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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Pacific International School

2016-2017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f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Philippians 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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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5 OF THE APIS KOREAN LANGUAGE ARTS PROGRAM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WAS PUBLISHED BY THE KOREAN LANGUAGE ART CLASS WITH THE HELP OF MANY STUDENTS, TEACHERS, AND STAFF MEMBERS IN SEOUL, SOUTH KOREA, IN THE YEA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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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ic Achievement Award and Dedication to the APIS Community as Artist for the APIS Korean Magazine Cover Contest

Grade 11 손주현 Julie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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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ic Achievement Award and Dedication to the APIS Community as Artist for the APIS Korean Magazine Cover Contest

Grade 11 김도윤 David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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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ic Achievement Award and Dedication to the APIS Community as Artist for the APIS Korean Magazine Cover Contest

Grade 11 권재은 Eugenie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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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Grade 12 엄대웅 Justin Um 현대인은 전자제품과 한 몸처럼 살아간다. 공부, 업무, 연구, 의사소통까지 여러 분야의 일을 온라인 으로 진행하다보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가 없으면 불안 증세 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편리 한 삶을 살도록 도와 주었지만 전자 기기 에 대한 집착 또한 만들어 주었다. 손으로 글을 쓰거 나, 종이 책을 읽는 일, 카카오톡이나 이 메일이 아닌 사람의 얼굴을 보고 하는 대 화, 모니터만 뚫어지 게 바라보는 컴퓨터 게임이 아닌 밖에서 뛰어노는 것은 과연 인류에게 추억이 되 어버린 것일까? 기계와 사람의 하나됨을 비판하고 그 스트레스를 자유롭게 날리고자 하는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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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춘다 Grade 11 이민정 Rose Lee

비오는 날에는 피하지 말고 춤을 추어라 굵은 빗줄기가 그칠 때까지 나는 춤을 춘다 어두운 밤이 두려워도 눈을 감은 채 나는 춤을 춘다 추운 날 칼바람을 맞서 나는 춤을 춘다 빗줄기가 빛줄기로, 두려움이 용기로, 바람 소리가 음악 소리로 그렇게 바뀔 때까지 나는 춤을 춘다 땀줄기가 빗줄기를 가릴 때까지 낮이 밤을 가릴 때까지 심장 소리가 바람 소리를 가릴 때까지 나는 그렇게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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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ing Hope Grade 12 김리아 Lia Kim 절망과 공포의 끝 에서 우리는 모두 불안해한다. 보이지 않는 두려 움은 우리의 몸을 마비시키고, 영혼까 지 집어 삼킬 듯 거 대하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둡고 까마득 한 외로움과 깊은 고독의 물이 차오르 는 상황을 인간이기 에 우리는 누구나 겪을 수도 때로는 상상할 수도 있다. 무너진 삶에서 홀 로 고통을 겪어내는 그 누군가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부 드럽게 날아가 따뜻 한 날개 짓으로 친 구가 되어 주는 한 마리 새를 떠올려 본다. 다소 불편하더라 도 혹은 돌아오는 대가는 없을 지라도, 내 자신보다 다른 누군가를 살피고 아 낀다면,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 넘 쳐 난다면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워지지 않 을까 한다. 그러한 소망과 바람을 이 한 장의 그림에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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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Artistic Achievement Award and Dedication to the APIS Community as Artist for the APIS Korean Magazine Cover Contest / 손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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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 4 권재은 • 5 자유 / 엄대웅 • 6 춤을 춘다 / 이민정 • 7 Embracing Hope / 김리아 • 8

시작하는 글 학생대표 인사말 / 김영은 • 16

11학년 외규장각 도서의 꿈 / 신유진 • 20 자유 / 전시현 • 21 시들어버린 아홉 송이의 꽃 / 김지아 • 22 고통 (苦痛) / 조소연 • 24 나무 / 이승호 • 25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 신성진 • 26 사우가(四友哥) / 김예담 • 27 다시 돌아온 흥부전 / 유유진, 김영민, 이건, 김유정, 오지원 • 28 갑신정변 일기 / 김태진 • 45 1882, 구식 군인은 아직 살아 있다 / 조은솔 • 52 갑신정변, 또 다른 이야기 / 박성규, 김진서 • 54 나에게 책이란 꿈이다

/ 이규영 • 64

난 내가 마음에 들어 / 김정우 • 66 마마보이 / 홍성욱 •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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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 이야기 / 조남형 • 71 수수께끼 인생 / 김재형 • 73 시편 23편, 그리고 나 / 이승빈 • 77 내가 쌓은 벽 / 이소형 • 80 나를 먼저 사랑하기 / 김도윤 • 84 나의 삶, 나의 미래 / 박정훈 • 88 진실을 말하다 / 김재홍 • 90 즐거웠던 중국 여행 / 신수지 • 92 영리함과 멍청함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한끗 차이 / 김서윤 • 95 동물이 전해 준 교훈 / 김현지 • 99 고통 속에서 발견한 삶의 가치 / 권재은 • 102 어둠 속, 찬란했던 한 줄기 빛 / 홍혁준 • 105 인류가 성장하기 위한 역사 / 강민정 • 108 우리 시대의 미디어 바로 보기 / 김태환 • 110 학창시절 연애, 긍정적인가 / 김지민 • 112 청소년 성형수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손주현 • 114 과거와 현재, 시대에 따른 바른 선택 / 최진이 • 116 과거에 비춰진 현재의 모습 / 김노아 • 119 대한민국, 화이팅! / 이연재 • 122 Utoro Village / 박성규 • 124 우리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 차성호 • 127 숨기지 말아야 할 과거의 진실 / 김남호 • 130 흥선대원군의 개혁 / 최민서 • 132 Dear Chloe / 황윤하 • 134 풀뿌리 민주주의의 출발 / 김여경 • 136 저는 정빙한이에요 / 정빈한 • 139 저는 오말이에요 / 오말 모란 카스트로 • 141 Do you know the “Titans”? / 채리티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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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학년 추운 봄 / 설정환 • 148 메뚜기 가득한 들판 / 윤희재 • 149 갇혀서 살아가는 우리 / 유석현 • 150 봄, 봄, 봄 / 손승한 • 151 떡잎 / 홍형기 • 152 잔치 흥 / 구재모 • 153 가을 흥 / 조하은 • 154 흥 / 김영은 • 155 정(情) / 김준현 • 157 정(情) / 장재근 • 158 반쪽 짜리 / 박천진 • 159 친구 / 정승수 • 160 굴렁쇠의 한(恨) / 최일식 • 161 바늘 꽂이의 한(恨) / 이예경 • 162 바람따라 떠난 임이여 / 손승모 • 163 모국 / 이희웅 • 164 안개 / 최윤진 • 165 상처만 남긴 싸움 / 김민규 • 167 광복 5년 / 이규연 • 168 대학 / 황정호 • 169 전쟁은 가라 / 최석영 • 170 하나님 아버지께 / 오서현 • 171 배구 / 강기선 • 174 2016년 한국, 혼밥의 시대 / 김현주 • 176 먹방에 빠진 한국인 / 박성재 • 179 오늘도 달린다, 대한민국 / 김찬우 • 181 한국의 효에 대한 고찰 / 김기환 • 184 딩동! 배달 왔습니다! / 황윤재 • 186 한국을 살린 선교사 - 아펜젤러 / 배병준 •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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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을 아십니까? / 정승현 • 190 살아있는 과거 / 박세라 • 192 Two Different Seouls made by Fifty Million Souls / 이송원 • 194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 이채영 • 197 근대화에 대한 세 가지 시각 / 이신영 • 199 서울은 만원이었다 / 윤세라 • 201 나는 흥선대원군이다 / 김윤수 • 203 2016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부합니다 / 조기완 • 206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 김유리 • 208 방법이 문제다 / 강준우 • 211 대. 한. 민. 국. / 박형빈 • 213 한국인의 과거와 미래 / 안예지 • 215 한국인의 현주소 / 박혜정 • 218 정의는 어디에 / 오승윤 • 221 대통령의 리더십을 논하다 / 인재원 • 224 제국주의의 변명, 식민사관을 논하다 / 임나연 • 227 숙제가 학업에 도움이 될까?/ 김지민 • 230 GMO 음식, 어떻게 봐야 할까? / 이희연 • 232 하람베의 생명 / 김현준 • 234 스마트 폰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 박정윤 • 236 지필 고사의 효용성 / 강가은 • 239 진실된 사과, Sorry? No Sorry! / 서수민 • 241 진실된 사과 / 윤설빈 • 245 그들의 보금자리 / 이신영, 안예지 • 249 색안경을 벗고 / 임나연, 이송원, 서수민 • 253 이산가족, 우리가 해야 할 내일 / 오서현, 윤설빈, 정승현, 강준우 • 258 통일에 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 / 조기완, 박형빈 • 263 색안경을 벗고 / 이희웅, 배병준 •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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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 to my father, 2014 / 김유리, 박현지, 최윤진 • 270 통일 / 김윤수, 인재원 • 277 광저우의 날씨 / 이페이 • 282 연필 / 이원형 • 285 Identification of Korean society: “Who are the Koreans?” / Caroline Webster • 287

2015-2016 백일장 수상작 고등어 / 구재모 • 292 늘 그렇듯 / 오승민 • 299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 / 박혜정 • 300 엄마 찾기 / 조하은 • 303 나의 하루 / 설정환 • 305 천둥 / 김선우 • 307 그녀의 ‘어머니’ / 서수민 • 308 심해 도시 / 윤수빈 • 313 괜찮아 / 이소형 • 315 어머니 / 박정연 • 317 기도 / 정강인 • 319 모녀 / 임나연 • 320 거북이 엄마 / 유유진 • 323 우리 엄마는 / 최진이 •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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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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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5학년 학생으로 처음 입학한 나, 김영은은 지난 8년 동 안 아시아 퍼시픽 국제 외국인 학교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나의 인생의 절반을 같은 학교에서 같은 친구들, 선생님들과 지내 왔기 때문에 어떨 땐 변화가 두렵고 코앞으로 다가온 대학 생활도 걱정될 때가 많다. 우리 학교는 항상 학생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해줬기 때문에 지난 8년 동안 나는 전교회장도 해 보고 잘 하지도 못하는 배구, 농구도 해보고 클라리넷 연주를 하러 저 멀리 카타르까지 가봤다. 나처럼 앞으로 많은 APIS 학생들이 꿈을 크게 꾸고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졸업하기 전에 꼭 한 번씩 은 느껴봤으면 좋겠다. 이번 해에는 학생회장으로서, 그리고 졸업하는 12학년 학생으로 서 많은 노력을 해왔다. 새로운 것도 많이 시도해보고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학년 애들이 최고의 한 해를 보낼 수 있게끔 학생 회 임원들과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지난 몇 개월을 달려왔다. 비록 우리의 노력이 알려지지 않더라도 친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필 때 우리의 노력 또한 빛이 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몇 개월 안남 은 고등학교 생활,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고 싶다. 책임 이 주어진 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욕심이 많은 나를 따라 주고 도와준 친구들과 동생들한테 매우 고맙다. 지난 8년 동안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더 많은 학생들과 선생 님들을 더 가까이 알게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으로서 공 부와 대학 입시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이나 가족과 같이 보 내는 시간이 줄어들 수 있지만 졸업하기 전에 관계의 중요성을 깨 달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졸업 후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겠지만 자 주 연락하고 지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국 문화보다 미국 문화에 더 익숙했던 나를 이해 해주고 품어준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앞으로 당분간 은 미국에서 생활을 할 텐데 떠나기 전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확실히 가르쳐주신 한국어 선생님 세 분에게 감사드린다. 또,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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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운 한국인이 되고 올바른 생활을 하는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Ever since I first came to APIS as a fifth grader eight years ago, I have grown and learned exponentially. I have spent half of my life at the same school with the same friends and teachers, therefore I feel uneasy when I think about

the

changes

that

will

come

when

I

graduate--especially life in college. However, APIS has always provided a host of nourishing opportunities for students like me, which is why I have been able to become Student Council president, play volleyball and basketball, and even travel to Qatar to play my clarinet. Like me, I hope current APIS students and future APIS students will be able to dream big and see those dreams become reality before they graduate. This year, as SRC president, and also as a graduating senior, I have but in my all. I’ve experimented with new events and add-ons, and I have especially worked hard with my class representatives to make sure the Class of 2017 can graduate with lots of good memories. Although students don’t often recognize the hard work put into SRC events, I believe that our efforts shine through the smiles and laughs of the student body. I only have a couple months left of high school, therefore I want to do anything and everything I can do for APIS--this is an important responsibility of mine as SRC president. I really want to thank everyone who has joined me in my efforts to enhance student life, and for tolerating my ambit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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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 One thing I regret not doing during the eight years I’ve been at APIS is not getting to know more teachers or students. As a high school student, it’s inevitable for us to spend less increasing

time

with

amount

of

family

and friends

assignments

and

due the

to

the

grueling

standardized testing process, but before students graduate, I

hope

everyone

understands

the

importance

of

relationships. Furthermore, although we may be worlds apart, I truly wish to keep in touch with my graduating class, along with teachers and underclassmen. Last but not least, I want to thank teachers and friends for understanding and embracing me for who I am--an

ethnic

Korean

who’s

more

used

to

Western

culture. I especially want to express my gratitude to the three Korean teachers at APIS, who have taught me how to embrace Korean culture and live as a responsible and proud Korean.

2016년 겨울 APIS 학생회장 김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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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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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외규장각 도서의 꿈 Grade 11 신유진 Claire Shin

너무나 낯선 곳 여기 위, 아래,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보이는 것은 오직 먼지와 생소한 외국 글자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됐는지 나도 모른다, 가물가물하다 수십 년째 그리워하는 나의 고향 바다의 짠 내 향긋하고 하늘 높고 푸르던 나의 고향 강화도 언제쯤 그곳에 돌아갈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소중한 글을 한 자씩 정독하던 젊은이, 내 표지에 쌓인 먼지를 매일 닦아주던 댕기 머리 그녀 희미하게 기억나는 먼지 쌓인 추억 언제쯤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여기는 너무 외로워 깜깜해 썰렁해 누가 나를 좀 조국으로 보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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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자유 구식 군인들의 외침

Grade 11 전시현 Jenny Jun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그리고 떨리는 노여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보며 굶주리는 가족들을 보며 오늘 하루를, 그리고 내일을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 통제되고 억눌려 꿈틀거리는 힘 뱉어내지 못한 마음 속 외침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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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들어 버린 아홉 송이의 꽃 병인박해로 순교한 아홉 명의 선교사님을 기리며

Grade 11 김지아 Gia Kim 낯선 땅에 들어와 그저 믿음과 사랑 전하려 했거늘 우리의 말들이 반대로 들렸던 것일까, 부족했던 것일까 그저 믿음을 전하고 싶었던 마음에 들어온 이 땅 이방인이기 때문에 원하지도 않았던, 바라지도 않았던 쉼표를 맞이했네 봄을 맞이하는 꽃처럼 찾아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혼자 색은 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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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뚝 뚝 떨어지고 말라서 굴러다니다가 찢어지고 누군가의 발밑에 박혀 있다가 떨어져 나가네 결국에는 주인 잃은 우산같이 언젠가 없어져 버릴 지나가는 계절만도 못한, 이름조차 사라진 고작 아홉 숫자로만 기억된 그 꽃송이 이제는 우리 마음 속에 고이 피어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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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통 (苦痛); 쓸 고, 아플 통 삼정의 문란, 고통 받는 백성들의 목소리

Grade 11 조소연 Rachel Cho 당신은 누구인가요? 우리를 구해줄 사람, 우리를 해칠 사람 둘 중 누구인가요? 피와 눈물은 섞여서 깊은 애통함이 되고 배신감은 뼈 속까지 사무친다 우리를 살려주세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몇 번이나 소리쳤건만 우리의 울부짖음은 메아리처럼 돌아오는구나 저 머얼리 보이는 실낱같은 희망 그 마저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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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무 Grade 11 이승호 Chris Lee 우뚝 선 나무 꼿꼿함에도 겨울 바람에 그 나뭇가지 흔들리듯 아무리 옛것을 지키고자 하여도 개혁의 바람은 비켜가지 못하는 법 겨울나무 잎 떨구고 겨울을 이기어 냈건만 어찌 나라가 백성을 버리고 개혁을 버티어 내겠는가 나무는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어 주지만 어찌 나라를 남에게 내어 주겠는가 나라에 맞서 개혁을 반대하는 것만이 옳고 나라에 따라 개혁을 찬성하는 것은 틀린 것인가?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으킨 반란이거늘… 왜 우리를 아무도 이해를 못하는가 왜 우리는 이대로 실패했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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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Grade 11 신성진 Sung Jin Shin

1919년, 한 소녀는 외칩니다 이 땅에서 도적떼는 물러가라고 2016년 다시, 많은 소녀들이 외칩니다 이 땅의 주인은 바로 우리들이라고 외침은 반복되고 역사는 되풀이 되지만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을 당하는 자를 두려워하고 강한 자는 누리는 듯 보이지만 약한 자가 강한 자의 주인됨을 명심하길 대한민국의 주권은 오직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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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시>

사우가(四友哥) - 윤선도 ‘오우가’ 패러디

Grade 11 김예담 Donna Kim 내 친구 도대체 몇이냐 물어보니 돈 있고 물 있고 책 있고 연필 있네 두어라 이 넷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나 말고도 다른 친구 엄청나게 많은 돈 같이 잘 놀다가도, 서로 또 싸우네 행복할 때 옆에 있고 화날 땐 없어지네 나에게 구세주 같은 너무나도 고마운 물 피곤할 때 허전할 때 시원하게 날 채우고 목마르고 힘이 들 때 상쾌하게 날 채우네 신기한 이야기, 재미있는 사실들 매일매일 들려주는 똑똑하고 인기 많은 책 공부 잘하든, 공부 못하든 언제나 내 옆에 있네 매일매일 일하는 부지런한 내 연필 창조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 연필이 나서서 늘 나를 도와 주네 나는 친구 몇 없어도 좋은 친구 있다네 돈 있고 물 있고 책 있고 연필 있으니 평생 동안 넷과 함께 즐겁게 지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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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소설>

다시 돌아온 흥부전 Grade 11 유유진 Sophie Yoo 김영민 Justin Kim 이건 Tommy Lee 김유정 Jocelyn Kim 오지원 Josephine Oh

<유유진> 한국의 전통과 현대가 적절히 공존하는 공간으로 불리는 이곳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동네이다. 한국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할 ‘핫 플레이스’로 꼽힌 게 한두 번이 아니고 매일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그런 곳, 또한 요 몇 년간 땅값이 하늘을 치솟는, 요즘 경제 상황 과는 맞지 않는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여주는 장수 동네이기도 하 다. 그리고 이 동네에 가장 북적이는 거리 맞은편에는 딱 봐도 넓 어 보이는 새로운 가게에 다소 심각하면서도 들떠 보이는 두 남자 가 앉아 있었다. “영만아.” “네, 형.” “앞으로 우리 잘 해 보자…. 시작이 좋아.” 얼핏 키가 큰 스모 선수를 연상시키는 철수는 육중한 몸을 끌어 의자에 힘겹게 앉았다. 그리고 그 두툼한 손을 비비며 동생 영만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잘 돼야죠. 이번 일도 안 되면 우린…, 적어도 난 이제 끝이에요.” 영만이는 웃었다. 그 형에 비해 덩치가 크진 않지만, 형제는 형 제인지라 닮은 모습이다. 형 못지않게 살집 있는 체격을 자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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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만은 영락없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형인 철수와 다른 점이라면 순한 눈매, 전체적으로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상냥한 인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나 여기에 내 돈 다 걸었잖아! 영희나 애들도 이제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살게 해주고 싶어, 진심으로. 나 같은 남편 만나서 내 가 서른 세 살인 아저씨가 되도록 한 번도 호강해 본 적 없는 영희한테도 미안하고…. 크는 애들한테도 당당한 아빠로 지내고 싶고.. 하… 형이랑 일하는데 잘 되겠지!” 영만이는 선량한 눈으로 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성공해야지! 거의 다 네 돈으로 꾸린 건데. 괜찮아, 나 만 믿고 사업하면 없던 돈도 생긴다, 아우야.” 철수는 영만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치며 능청스럽게 말하면서 옆 의자에 있던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너의 그 부대찌개 요리법만 있으면 진짜 맛집으로 소문나는 것 은 시간문제라니깐! 정말 나한테 고마워야 해, 넌. 흠흠, 이렇게 비즈니스를 아는 나를 친형으로 둔 너도 복이 많은 거다, 너.” 철수는 분주하게 서류를 들쑤시며 작은 공책을 꺼내 들었다. “자, 이제 빨리 그 요리법에 대해 좀 말해봐. 그래야 내가 이 사업 방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참! 그리고 그 뭐지, 그, 가게 명의는 당연히 나로 해놨지? 아무래도 내가 사업 관계자들이랑 만날 거니깐 그게 더 편리할 거야.” 철수는 숨도 쉬지 않고 영만이 끼어들 틈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넌 가게 운영만 잘해. 내가 거래나 뒷일은 다 부담할게. 형 믿지?” “네. 당연하죠, 가게는 어제 형 명의로 바꿔놨어요.” 얼떨떨하게 혼이 빠진 채 영만은 대답했다. 그리고 순순히 요리 법을 내어주었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철수의 예언과 같이 영만의 부대찌개 요리법은 대 히트를 거두었고 그렇게 두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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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식당, ‘놀부 부대찌개’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영만은 가게를 연 뒤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 었다. 모든 것이 즐거웠다. 10시간도 넘게 주방에서 일하고 신입생 들 교육하는 것, 그것은 일도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불 앞에 몇 시 간 동안 서서 요리를 하거나 재료 준비, 아니면 노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잡일들도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다. 늦은 나이지만 드디 어 제대로 가정에 해가 아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벅차 고 기쁜 기분은 매일 영만이에게 힘이 되었고 드디어 첫 월급을 번 날 떳떳이 사랑하는 아내, 영희에게는 따뜻한 점퍼를, 아이들에 게 군것질거리를 안겨줄 때의 가족들의 표정들을 떠올리면 들뜬 마 음에 긴 하루도 금방 지나갔다. 하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어 느 날 영만의 행복하게 진행될 것만 같던 미래는 손을 쓸 틈도 없 이 그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만은 형이 1박 2일 쉬라며 휴가를 준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어야 했다. 쉬면 서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낸 후 가게를 찾아가니 어두컴컴한 가게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아니…. 형은 대낮에 가게 문이 닫혀있으면 장사는 어떻게 하 려고…” 영만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뚜…. 고객님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다섯 번의 통화 모두 이렇게 끝났다. 다급한 마음에 영만은 형의 집에 무작정 찾아갔다. 하지만 형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살고 있 던 집은 텅 비어있었고 집주인에게서 형의 이사 소식을 전해 들었 다. 비로소 그제야 영만은 무엇이 잘못됐음을 인지했다. 영만이 형을 애타게 찾는 동안 철수는 새 동네 주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이사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것 들었어? 옆집 이사 왔다던데. 오늘 이사 트럭이 두 대나 다녀왔어.” “옆집? 그 큰 저택? 거기 땅값 오르지 않았나? 내가 저번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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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신 씨랑 얘기했을 때는 땅이 너무 비싸져서 사람이 산지 한 일, 이 년은 넘었다는데…” “이 불경기에 참 능력도 좋지. 엄청난 재력가인가 보네. 내가 저 집 전주인 가정부일 할 때 저 집을 들어가 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어휴, 말도 마. 비쌀 만하더라. 아주 치우느라 팔 빠 질 뻔 했어!” “그렇게 대단한가? 하긴 밖에서 봐도 장난이 아니니깐…. 아니 이 동네 한복판에 그 넓은 마당 있는 집이 어디 또 있겠어.” “야야야, 얘들 올 시간 다 됐다. 에고… 우리도 저녁하러 들어 가야지. 우리 팔자에 저런 집은 그림의 떡이다, 야. 차라리 안 보는게 배가 덜 아프겠다.” “새 집주인 누군지 한 번 되게 궁금하네!” 아줌마들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철수와 그의 가족이 나타났다. “안녕하신지요? 저는 김철수라고 이 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입 니다. 여기는 제 집사람이고, 여기는 제 자식들입니다. 허허, 이 삿짐 트럭 때문에 아침부터 시끄러우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철수는 넉살 좋게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자기와 자기 가족 소개 를 했다. “어머, 아니에요. 이웃지간 돼서 너무 좋네요. 저녁 시간인데 어서 이사 마무리 지으세요. 저희도 이만 들어갈게요.” 아줌마 중 한 명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 두 분 모두 조심히 들어가세요. 참! 그리고 제가 요 옆 동 네에서 부대찌개 가게를 하나 운영하는데요, 가게 이름은 ‘놀부 부대찌개’입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맛이 끝내줍니다. 언 제 한 번 가족 분들이랑 들러 주세요. 서비스 넉넉히 드릴게 요.” 가게 홍보와 함께 인사를 하고 아줌마들을 돌려보내자, 저 멀리서 영만이가 숨을 헐떡이면 뛰어왔다. “형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가게는 닫혀 있고, 비밀 번 호도 바뀌고, 형님 집에 가보니 주인아저씨는 형이 이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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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지를 않나….” 영만은 철수의 새 집이 눈에 들어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쫓아와, 정말!” 철수의 아내 말숙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신상 명품가방으로 영 만의 뺨을 내려쳤다. 선명하게 울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영만은 시멘트 바닥으로 넘어졌고 멍한 표정으로 영만은 후끈 달아오른 오 른쪽 뺨을 부여잡고 서서히 철수와 말숙을 쳐다봤다. 철수는 말숙 이 뒤에서 조용히 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김영민> 영만에게는 이 모든 일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는 지금까지 침묵 을 지키고 있는 형을 보면서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형으로 말 못 할 이유가 있겠지,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형을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형님…?” 그러나 철수는 매정하게 돌아서서는 아내를 데리고 새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 철수를 보고 영만은 너무 당황하고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이웃들 은 그 상황이 너무 궁금해서 그 자리를 못 떠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중 용기를 낸 한 주민이 영만이에게 물어봤다. “저기.... 죄송한데 왜 그러시는 건가요? 혹시 여기 새로 이사 온 분에게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당하셨나요? 우린 여기 주민 인데 좀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나 그렇게 형한테 당하고도 영만이는 그의 형 철수에 대해 서 나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긴 침묵 끝에 결국 이렇게 말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 이사 온 분들은 저의 형님 가족인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근데 저렇게 때리고 하는 거 보니까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은 데 진짜 괜찮은 사람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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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 겁니다. 형은 착한 사람이 고, 그 집안사람 모두 괜찮은 사람입니다.” 영만은 말을 마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다리에 모든 힘이 풀려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 면서 형 생각을 계속했다. ‘형이 그럴 리가 없어…. 부모님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혈육이 나 에게 이럴 리가 없어.’ 그는 어렸을 때 형이 자신에게 해준 일들을 되새겨봤다. 자기가 다쳤을 때 약을 구해다 준 일, 학교에 늦었을 때 등에 업고 데려다 주었던 일 등 자신에게 잘해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형 에게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무슨 사정이 있으니까 이런 일을 한 거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앞으로 가족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모아 놓은 돈이 없는데. 우리 아들들과 내 아내는 어 떻게 되는 거지? 우리 집 월세도 곧 내야하고 세금도 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는 그래서 일단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집 월세를 유지할 능력 이 없으므로 반지하로 이사를 할 생각하고 집을 찾아다니기로 했 다. 돈을 아끼기 위해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러다 나중에는 버스 탈 돈도 아까워서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기로 하고 변두리에 있 는 반지하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월세가 얼만가요?” “한 달에 30만원입니다.” “아....” 모든 집들의 월세가 예상을 뛰어넘어서 시무룩한 채 다시 집에 걸어가기 시작을 한다. 그의 고민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영만이는 어떻게 가족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이 상황을 또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또 힘들 때 결혼하고 도와준 아내가 또 고생할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고, 만약 다른 집으로 가서 아이들이 적응 못 하면 어떻게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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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이 들었다.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상처를 안 받을지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영만이는 그런 고민을 하며 돌아오다 마주 친 이웃들에게 친절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렇게 계속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깊은 생각을 했다. <이 건> ‘영희랑 아이들한테 뭐라 말해야 할지…’ 영만은 심각한 근심에 빠졌다. 예전부터 의지하고 이제 세상에 남 은 유일한 혈육인 철수가 배신을 해버리니 엄청난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진한 그는 형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지 는 않았다. ‘아니야. 이럴 때야 말로 신뢰를 가져야지. 형도 생각이 있으니까 그랬을 거야. 언젠간 다시 도와줄 테니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라 든 버텨보자.’ 과연 그 생각이 진심이었는지 자기 위안이었는지는 영만이 그 자 신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터벅터벅 집에 들어가 아내 와 어린 아이들을 웃음으로 마주했다. “아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 걱정했잖아.” 아내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오랜만에 형이랑 한 잔 했어.” 영만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서 들어가자! 아빠가 아이스크림 사 왔어.” “역시 우리 아빠야!!” 아이들이 들뜬 표정으로 아빠 주변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 영만은 그 다음 날부터 직업을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작정 편의점 앞에 있는 의 자 앞에서 신문에 붙어있는 직원 채용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편의점 알바, 피시방, 노인정 관리…. 이런 직업으로는 생활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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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데, 어떡하지?” 영만은 고개를 힘없이 숙였다. 온 재산을 바쳐서 열었던 식당도 잃은 상태에서 집세를 내고 자식들 생활비 벌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기에 가장인 그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느껴졌다. 그러던 도중 새로운 공사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어? 월급이… 괜찮은데? 한 4개월 정도만 일하면 다시 형편이 나아질지도 모르겠네. 가봐야겠다!” 그렇게 영만은 현다이 공사장에서 일꾼으로서 새로운 일을 시작 하게 되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공사장에 나와 부지런히 일하였다. 심지어 귀중한 주말도 가족과의 시간 대신 일에 투자할 정도로 돈 을 벌기 위한 의지가 넘쳐났다. 공사장 관리자들도 그의 성실한 태 도를 보고 감탄하여 영만이에게 보너스를 주곤 하였다. “이번 달의 ‘빛나는 근로자’ 상은 역시 김영만 씨에게 드리겠습 니다. 매번 꾸준한 태도와 열정을 가지고 일하여 주변의 근로자들 에게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하여 상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만 씨, 축하합니다!” 영만의 엄청난 체력과 근성을 옆에서 목격한 근로자들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저 사람 도대체 뭐야…?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뭐 인삼을 수시로 씹어 먹고 다니는 것도 아닐 테고, 어쨌든 일은 잘하니까 보기 좋네.” “쩝, 나도 저 사람처럼 보너스 좀 받아보고 싶다.” 일하다 수다만 떨고 있는 사람들 얘기를 엿듣고 있던 관리자가 그들의 뒤통수를 탁! 치면서 일침을 가한다. “받고 싶으면 일부터 해라, 이놈들아!” 결국 영만에게 원래 계획했던 4개월보다 좀 더 오래 걸린 6개월 의 시간을 공사장에서 보내어 조그마한 포장마차를 차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예전 식당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공간에서 일 하게 되었지만, 영만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자부심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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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음식점을 차리게 될 줄이야! 앞으로 정말 잘해봐야 지. 이번엔 실수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영만의 의지는 굳건했다. 영만이 쉴 새 없이 막노동을 하여 작디 작은 포장마차를 차려 기뻐하고 있을 때 철수는 갑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파죽지세로 전국 곳곳에 부대찌개 체인점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의 프랜차이즈는 해외여행 잡지에서도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식당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의 새카만 마음속에는 아 우의 요리법을 훔친 것에 대한 죄책감은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한 치의 양심마저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영만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 람을 보내 종종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알던 고등학교 동창이 식당에 찾아왔다. “오, 철수야! 오랜만이네. 소문대로 너 정말 출세했구나!” “민재야! 진짜 본 지 오래 됐구나…. 잘 지냈지? 이미 알겠지만 내 식당이 요즘 잘 돼서 말이지, 체인점도 차리고, 방송에도 백 주부랑 나오고…흠흠....” 철수의 자랑은 끝이 없을 정도로 길었다. “오, 그것 참 잘됐네.” 친구가 눈치를 보며 말한다. “배고프지? 저녁 먹을래?” 철수가 냉장고를 뒤지며 물어본다. “나 그 새로운 거, 순하리 한 병 만 줘봐 봐. 아, 근데 나 여기 오는 길에 네 동생 봤어. 같이 일하는 거 아니었냐?”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철수는 잠깐 멈칫하였다. ‘영만이를 보았다고? 이 근처에서?’ 그는 수사관 같이 꼬치꼬치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 신이 수상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였다. “철수가 여기 근처에 있다고? 걘 뭐 하고 있던?” “아, 쥐구멍만 한 포장마차에서 일하고 있던데? 얼굴 표정도 아 주 좋아 보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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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갑자기 정색하며 고개를 민재를 향해 돌렸다. “거기 어딘지 주소 당장 알려줘.” <김유정> 여느 때와 같이, 영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좁고 한적한 곳에 있 는 시장으로 향하였다. 영만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지갑에서 꺼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자!” 영만은 매일 새벽 아내와 아이들이 깨지 않게 살짝 나와, 시장에 들러 다양한 재료들을 사서 포장마차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주 변은 아주 조용했고,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포장마 차는 큰 길가에 위치하지 않아서, 오후 12시가 돼서야 사람들이 하 나 둘 보이기 시작했던 곳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시계는 저녁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만은 종일 서서 일을 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어휴… 허리는 왜 이리 또 아픈지… 좀 앉았다 해야지.” 하지만, 앉아 있을 시간도 잠시, 밤 8시만 되면 사람들이 퇴근 시간에 맞춰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저씨, 여기 떡볶이 1인분이랑 순대 1인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금방 가요!” 영만은 기분이 안 좋든, 슬픈 일이 있든, 항상 밝은 목소리와 웃 음으로 대답해, 손님들에게 많은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많지는 않지만, 몇몇 단골손님도 생겼고 예전보다 더욱더 많은 손 님이 찾아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두 시간 정도만 더 있다가 문 닫 아야 되겠다.” 벌써 시간은 새벽 1시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영만은 건너편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 사람을 보며 속 으로 말했다. ‘어이구… 저 사람은 술을 아주 많이 마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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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뀐 후, 몇 초 후에 정신없이 비 틀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양옆으로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사람 들의 어깨를 칠 뿐만이 아니라, 아주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포장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영만이는 예전에 술 에 취한 손님이 행패를 부린 것이 다시 생각나, 조금 전 길을 건넌 사람이 자기 포장마차에만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영만이의 생각대로 그 사람은 포장마차에 들어 와 테이블에 앉아 팔을 뻗고 축 늘어졌다. 밖이 어둡고 얼굴을 푹 숙인 채 들어와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얼핏 들어왔던 모습 을 봐선 30대 후반 정도 돼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소주 한 병을 달라고 고함을 질렀고, 철수는 놀라 기겁을 하였다. 철수는 조심스럽게 술병 하나 를 들고 와 탁자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그러자 남자는 벌떡 일 어나 주변에 있는 탁자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몇 몇 손님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을 갔고, 그 아저씨는 계속해서 행패를 부렸다. “아저씨! 여기서 왜 이러세요! 계속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합니 다!” 영만은 당황하고 화가 잔뜩 났지만, 워낙 선량한 성격으로 인해 애써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영만이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다 름 아닌 영만이의 형, 철수였다. 영만은 다른 때보다 더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리고 영만은 철수에게 계속해서 말리려고 노력을 해봤으나, 고집 세고 막무가내의 성격을 가진 철수를 말릴 수 없었 다. 그렇게 철수의 행동은 10여 분간 이어졌고, 철수는 영만이와 영 만이의 포장마차를 처참히 버려두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자리 를 떴다. 영만은 너무 놀라 바닥에 힘없이 앉아있었고, 아무도 없 는 좁은 길거리에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무엇을 한단 말이야… 어떻게 마련한 포장마차인데. 한순 간에 다 망가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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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만은 그 날 번 돈, 만 오천 원으로 아이들이 먹을 호떡을 한 봉투 사,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발걸음은 오늘 아침에 집을 나왔던 발걸음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 어느 때보다 힘없이 축 늘어 져 들어갔다. 매번 그래 왔듯이 아내는 영만이 들어올 때까지 잠에 안 들고 있었다. “여보, 어디 갔다 이제 와요. 기다렸잖아요.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힘들어 보이네요? 무슨 일 있어요?” “에이…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나는 금방 씻고 들어갈게. 당 신은 아무 걱정 말고 얼른 자, 기다리지 말고.” “알겠어요, 그럼. 밤늦게까지 너무 수고 많았고, 내일 아침 맛 있게 해줄 테니, 내일은 꼭 먹고 가요.” “알았어요. 얼른 자요.” 그렇게 영희는 방에 먼저 들어갔고, 영만은 깊은 고민에 빠져 밤 늦게까지 잠에 못들다 새벽 네 시가 돼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 날 새벽, 영희는 영만을 깨워 아침을 차려 먹고 가라고 하였지만 영만 은 어젯밤 사온 호떡을 아이들이 일어나면 주라는 말과 함께 집을 나왔다. 영만은 아직도 어제 일이 믿기지 않아, 포장마차 자리에 다시 찾 아가 보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책상과 의자는 모두 뒤집혀 있었 다. 영만은 발길을 돌려 시내로 나갔다. 시내로 나가니, 사람들은 더더욱 많았고 볼거리도 많았다. 영만은 다시 한 번 일자리를 찾아 보려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이쪽 식당에도 가보고, 저쪽 식당에도 가보고. 가 볼 수 있는 곳은 다 가보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죄송 합니다.” 이 말 뿐이었다. 영만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다른 음식 점을 찾아 들어가려는 순간, 깜짝 놀라 횡단보도로 뛰어갔다. 할머 니 한 분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던 중 몸이 불편해서 다 못 건 너셨던 것 같다. 한 대의 트럭이 박으려는 순간, 영만이 뛰쳐나가 위험에 처한 할머니를 도왔다. 할머니는 감사한 마음에 어찌할지 몰라,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수십 번 반복하였고, 영만은 활짝 웃으며 괜찮다며 조심히 다니시라는 말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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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원> “아이고, 정말 고맙소. 알고 보니 자네 눈이 정말 초롱초롱 해 보여. 잘하면 크게 될 사람의 인성을 갖춘 것 같아. 혹시 일할 곳이 필요한가? 내가 지금 보쌈집을 하나 차리려고 하는데,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같이 일할 직원들을 어떻게 불러 모아야 할 지도 모르겠구려. 혹시 괜찮다면 나랑 하지 않겠나?” 영만은 할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두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꼬옥 붙잡아 감사하다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했다. 영만이는 할머니와 함께 가게를 차리게 되었고 ‘할머니 보쌈집’은 할머니의 손맛 덕분에 어느 맛 집들보다 맛있는 곳으로 유명해졌 다. 그러는 동안, 경쟁업체들이 들어서면서 속속들이 신 메뉴를 개 발하고 있었지만, 영만이의 메뉴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던 철수의 가게에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어지고 말았다. 철수의 가게는 장사 가 계속해서 안 되자, 결국 망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와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아이고! 이제 어떻게 하나…” 그의 아내가 철수의 뒤통수를 치며 고함을 지른다. “가게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 요?” “내가 뭐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철수는 뒤통수를 긁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러던 중, 철수는 방송에 나온 영만이 할머니와 함께 인터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요리를 잘하기로 소문난 또 다른 할머니를 찾아 나선다. 철수는 사람을 시켜 일부러 사고를 내 달라고 하고, 그 상황에 맞춰 철수는 할머니를 돕는 상황을 만들려 고 했다. “어…! 어!” 철수에게서 돈을 받은 사람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차량 은 이미 할머니를 받아버렸다. 받자마자 차량에서 수 미터 날아가 버린 할머니의 머리에는 심각한 출혈이 나있었고, 의식을 잃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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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였다. 숨어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철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다. “아니, 이 사람은 왜 이런 일도 제대로 못해!” 그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게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나중에 철수가 조사해 보니 그 할머니는 사고로 기억 상실증에 걸려 요리법을 포함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 요양원에 입원해 있었다. 도망간 철수는 사건이 정리될 때까지 잠적해 있었지만, 돈 을 받아 사고를 낸 남자의 친구들이 그를 찾아냈다. “아니, 그러니까 우리 명우가 이 자식한테 돈을 받아서 일을 일 으킨 거였더라고. 도망가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지? 너 때문에 우리 막내가 감옥에 처박히게 된 거잖아!” 철수는 그 사람들에게 시원하게 얻어터졌고, 결국엔 돈, 가게, 심 지어 입고 있던 옷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철수는 거리를 터벅터벅 돌아다녔다. 철수의 옛날의 당당한 모습 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사치스럽던 그의 옷들은 옷 수거함에 서 주운 것처럼 허름했고, 건장하던 그의 덩치는 지침과 가난으로 인하여 왜소해 보이고, 당당하고 우악스러워 보이던 그의 얼굴은 이제 힘이 없어보였다. 그가 거리를 계속 걸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손가락질과 욕을 하며 비웃는 것만 같았다. 철수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더 욱 움츠러들였다. 결국 철수는 거리에서 도망치듯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철수를 맞이하는 것은 따뜻한 격려가 아닌 부인 에게서 온 질책이었다. “아니, 왜 구하라는 일자리를 안 구했으면서, 어떻게 뻔뻔하게 빈손으로 돌아와요!” 철수의 부인은 헐떡거리는 철수를 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 다. 철수는 그의 부인의 말에 그저 구차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 그것이… 사, 사람들이 계속 나를, 보고…” “변명하지 마요, 어제도 그러고, 그저께도 그러고, 전에도 그러 더니, 오늘은 또, 뭐요? 그 인간들이 당신을 욕하고 패고 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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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일자리는 구해야 할 것 아니예요!” 철수는 부인의 말에 폐허 같은 집에서 나왔다. 다시 거리로 나가, 작은 일자리라도 찾으려고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가게들 의 창문을 봤다. 그러나 철수의 시선과 집중력은 모두 사람들의 시 선에 쏠려 있어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공지도 하나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철수는 집에 가면 아내한테 야단이 날 것을 예감하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망설여졌 다. 그러던 도중, 그는 골목에 있는 헌책방을 발견했다. 평소에 책을 싫어하던 철수가 웬일인지 오래된 헌책방에 끌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철수가 나가려는 순간,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흥부전’. 그것이 제목이었다. 철수는 ‘흥부 전’에 묘하게 끌렸다. 그는 책을 집어 들어 일어선 채 읽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철수는 책을 다시 내려놨다. 그는 조금 복 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놀부랑 같구나. 다른 점이라면, 놀 부의 동생인 흥부가 놀부를 구해줘서, 놀부는 마음을 고치고 흥부 랑 착하게 산 것이겠지….’ 철수는 힘없이 책방을 걸어 나왔다. 그는 놀부가 부러웠고, 또 영 만이에게 미안했다.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은 놀부와 같았고, 철수는 흥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철수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철수는 만약에 영만이를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다 면, 그 때는 영만이가 용서하지 않더라도 미안하다고 말하자고 다 짐했다. 그 후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철수는 ‘흥부전’을 보고 집으로 가던 날, 부인한테서 많은 잔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 겨우 일자리 하나 를 얻게 되었는데, 바로 식당에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철수는 힘들게 일을 얻었으니 잘리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 짐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서툴렀다. 결국, 그는 일한 지 서너 시 간 만에 잘렸다. 철수는 다시 한 번 절망을 한 채 거리를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철수는 어느 큰 식당 집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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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당 집은 요즘 보쌈계에서 최고라고 칭송받고 있는 보쌈집이었 다. 보쌈집을 보고, 철수는 전에 자신이 지른 죄가 떠올랐다. 그가 일부러 일으킨 사고의 피해자이신 할머니는 아직 기억을 잃으신 채 병원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어? 손님, 왜 우십니까?” 철수는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올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보았다. 그리 고 철수는 눈을 크게 떴다. 말을 건 사람은 자신의 동생, 영만이었 다. 영만 역시 울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형님인 철수인 것을 깨닫 고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심술궂고, 위풍당당하 고, 뻔뻔했던 형님이 초라한 모습으로 울 줄 몰랐던 것이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사실 영만은 철수를 계속 만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철 수의 식당이 망했다고 들었을 때, 영만은 얼른 철수의 식당으로 달 려갔지만, 이미 식당 팔고 난 뒤였고, 그 뒤로부터 철수는 아무 말 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흐윽…” 영만은 철수의 울음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형님. 왜 우세요. 오랜만에 보는 건데 형님이 울고 있 으면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영만은 철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계속 걱정했다. 영 만은 다정하고 속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내 질문을 거두고 그 저 묵묵히 철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철수는 더 목 놓아 울었다. “영만아, 미안하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내 잘못이다. 전 부… 이런 일도 생긴 건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하다, 영만아…” 철수는 계속 미안하다며 영만에게 사과를 되풀이했다. “아닙니다, 형. 괜찮아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습니까. 자, 이리 들어오시죠.” 영만은 괜찮다고 철수에게 말하고 철수를 식당 안으로 데려갔다. “여보, 뭐해요? 지금 사람들이 다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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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만의 아내는 영만에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초라한 옷과 지저분 하고 퉁퉁 부은 철수를 보고 놀랐다. “아주버님. 괜찮으세요?” 영만의 아내는 얼른 자신의 손을 옷으로 황급히 닦고 철수에게 물었다. “여보, 형님 위해 푸짐한 음식 좀 준비해줄래?” 영만은 자신의 아내를 안심시키고 부탁을 했다. 영만의 아내는 흔쾌히 수락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 형님. 따라오세요.” 영만은 철수를 좋은 자리로 안내해 앉혔다. 그리고 영만은 철수 에게 물었다. “형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형수님도 오셔야죠.” 철수는 자신의 집에 전화를 했다. 영만의 식당에 온 철수의 부인 은 잠시 당황했는지, 철수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음식들이 나왔다. 진수성찬이었다. 철수와 철수의 부인은 음식들을 보고 허겁 지겁 먹었다. 근래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이었다. “형님, 형님만 괜찮으시다면,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은 어떠십 니까?” 영만은 철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너는 내가 밉지 않냐?” 철수는 영만의 친절하고 다름없는 태도에 감동받았다. “하하, 밉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래도 형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형님의 힘도 필요해서 말이죠. 제 아내가 계 속 저한테 제가 너무 우유부단하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제 성격 때문에 식당이 파산될 뻔했죠. 그래서 형님이 필요합니다. 형님 은 잘하시잖습니까?” 그리고 몇 년 뒤, 영만의 보쌈집은 전보다 더 크게 성공해, 번창 해 나갔다. 그리고 그 식당에서, 철수와 영만, 철수의 부인과 영만 의 아내가 함께 웃고 떠들며 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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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갑신정변 일기 Grade 11 김태진 Tae Jin Kim

1884년, 일기 1 1884년 10월 1일 나 황신형,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 할 것이다. 뭐, 뭔 일이 있 는 것은 아니고 그냥 기념이랄까? 경복궁 문지기 주제에 무슨 글이냐 며 주모가 기특하다면서 매일 양초 두 개씩 주신다. 음...양초를 얻은 기념으로 매일매일 일기를 써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내년에 있는 과거 공부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지. 일기를 다시 쓰는 건 오랜만이다. 음...뭐 특별한 일은 없었다. 가끔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었다. 그는 자신을 홍영식이라 소개 하였던 것 같다. 1884년 11월 11일 오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탓에 이 글을 쓴다. 동료에게 들은 이 야기인데, 검은색 옷의 사내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다 한다. 맨 처 음 그를 봤을 때 그의 옷을 보고 돈이 많고 신분이 높은 사람일 것이 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내가 생각한 대부분의 양반들 의 모습처럼 부와 신분을 앞세워 권력을 남용하고 과시하는 모습을 찾 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외쳤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에서 뭔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몇 해 전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들을 몰아냈다. 그날부터 우리 는 신분에 차별 받지 않고 돈이 아닌 재능으로 관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 사건은 지난 삼년 동안 글공부하기를 포기한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앉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분이 떠나신 후, 나라는 바뀌기 시작했다. 민비 주변 사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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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황후는 제사에만 빠져있고 폐하께서는 바른 소리 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기 바쁘시다. 이 혼란에 맞서며 그가 결의에 찬 눈으로 나라 를 바꿀 거라 외쳤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결심했다. 이분을 기필코 도울 거라고 1884년 11월 31일 이제 거의 안 남았다. 며칠 뒤, 우정국 낙성식 때, 성문을 열어둔 후 경우궁으로 가서 호위를 하면 된다.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해서 살아 돌아오기 힘들 것 같다. 이제부터 나는 유언장을 써야 맞을 것이다. 이로써 부모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불효겠지…. 1884년 12월 05일 성공했다. 성공할 줄 몰랐는데 하늘은 역시 우리 편이었나보다. 어 머니께 유언장을 이미 보내 버렸는데 어머니가 몹시 상심하시기 전에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서문을 보내야겠다.

