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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강의 교안

한국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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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의 역사와 사상의 이해 -

Ver. 03

송 석 기


Part Ⅰ. 한국 건축사 개관 Ⅰ. 강의 목표 및 계획 1. 학습목표 및 학습성과 2. 강의 및 과제 3. 교재 및 참고도서

Ⅱ. 한국건축문화의 형성 배경과 특성 1. 자연적 배경 2. 문화적 배경 3. 목조건축의 특성 4. 환경과의 조화

Ⅲ. 한국전통건축의 유형별 개관 1. 도성과 읍성 2. 궁궐 3. 공공건축물 4. 불교사찰 5. 문묘와 향교 및 서원 6. 주거건축

Ⅳ. 한국목조건축 용어 1. 평면 2. 기둥과 벽체 3. 마루 4. 공포와 가구 5. 처마와 가구 6. 지붕 및 기타

Part Ⅱ.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Ⅰ. 원시 및 고대건축 Ⅱ. 통일신라 및 발해건축


Ⅲ. 고려건축 Ⅳ. 조선건축 Ⅴ. 근대건축

Part Ⅲ. 한국 건축사 보충자료 Ⅰ. 공간 분석 사례 1. 추사고택 2. 윤증고택 3. 김동수 가옥 4. 정여창 가옥 5. 손동만 가옥 6. 관가정 7. 독락당 8. 도동서원 9. 병산서원 10. 소수서원 11. 화엄사

Ⅱ. 한국 현대건축에서 전통건축 참조 사례 1. 김수근 : 공간사옥 2. 김중업 : 주한 프랑스 대사관 3. 김효만 : 임거당 4. 류춘수 : 삼하리 주택 5. 배병길 : 은둔의 집 6. 승효상 : 수졸당 7. 우경국 : 몽학재 8. 김홍식 : 산림과학관 9. 류춘수 :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10. 정림건축 : 국립중앙박물관


Part 1. - 한국건축사 개관 -


Ⅰ. 강의 목표 및 계획 1. 학습목표 및 학습성과 한국 전통 건축물을 대상으로 사회, 문화적 배경 및 기술, 구조 측면에서의 분석 과 유형적, 역사적 측면에서의 이해를 통하여 한국 건축의 전통성과 한국성에 대한 이론적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국건축의 특성과 지향점에 대한 기본적 소양과 자세 를 함양한다.

건축 역사 자료의 수집과 정리의 필요성 및 방법을 이해한다. 팀웤의 장단점과 개인별 사고성향의 차이를 인식한다. 건축 역사에 대한 평생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다양한 세계건축문화와 구별되는 한국건축문화의 고유성을 이해한다.

2. 강의 및 과제

1

03/02~03/05

한국건축사 개요, 한국건축문화의 형성

2

03/08~03/12

한국전통건축의 유형별 개관 - 도성 및 읍성, 궁궐, 공공건축물

3

03/15~03/19

한국전통건축의 유형별 개관 - 불교건축, 유교건축, 주거건축

4

03/22~03/26

전통 목조 건축 구조의 이해 및 실습

5

03/29~04/02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 고대 건축

6

04/05~04/09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 통일신라 및 발해 건축

7

04/12~04/16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 고려시대 건축

8

04/19~04/23

중간 고사

9

04/26~04/30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 조선시대 건축(도성,궁궐,관아)

10 05/03~05/07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 조선시대 건축(불교,유교,주거)

11 05/10~05/14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 근대건축

12 05/17~05/21

한국건축의 기초 서술 및 공간분석론

13 05/24~05/28

조사사례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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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05/31~06/04

조사사례 발표

15 06/07~06/11

기말 고사

공학인증 학습성과와의 연관성 2. 자료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 : L1 20% 5. 복합 학제적 팀의 한 구성원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능력 : L1 30% 10. 평생 교육에 대한 필요성의 인식과 평생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 : L1 30% 12. 세계문화에 대한 이해와 국제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능력 : L1 20%

부여일자

제출일자

과제명

03월03일

03월31일

시대별 전개과정 조사 및 발표

03월03일

05월26일

대상 건축물 조사분석 보고서

* 과제 1 : 조별로 한국 건축의 시대별 전개과정을 조사, 발표한다. * 과제 2 : 각 개인별로 건축물을 선정하여 분석하고 이를 보고서 형식에 맞추어 작성한다.

3. 교재 및 참고도서 우리 건축을 찾아서1, 2, 편집부, 발언, 1994 한국 목조건축의 기법, 김동현, 발언, 1995 한국 건축의 역사, 김동욱, 기문당, 1997 한국의 전통건축, 장경호, 문예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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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국건축문화의 형성 배경과 특성 1. 자연적 배경

괄호 안에 적당한 단어를 보기에서 고르시오. 보기 : 기단, 석재, 기후적, 기와, 75%, 목재, 지질학적, 초석, 지리적, 점토

인류의 모든 문명권에서 형성되어온 건축문화가 갖는 고유한 특성은 각 문명이 성장해온 (지리적), (지질학적), (기후적) 조건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결정되어 왔 다. 한 민족이 삶을 영위했던 영토의 고유한 특성이 그 민족의 삶의 양식을 형성하 였고 그 민족의 정신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민족의 건축양식과 그것의 발전은 그 영토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기후는 건축의 특질이 발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반도는 그 면적의 약 (75%)가 산지로 구성되어 있 다. 한반도의 남쪽 지역과 서쪽 지역의 지형은 낮은 구 릉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동쪽과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동쪽과 북쪽 지역의 지형은 험준한 산악지대 를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 건축에서는 중국 건축 이나 일본 건축과 마찬가지로 (목재)를 주된 건축 재료 로 사용하였다. (석재)는 성벽과 다리, 성문, 무덤 등 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고 특히, 목조 건축물을 세우기 위한 (기단)과 (초석)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지붕에 한반도의 지형

는 (점토)로 만든 (기와)를 주로 사용하였다.

괄호 안에 적당한 단어를 보기에서 고르시오. 보기 : 영하 -8℃∼7℃, 지붕, 10℃∼16℃, 남쪽, 1,300mm, 담장, 19℃∼27℃, 경사, 창문과 문

한국의 기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뚜렷한 사계절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여 름과 겨울은 기후 차이가 매우 심하게 나타난다. 겨울은 주로 차가운 시베리아 한 랭전선의 영향으로 몹시 춥다. 반면 여름은 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덥고 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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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산악지대를 제외하고 연평균 기온은 섭씨 (10℃∼16℃) 정도이다. 1년 중 8월 이 가장 더운 달로 평균기온은 섭씨 (19℃∼27℃) 정도이다.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8℃∼7℃) 정도이다. 연간 강수량은 중부 지역에서 (1,300mm) 정도이다. 연간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되는 반면, 겨울철 의 강수량은 연평균 강수량의 1/10수준에 불과하다. 여름철의 집중호우로 인하여 빗물이 쉽게 흘러내려갈 수 있도록 (경사)가 급하고 넓게 펼쳐진 (지붕)이 한국건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지붕은 여름철의 뜨거 운 태양을 피하면서 충분한 일조를 허용할 수 있도록 처마부분에서 위쪽으로 들어 올려져 있다. 주택의 입면에는 완전히 개방할 수 있는 창문과 문이 설치되어 있어 여름철에는 (창문과 문)을 들어 올려 시원한 바람을 통과시킴으로써 뜨거운 열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택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은 가능한 한 (남쪽)을 향하 도록 배치하여 추위를 막고 마당을 둘러싼 높은 (담장)을 통해 겨울철의 차가운 바 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 문화적 배경

괄호 안에 적당한 단어를 보기에서 고르시오. 보기 : 러시아, 일본, 200km, 200km, 200km, 중국

한국은 (중국) 및 (일본)과 이웃하고 있다. 한국의 북쪽 국경선은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 (豆滿江)을 따라 형성되어 만주(滿洲)와 국경선 을 이루고 있다. 또한, 두만강의 동쪽 약 16km 가 (러시아)와의 자연적인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다. 한반도의 서쪽 해안선은 북쪽으로는 서한 만(西韓灣)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는 황해(黃海)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동쪽 해안선은 동해(東海)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 반도는 중국 동부와 약 (200km) 떨어져 있다. 한반도의 남동쪽 끝에서 중국 해안까지의 가장 짧은 거리가 (200km)이고 가장 가까운 일본 해 한반도의 위치

안과의 거리 역시 약 (200km)정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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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안에 적당한 단어를 보기에서 고르시오. 보기 : 불교, 불교, 불교, 성리학(性理學), 도교, 중국문화, 고구려, 유교, 유교, 유교, 유교, 서원(書院), 지배 구조, 사당(祠堂), 인도, 향교(鄕校), 일본, 일본, 일본

한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하여 ( (

)는 한국의 여과를 거쳐

)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는 공통적인 (

권과 (

)문화

)문화권을 형성하여왔다. 고구려(高句麗, 37B.C.∼A.D.668), 백제(百濟,

18B.C.∼A.D.660) 신라(新羅, 57B.C.∼A.D.676)의 삼국시대 동안, 한국인들은 동양 과 서양 고전 문화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다. ( 부터 수입되었고 불교는 멀리 (

)와 (

)는 중국으로

)와 중앙아시아에서 수입되었다. 유교와 불교는

대략 2천 2백년간 한국인의 정신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불교는 북중국 전진(前秦)의 승려에 의해 372년 (

)에 처음으로 전해졌다.

부처를 신앙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는 불교의 교리는 왕이 유일하게 모든 정치권력 을 소유하고자 하는 (

)와 유사했다. 따라서 불교가 왕을 중심으로 한 지

배 구조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삼국의 지배자들은 불교를 적 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왕실의 지원 아래 많은 사찰(寺刹)과 암자(庵子)들이 지어졌 고 신자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6세기경 많은 승려와 장인들이 불교 경전(經 典)과 예술품 등을 가지고 (

)으로 건너가 (

) 초기 불교 문화의 기반을 형

성하였다. (

)에 비해 (

로 개화한 것은 (

)가 한국에 더 이른 시기에 소개되었지만 (

)가 이념적으

)보다 늦은 고려(高麗, 918∼1392) 후기와 조선(朝鮮, 1392∼

1910) 초기에 소개된 신유학인 (

)을 통해서였다. 조선 왕조는 유교

를 공식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였고 유학에 근거한 교육과 의례, 국가 통치체계를 발 전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유교의 선현(先賢)들에 대한 제례 시설인 (

)과 (

) 및 (

)과 같은 공립 및 사립 교육기관이 활발

하게 설립되었다. 오늘날에도 조상 숭배에 대한 유교의 가르침은 여전히 한국사회 에 뿌리 깊게 남아있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에 대한 유교에서의 강조는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의 중요한 미덕으로서 지극히 존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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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조 건축의 특성

괄호 안에 적당한 단어를 보기에서 고르시오. 보기 : 내부공간, 지붕, 주심포(柱心包) 양식, 주심포 양식, 공포(栱包) 구조, 익공(翼工) 양식, 익공 양식, 입면, 다포(多包) 양식, 다포 양식

중국의 건축 문화가 소개된 이래 한국 전통 건축의 기본적인 목조 건축 형식은 한국의 토착적인 세부 처리 방식과 융합되어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한국 전통 건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목조 건축에서 사용된 ( 공포 구조는 (

)을 넓게 돌출시키고 (

)이다.

)을 장식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넓

게 돌출된 지붕은 기둥의 아래 부분이 비바람에 부식되는 것을 막고 천장을 높게 하여 넓은 (

)을 확보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목조 건축

의 공포 구조에는 기둥의 위 부분에만 공포가 있는 ( 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 (

)과 기둥

), 새의 날개 모양을 본뜬 공포를 사용한

)의 대표적인 3가지 양식이 있다.

(

)

(

)

주심포 양식에서는 곡선의 공포 부재들이 주두(柱頭) 위 에 올려지고 도리(道理, 중국식 표기 桁)와 보(樑)가 공포 위에 직교하여 짜여진다. 보머리는 처마를 향하여 돌출된 다. 돌출된 보와 공포 부재의 끝 부분은 소 혀의 모양으로 조각되어 살미(山彌)를 형성한다. 주심포 양식의 구조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며 천장은 판재나 닫집으로 마감하지 않 아서 내부 구조체가 모두 드러나는 연등천장(椽背天障) 형 식이 사용되었다. 또한 지붕은 대부분 경사진 박공이 있는 (

)

맞배지붕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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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포 양식은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다포 양식에서 공포는 기둥의 주두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평방(平枋) 위에 만들 어졌다. 다포 양식은 주심포 양식에 비해 시각적으로 육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주심포 양식과 달리 일반적으로 팔작지붕(八作屋蓋)이 사용되었고 천장은 널판으로 가려져 마치 바둑판과 같은 모습의 우물천장으로 처리되었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에 익공 양식의 공포를 가진 새로운 건축 양식이 나타났다. 익공 양식은 주심포 양 식보다도 더욱 단순하고 경제적인 양식이었다.

4. 환경과의 조화 한국의 전통건축에서 자연환경은 항상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졌다. 한국 건 축가들은 주변 지형을 최대한 숙지하였고 자연 경관과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물을 신중하게 배치하였다. 어떤 종류의 건물을 지을 때에나 건물을 짓기 위한 대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대지가 자연 환경 과 갖는 독특한 의미였다. 한국인들은 건물을 짓는 행위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장소 를 선택하기 보다는 산과 물을 적절히 감상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건물을 지 었다. 한국인들은 건축물을 계획하거나 지을 때 자연환경을 거스르거나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건축물의 계획하거나 짓는데 있어서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변형은 최대한 억제되었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하였다. 건축 재료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원래 그대로의 자연적 형태가 최대한 유 지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 건축은 보는 사 람으로 하여금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인간적 척도를 적용하여 지어졌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한 건축물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반대로 한국 전통 건축은 강렬하고 위압적이기 보다는 편안하고 알맞은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졌다. 한국인 건축가들은 그들의 개인적 독창성이나 지혜를 발휘하는 것 자연과의 조화

을 최소화하여 솜씨를 부리기보다는 자 연 속에서 작업하였고 그들의 직감이 발

휘될 수 있는 커다란 여지를 남겨두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건축은 인간의 정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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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이나 솜씨를 부리기보다는 자유롭고 무관심한 소박함을 특징으로 한다. 건축물의 외부 형태가 시각적으로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몇 가 지 세부적인 기법들이 사용되었다. 기둥의 중간 부분은 배흘림이라고 부르는 방법 으로 부풀어 오르도록 만들었다. 모서리에 있는 기둥은 다른 기둥들에 비하여 안쪽 으로 약간 기울어지도록 하였고 더 높게 만들어졌다. 모든 이러한 세부적인 기법들 은 건물에서 시각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또한 건물의 외 관은 지붕과 처마의 섬세하고 우아한 형태와 미학적인 조화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어졌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는 다양한 장식과 색채가 사용되었다. 중국 건축에서의 장식 은 극단적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때로는 장식이 과다하거나 이상 한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일본 건축에서의 장식은 더 단순하고 시각적 즐거 움을 추구한 것이었다. 한국 건축에서 사용된 색채와 장식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어 중국과 일본의 중간적인 특성이 나타 난다. 한국 전통 건축의 미학적 특징은 장식에서의 중용적인 우아함과 건물 계획에서의 꾸밈없는 개방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색채의 적절한 사용은 한국의 차분한 경관 에서 유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물 계획에서의 꾸밈없는 개방성은 한국 사람들 이 스스로를 자연에 순응시키는 계획 방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주요한 특징 들은 고대로부터 한국인 장인 건축가에 의해 전승되어왔다. 엄격한 대칭에 극도로 사로잡힌 중국인 건축가들이나 세밀한 표현에 과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인 건 축가에 비해 한국인 건축가들은 자연과의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포 괄적으로 노력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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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 건축과 서양 건축 □ 형태의 차이, 그 이유

□ 돌 건축과 나무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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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료와 형태, 돌 건축의 보편화

□ 서양 건축의 특성, 좋은 건축 VS 불완전한 건축, 시각 중심 건축

□ 동양 건축의 특성, 질료성, 교감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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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태와 인위성

□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

□ 서양의 건축관 : 절대성, 공간 중심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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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의 건축관 : 시간과 변화, 누적적 경험

□ 한국 건축과 서양 건축 :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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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한국 전통건축의 유형별 개관 1. 도성과 읍성 한국의 전통적인 도시계획은 (중국 도성 계획)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러나 중국의 도성 계획은 한국 에 적용되면서 한국의 지형과 마을, 도로 등에 의해 변형되었다. 중국 도성 계획의 기본적인 특징은 4면 이 폐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모든 중국 도성은 4면 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성벽은 직각으로 만 나 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벽 내에는 최소 한 1개나 2개 또는 그 이상의 성벽이 세워져 좀 더 주왕성도(周王城圖)

작은 사각형의 (울타리)를 형성하게 된다. 도성의 외곽 성벽이나 내부 성벽에는 모두 성문이 만들어지 는데 이것이 중국 도성 계획의 두 번째 특징이다. 모 든 중국의 도성이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중국 도성에 서는 외곽의 성벽에 각각 (3개)씩의 성문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12개)의 성문을 만들었다. 이상적인 계 획에서는 서로 반대편 성벽에 있는 성문의 위치는 동 일하게 계획되었다. 도성 내부의 내성에는 일반적으 로 4면에 최소한 1개 이상의 성문이 만들어졌다. 성

북경성

문 중 가장 중요한 문인 남문이 남쪽 성벽에 만들어 졌다. 대부분의 성문들은 지상에서의 출입을 위한 목

적으로 만들어져 도성 내의 주요 대로와 연결되었다. 일부 도성에서는 수문이 만들 어지기도 하였다.

□ 중국 도성 계획의 기본 원칙

前朝後市(

) :

左廟右社(

) :

前朝後寢(

) :

三門三朝(

) : 燕朝(

),治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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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朝(

)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은 1394년에 조선(1392∼ 1910)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太祖, 재위 1392∼1398)는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통한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고 백성의 정치적 지지를 얻어 이전 고려 왕조의 유산으로부 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현재의 서울인 한양(漢陽)은 문자 그대로 물과 바람에 대한 이론이라는 의미를 갖는 풍수지 리(風水地理) 이론에 따라 통치 권력의 새로운 입지로서 서울

선택되었다. 태조는 새로운 수도에 궁궐과 선대왕들을 위 한 사당을 건설하였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

치하여 도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도성축조 공사를 통해 태조는 18km의 성벽을 돌과 흙으로 쌓았고 서울의 8개 방 위에 4 대문(大門)과 4 소문(小門)을 축조하였다. 4 대문에는 동쪽에 흥인지문(興 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청문(肅淸門)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4 소문에는 동북쪽에 홍화문(弘化門), 동남쪽에 광희문(光 熙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 서남쪽에 소덕문(昭德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조의 손자이며 4대 왕인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재위기간 중이었던 1422 년 성벽을 따라 군사시설이 추가되었고 성벽이 보강되었다. 그 후 19대 왕인 숙종 (肅宗, 재위 1674∼1720)의 재위기간 중이었던 1704년 성벽은 사각형으로 다듬은 석재와 근대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다시 축조되었다.

서울의 성벽

서울 남대문

3대 왕인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재위기간 중이었던 1405년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 따라 시가지가 재구성되었고 도시계획이 완료되었다. 곧게 뻗은 넓은 대 로가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연결되었고 (곡선의 넓은 가로)가 남대문에서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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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종루(鐘樓)까지 연결되었다. 종루에는 도성 내의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리던 종 이 매달려 있었다. 동서대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던 종루에서 동서대로와 남북대 로가 만나 (T)자형으로 교차되었다. 북악산(北岳山) 아래의 경복궁(景福宮)에서 남 쪽으로 뻗은 넓은 대로와 평행하게 창덕궁(昌德宮)에서 시작된 또 다른 대로가 남 쪽으로 뻗어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시작된 대로들은 동서대로와 (T)자형으 로 교차되었다.

서울의 도시구조

남북으로 이어지는 대로와 동서대로의 주요 부분을 따라 가로의 양쪽 편으로 상 점과 가게, 작업장들이 선형으로 길게 늘어서서 분주한 도심의 가로 경관을 형성하 고 있었다. 궁궐과 각종 제례 시설, 중앙 정부의 관아 건물을 비롯한 중요한 건축 물들이 남북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T자형의 교차로를 따라 배치되어 막다른 도시경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한양의 전체적인 도시경관은 아시아의 다른 도성과 비교하여 질적으로 구별되는 특 징을 갖고 있었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소도시나 마을 역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예를 들어 낙안읍성(樂安邑城)은 1397년 처음으로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흙으 로 축조되었다. 읍성은 지방행정기관의 소재지인 읍치(邑治)에 축조되었다. 읍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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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기관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군사적인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평상시 에 읍성은 지방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고 비상시에는 방어를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 다. 낙안읍성에는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총 3개의 성문이 있어서 성 안의 넓 은 도로와 연결되었고 성벽의 일부는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돌 출되어 있었다. 읍성안의 마을에는 과거의 전통적인 모습들이 잘 남아있어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낙안읍성의 구조

2. 궁궐 현재 서울에 현존하고 있는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 壽宮) 등은 모두 조선시대에 지어진 궁궐들이다.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정궁(正宮) 인 경복궁은 1395년에 지어졌다. 큰 복을 빈다는 의미를 가진 ‘경복(景福)’이라 는 이름의 이 궁궐은 조선 왕조의 왕과 그 자손들 그리고 조선의 백성들의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찬양하는 의미로 지어졌다. 그러나 경복궁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중이었던 1592년 일본군의 방화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고 1865 년 다시 지어질 때까지 폐허로 남아있었다. 경복궁의 중심 영역은 몇 가지의 기본적인 배치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 경복궁 중심영역의 앞쪽 부분은 (국가적인 규모의 행사와 국왕의 공식적인 업무)를 위한 공간으로서 여러 전각과 영역들이 (남북) 축을 따라 대칭적으로 배치되었다.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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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으로는 왕과 왕비의 침소로 사용되는 침전(寢殿)과 휴식을 위한 정원들이 배치되었다. 이것은 공적인 업무 를 위한 공간이 앞쪽으로 배치되고 휴식을 위한 공간이 뒤쪽에 위치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경복궁이 조선 의 정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엄격한 배치 원칙이 적용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복궁 내에 있는 가장 중요한 건물로는 광화문(光化門), 근정문(勤政門), 근정전(勤 政殿), 사정전(思政殿),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 殿), 경회루(慶會樓) 등이 현존하고 있다. 광화문은 세종로(世宗路)를 내려다보는 2층의 누각과 경복궁

3개의 홍예문(虹霓門)으로 이루어진 경복궁의 남쪽 정 문이다.

