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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다. 이미 무수한 학자들이 그것을 해설하려고 꾀했는데도 그것조차 성취하지 못했다. 누가복음 10:27 시편 제 1 편 및 제 2 편. 신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신앙을 스스로 강하게 느낀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지극히 쉽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쇼펜하우어나 니체에 이르기까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신을 부정함으로써 일시적인 인기를 누려 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같은 신의 존재의 부정을 받아들이는 대중은 물론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단순한 부정적인 증명으로(그것은 원래 증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신을 안 사람들을 설득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또 마찬가지로 그들은 유태교나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그 뒤에 그에 못지 않은 영속성 가지고, 현명한 사람들에게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나 모두 한결같이 유익한, 또 어떤 경우에나 충분히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세계관을 세우는 것도 역시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그와 같은 새로운 건설을 시도하려고도 않고 다만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실제로 이같은 파괴가 다가올 시대에 있어서 영속적인 성과를 낳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건설적인 기독교를 절실히 요망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4:35 5 월 11 일 이미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그의 유명한 논문 (철학의 위안) 속에서 인간은 신에 생명에 힘입음으로써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논하고 있다. 그후 약 1500 년이 지났으나 그 누구에게도 이 사정은 변함이 없다. 그 점에서 특히 고마운 것은 신은 인간과 같이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형식적으로 신에게 접근한 것만으로 어두운 마음에 햇빛을 불러들일 수는 없다. 그리고 또 종교적 열광이나 흥분으로써도 이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신의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것들과는 아주 딴 것으로 오히려 아주 독특한, 조용하고 평화에 충만한 감정이다. 출애굽기 34:6 열왕기상 19:12 더욱이 이 감정, 즉 신의 가까이에 있다는 기쁨은 온갖 인간적 감정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것이다. 즉 이 감정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만족시킬 뿐 아니라, 또 온갖 제한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고 앙양하는 효과로 보아서 우정이나 그 밖의 감정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한 것이다. 가끔 인용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도 그것이 아주 진실하기 위해서는 이 점에서 좀더 중요한 보충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강한 힘을 가진 감정은 반드시 실재의 대상으로부터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스스로 이 감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이상 아무런 증명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들로서는 이 감정을 미처 몰랐던 과거의 나날을 유감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5 월 12 일 인간은 신에 대해서도 자유 의지를 가지므로, 그로써 신을 거부 할 수도 즉 신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고의로 끊을 수도 있다.(욥기 2:9) 그러므로 은총의 선택이라는 것도 신을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선한 사람들조차 그것은 가능하다. 구약의 다윗도 예컨대 만일 그가 왕자로서의 권력 의식을 가지고 예언자 나단의 질책을 물리쳤다면 신을 거부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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