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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서울시민연대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의 뿌리를 찾아서 떠나는 시간여행

!

역사의 현장에서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느껴 보자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2가 75번지 2층 전화 070-8834-4002 팩스 02-364-4300 http://cafe.daum.net/615simin 00sim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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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강좌

너희가 서울을 아느냐 를

개최하며

서울은 수도 , 중앙 이기에 앞서 1천만 시민이 먹고, 일하고, 놀

고, 쉬는 삶의 공간이자 터전입니다. 서울이 중앙 정치의 공간으로 만 인식되고, 모든 사람들이 부와 탐욕에 눈이 멀어 출세와 영달을

꿈꾸는 도시로만 생각할 때, 서울에서 더 이상의 생명력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서울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며, 누구의 고향도 될 수 없는 곳이

아닙니다. 서울은 600년의 역사를 지닌 오래된 도시이며, 문화와 역사가 숨 쉬는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그래서입니다. 서울시민이 유민(流民)이 아니라 정주민이라는 사실

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는 강좌 너희가 서울을 아느냐 를 개최합 니다.

모쪼록 이번 여행을 통해 서울 이라는 도시가 1천만 시민들의 정든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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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첫 번째 강좌

갑신정변, 3일천하 혁명의 길을 따라

04page

박은숙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두 번째 강좌

북촌에서 만나는 한옥과 선인들의 생활상 11page

이현군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세 번째 강좌

청계천, 그 역사와 문화를 찾아 떠나는 탐방 19page

전우용 전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네 번째 강좌

남산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서 30page

전우용 전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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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좌

갑신정변, 3일천하

혁명의 길을 따라

박은숙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

표로 일으킨 정치적 변혁운동이다.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저녁 9시경 시작되어 10월 19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으니, 이른바 3일천하 세상은 46

시간 정도로 이틀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은 빠른 속도로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인사를

단행하였으며, 자신들의 개혁구상이 담긴 정령(政令)을 반포하기도 했다. 김옥균 등은 언제

철수할지 모르는 일본군의 퇴각에 대비하여 매우 신속하게 권력기반 구축 작업을 진행하였 다. 그들의 숨가쁜 정변의 길을 따라가 보자.

첫날 : 10월 17일 저녁, 혁명의 깃발을 들다 우정국 만찬장, 불이야, 불이야 김옥균 등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우정국 개업 축하 만

찬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우정국 만찬은 10월 17일 견평방(堅平坊, 현 종로구 견지동)

에서 예정대로 저녁 7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는 우정국 총판인 홍영식을 비롯하여 김옥균 박영효 등의 정변주도세력이 참석하고 있었고,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이 자리하였으며, 미국공사와 영국영사청국총판 등 세계 열강의 외교관들이 참석 했다.

연회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미리 요리사에게 귀띔해 놓은 바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홍현( 峴)에서 누군가 김옥균을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김옥

균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박제경(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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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가와 기량을 다 써보았지


만 별궁(別宮)방화는 도저히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주변의 초가에 불

을 붙이도록 말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만찬 진행 중 별궁 방화에 실패한 소식이 전해오고 있었으며, 김옥균의 잦은 출입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저녁 9시경, 만찬도 거의 끝나 다과가 나오고 있을 즈음에 불이야, 불이야 라는 소리가

들리면서 우정국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졌다. 정변이 개시된 것이다.

민영익이 제일 먼저 나갔으며,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민영익은 동맥이 끊기고 귀와 볼 등 7군데나 찔려 옷 위로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그는 위독한 상황에서도 사력을 다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구원을 요 청했다. 그는 묄렌도르프(M llendorf)와 푸트의 보호 아래 묄렌도르프 집으로 가서 미국공

사관의 주치의 알렌(Allen, Horace Newton)의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김옥균과 동지들 또한 북쪽

창문을 뛰어넘어 문 밖으로 나와 비밀 암호인 천천천 을 외치면서 원래 계획대로 창덕궁

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이때 천(天) 은 무슨 뜻이었을까? 천하를 뒤집어엎는 혁명을 뜻 하는 것이었을까, 천천히 하자는 뜻이었을까? 왕세자의 혼례처, 안동별궁 방화 원래 계획에는 연회가 진행되는 도중 8시 30분~9시경에 별궁에 방화를 하기로 되어 있

었다. 그러나 처음에 시도한 별궁 방화가 발각되어 순라군과 포도청 포졸들이 불을 끄는

동시에 경비순찰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별궁에 방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행 동대원들은 김옥균과 연락을 취하여 별궁 옆 초가를 찾아 방화하였다.

안동별궁은 안국동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던 안동별궁(安洞別宮)을 가리킨다. 안동별궁은

1882년 왕세자 이척(李坧, 훗날 순종)과 세자빈 민씨(훗날 순명효황후)의 혼례를 위해 특별 히 지은 궁이다. 왕통을 이을 세자의 혼례는 전례 없이 화려하고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당

시 세자는 당시 9살의 어린이였고, 세자빈은 11살의 어린 소녀였다. 민비가 친정일가에서 간택한 세자빈은 민태호의 딸로서 민영익의 여동생이었으니, 민태호는 자신의 아들과 딸을 민비에게 바친 셈이다.

안동별궁이 방화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은 우정총국에서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

고, 개화당 동지 서광범 집과 담장을 맞대고 있어 거사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

동별궁은 중요한 곳이므로 화재가 나면 군영( 營) 대장인 민영익 이조연(李祖淵) 등의 정 적(政敵)이 몰려올 것이고, 그러면 장사를 매복시켰다가 일거에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도성 안에 불이 나면 군영 대장에게 화재진압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공사관에 들러,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별궁 방화와 우정국에서의 4영사 처단 등 제1단계 계획이 차질을 빚자,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공사관에 들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 一 )의 태도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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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일본측의 이상 없는 준비를 확인한 후, 이들은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김옥균박영효 등은 창덕궁의 서쪽 문인 금호문에 도착하여 문을 열게 하고, 숙장문 안에

서 김봉균 등을 보내 30분 후에 화약을 터뜨리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협양문(協

) 밖

에 가 파수보던 무감을 밀치고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계획대로 개화당 소속 전 영 소대장인 윤경완이 병정 50명을 이끌고 호위하고 있었다. 김옥균 등은 편전 안으로 들어가 환관 유재현(柳