근정전

경회루

사정전

교태전

근정문은 근정전의 남쪽 정문으로 우진각 지붕에 마치 탑과 유사한 형태의 구조 로 이루어진 2층 건물이다. 근정문의 지붕 처마는 (다포 양식)의 공포 구조로 지지 되고 있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의 정문 중에서 근정문 만이 유일하게 (중층) 건물이다. 근정문과 연결되는 지붕이 있는 복도 구조인 행각(行閣)이 사각형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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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로 근정전을 둘러싸면서 회랑(回廊)을 형성하고 있다. 행각에 사용된 목구조 양 식과 구조는 대부분 단순하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주된 전각인 (정전)이다. 조선의 국왕들은 근정전에서 국가적 인 의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주관했으며 외국 사신을 접견하였다. 그리고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모여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는 조하(朝賀)를 비롯한 각 종 하례(賀禮) 행사가 이곳 근정전에서 거행되었다. 1399년에서 1546년까지의 기간 동안 왕위에 올랐던 12명의 왕 중에서 7명의 왕이 이곳에서 즉위식(卽位式)을 거행 하였다. 근정전은 1394년에 지어졌는데 ‘근정(勤政)’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부지런한 정치)’라는 의미로서 통치자가 부지런할수록 국가를 더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오랜 믿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근정전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 소실되었고 1867년 다시 지어졌다. 근정전은 권위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2단의 석조 기단 위에 세워졌고,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였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근정전의 지붕은 중층 지붕으로 처리되었다. 근정전 내부에는 옥좌(玉座)가 놓여있는데 이곳 은 매우 높은 천장이 특징적이다. 주변 회랑을 포함하여 근정전의 모든 의장 요소 와 안뜰 바닥에 깔린 석재 포장, 그리고 화려한 색채는 왕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근정전에서 근정문 사이 안뜰 중앙의 통로로 사용되는 보도 양편에는 문무 백관의 품계를 표시한 品階石(

)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근정전의 바로 뒤쪽에 위치한 사정전은 ‘국정의 세심한 운영을 심사숙고하는 전 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건물로 국왕의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업무 공간으 로 사용되었다. 강녕전은 국왕의 침전으로 사용된 건물이었고 교태전은 왕비의 침 전으로 사용된 건물이었다. ‘즐거운 만남을 위한 누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경회루는 (휴식과 연회)를 즐기기 위한 2층 누각 건물로서 태종의 재위기간 중이었던 1412년에 지어졌다. 경 회루는 현재 한국에 현존하고 있는 누각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키가 큰 돌기둥과 장대한 지붕의 경회루는 궁궐의 서쪽 편에 있는 인공 호수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고 부드러운 석재로 사각형의 섬을 축조한 후에 그 위에 경회루 를 세웠다. 경회루로 연결되는 3개의 돌다리에 의해 인공 섬은 육지와 연결된다. 경회루 뒤쪽으로 호수를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아미산(峨嵋山)이라고 부르는 언덕 을 만들었다. 2층의 누각을 지지하고 있는 48개의 석재 기둥에는 용을 조각하여 장 식하였다. 경회루는 문무백관과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 란 중인 1592년 원래의 경회루는 소실되었고 석재 기둥만이 남아있었다. 1867년 경 복궁이 복원될 때 경회루 역시 다시 건축되었다. 당시 석재 기둥이 교체되면서 원 래의 석재 기둥이 갖고 있던 화려함은 사라져 버렸다. 이때 만들어진 석재 다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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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에는 동물 문양이 조각되었다. 또한 인공 호수를 따라 연못과 연꽃 문양의 기 단, 물을 흘려보내기 위한 용 모양의 관이 석재로 만들어졌다.

3. 공공 건축물 서울은 고대 중국 도성의 기본적인 배치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 궁궐의 오른쪽에 는 선대왕과 왕비에 대한 제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왕실의 사당인 宗廟(

)가

있었다. 또한 종묘의 반대편에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社稷(

)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 행정기관인 관아 건물들이 경복궁의

앞쪽에 남북축을 따라 T자형의 교차로에 배열되어 있었다. 종묘에는 주된 사당 건물인 정전과 보 조 건물인 영녕전(永寧殿), 그리고 다양 한 부속 건물들이 군집을 형성하고 있다. 경복궁이 세워지면서 정전이 1395년에 지 어졌고 영녕전은 정전의 공간이 비좁아 정전에서 모시기 어려운 왕과 왕비의 위 패를

모시기

위하여

정전의

북서쪽에

1421년에 지어졌다. 그러나 종묘의 정전 종묘

과 영녕전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 소실

되었고 1608년 다시 건축되었다. 19개의 개별적인 방들이 병렬적으로 연속하여 배치된 정전은 한국에서 단일 건물 로서는 가장 긴 건축물이었다. 정전의 건축 양식은 다소 소박한 편이다. 각 방들은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정전의 정면 앞쪽에 부가된 넓은 계 단은 이 건물이 더욱 위엄 있고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 종묘는 9개의 개별 적인 방으로 구성된 중국의 종묘 보다 훨씬 넓고 수평선이 강조된 정면을 가진 독 특한 건축물이다. 종묘는 고대 아시아 문화의 양식과 특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 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땅과 곡식 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기 위해 돌로 만들어진 제단인 사직은 1394년에 세워졌다. 제례 행사가 1년에 3번 봄, 가을, 겨울에 이곳에서 행해지곤 하였다. 풍 년을 기원하고 중요한 국가 행사가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의식과 기우제 등이 이곳 에서 치러졌다. 1902년 일본은 사직과 부속 건물을 옮기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 여 한국 사직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폄하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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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에 위치해 있었던 조선 시대의 지방 관아는 지방 수령(守令)이 업무를 행하 는 東軒(

)과 지방 수령의 숙소인 內衙(

한 숙소인 客舍(

), 중앙 정부에서 내려온 관리를 위

)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국립 부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부여 관아는 동헌과 내아, 객사로 구성되어 있다. 부여 관아는 1869년 모두 재건축되었다.

동헌

내아

지방 수령의 업무 공간인 (동헌)은 마루가 깔려있는 중앙의 대청(大廳) 과 한국의 독특한 바닥 난방 시스템 인 온돌로 난방 되는 4개의 작은 방 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 수령은 중앙의 대청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행정적인 업무와 사법적인 문제들을 처리하였다. 팔작지붕 건물인 부여 객사

동헌은 1985년에 수리되었다. (객

사)는 중앙 정부에서 온 관리를 접대하고 관리가 숙박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이었 다. 부여 객사는 박공지붕의 중앙 부분인 正廳(

)과 팔작지붕의 양측 翼軒(

)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익공(二翼工) 공포의 공포 부재들은 용머리 모양과 연꽃 봉 오리 모양의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부여 객사는 1880년 이곳에 보관되어있던 기 록에 따라 보수되었다. 객사의 중앙 대청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보관되어 있었다. 지방 수령은 1달에 2번씩 위패 앞에서 왕에 대한 경배 의식을 열 었다. 중앙 부분에서 동쪽과 서쪽 양방향으로 길게 뻗어나간 양 익헌은 온돌이 깔 린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4. 불교 사찰 불교는 4세기경 중국을 통해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삼국 중 최초로 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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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가 372년 불교를 왕실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백제가 두 번째로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가 마지막으로 528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은 유교와 불교가 갖고 있는 위계적인 구조를 받아들여 왕을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매우 정교한 국가 조직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삼국은 수도 주변에 유명한 많은 불교 사찰을 건설하였고 삼국시대에 뒤 이은 통일신라와 고려 왕조에서도 새로운 사찰을 건립하 였고 많은 기존 사찰을 증축하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 사찰은 동아시아 불교 건축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발전되어 왔다. 동 아시아 불교 건축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나타 나는 특징은 (배치 계획)의 개념과 형식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5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 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지(寺地)에서 확인 되는 사찰의 기본적인 배치 형식은 ‘1탑(塔) 3금당(金堂) 형식’으로 알려진 (하나의 중심 불교사찰 배치 형식

탑과 3개의 금당)이 결합된 형태이다. 고구려 의 불교 사지에서는 이러한 형식이 사용되어

팔각형의 평면을 가진 중앙의 탑 주위로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 (금당)이 배치 되었고 남쪽으로는 (출입문)이 설치되었다. 1탑 3금당 형식이 적용된 예는 백제와 신라에서도 발견되고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1탑 3금당 형식은 중앙의 전각 좌우의 동쪽과 서쪽에 전각을 배치했던 중국의 궁궐 건축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1탑 1금당’ 형식의 사찰 배치는 그 이전의 1탑 3금당 형식에서 발전되었다. 백제의 가장 초기 불교 사찰인 彌勒寺(

) 터에서는 발굴 결과 동쪽에서 서

쪽으로 일렬로 3개의 탑이 배열되고 그 북쪽에 3개의 금당이 배열된 독특한 배치가 확인되었다. 각각의 탑과 금당은 지붕이 있는 복도인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별 도의 3개의 사찰이 결합(三院式)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미륵사 터는 1탑 3금당 형식에서 1탑 1금당 형식으로의 변화 과정의 중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백제 사찰들은 중심에 위치한 하나의 탑과 출입문, 금당, 그 리고 강당과 사각형의 울타리를 형성하는 僧房(

)이 남북축에 따라 대칭적으로

배열된 특징을 갖는다. 일본의 사찰은 부분적으로 (백제) 건축양식의 영향을 간직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호류지(法隆寺)는 백제 사찰의 배치와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예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사찰의 배치 형식 변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 배치 형식이 ‘2탑 1금당’ 형식이다. 통일신라(統一新羅, 668∼935) 불교 사찰의 배치 형식은 중앙의 금당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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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에 배열된 2개의 탑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탑과 금당은 다른 건물들과 함께 남 북 축에 따라서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한 사 찰 배치 형식의 변화 과정에서 탑의 (크기와 재료)가 변화하게 되었다. ‘1탑식’ 사찰 배치의 형식에서 선호되었던 목탑이 석탑으로 대체되었고 탑의 크기는 점차로 축소되어 갔다. 통일 신라 시대 후기에는 불교 사찰이 점차 도시에서 벗어나 도심에서 멀리 떨어 진 산악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선불교(禪佛敎)가 전래되면서 나타 난 현상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인 신앙 특히 무속(巫俗) 신앙에서 유래하는 많은 종류의 불전과 전각들이 사찰 경내에 추가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산지 사찰 에서의 건축물 배치 형식은 주로 지형과 자연적인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되었다. 금당은 경내의 중심에 배치되었고 승려들의 숙소인 요사(寮舍)는 금당 앞의 안마당 좌우인 동쪽 또는 서쪽에 배치되었다. 안마당의 앞쪽 모서리에는 바닥이 들어 올려 진 누각을 세웠고 누각의 앞쪽으로는 출입문을 세웠다. 다른 건물들 역시 사찰 경 내의 기존 지형에 적합하도록 배치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3개의 불교 사찰은 通度寺( 고, 松廣寺( 佛寶(

)와 海印寺(

) 그리

)이다.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 사리(舍利)를 모시고 있는 사찰로서

) 사찰이라고 불려진다. 부처의 진신 사리는 통도사의 주 불전인 대웅전

(大雄殿) 바로 뒤편의 金剛階段(

)에 봉안되어 있다. 금강계단이란 금강석

(金剛石)과 같이 견고하고 귀중한 부처의 불법을 의미한다. 금강계단은 부처가 항 상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통도사

해인사

해인사에는 불교의 경전을 집대성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인쇄를 위하여 사 용되었던 8만장의 목재 대장경판(大藏經板)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法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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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이라고 불려진다. 해인사에는 전체적 으로 4동의 (장경판고)가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2동의 건물에는 각각 15개 의 방이 있고 측면에 하나씩 놓여진 2동 의 건물에는 각각 2개의 방이 있다. 전체 적으로 4동의 건물은 중정을 중심으로 사 각형의 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이 장경판 송광사

고는 1458년과 1488년에 세워졌고 임진왜 란 동안 전란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

다. 때문에 대장경판은 과거의 형식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송광사는 僧寶(

)사찰이라고 불려지는데 그것은 송광사 경내의 國師殿(

)

에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드높인 16명의 위대한 스님의 초상화를 보존하고 있기 때 문이다. 스님들의 초상화는 선불교에서 참선을 하는데 사용되곤 한다. 국사전은 1369년에 건립되었고 지금까지 총 2차례의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문묘와 향교 및 서원 조선왕조가 유교를 공식적인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선현들에 대한 제례 시 설과 학교를 전국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러한 학교를 통하여 유학을 공부하고 유학 에 정통한 학자 출신 관료들이 정부기관에 발탁되어 들어갔다. 유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정부의 관료들은 국가 운영에 있어서 왕의 의지를 대변하여 행동하였다. 반대 로 왕은 유학자들의 충고와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국립 유학 교육기관이었던 成均館( 립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文廟(

)과 함께 설 )는 특

히 조선왕조 동안 유교에 대한 학문 연구와 각종 유교 행사에 있어서 그 중심점이 되었다. 전국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성균관에 모여들었고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기숙사)인 東齋(

)와 西齋(

)에서 유학의 고전

에 대하여 논쟁하고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국가적 인 제례 행사는 문묘에서 거행되었다. 문묘의 중심적 인 제례 시설인 大成殿(

)에는 공자(孔子)의 위

패와 함께 맹자(孟子)를 포함한 위대한 4명의 유학자 문묘

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고 다른 16명의 중요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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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문묘의 부속 제례 시설인 東廡(

)와 西廡(

)에서

는 72명의 공자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한(漢)나라, 당(唐)나라, 송(宋)나라, 원 (元)나라의 중요한 유학자 및 18명의 한국 유학자를 포함하여 총 112명의 유학자의 위패가 모셔졌다. 제례 의식은 매년 2월과 8월 2차례에 걸쳐 이곳 문묘에서 거행되 었다. 문묘는 현재의 위치에 1398년에 세워졌으나 1400년에 소실되었고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2년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건 립한 것이다.

鄕校(

)는 유학을 가르치고 공자를 포함한

선현들에 대한 제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지방 정부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일반적으로 향 교는 교육을 위한 공간과 제례를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인 明倫 堂(

)과 학생들을 위한 동쪽과 서쪽의 기숙사

인 (동재와 서재)가 교육 공간의 중심적인 건물들 이었다. 그리고 대성전과 동무 및 서무가 제례 공 향교

간의 중심적인 건물이었는데 여기에는 공자의 위 패와 국가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중요한 유학자들

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었다. 대성전은 일반적으로 명륜당에 비하여 좀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동무와 서 무가 대성전 앞의 안마당 좌우측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재와 서재는 동무와 서무의 남쪽에 세워졌고 명륜당이 안마당의 모서리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향교에서 나타 나는 이러한 건물 배치 형식은 동시대 산지에 지어졌던 (사찰)의 건물 배치 형식에 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書院(

)은 선현들에 대한 제례 시설을 함께 갖고 있는 유학을 공부하기 위한

사립학교였다. 서원의 배치는 향교의 배치와 유사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원 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조선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성리학의 대가였던 李滉(

,

1501∼1570)이 그의 후진들을 가르치고 스스로를 수양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던 조그 마한 사립학교인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시작되었다. 1574년 지방의 사림과 유생 들이 이황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이때 학생들의 기숙을 위한 동재와 서재, 서책을 보관하기 위한 장서각을 비롯하여 주요 강의 시설인 전교당 (典敎堂)과 같은 교육시설들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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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이황은 당파간 의 정치적 갈등으로 점철되었던 당쟁(黨爭) 시기에 지속적으로 정부의 고위 관료 직을 여러 차례 역임 하였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고, 그 이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예조판서(禮曹判 書)를 역임하였다. 이황은 주희(朱熹, 1130∼1200) 가 제창한 신유학인 주자학(朱子學)에 있어서 최고 의 권위자였다. 그래서 이황은 한국의 주희라고 불 렸다. 이황은 11대왕인 중종(中宗, 재위 1506∼ 1544), 13대왕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14대 서원

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그의 철학은 일본에서 유학의 부흥에 영향을 주었다.

6. 주거건축 한국의 전통적인 주택 건축은 1개의 부엌과 1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사각 형 평면으로부터 발전하여 왔다. 이러한 단순한 형식의 주택들은 산이 많은 산악 지역에서 보편적이었는데, 일부 농촌 지역에서도 건립되었다. 또한 이 주택들은 선 사시대 한국의 수혈주거(竪穴住居)를 연상시킨다. 방바닥 밑의 연도(煙道)를 통해 연기를 통과시킴으로서 난방을 하는 온돌은 역사 이래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 어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온돌은 선사시대 수혈주거의 화덕으로부 터 발전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각형 평면의 최초의 주택 형식으로부터 한국 주거 건축은 한글의‘ㄱ’자형 평면으로 발전하였고 주택의 중심에 안마당을 둔 ‘ㄷ’자형 평면이나 ‘ㅁ’자형 평면으로 발전하였다. 상류층의 주택들은 여러 개의 분할된 건물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한 동의 건물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사용되었 고 다른 건물은 남자들과 손님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건물들은 하인들에 의해 사용된 건물이 주택 평면의 발전

었다. 모든 이러한 건물들은 높은 담장에 의해 둘러싸 여 있었다. 주택의 뒤쪽에는 가족들의 조상에 대한 제

례 시설인 사당이 세워져 있었다. 이상적인 경우에는 주택의 전면 담장 밖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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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이 있었고 때때로 정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상류층의 주택은 튼튼한 가구구조를 갖고 있었다. 비록 사찰이나 궁궐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화려한 단청(丹靑)의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많은 장식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었다. 상류 주택의 지붕은 우아한 곡선으로 처리되었고 약간 들어 올려진 처마에 의해 강조되었다. 지붕의 모서리 부분에는 처마를 따라 곡선의 막새 기와가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선교장(船橋莊)은 18세기 초에 지어진 조선후기 상류층 주택의 대표적인 예이 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이 주택이 속해 있는 마을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주택은 동측에 부속되어 있는 여성들 의 공간인 안채와 남성들의 영역인 사랑 채 그리고 하인들의 영역인 행랑채와 정 자로 구성되어 있다. 하인들의 영역 중 선교장

일부분이었던 서측편의 부속 건물은 현재

는 사라지고 없다. 사랑채는 1815년에 지어졌다. 활래정(活來亭)이라 불리는 ‘ㄱ’자형의 정자는 다음 해인 1816년 주택 바깥쪽 정원 앞의 넓은 연못 옆에 세 워졌다. 정자의 이름인 활래정은 중국의 시구(詩句)에서 유래한 것이다. 귀중한 고 서와 그림, 민예품들이 이 주택에 보관되어 있었다.

