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뭉해쌀소설]너를 되뇌다 3.

의뭉해쌀 / 이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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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골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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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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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트라우마센터 .................................................... 267 9-2. 약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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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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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썸 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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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그해 여름에 시작하는 이야기 골든타임과 중증외상을 되새기며.. 고독한 외상전문의 최인혁과 그의 곁을 지키는 파트너,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를 기억하며.. 상플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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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약한사람 (Something)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어느 덧 8월 중순, 햇살 좋은 어느 날 아침,

날도 좋은데 오랜만에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하려 트라우마센터로 향하는 한구. 그렇게라도 두 사람을 굴속 같은 그곳에서 빼내줘야 할 것 같았다. 요즘에 정말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사무실과 중환자실, 수술실에 살며 일만하는 두 사람. 지난겨울 외상센터를 신청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희망을 가지고 행복하게 미소 짓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가고 병원의 무관심속에서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갇혀 아등바등 일에 치여 지쳐가는 두 사람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한구였다. 이내 그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는데 인혁은 보이지 않고 졸린 표정의 은아가 혼자서 자료정리를 하고 있다.

“ 어? 최교수는 어디 갔나? ” “ 아, 오셨어요. 교수님은 저기, 집에 좀 가셨어요. 옷 좀 가지고 오신다고. ” “ 아아.. 에이.. 오랜만에 같이 커피나 한잔 하려고 했더니.. ” “ 이따가 점심시간 전에는 오실 거에요. ” “ 뭐, 그렇겠지. 음.. 신선생은 커피한잔 안할래요? 좀 피곤해 보이는데 쉬었다 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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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그럴까요? 그럼, 헤헤.. 과장님이 사주시는 거죠? ” “ 아유, 예예예~ 뭘 새삼스럽게. 가요. ”

그러면 그렇지.. 라는 생각을하며, 먼저 밖으로 나가는 한구. 은아는 커피 값이 굳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한구를 따라간다. 카페가 있는 병원 본관 로비로 온 두 사람. 한구가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 값을 계산하고 있고, 은아는 그 옆에서 계산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이 울린다.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휴대폰을 확인하는 은아. 그런데 화면에 동규의 이름이 뜬다. 동규씨가 아침부터 무슨 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버튼을 누르는 그녀.

“ 네, 동규씨! ” “ 아, 은아씨, 지금 바빠요? ” “ 네? 아니 바쁜 거는 아닌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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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규씨..? 아, 신선생 약혼자인가 보네. 그녀의 옆에 있다가 본의 아니게 통화내용을 듣고 있게 된 한구. 살짝 전화기너머에 상대방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 어제 야간근무 한 거 맞죠? 이제 퇴근할 시간 다됐겠네요? ” “ 아니, 그.. 퇴근 할 시간이 된 거는 맞는데. 할 일이 많아서 조금 더 있어야 되요. ” “ 아... 그래요... ” “ 근데 갑자기 퇴근시간은 왜.. 무슨 일 있어요? ” “ 아니요. 그런 건 아니구요. 사실, 지금 세중병원 앞이에요. 일부러 퇴근시간 맞춰서 온다고 왔는데.. ” “ 네?! 병원이라구요? 어.. 동규씨, 회사는요? ”

놀라서 목소리가 살짝 커지는 은아. 옆에서 한구가 통화를 엿듣고 있다가 갑자기 커지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약간 움찔 한다.

“ 오늘하루 연차썼어요. 오랜만에 은아씨 얼굴도보고~ 집에도 데려다 주려구요. ” “ 아... 그럼 지금 병원 어디에 있는데요? ” “ 지금 병원 건물 바로 앞이에요. 지금 막 들어가려고.. 어? 은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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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너머가 아닌 가까이서 들리는 동규의 목소리에 재빨리 정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 저 멀리 정문 바로 앞에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보인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은아의 이름을 크게 부른 동규. 덕분에 주위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한구도 누구인가 싶어서 그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갑자기 나타난 동규 때문에 약간 곤란해진 은아. 옆에 있는 한구에게 양해를 구한다.

“ 저, 저기.. 과장님, 죄송한데 커피는 나중에 마셔야 될 거 같아요. 먼저 올라가 계세 요. ” “ 어? 어어, 그래요. 그러지 뭐. ”

그리고는 서둘러 동규에게로 뛰어가는 은아. 한구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한 마음에 먼 거리에서 은아가 뛰어간 쪽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순간, 동규와 눈이 마주쳐버린다. 그러자 젠틀하게 웃으며 한구를 향해 살짝 눈인사를 하는 동규. 그러자 한구도 얼떨결에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는 척하다가 다시 두 사람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본다. 은아를 보고 너무 좋아하고 반가워하는 남자.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아 보이는 두 사람. 한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 오우.. 멋있네..! 이야.. 신선생 저런 남자친구를 숨겨두고 있었구만~ 오.. 근데 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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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리네.. 선남 선녀구만, 에잇.. 좋~을때다..! ’

그렇게 흐뭇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살짝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커피를 쪽쪽 빨며 엘리베이터쪽으로 사라지는 한구였다. . . . . 한편, 갑자기 나타난 동규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는 은아. 몇날며칠을 일에만 치여 사느라 헝클어진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게다가 다크써클은 피곤해서 눈 밑까지 내려온 상태인데.. 그녀는 오랜만에 그를 봤다는 기쁨보다는 요즘 들어 야근도 자주하고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자고 나올 정도로 일만했기 때문에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지금 너무나 초췌해보일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해진다. 반면, 동규는 몇 달 만에 그녀를 봤다는 기쁨에 내내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다.

“ 동규씨가 어떻게 여기까지.. ” “ 당연히, 은아씨 보고싶어서 왔죠~! 우리 몇 달 만에 보는 건지 알아요? ” “ 아.. 그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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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자신과 달리 조금 곤란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 자신은 그저 그녀를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연애초기에 그녀를 데려다주곤 했던 생각이 떠올라 퇴근시간 맞춰서 데려다주려고 온 것인데.. 동규는 곤란해 하는 그녀를 보고는 그녀의 상황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너무 마음만 앞섰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 아.. 이거 내가 와서 은아씨가 곤란해진 모양이네요. ” “ 네? 아, 아니 괜찮아요~ 괜찮은데, 다음부터는 연락만 좀 해주고 오면 되요. 여기 일이 너무 바빠가지고.. 퇴근시간이라고 바로 퇴근할 수 있고 그런 게 아니니까.. ” “ 아, 네.. 알았어요. 다음엔 꼭, 연락하고 올게요. ”

그가 너무 미안해하는 듯하자, 그가 너무 미안해하지 않도록 괜찮다며 살짝 웃어 보이는 그녀. 동규는 그런 그녀를 보며 또 기분이 좋아진다. 은아는 자신이 조금 곤란해진 건 사실이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서 자신을 데려다주러 왔다는 그가 고맙기도 하고, 또 너무 오랫동안 못 만난 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여기까지 데리러왔다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서 인혁에게 허락을 받고 퇴근하려고 마음먹는다.

“ 저, 그런데 동규씨, 제가 하던 일이 있어서..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래요? 내 가 퇴근한다고 말씀 드리고, 준비하고 나올게요. ” “ 아, 아까 그분한테요? 그분이 최인혁교수님이에요?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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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동규의 말을 못 알아듣고 살짝 멍했던 그녀.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 아아~! 아니에요~! 그분은 지한구과장님이시라고, 마취과 과장님이세요. 교수님은 다른 분이시고. ” “ 아아... ” “ ....?.... ”

왠지 실망한 듯한 동규의 표정. 사실, 아까 한구를 보고 나서는 그가 은아가 말하는 최교수인줄 알고, 왠지 안심이 되고,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끼던 그였는데. 은아는 갑자기 실망스러운 듯 변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며칠 후 아침,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앞, 함께 병원에서 야간근무를 한 두 사람. 새벽에 들어온 응급환자의 수술을 마치고, 병동에 들려 오전회진까지 끝낸 후,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은 인혁.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몸이 좋지 않은지 바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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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마에 살짝 맺힌 땀. 요즘 들어 늘 기운 없는 모습이긴 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는 인혁. 지금까지 한 번도 아프신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입을 여는 은아.

“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 “ ....?... 아.. 오늘 이상하게 힘이 없네.. 배고파서 그런가.. 저기, 그 밑에 컵라면 있을 거에요. 컵라면 좀 꺼내줘요. ” “ ... 컵라면가지고 되시겠어요? 몸도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열 있으신 거 아니에요? ” “ 열은 무슨.. 그냥 좀 피곤해서 그렇지. ” “ 그래도.. ” “ 아유, 아니라니까. 이따가 또 환자 보러 가야되니까. 시간 없어요. 빨리 컵라면이나 줘요. ” “ 아닌 거 같은데.. ”

피곤해서 그런 거 같아보이진 않은데.. 항상 자기 몸 힘든 건 잘 신경 쓰지 않는 인혁. 일단, 컵라면을 꺼내주고 다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를 뒤로 미는 은아. 그런데 그때, 그녀의 다리에 부딪힌 의자가 뒤에 있는 박스를 치는 바람에 박스가 덜컹- 하며 그녀 머리 위로 쏟아지려고 한다. 컵라면을 달라고 은아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가 그 모습을 발견한 인혁. 얼른 일어나서 간발의 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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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쏟아지려 하는 박스들을 두 손으로 붙잡는다.

“ ...하... 거, 조심 좀 하지. 이거 이러다 한번 큰일나겠ㄴ...!!! ” “ ...!!!... ”

박스를 붙잡고 있던 그. 그녀에게 한 소리를 하려 고개를 숙이는데, 갑자기 자신을 덮쳐오는 박스와 인혁을 피하느라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요상한자세로 서있는 은아. 인혁이 고개를 숙이자 그녀와 얼굴이 달랑 말랑하다. 당황한 두 사람. 인혁이 얼른 박스를 놓으려는데 박스가 또 떨어지려고 하고, 그걸 본 은아가 얼른 몸을 틀어 나오려는데, 인혁과 의자사이에 다리가 끼어있는 상태인 그녀. 좁은 공간에서 그녀가 움직이자 또다시 박스가 쏟아지려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두 사람. 그런데 그때, 갑자기 트라우마센터의 문이 열리고, 한구가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묘한 자세에 두 사람을 발견한다. 언뜻 보면 인혁이 은아를 덮치려는 듯한 자세. 순간, 그대로 멈춰버린 세 사람. 당황한 한구가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가려고 한다.

“ ...!!!!... 어, 미..미안.. ” “ 야!! 야!! 잠깐만!! 도와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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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나가려다가 인혁에 부름에 멈칫하는 한구. 도와달라는 그의 말에 다시 빠끔히 센터 안으로 고개를 내미는데 인혁과 은아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아까자세 그대로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 야, 이.. 이것 좀 잡아줘. ”

눈짓으로 쓰러지려는 박스더미를 가르키는 그. 한구는 그제서야 인혁이 박스더미를 받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서둘러 그들 옆에 가서 박스더미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 그제야 두 아저씨 사이로 간신히 빠져나오는 은아. 그사이, 인혁과 한구가 쓰려지려던 박스를 다시 밑에서부터 밀어서 제대로 쌓아올린다.

“ 흠, 이, 이거 큰일 날 뻔했네~ 야, 나라도 와서 다행이지.. ” “ 어어.. 다행이네. 신선생은 괜찮아요? ” “ 네? 아~ 네, 하하.. 저, 저야, 괜찮죠. 하.. ”

약간 민망했던 상황에 어색해진 세 사람.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말을 살짝 더듬는다.

“ 허허.. 아, 근데 뭐하려고 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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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맞다. 저번에 너랑 커피 한잔 하려고 했는데. 와보니까, 너 없더라고. ” “ 뭐, 그래서 커피마시자고? 나 아침도 안 먹었는데. ” “ 그래? 그러면, 점심이나 같이 먹던가. 어차피 지금 점심시간 다됐는데. ” “ 그래 그럼. 아, 신선생도 같이 먹읍시다. ”

주섬주섬 가운을 챙겨입으며 그녀를 향해 묻는 인혁. 그러나 은아가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손을 내저어 보인다.

“ 아, 아니에요. 전 응급실에 볼일도 있고, 조금 있으면 퇴근이잖아요. 집에 가서 먹죠 뭐. 교수님 드시고 오세요. ” “ 아, 예, 그래요. ”

그렇게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한구와 인혁. 그런 그의 뒷모습을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아.

“ 정말 괜찮으신 건가..? ”

한 번 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일에 집중하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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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한구의 사무실, 탁자에 앉아서 나란히 밥을 먹고 있는 두 사람. 열심히 밥만 먹고 있던 한구가 갑자기 피식- 웃으며 인혁을 향해 말을 한다.

“ 야, 난 아까 깜짝 놀랐네. 너랑 신선생이랑 뭐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 줄 알았짆아~ 하하~ ” “ 풉- 켁켁- 켁- ” “ 에이씨.. 드럽게.. 야, 여기 물. ”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아 힘없이 먹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한구의 말 때문에 먹던 게 걸려서 켁켁거리고 있는 인혁. 반면, 한구는 밥알이 튀었다며 인상을 찡그리다가 옆에 있는 물 잔을 그에게 건넨다. 그러자 인혁이 그 물 잔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마시고는 걸린 게 좀 나아진 거 같자 다짜고짜 그에게 소리를 지른다.

“ 야!! 뭐, 무슨 말도 안 돼는 소리를..! ” “ 아, 그래~ 그냥, 그런 줄 알았다고~ 누가 진짜 그렇데냐? 솔직히 아까 그 상황보면 누가 봐도 오해할 만 하지.. ” “ 이 미친놈.. 야,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임마! 어디, 결혼할 여자한테.. 할 농담이 없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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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말이~ 신선생이 그렇게 멋있는 남자친굴두고, 어디 너 같은 놈이랑! 하하.. 야, 말 도 안되지..! " " 허, 뭐, 뭐, 또 나 같은 놈은 뭔데. 참나.. “ “ 야, 너 같은 놈이 뭐긴 뭐야~ 나이 많은 노총각이지. ” “ 에이 진짜..! ” “ 하하, 알았다, 알았어. 아, 그건 그렇고. 나 저번에 신선생 남자친구 봤다. 병원에서. ”

갑작스러운 그녀의 남자친구 얘기에 다시 한구를 쳐다보는 인혁. 자신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 약간의 궁금증이 생긴다.

“ ...?... 저번에? 언제. ” “ 어.. 저번 주에 너 집에 갔다 온 날인가? 그, 퇴근시간 맞춰서 데리러왔나 보던데? ” “ 아, 약속있었나보네. ” “ 글쎄, 아닐걸..? 신선생도 모르고 있던 눈치던데..? 그, 나랑 커피마시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연락 받은 거 같더라고. 근데, 남자친구가 신선생보더니 되~게 좋아하 더라~? ” “ 뭐, 그럼 좋아하지 싫어하겠나. ” “ 아니, 그게 아니고, 엄청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더라고, 신선생, 요즘 데이트도 못하 나봐? 남자친구가 병원까지 오는 거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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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요즘 그, 퇴근도 제대로 못하고 그러니까. 뭐 만날 시간이나 있겠노. ”

한구의 말에 별 대수롭지 않은 듯 반응하다가 데이트도 못하냐는 말에 약간 마음이 안 좋아진 인혁. 병원 지원이 끊긴 뒤로는 응급구조사의 실습학생까지 마음껏 쓸 수 없게 되었고 순전히 두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외상환자를 받고 수술하고 치료하고 했기 때문에 은아가 제때에 퇴근할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새 학기 들어 그가 강의를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인혁은 강의준비와 수술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그녀는 인혁 대신에 외상업무와 기본적인 응급실업무까지 소화하느라 두 사람 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웬만한 응급환자는 다 받아서 수술을 해내고야 마는 인혁. 그 덕분에 은아는 데이트는커녕, 늘 야근과 과중된 업무에 시달려야했고, 인혁이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밥 먹을 시간도, 잠 잘 시간도 없이 일만 했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자신도 병원 안에서 살다시피 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인 인혁. 그러면서도 막상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그게 더 미안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한구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계속 은아의 약혼자에 대한 말을 이어나간다.

“ 아, 근데 그때, 점심시간이었는데.. 그때 온거 보면 한가한 사람인가..? 뭐하는 사람 이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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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뭐.. 외국계 회사에 다닌다고 들은 거 같은데. 나도 자세한건 모르지. 사생활 인데. ” “ 오~ 외국계회사라.. 하긴, 야, 잘~생겼드라~ 키도 크고, 멋있고, 옷도 비~싼 거 입었 더만, 아, 그래서 결혼하고 캐나다에 간다는 거구만~? 능력좋네~ ” “ 하, 그러게. ”

한구의 말을 들으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인혁. 그러고 보면 그녀가 이런데서 고생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괜히 자신이 붙잡은 바람에 그녀가 지금껏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인혁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발견한 한구.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에게 묻는다.

“ 근데, 안색이 왜 그러냐? 야, 너 식은땀도 흘리는 거 같은데? 어디 안 좋아? ” “ ....?... 아, 어. 어후.. 이거 오늘따라 몸이 찌뿌둥하고 힘도 안 나고 그러네. ” “ 너 요즘,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아이, 그러게 환자 좀 작작 받으라니까.. ” “ 괜찮아. 뭐 이 정도 쯤이야. ” “ 괜찮기는, 우리가 뭐 이팔청춘이냐~ 좀 쉬면서 해라..! ” “ 아, 괜찮다니까. 야, 이거 니가 치워라. 나 저기 중환자실 좀 가봐야 돼. ” “ 어유, 어유, 저거. 아무튼.. 뭐, 이따가 사무실에는 언제 내려가려고? ” “ 글쎄, 시간 좀 걸리겠지. ” “ 그럼 내가 좀 이따가 커피나 따뜻한 거 하나 사서 내려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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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래. 그러던가. ”

그렇게 사무실 문밖을 나가는 인혁.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는 한구.

“ 저거, 저거, 의사란 놈이.. 아주, 한번 된통 아파봐야지 정신을 차리지~ ”

자신과 만난 지 20년이 다 되가는 동안, 워낙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잘 아프지도 않았던 인혁. 어쩌다 한번 감기가 걸리더라도 그냥 특별한 조치 없이 일을 하며 버티다가 넘어가곤 했던 그였기 때문에, 아무리 뭐라 말해줘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아는 한구였다. 한 시간 후, 중환자실에서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오는 인혁. 한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던 환자의 상태를 수시로 관찰하고 체크하며 케어했더니 다행히도 환자가 점점 회복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 많이 걱정했던 환자인데, 그래도 환자가 잘 이겨내 줬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지는 그였다.

“ 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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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뒷목을 주무르는 그. 그런데 목에 땀이 흥건하고 몸도 아까부터 자꾸 축축 늘어지는 게 몸 상태가 아까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게다가 열도 좀 높아진 것 같고, 머리도 좀 아프고, 근육도 좀 아프고, 좀 춥기도 한 거 같고, 숨도 살짝 가쁘다.

‘ 아.. 감기기운인가.. ’

원래 심한 감기가 걸리는 체질이 아닌데다가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넘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요 며칠 동안 계속 무리를 한데다가 어제 내내 밤을 새고 일을 했더니, 몸이 버텨내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 하, 이 정도는 진짜 끄떡없었는데.. 흐음... “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인혁. 평소보다 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응급실로 내려가는 그였다. 한편, 응급실 데스크, 퇴근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 이제야 마무리작업을 분주하게 하고 있는 은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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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간호사가 다가온다.

“ 신선생님! 퇴근준비하세요? ” “ 응, 이제 가서 좀 자야지. ” “ 아, 그럼 저랑 같이 가실래요? ” “ .....?.... 아, 니 야간근무였지. 근데 아직 퇴근 안하고 모했나? ” “ 아, 병동에 잠깐 아는 분이 왔다고 해서 만나 뵈고 가느라구요. ” “ 아아,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리래이. 나 이것만 좀 정리하고. ”

그렇게 보고 있던 자료를 서둘러 넘기는 그녀. 곧, 자료를 다 처리하고 최 간호사를 기다리라고 한 뒤, 가방을 가지러 트라우마 사무실로 향하려는데, 저 쪽에서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인혁이 보인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자 확연히 드러나는 그의 상태. 열이 많이 오르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 빛. 이젠 눈에 확연히 보일정도로 흐르는 식은 땀. 게다가 살짝 충혈 된 채로 반쯤 감겨있는 눈에 전체적으로 아까보다 훨씬 나빠 보이는 그의 모습. 처음 보는 그의 아픈 모습에 놀란 은아가 얼른 그에게로 달려간다.

“ 교수님! 많이 안 좋으세요..?! ” “ 아.. 그, 아니에요. 괜찮아요. ” “ 괜찮기는..! 땀이 이렇게 흥건한데! 입은 뒀다 뭐해요! 아프다고 말 한마디 하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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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어디 열 좀 봐요! ”

안 그래도 요즘 너무 무리하던 그가 걱정되던 그녀. 자기도 모르게 응급환자를 대하듯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짚어보고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도 짚어본다.

“ 봐요! 이마가 이래 뜨거운데! ” “ ...!!!... ”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놀란 인혁. 역시나 놀란 응급실 사람들. 그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데스크로 달려간다.

“ 최 간호사! 저기, 체온계 좀. ” “ 네? 아아, 네! ”

은아의 스스럼없는 행동 때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녀의 명령에 마치 환자가 들어온 것처럼 서둘러 체온계를 건네주는 최 간호사. 그러자 인혁은 그녀가 또 아무렇지 않게 체온을 재려 할까봐 재빨리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녀는 체온계를 가지고 그를 따라 사무실안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러자 모두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트라우마센터 사무실을 바라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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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약간 티격태격하는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다시 문이 열리고, 인혁이 은아에게 등을 떠밀려 밖으로 나온다. 그러다 다시 멈춰서서 또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

“ 어~ 어어? 아잇! 나는 괜찮다니까요! 거, 신선생이나 빨리 퇴근해요. 나는 여기서 좀 쉬면 된다니까..! ” “ 그, 괜찮다는 소리는 되게하시네! 열이 39도가 넘는데 뭐가 괜찮아요..! 괜찮기는..! ” “ 아유, 내가 의사지 신선생이 의사에요? 내 몸은 내가 잘아니까 쫌.. ” “ 아시는 분이 그렇게 있어요? 진찰도 안 받으신다고 하고! 약도 안 드신다고 하고! 어제도 수술하느라 내내 못 주무셨잖아요..! 그럼 집에 가서 쉬기라도 해야죠! 빨리요! 앞장서요! ” “ 어어? 거참..! 아, 알았어요! 들어가면 되잖아! 들어가면! 거, 아무튼 고집은!! ” “ 참나.. 고집은 교수님이 더 세죠. 여기 옷가방이나 챙기세요! ” “ 하..!! 참..! ”

인혁의 말끝에 한마디도 안 지는 그녀. 결국 그녀의 말에 못 이기고 옷가방을 받아든 채로 그녀를 살짝 째려보다가 응급실을 빠져나가버리는 그. 그제야 은아도 조금 화난 표정을 풀고, 앞장서서 응급실을 나가는 그의 뒤를 쫓아간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살짝 벙쪄있는 인턴들. 그때 한 인턴이 두 사람이 나간 쪽을 바라보며 옆에 있는 다른 인턴을 툭툭치며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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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최교수님하고 신선생님하고 쫌 이상하지 않나? ” “ 응? 뭐가..? ” “ 두 분이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느냐고. ” “ 뭐, 좀 그렇긴한데, 야, 근데 두분 맨날 붙어 다니시니까. 친해서 그런 거 아니겠나. 벌써 같이 일한지 2년이 다되간다는데..? ” “ 아니 그래도~ 그렇게 무서운 최교수님이 저렇게 신선생님 말이라면 암 소리도 못하 잖아. 야, 그리고 가끔 집에도 데려다 주시고 그러던데, 그냥 친한 것 치고는 너무 가 까운거 아니야? ” “ 그런가..? 하긴.. ”

그때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김간호사와 최간호사. 갑자기, 욱!하면서 두 사람의 말을 끊는다.

“ 그렇긴 뭐가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맞아요! 신 선생님이 저렇게라도 챙겨주시니까 그나마 교수님 지금 좋아지신 건데..! 교수님 예전에는 어땠는지도 모르죠? 신 선생님 안 계셨으면 지금 인턴 쌤들도 더 힘 들었을 걸요? ” “ ....?!.... ”

갑자기 끼어드는 간호사들 때문에 살짝 당황한 인턴들. 간호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무서운 기세로 말을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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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리고! 신선생님이 얼~마나 자상하고, 능력 있고, 멋있는 약혼자가 있는데!! 어 디! 최교수님하고 엮어요! 엮기를! ” “ 그래요! 아무리 지어낼 말이 없어도 그렇지! 인턴쌤들 그래봤자 6개월 일해놓고서 는..!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해요! ”

죽자 살자 은아의 편을 드는 간호사들 덕분에 살짝 기세가 꺾인 두 인턴.

“ 모, 모르고 그랬죠.. 아.. 근데, 신선생님 약혼자가 있으시구나. 난 또 애인 없으신 줄 알았죠. 맨날 병원에만 있으시고 화장도 안하시고 그래가지고.. ” “ 저, 저도.. ” ” 애인이 없긴 왜 없어. 저번에도 집에 데려다 주러 병원까지 왔더구만. “ “ .....!!!!..... ”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는 네 사람. 고개를 돌린 곳에서는 커피를 양손에 든 한구가 빨대를 쪽쪽 빨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 안, 안녕하십니까!! ” “ 언, 언제부터 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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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긴, ...최교수님하고 신선생님 좀 이상하지 않냐?... 부터지. ” “ 아, 죄..죄송합니다!! 그게, 실, 실수로.. ”

그때, 갑자기 울리는 최 간호사의 전화벨. 확인을 해보니 은아로부터 온 전화였다. 서둘러 전화를 받는 최간호사.

“ 여보세요? 신선생님? ” “ 어, 난데~ 내 급하게 나오느라 같이 간다고 해놓고는 깜빡했네~ 니, 아까 퇴근한고 했지? 빨리 옥상주차장으로 뛰어온나! ” “ 아, 네! 네! 금방 올라갈게요~! ”

그렇게 전화를 끊자마자 인턴들을 착- 째려보는 최간호사.

“ 이봐요! 이래도 이상한사이에요? 그 최교수님이 하도 표현을 못하시고 일만하시니 까 챙겨주시려고 그러는거지! ” “ 아.. 아.. 예.. 죄송합니더..” “ 흥, 김간호사! 나먼저 가볼게~ 수고해!! 과장님 안녕히계세요! ”

그렇게 김간호사와 한구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데스크를 나와 응급실 밖으로 뛰어가는 최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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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김간호사는 인턴들을 살짝 째려보고는 다시 할 일을 하고 인턴들은 한구의 눈치만 보며 뻘쭘한 듯이 서 있는다. 그런 인턴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있던 한구.

“ 야, 그, 쓸데없는 소리 지어내지 말고 이거나 마셔. 뭐, 한잔밖에 없으니까 나눠마시 던가. ” “ 예에.. 잘.. 잘먹겠습니다. ”

원래 인혁에게 주려고 가져온 따뜻한 커피를 데스크에 내려놓으며 그들에게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날려주고는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나 데스크를 등지자마자 살짝 굳어버리는 그의 표정. 인혁과 은아 두 사람이야 워낙 가깝고 각별한 사이인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이상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지금이야 별일 없이 그냥 넘겼지만, 나중에라도 잘못하면 근거 없는 소문으로 두 사람이 상처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래도 인혁에게 조금 주의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한구였다. 한편, 옥외주차장,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있는 은아와 보조석에서 몸을 조금 떨고 있는 인혁. 두 사람 다 차안에서 최 간호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인혁의 몸이 조금 떨리는 걸본 은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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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 정말 약 안 드셔도 되겠어요? 많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 “ 거, 괜찮다니까.. 나 원래 약 잘 안 먹어요. 집에 가서 한숨 자고나오면 싹 괜찮아 질 거에요. 말 좀 믿어요. ” “ 아휴.. 그래도.. 어디, 열 좀 다시 재봐요. ”

그러고는 다시 그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려는 그녀. 인혁은 다시 올라오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밀어낸다.

“ 아, 그 참..!! 괜찮다니까. 아까도 거, 사람들 보는데..! ” “ ....?.... 뭐 어때요? 환자들도 그렇게 재는데..? ” “ 아유, 됐어요. 쫌..! ”

타박을 주는 인혁 때문에 약간 무안해진 그녀. 하, 기껏 걱정해줬더니.. 이내 표정이 살짝 불만스럽게 바뀌더니 그녀가 속상한 마음에 아픈 그를 타박해버린다.

“ 차암..나.. 그러게 좀 쉬엄쉬엄하시지..! 왜 아프고 그러세요..! ” “ 뭐, 누군 아프고 싶어서 아픕니까..!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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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죠? 그러다 몸에 탈나신다고..? 말 안 들으시더니..! ..... 됐어 요! 아픈 사람한테 이런 말해서 뭐해요.. ”

말을 하다말고 약간 언성이 높아질 거 같자 그냥 말을 멈춰버리는 은아. 그렇게 잠시 차안에 정적이 흐르고 서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흠.. 그래도 걱정해줘서 그랬을 텐데..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녀가 내심 고마운 그. 인혁이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는데, 헝클어진 머리, 화장기 없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 자신 못지않게 그녀의 모습도 많이 상해있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요즘 들어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그녀. 그녀에게 조금 미안해진 인혁이 슬쩍 그녀에게 입을 연다.

“ 흠, 그, 아무튼, 신경써준 거는.. 고마워요. 내일이면 정말 괜찮아질꺼니까.. 너무 걱 정하지는 말고. ” “ .... 알면 됐구요.. ” “ ... 신선생도 몸관리 잘해요. 아프지 않게.. ” “ 치.. 저는 아직 튼튼해요. 어리거든요. ” “ 에이..! 또.. 거 나이얘기 좀 하지 말라니까.. ”

그의 말에 피식- 웃는 은아. 인혁도 그녀를 보며 피식- 웃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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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간호사를 기다리는 차안에 살짝 웃음기가 맴돈다. 며칠 후 점심시간, 트라우마센터, 오늘도 밥은 안 먹고 점심시간 막간의 틈을 이용해 의학서적을 보고 있는 그. 평소처럼 간이침대에 앉은 채로 물품박스를 책상삼아 노트북을 올려놓고 의학서적과 번갈아가며 보며 환자케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고 있는 은아.

‘ 아이고... 저러니까 몸이 견디노? 아휴.. ’

요즘 수술하랴, 환자 케어하랴, 강의다니랴.. 워낙 정신없이 바쁜 시기인 건 알지만, 지난번 감기몸살을 앓고 나서도 여전히 환자만 보느라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자는 그. 게다가 몸이 피곤해져 만사가 귀찮은 건지.. 자른 지 너무 오래되어 길고 덥수룩한 머리. 보기 싫게 제 멋대로 나버린 수염. 피로에 지쳐서 늘 구부정한 그의 등. 안 그래도 외상센터에 대한 가망이 없어진 후, 전보다 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인혁인데.. 그녀는 정리되지 않은 그의 모습이 그를 더 쳐져보이게 하는 것 같아 속상하기만 하다. 인혁이 조금 더 씩씩한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그녀. 그를 향해 타이르듯,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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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교수님, 내일모레 강의가셔야되잖아요. ” “ 예. ”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며 여전히 눈을 책에 둔 채로 짧은 대답만 하는 인혁. 그러나 그런 대답이 익숙하다는 듯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은아.

“ ..또 저번처럼 그러고 가실 거 에요..? 머리도 안 자르시고, 수염도 안 깎으시고? 그 러니까 저번에 집에 다녀오실 때, 좀 자르고 오시라니까.. ” “ 아, 그.. 깜빡했네. ” “ 에휴.. 참,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그런 건 맨날 깜빡하시죠..? 아무튼 요즘엔, 말도 안 들으시고.. 교수님, 그러지 말고~ 오늘은 좀 시간있으니까~ 이렇게 시간 있을 때 자르고 오세요~ ”

그러나 그녀의 말을 못들은 척 하면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고 있던 자료를 주섬주섬 정리하는 인혁.

“ 흠, 나, 중환자실 좀 갔다올게요. ” “ 아직, 회진시간 안됐는데요..? 교수님, 아침도 못 드셨잖아요~ 점심식사는 안하세 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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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난 이따가 시간 날 때 먹으면 되요. 그, 저번 주에 수술한 환자, 상태 별로 안 좋잖아요. 자주 들여다봐야지.. 아, 신선생 먼저 먹고 있어요. ”

은아는 그가 또 피곤하고 귀찮아서 자신의 잔소리를 피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입을 삐죽거리며 말을 한다.

“ 에이, 저는 됐어요..! 아까 간호쌤들이랑 빵하고 우유 먹어서, 아, 그라지 말고 식사 부터 하시지.. ”

그러나 그녀의 말을 못들은 척 하면서 옷걸이에 걸려있는 가운을 입으려는 인혁 그런데 가운소매가 핏자국으로 얼룩져있다. 아무래도 아침에 들어온 응급환자를 치료할 때 묻은 피를 너무 바빠 신경 쓰지도 못하고 그대로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 잠깐만요. 교수님. 그거 그대로 입으시려구요? ” “ ....?.... 아아, 이거, 못쓰겠네. 거기, 가운하나만 새로줘요. ”

그의 말에 자연스럽게 선반에서 새 가운을 꺼내서 그에게 입으라는 듯이 펼쳐드는 은아. 인혁 역시 자연스럽게 그녀가 펼쳐주는 가운에 소매를 끼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사무실문이 벌컥 열리고, 한구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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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에게 가운을 입혀주는 은아와 그녀가 입혀주는 가운을 입고 있는 인혁을 발견한다. 잠시 당황하여 멈칫하는 한구.

“ ...!!... ” “ 어, 왠일이야. ”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마저 가운을 입는 인혁.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한구에게 인사를 한 후, 다시 책상에 앉아서 자료를 보는 은아. 한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입을 연다.

“ 어.. 어, 아니, 너 밥먹었냐? 나 밥 때를 놓쳤더니 이놈들이 지들끼리 홀랑 먹었네. ” “ 아, 난 아직, 근데 지금 환자보러 가는 중인데. ”

그런데 그때, 이때다 싶은 은아. 서둘러 인혁을 향해 묻는다.

“ 아! 잠깐만요 교수님, 그 환자 소변량하고 배액관이랑 혈압만 체크하면 되죠? ” “ 음, 글쎄. 가서 봐야겠지마는. 뭐, 일단은. ” “ 에이~ 그러면은! 과장님하고 식사하고 오세요~ 제가 먼저 가서 체크하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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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괜찮아요. 어차피 항생제 때문에 감영상태도 다시 확인하고 해야되니까. ” “ 그거는 이따가 저녁에 하시고~ 아직 급한 거 아니니까. 제가 가서 이상 있으면 전 화 드릴게요~! 그냥 지과장님하고 밥드시고 오시고, 가시는 김에 이발이나 쫌 하시고 오세요~! ” “ 아유, 거 이발은 쫌.. 괜찮다니까요..! 아직 더 있다 잘라도 되겠구만.. ” “ 괜찮기는요..! 교수님은 몰라도~ 이러고 강의가면 사람들이 욕해요~! 그리고 여기 환자들이나 보호자들한테도 깔끔하게 보이는게 좋죠! 참, 말 좀 들으세요~! 빨리빨리! ”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둘러 한구와 인혁의 등을 떠미는 은아.

“ 어어어~? ” “ 어어? 아잇, 알았어요! 참..!! ”

무방비상태로 있던 인혁과 한구는 작정하고 등을 떠미는 그녀 덕분에 힘없이 사무실 밖으로 밀려나버리고, 은아는 그들을 사무실 밖으로 밀어낸 후, 해냈다는 듯이 씨익- 웃더니 다시 두 사람을 향해 말을 한다.

” 교수님! 가시는 김에 면도도 좀 하고 오시고요! 지과장님! 쫌 부탁 좀 드릴게요~! 빨리 갔다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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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사무실의 문을 탁-하고 닫아버리는 은아. 그리고 그런 상황 때문에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앞에서 벙찐 표정으로 한참을 서있는 두 아저씨. 곧, 인혁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한구에게 말을 건다.

“ 야, 내가 그래 많이 지저분해보이나? ”

한구는 그를 잠깐 쳐다보더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 어. 넌 임마, 거울 좀 보고 살아 쫌. ”

그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된 인혁. 한구는 그런 그를 슬쩍 보며 피식 웃더니 인혁의 팔을 툭- 치고는 응급실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한다.

“ 야, 시간 없어. 빨리와. ”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구를 따라나서는 그. 그렇게 응급실 밖으로 사라지는 한구와 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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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병원근처 국밥집, 오랜만에 같이 점심을 먹는 두 사람. 그런데도 시간이 별로 없는 터라 두 사람 다 말도 없이 열심히 국밥만 먹고 있다. 그러다 몇 분 후, 먼저 그릇을 비운 한구.

“ 어후.. 이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네.. 야, 너는 머리 좀 제때제때 자르지~! 왜 제때 안 잘라 가지고는 이렇게 촉박하게 먹게 만들어~! ”

그렇게 인혁에게 타박을 주면서 물을 마시는 한구.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다시 인혁을 쳐다보는데, 은아 마음이 백번 이해되는 그. 정말 이놈, 몰골이 말이 아니다..

“ 야.. 너, 잠은 좀 자냐? ” “ 그냥, 맨날 그렇지 뭐. ” “ 아유.. 그래도 지난겨울에는 한동안 좋아보이더니. 또 돌아왔네. 일만하는 최교수~ 으이구, 축 쳐져가지고는.. ” “ 쳐치기는.. 무슨... ” “ 뭐, 그래도 신선생이 그나마 챙겨주니까 다행이긴 한데.. 야, 근데, 신선생이 뭐, 가 운도 입혀주고 그래? ” “ 어, 가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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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그, 머리도 자르라고 하고, 면도까지 신경써주고? ” “ 그것도 가끔. ” “ 아이고.. 신선생도 참.. 왜 아주 옷도 챙겨주고, 넥타이도 챙겨주고, 양말도 챙겨주 고, 그런다고 하지 왜~ ” “ 뭐, 그것도 가끔. 컨퍼런스갈 때랑, 강의갈 때는 챙겨주는데 왜. ” “ 왜기는~! 야, 너 저번에 보니까 신선생 집에 데려다주고 그러더만, 아직도 그래? ” “ 요즘은 못 그러지. 나도 집에 못 들어가는데.. 근데 뭐야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봐, 뭔 말을 하려고. ” “ 흐음.. 아니다. 야, 빨리 먹어~ 일어나게. ”

아까부터 계속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눈치를 주는 한구. 인혁은 갑자기 이놈이 왜 이러나 싶어서 그를 쳐다보다가 마지막 남은 한 숟갈을 떠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계산을 마친 뒤 식당을 빠져나가는 한구와 인혁. 곧, 두 사람 모두 근처 이발소에서 서둘러 이발을 하고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병원으로 항하고 있는데, 한구가 그에게 말을 건다.

“ 야, 신선생은 흠, 아직도 남자친구랑 데이트 잘 안하냐? ” “ 음.. 어, 요즘 워낙 바쁘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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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는 그의 눈치를 살짝 살피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 그러게. 애인 만날 시간도 없이.. 야, 신선생 요즘 좀 힘들어 보이던데, 잠도 못 자 는지 눈도 퀭하고.. 왠지, 점점 너 닮아가는 거 같기도 하고..? ” “ ..... ”

애인도 못 만나고 자신을 닮아간다는 말에 살짝 멈칫하며 한구를 쳐다보는 인혁. 안 그래도 그녀가 그렇게 사생활도 없이 일만하는 게 자신과 같이 일하기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은데..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런 것만 물어보나.. 싶어지고, 왠지 한구의 말에 뼈가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역시나 인혁의 눈치를 살피던 한구. 자꾸 머릿속에 아까 가운을 입혀주는 모습이 생각나고, 내가 생각해도 좀 그런데.. 남들 눈에는.. 흠.. 둘이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너무 가깝게 지내다보면 그때 그 인턴들 같이 오해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한구.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먼 곳을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그를 쳐다보며 갑자기 진지해진다.

“ 야, 최교수. ” “ 말해. ” “ 너 오피스와이프라고 아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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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 같은 직장에서 너무 오랫동안 같이 일하다 보니까.. 동료가 진짜 와이프나 남편 만큼 가까운 존재가 되는거지. 어떨 때는 진짜 남편보다 더 가까워질 때도 있고.. ” “ .... 갑자기 뭔 소리야? ” “ 흐음.. 아니 그냥. 신 선생 이제 곧 결혼할 사람인데, 너무 일만 하니까. 뭐, 그리고 신선생이 남자친구하고 보내는 시간보다, 너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잖아. 그냥.. 뭐, 둘이 너무 가깝게 지내는 거 같아서, ” “ 뭔 말이냐고. ” “ 어.. 야, 나야 솔직히 신선생이 너 챙겨주고 이런 거 좋지~! 신선생 덕분에 너도 많 이 바뀌고 외상센터도 좋아졌으니까~ ” “ .... 왜, 어디서 뭔 소리라도 들었나..? ” “ 아니, 그냥 별일은 아니고.. 야, 아무튼, 그냥 좀 조심하라고.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 어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야, 나 먼저 들어간다! ”

그렇게 말해놓고는 약간 무안해지는지 병원으로 서둘러 뛰어가 버리는 한구. 인혁은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한구가 뛰어간 방향을 멍하니 보고서있다. 아무 이유 없이 저런 소리를 할 놈이 아닌데.. 한구의 말 때문에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고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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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이른 아침,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오늘도 야간근무를 서고 있던 은아와 새벽에 응급환자수술을 끝내고 간이침대에서 쉬고 있던 인혁. 그가 갑자기 피곤한 몸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옷들을 챙긴다.

“ ...?... 어디 가세요..? ”

갑자기 이 시간에 옷을 챙기는 그를 살짝 놀란 듯이 쳐다보는 은아. 인혁은 계속해서 옷가방을 챙기면서 입을 연다.

“ 나, 몸이 좀 안 좋네. 오늘은 먼저 퇴근할게요. 신선생 시간되면 퇴근해요. ” “ 아.. 네! 그럼 교수님, 오늘 고생하셨어요..! 이따 저녁에 뵈요. ” “ 예, 그래요. ”

그렇게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겨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인혁. 그런 그의 뒷모습을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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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보이지는 않는데.. 연달아 수술을 하셔서 많이 피곤하신가..? 하긴.. ”

하기는 연달아 수술을 하고나서 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지금껏 그가 이렇게 버텨왔다는 게 신기할 뿐, 다른 의사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란 걸아는 은아였다. 물론, 요즘 들어 더욱더 힘든 걸 버티지 못하고 더 지쳐 보이는 그가 안쓰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이렇게라도 쉬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요즘 자신을 대하는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료정리도 원래 하던 대로 간이침대에서 안하고 자꾸 당직실에 가서하질 않나.. 왠지 전보다 더 말이 없어지고, 자신과는 말도 잘 안하고.. 대답도 짧아지고.. 웃음기도 없어지고.. 왜 저러시지? 나한테 뭐 화나는 일 있으신가..? 하지만, 왠지 물어보기에는 조금 애매하고.. 그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인혁과의 관계가 조금 서먹해진 것 같아서 요즘 왠지 그에게 조금 섭섭함이 느껴지는 은아였다. 한편, 옥외주차장, 자신의 차로 향하는 인혁. 어젯밤과 새벽에 연달아 수술을 마쳤더니 몸이 또 견딜 수 없이 피로해져오고, 뻐근해진 목과 어깨를 주무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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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탄다.

“ 하아... ”

운전석에 타자마자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내쉬는 그. 안 그래도 요즘 일이 피곤해 죽겠는데.. 며칠 전, 한구가 해준 말이 계속 신경쓰여서 은아 마저 편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는 인혁. 솔직히, 그 말을 들은 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충고를 해준 한구 녀석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그녀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냈을 병원 사람들 때문에.. 도대체 왜 그런 말들을 쉽게 하는 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그녀를 너무 편하게만 대해왔나 싶어지고, 앞으로 계속 일할 사이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앞으로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걱정이 된다. 만약, 혹시나 안 좋은 소문이 난 것 이라면.. 그녀에게 안 좋은 꼬리표라도 붙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 마음에 한 주 동안 은아에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그.

“ 후우.... ”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차를 출발시키는 그. 그동안은 아무렇지 않게 편하게 지내왔던 사이였는데.. 다른사람과는 다르게 먼저 다가와주는 그녀 덕분에, 그리고 그 사람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어떠한 편안함들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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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지독히 힘든 하루하루를 견딜수 있었는데.. 특히나 정부 외상센터 사업에 대한 희망이 없어진 후, 쉽게 의욕을 낼수 없었던 우리. 간신히.. 간신히.. 서로 의지하며 버텨왔었는데.. 하.. 오피스 와이프라.. 지금까지 그녀와 나눴던 많은 대화들과 많은 일들이 떠오르는 인혁. 단순히 그런 단어로 치부해버리기엔 그녀와 나 사이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단순히 일적인관계로만 가까워진 것도.. 그 마음을 어느 선 이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고.. 서로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길 수밖에 없는 그 무언가.. 같은 고생을 하고,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고난을 겪고, 같이 이겨내고, 해운대 세중병원 트라우마센터의 이 처절한 현실이,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그녀와 나만의 어떤 동지애를 만들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서로를 편하게 생각하려 했고 그만큼 가깝게 지내왔던 게 사실이었다. 지금껏 그런 그녀가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자신이었고, 지금껏 그런 그녀가 없었더라면 아마 유지되지도 못했을 트라우마센터였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한구의 말. 결혼할 남자가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사람. 새삼 이제서야 느끼게 된다. 그녀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걸.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가 떠나야할 사람이란 사실이 새삼 실감이난다. 하기야 이미 처음부터 예견됐던 일.

" 후... "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로 혼란스러운 인혁. 그를 태운 차가 세중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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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후,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 떼르르르릉- 떼르르르릉- /

동시에 울려대는 두통의 전화. 도형과 간호사한명이 동시에 전화를 받는다.

“ 예? 전복사고요? 잠시만요. 저기, 저기! 빨리 최인혁교수님께 콜 좀 해주세요!! ”

전복사고라는 말에 눈이 커진 도형. 서둘러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콜을 부탁하고, 다시 전화상대에게 상황을 자세히 묻는다.

“ 어떻게 다쳤습니까? ” “ 아, 그게 환자가 여러 명입니다!! 지금 15인승 승합차하고 승용차하고 충돌해가, 승 합차가 전복됐는데요!! ” “ 예? 승합차가요?! ” “ 예! 다행히도 다른 부상자들은 경증인데, 승용차 운전자하고, 승합차 운전자하고 그 외에 승합차에 타고 있던 3명이 중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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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유, 아유! 저희는 다는 못받습니다!! ” “ 아! 다 보낸다는 건 아니고요! 중증도가 심한 환자 2명하고 나머지 경상환자 9명이 갈데가 없습니더!! 지금 세중병원으로 보내도 되겠습니꺼? 나머지 환자는 부산대병원 에서 받아준다 카는데요. ” “ 아이!! 장난합니까?!! 그라믄, 11명을 보내겠다는건데, 그 환자들을 저희가 어디에 다 수용합니꺼! 안됩니다!! ” “ 아, 그래도 세중병원에 수술할 의사 분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거기 아니면 갈 때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꺼?!! 일단 보내겠습니더!! ” “ 안된다니까요!! 저희는 중증 환자 한명만 받겠습니다! ”

그때 응급실에서 뛰어나온 은아. 서둘러 도형이 있는 곳으로 뛰어오며 소리친다.

“ 무슨 일이에요?!! ” “ 아, 신 선생님! 최인혁교수님은요?!! ” “ 새벽에 수술하시고 몸이 안 좋아서, 방금 퇴근하셨는데..! 무슨 환자라는데요?! ”

도형이 들고 있던 전화를 잠시 내려놓고, 은아를 향해 다급히 상황을 전한다.

“ 승합차 전복사고라는데요!! 아니, 지금 당직들도 얼마 없을 텐데. 환자를 11명이나 보내겠답니다!! 아무래도 최인혁 교수님 오셔야 할 거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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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잠깐만요! 출발하신지 얼마 안됐으니까! 멀리 안 가셨을 거에요! ” “ 그러면 콜 좀 부탁드릴게요! ”

도형의 부탁을 듣고 인혁에게 콜을 하기 위해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단축번호를 누르는 은아.

[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

한편, 병원과 멀지 않은 대로변, 저번 감기몸살 이후, 몸이 쉽게 피로해짐을 느끼면서도 새벽에 들어온 환자의 응급 수술을 두 번이나 연달아했던 탓에 쓰러지기 직전상태인 인혁. 게다가 요즘 그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걱정 때문에 수술이 없을 때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더욱 더 피로함을 느끼던 그였기에, 잠시만 이라도, 아무도 없는 집으로 가서 피곤함을 달래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지 않을만한, 그녀와의 적정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2년 가까이 쌓아온 그녀와의 관계를 어색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지.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려고 했던 인혁이었다. 그렇게 엉켜오는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끼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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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설마, 또 환자..? 갑자기 다급하게 울려대는 전화벨소리에 불현 듯 불안한 예감이 스치는 인혁.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역시나 은아에게서 걸려온 전화. 서둘러 전화를 받는 그.

“ 예, 신선생! ” “ 아, 교수님! 멀리가셨어요? 지금 승합차 전복사고 때문에 응급환자가 있다는데요! 경환자 9명에 중환자가 2명이나 된답니다! ”

역시나, 응급환자가 있다는 소식. 인혁은 자신의 몸이 쓰러지기 직전인 상태라는 것도 잊은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유턴시키며, 환자상태를 묻는다.

“ 전복사고요?! 환자들 상태는요? ” “ 잠시만요! 김도형쌤 환자 상태는요? ...아, 그게 지금 자세한건 모르고, 다시 연락해 준다고만 말해놨데요! 그런데 환자 수가 너무 많아서, 일단은 다 못 받는다고 해놨어 요! 어떻게 할까요?! ” “ 아, 그러면 내가 직접 연락해 볼 테니까! 번호 좀 불러봐요! 예, 예, 신선생, 나 5분 내로 들어가니까. 응급실하고 중환자실 자리 있는지 좀 확인해줘요! ” “ 네! 알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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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전화를 끊고 은아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환자상태를 자세하게 파악하는 인혁. 구급대원과 심각하게 통화를 하는 듯하더니 결국, 나머지 환자들이 갈 곳이 없다는 말에 환자들을 다 받겠다고 하고는 찢어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다시 병원으로 향한다. 한편, 인혁과의 통화를 마치고 막상 전화를 끊고 나니, 약간 갈라진 듯한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리는 은아. 피곤한 모습으로 사무실을 나서던 인혁의 뒷모습이 생각나고, 쉬지도 못한 채로 다시 병원으로 돌아올 그가 걱정되어 그제야 도형이 외과당직에게도 콜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바로 고개를 돌려 도형에게 말을 하는 그녀.

“ 그런데, 김도형쌤! 외과 당직 쌤들한테는 콜 해보셨어요? ” “ ..예?.. 아니요. 안 했는데요? ” “ 그럼 확인도 안 해보고 교수님한테 콜하라고 하신 거에요? 교수님 연달아 수술하느 라 몸도 안 좋으신데? ” “ 아, 근데 지금 시간이 6신데. 당연히 바로 내려올 사람 없겠죠. 그리고 그, 외상환자 는 당연히 최교수님이 오셔야 하니까.. ” “ 당연한 게 어딨어요..! 교수님 오늘 당직도 아닌데. 그리고 아직 환자 상태도 모른다 면서요? ” “ 예, 그렇긴 한데.. 당직들 콜해도 내려오는데 한참 걸리지 않겠습니까? 최 교수님 오시면 여러 군데 콜 할 필요도 없이, 한 방이잖아요. 뭐, 콜 하더라도, 중요한 데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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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만 하면 되고.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해오던 건 데.. ” “ .... 하... ”

도형의 말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은아. 콜을 해달라는 말에 앞뒤 정황도 살피지 않고 바로 그에게 콜을 한 자신도 한심스럽고, 인혁을 대체할 외과 당직이 있는지도 안 알아보고 무조건 그를 부른 도형 때문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사실, 도형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외과 당직이라고 불러봐야 운 좋으면 간혹 가다 펠로우가 직접. 평소에는 거의 레지던트만 내려오는데다가 그나마도 응급실로 내려오는데 한참 걸리고 다시 수술할 써젼에게 연락하고 데려오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에 시간이 생명인 외상환자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외상외과가 따로 필요한 것인데.. 중증이든지.. 경증이든지.. 대체할 인력 없이 인혁 혼자 그 모든 외상환자를 감당하고 있으니 인혁의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몇 분 후, 병원으로 돌아오자마자 응급실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치는 인혁. 그를 보고 도형과 은아가 뛰어온다.

“ 김도형선생!!! ” “ 예!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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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들 30분 이내로 병원에 도착한다! 피 신청부터 하고! 응급실에 경환자들 처치 할 자리 비워두고! 환자 한명은 의식 없고, 다른 한명은 골반 골절 의심된다니까. 정 형외과, 혈관외과, 신경외과 콜하고 수술장 있나 좀 알아봐! ” “ 잠..잠깐만요 교수님!! 그 많은 환자들을 다 받으시려고요?! ” “ 그래, 일단, 경환자들 누울 수 있게 관찰구역에 자리비워두고, 나머지 비울 수 있는 침대 알아보고! 그래도 모자라면 임시로 쌓아둔 베드 2개 더 꺼내와! 아, 중환자실은.. ” “ 안됩니다!! 지금 자리도 얼마 없는데 그 많은 환자를 어디에 받습니까?!! ”

인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겁을 하며 환자를 다 못 받는다고 말하는 도형.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인혁은 피곤하다는 얼굴을 하며 강한 어조로 도형의 말을 맞받아친다.

“ 중환자 2명이고 나머지는 경환이라잖아! 환자한명은 출혈 많고, 나머지 한명은 혈압 60에 계속 불안정하다는데! 입씨름하느라고 시간을 지체하나? 그러다 중환자들 살릴 수 있는 시간 놓치고, 경환자들도 상태 악화되면 어쩔 거야! ” “ 교수님..! 아무리 그래도요! 경환자들이야 어떻게, 어떻게 해결한다고 해도! 지금 수 술실이랑 중환자실도 아직 안 알아봤는데 중환자를 두 명이나 어떻게 받습니까!! 자리 가 없는데요!! ”

환자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마음은 급한데 자신을 따라주지 않는 도형 때문에 화가 나는 인혁. 최대한 화를 삭이고 입을 연다. 그러나 피곤하고 예민해진 탓에 점점 높아지는 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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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응급환자가 자리가 없어서 수술도 못 받는다는 게 말이 되나?! 어?! 손도 못 쓰고 환자 죽으면 좋겠어?!! 옮길 환자들 옮겨서 자리 만들고, 응급실 비우면 환자 받 을 수 있어..!! 중환자실 어떻게 됐어요?! ”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가만히 있다가 인혁의 물음에 얼른 대답하는 은아.

“ 아, 중환자실은 자리 없다는데요? 어쩌죠..? ” “ 하.. 중환자실은 내가 다시 알아볼 테니까. 신선생은 마취과 연락해서 수술실 좀 알 아봐줘요. 가능하면 두 군데로. 김도형 선생, 자네는 아까 말 한데로 피 신청하고, 정 형외과, 혈관외과에 콜하고, 응급수술 필요할지 모른다고 전해. 그리고 인턴들 데리고 경환자들 받을 준비 좀 해놓고. 남은 시간 30분이다. ”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뱉어놓고, 중환자실 쪽으로 향하는 인혁. 은아도 그 뒤를 쫓아 서둘러 뛰어간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푹- 한숨을 내쉬는 도형. 애꿎은 인턴들에게 화풀이를 해댄다.

“ 뭘 보고만 있노? 빨리빨리 안 움직이나? 넌 빨리 퇴원 시킬 수 있는 환자 알아보 고! 너는 관찰구역자리 좀 비워놓고!! 너는 나 따라온나! 빨리빨리 움직인다! ” “ 예..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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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중환자실로 뛰어 들어온 인혁. 서둘러 데스크로 달려가서 상태가 양호한 환자가 없는지 확인한다. 미친 듯이 환자차트를 넘기는 그. 그러나 상태가 좋아진 환자를 찾기가 어렵다. 다급해진 인혁은 침대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환자들의 모니터와 차트를 직접 비교해본다. 그런데 정형외과의 한 환자의 상태가 일반병동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해 보이고, 서둘러 담당간호사를 부르는 인혁.

“ 여기 간호선생!! 이 환자, 담당선생님한테 연결 좀 해줘요! 담당이 누구지? ” “ 저기, 그게.. 황.. 황세헌과장님이라서.. 아마, 안된다고 하실 텐데요.. ”

담당의가 황세헌과장이라는 말에 잠시 멈칫하던 인혁.

“ 일단, 연결해줘요. ”

이내 다시 콜을 부탁한다. 하지만 그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는 중환자실 간호사. 그러자 인혁이 그녀에게 호통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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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요!! 시간 없다니까!! ” “ 아, 네!! ”

그렇게 간호사가 서둘러 데스크로 돌아가 황세헌과장에게 전화를 걸고 곧, 연결이 됐다며 인혁을 바꿔준다.

“ 예, 교수님, 저 최인혁입니다. ” “ 뭐야, 아침부터 또 무슨 일이야! ” “ 저, 위급한 환자가 오기로 되어있는데 중환자실 자리가 없습니다! 교수님 환자 중에 이용회환자 상태가 양호해 보이는데, 일반병실로 옮겨도 되겠습ㄴ.. ” “ 야! 임마!! 그 환자가 누군지 알아?! 해운대건설 사장에다가 시의원 아들이야!! 지금 누굴 엿먹일라고..! 안돼! 절대 안돼!! ” “ 교수님!! 그러지 마시고 한번만 양보를 해주시ㅁ.. ” “ 한번?! 지금 이게 몇 번째인 줄 모르고 하는 소리야?! 아니, 중환자실 자리 없으면 환자를 받지를 말던가! 아무튼! 그 환자는 절대 안돼! 절대!! 만약에 그냥 옮겨버리 면..!! 내가 그냥!!.. 아니! 나 지금 병원 들어가고 있으니까!! 들어가서 보자고!! ”

[ 뚝- ]

그렇게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는 세헌. 인혁은 여전히 수화기를 손에 들고는 화를 삭이느라 잠시 동안 고개를 숙이더니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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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인혁 그러다 다시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린다.

“ ..이용회환자 일반병동으로 옮기고! 저 침대 비워줘요. ” “ 저기, 교수님.. 과장님이 안 된다고한ㄱ.. ” “ 내가 책임질테니까!! 일단..!! 침대부터 비워요!! ”

터지기 일보직전의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인혁. 살짝 한숨을 쉬던 간호사는 어쩔 수없이 알았다고 대답하고, 인혁은 간호사의 대답을 듣자마자 서둘러 중환자실을 뛰쳐나간다. 잠시 후, 응급실, 인혁이 급히 응급실로 뛰어내려 와보니, 먼저 도착해있던 은아가 간호사들에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그녀를 향해 뛰어가는 그.

“ 수술실은! 어떻게 됐어요! ” “ 아, 30분 뒤에 10번방 수술 끝나니까, 지과장님이 일단, 거기 비워주신데서 하나는 구했는데..! 나머지 하나는 못 구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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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거.. 곧, 환자 도착할텐데..! 그러면! 응급실에서 수술할 수 있게. 빨리 세팅 좀 해줘요. ” “ 안 그래도 그러실 거 같아서, 알아보고 있었는데요. 마취과는 어레인지 됐는데, 수 술간호사랑 수술도구가 부족할거 같은데요? 어떻게 할까요?! ” “ 하.. 그, 일단 최소인원, 최소 물품이라도 확보할 수 있으면, 수술 하는 걸로 합시다. 경환자들 처치하느라 인턴들은 못 들어올 거 같으니까. 신선생 수술장 들어오고, 실습 학생, 응급구조사, 들어올 수 있는 사람 다 준비시켜요. ” “ 아.. 네..! 걱정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

그때, 인턴들을 데리고 급하게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뛰어오는 도형.