)에게 고종을 깨우도록 종용하였으

며, 이때 고종이 김옥균을 불러들였다. 이에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은 고종의 침실로 들어가

우정국의 변란을 알리고, 잠시 정전을 피해 이어할 것을 청하였다. 고종은 별 이의 없이 김

옥균의 의견을 따를 생각으로 옷을 입었으나, 민비는 의심을 품고 이 난이 청에서 나왔습

니까? 라고 캐물으면서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밖에서 예정된 포성소리가 나자

고종과 민비는 급히 경우궁으로 행차하였다. 방어에 유리한 고지 경우궁으로

창덕궁을 나서 궁궐 밖 경우궁으로 가는 도중에 김옥균은 고종에게 일본병을 요청해서

호위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고종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일본군사를 요청하려면 친필칙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요금문 내의 길 위에서 친 필로 일사래위(日使來 ) 4글자를 써 주었다. 갑신일록에는 일본공사래호짐(日本公使來 朕) 이라는 7자였다 한다. 이때가 밤 10시였다.

조금 후에 궁궐에서 숙직 중이었던 후영사 윤태준(尹泰 )과 심상훈(沈相 )이 변란의 소

식을 듣고 찾아왔다. 어가가 경우궁 정전(正殿) 뜰에 이르렀을 때, 고종의 친필칙서를 받은

일본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경우궁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호위에 들어갔다.

이튿날 10월 18일, 완고당 숙청과 또다시 창덕궁으로 반대파 숙청과 개혁 인사 단행 자정 넘어 10월 18일 경우궁에 대한 경비를 정비한 후 김옥균은 행동대원들로 하여금 고

종을 알현하러 오는 권력의 핵심 실세들을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이조연(李祖淵)

한규직( 圭稷) 윤태준(尹泰 ) 민영목(閔泳穆) 조영하( 寧夏) 민태호(閔台 )가 살해되 었다. 개화당 간부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도 처단되었다.

그리고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李 元)을 불러들여 협조를 구하였으며, 왕명으로 친군4군

영 군사 2천여명을 소집 동원하여 경우궁 수비를 맡겼다.

이어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고, 그 내용을 조보(朝報)를 통해 알렸다. 이때의 인사에서

영의정 이재원,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서광범, 호조판서 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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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 등으로, 전체적으로 대원군 계열의 종친과 왕실 외척과의 연대를 도모하였으며, 의정부

세력과 범개화세력을 동반세력으로 설정하였다. 이때의 인사를 두고 김옥균은 무릇 민씨 일파에게 굽히고 있던 자들을 대개 천거하여 관리로 삼았다. 고 하였다. 과연 적의 적은

동지 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개화당 인사의 수는 10여명 이내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무력에 기초하여 철저한 독재정권을 세우던지, 아니면 다른 정치세력과 연대한 정권을 수

립할 수밖에 없었다.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주로 왕실의 종친과 외척, 의정부세력과의 연대 를 통한 연합정권을 구성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공조를 모색함과 동시에 정변 의 정당성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노선과 지향이 왕실세력과의 정치적 연대

는 많은 문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변 때 단행된 인사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비교적 젊 은 관료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새벽 4시경에 각국 공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위문하게 하였다. 경우궁에 들어온

미국공사와 영국영사는 세계 모든 나라는 사소한 변동이 없지 않으며 라고 하면서 대체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반전을 노리는 민비의 계략 창덕궁 환궁 경우궁에 이어한 후에도 민비는 변란의 전말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민비는 김옥균

에게 사건의 본말을 계속 물었고, 추위와 비좁음을 핑계로 환궁을 요청하였다. 경우궁은 정

조의 후궁인 수빈박씨( 嬪朴氏, 순조 생모)의 사당으로, 그간 비어 있었기 때문에 난방에

문제가 있었고, 궁궐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았다. 그러나 어찌 단순히 춥고 비좁은 것 때문 에 그러했겠는가?

이미 정변의 실상을 파악한 민비는 정변을 와해시키고 개화당을 제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자신과 세자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떻

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로 방향을 전환하려 했으며, 그 하나가 바로 수비 범위가 넓은 창덕궁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궁녀와 내시들 또한 좁은 공간에서 떠들어대고 있 었는데, 김옥균은 이를 곤전(坤殿, 민비)의 계략 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오전 10시경 환궁을 졸라대는 민비와 대비(大妃)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경우궁 남쪽에

이웃해 있는 이재원의 집, 곧 계동궁(桂洞宮, 현 계동 현대빌딩 부근)으로 이어하였다. 그

런들 민비가 만족하겠는가? 자신의 목표가 관철될 때까지 요구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 였다.

예상대로 민비는 고종과 합세하여 창덕궁 환궁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김옥균은 방어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환궁요구를 묵살하였지만, 다케조에 일본공사는 창 덕궁 환궁을 내정하고 김옥균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김옥균과 개화당은 환궁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고종의 요구와 일본공사의 입장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김옥균과 개화

당 동지들의 문인적 기질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무관(武官)이거나 무인의 비중 이 높았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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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경 고종을 비롯한 일행이 모두 창덕궁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정전(正殿)인 인정

전(仁政殿)으로 가지 않고, 희정당 옆 높은 지대의 단촐한 건물인 관물헌( 物 )에 자리

잡았다. 아마도 김옥균은 청군의 진입에 대비하여 수비하기에 유리한 곳으로 판단하여 선 택한 것으로 보인다. 관물헌은 즙희( 熙) 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시경(

)에 나오는

말로 밝게 빛남 을 뜻한다. 이곳은 민비가 순종을 낳았던 산실(産室)이기도 했다.

밤이 늦어 창덕궁의 대궐 문을 닫으려 할 때, 청국 병영에서 선인문(宣人 , 창경궁 동남

문)을 잠그지 말라는 통보가 왔다. 이에 전 후영군을 불러 요지에 주둔하게 하고, 일본군

에게도 경계태세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셋째날 10월 19일, 뼈아픈 퇴각 개혁구상을 담은 정령(政令)의 반포 10월 19일 자정 무렵부터 김옥균 등은 개화당의 구체적 개혁구상을 담은 정령을 작성하

기 시작하였으며, 오전 10시경에 정령을 반포하였다. 이때 공포된 정령은 원래 80여개 조 항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재 14개 조항만이 갑신일록에 전하고 있다. 一 대원군을 불일내에 모셔올 것(조공허례는 의논하여 폐지함).