어머님 안녕하신지요, 어렸을 때부터 말도 안 듣고 속만 태워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불효 한 번 저지르기 전에 이렇게 편지를 남깁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올바르게 살겠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말씀하셨죠. 제가 하루하루 사는 것에만 만족하길 바란다면 제게 농사를 가르치고, 제가 부귀영화를 쫓길 바란다면 제게 장사를 가르치고, 제가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살기 바란다면 제게 글공부를 가르치시겠다 했죠. 저는 불효자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결코 욕 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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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일기 2 1884년 12월 1일 올해의 끝을 기념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 했다. 조상 대대로 이 어온 이 고기잡이가 우리 집안의 유일한 가업이자 내 자식놈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라 하더라도, 난 내 아들이 커서 나중에 이 일기를 읽게 할 것이다. 흠, 요새 들어 부쩍 왜놈들이 조선 땅에 늘어 나기 시작했다. 안사람은 그들에게서 신기한 걸 사오긴 하지만 나는 그들이 조선 앞바다에서 우리네 귀한 물고기들을 작작 좀 쓸어 담아 가면 좋겠다. 어제는 아들의 첫 돌이었다. 잔칫상에 올릴 술과 떡을 준비하느라 힘들었지만 어린 아들이 예쁘고 무탈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열심히 이것저것 준비했다. 원래 어제 이 일기를 썼으면 했 는데 훈장님과 마시다가 그만… 1884년 12월 14일 망할 왜놈들! 이번 항해는 망했다. 그들이 우리 선원들이 그토록 아 끼던 그물을 잘라 버렸다. 다행히 진성이 녀석이 바다에 뛰어들어 물 고기들은 무사히 가져왔다. 1884년 12월 16일 옆집 진성이가 쓰러졌다. 얼마 전에 왜놈들이 때문에 바다에 뛰어들 어서 고뿔이라도 든 것일까. 아님 장작이 부족해서 일까. 의원을 모셔 오려면 족히 200리를 걸어야 하는데, 이미 날이 지고 말았다. 내일 새 벽에 출발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1884년 12월 18일 새벽에 가보니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가족들을 불 러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 쉬도록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장작을 때는 걸 잊지 말라 했다. 그리고 의원을 모시기 위해 새벽부터 걸었 다. 서두른 덕에 고비는 넘겼다. 의원은 계속 몸을 따뜻하게 하고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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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많이 마시게 하라고 했다. 이제 곧 세금을 내야 하는데 의원을 부 르느라 수중에 남은 돈이 없다. 그래도 그의 목숨을 구해서 참 다행이 라고 생각한다. 1884년 12월 20일 보부상이 찾아 왔다. 물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요즘 나라 돌아가는 상황도 같이 말해줬다. 아무래도 난이 일어난 모양이다. 어지러운 나 라를 바꾼다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왜놈들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는 데, 이걸 어쩐다. 아무튼 조만간 나라가 평정해질 바랄 뿐이다. 쯧, 망 할 놈들. 1884년 12월 21일 옆집 진성이는 점점 괜찮아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몫을 낼 만큼의 돈 은 없어 사또에게 사정을 전하러 다녀왔다. 동정심 유발하면 봐줄 줄 알았더니 매정한 사또는 냅다 곤장을 치라고 했다. 포졸들은 나를 불 쌍히 여겨, 살살 쳐 줬다지만 아직도 엉덩이가 욱신욱신 쑤신다. 그래 도 곤장 값으로 그의 몫은 감면해 주었으니 참 다행이다. 1894년 1월 19일 오늘 다시 난이 평정 됐다는 전보를 받았다. 당연한 일이다. 망할 왜놈들...보부상이 찾아 왔다. 하지만 그는 평소보다 가지고 있는 물건 의 양이 적었다. 그는 그의 마을에서 난이 일어나서 모든 물건을 처분 하고 고부로 갈 거라고 한다. 나는 15년 동안 수고해준 그 친구와 이 별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1894년 6월 3일 오늘 부산 앞바다에 나갔었다. 가는 도중 까만 물체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이 왜놈들의 깃발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엄청난 수의 일본 배였다. 바로 돌아가서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지만 아무도 믿 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도망갈 채비는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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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 15일 아무도 믿지 않았던 나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오일장에 간 최 씨 할아버지가 여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마을에 일본군이 들어와 공사를 시작한 사건을 듣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한 모양이다. 그는 일본군들이 두꺼운 장대를 세우고 철을 바닥에 깔고 다닌 얘기를 하고 다녔다. 1894년 9월 23일 안녕, 우리 아들아, 네가 벌써 결혼할 나이가 되었구나. 첫돌일 때가 엊그제인 것 같았는데…지금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은 너의 어 머니가 주셨다는 것이겠지. 나는 내일부터 의병에 가담할 거란다. 왜 놈들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이 나라의 지도자란 놈들은 왜놈들을 도와 죄 없는 국민들만 학살하고 있단다. 미안하다. 지금까지 너를 핑계 삼 아 도망쳤지만, 나는 너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기는 정말 싫구나. 아 들아, 지금까지 바르고 건강하게 잘 자라 줘서 고마웠다. 나는 너의 미래를 위해 싸우겠다. 아들아, 너의 엄마를 잘 부탁한다.

1884년, 일기 3 1882년 11월 16일 고향 히타 지역을 떠나왔다. 집안은 별 볼일 없고, 형제는 나를 포 함해서 모두 다섯, 이 중 셋째인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배워 온 대장 간 일 말고는 희망이 없다. 가업을 잇는 것은 형들의 몫이라면 나는 도시로 나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노력할 자세가 되어 있다. 그렇 기에 오늘부터 난 출가하여 교토로 간다. 나는 ‘타이치 료타’다. 1882년 11월 23일 교토에 정착한지 3일. 첫째 날은 부득이하게 노숙을 했지만, 열심히 돌아다닌 덕에 살 곳을 찾았다. 짐을 풀고 일을 찾으려 했지만 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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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에는 남는 일자리가 없었다. 결국 잡일이라도 해야 겨우 생활 할 수 있다. 이제 서서히 일할 곳만 알아보면 된다. 1883년 1월 5일 드디어 일을 찾았다. 집에서 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공장이 있다. 내일부터 일하게 된다. 그 공장을 찾느라 몇 달 동안 뛰어다닌 걸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난다. 하지만 내일부턴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모아야지. 1883년 3월 17일 아…공장일은 그만 뒀다. 지금까지 거의 매일 마다 15시간씩 노역을 하니 몸이 버티질 못 했다. 결국 이제부터 백수 생활 시작이다. 1883년 4월 13일 망했다. 나의 봉급이 거의 없어졌다. 나태해진 것이 원인일까…다시 직장을 구해야겠지… 1883년 4월 17일 결국 직장은 못 구했다. 히타에 계신 부모님에게 손을 빌릴 수도 없 는데… 1883년 4월 18일 오늘 나는 군에 갈 거라는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을 한 뒤 바로 신청 을 하고 짐정리를 했다. 일단 군에 들어가면 밥은 먹을 수 있겠지. 1884년 10월 2일 오랜만에 일기를 써본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조선에 가서 중대한 극비리의 임무를 하는 부대에 소속 됐다.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겠지만 조선에 있는 친일파들의 호위를 하는 것 같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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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1월 13일 힘든 항해였다. 배 멀미 때문에 고생 하긴 했지만 결국 조선에 도착 하게 되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친일파들이 있는 경성으로 가 야 한다. 1884년 11월 30일 드디어 경성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고급 양복과 한복을 입은 사람들 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작전에 대한 정확한 날짜와 계획 을 말해주었다. 그럼 그전까지는 약간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 그래 서 나는 가장 번화한 명동 근처를 돌아다녔다. 대부분은 일본인들이었 지만 몇몇 조선인들도 있었다. 그들이 사고 파는 것은 대부분 고급물 건이었다. 아무튼 일주일 뒤 우리는 작전을 시작한다. 큰 행사가 있을 때 바로 성에 들어가 성문을 지키면 된다. 이 일만 잘 끝나면 진급은 꿈이 아니다. 1884년 12월 4일 성공이다. 그들은 원활하게 궁에 침투하여 쿠데타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나의 진급은 확정된 것인가. 1884년 12월 8일 망했다. 청나라 군인의 수가 너무 많았다. 우리들은 바로 도망쳤다. 승진은 물 건너갔지만 목숨부터 건져야지. 그렇다고 해도 3일 만에 끝 날 줄은 몰랐다. 1885년 1월 19일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한 생각은 단 하나. 그들이 바라는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돈? 아니 다, 그들은 이미 부자였다. 지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그들은 무엇을 이루고자 했을까? 어찌 자신의 목 숨까지 내걸고 조선을 바꾸려 했을까. 그들의 최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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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

1882, 구식 군인은 아직 살아 있다 Grade 11 조은솔 Sophia Cho 나는 조선 이 나라의 군인이다. 요즘 속히 말하는 구식 군인말이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평생을 이 나라에 모든 것을 바치고 이 나라 에 충성을 다하자는 마음 하나로 살아온 나는 지금 이 나라의 상황에 애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조선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많은 정책 들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많은 제도의 변화 가운데 군사 제도도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 어영의 2영으로 통합 개편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담 넘어 듣기로는 별기군은 일본 교관을 채용하여 근대식 군사 훈련을 받 는다는데, 그것이 어떤 훈련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군 사람들을 대하는 조정의 태도와 별기군을 대하는 조정의 태도 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너무나도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 가정의 아비로서 이 나라에 몸을 바쳐 살아오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계속해 서 녹봉을 조금씩 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주지 않는 일이 벌어 지고 있다. 벌써 이런 정부의 행동이 1년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우 리 군 사람들은 ‘굶어 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 다면 차라리 죽어야 할 사람들을 처단해서라도 이 원한을 씻겠다.’ 라 며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점점 더 커지면서 정부 교간들의 집을 습격하 고 별기군 교관들에게 복수를 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들과 같은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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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서 있는 내가, 어찌 우리나라를 욕하겠는가, 아무리 정부가 부패 하고 경제가 어렵다고 한들, 나는 조선을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버텨 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녹봉을 가져오지 못하기 시 작하면서 내 하나뿐인 아내도 남의 집 잡일을 해 주며 푼돈을 벌기 시 작하였는데, 집안의 갖가지 일과 아이들을 보는 일을 떠나 계속해서 집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올해 열 살이 된 우리 맏딸이 동생들을 챙기는 것을 보면서 기특하기도 하지만, 먹을 것 하나 변변 히 챙겨주지 못하는 나와 내 아내의 속은 타들어가기만 한다. 하지만 이 나라는 재정 확보를 위해 징세를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곡물이 계속 일본으로 들어가는 탓에 곡물 가격은 계속해서 치솟는 이 마당에,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어 제 우리가 마지막 희망으로 13개월 만에 들고 돌아온 쌀엔 온갖 모레 와 겨가 섞여있는 것을 확인했다. 민겸호, 그 이름 세 글자는 우리 후 손들 또한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명성황후가 누이라는 그 사실 하나 로 매일같이 떵떵 거리더니, 이제 이런 파렴치한 짓까지 벌인 것이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찌해야하겠는가.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 에 참 민망하다. 나라를 위해서 꿋꿋이 일하는 아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이 절망감. 더 이상은 나도 참을 수 없다. 우리 군인들도 나 라를 지키는 군인이다, 별기군만 군인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모습을 정부에게 보여줄 때가 된 것 같다. 우리, 구식 군인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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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역사극 시나리오>

갑신정변, 또 다른 이야기 Grade 11 김진서 Cole Kim 박성규 Maximillian Park

Scene 1 1884년, 재작년 발생했 던 임오군란을 빌미 삼아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조선을 간섭하는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해서 급진개화 파는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옥균의 집에서 박영효, 홍영식, 그리고 서 재필 등이 정변을 모의하 고 있다. 김옥균: 마치 청이 장난감 을 갖고 놀 듯 우리 조선 을 자기들 손 안에 두고 놀고 있습니다. 이런 치욕 그림: ‘갑신정변의 주역들’ 김도윤

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박영효: 밤낮 한탄만 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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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오로지 행동입니다! 김옥균: 선생께서는 뭐 좋은 묘수라도 있소? 박 영 효 : 최근에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전투로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많이 빠져 나갔다 들었습니다. 그들의 병력 부족으로 창덕궁을 지키는 청나라 군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니, 거뜬히 겨뤄 볼 만합니다. 홍영식: 아무리 군대를 모아 창덕궁을 포위한다 해도 우리들이 가진 군사력으로는 역부족일 텐데,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 아니겠소? 박영효: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서재필: 일! 본! 그들이 과연 우리들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박영효: 청나라가 조선을 이렇게까지 간섭하는 것도 그들에게 골치 아 픈 일이지 않소.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 준다고 약속을 했었고 서명까지 했는데, 뭐가 두렵단 말이오. 청한테 힘을 못 쓰면 그들의 명성도 다 헛것 아니겠소. 김옥균: 그런 일이라면 딱 적절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조선에 주둔해 있는 일본공사로 ‘다케조에 신이치로’란 자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지금의 정권을 빼앗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겁 니다. 서재필: 하지만, 저는 일본의 도움을 받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우 리나라를 차지하려고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맺었으며, 언제 어떻게 우리들을 배신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도움을 받을 것 같으면 차라리 미국의 도움을 받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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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당신은 일본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다고 주장했는데 어찌 미 국이라고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시오? 서재필: 미국이 현재 조선이랑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상태입니 다. 조선이 위기나 곤란에 처하면 미국이 의무적으로 우리를 도와줘야 한다는 얘기죠. 아, 맞습니다. 조약을 이용해서 미국 한테 도움을 받아 청을 몰아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옥균: 흠… 그거 참 말이 되는 제안이군요. 고려해 봐야겠어요. 그러 나 저는 아직 일본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 다. 홍 영 식 : 여러분, 지금 중요한 것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법을 써서 정변을 일으키는지 입니다. 우리는 힘을 모 아 정권을 빼앗을 것인가, 아니면 평화로운 방법으로 청과 통 상을 시도해 볼 것인가? 아시다시피 이 두 가지 방법 중에 하 나밖에는 고를 수 없습니다. 박영효: 아무래도 평화로운 방법이 제일 좋을 듯합니다. 청나라 군대 가 지금은 적어도 나중에 지원군이 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밀리게 될 겁니다. 서재필, 홍영식: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평화로운 통상을 하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옥균: 그대들의 생각이 정녕 그렇다면 평화로운 방법을 추구해보는 것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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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갑신정변의 주역들’ 김지민, 홍성욱

Scene 2 김옥균: 쉿! 조용히 하세요. 이제 창덕궁이 코앞이요. 서재필: 이제 창덕궁에 도달했다 해도, 어떻게 진입을 하고 명성황후 랑 황제 폐하를 만날 수 있습니까? 박영효: 최근에 청나라가 조선 정권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방어태세가 많이 허술해 졌다 합니다. 보초들 중 나랑 친한 자가 있는데 그에게 나의 신분을 알려주고 그의 손에 몇 냥을 쥐어주기만 하면 들어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개화파 4인방이 창덕궁 정문에 도달한다. 보초 대장: 거기- 알짱거리고 있는 네놈들은 누구냐? 당장 거기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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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신분을 말해라! 박영효: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자네 친구인 박영효일세! 보초 대장: 오! 자네가 왔는가? 자네 소식을 듣고 사실 기다리고 있 었네! 근데 옆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박영효: 안심하게, 조선을 청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인물 들일세. 보초 대장: 아, 아닌게 아니라 소식을 들었네, 조선의 개화를 위해 수 고하는 자네들의 성공을 기원하네. 박영효: (돈이 들어 있는 작은 보따리를 건네주며) 고맙네, 이건 자네 아이들 배불리 먹이는 데에나 쓰시게.

Scene 3 고종: 하… 요새 청이 조선 일에 계속 간섭을 해도 가만히 있을 수밖 에 없는 처지니 이 나라의 지도자로서 체면이 안 서는구나… 김옥균: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폐하, 그런 걱정이라면 저희가 해결할 방법 몇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고종: 아니, 네놈들은 누구인가? 경비는 도대체 어디 있느냐? 김옥균: 폐하, 제발 일단은 저희들이 할 말을 들어주십시오. 신이 정치 인 김옥균이요, 옆에 있는 자들이 개화파의 지도자 역할을 하 는 박영효, 서재필, 그리고 홍영식입니다. 저희 개화파는 조선 에 있는 청을 몰아내고 정권을 바로잡을 방법을 생각해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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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종: 개화파라면 짐도 들어본 적이 있소. 어디 한번 그대들의 계획을 들어보리다. 서재필: 황제 폐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조선 사회의 변화입니다. 조선 사회에 피해를 끼치는 신분 제도와, 특히 양반들이 가진 무한 특권들을 없애야지 조선 사람들이 전부 하나로 뭉칠 수 있습니다. 박영효: 국내 문제 외에도 청에 대처할 동맹군이 필요할 것입니다. 청 의 세력이 워낙 압도적인지라 혼자서 청을 대적했다가는 질 것 이 분명합니다. 김옥균: 그래서 저희가 제안하는 것이 일본이나 미국과 동맹을 맺어서 정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홍영식: 그러나 무조건 무력으로 인하여 청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닙니 다. 두 나라 중 하나랑 연합을 한 뒤에 청나라와 같이 한 상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두 나라의 관계를 유지하며 조선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지를 상의하는 것입니다. 고종: 그대들의 제안이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바람직한 대책 으로 보이는구나. 그러나 청나라가 계속해서 조선의 일에 간섭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박영효: 청이 그렇게 나오겠다 하면 어쩔 수 없이 총이랑 싸워야 할 것입니다. 충신이 결코 우리 조선이 한낱 외적의 장난감처럼 휘둘리는 것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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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종: 흠… 알겠다. 일단 내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다오. 이 일에 대해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구나. 그대들은 돌아가거라. 개화파 모두: 네, 알겠습니다. 폐하.

Scene 4 고종: 민비, 지금 조선에 들어와 있는 청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 시오? 명성황후: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다지만 뭐, 할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 전하께서는 갑자기 왜 그런 것에 대해서 물어보시 죠? 고종: 실은, 오늘 개화파 몇 명이 나한테 와서 청나라를 몰아내자는 뜻을 전해주더군. 명성황후: 뭣이? 도대체 어떤 자가 그렇게 방자하다는 것입니까? 고종: 모두 네 명이 있었는데 그들 중 가장 앞장 선 자는 김옥균이란 자로 보이더군. 명성황후: 전하, 이 개화파에서 온 자들이 전하께 정확히 무슨 말을 했습니까? 고종: 우선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 리를 임명하게 하자더군. 일본이나 미국과 연합을 맺어 청나라 를 조선에서 몰아 내자고 하는데, 실은 짐도 이런 방법이 맞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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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걱정이 되는구려. 명성황후: 전하, 아무런 걱정 마시고 저에게 이 일을 맡기십시오. 전하 께서 요새 하도 힘든 일이 너무 많아서 또 고뇌하셨다가 탈 이 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고종: 하… 알겠소. 민비, 그대에게 이 일을 잘 부탁하겠소. 명성황후: 네 전하. 편히 들어가십시오. 고종이 퇴장 명성황후: 홍! 종! 우! 홍종우: 예, 황후- 마마명성황후: 지금 당장 가서 개화파 일당을 불러오너라. 지금 당장 이 일을 진행하는 것이 발등의 불을 끄는 것처럼 급하도다. 홍종우: 알겠습니다, 황후 마마. 모두 퇴장

Scene 5 명성황후: (혼자 생각에 잠기면서) 그래, 아무리 내가 불러들인 자들이 더라도 청나라는 조선한테 너무나 큰 위협이 되고 있다. 홍종우: 황후 마마, 지난번에 왔었다는 개화파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개화파 모두: 황후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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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그래, 수고했다. 그대들은 저쪽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거라. 정변에 대해서 얘기를 좀 나눠보자꾸나. 김옥균: 황후 마마의 부르심을 받고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 명성황후: 그래,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서재필: 마마께서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셨습니까? 명성황후: 그대들이 그렇게나 원하는 정변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 불 렀다. 자 이제 물어보겠네, 무엇 때문에 청이 물러갔으면 하 는가? 박영효: 마마, 청나라는 날마다 조선의 국내 일에 간섭하면서 언제나 조선을 잡아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 것이 전혀 없고 해가 되는 것이 많은 청나라를 조선이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명성황후: 그대 말이 그렇다면 어떻게 막강한 병력을 가진 청나라를 물리칠 것인가? 홍영식: 우선 일본과 미국 중 한쪽과 동맹을 맺은 뒤에 청나라와 같이 한 상에 앉아 어떻게 하면 두 나라의 관계를 유지하며 조선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지 상의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명성황후: 그것이 참으로 괜찮은 생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청의 보 복이 심하지 않을까 두렵구나. 김옥균: 마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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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조선 백성들은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도, 하나 로 뭉칠 수도 없습니다. 서재필: 그 다음에 동맹을 맺는다면 이 고난을 헤쳐 나갈 길이 보일 것입니다. 명성황후: 그래, 그대들이 내 눈을 뜨게 했네. 지금 당장 신하들이랑 상의해서 조선의 옛 풍습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얘기를 해보 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네. 개화파 모두: 지혜로운 선택이십니다. 황후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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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에겐 책이란 꿈이다 Grade 11 이규영 Gyuyoung Lee 나에겐 책이란 손에 쥘 수 있는 꿈이다. 또한 나의 백지 같은 삶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물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이 세계에서 백지 위에 색깔이 다양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권리 가 쥐어진다. 어느 날 학원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 당시 내 나이는 초등학교 3 학년. 보통 다른 친구들과 같이 나는 매일 매일 꿈을 꾸고, 재밌고, 장 난스러운 상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해 리포터라는 책을 읽은 뒤 주인공인 포터에게 영감을 받아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선 그런 어린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 “빗나간 날씨예보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건 가능한 게 아니야. 그것 처럼 우리의 미래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면 해. 언 젠가 다른 길에 조금씩 빛이 보이고, 끊임없이 앞을 보고 나가야할 때 에 꺾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날 꿈꾸던 풍경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 니깐, 부끄러워하지 말고 꿈을 꿔.” 나는 아버지의 말씀의 감동을 받아, 내 꿈에 조금이라도 다다르기 위해 더 넓은 상상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선생님 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던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책은, 글쓴 이가 독자를 위해, 독자와 독자가 꿈꾸는 꿈을 이어주는 다리야.” 나 는 그 말씀을 들은 뒤, 방구석의 깊은 곳, 먼지로 뒤덮인 책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순간, 나는 또 다른 나를 이 세계에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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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같은 현실에서 색깔이 알록달록한 장소로 여행을 하였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또 다른 나의 생각, 심정, 고민, 갈등을 발견해 나갔 다. 또 다른 나를 알아가는 것, 그리고 그 또 다른 내가 미지의 세계 를 알아가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책은 우리가 쉽게 쥘 수 있는 꿈이다. 책을 통해 상상의 날개를 펼 치고, 그 날개를 이용해 글쓴이가 속삭임으로 만든 나라를 탐험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책이다.

역사 시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박영효의 이야기를 배웠 다. 만약 이들이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비록 3일 만에 실패로 끝이 난 정변이지만, 우리가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데 필요한 힘을 기르지 못했을 것이다. 나 또한 책을 통해 이들의 꿈을 배우며, 이 시대를 향한 나만의 꿈 을 키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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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난 내가 마음에 들어 Grade 11 김정우 Elliot Kim 이런 말 하면 자아도취 같을 수도 있지만 난 내가 마음에 든다. 건 강하고 키도 크고 운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웃을 때 시원스레 보기 좋게 생겼다는 게 다 마음에 든다. 나는 건강한 내 자신이 마음에 든다. 건강해서 내가 좋아하는 축구 도 마음껏 할 수 있다. 내 키는 181cm. 난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키 보다 더 크다는 것이 매우 뿌듯하다. 요즘 한국에 있는 애들을 보면 좀 씁쓸할 때가 있는데, 왜냐하면 한국에 있는 애들은 미국 친구들과 달리 운동도 많이 하지 않고 밥도 잘 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내가 한국인이어서 마음에 든다. 미국에서 11년을 살았지 만 난 아직도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후 8개월 때 미 국에 가서 5살까지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 다음 유 치원부터 3학년까지 한국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야 해서 다소 힘들었지만 3년 안에 한국어도 제대 로 배우고 처음으로 내가 미국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난 또 다시 미국을 가게 됐다. 그리고 6년을 미국에 살았다. 다시 미국에 가서 영어를 배우고,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렸다. 미국에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가장 어려웠다. 왜냐하면 우리 동네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6년 동안 미국 사람처럼 살았다. 미국 음식만 먹고, 영어만 쓰고…. 하지만 9학 년이 끝나자마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미국에 살 면서 한국에 큰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난 참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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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있는 16년을 산 셈이다. 한국인이지만 나는 외국인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물론 학비를 많이 내야하지만, APIS에 있는 선생님들부터 애들까지 모두 다 착하다. 내가 처음 전학 온 날, 우리 학년 애들이 학교에 대해서 많이 알려주고, 반도 어디 있는지 가르쳐줬다. APIS는 다양한 사람들 도 많다. 미국에서도 온 친구들도 있고, 호주에서도 온 친구들도 있고, 싱가포르에서 온 친구들도 있다. 그리고 미국 공립학교만큼 공부에 대 한 부담이 없다는 것이 좋다. 나는 내가 웃을 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이 들어도 가족과 친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너무 행복해서 저절로 웃음 이 나온다. 어렵게 공부랑 숙제를 다 한 후 가족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기분이 정말 좋아진다. 나는 앞으로 걱정 없이 열심히 살고 싶다. 학교에서 공부와 숙제를 할 때든 운동장에서 운동을 할 때든 뭐든지 다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하 고 싶다. 나는 사람이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에 충실한 것을 제일의 가치로 여긴다. 물론 돈도 많이 벌어야겠지만, 나처럼 행복한 아내와 나처럼 자랑스러운 아이들, 그래서 나처럼 멋진 가정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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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마마보이 Grade 11 홍성욱 Sean Hong 대다수의 아이들은 ‘엄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너무 싫고 짜증나고 상상조차하기도 싫어진다고 한다. 왜일까? 우리는 어느덧 엄마라는 존 재를 너무 편하고, 쉽고, 막 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 엄마만 졸졸졸 따라 다녔다. 어 릴 적 나의 옛이야기들을 들춰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마마보이’ 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왜 그랬을까? 엄마가 마냥 편 해서? 아님 기대고 숨기에 엄마만큼 듬직한 사람이 없어서? 나도 사 실 그때의 내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난 마냥 숫기가 없었다. 그래서 한없이 내 편이 돼 주시는 엄마 뒤에 숨기에 바빴을 것이다. 나는 사실 초등학교를 남들보다 빠르게 들어가려고 했다. 빠른 년생 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래서 유치원도 다소 빨리 가게 됐다. 엄마는 빨리 초등학교를 보내고 싶어 하셨지만 나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할 수 없이 다른 아이들과 같이 제때에 맞춰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내 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린나이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있는 것이 어쩐지 불편하고 불안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엄마만 없으면 울고 또 계속 울었다. ‘아이고, 엄마가 얼 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하고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본다. 별생각 없 이 엄마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다. 지금은 엄마 없이 울고 떼쓴다면 아 마 손가락질을 받는 나이겠지만, 여태껏 내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엄 마의 도움이 아주 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학교에서 나의 인생 에 대하여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조금씩 나의 성격이 바뀌었는지, 지금에 와서 이렇게 외향적인 성격이 되었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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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데에는 역시 엄마의 보살핌 이 크다. 엄마는 나를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무척 많은 공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주말마다 친구들을 부르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 을 만들어 주셨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내가 소심하게 조용히 있는 것 조차 엄마는 안쓰러웠나보다. 곰곰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엄마한테 고 맙고 감사할 뿐이다. 그때 엄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내성적인 성향을 지닌 채 존재감 없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근래에 내 삶에서는 부쩍 사건사고가 많았다. 사실 그런 일들이 겹 쳐 올 때 나는 무척이나 힘들고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사람,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 는 것에는 익숙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정작 내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힘들 때마다 혼자서 묵묵히 마음속으로만 삼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다가와 이런 저 런 이야기를 하셨다. 어쩌다 보니 그 순간 나의 얘기를 털어놓게 되었 다. 그래서 결국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때 나는 정말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할 사람은 가족 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요 즘 때론 웃으면서 그리고 때론 울면서 엄마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곤 한다. 커가면서 엄마의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고 사실 난 엄마한테 정말로 감사하지만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 에서 정말 죄송하고 면목이 없다. 끝으로 많은 유행어들 중에 ‘니 애미’라는 말이 있는데, 친구들이 그 말을 사용할 때마다 말은 안 했지만 마음으로부터 불편함이 밀려 온 다. 엄마가 없는 친구들도 있고, 엄마와 일찍 헤어진 아이들도 있다. 아픈 엄마 때문에 속상한 친구들 그리고 엄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 아서 늘 공부하다가도 집중하기 힘들어 하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비 록 그 말이 유행을 하다가 없어진다 하여도 사람들이 그 단어를 생각 없이 내뱉고 농담 삼아 던지지 말았으면 한다. 그 말 한마디가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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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상처로 전해 질 수 있고, 사람들이 엄마의 귀한 존재를 너 무 비하하는 것 같아 불쾌할 때가 많다. 엄마는 중요하다.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주신 분이고, 나를 본인보다 더 아껴 주시는 고마운 분이 다. 엄마는 여전히 사랑이고, 그리고 어린 시절 내 삶의 전부였다. 많 은 사람들이 엄마의 중요성을 많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그리고 내 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엄마도 내 마음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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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DS 이야기 Grade 11 조남형 Richard Shim Jo 용서 하는 마음이 있으면 인생은 훨씬 더 편해진다. 용서를 하지 않 을 때는 상대에게 화가 난 마음이 그대로 남는다. 예를 들어 남동생이 누나의 숙제를 가져갔다고 해 보자. 누나는 그것도 모르고 두 시간동 안 그 숙제를 열심히 찾는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나타나 누나의 눈 앞에서 웃으며 숙제를 찢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이 있을까? 첫째, 동생을 용서한다. 둘째, 동생에게 소리를 지른다. 셋째, 동생의 장난감을 망가뜨린다. 동생에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동생의 장난감을 망가뜨려도 숙제는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 면, 동생을 용서 한 후에 왜 동생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보고, 그 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 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동생과 사이가 좋아진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11살 때, 내 동생 은별이는 6살이었다. 아빠가 내 생일에 생일 선물로 새로운 DS를 사주셨다! 그때는 DS를 가지고 노는 순간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DS에는 마리오, 포켓몬, 젤다처럼 재미있는 게임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도 착해서 보니 내 DS가 사라졌다! 집을 모두 뒤지며 다 찾아보았다. 그 런데 DS은 정말 사라져 버렸다. 내가 DS를 열심히 찾고 있을 때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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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는 조용히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밤이 될 때까지 열심히 찾다 결국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동생이 내 옆에 있었다. 동생은 내 DS에 펜으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동생을 막 혼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DS보다 내 동생과의 사이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주 힘들게 동생을 용 서해 주었다. 나는 가끔씩 동생과 같이 있을 때 많이 힘들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동생이 이해가 안 갈 때가 많다. 동생이 자주 울고, 징징 거리고 바보처럼 춤을 추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 그래도 내 동생이 다. 사랑하는 내 동생이다. 사고를 많이 치더라도, 어떤 짓을 저지르더 라도 내가 이해해 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한 다. 용서하는 삶을 살면 마음이 훨씬 더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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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수수께끼 인생 Grade 11 김재형 Jeff Kim 나 김재형은 2000년 6월 23일, 후덥지근한 밤에 부모님의 부푼 기 대와 함께 서울의 한 병원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둘째 아이였다. 1.5킬로그램이라는 평범한 아이들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된 건강상태였 다. 어른들은 뼈밖에 보이지 않는 나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으 며 태어난 후에도 부모님의 품에 안기지도 못한 채 차가운 인큐베이터 안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했다. 미숙아로서의 상태가 어느덧 회복되고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나는 가족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다. 어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게 두 살이 될 때까지 한국과 필리핀을 자주 번갈아 다녔다. 태어났을 때 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 모습에 ‘와, 요녀석, 이젠 많이 통통해졌네.’라 고 많은 분들이 나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환경 탓인지 모국어가 아닌 영어와 필리핀어를 일찍부터 접한 나는 우리말을 보통 아이들보다는 비교적 뒤늦게 하게 되었다. 말문을 터야 할 나이가 지나도록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내가 벙어 린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네 살이 되던 해에 한국 유치원에 들어가 천천히 한글을 배웠다. 처음에는 영어와 달리 많이 헷갈리고 어려웠지 만 어머니께서 차근차근 나를 도와주셔서 곧 우리말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여덟 살이 되자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던 나로서는 ESL이라고 하는 특별 수업 을 들어야 했다. 이로 인해 나의 필리핀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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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다. 마치 영원히 함께 하고픈 가족을 만난 것처럼 나는 이 친구들 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돌아와 대치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 다. 처음 한국 학교에 다닌 나는 이 곳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몇 년 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필리핀에서는 정직과 규율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학교 규칙을 엄수하며 지냈던 내가 한국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한 시기였다. 소위 학교에서 공부도 제대 로 못 하고, 행동이 바르지 못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기 힘든 친구 들과 어울리며 나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는 생각보다는 친구들 무리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나를 훈 육하는 과정에서 부모님께서는 교육 문제로 자주 다투시기도 했었고, 그래서이지 나도 덩달아 자주 혼이 났다. 결국 부모님과 몇 년 동안 고민하여 나는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필리핀 학교로 돌아가 필리 핀 국회의원의 아들딸들이 다닌다던 학교로 입학하였다. 다시 입학 할 때 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이 이제 다 바뀌고 밝아질 것이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내 인생은 오히려 더욱 더 어두운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학교를 들어간 첫 번째 주부터 다른 아이들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내가 이 상한 게 아니야. 저 아이들이 이상한거야’ 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욕도 자주 하고 공부도 못하고 선생님들의 미움을 받으 며 벌칙(detention)도 많이 받아 가면 갈수록 내가 인생을 왜 사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따뜻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나는 ‘이제 이 인생을 끝내야겠다, 나도 이 정도면 열심히 산거야. 나 하나 없다고 세상은 상관하지 않을 거 야’라고 되뇌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에 대한 궁리를 많이 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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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6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나에게 희망을 가져준 담임선 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 그 선생님의 성함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선생님은 나와 시간을 자주 보내며 “힘내라. 너도 해낼 수 있어. 포기하지 마!” 라고 어쩌면 나보다 나의 삶을 더욱 더 소중히 여기며 나를 붙들어 주셨다. 나는 이 순간 ‘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선생님께 만큼은 실망을 드리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을 하며 나의 행동과 삶의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우선 선생님의 관심을 받기 위 해 학교 숙제도 하기 시작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기 시작하여 나의 학 교 성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는 저 밑에 있는 낭떠러지의 삶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성격을 바꾸기로 굳건히 다 짐하고, 욕도 최대한 자제하고 반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많은 친구 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6학년 마지막 학기가 끝나던 때, 5학 년 최종 성적보다 11점의 평균 점수를 끌어 올리고 단 한 번도 학교 벌칙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높은 성적으로 한 학년을 건너뛰며 바로 8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8학년이 되어 담임선생님이 바뀌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의 일상 생활을 순조롭게 이어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가진 나는 곧바로 반장이 되어 반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하고 반에서 1등을 거머 쥐었다. 나는 이렇게 급속도로 좋아지는 내 삶을 보고 결국엔 남들이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이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9학년이 되던 해에 나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했다. 난생 처음 다녀보는 국제 학교로 입학하니 전에는 결코 상상하지 못 했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보는 뷔페식 식당, 학교에 서 쓸 수 있는 갖가지 전자제품들, 대학교처럼 수업마다 반이 바뀌는 시스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동아리들을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할 수 있는 자유로움,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마냥 신기했다. 한국에 있는 학교를 워낙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마 치 친구들은 있는데, 그 모든 친구들이 마치 환상처럼 내 친구인 듯 혹은 친구가 아닌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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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완전히 적응하여 제자리를 잡고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 이 많이 생겼다. 학교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다시 오지 않는 기회인 만큼, 최대한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 인생은 아마 큐브와도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처음부터 마구 마 구 섞여서 나를 힘들게만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제를 풀어가 며 차근차근 이 미지의 복잡한 큐브를 풀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아마 나에게 큐브를 다 맞출 때의 성취감과 쾌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여러 가지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내가 살 수 있는 밝은 미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내가 원하는 회계사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그날까지 나는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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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시편 23편, 그리고 나 Grade 11 이승빈 Timothy Lee 나의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신앙의 선생님이시다. 1999년 10월 14일, 여의도에서 태 어난 나는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과 떨어져 약 1년 반 동안 외할머 니와 함께 살아야 했었다. 할머니 댁과 우리 집이 바로 이웃해 있기 때문에 할머니를 떠났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아무리 자 주 만난다 해도 할머니의 손을 떠나 유치원이든 초등학교든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점점 많아졌다. 2011년, 초등학교 5학년 2학기가 시작하기 전 나와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미국 뉴저지로 가게 됐었다. Ziporah Rothkopf라는 이름의 우리 할머니는 사실 할아버지와

결혼하기

‘김봉자’였었다.

