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의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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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저 문 경문규경저

영상복음미디어 영상복음미디어


666은 스스로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하늘의 폭로를 통해 드러난다


666의 폭로 지 은 이 문경규 펴 낸 곳 영상복음미디어 초판 1쇄 2013년 9월 1일 개 정 판 2015년 4월 13일 주

소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78

화 02) 730-7673, 010-2761-4728

출판등록 제 300-2009-107호 I S B N 978-89-94945-30-9


666의 폭로

문 경규 지음



목 차 책 머리에 /11

제1부

적그리스도의 시작

제1장/ 적그리스도의 출현 /15 1. 사도 요한의 증거 /15 2. 요한이 목격한 적그리스도 /18 3. 영지주의자들이 적그리스도다 /19 4. 영지주의의 이원론 /20 5. 영육의 이원론 /22 6. 적그리스도의 정체 /24

제2장/ 적그리스도의 맏아들 /26 1. 적그리스도의 맏아들 말시온 /26 2. 오직 믿음만의 구원 교리 /28 3. 말시온의 이원론 /29 4. 복음주의의 원조가 된 말시온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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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성경의 오직 믿음 /36 1. 성경의 믿음 /36 2. 성경의 행위 /44 3. 성경의 믿음은 일원론이다 /46

제4장/ 루터의 오직 믿음의 정체 /48 1. 믿음과 행위에 대한 무지 /48 2. 율법의 행위 /49 3. 믿음의 행위 /50 4. 이행칭의의 진리 /53 5. 루터의 심신의 이원론 /57

제5장/ 적그리스도의 오직 믿음 /60 1. 오직믿음은 초보의 믿음이다 /60 2. 믿음의 행위를 상급으로 매도한다 /68 3. 오직 믿음의 미혹 /73

제6장/ 루터는 적그리스도인가 /77 1.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원리 /77 2. 루터는 적그리스도인가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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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적그리스도의 완성

제1장/ 오직 믿음의 위기 /86 1. 오직 믿음의 계보 /86 2. 오직 믿음의 한계와 위기 /89

제2장/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96 1. 펠라기우스의 행위구원론 /96 2. 어거스틴의 은혜구원론 /98 3. 오직 오직 은혜는 오직 예정과 같다 /100

제3장/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 /103 1. 세례받은 유아 /103 2. 예정론과 예수님 /108

제4장/ 적그리스도의 완성 /113 1. 예정론의 핵심 기능 /113 2. 적그리스도의 오직 예정 /118 3. 예정론의 뿌리 /135 4. 666을 폭로한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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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일곱째 짐승의 정체

제1장/ 일곱 머리와 나라 /149 1. 일곱 머리의 순서 /149 2. 여덟째 머리 /152

제2장/ 일곱째 짐승 카톨릭 /154 1. 로만 카톨릭 /154 2. 일곱째 짐승의 특징들 /157

제3장/ 카톨릭과 어거스틴 /162 1. 카톨릭의 머리 어거스틴 /162 2. 여덟째 짐승과 어거스틴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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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여덟째 짐승과 666

제1장/ 두 짐승의 등장 /167 1. 일곱째와 여덟째 짐승 /167 2. 두 짐승이 나오는 곳 /168 3. 두 짐승의 특징 /176

제2장/ 적그리스도와 666 /179 1. 여덟째 짐승의 특징 /179 2. 여덟째 짐승과 개신교 /184 3. 개신교의 우상 숭배 /188 4.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 /201

제3장/ 666이란 무엇인가 /210 1. 짐승의 수 666 /210 2. 구원의 표 666 /211 3. 하늘 구원의 수 777 /213 글을 마치며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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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흔히들 적그리스도를 말할 때 그는 종말의 때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는 대환란 전에 온 세상의 권세를 한 손에 쥐고 등장하 여 땅의 성도들에게 강제로 666의 표를 받게 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적그리스도는 결코 제 스스로 그 모습 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등 장하지도 않는다.

사도요한이 증거한 적그리스도는 바울이 말하는 불법의 사람 이며 멸망의 아들에 해당하는 자다. 그런데 바울은 적그리스도 인 멸망의 아들이 자기 스스로 나타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 울은 살후2:3절에서“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 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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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한글로 보면 멸망의 아들이‘나타난다’ 고 되어 있 지만‘나타난다’ 에 해당하는 원어‘아포칼립토’ 를 보면 그 뜻 이 좀 다르다.‘아포칼립토’ 는‘덮개를 제거하다’ ,‘폭로되다’ 라는 뜻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것은 자기 스스 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 덮개를 제거함으로 수 동적으로 드러남을 뜻하며 정확히 표현하자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어 나타난다. 이 때문에 동사‘아포칼립토’ 는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바울은, 그 때에 불법한 자가‘나타나리니’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나타나심’ 으로 폐 하시리라(살후2:8)고 하는데, 여기서 불법한 자의‘나타나리니’ 는 동일한‘아포칼립토’ 로 기록된 반면에 예수의‘나타나심’ 은 동사가 아닌 명사‘에핍하네이아’ (출현)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결코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아 니며 눈에 보이게 666 표를 나누어 주지도 않는다. 그는 꼭꼭 숨어 있으며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교묘히 위장하고 있 다. 그럼으로써 땅에 속한 자들이 아무 것도 모른체 자발적으 로 666 표를 받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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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종말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광명한 천사 로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가면을 벗기고 그 실체를 폭로하게 되 는데 이러한 아포칼립토를 통해 드디어 적그리스도의 감추어 진 실체가 폭로되기에 이른다.

본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적그리스도와 666의 정체 를 폭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제 정한 때가 되었으므로 하 나님께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들의 숨겨진 모습들을 적 나라하게 폭로케 하신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 동안 숨겨져 있던 적그리스도의 정체와 666의 실체를 만날 것 이며 그 충격적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 2013년 가을에 문 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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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적그리스도의 시작


제1장/ 적그리스도의 출현

1. 사도 요한의 증거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 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 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1~3)

우리가 성경을 보면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유일하게 요한서 신에만 등장함을 볼 수 있다. 사도요한은 요한서신에서 적그리 스도라는 용어를 다섯 번이나 기록한다. 그러면서 요일4:3절에 서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나타나 존재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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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중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명시하는 곳은 요한서신 이 유일하지만 적그리스도에 대해 먼저 언급한 곳은 구약의 다 니엘서다. 다니엘은 단7장에서 적그리스도의 활동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예언하였다.“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 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 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단7:25) 다니엘은 8장에 서도 적그리스도의 활동에 대해 묘사한다.“그것이 하늘 군대 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 고 그것들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 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 으며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 더라” .(단8:10~12)

다니엘은 적그리스도가 이르면“성소와 백성이 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단8:13) 하며 탄식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이는 신약의 교회와 성도들이 적그리스도 에게 사로잡혀 짓밟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신약에서 요한보다 앞서 적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사 도바울이다. 물론 바울은 요한처럼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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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멸망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 여 적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는 그 때가 마지막 때라고 하며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 먼 저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 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 리니” .(살후2:3)

적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나타난다는 것은 예수께서도 말씀 하신 바 있다. 예수님은 다니엘서를 인용하여“그러므로 너희 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 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24:15)라고 하셨다. 따라서 이같 은 말씀들을 볼 때 마지막 때가 되면 적그리스도가 임하여 그 가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며 이 땅에서 멸망의 가증한 일들을 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한이 요한서신에서 마지막 때를 말하 면서 그 때가 바로 요한 당시의 그 때라고 밝힌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님이나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그 때는 먼 장래의 일 같은데 어째서 요한은 그 마지막 때가 벌써 임하였다고 하는 것 인가? 뿐만아니라 요한은 먼 미래에 올 것으로 알고 있던 적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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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도가 벌써 세상에 임하였다고 하며 심지어 많은 적그리스 도가 이미 일어나 활동 중이라고 증거한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2:18)

2. 요한이 목격한 적그리스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오리라 했던 적그리스도가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교회에 임한 것을 목격하였다. 그 모습을 분 명하게 보았기에 적그리스도가 이미 땅에 임한 것을 확신하며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적시하였다. 그렇다면 요한 은 대체 어떤 자를 보며 누구를 보았기에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지목하는가?

요한은 요한1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예수를 시인 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일4:3) 요한2서에서도“미혹하는 자 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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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이 1:7)라고 한다. 이러한 말씀으로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요한에 의하면 적그리스도는 예수를 시인 하지 않고 부인하는 자들이다. 특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며 또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 인한다.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이처럼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 야말로 적그리스도에 해당하는 자다.

3. 영지주의자들이 적그리스도다

요한은 자신이 사역하던 당시의 교회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자 들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 는 자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다 름 아닌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다. 그 영지주의자들은 교회 내 에 들어와(요일2:19) 예수를 부인하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을 부정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영지주의자들은 불신자들이거나 교회 밖에 있던 자들이 아 니다. 그들은 교회에 출입하며 성도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요 한은 요일2:18절에서“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하며 이어 2:19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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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라고 말한다. 이런 요한의 증거로 볼 때 이 자들은 한 때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으나 이후에 교회에서 나간 기독교 영지주의자 임을 알 수 있다.

4. 영지주의의 이원론

요한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를 부정하는 영지주의야말로 명 백한 적그리스도였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왜 그리스도께 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였을까. 그들은 왜 굳이 예수를 부 인한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원론(dualism)의 사 상 때문이다.

이원론(dualism)은 영지주의자들이 가진 핵심 사상이다. 이원 론이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두 원리를 통해 우주만물을 이 해하고 설명하는 사상을 말한다. 이원론에는 대표적으로 페르 시아의‘선악(善惡)의 이원론’ 과 헬라 철학이 말하는‘영혼과 육체의 이원론’ 이 있다.

페르시아의‘선악의 이원론’ 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에는 원초 적으로 대립하는 두 신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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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악한 신이다. 선한 신은 빛의 신이요 악한 신은 어둠의 신으 로써 우주와 만물은 이 두 신의 대립과 투쟁 가운데 파생되었 다고 한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 은 철학자 플라톤에 의해 제시된 관점 으로서 플라톤은 이 세계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본질과 현상이라는 두 원리가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 는 영혼은 본질적이고 불멸하는 것인데 비해 육체는 현상적이 고 결함이 많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순수한 영혼 이 결함많은 육체에 깃들인 것이며, 순수한 영혼이 자유로워지 려면 많은 수련을 통해 육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위와 같은 선악의 이원론과 영혼과 육 체의 이원론에 성경의 내용들을 혼합하여 만들어졌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영과 육 등의 내용을 다 른 이원론의 사상과 섞어서 혼합적인 이원론을 만들어 냈다. 이 것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영육(靈肉)의 이원론’ 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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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육의 이원론

영지주의자들은 우주의 모든 것을 영과 육이라는 두 개의 관 점으로 구분하여 본다. 그러면서 영(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한 것이라 보며 육체와 물질을 멸시한다. 그들은 육체와 물질을 악 하고 열등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육체와 물질을 만든 하나님과 창조 세계를 폄하한다. 창조의 하나님을 여러 신들 중에서 가 장 낮은 계급에 속한 데미우르고라는 신으로 보며, 이런 저급 한 물질의 신이 만든 창조의 세계 역시 수준 낮은 것이라 하며 멸시한다.

교회 내에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은 이같은 이원론의 사상으로 복음을 왜곡하였다. 그들은 이원론을 통해 복음을 이해하며 이 원론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성 경과 다르게 자신들 나름대로의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 은 인간이란 본래 하늘의 선한 영적 존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악한 육체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 다. 그래서 그들은 참된 구원이란 인간이 악한 육체에서 탈출 하여 선한 영적 존재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인 간이 육체에서 탈출하여 구원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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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스럽게 전수하는 영적 지식(gnosis)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혹한다.

이같은 영지주의의 사상으로 볼 때 하늘의 영이신 그리스도 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다. 육체를 입었다는 것은 곧 선한 영이 타락하여 육체의 감옥 에 갇힌 것이기에 영지주의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 었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한 것은 실 제로 임한 것이 아니며 다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 (docetism)을 주장하였다. 또한 영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예수의 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실 제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이원론의 사상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하신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악한 육체를 가 진 인간일 뿐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를 부인하며 또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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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적그리스도의 정체

요한 당시에 교회 내에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믿 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 하고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진리의 영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하나님만 인정하고 창조의 하나님은 부정하였으며, 영이신 그리스도만 인정하고 육체의 예수는 부정하였다. 그들은 땅의 육체에 불과 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존재라 하며 예수를 철저하 게 부정하였다.

사도요한의 눈에는 이런 자들이 다름 아닌 적그리스도에 해 당한다. 적그리스도란 그리스도를 반대하거나 혹은 가짜 그리 스도를 말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은 겉으 로 보기에는 그리스도를 믿고 경배하는 자들처럼 보였다. 하지 만 요한이 볼 때 그들은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듯하나 실상은 육체이신 예수를 부인함으로 그리스도를 허상으로 만 드는 자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이원론의 사상을 통해 영이신 그리스도만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써 예수를 멸시하였다. 그러 면서 결국 예수없는 그리스도를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실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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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하고 그리스도를 껍데기로 만드는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하 였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육체의 피를 흘리실 수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으며 그리스도와 인간은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육체가 없는 그리스도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며 껍데기 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원론 의 사상에 이같이 그리스도를 껍데기로 만드는 미혹과 속임수 가 있는 것을 알았다.

요한은 자신의 눈 앞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보며 그 것이 활동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요한이 본 적그리스도는 바 로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다.“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 적 그리스도” 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무척 쉬운 말 같지만 이 말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가장 강력한‘대원리’ 가 된다. 이 책의 뒷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예수를 부인한다는 이 말 안에는 엄 청난 비밀이 들어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적그리스도를 보 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이‘원리’ 가 적그리스도의 실체를 폭로하 는 능력의 원리임을 깨닫게 된다. 뿐만아니라 이‘원리’ 는 후에 666의 수를 세는 지혜의 원리가 되며, 짐승과 거짓선지자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원리인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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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적그리스도의 맏아들

1. 적그리스도의 맏아들 말시온

사도요한이 1세기 말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증거하였지 만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기독교 역사에서 적그리스도인 영지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2세기 에 이르러서다. 2세기의 영지주의는 조직과 체계를 정비하고 자신들 만의 교회를 세워 기존 정통교회와 견줄만큼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2~3세기 동안 영지주의자들이 세운 교회 때문에 정통교회가 위협을 받는 심각한 지경이 되기도 하 였다.

2세기 영지주의자의 대표는 단연 말시온(Marcion)이다. 그는 영지주의자 중에서 으뜸이었으며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은 그 를 칭하여‘땅에 내려온 첫 번째 사탄’ 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말 시온은 초기 교회 역사에서 사상 최대의 이단으로 평가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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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사단의 맏아들’ 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대단히 위험한 인물 이었다.

말시온은 터키 북부 지역인‘폰투스’ 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목사인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켜 추방되 었으며 139년경 로마교회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로마교회에 서 영지주의 교사였던 케르도(Cerdo)에게 가르침을 받아 영지 주의의 교리를 주장하다가 144년에 로마교회에서도 추방을 당 하였다. 그 후에 그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 수완 을 발휘하여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영지 주의의 가르침으로 미혹하였다.1)

말시온은 머리가 비상하고 재능이 많은 자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교회가 생각지 못했던 획기적인 일들을 시도하며 대중 적인 인기를 모았다. 첫째로 그는 당시의 교회보다 앞서 최초 로 정경 목록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는 영지주의의 관점으로 편집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10개만을 정경으로 수용하였다. 이에 위험을 느낀 교회는 말시온보다 약 200년이 지난 후에야 현재와 같은 66권의 정경 목록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둘째로 말시온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먼저 조직신학을 시 1) 필립샤프. 교회사전집2. 이길상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5.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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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대조(Antiheses)’ 라는 책을 저술 하여 여러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설명하였다. 그 책 을 통해 창조론, 구원론, 신론, 기독론 등 조직신학의 부분들에 대한 교리적 논증을 시도하였다. 물론 그 내용들은 모두 영지 주의의 관점에서 기록된 잘못된 것들이지만 아무튼 그가 기독 교 역사에서 최초로 신학적 기술을 시도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2. 오직 믿음만의 구원 교리

셋째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말시온은 기독교 역사에 남을 만한 획기적인 교리를 창안한 자였다. 그는 교회 역사에서 최 초로“인간은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는 교리를 주창 하였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소수의 현인들만 이 비밀스런 영지(gnosis)를 깨달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말시온은 구원이란 비밀한 영지(gnosis)를 통해서가 아 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직 믿음 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적인 주장을 하였다.

말시온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만이 완전한 순복음(Primitive gospel)이라고 하였다. 그는 처음에 그리스도가 땅에 오셨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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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율법이 완전히 제거된 순복음(Primitive gospel)을 전하였는 데 12제자들이 그 복음에 행위를 덧붙이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울만은 그 복음의 순수성을 보호하였고 그것 을‘오직 믿음만의 구원’ 이라는 교리로 증거했다고 한다.2) 그 래서 말시온은 바울의 복음만이 구원을 주는 참 복음이며 자신 도 바울처럼‘오직 믿음’ 의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하였다.

말시온은 극단적 바울주의자였다.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바울을 인정하고 수용하였지만 말시온은 바울 숭배자에 가까 웠다. 그는 바울이 전한 오직 믿음만을 복음으로 인정하고 추 종하였다. 그는 바울의 복음이야말로 율법과 아무 관련이 없으 며 또한 인간의 행위와도 아무 관련이 없는‘오직 믿음’ 의 복음 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말시온은 역사상 최초로 인간은 율법 이나 어떤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는 복음주의 교리를 제시한 효시가 되었다.

3. 말시온의 이원론

말시온은 영지주의자였기에 다만 이원론의 관점에서 믿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그는 믿음은 영적인 것으로 행위 2) 김광우. 신학이야기. 지와사랑. 2000. p104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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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육체에 속한 것으로 보고 양자를 분리하였다. 그래서 믿음 은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선한 것이나, 행위는 타락한 육체 에 관련된 악한 것이라 하며 멸시하였다. 그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었고 그에 따라 복음과 율법의 관 계 역시 적대적인 관계로 이해하였다. 이에 대해 터툴리안은 ‘복음과 율법의 분열’ 이라는 사상이 주후 150년경 말시온에게 서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비판하였다.3)

말시온이 주장한 복음과 율법의 이원론적 관계는 당연히 성 경의 진리가 아니다. 물론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부분도 있지 만 율법의 본질까지 완전히 폐하지는 않는다. 원래 율법의 본 질은 사랑이며 사랑은 폐해지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 법의 형식은 폐하여지나 그 본질인 사랑은 폐할 수 없다. 이 때 문에 주님께서는“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 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7)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믿 음과 행위는 말시온이 주장한 것처럼 이원론의 관계가 아니다. 물론 믿음이 행위를 폐하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에는 행위를 온 전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우리 3) cf. Turtulian. Adv. Marc.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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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행위)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 라 도리어 율법(행위)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고 하였다.

따라서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이란 율법을 완전케하는 복음이 다. 믿음 또한 행위를 굳게 세우며 온전케하는 것이 믿음이다. 복음은 율법폐기론이 아니며 믿음 또한 행위폐기론이 아니다. 그러나 말시온은 이원론의 관점 때문에 믿음과 행위를 오직 적 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로만 이해하였다. 믿음은 영적이고 선 한 진리로 인정하며, 행위는 육체와 악에 속한 것으로 부정하 였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과 행위를 분열시키고 그 행위를 완 전히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오로지 믿음만이 참된 진리요 인간을 구원하는 진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무조건 대립적인 관계로만 보고 행위가 빠진 이원론의 믿음을 주장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이원론의 믿음은 성경과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되지 못한다.

4. 복음주의의 원조가 된 말시온

말시온이 만든‘오직 믿음만의 구원’교리는 사단의 맏아들에 의한 교리다.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지목한 영지주의의 대표 인 말시온이 만든 교리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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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교회들은 말시온과 동일한 구원의 교리를 말하고 있 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인간은 행위가 아니라“오직 믿음만 으로 구원을 받는다” 는 구원의 교리를 선포한다.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어떻게 말시온이 말한 것과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가 말하는 구원론이 같을 수 있는가? 그것은 종교개혁가 루터 의 영향 때문에 그렇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카톨릭 의 행위구원론에 맞서‘오직 믿음만의 구원’ 교리를 제시하며 개신교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 루터가 제시한‘오직 믿음’ 만의 교리는 말시온이 주장한 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말시온은‘오직 믿음’ 을 강조하면서 행위의 문제를 완전히 멸시한데 비해 루터는 그렇 게까지 극단적으로 행위를 멸시하지는 않았다. 루터는 그리스 도인들에게 선행이 필요한 것을 인정하였고 성도가 이 땅에 사 는 동안 죄의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행위는 필요 하다고 보았다.4)

그러나 말시온이 행위를 무시했다고 해서 그가 방탕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보통 영지주의자들은 쾌락적 영지주의와 금 욕적 영지주의로 나뉘는데 말시온은 금욕적 영자주의자에 속 했다. 그래서 육체와 그 행위를 부인하면서 금욕적인 방법으로 4) 전경연. 루터신학의 제문제. 대한기독교서회. 1986. p220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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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다루었다. 이 점에서 말시온의 삶은 수도사적인 삶을 살 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육식(肉食)이나 성교(性交) 등을 육체 의 일이라고 멸시하며 오직 금욕적인 신앙생활을 지향하였다.5) 그는 이같은 금욕적인 삶을 통해 자신이 마치 행위를 철저하게 멸하고 오직 믿음의 삶을 사는 자처럼 행세하였다.

이렇게 보면 말시온과 루터의 행위에 대한 이해는 약간의 차 이가 난다. 말시온이 금욕적인 행위를 강조했다면 루터는 경건 한 행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오직 믿음만의 구원’ 을 주장한 것에는 동일하였다. 말시온과 마찬가 지로 루터 역시 인간의 행위는 구원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 로 이해하였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인간의 행 위는 구원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루터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분리하였고 구원에 있어서 행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말 시온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일체의 행위가 필요없는“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는 교리를 주장하였다. 결국 두 사 람은 일체의 행위가 배제된 오직 믿음을 말했다는 점에서 같은 구원의 교리를 주장한 사람들이 되었다.

루터와 말시온의 구원 교리가 같다는 점 때문에 오늘날 말시 5) 윌리스턴 워거. 세계기독교회사. 강근환외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1.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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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기독교 최대의 이단이라고 비난하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비록 이단 이지만“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최초로 창안 한 주창자였다” 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루터 신학 의 저명한 대표자인 하르낙은“말시온의 믿음만의 교리는 루터 와 동등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것이다” 라며 말시온의 구원론을 긍정적으로 평하였다. 이런 연유 때문에 오늘날 말시온을 연구 하는 사람들은 말시온이 주장한‘오직 믿음’ 만의 구원 교리가 ‘복음주의의 원조’ 에 해당한다고 비평한다.6)

하지만 사단의 맏아들인 말시온이 복음주의의 원조라는 것은 대단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떻게 사단의 맏아들의 주 장이 복음주의 구원의 원조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단 중의 이단이라 하는 자의 구원론과 복음주의의 구원론이 같을 수 있 는가? 참으로 황당하고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자의 구원론의 결론이 같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 려운 사실이다. 말시온이 주장한 구원론은 행위가 아닌‘오직 믿음’ 만의 구원이요, 루터가 주장한 구원론 역시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 만의 구원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두 사람 모두 동일한 결론을 제시하였고 또한 말시온이 루터보다 1,300년 이 상 앞서‘오직 믿음만의 구원’ 을 제시한 원조인 것은 어쩔 수 6) 김광우. 신학이야기. 지와사랑. 2000. p104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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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지주의 이단의 구원과 성경의 구원이 같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양자의 구원이 같다면 마귀들과 성 도가 천국에서 같이 영생한다는 말이 되는데 어찌 그런 일이 가 능하겠는가. 따라서 말시온이 복음주의의 원조라는 것, 말시온 과 루터의 구원론이 같다는 것에는 감추어진 비밀이 있음을 알 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시온이나 루터가 주장한‘오직 믿음’ 이라는 교리 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한 내용들이 있다는 말이다. 두 사람의‘오직 믿음’안에는 중대한 영적 문 제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그 문제를 제대로 분별한다면 우 리는 그 안에서 2천년 전에 사도요한이 말했던 적그리스도를 통찰하는 원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오직 믿 음’ 에 담긴 비밀한 내용들을 하나씩 파헤쳐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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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성경의 오직 믿음

1. 성경의 믿음

1) 문자적 의미의 믿음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믿음에 대해 말할 때 믿음이란“마음으 로 주님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 을 믿음이라 한다. 그리고“손 이나 발 등 몸으로 행하는 것” 을 행위라고 본다. 아마도 대부분 의 성도들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으로 시인하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초보적인 생각이다. 이 런 생각은 문자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생 각으로 믿음을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성경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것을 문자적,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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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로 사용함을 알 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성경의 의미를 놓치면 우리는 하나님 의 뜻을 한낱 문자적인 수준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예수께서는“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8:34) 하셨다. 이어 서“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5) 하 셨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 지 잘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자신을 부인 하라 하신다. 여기서“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는 말씀을 살펴 보자. 이를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저 주님 뒤를 따르라는 것이 되겠지만 이 말씀은“나를 믿으려거든” 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크게 보아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 은 같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주님을 믿는다는 말보다 주님을 따른다는 말이 더 정확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주님을 믿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믿는 것에 그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주 님을 따른다는 말은 모든 면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기에 믿 음의 의미가 훨씬 크고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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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믿음이란 마음의 고백 정도에 그치는 사전적인 뜻이 아니며, 가만히 서서 믿고만 있는 그런 정지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하셨다. 주님은 아 무리 믿음이 있다해도 자기 부인이 없는 믿음은 도리어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이 말씀으로써 주님은 주님을 믿 고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분명히 밝히신다. 곧 주님을 믿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고백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기까지 좇아야 하며 그런 자들이라야 구원을 얻 을 것이라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믿음의 의미 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이란 그저 마음으로만 믿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믿 음이다.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오직 말씀대로 따 르는 것” 이 믿음인 것이다.