一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으로써 관(官)을 택하고,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말 것.

一 전국적으로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곤란을 구제하며 더불어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할 것.

一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고, 그 가운데 우수한 재능이 있는 자는 등용할 것. 一 전후에 간탐(奸 )하여 나라를 병들게 함이 심한 자는 정죄(定 )할 것. 一 각 도의 환곡[ 上]은 영영 받지 않을 것. 一 규장각을 혁파할 것.

一 급히 순사를 두어 절도를 방지할 것. 一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

一 전후에 유배금고된 사람은 헤아려 석방할 것.

一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1영 중에서 장정을 뽑아 급히 근위( 세자궁을 우두머리로 함).

)를 설치할 것(육군대장은

一 무릇 국내 재정에 속한 것은 모두 호조가 관할하고, 그 나머지 일체의 재부아문( 혁파할 것.

)은

一 대신과 참찬[새로 임명한 6인은 지금 반드시 그 이름을 다시 쓸 필요는 없다]은 매일 합문( ) 안 의정소( 政所)에서 회의하여 아뢰어 결정하고, 정령을 반포 시행할 것.

一 정부(政府) 6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직에 속하는 것은 모두 혁파하고, 대신참찬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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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임오군란 때 납치되어 중국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있던 대원군의 귀국을

주장함으로써 대외적으로 독립국가로서의 대의명분과 체면을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속국 으로서 종주국(宗主國)인 중국에 예물을 바치던 조공(朝 )을 폐지하여 청으로부터의 독립

을 이루고자 했다.

주요 내용은 입헌군주제의 정치체제와 개화파 중심의 국가권력의 운영방안에 대한 비중

이 높았으며, 국가재정의 확보와 군사적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었고, 청으로부터의 독립 구

상, 인민평등권 제정과 같은 혁명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청군의 진격과 개화당의 패퇴

날이 밝은 후 김옥균은 군권을 담당한 박영효와 서광범을 각 영에 보내어, 각 영에서 보

유하고 있는 총과 칼을 정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총과 칼이 모두 녹슬어서 탄환을 장전 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공사가 이재원홍영식에게 일본군사가 오래 주둔할 수 없는 형세이므로 오늘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자립하는 방안이 설 때까

지만 이라도 기다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며, 결국 일본공사는 김옥균의 방안을 수 용하여 당장 철수는 미루어졌다.

오후 2시 30분 3시경에 청국진영으로부터 일본공사에게 서찰이 전달되었는데, 채 뜯기

도 전에 포성이 울리면서 동남문으로 청군이 협공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개화당의 행동대원들과 일본군은 청군과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때 전 후영군은 총을 분해

소제하던 중이라 모두 맨손으로 도망친 상태였고, 창덕궁 바깥의 수비를 맡고 있었던 좌우

영군은 청군에 합류하여 일본병을 공격하였다.

청군과 교전이 시작되자, 민비는 재빨리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궁궐 문을 나서 북묘(北

廟, 현 명륜동1가)로 피난하였다. 고종은 제쳐 두고

민비는 이후에도 고종을 따라가지 않

았다. 민비 일행은 혜화문 밖의 손가장(孫家庄) 마을을 지나 노원을 거쳐 각심사( 心社)로

피난을 갔다. 각심사는 노원구 월계동 각심마을에 있던 절로서, 이경하의 별장이 있었다 한

다. 그녀는 그곳에서 사태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비의 행보는 임오군란 때

자신에게 닥친 살해 위험에서 간신히 벗어났던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고종은 기회를 보다가 혼잡한 틈을 나서 시종 몇 사람만 거느리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뒤미처 김옥균과 서광범이 고종을 붙잡아 후원 뒤쪽 연경당에 모셨다. 도망가려는 왕과 붙 잡아 두려는 개화당

막다른 길목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옥균은 일본공사에게 대군주를 모시고 급히 인천에 가서 다음 계

책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는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 사이에 청군의 공격이 계속되어 개화파와 일본군은 다

섯 번이나 자리를 옮겨가면서 창덕궁 동북의 궁문 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개화파는 고종 을 강제로라도 인천으로 모실 것을 주장한 반면, 일본공사는 군대를 철수하려 하였다.

결국 사세가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정변주도층과 일본공사는 모두 철수하기로 하였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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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홍영식과 박영교는 사관생도와 함께 고종을 호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군과 조선군 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공사를 따라 일본공사

관으로 후퇴하였다. 이때가 저녁 7시에서 7시 30분경이었으니, 정변은 46시간여 만에 실패 로 끝났다.

흔히 권력의 변동을 불러오는 혁명이나 쿠데타를 두고 성공하면 충신, 실패하면 역적 이

라고 한다. 갑신정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실패한 갑신정변은 모반( 反) 으로 규정되었

고, 관련자들 또한 역적이 되어 모두 제거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은 갑신오적(甲申五 ) 으로 지목되어 제1차적 제거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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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강좌

북촌에서 만나는

한옥과 선인들의 생활상 이현군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북촌에는 누가 살았을까 조선시대 도성 안을 나누는 기준선은 종로와 청계천입니다. 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한 도로이고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니까, 종로와 청계천에 의해

도성 안이 남북으로 양분됩니다. 북쪽 동네와 남쪽 동네로 나누어지죠. 북쪽 동네를 북촌,

남쪽 동네를 남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청계천과 종로 북쪽이 북촌이면 남촌은 현재의 남산

기슭 한옥마을 근처로 생각하면 됩니다. 종종 북촌과 남촌의 구분선을 두고 종로다, 청계천 이다 논쟁하는데, 실제로 걸어보면 종로와 청계천은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습니다. 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북촌, 남촌이란 말은 조선 말기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 이라는 책에 나옵니다.

매천

야록 을 보면 북촌, 남촌뿐만 아니라 윗대(상대), 아랫대(하대)라는 말도 나옵니다. 조선시

대 한양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내용을 인용하여 거주지 분화를 설명할 정도로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남북촌 우대 아래대 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북촌, 남촌은 어딘지 알겠는데, 상대와 하대는 어디일까요? 윗대를 한자로 표현하면 위 상 上, 집터 대垈, 상대上垈입니다. 쉽게 말해서 윗동네입니다. 아랫대는 아래 하下, 하대下垈, 아랫동네이고요.