전 30년

전 한국인 할아버지와 이혼 하신 뒤 홀로 미국으로 떠 나 Moshe Rothkopf, 지금 의 우리 유태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

Moshe할아버

지는 태어났을 때부터 신실 한 유태인이셨기에 같은 믿 그림 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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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갖고 계신 유태인과 결혼하고 싶어 하셨고,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결혼하기 전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Ziporah’로 개명하셨다. 모세의 부인인 드보라는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내조를 너무나 잘 한 강인한 여성이 다. 우리 Ziporah 할머니 덕분에 지금의 난 유태인 친척들이 아주 많이 생겼다. 그래서 우린 Ziporah 할머니와 Moshe 할아버지의 큰집에서 같이 일 년을 살았던 적도 있다. 그 당시 동생은 4학년, 나는 5학년으 로 우린 Calvary Academy라는 기독교 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에서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수직적이었지만 이 학교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무척 평등했다. 한국과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나는 미 국 문화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금방 영어를 배우고, 일 년만에 누구든 서로 영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나의 친구인 Isaiah Lasche와 같이 살기로 했다. Lasche네 가족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신자들이었고, 예수님의 가르침 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6학년이었던 2012년 에 나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당시 나는 학교에서 Detention 을 30개 가까이 받으며 선생님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기도 했었다. 이때 만해도 A성적을 받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운 데, 기타를 오랫동안 치던 Michael(Isaiah’s father)은 나에게 기타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며 찬양 을 시작했다.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배워서 그런지 기타는 아주 빨리 늘었다. 그 해 나는 Lasche네 가족과 교회에서 찬양을 했다. 지금의 내가 7학년 때의 나를 다시 생각해보면 참 한심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말썽부리는 것도 급격히 줄고 성적도 전부 A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8학년 때가 내 인생 중 가장 재미있었던 해였던 것 같다. 미국으로 간 것도 한국으로 다시 오게 된 것도 전적으로 내 결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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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좋은 시간은 어느덧 흘러가고, 중학교 졸업식 후 난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엄마와 떨어져 살았고, 아빠와는 사 년 동안 떨어져 지내서인지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에 한국으로 다시 오게 되는 날 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아시아 퍼시픽 국제 외국인 학교에 입학하였고, 나의 숨 가쁜 고등학교 생활 은 시작되었다. 9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많은 것들을 배웠다. 매 해 난 다른 사람이 돼 가고 있었다. 불현듯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 가기 시작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마 음이 무거워지지만, 과거를 생각해보면 재미있었던 시간도 전혀 슬픔 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힘든 시간들도 항상 힘들었던 것만은 아니었 다. 나의 주변엔 항상 힘들 땐 위로해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에 힘든 기간도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난 하나님께 많이 감사하다. 난 지금 열여 섯. 내 앞엔 많은 어려움과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 만 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말씀을 붙잡고 나는 오 늘도 힘듦과 아픔이 즐거움과 행복에 뒤섞여 내 삶을 더욱 아름답고 빛나게 만들어 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 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 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시편 23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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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내가 쌓은 벽 Grade 11 이소형 Jenna Lee

나는 우리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다. 엄마, 아빠, 언니, 할머니, 할 아버지와 친척들은 나를 매일 칭찬하고 예뻐하셨다. 그래서인지 사촌 들과 언니는 가끔 그런 나를 질투했다.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과 사랑 을 듬뿍 받고 살던 나는 점점 청소년기로 성장하면서 외로울 때가 많 았다. 엄마와의 거리는 멀어지고 내 몸과 마음은 많이 지쳐갔다. 하지 만 나는 그 힘든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며 내 자신을 바 꿔갔다. 친구가 없어서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 때 미국에 이민 을 가서 미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냈고 한국에 와서도 외국인 학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누가 봐도 나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어느 한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8살 때 쯤 사랑하는 엄마가 암에 걸리셨다. 그 당시 나는 엄마가 암에 걸리셨 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부모님이 어린 내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서 언니한테만 말해준 것 같다. 엄마는 미국에 있는 나와 언니를 떠나게 되었고 우리 자매는 할머니와 살게 되었다. 가끔 한국에 있는 엄마와 아빠한테 전화가 왔지만, 나는 전화가 올 때마다 너무 서럽고 부모님 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의 병을 처음 알게 된 시기는 내가 9살 때쯤이었다. 엄마가 미국을 떠난 1년 후 즈음에 엄마가 나를 보러온다고 하였으나 응급수술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오지 못하셨다.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는 것을. 사실 나는 그 후로부터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부모님과 오랫동안 떨어져서 살아서 그런지 혼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내 자신을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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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키워가면서 살았다. 언니와 할머니는 나에게 부모 같은 존재가 되었고 우리 두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고 살았다. 아빠는 자주 미국을 방문했지만 엄마는 미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위로 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더 단단하게 먹었고 신앙심을 강하게 길렀다. 어린 나이에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더 활발해지려 애썼다. 나는 매일 할머니와 침대에 누워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찬양을 불렀 다.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큰 고통을 어렸을 때부터 극 복해왔냐고 물어본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린 이소형을 떠올리게 된다. 오히려 어렸던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강한 것 같다.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나는 한국으로 다시 이사를 오게 됐 다. 나는 엄마 아빠와 살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행복했으나 언니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으로 이사하기가 싫었다. 나는 엄마와 1년 후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엄마와 오랫동 안 몸과 마음이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어색하고 조용했 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엄마와 무뚝뚝했고 애정 표현이 서툴렀 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마음의 벽을 부수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 었다. 엄마는 건강을 되찾으시면서 그동안 나에게 많이 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셨다. 그때는 엄마를 짜증나게 하고 귀찮게 하는 존재였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많은 경험을 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엄마와 아빠는 내 지식과 성적 보다는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언니에게는 공부에 집중하라고 매일 혼내셨지만, 나에게는 사람이 되 는 게 중요하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내가 8학년이 된 여름,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영국으로 이사를 갔다. 영국은 나에게 낯설고 쌀쌀맞은 곳이었다. 영국 땅을 밟은 첫날, 나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미국과는 달리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고 나는 영국 발음을 못 알아들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길고 한국이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 었다. 물론 좋은 경험도 했었다. 엄마 아빠와 유럽 배낭여행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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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영국 친구들도 꽤 많이 사귀게 되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날도 많 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하지만 내 일상은 지루했고 나는 차츰 게을 러졌다. 다시 외로움의 구멍에 내 자신을 가둬 놓은 것만 같았다. 마 냥 침대를 떠나기가 싫었고 집 밖을 나가기가 싫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내가 그리워하던 한국으로 나는 돌아왔다. 영국에서 생활하던 것과 달리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점점 바빠졌다. 자신에게 많은 압박감을 주게 되었고 남들보다 더 열 심히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해야 할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나는 가족 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학교에서는 친구들 사이에서 활발하고 웃긴 아 이였지만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무뚝뚝한 딸로 변했다. 엄마, 아 빠에게 말끝마다 불만을 털어놓았고 어린아이처럼 짜증을 부렸다. 엄 마가 매일같이 내 짜증을 받아 주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끝을 모르 는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어느 날 엄마는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셨 고, 바로 그 다음 날 병원에 입원하셨다. 이번엔 신체적인 병이 아닌 우울증이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엄마와 예전처럼 떨어져 살게 되었다. 친구들은 나를 많이 위로해줬다. 하지만 나는 위로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엄마를 자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마음이 아팠다. 엄마 는 매일 나에게 나쁜 엄마를 만나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때 마다 엄마한테 쌀쌀맞게 굴었다. 엄마가 자신을 싫어하고 원망하는 모 습이 나는 너무 싫었고 답답하기만 했다. 엄마가 병원에 있는 것이 화 가 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원망했다. 집에 오면 아빠가 올 때까지 항상 혼자였고, 나는 홀로 외롭게 저녁을 먹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가고 엄마는 많은 약들을 먹으면서도 병을 극복 하셨다. 엄마의 몸 상태와 맞는 약을 찾는 것은 아주 오래 걸렸지만 마지막에는 그 힘든 시간이 다 보람이었다. 엄마는 4개월 동안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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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병원에서 보내고 2015년 봄에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내 곁으로 돌 아왔다. 나는 착한 딸이 되기를 결심하였고 의젓하게 자랄 것이라 다 짐했다. 서서히 내 굳은 마음은 녹았고 나는 무거운 일과들을 제치고 다시 엄마 품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10학년이 된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열 심히 공부해야했다. 처음에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눈이 어질어질하 고 배가 울렁거렸지만 지금은 이런 일과들에 익숙해졌다. 처음으로 ‘공부를 하는 것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9학년 때 나는 내 자신이 꽤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줄로만 알았지만 10학년이 되어서 나에게 이런 독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친구들과 선배 들은 10학년은 놀 때라고 하지만 나는 성적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고 부모님을 뿌듯하게 해드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했다. 머리가 아파 도, 배가 아파도, 눈이 부어도 나는 열심히 해냈다. 예전에 교회에서 목사님이 나에게 하나님은 내가 열심히, 성실하게 살길 바라신다고 그러셨다. 그 당시에는 나는 목사님이 나에게 거짓말 을 하시는 줄 알고 목사님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성숙 해져서 목사님의 말이 믿겨진다. 나는 지금의 내가 많이 자랑스럽다. 어린 나이부터 제일 까칠하고 예민할 나이까지 나는 많이 외로웠지만 결국 극복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극복한 것 같다. 만약 내가 외롭고 게으르기만 했었다면 나는 결코 내가 쌓은 벽 을 부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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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나를 먼저 사랑하기 Grade 11 김도윤 David Kim 전혀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17년 전 내가 세상에 태어났던 날 광화 문이 다 들썩거렸다고 한다. 집안의 막내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엄 마의 출산은 외가댁의 큰 경사였고, 친가는 호주라서 국제 전화는 불 이 났다고 한다. 대부분의 산모들이 몇 시간씩 진통을 하는데, 엄마는 나를 두 시간 진통 끝에 순산 하셨다며 태어날 때부터 효자라고 하신다. 나는 3.2kg에 52cm 크지도 작 지도 않게 태어났지만 유난히 건강을 챙겨 주신 엄마의 정성 으로 급성장을 하면서 또래보다 훨씬 큰 키로 자랐다. 그래서인 지 자라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키가 크다’였다. 어릴 때부터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그렸고 만들고 조립하는 그림 ‘자화상’ 김도윤

것을 유난히 좋아해서 우리 집 은 장난감 대신 늘 큰 책상에

각종 종이와 연필, 물감, 가위, 풀과 공구세트들이 가득 있었고 그걸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다. 친가가 호주에 있어서 한 살도 되기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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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며 자연스럽게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커서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 늘 비행기 그림을 그렸고, 공항에 가서 직접 비행기를 보고 그림을 그려오기도 했을 정도로 비행기에 대한 나의 사 랑은 대단했다. 네 살에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 혀를 다치기 도 했고, 눈 옆이 찢어져서 네 바늘이나 꿰매기도 하면서 엄마를 많이 놀라게 했었지만, 다섯 살에 유치원에 진학하고 수영, 쇼트트랙, 인라 인 등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넘어지거나 다치는 일이 없어졌다. 각종 서울시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고 초등학교 때는 교내 챔피언을 하기 도 했다. 그 당시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훈련을 받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매일 같이 안하겠다고 엄마랑 싸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운동을 한 것이 나중에 내가 외국 생활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고, 그 당시 정말 힘들었던 것은 사실 내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 같다. 한 여름 낮에는 인라인 하느라 고수부지 땡볕에서, 밤에는 수영장에 서, 한 겨울에는 추운 아이스 링크에서 매일 저녁시간을 꼬박 어린 나 와 함께 보내셨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내가 엄마에게 쇼트트랙을 다 시 하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면서 이젠 죽어 도 못 쫒아 다니시겠다고 하신다. 그때 좀 더 열심히 배워 둘 걸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긴 했다. 초등학교 2학년에 친가가 있는 호주 시드니로 간 것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긍정적인 충격 이었다. 내가 다닌 호주의 학교는 한국 학생이 전혀 없어서 한국인이 라는 존재만으로도 관심 받기엔 충분했다. 수영을 잘 해서 학교 수영 대표로 나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후배도 생겼으며, 그림을 잘 그린 다고 인정을 받아서 ‘아티스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때 그들이 내가 조금만 잘해도 너무 잘 한다고 칭찬해 주었던 것이 나에게는 큰 용기 가 되었고, 아티스트의 꿈을 꾸게 되는 자신감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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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의 생활은 내가 낯선 환경이나 새로운 일에 부딪혔을 때 당 황하거나 겁내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과 자세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 다. 나는 호주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육 학년 때 다시 한국으 로 돌아오게 되었다.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온 가족에게 충격이었다. 평소 청년 처럼 건강하셨음에도 심장마비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할아버지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가족들에겐 큰 슬픔을 남기고 가셨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족들은 더 서 로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한국 공부의 필요 성을 느끼고 한국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중학교 이 학년 때 부모님 을 설득해서 외국인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중학교에서의 생활은 좋은 경험이었다. 너무나 어려운 삶을 사는 친구 들도 있었고, 발달 장애를 가진 친구도 있었지만 그들 눈에는 아무 걱 정 없던 내가 더 이상해 보였던 것 같다. 요즘도 그때 친구들이 가끔 씩 연락을 해오면 너무나 반갑고 기쁘다. 외국인 학교에 다니는 나를 많이 부러워하는걸 보면 공부도 그로 인한 마음도 많이들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외국인 학교는 내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다시 호주로 반 쯤은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공부하기도 훨씬 수월했고 다양한 미술 수업도 있어서 여러 가지 많은 시도를 해보면서 진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파일럿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 트가 너무 좋고 거기에만 푹 빠져있다. 장래에 무슨 일과 직업을 갖겠 다는 구체적인 생각까지는 아직 없지만 좋은 아트스쿨에서 다양한 경 험을 통해 내 일을 찾을 거라는 자신과 확신이 생겼다. 늘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는 선생님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좋 은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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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아트에 푹 빠져있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로 했다. 나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고쳐나가는 것이 앞으로 꿈을 실현 하 는데 있어서 최선이라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울 앞에 당당히 서서 내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사랑한다,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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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나의 삶, 나의 미래 Grade 11 박정훈 James Park 나는 2000년 4월 2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의 중간 지점인 산타클라라에서 태어났다. 1남 1녀 중 장남이어서인지 어릴 때부터 책 임과 배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은 큰 어항이다. 어항 안에는 일반적인 금붕어보다 큰 물고기가 있는 것으로 기억나는데, 어머니께서는 그때 가 아마도 내가 세 번째 생일파티를 하는 날이었을 것이라 하신다. 자라면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책 읽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책을 보 기보다는 만화책을 자주 봤는데, 내가 만화책을 좋아했던 이유는 만화 로 보는 것이 글로 읽는 것보다 이해가 빠르고 나름 정확해서였다. 부 모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더 열심히 읽으라며 교육용 만화책들을 많이 사주셨다. 물론, 그걸 다 읽어내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나 는 자라서 과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많이 옮겨다니며 공부했다. 일 학년 때는 ICS라는 의정부의 외국인 학교를 다녔고, 2학년에는 CCS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나에게 무척이나 잘 대해주던 선생님이 계셨다. Ms. Nickel 선생님은 내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만 말하면, 너그럽게 봐주시 는 선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4학년 때쯤 아버지가 미국으로 파견근무 를 나가시게 되면서 우리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미 국에서는 4학년부터 7학년까지 모두 4년을 살게 되었는데 중학교를 다니면서, 단짝 친구 2명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한 명은 우리 바로 옆집에 살았고, 다른 한명은 2분 거리 근처에 살았다. 우리 셋은 언제 나 같이 다니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 친구들을 만난 것이 나는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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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 행운이라 생각한다. 8학년이 되어서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왔다. APIS에 다니기 시작했 는데 갑자기 미국에서 알던 학원 원장 선생님이 어머니께 연락을 취해 왔다. 나를 미국으로 다시 보내서 미국 공부를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원장선생님 말을 듣고 궁리 끝에 나를 미 국으로 다시 보내셨다. 하지만 다시 찾은 미국에서 나는 완전히 구제불능처럼 지냈다. 8과 목 중에서 5개를 턱걸이로 통과한 것은 기본이고, 차츰 공부와는 담을 쌓고 게임에만 중독 되어가고 있었다. 나를 데리고 있던 원장 선생님 은 어머니가 나에게 주라고 하신 돈의 일부를 떼어 중간에 가로채고 있었고, 내 룸메이트 형에게는 내가 없을 때 나에게 대한 뒷담화를 해 댔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눈치 채시고, 나를 한국으로 다시 데리고 오셨다. 내 삶에서 가장 힘든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잃지만은 않았다. 그때 미국에 서 힘들게 얻은 소중한 교훈 하나는 내 성격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살면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얻고자 달려 가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바로 두 번째 미국 에서의 홀로서기였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많은 돈보다는 작지만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큰돈으로 얻는 기쁨보다는 작 지만 소중한 행복을,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배려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힘든 시간을 통해 나는 그 누구도 쉽 게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을 얻은 셈이니, 그 아팠던 기억에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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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진실을 말하다 Grade 11 김재홍 Jae Hong Kim 나는 사실 어렸을 적부터 거짓말을 많이 하는 아이였다. 아주 사소 한 것에도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는 한참 동안 철이 없었다. 아주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큰일을 벌인 것도 아닌데 하루도 빠짐 없이 부모님과 형의 속을 썩여가며 가족들을 힘들게 하였고 그래서인 지 혼도 많이 났다. 머릿속 깊이 기억으로 남은 것들 이 많지는 않지만 그 중 하나를 떠 올린다면 아주 간단한 것이 하나 있다. 어느 여름날 나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숨바꼭질을 하면서 몸 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문방구로 향했다. 나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어머니가 절대 먹지 말라는 불량식품을 가득 사 안고 하루 종 일 어두워질 때까지 먹은 적이 있 그림 ‘자화상’ 김재홍

었다.

집에 가야할 시간이 되었을 때 마지막 캔디를 마저 다 해치우고 집 에 들어갔다. 너무 급하게 먹은 결과로 입주위에 캔디조각이 묻었는지 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문을 여는 순간,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보 게 되셨고 내 입 주변을 주시하시고는 나에게 성난 얼굴로 불량식품을 사먹었냐고 여러 번 물어봤지만 나는 계속 아니라고 거짓말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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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실이 들통 나고 그 날 밤은 어머니에게 엄청난 벌을 받았다. 이런 일 말고도 나는 학교 숙제를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수도 없 이 거짓말을 했다. 책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다 읽었다고 거짓말을 했 다. 아버지가 점검을 하려고 책의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는데 나는 책 을 하나도 안 읽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몰랐다. 물론 그에 적당한 벌 을 받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비슷한 행동을 한 것 같다. 잘못한 것임 을 분명 알았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해도 중독성 이 아주 심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거짓말이 확 줄었고 진실만을 말하고 다닌다. 이제 와서 느낀 것이지만 거짓말을 하고 넘어갈 때는 통쾌했 다. 하지만 동시에 들키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했고 급기야 혼이 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진실을 말할 때는 아무 걱정도 없었고 혼나지 않 아도 되니 너무나 좋았다. 거짓말보다 진실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깨 닫고 난 후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성실하고 믿 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많은 사람에게서 신뢰를 얻었다. 앞으로도 나는 정직하고 진실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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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즐거웠던 중국 여행 Grade 11 신수지 Sophia Suzy Shin 이번 방학에 중국에 다녀왔다. 중국은 아시아 국가라서 문화, 옷, 그 리고 예의 등이 한국과 똑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들 이 간 장소들은 그랬다. 그럼 이제부터 많은 일이 있었던 나의 중국 여행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엄마, 그리고 내 친구들인 지영이랑 미현이는 함께 중국으로 떠났 다. 우리 여행 그룹에는 엄마와 내 친구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 리는 패키지로 여행을 떠난 거라서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 등 연세가 많은 분들, 그리고 여행 가이드와 함께 갔다. 이 여행 그룹과 같이 여 행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끼리 여행을 갔 다면 길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시간을 많이 허비했을 것이다. 하지 만 우리가 가기 싫었던 장소들은 안 갈 수 있었을 것이고 연세 많은 분들 특유의 잔소리를 안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모든 것에 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것이고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웠던 여행 이었다. 첫 날, 우리는 비행기 탄지 3시간 만에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그후 바 로 관광버스에 타고, 중국 의 요녕성, 북한 쪽으로 갔다. 우리는 차로 한 네 시간 정도 이동을 해야 했 다. 저녁으로는 샤브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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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먹었는데 중국의 훠궈라는 샤브샤브여서 한국 샤브샤브랑은 많이 달랐다. 땅콩 소스, 타바스코 소스, 간장, 오일, 그리고 알 수 없는 여 러 가지 소스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중국어로 쓰여 있어서 뭔지 정확 하게는 알 수 없었다. 샤브샤브에는 오징어와 고기가 있었는데 그냥 먹어도 맛있었고, 소스와 같이 먹으니까 색다른 맛으로 즐길 수도 있 어서 좋았다. 잠은 두 밤이나 침대 차에서 잤다. 방 한 개가 아주 작았지만, 그 안에 노래방이랑 편의점이 있어서 좋았다. 편의점에서 레드불을 사 보 았는데 맛을 같았으나 캔의 모양과 색이 달라서 특이했다. 나는 침대 차 를 처음 타 보는 거라서 재미있었다. 그런데 화장실을 쓸 때 변기가 한 개 밖에 없어서 불편했고, 세면대도 사람 들과 같이 사용해야 했다. 모르는 사 람들과 같이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해야 해서 좀 어색하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들은 어르신들과 호텔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내 친구 들과 내가 제일 쉽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밥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처 음 보는 음식이라서 입에 대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새로운 음식들 도 맛보다 보니 맛있었고 새로운 것을 먹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었다. 아침 식사 후, 우리 여행 가이드는 백두산 천지에 가기로 했다. 엄 마는 백두산 천지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백두산 천지가 어디 있는지, 뭔지도 몰랐다. 여행을 같이 하던 할머니들이 거기에 가면 ‘예 쁜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했고,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말로는 구름이 좀 있어서 잘 안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백두산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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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서 천지를 바라보니 날씨는 매우 추웠지만, 예쁜 호수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다음에 백두산에 갔다 온 것이 너무 힘들에서 뭘 했는지 잘 기 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에서 친구들과 계속 게임을 하고 잤던 것 같 다. 밤에는 아침에 갔던 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중국 전통 사우나 에 갔다. 미현이랑 엄마랑 나는 샤워를 제대로 해서 좋았는데, 내 친 구 지영이는 자기의 몸을 딴 사람한테 보여주는 걸 싫어해서 울어 버 렸다. 지영이가 울기 시작해서 분위기가 좀 이상해지긴 했지만 사우나 를 끝낸 후에는 괜찮아졌다. 사실 나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샤워하 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밤이 되자 우리 투어 그룹은 다시 침대 차에 탔다. 거기서 친구들과 같이 신라면을 먹었다. 얼마나 한국 음식이 그리웠는지 라면을 먹으면 서 너무나 행복했다. 그 다음에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영어 노래를 불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과 엄마와 새벽 3시까지 놀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눈이 퉁퉁 부었었고, 너무 졸렸지만 말이다. 셋째 날, 우리는 좋은 호텔에서 잤다. 화장실 벽이 투명해서 웃겼지 만 넓은 침대가 있고 와이파이도 있어서 신이 났다. 그런데 중국에서 는 구글이랑 유튜브를 사용하지 못해서 좀 아쉬웠다. 네 번째 날,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나는 호텔 알람때문에 일찍 일어났다. 아침 일찍부터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친 구들이 계속 자서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침은 호텔 뷔페에서 먹고 드디어 한국으로 출발했다. 여행 막바지가 되니 아빠도 보고 싶었고, 한국 밥도 많이 그리웠다. 처음 가보는 중국 여행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고 배우고 체험해 본 것 같아서 뿌듯했다. 생각보다 한국과 다른 문화가 많이 있어서 놀 랐지만 각자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는 것도 좋은 경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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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영리함과 멍청함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한 끗 차이 책 <테레즈 데케루> vs. 영화 <테레즈 데케루>

Grade 11 김서윤 Julia Kim

세상의 많은 영화들은 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책들의 공 통적인 특징을 따져 보면,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세심한 디테일이 가득 하여 구성이 탄탄하게 짜여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는 사실적이고 상세한 배경, 생생한 인물들의 관계 설정, 공감을 이끌어 내는 이야기 구성, 그리고 선명히 전달되는 주제. 약 두 시간이라는 시간 제한 속, 그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는 확실한 요소들을 밑바탕으로 깔아 둔 후, 주요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주제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쌓아간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본 요소들을 <테레즈 데케루> 역시 모두 내포 하고 있지만, 2012년 제작된 영화 <테레즈 데케루>와 1885년생의 작 가가 쓴 책 <테레즈 데케루> 사이에 강조하는 내용의 차이는 배경과 이념, 인물에 대한 정의와 그에 따른 주제 전달 방식 등의 면에서 확 연히 드러난다. 먼저 책 <테레즈 데케루>의 기본 배경이 되는 설정은 매우 단순하 다. 수많은 관계가 얽혀있어 한 문장이라도 빼먹을까 노심초사하여 읽 으면서 관계도를 그려나가며 이해를 도와야하는 <폭풍의 언덕>과 같 은 책이 아니기에, 장소가 어느 마을인지 따위의 설정은 큰 비중도 없 거니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책이 강조하는 것은 가문의 명성과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 공을 들이던 당시 프랑스 시대상 정도이다. 행 동반경이 그리 넓지 않은 인물들, 그것도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테 두리 안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또한 그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시각적인 효과에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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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음에도 책보다도 배경에 무감각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 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어떤 관계인지 내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렇게나 빨리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가 정치 인이라는 설정과 그에 걸맞은 집안이 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주인 공 테레즈의 친정을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서술하는 책과는 달리, 영화 는 관객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후반부에나 가서, ‘그녀의 아버지가 속해 있는 프랑스의 1800년도 후반, 1900년도 초반은 가문에 병적으로 집착했구나’를 암시하는 몇 장면들만이 나올 뿐이다. 책이 달랑 두 가문의 몇 안 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을 지 속적으로 표현하며 지도를 그려나가는데 반해, 영화는 도리어 책에서 일어난 자잘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를 유추해 낼 수 밖에 없 도록 탑을 쌓는다. 영화와 책 사이에 가장 차이가 크게 나는 요소를 꼽으라 한다면 나 는 주저 없이 테레즈라는 인물에 대해 묘사한 그녀의 성격을 말할 것 이다. 책 속에서의 테레즈는 야망 있고 명석하며, 강단 있지만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그녀는 끊임없이 고뇌하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지경 까지 이르러 두 상반된 의견에 서서 고민하는 갈대와도 같은 여자지 만, 그렇다 해서 줏대 없고 융통성 없지 않다. 욕심 있고 똑똑한 보기 드문 그 시대의 여성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반항하기 보다는 시대와 가 정의 영향을 적당히 받아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그저 세상이 너무 뻔해서 재미없어하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사람들이 원하는 자신 과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 매력적인 캐릭터이니 만큼, 개인적으로 영화로 표현한 그녀의 성격과 생각들은 실망스러웠 다. 영화로 새롭게 만난 테레즈는 줏대 없고, 극심한 기분파에, 너무 똑똑해서 세상이 재미없다기 보다는 아무 생각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 나는지 모르는 우울증 환자 같았다. 책 속의 테레즈는 항상 고민한다. 법정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는 남편 베르나르를 죽이려한 이유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시누이이자 절친한 친구인 ‘안’이 용납할 수 없는 가문의 ‘장 아제베도’와 사랑에 빠지자 떼어놔 달라고 요청한 시어머니에게 장 아제베도가 천대 받아야 하는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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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두 가문의 재력을 대표하는 소나무 숲이 불타자 자신이 슬 퍼해야할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남편이 없으면 자신의 권태로움이 조 금이나마 사라질지에 대해서. 그녀의 고민은 우울하고 절망적인 것이 아니고, 그저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도 재미가 없어 일탈의 쾌락을 느낄 방법을 모색하는 목적의 것이다. 이 와 달리 책에서의 테레즈는 영화에서의 권태로움을 자유에 대한 갈망 으로 풀어내는 일차원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며 고민 없 는 인생을 사는 자신과 그러한 자신을 인정할 수 없는 자아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너무 영리해서 화를 부른 인물이다. 단순히 페미 니즘을 주장하며 자유를 찾아나서는 것을 주제로 하기에는 아이러니하 게도 오히려 그 시대가 요구하던 가문의 명성과 재력을 잃기 싫어하는 욕심쟁이이기에 그것들을 버리고 자유를 위해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아니 왜 그냥 저 가문을 떠나지 않지? 그녀의 할머 니 또한 가문에서 이름과 존재가 제명당하면서까지 자유를 찾아 떠났 는데 테레즈는 왜 그렇게 하지 않지? 떠나기 무서운건가?’라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든다. 책을 읽다보면 테레즈는 자주 남편인 베르나르도 혀 를 내두를 정도로 건방지고 겁이 없는, 일명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을 것에 반해 영화에서 묘사한 테레즈의 사고방식은 개연성의 부족으로 단지 이 세상을 겁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두 작품의 서로 다른 주제와 그 전달 방식 또한 괴리감을 안겨준다. 책이 전달하는 주제는 욕심쟁이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과 손에 쥐 고 있는 것을 담아낼 그릇이 못되어 자신의 본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 는 안타까운 시대의 안타까운 여성의 일에서 비롯된 비극인 반면, 영 화는 홍보와 트레일러, 그리고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까지 대체적으로 강조하는 주제가 여성의 권태로움과 그 자유를 향한 갈망이 몰고 온 비극이다. 책에서 테레즈는 단 한 번도 기계적이고 무감정한 사람으로 묘사된 적이 없는데, 영화 속의 테레즈는 무표정하고, 무감정하며, 의 욕도 없고 그녀만의 독특한 색도 잃은 듯한 느낌이다. 사실 테레즈는 굉장히 희망적이고 본인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기에 더더욱 영화에서 의 무표정한 설정이 아쉬웠다. 그녀는 결혼이 권태로움과 욕망을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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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줄 것이라고 믿었고, 아이를 낳으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을 품고 살았으며 남편인 베르나르를 깔보되 구태여 티를 내지 않으며 장단을 맞췄기에, 융통성 없게 무표정으로 다닌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 적이다. 심지어 친구 안이 장 아제베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편지를 주자 질투가 나서 사진을 변기로 버려버리는 등의 행동은 절대 그런 무표정한 여자의 것일 수 없다. 그녀의 머릿속은 아마 생각이 너무 다 양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무표정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 만, 똑똑한 여자이니만큼 그녀를 무표정한 괴물로 만들어버린 건조하 다 못해 삭막함 마저 드는 영화가 아쉽다. 개인적인 후기로, 나는 영화 예고편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몰 라도 영화가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는 오트리 토투가 여주인공으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는 홍 보와 트레일러의 배경음악이 잡아낸 아름다움과 잔잔함 속에 깔린 불 안과 혼란 등이 기대치를 너무 높여놓은 것 같다. 갈등 상황 자체가 한 사람의 혼란이니만큼 그 내적갈등과 수많은 생각들을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책은 테레즈의 권태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그 녀의 내적 갈등의 원인을 충실히 보여준 후에 변화가 필요한 그녀가 선택한 최후의 방법인 베르나르 독살을 제시하는 반면, 영화는 그녀의 권태로움 그 자체에 더욱 초점을 맞추느라 중요한 배경들을 놓치는 듯 해 안타까운 부분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먼저 접하면 그녀 가 너무하다, 이해할 수 없기에 크게 재밌거나 감동적이지 않다 등의 후기를 남기고 책을 읽은 후에 남자 작가의 여자 심리에 대한 정확하 고 자세한 표현에 감탄한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아야하는 관계로 영화 테레즈 데케루가 최선이었을 수도 있지만, 빠 른 전개와 덜 강조된 듯한 그녀의 심리는 그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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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동물이 전해준 교훈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vs 동물과 이야기하는 여자

Grade 11 김현지 Esther Kim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그리고 <동물과 이야기하는 여 자>, 이 두 책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책들이다. 로버트 뉴턴 펙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열세 살 어 린 소년, 로버트의 성장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로버 트의 아버지는 농장 일과 함께 생계를 위해 돼지 도살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는 부자는 아니지만 성실하며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 며 살아가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로버트 에게 진솔하면서도 중요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어느 날 로버트는 이웃의 암소의 출산을 부상을 감수하면서 도와준 보상으로 핑키라는 새끼 돼지를 선물로 받는다. 로버트는 새 친구가 생긴 것을 기뻐하며 지극정성으로 핑키를 보살핀다. 로버트의 가족들도 핑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소박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낸 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과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핑키가 암퇘지로 서의 중요한 역할인 새끼를 낳지 못하자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핑키 를 죽여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이는 열세 살의 어린 소년인 로버트 에게 처음 이별이라는 것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슬픔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키워주었다. 또한 가난이라는 장애물을 누구의 희생 없이는 넘을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로버트 뉴 턴 펙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열세 살 어린 소년의 시 점으로 안타까운 현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편 리디아 히비의 <동물과 이야기하는 여자>는 돼지가 한 마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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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던 날과는 다르게 시간의 흐름을 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이 아닌 각자가 경험한 신비롭고도 가슴 울리는 에피소드들을 정리 해 놓은

책이다.

리디아

히비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amimal

communicator)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란 사 람과 같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동물들과 직접 대화하고 마음을 나 누어 그들을 치료하는 직업이다. 이 책에서는 리디아 히비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서 살아가면서 겪은 이야기들과 그녀의 가슴을 울렸던 동물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전해준다. 그녀의 이야기에서는 그녀의 진심, 그리고 그녀와 소통했던 동물들의 진심이 녹아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동물들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같이 소통하고 마음을 나 눠야 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우치게 해준다. 이렇게 전혀 다른 장르의 책 이지만 두 책 모두 동물을 대할 때, 그 이용 가치를 넘어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준다. <돼 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에서는 처음부터 주인공이 힘들어 하는 암소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면서도 암소를 도왔다. 이는 주인공 이 진심으로 암소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한 이 책에서 주인공은 핑키라는 새끼 돼지를 만나게 되고 핑키에게 그의 마음을 완전히 주며 진심으로 보살펴 준다. 그 진심이 있었으므 로 훗날 핑키가 안타깝게 죽었을 때 열세 살 소년으로서 진실한 이별 을 마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물과 이야기하는 여자>라는 책 또한 리디아 히비가 진실된 마음 으로 동물들에게 다가갔기에 그들을 치유 할 수 있었고 그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향한 신뢰를 잃었고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이 다. 사람조차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다가가기 힘들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은 더더욱 힘들다. 하지만 그들에게 인내심과 진정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리디아 히 비의 삶은 동물을 향한 그녀의 진실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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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의 주인공은 서로 다른 성별, 다른 나이, 다른 국적, 다른 삶 을 살아왔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비슷했고 이 두 책을 읽은 나는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교훈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나 도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훗날 그들이 책을 통해 나에게 준 교훈이 언젠간 나의 삶에 도움이 되리라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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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고통 속에서 발견한 삶의 가치 책 <두근두근 내 인생> vs. 영화 <뷰티 인사이드>

Grade 11 권재은 Eugenie Kwon 나는 1학기 동안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 은 표지만 보고 내용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왠 지 표지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냥 평범한 풍선들로 이루어진 표 지이지만 책의 내용이 새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뷰티 인사이드>라는 영화를 몇 달 전에 봤다. 처음에는 영 화에 나오는 배우들을 보고 영화를 관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줄거리를 보니 너무나도 신선하고 생각지 못한 주제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개봉을 하고 바로 며칠 후 보게 되었다. 두 작품은 매우 깊이 가 있는 소재로 만들어졌기에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보았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에서는 비슷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책은 ‘한아름’이라는 아이가 고통을 감수 하며 살아가는 내용이다. 아름이는 평범한 병에 걸린 것이 아니고 일 찍 늙는 병에 걸렸다. 아름이는 17살, 아직 파릇파릇할 나이에 대략 70~80대의 얼굴과 체형을 갖게 되었다. 원인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치 료법도 없는 병이었다. 아름이는 태어난지 몇 년 후에 자신의 병을 알 게 되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병원에 있는 시간에 상상을 하며 글 도 쓰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아름이 는 외동아들로 아주 가정적인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왔다. 아름이의 아 버지는 한대수, 아름이의 어머니는 최미라였다. 그의 부모님은 고등학 교 때 어떤 사고로 인해 아름이를 낳게 되었다. 아버지는 딱히 꿈이 없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갈팡질팡 했고, 어머니도 하고 싶은 것 이 있었지만 못하게 돼서 좌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이가 태어난 이후에 그들의 삶은 새로워졌다. 그들의 일상은 병원에서 아름이를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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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행복했다. 아름이는 친구가 없어서 장씨 할아버지라는 분과 계속 인생에 관한 대화를 가끔 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의 친구 중에 피디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아름이를 다 큐멘터리에 출연 시키는 것이 어떤지 제안을 했다. 아름이는 찬성을 하고 TV에 출연하게 되었다. 나중에 TV를 본 많은 시청자들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이 아름이에게 특별한 메일을 보냈다. 이름은 이서하였 다. 아름이는 여자 아이에게 말해본 적이 흔치가 않아서 낯설었지만 계속 메일을 주고 받다보니 호감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서하라는 아이가 어떤 사기꾼 작가로 밝혀졌는데, 그는 아픈 아이들을 소재로 한 책을 출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이는 실망감이 오르던 찰나에 갖고 있는 병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아름이에 게는 죽음을 맞이해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름이의 부 모님도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나중에 결국엔 아름이 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뷰티 인사이드>라는 영화는 외국에서 출판된 책을 영화로 만든 것 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20대의 의자 회사에서 일하는 우진이라는 남자로, 매일 자고 일어나면 다른 얼굴, 다른 체형, 다른 나이, 다른 성별, 다른 국적,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하루아침에 일어나보니 이 같은 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와 친한 친구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다른 가구 회사에서 일하는 여자, 홍이수를 알게 되었는데 이후 로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매일 이수를 만나러 갔지만 이수 에게는 그저 항상 다른 손님으로만 보였다. 나중에 우진은 이런 특이 한 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했지만 이수에게는 믿지 못할 사실이 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점차 이수도 우진에게 빠지기 시작했다. 둘 은 계속 사랑으로 발전을 하지만 이수는 차마 말을 못할 만큼의 힘듦 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중에 우진은 이수로부터 떠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생각을 하고 해외로 떠나게 된다. 한동안 떨어져 있다 보니 우진 이 그리워진 이수는 그를 찾아갔다. 나중에 그 둘은 남은 삶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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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작품 <두근두근 내 인생>과 <뷰티 인사이드>를 연관지어 생각해 보았다. 이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특이한 병이 있다는 공통점 을 가지고 있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는 아름이가 빨리 늙어버리 는 병을 갖고 있고, <뷰티 인사이드>에서는 우진이가 매일 외모가 바 뀌는 병에 걸렸다. 나는 두 작품 모두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희귀한 병 을 통해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두 주인공이 겪는 희귀병은 둘 다 외모, 즉 겉으로 보이는 것에 관 한 병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리고 그 병을 갖고 있는 아 름이와 우진이 둘 다 자기 안에 생각이 많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 고 있다. 아름이는 병원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책도 읽고, 글도 쓰 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의 많은 것들을 일찍 배웠다. 우진도 마찬가지로 매일 자신에게 변화가 있는 것 때문에 항상 스스로 에게 익숙해져야 되고 강해져야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자신이 먼저 자신의 새로운 면에 익숙해하지 못하면 그의 주위 사람들은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름이에게 다가오 는 죽음과 우진이의 늘 변하는 외모 문제가 자신을 좀 더 강한 사람으 로 만들게 하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픔을 통해 이전에 자신이 알지 못한 부분들을 깨닫 게 될 수 있다. 아픔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과정은 자신에 게 억제되고 가능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들도 결국에는 실현될 수 있 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어떠한 병이 있더라도 그것을 딛고 희망을 꿈꾸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두근두근 내인생> 은 아름이의 성 장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 일부러 시간이 제한된 삶을 넣었다면 <뷰 티 인사이드> 같은 경우에 작가는 외모와 관계없이 자신의 내면을 사 랑하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 항상 변하는 외모를 설정한 것이다. 이 두 작품이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아픔을 지닌 누군가에 게 희망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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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어둠 속, 찬란했던 한 줄기 빛 Grade 11 홍혁준 Huck Jun Hong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와 그의 친구 송몽규의 삶, 우정, 작품 세계, 그리고 죽음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암울했던 일제 강 점기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두 젊은이들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 다. 흑백 화면은 당시의 칠흑 같은 암울함, 그리고 그 속에서도 빛났 던 윤동주의 시와 정신력을 표현하는데 매우 적절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전쟁의 광기로 식민지를 완전히 통제하려고 했던 일본, 그들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는 상황에서도, 윤동주는 끝까지 그 고고한 정신력을 잃지 않았다. 윤동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죽 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그리고 자신의 창 씨개명에 대해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자아성찰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장면은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 개명을 하고 자신의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선배 시인에게 털어놓는 장 면이었는데, 선배 시인이 “부끄러운 것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 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이 뭉클하였다. 선배 시인의 말은 옳았 고, 나라의 아픔 앞에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시인 윤동 주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했고 순수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시인 윤동 주와 송몽규의 끈기와 의리를 보여주는 몇 장면들 또한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너는 계속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 거니까”, 그리고 “두려 워할 것 없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했던 송몽규의 시인 윤동주 를 향해 한 말들은 두 청년들의 깊고 진실된 우정을 보여주었다. 한편 그 두 청년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우정은 마음에 아픔을 남겨주었다. 이 영화에는 윤동주의 많은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내게 특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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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깊고 슬펐던 시는 ‘별 헤는 밤’이었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략)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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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 다.’는 윤동주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고 전진 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 안 나는 이 시를 보고 너무 안쓰러웠다. 빛나는, 희망찬 내일을 생각했지 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또한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는 윤동주가 죽기 전까지 고향을 그리워하였고, 어머니를 그 리워하였다는 슬픈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 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는 자신을 벌레에 빗대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창씨개명,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에 대해 자책하 고 슬퍼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의 마지막 줄, ‘내 이름자 묻힌 언 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는 암울한 현실과 슬픔 속에 서도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묘에 초록빛 풀이 날 것이라는, 윤동주가 자신의 죽음 이후에는 한국에 희망이 오기를 바랐다는 사실 을 알 수 있었다. 조국을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시를 썼던 굳건한 청년 윤동주, 죽기 전까지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했음에도 한국에 대한 믿음과 자아성찰 의 굳건함을 잃지 않은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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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인류가 성장하기 위한 역사 Grade 11 강민정 Jennifer Kang

역사는 인류가 존재해 온 시간을 기록한 것이다. 글, 그림, 건축물, 음악 등 여러 형태의 문화유산들을 분석해보면 그 시대에 살았던 인간 사회와 철학이 어땠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오늘 날, 역사는 꼭 배워야 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학, 수학, 언어 같은 과목들은 마땅히 공부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역사는 그만큼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사를 배우는 것은 시간 낭 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역사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인간은 역사를 배우면서 어떤 방향으로 성장해야 하는지 알 수 있 다. 역사는 과거에 존재하던 사람들을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 큼 그들의 지혜를 얻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람들이 어 떤 이상적인 미래를 그렸는지, 그들이 알맞은 대책을 세우고 어떤 행 동을 했는지, 또한 과거 사람들의 이상이 현실로 이루어 졌는지, 다양 한 고찰을 통해 현재 인류가 진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종차별 문제를 보자. 전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내전 당시 아메리카 연합국의 흑인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 노예 해방을 선포하였다. 그리 고 거의 백 년이 지난 후, 링컨의 이상적인 미래를 같이 꿈 꾼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흑인 인권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흑인 인권 운동은 미국 헌법의 인종 차별을 철폐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 낸 것이 다. 인종차별이 과거에 비해 훨씬 나아진 것은, 이 글로벌 문제에 맞 서 싸운 사람들의 이상과 계획, 행동과 결과 등을 분석하고 그에 맞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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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한 결과로 얻은 열매인 것이다. 여전히 인종차별의 잔재가 남아있 는 현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사를 배워서,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해결책으로써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 해, 우리는 인종차별에 관한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사회의 법이나 편견 을 더욱 날카로운 시각으로 깊이 있게 평가할 수가 있어야 한다. 바르 고 정확한 지식을 먼저 가져야, 부당한 사회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류가 성장하기 위해서 역사 공부는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 해결방안을 우리들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고, 역사를 쓰면서 우리는 후 세대가 인류의 발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도 록 돕는다. 역사는 현재, 과거, 미래의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다리이며, 인간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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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우리 시대의 미디어 바로보기 Grade 11 김태환 Christopher Kim 불과 2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하루에 일어난 사건, 행사, 소식 등 을 그 다음 날이 밝아야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하루에 일어난 여 러 가지 사건 중에 기사에 실릴 만한 소식들을 편집을 하여, 편집장을 거쳐서, 인쇄기를 통해 수만 장 뽑고, 그리고 신문 배달부가 새벽에 신문을 각 가정집에 던져야지만 사람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간 단히 말해서 오늘 있었던 일은 내일 아침이 돼야지 알 수 있는 것이었 다. 하지만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인터넷 상용 서비스를 개시한 후‘인 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우리는 실시간으로, 장소와 무관하게 미디어에 접속할 수 있다. 이러한 인터넷 미디어의 특성 덕분에 정보 망이 넓어지고 빨라졌지만, 역효과도 동시에 생겨났다. 예를 들어, 저명인사 또는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연예인들을 보자. 팬클럽 회원 수만 몇 백만 명에 달하는 수준급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이 연예인의 인생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것, 바로 SNS이다. 연예인과 전혀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 어떤 한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거짓 정보를 인터넷에 올리면 전 세계 사람들이 순식간에 거짓 정보에 노출이 된다. 거꾸로 연예인이 일명 ‘허세 샷’을 올려 자신의 삶을 포 장하여 보이고자 할 때 그것을 본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것 이 진짜라고 생각하더라도, 실상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들의 생명줄은 조회수이다. 보다 많은 사람 들을 끌어오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 사진, 광고 그리고 심지어 기사 내용을 변형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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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왜곡된 미디어의 영향력 속에서 내 시각을 어떻게 ‘관리’해 야만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을까?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 들의 질이 쉽게 개선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의 자세에 변화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들이 왜곡 됐다고 치자. 같은 주제와 사건, 행사, 소식 등을 다룬 다른 언론사들 도 반드시 있다. 여러 언론사들의 기사를 서로 비교해 보는 노력을 기 울인다면 좀 더 정확한, 그리고 덜 왜곡된 사실들을 분별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기사를 비교해 모두 일치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왜 곡된 내용일 가능성이 낮은 사실일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자극적 인 기사 제목일수록 분별하여 클릭하지 않는 것이다. 뉴스 기사의 원 칙 중 하나는 객관성이다.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기사는 객관성을 잃 고 한 쪽으로 치우친 시각의 정보를 전달할 가능성이 크다. 불과 20여 년 전, 인터넷이 없었을 때 사람들은 그날에 일어난 소식 들을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접할 수 있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된 후, 사람들은 장소에 무관하게 실시간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터넷의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동시에 왜곡된 정보에 노출될 수 있다는 부작용도 생겼다. 이렇게 왜곡된 미디어를 피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여러 기사들을 비교하거나, 자극적인 기사 제목 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언론사에 변화가 찾아와야 한다. 아 무리 기사 조회 수가 중요하더라도, 본래의 원칙인 객관성을 유지하고 기사의 본질적인 의미와 기능을 지키도록 정직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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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학창시절 연애, 긍정적인가 Grade 11 김지민

Jenny Kim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수다거리 중 하나, ‘연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청소년 시기, 연애에 대한 학생들의 관 심과 질문은 거의 대부분 같았다. 학창시절에 과연 이성교재를 해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그럴 시간에 차라리 학업에 더 충실해야 할지 말이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과 보는 시점이 각각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학창시절 연애를 꼭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학창 시절 연애를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자. 먼저 반대하는 측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울 소재 ‘ㅁ’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 10대 청소년은 이렇게 언급했다. 이성교제를 하면 돈, 시간낭비가 많은 것 같아서, 차라리 학업관리를 잘 하는 것이 훨씬 미 래를 준비하는 데에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박하는 의견 은 이성교제를 하면서 쓰게 되는 비용과 시간은 각자가 어떻게 스스로 조절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는 돈 과 시간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가져오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견이다. 또한, 이성교제는 학창시절에서의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물론, 좋지 않은 끝맺음 또한 존재 하지만, 훗 날 그것 또한 추억으로,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는 닳지 않는, 잃어버 릴 수 없는 보물과도 같다. 나이가 들어 그때의 일을 추억한다면 얼마 나 행복하겠는가? 이런 추억 하나조차 없는 사람이 오히려 더 안타까 울 따름이다. 학창시절 이성교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린나이에 이성을 만나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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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 영양가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양가의 의미가 무엇인가? 좋아하는 사람은 음식으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다. 사랑 하는 사람에게서 영양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서로 좋 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한 영양 아닌가? 나이가 어리든 나이가 많 든 이성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신이 정한 자연의 섭리이고 매우 자 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 감정을 억누르고 가로막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성 친구를 사귀면 학업에 소홀해진다 등의 문제로 이 성교제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것도 자기 스스로의 조절 능력에 달렸다. 이성친구와 함께 놀 수도 있고 또는 공부하면서 학업 에 신경을 쓰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과 의지에 달 렸다. 오히려 좋아하는 이성 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부족한 부분과 지식을 공유해가며 행복하 고 편안한 마음에 공부가 더 잘 될 수도 있다. 물론 섣부른 판단으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실수도 항 상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뼈저리게 배우고 경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시절부터 조금 더 폭 넓게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매번 같은 성의 친구들과만 어울리던 이들에게 이 성이란 다른 분야를 더 많이 더 옳은 방법으로 접할 수 있는 건강한 기회가 조금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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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청소년 성형수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Grade 11 손주현 Julie Son 우리 한국 사회는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파 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오직 더 예뻐 보이고 싶고 잘 생겨 보이고 싶은 욕심에 성형 수술을 많이 한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성 형 수술이 희망이 될 수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 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나아지고 싶은 욕심에 돈을 들여서까지 살 을 빼고, 복근도 억지로 만들고, 코에 필러도 넣어 가며 여러 가지 문 제를 낳는다. 특히, 성형수술은 청소년들에게 문제인데, 그들은 집단에서 소외되 는 것과 혼자 외롭게 고립되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외모 때문에 따돌 림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한다면 차라리 성형을 하자고 선택한다. 마음 안에서 자신감을 찾지 못하고, 좀 더 예뻐져서 인기를 얻고, 그래서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헛된 희망을 갖는 청소년들이 사실은 은근 히 많다. 온스타일 채널의 성형수술 방송, ‘렛미인’을 보면 청소년들한 테도 이러한 희망을 주고, 더욱 더 예뻐지고 싶어 하는 그들의 마음을 자극한다. 못 생긴 청소년들이 의뢰인으로 등장해 학교에서 놀림 받는 방송을 만들어 상처 받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주인공은 울면서 자살하 고 싶다는 말까지 서슴치 않고 한다. 하지만 결국 성형 수술을 하겠다는 결심을 내렸을 때, 후회하기 시 작 한다. 성형수술을 하게 되면 부작용이 너무 많아 위험하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성형 중독에 빠진 청소년들은 하 나 둘 고치다가 또 다른 부위를 더 고치고 싶어 한다. 장기를 자르거 나 뼈를 깎아 버리는 끔직한 수술은 성장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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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청소년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누구나 예뻐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죽음까지도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성형수술은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예쁘다는 기준은 사실 객관적이지 않다. 아름다움에 관한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 라 마음에서도 비롯된다. 부모님들은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귀하게 낳 아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자의 삶에 맞게 신중하게 만들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정해 놓은 얼굴대로 무리하게 바꾸 고 싶어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외모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누구나 생긴 모습 그대로 존중 받는 사회 가 된다면 우리가 성형 수술에 이토록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지 않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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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평>

