되기 때문 이다.

사단도 성경의 수의 체계를 흉내내는데 사단이 주로 사용하 는 수는 6이다. 이 6의 수를 극대화 한 것이 바로 짐승의 표 666이다. 성경은 이 666을 짐승의 이름이나 그 수라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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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짐승의 수라는 것은 짐승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치를 뜻한다. 말하자면 6의 수를 원리로 삼는 자들은 짐승이며 그 들은 성경의 수 7을 따르는 성도들을 거스리고 훼방하는 자 들이다.

그럼 이제부터 성경이 증거하는 7의 비밀이 무엇인가 알아 보기로 하자. 우리가 7의 비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아담의 수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담 의 상태를 이해하며 또한 아담 안에 감추어진 수를 이해하는 것이 비밀의 수 7을 푸는 첫 단계다.

2. 아담의 수

1) 네페쉬의 아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 셨다. 그런데 혹자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을 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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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 넣은 것이라 하며 흙의 몸에 영을 넣음으로 인간이 혼의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영혼몸의 3분설 의 존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영을 불어 넣었다는 것은 사 실과 다르다. 만일 하나님이 영을 불어 넣으셨다면 생기라는 단어에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루아흐’ 가 쓰였어야 한다. 하 지만 생기라는 단어에 쓰인 원어는 루아흐가 아닌 네솨마다. 네솨마는 숨이나 호흡을 뜻하는 단어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 숨쉬고 호흡하는 생명체가 되도록 한 것에 불과하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코에 산소를 불 어 넣으시어 그가 숨쉬는 존재가 되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

네솨마가 영이 아닌 숨이나 산소의 의미일 뿐이라는 것은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아담이 생령이 되니라” 는 말씀에서 생령에 대한 원어는‘네 페쉬’ 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네페쉬는 단순히 땅에 서 숨쉬고 사는 생물체를 지칭하는 단어다.

아담이‘네페쉬’ 가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그리 대단한 존재 가 아님을 말해 준다. 네페쉬라는 존재는 그저 땅에 사는 생 물체를 뜻하는 단어일 뿐이다. 예를 들어 창조의 5일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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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바다의 생물을 창조하실 때“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창1:20)고 명하신다. 여기서‘생물’ 에 해당하는 원어가 바로 네페쉬다. 또한 창조의 6일에 하나님이“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 라” (창1:24)고 하시는데 여기서의‘생물’ 에 해당하는 원어 역 시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대단한 영적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담은 그저 이 땅에 사는 생물이나 짐승들처럼 코와 목으로 호흡하는 생물이 된 것일 뿐이다.

아담이 단순한 땅의 존재, 육적인 생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바울이 증거하는 바와 같다. 바울은 말하기를“첫 사람 아담 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 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고전15:45~46)고 밝히고 있다. 바울의 말인즉 아담은 신령한 영적 존재가 아니며 다만 육신을 가진 육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어서“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 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7)고 덧붙인다. 바 울은 아담이 땅에서 나고 흙에 속한 자이며 다만 육신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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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2) 중간적 존재인 아담

우리는 보통 아담의 타락 때문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땅에 오 신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담의 창조 상태를 제 대로 이해한다면 아담은 그가 타락하지 않았어도 구원이 필 요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 으나 아담은 타락하지 않았어도 태초부터 그는 구원이 필요 하며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태초의 아담의 상태는 네페쉬였다. 타락 전의 아담은 비록 무죄한 가운데 있었다 해도 그는 신령한 자는 아니었다. 태초 의 아담은 예수처럼 신령하고 거룩한 자가 아니며 엄밀히 말 해서 그는 중간적 존재였다. 그는 땅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으나 아직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늘의 신 령한 존재는 되지 못한 상태다.

때문에 에덴에서의 아담은 중간적 상태에 있었다. 에덴에서 의 그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는 생명나무같은 영 생의 존재가 아니며 선악나무같은 죽음의 존재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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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는 생명과를 먹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도 있었으나 반대로 선악과를 먹고 죽을 수도 있는 자였다.

아담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존재, 신령한 존재가 되거나 죄의 존재가 될 수 있 는 자가 아담이며 이런 중간적 상태가 바로 태초의 아담의 실 존이었다.

3. 아담의 존재의 목적

태초의 아담은 땅에서 숨쉬는 네페쉬(육)에 불과한 존재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담을 땅의 네페쉬로 계속 살게 하 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이 예수를 닮기 원 하시며 예수처럼 되게 하려고 만드셨다. 아담이 예수처럼 신 령한 존재 곧 루아흐(영)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고 아담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담이 예수와 일치하고 하나되며 예수의 지혜와 생명을 얻어 영생의 존재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를 잘 보여주는 것이 에덴 안에 있는 생명나무의 존재다.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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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무는 달리 말하면 지혜나무요 또한 예수나무와 같다. 만 일 아담이 생명나무이신 예수를 온전히 깨닫고 그 실과를 먹 었다면 그는 예수와 같은 신령한 존재 곧 루아흐의 존재가 되 었을 것이다.

아담이 땅의 생물체에 불과한 네페쉬에서 하늘의 신령한 존 재인 루아흐의 존재로 새로워 지는 것, 이것이 바로 아담의 존재의 목적이요 창조의 목적이었다. 이 목적이 있었기에 아 담은 처음에는 네페쉬로 창조되어 에덴에서 육의 삶을 시작 한 것이었다.

4. 타락 전 아담의 구원

아담이 장차 루아흐의 존재가 되기 위해 에덴의 삶을 시작 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아담의 실존과 미래를 결정짓는 문제이며 동시에 인류의 실존과 미래, 성도의 실존 과 미래까지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아담의 미래와 목적은 루아흐를 향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의 삶을 살았다면 그는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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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무의 실과를 먹을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생불사의 존재가 되며 하늘 루아흐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육의 아담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에녹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에녹은 이 땅에 살면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의 삶을 살았다. 그리하 여 하나님은 에녹을 불러 하늘로 데려가셨다. 에녹은 이 땅에 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여 하늘의 루아흐가 되었다. 따 라서 아담도 그가 타락하지 않고 순종의 삶을 살았다면 그 역 시 죽음과 무관한 루아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의 아담은 근본적으로 루아흐로 새로워지며 루아흐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였다. 아담은 비록 그가 타락하 지 않았다 해도 그는 애초부터 거듭남이 필요하였다. 타락과 상관없이 네페쉬에서 루아흐로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담의 삶의 목적이었다.

아담이 루아흐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달리 말해 루아흐의 존재로 구원받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태초의 아담은 처음부 터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는 말이다. 그러하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부터 이미 새롭게 거듭나야 하며 영의 구원을 받 아야 하는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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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꼭 죄에서 구원받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변화받는 것도 구원이 며, 부족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새롭게 되는 것도 구원이 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은 처음부터 루아흐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5. 타락 후 바싸르가 된 아담

타락 전의 아담은 비록 네페쉬(肉)의 존재였지만 그는 죄없 는 네페쉬였고, 무죄하고 의로운 땅의 존재였다. 그는 하늘의 루아흐(靈)가 될 수 있는 자격과 소망이 충분한 흠이 없는 육 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담이 타락하자 그에게 커다란 지각변동이 발생하 였다. 먼저 아담은 에덴에서 쫒겨났다. 그는 생명나무를 먹고 루아흐가 될 수 있는 은혜의 땅, 구원의 땅에서 쫒겨나 가시 와 엉겅퀴의 땅으로 떨어졌다. 에덴에서 쫒겨난 아담은 죄인이 되며 죄와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타락 때문에 아담은 네페쉬보다 못한 존재,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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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실 수 없는 바싸르의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자를 일컬어‘바싸르’ 라 한다. 창 6장에 보면“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6:3)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 서 육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바싸르’ 다. 바싸르는 육체 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를 지칭한다. 이 바싸르는 하나님이 고깃덩어리로 취급하는 인간과, 네페쉬보다 못한 타락의 존 재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세 종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루아흐(영)의 존재, 네페쉬(육)의 존재, 바싸르(죄)의 존재, 이렇게 셋으로 나뉜다. < 세 종류의 인간 > 영

루아흐

네페쉬

바싸르

이처럼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 냐하면 성경이 먼저 인간을 이와 같이 셋으로 구분하기 때문 이다. 예를 들어 레위기를 보면 레위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을 세 종류로 구분한다. 거룩한 것, 정결한 것, 부정 한 것, 이렇게 셋이다. 이 세 종류의 제물은 거룩한 성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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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한 성도, 부정한 성도를 상징한다.

계시록 12장에 보면 땅의 인간이 세 부류라는 사실이 잘 나 타난다.“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 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 음이라 하더라” (계12:12)

이 계12:12절에 하늘의 음성이 있는데“하늘과 그 가운데 거 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고 외치고 있다. 여기서 하늘에 거 하는 자들이란 당연히 루아흐에 속한 신령한 자들을 일컫는 다.

반면에“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많은 물이 모인 곳 즉 세상과 열방에 사는 허다한 불신자의 무리를 지칭한다. 하늘에서 볼 때 이들 은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불의하며 부정한 자들이다. 따라서 바다에 속한 자들은 바싸르와 같은 죄인들을 일겉는다.

그러면 땅에 속한 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바다에 속한 바 싸르의 죄인들이 아니며 그렇다고 하늘에 속한 루아흐의 신 령한 성도도 아니다. 이들은 믿기는 믿으나 참된 믿음이 없는 중간적인 존재들이다. 즉 루아흐도 아니고 바싸르도 아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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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쉬와 같은 자들이다.

이 중간에 속한 자들은 저 옛날 광야의 백성들처럼 하나님 을 믿기는 하나 참 믿음이 없음으로 멸망을 당하는 자들과 같 고,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나 주님으 로부터 부인을 당하는 자들과 같다. 이런 자들이 바로 땅에 속한 자들이며 땅에 속한 네페쉬의 존재들이다.

6. 아담의 구원의 수

1) 타락 전 아담의 수 2

이제 아담의 수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태초 아담에게 있어 서 그를 상징하는 수는 2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타락 전 의 아담은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야 했으며 그에게는 육 아니 면 영이 되는 두 가지 경우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아담에게는 계속 육으로 살든지 아니면 영으로 구원을 받든 지 하는 두 삶이 있었다. 그의 현재적 삶은 네페쉬지만 미래 의 삶은 루아흐로 주어져 있기에 그에게는 2가지 경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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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이렇게 두 경우의 실존이 주어졌기에 타락 전 아담 을 상징하는 수를 2로 볼 수 있다.

2) 타락 후 구원의 수 3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자 그의 존재의 경우의 수는 3으로 바 뀌었다. 그는 영이 되어야 하는 육의 존재에서 죄의 존재로 타락하였으므로 그에게는 영 - 육 - 죄의 3가지 현실이 나타 나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타락한 아담이 영의 존재가 되려면 그는 먼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맨 처음의 육의 상태로 회복되어야 한 다. 그런 후에 다시 육에서 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니 그의 구원의 과정은 3단계가 된다. 이렇게 타락한 아담이 바싸르 에서 네페쉬로, 다시 네페쉬에서 루아흐로 구원을 받아야 하 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아담의 실존의 수가 3가지가 되었음을 뜻하며 또한 그 의 구원의 단계가 처음의 2단계에서 3단계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여기에 바로 아담의 수의 비밀이 있다. 아담은 처음 에 그의 존재의 수가 둘이었고 그의 구원의 단계도 두 단계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가 타락한 후에는 그의 존재의 수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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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며 구원의 단계 역시 3의 단계가 되었다.

그래서 타락후 아담의 수는 3이 된다. 그의 존재의 경우의 수가 셋이요 그의 구원의 단계가 셋이므로 그의 수는 3이 된 다. 그런데 이 구원의 수 3은 그에게만 국한되는 수가 아니 다. 아담으로 인해 나타난 구원의 수 3은 타락 이후 모든 인 류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3단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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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구원의 3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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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주의 3의 구원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의 구원 과정은 3단계로 바뀌었 다. 아담 이후 구원이 3과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이 분 명하게 가르치는 진리이며 이에 대한 증거 말씀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이제 구원이 3단계라는 사실 을 증거하는 성경의 구절들을 찾아 보자.

창세기에 나타난 노아의 방주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구원의 방주에 해당한다. 이 방주는 구원의 과정이 3단계라는 사실 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방주를 지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네가 만들 방 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 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 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 6:15~16)

하나님은 방주를 만드는데 상중하 3층으로 만들라고 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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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왜 하필 3층일까. 그것은 구원의 과정이 상 중 하 3과정으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바싸르의 하, 네페쉬의 중, 루아흐 의 상, 이렇게 3단계인 까닭이다.

하나님은 또 방주의 길이를 300으로, 높이를 30으로 하라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3, 30, 300, 3천 등은 그 의미와 본질 이 비슷하다. 이 모두가 3의 의미를 상황에 따라 응용하는 것 일 뿐이다. 따라서 방주의 길이를 300으로, 높이를 30으로 하 라는 것 역시 그 의도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과 단계가 3의 수로 되어 있음을 예표하기 위해 300과 30의 수 를 사용하여 방주를 지으라 하셨다.

2. 에녹의 3의 구원 구원의 과정이 3단계라는 사실은 에녹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에녹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 의 삶을 살았다. 그는 65세에 성경의 최장수 인물인 므두셀라 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리고 365세가 되었 을 때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하늘로 승천하였다.

에녹의 기록을 보면 그는 365년의 생애 동안 하나님을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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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300년을 하 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3의 구원의 과정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에녹이 300년 의 순종의 삶을 산 것은 방주의 길이가 300인 것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에녹의 300과 방주의 300은 모두 구원의 3단계를 보여주며 구원의 수가 3인 것을 증거한다.

3. 구원의 3일

1) 요셉의 3일

하나님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지만 더 욱이 수를 통해서도 증거한다. 예를 들어 창40장에 보면 감옥 에 갇힌 요셉이 꿈을 해몽하는 사건이 나온다. 그 때 요셉은 같이 감옥에 있던 포도주 관원장과 떡 관원장 두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꿈에서 각각 포도나무 세 가지와 떡 세 광주리를 본 것을 말하였다. 이에 요셉은 포도주 관원장이 본 포도나무 세 가지가 3일을 의미한다고 해몽한다.“요셉이 그에게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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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창40:12) 한다. 요셉은 또 떡 관원장이 본 떡 세 광주리도 3일을 의미한다고 해몽한다.“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창40:18) 말한다.

우리는 요셉이 단지 꿈을 해몽하는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된 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해몽하며 사람의 꿈을 하늘의 뜻을 따라 해석하고 있다. 즉 요셉의 꿈 해석은 하나님의 예 언에 대한 해석이며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 석을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왜 요셉에게 포도주 관원장과 떡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와 떡은 그냥 포도주와 떡이 아니라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한다. 그리고 예수의 피와 살을 통해 구원하는 과정은 3단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떡과 포도주를 보이실 때 그것이 3의 구 원에 관한 것임을 증거하시려고 세 가지와 세 광주리를 보여 주셨다. 포도나무 세 가지와 떡 세 광주리는 모두 3의 구원을 예표하는 비유와 상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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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브라함의 3일

성경은 구원의 3과정을 3일의 과정으로도 보여 준다. 구원 이 3일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는 아브라함이 다. 아브라함은 칠십 오세에 부르심을 받아“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1)는 말씀을 듣고 구원의 여정을 시작 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구원의 여정을 완성하는 때는 아들 이삭 을 바칠 때다. 창22장에서 하나님은“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 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2)고 명하셨다. 이에 아브라함 은 지체없이 길을 떠나 3일째 되는 날 모리아 땅을 마주하기 에 이른다.“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 라본지라” (창22:4)는 기록과 같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을 보고 즉시 그 산에 올라가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를 서슴치 않는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말하기 를“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21)고 하였 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행함으로 믿음이 온전 하게 되었느니라” (약2:22)고 증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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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이삭을 바치는 그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온전케 되었다는 원어는‘텔레이오 오’ 로 그 뜻은‘완성하다’ ,‘완전케하다’ 는 뜻이다. 영어로는 퍼펙트(perfect)를 말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그 때 그가 믿음과 구원의 과정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에서 이삭을 바침으로 완전한 믿음과 구원을 성취하였다. 모리아 땅은 하나님께서 창12장에서 가 라고 명하신 바로 그 땅이다. 이 모리아 땅은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되며 시온산이 되는 거룩한 땅이다. 또한 부르심의 모 든 여정을 끝마치는 구원의 완성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을 향해 나아간지 3일 만에 그 땅을 보며 그 곳에 도착했다고 말해 준다. 아브라함 이 3일 만에 모리아 땅에 도착했다는 것은 중요한 영적 의미 가 있다. 아브라함이 제 3일에 그 곳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 거 룩하고 완전한 땅에 이르는 길이 3일 길이라는 것을 보여 준 다. 아브라함의 3일 길은 말하자면 구원의 3단계를 예표하는 3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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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세아의 3일

성경은 구원의 과정이 3단계의 3일 길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증거한다. 또 하나 예를 들면 호세아서를 찾아볼 수 있다. 호 세아서는 종말에 부어주실 하늘의 은혜를 미리 예언한다. 호 세아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부어주시는 은혜를 늦은 비의 은 혜라고 말한다.(호6:3)

호세아는 하나님이 언제 늦은 비의 은혜를 주시는가에 대해 밝히 증거하고 있다. 곧“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 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 리라” (호6:2)고 말한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을 이틀 후인 3일째 되는 날에 살리신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호세아는 왜 이틀 후를 말하며 왜 3일 째의 날을 말하는가.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구원은 3의 단 계 즉 3일에 이르러야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1단계의 바싸르나 2단계의 네페쉬의 상태에서는 온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인간이 온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3단계 의 루아흐의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이 3단계의 구원과 제 3일의 구원이 바로 성경이 증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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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구원이며 완전한 구원의 단계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 아를 통해 이틀 후인 제 삼일에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 하고 계시다.

4) 메시아의 세 사역

예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땅에 내려 오셨다. 본래 메시아는 세 가지 사역에 대해 기름부음을 받으며 세 가지 사역을 행해야 하는 구원자 다. 메시아의 제사장, 선지자, 왕의 사역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메시아의 사역은 왜 하필 세가지 일까. 이 역시 구원 의 수가 3인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메시아의 세 사역은 철저 하게 3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다.

첫째로 예수의 제사장 사역은 인간의 죄를 위한 것으로 예 수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 하나님께 드리는 사역이다. 이 사역 은 바싸르가 된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함이다. 인간이 바싸르에 서 네페쉬로 회복되려면 누군가 인간을 대신해서 생명의 피 를 흘려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를 흘려 이 일을 행하 셨다. 따라서 메시아의 제사장 사역은 1단계의 구원을 위한 사역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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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선지자 사역은 인간을 가르치고 양육하며 성장시키 는 사역이다. 제사장 사역이 피의 사역이었다면 선지자 사역 은 말씀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정신과 마음 을 깨우쳐서 의와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훈련하는 길이 다. 이 선지자 사역을 위해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많은 말씀으로 가르치며 비유와 교훈을 통해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이 사역은 네페쉬를 양육하고 훈련하여 루아흐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2단계의 구원의 과정에 해당한다.

셋째로 왕의 사역은 인간이 이 땅에서 순종의 삶을 살며 완 전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사역이다. 인간이 네페쉬에서 루아 흐가 되었다고 해서 구원의 일이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말 하자면 왕이 즉위식을 했다고 해서 왕의 일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루아흐는 루아흐대로의 삶이 있다. 루아흐가 된 인간은 이 땅에서 풍성한 루아흐의 열매들을 맺어 승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메 시아의 왕의 사역이 필요하다. 왕의 사역은 인간이 루아흐의 온전함을 이루고 3단계의 구원을 완성하도록 하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세 사역은 구원의 3단계를 위한 것이며 구원의 3일의 과정을 마치기 위한 사역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구원의 3단계를 3일의 과정으로 비유하셨다. 주님은“오 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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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완전하여지리라” (눅13:32) 말씀하셨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아 가 주님께서 3의 구원의 과정을 완성하는 분임을 증거하는 말 씀이다. 예수께서는 3일의 구원의 과정을 모두 완성하셨기에 완전한 그리스도가 되시고 메시아가 되신 것이다.

5) 출애굽의 세 땅

성경에서 구원의 과정과 단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바 로 출애굽 사건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 해서도 구원의 세 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주며 3일의 구원을 증 거하신다. 그래서 출애굽의 과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세 과정 으로 되어 있으며 3구원을 보여주기 위한 세 종류의 땅이 등 장하고 있다.

출애굽의 구원에는 첫째로 애굽 땅이 있고, 둘째로 광야가 있으며, 세번째 가나안 땅이 등장한다.

① 첫째 땅 애굽

먼저 애굽은 바싸르와 같은 땅이다. 인간이 사단의 종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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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종이 되어 평생을 종노릇을 하며 사는 곳이 애굽 땅이다. 그 땅에서 인간이 바싸르의 상 태에서 신음하듯이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로 신음하였다.

② 둘째 땅 광야

둘째로 광야는 네페쉬와 같은 땅이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널 때 애굽의 노예의 땅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애굽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바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스 라엘은 먼저 구원의 중간지대인 광야의 땅으로 간다. 광야로 들어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며 만나와 메추라기 를 먹고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걷는다. 그래야 가나안에 들어 갈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③ 셋째 땅 가나안

마지막으로 가나안은 드디어 3의 구원이 완성되는 루아흐 의 땅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요, 안식 의 땅이며 영의 구원의 땅이다. 애굽에서 종노릇 하던 이스라 엘이 드디어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땅의 주인이 되어 왕노릇 하는 땅이다.

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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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안은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땅이며 또한 루아흐로 승리해야 하는 땅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영적 전쟁 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가나안은 실패의 땅이 되고 만다.

하지만 가나안의 영적 전쟁은 어려운 싸움이 아니다. 만일 광야의 땅에서 훈련을 제대로 받은 자라면 누구나 손쉽게 전 쟁을 이길 수 있으며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승리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의 과정은 언제나 셋이다.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구원 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성경이 증거하는 참 구원 을 얻기 위해서는 3일의 구원의 과정을 모두 걸어야 하며 가 나안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온전하고 신령한 자가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 을 갖출 수 있다.

6) 성막의 세 장소

성경에는 출애굽과 똑같이 구원의 3단계를 보여주는 쌍둥 이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잘 안내해 주는 성막이다. 이 성막 역시 출애굽의 세 땅처럼 세 부분으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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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되어 있다. 뜰, 성소, 지성소의 세 부분이 그것이다.

성막에 세 장소가 있는 이유는 이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은 모두 구원의 3단계를 보여하기 위함이며 3 의 구원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① 첫 단계 뜰

뜰은 무엇을 위한 곳인가. 뜰은 예수의 제사장 사역을 위한 곳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린 곳이다. 그 피로 인해 우 리는 뜰을 지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노예의 땅 애굽을 탈 출하여 광야로 갈 수 있다.

② 둘째 단계 성소

둘째 장소인 성소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광야의 땅이며 네페 쉬의 땅을 의미한다. 성소 안에는 말씀의 떡상이 있고 성령의 등대가 있으며 기도의 분향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 같 은 성소 안에서 말씀의 떡을 먹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기도 의 훈련을 받는다. 이 훈련을 잘 마치면 우리는 드디어 지성 소에 들어갈 준비를 갖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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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셋째 단계 지성소

지성소는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지성소가 거룩한 이유는 그 장소가 구원의 과정을 모두 마치는 장소이 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가나안 땅과 같고 승리와 영광이 있는 왕의 자리와 같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 이 지성소 의 땅을 소유해야 하며 이 곳에서 승리를 성취해야만 온전한 영의 존재가 되어 참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막의 세 장소는 출애굽의 세 땅과 그 의미가 완 전하게 일치한다. 출애굽의 세 땅은 또한 인간의 세 상태를 보여주는 곳이며 인간의 세 상태는 메시아의 세 사역을 통해 완전해 질 수 있다. 이와 같이 세 장소의 성막, 세 땅의 출애 굽, 세 종류의 인간, 세 사역의 메시야는 모두 3단계의 구원 을 보여주기 위한 말씀인 것이다.

< 3단계의 구원 > 3단계

2단계

1단계

루아흐

네페쉬

바싸르

선지자

제사장

가나안

광야

애굽

지성소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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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아브라함의 세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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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브라함의 세 후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믿 는 자들의 조상으로 세우셨을 뿐만아니라 또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창12:2)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 원이 되게 한 것은 왜일까. 이는 그가 3단계의 구원의 길을 걷 고 그 길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달리 말하면 구원의 3단계를 걸은 삶이 요 3의 구원을 이룬 삶이다. 그가 어떻게 3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은 그의 생애에 있었던 세 사람의 후사가 잘 증거해 준다.

1) 첫째 후사 엘리에셀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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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창15:2)

아브라함은 창12장에서 75세에 부르심을 받은 후 창15장에 이르러 다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 서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후사가 아니라 장차 네 몸 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종된 자 엘리에셀이 그의 후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후 사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진짜 아들이 아닌 종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에셀은 표면적으로 보면 종 된 자이나 영적으로 보면 죄의 종된 자 바싸르를 상징하기에 하나님은 그를 후사로 인정치 않으셨다.

2) 둘째 후사 이스마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에서 후사가 날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수년이 흘러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라의 의견을 따라 그녀의 여종 하갈을 통 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99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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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기까지 이스마엘을 후사로 알고 살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후사로 인정치 않으셨다. 그 역시 자유의 아들이 아닌 여종이 낳은 아들이기에 믿음의 후 사로 적합치 못한 탓이다. 아브라함이 여종을 통해 낳은 것은 육체를 따라 낳은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스마엘은 육에 속 한 자요 네페쉬에 속한 자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약속의 후사로 삼으실 수 없다.

3) 셋째 후사 이삭

아브라함은 100세가 될 때 드디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후사인 이삭을 낳았다. 이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 는 아브라함의 후사요 믿음의 후사다. 하나님은 앞서 엘리에 셀이나 이스마엘은 후사로 인정치 않으셨으나 이삭만은 기쁘 게 인정해 주셨다.

그 이유는 쉽고도 분명하다. 이삭은 종으로부터 낳은 후사 가 아니라 자유의 여자로부터 낳았고 약속을 통해 낳았기 때 문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낳았으니 그는 영적인 의미의 아들이요 루아흐를 상징하는 인물이 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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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그의 생애에 이와 같은 세 후사를 갖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원의 세 과정을 걷게 하신 섭리이며 우리에게 3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외에 다름이 아니다.

2. 아브라함의 세 믿음

아브라함의 세 후사는 그가 가졌던 세 믿음의 단계를 그대 로 보여주기도 한다. 첫째로 그가 종된 자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고 있을 때 그의 믿음은 종의 믿음과 같았다. 그래서 하나 님께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 "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7),“나 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 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창15:7) 하며 약속의 말씀을 주셔 도 그것을 제대로 믿지 못하였다. 이 많은 약속의 말씀들을 받으면서도 도리어 그는“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15:8) 하고 증거를 요구하며 약속의 말씀을 쉽게 못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육의 후사인 이스마엘을 두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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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믿음은 육의 믿음과 같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아들을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그 말씀 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말씀을 비웃기까지 하였다.“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 리요” (창17:17) 하며 웃었다. 그러면서“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17:18) 하고 이스마엘을 후사로 고집하였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영의 후사인 이삭을 낳을 때 비로소 영 의 믿음을 가진 자로 변화되었다. 바울에 의하면 그는 이삭을 낳을 때,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 있었다.(롬4:20) 그는 이삭을 낳을 때 비로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영의 믿음을 가진 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세 후사는 그냥 아무렇게나 생겨 난 후 사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브라함의 세 믿음의 단계와 세 구원의 단계를 보여주기 위한 후사에 해당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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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브라함의 세 의

아브라함이 그의 생애에 3의 후사와 3의 믿음을 가진 것처 럼 그는 세 단계의 의의 과정을 걸으며 3의 의를 가진 자였다. 그는‘칭의 - 인의 - 완의’라는 세 의의 과정을 걸었으며 마 침내 의의 전 과정을 마치고 그 믿음과 행위가 모두 의로운 자가 되었다.

1) 칭의(稱義)

아브라함이 첫째 의 - 칭의를 받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 다. 그는 창15장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칭의를 받았다.“아 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 고” (창15:6)라는 말씀과 같다.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사실 은 바울을 통해서 거듭 증거되었다.

바울은“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 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4:3),“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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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3:6)는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사 실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2) 인의(印義)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이 칭의 외에 또 다시 의롭 다 함을 받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우리는 그저 아브라함 이 칭의를 받은 것이 전부인 줄로 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칭의 외에 또 다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 사실 역시 바울에 의해 잘 증거되어 있다.

바울은 롬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 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 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 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 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4:19~22)

아브라함은 99세에 하나님이 이삭을 주겠다는 말씀을 들었 을 때는 속으로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1년이 지난 백 세에는 그 믿음이 놀라운 믿음으로 바뀌었다. 바울은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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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때의 믿음이 약속을 의심치 않는 견고한 믿음이며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라고 증거하였다.

더욱이 바울은 롬4:22절을 통해 백 세의 그 견고한 믿음으 로 다시금 의로움을 받았다고 기록한다.“그러므로 이것을 저 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4:22)는 말씀을 통해 바울은 분명 하게 아브라함이 백 세에 다시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말한 다. 이 때 아브라함이 받은 의는 창15장에서 80세경에 받은 칭의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또 다른 의다.

바울은 이 또 다른 의에 대해 롬4장 앞부분에서 잘 설명하 여 준다. 바울은 4:3절에서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사실을 말한 후, 그 칭의를 언제 받은 것이냐고 물으며 4:10절에서 무 할례시에 받은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런 다음 4:11절에 서“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 를 인친 것이니” 라고 풀어 준다.

아브라함이 80세에 칭의를 받을 때 그는 할례가 없는 무할 례의 상태였다. 그러다가 99세에 이르러 할례를 받은 이후부 터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후 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80세에 받은 의를 인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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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 4:11절을 통해 아브라함이 받은 두 번째 의가 무 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시에 받은 두 번째 의는 무할례시에 받은 칭의에 도장을 찍고 인(印)을 새긴 것 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바울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받은 의는 80세 경에 받은 칭의에 인침을 더한 것이니 인의(印義)라 할 수 있 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연약한 믿음으로 칭의를 받 았으나 후에 견고한 믿음을 통해 다시 인의를 받았다는 사실 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3) 완의(完義)

아브라함은 칭의와 인의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드디어 세 번째 의인 완의를 받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아브라함이 받 은 완의에 대하여는 야고보가 잘 증거해 준다.

야고보는 약2장에서 아브라함이 완의를 받은 사실을 기록 한다.“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 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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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 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2:21~23)

야고보는 이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행함 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그 때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 한다. 그리고는 이에 아브라함이 받았던 의가‘응하였다’ 고 덧붙인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의가‘응하였다’ 고 말한 것은 무슨 의 미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그 때에 창15장에 서 받은 칭의가 응하였음을 말한다. 여기서‘응하였다’ 에해 당하는 헬라어‘플레로오’ 는‘마치다’ ,‘완성하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야고보는 이‘플레로오’ 라는 단어를 통해 아브라함이 이삭 을 바칠 때 받은 의가 무슨 의인가를 설명해 준다. 곧 아브라 함이 창15장에서 받은 칭의를 거의 30년이 지나 이삭을 바치 는 시점에서 그 의미를 완성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받은 의는 칭의나 인의와는 또 다는 의미의 의인 것이 확실하다. 이는 칭의와 인의의 과정을 지나 의의 모든 과정를 마치고 완성하는 세 번째 의, 완의(完義)에 해당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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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가 증거하는 완의는 의의 과정을 마친 의요 완전한 의며 거룩한 의과 같다. 이 완의는 보통 의가 아니며 믿음 뿐 만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함을 받는 완전한 의가 되며 의 의 세 과정을 모두 마쳐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의다.

세 번째 의인 완의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구원의 비밀이다. 이 완의는 아무 때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의 마지 막에 나타나며 종말의 때에 알려지는 비밀한 의다. 이 비밀한 의는 계14:6절이 말하는 영원한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되어 야 비로소 증거되는“영원하고 완전한 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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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멜기세덱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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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의 두 복

성경에는 크게 두 종류의 복이 나온다. 하나는 땅에 속한 육 의 복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다. 전자는 네페쉬의 복이고 후자는 루아흐의 복을 말한다.

네페쉬의 육의 복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은 아담이다. 하나 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복’ 을 주시며“생육하고 번 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1:28) 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많은 복을 주신 것 같으나 그 내용을 보면 모두 땅과 육에 속한 네페쉬의 복 뿐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네페쉬의 복도 필요하나 그보다 루아흐 의 복을 받아야 한다. 루아흐의 복은 바울이“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 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1:3)라고 말한 것처럼 하 늘에 속한 모든‘신령한 복’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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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은 아브라 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를 때 그에게 복을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 부르셨다.“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 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2:1)고 하셨다. 하 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려고 택하셨다. 그 복 은 다름 아닌 성도가 받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니 이제부터 그 복의 실체를 만나 보자.

2. 복의 근원 아브라함

1)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려는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이다. 하나님은 처음 그를 부르실 때 부터 그가 어떻게 영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를 밝히셨다. 그 방법은“내가 네게 지시할 땅 으로 가라” 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명하는 땅으로 가면 되는 것 이다.

물론 하나님이 명하는 땅은 당시의 가나안 땅이지만 하나님 은 눈에 보이는 가나안이 아닌 하늘의 땅, 영의 가나안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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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부르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영의 가나안으로 부르신 이유는 그 땅이 바로 복의 땅이요 복의 근원이 되게 만드는 신령한 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땅을 염두에 두고 이 땅을 목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2) 루아흐의 3의 복

그리하여 75세에 처음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마침내 110세가 넘어 이삭을 바치면서 드디어 그 신령한 땅에 도달한 다. 그 땅에 이르기 위해 아브라함은 약 40여년의 긴 여정을 걸으며 하나님의 인도와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오랜 시간을 걸어 아브라함이 도착한 하늘의 땅, 영적 가 나안은 바로 모리아 산이었다. 왜냐하면 그 산에서 이삭을 바 쳤을 때 그는 자신의 믿음의 과정을 완성하고 의의 과정을 완 성하며 하나님의 벗이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브라함은 그 모리아에서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주려 했던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었다.

