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둘리나 시선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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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둘리나 시선


비 이야기 −아이들의 합창과 대화가 있는 에피소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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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날 따라다니는 비. “아, 도망가야지!” 비는 물러섰다가는 다시 슬픈 듯 어린 딸아이처럼 따라붙는다.

날개처럼 내 등에 자리 잡은 비. 비를 나무란다. “부끄럽지, 요 망나니야! 정원사가 네게 눈물로 호소하지 않니 화초에게나 가보렴! 나한테 무얼 찾을 게 있다고?”

이제 사방은 덥기만 하다. 지상의 모든 것을 잊은 채 나와 함께 있는 비. 물뿌리개가 빙글빙글 돌듯이 25


아이들은 내 주위를 춤추듯 돌며 걸어간다.

음침한 생각으로 카페에 들어가 조용한 구석 테이블에 앉아본다. 창문 너머로 연방 내리는 비 잔을 통해 내게로 오고 싶어 한다.

밖으로 나가니 습기가 볼을 때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비는 이내 내 입술을 핥으며 비 맞은 강아지처럼 따스한 냄새를 풍긴다.

내 꼴이 우스울 거야. 젖은 수건을 목에 둘러본다. 비는 원숭이처럼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다.

비 때문에 당황하는 도시. 연약한 나를 보고 즐기는 비가 아가의 손가락으로 내 귀를 간질인다. 가뭄에 찌들어 모든 것이 건조한데 26


나만이 속살까지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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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히 인사 드려야 하는 집에 초대를 받았다. 쪽마루처럼 빛나는 호수 위로, 나뭇가지 같은 촛대 위로, 밝은 달이 떠오르는 집이다.

비와 무엇을 할까. 비는 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겠지. 비는 그곳까지 따라와 양탄자를 적실 거야. 비를 데리고 그 집에 가도 될까.

정중히 말해본다. “종종 친절을 베풀긴 하지만 바다만큼 넓지는 못한 나인데.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련만.” 비는 고아처럼 날 바라본다.

“아, 몰라, 비야 올 테면 와봐라! 27


어떤 사랑을 한바탕 쏟으려는지? 아, 저주받을 이상한 날씨다!” 용서받은 비가 내 앞에서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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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없이 나에게 존경심을 보여주는 집주인. 그러나 물에 빠진 쥐처럼 속살까지 젖어버린 나는 여섯 시에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른다.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비가 애석한 듯 뒷덜미를 향해 간지럽게 숨을 내쉰다. 발소리, 엿보는 구멍−침묵−빗장. 용서를 빌어본다. “날 따라다니는 이 비가 현관에 머물도록 해주세요?” 비는 너무 젖어 있고 방에 비해 너무 길다. “이걸 어쩌나?” 놀란 주인의 낯빛이 변한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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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나는 언제나 경쾌함이 춤추는 이 집을 사랑한다. 아, 여기 모서리에 팔꿈치가 다치지 않고 여기 칼에 손가락도 다치지 않으리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숄을 걸친 여주인의 비단옷 스치는 소리 찬장에 갇혀 잠자는 나의 공주−크리스털.

일곱 가지 장밋빛으로 불타오르는 스펙트럼이 유리관 속에서 죽은 듯 매혹적이다. 정신이 든다. 환영식에는 오페라 같은 춤과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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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여주인은 나만 사랑하지도 않으며 29


무모하지도 않으며 소심하기만 할 뿐이다.

안녕하세요? (아, 이 오만한 여성의 가느다란 목에 죽어버린 뇌우의 섬광이 있다!) 진흙 속 돼지처럼 열병에 뒹굴지라도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이번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 힘없이 인사한 후 사실 난 말하고 싶었다. “나는 헛되나 영광스럽게 살고 있소 당신을 다시 보니 특히 그렇소.”)

그녀의 말. “내가 당신을 비난하나요. 이런 천재께서 무슨 그런 말씀을! 비를 맞았군요! 이 먼 거리를!” 사람들이 소리 지른다. “불 피워, 불 지펴!”

언젠가 한 번, 30


광장에서 음악과 저주를 들으며 북소리에 맞추어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소리치는 당신. “그녀에게 불을, 불을!”

이 모든 것 때문에! 비 때문에! 그 후! 그때! 까만 두 눈동자의 검은 마력 때문에! 입술에서 나온 소리 때문에! 가볍게 날아가는 버찌 씨 때문에!

안녕! 내게로 날아오라! 불이여, 형제여, 혀 많은 개여! 큰 사랑으로 내 손을 핥아라! 너는 역시 비! 불에 덴 네 상처는 얼마나 습한가!