청계천에서 가장 긴 물길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 지역이 윗대, 상대가 되고 청계천의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지점, 즉 광희문,

동대문, 왕십리 근처가 아랫대, 하대가 됩니다. 정리해보면, 경복궁과 창덕궁이 가까운 북

촌에는 노론 지배층이 살고, 남촌에는 벼슬하지 못한 남산골 선비, 남인 계열이 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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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상대에는 경복궁에서 일하는 아전들이 살았고, 하대에는 군총이라 불리는 하급군인들이

살았습니다. 구한말에 있었던 임오군란은 구식 군대의 병사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홀대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역에서 내리면 국립의료원이 있는데, 국립

의료원 옆 공원이름이 훈령원공원입니다. 국립의료원이 세워진 자리가 옛날 군사기관인 훈

련원이 있었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광희문, 동대문, 왕십리 일대에는 구식 군대의 하급군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바로 이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 것이죠.

북촌 한옥마을을 가다 경복궁 동쪽에 팔판동(八判洞)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덟 명의 판서가 배출된 동네라서 팔

판동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이 임용시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과거시

험을 통해 몇 품 반열을 얻지만 실질(實 ), 실제 벼슬자리를 얻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

니다. 과거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직분을 맡는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집권층이 거주하는

지역인 북촌이었기에 계속 판서가 배출되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죠.

인사동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3호선 안국역이 나오고, 거기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풍문여

고입니다. 풍문여고는 안동별궁이었습니다. 학교 안에 표지석이 있는데요, 표지석에는 안동 의 한자를 安東 이라고 적었는데 잘못된 것으로, 안동별궁은 안국동의 줄임말인 안동(安洞)

에 있던 별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풍문여고 담장은 안동별궁의 담이었습니다. 지방의 갯 사나 동헌이 초등학교가 된 것처럼 이속도 왕실의 대저택이 학교로 바뀐 것입니다. 풍문여 고를 지난 정독도서관 가는 길에 있는 덕성여고도 조선시대에는 대저택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의 단골 소재 중 하나가 장희빈이죠. 숙종은 재위기간도 길고 치적도 많지

만 일반인들은 숙종하면 바로 장희빈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장희빈 때문에 인현왕후가

궁궐에서 밀려나 먼 곳으로 유폐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창덕궁 인근인 지금의 덕성

여고 자리에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아주 가까웠던 것입니다. 단지 궁궐 밖이라는 점이 심리 적으로 멀게 느껴진 것이죠. 이야기로 하는 것과 장소를 말하는 것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 습니다.

풍문여고 왼쪽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정독도서관이 나옵니다. 정독도서관 쪽으로 올라

가지 않고 마을버스를 타고 쉽게 한옥마을을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안국역에서 3번 마을

버스를 타고 가회동 주민센터 다음 정류장인 돈미약구 앞에서 내리면 북촌 한옥마을에 도 착합니다.

정독도서관 입구에서 보면 화기도감 표지석과 함께 성삼문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개

국공신 정도전의 집터가 종로구청이고 성삼문의 집터가 정독도서관이었다는 것은 조선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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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고위직은 궁궐 근처에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이곳을 지나 좀 더 북쪽으로 가면 티벳 박

물관, 장신구 박물관이 나옵니다. 장신구 박물관 북쪽에 보면 코리아목욕탕, 코리아단식센

터가 보입니다. 이곳에 멈춰서서 무조건 서쪽과 남쪽을 보며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왜 여 기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는 사진을 보면 압니다.

서쪽에 보이는 산이 인왕산이고 인왕산 뒤쪽에 있는 것이 무악봉수대입니다. 두 산을 겹

쳐 보면 인왕산 능선과 무악 능선으로 두 개의 능선이 나눠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이가 무악재, 의주대로입니다. 그리고 인왕산 오른쪽에 있는 산이 북악산입니다. 북악산 과 인왕산 사이 뚝 떨어지는 부분은 고개지점에 해당하는데, 바로 창의문이 세워진 곳입니 다. 북악산 아래 파란 기와집은 청와대이고 바로 가까이 보이는 것은 경복궁 안에 있는 국

립민속박물관입니다. 인왕산 왼쪽(남쪽)에 보이는 산이 남산입니다. 코리아목욕탕 앞은 한 양 도성의 절반이 보이는 장소입니다.

코리아목욕탕 주변에는 한옥이 잘 남아 있습니다. 동쪽으로 돈미약국 방향으로 조금 가

다 보면 한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한옥들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으세요. 가회동 맞은편의 계동 쪽에도 한옥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오면 가

회동 주민센터가 있는데, 주민센터 앞에 관내지도가 있습니다. 그 지도에서 한옥이 남아 있 는 구역을 볼 수 있습니다.

돈미약국 근처,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역으로서 고관이 살았

던 지역입니다. 종로와 청계천 북쪽 지역이 다 북촌에 해당합니다. 물론 조선시대에 가회동

일대에만 기와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거기만 한옥마을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을 텐데, 가 회동 일대에 한옥이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제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

역은 개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명동, 종로 등에 한옥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일제 강점기에는 남촌 일대가 많이 개발되었고 북촌은 종로와 약간 떨어져 있어 개발 에서 소외되었죠. 일부러 보존하기 위해 가회동 한옥마을이 남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 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청와대와 가까워서 고도제한 탓도 있었을 것이고요.

조선시대에는 북촌이 높은 사람이 살던 지역이었고 남산에는 딸깍발이 선비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사정이 바뀝니다. 북촌은 조선시대 양 반세력이 강해서 일본인들이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지역으 로 진입해서 개발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남촌 쪽을 노린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을지로와

명동 쪽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해갑니다. 명동 쪽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이동

해야만 갈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북촌 우위에서 일본인에 의해 남촌 우위로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도시의 변화과정에서 중심부와 주변부가 역전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둘러보느라 힘드셨다면 헌법재판소(광혜원)에 잠시 들러주세요.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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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쪽으로 가면 크고 흰 소나무, 백송이 있습니다. 나무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십시오. 남

쪽으로 내려가면 안국역 2번 출구입니다. 맞은편에는 운현궁과 교동초등학교가 있고 동쪽 으로 조금만 가면 창덕궁과 종묘가 나옵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남촌, 북촌, 상대, 하대는 종로와 청계천, 분지의 사면을 기준으로 나누어진 명칭입니다.

도성 안에서 취락이 들어설 수 있는 위치 중 상대적인 방향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것이죠.

