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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뜨는 무지개 - 이상우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작가 소개 1. 아르바이트 2. 두 아들 3. 비밀사업 4. 형제의 비극 5. 살인 사건 6. 유서 7. 질투 8. 용의자의 동태 9. 거액의 수표 10. 동반자 11. 과거 12. 복수 13. 또다른 검은 손 14. 죽은 자의 일기 15. 이상한 숫자 16. 사랑놀이 17. 레인보우 오브 나이트 18. 어릿광대

작가 소개 1938 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한국일보 주간 편집국장, 스포츠서울 초대 편집국장, 서울신문 전무이사 등을 역임한 저널리스트 작가이다. 1961 년부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온 그는 사건 추리를 통해 인간의 가식적 양심과 혼돈된 가치관 등 심리 이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지닌 작가이다. 또한 간결하고 힘찬 문체, 빈틈없이 짜여진 뛰어난 구성으로 놀라운 재미를 창조해내고 있다. 이상우는 이 작품 외에도 <화조, 밤에 죽다>, <안개도시>, <악녀시대>,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악녀의 성> 등 백여 편이 넘는 수준 높은 장,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현재는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 아르바이트 그 집에는 늘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비로운 것도 같고 섬뜩한 것도 같은 그 서릿발 같은 기운은 마치 깊은 산 속을 둘러싸고 있는 운무와도 같아서 정체가 불투명했다. 내가 그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은 순전히 고등학교 동창생인 허정화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허정화가 그 변호사 집의 가정교사 일을 맡은 것은 같은 반 친구의 소개였다고 했다. 아버지가 변호사이고 두 오빠 밑의 막내 딸인 희숙은 재수생 아닌 재수생이었다. 작년 서울대에 도전했다 보기좋게 떨어진 희숙은 우선 2 차 대학에 적을 두고 다녔으나 다시 서울대에 도전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허정화는 그 학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희한한 조건들을 제의받았다. 그때는 아직 한여름이어서 입시 날짜까지는 넉 달 남짓 시간이 남아 있었다. 조희숙의 어머니는 가정교사 수당으로 한 달에 1 백만 원씩, 5 백만 원의 선금을 내놓았다. 그뿐 아니라, 서울대에 입학하면 1 천만 원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했다. 만약 신촌대에 합격하면 5 백만 원을 보너스로 주겠다는 제의였다. 공부하는 방법은 일절 간섭하지 않을 터이니 희숙이와 상의해서 시간표를 짜라고 했다. 희숙 어머니는 그 외에 입주를 해서 함께 사는 것은 되지 않지만 필요하면 옆집에 자취할 수 있는 방을 얻어 주겠다고도 했다.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 줄 것처럼 했으나, 한 가지만은 엄격히 당부를 했다. 그것은 희숙과는 공부 이외의 대화는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안 형편을 묻는다든지, 장래 설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하는 따위는 삼가는 게 좋다고 여러 번 당부해 왔다. 허정화는 잘하면 1 천 5 백만 원이 금년 내에 생길 것이라는 기대에 젖어 있었다. 그 아이처럼 자존심 강한 여자도 없는데 1 천 5 백만 원이라는, 우리들 세계의 거금이 그녀의 자존심도 잠재운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그 집에 드나들게 된 것은 좀 치사한


이유에서였다. 허정화는 우리 대학에서도 뛰어난 수재일 뿐 아니라 성격이 차분하고 집념이 강해 무슨 일이든지 어김없이 잘해 내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엄청난 보수로 가정교사 청부를 맡은 뒤 그 일이 혼자서는 벅차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응원을 요청해 온 것이다. 역사, 윤리 같은 사회생활 과목에 약한 그녀는 나에게 그 부분에 한해 하청을 주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1 백만 원에 그 일을 하청받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시간씩 그 집에 가서 사회과목을 가르치기로 하고 보수의 전액인 1 백만 원을 선금으로 받았다. 그 돈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내가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만져보는 백만원권 자기앞수표였다. 자기앞수표의 색깔과 모양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그 집에 간 첫날 저녁이었다. 허정화가 먼저 한 시간 동안 학생인 희숙에게 영어 교습을 시켰다. 그동안 내게는 옆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곧 2 층 구석방으로 그 집 가정부의 안내를 받았다. 그 방은 둘째 오빠라는 조석호의 방이었다. 조석호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학원에서 체육학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대학 다닐 때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는데 학부를 마친 뒤에는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체육학이란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방은 한켠이 싱글 침대가 놓여 있고 발치에는 요란한 오디오 세트며 기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책장에는 학생과 어울리지 않게 무슨 통계연감에서부터 세계 명배우들의 전기까지 잡다한 책이 많이 꽂혀 있었다. 침대 머리맡 벽에는 잡지에서 오려낸 것 같은 외설스러운 여자 나체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이 방 주인의 취향과 사람됨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은 불쾌한 인상을 받았으나 호기심도 들어 그 벽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뜯어 보며 시간을 보냈다. 무료하게 앉아 있기가 무엇해서 텔레비전 스위치를 막 넣었을 때였다. 문이 덜컥 열리며 건장한 남자가 불쑥 들어섰다. 그는 청바지 차림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운동선수처럼 짧게 깎은 채였다. 떡벌어진 어깨며 길죽한 다리가 날렵하게 보였다. 생김새와는 달리 얼굴은 퍽 순하게 보였다.


눈꼬리가 양쪽으로 처져 웃음을 머금은 듯한 모습이고 작은 입의 선홍색 입술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약간 펑퍼짐하기는 해도 사나이다운 콧날이 그를 남자로 보이게 했다. 몸의 생김새와는 달리 얼굴은 조금 여성적이라고 할까? 나는 다소곳이 일어서서 목례를 했다. "아, 앉아요. 우리 희숙이 선생님이시죠? 처녑니까?" 나는 그의 마지막 물음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해서 다시 되물었다. "예?" 그는 웃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 "처녀냐구요?" 참으로 기가 막혔다. 처음 보는 여자를 보고 그따위 질문을 하다니. 더구나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보고, 그런 실례되는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화가 나서 아무 대꾸도 없이 방을 나오려고 문 쪽으로 걸었다. 그러자 그는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석호라고 합니다. 조석호. 희숙이 둘째 오빠지요. 총각이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다시 그를 피해 문쪽으로 나가려고 했다. "뭐라고 좀 얘기해 봐요. 드물게 보는 미인이신데......" 나는 그가 미인이라고 하는 말에 약간 누그러져 떼어놓던 걸음을 멈추었다. "장을자라고 해요." 나는 마지못해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의 정상이 아닌 듯한 정신상태라도 캐보려는 듯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하하, 을자 씨. 이름이 기억하기 좋군요. 좀 앉으세요. 아직 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초면에 그런 무례한 질문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용기를 내서 마침내 하고 싶던 말을 했다. "예? 그게 실례의 말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요. 솔직한 질문을 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약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더 솔직한 질문을 하자면, 을자 씨와 연애 좀 했으면 좋겠어요. 첫눈에 맘에 들었거든요."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솔직한 자기 마음을 스스럼없이 나타내는지, 아니면 좀 모자라는 청년인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원래 스포츠맨은 직선적이고 저돌적이지요.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스포츠맨이라고 하셨나요? 무슨 운동을 하시는데요?" "스포츠 학문을 하죠." 나는 그의 무례한 언동이 불쾌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듬어지거나 닳지 않은 순박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근사해요. 어쩜 그렇게 잘 빠졌어요?" 그가 나의 아래 위를 고개까지 끄떡이며 훑어보고 한 말이다. "혹시 데이트 신청 받은 것이 없다면 제가 첫번째라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나는 그저 빙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허정화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지? 어머 손님이 있었군......" 정화가 조석호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끝났어?" 나는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제 친구예요. 이쪽은 희숙이 둘째 오빠......"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시켰다.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잠시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허정화예요. 어제부터 희숙이와 공부하고 있어요." "아, 예. 난 조석홉니다. 예쁘시군요. 처녑니까?" 정화도 그의 뚱딴지 같은 질문에 어리둥절해 했다. "학생이에요. 영문과 3 학년......" 내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꿀 양으로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이봐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처녀냐구요? 나 참 기가 막혀서. 남의 집 가정교사나 하고 다니니까 사람이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내가 룸살롱 매미로 보여요? 그래 내가 처녀면 어쩌구, 처녀 아니면 어쩔 거예요?" 정화는 화난 듯 큰 소리로 그를 공박했다. 자존심 강한 그녀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처녀 아니면 별 볼일 없는 거죠 뭐. 그렇게 화내실 일 아닙니다." 그는 실실 웃으면서 능글맞게 대꾸했다. "무슨 일들이 났나?" 그때였다. 이집 어머니가 2 층 계단으로 올라왔다 우리가 있는 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석호 너 거기서 뭐하니? 빨랑 내려와 밥 먹어." 어머니 양윤임 여사는 근엄한 얼굴로 조석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서리맞은 호박잎처럼 기가 푹 죽은 모양이 되었다. "예." 그는 착한 유치원 아이처럼 어머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에게는 인사말 한 마디도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학생은 빨리빨리 볼일들 봐요. 앞으로 저런 녀석하고 잡담 같은 것 해선 안 돼요." 양 여사는 우리에게도 굳은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첫날부터 여느 가정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튿날 거금을 손에 쥔 우리는 좀이 쑤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십여 년 전부터 동생 인준이와 나 남매를 기르며 혼자 살아온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백만 원 중에서 반을 뚝 잘라 드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막 수표를 바꾸러 나가려는데 정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늘 다니던 종로 2 가의 단골 카페에서 만났다. "얘, 우리 맥주 한 잔씩 마시자." 허정화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맥주는 비싸 얘. 그리고 대낮부터 무슨......" 우리는 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만을 마시고는 종업원의 눈치를 보아가며 하루종일 버티고 앉았던 생각을 했다. 어떤 때는 둘이서 커피 한 잔만을 시켜 놓고 앉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종업원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얘, 우리 자동차 한 대 사자." 거품이 탐스럽게 넘치는 맥주를 시원스럽게 들이키며 허정화가 놀라운 제의를 해왔다. "뭐야?" "놀랄 것 없어. 장안평 가서 2 백만 원만 주면 쓸 만한 것 살 수 있어. 자동차 운전 실력 그것 두었다가 어디 쓰니? 그리고 그 희숙네 집에 밤 늦게까지 다니려면 차가 있는 게 좋아. 요즘 길거리엔 인신매매, 폭행범이 수두룩하대." 듣고 보니 허정화의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대학교 2 학년 여름 방학 때 어느 자동차 학원에서 접수를 보아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운전기술을 배워 면허까지 딴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겁이 나서 운전대를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으나 정화는 가끔 친구들 차를 빌려서 몰고 다니기도 했다. "넌 십만 원만 투자해. 가끔 내가 태워다 주고, 데이트할 땐 차도 빌려줄 테니까. 됐지? 자, 가자." 그녀는 내 동의도 얻지 않고 제멋대로 정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경우 나는 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그냥 입을 다물고 따라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는 중고차 시장을 하루 종일 헤매다가 비교적 모양이 깔끔한 엑셀 한 대를 1 백 80 만 원에 샀다. 2 년 반이나 된 차이지만 베이지색의 겉모양이 말끔했다. "와아 신난다. 당분간 우리 집에는 비밀이야." 그녀는 나에게 이 말을 두 번씩이나 되풀이했다. 엑셀을 타고 강변도로를 달리면서 시운전을 했다. 신나게 한나절을 보낸 뒤 그녀는 신문로의 어느 골목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6 시에 윤호 씨를 만나기로 했거든. 같이 들어가." 그녀는 입구가 깨끗한 지하 카페로 들어서며 말했다. "윤호 씨가 누구야?" "윤호 씨 말야. 조윤호. 희숙 큰오빠." "응 그래? 그 사람도 동생 석호처럼 또라이니?" "또라이? 호호호." 그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그는 벌써 와 있었다. "인사 나눠요. 내 친구 장을자, 새침뜨기 예쁜이." "조윤홉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는 공손히 절을 하면서 인사를 했다. 동생 조석호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생김새도 동생과는 반대였다. 눈은 위로 치켜지고, 코는 날카로우며 입은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매너는 생김새와는 달리 부드럽고 얌전했다. 우리는 거기서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며 두어 시간을 보낸 뒤 밖으로 나왔다. 허정화와 조윤호는 여러 번 만난 것 같았다. 자동차 앞으로 오자 허정화는 빙긋 웃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을자야, 너 좀 빠져 줘." 말을 끝내고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는 자존심이 바늘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나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난 볼일이 좀 있어 여기서 헤어졌으면 좋겠는데...... 조 선생님, 오늘 즐거웠어요." 나는 조윤호에게만 인사를 하고 돌아서 버렸다. 공연히 괘씸한 생각이 가슴에 뭉쳐져서 목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허정화의 솔직하고 대담한 성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가끔씩 이런 불쾌한 경우를 당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허정화가 미워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를 걸어나오다가 길모퉁이에 있는 공중전화에 눈이 갔다. 문득 훈이 생각났다. 나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다이얼을 찍었다. "여보세요." 굵직한 민훈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저예요. 장을자......" "아니, 을자 씨가 웬일입니까?" 민훈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나를 쫓아다녔지, 재가 그를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민훈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아니 싫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그 앞에서는 어쩐지 거꾸로 나가고 싶었다. 데이트를 하자면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디스코텍에 가자면 피곤하다고 거절했다. 그렇게 해놓고 돌아서서는 늘 후회했다. '훈, 나 좀 만나주지 않을래'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나는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형, 혹시 위지동이전 원본 갖고 있어요?" 민훈은 역사학과 선배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도 몰랐다. "아, 그거 있어. 필요하면 내가 가지고 나갈께. 거기 어디야?" "여기 광화문이거든. 신문로 쪽 아트박스 지하." "알았어. 반시간 내로 갈 테니 기다려." 그는 정말 30 분도 채 되지 않아 달려 나왔다. 직장에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받고 되돌아서서 나왔다고 했다. "웬일이야? 이거 믿어도 되는 거야? 을자 씨가 전활 다하고 말이야." 그는 내가 전화한 것이 그렇게도 감격스러운지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다. "우리 어디 멋있는 데 가서 저녁 먹어요. 내가 한턱


낼께요."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약간 들떠 있었다. 핸드백에 돈이 들어 있으니까 호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강대교가 잘 내려다보이는 어느 고층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에서 양식을 먹었다. 내가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는 한대목에서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그러면 조석호네 집에 갔었단 말야? 조철구 변호사의 둘째 아들." 오히려 놀란 것은 나였다. "예? 그럼 형이 그 집을 안단 말씀이에요?"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조석호는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야. 아니 고등학교뿐 아니라 국민학교 동창이야." "그러셨군요. 세상 넓고도 좁다는 말 이럴 때 쓰는 말이군요." "허허허, 정말 그렇네." "그런데 그 조석호란 사람 말예요. 사람이 왜 그래요?" "응, 그 친구 원래 체면따위 차리는 인물이 아니지. 야생마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할까. 전혀 길들여지지 않아서 학교서도 어릴 때부터 선생님 꾸중깨나 들었지." "글쎄 나보고 만나자마자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그래 뭐라고 했어요? 연애하자고?" "차라리 그렇게라도 말했으면 좋았겠어요." "그럼 뭐라고 했길래?" 훈은 칼질 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글쎄 처녀냐고 묻지 않겠어요. 나 기가 막혀서." 나는 그 말을 뱉고는 금방 후회했다. 훈 앞에서 너무 야한 말을 한 것 같아서였다. "뭐라고? 하하하. 그거 나도 궁금하던 건데......" "예?" "그래 뭐라고 대답했어요?" "아이 짓궂긴. 대답은 무슨 대답이에요?" 우리는 그곳을 나와 다시 지하에 있는 디스코 클럽으로 갔다. 그렇지 않아도 들뜬 기분이 된 나는 거기서 맥주 몇 잔을 마시자 완전히 간이 부어 올랐다. 훈을 꼭 껴안고 깨물어 주고 싶은 심정까지 되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나게 디스코를 추었다.


