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웅시선초판본_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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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웅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작품만을 선정합니다. 오랜 시간 그 작품을 연구한 전문가가 정확한 번역, 전문적인 해설, 풍부한 작가 소개, 친절한 주석을 제공하는 고급 시 선집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이광웅 시선 이광웅 지음 고인환 엮음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편집자 일러두기 ∙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 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 이로 추천했습니다. ∙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 석을 덧붙였습니다. ∙ 이 책은 ≪대밭≫(풀빛, 1985), ≪목숨을 걸고≫(창작과비평, 1989), ≪수선화≫(두리, 1992)를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습니 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 했습니다. ∙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 잡았습니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습니다. ∙ 주석은 현대에는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어, 원전의 글씨가 잘 안 보여 엮은이가 추 정한 글자, 사투리, 토속어, 북한어 등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 달았 습니다.


차례

제1시집 ≪대숲≫ 유치한 저녁상···················3 면도의 날·····················6 바깥 풍경 ····················10 보충 수업 10년 ··················13 李鍾根 ·····················15

예언서 ·····················17 주시 망상 ····················18 꿈 ·······················20 비의 暗層 ····················23 대밭 ······················26 버림받은 하늘 ··················29 한밥집 식탁 ···················31 램프의 아침 ···················34 묵은 노우트 ···················37 달빛 ······················39 종이꽃 ·····················40


제2시집 ≪목숨을 걸고≫ 양담배 ·····················45 그때 그 순간 악마가… ··············47 사회 참관 ····················50 바깥의 노래 ···················52 담 안의 노래 ···················54 햇빛의 말씀 ···················57 징역 생각난다 ··················58 목숨을 걸고 ···················60 전라도 거리 ···················61 연 ·······················63 달동네 꽃동네 ··················70 눈 다친 아이 ···················71 심연 ······················74 아들 생각 ····················75 작은 평화 ····················77 밤 그늘 ·····················79 아름다운 영혼은 ·················81 순서 정해진 여자의 마음··············83 크리스마스카드만 해도 ··············86


제자 ······················89 제자들이 죽어 가고 있다··············90

제3시집 ≪수선화≫ 폭설의 광야에서 ·················95 옆 사람의 웃음 ··················97 황야의 등불 ···················99 마음이 넓은 사람 ················100 떠나지 않는 사람 ················102 수선화 ·····················103 시 ·······················105 전향서 쓰듯···················106 장군봉 아래 운동장 아이들 ············108 이웃의 얼굴···················110 시인에게 ····················112 시인의 취미···················113 봄의 속삭임···················115 오빠는 운동권이 아니었어요 ···········116

해설 ······················117 지은이에 대해··················131


엮은이에 대해··················133


제1시집 ≪대숲≫



유치한 저녁상

점상1)이다. 오늘도 저녁노을이 밥상보처럼 내려앉는 저녁밥 점상 이다.

−전란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黃사진이 노을 비낀 저녁상을 내려다보았다−

늙고 늙으시는 어머니와 져믄 자식이 마주 앉아 밥 먹 는 저녁, 黃사진 틀 밑에 비리먹은 집 없는 두 개처럼 마주 앉아 밥 먹는 저녁, 어머니는 자식의 피로를 알아채고 자 식은 어머니의 근심을 측량하는 밥 먹는 저녁, 수업료 재촉과 이삭줍기와… 애국 조회와 버섯 따기 와… 소년단의 봉사 활동 새마을의 반상회… 아버지의 제 삿날 삼베 값이 금값이던 전란 때 슬프고 초라하던 망인의 장의 행렬 가까와진 망인의 잃어버린 제삿날… 생각들을 반추하며 밥 먹는 저녁.

