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민주언론시민연합 광주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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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시민연합 5·18 광주순례 2023 2023년 5월 13일(토)
민주언론시민연합 5·18 광주순례 2023

여는 글

34년 전 5월이 돌아오다

화정고등학교 고건호

그날의 함성 영원히 울릴 거라 믿었지만

34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함성은 간데없고

기계부품이 되어버린 오늘의 우리들은

좀 더 고성능의 부품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공정을 받고 있다

34년 전 뜨거웠던 몸부림은

볼펜 굴러가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버리고

34년 전 아버지들이 잡아냈던 승냥이들이

이리로 둔갑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하루하루 자기를 잘라 이리들의 간식으로 던져 준다

34년 전 아버지들이 울부짖던 함성소리는

이제 5월의 행사가 되었고

다녀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집을 나선 아버지들은

차디찬 추모비 돌탑 안에 갇혀버렸다

기계가 되어버린 우리, 몸속에 흐르는 기름이 다시 피가 되어

아버지들의 함성을 꽃 피우자

돌탑 안에 갇힌 웃음이

돌아오는 그날까지

* 2014년 5·18 민중항쟁기념 서울청소년대회(문예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날 짜 시 간 일 정 5.13 (토) 07:20 집결(동화면세점 앞) 07:30 출발(동천역환승주차장 정차 08:00) 08:10 참가자 인사 09:00 영상 시청 11:50 점심식사 12:50 국립5·18민주묘지 이동 13:10 단체 참배(민주의문) 13:30 송건호·리영희·김태홍 선생 참배 14:10 구묘역으로 이동 14:20 구묘역 단체 참배 15:10 5·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이동 16:00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관람 17:10 저녁식사 18:10 버스탑승 후 서울로 출발 22:00 서울 광화문 도착 5·18민주화운동 4 당시 언론보도 11 잠들지 않은 금남로 16 송건호 선생 17 리영희 선생 20 김태홍 선생 23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24 (구)묘역 열사 26 (구)묘역 배치도 30 함께 부르는 노래 32 CONTENTS 일정

5·18 민주화운동

5·18민중항쟁 직전

1979년

10월 4일 국회,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10월 16일 부산대, 동아대생 ‘정권타도’ 교내시위

및 시민 합세한 가두시위 전개

(부산민주항쟁)

10월 18일 마산민주항쟁 학생시위와 관련하여 부산

비상계엄령 발표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11월 19일 전국 대학 휴교 해제

12월 6일 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긴급조치

9호 해제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발생, 신군부 정승화

계엄사령관 강제 연행

1980년

2월 29일 윤보선, 김대중 등 정치인 687명 복권

3월 13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발족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

4월 30일 계엄사령관 지휘관회의, 노사분규와

학원소요 등 폭력 엄단키로 결의

5월 6일 대학가, 학원자율화·입영훈련 철폐 요구하며 가두시위 전개

5월 14일 광주지역 대학생 등 1만여 명 가두진출, 도청광장에서 ‘민주화 성회’ 진행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 시민 20여만 명

운집하여 계엄 철폐, 민주화 요구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5월 18일 5·18 민중항쟁 발발

▲ 부산민주항쟁
민언련 5 18 광주순례

5·18민중항쟁 상황

민중항쟁 발발

5월 17일 (토요일, 맑음)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24시 00분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월 18일 (일요일, 맑음)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10시 00분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 구호 외치며 항의시위

10시 15분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10시 20분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15시 40분 유동삼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 작전 감행

19시 02분 계엄사령부, 광주지역 통행금지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겼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03시 00분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규모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4시 40분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열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16시 30분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 의해 부상

20시 00분 수만 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08시 00분 고등학교 휴교 조치

10시 20분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 속옷만

입은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간의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금남로에서 200여 대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20시 10분 시민들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MBC 건물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계엄군 발포와 무장봉기

5월 21일 (수요일, 맑음)

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 계엄군과 공방전

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4시 30분 광주KBS 건물 방화

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실탄 지급 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10시 19분 광주세무서 건물 전소

11시 10분 대형 헬기, 도청광장 도착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5·18 민주화운동 4 5

민언련

광주순례

14시 35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 대 획득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 향해 조준사격

16시 00분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가 도청 앞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17시 30분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해방광주

5월 22일 (목요일, 맑음)

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 방송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13시 00분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

소형버스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

‘경고문’ 전단 시내 전역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 도착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 사격

14시 20분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 간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비)

11시 00분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 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함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인상착의 벽보 게시 5 18

최후의 항쟁

5월 27일 (화요일, 맑음)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

사격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

1980년 5·18 이후

5월 29일 5·18사망자 129구 시신을 망월동

시립묘지 3묘원 안장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 ‘학살정권 타도’ 외치며 투신

6월 9일 ‘광주시민항쟁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노동자 김종태 분신

12월 9일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1년

3월 3일 전두환 12대 대통령 취임

5월 18일 5·18 1주기 추모식 거행,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

5월 27일 서울대 침묵시위, 김태훈 투신 사망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

5월 18일 경찰의 원천봉쇄로 5·18 2주기 추모식

무산, 유족 30여 명만 위령제 거행

10월 12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5·18진상규명

요구 단식투쟁 중 옥사

1983년

5월 18일 유족과 부상자 격리조치로 5·18 3주기

추모식 무산, 묘지 이장 회유정책으로 유족 일부 이탈

10월 9일 미얀마 랭군사건 발생

11월 12일 미국 대통령 레이건 방한, 광주학살

배후조종 등 내정간섭 중지요구

반미시위

1984년

5월 18일 3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5·18 4주기 추모식 거행

8월 30일 경찰의 명동성당 난입

11월 18일 3개 대학 학생들 민정당사 점거 시위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

2월 12일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승리

5월 18일 5·18 5주기 추모식에 야당 의원, 재야인사, 종교인 등 500여 명 참석

5월 23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8월 15일 노동자 홍기일 금남로에서 분신

12월 2일 광주 미문화원 점거 농성

5·18 민주화운동 6 7

민언련 5 18 광주순례

민주시민운동의 폭발

1986년

4월 28일 서울대생 이재호, 김세진 “반전 반핵

양키고홈” 외치며 분신

5월 18일 시민, 학생 1천여 명 참석한 추모제 거행

10월 28일 건대사건 발생

1987년

1월 16일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발표

3월 6일 호남대 졸업생 표정두 “미 국무장관 방한

반대”하며 세종문화회관 앞 분신

5월 18일 추모식, 위령제, 기념예배 등에 수십만

명의 시민 참여

6월 10일 6월항쟁 발생,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광주시민 30만 명 시위

