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세 소극선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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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tre farces du Moyen Age 프랑스 중세 소극선



빨래통



나오는 사람들

자키노 그 아내 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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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자키노

자키노 (시작한다.)

내가 귀신한테 홀려 결혼을 했지 뭡니까. 맨날 폭풍전야 같고 근심 고통뿐이지요. 여편네는 무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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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쳐 대고, 그 에미는 일일이 참견을 해요. 쉴 틈을 주질 않아요. 돌멩이로 패고 찍고 내 골통이 박살 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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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쓰고, 지랄하고 원망하고, 욕을 하고. 평일이건 휴일이건 한눈팔 새가 없어요. 불평불만만 쌓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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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재미가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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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도 남잔데 이렇게 살 순 없지요. 두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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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키노, 아내, 장모

아내

빌어먹을! 저 주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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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닥쳐! 터지기 전에! 장모

(딸에게) 왜 그래?

아내

나도 몰라요.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집안일은 나 몰라라 저러고 있지 뭡니까.

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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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에게) 이건 따지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 마누라 말대로 하게. 다들 그렇게 살잖아. 자네가 일을 못한다고 저 애가 자넬 패도….

자키노 아! 장모님!

더 이상 못 참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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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

아니, 뭐라고? 그러면, 이 애가 심술이 나서 맨날 자넬 구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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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하는 줄 아는가? 그게 다 애정 표시야. 자키노 옳으신 말씀입니다.

근데 이건 얼렁뚱땅 넘어갈 문젠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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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어요, 제 말을? 장모

그래. 근데 신혼 초엔 다 싸우고 살지 않나. 알아들어, 이 바보야?

자키노 바보라고요! 졸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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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시다니. 내 이름은 자키노예요. 몰라요? 장모

잘 알지. 근데 자넨 결혼한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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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아! 이거 정말 열 받네! 장모

암, 자넨 마누라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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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여사는 사람이지. 자키노 쥐여산다고! 아이고!

차라리 날 잡아 잡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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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여산다고! 맙소사! 아내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 까라면 까야지.

자키노 빌어먹을! 안 그래도

막 부려 먹는 주제에. 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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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기억하기 좋게 자네 일을 정해 보세. 이 애가 시킬 일들을 종이에다 적어 보게.1)

자키노 좋아요! 그렇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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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작해 볼까요. (자키노 탁자에 앉아 종이와 펜을 잡는다.) 아내

알아볼 수 있게 적어. 내 말을 씹지 않으며 내가 시킨 일은 뭐든 무조건 다 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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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종이(rôlet)는 계약서 형식의 종이 두루마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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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빌어먹을! 다는 못해.

합당한 일은 몰라도. 아내

쓰라니까, 잔말 말고 피곤하게 하지 말고. 가장 먼저 일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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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을 한다라고. 자키노 원 세상에! 말도 안 돼!

그 짓은 죽어도 못해. 먼저 일어나! 뭐 땜에? 아내

옷을 불에 쬐 놔야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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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아니, 그런 법도 있어? 아내

그럼! 미풍양속인데 그걸 모른단 말이야.

장모

받아 적게!

아내

쓰라니까!

자키노 한 글자도 못 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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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도 되게 급하네. 장모

애기가 밤에 깨면

2)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가 입을 블라우스를 불에 쬐어 따뜻하게 해 놓 으라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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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게 하잖아 자네가 좀 힘들어도 일어나서 앨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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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 주고 안아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자키노 이제 뭐 잠도 다 잤군!

이게 인생 끝난 거지. 아내

적어 봐!

자키노 보시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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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을 다 채웠는데 나보고 뭘 더 쓰라고? 아내

안 써! 한 대 맞고 할까.

자키노 그럼, 쓰면 될 거 아냐. 장모

그다음은 반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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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만들고 빨래하고…. 아내

털고 씻고 빡빡 민다….

장모

왔다 갔다 걷고 뛰고, 정신없이 움직인다.

아내

빵을 굽고 군불 때고….

장모

방앗간에 갔다 오고….