1) 점상: ‘겸상’의 방언(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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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다지도 빚은 늘어만 가는가. 왜 이다지도 이자물이에 허리띠 더욱 졸라매야 하는가. 면 서기는 왜 다 자꾸 찾아오는 것인가. 문장 늙은이는? 지서장은? −아버지의 黃사진이 근심스레 흔들렸다−

묶여져 바람벽에 걸려 있는 저 시래기를 보셔요, 어머 니! 우리는 좀 더 유치해져야겠어요. 우리는 더 더 더 유치해져야겠어요. −다박솔밭 흔드는 하늬바람 따라 벌레 떼에 말라죽은 소나무 떼가 웃었다. 분명, 유치하지 못한 저녁상 보고 달아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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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말 몰아온 하늬바람이 잠이 드는 저녁밥 점상이다. 어둠이 밥상보처럼 내려앉고 웃음소리 멀어지고 사위가 적막해지는 저녁밥 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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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의 날

별일 없이 산책은 끝났다. 얼어붙은 강변에는 인적이 없었고 낯익은 조류의 동사체가 없었고 무수한 별만이 떨어져 서릿발처럼 발끝에 부서지고 있었다. 안심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별일 없이 산책은 끝나고 흔들리는 촛불 밑에서 면도의 날을 세운다. 흔들리는 촛불 밑에서 면도의 날이 명경 속에 널어놓는 세계의 껍질들−

어지러운 구름의 광채에 가려 넘지 못하겠던 보리고개가 다가서고 찔레꽃 강한 대낮의 향기 속 징후 없이 터지던 코피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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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서 올라온 추위와 바다 건너 들여온 강철제− 겨울 철책이 둘리고 보호받는 열대어의 지느러미며 떡시루에 김 내리고 볼품없는 식민지 명절, 그리고 순찰 중 이상 없음의 平日이 뜬다.

공중을 날아가는 까치를 보고 비상에의 동경을 키우던 학동의 날, 잃어버린 까치들, 그날의 짖음을 아쉬워하고.

들쥐의 양식으로 남겨진 이삭이나 촛불 빛에 둘러싸여 면도의 날에 묻어오는 가랑잎들, 지나쳐 온 가을마다 소중하게 거둬들인 흉작의 낙장들을 떼어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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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을 끊기에는 너무나도 힘에 부치는 면도의 날을 세운다. 빼앗기고 빼앗기고 빼앗긴 나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아 서 빛을 발하는 이기를, 손바닥에 긁히는, 초라한 지성을 뉘우친다.

바람받이 솔직한 가슴팍에 듣고 있는 몇 방울의 썩은 피를 남기고 겨울 식민지, 거대한, 동물원의 강철제− 무형한 몽상의 쭉지마저 부딪혀 접혀야 하던 동물원의 철책을 넘어 가능한 한 옛 벌판에 이삭 줍던 나의 소년을 고요히 살해하고,

밝는 새벽, 힘줄 솟아나 보습을 가는 마음으로 핏발 속에 저무는 야반, 흔들리는 촛불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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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기분을 맞아, 나는) 억울한 면도의 날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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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풍경

피신해 와 절로 연금 상태로 차단돼 있으면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 빛 잃은 다박솔밭 가을비 갠 하늘 추위에 떨고 있는 구름 뭉치들.

기온은 점점 내려갈 것이다.

그리워진다. 햇볕 바르고 바람막이 되어 있던 후미진 구렁 혼자 앉아 있어도 평온한 세상, 탐미주의자가 된 것같이 파고 두텁던 행복의 난류.

바람막이 없는 세상에서도 항상 그리워하고 서로 아끼던 친척 같은 여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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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막이 없는 세상에서도 어깨 맞대고 고요히 앉아 있으면 맑고 밝은 행복의 물결 가슴으로 전해 오던 친척 같은 여자 친구.

차디찬 벽 그늘 무참히 얹혀 있는 미결수 창백한 얼굴빛이 하늘빛 그리듯이 맑고 밝은 햇빛의 나라, 자유세계 그리며 핼쓱해져 뜬눈으로 밤새우던 사람들.