앞서 4장에서 밝힌대로 아브라함이 걸은 믿음의 과정은 3단 계이며 의의 과정도 3단계였다. 마찬가지로 그가 모리아 땅 에 이르러 받은 복의 과정도 3단계라 말할 수 있다. 그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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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이 주신 칭의로 바싸르의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첫째 복을 받았고, 아름다운 부인과 많은 자식들은 물론 은금과 재 물이 풍부한 땅의 네페쉬의 둘째 복을 받았으며, 모리아에서 온전한 믿음과 의를 이루는 세 번째 루아흐의 복까지 받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3의 과정 을 걸은 생애요 3의 생애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에게 주시려는 믿음의 수, 의의 수, 복의 수가 바로 3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 3의 수를 증거하 기 위해 그를 택하고 오랫 동안 단련하신 후에 3의 복을 받는 근원이 되는 자로 완성하셨다.

3. 멜기세덱의 등장

1)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보다 더 큰 복을 가진 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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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기자는 히7장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사 실을 밝히며“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 느니라” (히7:7)고 말한다. 히브리 기자에 의하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였으며 이에 아브라함 은 자신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다고 한다.

2) 하나님의 아들이자 제사장

히브리서가 밝히는 멜기세덱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살렘의 왕이면서 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다.(히7:1) 심지어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한다.(히7:3)

사람 중에 아비나 어미나 족보가 없는 자가 누가 있으며 생 명의 끝이 없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 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것이다. 따 라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며 장차 땅에 임하실 그리 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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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의 왕 평강의 왕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이 첫째 의의 왕이요 다음에 평강의 왕 이라 한다.(히7:2) 그가 의의 왕이라는 것은 의에 충만하고 완 전한 자임을 뜻한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아직 칭의도 받 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 이런 완전한 의 가운데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을 축복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다. 그는 의를 사랑하 며 평화를 사랑하는 왕이다. 히브리서가 첫째 의의 왕이라 한 것은 온전한 의가 있은 다음에야 평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의가 세워져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랑과 평화가 넘쳐 난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왕답게 의와 평강이 넘치는 하늘의 왕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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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브라함과의 만남

1) 아브라함의 전쟁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는 장면은 그가 칭의를 받기 바 로 전인 창14장에 나온다. 그 당시 가나안 지경에 전쟁이 났 는데 시날 왕을 포함한 네 왕이 소돔 왕을 포함한 다섯 왕과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에서 시날파의 네 왕이 승리하여 소돔 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가는 일이 발생하 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른 군사 318명을 데리고 단까 지 추격해서 밤에 그 왕들을 격파하고 롯과 함께 많은 사람들 을 구하였다. 더불어 왕들이 약탈했던 많은 재물까지 전리품 으로 취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웨 골짜기를 지날 때 떡과 포도주를 갖고 마중나온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 세덱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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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멜기세덱의 축복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 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 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 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8~20)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은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 을 만나 축복하도록 이끄셨다.

여기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에는 중대한 이유 와 비밀이 있다. 이 축복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은 크 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대접한다.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 한다. 셋째로 아브라함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넷째로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드린다.

이같은 네가지 순서에는 각각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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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은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러 한 순서를 정하셨다. 그럼 이 네 가지 일들이 각기 어떤 의미 를 갖고 있는지 살펴 보자.

5. 축복의 비밀

1) 떡과 포도주의 의미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을 마중 나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멜기세덱이 가져 온 떡과 포도주는 단지 접대 만을 위한 음식물이 아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따라서 그것은 영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니 곧 구원의 은혜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에 해당 한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면서 의의 왕이고 평강의 왕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존재다. 따라서 그는 떡과 포도주를 먹 으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에 대한 많은 말씀들을 들려 주었 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는 구원의 떡 과 포도주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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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을 주옵소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멜기세덱은 이 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 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라며 복을 빌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그에게 무슨 복을 주려고 축복을 한 것 일까.

사실 창14장 전체를 다 보아도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무 슨 복을 주려고 했는지 그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창14장을 주의깊게 보면 그 내용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 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복의 내용은 멜기세 덱이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음 단계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3) 승리의 의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주는 축복은“너희 대적을 네 손 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14:20) 는 말씀 안에 감추어 있다. 그는 이 20절 말씀으로 자신이 주 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은연 중에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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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0절 말씀은 얼핏 보면 이미 지난 승리에 대해 찬양을 하 는 것이기에 앞으로의 복이 아닌 지나간 복을 말한 것으로 생 각할 수 있다. 그러나 멜기세덱이 이미 받은 복을 언급하며 승리의 하나님을 찬양하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땅의 왕들을 쳐서 승리한 땅 의 복이었다. 그 복도 대단하기는 하나 하나님의 축복은 기껏 그런 땅의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땅의 복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은 하늘의 복이 아니며 영적인 복에 비할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아브라함이 참된 복을 받으려면 그는 하늘 의 대적을 쳐서 하늘의 승리를 얻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멜기세덱의 축복에는 바로 이같은 하늘 승리의 의미가 감추 어 있다. 멜기세덱이 하나님께 드린 승리의 찬양은 지나간 일 임과 동시에 앞으로 주실 하늘의 영의 승리를 예표하는 이중 적인 의미가 있다. 그가 말한 대적 역시 겉으로는 시날 왕을 포함한 네 왕을 말하나 그것은 사실상 영적 대적인 사단을 예 표한다. 그가 베푼 떡과 포도주가 구원의 은혜를 상징하듯이 그가 말하는 승리 역시 실제로는 영의 대적을 이기는 하늘의 승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의미가 무엇인 가를 알 수 있다. 그가“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라며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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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결국 땅의 승리를 통해 하늘의 승리를 상징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브라함이 땅 의 대적을 치는데 그치지 않고 하늘의 대적까지 쳐서 이기는 참된 승리자가 되도록 축복한 것이다.

4) 십일조의 의미

이제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의 의미를 풀어 보자. 아브라 함은“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인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 는 멜기세덱의 말을 듣고 십의 일을 드렸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멜기세덱에게 십의 일을 바친 것일까?

① 육의 승리 감사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에는 표면적인 의미가 있고 내 면적인 의미가 있다. 먼저 표면적인 이유를 보면 그는 멜기세 덱이 말한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승리를 얻었 음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얻은 승리와 전리품이 자신의 힘 에 의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었다. 아브라함 은 이를 분명히 믿었기에 그는 자신의 전리품을 하나님께 드 리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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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멜기세덱은 그 전리품을 영적으로 받아야 하기에 아 브라함에게 십의 일을 요구하였고 그 의미를 받아 들인 아브 라함은 십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그 십의 일을 통해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렸다.

② 영의 승리 예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데에는 내면적인 이유가 더욱 중 요하다. 그의 십일조는 그가 장차 드려야 할 영적 십일조를 상징하는 중대한 모형이다. 그가 장차 하늘 대적을 이기는 영 의 승리를 얻으면 그 때 비로소 하늘의 전리품으로 하늘의 십 일조를 드리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바로 이 하늘 승리를 주 기 위함이며 그로 인한 영적 십일조를 받기 위해서다. 멜기세 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하늘의 승리와 영적 십일조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 을 축복할 때 그가 땅의 승리를 얻은 것처럼 장차 하늘 승리 와 십일조의 복을 얻도록 축복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준 떡과 포도주, 승리의 기도, 십일조 등은 모두 영적 의미를 가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모두는 앞 으로 아브라함이 받을 하늘의 복들을 예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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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멜기세댁의 3의 복음

1) 복음을 전한 멜기세덱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복주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늘의 복과 하늘 승리의 복을 전 하였고 아브라함이 그 복을 받도록 축복하였다.

이 멜기세덱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마치 에녹과 같은 신령 하고 완전한 루아흐의 존재다. 아니 멜기세덱은 그보다 높은 존재다. 그는 아브라함이 영의 복을 받도록 축복하였는데 이 런 대단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는 하늘의 왕 예수 그 리스도이거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등장할 때 떡과 포도주를 갖고 온 것은 그리스 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 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하고 또한 예수의 복음을 상징하는 떡 과 포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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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이 가장 먼저 떡과 포도주를 대접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참된 승리의 복을 받기 전에 먼저 떡과 포도주의 복음을 받아야 함을 가르친다. 하늘의 복음인 떡과 포도주를 받아야 하늘의 승리도 받을 수 있기에 그는 아브라 함을 만날 때 맨 먼저 떡과 포도주의 복음을 전하였다.

2) 왕같은 제사장의 복음

우리가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건을 보면 크게 세 종류의 왕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바싸르같은 죄의 왕인데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땅의 왕들이다. 곧 아브 라함이 쳐부순 시날 왕을 포함한 네 왕과 같은 자들이다.

둘째는 네페쉬의 왕인데 이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은혜 로 땅의 왕을 이기는 자를 말한다. 본래 타락한 아담의 후손 들은 모두 바싸르가 되었기에 네페쉬의 왕이 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자는 그 로 네페 쉬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셋째로 멜기세덱같은 루아흐의 왕이 있다. 루아흐의 왕은 신령하고 장성한 자들이며 완전한 의를 가진 성도들을 일컫 는다. 멜기세덱을 만날 당시 아브라함은 아직 의를 알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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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칭의조차 얻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바싸르를 이기는 왕같은 은혜를 받았으나 아직은 하늘의 왕이 되는 참된 은혜 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나님이 멜기세덱을 만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 나님은 멜기세덱을 통해 참된 왕의 모습, 루아흐의 모습을 보 여주고자 하셨다. 그래서 멜기세덱을 통해 참된 왕의 모습을 보게 하시며 나아가 멜기세덱처럼 의의 왕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치셨다.

멜기세덱은 단순히 육의 왕이 되는 길을 가르친 것이 아니 다.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를 근거로 왕이 되는 길을 가르쳤다. 떡과 포도주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 이 주시는 영적 승리를 성취할 때 루아흐의 왕이 될 수 있음 을 전하였다. 그런 다음 하늘 승리의 십일조를 바칠 때 드디 어 자신과 같은 왕이 될 수 있음을 전해 주었다.

따라서 멜기세덱이 전한 복은 자신처럼 하늘의 왕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을 말한다. 그 복은 하늘에 속한 모 든 신령한 복과 같으니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음의 복 과 동일하다.

멜기세덱은 이같은 하늘의 복을 빌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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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하였다. 말하자면 멜기세덱은 복음이 임하기 2천여년 전부 터 이미 자신과 같은 왕이 되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왕의 복음’ 을 전했던 것이다.

3) 3의 복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전한 복은 곧 복음과 같다. 그런 데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잘 보면 그것이 세 단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첫째가 포도주요 둘째는 떡이며 셋째가 승리의 단계다. 이 세 가지는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해 하는 말이 아 니다. 이 세 가지 요소야말로 멜기세덱이 전하는 왕의 복음의 세 가지 핵심이다.

복음의 첫 단계인 포도주는 예수의 희생의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피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칭의를 받을 수 있다. 다음 둘째 단계인 떡은 성경에서 늘 증 거하는 것처럼 하늘의 떡인 말씀이다. 이 말씀의 떡을 먹음으 로 인간은 믿음이 자라고 훈련을 받아 영의 승리를 위한 준비 를 마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바로 승리의 단계요 복의 단계다. 이 단계는 다소 복합적이다. 이 단계의 승리를 얻은 성도는 영의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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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바칠 수 있으며 영의 십일조를 바친 성도는 드디어 루아흐 의 왕이 되며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 세 번째 단계까지 성취하는 것이 참 된 복음이다. 아무리 포도주의 은혜를 많이 받고 떡의 말씀에 깊이 감동한다 해도 영의 승리를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 다. 어느 누가 포도주와 떡의 은혜를 아무리 크고 풍성하게 받았다 해도 영의 승리로써 영의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는 성 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멜기세덱이 전한 복음이 무엇이며 성경 이 증거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성경 의 복음은 3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3의 복음이다. 그것은 [포 도주 - 떡 - 승리]의 단계로 되어 있으며 이 셋을 모두 이루 어야 하는 것이 성경의 복음이다.

이와 같은 3의 복음은 메시아가 성취하는 세 가지 사명과 동 일하다. 메시아는 [제사장 - 선지자 - 왕]의 세 사역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리고 피의 포도주를 통해 제사장 사역 을 이루고, 말씀의 떡을 통해 선지자 사역을 완수하며, 또한 죽음을 이기는 부할의 승리로 왕의 사역을 성취한다. 그리하 여 메시아를 따르는 성도들도 그 길을 걸어 자신과 같은 승리 의 왕이 될 수 있도록 이끄신다. 이 왕의 승리의 자리까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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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 지 못한다.

더욱이 멜기세덱의 3의 복음은 의의 세 단계와 정확히 일치 한다. 멜기세덱이 전하는 세 과정을 거치는 자는 하나님이 바 라시는 완전한 의를 가질 수 있다. 곧 [칭의 - 인의 - 완의]의 세 의를 갖게 된다. 처음에 피의 포도주로 칭의를 얻으며, 말 씀의 떡으로 인침의 의를 받고, 나아가 이삭을 바치는 승리로 써 완의에 이르는 것이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그 자신이 먼저 이 3의 과정을 걷고 3의 복을 받아 왕같은 제사장으로 선 자다. 그는 이 3의 구원에 이 르러 아브라함이 올 때를 기다렸고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3의 구원을 증거하였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살렘 왕을 통 해 3의 복음을 처음 들었으며 하늘의 복을 받는‘왕의 복음’ 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에 아브라함 역시 3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포도주와 떡 의 두 과정을 거치고 모리아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 드디 어 멜기세덱이 축복했던 영의 승리를 성취하는 자가 되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바친 영의 십일조는 그의 아들 이삭이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영의 십일조로 드렸을 때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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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고 그는 하늘의 승리를 성취한 루 아흐가 되었으며 완전한 믿음과 의를 가진 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와 같은 신령한 복의 길을 보여주기 위 한 사람이다. 그는 복의 3단계, 구원의 3단계를 증거하기 위 한 사역자로 택함 받은 인물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3의 복을 주시려고 멜기세덱을 만나게 하셨고 멜기세덱은 그에게 3의 복음을 주려고 축복하였다. 아브라함의 전 생애는 바로 이 3 의 과정을 걸은 생애이며 그가 3의 과정을 모두 마쳤기 때문 에 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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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브엘세바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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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엘세바의 뜻

창세기 2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사건이 나온다. 여기에서 브엘세바 사건을 다루려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는 브엘세바에서 멜기세덱이 축복했던 아브라함의 영적 승리 그 위대한 승리가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브 엘세바에서 7의 비밀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성경의 봉인을 여는 문제이기에 중요하다.

그러면 '브엘세바'의 뜻부터 살펴 보자. 앞서 보았듯이 브엘 세바는 브엘과 세바의 합성어다. 브엘은 우물이라는 뜻이고 세바는 일곱 혹은 맹세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브엘세바는 ' 일곱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성경이나 이스라엘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중요한 상징수다. 성경이 일곱의 의미를 거룩하게 여기는 것처럼 이스라엘에서 도 일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일곱의 수를 통하여 서로 언약을 맺는다. 고대 이스라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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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무언가 일곱 개를 건네는 것은 맹세의 행위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일곱의 수는 맹세와 같으며 혹은 약속, 언약 등의 의 미가 된다.

2. 브엘세바 사건의 배경

우리가 브엘세바의 비밀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배경을 살피 는 일이 필요하다. 창21장은 브엘세바 사건 전에 두 가지 사 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라의‘웃음 사건’ 이고 다른 하나는 하갈의‘통곡 사건’ 이다. 하나님께서는 브엘세바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 두 사건을 미리 보여 주신다.

1) 사라의 웃음 사건

창21장은 사라가 아이를 잉태하고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때 사라가 말하기를“하나님이 나로 웃 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21:6)하며 크게 기뻐하였다. 얼마 후 아이가 젖을 뗄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 대연을 베풀어 주니 사라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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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을 계속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에 게“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창21:10)고 청하였다. 사라의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크게 근심이 되었으나 하나님 께서 이 일에 대해 사라의 편을 들어 주셨다.“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 라” (창21:12) 하며 그들을 내쫓게 하셨다.

2) 하갈의 통곡 사건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아브라함은 물 한 가죽부대와 떡을 준비하여 하갈에게 주고 그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하였다. 졸지에 쫓겨난 하갈은 광야 길을 방황하다가 물이 다 떨어져 죽게 되니 아들을 떨기나무 아래 두고 자신은 멀리 떨어져서 크게 울며 통곡하였다.

그러자 하갈과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나타나셨 다. 하나님은 하갈을 위로하시며“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21:18)는 약 속을 주셨다. 그 약속을 받은 하갈은 이내 울음을 그치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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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을 차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샘물을 보고 아이에 게 마시게 한 후 물을 가죽부대에 담아 다시 길을 떠났다.

3) 두 사건의 의미

지금 본 두 사건은 나름대로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두 사건은 서로 대비가 되면서도 무언가 공통된 것을 보여 준다. 한 여자는 웃음으로 또 한 여자는 통곡으로 희비가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여자는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었 다. 사라가 이삭을 낳지 못했을 때 그녀는 한숨과 눈물의 나 날을 보냈다. 반면에 자신의 여종에 불과했던 하갈은 아브라 함의 아들을 낳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하갈이 자신의 아들 이 스마엘을 앞세워 사라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상황은 사라가 이삭을 낳음으로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이삭이 없을 때의 사라는 절망 가운데 있었으나 이삭을 얻은 사라는 승리자가 되고 다시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당당하 게 서서 여종 하갈에게 집에서 나가라고까지 명할 수 있었다. 사라에게 이런 승리를 쥐어 준 열쇠는 이삭이다. 이삭이 없는 사라는 죽은 자와 같으나 이삭을 가진 사라는 산 자요 기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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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웃을 수 있는 승리자가 되었다. 반면에 여종 하갈은 이삭이 나타남으로 내어 쫒기는 신세가 된다. 자기 아들과 함께 광야 길을 가다가 물이 떨어지니 절 망 가운데 통곡한다. 하갈이 길을 떠날 때는 그나마 살 곳을 찾기 위해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물이 떨어진 상태에서 뙤 약볕에 쓰러질 정도가 되니 이제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 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위로하며 샘물을 주시지 않았다 면 하갈은 기갈로 인해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두 사건이 보여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 다. 두 사건은 동일하게 승리의 요건, 생명의 요건이 무엇인 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라에게 승리의 요건은 무엇인가. 그에 게는 약속의 아들 이삭이 승리의 요건이요 핵심이다. 이삭이 없으면 그는 패배자요 이삭이 있으면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반 면에 통곡하는 하갈에게 생명의 요건은 샘물이다. 샘물이 있 으면 살 수 있으나 샘물이 없으면 그는 죽은 목숨이 된다.

하나님께서 두 사건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다. 하나님은 사라를 통해서는 승리의 열쇠인 이삭을, 하갈을 통해서는 생명의 열쇠인 샘물 을 보여주고 계신다. 이 두 열 쇠를 보여주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브엘세바 사건을 풀어주 는 열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열쇠가 갖는 의미를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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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알고 있으면 브엘세바 사건의 비밀을 푸는 것이 훨씬 수월 하다.

3. 아비멜렉의 방문

1) 화친 제의

두 여자의 사건 직후 당시 그랄 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 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때 아비멜렉 은 말하기를“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 시도다” (창21:22) 하며 아브라함을 두려워한다. 아비멜렉 입 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두려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예전 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한 일이 있을 때 그의 꿈에 하 나님께서 나타나셨었다. 그리고 사라를 돌려보내라 하시며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창20:7) 하고 경고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경고 후에 그의 집안의 모든 태가 닫히는 기 막힌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부랴부랴 사라를 돌 려 보내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았을 때 그 집안의 태가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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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었다.

그 일을 경험한 아비멜렉이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연실색하였다.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고 아브 라함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던 차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꿈에서 만난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며 아브라함까지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는 혹시라도 아브라함이 마음을 잘못 먹으면 자기 자신과 집안 전체에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꿈 에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말을 들었고 그가 너를 위해 기 도하면 살려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 있다.(창 20:7)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아비멜렉은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집안의 안전을 위해 아브라함 과 평화 조약을 맺으려 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만나“너 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창21:23)며 화친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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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물에 대한 맹세

아브라함 입장에셔는 그 땅을 다스리는 왕이 직접 찾아와 화친을 제의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그 역시 맹세하 겠다고 흔쾌히 대답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맹세를 하면 서 아비멜렉에게 하나의 불만을 제기한다. 그것은 그의 종들 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강제로 침탈한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아비멜렉은 변명을 하고 나섰다. 자신은 그 일을 알지 못하며 오늘에야 처음 들었노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에게 암양 새끼 7마리를 주며 이것으 로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보증해 달라고 하였다. 아비멜렉은 그리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두 사람이 우물을 두고 서로 맹세 하니 이어서 아브라함은 그 우물의 이름을 맹세의 우물 곧 브 엘세바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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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브엘세바의 비밀

1) 말씀의 우물

브엘세바 사건은 아브라함이 새끼 암양 일곱을 주고 우물의 소유권을 확보한 사건이다. 그가 우물의 소유권을 놓고 아비 멜렉과 담판을 벌인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당시 아브 라함이 살던 브엘세바 땅은 척박한 곳이다. 호수나 강이 없기 때문에 물이 귀하다. 그런 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 며 살기 위해서는 물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우물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의미다. 우 물이 있으면 살 수 있으나 우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 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우물은 사라의 이삭과 같 고 하갈의 샘물과 같은 의미다. 이렇게 보면 세 사람의 사건 은 모두 같은 의미를 보여주는 같은 이야기가 된다. 세 사람 의 세 이야기는 모두 자신의 생존권이 달린‘생명’ 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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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의 존재는 생명과 같은 존재다. 만일 이삭이 없다면 그는 죽은 자나 다름이 없 다. 물론 육적으로 보면 그나마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있으 므로 이삭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이삭이 없는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삭이 없다 면 그가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고 그는 복의 근원이 되지 못하니 존재의 의미가 소멸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영적 생명을 보장하는 것처럼 그에게 브엘세바 우물은 육의 생존을 보장하는 생명줄이다. 전자는 영의 생명줄이요 후자는 육의 생명줄인데 사실 두 가지의 의 미는 서로 상통한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아들이며 말씀의 아들이다. 말하자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를 상징하는 아들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브엘세바 우물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우물은 영적 목마름을 해갈하는 하늘의 물을 의미하며 구원 의 물을 뜻한다. 이사야가“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 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사12:3) 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사야 는 우물을 구원의 물 즉 말씀의 물로 잘 비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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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삭과 브엘세바 우물은 둘 다 같은 의미이며 둘 다 하나님의 약속과 생명을 상징한다. 둘 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상징하고 그 은혜를 상징하며 또한 구원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삭은 우물과 같고, 우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니“이 삭 = 우물 = 생명 = 말씀 = 구원” 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 다.

2) 새끼 암양 7마리

아브라함은 생명같은 우물의 소유권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7마리를 내 주었다. 그 7마리 양을 주며 브엘세바 우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맹세를 하도록 만들 었다. 그러면 왜 아브라함은 7마리 양을 내 놓은 것일까. 또 왜 하필 암양 그것도 새끼 암양으로 7마리를 주었을까? 이 또 한 하나님이 브엘세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비밀의 말씀이라 아니할 수 없다.

7이라는 수에는 언약이나 맹세의 의미도 있지만 특히 성경 에 나타난 7의 수는 완전을 의미하는 뜻이 강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의 완전함을 증거할 때 7의 수를 사용하신다. 예 를 들어 창조의 완전을 말할 때 7일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때를 정한 절기는 7절기에서 끝난다. 계시록의 모든 섭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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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의 단계에 이를 때 종결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곧 일곱 우물이라는 이름을 정한 것은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여기서 일곱이 완전을 의미하고 우물이 구원을 의미한다면 브엘세바는“완 전한 구원” 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브엘세바를 달리 말하면 완전한 생명, 완전한 말씀, 완전한 구원,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브엘세바 사건이 증거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브 엘세바 사건을 겪는 가운데 그가 완전한 생명, 완전한 말씀,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7마리 양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3) 승리의 우물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라고 이름한 것에는 또 다른 숨겨진 의 미가 있다. 처음에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으려고 먼저 손을 내 민 사람은 아비멜렉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두 려워 평화조약을 맺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 입장에서 는 평화조약만 맺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평화조약 을 맺어봐야 아비멜렉의 종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생존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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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우물을 파괴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따라서 아브라함 에게는 자신의 우물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보증을 받는 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화친도 중요하지만 우물의 소유권 을 확보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아비멜렉이 다 시는 우물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양 7마리를 통해 우물의 소 유권을 공증받았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양 7마리를 놓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자신이 아비멜렉에게 공증받은 우물 의 소유권이‘완전한’것임을 나타내고자‘7마리’양을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브엘세바는 그 영적 의미가 동일하다.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을 상징한다. 그 런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 암아 주어졌다. 이삭은 물론이거니와 브엘세바 역시 그의 힘 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아비멜렉이 먼저 화친을 맺으려 한 것도 그가 하나님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이나 우물을 주신 이가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브라함도 누구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 었다.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이삭을 잉태한 것은 오직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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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은혜요, 아비멜렉이 두려움으로 화친을 맺도록 한 이도 하 나님인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승리는 곧 하나님이 주신 승리요 하나님 의 승리다. 아브라함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였기에 그 우물 이 아비멜렉 왕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우물인 것을 믿었다. 그 우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땅 의 어느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완전한 자신의 소유인 것을 확신하였다.

여기에 바로 양 7마리의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가 이 삭을 얻은 것처럼 우물을 얻은 것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승리임을 알았다. 그것은 보통 승리가 아닌 영적 승리이 며 또한 완전한 승리였다.

하나님은 이삭과 우물의 승리를 함께 주셨다. 이삭과 우물 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소유한 자임을 나 타낸다. 이렇게 약속과 말씀의 구원을 받은 자는 아무도 건드 리지 못한다. 아비멜렉같은 땅의 대적 뿐만아니라 하늘의 대 적들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약속의 말씀을 소유한 자 가 가진 승리는 7과 같은 완전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양 7마리를 내 놓았다. 그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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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떤 대적도 건드릴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우물이 며 승리의 우물임을 확신하였기에 그 승리의 완전함을 표상 하려고 양 7마리를 내 놓았다.

성경에서 양은 우리의 화목 제물이신 예수를 상징한다. 그 러니까 7마리 양은 완전한 예수를 뜻하며, 완전한 예수의 구 원을 상징하는 양이 된다. 따라서 7마리 양이나 브엘세바 우 물이나 아들 이삭은 모두 같은 의미-완전한 구원과 승리를 예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암양 새끼를 놓은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승리가 아직은 자신에게 만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차 예수로 말미암은 구 원의 승리가 나타나면 그것이 수많은 민족과 열방들을 잉태 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새끼 암양이 훌쩍 자라 출산의 때가 되면 이 땅에 수많은 승리의 성도들을 잉태하고 번성시킬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소망이 미래에 성취될 것을 예표하고자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잉태와 번성을 의미하는 새끼 암양 7마 리를 놓도록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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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물과 에셀나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를 통해 완전한 승리를 얻은 후 그 우 물가에 에셀나무를 심었다.(창21:33) 우리는 보통 엘리야의 로뎀나무가 안식과 구원을 주는 나무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에셀나무가 참으로 안식과 구원을 주는 나무다.

로뎀나무는 크기가 2~3m에 불과하고 그늘도 엉성하여 쉼 의 장소로 마땅치 않다. 로뎀나무는 겨우 그늘을 피하고 빈약 한 위로를 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엘리야가 로뎀나무에서 쉴 때는 죽기를 구하였으며 거기서 살아난 것은 나무 때문이 아 니라 천사가 건네 준 물과 떡을 먹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 뎀나무는 시험과 연약함에 떨어진 성도를 의미하는 나무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에셀나무는 크기가 5~10m 정도이고 나무가 크고 잎 이 무성하며 그늘도 넓고 시원하다. 특히 에셀나무는 뿌리가 깊어 깊은 곳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리기 때문에 늘 싱싱하고 푸르르다. 또한 그 잎에 소금기가 많아 새벽녘에 이슬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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껏 머금었다가 한낮 더위에 수분을 조금씩 증발시킴으로 언 제나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여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쉬기에 충분하다.

성경에서 나무는 보통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가 장 대표적으로 포도나무는 예수를 뜻하며 우리는 극상품 포 도나무에 접붙여진 들포도나무 같은 자들이다.(사5:2)

따라서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옆에 에셀나무를 심었다는 것 은 그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영적 상태 를 증거하기 위해 에셀나무를 심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주 신 승리의 우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구원의 완전한 은혜로 말미암아 참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음을 알았기에 그 상태를 빗대어 에셀나무를 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브엘세바는 생명의 우물이요 구원의 우물이다. 그 옆에 심은 에셀나무는 완전한 우물에 뿌리를 내려 언제나 푸 르른 아브라함 자신을 예표한다. 이것은 하늘의 승리를 성취 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 안에 깊은 뿌리 를 내린 승리의 성도를 보여주는 복음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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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원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심은 후 그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 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21:33)라는 기록과 같다.

아브라함은 왜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까. 여기에도 숨은 뜻이 있다. 위 구절에서‘영생하시는’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오람’ 은 적절한 번역이 되지 못한다. 오 람의 뜻은 영생이라는 뜻도 있지만‘숨겨진’ ,‘영원한’이라 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는‘숨겨진’이라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과 우물의 승리를 경험한 아 브라함은 그 곳에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하나님, 숨겨 진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삭을 낳기 전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저 인간적이고 종교적 인 믿음에 머물러 있었다. 이삭을 낳을 때에야 비로소 오직 말씀만을 붙잡는 신령하고 견고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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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으로 그는 이삭을 얻었고 우물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 다. 그리고 그 승리를 얻은 후에 비로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브엘세바에서 그가 만난 하나님은 완전한 승리의 하나님이 요 완전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의 복을 받아 하늘의 승리, 영의 승리를 성취한 아브라함은 그 때서야 하나 님이 주시는 복이 완전한 복이며 하늘의 신령한 복인 것을 알 게 되었다.

이전의 아브라함은 자신이 무슨 복을 받게 될지 잘 모르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삭과 우물을 통해 승리의 복을 받고 보니 그것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던 깊은 복임을 알 게 되었다. 지금껏 아브라함은 그 복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숨겨진 복을 받았으므로 아브라함은 그 복에 감사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숨어계신 깊은 하나님인 것을 배 웠다. 그 분의 뜻과 섭리는 깊이 숨겨져 있으므로 쉽게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를 받아 영적 승리에 이른 자만이 알 수 있으니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에게는 깊이 숨겨 진 하나님이 된다. 다만 에셀나무처럼 말씀의 물에 깊이 뿌리 를 내린 자만이 그 깊은 하나님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숨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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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숨겨진 하나님에 대해 이사야는“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 다” (사45:15) 라고 하였다. 이사야의 말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신다. 그 분은 완전한 구원의 우물이 있는 7의 깊이에 계시고, 하늘 승리의 높은 자리에 계시며, 루아흐의 완전한 구원 안에 머무신다. 그런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쉽게 찾 을 수 없는 숨겨진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 중에 하늘의 승리와 영의 승리 를 성취한 자들 만이 깊은 하나님을 만난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깊은 하나님이며 완전한 하나님이 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크게 놀라며 하나님의 이름을 숨겨 진 하나님이라 불렀고 이사야도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였기에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분이라고 증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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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승리의 십일조

아브라함의 브엘세바는 그가 최초로 영적 승리를 거둔 곳이 다. 그가 그 곳에서 승리를 얻은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은 브엘세바의 승리에 앞서 먼저 살렘 왕 멜기세덱을 통해 승리의 복음을 알게 하셨다. 그 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3단계의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이끌어 3단계의 복음의 과정을 걷게 하시며 브엘세바의 승리에 이르도록 이끄셨다.

1) 복음의 1단계 - 포도주

창14장에서 멜기세덱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한 하 나님은 창15장에서 복음의 공식적인 첫 단계를 밟게 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칭의’ 를 얻는 단계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 시고” (창15:6) 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칭의의 은혜를 받고 복음의 첫 단계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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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받은 칭의는 믿는 자가 예수의 피로 죄를 씻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복음의 출발점과 같다. 이 은혜를 받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포도주의 은 혜가 필요하다. 멜기세덱이 가져 온 포도주는 바로 이같은 포 도주의 은혜를 예표하며 그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2) 복음의 2단계 - 떡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80세 경에 칭의를 받은 후 이어서 복 음의 둘째 단계를 향해 출발하였다. 복음의 둘째 단계는 멜기 세덱이 가져온 떡을 먹는 단계다. 이 단계는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며 최소 몇 년에서 몇 십년까지 걸리는 단계 다. 아브라함은 칭의를 받고 100세가 될 때에야 떡의 단계를 마쳤으니 그는 거의 20년이 걸린 셈이다.

복음의 둘째 단계인 떡의 과정은‘오직 말씀’ 만을 믿는 단 계라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며 오 직 하늘의 떡인 말씀 만을 굳게 믿고 따르는 견고한 믿음의 단계가 바로 떡의 과정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는 말씀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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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그 말씀을 믿지 않 고 도리어 속으로 비웃었다. 그에게‘오직 말씀’ 만을 바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 하나이다” (창17:18) 하며 엉뚱한 대답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180도 다른 믿음 이 되었다. 바울의 증언대로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을 가졌고(롬4:18) 오직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었다.(롬4:20)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말씀 만을 굳게 믿는 그 견고한 믿음을 보시고 다시금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롬4:22) 아브라함은 그 때 비로소 칭의 위에 인의를 더하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사실 일반적인 교회에서 칭의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인의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인의의 과정 이야말로 믿음의 비밀이며 거듭남의 비밀이다. 이 비밀을 몰 랐던 아브라함은 20여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어도 잘못된 믿 음, 종교적 믿음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인의의 비 밀을 깨달았을 때 그는 불과 1년 만에 오직 말씀 만을 믿는 신 령한 믿음을 가진 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인의의 비밀을 다룰 수 없으므로 넘 어가기로 하고 다만‘오직 믿음’ 에 대하여 잠시 살펴 보자.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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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보통‘오직 믿음’ 으로 칭의를 받고 구원을 받는 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오직 믿음은 단지 믿기만 하고 단 지 예수를 영접만 하면 되는 단순한 믿음을 뜻한다. 그저 믿 겠다고 하는 한 마디 고백 만으로 받는 칭의의 믿음을 오직 믿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오직 믿음은 이와 다르다. 성경의 오 직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말씀 만을 믿 고 따르는 것을 오직 믿음이라 한다. 아브라함처럼 사라의 경 수가 끊어져도 자신이 나이가 많아도 어떤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오직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오직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세상이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지혜도 따르지 않으며 죽음보다 강한 믿음으로 오 직 말씀 만을 따른다. 이런 믿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며 사 단도 감당치 못하는 참되고 견고한 믿음이니 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인의의 의를 허락하신다.