3) 믿음의 기준은 말씀이다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다시 살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 지 알고 있던‘오직 믿음’ 의 의미는 자칫 곡해의 소지가 있다. 그것은 믿음의 의미를 마음의 영역으로 한정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그저 가만히 앉아서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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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그 외의 것은 믿음이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제 본 대로 우리가 아무리 마음으로 믿는다고 해도 자기 부인 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 것이 되고 구 원마저 잃게 된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자신을 따르라 하시는 데 우리는 그저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가만히 서 있다면 그 것이 어찌 믿음이 되고 구원이 되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주님이 가르치는 믿음 의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마음을 기 준삼아 믿음의 의미를 생각하여 왔다. 마음이 중심이 되고 기 준이 되어 마음으로 믿어야 믿음인 것으로 오해하여 왔다. 하 지만 이제 믿음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마음이 아니라 ‘말씀’ 인 것을 직시해야 한다. 믿음의 기준은 오직 말씀 뿐이 다. 오직 말씀대로 따르면 그것이 믿음이며 누구든지 말씀을 따 르면 그는 믿음이 있는 자다. 반대로 아무리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했다 해도 그가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믿는 자 가 아니며 그런 자는 참된 성도라 할 수 없다.

4) 성령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오직 믿음의 의미를 잘 밝혀주고 있 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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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로부터 내려 온 율법적 크리스천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미혹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훼손하며 거짓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말하기 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면 믿음만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율 법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 다시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주 장하며 갈라디아 교회가 할례를 행하도록 미혹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바울은‘오직 믿음’ 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급히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 오직 믿음 으로 의롭게 되는 것외에 다른 복음은 없으며 믿음의 의가 아 닌 다른 의를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경 고하였다.(갈1:8) 그러면서“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 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3) 하며 갈라 디아 교회를 책망하였다.

이 갈3:3절에는 바울이 증거하는 믿음의 의미가 잘 나타나 있 다. 바울은 너희가 처음에 믿음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왜 지 금 엉뚱한 길로 가며 육체를 따라 마치려 하느냐고 묻는다. 바 울은 여기서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육체라는 단어는 문 자적인 의미의 살덩이를 말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가르 침, 거짓 복음, 거짓 믿음, 거짓 교사들을 통칭하는 의미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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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곧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잘못된 가르침’ 을 육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과 육체를 서로 대비되는 단어로 사용한다. 그리 고 갈라디아 교회가 처음에는 성령으로 잘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체를 따르며 참된 복음을 따르지 않고 거짓 복음을 따르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갈3:3절에서 말하는 성령은 곧 말씀과 같으며 믿음과 도 같은 의미다. 성령=말씀=믿음은 그 본질이 같다. 갈라디아 교회는 처음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성령과 말씀과 믿음으 로 잘 시작한 교회였다. 그런데 이제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에 의해 잘못된 말씀을 받고 육체를 따르고 있다. 갈라디아 교 회는 이제는 성령을 따르지 않고 말씀을 따르지 않으려 한다. 대신에 이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저들은 성령이 아 닌 육체를 따르며 말씀이 아닌 인간의 교훈을 따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바울은 이 갈3:3절로써 믿음의 의미를 잘 증거한다. 이 구절 을 보면 믿음이란 성령을 따르는 것이며 또한 말씀을 따르는 것 임이 나타난다. 반면에 행위란 다른 교훈이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행위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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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믿음과 행위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믿 음이란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또한 성령을 따르는 것이 참된 믿 음이며 행위란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갈3:3절에는 믿음에 대한 또 다른 교훈이 들어 있다. 그것 은 우리가 믿음을 시작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인들도 모두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행위 로 돌아가는 위험에 빠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이 믿음으로 잘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시작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더욱 힘쓸 것을 권한다.“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 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 라” (갈5:16)고 권면한다.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만 해서는 안되 고 더욱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에는 5:22절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를 맺기까지 성령을 좇아야 한다고 증거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믿음의 시 작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성령을 좇아 성령의 열 매를 얻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그러 면서 바울은 5:19절 이하에서 육체와 행위를 좇는 자들이 얻는 열매에 대해 15가지 이상의 항목들을 나열한다.“육체의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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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성경이 밝히는 믿음의 의미를 더욱 분명 히 볼 수 있다. 성경의 믿음이란 마음으로 고백하는 정도에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을 좇으며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기까지 계속적으로 성령을 좇는 것이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을 따라 살며,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의 열매를 맺기까지 나아간 다. 이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 하라” 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오직 믿음이 란 오직 성령과 같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믿음의 길에서 오직 성령을 좇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이다.

5) 성경의 오직 믿음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처 럼 믿음의 의미를 이해한다면‘오직 믿음’ 의 의미는 저절로 알 게 된다. 오직 믿음이란 오직 말씀, 오직 성령을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직 믿음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을 좇으 며 성령의 열매를 맺기까지 오직 성령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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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직 믿음은 일생에 한 번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느 한 때만 믿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믿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성령을 좇아 성령으로 사는 것이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마음 으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마음으 로 믿는 것은 물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행 위를 포함한다. 마음 뿐만아니라 그 행동까지 전인(全人)적으 로 오직 성령과 오직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바울이 가르치 는 오직 믿음인 것이다.

2. 성경의 행위

우리는 행위를 말할 때 보통 손이나 발이나 몸으로 행하는 것 을 행위로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기 쉽다. 하지만 이 역시 문자 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는 행위는 그런 초보적인 의 미가 아닌 영적 의미다. 성경이 말하는 행위란 믿음과 반대되 는 것을 행위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앞서 말한 믿음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행위의 의미는 저절로 알 수 있다.

앞서 본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오직 성령을 따르는 것” 이다. 그럼 행위는 이와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행위란“성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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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지 않거나 잘못 따르는 것” 이 행위다. 갈라디아 교회는 처 음에는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 람의 교훈과 가르침을 받아 성령이 아닌 것을 좇는 자들이 되 었다. 바로 여기에 행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바울이 말하는 행 위는 몸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의 교훈을 따르고 잘못된 진리를 따르는 것이 행위가 된다. 그러 므로 바울은 성령의 가르침이 아닌 사람의 가르침을 좇고, 다 른 진리를 좇는 것을 행위라 하는 것이다.

이제 오직 믿음은 오직 성령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데 오직 성령은 오직 말씀과도 같으니 오직 성령은 오직 말씀 도 된다. 오직 믿음 = 오직 성령 = 오직 말씀이다. 그래서 믿음 은 언제나 성령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말씀을 좇으 며 말씀의 열매를 얻기 위해 죽기까지 나아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성경은 오직 믿음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행위의 기준은 완전히 달라진다. 즉 행위란 몸으 로 행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가 아닌가가 행위 의 기준이 된다. 곧 어떤 것이든 그것이 말씀의 가르침을 따르 면 믿음이 되며 말씀과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행위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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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가 몸이나 마음을 기준삼지 않고 오직 성령과 오 직 말씀을 기준 삼으면 믿음과 행위를 성경적으로 구분할 수 있 다. 예를 들어 만일 누구든지 몸으로 어떤 행동을 했을지라도 그것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면 그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이 된다. 또한 누구든지 말씀과 다르거나 성령을 따르지 않는 잘못된 믿 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행위를 가진 것이 된다.

3. 성경의 믿음은 일원론이다

이제 우리는 믿음과 행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진 리를 좇으면 믿음이요 비진리를 좇으면 행위임을 안다. 오직 말 씀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따르지 않는 것은 행위가 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믿음이란 말씀의 방향과 깊게 관계되어 있다. 말씀과 방향이 같으면 믿음이요 방향이 다른 것은 모두 행위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몸을 기준으로 행위를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마음의 믿음은 인정하고 몸의 행위는 낮게 보는 편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마음의 활동 과 몸의 활동을 굳이 나누려고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믿 음이라 보고 몸에서 나오는 것을 행위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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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성경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과 몸에서 나오는 것을 굳이 구 분하지 않는다. 마음에서 나온다고 해서 꼭 믿음이라 여기지 않 으며 또한 몸으로 행한다고 해서 행위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성 경은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말씀대로 따르는가 아닌 가 하는 방향을 중요하게 볼 뿐이다.

이런 믿음이 바로 마음과 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일 원론(一元論)의 믿음이다. 일원론의 믿음은 마음과 몸을 나누 거나 분리하지 않는다. 마음을 기준으로 하여 몸의 행동을 떼 어 내거나 몸의 행동을 천대하지 않는다. 마음이든 몸이든 차 별없이 그것이 말씀을 따르는가 아닌가 만을 문제삼기 때문에 마음과 몸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이렇게 성경은 믿음의 의미를 전인(全人)에 적용하며 전인적인 믿음을 가르친다. 이런 믿음 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참된 믿음, 곧 마음과 몸을 분리하지 않는 일원론(一元論)의 믿음이다.

일원론의 믿음에서 오직 믿음의 기준은 오직 말씀 뿐이다. 행 위의 기준도 오직 말씀 뿐이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 가진 믿음 이 말씀과 틀리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행위가 되어 버린다. 또 한 누구든지 그 몸으로 행한 것이라해도 말씀에 일치하면 그것 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인정된다. 이와 같은 일원론의 믿음 이 바로 성경과 바울이 증거하는 올바른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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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루터의 오직 믿음의 정체

1. 믿음과 행위에 대한 무지

루터는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가운데 인간의 어떤 행위도 구원받는데 기여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구원의 유일한 길 은 오직 믿음 뿐이며 다른 길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믿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그는 다만 인간이 마음 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믿음인줄 알고 그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 는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문자적인 의미로 믿음을 이 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루터는 행위에 대하여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루터는 성경 이 말하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였다. 첫 째로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율법의 행위’ 가 있고, 둘째는 말씀과 성령을 좇는‘믿음의 행위’ 가 있다는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경이 부인하는 것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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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행위’ 이지‘믿음의 행위’ 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 실을 알지 못하였다.

2. 율법의 행위

성경에서 오직 믿음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증거하는 곳이 갈 라디아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은 행위가 아니라‘오직 믿음’ 으로 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 한다.(갈2:16) 하지만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행위를 부정할 때 에는 성경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갈라다아서 전 체에는 행위라는 단어가 6번 등장한다. 그런데 행위라는 단어 가 나올 때는 단독으로 나오는 곳이 한 곳도 없다. 갈라디아서 에 기록된 행위라는 단어 앞에는 모두 율법이라는 단어가 따라 붙어 있다. 그래서 6번 모두‘율법의 행위’ ,‘율법의 행위’하 며 갈라디아서가 부정하는 것이 율법의 행위인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래 갈2:16절 말씀을 살펴 보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율법의 행위’에서 아니 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율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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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여기 16절 말씀을 보면‘행위’ 라는 단어가 3번 나타나고 있는 데 3번 모두‘율법의 행위’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곳 에 있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갈3:2절, 3:5절, 3:10에도 행위라 는 단어가 나타나지만 단독으로 쓰인 곳이 하나도 없고 모두 ‘율법의 행위’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이 갈라디아서에서 모든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율법의 행위를 경계하였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인 간이 자신의 힘으로 의롭게 되려는 율법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 이지 말씀과 성령이 우리에게 명하는 많은 믿음의 행위까지 부 정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3. 믿음의 행위

성경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율법의 행위’ 를 구분한 것처럼 ‘믿음의 행위’ 도 분명하게 구분한다. 성경에서‘믿음의 행위’ 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히브리서 11장이다. 히11장은 믿 음장이라고 부를만큼 믿음에 대한 많은 말씀들을 증거한다. 특 히 11장은 믿음의 선진들이 행했던 믿음의 행위를 상세히 소개 한다. 11장 전체는 온통 누가 믿음으로 무엇을 행했고 누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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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행했으며 또 누구는 어떻게 행했는가를 설명하며‘믿음 의 행위’ 를 소개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11:33절 이하에“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 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 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 며”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보면 여러 선진들의 행위가 잘 나타나는데 히브리서는 이 모두가 믿음으로 행한 것이라 한다.

11:36절 이하에도“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 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 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 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 역시 누가 무엇을 행하고 또 행했다는 행위에 대한 기 록들을 보여 준다. 히브리 기자는 이런 행위들을 무가치하거나 믿음과 관계없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믿음으로 말미 암은‘믿음의 행위’ 라고 증거한다.

히11장은 수많은 믿음의 행위들을 증거하고 자랑한다. 그 행 위들은 결코 무시될 수 없으며 부정될 수 없는 성경이 증거하 는 행위들이다. 그 행위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나올 수 있으 며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나올 수 없다. 누구든지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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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당연히 그런 행위가 있으며 그 행위가 없는 자는 당연히 믿 음도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믿음이 있는 것과 믿음의 행위가 있는 것은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믿음의 유무와 행위의 유무는 서로 일치한다. 그렇기에 믿음과 믿음의 행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믿음에서 믿음의 행위를 따로 떼어낼 수도 없다. 만일 히11장에 기록된 선진들의 믿음에서 그 행위를 분리하여 빼낸 다면 히11장은 기록되지 못할 것이며 성경의 많은 부분들도 함 께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히11장이 말하는 믿음의 행위는 사실상 믿음과 같은 것 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행위는 그것이 행위라기보다는 믿음 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 령을 따라, 말씀을 따라 행해졌다. 그 모든 행위들은 결국 주님 의 말씀과 일치하는 행위들이다. 그러므로 히11장에 나온 모든 믿음의 행위들은 오직 말씀을 따른 행위이므로 그것은 곧 믿음 으로 인정되며 믿음과 같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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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행칭의의 진리

성경은 이렇게 율법의 행위는 부정하지만 믿음의 행위까지 부 정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믿음과 믿음의 행위를 서로 같은 것 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믿음의 행위를 부정한다면 그 에 따라 믿음도 함께 부정된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믿음과 믿음의 행위가 같은 것임을 가장 잘 증거하는 서신이 야고보서다.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준 다. 야고보는 2:21절에서“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 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 냐” 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더욱이 24절에서는“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하 며 놀랍게도 사람이 행함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증거 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무척 낯선 말이 다. 우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 는데 야고보의 말인즉 믿음 뿐만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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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이 말은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큰 충 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야고보가 이같은 주장을 한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야고보는 성경이 말하는 행위의 의미가 무 엇인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말씀을 따르는 행위는 결 국 믿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직 믿음만의 복음이 하늘 높이 증거되던 초대교회의 상황에 서 무조건 행위를 배척하지 않고 행위의 의미를 잘 분별하며 믿 음의 행위를 보호하는 서신을 기록하였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말씀을 따르는 믿음과 말씀을 따르는 행 위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그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같은 의미다. 따라서 그에게 는 이신칭의(以信稱義)와 마찬가지로 이행칭의(以行稱義) 또한 동일한 복음의 진리에 해당한다. 믿음이든 행함이든 그것이 성 령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라면 모두 같은 믿음이며 같은 진리가 되는 셈이다.

이같은 야고보의 증거는 오직 믿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자 들을 경계시킨다. 야고보 당시에도 이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그 당시에 활동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이다. 당시의 영 지주의자들은 오직 믿음을 말하면서 행위폐기론을 주장하고 있 었다. 그들은 믿음~ 믿음~ 하면서 모든 믿음의 행위까지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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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으로써 결국 성경의 믿음을 부정하게 만드는 자들이었다.

야고보는 그들이 주장하는 오직 믿음의 헛점을 잘 알고 있었 다. 그 믿음은 행위가 빠진 헛 믿음이요 죽은 믿음에 불과하였 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 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2:20)하고“영혼 없는 몸이 죽 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26)하며 저 들의 행위없는 믿음이 쓸모없는 죽은 믿음인 것을 경고하였다.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율법폐기론을 주장하며 행위무용론 을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래 복음이란 율법을 폐기하는 것 이 아니며 믿음도 모든 행위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나 믿음은 다만 말씀을 거스리는 행위를 폐할 뿐이다. 대신에 말씀과 성령을 따르는 믿음의 행위는 남겨두며 도리어 권장한 다. 성경은 일원론의 믿음을 가르치기에 믿음과 그에 따르는 행 위를 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믿음만 주장하며 믿음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이 점에서 영지주의자나 또는 말시온이 주장 한 오직 믿음은 잘못된 믿음임이 드러난다. 저들은 믿음, 믿음 하면서 믿음의 행위를 부정함으로 믿음을 파괴했던 자들이다. 이 점에서 안타깝게도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 역시 말시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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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게 믿음의 행위를 부정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은 모든 일체의 행위를 거부하는 믿음이기에 그렇다. 루터는 성경이 율법의 행위는 부정하나 믿 음의 행위는 보호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행위를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지주 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행위도 필요없는 오직 믿음만을 주 장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오직 믿음의 교리에 빠진 루터에게 야고보서는 눈에 가시같은 성경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미워하였다. 그는 자신이 외친 오직 믿음의 교리와 정반대의 말을 하며 더욱이 행위로도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하 며 이행칭의를 증거하는 야고보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루터는 야고보서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야고 보서는 지푸라기에 불과한 서신이며 차라리 불쏘시개로 쓰는 것이 좋겠다” 고 말하며 야고보서를 부정하고 멸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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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루터의 심신의 이원론

이제 우리는 루터의 오직 믿음 안에 심각한 문제들이 내포되 어 있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루터는 성경이 증거하는 믿음과 행위의 의미를 곡해하였다. 그는 사람이 마음으로 시인하고 인 정하는 것만을 오직 믿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몸으로 행하는 모 든 것을 행위로 매도함으로 히브리서나 야고보서가 증거하는 믿음의 행위를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마음의 시 인은 믿음이 되나 몸의 활동은 믿음과 무관한 것으로 인식되었 다.

루터처럼 마음의 시인과 몸의 활동을 별개로 분리해 버리면 마음과 몸이 분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마음의 시인은 영적인 것으로 높여지고 몸의 활동은 육체의 것인양 폄하된다. 이렇게 마음의 활동만 인정하고 몸의 활동이 부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과 몸을 분열시켜 몸의 행위를 멸시하는 심신(心身) 의 이원론(二元論)이 되는 것이다!

본래 성경의 관점은 언제나 일원론이며 또한 언제나 전인적 이다. 성경은 결코 이원론의 관점을 갖지 않으며 마음으로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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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을 별개로 나누지 않는다. 하지만 사 단은 언제나 이원론을 주장하며 진리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려 고 한다. 사단은 이미 사도시대부터 이원론을 통해 진리를 훼 방하고 파괴하려 하였다. 그 때부터 사단은 영지주의를 통해 영 만 인정하고 육체는 부정하는 이원론의 교리를 전파하였다. 그 래서 영이신 그리스도만 높이고 육체의 예수는 멸시하도록 하 여 결국 그리스도를 껍데기로 만들고자 하였다.

안타깝게도 루터가 주장하는 오직 믿음에도 이처럼 위험한 이 원론의 문제가 내재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히 믿어 왔던 루 터의 오직 믿음이 사실은 이원론에 의해 분열된 믿음이라는 점 을 인식해야 한다. 누차 밝힌대로 믿음이란 말씀대로 따르는 것 을 믿음이라 한다. 믿음을 이렇게 이해하면 마음으로 믿는 것 과 몸으로 행하는 것을 분리시킬 이유가 없다. 마음으로 믿든 지 몸으로 행하든지간에 말씀대로 하면 모두 믿음이 되며 그렇 지 않고 말씀과 다른 것을 좇으면 그것은 행위가 된다.

그러나 루터가 말하는 믿음은 마음의 시인이 핵심이 되는 오 직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몸의 행위와 아무 상관없는 마음의 고백만 있으면 되는 오직 믿음이다. 그것만 있으면 다른 아무 것도 필요없이 구원을 받는 오직 믿음이다. 하지만 이같은 믿 음은 마음의 믿음만 인정하며 몸의 행위는 부정하는 이원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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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불과하다. 믿음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일체의 행위를 부 정함으로 결국 믿음에서 알맹이를 제거하여 껍데기만 갖게 하 는 믿음이다.

따라서 루터의 믿음은 성경의 일원론의 믿음이 아닌 영지주 의의 이원론의 믿음과 같다. 저 옛날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를 부 정하여 그리스도를 껍데기로 만든 것처럼, 루터 역시 믿음의 행 위를 부정함으로 오직 믿음을 껍데기로 만들었다. 그의 오직 믿 음은 말은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그 안에 믿음의 행위가 모두 제 거되어 껍데기만 남은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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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적그리스도의 오직 믿음

1. 오직믿음은 초보의 믿음이다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만의 교리에도 인정해야 할 부분은 있다. 그가 저 암흑같은 중세 카톨릭의 시대에서 오직 믿음이 라는 소망의 빛줄기를 찾은 것은 실로 의미있는 발견이다. 하 지만 진리란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고 다른 것을 무시하게 되면 진리는 분열을 일으킨다. 루터의 오직 믿음의 진리가 이와 같 다. 그의 오직 믿음에는 진리의 부분이 있으나 많은 부분에 오 류들도 있다. 그 오류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않으면 오직 믿음 은 도리어 믿음을 분열하고 파괴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은 사실상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 이 아니다. 성경이 밝히는 온전한 믿음이 되려면 그 안에 행위 가 있어야 하고, 열매가 있어야 하며, 사랑이 있어야 한다. 성 경은 행위가 없는 믿음은 헛 믿음이요, 열매가 없는 믿음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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쁜 믿음이며, 사랑이 없는 믿음 역시 아무 것도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없는 오직 믿음은 헛 믿음에 불과하다.

1) 행위없는 오직 믿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다. 야고보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 었느니라” (약2:22)고 증거한 바와 같다. 야고보의 증거대로 온 전한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며 또한 행함이 있어야만 믿음 은 온전케 될 수 있다. 누가 아무리 오직 믿음을 외친다해도 그 에게 믿음의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믿 음은 속이 텅빈 깡통같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은 그 안에 아무 행위가 없다. 행 위가 있을 수도 없고 행위가 있어서도 안된다. 루터의 믿음은 사실상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행위 가 존재하지 않는 믿음이며 궁극적으로도 행위가 필요치 않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실제적인 믿음이 아니며 인격적인 믿음 도 되지 못한다. 이런 믿음은 다만 교리적으로나 논리로만 존 재할 수 있는 가상의 믿음이지 성도의 내면에 살아 역사하는 참 믿음이 되지 못한다. 만일 성도의 내면에 살아 있는 참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여 반드시 행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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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는 온전한 믿음에 이를 것이다.

성경은 행위가 없고 온전함이 없는 믿음을 어린아이의 믿음, 초보의 믿음이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 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 라” (고전3:1)고 하였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은 어린아 이들이며 육신에 속한 자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너희 가운 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 함이 아니리요” (고전3:3)라고 책망하였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 도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믿음의 행위가 없었고 어 리석은 육신의 행위들만 나타났다. 이는 그들이 아직 어린아이 의 믿음, 초보의 믿음에 있는 자들이기에 그런 것이다.

히브리 기자는 이런 어린 믿음을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믿음 이라 말한다. 히6:1은“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 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히6:1~2)고 한다. 여기 서 히브리서가 말하는 회개, 세례, 안수, 부활과 심판 등에 관 한 교훈의 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처음 믿고 세례를 받 을 때 배우는 교리들이다. 그것은 루터가 주장하는 오직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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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질 때 받는 기본적인 지식들이다. 히브리 기자는 그것들 을 다만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수준에 계속 머물지 말고 속히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한다. 히브리 기자가 말하는 완전이란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과 행위 가 함께 있는 온전한 믿음을 말하며 또한 지각을 사용할 줄 아 는 장성한 믿음을 말한다.(히5:14) 이 점에서 루터의 오직 믿음 은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이 아닌 어린 믿음이요 초보의 믿 음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2) 열매없는 오직 믿음 루터는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으나 그가 말 한 믿음은 그 안에 행위 뿐만아니라 그 어떤 열매도 존재하지 않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처음 믿을 때의 믿음, 이제 막 이신칭의를 받은 초보의 믿음이기에 그렇다. 그 칭의의 믿 음은 이제 막 믿음의 씨를 받은 어린 믿음이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씨뿌리는 비유를 보면 모든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모두 그 런 씨의 믿음으로 시작한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씨의 믿음이 아닌 열매의 믿음에서 시작하는 이가 없다.

그런데 씨의 믿음을 가진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은 겨우 싹이 났 다가 시들어 버리는 자가 있고 어떤 자는 잎만 무성한 믿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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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기도 하고 혹 어떤 자는 열매맺는 믿음까지 이르는 자들이 있다. 따라서 오직 믿음을 가진 자들이 누구나 다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누가 오직 믿음이 있다고 주장해 도 그 믿음이 어리거나 혹은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자들 은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열매는 오직 장성한 믿음, 온 전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히브리 기자는“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 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 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 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6:7~8)고 경고한다. 여 기서 땅은 성도를 뜻하고, 비는 말씀을 뜻하며, 채소는 하늘의 열매를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하늘의 열매를 맺 지 못하는 땅의 육신의 성도들은 그 마지막이 불사름이 될 것 이라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

예수께서도“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19) 하시며“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 들을 알리라” (마7:20)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을 믿지 않으신다. 그들이 아무리 오직 믿음을 외치고 그 믿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해도 주님의 뜻은 분명하다. 주님은 오직 그의 열매로 그 믿음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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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을 외치는데 안주하지 말고 속히 열매맺 는 믿음을 가진 자로 온전케 되어야 할 것이다.

3) 사랑없는 오직 믿음 루터의 오직 믿음은 행위도 없고 열매도 없으며 더욱이 사랑 도 없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루터의 오직 믿음은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믿음이요 그저 믿음 하나밖에 없는‘딸랑 믿음’ 이다. 그것이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의 정체요 특징이다. 그 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루터의 믿음은 이제 막 믿음을 시 작하고 구원을 시작하는 초보 수준에서 갖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가짜 믿음은 아닐지라도 자칫 게으름에 빠져 그 믿음에 머물다간 결국 헛 것이 되어버리는 그런 믿음이다.