충효당(忠孝堂)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이조판서(吏曹判書) 서애 유성룡(西厓 柳 成龍, 1542∼1607)의 주택이다. 유성룡은 많은 정부 요직을 역임했고, 영의정(領議 政)으로서 임진왜란 중의 어려운 국가적 상황을 극복하는데 공헌하였다. 서쪽 편으로 행랑채가 길게 늘어서 전체적인 정면을 형성하고 있다. 그 안쪽으로 한글의 ‘ㅁ’자 형태를 갖는 안채가 놓여있고 하이픈과 유사한 ‘一’자형의 사랑 채가 연속되어 있다. 좌로부터 사랑방과 대청, 그리고 방과 마루로 구성된 사랑채 는 남자 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의 접대를 위해 별동으로 지은 건물이다. 안주인 이 생활하고 집안일을 돌보기 위한 공간인 안채에는 북동쪽에 부엌이 있고, 주 거 주 공간인 안방과 대청, 안방 반대쪽의 건넌방이 있다. 그리고 건넌방의 앞쪽에는 마루와 2개의 온돌방, 부엌이 있어 사랑채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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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한국 목조 건축 용어 1. 평면

- 내진(內陣) : 건물의 내외에 이중으로 기둥이나 벽이 둘러쳐 있을 때 그 안쪽에 있는 기둥 열이나 벽체 - 외진(外陣) : 건물의 내외에 이중으로 기둥이나 벽이 둘러쳐 있을 때 그 바깥쪽 에 있는 기둥 열이나 벽체 - 내진주(內陣柱) : 건물의 기둥 열이 내외 이중으로 둘러 있을 때 그 안쪽에 있는 기둥 - 외진주(外陣柱) : 건물의 외부 변두리에 둘러 세운 기둥 - 우주(隅柱) : 건물의 모퉁이나 구석에 세운 기둥 - 활주(活柱) : 추녀를 받친 가는 기둥 - 어칸(御間) : 건물의 중앙간, 정간(正間) - 협칸(夾間) : 어칸의 양측에 있는 간 - 퇴칸(退間) : 건물의 좌우 끝 쪽에 있는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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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둥과 벽체

- 고막이돌(庫莫石) : 벽 하부 밑인방 또는 문지방과 지면 사이에 막아 놓은 돌 - 초석(礎石) :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 덤벙주초 : 둥글넓적한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주춧돌, 호박돌 주초, 자연석 주초 - 그레질 :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갓 둘레가 주춧돌에 꼭 맞게 그리는 일 - 인방(引枋) : 기둥과 기둥 또는 벽선에 가로질러 벽체의 뼈대 또는 문틀이 되는 가로재, 상인방, 중인방, 하인방의 총칭 - 하방(하인방, 下引枋) : 벽의 맨 아래쪽에 건너지른 인방 - 문지방(門地枋) : 출입문 밑에 건너지른 인방, 문틀이 됨, 문틀에서 밑에 가로댄 재 - 문설주(門楔柱) : 문의 양쪽에 세워 문짝을 끼워 달게 된 기둥 - 문인방(門引枋) : 문 위에 가로건너지른 인방, 상인방 - 띠방(帶枋) : 널이나 넓은 판을 대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로지르는 부재 - 벽선(壁線) : 기둥과 벽 사이에 세운 각재, 벽 중간에 벽을 치기 위하여 세운 굵 은 각재, 창문이 달리는 좌우에 세운 문틀재 - 주선(柱線) : 기둥 옆에 붙은 문설주, 또는 옆벽을 치는 수직재 - 문틀(門框) : 문을 다는 틀의 총칭, 문을 끼어다는 인방, 벽선 홈대 등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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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루

- 귀틀(耳機) : 짜맞춰 만든 틀의 총칭, 마루널을 깔거나 끼어 대는 장귀틀, 동귀 틀의 총칭 - 장귀틀(長耳機) : 기둥과 기둥 사이에 길게 건너대어 동귀틀을 받고 또한 마루널 이 끼이게 되는 귀틀 - 동귀틀(童耳機) : 장귀틀과 장귀틀 또는 꾀중방에 건너지르고, 마루널을 끼는 길 지 않은 귀틀 - 꾀중방 : 대청 마루귀틀이 끼게 되는 인방, 건너방의 하인방 등 - 여모중방 : 대청 앞 마룻바닥에 가로지른 인방 - 동바리(童子) : 가로재를 받쳐 괴는 수직으로 세운 짧은 기둥 - 머름(遠音) : 창 밑의 하인방과 창틀(창지방) 사이에 머름 동자를 세우고 널로 막아댄 부분 - 머름중방(遠音中枋) : 머름위 위에 가로긴 창틀 - 머름대 : 머름의 밑에 가로 낀 하인방 - 머름동자(遠音童子) : 머름중방과 머름대 사이에 간격을 두고 세워댄 짧은 기둥 - 머름청판(遠音廳板) : 머름중방과 머름대 사이를 막아댄 널, 머름궁창, 머름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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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포와 가구

- 창방(昌枋) : 기둥 위에 가로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 는 가로재 - 주두(柱頭) : 기둥머리를 장식하며 공포부재를 받는 부재 - 소로(小累, 小櫨) : 장여나 공포재의 밑에 받쳐 괸 부재 - 첨차(檐遮) : 주두 또는 소로에 얹히어 도리방향 또는 그에 직교하는 방향 십자 맞춤이 되는 재, 다포의 경우는 포살미와 십자맞춤이 되는 공포재 - 소첨차(小檐遮) : 주두 위 또는 출목쇠서 위에 가로대는 짧은 첨차 - 대첨차(大檐遮) : 소첨차보다 조금 길게하여 그 위에 얹어 짠 첨차 - 살미(山彌, 포살미) : 주심에서 보 밑을 받치거나 좌우기둥 중간에 도리 장여에 직교하여 받쳐 괸 쇠서모양으로 내민 공포부재의 짜임새의 총칭, 첨차에 직교되 며 외부는 쇠서형으로 내밀고 내부는 교두형 또는 초엽, 연화 등을 새김 - 살미첨차(山彌檐遮) : 공포에서 주두 위에 짜이는 첨차 중 보 방향으로 돌출되는 첨차, 도리방향첨차와 직교하는 첨차 - 쇠서(牛舌) : 보방향으로 얹어 첨차와 직교하여 짜여지며 끝을 소 혀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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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하여 오려낸 부재 - 수서(垂舌) : 포살미의 쇠서 끝이 아래로 삐죽하게 휘어내린 모양으로 된 것. - 앙서(仰舌) : 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오른 쇠서 - 공안(栱眼) : 첨차의 상부 소로와 소로 사이 윗면을 활형으로 가까아 내거나 어 깨의 옆면을 조금 파낸 것 - 교두(翹頭) : 살미나 첨차의 밑면 끝을 활형 또는 원호형으로 깎아 낸 모양 - 교두첨차(翹頭檐遮) : 첨차의 끝머리를 곧게 자르고 하반부는 휨하게 굴려서 깎 아 만든 형태의 첨차

- 평방(平枋) : 공포 등을 받기 위해 평주 위에 건너지르고 창방 위에 얹히는 가로 재 - 도리(道里) : 보와 직각 방향으로 걸어 서까래를 받는 수평재, 처마도리 중도리 등의 총칭 - 외목도리(外目道里) : 포작 외부에 내놓아 건 도리, 외출목 도리, 기둥의 중심선 바깥쪽에 나앉아 걸리는 도리 - 처마도리(檐牙道里) : 외진주 또는 벽체 위에 걸어 처마 서까래를 받는 도리 - 종도리(宗道里) : 지붕 마루에 수평으로 걸어 좌우 지붕면의 상연의 위 끝을 받 는 도리, 마루도리 - 주심도리(柱心道里) : 기둥 위에 놓인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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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여(長欐, 長舌) : 도리 바로 밑에 평행으로 받쳐거는 인방과 같은 재 - 통장여(通長舌) : 길게 건너지른 장여 - 단장여(短長舌) : 도리 밑에 건너 지르지 않고 짧게 받쳐 댄 장여 - 대들보(大梁) : 기둥 위에 얹힌 큰 지붕보, 들보 - 순각판(巡閣板) : 각 출목 사이사이를 첨차 위쪽에서 막아댄 반자널 - 승두(蠅頭) : 중도리가 보나 장여 위에 걸칠 때 기울지 않게 그 재에 직교하여 받치는 초새김한 짧은 재, 초공 - 안초공(按草工) : 기둥 머리의 내외로 평방에 직교하여 끼워서 기둥 상부의 공포 를 받는 부재 - 출목(出目) : 중심에 대하여 밖으로 나가 앉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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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諸貢, 齊工) : 공포에 있어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이 짜여진 것 - 두공(頭工) : 익공계의 공포에서 도리와 평행하게 주두 위에 얹은 초새김한 첨 차, 또는 행공 비슷한 공포재 - 두공첨차(頭工檐遮) : 두공모양으로 마구리에 초새김을 한 첨차, 두공으로 쓰이 는 첨차 - 행공첨차(行工檐遮) : 공포에서 외목도리와 장여를 받치는 첨차 - 뜬장여(浮長舌) : 도리 밑에 붙지 아니하고 통장여, 단장여 밑에 떠있는 상태로 부재 간을 연결하는 장여, 별장여 - 접시소로(楪匙小累) : 공포재가 끼이는 홈이 없이 운두가 납작하게 된 소로 - 대접받침(大楪枓) : 주두, 평방 위에 얹어 공포재를 받는 주두와 같이 쓰이는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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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공(翼工) : 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 모양을 내고 초각한 공포재, 외 부로 내민 것은 쇠서, 내부에서 보를 받는 것은 보아지 - 보아지(梁奉) : 기둥머리 또는 주두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 - 화반(花盤) : 주심에는 이익공으로 짜고, 창방 위 중간에 얹어서 주심도리 밑 장 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 - 재주두(再柱頭) : 이익공에서 주두 위의 이익공 두공 위에 얹어 도리 밑 장여와 들보를 받는 대접주두 - 고삽 : 귀평방 위에 얹어 귀의 공포를 받치는 짧은 재 - 귀한대(隅限大) : 귓기둥에서 도리와 45도 각도로 내민 포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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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처마와 가구

- 종보(宗梁) :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그 위에 건너지른 보, 대공 을 받음, 또는 고주에 얹히어 중도리, 종도리를 받는 보, 마루보 - 퇴보(退梁) : 퇴칸에 건 보 - 충보(衝梁) : 한 끝은 기둥에 짜이고 다른 끝은 들보에 걸치게 된 측면의 보 - 우미량(牛尾梁) : 도리와 보에 걸쳐 동자기둥을 받는 보 또는 처마도리와 동자기 둥에 걸쳐 이 한쪽 끝이 중도리로 쓰이는 보 - 대공(臺工) : 마룻대(마룻도리, 종도리)를 받는 짧은 대공, 두꺼운 널로 만든 것 은 판대공, 초엽무늬를 새긴 것은 파련대공 - 포대공(包臺工) : 대들보나 종보 위에 포작으로 짜 만든 대공 - 동자대공(童子臺工) : 각재를 써서 동자 기둥 모양으로 꾸민 대공 - 솟을대공 : 두재를 人자형으로 맏버티어 짠 대공, 人자 대공 - 솟을합장(合掌) : 종도리의 좌우 이동을 방지하고자 종보에 빗방향으로 버티어 대는 부재 - 포인방(包引枋) : 지붕가구에서 보방향 전후로 길게 건너지른 재, 초방(草枋) - 서까래(椽木) : 지붕 경사에 따라 처마도리, 중도리, 종도리에 경사지게 걸쳐 지 붕을 덮거나 산자를 엮어 대는 경사재 - 단연(短椽) : 종도리에서 중도리 사이에 건 짧은 서까래 - 장연(長椽) : 중도리에서 처마끝까지 내밀어 건 긴 서까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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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연(付椽) : 처마 끝에 덧 얹어 건 짤막한 서까래 - 목기연(木只椽) : 박공머리에 직각되게 건 짧은 서까래 - 선자서까래(선자연, 扇子椽) : 추녀 옆에서부터 중도리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하 여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 - 개판(蓋板) : 지붕널, 물건 위에 덮어 대는 널의 총칭 - 서까래개판(椽蓋板) : 서까래 위에 덮는 널 - 부연개판 : 부연 위에 넢는 널 - 선자연개판 : 선자서까래 위에 덮는 널 - 산자(橵子) : 서가래 위에 기와를 잇기 위하여 가는 나무, 장작 따위를 새끼로 엮어 댄 것 - 적심(積心) : 산자를 엮은 위에 기와잇는 물매를 잡기 위하여 서까래에 가로 덧 대는 잡목 - 평고대(平高臺) : 서까래나 부연 끝에 걸쳐댄 나무, 서까래 위의 것을 서까래 평 고대(초평고대, 초매기), 부연 위의 것을 부연평고대(이매기) - 연함(椽檻, 연암) : 암키와의 맞는 골을 파서 평고대 위에 박아 대처 처마끝 암 키와를 받는 재 - 반자(盤子) : 지붕 밑 또는 위층의 바닥 밑을 가리어 치장으로 꾸민 각 실의 상 부 구조물 - 우물반자 : 반자틀을 우물 정(井)자로 짜고 넓은 널 등으로 덮어 꾸민 천장, 우 물 천장 - 뜬창방(浮昌枋) : 용마루나 중도리 밑에 있는 대공, 또는 동자주에 가로건너지른 창방, 그 밑에 벽이나 평행가로재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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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붕 및 기타

- 용마루 : 지붕의 중앙부에 가장 높이 있는 수평마루, 종마루 - 내림마루 : 지붕면에 따라 경사져 내린 마루의 총칭, 박공마루, 합각마루, 추녀 마루, 우진각마루 - 추녀마루 : 지붕 모서리에 있는 마루, 추녀 위에 꾸민 마루, 귀마루, 귀내림마루 - 추녀(春舌) : 지붕의 모서리에 대각선 방향으로 거는 경사진 재 - 사래(蛇羅) : 겹처마의 모서리에서 추녀 끝에 내밀어 걸어 부연을 받는 짧은 추 녀 모양의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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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석(甲石) : 위에 뚜껑처럼 덮어 놓은 돌 - 면석(面石) : 기단의 대석(臺石)과 갑석(甲石) 사이를 막아댄 넓은 돌 - 지대석(地臺石) : 기단의 갓 둘레에 쌓은 돌 - 착고(着高) : 지붕마루의 적새 밑의 기왓골을 막은 수키와 - 부고 : 지붕마루에 있어서 착고 위에 옆세워 대는 수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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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한국건축의 시대별 개관 -


Ⅰ. 원시 및 고대 건축 1. 원시시대 1-1. 원시시대 건축의 이해 고대 한국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의 하나인 중국 역사책 “삼국지(三國 志)”와 다른 역사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한반도에는 수혈주거(竪穴住居), 통나무 주거, 항상식(杭上式) 주거와 같은 3가지 형식의 원시 주거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 록되어 있다. 그러나 3가지 형식의 주거 중에서 수혈주거의 유적만이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수혈주거는 1m∼2m 깊이와 5m∼6m의 폭을 갖는 원형이나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서 만들어졌다. 일부의 주거 유적에서는 주거의 중앙 부분에서 화로가 발견된다. 대부분의 초기 수혈주거는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 수혈주거들이 점차 강가로 이동하면서 수혈주거의 구덩이는 좀 더 커졌고 형태는 사각형에 가까 워졌다. 또한 서로 분리된 2개의 화로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통나무 주거는 통나무를 수평으로 교대로 쌓아 올려 만들어졌다. 통나무 사이의 갈라진 틈새는 진흙을 채워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통나무 주거와 유사한 형태들이 강원도 지방과 같은 산악 지대에서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남쪽 지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항상식 주거는 처음에는 동물들로부터 곡식을 보 호하고 곡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한 저장 시설로 사용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 로 추정된다. 이러한 항상식 주거의 형식은 교외지역의 수박밭이나 과수원 등에 세 워진 2층 형식의 정자나 망루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형식이다. 원시시대의 주 택 건설기술은 수혈주거로부터 통나무 주거로 발전하였고 마지막으로 항상식 주거 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온돌의 흔적이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한반도의 북쪽 지역에서는 넓 은 평석(平石)을 활용한 일종의 바닥 난방 시스템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바닥 난방 시스템이 오늘날의 한국 주택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온돌로 발전하여 왔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닥을 난방 하는 초기의 온돌 시스템은 불을 피워 만들어 진 뜨거운 연기가 바닥 아래의 연도를 통과하도록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는 시멘트 로 시공된 바닥에 묻어둔 파이프를 통하여 뜨거운 물이 흘러 바닥을 난방 할 수 있 도록 하고 있다.

고조선(古朝鮮)은 기원전 4세기경 건국하였고 기원후 3세기 말까지 국가로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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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109년 한국의 북서쪽 지역에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었다. 식민지가 설치된 이후의 기간 동안 중국 문화가 한 국에 이식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를 통한 중국 문화의 영향은 한반도 전역에 급속 하게 퍼져나가 한국 건축 발전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중국 식민지의 촉매 작용 하 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고대 국가였던 삼국의 문화적 발전이 시작되었다.

1-2. 원시시대 건축의 요약 ① 구석기시대 a. 시대개관 ㆍ기원전 30000년부터 기원전 4000년까지의 시기에 해당 ㆍ수렵과 어로 활동을 통해 식량을 채집 ㆍ타제석기를 사용하였으며 토기는 아직 제작하지 못하였음

b. 건축활동 ㆍ구석기시대의 문화유적이 발굴되었지만 건축발생을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음 ㆍ우리나라의 경우 동굴주거와 강유역의 주거지등이 발굴됨. ㆍ동굴주거 유적지-평양 상원읍,충북 제천군 포전리의 점말동굴과 제주 벌레못 동 굴 ㆍ강유역의 유적지-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지

② 신석기시대 a. 시대개관 ㆍ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700년 사이의 시기에 해당 ㆍ농경생활이 시작되고 집단적인 정착생활을 영위 ㆍ마제석기를 사용하였으며 동물의 뼈나 뿔로 간단한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 ㆍ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즐문토기를 사용

b. 건축활동 ㆍ구석기시대의 주거양식인 동굴주거와 함께 수혈주거를 이용 ㆍ대부분 수혈주거를 이용하였으며 수혈주거는 진정한 의미의 건축으로서는 최초의 형식 ㆍ수혈주거의 건축계획 -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방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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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기는 직경이 3.5m~6m 정도이며 바닥의 깊이는 지면으로부터 0.6m~1.2m정도 - 바닥은 진흙다짐이 대부분이며 바닥중앙에 취사를 위한 화덕을 설치 - 화덕부근에 식량저장과 작업도구 보관을 위한 저장공을 설치 - 지붕은 중앙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방사형으로 걸친 원추형 형태 - 수혈주거 실례 : 서울 암사동 주거지, 황해도 봉선군 지탑리 주거지, 함북 웅기 군 굴포리 주거지, 평북 증강군 토성리 주거지

③ 청동기와 철기시대 a. 시대개관 ㆍ기원전 700년부터 기원후 300년 사이의 시기에 해당 ㆍ무문토기를 사용 ㆍ집단적인 취락생활을 하는 소부족국가를 형성

b. 건축활동 ㆍ수혈주거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였으나 건축형식을 발전시켜 사용 ㆍ수혈주거의 건축계획 - 평면형태가 타원형을 거쳐 장방형으로 변화 - 바닥은 풀이나 짚으로 덮어 사용. 화덕을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수혈중앙이 아니 라 한쪽에 치우쳐 설치 - 화덕을 두 개 설치하는 경우도 있음 - 저장공은 한쪽 벽밖으로 돌출시켜 설치 - 지붕은 지둥, 보, 서까래에 의해 형성하는 맞배지붕 또는 우진각지붕 형식 - 신석기시대의 수혈주거에 비해 내부공간이 기능별로 점차 분화 ㆍ수혈주거의 실례 - 충남 서산군 해미 유적지, 경기 파주 교하리 유적지, 광주 송암동 주거지, 함북 무산군 호곡동 우적, 황해도 송림시 석탄리 유적지

④ 원시시대의 기타 건축양식 ㆍ원시시대의 주거건축과 고대가형토기의 형상의 고찰 문헌 기록을 통하여 원시시 대의 건축형식을 추측 ㆍ토막식, 초옥토실식, 누목식, 고상식 등 네 가지의 건축형식을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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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토막식 ㆍ지면을 파서 수혈을 만들고 간단하게 목재로 구조체를 세워 그위에 지붕을 덮은 수혈식 주거 ㆍ가구방식이 점차로 발달하여 기둥과 주초를 사용 ㆍ생활방식이 다양해짐에 따라 내부에 간막이를 설치하여 공간을 분리하고 일부에 서는 온돌도 설치

b. 초옥토실식 ㆍ수혈로 된 토막식 주거가 발전하여 수혈의 깊이가 점점 낮아지고 벽체가 발생 ㆍ벽면이 지상에 설치되는 지상주거

c. 누목식 ㆍ통나무를 井자형으로 중첩해 쌓아올리고 통나무 사이는 진흙을 발라 마감하여 벽 체를 형성 ㆍ주로 산악지대에 분포하여 흔히 귀틀집이라고도 함.

d. 고상식 ㆍ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설치하고 상부에 맞배지붕을 형성 ㆍ주거뿐만 아니라 후대에는 창고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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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시대 2-1. 삼국시대 건축의 이해 고구려(37B.C.∼A.D.668)는 한반도에 세워졌던 여러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중국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국가였다. 고구려는 313년 식민지였던 낙랑군을 멸망시 킨 이후 한반도의 북쪽 전역과 만주 지역의 절반 정도에 이르는 영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고구려의 궁궐이나 사찰, 무덤 등에서 나타나는 건축 양식을 통해 중 국의 영향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의 고유한 건설 방식에 중국적인 요소를 혼합함으로써 그들 자신 만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고 구려의 예술에서 나타나는 힘이 넘치는 선과 견고한 구조는 거친 지형과 혹독한 기 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이었다. 고구려 시대의 목조 건축 중에서 현재 까지 남아있는 건축물은 없다. 그러나 고 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 (平壤) 등에서는 성벽이나 왕과 귀족의 무덤과 같은 석조 건축의 유적들이 발견 되고 있다. 고구려의 왕과 귀족의 무덤에 는 2가지의 형식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돌로 만든 계단형 피라미드와 매우 유사 고구려 고분

한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흙무덤

의 형태이다. 무덤의 건설 방식이나 세부 표현 등에서는 고구려의 건축 기술과 솜 씨가 잘 나타나고 있다. 무덤 안의 석실 (石室)은 목조 건축의 형식을 모방하여 지어졌다. 고구려 무덤인 천왕지신총(天 王地神塚)에서 발견된 지붕 구성과 공포 구조는 목조 건축의 지붕 구성이나 공포 천왕지신총

구조와 유사하다. 그리고 쌍영총(雙楹塚) 에서는 2개의 팔각형 기둥이 입구 양측에

서있다. 안악 3호분(安岳三號墳)의 전실(前室)과 측실(側室) 그리고 현실(玄室)에 는 돌기둥과 지붕을 지지하는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무덤의 벽과 지붕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에는 무덤 주인 의 일상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벽화에는 궁궐이나 개인의 주택, 그리고 많 은 부속 건물들의 내부와 외부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건물들에 사용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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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는 배흘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많은 기둥의 상부에는 주두가 표 현되어 있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채색된 목조 공포 구조와 다양한 부재의 사 용은 후대의 한국 건축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미 이러한 기법이 고구려 시대 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북중국에서 불교가 소개된 이후 고구려에서는 매우 활발하게 불교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1936년 에서 1938년 사이에 진행된 일련의 발굴 작업을 통해 평양 인근에 있는 주요 사지들 즉, 청암리(淸巖里), 원오리(元五里), 상오리(上五里)의 사지들이 발굴되 었다. 이 사지들이 이른바 고구려 양식으로 알려진 ‘1탑 3금당’형식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 해 밝혀졌다. 동쪽과 서쪽, 북쪽에는 각각 불전이 놓 여졌고 남쪽에는 출입문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경 우에 중앙의 탑들은 8각형의 평면을 갖고 있었다. 궁 궐 건축물들 역시 이러한 배치 형식으로 지어졌던 것 청암리 사지

으로 추정된다.