사실 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로 이 믿음이다. 오직 말씀 만을 따르며 오직 말씀으로써 몸의 행실까지 죽일 수 있는 믿음(롬8:13)이 바울이 말하는 오직 믿 음이다. 이 믿음을 가진 자들 만이“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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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말씀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 자신의 욕심대로 살지 않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나는 죽고 말씀 만이 내 안에 살게 하 는 이런 믿음이 참으로‘오직 믿음’ 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처음 칭의를 받을 때는 이런 오직 믿음이 없었 다. 그러면서 인간적인 믿음의 수준으로 20년을 버티고 살았 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말씀에 대한 불신과 비웃음으로 나타났 다. 이는 아직 아브라함이 떡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 먹지 못 한 자임을 보여 준다. 그가 만일 하늘이 떡의 말씀을 먹을 수 있는 자였다면 그는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 게 받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99세가지의 아브라함은 오직 말씀대로 믿는 오직 믿음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 고 말았다.

따라서 이제 떡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 분명해졌다. 떡의 과 정은 말씀의 훈련을 통해 어떤 말씀이든 오직 믿음으로 먹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다. 이런 떡의 과정을 거친 믿음에 대해 성경은 의의 말씀을 경험한 믿음이라고 말한다.(히4:13) 즉 하늘의 떡의 말씀을 먹고 소화한 경험이 있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떡의 말씀을 경험한 자들은 아브라함처럼 연 약한 믿음을 버리고 견고한 믿음을 가지며 육의 믿음을 버리 고 하늘의 영의 믿음을 갖는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라야 복 음의 2단계를 마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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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음의 3단계 - 승리의 복

① 육의 제거

아브라함은 100세가 될 때 떡의 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 었다. 그 때 그는 아들 이삭을 육의 믿음이 아닌 영의 믿음으 로 낳았다. 그리고 아들 이삭이 무럭 무럭 자라 젖을 떼니 이 에 아브라함은 크게 기뻐하며 대연을 베풀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여종 하 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쫒아 보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미 크게 자란 이스마엘이 계속해서 이삭을 괴롭 히면 어린 이삭은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 이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이삭은 말씀과 예수를 상징 하는 아들인데 말씀이신 예수가 일시적으로 고난을 받을 수 는 있어도 계속해서 육의 희롱을 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마엘이 쫒겨나는데 바울은 그가 약속된 자가 아닌 육체를 따라 난 자이기에 쫒겨난 것임 을 증거하였다.(갈4:30) 말하자면 그는 육의 믿음으로 난 아 들이기에 쫒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스마엘이 떠나 자 비로소 어린 이삭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었고 그는 약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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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쫒아내자마자 곧이어 하나 님은 그에게 브엘세바의 승리를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이 렇게 곧바로 승리를 주신데에는 나름대로의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인의의 견고한 믿음으로 오직 말씀 만을 굳게 믿는 자가 되었다면 이어서 신속하게 육체의 것들 을 쫒아 내야 함을 가르친다. 곧 우리가 하늘의 승리를 얻고 자 한다면 그 전에 먼저 말씀을 훼방하는 육체의 것을 잘라 버려야 한다는 승리의 법칙을 가르치는 것이다.

② 승리의 법칙

이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삭과 하갈과 브엘세바 사건을 굴비 엮듯이 역어서 가지런히 보여주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모두는 아브라함이 하늘의 승리를 얻는 일련의 과정 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이스마엘이 아닌 영의 이삭 만을 바라며 살기를 원하신다. 또한 사라가 이삭의 안전을 원한 것 처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전하게 자리 잡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되려면 말씀을 훼방하고 거스리는 이스마 엘같은 육의 것들을 잘라 내야만 한다. 그래서 내 안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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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만이 유업을 갖도록 해야 한다. 여 기에 바로 승리의 법칙이 있다. 오직 말씀 만이 내 안에서 승 리할 수 있도록 육체의 것을 버리는 것이 승리의 조건과 법칙 이다. 그럴 때 비로소 승리의 축복이 주어지니 이것이 바로 브엘세바의 승리의 법칙이며 구원의 법칙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비결을 가르쳐 승리와 축복을 받 게 하려고 오랫동안 그를 인도하셨다. 칭의와 인의의 과정을 걷게 하신 후에 다시금 기다려서 육체에 속한 이스마엘을 버 리게 하시며 오직 말씀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도록 하셨다. 성 경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여러모로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바 로 이것, 그가 승리의 복을 받는 깊은 과정들을 자세하게 보 이기 위함이다.

③ 십일조의 복

이제 아브라함이 복음의 모든 과정을 마치기까지는 다만 한 가지 단계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승리의 십일조를 드리는 과 정, 루아흐의 왕이 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단계 를 성취하기 위하여 창21장의 브엘세바 사건이 끝나자마자 곧이어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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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 제로 드리라” (창22:2)고 명하신다. 지금까지의 아브라함의 태 도를 볼 때 그는 이같은 하나님의 요구에 자신의 의견을 보태 는 것이 당연지사다. 지금까지의 아브라함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그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출발 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한 길을 떠날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아무 말도 없이 떠나는 이 유를 알아야 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육적인 생각이나 의견을 일체 함구하며 오직 말씀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신뢰하고 오직 말씀 만 을 믿고 순종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다른 인간적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오직 말씀 을 살리는 것이 승리의 비결임을 배웠기에 다만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날 뿐이다.

이윽고 아브라함은 집을 떠난 지 삼일 만에 멀리 모리아 땅 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즉시 그 모리아 산에 올라가 주 저없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하였다. 이에 하나님은“그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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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하시며“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2)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 가.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승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십 일조의 의미가 되는 사건이다. 그는 이삭을 통해 영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고 이스마엘을 통해 육의 것을 버려야 함 을 배우며 브엘세바를 통해 승리를 얻었다. 그로 인해 아브라 함은 완전한 우물, 완전한 생명, 완전한 구원을 받는 깊은 은 혜를 체험하며 하늘의 승리를 맛보았다.

그는 이제 칭의의 아브라함이 아니요 인의의 아브라함도 아 니다. 이제는 오직 믿음과 오직 말씀을 오직 행함에 일치시킬 수 있는 온전한 아브라함, 승리의 아브라함이 되었다. 땅의 대적은 물론이요 하늘의 대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승리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행 함으로 순종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비록 이삭이 죽 을지라도 이삭과 세운 하나님의 언약은 변치 않으며 더 크게 성취될 것을 알고 믿었다. 심지어 그는 이삭이 피를 흘리고 죽을지라도 다시 살 것을 능히 믿었다. 바울이 기록한대로 아 브라함은“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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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롬4:17) 하나님이심을 믿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는 자신을 모두 버 리고 하나님 만을 높이는 믿음으로 선 자였다. 그는 하늘의 승리의 법칙을 너무도 잘 알기에 어떤 경우든지 자신을 버리 고 오직 말씀 만이 승리하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함을 보시고 그가 하나 님의 벗이 되었다고 칭찬하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사실상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 님께 바쳤다.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이나 의견 등을 모두 버리 고 오직 하나님 만이 승리의 왕이 되시도록 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믿음과 인간이 행할 수 없는 행위를 보 여 준다. 이는 아브라함이 드디어 하늘의 믿음을 가진 루아흐 의 존재가 되며 하늘의 왕같은 참된 승리자가 된 것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그가 이제 신령하고 완전한 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야고보가 말한대 로 그의 칭의가 완전케 됨으로 완전한 의에 이른 자가 되었음 을 뜻한다. 이같이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완전한 의는 칭의 나 인의 뒤에 오는 또 다른 차원의 높은 의다. 이 의는 멜기세 덱처럼 의의 왕이 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하늘의 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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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장에서 처음 부르심을 받고 14장에서 멜기세덱의 복음 을 들으며 15장에서 칭의를 받은 아브라함은 드디어 22장에 이르러 의의 왕이 되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의의 모든 과정 을 마치며 복음의 모든 과정을 끝마치는 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멜기세덱이 전한 복음의 승리와 축복을 모두 받은 자가 되었다. 그는 멜기세덱같은 의의 왕이 되고 하늘의 왕이 되었 다. 그래서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며 하늘의 신령한 복음을 증거하는 복의 근원이 되기에 이르렀다.

④ 왕의 복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물론 자신의 전체를 바치 는 하늘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 산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죽이고 번제로 드려 하나님 만이 승리의 영광을 받으 시게 하였다. 모리아 산은 지금으로 말하면 시온 산이요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산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 음과 의가 완전해진 그 순종의 땅에 자신의 성전을 세우신 것 이 아닌가.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이 임하는 땅은 거룩한 땅이다. 그곳 은 성도가 자신의 모든 것을 승리의 십일조로 바치는 믿음의 땅 위에 세워진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믿음으로 그 심령 안에 하늘의 성전을 세웠다고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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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성전의 의미다. 하나님의 성 전은 믿음으로 온전해 진 성도가 자신의 모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십일조로 바치는 곳에 세워진다. 이와 같은 승 리의 십일조를 통해 성전을 세우는 자는 자신을 온전하게 번 제로 드린 자니 그가 곧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또한 그런 믿 ㅇ므을 가진 자가 자신 안에 세운 심령의 성전을 화평과 의로 다스릴 수 있으니 곧 의의 왕이며 또한 평강의 왕이 된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과 같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 며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 되는 자리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승리이며 축복이고 복음이다. 성경의 복 음은 아브라함과 같이 3의 과정을 모두 걸어 자신 안에 완전 한 성전을 세우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 참 복음이다.

⑤ 복의 과정

지금까지 설명한 복음의 3단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1단계 : 포도주의 칭의 - 2단계 : 떡의 인의 - 3단계 : 육제거 → 승리 → 십일조 → 완의 → 왕

우리가 칭의의 1단계와 인의의 2단계를 지나면 이어서 이스 마엘을 내쫒은 것처럼 육의 것들을 제거하는 3단계의 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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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브엘세바의 승리를 성취하는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더욱 온전한 믿음을 배우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이 성도 자신의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모두 바치는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면 그 심령에 거룩한 하늘의 성 전이 임하는 은혜를 받는다. 그 성전이 임함으로써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를 완의의 존재로 인정하시며 자신의 친구로 받 아 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벗이 되는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 는 의인이 되며 늘 하나님을 섬기는 왕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아브라함을 통해 증거하는 복음의 과정이며 축복의 과정이다. 또한 죄인인 바싸르가 하늘의 루 아흐가 되는 참된 구원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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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3과 7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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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삭의 생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사건을 통해 7의 의미를 은 근히 보여 주셨다. 7은 완전수요 승리의 수다, 또한 완전한 구 원과 축복의 수임을 보이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 은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사건을 다시 보여주신다. 그 사건은 이삭을 통해 한 번 더 반복된다.

성경에 기록된 이삭의 생애를 보면 별 다른 것이 없다. 그가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번제로 드려진 것외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다. 그가 생애에서 한 일 중에 가장 중요하게 기록 된 것은 우물파는 일이다. 성경은 그가 평생에 일곱 개의 우 물을 판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우물에 관련되어 또 다시 브 엘세바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브엘세바와 마치 쌍둥이처럼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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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땅에 거하라 아브라함 사후에 이삭은 흉년을 당하여 가나안 남쪽으로 가 다가 그랄 왕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땅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애굽에 이를까 염려하신다. 그래서 이삭에게 이르시되“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26:2)고 말씀하신 다. 또한 하나님은 이 땅에 거하면 네게 복을 주고 이 모든 땅 을 네게 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삭은 그랄 땅에 머무는데 부전자전이라고 그 땅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아내 리브가를 자기 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아비멜렉 왕이 창 으로 보게 되어 그녀가 아내인 것이 발각된다. 그렇지만 아비 멜렉의 선처로 두 사람은 보호를 받고 그 땅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거하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이삭 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창26:12)라 는 기록처럼 복을 받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삭이 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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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

3. 일곱의 우물

이삭이 그 땅에서 백 배의 복을 받은 후에 이어서 나오는 것 이 그의 우물 사건이다. 그가 거부가 되고 양과 소가 큰 떼를 이루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그가 판 모든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사고가 발생하였다.(창26:15) 그러자 아비멜렉 이 말하기를“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 라” (창26:16) 하며 이삭을 반 강제로 내 쫒았다.

이삭은 하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 고 다시 우물을 팠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아버지 아브라 함이 팠던 우물을 기억하여 다시 팠기에 수월하게 우물을 얻 을 수 있었다.

다시 한참 후 이삭이 골짜기를 파서 세 번째로 우물을 얻었 는데 그랄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걸며 우물을 빼앗아 갔다. 그 러자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에섹(다툼)이라 하였다. 이어 네 번째로 우물을 파서 얻었는데 또 시비가 붙어 그 이름을 싯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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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이삭은 그랄 골짜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섯 번째로 우물을 파서 얻으니 그 이름을 르호봇(큰땅)이라 하였다. 이 때부터는 그 땅의 사람들이 시비를 걸지 않게 되 었다.

이삭이 거기서 다시 옮겨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또 우물을 파니 거기서 여섯 번째의 우물을 얻었다. 이 여섯째 우물을 얻은 후 아비멜렉 왕이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이삭을 찾아 왔 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모습을 본 이삭이 말하였다.“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창 26:27) 그러자 아비멜렉이 답하기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 심을 우리가 목격하였으므로 화친을 맺고 싶어 온 것이라 하 였다. 그 말을 듣고 이삭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서 로 화친을 맺은 후에 평안히 헤어졌다.

아비멜렉과 헤어진 그 날 이삭의 종들이 좋은 소식을 가져 왔다. 종들이 와서 말하기를“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창 26:32) 하며 일곱 번째 우물을 얻은 사실을 전하였다. 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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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세바’ 라고 외치며 그 우물에 이름을 붙였고 그 후로 그 성읍의 이름이 브엘세바가 되었다.“그가 그 이름을 세바 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 라” (창26:33)

4. 승리의 우물

이삭은 아비멜렉과 화친 조약을 맺고 얻은 일곱째 우물의 이름을 세바라 하였다. 이삭이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그가 일곱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삭은 아버지로 부터 하나님에 대해, 믿음과 복의 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웠을 것이다. 그 중에 아버지가 양 7마리를 주고 브엘 세바 우물을 보증받은 일도 들었을 터이다. 그래서 자기를 쫒아낸 아비멜렉이 화친을 위해 찾아왔을 때 그는 아버지의 일이 생각났을 수도 있다. 아무튼 상황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삭도 역시 아버지와 비슷한 사건을 겪은 것 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아비멜렉과 헤어진 그날 새 우물을 판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우물이 일곱째 우물인 것을 알고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그 이름을 브엘세바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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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일곱째 우물을 세바라 이름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일곱 번째의 우물이기 때문 만은 아니다. 이삭은 자신이 판 우물을 네 번이나 빼앗기는 고난을 받았고 다시 두 번의 우물 을 팠으나 그것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 던 차에 그 땅의 왕이 먼저 찾아와 화친을 청하니 이삭의 입 장에서는 크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삭이 왕과 화친을 맺었으니 그 땅의 목자들이 다시는 이 삭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며 아비멜렉 왕도 하나님이 무서워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삭은 더 이 상 우물을 빼앗길 염려없이 그 땅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은 셈이다.

그러던 차에 일곱째 우물을 얻었으니 그 물은 다시는 빼앗 길 염려가 없는 물이며 그 땅의 왕으로부터 승리를 얻은 것과 같은 물이 아닌가.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에 대해 세바라 하 였다. 빼앗길 염려가 없는 우물, 자신의 소유권이 보장된 완 전한 물을 얻었으니 세바라 불렀다. 그것은 또한 그 땅에서 승리를 얻은 것을 증거하는 물이니 세바라 하였다. 이삭은 이 제 완전한 물, 승리의 물을 소유하였음을 알았기에 아브라함 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기념하여 세바라 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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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원의 3과 7

1) 이삭의 7의 비밀

하나님은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사건을 보이셨 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우리에게 이삭의 브엘세바 사건을 보여주신다. 사실 두 사건은 그 내용이나 방식에 있어서 모든 것이 흡사하다. 결론마저도 쌍둥이처럼 동일하게 맺고 있다. 둘 다 일곱이라는 수를 보여주며 그것이 승리의 의미인 것을 증거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러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하나님 은 똑같은 내용의 사건을 하필이면 두 번씩 반복하고 계신걸 까. 이 두 사건을 동일하게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두 사건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 가 있다. 하나님은 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7의 의미를 보여 주려 하신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처음으로 양 7마리를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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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며 7이 완전한 생명과 구원의 수인 것을 보이셨다. 또한 7의 수가 바로 승리의 수라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그러면 이삭을 통해 보이시려는 7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 은 이삭이 일곱 개의 우물을 판 사실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이삭은 창26장에서 모두 7개의 우물을 파는데 성경이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는 데에는 그 하나 하나마다 중요한 의미가 담 겨있기 때문이다.

이삭이 판 7개의 우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째 부분은 대적들과 다투고 빼앗긴‘대적의 우물’ 이다. 이삭 은 처음 그랄 땅에 도착해서 판 것부터 4번째의 우물까지 모 두 침탈을 당한다. 그래서 3번째 빼앗긴 우물의 이름을 에섹 곧 다툼이라 부르고 4번째 빼앗긴 우물을 싯나 곧 대적이라 이름 붙였다.

둘째 부분은‘번성의 우물’ 이다. 이삭이 판 5, 6번째의 우물 은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그래서 5번째 우물 의 이름을 르호봇 즉 큰땅이라 하였고“여호와께서 우리의 장 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창 26:22) 하며 번성의 의미로 르호봇이라 불렀다.

이삭이 판 우물의 셋째 부분은‘승리의 우물’ 이다. 이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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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랄 왕에게 승리한 후에 얻은 7번째 우물이다. 이 우물로 써 이삭의 우물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는 7번째 우물이 바 로 승리를 표상하는 우물이며 영적으로 마지막 우물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브엘세바에서는 7이라는 수를 단 번에 보여주시나 이삭의 경우에는 이렇게 7을 4와 2와 1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여 주신다. 이 역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4, 2, 1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볼 것이지만 이 세 가지는 3단계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되 어 있다. 우선 4는 바싸르의 수요, 2는 네페쉬, 그리고 1은 루 아흐의 수로 볼 수 있다.

이삭이 처음의 4의 우물을 두고 다투는 것은 바싸르의 속성 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는 바싸르의 상태에 있는 자는 자기 의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모두 빼앗기는 종된 처지를 보여 준다. 그런데 그 종된 기간이 4와 같으며 또한 4천년과 도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싸르에서 속박을 당하는 인간을 위해 인류 역사 4천년이 되었을 때 이 땅에 내려 오셨다. 바싸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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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한이 4에 해당하기 때문에 예수는 4의 기한이 찼을 때 오셨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도 그 기한이 4대 곧 400년이었다. 애굽 땅의 바싸르의 상태에서 벗 어나는 것도 4의 기한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바싸르의 고난의 수는 4이며 인류가 바싸르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4천년을 기다리고 예수의 죽으심 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4의 속박의 기한이 종료되고 4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수 있다.

다음으로 2의 우물은 네페쉬의 수 2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의 피로 4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는 이어서 네페쉬의 수 2 의 단계에 들어간다. 이 2의 단계는 예수의 포도주를 받은 자 가 본격적으로 예수의 떡을 먹는 시간인데 성경은 이 시간을 2의 수로 상징한다. 아브라함은 이 떡을 먹는 시간이 20년이 걸렸으며 교회가 이 떡을 먹는 기한은 성령 시대 2천년으로 정해져 있다. 이처럼 성경은 2, 20, 2천 등을 같은 의미로 사 용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4의 포도주를 마신 성도는 2의 떡을 먹고 6의 수를 채워야 한다. 이렇게 6을 채운 성도는 드디어 7의 승리를 얻을 자격을 갖출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을 베푸실 때 여섯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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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고 하신다.(요2:7) 그러면 그 물은 혼인잔치의 포도주로 변화한다. 이 변화의 기적은 6의 기한이 차야 하늘 잔치의 7 의 때가 오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과 같다.

따라서 성도가 여섯 돌항아리에 물을 채움같이 자신 안에 6 의 수를 채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성도가 4와 2의 은혜를 받아 자신의 네페쉬가 6이라는 말씀의 물과 6의 은혜 에 완전히 잠겨지는 것과 같다.

성도가 자신 안에 6의 물 즉 6의 말씀을 갖는 것은 4의 우물 로 바싸르에서 벗어나고 2의 우물로 자신의 네페쉬가 채워지 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네페쉬를 떡과 말씀의 우물 에 잠기게 한 자는 드디어 하나님이 주시는 7의 우물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7의 우물은 곧 완성의 우물이며 승리의 우물을 뜻한 다. 또한 7의 우물은 완전한 말씀과 완전한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니 루아흐의 우물이라 말할 수 있다. 이 7의 물을 얻으려 면 바싸르의 4, 네페쉬의 2의 우물을 채운 후 루아흐의 1의 우물을 더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7의 우물과 그 승리를 맛볼 수 있다.

우리가 이 7의 승리를 얻으려면 이삭과 같이 6개의 우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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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모두 지나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삭처럼 고난과 인내를 배우며 믿음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안에 말씀을 거스리는 육의 것들을 자 르고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 쫒 았듯이 우리가 쉽게 떨치지 못했던 육의 것들을 내 쫒는 믿음 이 있다면 우리는 6의 우물을 모두 채운 자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두 브엘세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브엘세바는 7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며 이삭의 브엘세바는 7을 셋으로 구분하여 3단계의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7과 3은 별개의 수가 아니며 똑같은 승리의 의미를 7 혹은 3단계의 수로 표현한다. 그래서 7을 영 적으로 구분하면 3이 되고 3을 다시 펼치면 7의 의미와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2) 3과 7의 규례

하나님은 3과 7의 의미가 같은 것임을 증거하시고 규례를 정해 놓으셨다. 민19장에는 여러 정결 예식이 나오는데 거기 에 시체를 만진 자에 대한 정결 예식이 나타난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그는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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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 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다” (민19:11)

이 정결 에식에서 하나님은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하니 3일 과 7일에 잿물로 씻으라고 명하신다. 만일 3일과 7일에 씻지 않는 자는 부정하며 그런 자들은 성소를 더럽히는 자이므로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왜 시체를 만진 자가 3일과 7일에 정결해야 한다 고 하시는가.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3과 7의 의미가 서로 같고 두 날의 의미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3일에 정결한 자는 7일에도 정결해야 하며 두 날 모두 정결해야만 참된 정결을 얻을 수 있다.

이 3일과 7일에 대한 정결례는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고 시 체를 만진 자의 규례에만 나온다. 민19:16절 이하에는 시체 뿐만아니라 시체의 뼈나 무덤을 만진 자의 규례가 나오는데 거기에도 3일과 7일 두 날 모두 정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왜 유독 시체에 대한 규례에서 3일과 7일의 정결 례를 명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체에 접촉한 것은 죽음의 두려 움을 인식한 것과 같으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하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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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얻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러면 죽음을 인식한 인간이 하늘 생명의 구원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하나. 당연히 3의 구원을 받고 7의 승리를 이루어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완전한 보장을 받으려면 그 는 아브라함처럼 7의 승리를 가져야 한다. 또한 이삭처럼 대 적의 4의 과정, 번성의 2의 과정을 마치고 승리의 7의 과정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인 루아흐의 7 의 생명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7과 3의 영원한 생명을 주기 원하신 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두려움을 가진 자들에게 참 생명과 참 평안을 주고자 하신다. 그래서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된 자들에게 3과 7의 구원을 가르쳐 주시려고 두 날에 대한 정결 례를 기록하게 하셨다.

3) 3과 7의 절기

3과 7의 의미를 동일하게 여기는 하나의 예를 더 찾아 보자.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의 절기는 7절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는 처음에는 7절기를 말씀하시나 그것을 다시 3절기로 구분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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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23장에서 7절기를 각각 설명하시는가 하면 출23장에서는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출23:14) 하며 3 절기 만을 언급하신다. 신16장에서도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 “(신16:16)고 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7절기를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의 세 절 기로 말씀하시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이는 7절기의 뼈대가 3 절기이며 3절기를 지키는 것이 곧 7절기를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3대 절기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구원의 3단계를 보여 주는 절기다. 곧 무교절은 죄를 씻고 칭의를 받는 포도주의 단계 요, 칠칠절은 성령의 역사로 말씀의 떡을 먹는 인의의 단계 며, 초막절은 승리의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와 축복 의 단계에 해당한다. 이 3절기를 펼치면 7절기가 되고 7절기 를 구분하면 3절기가 되니 그러므로 3과 7의 절기는 본질적 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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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원의 1, 3, 7

하나님은 3과 7의 의미를 같게 여기심과 동시에 또한 1, 3, 7의 의미도 동일하게 취급하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잠9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 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 에서 불러 이르기를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잠 9:1~4)

이 말씀을 보면 지혜가 그 집을 집고 일곱 기둥을 다듬는다 고 하는데 이는 철저한 비유의 말씀이다. 여기서 지혜란 하나 님의 지혜인 예수를 뜻한다. 지혜가 집을 짓는 것은 그냥 일 반적인 집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을 일컫는다. 그런데 성전을 짓는데 아무렇게나 짓는 것이 아니라 일곱 기둥으로 짓는다 고 한다. 이는 7절기 곧 7우물의 말씀으로 성전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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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혜는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니 지혜의 수는 1이다. 성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3의 구원을 보여주니 성전의 수 는 3이 된다. 일곱 기둥은 말 그대로 7절기 혹은 7우물의 말 씀을 상징하니 7의 말씀으로 완전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 그러니 1, 3, 7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는 같은 수가 된다.

먼저 지혜 1은 구원의 성전 3을 마련하고 7의 말씀을 세운 다. 이어서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춘다. 지 혜가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춘다는 것은 어 렵지 않은 비유다. 그것은 지혜가 자신의 피와 살로 구원의 밥상을 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에 지혜는 자신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어 리석은 자들을 부른다. 성경에서 여종은 교회의 사역자를 뜻 하니 곧 지혜는 교회의 사역자를 준비하여 보낸다. 그러면 여 종들이 성중 높은 곳에서 어리석은 자들을 청한다. 여기서 종 들이 성중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은 3의 구원의 높은 단계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어리 석은 자들을 부를 수 있다.

여종은 그들에게 말하기를“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 라” (잠9:5~6) 하며 지혜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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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것을 완전한 7로 받으 려면 반드시 3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포도주의 수 4에 떡의 수 2를 더해 6을 만들고 승리의 1을 추가함으로 7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면 여종들이 전하는 지혜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며 완전한 7의 승리와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지혜 1은 3단계의 구원을 통해 7의 생명을 주려 하니 이 1, 3, 7은 모두 같은 구원을 전하는 같은 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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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구원의 7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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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조의 7과 3

하나님의 구원의 수는 7이면서 3이다. 그런데 구원의 수 뿐 만아니라 창조의 수 역시 7이면서 3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 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는 7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은 7일 에 이르러 모든 창조를 마치고 쉬셨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창 조의 수는 7과 같다.

그런데 창조의 수는 3으로도 볼 수 있다. 창조의 7일은 크게 보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그것은 4일 동안의 기본적인 창조와, 2일 동안의 생물의 창조, 그리고 1의 안식일로 구분 된다.

첫 단계인 1~4일의 창조는 한 마디로 말해 생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1 일에 빛과 어둠을 그리고 2일에 궁창 위와 아래의 물을 만드 셨다. 3일에는 풀과 나무들을, 4일에 하늘에 광명체들을 만드 셨다. 이 모든 창조들은 네페쉬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창조의 1단계는 무생물의 창조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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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둘째 단계인 5~6일의 창조는 이미 만들어진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생물을 만드는 단계다. 하나님은 5일에는 바다의 고기 와 공중의 새들을 만드시고, 6일에는 땅의 짐승들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창조의 2단계는 땅에 호흡하는 생물의 창 조 즉 네페쉬의 창조 단계다.

마지막 3단계인 7일은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마치고 안식하 신 날이다. 이날은 완성의 날이요 복되고 거룩한 날이다. 하 나님은 7의 날에 복을 주어 거룩하게 하고 안식하셨다.(창 2:3) 이 3단계는 거룩과 완전의 단계에 해당한다.

이렇게 창조의 7일을 4, 2, 1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삭의 7우물의 단계와 그 내용이 일치한다. 우리는 앞서 7우물이 바싸르의 4, 네페쉬의 2, 루아흐의 1로 구분되 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침탈당한 4우물은 생명체가 없는 무생물의 4일의 창 조와 일치한다. 고요하고 적막하여 생물체의 생기가 없는 4 일은 생명이 없는 죽음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번성의 2우물은 창조의 5~6일에 바다와 땅의 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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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창조한 것과 일치한다. 이삭의 2우물이 번성의 우물이었 던 것처럼 창조의 5~6일의 생명체들은 땅에 충만하며 번성 하는 존재들이다.

마지막 7번째 승리의 우물은 창조의 거룩한 날인 안식일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이삭의 7번째 우물이 완전한 구원의 수 인 것처럼 창조의 7일 역시 완전한 창조의 수다. 따라서 구원 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수 역시 7이면서 동시에 3이 됨을 알 수 있다.

2. 구원의 7천년

태초의 창조의 날이 7인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7에 의미를 두고 7을 강조하기 위해 제 7 일에 모든 창조를 마치고 안식에 들어가셨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창조와 구원의 수를 7로 정해 놓으셨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수 역시 7 즉 7천년으로 정 해 놓으셨다. 인류 역사의 7천년이 되면 모든 구원 역사가 종 말의 역사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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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모든 종말의 일들이 7의 인, 7의 나팔, 7의 재앙 등으 로 끝을 맺는다. 7의 수는 창조와 구원의 수이면서 동시에 모 든 것을 끝내는 종말의 수요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끝내는 완 결의 수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나 구원과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의 수도 3과 7로 정해 놓으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아담 이후 4천년이 되었을 때 오신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왜 하필 4천년이 되 었을 때 땅에 오셨을까?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죽음의 단계 즉 4일의 바싸르의 상태를 구속하고 끝내시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4천년이 종결되고 신약의 새 시 대가 열렸다. 즉 바싸르의 4천년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네페쉬의 시대가 열렸다. 이 네페쉬의 시대는 교회의 시대요 복음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복음시대는 2천년 으로 마칠 것이며 곧이어 종말의 7천년의 시대가 도래할 것 이다. 이 7천년의 시대는 창조의 7일과 같고 구원의 7우물과 같은 7의 시대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빛나고 영광 스러운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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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싸르의 4천년

인류 역사는 아담의 타락 때문에 바싸르의 시대로 전락하였 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죄와 사망의 노예 가 되었다. 인간은 순전한 네페쉬가 아닌 죄의 바싸르로 변질 되어 징벌과 어둠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언제까지 바싸르의 존재로 살도록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싸르에서 벗어나도록 이 땅에 예수를 보내셨다. 하지만 아무 때나 보내지 않고 바싸르 의 기간인 4천년을 꽉 채우신 후에 보내셨다.

4의 수는 바싸르의 수이며 죄인의 수이기도 하다. 인간은 4 천년 동안 죄인이 되어 죄와 사망의 종살이를 하였다. 사단의 속박에 매여 자신의 소유를 모두 빼앗기고 노예처럼 사니 마 치 4우물을 빼앗기고 떠돌아야 했던 이삭의 삶과 비슷하다.

이삭이 4우물까지 빼앗긴 것은 하나님의 허용하심이다. 이 는 4의 기한이 차기까지 인간이 노예처럼 빼앗기는 삶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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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4의 기간이 인간이 자신의 죄의 값 을 치루는 징계와 형벌의 기간으로 정해진 탓이다. 하나님은 이 4의 기한을 이루되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정확하게 채 우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를 통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심판하실 때“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창7:4) 하셨다. 하나님은 바싸르의 징계 기한을 상징하는 40일 동안 비를 내 려 땅의 생물들을 심판하셨다.

또한 신25장에 보면 악인이 태형을 당할 때 매맞는 수에 대 한 규례가 나온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재판장에게 악인의 죄 의 경중에 따라 매를 때리라 하시는데 거기에 조건이 붙어 있 다.“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신25:3) 하셨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벌을 내릴 때 40대 이상은 때리지 못하 게 하신다. 이는 죄에 대한 징벌에도 한계와 기한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징벌에 대한 한계와 기한을 40이라는 수 로 정해 놓으셨다. 여기서 40은 바싸르의 4, 혹은 인류 역사 4천년의 수와 같으며 그 징벌의 기한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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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힌 죄수가 기한이 차야 풀려나는 것같이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이 4의 기한을 채워야만 죄의 징벌에서 벗어나도 록 하셨다. 성경은 4와 40 그리고 4천이라는 수 외에 400이 라는 수 역시 같은 징벌의 수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창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너는 정녕 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 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라” (창15:13) 하셨다. 더불어“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 15:16) 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애굽 왕 바로 밑에서 400년을 종살이를 하고 4대를 신음하며 지냈 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단 원수의 노예 인 바싸르에서 벗어나려면 400년 즉 4의 기간이 필요함을 분 명하게 증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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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페쉬의 2천년

1) 예수의 2천년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징벌하는 4천년의 기한이 찰 때 예수 를 통해 바싸르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 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네페 쉬로 회복되게 하시고 말씀의 떡을 먹도록 하셨다. 하지만 인 간이 언제까지나 네페쉬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하나 님은 그 네페쉬의 기간을 2천년으로 한정하셨다.

네페쉬의 기간은 2일 즉 2천년이다. 이 기간은 예수의 초림 이후 다시 재림하기까지의 기간을 말하기도 한다. 성경은 예 수의 초림의 시기와 함께 재림의 기한에 대해서도 미리 정하 여 밝히고 있다.