7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장례식 거행

1989년

5월 18일∼27일

조선대생 이철규 사인 진상규명 투쟁 및 5·18 9주기 추모식

1990년

5월 18일∼27일

전야제에서 부활제까지 41개 단체 연합한 5월 행사

진행

학살책임자 처벌 운동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 백골단에 의해 타살

5월 18일∼27일

정신계승결의대회에서 5월 영령 부활제 등 5월 행사

진행

5월 26일 분신자살한 전남대생 박승희 장례식에

학생, 시민 20여만 명 참여

1992년

▲ 연세대생 이한열 장례식

1988년

4월 6공화국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성격 규정

5월 18일∼27일 준합법적인 5·18행사 진행

11월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및 청문회 가동

2월 25일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취임

1993년

5·18문제해결 5대 원칙(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집단배상, 명예회복, 기념사업) 확정

3월 18일 김영삼 대통령 망월동 참배 저지

1994년

5 18학살책임자 고소 및 고발운동 전개

1995년

7월 5 18학살책임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구성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전두환, 이희성 등 7명을

국회위증죄로 고발

8월 5·18학살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전개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부정축재혐의로

서울구치소 구속·수감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 5·18특별법 제정

민자당에 지시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 12·12 및 5·18사건 관련

혐의로 구속·수감

1996년

1월 23일 전두환 노태우 등 5·18학살책임자 8명

내란혐의로 기소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형 등

5·18학살 책임자 형벌 확정

4월 29일 정부 5·18민중항쟁 국가기념일 제정

5월 16일 5·18신묘역 준공식

5월 18일 정부 주관 5․18 17주년 기념식

1999년

5월 5·18자유공원 조성 (영창, 법정 이전)

2000년

5월 18일 정부 주관 5·18민중항쟁 20주년 기념식

2001년

5월 5·18기념문화관 건립

12월 21일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제정

2002년

7월 27일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시행, 5·18묘지로 승격

▲ 전두환, 노태우 기소

5·18 민주화운동 8 9

민언련

오월항쟁의 의의

5·18민중항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

온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소산이다. 조선 말기 갑오농민혁

명, 일제 강점기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온갖 탄

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해방투쟁,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

너뜨린 4·19학생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밑으로부터

개혁운동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던 것이다.

5·18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

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

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잡았다.

5·18민중항쟁은 당시에는 피의 진압으로 패배하였지만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

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증거가 되

었고, 나아가서는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정치

군부 세력을 심판하였으며 마침내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

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쟁이 국민저항권의 적극적

행사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5·18민중항쟁 시기의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

동체 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5·18민

중항쟁은 저항과 단죄를 넘어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

체 실현을 위해 우리 모두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

은 물론, 인류 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5 18 광주순례

80년 5월, 언론은 비겁했다

80년 5월, 당시 언론은 광주의 진실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왜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군부에 대해서는 찬양으로 일

관했다. 만일 언론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의문과 반성을 되새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 발발 후, 광주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3일 후인 5월 21일부터다.

학생 시민들 광주서 소요

- 중앙일보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부는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 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린 데 기인

했다고 발표했다.

- 서울신문 (1980년 5월 21일)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 조선일보 (1980년 5월 25일)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는가 하면 ‘한국방송은 못 믿으니

이북방송을 들으라’고 권유하는 사례, 도저히 데

모나 소요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군당국

의 설명이다.

- 서울신문 (1980년 5월 26일)

기사라고 보기 어려운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데 그쳤다. 초기 보도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계엄사의 발표문을 옮겨 놓았다 하더라도 다음에 이어

지는 후속 기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떤 기사도 공수부대 과잉진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당시 모든 언론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폭도

들의 난동,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에 의한 폭동

으로 몰고 갔다.

쓰러진

당시 조선일보 사설은 간첩들의 유언비어에 의한 선동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역시 유언비어로

사태가 악화한 바 있는 일본 관동 대지진 당시와 비교하

기까지 했다.

사회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또는 격앙된 군중 속에 서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파괴와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피흘림을 보고 불길이 솟고 군중의

격앙된 심리상태에 이성을 잃게 되면 냉철한 판단

쳐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바리케이드
80년 5월 언론보도 10 11

이 요구되는 분별력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57년

전, 일본 광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

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

- 조선일보 (1980년 5월 25일)

나팔수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침묵과 왜

곡 이후 벌어진 것은 당시 신군부에 대한 찬양이다. 모

든 언론은 당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이던 전두환을 실권자로 전면에 내세우는 데 열을 올리

기 시작한다.

광주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보도들만 봤다면 광

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은 너무나 자 명하다. 아마도 불순분자, 공산주의 폭동, 무정부 상태, 폭도, 이런 단어만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따라서 5월 27

일 새벽에 무자비하게 광주 시민군을 덮친 계엄군의 행

위가 신중을 거듭한 군의 노고 끝에 나온 것이라는 신

문 사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으시죠.

•예.

•그동안 국보위가 발족된 이후에 괄목할 만한 사

회개혁 사업의 전개로 해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

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동안 국

보위를 만드시고 또 맡으셔서 노고가 크시겠습

니다마는 전 장군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광주 시내 출입 당분간 제한, 시민 피해 없도록

- 중앙일보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반군투입 개시, 5시 10분 완료, 시내 출입

당분간 제한

- 동아일보 (1980년 5월 27일)

국군이 선량한 절대 대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

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

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 는다.

- 조선일보 (1980년 5월 28일)

역사적 책무를 좋던 싫던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지 않나 봅니다.

- 전두환 장군과 이진희 MBC 사장과의 대화

(1980년 8월 11일 MBC 방송)

이 방송이 녹화되기 직전 카메라에 포착된 당시 이진희

MBC 사장과 전두환 장군의 대화 내용을 보면 그 당시

MBC를 비롯한 모든 언론이 전두환 영웅 만들기에 얼마

나 주력했는지 알 수 있다.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한 강제진압 후 5·18 광주의 진실

은 묻혀버리고 80년 6월 이후부터는 광주에 대한 신문

보도는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다. 방송도 물론 이와 다

를 게 없었다. 현재 MBC, KBS 역시 당시 방송자료가 보

관돼 있지 않다. 그러나 5·18 당시 텔레비전 보도를 지켜

본 사람들은 모든 방송이 신문과 다름없이 계엄 당국의

(대담 전 녹화내용)

•저희들 지금 이미 팀을 만들어 가지고 시골로

내리고, 보고서 내 보내려는데 전 장군님 말하 자면은 어린 시절부터 해가지고 현재까지의 일 대기를 저희들이 지금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때 뭐 촌놈이라서 사진이 있어야지.
5 18 광주순례
•어릴
민언련

전두환을 미화하는 각 언론의 이른바 ‘신(新) 용비어천

가’는 끝없이 이어진다.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지닌 강력

한 양도자가 필요함은 국민적 여망이며 시대적 요

청이 아닐 수 없는가 합니다.

- 전두환 육군대장 전역식 녹화중계

(1980년 8월 22일 MBC 방송)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 경향신문 (1980년 8월 19일)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육사입교에서 대장 전

역까지 - 한국일보 (1980년 8월 23일)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 - 동아일보 (1980년 8월 29일)

내가 아는 전두환 장군 - 중앙일보 (1980년 8월 23일)

장군은 누구인가. 그렇다, 장군은 숨은 별이었다.