얼굴이 화끈해지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좀 쉬고 싶은 시간엔 완만한 블루스 곡이 흘렀다. 나는 훈과 손만 잡고 블루스 곡을 타다가 차츰 대담해져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껴안았다. 그도 옷에 땀이 배었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역했을 그 땀냄새도 나의 관능을 자극하는 달콤한 냄새처럼 느껴졌다. 나는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남자를 껴안고 싶은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 "훈, 우리 다른 곳에 가요." 나는 어둠을 이용해 대담한 제의를 했다. "왜? 피곤해?" 그는 내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허리를 더욱 힘있게 끌어당기면서 다시 말했다. "우리 둘이만 있는 곳에 가고 싶단 말예요."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하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고 입에 침이 말랐다. 그가 내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알았어." 그는 내 볼을 양손에 쥐고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생전 처음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전율 같은 쾌감을 느꼈다. "우리 나가." 그는 나를 조용히 안다시피하며 무도장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장충동에 있는 어느 호텔의 객실에 마주 섰다. 갑자기 훈의 키가 장대처럼 커 보이고 체구가 우람하게 보였다. 그의 손이 바삐 움직이며 나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2. 두 아들 훈의 손끝에 의해 나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블라우스를 벗어 버리자 이번에는 그의 손이 내 허리께로 왔다. 스커트의 지퍼를 찾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퍼를 쉽게 풀 수 있도록 허리를 옆으로 돌려 주었다. 그러나 여자의 스커트에 익숙하지 못한 그는 지퍼를 얼른 찾아내지 못하고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더듬기만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끌어다가 왼쪽 허리 지퍼 고리가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 그는 얼른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면서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갈증 만난 사람처럼 타오르는 나의 입술을 발견하고는 자기의 입술로 덮어 왔다. 촉촉하고 커다란 그의 입술이 싫지는 않았다. 지퍼가 풀린 스커트가 무릎 밑으로 내려왔다. 나는 두 발로 스커트를 벗어냈다. 그의 넓적한 손이 이번에는 나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입술을 받아내면서 가슴으로는 그의 손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남은 한 손으로 나의 허리를 힘차게 끌어다가 자기의 아랫배에 가져다 붙였다. 얇은 슬립을 통해 그의 미지근한 체온이 전달되었다. "불을......" 나는 그때야 지나치게 밝은 방 안의 불빛을 의식하고 신음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나의 슬립을 벗겨내려고 애를 썼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귓전에 거칠게 느껴졌다. "을자, 사랑해. 오늘밤 같은 날이 꼭 오리라고 나는 확신했거든......" 그는 나의 허벅지에서 슬립을 위로 걷어올리며 급히 말했다. 그의 손은 슬립 밑을 타고 들어와 이번엔 팬티를 움켜 쥐었다. "처녀냐고 그 녀석이 물었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아랫배에 침범해 온 그의 손을 피해 허리에 힘을 주었다. "오늘 저녁 내가 그 답을 마련할 거야. 을자가 처녀라는 것을 내가 증명할 거야." 그는 나의 팬티를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을 바꾸어 이번에는 슬립을 벗겨 올렸다. 머리 위로 그것을 치켜올렸다. 얇고 부드러운 실크 감촉의 흰 슬립은 매미 허물처럼 내 머리 위로 해서 제거되었다. 이젠 맨살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하얀 브래지어와 삼각 팬티만이 최후의 성을 지키려는 연약한 깃발처럼 내 몸에 남아 있었다. 그는 내 허리를 두 손으로 깍지낀 채 껴안고는 나를 침대 쪽으로 밀고 갔다. 나를 침대에 밀어 붙어 쓰러뜨린 후 그는 나를 천천히 내려다보며 자기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윗옷을 벗자 곧 우람한 근육질의 상체가 드러났다. 훈의 몸매가 겉으로 보기보다는 훨씬 남자다운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지를 벗으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빙긋 웃었다. 그의 얼굴도 열기와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내 곁에 파고들어 왔다. "을자......" 그는 내가 본능적으로 침대 시트로 몸을 감싸며 경계하자, 장애물을 제거하려 애를 쓰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너는 내 포로야. 내가 너를 여자로 만들어 줄 거야. 너를 내 것으로 만들고 말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며 우왁스럽게 나를 품으려고 덤볐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나는 좀 이상해졌다.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내가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안 돼." 나는 무턱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눈앞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노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여자란 자존심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특히 남자 앞에서는 그렇다.' 평소 어머니가 하시던 말 중의 하나였다. 허정화에게 무시당한 자존심을 훈에게서 찾으려 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기로 훈에게 전화를 걸고, 그를 먼저 유혹해서 호텔로 끌고 왔다는 것은 도저히 내가 나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될 것 없어. 조석호가 궁금해 하던 일을 내가 지금 해치울 거야. 을자가 처녀란 것을 내가 증명해 내지." 그는 더욱 거친 솜씨로 나를 공격해 왔다. 내가 감고 있는 시트를 거칠게 걷어내고는 한 손으로 브래지어를 움켜쥐었다. 내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자 브래지어는 벗겨져 나가고 젖무덤이 드러났다. 이번엔 그의 손이 팬티를 잡으려고 했다. 나는 두 발로 그의 허벅지를 밀어내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민훈!" 나는 그를 쏘아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불붙은 나의 눈동자를 보자 그는 주춤했다.


"민훈 씨, 내가 안 된다는데 왜 이래요? 이게 무슨 야만인 같은 짓이냔 말예욧!" 나는 벗어진 브래지어를 얼른 바로 매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재빠른 솜씨로 바닥에 흘러내린 슬립을 주워 입었다. "아니......" 나의 단호하고 재빠른 동작을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다시 공격해 오기 전에 빨리 이 곤경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재빠르게 스커트를 주워입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웠다. "아니, 을자!" 나의 재빠르고 단호한 행동을 보면서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그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빨리 옷이나 입어요."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화장실로 뛰어들어 갔다. 문을 잠근 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보았다. 흐트러진 머리 밑으로 잠에서 깬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했을까? 술 때문일까? 디스코 때문일까? 아니야. 허정화 그년 때문일 거야.'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뒤죽박죽 되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찬물로 얼굴을 씻은 뒤 욕실에서 나왔다. 후회스럽기 짝이 없었다. 훈은 어느새 옷을 단정하게 입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에 비친 그의 옆모습은 창백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무분별한 행동이 훈을 분노하게 하고 나 자신을 우습게 만들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훈, 미안해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나 훈은 아무 대꾸도 않고 한참 동안 담배 연기만 뿜었다. 우리들은 얼마 동안 정지된 화면처럼 그렇게 있었다. "나가요.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께." 훈이 결심한 듯 무거운 침묵을 깨고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참으로 비참한 심정이 되어 호텔을 나왔다. 우리 두 사람이 나란히 호텔 문을 나서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오해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오늘처럼 초라해진 적은 없어. 다음에 을자 씨가 전화하면 안 받을지도 몰라." 그는 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그는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해 자기를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더 후회할 짓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에요." "석호 만나거든 내 말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약속하겠어요. 그 대신 내가 다음에 전화 걸면 받겠다고 약속해요."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오며 정화와 나는 학교 앞의 조그만 카페로 들어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께 거기 들어섰던 것이다. 내가 파이를 시켰다. 우리는 솥뚜껑처럼 크고 넓적한 파이를 거의 다 먹을 때까지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어제의 일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았다. 파이를 다 먹고 나자 정화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어젠 미안했어. 기분 잡친 건 아니지?" "어차피 친구보다는 애인 아니니?" "호호호. 정말 미안했어. 하지만 애인이란 표현은 어쩐지......" "그럼 허즈라고 할까?" "어머머, 아이 징그러워." 정화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때리는 시늉까지 했다. "그럼 뭐라고 부르니?" "그냥 보이프랜드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흠. 보이프랜드라...... 그래, 재미는 좋았니?" "그냥......" 정화는 잠시 창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흐뭇하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어제 춘천 갔다 왔거든." "뭐야? 그 저녁 무렵 다 되어 거길 갔단 말야?" "뭐 자가용으로 두 시간도 안 걸리던걸." "그래 언제 왔니?" "오늘 새벽에. 우리 차 성능 아주 좋더라."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뭐야? 춘천서 둘이서 밤을 새우고 왔단 말야? 허즈도 아니도 애인도 아닌 보이프랜드라는 남자와?" 솔직히 말해 나는 약간의 질투를 느끼면서 말했다. "응......" "맙소사." "밤새 디스코 추면서 지냈어. 새벽녘이 되니 다리가 뻐근하던걸. 악셀 밟기가 힘들었어. 오다가 한 두어 번 쉬었어."


"아니 잠은 안 자고 춤만 추었단 말야?" "응. 오다가 차 안에서 쬐끔 잤어, 얘."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내 귀 가까이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얘. 차 안에서 키스해 봤니? 아주 그만이야. 움직일 때마다 차가 꿈틀거려 아주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거든......" "키스밖에 안했니?" 나도 목소리를 줄여 말했다. "상상에 맡기지. 호호호." 그녀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춘천까지 가서 하룻밤을 새우고 오면서 아무 일도 없다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기우임을 금방 알았다. "나 어젯밤 훈을 만났거든......" 나는 얼떨결에 이렇게 말해 버렸다. 어젯밤 훈과의 일은 입밖에 내지 말자고 내가 먼저 말했는데도, 내 스스로 지키지 못했다. 정화에게 나도 섬씽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자랑하고 싶은 사치의 일종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 정화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서 약간의 동요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랬니? 그래 재미있었어?" 그녀가 갑자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벽에 헤어졌어." 나는 거짓말을 했다. 어쩐지 나도 밤을 함께 보내줄 남자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그것이 민훈이라면 더욱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새벽까지......" 그녀는 그제사 약간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웃었다. 민훈. 그는 우리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다. 특히 성격이 활달한 허정화는 그를 좋아했다. 적극적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민훈은 정화보다는 나를 좋아했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자존심 강한 나는 그가 싫지 않으면서도 그와 어울려 주지 않았다. 독특한 나의 자존심 때문이라고나 할까. 키가 크고 인물이 잘생겼으며, 성격이 너그럽고 행동이 의젓해서 그는 늘 여학생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가 한때 운동권에 뛰어들어 경찰의 수배를 받자 더욱 많은 여학생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졸업반이 되어서는 운동권에서 발을 뺐다. 그의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망해 집안이 엉망이 된 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비교적 월급이 좋다는 제 2 금융권의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하고 착실한 생활인으로 사회 출발을 했다. 많은 여학생들이 그의 그런 좌절에 실망했다. 허정화도 그르르 포기하는 것 같았다. 정화는 늘 나에게 민훈을 자기 애인으로 만들겠다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정화가 적극적으로 나오면 나올수록 훈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근데 놀랄 이야기 하나 있어. 훈 씨가 글쎄......" 나는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다고 후회했다. "뭔데?" 정화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훈 씨하고 석호 씨, 조석호 씨하고 말야......" "그래서?" "학교 동창생이래. 고등학교. 어때? 세상이란 참 넓고도 좁지?" "뭐야? 증말? 호호호." 그녀도 놀라운 듯 한참 웃었다. 우리들은 즐겁게 가정교사 생활을 보냈다. 희숙이 성적이 의외로 빨리 나아져 그 집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 집 부모들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어머니인 양윤임 여사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시간이 늦을 때는 별채에서 자고 갈 수도 있었고, 넓은 정원을 마음대로 다닐 수도 있었다. 특히 희숙의 두 오빠, 조석호, 조윤호와 함께 어울릴 수도 있었다. 우리가 가정교사를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나서였다. 나는 우연히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허정화가 희숙의 큰 오빠 윤호가 아닌 석호와 어울려 있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날은 공휴일이었다. 제법 도톰한 가을 햇살이 피부에 와닿는 청명한 초가을 날씨가 공연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날이었다. 양윤임 여사는 외출을 하고 없었다. 주인 마님이 없으니까 가정부 아줌마도 부엌 안쪽 자기 방에 가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커다란 집에는 나와 희숙, 정화 세 사람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희숙의 공부방에서 국사 과목을 열심히 가르친 뒤 잠깐 쉬는 시간을 틈타 정원으로 나갔다. 나뭇잎들이 벌써 아침 저녁


찬바람을 맞았는지 누릇누릇한 색깔을 띤 것이 많았다. 아름드리 모과나무에는 누리끼한 모과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나는 신선한 숲 바람을 마시려고 정원 깊숙히 들어섰다. 사방에 희귀목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어 도심의 정글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닌 정원이었다. 내가 심호흡을 하면서 감나무 뒤로 다가섰을 때였다. 시야에 무엇인가가 걸리는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키득키득 웃는 여자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남자의 웃음도 섞여서 들렸다. 나는 맥박을 정지시키려는 듯한 은밀한 자세로 소리나는 쪽을 관찰했다. 대리석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원피스의 보라색 깃과 늘어뜨린 생머리가 곧 허정화임을 말해 주었다. 그 곁에 앉아서 왼팔로 정화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조석호였다. 아니 저럴 수가. 정화는 분명히 윤호 씨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동생인 석호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세상에 무슨 여자가 저럴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인가를 재미있게 하면서 계속 웃고 있었다. 정화가 어깨를 들먹이며 웃을 때 석호는 출렁거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즐거워했다. 나는 그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서 그냥 희숙의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과외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현관을 나설 때였다. "얘, 을자야. 혼자 갈꺼야?" 정화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얘, 석호 씨가 오늘 저녁 산대. 같이 가지 않겠니? 아주 분위기 좋은 스카이 라운지 식당으로 가자고 그랬어." "나야 뭐 불청객 아냐?" 나는 다소 뒤틀린 심사로 말했다. "불청객이라뇨? 무슨 말씀입니까? 공주님으로 모시고 싶은데요." 이번에는 석호가 나서면서 말했다. 조금 전 정원에서 본 선홍색 셔츠에 청바지차림 그대로였다. 어쩐지 너무 야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공주가 둘이나 되어서야 쓰나요?" 내가 톡 쏘듯이 말했다. "예쁜 공주야 많을수록 좋지요. 특별한 볼 일 없으시면 제게 기회를 주시지요." 그는 현관으로 나서며 말했다. 마치 내가 동의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느냐는 듯이 자신에 차 있는 것 같았다. "석호 씨는 아무래도 못 믿을 남자야. 공주가 많을수록 좋다니?" 정화가 석호의 어깨를 주먹으로 톡톡 치면서 말했다. 그러나 석호는 별로 신경쓰지도 않고 "차를 가지고 대문으로 갈께요." 하면서 앞장서 나갔다. 나는 정화와 함께 긴 정원을 걸어나오며 그녀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너 석호 씨 좋아하니?" 정화는 내 질문의 참뜻을 알려는 듯 잠깐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윤호 씨도 좋아하니?" 나는 어이가 없어 이번에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물런!"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하고 간단했다. "그럼 두 사람 다 좋아한단 말이야?" 내가 멈추어 서며 물었다. 그녀는 빙긋 웃고는 나에게 팔짱을 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이야. 두 사람 다 좋아해. 어쩌면 그 이상인지 몰라." "너 미쳤니?" 나는 마침내 안해도 좋을 말을 하고 말았다. "아니, 나 지극히 정상이야. 그리고 현실적이지." 정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이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다 놓치기 아까운 남자거든. 석호 씨는 석호 씨대로 장점이 있고 윤호 씨는 윤호 씨대로 좋은 점이 있어. 석호 씨는 사람이 담백 솔직하고 직선적이야. 그런 남자하고 살면 편할 것 같아. 와이프를 끔찍하게 위해 줄 그런 타입이거든. 윤호 씨도 말이야 나름대로 좋은 점이 많은 남자야. 첫째 성질이 꼼꼼해서 나같은 대충주의자한테는 아주 좋은 짝이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성실하긴 세퍼드 같아. 요령이 좋고 성질이 너그러워 아내를 늘 편안하게 해줄 타입이지."