“ 교수님! 응급실에 9자리 비워놨습니다! ” “ 그, 중환자실 한 자리가 부족하니까 자리하나 더 비워둬! 아, CT실에는 연락해놨 나?! ” “ 아, 아니요. 아직.. ” “ 일단, CT실에도 연락해놓고! 실습학생 수술실 들어오게 준비시켜놓고! ” “ 아, 예! ”

그때, 응급실에 구급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뒤, 경환자들과 중환자들이 차례대로 실려 온다. 갑자기 몰려온 환자들 때문에 정신없어진 응급실. 도형과 인턴들은 서둘러 경환자들을 처치하고 인혁과 은아가 구급대원들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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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온 중환자를 처치실로 이동시킨다. 처치실로 들어오자마자 간호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은아.

“ 환자 신원확인하고, 니는 수액이랑 피부터 달고, 니는 빨리 혈압체크 해라! ”

은아의 말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 그 사이 구급대원이 인혁에게 환자 상태를 알려준다.

“ 승합차가 전복되면서 차에 몸이 끼어있던 환자 입니다!! 구조하는데 50분 걸렸고, 경추손상 가능성있으며, 보시다시피 출혈 많아 현재 의식저하상태입니다! ”

구급대원에 말에 서둘러 환자상태를 살피는 인혁. 다리 쪽에 출혈이 많은 것으로 보아 골반골이나 대퇴골 쪽에 골절이 의심되는 상황. 그가 내부 장기를 확인하기 위해 청진을 해보는데, 다행히 장음에는 이상이 없는 듯 하다. 서둘러 인턴들을 향해 소리치는 그.

“ 자네는 일단, 경추손상 가능성있으니까 비디오 스콥써서 기도삽관부터 하고!! 신선 생은 응급실에 다 세팅됐나 확인 좀 해주고, 아, 포터블엑스레이도 좀 불러줘요!! ” “ 네! 알았어요!! ”

긴박하게 움직이는 소생실안, 그런데 그때, 또 다른 구급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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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몸을 돌려 응급실 문 쪽을 쳐다보는 인혁. 응급실 밖으로 나가면서 인턴을 향해 소리친다.

“ 어이! 인턴! 신경외과, 정형외과 빨리 내려오라고 하고! 엑스레이 오면, 엑스레이부 터 찍어놔! ” “ 예!! ”

그렇게 응급실 입구로 달려가는 인혁. 두 번째로 들어온 30대 후반 남자 환자. 그가 환자의 의식상태를 확인해보지만 역시나 의식이 없는 상태이고, 인혁은 서둘러 구급대원들과 함께 환자를 소생실안으로 데려온다.

“ 현재 환자 혈압 80에 60이고,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승합차하고 충돌해서 의식 을 잃은 상태입니다. ” “ 여기 환자 피검사 보내고, 수액이랑 피달아줘요!! 아, 기도삽관세트도 좀 준비해줘 요!! 인턴! 기도삽관해. ”

환자에게 기도삽관을 하는 인턴, 곧, 수액과 피를 달기위한 주삿바늘이 환자의 몸에 꽂힌다. 소생실 안에 두 환자. 인혁이 두 번째로 들어온 환자상태를 살피고, 청진기를 들고 확인을 해보는데, 내부 장기가 망가졌는지 장음이 엉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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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엑스레이 결과나왔습니다! ”

그때, 첫 번째 환자의 엑스레이를 찍던 인턴이 그를 향해 소리치고, 그가 엑스레이사진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인혁. 그때, 소생실로 들어오는 정형외과 레지던트와 펠로우. 들어오자마자 인혁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한다.

“ 어, 마침 잘 왔네, 사진 좀 같이 보자. ” “ 어떻게 다친 환잡니까? ” “ 그, 승합차가 전복되면서 차에 몸이 끼었다는데, 다행히 골반은 약간 골절이 있긴 한데 심하진 않은 거 같고, 여기 보이지, 대퇴골이 심하게 부서지면서 혈관까지 다친 거 같아. 이 환자, 자네들이 좀 맞아줘야겠는데. 신경외과, 혈관외과에서도 내려오기로 했으니까. 상의하고. ” “ 아.. 출혈이 많은데. 바이탈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곳에도 문제가 있는 거면... ” “ 보다시피 아직 바이탈 괜찮은 편이고, 장음도 좋아서 복부출혈은 없는 것 같은데, 자세한건 CT를 찍어봐야 알 수 있겠지. ” “ 그러면 저희는 다른 과에서 보고 나서 데려가도록... ” “ 아니, 여기까지 내려오기 기다리다간 늦어. CT실은 연락해 놨으니까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고, 신경외과, 혈관외과 내려오고 있을테니까 바로 CT실로 오라고 해서 상 의해. 구조하는데 오래 걸린 환자라 시간 오래 끌면 안 되니까. 상태 나빠져서 수술 못하기 전에 자네들이 지금 데려가서 찍어보고 바로 수술장으로 올려. ” “ 아.. 예, 그럼 CT찍어보고, 다른데 문제없으면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 “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고, 수술장은 10번방 어레인지 됐으니까. 거기서 하면 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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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외과 문제 있으면 컨설트하고. ” “ 예, 알겠습니다. 야 고선생, 환자 CT실로 올리고, 혈관외과랑 신경외과에 콜해서 CT 실로 오라고 해. ”

그렇게 정형외과 펠로우가 환자를 데리고 CT실로 올라가고 인혁은 두 번째 들어왔던 환자를 보기 위해 다시 몸을 돌린다.

“ 환자 혈압 어떻게 되요?! ” “ 80에 50이고, 혈압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

다른 곳은 다 멀쩡해 보이는데 의식이 없고 장음이 엉망이었던 환자. 서둘러 엑스레이 사진을 확인하는데, 우측 횡경막 부위에 이상이 보이는 듯하다. 일단, 직감적으로 내부출혈을 의심해보는 인혁.

“ 피하나 더 달고, 복부초음파 준비해줘요! ” “ 네! ”

그의 말에 간호사들이 서둘러 복부초음파를 준비하고, 인혁이 초음파로 환자의 뱃속을 확인해보는데 역시나 복부 내에 피가 고여 있는 듯하다.

CT를 찍기는 힘든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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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보호자 연락 됐어요? ” “ 네! 오는 중이랍니다! ”

그때, 서둘러 소생실안으로 들어오며 인혁에게 소리치는 은아.

“ 교수님! 응급실에 수술세팅 다 됐어요! ” “ 아, 그러면 이 환자 좀 옮겨주고, 보호자한테 다시 연결 좀 해줘요!! ” “ 네!! ”

그렇게 인혁이 수술준비를 위해 올라가고 환자는 수술준비를 마친 응급실 소수술실로 옮겨진다. 곧이어 시작되는 수술. 한 시간 후, 응급실에 두 번째 환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60대 여성과 젊은 남자 두 명이 보호자라고 나타난다. 아직, 응급실에서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간호사의 안내로 보호자들이 투명한 유리벽 사이로 수술 장면을 보게 되는데, 한두 가지씩 실수를 하는 실습학생과 응급구조사의 모습과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인혁의 고함소리. 복부에서 나오는 엄청난 출혈, 바닥에 흥건한 환자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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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어머니는 바닥에 피를 보고 잠시 정신을 놓고, 간호사와 같이 온 보호자 한명이 그녀를 부축한다. 그때, 간호사를 붙잡고 따지는 나머지 남자 한 명.

“ 저기요! 저렇게 응급실에서 막 수술해도 되는 겁니까?! 저기 옆에 있는 여자랑, 젊 은 사람들은 의사 맞아요? 저, 안경 낀 사람은 무지 어려보이는데? ” “ 네? 아아.. 그게.. ” “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낍니더, 나 의학 전문기자인데! 저렇게 준비도 제대로 안 하고 수술해도 되는 거냐고! ”

의학전문기자라는 말에 당황하는 간호사.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무도 대신 대답해줄 만한 사람이 없고,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수술장을 한번 바라보다가 이내 무섭게 따져대는 보호자를 향해 입을 연다. 그날 오후, 이른 아침에 시작됐음에도 점심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끝난 수술. 응급실에 부족한 인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친 인혁과 은아. 정형외과에서 데려간 환자는 인혁이 만들어놓은 중환자실 자리로 옮겨지고, 응급실에서 수술한 승용차운전자는 배를 닫지 못한 상태로 회복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함께 들어왔던 경환자들은 경과관찰 해야 할 환자 한 명 빼고는 모두 간단한 검사와 치료를 받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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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조치 되었다. 환자 보호자에게 수술결과를 설명 하려 보호자를 찾는 인혁. 간호사에게 자신이 의학전문기자라며 따지던 사람은 가족은 아니었는지 어디론가 가버려서 보이지 않고,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환자의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환자상태와 수술결과를 설명하는 그였다. 잠시 후, 그렇게 모든 일이 오후가 돼서야 다 끝이 났다. 그렇게 또 한차례전쟁을 치르고 사무실로 돌아온 인혁. 이젠 정말 쓰러질 거 같이 피곤한 몸을 잠시 간이 침대에 뉘이고 방금 전 수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인혁. 아까 세헌의 VIP환자를 맘대로 병동으로 옮긴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매번 이렇게 전쟁같이 수술을 하는 게 할 때마다 늘 어렵고 그를 지치게 한다. 역시나 같이 수술보조를 서주느라 퇴근할 시간이 훨씬 지난 은아. 그녀도 곧 쓰러질 거 같은 몸을 책상 앞, 의자에 풀썩 주저앉힌다. 눈을 감고 있던 인혁. 그녀가 힘없이 풀썩 주저앉는 소리만 듣고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채로 은아를 향해 말을 한다.

“ ..이만 들어가요. 퇴근 할 시간 많이 지났겠네. ” “ 아,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집에 가도 금방 다시 와야 되는데요 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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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그녀의 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갑자기 일주일 전 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인혁. 그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진다.

/ 야, 신선생 요즘 좀 힘들어 보이던데, 잠도 못 자는지 눈도 퀭하고.. 왠지, 점점 너 닮아가는 거 같기도 하고..? /

나를 닮아 간다..라.. 언제였던가.. 그녀가 나와 처음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즘이었던가.. 내가 입버릇처럼 괜찮다는 말만 반복 한다며 그녀가 나를 타박을 했던 적이, 아니 조금 놀리듯 말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다. 외상을 시작한 후로 언제부터인가 오직 일에만 미쳐서는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론 워낙, 누구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힘든 일을 하는 내내 괜찮다는 말을 되뇌지 않으면, 스스로 괜찮은 척을 하고 무심하게 넘겨버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고,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늘 괜찮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던 나였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도 괜찮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됐던 것 같다. 이젠 정말 나처럼 일에만 미쳐있는 그녀. 이 일을 한지 2년이 다되어가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저렇게라도 버릇처럼 괜찮다고 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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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일을 버틸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가 나를 닮아간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사람답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인혁은 꼭 그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 괜히 신경이 쓰이고 왠지 화가 나려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는 인혁.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히려 인혁을 걱정하듯 말을 꺼내는 은아.

“ 교수님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연달아 수술을 세 번이나 하셨는데.. 아까, 몸 안 좋 으셔서 들어가시려고 한 거 아니에요? ” “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여기서 좀 쉬면 나아지겠지. ” “ 그래도, 교수님 요즘 계속 몸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 “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택시라도 타고 가서 좀 쉬다 와요. 나도 여기서 좀 편히 쉬게. ” “ ....네?.... ”

왠지 자신이 사무실에 있는 게 불편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말투에 약간 당황해서 되묻는 은아.

“ ...여기 말고, 집에서 쉬다 오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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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돌아오는 같은 말. 그동안처럼 걱정해주는 말투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사무실에 있는 게 그가 쉬는데 방해가 된다는 듯한 뉘앙스로 들렸다. 살짝 섭섭하고 당황스러웠지만, 인혁이 요즘 워낙 쉽게 피곤해하고 그 때문인지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았기에 그를 이해하고 편히 쉬게 해주려는 은아. 애써 밝게 대답하며 짐을 챙긴다.

“ 아아.. 음.. 네, 알겠어요. 어.. 그럼 저 들어가볼테니까. 교수님 편히 쉬세요~ 이따 저녁에 뵐게요! ” “ ..... ”

그러나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도 없는 인혁. 피곤하고 예민해져서 일까.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복잡한 마음에, 그저 조금 혼자서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인데, 생각보다 말이 조금 쌀쌀맞게 튀어나간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좋지 않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면 조절을 못하고 또 쌀쌀맞은 말이 튀어나갈 거 같아 그냥 아무 말도 않고 있는 인혁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더니, 빠끔히 문을 열고 들어오며 퇴근하려던 은아와 마주친다. 정형외과 소속의 레지던트였다. 살짝 커진 눈으로 그 레지던트를 향해 무슨 일이냐 묻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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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슨 일이세요? ”

그러나 은아는 본채 만 채하며 인혁을 향해 입을 여는 레지던트.

“ 저기, 최인혁 교수님. 밖에서 과장님이 찾으시는데요.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고개를 돌리는 인혁. 레지던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 ...어디로 가면되나. ” “ 아.. 그게 2층 복도로.. ” “ 금방 갈 테니까. 나가 있어. ” “ 아.. 예. ”

그렇게 레지던트가 인혁에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인혁은 놀란 눈으로 서있는 은아를 슬쩍 보더니 아까 못한 인사를 하는 그.

“ ...이만, 퇴근하고, 이따 저녁에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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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인혁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바로 준비를 하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정형외과 사람이 사무실까지 와서 그를 데리러 온 적은 없었기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은아. 사무실 앞에 그를 다급히 부른다.

“ 잠시 만요! 교수님! 무슨.. 일이에요? ” “ 뭐... 별일 아니에요. 중환자실 때문에.. 늘 있는 일이잖아요. 신경 쓰지 말고, 퇴근해 요. ”

지쳐서 한껏 가라앉아있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먼저 응급실을 빠져나가 버리는 인혁. 늘 있는 일.. 맞는 말이었다. 늘 외상환자를 무리해서라도 수술시키고 나면 여기저기서 컴플레인이 들어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따라, 축 쳐진 그의 어깨와 뒷모습이 더욱더 눈에 밟히는 은아. 그녀는 퇴근은커녕 꿈쩍도 하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런데.. 늘 봐오던 뒷모습인데.. 오늘따라 왠지 저 쳐진 어깨가 머릿속에서 어떤 모습과 겹쳐진다고 느끼는 그녀. 뭐지..? 도대체 뭐지.. 이 불길한 예감.. ...?...아!.. 순간,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오른 은아. 분명 그때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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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전에 쓰던 사무실에서 쫓겨났던 그때, 아직도 그 당시의 인혁이 외과과장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는 그녀였지만, 저렇게 축 늘어진 그의 어깨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불안해했던 자신의 마음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은아였다. 그날,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땅만 보며 자신을 향해 힘없이 걸어오던 그. 왜 사무실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려 했던 그때의 그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는 그녀. 도대체 왜일까..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왜 그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걸까.. 그동안 잊혔던 일인데.. 오늘은 왠지 인혁을 저대로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은아. 재빨리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가방을 다시 사무실에 던져 놓은 뒤, 그가 나간 방향으로 발걸음을 움직인다. 그의 말대로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느껴지는 이 불길한 예감이 괜히 드는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작년여름처럼, 그 혼자 모든 걸 감당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번만큼은 욕을 듣더라도 같이 듣고, 힘들더라도 같이 힘들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더욱더 빨리 움직이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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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병동으로 가기 전에 응급실과 이어지는, 한산한 2층 복도, 인혁이 코너를 돌자마자 그의 눈에 방금 정규수술을 마치고 내려온 듯한 세헌의 모습이 보인다. 수술복 차림으로 단단히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복도 끝에 서 있는 세헌. 그런 그의 옆에서 안절부절 못한 표정으로 서있는 정형외과 펠로우와 레지던트. 인혁은 살짝 한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가서는 세헌의 앞에 선다.

“ 부르셨습니까. 교수님. ” “ 뭐? 부르셨습니까? 교수님?!

”

“ ..... ” “ 최선생, 아니, 최인혁. 너, 나를 스승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는거냐? ” “ ..... ” “ 니가 적어도, 나를 스승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환자를! 그것도 VIP를! 허락없이 막 병동으로 옮길 수 있어?! 너는 뭐 위아래도 없어? ” “ ..... ” “ 내가 분명히 안 된다고 했는데, 내말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아니, 자기 독단적으로 행동 할 거면! 왜 이병원에 있나? 나가서 개인병원을 차리던가!! ” “ 워낙에 위급한 환자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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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에게 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세헌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을 요량으로 한쪽 팔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혁. 하지만 점점 비꼬듯 말하는 세헌의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정확히 응시한다. 그런 그가 더 마음에 안 드는지 특유의 삿대질까지 해가며 더 흥분하는 세헌.

“ 뭐야?! 그러면, 남의 환자를 막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해도 되는거야? 그렇게 위급한 환자면 애초에 딴 병원으로 보냈어야지? 중환자실 자리도 확인 안 하고, 수술 실도 확인 안하고! 무조건 받아서 이렇게 다른 과까지 피해 주면! 어쩌자는거야! 내가 당신 때문에 진정이 안 되서 수술을 못해!! 수술을!! ” “ 갈수 있는 다른 병원이 없는 상황이어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중환자실자리만 나길 기다리다가 수술 안 하면은, 환자들 못 버티고 죽습니다. ”

지지 않고 맞대응을 하는 인혁 때문에 더욱더 열이 받는 세헌. 옆에 있는 레지던트와 펠로우는 그가 언제 터질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 이봐, 최인혁 너만 의사야? 당신만 환자 살리나?! 아무리 환자를 살리고 싶어도 여 건이 안 되면 못 받는 거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러면 지금 니 말은, 남의 환자를 허락도 없이 옮긴 게 잘한 짓이라는거야 뭐야?! VIP환자를 보호자한테 설명도 안하고 이리저리 옮겨놓고 나중에 뭐라고 설명할거냐고! ” “ VIP만 환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환자 의식있고, 감염도 없이 회복단계로, 상태 양호해 보였고, 병동으로 옮겨도 이상 없다고 판단해서 옮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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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근데 이자식이 꼬박꼬박!! ”

/ 짜아악- /

일순간에 정적이 흐르는 복도. 돌아간 인혁의 고개. 그의 뺨을 내려친 세헌의 손.

“ ....!!!..... ”

놀란 정형외과 레지던트들. 세헌 자신도 홧김에 그의 뺨을 내려쳐놓고는 살짝 당황한 듯 했다. 워낙 전부터 미워했던 놈이고, 아무리 자신의 제자였다지만 그래도 이미 교수가 된 인혁을 때리다니, 그것도 펠로우, 레지던트가 다 있는 자리에서..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세헌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이참에 아예 인혁을 눌러버리기로 결심한다.

“ 야..야, 임마!! 담당의가 못 보낸다면 못 보내는거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리고 감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적자만 내는 주제에!! 지금 하고 있는 외상수술들!! 다 니 가 잘나서 하는 거 같아? 내가 지금 이병원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고!! 너 때문에 쌓이는 적자가 얼만 줄이나 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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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쪽 손으로 뺨을 붙잡고 맞은 자세로 꼼짝도 않고 있는 인혁에게 계속해서 퍼부어대는 세헌. 그리고 그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옆에서 세헌을 말리지도 못한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있는 레지던트와 펠로우. 인혁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대로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헌이 의과대 교수시절부터 손버릇도 나쁘고 늘 권위적인 사람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교수가 된 자신에게 이렇게 까지 할 줄은 몰랐던 터라 지금 자신이 정말 그에게 맞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점점 인혁이 상황을 인식할 만큼 뺨이 아파오고 계속해서 세헌이 적자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자신을 몰아붙이자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인혁. 역시나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때린 세헌에게 맞서기 위해 고개를 드는데,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보이는 한 사람. 복도 저 끝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막은 채 놀라서 서있는 은아. 그녀가 보였다.

“ ...!!!... ”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린 인혁.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레지던트와 펠로우, 세헌 역시 말을 하다말고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고는 은아와 눈이 마주친다. 살짝 당황하는 세헌, 하지만, 간호사가 뭘 어쩌겠어.. 라는 마음에 그녀가 모른 척 넘어가리라고 생각했지만, 세헌의 예상과 다르게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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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금 자신이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면서도, 순간, 너무 화가 나고, 분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다가, 지금 자신이라도 인혁의 편을 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 지..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 “ ...!!... ” “ ..... 아무리 중환자실이 잘못됐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 “ 뭐.. 뭐야 당신은? 간호사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

은아의 말에 당황한 세헌. 간호사가 이 자리에 나설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그였다. 그런데 그때, 세헌의 눈에 은아의 이름표가 보이고,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 라고 써진 그녀의 명찰을 확인한다. 외상이라고..? 그러면 그렇지..! 그녀를 보고 피식- 웃는 세헌.

“ 이봐! 이봐! 의사가 병원규칙도 다 무시해버리고!! 위계질서도 모르고 설쳐대니까!! 그 밑에 있는 간호사도 이렇게 설쳐대는 거 아니야!!! ” “ 지.. 지금 말 다하..ㅅ..!! ” “ ...신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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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세헌의 말에 뭔가 대꾸를 하려다가 인혁의 부름에 멈칫하며 말을 멈춘다. 그리곤 자신을 부른 그를 돌아보며 그와 눈을 마주치는 그녀. 은아가 앞에 있기 때문에 간신히 화를 참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인혁. 그는 그녀에게 이런 일을 보인 것도 싫었고, 그녀가 자신 때문에 욕을 먹는 것도 싫었고, 이렇게 자신을 감싸주다가 자신과 무슨 사이라느니 또 엮이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도 싫었다. 자신이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도록, 제발 그녀가 자리를 피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인혁이었다. 이내 그녀의 시선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여는 인혁.

“ ...나서지 말고 사무실에 가있어요. ” “ ..... ”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한 채로 계속 인혁을 바라보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아. 그녀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듯한 인혁의 표정을 보고는 그의 말대로 물러나있을까도 생각해보는데, 순간,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인혁의 뺨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화를 못 참고 속마음을 내뱉는다.

“ 아니요..! 얘기해야 할 건 해야겠어요!! 우리가 무슨 죄인이에요? ” “ ...... ” “ 하루도 안 쉬고 병원에서 내내 일하면서!! 어떻게든 환자 살려보겠다고 그러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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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중환자실 없어서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나하고!! 사무실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 자라서!! 이렇게 맞기까지 해야 되요?!! ” “ 거, 나서지 말라니까!!!!!! 내 말 안 들어요?!!!!! ” “ .....!!!!..... ”

다시 일순간에 흐르는 정적. 결국, 참고 참던 인혁의 화가 터져버렸다. 인혁의 큰소리에 놀라서 그를 쳐다보는 은아. 역시나 그를 쳐다보는 세헌과 레지던트, 펠로우. 소리를 지르고 나서 한동안 은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세헌, 레지던트, 펠로우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인혁. 분노 때문에 그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얘기를 그들에게 대신해 준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녀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은아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어쩌면 자신을 때린 세헌에게, 자신을 이런 사지로 몰아세우는 병원에게 자신을 무시하고 왜곡하고 외롭게 만드는 병원 사람들에게 지금처럼 소리치고, 화를 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그 고생들을 내심 알아주길 바랐던 자신의 속을 들킨 것 같아서, 그러면 우리의 처지가 더 우스워질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그녀가 했던 말. 늘 생각하면서도 애써 지워버리려던 생각들이었다. 왜 이렇게 까지 힘들어야 하는지. 나는 병원에서 정말 이렇게 불필요한 존재인가. 외상이 필요하긴 하지만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병원, 그리고 이 나라. 그래서 늘 애물단지 취급만 받는 외상.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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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찢어져라 일해도 알아주기는커녕 이렇게 열심히 하면 할수록 늘 구박덩어리가 되어버리는 이 처지. 병원에서 적자교수로 낙인찍힌 채로 늘 손가락질 받는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고, 미련하게 느껴지고, 외롭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참았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참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갈 곳 없는 환자들.. 한명이라도 살릴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럴 때 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건지, 왜 이렇게 나를 몰라주는 건지, 단지, 그 답답함에서 나오는 화가 엉뚱하게 죄 없는 그녀에게로 튀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있는 공간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있는데, 그들을 향해 소리치는 누군가의 목소리.

“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

인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나병국 과장이었다. 좀 전에 도착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 과장. 인혁이 터지기 직전인 상태인걸보고 안되겠다 싶었는지 얼른 상황에 끼어든 그였다. 일부로 더 화를 내는 나 과장.

“ 응급실이 무슨 진짜 시장 통 인줄 아나?! 다들 뭐하는 거야 지금!! 당신들 목소리가 응급실까지 얼마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줄 알아? 안 그래도 복잡해죽겠는데! 나참, 환자들까지 무슨 일이냐고 수군거리고 난리가 났다고 지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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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나과장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상황을 파악한다. 언뜻 들었던 은아의 말처럼 정말 빨갛게 부어오른 인혁의 뺨. 그의 옆에서 거의 울듯이 서있는 은아. 그리고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 말도 없이 헛기침만하며 서있는 세헌. 그런 세헌의 눈치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있는 레지던트, 펠로우. 나과장은 일순간에 모든 상황파악을 끝낸 후, 그들을 쳐다보고 있고, 세헌, 레지던트, 펠로우, 은아, 인혁. 아무도 그에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그저 침묵만이 흐른다. 곧, 그 침묵을 깨고 인혁을 향해 입을 여는 나과장.

“ 어이 최교수, 자네 아까 응급실에서 수술했지? ” “ ..... ” “ .... 보호자 때문에 할 말이 좀 있으니까. 사무실에 내려가 있으라고. 신선생도. 자네 들은 올라가고, 저기, 황과장은 나 좀 봅시다! ”

나 과장에 명령에 세헌에게 허락을 받은 뒤, 자리를 빠져나가 버리는 레지던트와 펠로우. 그러나 인혁은 계속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있고, 은아 역시도 그런 인혁을 불안한 눈빛으로 보며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소리치는 나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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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해!! 내려가 있지 않고? ”

그제야 세헌을 노려보던 눈을 거두고는 성큼성큼 복도를 빠져나가는 인혁. 은아도 세헌을 한번 노려보고는 그의 뒤를 따라 복도를 빠져나간다. 그렇게 세헌과 나과장만 남은 복도. 나과장이 세헌에게 짜증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을 한다.

“ 아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하루도! 아니, 안 그래도 바쁘고 복잡해죽겠는데, 꼭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야겠어요? ” “ 그 소릴 왜 나한테 합니까? 저 분란덩어리 최인혁한테 해야지?! 아니, 그리고! 저 간호사는 또 뭐야 저거!! 갑자기 끼어들어서는! 어디 간호사가 함부로 나서 나서기를! 거 응급실에서는 사람관리를 이딴 식으로 밖에 못합니까? 응급환자 들어오면 꼭 다른 과한테까지 이렇게 피해를 줘야되요? ” “ 응급실이라뇨! 소속만 응급실이지 외과나 마찬가진데!! ” “ 허, 나, 참나 그럼 이 사태를 누가 책임질 거예요?!! ” “ 책임지긴 뭘 책임져요! 듣자하니 환자가 잘못 된 것도 아니라면서!!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사람을 때려요? 황과장이 무슨 깡패에요?! ” “ 뭐요?!!! ” “ 아니 아무리 제자였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레지던트 펠로우 다보는 앞에서 그렇 게 망신을 주는데, 어느 누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어요? 자기 팀이 그렇게 당하고 있 는데! 보고 있는 나도 욱하는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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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참나..!! ” “ 아무튼! 이번일 황과장도 분명 잘못한 거 있으니까! 그냥 조용~히 덮고 넘어갑시다 아?! 예?! 괜히 또 일 크게 키우지 말고!! ”

대답은 하지 않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세헌. 나과장은 그런 그에게 명심하라는 듯 입을 닫는 시늉을 하고 복도를 빠져나가 버린다.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아직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사무실로 들어온 인혁. 이내 그의 뒤를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은아.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에 그저 속상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주 조심스레 그를 불러본다.

“ ... 교수님.. ” “ ..... ”

그러나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돌아선 채로 아무 대답도 없는 인혁. 은아는 그의 뒷모습이 위태롭고 불안해보였다. 그가 다시 작년 여름처럼 또다시 무너져 내리면 어쩌나.. 혹시나 그가 병원을 그만두려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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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시 한 번 그를 불러보는 은아.

“ 교수님... 저 안보실거에요..? ” “ ..... ”

그러나 여전히 대답도 없고 돌아서지도 않는 인혁. 아마도 부어오르고 있는 본인의 얼굴을, 끓어오르는 분노와 내뱉지도 못하고 삭이지도 못하는 그 화를, 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 그럼에도 그가 화를 참지 못 하고 병원을 나가 버릴까봐 불안한 그녀. 다시 조용히 입을 연다.

“ 저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어디.. 가시지 말고.. 여기 계세요.. 아셨죠..? ” “ ..... ”

은아는 역시나 대답이 없는 그를 뒤로한 채 문을 열고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밖을 나간다. 그리고는 사무실문 앞에 기대어 그대로 서있는 그녀. 억울했다. 억울하고 분했다. 힘이 없으면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 걸까..? 교수님이 도대체 잘못해봤자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잠도 못자고 몸도 아파가면서 사람 한번 살려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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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그가 도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가 또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저런 상처들을 내뱉지도 않고, 또 혼자 삭이려 할 사람인데, 얼마나 그가 힘들어할지..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 한편,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방안에 혼자 남게 된 인혁.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여전히 문에서 뒤돌아선 채로 움직이지도 않고, 한참을 생각에 빠져 그러고 있었다. 몇 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미세하게 떨리던 그의 몸이 곧 잠잠해진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들어 아까 세헌에게 뺨을 맞은 자리에 갖다 대 보는데, 자신의 뺨이 뜨겁게 부어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왠지 헛웃음이 나오는 인혁. 울 수는 없으니 웃음이 나왔다. 남들은 자리 잡고 승진해서 편하게 지낼만한 나이인데, 한때의 지도교수였던 사람에게.. 이렇게 후배들 앞에서 뺨을 맞게 될 줄도 몰랐고, 그런 모습을 은아에게 보이게 될 줄도 몰랐다. 이젠 화가 나는 걸 넘어서서 허탈해졌다.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당하는 수밖에는.. 혼자서 화를 삭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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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비참해지고.. 깨지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처지로 살아야 하는 건지..

“ 하.. ”

다시 한숨 섞인 헛웃음이 나오는 인혁. 답이 없었다. 아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또 포기할 것인가? 그건 아니었다. 힘이 없으니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주먹이 절로 쥐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화를 삭여보려 해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가방을 열어보는 인혁. 가방 깊숙이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낸다. 그의 손에 들려져 나오는 하얀 봉투. 오래전에 써둔 사표. 늘 지니고 다니는 이 사표.

1년 만에 꺼내보는 이 사표. 작년 여름 사무실에서 쫓겨났을 때. 그때 써둔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외상센터에 남아준 이후로 이 사표를 다시 꺼내볼 만큼 힘든 날은 없었다. 내가 그러기 전에 그녀가 날 먼저 위로해줬고, 나는 그렇게 다시 힘을 얻고 일을 하곤 했다.

1년 전에 써놓은 이 사표를 꺼내본 것은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한참동안 그 사표를 노려보다가 손에 있는 그것이 꾸깃해지도록 꽉 쥐어버리는 그. 사표가 들린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제는 진짜 남아있는 게 악밖에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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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외상센터가 생길거란 희망은 사라졌지만, 이제야 비로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트라우마센터였다. 매일을 이렇게 무시당하고 싸우고 전쟁같이 보냈지만 그래도 그나마가 있기 때문에 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다. 비록 인력도 없고 지원도 거의 없는 트라우마센터지만, 확실히 이나마도 없던 예전과는 살릴 수 있는 환자의 수가 달랐다. 이 정도를 이루기까지만 해도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약속했었다. 작년 가을, 어머니의 뼛가루를 강물에 흘려보내면서 어머니께도.. 아버지께도.. 약속했었다. 이제는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 보겠다고. 두 분이서 함께 지켜보시라고. 그리고 또 약속했던 한 사람.. 내가 내손으로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놓은 그녀. 비록 외상센터에 대한 희망은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나에게 힘을 주며 버텨준 그녀. 신 선생 앞에서도 약속했었다. 포기하지 않을 테니 남아달라고.. 그래서 은아에게는 늘 고맙고도 미안해했던 인혁인데, 오늘 만큼은 그녀에게 화가 나는 그.

/ 이봐! 이봐! 의사가 병원규칙도 다 무시해버리고!! 위계질서도 모르고 설쳐대니까!! 그 밑에 있는 간호사도 이렇게 설쳐대는 거 아니야!!! /

아까 그녀가 황과장한테 들었던 말을 생각하니 참았던 화가 더 치밀어 오르는 인혁. 퇴근하라는 말도 안 듣고 왜 하필 그때 나타나서는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게 하는건지.. 그리고 왜 그녀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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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얽혀서 그녀까지 욕을 듣고 무시당하는 거 같아서 너무나도 화가 나는 그. 그런데 그때 또 생각나는 한구의 말.

/ 그러게. 애인 만날 시간도 없이.. 야, 신선생 요즘 좀 힘들어 보이던데, 잠도 못 자 는지 눈도 퀭하고.. 왠지, 점점 너 닮아가는 거 같기도 하고..? /

인혁은 정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와 같이 일만하느라 사람다운 삶도 못 누리는 그녀. 정말 그녀는 그런 취급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처럼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는 더 이상 기댈 곳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결혼을 기다리는 남자도 있고, 그녀를 걱정해줄 가족도 있고,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 줄 캐나다로 떠날 수도 있는 기회도 있고.. 그렇게 그녀는 언제든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심스레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쥐고 있던 사표를 가방 속에 넣고 서둘러 가방을 닫아버리는 인혁.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 그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리고는 간이침대에 걸터앉는다. 자꾸만 자신을 피하며 혼자 화를 참으려는 그가 섭섭했지만 애써 그런 마음을 숨기며 그에게 다가가 얼음 팩을 내미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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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교수님.. 이거, 얼굴에 대고 있으세요.. ”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그녀가 내미는 얼음 팩을 쳐다보는 그. 뭔가 울컥하는지 침을 한번 삼키더니 다시 고개를 내리며 그녀를 보지도 않고 말한다.

“ ... 거기 두고, 나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퇴근해요. ” “ ..... ”

그의 말을 듣고 덩달아 울컥하는 그녀. 또 혼자 해결하시려는 건지.. 자꾸만 자신을 신경 쓰지 말라는 그의 말이 그녀의 가슴을 찔러 온다. 그러나 지금 가장 힘든 건 인혁일 것이기에 그 울컥하려는 무언가를 참아보면서 그의 옆에 다가가 앉는다.

“ ... 퇴근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저 걱정하지 마시고.. 이거, 얼굴에 대고 있으세 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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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대답도 없이 있는 인혁. 그런 그를 보며 너무나도 속상한 그녀. 그의 뺨이 빨갛게 부어있는 게 보이는데, 그의 마음이 상처 입은 게 보이는데, 자꾸만 그는 혼자 해결하려 하며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또 다시 내버려두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은아. 자신이 먼저 다가가서라도 그의 상처를 감싸줘야겠다는 마음에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 들고 있던 얼음 팩을 그의 뺨에 갖다 대며 입을 연다.

“ 교수님, 이렇게라도 해야.. 빨리 가라앉죠. 제발 말 좀 들으시ㄱ.. ” “ ...!!!... 지금, 뭐하는 거에요!!!! ” “ ....!!!.... ”

은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녀에게 또 다시 소리를 질러버린 그. 그리고 그런 인혁 때문에 놀라 그대로 멈춰버린 은아. 평소 같았으면 그냥 약간에 짜증을 부리고 말았을 인혁인데, 이렇게 까지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낸 건 거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예민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며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사과를 하는 그녀.

“ 아, 죄.. 죄송해요. 저는 그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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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에 그냥 두고 퇴근하라고 했잖아요!! 내말 안 들려요?!! 신선생도 나 무시해 요?!! ”

당연히 그녀가 그를 무시해서 그럴 리는 없었다. 인혁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것들을 인식하기도 전에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튀어나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따지고 내뱉어야 할 말들까지 모두 그녀에게 뱉어버리고 있었다.

“ ....!!!... 그런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교수님을.. ” “ 그게 아니면!! 왜 아까 퇴근하란 말도 안 듣고 따라왔어요!!! 뭐 좋은 구경났다고 거 기까지 따라와요!!!! 따라오길!!! ” “ 교수님..!!! 무슨 말을 그렇게..! 저야 당연히 걱정되니까..! ” “ 그러니까!! 신선생이 날 왜 걱정해주냐고!!!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닌데!!! ” “ ......네..?! 교수님.. ” “ ....!!!!..... ”

홧김에 마음에도 없는 심한 말들이 튀어나가는 것도 모자라서 마음속에서 혼자만 걱정하고 있던 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은아가 그의 말에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고 나서야 자신이 뱉은 말을 인식하고는 아차 싶어서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는 그. 인혁과 은아 두 사람 다.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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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동안 흐르는 정적. 은아는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지금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도 서운하고 서러웠다. 그래도 적어도.. 그가 힘들어할 때 응원해주고, 이 정도로는 그를 걱정해줄 수 있는.. 예전에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가족 같은 팀원, 그 정도로 가까운 동료사이. 적어도 그 정도 사이는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리고 적어도 인혁도 자신을 그 정도로는 생각해 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게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걸까..? 안 그래도 요즘 자신에게 뭔가 화가난건지 자꾸만 자신을 피하고, 웃지도 않고 말도 잘 안하던 인혁이었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 은아. 하지만 그녀가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를 보던 시선을 거둬버리고 문 쪽으로 향하는 그. 지금 그녀에게 계속 말을 했다간 더 심한말로 상처를 줄 것만 같아서 자리를 피해버리려던 인혁인데, 은아도 순간 화가 나는 마음에 속으로만 걱정하던 말을 내뱉으며 그를 붙잡는다.

“ 또 이대로 병원 뛰쳐나가시려고요..?! ”

그녀의 말에 멈칫하는 인혁. 분명히 작년 여름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아예 안했던 것도 아니고, 그녀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때처럼 병원을 뛰쳐나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껏 그녀와 함께 고생해서 만들어놓은 트라우마센터를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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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녀에겐, 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던가..? 다시 울컥하는 마음에 괜히 침을 삼키는 인혁. 여전히 문고리를 잡은 채 그녀를 보지 않고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입을 연다.

“ .... 나 안 뛰쳐나가니까! ....걱정하지말고. 이만 퇴근하라구요. ” “ 지금 상황에 퇴근이 뭐가 중요해요!! 저한테.. 뭐 화난 거 있으세요..?! 차라리 화난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하세요!!! 요즘 교수님 이상하시잖아요!! 대답도 잘 안하시고!! 자꾸만 저 피하기나 하시고!!! ”

그동안 자신이 걱정했던 것들에 대해, 그 걱정들로 인해 어색하게 나타났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정곡을 찌르며 물어보는 그녀. 그 물음에 잠시 멈칫하던 인혁. 그러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는 또 그동안 걱정했던 것들을 쏟아내는 인혁. 하지만 화가 난 상태라 말이 곱게 나가질 않는다.

“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 퇴근하고 가서 신선생 할 일 하라구요!!! 괜히 나 같은 놈 하고 일하느라 욕이나 듣지 말고!! 잠도 자고!!! 남자친구도 만나고!!! 여자가 꼴이 그 게 뭐에요!!! ” “ ....!!!!.... ”

순간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란 그. 이런 식으로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지금껏 자신과 함께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해 준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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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없냐는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단지, 그녀에게 안 좋은 소문이 생길까봐, 괜히 자신 때문에 아까처럼 욕을 먹을까봐, 남들이 그녀를 나와 같이 일만하는 사람으로 볼까봐, 그녀가 더욱더 나처럼 사람답지도 못한 생활을 할까봐, 조금 더 자신의 생활을 찾았으면 하고, 그녀를 걱정했던 것뿐이었다. 정말 그 것 뿐이었다. 당황한 인혁. 지금 내뱉은 말에 그녀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녀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는 게 보인다. 눈가가 붉어지면서 점점 촉촉한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인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듯한 느낌이 드는 인혁. 정말 이게 아니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다.

“ .....저기.. 신ㅅ.. ” “ 죄송하게 됐네요. 저 이만 가볼게요. ”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가방을 들고, 그를 지나쳐서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은아. 인혁은 그녀가 자신을 스쳐갔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걱정했던 일들에 대한 오해를 오히려 키우는 일이 될 것이기에 다시 문을 열고 쫓아가서 그녀를 붙잡아놓고 사과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너무 미안해서 그럴 자격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인혁이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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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심한 말들을 내뱉어 버린 걸까. 지금껏 내뱉은 말들의 절반이상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들었지 그녀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 결국, 그녀에게 화풀이를 해댄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좀 전에 그녀와 나에게 독설을 해댔던 황세헌 그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그.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게 느껴지는 인혁이었다. 한편, 사무실 밖, 응급실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세헌의 호통소리를 들은 이후 은아와 함께 내려온 인혁의 뺨이 빨개져있는 걸 목격했던 응급실 사람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다들 수근거리고 있는데, 그때,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내에서 또 큰소리가 나는 듯하자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트라우마 센터 사무실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이내 사무실문이 열리고 은아가 밖으로 나오자 간호사들과 인턴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데.. 그런데 순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보이고, 간호사들이 한층 더 커진 눈을 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오며 묻는다.

“ ...!!... 신..선생님..? 우시는 거에요? ” “ 어머, 무슨 일이에요?! ”

그러나 은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만 저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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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그들의 곁을 지나친다. 그렇게 곧장 간호탈의실로 향하는 은아. 몇 분 후, 병원 앞 택시정류장, 응급실 간호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데도 아무 대답도 않고 그대로 옷만 갈아입고는 병원 밖으로 빠져나온 은아. 곧바로 택시를 잡고서는 뒷좌석에 몸을 싣는데.. 그러다 문을 닫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 쪽을 돌아보지만, 역시나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괜한 기대를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 더욱더 서러워지는 그녀. 이미 눈물은 그친지 오래였지만 서럽게도 그가 한말이 가슴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믿었던 그였기에.. 더 서럽고 화가 나는 은아.

[ 탁- ]

“ 남포동으로 가주세요. ”

[ 부우우우우우웅- ]

그녀를 태운 택시가 결국 그대로 병원을 빠져나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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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지친 얼굴로 간이침대에 주저앉아있는 그.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그녀의 모습. 인혁은 그녀의 눈물을 본 순간,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누구보다 자신을 생각해주고 위로해주려는 그녀인데 그런 사람에게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들.. 그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을 말들... 정말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 그러니까!! 신선생이 날 왜 걱정해주냐고!!!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닌데!!! / /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 퇴근하고 가서 신선생 할 일 하라구요!!! 괜히 나 같은 놈 하고 일하느라 욕이나 듣지 말고!! 잠도 자고!!! 남자친구도 만나고!!! 여자가 꼴이 그 게 뭐에요!!! /

“ ....하아....... ”

긴 한숨을 뱉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 그런데 그때, 은아가 떨어트리고 간 얼음 팩이 다시 그의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떨어진 얼음 팩을 주워드는 그. 그리고는 주운 것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볼에 갖다 대어 본다. 얼얼해졌던 뺨에 차가운 것이 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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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통증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대어주려고 했던 것일 텐데.. 그저 걱정되는 마음에 그랬을 텐데.. 인혁은 순간, 손을 뿌리치며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던 자신의 모습과..

/ ...!!!... 지금, 뭐하는 거에요!!!! / / ....!!!.... 아, 죄.. 죄송해요. 저는 그냥.. /

놀라고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위로해주려던 것뿐일 테니까. 그 사람한테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황과장하고 있었던 일 때문에 흥분해있는 상태에서 한구에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뒤엉키면서 그녀에 대한 일에 너무 예민해져 있던 그. 그냥.. 그 사람이 걱정 돼서.. 머리가 복잡해서.. 순간, 나도 모르게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피스 와이프라느니, 위계질서도 모르고 설쳐댄다느니, 눈이 퀭하도록, 나를 닮아간다느니.. 나와 함께 있으면서 무시당하는 모습에, 사람들에게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왠지 나도 모르게 화가 났었다. 그래서 그렇게 그녀를 밀어내 버렸다.

/ 저한테.. 뭐 화난 거 있으세요..?! 차라리 화난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하세요!!! 요즘 교수님 이상하시잖아요!! 대답도 잘 안하시고!! 자꾸만 저 피하기 나 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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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화가 났던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이, 그런 소문들이 신경 쓰이고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딱딱하게 대하게 되고 의도치 않게 피했던 건 사실인데.. 그녀도 내심 신경쓰이고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 ...... 하아.... ”

그렇게 예민하게 굴 필요도 없었는데.. 차라리 솔직하게 터놓고 말할걸.. 이런 말들이 돌고 있다고 하니, 조금 조심하자고.. 그런데 막상 그런 말들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녀와 어색하지 않게 지내고 싶어서 어떻게 돌려 말할지..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냥 단지..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었는데.. 오히려 시간만 끌다가 오해만 쌓이고 일이 더 틀어져 버렸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앞으로 은아의 얼굴을 보며 같이 일을 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지는 인혁. 뺨에 대고 있던 얼음 팩을 쥔 손을 툭 떨어트리고는 그 얼음 팩을 가만히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인혁은 죄 없는 은아에게 상처를 줬다는 자책감과 마음에 없는 말들을 쏟아낸 자신이 한심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헌의 일까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이 상황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게 느껴지자 그의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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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응급실 데스크, 응급실이 좀 한가로워진 틈을 타서 은아가 울면서 병원을 뛰쳐나간 일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간호사들.

“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 ” “ 그러게..? 아까는 황과장님한테 최교수님이 한소리 듣는 것 같더니, 왜 갑자기 신선 생님이.. ” “ 김쌤 못 들었나? 최교수님이 신선생님한테 퇴근이나 하라고, 할 일이 그렇게 없냐 면서 남자친구나 만나라고, 여자가 꼴이 그게 모냐고 막 그라던데..? ” “ 진짜로..? 설마..? 난 못 들었는데? ”

최간호사의 말에 놀란 눈이 되는 나머지 간호사들. 다들 설마..하는 눈치이다. 그러자 그들을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최 간호사.

“ 아, 내가 사무실 바로 옆에 있다가 똑똑히 들었다니까네..! ” “ 그런가..? 그게 그 소리였나? 그러고 보니 나도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아, 다른 얘 기는 못 들었노..? ” “ 글쎄, 지나가던 중이어서 다른 얘기는 못 들었는데.. 어쨌든간에~! 그 얘기는 똑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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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니까! 왜 그 뒤에 바로 신 선생님 뛰쳐나왔잖아~! ” “ 와.. 최교수님 성질 불같은 건 알았지만, 그렇게 안 봤는데... 여자가 꼴이 뭐냐고? 하, 참나.. 말이면 단줄 아나? ” “ 그라니까. 내말이..!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신 선생님한테 그럴 수 있 지..? ” “ 에이.. 딱보니까. 황과장한테 욕먹고 신선생님한테 화풀이 한거네..! ” “ 참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 진짜.. 내가 다 화가 나네, 아니..! 신선생님이 그 동안 최교수한테 얼마나 잘해줬노?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뭐라켔다고?! ”

그렇게 트라우마 센터를 쳐다보면서 인혁을 욕하고 있는 간호사들. 그런데, 그 소리를 옆에서 은근슬쩍 듣고 있던 인턴들. 자기들끼리 말을 하다가 인혁이 심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며 은아의 편을 드는데, 또 그 얘기를 다른 과 레지들이 듣게 된다. 그렇게 인혁과 세헌 사이에 있었던 일은 까맣게 묻힌 채로 온 병원에 인혁이 은아를 울린 것에 대한 얘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가 버린다. 잠시 후, 은아의 집,

[ 끼익- 탁- ]

문이 힘없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은아가 집안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은아. 자리에 앉자마자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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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몸을 소파에 아예 눕혀버린다. 그러고는 이마에 손을 얹는 그녀.

“ ....하아..... ”

지친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모든 의욕이 다 사라지는 기분.. 택시에 오는 내내 여러 가지를 생각했었다. 처음엔 그저 서러웠고, 그 다음엔 화가 났다. 왜 그가 그렇게 까지 화를 내는 건지 왜 요즘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가슴이 더욱더 답답해지기만 하고 화만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오는 동안 내내 귓가에 맴돌았던 그의 말.

/ 그러니까!! 신선생이 날 왜 걱정해주냐고!!!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닌데!!! / “ ..... ”

단지.. 그를 위로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다른 의사한테 이런 취급까지 당하는 그의 처지가 안쓰러웠고 또 혼자서 괴로워할 그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엔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혼자 싸매고, 뛰쳐나가고, 괴로워하고..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게.. 그렇게 잘못이었을까? 아까 일을 생각하니 다시 억울하고 서러워지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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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은 그녀. 하지만, 혼자서 울컥해봤자 더 억울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애써 아까의 일을 떨쳐버리려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고 눈을 감는데, 순간, 몇 시간 후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눈을 뜨고 시계를 보는 그녀. 벌써, 5시 20분. 쉴 수 있는 시간이 4시간도 되질 않았다. 오늘 평소보다 유독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애매해져 버린 시간. 잠을 자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졸리고 피곤한 몸을 그대로 둔 채, 그냥 출근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 .....하아.... ”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은아. 늘 이랬다. 늘 이런 생활에 반복이었다. 오늘이 유달리 늦게 퇴근한 날이긴 했지만, 평소에도 마찬가지로 쉴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정부의 외상센터 지원이 희미해지고 난 뒤, 트라우마센터의 여건은 더 안 좋아 졌고, 그럴수록 인혁은 환자를 살리는 일에 더 사활을 걸고 일했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무리하게 환자를 받는 일도 많아졌고, 인혁이 학교 강의 까지 시작하게 되면서, 자연히 은아가 감당해야 하는 일도 더 많아지게 됐었다. 때로는 그런 그를 보좌해주는 일이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업무량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다른 간호사들처럼 오프가 제대로 보장된 것도 아니었고, 아무리 오프라도 자신이 병원에 나가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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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혼자 고생할 걸 뻔히 알기에, 환자들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일손이 늘 부족한걸 알기 때문에, 늘 병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어떨 때는 바빠서, 어떨 때는 자발적으로, 거의 매일같이 출근하고 일하고 하고.. 그러다 응급환자라도 오거나 자료정리가 늦어져 오후 늦게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늘 시간이 촉박해서 간신히 샤워만하고 바로 잠을 자고, 눈을 뜨면 화장 같은 건 제대로 신경도 못쓰고 출근을 하고... 게다가.. 요즘처럼 야간 근무를 하는 날에는 잠을 자기에도 부족한 날이 많아, 가끔 병원에서 쪽잠을 잤을 정도로 시간에 쫓겨 사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지난 2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고, 그러는 동안 몸은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그가 하는 일이니까 버틸수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욕을 들어도, 궁지에 몰리더라도, 자기한 몸이야 어떻든 간에 늘 환자부터 챙기는 그. 은아는 아무리 몸이 힘들더라도 자신보다는 그가 더 힘들고 지칠 거란 생각에 힘들수록 더 웃으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알아주는 그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노력하는 걸 인정해주는 그였기에. 힘들어도 의욕이 꺾이지 않으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일을 미뤄두고 있던 그녀였다. 요즘들어 더 결혼을 재촉하는 어머니의 잔소리도. 한없이 자신을 기다리다 지쳐보이는 듯한 동규의 모습도 자신을 정리하고 가꾸는 일도.. 모두 미뤄두고 있던 그녀였다. 그렇게 지내왔었는데.. 그렇게 버텨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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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 퇴근하고 가서 신선생 할 일 하라구요!!! 괜히 나 같은 놈 하고 일하느라 욕이나 듣지 말고!! 잠도 자고!!! 남자친구도 만나고!!! 여자가 꼴이 그 게 뭐에요!!! /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말이 너무 야속해서 금세 울음이라도 터트릴 거 같은 그녀.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인혁이 겉으로는 무섭고 화만 내는 듯해도 사실은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란 것을.. 그것이 그와 2년 가까이 일할 수 있었던 이유였고 그동안 그를 존경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래서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한숨을 몰아쉬고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는 은아. 애써 그 말들이 정말 그의 진심은 아닐 거라고.. 단지, 상황이 안 좋아서.. 화가 나서 그랬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으려는 은아. 이렇게라도 그를 이해하지 않으면 정말 그가 너무 미워질 것 같았다.

2년 동안 그와 쌓아왔던 신뢰와 믿음도 자신이 고생했던 것들도 너무 허무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에게 이유를 듣지 못했다. 왜 요 며칠 자신을 피하는 건지, 나에게 왜 화가 나있는 건지.. 이유라도 알아야 이해를 하든 말든 하지.. 오늘 만큼은 그에게 꼭 그 이유를 들어야겠고 생각하는 은아. 다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는 그녀. 벌써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아무래도 졸다가 나가더라도 먼저 씻어야 할 거 같아서 소파에 뉘였던 몸을 일으킨다. 그리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발을 들여놓고 거울을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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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클어진 머리, 화장기없이 거칠어진 피부, 눈 밑 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 하... ”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 섞인 헛웃음을 짓는 그녀. 남의 처지를 생각하고 걱정하기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한편, 회복실, 차트와 모니터를 번갈아보며 방금 수술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인혁.

[ 탁- ]

“ ...하..... ”

그러나 방금 전에 일 때문에 차트가 눈에들어오지 않는지 차트를 소리가나게 덮어버리고 한숨을 내쉰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눈물. 그러다 안 되겠는지 환자오더를 다시 내리고는 중환자실을 힘없이 빠져나가는 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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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로 돌아온 인혁. 새벽부터 연달아 수술을 해서 몸이 피곤할 데로 피곤한데다가 세헌과 은아와의 일까지 겹쳐서 복잡하고 지친 마음에 아무런 힘이 나지 않는다.

[ 벌컥- ]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순간, 은아인가 싶어 얼른 고개를 드는 인혁.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나과장이었다.

“ 최인혁선생, 잠깐 나 좀 보지. ” “ ..... ”

그러고는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하는 나과장. 인혁은 너무나도 지쳐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간다. 곧, 응급의학과 사무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 나과장은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하더니 인혁이 앉자마자 지친다는 듯 그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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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이봐 최선생. ” “ ... 말씀하십쇼.. ” “ 자네가 환자 살리고 싶은 건 나도 알겠는데, 어느 정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지..! ” “ ..... ” “ VIP환자를 막 옮겼다면서..? 아니, 그러다 그런 환자한테 응급실에 컴플레인이라도 들어오면 어쩔거냐고? 그러면 자네가 책임져? 아니지~! 응급실과장인 나한테도 화살 이 날아올 거 아니야? ” “ ..... ” “ 아니, 그리고 왜 이렇게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 황과장 성질 뻔히 알면서 거기다 대고 왜 말싸움을 하냐고..! ”

인혁의 자존심이 일그러진다. 아무 대답 없이 굳어있는 인혁의 표정. 나과장은 짜증나고 답답한 마음에 뭐라 한마디 더 보태고 싶었지만, 순간, 아직도 빨간자국이 남아있는 그의 뺨이 눈에 들어오자 한숨을 내쉬며 이내 뱉으려던 말을 삼켜버린다.

“ 하... 됐어. 뭐, 그 얘기는 황과장한테 들을 만큼 들었을 테니 그만하고. 아무튼! 앞 으로는 그런 일은 좀 조심하라고..! 환자를 봐가면서 옮겨야지 말이야... ” “ ..... ” “ 아, 그리고, 아까 응급실에서 수술한 환자말이야. 보호자가 자기가 무슨 의학전문기 자라면서 응급실에서 준비도 없이 수술해도 되냐고 난리를 쳤다는데. 최선생도 들었 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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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 “ 무슨, 실습학생하고 응급구조사들 다 끌고 들어갔다면서? 그, 웬만하면 인턴들이라 도 데리고 들어가라니까.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말이야.. 안 그래도 응급실에서 수술 하는 것도 안 좋게 보는데 수술간호사랑 수술도구도 제대로 준비 안 해서 들어가면 누가 좋아하겠어? ” “ .... 환자상태 최악이었습니다. 초음파결과 복강 내 출혈 의심됐고, 바로 개복을 하지 않았다면 상태 악화되서, 생명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 하.. 아무튼, 이 사람 말이 안 통한다니까.. ... 그래서 수술은 잘 끝났다고? ” “ ... 출혈은 잡았지만, 아직 배 열려있는 상태이고 감염오지 않게 항생제 투여중입니 다. ” “ 하긴, 그, 외상환자니까 일단 시간 지나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아직 환자가 회복실 에 있다고? ” “ 예. ” “ 아.. 이거, 보호자가 만만치가 않아서, 빨리 중환자실에 자리가나야 할텐데.. 뭐, 아 무튼, 보호자가 수술기록을 복사한다느니 어쩌느니 말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보호자 만나서 설명 다시하고, 잘 좀 설득해보라고. ” “ ... 알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

그러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과장실을 나오는 인혁. 그런데 그 순간, 응급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웅성웅성 수군거리는 사람들. 인혁은 그 시선에 숨이 막힐듯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외면을 하고 곧장 보호자를 만나러 회복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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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 달칵- ]

보호자와의 상담을 마치고 중환자실까지 돌고서는 어깨가 축 쳐진 채로, 힘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혁. 들어오자마자 간이침대에 쓰러지듯이 몸을 눕힌 채로 잠시 눈을 감고서는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한다. 세헌과 은아의 문제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갑자기 보호자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하자, 정말 머리가 지끈거리는 그. 나과장이 말한 보호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낮에 들어왔던 환자의 보호자는 환자의 어머니와 아직 대학생으로 보이는 환자의 남동생뿐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다시 응급실에서 수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환자의 상태에 대해 다시 설명하고 내려 온 인혁. 그런데 문득, 신선생이라도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 다시 눈을 뜨는 그. 갑자기 아까 세헌과 있을 때 자신을 변호해주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 지..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 / ..... 아무리 중환자실이 잘못됐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 / 하루도 안 쉬고 병원에서 내내 일하면서!! 어떻게든 환자 살려보겠다고 그러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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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중환자실 없어서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나하고!! 사무실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 자라서!! 이렇게 맞기까지 해야 되요?!! /

사실, 지금껏 그렇게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특히, 황세헌같은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심지어 한구가 있었더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사람이었다. 병원사람들 누구도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서준 적이 없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도 모두들 외면하기에 바빴다. 정말 외상을 시작한 이후로는 늘 혼자였다. 늘.. 그런데, 그녀가 내편을 들어주었다. 나대신, 나를 변호해주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 고작 한다는 소리가..

“ 하.. 미친놈.. ”

인혁이 짧은 한숨과 욕을 내뱉고는 시간을 확인하는데, 그녀가 출근할 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은아의 출근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를 볼 자신이 없어지는 그. 자존심 때문에 늘 누구에게 먼저 사과한적이 없었는데..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 지, 어디서부터 설명하고 사과해야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냥 일단 미안하단 말부터 하고 볼까..? 하지만 미안하단 한마디로 해결하기엔 그녀에게 너무 상처가 됐을 거라 생각하는 인혁. 일단, 은아가 도착해있을 때 자고 있으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키는데, 몸이 너무 힘들어 제대로 일어나지지도 않는다. 그는 쓰러질 듯한 몸을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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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간이침대위에 있는 이불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상태로 그녀와 제대로 대화할 자신이 없어서 일단, 당직실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인혁이 이내 사무실을 빠져나가 버리고, 그가 나간 사무실 책상위에는 다 녹은 얼음 팩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한 시간 후, 세중병원 응급실, 불이켜져있는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은아.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래도 그를 웃는 얼굴로 볼 자신은 없는 은아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계속 그렇게 서있을 수는 없기에 마음을 다잡고 문고리를 돌리는 그녀.