그가 바로 우리의 지도자요. 목자임을 우리는 미

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은 장군 바로 그 자신이었다.

- 서울신문 (1980년 8월 19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80년 당시 언론의 이와 같은 행

적은 결국 5공 정권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정통성이 없는 5공 정권은 집권

후에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언론을 철저하게 이

용했다. 5공 출범 전뿐만 아니라 출범 이후에도 언론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미화하기 위해서 애쓴 증거는 여

러 군데에서 발견됐다.

<80년대 서장-활력과 확신의 시대>

분명히 말하건대 나의 대통령 입후보와 정권수임

은 미리 계획된 것이 전혀 아니었다. 국가원수의

시해라는 엄청난 역사적 분수령을 고비로 역사와

배후하게 된 나는 불의의 타도, 위기의 극복에 나

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을 뿐이다. 사심이라고는

추어도 없었다.

- 1982년 3월 1일 MBC 방송

당시 언론은 민주화를 앞당길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뒤집어엎은 쿠데타의 주역을 큰 바위 얼굴로 칭송하고 있다. MBC를 포함한 방송은 일제히 몇 개월 만에 소장 에서 대장으로 고속 승진한 전두환

5공 내내 지속된 이른바 ‘땡전 뉴스’도 그것이 물론 보도

지침에 의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방송이 대통령에 대한

과잉 충성이었음이 틀림없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금요일 밤 MBC 뉴스데스

장군의 전역식을 녹 화 중계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곳 연병장에서는 잠시 후 전두환 육군대장의 전 역식이 거행되겠습니다. 국내외 여러 사정과 우리 가 당면한 새 시대를 위한 일대 전환점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80년 5월 언론보도 12 13

민언련

크입니다. 오늘 뉴스데스크 첫 번째 순서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오전 청와대에서….

- MBC 뉴스데스크 (1985년 6월 7일)

전국에 알려지면 많은 사람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고 믿 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서슬 퍼런 계

엄 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 논리를

다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언론에

그런데 이날 뉴스데스크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다. 이날 뉴스에서 5·18 광주에 대한 내용을 다시 접하

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80년 계엄사령

부에서 발표한 내용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22일 무장 집단들의 난동은 영광, 함평, 완도, 목

포, 송정읍, 해남 등 전남 일대로 확산됐고 또다시

광주 교도소를 습격해 총격전을 벌였으며 이른바

시민군을 조직해서 끝까지 싸울 것을 선동했습니

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평소 원한관계가 있는 민

가에 침입해 가족을 몰살시키거나 금품을 강탈했

으며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도 차츰 이들의 만행에

위협을 느끼고 이성과 냉정을 회복하기 시작했습

니다.

- MBC 뉴스데스크 (1985년 6월 7일)

계속되는 대통령 동정보도와 이어지는 5·18 광주에 대

한 왜곡보도, 이날의 뉴스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광주로부터 시작해서 5공 내내 지속됐던 진실에 대한

침묵 또는 왜곡, 그리고 권력에 대한 찬양, 즉 당시 우리

언론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까지 살펴본 것처럼 1980년 민주화의 봄을 피로 물들

이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또 그 정권이 유지되는 데

1등 공신은 단연 언론이었다.

만약 언론이 80년 5월 당시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보도

했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4 19혁

명 때는 제 역할을 했던 언론들이 무릎을 꿇으면서 비

극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당시 광주시민들은 사건이

는 반성은커녕 변명만이 남게 된다. 5 18 광주순례

[한겨레 2015년 5월 15일 19면]

“국민 통합 저해”…보훈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거부 ‘황당 이유’

“북한 영화 배경음악 사용…‘임’과 ‘새날’ 의미 논란”

올해 5·18 기념식에서도 제창 아닌 합창단 합창으로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 영화의 배경음

악으로 사용된 점을 거론하며 이 노래를 제창할 경우 국

민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고 있다. 보

훈처는 이 때문에 정부 주관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이 아닌 합창 방식으로 부르기

로 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14일 보도자료를 내 “18일 열리는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예년과

같이 공식식순인 기념공연에 포함하여 합창단이 합창하

고 원하는 사람은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2008년 이전과 같이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제창해야한다는 5·18 민주화운동 단체

등의 요구를 이번에도 거부한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이

1997년 정부기념일로 제정된 이후 2008년까지 정부기

념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해왔다. 하지만 이

명박 정부 들어 첫해인 2008년 보수 안보단체들이 “대통

령 참석 행사에서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주먹

을 쥐고 흔들며 제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문제를 제

기하면서, 2009년부터 합창단 합창 방식으로 바뀌었다.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는 이유로 “이

노래가 1991년 남쪽의 황석영과 북쪽의 리춘구가 공동집

필하여 제작한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배경

음악으로 사용돼 ‘임’과 ‘새날’의 의미에 논란이 야기됐다”

고 주장했다. 또 “작사자(황석영)의 행적으로 대한민국 자

유민주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국민

통합에 저해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더불어 “정부기

념식에서 기념일과 동일한 제목이 아닌 특정한 노래를 부

르는 5·18 기념식과 4.3 추념식, 6·10 기념식 모두 합창 형 식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논리를 댔다.

는 궤변에 가깝다는 지적이 여권에서도 나온 바 있다. 지

난 4월 정의화 국회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광

주정신이며, 5·18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게

끔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주시민들이 주도하는 제35주년 5·18민중항쟁 기념행

사위원회(행사위)는 지난 11일 정부 주관 5·18 기념식 불

참과 국가보훈처 예산지원 거부를 공식선언했다. 대신 같

은 시각에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민주평화광장에서

독자적인 기념식을 열기로 했다. 이 기념식에선 ‘임을 위

한 행진곡’을 제창한다. 시민 주도 기념식에 광주시의회는

2명을 제외한 의장 등 전원과 천정배 무소속 국회의원도

참석한다. 윤장현 광주시장과 장휘국 광주시 교육감은 어 떤 행사에 참석할지 아직 발표하지 않았고, 광주 지역 새

정치민주연합 소속 국회의원들은 정부 주관 행사에 참여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계엄군에 사살된 시민군 대

변인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

된 노래로 백기완씨가 쓴 시에 기반해 황석영 작가가 작

사를 했다. 황석영 작가는 1989년 방북했다가 7년형을 선

고받고 1998년에 사면 석방됐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하지만 보훈처의 이런 주장이 오히려 국민통합을 저해하
80년 5월 언론보도 14 15

민언련 5 18 광주순례

잠들지 않은 금남로

금남로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1가. 5·18 민주광장부터 북구 발

산교까지 이어지는 2.6㎞의 광주 도심 중앙도로이며 5·18

민주화운동의 중심지. 지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일

빌딩245,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등이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민주화운동 기록이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역사적 기

록을 보존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2015년 5월 13일 옛 광

주가톨릭센터에 설립했다. 공공기관이 생산한 5·18민주

화운동 자료,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성명·선언문, 일기, 취

재수첩, 사진(흑백필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자료, 미국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 등이 유네스코 기록물로 등재돼

있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는 ‘항쟁 5월의 기록, 인류의

유산’이란 주제로 5·18민주화운동과 세계기록 유산을 소

개하는 상설전시관이 있고, 4층 열람실, 5층 수장고, 6층

은 윤공희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집무실을 재현해 놓

았으며, 7층은 강당과 세미나실로 구성돼 있다. 보존가치

가 있는 국내외 민주·인권·정의·평화 관련 자료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 5 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일빌딩245

전일빌딩은 76년간(1928~2004) 5개 신문사가 자리한 언

론의 중심지였으며 광주지역 최초 미디어문화 복합건축

물(1970~1990년대)이다. 방송국, 잡지사, 도서관, 기념관, 연구소, 체육관, 사무실, 다방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 고, 호남예술제와 대학가요제 등이 열린 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서린 곳이다.