싸우다가 숨 거두어 바람이 된 사람들, 사막의 모래 먼지에 질식해 간 사람들, 악몽만을 보다가 미쳐 나간 사람들… 구름같이 일었던, (천의 사람들… 만의 사람들…) 피신해 와 절로 연금 상태로 차단돼 있으면서 부질없는 그리움 젖어 말 못하게 흐릿해 있는 나의 눈은 사랑하던 사람들 초상 하늘 끝에 더듬으며 핀에라도 찔린 듯 허공에서 헤어나지 못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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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풍경, 젖은 잎사귀 떨워 보내는 부는 바람 속, 헤어짐의 열기 어린 온정의 돌무덤이 삐걱 열리고 흔들 수 있는 온정의 여윈 손이 나온다.

파닥임만 떠맡아 온 듯 나의 가슴은 벽 그늘 얹힌 무게랑 가중하여 무거워진 멧돌을 달고 나락의 깊이 속으로 타 없어지는 운석의 가속이 되어 바스러져 내린다.

(흩어진 사람들, 노역에도 휴식에도 입에 재갈 물린 사람들…, 힘을 모아 힘을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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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수업 10년

교사의 길이란 구절양장보다 어려운 밤길 여우한테 홀려 가는 보충 수업의 길이다.

보충 수업의 길 가기 싫다. 목이 쉬어 가는 밤길 발목 아프다.

하루에도 열 번이나 작파하고 싶은 마음− 난작 인간 식자인의 길이 아닌 노력에 따른 성과 없이 입시 제도의 개혁 없이 여우한테 홀려서 평생이 걸려 있는 이 길, 10년 동안 형광등 불빛 받아 눈비같이 자욱한 백묵 가루 날린다.

강의 한 시간에 담배 두 갑 값 줍기 위해 구절양장보다 어려운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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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걷는다. 제자리걸음이다. 보충 수업비는 불지 않고 머리 위에 수부룩히 백묵 가루 쌓인다.

소년들의 성장을 위해 가르친다는 기쁨 교직자의 사명감 다 잃어버렸다. 애초부터 부여받지 않았다. 백묵 가루 날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 꽃 한 송이 피어날 마음 한 조각 없다. 새 한 마리 지저귈 마음 한 조각 없다. 모두 다 태엽을 감아 놓은 기계와 같고 심중에 남겨 놓은 말 한마디 없다.

태엽이 닳아지면 될 것이 무엇일까? 소년들의 성장을 위해 물려줄 수 없는 이 길, 생명한테 죄 지으며 여우한테 홀려서 목이 쉬어 가는 밤길 가슴 얼어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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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根

평교사는 외롭고 서글프다. 전직 국회의원으로서 원내 상무위원이었고 현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의장이요 또한 사단법인 무어라는 학원 재단 이사장인 세칭 거물 실력 자와 3년 동안에 걸친 긴 법정 투쟁에서 대법원의 승소 판결을 마침내 얻어 내고도 남은 것은 쓰디쓴 자조와 빈주먹과 해 질 녘 빈 포도 위의 긴 그림자뿐.

교사가 굴종을 가르쳐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부끄럽지 않고서 교단 위에 서기 위해 말하자면 맨주먹만으로 잘 정비된 장갑차의 행렬 앞에 굽히지 않고 싸웠지만 그렇게 세칭 거물 실력자를 이겨 내고 굴종을 날려 버렸지만 눈치 보기만 일삼다가 떨어져 나간 동료 교사, 헐수할수없이 힘한테 빌붙어 살아야 하는 동료 교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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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미덥지 못한 친구와 친척들은 유리한 시점에서 타협할 줄 모르는 요령부득의 사내요 세상모르는 철부지, 괴짜이고 병든 자라고 의혹에 찬 시선만을 던져 주고 제 갈 길 찾아 돌아설 뿐.

불의가 살판 치는 세상이라 우울한 겨울, 해가 저물고 또 해가 떠도 똑같이 시련의 겨울 헤어진 옷가지와 냉랭한 온돌 가난한 아내와 기침하는 아이들,

봄은 아직도 멀고 타협과 굴종을 가르치느니 백묵을 쥐고 죽는 일이 낫겠 기에 닳아지는 청춘의 사그러드는 모닥불 곁에서 길고 긴 이 나라의 겨울이 평교사는 못 견디게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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