먼저 유월절 양에 대한 규례를 보면 초림의 시기가 잘 나타 난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양을 잡을 때는 14일 유월절 당일에 양을 준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월절 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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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하라 명하셨다.“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 을 취할지니” (출12:3) 라고 하시며“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 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으라” (출12:6) 고 하셨다.

이 유월절 규례를 보면 양을 준비해서 기다리게 하는 기간 이 4일이다. 왜 4일을 기다리게 하여 양을 잡는가 하는 문제 는 자명하다. 그것은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 이미 4일 전 즉 4 천년 전부터 예비되신 분이며 4천년의 기한이 되었을 때 죽 임을 당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의 초림은 고난의 피를 흘리기 위함이다. 초림의 의미 는 인간이 바싸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죄 사함의 피를 흘리 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2천 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도 성경 이 미리 증거하는 말씀이 있다.

성경에서 초림 예수를 예표하는 인물이 이삭이라면 재림 예 수를 예표하는 인물은 요셉이다. 요셉이 어릴 때 형들의 미움 으로 구덩이에 던져지는 사건은 예수가 죽음에 넘기우는 것 을 상징하며 요셉이 은 20개에 애굽에 팔려가는 것(창37:28) 은 예수가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것을 예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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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은 20개에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은 드디어 20여년 이 지난 후에 다시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여 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이 은 20에 팔려간다는 사실이다. 그가 은 20개에 팔리는 것은 초림 예수의 몸값이 20이라는 의미와 같다. 왜 예수의 몸값을 20으로 치는가의 문제는 두 가지로 풀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팔아 넘길 때 예수의 네페쉬의 값이 20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바싸르 같은 죄인의 모습이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기에 그 육체는 바싸르가 아닌 정결한 네페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예수를 팔 때 그 분을 바싸르로 팔지 못하며 네페 쉬로 팔게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페쉬의 수에 해당하는 2 즉 은 20에 팔려 간다. 은 20은 예수의 육체가 네페쉬로 팔 려가 죽임을 당하는 피값이 된다.

둘째로 은 20개는 예수가 팔려가는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 은 20에 요셉을 판 형들은 그 값을 받고 요셉과 영원히 헤어 지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요셉은 20년 만에 애굽의 왕같은 존재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이는 재림 예수가 2천년 만에 다시 이스라엘에게 전해질 때 천하의 왕으로 임하는 것을 미리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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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 주의할 것은 구약에서 예수의 몸값이 은 20으 로 나오는 것과 달리 신약에서는 그 값이 은 30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길 때 그 몸값 으로 은 30을 받았다.(마26:15) 여기서 은 20과 30은 각각 의 미하는 바가 다르다.

먼저 은 20은 초림 예수를 파는 것이요 그의 네페쉬까지만 파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은 30에 파는 것은 3의 예수를 파 는 것이며 그의 네페쉬의 수 2는 물론이요 루아흐의 수 1까지 파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육체 뿐만아니라 그 안에 있 는 성령과 진리까지 팔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하기를“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 라” (눅12:10)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네페쉬를 파는 것 은 요셉의 형들처럼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예수의 루아흐 즉 그의 진리를 파는 것은 유다처럼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 실이다. 유다의 죄는 3의 예수를 팔고 3의 예수를 모독한 것 에 있다. 그는 3년 동안 초림 예수를 따라다니며 하늘의 떡을 먹었고 그 기간 동안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러나 그는 예수를 부인하며 그 안에 계신 성령과 진리까지 팔 아 넘기며 끝내 자살을 선택하였다. 그는 예수의 말씀대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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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 태어나지 않은게 좋을뻔 하였다.(막14:21)

반면에 2의 예수를 팔며 육체로 임하신 인자를 거역한 자 들은 그나마 회개할 기회를 얻는다. 인자를 거역해도 사하심 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의 네페쉬를 거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예수의 네페쉬를 거역하는 자들은 그래도 회개할 기 회가 남아 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나 혹은 떡 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안 후에 부인하는 자들은 다 시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들은 가룟 유다처럼 예수 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부인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2) 두 데나리온과 2천년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거기에도 예수께서 2천년 후에 재림하시는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어떤 선한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에 강도 당한 사람을 보고 그를 불 쌍히 여긴다. 그래서“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 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눅 10:34) 그를 돌보아 준다.

이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실상 예수님 자신을 일컫 고 있다. 예수께서 강도 만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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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포도주를 붓고 자신의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심을 보여 준다. 여기서 기름은 성령과 같고 성령은 곧 말씀을 뜻하는 것이니 예수께서 말씀의 기름을 발라주시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단에게 강도를 당하고 망신창이가 된 인간을 자신의 포도주와 성령의 떡으로 치료하시고 주막 주인에게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눅10:35)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 겠노라고 약속한다.

여기 등장하는 주막은 두말할 것 없이 교회를 말하며 주막 주인은 교회의 사역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두 데나 리온에 맡기고 간 것은 자신이 2일 후에 돌아올 것을 미리 예 표하기 위함이다.

혹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말씀를 이처럼 비유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며 그것은 다만 강도 만난 현실의 이웃에 대한 말 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이 부어 주는 포도주와 기름을 그저 육신을 위한 것만으로 해석하면 그로 인해 예수의 피와 살의 의미가 부인된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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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왕의 7천년

예수의 재림의 시기는 이미 정해져 있다. 예수는 인류 역사 6천년이 지나면 이 땅에 왕으로 임하신다. 주님께서 땅의 왕 으로 임하심을 예표하는 말씀 중에 마17장의 변화산 사건이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 에 오르신 후“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 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는 말씀대로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다.

예수께서 이 모습을 보이신 것은 자신이 하늘의 왕임을 증 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제사장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 를 대표하는 엘리야를 부르시고 자신은 왕의 모습으로 변형 하셨다.

예수께서는 변화산에서 왕의 모습을 보이기 직전에 마16장 에서 이렇게 예고하셨다.“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 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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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 이렇게 예수는 마16장에서 왕이신 주님에 대해 미리 밝힌 후 곧이어 17장에서 변화산 사건을 통해 왕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산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주님께서 언제 왕으로 변형되셨는가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17:1절이 잘 밝혀주고 있다. 마태는“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 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마17:1) 변화산에 올라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말씀하신 후 6일이 지난 다음 변화산 사건을 보여주셨다. 마태가 이렇게 변화산의 이적을 6일 후의 사건 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실 때를 미리 예표하기 위함이다. 즉 예수께서 6일의 날이 지나고, 6천년의 기간이 지나면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께서 인류 역사 6천년이 끝나고 7천년이 시작하는 7의 때에 오실 것을 미리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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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랑의 7천년

예수께서 7천년이 시작하는 때에 오신다는 말씀을 하나 더 찾아보자.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 행하신 이적이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그런데 가나에서 만든 포도주는 예수의 대속의 피를 의미하 는 포도주가 아니다. 예수의 대속의 포도주는 죽음의 피를 의 미하는데 어찌 혼인잔치에서 그런 의미의 포도주를 마시겠는 가. 혼인잔치의 포도주는 신랑의 포도주요 기쁨의 포도주로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는 초림이 아닌 재림의 포도 주요 신랑으로 오신 주님이 주는 기쁨의 포도주와 같다. 주님 께서는 이 혼인잔치의 포도주를 통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참 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주님은 자신의 참 목적이 이 땅에 신랑으로 임하는 것임을 처음부터 증거하 기 위해 그 기적을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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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혼인잔치의 기적을 잘 살펴 보면 주님께서 신랑 으로 오시는 때를 미리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예수 께서는“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요2:1) 그 곳에 청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요한은 언제로부터 사 흘을 계산하는 것일까. 그것은 요1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요한은 요1장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일을 기록한 후 요1:29절에서‘그 이튿날’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만나신 일을 말한다. 다시 요1:35절에서‘또 이튿날’두 제자가 예수 를 좇은 일을 말한다. 이어서 요1:43절에서“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라고 하며 연속해서 세 번의‘이튿날’ 에 대한 기록을 보여 준다.

그러니까 요한은 세례 요한의 일로부터 계속 날짜를 셈하여 4일까지 계산하고 그 4일째 되는 날 빌립을 만났음을 보여 준 다. 그런 다음 요2장에서 혼인잔치의 기적을 설명할 때 그것 이 빌립을 만난 후 사흘째 되던 날의 잔치임을 밝힌다.

이제 우리는 요한이 사흘 되던 날이라고 기록한 의도가 무 엇인지 알 수 있다. 그는 결국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한 날로 부터 7일째 되는 날에 혼인 잔치의 기적이 있음을 밝히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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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왜 이렇게 굳이 7일이라는 날짜를 세면서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증거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께 서 7일이 되는 날 곧 7천년이 되는 그 때에 이 땅에 신랑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더욱이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 때 사용한 돌 항아리 가 여섯인데 이 또한 6의 기한이 차면 하늘의 기적이 있을 것 을 예표하는 항아리다. 6개의 돌 항아리는 6천년의 기한이 아 구까지 모두 채워질 때 기쁨의 포도주가 예비되고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시어 하늘의 혼인잔치가 시작됨을 알려 준다.

7. 성막의 7천년

예수께서 7천년의 때에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우리가 성막을 주의해서 보면 성막에도 7 천년에 관한 비밀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말한대 로 성막의 구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뜰과 성소 와 지성소의 세 부분이 그것이다.

먼저 뜰을 보면 그 안에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으며 뜰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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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피의 은혜를 상징하는 곳이다. 성도는 이 뜰에서 번제단 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물두멍의 세례를 통해 하나님 앞에 칭의를 받을 수 있다.

성도가 예수의 은혜를 힘입어 뜰의 과정을 지나면 다음 과 정인 성소 안으로 들어 간다. 성소는 말씀의 떡을 먹는 곳이 며 성령의 훈련과 연단을 받는 곳이다. 이곳 성소에서 말씀과 성령의 충분한 분량을 채우면 다음 장소인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

지성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그의 거룩함과 영광이 있 는 장소다. 말하자면 지성소는 하나님의 구원와 안식이 있는 거룩하고 완전한 곳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막의 구조를 살피는 것은 이 성막의 부분 마다 각각의 기한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먼저 뜰의 영역을 보면 그 과정을 마치는 기간은 4일 곧 4천년에 해당한다. 예 수께서는 4천년 만에 땅에 오시어 뜰의 사역을 모두 성취하 셨다. 따라서 이 뜰의 과정이 4천년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대 해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하겠다.

그러면 성소의 과정과 기한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내용는 성소의 크기 안에 감추어 있다. 성경을 보면 성소의 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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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20, 세로 10, 높이 10규빗으로 되어 있다. 이 수치를 곱 하여 부피를 구하면 2천이라는 수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2천이라는 수치는 성소의 2천년의 기간을 예표하며 예수의 두 데나리온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지성소의 기한 역시 그 크기 안에 감추어 있다. 지성소의 크 기는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10규빗이다. 마찬가지로 이 수 치를 곱하여 부피를 구하면 1천의 수가 얻어진다. 이 1천의 수 는 지성소의 천년의 기간을 예표하며 장차 예수께서 재림으 로 다스리실 천년 왕국의 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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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7일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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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과 아침의 원리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내용을 보면 항상 반복되는 말씀이 있다.“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는 말씀이 창조의 1일부터 6일까지 동일하게 6번 반복되어 있다.

그런데‘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관점은 아침 해가 뜨고 다시 해 가 지는 것을 하루로 표현하는데 비해 성경은 그와 반대다. 성 경은 저녁을 기준으로 하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때 하루가 지난 것으로 계산한다.

성경이 일반적인 방식과 약간 다르게 하루를 셈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창조 는 저녁과 아침의 순서가 반복되면서 순차적으로 완성을 향 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하루씩 더해질 때마다 창조는 더욱 고 차원적으로 되다가 결국 7일이 될 때 거룩하게 완성이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중대한 원리를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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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할 수 있다. 그것은 창조의 과정이 낮은 창조에서 높은 창 조, 초보의 단계에서 완성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하 나님의 창조는 저녁에는 낮은 상태에 있다가 아침에는 더 높 은 단계로 완성이 되며 하루 하루가 더할 때마다 점진적으로 완성에 다가간다.

이처럼 창조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 즉 저녁에서 아침 으로 진행하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원리다. 이 원리는 창조 뿐만아니라 구원의 과정에서도 동일하며 하나님의 모든 섭리 에 적용되는 법칙이며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진리다.

2. 저녁과 아침의 구원

저녁이 먼저 오고 후에 아침이 오는‘아침의 원리’ 는 구원 의 섭리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실 때 처음부터 덜컥 이삭을 주시지 않는다. 처음에는 저녁에 해당하는 낮은 아들 인 이스마엘을 먼저 주시고 그 다음 아침에 해당하는 참 아들 이삭을 허락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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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나, 태어나는 것 은 형 에서가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 동생 야곱이 나온다. 이 역시 저녁과 아침의 원리가 적용된 경우다. 하나님은 구원의 섭리에 있어서 저녁의 아들인 에서를 먼저 나게 하시고 다음 에 아침의 아들인 야곱을 나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실 때도 이와 같다. 하 나님은 먼저 훌륭하고 좋은 왕인 다윗을 세우지 않으신다. 우 선 믿음이 부족한 어리석은 왕 사울을 세우신 후에 그를 폐하 고 참된 왕 다윗을 다시 세우신다. 말하자면 저녁의 왕을 먼 저 세운 다음에 아침의 왕을 세우신다.

마찬가지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도 아침의 원리가 나타 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복음을 주실 때 처음부터 믿음의 복음을 주시지 않는다. 처음에는 저녁의 복음에 해당하는 율 법을 먼저 주신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출애굽의 이스라엘 이 우리보다 먼저 율법의 복음을 받았으나 순종치 아니했다 고 증거한다.(히4:6)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후 약 1,500년의 기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예수를 통해 아침의 복음을 주셨다. 하나님은 복음의 과정에도 위와 같은‘아침의 법칙’ 을 예외없이 적용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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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뿐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주의해서 보면 이‘아침의 원리’ 가 적용된 말씀이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것은 이 원리가 얼마나 중대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3. 저녁과 아침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에도 저녁과 아침의 은혜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이른 비의 은혜와 늦은 비의 은혜가 있는데 처음에 내 리는 이른 비는 저녁의 은혜요 나중에 내리는 늦은 비가 아침 의 은혜에 해당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의 절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절기는 크게 봄 절기와 가을 절기가 있는데 봄 절기를 위한 비가 이른 비이며 가을 절기를 위한 비가 늦은 비다. 봄 절기 에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이 있고 가을 절기에는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이 있다.

그런데 이른 비에 해당하는 봄 절기는 이미 성취된 것인데 비해 늦은 비에 해당하는 가을 절기는 아직도 성취되지 못한 절기다. 늦은 비와 가을 절기는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은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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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교회는 늦은 비의 은혜를 받아야 하며 종말적으로 임할 가을 절기의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 이는 땅의 교회가 아직도 은혜의 완전한 단계, 거룩한 아침의 은혜의 단계에 들 어가지 못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종말의 늦은 비의 은혜 그러니까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침의 은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신랑으로 오실 때 임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가나 포도주의 기적은 바로 이 아침의 은혜를 미리 보 여 주신 기적이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하늘의 포도주를 받아 마신다. 그것은 십자가의 피의 은혜요, 이른 비의 은혜와 같다. 그것 은 또한 봄의 4절기를 성취하는 은혜와도 같다.

반면에 예수께서 보여주신 가나 혼인의 포도주는 맑고 깨끗 한 신랑의 포도주다.(사25:6) 그것은 가을 절기의 늦은 은혜 를 증거하는 포도주와 같다. 그 포도주는 종말적으로 임할 늦 은 은혜 곧 아침의 은혜를 예표하는 포도주에 해당한다.

그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주는 포도주를 마신 사 람들이“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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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요 2:10)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셔서 주 는 포도주는 더 좋고 훌륭한 포도주다. 신랑의 포도주는 마지 막 끝날에 허락되는 아침의 포도주이기에 그렇다.

4. 저녁과 아침의 창조

하나님의 창조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태초 의 7일의 첫 창조요 다른 하나는 구원의 새 창조다. 그런데 구 원의 새 창조는 태초의 창조보다 더 높고 완전한 창조에 해당 한다. 태초의 창조는 네페쉬의 아담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니 육의 창조요 저녁의 창조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새 창조는 인 간을 예수처럼 만드는 것이니 신령한 루아흐의 창조이며 아 침의 창조가 된다.

바울은 아담에 대해 말하기를“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 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 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5~46) 하였다. 또한“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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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셨느니라” (고전15:47)고 말하였다.

바울의 말인즉 아담은 흙에 속한 네페쉬의 사람이나 예수는 하늘에서 나신 루아흐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15:49)는 말씀처럼 우리가 장차 예수 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 한다.

이같은 바울의 설명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역시 크 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아담과 같은 저녁의 인 간을 창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와 같은 아침의 인간 을 창조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태초의 아담의 창 조는 낮은 단계의 저녁의 창조요, 예수의 새 창조가 높은 단 계인 아침의 창조임이 분명하다.

5. 저녁과 아침의 안식

성경의 창조가 둘인 것처럼 그 안식 역시 두 개로 되어 있 다. 태초에 하나님은 제 6일에 아담을 창조하신 후 안식에 들 어가셨다. 그런데 아담은 육에 속한 창조요 흙에 속한 창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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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그로 인한 안식 역시 육의 안식이 되고 낮은 안식이 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예수를 통한 구원의 창조는 더 높은 창조요 영의 창 조이니 그로 인한 안식도 더 높은 안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은 둘로 구분된다. 태초의 낮은 안식 곧 저녁의 안식이 있는가 하면 구원의 높은 안식인 아침의 안식이 따로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대로 구원의 안식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안식이 다. 하나님의 절기가 4절기만 성취되고 3절기가 남아 있듯이 구원의 안식 역시 아직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는 종말의 안식 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종말적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땅의 교회에 남은 3절기의 늦은 은혜를 주시며 구원의 새 창조를 완전히 마치셔야 한다. 그와 함께 땅의 성도들을 예수와 같은 신령한 루아흐로 완성하셔야 한다. 그럴 때 드디어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안식, 더 높고 완전한 아침의 안식에 들어가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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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 7일의 아침

우리는 지금까지 저녁과 아침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창 조의 저녁과 아침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궁극적으로 성 경의 아침은 영적인 아침을 말하는 것임을 보았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영의 아침을 위한 것이고 그 아침의 일을 완성할 때 영의 안식이 성취될 수 있음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 이제부터‘7일의 아침’ 의 부분에 대해 알아 보자. 우 리가 창조의 6일까지의 과정을 볼 때 모든 날들에는 저녁과 아침이 반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창조의 7일에는 그런 말씀 이 나타나지 않는다. 제 7일에는 저녁이 되었다는지 아침이 되었다는지 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창조의 7일 안에 저녁이나 아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 해서 진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 7일에는 다른 날 과 달리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감추어 있을 뿐이다. 그래 서 영적인 분별과 지각을 통해서 보면 제 7일에도 저녁과 아 침이 있으며 더욱이 신령한 아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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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천년의 날

성경에서 7일의 아침에 대해 말씀하는 부분 중에 스가랴서 가 있다. 스가랴는 여호와의 빛의 날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슥14:1절에서“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고 예고한다. 그리고 14:7절에서“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고 말한다.

스가랴가 증거하는 여호와의 날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이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물리적인 낮과 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간을 뜻한다. 그는 어두워 갈 때에 빛 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가 말하는 빛은 생명의 빛이요 구원의 빛을 말함이니 곧 빛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과 같 다. 아니나 다를까. 스가랴는 14:9절에서“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라고 선언한다. 그는 빛이 임하는 그 날이 바로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는 날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는 그 날은 언제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종말의 마지막 날이며 인류 역사 7천년이 되 는 그 때를 말한다. 앞서 살펴 본대로 인류 역사의 시간은 총 7천년으로 되어 있다. 그 중 마지막 천년의 때가 바로 스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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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말하는 여호와의 날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 7천년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즉 1~6천년 까지를 빛이 임하기 전의 시간으로, 남은 천년의 시대를 여호와의 빛이 임하는 시간으로 볼 수 있 다. 즉 6천년까지는 저녁의 시간이며 7천년이 아침의 시간이 된다. 그리고 그 7천년의 시대에 여호와께서 저녁의 시대를 끝내고 아침의 시대를 여는 빛의 왕으로 임하실 것이다.

2) 제 3일의 날

스가랴가 7천년의 때를 여호와의 날로 말한다면 호세아는 제 3일을 여호와의 날로 증거한다. 호세아는 6:2절에서“여호 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 시리니” 라고 말한다. 여기서 호세아가 말하는 제 삼 일은 인 류 역사에서 바싸르의 4천년과 네페쉬의 2천년이 지나 3단계 에 이른 날 곧 여호와의 날을 일컫는다.

그래서 호세아는 6:3절에서“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 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고 증거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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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호와의 나오심이 새벽 빛같이 일정하다고 말한다. 여 기서‘일정하다’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쿤’ 은‘확정하다’ 라 는 뜻이 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나오심은 새벽 빛처럼 확정되 어 있다고 번역할 수 있는데 사실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나오심은 빛으로 임하시 며 그 빛은 새벽 빛이 나올 때처럼 그 시간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 탓이다.

따라서 앞서 스가랴가 말하는 빛과 여기 호세아가 말하는 새벽 빛은 둘 다 동일한 빛이며 여호와의 빛을 뜻한다. 그 빛 은 어둠의 시간 6천년이 찬 후 빛의 시간인 7천년이 이르면 새벽 빛으로 나타날 것이 확정되어 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 새벽 빛의 임함이 마치 땅을 적시는 늦 은 비와 같다고 말한다. 호세아는 여호와의 모습이 새벽 빛과 같으며 또한 늦은 비의 은혜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렇게 새벽 빛과 늦은 비로 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 은 주님께서 이 땅에 7일의 저녁의 시대를 끝내고 아침의 시 대를 열려 하심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태초의 제 7일에 숨겨진 저녁과 아침이 무엇 인가가 확연해졌다. 태초의 7일은 아담부터 종말까지 이어지 는 인류 역사의 시간이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7천년의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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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정해 놓으셨다. 그 중에 6천년을 저녁의 시간으로, 남은 1천년을 빛의 아침으로 구분해 놓으셨다. 그리고 남은 1천년 의 시간에 주님이 새벽 빛으로 임하실 것을 미리 정해 놓으셨 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7일의 아침 빛으로 땅에 임하시 며 종말의 늦은 비로 역사하실 것을 처음부터 확정하고 계신 것이다.

7. 구원의 아침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아침의 원리’ 는 성경의 모든 진 리를 포괄하는 대원리와 같다. 여기에는 구원의 진리도 예외 가 되지 않는다. 구원 역시 이 대원리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 에 저녁의 구원이 먼저 오고 아침의 구원이 나중에 임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역사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예 는 출애굽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희생 제물 로 삼아 애굽에서 탈출하였다. 이 출애굽은 이스라엘에게 대 단히 놀라운 사건이다. 하지만 구원의 전체 관점에서 보면 아 무리 대단한 출애굽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저녁의 구원과 같 은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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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해는 저녁의 구원이다

출애굽 백성들은 사실상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홍해 의 세례를 통해 칭의를 받은 자들이다. 바울은 말하기를“우 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 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 셨으니” (고전10:1~4) 라고 하였다. 바울에 증거에 의히면 출 애굽 백성들은 모두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홍해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있을 때 음란함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계 속해서 광야를 걸으면서도 완악함과 불순종으로 범죄하여 40 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 다. 그들은 죄 사함과 칭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난 것인가.

그 이유는 저들이 온전한 구원, 아침의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저희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 에 머무르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영적인 면에서 저 희는 어린아이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에 불과하다. 그래 서 죄 사함은 받았어도 계속해서 범죄하고 불순종함으로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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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였다. 이를 본 히브리 서 기자는 저들에 대해 말하기를“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히3:17) 하였고“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 지 못하리라” (히4:5) 하며 저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음을 증거하였다.

2) 요단 강이 아침의 구원이다

홍해와 요단 강의 두 물은 성경의 두 구원을 보여주는 표지 판과 같다. 출애굽의 홍해가 세례와 칭의를 상징한다면 요단 강은 성화와 인의를 상징하고 있다. 곧 홍해가 저녁의 구원이 라면 요단 강은 아침 빛의 구원을 보여주는 강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는 어두운 밤에 혼란과 두려움으로 건넌다. 이스라엘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당하는 가운데 홍해 앞에 이르렀다. 이에 저들이 모세에게 말하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 야에서 죽게 하느뇨” (출14:11) 하고 원망하였다. 그 때 홍해가 갈라지게 되었고“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 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출 14:20)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애굽 군대를 막아 주셨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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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저희는 밤새도록 정신없이 어둠을 헤치면서 홍해를 건 너게 되었다. 말하자면 저들은 저녁과 밤의 시간에 구원을 받 은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널 때는 밝은 낮에 질서정 연하게 건넜다. 이스라엘이 요단 앞에 이를 때“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수3:1)는 말씀처럼 요 단 앞에서 유숙하며 대기하였다. 그리고“삼 일 후에 유사들 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수3:2), 백성들에게 알리기를 언약 궤가 나아갈 때“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 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수3:4)고 가르친다.

이 말씀을 보면 요단 앞에 이른 이스라엘이 삼 일을 기다리 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아브라함이 모리아에 이르기까지 3 일 길을 걸은 것처럼 요단을 건너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는 구 원의 길이 3일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스라엘과 언약궤 사이의 거리를 이천 규빗이 되게 하라는 것은 홍해의 세례를 받은 자가 영적 요단을 건너 법궤 앞에 이르는 길이 2천년이며 동시에 2의 네페쉬의 수의 길이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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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온 백성이 요단을 건너니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요단 가운데 있는 돌 열둘을 취하고“오늘 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 (수4:3)고 하신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여호수 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 준비하고 이스라엘이 낮 동안 건넌 후에 밤에 이르러 유숙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낮과 밤을 따 지기 전에 저희가 요단 앞에서 3일을 기다리고 2천 규빗 떨어 져 언약궤를 따라 요단을 건넌 것 자체가 이미 영적인 새벽 빛을 따라 아침의 구원에 들어가는 과정임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알 것은 홍해는 낮은 구원이요 요단은 높은 구원이라는 사실이다. 홍해가 바싸르를 구하는 어둠의 구원 이라면 요단은 네페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빛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역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성경의 대원리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3) 구원 중의 구원

성경에는 요단 강과 같이 아침의 구원을 보여주는 사례가 여러가지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성막의 둘째 휘장이 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막에는 첫째 휘장과 둘째 휘장이 있는데 여기서 첫째 휘장은 홍해와 같고, 둘째 휘장은 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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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같은 의미의 휘장이다. 말하자면 출애굽의 세 땅이 성막 의 세 장소와 영적 의미가 같듯이 출애굽의 두 물은 성막의 두 휘장과 그 영적 의미가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절기 중에도 요단 강과 동일한 의미의 절기가 있다. 그것은 대속죄일이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이 1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속하는 날로 7월 10일에 지켜진다. 이 날에 대해 성 경은 큰 안식일이라고 말하는데 개정역 성경은 이를“안식일 중의 안식일”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레16:31)

이는 훌륭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속죄일은 둘 째 휘장을 열고 법궤 앞에 서는 날로 아침의 안식에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대속죄일에 둘째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는 것이 니 곧 안식 중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 이 아침의 구원과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 가나안에 들어 가는 것과 같으니 이를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는 것은 그것이 진짜 안식일이요 하 늘의 신령한 안식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구원 중의 구원이라는 것이며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것과 마 찬가지다. 이 구원은 홍해의 구원보다 높은 요단의 구원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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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휘장의 구원보다 높은 둘째 휘장의 구원이다. 이 구원이 야말로 참된 구원이며 거룩하고 영원한 아침의 구원이라 부 를 수 있다.

4) 7일 중의 7일

성경에는 언제나 말씀의 짝이 있기 때문에 안식일 중의 안 식일을 보여주는 짝도 찾을 수 있다. 그 예는 여리고 성을 무 너뜨리는 전쟁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에 첫 번째 전쟁을 치루는 것이 여리고 전투다. 그런데 여리고에 서 이스라엘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칼을 들고 싸우는 대신에 무조건 7 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여리고 성을 돌라고 하신다. 그리고 “제 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 며” (수6:4) 라고 명하신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6일을 돈 후에 제 7일에는 한꺼번에 성을 7번 도니 갑자기 거대한 여리고 성 벽이 무너졌다.

이 여리고 전투는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하는 원리를 보여 준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어떻게 승리하 는가 하는 원리도 보여 준다. 영적 승리의 원리는 제 7일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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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돌라는 말씀 안에 들어 있다. 이스라엘이 제 7일에 여리고 성을 7번 돈 것은 7의 은혜를 두 번 받는 것을 뜻하며 7속에 있는 7을 성취한 것을 뜻한다.

이는 7의 의미가 겉으로 드러난 7이 있고 속에 있는 깊은 7 이 있음을 보여 준다. 곧 먼저 오는 저녁의 7이 있고 나중에 오는 아침의 7이 있음을 증거한다. 이는 믿는 자가 7 속에 있 는 7의 은혜를 받으며 안식 중에 있는 안식을 얻을 때 영적 승 리를 거둘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믿는 자가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적 전쟁에서 늘 패배하기 일쑤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7의 은혜만 받고 그 안에 감추어진 영적인 7의 은혜, 아침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믿는 자 가 구원 중의 구원, 7 속의 7의 은혜를 받는다면 그는 언제나 이기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8. 복음 중의 복음

오늘날 믿는 자들은 모두 복음을 받은 자들이다. 하지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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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인 저녁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며 깊이 감추인 아침의 복음을 받는 자는 심히 찾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성 도들이 있으나 겉으로 드러난 7의 복음을 받은 자는 넘치되 그 안에 숨겨진 7의 복음을 받은 자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 제 하나님의 정해진 때, 7천년의 때가 되었으므로 우리 앞에 7 속에 감추인 7의 복음이 크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은 7천년의 때에 허락하실 복음 중의 복음에 대해 이 렇게 예고하셨다.“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 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계14:6)

하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영원한 복음 곧 이전보다 더 높 고 완전한 복음을 이 땅에 허락하신다. 복음 속에 있는 복음, 7속에 있는 7과 같은 복음을 선포하신다. 이 복음이 바로 아 침의 복음이며 빛의 복음이다. 언제나 영원한 아침의 빛 가운 데 서서 언제나 영원히 승리하는 복음이기에 영원한 복음이 라 이름하신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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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장

성도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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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의 교회

우리는 이제 인류 역사의 저녁이 6천년에 끝나고 7천년에 이르러 아침이 시작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땅의 역 사가 7천년이 될 때 7일의 아침이 시작되는 원리는 교회의 역 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류가 7천년 만에 아침을 맞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로 6의 시대를 모두 마치면 7의 시대에 아침을 맞는다. 그 아침의 시 대가 이르기 전까지 교회는 저녁의 교회로 서서 저녁의 시간 을 보낼 수 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현재 교 회가 아직 저녁의 복음과 구원을 가르치는 저녁의 교회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땅의 교회들은 모두 저녁의 교회들이다. 바싸르에서 네페쉬로 회복하는 복음은 갖고 있으나 네페쉬에서 루아흐가 되는 아침의 복음, 승리의 복음이 없기에 대부분의 교회와 성 도들이 아직 저녁의 상태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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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녁의 성도

과거 홍해를 건넌 출애굽 백성들이 저녁의 구원을 받은 것 처럼 오늘날 땅의 교회들도 저들처럼 겨우 칭의의 낮은 구원 을 받은 상태에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성도 역시 광야 의 이스라엘처럼 참 구원을 알지 못한체 온갖 육체의 일들을 행하며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 그 중에 극소수의 성도들 만이 온전한 믿음으로 깨어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참 믿음을 가진 자를 찾기는 심히 어려운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 둘이요 복음이 둘인 것처럼 성도들 역시 두 부류의 성도로 나뉘어진다. 한 쪽은 칭의 수준의 낮 은 믿음에 머무르는 저녁의 성도요 다른 한 쪽은 날마다 성화 의 승리를 거두는 아침의 성도로 나뉜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하기를“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 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1) 하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의 성도들은 대부분 그리스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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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속한 자요 어린아이와 같다. 그들은 많은 은사와 구변 에 풍족하였으나 또한 시기와 분쟁으로 서로 다투었다. 그래 서 바울은“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 이 아니리요” (고전3:3) 하며 책망하였다.

바울에 의하면 교회에는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영에 속한 온 전한 성도가 있다. 바울은 이들을 신령한 자들이라 부르며 성 령의 가르침을 따라 신령한 것들을 분별하는 자들이라 한 다.(고전2:13) 바울은 이들을 더욱 높이며“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 라” (고전2:15) 하고 말한다.

이런 신령한 자들이야말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완전한 자들 이며(히6:2)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들이다.(히5:14) 이 들이 바로 성경이 증거하는 빛의 성도요 아침의 성도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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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브라함의 아침

성경에서 모든 성도의 본이 되는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아 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요 믿는 자들 은 예외없이 그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구원에 이른다.

이런 아브라함에게도 저녁과 어둠의 시간이 있었다. 그는 75세에 부르심을 받아 99세에 이르기까지 25년동안 육신을 좇는 어린아이의 믿음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99세된 그에 게 하나님이 나타나사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을 때 그는“엎드 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 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17:17) 하고 비웃 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고 할례를 행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그 어리석은 믿음으로 말씀을 비웃 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고 이름까지 바꾸어 주신 것에 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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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의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미 알고 계셨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이제는 그만 그 어리석은 믿음을 버리고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로 거 듭나라는 의미에서 새 이름을 허락하셨다.