[ 끼익- ]

천천히 문을 열며 빠끔히 고개만 집어넣어 보는데, 불만 켜진 채로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사무실 안, 은아는 막상 그가 자리에 없자 그를 만나는 것을 미뤄도 된다는 안도감 보다는 왠지 모를 서운함과 허전함이 몰려옴을 느꼈다. 집에 갔던 내내 한숨도 못자고 고민하고 걱정만하다 출근했던 그녀였기에, 괜히 혼자만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한 거 아닌가 싶어서 왠지 그가 더 얄밉고 야속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오늘 수술한 환자가 두 명이나 되고.. 새벽에 수술한 환자까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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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 상태를 보러 가셨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시 고쳐먹는 그녀. 오늘 밤은 꼭 그에게 얘기를 듣고 싶었다. 요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화가 나있는 건지, 그 이유를 들어야만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정말 그와의 오해가 깊어지고, 지금까지 쌓아온 그와의 관계가 틀어질 것 같았다. 그럼 점점 더 그와 일하기가 불편해 질테고.. 그러다 서먹하고 꺼림칙한 게 남은 상태로 병원을 그만두게 되고.. 그런 건 정말 최악이었다.

2년간 모든 걸 바쳐온 직장인데, 2년을 함께 일 해온 인혁인데.. 이런 식으로 서로 틀어진 채 있고 싶지는 않았다.

‘ 이렇게 기다리면 오시겠지.. ’

마음속으로 그에게 물어볼 말들을 생각하며 그를 기다리려 간이침대에 앉아있는 은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돌아오지 않고, 은아는 그를 찾으러 갈까 생각해보다가 괜히 길 엇갈리지 말고 차라리 환자 기록정리나 하면서 그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책상 앞에 앉아 자료들을 꺼낸다. 그렇게 한 30분쯤 흘렀을까. 잠을 거의 자고나오지 못한 그녀. 이내 책상에 앉은 채로 꾸벅- 꾸벅졸기 시작한다. 몇 시간 후, 늦은 새벽, 병원이 가장 조용한 시간.. 한산하기만 한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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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조용해진 가운데 당직실 문이 열리고 인혁이 응급실 밖으로 나온다. 다행히도 수술했던 환자가 괜찮은지 노티도 없어서 몇 시간 동안 당직실에서 푹 자고 나온 그. 이틀이나 잠도 못자고 연달아 수술을 하느라 찢어질 거 같았던 몸이 그나마 잠시라도 자고 나니 좀 나아 지는 듯 했다. 그래도 늘 몸에 쌓여있는 만성피로는 어쩔 수가 없는지, 어제 유달리 피곤했던 하루를 보냈던 탓인지 한껏 쳐진 그의 어깨와 평소보다 더 구부정해 보이는 그의 등.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더니 트라우마센터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 안,

“ 하... ”

한숨을 한번 내쉬는 인혁. 안으로 들어가면 출근한 은아가 있을 거란 생각에 또 복잡한 생각이 밀려들어온다. 쉽게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는 그. 그러다 이내 문고리에 손을 얹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본다.

[ 끼익- ]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살짝 놀란 인혁. 자료정리를 하다가 피곤했는지 책상 위에서 엎드린 채로 자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다시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는 그. 아무래도 지금은 그녀를 좀 쉬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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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얘기는 내일로 미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중환자실로 옮기는 그였다. 몇 시간 후, 이른 아침, 여름도 다 가고 있어서 그런지, 이른 아침이면 꽤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날씨. 조금 춥다고 느껴서 몸을 뒤척이다가 책상 위에서 눈을 뜬 은아.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려는데..

[ 저릿- ] “ 으으... ”

어젯밤 내내 책상위에서 팔을 베고 잔 탓인지 팔이 저릿해져온다. 게다가 좁은 공간에 있었던 다리도 조금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려 약간 저린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아. 어..? 그런데 순간 머리가 핑- 돈다. 잠깐 자리에서 멈춰선 채로 눈을 감았다 뜨는 그녀. 갑자기 뭔가 싶어 머리를 짚어보는데 이마가 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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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꼬... 감기기운인가..? ’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사무실 안이 어제 그대로였다. 인혁이 왔다간 흔적은 전혀 없어보였다.

‘ 아마 사무실에 들어왔다면 나를 깨웠겠지.. 늘 그랬으니까.. ’

그런 생각을 하며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그녀. 벌써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 아직도 안 들어오시고.. 어디가신거지...? ”

그런데 그때, 책상위에 놓여있는 다 녹은 얼음 팩이 눈에 들어오고,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불안한 생각에 재빨리 사무실을 나서는 은아. 몇 분 후, 옥외주차장 응급실에 찾아봐도 그를 본 사람이 없자, 불안한마음에 몸도 안 좋은데 헉헉거리며 옥상까지 뛰어온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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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차를 찾아보는데, 주차장 한쪽에 서있는 그의 차가 보인다.

“ ...!!... 하아.... ”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털썩 주저앉는 은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머리를 짚으며 눈을 감는데 순간, 어제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 .... 나 안 뛰쳐나가니까! ....걱정하지말고. 이만 퇴근하라구요. /

다행히도 그 말이 진심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그녀. 그럼 도대체 그가 사무실도 안 들어오고 밤새 어디에 있었을까 고민해보다가, 문득, 그가 자신을 피하느라 사무실에 안 들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화가 나는 은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서둘러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후, 중환자실, 응급실과 회복실로 그를 찾아다녔지만 보이지 않는 인혁. 어디로 갔나 싶어 중환자실을 들어가 보는데, 그저께 새벽에 수술했던 환자 옆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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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가 보인다. 기가 막힌 은아. 왜 사무실도 안 들어오고 저기서 저렇게 졸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분명 저 환자는 어제 까지만 해도 상태가 나쁘지 않았던 환자인데, 자신이 없는 사이에 그새 상태가 안 좋아졌나 싶고, 인혁이 자신을 피하는 게 아니라면 사무실에 안 들어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을 피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는 그녀였다. 그때, 그녀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중환자실 간호사. 은아는 인사 받아주다가 간호사에게 묻는다.

“ 저기, 정간호사, 혹시 최교수님 언제부터 저러고 있는지 알아요? ” “ 아, 최교수님이요..? 어.. 한.. 3시간 됐나? 그 전부터 계속 왔다 갔다 하시더라구 요.” “ 아... 근데, 저 환자 상태가 그래 나빴었나..? ” “ 글쎄요, 환자상태는 별로 나쁘지 않던데.. 특별한 감염도 없구요.. ”

간호사에 말에 시선을 인혁 쪽으로 돌리더니 노려보다시피 그를 쳐다보는 은아. 간호사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인혁을 한번 보더니 약간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연다.

“ 아, 저기, 깨워드릴 걸 그랬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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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요..! 됐어요..! 저런데서 자다가 고개가 뿌사지든 말든.. ” “ 네.. 네? ” “ 아, 아니에요. 고마워요. ”

그렇게 중환자실 간호사가 다시 꾸벅하고는 자리를 뜨고 은아는 그 자리에서 서서 꾸벅꾸벅졸고 있는 인혁을 한참 노려보다가 바로 몸을 돌려 중환자실을 나가버린다. . . . . . . . 세 시간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인혁이 사무실에 들어와도 인사도 안하는 은아. 그 역시 단단히 화가 난 듯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아무 말도 건내지 못한 채로, 그저 어색하게 침묵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오전회진을 돌고 온 두 사람. 은아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바쁜 척 응급실용품들을 체크하고 있고, 인혁은 아까부터 그녀에게 사과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는 터라 말을 붙이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식은땀을 흘리는듯하고 몸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 역시나 인혁의 예상이 맞았던 건지, 그녀가 응급실 용품들 검수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갑자기 멈칫하며 머리를 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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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하며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여는 인혁.

“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 “ 하, 안 좋든 말든.. 저 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 “ ..... ” “ ..... ”

그녀의 가시 돋친 대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인혁. 그런 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 은아는 그렇게 쏘아붙여놓고서도 내심 인혁이 뭔가 말을 꺼내주길 기다렸지만, 그녀가 보기에 인혁은 해줄 말이 없는 듯, 그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또 울컥하는 은아. 어제 내내 걱정하고, 그를 이해하려하고 그래도 그가 먼저 사과라도 해주겠지.. 하는 기대들이 모두 한 번에 무너지는 듯 했다. 이대로 있으면 또 혼자 상처를 받을 거 같다는 생각에 재빨리 가방을 집어 드는 은아.

“ ..... ㅅ.. ” “ 퇴근 할 시간 됐네요. 저 이만 퇴근 할게요. ”

[ 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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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조심히 말을 꺼내려던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재빨리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녀. 그녀가 닫고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인혁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또 그녀를 잡지 못한 채로 기회를 놓친 것 같아, 그저 속이 답답해지기만 하는 그였다. 두 시간 후, 어느 버스 안, 두 시간 전에 사무실을 빠져나와놓고도 이제야 버스를 타고 퇴근 중인 은아. 아무래도 새벽에 느꼈던 감기기운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 내과에 들려 기다렸다가 진찰을 받고서는 다시 집으로 가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머리가 또 지끈거리는지 잠시 이마에 손을 갖다 대보는데, 열이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평소에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번 감기에 걸리더라도 두통 같은 건 없었는데.. 이번 감기는 웬일로 자꾸 두통과 어지럼증이 와서 의사에게 물었더니, 과로에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럴 수도 있단다. 그리고 가벼운 감기라도 쉬지 못하면 심해질 수 있으니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는 말을 들었던 그녀.

“ 참나.. 쉴 수 있게 해줘야 쉬나보다 하지.... 뭐, 마음이나 편하게 해주면 말이나 하 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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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트레스가 원인일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생각나자 인혁하고의 일이 떠올라 혼자서 원망 섞인 짜증을 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까 인혁에게 그렇게 톡 쏘아붙이고 그냥 사무실을 나와 버린 게 내내 마음에 걸리는 그녀. 그래도 너무 쏘아붙이고 나오지는 말걸... 안 그래도 황과장과의 일 때문에 버티기 힘든 사람일 텐데, 괜히 자신이 힘든 일을 더 보태어주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바라보는 은아. 하다못해 전화한통으로라도 미안하단 한마디만 해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자기 때문에 그렇게 나와 버렸는데도 전화는커녕 문자한통도 없는 그였다. 역시나 이것조차 혼자만의 기대라는 생각이 들자, 몸도 아픈데 괜한 걱정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서 쉬기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약간 늦은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쉬고.. 나도.. 교수님도.. 참.. 아니지, 교수님은 남들 쉴 때도 일할 때도 항상 일만하시지.. 그렇게 버스 밖 풍경들에 집중하려 애써보다가 또 괜히 그의 생각이 들어 다시 씁쓸해지는 그녀. 그녀는 사과 한마디 없이 자신을 피하기만 하는 그가 얄미우면서도 자꾸만 그가 안쓰러워지고 마는 이 복잡한 감정 때문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 . . . 그러다 몇 분쯤 지났을까. 낮이 되자 다시 무더워지는 날씨와 약기운 탓에 눈은 졸려오고 몸은 나른해지고, 그녀의 눈이 슬슬 감기려고 하는데..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버스 안에서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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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살짝 조는 듯 하다가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소리 때문에 놀라서 누군지 확인도 안하고 서둘러 전화를 은아.

“ 여보세요? ” “ 은아씨 나에요. ” “ 아, 동규씨.. ”

무의식중에 인혁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건지, 전화기너머로 동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입에서 약간 기운 빠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 많이 힘들어요..? 목소리에 기운이 없네.. 아! 아직 퇴근 전이죠? 내가 데리러 갈까요? ”

그러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동규의 목소리를 듣고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어버리는 그녀. 요 며칠 많이 지치고 힘든 상태였는데..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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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아니에요~ 벌써 퇴근하고 집에 가고 있어요. ” “ 벌써요..? 은아씨 원래 퇴근 늦게 하잖아요. 오늘은 일찍가네요? ” “ 아, 그게,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요~ ” “ 몸이 안 좋아요? 아파요? 어디가요? ” “ 그,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감기기운이 있어서 그래요. ” “ 그래요..? 목소리는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아! 은아씨, 아직 밥 못 먹었죠? 내가 죽이라도 좀 사갔고 갈까요? ” “ 아니요~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그냥 좀 쉬면 되요. ”

이럴 때라도 못 이긴 척, 그녀가 자신에게 좀 기댔으면 하는데.. 모든지 혼자서 해결하려는 그녀가 가끔은 섭섭하게 느껴지는 동규. 목소리의 아쉬운 마음이 그대로 다 들어난다.

“ 아.. 하긴.. 쉴 땐, 쉬어야죠.. 그럼요 은아씨, 집에 들어가면 꼭 쉬어요. ” “ 네~ 알았어요. 동규씨도... 아? ”

약간 실망하는 듯한 동규의 목소리에 살짝 웃음을 띠며 내일모래 오프 때는 꼭 만나자고 말하려 했던 은아. 그런데, 말을 하다 문득 창밖을 보니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내 자신이 내려야 할 정류장에 다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화를 끊으려 한다.

121

“ 아! 동규씨! 저 지금 내려야돼서요! 이만, 끊을게요! ” “ 아, 네! 많이 아프면, 꼭 연락하구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 “ 네..! ” [ 삑- ]

그렇게 버스에서 서둘러 내리는 그녀. 동규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또 꾸벅꾸벅 졸다가 내려야할 정류장에서 못 내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몸도 아프고 지치고 피곤한 이런 날에 정류장을 놓치지 않고 내려서 참 다행이라고 느껴지는데.. 그러다, 또 다시 몰려오는 피로감에 몸이 자꾸만 축축 쳐지고 늘어짐을 느끼는 은아. 아무래도 내일모래 있는 오프는 약속을 잡지 말고 꼭 제대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몇 시간 후, 늦은 오후, 마취과 사무실, 마지막 정규수술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 걸어가는 한구.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마취과 사무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122

“ 저기, 선생님, 제가 아까 구내식당에서 들었는데, 최인혁교수 말이에요~ ” “ 최인혁교수님? 어, 왜. ” “ 또 폭발했나 본데요? 거기 외상코디네이터있죠? 어제 울면서 뛰쳐나갔다고 하더라 구요~ ” “ ....?.... 왜? 두 사람 호흡도 잘 맞고 사이 괜찮아 보이 더만? ” “ 뭐,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얼핏들으니까.. 뭐래더라? 여자가 꼴이 그게 뭐냐고, 빨리 퇴근이나 하라고 그랬다나? 그리고 무슨 남자친구를 만나라느니 어쩌느니.. 아무 튼 얼핏 들은 거니까 자세히는 모르겠고, 둘이 싸운 거 같은데 최교수님이 말이 좀 심했나봐요. ” “ 아.. 폭발한 거 맞네. 아무튼, 그 사람은 그 성질부터 어떻게 죽여야지. 사람 살린다 고 백날 고생해봤자 소용없다니까~ 자기편도 좀 만들 줄 알아야하는데 남들 앞에서 웃을 줄도 모르고, 있는 사람도 떨어져 나가게 만드니 원.. 그래도 신은아 선생 오고 나서는 사람이 좀 순해졌다 싶었는데, 하긴, 뭐, 수술실에서야 여전 하지만.. ” “ 그러게요. 그 왜, 예전에는 장난 아니었잖아요~ 응급실 간호사들 줄줄이 그만두고... 아! 이번에 또 그만두는 거 아닌가? ” “ 글쎄, 그럴 수도 있고. 하긴, 이만큼 버틴 것도 오래 버틴 거지. ” “ 하긴.. 웬일로 한 사람이 이렇게 오래 버티나 했어요~ ”

문고리를 잡고 열려다가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문고리에서 손을 떼는 한구. 그는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는 생각에 인상을 한껏 찡그러트리고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혼자 중얼거린다.

“ 아~!! 이 자식한텐 내가 무슨 말을 못해요..! 하.. 진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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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일주일전,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충고를 해준 일이 계속 신경 쓰였던 한구. 특히, 지난 일주일동안 수술실에서 본 그의 모습이 평소보다 유독 예민한 듯 보였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여과 없이 곧이곧대로 듣고 마는 인혁에게 또 괜한 말을 했던 건 아닌가 싶어 살짝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도 그냥 그가 알아서 잘 알아들어주길 바랬었는데.. 역시나 그에게는 너무 무리한 바람이었나 보다. 그러다 아무래도 다시 제대로 얘기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응급실로 향하면서 휴대폰을 꺼내는 한구.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삑- ]

“ 예, 최인혁 입니다. ” “ 으이구 씨, 나다 임마! ” “ 어, 왜.. ” “ 너 지금 어디야?! ” “ .... 사무실 앞인데, 왜? ” “ 너 빨리 저기, 저, 우리 커피마시는데로 올라와봐. 빨리! ”

지금 한가로이 커피나 마실 상태가 아닌데.. 인혁은 한구의 말이 귀찮게 들려서 살짝 한숨을 내쉬며 대꾸를 한다.

124

“ 하.. 나 바쁘고 피곤하니까. 커피마시자는 거면 나중에 마시ㅈ... ” “ 아이씨, 나중이 어딨어!! 너 신선생이랑...! 아니, 아무튼 빨리 좀 와봐! 중요한 얘기 야! ”

[ 뚝- ]

“ ...?... ”

갑자기 한구의 입에서 은아의 얘기가 나오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 그러다가 한구가 또 오피스 와이프라느니 뭐라느니.. 그런 얘기를 하려는 건가 싶어서 이내 귀찮다는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버리는 인혁. 그렇게 그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였다. . . . . .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 벌컥-!! ]

125

“ 야, 너 올라오라니까 말도 안 듣고..! 얼씨구? ”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한구. 그런데 그의 눈에 퀭한 눈으로 간이침대에 쭈구려 앉아 환자자료와 의학서적을 보고 있는 인혁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그.

“ 쯧쯧쯧, 야, 너는 지금 그게 눈에 들어 오냐? ”

그러나 한구를 본채 만채 하며, 꽁한 표정으로 건조하게 대답하는 인혁.

“ .... 주말에 들어온 환자, 내일 2차 수술이잖아. 참고할 것도 있고.. ” “ 하아... 야, 어제 신선생 울면서 뛰쳐나갔다매? 말도 또 뭐라뭐라 심하게 했더만!! ”

한구의 입에서 은아의 얘기가 튀어나오자 멈칫하며 펜의 움직임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 왜 그랬을까.. 황과장과의 일 때문에..? 이 놈의 충고 때문에..? 아니면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 때문에? 인혁은 잠시 한구를 쳐다보며 그에게 어제의 일을 설명하려고 하다가 황과장에게 뺨을 맞은 일이나 그녀가 그 뺨에 얼음 팩을 대어준 일은 왠지 이놈에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모른 척하며 책을 읽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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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그를 향해 입을 여는 한구.

” 야.. 너.. 내가 한 소리 때문에 그러지? “ “ ..... ”

한구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또 시작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한심하다는 말투로 짜증내듯 입을 연다.

“ 아휴.. 이거 대답 없는 거보니 맞구만, 그거구만! 그래서 그렇게 일주일동안, 혼자 심각해한거냐? 어? 그래서 그렇게 뭐, 뭐래드라, 여자가 뭐 어쩌느니 남자친구를 만나 러 가라느니.. 그렇게 신선생한테 심한 말해서 울리고 그런 거야?! ”

그제야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고서는, 불만스럽게 한구를 쳐다보는 인혁. 그런 그를 보며 이놈을 어떻게 하면 좋냐는 표정으로 다시 짜증을 내듯 말을 꺼내는 한구였다.

” 이.. 답답한 놈! 야, 그거 별거 아니야~! 그냥 인턴들이 너랑 신선생이 너무 가까워 보인다고, 그 소리 몇마다 한 거라고..!! 야, 그나마도 그 인턴들은 신선생 약혼자 있 는 것도, 캐니다 가는 것도 모르니까 한 얘기고..! 게다가 간호사들이 그, 신선생 약혼 자 있는데 뭔 소리 하는거냐고 하도 난리쳐서 쏙들어가버린 얘기다 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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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잠시 동안 멍해지는 인혁의 표정. 지금 한구가 빠르게 쏘아댄 말들을 다시 이해해보려 빠르게 머리를 굴려본다.

“ ... 그럼.. 이상한 소문 같은 거 난건 아니었나..? ” “ 아잇!! 그! 신선생 잘생긴 남자친구 있는 걸 온 병원이 다 아는데..! 소문은 무슨 소 문이야!! 너랑 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그렇지! 나이 차이도 있는데! 아무튼 간에 이 자 식은..! 야, 너 완~ 전히 나쁜 놈이라는 그 소문은 벌써 파다하게 났더라! 신선생 울렸 다고! 마취과에까지! ”

한구의 말을 듣고서는, 약간, 충격을 받은 듯이 변하는 인혁의 표정. 그러다 다시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더니 낮고 느릿느릿하지만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한구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 .... 너, 그럼... 오피스와이프라느니 뭐, 뭐, 나 닮아간다.. 뭐 그런 소리는 와했는데. ” “ 아이!! 그걸 곧이곧대로 듣냐..?! 그건 그냥!! 후우.. 아니, 그건 그냥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야, 솔직히 아무리 신선생이 외상코디네이터라지만, 가운 입혀주고, 뭐뭐, 넥타이에 양말까지 챙겨준다며. 그건 좀 그렇잖아아~! ” “ ..... ” “ 아니, 둘이 워낙 오래 붙어있다 보니까 스스럼없이 그러는 건 알겠는데, 아까 말했 잖아. 당장 인턴들도 그런 소리 하는데, 남들 보는 눈도 있고, 안 좋은 얘기 돌면 신 선생이나 너한테 좋을 거 없고..! 그래서 그냥 좀 조심하라고 말한 건데..! 아니, 그걸 가지고 신선생한테 화를 내버리면 어쩌냐고! 도대체 혼자 뭔 생각을 했길래! 아휴.. 야, 나이가 몇 개인데 이렇게 일일이 말해줘야만 알아 듣냐? 이 답답..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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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

점점 일그러지는 인혁의 표정 때문에 말이 끝나갈수록 기어들어가는 한구의 목소리. 인혁은 천천히 소매를 걷기 시작한다.

” 잠깐.. 뭐.. 뭐야, 소매를 왜 걷ㅇ... ”

[ 드륵- ]

그러다 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슬슬 뒷걸음질을 치며 변명처럼 말을 이어나가는 한구.

“ 야.. 그.. 너.. 너도! 아직, 결혼안하고, 신선생도 따지고 보면 아직 결혼 안했는데.. 너무 신경들을 안 쓰는 거 같아서...! 그냥 그, 내가 좀 노파심에..! 나중에라도 안 좋 은 얘기 돌 거 같아서.. ” “ 그러면.... 진작 그렇게 쉽게 말하면 되지..!! 왜 벌써 소문이라도 돈 것처럼 말을 꼬 아서하노!! 꼬아서 하길!!! ” “ 아! 그.. 그래도 이번에 둘이 싸우는 바람에 그런 말은 쏙 들어가겠다.. 그, 그지..? 야, 야, 나.. 과, 과장이야. 마취과과장..! 너.. 수술실 쓰려면... 나한테 잘 보여야... ”

그러다 인혁이 달려들 것 같자, 안되겠다 싶었는지 말을 하다말고 잽싸게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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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그를 쫓아가려고 하다가 한구가 다시 재빠르게 닫아버린 문에 머리를 부딪칠 뻔 하고, 그러자 더 열이 받은 인혁이 문을 벌컥- 하고 열어 재끼는데, 순간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트라우마센터를 쳐다보고 있던 응급실 사람들과 눈이 딱 마주쳐 버린 인혁. 벌써 저만치 도망가 있는 한구. 그렇게 응급실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고,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한구는 상황을 살피다가 일부로 다 들으라는 듯이 인혁을 향해 크게 소리친다.

“ 어.. 어이! 최교수! 알았으니까! 신선생하고나 어떻게 풀지 생각해보라고~! 아, 신 선생 근무 끝나면 뭐 술이라도 같이 한잔하자고 하든가..! 나 때문에 신선생이랑 싸웠 으니까! 내가 살게! ” “ 저.. 저 자식이.. ”

그가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인혁과 한구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번갈아가며 보는 사람들. 인혁은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리자 쫓아가지도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있었다. 그러자 한구가 그런 그를 보고는 실실 웃으며 그를 향해 다시 크게 입을 연다.

“ 그럼, 난 일단 퇴근 한다잉~?! 이따가 꼭 연락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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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리쳐놓고는 자신도 창피한 건 아는지, 도망치다시피 응급실 복도를 빠져나가는 한구. 인혁은 그런 그를 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어있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트라우마센터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사무실안에 발을 다 들여 놓자마자 재빠르게 문을 닫아버리는 인혁. 그러고는 밀려오는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지며 다음에 한구를 보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고 몇 초간 멍하니 앉은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

“ .... 허.. 허허... ”

그러다 왠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헛웃음. 사실, 한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남녀가 너무 가깝게 지내다보면 사람들에게 충분히 오해를 살 수 도 있고, 그렇다면 진짜 지난 일주일간 고민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그저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고 친구로써 가볍게 충고를 해준 것일 뿐일 텐데.. 한구의 말처럼, 자신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각했던건지, 짧지만 길었던 8일간의 고민들이 모두 허탈하게만 느껴지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또 미안해진다. 그래도 오해가 풀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인혁. 자꾸만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그런데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정말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 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었는데.. 그냥 그럴 수 도 있다고 생각하면 끝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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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정말 그녀와 내가 무슨 사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던 건 아닌가..?

“ 하.. 에라이.. 무슨.. 허허.. ”

그러고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허허- 하고 웃어버리는 인혁. 당연히 그럴 리는 없으니까.. 그저 그 사람하고 나는 편한 사이일 뿐인데.. 그렇게 혼자서 심각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며 또 자꾸만 헛웃음만 짓고 잇는 그. 이제는 그녀와 화해하고서 다시 전처럼 편하게 지내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비교적 편안해져 온다. 그리고 그 마음 때문에 자꾸만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온다.

/ 하, 안 좋든 말든.. 저 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

그러다 문득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다시 떠오르자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는 인혁. 근데, 아까 신선생 정말 화 많이 난 것 같던데... 아.. 어떻게 사과를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그. 하지만, 지난밤 불편하게 일하다가 돌아간 그녀의 휴식을 굳이 지금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조금 있다가 그녀가 출근하면 그때는 꼭 제대로 미안한 마음을 전하리라.. 라고 다짐하며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녀를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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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미안해지는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래도 속은 편해졌다는 생각에 기분만은 좋다는 듯 간이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 인혁. 이제는 사람들의 눈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이, 정말 그녀의 그 마음만.. 실수로 상처 준 그 마음만 아물게 해주면 된다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더 잘하면 된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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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현 실(Something)

. . . . .

세 시간 후, 늦은 밤, 은아의 집,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로 잠을 자고 있는 은아. 그런데 이상하게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 이마에는 땀이 흥건하고, 숨은 거칠다. 게다가 나쁜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건지 잠을 자고 있는 내내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무언 가에게서 도망치듯 이따금씩 괴로운 표정으로 바뀌는 그녀의 얼굴.

[ 번쩍- ]

“ 허억.. 헉.. 헉... ”

134

지독한 악몽을 꾸다가 간신히 눈만 뜬 채로 잠에서 깨어 난 은아. 온몸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고, 자꾸만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고, 눈앞에 보이는 천정이 어질어질하다. 그래서 잠시 숨을 고르려 다시 눈을 감아보는데, 그러다 다시 그 꿈을 꿀까 두려운 생각에 또 급히 눈을 뜨게 되는 그녀였다. 이상한 꿈.. 잠에서 깬 직후인데도 불구하고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 그런 꿈이었지만, 그 지옥같이 처절한 느낌만은 생생히 남아있는.. 정말 이상하고 지독한 꿈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뻐근한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해보는 그녀. 그런데, 출근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시간을 확인하고 정신이 번쩍 든 은아는 서둘러 침대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움직인다. 하지만,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입안은 바짝바짝 마르고, 목은 타들어가는 듯 하고, 몸은 뜨거우면서 오한이 느껴지고.. 그제야 자신의 몸이 약간 떨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다시 침대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 은아였다. 한편,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일찌감치 중환자실과 병동을 돌고 온 뒤, 사무실에 앉아 아까 보던 수술관련 자료를 마저 보고 있는 인혁. 그러다 그는 손목을 들어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자료를 보기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사실, 그녀가 출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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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긴장하고 있는 그. 대뜸 미안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일단, 가볍게 밥은 먹었냐고 먼저 물어볼까..? 아니, 아침에 몸이 안 좋은 것 같았는데.. 몸은 좀 어떠냐고 물어볼까..? 그래, 그렇게 하다가.. 한구 놈이 했던 말 때문에 내가 좀 고민이 많았다고.. 좀 오해가 있었다고.. 어제는 너무 흥분해있어서 말이 헛나갔다고.. 그렇게 말을 심하게 한 건, 정말 미안하다고.. 원래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걸까..? 누군가에게 한 번도 이런 말을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는데.. 그녀에게 만큼은 꼭 미안하단 말을 제대로 해야 할 거 같았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니까.. 너무나도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이니까.. 그래서 몇 번이고 사과할 말을 다시 생각해보는 인혁. 같은 시각, 은아의 집, 이제 출근시간까지는 20분도 남지 않았다. 자신이 출근하지 않으면 인혁을 비롯한 누군가가 몇 배로 고생해야 하는걸 알기 때문에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어떻게 든 출근하려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던 그녀. 그러다가 이대로 가면 말도 없이 너무 늦어버릴 거 같다는 생각에 침대 위에 아무렇게 나 놓여있던 휴대폰을 들어 인혁에게 전화를 하려 다가 멈칫한다. 자꾸만 자신을 피하던 인혁인데.. 왠지 그가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 그러다 은아는 그의 번호가 아닌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건다.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삑- ]

136

“ 여보세요? ” “ 아.. 최간호사... 나 신은아인데.. ” “ 네, 신선생님~! 말씀하세요! ” “ 저기.. 내가 몸이 너무 아파가지고.. 쪼매 늦을 거 같거든..? 한 한시간정도면 도착 할거 같으니까.. 혹시 교수님이 나 찾으시면.. 말 좀 해줄 수 있겠나..? ”

그녀가 거의 다 쉬어버려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을 하자 그런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여는 최간호사.

“ 아... 네, 알겠어요..! 그런데, 신선생님 괜찮으세요? 목소리도 거의 안 나오시는 거 같은데요..? 많이 아프시면 김간호사 부를까요? 오늘 오프라 아마, 바꿔줄 수 있을 텐 데..! ” “ 음... 아니 괜찮다. 지금 나오면, 잠도 못자고 나올 텐데.. 내, 일단, 나가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연락할게. ” “ 아.. 네! 그럼 이따 뵈요..! ” [ 삑- ]

그렇게 간호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다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는 그녀였다. . . . .

137

.

30분 후,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준비를 하는데 30분도 넘게 걸린 그녀. 마지막으로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이를 악물고 출근하려는데..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그때, 가방 속에서 울리는 그녀의 휴대폰. 그녀는 서둘러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찾아 꺼내어, 이 시간에 누군가 싶어 확인을 해보는데, 동규로부터 온 전화였다.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 상태인데 어떻게 하지.. 은아는 그가 걱정할까봐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최대한 괜찮은 척 전화를 받는다.

[ 삑- ] “ 네.. 여보세요...! ”

하지만 숨겨지지 않는 쉰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전화기 너머에서 곧바로 놀란 듯한 동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여보세요?! 은아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 “ 아.. 그냥 조금... ” “ 목소리가 조금이 아닌데..?! 많이 아픈 거죠? 그 몸으로 출근한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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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직은 아닌데.. 지금 출근하려고요.. ”

낮에 그녀와 했던 통화에서 몸이 안 좋다는 은아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걱정 되는 마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한 동규. 지금, 목소리만 들어도 상태가 나쁜 걸 뻔히 알 것 같은데.. 그는 이 상태에서 출근을 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멈칫하다가 이내 그녀를 타이르듯이 다시 입을 연다.

“ ...... 잠깐만요 은아씨..! 지금 집이죠?! 기다려요! 내가 갈테니까..! ” “ 아니요, 저기, 동규씨..! 저 지금 출근 해야되요. 오지..ㅁ.. ” “ 은아씨..!!! ” “ ..... 네..? ”

그러나 기어이 출근 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언성을 살짝 높이는 동규. 은아는 처음 듣는 그의 화난 목소리에 살짝 당황하여 대답하고, 그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이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 .... 데려줘도 내가 데려다주고! 은아씨 어떤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 해야겠으니까..! 거기서 나가지 말고 꼭..! 나 기다리고 있어요! 내 말 안 들으면 이번엔 나 진짜 화낼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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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뚝- ] “ 여보세요..? 여보세요..! 동규씨..! ”

그러나 이미 끊어져있는 전화. 은아는 처음 들어보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하다. 한편, 사무실에서 자료를 보면서 그녀를 기다리던 인혁. 어느새 읽고 있던 자료에 빠져들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다시 문득, 몇 시인가 싶어 시계를 보는데.. ...어? 이미 지나있는 그녀의 출근 시간. 비록, 20분정도에 불과하지 않았지만 워낙에 출근시간은 어긴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혁. 하지만, 안 좋은 일도 있었고.. 한번쯤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다리면 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자료에 집중한다.

20분 후, 은아의 집 앞,

[ 띵동- 띵동- ]

140

“ 은아씨..! 나에요..! ”

결국, 은아의 집까지 와버린 동규. 어찌나 다급하게 나왔는지, 평소에는 항상 차려입고 나오던 그가 운동화에 집에서 입던 옷차림으로 문앞에 서서 오자마자 초인종을 누르며 다급히 그녀를 부른다.

[ 삐릭- 끼익- ]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는 그녀. 그녀가 나오자마자 서둘러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동규.

“ 은아씨..! 괜찮아요..? ”

가방까지 메고 출근준비를 다 마친 모습의 은아. 그러나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하고, 열도 있어 보이고, 그녀는 누가 봐도 쓰러지기 직전의 환자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태연하게 입을 여는 그녀.

“ 아.. 동규씨 왔어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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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지 뭐하러 왔어요.. 괜찮다니까... 그런데, 동규씨, 나 출근해야되요. 여기까지 왔는 데 정말 미안해요. ”

그런 그녀를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목이메는듯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동규.

“ ..... 들어가요. ” “ .... 네..? ” “ ..... ”

지금 상태가 상태인지라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그를 보며 되묻는 은아. 그런데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출근시간이 늦어 초조한 마음에 그를 재촉하듯 말을 한다.

“ 저기, 동규씨, 저 벌써 많이 늦었어서, 지금 빨리 출발해야되요.. 내일 환자 수술도 있어서 정리할 것도 많고, 지금 교수님한테도 연락 안 드려가지고.. ” “ .. 은아씨.. ” “ .... 네..? ” “ 이제는... 은아씨 자신도 좀 챙기면 안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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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녀를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바라봐주던 그. 하지만 조금은 화가 난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 꼭 은아씨가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거에요..? 은아씨가 하루 없다고 해서...! 병원 이 아예 안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 “ 아.. 그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일 수술도 있고, 교수님 혼자 외상환자들 보시고 하기에는 너무 벅차ㅅ... ” “ 지금..! 은아씨 몸 아픈 거는 안보여요..? 환자들만 보이고! 최교수님만 보이고! 은아 씨는 안보여요?! 그리고..!!.. ” “ ....!!!.... ”

처음으로 은아에게 큰소리를 내는 동규. 그동안 마음에만 쌓아두고 참고 있던 게 터져버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화를 내보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말, 지금 은아씨 앞에 있는 나는 안보여요?...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삼켜버린 그였다. 그러나 간절함이 묻어나는 그의 눈빛. 그리고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큰소리를 내는 동규 때문에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에 눈이 커진 은아. 그러나 이내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몸이 아픈 건 자신인데 어째 자신의 앞에 있는 그가 자신보다 더 아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괴로운 그녀. 알고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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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다는 걸. 자신이 그를 외롭게 한다는 걸. 하지만, 그런 줄을 알면서도 늘 환자가 먼저고 외상센터가 먼저였기에 그는 언제나 뒷전에 두었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불평한마디 없던 사람. 그래서 늘 미안했고 고마웠는데.. 오늘만큼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다고 느낀 은아.

“ 알았어요.. 오늘은 쉴게요.. 그리고 미안해요.. 정말.. ”

그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괴롭기만 한 동규. 그는 한참동안 그녀를 뚫어질듯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서는 입을 연다.

“ 미안해요... 아픈데 소리질러서 미안해요.. 그런데요, 은아씨.. ” “ .... ” “ 요즘.. 은아씨 많이 힘들어보여서.. 그래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 “ .... ” “ ..힘들 때는.. 나한테.. 좀 기대도 되요.. 내가 은아씨 애인이잖아요. 은아씨가 기대도 되는 사람이잖아요. ” “ .... 동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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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힘들어보여서 화를 낸 거라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파올 정도로 더욱더 미안해지는 그녀. 이 사람의 마음은 진짜였다. 자기보단 나를 더 걱정해주고 나를 정말로 사랑해주는 사람.. 몸도 아프고 마음도 힘들었던 탓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동규. 저도 모르게 그에게 기댄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있는 은아. 그녀는 문득, 오늘만큼은.. 이렇게 기대있어도 되지 않을까..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자신도 모르게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는 것을.. 늘 씩씩하고 뭐든지 혼자 잘해내는 그녀였지만, 살아가면서 감당해야할 많은 짐들을 모두 혼자서 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지금처럼 힘들고 지칠 때, 가끔은.. 어디라도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바로, 동규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 . . . . 잠시 후, 여기까지 온 동규를 그냥 가라고 할 수가 없어 동규의 부축을 받으며 같이 집안으로 들어온 그녀. 일단,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김 간호사에게 전화를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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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를 대신 서줄 것을 부탁한다. 그렇게 곧, 통화가 끝나고,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인혁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그때 옆에서 우물쭈물 거리다가 말을 시키는 동규.

“ 약은 먹었어요? ” “ 네? 아니요. 아직.. ” “ 내가 가져다줄게요. 어디있어요..? ” “ 아, 저기 식탁 위에.. ”

그녀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가서 약을 찾아오는 동규. 은아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아파서 창백해진 얼굴로 피식- 웃으며 어렵게 말을 꺼낸다.

“ 고마워요. 그런데 동규씨는 이제 그만 가봐도 되요. 내일 아침에 회사도 가야되잖아 요. ” “ 아.. 은아씨, 일단, 약부터 먹고. ”

동규의 말에 아, 맞다.. 라며 그가 가져다준 약을 입에 털어 넣는 은아. 그런데 동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머뭇거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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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은.. 은아씨 잠드는 것만 보고가고 싶은데.. ” “ ...네..?? 아, 그래도 그건.. ” “ 걱정말아요. 나는 여기 거실에 있다가, 정말 은아씨 잠드는 것만 확인하고, 바로 갈 게요. ”

그의 말에 살짝 당황하는 은아. 하지만, 그가 나쁜마음을 먹을 사람도 아니고.. 조마조마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규를 보고있자니 여기까지 자신이 걱정 되서 달려온 그를 그냥 가라고 밀어낼 수가 없어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하는 그를 빨리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그녀. 자신이 빨리 잠들어야 그가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로 향한다. 그리고 소파에는 그녀가 깜빡 잊은 채 놓고 간 휴대폰만이 혼자서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 . . . 그렇게 한 시간 후, 은아가 잠든 것을 확인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들어간 방문을 살짝 열어보는 동규. 곤히 잠들어있는 은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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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미소를 짓는 그. 방문을 닫고 나가기 전 방안을 한바퀴 삥 둘러본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 무언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화장대. 병원에서 쓰이는 자료로 보이는 서류가 잔뜩 꽂혀있는 책꽂이. 사실, 처음 와보는 그녀의 집이라 모든 게 신기하게 느껴지고 있는 중이었다. 낯설고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그녀의 집. 언젠가는.. 우리가 함께할 그날은.. 매일매일 보게 될 것들이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이내 방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그때, 얼핏 그의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 다시 나가려던 몸을 돌려서 화장대를 쳐다보는 동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은아의 화장대 앞에서 굳은 얼굴로 서있다. 화장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여러 장의 사진들. 주로 퇴원하는 환자들과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들마다 꼭 들어가 있는 한 남자. 그리고 화장대 제일 윗 쪽에 있는 한 장의 사진. 그 사진 속에는 다른 사진들처럼 환자도 한 명 없이 가운을 입은 그녀와 그 남자 둘만이 서있었다. 게다가 다정히 팔짱을 낀 채로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 이 사람이.. 최인혁... 교수.. ”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인혁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는 동규. 자신에게는 늘.. 왠지 모를 벽을 만들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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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자신에게 먼저 기댄 적도 없고, 늘 마음을 끝까지 열어준 적도 없던 그녀였다. 게다가 한번도.. 그녀가 먼저 팔짱을 껴주거나 손을 잡아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물론.. 그가 그냥 직장동료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의심하는 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신경 쓰이던 이 남자. 더욱이 이 사진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자꾸만 생기는 질투심을 그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거실에서부터 들려오는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 그녀의 방에서 몰래 사진을 보고있다가 시끄럽고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란 동규는 이러다간 그녀가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밖으로 나가서 종료버튼을 누른다. 이내 잠잠해진 벨소리. 다행히도 그녀가 깨지 않은 듯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확인해보는 그. 그런데.. 휴대폰 액정에 낯설지 않은 그 이름. 최인혁 교수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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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편, 몇 분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중환자실에서 콜이 오는 바람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 혹시 그사이 그녀가 왔던 건 아닐까 싶어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응급실에서도 못 본거 같은데.. 시계를 확인하니 그녀가 출근할 시간이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그제야 그녀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인혁. 아침에 몸이 안 좋아 보이더니.. 많이 아픈 걸까..? 아니면,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하지만, 설령 아프다 하더라도 연락을 안 하고 빠질 사람이 아닌데.. 그러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싶어서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는 인혁. 서둘러 그녀의 번호로 전화를 건다.

[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

이내, 휴대폰 너머로 들리던 짧은 신호음이 멈추고 상대 쪽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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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신ㅅ.. ” [ 뚝- ] “ .....!!..... ”

그대로 끊어져버린 통화. 당황한 인혁.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벙쪄있다가 이내 그녀가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로 전화기를 바라본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인걸까..? 아니면, 너무 많이 화가 나서.. 내 전화를 피하려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불안 했던 마음이 한 번의 통화로 인해 더 커져 버리고,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봐야 하는 건지 메시지를 남겨야하는 건지 고민하는 인혁.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시 망설이다가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다시 은아에게 전화를 한다. 또 다시 들려는 신호음.

[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

그러나 계속해서 허무한 신호음만 들릴 뿐, 전화를 받지 않는 은아. 왠지 그녀가 자신을 피할지도 모른다는 안 좋은 예감이 들자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 그러다, 마침내 통화모드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안심이 된 인혁이 바로 은아를 부르려는데,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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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 “ ....?!.... 아, 저기.. 신은아씨 핸드폰 아닙니까..? ” “ 예, 맞습니다. 최인혁 교수님이십니까? ” “ ....!!... 아.. 예, 맞습니다.. 그런데 혹시, 누구신지...? ” “ 저는 은아씨 약혼자, 이동규라캅니다. ”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적당히 절도 있는 말투로 자신을 그녀의 약혼자라고 소개하는 남자. 반면, 생각지도 못한 약혼자의 목소리에 약간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이는 인혁.

“ 아, 아... 예.... 근데, 저 신선생은..? ” “ 그게.. 은아씨가 지금 전화 받을 상황이 아닙니다. 많이 아파서.. 옆에서 자고 있습 니다. ” “ ....... 아... 그, 그렇습니까. ”

바로 옆에서 자고 있다는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당황하는 인혁. 왠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전화를 한 것 같아 빨리 전화를 끊고 싶어지는데, 그때 다시 들려오는 당당한 그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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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은아씨는 교수님께 연락을 못 드렸다고, 병원에 나가야한다고 했는데, 제가 강 제로 못나가게 했으니까. 너무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 아.. 예, 예! 잘하셨습니다. 그.. 저기, 내일인가 모레인가 오프일텐데. 그, 그때까지 푹쉬라고 전해주십쇼. 예.. ” “ 아, 그렇게 해주실래요? 예,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분 같 아 다행이네예. ” “ .... ”

왠지 모르게 뼈가 있는 듯한 말투에 잠시 침묵하는 인혁. 그때, 다시 동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아, 최교수님! ” “ .... 예? ” “

그동안 제가... 은아씨한테 최교수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한번 하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 “ 아...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아, 저, 신선생한테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 주시고요. 그럼, 저는 이만 끊겠습니다. ” “ 예, 그럼 저도 이만.. ”

생각지도 못한 동규와의 통화가 너무 당황스러워서였는지 서둘러서 전화를 끊어버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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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인다.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 씁쓸함 혹은 쓸쓸함.. 그녀가 약혼자와 함께 있는 건 당연한 일 일인데.. 왜 이렇게 갑자기 마음이 쓸쓸해지는 건지.. 인혁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 이상한 기분 때문에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동안 내려보다가 혼잣말로 뭐라 뭐라 궁시렁 거리기 시작한다.

“ 참... 사람이 아무리 아파도.. 아니, 연락이라도 하고 안 나오든가 해야지 말이야.. ”

그녀를 걱정하고 있던 마음은 어디가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언짢아지는 기분..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도대체 얼마나 아프기에, 한 번도 안 빠지던 사람이 출근도 못할 정도인가 싶어지고.. 그냥 마음이 이래저래 다시 복잡해지는 인혁이었다. 다음날 아침, 세중병원, 원장실,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달칵- ]

" 예, 병원장 오광철입니다. “ “ 아, 원장님?! 저 홍보과장입니다! ” “ ....?... 홍보팀에서 무슨 일로..? ” “ 기사 못 보셨죠? 지금 기사가 하나 터졌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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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말이에요? ”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한 원장. 전화상으로 한참동안 홍보과장에 설명을 듣더니 이내 표정이 굳어버린다. 그리곤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그. 몇 분 후, 응급실,

“ 최인혁선생!! 최인혁선생!!! ” “ ....?.... ”

오늘 수술할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회복실로 향하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인혁. 나과장이 씩씩거리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이봐!! 최선생!!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한거야?!! ” “ ..... 예? ” “ 지금 저번에 수술한 환자 때문에 난ㄹ..!! ... 잠깐만 내 사무실로.. 아, 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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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과장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를 키우다가 다른 환자들이 있다는 걸 인식하고 그에게 자신의 사무실로 오라는 듯 손짓한다. 반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인혁. 자꾸 빨리 오라 재촉하는 나과장을 따라 일단, 그의 사무실로 따라 들어가본다. . . . .

나과장의 사무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인혁이 들어가자마자 나과장을 향해 입을 연다.

“ 무슨 일입니까? ” “ 이것 좀 봐! 이것 좀 보라고! ”

[ 툭- ]

그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탁자에 프린트된 기사를 툭- 던져놓는 나과장. 인혁은 그런 나과장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가 던져놓은 기사를 읽어내려간다. 그리곤 점점 굳어지는 그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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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세중병원 과장단 회의,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의 병원장이 과장들을 향해 묻는다.

“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응급실에서 제대로 준비도 안하고 수술을 해서 기사가 터 졌다니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설명 좀 해보세요. ”

원장의 물음에 제일먼저 입을 열며 상황을 설명하는 기조실장.

“ 자세한 상황은 응급의학과의 입장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기사내용에는 CT나 다른 검사도 없이 바로 수술을 들어가고, 수술간호사도 없이 정규 수술실이 아닌 응급실에 서 수술을 한데다가, 배를 닫지 않고 수술을 마무리 하지도 않은 채로 환자를 그냥 방치해두고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환자가 우리 측, 잘못 때문에 거의 다 죽어 가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나와 있는 상태라, 이대로 두면 병원이미지의 큰 타격을 입 을 것 같습니다. ” “ 나과장, 어떻게 된거에요. 환자가 다 죽어간다는 게 사실입니까? ”

기조실장의 설명을 들은 후에 심각한 표정으로 응급실 나병국과장을 지목하며 묻는 병원장. 그에 나병국은 곤란한 표정으로 쩔쩔매며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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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최인혁.. 선생이 수술한 환자라.. 아, 그래도 환자상태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환자가 아직까지 개복한 배를 닫진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상태는 양호한 편입 니다. 게다가 오늘 2차 수술 잡혀 있어서, 수술을 마치고 나면 깨어나는데 크게 무리 는 없어 보입니다. 그, 기사에 약간 과장된 면이.. ” “ 그러면 기사에서 허위사실을 썼다는 얘기입니까? ” “ 저.. 허위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과장된 점이 더 많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기사에 나온 데로 수술과정에서 수술간호사도 따로 없었고, 중요한 몇몇 수술도구도 부족한 상태에서 수술이 시작된 건 사실입니다. 게다가 CT를 찍지 않은 것과 응급실 에서 수술한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끝난 걸로 알고 있 습니다. ” “ 하.. 우리 측에서 빌미를 제공했다는 거군.. 지금, 우리 측에 책임이 있는지가 중요 해요. 환자가 조금이라도 잘 못 되서 소송이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보호자들은 어떻 게 하고 있어요? ” “ 보호자들도 기사가 터지고 나니까, 뭐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만, 환자만 정상적으로 깨어난다면, 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 “ 그럼, 환자가 깨어나는 게 우선이겠군요. 그래도 환자상태가 양호하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그런데 그, 응급실 일이 기자 귀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에요? ” “ 아, 그게.. 알고 보니 그 환자도, 기자라고 합니다. 기사를 낸 사람은 환자의 후배구 요. 무슨, 자신이 의학 전문기자라면서 간호사를 협박한 모양이던데, 알아보니까, 큰 신문사는 아니고, 의학전문기자도 아닌데다가, 작은 지역 신문의 기자였습니다. 그런 데 아무래도 지인이 당한 사고다 보니까, 기사를 더 감정적으로 쓰고, 더 과장되게 표 현한 것 같습니다. ” “ 거, 하필이면 그런 환자가 걸려가지고.. 아무튼 최인혁이가 수술하는 환자들은 하나 같이..! ”

나과장의 말이 끝나자 혼자서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세헌. 그러나 병국이 그런 세헌의 말을 잘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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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CT검사를 하지 않은 부분이나 수술준비가 제대로 안된 부분은 조금 문제가 되겠지만, 그 신문사가 워낙 작아 파급력도 떨어지고, 보호자들도 그런 것들을 일일이 문제 삼을 여력은 없어 보이기 때문에, 환자가 정상적으로 깨어나기만 한다면 큰문제 거리가 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가만히 두면 오해가 커질 테니까, 정정기사를 요청해야지 않겠 습니까? “

기조실장의 말에, 자신의 일이 아니니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여는 민준.

” 그 기사를 쓴 기자가 환자 후배라면서요? 환자가 깨어난 후에, 환자 측에서 도와주 면 정정기사 정도야 어떻게 내보낼 수 있겠죠. ” “ 하지만, 환자가 깨어나려면, 못해도 2~3주는 걸립니다. 아무리 파급력이 적다고 해 도, 그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일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요? 막말로 그 쪽에서 악의적으 로 기사를 더 과장되고 부풀려서 퍼트리기라도 한다면, 다른 신문사나 경쟁병원들이 야 좋아라 할거고, 우리병원 이미지에는 큰 타격을 입겠죠. ” “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기사가 완전히 허위기사도 아니고, 우리 쪽에 서도 걸리는 게 있으니까 환자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은 당장은 정정기사 요청도 어렵 게 되는 건데.. 뭐, 어떻게, 방법이 없는 겁니까? ”

민준은 기조실장의 말에 반박하는 세헌을 보며 헛웃음을 치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이 또 말을 툭-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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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방법이야 있죠. 수술한 최인혁이 한테 책임을 물어서, 병원에서는 최소한의 조 취를 취했다는 걸 보여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 “ 그러면, 우리 측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자는 게 되는 건데.. 아직, 환자도 깨어 나지 않은 상태에서 대외적으로 문제가 더 커지지 않을까요? ” “ 뭐, 다른 방법 있습니까? 잠깐이라도 기사를 막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죠. ”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이 탁자를 두들기며, 또다시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세헌.

“ 그러게 애초에 환자를 그렇게 무턱대고 받지 말아야지..! 중환자실이랑 수술실이 있 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하고 받으니까, 무리하게 수술하려다 이런 사단이 나는 거 아 닙니까? 다른 과 환자한테 피해나 주고..! ”

순간, 세헌이 저도 모르게 조용히 묻어버리기로 한 얘기를 다시 꺼내자 그에게 무슨 짓이냐며 눈치를 주는 나과장. 병원장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또 무슨 일이냐며 묻는다.

“ 왜요? 또 무슨 일 있었어요? 황과장. 자세히 얘기 해보세요. ”

나과장이 눈치를 주자 아차! 싶어 약간 당황하는 듯하다가 병원장의 물음에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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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게.. 저.. 그날, 응급실에 최인혁선생이 무리하게 환자를 받느라. 중환자실에 있는 저희과 VIP를 보호자 허락도 없이 병동으로 옮겼었습니다. 원장님. ” “ 아니, 얘기 들어보니까, 어차피 곧 있으면 병동으로 옮길 환자였다면서요! 환자한테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그 얘기는 왜 자꾸 꺼내세요! 아, 그리고 최인혁선생은 외과 사람인데! 자꾸 모든 일을 응급실 문제처럼 몰아가는 건 곤란합니다! ”

응급실로 불똥이 튈까봐 선수를 치는 나과장. 말을 끝내고는 은근슬쩍 민준을 노려보고, 역시나 불똥이 튈까봐 잠자코있던 민준은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리자 변명하듯 대꾸한다.

“ .... 아, 뭐, 아직 외과 내 지시를 받고 있긴 하지만, 환자를 받고 말고 하는 건 응급 의학과에서 책임을 지셔야죠. 외과에서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신경 쓸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그, 주치의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를 옮긴 건 문제가 되죠..! 그것 도 VIP를... ” “ 차하, ” “ 아유, 그리고 이게 어디 하루 이틀 나온 얘기입니까? 이건 어느 한 과에서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다, 최인혁이가 문제라니까요. 지금까지 기사화가 안 되서 그렇죠! 늘 그랬습니다. 수술실, 중환자실도 없는데 환자들 밀어넣고, 응급실에서 준비 도 제대로 못하고 수술하고..! ”

민준의 말에 잠시 싸늘해지는 회의장. 모두들 속으로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들 외상환자를 누군가는 돌봐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외상 환자를 어떻게든 받아서 수술하고야 마는, 그래서 자꾸만 이런 성가신 분쟁을 만드는 인혁이 그들에겐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각자 자신의 과를 신경쓰기도 바쁜 교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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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혁이 아니었다면 이런 회의를 소집할 이유도, 더 이상 귀찮아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단, 한사람. 한구만 빼고.. 한구는 기가막혔다. 다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이 일이 꼭 인혁의 잘못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그들은 고의적으로 병원의 시스템이 나빠서 생기는 모든 문제까지 모두 인혁의 잘못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나서서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이다 인혁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해줄 수도 없는 한구. 지금 이곳에서 시스템얘기를 하며 그의 편을 드는 일은 허황된 얘기라고 미친놈소리를 들을 것이 뻔한 일이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조직의 일이 그렇듯, 이 자리는 책임을 가리기 위한 회의였다. 그래서 모두들 서로를 헐뜯으며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만 했지, 원인을 찾고 뜯어고치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병원에서 단 한사람. 최인혁 그놈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희의장의 정적을 깨며 불만스럽게 입을 여는 황과장. 그리고 그 말을 거들어주는 민준.

“ 그런데 트라우마센터는 이대로 계속 둬야 하는 겁니까? 이렇게 문제는 수시로 일어 나는데, 경계도 분명하지 않아서 분명하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잖아요..! 정부에서 지 원해준다는 외상센터야, 만들어질지 안 만들어질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그거하나 믿고 있어야 합니까? ” “ 그러게요. 말이 나왔으니까 한마디 하겠습니만, 뭐, 트라우마센터야 애초에 정부 특 성화센터 사업 때문에 시작했고, 특성화사업이 끝나면 외상센터사업으로 넘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던 건데, 이미 특성화 사업도 거의 끝났고, 외상센터 사업은 아예 불투명해진 상태잖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더 이상 지원도 안 나올 거 같은데, 더 유지시킬 이유가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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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럼요..! 지금까지 지원받던 2억도 당장 내년부터는 더 이상 지원 받을 수 있 을지, 없을지, 불투명하다면서요? 게다가 그 놈의 적자는 또 얼마입니까! 그나마 우리 정형외과에서 그만큼 벌어들였기에 망정이지! 병원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이미 적자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지난번 병원평가에서도 우리병원 실적이 거의 꼴찌입니다. 이대로 는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원장님. ”

약속이나 한 듯 척척 맞아떨어지는 세헌과 민준의 호흡. 병원 내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어들이며,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두 사람이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오자 입장이 곤란해진 병원장.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다시 입을 연다.

“ ... 그래서요? 지금, 트라우마센터를 없애기라도 하자는 말입니까? ” “ 뭐, 지금 같은 때면, 명분이야 뭐 충분히 되지 않겠습니까? 트라우마센터가 존재하 는 이상 계속 이런 일 생길거고, 그리고 그, 최인혁이가 환자를 살려봤자 얼마나 살린 다고.. ” “ 아직 최인혁교수 의무 복무기간도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트라우마센터는 처음에 3 년 이상 유지시켜준다고 약속한 거 아니었습니까? ” “ ...!!!... ”

참다, 참다못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한구. 수술실을 관리감독 하는 마취과의 특성상, 평소 회의에서는 입을 잘 열지 않고 어떻게든 중립을 지키려하는 그였기에 다들 살짝 놀란 눈으로 한구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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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한구의 말을 거들어주는 병원장.

“ 그래요. 마취과장 말대로, 최교수, 아직 의무복무기간도 안 끝났어요. 최인혁교수 티 오문제도 있고, 애초에 약속한 기간이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트라우마센터를 없애는 식의 징계를 내리자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 “ 뭐.. 그러면, 최인혁교수 티오는 유지 하고, 이번기회에 트라우마센터 지원을 줄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 “ .....?.... ”

그러나 병원장의 말애 바로 치고 들어오는 민준.

“ 어떤 식으로든 책임은 물어야 할 거 아닙니까? 뭐, 병원 실적문제도 있는데, 더 이 상 적자도 감당하기 힘들고, 어차피 대외적으로 티 안 나게 정정기사를 요청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징계는 내려야 할거고요. ”

민준의 말에 다시 정적이 흐르면서 긴장감이 도는 회의장 그런데, 그 침묵을 깨고 나과장이 갑자기 끼어든다. 그리고 그 말을 떠받쳐주는 기조실장.

“ 뭐, 맘대로들 하세요!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센터 지원이 줄어들면 당장 인력부터 줄여야 하는데! 그럼 외상환자는 어떻게 할겁니까? 최교수 혼자 감당 하지 못하면 응급실 인력 가져다 쓸거고, 그것도 안 되서 응급실에 환자 방치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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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 몰라라 하면! 그거는 못 참습니다! 각과에서 콜들 똑바로들 받고, 외상환자 확 실히 책임질 수 있습니까? 네? ” “ 나과장말이 맞아요. 트라우마센터가 없어지게 되면 외상환자들을 어떻게 합니까. 갈 곳이 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일이 하나 생겼다고 트라우마센터에 지원을 갑자기 줄인 다는 거는.. ”

그러나 나과장의 말을 받쳐주던 기조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고 끼어드는 민준과 세헌.