조선시대 당파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동인, 서인이란 말이 먼저 생겼고 남인과 북인은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선조 대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지고, 또 숙종 대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집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은 방향을 딴 말입니다. 예전에 김영삼(YS)을 중심으로 한 정파를

상도동계, 김대중(DJ)을 중심으로 한 정파를 동교동계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상도동, 동교

동은 중심인물의 주소입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 당

파의 명칭인 동인, 서인, 남인, 북인도 영수 저택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붙여졌습니다. 김

효원을 따른 일파를 동인이라고 했는데, 김효원은 낙산(타락산) 아래 살았습니다. 반면 서

인의 수장 격인 심의겸은 현재의 정도에 살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서쪽이어서 그를 따른 일

파를 서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우성전이 남산 밑에 살아서 그를 중심으로 한 당파가 남인이 된 것이고, 이발이 북악산 아래 살아서 그의 당파가 북인이 됩니다. - 출처 : 이현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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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 청어람미디어, 2009년 발췌(105 121쪽)


북촌의 역사 북촌의 형성과 변화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 주거지역이다. 그리

고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

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

어진 이곳은, 이름도 정겨운 가회동과 송 현동, 안국동 그리고 삼청동이 있다. 사간 동, 계동과 소격동 그리고 재동에는 역사

의 흔적이 동네이름으로 남아 수백 년을 지켜온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되었

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 들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 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유적과 문화재들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이 지역의 역 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북촌지역의 가장 큰 특성은 지형과 물길이라 할 수

있다. 북촌의 지형은 남쪽이 낮고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면 네 곳의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물길은 계곡을 따라 흐르며 길들은 물길과 나란히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길의 형태는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까

지도 북촌의 주요 남북가로를 이루고 있는 삼청동

1750년 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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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회로, 계동길, 원서동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양의 중심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잡고 있고 북악과 응봉을 잇는 산줄기의 남

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리로 자리매김 해왔다. 1906년 호적자료에 따르면 북촌 전체인구 10,241명(1,932호)

중 호주의 신분에 따른 구분에서 양반과 관료가 43.6%를 차지하고 있어 권문세가들의 주거 지로 양반들의 주택들과 관료들의 집들이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서의 북촌의 위상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이어져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 화파들과 민대식(민영휘의 아들) 등 여흥민씨 세력들 이 북촌에 많이 거주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많 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로의 인구집중 현상은 서울의

주택난을 가중시켰고 이러한 주택난에 따라 민간에

의해 진행되는 구획형 개발이 나타났다. 주택의 매매 를 통해 이윤을 얻고자 하는 주택경영회사들이 등장 하면서 1912년 이후 주택난으로 인해 중대형 필지의 분할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한옥들이 급속하 게 건설되었다. 현재 북촌의 대표적 한옥밀집지역인 1927년 경성시가도

가회동 31번지, 11번지, 삼청동 35번지 일대 등도 모 두 이때 주택경영회사에 의해 집단적으로 건설된 한 옥주거지들로서 대규모로 건설된 후 분양되는 방식으

로 공급되었다. 이 시기 건설된 한옥들에는 유리와 타일 등 이전에 쓰이지 않던 새로운 재

료가 사용되었고 평면이 일정부분 표준화되었으며 가로체계 등과 함께 만들어진다는 점에 서 이전의 한옥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한옥 주거지는 해방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건설되어 학교 및 공공시

설로 남은 몇 개의 대형부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이 한옥들로 채워졌다.

1970년대 : 학교이전과 북촌경관의 변화 1960년대 후반기부터 1970년대 전반기에 걸쳐서 시행된 영동지구 개발사업을 시작으로 본 격적인 강남개발이 이루어짐에 따라 강북지역의 인구가 강남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강북지

역의 학교들도 강남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76년 경기고가 이전하자 그 건물은 정독

도서관으로 이용되었고, 1978년 휘문고가 이전하면서 1983년 그 자리에 15층의 현대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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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이 신축되었으며, 창덕여고가 1989년 이전한 뒤에는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학교가 이

전하면서 신축된 대규모 시설들은 북촌지역의 경관을 크게 바꾸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 게 되었다.

1978년 휘문고 이전후 1983년 신출한 현대건설사옥

창덕여고가 1989년 이전한 뒤 들어선 헌번재판소

1980년대 : 경직된 한옥보존, 북촌길 개설 학교 이전지 개발에 따른 변화가 확산되면서 한옥의 보존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76년

민속경관지역 지정 논의 이후 1983년 제4종미관지구 지정으로 본격적인 한옥보존정책이 시 행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한옥보존정책은 주민들과의 논의나 합의 없이 행정주도로 시

행된 것이며, 한옥을 문화재와 같이 엄격하게 규제하는 방식이었고, 또한 북촌길을 확폭하

면서 많은 한옥들을 철거하는 등 이중적인 행정운영으로 주민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 : 한옥멸실 및 다세대 건축 확산 주민들의 계속되는 건축기준 완화요구에 따라 서울시는 1991년 5월 주택의 경우 1층으로

규제하던 건물높이를 10미터 이하(또는 3층 이하)로 완화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다세대 주

택의 신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1994년에는 경복궁 주변의 10미터 고도 제한을 16미터로 완화하고 최대 5층까지 건축을 허용하면서 원서동을 비롯한 북촌 전역에 서 한옥철거 후 다세대 주택건설이 확산되어 북촌경관이 급속히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 북촌 가꾸기를 위한 새로운 시도 급속도로 진행되는 한옥멸실과 다세대주택의 신축 등으로 북촌경관이 변해가고 주거환경

도 악화되어가자 1999년 주민조직인 '(사)종로북촌가꾸기회'의 요구로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에서는 주민들과 전문가, 서울시와 더불어 새로운 북촌 가꾸기 정책을 수립하였다. 북촌의

보전과 관리를 위해 기존의 일방적 규제와는 달리 주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기초하는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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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제를 근간으로 하고, 현대적 생활요구를 수용하면서도 한옥 고유의 아름다움이 유지되

도록 한옥수선을 유도, 지원하고 관리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활동으 로 마을의 환경을 개선해가고, 거주지로서의 매력을 증진시켜가는 과정을 통해 북촌을 가 꾸어 가고자 하는 것으로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서울특별시 홈페이지(http://bukchon.seoul.go.kr/intro/history.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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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강좌