또한 새 이름을 주신 것은 그가 이제 할례받는 자가 될 것이 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는 그와 그의 온 집 안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할례 와 다른 사람들의 할례에는 차이점이 있다. 다른 자들은 그저 주인이 시키는대로 표면적인 할례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할례는 그냥 할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비웃음의 믿음, 육의 믿음을 잘라내는 내면의 할례를 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할례 사건이후 1 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의 어리석은 육의 믿음을 버리고 드디 어 온전하고 견고한 믿음을 가진 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가 백 세가 되었을 때 그는 새 이름에 걸맞게 온전 히 거듭난 자가 되었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 견고하고 신령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 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믿음 중 에 믿음을 가진 성도, 아침의 성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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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야곱의 아침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 야곱의 이름도 바꾸어 주셨다. 하 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는 것은 그가 거듭나게 되었 음을 뜻한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 는 중에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며 거듭나는 자가 되었다. 도대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무슨 일을 겪으며 어떤 거듭남 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신 것일까.

야곱의 거듭남의 비밀은 그의 환도뼈에 있다. 그는 천사와 씨름하는 중에 밤새도록 천사를 놓지 않고 끈질기게 붙들었 다. 그러자 천사는“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 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 골되었더라” (창32:25)는 기록처럼 그 환도뼈가 상하였다.

이 말씀에서 환도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야레크 카프’ 에 해당한다. 야레크는‘허벅지’ 를 의미하며 카프는‘오목한 곳’ 을 뜻하니 허벅지 안쪽 오목한 곳을 다쳤다는 말이다. 이 환도뼈가 정확하게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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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러 용례를 볼 때 허벅지 안 쪽의 사타구니 근처를 친 것 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늙은 종을 보낼 때 그에게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어 맹세를 시켰다.(창 24:2) 야곱도 말년에 요셉을 불러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어 맹세하게 하였다.(창47:29) 물론 이 두 구절에는‘야레 크’ 만 기록되어 있으나 야곱이 맞은‘야레크 카프’ 와 그 의미 가 다르지 않다.

창46:26절에“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 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야곱의 몸에 서 나온 자가 66명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야곱의 몸’ 이라는 원어를 보면 야곱의‘야레크’ 로 기록되어 있다.

출1:5절에도 야곱의 가족 수를 말할 때“야곱의 허리에서 나 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라고 말한다. 여기‘야곱의 허리’ 에 대한 원어 역시 야곱의 '야레크 ‘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야레크라는 말이 단순히 환도뼈나 허벅지를 말 하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것은 자손을 번성하는 부분 즉 남자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에 해당한다. 따라 서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것은 단순히 뼈를 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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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그의 생식기를 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천사 와 씨름하는 가운데 천사를 통해 할례를 받으며 그로 인해 이 름이 바뀐 것을 유추하게 해 준다.

환도뼈를 맞은 후부터 야곱은 다리를 절었고 그 모습으로 여생을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왜 그의 환도뼈를 쳐서 다리를 절게 하셨을까. 그것은 야곱이 더 이상 육신의 방식으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할례의 표징이다.

야곱은 자기 생각과 잔 꾀가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 어 디서나 자신의 꾀를 내어 살면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 고 삼촌 라반까지 속이며 지금껏 살아 왔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야곱 자신 의 육신의 꾀가 아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살 기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얍복강 가에서 그의 육욕의 본성에 해당하 는 그의 환도뼈를 치셨다. 그가 다시는 자신의 육신의 잔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하시려고 천사 를 통해 그의 생식기를 치시며 내면의 할례를 행하셨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야곱은 환도뼈를 맞은 후 거듭난 자가 되고 이름이 바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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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어 새 아침을 맞았다.“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 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창32:31)는 말씀 과 같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로 그는 브니엘을 지난다. 브니엘의 뜻은‘하나님과 대면하다’ ,‘하나 님의 얼굴을 보다’ 라는 뜻이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고 환 도뼈를 맞을 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성경에서 하나 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참된 빛을 보며 지성소의 하나님을 만난 것을 뜻한다.

둘째로 그는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는 것을 보았다. 여기 서 말하는 해는 단순히 하늘에 뜨는 태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 다. 그것은 의의 빛과 같은 하나님의 얼굴 빛을 말하며 거듭 난 자만이 볼 수 있는 영의 아침 빛을 말한다. 그가 마음의 할 례를 받기 전 천사와 씨름을 할 때 그는 영적으로 아직 저녁 의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고 이름이 바뀐 후부터 그는 하늘의 아침을 보는 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새 이름을 받아 거듭난 후에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는 성도, 아 침의 성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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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침의 할례

이제 본 바와 같이 할례에도 두 종류가 있다. 사람의 손으로 받는 몸의 할례가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할례가 있다. 몸의 할례는 저녁의 할례요 마음의 할례는 아침의 할례와 같 다. 그래서 몸의 할례만 받은 자는 아직 저녁과 어둠 가운데 있으나 마음의 할례를 받는 자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얼굴과 그 아침 빛을 보는 자가 된다.

몸의 할례는 지금으로 치면 세례를 말하고 칭의를 말한다. 이 세례와 칭의는 교회에 출석하여 믿음을 고백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고 또한 육의 목사들도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육 의 할례와 같다. 하지만 마음의 할례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세례와 다르고 칭의와 다르며 목사들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 다. 그것은 야곱처럼 하늘의 천사가 주는 할례니 오직 장성하 고 신령한 아침의 성도만이 받는 아침의 할례다. 이 아침의 할례를 달리 말하면 할례 중의 할례라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은 할례 중의 할례를 받지 않고 몸에만 할례받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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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싫어하신다. 하나님이 보실 때 몸의 할례만 받은 자는 표 면적인 할례만 받은 자이기에 그를 인정치 않으신다. 인정치 않으실 뿐만아니라 그들을 벌하신다. 하나님은“보라 날이 이 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 니” (렘9:25)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날이 이를 때 할례 받 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동일하게 벌하겠다고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 받은 자는 몸에만 할례 받은 자를 일컫 는다. 하나님은“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 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렘9:26)고 증거하셨 다. 이 증거와 같이 하나님은 몸에만 할례받은 이스라엘을 이 방 민족들과 동일하게 여기시며 동일하게 심판하신다. 몸에 만 할례받은 자는 아직 저녁에 속한 자요 어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참 성도로 인정치 않으신다. 하나님 은 다만 마음의 할례를 받은 아침의 성도 만을 참 성도로 인 정하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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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침의 복음

오늘날 세례받고 죄 사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해 야 한다. 그런 자들은 속히 영의 세례를 받고 성화와 함께 죄 를 이기는 아침의 믿음에 들어가야 한다. 어서 속히 그 신령 한 믿음에 들어가지 못하면 몸에만 할례받은 자들처럼 하나 님의 벌을 받는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육의 믿음에 머무르며 저녁의 구원에 서 방황하기를 그쳐야 한다. 우리가 육의 믿음에서 벗어나 아 침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을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말씀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참된 말씀이 무엇 인가를 끊임없이 찾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참된 말씀을 전하는 곳은 찾기 어렵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직 땅의 교회에 아침의 말씀을 허락치 않고 계 신 까닭이다. 아모스는 말하기를“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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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8:11) 고 하였다. 아모스의 말처럼 지금 이 땅에는 말씀이 없는 기 근과 기갈이 넘쳐 난다. 이 땅에 아침의 말씀이 없으므로 저 녁의 교회와 저녁의 성도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부터 아침의 말씀과 복음을 허락 하신다. 본서가 전하고 있는 14장의 말씀이 바로 아침의 구원 이며 아침의 복음이다. 이같은 아침의 구원과 복음을 받은 교 회가 모이는 곳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예루살렘, 시온 산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시온 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 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 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 다” (사25:6)

하나님은 아침의 구원과 복음이 있는 말씀의 산 시온산에서 오래 저장한 맑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 이 맑은 포도주는 유월절에 마시는 칭의의 포도주가 아니라 하늘의 혼인 잔치인 7천년의 아침에 마시는 결혼의 포도주요 기쁨의 포도주다.

하나님은 이 기쁨의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에게 이어서 말씀 하신다.“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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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니 라” (사25:7~8) 하나님은 시온 산에 이른 자들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덮개를 영원히 제할 것이라 하신다.

여기 시온 산의 교회들은 저녁의 복음이 아닌 아침의 복음 을 전하기에 아침의 성도들로 가득하다. 시온에 모인 성도들 은 그 얼굴에 가리개나 면박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밝고 똑똑 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가렸던 낮은 복음, 저녁의 복음과 같은 덮개를 벗었으므로 모든 것을 빛 가운데 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리개와 면박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복음, 칭의의 복음을 말한다. 그 것은 육의 수준으로 말씀을 가르치며 어린 아이의 수준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어린 복음이다. 그것이 바로 신령하지 못한 육의 복음이자 저녁의 복음에 해당한다. 이런 복음은 가리개 와 면박을 쓴 상태에서 받는 것이기에 진리를 온전하게 받기 어렵다. 다만 늘 흐릿하고 애매하게 복음을 받음으로 어둠 가 운데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제 날이 이르면 하나님은 이 육의 복음에 속한 교회와 성 도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가리개와 면박 을 덮어쓰고 소경처럼 서 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치실 수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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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치시는 것은 꼭 심판 만을 위한 것이 아니 다. 하나님은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친 것처럼 육의 복음에 속한 자들을 치고 징계하신다. 그러면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환도뼈를 맞으며 돌이켜 회개할 것이다. 그 회개로써 마음의 할례를 받는 자들은 시온의 아침 빛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시온의 아침의 복음이 임해도 그것을 부인하며 끝까 지 거부하는 자들은 진짜 심판을 당하기에 이른다. 끝까지 초 보의 구원인 칭의 만을 붙잡고 저녁의 복음에 머물기를 고집 하는 자들은 예비된 멸망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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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재림의 기초와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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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셉과 재림

성경에서 재림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은 단연 요셉이 다. 요셉은 그 생애가 흠없는 예수의 삶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그 이름 안에 재림의 의미가 담겨 있다. 요셉의 이름의 뜻은 ‘다시 오는 아들’ ,‘두 번 오는 아들’ 이라는 의미가 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그가 은 20개에 팔리면서 애굽의 총리 가 되기까지의 모든 삶이 앞으로 오실 재림 예수를 예표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잘 보면 재림 예수의 모습과 실체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2. 에수의 원림

요셉의 생애에 대해서는 다음 12장부터 본격적으로 살필 것 이므로 본장에서는 재림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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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왜 두 번 임하시는가 하 는 점이다. 그저 한 번 오셔서 모든 것을 단 번에 해결하실 능 력과 지혜가 충분하신 주님이 왜 굳이 초림과 재림으로 나누 어 오시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라면 의문이다.

1) 예수의 원림

우선 기본적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이유에 대해 생 각해 보자. 우리는 보통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기 위해 오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 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고 인류가 죄에 빠지지 않았어도 반드 시 오셔야 할 분이다.

예수께서는 죄와 상관없이 인간을 위해 예정된 분이다. 본 래 인간은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를 위해 예수처럼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꼭 한 번은 인간을 만나야 하 고 인간을 이끌어 자신과 하나되게 하는 과정을 만드셔야 했 다. 이것이 태초부터 정해진 예수의 원초적 강림, 즉 원림(原 臨)이다.

예수께서 아담의 타락과 무관하게 원래적으로 임하시는 데 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네페쉬인 인간을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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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의 존재로 만드는 목적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타락하지 않고 잘 살아봐야 인간은 그저 네페쉬의 존재일 뿐이다. 인간 은 자신의 힘으로 신령하고 영적인 존재, 루아흐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이 루아흐의 존재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 씀이 있어야 하며 말씀의 떡인 예수가 있어야 한다. 그 떡을 먹고 변화를 받아야만 하늘의 루아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창세 전부터 이미 말씀의 떡으로 존재하 셨으며 인간 속에 들어가 인간을 루아흐로 변화시키기 위하 여 예정되셨다. 이것이 예수께서 죄와 상관없이 땅에 오셔야 하는 최초의 이유다.

2) 초림의 발생

예수의 원초적 사명은 인간을 네페쉬에서 루아흐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바싸르의 존재로 타락함으로 써 예수의 사명이 변화되었다. 예수께서는 바싸르로 타락한 인간을 타락 전의 네페쉬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적 인 일이 되었다.

타락한 바싸르를 구하려면 누군가 죄없는 자의 희생의 피가 필요하기에 예수는 인간처럼 네페쉬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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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오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오르시고 희생의 피를 흘리셨다. 이 피흘림이 초림 예수의 중대한 목적이며 피흘림이 없는 초 림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초림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없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굳 이 육체를 입으실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피를 흘리실 필요가 없다. 초림은 다만 아담의 타락으로 빚어진 것이기에 타락과 죄가 없다면 굳이 예수의 육체와 피가 필요치 않다.

물론 인간은 이미 타락한 존재이기에 초림이 없는 것은 상 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타락을 미리 아시 고 창세 전부터 인간을 위해 한 몸을 예비하고 계셨다.

하지만 태초의 아담은 무조건적으로 타락하도록 예정된 존 재가 아니다. 그는 타락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도리어 타락하 지 않고 루아흐의 존재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예를 들어 에 녹의 경우에 그는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함으로 죽음을 맛보 지 않고 승천하지 않았는가.

아담도 에녹처럼 못할 이유가 없다. 아담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길이 활짝 열려 있 었다. 그도 얼마든지 말씀에 순종하여 에녹처럼 루아흐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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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은혜를 받을 수 있었으나 결국 범죄함으로 타락과 죄에 빠 지고 말았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반드시 육체를 입으시고 또 반드시 피를 흘리는 것이 요구되었다. 따 라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기꺼이 육체의 피를 흘리셨다. 그럼에도 예수의 피는 인간을 바싸르에서 구할 뿐 이기에 초림 만으로는 예수의 본래적 사명을 모두 이룰 수가 없다. 예수께서 자신의 본래의 사명을 모두 이루려면 인간을 루아흐로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원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시 오셔야 하며 이제 다시 임하실 것이다. 다시 임할 때는 인간 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루아흐로 만드는 일을 이루 기 위해 역사하신다. 말하자면 예수는 인간을 루아흐로 만드 는 원림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재림의 역사로 임하시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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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재림의 본질

우리가 에녹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에녹은 굳이 육체의 예수를 만나지 않아도 말씀으로 거듭나고 말씀의 인도로 루 아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인간이 루아흐의 존재가 되기 위 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충분함을 보여 준다.

물론 우리가 바싸르의 상태에 있다면 반드시 예수의 성육신 과 그 피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죄 사함을 받고 네 페쉬로 회복된 존재라면 굳이 더 이상 육체의 예수를 만나지 않아도 말씀 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초림의 예수가 필요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다만 예수가 재림하실 때 굳이 육체를 입고 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보통 예수께 서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육체로 재림하시는 것으로 생각하 지만 그것은 문자 중심으로 보는 관점일 뿐이다.

예수의 재림의 핵심은 육체로 오시는 것보다 말씀의 임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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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핵심이 있다. 예수의 초림은 피가 있어야 하므로 반드시 성육신의 몸이 있어야 하지만 재림은 그렇지 않다. 재림은 육 체를 입지 않아도 가능하며 사실은 육체가 아닌 영과 말씀으 로 임하는 것이 재림의 가장 큰 본질이다.

4. 구름과 재림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 손오공처럼 하 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주님이 승천하 실 때 구름 가운데 올라가셨고“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 대로 오시리라” (행1:11)고 기록된 말씀 때문일 것이다. 이 말 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올라가신 그대로 구름 을 타고 오신다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4:30),“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 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계1:7) 라는 말 씀들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께서 올라가신 그대로 구름을 타 고 오실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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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가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는 분명히 구름 가운데 올라가셨고 또 그 모습으로 내려 오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 나 성경은 의미를 알고 읽어야 하며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 을 조화시켜야 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1) 구름은 말씀이다

그런데 앞서 본대로 재림의 본질이 말씀의 재림이라면 성경 의 구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뭉게구름이 아닐 수 있다. 성경은 구름의 의미를 영적으로도 사용하기에 그러하다. 예를 들어 유다서는 거짓 목자들에 대해“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 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유1:12) 라고 한다. 여기서 물 없는 구름이란 무엇인가. 곧 하늘의 물이 없는 자를 말함이니 참된 말씀이 없는 목자를 일컫는다. 따라서 구름의 영적 의미 는 하늘에 있는 물 곧 하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에 물로써 세상을 심판하고 멸하셨다. 그 후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리라 하시며 그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 의 증거니라” (창9:13)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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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멸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무지개를 보여 주시는데 그것을 구름 속에 두었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름 속의 무지개는 언약의 증표이며 또한 언약의 상징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구름 속의 무지개 를 언약의 증표로 삼으시는가. 그것은 우선 하늘의 무지개가 예수를 상징하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무지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 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겔1:28) 하나님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를 보이시며 그것이 여호와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증거하신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일컬어 자신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하시 지만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따로 존재한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곧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4),“이는 하나님 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1:3)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언약의 증거라고 하신 무지개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 무지개는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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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 무지개를 어디에 두시는가 하면 바로 구름 속에 두시며 구름과 함께 있게 하신다. 왜 하나님은 구름 속에 무 지개를 두시며 또한 구름 속에 그리스도를 두시는 걸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 속에 예수를 두시는 것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 (창9:13)고 하신 것은 그의 형상과 모양이신 예수를 구름 즉 말씀 속에 두었다는 것과 같다. 이처럼 성경은 구름을 말씀으로 해석하 며 무지개를 예수로 증거해 준다.

2) 구름은 성령이다

성경에서 구름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다. 하나님은“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 라” (출16:10)는 말씀처럼 구름 가운데 나타나시며, 구름 가운 데서 모세를 부르셨고(출24:16), 광야의 이스라엘을 불 기둥 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구름 기둥의 인도를 따라 행해졌 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이스라엘이 나아갔고 구름이 멈추면 이스리엘 진영도 걸음을 멈추었다.(민9:17)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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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구름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상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여 주는 구름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시겠 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무지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도 언제나 구름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름 가 운데서 모세를 만나시며(출19:9), 하나님이 성막에 임하실 때 는 늘 구름과 함께 임하셨고(출33:9),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 었다.(출34:5)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왜 구름 가운데서 역사하 실까. 그것은 구름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구름이 없으면 무지개가 나타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늘에 무지개가 뜨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무지개는 빗방울에 햇빛에 반사됨으로 나타나는 빛의 굴절이다. 그래서 무지개는 언제나‘빛과 물’ 의 두 가지 요소 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백성들을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과 물, 즉 빛과 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위헤 머무르는 것을 증거하셨다. 무지개가 언제나 빛과 물을 통해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영광 역시 언제나 빛과 물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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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빛과 물은 우리에게 주님의 역사와 재림에 대한 중 대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주님이 땅에 임하실 때는 언제나 빛과 물로 역사하신다. 이 땅에 주님의 임하심은 빛과 같으며 그 사방의 광채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의 광채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물과 구름을 통해 반사가 된다. 그리하여 주님의 모습은 7색의 무지개로 찬란 하게 빛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인 예수가 말씀과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보여 준다. 달리 말해 무지개이신 예수는 말씀 의 구름이 없으면 나타나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언제 나 구름 즉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며 이것이 없이는 사람에게 나타나지 못하신다.

3) 구름 속에서 재림하신다

이제 주님이 구름과 함께 재림하시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주 님이 땅에서 승천하실 때는 행1:9절에“저희 보는 데서 올리 워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려 보이지 않게 하더라” 는 말씀대로 구름과 함께 물리적으로 승천하셨다. 물론 주님은 재림하실 때도 이와 같이 내려 오실 것이다. 내려 오실 때도 역시 구름 가운데 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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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님은 뭉게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구름으로 오신다. 또한 구름 위에 계신 것이 아니라 구름 속 에 계심으로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주님은 빽빽한 구름에 쌓여 강림하심으로 그 모습을 찿기 어 렵다.

따라서 우리가 재림을 볼 때 먼저 보는 것은 주님의 모습이 아닌 구름의 모습이다. 수많은 말씀의 물을 머금은 빽빽한 말 씀의 구름을 먼저 본다. 그러면서 구름같이 몰려오는 하늘의 말씀들을 통해 진리의 빛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구름 속에 있는 빛과 진 리를 제대로 볼 수 있으면 그 구름 속에 숨어 계신 주님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구름에 가려져 볼 수 없었으나 구름과 빛 을 보는 눈이 열리고 나면 이어서 주님을 보는 눈도 열리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주님께서 올라가신 그대로 강림하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올라가실 때는 구름을 타고 올라가 신 것이 아니라 구름이 그를 가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올라가 셨다. 주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모습으로 내려오신다. 주님이 오실 때 처음에는 구름의 말씀에 가려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다가 우리가 구름의 말씀을 진리의 빛으로 깨달을 때 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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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 주님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그 모습은 엄청난 비를 내린 구름 뒤에 빛나는 7색의 무지개와 같다. 주 님이 이렇게 무지개처럼 임하시는 데에는 중대한 뜻이 있다. 말하자면 주님은 빽빽한 구름의 말씀과 같고 그 말씀은 7색 의 무지개와 같기에 무지개처럼 임하신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이니 한 분 예수님 뿐이다. 하나 님의 언약의 증거도 하나이니 한 분 예수님 뿐이다. 그런데 그 한 분이신 예수를 펼치면 3이요 또 완전히 펼치면 7로 나 타난다. 7색의 무지개는 바로 이같은 주님을 증거한다. 빽빽 한 구룸과 같은 수많은 말씀도 결국은 7의 말씀이요 7의 언약 인 것을 증거히시려고 주님은 7색의 무지개로 나타나신다.

4) 말씀의 재림

이제 우리는 주의 재림이 구름의 재림이요 말씀의 재림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육체가 아닌 말씀으로 임하신다. 물리적인 뭉게구름이 아닌 늦은 비의 비구름으로 임하신다. 신령한 말씀이 가득한 하늘 구름으로 임하시며 성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 때 성도들이 분명하게 목격하는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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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물리적인 얼굴이 아니라 말씀과 빛의 얼굴이다. 그 엄 청난 양의 하늘 말씀이 구름처럼 임할 때 그 안에 무지개의 형상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육체의 예수가 아닌 말씀의 예수 인 것을 깨닫는다. 그 때 우리는 재림 예수의 얼굴을 물리적 으로 보지 않아도 말씀의 빛을 봄으로써 그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그 모습 가운데 무지개처럼 빛나는 일곱 말씀을 똑똑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진리의 얼굴이고 말씀의 얼굴이며 예수의 얼굴이다. 그 영광의 얼굴을 보는 성도는 그 자리에서 통곡하 고 회개하며 자기 자신을 찢는 마음의 할례로써 주님을 영접 한다. 이 영접은 초림의 영접이 아닌 참된 진리를 받아 들이 는 재림의 영접이다. 물처럼 흘러내리는 말씀을 통해 늦은 비 의 은혜에 흠뻑 젖어 영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 들이는 영접이 다. 이렇게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영접하 는 것이며 주님을 육체가 아닌 루아흐로 영접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영접이야말로 창세 전부터 본래적으로 준비하셨던 원림의 영접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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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초림과 재림의 차이

어찌 보면 초림과 재림은 그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인간을 루아흐로 만들기 위한 동일한 역사다. 다만 굳이 양자를 구분하려는 것은 서로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 이다.

초림의 주님은 우리를 위해 포도주같은 피를 흘리셨으며 떡 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포도주 의 은혜는 잘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떡의 은혜를 받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만일 사람들이 떡의 은혜를 잘 받고 말씀을 제대로 소화했다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을 것 이다. 만일 교회가 떡의 말씀을 제대로 소화했다면 이미 거룩 하고 신령한 교회들이 세상에 나타나며 이미 재림의 역사마 저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의 교회는 말씀대로 행치 못함으로 어리석은 가운 데 세상의 멸시를 받는 교회가 되었다. 유명하고 큰 교회들에 서 세상보다 못한 일들이 일어나며 성공한 목회자들이 지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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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는 일도 흔하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교회가 말씀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림으로 세워진 교회에는 이렇게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난 다. 그것은 사람들이 초림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초림 때 주신 떡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초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초림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 여기에 초림 의 중대한 비밀이 숨겨 있다. 초림에 감추어진 하나의 비밀은 사람들이 초림의 말씀을 올바로 받거나 깨닫지 못한다는 것 이 비밀이다. 만일 사람들이 초림의 말씀을 제대로 받았다면 초림 만으로 이미 교회와 성도들은 루아흐의 존재들이 되고 왕의 승리를 누리는 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초림의 의미와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으로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은 타락과 부패에 연루되고 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다. 주님이 굳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은 사람들이 초 림의 복음과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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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이 초림의 말씀을 제대로 받고 그 구 원을 온전히 받도록 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 주님은 사람들이 홍해의 초보적인 구원에 머물지 않고 온전한 요단강의 구원 을 받도록 하기 위해 다시 임하신다. 아직도 칭의와 죄 사함 의 초보적인 구원에서 헤메이는 어린 자들을 온전한 자들로 세우기 위해 다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은 성도들이 말씀을 온전하게 먹고 소화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재림이다. 물세례가 아닌 불의 세례 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닌 죄를 이기 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재림이다. 성도들로 하여금 신령하 고 견고한 믿음으로 요단 강을 건너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다시 역사하는 재림이다.

주님은 초림 때나 재림 때나 언제나 떡과 포도주의 주님이 시다. 그러나 초림 때는 포도주의 피의 은혜가 핵심이 되고 포도주의 구원이 널리 퍼진다. 반면에 재림의 때가 되면 이제 떡의 말씀의 은혜가 주로 전파되며 떡의 구원이 널리 퍼질 것 이다. 그럼으로써 초림의 일을 새롭게 하고 다시 세우며 완전 케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대한 차이 점이다. 주님의 재림은 초림 때 주신 떡의 말씀을 다시 세우 고 완전케 하기 위한 재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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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재림의 목적

주의 재림의 핵심은 떡의 재림에 있고 말씀의 재림에 있다. 주님은 초보의 수준의 저녁에 머물고 있는 교회를 온전한 아 침의 교회로 만들기 위하여 재림하신다. 그 떡의 말씀으로 우 리를 루아흐가 되고 아침의 성도가 되게 하려고 다시 임하신 다. 그 말씀을 다시 가르쳐서 우리를 온전케하며 온전한 구원 을 얻도록 하기 위해 다시 일하신다.

히브리 기자는 주의 강림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혀 준다.“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9:28)

히브리서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두 번째 나타나신 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 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가 단번에 드리신 바 된 것은 언제 된 일인가. 그것은 그가 처음 오셨을 때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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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러니까 그는 초림 때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셨지만 이제 재림의 때에는 죄 문제가 아닌 구원을 위 하여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초림과 재림의 두 목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래 주님의 원림의 목적은 죄가 아닌 구원이다. 네페쉬에서 루아 흐로 구원하는 것이 창세 전부터 가진 예수의 본래 목적이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하자 예수께서는 죄 문제를 우선 해결하 셔야 했다. 그래서 초림으로 오셔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 고 단번에 드려진 바 되셨다.

그러므로 두 번째 오실 때는 더 이상 죄 문제를 신경쓰지 않 아도 된다. 즉 두 번째 오실 때는 죄와 상관없이 오시며 이제 는 바싸르의 죄 문제가 아닌 네페쉬의 구원 때문에 임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두 번째 오신다고 증거한다

그러면 두 번째 오시는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포도주보다 떡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떡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네페쉬에서 루아흐로 구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재림의 본질이며 재림의 비밀이다. 이는 재림의 참된 실체가 말씀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 로 재림은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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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내가 떡의 말씀을 목격하였는가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7. 개인의 재림

재림의 본질과 실체가‘말씀’ 인 것을 알면 재림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재림의 때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 는 재림이 될 수 있다. 그 때가 에녹의 때든지 아브라함의 때 든지 간에 그가 말씀으로 거듭나고 루아흐의 구원을 받은 자 라면 그는 주님의 재림을 본 자가 된다.

이 점에서 창세기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인 에녹, 아브라 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은 모두 예수의 초림과 재림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림으로 예수의 초 림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으며 오직 말씀만을 믿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나 재림의 구원을 받았다.

신약에서도 바울이나 요한이나 베드로 등 사도들 역시 예수 의 초림과 재림을 모두 통과한 사람들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 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은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었던 참된 주 님, 참된 복음을 만난 것이며 그로 인해 그는 복음의 말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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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거듭난 자가 되었다. 바울이 주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었 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하여 성령으로 충 만케 하시니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 다.(행9:18) 이는 하나님께서 그 눈을 가린 가리개와 덮개를 벗겨서 루아흐의 진리를 보고 영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 신 것이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주님의 말씀을 배웠음에도 말씀으로 거 듭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남 으로 죽음을 이기는 승리의 말씀을 체험하며 예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 로 거듭난 자가 되었으나 사실은 부활의 예수를 만날 때 이미 거듭난 자였다. 그가 만난 부활의 예수는 다름 아닌 재림의 예수였으며 그 때 그는 예수의 말씀의 권능에 충격을 받아 마 음이 깨지고 찢기는 영의 할례를 받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받은 자들은 모두 말씀 의 재림을 체험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사도들 뿐만아니라 지나간 모든 시대의 어떤 성도라 할지라 도 그가 말씀을 온전하게 받고 루아흐가 된 자라면 그는 재림 의 말씀을 본 자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는 신령한 성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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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예수를 보지 않아도 초림은 물론 재림 의 과정까지 성취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드림으 로 초림의 은혜를 받으며 또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예수의 피 를 의지하면 그는 초림을 통과한 자가 된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 오직 말씀 만을 따르는 거듭난 자가 되면 그는 재림을 통과한 자가 되는 것이다.

8. 역사의 재림

성도 개인의 재림이 언제 어디서나 있는 일이라면 역사의 재림은 단 한 번 일어난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7천년이 시작 되는 시점에 일어난다. 주님이 강림하시어 짐승과 거짓선지 자를 붙잡고 사단까지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함으로 재림의 역사는 천년 왕국으로 이어지며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신령 한 성도들이“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20:6)는 말씀이 이루어 진다. 곧 땅의 성도들이 멜기세댁처럼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승리와 축복의 역사가 주님의 재림을 통해 실제적으로 성취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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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주님의 역사는‘초림 - 재림 - 천년왕국’ 으로 이어지는 역사다. 또 천년이 지나면“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계20:7) 라는 말씀대로 사단이 잠시 놓여 전쟁을 일으키나 사단은 결국 멸망을 당하여 유황 못에 던져진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사단이 멸망을 당하면 하나님의 모든 역 사도 종국에 이른다. 그 다음에“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 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 라” (계20:11)는 말씀이 임한다. 이제 땅의 인간들이 모두 부활 하여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백보좌 심판’ 이 내려지 는 때가 이른다.

계시록은 이처럼 재림 이후의 과정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한 다. 재림과 천년왕국이 지나면 최후의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 을 증거한다. 그래서 이 백보좌 심판까지 합하면 주님의 강림 은 총 세 번이 된다. 주님께서는 초림주 - 재림주 - 심판주로 서 성도들에게 세 번 역사하신다.

주님이 세 번 임하시는 삼림에 대한 부분은 바울이 증거하 는 말씀과 일치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에 대해 다 음과 같이 말하였다.“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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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3)

바울은 이 구절에서 세 번의 부활의 순서를 밝힌다. 첫째는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다. 이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부활 을 가리킨다.

둘째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재림과 천년왕국의 때에 일어나는 성도 의 부활을 말한다. 사도 요한은 계20:4절에서 짐승의 표인 666을 거부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증 거한다.“(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5)는 말씀과 같다. 이 첫 째 부활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첫째 부활이나 주님의 입장에 서는 자신의 부활에 이은 둘째 부활이 된다.

바울이 세 번째로 말하는 부활은 최후의 부활이다. 그 때는 예수께서 모든 권사와 능력을 멸하시고 사단까지 멸하여 세 상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다. 바울은“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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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고전15:23)는 말씀으로 셋째 부활을 증거한다. 이 셋째 부 활은 모든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는 최후의 백보좌 심판의 때 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의 진술에 따르면 성경의 부활의 역사는 세 번이다. 차례대로 초림 - 재림 - 심판의 때에 맞추어 부활이 일어난다. 이는 주님의 역사가 세 번임을 증거하는 것과 같 다. 주님께서는 초림의 주, 재림의 주, 심판의 주로 세 번 강 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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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대환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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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무후무한 대환난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24:21)

마태는 주님의 재림 전에 이 땅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을 예언 한다. 그것도 보통 환난이 아니라 창세로부터 처음 있는 전무 후무한 대환난이다. 우리는 보통 이 대환난의 때에 온 세계가 멸망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일을 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 지만 이 역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관점에 불과하다. 마태 가 말하는 대환난은 그런 물리적인 환난을 말하지 않는다.

대환난을 설명하는 마24장을 읽어보면 환난의 의미를 대략 알 수 있다. 마태는 4~5절에서 환난을 언급하기도 전에 먼저 사람의 미혹과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고한다. 이어 11절에서 도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경고한다. 21절에서 대환난을 말한 후에도 24절에서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에 대해 경고 의 말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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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가 대환난을 말하면서 세 번씩이나 적그리스도의 미혹 을 말하는 것은 그 환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짐작케 한다. 그 것은 땅에 물리적인 환난보다 복음과 말씀에 대한 환난을 더 욱 경계하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땅과 육체의 환난보다 하늘 과 영의 환난의 의미가 더 중요함을 일깨운다.

사실을 말하자면 재림 전 대환난은 물리적인 것보다 영적 환난인데 그 환난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 씀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 있는 요셉의 말씀 안에 감추어 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그 안에 대환난의 실체를 보여주는 말씀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요셉과 대환난

요셉의 생애에는 재림 전 환난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 있 다. 그것은 요셉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사건이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은 20개에 팔린 후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 에 총무가 된다. 그러다가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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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요셉이 은 20개에 팔리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겪는 것은 모두 예수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다. 요셉이 형 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가듯 예수는 이스라엘에 의해 이방 로 마에 넘겨져 고난을 당한다. 또한 요셉이 억울한 옥살이를 겪 듯이 예수도 역시 영적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다. 예수가 당하는 억울한 옥살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은 요셉이 감옥에 서 겪는 꿈 해몽 사건이 잘 보여 준다.

창40에 보면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던 중에 바로 왕의 술 관 원장과 떡 관원장을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두 사 람이 꿈을 꾸고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한다. 이에 요셉은 그 들에게 청하여 꿈 이야기를 듣고 그 해몽을 해준다.