"넌 도대체 그런 남성연구를 언제 그렇게 했니?" "후후후. 나 원래 남성학 수재 아니니......" "그래, 그렇다고 두 사람을 허즈로 삼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지금 저울질하는 중이야." "뭐라고?" 정말 정화의 남성관에는 두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감을 고르기 위해 형제와 동시에 연애를 한다는 뜻인데, 세상에 그렇게 해도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과 동시에 데이트를 한단 말야? 그것도......" 나는 '육체까지 내맡기면서'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정화가 점점 무서운 여자로만 느껴졌다. "동시에 데이트야 할 수 있니? 시간을 따로따로 해서 하는 거지. 물론 두 사람한테는 비밀로 지키고 말이야. 두 사람이 모두 나를 좋아하니까 천만다행이야? 어떤 애들은 도덕도 양심도 없는 계집아이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다른 남자들도 결국은 사귀어 보고 결혼하는 것 아니니? 마음에 안 들면 어차피 딴 사람 사귀어야 하니까. 형제간이면 좀 편리하지 않겠어?" 나는 정화의 지독한 실용주의에 혀를 내둘렀다. "자, 빨리 갑시다." 어느새 석호가 차를 우리 앞에 가져다 세웠다. 정화가 재빨리 석호 옆좌석에 올라탔다. 나는 뒷좌석에 혼자 타면서 또다시 불청객이 끼어든 것 같은 겸연쩍음을 느껴야만 했다. "퀸카 둘을 한꺼번에 잡다니. 야, 신난다. 야호!" 석호는 유치한 환호성을 지르며 악셀을 밟았다.

3. 비밀사업 화사하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저녁을 사겠다는 조석호의 말은 실제와 전혀 달랐다. 나와 정화가 조석호를 따라 들어간 곳은 홍익동에 있는 어느 지하 카페였다. 홀은 꽤 넓었으나 여기저기 무더기로 앉아 담소하고 떠드는 남녀 무리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술냄새와 섞여 후텁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덮쳐왔다. "여기가 아늑하겠군. 자 공주님들 이쪽으로 앉으실까요? 어이, 미스 박!"


조석호는 홀의 가장 가운데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키면서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가 부른 미스 박이란 여자는 평소 잘 아는 이 집의 종업원인 모양이었다. 홀의 가운데 있는 그 자리는 사방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라 사람들이 앉지 않는 자리 같았다. 나는 마지못해 그 자리에 앉으면서 어쩐지 겸연쩍어졌다.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안주삼아 입에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우리 딴 자리로 가면 안 될까요?" 내가 주저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딴 자리요? 아니 여기보다 명당이 어디 있습니까? 이 큰 홀의 가장 중심 부분, 우리 공주님들은 이 홀의 꽃인데 왜 변두리로 갑니까? 군자는 대로를 정정당당하게 걸어가고 공주는 중앙을 떳떳하게......" "호호호......" 정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앉아요. 까짓 거 오늘 구경거리 한번 되지 뭐." 정화는 서 있는 나를 끌어 앉히며 말했다. "어이 미스 박!" 조석호가 워낙 큰 소리로 부른 탓에 보이지도 않는 구석자리에 있던 미스 박이란 아가씨가 달려왔다. "아이, 석호 씨가 오신 걸 미처 몰랐어요. 어서 오십시오." 얼굴이 주근깨 투성이에다 젖가슴이 완전히 절벽인 마치 장작개비 같은 웨이트리스 미스 박은 조석호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 같았다. "여기 생맥주 세 조끼하고, 아니, 여긴 생맥주가 없지. 우리 진토닉으로 어때요?" 조석호가 재빨리 주문을 했다. 우리들에게 묻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 마음대로 술과 안주를 주문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태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독선적이고 거칠 뿐 아니라 호탕한 성격과는 달리 구질구질한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홀의 분위기가 우선 비릿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탁한 공기 속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욕설을 퍼부어 대는 무리들의 소굴로만 느껴졌다. 이런 분위기는 조석호의 쾌활하고 솔직한 성격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오늘 같은 영광스러운 날 실컷 취해 보자구 우리." 조석호는 진토닉을 숭늉 마시듯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천박스럽게 마시면서 계속 큰 목청으로 떠들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께." 진토닉 한 잔을 비운 정화가 내 귀에 대고 말한 뒤 일어서서 나갔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나를 여기에 버려둔 채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요? 여기 분위기." 조석호가 나한테 감동이라도 하라는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너무 시끄럽군요." 나는 더 강력한 불만을 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을자 씨는 참 쓸 만한 여자예요." 그는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훅 뿜으면서 말했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역겨웠다. "어떤 점이 쓸 만한가요?" "어떤 점이냐구요? 하하하. 여자는 첫째로 하드웨어가 괜찮아야 합니다." "예? 하드웨어라고요?" 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그것이 곧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차렸다. "하드웨어는 성능도 좋아야 하지만 우선 모양이 괜찮아야 합니다. 을자 씨 정도면 아주 우수한 하드웨어입니다. 반반한 얼굴, 굴곡이 잘 배합된 바스트, 날쌔게 잘룩한 웨스트, 그리고 아주 듬직한 히프. 하하하, 형이상학적으로 우수품이죠." 나는 조석호의 지나치게 저질스러운 말에 반박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잠자코 있었다. 도대체 저런 남자를 어디가 좋다고 정화는 결혼 상대자로 테스트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헌데 소프트웨어는 어떤지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을자 씨는 한 가지 수선할 것이 있어요." "예? 수선을 해요?" "이거 미안합니다. 물건이 아니니까 실례되는 용어였군요. 고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빼어난 용모에 수수한 성격이면 여자로서는 중상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을자라는 이름, 더구나 성까지 붙여 장을자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요. 글쎄 근사하고 섹시한 이름이 얼마든지 있는데 '을짜'가 뭡니까? 아이 촌스러워." "그래도 난 내 이름을 사랑해요. 더럽히고 싶지도 않구요." 나는 처음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 이름 누가 지었습니까? 동대문 시장 요강장수가


지은 것 같군요."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지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요?"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쏘아붙였다. "예? 정말 아버님이......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내가 화를 내자 조석호는 몹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벌떡 일어나 절을 하면서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렇게 능글맞고 호탕스럽던 사람이 저렇게도 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웃음이 나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정말 미안했어요. 자 사과하는 뜻으로 우리 건배해요." 나는 술이 싫었지만 하는 수 없이 잔을 마주치고는 입에 술잔을 가져다 대었다. "참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물어보았었지요? 을자 씨가 처녀냐고 말입니다."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런 질문을 예사롭게 했다. 나는 그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걸 왜 석호 씨가 알아야 하나요?" "여자에게는 그게 중요한 일 아닙니까?" 그는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을자 씨 같은 미인이 아직도 처녀일 리가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특히 을자 씨는 이 부분이 멋지거든." 조석호는 손가락으로 나의 왼쪽 유방을 찌르면서 말했다. 느닷없는 남자의 습격에 유방이 긴장하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나무라야 당연하지만 나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런 건 정화에게나 물어봐요." 그가 내 곁에 너무 다가 앉았기 때문에 나는 게걸음 걷듯 옆으로 비껴 앉으며 말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내가 다 알고 있어요."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다시 담배 연기가 쏟아져 나와 나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어떻게 그렇게 남의 비밀을 다 알고 계세요?" "하하하, 체험으로 알죠. 정화 씨 멋진 여자지요." "예?" 나는 스스럼없는 그의 답변에 놀랐다. "정화하고 결혼할 건가요?"


"결혼? 글쎄요. 그건 좀 생각해봐야 겠는데요." "결혼도 안하면서 체험부터 하나요?" "하하하, 누가 결혼 안한다고 했나요? 경우에 따라서는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결혼과 체험은 함수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은 기초 아닙니까?" "윤호 씨도 정화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요." "형이?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석호는 그 이야기에 퍽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정색을 하고 술잔을 놓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진지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형이 정화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까? 정화 씨가 그랬어요? 허정화가 조윤호를 좋아한다고 했나요? 말해 봐요." 그의 지나친 반응에 이번에는 내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해본 소리예요. 정화는 윤호 씨에게 관심이 없어요. 오직 석호 씨에게만......" 그때였다. 자리를 떴던 정화가 남녀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우리 또래의 여자와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우리 앞에 섰다. "인사들 해요. 여기는 내 친구 장을자. 그리고 여기는 조석호 씨." 정화는 우리를 소개한 뒤 두 남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저는 백준길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턱수염이 멋대로 나 있고 머리가 텁수룩한 것이 한눈에 보아도 복학생임을 알게 했다. 복학생들은 보통 우리보다 서너 살 위였다. "전 민자라고 해요. 박민자. 도서관학과예요. 87 학번." 그녀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먼저 자리에 앉았다. 뒷머리를 치켜올려 커트를 했기 때문에 남자머리처럼 보였다. 얼굴이 희고 턱이 뾰족했다. 아주 작게 보이는 입은 진한 루즈를 발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 합석해요. 화장실 갔다 오다가 이 커플을 주웠거든요. 자 준길 씨 여기 앉아요." 그래서 우리는 다섯 명이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봐요 미스 박, 여기 진토닉 큰 걸로 하나 더." 조석호가 홀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주문을 하고는 백준길과 박민자를 향해 물었다. "두 사람은 애인 사입니까? 아니면 친굽니까? 아니면 캠퍼스 커플?"


석호의 당돌한 질문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석호 씨는 원래 말투가 이래. 오해는 하지 마,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니까 말야." 정화가 두 사람을 보고 양해를 구했다. "우리는 애인도 친구도 아니에요." 박민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내가 다시 물어 보았다. "세번째." "우리는 캠퍼스 커플이랍니다. 지난 봄에 결혼을 했어요." 준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와아, 정말 멋진 학생들이야. 형씨는 복학생이라고 했던가?" 석호는 감탄하는 것 같았다. "자아, 우리 백준길 씨와 박민자 씨를 위해 축하연을 가집시다. 한바탕 흔들러 갑시다." 조석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떠들었다. 나는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던 참이라 얼른 따라 일어섰다. 우리 다서 사람이 카페를 나섰을 때는 밤이 제법 깊어서였다. 그러나 거리는 아직도 자동차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일행 다섯 사람은 조석호의 차를 타고 다시 신촌 쪽으로 가서 그리 크지 않은 디스코 텍으로 들어갔다. "자, 오늘 돈은 내가 몽땅 낼 테니까 마음 놓고 마시고 흔들어요." 조석호는 계속 호기있게 떠들면서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백준길과 박민자는 즐거운 듯 잘 어울렸다. 춤솜씨도 뛰어나 보기가 좋았다. "우리도 한바탕 비벼대 볼까요?" 조석호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나는 얼른 정화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정화는 그냥 담담한 표정으로 눈웃음만 보냈다. 나는 석호에게 끌려나가 출 줄 모르는 디스코를 상대해 주느라 땀이 뻘뻘 났다. 힘이 들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까지 했다. "힘들어? 내가 좀 부축해 줄까?" 그는 내가 힘겨워 한다는 것을 핑계로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한 손은 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와 몸이 닿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그는 자꾸만 몸을 밀어붙였다. 그의 가슴과 배가 막무가내로 내 가슴과 아랫배에 밀고 들어왔다. "당신은 정말 멋진 하드웨어를 가졌단 말야. 형이하학적으로는 만점이야, 만점."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며 한 손을 뒤로 돌려 나의 히프를 쓰다음었다. 나는 피가 머리로 모두 솟구쳐 오르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끼며 그를 떠밀어 냈다. "이거 놓지 못해요. 내가 정화인 줄 아세요?" 나는 다시 그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나직히 말했다. "이 손 놓지 않으면 물어뜯어 버릴 거예요." 나의 단호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효과를 낸 것 같았다. 그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얼른 나한테서 떨어져 나갔다. 그날 밤은 내게는 아주 엉망이었다. 조석호는 그날 밤 이후 내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나 은근한 탐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버릇은 여전했다. 나는 날이 갈수록 그 집 식구들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두드러지게 느꼈다. 조석호의 동키호테 같은 지싱며 그와는 퍽 대조적이지만 상식을 벗어난 인물인 조윤호, 그리고 인형처럼 주견이 없는 희숙이, 주책바가지지만 개성이 강한 어머니 양윤임 여사, 좀체 정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아버지 조철구. 그 중에도 어머니 양윤임 여사의 새로운 모습을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날은 정화가 일이 있어 가정교사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 혼자 희숙이와 두 시간 동안 씨름을 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러 2 층으로 올라갔다. 집안에는 일하는 아줌마와 양윤임 여사 외에는 희숙과 나뿐이었다. 나는 이층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이집 주인이 쓰는 서재에 들어가 보았다. 주인이 변호사라서 그런지 두툼한 법률책이 잔뜩 꽂혀 있고 넓직한 방 한가운데에는 흔들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큼직한 나무책상과 바닥에 깔린 짙은 회색 카펫이 방안 분위기를 품위 있게 만들었다. 책상 위에는 각종 월간 잡지들이 놓여 있고 그 곁엔 야한 사진이 표지로 나온 주간지도 얹혀 있었다. 근엄한 변호사도 저런 책을 보면서 몰래 즐긴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곳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처음엔 누가 받으려니 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장식장에 있는 각종 기념품이며 조각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벨이 울렸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수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사 나는 이것이 특수한 전화기라서 버튼을 눌러야 통화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 저것 버튼을 눌러 보았으나 여전히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온(on)'이라고 된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자체의 스피커와 연결이 되었다. 인터폰을 겸한 전화기라서 통화하는 내용이 그냥 들렸다. 그때는 이미 아래층에서 양 여사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상대방 남자와 통화하는 내용이 그대로 방 안에 흘러 나왔다. "최 박사님, 정말 그러시기예요?" 양 여사의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양 여사, 어젯밤 향취에서 아직 난 깨지를 못하고 있단 말이요." "호호호, 저두요. 최 박사님 정말 멋졌어요." 나는 버튼을 도로 누르려고 하다가 묘한 이야기에 끌려 그냥 본의 아닌 도청을 했다. 그들 남녀는 무슨 관계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주고받는 이야기는 낯이 뜨거운 중년남녀의 탈선에 관한 것이었다. "양 여사, 그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좋은 피부를 가지고 있어요? 정말이지 감탄했습니다. 하하하......" "어머머, 그 나이라뇨? 내 나이 이제 마흔 아홉이에요." "하하하, 벌써 4 년째 마흔 아홉이군요. 하하하......" "호호호. 그렇게 되었나요? 하지만 최 박사님도 젊은이 못지 않던걸요." "그렇게 느꼈어요? 하하하, 걸프랜드 하나 근사하게 두었네." "걸프랜드라구요? 그거 근사한 말이군요. 그럼 최 박사님은 제 보이프랜드네요. 어째 삼십 년 전 대학 시절이 생각납니다." "좋은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50 대 보이프랜드라는 것도 새로운 멋이 있잖아요?" "그렇군요. 새로운 멋인지 맛인지 모르지만......" "지금 뭘하고 계셔요?" "그냥 멀건히 누워서 최 박사님 생각하고 있었지요. 어젯밤에 어떻게나 녹초가 되었는지...... 아직도 그 기분에서 깨어나지를 못했어요."