백제(18B.C.∼A.D.660)는 고구려의 영향과 함께 남중국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낙랑군의 멸망이후 백제는 한편으로는 남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한 왕족 세력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한 전략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백제는 일본으로 중국의 문화를 전달하는 전 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백제는 그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해가면서 475년 수도 를 현재의 공주(公州)인 웅진(雄鎭)으로 옮겼고 538년 현재의 부여(扶餘)인 사비 (泗沘)로 옮겼다. 점차 백제의 예술은 고구려의 예술에 비하여 더욱 풍부해지고 섬 세해져갔다. 또한 백제 건축은 곡선적인 의장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백 제 건축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건물은 전혀 없다. 사실, 삼국시대의 어떠한 목 조 건축도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 장인들에 의해 지어진 일본의 몇몇 사찰 건축물을 통해 384년 불교가 백제에 소개된 이후 백제 건축이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랜 시간에 속에서도 살아남은 많은 유물 들 즉, 건물지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있는 기와나 다른 유물들 그리고 석탑들은 고 도로 발전된 백제의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80년 백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지였던 미륵사지가 전라북도(全羅北道) 익산 (益山)에서 발굴되었다. 발굴을 통해 백제 건축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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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미륵사지에 남 아있는 석탑은 현존하는 2개의 백제탑 중 하나이다. 미륵사 석탑은 현존하는 한국 의 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동시에 가 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미륵사 석 미륵사

탑은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어 가는 전환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미륵사

는 회랑에 의해 둘러싸인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으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별개의 사찰 3개가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앙에 있는 탑은 목재로 만들어 진 것 으로 밝혀진 반면 다른 2개의 탑은 석재로 만들어졌다. 목조탑의 북쪽과 남쪽으로 대규모 금당지와 남문지가 발굴되었다. 백제탑이 현존하고 있는 또 다른 사지 인 정림사지(定林寺址)가 1982년 발굴되 었다. 발굴을 통해 중심축을 따라 탑의 북쪽으로 금당지가 발견되었고 그 뒤쪽으 로 강당의 유적이 배열되어 있는 것이 밝 혀졌다. 또한 중심축을 따라 탑의 남쪽으 로 중문지가 발견되었고 그 앞쪽으로 남 문지와 연못이 배열되어 있는 것 역시 밝 정림사

혀졌다. 중문으로부터 강당까지의 사찰 영역이 회랑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는 사

실 역시 확인되었다. 이것이 백제 불교 건축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1탑’식 가람 배치로서 1964년에 발굴된 부여의 군수리(軍守里) 사지와 금강사지(金剛寺址) 의 발굴에서도 역시 확인되었다. 그러나 금강사지에서 발굴된 건물의 유적은 남북 방향이 아닌 동서 방향의 중심축을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백제에서도 많은 궁궐들이 건설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세 번째 궁궐이 있었던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백제 궁궐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삼 국사기(三國史記, 고려시대 학자인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에 쓴 삼 국시대에 대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궁남지(宮南池)에서도 백제 궁궐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궁남지는 ‘궁궐 남쪽에 있는 연못’을 의미한다. 무령왕릉(武零王 陵)의 벽돌무덤과 송산리(宋山里)의 6호 고분에서는 다른 한국의 고분과는 구별되 는 독특한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 무덤들에서 나타나는 벽돌로 만든 궁륭(穹窿) 형 지붕과 홍예의 구성은 남중국의 양나라(梁, A.D. 502∼587) 시대에 세워진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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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나타나는 궁륭형 지붕 및 홍예 구성과 그 크기나 형태에서 유사점이 발견 된다. 백제의 돌무덤은 대개 밝은 광택이 나는 거대한 크기의 화강암 석판으로 구 성되어 있고, 종종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벽화에 의한 장식적인 처리는 백제 무덤 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는 대륙 건축의 영향을 수용하 고, 다양한 영향을 흡수, 동화시켜 중국식 모델로부터 파생되었으나 독자적인 특징 을 갖는 건축 문화를 형성하였다. 후에 백제 건축양식의 중요한 요소들은 일본으로 전달되었다.

신라는 6세기에 삼국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왕권 중심의 국가를 발전시켰다. 신라 는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 발전이 지연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들 중 하나인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는 오랜 시간 동안 번영을 누려왔 다. 현재까지도 그 유적을 확인할 수 있는 4개의 산성이 도시의 사면을 모두 둘러 싸고 있었다. 신라의 영토가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 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적 영향은 많은 부분에서 희석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문화적 발전이 지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가장 초기 사찰 중 하나인 황룡 사(黃龍寺)는 1976년 이후 체계적으로 발 굴과 연구를 통해 엄청난 규모를 갖고 있 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황룡사는 담장으 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대지 안에 세워져 있었다. 사각형의 가장 긴 변은 288m에 달했다. 회랑에 의해 둘러싸인 영역은 대 황룡사

략 19,040㎡ 정도의 면적이었다. 삼국유

사(三國遺事)에는 황룡사에 9층 규모의 목탑이 645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기록 되어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높이는 오늘날의 척도로 80m 정도였다. 황룡사 9층 목탑은 1229년 몽고의 침략 중에 파괴되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의 커다란 불상이 황룡사의 중앙 금당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불상의 좌대(座臺) 만이 남아있다. 6세기 중엽에 세워진 황룡사는 약 680년 이상의 기간동 안 번성했는데 그 기간 동안 불전의 배치는 여러 차례 바뀌어 왔다. 신라가 668년 한반도를 통일한 직후인 가장 초기의 황룡사는 백제의 미륵사에서 나타났던 ‘1탑 1금당’양식과는 다른 ‘1탑 3금당’양식의 배치형식을 갖고 있었다. 또 다른 신라의 주요 사찰인 분황사(芬皇寺)에는 현재까지도 3층탑이 남아있다. 이 탑은 최초에는 9층 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의 탑은 석재를 벽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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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으로 잘라 쌓는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분황사의 탑은 ‘모전석탑(模甎石 塔)’이라고 불려진다. 또한 분황사 터에는 다른 석조 유물들과 함께 깃대 역할을 하는 한 쌍의 돌기둥인 당 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아시아 최초의 석조 천 문대인

첨성대(瞻星臺)는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의 재위기간 중에 건설되었다. 첨성대는 독 특하며 우아한 그 형태로 유명하다. 첨성대의 구조는 첨성대

곡면의 탑이 사각형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고 탑의 가 장 위쪽에는 커다란 석재 보 4개가 가로질러 놓여있는

형태이다.

2-2. 고구려 건축의 유형별 정리 ① 도성 및 궁궐건축 a. 도성계획 ㆍ도읍을 졸본성,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장안성 등으로 천도 ㆍ국내성 : 만주 통구 지방 - 방형성으로 사방에 성문 설치 ㆍ장안성 : 586년(평원왕 2년) - 중국 수나라의 도성제를 참고하여 현재의 평양일대에 건설, 중국식 도성계획 기 법인 방리제를 최초로 적용한 실례

b. 궁궐건축 ㆍ중국의 궁궐건축형식과 유사 ㆍ중국 사기 천관서에 있는 오성좌를 배치의 기본형식으로 함 ㆍ안학궁 : 평양 대성산 - 약 12000평의 성곽 내에 52동의 건물과 정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궁궐 - 동궁, 서궁, 남궁, 북궁, 중궁 등 5개의 궁전을 오성좌에 의해 배치 - 정전인 남궁을 통과하는 남북축의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 ㆍ기타 궁궐유적지 : 국내성의 궁궐지(만주 통구 지방), 청암리 유적지(평양 대성 산 부근)

② 불사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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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건축개요 ㆍ375년(소수림왕 2년) 중국의 북위로부터 불교가 전래 ㆍ375년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최초로 창건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 ㆍ궁궐건축의 배치형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음 ㆍ중국의 사기의 천관서에 있는 오성좌에 의한 배치형식을 가람배치의 기본형식으 로 함. ㆍ일탑식 가람배치를 사용

b. 건축실례 ㆍ청암리사지 : 평남 평양 - 오성좌에 의한 가람배치 - 팔각형의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건물의 기단지가 위치 - 동, 서, 북쪽은 금당의 기단지로 남쪽은 중문의 기단지로 각각 추측 -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로서 불탑 중심의 가람 ㆍ기타 사찰 유적지 : 정릉사지, 상오리사지, 월오리사지, 모두 청암리사지와 유사 한 가람배치로 추측

③ 기타건축 a. 주거건축 ㆍ문헌 및 고분벽화를 통해 당시의 주거양식을 추측 ㆍ왕궁, 관아, 사찰 귀족주택은 기와지붕이고 일반주택은 초가지붕 ㆍ왕족과 상류계층은 침대, 탁자, 의자 등을 사용 ㆍ장갱을 이용한 난방방식 - 바닥에 장갱을 설치하고 겨울에는 불을 때서 열을 이용하여 난방 - 일반서민이 이용한 난방방식으로 온돌의 시원적인 구조 - 고구려시대의 주거지인 토성리 유적에서 화도가 발견됨

b. 분묘건축 ㆍ고구려 고분은 외형에 따라 석총과 토총으로 구분 ㆍ석묘총 - 장군총, 태왕릉 등이 대표적 실례 ㆍ토총묘 - 묘실의 벽면에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사신도를 그려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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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실의 천장은 귀접이 천장을 사용 ㆍ귀접이 천장 - 일명 투팔천장또는 말각조정 천정이라고도 하며 상부로 올라갈수록 천정를 좁혀 들기 위해 모서리에서 45도 방향으로 판석을 내밀어 모서리를 귀접이하며 층층이 쌓아 올린 천장양식 ㆍ쌍영총, 무영총, 쌍용총, 우현리대총 등이 대표적 실례

c. 탑파건축 ㆍ청암리사지 목탑지 ㆍ상오리사지 목탑지

2-3. 백제 건축의 유형별 정리 ① 도성 및 궁궐건축 a. 도성계획 ㆍ도읍을 위례성, 웅진, 사비 등으로 천도 ㆍ사비성, 성왕 16년, 538년 -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부근의 산지에 산성을 독립적으로 건설하는 종래의 고 성계획에서 탈피 - 중국식 축성법인 시가지 포위식 축성법을 최초로 응용 - 우리나라의 산성식과 중국의 시가지 포위식 축성법을 혼합 - 도성 내에 부소산성을 만들고 시가지를 포함하여 축성 ㆍ성흥산성, 임천 - 계곡을 포함하지 않고 산정을 중심으로 방형으로 축성. 고구려와 신라에는 유래 가 없는 독특한 축성법

b. 궁궐건축 ㆍ구체적으로 발굴자료는 없으나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장대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 ㆍ사비궁, 망해궁, 황화궁, 태자궁 등의 궁궐이 사비성 내에 있었음. ㆍ백제는 발달된 궁궐건축과 조원의 기술을 일본에 전래

② 불사건축 a. 건축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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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고구려의 가람배치형식을 계승 발전시켜 일탑식 가람배치을 형성 ㆍ중문, 불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좌우대칭으로 회랑을 돌 리는 일탑일금당식 가람이 대부분.(예외적으로, 미륵사지는 삼탑삼금당식 가람) ㆍ신라와 일본의 가람배치에 영향.(에, 신라의 황룡사와 일본의 사천왕사)

b. 건축실례 ㆍ미륵사지, 전북 익산, 7세기 초 창건 - 백제의 대표적인 가람배치 형식 - 일탑식 가람배치가 3개 복합된 대규모 가람배치로 동양 최대규모로 추측됨 - 3개의 탑중 현존하는 서탑은 백제의 석탑 중 가장 대규모로 목조탑 형식을 취한 석조탑(가구식구조 기법과 공포기법을 사용) ㆍ정림사지, 충남 부여, 7세기 초 창건 - 전형적인 백제의 일탑식 가람배치 - 5층 석탑은 부드럽고 세련된 외관으로 백제의 석탑양식을 대표 ㆍ기타 백제의 일탑식 가람배치 실례 - 군수리사지, 충남 부여 - 동남리사지, 충남 부여 - 긍강사지, 충남 부여

③ 기타건축 a. 주거건축 ㆍ삼국 중 주택 관련 자료가 가장 빈약 ㆍ고구려의 주거건축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측 ㆍ말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온돌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

b. 분묘건축 ㆍ송산리 6호분, 충남공주 - 조적식 구조로서 장방형 평면의 묘실의 천장은 한국건축으로서는 드물게 보울트 구조 - 벽면에는 프레스코 기법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음. ㆍ무녕왕릉, 충남 공주 ㆍ능산리 고분 벽화, 충남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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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탑파건축 ㆍ발달된 건축술을 바탕으로 하여 7세기 초부터 삼국 중에서 선구적으로 석탑을 축 조 ㆍ미륵사지 서탑, 전북 익산, 7세기 초 - 공포구조 등 목탑의 기법을 적용한 석탑으로서 목탑으로부터 석탑으로의 변화과 정을 예시한 탑파 ㆍ정림사지 5층 석탑, 충남 부여, 7세기 초 - 초층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라고 새겨져 백제멸망의 비운을 전해주는 탑 ㆍ군수리사지 목탑지, 충남 부여

2-4. 신라 건축의 유형별 정리 ① 도성 및 궁궐계획 a. 도성계획 ㆍ건국 당시 경주를 도읍으로 정한 이후 1000년간 이도하지 않고 지속 ㆍB.C. 37년 금성을 건설하고 101년 월성을 건설하여 도시을 확장 ㆍ고구려의 장안성, 백제의 사비성와는 달리 도시전체 외곽을 둘러싸는 나성을 축 성하지 않음. ㆍ주위에 산성을 쌓아 나성의 역할을 대신

b. 궁궐건축 ㆍ고구려, 백제 및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음 ㆍ건국 초부터 궁궐건축은 비교적 검소하였던 것으로 추측 ㆍ처음에는 금성에 궁궐을 건축하였으며 월성을 건설한 후 월성으로 이주

② 불사건축 a. 건축개요 ㆍ백제의 일탑식 가람배치로부터 영향 ㆍ534년(법흥왕21년) 흥륜사와 영흥사를 최초로 건축 ㆍ황룡사가 신라의 가람배치를 대표

b. 건축실례 ㆍ황룡사, 경북 경주, 553년 창건 - 9층 목탑을 중심으로 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로 신라 사찰 중 최대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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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황사, 경북 경주, 634년(선덕왕 3년) 창건 - 일탑식 가람배치로 추정 - 안산암을 전같이 가공하여 축조한 모전석탑이 유명

③ 기타건축 a. 주거건축 ㆍ신라와 통일신라의 주거건축은 상호유사하며 시대적 구분이 명확치 않음

b. 분묘건축 ㆍ외형은 모두 큰 봉분토이나 내부구조에 따라 적석목곽분과 석곽분으로 구분 ㆍ적석목곽분 -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 등이 유적으로 현존 ㆍ석곽분 - 경북 고령 고아동의 벽화고분이 유적으로 현존

c. 탑파건축 ㆍ분황사 모전석탑, 경북 경주, 634년 - 신라 최고의 석탑으로 안산암을 장방형의 벽돌 형태로 다듬어 축조 - 원래는 9층 석탑이었으나 현재는 3층만 현존 ㆍ황룡사 9층 목탑, 경북 경주 - 백제의 아비지가 축조한 한국 최대 규모의 목탑

d. 첨성대, 경북 경주 ㆍ천문과 기후를 관측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 ㆍ건축형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한 곡선미를 표현

e. 석빙고, 경북 경주 ㆍ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는 얼음 창고 ㆍ화강석으로 쌓았으며 출입문은 내외 2중문, 상부는 보울트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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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통일신라 건축 (7세기∼10세기) 1. 통일신라 건축의 이해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처음으로 한반도 를 통일하여 통일신라시대(676∼935)를 열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 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불교의 사상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융성하였고 불교 건축 및 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많은 건축 물들이 지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모든 영광스러운 흔적들은 오늘날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다. 전성기 때 약 100만 명이 살았던 경주는 전략적으로 2개 의 강과 3개의 산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연적인 경계가 된 강과 산이 가 로 5마일과 세로 7마일의 비옥한 분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경주의 도심은 3단계에 걸쳐 발전되고 확장되었다. 2번째 단계에 황룡사가 도심의 중심에 세워졌었고 도심 지역에는 넓은 가로를 갖는 격자형 도로 패턴이 형성되었다. 신라의 궁궐 건축은 왕세자의 궁궐이었 던 동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976년에 실시된 동궁지의 발굴을 통해 임해전(臨海 殿)이라고 부르는 전각과 안압지(雁鴨池) 라는 연못의 위치가 밝혀졌다. 임해전과 안압지의 건설은 삼국 통일 직후인 문무왕 (文武王, 재위 661∼681) 재위 기간 중에 시작되었다. 임해전과 안압지는 현재까지 동궁지

발굴이 진행되고 있고 2개의 전각이 복원 되었다. 발굴과정에서 엄청난 숫자의 기와

와 아름답게 장식된 사각형의 포장용 전돌이 발견되었다. 목재 공포 부재와 난간 그리고 금속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신라 건축의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통일신라시대 불교 사찰의 평면은 중앙의 금당과 금당 앞쪽에 놓인 2개의 탑을 특징으로 한다. 탑과 금당은 다른 건물들과 함께 남북축을 따라 대칭적으로 배치되 었다.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통일신라시대에는 50여개 이상의 대표적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국사(佛國寺)를 포함하여 그 중 약 10여개 이상의 사찰이 오늘날까지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찰의 목조 건축물들은 모두 재건축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사찰 중 가장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사찰은 불국 사로서 774년에 완공된 이 사찰은 김대성(金大城, 770∼774)이 공사를 감독한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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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알려져 있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불국사는 다양한 크기의 자 연석과 다듬은 돌이 서로 아름답게 어울려 있는 석축 기단 위에 세워졌다. 석축 기 단을 따라 돌로 만든 난간이 길게 놓여있다. 한때 사찰 앞에는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은 사찰과 세속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분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국사 경내 로의 접근은 원래 다리라고 불리는 2쌍의 계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쪽에 있는 다 리는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으로 연결되고 이곳에서 중심 불전인 대웅전 (大雄殿)으로 연결된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서쪽에 있는 다리는 극락전(極樂殿)으로 연결되는데 극락전에는 아미타부처(阿彌陀佛)의 불상이 모셔져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신라 탑 중에서 가장 아름 답고 대표적인 예이다. 좀 더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진 석가탑은 대웅전 앞마당의 왼쪽에 위 치하고 있는데 초월적인 고요함 속에 있는 부 처의 현현(顯現)을 상징하고 있다. 석가탑은 2 층의 기단 위에 올려진 3층 석탑으로 전체 높 이는 25피트에 이른다. 석가탑은 단순하며 장 식이 없는 평평한 기단과 5단의 처마를 갖고 불국사

끝이 잘려 면으로 처리된 지붕을 갖는 3층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한국

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특징이다. 마당의 오른쪽에 위치하는 좀 더 복잡 한 다보탑은 변화무쌍한 우주 속에서의 부처의 현현을 나타내고 있다. 다보탑은 한 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매우 독특한 탑의 형태를 갖고 있다. 전체 높이 가 35피트에 이르는 이 탑은 4면에 각각의 계단을 갖고 있다. 또한 4층의 탑은 난 간으로 둘려져 있고 탑의 최상부에는 왕관의 형상과 구슬, 그리고 평판이 교대로 쌓여져 있다. 탑의 장식용 쇠시리와 다른 세부 표현에서는 연꽃에서 유래하는 의장 요소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토함산에 세워진 인공 동굴 사원인 석굴암(石窟庵)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동아시 아 전역을 거쳐 왔던 석굴 사원 운동 중에서 가장 예술적으로 위대한 걸작이다. 석 굴암은 불국사를 지은 장인인 김대성이 같은 시기에 지은 것이다. 이 동굴 사원은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여 인공적이며 정교하게 건설되었다. 인공으로 축조된 동굴 사원 위쪽으로 흙을 쌓아올려서 마치 자연적인 동굴인 것처럼 보인다. 완벽한 형태 를 갖는 본존불상(本尊佛像)이 석굴 사원 안쪽에 보관되어 있다. 불국사의 부속 건 물인 석굴암은 동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치되었다. 석굴암은 거대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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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지붕의 주실(主室)과 작은 통로에 의해 연결되는 전실(前室)로 구성되어 있다. 전 통적인 의미에서의 사찰은 아니지만 석굴 암은 사찰을 구성하는 불전에서 일반적으 로 발견되는 모든 요소와 모든 특징을 갖 고 있다. 석굴암 전실 벽에는 불교를 지키 는 8명의 수호신인 팔부신중(八部神衆)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원형지 붕의 주실로 연결되는 출입문 양쪽에는 4

석굴암

개의 사천왕(四天王)이 조각되어 있다. 석 가모니 부처는 원형지붕의 중심에 앉아있고 벽을 따라 11명의 보살(菩薩)상과 10명 의 부처의 제자 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보살상들은 부조 조각으로 장식된 둥 근 원형 천장 아래쪽의 벽체 위쪽 부분에 있는 벽감(壁龕) 속에 안치되어 있다. 석 굴 사원 앞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부가된 구조물은 석굴암을 수리하던 1964년에 부 가한 것이다.

2. 통일신라 건축의 유형별 정리 2-1. 도성 및 궁궐건축 ① 도성계획 ㆍ신라시대 이래 경주를 지속적으로 도읍으로 함. ㆍ695년(효소왕 4년) 황룡사를 중심으로 도시를 확장한 이후 수차례 걸쳐 확장 ㆍ방리제의 적용 - 도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당시 중국의 수, 당에서 사용되던 방리제를 적용 - 초기에는 방리제를 적용하였지만 후기에는 자연지형에 따라 가로망을 확장 - 중국의 기하학적이고 정형적인 도시형태와는 달리 경주는 도시형태가 자연지형 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형성됨.