이런 딸랑 믿음은 사람이 처음 믿을 때 갖는 시작의 믿음이다. 누구나 처음에 교회에 나가며 신앙 생활을 시작할 때는 이 초 보의 믿음이 유일하다. 이 어리고 연약한 믿음 외에 다른 믿음 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자는 없다. 이제 막 구원의 길을 출발하 는 어린 신자에게는 이‘딸랑 믿음’ 만 있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 며 그 안에 거룩한 행위나 성화의 열매 등이 없다 해도 아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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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도가 믿음 생활이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해서 오직 믿음만을 외치며 다만‘딸랑 믿음’ 밖에 없다면 그것 은 문제가 된다. 그런 성도는 한 달란트 받은 은혜를 땅 속에 묻 은 자처럼 게으른 자요 어리석은 자가 된다. 그런 자는 입으로 만 주여 주여 하면서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니 시간이 지날 수록 불순종하며 완악한 자가 된다. 디도는 이런 자들에게“저 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 치 아니하는 자요” (딛1:16)라고 꾸짖는다. 이 자들은 믿음의 시 작은 잘하였으나 도중에 성령을 좇지 않고 육체를 좇아 육체의 열매가 가득하기에 마침내 불사름이 되는 자들이다.

본래 믿음이란 성장의 과정이 있고 도달해야 할 목적이 있다. 믿음이 도달해야 할 목적은 사랑이다. 믿음이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이유는 사랑에 이름으로써 비로소 믿음이 온전해지기 때 문이다. 믿음은 사랑에 이를 때에만 완전할 수 있다. 사랑에 이 른 믿음이야말로 행위를 온전케하고 율법을 굳게 세우는 성경 의 참 믿음이 된다. 이런 연유로 바울은“또 산을 옮길 만한 모 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 전13:2)라고 하였다. 바울의 말인즉 누가 천사의 말을 하고 예 언의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해도 그 믿음이 사 랑에 이르지 못한 것이면 그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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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바울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 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5:6)고 하였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핵심 요절이다. 갈라디아서는 전체적 으로 보면 오직 믿음 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 갈라디아서의 결론과 핵심은‘사랑의 믿음’ 임을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할례나 율법을 더하려는 유대인들을 경 계하기 위해 기록한 서신이다. 하지만 또한 딸랑 믿음만을 외 치며 행위폐기론을 외치는 자들도 경계하기 위한 서신임을 알 아야 한다. 바울은 이 갈5:6절을 통해 믿음에 율법을 더하려는 할례자들과, 또한 딸랑 믿음만을 외치며 행위를 폐하려는 무할 례자들을 동시적으로 물리치고 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행 위로 의롭게 되려는 할례의 믿음이나, 행위를 폐기하는 무할례 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 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하게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은 오직‘사 랑의 믿음’뿐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보면 오직 믿음은 구원을 시작하는 믿 음은 될 수 있으나 아직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에 조심스런 부 분이 많음을 알아야 한다. 자칫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면서 그 안에 행위, 열매, 사랑이 없는 믿음으로 머물고 있으면 필경은 불사름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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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믿음의 행위를 상급으로 매도한다

루터의 오직 믿음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특징이 있다. 그 믿음 은 이제 막 구원을 시작한 씨의 믿음이요, 젖먹이의 믿음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믿음을 이미 구원받은 믿음이며 구원받기에 합당한 참 믿음으로 취급되는 것이 문제다. 성경은 이 믿음을 어리고 약한 초보의 믿음이며 또한 성령을 따르지 못 하고 육신을 따르는 육의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열매없 고 사랑없는 이 믿음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구원을 잃어버리고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 의 경고를 무시하며 이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으며 이 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큰 소리 치고 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행위, 열매, 사랑 등은 구원과 상 관이 없고 다만 상급에만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 장을 하는 자들이나 이런 주장을 믿는 자들은 대놓고 말씀을 무 시하는 자들이다.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은 믿음의 열매가 없는 자들이 구원에서 쫓겨날 것이라 경고하는데도 어리석은 자들 은 그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집대로만 믿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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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위없는 믿음은 구원이 없다 주님께서는“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하셨다.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자들 은 모두 주님을 믿으며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 대해 주님은“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3)하며 쫓아 내신다. 이 자들은 왜 쫓겨나는가. 이들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그 행 위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자 들을 모두 쫓아내시며 천국은 다만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 야 들어갈 수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젖동생인 야고보도“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17) 하였고“내 형제들아 만일 사 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4)하며 경고하였다. 야고보의 증거 역시 그 말하는 바가 명백하다. 행위가 없으면 죽은 믿음인데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이다. 야고보도 예수님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 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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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나만 더 살펴 보자. 예수께서는 마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 셨다. 그런데 비유의 내용을 살펴 보면 그 안에는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에 대한 내용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그 비유 에는 다만 성도들이 땅에 사는 동안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행 한 행위들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다른 형제들 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또 작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 은 자들은 여지없이 심판을 받는다.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 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1)고 명하신다. 여기서 저주 를 받는 자들은 불신자들이나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다. 그 들은 분명 믿음이 있고 주님을 알고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자들 인데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열매가 없으므로 결국은 마귀가 떨 어지는 지옥불에 같이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들은 믿 음은 있으나 믿음의 행위가 없으므로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 으로 드러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2) 열매없는 믿음은 구원이 없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바울은 갈5장에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 을 증거한다.(갈5:22) 이 열매들은 믿음이 있다고 해서 누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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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나 저절로 열리는 열매들이 아니다. 오직 말씀과 성령을 좇 아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며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열리는 좋은 열매들이다. 또한 갈5장에는 육신을 좇아 나쁜 열매를 맺는 자 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있다. 바울은 5:19절 이하에서“육체 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라는 말씀으 로 육신의 나쁜 열매들을 언급한다. 이어서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짓는 것과 술 취하고 방탕하는 일 등 육체의 열매들을 나열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 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21)라고 분명하게 경고한다. 이 말씀에서도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 처 해지는 결국은 마찬가지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 로 받지 못하고 천국문 앞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처럼 믿음은 있는데 열매가 없는 자들에 대한 성경의 경고 는 언제나 동일하다. 열매 없는 자들은 천국을 빼앗기며 그 나 라의 열매 맺는 자들만이 받는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내가 너 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21:43)는 말씀과 같다.

3) 사랑없는 믿음은 구원이 없다 사랑없는 믿음도 구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사랑이 없는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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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은 아무 것도 아니며 구원에 아무 효력이 없다. 그리스도 안 에서 유일하게 그 효력이 인정받는 믿음은 사랑의 믿음 뿐이다. 바울과 같이 이 진리를 잘 알고 증거한 사도가 바로 요한이다. 요한은 그 별명이 사랑의 사도인 것처럼 사랑의 진리를 잘 증 거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요한의 증거들은 너무도 분명하므로 한 말씀만 살펴 보아도 그 의미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요한은 요일3:10 절에서 이렇게 말한다.“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 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요한은 믿는 자들이라 해서 다 성도가 아니며 그 중에는 하나 님의 자녀들이 있고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마귀의 자녀를 가르는 척도는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 음이 아니다. 요한은 의를 행하는 것과 사랑이 그 척도라고 말 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의를 행하는 것과 사랑은 동일하게 취 급된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누구든지 사랑치 않는 자 는 마귀의 자녀라는 말이다. 이 말씀만 보아도 사랑이 없는 자 의 결국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누구든지 오직 믿음이 있다고 말 하면서 그 안에 사랑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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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마귀의 자녀일 뿐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끝내“마귀와 그 사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1)는 저주 를 받고 만다.

3. 오직 믿음의 미혹

1) 오직 믿음은 육의 믿음이다 루터의 오직 믿음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이 얼마나 맹점이 많은 교리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수많 은 사람들은 이 교리를 믿고 따르며 구원의 가장 중대한 교리 로써 받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교리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는 철저하게 보호의 장벽을 만들고 있다. 성경이 분명하게 행 위나 열매가 없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고 해도 그것을 받아 들 이지 않는다. 도리어 행위나 열매를 강조하는 말씀들에 대해서 ‘행위구원’ 을 말하는 것이라고 매도하기 일쑤다.

또는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있는 온전한 믿음에 대해 말해도 사 람이 어찌 온전할 수 있느냐며 반대한다.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육체를 따르며 죄된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고 변명한다. 그러면서 육신을 좇아 육신의 열매를 맺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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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하듯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무지한 사람 들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한 자들이기에 승리의 기쁨도 알 지 못한다. 성령을 따라 열매를 맺는 삶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그런 신령한 일들이 있는지에 대해 무감각하다. 그러는 가운데 믿음의 영적 전쟁에서 언제나 실패하는 삶을 반복하며 무기력 하고 열매없는 믿음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성령을 따라 사는 대신에 육신을 따라 사 는 자들이다. 초보의 믿음으로 육신을 따라 육신의 열매를 맺 으며 사는 육의 성도들이다. 밥으로 먹지 못하고 젖으로 먹는 처지에 있는 자들이다.(고전3:2) 이런 자들이 영의 일이나 장성 한 분량의 일들을 알리가 없다. 그러면서 그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루 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에 세뇌되어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교리만 되내인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 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2) 오직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루터의 오직 믿음은 구원을 시작하는 믿음일 뿐 아직 구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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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젖을 먹으며 육신을 따르 는 어린 믿음이지 성령을 따라 승리하는 장성한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자들은 마치 오직 믿음이 참되 고 온전한 믿음인양 믿어 버린다.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 온전한 믿음이 되려면 거기에는 반드 시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행함이 믿음과 함께 있고 행함 으로 나타난 믿음만이 온전한 믿음이다.(약2:22)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오직 믿음은 그 자체로는 결코 온전한 믿음이 되지 못 한다. 그의 오직 믿음은 행위가 없고 행위가 있을 수도 없기 때 문이다.

온전한 믿음이란 행위가 함께 있으며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루터의 믿음은 근본적으로 행위가 없는 믿음이므로 자기 자신이 온전한 믿음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오직 믿음이 참 믿음, 온전한 믿음임을 주장하려면 반드 시 행위가 필요한데 태생적으로 행위가 없는 믿음이 어찌 자신 의 온전함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제 루터의 오직 믿음의 의미와 맹점을 분명히 할 때 가 되었다. ① 루터의 오직 믿음은 다만 초보의 믿음이다. ② 그 런데도 이 초보의 믿음은 자신이 구원받은 온전한 믿음인양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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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다. ③ 이 믿음은 행함이 있는 온전한 믿음을 구원과 관계 없고 상급에만 관련된 믿음이라고 왜곡하고 부인한다. ④ 그러 면서 자신은 결코 구원의 믿음인 것을 증명치 못한다. 자신에 게 행위도 열매도 사랑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의 믿음인 것을 확 증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자신이 가진 초보의 믿음을 구원받는 온전한 믿음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온전한 믿음이요 구원의 참 믿음인 것을 증명치 못하는 루터의 믿음을 구원의 교리로 믿어 온 셈이다. 행위도 없고 열매도 없는 헛 믿 음이 온전한 믿음 행세를 하며 도리어 온전한 믿음을 박해하고 왜곡하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처럼 오직 믿음을 말 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성경의 믿음을 왜곡하게 만드는 루터 의 딸랑 믿음이야말로 성경과 다른 복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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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루터는 적그리스도인가

1.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원리

이제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힐 때가 되었다. 저 옛날 요한의 때에 나타난 적그리스도는 영지주의자들이였다. 그렇다면 말 세를 만난 오늘날의 적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적그 리스도를 분별하는 원리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일찍이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원리를 증거하 였다. 그 원리를 잘 보면 오늘날 어떤 자들이 적그리스도인가 하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다.

요한이 말한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원리란 무엇인가? 그것 은“육체를 부인하는 자” 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곧“예 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 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이1:7)는 말씀과 같다. 과거 영지주 의자들은 영(靈)만 인정하고 영만 높이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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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모든 것을 미워하며 멸시하였다. 그래서 육체를 부인하 며 육체로 임하신 예수를 부인하였다.

저들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하였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며 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는 비록 몸을 입으셨으 나 인간으로부터 난 육체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육체를 입으 셨다. 그는 육체를 입고 육체의 모든 고난을 똑같이 체휼하셨 으나 죄없는 몸으로 오셨고 죄없는 삶을 사신 분이다.

따라서 모든 육체가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사실이나 예수께 서는 타락하고 부패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로 나서 성령으 로 잉태되신 예수의 몸을 어찌 부패하고 더럽다 할 수 있겠는 가. 만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지 않고 타락한 인간을 통해 오 셨다면 예수의 육체는 인간을 위한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없으 며 그 분의 피 역시 죄를 사하는 거룩한 피가 될 수 없다. 예수 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땅의 모든 육체와 그 피는 악 할지라도 예수의 육체와 그 피는 거룩하고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영과 육체가 모두 거룩하며 예수 안 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2:9)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예수로 오셨으며 예수는 곧 그리스도다. 따라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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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누구든지 예수를 부인하거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하는 자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그의 아비인 뱀의 지혜를 사용하여 예 수와 그리스도를 교묘하게 분열시켰다. 사단은 그리스도는 인 정하는 대신 예수를 부정하는 이중적인 전략을 사용하였다. 그 리스도~ 그리스도~ 하면서 그리스도만 높이고 육체의 예수는 부정하고 멸시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스도만 인 정하고 예수를 부정하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가 파괴되기 마련 이다. 바로 여기에 사도 요한이 말한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원 리가 담겨 있다. 누구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모르고 그 리스도만 높이며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달리 말해 영만 높이고 육체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 다면 그런 자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2. 루터는 적그리스도인가

예수의 영은 곧 예수의 육체와 같다. 예수님의 영과 육체는 하 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로 오신 것이고 육체의 예수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성경이 말하는 진 리는 언제나 일원론(一元論)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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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육체를 분리하지 않으며 전인(全人)의 관점에서 예수의 영 과 육체를 하나된 것으로 증거한다.

예수의 영과 육체가 일원론의 존재인 것처럼 예수의 마음과 몸 역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원론의 존재다. 예수님의 마음 과 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 분의 마음의 생각과 몸의 행 위는 언제나 한결같이 일치한다. 예수님의 믿음과 행위도 마찬 가지다. 예수님의 마음의 믿음과 몸의 행위는 서로 분리되지 않 으며 그 믿음과 행위는 동일한 것이다. 예수님의 믿음은 행함 이며 그 분의 행함은 곧 믿음과 같다. 양자는 이원론으로 구분 되지 않으며 언제나 일원론의 믿음과 행함이 있을 뿐이다.

영과 육, 마음과 몸, 믿음과 행위의 일원론은 예수님께만 해 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일원론은 모든 교회와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릇 성도란 예수를 온전하게 닮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성도의 마음과 몸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그 믿음과 행위 역시 나누어질 수 없다. 성도의 믿음은 그 행위와 같으며 그 행위는 언제나 믿음의 행위여야 한다. 온전한 성도는 육체 의 행위는 미워하되 말씀을 따르는 행위는 미워하지 않는다. 오 히려 믿음의 행위는 믿음과 같은 것임을 알기에 믿음의 행위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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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일원론의 진리가 루터에게 이르면 그것은 여지없이 분열을 일으킨다. 루터의 입장에서는 믿음과 행위는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으며 언제나 이원론으로 대립한다. 마 찬가지로 루터에게는 마음과 몸도 역시 서로 이원론으로 대립 한다. 그에게 마음으로 시인하는 것은 믿음으로 인정되나 몸으 로 행하는 것은 믿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루터의 관점은 언 제나 심신의 이원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의 영육의 이원론이나 루터의 심신의 이원 론은 둘 다 진리가 될 수 없다. 영만 인정하고 육체를 부정하는 영지주의와 믿음만 인정하고 행위를 부정하는 루터의 교리는 근본적인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육체나 몸의 행위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의 주장과 루터의 주장은 결국 이 원론의 믿음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루터는 비록 사람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말씀을 따르고 성령을 따르는 행위라면 그것이 곧 믿음임을 알지 못하였다. 믿 음의 행위는 곧 믿음과 같은 것이라는 일원론의 진리에 무지하 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부인함으로 결국 오 직 믿음을 행위가 제거된 이원론의 믿음으로 만들어 버렸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말할 때 행위의 의미를 주의해서 다루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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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야 했다. 그래서 말씀과 어긋나는 행위는 버리고 말씀과 일 치하는 행위를 취함으로 믿음과 행위를 일치시키고 믿음이 즉 행위가 되는 일원론의 오직 믿음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그는 행위를 무조건 부인하고 입술의 고백 정도에 그치는 믿음을 오 직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행 위없는 죽은 믿음, 행위가 제거된 이원론의 믿음을 오직 믿음 이라 외치는 말시온과 같은 자가 되었다.

성경에는 루터같은 딸랑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미리 경고하 는 말씀이 있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 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 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 서 루터처럼 이원론의 믿음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 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 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주님을 믿기는 하나 믿음의 행위가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시 인하나 행위로는 주님을 부인한다. 이들은 마음으로는 주님을 믿으나 몸의 행위로는 주님을 부인한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엄히 경고하신다. 믿음~ 믿음~ 한다고 믿는 자가 아니라 아버 지의 뜻대로 곧 그 분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참된 믿는 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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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오직 믿음~ 오직 믿음~ 하면서 행위가 없거나 행위가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 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자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 면서 행위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입으로는 오직 믿음 을 외치나 실제로는 바울의 오직 믿음을 부인하고 파괴하는 자 들이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육체를 부인하고 그 행위를 파괴하 는 적그리스도와 같은 자들이다. 육체를 부정함으로 몸의 행위 를 부정하게 만들고 이어서 믿음의 행위까지 부정하여 결국 믿 음을 파괴하게 만드는 자들이 바로 요한이 증거하는 적그리스 도인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모두 적그리스도들에 해 당한다고 보면 된다. ①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며 예수를 부인 하는 자들, ② 오직 영만 높이고 육체를 부인하는 자들, ③ 오 직 마음만 높이고 몸을 부인하는 자들, ④ 오직 믿음만 외치며 모든 행위를 부인하는 자들, 이런 자들은 모두 거짓 믿음을 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며 곧 적그리스도와 같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오직 믿음만 인정하고 일체의 행위를 부정한 루터의 믿음은 적그리스도의 교리임이 드러났다. 루터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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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여 주여하는 입술의 시인만 인정하고 몸의 순종은 믿음으 로 인정하지 않는다. 몸의 순종은 있으면 좋지만 그런 순종과 열매는 구원과 상관이 없는 행위라고 치부해 버린다. 기껏해야 상급에만 관련된 행위라고 여긴다. 이같은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었는 지 모른다. 수많은 교회들이 믿음~ 믿음~ 하면서 실제로는 행 위가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되었다.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 믿음~ 하면서 실제로는 행위를 부인하는 이원론에 빠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행위없는 딸랑 믿음이 구원의 믿음인 것 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저들은 루터의 교리에 속고 있다. 루터의 오직 믿음은 이미 그 자체에 행위가 빠져 있고‘믿음의 행위’ 를 부인하는 이원론의 믿음인 것을 모르고 거기에 미혹을 당하고 있다. 사단이 루터 를 통하여 이미 육체를 부인하고 그 행위를 완전히 제거한 공 허한 믿음을 주장하게 만든 것을 모르고 유린을 당하고 있다. 그만큼 루터의 오직 믿음은 말시온의 오직 믿음보다 더 세련되 게 다듬어진 적그리스도의 교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믿 음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정체는 바로 영지주의나 말시온이 주장한 이원론의 믿음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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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적그리스도의 완성


제1장/ 오직 믿음의 위기

1. 오직 믿음의 계보

신학적으로 볼 때 루터의 오직 믿음은 그 자신이 독자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을 이단 말시온으 로부터 가져온 것도 아니다. 신학의 계보로만 보면 종교개혁가 루터와 이단 말시온은 아무 관련이 없다. 신학적 관점에서 루 터의 믿음의 계보는 오히려 어거스틴(Augustine)으로부터 연원 한다.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은 그 내용이 어거스틴의 것과 같으며 그의 교리와 동일하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오직 믿음은 서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리 우는 터툴리안에게 맞닿아 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서방 신학의 기초를 놓으며 오직 믿음만의 구원에 대한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그는 구원이란 오직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가능하다 고 보았으며 구원을 세례로 이해하였다. 터툴리안은“구원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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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7) 그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취된다. 따라서 오직 믿음 의 계보는 터툴리안 - 어거스틴 - 루터의 계보로 보는 것이 기 본적이라 하겠다.

그런데 터툴리안은 법률가라는 출신답게 대단히 율법적인 성 향이 강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의 능 력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세례 후에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터툴리안은 세례 후에 타락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때문에 매우 엄격하고 금욕적인 신 앙생활을 추구하였다.8)

신앙인으로서 금욕적이고 완전한 삶을 추구했던 터툴리안의 성향은 그를 이단 몬타누스(Montanism)에 빠지게 하였다. 몬타 누스는 성경보다 계시를 중시하는 이단이며 신비적 종말론자 였다. 교주 몬타누스는 자기 자신을 성령 하나님이라 주장하며 성경보다 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라는 두 여자의 예언을 중시 하였다. 이들은 종말론적 신앙으로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성별 과 금욕의 삶을 강조하여 혼인 및 재혼을 금하기까지 하였다. 터툴리안은 그의 말년에 이런 극단적인 금욕 신앙과 종말론적 7)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1. 차종순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279. 어거스틴은 터툴리안의 구원론을 계승하여 구원은 세례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성례전은 생명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8) 김광채. 교부열전(상).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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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이단을 추종하는 자가 되었다.9)

따라서 터툴리안이 비록 오직 믿음을 주장했을지라도 그 내 용이 루터와는 조금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루터는 행위가 일절 필요없는 오직 믿음을 주장하였고 어떤 행위일지라도 구 원과 무관한 것으로 보았다. 선한 행위는 다만 죄의 본성을 억 제하기 위한 소극적인 의미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터툴리안은 금욕적인 행위로 자신이 받은 구원을 증명하려 했기에 루터와 사뭇 달랐다. 루터는 행위가 일절 필요없는 오직 믿음만의 구 원을 주장하였으나 터툴리안은 구원받의 자로서의 삶을 증거 하기 위해 금욕적인 삶으로 일관하였고 그로 인해 은혜보다 행 위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터툴리안 이후 어거스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 직 믿음의 교리가 아직 체계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나타 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루터가 주장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오 직 믿음의 교리를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오직 믿음의 교리는 어거스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논리와 체계를 갖추었으며 기독 교 구원론을 대표하는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어거스 틴 이후에 오직 믿음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사실상 어거스틴의 교리를 답습하거나 그에 대한 주석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9) 후스토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엄성욱역. 은성출판사. 2012.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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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는 루터나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들도 모두 예외가 되지 못한다.

2. 오직 믿음의 한계와 위기

1) 오직 믿음의 본질적 한계 루터의 오직 믿음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믿음이다. 그것 은 딸랑 믿음밖에 없는 수준이기에 아직은 신령하고 장성한 믿 음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이런 어린 믿음에 있는 자들은 아 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였므로 많은 육신의 일들에 휩쓸리 게 마련이다. 마치 초대교회 때 고린도교회가 그러했듯이 딸랑 믿음밖에 없는 어린 자들은 육신의 일들에 끌려다니며 세상의 유혹과 욕심에 쉽게 넘어진다. 교회 안에 이런 어린 성도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여러 가지 죄와 부패에 휩쓸리며 세상 사람들 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어리고 연약한 육의 성도들에게 언제나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 초보 수준에 해당하는 육의 성도들이 많을 수록 교회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시간이 오래 되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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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불구하고 아직도 장성한 믿음을 갖지 못한 성도가 많을수록 교회는 더욱 더 고질적인 병폐에 빠지게 된다. 이런 성도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육신의 죄들에 연루된다. 아직 성령의 열매 를 맺는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육신의 열매를 맺는 일이 더욱 쉽고 자연스럽다. 이런 자들에게는 고린도교회에 있 었던 온갖 죄의 열매들이 계속 나타난다. 곧 음란과 거짓, 시기, 다툼, 분쟁, 방탕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면 이런 죄에 빠지는 성도들은 양심의 가책과 함께 자신 의 믿음이나 구원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과연 자신이 하나님 의 자녀이며 구원받은 성도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혹시 자 신은 구원에서 떨어지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닌가 하 는 불안감도 커진다. 더욱이 그런 상태에서 외부의 비난이나 질 책이라도 받게 되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교리는 그 근간이 심하게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믿음이 약하여 늘 죄 가운데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데 그런데도 구원을 받았다 고 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감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죄와 죄책감에 깊이 빠지며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일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그리스도 도의 초보 에 머물러 신령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이런 고통이 일 종의 통과의례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죄책과 회의에서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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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 온전한 믿음과 자유에 이르는 성도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 는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런 초보 수준에 머무르면서 계속적 으로 고통에 시달린다. 그 중에 어떤 성도들은 자기가 죄 짓는 것과 무관하게 이미 보장된 구원을 받은 자라며 스스로를세뇌 하고 자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자신이 죄짓는 일을 그 치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이 허사일 뿐인데도 말이다.

아직 연약한 믿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늘 이런 어려움과 고 통 속에 빠진다. 자신의 믿음에 따르는 행위나 열매가 없다는 한계를 깨달을 때마다 슬픔과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 이런 자 들은 아직 히브리기자가 말하는 장성한 믿음(히5:14)을 알지 못 하므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울이 말한대로 신령한 믿 음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늘 양심의 가책과 다른 사람들의 판단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 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5)는 말씀처럼 신령한 자들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으며 모 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2) 오직 믿음의 위기 어거스틴이 믿음의 교리를 정립하기 전, 당시의 로마교회는 날로 타락과 부패에 휩쓸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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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앞서 설명한 딸랑 믿음의 맹점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당시 로마교회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많은 권력과 부가 집중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개종자들이 한꺼번에 교회 에 밀려들면서 교회에는 초보적인 믿음을 가진 신자들로 넘쳐 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로마교회는 점점 세속화되며 타락의 정 도가 심화되었다. 성도들 역시 점점 무기력하고 부도덕한 삶에 만연되고 있었다.

그 때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은 로마교회와 성도의 타락에 대 해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다. 그들은 성도가 세상 사람들의 본 이 되어야 함에도 오히려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일들을 자행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입술로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행위로는 세상의 온갖 더러운 일들을 행하는 성도들을 보며 그들의 어리 석음을 성토하였다. 말로만 오직 믿음을 외치는 것은 죽은 믿 음이며 헛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며 교회의 행위없는 믿 음에 대하여도 질타하였다.