청계천, 그 역사와 문화를 찾아

떠나는 탐방

전우용 전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청계천의 탄생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

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 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

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

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

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다. 개

천에 대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자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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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몇 차례에 걸친 정비로 하

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비가 올 때마다 피 해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 渠 監)'를 설

치하고, 다음 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 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였다.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

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 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

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 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태종 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

( 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 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마전교( 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표석을 세웠다. 이 표석에 척

(尺) 촌(寸) 분(分) 등 눈금을 기둥 위에 새겨,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水標)이다. 수표는 개천의 수위를 계수화하여 측정함으로써 사전에 홍수를 예방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세종때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청계천의

성격을 도심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

는 것이다.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정할 때 풍수학상으로 서울 둘러싸고 있는 외 수(外水)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

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 수(內水) 청계천이 한강과는 반대로 서에

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려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같

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 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

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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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개천을 치다 세종 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임금은 영조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행한 준천을

은근히 중국 고대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치수나 수( )나라 양제(煬帝)의 운하정비와 비 교하였으며, 탕평( 平) 균역(均役)과 함께 자신 80평생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울 정도였다. 태종, 세종 때 조성된 개천은 이

후 영조가 즉위하기까지 약 350여 년 동안 주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

다. 비가 와서 물이 넘쳐 부근민가 가 침수되고, 다리가 유실되는 등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개천에서 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도 태종, 세종 때에 정비한 개천의 하수처리 용량이 당시 도성 인구 하는 데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0만정도가 쏟아내는 하수를 처리

그러나 17 8세기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임진(1592년) 병자(1636년) 두 차례의

전란을 겪는 이후 많은 유민(流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였다. 1657

년(효종 8) 약 8만 명 남짓한 서울의 인구는 10년 후인 1669년(현종 10)에는 19만 명으로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으로 생활하수는 개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였다. 더

구나 유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개천 변에 채소밭을 경작함으로써 수로가 막혀 배수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17 8세기에는 때 아닌 이상기온현상으로 대풍, 폭우, 우박, 서리, 눈 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성 주변에 있는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 되어 조금만 비가 와도 토사가 쓸려 내려

와 개천을 메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조가 즉위한 1725년경에는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 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기에 이르러 준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준천을 시행하기에 앞서 영조는 수 차례에 걸쳐 그 시행여부를 조정의 관리와 백성들에

게 물어본 다음 1759년(영조 35)년 10월에는 준천을 관리할 기관으로 준천사(濬川司)를 설 치하였다.

1760년(영조 36) 2월 18일 드디어 대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의 준천은 송기교(현재

광화문 네거리와 신문로 접점 지점)에서 영도교(현재 영미교길) 까지 총 8개 구간으로 나누 어 진행되었다. 개천에 두텁게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였다.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고, 상류 및 지류는 물론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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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등 궁궐 안에 있는 물길도 준설하여 물이 잘 통하게 하 였다. 이 준천은 4월 15일까지 총 57일간 시행되었으며,

동원된 인력은 한성부민 15만 명, 고정( 丁-고용인력) 5 만 명 등 모두 20만 명이고, 전( ) 35,000민( ), 쌀

2,300여 석(石)이 투입되었다. 준천의 대역사가 진행되는 중에 영조는 수 차례 공사현장을 방문하여 한편은 작업을

독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들을 위로하였다. 또한 준 천의 시말(始末)과 장래에 해야 할 일을 기록한

준천사

실(濬川事實) 을 편찬하여 이후 개천 준설의 지침으로 삼 도록 하였다.

1773년(영조 49) 6월 영조는 다시 한번 개천 정비를 위

한 공역을 실시하였다. 1760년 준천을 할 때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던 개천 양안을 석축(石 )을 하는 것이었다.

작업은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三

)이 작업구간을 3개로 나누어 진행하였

다. 양쪽 제방에 돌을 쌓아 튼튼하게 하고, 구불구불한 수로를 곧게 바로 잡았다. 또한 양

안에 버드나무를 심어 큰비가 올 때도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1773년의 준천은 시작한 지 2개월 후인 8월초 완성하였다.

준천의 역사가 끝나자 영조는 왕세손(후에 정조)와 함께 광통교에 나가 완성된 석축을 살

펴본 후, 역부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스스로

이 80평생 동안.

준천명(濬川 )과 소서(小序) 를 지어 자신

한편 영조가 개천 준설을 위하여 대역사를 시작한 것은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휼의

목적도 있었다. 그것은 곧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생계를 위하여 ���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에 대한 구휼이었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도성축조나 준천과 같은 큰 토목공사를 일으켜 이들

을 고용하였다. 영조가 실시한 준천 역시도 5만여 명의 고용인력이 투입되었다. 즉 준천사 업은 오늘날 공공근로사업(1930년대 말 대공황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New Deal 정 책)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

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

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 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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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

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 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청계천 일제강점기 청계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조

선 500년 동안 불리어 오던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에 '청계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

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청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4년 일제

에 의하여 조선의 하천명칭들이 정리될 때 개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1916년경부터는 '개천'이라는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 고 있다.

조선시대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계였던 청계

천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민족의 거리 종로(

)'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 本町 '를 가르

는 경계선이 되었다. 이것은 곧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의 차별의 선이 되었다.

먼저 마을 이름에서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북

쪽은 ' 동(洞)'과 같은 전래의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지

만,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은 '혼마찌(本町, 지금의 명동)'과 같은 일본식

지명을 사용하였다.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

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한 신문에는 "북부(청계천 북 쪽)일대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지마는 본정(本町) 일대는 길에 밥 이 떨어져도 주워 먹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정작 청계천 자체는 대한제국 이후 약 10여 년 동안 방치되었다. 일본은 청계천(淸溪川,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을 이름 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

고 비웃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울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흘러온 청계천은 하루아침에 더 러운 하수구로 전락하여,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이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경부터

였으며, 그것도 서울에서 청계천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보 건, 위생 등 서울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성을 인식

한 때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조선 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 업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1918년부터 일본은 청계천과 일부 지천에 대하여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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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준설하고 양안에 석축을 새로 쌓았다.