특히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압에

맞서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 는 건물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실시한 국립과학수사

연구원 조사결과, 245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시민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위, 집회를 하다 계엄군에 쫓겨 전일빌딩에 몸을 숨겼

다. 5월 27일 전일빌딩에 진입한 공수부대가 밖으로 집중 사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를 냈고, 옥상을 제압한 뒤 광주 YWCA 안에 있던 시민군과 교전하다 3명을 사살하고 29 명을 체포했다. 광주전남언론인회 회보(2015년 3월 18일)에서 최승호 전 광주일보 사장은 “5·18민주항쟁, 그 피맺힌 진실을 가슴 에 품고 있는 분수대와 이 눈물겨운 민주의 광장을 지금

도 내려다보고 있는 ‘역사의 눈’ 금남로1가 1번지 전일빌딩

은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한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옛 전남도청 부지에 아시

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제27조에 따라 설

립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소속 기관. 광주를 아시아 문화

예술 교류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

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5 18 당시 전일빌딩 앞 계엄군 헬기

한국 언론의 사표, 청암 송건호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청암(靑巖)이

다. 1926년 음력 9월 27일(호적상으로

는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에 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학교 법대

를 졸업하고, 1968년 베를린신문연구 원에서 수학하였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3년 <대한

통신>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에 몸담 은 이래, 1950년대 <조선일보>, <한국 일보>, <자유신문> 등의 외신부에 근 무하였다. 이어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0), <경향신문> 논설위원·편집국 장, <조선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편집국장(1974), 한국기독 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1978),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1984), 민 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87)를 지낸 뒤 1988년 <한겨레신 문> 발행인 겸 인쇄인을 거쳐 회장·고 문(1991∼1993)을 지냈다.

‘한국 언론의 사표’, ‘해직기자의 대부’, ‘민족지성’ 등 다양한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로 한국 언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언론인이다.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150여 명의 기자가 강 제 해직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 표를 던졌다. 이후 재야 언론인으로 활

동하면서 1984년 해직 언론인들과 함

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초대의장 역

임)를 만들고 이듬해 월간지 「말」을 창 간하여 제도권 언론이 외면하는 노동 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실상과 민주

화운동을 소개하는 한편, 1986년에는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이듬해 6월 항쟁의 불씨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사장과 회장으로 있으면서 편집권 독

립과 남북한 문제에 대한 냉전적인 보

도의 틀을 벗어나게 하는 데 이바지하 였다. 그러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기관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 슨병을 앓기 시작하였고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2001년 12월 숨졌다.

저술 활동에도 힘써 1978년 신진 학자 들과 함께 저술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을 비롯해 「민족지성의 탐구」, 「한국현 대인물사론」, 「민중과 민족」, 「민주언 론, 민족언론」,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 년」 등 2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제1회 심산학술상(1986), 한국언론학 회 언론상(1991), 호암언론상(1994), 금 관문화훈장(1999), 정일형자유민주상 (2000) 등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무궁 화장이 추서되었다.

인물 소개 16 17
인물소개 / 01

민언련

송건호 선생이 걸어온 길

1927.9.27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에서 출생

1940 (15세) 경성 한성(漢城)사립상업학교에 입학하

다. 이 학교로의 진학은 부친의 희망에 따른 것

이었는데, 부친은 왜놈 밑에서 공부는 무슨 공

부냐면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할 것을 권고

했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훌륭한 스승의 지도

하에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

터 고서점을 찾아다니는 취미를 갖게 되었으

며 독서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과목 중에서

는 특히 한문과 역사를 좋아했다. 졸업을 앞두

고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둘러싼 일본인 학생

과의 차별대우에서 한국인임을 자각하기 시

작했다고 한다.

1946 (21세)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다. 입학 후

6개월간은 학교를 잘 다녔지만 학교가 격동에

휘말리는 바람에 제대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1948년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다. 이때부터 학비를 스스로 조달하다.

6·25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하다.

1953 (28세) 서울에 다시 올라와 서울대 법대에 복

교. 학교에 다니면서 <대한통신사> 기자 공채

에 응모하여 외신부 기자로 들어갔으며 이때

부터 언론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54 (29세) <조선일보> 외신부가 새로 생김에 따

라 이 신문사로 옮기다. 이때부터 평론을 쓰기

시작하여 신진평론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9 (34세) 이후 <자유신문> 외신부장, <세계일보

> 조사부를 잠깐 거쳐 6월 <한국일보> 논설위

원, <민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친 후 다시 <한

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돌아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옮기는 한편 국학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다. 이때부터 대학에서의 강연도 잦아

지게 되었다. 1964년 「미국과 한국」 등 평론을

발표하다.

1965 (40세) <경향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하다. 「드

골 프랑스의 영광」 출간하고, 이해에 동남아 여

러 나라를 순방하다. 1966년 <조선일보> 논설

위원으로 옮기고 국민대학에 출강하다. 「드골 평전」, 「한국지식인론」 출간하다.

1969 (44세) <동아일보> 논설위원, 통일문제연구소

장에 취임하다.

1974 (49세)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다. 편

집인협회 보도자유위원장이 되었고 IPI 국내위

원을 맡다. <동아일보> 기자들 언론자유수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10·24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하다.

기자들은 민주언론운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선언의 신문 보도를 요구하는 한편, 수사기

관원의 신문사 출입을 금지하는 등 선언의 내

용을 실천에 옮기려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

개하다.

1975 (50세) 기자들의 언론자유운동, 민주언론운동

이 더욱 세차게 전개되자 정부는 1974년 12월 10일부터 <동아일보>에 대해 유례를 보기 드

문 광고탄압을 가하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이 같은 탄압에 굴복하는 한편, 거꾸로 권력과

은연중에 결탁하여 자유언론실천기자들을 대 거 해고하고 편집국장에게 동의를 요구하다.