② 궁궐건축 ㆍ통일신라 궁궐유적으로는 별궁인 동궁지와 포석정이 현존 ㆍ동궁의 안압지 및 임해전지, 경북 경주 - 안압지는 중국 당나라 장안성의 금원을 모방하여 조원한 궁궐의 정원 - 임해전은 군신들이 현회를 베풀고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영빈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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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포석정, 경북 경주, 9세기경 - 석조수로로 이루어진 궁궐의 유원지

2-2. 불사건축 ① 건축개요 ㆍ삼국시대의 일탑식 가람배치에서 이탑식 가람배치로 발전 ㆍ금당이 가람의 중심이 되었으며 금당의 전면 양측에 2개의 탑을 세움. ㆍ중기이후 밀교, 선종의 성행으로 내적성찰을 중요시하게 되어 산지가람을 조영

② 건축실례 ㆍ불국사, 경북 경주, 536년(법흥왕 27년) 창건 - 김대성에 의해 건축 - 다보탑과 석가탑을 중심으로한 이탑식 가람배치 ㆍ기타 이탑식 가람배치 실례 - 감은사지, 경북 월성 - 사천왕사지, 경북 경주 - 망덕사지, 경북 경주 - 천군리사지, 경북 경주 - 설상사지, 전북 남원 ㆍ석굴암, 경북 경주 토함산, 8세기경 - 인도, 중국에서 4,5세기경 유행했던 자연석굴을 사원을 모방한 인공적인 석굴사 원으로 김대성에 의해 건축 - 사각형 평면의 전실과 원형 평면의 주실로 구성 - 불상이 있는 주실의 천장은 돔 구조

2-3. 기타건축 ① 주거건축 ㆍ신라와 통일신라의 주거건축은 상호유사하며 시대적 구분이 명확지 않음. ㆍ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당시의 주거양식에 관한 기록이 전래 ㆍ건축규제와 가사제한 - 골품제도에 의해 주거양식을 제한 - 신분계급에 따라 대지의 규모, 주택의 규모와 사용재료 등을 제한 ㆍ기후조건으로 보아 마루구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온돌의 사용여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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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분명

② 탑파건축 ㆍ삼국통일 이후 석탑건축이 현저하게 발달 ㆍ석탑 -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 경북 월성, 682년 - 삼국통일을 계기로 이전의 탑파양식이 집약 정돈된 석탑으로 전형적인 한국석탑 의 시원적인 양식의 석탑 - 천군리사지 동서 3층 석탑, 경북 경주 실상사 백장암 동서 3층 석탑, 전북 남 원, 9세기 후반 - 탑신에 목조건축의 공포와 난간을 모각한 석탑 - 화엄사 사사자 4층 석탑, 전남 구례 - 8세기 중반 탑신이 네 마리의 사자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석탑 -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경북 경주 - 정혜사지 13층 석탑, 경북 월성, 9세기 경 - 원원사지 3층 석탑, 경북 월성, 8세기 후반 - 창령 술정리 3층 석탑, 경남 창령, 8세기 후반 - 진전사지 3층 석탑, 강원 양양, 8세기 후반 - 고선사지 3층 석탑, 경북 경부, 686년 - 나원리 5층 석탑, 경북 원성 나원리 ㆍ목탑 - 사천왕사 탑, 경북 경주 - 망덕사 탑, 경북 경주 ㆍ전탑 - 송림사 5충 전탑, 경북 칠곡 - 안동 동부동 5층 전탑, 경북 안동

③ 특수형식탑 ㆍ의성 탑리 5층 석탑, 경북 의성, 7세기 후반 ㆍ초층탑신은 목조건축형식이고 옥개석 부분은 전탑 형식으로 된 목전혼합 형식의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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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고려 건축 (10세기∼14세기) 1. 고려 건축의 이해 고려 왕조의 문화는 불교를 포함하여 신라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고려의 예술과 건축은 중국의 송나라와 요(遼)나라 같은 동시대 문화와의 영향관계 속에서 발전되었다. 오늘날의 개성(開城)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는 한반 도 중심부의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송도의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송 도의 전체적인 도시 형태는 기하학적인 축이 강조되는 형태로 형성될 수 없었다. 송도에 세워진 궁궐과 사찰은 송악산(松嶽山)의 측면을 따라 무리지어 세워졌다. 그리고 도시는 구불구불한 부정형의 성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고려시대 동안 에는 마을의 위치를 선택하거나 건물의 대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풍수지리가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자연의 지형과 경관이 현재와 미 래의 번영과 행복에 명백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건축가들은 자연적 경 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축가들은 그들의 건물 계획에서나 마 을 계획에서 기존의 물리적인 환경을 존중하였다.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중국 송나라 건축 경향의 영향을 받아 고려는 초기에 기둥 위에 곡선의 공포를 결구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주심포 양식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발전 시켰다. 기둥 위에 공포가 결구되면서 전체적인 구성은 좀 더 단순했다. 고려시대 건축 중에서 주심포 양식을 사용한 예로서는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현존하고 있 다.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安東)에 있는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 부석 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충청남도(忠淸南道) 예산(禮山)의 수덕사(修德寺) 대웅전(大雄殿), 강원도 강릉(江陵)의 객사문(客舍門) 등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한 국에서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71년 수리를 위해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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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극락전을 해체하면서 봉정사가 1363년에 재건축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포를 포함하여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양식이 고려 중기 이후에 나타났고 조선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고려 시대 동안 도교(道敎)나 무속신앙(巫 俗信仰) 등 다른 종교 체계들이 불교에 가미 되었다. 몇 개의 금당과 결합된 ‘1탑’형식 부석사 무량수전

이나 ‘2탑’형식과 같은 전통적인 사찰의 배

치 형식은 사라졌고 칠성각(七星閣)이나 산신각(山神閣)과 같은 새로운 전각들이 사찰 경내에 유입되었다. 사찰 계획에 풍수지리가 도입되면서 건물들의 배치는 더 욱 복잡해져갔다. 이것은 도선(道詵, 827∼898)이라는 매우 존경받았던 승려의 영 향이었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중요한 사찰로서는 흥왕사(興王寺), 불일사(佛日寺), 만복사(萬福寺) 등이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사찰 중에서는 어느 것도 현존하지 않 지만 사지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 작업을 통하여 고려시대 사찰의 배치 형식이 어떠 했는지 밝혀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그 이전 시대의 석탑 양식과 비교하여 양식적으로 다양한 특 성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이 그대로 계승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였던 곳에서는 각각 고구려 양식과 백 제 양식에 따라 석탑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탑들은 일반적으로 3층 석탑, 5층 석 탑, 7층 석탑, 또는 9층 석탑 등 다양한 형식으로 세워졌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 는 13층 석탑이 지어진 예도 있었다. 개인들의 주택 역시 신라 시대의 형식을 그대 로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집 주인의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에 대한 규제가 있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 고려 건축의 유형별 정리 2-1. 목조건축 양식 ① 개관 ㆍ초기에는 통일신라의 건축수법을 계승 ㆍ고려중기에 주심포양식이, 고려후기에 다포양식이 각각 발생됨 ㆍ이 두가지 공포양식은 이후 한국 목조건축양식의 주류를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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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주심포양식 ㆍ고려시대 중기 중국 송나라로부터 전래 ㆍ고려시대의 주류적인 공포양식으로 당시의 주요건물에 사용 ㆍ고려시대 주심포양식은 주두와 소로의 굽면이 곡면이며 각각 굽받침을 지님 ㆍ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의 주심포양식 건물오서는 예외적으로 주두와 소로가 굽받침을 지니지 않음 ㆍ건물실례 - 봉정사 극락전, 경북 안동, 12세기말 - 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영주, 13세기 초 - 수덕사 대웅전, 충남 예산, 1308년 - 성불사 극락전, 황해 해주, 고려말 - 강릉 객사문, 강원 강릉, 14세기 경

③ 다포양식 ㆍ고려시대 말기 중국 원나라로부터 전래 ㆍ기둥상부에만 공포를 배치하는 주심포양식과는 달리 주간에도 공포를 배치 ㆍ주간에 공포를 배치하기 위해 창방 위에 다포양식 특유의 부재인 평방을 덧대어 구조적으로 보강 ㆍ건물실례 - 심원사 보광전, 황해도 해주, 1374년 - 석왕사 응진전, 함남 안변, 1386년 - 경천사 10층 석탑, 서울 1349년 : 탑신의 옥개석 하부에 다포양식의 공포구조를 조각

2-2. 도성 및 궁궐건축 ① 도성계획 ㆍ개성 -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태조 2년인 919년 정도 - 자연지형과 기능에 따라 비교적 자유스러운 형상으로 발전 ㆍ삼경의 설치 -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설치 - 개경을 수도로 하고 동경(경주), 서경(평양), 남경(서울)의 삼경에 도성을 각각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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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궁궐건축 ㆍ만월대, 장락궁, 수창궁 등이 건설되었으나 만월대만이 유구로서 확인됨. ㆍ만월대, 개성 - 궁궐은 일반적으로 평지지형에 건설되나 만월대는 경사지형에 건설 - 경사지형에 형성된 수개의 단지에 분절된 남북 축을 따라 건축물 등을 배치 - 정문인 승평문과 정전인 회경전을 비롯하여 장화전, 원덕전, 장경전 등의 건축 물로 구성

2-3. 불사건축 ① 건축개요 ㆍ통일신라의 이탑식 가람배치를 계승하고 일탑식 가람배치도 겸용 ㆍ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산지가람이 성행 ㆍ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유곡의 경사지형에 건물을 자유스럽게 배치 ㆍ이전 시대의 대칭적이고 정형적인 가람배치가 붕괴 ㆍ지형적인 관계로 회랑이 없어지고 중문이 루의 형식의 건물로 바뀜

② 가람배치 실례 ㆍ일탑식 가람배치 실례 - 불일사, 영주 부석사, 영주 봉정사, 예산 수리사, 개성 개국사 등 ㆍ이탑식 가람배치 실례 - 흥왕사, 보림사 등

③ 주요 사찰 건축물 ㆍ봉정사 극락전, 경북 영주, 12세기 말 - 고려 시대 주심포식 건물로서는 예외적으로 주두와 소로가 굽받침을 지니지 않 음 - 주심포식, 단층 맞배지붕으로서 기둥의 배흘림이 뚜렷 ㆍ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영주, 13세기 초 - 외관이 장중하고 안정감이 있어 한국건축중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축물 - 주심포식,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기둥의 배흘림이 뚜렷함. - 내부의 주불인 아미타불이 일반적인 남향이 아닌 동향을 한 특수한 예의 건물 ㆍ수덕사 대웅전, 충남 예산, 13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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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측면의 가구조직이 한국건축의 구조미를 잘 나타낸 건물 - 주심포식, 단층 맞배지붕으로서 헛첨차와 우미량을 사용 ㆍ성불사 극락전, 황해도 해주, 1320년 경 - 고려 후기의 주심포식 건물 ㆍ심원사 보광전, 황해도 해주, 1374년 -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다포양식 건축물 ㆍ석왕사 응진전, 함남 안변, 1386년 -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다포샹식 건축물

2-4. 기타건축 ① 주거건축 ㆍ왕족과 상류계층은 중국식으로 의자, 탁자, 침상 등을 이용 ㆍ온돌구조가 삼국시대와 같이 북부지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서민주거에 전국적으로 널리 이용됨. ㆍ풍수지리사상의 영향 - 음양오행설에 의한 풍수지리 사상이 주택의 입지와 규모에 영향 - 전국토가 산지지형이므로 음양의 조화를 위해 단층의 주택을 지어야한다고 강조 ㆍ고려말기 부터는 유교의 영향으로 주택내에 가묘, 즉 사당을 설치

② 탑파건축 ㆍ초기에는 신라 및 백제의 탑파양식을 계승하고 중기에는 절충양식을 건설하고 후 기에는 전형적인 고려 ㆍ석탑형식을 완성 ㆍ석탑 -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전북 김제, 11세기경 - 원정사 팔각 9층 석탑, 강원 평창, 1000년 경 - 개심사지 5층 석탑(1010년), 경북 예천 - 마곡사 5층 석탑, 충남 공주, 14세기 경 - 남계원지 7층 석탑, 서울 경복궁내 - 흥국사지 석탑, 황해 개성 - 보원사 5층 석탑, 충남 서산 ㆍ목탑 - 현존하는 유적이 없음 ㆍ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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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5층 석탑, 경기 여주

③ 특수형 석탑 ㆍ경천사지 10층 석탑, 서을 경복궁내, 1349년 - 탑신의 옥개석 하부에 목탑의 기법인 다포양식의 공포구조을 조각한 석탑 ㆍ월남사지 3층 석탑, 전남 강진, 12세기 - 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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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주요 현존 목조건축물 비교

건립시기

봉정사 극락전 - 1363년 옥개 중수 - 12C 말 또는 13C 초

전체 규모

- 정면 3칸, 측면 4칸

외부 입면 천장 및 바닥 가구 구조 공포 및 지붕 기둥 주두 및 소로 첨차

대공 도리 장혀

-

중앙칸에 널문 양협칸에 붙박이 살창 연등천장 바닥은 전을 깔았음. 1고주 7량가 주심포계 맞배지붕 제2제공, 외1출목

-

부석사 무량수전 1376년 중수 13C 초반 정면 5칸, 측면 3칸 전후 퇴간형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

- 1308년 건립

- 고려말

- 1377년(?)

- 정면 3칸, 측면 4칸 - 전후 퇴간형

- 정면 3칸, 측면 2칸

-정면 3칸, 측면 1칸

- 井자형 살창

- 3매씩 결합된 빗살문

- 판문

-

-

연등천장 바닥은 전을 깔았음. 2고주 9량가 주심포계 팔작지붕 제2제공, 외1출목

연등천장 우물마루 2고주 9량가 주심포계 맞배지붕 초제공, 외1출목

- 배흘림 원기둥

- 강한 배흘림 원기둥

- 강한 배흘림 원기둥

- 내반곡형 굽

-

-

단일부재의 굽받침 살미첨차의 사용 헛첨차-보아지 사용 사절형, 초새김형 행공첨차

-

고주 사이 대들보 항아리형 단면 고주-외주 사이 툇보 툇보머리 쇠서형 우미량, 초방

- 十자형으로 중첩 - 직절형 - 초새김형(쌍S형)

강릉 객사문

단일부재의 굽받침 十자형으로 중첩 사절형 초새김형(쌍S형) 행공첨차

- 고주 사이 대들보 - 내부 고주와 외진 평 - 항아리형 단면 주에 걸친 대들보 - 고주-외주 사이 툇보 - 항아리형 단면 - 툇보머리 쇠서형 - 다수의 뜬보(초방) - 山형 대공 - 人자형 대공 : 종도리 에서 처마도리까지 연 결 - 굴도리 - 중도리만 납도리 사용 - 단장혀 - 뜬장혀 -

人자형 대공 굴도리 단장혀 뜬장혀

- 人자형 대공 - 파련대공 - 포대공 -

굴도리 하중도리만 납도리 단장혀 뜬장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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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량가 주심포계 맞배지붕 초제공, 외1출목 강한 배흘림 원기둥 민흘림 각기둥 단일부재의 굽받침 살미형 첨차(초기형) 헛첨차 - 창방뺄목 사절형, 초새김형 행공첨차

-

대들보 항아리형 단면 보머리 쇠서형 우미량

-

중앙칸에 세살문 양협칸에 붙박이 살창 연등천장 바닥은 전을 깔았음. 5량가 주심포계 맞배지붕 초제공, 외1출목

- 배흘림 원기둥 -

살미형 첨차 헛첨차 사절형, 교두형 포대공은 十자형

- 대들보 - 밑을 굴린 사각 단면 (항아리형의 변형)

- 판대공 - 화반대공 - 포대공

- 人자형 대공 - 포대공

- 굴도리

- 굴도리

- 단장혀 - 뜬장혀

- 단장혀 - 뜬장혀


Ⅳ. 조선 건축 (14세기∼19세기) 1. 조선 건축의 이해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조선시대에 지어진 상대적으로 많은 숫자의 건축물들 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고 있는 대부분의 조선시대 건축물은 16세기 말에 있었던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조선시대 건축은 문화적이며 건축적인 발전에 따라, 초기와 중기, 후기의 3개시기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남대문

무위사 극락전

조선시대 초기에 건축은 유교라는 새로운 정치적 지도 이념과 함께 조선시대 이 전 왕조의 문화적 유산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발전되었다. 조선 왕조는 유교를 숭상 하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불교 사찰 건축의 건 설은 급격하게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유교의 제례 시설인 사당과 향교나 서 원 등은 활발하게 지어지고 있었다.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반적으로 좀 더 단순한 공포 구조 형식인 주심포 양식이 다른 양식들에 비해 선호되었다. 그러 나 다포 구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일부 건축물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무위사(無爲寺) 극락전, 송광사 국사전 및 하사당(下舍堂), 도갑사(道岬寺) 해탈문 (解脫門) 등은 조선시대 초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들이다. 서 울의 남대문과 봉정사의 대웅전 그리고 개성의 남대문 등은 조선시대 초기에 지어 진 대표적인 다포 양식의 건축물들이다. 조선시대 중기인 1592년부터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조선의 국가 적 재원은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파괴를 복구하고 재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일련의 외국과의 전란 이후에 익공 양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양식이 조선시대 중기에 발생하였다. 익공 양식은 주 심포 양식에 비하여 더 단순하고 더 경제적인 건축 양식으로서 반복되는 전쟁과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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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충돌로 인해 국가 재정상의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조선 사회의 상황 에 적합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궁궐 건축과 중요한 사찰 건물들은 계속해서 더욱 장식적인 다포양식으로 지어졌다.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통도사 금강계단, 법주 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등은 조선시대 중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다포 양식의 건축물들이다. 일반적인 건물들은 익공 양식으로 지 어졌는데 조선시대 중기에 익공 양식으로 대표적인 건축물에는 종묘의 정전과 영녕 전 등이 있다.

창경궁 명정전

법주사 팔상전

덕수궁 중화전

동대문

조선시대 후기는 제 21대 왕인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왕위에 오르면서 부터 시작된다. 조선왕조가 문화적으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영조가 즉위한 이후인 1725년부터였다. 이 시기에 실학(實學)이라고 부르는 좀더 실천적인 학문을 추구하던 일단의 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실학은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과 학적 연구를 진작시켰으며 18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민족주의를 자각시키기 시작 하였다. 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조선에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건축 분야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침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모든 예술 분야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은 과도하고 피상적인 장식의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후기 건축물에는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덕수 궁의 중화전(中和殿)과 동대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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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초기에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수도인 한양은 한강변에 건설되었다. 한양을 둘러싸는 18㎞의 성벽은 8개의 문을 설치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한양의 도시계획은 아름다운 언덕과 산에 의해 둘러싸 인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되었다. 도시의 기본적인 가로 구성을 위하여 일반적으로 격자형의 가로 체계가 적용되었으나 격자형 체계는 기존 지형과 많은 자생적인 곡선 도로, 우회로, 막다른 길에 의해 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한양의 남 문인 남대문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많은 현존하는 문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위엄 있는 것이었다. 남대문은 1444년에 다시 지어졌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고 보수되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 지어졌던 원래의 남대문이 갖고 있었던 비례와 세부 표현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출입문이 설치된 육중한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지붕의 누각은 남대문을 우아하고 기념비적으로 보이도록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지어졌던 대부분의 궁궐은 임진왜란 중에 파괴되었다. 서울에 현존하 고 있는 대부분의 궁궐의 목조 건축물들은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에 다시 지어진 것 들이다. 예를 들어 정전이나 남쪽 정문과 같은 궁궐 내의 중요한 건축물들은 대부 분 다포 양식을 사용하여 지어졌다. 반면 익공 양식은 주택이나 정자와 같은 좀 더 일반적인 건물에서 사용되었다. 궁궐 건축에서 주심포 양식이 사용된 예는 거의 없 었다. 궁궐 건축의 문에서는 우진각 형식의 지붕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중요한 건물의 지붕은 주로 팔작지붕 형식이었다. 용이나 다른 동물들의 머리 모양 을 한 자기로 만들어진 장식적인 조각상들이 용마루 끝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유 명한 중국 소설에서 유래한 점토 조각인 잡상(雜像)이 악귀들로부터 건물을 보호하 기 위하여 일렬로 귀마루에 늘어서 있었다. 중요한 건물의 천장은 바둑판과 같은 형태의 널판으로 마감되거나 아주 장식적인 닫집으로 마감된 우물천장이 사용되어 지붕 구조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공포와 천장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고, 보 와 기둥들이 만나는 곳은 화려하게 조각된 양봉(樑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 건축 이외에도 통치와 교육, 교통, 군사적 목적을 위한 많은 공공건물들이 지어졌다. 유교의 제례 시설인 문묘는 서울 구도심의 동쪽 부분에 위 치하고 있었고 1601년에 다시 지어졌다. 강학 공간과 기숙사로 이루어진 명륜당은 1606년에 다시 지어졌고 그 이후에도 계속 수리되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유교를 가 르치기 위한 지방의 사립학교였던 서원이 건립되었다. 강학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과 제례를 위한 사당인 대성전, 그리고 유학자들을 위한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등 의 건축물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조선 왕조의 왕실 제례 시설인 종묘는 경복궁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종묘는 여전히 수많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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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자리 잡고 있다. 넓은 나무 숲 속에 위치한 종묘의 배치는 질적으로 매우 독 특한 공간감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의 주택들은 16세기 이후에 그 전형적인 형식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주택 건축은 그 초기에 부엌이 별도의 건물로서 독립해 있었으나 인구가 줄어들고 경제적인 상황이 점차로 악화되면서 온돌을 통해 거주 영역을 난방 하는데 사용하 는 아궁이와 부엌이 결합되었다.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택은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졌고 많은 장식적인 요소를 특 징으로 하고 있었다. 상류층 주택의 평면 형태는 물리적 기능에 근거하여 결정되기 보다는 가족과 사회생활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 서 주택의 형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은 사회문화적 인 요인이었다. 물리적인 요인은 2차적이었다. 주택 내에서의 활동 영역은 위계적 인 인간관계와 성별의 차이에 의하여 명확하게 구분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하류 층의 주택은 일반적으로 통나무로 만들어졌고 목재로 만든 장식적인 처리가 적었 다. 그리고 하류층의 주택은 대부분 초가지붕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도시로부터 강제로 추방되어 멀리 떨어진 산악지대로 옮겨 가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찰 건물들의 배치는 지형과 자연적인 주변 환경에 의해 주로 결정되었다. 사찰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좌우의 요사 그리고 누각은 사찰 경내의 중앙에 있는 안마당 주변에 건립되었고 다른 건물들은 대지의 기존 지형에 순응하는 위치에 세워졌다. 대부분의 불교 사찰들이 처음 지어진 것은 주로 통일신 라시대와 고려시대 초기였다. 그 이후로 사찰의 일부 건물들이 다시 지어졌고 지속 적으로 개축되고, 수리되었다. 이러한 사찰 건물들의 대다수가 조선 시대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현존하고 있는 사찰 건축들은 조선시대 동안의 사찰 건축의 역사 적 발전 과정을 어떠하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정원과 조경은 불규칙성, 비대칭성, 곡선, 구불구불한 형태, 신비함과 자연에 대한 모방과 같은 완 전히 도교적인 개념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자연의 일부 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이 오랜 기간동안 한국인들 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건축은 결코 건물 그 자체 의 형식적인 완결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주변의 경관까지 확장된 적이 없었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 정원은 한번도 주택을 위한 배경으로 생각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주택 비원

이 정원을 위한 배경으로 생각되었다. 창덕궁 뒤쪽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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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한 조선왕조의 전형적인 왕실 정원인 비원(秘苑)은 외부로부터 격리된 넓은 경관 위에 만들어졌다. 비원에는 많은 숫자의 정자들이 정원에 있는 연못과 시내를 따라 위치하고 있다.