과거와 현재, 시대에 따른 바른 선택 개화와 위정척사

Grade 11 최진이 Jinny Choi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자 고종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와 동 시에 조선에는 민씨 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통상 개화파도 성장하 고 있었다. 곧 이어 1875년에 운요호 사건이 터졌을 때는 지금까지 흥선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는 완전히 다른 정책이 펼쳐졌다. 바로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한 것 이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부산, 원산, 그리고 인천을 개항해야 했다. 하지 만 강화도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인 동시에 불평등 조약이기도 했다. 조선은 일본에게 조선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도록 해야 했고, 치외 법권을 허락하여 일본인이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 영사가 재판해야 했다. 이러한 강화도 조약의 불평등한 조건만 보고도 나는 내가 당시 조선 의 백성이라면 유학자의 위정척사를 지지했을 것 같다. 물론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사시찰단의 보고를 고려한다면 개방 정책을 지지하 는 것이 나라에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개방을 하면 다른 나라의 좋은 점을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 를 들어 조사시찰단의 일원이었던 박정양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인재를 등용할 때 왕족, 사족, 그리고 평민으로 구분하고 있을 동안 일본에서는 전적으로 재주로써 사람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 기 때문에 평민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자도 많았다. 또한 방적소에 갔 더니 남녀가 함께 모여 있고, 증기를 이용해 솜을 실로 뽑아낸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제도가 비록 장대하나 모두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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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것을 보여주는 보고를 통해서도 일본의 선진성을 알 수 있다.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을 것이 라고 생각한다. 우선 외세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판단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다. 개화파는 조선의 부족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개혁 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의 약점을 꿰뚫고 있던 외부의 세력 들은 조선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고 했다. 때문에 개방을 했을 때 일본 같은 외세로부터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대량 생산할 수 있던 서양의 공업 생산품과 유한한 조선의 농산품을 교역했을 때 조선은 경제적인 손해가 불가피했다. 게다가 내가 만약 당시 조선의 백성이었다면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 그리고 신 미양요로부터 생긴 반개혁 정신에 의해서 개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 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FTA에 대한 나의 입장은 다르다. 그 이유는 과거의 조선과 현재의 우리나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경제 발전은 대외교역을 통해 성장을 이룬 전형적인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TA (Free Trade Agreement)는 나라 사이의 무역을 가로 막는 모든 장벽을 없애고 한 나라 안에서 무역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자유 무역 협정이다. FTA를 맺은 나라끼리 는 무역할 때 관세를 낮출 수 있기 때문에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미 자유 무역 협정 협상 덕분에 우리나라는 미국으로 자 동차를 수출하기 쉽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동차에 관세가 없어지면 미 국의 자동차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자동차를 사고 팔 수 있기 때문에 공평한 경쟁을 할 수 있다. 또, 서로 공평하게 경쟁을 할 때에 우세하 기 위해서 서로 더 좋은 차를 만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자동차의 품 질도 좋아진다. 한 곳에서만 만드는 자동차보다 서로 경쟁 할 때에 만 드는 자동차가 훨씬 좋은 자동차이기 때문에 소비자들한테도 좋은 일 이다. 즉, 나라 간의 산업 수출이 쉬워지고 투자가 활발해져 더욱 발 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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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발전보다는 외세적 침략 문제가 중점이 되었다면 지금은 발전이 더 중점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힘이 있어지고 다른 나라와 보다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미래에 우리 가 같은 쟁점을 논의할 때, 더욱 능동적인 선택의 입지를 구축한 나라 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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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평>

과거에 비춰진 현재의 모습 개화 정책과 자유무역협정의 비교

Grade 11 김노아 Noah Kim 1800년도 후반, 조선에서는 나라의 미래가 걸린 개방 정책에 대하 여 나라가 외세와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자는 입장의 통상개화파 (通商開化派)와 서양 문물로부터 철저하게 나라를 지키자는 입장의 위 정척사파(衛正斥邪派)가 격하게 대립했다. 위정척사는 이로운 것은 지 키고, 사악한 것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배척하자는 사상을 바탕 으로 주어진 이름이다. 통상 개화론자들은 조선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 여야 과학과 무기 기술이 발전을 할 수가 있고, 또한 조선의 신분제도 역시 서양의 나라들처럼 폐지되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 다. 반면, 위정척사파는 외세가 많은 양의 공산품으로 조선의 시장을 잠식하고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양쪽의 공방이 점점 치열해졌고, 결국 흥선대원군 정권이 물러나고서야 개화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양쪽 의견을 역사적인 배경지식을 이용해 심층 분석해보면, 늦은 개화라도 아예 없는 개화보다는 낫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개화를 추진해서 무조건 역사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았 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개방이 늦어졌다면 더욱 심한 경제적 고립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지금의 비교적 안정적인 위치까지 오기가 더 힘들어 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화를 진행하고 나서부터 서양의 우수한 문물이 조선 땅에 들어오 기 시작했다. 조선이 이전까지 보유하고 있지 않던 다양한 신식무기들 이 조선군에 지급되었고,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창설에 보탬이 될 수 있었다. 조선에 없던 기술을 다른 나라로부터 전수받음으로써 국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조선은 이웃 나라인 청나라와 일본에 거의 모든 면에서 심히 뒤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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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군사적인 힘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 정권의 안정성, 효율 적인 외교 능력 등이 좀처럼 발전을 하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 은 각각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상태였다. 하지만 조선만은 개 방을 늦추었기에 효과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통상수교 반대정책으로 인해 이웃나라와의 경쟁에서 밀 려나고, 결국 교역에 경험이 없었던 조선은 다른 나라와의 불평등한 조약으로 그 위상을 실추하게 된다. 불평등한 조약들 중 가장 대표적 인 조약은 강화도조약이다. 강화도조약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 자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진 불평등 조약인데, 이 때 문에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서 많은 횡포를 부렸던 것이다. 만약 애초 에 프랑스나 미국에 문을 열었더라면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미리 파악하고 일본에게만 유리한 교역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은 얼마 전까지 주요 쟁점이었던 FTA 찬반 논의와 아주 유사하다. FTA를 찬성하는 쪽은 대한민국의 수출시 장을 확장하기 위해 관세 없이 해외 시장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허용하 자는 입장이다. 반대로 FTA를 반대하는 쪽은 대한민국 토종 물건들이 경쟁력을 잃게 되고 상인들의 삶이 더 곤궁해질 수 있다며 반박했다. 이 쟁점 역시 나라 경제 발전을 참고하며 객관적으로 봤을 때, FTA를 찬성하는 쪽이 국익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FTA를 허용하면 국민들이 값싸게 좋은 해외 물건들을 보급 받을 수 있다. 물론 FTA를 허용함에 따라 생기는 문제들도 있다. 품질 좋은 해외 물건들의 값이 싸지면서 소수의 상인들의 물건들이 국내 시장에 서 경쟁력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역시 효 과적인 보완 작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사료된다. 토종 품 종을 개량해서 경쟁력을 올리거나, 몇몇 품종만 관세를 붙이는 등, 다 양한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개화와 FTA 두 쟁점 모두 나라가 어떻게 발전하느냐의 문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라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 만큼 신중하게 정 책을 펼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개화나 FTA가 성공하려면 가장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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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세계 속의 대한민국의 영향력이다. 이것이 곧 국가 브랜드가 되어 한국의 위상을 더욱 가치 있게 끌어올림으로써 세계에서 경쟁력 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라의 입지가 떨어지면 이러한 무역 협정들은 한국에게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나라에 이득 을 최대화하려면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 이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조선의 영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결과, 외세에 침탈당하는 많은 수모를 겪었다. 그 결과를 반복하지 않기 위 해서는 국력을 키우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를 통해 밝은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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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평>

대한민국, 화이팅! Grade 11 이연재 Jennifer Lee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은 조선이 중국의 청나라와 일본에게 나라 의 힘을 빼앗기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힘을 모은 집단과 예전부터 힘이 있던 집단 사이에서 서로 싸워서 결국 1884년 갑신정 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조선후기 사회는 봉건적인 구습을 깨고 근대화 사회로 새롭게 발전 하려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지식인들과 양반들 사이에서 는 조선을 더욱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생각들이 퍼져 나갔습니다. ‘조 선책략’ 등과 같은 양반출신의 지식인들이 외국에서 들어 온 책을 읽 으면서 외국의 지식과 문화에 한 발짝 더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 면서 조선사회가 새롭게 변화되고 시민들의 눈이 새로운 것에 더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의식도 성장했습니다. 평등사상, 민주적인 분위기,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에 앞장섰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잘 배우지 못했던 평범한 농부들이 힘을 합 쳐 하나가 되어 일본군과 싸우는 중심에 섰고, 이러한 정신은 3.1운동 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중국 등 외세와 여러 번 전쟁을 겪으면서도 결코 지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될 수 있었던 것 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가진 결과라고 생 각합니다.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전쟁 속에서도 우리나라는 자주성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지금까지 한국이 세계 속 에서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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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을 배우면서 얻은 역사적 교훈 은 모든 시민들이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으고, 다함께 힘을 하나로 합 치면 언젠가는 그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나 라 사랑과 그에 대한 열정이 매우 크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지금은 우 리나라가 잠시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전 어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처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조국을 지키려는 정신을 기억해야 합 니다. 더욱 더 한 마음, 한뜻으로 모두 다 같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성장시킬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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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평>

Utoro Village Grade 11 박성규 Maximillian Park 우토로 마을은 일본 교토부 남부 우지시에 위치하고 있다. 1942년 일제 강점기, 일본이 교토에 비행기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당시 조 선에서 약 1300여 명의 한국인을 징용해 이 공장 건설에 동원하도록 했다고 한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일제 강점기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돌아 갈 자금 부족으로 인하여 일본에 남아서 생활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주민이 1300명에서 겨우 150명밖에 남지 않은 지금 우토로 마을 주민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한국에 남 아 있는 가족들이 없고, 한국 국적도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떠나 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더불어 최근 한국어 수업 시간 중에 시청한 MBC ‘무한도전’ 프로그램에서 우토로 마을에 대한 내용을 보고 더 깊 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기 전에는 우토로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도 몰 랐다. 하지만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고난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고, 특히 어렸을 적 고향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김경남 할머니 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본이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들에게 저지른 만 행들에 대한 증오심이 들었다. 동영상을 보면서 우토로 마을의 어려운 상황과 시설들을 확인하며 가슴이 많이 아팠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토로 마을 주민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밝 은 태도를 유지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당장 조국으로 돌아 가고 싶어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 계속 일본에 남아서 생을 마감하겠 다는 의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일본 국적을 취득할 기회가 있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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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 계속 살겠다는 의지와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을 보며 과연 나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 학생들 대부분 이 너무나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좀 더 역사에 관하여 깊은 관심 을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특히 일본이 조선한테 저질렀던 악행에 대 해서 알면서 당시 이러한 고생을 견뎌야 했던 우리들의 조상들에 대하 여 기억 할 수 있게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 다고 느꼈다. 나는 전 세계에 일본이 일제 강점기 시기에 우리 조선인 들에게 저지른 만행과 이를 극복하려 애쓴 우리 조상들의 강한 불굴의 의지와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

Utoro Village is a village located in Kyoto, Japan. It was formed during 1942 when the Japanese military brought about 1300 Koreans to Japan in order to have them assist the construction of a military airplane factory. Despite the end of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after the end of World War 2, the Koreans trapped in Utoro didn’t have enough money to return to Korea. A long time has passed and now only 1 of the 1300 original people who had come to Utoro is alive while the entire population of Utoro has dropped from 1300 to a mere 150. I am writing this to express my thoughts upon watching a documentary about this village during Korean class. Before I watched the video, I didn’t even know that Utoro Village existed. It was sad to see people set in such disheartening conditions and also infuriating to hear about Kang Kyungnam’s account of what the Japanese did to her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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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hild. For me, the most impressive part was when I saw that the villagers of Utoro continued to live with hope. I was amazed that the villagers were prepared to die in Japan, and even more impressed that they wanted to die as Koreans. I know that I wouldnâ&#x20AC;&#x2122;t have been able to do that. After

watching

the

video

about

Utoro

Village,

I

thought that it is important that us Koreans know about our history so that we wonâ&#x20AC;&#x2122;t forget the bad things that the Japanese did to us. I feel like Koreans do not know their own countryâ&#x20AC;&#x2122;s history very well, and that we need to know more so that we can respect the pain that our ancestors went through many years ago. I want to show the world how amazing our country and ancestors were, and how they never gav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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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평>

우리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Grade 11 차성호 William Cha 우토로는 일본 교토부 남부에 위치한 우지시의 한 마을이다. 본래의 표기는 우토구치였으나 잘못 읽혀져 우토로가 되었다. 이 지역은 상수 도 시설이 없어서 직접 우물을 파야 했으나, 지금은 주변의 도움을 받 아 어느 정도 식수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하 수도 시설은 아직도 없다. 비가 오면 이 마을은 속절없이 침수당한다 고 하며 2017년 재개발을 할 예정인데, 그때는 이 마을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우토로 마을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에 강제로 징용 당한 조선 사람들이 광복 이후, 집에 돌아갈 능력이 없는 일부 조선 사람들 이 잔류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 당시에 일본군 의 비행기 공장 건설 공사에 강제로 끌려 온 징용자들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일본에 거주하던 사람들이나, 광산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 자들 중 여기서 일하면 더 이상의 징용은 없다는 일본군의 말에 속아 우토로에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공사는 중단 되었고, 자연스레 노동자들은 실업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활하던 합숙소가 현재 우토로 마을이 된 것이다. 이후 그곳에 살던 재일 한국인들은 퇴거 위기에 늘 시달려야 했으며, 이러한 문제들로 당시 1300여명이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2015년 기준으로 150여명밖 에 거주민이 남지 않게 되었다. 우토로에 사는 주민들은 각자의 고향을 마음에 묻고 산다. 그렇지만 쉽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금전적인 문제나, 특히 1세대 같은 경우는 많은 연세로 거동하기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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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셔서 쉽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광복 이후 한국은 경 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에 집중했고,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사정에는 눈 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우토로 마을의 사정을 아예 몰랐거나, 무시하는 상황이 빈번했다. 또한 가족들이 흩어진 사람들도 많았고, 고향으로 돌아 가봤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전쟁 이후 많은 것들 이 바뀌었으며, 전쟁 중에는 언제 돌아갈지 모르고 우토로에 정착을 하였기에 우토로가 말 그대로 제 2의 고향이 되어버린 것이다. 궁극적 으로 우리가 너무 늦게 관심을 가져서 이런 슬픈 일이 초래된 것일지 도 모른다. 하지만 2015년 9월 5일, MBC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하하 씨와 유재석 씨가 우토로 마을을 방문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유재석 씨와 하하 씨는 우토로 마을에 살아 계신 김경남 할머 니를 위해 할머니의 고향인 경남 사천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고향 음 식들을 선물하였다. 90세가 이미 넘으셨고, 어릴 적 고향을 떠나와 80 여 년간을 우토로에서 지내오신 할머니는 고향의 사진을 보며 “나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걸 봤으니 눈을 감고 편히 갈 수 있겠다.”고 전하였다. 유재석 씨와 하하 씨는 헤어질 때에 할머니께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는 울지 말라며 위로를 하였고, 할머니는 “절대로 남의 것을 훔쳐 먹고 나쁜 짓을 하 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 고 역사적으로 잊혔던 사실을 새롭게 접하게 되었으며, 우리가 모르거 나 무시하고 지나왔던 일들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며 잠시 눈물을 흘리지만, 금방 잊힌다면 진정한 눈물의 의 미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토로는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곳이 며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이다. 늦게나마 세상에 이 기막힌 사실들이 방송을 통해 알려졌지만 우리 는 이 아픈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며, 그 고통을 겪고 살아낸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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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작은 것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노 력은 금전적인 문제보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우선이고 가장 중 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어, 관심을 갖게끔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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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평>

숨기지 말아야 할 과거의 진실 Grade 11 김남호 Namho Kim 우리나라가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 말로 다 할 수 없 는 괴로움을 겪었다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당했고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는지는 사실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어 시간에 본 영상 한 편이 내 마음에 역사적 아픔을 일깨워주는 감동을 주었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본 우토로 마을을 찾아갔다. 과거 일본으로의 징용과 징병을 강요당했던 분들 중 아직까지도 살아계신 어르신들을 만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한과 서러움을 담은 내용이었다. 한국의 고향과 그곳의 정취를 어르신들에게 대신 전해드리자는 계기 로 시작되었다. 영상 처음 부분에서 진행자 하하 씨도 우토로 마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고통 받고 고문당했는지 잘 알지 못하였다. 하지 만 하하 씨는 우토로 마을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얼마나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 았는지를 듣고 나서 솟구치는 슬픔과 원통함을 감출 수 없어 보였다. 이 영상에서 제일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은 하하 씨와 유재석 씨가 같이 마을을 돌아다닐 때 마을 안에 수도시설이 없어 물이 빠지지 않 고 그렇게 된 이유는 원래 이 지역이 전쟁을 대비한 항공장으로 지어 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드릴이나 삽도 주지 않고 일본인 들은 분명 그냥 조선 사람들에게 손으로 땅을 파게 하였을 것이고 우 토로 마을 지도를 보면 항공장 쪽보다 아주 아래 부분에 있는데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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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당시 조선인들이 맨손으로 팠다고 생각하니 깊은 슬픔이 솟아 올라 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하 씨와 유재석 씨가 우토로 마을을 떠날 때 할 머니에게 정성껏 인사하는 장면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할머니는 떠 나보내는 것이 물론 슬펐지만 하하 씨와 유재석 씨의 마음을 생각해서 애써 눈물을 참으시고 노래를 부르셨다. 하하 씨와 유재석 씨는 눌렀 던 감정이 벅차올라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아주 서글프게 우는 장면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이 영상을 보고 그동안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많았지 만 내가 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 됐고 어떤 것을 고쳐야 되는지 알고는 있다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들은 공부해야지 말만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친구들과 컴퓨터로 톡을 하 거나 유투브 등을 보면서 세월을 허비할 때가 많다. 말만 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며 고치기 참 어렵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치러왔는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마음만 가지고 있고 행동으로 옮 기지는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역사적 아픔에 대하여 외면하지 말고, 함께 동참하며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고, 잘못된 것들이 더 이상 이 사회에 만연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라고 생 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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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만평>

흥선대원군의 개혁 Grade 11 최민서 Michelle Choi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조선은 이미 60여 년 동안 세도정 치에 쇠약해져 있었다. 관리들의 비리와 수탈로 인해 삼정의 문란이 심했고 또 이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비참해져 갔다. 삼정(三 政)의 첫 번째, 전정의 문란은 법으로 정한 토지세 외에도 갖가지 명 목의 부과세와 수수료를 농민에게 물린 관리들의 부정행위였다. 두 번 째, 군정은 장정이 직접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던 것을 말하는 데, 양반은 병역이 원래 면제된 반면, 무력한 농민들은 관리들의 갖가 지 부정행위에 고통을 받았다. 셋째, 환곡은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고 리대로 변해 폐단이 아주 심했고 농민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기 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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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해결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개혁을 단행한 다. 삼정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양반들의 특권을 폐지하는 특단의 조치들을 감행하게 된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폐지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기존의 서원 은 학문 연구와 선현 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 관이었으나 서원이 전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면세, 면역의 특권을 누리 고 국가의 재정을 좀먹는 붕당의 근거지가 되어버렸다. 이 문제를 알 게 된 대원군은 즉시 600여개의 서원을 철폐했고, 유생들의 강력한 반 발을 불러 일으켰다. 서민을 안정시키려는 정책들은 하나같이 양반이 이전까지 누리던 것 들을 빼앗는 것이었기에, 양쪽을 만족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 다. 이 그림에서 양반 무리와 서민 무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싸우고 있는 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양쪽을 만족시키기가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려고 했다. 결국 유생들의 반발에 부딪혀 흥선대원군은 10년의 정치를 마감하 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일반 백성과 양반, 모두를 아우르는 점진적인 개혁을 했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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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지>

Dear Chloe Grade 11 황윤하 Jeff Hwang

Hi, Chloe, For you who is interested in Korean history, I will tell you about the situation in the end of the Choseon era. 한국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고종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버 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게 되었어. 당시 왕의 외척세력인 안동 김 씨들이 득세하는 행태를 보고 아들 고종의 부인만큼은 친인척이 별 로 없을 것 같은 민비를 택했지.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민비 역시도 정치적 야심을 키우면서 민씨 세력들을 끌어 들인거야. 당시 근대화가 세계적인 흐름인지라 고종과 민씨 역시도 개화정책을 추진해 갔고, 외 국과의 교섭과 통상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가 자연스럽게 등장하 자 전통을 고수하자는 수구파의 반발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어. 그러던 중 1882년 임오년 6월,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인 별기군 간의 분쟁에서 발생한 임오군란은 처음에는 흥선대원군이 사태수습을 했지. 하지만 군란 처리를 위해 청과 일본이 출병한 데다 특히 청은 많은 대 군을 출동시키고 대원군에게 책임을 물어 청나라로 압송해 데려갔어. 이후 고종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에 조인하였으며 그동안 민비 측근도 세력을 점점 회복했어. 이후 민비를 비롯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사이가 급속히 나빠 졌는데, 민비와 온건개화파는 조선에 진출한 청나라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하려 했고 급진개화파는 일본에서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비용을 마련하려 했으나 불발되고 그들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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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1884년 12월, 급진개화파는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에서 폭 탄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청나라를 의지하는 사대당 요인들에 대한 암 살을 시도했으나 한 사람만 중상을 입히고 말았어. 창덕궁에 달려가서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 거짓으로 보고하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기고 사대당 요인들을 죽였는데, 다음 날 급진 개화파는 혁신정강 14개조를 발표하고 개화 실시를 선언하였어. 그렇지만 청군 1500명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개화파 일당 은 패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약속대로 이들을 제대로 돕지 않고 철군해 버려서 갑신정변은 결국 3일 천하로 끝나고 만거야. 하지만 우리가 주목 해야 할 점은 갑신정변은 우리 민족이 근대 국 가를 건설하려한 적극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어. 개화 운동과 민족 운동을 계승하게 하였으며 외세의 반침략적인 움직임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의 기원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 세계 여러 열강들이 개방을 요구하는 시기에 가장 가깝게 의견을 하 나로 모아야 할 대원군과 민비 주변의 세력다툼이 결국은 외세인 청나 라를 끌어 들였고, 열심히 왕권 강화 정책으로 조선을 살리고자 애썼 던 대원군은 세계정세를 바로 보지 못하고 힘을 잃은 채 청나라에 납 치되는 수모까지 겪게 됐다는 것이 모두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야. 고종 은 급진개화파와 함께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개방을 위해 힘썼지만 믿고 의지한 일본의 등돌림으로 무산되었고, 민비는 청나라의 힘을 믿 었으나 결국 반대 세력인 일본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결국 다른 나라에게 의지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 알게 해 줬어. 그 후로 우리민족은 완전 자주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어. 그리고 민중도 개혁에 같이 동참을 하는 운동이 벌어졌 고 평등사회를 위해 다 같이 애썼으며 오늘날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어왔단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가 너의 역사공부에 조금 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에 또 보자. 안녕. Your friend, 황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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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풀뿌리 민주주의의 출발 Grade 11 김여경 Jennifer Kim 1882년 구식군인과 신식군인인 ‘별기군’ 간의 차별대우로 ‘임오군 란’이 발발했다. 고종의 근대화 정책으로 새롭게 조성된 신식군대와 다르게 기존의 구식군대는 제대로 된 급여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신식군대에게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에 항의하는 구식군대에게 돌아온 것은 잡쓰레기가 가득한 오래된 쌀을 일 년치 급여로 받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구식군대는 신식군대를 포함해 당시 별기군을 관할하 던 일본군까지 죽이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며, 민비를 노려 궁궐까지 쳐들어가, 격렬한 시위를 하였다. 타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은 구식군 인들은 큰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고종과 민비는 주체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구식군대의 화를 잠재우려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임오군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조금씩 우리나라의 여러 사건들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884년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당 시 개화파의 두 부류인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있었는데, 청나 라의 분위기를 따라 갔던 온건개화파가 주도하는 분위기에서 당시 조 선의 개화가 너무 더딘 것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개혁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급진개화파가 개화를 주장하며 일으킨 사건이다. 청프 전쟁으로 청의 병력이 조선 땅에서 반 이상 빠져나간 상태에서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삼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이 주도 하는 급진개화파는 궁을 장악하고 고종을 인질로 잡은 뒤, ‘14개조의 개혁안’을 발표하며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조선의 자주권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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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문벌타파, 조세제도 개혁, 부패한 탐관오리 처벌 등 당시로서는 혁 명적이며 근대적인 조항들이었다. 이들은 보다 빠른 개화와 신기술 도 입, 근대적 사고의 방향 등을 조선에 도입하고 적용하고자 노력했지 만,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정권의 진압에 의해 제대로 된 뜻을 펼치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단 삼일 만에 종료되었고, 큰 변화를 일으 키진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개혁에 큰 발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십 년 후, 1894년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적 성격과 반외세적 의지를 표방하며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강압적 인 정권과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 아래 끊임없는 차별과 불공정한 일들 로 지친 평범한 농민들이 봉기한 일이 있었다. 바로 전라도 고부 지방 의 조병갑이라는 군수가 당시 자기 아버지의 공적비를 세운다는 명목 하에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필요 없는 각종 잡세를 거둬들여 일 반 사람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한편 최제우를 중심으로 모인 ‘동학’은 모든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을 주장하던 중에 울분과 서러움에 고통 받던 농민들의 마음을 달래주게 된다. 결국 농 민들은 하나 둘씩 모여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고, 부패한 탐관오리 처 벌, 노비제 폐지, 봉건적 신분 차별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등 당시로 서는 혁명적이면서도 가장 민주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관군과 싸우게 된다. 하지만, 농민들의 힘이 전국적으로 결집되고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 해지자 조선정부는 또다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갑신정변 때 맺은 ‘텐진조약’의 조건으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의 병력이 동시에 조 선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에, 농민들은 반외세를 주장하며 남의 나 라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자립심과 독립심을 더욱 강하게 내세웠다.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끝까지 싸운 우리나라 농민군들은 신무기 기술의 부족으로 당시 잘 나가던 일본군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민중이 힘을 합쳐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동학농민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자 평등사회로 진입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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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우리 조 상들이 어떤 방식과 어떤 사상을 가지고 살았는지 아는 것은 오늘 날 의 우리나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앞에서 언급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 일련의 이 러한 사건들은 우리 조상들이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변호하고, 더 나 은 세상을 꿈꾸며 직접 만들기 위해, 정권의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보다 더 강력한 세력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 신의 뜻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다. 그러 한 어르신들과, 이런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 태어난 나 역시도 불굴의 의지로 옳은 것을 지키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정신을 앞으로도 계 속 본받아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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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저는 정빙한이에요 Grade 11 정빙한 Bing-Han Jerry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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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家好, 我叫鍾秉翰。我來自台灣的台北,我是高中生。我喜歡打籃球, 玩電腦遊戲, 和拉小提琴。我的家庭中有四個人, 我的爸爸,媽媽跟 妹妹。我是在1998年出生的,

今年18歲。我會講一點韓語,英語,中

文,跟閩南語。現在的我我正在學韓語, 韓語對我來說不會很難,因為韓 語跟中文很多地方很像。我是一個熱愛生活,積極向上,開朗樂觀,做 事認真的男孩。在困難面前,我從不後退,總是開動腦筋,想方設法去 解決問題,克服困難。而每解決一個問題,克服一個困難,都使我的信 心得到了提升。我相信,只要有足夠的自信,再加上加倍的努力,就一 定能戰勝各種艱難險阻,通向成功的彼岸。在我目前的學習過程中,我 能夠認真對待每一門課,認真預習,積極複習。遇到問題,向同學請 教,向老師諮詢,特別是英語有些我看不懂的單字。我會不斷改進學習 方法,找到最適合自己的學習方法,調整學習計劃,合理安排時間我把 學習當成獲取知識,豐富自己的樂事,對它充滿了興趣。我非常喜歡音 樂,在學校積極參加管弦樂團,在管弦樂團裡,我們相互配合,並為學 校去參加比賽,獲得優異成績,為學校爭得了榮譽。並且我也很善於中 提琴,也曾獲得全國性獎項。通過參與學校的管弦樂團,我深深地體會 到做任何事兒,不僅需要熱情,更需要認真負責的精神和與他人合作的 精神。對於我的未來,我想要讀醫學系或者是電機系,因為學醫的話可 以幫助到很多人,學電機的話可以改變人類的生活。 謝謝大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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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저는 오말이에요 Grade 11 오말 모란 카스트로 Omar Morán Cas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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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a, soy Omar Morán Castro, tengo 16 años y soy estudiante en Asia Pacific International School, también soy futbolista. Nací en Mexicali, Baja California, México el 23 de Febrero del año 2000. He vivido en Mexicali, Puerto Vallarta, Ciudad de México, Santiago de Chile, Pinotepa Nacional, San Felipe y Seúl. Dentro de mis gustos y aficiones se encuentran el piano, el fútbol, la comida y música mexicanas, escribir, hablar y cantar. Soy hincha a muerte del Club Atlético de Madrid SAD de Esp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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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Do you know the “Titans”? Grade 11 채리티 Charity, McClure Hello, my name is Charity McClure. I am from Texas in the United States. I am in 11th grade at APIS. I’ve lived in Korea for almost a year now. My favorite part of living in Korea is all the friends that I've met and the fun memories that I have made. I love to listen to music and watch movies on Netflix. My favorite activity is to hang out with my friends. I have two dogs named Teddy and Natalie, and I enjoy taking care of animals. My favorite food to eat is anything that is Italian or Mexican. My favorite school subject is World History, but I want to pursue a career in Nursing. When I lived in the United States, cheerleading was a huge part of my life. I started cheerleading when I was 8 years old, continued for 7 years, and won many national and world championships. I was devastated when I thought that I would have leave such a big part of who I was behind when I moved to Korea for my dad’s job. However, Korea has brought me so many new experiences and a different culture, such as food, that I would’ve never known living in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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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cheerleading taught me many life lessons and values

that

I

can

apply

to

my

everyday

life.

First,

cheerleading taught me the importance of teamwork since my teammates and I had to trust each other and work hard individually so that we wouldn’t let our teammates down. During competitions, I also learned that when you make mistakes or lose a competition you need to persevere and work harder so that you will improve. Lastly, cheerleading taught me the importance of always having a good attitude and staying positive even through difficult times, because of the long practices and injuries that I went through in cheer. All of these lessons directly translate to my life outside of cheerleading, and I believe that cheerleading has made me a better athlete and a better person. Therefore, I want to make a cheer club at APIS because I believe that interested students could benefit from the life lessons and values that cheerleading can bring. Cheerleading at APIS could also bring the whole school more school spirit and greenhawk pride.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채리티 맥클루예요. 저는 미국 텍사스에서 왔어요. 저는 아시아 퍼시픽 국제 외국인 학교 11학년이에요. 제가 한 국에서 산지는 1년 정도 되었어요. 한국에서 친구들과 재미있는 추억 을 많이 만들고 있어요. 저는 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넥플랙스에서 영 화를 보는 것을 좋아해요. 저는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해요. 저에게는 테디와 나탈리라는 강아지가 있는데, 저는 동물을 키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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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좋아해요. 저는 아무 음식이나 다 잘 먹지만, 이태리 음식이나 멕 시칸 음식을 좋아해요. 저는 역사 공부를 좋아하지만 간호사가 되는 것이 제 꿈이에요. 미국에 있을 때, 저는 여덟 살 때 시작해서, 칠년 동안 치어리더로 활동했어요. 많은 국제 대회와 세계 챔피언 상도 받 았어요. 아버지 직업 때문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을 때 너무 힘들었지 만, 한국은 제가 새롭고 재밌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 곳이에요. 미국 에 있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음식들, 다른 문화들이 정말 재미있어 요. 치어리더를 통해 저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어요. 먼저 치어리더 활동은 개인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서로를 믿고 신뢰하지 못한다 면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팀워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시합이 있을 때, 어떤 팀원이 실수를 하거나 시합에 참여할 수 없을 때, 나머 지 팀원들은 더 열심히 연습하고 인내하는 동안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마지막으로 다칠 수도 있고, 연습도 길지만 이 과정을 통해 저는 어 려워도 늘 긍정적이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중요성을 배웠어요.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강인 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도 이 치 어리더 클럽을 만들어 활동을 계속해 보고 싶어요. 학생들이 치어리더 를 통해 얼마나 많은 흥미와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싶어 요. APIS에서 치어리더 활동을 하게 된다면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 지가 더 많이 생길 것이라 기대하며, 앞으로의 학교생활이 더욱 기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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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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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추운 봄 곧 돌아올 봄 날, 광복을 기다리며

Grade 12 설정환 Jeonghwan Sul 어느덧 땅에 추위가 누웠다 하늘은 우리의 마음과 같아지고 우리의 염원은 동굴이 되어갔다 그런 밤에 기도를 해보다 끝이 없는 공간 속에 저 보이는 희미한 꽃 이파리를 잡아보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추운 봄 동굴의 벽을 밀쳐내 봐도 떨쳐내 지지가 않는 우리는 서로를 밀어본다 그리고선 조금씩 더 걸어가 본다 그제야 잡힐 듯한 선량한 봄 얼어붙은 살결에 슬쩍 다가오는 따뜻한 꽃의 향기 이제서야 느끼는 희망의 추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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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메뚜기 가득한 들판 광복, 빛을 되찾은 고향을 그리다

Grade 12 윤희재 Hannh Yoon

나는 그린다, 그곳을 마음에 그려본다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 하고 매일 생각한다 바삭바삭한 메뚜기와 잠자리가 가득하던 들판 푸르른 풀들과 꽃들이 무성하던 그 들판 지금쯤 그곳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만약에, 만약에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만약에, 만약에 그날이 올 수만 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내려놓고 그곳으로, 풀 냄새 흙냄새 그윽하던 그곳으로 뛰어가고 싶다 그런 날이 오기만 한다면 그 푸르른 메뚜기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다 그날이 오길 나는 그곳을 매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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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갇혀서 살아가는 우리 식민지의 굴레, 그 안에서

Grade 12 유석현 Paul Yoo 언제까지 갇혀서, 아무것도 못한 채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가? 구름 하나 없는 하늘 바라보며, 푸르고 무한한 광경에 감탄하고, 또 평화를 느낀다 하지만 곧 현실을 깨닫고 만다 푸른 하늘에 다가가는 걸 막고 있는 철장, 희망을 잃어버린 현재에 분노를 느낀다 아무런 죄도, 또 잘못도 없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우리의 자유를 왜, 무슨 권리로 가져 가는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죽고 또 죽어도, 몇 백번, 아니 몇 천 번 죽는다 해도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다 우리를 가두었던 철장을 부수고 자유를 위해 싸워서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갈 것이다 우리는 새장 속에 갇힌 새들이 아니다 무한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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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봄, 봄, 봄 언젠가는 올 광복이여

Grade 12 손승한 Chris Sun

언젠가는 온다고 배웠다 따뜻한 봄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개나리가 필 때쯤 나의 미래도 만개한다고 배웠다 내 벗은 언제 오나 저 멀리 그 곳에서 잘 살고 있을 런지, 추운 겨울에 옷은 따뜻하게 입고 있을 런지, 혹여나 몸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더 이상은 붉은 태양에 경배하고 싶지 않고 붉은 태양을 두 손에 받들고 싶지도 않다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는 어느 밤 내 맘처럼 타오르는 열기에 태워버린다 언젠가는 온다고 배웠다 따뜻한 봄이 내 두 눈 감기 전, 활짝 핀 개나리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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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떡잎 광복의 꽃을 품고

Grade 12 홍형기 Henry Hong

처음부터 창대한 것이 어디 있으랴 모두 떡잎부터 시작하거늘 폭풍우가 떡잎에 몰아치는 순간 떡잎은 흔들리고 뿌리 일부 드러나고 줄기가 끊기기 직전이라도 떡잎은 절대 뽑히지 않을 것이다 비록 흔들리며 꺾여도 비록 잎 하나가 날아가도 떡잎은 굳건히 버텨 폭풍우가 지나간 뒤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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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잔치 흥 Grade 12 구재모 Jaemo Koo

흔들흔들 금빛밭 흔들려 그 중에 고동색 판자 위에 엇차엇차 살어리랏다 청자엔 흐르는 투명한 청주가 접시엔 놓인 오동색 안주가 판자 위엔 경사 난 마을 사람들 산들바람은 흥을 돋우고 장구소리는 목소릴 키우고 그 바람에 실려 나아간 흥 소린 옆 마을 없던 흥 돋운다 아이고 경사났네, 경사났어 우리가 가진 건 하나 없지만 이런 흥쯤은 있어야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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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가을 흥 Grade 12 조하은 Crystal Cho 마을 사람 한껏 모인 마당 둥그렇게 모여 풍물이구나 채배들 상모 돌아간다 빙그르르르 늙은 놋 꽹과리 운다 꽤갱꽤갱 꽹깨개괭 밧줄 얽힌 장구 읊어댄다 덩기덕 더러러러 고깔모의 꽃이 빨갛게 하얗게 노랗게 피어갈 때 얼씨구 어절씨구 흥 여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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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흥 Grade 12 김영은 Grace Kim 2016년 10월 유치원 때 이후 처음으로 부산에 갔다 아빠는 고향이 부산이다 서울에서 자랐지만 초등학생 때까지는 부산에 살았다 하지만 사투리를 쓰지 않으셔서 나는 아빠가 부산 사람 같지 않았다 아빠 고향 친구 아저씨 차 타고 감천 문화 마을도 가 보고 해운대에서 평소엔 싫어하는 회까지 먹었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엔 엄마 아빠 손잡고 국제시장에 갔다 때마침 자갈치 시장에선 자갈치 축제를 하고 있었고 술처럼 흥에 취한 행인들은 빵빵하게 나오는 트로트에 맞춰 춤을 췄다 일상에 지친 직장인, 학업에 지친 대학생 남 신경 쓰지 않고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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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자갈치 회 한 그릇에 소주 딱 세 잔을 마시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나 또한 흥이라는 전염병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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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情) Grade 12 김준현 June Hyun Kim

마음 심 변에 맑을 청이라 써 정이라 읽는다 마음이 어두워져, 마음이 차가워져 꼬인 실타래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무심히 전해져온 정은 마음을 맑게 만든다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워진 마음 속에서 꽁꽁 얼어버려도 따뜻하게 다가온 정이 언 마음 녹여낸다 녹은 눈물 흘러내려 누군가의 마음을 향해 갈 때 내일을 살아갈 양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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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情) Grade 12 장재근 Kevin Jang

그때 그 시절 기억이 난다 모두가 없어서 조그만 것도 나누던 그 시절 남의 일이 내 일인 것처럼 걱정하던 그 시절 나를 위하기보다 다른 이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그 시절 미운 사람들도 정으로 사랑했던 그 시절이 이젠 어디서도 다시 볼 수 없는 그 시절이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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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반쪽 짜리

Grade 12 박천진 Chun Jin Park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정이란 무엇인가? 주는 것일까, 받는 것일까 아니면 주고받는 것일까 사람들은 정에 울기도, 웃기도 하고 가슴을 한탄하기도, 가슴 찡하게 감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언제나 우리의 상한 마음 맑은 물처럼 깨끗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 정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정을 그리워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정에 목말라 한다 어쩌면 우린 아직도 혼자 있을 줄 몰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정을 그리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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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친구

Grade 12 정승수 Seung Soo Chung

한없이 큰 세상에 눈, 코, 입 피부색도 가지각색 허나 우리 속은 모두 다 똑같지 언어와 문화의 차이, 다 뛰어넘어 절대 중요하지 않아, 너와 나의 나이 그 중 하나 마음 잘 맞는 벗을 만나 때로는 위로를 받고 가끔은 상처도 받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느낌 함께 나눈 시간 추억으로 남아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약하며 서로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 그 느낌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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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굴렁쇠의 한(恨) Grade 12 최일식 Daniel Choi

나는 굴렁쇠와 같다 세상이란 작대기에 끊임없이 떠밀려간다 구르기 위해 만들어졌듯 살기 위해 만들어졌다 허나 구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뿌리 하나 박히면 찌그러지고 찢겨서 삐걱대는 것을 일그러진 굴렁쇠는 아무도 굴리지 않는 것을 녹이 슬어 없어지듯 나도 없어져간다 다시 구를 힘조차 이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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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바늘 꽂이의 한(恨)

Grade 12 이예경 Yeakyoung Lee 바늘꽂이 물도 흘려보낼 만한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과연... 아름다움이 목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생기는 구멍 커지는 구멍 비단은 점점 갈라진다 피하고 싶다 그 가시 하지만 그것이 내 쓰임이라면 그것이 나의 아름다움이라고 곧 세뇌를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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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바람따라 떠난 임이여

Grade 12 손승모 Seungmo Sohn 그 시작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덧 내 옆에선 항상 바람이 불었다 때론 연풍처럼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때론 돌풍처럼 나의 몸을 거세게 휘몰아치고 때론 태풍처럼 나의 사랑을 이리 저리 흔들었다 항상 작은 실바람이 날 휘감았지만 이제는 산들바람이 되어 멀리 사라졌다 잊을 만 하면 그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떠난 임 기다리며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마음이 쓰라리고 저려도 해소 할 수 없다 그대가 없음에도 내 마음에는 여전히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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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국 Grade 12 이희웅 Paul Lee

죽는 날, 나는 명예로울까 목숨 다 하는 날, 내 꿈은 이뤄졌을까 누구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았을까 나는 과연 자랑스러운 한국인일까 사는 동안, 나는 명예로웠을까 숨 쉬는 순간마다, 나는 꿈을 이룰 수 있었을까 나는 과연 모국에 헌신했을까 거울을 보며 반성한다 국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나의 존재 존재의 반만이라도 국가를 위했더라면 먼 훗날 누군가 내 삶을 뒤돌아 보았을 때 그들은 과연 나를 한국인이라고 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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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개 Grade 12 최윤진 Christine Choe

안개 자욱 가득히 내린 두 눈 밑 굽고 주름진 창백한 손 마디마디가 눈에 밟힌다 평온한 얼굴 눈을 감고 하얀 저고리 입은 채 나풀나풀 따듯한 온기 느껴진 손으로 조금 더 빨리 잡아야 했었나 눈시울이 붉어 가만히 말 못하고 드리워진 내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어 ‘괜찮다-’ 말해주네 이 몸은 늙어 갈색 흙 밭을 떠나지만 너는 아직 파란 하늘을 볼 날이 많지 않냐 누런 콧물을 흘리며 바보처럼 질질 우는 나를 다독이며 꿈에는 안 나오나 이토록 그리워하는 나를 살아생전 조금만, 조금만 더 하시며 그 큰 눈으로 나를 담아가시려고 하셨나 너무 그리워 작은 손을 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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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두 달이 흘러 꿈속에 나와 이젠 가겠다며 아이처럼 작고 하얀 손을 흔들고선 뿌옇게 흩어지네 안개 자욱한 새벽녘 빨간 심장이 빠르게 뛰고 굵은 눈물이 뚝뚝 비가 되어 쏟아진 날 하얀 저고리를 입은 천사가 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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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상처만 남긴 싸움 Grade 12 김민규 Min Kyu Kim

상처만 남긴 싸움 어른들의 생각이 달라서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사랑하는 그녀와, 가족과, 친구들과 어른들은 결국 다 우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지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별에서 오는 고통, 슬픔, 괴로움 어른들의 의미 없는 싸움에, 이득을 챙겨보고자 끼어드는 다른 나라의 어른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알긴 알까 저기 보이는 저 부질없는 선 어른들의 욕심과 다툼으로 태어난 선 빨리 허물어다오, 내 상처도 고통도 허물어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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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광복 5년 Grade 12 이규연 Edwin Lee 광복 5년 5년 전의 이웃이 적이 되어 만나네 광복 5년 얼마 긴 시간도 아닌데 우리는 너무 멀어졌네 광복 5년 우리는 너무 먼 길을 왔네 이미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 버렸네 광복 5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나? 우리는 남이 되어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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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학 Grade 12 황정호 Ryan Hwang 여기서도 뻥저기서도 뻥그리고 나는 엉엉엉 열심히 좀 할껄 공부도 좀 할껄 애들은 나를 보고 껄껄 농구가 뭐라고 게임이 뭐라고 엄마는 말한다 “공부 좀 하라고!” 넣고 넣고 또 넣고 하고 하고 또 하고 여자가 골키퍼인 듯 들어가지 않는 골 축구 공처럼 차이고 족구 공처럼 차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약을 먹은 듯 마음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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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시>

전쟁은 가라 Grade 12 최석영 Hannah Choi 전쟁은 가라 사람들을 죽이고 같은 민족과 같이 싸우는 전쟁은 가라 전쟁은 가라 같은 민족끼리 죽이려고 작정하는 이 끝도 없는 전쟁은 가라 우리를 해치고 사람들 슬프게 하는 전쟁은 가라 같은 나라라는 이름으로 두 동강으로 갈라진 것처럼 소통도 안 되는 이 나라들은 얼마나 더 우리 민족을 아프게 해야만 그만둘 것인지 나의 가족이 흩어져 서로를 향해 싸우게 되고 이런 자비 없는 나라 한 때는 ‘우리나라’였던 그 나라 이제 전쟁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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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