“ 뭐, 트라우마센터야, 외과의가 응급실에 있을 명목으로 임시로 만들어놓은 것 아니 겠습니까? 어차피 지금도 형식적으로 제대로 갖춰진 상태도 아니니까, 인력이 없는 건 마찬가지일 테고, 최인혁이야 뭐 전에도 몇 년간 혼자서 외상환자 받았던 사람이 고, 그러니까 지원을 줄인다고 해서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여유 인 력이 없으면 최인혁교수가 응급실의 보조적인 역할만 하고, 더 이상 환자를 무리해서 받거나 하지는 못 하겠지요! ” “ 그리고..! 무조건 반대만 한다고 될게 아닙니다. 트라우마센터가 생긴지 벌써 2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그 2년동안 성과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적자만 수두룩하게 쌓였 지..! 트라우마센터를 만들고나서 얼마만큼의 성과가 있었는지 증명해내지 못한다면, 적자가 이렇게나 나고 있는 상황인데, 저희 입장에서는 계속 유지를 시켜야하는 건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명분이 분명한 민준과 세헌의 말에 더 이상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고 다시 회의장 안에는 긴장감이 감도는데, 그때, 가만히 있다가 상황을 마무리하려 다시 입을 여는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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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그 문제는 여기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나중에 얘기하도록 합시 다. 그리고 나과장. ” “ 예, 병원장님. ” “ 보호자를 다시 만나서 병원비를 감면해주는 선에서 설명을 하고, 정정기사를 내달 라고 설득할 수 있도록 부탁해보세요. 게다가 아무래도 응급실 수술은 제대로 갖춰지 지 않고 수술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으니까. 나병국과장이 책임지고, 앞으로 이런 문 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써주세요! ” “ 예, 알겠습니다. ”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교수진들, 한구도 한숨을 내쉬면서 회의장을 빠져나가려는데 회의실 안에서 나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이봐요, 황과장! 그 일은 조용히 덮고 넘어가기로 해놓고 그걸 거기서 왜말해요? ” “ 참나.. 그럼 원장님이 물어보시는데 어쩝니까? 대답해드려야지..?! ” “ 아, 그거야 황과장이 다른 과에 피해를 줬다느니 어쩌느니 먼저 말을 하니까 그러 신거지..!! 그럼, 왜 황과장이 최선생 뺨 때린건 싹- 빼놓고 얘기합니까?! 여쭤보셨으 면 그거까지 말씀드려야지? ” “ 아, 여기서 그 얘기가 또 왜 나옵니까?! ” “ 그 일 때문에 덮고 넘어가기로 한건데..!! 당연히 얘기 해야죠!! 아니, 안 그래도 그 놈의 기사 때문에 응급의학과가 곤란해죽겠는데 왜 말을 보태냐구요 보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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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머릿속에서 모든 상황이 짜 맞춰지는 그. 한구는 왜 그가 소문이 나돌 만큼 은아에게 화를 내고 왜 그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때, 다시 들려오는 세헌의 목소리.

“ 거,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거지.. 참..! ” “ 어쨌든!! 이번에 황과장, 운 좋은 줄 아세요!! 최인혁선생이 그날 자기 팀 코디네이 터하고 싸우는 바람에, 황과장일은 싹다 묻혀버린거니까! 거, 때가 어느 땐데 폭력이 나 휘두르고 말이야..! ” “ 흠..흠..!! 그, 알았으니까. 앞으로 그 최인혁이 얘기는 그만하는 걸로 합시다..! ”

그때, 나과장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회의실을 나오는 황과장. 그러다 회의실 문 앞에 있던 한구와 눈이 딱 마주치는데, 한구는 자기도 모르게 세헌을 노려보고 있고, 그런 한구를 보며 세헌은 살짝 당황하는 듯 하더니 그냥 모른 척 지나쳐버린다. 곧이어,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회의실에서 나오다가 똑같이 한구와 마주치는 나과장. 어색하게 한구에게 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냥 헛기침만 하면서 그를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그대로 문 앞에 혼자 남겨진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다가 나지막하게 혼자서 중얼거리는 한구.

“ 하.. 진짜 최인혁.. 이 미련한 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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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얘기를 들은 한구는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기가차고 화가 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던 인혁에게 너무나도 섭섭하고 답답해서 화가 났다. 하지만 인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 아마도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 이었을 거란 생각에 아는 척 해줄 수도, 위로해줄 수도 없는 자신이었기에 이 상황이 더 화가 나고 그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한구였다. 그날 저녁, 은아의 집, 동규로부터 인혁이 오프까지 쉬다 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어젯밤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자고 일어난 은아. 도대체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를 만큼 땀을 빼며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역시 휴식이 필요했던 건가.. 하는 생각에 인혁의 말대로 내일까지는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내 혼자 고생하고 있을 그도 생각나고 외상환자들도 자꾸 눈에 밟히고 해서 아무래도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은 일찍 출근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그녀. 그나저나 동규씨가 그 전화를 받았다니.. 교수님 많이 당황하셨을 텐데.. 걱정하셨으려나.. 화나셨으려나..? 어제는 몸도 아프고 너무 정신이 없는 바람에 인혁에게 연락을 한다고 하고 깜빡했던 그녀인데 그 전화를 동규가 받았다고 하니 당황했을 인혁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뭐가 불만인지 일주일 넘게 자신을 피해 다니는 인혁이 얄밉고 야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제 갑작스럽게 빠졌으니 또 나중에 오해 없게 제대로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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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제 저녁부터 별로 먹은 게 없다보니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연락을 하더라도 저녁부터 해먹고 나서 해야겠다 싶어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하려는데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갑자기 울리는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 이 시간에 누구지..? 동규씨..? 교수님..? 아무래도 둘 중 한사람이겠다 싶어서 서둘러서 침대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드는 은아. 그런데, 전화를 한 사람은 동규도, 인혁도 아닌,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 결혼한 남동생이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씨익-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 이내 통화버튼을 누르고 장난스럽게 입을 연다.

“ 와~ 누나보고 싶어서 전화했나? ” “ .... 누나.. 여기로 좀.. 올라올 수 있나? ”

오랜만에 하는 남동생과의 통화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한껏 들뜬 은아의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갑작스레 올라와 줄 수 없겠느냐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남동생. 그러자 순간, 당황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녀의 목소리 톤도 살짝 내려간다.

“ ....?... 아.. 여기 일이 바빠서 올라가는 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왜, 무슨 일 있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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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엄마가 누나 니 한테는 말하지 말라켔는데.. 내일, 엄마 수술 있다. ” “ ..... 니, 뭔 말이고..? 수술..? ”

어머니가 수술을 받는다는 소리에 놀라서 갑자기 심각하게 변하는 그녀의 목소리.

“ 응.. 큰 수술은 아니지만서도, 아무래도 누나가 쪼매 올라와봐야 할 것 같다. ” “ 무슨 수술인데..?! 많이 심각하나?! ” “ 아니, 그건 아닌데.. 아, 잠깐 나 끊어야 할 거 같거든? 내 이따가 다시 전화해서 말 해 줄게! 일단, 올라와보면 안 데이..! 최대한 빨리 올라올 수 있나..? ”

누가 자신을 부르는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하며 그녀의 대답을 재촉 하는 남동생. 큰 수술은 아니라면서도 동생의 목소리가 왜 이리 심각한 건지.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직감적으로 꼭 올라가봐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은아.

“ .... 일단, 알았다! 내, 올라 갈 테니까! 그때까지 엄마 좀 잘 보살펴드리고 있으라! ”

그렇게 동생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식탁위에 있는 물을 단숨에 다 마셔버리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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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하자.. 신은아.. 큰 수술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큰일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러다 문득, 병원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원래는 내일까지 쉬기로 되어있으니, 그 문제는 기차 안에서 생각해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은아. 일단은 새벽기차라도 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을 챙기면서 몸을 바삐 움직이는 그녀였다. 한편,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퇴근을 하기 전, 인혁을 보기위해 응급실로 내려와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앞에 선 한구. 문을 열려다가 잠시 망설이고는 이내 노크를 한다.

[ 똑똑- ]

“ 네. 들어오세요. ”

[ 끼익- ]

한구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금 수술을 끝내고 내려 온 건지, 땀이 흥건한 수술두건도 푸르지 않은 채로 간이침대에 쭈구려 앉아있는 그가 보인다. 그런데, 평소처럼 환자자료를 보고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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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서적을 보고 있는 것도, 그렇다고 쉬려고 자리에 누우려던 것도 아닌, 그저 멍- 한 표정으로 있는 그. 평소보다 더 많이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괜히 더 기운 빠지게 할까봐 한숨도 내 쉴 수 없는 한구.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자기에 대한 온갖 소문이 나도는데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항상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있는 이놈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그가 왜 그러는지 알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한구였다. 그때, 인혁이 아무 말 없이 그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구를 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피식- 웃으며 말을 한다.

“ 허.. 들어왔으면 말을 해야지. 웬일이야, 니가 노크를 다하고 들어오고. ” “ 어.. 그냥. 뭐 하고 있나 해서. 신선생은? ” “ 어.. 몸이 좀 아픈가봐. 내일이 오프라서 내일까지 푹 쉬다 나오라고 했어. ” “ 아아, .... 흠... 야, 술이나 한잔 하러가자.

”

“ 됐어. 술은 무슨.. 오늘 그 환자 2차 수술 있었잖아. 가서 수시로 봐야지. ” “ 아, 중환자실 선생들 있잖아~! 그러지 말고... ” “ 됐어.. 괜찮다니까. ”

지금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는 듯, 정말로 힘없이 대답하는 인혁. 한구는 그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책상 옆에 있던 간이의자를 끌어다가 앉으며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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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과장한테 들었어? 회의내용. ” “ 뭐, 대충. ” “ 대충은.. 씨, 어디까지 들었는데. ” “ 뭘, 어디까지 들어.. 환자들 검사 똑바로 하고, 당분간 응급실 수술 자제해라. 병원 에서 보호자한테 병원비 대주고 무마하기로 했다. 환자가 빨리 깨어나야 한다. 나중에 책임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뭐.. 그런거지. ” “ 흠.. 그게 다야? ” “ 와.. 뭐가 또 더 있나? ” “ ... 아니, 뭐.. 아무튼, 그래서 어쩌려고..? ” “ 뭘 어떻게. 방법있나.. 그냥 하던데로 해야지. 2차수술도 잘 끝났으니까 환자 잘 회 복시키고, 뭐..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면 되고.. 거, 그렇게 죽을상 하고 있을 필요 없어. 내가 언제는 뭐, 좋은 소리 듣고 수술한 것도 아니고.. 그 기사야 뭐.. ” “ 그런데, 지금.. 그 기사가 문제가 아닌 거 같아. 분위기가 좀 이상해. ”

결국 인혁의 말을 가로막으며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을 꺼내는 한구. 그리고 갑자기 진지해지는 그의 말투에 직감적으로 불안함을 느끼는 인혁.

“ .... 뭔 소리야..? ” “ 환자만 깨어난다면, 기사정도야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트라우마 센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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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사로 트집을 잡아서 센터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어. 티오며, 적자며, 중환자실 에 수술실문제까지, 특히 적자가 제일 걸리는 부분인데.. ” “ 그거야, 늘 나오던 얘기잖아.. 갑자기 왜 이렇게 심각한데. ” “ .... 트라우마센터 지원을 줄이자는 얘기까지 나왔어. 그것도 꽤 구체적으로.. 최소비 용을 제외한 모든 지원을 줄이자는거야. 인력도 포함해서.. 뭔가 이번에는... 작정하고 몰아가는 분위기야. ” “ ....!!!.... ”

한구의 말에 눈이 커지는 인혁. 인력을 줄여야 한다는 얘기에는 당연히 외상코디네이터자리도 포함 되어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말을 전해주는 저놈의 표정이 이렇게도 좋지 않은 것이리라..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한구.

“ ... 그쪽에서는 센터가 생긴지 2년이 되는 동안 적자만 쌓였지 어떤 성과가 있었냐 는 거야. 외상센터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는 상황도 아니니까. 성과를 증명해내지 않으 면, 자기들 입장에서는 계속 센터를 유지시켜야 하는 건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 다는 거지..

한구는 자신의 말을 들으며 그대로 굳어져서는 점점 더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인혁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서 꼭 해줘야할 얘기이기 때문에, 회의에서 나왔던 내용들을 전부 얘기해주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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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뭐, 물론, 아직까지는 언급만 된 거고 확실히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기사문제도 병원장님이 중재하시는 바람에, 보호자를 설득해서 정정기사 요청한다는 선에서 넘어 갔고.. 하지만.. 다음번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 ” “ .... ”

얘기를 듣는 내내 화를 내지도 질문하나도 없이 그저 침묵하고 있는 그. 한구는 그런 인혁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너무 쳐지는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는 듯 살짝 목소리 톤을 높인다.

“ 그, 외상센터사업은 어떻게 됐어..? 아직, 재개한다는 소식 없어? ” “ ... 모르지. 어떻게 될지.. ” “ 큰일이네.. 외상센터 사업이라도 가망이 있어야. 뭘 어떻게 증명해보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아.. 이거, 아무래도 뭔가 다른 거라도 병원에 보여 줄만 게 필요할 거 같 은데.. 야, 어떻게 그, 학회에ㅅ.. ” “ 한구야... ”

그런데, 너무나도 지쳐있는 듯 한 목소리로 아주 나지막이 한구의 이름을 부르는 인혁. 한구는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말을 멈추고는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인혁을 보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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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아무 말도 없이 한참동안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이내 지쳐있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 꼭.. 뭔가를 보여줘야 하나..? ” “ ..... ” “ 의사가.. 최선을 다해서 죽어가는 사람 살릴 수 있으면은... 그걸로 된 거 아니냐고.. ”

인혁의 말을 듣고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한구. 하지만, 이내 그의 시선을 피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그를 쳐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연다.

“ .... 너도 알잖아.. 의사가 환자만 살린다고 다가 아니라는 거. ” “ .... ”

인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한구를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이내 그 말이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 화가 나는지 짧은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한구를 쳐다보지도 않는 그. 한구는 그런 인혁을 어쩔 수도 없어서 그저 한참동안 그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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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혁아.. ” “ 와.. ” “ 너.. 후회 안하냐? ” “ 후회는 무슨..!! 그럼, 검사 못 하고, 수술간호사 없다고 수술 안 해서 환자 죽여야 하나?! 환자 살아있으면 된 거 아니냐고..!! 이제 회복만 잘 되도록 옆에서 지켜보면 서...! ” “ 아니, 임마, 그거 말고. ”

그의 말에 울컥하는지 괜히 한구에게 화풀이를 하듯 큰소리를 내는 인혁. 하지만, 한구가 그의 말을 가로막는다.

“ 너 그때.. 연수가기 전에 연락 왔을 때 말이야. 선배 안 따라간 거.. ” “ ...!!... ” “ 그거, 후회안하냐고. ”

그러자 말문이 막히는지 하던 말을 멈추고, 떨리는 눈빛으로 한구를 쳐다보는 인혁. 이내 뭔가 울컥하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듣기 싫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아까와는 다르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 거, 다 지나간 얘기는 뭐 하러 다시 끄내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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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 이번에 서울에 새로 생긴 암센터, 센터장 된다고 하더라. ‘ “ .... ” “ 임마... 너도 그때 외상포기하고 서울로 갔으면.. ” “ 그만해라! 임마..!! ”

한구의 말을 가로막으며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치는 인혁. 그런 그 때문에 한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꺼낸다.

“ .... 어쨌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잖아.. 신선생 오면 잘 얘기해봐.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하긴, 뭐.. 인원 감축된다고 해도.. 신선생이야 어차피 떠날 사람이긴 하지 만.. 야, 그래도 트라우마센터 잘못되면 신선생도 속편하게 못 떠날 거 아니야? 신선 생도 너만큼 센터에 열정이 있어 보이던데.. ” “ ..... ” “ ... 아무튼, 잘 생각해봐. 나 간다. ”

그렇게 한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인혁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다시 그를 불러 세운다.

“ 한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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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 “ 아직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 우리센터 지원문제.. 과장급 아닌 이상은.. ” “ 뭐.. 그렇지. ” “ 병원에 간호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알리도 없고..? ” “ 음, 당분간은.. 과장들도 체면이 있는데, 그 시꺼먼 속들을 쉽게 내비칠 리는 없지.. 근데 그건 왜? ” “ 그러면.. 신선생한테는.. 아무 말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 “ ... 왜..? 어쩌려고.. ” “ .... 그냥.. 그렇게 해줘.. ”

왠지 인혁의 말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한구.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 보이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서 서서 불안하게 인혁을 쳐다보고만 있는 한구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기차 안, 새벽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서, 아침이 되자마자 첫차를 타고, 수원으로 올라가고 있는 은아. 그녀의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갑자기 수술이라니.. 사고라도 난 걸까..? 혹시 큰 병이라도 걸리신 걸까..? 아니, 큰 수술은 아니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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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번 통화 할 때도 이상한느낌은 없었는.. 아니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였더라..? 하.. 전화라도 자주 드려볼 걸.. 뒤늦은 후회를 하는 그녀. 세중병원에서 코디네이터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늘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도 한번 제대로 해드린 적이 없었고,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한번 올라간 적도 없는 그녀였다. 게다가, 어쩌다 한번 통화를 하더라도, 늘 어머니가 먼저 하곤 했지, 자신이 먼저 전화를 했던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 생각에 괴로워지는 그녀.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남동생이었다. 서둘러 전화를 받는 은아.

“ 어! 은강아! 내다..!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긴데..?! 엄마가 무슨 수술을 받는데..?! 많이 심각하나? 혹시.. 큰 수술이고? ”

다급한 마음에 걱정했던 것들을 두서없이 막 물어보는 은아. 그런데, 그런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한 남동생의 목소리.

“ 아.. 그기, 큰 수술은 아니고.. 무릎하고 허리수술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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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 무릎하고 허리..? 갑자기.. 무슨..? ”

남동생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나오자, 살짝 당황하는 그녀. 한편으론, 자신이 걱정했던 큰 병들은 아니라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론, 또 다른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 수술들 역시 작은 수술은 아닌데다가.. 그전부터 다리가 안 좋긴 했어도 아직 비교적 젊은 연세시라, 그런 수술들을 받을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 남동생.

“ 내 말했잖아. 그렇게 큰 수술은 아니라꼬..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 “ ....?.... ” “ 그.. 화내지 말고 들으라. 엄마가.. 우리 몰래.... ”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해나가는 동생. 그리고 남동생의 설명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는 은아. 그리고 그런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눈치를 주는 사람들.

“ 뭐라꼬..?! 식당..?!! ” “ 아, 화내지 말고 들으라니까..! 뭐.. 더 자세한 거는 누나 올라오면 그때 말해 줄 테 지마는.. 그나마도 집사람이 빨리 발견해서 병원이라도 모시고 갔으니까 다행이제. 엄 마도 참.. 내도 감쪽같아 몰랐다 아이가. 우리 몰래 혼자 어떻게 참아 보실라꼬,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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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혼자 끙끙 앓은 모양인데.. 여, 의사가 그러드라. 그 아픈 거를 그동안 어떻게 참았꼬.. ” “ 아, 니는 뭐하고..! 하아.. 됐다. 여기 기차 안이니까. 올라가서 보자..! 끊는다..! ”

화가 난다고 바쁘게 사는 남동생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용한 아침 기차 안에서 큰소리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기가 막히고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동안 어머니가 동생내외 모르게 식당일을 해오시다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무릎과 허리가 도졌다는 동생의 설명.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건, 그나마도 혼자 숨겨보려고 몇날 며칠을 말도 안하고 끙끙 앓으시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며느리가 발견해서 병원에 모시고 왔더니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꽤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답답해져서 속이 상하다 못해 자꾸만 화가 나는 그녀. 몇 년 전부터 동생과 은아는 계속해서 일하시겠다는 어머니를 늘 말려왔었다. 이제 일 좀 그만하고 쉬시라고.. 이만하면 할 만큼 하셨으니 이제는 돈 걱정 좀 하지 마시고.. 아들, 딸이 벌어오는 돈 가지고 편히 좀 사시라고.. 아직, 쉰여섯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셨지만, 스무 살 어린나이에 나이차이 많이 나는 아버지께 시집을 와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사시던 어머니셨다. 물론,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상하고 사랑 많은 아버지셨지만, 그런 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로는 4년간 남편의 병수발을 하며 두 남매를 키워야 하기에 식당일부터 생선장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20년이 가까이 지독히도 일만 하셨던 어머니. 그래서 남자보다도 더 드세고 목소리도 크고, 어느 누구 앞에서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살면서, 아버지 대신 가장의 노릇을 해왔던 어머니셨다. 하지만, 그 몇 십 년의 세월동안 지독히 일만하시면서 어머니의 몸이 이미 닳을 데로 닳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은아와 남동생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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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을 못하시도록 그렇게 말렸던 건데.. 그런데 동생 내외한테는 말도 안하시고 또 식당일을 나가시다가 수술까지 받으신다니, 은아는 속이 상해서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 아, 엄마는 고집 좀 부리지 마시라니까, 결국에..! 하아... ”

하지만 2년 만에 뵈러가는 어머니인데 다짜고짜 화부터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속상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창밖을 바라보는데,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그래도 최대한 창밖 풍경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그녀.

[ 덜컹- 덜컹- 덜컹- ]

이상하게도 멀리 있는 풍경들은 잘 보이지만, 오히려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빠르고 바쁘게만 달려가는 기차. 어쩐지 그 기차와 닮은 듯이 살아가는 은아. 감기로 인한 두통이 간신히 나아가고 있었는데..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고 지끈거림을 느끼는 그녀는 빠르게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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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후, 세중병원 응급실,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

오전이지만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응급실에 한통의 전화가 울려 퍼진다. 마침, 데스크 바로 옆에 있다가 바로 전화를 받는 도형.

“ 네, 세중병원 응급실입니다. 예..? 트렌스퍼요? 어떻게 다친 환잡니까? 예, 예, 환자 혈압은요? 잠시 만요..! 최간호사님! 빨리 최인혁교수님 콜해주세요..! 10미터높이에서 추락한 폴다운 환자랍니다! ”

전화로 트랜스퍼문의를 받자마자, 바로 인혁에게 콜을 하는 도형. 그러고선 다시 전화기 너머로 좀 더 자세한 환자상태를 확인하려는데, 그때 응급실 데스크를 지나가던 나과장이 급한 전화를 받고 있는 도형을 발견하고 다가온다.

“ 무슨 전화야?! ” “ 아, 과장님! 울산병원에서 추락환자 받아줄 수 있냐는 전환데요..! 혈압 90에 60이 고 응급환자라고 해서, 방금 최인혁교수님께 콜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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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생한테? 잠깐, 지금 수술실, 중환자실 있어 없어? ” “ 글쎄요..? 아직 확인 안 해봤는데요..? 응급실 베드는 많이 남아 있는데.. ”

그러자 바로 찡그려지는 나과장의 눈썹. 도형의 말에 버럭 하고 화를 낸다.

“ 일단, 그것부터 확인을 해야지!! 응급실 레지더트씩이나 되가지고. 수술실도 알아보 기 전에 바로 콜을 해버리면 어떻게?! ” “ 예..? 지금까지 늘 그렇게 해오던 건데요... 최인혁교수님이 수술은 응급실에서 하면 되니까. 일단, 외상환자 문의 오면 무조건 콜부터 하라고.. ” “ 늘 그래왔으니까, 그렇게 문제가 생기는 거지! 빨리 수술실하고 중환자실부터 알아 보고! 없으면 못 받는다고 해. ” “ 아.. 아, 예! ”

나과장의 말에 서둘러 어디론가 전화를 해서 수술실과 중환자실이 있는지 알아보는 도형. 그러다 수술실하고 중환자실을 구할 수가 없었는지, 아까 걸려온 전화에 환자를 못 받겠다고 설명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러자, 이제 됐다는 듯이 자리를 뜨려다가 몸을 돌려 도형에게 다시 한마디를 하는 나과장.

“ 아, 그리고! 당분간 응급실에서 수술 자제시키고, 최교수한테도 웬만하면 외상환자 는 새벽에만 받으라고 말해놨으니까..! 수술실하고 중환자실 없으면, 무조건! 못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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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해, 무조건! 최인혁교수가 받는다고 해도! 자네가 막아야되, 알았어? ” “ 최.. 최인혁교수님을 막으라고요..? 아, 그래도 제가 어떻게.. ” “ 스읍...! 이봐 김도형선생..! 자네 외과야..? 아니면 최교수가 응급의학과 과장이야..? ” “ 아, 아닙니다..! ” “ 최인혁교수는 외과! 당신은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나는 자네가 소속되어 있는 응급 의학과 과장..! 똑똑히 기억해두라고! ” “ 예.. 예!!! ”

오늘따라 예민하게 화를 내는 나과장 때문에 도형은 겁먹었는지 바짝 얼어있고, 병국은 그런 그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하더니 마치, 긴밀한 얘기를 해준다는 듯이 도형에게만 들리도록 입을 연다.

“ 그리고 내가 없으면, 나대신 여기 응급실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최인혁교수가 아니 고 자네라고 자네! 응급실에 몇 안 되는 귀~ 한 레지던트..! ” “ 아, 예..! 예!! 알겠습니다..! ”

자신이 응급실을 책임져야한다는 말에 바짝 군기가 잡혀서는 아까보다 훨씬 큰소리로 대답하는 도형.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레지던트로써 인정을 받는 것 같은지 약간 기분 좋아 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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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으로 연결되는 응급실 입구에서 부터 서둘러 뛰어 나오며 도형을 부르는 인혁.

“ 김도형선생!! 트랜스퍼 문의 어떻게 됐어!! ” “ 아, 수.. 수술실이랑, 중환자실 없어가지고..! 못 받는다고, 했.. 했습니다.. ” “ 뭐?!!!! ”

인혁이 데스크로 달려오면서 도형에게 호통을 치자, 그 호통에 움찔한 도형이 아무래도 밀리겠다 싶었는지, 나과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불쑥 대화에 끼어든다.

“ 이봐, 최선생, 내가 못 받는다고 했어. ” “ ...!!... ”

그의 말에 놀라서 눈이 커지는 인혁. 항상 인혁을 탓하고 타박하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나과장이 지금까지 응급환자를 받는 일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막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인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약간 찔리는듯해 하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나과장.

“ 아니, 수술실하고 중환자실도 없는데, 환자 못 받는 건 당연하잖아..! 아니면, 또 응 급실에서 수술해서 문제일으킬 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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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장님, 지금 환자혈압이 90에 60이고, 10미터에서 추락한 초 응급 환자입니 다..!! 그러다가 이 환자..! 병원도 못가보고 구급차에서 죽습니다..! ” “ 하.. 최선생, 잠깐 나 좀 보지..! ”

나과장은 인혁이 또다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자 그를 사람이 없는 복도 쪽으로 따로 데려가더니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하면서도 약간 짜증이 난 듯한 말투로 입을 연다.

“ 내가 분~ 명히! 응급실에서 수술자제하고, 외상환자는 수술실 있는 야간에만 받으라 고 말하지 않았나? ” “ 과장님, 그건, 일단 환자부터 받고나서, 살리고 난 다음에..! ”

“ 그 다음에 뭐..! 어제는 그냥 넘어갔지만, 또 그 기사 같은 문제생기면 어쩌려고 그 래..?! 응급의학과에 까지 피해오면, 그땐 자네가 책임질껀가? ”

“ .... 예, 제가 책임집니다. ”

그 말에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인혁. 그러자 답답하고 말이 안 통한다는 듯이 가슴을 몇 번 치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말을 꺼내는 나과장.

“ 하아.. 답답하게, 이봐, 최선생!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할라고 했는데! 회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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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센터를 없애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환자 살리려다가, 자네가 먼저 죽는 수 가 있다고..!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센터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는데, 이번에 또 문제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 지금까지 고생한 거 아깝지도 않아? 이러다 트라우 마센터 없어지고 나서, 덜컥 외상센터지원한다 발표라도 나면! 아깝지 않겠느냐고! ”

심하게 흔들리는 인혁의 눈빛.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나과장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는 그.

“ 그리고, 부산에 병원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환자가 꼭 우리병원에 와서 자네 한테 수술 받아야지만 사는 거 아니잖아..! 물론 자네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시간이면, 한가한 병원 많을 테니까. 우리병원 말고도 갈 곳이 많을 거다, 이 말이야..! ”

그러자 인혁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고, 나과장은 이제 됐다 싶어진 마음에 그에게 다짐을 받아내듯이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 아무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분간은 응급실 수술 절대 안 되니까..! 그렇게 알 고 있으라고. ”

그렇게 자리를 뜨는 나과장. 하지만 인혁은 더 이상 그를 붙잡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환자를 데려와야 한다 말하지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서 다시 한 번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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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날 정오,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로비,

[ 띵동- ]

엘리베이터가 병원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은아. 이내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올라타고, 사람들을 꽉 채운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 띵동- ]

곧, 6층 병동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은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내리자마자 동생이 알려준 어머니의 병실을 찾아본다.

6011호, 6011호..

“ 누나..! ”

그런데, 뒤에서 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서둘러 뒤를 돌아보니, 남동생이 병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을 발견하자마자 그 앞으로 뛰어가는 그녀.

“ 엄마 안에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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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약간 흥분해있는 상태에서 바로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그런 그녀의 앞을 막으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동생.

“ 아! 잠깐만, 잠깐만, 누나! 잠깐만..! ” “ ....?... 와 그라는데..? ” “ 있잖아.. 내 말 안 한기 있는데.. 엄마가, 누나 이제 다시는 안보겠단다. 그래서 연락 도 하지 말라켔는데.. 그래도 말이 그렇지, 어떻게 연락을 안 하노? ” “ ... 얘가 뭔 소리 하노..? 나를 왜 안 보는데..? ” “ 누나 니도 엄마 성격 알잖아~! 한번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 이번에 누나 진짜로 안 올라오면, 둘이 다시는 못 볼 거 같아서.. 내 그래서 연락했다. 아, 아무튼 내 다 설명 해줄테니까. 일단, 여기 잠깐만 있어봐라. 지금은 지금 엄마 기분 어떤지 좀 보 고.. ” “ 아잇, 답답하게, 뭔소리고? 비켜봐라..! ”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침대에 환자복을 입고 누워계신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전에 비해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서 엄마..! 라고 부르려다가 잠시 멈칫 하고서는, 일단은 걱정하고 흥분했던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는 그녀. 그러다 문을 등지고 돌아누워 계신 어머니에게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부르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흔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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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내 왔는데.. ”

[ 휙- ]

“ ...!!!... ”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누워 있는 채로 그녀의 손을 잡아 휙- 뿌리치는 어머니. 은아는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의 행동 때문에 너무나 당황스럽고 놀라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부르며 한 번 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는데...

[ 휙- ]

“ ...!!... ”

그러나 또다시 그녀의 손을 뿌리치는 어머니. 은아는 답답하고 당황스럽고 속상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약간 큰소리를 내버린다.

“ 엄마..! 대체 와이라시는데..?! ”

하지만,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소리치듯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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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락하지 말라켔더니!! 누가 연락 했노!!! 이 가스나 도로 안 내려 보내나?!! ” “ 엄마!! ” “ 와!!! 꼴도보기싫다 마!! 퍼뜩 나가래이!! ”

약간 체구가 있으신 터라 누구보다도 크고 쩌렁쩌렁한 어머니의 목소리. 이렇게 화가 나실 때면, 마치 독을 품은 가시처럼 더 무섭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셨다.. 그렇게 단호한 어머니의 태도에 서럽고 섭섭하고 화가 나서 잠시 울컥하는 마음에 속상한 마음을 따지듯 내뱉는 은아.

“ 아, 그러게..! 몸도 안 좋으면서 아들 몰래 식당일은 와 하시는 데? 자들이 돈을 못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용돈을 안 보내준 것도 아이고! 뭣 하러 그 궂은일은 해 가지고..! ”

그러나 그녀의 말에 화가 난다는 듯 아픈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동안 맺혀있던 마음을 발악하듯 소리치며 내뱉는 어머니.

“ 그라믄! 이 나이에 방구석에 틀어박혀가 할매들처럼 티비만 보고 있어야하나?! 내 아직 쉰여섯이다! 쉰여섯! 글고, 자들도 아 태어나고 나면 빠듯할낀데! 아직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데도! 어떻게 자들이 차려주는 밥상만 축내고 있나? 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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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무리 그래도..! ” “ 그라고!! 내가 여기 동무가 있노! 친척이 있노? 딸내미라고 있으면 뭐하는데?! 며늘 아 보다도 못해가지고, 지 애미 코빼기도 안 들여다보는데..! 됐다마, 필요 없다..! 계 속 그 병원에서 일이나 하지!! 누가 올라 오라켔나?! 도로 내려가라카이!! “ “ .... ”

그동안 섭섭하고 서러웠던 것들을 한 맺힌 듯이 한 번에 쏟아내는 어머니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은 은아. 어머니는 항상 강한 분이셨는데.. 이런 내색은 하지 않으셨던 분이셨는데.. 그동안 통화에서도 간간히 안 올라올 거냐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거냐고.. 빨리 결혼할 사람 데리고 올라오라고.. 그런 말들을 하시긴 하셨지만, 이렇게까지 섭섭하게 느끼고 계실 줄은 몰랐고, 이렇게 외로워하고 계실 줄도 몰랐다. 하지만, 그 조차도 나만의 생각이었던 걸까. 한참동안 그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더니 이내 그녀를 등지고서 다시 돌아눕는 어머니. 은아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쑤셔오고, 콧등이 자꾸만 시큰해져서 애써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채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무언가를 꾹꾹 눌러 삼키는 그녀.

“ 누나. 잠깐 나 좀 보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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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남동생이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조용히 그녀를 밖으로 불러낸다. 그리곤 병실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계단이 있는 복도로 걸어가는 두 사람. 남동생은 약간 눈이 붉어져 있는 은아를 보더니 살짝 한숨을 쉬며 화가 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묻는다.

“ 누나.. 엄마한테 섭섭하나? ” “ .... ”

남동생의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애써 괜찮다는 듯이 대답하는 은아.

“ .. 아니... 속상해서 그라지. 섭섭하기는.. ”

동생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자신도 속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쉰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화가 난다는 듯 입을 여는 동생.

“ 하... 두 시간 있으면 허리 수술들어갈끼고, 병원에 한 열흘간 입원해야 한다 카드 라. 간병하는거야 집사람이랑 나랑 일주일만 돌아가면서 하면, 그 다음부터는 크게 어 려운 것도 없고, 회복도 생각보다 금방 된다카고. 그런데.. 내가 이런 거 말해줄라꼬 누나 부른 줄아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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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거야 누나가 더 잘 알테니까 전화로 말해주면 되지..! 내가 누나 바쁜 거 뻔히 알면서, 왜 여까지 불렀겠노? 하... 와서 엄마 얼굴도 쫌 보고, 마음도 좀 풀어주라꼬 부른긴데..! 내 말도 안들어보고, 그래 들어가서 속을 또 뒤집어놓으면 내보고 우짜라 는 긴데..?! ”

은아에게 화를 내는 남동생. 사실, 자신이 잘한 것도 하나 없는데.. 좀 전엔 너무 흥분했던 게 사실이었다. 동생과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속상한 마음이 겹쳐서 차마 동생을 쳐다보지 못하고 한손으로 머리를 잡고 계단에 주저앉는 은아. 동생은 그런 그녀를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좀 전보다는 목소리에 힘을 빼고 말을 이어나간다.

“ 흠.. 누나 니.. 엄마가 와.. 식당일 했는지 아나? ” “ ... 너희들한테... 미안해서 그랬다면서.. ” “ 물론, 우리한테도 그렇지마는.. 누나 결혼할 사람. ” “ ....?.... 동규..씨? ”

갑작스럽게 동생의 입에서 동규의 얘기가 나오자 붉어진 눈으로 살짝 놀란 듯이 동생을 쳐다보며 되묻는 그녀. 동생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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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 매형 될 사람.. 그 사람이 그래 잘 번다면서. ” “ ... 갑자기 그건 와 물어보는데..? ”

생각지도 못한 동규에 대한 이야기.. 은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동생의 대답을 기다리고 동생은 속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지더니 통장하나를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며 말한다.

“ 열어봐라. 엄마가 누나 줄라꼬 모아놓은 기란다.. ”

하지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면서 그가 내밀고 있는 통장을 받지 않고서 멀뚱히 있는 그녀. 남동생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보더니 통장을 억지로 그녀 손에 쥐어주며 말을 이어간다.

“ 이래도 모르겠나..? 아무리 누나가 외국으로 나가서 산다케도, 여기도 뭐라도 준비 해야할 거 아이가? 혼수도 그렇고, 결혼식도 그렇고.. 그리고 집 장만할 때도 보태야 할 끼고. ” “ ....?!... 니 뭔 말 하는 긴데..? ” “ 그래..! 누나 니 결혼할 때 보태줘야한다꼬, 그런 것도 안 해 가면 시집가서 구박받 는다고, 그래서 그래 일하신기라고. 우리한테는 말도 안하시고..! ” “ ....!!.... ” “ 후.... 그러니까네..! 엄마가 저래 말 심하게 한다고 섭섭해하지 말라고, 다 누나 위 해줄라 카다가 그런 건데! 누나는 한번 올라와 보지도 않고..!! 안 그래도 노인네 취급 받는 거 싫어하시는데.. 몸은 맘처럼 안 따라가서 저래 되버리고..! 엄마도..! 속상해서 그러는 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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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 그라고..!! 누나 니도 심했다 아이가..! 어떻게 2년 동안 한번을 안 올라오노? 연 락 한번을 할라 해도 그래 힘들고..! 엄마 여로 올라오고 나서, 얼마나 많이 외로워하 셨는지 모르나..? ” “ ..... ” “ 생각을 해봐라. 우리가 아무리 잘해드린다케도.. 집사람이랑 나랑 둘 다 일 나가면, 하루 종일 집에 혼자계시는데..!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네, 말동무 할 사람도 없고..! 누 나라도 쪼매 자주 연락해드리고 했으면은, 좀 덜 외로우셨을꺼 아이가..?! 캐나다가버 리면.. 앞으로.. 자주 보지도 못할 끼면서.. ”

어머니 못지않게 동생역시 섭섭했던 건지 속상하고 화나는 마음에 그녀를 탓하는 듯한 말투로 그동안 못했던 말들을 원망스러운 듯한 말투로 쏟아내는 동생.

“ 그라고..! 엄마가 누나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 줄 아나? 도대체 결혼은 와 미룬긴데? 누나 결혼해서 캐나다 간다고 했을 때 엄마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 일도 좋지마는, 결혼은 해야 할 거 아이가.. 벌써 작년 겨울에 캐 나다로 갔어야 할 사람이 여태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결혼 엎어지면 어쩌냐고 얼마나 걱정을 하시는데.. ” “ .... ”

결혼얘기가 나오자 또 죄인처럼 계단에 앉은 채로 고개만 숙이고 있는 은아. 동생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답답하다는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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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언제까지 병원에서 일만 할낀데..! 이제 누나도 서른 넷이다. 서른 넷..! 그거 마흔 넘고 쉰넘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빨리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자 리 잡아야할 거 아니냐고, 아도 낳아야 하고..! 그 매형 될 사람 나이도 있을 낀데..! ”

나이는 그녀보다 어리더라도, 어릴 때부터 투정도 한번 잘 안 부리고 늘 오빠같이 듬직했던 동생.. 그녀가 걱정되고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그녀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그녀에게 다 털어놔 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서는 손에 통장을 꼭 쥔 채로 차마 울지도 못하고 있는 누나를 보고선, 더 이상 나무라듯이 몰아붙이지는 못하고.. 그저 고개를 돌리며 계속해서 말 못할 한숨만 내뱉는다. 그러다 이내 너무 몰아붙여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제는 조금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여는 동생.

“ 누나.. 내 모르는 거 아니다.. 누나가 내 어릴 때부터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아버지 쓰러지셨을 때도, 혼자서 아버지 간병 다하고.. 그러느라 대학도 원하는 대로 못가고, 바로 간호사로 취직해서 살림 다 책임지고. 남들처럼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10년 내내 병원에서 일만하고..” “ .... ” “ 엄마도 그걸 아니까네.. 누나 시집가기 전에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겠 나..? 엄마가 얼마나 누나한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지.. 특히, 누나를 얼마나 아끼는 지.. 잘 알잖아.. 옛날부터 엄마가 바라는 거 한가지.. 뭔지 모르나? ” “ ... 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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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뜨거운 걸 간신히 삼키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 동생은 그런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본인도 목구멍을 가득 메운 뜨거운 무언가를 삼키며 간신히 말을 이어나간다.

“ 니는 내처럼 살지 말라고.. 좋은데 시집가서.. 고생하지 말고 살라꼬.. 엄마처럼.. 평 생 쌔가 빠지게 일만하다가, 외롭게 늙는 게 아니고.. 여자로써 사랑받으면서 행복하 게 사는 거.. 그기 엄마가 누나한테 바라는기다. 그래서 캐나다 가면, 얼굴 자주 못 볼 꺼 뻔히 알면서도.. 자꾸 캐나다, 캐나다 노래를 부르면서 보낼라 카는기라고. ”

동생의 말에 결국 붉어져있던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한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자신도 울컥하는지 고개를 돌리는 남동생. 그러다 한번 깊은 한숨을 다시 몰아쉬고 그녀를 향해 다시 타이르듯 조근조근 말을 이어나간다.

“ 후우... 그라고, 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내가 뭐, 벌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앞으로 5년만 더 고생하면, 엄마도 지금보다 더 호강시켜드리면서 잘 살 수 있으니까네. 내 믿고. 엄마도 집사람 이뻐라 하고, 집사람도 엄마를 잘 따르고 누나보다 더 잘 챙겨드 리니까.. 맘편히 가서 잘 살라고.. 엄마도 내도.. 누나한테 다른 거 아니고 그거 바라는 거니까네.. ” “ .... ” “ 그러니까, 울지 말고.. 엄마한테 너무 섭섭해 하지 말고.. 그만큼 고생했으니까.. 이 제 누나도 빨리 결혼하고 자리 잡으라고 한 소리라꼬.. 그래야, 엄마도 저런 고생 사 서 안하고 마음 편히 사실 꺼니까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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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손으로 스윽- 닦아내기만 할 뿐, 동생에게 알겠다는 말이나 안 된다는 말.. 그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는 은아.

“ 흠.. 아무튼 내 먼저 들어갈테니까. 쪼매만 있다가 들어와라. ”

동생은 아무런 말도 대답도 없는 자신의 누나를 보며,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를 한번 토닥여주고선 어머니가 계시는 병실 쪽을 몸을 돌리는 동생. 그런데, 감자기 무슨 생각인지 또 잠시 멈춰서더니 그녀를 슬쩍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연다.

“ 이번에는.. 웬만하면 바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 쪼매만 더 있다가.. 엄마 마음 좀 풀 어주고, 내려가면 안 되겠나..? 그라고, 내는.. 누나 캐나다 가기 전에, 여로 올라와서.. 우리 네 식구 몇 달이라도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몇 달이라도.. ”

그렇게 다시 병실 쪽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이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생. 그리고 텅빈 계단복도에 홀로 남은 그녀. 은아는 소리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몇 번이고 훔쳐내더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통장을 떨리는 손으로 펼쳐본다. 많지는 않지만 결코 적지 않은 액수, 아마도 하루 이틀 모아온 돈이 아닌듯했다. 변변찮은 수입도 하나 없으셨을 텐데, 도대체 이런 돈은 언제 모아 오신 건지.. 도대체 딸자식 결혼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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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저지경이 될 때까지 일을 하셨다니.. 이 돈을 모으려고 어머니가 고생 하셨을 걸 생각하니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속상하고 죄송스러워서,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는 은아.

“ .... 누가.. 이런 거 해달라 켔노.. 아무 튼간에... 후.. ”

눈물 섞인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어머니생각에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삼키는 그녀. 정말로.. 많이 섭섭하셨을 것이었다. 시집보내기 전 조금이나마 보태줄려고 좋아할 자식의 모습을 생각 하며 자신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있는데, 정작, 딸자식은 전화한통 먼저안하고 한번 보러오지도 않으니.. 그때마다, 섭섭하고 허탈하고 외로움을 느꼈을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혼자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셨을지.. 그런 걸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저 바쁘게만 살았던 자신이.. 오늘따라 너무 원망스럽고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그녀. 하지만.. 결혼.. 가족들의 마음은 알겠지만.. 물론, 언젠간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은.. 아직은.. 은아는 다시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의 수술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시간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눈물을 훔치는 그녀. 마음속 깊은 슬픔과 복잡한 고민들은 잠시 미뤄둔 채 수술이 시작되기 전 어머니의 마음부터 풀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어머니가 계시는 병실로 발길을 옮기는 은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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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잠시 후, 은아 어머니의 병실,

[ 드륵- ]

병실 문이 열리고, 은아가 병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동생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는 듯한 신호를 주는 그녀. 남동생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밖으로 나가고 은아는 어머니가 계신 침대 옆 간이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하지만, 분명히 인기척을 느꼈으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서 등 돌린 채로 누워계시는 어머니.

“ 엄마.. ” “ ... ” “ 엄마.. ” “ ... ”

여전히 대답 없이 돌아보지도 않는 어머니. 은아는 자꾸만 흐르려는 눈물을 꾹 참고선 몸을 일으켜 어머니가 계신 침대위에 걸터앉는다. 그리곤 이내 그 옆에 몸을 뉘이며 어머니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시 말을 하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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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엄마는 내 안 보고 싶었는 갑네.. 내는 억수로 보고 싶었는데.. ”

자신을 끌어안은 딸의 팔을 또다시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고집스럽게도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는 어머니.

“ 진짜로 안 보고 싶었나보네.. 내 진짜로.. 다시 내려갈까....? ” “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말래이.. 그래 보고싶었다는 년이 2년 동안 한번도 안 올라오나..? ” “ ... 진짠데... 진짜로 보고싶었는데... ” “ ..... ” “ 엄마... 나 쪼매만 더 믿어주면 안되겠나..? 내년이면 일도 마무리 하고.. 결혼도 하 고.. 엄마도 보러오고.. 은강이도 챙기고.. 그랄낀데.. 근데, 거기 있으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 “ ..... ” “ 그라고... 딸래미가 시집갈라꼬 얼마나 준비를 잘해놨는데.. 속상하게 뭐하러 이런 거 한다고 허리까지 다치고 그러노.. ” “ .... ”

그러나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침묵. 은아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또다시 눈물이 흐르고.. 그녀가 누운 자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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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송해요.. 엄마.. ” “ .... ” “ .. 잘못했어요.. ” “ .... ” “ ... 죄송해요.. 죄송해요.. ”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은아를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떼는 어머니.

“ ....나쁜 가스나.. 어떻게 한번을 안 올라오노.. 그놈의 환자들만 중요하고.. 니 애미 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관심도 없제? ” “ 그런 말이 어데 있노.. 당연히.. 우리 엄마가 더 중요하지....... 죄송해요.. 죄송해요.. ” “ ....... 니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에 캐나다가도 이래 안 보러 올끼제..? ” “ 아니에요... 내가 우리 엄마를 왜 안보러 오노.. 아니에요.. 아니에요.. ” “ .... 흑...흑... 나쁜... 가스나... ”

결국 어머니도 눈물을 터트려 버리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두 모녀. 은아는 어머니의 눈물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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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그녀.. 아직 놓을 수 없는 일이 있기에 혼란스러운 마음.. 왠지 또다시..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할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그 것이 또 죄송스러워 더욱더 복받쳐 울고 있는 그녀였다. 그날 새벽, 해운대 세중병원, 중환자실, 벌써 새벽 2시였다. 피곤한 몸.. 뻐근한 목.. 지칠 대로 지친마음.. 응급환자도 들어오지 않은 오늘, 이런 날이라도 자둬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인혁은 이 새벽에 잠도 안자고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들락날락거리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인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머릿속에 온갖 괴로운 생각들이 떠올라서 잠은커녕.. 가만히 있는 것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는 편이 차라리 덜 괴롭게 느껴졌기 때문에.. 인혁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눈앞에 환자들에게만 몰두하려 애를 썼다.

[ 탁- ]

하지만, 그래도 차트가 눈에 안 들어오는지, 들고 있는 것을 소리가 나도록 덮어버리고는 깊은 한숨을 쉬는 그.

“ 하아... ”

206

그러다 지금 중환자들 앞에서 뭐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간호사들에게 오더를 새로 내린 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터덜터덜 복도로 걸어 나오는 인혁. 하루에도 몇 십번씩 들락거리는 중환자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오늘 따라 왜 이리 무거운 건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정말 의욕이 나질 않았다..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에도 차트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터질 듯 뜨거웠다. 그리고 오늘따라 왠지 더 창고 같이 느껴지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로 돌아가기가 싫은 마음이 들어서 트라우마센터로 향하던 발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 . . . . . 한 시간 후, 옥상 정원, 어두운 새벽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달빛과 옥상에 군데군데 설치된 작은 조명들 덕분에 다행히도 앞은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어둠속에 퍼지는 뿌연 담배연기.

“ 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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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시간째였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온 몸을 때리고 있는데도 그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연신 담배만 피워 대며 난간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까마득한 아래, 끝도 없는 낭떠러지.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에는 점으로 보이는 가로등불빛들만이 간간히 보였다.

“ 후.. ”

다시 코와 메마른 입술사이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그. 이렇게 담배를 피워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일부로 끊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말 지독하게 힘들 때가 아니면 담배도 잘 피우지 않을 정도로 그냥 바쁘게 지내왔었다. 예전에는 정말 많이도 폈었는데.. 마지막으로 폈던 게 언제였더라.. 그러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 수술이 끝나고 나면 늘 같이 줄담배를 태우곤 했던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 인혁아.. / / 예, 교수님. / / 후우....... 인혁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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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형 무슨 일 있나? / / ......... 아니~! 그냥 불러봤다 임마. / / 참나, 싱겁기는.. / / ..... 인혁아.. 후우.. / / 왜..! 왜 자꾸 부르고.. / / 미안하다... / / ...... 뭐가..? / / 그냥.. 다.. 여기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다 미안하다... 그냥.. 미안해.. / / ...... /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유일하게 존경하고 믿고 따르던 선배였는데.. 그리곤 아무 말도 없이 서울로 훌쩍 떠나버렸다.

“ 후우.... 이 미친놈,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

다시 한숨대신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인혁. 엊그제 한구가 했던 말 때문인지 왠일로 오래전일이 떠올랐다. 믿고 따랐던 만큼 오랫동안 원망하게 만들었던 일.. 의사로써 어떻게 살겠다고 나를 채찍질하게 만들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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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오늘따라 그 날의 일이 떠오르는 건지.. 왠지 오늘은, 그 선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이 그를 그렇게 괴롭혔던 건지.. 왜 비겁한걸 알면서도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떠오르는 한구의 말.

/ ... 최인혁.... 너.. 후회 안하냐?... 임마... 너도 그때 외상포기하고 서울로 갔으면..

후회라... 수도 없이 했었다. 한때는 이 두 손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부푼 꿈을 안고, 가슴 뛰고, 설레어 하며 하루하루를 희망차게 보냈던 적도 있지만, 그것은 교수가 되기 이전의 얘기였다. 연줄도 없고 힘도 없어서 떠밀리듯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했던 선택..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힘들고 괴로웠던 적이 너무도 많았기에 때로는 외상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원망스럽게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외상이라는 이 일 자체에 대한 후회는 아니었다. 이 시스템, 이 구조.. 그리고 각종 이해관계들..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현실,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현실, 그 지긋지긋한 현실이 나를 화나게 했었고 가끔은 이 선택을 후회하게도 만들었었다. 하지만..

210

/

그럼에도 이 일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 의사로써, 사람으로써..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그 어떤 무언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그것.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가치.. 그걸 지킬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의사로써 성공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의사로 살면서 그 가치와 신념만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망설였었다. 그 무엇가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앞에서 흔들리고 말았다.

/ 하아.. 답답하게, 이봐, 최선생!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할라고 했는데! 회의에서 트라우마센터를 없애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 지금까지 고생한 거 아깝지도

않아? 이러다 트라우마센터 없어지고 나서, 덜컥 외상센터지원한다 발표라도 나면! 아 깝지 않겠느냐고! /

이 트라우마센터 때문에.. 흔들리고 말았다. 힘들다.. 안 된다.. 현실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꿈은 꿈일 뿐이다.. 이 수많은 충고들을 모두 무시한 채로 지난세월 이 악물고 버텨왔던 것들이 모두 헛수고 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지난 10년 동안의 고생들이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몸을 사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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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이번에는... 작정하고 몰아가는 분위기야... /

/ .... 환자 살리려다가, 자네가 먼저 죽는 수가 있다고..!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센터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는데, 이번에 또 문제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 /

아마.. 그들이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지원도 없어지고 트라우마센터가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나과장의 말처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한다면 아마 그 일은 더 앞당겨지겠지..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는 그.

“ 후우....... ”

아까 그 일이 있은 후, 다시 전화를 하여 환자상태를 알아보니 다행히도 환자는 죽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2차병원으로 이송되는 바람에 지체된 채로 있다가 뒤늦게 수술을 받은 환자.. 많이 위독하다고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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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센터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몸이 떨릴 만큼.. 두려워졌다.

“ .... ”

나도 변해버릴 까봐.. 두려워서 몸을 사리게 될까봐.. 또 다시 이런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무언가를 외면해 버릴까봐.. 그런 나의 선택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 버릴까봐.. 제발.. 내가 변하지 않게.. 누가 나를 잡아줬으면.. 제발 나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주고.. 내가 다시 싸울 수 있도록 힘을 줬으면.. 나를 잡아줬으면..

“ ..... ”

아까부터 자꾸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그. 오늘 벌써 몇 번째 이런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말 유난히 힘든 하루 오늘 하루..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213

나에게 진심어린 그런 말을 해준, 이 사람이라면..

/ .... 교수님..! 사람이요~! 사람은 살리고 봐야죠~ 외상센터가 생겨야지, 죽어가는 환 자들 한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잖아요~ ... 그러니까요. 포기하지 마세요오~?... /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 그리고 10년 전에..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났던, 그 선배를 원망하면서..

20년 전에.. 아버지를 외면했던 그 의사들을 원망하면서.. 내 자신이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외쳤던 말..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 .... ”

그랬다. 그래서 였다.. 사람을 위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연수갔다온 뒤로 한번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트라우마센터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고.. 그래서, 지난 1년간 창고 같은 저 방에서 외상센터한번 만들어보겠다고.. 환자 한번 살려보겠다고.. 제대로 한번 쉴 시간도 없이 죽어라 노력하며 매일 매일을 전쟁같이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정부발표는 몇 번이나 번복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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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과장에게 뺨을 맞은 그날도 병원을 뛰쳐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이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트라우마센터가 있기 때문에.. 비록 어렵게라도 유지 되고는 있으니까.. 이나마도 있어서 아직은 환자들을 살릴 수는 있으니까.. 더 많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지만, 사람을 살리려고 지켜왔던 이 트라우마센터 때문에 눈앞에 있는 환자를 외면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런 결정을 하게 된다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지난 10년간 이 일에 몸 받쳤던 이유를 스스로 무너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그렇게 해버렸고,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담배라도 피면서 숨을 내뱉지 않으면 곧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디시 깊게 빨아들인 담배를 아주 길게 내뱉는 인혁.

“ .... 후우....... ”

인혁은 지금, 지친마음을 위로해주고.. 자신을 바로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있던 몸을 돌려서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옥상정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인혁.

215

그녀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고 가장 힘들어 했던 시기.. 모든 것을 다 포기하려했던 그때에 나를 잡아주었던 그녀라면.. 하지만, 벌써 3일이 지났다.. 아니, 이제 4일째.. 그녀에게 심한 말을 하고 그녀를 그렇게 보내고 난 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4일이 지나버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건지.. 이틀 전, 그녀의 약혼자가 대신 전화를 받은 이후로 왠지 그녀가 약혼자와 같이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던 그.

“ ...... ”

그래서 이렇게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도 못하고.. 지금처럼 새벽을 그냥 뜬 눈으로 지새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에서.. 이제 몇 시간 후면 은아가 출근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 오늘만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빨리 와줬으면.. 그래서 나를 좀 잡아줬으면.. 하고 조금은 간절히 바래본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돌려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는 인혁. 차가운 새벽바람이 또 다시 그의 몸을 때리고 지나간다.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216

그런데 그때, 그의 손 위에서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응급 콜인가 싶어서 서둘러 전화를 확인하는 인혁.

“ ...!!... ”

액정에 뜨는 세 글자. 신 선생.

[ 철렁- ]

정말 그녀였다.

. . . . . 한 시간 전,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어머니의 병실, 이미 창밖은 어두워진지 오래였지만, 수술 후에 마취가 풀리자 참기 힘든 통증 때문에 늦게까지 주무시지도 못하는 어머니.

217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정말 괴로워하시다가, 간호사가 놔주는 진통제를 맞은 후에야 통증이 가라앉는지 조금 덜 아파하신다. 하지만 어머니는 벌써 여덟 시간 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진령이 나고 답답한지 자꾸만 몸을 뒤척이며 다시 힘들어 하시고, 은아는 그런 어머니 곁을 지키며, 소변도 비우고, 몸도 닦아 드리고 정성껏 보살펴드린다. 그러다 잠시 후.. 모든 일이 끝나자 간이침대에 앉은 채로 손을 들어 찬찬히 어머니의 얼굴을 쓸어드리는 그녀. 그리곤 다시 손을 내려 어머니의 손을 살짝 잡아보는데.. 비록, 수술 때문에 고개는 돌려 딸을 보진 못하지만, 투박한 자신의 손을 감싼 딸의 손을 같이 꽉 쥐어주는 어머니. 그러자 살짝 미소를 짓는 은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어머니의 손을 잡아본 것도.. 이렇게 오랫동안 곁을 지켜드리는 것도.. 어머니의 마음이 다시 조금씩 풀어지고 있는 게 그녀에게 느껴졌다. 몇 분 후.. 은아의 손을 잡은 채로 잠이 들어버린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점점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은아. 매일 병원에서 일하면서 다른 환자들을 간호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2년동안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일만하는 동안, 정작 나의 가족은 보살피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꾸만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 늦게라도 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출발해야만 했지만, 계속해서 초조해하며 시간을 확인하기만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번만은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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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며칠이라도 이렇게 있어드려야 하는데.. 그동안 못해드린 것들을 이런 걸로 대신할 순 없겠지만, 그동안 혼자서 맘고생 하셨을 어머니의 곁을 지키며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교수님 혼자서 힘드실 텐데..

3일이나 출근하지 않았는데.. 또 못나간다고 하면.. 하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다가 이대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어머니가 잠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한 후, 붙잡혀 있던 자신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빼내고는 괴로운 마음을 안고 조용히 병실 밖을 나가는 은아. 잠시 후, 병원 앞 한적한 벤치, 낯선 바람이 불고 낯선 야경이 보이는 그곳에서 벤치 앞을 홀로 서성이고 있는 은아. 한손엔 가방을 들고, 한손엔 휴대폰을 든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그녀.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문자를 써내려간다.

「 교수님, 혹시 주무세요..? 저.. 집에 일이 생겨서.. 내일 출근을.. 」

하지만, 썼던 걸 다시 모두 지워버리는 은아. 아프다고 3일이나 쉬었는데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았다.