1925년부터는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즉 청계천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백운동천을 비롯하여 옥류동천, 사직동천 등을 복개하였다. 당시 복개는 하천에 ' '형의 하

수관을 만드는 것으로 이로써 지천들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라 영락없는 하수구로 전락하였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여러 차례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하였다. 1926년에 청계천을 복개하여 1만평의 택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광통교에서 주교정(

橋町)까지를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서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곳에 택지와 상가, 위락 시설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1935년에는 청 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를 만들고, 그 위 로 고가철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

다. 1939년에는 청계천을 덮어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든다는 안이 마련되었고, 1940년에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위로는 전차, 밑으로는 지하철을 부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청계천 복개구상은 일본 식민정부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 의 지배를 더욱 공공히 하고, 나아가 서울을 대륙의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들은 재정문제로 인하여 구상에 그치고 말았으며, 실제 복개가 이루

어진 것은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었다.

한편 일본의 청계천 정비로 인하여 청계천에 있던 많은 다리들이 수난을 겪었다.

광통교의 경우 다리 옆 전차선이 놓이게 되었으며, 다리는 콘크리트로 보강되어 확장되

었다. 광통교 교대에는 지름 1m가 넘는 하수관이 묻히게 되었다. 오간수문은 1908년 완전 히 헐리었고, 대신 차로와 전차선로 겸용 다리가 놓여졌다. 하량교, 영도교 등 일부 다리는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으며, 관수교, 주교와 같은 근대식 토목공법을 이용한 새 로운 다리도 가설되었다.

1950년대 이후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청계천 정비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재원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 모든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 었기 때문에 청계천 준설을 비롯한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은 거의 방치되었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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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 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1949년 광

통교에서 영도교까지 청계천을 준설 하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 마저도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 로 중단되고 말았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생

계를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

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정 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

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다.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 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기초적인 생활필수품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그것은 ' 복개(

)'였다.

진청계천은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

로 복개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 5월 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 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 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고가도로도 건설되었다.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 1967년 8월

15일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흐르던 하천은 깨끗하

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하였다. 시

원하게 뚫린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위에는 자동

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었던 청계천은 근 대화 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반면 청계천 복개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

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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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를 당하여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를 형성하

였다. 또한 광통교와 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 께 훼손되었다.

변청계천이 복개 이후 약 40년이 지난 오늘날 청계천

은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도로 양편으로 공구상, 조명 가게, 신발상회, 의류상가, 헌책방, 벼룩시장 등 크고 작

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복개

도로와 고가도로에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차량들이 지 나 다닌다.

그러나 더 이상 청계천을 서울의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서울에서 가장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청계천 주변을 낙후시키고, 서울의 이미지를 해치는 주범으로 지 적 받고 있으며, 청계고가도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근대화 산업화의

상징이 아니라 개발시대의 무지가 낳은 흉물로 인식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청계천만큼 지난 50년 동안 서울의 역사를 분명하게 농축하고 있는 곳은 없

다. 1950년대 말 쓰레기와 오수로 뒤덮인 불결과 빈곤의 상징에서, 60 70년대는 성공적인 산업화 근대화로 상징되었으며, 80 90년대는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산업의 중심지임과 동시에 소음 혼잡 매연 등으로 도 .시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003년! 지난 40년간 덮여있던 청계천이 다시 열리는 복개(復 )가 구체화되고 있다. 이

제 청계천에는 새로운 시간의 단층이 한 겹 더 쌓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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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사 사업기간 : 2003년 7월

2005년 9월

사업의 공간적 범위 : 청계천로(태평로 시점

동대문

변 5.84km

신답철교) 및 삼일로와 그 주

사업의 시간적 범위 : 기준년 2003년, 중기 목표 2008년, 장기 목표 2013년

사업비 : 착공 전 청계천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공사비를 산정한 결과 349,423백만 원이었

으나 실제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설계변경, 물가변동, 추가과업의 실시 등으로 인해 2005년 현재 386,739백만 원이 소요되었다.

구분

2002

청계복원사업 비용총괄 2003

2004

(단위 : 백만 원)

2005

354,400

357,692

379,307

386,739

공사비(시설비)

331,200

345,063

366,358

375,260

감리비

9,900

7,226

7,546

7,546

설계비

보상비(토지매입비) 시설부대비

12,700 -

600

2,097

2,706 600

2,097

2,706 600

2,097

1,236 600

기타

- 6km에 이르는 공사구간을 세 구간으로 분할하여 공사시행 및 주변상가 영업활동 보장 - 청계천로 양측에 편도 2차선 확보, 가림막 설치

- 화물조업 주차 공간 확보 및 공사차량 야간운행

- 대중교통중심운행, 도심 전역 교통혼잡구역 지정, 통과교통 우회처리 등 적용

- 지하철역의 지하수로 유지용수 우선공급, 한강물을 주 용수로하고 중랑하수처리장의 처 리수를 보조수로 활용

- 도시기본계획, 도심부관리기본계획 등 상위계획을 바탕으로 청계천 복원과 연계한 개발 기본구상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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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유적

산의 도시, 물의 도시, 서울에는 다리 또한 많았다. 옛 서울지도를 살펴보면 물길과 도로가 만나는 곳곳에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비교적 다리가 풍부하게 표시된

수선총도 에는

약 190여개의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에서 명칭과 위치가 확인되는 것만 약 80개 정 도이며, 1760년 영조 임금의 준천당시에 청계천 본류에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다.

모전교 : 모전 隅廛

부근에 있

었으므로 모전교라고 하였다. 모전은 각종 과일을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큰 길 모퉁이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모전교라고 이름 한 것은 이 다리가 모전 부근에 있었

기 때문이다. 현재 중구 서린동 무교 동 사거리 지점이다.

광통교 :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

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다. 현재 광교네거리 지하에 남아 있다.

장통교 : 중부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

치하였다. 장통교는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 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하랑교 :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하랑교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청계 3가 센츄럴 호텔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효경교 :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 하여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불렀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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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교 : 다리 부근에 우마를 매매

하는 마전 ( 廛)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청계 5가 사거 리 동쪽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된다.

오간수문 :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

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

여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 (水 )

으로 이것이 다섯개 있었으므로 오간

수문이라고 하였다. 다만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다리가 놓여졌으며, 이때 부터 오간수교(五 水橋)라고 불렀다.

영도교 :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

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

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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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강좌

남산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서 전우용 전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남산 산의 높이는 262m이며 한양이 조선의 도읍(

)으로 정해지면서 도성( 城)의 남쪽에

위치하는 산이라 남산이라고 불렀다.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 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또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불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재위 4년인 1395년 남산을 목멱대왕(木 大王)으로 봉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을 목멱신사(木 神祠)라 하였다. 매년 나라에서 재사를 올리게 되자 목멱신사를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불

렀다.