"저런? 그럼 오늘 저녁 또 어때요?" "예? 오늘 밤에 또? 아이 그러다가 우리 조 박사한테 쫓겨나요." "그렇게 되었나요? 그럼 다음 기회를 위해 참아 두죠. 그건 그렇고 그 껀은 어떻게 할까요?" "소비자관계 말씀이죠? 그거야 근사한 명분을 하나 만들기로 했잖아요? 우선 최 박사님이 취지문을 만드시고 명분을 하나 찾으세요. 요즘 유행하는 그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소비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어쩌구 하는 것 있잖아요." "취지문은 벌써 만들어 놓았지요. 헌데 재벌 총수 서너 명은 발기인에 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조 변호사를 통해서 좀 해보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아이구 최 박사도. 꿩 자시고 알 자시려고 하네. 나를 걸프랜드 삼으면 됐지 또 그이까지 이용하려고 그래요?" "하하하. 걸프랜드 좋다는 게 뭡니까?" "알았어요. 내 그이 들어오면 다시 흘려볼 테니까. 베개밑 송사라는 것 있잖아요. 이불 밑에서 속삭여 안 되는 일 있어요?" "아, 질투나네......" 나는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버튼을 눌러 버렸다. 타락한 중년 여인이니 유한마담이니 상류층 주부니 하더니 정말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임을 실감했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도둑질을 한 것 같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이야기로 보아 무슨 허울 좋은 사회사업을 합네 하고 썩어 문드러진 짓들을 하고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사회의 이면에는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재를 나와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다. 이동식 무선 전화기를 들고 거실을 오가며 전화를 하고 있던 양 여사가 그때 막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는 순간이었다. "미스 장, 쉬는 시간이구먼." 양 여사는 얼굴이 상기된 채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쉰 두셋으로 보기에는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그레한 뺨과 아직은 주름살이 별로 없는 목덜미가 그를 젊어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정화가 못 와서 제가 한 시간 더 하기로 했어요." 나는 어쩐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거기 좀 앉아요. 우리 유자차 한잔 마실까?"


그녀는 내 어깨를 잡고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별로......" 나는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앉으면서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예쁘기도 해라. 한창 나이지.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가 싶어." 그녀는 내 어깨며 팔을 만져보면서 부러운 듯이 말했다. "어때 힘들어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조윤호가 들어왔다. 퇴근길인 모양이었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조윤호는 국민학교 학생처럼 양 여사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는 나한테도 목례로 인사를 했다. 어쩌면 동생인 조석호와 저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싶은 태도였다. "너 혹시 허 양한테 검은 맘 가지고 있는 것 아니니? 어쩐지 네 태도가 이상해. 하지만 똑똑히 알아둬. 허정화 같은 미천한 집 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 없어." 나는 양 여사의 그 소리를 들으며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양 여사는 나같은 존재는 안중에 없는 것처럼 떠들었다.

4. 형제의 비극 일을 꾸미는 것은 언제나 겁이 없는 정화였다. 우리는 춘천 가는 새 포장도로 입구에서 민훈이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반갑고 놀라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정화의 장난기가 그때처럼 나를 즐겁게 해준 일은 없었다. 그날 정화는 우리들의 차를 끌고 나와 조윤호와 함께 1 박 2 일 코스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나와 합자해서 산 자동차지만 나보다 정화가 더 많이 타고 다녔다. 나는 운전솜씨도 서툴 뿐 아니라 차를 몰고 길에 나갔다가 교통순경이나 경찰차만 보아도 그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오금이 저려 차를 더 몰고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 차는 정화의 독점물이 되다시피했다. "우리 오늘 윤호 씨 싣고 드라이브 가지 않을래? 서울서 춘천까지 1 시간 50 분이면 갈 수 있어. 춘천 못 미처 강촌이란 데까지 가도 좋고." 그녀는 나와 상의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은


자기가 이미 정해 놓고 말만 그렇게 한다는 것을 나는 다 알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일 뿐 아니라 희숙이 과외수업도 마침 끝난 뒤여서 바람도 쏘일 겸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윤호 씨와 네가 가는데 나보고 끼란 말야?" 나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면서도 일단 그렇게 물어 보았다. "왜 싫으니? 윤호 씨는 내것도 네것도 아냐." "뭐라고?" "호호호, 그렇지 않니?"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같았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거북하게 들렸다. 말을 함부로 하지만 때로는 재치가 있어 미소를 머금게 하는 정화였다. 그러나 사람을 두고 네것이니 내것이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렸다. "윤호 씨가 뭐 강아지니? 네것 내것 하게, 그 사람이 들었다가는 혼쭐내려고 할 거야." "어차피 어떤 여자 소유뮬이 될 것 아니니. 그런데 아직 내가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하지 못했거든. 어떻게 보면 석호 씨보다 나은 점이 있긴 한데...... 평생 함께 살 거란 생각을 하면 좀 답답한 데가 있어. 사람은 진국이지만 맹꽁이잖니." 나는 정화의 말을 들으며 양윤임 여사의 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시어머니 될 사람이 꿈도 꾸지 않고 있는데 마치 선택권이 전적으로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하는 그녀의 태도가 부럽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했다. "양윤임 여사가 너 며느리감으로 어떻다고 말하든?" 내가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녀를 차마 정면으로 보고 말할 수 없어 먼 하늘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얘긴 해본 일이 없지만, 관계 없어. 지가 날 미워할 이유도 없지만 반대해 보았자 아들이 좋다면 그만이야. 아들 이기는 엄마 보았니?"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나는 양 여사가 절대로 너 같은 '미천한 집' 딸을 며느리로 삼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를 해주고 절망하는 그녀의 표정을 볼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윤호 씨, 자 출발합니다." 운전하는 정화 옆자리에는 조윤호가 앉았다. 나는 뒷자리에 혼자 앉아 가면서 어쩐지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다. 남의 데이트에 끼어들어 눈치나 보는 여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나같이 내성적이고


주변머리나 배짱 없는 여자에게는 일종의 고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서울의 복잡한 경계선을 넘어서자 길 모퉁이에 뜻밖에도 민훈이 서 있었던 것이다. 빨간 등산모자에 푸른색 진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은 참으로 산뜻했다. 뜻밖에 만난 사람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남의 데이트에 끼어 고민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저 남자, 우리 주워 가지고 가자." 정화는 민훈 앞에 차를 대면서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나는 덜렁이 정화가 이런 깜찍한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데에 감탄했다. "안녕하세요?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민훈이 차애 올라와 내 곁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흐뭇한 웃음을 보냈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얼굴이 붉어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가 내 곁에 앉자 공연히 심장이 빨리 뛰고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예요." 나는 엉겁결에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했다. "달리면서 인사 나누세요." 정화가 운전을 하면서 큰 소리로 조윤호와 민훈이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이쪽은 조윤호 씨이고 뒤쪽은 민훈 씨예요. 민훈 씨는 학교 다닐 때 우리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답니다. 지금은 타락한 샐러리맨. 이쪽 조윤호 씨는 민훈 씨 고교 동창인 조석호 씨 형입니다. 앞으로 형이라고 부르세요." "아, 예. 그렇습니까? 전 민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민훈이 허리를 굽혀 앞자리의 조윤호에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전 조윤홉니다. 석호의 형 됩니다." "앞으로 형이라 부르겠어요. 잘 부탁합니다." "대학시절엔 날리셨다고 하더군요. 미스 허가 하도 자랑을 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허풍을 쳤군요. 전부 거짓말로 받아 넘기십시오. 석호가 잘 알아요." "훈 씨, 우리 여기서 석호 씨 이야기는 싹 빼기로 해요." 정화가 불쾌한 듯이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정화가 조금 뜸을 들인 뒤 이야기를 이었다.


"만약에 내가 윤호 씨하고 결혼하고 을자가 훈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정화의 서슴없는 말에 나는 감전된 것처럼 깜짝 놀랐다. "얘가 지금......" 나는 훈이 쳐다볼까 봐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호호호. 만약이야. 좋아할 것 없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민훈 씨가 조윤호 씨를 형이라 부를 테니까, 을자는 나보고 형님이라고 불러야 할걸?"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민훈이 큰소리로 웃으며 슬그머니 내 팔을 잡았다. "형은 무슨......" 조윤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자, 여기 좀 쉬었다가 갑시다." 정화가 강촌 입구의 계곡 곁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함께 내려 강가로 가서 넙적한 바위에 걸터 앉았다. 정화는 머리에 체크무늬가 있는 푸른색 스카프를 살짝 매고 있었다. 깃을 세운 점퍼와 히프에 꼭 맞는 바지가 잘 어울렸다. 얄팍한 그녀의 입술이 풍만한 육체와 조화를 이루어 퍽 섹시하게 보였다. 헐렁한 블라우스와 펑퍼짐한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나는 촌스럽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신경이 쓰였다. 바위에 쪼그리고 앉은 나는 풍성한 스커트 자락으로 다리와 발끝을 감추었다. 조윤호와 민훈은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이 계곡의 나무 뒤로 걸어들어 갔다. "저이들 어디 가는 거니?" 내가 이상해서 정화를 보고 물었다. "호호호, 눈치 없긴. 쉬하러 가는 것 아니니. 호호호." 참으로 나는 눈치 없는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너 민훈 씨하고 결혼할 거니?" 정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무어라고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같이 잠자리도 해보았다면서? 그만하면 일차 테스트는 끝난 것 아니니?" "뭐라고?" 그녀의 말에 너무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얜! 귀청 떨어지겠어." 내가 너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정화도 놀란


모양이었다. "미안해. 좀 저속한 표현을 써서. 하지만 우리뿐인데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는 것 아니니?" "하지만 그런 이야기 난 싫어. 민훈 씨하고 결혼할 거란 생각 해본 일 없어. 더구나 결혼이 뭐 나 혼자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이니?" "얘. 너 그 사고방식은 고쳐야 한다. 결혼이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거야. 말대가리 선생 말 안 들었니?" 말대가리 선생이란 철학개론을 강의하는 여교수를 말했다. 얼굴이 길쭉하고 뻐드렁니가 유난히 뛰어나와 별명이 말대가리였다. 그 교수는 강의시간에 늘 결혼은 전쟁의 전리품이란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정작 마흔이 넘도록 노처녀로 있었다. "난 아직 학생이야. 그리고 남자들이랑 못된 실험 같은 거 하긴 싫단 말이야." 못된 실험이란 정화가 늘 말하는 몸으로 남자를 고르는 일이었다. "학생이니까 우린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하는 거야. 민훈 씨 괜찮은 바지야. 잘 붙들어 봐." 그때 두 남자가 돌아왔다. "와아 벌써 단풍이 멋있게 들었군요. 카메라 가져왔으면 좀 박아 둡시다." 민훈이 계곡 사방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누르스름한 낙엽수 사이로 단풍이 피를 토하듯 선홍색을 띠고 중간중간 서 있었다. "도시 먼지를 다 털어내는 것 같아 정신이 맑아졌어요. 이런 아름다운 계곡을 그냥 지나갈 수 있나요. 우리 목청껏 노래나 한 곡조 뽑지요." 정화가 바위 위에 올라서 산을 쳐다보며 가수처럼 두 손을 모으고 한 곡조 뽑을 자세를 취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요." 민훈이 벌떡 일어서서 나란히 섰다. 나는 노래란 말만 나와도 가슴이 철렁했다. 음치이기 때문에 모임에 나가면 누가 노래 부르라고 할까 봐 늘 걱정이었다. "난 듣기만 하겠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두요. 자 빨리 한곡 뽑아봐요. 혼성 듀엣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조윤호가 웃지도 않고 앉은 채로 말했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정화가 선창을 하자 민훈이 곧 따라 불러 합창이 되었다.