219

게다가 트라우마센터가 괜찮은지도 걱정되고..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무책임하게 빠져도 되는 건지.. 미리 얘기도 안했는데.. 아니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건..? 하아.. 그러려면 지금이라도 출발해야 하는데.. 벌써 새벽 두시가 넘었는데.. 한편으론 센터와 병원 생각에 마음이 자꾸 초조해져오고, 또 한편으론 어머니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괴로워져 왔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 그녀. 지금 그에게 꼭 연락을 해야 하는데..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다시 짧은 한숨을 쉬는 그녀.

“ .. 하... ”

힘들었다. 꼭 어머니가 아프셔서도 아니었고, 출근을 한다못한다 연락을 못해서도 아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도대체 어디인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게 맞는 건지..

“ .... ”

어제 오늘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220

동시에 자신을 원망하던 어머니와 동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자신한테 등을 돌린 채로 누워 있던 어머니의 뒷모습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나쁜 가스나.. 어떻게 한번을 안 올라오노.. 그놈의 환자들만 중요하고.. 니 애미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관심도 없제?.... / / ...... 아, 그라고..!! 누나 니도 심했다 아이가..! 어떻게 2년 동안 한번을 안 올라오 노? 연락 한번을 할라 해도 그래 힘들고..! 엄마 여로 올라오고 나서, 얼마나 많이 외 로워하셨는지 모르나..? ..... 캐나다가버리면.. 앞으로.. 자주 보지도 못할 끼면서.. /

그동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걸까..?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그저 난생 처음으로 내가 걷고 싶은 길을 걸으려 했을 뿐인데.. 난생처음으로.. 정말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일..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려고 했던 것뿐인데.. 한번쯤은 다른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내 인생을 살아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데, 그런 나의 선택이 내가 살아가면서 꼭 해야 할 일들.. 가족으로써.. 연인으로써.. 꼭 해야 하는 일들을 하나 둘씩 놓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뤄왔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모두 한 번에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내 주변사람들도.. 나도.. 모두 힘들고 지치게 만들어 버렸다.

“ ...... ”

221

사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자주 연락하고, 챙겨주고, 함께 있고.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누리면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고 단, 1분, 1초만으로도 생사가 오고가는 늘 불안과 긴장의 연속인 그곳에서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을 판단하고 생각할 시간은커녕.. 그저 하루하루가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갈 뿐이었다.

“ ...... ”

한편으로는.. 외롭고 서러운 생각도 들었다. 귀중한 생명들을 살리는 뜻 깊은 일.. 그래서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고생하며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만큼 병원에서는 제대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이 일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바랬다. 조금만 더.. 나를 믿어주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이해해줬으면.. 조금만 더.. 내가 한 선택을 지지해주고 내편이 되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이렇게 가족들조차 기다려주기 어려운 일.. 중증외상.. 처음부터 몰랐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모르고 시작했던 것도 아닌데..

222

그녀는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왜 이 일을 사람들이 기피하는지.. 막상 병원을 떠나서 그동안 외면해왔던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고 나니.. 꿈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얼마나 많고 무거운 책임들을 감당해야 하는지.. 이제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환자도, 센터도, 인혁도 아닌 진짜 나 자신의 현실이 보였다. 은아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갑자기 모든 일이 버겁고 두렵게 느껴졌다. 지난 2년 동안 괜찮다고 생각하며 미뤄왔던 일들에 대해 갑자기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

.... 도대체 언제까지 병원에서 일만 할낀데..! 이제 누나도 서른 넷이다. 서른 넷..!

그거 마흔 넘고 쉰넘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빨리 결혼해서 안정적으 로 자리 잡아야할 거 아니냐고, 아도 낳아야 하고..! 그 매형 될 사람 나이도 있을 낀 데..!... /

33살, 여자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나이. 자칫 잘못하면 결혼시기를 놓칠 수도 있는 적지 않은 나이. 결혼을 아예 안 할 생각이라면 몰라도, 언젠가는 꼭 하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가족들의 우려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의 결혼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도.. 누나와 어머니가 편하게 살길 바라는 동생의 마음도.. 왜 나를 응원해 줄 수 없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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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가족들도 이해하기 힘든 나를.. 동규씨.. 그는 언제까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은아는 문득, 어젯밤 처음으로 화를 내던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자신 땜에 아파하는 간절한 눈빛.

/ ..... 힘들 때는.. 나한테.. 좀 기대도 되요.. 내가 은아씨 애인이잖아요. 은아씨가 기 대도 되는 사람이잖아요. /

동규씨.. 그는 나에겐 조금 아까울정도로,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따뜻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 이렇게 지치고 힘들 때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 나의 부족한 모습들을 이해해주고 넓은 마음으로 나를 감싸주는 사람.. 그래서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사람..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하지만, 아무리 그런 동규씨라도 나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주기만 할 수 있을까..?

“ ..... ”

224

중증외상 코디네이터.. 처음으로 갖게 된 나의 꿈..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있을까.. 내 인생의 다른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환자들을 돌보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 까지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있을까..? 내가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더라도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외면하지 않을.. 그만큼의 용기가 있는 사람일까..? 이 세상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딱 한사람.. 교수님, 최인혁교수님, 그 분 빼고는.. 다시 인혁을 생각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그녀. 그는 그랬다. 마치 혼자서 세상일을 다 짊어진 듯이 늘 축 쳐진 어깨를 하고서는 오로지 환자만 돌보고, 환자만 생각하는 사람. 사람들의 시선, 직책, 사생활, 결혼.. 모든 걸 다 잃고 포기하게 되더라도 환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사람. 게다가 그로 인해 온갖 배척과 무시를 당하고 지독히도 처절하게 외롭고 힘들어질 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는 사람. 그래서 그토록 존경하게 된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까..?

1년, 2년 잠깐이 아닌 10년, 20년 인생을 다 걸만큼.. 모든 걸 바칠 수 있을까? 아니면, 가족도, 결혼도, 일도.. 모두 다 잘해낼 순 없는 것일까..?

225

“ 하.. ”

하지만.. 모든 걸 다 잘해낼 순 없다는 걸 그녀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 것이 아무리 괴롭고 힘든 결정일 지라도 결국에는 어떤 한 가지를 택해야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외면당하거나 결혼을 포기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애초에 끝을 정해놓고 시작했던 일.. 더 이상의 미련은 모두를 힘들게 할뿐이었다.

“ .... ”

이제.. 슬슬 때가 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번 계약이 끝나면 바로 캐나다로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일.. 은아는 마치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마음이 무거워지는걸 느꼈다. 그리고 울컥할 만큼.. 마음이 아파오기도 했다.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로써의 삶.. 아직 끝은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생한 것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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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야 할 일도 너무나 많고, 또 이루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어느새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조금 붉어진 눈으로 다시 휴대폰을 바라보는 은아.

[ 휘익- 휘이익- ]

낯설고 차가운 바람이 계속 불어오는데,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자꾸만 가슴이 아파왔다. 그런데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이 답답함을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외로웠다. 날 이해해주고 날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 가족들은 날 이해해주지 못하고 동규씨에겐 또다시 짐이 될 수 없고.. 그리고 교수께는.. 그분한테는.. 그렇지 않아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에게는.. 절대 말해서도 들켜서도 안 되는 일.. 그저 이렇게 혼자 앓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부터 요란한 구급차소리가 들리고 점점 그 소리가 그녀에게로 가까워진다.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녀.

[ 삐-- 뽀-- 삐-- 뽀-- ]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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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 한 대가 급히 응급실 앞에 정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출혈이 많은 환자 한명이 응급실 안으로 실려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 쿵쾅 쿵쾅 ]

그 순간, 심장이 아플 만큼 요동쳤다.

[ 쿵쾅 쿵쾅 쿵쾅 ]

다시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 은아. 혼란스러운 그녀. 아까 와는 또 다른 죄책감이 들면서 머릿속엔 딱 한사람이 떠올랐다. 눈시울이 약간 붉어진 채로 다시 휴대폰을 들어 한참동안 내려보다가 단축번호를 하나 누른다. 인혁의 번호였다.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

신호음이 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내가 과연 저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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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떠나야하는 순간이 왔을 때 트라우마센터를 포기하고, 나의 손길이 필요한 그곳을 등지고 정말 떠나 버릴 수 있을까..?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

정말 두려웠다. 내가 그곳을 떠나지 못할까봐 그리고 또 두려웠다. 내가 정말 그곳을 떠나버릴 까봐 두려움이 몰려오자 그가 생각났다. 그가 필요했다..

“ 여보세요. ”

들고 있는 전화기 너머로 중저음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하지만, 막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은아. 이 두렵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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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에게 근심만 심어주게 될까봐 도저히 아무 말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외롭고 힘든 그녀.

“ ..... 신선생..? ”

그러다 다시 한 번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간신히 입을 여는 은아.

“ 네, 교수님 저에요. ”

여전히 몸이 아픈 것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매우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인혁은 그녀가 걱정되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 그리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에 잠시 주저하다가 천천히 말문을 연다.

“ 아, 그.. 몸은.. 좀 어때요. 들어보니까 많이 아프다고.. ” “ 네.. 괜찮아요.. ”

인혁의 물음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간신히 대답하는 은아. 지금은 몸이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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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점점 끝이 보이는 것 같아서 끝까지 그와 함께할 자신이 없어서져서 계속 슬픔과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인혁.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많고, 자꾸만 약해지고 있는 자신을 잡아줄 사람이 너무나도 절실히 필요했지만, 아픈 그녀를 조금 더 쉬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이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 그.. 혹시 아직도 많이 아픈 거면은, 이따가 나올 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되요.. 그리고, 저기.. ” “ 저기, 교수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

그런데, 서둘러 인혁의 말을 자르는 은아.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스스로의 죄책감이 가슴을 더욱 더 짓누르는 것 같았다. 털어놓을 수도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마음에 서둘러 용건을 말하고 끊고 싶어졌다.

.“ 아아.. 예, 말해봐요. ” “ ....저, 교수님.. 정말로 죄송한데요.. 저 출근 못할 거 같아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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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아직 아파서 못나오겠다는 얘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그가 더 이상의 고민을 할 새도 없이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은아.

“ 지금 여기, 수원이에요. 어머니가 좀 아프셔서요.. 차도 끊기고.. ” “ 아, 그, 그래요..? 아아.. 후.. 저기, 그럼 내일 야간근무로는.. ”

그녀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인혁. 하지만, 그래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내일 저녁에는 출근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는데, 그녀가 다시 그의 말을 자르며,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연다.

“ 아니요..! 교수님, 저.. 한, 일주일은 못 나갈 거 같아요.. ” “ ... 예..? 갑자기 그게 무슨.. ”

갑작스러운 은아의 말에 당황하는 인혁. 역시나 놀라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더욱더 미안해지는 은아.

“ 그게 사실.. 입원을 하셔가지고. 정말로 죄송해요, 교수님.. 저.. 병원에는 아무 일 없 죠..? ”

232

“ .... ”

그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 이라..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응급수술에 대한 기사가 터지고, 교수 회의가 열리고, 그 때문에 응급실 수술을 금지당하고, 그래서 환자를 받지 못하게 되고.. 하지만, 어머니의 입원으로 마음이 안 좋을 그녀에게 차마 그 일들을 말할 수가 없는 인혁. 그런데,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욱더 미안해지는 은아.

“ 정말 죄송해요.. 미리 말씀도 못 드리고 이렇게 갑자기.. ” “ 아아, 예.. 그럼 어쩔 수 없죠.. 하아... 근데 그, 어디가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 “ 저,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 “ 후.. 예, 알았어요..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해요.. 일주일 후에 봐요.. ” “ 네.. 감사해요.. ”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알았다고 해주는 그가 고마운 은아. 하지만 사실, 인혁은 지금 간신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없는 3일 동안 일어난 일들.. 이걸 어떻게 다 설명해야 해야 할까..

233

지금 내가 흔들리고 있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다고.. 당신에게 어떻게 이 말들을 할 수가 있을까.. 인혁은 그렇게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그저 혼자서 가슴 속에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안 좋은 일을 겪고 있을 그녀를 걱정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 후... 음... 좀 괜찮아요..? 신선생은.. ” “ .... ”

괜찮냐고 물어보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는 은아. 그녀 역시 괜찮지 않았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눈앞에 현실들이 너무나도 버겁고 두려운데 어디에도 말할 곳도 기댈 곳도 없어서 너무나 외롭고 힘들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인혁이 괜찮다고 물어봐주니 마음이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어느새 붉어져 있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 투둑- 툭- ]

결국,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하지만, 그에게 눈물을 들킬 수가 없어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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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죄송해요. 저 이만 끊을게요..! ” “ .....?!.... 신선생, 잠깐만..! 신선생? 신선생?! ”

그러나 들리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 서둘러 전화를 확인하는 인혁. 아직 끊어지지 않은 전화.

“ 저기, 신선생..! 내 말 들려요..? ”

그녀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그. 애타게 그녀를 불러보지만 여전히 그녀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드는 그. 일단,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를 해보려는데, 바로 그때, 희미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 .....흡... 흐윽..... ” “ ....?!!... ” “ ..흑... 흐윽... 흡... ”

235

전화기 너머로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마음에 다시 그녀를 부르는 인혁.

“ 신선생..?! ”

하지만 여전히 대답 없이 울기만 하는 그녀. 전화기가 멀리 떨어졌는지 희미하게 들리긴 했지만,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다.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낼 수가 없는 그.

“ 흐윽... 흡... ..흑... ” “ .... ”

그녀는 자꾸 울음을 참으려는지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최대한 숨죽인 채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심장이 멈춰진 듯, 크게 숨을 쉴 수도 없는 인혁. 왜 저렇게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혼자 아파하고 있었다. 늘 웃어주던 사람인데, 늘 힘을 주던 사람인데, 인혁은 가슴이 옥죄는 듯 아파왔다.

“ .... ”

236

그녀의 흐느낌이 들리는 순간마다 괴로움은 더 깊어졌다. 그녀가.. 너무나 불쌍했다. 내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될 사람. 이런 고생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될 사람.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는 모든 게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자기 옆에 있어서 그녀가 불행해지는 것 같았고, 자꾸 울 일만 생기는 것 같았다.

“ .... ”

그리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됐구나. 이 사람도 지쳐가고 있구나. 진창 같은 내 인생에 잘못 걸려들어서 길을 못 찾고 허우적거리고 있구나. 결국엔.. 이럴 거였다. 이렇게 또 한사람이 지치고 좌절한 채로 내 곁을 떠나가려는 걸 나는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다. 붙잡을 수도 없다.

“ 흐윽... 흡... ..흑... ” “ .... ”

237

괴로웠다. 서러웠다. 그도 그녀처럼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마 울 수가 없어서 끊일 줄 모르는 그녀의 울음을, 눈물을 한 시간 가까이.. 계속 듣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으로 울었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 서로 멀리 떨어져있는 두 사람..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울고 있었다. 서럽게 숨죽여 울었다. 깊은 새벽,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정말 서럽게도 울었다. . . . . . 한 시간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 탁- ]

들어오자마자 조용히 문을 닫고 방안을 찬찬히 살피는 그. 사무실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여전히 어두운 창고 같은 이 곳. 온갖 응급실 물품들이 가득 차 있는,

238

간이 물품 창고로 쓰이는 이 곳. 거기에 작은 책상하나와 간이 침대하나, 철제책꽂이 하나. 그 책꽂이에 빽빽이 꽂혀진 외상에 관련된 서류 파일들. 그 파일들마저 없었다면 아무도 이 곳이 센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이 방. 트라우마센터라는 이름을 걸고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지내왔던 이 방. 가만히 서있던 자리에서 움직이며 센터 안을 둘러보던 그.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센터안의 물건들이 오늘따라 하나하나 그의 눈에 들어온다.

“ ..... ”

그런데,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하나.

1년 동안 항상 같은 자리에 있기에 한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모형 헬기. 그날 이후에도 머리가 복잡할 때면 간간히 옥상에 올라가서 날리곤 했던 헬기. 책상위에 있던 모형 헬기를 집어 드는 인혁. 헬기를 손에든 채로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한참을 그 자리에 홀로 서있는 그.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사무실 안에 있는 커다란 창문사이로 날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게 보였다. 어느새 아침이 오려는지 어둠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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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손에 든 헬기를 내려놓고 그 커다란 창문 앞으로 걸어가는 인혁. 그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손을 들어 블라인드를 내려버린다. 다시 깜깜하고 어두워진 방안, 그리고 그 안에 홀로 서있는 그.

/ ... 흐윽... 흡... ..흑...... /

그녀가 흐느끼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어두워진 트라우마센터 맨바닥에 천천히 주저앉는 그.

..... 이 곳, 부산...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 바로 그 부산에 있는 절대 작지 않은 규모의 이 병원. 그 병원에 응급실 옆 귀퉁이.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이 방. 해운대 세중병원의 트라우마센터. 이 땅의 그나마 몇 존재하지도 않는 이 트라우마센터.. 그리고 중증 외상... 어느 몇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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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모든 걸 다 걸어야만 하는 이 현실.. 이 것이 이 나라 중증외상의 현실..

다시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트라우마센터를 보다가 쓸쓸하고 초라한 눈앞의 풍경을 차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다시 눈을 감으며 뒤에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대는 그.

“ .... 하아......”

역시나.. 꿈은 꿈일 뿐이었다.. 나를 잡아주고 희망을 얘기하던 그녀조차 현실 앞에 좌절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 ”

역시나..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저 사람도 저렇게 현실에 좌절하고 괴로워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나를 떠나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잊어버릴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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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희망을 얘기하는 건 쉽지만, 그 희망을 지켜내고 버텨내는 건 너무나도.. 지독히도.. 괴로운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것이 지난 10년간 이 일을 해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니까.

“ .... ”

늘 그랬다. 모두가.. 저렇게 괴로워했다. 같은 꿈을 꾸려다가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가 버린, 선배도. 정말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며 이 일을 배워보겠다고 찾아왔던 후배 녀석들도. 처음엔 대단한 일을 한다며 힘을 북돋아주던 동료 교수들도. 모두 다 이 곳을 외면해버리고 떠나버리고 잊어버렸다.

“ .... ”

242

외상센터라는 희망을 심어주고 벌써 10년째 아무런 대책도 내놓고 있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와 복지부도 마찬가지 였다. 희망을 얘기하는 건 쉬웠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고.. 꿈은.. 꿈일 뿐이었다..

“ .... ”

어쩌면 혹시.. 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곳에서는 될 리가 없다는 걸. 그래서 그렇게.. 이 곳을 외면하고 포기하고 떠나갔던 것일까. 떠나가는 그들을 원망하면서 세상에 돈보다 무엇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걸 우리가 의사라면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는 걸 포기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나 혼자라도 버텨내며 증명해보이고 싶었지만, 나 역시도, 결국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 ..... ”

지난 16년 내내 이 미로 같은 병원에 갇혀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버텨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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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이 곳을 지켜온 나.. 이런 나에게 기꺼이 동료가 되어 주겠다며 지난 2년 동안 나와 같이 그 현실을 감당해왔던 그녀.. 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이제는 정말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모두 허상이 되어버릴 꿈을. 또다시 심어줄 자신이 없다. 다시 함께하자고 말할 자신이 없다. 더 이상 이 곳을 붙잡고 있는 건 내 집착이고 욕심인지도 모른다. 정말 여기까지다.

“ ...... ”

의무복무기간이 10개월도 안 남았다. 내가 이 병원에 있어야만 하는 시간.. 그냥 딱 그만큼.. 딱 그만큼.. 딱 그때 까지만 이라도 이 트라우마센터가 유지될 수 있다면.. 딱 그만큼.. 딱 그때까지만.. 내가 버텨낼 수 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주먹을 꽉 쥐는 인혁.

“ ..... ”

하지만, 단하나 지켜야할 것. 생명을 위해 있는 이 트라우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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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만은 절대 외면하지 않기를.. 그것이 지난 10년 동안의 고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정말 혼자 남게 될 남은 시간. 이젠 잃을 것도 없으니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없다. 그저 내 방식대로 버티고 맞설 뿐,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그 어떤 책임을 지더라도, 그 단 하나만은 포기하지 말기를.. 몸이 부서지더라도..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기를.. 인혁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스스로에게 소리 없이 외쳐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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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썸띵(Something)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다음날 정오, 중환자실 복도, 중환자실에서 걸어 나오는 인혁. 벌써 4일째 은아도 없이 혼자서 회진을 돌고, 수술했던 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는 외상 코디네이터인 그녀가 없는 탓에 혼자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져서 전보다 몸을 두 배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걸음만 바빠졌을 뿐 왠지 전보다 쳐져 보이는 그의 어깨.

“ 아휴.. 저 자식은 저거.. 흠.. ”

회의결과를 알려준 이후로 그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여 같이 커피를 마시려는 핑계로 그를 보러온 한구. 하지만, 인혁이 사무실에서도 보이지 않자 굳이 여기까지 인혁을 찾으러 올라온 그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쳐질 대로 쳐져있는 인혁의 뒷모습. 한구는 살짝 한숨을 내쉬다가 일부러 큰소리로 그를 불러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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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최교수! ”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소리에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는 그. 한구가 복도 끝에서 자신을 부르며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애써 밝은 척 다가오는 한구를 보면서도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무심히 말을 건네는 인혁.

“ 니가 여긴 웬일이고. ” “ 웬일이기는~! 커피나 한잔 하자고 왔지~ 사무실 갔는데 너 없길래, 왠지 여기 있을 거 같더라고. ”

한구는 힘없이 쳐져있는 그를 보고 일부러 장난을 걸듯이 밝게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런 한구를 다시 무심히 보더니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입을 여는 인혁.

“ 바쁘다. 다음에 마시자. ” “ 에이, 점심시간인데, 커피한잔 할 시간도 없냐.. 야, 그러지 말고 같이 가~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햇볕도 쐬고 그러는 거지.. ”

하지만 약간 냉랭해진 말투로 한구에게 차갑게 대하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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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취과 그래 한가하나? ” “ 참나, 왜이래 이거~ 마취과 안 한가하거든? 오늘도 정규수술 꽉~ 차가지고, 오후 내내 수술장에 있게 생겼구만. ” “ 그러니까. 그래 바쁘면 다음에 마시자고. 나도 바쁘니까. ”

하지만 아무리 장난을 걸어도 소용이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냉랭한 인혁의 태도에 살짝 당황하는 한구.

“ 아... 그래~ 그럼, 다음에 마시지 뭐.. ”

한구는 그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단걸 느끼며 일단은 한발 물러서서 그를 다시 살펴보는데, 몸은 축 쳐져있으면서도 왠지 독기어린 그의 눈. 게다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심한 담배냄새 까지 났다. 뭐야.. 도대체 얼마나 피워 댔길래 이렇게.. 잠깐, 요즘은 거의 안 피는 걸로 알고 있는데..?

“ 그래. 간다. ”

그런데 한구가 다시 그에게 뭐라 말해볼 새도 없이 바로 한구를 지나치며 바로 응급실로 가버리려는 인혁. 그러나 그런 그를 다시 급하게 붙잡는 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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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잠깐만, 그거 물어보려고 왔는데, 저기, 신선생도 안보이드만? 오늘 출근하는 날 아니었나? 야간근무인가? ”

한구의 말에 잠깐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는 그. 그러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매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 .. 일주일간 휴가야.

“

“ ...!!... 뭐, 휴가? 일주일이나? 왜 하필 지금?! 아직도 아프데?! ”

그의 말에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는 한구. 지금 외상센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은아가 병원에 나오질 않는다니, 한구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 .. 간다. 나중에 수술실에서 보자. ”

하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바로 자리를 뜨는 인혁. 그리고 응급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참동안 보고 있는 한구. 그렇지 않아도 교대해 줄 사람도 없어서 제대로 한번 쉬어보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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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버텨가며 간신히 살아가는 놈인데 신선생이랑은 싸우고, 황과장한텐 맞기까지 하고..

“ .... ”

게다가, 이틀 전에 회의 결과를 듣고 난 후에 전보다 더욱 더 지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인혁. 그가 얼마나 낙심하고 좌절했을지 잘 알고 있기에 걱정되는 마음에 여기 까지 그를 찾으러왔던 것인데, 인혁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심각해보였다. 그냥 평소의 체념하고 좌절하던 모습 정도가 아니었다. 전보다 훨씬 더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 저 괴로움을 혼자서 누르고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뻥- 하고 터져버리거나 어느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 한구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를 오래 봐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 느낌. 그는 또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려 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일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자꾸만 스스로를 혼자처럼 만들면서, 그렇게 스스로 외로워지고 있었다.

“ .... 어떻게 하냐.. 흐음... ”

절로 한숨이 나오는 한구. 분명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이틀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돼 버린 건지. 게다가 지금 저놈을 잡아줄 사람은 딱 한사람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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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이런 때에 신선생까지 나오지 않는다니, 앞으로 외상센터를 어떻게 할지 한시라도 빨리 두 사람이 의논해봐야 할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길래,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하아..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급하게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그.

[ 뚜르르르- 뚜르르르- ]

“ 예, 여보세요? ” “ 어, 김선생. 나 지한구과장인데. ” “ 예! 과장님! ” “ 어, 미안한데, 오늘 나대신 수술 좀 들어가줘야겠다.. ”

짧은 통화를 마친 한구. 아무래도 지금은 인혁을 혼자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후, 응급실, 병동과 이어지는 복도에서 걸어 나온 인혁이 응급실을 지나 트라우마센터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인혁이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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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한명이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 저기요, 선생님! 저희 남편은 언제 봐주실 겁니꺼? ” “ ....? ” “ 아니, 점점 더 아프다카는데,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시면.. ” “ 아, 환자가 어딨습니까? ”

대충 상황파악이 된 인혁이 보호자를 따라서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런데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환자가 침대 위에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며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꽤 심각해 보이는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보호자를 향해 묻는 인혁.

“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 “ 아, 일 끝나고 들어와서.. 어젯밤부터.. ” “ 이, 상태가 많이 좋은데.. 여기, 최간호사! 이 환자 CT부터 좀 찍을 수 있게.. ” “ 아아, 잠깐만요 선생님. 아까 무슨 검사를 하긴 했는데요.. 그 뒤로 아~무 것도 못하 고 있습니더..! 남편은 계속 아프다카는데, 저기 있는 선생님들은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고.. 벌써 두 시간째 기다리고만 있다 아입니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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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인턴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인혁. 그곳에선 인턴들이 정신없이 다리가 찢어진 젊은 여자환자를 봉합해주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은지 옆에 있는 최간호사에게 환자 CT결과를 보여 달라고 하며 조용히 입을 여는 인혁.

” 김도형 선생 어디갔어요. ” “ 어.. 아까 나병국과장님 따라서 어디 올라가셨는데요. ”

그 말에 인혁이 살짝 한숨을 쉬며 CT결과를 확인하는데, 그런데, 환자 뱃속 군데군데에 프리에어가 보인다. 아무리 인턴이라도 이 정도 크기라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인혁은 바로 표정을 굳히며 간호사에게 CT를 찍었던 인턴이 누군지 물어보고, 간호사는 복도 끝에 서있는 인턴한명을 가리킨다. 그러자 화를 누르며 그 인턴을 부르는 인혁.

“ 거기, 인턴!! 이리 좀 와봐! ” “ 예! 교수님! ” “ 자네, 이 환자 CT 확인 했나? 외과는, 불렀어? ” “ 아아, 아니요. 갑자기 열상환자가 들어와서 정신이 없는 바람에.. ” “ 그래서 CT를 찍어놓고 확인도 안했어? 항생제는? ” “ 아! 맞다. 죄.. 죄송합니다! 오더 넣는다는 걸 깜빡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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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오더를 깜빡했다고 하며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서둘러 CT를 살피는 인턴. 그러자 점점 일그러지는 인혁의 표정. 화가 난 듯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 이봐.. 지금 환자 저렇게 아파하는 거 안보이나? 복막염인데 CT도 확인안하고..? ” “ 네?! 복.. 복막염이요?! 죄.. 죄송합니다! 저는 환자가 너무 젊어서.. 단순 복통인줄 알고.. 실수로.. ” “ 하.. 지금 자네, 제정신이야..? 환자 이렇게 방치하다가 의식 잃고 못 깨어나면, 그때 도 실수라고 할 건가?! 자네, 앞으로 응급실 인턴생활 한 달도 안 남았다. 그런데 대 체 언제까지..! ”

어제 일 이후로 응급환자 앞에서 더 예민해진 인혁. 게다가 곧, 인턴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응급환자를 안일하게 대처한 인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더 화가 나는 그였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는 갑자기 끼어드는 한구.

“ 아, 적당히 해~! 인턴이 뭘 알아~ ” “ ...!!?... ” “ 뭐, 수술 필요한거야? 수술실 비워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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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살짝 눈이 커지며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데, 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인혁을 쳐다보면서 약간 능청스럽게 그를 재촉한다.

“ 야, 뭐해? 환자 숨넘어가겠다! 빨리빨리! ” “ 하.. 인턴! 환자 수액 달고, 항생제부터 투여해. 아, 그리고! 보호자한테 수술동의서 받고, 수술 바로 시작할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외과에 연락해서 중환자실 자리 있나 알아봐. ” “ 예.. 예!! 알겠습니다! ”

인혁의 말에 허둥지둥 움직이는 인턴. 그런 인턴을 보며 짧은 한숨을 쉬더니, 한구를 보고 다시 입을 여는 그.

“ 니가 여기 와있는데. 지금, 수술 들어 갈 시간 아니야? ” “ 어? 음.. 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환자가 중요하지! 아유 얘는.. 아, 근데 많이 급 한 수술인가? 지금 웬만한 방은 거의 다 수술 시작해서 비우기 힘들 텐데..? ” “ .. 뭐, 상태로 봐선 아주 급하진 않지만, 그래도 응급이니까. 최대한 빨리하면 좋겠 지. ” “ 그래 그럼, 수술실 알아보고 연락 줄 테니까. 이따가 수술실에서 보자. 아,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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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의 말을 묘하게 돌리면서 서둘러 수술실을 알아보러 가려던 한구.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인혁의 팔을 끌어당기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을 한다. 인혁을 걱정스러워하는 그의 말투.

“ 너 힘든 건 아는데, 애들한테 적당히 해~ 또 터지지 말고.. 알았냐? ” “ ... 알았으니까 빨리 가.. ” “ 그래~ 잘 생각했어~ 뭐, 저놈들이 너 힘든걸 알겠냐~? 엉? 암튼, 이따보자잉? ”

그러더니 인혁의 어깨를 힘내라는 듯 두어번 쳐주면서 서둘러 수술실 쪽으로 뛰어가는 한구. 인혁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바뀌는 그 미소. 인혁은 이렇게 한구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센터에 일어날 일들 모두 자기 혼자 감당해야할 몫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정말 혼자 버텨낼 수 있도록 더욱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인혁은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짧은 한숨을 쉬고는 이내 다시 수술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 . .

그로부터 며칠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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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는 되도 않는 핑계를 대가며 인혁을 지겹게 쫓아다니곤 했다. 인혁이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옆에 참 징그럽게도 붙어 있는 한구. 도대체 마취과 일은 어떻게 하고 오는 건지 몰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응급실에 내려와서는 그가 가려는 데마다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인혁이 인턴들이나 누구한테 화를 낼라 치면

“ 적당히 해~ 인턴이 뭘알아~ ”

이런 식의 말을 뱉어내기도 하고, 그러다가 자꾸만 쫓아다니며 참견하는 한구 때문에 짜증이 난 인혁이 그에게 화를 내려고 하면

“ 그래~ 형이 다 받아줄게~!! ”

이렇게 장난하는 투의 말을 뱉어내면서 인혁의 화를 조금아니마 풀어주곤 하는 그. 한구는 그렇게 최대한 인혁의 옆에 붙어 있으면서 은아가 하루 빨리 출근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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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혁의 수술로 인해 터졌던 기사는 정정기사가 나가면서 어느 정도 무마가 되었고, 응급실에서의 수술은 특별히 공문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윗선에서 응급실 수술을 자제하고 정규수술실을 이용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게다가 과장들의 성화로 중환자실과 수술실이 없으면 절대 외상환자를 받지 말라는 권고사항이 함께 내려옴으로 인해, 수술실이 없는 낮에는 거의 환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두 명령 모두 이전에도 있었던 명령이고 강제력은 없는 명령이었지만, 만약 이번에도 어긴다면, 더 이상 트라우마센터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다행히도 며칠간은 새벽을 제외하고는 응급환자가 들어오는 일이 없었기에 윗선의 명을 어기지 않고 버틸 수가 있는 그였다. 그러나 폭풍전야.. 교수들 사이에서는 트라우마센터 지원 삭감문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교수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 일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스텝들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 모두가 일단은 숨을 죽이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는 듯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인혁은 이상하리 만큼 차분했다. 환자 관한 일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수술실에서 간간히 소리치는 것을 제외하면 그 어떤 일에도 화를 내거나, 웃지 않았다. 그리고 눈빛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수술을 하고, 환자에게 집중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는 정말 그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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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중환자실 복도, 오늘도 어김없이 중환자실에서 나오는 그. 그때, 한구가 또 그를 놀래켜주려 어디선가 불쑥 등장한다. 그러나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 인혁. 그냥 살짝 한구를 째려보기만 하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가려는데, 한구가 그를 따라오면서 말을 건다.

“ 야, 넌 근데 하루에 중환자실을 몇 번씩 들락날락 거리냐? 다른 외과교수들은 이렇 게 안 하드만.. 너는 사무실 아니면 응급실, 응급실 아니면 중환자실. 야, 너 찾는 거 되~게 쉬워~ ” “ 하아.. 좀 가라 쫌. 나 찾아다닐 시간 있으면 마취과에 좀 더 신경을 쓰든가~ ” “ 아, 그러니까~ 신선생 좀 빨리 데려오라고, 나도 우리 과에 가서 맘 편히 일 좀하 게. ” “ ..... ”

그러나 은아의 얘기가 나오자 또 대답이 없는 인혁. 다시 축 쳐진 어깨를 하고서는 계속 응급실로 향하는데, 그런 그를 못 봐주겠다는 듯, 인혁의 등짝을 한 대 퍽- 하고 내려치는 한구. 그러자 바로 인상을 쓰며 짜증을 내려는 인혁. 하지만, 한구는 그럴 틈도 안주고 바로 은아의 흉내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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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어깨 좀 피고다니시라구요! 이렇게에? 신선생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까? 엉? 야, 신선생 내일모레 출근이지? ” “ 아, 그래..!! 몇 번을 물어! ”

방금 맞은 등이 따갑고 화끈거리자 약이 오르는지 그에게 성질을 내는 인혁. 그러자 곧바로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한구.

“ 야, 물어볼 수도 있지 뭘~ ”

그런 한구의 표정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미안한 마음에 또 괜히 툭툭대는 인혁.

“ .... 그러니까 가 쫌..! 나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말고. ” “ 알았어~ 안 그래도 이제 가보려고 했어. 어깨 좀 펴고다녀라! 나 간다잉? ”

그렇게 한구가 인혁의 등을 다시 한 번 툭 치며 마취과 사무실 쪽으로 향하고 인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신의 걸음을 재촉한다. 그리고 복도 코너를 돌아 응급실로 향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 은아의 이야기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소리에 걷다말고 멈칫하며 자리에 멈춰서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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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신선생님 오늘도 안 나왔다며? 진짜 누구말대로 그만두려는 거 아니야? ” “ 뭔말이야~ 간호사들 말로는 아파서 안 나왔다는 데. 넌 그 입 좀 조심해라. 그러다 가 진짜 그만두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 뭐, 맨날 나오던 사람이 안보이니까 그러지~ 그리고 병원에도 벌써 소문이 파다하 게 난건데 말도 못하냐? 엊그제 외과 레지들이 그러더만.. 신선생님, 최교수님 때문에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 “ 이랬든 저랬든 간에~ 여기 복도거든? 그러다 누가 듣는다고~ 저번처럼 또 쓸데없는 소리하다가 간호선생들한테 욕이나 듣지 말고. ” “ 쳇.. 아, 근데~ 왜 자꾸 그런 소문이 돌지..? 같이 일하다보면 한번쯤 싸울 수도 있 는 거 아닌가? 뭐 진짜로 아파서 안 나오는 걸 수도 있고. ”

가만히 들어보니 응급실 인턴들의 목소리였다. 인혁은 이대로 그들과 마주쳐봤자 좋을 게 없을 거 같아서 다시 중환자실로 가야겠다 싶어 몸을 돌리는데, 언제 또 왔는지 한구가 자신의 뒤에 서서 그들의 얘기를 같이 듣고 있었다.

“ 왜 또 왔어? ” “ 니가 안가고 멀뚱히 서 있길래. 뭔 일인가 하고. 야, 쉿. ”

그를 조용히 시키는 한구. 인혁이 됐다며 자리를 피하려는데, 한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있어보라는 듯 그의 팔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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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의 말을 엿들으려는지 귀를 쫑긋 세우는 그.

“ 넌 그 소린 못 들었냐?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유명했다잖아~! 최교수님 연수갔다와 서 복귀한 뒤로, 간호사들하고 응급구조사 줄줄이 그만두고, 코디네이터도 그만두고.. 그게 최교수님 때문이라던데? 다른 병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던데 뭘.. ” “ 그래..? 왜 그랬지..? 최교수님이 좀 어렵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뭐 수술실에 서야 장난 아니게 무섭긴 하지만, 그거야 수술중이니까 그런거고. 그것도 가끔은 멋있 던데. 피 퐉~ 나고, 꺼즈!! 캬아.. 그게 바로 외과의의 카리스마 아니겠냐~ ” “ 참나~ 하, 그런 놈이 레지던트 지원대상에서 외과를 제일먼저 제외해두냐~? ” “ 아, 그거는 다른 문제지~ 보기에 멋있는 거하고, 직접 하는 거하고 같냐? 야, 평생 그 힘든 걸 어떻게 하냐? 뭐 자리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야, 나는, 편~ 하게 일할 수 있는 대로 갈거다. ” “ 하긴, 그건 그래, 내가 의대를 어떻게 졸업했는데, 그렇게는 못살지.. 으아~ 나도 편 한 대로 갈거다~ ” “ 참나, 언제는 환자 살리고 싶어서 의대 왔다며~ 뭐 진짜 칼잡이가 되겠다드니 어쩌 겠다느니 하던 게 몇 개월 이나 지났다고~? ” “ 야, 그것도 어느 정도지, 외상은 어후.. 그게 어디 사람 사는거냐. 당장 최교수님만 봐도. 너무 힘들어 보이잖아. 맨날 당직서고, 다른 교수님들보다 두세 배로 일하고, 힘 들게 수술하고 환자만 죽어라 보는데도 인정도 못 받고, 진급도 안 되고. 으아.. ”

그 말에 점점 굳어가는 인혁의 표정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인턴들. 가까워지는 인턴들의 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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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그런 거보면 최교수님만 불쌍하지. 야.. 근데 최교수님이 옛날에 진짜 그렇게 심했을까? 지금 보면 최교수님은 점잖은 편이잖아? 말붙이고 가까이 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누구는 인턴나부랭이라고 의사취급도 안하는데, 최교수님은 그러지도 않고. 오히려 김도형쌤이 더 못살게 굴지 않나..? 최 교수님은 안 그랬을 거 같은데..? ” “ 그건 모르지~ 그때는 그랬다잖아. 그리고 엊그저께 신선생님한테 하는 거 보니까. 말도 심하게 하드만. 야, 사람일은 모르는 거야~ 우리가 모르는 모습이 있을지 누가 알아? ” “ 그런가..? 하긴.. 아! 그럼 그때 간호사 쌤들이 그래서 신쌤 편들고 그랬던거야? 아 아..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럼 그.. 어...? 왜? " “ 야, 야.. 교수님, 교수님.. ” " ...!!... 교.. 교수님..? "

정신없이 인혁의 얘기를 하며 걸어오다가 복도 코너에 서있는 인혁과 한구를 발견한 인턴들, 놀라고 민망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는데, 인혁은 마치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그들을 못 본 척 그냥 쌩하니 지나쳐버린다. 한구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인혁이 그들을 그냥 지나쳐버리자 그들에게 한마디 툭 던져놓곤 재빨리 인혁을 쫓아간다.

“ 니들 저번에 그 인턴들이지? 나중에 잠깐 나 좀 보자. ”

그렇게 화난 표정의 한구가 자리를 뜨고 멘붕상태로 복도에 남겨진 두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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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야, 우리 어떻게..! ” “ 야,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씨.. ”

후환이 두려워진 인턴들. 서로를 원망스럽게 탓하다가 별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는 그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뒷머리를 박박긁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들어오자마자 일을 하려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인혁. 그런데 뒤이어 따라 들어온 한구가 문도 다 닫지 않고 인혁이 켜놓은 노트북을 덮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 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 “ 뭐가. ” “ 너 언제까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냐?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있으면 풀어야 지~! ” “ 뭘 어떻게 풀어. ”

하지만 한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말을 내뱉는 인혁. 그러다 잠시 말을 멈추고 한구를 쳐다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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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 뭐, 구구절절이 내가 살아온 얘기 그거 다 해줘야하나..? 뭐뭐, 나 이런 일 겪었고, 이렇게 힘들었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 좀 이해해달라고.. 하, 야 뭐, 그런 얘기라도 해야 하노~! 됐다~ 임마. ”

일부로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며 연수 갔다 온 직후의 얘기를 하고 있는 인혁. 외과에서 쫓겨나고, 어머니까지 잃고, 방황하는 그를 아무도 감당할 수 없어서 간호사, 응급구조사, 코디네이터 할 것 없이 한 달도 못가서 줄줄이 그만두던 그때, 누구에게도 먼저 속을 털어놓지 않는 인혁이기에 갈 곳 없는 마음을 그렇게 여기저기 터트려댔었고 그것을 모르던 사람들은 그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벌써 2년이나 지난 그 몇 달 간의 일이 아직까지도 인혁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한 한구.

“ 하아.. 야, 그때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에 신선생하고 일은 다들 모르고 하는 소리잖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방금 저놈들 때문에 시작된 건데, 그냥 이대로 있으면 너만 완전히 나쁜 놈 되는 거야~~! ” “ 뭐, 상관없다. 어차피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저 정도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 면 다들 잊게 돼 있어. 저런 말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도 없고. ” “ 아우씨, 암튼 고집은..! 씨.. 그럼, 신선생은 대체 왜 안 나오는 건데? 정말 그때 그 일 때문이야? ” “ 흠... 글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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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뭔데 그래~? 야, 나한테도 말 안 할 거야? 뭘 이유라도 알아야 도와주든가 말든 가 할 거 아니야~~! ”

하지만 그녀의 얘기가 나오자 또 다시 표정을 굳히고 침묵하는 인혁. 안 나오는 이유라..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 사람 어머니가 아프셔서..? 아니..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도 그 이유를 뭐라 단정 지어 설명할 순 없었다. 그저 분명한건, 그녀가 너무도 힘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언가를 예고하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너무나도 괴로워지고 있다는 사실.. 인혁은 그날 들었던 그녀의 흐느낌소리가 또 다시 귓가에 들리는 듯 하자, 한동안 잠잠했던 가슴이 다시 아프게 요동쳐 옴을 느낀다. 나와 같이 일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힘들어할 일이 있었을까? 붙잡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힘들게 할 바엔 보냈어야 했다. 어차피 지원이 끊겨버려서 힘없이 떠나보낼 바에는 차라리 제때 자기 인생을 찾아가도록 그렇게 보냈어야 했다. 그 사람을 붙잡지 말았어야 했다.. 한구에게 일일이 말로 다 설명할 수도 없이 너무나도 괴롭고 복잡한 인혁의 마음.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서 말이 없는 인혁을 보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비꼬듯이 입을 여는 한구.

“ 에이씨.. 그래~! 그렇게 살아라~~ 신선생하고 싸움을 하든 말든, 황과장한테 뺨을 맞든 말든 나한테는 뭐 말도 안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니 맘대로 해라.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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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말은 안하고 참고 있었지만 자신에게까지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인혁때문에 내내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던 한구. 혼자 투덜투덜 대더니 다시 입을 연다.

“ 너 근데 그건 아냐? 어? 야, 그 황과장이 너한테 손찌검 한 것도~ 너가 신선생하고 싸운 일에 묻혀버려서 아무도 모르더라~! 씨.. 뭐, 그냥 너만 그냥! 별 이유도 없이 신 선생 한테 화풀이 한 꼴 되버린거야~! 그런데도 계속 억울하게, 이렇게 혼자서 욕 다 얻어먹고 있을 거야? 어? ” “ .... ”

하지만,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라는 듯, 대답은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채 한구를 쳐다보는 인혁. 그러나 그런 인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한구.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약간의 긴장감. 인혁은 물러서지 않을 거 같은 한구의 모습에 먼저 그의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이젠 더 이상 말할 힘도 없다는 듯이 입을 연다.

“ 됐다, 그만하자..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이 병원에 있어봤자 얼마나 있는 다고.. ” “ ...?!... 뭔 소리야..? ” “ 나 피곤하다.. 나중에 이야기 하자.. ”

그러고선 바로 책상에서 일어나 간이침대로 가서 몸을 뉘이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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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는 인혁의 말 때문에 그를 불안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화를 가라앉히며 불안한 듯 입을 연다.

“ 야.. 하나 만 물어보자.. 너 만약에, 정말 트라우마센터 지원 끊기면.. 어쩔거냐..? “ .... ” “ 외상센터.. 포기할거야? ” ” 하, 만약에 내가 포기하면.. 환자는 누가 보겠노? ” “ .... ”

한구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일부로 농담을 던지는 인혁. 하지만, 그 농담에 전혀 웃을 수 없는 한구. 인혁은 굳어있는 그의 표정을 보곤 눈을 감더니 마치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입을 연다.

“ 이제 가~ 그리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한참동안 말없이 보고 있던 한구. 그러다 이내 사무실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리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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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사무실 밖, 트라우마센터안에서 씩씩거리며 나오는 한구를 의문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센터실의 문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았던 바람에 안에서 큰소리로 화를 냈던 한구의 목소리를 거의 다 듣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때, 마침 응급실로 돌아온 아까 그 인턴들. 응급실을 빠져나가려던 한구와 마주치는데, 한구는 그들을 노려보다가 쌩하니 그들을 지나치려 한다. 그러자 어쩔 줄 몰라하다가 죄송하단 말을 연발하는 인턴들.

“ 과장님! 아, 아까는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로.. ” “ ... 뭐가 죄송하단 거냐? ” “ 그.. 그게.. ” “ ... 니들 아까, 최교수 때문에 신선생 안 나온다고 했지? ” “ 죄.. 죄송합ㄴ.. ” “ 그게 너희들 때문인 건 알고나 있냐? ” “ 예.. 예..? ” “ 하.. 신경 쓰지 말라는 놈, 무슨 상관이야. 씨.. 늬들이 뭘 알겠냐..! 비켜 임마!! ”

그렇게 인턴들에게 버럭 화를 내며 답답하고 열 받는다는 듯 씩씩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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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응급실을 빠져나가는 한구. 그가 가버리자 인턴들을 보며 웅성거리는 응급실 사람들.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Father(Inst.) 그날 저녁,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방금 막 중환자실에서 돌아온 인혁. 몸이 피곤한 지 고개를 잠시 뒤로 젖혔다 풀더니 이내 2주 후에 있을 강의준비를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열리는 문.

[ 벌컥- ]

갑작스런 문소리에 고개를 드는 인혁.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한구였다. 인혁은 그를 살짝 놀란 듯이 쳐다본다. 낮에 그렇게 가버리고 나서 며칠은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한구.

“ 야, 나가자. ” “ 어딜? " " 한잔하자고. “ “ .. 됐어. 나 괜찮다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했잖... ” “ 뭐래냐? 내가 마시고 싶어서 그래~! 같이 술 좀 마셔달라고 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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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안 갈거야? 안가면 뭐.. 나 혼자 외롭게 마셔야지. 아유.. 병원에 친구 놈이라고 하 나 있는 게.. 씨.. 있으면 뭐해, 같이 술도 한번 안마셔주고.. ”

그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인혁. 혼자서 궁시렁거리는 한구의 모습을 보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입을 연다.

“ 기다려, 이것만 정리하고. ”

그러자 인혁을 보며 해냈다는 듯이 씨익- 하고 웃는 한구. . . . . 두 시간 후, 병원근처 어느 호프집, 입구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인혁과 한구. 들어오자마자 서부터 둘이서 얼마나 마셔댔는지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서 말이 많아진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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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너 그거 아냐? 우리 첫째애가 벌써 초등학교 6학년이다. 하하 ” “ 오 그래? 허, 벌써 그렇게 됐노? 이야.. 그럼 내년이면 중학생이네.. 이름이 뭐랬지? 종구라고 했나? ” “ 오오, 기억하네? ” “ 차하, 그럼 그걸 기억 못하노. 이름이 종구가 뭐야 종구가. ” “ 에이씨, 또 그 소리냐. 우리집안 돌림자라니까.. 야, 그나저나 너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냐? 벌써 마흔 넷인데, 우리 최교수도 장가가야지이~? 내가 와이프한테 부탁해 서 선 자리 알아봐줄까? ” “ 이기 놀리나. 시끄럽다 임마, 술이나 마셔. ”

은근히 놀리듯이 말을 하는 한구가 얄미워서 그에게 면박을 주는 인혁. 그러자 한구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이 킬킬 거린다. 그러자 인혁은 덩달아 피식거리다가 이내 허허- 소리를 내며 웃는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보는건지.. 꽤 오랫동안 웃을 일이 없었는데 자꾸만 장난을 거는 한구 덕분인지 아니면 취한 덕분인지 왠일로 웃음만 잘나온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인혁의 눈치를 살피며 일부로 병원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만 늘어놓던 한구. 그리고선 계획적으로 그에게 계속해서 술을 멕이이다가 예상대로 그가 어느 정도 취했다고 생각하자 은근 슬쩍 묻고 싶었던 얘기를 묻는다.

“ 야, 너 근데 진짜 얘기 안 해 줄거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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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를. ” “ 뭐기는, 신선생 말이야, 왜 안 나오는 거냐고. 설마 진짜 그일 땜에 그만두려는거 야..? 인턴들 말대로..? ” “ 아, 뭘 자꾸 물어봐..! 아니라니까 그런 거는. ” “ 뭔데 그럼~! ” “ 뭐.. 부모님이 서울에서 입원을 하셨다는데. 자세한 거는 모르고.. ” “ 아아.. 난 또.. 그나마 다행이네. 흠.. 아, 그런데 부모님이 많이 아프신가봐? 일주일 씩이나 쉰다는 거 보면? ” “ 모르지 그건.. ”

잘 웃다가 은아에 대한 얘기가나오자 또 표정이 괴로운 듯 복잡하게 변하는 인혁. 일주일 내내 은아의 얘기만 나오면 계속 이런 표정을 짓곤 하는 그였다. 한구는 그의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또 다시 인혁의 글라스에 술을 부어주며 슬쩍 화제를 돌리다.

“ .. 야! 아무튼 아까 그놈들 하는 말은 신경쓰지마~ 그 자식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야, 마셔마셔. ”

그러나 한구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지 않고 잠시 바라보고만 있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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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건 뭐, 어차피 모르고 하는 얘기니까.. 상관없는데. ” “ 상관 없는데..? ” “ 아까 들었노..? 편하게 살고 싶단다.. 뭐, 그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마는.. 이제는 사람 살려보고 싶다고 오는 놈들도 없어지고.. 뭐, 있다고 해도, 이 힘든 일에 누가 뛰 어들겠노.. 다들 편한 데만 찾아간다는데.. ” “ .... ” “ 하,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혼자 버틸 수 있겠나.. ” “ 뭐..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이렇게 고생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흠.. 야, 그래도 아직까진 신선생 있잖아? ” “ .... ”

하지만 인혁은 한구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아까 한구가 따라준 술을 목구멍으로 한 번에 넘겨버린다. 그런 그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은아에 대한 얘기를 다시 꺼내는 한구.

“ 그러고 보면 신선생 참 대단해~ 남들은 1년 하기도 힘들다고 도망가버리는데.. 지금 얼마나 됐지? ” “ 뭐, 아직 2년은 안됐고.. 한.. 1년 10개월.. 재계약만 세 번이 넘었으니까. 오래 했 지.. ” “ 흠.. 그러게, 오래 했네. 그래도 지금까지 신선생 있었으니까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까지 센터유지하는 것도 힘들었을 거야? 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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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겠지.. ”

그러곤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술잔을 채우는 인혁. 한구는 기회를 놓지지 않고 다시 입을 연다.

“ 아, 근데 신선생은 언제까지 일해 줄 수 있데? 난 내년까지로 들었던 거 같은데? 아닌가? ” “ .. 모르지, 그건 그때 얘기고.. 이번 계약 끝나면 어떻게 될지.. ” “ 뭐.. 병원 지원 때문에 그래? 흠.. 야, 그래도 아직까지 과장들 조용한 거 보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거 같기도 한데.. ” “ .... ”

센터얘기에 다시 어두워지는 그의 얼굴. 한구는 슬쩍 그의 표정을 살핀 후 다시 조심스레 말을 돌린다.

“ 하긴, 아직까진 어떻게 될지 모르지.. 뭐, 나과장이 낮에는 외상환자 받지 말자고 했 다며. ” “ 어.. ”

[ 벌컥벌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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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들고 있던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그리고선 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을 한다.

“ ... 그래서 며칠 전에 한명 있었는데, 못 받았어. 초 응급상황이었는데.. 받아서 응급 실에서 수술 할 수도 있었는데.. 못 받았어. 근데 지금은 위독하단다.. ”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취해가는 인혁. 그런 그를 잠시 말없이 보다가 이내 위로 하듯이 말을 건네는 한구.

“ .. 야, 그 많은 환자들을 니가 다 수술할 수는 없잖아.. 다 살릴 수도 없고. 우리가 무슨 신도 아니고.. ” “ .. 암만 다 살리지는 못해도, 그래도.. 최선은 다 해봐야하지 않겠나..? ” “ ..... ” “ 하.. 니 말대로 우리가 신도 아니고.. 수술한다고 다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마는..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봐야지, 수술도 못해보고 죽게 내버려둘 순 없잖아. 뭐, 수술 하고 나서 최선을 다해 케어 하는데 그때도 안 되면..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영역 이 아니니까, 그땐 어쩔 수 없지마는.. ” “ ..... ” “ 그 환자도 그때, 바로 우리병원으로 트렌스퍼되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수술만 받았 더라면, 아마.. 지금보다는 상태가 좀 나았겠지. ”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그. 한구는 인혁의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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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만 좀 참아줬으면 좋겠는데.. 왠지 이러다가 그가 또 일을 낼 것만 같았다. 그를 이해시켜보려는 한구.

“ ... 니 마음은 알겠는데, 야 그거 원장님 명이야. 수술실 없다고 응급실에서 수술하 면 위험부담이 많아지니까 받지 말라고 한 것도 있지만.. 뭐, 꼭 그것 때문이겠냐? 과 장들이 트라우마센터 없애라 마라 말이 많으니까, 불만도 잠재울 겸 그러는 거지.. ”

그러나 아무런 대꾸 없이 한구를 보며 풀려버린 눈으로 눈만 끔뻑거리다가 무겁게 입을 여는 인혁.

“ ..... 그래서.. ” “ ..... ” “ 내보고 매번 이럴 때마다, 환자 모른 척 피하라고..? ” “ ..... ” “ 하..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 그러면 우리 트라우마센터.. 뭐, 유지시켜주기라도 한 다드나? 뭐 아니면, 없던 외상센터가 생기고.. 갑자기 중환자실이 생기고.. 헬기가 생 기고.. 뭐 그렇게라도 되는 거냐고 임마.. 혹여나 그렇게 유지시켜서 그 트라우마센터 가 뭔 의미가 있노. ” “ ..... ” “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결과는 똑같을거고.. 이번 고비 넘긴다고 해도.. 확실한 지원 못 받으면 애물단지되는 거 똑같다. 그러니까 나는.. 하던 데로 하면 되는 거라고.. ” “ 야, 그래서 환자 받아서.. 정말 트라우마센터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땐 어쩌려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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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

그러나 이미 인혁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센터 때문에 환자들을 피할 순 없었다.. 한번 피하다보면, 두 번.. 세 번 피하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피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계속 편한 길을 찾고 싶어질 것이다. 분명, 나 역시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한구의 말에 피식 웃으며 느릿하게 입을 여는 인혁.

“ 니 아까 내 한테.. 왜 이렇게 중환자실을 몇 번씩 들락날락 거리냐고 물어봤나.. ” “ .. 그래. ” “ .. 거기 있다 보면은... 가끔 부끄러울 때가 있어. 의식 없이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병하고 싸우는 환자들 보고 있으면..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죽지 않으 려고 애쓰는구나 싶어서.. ” “ ..... ” “ 한구야.. 외상센터는 이미 저 사무실로 쫓겨났을 때부터.. 가망 없었어.. 니가 보기 엔.. 내가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을 거 갔노.... 만약, 내가.. 저 환자들 포기하면은.. 그때는 정말 끝인 거야 ”

한구는 오히려 자신을 설득하려는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짧은 한숨을 내쉰다. 그는 인혁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벼랑 끝에서 버티고 있는 그에겐 이제 더 이상 잃을게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 외에는 더 이상 잃을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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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더 그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거의 20년 동안.. 정말 오래도록 그를 지켜봐 오면서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트라우마센터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졌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구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힘들게 만들어온 트라우마센터 마저 이렇게 그에게서 앗아가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래서 다시 머리를 굴려보는 한구. 그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게 필요했다. 그때,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얼굴. 한구는 이거다 싶은 마음에 얼른 그를 향해 입을 연다.

“ 그럼, 신선생은..? 이대로 잘리게 둘거야? ”

그러자 역시 대답이 없는 인혁. 은아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또 복잡하고 괴로운 듯 얼굴색이 변한다. 그러더니 계속해서 술만 들이키는 인혁. 그리고 말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앞에 맥주잔을 그와 함께 들이키는 한구. 지금으로써 그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은아란 걸, 이미 잘 아는 한구 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0년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인혁에게 제대로 된 동료의 역할을 해줬던 건 그녀가 유일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족도 없어서 맨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가 매일매일 가족처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그녀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구 였다. 그런데 그때, 잔뜩 취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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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드라.. ” “ 얘 뭐라는 거야.. 안 들려 크게 말해~! ” “ 소리도 못내고.. 혼자서 울드라고.. 누가 들을까봐 입도 틀어막고.. ” “ .. 언제? 뭐, 그날 얘기하는 거야? 둘이 싸운 날? ”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고개를 젓는 인혁.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만큼 잔뜩 취해서일까..? 그날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표정이 떠오르자 또 다시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저릿해져온다. 하지만 애써 일렁이는 가슴을 누르며 한구에게 중얼거리듯 대꾸하는 그.

“ 아니 그날 말고.. 하아.. 맨날 야근에.. 수술실 따라 들어오느라 하루 종일 서있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할 때도 힘들다는 소리 한번 안하던 사람이.. 후.. 울드라고... 혼자서.. ” “ .... ” “ 힘들어서.. 소리도 못내고.. 후아.. 이제 때가 된 거지... ”

취해서 풀려버린 눈으로 한구를 보며 어눌한 말투로 두서없이 기억을 끄집어내는 인혁. 그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다가 은아가 울었다는 소리를 듣고 조금 체념하듯 변하는 한구의 표정. 역시나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다시 한숨을 내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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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본다. 때가 됐다.. 라.. 그만둘 때가 됐긴 됐지.. 그래도 이놈한테 들킬 정도면 심각한 거 같은데.. 하긴.. 한구는 다시 앞에 있는 술잔을 채운 후, 안에 있는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키더니 이내 탁-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는다. 그리고선 입에 묻는 거품을 슥슥- 닦아내더니 눈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혁을 향해 다시 입을 연다.