언론탄압과 대량해임에 항의하며 기자들이

대대적인 제작거부농성에 들어가자, 3월 15일

“현재의 사태를 수습하는 길은 회사측이 하루

빨리 기자들을 복직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렇

지 않으면 <동아일보>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건의를 내고 편집국장직을 사임하 다. 이로써 22년간에 걸친 언론의 현장을 떠나 다. 사임 후에는 원고 집필과 번역 등으로 생계 를 이어가다. 한양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 하다. 「민족지성의 탐구」 출간하다.

1976 (51세) 당국의 압력으로 한양대학교 출강을 금 지당하다. 「조선의 예술」을 번역하는 한편 「단 절시대의 가교」를 출간하다.

1979 (54세) 「한국현대사론」, 「현실과 이상」, 「서재필 과 이승만」, 「소크라테스의 행복」, 「무지개라도

있어야 하는 세상」 등을 출간하다.

5 18 광주순례

1980 (55세) 5·17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포고령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다. 군재(軍裁)에서 3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2년형으로 감형된 후, 다시 육군형무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다.

「김구」, 「한국현대인물사론」을 출간하다.

1984 (59세) 12월 19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

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80년 해직

언론인협의회의 회원들이 중심이 된 민주언론 운동협의회가 발족되고 의장에 선임되다. 「말」

지 발행하다.

1985 (60세)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 「말」지

가 문제되자 발행인으로서 마포경찰서에 연행

되어 조사받다. 「살아가며 고생하며」, 「의열단」

을 출간하다.

1986 (61세) 제1회 심산상(심산사상연구회)을 수상 하다. 「분단과 민족」, 「민족통일을 위하여」, 「민 중과 민족」, 「한국현대사론」 등 간행하다. 「청 암 송건호 선생 회갑기념문집」이 출간하다.

1987 (62세) 새신문 창간발기위원장으로 취임하고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맡다. 「민주언론 민족

언론」을 출간하다

1988 (63세) 한성인상을 받다. <한겨레신문>을 창

간하고 초대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다.

1989 (64세) 「한나라 한겨레를 위하여」를 출간하다.

1990 (65세) 파킨슨증후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

다. 「한국현대언론사」 출간하다.

1991 (66세) 제7회 언론상(서울언론인클럽)을 수상

하다. <한겨레신문> 대표이사와 회장을 역임

하다.

1992 (67세) 제2회 한국언론상 본상(한국언론학회)

을 수상하다.

1994 (69세) 1980년 신군부에 의한 고문 후유증으

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하

다.

1999 (74세) 금관문화훈장을 받다. 기자협회보에서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편집·보도국장과 언론

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20세기 최

고언론인’으로 위암 장지연 선생과 함께 선정

되다.

1994 1980년 신군부에 의한 고문 후유증 ~2001년

으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8년간 투병 생활

을 하다.

2001 (76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다. 12월 21일

오전 8시 영면에 들다. 24일 오전 9시 사회장

으로 영결식이 거행되고 오후 2시 광주 5·18국

립묘지에 안장되다.

민언련, 2004년 제3회 송건호언론상 수상

‘송건호언론상’은 언론 외길 40년을 언론자유와 진실보도를 위해 바쳤던 故 송건호

청암언론문화재단과
설립 이후 보도지침 폭로, 언론교육과 언론감시 활동을 통해 수용자주권 의 식 확산 및 언론 바로 세우기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지난 2004년 12월 3일 제3회 송건호언론상을 받았습니다. 인물 소개 18 19
선생을 기리기 위해
한겨레신문사가 2002년 제정한 상입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1984년

인물 소개 / 02

실천지성, 리영희

사실의 빛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데 온

전히 바쳐진 선생의 삶. 이제 누가 앞

장서 허위의 장막을 찢고 우상의 주술

을 벗겨낼까. 탐욕의 족쇄를 깨뜨리고

자유인의 길로 이끌까. 선생은 홀연히

떠났지만, 우리의 눈앞은 캄캄하고, 머

리는 허둥대고, 가슴은 떨린다. 언제나

선생의 뒤를 따르던 이들이었기에 더

욱 황망하다.

혹자는 선생을 사상의 은사 혹은 사 상의 스승으로 상찬하지만, 선생의 위

치는 전선의 맨 앞자리였다. 대학 강단

마저 허위와 싸우는 전선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땐 고교 강단에서 전

선으로 달려나갔듯이, 언론과 학계에

선 허위 그리고 우상과 맞서 싸우는

최전방의 전사였다. 탄광의 갱도보다

더 힘들고 위태로운 진실의 막장, 선생

의 자리는 언제나 그 갱도 끝이었다.

일쑤 말했듯이 선생이 글을 쓰는 목

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서 시작해, 그것에서 그쳤다. 베트남전과 미군 개

입의 진실, 미국 세계전략의 진실, 분

단의 진실, 남과 북의 진실, 쿠데타의

진실, 자본과 시장의 진실, 전체주의

등.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돌아

보려 하지 않던 것들의 정수리를 선생

은 겨냥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그를 회유하고

압박했지만, 그의 글쓰기를 멈추게 하

진 못했다. 진실의 드러냄만이 약자의

유일한 무기였던 시절, 그건 최고의 금

기였다. 지배집단은 더 큰 권력과 더

많은 부를 위해 거짓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우상을 앞세워 굴종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 이들의 숨

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천착했으니, 선생은 9번의 형사입건, 4번의 구속, 언론과 학계에서 모두 4번의 해직을

감수해야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

머니의 부고도 감옥에서 받아야 했다.

이러했으니 권력과 그 부나비들이 선

생을 의식화의 주범이라고 매도할 법

도 했다. 물론 선생이 진실을 드러내

고, 진실로써 어둠을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선생의 노력이 의식화 곧 계몽

의 빛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

생이 추구한 진실이, 다른 이를 억압

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그들의 비난은 부

질없다. 선생의 진실은 진정한 자유인, 곧 인간의 해방과 행복에 이르는 길

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야말로 선생

을 은사로 삼아야 했다. 허위와 우상

을 키워냈고 지금도 키우는 것은 분단

체제, 분단을 빌미로 남과 북의 정권

은 전체주의를 강화했고, 폭력을 제도

화했으며, 수탈을 합리화했고, 인간성

파괴를 상습화했다. 선생이 종내 민족

문제에 천착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

고, <한겨레> 방북취재 기획으로 선

생은 결국 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1999년 연평도 교전사태 직후

북방한계선은 남쪽의 영토선이 아니

라고 하여 충격을 주었듯이, 1998년

방북 땐 북쪽 정권의 이중성을 대놓고

민언련 5 18 광주순례

리영희 선생이 걸어온 길

비판한 것도 선생이었다. <한겨레>의

탄생을 두고 선생은 ‘캄캄한 하늘에

뜬 큰 별’에 비유했다. 우리는 그것이

단지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진실을 드

러내는 빛으로서 <한겨레>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의 표시였음을 안다. 지금

도 여전한 자본과 권력의 숨겨진 진실

을 <한겨레>는 얼마나 드러냈는가. 생

존을 핑계로 타협한 일은 없는가, 선생 은 과연 평안히 눈을 감으셨을까. 떨리 는 마음으로 삼가 옷깃을 여민다.