하나님 아버지께

Grade 12 오서현 Sally Oh

하나님 아버지, 요즈음 제 주변에서 참 흉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 장해 가면서 제 성격이 수차례 바뀐 것처럼, 이 세상도 저와 같이 성 장해 가며 많이 변했나 봅니다. 제 몸과 마음이 지친 것처럼, 이 나라 도, 이 나라의 국민들도, 모두가 지치고 병들었나 봅니다. 저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한국의 부패하고 불투명한 정치에 대해 많 은 불만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 거나 서로 한탄만 해대면 “왜 정작 고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뒤에서 만 저럴까”라고 하는 안 좋은 감정만 가지고 최대한 그 대화에 끼지 않으려고 하고, 저만의 생각은 혼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 이가 조금 더 차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더 넓어지고, 한 국에 대해 배우는 것이 하나씩 늘어날 때 즈음, 사람들이 왜 한탄만 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이 나라의 국민이기도 하는 동시에 ‘한낱’ 국민입니다. 저희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을, 무언가를 순수하게 바라고 그리고 진실을 요구 한다고 해서 이 나라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19살이 된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뉴스를 들었을 때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그동안 한국학 시간 때 배운 불 공평한 분배와 그것의 중심에 대기업이 있으며, 이 나라의 모든 경제 를 이끌어가는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하고, 해결 방안을 찾고 있 을 당시에 딱 이런 일이 터져서 모든 것이 퍼즐을 짜 맞추듯 다 맞아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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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미 양쪽 다 지나치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상태라 뭐라 말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말하기에 도 많이 조심스러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들 그것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정의롭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모두가 일을 했었더 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싶습니다. 물론 인간의 욕심은 끝 이 없고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결코 안했다고 딱 잘라서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라의 일이 이렇 게까지 된다면 저는 죄책감에 살아가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성격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죄를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처벌을 달게 받았을 것 같습니다. 아직 뭐가 맞고 틀린지 구분하기에는 많이 어리석은 나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제 생각엔 양쪽 다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한국의 무너진 질서와 경제, 뒤 틀리고 엇갈린 정부와 국민과의 신뢰도, 그리고 불공평한 경제적 공정 성 등이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를 띄우시고 홍수로 세상의 악한 것들을 쓸어버리신 것처럼, 한국 또한 이러한 엇갈린 것들이 이번 기회로 인 해 완전히 뒤집혀졌으면 오히려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양쪽 다 정직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세요. 서로 솔직해 질 수 있게 해 주시고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일 수 있도록 돌보아 주세 요. 신뢰가 없는 불신으로 나라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서로 간의 연결고리도 없고 이미 처참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워주세 요. 그리고 그 신뢰가 정직한 사회, 정직한 나라가 될 질 수 있도록 우리나라를 붙들어 주세요. 이미 저와 제 친구들은 내년에 미국 대학으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고, 저희 또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틀에 저희 자신을 가두고 맞 추어 가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미 사회에 입성하게 되어 이 기성세대 의 틀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 기성세대 의 틀에서 온갖 아픔과 슬픔을 참고 세상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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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달했을 때, 그 때에 저희 모두가 전 세대와는 다른 방법으로, 다 른 방식으로, 저희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희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이 기존 질서를 따르지만, 무 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도달 했을 때에, 그때 이 나라의 불공 정한 구조를 바로 잡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상대평가로, 점수만으로 사람을 평가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다윗을 외모로 평 가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중심을 보고 고르신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 가짐과 다짐,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이끌어 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길잡이가 되고, 그러한 미래가 되고 싶습 니다. 부디 저 말고도 이 방에서 같이 기도문을 쓰고 있는 제 친구들 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 나아갈 수 있도록 저 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세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에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차이점이 있어서 신 세대들은 이미 기성세대의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맞추어 놓은 틀 안에 열심히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고, 그 틀에 맞추기 위해 어떠한 몸부림과 수고, 고생, 부정행위 또한 수 없이 일 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저희 신세대가 그것을 서둘러 깨닫고 깨어나 신세대에 맞게, 현재에 맞게 저희만의 정직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에도 믿음과 신뢰가 있게 해 주시고, 그것이 새로이 나라를 만들어 가는, 우리나라를 다시 세우는, 그러한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세요. 안된다고 생각하여 미리 포기 하지 않는 신세대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희가 배운 만큼, 고생 한 만큼, 노력 한 만큼, 그만큼 나라를 다시 세워 바르게, 정직하게, 올바르게, 평등하게 이끌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만의 힘과 노 력으로는 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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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배구 Grade 12 강기선 Andrew Kang

나는 중학교 때 처음 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그냥 했던 것 같다. 단지 체육 선생님께서 나와 친구들에게 공을 받고 패스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걸 따라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배구의 조금 쉬운 버전인 왈리볼 (Wallyball)을 하면서 엄청 재미있었던 기억도 난다. 왈리볼은 공을 땅 에 바운스 할 수 있어서 훨씬 쉽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웠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배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는 배구를 전혀 하지 않았고 그래서 배구에 대한 내 관심을 점점 사라졌다. 게다가 나는 배 구를 하면서 즐거웠던 기억들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10학년 때 몇몇 친구들이 배구 팀에 들어가서 연습을 하고, 경기를 하는 것을 보긴 했 으나 흥미를 잃어버린 나는 팀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후회되는 일이다. 그러다가 누나와 같이 이번 여름 방학에 배구 캠프에 가게 되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가게 된 캠프였지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캠프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힘들었다. 나는 배구가 이렇게 어 려울 줄 몰랐다. 배구가 어렵다는 생각은 나를 자꾸 실수하게 만들었 다.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 보니 캠프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잘하는 것 같아 보이는 선수들이 실수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연습을 더 열심히 하였다. 그러다 보니 배 구공을 만지는 내 손에서 약간의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공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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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패스를 하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스파이킹, 블로 킹, 서브 같은 기술들도 익히게 되었다. 배구 캠프를 통해서 잊고 있었던 배구의 즐거움을 다시 알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이제 배구 시즌이 모두 끝났다. 나는 12학년이기 때문 에 학교에서 배구를 할 기회는 이제 없다. 하지만 이 기억들을 되살려 서 기회가 된다면 어디서든 배구를 계속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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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보고서>

2016년 한국, 혼밥의 시대 Grade 12 김현주 Lauren Kim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한국의 밤 풍경은 나의 이번 여행을 축하해주 는 듯한 황홀한 착각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나의 친구들은 지난해 나와 함께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보낸 은경, 서진. 우 리들은 다시 만난 것을 반가워했고, 나는 친구들에게 이번 여행은 색 다른 많은 경험을 통해 문화를 알고, 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따라 해 보고 싶다고 일러두었다. 우선, 나는 신림동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그 곳은 친구의 집과 두 블럭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피곤은 하였지만 한국 친 구들과 숙소 앞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가볍게 맥주 한 잔 하며 담소를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참으로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발견했다. 그것은 여럿이 모여 있는 테이블은 우리 뿐, 다른 테이블은 모두 혼자 앉아 술을 마 시며 스마트 폰을 만지든지 보든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기도 하며 너무도 조용히 모두 혼자라는 점이었다. 이상했지만, 친구들과 그동안 의 안부를 묻고 답하며 즐겁게 떠들고 웃다 늦은 시간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갈증을 느끼며 눈을 뜨고, 오늘은 어떤 모험을 하며 보낼까를 기대하며 문밖으로 나섰다. 길가에 모두가 분주해 보였고 빠 른 걸음으로 어느 곳인가를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나 라, 어느 도시와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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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잊었던 마실 물을 떠올리며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서 우유와 빵을 먹고, 혼자 와서 김밥을 사가고, 나중에 알았지만 라면이라는 인스턴트 누들 을 서서 먹고 가는 너무도 자연스런 모습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며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 사 실을 말하였더니 웃으시며 이곳 신림동만 하여도 1인 가구가 70%란 다. 점점 늘어만 가는 싱글족의 증가로 생활이 변화해 1인을 위한 음 식점이 생겨나고 혼자 밥을 먹어 ‘혼밥’, 혼자 술을 마셔 ‘혼술’이란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게 되었단다. 여행사에 들르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한국 텔레비전의 프로가 어 떨지 궁금해져서 잠시 틀어 보았다.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수이자 배우인 김동완의 혼자서도 분주한 하루가 나왔다. 그는 집에서 자신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 즐기며 살고 있었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당당하고도 자연스러웠다. 인터뷰에서 그는 친구들과 연락하 고 시간 약속을 잡고 계획을 세우는 이 모든 일들에 보내는 시간이 아 깝다고 말하는 그는 자기개발에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완전한 자신 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여자 친구도 있었지만 그에 맞추며 자신 의 것을 즐기지 못함에 헤어졌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행사에 방문할 시간이 되어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강남역으로 향하 였다. 지나치는 편의점에서 혼자 삼각 김밥을 먹는 사람들, 패스트푸 드에서 버거를 혼자 먹으며 나서는 모습들, 분식점에서 혼자 앉아 식 사를 하는 그들을 보며 나도 그들처럼 중국집에 들려 자장면을 하나 시켰다.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었던 건 이미 나와 같이 혼자 먹고 있 는 손님들로 그곳이 붐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행사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갈 무렵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식사를 모르는 이들과 함께 하자고. 그는 혼밥 먹기가 싫증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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땐 소셜 다이닝을 통해 밥 친구를 만든다고 한다. 함께 식사하고, 공 통 관심사를 주제로 대화도 나누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하나 의 트렌드란다. 친구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억지로 사람 기분 맞춰 가며 감정 소모를 겪는 것보단 혼밥이 완벽한 최고라고 했다. 혼밥을 통해 시간, 금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 간을 가질 수 있어 편하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한국의 문화 중 ‘혼밥’이 가장 맘속에 잊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되었다. 개인주의와 스마트폰에 기인한 현상. 과거에 비해 가족 수가 줄어들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 고 경쟁이 치열해지며 여러 사람과 시간, 음식 종류 등을 맞추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고 느끼게 됐다는 그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상대 방이 없어도 일종의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며 혼자서 멍하니 밥을 먹 던 때와는 다르게 SNS를 하며 어색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며 내가 알아왔던 한국, 아시아가 가족 중심적이고, 인간관계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세상 어디서나 변화가 있듯이 이곳 또한 급변하는 생활환경에 적응되어 가며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었다. ‘혼밥.’ 편리하고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 하지만, 한쪽에 소리 없이 흐르는 외롭고 고독하기만한 찬 기운은 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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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보고서>

먹방에 빠진 한국인 Grade 12 박성재 Sung Jae Park 나는 네덜란드 사람이다. 그동안 한국에 몇 번 가봤지만 오늘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설렘이 어느 때보다도 컸다. 요새 한국 친 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한국에서는 텔레비전 뿐 아니라 SNS에만 들어가도 많은 방송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오는 비행기에서 잠을 많 이 잔 탓에 밤에 한국에 도착한 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할 게 없어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보기로 했다. 기대감에 한국 텔레비전을 틀었지만 바로 실망하고 말았다. 채널을 돌리고 또 돌려봤지만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음식에 관한 것들 밖 에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부탁해’, ‘식사를 합시다’ 등 모두 음식 에 관한 프로그램들 뿐이었다. 인터넷 SNS에 가도 모두 먹방과 맛집 얘기 뿐이었다. 나는 먹방 비디오를 시청 하면서 왜 그렇게 한국인들이 음식을 한 번에 많이 먹으려는지 이해가 안 갔다. 또한 왜 굳이 음식 만드는 프 로그램들이 이렇게 많은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 우 재밌게 보았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꾸준히 높은 시청률을 유지 했고 인터넷 먹방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도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프로그램들과 방송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 만드는 방송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텔레비전을 보기 싫어질 정도로 많은 것은 너무 과 한 것 같았다. 나는 다음 날 일어나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기 위해 채널을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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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돌렸다. 하지만 역시 아침이어서인지 음식의 조리법을 소개하는 프 로그램이 대다수였다. 나이 많으신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하나하나 설 명을 하는데 이미 다 아는 것을 계속 해서 반복할 뿐 이었다. 아침에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거의 모든 채널들이 비슷한 메뉴를 매일같이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여행 또는 다 른 여행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 까 프로그램의 절반은 여행이 아닌, 맛집, 혹은 음식에 관한 이야기였 다. 대부분의 반응은 비슷했다. 음식의 맛을 보고 음식의 맛을 극찬했 다.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돌려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거의 대부분 알아챘다. 출연자가 음식에 대한 부정 적인 반응을 보이면 다른 방송들에서는 출연을 못할 테고 결국 자기들 손해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SNS에 그 방송에 대한 게시물이 올라오면 댓글에서 모두가 출연자들의 속마 음까지 꿰뚫어 얘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뒤에서는 험담을 하면서도 굳 이 매주 이런 방송들을 챙겨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도저히 못 보겠어서 그냥 옛날 방송을 보기로 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음식에 관한 방송은 이렇게 많지 않았다. 또한 음식을 소재로 하지 않는 방송 들은 음식에 관해서는 거의 얘기를 안 했다. 모두가 자신들의 다양한 방송 소재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음식이 아닌 사람, 자연, 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원한 것 이었다. 한국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배고픈 시절’을 겪었다고 한다. 막 전쟁이 끝났고 피난민이 된 이 나라 국민들은 먹을 것을 못 구해 굶는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러한 과거를 알고 나니 요즘 먹방 프로 그램에 더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아무리 지금의 대한민국이 먹을 것이 넘쳐 난다고 해도 이렇게 음식을 위주로 한 프로그램들 보다는 지금도 지구의 어느 편, 이전의 한국처럼 가난과 배고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한 프로그램들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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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보고서>

오늘도 달린다, 대한민국 Grade 12 김찬우 Eric Kim 오늘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먼 길을 온 보람이 있는 것 같다. 공항 은 매우 깨끗했다. 역시 세계 1위의 공항은 다르긴 다르구나. 매우 낯 선 나라지만 여기는 인종이 다양하기보단 한정된 인종이 모여 사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매우 신기하게 쳐다본다. 한국에 오자마자 교통수단이 잘 되어 있어서 매우 편하게 서울까지 갈 수 있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밤 9시 반이 넘어서였 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지 매우 졸립다. 그러나 서울의 야경은 나의 졸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밝은 빛을 자랑한다. 토요일인데 도 불구하고 높은 빌딩들에는 불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게 말로만 듣 던 야근이라는 것이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추가 수당을 줘야 되는데 이 나라는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그러한 열정 때문에 이 작은 나라가 아무 자원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사는 나라는 이 시간 쯤 되면 길에 아무도 없는데 길에는 사람이 매우 많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꽤 많아서 길을 쉽게 물을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의 학생 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매우 궁금하여서 대치동이란 곳을 가보기로 결심했다.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대치동은 위치해 있었고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지하철 덕에 3호선을 타고 금방 도착했다. 불행히도 내가 도착한 곳은 도곡역이 아닌 학여울역이어서 택시를 타야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택시 가격을 생각하고 매우 걱정했는 데 막상 타 보니 얼마 나오지 않았다. 도착해보니 여기 또한 길거리 빼곡하게 서있는 건물들에 모두 빛이 가득차 있었다. 처음에는 사실 매우 걱정했었다. 혹시나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한건 아닐까. 처음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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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많은 빛들이 식당이나 회사에서 나오는 빛인 줄 알았다. 그러나 번역기에 돌려보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수학, 영어, 국어, 사회, 과학 을 가르치는 각종 학원들이었다. 무려 지금 시간은 밤 10시 반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아직까지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탄 을 감추지 못하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학원이란 게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두 눈으로 보아도 잘 믿기지가 않는다. 창문으로 작게나 마 보이는 학생들은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판을 보고 있는 학생들이 그저 불쌍하기만 했다. 비록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고서 공부 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앞으로도 많은 시련들이 있을텐데 저 어린 나이부터 저런 고생을 하는 게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나는 저 나이 때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뛰어 놀고 그랬는데… 물론 아직도 우리나라에선 대학가기 전까진 이 시간에는 자고 있거나 집에서 가족들이랑 텔레비전을 보며 수다를 떤다. 한국문화에 아직 적 응이 안 되어서인가 너무나도 적응이 안 된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 자 야겠다. 시차적응이 안 돼서 피곤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바로 종로에 가보기로 하였다.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곳이라고 하길래 나도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가기 위해서 지하 철을 타고 가는 데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매우 바글거렸다. 지하철 의 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학생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은 취미로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기 위해서 책을 보고 있 는 것이었다. 지하철에서도 책을 보다니 매우 충격이었다. 할렐루야. 아무튼 그런 풍경을 보고서 종로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사방에서 k-pop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고 그것 또한 신기하였다. 조 금 더 걸어가자 재수학원이라는 간판으로 건물들은 빼곡하였다. 잠시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마치 대학교처럼 큰 강의실이 있었다. 강의실에 는 학생들로 빼곡하였고 매우 지친 얼굴로 추리닝을 입고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이번 한국 여행을 통해 나는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인상 깊은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비록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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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지만,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또 회사원들이 피땀 흘 려가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젊은 나이부터 희생하는 것일까,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앞을 향해 달려만 가는 것일까. 그런 질문들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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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보고서>

한국의 효에 대한 고찰 Grade 12 김기환 Andrew Kim 이 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는 조금 다른 문화가 있다. 바로 윗사람에 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윗사람에게는 차원이 다른 존경을 표한다. 어른들에게는 존댓말을 쓰고, 식사할 때에도 어른들이 먼저 드시고, 집 문을 나설 때와 돌아올 때도 문 앞에 나가서 고개 숙 여 인사하는 문화이다. 그나마 지금이 21세기라서 덜 엄격하다고 들었 다. 조선 시대에는 아들이나 딸이 아버지의 앞으로 지나가는 것은 무 례한 짓이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21세기의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물어보았다. 옛날 아버지들은 어땠는 지. 옛날의 아버지들은 무서웠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반말을 쓰거나 따박 따박 대들면 그 즉시 아버지에게 맞는다고 했다. 옛날의 아버지 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것,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어머니들의 일이었다 고 한다. 지금은 문화가 많이 바뀌어 아버지와 아이들의 사이가 각별해지고 가족들끼리 놀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하늘같은 존재라 아버지 앞에서는 무례해서는 안 된다. 이 문화는 유교에서 유래된다고 한다. 유교는 삼국시대, 고려, 조선 대대로 내려오는 사상이자 종교이다. 유교에서는 ‘효’를 하늘로 여기라 고 한다. ‘효’는 부모님한테 하는 것이므로, 결국 ‘부모님의 뜻을 하늘 처럼 여기라’가 된다. 그러나, 어떤 부모들은 이 권력을 남용하기도 한다. 부모님이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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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해서 자녀들의 자유 의지도 없어지는 것이다. 한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가정은 매우 엄숙한 분위기였다. 아들과 아버지가 한 밥상에 있어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희한한 점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키실 때나 중대한 결정을 하시면 아들은 무조건 “네” 라고 밖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가 봤을 때도 아버지가 하시는 말들은 스트레스만 쌓이게 하는 말들이 다. 이 나라에서는 서울대, 연대, 고대. 대학과 진로의 문제 만큼 부모 님의 막강한 권력을 드러내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녀들은 대꾸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꾸하는 것이 예의 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인지, 어쩌면 대꾸한다고 해도 이 상황이 달 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 이야기 말고도 자녀들을 스트레스 받게 만드는 것은 많다. 자녀가 자라나서 직장을 선택할 때, 배우자를 선택할 때까지도, 무엇이든지 부모가 원하는 것 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모든 한국 부모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어떤 부모님은 낳아주고 극진히 길러주었다는 이유로 부모의 청을 들어드리지 않으면, 불효자가 된다 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하는 듯 하다. 어떤 한편으로는 맞은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 여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인정한다. 하 지만 그 효의 중심이 ‘부모의 왜곡된 행복’에 기준을 두고 있다면, 자 식도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효’의 나라라고 들었다. 오래전부터 내려 오던 전통일수록 그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고 바르게 지켜져야 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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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보고서>

딩동! 배달 왔습니다! Grade 12 황윤재 Yoon Jae Hwang 내가 한국에 처음 와서 겪은 많은 일들 중에 가장 놀라웠던 건 바 로 한국의 배달 문화이다. 넓은 미국에서는 이러한 일을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조그마한 나라에서의 이러한 문화는 작은 나라만의 매력적인 문화인 것 같다. 이번 여름에 내가 한국 인천 국제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내 앞 에 펼쳐진 수많은 장면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모든 음식점 앞에 ‘배달 가능’ 이라고 쓰여 있는 광고판이었다. 한식, 이탈리안 요 리, 중식, 일식, 동남아 등 세계 모든 음식들을 집으로, 또는 내가 있 는 어느 곳이든 배달해 준다는 것이 큰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미국에 서도 동네에서 피자를 배달해 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음식을 배달해준다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덕분에 이번 한국 여 행에서는 어떠한 문화를 경험해 볼지에 대한 고민은 바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는 1주일 동안 어디에 가든 배달 음식만 먹기로 결 심한 것이다. 첫날은 묵고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한식을 시켜보기로 하였다. 한 국인들이 추천한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을 시켜보았다. 여기서 또 놀 라게 된 것은 국물요리면 대략 한 시간 넘게 걸릴 줄 알았는데 20분 안에 배달해 준다며, 또한 시간 약속을 못 지킬 때에는 환불을 해준다 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 온 음식은 바로 끓여낸 것처럼 따뜻하였고 나는 미국에서처럼 배달원에게 팁을 주려고 하였다. 여기 서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한 것은 한국은 팁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미국에서는 당연히 하나의 예절 문화로 팁 문화가 있는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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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팁도 전혀 받지 않았다. 돈을 조금 이라도 아낄 수 있었지만, 항 상 팁 문화에 익숙해져있던 나에게는 조금의 의아함과 죄책감이 들었 다. 둘째 날은 날씨가 좋아 잠시 운동을 하려고 한강을 찾게 되었다. 날 씨가 좋아서일까 한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다들 나들이를 왔는 지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여기서 눈 에 크게 띈 것은 여기 서기서 음식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알고 보니 모두 배달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한강 같은 공원까지 음식을 배달해 준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경치와 하 늘을 바로 보면서 내가 따로 힘들게 음식을 준비해가지 않아도 된다 니, 가끔 요리하는 것이 귀찮았던 나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일이었다. 남은 기간 동안에도 어김없이 나는 배달 음식을 계속 시켜 먹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모든 배달음식은 30분 안에 배달이 되었고, 맛과 품질 또한 좋았으며, 배달해 주시는 분들조차 친절함이 넘쳤다. 이번 한국 여행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으며, 미국과는 색다르면서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았던 한국만의 배달 문화를 경험해보아서 좋았다. 미국에 도 한국처럼 배달 문화가 더욱 발전되었으며 하는 바람이다. 한국에서 의 이 특별한 경험은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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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한국을 살린 선교사 - 아펜젤러

Grade 12 배병준 Daniel Bae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2.6.~1902.6.11)는 미국의 감리교 학교 에서 공부를 마친 후 1884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후 1885년 4월 5 일 부활절에 감리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가 한국에 온 후 처음으로 드린 기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 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고 내려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도 우리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시작부터 끝까지 헌신을 했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현재 그의 가묘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 위치한 선교사 묘지에 있다. 한국에 무사히 도착한 아펜젤러였지만 당시 갑신정변 등의 정치적 이유로 그는 다시 일본에 머물다가 같은 해 7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 아왔다. 그리고 그 해 8월 3일에 고종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통역관 (通譯官)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군을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유 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는 설립목적으로 우리나 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학교인 배재 학당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을 세웠다.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는 모두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많은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들이다. 또 한 같은 해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 우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힘을 썼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위한 아펜젤러의 노력과 봉사는 배재학당 건립에 그치지 않았다. 먼저,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많은 힘을 썼다. 벙커 선교사님과 독립 운동가들은 도우면서 1896년에 협성회를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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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 외에도 우리나라 백성들이 돕고 한글 장려를 위해서 성격을 번역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890년에 다른 선교사들과 손을 잡고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했으며 마가 복음서를 번 역했다. 한글 장려를 위해 1897년 2월에 ‘조선그리스도인 화보’를 순 한글로 창간한 바 있다. 하지만 성경번역 모임을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아펜젤러는 44세 되던 1902년에 생을 마감하게 되 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가 조선인 여 고생을 구하려다가 익사했다는 이야기와 또 하나는 비서를 구하기 위 해 배의 선실로 다시 뛰어들었지만 배가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아펜젤러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 을 희생하려 했던 정신을 우리가 엿볼 수 있다. 아펜젤러가 성서를 국어로 번역할 뿐만 아니라 한글을 장려했기에 지금 현재 교회를 다니면서 더 편하게 국어로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같다. 또한 한국 학교를 다니면서 만났던 교회, 학교 선배들과 친구들이 실제로 배재학교를 가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 에 교육면에서 아펜젤러가 우리 세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욱 나아가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면서 독립의 위해 쏟았던 열정을 쏟았기에 조금이나마 독립에 더 가까이 다 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전체적으로 그 당시 불안하고 많은 일 들이 끊이지 않았던 우리나라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국민 들에게 희망을 줬기에 지금과 같은 국가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 같으 며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우리나라 국민을 구하려던 그의 태도 와 의지는 내가 본받아야할 대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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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석호필을 아십니까

Grade 12 정승현 Jenna Chung 석호필의 본명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로 영국에서 태어나 캐나다 온태리오에 위치한 OVC에서 수의학을 전공한 학생이었다. 수의학을 전공 한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으로부터 교수직을 요청받아 1926년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입국해 세균 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인들과 유대감을 쌓아갔다. 한국에서 교수직을 맡게 된 몇 년 후, 직장 동료인 이갑성의 부탁으로 현장을 조사해 ‘수원에서의 잔학 행위 보고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것이 석호 필이 독립운동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였다. 그 후로도 석호필은 3.1운 동 당시에 찍은 사진과 그 후에 벌어진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의 진상을 언론에 발표를 하기도 했고 3.1운동 관련 수감자들이 있던 서 대문 형무소를 자유롭게 방문하는 등 활발하게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이렇게 자유롭게 제제 없이 독립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석호필 본인이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 신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석호필은 1920년도에 영국으로 추방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한국을 떠난 후에도 독립을 위해 한국을 잊지 않고 계속 편지를 보내 며 한국인들을 독려했다. 결국 한국이 독립을 한 후에야 한국 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석호필 박사는 1958년도에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임명이 되어 남은 생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결정한다. 한국이 독립을 한 후에도 석호필 박사는 멈추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 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비난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힘썼 다. 결국 1970년 4월 12일에 영면해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에 묻히게 된다. 그는 후에 34번째 민족대표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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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 박사가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독립운동은 훨씬 더 어려워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전 세계에 알릴만 한 위치에 있었던 조선인이 없었던 건 물론이고, 마치 조국의 일인 마냥 힘을 써 준 외국인들도 드물었다. 그 당시에 조선은 동방의 힘없는 나라였고 기반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온 나라가 힘들었던 순간에 선뜻 도움을 주고 독립 후에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석호필 박사가 없었더라 면 지금 대한민국은 이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석호필 박사가 조선 의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건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의 독립운 동은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는 모두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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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보고서>

살아 있는 과거 Grade 12 박세라 Sarah Pak 2016년 5월 24일, 한국 근현대사 수업에서 11학년 단체로 서울 종 로구에 위치한 역사박물관으로 견학을 갔다. 서울 역사박물관에는 1층 부터 4층까지 다양한 전시들이 있어서 주어진 2시간 내에 모든 전시 관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보 려고 노력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만 더 있는 가운데 안내자의 자 세한 설명도 들으면서 여유롭게 관람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아쉬 움이 남는다. 우선 서울 역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 울의 역사와 문화를 총망라하듯 전시해 놓았다. 많은 전시관들이 연도 별로 나누어져 있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변천사를 한눈에 살 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관은 조선 왕조의 수도였던 서울의 모 습을 조형물로 재현해 내서 전시한 곳도 있었고 그 당시의 서울의 모 습을 영상으로 만들어서 영화관처럼 상영하는 곳도 있었다. 이 밖에도 옛날의 도구를 조작할 수 있는 체험공간과 다양한 활동들이 있어서 지 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사진에 있는 태극기 하나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고종 19년,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가 처음 사용하고, 고종 20년에 정식으로 우리나라 국기로 채택되어 공표된 태 극기이다. 한국 근현대사 수업 시간 때 배웠던 고종의 수신사 파견은 책으로만 접하고 배워서 사실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실제로 태극 기를 직접 보면서 책을 통해 배운 것보다 더 생생하고 자세한 부분까 지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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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한 장의 태극기가 나에게 있어서 주는 의미는 과거와 현재의 중 요한 연결 고리라고 생각된다. 과거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 했던 것들 을 지금 현재에 있어서 단지 유리 안에 진열된 전시품이 아닌 살아있 는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되찾아 갈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는 것 같다. 그러한 역사의 발자취를 현재까지 계승하고 이어내려 비단 나뿐 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과 맥락 그리 고 그 숭고한 가치도 함께 전해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역사라고 하면 과거에 이미 다 끝나버린 죽은 이야기라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역사는 과거의 사실 뿐만 아니라 그 가치가 현재까지 보존되고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사실적인 것만 기억 된다면 그와 관련된 진정한 의미 를 깨닫지 못한 채 표면적인 것만 이해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 나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현재의 것 을 과거의 것이 비추어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는다면 결국 과거는 죽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안에서 충분히 살아 숨 쉬는 현재 진행형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귀중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이번 견학을 통해서 역사와 그에 담긴 가치를 직접 체험해 본 좋은 경험이 되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더 바빠지겠지만 앞으로의 시간과 여건이 허락 된다면 서울 역사박물관 이외에 다른 여러 박물관에도 가 보게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은 끝난 것 같지만, 나의 역사에 대 한 관심은 사실 이제 시작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역사적인 것들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나와 모두의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 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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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보고서>

Two Different Seouls made by Fifty Million Souls

Grade 12 이송원 Shannon Songwon Yi 2016년 5월 24일 화요일, APIS 11학년 전체는 광화문에 위치한 서 울 역사박물관으로 견학을 갔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많은 역사적 사료들을 보았지만, 대한민국의 현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두 장의 긴 사진이 나에겐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1950년 6. 25 전쟁 직후의 서울과 60년이 지난 2010년의 서울의 대조적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나라 가 반세기 이후 놀라운 변화를 이뤄내며 오히려 기회의 땅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적 같았다. 무너졌던 대한민국이 국민들의 끊임없는 열정과 단합된 노력을 통하여 오늘날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나라로 바뀌었 다는 점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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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체험 학습을 통해 한국 역사 수업에서 배웠던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발전 방향과 가능성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그 리고 우리 선조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떠한 업적들 을 남겼으며 동시에 얼마만큼의 아픔들을 겪어 냈는지를 반드시 알아 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 어르신들이 무엇을 위해 힘을 썼는지 배움 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 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대한민국의 역사 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오늘날 세계무대의 치열한 경쟁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체성을 지녀야하기 때문이다. 오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우리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그 자부심을 키워가기 위해 평범한 일상이 곧 역사임을 알고, 배우고, 또 책임감 있게 이어가야 할 것이다. On May 24th 2016, the APIS junior class went on a field trip to the Seoul Museum of History. One set of photos notably, took away my attention. The photo above showed the 1950s Seoul right after the Korean War, and the photo underneath, Seoul in 2010. The two photos demonstrated the marked difference in Seoul’s modernization and development between a short span of roughly sixty years, and I was especially astounded by the opportunities that it brought to its citizens. I was proud that my country― the once destructed Korean nation― had now become the centre of media, modern culture, and even the economy, solely through the efforts of its people. Through this experience, I will commemorate and treasure the historical feats that South Korea has achieved. To explore the lifestyles of our ancestors, acknowledge their legacies, and recognize the pains and conflicts that they fought through is extremely crucial.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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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ing about the goals that they strived to reach, we have come to appreciate their hard work, and not take anything we have for granted. We, as the people of a country of more than five thousand years of history, we must continue learning that even the commonplace parts of our lives serve as significant historical evidence, left for our future generations to un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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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보고서>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Grade 12 이채영 Chae Young Lee 2016년 5월 24일, 한국어 시간을 통해 1년 동안 학습한 한국사 중 에서 조선시대 이후 대한민국의 근대화, 현대화의 중심 현장인 서울의 역사를 알아보고 학습하기 위해 광화문 ‘서울역사 박물관’을 견학하게 되었다. 학교 버스를 타고 함께 박물관에 도착한 우리들은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자유롭게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전시와 함께 사진을 찍는 미션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모두가 분주해 보였다. 그 분 주한 와중에 우리들은 유물들을 찬찬히 보면서 옛 조상님들의 지혜를 엿보고 교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먹구름으로 덮인 듯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보다는 그 바로 이전의 조선시대에 더 관심이 갔다. 특히 전시관 3실에 전시되어 있던 서울 사대부 가문들의 유물들 이 가장 나의 관심을 끌었다. 92년 조선이 개국하여 한양을 도성으로 정한 이후 ‘서울’은 말 그대로 한국의 모든 역사적 흐름의 중심에 서 있었고 조선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선도한 주류층인 사대부의 문화와 삶을 그대로 유물로 보여주는 전시는 조상들의 풍류, 지혜 등을 느낄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한양 사대부가의 서재가 전시 되 어 있는 전시실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서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 었는데 특히, 현재 우리나라 사회의 생활상과 비교해 보게 되었다. 일 단, 유교적 관료정치를 추구하며 형식과 명분을 중요시 했던 조선시대 사대부에게 서재란 학습의 공간이란 기본적인 역할 외에도 독서와 사 색의 공간, 서적과 그림의 수장과 감상 공간, 손님을 접대하는 교류공 간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서재에서 공부했던 조상들은 유교 적 가르침을 끊임없이 학습하며 그 유교적 이론과 가르침을 정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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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예술 등에 적용하며 그 고고함과 유식함에 스스로 취했었을 것이 다. 그렇다면 오늘,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나의 공부방에서 어떤 공부 를 하고 있는가? 나는 영어로 교실에서 소통하고 영어로 된 교재를 읽으며 대부분의 숙제를 컴퓨터로 당연히 영어로 써서 제출한다. 물론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내 또래 친구들은 나와 달리 한국어로 학습하지 만 나와 내 학교 친구들은 나와 사정이 같다. 그리고 과거 조선시대 사대부가 학습했던 유학은 내가 아는 역사 속의 많은 학문 분야 중 한 부류일 뿐이고 나는 역사를 통해 그들의 학습 내용을 몇 페이지로 정 리해서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전 세계의 역사와 다양한 학설과 이론 을 학습해 가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서재와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공부방은 그 모습도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종류와 다양성도 많 이 다르지만, 또 그 서재에 앉아 공부했을 선배와 공부방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도 많이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학 문을 통해 자신의 지식과 덕을 쌓고 그것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한 역사학자는 ‘역사란 비행기를 타고 높이 날면서 구름에 가려진 강물 줄기를 찾아 따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역사를 정리해주는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의 전시실 유물들을 보며 그늘에 가려진 조선시대라는 큰 시간의 강물 줄기를 보았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였을 역사 속 인물 들의 움직임과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견 학은 역사라는 것이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가깝게 느껴 지는 소중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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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보고서>

근대화에 대한 세 가지 시각

Grade 12 이신영 Shin Young Lee 2016년 5월 24일, 광화문에 위치한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견학을 갔다. 수업에서 배웠던 한국의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 현상을 박물관 유물들을 통해서 좀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인상 깊게 접했던 유물은 근대화 초기의 한국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는 외 국 신문 한 장과 광고 카드 세 장이었다. 한국 역사 수업 시간 때 배운 근대화 과정에 의하면,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살아계시던 때의 근대화는 고통 그 자체였 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끌리듯 시작된 한국의 근 대화는 아름답지 않았다. 프랑스와 미국과 전투를 했던 병인양요와 신 미양요, 일본에 의해서 국모가 시해되는 일 등, 강대국들의 압박에 어 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서양문화와 동양문화가 섞여 있는 이 그림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 그림들처럼 근대화의 과정이 아름 답게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가 이 그림들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 과정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에게 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근대화 과정이 감사하다. 멋진 옷들을 입을 수 있고, 맛있는 각국의 음식들을 먹을 수 있고, 그리고 편리하고 바쁜 이 도시에서 사는 것이 감사하다. 이 과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처럼 풍족하게 살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더욱 더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한국과 서양 문화가 조화롭게 공존되는 것이 내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한국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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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의 문화가 조금 더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항상 있었고, 저 그림이 그 바람을 그대로 그려내는 듯 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커피숍들의 이름이 영어로 되어 있고, 한국인들 중에 김치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우리 가 우리만의 문화를 너무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렵다. 나는 외국인학교 학생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외국문화를 더 선호하 는 한국인이다. 하지만, 나의 뿌리는 항상 한국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고, 사회의 변화들을 인지하며, 한국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외국으로 대학을 가더라도, 나의 바람은 한국으로 다 시 돌아와서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계속해서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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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보고서>

서울은 만원이었다

Grade 12 윤세라 Sarah Yoon

2016년 5월 24일, 한국 근현대사 수업에서 한국 역사를 더 깊이 알 고 이해하기 위해 모두 광화문에 있는 한국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처 음에는 수업에서 배웠던 고종, 일제강점기 등에 대해서 찾아보았지만 수업 때 배우지 않았던 모르는 역사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계속 돌 아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서울은 만원이다’는 문구 가 눈에 띄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휴전 직후 1954년 124만 명이였던 서울 인구는 일자리 때문에 서울로 다시 몰려든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1960년 244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리고는 1970년에는 543만 명 에 이르렀다. 갑자기 불어난 인구에 주택, 교통수단, 식량 등 도시의 기본 시설이 부족하게 되고 만원 버스, 공동화장실, 교통 혼잡 등이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많아 한번 화재가 일어나면 많은 인명피해를 낳는 대형 참사로 이어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보건위생에도 문제가 일어나고 역동적인 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사정변으로 인해 인구 억제를 위한 등장하게 된 ‘출산율 낮추기’ 캠페인이 들어섰다. 사 진 속 왼쪽 가운데에 있는 포스터가 출산율을 낮추기 위한 가족계획 포스터이다. 사실 이것을 읽고 보면서 놀라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출산율이 저조해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1970년에는 반대로 인구가 너무 많아 출산을 낮추기 위해서 캠페인까지 만들었다 니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식량부족으로 인해 밀가루로 만들어 진 국수, 라면, 빵들을 먹어 하루 한 끼 분식 캠페인을 실천하기도 하 였다고한다. ‘전쟁 이후 농업생산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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픈 사람들은 많아지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미국역사를 배우던 때에 옛날 미국이나 유럽에서 전염병으 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실을 공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많아지고 지역이 밀집돼 위생 문제를 일으키면서 생긴 전염 병으로 164명이나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니 또 놀라웠다. 그때는 경제 도 어려웠을 시기인데 다들 어떻게 이런 고통을 이겨냈을까라는 의문 점을 갖게 되었다. 내가 이미 알던 역사를 다시 복습하는 것도 좋았지 만 내가 몰랐던 한국의 모습을 알게 되어 신기하고 새로웠다. 나에게 한국역사란 끝나지 않는 공부인 것 같다. 설령 한국역사를 끝까지 다 배운다 해도 그 속의 의미들과 생각을 어떻게든 풀어 헤칠 수 있는 공 부인 것 같다.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한국역사는 당연히 배워야하 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인데 한국의 진정한 역사를 모르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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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지>

나는 흥선대원군이다 Grade 12 김윤수 Martin Kim 여보게, 안녕들 하신가. 나는 흥선대원군일세. 나는 왕은 아니지만 장차 왕이 될 나의 첫째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 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백성이 행복한 최고의 나라로 조선을 만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석연치가 않다. 계획이 실패 로 돌아가고 있지만 나는 너에게 나처럼 외세에 당하지 않기 위한 방 법을 가르쳐 주려 한다. 으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의 시작은 정말 좋았다. 일단 나의 목표는 왕권 강화, 경제 안정, 그리고 민생 안정, 크게 이 세 가지였 다. 내가 정치판에 뛰어들기 전까지 조선은 엉망이었다. 신분제와 부 패한 관리는 너무 강해서 평범한 서민들은 과도한 세금을 내면서 경제 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양반과 귀족들은 호화롭게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서민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살고 있었다. 삼정이라고 들어 는 봤는가? 삼정은 토지세인 전정, 군역으로 대신 포를 내는 군정, 곡 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붙이는 환곡이 있었는데, 이것이 백성들을 과도 하게 수탈하는데 아주 심각했다. 그러나 가장 심각했던 것은 바로 세 도정치. 세도정치가 너무 강해서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했고 각종 부정 부패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나섰다. 일단 서원을 폐지하기로 했다. 많은 서원들이 부패하자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의 세금을 수탈하 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고, 당시 행정, 군사, 외교 등 절대 권력을 행 사하는 기구가 비변사였는데, 이 비변사 역시 세도가문들이 뒤에서 조 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변사도 폐지하고 그 대신 세도세력이 간섭 할 수 없게 행정 관리의 의정부와 군사 관리의 삼군부를 세웠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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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로 세도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을 한 셈이다. 그리고 호포제를 만들었는데, 농민 장정들에게 부과하던 군역의 의 무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했다. 집집마다 포를 내게 함으로써 합리적인 조세 정의에 부합하도록 하였다. 누구나 신분에 상관없이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이는 신분제를 약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예상한 대로 양반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만 엄연히 백성들을 위해서 한 것이 었고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살기가 편안해졌기 때문에 나는 일이 내 계획대로 되가는 듯 만족했다. 그리고 공무원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서 마을의 덕망 있는 민간인을 사수로 지정하여 사창이라는 창고를 지 방마다 관리하게 하였다. 하지만 점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은 경복궁을 다시 짓자고 했던 것 인데, 이게 화근이 될 줄이야. 내가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한 이유는 왕권을 확실하게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의 욕심이 너무 앞서 가서 잠깐 나의 시야가 흐려졌던 것 같다.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물가 가 폭등하고 화폐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게 되었다. 결국 화폐 유통 질서에 대대적인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더 나아가 원납전을 걷기 시 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창피한 일이다. 원납전은 경복궁 재건 에 도움을 주기 위한 기부금 정도로 생각했는데, 기부금이라고 말하기 에는 백성들이 강제로 내야하는 부담이 컸나보다. 백성들이 스스로 기 부금을 내면 그 액수에 따라 상과 벼슬을 줬는데, 여전히 돈은 모자라 고,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백전까지 발행 하게 된 것인데 결국 결과는 처참했다. 백성들은 나에 대한 존경과 신 뢰를 잃고 결국 나의 입지는 점점 작아졌다. 나의 실패의 원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외교정책을 정말 잘못된 방법으로 했다고 시인한다. 나는 아주 보수적인 정치를 하였는 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서구의 새로운 사상이 왕권중심의 전통질서인 유교사상을 교란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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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치를 주장했다. 하지만 근대화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채 변화하는 국제관계를 빨리 파악하지 못하고, 주변 나라들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일 기회를 놓쳐버렸다. 프랑스와의 병인양요와 미국과의 신미양요에 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건 전혀 의미 없는 승리였다. 오 히려 서구 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할 기회를 놓쳐버린 꼴이 되고 만 것 이니 말이다. 결국, 며느리 명성황후는 유생대표 최익현과 나를 반대하는 세력을 부추겼다. 최익현은 그동안 나의 서원 철폐 정책 등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는 동부승지로 기용되면서 명성황후의 측근들과 손을 잡고 나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의 정치적 퇴진을 강력히 주장 하였다. 최익현의 탄핵은 결국 나의 실각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 다. 결국 1873년 나의 아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친정을 선포하였고 나는 원치 않았으나 정계 은퇴를 해야만 했다. 이로써 내가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과욕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과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스스로 갇히게 된다는 것이 다. 잘 해보려 했던 의도와는 달리 나의 왕권 강화에 대한 욕심이 백 성들의 지지를 잃게 하였고, 주변의 정세에 어두웠던 나는 외국과의 소통을 막게 되었다. 재빠르게 앞서 나가지 못하고, 결국은 내 것을 억울하게 내어주게 되었으니 이렇듯 내 인생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지 만 너는 내가 겪은 일들과 내가 한 말들을 자세히 새겨 듣고 나와 같 은 실수를 결코 하지 않기를 바란다.

흥선대원군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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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지>

2016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부합니다. Grade 12 조기완 Leo Jo 여러분, 안녕들 하신가요? 저는 흥선대원군, 조선의 왕좌에 올랐던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제 실제 이름은 이하응, 하지만 많은 사람들 은 저를 흥선대원군이라고만 알지요. 왕족이었으나 안동 김 씨의 세도 정치 아래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항상 마음속에 이 나라를 싸그리 바꿔버리겠다는 야망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썩어빠진 조선 사회를 새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 인지, 드디어 저에게도 기회가 왔었습니다. 철종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자, 저의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 명복이가 조선의 새로운 왕으로 지목되었고, 그가 장성할 때까지 제가 대신 왕의 역할을 할 수 있었습 니다. 저는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염원인 세도정치의 발본색원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차근차근 양반들의 세력을 궁지로 몰아가고, 비변사 폐 지, 의정부와 삼군부 새롭게 설립하는 등 저는 그동안 왕의 권력만큼 이나 강력했던 안동 김 씨 세력과 풍양 조 씨 세력, 그리고 그에 힘입 어 힘없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수탈하는 수많은 양반들을 정 리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저는 그 동안 꿈꾸던 강력한 조선, 질서 잡힌 조선,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조선사회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 다고 느꼈습니다. 소위 돈 많고 권력 있는 고위 계층 사람들이 힘주고 있는 한 마디로 허수아비 왕권이 아닌, 왕이 제대로 된 권력을 쥐고 나라를 그럴듯하게 통치하는 그런 왕권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이른바 저의 왕권강화 정책은 양반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약해진 양반들의 세력은 궁궐까지 들어올 턱이 없었습니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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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서민들을 위하는 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저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있었 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던 중 일어났습니다.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임진 왜란 때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던 경복궁을 재건하려 했던 저는 결 국 정부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원납전, 당백전이라는 화폐를 발행하 게 하였고, 무리하게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받은 백성들은 차츰 저에게 원한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백성의 의지가 아닌 제 뜻으로 감 행한 왕권 강화 계획은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고, 저는 유생대 표 최익현의 상소문을 끝으로 급기야 1873년 왕권을 내려놓게 됩니 다. 당신들의 조선은 어떠한지요? 백성들은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 까? 누가 위정자인지 모르겠지만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있습니까? 백성들의 삶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 고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습니까? 제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접촉 을 끊고서라도 백성들을 지키고 싶었고, 이 나라의 전통과 예의범절을 고수하고 싶었습니다. 외세의 문물이 조선으로 들어와 우리 것을 헤집 어 놓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조선을 그렇게 망가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처단하고, 프랑스와의 통 상수교정책을 거절하였으며,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고, 우리의 것을 끝까지 지키려 애썼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반대 할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조선이 발전하는 것을 늦출 것이라고 말입 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은 조선을 지키기 위한 저의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부디 미래의 조선도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우리 것을 지키고 우리의 국토와 우리의 생명을 저들에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제발 이 아름다운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켜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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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Grade 12 김유리 Stephanie Kim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한국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여느 나라가 그랬듯이,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가 속한 사회를 마냥 주관적으 로 보지 않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각이 필요하다. 현재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꾸준히 발전하며 다른 나라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 면 한국은 지금의 사회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전통적인 문화를 서양에 맞춰 바꾸고 무조건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 이 옳은 일이냐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을 생각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알지만, 이는 미래를 멀리 보지 못하고 형 식적인 일에만 얽매인 의견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우선 대다수 의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은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나오는 대답들은 ‘강인한 의지, 민족주의, 집단주의, 냄비근성, 빨리빨리 정신, 경직된 위계질서’ 다. 긍정적인 부분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한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같은 한국인을 깎아내리는 듯 싶어 보 인다. 우리는 왜 이러한 말들이 생겨났는지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한국은 일본 식민지 시절과, 남북 분단, 그리고 경제적 가난을 겪고 일어선 나라이다. 현재의 발전된 상황으로 진입하기까지 분명 뼈를 깎는 노력 이 필요했고, 한국이 이룬 지난 몇 십년간의 경제 성장은 분명 자국민 으로서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잔재 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나 친 집단주의와 빨리빨리 정신, 그리고 위계질서 등은 산업화 시대 당 시에는 일의 효율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지만 현재의 정보화 시대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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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는 오히려 일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단지 윗사람의 비위 를 거스르지 않고 명령에 순종하며 기계적으로 맡은 일을 빠르게 끝내 기만 하면 됐던 시대는 이제 지나버렸다. 정보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은 보다 창의성 있는 인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나, 현재의 한국 의 교육 시스템과 사회 의식구조로는 그러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은 어 려워 보인다. 사람들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에 대해 생 각해 보지 않고 그저 정해진 길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라면, 그리고 그 러한 길을 따르지 않았을 때 큰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국가가 원하는 창의적인 인재가 나올 가능성은 정말 희박 할 것이다. 현재 한국은 불편하지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것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관습이라고 하기 보다는 비판하여 개 선해야만 하는 악습에 가깝다고 본다. 무조건 미국과 같은 서양 국가 들을 답습하여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보다 더 나은 사회 시스 템이 있다면 그러한 것을 본받아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자는 얘기 다. 기존의 시스템으로 빠른 국가성장을 이뤄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선진국들은 이미 한국보 다 훨씬 앞서서 보다 효율적인 시스템을 도입하여 안정적이고 높은 GDP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보화 시대의 선두에 선 나라들의 사회 시스템을 본받자는 것은 절대로 자존심 상해 할 일이나 무조건적으로 서양 문화를 숭배하는 등의 사대주의적 태도는 아니라는 거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좀 더 효율성 있고 국민들의 형편과 사정에 맞춘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한국은 새롭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다면 바꾸려 시도라도 해 봐야 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새로운 사회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체제에 익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반 강제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들, 야근 까지 하며 열심히 일해도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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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 그리고 윗사람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낼 수조차 없는 전반적인 사회 의식구조까지 이러한 점 들이 한국의 경제발전, 혹은 인권 문제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지금까지와 같은 사회 구조를 유지해도 현재 고 수하고 있는 일의 효율은 현저하게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 가 이러한 구조의 한계점은 분명히 올 것이고, 그 때에 가서 개선할 수 있는 일과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일, 그리고 어쩌면 세계적으 로 한국이 새로이 주도할 일도 영영 없을 것이다.