2. 조선 건축의 유형별 정리 2-1. 목조건축 양식 ① 개관 ㆍ고려시대의 목조건축 수법을 계승 발전시킴 ㆍ주심포양식과 다포양식을 지속적으로 사용 ㆍ이후 우리나라 독자적으로 익공양식을 개발하여 사용

② 다포양식 ㆍ가장 널리 사용된 공포양식 ㆍ궁궐의 정전이나 사찰의 주불전 등의 주요건물에 사용 ㆍ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공포양식의 장식적이고 화려해짐 ㆍ주요 건축 실례 - 남대문(1867년), 동대문(1869년) - 경복궁 근정전(1867년), 창덕궁 인정전(1804년) - 창경궁 명전전(1616년), 덕수궁 중화전(1908년) - 화엄사 각황전(1703년), 금산사 미륵전(1635년) - 통도사 대웅전(1645년), 봉정사 대웅전(조선초)

③ 주심포양식 ㆍ조선시대 초기에만 주로 사용되고 중기이후로는 널리 사용되지 못함. ㆍ고려시대 주심포양식과는 달리, 다포양식과 마찬가지로 주두와 소로의 굽면은 사 면이며 굽받침 없음. ㆍ건축실례 -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경북 영천, 조선초 - 송광사 국사전과 하사당, 전남 승주, 조선초 - 무위사 극락보전, 전남 강진, 1746년

④ 익공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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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선시대 초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어 사용된 공포양식 ㆍ향교, 서원, 사당 등의 유교 건축물에 주로 사용 ㆍ궁궐이나 사찰의 침전, 누각, 회랑 등 주요건물이 아닌 부차적 건물에 주로 사용 ㆍ건축실례 - 오죽헌, 강원 강릉, 1536년 - 경복궁 경회루, 서울 1867년 - 청평사 회전문, 강원 춘천, 1557년 - 종묘 정전 및 영령전, 서울, 1608년 - 서울 문묘 명륜당, 서울, 1601년 - 옥산서원 독락당, 경북 월성, 1532년

2-2. 도성 및 읍성 계획 ① 도성계획 ㆍ1394년(태조3년) 한성에 정도한 이래 조선왕조 500년간 지속 ㆍ한성 도성계획의 특징 -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명당의 입지에 정도 -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여 궁궐을 중심으로 계획 - 한성의 자연지형을 우선으로 하여 중국식 도성계획 기법을 부분적으로 적용 - 기하학적, 정형적인 중국의 도성계획과는 달리 한성의 도성계획은 자연지형에 따른 불규칙적 형태 - 전체적인 가로망은 우회로와 불규칙한 곡선로로 구성 ㆍ중국식 도성계획 기법의 적용 실례 - 좌조우사의 적용 :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 직단을 배치 - 전조후시의 적용 : 궁궐 앞쪽에 6조의 관아를 배치. 방리제의 적용. 도성 중심 부의 일부 가로망은 격자형을 기본으로 함. ㆍ성곽계획 - 도성의 경계에는 지세에 따라 단형으로 성곽을 축조 - 근교의 주요산에는 북한산성, 남한산성 등의 산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 - 주요지점에 도성의 출입구로서 사대문과 사소문을 설치 - 사대문 :

동쪽(흥인지문, 일명 동대문, 현존) 서쪽(돈의문) 남쪽(숭례문, 일명 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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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숙청문) - 사소문 :

동북쪽(홍화문) 동남쪽(광희문) 서북쪽(창의문) 서남쪽(소덕문)

- 남대문, 서울, 1448년 중건 : 증층 우진각 지붕으로 다포양식 목조건축물 - 동대문, 서울, 1869년 : 중층 우진각지붕의 다포양식 건축물

② 읍성계획 ㆍ조선시대에는 행정상 중요한 지점에 읍성을 국방상 중요한 지점에 산성을 설치 ㆍ읍성의 계획기법 - 각도의 중요한 읍성에는 왕의 위패를 보관, 조정의 파견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를 반드시 설치 -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를 읍성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배정하고 객사의 전면에 광 장을 형성 - 서쪽에 문관이 사용하는 본부향청을 배치하고 동쪽에 중영, 훈련원, 군기고 등 을 배치 - 향교 및 문묘는 약간 떨어져 한적한 곳에 배치 ㆍ수원성, 경기 수원, 1794~96년(정조 18~20년) - 임진왜란의 경험과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서구식축성법을 참고, 동양에서 가장 발달된 형식으로 축성 - 실학사상에 따라 건축의 규격화 계획적인 시공, 근대화 공법 등을 시도 - 정약용 등의 당시 실학자들이 축성과정에 참여 - "화성성역의궤(1796년)"을 통해 당시의 공사상황을 자세히 기록 - 성벽일부와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 화서문, 방화수류정 등의 건축물이 현존

ㆍ완산성, 전북 전주 - 격자형 가로망을 기본으로 하여 곡선형 가로망을 구성 - 음성 성곽의 정문인 풍납문이 유명하며 전체 읍성의 평면형은 방형형태 ㆍ낙안읍성, 전남 승주 - 관에 의해 계획된 한국 읍성 마을의 전형적인 실례 ㆍ해미읍성, 충남 서삼 ㆍ청주성, 충북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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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궁궐건축 ① 건축개요 ㆍ조선시대 궁궐은 왕실의 존엄성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화려하게 건 축 ㆍ중국의 궁궐건축의 영향을 받음 ㆍ조선시대의 궁궐건축은 정무공간, 생활공간, 정원공간의 세 영역에 의해 구성 ㆍ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 등의 4대궁이 현존

② 경복궁 ㆍ1395년(태조3년) 창건, 1863~70년(고종2~7년) 재건 ㆍ한국의 궁궐 중 가장 대규모로서 한국의 궁궐건축을 대표 ㆍ정전등의 주요 건물은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하고 부속건물과 정 원은 비대칭적으로 자유스럽게 배치 ㆍ정문인 광화문과 정전인 근정전 등 주요한 건물과 회랑은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 우대칭으로 배치 ㆍ정원공간으로 방지와 경회루, 향원지와 향원정 등이 있음. ㆍ주요건물 - 근정전 : 다포양식,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건물로서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 가 장 대규모이며 조선후기의 대표적 건물 - 경회루 : 평면구조, 칸수, 기둥수, 부재길이 등을 주역의 이론에 의거하여 건축 한 건축물로서 장비의 중앙에 위치한 익공양식의 2층 누각 건물 - 향원정 : 한국건축물로서는 예외적으로 평면이 6각형인 정자 건물 ㆍ기타 건물 - 편전인 사정전과 만춘전, 침전인 강령전과 교태전, 내전인 자경전과 수정전 등 이 있음

③ 창덕궁 ㆍ 태종 5년 창건, 광해군초 재건 ㆍ일반적으로 평지에 건설된 다른 궁궐과는 달리 경사지형에 건물들을 자유스럽게 비정형적으로 배치 ㆍ창덕궁의 후원인 비원은 한국의 정원 중 가장 아름다운 정원 ㆍ주요건물 - 인정전, 1804년 :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다포양식의 중층 건물이며 건물양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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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과 유사하나 근정전에 비해 단정하고 고전적인 인상 - 돈화문 : 창덕궁의 정문으로서 중층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 ㆍ기타건물 - 편저인 선정전과 내전인 대조전, 희정전 등이 있음

④ 창경궁 ㆍ1483년(성종 14년) 창건, 1616년(광해군 8년) 일부재건 ㆍ현존하는 궁궐중 시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궁궐 ㆍ정전인 명정전을 비롯한 주요건물들이 일반적 궁궐과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을 한 독특한 배치의 궁궐 ㆍ주요건물 - 명정전, 1616년 :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단층 팔작지붕 의 다포양식 건축물 - 통명전 : 내전 건물로서 지붕의 용마루가 없는 특이한 이익공 양식의 건물 - 홍화문, 1616년 : 창경궁의 정문으로서 중층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 건축물

⑤ 덕수궁 ㆍ1908년 중건, 원래는 행궁이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정궁으로 사용 ㆍ조선말기에 많은 양식 건축물이 세워져 본래의 상태를 추정하기가 곤란 ㆍ주요건물 - 중화전, 1908년 : 다포양식으로서 창건 당시에는 중층이었다가 재건 당시 단층 으로 규모가 축소됨 - 석어당, 1908년 : 궁궐의 건물중 정전 이외의 건물로는 드물게 2층 건물 형식을 취함 - 기타 건물 : 즉조당, 석어당 등이 있음

⑥ 경희궁 ㆍ원래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며 일제 때 대부분의 전각들이 옮겨 건설되거나 헐림 ㆍ주요건물 - 홍화문, 서울, 1616년 : 경희궁의 정문 - 승정전, 서울, 1616년 : 경희궁의 정전

2-4. 불사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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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건축개요 ㆍ고려시대의 가람배치 형식을 더욱 자유로운 형식으로 발전시킴 ㆍ초기엔 평지가람도 조영되었으나 후기에는 숭유억불 정책,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 으로 주로 산지가람을 조영 ㆍ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필요한 거물을 지형에 따라 적당한 곳에 자유스럽게 배치 ㆍ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국 고유에 가람배치 형식이 완성됨.

② 가람배치 실례 ㆍ평지가람 실례 - 송광사, 전남 순천 :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로서 대웅전, 국사전, 하사당 등의 건물로 구성 - 통도사, 경남 양산 : 삼보사찰 중 불보사찰로서 대웅전 내부에 불상이 없고 대 웅전 뒤쪽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치한 금강계단이 예불의 대상 - 기타 : 전북 김제 금산사, 충북 보은 법주사, 충남 부여 무량사 등 ㆍ산지가람의 실례 - 해인사, 경남 합천 :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로서 팔만대장경을 보관 - 기타 : 경남 하동 쌍계사, 충남 서산 개성사, 부산 범어사 등

③ 주요 사찰건물 ㆍ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경북 영천, 15세기경 - 건립시기가 고려말 또는 조선초로 추정되는 주심포양식의 건축물 ㆍ무위사 극락보전, 전남 강진, 15세기 중기 - 조선시대 초기 주심포양식의 전형적인 건물 ㆍ봉정사 대웅전, 경북 안동, 조선초 - 조선초의 다포양식 건물로 팔작지붕 ㆍ통도사 대웅전, 경남 양산, 1644년 - 다포양식의 건물로 정자형의 독특한 지붕을 지님

ㆍ중층건물 - 금산사 마륵전, 전북 김제, 17세기 경 : 다포양식의 3층 팔작지붕으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3층 목조불전 - 쌍봉사 대웅전, 전남 화순, 1690년 : 원래는 목탑이었지만 후에 대웅전 건물로 전용되다가 현재는 화재로 소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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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각황전, 전남 구례, 1703년 : 다포양식, 팔작지붕의 2층 건물로서 현존 하는 불전 중 가장 대규모 - 법주사 대웅보전, 충북 보은, 이조중기 : 다포양식, 팔작지붕의 2층 건물 - 마곡사 대웅보전, 충남 공주, 이조중기 : 다포양식, 팔작지붕의 2층 건물 - 무량사 극락전, 충남 부여, 이조중기 : 다포양식, 팔작지붕의 2층 건물

2-5. 유교건축 ① 개요 ㆍ조선시대에 들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건축이 절정기를 맞이 ㆍ한국의 유교 건축 중 가장 대표적인 건축형식으로는 향교 및 서원이 있음 ㆍ향교 및 서원 - 유교의 교육과 제례의식의 거행을 주 기능으로 하는 교육기관 - 향교는 국가에서 건립한 관학이며 서원은 유학자가 건립한 사학 - 조선시대 전국각지에 건립, 전반적인 건축형식은 상호유사. 공포양식은 간단한 익공양식을 주로 사용 ㆍ기타 종교 건축물 - 종묘 : 사직단, 주택의 사당

② 향교건축의 실례 ㆍ서울 문묘, 서울, 1398년(태조 7년)창건, 임진왜란후 재건 - 전묘후학의 배치로서 조선시대 향교 중 가장 대규모 - 대성전은 단층 팔작지붕, 다포양식의 건축물 - 명륜당은 맞배지붕, 익공양식 건축물 ㆍ나주향교, 전남 나주, 17세기 경 - 전묘후학의 배치로서 서울 문묘와 배치가 매우 유장수향교,

전남 장수, 1407년

창건 - 전학후묘의 배치 - 동무와 서무가 없고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 뒤에 오는 특이한 배치 ㆍ여천향교, 경북 영천, 1590년 창건 - 전학후묘의 배치 ㆍ경주향교, 경북 경주 - 전학후묘의 배치 ㆍ청도향교, 경북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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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렬배치

③ 서원건축 ㆍ소수서원, 경북 영주, 1542년 - 최초의 서원으로서 매우 자유스러운 배치를 취함 ㆍ옥산서원, 경북 월성, 1532년(중종 27년) - 회제 이언적이 설립한 사원 - 이언적의 별서인 독락당은 익공양식 건물로 주위의 자연환경을 잘 이용한 뛰어 난 조원계획으로 유명 ㆍ도산서원, 경북 안동, 1557년 - 퇴계 이황이 설립한 한국 최대규모의 서원 - 강당인 전교당은 단층 팔작지붕의 굴도리 집 ㆍ도동서원, 경북 달성, 1604년 ㆍ병산서원, 경북 안동, 1572년 ㆍ필암서원, 전남 장성, 1590년

④ 종묘 및 사직단 ㆍ좌조우사의 법칙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 을 각각 배치 ㆍ종묘, 서울, 1608년 중건 -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일종의 국가적 사앙 - 정전은 익공양식으로 한국건축물중 단일건축물로는 길이가 가장 긴 건물 - 영령전은 익공양식으로 형태와 기능이 정전과 유사 ㆍ사직단,서울 - 토지의 신인 사와 오곡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

2-6. 주거건축 ① 개요 ㆍ이전의 시대와는 달리 직접적인 유구를 통하여 고찰할 수 있음 ㆍ건축법규에 의한 건축규제 - 주택의 사치와 대규모화로 인해 신분계급에 따라 대지와 가사의 규모를 통제 - 경국대전, 이조실록 등의 서적에 당시의 건축규제 내용이 기록되어 전래 ㆍ풍수지리 사상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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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음양오행설에 의한 풍수지리 사상이 영향 - 주택의 입지, 배치, 규모 등에 영향 ㆍ유교사상의 영향 - 주택 내에 사당을 설치 - 주택 내에서 남녀 또는 신분계급의 위계성에 따라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

② 건축실례 ㆍ연경당, 창덕궁 비원, 1828년 -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내에 사대부 주택을 모방해 지은 왕가의 살림집으로서 99 간 규모 - 당시 양반의 주거양식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주거건축의 대표적 실례 -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채 건물과 서재인 선향재와 별당인 농수정 들의 건물 로 구성 ㆍ향단, 경북 월성 양동마을 -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한 건물로 이루어져 2개의 중정을 지닌 용자 형 평면을 취한 양반주택 ㆍ오죽헌, 강원 강릉, 16세기 초 - 율곡 이이의 출생가의 별당 건물로 조선의 대표적인 익공양식 건축물 - 고산 윤선도의 고택으로 60칸 규모의 양반주택 ㆍ하회의 충효당과 양진당, 경북 안동 하회마을 ㆍ의성 김씨 종가, 경북 의성, 조선 중기 ㆍ선교장, 강원 강릉, 19세기 초 ㆍ임경당, 강원 강릉, 19세기 초 ㆍ운조루, 전남 구례, 1776년 ㆍ동춘당과 제월당, 충남 대덕, 17세기 말경

2-7. 기타건축 ① 탑파건축 ㆍ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계승, 세부형식에만 부분적인 변화 보임 ㆍ석탑 - 낙산사 7층 석탑, 강원 양양, 1468년 - 신륵사 다층 석탑, 경기 여주, 1472년 ㆍ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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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봉사 3충 목탑, 전남 화순, 17세기 말 : 후에 대웅전 건물로 사용되다가 현재 는 화재로 소실 - 법주사 팔상전, 충북 보은, 17세기 전반 : 5층 목탑으로서 조선시대의 목탑으로 는 유일하게 현존 ㆍ특수형식탑 - 원각사지 10충 석탑, 서울 파고다 공원 내, 1746년 - 탑파양식이 고려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유사하여 대리석으로 축조

② 누각 및 정자건축 ㆍ조선시대에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에 누와 정을 건축 ㆍ평소에는 유람상춘의 장소로서 이용하며 전시에는 장수들의 지휘소로서 이용 ㆍ건축실례 - 경남 진주 촉석루, 경남 밀양 영남루 - 충북 제천 한벽루, 전북 정읍 피향정 - 전남 여수 진남관, 제주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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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근대 건축 한국에서 전통적인 목조건축 형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형식의 건축이 시작된 것은 1876년 개항(開港)이후의 일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난 한국 건축에 서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흐름으로 요약, 정리될 수 있다. 첫 번째는 한국의 전통적인 목조건축에서의 변화였다. 조적조 건축의 등장과 다 층건축물의 등장이 그것이다. 한국의 전통건축은 목구조에 기초하고 있으며 벽돌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온돌을 사용했던 한국 전통 목조건축에서는 목구조의 재료 와 구법의 특성상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다층 건축이 거의 존 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항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 발전에 따른 도시화와 서양 건축의 도입으로 도심부의 중심 가로를 중심으로 조적조 건축물과 상업적인 용도의 2층 한옥상가 건축물이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양인 선교사와 외교관 들이 한국 내에 거주하게 되면서 한옥이 그들의 생활 관습에 적합하도록 변형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서는 일반화되지 않았던, 벽돌 사용이 확대되었다. 구 미국공사 관(舊 美國公使館) 건물은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서양인들에 의해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지방에서는 개항이후 서양종교가 전파되면서,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와 구 조를 유지하면서 서양식 종교기능을 수용 하는 새로운 유형의 교회건축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성공회 강화성당(聖公會 江 華聖堂)이 그 대표적인 건축물라고 할 수 있는데, 전통건축의 구법을 유지하면서 건물의 출입구방향을 횡축에서 종축으로 변경하여, 서양의 전통적인 교회 평면구 성공회 강화성당

성인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및 고측창

(高側窓) 등을 구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서양의 초기 기독교건축에서 로마의 바 실리카 양식을 변형하여 바실리카식 교회 양식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한국에 온 서양인 신부나 기술자 또는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의 등장이다. 프랑스인 신부나 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대도시 를 중심으로 지방에 지어졌던 한옥 성당과는 구분되는 명동성당(明洞聖堂), 전동성 당(殿洞聖堂), 정동교회(貞洞敎會) 등의 건축물을 지어나갔다. 또한 각국의 외교공 관 건축은 각 나라에서 온 건축기술자들에 의하여 지어졌다. 영국공사관(英國公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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館)이나 벨기에 영사관 등이 당시에 지어 졌던 외교공관 건축물 중에서 현존하는 예이다.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은 그들이 서양건축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서 양의 역사주의 건축양식을 모방하는 건축 이 주를 이루었다. 구 대한의원본관(舊 大韓醫院本館), 구 공업전습소 본관(舊 명동성당

工業傳習所 本館) 등이 당시에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현존하는 건축물의 예로서 구 공업전습소 본관은 목조로 서양건축을 모방하여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서양건축의 동아시아적 변용의 예가 된다. 세 번째는 1897년 수립된 대한제국(大 韓帝國) 정부와 민간에서 지은 서양식 건 축물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근대국가건설 을 지향하며, 적극적으로 서양건축을 도 입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덕수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서구건축을 적극 도입 하였는데, 정관헌(靜觀軒)과 석조전(石造 덕수궁 석조전

殿) 등이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은 대표적

인 서양식 궁궐 건축물이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입장은 민간차원에서 추진한 독립 문(獨立門) 건설을 적극 지원한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을 비롯한 외세에의 독 립과 계몽운동을 위한 민간단체였던 독립협회(獨立協會, 1896∼1899)에서 주도하여 건설한 독립문은 그 건설과정에서 한국인 목수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실질 적인 실무 책임자로서 참여하였다. 심의석은 덕수궁의 석조전 공사를 감독하기도 하였으며 전통 목수로서 서양 건축기술을 배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다양하게 전개되던 한국 건축에서의 변화는 1910년 일본의 한국병합으로 서양건 축의 다양한 영향이 사라지고 일본에 의한 일방적인 영향으로 진행되었다. 1945년 한국이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될 때까지 일본인에 의해 많은 관공서와 은행, 학교, 상업 건축물이 지어졌다. 식민지 지배 전반기는 식민지배시스템의 구축을 위한 관 공서 건축인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 廳舍)를 비롯하여 조선은행(朝鮮銀行), 경성정차장(京城停車場), 경성부청(京城府廳) 등이 서양의 역사주의 양식 건축 중 고전주의 양식 건축으로 지어졌다. 식민지배가 안정기에 접어든 1920년대 후반부터 한국건축에서 서양의 모더니즘 건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에 들어서는 이러한 건축경향이 철근콘크리트의 보급과 함께 모더니즘 경향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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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관공서는 물론 민간건축에서도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방회계 과(官房會計課)에 의해 건축된 관공서 건축물인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과 총독부 상공장려관(總督府商工獎勵館) 그리고 적십자사경성본부(赤十字社京城本部) 등의 건축물은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대표적인 모더니즘 경향의 건축물로 1930년대 한국 근대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한국인 건축가인 유상하(劉相夏)에 의한 오원석 병원(吳元錫 病院)이 지어졌고, 박길룡(朴吉龍)에 의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등 이 지어졌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한국인 건축가가 지은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물 이었다. 식민지배 전반기는 관변 건축가와 일인자본의 후원 하에 일본인 건축가에 의한 양식주의 건축이 한국건축계를 주도하였으나, 식민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조선 인 건축자본의 형성은 한국인건축가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인 박길룡(1898∼ 1943)은 1932년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개 소하였고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과 간송 미술관과 같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박 동진(朴東鎭, 1899∼1980)은 석조 건축물 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한국 건축에서 전 통적인 석축 기법을 응용하여 고려대학교 본관(高麗大學校 本館), 중앙고등학교 본 화신백화점