“ 너 그것 때문에 요즘 그렇게 저기압이었냐? 신선생 그만두는 것 때문에? ” “ .... ” “ 뭐.. 그만하면 오래 버텼어~ 지칠 때도 됐지.. 그만 둘 때도 됐고. ”

그때, 흔들리는 고개를 가누지 못해서 내내 땅만 쳐다보던 인혁. 한구의 말에 왜인지 피식- 하고 웃는다. 그러다 다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여는 그.

“ 어차피.. 떠나기로 했던 사람이니까.. 그만두는 거는 어쩔 수 없지마는..

”

“ .... ” “ 그 사람만큼은.. 내 옆에 있는 게 힘들어서.. 이 외상이 지긋지긋하게 힘들어서.. 다 포기하듯이.. 그렇게 그만두지는 않았으면 했는데.. 좌절하듯이.. 그러지 않았으면 했는 데.. 나한테는 같이 외상센터 한번 만들어보자고.. 포기하지 말라고.. 그러더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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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너무 힘드니까.. 하.. 나부터도 못 버티겠을 정도로 이 렇게 힘드니까.. 그러니까 그래 소리도 못 내고 운거 아니겠나.. 어쩔 수가 없는 거지. 결국에는 이렇게.. 암만 계속 해봐도.. 아무것도 바뀐 게 없으니까.. ”

그때, 마치 죽어가는 듯이 지쳐있는 그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욱-하며 억지를 쓰고 싶은 한구.

“ 야, 그래도 혹시 아냐! 한 달 안에 외상사업재개할지?! 지원만 받으면 다 문제없는 거 아니야~~ ” “ 허허, 외상센터? 니 아직도 외상센터가 생길 거 같나? 10년이야 10년.. 10년동안 지원한다는 말만 있었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하, 그리고.. 아까 인턴들말 못 들 었나..? 이런 건 안 한 다잖아.. 아무리 지원을 받아서 수술실하고, 중환자실하고, 장 비들하고.. 다 갖춰진다고 해도. 같이 일할 사람이 없으면.. 다 소용없어.. 다아.. 다아 아... 소용없어. ” “ 그거야 그렇지.. 에이씨.. 그래에! 까짓거 뭐.. 아직 안 늦었지.. 내가 도와줄테니까! 외상때려치고 딴 병원 알아보자. 거 지긋지긋하게 붙잡고 있더니 드디어 놓는다니까 야, 씨.. 다행이네..

”

“ .... 때려치긴 누가 때려친다고 했노.. 센터는 몰라도.. 환자는 살려야지.

이대로 지원이 끊기고 그녀가 떠나더라도.. 그렇게 혼자 남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유지될 트라우마센터. 아무리 가망이 없다고 해도 그때까진 어떻게든 버텨볼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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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젠 정말 나 혼자서.. 나 혼자서라도 환자 받아서.. 수술하고.. 회복시키고..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버티디가.. 안되면.. 그때는.. ”

반면, 인혁을 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한구. 이까 보다 훨씬 더 말투가 느릿느릿해진 그의 말투를 보니 이제 한계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인 것 같은데, 내일 기억이나 할 수 있을런지.. 그때, 인혁은 숨을 내뱉듯이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 후우.. 그때는.. ”

[ 툭- ]

그러다 결국 테이블 위에 툭- 떨어지는 인혁의 고개. 한구는 안 되겠다는 듯 다시 한숨을 푹푹 쉬더니 잔에 남아있던 술을 다 마셔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혁을 부축한다. 잠시 후, 늦은 밤 인혁의 집, 한구가 집안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걸 한사코 뿌리치며 혼자서 여기까지 비틀비틀 위태롭게 걸어 올라온 그.

[ 끼익- 철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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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집안으로 인혁이 휘적휘적 걸어 들어 들어오고 곧, 문이 닫히고 불이 켜진다.

[ 달칵- ]

불이 켜지자 금방 집안이 환해지고, 정리가 안 된 너저분한 집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틈도 없이 취한 몸을 비틀비틀 가누다가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리며 몸을 누이는 그. 코가 침대에 닿지 않게 고개를 살짝 돌리니 어두운 창문 사이로 아름답게 펼쳐진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심하게 풀려있는 그의 눈, 무표정한 얼굴. 야경을 보고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화려한 것들과 비교되는 내 모습.. 편하게 살고 싶다.. 라.. 때로는 그런 인생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다른 의사들처럼 골프도 치고.. 여행도 다니고.. 하지만, 그렇게 고여 있다가 썩어가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다. 편하게 산다는 대가로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결정을 내리고 그로인해 피해 받는 사람들을 나몰라라 하고.. 무뎌져가고.. 그렇게 살바엔..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다. 최선을 다해 환자를 위한 결정을 내리고 아무리 두렵더라도.. 그 결정에 책임을 지고.. 정직하게.. 후회하지 않게.. 그런데 오늘 따라.. 왜 이리 고독함과 외로움이 밀려오는 건지.. 그러다 이내 눈앞에 야경이 보기 싫은지 고개를 억지로 반대편으로 돌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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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우...... ”

인혁은 아주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두 눈을 느리게 끔뻑끔뻑 거리다가 이내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어버린다.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다음날 오후, 해운대 세중병원 응급실,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응급실에 울려 퍼지는 전화벨소리. 데스크 근처에서 환자를 보고 있던 도형이 바로 전화를 받는다.

“ 예, 세중병원 응급실입니다. 예? 트렌스퍼요? 어떻게 다친 환자입니까? 예, 예, 간 도 깨지고, 비장파열이요? 아, 중증외상환자네요. 잠시만요. ”

전화를 건 상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서둘러 중환자실과 수술실이 있는지 알아보는 도형. 하지만 둘 다 여의치 않자 바로 거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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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아, 저희는 못 받습니다. 수술실도 없고 중환자실도 자리가 없습니다. 예, 다른 병원으로.. ”

[ 타악- ]

그때 도형이 들고 있던 수화기를 갑자기 누군가 낚아챈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고개를 돌리는 도형.

“ ...!!! ”

그의 눈앞에서 무서운 눈빛으로 서있는 인혁. . . . . .

그날 밤, 세중병원 세면실, 인혁은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수술두건을 쓴 채로 여기저기 피가 튀어있고 전보다 몇 배로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 결국 오갈 데 없는 초 응급환자를 받아서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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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행히 환자는 살았지만, 인혁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 쏴아-- 스윽- 스윽- ]

그렇게 한참동안 굳은 표정으로 거울만 쳐다보다가 땀과 함께 엉겨 붙은 피를 씻어내고 천천히 면도를 시작하는 인혁. 방금 수술한 환자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간과 비장파열로 심각한 출혈이 있었음에도 전에 있던 병원에서 각종검사로 시간을 지체해 사고이후 이미 4시간이 지나서 쇼크 상태로 들어온 환자. 일단은 급한 부위만 막아가며 서둘러 지혈을 한 덕분에 간신히 테이블데스는 면했지만, 바이탈이 계속 흔들리는 어려운 수술이었다. 만약, 그가 환자를 받지 않았다면 이 병원도 저병원도 가지 못하고 시간만 끌다가 분명 벌써 사망했을 터.. 그나마 다행히도 한구의 도움으로 정규 수술실을 빌려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이 일이 앞으로 외상센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스윽- 멈칫. ]

또 다시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르는 은아의 얼굴.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한구의 말이 그를 괴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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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 신선생은..? 이대로 잘리게 둘거야? /

“ ..... ”

은아가 다시 출근을 하는 내일, 점점 더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지는 인혁이었다. 같은 시각, 은아의 집,

[ 툭- 털썩- ]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은아. 오자마자 가지고 왔던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쓰러지듯이 몸을 뉘인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가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녀.

“ 후우..... ”

그리고 또 다시 멍- 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위에 얹어본다. 조용한 심장. 그날, 그렇게 쿵쾅거리던 심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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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실을 마주했던 지난 일주일동안 어느새 다시 잠잠해져 버렸다. 어머니가 계신 동생부부의 집에 있는 동안, 그리고 병원을 떠나있던 지난 열흘 동안, 나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도 까맣게 잊고 살았던 나의 현실을 보았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온 하루하루. 이곳에 남겠다고 한 날로부터 나에게는 멈춰있다시피 한 시간이 나의 연인, 나의 가족들에게는 너무나도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는 걸,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변했는데 나 혼자만 이 시간 속에 멈춰 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는 정말 그들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에 그날 나는 정말 펑펑 울었었다. 내가 그렇게 눈물이 많았던가.. 정말 그렇게 울어본 게 몇 년 만인지..

“ ..... 참내.. ”

한편으론 서글프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혼자 왠 청승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잔 마셔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드는데, 바로 눈앞에 보이는 화장대. 그리고 화장대 거울에 붙어있는 수많은 환자들의 사진. 그리고 화장대 맨 위쪽에 붙어있는 사진. 인혁과 팔짱을 낀 채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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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작년 겨울..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환자와 센터만 생각했던 그때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사이좋게 서있는 인혁의 모습. 또다시 가슴에 돌덩이가 앉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은아.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건지.. 다시 저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환자만 생각하며 열정적이고 행복하게 웃으며 일할 수 있을지. 내일이면 출근해서 볼 텐데.. 혼자서 힘드셨을 텐데.. 이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도대체 교수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자꾸만 자신이 없어지는 그녀였다.

-

다음날 이른 아침, 해운대 세중병원 앞, 이른 아침이라 한가로워 보이는 응급실 안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은아. 그녀는 한참동안 들어가지도 못한 채로 서 있기만 하다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후에서야 응급실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 신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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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이네~ 잘지냈나~? ”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기분 좋게 반겨주는 간호사들. 막상 자신을 반겨주는 이들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은아. 그들에게 잘 지냈냐며 인사를 해준다.

“ 몸은 좀 괜찮으세요? 왜 이렇게 오래있으셨어요~! 선생님 안 나오셔서~! 우리가 얼 마나 힘들었는데요~! ” “ 맞아요~! 그리고 신선생님 이제 안 나오시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 “ 너희는 쓸데없는 소리를..! 아니에요 선생님 신경쓰지 마세요! 잘오셨어요! ”

그녀가 오자마자 또 괜한 소리를 하는 최간호사와 박간호사. 그런 그녀들의 옆구리를 쿡쿡찌르며 눈치를 주는 김간호사. 다시 이것저것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는 간호사들.

“ 그런데, 선생님. 정말 최교수님 때문에 안 나오셨던 거에요..? ” “ 아, 교수님 때문에 안 나온 건 아니고, 집에 사정이 있어서.. ” “ 아아, 그럼 최교수님이랑 싸우신게 인ㅌ.. ” “ 아! 잠깐만, 나 저기, 먼저 교수님한테 인사 좀 드리고.. 이따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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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한 질문에 답을 해주기가 어려워 이리저리 둘러대려다가 인혁에 핑계를 대며 서둘러 간호사들을 떼어내는 은아. 그녀는 간호사복으로 갈아입지도 않은 채, 재빨리 사무실로 향한다. ※ 추천브금 : 10cm - 어느 날(Inst.) [ 달칵- ]

그런데, 문고리부터 잡아 돌리다가 막상 인혁의 얼굴을 보려니 살짝 긴장이 되는 그녀. 약간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내 결심한 듯 문을 열고 씩씩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텅텅 비어있는 사무실. 보이지 않는 인혁의 모습. 그런데 그때,

“ 왔어요? ”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 하며 놀란 은아. 인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와서 그녀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로 책상 앞으로 가더니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위에 자료를 챙기는 척 한다. 그러나 이내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는 인혁.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조금 낯설었다. 아직 사복차림에 머리를 묶지 않은 그녀의 모습. 게다가 화장도 하고, 작은 귀걸이까지 하고.. 물론 전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이긴 하지만.. 조금 낯선 그녀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좋지 않은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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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굳어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우물쭈물 입을 여는 은아.

“ 저.. 교수님, 죄송해요. 그날 그렇게 갑작스럽게 못나온다고 해가지고.. 정말 죄송해 요.. ”

인혁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면서 입을 연다.

“ 왔으니까 됐지 뭐.. ... 어머니는.. 좀 괜찮으세요? ” “ 네? 아아, 네, 괜찮으세요.. 병원엔.. 별일 없었죠..? ” “ .. 예, 별일 없었어요. ”

그리곤 둘 사이에 잠시 흐르는 정적.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서로 들키지 않으려는 듯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 하고 있는 두 사람. 인혁은 그녀에게 바로 센터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고 은아는 막상 인혁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미안함과 지난 열흘 동안 그만둘 일을 내내 고민했던 탓에 생각처럼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인혁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왠일로 먼저 정적을 깨며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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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흠흠, 열흘 동안 쉬고 왔으면, 이제 일을 해야지. 거기 그 것 좀 정리해줄래요..? ” “ 아아, 네. ” “ 그거 다 정리하면.. 회진.. 회진 돌아야하고, 할 거 많네. ”

그렇게 말을 뱉어내고선 재빨리 책상에 앉아 바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는 인혁. 은아는 잠시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말한 간이침대에 있는 자료를 아무 말 없이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다시 그를 흘끔 쳐다보는 그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하고 있는 그. 은아는 그를 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이내 시선을 다시 자료로 돌린다. 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밀더니 슬쩍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맞아주는 그가 내심 고마운 은아. 물론, 아직까지 복잡한 머리와 무거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인혁덕분에 지금까지의 걱정과 긴장이 허무해질 만큼 점점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 옴이 느껴졌다. 비록, 두 달 후에 이곳에 있을 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때,

“ 신선생. ” “ 네..?? ”

294

고개는 들지 않고 여전히 모니터에 눈을 둔 채로 갑자기 그녀를 부르는 인혁. 자기도 모르게 인혁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작스런 그의 부름에 깜짝 놀라는 은아. 그가 고개를 들더니 그녀와 눈을 잠깐 마주치며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 그러고 일할 거에요? ” “ ....? ” “ 가운.. 안 입어요? ”

인혁의 말에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은아. 아차! 싶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연다.

“ 아, 맞다.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

그러곤 서둘러 방문을 나서려다 잠시 멈칫하는 그녀. 이상하게 아까부터 사무실 안에 풍기는 낯선 냄새. 아무래도 담배냄새 같았다. 담배 피셨나..? 나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인혁을 흘끗 보는 그녀. 웬만큼 힘들지 않으면 잘 안 피시는데.. 하지만, 며칠 동안 혼자 고생했을 인혁이기에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은아. 센터 밖으로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295

-

잠시 후, 중환자실 복도,

오랜만에 같이 오전회진을 돌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다. 그런데 아까부터 거의 말이 없는 인혁. 아직, 그날 일 때문에 그러시나.. 그러나 정작 은아에게는 이제 그때의 일 같은 건 별로 중요 하지 않았다. 물론, 분명히 속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이제 그만둬야하는 건지, 마는 건지 고민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얼마 안 남았을지 모르는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더 소중했다. 남은 시간이라도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인혁에게 말을 걸면서 아직 약간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은아.

“ 그런데, 교수님. 생각보다 새로운 환자가 거의 없네요? 휴가철이 끝나서 그런가.. 저 없는 동안 환자가 거의 안 들어왔나봐요~ 저는 교수님 혼자 고생하시겠구나.. 그래 생 각했었는데. 그래도 다행이네요. ” “ .. 환자가 있었는데, 못 받은 거 에요. ”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여는 인혁. 반면, 은아는 그의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에게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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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 “ 못 받았다구요, 환자. ....앞으로도 수술실, 중환자실 자리 없으면 못 받게 됐어요. 응 급실에서 하는 수술도 못하게 됐고. 그래서 새벽이라면 모를까, 낮에는 수술실 못 구 하면.. 환자 못 받게 됐어요. ”

그러자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서서 놀란 눈으로 인혁을 쳐다보는 그녀. 역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는 그.

“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응급실에서 수술을 못 한다구요? 환자를 못 받아요? 왜요..?! ” “ ... 내려가서 얘기합시다. ”

인혁은 점점 심각하게 변해가는 그녀의 표정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며 덤덤한 척 입을 연다. 그러자 다시 그의 팔을 붙잡는 은아.

“ 잠깐만요. 교수님! 잠깐.. 교수님 저한테 아무 일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 “ ... 내려가서 얘기해요. ”

인혁은 그녀에게 붙잡힌 팔을 잠깐 보더니 다시 덤덤한 목소리로 내려가자는 말만 반복한다.

297

하지만 그런 목소리와는 다르게 흔들리고 있는 그의 눈빛. 은아는 그의 불안한 눈빛을 보고선 다시 마음이 불안해져 옴을 느끼고, 이내 잡고 있던 그의 팔을 놓고서는 말없이 그를 따라 트라우마센터로 향한다.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은아는 센터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불안한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 그를 재촉한다.

“ 교수님 대체.. 무슨.. 일인데요? 응급실 수술을.. 갑자기 왜 하지 말라는 건데요? ”

인혁은 들어가자마자 책상으로 앞으로 가더니 파일 안에 있던 프린트된 기사를 말없이 건넨다. 그러자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기사를 집어 드는 은아.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설명을 시작하는 인혁.

“ 이게.. 뭐에요..? ” “ .. 기사가 하나 터졌어요. 수술준비가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검사 없이 응급실에서 수술을 했다는..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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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아는 놀란 얼굴로 서둘러 기사를 읽는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그녀의 표정.

“ 환자가 누군데요..? 상태가 이렇게 심각해요? ” “ 아까.. 중환자실에서 본 그 환자에요. 그날, 신선생 결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응급 실에서 수술했던.. 자동차 전복사고로 들어왔던 그 환자. ” “ ...?... 그 환자.. 상태 나쁘지 않잖아요? 아직 의식은 없어도 회복기인데다가.. 지금 심각한 감염도 없고.. 소변도 잘나오고.. 바이탈도.. 아니, 그럼, 지금 이 기사하나 때문 에 응급실에서 수술을 못한다는 거에요?! ” “ 예, 그렇게 됐어요.. ”

낮게 가라앉은 인혁의 목소리. 그는 이번에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자 답답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 은아. 자신은 센터에 이런 일이 생긴 줄도 모르고.. 센터를 그만둬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니.. 자꾸만 그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그를 원망하듯 입을 여는 그녀.

“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아니, 저한테 말씀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 “ .... ” “ 그때 전화했을 때.. 센터에 일이 생겼다고 한마디만 해주셨어도..! 내가 바로! 아니.. 그 다음날이라도 바로 왔을 거 아니에요! 왜..! ... 저를 왜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만드세요.. ”

299

그러나 괴로움을 애써 참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끝을 흐리는 은아. 그녀보다 더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인 인혁. 지금 그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었던 그 말.

“ 신선생. ” “ .... ” “ .. 미안해요. ”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그동안도.. 그리고 앞으로도 미안했고, 미안할 일 투성이였다. 그러면서, 이 말 한마디 하기가 뭐가 그리 어렵다고..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건지... 인혁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너무 멀리 까지 와버렸다는 사실뿐. 한편, 그 말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는 은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지난 열흘 동안 그가 혼자 힘들어 했을 모습이 머릿속에 너무도 빤히 그려지자 분통이 터지는 그녀.

300

“ 교수님이 뭐가 미안해요..! 수술 못하게 한 거는 병원인데..! ” “ .... ” ” 그리고 하... 그때, 내려왔어야 하는데.. 병원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열흘이 나 안 나오고.. 죄송해요.. ” “ 신선생이 죄송할 거 없어요. 신선생 잘못 아니니까. 어차피 내려온다고 해도. 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 “ .... ” “ .. 다만.. 이 일로 우리 센터가.. ”

어렵게 말을 이어가다가 잠시 멈추는 인혁. 만약, 지원이 줄어든다면.. 그녀가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할까..? 아니,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일을 안 그래도 힘든 사람한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지금껏 고생 만 해 온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런 얘기를 도저히 꺼낼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그녀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재계약을 할지 말지도 모르는데.. 그녀 모르게 나 혼자 감당해도 될 일이라면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 아니에요. 수술실, 중환자실 없으면 환자 받지 말라는 거 뭐, 한두 번도 아니었고.. 그냥 하던 데로 하면 되요. 뭐, 어제도 환자 받았고. 그러니까 기사문제는.. 이 정도로 얘기 합시다. 그냥 그렇게 알아두면 되요. ”

301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키는 말을 뱉어놓고 도망치듯이 바로 사무실문을 빠져나가는 인혁. 자신의 옆을 스쳐가는 그를 붙잡지도 못하고 그가 나간 문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녀. 어쩐지.. 오늘아침 그에게서 나던 담배냄새와 조금 야위어보이던 그의 모습을 보고서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그와 통화를 했던 그날 그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었다. 한번만 더 제대로 물어볼 걸.. 환자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그였다. 환자를 못 받았다면 많이 괴로워했을 텐데.. 자신의 괴로움을 신경쓰느라 그가 어떤 상황인지는 신경쓰지도 못했던 것 같아서 더욱더 미안해지는 은아. 한편, 엘리베이터 나란히 서있는 기조실장과 나과장. 그때, 복도 저쪽 끝에서 세헌이 걸어오고, 한곳에 모인 3명의 과장들이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그런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여는 세헌.

“ 아참, 어제 최인혁이가 수술실도 없는데, 수술해야 한다고 또 한바탕 했다면서요? 웬일로 며칠 조용하다 했더니.. 그, 저번 주에 원장님 명으로 자리 없으면 안 받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 “ 그렇게는 한데, 뭐 딱히 공문이 떨어졌던 것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제재를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저번처럼 실습학생 데려다가 응급실에서 수술한 것도 아니고, 갖출 거 다 갖추고 정규수술실에서 수술했다는데. ”

302

“ 검사는? 저번에도 검사 안하고 수술해서 문제된 거 잖아요? ” “ 뭐, 이번에는 다른 병원에서 이미 CT도 찍고 온 상태였고, 수술도구도 다 있었는데 요. 당연히 수술 간호사도 있었고. 그 딱히 명을 어겼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뭐라고 할 방법도 없고, 그냥 원장님 심기만 불편하시게 된거죠. ”

세헌의 말에 기조실장은 역시나 인혁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한숨을 쉬며 계속 대답을 해준다. 그러자 혀를 차면서 마음에 안든다는 듯 얘기를 하는 세헌. 괜히 나과장한테 화살을 돌린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걔는 뭘 그렇게 무서운 게 없어? 원장님 명을 보란듯이 어 기고.. 그, 응급실에선 뭐합니까? 그런 거 하나 못 막고. ” “ 하, 참나.. 한번 데려가 보세요..! 그게 맘대로 되나..! ” “ 허, 그건 김민준과장한테 얘기해야죠~! 정형외과가 무슨 상관이라고... ”

그러자 화살이 돌아올까 가만히 있다가 세헌의 말에 욱하는 나과장. 그리고 두 사람을 말리려 끼어드는 기조실장.

“ 뭐, 막는다고 막아졌으면 이럴 일이 있겠어요? 제어가 안 되니까 문제지. 그래도 저 번처럼 문제생기면 응급의학과는 책임을 피해가기 힘들 텐데, 응급의학과에선 골치깨 나 썩겠습니다? ”

그러면서 기조실장이 나과장을 슬쩍 쳐다보자

303

반박할 수 없는 말에 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다. 아무래도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나과장. 그때, 못마땅하다는 듯이 다시 끼어드는 황과장.

“ 뭐 응급의학과만 피해 받나.. 이번엔 흉부외과에서 중환자실 내줬다면서요. ” “ 예, 그랬답니다. ” “ 거, 그래서 화근덩어리라니까. 아니, 하루 이틀 문제되는 것도 아니고. 이거 뭐 어디 로 보내버리든가 해야지 원.. ” “ 보내버려요..? ”

황과장의 말에 솔깃하는 나과장. 당분간만이라도 어딘가 보내버리면 좋을 텐데.. 그때, 그런 나과장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여는 황과장

“ 일개 스텝이 중환자실을 비워라, 수술실을 비워라 설쳐대는 걸 언제까지 두고봅니 까? 조만간에 원장님한테 정식으로, 트라우마센터 문제 다시 말씀드리든가 해야죠. 이 대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 “ 그거야 그렇죠. 정부에서 다시 사업을 재개한다고 하면 모를까. 지금까지 딱히 성과 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외상환자 때문에 중환자실이 부족하니까 매번 여기저기 부딪 히고, 시끄럽고, 이대로 유지시키는 건 무리니까. ” “ 아무튼, 저번처럼 내 수술티오나 중환자실 건드리면, 난 가만히 못 있습니다. ”

[ 띵동- ]

304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는데, 승강기 안에 서있던 한구가 그들과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그들에게 살짝 꾸벅 인사한 후, 서둘러 승강기를 빠져나가는 한구. 이내 그들을 지나쳐 복도를 걸어가려는데, 세헌이 뒤에서 그를 부르고, 한구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친다. 약간 거리를 두고 서있는 두 사람.

“ 어이, 지한구과장. 어제 최인혁이 한테 수술실 내줬다면서? ” “ 아.. 예. ” “ 거, 지과장은 저번에 원장님 말씀 못 들었나? 자리없으면 수술실 내주지 말라니까. 자꾸 마취과에서 수술실 열어주고 그러니까. 자리있는지 없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 조건 환자부터 들이미는 거 아니야. ” “ .... ” “ 자꾸, 수술스케줄 밀려서 스케줄 빡빡해지고, 컴플레인 들어오면 마취과에서 욕먹는 거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하는 건가? 마취과면 마취과답게 똑바로 관리해야지 말이야.. 거, 계속 그러면 수술실 위원회 열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

그렇게 한구에게 말을 뱉어낸 세헌이 이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이번엔 한구가 그를 부른다.

“ .. 황과장님! ” “ ...? ”

305

인혁의 일로 황과장에게 앙금이 남아있는 한구. 일부러 그를 열 받게 하기위해 실실 웃으면서도 공손하게 입을 연다.

“ 외상환자 수술은 외과수술이라 주로 외과수술을 미루는데요. 지금까지 정형외과수술 에는 지장 가는 일이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말은 제대로 하셔야죠~ 어제는 외과에서 양보를 안 해주니까. 다른 수술이 밀렸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 저한테 얘기하실 게 아니죠. ” “ ...?!!... ” “ 그리고.. 외상환자를 아예 안 받을 순 없잖습니까. 혈압이 60이 밑도는 환자를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구요. 마취과에서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황과장님. ” “ 아니, 그러니까 지금..! ” “ 그럼 전 수술스케줄이 있어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렇게 뭐라 더 말을 하려는 황과장의 말을 끊으며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바로 몸을 돌리는 한구. 그러나 그들을 등지자마자 굳어버리는 한구의 표정. 그렇지 않아도 어제 수술실을 내주며 불안 불안하다 느끼긴 했는데.. 이대로 가면 정말 인혁과 트라우마센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병원 모든 과의 수술스케줄 책임져야하는 마취과 입장에서도 계속 덮어놓고 인혁을 도와주기엔 무리인 상황. 하.. 이 자식 당분간은 좀 조심하라니까.. 이틀 전 인혁과의 술자리에서 분명히 말을 해줬지만, 또 환자를 받아버린 인혁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한구. 아무래도 수술이 끝나자마자 인혁에게 다시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자리를 뜨는 그였다.

306

한편, 할 말 다하고 떠나는 한구의 뒷모습을 조금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는 황과장과 그의 옆에서 쌤통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황과장을 약 올리듯 한마디씩 던지는 두 과장.

“ 그러게 왜 괜한 사람을 건드려요? “ " 아무튼, 쯧쯧쯧. “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는 황과장. 그를 보며 피식-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기조실장과 나과장이었다. 그날 오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그동안 밀린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은아. 침대 위에서 환자케어를 위해 의학서적을 뒤지고 있는 인혁. 그는 아까 일 이후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자꾸만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런 그에게 말을 걸 수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 였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전처럼 다시 힘내서 일해보자고 버텨보자고 외상센터가 생길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그런 말을 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가 있다한들 해결 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고 싶은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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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교수님.. ” “ 예. ” “ 어제 들어온 환자는.. 어떻게 받으셨어요? 어제는 수술실 있었어요..? ” “ 아니요. ” “ ...?!... 그러면, 응급실에서 수술하셨어요?! 아까 응급실에서 수술하면 안 된다고... ” “ 위에서는 응급실에서 수술하지 말고, 수술실, 중환자실 자리 없으면 받지 말라고 했 는데, 수술실 중환자실, 억지로 만들어서 받았어요. 뭐, 지금까지 그렇게 수술했잖아 요. 응급실수술이야 뭐 당분간만 조심하면 되고. ” “ 아아.. ”

인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하긴, 지금까지 그렇게 수술했으니까.. 단순히 응급실 수술만 금지된 거라면 뭐..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닐지 혼자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때 문득, 세중병원 응급실은 나름 소수술실로 쓰이는데.. 기사가 터질 만큼 응급실 수술이 잘못된 건가..? 라는 궁금증이 떠오른다.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그를 향해 입을 여는 은아.

“ 근데, 응급실에서 수술하면 원래 안 되는 거에요..? 지금까지 계속 문제없이 수술해 왔고.. 정규수술실은 아니지만, 수술실로 쓰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거고.. 그리고 그 때 그 환자, 상태도 나쁘지 않잖아요.. ” “ .. 응급실에서 수술을 하면, 수술도구도 없고, 마취과 인력도 부족하고, 수술간호사 도 없는데,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수술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이번이야 환자 가 괜찮아서 어떻게 넘어갔지만, 환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고스란히 병원 책임이 되 니까. 응급실에서 수술할거면 환자 받지 말라는 거죠. 검사도 똑바로 하고 수술하라는 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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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그래도, 지금까지는 응급실이라도 있어서, 수술 많이 할 수 있었는데.. "

그런데 그때,

[ 벌컥- ]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나과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굳어있는 표정의 나과장. 은아에겐 일단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인혁을 보면서는 딱딱하게 입을 연다.

“ 어어, 신선생 오랜만이야.. 흠, 최선생한테 할 말 있었는데. 마침 신선생도 있으니까 잘됐네.” “ 예, 말씀하십쇼. ” “ 저기, 이달 말부터 전남에 헬기 뜨는 거 알고 있지? 다음 주에 거기서 운영 전에 헬기이송체계에 관해서 컨퍼런스를 한다고 연락이 왔는데, 최선생이 나대신 거기 좀 가줬으면 해서. ”

어제 수술에 관한 일로 나과장이 한마디 할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컨퍼런스를 가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인혁.

“ .. 전남은 저희랑 권역이 다르지 않습니까. 헬기이송에 관한 거라면 여기하고 상의 할 필요가 없을텐데요. 굳이 병원을 비우면서 까지 갈 이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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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긴 한데, 뭐.. 어차피 오전에 수술 못하잖아. 환자도 못 받는 데, 괜히 병원에 있는 것보다 낫지 뭘.. 외상환자들이야, 밤에 보면 되고. 뭐, 특별하게 준비할 것도 없 고, 그냥 하루 갔다 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자네 안 쉰지도 오래됐으니까. 바 람도 쐴 겸, 한번 갔다 오지 그래? ”

그의 말에 대답 없이 표정이 굳어지는 인혁. 그런 그를 보며 똑같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여는 나과장.

“ ..... ” “ 그럼 갔다 오는 걸로 알고. 나는 이만 바빠서.. ”

[ 쾅- ]

기분이 나쁜 듯이 문을 쾅닫고 나가버리는 나과장. 그가 나간 문을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제자리에서 꿈쩍도 안하고 앉아는 인혁. 나과장의 말은 한마디로 자리 없는데 수술해서 시끄럽게 할 바엔 낮에는 그냥 병원에 있지 말라는 충고였다. 어제 수술실과 중환자실도 없는데 또 무리하게 받은 인혁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열흘 동안 자리를 비운 탓에 나과장의 말뜻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은아. 그저 두 사람사이에 냉랭하고 딱딱한 분위기와 굳어있는 인혁의 표정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함만 느끼고 있는데, 그때, 다시 벌컥- 하고 열리는 사무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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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컥- ]

역시나, 한구였다. 들어오자마자 은아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그.

“ 어! 신선생, 오랜만이네요? ” “ 아! 과장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지내셨어요? ” “ 나야 뭐, 잘 지냈죠. 최교수가 문제지.. ”

그러고 인혁의 얼굴을 슬쩍 살피는데, 그의 표정이 매우 딱딱하게 굳어있다. 방금 나과장이 굳은 얼굴로 센터를 나가는 걸 봤기에 대충 무슨 일 때문인지 짐작이 가는 한구. 일부로 인혁에게 말을 시키지 않고, 은아에게 계속 말을 건다.

“ 아,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면서요. 신선생이 열흘이나 못 나온 거보면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인데, 어디 큰 수술이라도 받으셨나봐요? ” “ 아, 아니요, 큰 수술은 아니고, 무릎하고 허리가 안 좋으셔서.. 허리수술을 좀 받으 시느라.. ” “ 아아.. 그, 허리수술도 큰 수술이죠.. 흠.. 뭐, 그래서, 수술은 잘 받으셨어요? ” “ 네, 수술은 잘됐고, 결과도 좋고, 관리만 잘 하시면 앞으로 지장은 없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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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잘됐네.. 흠.. 근데, 신선생 그 얘기는 들었나? ”

그러고 인혁의 표정을 다시 살피는 한구. 눈치를 보아하니 아직 은아에게 아무 말도 안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인혁은 그제야 고개를 들며 한구와 눈을 마주치더니 일부로 한구의 말을 가로 막으며 입을 연다.

“ 뭐하러 왔노. ” “ 어? 아아, 신선생 왔나해서, 인사 좀 하려고. 너한테 할 말도 있고, 커피도 한잔 할 겸. 나갈래? ”

아무래도 트라우마센터 지원문제는 인혁이 직접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로 그를 밖으로 불러내는 한구.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미 알고 있는 인혁. 바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다시 의학서적을 뒤적이며 거절을 한다.

“ 나중에. ” “ 음.. 그럼, 신선생은요? ” “ 아, 저도 나중에.. ”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저기 그럼, 나중에 신선생하고 술이나 한잔 하자고, 신선생 괜찮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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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네, 시간 날 때 불러주세요. ”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아쉬운 듯 다시 밖으로 나가는 한구. 은아는 그가 나가자마자 다시 인혁의 상태를 살피는데, 여전히 굳은 표정의 그. 넘어가지 않는 그의 책장. 하지만 간단한 말조차 걸 수 없을 정도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의 모습. 아무래도 오늘은 그를 혼자두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은아였다.

※ 추천브금 : 아일랜더 - 사랑아 가지마 (골타ost 中) 그날 저녁,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이미 퇴근할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집에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녀. 은아는 그저 아까부터 정리하던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간이침대에서 의학서적을 보고있는 인혁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이따금씩 그의 상태를 살필 뿐이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한 트라우마 센터.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은아를 부르는 인혁.

“ 신선생.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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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시간 지났어요. ” “ 아아, 알아요. 저기, 할 일이 좀 남아있어가지고.. ” “ .... ”

다시 고요해진 트라우마센터 안, 간간히 인혁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은아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 고요한 센터안에 울려퍼지는 시끄러운 전화벨소리.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갑자기 울려퍼지는 전화벨소리에 살짝 놀라 서둘러 전화를 확인하는 은아. 그런데, 휴대폰 액정에 동규씨. 라는 글자가 떠있다. 그러자 그녀가 밖으로 나가서 받으려는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런데, 그녀보다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며 입을 여는 그.

“ 나 신경 쓸 것 없어요. 편하게 받아요. 어차피 중환자실 가봐야하니까.“

그러고는 주섬주섬 가운을 챙기는 인혁. 은아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살짝 당황했지만, 곧, 통화가 끊길 것 같아 서둘러 통화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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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동규씨..? ”

그러자 살짝 멈칫 하는 인혁.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중환자실을 나서려는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은아의 통화소리.

“ 네?.. 금요일이요? 아.. 그때는 야간근무라서 힘들 것 같은데.. 네.. 네.. 네? 지금이 요? ”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인혁을 쳐다보는 은아. 그러나 이미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있는 그. 반쯤 열려있는 문 틈사이로 너무나도 축쳐진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잠시 동안 망설이는 그녀. 그러다 이내 짧은 대답을 한다.

“ 아... 네, 알았어요. 거기에서 기다릴게요. ” . . . . 잠시 후, 다시 트라우마센터로 돌아온 인혁. 그런데 역시나.. 텅 빈 사무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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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눈앞에 보이는 당연한 현실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허해져온다. 내가 정말 그 사람에게 쓸데없이.. 너무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잠시 사무실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텅빈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그. 그런데,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다가 멈칫하는 인혁. 그리곤 무언가를 보더니 이내 피식- 하고 웃는 그. 책상 위에는 차가운 캔커피와 빵과 김밥이 놓여져 있었다. 아마도 인혁이 하루 종일 뭔가 먹는 걸보지 못해서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급하게 뭐라도 사다놓고 가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늘 그랬었다. 그가 무언가에 치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항상 저녁 늦게까지 같이 있어주면서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그를 챙겨주곤 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항상 툭툭 거리면서도 늘 그녀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욱더 미안해지고 무거워지는 마음. 그리고 변치 않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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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녀는 가야할 사람이었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지만 결국은 지금처럼 떠나야하는 사람. 지금처럼 이렇게.. 결국은 떠나고 말 사람. 그의 얼굴에 다시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그날 밤, 은아의 집근처 한 커피숍, 늦은 시간이라 거의 손님도 없는 그 곳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동규와 은아. 동규는 은아를 불러다놓고 계속해서 차만 홀짝일 뿐 한참동안 말이 없다. 은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말을 기다리가 안되겠다 싶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 중요한 일이란 게 뭐에요, 동규씨? ” “ 은아씨.. ” “ ...?... ”

오늘따라 왠지 진지한 분위기의 그. 그런 동규 때문에 은아는 살짝 긴장하고 그의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데, 왠일인지 동규는 말은 안하고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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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스윽- 내민다. 의아스럽게 변하는 그녀의 표정.

“ 이게 뭐에요? ” “ 한번 열어볼래요..? ”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류봉투를 열어보는 그녀. 꽤 두툼했던 그 봉투 안에는 영문으로된 캐나다 병원들의 홍보물들과 간호사 지원 서류 같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하는 은아.

“ 동규씨, 이게 뭐..에요..? ” “ .. 내가 알아본 캐나다병원들이에요. ” “ 아니, 그거는 알겠는데.. 왜 이 거를..? ” “ 은아씨.. 나랑 결혼하고 캐나다 가서도, 간호사일 꼭 할 수 있게 해줄게요. 가족들 보고 싶으면은 한국으로도 자주 들어오고.. 은아씨가 하고 싶은 것들, 다 할 수 있게 해줄게요.. 정말 행복하게 해줄게요. ” “ ... 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

조금은 뜬금없게 느껴지는 그의 말. 은아는 그의 생각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캐나다에게서도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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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은 일이지만.. 대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는 그녀. 왠지 그의 입에서, 자신이 걱정하던 말이 나올 거 같았다. 그때,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여는 동규.

“ .. 내말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어요.. 은아씨가 지금하는 일..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떻겠어요? ” “ ...!!... ”

순간,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 그의 말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 결국, 걱정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가 더 이상.. 나를 기다려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그.

“ 저번에.. 은아씨 아프고 나서, 많이 생각해봤는데.. 은아씨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안 되겠어요.. 나는 은아씨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고생하는 거 더 이상 보기가 힘드네요. 그라고, 내가 저번에는 말 못한 게 있는데.. ” “ .... ” “ 나 한 달 후에, 다시 캐나다로 들어가봐야 되요. ” “ 네..?! 캐나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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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당황스러운 은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데, 그런 그녀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하는 동규.

“ 내가 작년에 한국 들어올 때, 우선 1년만 들어오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 “ 아.. 네.. 근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거에요? 아예 들어가야 되는 거에요? ”

그녀가 정말 기억을 하긴 했던 걸까..? 바로 떠나야 하는 건지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를 보다가 조금 씁쓸한 듯 웃으며 고개를 두어 번 젓는 동규.

“ 그거는 아니고..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다시 한두 달 정도 들어가 있기로 했 어요. ” “ 아.. 난 또.. 놀랐잖아요. ”

동규는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 모습이 귀여운 듯 피식- 웃는다. 그러나 다시 씁쓸하게 바뀌는 그의 미소.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있는 듯 했다.

“ 은아씨.. 우리가 캐나다가서 결혼하기로 한 날이, 한 1년 정도 남은 거 알고 있죠..? ” “ 네, 그럼요. 당연히 알고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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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아직, 양가 부모님들께 인사도 못 드렸어요.. 캐나다 가려면 준비할 것도 많은데.. 집도 아직 못 알아봤고.. 결혼식날짜도 못 정했고.. ”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그. 은아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작게 입을 연다.

“ ... 미안해요.. ” “ 은아씨, 미안하라고 한말이 아니라.. 음.. 나는 은아씨가 좋아하는 일하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도 좋지만.. 이제는 우리 미래도 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 “ ... ” “ 그리고 이 일은, 은아씨가 너무 힘들고, 고생스럽고.. 은아씨가 말은 안 해도 여기서 외상 코디네이터 일 하는거.. 대접도 못 받고.. 힘들잖아요. 그리고 아직 외상센터소식 도 없다면서요.. 언제까지 여기에만 얽매일 수도 없고.. 조금 있으면.. 이번 계약 끝난 다고 했었죠..? ” “ 아, 네.. ” “ 그러면 이제.. 이 일 그만두고, 결혼준비도 하고.. 나 캐나다 가있을 동안, 은아씨도 한국에서 다른 정리도 좀 여유롭게 하고..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다 여 유가 되면, 캐나다에 조금 일찍 들어갈 수도 있고. ”

행여 그녀의 마음이 다칠까 조심스럽게 돌려서 말을 마친 그. 동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언제까지 이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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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외상센터가 생길 때까지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겠다고, 기다리겠다고 한 자신의 말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매번 만나기도 힘들고 통화 한번 하기도 어렵고, 지난 1년간 그녀를 기다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지쳐가고 있던 그였다. 게다가 저번처럼 몸살이 날정도로 그녀가 고생하는 것도 자신은 쉬는 시간 하나 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은아.

“ ... 저기, 동규씨 미안한데요.. 조금만.. 내가 생각할 시간을 줄래요..?” “ ..... ” “ 지금, 센터 상황이 너무 안 좋아 가지고.. ”

말끝을 흐리는 은아. 곤란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잠시 침묵하던 동규. 역시.. 무리였구나.. 마음만 앞서서 너무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낸 거 같아서 조금 미안해지기도 하고 마음이 조금 씁쓸해지기도 하는 그. 하지만, 조만간 대답을 꼭 받아내고 싶은 마음에 일부로 괜찮다는 듯 말하면서도 다시 강조한다.

“ 아직, 시간 있으니까.. 기다릴게요. 그래도 나 캐나다 가기 전까지는 말해줄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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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네 그럴게요.. ”

평소보단 조금 더 단호한 모습의 동규. 그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잠잠했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져 옴을 느끼는 은아. 두 달 후면 이번계약은 끝이 난다. 교수님께는 적어도 내년 여름까지는 일하겠다고 했었지만, 애초에 6개월만 하려고 했던 일. 그런데 벌써 시작한지 2년이 다되어가고 있는 일. 이제는 재계약을 할지 말지.. 도저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역시..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하는 것일까..? 내가 그만두고 나면 트라우마 센터는 어떻게 될까..? 지금도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센터. 만약 사람이 구해지지 않는다면.. 아니,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이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직 외상센터는 만들지도 못했는데.. 꼭 외상센터를 만들고 떠나고 싶었는데.. 정말 여기서 멈춰야 하는 것일까..? 그냥.. 조금만 더 있을 순 없을까..? 아니, 아니지. 그러면 가족들이나 동규씨의 말대로.. 결혼도.. 내 인생도.. 역시 그러면 너무 늦어버리는 거겠지.. 하지만, 벌써부터 그곳이 그리워지는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까보다 더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그녀의 마음이 다시 무겁게 짓눌려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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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중환자실, 그저께 들어온 TA환자의 상태가 심각했다. 간과 비장파열, 대량 출혈로 인해 쇼크상태에 빠졌던 환자. 만약, 인혁이 받지 않았다면 이미 사망했을 그 환자. 그런데 수술도 간신히 끝낸 그 환자의 몸에 이번엔 심각한 감염이 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걱정스럽게 중환자실을 나서는 인혁. 옆에 있던 은아에게 이 환자는 좀 더 신경써서 관리하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분명 옆에 있던 은아가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그. 그런데, 아까 있던 환자침대 옆에 멍- 하니 서있는 은아. 중환자실이라 그녀를 크게 부를 수 없어서 다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는 인혁.

“ 신선생, 안가고 뭐해요. ” “ ...!!... 아아, 네, 가야죠. ” “ ..... ”

은아는 혼자서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가 그가 갑자기 나타나자 움찔하며 놀란다. 무슨 일인지 오늘 아침부터 계속 그렇게 멍한 상태이던 그녀.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던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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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걸음을 옮겨 중환자실을 빠져나가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차 싶은 은아. 자신이 또 멍해졌구나 싶어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간다.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오자마자 가운을 벗어 놓는 인혁.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더니 바로 책상 앞에 앉는 그녀. 그러다 갑지기 뭔가 떠올랐는지, 인혁을 향해 입을 연다.

“ 아, 교수님, 나과장님이 말씀하신 다음 주 컨퍼런스요. 자세한 장소하고 시간은 못 들었는데, 혹시 얘기 들으신 거 있어요? ” “ 아니요. 아직. ” “ 아! 그러면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

그러곤 서둘러 책상에서 일어나려는 그녀. 그런데 인혁이 바로 입을 열며 그녀를 제지한다.

“ 됐어요. 신경쓰지 말고 할일해요. 뭐, 알아서 말해주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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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알았어요. ”

결국, 다시 자리에 앉는 은아. 인혁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침대에 앉더니 그녀를 보지 않고 노트북을 켜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연다.

“ 아, 그리고 그 컨퍼런스는 나 혼자 갈 겁니다. 신선생은 병원에 있어요. ” “ 네? ” “ 뭐, 어차피 우리 권역도 아니라 중요한 자리도 아니고, 가져갈 것도 없어서 나 혼자 충분히 갔다 올 수 있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신선생은 병원에 있어요. ” “ 교수님 그래도.. ” “ 아, 그리고, 그저께 수술한 환자 좀 잘 봐줘요. 내가 보고 갈꺼지마는, 그 환자 감염 이 심하니까 혈압이랑 소변량 수시로 확인 좀 해주고, 수액하고 체온도 신경써주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주고.. 내가 없으면, 신선생이라도 환자들 봐야죠. ”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보며 아까 못했던 말을 하는 인혁. 그녀에게 좋지 않은 환자를 자기 대신 잘 케어하라고 말을 한다. 그런 그의 말끝에 계속 같이 가자고 할 수 없는 은아.

“ 아..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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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에게 알았다고 대답하지만, 자꾸만 마음이 씁쓸해져 오는 은아. 왠지 그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또다시 생각나는 그날, 그가 자신을 피해 다니던 그때가 생각난다.

“ ..... ”

하지만, 이젠 그때처럼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게 된 은아. 화가 난다기 보다는.. 이젠 그에게 미안해질 뿐이었다. 아직 인혁 혼자 힘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외상센터. 그에게 꼭 같이 외상센터를 만들자고 했었는데.. 하지만, 어제 동규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다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그녀. 그런 그녀를 볼 듯 말 듯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노트북에 고정시키며 그녀를 부르는 인혁.

“ 신선생. ” “ 네..? ” “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난 괜찮으니까. ” “ .... ”

그러고는 여전히 노트북만 바라보며 계속해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그. 그런 인혁을 말없이 바라보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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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왠지 흔들리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단지 기분 탓 인걸까..? . . . . . 그날 이후 며칠간, 전처럼 똑같이 환자를 돌보고 회진을 돌고, 수술을 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두 사람. 그러나 그건 겉보기에 모습일 뿐이었다. 두 사람 다 서로 시선을 잘 마주치지 않았고 사적인 말도 잘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문득 멍해지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건 인혁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벌써 버럭 화를 내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에게 만큼은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인혁이었다. 그는 그저 초연히 그녀가 해야 할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변화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딱 한사람, 한구를 제외하고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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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Father(Inst.)

그로부터 며칠 후, 응급실 데스크, 새벽에 수술한 환자의 기록을 보며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두 사람. 그러다 인혁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서둘러 자료를 챙기며 말을 한다.

“ 아, 나 저기 중환자실 좀 갔다올게요. ” “ 예, 그러세요. ”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것 같지만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얘기하는 두 사람. 그리고 인혁이 자리를 뜨자마자 잠시 멍- 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 생각하다가 힘없이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은아.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책상에 앉아서 그동안 못했던 물품정리를 힘없이 하고 있다가 다시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 한 표정으로 변하는 그녀.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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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

“ ...?... 네, 들어오세요. ”

그녀의 대답 뒤에 바로 끼익- 하고 열리는 문. 은아가 누구인가 싶어 문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구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아이스커피 두잔.

“ 아, 과장님, ” “ 어 신선생, 뭐 하고 있었나? ” “ 네, 그냥 좀 정리할게 있어서.. 근데 저기, 교수님은 좀 전에 중환자실 가셔서 조금 걸리실 것 같은데.. 어떻게요, 커피에 있는 얼음 다 녹겠네요. ”

조금 아깝다는 표정을 하며 한구가 들고 있는 커피를 가리키는 은아. 그러자 씨익- 웃으며 입을 여는 한구.

“ 아아, 아니~ 오늘은 인혁이 보러 온거 아니고 신선생 보러 온거에요. ” “ ..?... 저를요..? 저를 왜..? ” “ 뭐, 해줄 얘기도 좀 있고. 해결할 문제도 있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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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는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여전히 멀뚱멀뚱 자신을 보고만 있자,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커피를 살짝 들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연다.

“ 나랑 잠깐, 커피한잔 안 할래요? ”

그러자 무슨 말일까 궁금한 마음에 이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나서는 은아. 잠시 후, 응급실 2층 회의실 앞,

2층 회의실 앞에 도착한 한구와 은아. 한구가 이미 회의실 문이 열려있는 걸 보고서는 그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하는데, 은아는 왜인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텅빈 회의실 안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은아를 의아하다는 듯이 보다가 들어가길 재촉하는 한구.

“ 신선생..? 안 들어가요? ” “ 아..!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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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다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의 말에 얼른 대답을 하고는 서둘러 회의실로 들어가는 은아. 그녀를 뒤따라 들어가는 한구. 이내 두 사람이 각각 회의실의자에 앉고, 한구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은아에게 내미는데, 또 뭔가 멍- 한 표정이 되어서는 그가 커피를 주는 줄도 모르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자 한구는 커피를 그녀앞 책상에 내려놓고 왜그러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일부러 놀래 키려고 큰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 신선생! ” “ 네..? 아아, 죄송해요.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 아.. 그게.. ”

그러나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은아. 뭔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일부로 가볍게 지나가는듯한 말투로 그녀를 떠보는 한구.

“ 최교수 때문에 그래요..? ” “ 아, 아니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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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약간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 그러자 한구는 들고 있던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며 이번에는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그녀를 향해 다시 묻는다.

“ 많이 힘들어요..? 인혁이 때문에..? ” “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음.. ” “ ...?... ” “ 여기 이 회의실이요.. 지난 봄이었나.. 아, 겨울이었나..? 그때 이후로 거의 와본 적 이 없는 것 같네요. 교수님이랑.. ”

무언가를 회상하며 추억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 한구는 약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 ...?... 왜, 여기서 뭐했었나..? ” “ 네.. 저희 사무실은 너무 좁으니까. 항상 회의할거 있으면 여기로 왔었어요. 앞으로 외상센터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 좋은 외상센터를 세우려면 뭐가 필요할지.. 매일 회 의하고 그랬었어요. ” “ 아아.. ” “ 그런데, 외상센터사업은 불투명해지고.. 그나마도 헬기사업이랑 남은 외상사업들까 지 전부 흐지부지된 후로는, 그런 회의도 거의 하지도 못했네요. 뭐, 정부사업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회의 해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어차피 그렇게 된 거, 그 시간에 환자를 한명이라도 더 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매일 잠 잘 시간도 없이, 밥 먹을 시 간도 없이 환자들만 죽어라 보고.. 센터 만들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 벌써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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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그러고 있네요. ”

은아가 조금은 추억에 잠긴 듯이 몇 달 전 이야기를 조근조근 털어놓자 그녀의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어주던 한구. 그러다 이내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번엔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이 입을 연다.

“ 음... 그렇겠네.. 신선생이 고생이 많았겠어요. ” “ 아.. 아니에요, 고생은요.. ”

은아가 가벼운 칭찬에 조금 민망해하는 듯하자 그 모습이 왠지 인혁의 모습과 겹치는 듯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는 한구. 이럴 때 보면 그녀는 정말 인혁과 똑같았다. 머릿속에 온통 외상센터와 환자들에 생각들을 가득 담고서 이 일을 정말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있는 두 사람. 역시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외상센터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인혁이 옆에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지금부터 그녀에게 해줘야할 말들이 걱정스러운 한구. 그러다 괜히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놀려줄 요량으로 장난을 걸듯 입을 연다.

“ 근데 난 솔직히, 신선생 얼마 못 버틸 줄 알았는데~?? 하하, 이렇게 오래하게 될 줄은 몰랐지, 다들 최교수랑 같이 일하기 힘들다고 도망가고 했는데.. 신선생은 지금 거의 2년이 다 되가니까. 맞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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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네.. ” “ 하, 그래도 신선생이 있었으니까. 다행이죠. 안 그러면 저 녀석 혼자 버티지도 못 했을 거에요. 사무실에서 쫒겨났을 때도 그렇고.. 아~! 근데, 신선생이 잘 챙겨줘서 그 런가? 뭐, 그때는 사무실에서 쫓겨났는데도 표정은 더 좋아지더만? 난 저놈 저거 레 지던트 때 이후로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다니까요~? 하하. ”

한구의 농담에 피식- 하고 웃는 은아. 그러다 문득, 정말 그래서였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그녀. 정말 내가 잘해서 였을까..? 내가 잘해서 트라우마센터가 여태껏 유지될 수 있던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 악조건 속에서도 환자만은 다 받아서 수술하는 사람. 늘 체념하는 듯, 포기하는 듯 말하다가도 사실은 절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 속으론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 그런데 난..

“ 글쎄요.. 제가 잘 했다기 보단 교수님이 대단하신 거죠.. ”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걱정들 때문에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는 한구.

“ 아니지~ 신선생 덕분에 많이 좋아진거지.. 아, 신선생 혹시 아나? 최교수가 레지던 트 때 어땠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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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아, 아니요. 어땠는데요..? ” “ 아유, 말도 마요. 아주 고집불통에다가.. 아! 그럼, 혹시 인혁이가 외상센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는 아나? ” “ 음.. 글쎄요. 어떻게 시작하셨는데요..? ”

외산센터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흥미로운듯한 표정을 짓는 은아. 한구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역시나 라는 생각에 씨익- 하고 웃더니 이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 한.. 15년전인가.. 최교수 레지던트 때, 그때도 병원은 뭐.. 지금하고 똑같았어요. 당 직들 있어도 알잖아요. 콜해도 제때제때 안 오는 거. 그땐 더 힘들었지. 다들 안내려 오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각자 자기과 일만해도 감당하기 벅찬상태에서 응급실 자주 들락날락하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 “ 아.. ” “ 근데 저놈이 저거, 레지던트 되자마자 선배들한테 따졌데요. 왜 응급콜 제대로 안 받냐고. 교통사고 환자들 왜 나 몰라라 하냐고. 그러다가 엄~청 깨졌었지? 무지~하게 맞았을 거에요 그때. ”

한구가 분위기를 무겁게 하지 않으려 약간 장난조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은아는 그때도 지금처럼 힘들어했을 인혁의 생각에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구나 싶어 괜히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짓게 되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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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그때 선배들이 하던 말이 있었어요. 그렇게 잘났으면 우린 바쁘니까 니가 내려 가서 봐주고 내려오라고. 그런데 레지던트 1년차가 교통사고환자를 어떻게 보냐고. 내 려가서도 무시만 당하고 엄청나게 깨졌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놈이라는 소리만 듣 고.. 그때 이를 갈았어요 저놈이. 자기도 빨리 크겠다고. 빨리 커서, 자기가 다 수술하 겠다고.. 그런데, 미운털 박힌 레지던트 1년차한테 누가 수술을 가르쳐줘요. 그러니까 또 미친 듯이 병원에서 일만해댔죠. 혼자서라도 실력을 키우겠다고 쉴 시간에도 공부 하고 연구하고. 환자한테만 빠져가지고.. ” “ .... ”

특유의 말투로 말을 이어나가는 한구. 그런데 이번엔 그의 말을 듣고 웃을 수 없는 은아. 그녀는 왠지 눈앞에 처절했던 그의 젊은 시절이 보이는 듯 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그의 모습.. 젊은 시절마저도 외로웠을 그 모습.. 매일같이 싸우고, 수술하고, 또 괴로워하는 그 모습. 한구는 심각하게 변하는 은아의 표정을 보더니 이번엔 조금 밝은 톤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 아무튼 그러고 있었는데, 저기, 우리 선배 중에 펠로우 양반이 하나 있었어요. 지금 김민준과장하고 동기였나..? 1~2년 선배였나 그랬는데, 그 선배가 인혁이를 좀 눈여겨 보고 챙겨줬었죠. 그 당시 외과 과장님이셨던 정교수님한테 이런 레지던트 하나가 있 다 언질도 해주고. ” “ ..... 지금 학장님으로 계신 분이요..? ” “ ...?... 아네? 최교수가 말해줬나? ” “ 아, 예전에 회의하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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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아무튼 인혁이 저놈이 들어오자마자 미운털이 박히는 바람에 선배들한테도 그렇고 외과 내에서는 거의 혼자였어요. 그래서 힘들어 보였는데, 그 선배랑 정교수님 만난 뒤로는 생기가 돌았죠. 정교수님 수술실도 따라들어가고, 가서 다른 레지던트들 보다 개복도 일찍해보고 이것저것 빨리 배우고, 뭐, 인혁이 저놈도 워낙에 손재주가 좋고 눈썰미도 좋으니까. 곧잘 따라했죠. 그래서 교수님도 이뻐라하시고. ” “ 아아.. ” “ 그러다가 인혁이가 박사학위가 끝날 때쯤에 정교수님이 트라우마센터도입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하셔서. 그 선배랑 인혁이가 교수님 연구도 도와드리고, 그러다가 선배가 먼저 외상을 시작해보겠다고 해가지고, 외상환자 들어오면 응급실 콜받고 선배가 외 상환자수술하고, 인혁이는 가끔 어시스트 해주고. 그 밑에 들어온 후배 몇 명까지 합 세하면서 세중병원에서 새로운 거 한번 시도해보자고 으쌰으쌰 하고 있었죠. ”

흥미롭게 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녀. 그런데 이번엔 한구가 씁쓸하게 미소짓더니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어간다.

“ 그런데.. 윗선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만호과장님이 갑자기 외 과과장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었어요. 그리고 의과대 학장으로 임명되시고.. 그 뒤로, 그 선배가 1년 좀 넘을 동안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는데, 어려움이 많았죠. 그 당시만 해도 외상수술은 다른 과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데, 그전에야 과장님이 있으니까 도와 줬다 치지만, 과장님 가시고 나서는 다른 과들 자꾸 불러내니까, 불만이 많아지고. 병 원이 시끄러워지고. 적자는 쌓여가고.. 병원에서 골치 아픈 존재로 전락해버렸죠. ” “ .... ” “ 게다가, 일이 너무 힘드니까 어느 순간 후배들 한두 명씩 떨어져 나가고, 선배는 자 꾸 외과 내에서 자꾸 궁지로 몰리고.. 진급도 어렵고, 입지도 좁아지고, 집에도 못 들 어가고.. 집에서는 이혼하자고 그러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믿었던 동료 교 수들한테도 외면당하고.. 그래서 그만 뒀어요. 쫓겨나다 시피.. 뭐, 일부에서는 의도적 으로 몰아붙인 것도 있었고..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제 발로 걸어나갔던 거지. 그렇게 끝나버렸어요.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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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마치, 자기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의 인혁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가족들조차 이해해주지 못하는 일..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일.. 힘들고 괴로워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몰아칠 때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그 순간,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무너져버릴 것 같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괴로운 듯이 변하는 은아의 표정. 그러나 계속 말을 하는 한구.