표어: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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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방법이 문제다 Grade 12 강준우 Joon Woo Kang 불과 60년 전만 하여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 였다. 국민들 대다수는 빈곤하게 살았고,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던 극 소수의 사람들은 희생을 감수하며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그러나 요즘 한국 사회에는,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목전에 두 고 있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한국 사회의 문제는 교육 시스템이다. ‘교육’은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개발시키고, 성숙하게 양육함으로써, 비롯된 인격과 가 치를 높이고자 하는 고차원적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OECD 국가 중 한국 학생들의 행복지수는 가장 낮고, 반면 ‘학습부담’과 ‘성적압박’의 비율이 가장 높다. 그렇다면 한국은 과연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점이 가장 큰 의문이다. 지금의 현 체제로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학생들의 다양한 의욕, 서로 다른 능력, 출발선이 다르기 에 빚어진 이해와 준비도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꽉 짜인 교육 내용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주입식 교육’과, 오로지 성적과 서열로 말미암아

철저히 가려지고 배제되는 인성교육, 그리고 짧은

기간 정권 교체에 따른 빈번한 교육제도의 변화 등은 모두 한국 교육 계의 심각한 문제인 것을 누구나 안다. 한국의 학생들은 경제적으로는 발전된 선진국에 살면서도, 전혀 발 전적이지 못한 후진국의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때는 이 모든 것들조차 의미가 있었다. 6.25 전쟁 후,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당장 효과가 빠른 주입식 교육은 환영 받았고, 그로 인해 이미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 ‘한강의 기적’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 날의 한국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100배 이상의 GDP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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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이는, 그때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 다. 이른바 방법이 문제이다. 도대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이다. 일단, 선생님들의 역할부터 전면 수정 돼야 한다고 본다. 학생들에게 내용만 을 전달하는 역할이 아닌 토론식 수업의 진행자로서의 역할로 선생님 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펼칠 자유를 주며, 학생마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가게 할 수 있는 환 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앞서 나가는 나라들의 긍정적인 교 육 방식들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받아들이며, 한국은 선진국다운 교육 시스템으로 서서히 진입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의 경제적 현황만을 봐서도, 후기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점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빈부격차’, ‘사회 양극화’, ‘복지 문제’, ‘환경 파괴’ 등, 정부에서는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한국의 사회 구조 안에 나타나고 있다. 하 지만,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다. 바로 혁신에 대한 제 한이다. 한국의 회사원들은 대부분 매우 불공정한 상황 안에 놓여 있 다. 그들의 모든 작업들과 결과물들은 기업의 것이고, 혁신의 주체가 회사원들이라 하여도, 지금의 기업들은 일개 개인에는 조금의 보상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제한들이 온전히 풀리고, 혁신을 인정하고, 개인 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국은 더 발전 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은 부지런한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가 맞다. 하지만, 이 부지런함이 경제, 교육, 사회 모든 면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어야 한 다. 국민들을 과거 제 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과 다름없는 답답한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지속적으로 주입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자성해야 한 다. 이제, 한국은 세계 제 1의 선진국으로서, 과거 식민지의 역사적 실패와 6.25 전쟁의 상흔에서 반드시 벗어나 창의적이고, 모두가 자신 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새로운 도약을 이뤄 낼 때가 반드시 와야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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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대. 한. 민. 국. Grade 12 박형빈 Harry Park

대. 한. 민. 국. 이 네 글자만 들어도 우리 한국인들의 가슴은 뛴다. 어렸을 때부터 늘 강조해 온 애국심, 반 만 년의 유구한 역사, 실패와 어둠을 극복하고 되찾은 숭고한 발전 그리고 빛, 나라를 사랑하는 마 음을 지닌 한국인이라면 이러한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들었을 법하다. 그래서 인가, 오늘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나라를 향한 사랑이 매우 큰 듯하다. 하지만 요즘 청소년들은 나라를 무조건 비판하는 말들을 너무나 쉽 게 내뱉는다. ‘헬조선’과 같은 대한민국을 비하하는 말은 매일 신문에 나올 정도로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고 나라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 를 갖기는커녕, 비판하는 것이 어쩌면 더 익숙해진 것이 불편한 현실 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치열해지는 경쟁 때문인가, 사회가 정해 놓은 틀 안에서 이리저리 치 이는 우리들은 민심과 민생에 대해 무관심한 정부에 대한 실망, 그리 고 그런 나라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가졌던 존경심을 잃었다. 물론 자만하는 마음으로 지나친 국수주의는 배격해야 하겠으나 우리는 한국 인들이 지닌 우리만의 개성과 능력 그리고 의지를 믿고 자부심을 간직 한 채 살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단언하건대 열정 있는 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을 할 수가 있다.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을 하게 된 과정과 한국전쟁을 극복한 것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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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은 세계적으로도 주목 받는 사건이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 던 식민지 역사의 해방을 특유의 끈기로 극복하고 이기려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아무리 우리나라의 문화, 교육, 언론 등 모든 것들을 억압하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열정만은 빼앗지 못해 끝끝내 우리는 광 복을 이루었다고 본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한줄기 빛만을 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그 원하는 바를 이뤄내려 애쓰는 민족은 아마도 한국인들이 세계 최고일 것이라고 자신감 있게 말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을 떠올리 면 다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을 언급하지만 그 전에 ‘장사상 륙작전’이 있었기에 인천 상륙 작전이 가능했다. 장사상륙작전이란 ‘인 천상륙작전’에서의 적의 교란을 위해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포항에서 희생된 작전이다. 본인들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작전을 수행 하려 목숨을 내던진 민족이 또 어디 있을까? 그 당시 사람들의 조국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열정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열정을 잊어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이어가야만 더욱 더 강력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G20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하지만 세계에서 우리를 어떻게 바라 보고 어떻게 대하는가는 모두 다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아 무리 사회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어려워지더라도 우리가 어떤 민족인 지 그 정체성을 잊지 않고,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갖 고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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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한국인의 과거와 미래

Grade 12 안예지 Angelina Ahn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이 어떤 민족인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모순 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인이기에 한국인의 정서와 고유한 특성 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나는 한국인이 어떤 민족인지에 관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 보고자 한 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정(情)이 많은 민족이다. 중국에서 비롯된 유교 사상, 많지 않은 인구와 좁은 면적의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공동체 간 에 똘똘 뭉치는 모습은 매우 유별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중국, 일본 등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변 열강으로 인해 크고 작은 피해를 받았고, 이로써 사람들의 정서가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 을 1900년 초기에 침입해 1945년까지 식민지화했고, 이 3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인의 정서는 많이 바뀌게 된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한국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한국인에게 일본을 향한 내선일체 즉, 정서 적 합일을 요구했고, 병참기지화 하려는 야욕에 경제적인 수탈까지 서 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정해 놓은 비인격적인 규범과 틀 안에서 수 동적인 굴종을 강요당해야 했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요구에서 벗어 나게 되면 잔인한 처벌과 고문이 뒤따랐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그 세월 동안 무수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억울함에 시달려야 했다.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종식되자 일본은 한국에서 퇴각하고 한국 은 자연스레 독립이 되었다. 하지만, 독립이 되자마자 일본에 이어 다 른 외부 열강의 간섭에 휘말리게 된다. 카이로 회담에 이어 포츠담 선 언으로 휘말린 한국은 과거 누군가의 식민지였기에 당시 세계열강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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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과 북, 다시금 통제의 범주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남한은 미국의 통치를 받으며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당시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간섭을 받으며 한국은 또 다른 모습의 의존적인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는 억압 속에서 버티고 살아온 한국인들이 어쩔 수 없 이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를 중시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했던 연약한 나라 형편으로 인해 사람 들의 마음 안에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습관이 관습처럼 굳어졌고 큰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서는 는 것을 강하게 원하면서도 한 편으로 는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와중에도 억압과 탄압을 극복 하고 그 속에서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일념을 가진 사람들이 결 국은 똘똘 뭉치는 습성과, 강한 애국심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당시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에서 필요한 자원들을 한국으로부터 수 탈하기 위해 한국의 전통문화인 농업사회 분위기를 강제로 산업 사회 구조로 바꿨다.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사용할 계획에 한국을 일본처럼 단기간 내에 산업화시킨 것이다. 농경생활을 해왔던 우리나라 사람들 은 갑작스런 변화에 생활 패턴과 문화를 순식간에 바꿔야 했다. 매일 공장으로 출퇴근을 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문제는 이러 한 패턴이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성장이 아닌 강압적으로 이뤄진 산업 화였기 때문에 정신적 측면에서는 올바른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로 남는다. 경제적으로는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 사 고방식 등은 그만큼 앞서가지 못했다. 계급사회 구조를 과하게 중시하 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성향을 띄지만 정신은 매우 보수적인 것이 그 문 제라고 본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산업화를 일찍 이룬 나라들을 보면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함께 이뤄냈지만 반면 한국 은 경제성장의 속도와 달리 의식적인 부분에서는 그 속도를 앞서지 못 해 이것이 한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데 발목 잡히는 요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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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을 보면, 내신등급으로 학 생들을 줄 세우고, 누구나 똑같은 교과과정을 가르쳐 서로 개성이 다 른 아이들에게 창의력을 키워줄 기회는 안 주고, 결국 교과과정 내용 을 누가 더 잘 외우느냐가 대학 진학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니 한심 한 노릇이다. 앞으로 정보화 시대를 살아 내야 할 우리 어린 학생들이 도무지 창의력을 키울 수 없는 이 교육 현실에서 당연히 우리나라는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려면 역사적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우리나라에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늘 깊 이 생각 해봐야 한다. 이 변화가 이뤄지기 위해서 당장 교육부터 개선 해 나간다면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 갈 방향과 길이 바뀔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태껏 한국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수없이 언급되었지만,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국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 할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이 살아가고 이끌어 갈 한국에는 그 성장에 방해되는 요소들 없 이 창의적이고 더욱 민주적인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극기와 표어: 안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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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한국인의 현 주소

Grade 12 박혜정 Claire Park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정체성에 대한 혼돈이 오는 경우가 있다. 특 히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돈이 생기는 건 어쩌면 불가피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럴수록 한국인의 현실 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관습과 관행으로 여겨졌던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며, 고칠 것은 고치고 한국의 자랑거리라 생각되는 것 들은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은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대다수의 사람 들이 좋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따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조선시대부 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되돌아 봤을 때 한 국이라는 나라가 이웃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사회, 경제 및 문화 등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가치관이나 관습을 따라하는 것은 그 당시 시대에서의 생존전략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강대국 에 휘둘려서 자신의 고유한 것은 잊고 모든 제도와 관습, 문화를 다른 나라의 것에 맞춰서 무분별하게 따라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 다. 물론 우리나라가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불안정 했을 때 민주주의 와 자본주의 같은 선진국들의 정치제도와 경제이념을 도입하였기 때문 에 다른 나라보다 더욱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미래이고 지금의 선진국들도 매순간 변화 와 혁신으로 순간마다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지금 선진국의 제도라 해서 그것을 영원불변의 절대 가치로 받아들여서 그 이외의 것들은 하찮게 매도해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한국은 전혀 발전 이 없을 것이다. 이미 확정된 것들만 따라하고 그것을 뛰어 넘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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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발전을 무시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발전하는 한국을 원한다면 이미 정해진 것들을 모방하고 답습하기 보다는 새로운 한국만의 특색들을 찾아내고 발전시키려는 혁신적인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 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변화를 두려 워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겠다. 한국인들은 새롭거나 익숙지 않은 것들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의 교육 제도 를 살펴보면,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은 공부만이 성공의 길이라고 여겨 왔다. 성공에 대한 압박감 속에서 한국은 교육에 거의 종교에 가까운 집착을 보여 왔고 이로 인해 모든 한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서 빠른 시간 안에 지식 습득에만 매진한 채 창조적이 고 다양한 범주와는 동떨어진 방식의 교육을 받아왔다. 미국과 유럽처 럼 개인의 특성을 우선으로 여기는 나라들의 교육제도에는 학생 각자 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그들이 배우고 싶거나 펼치고 싶은 꿈들을 적 극 지원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개인의 의견보다는 공동체와 사회가 더 중요하며, 이미 정해진 ‘공부의 길’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 똑같은 것 들만 교육시키며 정답만 추구하고 교육으로 주어진 일들만 해내는 일 꾼들을 생성해 내기 위한 교육제도로 인해 한국인들은 창의성과 개성 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이 더욱 발전하는 사회로 도약하는 기회 마저도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면이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수많은 역경과 경제적 수난들을 이겨내고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한국이 발전된 나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한국인들의 성실함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었음은 사실상 모순처럼 느껴 진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묵묵히 성실하게 한걸음 한걸음씩 발전해 나 가며 한국은 경제적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있 는 나라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빨리빨리’ 문화는 어떻게 보면 예전 부터 한정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고자 했던,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을 해내고자 했던 한국인의 열정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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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선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인들이 지닌 장단점들을 모두 파악하여 고칠 것은 확 실히 고치고 지켜내야 할 것들은 계속 지키고 보존해 가야 한다고 생 각한다. 이러기 위해선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 교육이 도움이 될 것 이라 여겨진다.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교육하여 왜 한국 인의 습성이 이렇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게 되어 이를 통해 비판적이고 성숙한 사고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정착된다면 가장 한국적인 가장 세 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며, 우리의 좋은 것은 잃지 않 고 선진국의 발전된 것들은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민의식으로 한층 발전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 뒤쳐지지 않고 또한 우리 고유의 한국적인 것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교육을 통해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추고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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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정의는 어디에

Grade 12 오승윤 Erin Oh

신에게 묻고 싶다. 언제부터 우리나라는 이렇게 ‘개념 없는’나라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우리나라 국민들은 힘 있는 일부의 목소리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2016년 11월, 최순실-박근혜 대통령, 일 명 ‘최순실 게이트’ 사태를 보며 나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통탄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 기는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사회의 발전에 나의 작은 바람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최순실-박근혜 사태를 모르는 사람은 없 을 것이다. 훗날 역사에 기록될 최순실, 그리고 한때는 국민들의 존경 을 한 몸에 받던 대통령 박근혜. 하지만 정말 문제인 것은 이러한 일 의 뿌리가 너무도 깊고 서로 얽히고 설켜 그 문제의 시작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태를 보며 내가 느낀 점은 우리사회에 도덕성은 과연 존재하는가이다. 우선, 나는 우리 사회가 가진 자에게 약하고 가지지 않은 자에 강한 점이 매우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그게 바로 현 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다. 기업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정 치인들과 손을 잡고, 정치인들은 公과 私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만 급급하다. 예를 들어,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 우 비리, 소위 우병우 게이트를 보면, 작은 기업은 더 큰 기업에 뇌물 을 주어 자신의 배를 불리는데 눈이 멀고, 또 그 큰 기업들은 정치인 들과 손을 잡아 자신들의 사적인 욕심을 채웠다. 가령 면세점 입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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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작은 기업들의 뇌물 수수 또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 자녀들의 병역비리가 오늘날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일이지는 않지 않은가. 여기 서 가장 분통 터지는 것은 이러한 가진 자들은 그들의 재력과 권력을 앞세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준수해야 할 나라의 법을 지키지 않음에 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더욱 안타까웠던 점은 과연 이러한 일이 기업과 기 업인 혹은 정치인들 사이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청소년들 사이에도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부모님의 지위 혹은 인맥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파다하다. 가령, 나이나 신분에 맞지 않는 직업 혹은 능력에 걸맞지 않은 지위와 대우를 얻은 경우가 그 예 이다. 우리는 사회적 성취와 지위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으로 일궈 내야한다는 생각보다는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같이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찌 보면 이것은 그들만의 특권일 수도 있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남들보다 쉬운 길을 걷는 것을 어느 누가 마다하 겠는가. 하지만, 과연 우리는 정당하게 이 지위를 얻어낸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부터 남에게 삿대질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더 당당 해져야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이러한 정서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부 모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지 않겠는가. 자식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현재 온 나라가 부도덕과 불공정, 비리에 의해 흉흉해진 이 시 점에서 우리 사회의 정의의 행방을 뒤돌아 봐야하며 사사로운 개인의 의사와 감정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 혹은 사회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부디 비 온 뒤 맑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사건을 통하여 부패한 정권을 척결하고 우리 스스로를 역시 뒤돌아보아 좀더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회, 바른 나라가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남들은 불가능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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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칙대로 행하며, 자신의 물질적 욕심으로 사회와 공동체를 혼 란스럽게 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자신의 도리를 다한다면, 우리 사회 에 아직은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표어: 오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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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대통령의 리더십을 논하다 Grade 12 인재원 Jae Won In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의 한국의 역사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1956년에 있었던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 후보로 나 오고 나서 시작된 민주화의 서늘한 깃발은 아직도 나부끼는 듯 느껴진 다. 이승만은 이미 8년을 걸쳐 1, 2대 대통령을 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는 나올 수 없었지만 자유당은 이승만의 장기 집 권을 위해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법안을 국회에 올리고 많은 반 발을 무시하면서도 이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려면 총 203명의 국회의원 중 2/3인 136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지만 투 표 결과는 135표였기 때문에 1표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자유당이 제 출한 3선 금지조항 폐지 법안은 여기서 부결이 됐어야 했지만, 자유당 은 서울대 수학과 교수의 의견을 얻어 203명의 2/3인 135.33의 0.33 는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135명으로 바꾸고 법안을 통과시 켰다. 여기서부터 국민들의 불만은 쌓이기 시작했고, 결국 이승만은 3 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하게 됐지만 국민들의 마음은 이승만을 떠난 상태였다. 1960년, 3월 15일에 있었던 부정 선거는 파급이 컸다. 이 선거에서 는 3명이나 9명을 한 조로 묶어 서로 감시하면서 자유당을 찍게 하고, 투표를 하러 오지 못한 사람들의 투표용지는 자유당 사람들이 임의로 도장을 찍어 투표함에 넣고, 심지어 개표장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투표 함을 바꿔 치는 등,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당연히 국민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고, 시위 도중 경상남도 마산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고 등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됐다.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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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를 마산 앞바다에 버렸지만 며칠 후 발견 됐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경악하고 “이승만은 물러가라!” 고 외치며 더 강렬하게 시위 를 벌였다. 한 달 후, 4월 19일, 이승만 정부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계엄령 을 선포하고 군대까지 동원했지만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4월 26일에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떠나야만 했다. 이승만이 떠난 후, 자유당도 무너지자 사회에 혼란이 생겼다. 그리고 그 해 5월, 박정희 가 이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쿠데타를 벌이고 민 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서 윤보선을 15만 표로 제치고 제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 정부는 공업화를 최 우선 과제로 삼아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수립했지만 막상 투자자금 이 부족해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 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에게 불만이 많았던 한국 학생과 시민들은 이 한일 국교 정상화는 “굴욕 외교” 라고 하며 반대 시위를 벌였고, 정부 는 국민들을 무시한 채 바로 회담을 서둘러 공업화를 위한 자금을 제 공해달라는 주요 내용으로 일본과 협정을 체결해서 국민들에게 자존심 에 상처를 주었다. 그러고 난 후, 1967년이 되자 박정희는 또 다시 대 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헌 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2 번 이상 선거를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억지로 3선 개헌을 통과시켜 버렸다. 당시는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시민들이 좋아해도 무조건 금지 되는 그런 사회였다. 1975 년에는 무 려 200 여 곡의 가요가 금지되었고, 영화 또한 정부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으면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없었다. 경찰들은 가위나 이발 기 계를 가지고 다니면서 긴 머리를 하고 다닌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고도 했다. 미니스커트 역시, 너무 짧다고 생각되는 여자들을 세우고 치마 길이를 재며 단속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9년 10월, 시민들의 불만은 쌓이고 쌓이다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부산과 마산에서 불만이 가득 찬 학생들과 시민들은 시위를 시작했고, 박정희 정권은 무력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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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항쟁을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그 진압에 대한 방법을 놓고 정권 내부에서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과정에 서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했고, 이 사건 을 계기로 유신 정권은 막을 내렸다. 1979년 12월 12일에 전두환 일행이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 하는 구데타를 일으켰다. 1980년이 되자 다시 한 번 국민들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를 벌여야 했다. 5월 15일에는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서울역에서 ‘서 울의 봄’ 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 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군부 세력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 했다. 결국 광주 시민들은 분노로 찼고 더 격렬하게 저항을 시작했지 만 신군부는 무력으로 광주 시민들을 참혹하게 사살했다. 현재, 2016년에는 또다시 많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이라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그간 숨겨왔던 많 은 비밀들이 들춰지기 시작했다. 점점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많은 국민들이 시위를 벌이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서서히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겪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오늘날을 버텨 냈다는 게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기도 하면서도 우리나라 역사에 이렇게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 참 아쉽고 창피하다. 요즘 들어 그래도 과거보 다 더 중요한 현재의 대한민국은 많이 발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결과적 으로는 우리나라가 더 자랑스러운 도약을 이뤄낼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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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제국주의의 변명, 식민사관을 논하다 Grade 12 임나연 Na Youn Lim 세계사에서 제국주의의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자면 한 가지 공통적인 부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힘이 있는 한 나라가 그보다 약한 다른 나라의 국토와 그들의 문화,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마저도 약탈해 가 는, 도덕성과 형평성에 어긋나는 식민지화에는 늘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어떠한 논리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각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사관으로 반영된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 사관들을 곰곰이 살펴보자면, 그저 제국주의 국가의 변명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선 타율성론1)에서 언급된 조선은 스스로의 자율적 능력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 자체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 민족에게 자주적인 역사의 발전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모순이 되는 주장이다. 기원전부터 존재하였던 단군 시대부터 안정된 정치 기구를 세워 나라를 통치하고, 국내외로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던 것으로 비추어 보아, 조선의 자율적 발전 능력을 문 제 삼아 식민지를 정당화 시키는 논리는 옳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대륙에 붙은 반도라는 지형적 요소가 조선이 타율적일 수 밖에 없다는 ‘반도사관’2)은 어떠한가? 이 역시도 논리적 오류가 있다 1) 타율성론: 너희들은 원래 그래! 조선인들에게 자율적 자치 능력이 없다는 것. 중국 에게 빌붙어 살던 조센징이니 중국을 대신해 일본이 지배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는 이론 2) 반도사관: 대륙에 붙은 반도라는 지형 자체가 어쩔 수 없이 타율성이라는 매카니즘 을 만들어냈다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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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조선이 반도이기 때문에 정치적, 외교적, 경 제적으로 다른 나라보다 열등하지 않다. 물론 지형적인 한계가 없었다 고는 할 수 있지만, 한 나라의 잠재적 능력과는 무관하다. 이런 주장 을 펼치는 일본을 보자.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섬나라 임에도 뛰어난, 외교적 활동을 하듯 조선은 대륙과 바다를 넘나들며 오히려 고려 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도 근접한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해왔다. 이와 같이, 반도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의존적이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한편, 조선은 역사적으로 발전이 없었다는 ‘정체성론3)’을 보자면, 더 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선 시대부터 현재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는 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무수한 방면에서의 발전이 있었다 는 것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140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로도 알려져 있는 한글을 만들고, 또한 오늘날에 있어서는 IT 강국, 문화 강국, 반 도체 강국 등 여러 분야에서 매 해 도약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 면, 정체성론 또한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조선인의 혈액에 특수한 피가 섞여 누구나 갈등과 충돌 을 일으킨다는 ‘당파성론4)’은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사례만 보더라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양상이다.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이 처 음 북아메리카 땅을 밟고 인디언들을 보았을 때, 스페인 식민지 개척 자들이 남아메리카에서 자연자원과 원주민들의 노동을 착취했을 때, 모두 같은 주장이었다. 제국주의 국가의 가장 쉬운 변명인, 바로 ‘미개 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들을 나열하며 조 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 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논리와 그에 기반한 과 거의 잘못된 역사관을 우리는 언제든 다시 한 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 3) 정체성론: 역사상 조선에게는 발전이란 없었고, 옛날의 농업국가 그대로 이어져 왔 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니 조용히 가만히 있어야 한다. 고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조선을 일본이 근대화시켜 준 것이니 식민지 조선은 일본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 4) 당파성론: 한국인들의 당파싸움은 계속 되었으며, 이는 결코 고칠 수 없는 것. 조 선인의 본성은 늘 끊임없이 싸워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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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신채호 선생님께서는 화랑도의 낭(郎)사상을 말씀하시며, 우리 선조 들께서 산천을 누비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진취적인 기상을 잊지 말라 고 당부하셨다. 또한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하시며, 이런 투쟁을 통해 모든 나라의 역사는 발전해 왔다고 하셨다. 아는 조 선이라 한다면 비아는 주변국으로서 역사가 주변 국가와의 투쟁 과정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기에 지금 현재 우리도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면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한다고 당당하게 가르쳐 주신다. 또한 박은식 선생님께서는 한국통사를 통해 한국의 아픈 역사가 있 음은 인정하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를 이해하고 고치며 해결해 가 는 것이라고 하셨다. 정인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얼’처럼 모든 나라 에는 혼(魂)과 얼(뜻과 정신)이 있는데, 우리는 ‘국혼’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조국의 광복을 이루어냈을 것이며 우리는 이를 영원히 잘 지 키고 갈고 닦아서 후세에 잘 물려 줄 책임이 있다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관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잘못된 것은 과 감히 배격하며 옳은 것들을 선택하여 과거 훌륭하신 어르신들께서 말 씀하신 것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나라의 역사적 발전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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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숙제가 학업에 도움이 될까? Grade 12 김지민 Grace Kim 많은 사람들은 사는 동안 12년 이상 학교를 다닌다. 그동안 선생님 들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거의 매일 내준다. 그런데 이 많은 숙제의 의 미가 무엇일까? 정말로 숙제가 필요한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숙제가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지 않으면 학생들이 게을러질 것이라고 생각하 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부정하는 많은 조사 결과가 존 재한다. 쿠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숙제를 하는 것과 성적이 더 높아 지는 것은 관계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너무 많은 숙제 를 하면서 학생이 배우는 것에 대한 흥미를 잃거나 지치게 되는 경우 도 있고 여가 시간이 부족해 피곤해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여가 시 간이 부족하면 학생들은 삶의 균형을 잃을 수 있고, 공부할 것들이 너 무 많아지면 피로가 누적되어 다음 날 학교에서 집중이 안 되므로 결 과적으로 숙제가 학습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당연히 숙제를 하는 것에 따른 좋은 점도 있다. 학생들은 숙제를 통 해 자습을 할 수 있고,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학업 능력 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릴 수도 있다. 또한 숙제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배우게 해 주고 책임감도 가르쳐 준다. 숙제를 하면서 잘 모르는 점들을 발견해내서 더 깊이 공부 할 기회를 준다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많은 사람은 숙제가 필요하다고 생 각한다. 하지만 최근 직접적으로 숙제의 부정적인 영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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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숙제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 한다. 요즘 나는 주어진 숙제가 너무 많아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 할 수가 없다. 계속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학 교에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어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수업을 듣 고, 방과 후에 운동을 하고, 또 집에 와서 매일 밤을 새며 숙제를 하 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든다. 하지만 어른들은 우리의 이런 삶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수업 시간에 잠을 자면 화를 내거나 다른 처벌을 한 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숙제를 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숙제의 상당 부분을 수업 시간에 해 결할 수 있다면 숙제 없이도 우리는 높은 학업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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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GMO 음식, 어떻게 봐야 할까? Grade 12 이희연 Gloria Lee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는 유전자 변형 농산물로써 일반적으로 생산량 증대 또는 유통, 가공 상의 편의를 위하여 유전공 학기술을 이용, 기존의 육종방법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형질이나 유전 자를 지니도록 개발된 농산물을 말한다. 요즘 우리가 먹은 음식에는 거의 GMO가 들어가 있다. 특히 옥수수와 콩은 90%가 GMO이다. GMO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특히 농산물의 경우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GMO 농산물은 병충해에 강하고, 적은 노동력과 비용으로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어 세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 된다. 세계에는 경제가 어려워서 식량이 부족한 나라들이 많이 있다. 영양 섭취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병에 걸리거나 죽은 사람이 많은 나라 들도 있다. 하지만 GMO 관련 기술이 발달하면서 농산물이 부족한 나라 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농산물을 두세 배 정도가 아니라 천 배 이상 수확함으로써 식량 공급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이것을 통해서 어려 운 나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여기까지 본다면 GMO는 굉 장히 좋은 기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첫째, 한 유전자가 다른 종에 도입되는 경우, 새로운 물질이 생산되 므로 독성을 나타내거나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최근 GMO 식품이 GMO 농산물 생산 부동의 세계 1위인 한국 자살률의 원인에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연구에 따 르면 한국이 세계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 원인에는 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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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 제초제에 포함된 ‘글리포세이트(Glyphosate)’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WHO가 2A등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이 ‘글리포세이 트’는 인체에 들어가면 장에서 몸속의 독소 제거와 면역 시스템 강화 와 세로토닌 생성에 도움을 주는 세균들(microbiota, 미생물총)을 죽 인다. 결국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의 감소가 한국인의 우 울증 발병과 자살률 증가라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또 한 대부분의 콩기름과 카놀라유, 옥수수유는 GMO로 만들어지며, 가공 식품에 들어가는 액당, 과당(단맛을 내는 첨가물)도 GMO 옥수수가 원 료라고 지적한 뒤 이들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 항생제 내성 표시 유전자가 장내 박테리아와 병원균에 확산되 면서 인체 내 항생제 내성이 증대된다고 한다. GMO가 미치는 인체에 대한 악영향을 알고 많은 나라들은 관련 법 규를 만들고 있다. 그 법규에 따르면 야채, 과일 등에 사용된 농약을 정확히 표시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농산물을 믿고 안 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직도 이러한 법률을 도입하고 있 지 않는 나라들이 많지만, 러시아처럼 GMO 농산물을 아예 수입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처음에 GMO는 적은 노동력과 비용으로 세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 였지만 지금은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요 소 중의 하나인 음식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음식에 GMO가 들어 있다면 우리의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항상 식품을 구입할 때는 GMO가 들어 있는지 살펴보고 구입해야한다. 그리고 GMO가 들 어간 음식은 되도록 먹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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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하람베의 생명 Grade 12 김현준 Josh Kim 고릴라 ‘하람베’는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동물원에 살고 있었 다. 동물원에서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하람베는 2016년 5월 2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하람베가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하람베 를 사람들이 쏜 총에 맞아서 죽었다.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그날 한 아이는 가족과 함께 동물원에 왔다. 동물들을 구경하던 아 이는 하람베 우리 안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 기 시작했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안전요원은 아이의 안전을 위해 하람베를 총으로 쏴서 죽였다. 하람베는 그 때 고작 17살이었고 멸종위기 1급 로랜드 고릴라였다. 이 사건에 대한 견해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하람베를 죽인 것이 잘 못이라는 의견과 하람베를 죽인 것이 잘한 선택이라는 의견이 있다. 첫 번째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하람베를 죽인 것이 큰 잘못이라 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이 찍은 여러 동영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 람베가 아이에게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 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보이긴 했으나 그것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운 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람베가 아이를 보호하고 있어!”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람베의 보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 은 부모님의 부주의에서 비롯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부모님은 아이를 잘 지켜야 하는데 이 아이의 부모님은 아이를 동물 우리 안으로 떨어 지게 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짜 총이 아닌 수면마취 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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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어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수면마취 총은 몸에 전달되 는 반응이 비교적 느려서 아이가 위험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하람베를 죽인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 다. 영상에서 하람베가 다른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모습은 아이 가 마치 끌려가는 것 같았고 몇몇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 치 못했다. 고릴라가 사람, 특히 어린 아이에게 엄청 위험한 것도 사실 이다. 그래서 만약 총으로 쏘지 않고 그냥 나뒀다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아이니까, 그리고 고릴라와 크 기의 차이도 엄청 많이 나니까, 하람베가 살짝만 때렸어도 아이가 즉사 할 위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의견 중 어느 하나가 전적으로 맞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첫 번째 의견에 동의한다. 인간과 동물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위험 한 발상일지도 모르지만 하람베도 소중한 생명이다. 나도 영상을 보면 서 아이가 걱정되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빠르 게 수면마취 총을 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그 아이의 부모님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 맹수들이 많이 있는 동물원에서 아기가 위험에 빠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는지 이해 가 가지 않는다. 이것은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건이 마무리 된 후, 아이의 엄마가 소셜 미디어에 자기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한 글을 읽었다. 자기는 원래 좋은 부모인데 어찌 하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아이가 무사한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하였 다. 아이 엄마의 변명 같은 이런 반응을 보고 더 화가 났다.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할 상황에서 변명 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를 키울 때 책임을 다해야 한 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없다면 아예 아이를 키우지 말아야 한다. 하 람베 사건은 나에게 동물 생명의 중요성과 부모의 책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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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스마트 폰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Grade 12 박정윤 Eujene Park 요즘 세상에서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살아남기가 정말 힘들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 속에서 여러 가지 과학 기술로 인한 기 기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그중에 하나이다. 이제 사람과 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일 부가 되어버린 스마트폰, 그 득과 실을 알아보자. 급격히 발전하는 요즘 사회에서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간편함도 중요 하다. 그런 지금 사회에서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스 마트폰의 장점들은 여러 가지다. 첫 번째는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다. 스마트폰은 사람들이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져 어딜 가든 언제나 들고 다니면서 중요하고 필요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두 번째 장점은 조그마한 기기 안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용량이 크면 클수록 많은 정보와 기능들이 들어 갈 수 있다. 애플리케이션을 깔면 깔수록 한 기기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메시지와 전화는 기본이고 손전등, 카메라, SNS, 카드 계 산, 폰뱅킹, 인터넷 쇼핑 등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거의 모든 것 을 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이 합쳐져서 너무 편리하고 좋은 기기가 되었다. 언 제 어디서나 온갖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발 전이고 이 발전이 사람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스 마트폰이 발전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가 힘들었 다. 특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더 그랬다. 사람들은 버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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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 오고 가는 시간, 가면서 걸리는 시간, 이런 것들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발명 되고 지하철과 버스의 시간표, 걸리는 시간 등이 다 나오게 되니 사람 들이 기다리는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을 합쳐서 또 다른 일들을 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시간을 미리 아는 장 점이 크지만, 그런 시간들을 언제나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집에서만 시간표를 볼 수 있었다면 덜 효율적이었을 텐데 움직이면서 볼 수 있고,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으니까 더욱 사 람들에게 유용해졌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스마트폰의 여러 가지 장점들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장점들을 모두 없앨 수 있는 더 큰 단점들도 있 다. 스마트폰을 쓰려면 일단 배터리와 데이터가 필요하다.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기능들은 다 쓸모가 없다. 그리고 기능이 많을수록 배터리가 빨리 줄어드는 스마트폰이 많아 사람들에게 불편함 을 준다. 배터리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데이터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살 때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쓸지 정해둔다. 그걸 넘어가면 돈이 더 나가거나 아예 데이터가 차단된다. 데이터를 더 많이 쓸수록 돈도 많이 나간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에 게는 스마트폰이 유용하지만 돈을 아끼는 사람들한테는 별로 좋은 기 기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기기에서 오는 기술적인 단점들 말고도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 들이 겪게 되는 사회적인 문제점도 지적할 수 있다. 요즘 지하철을 탄 사람들을 보면 거의 90퍼센트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게임이나 SNS를 하 고 있다. 이것을 보면 스마트폰 중독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 마트폰에 있는 기능들이 많을수록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유혹할 수 있 게 된다. 게임이나 티비, 또는 SNS 등 더 많은 할 것들을 제공해 주 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관리와 시간 관리를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스 마트폰이 결코 도움이 되는 기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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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중에 언제나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다. 스마 트폰으로 뭘 하는지 보면 항상 웹툰을 보고 있거나 게임을 하고 있거 나 페이스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스마트폰들의 장점들이 단 점으로 변화되는 걸 볼 수 있다. 결론은 아무리 스마트폰이 많은 기능 이 있어서 좋아도, 쓰는 사람이 잘 못 쓰면 오히려 더 안 좋은 영향을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기가 아니다.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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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지필 고사의 효용성 Grade 12 강가은 Johanna Kang 세상에는 지필 고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중요하 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필 고사는 한국, 일본,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나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는 SAT, ACT 등의 국가 차원의 지필 고사와 학교 내에서 치러지는 지필 고사 들이 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지필 고사로 테스트를 한다. 한국에도 영어 실력을 평가하는 TOEFL이라는 지필 고사가 있다. 이처럼 세상 에는 많은 종류의 지필 고사가 있다. 지필 고사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학생들의 실력이 어떤지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71억 사람들이 있고 그 들은 다 다르다. 그런 사람들을 평가하기 위해 사람들은 시험이란 하나 의 도구를 사용한다. 이러한 시험은 학생들이 얼마나 공부했는지, 또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 에서도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풍요

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 다. 지필 고사가 필요 없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 원에 매일매일 다니는 사람들은 당연히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고. 학원 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필 고사는 불리할 것이다. 그리고 학원에 다니는 애들은 혼자서 노력을 한 것이 아니기에, 대학에서 혼자 공부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험의 성적으로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 시험 문제를 잘 못 푸는 학생들도 있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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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할 때 본인의 진짜 능력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고,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필 고사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지필 고사는 사람들의 능력 을 정확하게 측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필 고사는 사람들의 실력을 정 확하게 판단할 수 없으면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만 준다. 이런 지필 고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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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콩트>

진실된 사과, Sorry? No Sorry! Grade 12 서수민 Michelle Sumin Suh

얼마 전 체결된 일본 ‘위안부’에 대한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협 상안에 대한 질문을 위해 일본 대사관과의 연락을 취해 사전에 약속을 잡고 인터뷰를 가지기로 하였지만, 약속되어 있던 시간에 인터뷰를 가 지기로 한 대사관 직원들은 자리를 비워 만날 수 없었으며, 다음 날 다시 찾아간 일본 대사관에서 한 직원과 짧게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 다.

韓: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아시아 퍼시픽 국제 외국인 학교 11학년에 재학 중인 서수민이라고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 시간에 일제강점 기와 일본 ‘위안부’에 대해 배우던 중 2016년 1월 16일 한국 정 부와 일본 정부가 체결한 관련 협상안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 보고자-

日: 죄송하지만 저희 측에서는 딱히 말씀드릴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韓: 궁금한 점들이 있는데 일본 측에 보낸 이메일에는 답장이 없으셔 서 어쩔 수 없이 대사관에 전화 드려서 인터뷰를 가지기로 했었 는데, 그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찾아왔는데요, 간단한 질문 몇 가 지만 드릴 수 있을까요?

日: 저희 측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미 표명되어 있을 뿐더러, 이번 협 상과 저희 대사관측은 관련이 없습니다.

韓: 대사관은 외교사절단이 지내는 곳이고, 외교사절단은 자신의 국가 를 대표하여 외교교섭을 행하는 곳인데, 이번 협상과 같이 외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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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영향을 갖는 일과 관련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日: 하…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이번 협상은 1965년, 1993년, 그 리고 그 이후로 행해진 수많은 사죄와 협상에 이어 일본 정부가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다시 한 번 공식적으로 사죄드리고, 보 상하고자 이루어진 협상으로 일본 정부는 이미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모든 보상을 마쳤습니다.

韓: 네, 그 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협상은 양측이 동등한 입장으로 원하는 것을 ‘거래’할 때 사용되는 말이 아니던가요? 일본 정부가 주장하듯이, 정말로 사죄하는 마음에서 하는 보상과 배상이었더라면, 협상안이 아니라 사과문을 보내어 일 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니었을 까요?

日: 우선, 이 협상안에 응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한국 정부이며, 한 국 정부는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의 대변인 이라는 사실을 간과하 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대표하는 한국 정부는 이미 저희 측에서 제시한 조건들에 응하고 사과를 받아들였으며, 협상안은 단 지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담화와 그의 대한 결론에 붙은 명칭 일 뿐 입니다.

韓: 방금 ‘대변인’이라고 언급하셨는데요, 어느 상황에서든지 제 3자 가 끼어들어 피해자 대신 가해자와 합의를 보는 것이 합당한 일인 가요? 뿐만 아니라 권리를 가진 대변인이라 할지라도 피해자들의 의견으로 제대로 대변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협상을 맺 는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닌가요?

日: 방금 언급하였듯,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변한 것은 한국 정 부이지 일본 정부가 아닙니다. 만약 협상에 관해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한국 시민들과 한국 정부가 해결을 봐야 할 일이지, 이미 보상을 마친 일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韓: 아니오, 이런 협상을 맺은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을 뿐더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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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위안부’에 관한 보상을 모두 마쳤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는 당장 이 주장을 접고,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합니다.

日: 진정한 사과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의 하실 수 있으신가요? 일 본 정부는 꾸준히 한국과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해왔습 니다. 그리고 한국 국민들은 지금까지 그런 노력들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의 사죄를 ‘진정한 위 로와 사과’ 라고 받아들이실 것인지, 정확히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 요?

韓: 우선, 지금까지 일본이 한국에게,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 과해왔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전부 유효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박정 희 정부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과도, 전부 증명되지 않은 루머 일 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께서는 이번 협상 이후 눈물을 흘리시며 어떻게 피해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맺어진 협상이 진정한 사과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신체적은 물론 정신적인 피해까지 도 겪어야 합니다. 대부분은 결혼을 하지 못해 가족 없이 살아가시 고, 결혼을 하셨다 하더라도 신체적 혹은 정신적 문제로 임신이 불 가해 자식을 가지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 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 는 아직까지도 물질적인 배상으로 그 모든 문제를 ‘지워버리려’ 합 니다.

日: 일본 정부는 절대로 역사를 ‘지워버리려’ 한 적도,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잊으려 한 적도 없습니다. 일본 정부가 그런 생각을 가 지고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협상을 맺고자 하지 않았을 것 입니 다.

韓: 일본 정부가 역사를 지워버리려 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역사왜곡은 물론이고, 아예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곳은 더 많습니다. 미국 LA에 설치된 소녀상을 일본인들이 철거하 라 주장했던 것 역시 그 예입니다. ‘위안부는 어느 나라 어느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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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이용된다. 일본은 그 중 하나일 뿐 잘못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피장파장의 오류를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했습 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본이 정말로 잘못을 인정하고 자 했던 것이라면, 소녀상의 철거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역 사교육 시스템을 재편하고 법을 개정해 일본 ‘위안부’와 같은 일이 재연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야 했습니다. 현재 일본 국민들의 64 퍼 센트는 일본이 일본 ‘위안부’와 관련해 잘못한 바가 없으며, 사과할 필요도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의 일러스트레이 터는 ‘Sexy Lady’ 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들을 조롱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일본의 교육이 그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직원은 더 이상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나가줄 것을 종용했고, 나는 결국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쫓겨나듯 대사관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일본은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진실된 사과를 건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UN에서 권고하듯이 법을 개정 해 이런 일들을 미연에 재발방지 해야 하며, 뚜렷한 역사교육을 통 해 일본의 시민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야 한다. 물론 일본정부가 주 장하듯이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지 못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피해자들이 또다 시 생기지 않도록, 또 다시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쓰 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와 다음세대들이 전 세대들을 위해 풀어야할 숙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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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콩트>

진실된 사과

Grade 12 윤설빈 Seolbin Yoon

‘딩동댕’ 종이 울렸다. 다음 시간은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국역 사시간이다. 며칠 전, 인터넷에 일본 ‘위안부’에 관하여 뉴스를 봤는데 난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뭔 일이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일본과 한국 이 이 일본 ‘위안부’ 문제로 논쟁을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그 땐 시간 이 없었기에 넘어 갔었다. 그래서 어제 선생님께서 오늘 일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려주시겠다고 하였을 때 난 오늘이 오기를 하염없이 기 다렸다. 비록 아직 초등학생이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다닥’ 나는 반에 빨리 가기 위하여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반에 도착하자 몇몇 친구들은 떠들고 있었고 선생님은 수업준비를 하고 계 시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단짝 옆에 가 자리에 앉고 노트를 꺼냈다. ‘딩동댕’ 두 번째 종이 울렸다. “자, 다들 자리에 앉아주세요. 오늘 선생님이 일본 ‘위안부’에 관하 여 알려준다 했죠?” “네!” “일단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선생님한테 말 해 줄 수 있는 사람, 손!” 나는 이때다 싶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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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이 말해 보세요.” “일본 ‘위안부’는 일본이 1930년도쯤에 전쟁 군인들을 위해 ‘위안 소’를 설치해, 한국, 베트남 등 많은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 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정확합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하며 비인간적인 행동들 을 많이 하였는데요. 저 일본 ‘위안부’에 이용당했던 분들이 아직까 지 한국에 살아 계시는 것 여러분 알고 계셨나요? 지금도 할머니들 께선 그 때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계십니다. 하지만 일본은 할머니 들과 상의 하나 없이 멋대로 협상을 한국과 맺었는데요. 이것으로 한국과의 일본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라는 조건을 내걸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내일까지 숙제 는 이 일본군위안부에 관하여 조사하여 알아오는 것입니다.” ‘딩동댕’ 종이 울렸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일본군 ‘위안부’에 관하여 검색을 하였다. 처 음 뜬 기사는 일본기자가 쓴 것을 한국말로 변역한 기사였다. 나는 제 목을 보고 의문이 들어 바로 들어가 보았다.