이 와중에 영국에서 온 수도사인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자 가 급부상하였다. 펠라기우스 역시 로마교회의 행위없는 죽은 믿음을 비난하였다. 그는 수도사답게 자신이 먼저 금욕적인 삶 을 실천하며 교회를 비판하였기에 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모았 다. 특히 그는 로마교회가 이토록 타락하게 된 이유가 잘못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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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상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가 오직 믿음과 오직 은 혜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인간의 책임과 행위가 약화 되어 교회가 타락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당시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오직 믿음의 교리가 이런 문제를 일으키 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며 어거스틴을 비판하고 나섰다.

당시 어거스틴은 로마교회와 터툴리안으로부터 세례와 믿음 만으로 받는 구원의 교리를 유산으로 갖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 자신이 먼저 은혜를 체험하는 가운데 믿음을 가진 자였기에 자연스럽게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어거스 틴의 입장은 펠라기우스와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펠라기우스 는 은혜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지적 책임을 더욱 중시하였다. 그는 은혜의 측면을 너무 강 조하면 상대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약화된다고 보았다. 은혜는 구원을 받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며 인간의 책임있는 행동을 중시하였다. 심지 어 그는 굳이 은혜가 아니어도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 와 능력이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충분히 구원을 이룰 수 있다 고까지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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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거스틴의 변호 갑자기 나타난 펠라기우스로 인해 오직 믿음의 교리는 위기 를 당하였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믿음의 교리가 심각하게 위 협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가 나타남으로 써 오직 믿음은 행위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공격에 노출되었다. 마침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로마교회는 행위없는 믿음으로 인한 심각한 폐해를 드러내고 있었다. 오직 믿음은 그 본질적 한계와 맹점을 모두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의 교리는 내적으로는 교회의 타락 때문에, 외적으로는 펠라기우 스의 도전으로 인해 그 입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였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 달았다. 두 사람의 교리적 주장이 너무도 정반대의 입장에 있 던 탓이다. 어거스틴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구원을 주장하 였고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의 구원을 주 장하였다. 이 문제는 어거스틴의 남은 생애 동안 지속된 싸움 이 되었고 교회 역사에서 저 유명한 예정론 논쟁으로 비화되기 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비로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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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믿음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오히려 오직 믿음의 교리를 변호하고 논증하며 그 교리 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그의 죽음이 임 하기 직전에 오직 믿음의 교리를 완성한‘은혜론’ 의 저술을 마 침으로써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로마 교회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오직 믿음의 교리는 어거스틴 으로 인해 그 논리 구조가 완성되었다. 이로 인해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고 드디 어 오직 믿음의 교리는 기독교 역사에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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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1. 펠라기우스의 행위구원론

예나 지금이나 행위없는 오직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비판 을 받는 것은 늘 동일하다. 그만큼 행위없는 믿음의 폐해는 교 회의 현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맹점이다. 그런데 펠라기우 스는 행위없는 믿음을 비판하면서 심히 어리석은 방향으로 나 아갔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성경의 근본 적인 부분들을 파괴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먼저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타락이 그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개 인적인 죄에 불과하다고 하며 원죄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갓 태 어난 유아에게는 죄가 없으며 인간은 자유의지의 노력에 따라 죄없는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나아가 인간의 선한 의 지를 잘 사용하면 죄와 무관한 삶을 살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 였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주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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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시작하고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성경의 기초도 모르는 무지한 생각일 뿐 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맹신하였다. 그는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선이나 악 을 행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구원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펠라 기우스는 인노센트(Innocent)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또한 짓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10)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책임이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있다고 본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주장들은 하나같이 성경의 진리를 무시하고 있 다. 그의 주장과 달리 아담의 죄는 전인류적인 것이어서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아 래 놓여졌다. 유아에게도 죄가 유전되며 그들에게도 사망이 동 일하게 임한다. 인간에게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인간의 의 지는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를 행할 수 없으며 자유의지로 구 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펠라기우스의 주장들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구원론에 불과한 어리석은 주장이다. 10)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 차종순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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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거스틴의 은혜구원론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만큼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어거스 틴은 아담이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하였고 아담 이후 의 모든 인간들도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고 바르게 보았다. 그 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타락과 함께 자유의 지 역시 죄에 오염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담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했다고 주장한다.11)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의지가 불구가 되어 자신을 구원하 는 일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에서 가장 쟁점이 된 부분이 바로 이‘자유의 지’문제였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100% 신뢰한 반면 어 거스틴은 100% 부정하였다. 펠라기우스는 구원에 있어서 의지 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나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는 100% 무용지물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자유의지를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두 사람의 주장도 서로 충돌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를 과신하고 구원 11) Bengt Hagglund. 신학사. 박희석 역. 성광문화사, 1977.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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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인간의 책임으로 이해하였다. 그에게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의지의 책임이 되며, 구원을 받는 것은 의지의 공로로 돌려진 다. 이와 반대로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부정하여 구 원은 의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구원은 오 직 은혜에 의해 결정되며, 오직 100% 하나님의 은혜로만 결정 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타락하였기에 인간 은 하나님을 믿으려는 마음조차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럼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가? 이에 대해 어거 스틴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치유할 때 비 로소 믿으려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인 간의 마음에 믿음을 선물로 주입시킴으로써 믿음을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2)

이렇게 어거스틴에게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일 따름이 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는 자는 이미 치료를 받고 믿음을 선물 로 받은 자다.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은 그 의미가 같다. 왜냐하면 오직 은혜라는 선물을 받은 자만이 오직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어거스틴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의 기틀을 만들었 12) Augustinus.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신앙론. 김종흡 역. 생명의말씀사, 1997. p23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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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구원이란 인간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100% 은혜의 구원으로 보았다.

3. 오직 은혜는 오직 예정과 같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 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인 간이 타락하고 모두가 불의하기에 아무도 은혜를 받을 자가 없 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받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은혜를 받을 뿐이다. 어 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그 분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 주어진다.13)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은혜와 믿음이란 인간의 의지가 관여 할 영역이 아니며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영역이다. 그는 하나님 의 절대 주권이 누구의 마음 속에 은혜와 믿음을 주입해 주실 지를 결정하신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그 절대 주권의 결정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불렀다. 또한 어거스틴은 그 결정과 선택 이 창세 전에 예정된 것이라고 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 13)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4. 차종순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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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예정의 교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어거스틴의 예정론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가운데 오직 은혜의 교리를 제시하며 오 직 예정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였다. 오직 믿음은 오직 은혜에 의하며 또한 오직 은혜는 오직 예정된 자만 받는다고 하였다. 이로써 믿음, 은혜, 예정을 같은 의미로 일치시키며 이 모두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선물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오직 예정된 자만이 오직 은혜로 인해 오직 믿음을 선물로 받아 구 원을 받는다는 예정론의 교리를 확립하였다.

처음에 어거스틴은 서방교회로부터‘구원=세례’ 라는 도식을 물려 받았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여기에 하나님의 예정을 더 하여‘구원=세례=예정’ 이라는 도식으로 발전시켰다. 이로써 은혜와 예정의 교리를 완성하였다. 이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오 직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아무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오 직 택함를 받은 자, 그것도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 이 은혜를 받고 믿음을 받는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오직 하나 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모든 결론을 예 정론의 교리로 귀결시켰다. 믿음의 결심을 인간의 의지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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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한 것으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펠라 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물리치고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행 위론도 침몰시켰다. 그러나 그의 예정론은 이후의 기독교 역사 에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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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예정론을 완성하였 지만 예정론은 교회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교리다. 이곳 에서 그 교리를 다루는 것은 지면상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여 기서는 어거스틴이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라고 주장한 것에 대 해서만 부분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예정론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홈페이지(www.cresal.net)를 참조하면 좋을 것 이다.

1. 세례받은 유아

어거스틴은 그의‘은혜론’ 에서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는 세례 받은 유아들과 예수님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다.14) 그는 세례 받은 유아들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이 자유의지 때문에 세례받 14) Augustinus.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신앙론. 김종흡 역. 생명의말씀사, 1997. p24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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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유아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 례를 받고 또한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유아들이 세례로써 구원받 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 장하였다.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세례를 받은 후에 죽게 된 유아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고 죽은 유아는 창세 전에 구원받 을 백성으로 선택된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창세 전에 선 택되었기에 죽음을 당하기 전에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하 였다. 반면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는 유아들은 그들이 예정 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은 것이라 하였다.15)

그러나 세례받은 유아가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라는 주장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우선 어거스틴은 아무 근거없이 세례와 예 정을 동일시하고 있다. 세례는 믿음의 시작에 대한 외적 표시 일 뿐이다. 그것을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표시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성경 어디에도 물세례와 예정을 동일시하는 부 분이 없다. 만일 그런 부분이 있다면 바울이 세례를 대단히 중 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나는 그리스보와 가이 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 15)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4. 차종순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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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감사하노니” (고전1:14)라고 말하였다. 만일 세례와 예정이 같은 것이라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세례가 예정과 같은 것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세례를 주어야 할 터인데 어 찌 세례를 베풀지 않아 감사하다고 하겠는가.

바울은 물세례를 주기 위해 사역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십자 가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주님께 바 치는 영적 세례를 위해 사역하였다. 때문에 바울은“그리스도 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 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고전1:17)라고 하였다. 바울이 전하려 한 것은 형식적인 세례가 아닌 영적 진리를 전하려는 것 이었다. 영적 진리를 가르쳐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하는 영적 세 례를 받게 하려고 사역하였다. 따라서 외적인 세례를 마치 영 원한 구원의 증거인양 제시하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성경의 진 리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유아가 세례받고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유아가 믿음 생 할을 계속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살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 가. 유아세례를 받고도 성인이 되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으며 또 타락에 떨어지거나 심지어 이단이나 다른 종 교로 가는 자들도 부지기수다. 만일 유아세례가 예정의 증거라 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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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물세례의 의미를 과대하게 해석하여 예정과 동일 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주장에는 이런 일들 이 많이 있다. 그의 교리에는 주장만 있고 논증이나 설명을 하 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 당시에도 유아세 례를 받은 자들이 나중에 믿음에서 떠나는 일이 많았다. 그러 면 왜 세례를 통해 예정된 구원을 받은 자가 믿음에서 떠나는 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중간 에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은 결국 택함받지 못한 자라고 설명을 할 뿐이다.16)

이런 해명은 자신의 주장을 뒤집는 어리석은 말이다. 어거스 틴은 분명히 예정된 자만 믿고 세례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런 데 세례 후에 타락한 자들은 어떻게 예정되지 않았는데 세례를 받았는가. 그런 자들은 예정이나 구원과 상관없이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정된 자만 세례를 받는다는 어거스틴 의 주장은 거짓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유아가 아닌 성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거스틴 은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만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예정된 자만이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7) 16)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4. 차종순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419. 17) 앞의 책.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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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인들의 경우에도 믿고 세례받은 이후에 믿음을 떠 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예정된 자는 다 시 회개할 것이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예정되지 않은 자 라 하였다. 여기에도 똑같은 의문이 발생한다. 믿다가 타락한 자는 예정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믿음을 가졌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어거스틴은 이 점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대답이 없다. 그저 믿음을 가진 자는 예정된 자요 믿음을 버린 자는 예정되 지 않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그는 예정되지 않은 자 가 어떻게 믿음을 가졌는가 하는 근본적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 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필자는 2002년 무더운 여름 내내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읽으 며 몇 달을 씨름한 적이 있다. 그 때 두려운 마음으로 그 책을 보았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신비한 영역이며 인간 이 알 수 없는 난해한 부분인데 내가 어찌 그 신비스런 예정과 구원을 이해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천 페이지가 넘 는 어거스틴의 책을 탐독하면서 필자는 배신감을 느겼다. 그 크 고 두꺼운 책에서 주장하는 예정론의 논리가 너무도 허술하고 빈약하여 헛웃음만 나왔다. 그 책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책 이 아니라 다만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책에 불과하였다. 그래 서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만 하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이 나 오면 아예 언급을 피하거나 혹은 비논리적인 변명으로 덮어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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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곤 하였다. 그 책을 어거스틴을 숭배하는 관점에서 읽으면 모 를까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허술하고 빈약한 논 리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왜 이런 책을 최고의 진리로 여기 고 받드는지 참으로 의아스러웠다.

2. 예정론과 예수님

어거스틴은 세례받은 유아와 함께 예수님이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라고 주장하였다.18) 어거스틴은 예수도 이 땅에서 어떤 일 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되었으므로 예정론의 큰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야말로 예정의 교리를 증거하 는 가장 확실한 표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이런 주장이 바로 어거스틴에게 실망할 수 밖에 없는 말도 안 되는 부분이다. 어거스틴은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가 예수님이 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어리석은 논리 에 불과하다.

우선 예수님과 인간을 동일한 예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다. 예정에 있어서 양자는 결코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다. 18) 앞의 책.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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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 이다.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주체이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 다. 예수님은 죄인도 아니고 구원받아야 할 어리석은 인간이 아 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신 분이다. 이 런 예수님이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예정론의 대상이 된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어거스틴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예정론의 증거라면 결국 하나님 자신이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 아야 하는 죄인으로 전락하는 신성모독이 되고 만다.

물론 성경도 예정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예정의 말씀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를 예정하시며 인간의 구원자로 미리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처음 부터 인간의 맏아들로 예수를 예정하셨고 모든 성도들이 예수 를 본받도록 미리 정하셨다. 하지만 예수는 구원의 주체로 예 정된 분이지 결코 구원의 대상이나 은혜로 구원받는 인간의 표 본으로 예정된 분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예정과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예정론은 그 의미가 다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일반적인 예정을 말하나, 어거스틴처럼 각 개인의 구원을 결정 하는 예정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왜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가 하는 개인 예정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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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예정론을 주장 한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설명한 부분이 있다. 그는 인간이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데 왜 이토록 쉬운 구원을 거부 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쉽게 믿고 구 원을 받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권해도 끝내 구원받기를 거부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얻은 결 론이 예정론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믿음만 있으면 쉽게 받는 구 원이지만 타락한 인간은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창세 전에 예정된 자만이 믿음을 선물로 받아 믿기 시작한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는 것이다.19)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주장한 예정론은 누가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개인 예정’ 에 관한 교리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는 성경의 예정과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예정을 말하기는 하나 결코 예정론을 말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세 전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을 예정하셨다. 하지만 창세 전에 누구는 구원 받고 누구는 버림받을 것인가를 정하는‘개인 예정’ 에 관한 예 정론을 정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의지를 가진 분이므로 얼마든지 예정을 하실 수 있 19)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2. 차종순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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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단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므로 결코 악한 예정은 할 수 없으 시다. 아무런 이유없이 창세 전에 인간을 만들기 전부터 누구 는 구원하고 누구는 저주하는 불공평하고 불의한 예정은 할 수 없으시다. 이는 부모가 자식에 대해 선(善)한 예정은 할 수 있지 만 악(惡)한 예정은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비단 부모 뿐만아니 라 선한 인격을 가진 자는 정당한 근거없이 악한 일을 예정하 지 않는다. 선한 존재에게 선한 예정은 있을지라도 악한 예정 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선하신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어 떤 이유나 근거도 없이 어떤 사람은 영원히 사랑하고 어떤 사 람은 영원히 저주하는 개인 예정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개인 예정을 주장하면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을 저주 하는 불의한 예정을 하는 분이 되므로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 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를 예정하셨다는 것은 구원하는 하나님으로 선하게 예정된 분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버림받는 예정론의 표본으로 정해진 분이 아 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아야 할 인간이 아니므로 애초부터 예정 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처럼 예 수님을 예정론의 표본이라고 주장하면 예수께서 구원받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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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으로 전락하는 문제가 발생해 버린다.

결론적으로 보아 어거스틴이 예수를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 라고 한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성경의 예정과 자신의 예정론을 교묘히 혼합하여 마치 예정과 예정론을 같은 것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예정과 예정론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성경의 예정이란 모 두 선한 예정을 말할 뿐이며 악한 예정을 말하지 않는다. 설령 심판과 저주에 대한 예정의 말씀을 할 경우에도 먼저 반드시 그 근거와 이유를 밝히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언제나 공의의 예정 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그 안에 아무런 이유나 근거가 없는 불의한 예정이 들어 있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훼손하게 된 다. 또한 예수님을 구원의 주체가 아닌 구원의 대상으로 전락 시키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독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 서 예수님이 예정론의 가장 큰 증거라고 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논리적 근거가 없으며 진리가 아닌 빈약한 교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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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적그리스도의 완성

1. 예정론의 핵심 기능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논쟁이 되는 교리는 바로 예정론 교리다. 어거스틴 때부터 시작된 예정론 논쟁은 종교개 혁 때는 물론이요 현재까지도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예 정론 교리는 분명한 정체가 있다. 예정론은 그 핵심이 분명하 다. 따라서 예정론의 복잡하고 세부적인 내용들을 다 살피지 않 아도 예정론의 핵심 기능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면 예정론의 실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 인간의 의지를 완전 제거한다 예정론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가운데 완성된 교리 다. 두 사람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오직 은혜를, 펠라기우스 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였다. 양자가 벌인 논쟁은 구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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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하나님의 은혜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인가에 대한 문제와 도 같았다.

어거스틴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결정된다 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는 구원이 100% 하나님의 주권에 의 해 주어지는 것임을 말하며 예정론을 주장하였다. 바로 여기에 예정론의 핵심 기능이 존재한다. 예정론은 인간의 의지를 완벽 하게 부정하는 논리를 갖고 있다. 예정론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지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폐기된다. 그리하여 예 정론을 믿는 순간 인간의 모든 의지나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 는 것으로 완전하게 제거되어 버린다.

예정론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것은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 는다. 이 교리는 인간에 속한 모든 것을 100% 소멸시키는 기능 을 갖고 있다. 인간의 행위를 100% 멸절시키고 오직 믿음만 남 게 하며, 인간의 의지를 100% 멸절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만 남게 하는 가공할 파괴력을 갖고 있다.

2) 인간의 행위를 완전 제거한다 어거스틴은 오직 믿음에 인간의 행위가 털끝만큼이라도 개입 하면 믿음의 의미가 훼손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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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에서 하나님의 예정 외에 인간의 어떤 것도 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일체 개입하지 못하고 100% 오직 믿음만 존재하는 교리를 만들었다.

사실 터툴리안이 오직 믿음을 말할 때나 말시온이 오직 믿음 을 주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 믿음의 교리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터툴리안은 믿음을 말해 놓고는 금욕적인 행위에 관 심을 기울이다가 이단에 빠지는 문제를 드러냈었다. 말시온도 오직 믿음을 말하였으나 그 역시 믿음에 대한 인간의 결단을 촉 구함으로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말시온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원하는 자는 오직 믿음 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인간은 누구나 자 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자비를 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구원을 의지할 수 있 다고 보았다. 따라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쉽게 구원을 받는 다고 하며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는 오늘날 현 대적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것처럼 인간의 마음과 의지로 믿음 을 결심하도록 사람들을 초청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말시온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용인하고 있었다.

말시온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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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그러면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의 구원을 주신다 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당시의 많은 교회들이 가진 보편 적인 생각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예정론의 교리에 신경 쓰지 않 는 복음주의 교회들 역시 이런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말시온의 오직 믿음은 어거스틴과 달리 인간의 자유 의지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다. 말시온의 말대로라면 믿음을 갖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한다. 그렇게 되면 은연 중에 인간의 의지적 결정이 구원의 공로가 되는 문제가 발 생한다. 어쨌든 자유의지가 믿기로 결심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 으니 그것이 미력하나마 인간의 공로가 되고 자랑이 될 수 있 지 않겠는가.

이처럼 예정론의 관점이 아닌 여타의 복음주의 관점에서 말 하는 오직 믿음은 그 안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허용되어 있으며 따라서 언제든지 털끝만큼이라도 인간의 공로가 개입할 수 밖 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말시온이나 복음주의가 말하는 오직 믿 음은 인간의 의지의 공로를 100% 제거하지 못하기에 순수한 의 미의 오직 믿음이 되지 못하는 문제가 드러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 이전까지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공로를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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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히 제거한 오직 믿음의 교리가 존재하지 못한 상태였다. 교 회가 아무리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을 외친다 해도 거기에는 늘 자유의지의 행위가 개입되어 있었다. 오직 믿음을 전하면서 인 간의 의지적 결심을 인정하고 촉구하는 상태였기에 인간의 의 지가 개입되는 일을 막지 못하였다. 어찌되었든 인간이 의지하 고 결심함으로 구원을 받으니 그 의지의 결심이 공로가 되고 행 위가 되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등장으로 인해 상황은 반전되었다. 어거 스틴은 예정론 교리를 통해 인간의 의지를 원초적으로 부정하 였다. 예정론을 통해 자유의지가 구원에 개입할 수 없도록 만 들어 인간의 공로나 의를 주장할 수 없도록 하였다. 오직 믿음 안에 인간의 어떤 의지나 공로나 행위가 개입할 수 없도록 믿 음의 교리를 완전하게 다듬었다. 그럼으로써 어거스틴과 그의 예정론으로 인해 드디어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행 위나 공로가 완전하게 제거된 100% 오직 믿음만의 교리가 나타 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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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그리스도의 오직 예정

1) 오직 믿음의 둔갑 어거스틴은 오직 믿음의 교리를 새롭게 완성하였다. 그는 오 직 믿음을 오직 예정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고 그 믿음을 하나 님이 주입하시는 믿음으로 만들었다. 어거스틴에게 믿음은 인 간이 의지하거나 결심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란 다만 창세 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만 가질 수 있는 신비한 선물이다. 이렇게 어거스틴은 믿음의 시작을 인간 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에 의한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오직 믿음의 문제를 다룰 때 온전한 믿음 이나 열매맺는 믿음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그는 이제 막 구원을 시작하는 씨의 믿음이나 처음 세례받는 정도의 초보 수준의 믿음을 다룰 뿐이다. 믿음에 대한 그의 모든 관심은 믿 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이 그 정도의 믿음만을 다루고 그친다면 어거스틴의 노력도 나름대 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의 시작보다 열매 맺는 믿음, 온전하고 장성한 믿음, 바울이 증거한 신령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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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 더욱 관심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① 신령한 믿음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중대한 이유 중 하나는 고린도교회 의 분열 때문이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에 사분오열되 고 있었다. 교인들은 서로 파당을 지어 누구는 바울파, 누구는 베드로파나 아볼로파, 혹은 그리스도파에 속했다고 하며 서로 분쟁을 일삼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급히 고린도전서를 쓰 게 되었는데 문제는 바울이 파당을 비판하는 서신을 쓰면서 또 다른 파당을 언급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말하기를“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1)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2)고 한다. 바울의 말인즉 하나님의 교회에는 어린이가 있고 장성한 자가 있으며 또한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신령한 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린 자는 젖으로 먹고 다른 신령한 자들은 밥으로 먹 는다고 한다. 이와 함께 바울은“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 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2:15)고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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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수준낮은 어린이로 판단하며 그 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령한 자들은 아무에게 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며 고린도교회가 바울 자신이나 혹은 신 령한 자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불허한다. 고린도교회의 입장 에서 이 말을 들으면 화가 날 수 있는 말이다. 신령한 자들이 뭐 가 대단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며 또 자신들은 아무에게도 판단 을 받지 않는다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물론이요 우리 역시 바울의 말에 귀를 귀울여 주의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인간적이고 육적인 믿음을 가진 자가 있고 혹은 신령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있음 을 알아야 한다. 한편으로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어린아이가 있 고 혹은 하늘의 믿음을 가진 장성한 자가 있음을 분별해야 한 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육신을 따라 육신의 열매를 맺는 자들 과, 말씀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로 양분되는 것을 두 렵게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파당과 분쟁을 일삼고 심지어 음행까지 행하는 육의 성도들이다. 그들은 믿고 세례받 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종교적인 수준의 믿음에 처해 있 다. 그런 자들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이 속히 말씀의 젖을 먹 고 어서 속히 성장하여 장성한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갓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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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는 말씀 과 같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지 못하면 그들은 베드로가 경고한 것처럼“이런 것(성령의 열매)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 었느니라” (벧후1:9)는 책망을 듣는다. 베드로의 말인즉 그런 자 들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요 또한 죄 사함 받은 은혜를 망각하 여 그것을 헛되게 하는 자라는 말이다. 그런 자들의 최후는 분 명하다. 그들은 열매없는 자, 불순종하는 자, 입으로만 믿는 가 라지 믿음을 가진 자로 판정되어 바깥 어두운 곳으로 버려지고 만다.

② 사랑의 믿음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도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 온전 한 믿음을 증거한다. 우리는 흔히 갈라디아서가 이신칭의를 증 거한다고 알고 있지만 갈라디아서는 그런 초보의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한 서신이 아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구 절은 5장 6절에 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 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바울은 이 말씀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효력이 있는 진짜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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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증거한다. 그것은 사랑으로 나타나고 표현되는 믿 음이다. 이 믿음은 그 안에 사랑이 충만하기에 이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며 역사한다. 바울은 이 믿 음 외에 다른 것은 아무 의미나 효력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한 다.

이 5:6절 말씀을 보면 세 종류의 믿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할례를 주장하는 믿음이다. 이는 유대에서 온 율법주의 자들이 주장한 것인데 오직 믿음만 갖고는 부족하니 할례와 율 법을 더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무할례를 주장하는 믿음이다. 이는 그 당시 기독교 영 지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성도의 행위를 모두 무가치 한 것으로 여기고 일체의 행위가 필요없는 오직 믿음만을 주장 하였다. 마치 영지주의자 말시온처럼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며 그 외에 어떤 행위도 필요치 않다는 주장이다. 바울은 이처럼 믿기만 하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영지 주의의 믿음을‘무할례’ 의 믿음으로 구분하였다.