2010년 12월 6일자 한겨레신문 사설 <리영희, 담대한 진실의 향도>

1929.12.2 부친 이근국과 모친 최희저 사이에서 평안북

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출생

1936 대관공립보통학교 입학

1942 경성공립공업학교 입학

1946 국립한국해양대 입학

1950 해양대 졸업, 경북 안동중학교에서 영어교사

를 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해 입대

육군 중위로 유엔군 연락장교단 근무

1956 윤영자씨와 군산에서 결혼

1957 육군 소령 예편, 서울 합동통신사 입사

1959-60 미국 노스웨스턴대서 신문학 연수

1959-61 미국 <워싱턴포스트> 통신원 활동(익명 기고).

1961 5·16쿠데타. 박정희-케네디 회담 합의 내용 특

종보도

1964 <조선일보> 정치부로 옮김. 11월 유엔총회 남

북한 동시 초청안 관련 기사로 구속·기소. 12월

석방

1965 <조선일보> 외신부장

1969 베트남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적 보도

로 박정희 정권의 압력을 받아 <조선일보> 강

제 퇴사

1970 <합동통신> 외신부장

1971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으

로 강제 해직

1972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앰네스티 인터

내셔널 한국지부 창설 발기인

1974 군부독재 유신체제 반대 ‘민주회복국민회의’

이사.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1976 제1차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강제 해임

1977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출간, 반공

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2년형 선고

1980 만기 출소, 한양대 복직, 5월 17일 ‘광주 소요

배후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날조돼 구속

7월 석방과 동시에 다시 해직

인물 소개 20 21

1984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주관 ‘각급학교 교과서

반통일적 내용 시정연구회’ 지도 사건으로 다

시 구속 후 두 달만에 석방, 한양대 제2차 복직.

<분단을 넘어서>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출간

1987-88 <역설의 변증> 출간. 미국 버클리대 아시아학

과 교수로 임용돼 ‘한민족 현대정치운동사’ 강

1988 한겨레신문사 창간, 이사·논설고문 역임. 자전

에세이 <역정> 출간

1989 주한 외국언론인협회 언론자유상 수상. <한겨

레> 창간 1주년 기념 방북취재기획 관련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60일 만에 석방

1990 <자유인. 자유인-리영희 교수의 세계인식> 출간

1994 <새는 ‘좌 ‘우’의 날개로 난다> 출간

1995 한양대 정년퇴직. ‘단재상’ 수상

1998 <스핑크스의 코> 출간

1999 ‘늦봄 통일상’ 수상, <동굴 속 독백> <반세기의

신화-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

출간

2000 ‘만해상’ 수상, 11월 집필 중 뇌출혈로 우측 반신

마비

2005 자전적 대담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출간

2007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2010 12월 5일 별세

민언련 5 18 광주순례

인물 소개 / 03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폭로, 민주언론인 김태홍

1942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한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에 주도적 으로 참여해 광고이사와 제작담당 이사

저서

『80년 5월의 민주언론』 나남출판사 / 『민중과 자유언론』 아침출판사 / 『보도지침』 두레출판사 / 『작은 만족 이 아름답다』 수필집 인동출판사

국일보와 합동통신에서 기자 생활을 시 작했다. 1980년 해직기자로 한국기자협 회 회장을 지내며 계엄 철폐와 언론검 열 철폐 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됐다. 1984년에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 련 전신)의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1986년 말지를 통해 ‘보도지침’을 폭로한 주역이다. 이 때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 가모독죄로 두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후 19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풀려 났고, 8년여가 흐른 1994년 7월 5일에야 서울형사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로 활동했다.

1995년 정계에 입문, 광주광역시 북구청 장을 거쳐 16, 17대 국회의원(민주당, 열 린우리당)을 지냈다.

2009년 루게릭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다 2011년 10월 18일 숙환으로 별세했 다. 루게릭병은 김태홍 선생이 보도지침

폭로로 투옥됐을 당시 고문의 후유증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장례식은 민언련과 한겨레신문사, 전국 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가 함께 주 관하는 민주언론인장으로 치러졌다.

김태홍 선생이 걸어온 길

1942.9.7 광주광역시에서 출생

1970~1980 한국일보, 합동통신 기자

1980 한국기자협회 회장

1980.8 기자협회 사건 및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1981.12 투옥

1984~1987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공동대표

1985 [말]지 창간, 발행인

1986.12 월간 [말]지 특집호 ‘보도지침’ 사건으로

~1987.6 투옥

1987~1994 한겨레신문 창간 3인 기초위원, 제작·판

매 광고 발전기금 담당 이사

1987 제1회 카톨릭언론인상 수상

1995~1998 초대 민선 광주광역시 북구청장

1998~2000 광주광역시 정무부시장

2000.4 제16대 국회위원

2000.5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2002.6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약분업 대책 위원회’ 위원장

2001.11~2002.5 새천년민주당 홍보위원장

2002.7~2006.5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위원

2003 열린우리당 창당발기인 및 중앙위원

2003.10 제16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제4정조위원장

2004~2007.02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위원

2004 국회 신재생에너지정책연구회 대표의원,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부위원장

2005 열린우리당 윤리위원장

2006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한미 FTA를 연구하는 의원모임 공동대표

2008.05 제17대 통합민주당 국회의원

2009 루게릭병으로 투병

2011.10.8 별세

인물 소개 22 23

민언련 5 18 광주순례

인물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위르겐 힌츠페터는 독일 제1공영방송

ARD 산하 NDR의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980년 5월 20일, 광주민

주화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현장으

로 달려가 계엄군이 자행한 학살과 시

민의 항쟁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언론

통제로 인해 국내에서는 보도될 수 없

었던 광주의 참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일명 ‘푸른

눈의 목격자’로도 불린다.

언론인이 수집한 자료를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고

머릿속에 넣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나?

‘학살 광주’의 모습을 10롤의 필름에

담은 그는 도쿄로 돌아가 이틀분의 화

면을 독일로 전송했다. 그가 위험을 무

릅쓰고 카메라에 담은 이 영상은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여러 외국에 즉시

보도됐다. 이후 힌츠페터는 5월 23일

광주로 돌아와 계엄군이 철수한 ‘해방

광주’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그가 촬영한 영상은 그해 9월 17일 ‘기

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45분 다

큐멘터리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광주항쟁 취재 이후에도 힌츠페터는

꾸준히 전두환 정권의 폭압상을 폭로

하는데 주력했으며 1986년 11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 취재 중 사복

경찰에 맞아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

도 했다.

1995년 기자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

석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지속적

인 활동을 펼쳤다. 힌츠페터는 5·18 민

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을 “내 생애 어

디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최초의 엄청

난 슬픔과 서러움”이라 밝히기도 했다.