1) 술 관원장의 꿈

술 관원장은 자신이 꿈을 꾸는데 포도나무의 세 가지를 보 았다고 한다. 그 가지에 포도송이가 익어 그것을 따서 즙을 내여 바로에게 주며 꿈을 깼다고 한다. 이에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하는데“세 가지는 사흘이라” (창40:12) 하고 풀었고“사 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창40:13) 라며 술 관원장이 3일 안에 풀려날 것이라 해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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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떡 관원장의 꿈

함께 있던 떡 관원장 역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데 꿈에 서 흰 떡 세 광주리가 머리에 있고 그 중 가장 높은 셋째 광주 리에 바로를 위한 음식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그 광주리의 음식을 먹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요셉이 또 해석 을 하는데“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창40:18) 하며“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창40:19) 라며 떡 관 원장이 3일 안에 죽을 것이라고 해몽하였다.

3) 두 관원장의 의미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장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몽을 하 는 것은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이는 장래에 있을 예수의 억울한 옥살이와 그 고난을 보여 주는 예언적 사건이다.

감옥에서의 요셉은 당연히 예수를 의미하며 그 옥살이는 예 수의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는 중에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 을 상징한다. 그리고 술과 떡을 맡은 두 관원장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의 두 은혜 곧 포도주와 떡의 미래를 보여주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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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몽하니 포도주 관원장은 복직을 하고 떡 관원장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들의 엇갈린 운명은 무엇 을 말하는가. 그것은 앞으로 있을 예수의 포도주와 떡의 일을 미리 예언하는 사건이다.

우선 두 관원장이 감옥에 들어오는 것은 복음이 처음 이방 에 전파될 때 예수의 피와 떡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상징한 다. 여기서 바로 왕은 땅의 왕을 말하며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자신을 왕으로 여기고 사는 땅의 불신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왕이 두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은 이들에게 예수의 피와 떡이 전해질 때 그것을 업신여기고 박해하는 것을 예표한다.

그런데 처음에 예수의 피와 떡을 핍박했던 이방인들이 어찌 된 일인지 나중에는 그 복음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예수의 피와 떡을 모두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피의 은혜는 잘 받 는데 비해 떡의 은혜는 거부하고 죽여 버린다.

4) 바로의 생일

이 모든 일은 바로의 생일 날 벌어지는데“제삼일은 바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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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라” (창40:20) 한 것처럼 두 관원장이 꿈을 꾼후 제 삼 일이 되는 날 벌어진다. 여기서 바로의 생일이라 한 것은 이 방인의 영적 생일을 상징하는 것이니 곧 그들이 복음을 수용 하고 받는 구원의 생일을 말한다.

또 그 생일이 제 삼일인 것은 그들이 처음에 예수의 3의 복 음을 받았음을 뜻하며 그 3의 복음을 받고 구원받은 것을 생 일이라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 이방인들이 예수의 3의 복음을 받고 구원의 생일을 맞는 그 자리에서 저들은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의 은혜는 잘 받아 들이면서 떡의 말씀은 온전하게 받지 못한다. 오히려 떡 의 말씀을 부정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바로 왕이 떡 관원장을 죽이는 것은 이방에게 복음 이 전해질 때 예수의 말씀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 처음에 이방의 교회들이 복음을 받을 때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 피의 은혜를 믿고 감격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그 들은 다만 초보적인 칭의 수준의 복음만 받아 들일 뿐, 깊고 신령한 말씀들은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함으로 거부하고 방치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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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씀의 환난

술 관원장은 포도나무 세 가지를 보고 떡 관원장은 떡 세 광 주리의 꿈을 꾸며 바로 왕은 제 삼일에 생일을 맞았다. 성경 이 이렇게 3의 수를 반복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이는 복 음이 3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며 처음에 이방에 전해진 복 음도 3의 복음임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바로 왕은 3의 은혜 중에 포도주만 먹고 떡을 버림으로 3의 복음을 온전히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만 초보의 은혜와 칭의 만을 받고 저녁의 복음에 속한 자가 되었을 뿐이다.

이방의 교회들은 바로처럼 예수의 포도주의 복음만 마시고 그 깊고 신령한 떡의 복음을 먹지 못함으로 이 땅에 환난이 시작되었다. 떡의 말씀이 없는 환난, 하늘 양식이 없는 기근 과 기갈의 대환난이 발생하였다.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말씀 이 없으므로 헐벗음과 굶주림으로 죽음을 당하니 이것이 바 로 성경이 말하는 대환난이다. 이방의 교회들에서 떡의 말씀 이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니 이것이 바로 말씀의 환난이요 예 수의 환난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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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떡 세 광주리

떡 관원장은 그의 꿈에서 세 광주리의 음식을 보았다. 그가 세 광주리의 떡을 본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가 셋째 단계의 말씀 곧 3의 말씀을 보며 3의 구원을 본 것을 의 미한다.

따라서 바로 왕이 받은 말씀 역시 3의 복음이며 3의 구원이 다. 성경은 하늘의 떡의 말씀을 정확하게 세 단계의 말씀으로 구분한다. 하늘 떡의 말씀이 3의 단계로 된 것을 가장 잘 증 거하는 예는 엘리야의 세 떡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엘리야는 성경이 증거하는 선지자의 대표다. 선지자의 사명 은 하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핵심인데 그 말씀을 전하려면 선지자 자신이 먼저 하늘의 말씀을 잘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엘리야의 생애를 보면 그의 평생에 세 가지 떡을 먹는 사건들 이 나온다. 그 세 가지 떡 사건은 그가 하늘의 말씀을 완전하 게 받아 먹은 참 선지자인 것을 증거한다.

① 까마귀의 떡

엘리야는 처음에 까마귀에게 떡을 얻어 먹는다. 그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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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명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 머물 때 그 물을 마시면서 까 마귀가 물어 주는 떡과 고기를 먹었다.“까마귀들이 아침에 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왕상17:6) 라는 기록처럼 그는 한 동안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을 먹고 살았다.

② 과부의 떡

얼마 후 가뭄 때문에 그릿 시내의 물이 마르자 하나님은 그 에게 그 곳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 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왕상17:9)고 하셨다. 그 러자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를 떠나 사르밧에 있는 과부에게 찾아가 과부가 주는 떡과 기름을 먹으며 지냈다.

③ 천사의 떡

엘리야는 과부의 떡을 먹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갈멜산에 올 라 갔다. 그 곳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그들을 일 거에 멸하는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내 이세 벨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 무 밑에 이르렀다. 그 나무 아래 누워서 낙심하고 절망하면서 죽기를 구하는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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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는 세 번째로 천사가 주는 떡을 먹게 되는데 그것이 숯불에 구운 떡이다.(왕상19:6) 엘리야는 그 불의 떡을 먹고 기운을 차려 사십 주야를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 산에 이른 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며 그의 세미한 음성 을 듣는다.

엘리야가 이렇게 세 가지 떡을 먹은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 다. 이 세 떡에는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곧 엘리 야의 세 떡은 3단계의 구원의 떡을 의미하며 세 광주리의 복 음의 떡을 의미한다. 그는 가장 낮은 1단계의 짐승의 떡에서 가장 높은 3단계의 천사의 떡까지 모두 먹었으니 곧 완전한 복음과 완전한 루아흐의 떡을 먹은 것과 같다.

엘리야가 먹은 세 떡은 모든 성도가 먹어야 하는 구원의 떡 이며 3단계의 구원을 가르치는 떡이다. 곧 성도는 짐승의 떡, 인간의 떡, 천사의 떡을 먹는 과정을 걸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엘리야는 그가 과부를 통해 인간의 떡을 먹었을 때 큰 승리를 얻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이다. 그 승리가 사라지자 그는 낙심하고 절망하여 죽기를 구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

엘리야의 참된 승리는 그가 셋째 광주리에 있는 천사의 떡 을 먹을 때 주어졌다. 천사의 불의 떡 곧 하늘 숯불의 말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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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깨끗함을 입은 후에야 그는 완전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 는 길을 걸을 수 있었고 결국 에녹처럼 하늘로 승천하는 영광 을 얻게 되었다.

4. 짐승의 카톨릭

구약이나 신약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떡은 천사의 떡이며 셋 째 광주리의 떡 뿐이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떡의 말씀 도 이 셋째 떡이고 셋째 말씀이었다. 그런데 바로 왕과 같이 어리석고 무지한 세상의 왕과 이방의 교회들은 그 셋째 떡을 받지 못하였다. 기껏해야 짐승이나 과부 수준의 말씀 만을 받 고 그 외의 말씀들을 거부함으로써 완전한 말씀을 먹지 못하 였다.

그러면서 짐승이나 인간 수준의 떡을 먹은 자들이 나름대로 세운다고 세운 교회가 바로 카톨릭이다. 카톨릭은 AD 303년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 와중에 수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와 교회는 초보적인 성도들로 넘쳐 났 고 더불어 온갖 세속의 것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타락시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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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회는 점점 부패와 타락에 찌들었고 세속의 권력과 결탁하여 성도들의 고혈을 짜는 집단이 되어 갔다. 그들은 교 회의 겉모양만 갖추었을 뿐 그 속은 그야말로 짐승과 다를 바 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수의 피로 세우신 교회라고 자 랑했으나 그 안에는 짐승 수준의 떡 만이 가득한 짐승의 교회 였다.

카톨릭은 기껏해야 짐승의 수준으로 성도들을 가르쳤다. 교 회를 빙자하여 성도들을 우민화하며 무조건 교회 권력에 순 종하는 자들로 만들었다. 그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조차 금하였다. 성도들이 성경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 며 읽지 못하게까지 만들었다.

카톨릭의 미사는 구약의 제사와 같았고 매 주 예배마다 죄 의 용서 만을 가르칠 뿐 도무지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다. 예 배 때마다 라틴어로 성경을 읽으니 일반 성도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주문과 같았다. 이런 수준이 바로 짐승의 수준이며 짐승의 교회와 같은 카톨릭이다. 가장 수준 낮은 초보의 떡을 먹고 있으니 나오는 것은 짐승의 생각과 행동이 나올 뿐이다. 이와 같이 중세까지의 카톨릭 교회는 바로 짐승의 교회에 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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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과부의 개신교

개혁가 루터는 카톨릭의 타락과 부패에 대항하여 종교개혁 을 일으키고 개신교를 촉발시켰다. 이에 칼빈이 합세하여 카 톨릭과 다르게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오직 은혜, 오직 믿 음의 교리를 정립하며 새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개신교는 카톨릭의 짐승의 수준에서 벗어나기는 하 였으나 과부의 수준, 인간의 수준으로 말씀을 가르칠 뿐이었 다. 루터의 핵심 교리는 오직 칭의에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복음이며 저녁의 복음에 해당한다. 거기에 칼빈 이 기독교강요를 통해 성화론을 더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허 울 뿐이었다. 개신교 성화론을 만든 칼빈은 실제로는 성화와 정반대의 삶을 산 자였다.

그는 자신의 예정론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화 형시켰으며 자신을 욕한 자의 혀를 꼬챙이로 찌르고, 자신을 위선자라고 비판한 자를 고문하고 사형시켰다. 예배에 참석 치 않으면 벌금을 물리고, 카드놀이를 하면 기둥에 묶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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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 받기를 거부하면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겉은 사람이었으나 속은 짐승이었다. 앞으로는 은혜의 교리를 말하면서 뒤로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고문하고 추방하고 사형시켰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 은 루터나 칼빈이 천사의 떡을 받지 못하고 과부의 떡을 얻어 먹은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신교가 사회에 빛이 되기보다 불신자들의 손가락 질을 받는 개독교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안에 과부 같은 성도만 가득할 뿐 불의 떡을 먹는 천사같은 성도들이 없 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오직 칭의라는 과부의 복음에 빠져 온 전한 천사의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칭의는 홍해 의 구원에 불과한데 교회가 거기에 빠져 있으면 어리석은 개 신교가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모습은 저 광야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광야의 백성들처럼 완악하고 불순종하여 하나 님을 거스리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개신교가 이런 상태 에 빠져 있는 이유는 떡 관원장의 셋째 광주리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첫째나 둘째 광주리에 있는 떡을 먹으 면서 그것이 복음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에 광야의 불순종의 일들과 죄의 일들을 벗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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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환난의 실체

이제 대환난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양식이 없어 주 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닌 것처럼, 전쟁이 나고 지 진이 나는 것이 대환난이 아니다. 진짜 대환난은 교회에 참된 구원의 말씀이 없어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죽어 넘어지는 것 이 대환난이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까마귀의 복음과 과부의 복음이 넘쳐 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천사의 복음이 없고 아침의 복음이 없기에 교회마다 성도의 시체들로 넘치고 있다. 이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대교회 100여년 정도 사도들의 복음 시대 외에 거의 2천여년 동안의 모든 교회가 거의 그런 상태 였다. 지난 2천여년 동안 셋째 광주리의 떡이 죽임을 당하고 있었으니 그 2천년의 시대가 모두 대환난의 어둠의 시대가되 는 것이다.

요셉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옥에 같힌 것처럼 지난 2천년 동안 예수의 말씀도 모함을 받고 짓밟히며 내쫒김을 당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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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예수의 피의 복음은 옥에서 풀려나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 으나 예수의 셋째 광주리의 말씀은 아직도 계속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며 어둠 속에 같혀 있다.

이와 같이 요셉의 옥살이는 말씀의 떡이 잘못 해석되고 죽 임을 당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수의 옥살이다. 하나님의 입장 에서 보면 이보다 더 큰 환난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인 말씀 이 옥살이를 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2천년 동안 지속되니 하나님의 섭리에서 이보다 더 큰 환난이 어디에 있는가. 이러 한 환난은 하나님이 창세 이후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환난 이며 앞으로도 없을 대환난이다.

그래서 마태는 말하기를“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 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 라” (마24:21)고 증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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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장

2014년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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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림의 봉인

성경에는 아직 많은 말씀들이 봉인으로 덮혀 있다. 그 많은 봉인 중에 최고의 봉인은 재림의 봉인이다. 재림의 봉인은 모 든 봉인과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봉인을 푸는 열쇠다. 그래서 재림 봉인이 풀리면 자동으로 많은 봉인이 풀리게 되며 재림 을 통해 성경의 모든 비밀과 봉인들이 열린다.

그러면 재림의 봉인은 언제 풀리는가. 앞서 말했듯이 재림 의 봉인이 풀리는 시점은 인류 역사 7천년이 시작되는 때다. 인류 역사가 7천년기에 접어들 때 재림의 비밀이 열려 진다. 그렇지만 초림의 역사가 4천 1년이 아닌 4천 30년에 나타났 듯이 재림 역시 정확히 6천 1년이 아닌 조금 더 지난 시점에 일어난다.

재림의 봉인이 풀리는 때는 주님의 7의 말씀이 나타나는 때 와 일치한다. 7의 구원의 말씀은 지난 2천여년 동안 방치되고 버려져 왔다. 그러나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가 되 었듯이 지금껏 버려져 왔던 7의 복음 역시 이제 어둠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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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깨고 나와 찬란한 빛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 7의 복음이 어느 때 나타날지에 대하여 미리 계 획하고 준비하셨다.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나타날지에 대하 여도 성경에 미리 증거하였다. 그리고 그 비밀 계획을 요셉의 생애 안에 봉인으로 감추어 두셨다. 이제 요셉의 생애 안에 담긴 7의 말씀이 나타나는 때와 시간을 추적해 보자.

2. 바로의 꿈

요셉이 감옥에서 나오는 때는 두 관원장의 꿈을 해몽한 후 만 2년이 지나서다. 요셉이 감옥에서 꿈 해몽 사건을 겪은지 2년이 된 어느 날 그는 바로 왕의 부름을 받고 왕의 꿈을 해 몽하기 위해 감옥 문을 나선다. 그 때 바로 왕은 매우 이상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해석하기 위해 근심하던 중 포도주 관원장 의 추천으로 요셉을 부르게 되었다.

바로 왕이 꾼 꿈의 내용은 이러하다. 바로가 꿈에 나일 강에 서 보니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있는데 이어서 악하고 흉한 일곱 암소가 나타나 처음의 소들을 모두 잡아 먹었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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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가 꿈에서 깬 후 다시 잠이 들었는데 또 비슷한 꿈을 꾸었 다. 이번에는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보이는데 이어 나 타난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이 처음의 이삭들을 모두 삼켜 버 렸다. 바로는 그 꿈이 하도 이상하여 점술가들을 불러 꿈을 해몽하려 하였으나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바로의 꿈 내용을 들은 요셉은 그 자리에서 꿈에 대 한 해석을 내 놓았다. 요셉은 살진 7암소와 충실한 7이삭이 모두 7년을 뜻하며 앞으로 애굽 땅에 7년의 풍년이 있을 것이 라 하였다. 이어 나타난 흉측한 7암소와 마른 7이삭 역시 7년 을 뜻하며 7년의 풍년이 지나면 7년의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7년의 흉년이 나타나면 앞서 있던 풍년의 일 들을 모두 잊게 될 것이며 심지어 흉년 때문에 애굽 땅이 모 두 멸망할 것이라고 해몽해 주었다.

요셉은 앞으로 애굽 땅에 7년의 풍년과 흉년이 있을 것을 말 하며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말하였다. 그는“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창41:34) 그 오분의 일을 각 성읍에 쌓아두어 7년 흉작을 대비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 말 을 들은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요셉의 해석을 기쁘게 여기며 좋아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요셉을 일약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여‘7풍 7흉’ 의 일을 대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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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요셉은 감옥에서 풀려나 하루만에 애굽의 총리가 되 었다. 바로 왕이“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창 41:40)고 말한 것처럼 그는 애굽의 모든 실세를 한 손에 쥔 권 력자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섭 리하신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재림의 일을 미 리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재림의 봉인에 대한 일 들을 미리 증거하기 위해 바로에게 7풍 7흉의 꿈을 주시고 요 셉으로 하여금 그 꿈을 해몽하게 하셨다.

3. 7풍 7흉의 영적 의미

바로가 꾼 7풍 7흉의 꿈에는 재림의 봉인이 들어 있다. 7풍 7흉은 단순히 애굽 땅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7 풍 7흉을 보여주는 예언적 사건이다. 이는 예수의 복음이 애 굽과 같은 이방에 전파될 때 처음에는 7풍 즉 완전한 풍년의 말씀으로 전파될 것이나 그 후에는 7흉 즉 완전한 흉년의 말 씀으로 변질될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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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풍 7흉은 종말의 전무후무한 대환난의 의미를 잘 보여준 다. 처음에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7년 풍년과 같은 복음이니 곧 완전한 복음이었다. 하지만 바로 왕이 떡 관원장을 죽인 것과 같이 이방의 교회들은 완전한 7의 복음을 떡이 없는 포 도주의 복음으로 축소하였다. 그럼으로써 이방교회들은 하늘 의 말씀이 없는 영적 흉년을 당하고 기근과 기갈을 맞게 되었 다. 이같이 떡의 말씀의 없는 흉년의 기간이 2천년 동안 이어 지니 이 일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환난의 실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대환난은 언제 끝나는가. 그리고 대환난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 역시 요셉의 해몽 안에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대환난의 문제가 언제 어떻게 해결 되는가에 대해 요셉의 해몽을 통해 미리 보여주셨다.

먼저 대환난의 문제가 언제 끝나는가를 살펴 보자. 그 때는 요셉이 감옥에서 나오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요셉은 떡 관원 장이 죽은 후 만 2년이 지날 때 감옥에서 풀려 난다. 이는 예 수께서 초림의 복음이 전파되고 떡의 말씀이 죽은 후 2천년 이 지나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상징한다. 요셉의 출옥은 예수 의 출옥이고 말씀의 출옥이며 예수께서 다시 세상에 나타나 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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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왕은 요셉이 출옥할 그 시점에 정확히 맞추어 꿈을 꾼 다.“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창41:1)이라는 기록처 럼 바로는 떡 관원장 사건 이후 만 이 년이 될 때 7풍 7흉의 꿈을 꾼다. 이것은 떡의 말씀이 죽은 후 2천년이 찰 때 모든 일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을 암시한다. 드디어 2천년의 기한 이 차면 떡의 말씀이 죽임을 당한 것과 대환난에 관한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대환난의 전모가 드러날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는가. 그 해결의 열쇠는 요셉이 제시한“일곱 해 풍년에 애 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라” (창41:34)는 말씀 안에 들어 있 다. 요셉은 7년 풍년의 양식 중에서 1/5을 따로 모으라고 말 한다. 그것은 풍년의 양식을 5등분하여 그 중에 4를 먹고 1을 저장해 놓음으로 영적 흉년을 준비하는 비책이다.

요셉은 7년 풍년의 양식을 5로 환산하며 그것을 다시 1과 4 로 구분하라고 한다. 요셉은 왜 풍년 양식을 5등분하며 왜 그 것을 다시 1과 4로 구분하는 것일까? 그것은 5와 14의 수 안 에 대환난을 해결하고 재림을 예비하는 봉인이 숨겨 있기 때 문이다. 이 5와 14, 그리고 1/5의 수야말로 봉인 중의 봉인이 니 곧 재림의 봉인을 푸는 핵심 열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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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과 4의 영적 의미

1) 5는 하늘의 양식

그러면 우선 5의 의미부터 살펴 보자. 5의 의미는 그리 어렵 지 않다. 요셉이 말하는 5는 7에서 온 것이며 7의 양식을 환 산한 것이기에 5와 7은 서로 같은 의미다. 말하자면 7의 양식 과 5의 양식은 숫자만 다를 뿐 그 의미와 본질이 같다.

요셉이 말하는 7의 양식은 달리 말하면 완전한 양식이며 하 늘의 양식이다. 이런 양식은 하나밖에 없으니 곧 완전한 복음 의 양식을 말한다. 이 점에서 7을 5로 환산한 5의 양식 역시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 5의 양식도 하늘의 양식을 뜻하며 완 전한 복음의 양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굳이 7의 양식을 5의 양식으로 바꾸시 는걸까. 7과 5가 같은 의미라면 그냥 7의 양식에서 일부를 떼 면 되는데 굳이 7을 5로 바꾸며 1/5을 저장토록 하시는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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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하나님이 5의 수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특별 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7과 5에 대한 말씀을 주의해서 보면 두 수의 사용법 에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요셉은 풍년의 양식을 전체적으로 언급할 때 7이라는 수를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7 의 양식은 하늘의 양식 전체를 상징한다. 반면에 5의 양식은 하늘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구분할 때 사용되고 있다.

요셉은 하늘의 7의 양식을 둘로 구분하려는 목적 때문에 5 의 수를 사용하며 5를 통해서 하늘의 양식을 1과 4로 나눈다. 따라서 5의 수는 하늘 양식을 표현하는 수이며 또한 하늘 양 식을‘둘로 구분하는 수’ 임을 알 수 있다.

2) 1과 4의 두 양식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3의 수를, 이삭을 통해서는 7의 수를 보여준 것처럼 요셉을 통해서 5의 수를 보여주신다. 창 세기에 기록된 요셉의 삶을 보면 그 중심에 5의 양식이 있으 며 그의 생애는 5의 양식을 증거하기 위한 생애라 해도 과언 이 아니다. 그는 7의 양식에 대한 해몽으로 일약 애굽의 총리 가 되었고 그것을 5의 양식으로 셈하여 온 땅은 물론이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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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엘과 열두 지파까지 구휼할 수 있었다. 이로 보아 요셉의 사명은 하늘 양식을 증거하는 것이며 특히 그는 5의 양식을 증거하기 위한 사역자임을 알 수 있다.

요셉은 7의 양식을 5의 양식으로 전환한 후에 그것을 다시 1과 4의 양식으로 나눈다. 그런 다음 4는 먹되 1의 양식은 먹 지 말고 각 성에 저장해 놓으라고 한다. 이는 5 안에 두 양식 이 있으며 그것이 1과 4로 구분됨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요셉은 왜 5의 양식을 1과 4로 구분하는가. 그것은 완전한 하늘의 양식에 두 종류가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곧 1과 4의 두 양식이 있는데 이는 어려운 의미가 아니다. 이 두 양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양식을 말함이 니 곧 예수의 피와 살을 의미한다.

하늘의 두 양식인 예수의 피와 살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 수적인 양식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바싸르 의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하는 것이 곧 예수의 피의 양식이다. 그리고 다시금 네페쉬의 상태에서 벗 어나 루아흐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하는 것이 예수의 살의 양식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하는 두 양식이 있으며 이 두 양식을 가리키는 수가 바로 1과 4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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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원의 능력을 주는 수

이와 같이 하늘의 완전한 양식인 5 안에는 두 양식이 존재 한다. 우리의 구원의 양식이신 5의 예수는 그 안에 4와 1의 양 식을 품고 계신다. 곧 4의 바싸르에서 구원하는‘육체의 피’ 와 1의 루아흐로 구원하는‘진리의 말씀’ 을 갖고 계신다. 따 라서 1과 4는 모두 예수를 상징하며 특별히‘구원의 양식’ 이 신 예수를 증거하는 수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3이나 7 대신 5의 수를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 기에 있다. 하나님이 3과 7의 수를 보여주신 이유는 구원의 과정과 단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구원에는 크게 3과정이 있 으며 4, 2, 1의 단계로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3과 7을 사용하신다. 이렇게 3과 7이‘구원의 약도’ 를 보여주는 수라 면 5는 그 길을 가는데 필요한‘구원의 양식’ 을 보여주기 위 한 수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구원의 3과 7을 이루고 성취하는 능력 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5의 양식에서 온다. 곧 예수의 말 씀과 피에 해당하는 14로부터 온다. 이 14의 두 양식을 먹을 때 우리는 3과 7의 모든 과정을 걸을 수 있는 에너지와 힘을 얻는다. 이렇게 모든 구원을 성취하는 힘이 5의 양식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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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14를 구원의 길을 걷는데 필요한 양 식의 수로 사용하신다.

5. 예수의 수 14

이제 요셉의 해몽 사건에 등장하는 5와 14의 수가 모두 예 수를 상징하는 수임이 분명해졌다. 예수의 수가 14라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거되는 진리인데 그 증거가 되는 말씀 중에 몇 구절을 살펴 보자.

1) 에덴의 예수의 수

성경에서 1과 4에 대한 말씀이 처음 나타나는 곳은 창세기 의 에덴이다. 에덴에는 한 강이 있는데 그 강의 물이 온 땅에 흘러 적신다.“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 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라는 말씀과 같 다. 창세기 기자는 에덴에 강이 있고 그 강이 네 지류가 되어 온 땅에 물을 준다고 한다. 이는 하나의 강과 네 지류를 말하 는 것이니 곧 14의 물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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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4의 물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에덴동산의 물이며 온 땅의 근원이 되 는 물이다. 이런 물은 하나 밖에 없다. 이는 땅의 생명의 물이 며 말씀의 물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에덴에서 나오는 14의 물 은 예수를 상징하는 14의 구원의 물과 같다.

2) 어린 양 예수의 수

성경에서 14의 수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유월절 절기 를 통해서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을 때 14일 해 질 때에 양을 잡으라고 하신다.(출12:6) 하나님은 왜 굳이 14일 에 양을 잡으라고 하실까. 1일이나 10일 아니면 보름에 잡으 면 외우기 쉬울 텐데 왜 수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14일에 잡 으라 하실까.

그것은 14라는 수가 어린 양이신 예수와 깊이 관련된 수이 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 양 예수의 피와 살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그 피를 통해 4의 바싸르에서 벗어나며 그 살을 먹고 1의 신성의 존재로 구원을 받는다. 말하자면 어린 양이신 예 수의 살과 피인 14를 통해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하 나님께서는 예수의 살과 피를 기념하기 위해 14일에 어린 양 을 잡으라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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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의 말씀의 수

신약에도 14라는 수가 기록된 말씀이 있다. 요한은 요19장 에서 이렇게 기록한다.“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 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 라” (요19:23)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를 때 로마 군인들이 그 옷을 취하였다. 그리고 겉옷을 네 조각으로 만들어 나눠 가졌는데 속옷은 바느질이 없는 통으로 된 옷이므로 그 옷은 제비를 뽑았다. 이 말씀을 보면 속옷 1에 겉옷 4, 즉 14를 보 여주는 설명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옷이란 의의 옷이요 구원의 예복을 상징한다. 따 라서 예수의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닌 말씀의 옷을 뜻한다. 그 리고 예수의 옷이 겉옷과 속옷으로 나뉜 것은 예수의 말씀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있고 속에 감추인 부분이 있는 것을 보 여 준다. 여기서 겉에 드러난 옷은 칭의의 말씀, 저녁의 복음 인 4를 말하는 반면 속에 감추인 옷은 신령한 말씀, 아침의 인 1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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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4는 어린 양과 예수 를 의미하며 또한 그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 의 말씀은 겉옷과 같은 초보의 말씀 4가 있고 속옷과 같은 깊 은 말씀 1이 있다는 사실이다.

4) 휘장의 수 14

성막 안에도 예수의 수 14가 존재한다. 성막에는 예수의 겉 옷과 속옷을 상징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첫째 휘장과 둘째 휘장이다. 먼저 성막의 첫째 휘장은 예수의 겉옷과 같으 며 칭의의 휘장과 같다. 칭의의 휘장은 온 땅의 교회가 열렬 히 환영하는 죄 사함의 휘장이며 포도주의 4의 휘장이다. 이 첫째 휘장은 누구든지 믿고 세례만 받으면 쉽게 통과할 수 있 는 휘장이다. 그저 육의 믿음, 종교적인 믿음, 인간적인 초보 의 믿음만 있어도 쉽게 그 휘장을 지나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이와 달리 성막의 둘째 휘장은 예수의 속옷과 같으며 성화 의 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아무나 쉽게 받는 은혜가 아니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깊은 은혜를 보 여 준다. 이 은혜를 받으려면 제비뽑힌 로마 군병이 그 옷을 취한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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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의 속옷은 특별하고 거룩한 날 대제사장이 열 고 들어가는 둘째 휘장의 은혜와 같다. 둘째 휘장은 초보의 은혜가 아닌 신령하고 온전한 은혜이며 육의 믿음이나 종교 적인 믿음으로 받을 수 없으니 오직 견고한 영의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모름지기 참된 성도는 이 둘째 휘장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겉옷의 말씀인 4 뿐만아니라 더 깊고 어 려운 속옷의 말씀인 1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옷이 하늘 천국의 예복이 되고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는 완전한 영의 옷 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 14의 옷을 모두 갖추지 않으면 우리 는 하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6. 왕같은 제사장

이제 14의 의미가 무엇이며 1과 4의 말씀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졌다. 은혜는 다 같은 은혜가 아니니 1과 4의 은혜가 다르고, 말씀도 다 같은 말씀이 아니니 1과 4의 말씀이 각각 다르다. 곧 복음에도 14가 있고 구원에도 14의 두 구원이 있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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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사장의 수 4

그러면 4의 은혜와 구원에 대해 좀 더 살펴 보자. 4의 은혜 는 한 마디로 말해 포도주의 은혜요 죄 사함의 은헤다. 4의 은 혜는 인간을 바싸르에서 구원하는 것이니 그것은 너무도 쉽 고 단순한 초보의 구원이다.

또한 4는 땅의 4천년을 대속하는 피의 수다.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 4천년을 씻으셨으니 4의 수는 예 수의 제사장 사역을 표상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 완전 한 피의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의 직분을 완전히 이루셨으니 그는 4의 죄를 씻고 4의 바싸르를 구원하는 대제사장이다.

2) 왕의 수 1

4와 달리 1의 수는 더 온전한 은혜와 구원을 상징한다. 이것 은 초보의 은혜와 구원이 아닌 완전한 은혜와 구원이다. 4의 은혜를 받은 자는 다시 한 번 1의 은혜를 받음으로 히브리서 가 말한대로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 데로 나아 가는” (히6:2) 자가 된다. 이 1의 은혜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온전한 하늘의 루아흐의 성도가 되며 왕같은 존재로 거듭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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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그래서 1은 성도가 왕이 되어 왕노릇하는 천년왕국의 수와 같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땅에서 완전한 삶을 살고 죽 으시어 우리가 왕이 되는 길을 개척하셨다. 주님은 가장 먼저 왕의 사역을 이루시고 모든 네페쉬에 속한 성도들도 왕이 되 도록 인도하시니 그는 1의 사역을 이끌고 완성하시는 1의 메 시아다.

이렇게 1은 왕의 수요 4는 제사장의 수이니 14는‘왕같은 제 사장’ 의 의미가 된다. 또한 예수께서 성도를 이끌어 왕이 되 게 하시니 14는 왕같은 제사장이 된 성도를 의미한다.

14에는 왕과 제사장 뿐만아니라 선지자의 의미도 들어 있 다. 성도가 왕의 루아흐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4의 바싸르 와 2의 네페쉬의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2의 네 페쉬의 과정을 통과하게 만드는 것이 선지자의 사역이다. 예 수께서는 이 선지자의 사역을 위해 3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 치며 본을 보이셨다. 그런 후에 그들을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14의 존재가 되게 하셨다.

따라서 왕같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4와 2의 과정을 모두 마친 것을 의미한다. 왕의 수 1을 가진 자는 당연히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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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 수 4와 선지자의 수 2를 함께 가진 자다. 이렇게 14는 그 안에 2의 의미까지 포괄하고 있으니 14의 수는‘1(2)4’ 로표 현할 수 있으며 또는 14와 7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제 14 안에 감추인 수의 비밀과 봉인이 드러났다. 14는 바 로 메시아의 수와 같다. 14는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사역을 성 취한 예수를 나타내며 왕같은 제사장인 거룩한 성도를 표상 한다. 바싸르의 4, 네페쉬의 2, 루아흐의 1의 모든 일을 거룩 하게 성취한 7의 예수와 그 성도들을 가리키는 봉인의 수가 바로 14다.

7. 성육신의 수 5

성경에서 14인 예수는 종종 5로 표현되기도 한다. 성경이 5 를 사용하는 이유는 1과 4의 합이 5가 되며 이를 통해 예수가 증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모습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바싸르처럼 피를 흘리셨으니 그 겉 모습이 4다. 반면에 그 속에는 하늘의 신성과 능력이 충만하니 속의 모습 은 1이다. 그리하여 14는 예수의 겉과 속, 육신의 모습 4와 신 성의 모습 1을 함께 보여주는 수가 된다. 말하자면 말씀이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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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입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성경은 특별히 성육신 의 예수를 표현할 때 5라는 수를 사용하고 있다.