아내

새벽같이 이불 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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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면 작살나고. 장모

냄비에다 밥을 하고 부엌을 깔끔히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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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더 이상 빨리 받아쓰지 못하고)

그렇게 빨린 못 써요. 하나씩 불러 줘야지. 장모

좋아! 그럼, 받아 적게. 반죽하고….

아내

빵 만들고….

자키노 (이미 써 놓은 것을 보고)

빨래하고. 아내

털고….

장모

씻고….

아내

빡빡 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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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씻어요, 뭘? 장모

냄비, 접시.

자키노 잠시 대기.

냄비, 접시…. 아내

밥그릇도….

자키노 젠장! 머리가 나빠서

다 기억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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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그러니까 적어 놔야 안 잊어버릴 거 아냐?

자키노 좋아. 씻고…. 아내

애기 똥 싼 기저귀를 냇가에서.

자키노 이거 돌아 버리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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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는 거야. 아내

쓰라면 써! 이 멍청아! 뭐 쪽팔린다 이거야?

자키노 빌어먹을! 그건 못해.

꿈에도 생각하지 마.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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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한번 맛 좀 볼래. 죽통을 날려 버린다.

자키노 아아! 쓰면 될 거 아냐.

더 이상 싸우긴 싫어. 아내

끝으로 해야 할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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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정리가 남았고 그리고 지금 당장은 나하고 같이 후닥닥 빨래를 짜서 널면 돼. 적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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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자, 다 됐어! 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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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말이야, 있잖아? 몰래 하는 거 거시기.

자키노 (아내에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쫙 갈겨 주면 되잖아. 아내

아니! 하루에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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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섯 번은 해야지! 자키노 말도 안 돼! 이런 제기!

두 번 세 번도 아니고 대여섯 번씩이나 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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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놈, 재미없게! 그 몸으로 뭘 하겠어?

자키노 난 정말 바보라니까!

당하고 사니. 세상에 나 같은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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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한심한 노릇이야! 아니 이걸 자나 깨나 외우고 다녀야 하니. 장모

빨리 써, 잔소리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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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썼으면 사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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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다 됐습니다. 자, 여기!

잃어버리면 안 돼요. 이제부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종이에 쓴 것 말고 다른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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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안 할 겁니다. 장모

자네가 잘 보관하게.

아내

(장모에게) 그럼, 안녕히 가세요.

(장모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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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자키노, 아내

아내

자아! 거길 잡아, 이런! 힘 좀 써 봐, 땀 좀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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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잡아당겨 봐. 자키노 이게 뭔 소리야, 아니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내

따귀 한 대 맞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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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랠 잡으라고 했지! 자키노 (종이 두루마리를 뒤적이며)

여기 그런 말은 없어. 아내

있다니까!

자키노 없다니까! 아내

없어? 있어, 있다니까! (남편의 따귀를 때리며) 이게 어디서 까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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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그만해! 하면 되잖아.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다음부터 주의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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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빨랫대야 주위에 있는 의자 위에 올라선다. 아내가 빨랫대야에서 아기 이불 홑청을 꺼낸다.)

아내

끝을 잡고 세게 당겨!

자키노 아! 지독하게 더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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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거 똥 냄새 아냐. 아내

당신 입 냄새겠지! 자! 날 봐, 나처럼 해 봐.

자키노 진짜 똥이 묻었잖아.

집안 꼴이 이게 뭐야!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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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그냥 얼굴에다 던져 버려, 장난 아냐.

자키노 빌어먹을, 그건 안 돼. 아내

(남편 얼굴에다 이불 홑청을 던지며) 냄새 좋지, 이 바보야.

자키노 이런 씨! 제정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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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엉망이 됐잖아. 아내

시키는 일이나 하지 웬 말이 그렇게 많아. 잡아당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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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가 이불 홑청을 사정없이 잡아당기자, 아내는 균형 을 잃고 잡고 있던 것을 놓친다.)

이런, 젠장! 호랑이가 물어 갈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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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빨랫대야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이게 무슨 망신이야! 날 좀 여기서 꺼내 줘. 정말 창피해 죽겠어. 자키노, 날 좀 구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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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에서 날 꺼내 줘. 자키노 (종이를 뒤적이며)

여기 그런 말은 없어. 아내

(애처로운 목소리로) 이 통에 짓눌려 꼼짝할 수가 없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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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여기서 꺼내 줘! 자키노 (노래로 응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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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한번 고약하군. 술주정뱅이. 엉덩이를 돌려 다른 쪽으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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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목숨만 살려 줘! 정신이 오락가락해. 날 좀 도와줘, 조금만.