맑고 힘찬 정화의 목소리와 느긋하면서도 정감이 도는 민훈의 목청이 잘 어울렸다. 한 곡을 부르고 나자 흥이 돋아나는지 그들은 계속 합창을 했다. "나의 기쁜 마음 그대에게......" 쇼팽의 이별곡까지 여섯 곡을 부르고 나자 직성이 풀리는 듯, 나와 조윤호의 박수를 받으며 합창의 막을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차를 타고 춘천으로 달렸다. 소양호반에 있는 조그마하고 깨끗한 매운탕집으로 들어갔다. "아이, 배고파. 빨리 먹었으면 좋겠어요. 남자라도 잡아 먹겠어." 정화가 또 저질스런 농담을 하면서 두 남자를 흘깃흘깃 보았다. 나는 민훈 보기가 민망스러워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 호수엔 옛날에 공룡이 살았대." 우리들은 거기서 얼큰한 메기 매운탕을 맛있게 먹었다. 조윤호와 민훈은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정화도 몇 잔 마시고 얼굴이 붉어졌으나 나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자 이제부터 두 시간씩 자유시간이다. 우리 두 사람씩 헤어졌다가 5 시에 이 매운탕집 앞 우리 자동차에서 만나자. 어때?" 정화가 이렇게 제의하며 일어섰다. '어때' 하고 남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았지만 자기 혼자 결정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 저쪽 호반으로 산책 나가자." 내가 정화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으레 나와 정화, 그리고 조윤호와 민훈이 짝이 되어 나가는 줄 알았다. "얘 봐. 무슨 동성연애할 일 있니? 징그럽게 굴지 말고 훈 씨하고 나가." 정화는 매정스레 내 팔을 떨쳐 버리고 조윤호와 함께 나갔다. 민훈은 빙그레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와 나직히 말했다. "딱지 맞으셨군요. 내가 대신 짝이 되어줄 테니까 호반에 산책이나 나갑시다." 우리는 아무 말도 않고 십여 분 동안 호반을 걷기만 했다. 풍성한 햇살이 넓디넓은 호수에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햇살을 받은 수면은 수천 수만 개의 작은 파도를 일으키며 하늘을 향해 반짝였다. 마치 햇빛의 은혜를


박수로 보답하는 것 같은 감동스러운 모습이었다. "정화 쟤 참 재밌죠?" 무료하게 호반을 걷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아가씨예요. 하지만 을자 씨와는 참 대조적이지요." "저야 아래 위로 꽉 맥힌 쑥맥인 걸요." "하하하, 쑥맥이라구요? 난 쑥맥을 원래 좋아하거든요. 하하하." "아이 짓궂기도."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런데 허정화 씨는 석호를 좋아하는 겁니까, 형을 좋아하는 겁니까?" "글쎄요. 두 사람 다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나는 대답하기 난처하여 적당히 대꾸했다. "두 사람 다 좋아한다구요? 그거 남의 집안 우습게 만드는 일 아닐까요?" "그러다가 한 사람을 선택하게 되겠지요, 뭐." 나도 정화의 말을 떠올리며 대충 대답했다. "그 집의 내력인지 몰라요." 민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그 말이 귀에 몹시 걸렸다. "그 집의 내력이라니요?" 내가 민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는 슬그머니 팔을 내 어깨에 올린 뒤 나를 그의 가슴에 끌어당기면서 걸었다. "그 얘기 몰라요?" "무슨 얘긴데요?" 나도 용기를 내어 왼팔을 올려 슬그머니 민훈의 허리를 감았다. 어깨동무를 하고 걷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다정한 연인의 산책포즈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석호 부모 이야기 말입니다. 석호 어머니를 석호 아버지와 그 동생이 함께 좋아해서 시끄러웠다고 하는 얘기 못 들었어요?" "예? 석호 아버지와 삼촌이?" "하하하,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삼촌도 아버지도 아니었지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있었대요. 석호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그 집 주변에 떠도는 이야기랍니다. 석호 어머니 양 여사는 지금 나이가 들었어도 미인티가 남아 있잖아요? 처녀땐 뭇 남성의 시선을 모았을 겁니다."


나는 양 여사의 미모와 그녀가 풍기는 개운치 못한 섹시한 분위기를 상상해 보았다. 젊은 시절에도 남자들의 엉큼한 생각을 도발시키기에 충분한 여자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형제가 함께 양 여사를 차지하려는 싸움이 벌어졌대요. 마침내 형이 이기고, 석호 삼촌은 자살을 했다고 하던가......" "예? 자살을 해요?" "자살인지 교통사곤지 확실하게 모르지만 하여튼 죽었다고 하더군요." "어머나...... 양 여사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나는 양 여사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며 충격에서 헤어나려 애를 썼다. 가정교사로 내가 그 집에 처음 갔을 때부터 어쩐지 이상한 분위기가 그 집에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었다. 그 집 식구들은 느끼지 못하는 무겁고 침울한 한 올의 검은 실이 그 집 여기저기에 얽혀 있는 것 같았다. 더욱이 양윤임 여사가 풍기는 요괴스러운 여자의 마력 같은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양 여사는 형제간의 비극을 만들고 그 집에 시집 온 뒤에도 여전히 다른 남자의 품을 찾아 삼십 년을 헤매고 있는 숙명적인 여자라는 생각을 나는 떨쳐낼 수 없었다. "좀더 자세하게 얘기해 보아요." 우리는 호반에 있는 잔디에 앉았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요. 윤호 씨와 석호에게는 모르는 척해요. 아니 정화 씨에게도 아는 척하면 안 돼요." 민훈이 다짐을 받으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염려 말아요. 헌데 정화가 꼭 양윤임 여사를 닮은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나는 문득 소름이 끼치는 것을 의식했다. 정말 정화는 조윤호의 부모가 걸어온 비극의 길을 또 걸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다가 분명히 석호와 윤호 형제간의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정화를 가운데 둔 형제간의 싸움이 윗대에서 벌어졌던 죽음의 비극과 똑같은 것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슨 짓궂은 숙명이란 말인가? 나는 소름이 끼쳐졌다. 불안을 떨쳐 버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화 씨가 정말 석호와 윤호 형을 동시에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조석호 형제가 모두 허정화를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맙소사." 민훈도 생각이 나와 같은 곳에 닿았는지 불안한 말을 토했다. "우리 쓸데없는 남의 걱정 그만하고 일어나요." 이번에는 내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들은 호숫가를 근 십리나 걸어다녔다. 그러면서도 다리가 아픈 줄 전혀 몰랐다. 어떻게 시간이 그리 빨리 갔는지 우리가 다시 모이기로 한 자동차로 돌아왔을 때는 다섯 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아니, 자동차가 없잖아?" 민훈도 나도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늦었다고 먼저 가버린 것 아닐까요?" 내가 걱정스레 민훈을 쳐다보았다. "설마하니...... 이 근방을 찾아봅시다."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숲 속 그늘에서 차를 발견했다. 차는 발견했으나 나와 민훈은 입을 딱 벌리고 그냥 서 있어야 했다. 자동차 안에 앉아 있는 정화와 윤호는 서로 껴안고 입맞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화의 두 손이 윤호의 목덜미와 등을 끌어당기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윤호는 자기의 얼굴을 정화에게 맡긴 것 같은 엉거주춤한 모습이었다. 나와 민훈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그냥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한참 동안 열을 올리며 키스를 교환하던 정화와 윤호는 우리들의 모습을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팔을 풀었다. 정화가 먼저 자동차 밖으로 나왔다. "을자 언제 왔니?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정화는 언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자 빨리 빨리들 타세요. 출발합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차에 올랐다. 잠시 후 춘천시에 도착했다. "우선 잠잘 곳부터 마련해 놓고 시내 놀러나가는 게 어때?" 정화가 번화가를 두리번거리며 차를 몇 군데 세우려다가 조그만 어느 호텔 앞에 섰다. "자, 여기를 우리의 보금자리로 정하자." 두 남자를 완전히 무시한 채 정화가 앞장서서 호텔로 들어갔다. 그녀가 호텔 프런트에서 방 열쇠 두 개를 얻는 동안 조윤호는 부지런히 지갑을 여닫고 있었다.


"자, 이건 너네 것." 정화는 열쇠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네 것이라니?" 내가 영문을 몰라 되묻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 민훈 씨하고 네가 쓸 방이란 말야." "뭐? 민훈 씨하고?"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분해서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 "여기까지 와서 내숭떨지 마. 기집애가 그냥......" 정화는 우리를 로비에 둔 채 조윤호와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내숭이라고.' 나는 분하고 당혹스런 기분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숨만 거칠게 쉬고 있었다.

5. 살인 사건 "우리도 그냥 올라갑시다. 난 소파에서 자지요." 민훈이 멋적어하면서 나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그렇게는 못해요." 나는 프런트로 걸어가서 말했다. "빈방 하나 있어요?"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프런트의 총각은 우리의 아래위를 힐끔 훑어 보았다. 그의 눈이 내 손에 쥐어진 방 열쇠에 닿았다. "방근 체크인 하지 않았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그것만 대답해요." 내가 부드럽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내 뒤에 서 있는 민훈을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여자를 어떻게 해 놓았기에 방 열쇠까지 받아쥐고 저렇게 앙탈이냐는 투였다. "저어, 우리는 방이 두 개가 있어야 할 사정이라......" 민훈이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거들었다. "훈 씨는 가만 있어요." 내가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알겠습니다. 그건 몇 층이지요?" 총각은 더 이상 버티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쥐고 있는 방 열쇠를 보았다. "308 호......" "바로 옆방은 나갔구요. 312 호실이 비어 있습니다."


총각이 열쇠를 집어주면서 숙박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민훈에게 맡기고 혼자 308 호실로 올라갔다. 옷도 벗지 않은 채 한참 동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빌딩에는 하나 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있던 나는 갑자기 후회가 되었다. 민훈이 얼마나 무안해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민훈이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화도 잘못한 일이라고만 할 수 없었다. 연인끼리 한방을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민훈과 함께 밤을 새우는 데이트까지 했다고 자랑하지 않았던가? 슬그머니 일어난 나는 머리 매무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갔다. 312 호실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금방 문이 열렸다. "을자 씨 어서 와요." 민훈은 웃저고리 하나 벗지 않고 그대로 있다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방 안에 들어갔으나 우리는 한동안 우두커니 그냥 마주보고 서 있었다. "샤워 않해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퍼만 벗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안의 모습을 상상하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벌거벗고 샤워를 하고 있을 민훈의 모습과 하얀 시트로 덮여 있는 침대가 번갈아 눈을 어지럽혔다. 나는 창 곁으로 가서 얇은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춘천시는 도리어 활기를 찾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자동차며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 것 같았다. "을자......" 그때였다. 어느새 나왔는지 민훈이 뒤에서 내 가슴을 감싸안으며 귓불에 대고 나직히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내 가슴을 감싼 그의 팔목을 잡았다.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실막한 팔목이 잡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섰다. "을자......" 돌아선 나를 그가 꼭 안았다. 그의 까칠한 턱이 내 뺨에 닿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의 두툼한 입술이 내


입을 덮어버렸다. 그의 팽팽한 아랫배가 나를 죄어왔다. 그의 힘센 어깨가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나를 옥죄었다. "음음......" 마침내 나는 숨이 막혀 주먹으로 그의 등을 통통 쳤다. 그의 큰 입이 내 얼굴에서 떨어졌다. 나를 옥죄이던 팔도 풀어주었다. 그대신 이번에는 나의 블라우스 단추를 우악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블라우스는 금방 벗겨지고 브래지어만 남았다. 곧이어 내 스커트를 풀려고 허리춤 이곳 저곳을 더듬었다. 그러나 쉽게 스커트를 벗기지 못했다. 한참 동안 더듬거리던 그가 나직히 말했다. "어떻게 벗는 거야? 단추도 자크도 없잖아요." "후후후......"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 스커트 벗겨 본 일 없어요?" "응, 그때 말고 처음이야......" 나는 왼쪽 허리춤의 호크를 풀고 자크를 열었다. 플레어 스커트가 스르르 미끄러지자 팬티만 남았다. 그는 나의 맨살을 무작정 쓰다듬으며 신음을 토했다. 그도 팬티만 입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의 무성한 털이 내 어깨를 간지럽혔다. 어깨며 허리, 허벅지가 드러난 곳을 그는 두 손으로 마구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는 왼손을 내 가슴의 브래지어 밑어로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다. "잠깐......, 샤워 좀 하고 올께요." 하며 가볍게 그의 가슴을 떠밀어 냈다.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땀이 배었어요. 잠깐만......" 내가 힘을 주어 그의 턱을 손으로 밀자 그는 마지못해 물러섰다. 재빨리 욕실로 뛰어 들어간 나는 문을 잠갔다. 샤워를 틀었다. 팬티와 브래지어를 벗어 문에 걸어두고 몸을 적셨다. 샤워를 다한 뒤 나는 한참 망설였다. 그냥 나가면 민훈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럴 때 그의 공격을 피해야 하는지 받아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나는 결심을 하고 욕실문을 열었다. 민훈은 의자에 앉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욕실을 나선 나는 탁자 위에 얌전히 개켜진 채 얹혀 있는 스커트를 재빨리 나꿔챘다. 막 입으려고 할 때였다. 민훈이 벌떡 일어서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스커트를 빼앗아 집어던지고는 나를 번쩍


들어 침대에 뉘었다. "을자......" 그는 잇따라 내 위를 덮쳐 누르며 키스를 퍼부었다. 한 손으로는 브래지어를 벗겨버렸다. 억세게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이 유방을 우악스럽게 거머쥐었다.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엔 팬티를 벗겨냈다. "민훈 씨......"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며 허벅지를 꼭 붙였다. "을자, 우린 사랑하는 사이야. 우리는 오래 전부터 서로를 찾고 있었어. 이제 우리 가면이나 체면, 자존심 같은 것 다 벗어버려. 장을자와 민훈, 발가벗은 두 사람이 되는 거야.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지금 사랑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거야." "......" "우리는 결혼해야 돼. 우린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운명지어져 있어. 대학교 일학년 때, 캠퍼스의 잔디밭에서 을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운명 같은 것을 느겼어. 그때 우리는 몰랐지만, 두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야." 따르릉......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몸을 빼내 시트로 알몸을 감춘 뒤 수화기를 들었다. "을자니?" 정화의 명랑한 목소리였다. "얘, 니들 지금 뭐하니? 못된 짓 하는 건 아니겠지? 호호호." "아니 저어......" 나는 너무 당황하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금방 얼굴이 화끈거렸다. "샤워했음 밑으로 내려와. 윤호 씨와 함께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았어. 곧 내려갈께." 나는 창피하고 떨려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얼른 일어서서 팬티를 찾았다. "아니 을자 씨......" 팬티를 벗고 모로 누워 있던 민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빨리 옷 입어요. 정화가 기다리고 있대요." 나는 차마 민훈의 알몸을 볼 수 없어 벽으로 돌아선 채 부지런히 옷을 입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민훈과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것은 두 번째였다. 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저번에는 자의에서였지만 이번에는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민훈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우리 이따 밤에 다시 시작해요." 나는 옷을 다 입고 돌아서서, 그때까지 멍청히 누워 있는 민훈을 보고 위로의 말을 했다. 춘천의 밤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지만 밤이 되어도 우리는 끝내 아무 일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우리들은 디스코 홀이며 횟집이며, 마지막으로 포장마차까지 다니며 술을 마셨다. 비교적 술이 세다는 민훈도 마침내 곤드레가 되어 버렸다. 새벽 2 시쯤 나의 어깨에 얹히다시피 하여 호텔로 돌아온 그는 거의 인사불성이 된 채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308 호 내 방에서 혼자 자며 누구에게인가 속은 듯한 분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춘천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그 비극은 일어났다. 허정화가 비참하게 죽은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내가 청천벽력 같은 허정화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달려 갔을 때, 희숙이네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정화의 시체는 이미 경찰병원으로 옮겨진 뒤였다. "언니!"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희숙이가 뛰어나와 내 손을 와락 잡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정화가 죽다니 그게 정말이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나는 희숙을 껴안은 채 멍하게 서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점퍼 차림의 낯선 사람들은 우리 모습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미스 장 왔구나. 이게 글쎄 무슨 날벼락이니." 희숙 어머니 양윤임 여사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모습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 "사모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는 그 와중에도 고개를 깊숙이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물었다. "글쎄, 그 웬수가 누구 집안을 망치려고 그랬는지......" "예?" 나는 양 여사의 말투가 수상쩍어 되물었다. "글쎄 방까지 하나 내주었더니 떡하니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지 않아. 방은 절대로 안 주려고 했는데 희숙이가 조르는 바람에......"