세 번째 믿음은 바로 바울이 제시하는 사랑의 믿음이다. 이 믿 음은 그 안에 사랑이 충만한 믿음이다. 이 사랑으로 충만한 믿 음은 곧 온전한 믿음과 같다. 믿음이 사랑으로 충만하여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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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사랑의 행위가 나오고 온전한 행위가 나오니 이 어찌 온전 한 믿음이라 아니하겠는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증거한 믿음은 바로 이 사랑의 믿음이다. 그저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 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그런 식의 초보의 믿 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의 오직 믿음은 무할례를 주장 하는 영지주의자들의 믿음과 같아서 구원에 아무 효력이 없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되는 유일한 믿음은 오직 사랑 의 믿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믿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 가지 믿음 모두 처음 시작할 때는 초보의 믿음으로 시작한다는 사실 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의 이름을 믿고 세례받아 어린아이의 믿 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믿고 세례 받는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믿음을 시작한다고 해 서 구원이 모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무 행위도 없는 오직 믿음에 계속 머무르며 그것 만 주장하면 그것은 무할례의 믿음이 되어 버린다. 또한 믿음 에 율법의 행위나 육체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할례 를 주장하는 믿음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오직 믿음으 로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참 되고 온전한 믿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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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야 하며 성령의 인도와 연단을 받아야 한 다. 그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온전한 믿음, 사랑의 믿음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믿음의 시작이 아무리 좋 고 은혜스러웠다 할지라도 그 마지막은 아무 효력도 없는 믿음 인 것이 판명되어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지고 말 것이다.

③ 믿음의 시작은 아직 구원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고 세례받고 죄 사함을 얻는 것은 대단 히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전부가 아니며 구원 의 전부도 아니다. 그것은 초보의 믿음, 육의 믿음에 불과하여 아무나 원하기만 하면 쉽게 받을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은혜에 불과하다. 심지어 신천지같은 수많은 이단들도 처음에는 다 그 런 믿음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믿음의 과정에서 파선하거나 변질되어 타락하고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 다. 그러니까 믿음의 시작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으나 그것 을 과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믿음의 시작은 이제 막 구원 을 출발한 것이며 아직 부르심의 구원을 받은 상태에 불과하다. 그런 상태에서 이미 구원을 다 받은 것인양 믿음의 시작을 애 지중지 해봐야 그것이 구원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믿음의 시작에 사로 잡힌 자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버림받 거나 심판날에 염소같은 성도들로 판정되어 영영한 지옥 불에 던져질까 두려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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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참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성취해야 할 믿음은 온 전한 믿음, 사랑의 믿음 뿐이다. 또한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신 령한 믿음 뿐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지각과 분별을 가진 장성 한 믿음인데 우리는 이 믿음을 꼭 가져야 한다. 그래야 딸랑 믿 음만 주장하는 무할례의 헛된 믿음에 속지 않는다. 또한 믿음 외에 인간의 행위를 더하려는 할례의 믿음에도 속지 않는다. 성 경은 믿음외에 육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인 간의 행위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성경은 행위를 요구하 나 다만‘믿음의 행위’ 를 요구할 뿐이다. 믿음의 행위는 구원받 기에 합당한 자들이 가진 온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 회에서 이런 믿음의 행위가 따르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를 찾 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도“인자가 올 때에 세 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고 탄식하셨다.

④ 믿음의 시작을 위조한 어거스틴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오직 믿음과 그 예정론 을 다시 냉철하게 분별해야 한다. 그의 오직 믿음과 예정론은 다만 믿음의 시작에 집착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생명 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길이 좁고 협착하다는 사실을 성찰하지 못하고 그 길을 다 걷지 못한 자다. 그래서 그저 믿음을 시작하 고 세례를 받기만 하면 모두 다 예정된 자요 구원받은 자라는 식으로 가르쳤다. 사도 바울은 세례를 중요시하지 않았으나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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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틴은 세례를 예정과 동일시하면서까지 세례를 과대하게 취 급하였다. 또한 그는 행위없고 열매없는 믿음은 천국문 앞에서 쫓겨나리라는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며 행위없는 오직 믿음이 예정된 자의 믿음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의 맹점을 제대로 분별해야 한다. 그의 예정론은 장성하고 온전한 믿음과 아무 관련이 없 는 교리다. 그것은 초보 수준의 오직 믿음을 과잉 보호하기 위 해 어거스틴이 스스로 만들어 낸 교리에 불과하다. 그의 교리 에는 대단히 위험한 영적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도 의 초보에 불과한 오직 믿음을 마치 완전한 믿음인양 둔갑을 시 킨다는 사실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어린 믿음을 마치 믿음 의 길을 이미 끝낸 택함받은 믿음인양 착각하게 한다. 그래서 기껏 종교적인 수준에 있는 육신의 성도들이 이미 구원을 다 받 은 것인양 오해하게 만든다. 이는 성도들이 온전한 믿음과 온 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속이고 미혹하는 일에 다름이 아 니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어거스틴의 오직 믿음은 무할례의 믿음 과 동일하다. 그의 믿음은 펠라기우스처럼 행위를 주장하는 할 례의 믿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5:6절의 사랑의 믿음도 되지 못한다. 그의 믿음은 저 옛날 영지주의자들이 외친 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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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의 믿음에 불과하다. 아무런 행위도 필요없고 어떤 열매가 없 다해도 오직 믿음만 있으면 그것이 구원이라 주장하는 것이 영 지주의의 무할례와 같은 교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우리는 어거스틴 이전에 이미 무할례의 믿음을 주장한 영지 주의를 알고 있다. 영지주의자 말시온은 어거스틴보다 200년 이상 앞서 오직 믿음을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한 오직 믿음은 ‘믿음의 행위’ 까지 모두 폐기한 무할례의 믿음을 주장한 것이 었다. 그런데 이런 말시온의 오직 믿음은 그나마 순진한 편에 속한다. 어리숙한 말시온은 오직 믿음에서 행위를 완전히 제거 하지는 못하였다. 그에 비해 어거스틴은 말시온보다 더욱 정교 한 형태로 오직 믿음을 위조하고 둔갑시켰다. 그는 오직 믿음 에 예정론을 덧씌움으로 오직 믿음에서 인간의 행위를 완전하 게 제거하였다. 그런 다음 오직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믿음, 창세 전부터 예정된 완전한 구원의 믿음인양 탈바꿈시켰 다. 구원의 효력이 없는 무할례의 믿음을 구원의 효력을 가진 진짜 믿음인양 위장하고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2) 오직 믿음의 신비화 거듭 말하지만 오직 믿음은 초보적이고 육적인 믿음에 불과 하다. 그런데 그 오직 믿음이 오직 예정을 만나면 그것은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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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믿음인양 둔갑한다. 그 믿음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택함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인양 과대하게 높 여진다.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입은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신비한 믿음인양 미화되고 만다.

그러나 처음 믿을 때의 오직 믿음은 그런 신비하고 난해한 믿 음이 아니다. 그 믿음은 땅의 죄인들도 가질 수 있는 종교적 수 준의 믿음이다. 그 믿음은 타락한 인간이 결심하는 것이기에 어 리석고 악한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당장에는 믿는다고 고백 하지만 돌아서면 바로 범죄하는 것이 땅의 인간들이 가진 믿음 의 수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 에게서 나오는 믿음을 수용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죄 인이 처음 믿음을 가질 때는 그런 부끄러운 믿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땅에 죄인도 자신의 의지로 종교적 수준 정도의 믿음은 가질 수 있다. 그 믿음이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부패한 믿음에 불 과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쓰레기같은 죄인으로부터 나오는 쓸모없는 것이 믿음인양 인정을 받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 나님의 긍휼과 그 분의 약속 때문이다. 하나님은 땅에 죄인들 에게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죄를 사하실 것이라고 선 언하셨다. 그러면 죄인들은 그 선언에 따라 믿음을 고백하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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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면 아무리 더러운 자의 고백이어도 그 믿음으로 죄 사 함을 받는다. 이 때 죄인의 고백하는 믿음이 무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겠는가. 전혀 가치도 없고 아무 쓸모도 없다. 도리어 악하고 추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라도 고백만 하면 죄 를 사하겠다는‘약속의 말씀’ 이 공표되었기에 죄인의 어리석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처음 믿음을 가질 때의 믿음은 아무리 더럽 고 악한 자의 믿음이어도 상관없다. 그저 타락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수준의 믿음이면 족하다. 이 점에서 인간이 처음 믿을 때의 믿음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타락한 자에게 나온 불 의하고 부패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놀랍게도 믿음이라 여겨지며 의롭게 여겨지고 믿음의 행위로 여김을 받 는다. 왜냐하면 죄인의 믿음은 심히 더러우나 그것이 예수의 피 를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고백한 것이면 효력이 있는 것으로 대 우를 받기 때문이다.

이로써 타락한 죄인들도 구원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저 타락한 자의 수준만큼만 믿고 회개하면 이제부터 하늘 구원 에 참여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믿음을 가 진 성도들은 자신이 이제 겨우 구원을 시작하는 부르심을 받은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인의 더러운 믿음에 예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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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뿌려 그것을 받아 주셨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죄인을 천국 에 들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천국은 온갖 더러운 자로 득실거 리는 더러운 곳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제 땅에 죄인은 더욱 하 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 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죄인은 반드시 성령 곧 진리의 말씀으 로 그 내면이 새롭고 온전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의 날이 이를 때 온전하고 정결한 예수의 신부로 그 날을 맞이할 수 있 다.

하지만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 예수의 신부로 단장하는 길 은 쉬운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길 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바로 이 길에서 실패하여 천국문 앞에 서 버림을 받고 있다. 많은 자들이 부르심의 구원을 받았으나 택하심의 구원에 이르지 못함으로 버림을 당한다. 오직 죽기까 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좇으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 숨을 버리기까지 말씀을 좇는 자만이 좁은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이란 예수를 닮는 것이고 말씀을 닮는 것이다. 말 씀을 믿고 배우고 깨달아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자가 될 때 그 사 람 안에 온전한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이런 구원은 초보의 오 직 믿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죄인이 처음 믿는 세례의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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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불가능한 구원이다. 오직 온전한 믿음, 장성하고 신령한 믿음에 이른 자만이 이 구원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어거스틴은 이런 신령한 믿음이나 온전한 구원과 관계된 예정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세례받은 초보 의 믿음과 예정론을 연관시켜 말하였다. 만일 그가 지혜있는 자 였다면 그는 초보의 믿음에서 온전한 믿음에 이르는 과정을 탐 색하고 그것을 증거했어야 했다. 그 어렵고 좁은 길을 어떻게 걸을 수 있는가를 깊이 연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성경이 밝 히는 온전한 믿음과 참된 구원의 과정에 대해 간과하였다. 다 만 오직 믿음에 매달려 그 초보의 믿음이 대단하고 신비한 믿 음인양 과대하게 부풀리는데 집착하였다. 그래서 죄인이 갖는 종교적 수준에 불과한 믿음을 하늘의 거룩한 택함의 믿음인양 비약시켜 놓았다. 그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같이 구덩이 에 빠지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3) 오직 믿음의 성역화 어거스틴의 오직 믿음과 오직 예정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양자는 서로 돕고 돕는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먼저 오직 믿음은 오직 예정이 없으면 완전한 교리가 될 수 없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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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믿음은 늘 행위없는 헛된 믿음, 구원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 는 비난에 시달려야 한다. 더군다나 오직 믿음은 믿음을 결심 하는 인간의 의지가 늘 개입하기에 순수한 의미의 오직 믿음이 되지도 못한다.

하지만 예정론이 함께 있으면 상황은 놀랍게 달라진다. 예정 론은 오직 믿음에서 인간의 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누 가 믿음을 결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예 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직 믿음을 인간의 어떤 공 로도 개입할 수 없는 순수(?) 오직 믿음이 되게 만든다. 그런 다 음 이렇게 처음 믿음을 결심하는 초보 수준의 믿음을 택한 자 만 받을 수 있는 신비한 믿음인양 둔갑시킨다. 수준낮고 어린 죄인의 믿음을 하나님의 주신 특별하고 신비한 믿음인양 포장 해 버린다.

이 과정을 통해 성도의 믿음은 딸랑 믿음만 있어도 아무 문제 가 없는 것인양 변조된다. 그런 다음 이 행위없는 죽은 믿음에 예정론을 덧씌워서 참된 믿음인양 미화시킨다. 아, 행위없는 믿 음은 죽은 믿음이요 이원론으로 분열된 적그리스도의 믿음인 데... 어거스틴은 예정론을 통해 행위가 없는 믿음이 정상적이 고 참 믿음인 것처럼 둔갑을 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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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오직 예정 역시 언제나 어거스틴의 오직 믿음을 필 요로 한다. 만일 그의 딸랑 믿음이 없으면 예정론은 아무 쓸모 가 없다. 예정론이라는 바이러스는 언제나 딸랑 믿음이라는 숙 주를 필요로 하며 그 믿음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예정론은 오 직 믿음이 아닌 다른 것, 예들 들어 열매나 사랑이 있는 믿음 등 을 숙주 삼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믿음은 그 자체가 택하심 의 구원을 확증해 주기에 다른 보증이 필요치 않는 탓이다. 그 렇지만 딸랑 믿음의 경우는 다르다. 딸랑 믿음은 아직 택함받 을 정도의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에 그것을 택함의 믿음처럼 보 이게 하려면 예정론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결국 예정론은 딸랑 믿음을 참 믿음으로 위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또한 그것을 숙주 삼아 존재하는 공생관계를 갖는 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어거스틴은 오직 믿음과 오직 예정을 동시적으로 주장하였다. 오직 예정된 자만 오직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오직 믿음을 가진 자는 이미 예정된 자라 말하였다. 이렇게 그의 믿음과 그의 예정은 서로 완전하 게 의존하고 결합한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자기 스스로 온전 한 믿음인 것을 증명하지 못하기에 그러하다.

결국 어거스틴은 예정론을 동원함으로 오직 믿음을 신비화하 고 성역화 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땅의 인간들도 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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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육의 믿음을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하락하시는 신비 한 믿음인양 바꾸어 놓았다. 그는 초보 수준에 불과한 딸랑믿 음에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뒤집어 씌어 그것이 인간이 범접 할 수 없는 난해하고 신비한 믿음인양 위조하였다. 하나님의 주 권에 의한 예정의 섭리라고 겁을 주며 어리석은 자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어리고 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신 것 이라고 겁을 주면 누가 감히 섣부르게 그 강력한 교리에 대들 려 하겠는가. 그 믿음에 행위가 없다든지 다른 어떤 문제가 있 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 우긴다면 어느 누가 쉽 게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이처럼 오직 예정은 오직 믿음을 신비한 교리처럼 만들고 하 나님의 주권을 핑계삼아 어떤 비판도 할 수 없도록 성역화 한 다. 예정론은 오직 믿음을 비판을 가할 수 없는 성역의 교리가 되게 함으로써 오직 믿음을 완전한 교리로 완성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기생할 수 있는 완전한 숙주가 되도록 만든다. 이렇게 오직 믿음과 오직 예정은 서로를 보호하고 서로를 진리처럼 위 장하며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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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정론의 뿌리

교회 역사에서 예정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어거스틴이 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예정론을 주장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예정론을 어디로부터 가져왔을까. 과 연 어거스틴의 예정론의 근거와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어거스틴은 예정론의 근거에 대해서 따로 밝히지는 않 는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을 잘 살펴 보면 그 교리가 어디서부 터 왔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어떤 자가 은혜를 받 고 믿음과 구원을 받는가?”하는 문제는 창세 전에 결정된 하나 님의 택함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정론이 어디로부터 왔 는가 하는 문제의 답은 의외로 간단해진다. 그의 주장에 따르 면 예정론은 하나님의 심중에 있는 창세 전의 작정으로부터 온 것이다.

어거스틴은 예정론이 하나님의 창세 전 작정으로부터 온 것 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필이면 왜 그런 결정을 하 신 것일까?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한 일 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왜 그런 작정을 하셨는가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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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는 알 수 없을 뿐만아니라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예정론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 으로 보았고, 예정론에 대해 알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도 하나 님께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 어거스틴은 왜 이렇게까지 예 정론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일까. 그것은 예정 론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수록 많은 불합리한 점들을 느끼게 되 며 그 의문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자와 유기자를 결정하셨다고 하면서 왜 그런 결정을 하 셨는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자신도 예정론의 원인이나 이유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셈이다.

어거스틴은 참 편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가장 중 대한 구원의 문제를 논하면서 구원이란 창세 전의 택함에 의한 다고 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하 기 어려운 주장이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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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어 있다면 그 원인이나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그 이유가 합당하면 수긍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 면 예정론은 거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토록 중대한 구원의 문제를 논하면서 하나님이 왜 그런 예정을 하셨는가에 대해서는 자신도 모르는 신비라고 얼버무렸다. 그 리고 그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하 였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은 잘 주장하면서 그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는 모르겠노라며 참 편리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정론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은총이 될지 몰라 도 유기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저주의 교리가 된다. 유기자들은 그들이 창조되기 전부터 버림받고 저주받을 자로 예정되어 있 다. 자신이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영원한 지옥의 멸망을 받을 자로 예정되어 있다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끔찍한 일인가. 만 일 그렇다면 유기자들의 입장에서는 모든 분노와 원망이 하나 님께 돌려질 수 밖에 없다. 자신들이 버림받는 이유가 자신들 에게 있지 않고 창세 전 하나님의 작정에 있기 때문에 유기자 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공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

어거스틴도 이같은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신 자들에게 예정론을 말하는 것을 조심시켰고 성도들이 예정론 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도 경계하였다. 예정론은 그 안에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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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불합리와 의문들이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 의문을 해결하거 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교리다. 이 때문에 누구든지 한 번 예정론의 문제에 붙잡히면 그 문제와 의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더욱 깊은 미궁 속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이 점을 우려하여 성도들이 예정론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고 그것 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차단하였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리시는가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신비의 영역이라고 하였지만 그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 논리적으로 보아도 예정론 의 원인은 분명하다. 누가 택함을 받고 누가 버림을 받는가 하 는 문제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로 결정된다. 말하자면 어 거스틴이 주장하는 예정론의 모든 원인과 뿌리는 하나님께 돌 려지고 만다.

이 점은 절대예정론을 주장한 칼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차 가운 이성을 가진 칼빈은 이 부분을 모호하게 하지 않고 적나 라하게 드러내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유기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그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 하셨다고 말하였다.20) 그는 유기와 저주에 대한 모든 원인은 결 국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있다고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20) 존 칼빈. 기독교강요(중). 김종흡외역. 생명의말씀사. 2012. 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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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예정론의 모든 원인은 하나님께 있으며 선택과 유기 의 모든 원인도 오직 하나님께 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저주의 유기를 받 는 자들도 그 저주의 최초 원인이 그들에게 있지 않다. 이 모든 이유와 원인은 창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정론의 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 정론의 뿌리는 하나님의 마음의 결정으로부터 온다. 좀 더 정 확히 말하자면 예정론의 뿌리는 하나님의 두 마음으로부터 온 것이다. 한 마음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마음이요, 또 한 마음 은 저주와 재앙과 형벌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이 두 마음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이 왜 이러한 두 마음을 갖고 계 시는가에 대해서는 어거스틴도 칼빈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아무튼 이유는 모르겠으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이 두 마음을 갖고 있으며 이 두 마음으로부터 택함과 유기, 은혜와 저주의 일들이 나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어거스틴은 도데체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였을까. 칼빈은 택함 뿐아니라 유기의 원인도 하나님께 있다 고 당당하게 말하였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하였을 까? 그것은 하나님을 두 성품의 하나님 즉 이중 인격의 존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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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말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인류의 역사 가 있기 전부터 하나님은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는 두 마음을 가 지셨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예정론이 나왔고 그 예정론 때문 에 인류 역시 크게 택자와 유기자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말 인데....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두 성품을 갖고 있었고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성경 의 진리인가? 이것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익숙한 말이 아닌가. 이것은 사단이 좋아하는 이원론의 사상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이원론은 세계의 시초부터 두 원리가 있으며 두 원리는 서로 대 립하고 충돌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면서 두 원리의 근원을 알 수 없고 두 원리에 의해 세계가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이 원론의 사상이다.

페르시아의 선악의 이원론이나 영지주의의 영육의 이원론은 모두 이와 같다. 이들이 말하는 이원론은 태초부터 서로 대립 하고 충돌하는 두 원리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원리의 근원 은 알 수 없으며 두 원리의 충돌과 투쟁 가운데 역사가 진행되 고 종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원론을 통해 영지 주의자 말시온은 하나님을 영의 하나님과 육의 하나님으로 분 열시켰다. 영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으로, 육체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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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은 전쟁과 살인의 하나님으로 분열시켜 버렸다.

어거스틴의 예정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이단 말시온이 하나님을 외(外)적으로 분열시킨 것에 비해 어거스틴은 내(內) 적으로 분열시킨 것이 다를 뿐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마음 을 분리하여 두 성품을 가진 하나님으로 분열시켰다. 한 성품 에는 사랑과 은혜의 마음이 있고 다른 성품에는 유기와 저주의 마음이 있는 이원론의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왜 그런 두 성품과 마음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도 원인도 말 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서로 대립하고 모순된 두 성품으로 인해 인류 역사가 구원과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하니 이것이 야말로 이원론의 사상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제 예정론의 뿌리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예정론은 하나님 의 성품을 둘로 분열시켜야만 존재할 수 있는 교리임이 나타났 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성품을 분열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조차도 두 존재로 분열시킨다. 한 쪽은 영원 전부터 은혜를 받은 택자로, 다른 한 쪽은 영원 전부터 저주를 받은 유 기자로 분열시켜 양자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대립하는 존재로 만든다. 이 역시 인간을 이원론의 사상으로 분열시키는 것에 다 름이 아니다. 왜 그런지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으나 처음부터 태생이 다른 두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원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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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하자면 예정론은 공의로운 성품, 진실한 마음에서 는 결코 나올 수 없고 나와서도 안되는 교리다. 예정론은 아무 근거나 이유도 없이 은혜와 저주의 분열된 마음이 있어야만 나 올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아무 이유없이 웃다가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죽인다면 이는 이중 인격이거나 잘못된 인격의 소유자 일 것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하나 님이 창세 전부터 이런 두 마음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 는 하나님을 이중 인격을 가진 이원론의 하나님으로 분열시키 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이원론으로부터 나오는 교리임에 틀림이 없다. 예정론은 이원론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며 만일 이 원론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예정론은 분열된 마음을 가진 존재,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두 성품을 가진 존재에게서 나 오는 교리다. 그러면서 두 마음이 나오는 이유나 원인을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예정론은 이러한 인격의 분열과 충돌 의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로 인한 의문이나 모순들을 해결 할 방법이 없다. 어거스틴 역시 예정론을 주장함으로 파생되는 이런 의문이나 모순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신비 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덮어버렸다.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 이 예정론은 그저 신비하고 난해한 교리인 줄 알고 그에 대한 접근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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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정론의 뿌리는 분명하다. 예정론은 뿌리는 이원론 에 있다. 예정론은 하나님을 이원론의 하나님으로 분열시켜야 만 나타날 수 있으며 그 분열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이원 론의 교리다.

4. 666을 폭로한다

이제 예정론의 정체와 뿌리가 분명해졌다. 예정론은 이원론 에서 나온 교리이며 그것은 이원론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고 이 원론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교리다. 그리고 사도요한이 잘 증거 하였듯이 이원론은 사단의 교리요 적그리스도의 교리에 해당 한다. 그렇다면 예정론의 정체는 더욱 명확해진다. 예정론은 사 단에 의한 교리이며 적그리스도에 의한 교리인 것이다.

사도요한은 요일1:7절을 통해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대원리 를 이미 밝혔었다.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 마다 적그리스도요 666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요한이 증거 한 666을 분별하는 기준과 원칙은 이원론에 있다. 누구든지 이 원론을 통해 예수를 부인하면 그는 적그리스도요 666에 해당하 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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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를 파괴한 666 666의 시작은 영지주의자들이다. 저들은 이원론의 사상을 통 해 육체를 멸시하는 자들이었기에 육체로 임하신 예수를 부인 하고 멸시하였다. 저들은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둘로 분 열시킨 후 그리스도만 인정하고 예수를 부정하였다. 그럼으로 써 예수를 파괴하였고 실체가 없는 껍데기 뿐인 그리스도를 만 들어 놓았다. 결국 저들은 예수를 파괴함으로 자연스럽게 그리 스도까지 파괴하는 사단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다.

2) 믿음을 파괴한 666 영지주의의 대표인 말시온은 바울이 말하는 일원론의 믿음을 이원론의 믿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원론을 통해 믿음과 행위를 분열시켰고 믿음만 인정하고 일체의 모든 행위를 멸시 하였다. 그럼으로써 믿음의 행위를 파괴하고 실체가 없는 껍데 기 믿음만 남겨 놓았다. 결국 그는 행위를 파괴함으로써 자연 스럽게 믿음까지 파괴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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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을 파괴한 666 666의 완전한 완성은 어거스틴에 의해 성취되었다. 요한 당시 에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를 둘로 파괴하고, 말시온이 믿음을 둘 로 파괴하였다면,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둘로 파괴하였다.

어거스틴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두 하나님으로 나누었다. 그 는 하나님을 두 마음을 가진 이원론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았 다. 처음부터 그는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과 저주의 하나님으로 분열시켰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이원론의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론의 교리를 뽑아 내었다.

예정론 교리는 이원론의 하나님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즉 하나님이 둘로 분열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 정론 교리다. 예정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완전 한 이원론의 교리인 것이다!

그래서 예정론은 그 자신이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이원론으 로 분열시킨다. 예정론은 먼저 하나님을 두 하나님으로 분열시 킨다. 인류도 마찬가지로 두 부류로 분리하며 아무 근거없이 인 간을 택자와 유기자로 분열시킨다. 또한 믿음을 믿음과 행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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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시키며 오직 딸랑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속 삭인다. 결국 예정론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완전하게 분열 시키고 파괴하는 사단의 칼날과 같은 교리다.

예정론은 하나님보다 높은 교리이며 하나님을 대신하는 교리 다. 예정론은 하나님을 둘로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자신이 올라 앉는다. 그리고 완전한 이원론의 믿음인 딸랑 믿음을 앞세워 자 신의 정체를 교묘하게 감춘다.

그러므로 이같은 예정론을 만든 어거스틴이야말로 666의 대 표요 머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예정론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교리인 이원론의 사상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교리를 더 높이고 숭배하도록 만들며 구원의 모든 진리 를 파괴하였다. 그러니 어거스틴이야말로 바울이 미리 증거한 완전한 666의 실체라 아니할 수 없다.