자키노 여기 그런 말은 없어.

거짓말하면 지옥 가.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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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날 이대로 놔두면 저승사자가 잡아가.

자키노 (종이에 적은 것을 읽으며)

빵 만들고, 빨래하고. 털고, 씻고, 빡빡 민다. 아내

헛것이 보이고, 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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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넘어갈 것 같아. 자키노 키스하고 포옹하고. 아내

어서 날 좀 꺼내 줘요.

자키노 왔다 갔다, 걷고 뛰고. 아내

오늘을 못 넘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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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빵을 굽고, 군불 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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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자키노 방앗간에 갔다 오고. 아내

똥개만도 못한 자식!

자키노 새벽같이 이불 개고.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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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장난 아냐.

자키노 냄비에다 밥을 하고. 아내

젠장! 엄만 어디 있지?

자키노 부엌을 깨끗이 치운다. 아내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신부님을 불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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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걸 쓴 사람이 난데 그런 말은 여기 없어. 아내

왜 그게 없단 말이야?

자키노 그런 말은 안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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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든 살든 알아서 해. 나로선 어쩔 수 없어. 아내

그럼, 어디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나 봐.

자키노 그런 말도 여기 없어.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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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힘으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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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좀 도와줘, 여보! 자키노 웬수라고 하지그래.

죽고 나면 건져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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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자키노, 아내, 장모

장모

아무도 없나!

자키노 누구세요? 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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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도 잊었나. 궁금해서 들러 봤네. 다들 잘 있지?

자키노 집사람이

뒈져서 정말 좋아요. 소원이 이뤄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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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된 기분이죠. 장모

뭐! 내 딸이 죽었다고?

자키노 빨랫물에 익사했죠. 장모

뭐? 이 흉악한 살인자.

자키노 빌었지요,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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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이 사람의 혼이 달아나기 전에 악마가 잡아가라고. 장모

아니! 내 딸이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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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키노 빨래를 짜다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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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거리더니 냅다 뒤로 곤두박질쳤죠. 아내

엄마! 나 다 죽어 가요. 제발 날 좀 구해 줘요.

장모

나 혼잔 어림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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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좀 도와주게. 자키노 (종이를 뒤적이며)

여기 그런 말은 없는데. 장모

없다면 자네 실수지.

아내

사람 살려!

장모

나쁜 자식! 그냥 죽게 놔둘 건가?

280

자키노 별수 없죠. 종노릇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아내

나 죽네!

자키노 아무리 봐도

그런 문구는 없어요. 장모

여보게! 저 애를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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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세. 날 좀 도와줘. 자키노 그건 죽어도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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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를 이 집 가장으로 모신다는 약속을 하기 전에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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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쫓겨난다 해도 당신한테 약속하지.

자키노 정말이야? 아내

이제부터 집안일은 내가 다 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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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한테 안 시킬게. 자키노 좋아! 그럼, 꺼내 주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약속은 꼭 지켜야 해. 방금 했던 말 그대로. 아내

300

두말하면 잔소리지. 여보! 약속해 정말로.

(남편이 아내를 빨래통에서 꺼내 준다.)

자키노 (장모에게)

이 사람 말 잘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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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가장이죠. 장모

가정에 불화가 생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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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게 하나도 없지. 자키노 아무리 바보 천치라도

여편네가 지아비를 종 부리듯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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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전 사람들 눈총을 많이 받았죠. 근데 이제부터 열심히 집안일 하고 살게요. 난 이제 이 집 하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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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제 본분인 거죠. 자키노 그렇게만 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죠. 아내

약속은 꼭 지킬게요. 날 믿어요, 이제 이 집 가장은 당신이에요. 나 많이 뉘우쳤어요.

자키노 나도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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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억지 소동을 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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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을 떨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절 비웃었던 분들도 이제 제 편을 들겠죠. 방방 뛰던 집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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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었잖아요. 결론이 그런 거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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