양 여사는 분노에 찬 얼굴을 해 보였다. 정화와 나는 며칠 전부터 이 집에 방 한칸을 얻어 쓰고 있었다. 희숙이 성적이 점점 좋아지자 조철구 변호사 내외는 우리에게 보답한답시고 2 층의 넓고 깨끗한 방 한칸을 내주었다. 나는 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잘 이용을 하지 않았지만, 집이 시골인 정화는 하숙집에서 나와 그곳에서 기거를 했었다. "그럼 정화가 자살을 했단 말야?" 나는 양 여사의 말투를 비로소 알아차리고 희숙에게 물어보았다. "잘은 몰라요. 아니면 누가 정화 언니를 죽였겠어요?" 희숙의 겁에 질린 얼굴이 더 파랗게 되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하게 얘기 좀 해봐." "아침에 자고 나서 수학 복습해야 하는데 언니가 안 오잖아요.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언니방으로 올라 갔더니 글쎄......" 희숙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섞인 그녀의 설명은 대강 이러했다. 희숙이 아침 공부를 해야 하는 시간은 6 시였다. 그런데 6 시 20 분이 되어도 정화가 내려오지 않았다. 희숙은 혼자 자습을 하다가 책을 들고 정화 방으로 올라갔다. 노크를 했으나 기척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 보았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희숙은 문을 쾅쾅 소리나게 쳤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희숙이 언니 언니 하고 불렀다. 그러나 정화는 나오지 않고 옆방에 있던 석호 오빠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 새벽부터......" 가운 차림의 석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오빠, 이상해. 언니가 문을 안 열어줘." "뭐야?" 석호가 다시 노크를 하고 정화를 불렀으나 기척이 없었다. "방 안에 없는 걸까?" 희숙이 혼잣말을 했다. "방 안에 없는데 왜 문이 잠겨 있어." "외출하면서 잠갔겠지 뭐." 희숙은 돌아서려다 다시 멈추었다. 정화의 신발을 현관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니는 방 안에 있어요. 신발이 현관에 있었거든."


그들은 현관에서 정화의 신발을 확인하고 방 비상 열쇠를 찾아내어 문을 땄다. "정화 씨!"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간 석호가 깜짝 놀라 비명처럼 정화를 불렀다. 그녀가 침대가 아닌 방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잠옷도 아닌 평상복 차림이었다. "정화...... 정화......" 조석호가 계속 부르며 그녀를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윽, 주......, 죽었어." 석호가 비명을 지르며 정화로부터 한발짝 물러섰다. "엄마!" 희숙은 울음을 터뜨리며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야기를 듣고 난 나는 다시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정화는 왜 죽은 거야?" "몰라요. 경찰관은 자살이 아니냐고 했어요." 희숙은 거실 가운데 서서 불도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늙수그레한 사나이를 가리켰다. 갈색 점퍼 차림에 주름도 서지 않은 헐렁한 회색 바지를 입은 그 사나이는 50 살은 충분히 돼 보였다. 둥그스름한 특징 없는 얼굴에 잔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도무지 경찰관 같은 인상은 없는데, 그가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약간 웃어보였다. 나도 외면할 수가 없어 목레를 했다. 그러나 그는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듯 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저 허정화 씨와 함께 가정교사를 하는......" "예. 장을자예요." "그렇군요. 난 시경에 있는 추 경감이라고 합니다. 잠깐 나하고 얘기 좀 할까요?" 그때였다. 조석호가 어디서인지 뛰어나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장을자 씨는 이 일과 아무 상관 없어요. 괴롭히지 말아요." 석호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추 경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 일이나 봐요. 허정화는 장을자 씨의 친구니까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을 겁니다." 추 경감이 나를 보고 동의를 구하는 눈짓을 했다. "석호 씨는 제 걱정 말고 일 보세요."


나는 추 경감과 함께 정원으로 나왔다. 그렇게 무성하고 탐스럽던 다알리아꽃은 벌써 다 지고 없었다. 나는 쓸쓸해 보이는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허정화 양이 요즘 이상하게 보인 점은 없었나요?" 추 경감은 호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려고 철거덕거렸다. 그러나 고물이라서 그런지 좀처럼 불이 켜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보인 적은 없어요. 걔는 항상 명랑하고 낙천적이었거든요. 근데 누가 죽였을까요?" 나는 궁금하던 것을 물어 보았다. "글쎄요. 아직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모릅니다. 얼른 보아서는 약물중독이나 수면제 과용 같습니다. 어쩌면 자살인지도 모릅니다." "자살이라구요? 아니 정화가 자살을 했단 말입니까?"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서면서 말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유서 같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허 양이 쓰던 타자기에 유서와 비슷한 글이 적혀 있었거든요." "그 타자기는 저도 쓰는 거에요. 정화가 유서를 찍어 놓고 자살을 했단 말입니까? 어디 그 유서 좀 볼 수 없나요?" "감정을 하러 가져갔습니다. 나중에 보여드리지요. 그러나 자살로 보기는 미심쩍은 데가 너무 많습니다. 자세한 것은 부검이 끝나야 알겠지만,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 곳이 있고 특히 목이 졸린 듯한 흔적도 있었어요. 누가 죽여 놓고 자살로 위장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추 경감은 마침내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장 양은 어젯밤에 허정화 양과 같이 있었다죠?" 추 경감이 갑자기 조용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예. 어젯밤에 그 방에 같이 있었어요." "몇 시에 헤어졌나요?" "밤 11 시쯤일 거예요. 조석호 씨가 그때 들어왔어요. 석호 씨는 술이 약간 올라 있었어요. 정화는 나보고 자리를 좀 피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거든요." "그때 이상하게 보인 점은 없었나요?" "글쎄요. 두 사람이 무언가 할 일이 있는 것 같았어요." "할 일?"


추 경감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밤중에 남녀가 방 안에서 할 일이 무엇이냐는 투였다. "꼭 싸움을 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나는 얼른 대답을 했다. "사랑이 아니라 싸움이라구요? 후후후." 추 경감은 혼자 하늘을 보고 웃었다. "왜 싸우려고 했나요?" "글쎄요. 나는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냥 나와 버렸어요." "이 집을 나가서 어디로 갔습니까?" "지하철을 타고 그냥 집으로 갔어요. 12 시쯤 집에 들어갔는데 늦게 다닌다고 혼났어요." "평소에 허정화와 이집 식구들의 관계는 어땠나요?"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허정화와 조석호는 사랑하는 사이였나요? 조석호는 장을자 양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추 경감은 여전히 하늘을 보면서 물었다. "나를 조석호 씨가 좋아한다구요? 그건 잘못 보신 것 같아요. 그는 정화를 좋아했어요." 나는 억울하단 듯이 항의조로 말했다. "정화 양은 그 형인 조윤호를 좋아한 것 아닙니까?" 나는 추 경감이 짧은 시간 동안에 상당히 많은 것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을 두고 이러니 저러니 하기가 뭣하군요."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양윤임 여사는 정화를 어떻게 생각했나요?" "그냥 그랬던 것 같아요."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았습니까?" "싫어했다면 가정교사로 두고 방까지 마련해 주었겠습니까?" "조 변호사는 어땠습니까?" "변호사님은 딱 한 번밖에 본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희숙이는 허정화 양을 잘 따랐나요?" "그런 편이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나는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부잣집 아이들이 흔히 갖는 태도지만...... 나나 정화를 지식의 전달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추 경감은 딸 같은 나에게 지나친 공대말을 쓰면서 물었다.


"말하자면 자기 집의 운전기사나 가정부와 꼭같이 취급했어요." "아,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장을자 씨나 허정화 양은 굴욕감 같은 것을 느꼈겠군요." 그러나 나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6. 유서 허정화의 시신은 땅에 묻지도 못한 채 경찰병원 영안실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한동안 병원 영안실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너무 슬프고 기가 막혀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도무지 정화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정화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느낀 것은 빈소에 놓인 흰장미 한 송이가 시들고 고개를 숙인 때였다. 정화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을자 씨 너무 이러면 안 됩니다. 정신 좀 가다듬어요." 보다 못했던지 민훈이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슬픔이 한꺼번에 내 전신을 덮쳐오는 것 같았다. 슬픔의 강은 나의 온몸을 가득 채우고 넘쳐 마침내 입으로 눈으로 심장으로 터져나왔다.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창피한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울었다. "을자 씨, 왜 이래요?" 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자 민훈은 당황한 듯 내 어깨를 흔들며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실컷 울고 나서야 나는 옆에서 민훈이 애를 태우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모르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추한 모습을 민훈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여자의 본능 같은 것이 되살아났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우리는 병원 앞에 있는 피자 파이집에 들어가 마주앉았다. 한참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화는 정말 자살한 걸까요?" 나는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민훈은 한참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누가 죽인 거예요?" 이번에도 민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몰라. 허정화는 자살할 아무런 이유도 없어. 미스 허 같은 낙천주의자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한단 말이야?" "그럼 그 유서라는 것은 뭐예요? 타이프 라이터로 쳤다는......" "그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유서라는 것의 내용이 뭔데요?" "강 형사라는 사람이 보여줘서 보았는데, 세상을 원망하는 그런 내용이야." "세상을 원망하다뇨?" "말하자면 사회의 모순 같은 것을 비판한 내용이 대부분이야. 가진 자에 대한 원망, 못 가진 자의 서러움 뭐 그런 것 있잖아." "예? 정화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나는 너무도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자기는 머리 나쁜 아이의 노리개감이 되어가면서 지식을 팔아야 하는 못 가진 자, 굴욕을 참아야 하는 이유가 오직 부자인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자기는 떳떳한 집안의 남자를 사랑할 자격도 없고, 그런 집의 며느리도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 아니냐, 너무 불공평한 세상이 아니냐, 뭐 그런 이야기를 유서에 담고 있었어." "걘 명랑하고 낙천주의자이지만 가끔 그런 심각한 때가 있긴 했어요." 나는 허정화가 가끔 서클에서 운동권 아이들과 어울려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화가 그런 일로 자기의 목숨을 버릴 만큼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가 정화를 죽인 뒤 타자기에 일부러 그런 걸 쳐두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강 형사 말은 타자기에는 허정화의 지문과 을자 씨 지문만이 채취되었다고 하더군." "내 지문이?" 나는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민훈을 쳐다보았다. "그야 당연하지. 을자 씨와 정화 씨가 함께 쓰던 타자기 아닙니까?" 민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정화가 유서로 썼거나, 아니면 내가


그렇게......" "걱정 말아요. 거기엔 허정화가 그날 밤에 타자를 친 것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그거야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8 월 3 일 밤, 허정화라고 한 부분 중 타자를 친 것은 날짜뿐이고 이름은 볼펜 글씨로 서명하듯 쓰여 있었대요. 감정 결과 허정화의 글씨가 틀림없다고 하더군." 민훈은 파이와 콜라 두 잔을 시킨 뒤 말을 계속했다. "그것이 유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친필 서명 때문이야. 그러나 유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단정짓지 않는 것은 미스 허의 몸에 나타난 상처 때문이야." "상처가 많았대요?" 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해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런 얘긴 다음에 하고 배 고픈데 파이나 먹어요." 나는 민훈의 말대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에 가져온 파이를 집어서 한입 가득 물었다. 그러나 전혀 맛을 알 수 없었다. 콜라를 꿀꺽꿀꺽 마셔서 억지로 삼켜 버렸다. 우리는 밤이 꽤 깊어서야 파이집을 나왔다. "내가 운전하지." 민훈이 운전석이 앉았다. 정화와 공동투자해서 산 엑셀을 병원 앞에 세워 두었었다. 나는 차를 보자 또다시 정화 생각이 나서 울음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내를 가로질로 민훈의 집 앞까지 왔다. "내리세요. 이제부터 제가 운전해서 우리 집까지 가겠어요." 나는 차에 탄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을자 씨 집까지 데려다 드리고 난 택시 타고 다시 오겠어요." 민훈은 자기집 앞을 그냥 지나치면서 말했다. 우리 집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집 입구에 차를 세운 민훈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너무 좁고 가파르기 때문에 차가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차는 가지고 가세요. 난 집에 그냥 들어가면 되니까요." 내가 차에서 내리려고 문의 손잡이를 잡을 때였다.


"을자!" 갑자기 민훈이 내 어깨를 껴안았다. "을자!" 그는 번개처럼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왔다. 까칠한 수염이 뺨에 닿았다. 차고 두터운 입술이 보드라운 내 입술에 낯선 촉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맡겨두었다. 그는 미친 듯이 나의 어깨와 목을 잡아당기면서 입술을 비볐다. "누가 보겠어요." 나는 살며시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섰다. 그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불만에 찬 얼굴로 보다가 그도 차에서 따라 내려섰다. 자동차의 문을 잠근 뒤 열쇠를 내 앞에 내밀었다. "고마워요, 훈 씨." 자동차 키를 받아 쥐면서 나는 따뜻한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푹 쉬어요, 미스 허 생각은 당분간 잊어버리구요."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자리에 쓰러졌다. 며칠 동안 온통 잠만 잔 듯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겨우 하룻밤을 푹 잔 것에 불과했다.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집을 나섰을 때는 해가 중천에 솟아 있는 정오께였다. 내가 자동차 문을 열려고 키를 막 꽂았을 때였다. "저 실례합니다. 장을자 씨."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거기에는 엄숙한 얼굴을 한 점퍼 차림의 꺼칠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기억하시겠는지요? 시경의 강 형삽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이 기억났다. 몇 번이나 그날 밤의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물었기 때문에 짜증스러웠던 사나이였다. "웬일이세요? 아직도 저한테 볼일이 남았나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얼굴을 돌렸다. "이거 미안합니다. 외출을 하시려는가 본데 제 차로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차는 좀 좋지 않습니다만......" 그는 내 차 앞에 서 있는 낡은 고물 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차를 하지 않아 먼지투성이에다 뒷범퍼도 달아나고 옆구리가 찌그러진 차였다. "자, 제 차를 타시지요." 성큼성큼 내 앞을 걸어간 그는 지저분한 포니의