−약간은 변덕스런 너의 독백− 상처받은 주인이 말한다− 그러나 찬가는 초록빛 싹! 매력 있는 젊은 세대.

−내 말을 듣지 마! 의식이 흐려져 간다!− 31


물어본다−이 모든 일은 네가 한 거지. 비는 악마처럼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힌다. 그래, 이 비가 내 의식을 흐리게 한 거야.

갑자기 내가 보게 된−“저쪽 창가에 홀로 서서 새치름히 울고 있는 믿음직한 나의 비.” 내 마음에 새겨진 비 자국만이 내 눈 속에 눈물로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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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위 비둘기처럼 쓸쓸해 보이는 여자 손님이 안경을 쳐들고 적의에 차서 변덕스런 질문을 한다. “당신 남편은 정말 부자인가요?”

“그가 부자냐고요? 잘 모르겠네요. 큰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지요. 비밀을 알고 싶은가요? 내게는 불치의 빈궁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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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내게는 그런 솔직함이 있다! 그는 일시에 값진 것을 물로, 짐승으로, 풀밭으로 바꿀 수 있다.

내가 증명해 볼까요! 반지를 줘봐요! 작은 반지에서 별을 구해낼게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다가 그녀는 내게 반지를 주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여기 상세한 내막이 있다. 울타리 밑에서 고민하는 나를 끌어낸다. (나의 혀는 무의미로 불탄다. 아, 이 비는 자기의 말을 내가 받아쓰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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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 이후로도 오래오래 너를 기억할 테냐? 다른 손님이 거친 목소리로 넌지시 묻는다. “신의 선물을 33


선사한 자 누구인가요? 어떻게?”

오한이 나를 작은 방울처럼 흔든다. 교수처럼 조금은 고풍스런 신이 찾아와 즐거이 축복하며 당신의 이마를 부드럽게 덮는다.

눈과 공기와 길모퉁이에서 호텔과 병원의 시트에서 팔꿈치와 무릎에 피가 나도록 하고 당신은 멀리 아래로 위로 날아다닌다.

이빨로 장식된 성 바실리 성당1)의 예리한 둥근 지붕을 기억하시나요? 상상해 봐요−

1)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은 14세기 몽골 타타르 민족의 침입을 막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반 4세가 건축한 성당이다. 이반 4세는 성당에 감탄한 나머지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성당을 다시는 짓지 못하도록 두 수 석 건축가의 눈알을 빼서 장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 건축가의 이름은 포스트니크와 바르마다. 이 성당은 통일된 러시아 국가의 기치를 드높 이고, 몽골·타타르와 용감하게 싸우다가 희생된 민족 영웅들의 넋을 기리며 정교로 국민을 통합하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정치 적·종교적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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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으로 그것을! −자, 앉아요!− 그녀는 내 마음의 콧대를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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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손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새롭고 사랑스런 무엇인가가 일어났다. 어린애들의 레이스 모양을 한 은빛 구름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여주인님, 용서하세요, 내가 나빴어요! 내가 늘 거짓말하고 바보처럼 굴었어요! 유리를 부는 직공의 입술처럼 당신에게는 맑은 유리의 날숨이 있어요.

당신의 영혼으로 충만한 그릇 당신의 아이는 정말로 부드럽게 만들어졌다! 참으로 정밀한 무엇인가를 에워싼 윤곽! 그것을 모른다고 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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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 당신의 잔인한 천재는 하루 종일 절망하여 밤새도록 당신의 아이 위로, 아, 작은 아이 위로 커다란 머리를 떨어뜨린다.

비는 내 입술을 손 쪽으로 부른다. 울고 있는 나. “용서해 주세요! 용서! 당신의 눈은 현명하고 아주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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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의 합창 소리가 들린다. “아, 시간은 이렇게 흐르는구나. 우리에겐 미소가 중요하다! 어느 유대인에게 헤헤! −아내가 있었다.”

동전 한 닢이 집만큼 크게 자라나도록 그의 아내는 36


고된 일에 전념한다.

아, 열매처럼 익어버린 금속 조각들! 당신은 창공을 장식하며 태양처럼 일어선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농담일 뿐이며 우리의 숫자요 우리의 인사다. 20세기는 자라나 우리를 즐겁게도 하고 기분 나쁘게도 한다.

우리는 작은 아이들 하지만 꿈속에서 자란다. 국고에서 불려진 작은 돈처럼.

우리 등에 부드러운 추위 두 날갯죽지. 알루미늄은 하얀 서리처럼 우리 살갗을 덮는다. 37


지루하지 않게 살기 위해 작은 예술 예술은 타인의 아기 우리를 종종 감동시킨다.