2016년 1월 25일, 80세를 일기로 본

국에서 삶을 마감했으며 ‘광주에 자

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서 비석과 함께

5.18 구묘역 입구에 안치했다.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걸어온 길

1937년 독일 출생

1963년 서독 제1공영방송 함부르크지국 TV방송국 카메

라맨으로 입사

1967년 홍콩 발령

1973년 독일 제1공영방송 도쿄지국 특파원 발령

1995년 기자직 은퇴

2003년 제2회 송건호언론상 수상

2005년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특별상 수상

2016년 1월 25일 별세

2021년 5·18기념재단·한국영상기자협회, ‘힌츠페터국제

보도상’ 제정

소개 / 04
인물 소개 24 25

민언련 5 18 광주순례

(구)묘역 열사

노동열사

김종태(80.6.9/ 당시 22세)

1980년 6월 7일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내용의

유서를 이해학 목사에게 전달할 것을 당부하고, “유신잔

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를 외치면서 6월 9일 이대 앞 네거리에서 분신

년 5월 16일 612일 간의 사투 끝에 운명

홍기일(85.8.15/ 당시 26세)

5월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활약. 1985년 8월 15일 전남도

청 앞 금남로에서 ‘8.15를 맞이하는 뜨거운 무등산이여’라

는 유인물과 유서를 뿌리고 분신. 22일 운명

이상모(89.5.29/ 당시 20세)

대우조선 노동자, 박진석의 분신소식을 듣고 회사의 노조 분열책에 분노하면서 기본 근무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옥포관광호텔 용역계약 해체 철폐투쟁 집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옥포로 갔다가 취소된 것을 알고 격분. 1989년 5

월 29일 대우조선 제3기숙사 7동 옥상에서 분신, 투신

신호수(86.6.19/ 당시 23세)

1986년 6월 11일 인천시 남구 소재 도화가스에서 근무 중

서울 서부서 형사들에 연행 후 행방불명. 1986년 6월 19

일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

박진석(89.6.4/ 당시 20세)

대우조선 노동자. 회사 측에서 구사대 가입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나눠주자 “노동자 간 싸움을 유발시키지 말라”

고 항의하며 4월 29일 분신 후 투신. 6월 4일 운명

장용훈(88.5.30/ 당시 29세)

현대교통 택시기사로 근무하면서 노동자 권익을 옹호, 대 변하는 데 앞장서오다가 1988년 5월 24일 회사 측의 부

당노동행위와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 1988년 5

월 30일 전남대 병원에서 운명

최동(90.8.7/ 당시 30세)

1989년 9월 인노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구속. 집행유예

로 출소.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가 1990년 8월 7일 오전 9 시 30분경 한양대 사회과학대에서 분신

이상남(89.5.16/ 당시 30세)

현대 엔진 공업에 입사, 상기철구 공장 기능직 사원 근무. 1987년 9월 현대중공업 구사대 차량에 깔려 중상. 1989

윤용하(91.5.12/ 당시 22세)

성남피혁 노동자. 1989년 초 대학 출신 현장 활동가를 만

나면서 노동현실 인식. ‘민주화운동직장연합’ 활동. 1991

년 5월 10일 ‘조국의 참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많은 젊

은이들이 노태우 정권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12일 운명.

학생열사

기혁(85.1.31/당시 21세)

1985년 1월 파쇼정권의 교육정책인 부당유급제 반대투

쟁 중 행방불명. 1월 31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준)

무등산 바람재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도중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 이 쏜 직격 SY-44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져 7월 5일 운 명 조성만(88.5.15/ 당시 24세)

이재호(86.5.26/ 당시 21세)

1983년 서울대 입학.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

원회 산하 ‘반전반핵 평화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 활동.

1986년 4월 28일 김세진 열사와 함께 ‘전방입소 결사반

대 및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 5월 26일 운명. (함께 분

신한 김세진 열사는 5월 3일 운명, 판교 공원묘지 안장)

1984년 서울대 입학하여 학생운동에 헌신. 1988년 5월

15일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던 명동성당 내 교육관 옥상에서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

고 할복, 투신하여 운명

박선영(87.2.20/ 당시 21세)

1987년 2월 20일 학내 비민주적 학사운영 및 미제국주 의 매판세력의 지배를 받는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분노, 항의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자결.

최덕수(88.5.26/ 당시 20세)

1987년 단국대 입학 후 학생운동에 헌신. 1988년 5월 15

일 “광주항쟁진상규명, 국조권 발동”을 요구하며 분신. 5

월 26일 운명

표정두(87.3.8/ 당시 25세)

5.18 광주항쟁으로 정학. 1983년 호남대 무역학과 입학.

제대 후 자퇴.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밤에는 무

등교회 내 ‘무등터 야학’에서 교사 활동. 1987년 3월 6일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내각제 개현 반대, 장기집권 음

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고 외치

며 분신. 8일 운명

이한열(87.7.5/ 당시 21세)

1986년 연세대 경영학과 입학, 동아리 ‘만화사랑’ 활동.

양영진 (88.10.10/ 당시 21세)

1988년 전방 입소거부 투쟁. 1988년 10월 10일 부산대

재료관 5층 난간에서 “이제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고 절규한 후 투신, 운명 이철규(89.5.10/ 당시 25세)

1989년 <민주조선> 발간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로 수배. 1989년 5월 3일 행방불명, 1989년 5월 10일 의

문의 죽음을 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됨

1987년
학내에서 벌어진 ‘6·10대회 출정을 위한
6월 9일
열사 소개 26 27

민언련 5 18 광주순례

이내창(89.8.15/ 당시 28세)

1989년 중앙대 총학생회장. 8월 15일 거문도 앞바다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 거문도까지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

과 동행한 것으로 밝혀짐

신장호(90.5.19/ 당시 23세)

1990년 5월 19일 ‘광주 성지 순례와 전대협 제4기 출범식’

참가를 위해 광주로 가던 중 장성에서 검문을 피하다 운명

이경동(93.9.8/ 당시 24세)

광주전남 교사 청년회 간사로 활동. 1993년 9월 8일 임용

고시철폐, 주한미군 철수와 기만적인 김영삼 정권을 반대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항거

한상용(93.11.10/ 당시 23세)

초등 교육 개혁과 교대 교육정상화를 위한 4학년 대책위

원회 위원장 활동. 1993년 11월 10일 임용고시 반대투쟁

승리의 염원을 담은 종이학을 접는 등 투쟁을 하다가 분 신·투신, 운명

박승희(91.5.19/ 당시 21세)

1990년 전남대 입학 후 교지 <용봉> 편집위원회 활동.