관(中央高等學校 本館)과 같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김순하(金舜河, 1901∼1966)는 전라남도청 평의원 회의실(全羅南道廳 評議員會議室)과 같은 모더니즘 경향의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이외에도 1930년대에 는 많은 한국인 건축가들이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서 김세연(金世演, 1897∼1975)의 구 경교장(舊 京橋莊)과 강윤(姜沇, 1899∼1974)의 이화여자대학교 본관(梨花女子 大學校 本館) 등은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하였거나, 설계에 참여한 건축물의 예이 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화로 초래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은 무 르익어가던 모더니즘에 장애가 되어, 민간 차원의 건축 활동은 급속히 위축되어 갔 다. 태평양전쟁의 종식과 함께, 1945년 한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나 미국과 소 련의 진주에 의한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그리고 1950년에 시작된 한국 전쟁으로 한국의 도시와 건축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전후 남북한은 상이한 이데올로기 체 제하에서 체제이데올로기가 반영되는 상이한 건축을 만들어왔다. 철원 노동당사(鐵 原 勞動黨舍)는 한국 전쟁 동안 파괴된 채 남북한의 접경지대인 비무장지대에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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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남아있는 건축물로서 전쟁으로 인한 당시의 파괴와 상처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 전후 복구 사업이 본격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서구 의 국제주의(國際主義) 건축양식이 직접적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한국인 건축가 들은 설계사무소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추구와 함께 한국 전통 건축을 근대적인 언어로 재해석하는 실험적 시도를 시작하였다. 한 국 건축에서 1960년대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시각에서 보자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시기는 한국인 건축가가 서 양의 모더니즘 건축을 각자의 방식으로 모방하기도하고 재해석하기도 하는 실험적 인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에서 는 당시 한국인 건축가들이 추구했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이 잘 드러나 있다. 정 인국(鄭寅國,

1916∼1975)의

국립중앙관상대(國立中央觀象臺),

김정수(金正秀,

1919∼1985)의 구 성모병원(舊 聖母病院), 이희태(李喜泰, 1925∼1981)의 절두산 복자기념성당(切頭山福者記念聖堂)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건축 기술이나 재료 등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의 상 황에서 모더니즘 건축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한국인 건축가들의 강한 의지와 한국 전통 건축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이 묻어나는 이 시기 한국 건축의 대표적인 건축물 들이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건축가 중에서 한국의 현대건축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건축가는 김중업(金重業, 1922∼1988)과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이었다.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김중업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하였고, 일본에 서 공부한 김수근은 자유센터와 같은 건물을 대표작으로 남겼다. 이들은 1980년대 까지 활동하면서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세워 나갔다. 김중업과 김 수근 모두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근대적인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었으나 그 표현 의 방식은 서로 달랐다. 오히려 서로 다른 표현의 방식이 한국 현대 건축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대사관

자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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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 한국건축사 보충자료 -


Ⅰ. 공간 분석 사례 1. 추사고택 1-1. 추사고택 개관 - 종목 : 시도기념물 24호 - 명칭 : 김정희 선생 유적(金正喜先生遺蹟) - 소재지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외 13필

조선 후기 학자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유적으로 추사고택과 이 일대를 말 한다. 김정희는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로서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 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고증학과 금석학·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내었다. 헌종 6년(1840)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9년 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유배생활에서 돌아 와 아버지 무덤이 있는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1-2. 추사고택 공간 분석

가. 사랑채와 안채 : 남녀 공간의 구분 전통주택은 대개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있다. 이는 남녀간의 구별을 강조했던 유교사상에 기인한다. 추사고택은 안채와 사랑채간의 분리가 아주 뚜렷한 집이다. 건물이 아예 분리되어 있고 분리된 건물간의 성격이 아주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나. 사랑채와 안채 : 개방성과 폐쇄성 'ㅁ'자로 둘러쳐져 있는 안채는 폐쇄적이다. 반면 사랑채는 주변에 열려 있어 개 방적이며 더불어 그 영역이 주변으로 널리 확대되어 나가도록 되어있다. 비록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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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하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무관하게 놓여있지는 않다. 그 정도가 미약하긴 하나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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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증고택 2-1. 윤증고택 개관 - 종목 : 중요민속자료 190호 - 명칭 :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 -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 시대 : 조선 효종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 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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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 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뒤쪽에는 완만한 경 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 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一자형의 중문간채와 1칸 떨어져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자 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에 앞면 3칸·옆면 2칸의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그 왼쪽으로 윗방·안방을 두었다. 안방 앞면에는 4칸의 넓은 부엌을 돌출시켰다. 오 른쪽에는 건넌방과 마루방을 배치하였는데, 마루방 앞으로 안사랑방과 작은 부엌을 마당 쪽으로 달아내었다. 대청 양쪽의 각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서로 연결하고 있다. 대청 뒷면은 벽을 쌓고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였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높이 쌓아올린 축 대 위에 지었으며, 가운데에 2칸 사랑방을 배치하였다. 오른쪽에 대청이 있고, 왼 쪽에는 앞쪽에 1칸 마루방과 그 뒤로 부엌을 둔 작은 사랑방이 있다. 사랑방 앞으 로는 툇마루를 두고 뒤퇴에는 작은 마루방을 설치하여, 사랑방과 연결하면서 작은 사랑방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사랑마당 왼쪽에는 네모반듯한 연못을 파고 조그만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며 놓았다.

2-2. 윤증고택 공간 분석

가. 영역의 결합과 분리 : 건물군 한국 전통주택은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여러 개의 건물 은 서로 흩어져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묶여져 있기도 하다. 윤증고택은 크게는 사랑채, 사당채,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 또한 흩어져 있음과 동시에 서로 묶 여 있다.

나. 영역의 결합과 분리 : 담장 윤증고택의 경우 건물들이 나뉘고 묶이는데 있어 큰 특색이 있다. 건물들이 서로 묶이되 각 건물의 개성은 거의 유지된다는 점이다. 윤증고택에는 이런 특색을 만들 어내는 다양한 수법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담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법이다. 윤증 고택에서 담은 건물들을 밖에서 크게 둘러싸는 것이 아니라 나뉘어진 건물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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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놓여진다. 마치 필요한 부분만큼만 최소로 묶는 식이다. 이러한 특이한 묶이는 방식에 의해 각 건물들은 어느 정도 독립되어지게 된다. 그 만큼 각 건물의 개성 또한 유지될 수 있게 된다. 담 이외에 그 특색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수법들이 윤증 고택 안에 있다. 그 수법들을 찾아내는 것은 윤증고택을 보는 각별한 재미일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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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동수 가옥 3-1. 김동수 가옥 개관 - 종목 : 중요민속자료 26호 - 명칭 : 정읍김동수씨가옥(井邑金東洙氏家屋) -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814 - 시대 : 조선 정조

김동수의 6대 할아버지인 김명관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세운 집이다. 뒤쪽으 로 창하산이 있고 앞쪽에는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풍수지리 에서 명당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이루고 있다. 건물들은 행랑 채·사랑채·안행랑채·안채·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 과 바깥행랑채가 있고 바깥행랑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으로 ㄷ자형의 안행랑채를 배치하였는데 그 앞쪽으로 ㄷ자 평면 을 가진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우 대칭을 이루게 지어 좌우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는 특이한 평면을 갖추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 안사랑채는 김명 관이 본채를 지을 때 일꾼들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소박한 구조와 건축가의 독창성, 조선 기 사대부 가옥의 중후한 모습을 대체로 원형대로 잘 유지하고 있어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좋은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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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김동수 가옥 공간 분석

가. 담장의 역할 김동수 가옥에는 집 전체를 둘러치는 담이 있다. 이 담은 모양이 반듯하지가 않 다. 부분적으로 꽤 심하게 변형이 되어 들쑥날쑥하다. 집 전체를 둘러치는 담의 주 요 역할은 집안과 바깥세상을 구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동수 가옥의 담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변형된 가지 수 만큼 여러 가지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이 김동수 가옥의 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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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여창 가옥 4-1. 정여창 가옥 개관 - 종목 : 중요민속자료 186호 - 명칭 : 함양정병호가옥(咸陽鄭炳鎬家屋) -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 시대 : 조선시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 정여창(1450∼1504)의 옛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 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의 고조할아버지가 다시 지었다고 하며, 안채는 약 300년 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집의 터는 500여년을 이어오는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4개나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사랑채는 ㄱ 자 모양이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옆면을 따라가면 다시 중문이 있고 이 문 을 지나야 一자모양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는 아래방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 로는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다. 또 안채 뒤 따로 쌓은 담장 안에는 가묘(家廟)가 있 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랑채 앞마당에 꾸민 인공산이다.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엄격한 법도에 따라 아름다운 인공산을 꾸몄는데, 지금은 원래 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구조적 특성과 함께 살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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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4-2. 정여창 가옥 공간 분석

가. 영역의 분리 : 마당과 건물 한국 전통 주택은 여러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마당도 여러 개 로 나뉘어져 있다. 마당이 여러 개로 나뉘는 이유는 마당이 건물들과 담에 의해 둘러 싸여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둘러싸인 마당이 주변에 있는 다른 마당과 구분되어 서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눠진 마당과 그 주위의 건물로 구성된 한 단위의 공간을 소위 '영역' 이라 부른다. 그래서 한국 집은 보통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집 이 된다.

나. 영역의 통합 : 마당과 건물 한국 전통 주택은 영역과 영역이 만나는데 있어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영 역들이 완전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역들은 구분됨과 동시에 서로 합쳐 지기도 한다. 한국 전통 주택에는 이런 식의 '구분 과 동시에 통합'을 이끌어내는 수도 없이 다양한 수법들이 있다. 여러 개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정여창 가옥은 ' 구분'과 '통합'간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수법들을 들여다보기에 좋 은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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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손동만 가옥 5-1. 손동만 가옥 개관 - 종목 : 중요민속자료 23호 - 명칭 : 월성손동만씨가옥(月城孫東滿氏家屋)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23 - 시대 : 조선시대 초기

경주 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 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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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 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는 뒤편 정원에 수백년 묵은 향나무가 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 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 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종의 마루통로 형식으 로 꾸민 점 역시 특이하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 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 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행랑채는 앞면 8칸·옆면 1칸 크기로 대문을 포함하고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오 른쪽에 광 1칸이 있다. 대문 왼쪽으로는 마루방 1칸·온돌방 2칸·광 3칸이 순서대 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서백당)는 ㄱ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높은 단 위에 방과 마루를 두었 다. 사랑 대청을 사이에 두고 큰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사 랑방은 연이은 2칸 방 사이에 문을 두고 방을 나누거나 큰사랑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집은 작은 사랑방을 모서리에 배치하여 방과 방이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도록 꾸몄다. 둘레로 난간을 둘렀으며 대청에서 내 려다보는 후원의 경치가 운치 있다. 안채는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 3칸·부엌 3칸을 두고, 오른쪽에 건넌 방과 작은방·마루방을 두었다. 마루방은 사랑채의 작은 사랑방과 붙어 있으며, 대 청 끝에서 작은 사랑방까지 툇마루를 두어 일종의 마루통로로 쓴 것이 특징이다. 안방 천장은 다락으로 꾸몄고 대청 쪽으로 작은 창을 달았다. 또한 일부 둥근 기둥 을 사용한 점이 눈길을 끈다. 사당은 사랑 후원 뒤쪽 높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5-2. 손동만 가옥 공간 분석

가. 마당의 역할과 비중 : 큰 비중을 가진 마당 손동만 가옥의 마당은 주택 내에서 매우 넓은 영역과 비중을 차지하면서 건물군 과 대조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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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마당의 역할과 비중 : 여성을 위한 마당 'ㅁ'자로 둘러쳐져 있는 안채는 폐쇄적이다. 반면 사랑채는 주변에 열려 있어 개 방적이며 더불어 그 영역이 주변으로 널리 확대되어 나가도록 되어있다. 비록 분리 된다 하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무관하게 놓여있지는 않다. 그 정도가 미약하긴 하나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다. 마당의 역할과 비중 : 남성을 위한 마당 자고로 우리 조상들은 개방적이고 스케일이 큰 것을 남성들의 덕목으로 꼽았다. 이런 뜻을 사랑채에 면한 우측 마당이 담고 있다. 우측마당이 매우 큰 것이 그렇고 대문 가까이에 있으면서 밖에 열려있는 것이 그렇다. 남성들의 덕목으로 꼽는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조상을 잘 숭배하는 것이었다. 이런 뜻 또한 우측 마당이 가지 고 있다. 우측 마당에는 사당이 놓여 있다. 그것도 마치 사당이 마당의 주인 인양 중앙에 떡 버티고 있다. 이런 상황은 조상을 홀대 하지 않고 잘 받들고 있다는 메 시지가 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남성의 위신을 세워주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 측의 큰 마당이 하고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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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가정 6-1. 관가정 개관 - 종목 : 보물 442호 - 명칭 : 관가정(觀稼亭)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50 - 시대 : 조선시대 중기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 ∼1529)의 옛집이다. 언덕에 자리 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 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觀稼亭)’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온돌방, 부엌, 작은방들을 두었고 그 앞에 ㄷ 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살림을 하는 공간으로, 부엌, 안방, 큰 대청마루,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이 된다. 네모기둥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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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뒤쪽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워 조금은 웅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랑방과 누마루 주변으로는 난간을 돌렸고, 지붕은 안 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관가정은 조선 중기의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6-2. 관가정 공간 분석

가. 중심성과 개별성 : 중심이 되는 마당 관가정에는 중심이 되는 곳이 있다. 가운데 네모 모양으로 된 마당이 그 중 심이 될 수 있다. 이 네모 모양의 마당 주변을 따라 건물이 'ㅁ'자 로 놓여 있 다. 'ㅁ'자 건물 바깥쪽 둘레에는 또 다른 마당이 있고 이 마당 둘레로 담이 쳐져 있 다. 크게 보면 가운데에 중심을 두고 동심원의 켜가 만들어지는 꼴을 하고 있다.

나. 중심성과 개별성 : 4개의 다른 마당 'ㅁ' 자 건물 주변의 마당은 크게 넷으로 세분화된다. 모양만 그러는 것이 아니 라 성격도 세분화 되어진다. 'ㅁ'자 건물이 각기 다른 4개의 마당을 대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 할 수 있다. 전체로 보면 관가정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해서 바깥의 세상과 4개의 각기 다른 관계를 맺어 가는 식의 틀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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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독락당 7-1. 독락당 개관 - 종목 : 보물 413호 - 명칭 : 독락당(獨樂堂)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1 - 시대 : 조선시대 중기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 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 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 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 내 준다고 하겠다.

7-2. 독락당 공간 분석

가. 상대적 공간 : 단계에 의한 절차 독락당은 바깥에서 집안까지 단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있다. 집안까지 들어 가기 위해서는 절차를 거쳐야한다. 가장 앞에 냇가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해서 집안 중간 중간에 담과 문을 통하는 절차 등 여러 개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런 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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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계의 절차에서 '세상 을 멀리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일련의 절차가 되는 것이다.

나. 상대적 공간 : 여러 겹의 켜 독락당에서 절차들은 차례차례 순차적이다. 그래서 여러 겹의 켜를 연상 시킨다. 이런 식의 절차는 크고 두꺼운 성벽과는 아주 다른 개념이다. 한번에 강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그것도 은근하게 거른다고 할 수 있다. 독락당의 절차는 매 단계마다 수법이 모두 다르다. 마치 사람의 여러 가지 생리나 심리가 고려된 듯한 다양한 절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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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도동서원 8-1. 도동서원 개관 - 종목 : 보물 350호 - 명칭 :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 - 소재지 :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 시대 : 조선 선조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을 말한다. 도동서원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년(1607) 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 년(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있다. 좌우 끝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앞면엔 각각 작은 툇마루를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툇마루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제사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김굉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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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지붕과 공포를 쌓은 양식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 다. 앞면 3칸에는 각각 2짝씩 널문을 달았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맞담으로 구성하여 매우 아름답다.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8-2. 도동서원 공간 분석

가. 다양한 영역과 공간의 연결과 통합 : 영역의 다양성 도동서원에는 여러 개의 영역이 있다. 이 영역들은 담에 의해 둘러 싸여 있으며 각 영역과 영역사이에는 제법 높은 단들이 놓여 있다. 이들 담과 단들은 영역과 영 역 사이를 확실하게 경계 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각 영역들이 비교적 뚜렷 하게 구분된다.

나. 다양한 영역과 공간의 연결과 통합 : 축 도동서원에 있는 여러 개의 영역들은 하나로 통합이 된다. 도동서원에는 한 개의 축 선이 있다. 이 축 선을 따라 중요한 건물과 마당이 순차적으로 그리고 일렬로 나란히 놓여 있다. 크게 보면 여러 개의 영역들이 한 개의 축선 상에 매달려 의지 하고 있는 꼴이 된다. 그래서 여러 영역들의 ‘중심 축’이 된다. 여러 개의 가지 들이 하나의 큰 줄기에 의해 통합되는 것처럼 여러 영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축 선이 되는 것이다. 축 선은 여러 개의 영역들을 관통해 지나가는 길이 되기도 한 다. 그러면서 통합하는 힘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 길 덕택에 여러 개로 나눠진 영 역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다. 다양한 영역과 공간의 연결과 통합 : 영역의 관계성 도동서원에 있는 각 영역은 매우 독립적이면서도 그들 간에 서로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 말을 바꾸면 부분이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체로 통합이 되어 있는 것이 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도동서원에 쓰인 ‘구분, 통합’의 방법이 모두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분, 통합’ 둘 간의 절묘한 배합법이 있기 때 문이다. ‘담으로 둘러치고 단으로 막는 식의 구분’, ‘이들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길을 가지고 영역들을 쭉 이어지게 하는 식의 통합’ 이들은 모두 그 힘이 센 것들 이다. 그만큼 구분하는 힘, 통합하는 힘도 세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 둘은 서로 대립적이다. 그래서 자칫 서로 해치기 쉽다.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경우 더욱 그렇 다. 그러나 이 둘은 힘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돕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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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게 조율되어 있다. 그 덕에 도동서원에 있는 영역들은 분명히 ‘구분’이 되 면서도 서로가 하나로 ‘통합’이 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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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병산서원 9-1. 병산서원 개관 - 종목 : 사적 260호 - 명칭 : 병산서원(屛山書院) - 소재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 시대 : 조선 광해군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 글씨, 문장, 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 화기제작 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 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 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 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9-2. 병산서원 공간 분석

가. 개별성과 유사성 : 3개의 개별성 병산서원은 세 개의 무리로 되어 있다. 하나는 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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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강당, 동재, 서재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고직사 등 부대시설이 중심이 되는 무리이다. 이들 각 무리는 아주 특이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각 무리들이 특정한 모양을 가지게 되고 더불어 특정한 위치에 놓 이게 되기 때문이다.

나. 개별성과 유사성 : 관계 맺기 무리 짓기는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고 다른 무리를 배타하는 그런 식으로 이루 어지지는 않는다. 무리와 무리들 간에 서로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 무리 안에 있는 한 부분이 다른 무리전체와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 혹은 무리 안에 있는 한 부분이 다른 무리중의 한 부분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병산서원에서의 무리 짓기는 단순히 무리들 간의 분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 개별성과 유사성 : 유사성에 의한 통합 무리 짓기는 병산서원뿐 아니라 다른 서원은 물론 가옥, 사찰 등 전통건축에 두 루 행하여지는 수법이다. 그러나 무리 짓기는 집마다 똑같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무리 짓기에는 수많은 다른 방법이 있다. 묶이는 방법, 놓이는 방법, 모양을 가지 는 법이 모두 다르다. 그 방법에 따라 집마다 고유한 성격을 가진 자리들이 만들어 진다. 병산서원 역시 고유한 방법으로 무리 짓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아주 독특 한 성격을 가진 자리가 생겨난다. 서원을 비롯한 한국 집은 여러 채의 건물과 여러 개의 마당으로 되어있다. 무리 짓기는 이들을 적절히 배열하는데 있어 아주 효율적 일수 있다. 집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건물과 뜰 중에 성격상 관계가 깊은 것끼리 서로 묶고 적정한 위치와 모양을 찾아가는 것으로 일단 집의 큰 틀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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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소수서원 10-1. 소수서원 개관 - 종목 : 사적 55호 - 명칭 : 소수서원(紹修書院) -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 시대 : 조선 중종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 다. 조선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 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 (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 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 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 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 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 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 아있다.

10-2. 소수서원 공간 분석

가. 개체성과 무차별성 : 무차별성 소수서원에 있는 집들은 서로 생김새가 고만고만해 통 구별하기가 어렵다.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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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조금 다를 뿐 지붕이 거의 비슷하고 벽의 생김새 또한 비슷비슷하다. 소수서원 에는 큰 질서도 없어 보인다. 축이라든지 중심이 되는 공간이 있어 건물이 이를 기 준으로 배열된다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몇 개의 담으로 공간들을 적절하게 나누어 주었더라면 이 또한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러나 집안에는 이런 담이 거의 없다. 한 개의 큰 마당에 듬성듬성 놓여 있는 식이 다. 그래서 그 집이 그 집 같아 쉽게 구별을 할 수가 없다.