부모님들 때문에 우리는 벌금을 물 거야. 만세! 아, 범속함, 당신은 비겁이 아니라 지혜의 기쁨일 뿐이다.

고통과 분노 때문에 당신은 우리를 구해줄 거야. 여왕이여, 우리는 당신의 비로드 옷에 키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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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이 병 되어 원을 그리고 내 어깨는 낯선 손을 향해 명령한다. 아기 새처럼 손바닥으로 술잔을 따듯하게 한다. 38


지저귀는 열린 부리.

여주인, 당신이 중독된 가슴을 그 입술에 그 갈망의 아픔에 쏟아 넣을 때. 이내 잠들어버린 아가에 대해 슬픔을 느끼나요?

음악의 스프링은 갑자기 조가비 속에서 굽은 채로 잠이 들었나? 하얀 꽃봉오리에 생겨난 무지개일까? 얼굴에 숨겨진 아름다운 근육일까?

깨어나지 않은 사셴카2) 블로크처럼? 암곰이여, 당신은 어떤 기분으로 사랑스런 이빨로, 새끼 털 속에 벼룩 같은 신을 찍어내나요?

2) 사셴카(Сашенька)는 시인 블로크의 이름인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의 애 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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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은 내게 코냑을 따라준다. −오한으로 떨고 있군요. 난롯가에 가서 몸을 데우세요. −나의 비, 안녕! 혀끝에 한기를 느끼니 참으로 즐겁고 기분이 좋다!

술 속에 장미 향기가 짙게 풍긴다! 술, 너만은 아무 죄가 없다. 포도의 원자가 내 안에서 분해된다. 내 안에서 장미 전쟁이 타오른다.

나의 술, 나는 굽어버린 두 나무를 사랑하는 패배한 너의 왕자! 날아라! 두려워 마라! 사형은 종소리로 나와 나를 헤어지게 한다!

나는 점점 커지고 점점 착해진다! 보아라−이미 착한 나, 광대처럼 당신의 발아래 무릎 꿇고 인사하지 않는가! 이미 내게는 창과 문이 비좁다! 40


오, 주여, 어떤 선량함인가요? 서둘러라! 눈물로 동정을! 무릎 꿇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불구자의 수줍음 때문에 나의 볼은 창백해지고, 입술은 비죽거린다.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창피를 주세요! 사정없는 창피를! 화폭 같은 커다란 가죽이 있다! 상처 났던 자리가 깨끗하다!

수치를 모르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 나의 포옹은 하늘같이 둥글다. 우리는 같은 샘에서 나왔으니 모두 형제다. 나의 아이, 비! 얼른 이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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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가 등줄기를 따라 빠르게 지나갔다. 침묵을 깨는 여주인의 무서운 비명 소리. 그리고 녹슨 오렌지색 표지판이 41


하얀 천장 위로 갑자기 떠오른다.

비가 막 쏟아져 내린다! 비를 대야에 받는다! 빗자루와 솔들이 비를 마셔버렸다. 비는 갈가리 갈라진다. 비는 볼을 따라 흐른다. 비는 눈앞이 투명한 장인으로 일어섰다.

비는 무심코 캉캉을 춘다. 비는 수정 유리로 연주하는 소리를 낸다. 빗속의 집은 이미 자물쇠를 잠근다. 돌아가며 파놓은 튼튼한 함정처럼

비가 우수에 찬 표정으로 애무하듯 토끼장을 더럽히며 나에게 알랑거린다. 빗속에서 남자들이 바지를 추어올려 가늠해 보고 뒤축에 집어넣는다.

사람들이 마루 걸레로 비를 묶어 꺼리듯, 화장실에다 짜낸다. 갑작스레 쉬어버린 가련한 목구멍으로 나는 소리 지른다. 42


−건드리지 마세요! 비는 나의 것! 아이처럼 야수처럼 살아온 비. 아, 당신의 아이들은 불행과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비밀을 모르는 눈먼 손을 당신은 왜 죄 많은 비에 적시었나요?

그 집의 여주인이 속삭인다.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만남에 대해. 당신이 계속 대답해 주셔야지요! 나는 웃기 시작했다. −어떻게 대답할까요, 아시나요. 당신이 싫으니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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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이가 가련한 내 모습에 놀란다. 말해본다. −괜찮소. 그만두시오. 이것도 가버릴 거야. 마른 아스팔트 위에 생긴 43


물 얼룩에 나는 키스했다.

알몸의 지구는 과열되고 도시의 지평선이 갑자기 핑크빛을 띤다. 두려움에 시달린 기상대는 아무런 약속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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