바울은 어거스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저는 대적 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 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 느니라” (살후2:4)

과연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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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의 폭로


열시키고 쫒아 내었으며 하나님보다 높은 자로 행세하였다. 그 는 자신의 예정론 교리를 통해 성전의 가장 높은데 앉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구원을 주는 자가 되었다. 이는“하 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는 말씀이 응하는 일과 같다. 참으로 어거스틴이야말로 다니엘서가 예언 하고 바울이 증거한대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며 멸망의 가 증한 것을 세운 적그리스도의 머리요 666의 실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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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일곱째 짐승의 정체


제1장/ 일곱 머리와 나라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계13:1)

666의 실체를 보다 정확히 알려면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째 짐 승과 여덟째 짐승의 정체가 무언가를 알야야 한다. 일곱째 짐 승에서 여덟째가 나오고 그 여덟째 짐승이 바로 666의 표를 나 누어 주는 장본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곱째 짐승의 정 체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따라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곱째 짐승의 정체를 먼저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

1. 일곱 머리의 순서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 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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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 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계17:9~11)

계시록에서 언급되는 짐승의 수는 모두 여덟이다. 요한은 계 17장에서 이 짐승들의 수와 비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천사 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 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계17:7)하며 일곱 머리의 비밀을 증거한다.

1) 다섯은 지나감 요한은 일곱 머리는 일곱 왕과 같은데 다섯은 이미 망하였다 고 한다.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머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 들을 압제하고 핍박하는 권세를 가진 왕들이나 나라를 뜻한다. 요한은 이런 왕들이 다섯이 지나갔다고 한다. 이 다섯 왕 곧 다 섯 나라는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 보면 그 수를 세어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핍박한 첫째 나 라는 애굽이다.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430년 동안 종살 이를 시키며 핍박하였다. 둘째는 앗수르 제국이다. 앗수르는 BC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민족과 종교에 대한 혼합 정책을 실시하여 이스라엘 10지파를 멸절시켰다. 셋째는 바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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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인데 바벨론은 남유대를 정복하여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 도록 만들었다. 이 바벨론은 후에 나타날 영적 바벨론을 상징 하는 나라이며, 70년의 포로 생활 또한 교회가 완전하게 폐허 가 되는 영적 포로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넷째는 바벨론 후에 등장한 메대파사국이다. 메대파사 역시 바벨론에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압제하였다. 마지막 다섯 째는 메대파사를 멸망시킨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다. 이 렇게 다섯 나라는 사도요한이 살았던 시기에 이미 다 역사 속 으로 사라졌다. 요한은 이들 다섯 나라를 가리켜 다섯은 이미 망하였다고 증거하였다.

2) 여섯째는 있음 빠르고 막강한 대국 헬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나라는 로마 제국이다. 로마는 요한이 살던 당시 세계의 초강대국이었다. 로 마 역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핍박하며 끝내 예루살렘까지 멸 망시킨 나라다. 요한이 하나는 있다고 밝힌 것은 요한 당시에 존재한 나라를 말한 것이니, 여섯째 머리는 곧 로마에 해당함 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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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곱째는 이르지 아니함 요한 당시 일곱째 머리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요한은“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 무르리라” (계17:10)고 하였다. 이 일곱째 짐승은 장차 올 것인 데 다른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오면 잠시 동안 머무르게 된다. 또한 일곱째 짐승은 여섯째 짐승 이후에 오는 짐승이므로 로마 이후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고 핍박하는 나라 가 일곱째 나라가 된다.

2. 여덟째 머리

요한은 계속해서 여덟째 짐승에 대해 언급한다.“전에 있었다 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 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계17:11)고 한다. 그런데 여덟째 짐승 은 전에 있었던 짐승이고 지금은 없다고 한다. 그는 원래 일곱 중에 속하였는데 일곱째 짐승에 이어 다시 출현하므로 여덟째 짐승이 된다.

이 여덟째 짐승은 계13:11절 이하에 잘 설명되어 있다.“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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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계13:11) 요한은 이 짐승이 일곱째 짐 승과 달리 바다가 아닌 땅에서 올라오며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다고 한다. 이 여덟째 짐승에 대해서는 4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므로 우선 일곱째 짐승의 정체부터 밝혀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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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일곱째 짐승 카톨릭

1. 로만 카톨릭

계시록과 다니엘은 동일하게 로마가 여섯 번째 짐승임을 지 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마가 망한 이후에 나타나는 나라가 일 곱째 짐승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로마 이후에 나타나는 나라는 용의 권세를 갖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며 지극히 높 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서방의 역사에서 로마 이후에 용과 같은 권세를 가지 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사실 역사 적으로 살펴 보면 그런 나라는 찾을 수 없으며 존재하지도 않 는다. 하지만 나라는 아니나 로마 이후 뱀의 권세를 갖고 하나 님의 교회를 핍박한 권력이 딱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로 만 카톨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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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의 후예 카톨릭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로 마의 국교로 공인하였다. 그 후 황제는 교회와 사제들의 세금 이나 군대를 면제하고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도록 하며 이교도들의 신전을 빼앗아 교회에 헌납하였다. 또한 콘스탄틴 황제가 330년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면서 로마 는 동서로 분열되기에 이르렀고, 그 때 황제는 로마시에 대한 주권을 카톨릭 교회에 이양하였다. 그 와중에 대규모의 시민들 이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면서 카톨릭은 갑작스럽게 권력과 부 를 가진 조직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다가 476년, 서로마는 북방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멸망 을 당하게 되었고 서로마는 10개의 나라로 나뉘어 분열되었다. ①프랑크(프랑스), ②앵글로색슨(영국), ③롬바르드(이태리), ④알라만(독일), ⑤서고트(스페인), ⑥수에비(포르투갈), ⑦부 르군트(스위스), ⑧헤룰라이, ⑨반달, ⑩동고트 등 10개국으로 나뉘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도 카톨릭은 계속해서 세력을 확 장하였고 서로마 제국 전체에 대한 정치, 종교적 지배력을 키 워나갔다.

그리고 카톨릭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신을 반대하는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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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이, 반달, 동고트 세 나라를 동로마 황제인 유스티니안을 통해 멸망시켰다. 드디어 538년, 카톨릭은 마지막까지 저항하 던 동고트를 멸망시키며 서로마 제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종교적 권세를 갖게 되었고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안을 통 해 세계 교회의 머리로 등극하였다. 그러므로 538년은 카톨릭 이 옛 로마 왕국의 권세를 가진 강력한 존재임을 대외적으로 천 명한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다.

2) 중세 천년의 권세를 누린 카톨릭 카톨릭은 538년 교황권을 확립한 이후 중세 천년 이상 유럽을 장악하고 호령하였다. 그 천년 이상의 기간 동안 카톨릭에 맞 설 상대는 아무도 없었으며 카톨릭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옛 로마의 영화를 누렸다. 그 가운데 카톨릭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잔해하는 짐승같은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따라서 계시록과 다니엘이 예언한 3년 반을 다스리는 일곱째 짐승은 카톨릭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카톨릭이 일곱째 짐승이라는 다른 증거들도 많이 있다. 중세 역사에서 카톨릭이 행했던 수많은 일들은 사실상 다니엘과 계시록에서 예언했던 바로 그 일들과 일치한다. 카톨릭은 중세의 기간 동안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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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훼방하고 여러 교회를 핍박하며 땅에 성도들의 권세를 완전 하게 짓밟아 깨트렸다. 이제 카톨릭이 일곱째 짐승임을 증거하 는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2. 일곱째 짐승의 특징들

1) 용이 자기의 권세를 짐승에게 줌 계13장에 등장하는 일곱째 짐승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자기 자신이 스스로 권세를 갖는 존재가 아니다. 일곱째 짐승은 용 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부여받고 있다. 요한은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계 13:2)고 밝힌다. 용은 옛 뱀이며 사단이다. 따라서 일곱째 짐승 인 카톨릭은 사단인 용에게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물려받게 됨 을 알 수 있다.

요한이 말한대로 카톨릭은 자신이 스스로 권력을 창출한 존 재가 아니었다. 카톨릭이 가진 권세와 능력은 대부분 여섯째 짐 승인 로마로부터 물려받았다. 카톨릭은 처음에는 기독교를 공 인한 콘스탄틴 황제로부터 후원을 받아 권세를 얻기 시작하였 다. 그 다음에 동로마 황제인 유스티니안 황제의 무력을 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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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 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후 에 다시 유스티니안 황제로부터 세계의 머리로 인정되는 권세 를 부여받았다. 이와 같이 카톨릭은 세상 황제들의 권세와 보 좌의 힘을 빌어 옛 로마 제국의 후예가 되었으며 1,000년 이상 옛 로마의 영토를 호령하였다.

2) 눈과 입이 있어 큰 말을 함 다니엘 7장은 일곱째 짐승을 가르켜 작은 뿔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으 며 큰 말을 한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이 7장 8, 20, 25절에 반복 하여 나타난다. 요한도 동일한 증언을 하는데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하는 입을 받았다고 하며(계13:5), 짐승이 입을 벌 려 하나님과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한다고 말한다.(계13:6) 따라서 이 일곱째 짐승은 눈과 입이 있고 입을 벌려 큰 말을 하 는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짐승에게 눈이 있다는 것은 곧 짐승이 세상을 살피고 감시하 는 감찰과 통제의 능력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 입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을 교훈하고 가르치는 권세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짐승은 이 입으로 과장되고 신성 모독하는 참람한 말을 하며 하 나님과 교회를 훼방하는 큰 말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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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곱째 짐승이 눈과 입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 인 힘과 종교적인 힘을 동시에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은 짐승이 가진 정치적인 힘을 이렇게 표현한다.“또 권세를 받 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 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계13:7)라고 한다. 일곱째 짐승은 성도들을 이기며 각 족속과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적인 권세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또한 다니엘은 짐승이 그 입의 말로써 종교적인 권세를 부린 다고 한다.“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 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단7:25) 한다. 짐승은 하나님과 성도들 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때와 법을 바꾸는 교리적인 일도 서슴 치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 이후 이와 같은 정치, 종교 적인 두 힘을 모두 가진 세력이 누가 있겠는가. 이 두 힘을 갖고 천년 이상 유럽을 통치하는 권세를 누린 집단은 카톨릭 이외에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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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함 역사적으로 카톨릭이 행한 일들을 보면 그가 일곱째 짐승이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카톨릭은 그 입의 말을 통해 하나님을 훼방하고 성경과 다른 많은 교리들을 주장하였다. 마 리아 숭배, 성인 숭배, 연옥 주장, 교황 무오설, 고해 성사, 면 죄부 판매 등 성경에 없는 교리들을 만들어 가르치며 거짓과 미 혹의 일들을 수없이 자행하였다.

카톨릭은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며 예배와 설 교도 라틴어로 진행하여 성도들을 우민화하였다. 심지어 성경 을 금서로 만들어 성경을 읽거나 소지하는 것조차 법으로 금하 였다. 카톨릭은 겉으로는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말씀을 훼방하는 짐승의 모습 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카톨릭은 중세기 동안 자신들의 교회나 교리에 반대하 는 5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이는 종교적 살인을 자행하였 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카톨릭만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며 잔 21) 해하고 살육한 짐승이 어디에 있는가! 이로 인해 로마서 강해

자인 로이드 존스가 카톨릭을 사단의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말 21) 조찬선. 기독교 죄악사(상). 평단문화사. 2000.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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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연 카톨릭은 용의 보좌와 권세를 빌 어 중세 천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고 유린한 그 일곱째 짐승과 같은 존재임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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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카톨릭과 어거스틴

1. 카톨릭의 머리 어거스틴

일곱째 짐승의 정체가 카톨릭임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 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앞서 살펴본 내용들을 보아도 그렇거 니와 교회 역사를 살펴 보아도 일곱째 짐승이 카톨릭이라는 사 실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곱째 짐승의 머리가 누구 인가 하는 문제는 조금 다르다. 보통 일곱째 짐승의 머리는 교 황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교황은 그 머리가 되지 못한다. 교황은 이미 마련된 자리에 그저 앉기만 하는 선출직이지 그 자 리를 마련하는데 공헌한 종교적 원조는 되지 못한다.

일곱째 짐승의 머리는 따로 존재한다. 먼저 카톨릭이 가진 두 힘 중에서 정치적 권세는 로마 황제로부터 기인되었다. 그렇다 면 종교적 권세는 누구로부터 왔는가. 카톨릭은 자신들의 수위 권이 사도 베드로로부터 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근거없는 주장 이다. 카톨릭이 가진 종교적 권세의 힘은 베드로로부터 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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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며 다른 누구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어거스틴의 신학으로부터 온 것이다. 어거스틴은 초기 기독교 신학을 완성하고 중세 신학을 출발시킨 자로 평가받는 신학자다. 이 어거스틴이 마련한 신학적 기반이 있었기에 카톨 릭은 이에 근거하여 종교적 권세를 갖고 교회를 다스릴 수 있 었다.

카톨릭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교리가 교회론과 성례전인 데 이는 서방신학과 어거스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또한 유아세례와 연옥교리는 물론이요 성례를 통한 구원론 역시 어 거스틴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카톨릭이 가진 중대한 신학적 틀은 모두 서방신학과 어거스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 데 이 서방신학과 어거스틴은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 방신학을 종합하고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어거스틴이기 때문 이다.

따라서 카톨릭이 가진 종교적 권세 즉 큰 말을 하는 권세는 바 로 어거스틴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크 게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눌 수 있는데 두 교파 모두가 어거스 틴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 이는 세계 기독교 전체가 어거스틴 과 그 신학을 머리로 삼고 있음을 뜻한다. 다만 카톨릭이 주로 그의 교회론을 따른다면 개신교는 그의 은혜론을 따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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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날 뿐이다. 그래서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해“어거스 틴의 교회론에 대한 그의 은혜론의 승리” 라고 말을 할 정도다. 이 말은 두 교회가 얼마나 어거스틴의 신학에 의존되었는가를 잘 표상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카톨릭은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개신교는 그의 은혜론에 의존해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카톨릭의 정치적 머리가 콘스탄틴이라면 그 종교적 머리는 사실상 어거스틴이 되는 것이다. 중세 카톨릭은 어거스 틴의 교회론을 따라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며 카 톨릭이 지상에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성 례전을 따라 성찬이 곧 구원이며 생명이라고 믿고 따랐다. 카 톨릭은 어거스틴이 집대성한 서방신학의 체계 위에 세워졌고 또한 그의 교회론과 성례전을 통해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이 렇게 볼 때 어거스틴이 카톨릭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이 상한 일이 아니다.

2. 여덟째 짐승과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개신교의 머리도 되기 때문 에 양쪽에서 동일하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사실 카톨릭보다 는 개신교가 더욱 철저하게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존경하며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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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입장이기는 하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어거스틴의 예정론 과 구원론을 진리로 삼아 출발하였기에 만일 어거스틴이 없다 면 개신교도 존재하지 못할 정도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카톨릭 의 머리가 되는 동시에 개신교의 종교적 머리에 해당하는 인물 임을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어거스틴은 다음 4부에서 언급하 는 여덟째 짐승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제 4부를 통해 어거 스틴과 여덟째 짐승의 관계에 대해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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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여덟째 짐승의 정체


제1장/ 두 짐승의 등장

1. 일곱째와 여덟째 짐승

계시록 13장에는 거대한 두 짐승이 등장한다. 한 짐승은 바다 에서 올라오고 또 다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다. 먼저 바다에 서 나오는 짐승은 열 뿔을 가진 일곱째 짐승이다. 이 짐승은 카 톨릭이며 용이 카톨릭에게 자기의 보좌와 권세를 쥐어 준다. 카 톨릭은 입을 벌려 큰 말과 참람된 말을 하는 입을 받고 하나님 을 훼방하는데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자들은 모 두 카톨릭의 다스림을 받는다.

다음으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있다. 이 짐승은 모양새가 특이하여 흡사 어린 양 같은 모습이다. 요한은 그 모습에 대해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 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계13:11)고 한다. 우리는 이 새끼 양 같은 짐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새끼 양같은 짐승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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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 짐승이며 666의 표를 나누어 주는 적그리스도에 해당하 기 때문이다.

2. 두 짐승이 나오는 곳

1)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 일곱째 짐승인 카톨릭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다. 성경 에서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는 단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천 국은 마치 바다에 그물을 치고 각종 물고기를 잡는 것 같다고 하셨다.(마13:47) 예수께서는 세상인 바다에서 교회라는 그물 로 물고기인 성도를 구원하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바다에는 많은 고기가 있고 또 많은 물이 있다. 예수께서는 많 은 고기가 있는 바다를 세상으로 말씀하시며 요한은 많은 물이 있는 바다를 세상으로 비유한다. 요한은 계17장에서 일곱째 짐 승인 카톨릭을 바벨론에 비유하며, 땅의 음녀로도 표현하고 있 다. 그리고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하며 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계17:15) 이렇듯 요한은 많은 물 을 많은 백성과 세상 나라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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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의 폭로


따라서 일곱째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세상 나 라로부터 나온 짐승인 것을 의미한다. 요한의 말대로 카톨릭은 세상의 권력인 로마를 힘입고 나왔으며 또한 세상 사람들 머리 위에 앉아 세상 나라까지 다스렸다. 카톨릭의 권세는 성도들과 싸워 이길 뿐만아니라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까지 다스 리는 바다의 권세였다.

2) 땅에서 올라 온 짐승 요한은 여덟째 짐승인 새끼 양이‘땅’ 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 았다. 여덟째 짐승은 일곱째와 다르게 땅에서 올라온다. 그러 면 요한은 땅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 요 한은 계시록 13장을 통해 우리에게 크게 세 영역을 보여주고 있 다. 첫째는 바다요 둘째가 땅이며 셋째는 하늘이다. 요한은 바 다에 대해서는 계17:15절에서 그것이 많은 물 곧 많은 백성이 있는 세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땅의 상징적 의미에 대하 여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계시록 전체에 땅이라는 단 어가 80여회 가까이 나오는데 딱히 땅의 의미를 설명하는 곳이 없다.

그 대신에 요한은 바다와 함께 하늘이 상징하는 의미는 잘 설 명하고 있다. 요한은 계13:6절에서“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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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 들을 훼방하더라” 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바다에서 올라온 카톨릭이 하나님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는 것 을 말한다.

여기서 요한은 바다나 땅이 아닌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있다 고 증거한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하늘은 사후의 세계를 의 미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에 대 해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말하자면 땅에 살고 있 는 자 중에 특별히 하나님의 장막에 함께 있는 자들을 하늘에 거하는 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록에서 장막에 관련된 구절들을 찾아 보면 그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7:15절 말씀을 살펴 보자.“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 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 이 구절의 뒷부분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 위에 장막을 치 고 함께 거하신다고 한다. 그들이 누구인가는 앞부분에 잘 나 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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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 누가 하늘에 거하는 자들인가를 알 수 있다. 하 나님은 자신의 보좌 앞에서 밤낮 섬기는 자들에게 장막을 쳐 주 시는데 요한은 그 장막에 거하는 자들을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라고 칭한다. 요한은 계21:3절에서 이런 자들에 대해 보다 자세 하게 설명한다.“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시니” . 이 구절을 보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 의 참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 위에 하나님의 장막이 있 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이 말하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 은 곧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참된 백성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의 참 성도들이므로 그들 위에는 하늘의 장막이 쳐 있다.

3) 하늘에 거하는 성도 장막이라는 용어는 계시록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계시록은 장막을 기준으로 해서 전체 줄거리를 전개 하고 있다. 계시록은 처음에 일곱 교회와 일곱 인에 대한 얘기 를 하다가 계7장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를 약속하면 서 처음으로 장막에 대한 말을 한다. 7장에서 요한은 큰 환난을 이기고 나오는 흰 옷 입은 성도들이 있는데(계7:14) 하나님이 그들에게 장막을 쳐 주신다고 말한다.(계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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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8장부터는 일곱 나팔의 얘기가 나오고 11장에서 이 모 든 것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한 후에(계11:15) 하늘에 있는 성전 곧 장막이 열리고 그 장막 안에 언약궤가 보이는 모 습을 설명한다.“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 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계11:19)고 한다.

이어서 12장부터 용과 짐승과 666의 일들을 설명하며 15장에 서는 이 모든 것과 짐승의 수를 이기고 나오는 자들이 하나님 을 찬양한다.(계15:3) 이 승리의 때에도 역시 장막에 대한 내용 이 나온다. 요한은“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 의 성전이 열리며” (계15:5)라고 설명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백 성들의 승리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장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16장부터 일곱 재앙이 일어나고 음녀가 심판을 받고 사단 이 결박을 당한 후에 승리한 성도들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는 역사가 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의 장막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 성들이 승리하는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장막의 말씀이 임하고 있다. 계21장에서 요한은“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 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 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계21:3)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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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나는 환난과 재앙, 짐승의 핍 박 등을 말할 때마다 늘 성도들의 승리를 약속하며 또 성도들 이 승리할 때마다 언제나 장막에 대한 말씀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말하는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이 땅 의 환난이나 짐승의 수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을 말하며 이런 자 들을 보고 요한은‘하늘에 거하는 자’ 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4) 하늘, 땅, 바다 이제 계13장에서 말하는 바다와 하늘의 의미가 밝혀졌다. 바 다는 세상과 세상의 백성들을 뜻하며, 하늘은 짐승과 그 수를 이기고 승리한 참된 믿음의 성도들을 뜻한다. 그러면 이제 땅 의 의미를 밝힐 차례다. 요한은 땅의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나 그것은 바다와 하늘의 의미를 통해 자연스 럽게 알 수 있다. 바다가 세상 백성을 의미하고 하늘이 승리한 성도를 의미한다면 땅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 중간 에 속한 자들을 의미하는 용어다. 곧 바다에 속한 세상 죄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늘에 속한 거룩한 성도들도 아닌 자들을 지 칭한다.

이들은 성도는 성도인데 아직은 땅에 속한 육의 성도들을 말 한다. 이들은 아직 온전한 믿음이 없으므로 육신에 속하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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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속한 어린 자들이다. 이들은 환난을 이길 믿음이 부족하고 짐승의 수를 이길 지혜가 없으므로 짐승 에게 속아 짐승을 섬기고 경배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이다.

이런 자들은 주여~ 주여~ 하며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나 행위 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 자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 갔다가 신랑을 만나지 못하여 버림받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 다. 또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지 않으므로 심판 날에 염소 로 판정되어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는 성도들과 같은 자들 이다.

이들은 신약으로 말하면 육적 성도들이며 구약으로 말하면 육 적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이다. 저 옛날 출애굽 당시 40년 광야 길을 걸으며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모두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 었던가. 저들은 애굽에서 나왔기에 애굽에 속한 자들도 아니었 다. 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구원에 들어간 백성들도 아니다. 저 들은 애굽 세상도 아니고 가나안 하늘도 아닌 그 중간에 속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 대해 히브리 기자는 저들이 온전한 믿 음이 없으므로 하늘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증거하였 다.(히4:11)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 13장에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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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다. 첫째는 바다에 속한 세상 인간이 있고, 둘째는 광 야의 백성들처럼 불순종으로 멸망하는 땅에 속한 성도가 있으 며, 셋째는 하늘에 속한 참된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바다에 속 한 자들은 바다에서 나온 일곱째 짐승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땅에 있는 자들은 땅에서 올라온 여덟째 짐승에게 미혹을 당하 나, 오직 온전한 믿음이 있는 자들은 하늘 장막에 거하며 살고 있다.

요한은 세 종류의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그러므로 하늘 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 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계12:12) 요한은 하 늘에 거하는 자들 즉 온전한 믿음과 지혜가 있어서 세상의 환 난과 짐승의 수를 이기는 자들에게는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그 러나 땅과 바다는 화가 있을 것인데 너희에게 마귀가 분내어 내 려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요한은 땅과 바다에 대해 너 희라고 지칭함으로 이들이 하늘에 속하지 못한 두 부류의 인간 들인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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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짐승의 특징

1) 정치, 종교적 권력 이제 바다, 땅, 하늘의 의미가 나타났으므로 바다와 땅에서 올 라오는 짐승의 의미도 더욱 분명해진다. 일곱째 짐승이 바다에 서 올라오는 것은 세상에서 올라오는 것이며 여덟째 짐승이 땅 에서 올라오는 것은 곧 어리석은 땅의 성도들 가운데 올라오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계13장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세상의 힘을 갖고 세상을 다스리기에 정치적인 힘을 가진 짐승이다. 동시에 이 짐승은 종 교적인 권세도 함께 갖고 있다. 종교적인 권세로써 하나님을 훼 방하고 하늘 장막에 거하는 성도들을 훼방한다. 큰 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고 성도들과 싸워 이기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거하는 성도들은 모 두 일곱째 짐승을 따른다. 이는 일곱째 짐승인 카톨릭이 아직 구원을 모르는 세상과 육적인 성도들을 동시에 다스리며 그 위 에 군림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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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적, 영적 권력 바다에서 올라온 카톨릭은 정치, 종교적인 두 힘을 가졌으나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땅 즉 육의 성도들 중에서만 나오기에 정치적인 힘은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땅의 짐승은 카톨릭보 다 훨씬 종교적이며 나아가 더욱 영적인 특징을 갖는다. 땅에 서 올라온 짐승은 얼마나 종교적 특성이 강한지 마치 어린 양 의 모습과 같으며 말은 용처럼 말을 한다. 이는 그 모습이 마치 예수님과 같고 그 말하는 것에 뱀의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 을 의미한다.

여덟째 짐승의 모습은 너무도 영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짐승 은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뱀같은 말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특히 땅의 성도들을 미혹한다. 요한은 이 짐승이 이 적을 행하며 땅에 거하는 육적 성도들을 미혹한다고 증거하다.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 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 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계13:14)

이 짐승은 예수님처럼 치장을 하고 예수님의 흉내까지 낸다. 그러면서 온갖 이적을 행하며 땅의 성도들에게 짐승의 우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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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 는 몇이든지 다 죽이며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가 없이는 아무도 매매를 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하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며 이마와 손 에 그 표를 받지 않는다.(계20:4) 다만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는 육적 성도들만이 새끼 양에게 속아 그 표를 받으며 짐승에게 경 배하고 절한다. 이 새끼 양같은 짐승이야말로 성경이 오리라 했 던 그 불법의 사람이고 멸망의 아들이며 666의 표를 나누어 주 는 적그리스도에 해당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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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적그리스도와 666

1. 여덟째 짐승의 특징

여덟째 짐승의 모습은 대단히 영적이다. 그는 새끼 양처럼 두 뿔 달린 모습을 갖고 있는데 사단처럼 말을 한다. 그가 사단처 럼 말을 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새끼 양의 모습이 철저하게 위 장된 것임을 말한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과 같은 선 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입으로는 뱀의 독을 뿜어 땅에 속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죽이고 있다.