2016년 1월 2일, 일본군 ‘위안부’ 사과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것인가 1906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후, 한국과 법률적으론 해결이 되었지만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 (일본시민들이 스스로 기부하는 시스텤) - 이거 자 체가 일본 시민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 이 후 2002년에 일본 총리가 보상을 받은 분들께 보상금과 서명이 담긴 서 한을 각각에게 보냄 1993년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 2년간의 위안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한 ‘고 노담화’를 인용해 일본 정부가 진지한 사과와 함께 후회를 표시했다고 밝 힘. 또 한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위안부 설치에 관여를 했다고 밝힘 2015 공식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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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원하는 진정한 사과는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읽고 난 후 난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 한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조금 더 검색을 해보고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가는 길에 사람들 몇몇과 소녀상을 보았다. 나는 뭘 하는 거지 하고 의문이 들어 가까이가 어떤 할머니가 말씀하 시는 것을 들었다. 듣고 나서 보니 그분은 일본 ‘위안부’ 할머니이셨 고,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제 일본 기자가 쓴 것을 보고 의문이 든 나에게 정말 한심스러웠다. 학교에 도착해 선생님에게 바로 향하였다. “선생님.” “어 민정아, 무슨 일이니?” “저 오는 길에 수요시위를 봤는데 너무 슬퍼서.” 그리곤 난 어제 저녁에 읽은 기사와 지금까지 내 생각들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음……. 민정이가 생각을 많이 했겠구나. 지금까지 일본이 한국에 게 자잘한 사과들을 해온 것은 맞지만 할 때마다 항상 뒤에 말이 많았고 돌려가며 사과했단다. 그래서 지금 한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란다. 또한 선생님 생각으로는 이 일은 일본이 아무리 사과를 해도 일본군 위안부 할머... 아니... 한국인들은 받아드릴 수 없을 거야. 일본이 사과를 받을 수 없는 짓을 했기 때문이지.” “일본은 너무 뻔뻔한 것 같아요.” “맞아, 일본은 뻔뻔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실 되게 인정, 또 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걸 우린 기억해야 돼. 민정이가 이런 생 각을 한 게 선생님은 너무 자랑스럽다. 다음엔 반 애들과 같이 수 요시위에 가자. 아, 또 지금 민정이가 생각하고 말한 걸 오늘 반 애들에게 말 해 줄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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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는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올 때와는 다른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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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문>

그들의 보금자리

Grade 12 이신영 Shin Young Lee 안예지 Angelina Ahn

예지: 신영아, 우리 이제 곧 11학년도 끝나가고 여름방학도 오는데 어 디 놀러가자! 신영: 흠…….어디 갈까? 예지: 서울을 벗어나 공기 좋은데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는게 좋을까? 서울을 잠시 벗어나고 싶어. 신영: 내가 재작년 여름에 가족들이랑 남해를 갔는데, 바다도 있고, 공 기도 좋고. 진짜 재미있었어. 아 맞다! 거기 독일인 마을도 있어. 저번에 영화 ‘국제시장’에서 본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이 귀국해 서 모여 사는 곳이래. 예지: 아, 기억난다! 나도 독일인 마을 가 봤어! 영화에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접하게 된 이후로 그 마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졌어. 국제시장에서 1970년대에 살고 있는 남한 사람들의 일상을 비췄 는데, 난 독일로 파견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삶이 제일 인 상 깊었던 것 같아. 가족을 위해 돈 벌려고 모든걸 내려놓은 그 분들이 존경스럽더라고. 국제 시장의 황정민이 본인의 꿈이었던 선장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코앞에 두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 해서 그 기회를 버리고 베트남, 유럽에 가서 극한 직업을 택했었 잖아. 신영: 나도 그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던 것 같아. 꽤 많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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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파견 되어서 이런저런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 피와 눈물로 벌은 돈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들을 위해서 사 용하는 그런 희생적인 고생 말이야. 나아가, 그 분들은 외딴 나 라에서, 그 나라 언어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보내졌기 때문에, 그 지역에 익숙해지기가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아. 나도 잠시 미 국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 굉장히 낯선 문화 때문인지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매일매일 조금씩 지치더라. 하지만 한국에서 온 사 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적응하는데 쉬웠어. 그래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같은 나라에서 온 그리고 힘든 점들을 함께 겪는 사 람들끼리 결혼도 하고 모여 사는 일이 자연스러웠을 것 같아. 그 래서 독일인 마을도 생겼던 것 같아. 그런데 그 사람들을 대체 왜 독일로 보내져야만 했던 거야? 갑자기 어마어마한 수의 한국 사람들이 그때 먼 유럽으로 보내졌다는 것 자체가 조금 놀라워. 예지: 사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독일로 총 7,900여명의 광부들을 보냈 었어. 6.25전쟁 후,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이 많이 열약해 실업률 이 굉장히 높았어.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광부와 간호사들을 당 시 노동력 부족상태를 겪고 있었던 독일에 보내 우리나라의 경 제성장을 추진하려고 했지. 결국 노동자들을 통해 30%에 육박하 던 실업률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대. 신영: 아하, 그것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써 이루어진 일인가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계획했던 국민경제개 발 계획이었고,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자본을 외화를 국내로 끌어 들이는 방법으로 해결했대. 그때 파독 광부 와 간호사들이 벌은 외화가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것이 이 문제 를 가장 빠르게 해결 했다고 들었어. 예지: 나도 동의해.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 아니었으면 우리나라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려웠을 거야. 박정희 정권이 당시 한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갖은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중에 독일이랑 맺은 협상도 있었지만 일본 식민지 역사적 보상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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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문제에 대한 청산을 돈으로 요구했던 것도 있어. 그래서 일 본은 우리에게 5억원 상당의 금전적 보상을 했는데, 요즘 문제가 되는 것이, 식민지에 대한 사과나 보상이 일반인들의 의견과 상 관없이 돈으로만 청산 되었다는 것이야.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 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가 회복할 수 있었어. 신영: 그러한 배경이 있었구나. 한국이 그렇게 처참한 경제적 어려움 을 겪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굉장히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아. 예지: 정말 그 분들이 있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 해. 우리가 곧 갈 독일인 마을은 남해군 정부 단체에서 2000년 부터 2006년까지 독일로 일 하러 떠난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다 시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어준 마을이야. 이곳의 주택들은 독일교포들의 주거지이기도 하지만 또 독일인 마을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관광객들의 민박으로도 사용되고 있어. 신영: 남해군에서 이 마을을 만들어 주어서 참 다행이라고 느껴져. 독 일에서 오랜 시간 살면서 갖은 고생을 한 사람들은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자신들을 온전히 이해해 줄 사람을 찾기 힘들어. 같 이 고생을 한 동료들 말고는. 또, 모국과 고향이 당연히 그립겠 지만, 한국이 너무 많이 변해버린 탓에 독일에서 오랜 시간을 보 낸 사람들은 오히려 독일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있을 것 같아. 그 딱 중간이 바로 독일인 마을인 것 같아. 자기들의 고향인 한 국에서 독일의 풍취를 느끼면서 노년 생활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곳. 그 들의 삶이 이제야 평안해진 듯 느껴져서 한편으로 다행이야. 예지: 남해군에서 그 지역을 관광지로 쓰려고 일부러 교민들에게 부업 으로 민박만을 허락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 민박을 통해서 돈을 벌면서 생활하고 있대. 이 독일인 마을에 살면서 정원도 가 꾸고, 독일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사용해도 서로 잘 알아듣는 사 람들끼리 살고 있다고 하더라. 독일로 일하러 나간 광부들과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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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들을 위해서 독일인 마을을 독일과 흡사하게 묘사하려고 직 접 독일에서 건축부재를 수입해 전통적인 독일 양식 주택을 건 립했대. 그래서 지금 독일인 마을에 가보면 이색적인 주택 풍경 이 정말 인상적이야. 이런 이국적 풍경뿐만 아니라 독일인 마을 내 독일 맥주, 소시지 등 독일 먹거리도 많아 독일인 교포들이 편안하게 생활 할 수 있다고 하네. 이런 색다른 문화를 느끼기 위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고, 독일인 마을은 관광지로 점점 더 인기가 많아지고 있어. 하지만, 독일인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 교포들은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가끔 주택 안으로 허락 없이 들어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사생활 침해 피해도 번번 이 있나 보더라. 신영: 그런 힘든 점도 있겠구나. 우리는 이번에 놀러 갈 때 그런 무례 한 짓은 하지 말자. 가서 독일 교포들과 파독 당시의 경험에 대 해서 들어보고 싶다. 가서 꼭 그 분들과 이야기 해보자! 예지: 그러자, 가서 직접 그분들한테 그분들의 삶의 여정을 들으면서 값진 경험을 가져보자!

그림과 표어: 이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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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문>

색안경을 벗고

Grade 12 임나연 Cathy Lim 이송원 Shannon Yi 서수민 Michelle Suh 송원: 영화 어땠어? 나연: 느끼는 게 많았던 영화야. 나는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나오는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 송원: 맞아. 동남아 근로자들이 한국 음식점에서 뭘 먹고 있는 모습을 본 한국 청소년들의 태도가 나도 기억에 남아. 나연: 한 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가족이 미국에서 지냈을 때 미국 사 람들의 눈에는 우리 아빠 역시 외국인 노동자였을 텐데, 모습이 다르다 해서 누구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안 될 것 같아.

송원: 맞아. 그 노동자들도 개개인만의 가족과 사연이 있을 테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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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들이 하는 고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 일상에 도 큰 영향이 있을 거야. 예를 들면 공장에서 일을 할 일꾼들이 부족 했다면, 우리가 쉽게 구입 할 수 있는 물품들을 구하기 어 려울 수도 있어. 또, 우리 집을 짓는 데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필 요한 것처럼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 나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영화 내에서 황정민이 그렇게까지 분노 하며 학생들을 다그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해. 수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황정민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아. 타지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로 힘들고 처참한 상황에서 일하신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세대가 그런 청소년 을 봤을 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더 힘드셨 을 것 같아. 그 분들께서는 자신들의 가족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인생과 행복을 희생하셨는데, 정작 우리는 그런 노고를 기억하지 않으니까. 우리도 누군가가 우리가 고생해서 한 일을 인정해주기는커녕 무시한다면, 화나지 않겠어? 송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장면에서 우리에게 주려는 메시지는 타 지에서 일 하는 노동자들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받아들이며 그들 의 입장도 존중해야한다는 것 같아. 생각해보면 우리는 길거리에 서 흔히 외국인들을 자주 보곤 하는데, 우리도 모르게 백인들에 대해 느끼는 것과 동남아인들이나 중동 사람들을 볼 때 느끼는 것이 확연히 다른 것 같아. 나연: 그러게 말이야. 서양 문화와 서양 사람은 동경하면서, 동남아인 들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아. 우리 나라는 서양 국가들을 능가하는 선진적인 기술 발전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는데, 정작 문화적이나 인종적 인식에 대해 서는 여전히 그에 비해 후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송원: 만약 동남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이 선진국이었고, 반대로 미국이 나 영국 같은 세계 경제 중심지인 나라들이 후진국이었다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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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의 관점 역시 뒤집혔을 것 같아. 단순히 어떤 나라의 경제적 상황을 바탕으로 그 나라의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그들의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은 몹시 바르지 않다고 생각해. 이 뿐만이 아니 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대하는 태도 속에는 미(美)의 기준 역시 포함 되어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만, 한국 사람들은 본인들도 모르게 외모지상주의적인 사고를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요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취직을 위해 성형 수술까지 강행 한다는 말도 있잖아.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백인들의 외모, 큰 키와 흰 피부, 큰 눈과 오똑한 코가 미인의 얼굴상이라 고 생각하며 동남아인들만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 아서 몹시 아쉬워. 이에 따라 그들을 대할 때의 태도 역시 백인 들을 대하는 태도보다 조금 더 거만하거나 우쭐대는 경향이 없 지 않아 있는 것 같아. 나연: 한국 사람들의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시선에 송원이의 말대로 외모도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특정 인종이라든지 얼굴이나 외 모의 특징 때문에 어떤 인종은 상대적으로 부러워하고, 다른 인 종은 무시하거나 깔보게 되는 외모 지상적 의식은 흔히들 다 가 지고 있는 것 같아. 창피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어쩔 땐 한 사람의 무능력함을 그 사람의 인종이나 외모와 연결 짓기 도 하는 것 같아. 또한, 외모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문화적 배경 도 우리의 편파적인 태도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인도, 중동, 아프리카 사람들이 숭배하는 종교나 그들이 행하는 전통적 인 관습을 어떤 사람들은 미개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고, 또 다르게 인종으로 보자면 흑인들만의 특별한 태도라든지 자유 분방함이 우리 눈에는 익숙지 않고, 그런 차이점 때문에 더 두려 워하는 듯해.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적인 국가기 때문에 다양한 인 종이 사는 편은 아니잖아. 그런 만큼 외국인도 많은 편이 아닌지 라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는 인식이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아. 수민: 나는 동남아 사람들은 괜찮은데, 흑인들을 보면 다소 무서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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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미국에 있을 때 무서운 일이라고 해야 할까, 당황스러운 일을 여러 번 겪었거든. 분명히 밝은 낮에, 큰 도로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몸을 만지지 않나, 수치스러운 농담을 던지지 않나, 분명히 한국인이나 백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흑인 남자들은 유독 무서워지더라고. 그래서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도 이태원 같은 곳 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곳에서 흑인남자들과 마주치면 도 망가게 돼. 그들의 문화나 국가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곳에서 사귄 흑인 친구들도 있지만 말이야. 분명 그런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좋지 않은 것과 그런 인종차별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의 지위나 힘에 의해서, 혹은 개인적 인 경험에 의해서 인종차별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 것 같아. 불가피 하다 하더라도, 그런 인종차별의 문제점을 깨닫고 그런 사회 속에서 오직 나만이라도 그러한 잣대에 휘둘려 무고 한 피해자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기 위해 그 노력의 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노력하는 것이지. 송원: 맞아. 우리가 일상 속에서 외국인들과 소통 할 때 그들에게 우 리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다른 태도로 대하지 않도록 조 심해야 할 것 같아. 예를 들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외국인 근 로자들을 봤을 때 옆에 앉길 꺼려하거나 어색해하지 않는 방법 도 있잖아. 수민: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해. 방송에서도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 서 외국인 옆에 앉기 꺼려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아. 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 인데 말이야. 소수자를 차별 하고 박해하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성 차별, 성 소수자 차별, 인종 차별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 선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겠지만, 나 한명이라도 작은 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예를 들어 우리학교에 전학 오는 외국 인 친구들에게 먼저 친절하게 대해주고, 한국을 소개해주거나 같 이 나가서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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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 이미 굳혀진 인식 속에서 사회를 바꿔나간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겠지만, 그래도 우리 한 명 한 명이 그러한 인식들에 휘둘리 지 않고, 남들의 인식도 차차 바꿔나가는 데에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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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문>

이산가족, 우리가 해야 할 내일

Grade 12 오서현 Sally Oh 윤설빈 Seolbin Yoon 정승현 Jenna Chung 강준우 Joon Woo Kang

서현: 얘들아, 영화 ‘국제시장’에서 보면 1950년 6.25 전쟁 때, 흥남부 두 철수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에 오르지 못하고 가족들을 잃 거나 헤어지잖아.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1980년대 즈음인가, KBS 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방송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던 많은 가족들이 다시 만나잖아.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요 즘에도 사람들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북한과 통일해야 한다 든지, 아니면 남과 북에서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서로 만나서 ‘눈물의 이별’을 했다든지 이런저런 기사들이 나오잖아. 아직 도 우리나라 이산가족이 그렇게나 많은 걸까? 설빈: 아 맞아. 요즘 이산가족 상봉 시청자 수만 봐도 6만 얼마가 남 았는데, 예전에는 13만 얼마가 있다하니 우리나라가 어떤 상 황들을 겪어왔는지 뻔히 보여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 특히 네 가 말한 KBS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방송을 봤을 땐 같은 한 국인으로서 너무 슬퍼서 눈물이 다 나더라. 근데 다행히도 요 즘은 이상가족 상봉 행사도 많고 핸드폰으로 간편히 서로의 생사를

있는

사이트가

있어서

다행인

같아.

‘Reunion.unikorea.go.kr’ 이라고 들어가 보면 단기적으로 생 사 확인, 서신교환, 또 제3국 상봉이 지원되기 때문에 많은 이 산가족들이 참여 한다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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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역사적으로 정말 아프고 슬픈 일이기도 하고, 또 기억에 오랫동 안 남을 일이라서 정부와 민간단체가 오래 전부터 이산가족 사봉을 위해 이런 저런 일들을 시도 해 왔어. 현재 진행형이기 도 하고. 요즘에는 기술도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핸드폰이나 인터넷 또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쓰이고 있어. 이산가족 교 류의 최첨단 유형은 강한 전파를 10여 분간 사용해서 통화를 하는 것이더라고. 중국 핸드폰이 그렇게 귀중한 교류 수단이 래. 그나저나 네가 아까 얘기한 웹사이트 있잖아, 그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을 할 수가 있는 거야? 설빈: 일단 북한 내 가족 생사확인을 원하는 사람은 유니언커뮤니티 인터넷에 접속해 신청 하고

한빛은행에 의뢰

대금을 입금하면 유니 언커뮤니티가

북쪽의

금강산 국제그룹에 연 락해서 이산가족의 생 사여부를 확인하는 거 야. 가족을 찾는 데 드 는 비용은 대략 $500 에 대행료 70만원이야. 하지만 문제점 또한 있 어. 남북정상회담 분위 기를 타서 인터넷을 이 용해 이산가족을 찾아 준다는 단체들이 생겨 나고 있지만 북한이 이 런 단체들의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지원하고 그림: 김윤수

있는지 없는 지 알 길 이 없어. 그 작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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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해도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금강산 에서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혹시 알아? 서현: 응.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작년 10월 20~26일 금강산에서 개최됐어. 그 전에도 2003년부터 제 1차부터 7차까지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이루어 졌지. 설빈: 아 맞다, 그리고 8.25 합의 이후남북 간 민간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 되었는데 10월에는 개성에서 만월대 출토유물 전시회가 열렸었고 평양에서는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가 금강산에서는 겨레말 큰 사전 남북 공동 편찬회의 등등 많은 노력이 있었지. 준우: 맞아. 이산가족의 상봉을 위해서 나라가 많을 것을 했지. 그런 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전쟁에 대한 경험도 없고, 북한에 먼 친척 한 명도 없어. 그래서 ‘통일’이라는 단어가 특히 마음 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하지만, 전쟁을 통해 가족과 친구를 잃은 분들이 느끼는 아픔은 이해하는 것 이 중요한 것 같아.

표어: 윤설빈

승현: 나도 일단 그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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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분들이 정확히 어떤 삶을 사셨는 지,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아예 모르잖아. 준우: 맞아. 그런 아픔은 무엇을 통해서도 완전히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통일을 무조건 좋게만 보는 것보다, 통일이 되 었을 때 일어 날 수 있는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잘 생각 해봐야 될 것 같기도 해. 승현: 사실상 그런 실질적인 것들이 문제가 되는 거지. 통일을 한다고 하면 북한 정부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런 불안정하고 언제 어 디로 튈지 모르는 정부가 없어진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득이라고 생각하지만 북쪽 영토를 개발시키는 책임은 온전 히 우리에게 떨어지잖아. 준우 : 그렇지. 네가 말했 듯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경제 시스템을 하나로 만드는 것과, 대립되는 두 정치적 제도를 타협시키는 것과 같은 문제들도 존재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남북사이의 문화적인 차 이가 가장 큰 문제가 될 것 같아. 그래도, 나는 그런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게 한 민족으로서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해. 승 현 : 문화적인 차이도 무시 할 수 없지. 몇 십 년 동안 완전히 다른 정치 체제 속에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 왔는데,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해도 당연히 모든 것이 다를 테고. 문화적인 차이를 좁히지 않으면 민족이 통일되었다는 느낌도 받지 못 할 것 같 아. 하지만 문화적으로 남북 민족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 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준 우 :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 권력에 기초한 생활을 살아온 북한과, 자 본주의 속에서 살아온 남한과는 정반대잖아. 하지만, 이러한 문 제들에도 불구하고 만약, 통일이 된다면, 그를 통한 결과는 어 떨까? 승 현 : 일단 처음에는 어렵겠지? 문화적 차이도 있고, 북쪽 영토는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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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하면 폐허 상태인데, 개발도 힘들고 남북 간의 개발된 정 도의 차이를 좁히는 것도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아. 하지만 더 오 랜 시간이 지나고 지속적인 개발과 문화적인 동화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진정한 한 민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준 우 : 그렇지. 통일이 된 후, 안정이 된다면 군비 축소, 복지 증가, 북한 으로 인한 지하자원의 증가 등 장점이 많을 것 같아. 승 현 : 나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통일이 우리에게 주게 될 장점이 더 많 을 것 같아. 아무래도 영토도 더 넓어지고, 자원도 더욱 풍부해 지고 여러모로 이득이 되는 것이 많아.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화는 남측에서도 북측에서도 끊임없이 계속 되어야 할 것 같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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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문>

통일에 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

Grade 12 조기완 Leo Jo 박형빈 Harry Park

기완: ‘국제시장’을 보고 문득 생각난 건데, 남한과 북한의 이산가족들 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현재까지도 이산가족 상봉 캠페 인이 진행되고 있나? 형빈: 글쎄…….이산가족상봉 자체가 뭐야? 그냥 남북으로 흩어진 가 족들이 서로 만나는 거야? 기완: 이산가족상봉은 과거에 남북전쟁으로 인해 흩어진 한국 사람들 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운동이야. 2015년 통계에 따르 면, 현재 남한에 살고 계신 이산가족 생존자들은 6만8303명 정도야. 그중 대부분이 여든 살을 넘으신 분이시고. 북한도 아 마 상황은 비슷할 것 같아. 이분들은 과연 다시 가족을 만나실 수 있을까? 궁금하다. 형빈: 겉으로 보면 이산가족상봉은 그저 남북으로 갈라진 가족들이 편 안하게 만나는 것 같지만, 이 안에서도 문제점들이 꽤나 많은 것 같아. 기완: 아, 진짜?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 형빈: 먼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 는 데 있어서도 문제점이 있고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지고 나서 도 문제점이 있는 것 같아. 점점 갈수록 이산가족상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세세한 문제들까지 들어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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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완: 예를 들어서 어떠한 문제? 형빈: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는데 이산가족상봉을 할 때 다소 상반되 는 두 가지의 차이점이 있어. 경제적 및 정치적 성격이 들어나 고 있어. 정치적인 차원에선 가족들이 서로 만났을 경우 사상 이 너무 다른 거야. 그래서 대립도 생기고 싸움이 났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래.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는 북한의 부를 보여 주려고 이 가족들을 이용한다는 거야. 그런 면에서 차이점들이 수두룩했었던 것 같아. 기완: 국제시장에서 보면, KBS방송국이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실 행하던데, 그것에 관해 자세하게 아니? 보고 나서 너무 감명 받았어. 형빈: 당시 ‘이산가족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은 원래 1983년 6월 30 일 단 하루만 방영하기로 한 방송이었대. 그런데 이산가족들이 그 방송을 보고 전화와 편지를 방송국에 엄청 보냈대. 그래서 총 55일 동안 방영을 연장했다고 들었어. 기완: 그렇구나. 나도 조사를 해 보았는데, 이 프로그램은 하루 평균 6만여 통의 전화와 편지를 받고, 100,952명이나 되는 이산가 족의 사연이 접수되어, 결국 1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대. 이런 것을 보면 대한민국 시민들의 의식은 정 말 대단한 것 같아. 형빈: 어떤 의식? 기완: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이산가족이 있었 는지 몰랐겠지. 하지만 이 방송으로 인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슬픔에 함께 하며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어. 그리고 그 전에는 ‘이산가족, 나랑 상관없어’가 대다수였다면 이제는 ‘이산가족, 우리 모두의 과 제구나’라는 의식이 더 커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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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빈: 또 다른 활동이 이루어지진 않았나? 기완: 뭐, 북한과 남한이 합의를 보아서 이산가족들을 서로 만나게 하 는 그런 캠페인도 있지 않았을까? 형빈: 2014년에 이산가족상봉이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기완: 응 맞아! 그 때 3년 만에 다시 이루어진 상봉이라 말이 많았지. 형빈: 내가 알기로는, 그런 캠페인은 1973년, 23선언을 했을 때부터 말이 많아진 것 같아. 물론 그 때에는 북한이 교류를 거부하면 서 실패하였지만, 꾸준히 노력한 끝에 서로 합의를 봐서 이산 가족상봉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었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이란 걸 만들어서… 기완: 잠깐, ‘햇볕정책’이라는 것은 뭐야? 형빈: 간단하게 말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 시대에 내세웠던 정책인데, 남북의 화해를 위하여 세워진 거야. 이런 정책을 기준삼아, 2000년도부터는 매년마다 개최하려고 노력하였대. 또한, ‘남북 정상회의’를 실행해서 최대한 이산가족들이 다시 만나게 하려 고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어. 혹시 더 아는 것 있니? 기완: 음, 내가 알기로는 1980년 정도부터 현재까지 약 20회에 걸쳐 서 이산가족 상봉을 실행하였다고 해. 남한과 북한의 합의 하 에 걸쳐서 일 년에 약 100~300명 정도가 모여서 금강산 면회 소에서 만난다고 해. 정말 좋은 정책 같아. 이런 분들이 평생 같이 사시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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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문>

색안경을 벗고

Grade 12 이희웅 Paul Lee 배병준 Daniel Bae

희웅: 병준아, 혹시 ‘국제시장’이라는 영화 봤니? 병준: 저번에 우리 국어 시간에 같이 봤잖아! 거의 모두가 눈물 흘 리면서 봤지 뭐……. 희웅: 너는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뭐였어? 병준: 개인적으로 주인공이랑 부인이 서로 다투다가도 갑자기 애국 가가 울리니 태극기가 있는 방향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게 좀 놀라우면서도 인상적이더라고. 희웅: 맞아. 나도 그 장면을 보고 ‘애국심’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어. 그렇게 감정적인 상황 속에 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해. 병준: 그 당시 애국심은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희웅:

음… 내 생각에는 ‘모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당시 국민들에 게 있어서 국가는 부모님과도 같은 절대적 존재였던 것 같 아. 가난과 역경을 부모님 탓을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받 은 것이 더욱 많다는 생각에 언제나 공경하고 감사하게 되 잖아. 네 생각은 어떠니?

병준: 맞아. 우리 할아버지 정도 세대에서는 국가라는 주체를 우리 의 관점과는 많이 다르게 본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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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경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뭐냐면 정부가 혼 란스러운 그 당시 상황과 사람들의 심정을 바로잡으려고 한 노력도 있는 것 같아. 당시에 한 단독 정부가 세워진지 도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북쪽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정부 밑에서 단 결되고 태극기를 통해 새로운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믿음 을 느끼게 하려고 한 것 같아. 희웅: 조사를 해보니 그 당시에는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애국가 가 나오면 반드시 누구든 자리에서 일어나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고 해.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심지어 영 화관에서도 영화가 시작하기 전 애국심을 자극하는 영상이 십분 정도 상영되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야. 병준: 그럼 당시의 애국심은 현재의 애국심과 어떻게 다른 걸까? 희웅: 내 생각에는 최근 개인주의 사상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국가’ 라는 하나의 공 통분모가 없어 진 것 같아. 영화 에서 볼 수 있듯 이 그 당시에 국 민들은 ‘대한민 국’ 이라는 공통 분모에 속해서 같이 한국전쟁도 경험하고, 피난길 에도 올라보고, 독일로 파견되어 서 죽을 듯이 고 생도 해보고, 또 월남전에도 파견 그림과 표어: 배병준 되면서 여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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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고난과 역경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그 ‘대한민국'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 있었던 것 같아. 병준: 맞아…….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같은 급속도로 아픔을 겪으 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기댄 느낌이 있었다면 요즘은 그런 것 같지 않아. 산 업화가 진행되고 삶의 질이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고 서구 문명이 활발 히 들어서고, 또 사회적 경쟁구조 가 치열해지면서 사람들이 다들 각 기 개인이나 본인 의 가족에만 신경 쓰고 뭔가 공동체라는 의식이 많이 사라 진 것 같아. 요즘은 정부나 국가에 대한 불신도 많아서 국 가적인 일에서 잘 단합되지 않는 일도 많은 것 같고. 그리 고 또 우리나라에 자긍심을 느끼기보다는 다른 나라에 사 는 국민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더더욱 많아지는 듯해. 희웅: 그렇다면 다시 예전과 같은 애국심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어 떻게 해야 할까? 병준: 나는 사람들의 삶에 좀 여유가 생기면 아무래도 국가를 바라 보는 시선이 나아지면서 애국심을 되찾을 수 있을 있지 않 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요즘 너무 학생부터 어른까지 계 속 경쟁하고, 스트레스만 쌓이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상황에서 국가에 대한 시 선이 안 좋을 수밖에 없고, 또 그래서 애국심이라는 것이 사라진 듯해. 삶에서 여유가 생긴다면 국가를 더욱 긍정적 으로 바라보고, 그래서 애국심이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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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웅 :

그림과 표어: 이희웅

맞아, 나도 너의 의견에 동의해. 하지만 나는 국가에 대한 사랑은 올바른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 최근 일본과의 여 러 가지 역사분쟁도 있고 또 외국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것을 배우려는 노력은 점점 줄 어들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워. 영어를 배우고, 또 중국어를 배우기 전에 먼저 올바른 국사와 국어 교육을 받는 것이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인거 같아.

병준: 나도 동의해 희웅아. 앞으로 우리 둘 다 이 사회의 주역이 되어 꼭 우리 국민들에게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심어줄 수 있는 그런 미래를 기대해 보자. 희웅: 그래 꼭 각자의 위치에 서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 고 나아가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최선 의 노력을 다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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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문>

Ode to my father, 2014

Grade 12 김유리 Stephanie Kim 박현지 Sarah Pak 최윤진 Christine Choe

윤진: 안녕, 얘들아. 너희도 알다시피 이번에 우리가 영화 ‘국제시장’ 을 감상했잖아. 유리: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정말 뜻 깊은 영화였어. 윤진: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이 영화를 외국인들에게 소 개하면 어떨까? 현지: ‘국제시장’ 영화의 배경과 모든 상황들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들인데 과연 우리가 소개해주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윤진: 아마 이해하긴 어려울 텐데, 우리가 미국이 겪었던 전쟁과 한 국의 6.25 전쟁을 비교해 설명해주면 그래도 좀 이해하기 쉽 지 않을까? 유리: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자는 거지? 그럼 일단 세계경제 대공황이랑 한국의 IMF 사태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현지: 세계경제대공황은 1929년에 일어났는데 전쟁 참전국들이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전쟁용품 등의 제품들을 생산하면서 일어났 어. 무지막지한 전쟁용품들을 생산하고 그것들을 조금씩 소비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많은 양의 제품들이 남았어. 당연히 많은 양이 남을 수밖에. 전쟁이 끝나가니 군인들의 전쟁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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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량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제품의 수요처가 없어져버렸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많던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에게도 마땅한 일자리 하나 구해주지 못 했지. 윤진: 맞아, 기업들에게도 위기였지. 기업은 기업대로 제품의 재고가 쌓여가고 있었으니 말이야. 이것 때문에 시장 전체가 위축되어 있었어.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국은 뉴딜 정책을, 영국은 경 제블록을 형성해나갔어. 미국의 뉴딜 정책이란, 정부가 일일이 경제에 개입하여 사업권의 하나하나를 관리하고 허가해주는 방식으로 어느 한 산업분야에만 치우치지 않고 조절하는 게 목적이었어. 프랑스는 경제블록도 나름 효과적이었어. 그들의 식민지와 자국을 하나의 국가처럼 연결해서 타국의 수입을 제 한했고, 수출만을 허용해 제품의 유효 수요를 창조하며 유지해 나갔지. 이렇게 조금씩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경제 대공황을 극복해나갔어. 유리: 아, 그런 역사가 미국과 여럿 국가에 자리 잡혀 있었구나. 현지: 세계경제대공황과 비슷했던 한국 역사는 뭐가 있을까? 윤진: 1997년에 일어난 한국의 외환위기(IMF)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 어. 흔히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면 은행에서 돈을 빌리잖아? 나 라가

돈이

필요할

때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라는 곳에서 돈을 빌려. 우리나라도 한 때 이 곳에서 돈을 빌렸었어. 그 동안 우리나라 금융 기관과 기업에 자금을 대 주던 한국 외에 다른 나라라 금융 기관들이 외환, 즉 달러를 한꺼번에 되찾아 갔었어.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더 이상 남은 외환이 없었고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돈을 제 때에 갚지 못해, 위기가 찾아왔어. 현지: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로 똘 똘 뭉치기 시작했어. 1997년의 IMP 관리 체제 때 일어난 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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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적인 운동이 있었는데 그 운동이 바로 ‘금 모으기 운동’이 야. 모두들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나서서 집에서 안 쓰는 금이 나 장신구에 붙어 있는 금을 녹이고 심지어 이에 쓴 금을 떼 어다가 기부를 한 사람들도 있었어. 전국적으로 우리나라 국민 들이 모여서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극복해 나가려고 노력했 어. 실제로 이 운동으로 전국 누계 약 351만 명이 참여해서 약 227톤의 금이 모였고, 약 21억 3천 달러 어치의 금이었지. 우리나라가 갚아야하는 돈 1373억 달러에 비해 21억 3천 달 러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국가 경제 어려움 속에서의 우리 나라 국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유리: 아하, 그런 사건들이 있었구나. 세계경제대공황과 우리나라의 IMF 사태를 비교해보니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는 걸? 세계경 제대공황과 우리나라의 IMF 사태 둘 다 경제에 큰 위기를 겪 었었고, 정부에서 그 경제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책을 펼쳤 었어. 세계경제대공황에서 미국에서는 뉴딜 정책을 실행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경제 블록을 형성해 정부가 경제에 하나하나 개입해 수입을 금하고 수출만을 허용했어. 한국의 IMF 정책 때는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집 안의 금붙이를 모으게 해서 경제를 일으켰지. 이처럼 한국과 똑같이 자국의 경제 대 공황을 겪은 외국인들에게 세계경제대공황 때와 한국의 1990 년도 IMF 사태를 비교해서 알려주면 영화 ‘국제시장’도 잘 이 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들도 똑같이 힘든 시기를 겪었으니 주인공들이 전쟁이 끝난 후 가난해서 독일까지 광산 일과 간 호사 일을 하는 것도 더 자기 일처럼 와 닿을 수 있을 거야. 현지: 맞아, 내가 생각해도 영화와 공통된 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이렇게 비교해보니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너무 힘드셨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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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 나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잠시만, 세계경제대공황과 IMF 이외 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 너희 레전드 가수 남진이랑 나훈아 알지? 유리: 응, 알지. 엄청나게 유명한 트로트 가수잖아. 윤진: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알겠지만 거기서 가수 남진이랑 나훈아 가 나오잖아. 한국에서는 정말 유명한 가수이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누군지 잘 알아볼 수 없을 거야. 현지: 정말이네. ‘국제시장’에 나오는 다른 많은 유명인들도 외국인들 은 알아보지 못 해서 영화의 재미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들에게 이런 한국의 유명인들을 어떻게 설명하지? 유리: ‘국제시장’에 남진과 나훈아 같은 유명인들이 카메오로 나오는 것은 비단 재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 아. 당신 어려웠던 시대에 자기가 뜻하는 바를 이루려 노력해 서 결국 국민 모두가 다 알만큼 유명해진 사람들이잖아. 그만 큼 그런 사람들을 영화에 넣은 건 힘들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그래서 꼭 외국인들에게 이 들이 누구인지, 왜 감독이 영화에 그들을 넣었는지 제대로 설 명해줘야 할 것 같아. 윤진: 남진과 나훈아는 지금의 엑소(EXO)와 방탄소년단과 같았다고 보면 돼. 지금 보면 엑소랑 방탄소년단은 인기가 엄청나잖아. TV만 켜면 나오고 거의 안 나오는 경우가 없지. 워낙 인기도 많고 엑소랑 방탄소년단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들이 하루아침에 유명하게 됐을까? 그들은 카메라 밖에서 보이지 않는 노력을 했어. 그들도 유명해지기 전에는 신인이잖아? 매 일 하루하루 새로운 다른 가수들이 데뷔를 하는데 그 많은 사 람들 속에서 경쟁하기란 쉽지 않았을 거야. 몇 번이고 포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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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고 관두고 싶었겠지만 결국 꿈을 잃지 않고 노력했기 때 문에 지금의 그들이 있게 된 거 같아. ‘국제시장’에서 그려진 남진과 나훈아는 갓 데뷔한 풋풋한 신인에 불과했어. 갓 뜨고 있는 신인인 남진과 나훈아는 암울한 시대의 꿈과 희망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지. 유리: 그만큼 현재의 우리들이 남진과 나훈아가 유명한 가수로 성장 한 게 와닿는 것 같아.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남진과 나 훈아를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려 얼마 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감도 오지 않아. 윤진: 맞아 맞아, 근데 너희들 지금 현대그룹 정주영 사장 알아? 그 분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에 모티브로 나오신 분인데 거기서 그 분께서 한 명언이 있어. 그분이 황정민한테 구두를 맡기시 면서 얘기를 하셨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거야.” 힘들 었던 당시 시대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해온 사람들에게 딱 맞는 얘기인 것 같아.

표어: 최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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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 그 는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가난해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 했어. 그래서 소학교를 나온 후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살 았대.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몇 번의 가출을 시도하고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경일 상회라는 미곡상을 시작했어. 그 후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고 본인의 회사인 현대 자동차 공업사를 설립하는 둥 끝없이 자신의 꿈을 좇으며 마침내 회 장 자리에 앉는데 성공했지. 또한 그의 회사인 현대 그룹도 6.25 이후 자동차의 수요가 늘어 크게 성공했어. 현지: 앙드레김 역시 당시 시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지. 지금도 앙드레김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도 그의 이 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유리: 맞아, 앙드레김은 세계적인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로 우리나라 의 경찰 제복도 디자인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야. 본명은 김봉 남으로 서울로 올라와 패션쇼를 구경하다 우연히 한 디자이너 분과 인연을 맺은 후 본격적으로 패션에 대해 공부했다고 해.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프랑스의 한 외교관이 지어준 이름 이라는 모양이야. 한국에서는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였고, 당시 톱스타였던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해준 후 여러 은막 스타들의 패션을 디자인해주며 유명세에 올랐어. 이후 프 랑스 파리나 미국 워싱턴 등 세계 각국의 패션쇼에 초대를 받 으며 한국의 패션을 세상에 알렸지. 윤진: 6.25 이후에 한국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는데도 정말 많은 분들 이 노력해 꿈을 이룬 것 같아. 김동건 아나운서와 씨름선수 이 만기도 당시 어려웠던 시절에 유명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야. 역시 이 둘도 영화 ‘국제시장’에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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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김동건 아나운서는 가요무대 사회자로 널리 알려진 아나운서 야. 또한 이만기는 1983년에 씨름판에서 개인전 우승을 한 선 수이자 천하장사 타이틀을 단 선수야. 그는 약 10년 동안 늘 2등만 하다가 10년의 노력 끝에 드디어 1등을 거머쥐게 되었 어. 어렸을 때의 그는 시골에서 소를 모는 소년이었지만 서울 로 올라온 후 노력 끝에 씨름선수가 되었지. 1983년의 우승 이후 많은 기록을 세우며 마침내 국회의원까지 되었지. 현지: 이렇듯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나라의 유명 인사들과 힘들었던 한국의 역사를 외국인들에게 알리기 좋은 영화인 것 같아. 주 변의 외국인들에게 ‘국제시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면 그들 도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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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문>

통일 Grade 12 김윤수 Martin Kim 인재원 Jae Won In

윤수: 벌써 한국휴전협정을 한지 6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통일을 못했 네.

재원: 그래도 그 긴 시간 동안 남북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많은 통일 대비 정책이 있었잖아. 윤수: 맞아. 남한은 항상 지금까지도 북한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 려고 노력한 것 같아.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기회도 제공 해주고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매년 쌀도 보급해주고 있잖아. 재원: 이렇게 남한이 노력을 하는데도 북한이 계속 평화를 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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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뭐라고 생각해? 내 생각에는 북한과 남한의 사상에 차이 가 있는 것 같아. 기본적인 생각과 사회를 보는 관점이 벌써 너무 차이가 크니까 자꾸만 남한 정부와 북한 정부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 너는 통일이 계속 어려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윤수: 네가 하는 말이 맞아. 남한은 자유 민주주의고 북한은 공산주의 잖아. 그래서 남한은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통일을 하려 고 하고 있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동의를 해야지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통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통일이 늦 춰지는 것 같아. 왜냐면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통일을 동의하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잖아. 지금도, 특히 어린 나이의 국민 들은 북한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더더욱 통일을 하고 싶지 않아하지. 일단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원해야지 이루어질 수 있는데, 사람들이 애처에 원하지를 않는다면, 그리고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통일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거지. 재원: 맞아. 그리고 북한은 계급이 중심인 주체사상을 통해 통일을 하 려고 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자유 민주주의인 남한이랑은 안 맞는 거지. 그리고 남한이 원하는 것은 화해랑 협력을 통해 연합시킨 통일 국가인데 북한은 연방제를 실시하는 연방 국 가를 원하는 거지. 윤수: 아, 그래? 근데 연방제가 뭐야? 재원:

음, 나도 자세하게는 몰라서 한 번 조사를 해봤는데, 연방제는 국가의 권력이 중앙 정부에 동등하게 분배하는 제도래. 더 쉽 게 말하자면, 미국이 각 주에 어느 정도의 독립적인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것이 이 제도를 활용한 예라고 볼 수 있어. 북한 이 내세우는 연방제는 고려 연방제라고 하는데, 이 제도가 북 한의 공식적인 통일 방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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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 그렇군. 그런데 연방제에 대해 들어보니까 좋은 제도인 것 같은 데? 북한의 통일방안의 문제점이 뭐지? 재원: 문제는 연방제를 실시하려면 북한과 남한이 모두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존중해서 각 국의 체제가 타협이 돼야 하는 데 북한은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야.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상황이지. 북한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꿈같은 주장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남한에게 흡수당하 지 않기 위해서 남한의 사상과 제도, 정치질서를 부정하고 있 어. 또, 남한에게 흡수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완성론 적 연방제’, ‘단계론적 연방제’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냥 모두 말도 안 되는 제도들이지. 결론적으로 북한은 남한과 평화롭 게 합쳐질 생각이 없어. 만약에 통일이 되더라도 남한을 북한 체제로 바꿔버리려고만 하는 거지. 윤수: 아, 겉에서 봤을 때는 이상적인 제도로 들렸는데 역시 현실에서 는 달랐구나. 남한도 통일방안을 위한 제도가 있어. 바로 한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이야. 재원: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그건 뭐야? 윤수: 1989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통일방안인데 현재까지도 이 제도는 이어지고 있어. 한민족 공동체는 자유 민주주의를 강 하게 지지하는 제도야. 말 그대로 공동체 중심의 제도이지. 노태우 정권은 자유 민주주의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무 조건 지켜내야 하는 것이라고 그랬어. 조금 잔인하게 들릴 수 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독재를 막기 위한 평화적인 방안이야. 재원: 와, 그만큼 남한이 자유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북한은 이 에 반대되는 사상을 지지하니까 통일이 힘든 거구나. 윤수: 응. 맞아. 아까 북한의 연방제는 권력을 배분하는 것에 초점을 둔 제도였잖아. 그러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은 통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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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어떻게 배분 하느냐보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함께 살 아가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어. 남한은 통일을 단순하게 그냥 국가 체계 창립으로 보지 않아. 북한은 통일을 무슨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필요하지 않은 위협으로, 아주 기계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 같은데 남한은 어떻게 보면 그것의 반대야. 남한은 통일은 그 나라 안의 국민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아주 잘 의식하고 있어.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민족 공동체 의 건설을 최우선으로 생각 하는 거야. 재원: 역시 남한이 북한보다 이상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군. 남한 정부는 북한과 달리 진정한 평화 통일을 원하고 있잖아. 혹시 남한이 계획해 놓은 통일 과정은 있어? 윤수: 당연히 있지. 남한 통일방안 계획의 가장 첫 번째 단계는 바로 화해 협력 단계야. 우선 북한과의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 를 무너뜨리려는 거지. 남한은 끊임없이 북한 정부와 타협하 고 회의하면서 점진적으로 북한과 화해를 하려고 하고 있어. 그 다음에는 남북 연합 단계인데 경제적으로도 정당하고 동 등한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당연히 한민족 한국가의 통일국가를 완성해 내는 것이야. 남 한도 통일이 현실적으로 빠르게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노력을 하고 있어. 재원: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은 통일의 주체가 프롤레타리아 계 급으로 한정이 되어있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쉽게 말하자면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어. 북한은 국가권력에 직접적인 영 향을 주는 사람들 위주로만 정책을 내세우는 거지. 자기의 나 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만 집중을 하는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지. 남한은 어때? 윤수: 남한은 당연히 민족 구성원 모두가 주체지. 남한은 국민이라면 단 한 사람도 주체에서 빼먹지 않아. 국가에 도움을 주든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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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자기 나라의 사람이고 모두 에게 영향을 주는 일인데 당연히 모든 국민의 의견을 고려하 는 것이지. 재원: 역시 그렇군. 하…….통일은 많은 사람이 바라고 있는 것이면서 도 현실적으로 실현되기가 너무 힘든 것 같아. 윤수:

맞아. 그것이 현실이지. 남한은 통일의 원칙으로 내세운 세 가 지 원칙이 있거든? 바로 우리 민족의 뜻에 따라 자주적이고, 전쟁이나 전복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는 평화적이고, 민족 구 성원 모두의 자유와 권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적 통 합이야. 언제가 될지는 현실적으로 불확실하지만 언젠가 정말 이런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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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광저우의 날씨 Grade 12 이페이 Yifei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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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연필 Grade 12 이원형 Paul Lee 연필은 제가 공부할 때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이 물건 으로 사람들은 글을 쓰고, 글을 수정합니다. 연필을 가지고 중요한 문 서들 안에 글씨를 적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않아도 다시 볼 수 있도록 종이에 연필을 이용해서 메모를 할 수 있습 니다. 이렇게 중요한 연필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연필의 역사를 알아보기 전에 연필을 필요하게 만든 문자의 탄생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 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행동은 기원전 6200년에서 기원전 5200년 사이에 차 탈회위크(Çatalhöyük)라는 도시에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 도시는 지금 터키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터키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기 이 전이었습니다. 그 후 문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견된 쐐기 문자 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언 어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자가 세상에 사용되면서 여러 가지 필기도구가 생겼습니 다. 연필도 그중 하나입니다. 연필은 16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던 것으 로 볼 수 있으나 일반화는 19세기 이후라고 합니다. 1795년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화가인 니콜라 자크 콩테(Nicola Jacques Conté)가 우리 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연필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뉴욕 타이콘데로가 요새에 연필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타이콘데로카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 조지 워싱턴이 지켰던 요새입 니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연필이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입니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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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란색 바탕에 초록 글씨로 로고가 들어가 있는 바 로 그 연필입니다. 연필 안에는 연필심이 있고, 나무가 덧씌워져 있습니다. 연필 뒤에 는 지우개가 달려 있는 것들도 있는데 보통 잘 안 지워집니다. 연필 옆에는 그림이 들어가 있거나 회사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연필심은 흑 연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먹으면 안 됩니다. 만약 먹게 된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테니 의사와 바로 상의하세요. 지금까지 연필의 쓰임새, 역사, 구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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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Identification of Korean society: “Who are the Koreans?”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정체성, 한국인은 누구인가?