문을 열었다. 그 포니는 나의 엑셀 앞에 바싹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차가 비켜 주지 않으면 내 차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가시는 데까지 모셔다 드리면서 한두 가지만 물어보겠어요." 그가 다시 재촉을 했다. 나는 그의 굳은 표정에서 고집을 세워 보았자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럼 시내로 나갈 때까지만......" 나는 혼잣말처럼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강 형사의 차에 탔다. 차에서 퀴퀴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쾌해 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는 창문을 열면서 시동을 걸었다. "차 안에서 노총각 냄새가 좀 나시겠지만 참으십시오. 잠깐이면 다방까지 갈 수 있습니다." "다방이라뇨?" "차 안에서보다는 다방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서......" "예?" 나는 기가 막혀 쏘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우리는 무교동에 있는 조그만 지하 카페에 마주 앉았다. "미안합니다. 몇 가지만 더 말씀해 주십사 하고......" 강 형사는 조금도 미안한 표정을 짓지 않으면서 계속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희숙이 삼촌, 즉 조철구 변호사 동생이 젊었을 대 자살을 했다고 하던데 혹시 들으신 적 없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희숙 어머니 양윤임 여사는 젊을 때 굉장한 미인이었겠어요. 지금도 출중한 미모를 그냥 간직하고 있거든요. 처녀 때는 총각들의 가슴깨나 태웠을 거예요. 장을자 씨도 미인이지만......" 그는 내 표정을 흘금흘금 보아 가면서 말을 계속했다. 내 마음을 풀어놓으려고 가끔 농담 같은 말을 했지만 말재주가 없어 어색하기만 했다. "양윤임 여사의 처녀 시절 때 조철구 형제가 함께 사랑했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동생의 애인이었는데 형이 뺏었다든가...... 맞아요?"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애인을 뺏긴 동생이 자살을 했다던가?" "전 잘 몰라요." 나는 좀체 경계의 표정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 형사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조윤호와 조석호 형제가 함께 허정화를 사랑했던 것 아닙니까? 부모님 대에서 일어난 비극이 아들 대에서 또 일어난 것 아닌가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사건이지요. 다르다면 형제 중 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이번엔 상대인 여자가 죽은 것이지요.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비극이 되풀이된 건 틀림없지 않습니까?"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강 형사로부터 한번 더 듣고 나니까 더 한층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도 참 이상한 연관성 같은 것을 느끼며 소름이 끼쳤어요." 내가 약간 웃어 보이며 말하자 강 형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시켜준 사과 주스를 쭈욱 들이켰다. "강 형사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요?" 내친김에 궁금하던 것을 물어볼 속셈으로 부드럽게 내가 말했다.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내 신상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서른세 살에 아직도 순진한 총각......"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허정화의 사인은 뭐에요? 수면제 같은 것을 먹었나요?" "아, 네. 글쎄 그게 의문입니다. 부검까지 끝냈습니다만 사인이 무엇이란 것은 밝히지 못했습니다." "예? 사인을 못 밝혔다구요?" "검시의의 소견서에 보면 약물중독에 의한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나 있으나 혈액이나 장에서는 어떠한 극약도 검출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몇 군데 울혈 현상이 있으나......" "울혈이 뭐예요?" "뭐라고 할까? 피멍 같은 것이지요. 일반 사진에도 구별할 수 있게 나타나 있습니다만...... 왼쪽 어깨와 왼팔 세 군데에 피멍이 들어 있고 오른쪽 무릎도


부딪치거나 얻어맞은 것 같은 흔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목 언저리에도 울혈 현상이 약간 있었습니다만 그건 사인이 될 수 없다는군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누구와 싸운 흔적이 아닌가 해요." "누구와 싸웠다구요?" "글쎄 그렇다니까요. 그리고 또 의문점이 있어요. 을자 씨가 그날 밤 그 집에서 나올 때 석호 씨가 들어왔다고 했죠? 그런데 석호 씨는 그날 밤 을자 씨를 본 일이 없다고 하거든요." "예? 뭐라구요?" 나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가 나를 본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다니. 무엇 때문일까? "우리 이러지 말고 시경에 좀 들러볼까요? 미스 허에 관한 사인도 더 자세히 알아볼겸......" 강 형사는 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벌떡 일어서서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차값을 계산한 그는 뒤늦게 일어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경찰국 같은 데는 겁니 나서 못 가요. 이만 실례하겠어요." 내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겁이 나요? 하하하. 죄지은 것 없으면 겁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자, 가시지요." 나를 시경까지 꼭 데리고 가야겠다는 의지가 그에게 있는 것을 그때야 나는 비로소 눈치챘다. "나를 왜 연행하려는 거죠?"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 꼭 연행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참고인 진술을 좀더 듣고 싶고, 그리고......" 강 형사는 그쯤에서 약간 망설였다. "그리고 뭡니까?" "지문도 좀 대조해 보고......" "예? 지문요? 누구의 지문을 대조합니까?" "장을자 씨의 지문과 비슷한 것이 허정화의 유서와 타자기에서 발견되었거든요." "그러면 치안본부나 주민등록부에 있는 제 지문을 대조해 보았을 것 아녜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치안본부나 주민등록표에 있는 지문은 엄지 뿐입니다. 수사상 필요한 것은 열 손가락 지문 모두거든요." 나는 그제야 아찔함을 느꼈다. 경찰에서는 나를 허정화의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찰국으로 나를 강제로라도 연행해 가려는 강 형사의 임무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분해서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나를 허정화 살인범으로 보고 있군요. 당신들은......"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의심나는 점은 일단 깨끗이 해놓는 게 좋습니다." 강 형사는 다시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살인 사건이 한번 나면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이 진술을 하고 지문을 제공합니다. 그냥......" "내가 친구를 죽일 그런 여자로 보여요? 정화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럴 수 있어요?" 나는 이유가 닿지 않는 화를 냈다. 그러나 결국 퀴퀴한 냄새가 나는 그 차를 타고 시경 수사과로 갔다. 강 형사를 따라 들어간 곳은 아주 기분 나쁜 곳이었다. 여기저기 낡은 책상이 몇 개 놓여 있고 볼품 없는 의자도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음침한 방이었다. 강 형사는 자기 책상인 듯한 곳에 앉으면서 책상 모서리에 있는 때묻은 철제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 바닥이 시커멓게 더러워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앉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촉감이 기분 좋지 않았다. 강 형사의 책상 위에는 지저분한 서류 따위가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뒤의 옷걸이에는 찌들어 빠진 여름 점퍼가 하나 걸려 있었다. "여기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지문 채취 도구를 곧 가져오지요." 강 형사는 밖에서와는 전혀 다른 사무적인 표정으로 말하며 일어서서 옆방으로 나갔다. 나는 멍하니 강 형사의 어지러운 책상 위를 보고 있다가 표지가 두꺼운 일간지 같은 책에 눈이 멎었다. 책 틈에 컬러 사진 몇 장이 삐죽이 모서리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 책을 집어당겨 사진이 꽂힌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아니 이건......"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벌거벗은 여자의 사진이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천천히 훑어 보았다. 벗은 여자의 전신을 이곳 저곳에서 찍은 십여 장의 사진이었다. 유방이며 음모까지도 생생히 드러난 그 사진은 어쩐지 섬뜩한 감이 들었다. 사진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아니......" 그것은 죽은 허정화였다. 눈을 감고 이를 앙다물고


있어 얼른 알아보지 못했으나 정화의 모습이 분명했다. 납색처럼 푸르고 차가운 빛까지 감도는 정화의 육체는 너무나 섬뜩했다. 그러나 참으로 균형잡히게 잘 빠진 몸매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부검을 하기 직전에 찍은 사진 같았다. 강 형사가 말한 대로 왼쪽 어깨와 오른쪽 무릎 부근에 색이 변한 듯한 부분이 보였다. 피멍의 흔적이 있다고 하던 강 형사의 말이 생각났다. 정화는 나의 단짝 친구지만 살아 있을 때도 그의 벗은 몸매를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죽고 난 뒤에 보는 정화의 나신은 질투가 날 정도로 미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은 친구를 놓고 질투를 하다니. 내가 미쳤어.'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사진을 모두 책 속에 엎어서 넣어 버렸다. 그러고는 두껍고 까만 책 표지를 덮으려다가 문득 거기 낙서처럼 쓰인 글 중에 '장을자'라는 글씨가 얼핏 눈에 띄었다. 책을 당겨놓고 자세히 보았다. 거기에는 무질서한 글씨로 낙서하듯 여러 가지 상황이 적혀 있었다. 허정화의 죽음에 관한 수사기록 같기도 했다. 눈에 띄인 내 이름 석 자에는 여러 차례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의문 부호도 여러 개 그려 있었다. 내가 이 사건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 쓰인 무질서한 글씨를 찬찬히 읽어 보았다. 허정화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장을자, 조석호, 조윤호, 조희숙, 양윤임, 조철구 등의 이름이 씌어 있고 이름 밑에 선을 치거나 혹은 A, B 같은 부호가 적혀 있기도 했다. 조석호와 조윤호에 관해서는 나이며 주변상황으로 추측되는 '온건' '확실' 등의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어려운 글씨가 많이 씌어져 있었다. 김석진, 이민화 등의 이름도 씌어 있었으나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허정화를 죽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 같은 인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중요한 혐의자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화가 났다. 그러나 뒤따라서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노트를 얼른 덮어버린 나는 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어 금방 비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집을 나설 때의 쾌청한 날씨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강 형사가 다시 들어왔다. 그는 학교에서 프린트


인쇄를 할 때 쓰는 것 같은 까만 고무 롤러와 서류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왔다. "자 여기에 손가락 끝을 대세요. 왼손부터 할까요?" 그가 시키는 대로 나는 열 손가락 끝의 지문을 찍어주었다. 속으로는 분한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자, 그럼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얘기해 볼까요? 아주 사소한 일도 빼면 안 됩니다." 나는 강 형사의 메마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를 완전히 범인 취급 한다는 생각을 했다.

7. 질투 "그날 밤, 그러니까 8 월 3 일날 밤 이야기는 저번에도 했지 않습니까?" 나는 눈으로 나타나는 약간의 공포를 숨기기 위해 시선을 창 밖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러나 강 형사는 좀체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장을자 씨는 숨긴 것이 있었어요. 사실대로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해요." "숨긴 것이......?"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면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숨겼다기보다는 빠뜨린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 강 형사가 다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빠뜨린 이야기라뇨?" 나는 더 버텨 볼 요량으로 시치미를 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지 못했다. "민훈 씨가 그날 밤 그 집에 갔던 것을 왜 숨겼나요? 아니 숨긴 것이 아니라 왜 얘기 중에서 빠뜨렸나요?" 그는 너구리 같은 형사라서 다 알고 있었다. 내가 민훈 씨가 그날 밤 다녀간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를 그런 일에 끌어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단순한 생각으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이 차츰 여러 가지 거짓말을 낳게 하고 말았다. 처음엔 그가 있었다는 말만 하지 않았지만, 나중엔 말이 맞지 않아 거짓말을 꾸며대고 말았던 것이다. "좋아요. 민훈 씨가 그날 밤 왔던 것을 이야기 안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와 허정화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상관이 있고 없고는 우리가 판단합니다. 장 양은


사실대로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자, 그날 밤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볼까요?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생각이 잘 안 나는 수도 있어요. 나중에 정신을 가다듬고 나면 안 나던 생각도 나게 되지요. 친구가 갑자기 변을 당했으니 그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을 이해합니다." 강 형사는 내가 겸연쩍어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좋아요. 이야기를 다시 하지요." 나는 백 속에서 껌을 꺼내 씹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가끔 껌을 씹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과외를 다 마치고 정화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지요. 내가 무심코 정화의 방문을 홱 열었을 때였어요. 나는 방 안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방문을 도로 닫고 나오고 싶었어요." "거기에 민훈이 와 있었죠?" 강 형사가 담배를 피워물면서 물었다. "예. 민훈 씨가 거기 왔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정화가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나는 그때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누구에게도 아닌 분노 같은 것이 치솟았다. 아니 분노라기보다는 배반감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때 내가 방문을 열자 먼저 눈에 뜨인 것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것 같기도 하고 앉은 것 같기도 한 정화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채 매미날개 같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잠옷 속으로 핑크빛의 유두가 멀리서 보아도 짐작이 갈 정도로 보였다.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비스듬히 누워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얇은 잠옷 자락은 볼륨 넘치는 히프를 감당 못한 채 허연 허벅지에서 멎었다. 곧게 뻗은 우윳빛 정강이 끝에는 잘록한 발목과 얌전한 열 개의 발가락이 강렬한 여인의 체취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 요염한 침대 밑의 방바닥에 민훈 씨가 넋 잃은 사나이가 되어 퍼질러 앉아 있었다. 숨이 막혀 도저히 그냥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응? 을자구나. 들어와." 허정와는 자기의 그런 모습이 조금도 꺼리낄 것이 못 된다는 듯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심술이 나고 기가 막혀 그 두 사람 사이에 가서 앉았다.


"민훈 씨는 언제 왔어요? 처녀가 옷벗고 자려는데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들어오시다니?" 얼굴이 상기된 채 눈이 불을 튀기며 흘겨보자 그때야 민훈은 제정신이 드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을자가 나보고 오라고 했잖아. 끝나면 같이 가자구...... 와 보니까 을자는 수업중이라......" "나 아직 잠들 시간 아니야. 우리 셋이 좀 놀다 가......" "정화보고 한 얘기 아니야."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민훈 씨. 사람이 어쩌면 그래요? 여자의 침실에 들어오면서, 숙녀에게 옷 입을 시간도 안 주고 들어오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나직하면서도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저어......" 민훈 씨가 더듬거리자 정화가 말을 받았다. "넌 이런 옷이 홈웨어란 것 모르니? 민훈 씨 정도면 다 이해할 거야. 을자 네가 지나치게 신경쓰는 것 아니니? 호호호......" 정화는 우습지도 않은 웃음을 크게 웃었다. "난 오늘 밤 민훈 씨 다시 보았어요. 너무 신사답지 못해요." 나는 정화는 상대하지 않고 계속 민훈 씨만 윽박질렀다. "나 민훈 씨 같은 사람하고 같이 가고 싶지 않아요. 나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 테니 혼자 가세요. 아셨죠?" 나는 민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듯이 말했다. "을자 씨, 그게 말이야......" 민훈은 내 팔을 잡으며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나는 팔을 그냥 뿌리치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얘 을자야. 너 오늘 밤 왜 이러니! 훈 씨 잘못한 것 하나도 없어. 우리 사이가 뭐 체면이나 가릴 그런 사이니?" 이번에는 정화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는 말을 하지 않고 계속에서 민훈에게만 퍼부었다. "알았어요. 이제 그만 갈 테니까 그쯤해 두어요." 내 등쌀에 견디지 못한 민훈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잘 가요. 그리고 당분간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아욧." 나는 민훈이 방문을 열고 나갈 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끈적하고 비굴하고 음흉한 눈초리로


반나의 허정화 몸매를 바라보며 그것을 즐겼을 민훈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사나이의 속셈이 그렇다고 쳐도 나는 불쾌해서 그냥 견딜 수 없었다. 민훈이 나가고 나자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을자야 화났니?" 한참만에 정화가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내 어깨를 매만지며 말을 걸었다. "아니." 나는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을자야 미안해. 나는 네가 그렇게 언짢아할 줄 몰랐어. 그냥 무심코......" "괜찮아." 나는 허정화의 손을 다독이며 생긋 웃어보였다. 그녀가 민훈에게 무슨 딴 마음이 있어서 그랬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워낙 명랑하고 개방적인 그녀의 성격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도 그만 가봐야겠어. 내일 아침 일찍 갈 데가 있어서......" 내가 일어서자 정화가 따라서 일어났다. "그럴 줄 알았으면 훈 씨를 붙들어 놓을 걸 그랬다. 괜히 쫓았잖아. 기집애두......" "하하하."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때였다. 조석호가 도어를 빠끔히 열고 우리 방을 들여다보았다. "또 뭐예요?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요? 아직도 나한테 볼 일이 남았던가요?" 갑자기 정화가 소리를 질렀다. 조석호를 향해 악을 쓰듯이 말했다. "후후후. 뭐 그렇게 화를 낼 거야 없어요. 후후후." "뻔뻔스럽기두 해라. 쯧쯧쯧." "정화 씨. 그러면 못 써요. 예쁜 얼굴에 주름살 생깁니다. 후후후." 조석호는 술이 아직 덜 깬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도어를 연 채 얼굴만 들이밀고 있다가 이번에는 아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요?" 정화가 발딱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처럼 성난 그녀의 유방이 출렁거렸다. 얇은 잠옷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팽팽한 모습이었다. "정말 이러기요?" 정화가 조석호를 막아서자 그도 자존심을 다쳤다는