1991년 4월 29일 전남대에서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

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

놈들 몰아내자”고 외치며 분신. 5월 19일 운명

노수석(96.3.29/ 당시 21세)

1995년 연세대 법학과 입학. 풍물패 ‘천둥’ 활동. 1996년 3 월 29일 등록금 인상저지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연세인 수업거부 총궐기 후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

보를 위한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결의대회 참여 도

김철수(91.6.2/ 당시 18세)

1989년 보성고 입학. 5월 항쟁 11주년 기념일이자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하던 1991년 5월 18일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기념행사’ 도중 보성고 운동장에

서 “노태우 정권 퇴진”, “참교육 쟁취”를 외치며 분신. 6월 2

일 운명

문승필(92.11.2/ 당시 19세)

1992년 YMCA 회장으로 활동 시작. 경찰로부터 계속적인

협박 받음. 1992년 10월 14일 밤 12시 동아리 선배를 만난

이후 귀가 중 행방불명. 그해 11월 2일 광주 보훈병원 영안

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경찰은 단순 열차사고로 처리함

중 경찰의 토끼몰이식 폭력진압으로 쓰러져 운명

류재을(97.3.20/ 당시 20세)

1996년 조선대학교 행정학과 입학. 1997년 3월 20일 조

선대학교에서 열린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한보비

리 등 부정, 부패, 부도덕, 반민중, 폭력적인 김영삼 정권

규탄 남총련 집회’ 참가. 시위 도중 시커먼 물체를 맞고 쓰 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바로 운명

김준배(97.9.15/ 당시 27세)

광주대 재학시절인 1993년부터 수배를 받아오던 한총련 투쟁국장. 경찰의 과잉검거 작전으로 인해 1997년 9월 15 일 밤에 사망

재야열사

강상철(86.6.26/ 당시 23세)

1986년 목포사회운동연합 사무처장. 목포민주회복국민

회의 사무차장 등을 역임하며 목포지역에서 운동. 1986

년 6월 6일 목포역 광장에서 ‘민주화운동탄압 중지와

5.18진상규명, 직선제 개헌 단행을 촉구하는 양심선언’을

외치고 분신. 6월 26일 운명

김길호(89.3.25/ 당시 35세)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기독교농민회에 가입하여 활동.

1987년 12월 20일 무안에서의 대통령선거 무효투쟁시

오후 5시경 무안읍에서 광주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경찰

이 논두렁에 처박고 집단구타.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무

안읍 유성병원을 거쳐 목포 성 콜롬반 병원으로 옮겼으

나 계속 악화되어 1988년 3월 18일 광주기독병원에 입

원.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3월 25일 “나는 할 일이 많은데 …”라는 말을 끝으로 운명

이정순(91.5.18/ 당시 39세)

1991년 5월 18일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연 세대 정문 앞 철교에서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을 외 치며 분신, 투신하여 운명

정상순(91.5.29/ 당시 25세)

1991년 고교 후배인 김철수 열사가 분신한 후 괴로워하

다 5월 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옥상 위에서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 자”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 5월 29일 운명

열사 소개 28 29

(구)묘역 배치도

0-1 0-2 1 2 3 4 5 심 동 선 신 장 호 함 광 수 김 명 철 박 인 배 김 광 석 나 홍 수 13-1 13-2 13-3 13-4 14 15 16 17 18 19 김 영 묵 김 재 평 양 영 진 안 병 섭 김 재 수 김 만 두 나 종 기 이 금 재 안 병 복 27-2 27-3 27-4 27-5 28 29 30 31 32 33 34 임 태 남 이 철 규 김 형 관 홍 순 권 이 경 호 조 규 형 홍 인 표 김 완 봉 문 용 동 42-1 42-2 42-3 42-4 43 44 45 46 47 48 49 50 김 명 숙 이 내 창 장 용 훈 임 균 수 장 재 철 이 성 자 무 명 열 사 윤 형 근 김 영 철 이 북 일 59-5 59-6 59-7 59-8 59-9 60 61 62 63 64 65 66 67 문 승 필 윤 용 하 류 영 선 최 덕 수 박 재 구 김 춘 례 박 진 홍 박 재 영 김 상 태 안 두 환 김 경 철 김 천 배 79-1 79-2 79-3 79-4 79-5 79-6 80 81 82 83 84 85 86 87 김 철 수 정 상 순 박 승 희 강 경 대 임 병 철 신 영 일 김 동 진 박 세 근 한 영 길 손 옥 례 강 대 일 김 정 김 동 수 서 종 독 100-1 100-2 100-3 100-4 100-5 100-6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박 태 조 김 정 곤 박 귀 주 이 정 순 조 성 만 무 명 열 사 양 찬 근 김 재 형 문 재 학 무 명 열 사 김 길 호 무 명 열 사 허 봉 무 명 열 사 122-3 122-4 122-5 122-6 122-7 김 남 주 이 경 동 122-8 122-9 122-10 122-11 122-12 122-13 122-14 엄 익 돈 한 상 용 122-15 122-16 122-17 122-18 122-19 122-20 122-21 363 367-3 류 재 을 노 수 석
민언련 5 18 광주순례

5월 영령들이 이곳에 묻힌 것은 1980년 5월 29일이다.

5월 27일까지 계엄군에 학살된 시신 중 126구가 청소차에 실려

폭도라는 이름으로 묻혔다. 1980년 5월 장례식 이후

독재정권은 유족의 제사도 허용하지 않았다.

‘5·18 구묘역’은 80년 5월 영령들이 묻힌 이래 수많은

민주화운동 열사들이 숱한 우여곡절 속에 안장되었고,

1997년 신묘역 조성 이후에도 현 묘역에서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6 7 8 9 10 11 12 13 박 금 희 박 종 화 민 청 진 장 하 일 채 수 길 권 금 림 조 대 훈 김 복 만 20 21 22 23 24 25 26 27 27-1 전 영 진 홍 성 규 조 남 신 김 상 구 윤 재 식 양 희 영 양 인 섭 박 민 환 김 형 영 35 36 37 38 39 40 41 42 표 정 두 조 사 천 안 종 필 전 종 호 양 희 태 임 수 춘 왕 태 경 김 병 연 51 52 53 54 55 56 57 58 59 59-1 59-2 59-3 59-4 박 기 현 김 점 렬 정 민 구 박 선 영 이 한 열 박 관 현 김 준 배 황 호 걸 김 종 철 이 재 호 68 69 70 71 72 783 74 75 76 77 78 79 류 동 운 이 종 인 김 인 태 조 일 기 김 종 연 최 승 희 이 강 수 기 종 도 박 종 길 박 용 춘 박 태 영 전 재 서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234 장 방 환 강 정 배 박 성 용 최 강 식 서 만 호 김 성 근 김 재 화 박 현 숙 무 명 열 사 무 명 열 사 무 명 열 사 최 열 락 김 양 무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2-2 무 명 열 사 윤 상 원 무 명 열 사 김 중 식 민 병 대 백 대 환 조 행 권 김 남 석 이 명 진 이 용 충 전 재 수 방 광 범 임 종 인
(구)묘역 배치도 30 31
함께
민언련 5 18 광주순례
부르는 노래

함께 부르는 노래

광주출정가

1.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출정하여라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2. 투쟁의 깃발이 높이 솟았다 혁명의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2

1.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오월의 노래
출정하여라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2.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4.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함께 부르는 노래 32 33
3.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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