Caroline Webster Korean Department Chair Emily Kim began the school year by asking her Korean Studies and Comparative Perspectives of East Asia (Grade 12 course) students, all native Korean speakers, to look closer at their cultural roots and reflect on how they might describe Korea to a foreigner. Many students quickly said, “rushing.” “How would you describe another country, then?” she asked. “The U.S., for example?” “Freedom,” was one answer. Ms. Kim observed that the students held positive perceptions of another place, but the first word that came to mind about Korea was one with a relatively negative connotation. She sought not necessarily to change the students’ minds, but rather to expand them, by asking them to look deeper. “The fact is, Korean ancestors have a very sad background. Japanese colonization, Korean war, severe poverty … we want to overcome the negative circumstances of our history. I want to introduce to students the idea: ‘don’t give up.’ I want to emphasize the persistence of our Korean ancestors … to see what we can learn from our cultural roots, and apply to our lives today.” Through guided small group discussions and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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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ping to different prompts, students did look deeper. Over their course of study, they came to see the world around them not as a hurried, busy place, but rather as a prospering, resilient, thriving country, surviving because of perseverance and aspirations held and nurtured over decades and generations. Michelle Suh (Grade 12) explained how the class, in the end, landed on a different, far more positive “r” word, “resilience.” “We were invaded by different countries several times. We had to face our demise a few times. We really had to suffer. But, then, the thing that’s really special about Koreans is that they never give up. They always come back up. Fifty years ago, we needed help from other countries. Now we’re giving help to other countries. I think that’s an amazing trait to have as a nation and ethnicity. We wanted to portray that resilience in our big picture. That’s how we came up with the image – fighting.” To translate their understanding and insight in a tangible way, the class came together to create a mural on the theme “resilience.” Two students, Michelle Suh and Sally Oh (Grade 12), created the outline of Taekwondo fighters as a mural background, and each student in the class received an A4 piece of paper on which to depict something of cultural significance. The finished project presents a stunning reflection of Korean resilience over time. Regarding the end result, Ms. Kim observed, “I’m really proud of my students. They made such an effort.” Al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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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and

Nam

Hee

Kong,

fellow

Korean


language teachers, each teach sections of the same Grade 12 Korean Studies course. The Korean department plans collaboratively on course objectives and themes, and then each teacher tailors the content to meet different students’ needs. Alice Chang shared, “We start from point of view – how to look at other countries’ cultures with open minds, and look at our own country in comparison.” Ms. Kong added, “Understanding one’s own Eastern culture helps create a bridge to Western culture,” a key piece of the APIS mission statement to create globally enlightened citizens, who are able to bridge the gap between East and West. Ms. Chang said “When we see other countries, we can better understand why they do what they do when we understand our own values and culture.” Stephanie Kim (Grade 12) shared, “Before I knew specifically about Korean history, there were some things that I couldn’t understand about my parents. But, after I knew that there was a huge economic difficulty when our parents were young, now I can understand some of the things I couldn’t understand before … In our age, I think we more want to be free. In our parents’ age, what they would think about was to save our country. They lived their whole life just for that. Now I see why they are so into their children’s education and want them to have economic power and support the country. [This class] helped me shift my thinking.” Michelle Suh concluded, “A popular term we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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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describe ourselves, 의지의 한국인, literally means ‘resilient Koreans’ if you translate it, but it means much more to us. We always believe we can do it if we work together. We can work for a better future. If we come together, there’s nothing we can’t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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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 APIS 제 6회 한국어 백일장 ‘Mother,

어머니,

母’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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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소설)]

고등어 Grade 12 구재모 Louis Koo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자갈치 시장의 입구로 들어서자 비릿한 바다의 짠 내와 차가운 얼음 기운이 코 끝에 맴돈다. 언제나와 같이 만선인 배로 가득 들 어찬 자갈치 시장에는 손님을 모으려는 장사치들과 저녁 반찬거리 를 찾으려는 아주머니들로 북적거렸다. 구름 몇 점 떠다니는 초봄 날씨에 꽃샘추위가 아직 가지 않았음에도 장터는 들어찬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개중에, 썬캡을 푹 눌러쓰고 오른손에 검은 비닐봉 투와 살 물건 목록을 쥐고 여러 상점을 기웃거리는 꽃무늬 옷은 분명 한 가정의 어머니의 것이었다. 그녀의 등은 아치 모양으로 굽 었고, 얼굴의 주름은 그녀의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거, 아저씨요, 오른쪽에 고등어 한 마리 얼마요?” 찰팍찰팍, 바지가 젖는 건 신경 쓰지 않는지 시장 바닥에 고인 물을 억세게 헤쳐 나가며, 썬캡의 주인은 장사치에게 물었다. 등 푸른 생선이 오늘따라 팔리지 않던 터라, 상인은 다가온 손님이 매 우 반가운 눈치였다. “아, 요놈은 몸이 튼실해 갖고 조금 비쌉니다예. 한 가족은 거 뜬히 잡수실 수 있을겁니더. 오천 원만 주이소.” 노모의 눈에도 꽤나 싱싱한 생선이었던지라 평소보다 높게 부르 는 가격에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말없이 지갑을 뒤지기 시작하자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상인 역시 익숙하게 얼음을 퍼서 생선과 함께 비닐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푹, 푹, 거세게 퍼 담은 얼음은 고기를 비닐봉투 안에 파묻어 버렸다. “그,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내는 어디로 갔는교? 어디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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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나?” 포장을 기다리며 손끝을 꼼지락거리다 그 마저 지루해졌던지 노모 는 상인에게 말을 넌지시 건넸다. 봉투에 얼음은 이미 넘치는데도 상인은 억지로 꾹꾹 눌러 담았다. “군대 갔습니다. 그, 어딥니까, 북한놈들 맨 앞에 거 어디, 아 그 지오핀가 거기로 지가 스스로 갔다 아입니꺼?” “지가 자진해서 간기가?” 포장을 끝내고 의자에 걸터앉은 상인이 말했다. “뭐, 그렇지예. 고집이 워낙 쎈 놈이라 갖고 이 애비가 아이고, 사고라도 당하면 우짤기고 하고 말려도 뭐 본채 만 채 하덥디 다. 잘 살아있긴 하다만서도 그래도 걱정되는 게 아비 마음 아니 겠습니꺼?” 이미 상인의 시선은 자갈치 시장의 좁은 하늘 너머를 보고 있었 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적어도 노모가 보기엔 그 랬다. 왜냐면 그녀도 그랬으니까. 상인은 그녀에게 그녀의 아들도 군인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답을 하지 않았고, 상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고등어의 값을 치르고는 발걸음을 땠다. 그녀의 아들 또한 군으로 복무했었다. 그녀의 아들은 어릴 적 아 버지를 여의고부터 계속된 불우한 환경 탓인지 동네에서 자주 문제 를 일으키다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하였다. 그 스스로도 그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알던 지 대학도 검정고시로 간신히 들어갔으나, 방황 과 연속되는 결석으로 성적은 바닥을 치고,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 리다 결국 학사경고를 받고 말았다. 자신에 대한 한심함, 분노, 짜 증,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쌓여 노모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은 채 도망치듯 군대로 가버렸다. 군대로 가면 무엇이라도 달라질 줄 알 았다. 2년간 수직 사회의 불합리함을 겪고 오면 사람이 뭐라도 바 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어야 한다. 그는 어 느 날, 해군으로 복무하던 중 서해에서 북한 잠수정과의 교전 중 그만 전사하고 말았기에. 어뢰에 직격탄을 맞은 그가 탄 고속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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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노모의 마음처럼, 차디 찬 깊은 바다로 가라앉았다. 나라는 그를 ‘영웅’이라 추켜세웠고, 국민들은 그를 진정한 군인이라 찬양 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아들의 죽음은 단순한 ‘개죽음’일 뿐이었다. 노모는 받은 생선을 들고 버스를 탔다. 손잡이를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군인 청년이 마치 자기 아들 같아, 다시 보았지만 아니 었다. 아들도 저렇게 차만 타면 졸았는데. 끼익- 하고 버스가 멈춰 서고, 노모는 버스에서 발을 떼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골목길 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 도착한 작지만 그녀의 일생이 담긴 집. 하 지만 아들이 저 세상으로 간 후, 온기마저 사라지고 이젠 색채마저 잃어버리고 아픈 추억 조각들만 남은 곳. 노모는 부엌에 들어가 고등어를 굽기 시작했다. 두런두런 말소리 가 텔레비전에서 들려온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오직 그녀 혼자만 남겨진 기분이라, 억지로라도 텔레비전을 틀어놓아야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여러 사람들과 그들 가족의 희 로애락은 그녀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고등어가 기름에 튀 겨지는 소리와 텔레비전의 말소리. 하지만 어떠한 듣기 좋은 소리 라 할지라도 그녀에겐 아들의 목소리가 없는 이상 단지 소음일 뿐 이었다. 밥상 위에 놓인 것은 쌀밥과 김치, 말라붙은 나물, 그리고 고등 어. 고등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젓가락으로 한 점 떼어 입에 넣었 다. 그의 아들은 어릴 적부터 고등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른 생선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고등어는 유독 좋아했던 아들. 노모 의 볼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볼 에서 눈물을 닦아줄 사람은 집에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고등어가 그날따라 짜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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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kerel Come, See, Buy! Through the entrance of Jagalchi market, brackish scent of oceanside and chilling air from mountains of ice cubes flowed and lingered on oneâ&#x20AC;&#x2122;s nose. As always, packed with ships loaded with fish, Jagalchi market was crowded with merchants seeking for customers and middle-aged women looking for something to be on their dinner table. Market was full of people, even though cool winds sweeping through the market clearly showed the spring was yet to come. Out of those many, clothes with cheap flower decorations and a visor worn by an old woman were evident signs that she was a mother of someone. She passed by seafood stores with a half-filled black vinyl bag hanging on side of her arm. Her back was seriously bent, and her wrinkled forehead proved her years of harsh living. "My, a good sir, how much does that fish on the side cost?" Splashing through puddles of water as though she never cared about wearing a soaked pair of pants, the old woman asked the merchant. Mackerel, the fish the woman was asking about, recently lacked customer seeking it, and the merchant, therefore, seemed eager to help her buying it. "That one's quite overgrown in size, 'nuff for a family or two. Jest' pay me five bucks for it.â&#x20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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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 it was surely more expensive in price than usual, the mackerel for sure seemed decent in quality to the woman too, so she decided to satisfy with it. She digged through her purse, and the merchant started to fill a black vinyl with ice cubes. Ice cubes slowly buried the mackerel until it could be seen no more. "Oh, uh the man - the man who was working with you here - where did he go? Somewhere far, I expect?" The old woman curiously inspected her fingers while she was waiting.

Failing

to

entertain

herself,

she

blurted

out

another question to the merchant. The bag was already full of ice cubes, but that was no reason for the merchant to stop from shoving in some more. "He went to serve the army. Where was it, the place where they fight North Korea, the GOP? He went there." The old women faced the merchant with a questioning look. "Did he volunteered for it?" Already finished with packaging, the merchant sat on his plastic chair

and answered. "Well,

yeah.

He

becomes

pigheaded when it comes to his own life decisions, and even his father - myself - could do nothing to convince him not to. He is definitely alive with no lost body parts, but fathers are always worried of their sons." His eyes, overflowing with regret and nostalgia, stared out to a narrow opening on the ceiling of Jagalchi market. At least that's what the old woman could see from him. The merchant asked the woman if she had any child out on a military service. She gave him no reply, and the merch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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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returned no more questions. The old woman paid for her mackerel and went on. Her son did serve in the military as well. Her son lost his father when he was young, and therefore their family was always short on their finance. Discontented and angered with his life, he quitted his high school after causing series of troubles in the town. Regretting his choice, he did get accepted to a local college, but it took not a long time for him to be placed in an academic probation with failing grades. Anger, frustration, and hatred filled his heart. Furious at his own foolishness, he ran off to the navy without even realizing how his mother would've felt. He hoped two years of service could change him as a person somehow. He believed such a rigid and strict military environment could turn him into a new man. But he should have reconsidered his choice before acting - he was killed in action when he was out in a battle against a North Korean submarine. Struck by a torpedo, the ship the son was on board sank to the cold ocean floor, like his motherâ&#x20AC;&#x2122;s broken heart. To the nation, his death was a heroic sacrifice; and to the general public, his death was a loss of a truly devoted soldier. To his mother, however, his death was meaningless - it only brought her a loss of her beloved son. The old woman, now holding a black vinyl bag with ice cubes and a mackerel, stepped on to a bus to her home. A drowsing serviceman, firmly holding on to his handle, seemed like her son. Her son, too, always dozed off when he was on a bus. The bus stopped; the woman stepped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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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hills

and

through

the

narrow

passageways

between houses, she came before her house. Her house her house was small but overflowing with memories of her and her son. Such warm and soothing memories, however, lost their colors and were now nothing but a painful recollection. She placed her mackerel in a pan and fried it with oil. Sound of people talking and laughing with cheers flowed from the television. She had to leave the TV on, though there was no one to watch it. She had to have some sound floating in the air somehow - without it, she felt like she was left in the world all alone, isolated from people and society. What television reflected on its screen, however, - groups of people overjoyed with their families only made her even more miserable. Sounds of the TV and frying mackerel soon filled the living room and the kitchen, singing in harmony. It was a cacophony to the woman, who only could hear sounds that lost the voice of her son. On the table laid a bowl of cooked rice, salted cabbage, dried up herbs, and the fried mackerel. The woman stared into the mackerel, and placed a piece in her mouth. Her son especially liked mackerels. Though he hated other fish, for some reason he loved a fried mackerel as a side dish. One, two. Drops of tears rolled down her cheeks, but there was no one to wipe the tears for her. The mackerel tasted saltier than us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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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운문 (시)]

늘 그렇듯 Grade 9 오승민 Andy Oh

나는 학교에 갑니다 늘 그렇듯, 잘 갔다 오라고 문자를 하십니다 나는 봤음에도, 답을 안 합니다 나는 놀러 갑니다 늘 그렇듯, 잘 다녀오라고 문자를 하십니다 나는 또 봤음에도, 또 답을 안 합니다 어머니가 출근하십니다 늘 그렇듯, 나는 잠들어 인사조차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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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산문(수필)]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 Grade 12 박혜정 Claire Park ‘엄마’라는 존재에는 무게감이 있다. 엄마가 되는 일은 어렵고, 그 과정 또한 쉽지 않을 것을 안다. 새로운 존재와의 직면, 그리고 그 인생을 송두리째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라도 엄마라는 역할이 때로는 적잖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산부인과 의사인 우 리 엄마가 말씀하시던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누군가의 탄생이 며, 그 순간 같이 축복할 가족이 있다는 것이라며 나에게 어릴 적 부터 말씀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원 없이 받고 자 란 나에게는 엄마의 사랑이 간섭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고, 가끔은 지나치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게 된 계기는 나의 생물학적 엄마를 통 해서가 아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없는 아이들을 만나고 나서 부터였다. 작년 겨울부터 나는 영유아들 수십 명이 모여 있는 고아원으로 봉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대학 입시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절실히 봉사를 하고 싶어서 고아원을 찾았다기 보다는 미안 하지만 현실적인 이해관계로 대학 지원서에 봉사기록을 하나라도 더 적기 위해 찾아간 마음이 컸다. 딱 일주일만 참고 봉사를 하자 는 마음으로 고아원의 문을 여는 순간,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 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한 살도 채 안된 아기들이 예닐곱 명이나 있었고, 적지 않은 수의 자원 봉사자분들도 꽤 있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갓난아이를 만져보거나, 안아본 적도 없던 나는 자지러지 게 우는 아이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다른 봉사자가 오기까지 아이 곁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당황하던 나에 게 한 봉사자 분께서 다가와 아이를 제대로 안아주는 법과 달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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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기저귀를 가는 것부터 분유는 어디에서 어떻게 탈 수 있는 지 까지 일일이 다 설명해 주셨다. 이른바, 나의 봉사활동의 시작이었 다. 예상대로 갓난아기들을 돌봐주고 달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 에 아기를 안았을 때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안아서인지, 아기와 나, 둘 다 모두 불편해 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 을 거라 생각했던 힘들고 고된 고아원에서의 봉사활동에 나는 서서 히 익숙해져갔다. 모든 아이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수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에는 시간이 다소 걸렸지만, 한 명 한 명씩 친해 지는 그 얄궂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그 다음 봉사활동 날이 기대 되고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비록 다른 봉사자 분들처럼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분유를 타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달래고 놀아주는 것만큼은 있는 힘껏 최선을 다 했고, 내가 갈 때마다 아 이들도 곧잘 웃어주고 나를 잘 따라주었다. 아이들과 친해지려는 나의 진심이 아이들에게도 통했는지, 봉사활동을 시작한지 나흘이 지나고서 부터는 아이들이 먼저 나를 반겨주고 나에게 안기려 했 다. 봉사활동을 감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아원에는 어둡고 낯가림이 심한 아이들만 있을 거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나는 그게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이 곳의 아이들은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고, 애교도 많고, 말도 잘 듣고, 밥도 잘 먹 고, 예상 외로 자주 울지도 않았다. 고아원은 대체로 아이들 덕분 에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아이들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점 점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버리게 된 그들의 부모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고아원의 책임자이셨던 한 수녀님과 이 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들의

대부분이

일명

‘베이비박

스’(babybox)에 버려져 고아원으로 넘겨진 다는 것과 이 아이들을 내버린 부모들은 ‘리틀부부’(미성년자 부부) 혹은 경제적으로 힘든 부모들이란 것을 수녀님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야기들이었지만, 실제로 들어보고 또 그 아이들과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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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보고 친해진 후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음 한 켠이 어두 워지고 아이들이 너무나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수녀님과의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다온이라는 한 남자아이가 수녀님에게 ‘엄마, 엄마’ 라며 해맑게 달려올 때 나는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서 시선을 다른 아이들에게 향하려 애썼다. 다온이가 수녀님을 부른 ‘엄마’라는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나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비록 수녀님을 비롯하여 고아원을 찾아주는 봉 사자분들이 그 아이들의 진정한 엄마는 아니지만, 이 아이들에겐 나를 포함한 다른 봉사자분들이 엄마와 같은 존재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아이들을 무턱대고

동정하기보다

는 책임감을 갖고 돌보고 사랑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마치 그들의 ‘진짜 엄마’가 된 것 마냥 계속 지지해주고 아껴주며 ‘진짜 가족’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끝으로 나의 일주일 봉사활동은 마무리 되었 다. 그렇지만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주일 만에 끝났을 고아원에서의 봉사를 나는 아직도 꾸준히 하고 있다. 비록 몸은 고단하고 힘들지 만,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서 알 수 없는 에너 지를 받고, 책에서는 배우지 못할 많은 것들을 얻어 간다. 크리스 마스이브에 화려하게 차려 입고 콧노래를 부르며 놀러 나간다던 친 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이번 봉사 활동 경험은 나에게 그 어떤 선물보다 더 뜻 깊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다. 하루하루 ‘엄마’ 없이도 삶을 이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벌써 그들의 ‘엄마’가 된 기분이고 앞으로도 쭉 봉사활동을 해가며 그들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동시에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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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운문(시)]

엄마 찾기 Grade 12 조하은 Chrystal Cho

엄마는, 우리 엄마는 입을 여노라면 말문이 탁 막히는 나 목에 무엇이 걸린 듯 코가 시큰해지고 하나의 꿈처럼 아련해지는 마음에 맺힌 울음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 애써 가다듬고 ‘우리 엄마는…’ 미처 맺지 못한 말들 또다시 허공의 파동처럼 파스스 사라진다 우아하면서 개구지고 활기 있다가도 불쌍하고 변함없이 떠오르는 해처럼 믿음직하면서도 계절따라 지는 꽃처럼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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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의 미숙한 말들로는 그리지 못하는 ‘우리 엄마는’ 닳지 않고 마르지 않는 ‘엄마를, 우리 엄마를’ 부르고 또 불러보다 보면 알려나 내 마음을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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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운문(시)]

나의 하루 Grade 12 설정환 Jeonghwan Sul

이른 아침 몸을 일으켜 밤새 차가워진 바닥에 발을 딛자 팔이 저려 등이 굽어 기지개라도 천천히 켜본다 가족의 하루를 책임지려 해보지만 눈이 어두워, 정신이 없어 참아내려고 해보지만 저 두터운 이불 속에 숨고만 싶다 정신을 차려 아침의 시작을 알린다 어둔 방의 빛을 밝히고 모두의 눈을 뜨게 한다 바라만 봐도 안쓰러운 남편의 표정 “어서!” 라는 말 뒤에 들려오는 아이의 투정 나조차 이렇게 힘든데 몸을 일으켜 집 밖을 나가는 게 얼마나 더 힘들까 나의 힘듦은 잊은 채 아이에게 “힘들지?” 라고 한번 더 다독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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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모두가 떠난 후에 현관문에서 우두커니 이쯤이면 그리워지는 모두의 떠나는 뒷모습 언제나 그랬듯 물밀듯 밀려오는 공허함 아무도 없이 텅 빈 듯한, 그런 고요한 집 그 누구도 말조차 걸어주지 않을 듯한 그런 쓸쓸한 나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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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운문(시)]

천둥 Grade 8 김선우 Sun Kim

입 대고 우유를 마실 때마다 ‘쿵’ 하고 내리치는 천둥 번개보다 날카로운 목소리 제우스보다 엄한 목소리로, “알지?” 몰래 일어난 새벽, 게임을 할 때마다 ‘쿵’ 하고 내리치는 천둥 번개보다 빠른 눈빛, 천둥보다 무서운 눈빛으로,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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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산문(소설)]

그녀의 ‘어머니’ Grade 11 서수민 Michelle Suh 나는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 만 그녀의 어머니보다는 그녀를 더 사랑했고, 그래서 그녀의 어머 니는 항상 나의 적(敵)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소질이 있었고, 나의 그녀는 그 녀의 어머니의 곁에선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만 같아 보였다. 그녀 의 고통을 직면하면서부터 난 점점 더 그녀의 어머니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녀의 어머니 역시 이런 감정을 갖고 있는 나를 곱게 보 지는 않는 듯 했다. “제발, 나한테는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내 딸한테는 그러지 말 라고!” 때때로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는 나에게 손찌 검을 했고, 나의 자존감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 또한 서슴없이 내뱉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러려니 하게 되었지만, 경상도 사투 리 특유의 공격적이고 직선적인 말투에 더해진 욕설들은 어린 내 자존감에 이런 저런 상처를 입히고도 남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그녀, 즉 ‘나의 어머니’에게라도 투정을 부리고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내 오래된 증오로 습관이 되어 버린 짜증을 뱉어내는 것이 꽤나 정당하다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어느덧 내가 자라, 점점 더 많은 상황들을 이해하게 되었 을 때엔… 이미 늦어버린 그 때엔 그녀가 나보다 더 오랜 세월을 ‘그녀의 어머니’에게 지속적으로 상처 입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리고 자신의 고통이 나에게 되물림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받았을 적잖은 충격과 또 다른 입장으로서의 상처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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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제발! 제발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좀 하지 마! 엄마 는 왜 항상 남에겐 친절하고, 착하고, 베풀면서 엄마 친딸한테는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데? 내 오십 년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날 위해서 생각하고, 날 위해서 행동해 봐, 제발!” “뭐라고? 내가 니 핵교 졸업 때까지 밥멕이고 재워주고 키워줬 더니, 뭐라꼬? 은혜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년! 내 지금까지 뭔짓 해서 니를 키웠냈는지 니년이 알기나 아나?” “누가 그렇게 키워 달랬어? 우리 한번 누가 더 많이, 뭘 해줬는 지 따져볼까? 난 지금까지 그냥 컸지, 엄마가 키워주지 않았어! 알아?” “조용히 해, 이년아!” “엄마 수술했을 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이게 다 나 때 문이라고, 나 때문에 엄마 인생이 망한 거라고 눈 시뻘개져서 쳐 다보면서! 누가 그렇게 나 낳으랬어? 누가 미혼모로 엄마 혼자 애 낳아서 키우라고 했냐고. 나 이렇게 키울 거였으면, 그냥 낳 지도 말지! 대학도 내 돈으로 다녔어. 매일 밤새워 공부하고, 과 외하고, 다 내가 벌어서 다녔다고! 방세는 누가 냈는데? 나 어릴 때 엄마라는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죄다 기억해. 좁은 단칸방에 가둬놓고 대걸레로 소리지르면서 피해다니는 애한테 어 떻게 매질을 했는지, 뭐라고 욕을 했는지 다 기억한다고! 당신이 그러고도 엄마야? 그러고도 인간이냐고! 그리고 윤희한테는 어떻 게 했어. 똑같이 때리고, 욕하고! 당신이 뭔데 내 딸한테 그래? 나는 당신 딸이니까 가만히 당해줬지만, 윤희한테는 손 대지마! 알았어?”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다툼은 나에게 일상이 되어갔고, 혹여 둘의 몸싸움 도중 누구 하나라도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제외하고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평범의 범주에 다달 았다. 둘의 불화에 무감각해지고, 그녀 역시 그녀의 어머니를 사랑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후 나는 더욱 더 무신경한 채 로 그녀에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하여 당연히 안 좋게 말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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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내가 그 당시 깨닫지 못했던 사 실은 꽤나 간단하고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나의 할머니는 ‘어머니’였으며, 절대로 뿌리칠 수도, 벗어날 수도, 부정 할 수도 없는 질긴 인연이자 존재였고,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 근원을 알고 보면 할머니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함께 해왔던 끈적한 관계의 사람들이었다는 것. 나는 이 낯설지만 당연한 사실들을 훨씬 이전에 깨달았어야 했다. “어데 가나?” “...응, 나갔다 올게.” “친구 만나러 가는 기가?” “어!” “쪼매만 기다려 봐라.” 나는 아마 할머니 역시도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단지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그녀에게’, 그리고 ‘나에 게’ 전달해야 할 지 배우지 못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할머니의 쌈짓돈은 항상 툴툴거리는 어린 손녀를 위해 풀렸으니까. “할매가 니한테 줄 수 있는 게 요 돈밖에 더 있겠나.” 하지만 할머니의 말은 항상 무책임했다. 나에게 괜한 욕설을 퍼 붓고, 화풀이를 하고, 사이가 안 좋아진 후에는 나에게 얼마의 돈 을 쥐어주며 권력이 비권력에게 향하는 부당한 화해를 청하곤 했 다. 내가 원한 화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항상 그렇게 씁쓸하게 상황을 모른 척 넘어가곤 했다. 아마 나 역시도, 이런 할머니를 어 떻게 사랑해 드려야 할지 모르는 그런 무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 고 생각한다. 그녀의 어설픈 친절보다, 그녀의 날선 욕설과 폭력이 나에겐 훨씬 더 진하게 다가왔으니까. 나에게 남은 것은 추억보단 상처가 많았으니까. 아마 그래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엄마가 그랬지? 우리 따로 살자 고. 나도 좋아. 우리 따로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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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싸움과 다툼은 그녀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결 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스트레스는 몸의 질병으로 이 어졌고, 그녀가 우울증을 앓던 때에 의사가 말했듯이, 그녀의 스트 레스 대부분은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으니까. 할머니 와 싸우고 난 후면 엄마는 숨을 헐떡이며 쓰러질 듯 보였고, 충혈 된 눈 가득 고인 눈물은 나까지 숨죽여 흐느껴 울게 만들었다. 후 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녀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내가 가 장 컸다고 한다. 대학에 가고 시집을 가게 되면 더 이상 그녀와 한 집에 살게 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그녀와 함께 있는 지금을 행 복하게 보내야 될 텐데. 결국 그녀 역시 그녀의 어머니보다 나를 더 사랑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러했듯이. “언제 오나 했는데, 이제 왔구나.” 확실히, 다른 집에 살게 되자 그녀와 나 모두 심적으로 안정을 찾았고, 좀 더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욕설과 폭행은, 확실 히 사람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병들게 하니까. “자주자주 좀 놀러 와라. 강아지도 좀 보고. 얼굴 까먹겠다.”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자, 욕설과 폭행의 시간은 줄어들 수밖 에 없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 그것이 증오이건, 사랑이건, 애증이 건, 그러한 것들을 보여줄 시간조차도 부족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제 나도,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도,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갈 준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갈 준비. 아마도 이제는 서로 그럴 수 있다고, 배워갈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할머 니의 집을 찾아가는 횟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명절 때에도 찾 아가지 않는 상황이 되었고, 내가 받은 상처와 고통은 할머니의 존 재 자체와 함께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대학에 가고 난 후, 할머니의 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을 뿐 더러 엄마에게 물어 볼 수 없었으며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엄마는 언제나 그래왔듯 다시 할머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을 것이고, 할머니는 그런 엄마에게 상처를 입혔을 것이며, 둘의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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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시 시작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난 더더욱 할머니의 대한 얘기 를 회피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한국에서 온 연락에는 할머니의 부고에 대한 소식 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어떠한 감정도 나에게 밀려오지 않았다. 단지 시 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구석 어딘가에서 찡한 아픔이 밀려왔다는 것.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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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산문(소설)]

심해 도시 Grade 10 윤수빈 Joyce Yoon 모선(母船)은 부서져도 녹슬어도 장엄하다. 한때 마른 땅은 바다의 바닥이었다. 메구미는 한때 심해였던 공 간에 선다. 물 한 방울 없는 땅에 발자국이 찍혔다. 수백 수천 척 의 배들은 폭격을 맞아 가라앉고 바다는 말라붙었다. 그리고 메구 미 앞의 거대한 기물이 모선의 유해다. 꼭 이 배가 모선이었다는 것은 그 크기와 위엄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점이다. 그 정도 크기 의 배는 모선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메구미는 그렇게 믿었다. 무 너진 모선 아래에 서면 햇빛을 피할 수 있었다. 최근 태양은 바다 가 말라버릴 정도로 아주 강했다. 메구미는 누구나 그렇듯 집이 없 었기 때문에 죽은 모선 아래에서 해를 피했다. 본래 모선이란 거느릴 배가 있어야지만 모선이 될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다른 배들은 모두 폭격을 맞은 즉시 혹은 바다에 가라 앉은 뒤 곧 산산이 조각나 사라졌다. 그렇지 않은 배는 사람들이 가져가서 쓸 만한 재료를 재활용하거나 전시하거나 팔아넘기거나 했다. 오직 모선이었던 배는 그 크기와 비례하는 무게가 너무나 대 단해 아무도 손댈 수 없었기에 가라앉은 자리에 마모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다른 배는 한 척도 남아있지 않기에 원래대로라면 모선은 더 이상 모선이라고 불릴 수 없으나 모선은 이미 모선이었 다. 가족도, 근본도 없는 메구미가 햇빛을 피하러 모선 아래에 숨 기 때문이다. 배는 메구미의 어머니가 되었다. 배는 다시 모선(母 船)이 되었다. 메구미는 세상에 홀로 존재했다. 못생기고 미소 짓는 방법도 고 개 숙이는 방법도 모르는, 무엇 하나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메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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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미움 받기에 알맞은 존재였다. 능력이 없는 자는 사랑스러워야 하고, 사랑스럽지 못한 자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혹은 그 렇지 않더라도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고 말 없고 왜소한,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메구 미는 자연스레 축복받은 소수에 들지 못했다. 메구미는 인간을 좋 아하지 않았고 그런 메구미의 태도에 응답하듯 인간도 메구미를 좋 아하지 않았다. 시내에 나간 메구미에게 어른들은 빵을 주지 않았 고 아이들은 돌멩이를 던졌다. 모선은 그런 모든 것과 무관하게 메구미를 품어주었다. 무심한 존재였다. 꼭 메구미처럼 무심한. 메구미의 기계 같은 심장과 모선 의 부서져서 멈춰진 엔진은 닮아있었다. 메구미는 아무런 생각도 마음도 없이 조용히 모선이 만드는 그늘 아래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고 있으면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저물고, 다시 해가 떴 다. 12월의 해는 마른 바닥에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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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운문(시)]

괜찮아 Grade 11 이소형 Jenna Lee

엄마는 김밥을 만든다 손을 떨며 칼을 떨어뜨린다 당근 채를 썰다 피를 본다 엄마는 나에게 걱정 말라며 웃는다 ‘괜찮아-’ 엄마는 날 위해 된장찌개를 만든다 간을 보다 혀를 데이고 냄비를 열다 손을 데인다 엄마는 맛있게만 먹는 날 향해 웃는다 ‘괜찮아-’ 엄마는 오늘도 내 방을 청소한다 피곤한 몸을 세워 빨래를 갠다 내가 내버린 냉소를 줍고 내가 내던진 내 삶의 무게를 받으며 웃는다 ‘난-, 괜찮아’ 엄마는 장을 보러 간다 가족을 생각하며 새우깡을 산다 무거운 짐을 들고 지하철을 탄다 당신에게 기댄 사람들 생각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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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난 괜찮아’ 엄마는 아프다 마음이 아프고 몸도 계속 아프다고 한다 나의 걱정스런 눈빛에도 결국 웃는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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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운문(시)]

어머니 Grade 9 박정연 Clara Park 두 살 가와사끼병 진단받아 입원하게 된 나 낮이든 밤이든 돌보시는 그 분 어머니 다섯 살 길 가에 넘어져 울고 있는 나 괜찮다며 다독이며 두 발로 다시 설 수 있게 하시는 그 분 어머니 아홉 살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두려워 떠는 나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그 분 어머니 열두 살 한국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나 뒤에서 격려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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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봐주신 그 분 어머니 열다섯 살이 된 오늘까지도 나의 지도자, 나의 선생님, 나의 지원군, 영원한 사랑을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어머니 그 위대한 세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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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운문(시)]

기도 Grade 8 정강인 Bryan Jung

나는 보네 사랑의 증오, 행복의 절망 분장한 악마가 떠드는 희망 방안에 앉아 눈을 감는 나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나이기에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는다 칠흑 같은 암흑을 지나 갈 때에도 빈 방에 홀로 갇혀 헤매는 순간에도 날 버티게 하는 힘 못 다한 말 기도가 되어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매일 이 자리에 서는 것 엄마 그리스도 앞에서 오늘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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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산문(수필)]

모녀 Grade 12 임나연 Cathy Lim 엄마와 친해지게 된 것은 몇 년 전이 되어서였다. 물론 그 전에 도 엄마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한 것은 맞지만, 엄마와 나는 ‘모 녀’라는 관계에서 서로 지정된 삶을 살고 있는 데에 그쳤었다는 어 딘가 찝찝한 느낌은 끊임없이 나의 생각의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 다.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조금 더 자라, 이 뽑기가 무서워 치과가 떠나가라 고함치며 울었던 시절, 그리고 ‘창파유치원’이라 적힌 노 란 가방을 메고 뒤뚱뒤뚱 유치원을 향하던 그 날까지도, 어린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놀기 바빠 그랬는지, 엄마가 나의 어린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도통 정의내릴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텍사스에서는 공부하는 아빠를 뒤로하고 내 세상의 전부는 그저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지만, 잠깐의 시간 동안 한국에 머물렀을 때는 우리 모녀와의 추억은 무척이나 희미하다. 그나마 자욱한 연기에 묻혀 흐릿하게 남아있는 기억 중에서도,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 있는 기억은 한국에 돌아와 외할머니 댁에서 지낼 때였다. 아빠는 미국에 남아 대학원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고, 엄마는 한국에 돌아와서 직장에 다녔다. 나는 매일같이 6시만 되면 “엄마 데리러 가자!” 라는 외침에 달려 나가 외삼촌 등에 업혀 엄 마에게 향했다. 내 하루의 전부는 우리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로 이 루어져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엄마의 부재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엄마’라는 존재는 나에게 조금 다른 의미,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말이 꽤 나 서툴렀기에, 사실 그저 초록색 손잡이의 주걱에 불과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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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받아쓰기’시간은 공포였다. 엄마의 꾸중에 집안이 떠나가 라 울어대며 연필을 꾹 쥐고 받아쓰기 공부를 했었다. 엄마는 워킹 맘이었다. 직장에서 하루종일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도 주말만 되면 내 손을 잡고 나에게 서울 시내 곳곳을 지하철을 타고 미술관과 음악회를 보여줬다. 그 순간들이 있어서인지 엄마는 어린 나에게 두려운 존재인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멋진 여장부로 보였다. 하지 만 커갈수록 엄마는 내 인생에서 복잡하고 모호한 역할을 지닌 듯 느껴졌다. 여느 엄마들처럼 우리 엄마 역시도 마찬가지로 잔소리와 나무람, 그리고 나에 대한 지지는 모두 엄마에게서였다. 하지만 나는 비교 적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거세게 저항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이 해심이 부족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단정지을 때가 많으며 누 구 때문인지도 모를 ‘욱’하는 성질 때문에 나는 속상했다. 골을 냈 으며 다른 엄마들과 비교해 끊임없이 재어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길 잃은 나를 다시 제자리로 오게 해주었다. 싸울 때는 열이 난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가쁜 숨을 푹푹 내쉬며 서로의 방문을 쾅 닫고 화가 나있다가도, 금세 다시금 그저 그런 모녀 사이의 관 계를 왔다 갔다 하는 우리는 모녀다. 하지만 엄마가 내 친구라고 느껴지게 되고, 내가 엄마를 진심으 로 존경하게 되었을 때는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어떤 사건이 계기 가 되었거나 어떤 사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정말 ‘별 것도 아닌’ 작고 사소한 행동, 이를테면 아빠의 교과서적인 훈계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라는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우리 머리 좀 식히러 산책이나 갈래?’라는 엄마의 말 한 마디는 학교, 성적, 예민한 친구들과의 관계 등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지칠 대로 지쳤던 나에게 별 감흥이 없었다. 그 이후에도 냉랭하고 진한 애정표현 없는 우리 경상도 모녀에 게는 별다른 변화 따위는 없었지만, 그 작은 제스처들이 이내 쌓이 고 쌓여, 어느 샌가 나는 우리 엄마가 어린아이를 마냥 품어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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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희생적인 이미지로서가 아닌 한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빠와 이런저런 일들로 다투었을 때, 무뚝뚝한 아빠 의 이해가 부족해 서운해 하던 엄마도 여자였고, 누군가로부터 사 랑받는 딸이었다. 직장에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에, 그토록 단단 하고 강철 같던 엄마도 지쳐 넘어질 때도 있었다. 꼭 나처럼. 내가 조금 더 성숙해져서 였는지, 아니면 우리 모녀가 십 몇 년이 지나 고 나서야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서였는지는 나도, 엄마도 알 수는 없지만, 우리 모녀는 드디어 조금씩 조용한 침묵 속에서 좀 더 이 해심 깊고, 조금 더 가까운 모녀 관계를 싹 틔워 나가고 있는 중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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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산문(수필)]

거북이 엄마 Grade 11 유유진 Sophie Yoo 코끼리는 새끼를 낳는 순간부터 새끼와 함께 한다 강아지는 새끼를 낳는 순간부터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새는 알을 낳는 순간부터 품에 품고 산다 늑대는 새끼를 낳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곁에 있는다 거북이 어미는 알을 낳고 묻는다 그리고 그 거북이 어미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바다로 향한 다 우리 엄마는 그 거북이 엄마이다 어린 나의 두 눈에 비친 우리 엄마의 모습은 항상 ‘무서운 사람’ 이었다. 그 당시 엄마는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 때문에 바빴고 나는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손에서 컸다. 그때는 엄마와 시간을 많이 못 보냈을 뿐만 아니라 엄마랑 시간을 보낼 때 조금만 잘못을 해도 눈물 핑 돌 정도로 매섭게 혼쭐이 났고, 그 여린 마음에 상처를 받 기도 했다. 또 엄마보다는 할머니와 더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초등학생까지만 해도 엄마는 낯선 사람이라고 느낄 정도로 애정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그시기에 끄적였던 일기장을 들춰보면 엄마를 싫어한 내 마음이 비춰져서 마음 한 켠이 시려왔던 경험이 있다. 나는 봤다. 우리 엄마는 거북이 엄마처럼 나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바다로 향했다. 아니 그렇게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누가 “그럼 엄마와 사이가 안 좋니?” 라고 물어본다면, 난 한번에 “아니요, 저와 제 엄마는 각별한 사이예요!” 라고 말할 자신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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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현재 엄마는 나에게 친구 같은 존재이고, 또 내가 연극의 주인 공이라면 우리 엄마는 커튼 뒤에서 나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튼튼 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스태프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중학교를 들어갈 때까지는 엄마에 대한 이 마음이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고 몇 번 엄마와 깊은 얘기를 하 면서, 그 당시 우리 엄마가 무슨 일을 홀로 겪어내고 있었는지를, 자신이 너무 예민해서 그렇게 심하게 혼낸 것을 아프게 반성해 왔 는지, 내가 어렸을 때 다른 엄마들처럼 흔히 말하는 ‘엄마 역할’을 못해준 것에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는지도 알게 되었다. 요즘도 가 끔 엄마가 어릴 때 나를 많이 못 챙겨준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시 는 것이 느껴진다. 그럴 때 난 항상 말한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엄마는 내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이고, 나는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워.”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연 그 거북이 엄 마는 자신의 소중한 알들을 두고 바다로 가는 것이 쉬웠을까? 마 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정말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숨에 뒤돌아보며 망설이지 않았을까? 답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난 그 과정에서 엄 마가 느꼈을 슬픔과 체념해야 했던 현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여 느 엄마와 다르게, 엄마는 자신 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안다. 우리 엄마는 거북이 엄마다. 또 우리 엄마는 항상 말한다. 사랑한다고. 또 내가 전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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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산문(수필)]

우리 엄마는 Grade 11 최진이 Jinny Choi 우리 엄마는 사실 강하지도 엄격하지도 옳지도 않다. 어렸을 때 에는 엄마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엄마는 강하다. 엄마는 엄격 하다. 엄마는 옳다.’ 같이 슬픈 영화를 볼 때를 제외하고는 여간해서 엄마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주 뜨거운 냄비를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잡으셨고, 내가 감기에 걸렸으면 감기에 옮든 말든 상관 없이 나를 보살펴주셨다. 길을 가다가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담배 를 피며 노려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고, 아주 깊은 밤이어도 엄마 와 함께라면 나도 덩달아 무섭지 않았다. 내가 한창 사춘기 때 반항심이 들어 엄마에게 대들려고 했을 때 엄마는 네가 힘으로 나를 이길 수 있겠냐며 팔씨름을 한 적이 있 는데 나는 완패를 했었다. 엄마는 힘도 세셨다. 내가 숙제도 안하고 놀고 있으면 잔소리를 하셨다. 꼭 내가 잠깐 페이스 북을 켤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방문을 벌컥 열며 빨리 끄 라고 하시며 혼내셨다. 공부해라. 넌 커서 뭐가 될 거냐. 숙제 해 라. 시간 낭비 하지 말아라. 이러지 마. 저러지 마. 그러지도 마. 엄마는 엄격했다.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겼다. 언제든지 문제가 생 기면 엄마한테 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항상 답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답보다 더 지혜로운 답을 제시해 주셨고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도 엄마는 알았다. 엄마가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항상 그에 따른 벌이 있었다. 엄마는 옳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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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고등 학생이 되고부터 내가 엄마보다 키도 훨씬 커지고부터, 나도 엄마 도 나이를 더 먹으면서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이 기 시작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엄마가 우는 것을 봤다. 슬픈 영화 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같이 교회에서 기도를 하다가 우시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토록 강한 엄마가 눈물을 흘리시다니. 하루는 매실차를 마시려고 엄마가 냉장고에서 매실원액을 꺼내셨 는데 뚜껑이 꽉 닫혀있었는지 뚜껑을 따지 못하셨다. 아무리 힘을 써도 뚜껑이 열리지 않자 나는 엄마에게 내가 따주겠다고 했다. 나 는 너무나도 쉽게 뚜껑을 열었다. 요즘 들어 내가 공부하기 싫다고 큰 소리 치며 방문을 쾅 하고 닫으면 엄마는 조용히 나를 건들지 않으신다. 언제나처럼 엄마는 나를 혼내시겠지 생각했지만 엄마는 나에게 더 이상 무엇을 강요하 지 않는다. 가끔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엄마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엄마도 모르겠다고 하실 때가 생겼다. 항상 옳지도 않다. 요즘은 내가 더 답을 잘 찾는다. 엄마는 생각보다 나와 다르지 않다. 생각보다 연약한 여자이고 생각보다 작다. 나를 지켜주시지만 언젠간 내가 지켜줘야 하는 존 재가 될 것 같다. 엄마는 생각보다 엄마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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