그 짐승에게는 두 뿔이 있다. 성경에서 뿔은 권세, 나라, 머리 를 뜻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새끼 양의 두 뿔은 그에게 두 권 세 즉 두 왕이 있음을 의미한다. 일곱째 짐승은 열 뿔 중에서 나 와 홀로 권세를 가진 자였다. 하지만 여덟째 짐승은 처음부터 두 왕이 함께 나오며 두 왕은 서로 균형을 이루며 끝까지 같이 간다. 이 짐승같은 두 왕은 서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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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곱째 머리를 섬긴다 일곱째 짐승이 여섯째 짐승에서 나왔듯이 이 여덟째 짐승 역 시 자신보다 앞선 일곱째 짐승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요한은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 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 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계13:12)고 한다. 요한은 새끼 양이 일 곱째 짐승이 가진 권세를 성도들에게 똑같이 행하며 땅에 거하 는 자들에게 죽게 된 상처가 나은 자에게 경배를 시킨다고 말 한다.

새끼 양은 일곱째 짐승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고 더욱이 일 곱째 짐승의 머리를 경배하는 자다. 또한 새끼 양은 땅에 거하 는 자들에게“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계13:14)고 하며 일곱째 짐승을 위한 우상까지 만든다. 그리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를 모두 죽이기까지 하고 있다.“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 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 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13:15)

희안하게도 이 새끼 양은 자신이 왕노릇을 하거나 자신을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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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려 하지 않는다. 새끼 양은 마치 일곱째 왕을 위한 존재처럼 일곱째 짐승을 섬기고 높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아닌 그 짐승을 섬기라고 강요한다. 새끼 양은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에게 특별히 지극 정성이다. 그 상처가 나은 짐승을 위 해 우상을 만들고 그에게 생기를 주며 그를 경배하며 받들어 모 신다. 이처럼 상처가 나은 자를 극진히 섬기고 경배하는 것은 여덟째 짐승이 갖는 큰 특징이다.

2) 일곱째 짐승에서 나온다 우리는 앞서 일곱째 짐승의 정체와 그 머리가 누구인가를 살 펴 보았었다. 일곱째 짐승은 카톨릭이며 그 머리는 어거스틴에 해당함을 알아 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나오게 될 여덟 째 짐승을 위한 중대한 기초가 된다. 여덟째 짐승은 아무 근거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곱째 짐승을 근거로 나오며 또한 그 머리와 깊이 관련되고 그 머리를 숭배하는 짐승이기 때 문이다. 따라서 만일 일곱째 짐승이나 그 머리가 없다면 여덟 째 짐승은 아예 존재하지 못할 정도다.

여덟째 짐승은 일곱째 다음에 오며 또 반드시 일곱째 짐승 안 에서 나온다. 요한은“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 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계17:11)고 한다. 요한은 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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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짐승이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입곱 중에 속한 자라 함은 일곱 중에 하나이거나 혹은 일곱 번째에 속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이 일곱 중에 하나라는 것은 과거의 애굽이나 앗수르 같은 나 라가 다시 여덟째로 부활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실 일 곱 나라의 왕들은 수는 여럿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의 본질은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영적 바벨론 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요한도 계17장에 나타난 일곱 째 짐승이자 음녀에 대해“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 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계17:5)고 하였다.

요한은 일곱째 짐승이자 음녀의 이름이 바벨론이라고 하였지 만 사실 일곱 왕들과 짐승들의 본질은 모두 바벨론과 같다. 이 런 의미에서 여덟째 짐승의 정체 역시 일곱 왕들과 본질이 동 일한 또 다른 영적 바벨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곱 왕들 중에는 바벨론 나라의 왕도 실제로 존재했 었다. 이 점에서 여덟째 짐승은 실제 존재했던 바벨론의 모습 을 다시금 재현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 중 에서도 가장 강력한 영적 위용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 땅에 속 한 성도들을 미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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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짐승은 음녀의 모습과 같고 그녀의 이마에 써 있는대 로 그 본질과 이름이 영적 바벨론이다. 일곱째 짐승이 음녀로 표현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배도하고 파괴하기 때문이 다. 성경의 복음을 변질시켜 다른 복음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짐승을 음녀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일곱째 짐승은 바벨론 중의 바벨론이며 큰 바벨론이 라 할 수 있다. 과거 역사 속의 바벨론이 외형적인 바벨론이었 다면 이 음녀야말로 성경이 가리키는 영적 의미의 바벨론에 해 당한다. 또한 여섯째 짐승까지가 모두 정치적인 바벨론이었다 면 이 일곱째부터는 종교적 바벨론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덟째 짐승은 이 음녀의 머리를 섬기는 자다. 음녀의 머리를 위해 우 상까지 만드는 자다. 이 때문에 여덟째 짐승은 일곱 짐승보다 더 강력한 영적 바벨론의 본질을 가지며 음녀보다 더 종교적이 고 더 영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게 영 적인 모습을 보였으면 요한은 그 모습이 어린 양의 모습이라 하 였을까.

이러므로 여덟째가 일곱 중에 속하였다는 것은 여덟째 역시 바벨론의 본질을 가진 짐승임을 의미한다. 또 여덟째가 일곱 중 에서 나온다는 것은 더욱 강력한 영적 힘을 가진 바벨론으로 나 타나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여덟째 짐승은 다른 어떤 짐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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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강력한 영성을 띠고 나타난다. 또한 이 짐승이 음녀의 머리 까지 섬기는 것을 볼 때 이 짐승은 일곱째 짐승과 음녀로부터 나오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2. 여덟째 짐승과 개신교

1) 개신교의 출현 여덟째 짐승은 반드시 땅에서 올라오고 또 새끼 양의 두 뿔을 가지며 일곱째 머리를 숭배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현재적으로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먼저 짐승이 땅 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아직 하늘에 속하지 못한 땅의 성도들 가 운데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즉 종교적 세력을 기반으로 나 타나는 것이 여덟째 짐승의 분명한 특징이다.

앞서 나타난 일곱 짐승들은 어느 하나도 땅에서 올라온 것이 없다. 심지어 종교적 권세를 가진 카톨릭마저도 그 권세는 세 상으로부터 온 것이며 바다로부터 왔다. 나머지 여섯 짐승도 말 할 필요없이 그들의 권세는 모두 바다에서 온 것들이다. 바다 나 세상의 인간들이 아닌 땅 즉 육의 성도로부터 권세를 받아 나온 것은 오직 여덟째 짐승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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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양같은 이 짐승에는 두 뿔 즉 두 왕이 있는데 두 왕은 일 곱째 짐승의 머리를 섬기고 숭배하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이다. 두 왕이 그토록 그 머리를 숭배하는 것은 자신들의 모든 권세 가 그 머리로부터 왔고 그 머리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 문이다. 심지어 두 왕이 그 머리를 부활시키고 우상화까지 하 는 것은 자신들의 생사권이 그 머리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두 왕과 일곱째 머리는 자신들의 존폐를 함께 할 정도로 종교적으 로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곱째 짐승 중에서 나오되, ① 마치 어린 양같은 복 음적인 모습으로 오며, ② 두 왕이 있고, ③ 일곱째 머리를 죽도 록 섬기는 영적 바벨론같은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그런 존재 가 지금 현존하는가 아니면 미래에 오는가? 두려운 일이지만 그 존재는 지금 현존하고 있다. 지금 이 땅에서 이 세 조건을 만 족시키는 존재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카톨릭에 이어 루 터와 칼빈 두 머리를 필두로 하여 나타난 개신교를 말한다. 이 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라 하겠으나 사단의 미혹과 속임수 가 본래 그러하다. 사단은 때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 하고 나타나기에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거룩하고 존귀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는 양을 잡아먹는 사악 한 뱀이요 하늘의 포도원을 허무는 늙은 여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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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신교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새끼 양의 모습을 닯았다. 새끼 양은 땅에 수많은 성도들의 지지를 받고 나타나기에 그 모 습은 대단히 복음적이고 은혜로운 모습이다. 아직 하늘에 속하 지 못한 수많은 어리석은 성도들을 미혹할만큼 그 모습이 순결 하게 비쳐진다. 그것은 누가 봐도 복음처럼, 진리처럼, 예수님 처럼 보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게 된다.

2) 루터와 칼빈 개신교의 권세는 두 뿔 즉 두 왕에게 있다. 개신교의 권세를 세운 두 왕은 누구인가. 그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루터와 칼빈 을 의미한다. 먼저 루터는 오직 믿음의 구원을 주장하며 개신 교의 기초를 놓았다. 중세 카톨릭이 주장하는 행위 구원을 배 격하면서 오직 은혜의 구원을 외치며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루터의 외침에 따라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카톨릭의 행위주의를 박차고 나와 루터의 구원의 교리를 따르 고 좇았다.

다음으로 칼빈은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구원에 동조하면서 그 구원은 오직 예정된 자만이 받을 수 있다며 예정론의 교리를 강 조하였다. 루터와 칼빈은 둘 다 오직 믿음과 오직 예정의 교리 를 믿고 가르친 자들이다. 다만 루터는 오직 믿음을 강조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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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칼빈은 오직 예정의 교리를 더욱 정리하고 완비한 것이 차 이가 있다. 말하자면 개신교의 기초를 놓은 자는 루터지만, 개 신교의 교리적 체계는 칼빈이 완성한 것이다.

3) 카톨릭에서 나온 개신교 새끼 양의 두 뿔은 루터와 칼빈 두 사람을 뜻하지만 또한 오직 믿음과 오직 예정의 두 교리를 뜻하기도 한다. 먼저 오직 믿음 은 루터가 카톨릭에 반기를 들고 나와 새롭게 주장한 개신교의 핵심 교리다. 개신교가 카톨릭에서 분열되어 나온 것은 다른 이 슈들도 있으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구원론 때문이다. 당시 카 톨릭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였고 루터는 오직 믿음의 구원 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다른 문제도 아닌 교회의 본질에 해당 하는 구원론이 달랐기에 루터는 카톨릭으로부터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루터 이후 오직 믿음은 개신교가 카톨릭과 차별화된 교 회임을 증거하는 가장 중대한 모토(motto)가 되었다.

종교개혁은 루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의 교리만으로 개혁 이 완성될 수는 없었다. 오직 믿음의 교리는 그 자신이 독립적 으로 존재할 수 없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은 언제나 오직 예정을 필요로 하며 오직 예정이 있어야만 모든 비판으로 부터 보호를 받아 완전한 교리인양 행세할 수 있다. 오직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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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반드시 예정의 교리와 함께 짝을 이루어야만 완전할 수 있 기에 칼빈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칼빈은 루터를 이어 루터가 시 작한 개혁의 정신을 체계화하고 완비하였다. 그는 기독교강요 를 통해 개신교의 신앙체계를 정돈하였고 그 가운데 오직 예정 의 교리를 제시하였다. 칼빈은 예정론 교리를 통해 개신교의 구 원론을 특징짓는 두 번째 뿔을 세우는 자가 되었다.

결국 개신교는 루터와 칼빈에 의한 두 교리의 권세가 있었기 에 그 존재가 성립될 수 있었다. 두 교리는 개신교의 핵심이며 그 구원론의 핵심과 같다. 이 두 교리를 구원론의 뿔로 세운 개 신교는 그 모습이 너무도 복음처럼, 너무도 예수처럼 보였기에 땅에 속한 많은 성도들은 그것을 참 진리로 믿고 따랐다. 아직 하늘에 속하지 못한 어리석은 성도들에게 두 교리는 놀라운 은 혜의 말씀이요 천사의 복음과 같아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두 교리가 마치 어린 양이신 예수처럼 순결한 진리로 보인 것이다.

3. 개신교의 우상 숭배

개신교 구원론의 두 뿔은 오직 믿음과 오직 예정이 차지한다. 그렇지만 루터나 칼빈은 이 교리를 만든 자들이 아니다. 두 교 리를 이미 완전하게 만들어 놓은 원조는 따로 있다. 그는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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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카톨릭의 머리에 해당하는 어거스틴이다. 그렇다! 새끼 양 의 두 뿔의 권세, 개신교가 가진 두 교리의 권세는 바로 어거스 틴으로부터 온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다만 그의 교리를 재천 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어거스틴이 완성해 놓은 은혜 론의 교리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을, 칼빈은 오직 예정을 취하 여 각각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1) 우상을 만들고 생기를 준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 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 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13:15)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짐승들은 모두 자신들을 높이며 자신 들을 섬기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유독 여덟째 짐승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일곱째 짐승의 머리를 높이며 그 머리만을 섬기도 록 한다. 어찌 보면 그 이유는 당연하다 하겠다. 새끼 양의 두 뿔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영적 권세를 일곱째 짐승의 머리에서 빌려 왔으니 어찌 그 머리를 섬기지 않겠는가.

새끼 양의 두 뿔은 일곱째 머리를 섬기는 자들이기에 땅의 성 도들에게도 그 머리를 섬기고 그의 우상을 만들라고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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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뿔은“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 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 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계13:14)고 명한다.

두 뿔은 일곱째 머리를 섬기고 높이는 일에 혈안이 된 자들이 다. 그래서 그 짐승의 머리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며 그 우상이 말을 하도록 만든다. 또 우상 에게 경배하게 하고 만일 경배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 죽이게 한다. 이에 대해 요한은“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 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 13:15) 하였다.

새끼 양이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루터와 칼빈이 어거스틴을 우상화하 며 그의 교리를 다시 부활시켜 살아 있는 교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기의 천년 동안 카톨릭은 교회론을 통해 세상과 땅을 다 스렸다. 카톨릭은 누구든지 자신들의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받 은 것이며 카톨릭을 떠난 자는 교회를 떠났기에 구원이 없다 하 였다. 구원은 카톨릭이 베푸는 성례전을 통해 확증될 수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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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 행위가 부족한 자는 고해성사와 보속으로 채우게 하였다. 카톨릭은 이런 방식으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기에 다른 구원론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굳이 어거스틴의 은혜론 이나 예정론을 가르칠 이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 세기 천년 동안 어거스틴의 은혜론이나 예정론은 잊혀지고 사 라진 교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루터가 출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루터는 카톨릭 의 교회론에 맞서 은혜의 구원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구원이란 카톨릭의 교회론이나 성례전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며 오직 믿 음으로 얻는 것이라 하며 카톨릭에 반기를 들었다. 이 오직 믿 음의 교리는 바로 어거스틴의 은혜론 안에 있던 것이다. 루터 는 그 때까지 죽은 것처럼 잊혀졌던 어거스틴의 교리를 끄집어 내었고 그것으로 카톨릭의 구원론에 대항하였다. 그것은 천년 이상 잠자고 있던 어거스틴의 은혜론이 찬란하게 부활한 것과 같았다.

루터는 중세기 동안 죽은 듯 잊혀졌던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는 예정론의 내용을 알고 그것을 믿고 있 었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를 먼저 부활시키며 그것을 힘써 강조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다음에 칼빈은 루터에 이어 오직 예 정의 교리를 부활시키며 그것에 생기를 주었다. 칼빈은 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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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의 예정론을 더욱 강조하여 선택과 유기의 모든 원인이 하나 님께 있다는 절대예정론을 주장하였다. 이 절대예정의 교리는 다시금 커다란 논란이 되지만 아무튼 이로써 어거스틴의 구원 론은 새로운 부활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루터와 칼빈은 어거 스틴의 구원론을 부활시켰기에 카톨릭에 맞설 힘을 갖게 되었 고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루터와 칼빈은 새끼 양의 두 뿔이 되어 천년 이상 잊혀진 어거 스틴의 구원론에 생기를 주고 그것을 되살렸다. 두 사람은 그 의 구원론을 대단히 기뻐하고 그것을 높이 숭배하였다. 그의 구 원론이 참된 복음의 진리라고 자랑하면서 두 뿔은 서로 힘을 합 하여 오직 믿음, 오직 예정을 소리 높여 외치고 경배하였다. 많 은 사람들에게도 이같은 구원이야말로 참된 예수의 복음이라 하면서 그의 교리를 믿고 경배하도록 이끌었다. 이렇게 두 사 람은 땅의 성도들이 어거스틴을 섬기도록 하였고 그의 음성이 교회 안에 다시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교 리를 우상처럼 만들고 그것을 교회 안에 되살려 그 우상으로 말 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2) 하늘로부터 불이 오게 하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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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내려오게 하고” .(계13:13)

칼빈은 개신교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할 뿐만아니라 그 교리를 바탕으로 제네바 시를 신정(神政)으로 다스린 자였다. 칼빈은 제네바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리를 따르게 하였 고 예정론을 믿도록 강요하였다. 제네바에서의 그의 통치는 유 명하다. 그는 인구 13,000명에 불과한 제네바에 종교법원(Consistory Court)을 두고 모든 신자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다스렸 다. 예배에 불참하였다고 벌금형을 내리고, 세례식 때 웃었다 고 사흘을 감방에 가두며,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가 춤곡을 연 주하였다고 추방시키고, 카드놀이 한 사람의 목에 카드를 걸고 기둥에 묶어 채찍질하였다. 술에 취해 칼빈을 욕했다고 쇠꼬챙 이로 혀를 찌르고 추방시키며, 자크 그뤼에라는 사람은 칼빈을 위선자라고 했다고 고문후 사형시키고, 예정론을 반대한 자를 도로에서 채찍질하고 화형시켰다.22)

세르베투스(Servetus)라는 의학자겸 신학자는 칼빈의 교리와 예정론을 반대하던 중에 제네바에 들렀다가 칼빈에게 붙잡혀 종교법원에 고발을 당하였다. 그리고 재판 후 화형(火刑)을 당 했다.23) 이는 개신교 역사에 기록된 끔찍한 종교 재판이었다. 저 부패하고 타락한 카톨릭도 출발한 지 500년 이상 거의 1,000 22) 슈테판 츠바이크.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 자작나무. 1999. p68 23) 앞의 책.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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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이 되어서야 화형을 집행했는데 칼빈은 개신교를 출발시키 자 마자 화형을 집행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또 경건한 신학자 인 카스텔리오가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칼빈을 인권유린으로 고발하자 그마저 감옥에 가두어 죽게 만 들었다.24)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의 서문에서“누구든지 신앙과 교리 가 다르다고 해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고 기록하였다. 그 런데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킨 후 기독교강요 재판을 찍을 때는 그 내용을 슬그머니 삭제하였다.25)

칼빈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런 일들이 카톨릭과의 목숨을 건 투쟁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며 또 세르베투스에 대 해서도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죽일 의도가 없었고 종교법원의 기록에서도 화형이 아닌 교수형을 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런 일들은 양심을 가진 자로서 더군다나 성령의 사람이라면 도 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만나기 전부 터 세르베투스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그의 이단성에 분노하 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인 파렐에게“만일 세르베투스 가 제네바에 온다면 그를 살려 보내지 않겠다” 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 칼빈은 겉으로 볼 때는 경건한 자 같으나 칼빈의 죄 24) 앞의 책. p7 25) 앞의 책.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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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밝힌‘기독교 죄악사’ 를 쓴 저자의 말대로 그는‘구원받 지 못한 살인자’ 에 불과하다. 그 저자는 칼빈은 그리스도를 믿 었던 세르베투스, 카스텔리오, 그뤼에 등 수십명의 사람들을 종 교나 신학상의 이유로 고문, 처형, 화형시킨 살인자로 고발하 고 있다.26)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화형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벌 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그를 처단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 리에 반대하는 것을 성경에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에 게 반대하는 것을 하나님께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칼빈 은 자신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자’ 라는 죄목을 씌워 단죄하였다. 그리하여 그 조그마한 도시 에서 칼빈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였다. 그가 제네바를 신정(神政)으로 다스렸던 4년 동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35명이 화형을 당하고 13명이 사형 을 당하며 76명이 추방되었다.27)

칼빈과 종교법원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35명의 사람들을 화 형시키면서 이것이 말씀을 거역하는 이단자들에게 내려지는 벌 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는 계13장의 말씀이 응하는 것과 같다. 새끼 양의 두 뿔이“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 26) 조찬선. 기독교 죄악사(하). 평단문화사. 2000. p113 27) 앞의 책.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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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계13:13)라는 예언 이 응한 것이다.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해서 무슨 신비 한 역사를 말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불을 피워 놓고 그 불이 이단자를 심판하는 하늘의 불이라고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새끼 양의 두 뿔은 자신들의 권세로 어거스틴의 교 리를 우상화하고 땅의 모든 성도들에게 그 교리를 섬기고 경배 하도록 만들었다. 우상의 교리에 생기를 주어 부활시키고 그 우 상의 교리가 다시 살아 음성을 발하도록 소리내어 가르쳤다. 또 우상의 교리를 섬기지 않는 자들은 몇이든지 다 죽이며 우상에 대한 경배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칼빈에 의해 이루어졌 다. 결국 계13장의 새끼 양에 대한 예언들은 루터에 의해 시작 되고 칼빈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3) 오른손이나 이마의 표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 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6)

새끼 양의 두 뿔은 땅에 속한 모든 성도를 미혹하고 또한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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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 두 뿔은 땅의 성도들에게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으라 한다. 땅의 성도들은 누구 든지 우상을 경배하는 표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므로 자발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

새끼 양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들의 오른손에 짐승의 표 를 받는다. 성경에서 오른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신33:2),“오른손 으로 구원하소서” (시108:6),“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0)는 말씀 등이 있다. 이를 보면 오른손 은 말씀, 구원, 의 등 진리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손은 그 사람이 행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도 오 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의의 오른손으로 사람을 붙들어 주신다. 따라서 오른손이란 사람이 행하는 의롭고 가치있는 일을 뜻한 다. 특히 성도가 행하는 의롭고 가치있는 일이란 말씀과 관계 되고 구원과 관계된 일들이다. 이렇게 보면 오른손에 짐승의 표 를 받는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성도가 자신의 오른손 으로 우상이 주는 구원의 가르침을 굳게 붙들며 그 교리를 믿 고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그들의 오른손 뿐만아니라 이마에도 짐승의 표를 받 는다. 이마는 머리를 뜻하고 머리로 하는 분별이나 판단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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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한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과 목표는 그 이마가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그 이마가 어떤 방향을 향한다면 바로 그 곳에 그 사람의 생각과 목표도 있다. 하나님께서는“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겔3:7)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이 스라엘의 생각이 완악하고 그 원하는 바가 강퍅하다는 의미와 같다. 따라서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그 머리의 생각에 우 상의 교리를 담는 것을 뜻한다. 그 머리에 담은 우상의 교리를 좇아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이마에 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서에서 종말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 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겔 9:6)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성소로부터 심판을 시작하라는 것 은 이 땅의 교회부터 먼저 심판을 한다는 말과 같다. 또한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부터 죽이는 것은 오래 믿은 자들, 힘을 가진 목사들과 장로들부터 심판한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마에 표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까이 말 라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표는 짐승의 표를 말하는 것이 아니 라“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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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인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자들에게는 그 이마에 하늘의 인을 쳐 주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것은 그 머리의 생각과 마음의 원함 이 의롭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그 이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 득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 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을 쳐 주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머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고 그 나아가는 방향이 진리를 향한 자들은 그에게 하나님의 인이 있 다. 반면에 하나님의 인이 없는 성도들은 그 머리에 짐승의 교 리와 생각이 가득하므로 짐승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 간다. 그 들의 이마는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성령의 인도와 음성을 받지 못하고 새끼 양의 두 뿔을 따라 간다. 오직 믿음, 오직 예정이 라는 두 뿔을 오른손으로 붙들고 두 뿔이 가라는 곳으로 이마 를 향하고 걸어 간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이 바로 짐승의 길이 요 사람이 가르치는 육체의 길인 것을 모르고 무작정 미친듯이 따라 간다.

4) 매매를 금지한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 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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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양의 두 뿔은 자신들이 나누어 주는 표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매매를 못하게 만든다. 다만 오른손이나 이마에 우상의 표를 가진 자들에게만 매매를 허용한다. 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죽이거나 쫓아 버린다.

여기서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사람 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못하게 한다는 그런 경 제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 의미는 사람들이 받는 우상의 표에 해답이 들어 있다. 땅에 성도들이 받는 표는 말씀과 교리에 대 한 표요, 구원받은 것에 대한 표다. 다만 그들이 받은 구원의 표 는 어거스틴과 두 뿔이 주는 표이기에 구원의 효력이 없는 짐 승의 인(印)에 불과하다. 오직 믿기만 하면 행위와 아무 상관없 이 구원을 받으며, 그 딸랑 믿음이 창세 전에 예정된 믿음이라 고 속이는 짐승의 표에 불과하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그 우상의 표가 진짜 구원의 표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 표만이 참된 진리요 참된 복음 이라고 확신한다. 혹 다른 자들이 딸랑 믿음에 반대하며 그것 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비판하면 무조건 그들을 물리 치며 내어 쫓는다. 그런 자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고 사귀지도 않으며 일체의 교제를 허락치 않는다. 오직 믿음을 인정하고 그 표를 가진 자들끼리만 서로 사귀고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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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서 계13:17절이 말하는 매매란 자신들이 인정하는 우상의 교 리만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 짐승의 표가 허락하 는 내용만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만 소통을 허락 하는 것이 곧 새끼 양이 허락하는 매매에 해당한다.

실제로 칼빈은 제네바를 다스리면서 사법권은 갖지 않았으나 파문권을 갖고 있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에 의해 파문을 당하는 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고 죄인 취급을 받았다. 한 번 파문 을 당하면 모든 시민들은 그와 대화하기를 금하였고 심지어 그 에게 물건을 사거나 파는 것도 금지하였다.28) 그가 공개 참회를 하면 용서하기도 하였지만 참회를 거부하는 자들은 제네바에 서 추방하였다. 이로써 매매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계13:17절의 말씀이 현실적으로도 응한 것을 알 수 있다.