1) 번제단과 5

성막의 뜰에는 번제단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가 5 X 5로 되어 있다.“조각목으로 번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는 다섯 규 빗이요 너비도 다섯 규빗이라 네모가 반듯하고 높이는 세 규 빗이며” (출38:1) 라는 기록과 같다. 그러면 왜 번제단의 가로 와 세로는 5 X 5의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인가. 그것은 번제단이 성육신의 5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며 그 은혜가 땅의 사방에 퍼지기 때문이다.

또한 번제단의 높이가 3규빗인 것은 5의 성육신을 통해 이 루는 구원이 3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 3의 구원은 메시아의 세 구원인 제사장, 선지자, 왕의 사역이니 이것은 5의 예수의 사역과 같다. 이렇게 보면 번제단의 3과 5 역시 예수의 사역 과 그의 은혜를 상징하는 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래 번제단의 크기는 5, 5, 3이지만 5, 5, 5로 말해 도 의미가 다르지 않고 다시 777로 바꾸어 표현해도 그 본질 이 달라지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1, 3, 5, 14, 7 등의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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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동일한 예수를 표현하는 수이기 때문이다.

2) 방주와 5

성경에서 번제단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노아의 방 주다. 방주의 크기를 보면 번제단과 비슷하게 3, 5, 3으로 되 어 있다.“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창6:15)는 기록과 같다.

여기서 방주의 높이는 삼십 규빗이고 3층으로 되어 있다. 이 역시 3의 구원을 표현하기 위함이며 그 의미는 7과 같고 5와 동일하다. 방주의 길이는 300이요 넓이는 50인데 이는 배의 구조상 번제단과 같은 정방형으로 할 수 없어서 장방형으로 만든 까닭이다. 그 길이가 300인 것은 3의 구원을 증거함이 요, 그 넓이가 50인 것은 5의 성육신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함 이다. 이처럼 성경의 수 3, 5, 7은 그 의미와 본질이 동일하니 모두 예수와 그의 구원을 증거하기 위한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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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령의 5

예수께서는 부활 후에 바로 승천하지 않고 이 땅에 40일을 머무셨다.“그가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 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3)는 기록과 같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40일을 계셨던 것일까. 그것은 기록된 말씀대로 제자 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으로 가르치기 위함이다. 하 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본래 예수의 초림은 바싸르를 위한 것이요‘피의 구원’ 을 위한 것이다. 그 일을 위해 4천년을 기 다리고 그 피를 흘려 4방으로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부활 후 에도 40일을 땅에 머무셨다. 하지만 예수는 40일 이상을 땅 에 머무실 수 없다. 그의 초림은 4의 사역을 위한 것이기에 4 의 기한이 차면 더 이상 땅에 머무를 수 없다.

그러면 땅의 성도들을 왕같은 존재로 만드는 떡의 구원 즉 1의 신성의 구원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예수는 그 1의 구 원을 위해 성령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4의 사역을 완 결하는 40일에 승천한 후 50일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 셨다.

이에 따라 예수의 승천 후 10일이 지난 오순절에 성령이 강 림하셨다. 예수의 승천에 10일을 더한 50일에 성령이 강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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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성령께 1의 사역을 의탁 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피의 사역 4에 성령의 진리의 사역 1 을 더하여 예수의 사역을 완성하고 그의 재림을 준비토록 하 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제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헤아리는 수의 기본적 인 비밀들이 모두 드러났다. 먼저 초림 예수는 성육신의 5의 모습으로 땅에 임하셨다. 그는 죄없는 네페쉬의 2의 모습으 로 임하였고, 바싸르의 4의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신성의 말씀이 충만하니 그는 본래 1의 신성의 하 나님이시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의 양식인 피와 진리를 받아 먹는 자에게는 자신의 신성 1까지 허락하신다. 그리하여 자신 과 같은 완전한 7의 존재가 되게 만드신다.

초림의 예수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주셨다. 곧 육체의 생명의 피 4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1을 주셨다. 하지만 땅의 인간들은 4의 은혜는 쉽게 받으나 하늘의 신성의 말씀 1은 쉽게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초림의 4의 사역을 모두 마쳤기에 부활 후 40일 이상은 땅에 머무실 수 없었다. 예수의 남은 1의 사 역은 성령의 사역이 되어야 하기에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진리의 속옷을 입히는 1의 사역을 위해 강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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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는 성도들이 어서 속히 1의 말씀을 소화하여 14의 성도가 되고 5의 예수처럼 되도록 역사하셨다. 그러나 땅의 어리석은 성도들은 신성의 말씀 1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 다. 그 말씀을 이해하기는 커녕 도리어 1의 말씀을 왜곡하고 짓밟으며 성령을 거스리고 훼방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순식 간에 교회 안에서 1의 말씀이 변질되고 소멸되는 가운데 4의 말씀만 남게 되었다.

4) 1/5의 저장

오늘날 땅의 교회에는 가는 곳마다 4의 복음이 차고 넘친다. 4의 복음은 카톨릭이나 러시아 정교에도 있고 개신교에도 있 다. 하지만 신성의 1의 말씀이나 온전한 5의 말씀 혹은 3의 구 원이나 7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찾을 수 없다.

신성의 1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방치되고 잊혀졌으며 자동 으로 깊이 숨겨져 저장되었다. 교회들이 1의 말씀을 발견치 못하고 먹지 못함으로 그 말씀은 깊은 굴 속에 묻힌 포도주처 럼 2천년 동안 잊혀진 말씀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요셉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요셉 은 풍년의 양식 중에서 4는 먹되 1은 저장하여 흉년의 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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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하라고 하였다. 이같은 요셉의 말은 성령 안에서 성취되 었다. 성령께서는 지난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1의 말씀을 보호하고 저장하시어 마지막 때를 준비하셨다. 성령의 보이 지 않는 손이 1의 말씀을 감추고 보호하고 저장함으로 현재까 지 이르게 하였다.

그래서 7천년이 시작되는 오늘날 드디어 그 1/5의 양식, 신 성의 1의 말씀을 다시 꺼내신다. 그 1의 말씀을 꺼내어 완전 한 7의 흉년이 닥친 오늘의 교회에 하늘의 양식을 주어 구휼 하신다. 이 양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초림의 풍년 때 부터 있던 예수의 말씀이요 사도들의 말씀이다. 그 중에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던 1/5의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그 오래 묵 은 맑은 포도주와 같은 깊은 말씀을 이제 다시 꺼내 주신다. 그 1의 말씀으로 칭의의 4의 구원에 갇혀 있는 자들을 구휼하 시며 저들을 성화의 구원을 이루는 자들로 구원하신다.

8. 왕의 장막절

1의 신성의 말씀, 14의 완전한 말씀, 5의 성육신의 말씀은 아무 때나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땅에 완전한 흉년이 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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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마지막 때에 나타난다. 그 때가 되면 종말의 날이 시작됨 과 동시에 감추인 1의 말씀이 증거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종 말과 1의 말씀의 임함을 땅의 교회에 널리 알리는 것이 성경 의 나팔절이다. 나팔절은 이 1의 말씀이 출현하는 것을 온 세 계에 알리는 종말의 절기다.

종말의 절기는 가을의 3절기를 말한다. 나팔절을 필두로 대 속죄일, 장막절의 3절기는 1의 말씀이 결실하는 종말의 절기 다. 이 3절기는 장막절로써 종결되는데 장막절은 1의 말씀과 비밀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성경의 마지막 절기다.

하나님께서는 장막절을 지키는 규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 신다.“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 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이레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민29:12) 이어서 말씀하실 때“너희 번제로 여 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세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열네 마리를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리 라” (민29:13) 하신다.

민29장을 보면 장막절의 기간 7일 동안 번제를 드리는데 수 송아지 13마리, 숫양 2마리, 일 년 된 숫양 14마리를 매일 바 치라 하신다. 이를 7일 동안 바칠 때 수 송아지만 매일 한 마 리씩 줄이라 하신다. 이렇게 수 송아지를 13마리부터 해서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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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한 마리씩 줄이면 마지막 7일 째는 7마리를 드리게 되어 도합 70마리의 수 송아지를 드리게 된다.

성경에서 숫 소 혹은 수 송아지는 국가나 단체, 대표를 상징 하는 제물이다. 따라서 이는 장막절의 절기에 회개하고 돌아 온 나라들을 대표하는 것이며 70나라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70나라는 정확히 70개의 국가일 수도 있으나 거룩한 7의 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 겠다.

하나님은 또 숫양 2마리와 일 년 된 숫양 14마리를 바치라 하는데 여기서 보려는 것은 숫양 14마리에 대한 부분이다. 성 경에서 숫양 14마리를 바치는 곳은 이 곳 장막절 뿐이다. 하 나님은 민28장 이하에서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에 각각 1년 된 숫양 7마리 씩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유독 민29장의 장막절에는 14마리를 바치라고 하신다. 그 이 유는 분명하다. 종말의 장막절이 임할 때 그 때 비로소 14의 예수의 의미가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기에 하나님은 14마리를 바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그 종말의 장막절이 성취되면 땅의 성도들도 14의 예수를 배우고 14의 예수를 닮은 14의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제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시고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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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절에 14마리의 숫양을 드리라고 명하고 계신다.

9. 2014년의 재림

이제 주님이 재림하시는 시기에 대해 알아 보자. 도대체 주 님은 언제 어느 때 땅에 강림하시는가. 이에 대한 본질적인 답은 7풍 7흉의 사건 안에 들어 있다. 7풍 7흉의 사건은 하나 님이 재림의 핵심을 보여주기 위해 만드신 사건이다. 따라서 7풍 7흉을 잘 보면 재림의 시기를 이해할 수 있다.

7풍 7흉은 땅의 교회에 말씀이 없음으로 겪는 환난을 예언 하면서 아울러 환난의 문제가 해결되는 시기도 함께 보여 준 다. 교회에 말씀의 떡이 없는 환난과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참 복음인 1의 말씀이 나타나면 된다. 그 1의 말씀 이 나타나면 그 때가 바로 환난의 시대가 끝나고 주님이 재림 하는 때인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1의 말씀이 나타나려면 꼭 필요한 인물이 있 다. 바로 요셉과 같은 재림의 종이 있어야 한다. 요셉은 재림 예수를 상징하면서 또한 1의 말씀을 관리하고 나누어 주는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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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의 종을 나타낸다.

앞에서 이미 살폈듯이 요셉이 옥에서 나오는 때는 떡 관원 장이 죽음을 당한 후 만 2년이 지나서다. 이는 요셉과 같은 재 림의 종이 나타나기 전에 교회는 2천년의 시간을 지나야 함 을 보여 준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교회는 말씀이 없는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 일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는 가운데 완전한 영 적 흉년의 기근에 빠진다. 하지만 요셉과 같은 말씀의 종이 나타나면 모든 상황이 일시에 반전된다.

요셉같은 종이 나타나면 그는 교회가 당하고 있는 대환난의 실체를 일깨워 준다. 또한 교회가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길 을 가르쳐 준다. 그는 지난 2천년 동안 감추어 있던 1의 말씀 을 나타내며 그 하늘의 떡을 나누어 준다. 그럼으로써 대환난 의 영적 기근이 해결되며 드디어 이 땅에 1의 말씀 곧 왕의 말 씀이 승리하는 재림의 역사가 일어난다.

1) 감추인 만나

교회시대의 2천년 동안 그러니까 7천년이 시작되기 전까지 땅의 교회에는 온전한 말씀이나 온전한 구원을 찾기 어렵다. 하나님께서 그 기한까지 신성의 1의 말씀을 감추고 계신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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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리를 찾고 말씀을 구하는 자들에게 는 언제나 그 말씀을 허락해 주신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어느 때나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 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하나님은 버가모 교회에 편지하시며 이기는 자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겠다고 하셨다. 이는 성도가 제 스스로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기기를 위해서 믿음과 기도로 구하 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기는 자들은 감추인 만나를 받아 먹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감추인 만나는 다름이 아 닌 감추인 1의 말씀이며 1/5의 말씀이다. 이 1/5의 양식을 하 나님은 감추인 만나라고 표현하신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며 또 흰 돌을 주 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흰 돌은 무슨 의미인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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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문화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 다. 당시의 문화에서 흰 돌을 주는 것은 전쟁이나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돌이었다. 또는 법원에서 무죄 판정을 받 은 자에게 의롭다는 증거로 준 것이 흰 돌이다.

성경에서는 종종 돌을 예수로 비유한다. 더군다나 의로움을 증거하는 돌이라면 그 돌은 당연히 예수를 상징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흰 돌을 주신다는 것은 이기는 자에게 예수의 의의 돌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약속하는 의의 돌은 우리가 익히 아는 칭의의 돌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기는 자에게 주는 의의 돌은 견고한 믿음으로 받는 인의와,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 는 완의의 돌이다. 따라서 흰 돌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이기고 승리하는 자들 만이 받는다. 세상과 죄를 이기고 사단의 회까지 이기는 성도들이 감추인 만나인 1의 말씀을 먹 은 후에 받는 돌이 바로 승리의 흰 돌이다.

2) 예수의 새 이름

하나님은 또 흰 돌 위에 새 이름이 있고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 흰 돌 위에 있는 새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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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무엇을 말하며 왜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걸까. 그것은 흰 돌과 새 이름의 은혜가 좁고 협착한 곳에 감 추어진 깊은 은혜에 해당하기에 그렇다. 그와 같이 신령한 은 혜는 그것을 받고 체험한 자 외에 다른 자들은 알 도리가 없 다.

하나님께서 깊이 감추신 은혜를 체험하고 흰 돌을 받은 자 들은 그 위에 쓰인 새 이름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린 양이신 예수의 새 이름이다. 사도요한은 어린 양이신 예수에게 새 이 름이 있다고 증언하는데 그 이름은 흰 돌은 물론이요 성도들 의 이마에도 새겨져 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계14:1)

계시록에 나타난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인을 받아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계14:5) 그들은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데 시온 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성전의 땅이요 완의의 땅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 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의를 가진 자들 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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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써 있다. 그들의 이마에 써 있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 안에 새겨 져 있는 것을 상징한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어린 양의 이 름으로 가득하고 충만한 상태다.

그들의 이마에 써 있는 이름은 받은 자 밖에는 알 수 없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어린 양 예수의 이름인데 사실 그것은 예부터 존재하던 이름이니 새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 지 모르고 있던 이름이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기에 사 람들이 들을 때는 새 이름처럼 듣게 된다.

어린 양 예수의 새 이름이란 에덴의 14, 유월절의 14, 속옷 과 겉옷의 14를 말하며 종말에 나타나는 예수의 새 말씀을 일 컫는다. 종말에 다시 새롭게 전해지는 완전한‘새 복음’ 이있 으니 그것이 곧 예수의‘새 이름’ (New brand)이다.

시온 산의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은 이같은 새 말씀인 감추 인 만나를 받으며 감추인 1/5의 말씀을 먹는 자들이다. 말하 자면 이들은 거룩하고 완전한 말씀을 먹은 자들이다. 이 때문 에 요한은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을 언급한 후 이어 계14:6절 에서 영원한 복음이 전해진다고 증거한다. 이들이 받거나 전 하는 말씀이 곧 완전하고 흠이 없는 복음이기에 요한은 이를 영원한 복음이라고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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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원한 복음

영원한 복음은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이 받고 또 전하는 복 음이다. 이는 14의 말씀 즉 떡과 포도주가 함께 있는 완전한 복음을 일컫는다. 이 14의 복음은 멜기세덱이 들고 나온 떡과 포도주의 복음이며 어린 양 예수의 살과 피의 복음이고 성육 신의 5의 복음이다. 성경은 이 복음을 수로써 표현하며 그것 을 14의 수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14의 말씀과 진리가 곧 어 린 양 예수의 새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들은 14가 숫자일 뿐이지 이름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 다. 하지만 성경은 숫자와 이름을 동일시하고 있다. 예를 들 어 계13:17절에“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7)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보면 짐승의 이름이나 그 수를 같은 것으로 말한다. 짐승의 이름이 곧 수요 수는 또한 표와 같고 표는 짐승의 가르치는 미혹의 교훈과도 같다.

짐승의 이름이나 수는 예수의 이름과 수를 흉내내고 그것으 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수다. 짐승의 수는 짐승의 수의 교리로 써 예수의 이름과 그 수를 파괴하고 왜곡한다. 짐승과 거짓선 지자들은 구원을 말하기는 하나 바싸르와 네페쉬의 구원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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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말하지 못한다. 바싸르의 4와 네페쉬의 2의 구원을 아무 리 완전하게 받는다 한들 6밖에 되지 못하니 짐승의 구원의 수는 아무리 채워봐야 666이다. 루아흐의 1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의 단계를 6으로만 채우고 있으니 저들의 구원의 수는 언 제나 666에 그치고 만다

반면에 예수의 이름과 수는 14와 같다. 14는 완전한 말씀이 고 완전한 복음이다. 14 안에는 신성의 말씀 1이 있기 때문에 바싸르와 네페쉬를 합한 수 6에 더해 완전한 수 7을 이룰 수 있다. 또한 14를 통해 3의 구원을 성취하고 동시에 7의 승리 를 성취할 수 있으니 14는 예수의 이름과 수이며 하나님의 진 리의 수, 말씀의 수가 되기에 합당하다.

뿐만아니라 누구든지 14의 수와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은 3단 계의 구원의 과정을 매 단계마다 7, 7, 7로 완성할 수 있으니 이 14야말로 완전한 복음이며 또한 영원한 복음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왜 2014년이 재림인가

이제 주님은 왜 하필 2014년에 재림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말할 때가 되었다. 주님이 6천년이 지난 7천년의 때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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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다면 그 해는 언제인가. 그 해는 7천년의 첫 해가 되는 서 기 2001년이 아닌 2014년이 되니 바로 올해가 주의 재림의 해 다.

그러면 2014년이 재림의 해가 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실 재림이란 그 해가 몇 년도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치 않다. 재 림의 때를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기준은 요셉이 말한 1/5의 말씀이다. 그 감추인 만나의 말씀, 신성의 1의 말씀이 언제 나 타나는가 하는 것이 재림의 절대 기준이다.

그 해가 2001년이든 2050년이든지 간에 1의 말씀이 나타나 는 그 해가 바로 재림의 해요 주님이 땅에 임하시는 해와 같 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올해 2014년에 1의 말씀이 나 타나게 하셨다. 성도를 온전케하는 1의 신성의 말씀을 이 해 에 증거되고 선포되게 하셨다.

본서가 지금까지 말한 3의 구원과 7의 승리와 5의 성육신의 진리가 바로 1의 말씀이며 신성의 말씀이다. 이같은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니 또한 완전한 7의 말씀이다. 7의 말씀은 완전 한 승리의 말씀이며 루아흐의 왕이 된 자들이 갖는 영원한 이 름과 그 수다.

하나님의 말씀이 7의 말씀이 되고 영원한 말씀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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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필요한 말씀이 곧 1의 신성의 말씀이다. 이 1의 신성 의 말씀이 나타나 땅에 7의 말씀이 증거되고 땅의 성도들에 게 7의 말씀이 전파되는 때가 곧 재림의 때인데 하나님은 올 해 2014년에 이 일들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하필이면 2014년에 7의 말씀을 허락하신 것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먼저 서기 2000년은 구원의 7천년이 시 작되는 해이며 창조의 7일의 아침이 되는 기념적인 해다. 그 렇지만 하나님은 2000년이나 2001년이 아닌 2014년에 7의 말 씀을 선포하신다. 이는 14라는 수가 예수의 수와 그 이름과 그 수에 해당하는 중대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7천년의 시대는 예수의 시대요 재림 예수의 시대다. 그리고 7천년의 시대는 14이신 예수의 시대다.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보이시려고 2014년을 정하셨다. 2000년으로부 터 시작되는 새 천년이 14로 말미암는 재림 예수의 시대인 것 을 보이려고 일부러 2014년을 미리 정하셨다.

또한 14의 말씀이 2천년의 감옥의 시간을 견디고 나타난 승 리의 해인 것을 증거하시려고 2014년을 귀하게 택하셨다.

뿐만아니라 2014 안에는 4와 2와 1의 세 구원의 수가 들어 있다. 이는 2014년에 3단계의 구원이 모두 나타나고 성취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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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2014의 의미는 또 있다. 이 2014는 그 수의 합이 7이다. 4와 2와 1이 있으니 도합 7이 된다. 이는 2014년으로부터 7의 복 음이 증거되며 7의 시대가 열리고 7의 루아흐의 승리가 성취 되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모든 역사가 영광스럽게 완성되는 7의 승리를 선포하고 기념하는 해로써 2014년은 손색이 없는 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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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재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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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의 복음

1) 마지막 복음

2014년은 재림의 해다. 1의 신성의 말씀, 3의 구원, 5의 성 육신의 비밀, 7의 영원한 복음이 완전하게 드러났으니 이 말 씀이 증거될 때 재림의 역사는 성취된다.

이 1 3 5 7의 수는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담은 수다. 이 수들 은 모두 소수로 되어 있다. 소수란 1과 자기 자신 외에는 나누 어지지 않는 수다. 물론 1은 소수는 아니지만 소수의 속성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소수의 근원이 되는 수다. 하나님이 이 1 3 5 7을 택하여 그 안에 진리를 담은 것은 이들이 모두 나누 어지지 않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결코 나누어지거나 쪼개지 지 않고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수를 변치 않는 진리를 상징하는 수로 사용하신다.

1은 모든 시작과 근본을 의미하기에‘하나님의 창조’ 를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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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수다. 3은 구원의 3단계를 모두 완성하신‘예수의 초림’ 을 의미하는 수다. 타락한 창조의 네페쉬를 구원하고 또 다시 루아흐로 구원하는 3단계의 구원을 뜻하는 수다. 5는 예수의 성육신을 뜻하면서 예수의 떡과 포도주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때인‘예수의 재림’ 을 의미하는 수다. 7은 하나님의 모든 역 사를 나타내고 완성하는‘마지막 종말’ 의 수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요21:6) 하셨을 때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 다. 이 수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당시 주님의 영적 위치를 나타내는 수다. 주님은 창조의 하나님 1이요, 초림의 메시아 3이며, 재림주 5인 것을 보여주는 수다. 베드로는 이 때 부활과 동시에 다시 오신 재림의 주님을 만난 것이며 5의 주님을 목격한 것이다.

이전의 베드로는 예수께서 4의 피를 흘리기 위한 분임을 미 처 인식하지 못하였고 1의 창조의 하나님인 것을 알지 못하였 다. 하지만 그는 부활 후의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예수께서 3의 주님이요 5의 재림의 주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때의 주님이 창조, 초림, 재림의 주인 것을 증거하 기 위해 153의 수를 표하였다.

1은 창조와 시작의 수요 7은 종말과 완성의 수다. 의미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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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볼 때 성경은 1을 처음의 수로 7을 마지막 수로 사용한다. 주님께서“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계22:13) 하신 것이 이런 의미다. 주님이 자신을 시 작과 마침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은 곧 1과 7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말씀이다.

이 때문에 계시록의 모든 말씀들이 7의 수로 한정되어 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 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 라” (계1:20)는 기록처럼 모두 일곱이다.

7교회, 7사자, 7별과 촛대, 7영, 7등불, 7인, 7나팔 7대접 등 모든 것이 일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일곱 천사가 일 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 것으로 마치리로다” (계15:1)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모든 역사 는 7의 단계에서 끝난다. 이는 하나님께서 7의 수를 모든 일 을 마치는 완결의 수로 사용하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은 7째 천사를 통해 완전하게 나타난 다.“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 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 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계10:7)는 기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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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7째 천사가‘소리를 낸다’ 는 헬라어‘프호네’ 는‘연 설하다’ 는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7째 천사가 음성을 발하여 말씀을 전할 때 7째 나팔이 울리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는데 그 비밀은 다른 것이 아닌 선 지자들을 통해 전하신 복음의 비밀과 똑같은 내용이다.

7째 천사의 소리는 천사의 소리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 자의 소리다. 하나님이 택하신 종을 통해 7째 나팔을 불게 하 시는데 그 강연과 설교를 통해 나오는 것이 바로 7의 소리이 며 7의 말씀이다. 이 7의 말씀으로 그 동안 감추어 있던 복음 의 모든 비밀들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곧 그의 사역으로 완전 하고 영원한 복음이 나타나며 세상에 전파된다.

7의 천사가 전하는 나팔 소리는 하나님이 봉해 두신 7우레 의 말씀이 열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일곱 우레의 소리를 발하신 후에“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 지 말라” (계10:4)고 하셨다. 그래서 일곱 우레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은 일곱 우레에 대해 인봉한 것을 기록하면서 왜 그것 을 여는 일을 말하지 않는 걸까. 일곱 우레는 계10장의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칠 때 하늘에서 발한 소리다. 그 때 힘센 천사가 말하기를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내며 나팔을 불 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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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비밀이 성취된다고 하였다. 이는 7의 천사가 말씀을 전할 때 일곱 우레의 말씀도 함께 나타나며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7의 천사의 말씀은 하나님이 감추어 두신 모든 것 이 나타나는 마지막 말씀이요 마지막 복음의 소리다. 이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더할 복음이 없으니 복음의 모든 말씀이 이 것으로 마쳐진다. 곧 하나님의 복음은 7의 천사가 전하는 7의 우레로 끝나는 것이니 7의 우레는 7의 말씀과 같고 마지막 복 음과 같다. 이로써 하나님의 135의 진리의 수는 7의 마지막 수가 더해져 1357로 완결된다. 7의 말씀은 최후의 마지막 복 음이요 끝의 복음인 셈이다.

2) 5배의 복음

7째 천사의 나팔 소리는 7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소리다. 이 나팔 소리는 요셉과 같은 재림의 종이 나타나 7의 완전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과 같다. 이 재림의 종은 7의 말씀으로 하 나님의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하고 7의 흉년을 이길 수 있도 록 이끈다. 그런데 재림의 종이 전하는 말씀은 다른 것이 아 니라 요셉이 저장해 놓은 7년 풍년의 말씀이니 곧 초림 때 전 한 사도들의 복음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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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의 복음을 통해 이 땅에 주님의 재림이 임하면 많은 성도 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7의 양식을 받아 먹는 역사가 일어난 다. 마치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풍년의 양식을 얻어 먹듯이 땅의 교회들은 7의 종을 통해 영의 양식을 받아 먹는다. 그런 데 요셉이 형들에게 풍년의 양식을 나누어 줄 때 그들의 음식 을 베냐민의 음식과 차별하여 제공한다.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 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 였더라” (창43:34) 이 말씀처럼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의 동생 인 베냐민에게 5배의 음식을 주고 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 미가 감추어 있다.

요셉이라는 재림의 종이 나타날 때 요셉의 형들과 같은 자 들 즉 이미 믿고 있는 성도들은 4의 포도주의 양식을 먹은 상 태다. 이들은 다시 4의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으며 1의 말씀 만 더하여 먹으면 된다. 그것으로 5의 말씀을 채워 맛있게 먹 고 7의 승리를 받으면 된다.

반면에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과 같은 자들 즉 요셉이라는 재림의 종이 나타난 이후에 믿음을 시작하는 세대들은 굳이 하늘 양식을 4와 1로 나누어 받을 필요가 없다. 요셉 이후에 출현하는 믿음의 세대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복음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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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5의 양식을 받아 먹는다. 이들은 이전의 성도들과 달리 4의 포도주의 은혜와 1의 신성의 말씀을 동시에 받으며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요셉이 동생 베냐민에게 5배의 음식을 준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을 예표하는 상징이다.

요셉은 5의 양식을 모두 먹은 형제들에게 옷도 나누어 준다.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 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창45:22) 라는 기록과 같다. 여기서 도 마찬가지로 형들에게는 1벌 옷을 주되 동생 베냐민에게는 특별히 5벌의 옷을 준다. 이 역시 요셉 이후의 세대는 처음부 터 5의 말씀을 배우며 예수께서 주시는 5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을 표상한다.

그런데 요셉은 베냐민에게 5벌의 옷과 함께 은 300을 더해 준다. 요셉이 주는 은 300 역시 영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 다. 그것은 3의 구원을 말하며 3단계의 복음을 가리킨다. 요 셉이 나타나기 전까지 교회와 성도들은 3의 구원을 듣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셉의 동생 즉 요셉 이후에 믿음을 배 우는 성도들은 처음부터 구원이 3단계인 것을 배우며 은 300 개로 상징되는 3단계의 완전한 복음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 을 받아 열심히 남길 때 금 300개와 금700개의 열매로 결실 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7의 성도, 완전한 성도로 인정을 받 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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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의 회복

은 300의 복음은 이미 초림의 때에 이스라엘에게 전해졌던 복음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지 않고 그 포도주와 떡을 이방인에게 팔아 버렸다. 또한 초림의 복음을 받은 이방 인들은 포도주는 받되 떡의 복음을 옥에 가두고 죽이고 일을 행하였다.

그 후로 2천년이 되었을 때 동방으로부터 요셉과 같은 재림 의 종이 나타난다. 재림의 종은 동방의 독수리요 동방의 의인 이며 동방의 왕이다. 재림의 종은 은 300의 말씀으로 연단을 받아 7의 말씀으로 승리한 루아흐의 성도이니 그가 바로 동 방의 하나님의 종 고레스 왕이다.

이사야는 고레스에 대해 말하기를“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사44:28) 하며 증거하였다. 이사야 가 말하는 고레스는 종말의 고레스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 의 목자이며 하나님의 모든 기쁨의 일들을 성취하는 7의 목 자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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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으로부터 나타난 재림의 종 고레스는 자신이 받은 7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며 7의 나팔 소리를 우레처럼 울리도록 한다. 그러면 온 땅에 7의 말씀을 알지 못하던 이방의 교회들 이 돌이켜 회개하며 충만한 수가 채워진다. 이는 바울이“이 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 게 된 것이라” (롬11:25)고 증거한 것과 같다.

여기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란 많은 수의 의미도 있으나 많 다는 것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충만’ 에 해당하는 헬라어‘플레로마’ 는 충만과 함께‘완성’ 이란 뜻이 있다. 따 라서 이방인의 완전한 수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해석하 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그들 의 수보다 그들이 7의 온전함을 받은 성도의 수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초림의 복음이 이방에게 전파된 후 이방의 복음은 다시 이 스라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종말의 회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만일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이 방의 복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스라엘 로 돌아가는 이방의 복음은 완전함이 채워진 복음, 7의 복음 이 되어야 하며 7의 복음으로 충만한 이방의 복음이 이스라 엘을 구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바울이 말한 바“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11:26)는 말씀이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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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으로 팔려간 초림의 복음은 이방으로부터, 정확히 말하 면 동방 땅끝으로부터 7의 완전한 복음이 되어 이스라엘로 다 시 들어 간다. 이 7의 복음은 이스라엘이 버린 초림 예수의 복 음이며 초림 때 죽으신 예수의 살과 피다. 이 7의 완전한 복 음을 동방의 목자인 고레스가 이스라엘에 전파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7의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가 이내 그것이 자신들이 창으로 찌른 예수의 복음인 것 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죽인 주님을 다시 바라보며 통곡하고 회개한다.

이는“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 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 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계1:7)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요셉은 그의 형들 앞에 섰을 때 애굽의 옷을 입고 애 굽 사람처럼 말을 하였다. 그래서 형들은 그가 요셉인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였고 다만 애굽의 총리인 줄로 알았다. 그런 데 이방 사람인줄 알았던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 팔아버린 요 셉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리둥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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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모습이 완전히 이방인과 같았으므로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은 재림의 모습을 그대로 표상해 준다. 재림의 때에 이스라엘에 전해지는 것은 그들이 팔아 버린 예수가 전해진다. 그런데 동방 땅끝에서부터 전하 는 예수는 그 모습이 완전히 이방인처럼 보이고 이방의 종교 처럼 보이기에 이스라엘이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나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야 동방에서 온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의 말씀인 것을 알고 회개하고 통곡 한다. 자신들이 팔아 넘기고 창으로 찔러 죽인 그 예수가 다 시 나타나 하늘의 왕으로 임하신 것을 보고 회개의 눈물을 쏟 아낸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동방으로부터 오시는 7의 예수를 통해 다시금 회복의 은혜를 받는다. 동방 땅끝에서 전하는 재림 예 수를 만남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나타난다. 이사야가 고레스에 대해 말한 것은 바로 이같은 역사를 예언 하기 위함이다. 이사야는 사44장에서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 으로 소개한 후에 45장에서 고레스에 대해“내가 나의 종 야 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 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 45:4)고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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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증거대로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위해 지명을 받고 세움을 받은 하나님의 목자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 나 하나님은 그에게 칭호를 주셨다. 곧 동방의 의인이며 동방 의 왕이라는 칭호를주셨다. 그가 동방의 왕인 것은 그가 완전 한 7의 말씀을 받고 땅끝 동방에서 왕같은 제사장의 존재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루아흐의 왕이 된 고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다.“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 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사45:1) 이렇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고레스는 열국과 싸워 이기며 이스라엘로 들어 간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게 7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니 이 사야가 사45장 중반에서 말한 바“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 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 (사45:17)는 말씀이 성취된다. 이사야가 말하는 영원한 구원이란 왕같은 제사장이 전하는 완전한 구원이자 7의 구원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역사는 이렇게 완성된다. 이스라엘의 회 복은 동방에서 전해지는 완전한 복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재 림의 종을 통해 성취된다. 저들은 동방의 종 고레스를 통해 영원하고 완전한 7의 말씀을 들으며 7의 예수를 받는다. 그리 하여 이스라엘은 영원한 구원을 받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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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회복을 받는 역사를 이룬다.

3. 재림과 심판의 역사

재림의 말씀이 이스라엘과 온 땅에 전해질 때 땅에는 일곱 대접의 재앙이 쏟아진다.“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 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 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계16:2)는 말씀대로 첫째 재앙 이 짐승의 가르침에 속아 6의 말씀만 고집하는 자들에게 임 한다.

짐승의 표 666을 받은 자들은 7의 말씀을 듣고 회개치 않은 완악한 자들이다. 저들은 1의 신성의 말씀을 부인하고 4와 2 의 구원에 매달려 재림의 주님을 반대하고 훼방한다. 저들은 예수를 믿되 4와 2의 예수 만을 믿고 고집하며 1의 예수를 거 부하며 죽이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더 이상 그냥 두 지 않으신다. 저희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게 하여 저희의 불순종을 심판하신다.