“ 그런데 선배가 저놈한테 그만둔다고 말 꺼내기가 미안했는지. 한마디 상의도 안하 고, 그렇게 그만뒀었어요. 그렇게 떠나갔어요 사람들이. 같이 했던 사람들 모두 이제 외상이라면 지긋지긋 하다면서.. 뭐, 하도 시달렸으니까, 이해는 하지. 여건도 안 따라 주는데, 쉬지도 못하고, 배척당하고, 티오도 못 받고. 그래서 저놈도 그때 외상은 포기 하려고 했죠. 떠난 그 선배한테 배신감도 느꼈었고.. 원래 간담췌가 전공이니까. 간담 췌 파트로 가려고, 그런데 자리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다시 외상을 할 수밖에 없 었죠. 떠밀리듯이. ” “ ..... ” “ 뭐, 다행히도 여기 해운대에 세중병원이 생기면서, 정교수님이 다시 잠깐 외과 과장 으로 임명됐고, 그 덕에 저 녀석도 외과에서 외상전문의로 자리하나 얻을 수 있었고, 나하고도 여기서 다시 만나고 그랬는데, 한 3년동안.. 철저하게 혼자였어요. 외과 내에 서 온갖 욕 다 얻어먹으면서 혼자 버텨보다가 무리해서 수술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점점 사람들하고 관계만 안 좋아지고. 뭐 그러다가 힘이 없으니까 몰려가지고 외과에 서 쫓겨났었는데, 그때 마침 정부에서 지역마다 특성화센터 세워준다고 발표가 나고, 정교수님이 이때다 싶어서 외상전문의를 제대로 키워야 한다고 미국으로 외상연수 보 내고.. 그러고 1년반 만에 다시 돌아왔죠. 그러고 몇 달 있다가 신선생도 들어오고. 트 라우마센터도 자리 잡아가는 듯 했고.. 하지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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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또 다시 예전처럼, 쫓겨날 위기에 처해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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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짧은 정적. 한구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해 흔들리다가 이내 동그랗게 커지는 은아의 두 눈. 반면, 너무나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애꿎은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는 한구.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 ... 미안해요, 사실 그일 때문에 보자고 한 거 에요. 아마 최교수가 말 안한 것 같은 데.. 트라우마센터, 지금 좀 위기에요. 잘못하면 지원이 끊길지도 모르고, 아니면.. 센 터가 없어질지도 몰라요. ” “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센터가 없어지다니?! ”

역시나 매우 놀라는 표정의 은아. 자신이 은아에게 직접 이런 얘길 하긴 부담스럽지만, 인혁을 위해서라도 외상코디네이터인 그녀가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계속 말을 이어니가는 한구.

“ 지금은 아니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조만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죠. 아무래도 신 선생이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말해주는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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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깐만요.. 설마, 그 기사하나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 “ 아니에요. ” “ 그럼..! 뭐가 문젠데요..? 왜 우리 센터가 없어져야 하는데요?! ” “ 뭐.. 다른 문제가 있겠어요. 적자 문제도 그렇고.. 중환자실, 수술실 문제도 그렇고.. ”

일단은 직접적인 사실만 얘기하는 한구.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점점 일그러지며 변하는 은아의 표정 외상센터가 없어질 수 있다니.. 지금껏 얼마나 고생하며 유지해왔는데, 교수님은 2넌 동안 이틀도 쉬지 않으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해 왔는데..! 나는 가족이랑 연락도 한번 못하고 사생활도 하나 없이 일하면서 그렇게 지켜온 트라우마센터인데..! 게다가 그놈의 수술실, 중환자실..! 이젠 정말 그녀도 지긋지긋 할 정도였다. 환자가 들어올 때마다 중환자실 한번 구하려고 이리뛰고 저리뛰고 사방팔방 아쉬운 소리하고.. 아니, 그런 건 이제 상관없다 치더라도,. 바로 그 중환자실 때문에 황과장에게 뺨까지 맞았던 인혁이 떠오르자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는 은아.

“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하, 교수님이 잠도 안자고 집에도 못 들어가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하, 환자들 한번 살려보겠다고 아파도 쉬지도 못하고..!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뺨까지 때리더니!! ” “ ....!!... 아, 저기.. 일단, 진정하고.. 신선생, 커피라도 마시면서 잠깐 진, 진정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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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소리로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어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면서도, 일단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한구. 그러자 순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인혁이 아닌 한구라는 사실을 자각한 은아. 그의 말대로 진정하기 위해 커피를 뚜껑채로 열어 마시며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참아 보려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은아를 보며 더 미안해지는 한구. 슬쩍 은아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가 조금 화를 가라앉힌 듯 하자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 ... 저기.. 신선생, 지금까지 최교수랑 둘이서 고생했던거, 트라우마센터가 신선생 덕 분에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잘 버텨온 거,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그런데, 그렇 게 감정적으로 나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센터 적자 문제.. 하루 이틀 나 온 얘기 아닌 거는 신선생도 알고 있죠? ” “ 하.. 네. ” “ 뭐, 사실, 자금도 자금이지만, 중환자실하고 수술실도 마찬가지고.. 다른 과 교수들 불만이 하루 이틀 쌓인 게 아닌 것도 아마 알거에요. 외상환자 들어온다고 자기 과 수술스케줄이 갑자기 밀리고, 환자들한테는 좋은 소리 못 듣고, 각과에 인력도 딸리는 데, 외상환자 들어오면 본인들도 힘들고, 중환자실도 빡빡하게 굴려야 되고.. 그런 것 도 문제죠. 하루 이틀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벌써 2년동안 그러고 있으니 다들 참고 있 기가 어려운거지. 그렇다고 저 놈이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교수들하고 친하거 나 융통성 있는 스타일도 아니니까. ” “ 그게.. 왜 우리 잘못이에요..? 무조건 정규수술이 중요한건 아니잖아요..! 저희도 환 자살리고 수술해야되잖아요..! ”

“ .... 외상수술은, 돈이 안 되잖아요.. 아까 말했던 그 기사문제.. 그 기사는 별거 아니 지만, 힘 있는 교수들이 그 기사를 빌미로 외상센터의 모든 문제를 걸고넘어지고 있 어요. 수술실문제, 중환자실문제, 외상티오문제, 응급 콜, 병원 내 위계질서...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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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돈이에요. 자금 문제.. 그래서 나온 얘기 중하나가 트라우마센터를 없 애자는 얘기였고, 다른 하나는 센터를 갑자기 없앨 수는 없으니까. 센터의 지원을 줄 이자는 얘기였고.. "

“ 아니, 그래도 이건..!! 하.. 말이.. 안 되잖아요.. ”

대답은 않고 한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은아. 그러나, 결국 화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분통을 터트리다가 무언가 생각나서 말끝을 흐린다. 적자.. 제일 어렵고 심각한 문제.. 지금까지 트라우마센터를 운영해오면서 가장 큰 걸림돌이 적자였다. 지금까지 수술이야 응급실에서 하면 됐었고 중환자실이야 자리가 빌 때까지 회복실에 두거나 했었지만, 적자는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규모가 큰 만큼 병원의 수익이 우선시되는 대형병원. 병원 원무과나 QI실에서 수시로 전화를 해오며 압박을 하다못해 각과마다 수익이 얼마나 났는지 점수나 순위를 매기기까지 했었다. 물론, 당연히 트라우마센터가 속한과는 늘 꼴찌였고, 그렇기에 과장들에게 트라우마센터는 늘 기피의 대상이자 미움에 대상이었다. 그걸 잘 아는 한구와 은아 이기에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그때, 조심스럽게 그 침묵을 깨는 한구.

“ ... 신선생도 이미 알겠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말이 되요. ” “ .... ” "... 뭐, 만약에 외상센터사업이 계속 진행된다는 희망이라도 있으면 괜찮겠지만, 신선 생말대로 외상센터도 불투명하다면서요. 다들 정부지원이 없으면 더 이상 유지시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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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 “ .... ” " 그리고, 며칠 전 수술만 해도 최교수가 참았어야 하는데.. 당분간은 그 기사 때문에 응급실 수술도 하지 말고, 낮에도 환자 받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또 환자를 받 아버리니까.. 다른 교수들은 최교수를 안 좋게 볼 수밖에 없죠. 물론 그 기사가 최교 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걸 떠나서.. 문제가 하나 더 있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잠시 머뭇거리며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어렵기 말문을 여는 한구.

“ .... 미안한데, 그래서 앞으로는 내가 외상환자 수술실 못 구해줄지도 몰라요. ” “ 네..? 과장님..!! ” “ 마취과가 수술장 전체를 관리해야 한다는 건 신선생도 알고 있을 거에요. 늘 정해 진 스케줄이 있는데, 외상환자를 받으려면 다른 수술이 밀려야 하니까. 마취과가 한 교수에게 혜택이니 특혜니 말도 많고, 이런 상황에서 마취과는 균형을 유지해야 하니 까. 어쩔 수가 없죠. 잘못하면 수술실을 관리감독하는 권한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까.. ” “ ... 하.. 그래도.. ” “ 그래서 오늘 신선생을 부른 거에요. 앞으론 나도 도와주기가 어려우니까.. ” “ ..... ” “ 아마, 지금 상황에서 또 문제생기고.. 중환자실도 없는데 비집고 들어가고 이러면, 이번엔 아마 과장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에요. 그런데, 최교수는.. 어떤 상황이 있어도 환자를 받으려고 할테니까.. 그러니까 당분간만이라도 잠잠해질 때까지 신선생이 최교 수를 잘 잡아줘야한다는 거지.. 신선생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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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한구. 그러자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은아. 그녀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구였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런 얘기를 인혁에게 직접 하면 좋겠지만, 외상센터보다 환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그에게는 통하지 않을 얘기들.. 그리고 2년동안 외상센터를 끔찍이 생각하며 관리해 온 은아라면 분명 자신의 말을 현명하게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한구. 게다가 아직 그녀가 들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기에 그는 다시 은아의 표정을 살피며 조금 단호하게 입을 연다.

“ 신선생, 이번 고비 정말 잘 넘겨야되요. ” “ ..... ” “ 아마, 센터가 바로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 그런데, 지원이 줄어드는 건 지금 상황에선 시간문제에요.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 면.. ”

여전히 한구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커피 잔만 쳐다보고 있는 은아. 그런 그녀를 향해 어렵게 입을 여는 한구.

“ ... 제일먼저 인력부터 줄여야 할 거에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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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구. 그녀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흔들렸다. 한구가 하고 있는 말의 뜻을 모두 알아들은 은아. 이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 .... 그럼, 제가.. 잘릴 수도 있는 거네요. ” “ 예.. 그렇죠.. 그렇게 되면 최교수는 또 혼자서 외상환자들을 봐야 할 거고.. 당연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 혼자서 버티다가.. ” “ .... 결국엔 교수님이 스스로 그만두게 되겠네요.. ”

은아의 말끝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 없이 한숨을 쉬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는 한구. 결국엔.. 이거였다. 그들은 인혁이 그만두길 바라고 있었다. 센터가 적자가 많아지고 자꾸 거치적거리고 그들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니까 없애려는데 인혁의 존재가 그 일에 걸림돌로 작용하니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 그가 먼저 포기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외상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인혁은 당연히 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젠 너무 분하고 답답하고 화가 나서 이젠 소리치며 화를 낼 수도 없는 은아. 그저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다가 이내 마른침을 삼키고는 다시 따지듯 말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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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어요? 사람 살리겠다는 게.. 무슨 죄 에요? 대형병원에서 교통사고 환자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열심히 수술한 게 무슨 죄라고! 어떻게 병원이 이럴 수가 있어요! 병원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 “ 그렇죠.. 병원이 이러면 안 되죠.. ” “ 교수님은 어떻게 이런 데서.. 하, 진짜.. ” “ 문제는.. 다른 병원도 똑같아요. 지금 대한민국에 이 적자를 감당하면서 외상센터를 운영하는 병원이 몇 개나 있을 거 같아요. 정부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 “ ..... ” “ 그리고 뭐...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하고 싶은데.. 저 연차에 어 딜 들어가요. 다른 병원도 교수티오 없긴 마찬가진데.. 게다가 벌써 외상외과경력만 7 년이니까. 가려면 외상센터가 있는 곳으로 가야되는데.. 다른 나라로 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죠.. 뭐, 그렇다고 딱히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어서 개인병 원을 차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진 거라곤 7년동안 외상환자 치료했던 경험하고, 신선생이랑 힘들게 만들어놓은 저 센터뿐인데.. 저 트라우마센터가 잘못되면 그것도 다 소용없게 되는 거죠. “

한구의 말에 말문이 막히는 은아. 너무나도 답답하고 억울해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듯 했다. 한구는 잠시동안 그녀의 말을 기다려주다가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진지하게 입을 연다.

“ 신선생.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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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가.. 수술만 잘하고 환자만 잘 보면 되는 게 아니에요. ”

평소 은아가 보지 못했던 한구의 모습. 말을 이어가는 그의 표정이 꽤 단호하게 변한다.

“ 실적도 좋아야하고, 명분도 있어야하고, 세력도 있어야 하고, 권력도 있고.. 연줄도 있어야 하고.. 그럴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가끔은 굽힐 줄도 알아야 하고.. ” “ .... ” “ .... 세상이 그래요. 누구든지 힘이 있어야지 살아남고 버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최 교수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냥 저 트라우마센터가 다에요. 내말 무슨 말인 지 알겠어요..? ”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은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한구를 바라보는 은아. 그런 그녀를 보며 조금은 냉정하게 입을 여는 한구.

“ .... 이게.. 현실이에요.. ” “ ... ”

한구의 말을 듣고서 두려운 듯 떨리는 은아의 눈빛. 그러자 너무도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며 입을 여는 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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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기, 난 수술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

그러고선 은아의 어깨를 한번 토닥여준 뒤 천천히 회의실을 나가는 한구. 충격에 빠져서 혼자 남겨진 채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은아. 머릿속이 온통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센터가 없어질 수도 있다니.. 지원이 끊어질 수도 있다니.. 지금껏 2년 동안 고생해온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 벌떡- ]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은아. 그러고선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더니 이내 회의실을 급하게 빠져나간다. 잠시 후, 중환자실 앞, 응급실 2층에 있는 회의실에서부터 순식간에 중환자실 앞까지 달려온 은아.

“ 헉.. 헉..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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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까지 이렇게 급하게 뛰어왔는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다만, 머릿속에 그가 떠오르자마자 빨리 이곳으로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서둘러 중환자실 입구로 들어가서 그를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그녀. 그때, 저쪽 한구석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열심히 차트와 모니터를 번갈아보며 환자 상태를 체크하는 그.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참동안 말없이 그 환자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차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런 인혁의 모습을 보고 뭔가 가슴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듯하여 서둘러 중환자실을 빠져나오는 은아.

“ 하, 진짜... 하, ”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그는 정말 환자밖에 모르는 의사였다. 자기 몸 하나 돌 볼 생각도 못하고 오직 환자만 생각하는 그런 의사였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지는 못할망정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센터를 없앤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그녀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무언가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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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으니 자꾸 허탈한 웃음만 새어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만큼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꽉 주먹을 쥐고 있는 은아. 그런데 그때, 누군가 중환자실에서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흠칫 놀라며 문 쪽을 바라보는데, 다행히도 인혁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일단 사무실로 가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 달칵- 탁- 스윽- ]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문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쭈그려 앉는 은아. 그러고선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눈을 감는다. 그리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는 그녀. 이내 다시 눈을 뜨고 땅에 꽂혀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데, 오늘따라 더 초라해 보이는 창고 같은 사무실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 하, .... 하, 진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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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기가 찼다. 열심히 일을 안 한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환자를 살리려 애썼는데 도대체 왜 이런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건지.. 이 구석진 곳에서 일해 오면서 병원에 그리 큰 걸 바랬던 건 아니었다. 적자문제도 알고 있었고, 수술실과 중환자실이 부족하다는 것도 마취과나 수술간호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뭔가를 바랄래야 바랄 수 도 없었다. 그저 이 작은 트라우마센터.. 이 센터에서 외상센터 발표가 나길 기다리면서 갈 곳 없는 외상 환자들을 열심히 돌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했다. 당연히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작 외상 코디네이터 한명, 그리고 이 창고 같은 트라우마센터 하나도.. 유지시켜주지 못하겠다니.. 센터를 없애려고 한다니.. 그리고 그를 밀어내려 한다니.. 은아는 한구의 말이 떠올랐다.

/ 그리고, 며칠 전 수술만 해도 최교수가 참았어야 하는데.. 당분간은 그 기사 때문에 응급실 수술도 하지 말고, 낮에도 환자 받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또 환자를 받 아버리니까.... / / 아마, 지금 상황에서 또 문제생기고.. 중환자실도 없는데 비집고 들어가고 이러면, 이번엔 아마 과장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에요. 그런데, 최교수는.. 어떤 상황이 있어도 환자를 받으려고 할테니까.. /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환자를 보며 미소 짓던 인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히 아까 보고 있던 그 환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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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센터가 없어질 걸 알면서도 기어코 수술하고야 만 그 환자.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는 인혁의 말.

/ 아니에요. 수술실, 중환자실 없으면 환자 받지 말라는 거 뭐, 한두 번도 아니었고.. 그냥 하던 데로 하면 되요. 뭐, 어제도 환자 받았고.. 그러니까 기사문제는.. 이 정도로 얘기 합시다. 그냥 그렇게 알아두면 되요. / / 위에서는 응급실에서 수술하지 말고, 수술실, 중환자실 자리 없으면 받지 말라고 했 는데, 수술실 중환자실, 억지로 만들어서 받았어요. 뭐, 지금까지 그렇게 수술했잖아 요. 응급실수술만 당분간만 조심하면 되지 뭐. /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이건 단순히 응급실 수술이 금지된 정도가 아니었다. 한구의 말처럼 이대로라면 정말 센터가 없어질 수도 있는 일..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환자를 받는다면 센터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대체 왜.. 이번에도 환자를 위해서..? 아무리 환자의 목숨이 중요하다지만 7년 아니, 10년 넘게 내내 고생해서 간신히 만들어온 센터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데.. 그는 대체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그가 사생활도 모두 포기하고 다른 남들처럼 자리욕심하나 없이 오로지 환자만 돌보고, 환자만 생각하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암만 그렇다 해도 어떻게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것 까지 포기하면서.. 환자를 살리려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제는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병원을 원망하다 못해 지독하고 답답할 정도로 환자만 생각하는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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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원망스러워 질 것 같은 그녀. 그때, 문득 며칠 전 인혁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 ...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난 괜찮으니까... /

‘ 그래서 그때 나한테 그런 말을.. ’

[ 벌떡- ]

그의 말이 생각나자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녀. 이 상황에서.. 나보고 그냥 도망가라는 말일까.. 그리고 괜찮다니.. 괜찮다니.. 나는 이렇게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니.. 아니 분명, 그도 괜찮을 리가 없다. 아무리 이런 일을 많이 겪어왔고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기며 버텨왔던 그였지만 이런 일에 괜찮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열흘 만에 병원에 돌아왔던 날, 그에게서 풍겼던 그 짙은 담배냄새를 기억한다. 웬만큼 힘들지 않으면 담배에 손대지 않는 그. 그저 응급실 수술을 못하게 돼서가 아니라 분명 이 일 때문에 혼자 괴로워했을 그였다.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 하면서도 또 혼자 모든 걸 감당하고 해결하려고 바보같이 혼자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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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까지.. 하.. ’

그는 언제부터 이 사실을 알았을까..? 대체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보다 나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도대체 열흘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던..

“ 하.. ”

그 순간,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간이침대위에 천천히 주저앉는 그녀. 변명 같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곁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이렇게 화가 나는 이유는.. 외상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으면서 이런 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못 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심각한 일을 알지도 못하고 그저 그만둘 생각만 했다는 것.. 그녀는 며칠 동안 계속 그만둘 일을 고민하느라 센터일은 신경 쓰지도 않고 멍하니 시간을 보냈던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일을 그만두라고 권하던 동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는 그녀.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당분간만이라도 잠잠해질 때까지 신선생이 최교수를 잘 잡아줘야한다는 거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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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천천히 눈을 감는 그녀. 눈을 감고 어둠속에 갇히고 나니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던 그의 모습이 또 다시 보이는듯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조차도 그런 미소를 지을 수가 있는 걸까. 만약 이곳을 떠난다면..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그녀의 눈앞에 혼자 남겨질 인혁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렇게 혼자서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엔 쫓겨나듯 이 곳을 떠날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다시 눈을 뜨고,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자 바로 눈앞에 책상위에 넘어져있는 모형헬기가 보였다. 괴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그 모형헬기를 집어 드는 은아. 그는 이런 외상센터를 만들고 싶어 했다. 헬기가 환자를 병원까지 실어 날라 오고 의사는 대기하고 있다가 신속히 환자를 치료하고 자리가 없어서.. 수술할 의사가 없어서.. 힘없이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없는 그런 외상센터. 그리고 나는 그런 외상센터의 코디네이터가 되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그 외상센터에서 일하지는 못하더라도 훗날 그런 외상센터가 생길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까지 미루며 지난 2년 동안 이곳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이 일에만 미쳐있는 듯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외상센터가 없어진다면.. 이렇게 끝나버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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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껏 이곳에 남아있던 이유. 결혼을 미루면서까지 이 일을 했던 이유.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아직 나에겐 1년이란 시간이 남아있다. 물론, 그 후엔 떠나야 하겠지만.. 아니, 그때까지도 센터가 이런 상황이라면..

1년을 또 남아 있어봤자..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건 그때도 마찬가지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힘없이 센터가 없어져야 한다면..

/ .... 세상이 그래요..... 이게.. 현실이에요.. 이게.. 현실이에요.... /

눈앞이 깜깜해져왔다. 아무리 어떻게 노력해도 안 되는 것.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두려움. 그는.. 어떻게 이런 두려움을 견뎌왔던 걸까. 어떻게 이런 일들을 참아왔던 걸까. 지금 이 순간, 인혁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가 미치도록 안쓰러워지는 은아. 그런데 그때, ※ 추천브금 : 10cm - 어느 날 (가사有) [ 달칵- ]

중환자실에서의 할일을 마치고 사무실문을 안으로 들어오는 인혁. 간이침대에 앉아서 헬기를 손에 들고 있는 은아와 눈이 마주치고 조금 멈칫 한다. 한편, 인혁이 들어오자 헬기를 내려놓고선 말없이 그를 보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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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평소처럼 오셨어요- 라는 인사도 없이 그녀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분명 할 말이 있는 눈빛이었지만 그녀는 계속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보고 있기만 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을 피해버리며 책상 앞으로 가는 그. 결국, 때가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그녀의 말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일부로 다른 얘기를 꺼내는 인혁.

“ ... 저기, 내일 컨퍼런스는 집에서 출발할거니까,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할게요. 한참동 안 못 갔더니 가져갈 짐도 많네. 옷도 좀 챙겨야되고.. ” “ ..... ” “ 아, 그리고 그, 감염 심했던 환자. 오늘 보니까 감염수치가 조금 떨어졌네. 요 며칠 신경써서 들여다보고 항생제를 좀 강한 걸로 바꿨더니 효과가 있네. 허허.. 뭐, 그래도 안심할 단계는 아니니까. 신선생이 잘 좀 신경써줘요. ” “ ..... ” “ 아,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강의 들어가야 되니까.. ” “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

조금은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멈칫하는 인혁. 이내 파일을 정리하다말고 고개를 드는데 은아가 자신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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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젠 피할 수가 없는 일임을 깨닫고 이번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는 그.

“ .. 뭐가. ” “ .... ”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는 은아.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며 자신이 잡고 있던 모형헬기를 바라본다. 그러다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간이침대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그녀.

[ 드륵- ]

그러고선 들고 있던 헬기를 책상에 내려놓더니 인혁을 향해 살짝 굳은 얼굴로 입을 연다.

“ 배고프실텐데 괜찮으시냐구요.. ” “ .... ” “ 퇴근하시기전에 저랑 같이 밥 먹으러 가실래요..? 아직 구내식당 열었을 텐데. ” “ .... ”

359

그러나 대답이 없는 인혁. 이 여자가 지금 뭐하자는 건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못하는 건가..? 그런데 그때, 암만 기다려도 인혁이 대답이 없자 그의 손에 들려있던 파일을 뺏더니 의자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들어 대신 넣어주며 입을 여는 은아.

“ 싫으면 마시구요.. 그럼, 집에 가서 드세요. 전 간호쌤들이랑 먹으면 되니까. 근데, 이거 챙겨 가실 거 맞죠? ” “ .. 줘요. 그건 내가 챙길테니까. ” “ 네, 여기.. 근데, 집에 가면 뭐, 드실거나 있으세요? 잘 들어가지도 않으셔서 별로 없을 거 같은데, 그냥 여기서 드시고 가시지.. ” “ ... 같이 먹고 옵시다. 가요. ”

그리고선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먼저 조용히 사무실을 나가는 인혁.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짧은 숨을 내쉬고는 이내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가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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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구내 식당,

서로 마주앉았지만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저 말도 없이 묵묵히 밥만 먹고 있는 두 사람.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른다. 그러다 그 침묵을 먼저 깨고 입을 여는 은아.

“ 오늘... 식사는 하셨어요? ” “ 아니요. ” “ 밥 좀..! 제때 드시라니까요.. 후... 말도 안 들으시고.. 그럼, 어제 잠은 좀 주무셨어 요? ”

그에게 터트려야 하는 화가 아닌데 은아는 자꾸 그에게 화가 났다.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오히려 이 곳에서 내몰려고만 하는데, 앞으로 챙겨줄 사람도 없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미련하게 자기 몸은 돌보지도 않는지.. 왜 이렇게 까지 환자만 생각하는 건지.. 자꾸만 화가 났다. 나는 그처럼 그럴 수가 없어서 더 화가 났다.

“ .... ” “ 오늘 들어가시면, 푹 주무세요. 내일 전남까지 운전하고 가시려면 자둬야죠.. 또 졸 음운전 하지 마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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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았어요. ”

왠일로 그녀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인혁. 다시 둘 사이에 이어지는 침묵.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밥만 먹는 두 사람. 그러다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다시 그를 탓하듯 입을 여는 은아.

“ 그러고 보니까. 저희 구내식당에서 같이 먹은 적은 한 번도 없네요. ” “ .... ” “ 어떻게 2년 동안 한 번을 같이 못 오노.. ” “ .. 뭐, 여기는 일찍 닫으니까.. 환자 보다보면, 매일 밥시간 놓치기 일쑤였지. ”

역시나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으며 대답을 해주는 그. 그러자 또다시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은아.

“ ...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 “ ... 뭐를. ”

인혁은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멈칫하며 고개를 든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않는 그녀.

362

“ 우리센터가.. 지원이 끊길 수도 있고.. 그리고 잘못하면 없어질 수도 있다고.. ” “ .... ”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던 손은 멈췄지만 여전히 계속 식판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 인혁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수저를 들며 대답한다.

“ ..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일 아니에요. 아직 결정된 것도 없는 일이고. ” “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에요..! 센터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데! ” “ .... ”

별일 아니라는 인혁의 말에 욱해서 소리치며 그를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는 은아. 인혁 역시 다시 손을 멈춘 채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은아는 짧은 정적 뒤에 다시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듯 입을 연다.

“ 죄송해요. 큰소리 내서... 그런데, 교수님.. ” “ 예. ” “ 그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

363

그러자 다시 앞에 있는 국을 퍼먹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그녀를 안심시키는 인혁.

“ 별일 아니라니까요.. 우리 센터 문제 삼았던 게, 뭐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적자든 수술실이든, 중환자실이든 문제되던 것도 한두 번 아니었잖아요. ” “ .... ” “ 그리고 이 센터 시작할 때, 3년은 유지시켜주기로 한 거였다고.. 처음에 얘기 해줬 잖아요. 아직 3년 되려면 멀었어요. 그러니까.. 어서 밥이나 먹읍시다. ”

그렇게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말을 마치고 계속 밥만 열심히 우걱우걱 씹어대는 그. 이 것 때문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그녀가 센터 사정을 알아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더 괴로워지는 인혁. 사실, 말로는 이렇게 그녀를 안심시키듯 말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흔들리고 있는 그녀를 당장이라도 남아달라고 붙잡고 싶은 그였다. 센터가 위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보자고.. 하지만 계속 힘들어 할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이니까.. 이런 일을 외면하지 못할 사람이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가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 또다시 그녀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도 없으면서 이대로 발목을 붙잡을 순 없는 노릇이기에 그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은아.

364

그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괜찮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모를 리 없는 그녀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지 말라고 제발 혼자서만 감당하려 하지 말라고 예전처럼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다. 그에게 미안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인혁을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애써 불안함을 감추려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그녀.

“ 그래도.. 교수님, 만약에.. 외상센터발표가 너무 늦게 나서 병원에서 못 기다리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거에요..? ” “ ... 뭘 어떻게 해요. ” “ 혹시 만약에.. 트라우마센터가.. 잘못 되서 없어진다거나.. 그러면.. ” “ ..... ”

그녀의 말에 침묵하는 인혁. 예전 같았다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어떻게든 버텨 보자고 이겨내보자고.. 그렇게 위로해주고 용기를 줬을 사람이었다. 눈앞에 자신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 그리고 불안함을 애써 감추려는 그녀의 목소리. 그는 그 눈빛과 목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기에 그녀의 그 모습들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그. 그런 인혁의 마음을 모르고 다시 입을 여는 은아.

365

“ 교수님.. 혹시 모르니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까. 환자 받는 것도 좀 줄 이면서 조금 기다렸다가..

”

“ 언제까지 기다려요. ” “ ..... ” “ 환자들 갈데 못 찾고 헤매는 거 뻔히 알면서, 언제까지 기다릴까요. ” “ ..... ”

아까와는 다르게 고집스러워진 그의 목소리. 낮게 깔린 목소리로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듯, 무섭게 굳어져 있는 그의 표정.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로 고개를 숙이는 은아.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잠시 멈칫 하다가 이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여는 인혁.

“ 그냥.. 하던 데로 합시다. ” “ .. 그러다가요.. 정말 센터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때는요! ” “ ......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 지금껏 하던 데로 나는 수 술하고, 신선생은 센터 잘 운영하고, 먼저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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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다르게 자꾸만 포기할 듯이 체념적으로 말하는 그녀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던 인혁. 그는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속마음을 얘기해버린다. 하지만, 말하는 동시에 속으로 후회가 되는 그. 내가 지금 떠나려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인혁은 목소리를 더 줄이고 말끝을 얼버무리며 들릴 듯 말듯 하게 입을 연다.

” ... 그러면 되지.. 뭐가 걱정이에요.. ”

그러다 그녀에게 괜한 말을 했다 싶어서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내리깔고 다시 밥을 먹는 척 다시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는 그.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향해 들릴 듯 말듯 다시 입을 연다.

“ .. 미안해요. ”

그의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말문이 또 막힌 은아. 그녀는 그의 미안하다는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왜 그가 미안해야 하는 건지.. 그게 더 서러워진다. 하지만, 당연한 게 통하지 않는 현실. 더 이상 이런 방법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게다가.. 게다가 정말 내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그가 혼자 이 센터를 꾸려 나갈 수 있을까.. 한참동안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여는 그녀. 그에게 더 지독한 현실을 말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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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약에 제가 없어지면요..? ” “ ..... ”

아주 조심스레 말을 뱉어놓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표정을 살피는 그녀.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놀라지 않는 그. 그는 마치, 미리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전혀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이 더 당황하는 은아.

“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지원이 줄어들어서 코디네이터 자리가 없어진다거나.. 그 것도 아니면.. ”

하지만, 불안한 듯 간신히 이어가는 그녀의 말을 단박에 자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는 인혁.

“ 그래도 혼자서 버텨봐야죠. 그러다 안 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고. ”

그러고는 다시 묵묵히 밥만 퍼먹는 인혁.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흔들리는 은아의 눈동자. 차라리.. 붙잡는다면 모르겠지만.. 마치 모든 걸 체념한 채로 떠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떠나보내려고 하는 그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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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프게 다가온다. 내가 떠난다고 해도.. 붙잡지 않을 사람. 그녀는 수저를 놓아 버린 채로 밥도 먹지 못하고 한참동안 아프게 그를 바라본다. 그러다 이내 다시 놓아버렸던 수저를 들고 다시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하는 은아. 그리고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서로 아무 얘기도 꺼내지 않는 두 사람. 한 시간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 달칵 탁- ]

은아는 혼자서 퇴근을 하겠다는 그의 뒤를 쫓아가서 아무 말 없이 그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그를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사무실 문 앞에 기대서는 그녀.

/ 그래도 혼자서 버텨봐야죠. 그러다 안 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고. /

어쩔 수 없다.. 라는 인혁의 말. 그 말이 안타까움을 넘어서 아프게 가슴을 찔러온다. 그녀는 문득 한구가 해준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힘들게 외상을 시작했던 지난 7년 동안 미운오리새끼마냥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배척당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몇 번씩이나 쫓겨날 뻔 했다던.. 그의 처절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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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가 굳게 믿고 의지했었지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를 떠났다는 그 선배라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났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가 배신감을 느끼며 외상을 포기하려 했었다는 이야기. 그 많은 사람을 보내면서 수없이 상처받고 좌절하고 체념했을 그.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혼자 버텨내는 것에 익숙해져서 다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 했을 그. 그래서 이제는 누구도 붙잡지 않는 사람.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사람. 그런 그가.. 나만큼은.. 믿고 있다. 내가 이 센터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과. 우리가 같이 했던 약속.. 센터를 만들어 보자는 그 약속을.. 그는 믿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꾸 밀어내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믿고 있다. 그 마음이 분명 느껴졌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 분명, 내입으로 그에게 말했던 약속.. 그때 나는 분명.. 떠나려는 그를 붙잡으며 말했었다. 이젠 이 일이 내 꿈이라고.. 같이 헬기를 갖춘 센터 한번 만들어보자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굴욕적으로 사무실에서 쫓겨나고 그 현실을 참을 수 없어서 병원을 떠나려던 그를 내가 그렇게 붙잡았었다. 그랬기에 그는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교수로써의 체면, 자존심 다 접어 버리고 이 창고 같은 사무실로 돌아왔었다. 그렇게 그를 붙잡아 놓고, 그래놓고.. 지금 이곳을 떠나려 한다니.. 이대로 떠나버리면 그가 무너질 것을 뻔히 알면서 이곳을 외면하고 떠나버리려 한다니.. 내가 떠나면.. 그는 또다시 이 꿈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까. 그렇게 무너져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거 아닐까. 차마 이제 와서 도저히 그를, 그의 믿음을, 이 센터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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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윽- 툭- ]

지난 7년동안 묵묵히 이곳을 지켜온 그. 혼자서 버티고 깨지고 온갖 설움을 받으면서도 이 중증 외상이란 이 분야를 끝까지 지켜온 그. 그건 최인혁교수님.. 그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런 그가 없다면.. 더 이상 누구도 이 일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이곳에서 외상센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꼭 이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가 남아있기 위해선 이 센터가 필요하다. 이제 그에겐.. 힘이 필요하다. 결코.. 이대로 둘 순 없다. 절대 이대로 그만둘 순 없다. 꼭 만들고 싶던 외상센터, 나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이 곳, 외상코디네이터로의 내 모습을 알게 해 준 이곳, 그만둘 땐 그만두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여유가 있다. 1년.. 그 후엔 떠나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에겐 믿고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힘이 되어줄 것이 필요하다.

/ ... 신선생 ... 의사가.. 수술만 잘하고 환자만 잘 보면 되는 게 아니에요. 실적도 좋 아야하고, 명분도 있어야하고, 세력도 있어야 하고, 권력도 있고.. 연줄도 있어야 하 고.. 그럴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가끔은 굽힐 줄도 알아야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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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지만.. 아무리 인정하기 싫더라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받아들이고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분명 나는 언젠간 떠나야 한다. 그리고 다른 코디네이터가 들어오더라도 어차피 계약직인 이상..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사람은 언젠간 떠나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떠나더라도 계속 그를 지탱해줄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외상센터가 필요하다. 그에게 힘을 만들어 줄 수 있는..

/ .... 세상이 그래요. 누구든지 힘이 있어야지 살아남고 버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최 교수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냥 저 트라우마센터가 다에요. 내말 무슨 말인 지 알겠어요..? /

이 외상센터.. 이 헬기를 갖춘 외상센터만 있다면 더 이상 이런 부당한대우를 받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상센터만 있다면 환자도 살릴 수 있고 이 외상센터만 있다면.. 지금껏 우리가 함께해온 고생들도.. 그의 꿈도.. 나의 꿈도..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을 때까지.. 외상센터가 생길 수 있다는 희망을 되찾을 때까지.. 제발..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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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방황하는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순간, 단호하게 변하는 그녀의 눈동자.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다음날 아침, 해운대 세중병원 응급실,

[ 삐-- 뽀-- 삐-- 뽀-- ]

조용하던 응급실에 갑자기 울려 퍼진 구급차소리. 곧, 소방대원 두 명이 베드를 급하게 끌고 들어온다. 베드위에는 출혈량이 상당한 젊은 남자 환자가 누워있고, 도형은 놀란 얼굴로 소방대원에게 달려간다.

“ 갑자기 무슨 환잡니까? 연락도 없이!! ” “ 오토바이사고 환자입니다! 다른 병원으로 가다가! 환자 의식 갑자기 처지고, 혈압도 갑자기 떨어져서! 일단 이리로 데려왔습니다! 좀 받아줄 수 있습니까?! ” “ 아무리 그래도 환자를 이렇게 갑자기 데려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수술실이 랑 중환자실 자리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 “ 그래도! 여기는 수술할 의사 분도 계시잖아요..! 환자가 구급차에서 죽는 것보다 낫 지 않습니까..! ” “ 아이! 그래도..!! ” “ 지금 환자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그러러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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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우짜노..! 지금 최교수님도 안계신데..! ” “ 빨리요! 지금 현장에 다른 환자들도 있어서 저희 빨리 가봐야 합니다!! ” “ 아, 일.. 일단은! 소생실로! ”

결국, 소생실로 옮겨지는 환자. 도형은 허둥지둥 서둘러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더니 주변에 있는 간호사들과 인턴들에게 소리친다.

“ 최 간호사님! 라인잡고, 바이탈 체크해주세요! 니는 피검사 보내고, 니는 기도삽관해 라! 그, 그리고.. 아! 엑스레이! 저기, 김간호사님! 엑스레이 좀 불러주시구요! 그리고 CT는.. 잠깐만.. ” “ 김도형 쌤, 뭐하세요? ” “ 아니, 출혈이 너무 많아서 CT찍을 시간이 없을 거 같은데? 아, 이거 우짜지..? 아 잇, 모.. 모르겠다. 일단, CT도 찍어야 하니까! CT실에도 연락하고!! 니는 외과에 콜해 서 당직선생 내려오라케라! 그, 정형외과랑 신경외과에도 콜하고! 마취과에 연락해서 수술실 있는지 알아보고! ”

“ 예.. 예!!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는 도형. 응급실 레지던트 생활 2년을 채워가고 있었지만, 그동안은 병원에 늘 인혁이 있었기에 외상환자를 직접 받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막상 그 혼자서 있는 상황에서 이런 초 응급환자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잘 안서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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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동안 인혁의 옆에서 봐왔던 게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초 응급환자는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 어찌저찌 응급한 처치들을 신속히 끝내놓고 환자를 CT실로 보낸 후, 다른 과가 내려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잠시 후, 도형이 검사결과를 확인하는데, 간열상이 의심된다. 그래도 복부출혈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안심하는 도형. 그때, 엑스레이 사진을 찍은 인턴이 도형에게 검사결과를 보여주며 놀란 듯 말한다.

“ 선생님! 골반뼈가 좀 부서졌는데요? ” “ 뭐..?! 아, 이거 우짜노..! 정형외과 아직 이가? 빨리 내려와서 봐야 할낀데..!! 마취 과는 연락됐나? ” “ 마취과 연락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도형 쌤!! 정형외과는 당직이 시술중이라, 조금 걸릴 거라는데요?? ” “ 아유!! 응급이라 말하라니까! ” “ 그래 말 했는데도! 기다리라는데요?! ” “ 그럼, 외과는?! ” “ 외과는 전화를 아예 안 받는데요?! ” “ 우짜노, 참말로..! 안되겠다! 비켜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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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은 인턴을 밀쳐낸 후, 자신이 일일이 다시 콜을 한다. 그런데..

“ 여보세요? 아니! 연락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내려오시면 우짭니까?!! 네? 기다리 라고요? 지금 환자가 응급실에서 다 죽어 가는데!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 [ 뚝- ]

“ 여보세요?! 여보세요!! ”

하지만, 그대로 끊어져버린 전화기. 다른 과들도 아직 내려오지도 않은 상태라서 혼자서 속이 타들어가는 도형. 이번엔 외과에 콜을 해보지만, 한참 후에서야 연결된 통화에서는 마찬가지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환자가 들어오고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나고 난 후에야, 응급실로 내려온 정형외과 레지던트. 그는 환자 상태를 체크하더니 망설임없이 바로 입을 연다.

“ 저희는 이 수술 못합니다. 환자 바이탈이 이렇게 불안정한데, 어떻게 수술을 합니 까? 바로 테이블 데스인데. 그리고 지금 머리랑 배가 더 문제인거 같으니까! 외과나 신경외과에서 먼저 수술하라고 하세요. ”

그리고 바로 올라가버리는 그. 곧이어 내려온 신경와과 레지던트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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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지금 신경외과 문제로 보여요? 봐요! 딱봐도 머리에서 나는 것보다 다리에서 나는 출혈이 더 많구만! 저희는 다른 과 수술하고 혈관조영으로 막아보다가 환자 안 정되면! 그때 수술하겠습니다! 이거 잘못하면 테이블데스인데! 우리가 뭐할라꼬 그 덤 터기를 뒤집어쓰고 수술을 합니까?! ”

그러고 올라가버리는 신경와과. 두 과의 레지던트들 역시, 정형외과레지던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길 뿐이었다. 테이블데스위 위험이 있을 정도의 응급한 환자를 앞에 두고 누구하나 위험을 감수하며 수술하려 들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낀 도형. 그런 그를 재촉하는 인턴.

“ 선생님!! 마취과에서 수술 누가 할 꺼냐는데요? 누가한다고 할까요?! ” “ 아, 미치겠네! 정형외과 아니면, 외과가 먼저 해야할 거 같은데! 일단은 다시 연락해 준다고 해라! 아, 참말로! 외과는 도대체 왜 안 내려오노?!! ” “ 김도형 쌤!! 환자 혈압 계속 떨어지는데 어떻게 할까요? ” “ 에피주고! 라인하나 더 잡고! 피하나 더 달아주세요! 니 뭐하는데, 엠브 짜라! ”

다행히도 환자의 몸에 수액과 피가 공급되자 혈압이 조금 오르고 바이탈이 안정되는 듯 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서야 내려온 외과 레지던트. 도형은 외과레지던트를 보자마자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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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리 전화를 안 받노!! 콜을 몇 번이나 했는데!! ” “ 아잇! 귀청떨어지겠네! 왜 소리를 지르고.. 아, 회진 중에 과장님 옆에 계시는데 어 떻게 전화를 받나?! 보호자도 다보고 있는데, 그리고 최인혁 교수님 있을 거 아니야! 도대체 아침부터 콜을 몇 번이나..! ”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평소에는 인혁이 항상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외과에 콜해야 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래서 어쩌다 전화를 하더라도 전화를 잘 받지 않는 외과였고, 웬만하면 외과가 내려오기 전에 늘 인혁이 먼저 등장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혁이 없는 상황. 외과에서 봐줘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전화도 받지 않더니..! 책임을 떠넘기는 외과의 태도에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는 도형.

“ 야, 최인혁교수님이 안계시니까 콜을 하는 거 아이가!! 됐고! 빨리 CT나 확인해봐 라! 얼른! ”

그러자 도형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피곤하고 귀찮다는 듯 CT를 확인하는 그. 그러나 CT를 확인하고 나서 눈이 커진다.

“ 이, 간이 찢어진 거 같은데..?! 바로 수술들어가야겠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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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라니까 빨리 좀 내려오라니까! 어쨌든 수술실이랑 마취과는 어레인지 됐으니 까. 외과가 데려가라. ” “ 저기, 우짜지.. 중환자실자리가 없는데.. ” “ 중환자실 자리 없어도, 일단 회복실에 두면 되잖아! 빨리 연락해라! ” “ 아니, 그기 아니라, 간담췌 교수님이 한 분은 수술중이고, 한 분은 지금 휴가 중이 라 수술할 사람이 없다. ” “ 뭐라꼬?!! 아, 그걸 이제 얘기 해주면 우짜노! ” “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당연히 최인혁교수님 있을 줄 알았지.. 뭐, 그래도 아직 혈압 괜찮으니까! 빨리 트렌스퍼 보내면 되겠는데? ” “ 에이씨.. 인턴! 트렌스퍼 알아봐라! 얼른!! ”

곧, 트렌스퍼 되는 응급환자. 그러나 가다가 몇 분도 안되서 어레스트가 오고, 환자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그 후 CPR과 수혈로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어찌저찌 외과에서 인계를 받아 수술실로 보내졌지만, 이미 늦은 환자의 상태. 수술을 하는 도중 어레스트가 오고, 결국 환자는 사망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한바탕 뒤집어진 병원. 뒤늦게 도착한 환자의 보호자가 아들을 다시 살려내라고 난리치고 통곡을 하다가 원장실에 난입해서 보안요원들의 손에 의해 질질 끌려 나오는 일이 발생한다. 그 일로 인해 뒤숭숭해지는 병원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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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해운대 세중병원 소회의실, 보호자에게 멱살까지 잡혔던 터라 잔뜩 화가 난 상태로 과장들을 다그치는 병원장. 그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는 과장들.

“ 나과장!! 말 좀 해봐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보호자가 원 장실까지 뛰어들어오는 거에요! ” “ 면..면목이 없습니다. 원장님.. ” “ 낮에는 외상환자 안 받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 “ 저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트렌스퍼문의야 거절하면 그만이라지만, 그 래도 저희병원이 권역센터인데, 정당한 이유없이 환자를 무조건 돌려보낼 수 없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어제처럼 구급대원들이 무작정 밀고 들어올 때는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장님.. ”

그때, 병원장의 눈치를 보다가 얄밉게 끼어드는 세헌. 그런 세헌의 말에 욱하는 나과장.

“ 아이.. 그래도 거, 수술할 의사가 없으면 다른 병원으로 보냈어야지.. ” “ 이봐요, 수술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고 콜을 한 거 아닙니까! 다들 콜들 이나 똑바로들 받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응급실에 환자 방치해 두고 나몰라라 하지말라고! 다들 한시간이나 늦게 내려오고, 외과에서는 아예 콜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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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잖아요! ”

나과장이 민준을 가리키며 말을 하자, 민준을 향해 큰소리를 치며 입을 여는 병원장. 반면, 이번에는 찔리는 것이 있기에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민준.

" 김과장!! 이래놓고 어떻게 외상센터 없애자는 얘기가 나와요! 당직하나 똑바로 관리 못하고, 교통사고환자 한명 감당 못 해서 매번 이런 일 생기면! 그땐 책임질 수 있어 요? “ “ 아.. 그게.. ” “ 지난번엔 다들 큰소리치더니! 왜 이렇게들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어요!! 대책을 내놓 든지 말들 좀 해보세요!! ”

하지만, 고요한 회의실. 아무도 병원장이 말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때, 조심스럽게 병원장을 향해 입을 여는 기조실장.

“ 저기.. 원장님? 정규수술하느라 수술실이랑 중환자실이 부족한데, 무조건 받을 수는 없으니까, 트렌스퍼 받는 거는 자제하도록 하고, 그러다가 이번처럼 급한 경우는 이비 인후과처럼 작은 수술들을 양보해주면 어떻겠습니까? ” “ 그럼, 이비인후과에서 반발하지 않겠어요? ” “ 그건 그렇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 “ 흠.. 그럼, 조만간 모탈리티 컨퍼런스에서 해당 과들 다 모였을 때 다시 얘기해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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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하고, 어쨌든! 각과에서 조율들 똑바로 해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

그렇게 병원장이 화를 내며 회의실을 나가버리고, 회의 내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병원장이 나가자마자 서로에게 탓을 돌리며 각자 큰소리치기 바쁜 과장들. 가장 먼저 큰소리 치며 입을 여는 세헌.

“ 아~ 이거, 트라우마센터는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 거, 외과에서는 왜 콜을 제대 로 안 받아서 이 사단을 만듭니까! ” “ 뭐, 정형외과는 콜 똑바로 받으셨어요? 그쪽도 1시간 있다가 내려왔으면서 뭘.. 하 기야, 평소에도 제일 늦게 내려오니까. ”

그러자 세헌의 말에 톡- 끼어들며 평소에 불만이 많다는 듯 궁시렁대는 나과장. 기조실장은 또 얘기가 셀까봐 다시 그들의 말에 끼어들며 입을 연다.

“ 아무튼, 이제 트라우마센터 없애자는 얘기도 못 꺼내게 생겼어요. 당장 이런 일이 생기는데 어떻게 없애자는 얘기를 해요..! ”

그러자 왠일로 조용히 있다가 변명을 하듯 입을 여는 민준 은근슬쩍 책임을 응급의학과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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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번에는 우리 당직들이 실수를 하긴 했지만, 센터가 없어도 크게 상관은 없어 요, 다른 병원도 다 그렇게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리고 우리야 당연히 평소처럼 최인 혁이가 있을 줄 알았지. 안 그랬으면 바로 내려갔겠죠. 아니, 컨퍼런스를 보냈으면 보 냈다고 얘기를 해주든가.. ” “ 뭐요? 지금 누구 탓으로 돌려 돌리기를! 그리고, 아까 원장님 앞에서 그렇게 얘기해 보시지 왜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을까요? ”

그러자 또 욱하는 나과장. 민준역시 그의 말에 욱하며 대답을 하려는데 기조실장이 먼저 입을 열며 그를 막는다.

“ 자자, 진정들 하시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얘기해보자구요. ”

그렇게 몇몇 과장들로 이루어진 회의가 계속 진행되지만, 딱히 뾰족한 수를 찾을 수가 없는 그들이었다. 한편, 그날 정오, 세중병원 구내식당,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으며 보호자가 원장실에 난입한 일을 얘기 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 제일 시끄럽게 떠드는 중환자실 간호사들.

“ 야, 니 그 얘기 들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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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들었제, ” “ 와..? 무슨 일인데..? ” “ 니 모르나? 어제 응급실에 교통사고 환자 한명이 들어왔는데, 시간 끌다가 사망해 가지고 보호자가 난리를 쳤다드라. 원장실까지 쫓아 올라가가지고 원장님은 멱살까지 잡힜다든데.. ” “ 진짜?! 참말이가? ” “ 그래~ 그래서 병원이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오늘아침에도 보니까. 각과 과장님들 전 부 불려갔다더라. ” “ 과장님들이? 와? 응급실에서 잘못됐다믄서? ” “ 왜기는? 응급실에서 잘못된 거는 맞는데, 그 교통사고환자를 응급실에서 어떻게 감 당하노? 다른 과에 인계를 해줘야하는데, 와과는 아예 전화도 안 받고, 다른 과들도 뭐, 알잖아? 다 자기소관아니라고 미루고 그란기제. ” “ 그래? 하긴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 야, 근데.. 교통사고 환자면 외상환자 아이가..? 응급실에 최인혁교수님 있잖아? 그 래서 외과에는 콜 잘 안 하든데? “ “ 어제 컨퍼런스가느라 자리에 없었다드라. 뭐, 수술하지말라고 나과장님이 일부로 보 냈다든데. ” “ 수술을 하지말라꼬..? 와? ”

계속되는 한 간호사의 질문에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키우며 입을 여는 다른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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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참, 가스나 답답하게.. 저번에 응급실에서 수술한 환자 기사 터진 거 모르나? 그 뒤로 응급실수술하지 말라켔다던데, 낮에는 환자 받지도 말라카고.. 근데, 엊그제 또 받았다잖아~ 말을 안 들으니까 보내버리라 켔나보지 뭐. ” “ 아이고.. 그래도 최교수님 있을 때는 수술도 못 받고 죽어나가고 이러진 않던데.. 운 이 없네, 운이 없어.. 또 죽은 사람만 불쌍하게 된기네.. ” “ 그라니까.. 아 맞다. 니들 그 얘기는 들었나? ” “ ....?... 뭔 얘기..? ” “ 이건 교수들 밖에 모르는 이야긴데, 병원에서 트라우마센터 없앨라 칸다드라. ” “ 뭐? 와? ” “ 와기는? 맨날 수술실도 없고 중환자실도 없는데, 환자밀고 들어오고 그라니까 그러 제.. 저번에도 모르나? 황과장하고 최교수하고 중환자실 때문에 대판 싸웠대잖아. 그, 소문으로는 황과장이 뺨도 때렸다든데.. ”

한간호사의 말에 눈이커지는 다른 간호사들 다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한 표정이다.

“ 뺨? 야, 그건 너무 심한 거 아이가..? ” “ 그러게, 듣기로는 최교수님이 황과장님 제자였다 카든데.. 하긴, 암만 그래도 심했 지. 듣자하니까, 그 자리에 외과 레지던트들도 있었다든데..? ” “ 야.. 황과장, 암만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노? ”

한 간호사가 얘기에 심취해 목소리가 커진 상태에서 흥분해서 황과장이라는 말을 대놓고 입에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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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눈치를 보며 그 간호사를 툭툭치는 다른 간호사.

“ 야, 누가 듣는다. 조용히 쫌 해라. ” “ 알았다! 그만때리라..! 뭐, 그래서 최교수님은 가만히 있었다드노? 최교수도 성격 장 난 아닐낀데? ” “ 글쌔, 다른 소문은 없는거 보니까. 참았다는거 같던데.. ” “ 와.. 최교수가 참았다꼬..? 자존심 엄청 상했을긴데.. ” “ 그러게. 야, 가만보면 최교수 좀 불쌍하지 않노? 다른 교수들 사이에서도 따돌림 당 하는 거 같든데. 그리고 외과당직도 맨날 혼자서서 병원에 없는 날이 없더만. ” “ 아, 그거는 불쌍하다기보다는 대단한 기제~ 사실, 그래 열심히 환자만 보는 사람이 어뎄노? 중환자실도 하루에 몇 번씩 왔다갔다 하시더만, 교수들 중에 그 정도로 신경 쓰는 사람은 최교수님 밖에 없을 걸? ”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간호사들. 사실, 그동안은 인혁이 매일 중환자실에서 살다시피하고 매일 마주치는 사람이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했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 하기는 그래 맨날 있으니까, 콜도 바로바로 받고, 수술도 바로바로하고 그라는기제. 솔직히, 교수씩이나되가꼬 그래 해주는 사람없제. 중환자실에서 콜하면 최교수가 제일 먼저 온다아이가. 인턴들도 그래 빨리는 안 오지. ” “ 그렇기는 하지.. 야, 그라고 보면 최교수 오고 나서, 교통사고환자 죽어나가는 거는 얼마 못 본거 같은데? ” “ 그라네, 최교수가 없으니까 교통사고 환자가 죽어나가는 기네. 환자가 그래 죽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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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보호자가 원장실 들어가서 난장 치는 일도 생기고. ” “ 그라니까, 다~ 자업자득이라니까네. ”

그렇게 인혁을 옹호하면서 병원을 욕하고 있는 중환자실 간호사들. 그리고 간호사들의 얘기를 엿듣는 수많은 귀들. 어느새 온 병원에는 인혁과 세헌에 대한 소문과 인혁이 없기에 외상환자가 죽어나간다는 얘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가 버린다. 그날 늦은 오후, 컨퍼런스가 끝나고 오느라 조금 늦은 출근을 한 인혁. 차를 옥외주차장에 주차시킨 뒤, 옷 짐을 들고 응급실로 내려오는데.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뭔가 조금 이상한 기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사무실안으로 들어서는데 웬일로 한구와 은아가 같이 커피를 마시며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인혁을 발견하고서는 말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를 하는 두 사람.

“ 아, 오셨어요? ” “ 예. ” “ 어, 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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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한구의 인사는 안받아주고 왜 여기 있냐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 니가 이 시간에 여기 왠일이야? 수술 안 들어가나? ” “ 오늘 주말이거든? 나는 뭐 주말도 없이 수술실에만 있는 줄아냐~ ” “ 뭐, 그러면 집에 있어야지. 여기 와있는데. ” “ 에휴.. 말도마~ 난리도 아니다.. ”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찡그리는 한구. 그런 그의 모습을 의아한 듯 보다가 한구에게 무슨 일이냐 되묻는 인혁. 그러자 살짝 끼어들며 대답을 해주는 은아.

“ ...?... 왜, 무슨 일인데..? ” “ 어제 교통사고 환자가 한 명 들어왔었는데.. ” “ ....!? ” “ 여기저기서 미루다가 어레스트 나가지고.. 결국에 사망했데요. ” “ ...!!... ”

역시나 놀라는 인혁. 점점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가는데, 한구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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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보호자가 원장실까지 올라가가지고 원장님 멱살 잡고, 아휴.. 그래서 아침부터 과장들 소집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

그러면서 어제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세세히 얘기해주는 한구. 더욱더 심각한 표정이 되는 인혁과 은아. . . . . . “ 아무튼, 이래서 외상센터가 있어야 되는데 말이야.. 쯧.. 뭐, 이참에 잘됐어. 외상센 터가 왜 필요한지 확실히 보여줘야 되는데. ” “ 근데, 외상센터사업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

외상센터로써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한구의 말에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은아. 그러자 인혁이 두 사람을 보면서 맘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 뭔 소리들이야? 환자가 죽었다는데. ” “ 아, 그거야 당연히 안 된 일이긴 한데.. 근데 지금 외상센터ㄱ.. ” “ 너, 그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가라 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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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았다! 안 그래도 가려고 했다. 아무튼.. ”

그러고는 인혁을 살짝 쩨려보다가 궁시렁거리며 사무실을 나서려는 한구.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뒤돌아보며 은아를 향해 입을 연다.

“ 신선생, 잘 부탁해요. ”

그러고는 자기말만 하고서 이내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한구. 그러자 뭔가 심각하게 변하는 은아의 표정.

“ ..... ”

그리고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살짝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인혁. 그날 저녁, 퇴근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퇴근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은아. 아까부터 혼자 뭐가 그리 분주한지 이것저것 박스를 뒤지고 있다. 그러다 찾는 자료가 없는지 자리를 옮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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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앞에 박스들을 다시 뒤지기 시작하는 그녀. 그때, 마침 중환자실에서 인혁이 돌아오고, 쭈그려 앉아서 온갖 자료들을 다 꺼내서 정리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 퇴근안하고 뭐..해요? ” “ 아이, 깜짝이야.. 후.. 교수님 오셨어요? ”

문을 등지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인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는 그녀. 그러다 인혁과 눈을 마주치자 가볍게 그를 반기다가 이내 자신이 하던 일에 다시 열중을 한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서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가만히 보는 인혁. 그때, 바로 등 뒤에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리는 은아.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그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뭘 하고 있냐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서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그를 향해 입을 연다. 동시에 손에 있는 서류들을 살짝 들어 보이는 그녀.