남산은 북악산(北岳山) 낙산( 山)

인왕산(仁王山)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 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조선

이 건국되면서 여러 산과 더불어 왕

도의 위곽(圍 )을 이루어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여졌었고, 도성을 에 워싸는 방벽은 태조 재위 5년인 1395 남산 팔각정

년에 축성되어 이후로 여러 차례 증

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남산의 정 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봉수대(烽

燧 )가 설치되었고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북쪽 산허리에 왜장(倭將)들이 왜장대(倭將 )라고 한 성채를 쌓았던 일이 있었다. 또

한 군영인 어영청과 금위영의 분영이 남산 자락에 위치했다. 남산은 예로부터 경치가 뛰어

난 곳으로 여러 선비들이 거처했고 그들이 지은 누각이 곳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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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조선전기에는 부산포 왜관으로 내항한 일인들이 상경하 여 머무는 동평관이 남산 인근에 있었다.

1900년에는 남산 동쪽에 을미사변 때 희생된 항일 인물들을 배향하는 장충단을 세웠다.

남산이 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으로, 당시 공원 표지로 세웠던 한양공원(漢 公園) 이 란 고종( 宗) 친필의 석비(石碑)가 지금도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는 남산 중턱에 왜성대공원(倭城 公園)이라 이름 지었고 공원에는 경성신사(京城神社)를

만들었다. 1925년에는 현 남산식물원 자리에 조선신궁(朝 神宮)을 만들었는데 이때 일제는

남산 꼭대기에 위치하던 국사당을 헐어 인왕산으로 옮겨버렸다. 광복 후 일제의 신사는 철 거되었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1959년에는 그의 호를 따 우남정을 건립했다

가 4.19때 철거되었다. 1962년 남산 케이블카가 설치되었고 1965년 남산도서관, 1968년에 는 남산식물원을 개관하였다. 1969년 8월에는 백범 김구( 九)의 동상을 세웠다. 1973년에

는 국립극장이 들어섰으며 1975년에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인 남산타워(현 N서울타워)를 완공하였고 1980년 10월 일반인들에게 전망대를 공개하였다. 남산은 서울 중앙에 있으면서 102만 9300

산지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서울에서 가장 넓은 도심공원이 되었다. 조선

태조(太祖) 때 쌓은 성벽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이루는 푸른 수림경관이 훌륭한데, 특히 조선시대

에 금송이 많이 자랐다고 전해지며 이곳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산

꼭대기에서는 사방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 시가지를 볼 수 있다. 한편, 수림은 잘 보호 되어 대도시 도심부( 心 )임에도 꿩을 비롯한 각종 산새 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남대문 퇴계로3가 장충공원 이태원동(梨泰 洞) 후암동(厚岩洞) 등 여러 곳으로부 터 산꼭대기에 이르는 산책로가 있으며 서울시 전망을 조망하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八 亭)과 N서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카페

등의 시설이 있고, 산정부 한국의 경위도 원점(

度原 )이 있다.

남산 서쪽은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에 있

는 광장은 녹지대를 포함하여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 그 위에는 약 6,000평 규 모의 백범광장(白凡廣場)이 있고, 위쪽 광장에는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이 있는데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은 1970년 어린이회관으 로 건립한 18층(시설면적 3,702평) 건물이다.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데

1970년에 건립하여 의사의 사진 유묵( 墨)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안중근의사 동 상과 휘호(揮毫) 장인(掌印)이 새겨진 비석(碑 石)이 있고, 광장 동쪽 비탈진 곳에는 총 2,500

종, 1만 5000여 그루의 선인장 컬렉션 외에 200

남산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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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종, 3,000여 그루의 영산홍 동산 및 소동물원을 갖춘 남산식물원이 있다. 동쪽에는 야생

화화원과 팔도소나무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밖에 후암동 쪽 순환도로변에는 시립 남산도 서관, 그 정면 양쪽에 퇴계( 溪) 이황(李滉)과 다산( 山) 정약용(丁

)의 동상, 부근에

소월시비( 月 碑)가 있다. 회현동(會 洞) 쪽 순환도로변에는 팔각정과 연결되는 케이블

카 승강장이 있다. 서울 시가지 팽창으로 교통문제를 초래하게 되어 1 2 3호 터널이 뚫려

있다. 남산한옥마을, 장충단공원, 정도 600년 타임캡슐 등이 주변의 명소들이다.

남산봉수대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기념

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을 건 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 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

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 두 남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

는데,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 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남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목멱산 봉수대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 山)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

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이다.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

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

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릴레이식으로 중앙에 알리는 역할 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

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 섯을 올리도록 하였다.

서울특별시는 남산 봉수대 이외에도 무악동 봉수대와 아차산 봉수대를 복원하고 서울특

별시 기념물 13호와 15호로 각각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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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한옥마을 1989년 남산골의 제모습찾기

사업에 의해 조성한 마을로 수

도방위사령부 부지를 인수하여,

서울특별시 지정 민속자료 한옥 5개 동을 이전 복원하고 전통정

원으로 꾸몄다. 1998년 4월 18 일에 개관하였다.

한옥은 변형이 없는 순수한

전통가옥을 선정하였다. 순정효 황후 윤씨 친가는 종로구 옥인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

동에 있는데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복원하였다.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서울민속자료 24)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하였고,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서울민속자료 18)은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것을, 오위장 김춘영 가옥

(서울민속자료 8)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다. 경복궁 중건시 도편수였 던 이승업 가옥(서울민속자료 20)은 이승업이 1860년에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지역의 사대부 가옥부터 서민 가옥까지 당시의 생활방식을 한자리에 볼 수 있

도록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맞은 가구들을 예스럽게 배치하였으며, 전통공예 전시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기념상품이 전시되어 있다.

마을 안의 남산골 전통정원은 남산의 산세를 살려 자연식생인 전통수종을 심었으며, 계

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정자, 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

으로 꾸몄다.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특별시의 모습을 대표 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은 캡슐을 지하 15m에 수장해 둔 타임캡슐광장이 있다.

한옥마을에서는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는 한국의 연극, 놀이, 춤 등이 공연되어 옛 문화

를 접하며 배울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한다.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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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