또한 거짓선지자를 동원하여 7의 말씀을 훼방하는 짐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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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거지를 용서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마지막 일곱째 재앙을 짐승의 본거지인 바벨론에 쏟아 부으신다. 그래서 큰 성 바벨 론이 세 갈래로 쪼개지며 만국의 성들까지 무너지도록 역사 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인 6의 구원에만 매달려 온전 한 7의 구원을 부인하는 자들을 살육하는 기계로 처리하신다. 이에 대해 에스겔은“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 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 고 나아오게 하라” (겔9:1)고 말한다.

에스겔은 성전의 성소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에 속한 불순종 의 성도들을 심판하는 역사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참 믿 음을 가진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 하시며 표가 없는 자들은 모두 쳐서 죽이라 하신다.“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 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겔9:6)는 기록과 같다.

하나님은 살육하는 자들에게 순서를 정해 주셨다. 먼저 하 나님의 성소에서 시작하라 하시며 또한 늙은 자로부터 시작 하라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순서다. 하나님의 심판은 성소로부터 시작한다. 즉 칭의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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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성소에만 머물러 온갖 불순종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시 작한다. 또한 심판은 늙은 자들부터 시작하는데 이들은 성소 안에 있는 장로들과 목사들을 말한다. 이들은 오래 믿고 나이 를 먹어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나 그들의 나이만큼 완악 한 자들이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가장 먼저 죽이신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심판의 첫째 대상은 성소에 있는 자들이며 성소에 있는 장로와 목사들이다. 이들은 4와 2의 구 원에 머물러 언제나 6의 교훈과 가르침 만을 전하며 자신들 도 지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 니 하나님이 가장 먼저 처리하신다. 이런 자들이 바로 짐승의 구원의 표 666을 나누어 주는 자들이며 또한 성도들을 미혹 에 빠져 죽게 만드는 거짓선지자요 적그리스도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4. 치료의 역사

하나님은 끝까지 거역하는 자는 심판하시나 회개하고 돌아 오는 자는 용서하고 치료하신다. 주님은“보라 용광로 불 같 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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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4:1) 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재 림과 심판의 날 곧 용광로 불 같은 날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 하는 자들을 모두 벌할 것이라 하신다. 그들을 불사르며 뿌리 와 가지를 남기지 않겠다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이어서“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 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고 약속하신다. 하 나님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공의의 해와 치료의 광선 을 비춘다고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의 해와 치료하는 광 선이란 영적 아침의 해와 아침의 빛을 말한다. 즉 아침의 복 음을 말하며 7의 복음의 빛을 뜻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의로운 말씀의 광선으로 치료하시며 저희에게 치료의 포도주를 바르신다. 하나님은 4 의 포도주 뿐만아니라 5의 포도주도 허락하신다. 주님은 이 렇게 말씀하신다.“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 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 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 도주로 하실 것이다” (사25:6)

주님은 종말의 시온 산의 성도들에게 기름과 포도주로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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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베풀어 주신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과 포도주는 초림 예수 께서 강도 만난 자에게 발라 주신 그 포도주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주님이 초림 때 주신 포도주는 이제 막 담근 처음 포도주요 이른 포도주다. 반면에 종말의 시온 산에서 주 시는 포도주는 오래 저장한 포도주요 늦은 포도주다. 말하자 면 강도 만난 자에게 바른 포도주가 4의 포도주라면 시온 산 에서 마시는 포도주는 1의 포도주요 혹은 5의 포도주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두 포도주가 있다. 첫째는 초림의 고난과 피의 포 도주니 곧 약혼의 포도주요, 둘째는 재림의 기쁨과 연회의 포 도주니 곧 결혼의 포도주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 는 자들은 이 두개의 포도주를 모두 마신다. 먼저 약혼의 포 도주를 마신 후 다음에 결혼의 포도주까지 마신다.

이 결혼의 1의 포도주를 마시고 5의 포도주로 예비하여 신 랑을 맞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들의 얼굴에 덮힌 면박을 걷어 올리며 기쁘게 자신의 신부로 맞아 주신다. 그래서 이사 야는 맑은 포도주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 이어서“또 이 산에 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신다” (사25:7)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가린 덮개와 휘장을 제하면 그 때 우리는 신랑이신 재림 예수 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으며 온전한 진리를 들여다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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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 얼굴에 수건을 벗은 온전한 자가 되 고 온전한 율법과 복음을 들여다 보는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예수의 거룩한 신방에 들어간다.

5. 종말의 엘리야

1) 세례 요한과 엘리야

하나님은 말4장에서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의로운 해를 약속하실 때 이어 선지자 엘리야에 대해서도 약속하셨다.“보 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 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4:5) 라고 하시며“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말4:6)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보내는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 라고 믿고 있다. 예수께서“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 니라” (마11:14) 하며 세례 요한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삶을 살펴 보면 그가 과연 오리라 한 엘리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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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이 임박해서 온 것이 아니라“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 라고 전하는 은혜시대가 임박해서 온 사 람이다. 또한 그는 여호와의 심판을 예고하는 대신에“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3:2) 하며 은혜의 복음을 전하 는 자로 왔다.

심지어 그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아 니라고 하였고(요1:21) 자신이 해야 할 메시아를 증거하는 일 에서도“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 리오리이까” (마11:3) 하고 의심하였다.

구약의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상대로 대 승리를 거 두었으나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불의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혀 끝내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엘리 야를 보내어 그가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할 것 이라 하셨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 를 촉구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이키지 아니하였고 끝내 예수를 죽이는 자들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오리라 한 엘리야는 맞는데 왜 그의 사역은 맞지 않는가 하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본래 세 례 요한의 사역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며 그 길을 평탄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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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초림을 보면 그 길을 평탄케 하는 일이 그리 비중있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주님의 재림시에는 그 길을 평탄케 하는 사역이 대 단히 크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재림 사역은 말씀이 임하는 사 역이기에 그 말씀을 증거하는 재림의 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재림의 종이 없으면 재림의 말씀이 임하지 못 하여 재림의 길이 막혀 버릴 정도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 요 한이 오리라 한 엘리야는 맞으나 그 역시 종말에 임하는 재림 의 엘리야를 예표하는 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사실상 재림의 길을 예표하는 진짜 엘리야를 표상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점을 직 시한다면 세례 요한이 왜 그토록 미미한 사역 가운데 생을 마 감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재림의 때가 되고 여호와의 심판의 재앙이 임박하면 그 때에 오리라 한 종말의 엘리야가 임할 것이다. 그는 1 3 5 7의 말씀으로 말씀이 재림하는 길을 예비할 것이며 재림의 길 을 평탄케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재림의 말씀을 전파하여 많 은 사람들이 온전한 예수를 깨닫고 영접하며 하나님께 완전 히 돌이키도록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 엘리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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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은 자들 안에 완전한 7의 말씀이 있음을 알므로 그들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이로써 자녀의 마음과 아비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엘리야의 사역이 완전한 성취를 이룬다.

성경은 초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세례 요한에 대해 잠시 언급할 뿐이다. 반면에 재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는 성경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 동방의 독수리, 동방의 의인, 고레스 왕, 그리고 엘리야까지 여러 종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사역 또한 대단히 중대한 사역 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동방의 종에 대해 말할 때“내 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사46:11) 하시며 고레스에 대하여는“그 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사44:28)고 하 실 정도다.

성경에서 어느 종이 하나님의 모략을 이루며 그 모든 기쁨 을 성취할 수 있는가. 굳이 말하면 예수 외에는 누구도 하나 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할 수 있는 자가 없다. 하지만 재림 예 수의 길을 평탄케 하며 그의 7의 말씀을 전하는 재림의 종이 라면 예외다. 그가 전하는 말씀이 곧 완전한 7의 말씀이 되기 에 그는 하나님의 모략과 기쁨의 일들을 모두 성취하는 하나 님의 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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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의 말씀과 엘리야

성경에는 유명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선 지자 중에서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심판 전에 엘리야를 보내 시는 걸까. 여기에는 중대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의 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엘리야를 말할 때 그를 능력의 종이라고 말한 다. 그가 갈멜산에서 대 승리를 거둔 것과 능력의 기도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한 것 그리고 불병거를 타고 회리 바람으로 승천한 일 등은 능력의 종이라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재림과 종말의 선지자로 쓰시는 것 은 그가 많은 능력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그가 거짓 선지자와의 싸움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 가 종말과 재림의 종으로 택함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3 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유일하게 세 떡을 먹은 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성경에서 짐승의 떡, 사람의 떡, 천사의 떡을 먹은 사람으로 소개된다. 특히 그는 천사가 주는 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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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을 먹은 사람이다. 그래서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고 하 나님의 불의 심판이 임할 때 그 불의 심판을 견딜 수 있으며 다른 사람까지 이끌어 불의 심판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물론 하나님의 종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한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엘리야를 택하여 3단계의 구원의 떡을 먹게 하셨고 바싸르 - 네페쉬 - 루아흐의 단계 를 거친 선지자로 공식적인 인정을 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땅의 성도들에게 3의 말씀 곧 7의 구원을 전할 수 있으 며 종말의 7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될 수 있다.

이제 종말의 때가 되었으므로 이 땅에 재림을 예비하는 종 말의 세례 요한이 임할 것이다. 재림의 세례 요한은 곧 다시 오는 엘리야인데 그는 4, 2, 1의 세 단계로 되어 있는 3의 떡 을 증거한다. 이 완전한 복음의 말씀, 영원한 복음의 말씀으 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칠 것이며 그 말씀을 바로 배운 자 들은 즉시 그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킬 것이다. 하나님도 흡족 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돌이켜 기뻐하실 것이니 그가 바로 하나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는 동방의 고레스요 종말 의 엘리야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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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말의 요단강

1) 요단 강의 사역

하나님이 종말의 때에 엘리야를 보내는 이유는 성도들이 하 나님께 온전히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성도들이 완전 히 돌이켜 회개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 았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가장 중요한 사역은 성도들이 마음 의 할례를 받아 아침의 성도가 되게 하는 일이며, 성도들이 요단강을 건너 영적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일이다.

성경에서 요단 강물을 쳐서 가르고 건넌 선지자는 엘리야 뿐이다.“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왕하2:8)는 말 씀처럼 그는 겉옷으로 요단 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였다.

엘리야의 겉옷은 그의 사역을 상징하는 옷이다. 엘리야가 겉옷으로 요단 물을 가른 것은 그의 사역이 요단 강을 가르는 사역임을 증거한다. 그래서 그는 제자 엘리사를 부를 때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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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겉옷을 던졌고 마지막으로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면서 역 시 겉옷을 남기고 갔다. 그의 겉옷은 그의 사역을 상징하는 제복과 같은 옷이다.

엘리야가 남긴 겉옷은 그의 사역을 엘리사에게 맡기고 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엘리사 역시 그의 겉옷으로 요단 강을 칠 때“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왕하 2:14)는 말씀처럼 능력으로 요단 강을 건너는 자가 되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모두 동일한 겉옷으로 강물을 쳐서 가르 며 요단을 건넜다. 성경에서 요단 강을 쳐서 가른다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요단 강은 하늘 가나안에 들어 가는 영적 관문을 의미하며 그런 의미의 요단을 건너는 것은 법궤 만으로 가능한 사역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법궤로 열었던 요단 물을 자신의 겉옷으로 쳐서 갈라 버린다. 이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요단 강을 가 르는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며 그의 핵심 사역이 요단 강을 갈 라 성도들을 인도하는 사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 야는 그의 생전에 요단 강을 가르고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사 역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요단 강을 가르는 이적을 행한 것은 종말에 나타날 엘리야의 사역을 표상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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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 강을 치고 갈라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는 일은 아담의 때로부터 예비된 사역이다. 아담 역시 완전한 말씀을 받아 요 단을 치고 하늘 안식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 안식에 참여치 못하였다. 하지만 구약 의 선진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요단을 가르고 하늘 안식에 들어갔었다.

이제 여호와의 불같은 날이 임하였으니 종말의 엘리야가 나 타나며 그로 인해 요단 강이 열리는 사역이 시작될 것이다. 창 세로부터 예비되었고 구약의 선진들에게 일부 허락되었으나 종말이 되어야만 비로소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는 요단 강의 사역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가 되었다.

엘리야가 겉옷으로 요단을 가른 것은 바로 이 종말의 사역 을 미리 보여주기 위함이다. 종말의 엘리야가 나타나 요단 강 을 가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늘 안식에 들어가게 할 때 드 디어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모든 모략의 일들이 드러 나며 그 기쁨이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하늘 안식에 들어가는 일은 둘째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과 같고, 천년왕 국에 들어가는 일과 같으며, 하늘 예루살렘의 신방에 들어가 는 일과 같다. 그만큼 요단 강을 건너는 일은 매우 중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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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일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성패를 가 르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차대하다.

그래서 이 요단의 사역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없이 이어 져 왔고 천년왕국의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실행되며 계속해 서 후대에 계승이 된다.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남 긴 것은 바로 이런 의미 때문이다. 요단 물을 여는 사역은 어 느 시대에나 끊임없이 지속되는 중대한 사역이기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제자를 세우라 명하시고 그의 겉옷을 남기고 전 하도록 하셨다.

이제 종말의 엘리야가 나타나면 요단의 사역이 본격화하며 정상적으로 실행될 것이다. 종말로부터 요단 사역이 본격적 으로 계승되기 시작하여 7천년의 시대 동안 지속된다. 이처 럼 요단의 사역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야 함을 증거하기 위 해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택하셨다. 그들을 통해 종말 의 천년 동안 행해질 중대한 사역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은 두 사람이 동일하게 요단 강을 가르는 이적을 행하게 하셨다.

2) 요단 강의 비밀 과정

오늘날 땅의 교회는 아직 요단 강의 사역이 무엇이며 그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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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요단 강의 사역이란 구원의 좁은 길을 통과하는 사역이며 성도의 마음을 옥토로 변하게 하는 사역이다. 요단 강의 사역은 달리 말해 자아의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는 사역이다. 이 사역은 아직도 깊은 베일에 쌓여 있으 며 아직 감추인 만나처럼 덮혀 있는 사역이다.

본서는 지금까지 종말에 나타나는 영원하고 완전한 복음, 7 의 복음’ 의 구조와 핵심에 대해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 7의 복음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는 제대로 언급하지 못하였다. 성도가 7의 복음을 받고 내 것 으로 만들려면 자아의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요단 강을 가르고 통과하는 과정을 지나야 하는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 니다.

물론 자아의 죽음을 거치고 요단 강을 건넌다고 해서 7의 과 정을 모두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7의 과정은 < 칭의 - 인의 - 완의 >의 세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요단 강을 건너는 것은 인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불과하기에 그 후에도 완의에 이 르는 과정을 또 거쳐야 한다. 7의 과정이 이렇게 좁고 협착하 기에 주님께서도 이 구원의 을 좁은 길이라 하였고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다.

지금 땅의 교회들은 칭의를 받는 과정에 대해서는 너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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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잘 가르치고 있다. 반면에 인의에 대해서는 거의 아 무 것도 모르며 그 과정을 어떻게 지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 러니 완의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오늘날 땅의 교회에서 자아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요단 강을 건너는 믿음의 사람이 더러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뿐만아니라 이미 18세기의 잔느 귀용부터, 존 웨슬리, 앤드류 머레이 등 과거 유럽과 미국에서 자아의 죽음 의 의미를 알고 요단 강을 건넌 사람이 꽤 있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말씀을 통하여 조명하고 가르치며 인의와 완의의 과정을 알고 인도한 사역자는 아직 없는 상태다.

요단 강의 의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아직 요단 강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깨닫고 자아의 죽음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이해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요단을 건넌 사람들이 대부분 인 의와 완의 사이에 정체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본 서가 밝혀 주는 14장의 말씀을 이해한 사람은 이제 본격적으 로 요단 강을 건너는 과정을 배워야 한다. 정교한 말씀의 인 도를 받아 인의에 들어가는 과정부터 완의에 이르는 과정을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 그래야만 종말의 온전한 성도 7의 성 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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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는 글

지금까지 엘리야를 통해 본 것처럼 우리가 주의 재림을 맞 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일이 시급하다. 하나는 영원한 복음 곧 7의 복음을 배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요단 강을 건너 실 제로 7 복음을 성취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엘리야의 사역과 짝이 되는 말씀이 동방의 왕 고 레스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고레스에 대해“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겠다” (사45:3)고 말 씀하셨다.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흑암 중의 보화 그리고 은밀 한 곳의 재물 두가지를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단순한 사실을 반복하거나 혹은 피상적인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 약속은 엘리야와 같은 재림의 사역 자에게 꼭 필요한 두 가지 말씀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먼저 흑암 중의 보화란 어둠 가운데 빛을 밝혀 주는 보화같 은 말씀을 의미한다. 이는 빛의 말씀인데 곧 광야의 저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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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 가나안의 아침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새벽 빛의 말씀이 다. 말하자면 성도로 하여금 어둠에 속한 육의 믿음을 끝내는 말씀이니 이 말씀이 바로 요단 강을 쳐서 가르는‘흑암 중의 보화’ 와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은밀한 재물이란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숨겨진 말씀 을 말한다.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 중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말씀이요 마지막 말씀이니 곧 7 의 말씀이다. 이 7의 말씀은 새벽 빛을 보았다고 해서 쉽게 찾 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빛을 본 자 중에 특별 히 재림의 종에게 허락되는‘은밀한 재물’ 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동방의 종 고레스에게 이 두가지 말씀을 허락하신 다. 그래서“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 일 것이요” (사45:5) 라는 말씀을 성취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동여 주시는 띠는 온전하게 매는 띠요(골3:14) 진리의 띠를 말 하니(엡6:14) 곧 완전한 복음의 진리를 뜻한다.

하나님이 고레스에게 이런 완전한 복음을 주시는 것에는 다 른 이유가 없다. 그것은 고레스로 하여금 종말의 엘리야가 되 어 그의 두 사역을 성취케 하려 하심이다. 그를 통해 요단 강 을 가르고 7의 복음을 완성하려 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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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5년에 요단 강을 가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 정을 담은 책‘신약의 요단강’ 을 저술한 바 있다. 그러나 하 나님의 뜻에 의해 그 책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주변 에 소수의 사람에게만 전하였다. 그 뒤 2009년‘신약의 요단 강’2부에 해당하는 책‘교회 최대의 영적 비밀’ 을 출간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출판 직전에 덮어 두었 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필자는 어둠 가운데 빛을 보게 하는 이 요 단 강의 사역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지나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 지 않는다. 필자의 외침에 대해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무관심 의 반응 뿐이다.

왜 이 귀한 말씀, 이 요단 강을 건너는 말씀을 외면하며 거 부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땅의 교회와 성 도들이 영적 어둠에 갇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탓이리라. 그 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잠잘 시간이 없다. 지금 잠자는 자들은 어서 속히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용광로 불처럼 땅에 임하시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 동안 미루었던‘요단강 세미나’ 를 열려 하며 요단 강의 말씀을 들으려는 자들을 모으고자 한다. 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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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말씀을 통해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참 거듭남을 받으 며 아침의 성도가 되는 자들을 자들을 모으려 한다.

이 요단 강의 말씀을 깨닫고 7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은 참으로 복된 성도들이다. 이런 성도들이 모인 곳 이 바로 종말의 시온 산이며 십사만 사천의 거룩한 자들이 모 인 곳이 되기 때문이다.

종말의 시온 산은 다른 곳이 아니다. 이 산은 말씀의 산을 말하는 것이니 성전의 3의 말씀, 재림의 5의 말씀, 완전한 7 의 말씀이 있는 곳이 바로 시온 산이다. 이 산에는 7의 말씀 을 통해 자신 안에 완의를 이루어 하늘 성전을 세우고 왕같은 제사장이 된 자들이 모였으니 이런 성도들이 있는 곳이 곧 종 말의 시온 산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이여, 어서 말씀의 시온 산으로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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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일곱 수의 요약 이제 우리는 성경이 봉인하고 있는 일곱 수의 비밀을 헤아 릴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1부터 7까지 각각의 수가 가르치 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 본 일곱 숫 자의 의미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자.

숫자 1

먼저 1의 수는 시작, 처음, 출발의 의미를 갖는 수다. 1은 모 든 수의 모태와 뿌리가 되는 수니 근본의 의미를 가지며 으뜸 의 의미를 갖는다. 이 점에서 모든 만물의 근본과 으뜸이 되 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1은 하나님의 수요 하늘 신성의 수에 해당한다.

숫자 2

1 다음에 오는 수 2는 1보다는 못하나 1에 버금가는 수다. 1 이 신성과 하나님의 수라면 2는 인성과 인간의 수에 해당한 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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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예수처럼 되는 존재이니 하 나님에 버금가는 것이 인간이라 할 수 있다.

2가 인간의 수인 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고 짐승 처럼 될 수도 있는 두 실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 원히 땅의 존재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거나 혹은 짐승처럼 죽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두 경우의 삶이 가능 하며 두 경우의 삶에 놓여진 존재이기에 인간의 수는 2다.

인간의 수 2는 확정적인 수가 아니라 중간적인 의미의 수다. 두 존재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승화시켜 더욱 고결하고 완전한 존재인 1의 존재로 만들 수 있다. 반대로 땅 의 육욕을 좇아 짐승과 같거나 그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인간은 2의 존재에서 짐승같은 4의 존재로 떨 어진다.

인간은 하나님 다음의 존재이기에 2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런데 만일 인간이 그보다 못한 짐승같은 존재가 되면 인간은 3이 아닌 4의 존재로 추락한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2 의 존재에서 떨어져 3의 존재가 되어야 하나 하나님은 인간 에게 3의 수를 허락지 않으신다. 3의 수는 이미 예수의 수로 결정되어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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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1부터 7까지의 수에 독특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면서 7개의 숫자를 크게 둘로 구분하여 홀수와 짝 수로 나눈다. 하나님은 홀수 1 3 5 7을 특히 구분하여 영적인 의미의 수로 사용하신다. 반면에 짝수 2 4 6은 육적인 의미를 드러낼 때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홀수를 하나님을 표현하는 영적인 수로 짝수를 인 간을 표현하는 육적인 수로 사용하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홀수 1 3 5 7은 모두 1과 자기 자신 외에는 나누어지지 않는 소수의 특성을 가진 수다. 이는 하나님의 신성과 진리는 나누 어지지 않고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기에 알맞다.

이와 달리 짝수 2 4 6은 잘 나누어지는 수들이다. 수가 많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무언가 더해져 순수하지 못하고 혼합된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2는 무죄한 육신을, 4는 타락하고 범 죄한 육신을, 6은 죄많은 육신인데 동시에 칭의의 은혜를 받 은 자를 상징한다. 이렇게 보면 짝수의 수가 높아질수록 그 내면이 복잡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이 하나님은 홀수를 영의 수로 구분하시기에 타락한 인간에게 홀수를 사용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의 수는 3이 되지 못하고 4가 된다. 무죄한 육이었던 2의 존재가 사단의 누룩을 먹고 그 순수성을 잃고 혼탁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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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을 2보다 못한 4의 존재가 되게 하 셨다.

숫자 3

본래 무죄한 육이었던 아담은 하늘과 땅의 두 길의 가능성 을 가진 2의 존재였다. 그 때 아담은 땅의 방향으로 향하는 마 음을 쪼개어 버리고 하늘의 방향 하나 만을 좇는 마음으로 새 롭게 정화되어야 했다. 그러면 그는 겉으로는 2의 존재이나 그 마음에 오직 하늘의 정신 1을 품은 자가 되어 12의 존재 즉 신성 1을 가진 2의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성경이 열두 지파 혹은 열두 제자를 택하여 세우는 것은 이 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성경이 열둘이라는 수를 사용하는 것 은 사실은 1과 2를 병렬시킨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신성을 가 진 인간을 보여주는 수다. 예수께서 제자 열둘을 택하여 가르 친 것은 그들을 12의 존재 곧 신성을 갖춘 인간으로 만들기 위함이며 따라서 누구든지 12의 수를 갖춘 자는 예수의 제자 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중에 참된 의미의 12의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 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온 땅에서 참 신성을 가진 인간은 오직 예수 한 분 뿐이다. 예수께서는 비록 죄인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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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으로 오신 분이나 그는 죄가 없으시며“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2:9) 라는 말씀처럼 그 육체 안에는 신성이 충만하시다.

그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주님은 참되고 유일한 12의 존재 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3의 존재가 되는 분이다. 하 나님은 창세 전부터 예수를 1과 2를 동시에 가진 하나님의 아 들의 존재 즉 3의 존재로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2의 존재인 아담의 미래로서 3의 존재인 예수를 예비하셨으니 예수야말 로 참된 인간, 참된 성도, 참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다.

예수께서 3의 존재인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그 는 완전한 하나님 1이며 완전한 인간 2의 존재이기에 도합 3 의 존재가 되신다. 둘째로 그는 땅의 인간들을 이끌어 자신과 같은 3의 존재가 되게 하시니 3의 구세주시다. 셋째로 그는 비록 인간이 죄에 빠지고 반역할지라도 3단계의 구원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니 3의 사역자가 되신다.

그래서 이 땅에 3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인간을 3단계로 이 끄신다. 죄의 존재인 4의 인간을 4에서 구하여 2가 되게 하시 며 2의 인성을 교정하고 훈련하여 1이 되도록 양육하시며 1이 된 자를 더욱 깨끗케 하시어 완전한 존재인 7로 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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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인간이 4 2 1의 세 과정을 걷게 하심 으로 도합 7의 구원을 받게 하시니 7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며 영원한 구원이 된다. 이 7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땅에 오 셨고 이 땅에서 메시아의 세 사역을 모두 이루심으로 3과 7의 모든 구원의 길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3은 예수의 수이고 7을 성취하는 구원의 능력의 수가 된다. 이 구원의 능력을 주시려 고 하나님은 특별히 육체로 임하신 초림 예수의 수를 3으로 예정하고 계셨다.

숫자 4

숫자 4는 타락한 인간을 가리킨다. 본래 타락 전의 아담에 게는 하늘의 길과 땅의 길 두 길 밖에 없었다. 그는 생명과를 먹든지 선악과를 먹든지 두 기로에 선 존재였다. 하지만 인간 이 타락한 후에는 하늘의 길을 잃어 버렸고 생명과를 먹을 수 없는 존재가 되니 땅의 길만 남게 되었다.

하늘의 길을 잃어버린 인간은 오직 땅의 길을 향하는 자가 되었다. 땅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신세로 추락하였다. 땅의 사방으로 흩어져 유리하고 방황하며 헛된 것을 구하다 가 죽는 자가 되었다. 이렇게 하늘의 길을 잃고 땅의 사방의 것에 얽매인 자가 된 것을 보여주는 수가 4다. 4는 땅의 동서 남북 사방에 있는 것들로 미혹을 당하여 다만 육욕으로 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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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사는 짐승같은 인간을 상징하는 수다.

숫자 5

숫자 5는 감추어진 수요 은밀한 수다. 초림의 수 3은 그나마 눈에 보이는 육체의 예수가 있기에 어느 정도 인식이 가능하 다. 하지만 숫자 5는 오직 영적인 분별로써 인식하는 수이기 에 깨닫기가 쉽지 않다. 숫자 5는 영안이 열린 자, 이기는 자 에게만 허락되는 감추인 만나와 같은 수에 해당한다. 특히 하 나님의 말씀을 내적으로 깨달을 때 보여지는 수이기에 5는 깨 달음의 수라 할 수 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 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마13:23) 는 기록처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5의 수를 아는 자다. 말 씀을 듣고 깨닫는 자마다 참 진리와 참 예수를 만나는 것이니 5는 진리의 예수를 새롭게 깨달을 때 볼 수 있다. 오랫 동안 말씀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던 자가 어느 날 홀연히 성령의 조 명을 통해 참 말씀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며 그로 인해 진리 의 열매를 맺는 자가 5를 아는 자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 것 혹은 말씀을 영적 으로 깨닫는 것을 5로 상징한다. 이는 재림 예수와 같은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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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는 5의 양식을 먹고 5안에 있는 1의 신성의 말씀을 발견 하는 것이니 재림 예수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5는 재 림 예수의 수요, 감추인 양식의 수가 된다. 누구든지 말씀을 참되게 깨닫는 자는 참된 양식을 얻는 자이니 그는 5의 수를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5를 비밀한 수로 정하시어 3과 7 사이에 두신 것 은 각별한 뜻이 있다. 본래 하나님은 1의 하나님이다. 1의 하 나님은 시작의 하나님이요 창조의 하나님을 뜻한다. 그 1의 하나님은 2의 몸을 입고 초림의 주님 3으로 내려 오셨다. 3으 로 오셔서 7의 구원을 이루시고 7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런 데 4에 불과한 인간이 3의 주님의 뜻을 깨닫고 7의 길에 이르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3의 주님은 어리석은 인 간에게 끊임없이 7의 존재가 되도록 가르치신다.

주님께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에게 계속해서 완전한 길 인 7을 가르치는 것은 그 7을 성취하는 비결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이 주님의 말씀을 5로 깨달을 때 즉 그 말씀의 비밀을 깨달을 때 7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알고 계신다. 인간이 처음에는 신출내기처럼 어리버리해도 계속해서 말씀 을 배우고 익히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결국 5의 말씀을 배 울 수 있음을 아시기에 끝까지 인간들을 이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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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3이 구원의 시작이요 7이 구원의 끝을 보이는 약도 와 같다면 5는 그 길을 걷게 하는 주먹밥과 같다. 구원의 길 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못 걸을 것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5를 3과 7 사이에 두셨다. 구원의 길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5의 주먹밥을 통해 힘을 얻게 하시고 7에 이를 수 있는 넉넉한 능력을 주시기 위해 5 를 구원의 양식으로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5는 말씀의 양식을 뜻하며 재림의 양식, 재림 예 수를 뜻하는 수다. 하지만 누구든지 처음부터 5의 말씀을 깨 닫는 자는 없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같은 연약한 믿음으로 초 림 예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시작하며 그리스도 도의 초보 의 길에 들어 설 뿐이다. 그러나 그 초보의 믿음에 머물지 않 고 끊임없이 말씀을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성령께서는 깊고 신령한 말씀들을 허락하신다. 그 깊은 영의 말씀을 깨닫고 이 해하는 자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깊은 주님을 깨닫고 숨겨진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 숨겨진 주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다시 깨달고 다시 만나는 것이니 주님을 두 번 만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믿음을 시작할 때 알던 주님이 아니라 신 령한 말씀을 깨닫고 두 번째 주님을 만나는 것이 다름아닌 재 림의 주 5를 만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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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의 해 2014


숫자 6

인간이 타락한 존재 4가 되었다고 해서 모두 짐승같은 육욕 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땅의 사람 중에는 2의 속성을 가 진 자들도 많다. 그런 자들은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구하 는 2의 목적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철학을 구하고 종교 를 찾으며 보이지 않은 신을 만나기 위해 헤메인다. 그 중에 더러는 복음을 듣고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믿기도 한다.

이렇게 땅의 죄인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가운데 예수를 믿고 자 하며 하늘의 진리와 생명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피의 공로를 근거로 그런 자들을 받아 주신다. 받으실 뿐만아 니라 그들에게 의롭다 함을 주시고 2의 신분을 허락하신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2의 신분을 회복한 자는 더 이상 땅에 묶인 자가 아니며 이제는 하늘의 생명나무를 취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된다. 성경은 이런 자를 6의 존 재로 여긴다. 6의 존재라는 것은 그 안에 4가 있으되 2를 회 복받아 6이 된 자를 말한다. 그래서 6의 수를 가진 자들은 실 제로는 죄인 4와 같은 자들이나 그 신분에 있어서는 태초의 아담과 같이 무죄한 2의 존재로 여김을 받는다. 이렇게 6이 된 자들이 만일 진정으로 회개하고 1을 취하여 7에 이르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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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은 그런 자들을 완전한 7의 존재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나 6의 존재는 2 4 6이 있는 자이므로 더욱 복잡하고 혼 란스런 존재다. 이런 자들은 열심히 하늘의 일을 구하다가 때 때로 죄를 사랑하고 악에 빠지는 일을 행한다. 혹은 다시 회 개하기도 하면서 더욱 교묘하게 위선을 행하는 재주를 부리 기도 한다. 또한 6에 속한 많은 자들이 교만하고 자랑하며 자 기를 세우기에 급급하여 진리의 말씀을 거짓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2의 존재로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범죄하는 자들이 바로 6에 속한 자들이요 6의 성도 들이다. 6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제대로 알지 못 한다. 그러면서 6에 속한 자 중에 힘 있는 자나 지혜있다고 하 는 장로들은 7을 훼방하는 일들을 한다. 끊임없이 6에 속한 일들을 만들어 내면서 그것을 7에 속한 것으로 속이는가 하 면 자신이 7에 속한 자인양 자랑과 거짓으로 충만하다.

이처럼 6에 속한 자가 힘과 논리를 갖고 많은 무리를 미혹 하여 거짓 것을 믿게하고 거짓 구원에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요 666이다. 666은 다른 것이 아니다. 666은 6에 속한 자가 힘과 세력을 갖고 삼위 하나님의 흉내를 내며 3의 구원을 대신하려는 것이 666이다. 그래서 6의 지혜와 논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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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의 해 2014


갖고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모아 6에 6을 더하여 끊임없이 66666.... 의 존재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666의 정체다. 그러므로 6은 짐승의 수요 짐승같은 육욕을 벗 지 못한 성도의 수이며 7이 되지 못한 6의 구원을 구원이라고 미혹하는 목사를 상징하는 수이기도 하다.

숫자 7

성경은 모든 성도들을 두 존재로 나눈다. 하나는 6의 성도 이니 은혜를 받고 칭의를 받았으되 신성의 말씀 1이 없음으로 온전치 못한 육에 속한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7의 성도이니 6의 믿음에 요셉이 나누어 주는 감추인 말씀 1을 더하여 7에 이른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아담이 받은 복 6에 하늘의 복 1을 더하여 받았 으므로 땅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다. 약 속의 아들 이삭처럼 하늘 유업을 잇기에 충분하니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자들이다.

따라서 7은 완성의 수요 완전한 수이며 마지막 수다. 거룩 한 수요 복의 수이며 승리의 수다. 모든 비밀과 봉인을 열어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수이니 종말의 수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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