나. 개체성과 무차별성 : 개체성 그렇다고, 소수서원의 건물들을 모두 꼭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우선 각자 놓여진 위치가 모두 다르다. 중앙, 모 서리, 가까운 쪽, 먼 쪽, 앞 쪽, 뒤 쪽 제 각기 다른 위치에 잇다. 건물내부의 공간구조도 모두 다르다. 기본은 마루와 방으로 되어 있으나 배열법은 모두 같지 않다. 방-마루-방, 방-마 루, 심지어 마루로만 혹은 방으로만 되어있는 것이 있다. 그러다보니 각자의 건물 이 자신이 처한 주변 것들과 독특한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그들과 아주 독특한 일 을 하게 된다. 각 건물이 나름대로의 분명한 위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곧 건물 각자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수서원 안에 있는 각 건물이 가진 정체성은 다른 건물과의 비교를 통해 파악될 수 있다. 다른 것과의 차이에 의해 한 건물이 가지는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처 음부터 고정된 정체성은 없는지도 모른다. 다른 것과의 차이에 의해 소수서원 안에 있는 건물들은 꼭 같은 채로 시작을 했는지 모른다. 이들 하나, 하나가 조금씩 달 라지고 정체성 차이에 의해 구분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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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화엄사 11-1. 화엄사 개관 - 종목 : 사적 및 명승 7호

국보 67호

시도유형문화재 49호

- 명칭 : 지리산화엄사일원

화엄사각황전

화엄사보제루

(華嚴寺覺皇殿)

(華嚴寺普濟樓)

(智異山華嚴寺一圓)

-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외 - 시대 : 백제시대

조선 숙종

지리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 하여 두류산이라고 불리는 민족의 영산이다. 산기슭에는 실상사, 연곡사, 화엄사를 비롯하여 많은 절 과 유적이 있다. 또한 지리산 일원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는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자락의 남쪽 기슭 계곡에 위치하며 해발 250m 정도의 산간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아름답고 화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화엄종의 맏형격인 큰 절로서 장엄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1592) 당시 완 전히 불타버린 것을 1630년에 각성스님이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의 대부분을 다시 세 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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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화엄사에는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 호), 화엄사 4사자 3층석탑(국보 제35호) 등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지리산 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뛰어난 사적 및 명승지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 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 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 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 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 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보제루는 법요식 때 승려나 불교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강당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 규모로, 맞배지붕집이다. 대웅전 앞 한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짝의 빗살문을 달고 그 반대쪽 5칸은 널 판지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11-2. 화엄사 공간 분석

가. 화해와 융화 : 공존성 어떤 사물(事物)이든지 혼자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주변에는 다른 사물들이 공 존한다. 그래서 한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 함께 큰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들 사이 에는 서로 잘 맞는 것이 있는 반면 서로 물리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는 공통된 점이 있는 반면에 서로 다른 점이 있다.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어 떤 사물이든지 이런 상반된 조건을 가진 것들과 마주하게 된다. 제대로 존재하려면 이들을 인정해야하고 서로 원만히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논리는 불교의 화엄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반된 여럿이 어울려 화목하 게 되는 것 그래서 궁극에는 그들 간에 구별이 없도록 되는 것, 이것이 화엄사상의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이다. 이 화엄사상은 집이 만들어지는 원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크고, 작고,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 등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것들을 한데에 모이게 하고 그들 간의 차이를 좁히고 또 화해를 도모하며 결국 이들이 서 로 융화토록 하는 것, 이것이 곧 건축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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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닌 한국 화엄종의 종찰인 화엄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이 화엄사상은 사찰내의 건물들을 배열하는데 있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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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국 현대건축에서 전통건축 참조 사례

1. 김수근 : 공간사옥 1-1. 개요 -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219 - 설계년도 : 1971, 준공년도 : 1974 - 구조형식 : 철근콘크리트조 - 내부마감 : 전벽돌

1-2. 설명 건축가 김수근의 대표작에 속하며, 그의 작업실이 있던 건물이다. 서울의 옛 모 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원서동 일대의 분위기를 최대한 반영한 점과 전통공간을 새롭게 해석한 점 등이 크게 돋보이는 건물이다. 공간사옥은 1971년에 1차로 연면 적 360㎡ 규모의 구관이, 1977년에 2차로 구관에 연결하여 현재의 건물이 완공되었 다. 율곡로에서 갈라져 나온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면, 담쟁이로 씌어진 검은 색 벽돌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벽돌 벽이 나타나고, 옆으로 비켜선 마당이 보인다. 골목보다 몇 단 맞은 이 마당은 건물의 모든 동선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이다. 구관 은 전면에 있는 건물로서 경사진 대지를 적적하게 잘 이용하여 공간의 연속성과 과 정성을 2층 높이까지 적용된 스킵 플로어에 나타나게 한 건물이다. 신관은 구관과 달리 매우 풍부한 공간 개념이 표현되어 있다. 공가의 연출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벽돌조 대신에 라멘조를 채택하였고, 벽돌은 구조체를 치장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공간의 매개성과 장소성이 구현된 건물이다. 신관과 구관 모두 형태보다는 건축 내 부공간의 탁월한 구성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설계자 김수근은 자신의 건축철 학으로서 형태보다는 공간에 주목하는 궁극공간, 네가티비즘 등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이 건물에 그의 건축철학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내외로 이 어지는 극적인 공간의 연속, 인간 중심적인 척도로 공간을 분할한 아기자기한 규모 의 내부공간 구성, 외부공간에서의 막힐 듯 막히지 않는 마당 간의 연결 등으로 감 동을 주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 나타나는 공간의 특징은 서구건축에서 보는 투시도 적 공간이라기보다는 근접, 분리, 연속, 폐합 등으로 이루어지는 위상 기하학적인 공간에 있다. 천정 높이가 일곱 자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두 자 폭 밖에 안 되는 계단이 있어서 더욱 친숙한 공간의 맛을 느끼게 한다. 현재 설계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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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소극장, 갤러리, 김수근 문화재단 서울건축학교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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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중업 : 주한 프랑스 대사관 2-1. 개요 -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합동 30 - 설계년도 : 1961, 준공년도 : 1964 - 구조형식 : 철근콘크리트조 - 내부마감 : 노출콘크리트

2-2. 설명 서울의 서대문구 합동은 예로부터 외국의 대사관저들이 집락을 이루던 곳이다. 이 건축은 프랑스 건축가 7인과 함께 지명설계에 응모하여 김중업의 안이 당선되어 실현된 것이다. 건물은 크게 대사관저와 업무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건물이 대 사관저이고 작은 것이 대사업무동이다. 표현적으로도 대사관저는 남성적이며 업무 동은 여성적이다. 그래서 두 건물은 마치 자웅(雌雄)의 관계처럼 인상지어 진다. 그중 업무동은 지붕 부분이 개수되어 처음의 조형성이 상당한 만큼 손상되었다. 대 사관저는 내부의 부분적인 개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 건축의 압권으로는 전면의 필로티로 얹혀진 지붕의 다이나믹한 조형일 것이다. 전 면의 모자이크 벽면을 포함하여 상세의 조형이 잘 다듬어져 있음도 이 건축을 풍요 롭게 한다. 전체적으로 두 건물의 배치적 묘미에서부터 건축의 조형이 도모하고 있 는 한국적 정서와 프랑스의 엘레강스한 품위를 나타낸다. 작가 김중업은 이 작품으 로 국내에서는 1962년 서울시문화상을, 1965년에는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 에 서훈되었다. 1992년에는 공간 25년 상을 수상하였는데 이는 이 건축의 항속적인 미학적 가치를 길이 남기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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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효만 : 임거당 3-1. 개요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 803-6 - 준공년도 : 1999, 설계년도 : 1998 - 구조형식 : 철근콘크리트조

3-2. 설명 이 주택은 한국의 전통주택이 가진 전통주택이 가진 고요한 공간과 조형의 현대 적 실현에 그 계획의 목적을 두고 있다. 무한한 연속성을 가지고 회화적으로 프레 임 되며, 비대칭적이 중첩되어 엮어지는 소담한 작은 '마당'들이 이루어내는 다양 한 전통적 드라마는 이 주택의 여덟 마당 즉, 진입마당, 안마당, 정자마당, 서재 앞 지하마당, 식당 앞 지하마당, 옥상대청마당1, 옥상대청마당2, 서비스마당 등 여 덟 곳의 마당이 수평, 수직적 체계의 '길'을 통해 서로 엮어지면서 은유적으로, 재 현되고 있다. 필로티로 처리된 도로 전면 쪽 긴 Mass의 띄움은 전통건축의 '비상' 적 이미지에 대한 감수성으로 강조되었으며 역사성, 시간성을 가진 재료인 목재를 사용하여, 한식 접어들어 올림문의 멋, 목재결구 철물의 사용 등, 이 시대의 현대 적 기능과 감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현재성을 가진 전통적 요소들이 은유적으로 선 택, 적용된다. 70평이라는 작은 대지에서 최대한의 '마당'의 면적을 확보하려는 목 적은 누마루식 프로그램으로 선택 적용되었다.

풍요롭고 서정적인 공간을 위해 그는 자주 전통 건축의 마당을 적용하곤 하는데, 넓은 대지를 갖지 못하는 도시 주택에서는 이렇게 높낮이 변화를 통해 수직적 체계 의 마당을 시도한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임거당의 경우, 입구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진입마당, 안마당, 정자마당, 식당 앞 지하마당 Ⅰ, 서재 앞 지하마당 Ⅱ, 옥상 대청마당 Ⅰ, 옥상 대청마당 Ⅱ, 서비스마당 등 여덟 개의 마당이 자연스 레 이어지고 있다.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길’처럼 이 마당들은 그의 건 축을 살아 움직이는 자연으로 만드는 요소가 되는 셈이다. “공간 그 자체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지만 마당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속성을 담아내는 겁니다. 여기에서 마당은 곧 공간을 활성화하고, 그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자연인 셈이죠. 인테리어는 따로 필요가 없어요. 시시 각각 변화하는 풍경,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모습을 공간 안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훌륭한 인테리어가 될 테니까요. 그것이 도시라고 해서 크게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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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진 않습니다. 거실에서 보는 풍경과 식당에서 보는 풍경을 달리 만드는 것으로 도 얼마든지 자연과의 소통을 꾀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자연과 건축의 상호 소통을 도모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주로 전통 건축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 전통은 현대를 포용할 수 있는 전통이어야 한다. 지금 이 시 대의 시간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전통. 그래서 그의 건축은 전통과 현대가 융화돼 새로운 독창성을 지닌다. 임거당의 전체적인 형태는 전통 건축의 누 (樓) 마루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1층은 벽체 없이 기둥으로만 만들고 2층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땅과 접하는 마당의 면적을 최대화하면서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역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 1층을 가로막지 않고 비워둠으 로써 하늘을 향해 개방된 공간으로 완성한 것. 이런 그의 건축을 두고 혹자는 ‘비 상(飛翔)하는 건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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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류춘수 : 삼하리 주택 4-1. 개요 - 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 - 준공년도 : 1986 - 구조형식 : 목구조(미송)

4-2. 설명 몇 해 만에 주택을, 그것도 40평 정도로 제한된 자그마한 주택을 풍광이 좋은 그 린벨트 안에 안목 있는 건축주와 더불어 설계할 기회를 가진 것은 여간한 즐거움이 아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건축에 대한 생각이나 건축가로 서의 자질이 주택에서만큼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기에, 이는 건축가의 보 람이 될 수도 있고, 취약점을 드러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 위에 본채와 부속사를 직렬로 배치함으로써 생긴 앞 뒤 마당은, 두 집채 사이의 3m 공간이나 부속사 끝의 개방공간과 함께 이룬 셈이라 하겠다. 가구식 목구조를 택함 으로써 문간방과 거실은 터서 쓸 수 있도록 융통성을 주었으며, 안방과 건너방도 떼어내기 쉬운 벽장으로 막았다. 또 노출된 미송의 기둥과 서까래는 이 집의 구조 재이며 안팎의 마감재이니, 담백하여 가식이 없다. 거실이나 방으로 들때 1.95m 높 이의 낮은 천장이 통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스케일이지만, 이것은 고정관념일 뿐이며, 작은 집에는 얼마나 친근하며 잘 어울리는 높이인지를 이 집에서 새삼 확 이할 수 있을 것이다. 재료와 색상, 그리고 스케일 등 한옥의 전통미가 현대적인 기법으로 표현된 목구조 건축으로 국내외의 여러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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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배병길 : 은둔의 집 5-1. 개요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936번지 - 구조형식 : 철근콘크리트조

5-2. 설명 우리 조상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은자의 모습으로 자연을 벗 삼아 살았지만 자기 학문의 도를 위해서는 치열 한 삶을 살았다. 또한 수많은 선비들이 초야에 묻혀 학문과 예술로 일생을 보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예술품이 있지만 익명의 작업들이 너무나 많음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주택은 도시생활에서의 외적인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내적인 즐거움을 추구하 는 은둔적, 청담의 의미를 가진 주택이다. 또한 건축주는 자신을 드러내기에 극히 인색했고 나 또한 그가 자신을 드러내야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 은둔의 집에서의 생활은 바깥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물과 일상사에서 즐거움 을 줄 것이다. 어두움에서 보여지는 빛의 감사를, 침묵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즐거움을, 외적인 가벼움에서 내적인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범사에 감사하는 겸허함을 일깨우는, 『그리고 침묵하라!』 은둔은 자신의 내부 세계에서 외부의 다른 세계와 즐거운 만남을 기다리게 될 것 이다.

노자의 도덕경 22장의 말씀 구절을 인용하였다. 曲則全, 枉則直. 不自見, 故明.

窪則盈, 弊則新. 少則得, 多則惑. 不自是, 故影.

不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不自我, 故有功.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不自衿, 故長.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아파트 숲들 속에서, 도시민의 마음이 의지할 곳 없는 일산 신도시의 황량하게만 느껴지는 곳에서 벽의 채용은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그래서 채용된 하나의 벽들 은 격자형을 이루며 내, 외부 공간을 이룬다. 이 4개의 벽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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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운데 하늘로 열린 외부공간을 만들고, 그 경계의 벽 너머에는 삶의 공간이 자 리한다. 그 경계의 벽을 넘나들며 내부와 외부공간은 교감하며 다른 바깥 쪽 공간 과는 극히 제한된 창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주택의 중심공간은 외부공간인 작은 마당이다. 이 마당은 양동마을의 향단 마 당에서 보았던 하늘의 경이로움을 재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입의 동 선 또한 그와 무관하지 않으며 도시에서의 은둔의 삶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기도 하 다. 『침묵하라. 내면에서 침묵을 지키는 자가 말의 뿌리를 건드린다.』 - Rainer Maria Ril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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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승효상 : 수졸당 6-1. 개요 -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102-14 - 준공년도 : 1993, 설계년도 : 1993 - 구조형식 : 조적조 - 외부마감 : 드라이비트

6-2. 설명 1970년대에 서울 강남지역이 개발되면서 신시가지로 구획된 집단주거지역에 들어 선 주거용 건물이다. 집 앞 골목에서 시작되는 길은 대문을 지나 집안의 흙 마당, 마루 마당, 뒤 마당으로 이어지며 외부공간을 형성하고 있고, 건물은 각 공간 사이 에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차지하며 들어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진입방식, 외부공간 구성방식, 건물 배치방식은 한국 전통주택의 특성과 통한다. 아래층의 잔 디가 없는 흙 마당과 마루 마당, 장독이 있는 뒤 마당, 그리고 위층의 위 마당은 각 공간이 서로 넘나들며, 때로는 정원으로, 때로는 거실로, 때로는 잔치 집 마당 등으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 거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내부공간을 거실 밖 마루 마당으로 이어지게 처리함으로써 각 공간들이 실제 보다 크게 느껴지게 처리되었 다. 대문채에 붙은 사랑방 앞 흙 마당과 거실 앞 마루 마당 사이에 위치한 재래식 사고석 담장은 마당 사이의 공간이 분절되면서 연속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간 처리 형식은 편리성과 효율성만 추구하는 '기능적 공간'에 바탕을 둔 건축을 만드는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제2회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과 1993년 제4회 김수 근 건축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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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경국 : 몽학재 7-1. 개요 -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55-3 - 설계년도 : 1993, 준공년도 : 1994 - 구조형식 : 철근콘크르트조+철골조 - 내부마감 : 석고보드 - 외부마감 : 와이어 패널 위 드라이비트+노출콘크리트

7-2. 설명 이 주택은 3대를 위한 집으로 공간의 유용성과 가변성이 주요한 관점으로 대두되 는 것은 당연하다. 실내공간과 실외공간의 영역설정을 반 내부와 반 외부의 공간으 로 전환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거실과 안방 사이에 있는 마루, 마 당(테라스) 공간을 내부화된 외부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가변적인 칸막이 가 설치되고 실내에 놓여져야 할 벽난로가 외부에 놓인다. 이런 관심은 현대 생활 의 패턴이 다양성과 변화를 요구하는데서 온 것이다. 동시에 한옥에서 나타나는 비 움의 공간에 대한 재해석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주택은 과거로부터 가구식 공법인 목조를 일상화하였으나, 근대화 이후 조적식으로 바뀌었다. 몽학재 에서 사용한 기본 개념은 전통적 한옥의 "칸"개념을 현대화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 였다. 일자형(홑집) 두 채를 나란히 배치하고 옥외 마루 마당을 두어 가정의 중심 공간을 형성한 것이다. 목구조가 그렇듯이 철골구조에서도 구조미를 살리는 것이 당연한 과제였다. 외부에서는 철골을 필요부분에 적극적으로 노출시키고, 내부에서 는 2중으로 단열처리한 후 마감하여 결로와 관계없는 부분에서는 철골을 그대로 노 출시키고 기계미를 살리도록 하였다. 기타 주요 부분에서는 금속성과 목재의 자연 미를 대비시켜 내부공간에서의 극적인 효과를 추구하였다. 지하 1층과 도로변의 외 벽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킨 채 본채의 철골 프레임이 연장되어 콘크리트벽을 관통하도록 하여 철골의 단면을 순수하게 표현하였다. 1∼2층 벽은 화장실을 제외 하고 건식 공법으로, 철골 프레임 패널 위 드라이비트 벽으로 마감하여 중량감과 경량감의 적절한 대비를 이루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집은 외관에서 느끼는 하 이테크한 느낌과 전통적인 주거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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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홍식 : 산림과학관 8-1. 설명 이 전시관은 산림종합전시관으로서 고유의 기능을 수용하며 임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특성에 맞는 독특한 조형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건축적 특성이 강 한 건물로 계획하며 기존 수목원과의 유기적 연계를 확립하였다. 국산 간벌재, 조 림재의 활용방안을 제시하고 하이테크를 이용한 경제적이고 다양한 목구조법을 제 시함으로써 목구조 부흥을 선도하고 산림자원의 수요를 증대시키며 임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특히 산림전시관이라는 특성에 맞는 재료의 선택으로 환 경적 유리함을 고려하였다. 공간에 있어서는 각 용도를 층별로 구분하였고 일방순 환동선체계를 채택하였고 가변성 있는 평면구성과 휴게공간의 확보로 지루함을 배 제하였다. 상층부는 드라이비트로 마감하여 전통 회벽의 조형언어를 도입하였고 중 층 및 저층부는 불국사의 기단을 현대화하여 표현하였으며 지붕은 박공과 초가를 답습하되 그 재료는 동판으로 마감하였다. 구조 자체가 전시물이 될 수 있도록 전 통성이 가미된 하이테크 목구조법을 표현하였고 1층 홀부분의 개방감을 위하여 2층 을 open시키며 천장부분은 목조트러스 top light로 계획하였다. 지하층은 개방감 확보를 위하여 1층화하였으며 만약의 침수에 대비토록 하였다. 구조계획에 있어 목 구조는 가구식, 틀식, 엮는 식 등 전통적 언어가 담긴 아름다운 목구조법 개발을 적용하였고 각 실의 기능에 따라 목조 스페이스 프레임, 목조 트러스, 구조용 집성 재, 전통 가구식 등 다양한 목구조법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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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류춘수 :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9-1. 역사 경기장 시설은 근본적으로 "담는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월드컵 주경기장은 선수, 관중, 전 세계의 시선을 "담는" 무대이다. 이러한 경기장의 개념에 우리민족 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21세기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맞이하는 이의 정성을 담 은 전통 소반" 위에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팔각모반"을 두 겹 겹쳐 놓은 상태로 형 상화하였다. 경기에서 승리를 지향하는 희망을 띄우고, 월드컵을 통해 우리나라 의 이미지와 문화를 띄우며, 새로운 세기 통일에의 희망과 인류의 희망을 띄워 보내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경기장의 지붕을 전통 방패연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지붕재료로 사용된 막 구조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용해 첨단 의 기술로 한국의 전통적인 지붕과 처마 선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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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림건축 : 국립중앙박물관 10-1. 설명 박물관은 ‘한국 전통 건축의 현대적 재해석’을 건축 기본 개념으로 하고 있다. 단순히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한국성의 재현이 아닌, 내재된 정신과 정서를 현대적 으로 해석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남쪽에 큰 마당을 두고 동서로 길게 뻗은 남향의 건물은 한강과 남산을 앞뒤로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배치이다. 건물의 형상은 전 통 성곽의 개념을 도입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감싸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외벽에 사용된 국산 화강암은 이런 개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박물관은 크게 3 개 공간으로 나뉜다. 중앙의 ‘열린 마당’을 기준으로 상설 전시실인 동관과 편의 및 부대시설을 갖춘 서관으로 구성된다. 열린마당은 박물관의 주 출입구에 형성된 공간으로, 전통 건축의 대청마루에서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앞뒤로 열린, 외부이 면서도 내부인 공간은 ‘ 차경(借景)’이라는 전통적 수법으로 남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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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사  

한국 건축사 송 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