“ 저기, 그.. 사무실 정리 좀 하려구요. 버릴 건 버리고, 남겨둘 건 남겨두고 그럴려구 요. 아, 이것 좀 보실래요? ” “ 뭔데요. 이게. ” “ 기억나세요? 저희 처음에 외상센터 만든다고 아침마다 회의할때요. 그때 정리했던 거에요. 아참, 그리고 지금까지 환자 자료들도 다시 정리하고 있어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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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서 그녀는 계속 쭈그려 앉은 채로 박스에 자료들을 하나둘씩 꺼낸다. 그런데, 여전히 그녀의 뒤에 서서 자료를 정리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이 상황을 체념한 듯한 표정이 스친다. 그때, 옆으로 조금 자리를 옮기려 다가 여전히 자신의 뒤에 있는 그를 발견하는 은아.

“ 아! 교수님은 가서 할 일 하세요~ 이건 저 혼자 그냥 하는 거니까. ” “ ... 갑자기 이런 걸 왜 해요. 퇴근이나 하지. ” “ 어.. 그냥, 언젠간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요. 2년 동안 뭘 했나.. 좀 확인도 하고, 읏 차..! 이렇게 정리도 해두면 앞으로 센터 에도 도움이 될 거 같아서요. ” “ .... 그런 건 나중에 하고, 빨리 퇴근이나 해요. 내일 또 일하려면 쉬고 와야지. ” “ 에이, 저 열흘 동안 푹 쉬고 왔잖아요. 괜찮아요. ”

그러나 인혁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박스를 정리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들키지 않을 정도의 작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몸을 돌려 책상위에 담배를 집어 들고 다시 사무실을 나서는 인혁. 그리고 그가 나간 인기척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자료 정리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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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일주일 후, 어느 날 오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회진을 돌고 온 두 사람. 은아가 들어오자마자 책상 앞에 앉으며 며칠 전 깨어난 기자환자의 얘기를 꺼낸다.

“ 그나마 다행이에요, 금방 깨어나고 일반병동으로 가게 되서. ” “ 그러게요. 다행이네. ”

역시나 오자마자 간이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켜다가 은아의 말에 그녀를 슬쩍 보며 짧은 대답을 하는 그. 그녀는 일주일 전부터 센터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중에 인수인계를 하려고 그동안 일했던 것들을 정리하나 싶었는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그런 건 아닌 듯 했다. 도대체 밤마다 센터 안에서 혼자 뭐에 그리 열중하는 건지.. 사실, 그날이후 더욱더 은아의 맘을 모르겠는 인혁. 분명히 그만둘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도대체 왜 말을 안 하는 건지. 아무리 기다려 봐도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않는 그녀. 센터 상황이 안 좋아서.. 그런 말은 못 꺼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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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 지금껏 하던 데로 나는 수 술하고, 신선생은 센터 잘 운영하고, 먼저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지.. /

아니면 내가 했던 말이 또다시 그녀의 발목을 붙잡은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건가. 이제 솔직히 말해서.. 어차피 재계약을 못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힘들면.. 떠나도 된다고. 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 말은 차마 먼저 못하겠는 그. 복잡한 생각에 노트북만 그냥 켜놓은 채로 멍하니 있는 인혁.

“ 교수님..? ” “ .... ” “ 교수님..! ” “ ...? 아! 예. ”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하고 놀라며- 하며 고개를 드는 인혁. 은아는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이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입을 연다.

“ 아, 저기.. 저, 내일모레 오프 인데. ” “ 예, 알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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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저번에 휴가를 너무 길게 써서.. 그날 저 안 나와도,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 “ 아아.. 예, 그럼요 예. 괜찮죠. 뭐.. 이제 중환자도 별로 없잖아요. 괜찮으니까. 다녀 와요. ” “ 네, 알았어요.. 근데, 저, 혹시 그날은 응급콜 하셔도 못 나올지도 몰라요. 쪼매 멀리 있을 거 같아서..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 “ 아.. 예, 괜찮아요.. 흠, 근데 뭐 어디, 또 어머니한테 다녀올 건가 봐요. ” “ 네? 아, 그게 아니고. 동규씨랑 약속이 있어서. ” “ 아아.. 예.. ”

그런데 그때,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전화벨소리. 인혁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얼른 전화를 받는 그.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 예, 최인혁입니다. ” “ 어, 최교수 날세. ”

전화기너머에서 병원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살짝 놀라며 눈이 커지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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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원장님. ” “ 지금 바로, 내방으로 좀 올라올 수 있겠나? 긴히 할 얘기가 있네. ” “ .. 예, 알겠습니다.. 곧 올라가겠습니다. ”

알겠다고 대답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매우 좋지 않았다. 벌써 올 것이 온 건가..? 아직 이 사람한텐 말도 못했는데.. 전화를 받고 갑자기 심각해지는 그의 표정. 한편, 원장님이란 말을 듣고 나서 불안함을 느꼈다가 갑자기 심각해지는 그의 표정 때문에 덩달아 심각해지는 은아의 표정.

“ 무슨 일인데요..? ” “ 글쎄요.. 일단, 올라가봐야지 알겠는데.. ” “ 혹시.. 저기.. ” “ 나 좀 올라갔다올게요. 갔다 와서 얘기합시다. ”

잠시 은아와 눈을 마주치고선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실 밖을 나서는 인혁. 그런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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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원장실,

[ 똑똑똑- ]

“ 예, 들어오세요. ”

병원장의 목소리에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나고 바로 인혁이 들어온다.

“ 어, 왔나? ” “ 부르셨습니까. ” “ 음.. 일단 앉지. ”

인혁이 병원장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고, 병원장 역시 똑같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는 조금 엄한 표정으로 인혁을 바라보는 그.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병원장을 보지 않는 인혁. 병원장은 그런 그의 태도에 살짝 한숨을 쉬다가 이내, 목소리에 무게를 잡고 천천히 입을 연다.

“ 자넨, 외상환자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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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개를 들어 병원장을 쳐다보는 인혁.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병원장의 의도를 알 수가 없는 그. 인혁이 대답 없이 자신을 보고만 있자 이내 병원장이 다시 입을 연다.

“ 아마 자네도, 며칠 전 일은 들어서 알고 있을 거네. 응급실에 들어왔던 교통사고 환 자가 사망한일 말일세. ” “ .. 예, 알고 있습니다. ” “ 그 일로 병원이 소송을 당했어. 그것도 들었나? ” “ .. 그것도 들었습니다. " " 그래.. 자네가 했던 응급실 수술로 인해서 기사 터졌을 때보다 더한 일이지.. 듣자하 니, 그 환자는 의식을 찾았다고 하던데. “ “ 오늘 상태가 더 좋아져서 일반병실로 옮겼습니다. ” “ 아. 그랬나..? 음.. 이봐, 최교수. ”

인혁의 말에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그를 부르는 병원장. 그리고 병원장을 보지 않고 대답을 하는 인혁.

“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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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 외상환자를 못 받게 한일이나, 응급실수술을 못 하게 한 일이 꼭 그 기사때문 만이 아닌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거네. 들었겠지만, 저번 그 기사로, 그동안의 쌓여있 던 다른 과 교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어. 그동안에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그 래서 외상센터를 없애자는 얘기가 나오고 그것도 아니면 지원이라도 없애자는 얘기까 지 나왔고. 그 건 알고 있겠지? ” “ .. 예, 알고 있습니다. ” “ ... 외상환자들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자네 마음도 알고, 의욕도 좋지만, 앞 으로 외상환자들이 갈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 “ .... ” “ 자네가 지금까지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나. 다른 과들에 서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양보를 해주고, 병원에서는 수천만 원의 적자를 감당하면서 까지 센터를 유지시켜주고 수술을 할 수 있게 해주니까. 지금까지 수술을 해올 수 있 었던 거 아닌가? 체계를 무시하고 다른 과들하고 협력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몇 사람 이나 살릴 수 있겠나? ” “ .... ”

병원장에 말에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 인혁.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병원장의 말. 모두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어렵게나마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막대한 비용을 들이며 환자를 케어 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세중병원에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도 참을 수 있었고, 몇 번이고 병원을 나가려 했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건.. 인혁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대형병원이 체계 없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위계질서와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병원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꼭 자신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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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개 스텝에 불과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그 체계를 인정하긴 하면서도 무작정 덮어두고 따를 수만은 없는 인혁. 병원장은 그걸 알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 지금까지는 그 트라우마센터를 있게 한 분이 내 스승님이셨던, 현 의과대 학장님이 시기 때문에, 과장들의 불만을 내 선에서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었지만, 더 이상은 무 리야. 만약 자네가 다른 과들과 조율을 하지 못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계속해서 체계를 무시하고 명을 어기는 일을 한다면, 그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막아줄 수 없다는 말이네. ....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역시나 직접적인 엄포를 놓는 병원장. 그래도 일단, 센터 지원문제는 아직 건드리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외상환자 수술 문제.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그. 그때, 병원장이 그를 타이르듯 말을 이어간다.

“ 흠.. 그렇다고 해서 요 며칠 그래왔던 것처럼, 낮에는 무조건 환자를 받지 말라는 말은 아니네. 물론, 중환자실, 수술실 여력에 따라서 자네가 조절을 해야겠지만, 앞으 로 이번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이비인후과 같은 작은 수술들을 양보해주도록 얘기를 해놨네. 그러니 앞으로는 꼭 새벽시간이 아니더라도 다시 전처럼 환자를 받을 수 있 을 거야. ”

그러자 숙였던 고개를 들어 병원장을 보는 인혁. 계속 말을 이어가는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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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쉽게 트라우마센터를 없애자는 얘기들은 당분간은 못 할 것 같네. 아마 지원도 당분간은 그대로 유지될 거고, 그래도 안심하기엔 이르니 까. 환자를 무작정 받는다거나 해서는 안 되겠지. 그리고 응급실 수술은 제대로 갖춰 지지 않고 수술하는 경우가 많고,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까. 앞으로 자제해줬으면 좋겠네. 나과장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겠네. ” “ ... 예, 알겠습니다. ” “ 그래, 그럼 이만 나가보게. ” “ 예. ”

인혁은 짧은 대답 후에 바로 일어나서 병원장을 향해 살짝 고개숙여 인사한 뒤 바로 원장실을 빠져나간다. 잠시 후, 병원 복도, 힘없이 터덜터덜 응급실을 향해 걷고 있는 인혁. 솔직히 거의 체념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당분간은 트라우마센터를 유지할 수 있고 다시 전처럼 환자를 받을 수 있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전혀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인혁. 꼭 환자가 한명 죽거나, 문제가 일어나고 나야지만 뭔가가 바뀌는 걸까..? 결국엔, 응급실에 들어온 다른 환자가 죽는 바람에 트라우마센터가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이것은 그저 일시적인 해결에 지나지 않았다. 트라우마센터가 가진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언제든지 또다시 닥칠 수 있는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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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정부의 외상센터 사업. 이대로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 런지.. 게다가 앞으로는 환자를 최소한으로 가려서 받아야 한다는 얘기인데, 덜 위급한 환자는 보내고 위급한 환자를 받고.. 후.. 살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을 돌려보낸다면 그 환자역시 골든타임을 지체해서 살 가능성이 떨어지게 될텐데..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져 온다. 그런데 그때,

“ 교수님..! ”

눈앞에 그녀가 서있었다. 그러자 멈칫하며 제자리에 멈추는 인혁.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마중 나온 은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

“ 원장님이 뭐라세요..? ” “ ..... ” “ 무슨.. 일로 부르신 거에요? ” “ ..... ”

그러나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인혁. 그래도 어찌됐든 센터지원이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외상코디네이터 자리도 계속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수명이 연장된 이 곳을 유지하려면 외상코디네이터에 도움이 절실히 필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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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능력 있는 코디네이터인 그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떠날지도 모르는 그녀. 다시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울음소리. 나는.. 이 사람을 잡아야 할까..? 이 사람이 괴로워할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옆에 붙잡아 둬야 하는 걸까..? 그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보고만 있는 인혁. 그리고 대답 없는 그를 계속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은아. 그렇게 말없이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한편, 세중병원 소회의실, 트라우마센터의 규제가 다시 전처럼 풀렸단 얘기를 듣고 답답한 마음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 과장들. 딱히 계획을 했던 건 아니었지만, 다들 속으론 인혁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를 잡아 이때다 싶은 마음에 약간 우발적으로 트라우마센터를 밀어붙였던 그들. 그런데 보호자의 원장실 난입으로 일이 틀어지고 오히려 세헌이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병원에 돌면서 인혁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상황. 그동안은 인혁이 병원에서 외톨이라 몰아붙이기 쉬웠지만, 이렇게 되면 손쉽게 그를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된 그들이었다.

“ 아.. 이거 일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어요~! 심지어 교수들 중에서도 최인혁이 동 정하고 편드는 사람이 나오고있다니까요. ” “ 이거, 이러면 다른 데로 보내기도 어려워지는 거 아니야? 다른 과에서 편들어주면 힘들어 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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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실장과 세헌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욱- 하며 끼어드는 민준.

“ 뭐.. 동정을 하든 편을 들든 어쩌든, 지들이 어쩔껀데요? 티오도 없는데..! 그리고 설령 티오가 있다고 해도~ 누가 최인혁이같은 사람을 자기 밑에 두고 싶어 하겠습니 까. 이리저리 쉽게 부릴 수도 없고 명령도 안 통하고, 수술 좀 한다고 자기들 머리 꼭 대기에 앉아 있으려고 할텐데. ” “ 아이, 그러게 왜 괜한 짓을 해가지고..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황과장 너무 오만한 거 아니냐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얘기 하고 다닌답니다. 뭐, 그런 말 들어도 이상할 것도 없죠. 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뺨을 때릴 생각을 해요? 그것도 레지던 트들 보는 앞에서 교수 뺨을.. 참나, 그 얘기 듣고 가만있을 교수들이 어딨어요? 황과 장이 무슨 깡패도 아니고.. ” “ 뭐, 뭐? 깡패? 지금 말다했어요? ”

기조실장의 말에 욱하는 세헌. 혼자 골똘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싸우려고 하자 방해하지 말라는 듯, 약간 짜증을 부리듯 말을 하는 민준

“ 아유, 거, 조용히들 좀 해보세요 쫌..! 지금 이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대책을 세우던가해야지! 또 최인혁이한테 중환자실이랑 수술실 시도때도 없이 내주게 생겼다 구요. ” “ 허.. 참. ”

민준의 말에 어쩔수 없이 화를 참으며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뱉는 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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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혁이 없으니 환자가 죽어나간다는 얘기가 돌만큼 병원여론이 인혁에게 유리해진 상황에서 섣불리 다른 조취를 취할 수 없는 과장들. 일단은 기다렸다가 다시 때를 노려보기로 하며 회의실을 나서는 그들이었다. ※ 추천브금 : 이루마 - Beloved 이틀 뒤, 동규의 차안, 꽤 빠른 속도로 경사진 도로 위를 달리는 그의 차. 산으로 가기 위해 등산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 아주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다 한동안 말이 없이 차창너머로 불어오는 가을바람만 맞고 있다. 그때,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여는 동규.

“ 일하느라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 “ 괜찮아요. 예전에 가봤잖아요. 주말마다 동규씨 혼자 가는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잘됐네요~ ”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하고서는 이내 다시 바람을 맞으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스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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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후, 산중턱에 오른 은아와 동규. 은아는 오랜만에 산행이 힘들기만 한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쫓아가기에 바쁘다 그때, 그녀가 잘 쫓아오는지 확인하다가 그녀가 힘들어 하는걸 발견하고는 옆에 있는 널찍한 바위에서 쉬어가자는 그. 그의 말대로 바위에 앉는 은아. 동규는 배낭에서 물을 꺼내 그녀에게 먼저 건네며 상쾌한 듯 웃으며 입을 연다.

“ 헉.. 헉.. 은아씨 괜찮아요? 정상까지 갈 수 있겠어요? ”

그러자 그가 건네는 물을 마시며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포기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은아. 동규는 그녀를 향해 못 말린다는 듯 웃어버리더니 자신도 조금 힘에 부치는 지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배낭에서 물병을 하나 더 꺼내서 마시는 그. 그러다 마시던 병을 다시 집어넣고서는 고개를 들어 주변 경치를 둘러보는데, 산 중턱에 있어서 그런지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그녀와 나를 둘러싼 푸르른 나무들,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분 좋은 흙냄새.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그녀까지. 동규는 저절로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듯 했다. 오랜만에 데이트에 기분이 좋아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크게 소리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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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좋네~! ”

그러고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데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는 그녀. 동규는 기다리는 전화가 있나 싶어 그녀를 부른다.

“ 은아씨, 기다리는 전화 있어요..? ” “ 네?! 아아.. 음.. 그런 건 아니고, 병원에서 전화 왔을까봐 확인한 거에요. 요즘 병원 이 좀 시끄럽거든요. 센터도 그렇고.. ” “ 아아.. ”

병원얘기에 살짝 어두워지는 동규의 표정. 아랫입술을 쭉 내민 채 코로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애써 밝은 표정으로 경치를 둘러보는 척한다. 그렇게 둘 사이에 잠시 흐르는 정적. 이내 그 정적을 깨고 조심스레 입을 여는 동규.

“ 은아씨, 저번에 물어본 거는... 생각 해봤어요..? ”

아까부터 자꾸만 떠오르는 병원걱정에 잠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아. 갑작스런 동규의 말에 멈칫하더니 말을 알아듣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역시 예상했던 데로 확신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 그러자 약간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되묻는 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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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아직 이에요? “ “ 네.. ”

반면, 그녀는 동규의 체념한 듯한 목소리 때문에 마음이 더욱더 무거워져서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번엔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 나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 걸까..? 그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써 그런 생각을 지워버리며 다시 심각한 표정을 풀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는 동규. 반면, 그에게 해야 할 말이 미안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냥 아까부터 계속 바다만 쳐다보고 있는 그녀. 가을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간다. 그때, 그녀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보채고 싶어지는 그.

“ 은아씨..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여기 남고 싶은 이유가 뭐에요..? ” “ 아.. ” “ 편안하게 대답해요. 은아씨 솔직한 대답이 궁금해서 그래요.. 캐나다가면 더 좋은 대우받으면서, 똑같은 일할 수 있는데도.. 왜 굳이 여기 있고 싶은 건지.. ”

단도직입적인 그의 질문에 살짝 당황하는 은아. 자기 자신 조차도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그런 이유.. 그와 눈을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중심을 찾는 그녀의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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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에게서 다시 시선을 떼고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에게 고백하듯 입을 연다.

“ 제가 전에.. 아버지 얘기 한 적있죠..? 간호사가 된 이유..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 “ 아.. 예. ” “ 전에 응급실, 중환자실에서 간호사일 할 때도 물론 좋았어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서 뭔가 판단할 수 있 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내려준 오더대로 그대로만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고, 잡다한 업무들을 하고..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지난 간호사 생활 7년동안 나에게 남은 게 뭐가 있나.. 그렇게 허무해지고 있는데, 그때 교수님을 만나고 이일을 시작했어요. ” “ ..... ”

인혁의 얘기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굳는 동규. 하지만 그런 그를 알아채지 못하고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

“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힘들게 일했어요.. 사무실하나만 달랑 있고, 인력도 없고, 지 원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맨날 야근에.. 집에도 못 갈 때도 있고, 그런데 그 와중 에 정말 행복하더라구요. 그동안은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 ” “ .... ” “ 아.. 저 정도 중증환자들도 살아날 수가 있구나, 수술 잘 받고 치료 잘 받으면.. 살 수 있는 거였구나. 그걸 여기서 알았어요. 그리고 저 사람들이 치료받으려면 수술할 수 있는 의사랑 제대로 된 외상센터가 필요한 거구나.. 근데, 내가 외상코디네이터라 니.. 아, 내가 환자들을 살리는데 이런 식으로도 도움이 될 수도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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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래서 생각했어요. 이런 외상센터를 관리하는 코디네이터라면 해볼 만하겠다. 정말 의미 있는 일이겠다. 그래서 정말 잘해야겠구나.. 그렇게 잘 유지시키고, 잘 관리하다 보면, 나중에는 내 손으로 제대로 된 외상센터도 만들 수 있겠구나.. 난생 처음으로 그런 큰 꿈도 꿨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힘든데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손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

동규는 조바심이 들어 그녀를 보채던 건 잊어버리고 어느새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조근조근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진지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그의 눈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사실, 그동안 이렇게 까지 자세하게 그녀의 얘기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녀가 간간히 센터 상황을 얘기해주긴 했었지만, 대체 왜 이 외상을 시작하게 됐는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일을 하고 있는지.. 그동안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던 동규였다. 그런데 그때, 바다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그녀. 그러나 동규는 당황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여는 은아.

“ 그런데, 아마 나 혼자라면 그런 생각은 못했을 거에요. 그리고 버티지도 못 했을 거 에요. 너무 힘들어서. 최교수님하고 같이 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 “ ..... ”

다시 인혁의 얘기가 나오자 마음이 언짢았지만,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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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속 그와 눈을 마주치다가 다시 바다를 보며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

“ 그분은.. 절대 환자를 포기하시지 않으세요. 이분만큼 이렇게 목숨 걸고 할 수 있는 분이 없어요.. 사생활도 없이 병원에서만 살다시피하면서.. 그런데 그런 분이.. 힘이 없 어서, 외상센터가 없어서.. 늘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면서 수술을 하고 있어요. 작년에 사무실에서도 쫓겨나서 지금은 창고 같은데서 일하고 있고.. ”

인혁의 얘기를 하는 그녀의 눈빛이 작게 일렁인다.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는 그 사람. 그동안 그녀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분명 쉽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그걸 인정하기에 그녀가 이렇게 그를 동경하는 걸 아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불안했다. 남들이 속 좁은 놈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두워지는 그녀의 표정. 그런 그녀를 보며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는 동규.

“ 그래도 그나마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이제는 병원에서 그나마도 유지시켜주지 않겠데요.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정부사업만 믿고 기다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지원도 줄이고 코디네이터도 자르려고 하고.. ” “ ...!!... ”

그녀의 얘기에 살짝 눈이 커지는 동규. 코디네이터를 자른다니..? 서둘러 그녀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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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요 은아씨. 코디네이터를 자른다는 거는.. 은아씨가 잘린다는 거 아니에요..? ”

그러자 은아는 대답 없이 그를 잠시 바라본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이 약간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눈을 보고 아무 말도 건넬 수 없는 동규. 당연한 일이지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병원에서 그런 일을 겪고 있을 줄은.. 물론, 그녀가 빨리 이 일을 그만두길 바랐었지만.. 잘릴 수도 있다니.. 이런 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기 일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사람. 분명 상심이 클 텐데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건지.. 그때,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녀.

“ 맞아요.. 다행히 힘든 고비는 넘겨서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렇게 점점 지원을 줄 이다가 결국에는 센터를 없애려고 한데요. 근데 그러면은 교수님은 갈 곳이 없으세요. 다른 과에 티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분 이 병원 그만두면은.. 외상환자들이고 다른 응급환자들이고.. 갈 데가 없어요. 다들 새 벽에 구급차에 실려 오면은.. 경험 없는 인턴들이나 레지던트쌤들이 제대로 볼 줄도 모르고 시간만 끌다가 환자들은 사망하겠죠. 수술만 제때 받아도 살 수 있는 환자들 인데.. ”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그녀. 그러다 이내 뭔가에 분노하는 듯, 아까보다 단호해지는 그녀의 눈빛과 말투.

“ 그래서 최교수님은 이곳에 꼭 필요한 분이세요. 그런데 그런 분이 힘이 없어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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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센터가 없어서 그만두게 되면 안 되잖아요. 내손으로 일으켜 세운 이 센터가 잘 굴 러가고.. 센터가 잘 자리 잡아서 교수님 같이 훌륭한 분들이 잘 일 할 수 있고.. 그래 야 맞는 거잖아요. 세상이치가.. ” “ ... 그렇죠.. ” “ 동규씨.. 아직은.. 외상코디네이터가 꼭 필요해요. 제가 지금 그만두면.. 외상센터는 그대로 무너져 버려요. 그러면 지난 2년동안에 고생들도 한순간에 무너져버려요. ”

이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는 동규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단호한 모습이었다. 자기 일에 대한 어느 열정을 넘어서서 이 일에 전부를 걸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는 듯 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말릴 수가 있을까. 흔들림 없는 은아의 눈빛을 보고서 차마 그녀를 말릴 수가 없는 동규. 그때, 은아가 다시 그를 보며 간절히 부탁하듯 입을 연다.

“ 그리고.. 동규씨 말대로 캐나다는 간호사 대우도 좋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해주고 일하기도 편하고 그러겠지만, 여긴.. 제가 30년을 넘게 살아온 곳이에요. 이왕이면은.. 이곳에서 마무리 짓고 싶어요. 부산에 있는 동안.. 아니, 내 인생에서 이거하나만큼은.. 제대로 마무리 하고 싶어요. ” “ .... 알았어요.. 그러면은.. ” “ 그 대신에요 동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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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진지하게 입을 여는 그녀.

“ 우리 캐나다로 가는 거는 지장 안가도록.. 봄 되면은.. 후임부터 꼭 뽑을게요. 그래 서 계약 마치기 전에 제대로 가르쳐 놓고, 계약 마치면 나도 더 미련 안가지고.. 캐나 다로 갈 거에요. 동규씨랑. ” “ 정말.. 괜찮겠어요? ”

그녀가 걱정스러운 동규. 과연 내년이 된다고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정말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꿈이 큰 사람.. 혹시 내가 이 사람을 옭아매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은아.

“ 그럼요, 당연하죠. ”

아까와는 다르게 한결 부드러워진 그녀의 표정.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주는 동규. 그가 이해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는 은아. 역시나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 그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그녀의 고개를 자신에 어깨로 가져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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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살짝 놀라며 그의 손길에 이끌리다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는 그녀. 그렇게 한참동안 가만히 있는 두 사람.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살짝 두 사람의 얼굴을 스친다. 그리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그.

“ 흠~ 잘됐으면 좋겠네요. 외상센터.. 우리 은아씨가 이렇게 사람 살린다고 애쓰고.. 고생하는데.. 센터가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 최교수님도 그렇고. ”

그러자 그의 어깨에 기대있던 고개를 들고 일어서며 미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

“ ..... ”

그녀는 그렇게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 ... 동규씨처럼 좋은 사람 만난건 제 인생에 큰 행운이에요. 그런데, 동규씨하고 앞 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기 전에. 내 인생을 한번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래야 좀 더 동규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 같았 고.. ” “ ... 왜 그런 소리를 해요.. 은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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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살짝 놀라는 동규. 자신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라니..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란 거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그였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 이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입을 연다.

“ 은아씨는.. 은아씨 자체로 나한테 소중한사람이에요. ” “ ... 고마워요.. ”

그러자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이는 은아. 그에게 정말 고마웠다. 정말로 고마웠다. 나의 가족들처럼 그도 분명 날 이해해주지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날 이해해주는 그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자신을 믿어주는 그를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 그녀.

“ 만약에.. 외상센터가 만들어진다면, 최교수님이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을 거에 요. ” “ ...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

자신을 응원해주는 듯한 동규의 말에 미소짓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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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그때까지는 챙길게 많을 거에요. 교수님도, 외상센터도.. 나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여기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이 일을 못하게 되더라도, 후회 없도록... ”

“ .. 그럼.. 나도 그때까지.. 잘 기다릴게요. 더 열심히, 더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캐나 다가면 우리 부족한 거 없이 행복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일하면서 은아씨 기다릴게 요. ”

동규의 말에 피식웃으며 다시 바다를 보는 은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뱉으니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제 정말로 병원에 남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기뻤다. 물론, 비록 자신은 끝까지 함께 못하겠지만.. 인혁만큼은 그의 꿈을 꼭 이뤘으면 했다. 그럼 멀리서라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감사하고 꿈이 생겼었다는 것에 감사해하며 정말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그녀였다.. ★★★추천브금 : 이승철 - 인연 다음 날, 이른 아침,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앞, 수술복을 입고 두건을 두른 채로 응급실로 내려온 인혁. 어제 낮부터 한숨도 못잔 상태에서 새벽에 들어온 응급환자를 수술하고 내려온 터라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계속 뒷목을 주무르며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을 애써 끔뻑이는 그. 오전까지 잠깐 눈이라도 붙여야할 거 같아서 서둘러 사무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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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 오셨어요? 수술은 잘끝났어요? ”

눈앞에 있는 그녀를 보고 약간 놀라다가 얼른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인혁. 그녀가 출근을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2시간은 더 일찍 출근한 것 같았다. 일단은 몸이 너무 피곤한지라 간이침대로 걸어가면서 약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인혁.

“ 예, 잘 끝났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지금이 몇 신데. ” “ 아..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챙겨놓을 것도 많고. ” “ ...?.. ”

인혁은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조금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뭔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거의 한달 동안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사라지고 그녀가 왠지 전처럼 다시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간이침대에 앉는 그. 한편,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로 무언가를 정리하던 그녀가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급하게 그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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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교수님! ” “ 예? ” “ 저기, 그저께 남부지역 외상학회에서 연락이 왔었는데요. 이번에 부산대학교에서 외 상컨퍼런스 할거라는데 참여하실거죠? 다음 주라는데. ” “ 아.. 예, 그래야죠. ” “ 근데, 이거 그저께 온 연락인데. 죄송해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가지고~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 “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

역시, 이틀 전에 들었던 것 보다 훨씬 더 힘 있고 밝아진 그녀의 목소리. 인혁은 그녀가 갑자기 왜 저럴까.. 하는 생각에 살짝 벙찐 채로 당황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센터가 다시 유지 될 수 있게 돼서 그런가..? 아닌데, 그저께만 해도 분명 어두웠었는데.. 그런데, 다시 쉴 틈 없이 입을 여는 그녀.

“ 어.. 교수님, 그러면 우리가 준비할 자료들이 좀 있겠네요? 이번에는 2·3차병원이 다 모인다는데, 거기서 환자 이송시스템도 어떻게 개선할지 의논 한다 그라고. 우리도 발표할 거를 좀 준비해야 할 거 같아요. ” “ 예, 그래요 뭐, 중환자도 얼마 없으니까. 천천히 합시다. ” “ 네, 알았어요~ 근데 여기서 얘기가 잘 되서 2차병원들이 협조만 잘해주면~ 우리 트 렌스퍼 보내는 거 조금 쉬워지지 않을까요? 어차피 여기서 다 수술할 수 없으니까, 보내는 거라도 잘 되면 좋을텐데.. 음.. 그래도 다행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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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요..? ” “ 이렇게 외상컨퍼런스도 간간히 열리고, 학회도 간간히 모이니까 다행이라구요~ 아 직 정부발표는 안 났어도, 이렇게 외상센터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고, 앞으로 희망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 “ 아... 예.. 그렇죠. ” “ 아! 그리고 저희 작년에 외상환자 수로 프로그램 만들다 만 거 기억하세요? 그것도 다시 시작했어요. 뭐, 센터 유치에 도움 될 만한 다른 자료도 다시 정리하고 있고. ” “ .... ” “ 아직 외상센터사업이 언제 재개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딱! 잡을 수 있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시간 있을 때, 다시 차근차근 준비 해놔야 할 거 같아서요~ ”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 그녀는 분명 미래의 일들을 얘기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에게 남아달라는 얘기를 못 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불안함이 사라진걸 보니 뭔가 확실한 마음에 결정을 내린 듯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병원에 남는 쪽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는 인혁이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할 그의 표정이 왠지 아까부터 좋지가 않다. 다시 외상센터를 준비하겠다며 희망을 얘기하고 기대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인혁. 이제 센터가 위기를 모면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었다. 여전히 중환자실도 없고, 수술실도 없고, 인력도 없어서 앞으로도 언제든지 다시 위기가 올 수 있는 조건이었고, 여전히 정부사업도 언제 재개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라서 내년까지 이 센터를 유지 할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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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외상센터라.. 인혁은 그녀가 외상센터에 대해서 전처럼 많은 기대를 갖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가 좌절하는 모습을 한번 보고나니 또다시 그렇게 될까봐 자신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 그런 사람일수록 더 깊은 좌절을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아는 그. 인혁은 그녀가 좌절하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점점 심각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 그런데, 대답이 없는 그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다가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하자 일부러 힘을 주어 그를 부르는 그녀.

“ 교수님! ” “ 예..? ”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가 갑작스런 부름에 약간 놀라며 고개를 드는 인혁. 그런 그를 보며 왜 그러는지 씨익- 웃어보이더니 약간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친다.

“ 오늘 같이 힘내보자구요..! ”

그래놓고는 본인도 약간 민망함을 느꼈는지 응급실에 갔다 오겠다며 얼른 자리 뜨는 그녀. 그리고 그녀가 나간 문을 약간 멍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하고 웃어버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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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야 그녀가 그녀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좀 전 까지 심각하게 그녀에 대한 고민을 하던 것도 잊은 채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다시 저절로 힘이 나고 있음을 느끼는 그. . . . . . 그날 이후, 다시 하루하루는 전쟁과 같이 지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생기를 찾아가고 있는 두 사람. 여전히 중환자실과 수술실은 부족했지만 인혁은 다시 전처럼 최선을 다해 환자를 받았고, 은아는 정신없이 그와 함께 환자를 돌보면서도 최선을 다해 외상센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바쁜 일정이라도 외상과 헬기관련 컨퍼런스나 학회모임에는 거의 빠짐없이 그를 참석시키곤 했다. 그런데 때마침, 중증외상환자를 위한 손상통제수술법이 외과 교과서에 실리고 그 수술법이 인혁이 시행하는 수술법과 거의 동일했기에 그의 학회활동 역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점점 더 그의 학회 일정이 더 늘어나게 되고 인혁이 학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발표가 많아지면서 경상지역 병원들과 외상학회에서 그의 이름을 조금씩 주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덕분에 더 빡빡해진 학회일정과 강의스케줄. 그 바람에 두 사람이 해야 할 일들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인혁과 은아는 거의 하루 종일 병원에서 같이 있다시피 하며 계속해서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었다. 정말 잘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이 일만하는 두 사람.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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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관계가 다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전과 비교해서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는 것. 인혁은 앞으로 다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냈을 만한 상황도 웬만하면 조용히 넘기고 그녀에게 말을 할 때도 조금 더 부드럽게 하려 노력하는 그. 그리고 다시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보름 후, . . . . . 어느 날 정오,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아침에 오전회진을 돌고 온 이후부터 정신없이 학회발표준비를 하고 있는 그. 요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라 쾡한 눈으로 키보드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벌컥- 하고 열리는 사무실 문.

[ 벌컥- 쿵!! ] “ 교수님!!! 헉헉.. 헉.. ”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드는 인혁. 그런데, 눈앞에서 그녀가 무슨 일인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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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직감적으로 환자라도 잘못됐나 싶어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치는 그.

“ 무슨 일이에요!! ”

그러자 그의 물음에 빨리 답하기 위해 여전히 헉헉거리면서 간신히 입을 여는 은아.

“ 헉헉.... 복지부가..! 외상센터 사업을 재개한데요. ” “ ...?!!... ”

그녀의 말에 아까보다 더 놀란 눈을 하며 그대로 굳어버린 인혁. 은아는 그런 그를 보며 기쁜 듯 미소를 짓더니 손에 있는 자료를 들어 그에게 읽어준다.

“ 들어보세요. 중증외상환자 치료의 길이 열렸다. 16개소 지역의 .... ” “ 잠깐 줘봐요. ”

인혁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기사를 건네받는 후, 서둘러 기사를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기사를 읽는 동안 점점 굳어가는 그의 표정. 기사 내용은 외상센터 16개소 건립 안에 대한 내용과 다시 트라우마센터에 지원하겠다는 복지부 발표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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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처럼 6개소에 800억씩 지원하겠다는 내용도 아니고 그보다 줄어든 20개소에 240억씩 지원한다는 내용도 아니었다.

2000억원을 16년까지 16개소에 나눠서 지원하겠다는 내용. 각 병원마다 100억가량의 지원금을 받는 다는 얘기인데, 외상센터를 운영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비용이었다.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는 외상센터를 위해서는 1000억원 가량의 돈이 필요한데.. 그 예산의 10분의 1. 작년 초기 6000억이었던 예산이 반 토막이 나더니 거기서 한 번 더 반 토막이 난 것도 모자라 그 비용을 더 나누고 쪼개겠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100억이 어디냐며 힘을 내보자는 은아. 그러나 무언가를 예감이라도 하듯 여전히 어두운 표정의 인혁. 그날 오후, 2층 테라스, 조금 추워진 날씨 탓에 따뜻한 커피를 한잔씩 손에 들고 난간 앞으로 걸어오는 한구와 인혁 한구는 난간에 가까워오자 마자 인혁을 향해 입을 연다.

“ 잘됐어. 또 한고비 넘겼네. ” “ 흠.. ”

그러나 그닥 후련해 보이지 않는 인혁의 표정. 그는 아까부터 시선을 깔고서는 내내 커피만 쳐다보며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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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혁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을 여는 한구.

“ 왜, 아직도 뭐가 맘에 걸려? ” “ 글쎄.. 아직은 두고 봐야지. ” “ 야, 두고 보긴 뭘 두고봐~~ 외상센터사업 다시 추진한다며~ 공모 시작하면 신청하 고, 이제 잘되는 일만 남은 거지~ ” “ ..... ”

하지만 아무 대답 없이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는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그. 정말 제대로 진행될지 불안 불안한 사업이긴 하지만, 그나마 외상센터를 신청해볼 수라도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겨 보기로 했다. 제발.. 이번 사업만큼은 제대로 진행 돼서 지원도 받고, 인력도 충원하고, 중환자실자리도 만들고, 그렇게 일단은 최소 규모라도 확보해놓고 싶은 인혁. 이번만큼은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그였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두 사람은 공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은아가 정리하던 프로그램으로 인해 지금까지 수술한 환자의 수가 복지부가 제시한 외상센터 지원기준보다 월등히 높을 뿐만아니라, 전국에서 최상위권의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나마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이를 악물고 버텨오며 지금까지 제대로 쉬는 날 하나 없이 수술하고 환자만 보고 했던 그들이기에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인혁과 은아의 값진 노력으로 만들어낸 환자 수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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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운영에 대한 병원지원이나 운영계획은 거의 전무한 상황. 복지부가 제시한 지원기준에는 환자 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이라도 병원의 지원과 협조를 얻어내야 하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병원이 그것을 받아들여줄지.. 걱정이 많아진 인혁과 은아. 그런데 그때, 우연치 않게도 경남소방본부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세중병원 응급실. 알고 보니 응급환자를 가장 많이 받아준 공로로 수여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트라우마센터가 속한 응급실 나 과장에게 감사패가 수여되고 그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트라우마센터라는 걸 알리게 된다. 그 덕분에 외상센터지원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 인혁. 관계자들에게 외상센터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병원 내 외상컨퍼런스를 열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 컨퍼런스에서 지금껏 그들이 수술한 환자의 수가 전국 최상위권이라는 소리를 듣고 놀라는 관계자들. 대형병원이긴 하지만 지방병원이었던 해운대 세중병원이 전국에서 어떤 순위 안에 꼽히는 건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별다른 지원도 하나 없이 센터를 이렇게 발전시켜 왔다는 것과 단 하루 만에 빈틈없이 준비된 컨퍼런스에 다시 한 번 놀라는 병원사람들. 결국 그렇게, 병원지원만 있다면 외상센터는 언제든지 준비되어있다는 것과 앞으로 외상센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 보이는 두 사람. 지금까지 차근차근 외상센터에 대해 정리하고 기록했던 은아와 그 와중에도 환자를 놓지 않았던 인혁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컨퍼런스 이후, 병원차원의 지원을 늘려야한다는 의견에 따라 바로 충원되는 응급구조사 인력. 앞으로 외상센터사업에 선정된다면 병원지원을 더욱더 늘려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 소식을 듣고 함께 모여 기뻐하는 인혁과 은아, 그리고 한구. 순간, 은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구와 인혁 두 사람의 손을 동시에 잡고 앞으로 외상센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뛸 뜻이 기뻐하는데, 또 갑작스런 은아의 행동에 당황하는 인혁. 자신도 똑같이 당황하다가 인혁의 표정을 보고 너 왜 입이 찢어지냐며 그를 놀려먹는 한구. 그러자 니 입이 더 찢어졌다며 시끄럽다는 인혁.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두사람을 보고 즐거운 듯 웃는 은아.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활짝 웃고 있는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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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외상센터 공모일을 기다리며 센터 신청 준비에 여념이 없는 두 사람. 또 다시 밥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병원에 살다시피 하며 환자 돌보랴, 공모준비하랴, 병원관계자들 설득하랴 정말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인혁과 은아였지만, 몸은 힘들더라도 외상센터라는 한 가닥 희망덕분에 그 힘든 하루하루를 기꺼이 버틸 수 있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열흘 후, 열심히 공모를 준비하고 있는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증외상센터 공모를 무기한 연기한다는 복지부의 발표. 애초에 80억이라는 말도 안 되게 적은 지원금으로는 또다시 적자만 만들뿐 결코 제대로 된 센터를 만들 수 없다는 문제제기가 계속해서 빗발쳤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산 되어 버린 병원의 추가 지원과 또다시 고꾸라진 외상센터의 꿈. 두 사람은 또 다시 찾아온 위기에 서로 내색은 하지 못하지만, 전보다 더 좌절하고 지쳐가고 있었다. 특히, 은아 인혁에게 힘든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외상센터를 만드는 일에 더욱 집중하려 하곤 했지만, 결혼과 외상센터에 대한 압박과 조바심이 그녀를 더욱 눈이 띄게 지쳐가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인혁. 하지만, 그녀에게 미안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였다. 그리고 슬금슬금 다시 시작되는 병원 측의 압박. 그렇게.. 복지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힘없이 흔들리는 트라우마센터. 그들이 끝도 없이 좌절하고 체념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는 그저.. 항상 마지막 수술이라는 생각으로 수술실을 들어가는 인혁. 그렇게 10월의 한 달이 지나가고 어느덧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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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부산의 깊은 밤, 어느 호프집 응급실 회식자리, 1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에 한껏 들떠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신나있는 인턴들, 그런 그들을 보며 재밌다며 웃고 있는 응급실 간호사들, 그리고 벌써부터 취해서 주정을 부리고 있는 도형과 과장들끼리 따로 회식이 있다며 일찍 자리를 뜨는 나과장. 호프집에 테이블을 거의 다 차지하고 시끄럽게 놀고 있는 그들 틈에 인혁과 그녀가 있다. 인혁은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서 아까부터 말없이 글라스에 소주를 따라 마시고 있고, 응급실 간호사들 틈에 앉아있는 은아는 계속 술만 마셔대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 벌컥벌컥- 탁- ]

다시 한 번 글라스에 담긴 소주를 입안에 쏟아 넣다가 입가를 타고 흐른 소주를 소매로 쓱쓱 문질러 닦는 그. 은아가 보기엔 이미 주량을 넘긴 듯한데 그는 사람들하고 말 한번 섞지 않고 계속해서 술잔만 넘기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그녀는 인혁을 불안한 듯 쳐다보다가 아무래도 그를 말려야겠다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런데, 그녀보다 먼저 인혁의 앞자리로 가서 앉는 한 인턴. 조금 취해 있는 인턴은 그가 어려운지 약간 망설이다가 이내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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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 “ .... ”

그러자 푹 숙여져있던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앞에 앉은 인턴을 잔뜩 풀린 눈으로 쳐다보는 인혁.

“ .. 왜, 할 말 있나.. ” “ 예? 아.. 그게.. 저, 처음에 여기 들어왔을 때.. 교수님 수술방 들어갔을때요~ 사실은 교수님 수술하시는게 너무 멋있어서.. 외과들어갈려고 했었습니다..! ”

살짝 취해서는 무슨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듯이 인혁에게 말을 거는 인턴. 그러자 인혁은 그 앳되보이는 인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입을 연다.

“ .. 알아. ” “ .... 네? ”

인턴은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되묻는다. 그러자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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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었다고, 자네 외과에 관심 있는 거.. 권세훈 선생. ” “ ...!!... 아.. 제 이름 아시고 계셨습니까? ”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인턴은 약간 놀란 듯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러자 인혁은 피식- 웃으며 눈앞에 빈 술잔을 말없이 인턴에게 건네더니 그 술잔에 술을 따라 주려는 듯 술병을 집어 든다. 순간, 살짝 당황하다가 그가 주는 술을 받아 마시려는 인턴. 그런데, 인혁은 인턴에게 건배를 하자는 듯 술잔을 들어보이고, 인턴은 약간 어색해하며 그와 건배를 한다. 그때, 다시 입을 여는 인혁.

“ 그럼, 몇 개월을 봐놓고 이름도 모를 줄 알았나.. 자네, 이번에 성형외과 들어갔지. ” “ ...!!... 아, 예..! 그런데, 그런.. 것도 잘 아시네요. ”

그러자 다시 대답 없이 피식 웃는 인혁. 또 말없이 술잔만 들이키는 그였다. 반면, 인혁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줬던 거 같아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뿌듯해지는 인턴. 사실, 인혁이 어려워서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인혁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도 하고, 마음속으로는 그를 조금 동경하기도 했었다. 대학시절 생각했던 이상과 거리가 먼 실제 병원생활. 다른 교수들이나 선배들, 병원사람들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주어진 대로 살기 바빠보였다. 그런데, 그런 병원 내 에서 유일하게 그 주어진 것을 거스르는 사람. 어떤 때는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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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내내 쉴 시간도 없이 일만하고, 늘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자리욕심하나 없이, 오로지 환자밖에 모르는 사람..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봐오지 못했던.. 자신은 절대 못할 거 같은 길을 가는.. 그런 사람. 인턴은 늘 궁금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는 건지. 왜 그렇게 까지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건지. 그래서 그를 어떤 면에서는 동경하고 늘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니.. 인턴은 지금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인턴.

“ 저기.. 교수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 ...말해봐. ” “ 교수님은 왜 그렇게 일만하십니까..? 맨날 죽어라 환자만 보시고.. 자리에는 관심도 없으시고.. 항상 환자밖에 모르시고.. ” “ .... ” “ ... 그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

그러나 인혁은 그 질문에 대답 하지 않고 다 풀려버린 눈으로 그 인턴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이 인턴이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정말 진심으로 진지하게 묻고 있는 듯 했다. 그러자 심하게 풀려있던 그의 눈이 다시 초점을 찾고, 이내 그가 인턴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면서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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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가.... 사람 살리는데, 이유 같은 게 필요 하나? ” “ 아,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 “ 누가 꼭 알아줘야지만 사람을 살리는 거냐고..!!!! ”

갑작스럽게 화를 내며 소리치는 인혁.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린다. 그러자 놀라며 바로 고개를 숙이는 인턴.

“ .....!!!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

늘 묵묵히 환자를 돌보던 인혁의 모습을 보다가 술에 취해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처음본터라 그의 앞에서 꽤나 쩔쩔매고 있는 인턴. 인혁은 그런 인턴을 가만히 보더니 다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 자네는.. 그 과를 왜 지원했나.. ” “ 아.. 그건....... ” “ ..... ”

인혁은 인턴이 대답을 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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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까지 대답을 못하는 인턴. 그런 인턴을 다시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나지막하게 입을 여는 인혁.

“ 자네도.. 환자가 돈으로 보이나? ” “ ...!!... ”

직설적인 인혁의 질문에 놀라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인턴. 그러자 그는 또다시 그 인턴의 대답을 기다리며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긴 정적 다시 점점 풀려가고 있는 인혁의 눈. 하지만 풀려가는 눈으로 여전히 인턴을 바라보면서 이번엔 조금 진심어린 목소리로 입을 연다.

“ .... 어느 과를 가는지가 중요한건 아니야.. 하지만, 벌써부터 이 과가 편할까, 저과가 편할까.. 어떻게 하면 더 높이 올라갈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까.. ” “ ..... ” “ 그러진 마. ”

그러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인턴. 심하게 흔들리는 인턴의 눈동자.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인혁에게서 한참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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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쓰러질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인턴을 향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인혁.

“ 어딜 가든.. 좋은 의사가 되라. ” [ 쿵- ]

그리곤 테이블위에 힘없이 떨어지는 인혁의 머리. 그 순간, 조용해진 호프집 안.. . . . . .

잠시 후, 병원근처 호프집 앞, 술에 취해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인혁을 낑낑거리며 업고 나오는 인턴들. 그 옆에서 인혁의 외투와 가방을 챙겨서 그들을 따라가는 은아. 인턴들은 그를 업은 채로 힘겹게 대로변으로 걸어가더니 어느 버스정류장 벤치에 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려는 듯 은아에게 인사를 하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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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신선생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 네, 인턴쌤들 고생하셨어요. 저기.. 그런데 어떻게요. 회식 분위기가 다 깨져버려서... ”

정류장 벽에 기대있는 인혁을 보다가 그들에게 약간 미안한 듯이 말하는 은아. 그러자 인턴들이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연다.

“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기, 저희는 괜찮은데, 신선생님 혼자 괜찮으시겠습니 까? 교수님 몸도 못 가누시는데.. 저희가 같이 기다려 드릴까요? ” “ 아니에요~ 지과장님 금방 온다고 하셨어요. 아, 다른 쌤들 자리 옮긴다는 것 같던 데.. 얼른 들어가 보세요..! ” “ 예, 그러면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

은아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벗어나는 그들. 그렇게 인턴들이 모두 돌아가 버리고, 은아는 혼자 남게 되자 살짝 한숨을 지으며 벤치에 앉아있는 인혁을 내려다본다. 힘겨워 보이는 그의 모습. 술에 취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앞으로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앉아있는 그였다. 은아는 그를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서 정류장 유리벽에 기댈 수 있게 해준다. 그러자 그 자세가 편했는지, 아예 머리까지 유리벽에 기대고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는 그. 눈은 다 풀려서 감겨져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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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고개가 젖혀지느라 살짝 벌려져서는 술기운이 오르는지 계속해서 거친 숨을 내뱉는다. 괴롭고 힘이 들어 보이는 인혁. 그런 그의 모습이 속상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그를 바라보며 푸념하듯 중얼거리는 은아.

“ ... 인턴들이 뭘 안다고.. 그래 소리를 지르노.. ”

그러나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그는 술에 취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은아 역시 그런 그를 말없이 한참 쳐다보다가 이내 그와 조금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는다. 그리고선 인혁의 옆모습을 또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이 방금 한말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어트리는 그녀.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지 않았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 했지만.. 모든 게 허탈했다. 모든 게 괴롭고, 모든 게 힘들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왜 우리는 이렇게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을 이렇게 힘들게 지켜야 하는 건지.. 모든 것에.. 화가 났다.

/ .. 의사가.... 사람 살리는데, 이유 같은 게 필요 하나? 누가 꼭 알아줘야지만 사람을 살리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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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고, 누가 알아줘야만 사람을 살리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해야 하는 일. 하지만,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그런 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따라 이 일을 시작했고,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그런데 왜 우리는

/ ..... 임마!! 담당의가 못 보낸다면 못 보내는거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리고 감 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적자만 내는 주제에!! 지금 하고 있는 외상수술들!! 다 니가 잘나서 하는 거 같아? 내가 지금 이병원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고!! 너 때문에 쌓이 는 적자가 얼만 줄이나 알아?!........ 이봐! 이봐! 의사가 병원규칙도 다 무시해버리고!! 위계질서도 모르고 설쳐대니까!! 그 밑에 있는 간호사도 이렇게 설쳐대는 거 아니 야!!!....... /

왜 우리는

/ ... 내가 여기 동무가 있노! 친척이 있노? 딸내미라고 있으면 뭐하는데?! 며늘 아 보 다도 못해가지고, 지 애미 코빼기도 안 들여다보는데..! 됐다마, 필요 없다..! 누가 올 라 오라켔나? 도로 내려가라카이!! ....나쁜 가스나.. 어떻게 한번을 안 올라오노.. 그놈 의 환자들하고 간호사 일만 중요하고, 니 애미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관심도 없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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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걸까

/ 신선생. ... 의사가.. 수술만 잘하고 환자만 잘 보면 되는 게 아니에요. .... 세상이 그 래요. 누구든지 힘이 있어야지 살아남고 버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최교수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냥 저 트라우마센터가 다에요. 내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걸까 고개를 들어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은아. 세상에 온갖 괴로운 짐은 혼자서 다 안고 있는 듯한 표정.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그는 늘 그런 표정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짊어지려하다가 곧 무너져버릴 것 같으면서도 그는 늘 그런 모습이었다.

[ 주륵- ]

하지만, 그런 그를 보는 게.. 이젠 힘들다. 내가 언제까지 있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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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이렇게 혼자서 고집스럽게 버티려고 하는 건지.. 이제는 그가.. 조금 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그가 조금만 이기적 이기라도 해서.. 내가 이 곳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도록.. 조금만.. 남들처럼 조금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주륵- ]

누구나 아는 얘기. 그러나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얘기. 이 세상에서 그걸 온전히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그도.. 나도.. 모두가 마찬가지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이 외면해야하고 무언가를 포기해야하고. 남보다.. 자기 자신을 챙겨야하고.. 무언가를 바랄 수밖에 없고.. 사람이기에.. 살아가야 하기에..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도 힘들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이제.. 그걸 인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도.. 나도.. 그럴 때가 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해야 하는 일. 하지만, 쉬우면서도 어려운 그런 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하지만.. 이 세상엔 분명히.. 마음만으론 안되는 게 있다. 그가 많은 환자를 살리고 싶어 하지만, 이 세상 모든 환자를 살릴 수는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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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외상센터를 끝까지 지키고 싶지만.. 결국엔.. 떠나야 하는 것처럼..

[ 주륵- ]

그녀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다시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살짝 코를 훌쩍이며 그 눈물을 얼른 닦아내는 그녀. 그런데 그때, 울고 있는 그녀의 소리가 들렸는지, 술에 취해 감겨있던 눈을 살짝 뜨는 인혁.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그녀를 보려는데, 머리가 너무 깨질 듯이 어지럽고 눈앞이 핑핑 돌아서 정말 내 몸 하나도 지탱하기가 버거웠다.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나도 취한상태라 아무것도 분간이 안가는 그 상황 속에서도.. 그녀만은 또렷이 보였다. 그녀가 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파 왔다. 그녀가 그만 울었으면.. 그만 슬퍼했으면 했다. 내 곁에 있어서 슬픈 사람.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외면하지 못해 아픈 사람. 불쌍했다.. 나 때문에 불쌍해지는 사람.. 그래서 미안했다.. 너무나도 미안했다.. 이제는 그만 울었으면.. 이 사람이 그만 슬퍼했으면.. 술에 취해서인지..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인혁. 그가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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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뻗었는데도 손이 닿질 않았다. 그녀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래서 벽에 기대져있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몸을 천천히 그녀 쪽으로 기울이는데.. 아직도 손이 닿질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한곳에 있는 그녀. 더욱더 몸을 기울이는 그. 그러다 손끝의 그녀의 볼이 스치려는 순간,

[ 풀썩- ] “ ...!!!!... ”

기울어지는 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그녀의 무릎 위로 쓰러져버린 인혁. 멍하니 하늘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은아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쓰러져버린 그 때문에 너무 놀라 잠깐 숨이 멎는 듯 했다. 자신의 무릎위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 그녀는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깨운다.

“ 교수님..! 일어나보세요..! 으읏!! 차..!! ”

몸이 축쳐져 있어서 더 무거운 그를 힘겹게 일으켜 다시 유리벽에 기대어 주는 그녀. 하지만 인혁이 자꾸만 쓰러질 듯 미끄러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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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그를 지탱하기 위해 바로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잡아준다. 그러다 곧, 그가 중심을 잡고 제대로 앉는 듯하자 바로 손을 떼어 내고 일어나려는데,

“ 후..... 신선생.... ” “ ...!!... 정신이 좀 드세요..? ” “ ....후우... 신선생... 신선생... ” “ .... ” “ .... 후우.... ”

술주정이었다. 술에 취해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그를 보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은아. 이내 짧은 한숨을 쉬며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려는데,

“ .... 미안해... ”

[ 풀썩- ] “ ...!!... ”

아주 작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다시 쓰러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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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 “ .... ” “ ... 울지마... ”

그의 말의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는 은아. 그런데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의 잘못이 아닌데.. 그 때문에 운 게 아닌데.. 자꾸만 자신 때문이라는 인혁 때문에 또 눈물이 나왔다.

“ .... 미안해.. 미안해... 신선생.. ” “ .... ”

그런데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여린 어깨에 기댄 채로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해대는 인혁. 그렇게 미안하다는 그 말로 계속해서 그녀를 울리는 그.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저 아무 말도 못한 채로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은아. 모든 걸 다 짊어지려는 그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너무나도..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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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떠날 수도 없게 만드는 사람.. 정말 불쌍했다.. 그도.. 나도.. 그렇게 한참을 서로 기대어 서로의 방법으로 울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의 가을밤이 그렇게 쓸쓸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 . . .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현실에 우리는 아팠다.. 너무 아팠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너무나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서로에 대한 연민.. 혹은 동정.. 혹은 미안함..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불쌍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 불행해지기를 서로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이젠 벗어날 수도 없는 현실 그 지독한 현실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우린 더 아팠다.. 너무 아파서..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 모를 만큼 그렇게 아파서.. 정말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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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바보같이 그 마음이 사랑이 되가는 줄도 몰랐다.

. . .

우리가 함께해온 이유. 우리가 함께해온 시간. 그 시간동안 당신과 내가 쌓아온 믿음. 그 시간동안 우리가 흘린, 피보다도 진한 땀과 눈물. 그 어떤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그와 나, 그녀와 나, 우리사이에 그 어떤 무언가.. . . . .

Something.. 그리고 반년 후,

2012년 5월, 다시 재개된 외상센터 사업. 또다시 그 사업에 희망을 걸로 열심히 외상센터를 준비하는 은아. 그런 그녀와 반대로 이제 외상센터는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환자를 돌보는 데만 집중하는 그. 그렇게 다시 다가오는 뜨거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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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10중 추돌 사고가 일어난 어느 날, 세중병원 응급실, 약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그 환자들을 전부 받겠다고 하는 인혁. 덕분에 순식간에 응급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들 30분도 안 되서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그곳. 더 이상 환자가 누울 공간도 없을 때가 되어가던 그때,

“ 김 선생! 있잖아요..! ”

땀에 범벅이 된 몸으로 급하게 카운터로 달려 나오는 인혁을 향해 매우 다급하게 외치는 은아.

“ 교수님!! 지금 응급실 공간이 너무 포화상태라..!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가 없습니 다..!! ”

그녀의 말에 상황을 판단하려 재빨리 응급실을 빙- 둘러보는 인혁. 이건 그동안 봐왔던 상황 중에 최악인 상황이었다.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보다 차고 넘쳐서 온갖 종류의 베드가 응급실 전체에 깔려있고, 환자들의 신음소리와

보호자들, 의사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들려왔다. 흡사, 전쟁터 혹은 지옥과 같이 혼돈상태에 빠져버린 그곳. 인혁은 그제야 앞뒤 가리지 않던 상태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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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응급실 상황을 자각한다. 그런데 그때, 새롭게 들어온 중환자를 가리키며 인혁에게 따지듯이 묻는 도형.

“ 교수님!! 지금 이환자를 어디에 받을 껍니까?!! ” “ .... 교수님!!! ”

인혁의 빠른 판단을 재촉하는 도형과 은아. 그러자 광기 어려 보이던 그의 눈이 순간 중심을 되찾고, 그 순간, 망설임 없이 응급실 안내방송 버튼을 누르는 그.

[ 삐익- ]

그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입을 연다.

“ 안내말씀 드립니다.. 지금 레벨 원 , 레벨원의 재난 상황임을 선포합니다..! ”

그러자 또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으로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는 은아와 도형.

“ 하아.. ” “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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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인혁.

“ 지금부터 30분 안에.. 응급실부터 비웁니다. ”

------------------------------- [ 인혁은아 소설 ] 너를 되뇌다. 4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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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소장용 총7권 제작 저의 2012년 여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셨던 배우 송선미, 이성민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 mirim_love@naver.com ] 201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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