4.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13:3)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 28) 슈테판 츠바이크.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 자작나무. 1999.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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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계13:14)

새끼 양의 두 뿔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 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해 우상을 만들라고 한다. 칼에 상하 였다가 살아난 짐승은 일곱째 짐승의 머리를 말한다. 그 머리 가 상처로 인해 죽게 되었으나 상처가 낫게 되니 온 땅이 놀랍 게 여겨 그 머리를 따른다.

그런데 짐승의 머리가 죽게 된 일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요 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일은 일곱째 짐승이 권세를 잡기 바로 전에 일어난 일(계13:3~5)이기에 대략 AD 500년 이전의 일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양의 두 뿔은 그 머리가 어 떻게 상처를 당하여 죽게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 짐승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 살아 난 머리를 기념하여 우상를 만들라고 한다.

우리는 앞서 일곱째 짐승의 머리가 어거스틴에 해당함을 살 펴 보았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이 바로 죽게 된 상처가 나은 자 이며 그가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자라는 말인가? 그러하다. 어거스틴은 칼에 상하였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고 다시 살아 나는 일을 겪은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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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거스틴은 그 몸에 직접 칼을 맞은 적은 없다. 하지만 짐승이 칼에 상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꼭 쇠로 된 칼이라고 생 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쇠로 된 칼로 생각하겠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 다.“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 는 양약 같으니라” (잠12:18). 이처럼 성경은 사람의 말을 칼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으로 비유되 어 있다.(히4:12)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문학작품이나 일상생활 에서 사람의 혀는 곧잘 칼로 비유되곤 한다. 일반 법정에서 혀 의 말은 때로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살리기도 하는 칼의 기능 을 가진다.

어거스틴같은 신학자에게 쇠로 된 칼로 죽는 건 별 의미가 없 다. 하지만 그가 교리의 싸움에서 논쟁의 칼날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죽음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의 이름이나 사상은 기억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교리는 이단의 교리처럼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같은 사람에게 육체 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며 사상과 교리의 죽음이야말로 참으 로 비참한 죽음이 된다.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에서 크게 세 번에 걸쳐 교리 논쟁을 전 개하였다. 첫 번째는 마니교와 벌인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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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가 도나투스파들과 가진 교회론 논쟁, 그리고 세 번째 로 펠라기우스와 싸운 예정론 논쟁이 그것이다. 어거스틴은 마 니교나 도나투스파들과 가진 논쟁에서는 큰 문제없이 논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승리하였다. 하지만 세 번째 펠라기우스와 벌 인 예정론 논쟁에서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 번째 논쟁은 교 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이기도 하거니와 어거스틴이 죽기 전까지 20여년간 사투를 벌였던 긴 논쟁이었다. 어거스틴은 이 논쟁에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이 논쟁은 오직 믿음, 오직 예정 의 교리를 두고 벌인 싸움이기에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목숨 보다 소중한 논쟁이었다. 어거스틴이 볼 때 예정론 논쟁은 구 원론의 존망이 달린 것이었기에 논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펠라기우스는 400년 경에 로마에 정착하여 카일레스티우스 (Caelstius)라는 제자를 얻었는데 411년에 알라릭(Alaric)이 로마 를 침공하기 직전에 두 사람은 카르타고로 피신하였다. 거기서 제자 카일레스티우스는 교회의 감독직을 얻고자 하였고 펠라 기우스는 예루살렘으로 떠나며 헤어졌다. 그런데 카르타고에 있던 집사 파울리누스(Paulinus)라는 사람이 카일레스티우스와 펠라기우스가 잘못된 교리를 전한다고 보고 두 사람을 카르타 고 공회에 고소하였다.29) 29)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1. 차종순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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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처음에 펠라기우스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415년 그가 쓴 자유의지에 대한 글을 보고 그의 주장이 매우 위험하 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오로시우스라는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그 곳에 있던 펠라기우스를 예루살렘 공 회에 고소하였다. 그러나 415년 7월과 12월에 열린 예루살렘 회 의에서 펠라기우스는 교묘하게 무죄를 인정받았다. 또한 예루 살렘 공회는 펠라기우스 논쟁은 서방에서 촉발된 것이니 서방 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논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였다.

이에 분노한 어거스틴은 416년 북아프리카 공회를 소집하였 고 399명의 감독 전원이 만장일치로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 죄하였다. 어거스틴은 이 내용을 당시 로마교회의 교황이었던 인노센트(Innocent)에게 보냈고 교황 인노센트는 북아프리카의 결정을 받아 들여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어거스틴은 교황 인노센트의 이단 단죄로 인해 모든 논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6주가 못되어 다시 어거스틴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졌다. 펠라기우스를 정죄한 인노센트가 6주 만에 갑자기 죽고 후임으로 조지무스가 임명된 것이 화근이었 다. 새로 임명된 교황 조지무스는 갑자기 펠라기우스에 대한 모 든 정죄를 취소하고 그의 무죄를 인정하였다. 때문에 상황은 역 전되어 갑자기 펠라기우스가 정통인 것처럼 여겨지고 도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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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교리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되었다.

이는 어거스틴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펠라기우스가 이단이 아니라는 교황 조지무스의 선언에 어거스틴은 흡사 칼을 맞은 자처럼 되었다. 몇 년간의 그의 노력들은 모두 허사가 되었고 어거스틴의 오직 믿음의 교리는 로마에서 설 자리를 잃어 버렸 다. 이대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어거스틴과 그의 은혜론은 존 재감이 상실되어 교회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그 때 어거스틴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교회 밖의 힘을 빌 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호노리우스 (Honorius)의 힘을 빌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하였다. 어거 스틴은 전에도 도나투스파의 논쟁에서 로마 군대의 힘을 통해 손쉽게 도나투스파를 제압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 도나 투스파와 논쟁을 시작하였을 때는 대화와 소통의 방법으로 문 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들로 인해 교 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였으나 그들의 과 격함으로 인해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 들의 폭력성이 더욱 심하게 나타났기에 어거스틴은 하는 수 없 이 로마 군대의 개입에 동의하고 무력 진압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로마 군대의 무력 진압은 대단히 신속하고 효과적이었 다. 어거스틴과 북아프리카 교회가 오랜 시간 힘들여 노력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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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던 일을 로마 군대는 순식간에 해결해 주었다. 이로 인해 어거스틴은 때로 수많은 말보다 권력에 의한 제압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바 있다.

때 마침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도 도나투스파처럼 과격 하고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본래 종교적 열정과 의분이 넘 치는 자들은 투쟁과 폭력에 앞장서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펠라 기안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수도원을 공격하는가 하면 로마 에서 폭동을 일으켜 로마 관리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를 반역자로 몰아 로 마 황제에게 진압을 요구하였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이를 흔쾌 히 받아 들여 어거스틴의 요구대로 펠라기우스를 반역자로 정 죄하고 펠라기안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칙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황제 호노리우스가 칙령을 발표하자 다음 날인 418년 5월 1일 카르타고에서 200명의 감독들이 모여 다시금 펠라기우스를 정 죄하였다. 황제의 갑작스런 칙령과 카르타고 공회의 거듭된 정 죄로 인해 곤경에 처한 사람은 교황 조지무스였다. 만일 조지 무스가 반역자인 펠라기우스를 단죄하지 않고 계속 그를 옹호 한다면 조지무스 역시 반역자로 몰릴 것이었다. 조지무스는 계 속 펠라기우스를 옹호하다가 로마의 반역자가 되든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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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정죄하여 반역자가 되는 것을 면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서 게 되었다. 결국 조지무스는 자신이 살기 위해 펠라기우스를 이 단으로 정죄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로써 어거스틴은 승리를 되찾았다. 교황 조지무스의 개입 과 그의 선언으로 인해 상처를 받아 죽게 되었던 어거스틴의 처 지는 로마 황제를 동원하는 계략을 통해 다시 살아날 수 있었 다. 그 때 서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갑자기 되살아난 어거스 틴을 기이히 여기며 그의 교리를 수용하고 따르게 되었다. 소 수의 로마 감독들이 끝까지 어거스틴을 반대하는 일이 있었으 나 대부분의 교회는 그의 은혜론을 인정하고 대신에 펠라기우 스를 정죄하였다.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교회론을 정립했 던 어거스틴은 이 펠라기우스 논쟁에서도 승리함으로 드디어 예정론까지 완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어거스틴은 초기 기독교 의 교리를 모두 종합한 자로 인정되었고 중세 시대를 여는 교 리적 체계를 완비한 자로 높임을 받았다.

이렇게 어거스틴은 교회론과 은혜론의 교리를 완성함으로 일 곱째 짐승의 머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조지무스에게서 나온 혀의 칼에 맞아 죽을 뻔 하였으나 로마 황제의 힘을 동원하는 계략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조지무스를 궁지에 몰아 그의 항복을 받아냄으로 칼에 맞은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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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그 죽게 된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라는 계13:3절의 예언의 말씀이 그에게 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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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666이란 무엇인가

1. 짐승의 수 666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 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 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 백육십육이니라” .(계13:17~18)

새끼 양의 두 뿔은 짐승의 우상을 섬기게 하고 표를 나누어 주 는데 그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한다. 그 수는 또 한 사람의 수인데 666이 된다. 그러면 과연 이 666은 무엇이며 이 수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새끼 양은 짐승을 우상으로 만들고 그 우상을 섬기도록 부추 키고 있다. 이 일은 어거스틴을 경배하며 또한 그의 은혜론을 섬기도록 하는 것과 같다. 새끼 양이 이토록 어거스틴과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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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론을 섬기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어거스틴 의 은혜론을 진짜 구원의 진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끼 양은 땅에 모든 성도들에게 그의 은혜론을 믿고 배우도록 가르친다. 그의 오직 믿음과 오직 예정만이 참된 구 원의 진리라 하며 사람들이 그 교리를 이마와 손에 새겨서 믿 고 따르게 만든다. 신자들의 머리에 딸랑 믿음을 세뇌시켜 그 것이 구원의 유일하고 참된 진리인양 확신하게 만든다. 이쯤 되 면 새끼 양이 나누어 주는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나 타난다. 새끼 양이 나누어 주는 표는 바로‘구원의 표’ 를 말하 는 것이다.

2. 구원의 표 666

오늘날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어 거스틴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믿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오직 믿음이나 혹은 오직 예정에 의한 구원 교리를 믿는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교리를 이마에 두고 그 교리를 믿고 따르며 신앙생 활을 한다. 자신들의 행위가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 마와 손에 새겨 놓은 어거스틴의 교리가 마치 천국을 약속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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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표인양 철썩같이 믿으며 살아 간다.

그러나 어거스틴에 의한 구원 교리는 짐승의 교리요 짐승의 표와 같다. 그리고 짐승의 표는 짐승의 수(數)와 같다. 짐승의 수(數)라는 것은 짐승에 의한 계산이며 짐승의 생각과 수준으 로 수리(數理)를 따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짐승의 수리, 셈법, 논법이라 할 수 있다.

짐승은 짐승의 머리로 생각하고 계산하며 이치를 따진다. 짐 승은 자신의 수준과 처지를 모르고 아무 것이나 수(數)를 따져 계산을 한다. 더욱이 짐승은 자신의 셈법으로 감히 하늘의 진 리를 따지고 그 수(數)를 계산하려 한다.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 음으로 하늘의 진리를 헤아리고 구원의 수를 계산하여 답까지 내어 놓는다. 어리석은 짐승은 그 수가 바로 자신의 숫자요 땅 의 인간의 수에 불과한 것을 모르고 그것을 하늘의 수라 주장 하며 구원의 수라고 주장하니 그것이 바로 짐승의 수 666이다.

하늘 장막에 속하지 못한 짐승과 인간은 아무리 구원의 수를 헤아려 봐야 666의 수밖에 계산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666의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 6은 땅의 수요, 인간의 수이며, 하늘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갖는 미완성과 불완전함의 수다. 6이 셋이 모인 수 666은 그것이 부정한 짐승의 상태를 보여주는 숫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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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이러한 666의 정체는 하늘 장막에 속한 자들이 알며 하늘 의 진리를 가진 자들이 그 정체를 볼 수 있다. 하늘에 속한 자들 은 땅의 수준에서 벗어나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기에 6의 불완 전을 벗고 하늘의 완전수인 7에 참여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 님의 보좌 앞 하늘 장막에서 땅의 일들을 바라보기에 땅의 성 도들이 가진 짐승의 표를 능히 분별할 수 있다. 그것이 어거스 틴에 의한 교리의 수이며, 두 뿔이 합세하여 주는 미혹의 수인 것을 헤아려 알 수 있다.

3. 하늘 구원의 수 777

1) 구원의 수 777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6:3)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 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계4:8)

짐승의 수 666은 구원에 관련된 수다. 짐승이 하나님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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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잘못 헤아려 어리석게 가르치는 구원의 수가 666이다. 성도 의 행위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고 딸랑 믿음만 있으면 구원 인줄 믿고 그 교리를 머리와 마음에 새긴 것이 바로 666이다. 그 교리는 가짜 진리이며 가짜 구원의 수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수를 흉내내어 그럴듯하게 만든 가짜 구원이다.

그렇다면 참된 구원의 수는 무엇인가. 참된 구원의 수는 하나 님의 장막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계시록에서 장막에 거하는 자 들은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참 백성된 자를 뜻 한다.“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계21:3) 라는 말씀과 같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장막에 있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동일한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에서 참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모두 장막에 거하는 자 들이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장막에 거하는 것은 뜰이나 성소에 거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7:15) 이 말씀을 뒤부터 보면 하나님의 장 막이 함께 하는 자들은 성전에서 밤낮 섬기는 자들인데 그들이 보좌 앞에 있는 것이 나타난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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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장막을 치고 계시다.

또한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000명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노래를 부른다.“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 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3) 이는 곧 땅에서 구원을 받아 하늘에 속한 자들이 보좌 앞에 서는 것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종말에 구원을 받는 모든 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보좌 앞 에 선다.“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 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7:9)라는 말씀 과 같다.

이처럼 계시록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장막 곧 하나님 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 안에 있는 것이 나타난다. 이는 계시록 에서 말하는 구원이 지성소의 보좌 앞에 서는 것과 같기 때문 이다. 구약에서 이같은 지성소의 구원을 먼저 본 선지자가 있 다. 선지자 이사야는 사6장에서 이렇게 말한다.“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1). 이사야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지성소의 광경 을 보았으며 이어서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의 찬양 소리를 들 었다. 스랍들은“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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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6:3) 라고 찬양하였다.

계시록에도 이와 동일한 장면이 나타난다. 요한은 이렇게 말 하고 있다.“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4:2)라고 한다. 이것은 이사야가 보았던 바로 그 지성소와 보좌의 모습과 같은 광경이다. 이 때 요한도 이사야가 들었던 스랍들의 찬양 소리 를 들었다.“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 룩하다 거룩하다” (계4:8)하는 하늘의 노래를 들었다.

성경 전체에서 여섯 날개의 스랍이 찬양하는 것을 기록한 곳 은 이사야와 계시록 두 곳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두 종은 동 일한 노래 소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찬양 소리를 듣 고 기록하였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는 것인데 특 히 구원의 역사를 노래하고 찬양한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구원 의 거룩함을 찬양하는데‘거룩하다’하며 세 번 노래하고 있다. 이 스랍들의 찬양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수를 유추할 수 있 다.

먼저 거룩하다는 것을 수로 환산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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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요 하나님의 완전수와 같으니 곧 7이다. 7은 하늘의 완전 을 의미하는 수요 구원을 통해 하늘의 완전에 참여한 성도의 수 이기도 하다. 이 성도들은 본래 땅에 속한 6의 존재였으나 하나 님의 완전한 7의 섭리를 통해 구원을 받아 하늘의 7이 된 자들 이다. 그런데 스랍들이 거룩함을 세 번 노래하여 777을 창화하 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땅의 인간을 구원하 여 하늘의 7의 존재로 만든 일에 대해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는 것을 나타낸다.(7의 수에 대해 알려면 필자의 저서‘재림 의 해 2014’ 를 보면 7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2) 장막의 수 777 스랍들이 하필이면 보좌 앞에서 777을 노래하는 것에는 또 다 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777의 수가 장막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 한 지성소와 관련된 수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장막 곧 성막 은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그림과 같다. 장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주며 또한 장막 중에서 도 지성소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곳이다. 그런 데 성도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뜰과 성소의 길을 지나야만 한다. 장막은 뜰, 성소, 지성소의 과정으로 이어 지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기 위해서는 이 세 과정을 모두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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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성자의 7 장막은 그 전체가 하나님을 상징하며 또한 예수의 구원을 상 징하는 모형이다. 더욱이 장막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표상하 기도 한다. 가장 먼저 뜰은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상 징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의 희생 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뜰의 믿음을 가져야 하고 물두멍에서 손을 씻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 도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혜와 자격을 얻을 수 있다.

② 성령의 7 성전의 두 번째 장소인 성소는 성령의 사역을 상징하는 곳이 다. 성소 안에는 창문이 없고 오직 성령의 등대만이 어둠을 밝 혀 준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 앞에 놓인 말씀의 떡을 찾아 먹고 온전한 향단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영적 어둠의 과정을 헤쳐 나가야 한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 정인데 곧 광야 40년의 연단의 과정과 같은 고된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성도는 징계와 연단과 훈련을 받아 요단 강을 건널 준 비를 하듯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다.

② 성부의 7 성자의 피를 믿음으로 받은 자는 뜰의 과정을 완전하게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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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니 성자의 7을 가진 자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 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 자(딤전4:5)는 성소의 과정을 통과하 였으니 성령의 7을 가진 자다. 이 두 과정을 무사히 마친 자는 드디어 성부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보 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섬김으로 성부의 7을 받는다. 이것 이 바로 하나님의 인에 해당하는 777이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지성소에 들어간 자는 자신의 삶에서 놀라운 기쁨과 환희와 영광을 체험한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며 마귀를 이겨 계시록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 승 리자가 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다. 이것이 성막이 우리에 게 보여주는 구원의 과정이며 삼위 하나님이 인도하는 거룩하 고(7) 거룩하고(7) 거룩한(7) 구원의 세 과정이다. 이 구원의 과 정을 거친 자들에게 하나님은 하늘 장막을 허락하시며 하나님 의 보좌 앞에 서는 영광을 갖게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 자가 가진 구원의 인은 도장이 셋이다. 곧 뜰의 예수의 피와, 성소의 성령의 떡과, 지성소의 하 나님의 인이 모두 들어 있는 삼위의 구원의 표니 그것이 바로 777의 인이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한 성도 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인침의 수인 777을 받은 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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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단과 짐승들은 바로 이 구원의 과정을 모방하여 가 짜 구원의 수를 만든다. 먼저 일곱째 짐승인 카톨릭은 성도들 을 뜰에 모아 놓고 뜰에만 머무르도록 붙잡아 둔다. 뜰의 물 세 례와 성찬 만을 받게 하되 말씀의 떡은 주지 않는다. 중세까지 의 카톨릭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을 수 없게 하고 심지 어 성경을 소지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예수의 죄 사 함의 은혜마저 중간에 신부들이 가로채어 자신들이 죄를 사할 권세를 부여받았다며 신자들의 고해를 듣고 죄를 사하는 참람 한 일을 하였다. 이런 자들에게 어찌 장막의 구원인 777이 성취 되겠는가. 이런 자들이 가르치는 구원은 뜰의 구원도 성소의 구 원도 지성소의 구원도 모두 거룩치 못하니 666의 구원이 될 수 밖에 없다.

여덟째 짐승인 개신교는 카톨릭보다 조금은 발전되었다. 그 래서 신자들이 뜰의 과정 정도는 지날 수 있게 해준다. 개신교 는 누구나 자신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 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뜰의 과정을 쉽게 통과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개신교도 모든 신자들을 성소에 모아 놓고는 성소에만 머무르도록 붙잡는다. 성도들에게 다만 뜰에 있는 예수를 피 곧 포도주만 받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 며 성도들을 성소의 어두운 곳에 가두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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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역시 성소의 떡을 주지 않는 것은 카톨릭과 마찬가지 다. 물론 카톨릭보다는 그나마 낫기에 뜰의 포도주는 잘 먹도 록 도와 준다. 목사들은 카톨릭 신부들처럼 뜰의 포도주를 차 지하는 특혜를 갖지 않으며 누구든지 만인제사장이 되어 포도 주의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말씀 의 떡도 마음껏 배우고 먹으라고 권해 준다. 그렇지만 말씀을 잘 알지 못하고 온전히 알지 못해도 포도주의 피의 은혜와 그 것을 의지하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뜰의 포도주를 먹은 자는 반드시 성소의 떡을 먹어야 하고 또한 온전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개신교는 성도가 성소에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지 않 는다. 뜰에서 성소에 진입하는 방법은 기가 막히게 잘 가르쳐 주는데 비해 어떻게 성소의 영역을 마치고 지성소에 진입하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믿기만 하면 무조 건 구원이고 뜰의 과정만 지나면 무조건 구원이라 하며 젖의 말 씀만 줄 뿐 고기나 밥에 대한 말씀은 주지 못한다.

그래서 개신교 안에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계시록의 라오 디게아 교인들처럼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리며 궁핍한 상태에 놓여 있다. 왜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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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3:16)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이 뜰 에서 머무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요 그렇다고 지성소에서 온 전하게 믿는 뜨거운 자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막의 중 간 과정 곧 구원의 중간 단계에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있는 탓이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모습은 오늘날 개신교인들 의 영적 모습과 동일하다.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바다에 속한 세 상의 불의한 자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 장막에 속한 온전한 자들도 아니다. 저들은 그 중간 즉 땅에 속한 자들이며 중간 수준의 믿음을 가진 미지근한 상태에 속해 있다.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모두 성소에 모여 있다. 성소에서 말씀 의 떡을 먹기는 하나 대부분 초보의 수준에서 젖으로 먹고 있 다. 그러면서 성소에 머무는 것을 구원을 다 받은 것으로 착각 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지성소에 들 어가는 일을 말하지 못하며 그 길을 가르치거나 인도하는 자도 없으니 어찌 그 길을 갈 수 있겠는가. 그저 성소에만 있으면 구 원을 다 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열매나 사랑이나 온전함이 없는 믿음은 헛 믿음인줄 알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며 믿고 있으 니 이보다 게으르고 미지근한 믿음이 어디 있겠는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구원의 좁은 문(마7:13)이기에 그 길 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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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성소 안을 광야처럼 떠돌다가 생을 마칠 뿐이다. 만일 성 경이 성소의 구원 만을 말한다면 그 구원은 너무도 쉬울 것이 다. 성소의 구원은 십자가만 믿으면 되고 예수만 영접하면 된 다. 뜰에서 예수의 희생의 피를 의지하고 물 두멍의 세례만 받 으면 누구나 성소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성 소에만 머무르는 자들은 지성소의 구원에 이르지 못함으로 결 국은 구원에서 제외되고 만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보면 카톨릭은 뜰에, 개신교는 성소에 성도들을 포로로 잡아두는 짐승들이 분명하다. 이 두 짐승은 신 자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구원의 표를 열심히 나누어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성소와 보좌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이 아니기 에 가짜 구원을 주는 미혹의 낙인과 같다. 혹여 그것을 받고 기 뻐하는 자들은 예수의 희생도 성령의 인도도 모두 헛되게 만들 어 버리며 성막의 세 과정을 모두 짐승과 인간의 수인 666으로 채우는 자들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누구든지 참된 구원을 받으려거든 짐승과 그 우상의 수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 뜰에 붙잡아 두려는 짐승의 수를 이 기고, 성소에 붙잡아 묶는 인간의 교리를 이기며 그들의 미혹 을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 게 짐승의 수를 이기고 인간의 수를 이기는 자들이 바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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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에 들어가 하나님의 인을 받을 수 있으니 그것이 참된 구 원의 표 777인 것이다. 요한은“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 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15:2)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 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찬양과 144,000 명의 찬양과 보좌를 모시는 스랍들의 찬양은 결코 다르지 않다. 이들의 찬양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노래하는 하 늘 장막의 찬양이요, 지성소 보좌 앞에서만 부를 수 있는 완전 한 구원의 노래인 777의 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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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치며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 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 후2:2)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종말이 시작되는 순서를 말해준 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그 다음에 불법의 사람이 폭로됨 으로 주의 날이 임한다고 말한다.

본서가 증거한 바와 같이 지난 기독교 역사 2천년은 가히 배 도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는 바 로 짐승으로 인한 배도의 역사가 아니던가. 또한 우리는 불법 의 사람이자 적그리스도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누가 배도의 역 사를 이끌며 666의 표를 나누어 주는가를 보았다. 배도를 이끌 며 666의 표를 나누어 주는 저 불법의 아들이 바로 어거스틴이 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제 666의 폭로와 함께 주의 재림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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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이 이르려면 그 직전에 영원한 복음(계14:6)이 임해야 한다. 영원한 복음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도록 안내하는 진리가 영원한 복음이다. 곧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 앞 에 서서 하나님의 인을 받으며 하늘의 장막을 완성하도록 이끄 는 진리가 영원한 복음인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04년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말씀을 받고 영적 요단강을 건너면서 신약의 백성들이 건너야 할 영적인 강이 있 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그것을‘신약의 요단강’ 이라는 책으 로 저술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 출판할 수 없 었다.

본서에서 요단강을 건너며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말씀을 전하지 못해 아쉽다. 666의 말씀을 폭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은 바로 이 말씀, 지성소에 들어가 하늘에 속한 자가 되게 만드는 말씀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쉬운대로 필자의 홈페이지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과정과 영 원한 복음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며 이제 속히 오시는 예수님을 지성소의 보좌 앞에서 맞이하는 성 도들이 되기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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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의 폭로


666 은

스스로 나타나지 않고

폭로로써 나타난다

바울은 살후2:3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할 때 ‘나타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아포칼립토’를 수동태로 사용하고 있다. 아포칼립토의 뜻은‘폭로되다’라는 뜻이니 곧 666은 스스로 나타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는 것을 뜻한다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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