듯 화난 목소리가 되었다. 나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 정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화는 화가 나서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표정을 내가 자리를 피해 주기 원한다는 것으로 혼자 해석하고 그 방을 나왔다. 복도에 나서며 시계를 보았다. 11 시 5 분쯤 되었다. 아직 버스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를 타고 가기로 작정하고 기다란 그 집 정원을 통과해 대문께로 걸어갔다. 나는 혼자 집을 나섰지만 언제나처럼 그 집에서는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내가 대문을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 "을자 씨!" 정원 벤치에서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보나마나 그것은 민훈의 목소리였다. 나보다 10 여 분 먼저 나간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원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집에 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서성거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내가 화가 나서 가지 않는다고 한 말을 곧이 듣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야?" 나는 뻔히 알면서 나직하게 되물었다. "훈이요, 훈. 같이 가요." 그가 걸어오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그러나 나는 같이 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 대꾸도 않고 대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자동으로 잠기는 대문을 열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그 집 앞을 빠져나와 처음 생각과는 달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2 시 가까이 되어 지하철이 집 가까이 닿았을 때야 민훈에 대한 화가 조금 풀렸다. 따지고 보면 민훈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내 부탁을 받고 늦게 가는 나를 집까지 에스코트해 주기 위해 희숙이네 집까지 왔고 거기서 돈벌이 교습이 덜 끝난 나를 기다리고 있은 죄밖에 더 있는가? 여자 친구가 반 나체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의 미끈한 육체미를 노출시키고 있었던 것은 전혀 민훈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다음에 만나면 사과까지는 않더라도 마음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화가 민훈 앞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너그럽게 보려면 볼 수도 있었다.


정화는 원래 성격이 활달하고 격식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 지극히 현실 숭상주의자가 아닌가? 조석호와 윤호 씨 형제를 두고 누가 신랑감으로 적합한지 잠자리까지 같이 할 정도로(이 부분은 사실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없는 얘기지만......) 현실주의자가 아닌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강 형사는 다시 몇 가지를 물었다. "그러면 대문 앞에서 민훈 씨를 만난 것이 아니고 목소리만 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곧 그가 내 쪽으로 오는 기척을 느끼고 나는 대문을 닫고......" "아, 알겠어요. 그러면 민훈 씨가 그 집을 나와 집으로 갔는지, 아니면 그냥 그 집 정원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겠군요." "그런 셈이죠." "그럼 민훈 씨가 그 길로 허정화 양의 방으로 도로 갈 수도 있었겠군요." "예?" 나는 강 형사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뒤늦게 알고 놀랐다. 반나의 미모 여인을 본 남자가 그 모습을 못 잊어 다시 그녀의 방으로 갔다가 완강히 거부하는 여인을 향해...... 나는 삼류소설이나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치사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강 형사는 분명히 민훈 씨를 그런 사람으로 본 것 같았다. "이봐요, 강 형사님. 민훈 씨는 그런 치사한 덜된 사람이 아녜요. 그것은 강 형사님의 저속한 오버센스랍니다." 나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예? 저속한 오버센스라뇨? 내가 무엇을 했기에......" 강 형사는 어이없어 하며 나를 건너다보았다. "지금 민훈 씨도 혐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살인 용의자는 나 하나면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하하하. 장을자 씨. 오해하지 마십시오. 장을자 씨를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의자가 아니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게 그 말 아녜요? 이젠 가도 괜찮은가요?" "물론입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딜 가시는지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강 형사가 나를 따라 나오며 말했다. 나는 퀴퀴한 총각 냄새가 나는 그 낡은 강 형사의 포니를 다시는 탈 생각이 없었다. "내 걱정 말고 정화 살인범이나 빨리 잡아요." 나는 시경 앞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경찰이 괘씸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부엌에 들어가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끓어오르는 분함을 물로 다스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냉수를 두어 사발 들이키고 나자 속이 좀 풀렸다. 오후 내내 방 안에 누워 있다가 해가 뉘엿해서 일어났다. 그냥 집에 있을 수 없었다. 희숙이네 집에 가서 무엇인가를 좀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엑셀의 운전대에 앉아 시동을 걸면서 갑자기 정화가 즐겨 듣던 카세트 테이프 생각이 났다. 그녀는 김민기의 노래를 즐겨 들었었다. 그 중에서도 아침이슬을 특히 좋아했었다. 나는 갑자기 그 노래가 듣고 싶어 차 앞의 테이프 보관함을 열었다. 꽉 채워 놓은 테이프를 뒤적이며 '아침이슬'을 찾았다. 테이프를 찾다가 문득 그 옆에 있는 노트를 발견했다. '아니 여기 무슨 노트가......' 나는 표지가 빨갛게 생긴 조그만 노트를 끄집어 냈다. 표지에 금박글씨로 '다이어리'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정화의 일기책이었다. 나는 테이프 찾는 일은 그만 두고 정화의 일기책을 펼쳐들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노트의 절반 이상이 차 있었다. 꼼꼼하지 않은 그녀의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꼼꼼하게 씌어진 일기는 나를 놀라게 했다. 정화의 또다른 내면 세계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차의 시동이 걸린 것도 잊고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일기가 거의 그렇듯이 정화의 것도 내가 알지 못하던 그녀의 이성교제에 관한 부분이 많았다. 주로 조석호와 윤호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녀는 '조 S'와 '조 Y'로 표현하고 있는데, '조 S'는 조석호, '조 Y'는 조윤호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비교해서 써놓은 부분이 많았는데, 종합해 보면 조윤호보다는 조석호 쪽에 마음이 쏠려 있는 것 같았다. 남의 비밀이나 내면 세계를 보면서 은밀히 즐긴다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일이다. 나는 빙긋이 미소를 머금고 정화의 일기를 읽어 가다가 이상한 구절이


중복되고 있는 것을 찾아냈다. M 이라고 표현된 남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M 을 이상적인 남자처럼 묘사해 놓았다. '그가 M 보다 훨씬 뒤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이런 구절을 여러 군데서 발견했다. 나는 M 이 민훈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일기장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인 7 월 29 일자에서는 나를 놀라게 하는 구절이 나왔다. 'M 이 찾아왔다. 나는 지저분한 내 하숙방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지만...... M 은 나직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나는 황홀했다.' 중간 부분을 사인펜으로 지워버려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일기는 나의 피를 거꾸로 돌게 하는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이럴 수가...... 민훈 씨가 정화의 자취방을 찾아가다니. 그리고 그녀를 황홀하게 해 주었다고?' 나는 배신감으로 미칠 것 같았다. 민훈 씨가 그렇게 엉큼한 사나이라고 생각하자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정화와 몰래 만나 즐기면서 나한테는 나만 사랑하는 척 속임수를 쓰다니...... 나는 일기책을 덮어 버리고 자동차를 거칠게 몰았다. 민훈이 근무하는 빌딩 앞에 주차를 해놓고 지하다방으로 가려다가, 옆 건물의 카페로 들어갔다. 민훈을 불러내어 큰 소리로 욕설과 함께 절교 선언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민훈의 사무실 빌딩보다는 딴 장소가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조용한 카페의 공중전화에서 민훈을 불러내며, 혹시 정화를 죽인 것이 민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민훈 씹니까? 나 장을자예요. 요 옆 카페 무지개에 있으니까 빨리 좀 나와요." "아니 을자 씨......" 민훈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카페의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민훈이 나타나면 첫마디를 무엇이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민훈이 뛰어들어왔다. "을자 씨! 갑자기 웬일이야?" 민훈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나는 그의 웃음이 이중성격자의 비겁한 가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 "민훈 씨가 정화를 죽였지요!" 나는 어떻게 해야 모진 말을 할까 하고 벼르다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쏘아붙였다. "아니 을자 씨, 뭐라구요? 지금 형사놀이 하는 겁니까? 하하하. 제법 무서운 표정인데......" 민훈은 큰소리로 웃으면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정말 퇴근시간에 맞춰서 잘 왔어. 우리 어디 가서 불갈비나 먹자." 그는 여전히 내 표정을 무시하고 말했다. "나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나 지금 심각하단 말입니다. 바로 말해 봐요. 허정화는 민훈 씨, 당신이 죽였지요?" 나는 풀리지 않은 얼굴로 될 수 있으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내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나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을자 씨, 왜 이러는 거야? 그거 농담이지." 그제야 민훈 씨는 내 모습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동안 허정화와 나 몰래 더러운 정사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다 알았단 말예요. 그래 허정화의 자취방에서 벌인 사랑놀음이 그렇게도 재미 있었나요?" "아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을자!" 그는 몹시 당황한 듯 내 손을 잡으면서 심각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왜 이래요. 그것도 모르고 난 민훈 씨가......"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분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 모습을 그에게 정면으로 보이기가 싫었다. "을자 씨!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아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허정화의 자취방에는 몇 번이나 드나들었어요? 그 집에서 무슨 짓들을 했나요?" 나는 질투에 눈이 어두워 아무 말이나 마구 튀어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미스 허의 자취방에 딱 한 번 간 일이 있어. 그러나 그건......" 나는 M 이 민훈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더 이야기 안해도 됐어요. 정화의 일기장에 다 씌어 있더군요. 흥!" 나는 벌떡 일어서서 카페를 나와 버렸다. "을자 씨! 아니 을자 씨!" 민훈이 허둥지둥 뒤따라 나왔으나 나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뛰다시피 내 차로 갔다. 눈물이 쏟아져 길도 잘 보이지 않았다.

8. 용의자의 동태 나는 경찰로부터 허정화 살해 용의자 중의 한 사람으로 찍혀 있음으로 알았다. 그것도 중요한 혐의자에 속했다. 나는 갑자기 혈관을 가득 채운 듯한 분노의 물줄기를 의식했다.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슬픔만으로도 내 감정은 헤쳐나가기 힘들었다. 그런데 살인 혐의까지 받고 보니 정말 앞이 캄캄했다. 살인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내 손으로 범인을 잡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혐의를 벗기 위해서보다는 친구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 주기 위해서라도 범인은 꼭 내가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꼭 범인을 잡고 말거야. 정화야, 네가 편안히 쉴 수 있게 내가 원수를 갚고 말거야.' 나는 마치 정화가 내 곁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맹세를 해보였다. 나는 이틀 동안 학교에도 가지 않고 방 안에 박혀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친구의 죽음, 살인 혐의, 거기다가 나의 희망인 민훈의 배신 등이 나를 괴롭혔다. 민훈은 M 이 자기일지 모르지만 부끄러운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옛날처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민훈이 허정화의 살인범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까지 마음 한켠에서 자꾸 고개를 들었다. '정화를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정말 자살을 했을까? 정화를 죽였다면 과연?' 나는 정화를 죽일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희숙이네 집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꼽혔다. 허정화를 다투어 가지고 놀던 조윤호와 조석호 형제가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서로 질투를 하다가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희숙 어머니 양윤임 여사를 생각해 보았다. 별볼일 없는 집안의 딸인 허정화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기 싫다면 죽일 수도 있었다. 다음 조철구 변호사? 죽일 이유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너무 끔찍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허정화 같은 아이라면 연인의 아버지를 유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귀찮아진 아버지는 아들 보기가 거북해서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민훈, 나를 속이며 몰래 만나온 불륜(?)의 남자니까 어떤 부도덕한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용의자는 다섯 명이었다. 아니 한 사람 더 있었다. 희숙이. 그렇다. 지겨운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면 원인부터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희숙이가 정화를 해쳤다는 생각은 나 자신도 수긍되지 않았다. 나는 이틀이나 걸려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다만 감정은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다. 나는 며칠 만에 희숙이네 집으로 갔다. 허정화의 원수를 갚자면 호랑이들이 있는 굴로 가야 한다는 웃지 못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안녕하셨어요. 사모님." 나는 일부러 명랑한 미소를 지으며 양윤임 여사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양윤임 여사는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잠옷을 입은 채였다. 역겨울 정도로 화사한 핑크빛에다 요란한 레이스가 눈을 어지럽혔다. 거기다 아오자이처럼 허벅지 쪽이 깊이 타져 희멀건 살갗이 노출되어 있었다. 아무리 자기 집에 있지만 대낮에 저런 유치한 차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희숙이 있나요?" 나는 딴 곳을 보면서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들어가 봐요." 양 여사도 나를 쳐다보지 않은 자세로 말을 던지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희숙이의 방으로 가 보았으나 그녀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허정화가 있던 방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냥 나왔다. "안녕하세요?"


현관에서 가정부 아줌마를 만났다. "오랜만이에요." 나는 아줌마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반가워했다. 갑자기 정화 생각이 나서 눈이 흐려졌다. 자꾸 눈물이 흘렀다. 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 주책스럽게 여겨져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여자를 보는 아줌마의 심정도 착잡했으리라 생각되었다. "왜? 벌써 가시려구요?" "예. 희숙이도 아직 안 돌아오고 해서요." "희숙 아가씬 시골 가셨어요." "그랬어요? 언제 갔나요?" "오늘 갔는데...... 여주 외갓집에 가셨걸랑요. 모레쯤 올 거예요." 나는 희숙이가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양 여사가 괘씸하게 생각되었다. "또 봐요. 그럼......"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현관을 나와 버렸다. 현관에서 대문까지는 정원 속의 좁은 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얼굴을 대강 수습하자 문득 문득 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양윤임 여사가 범인일지도 모른다. 양 여사를 지켜봐야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가는 아줌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대문으로 가지 않고 정원의 나무숲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 잎이 덜 떨어진 나무 뒤로 돌아가 누릇한 잔디 위에 앉았다. 단풍이 곱게 든 감나무 잎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초가을인데도 제법 추색이 드리워 있었다. 나는 잔디 위에 앉아서 거의 반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 집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방문객도 없었다. 형사들이 숨어서 용의자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 여 년을 살면서 이런 짓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을 느끼며 총각 선생님의 일을 훔쳐보던 생각이 났다. 그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옆교실의 여선생님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짓궂기로 이름난 남학생이 나를 데리고 현장을 잡겠다며 강당 뒤에 숨어 있었다.


두 선생은 수업이 끝난 뒤 강당 뒷문으로 들어가 연애를 한다는 것이었다. 강당 뒷문은 늘 잠겨 있었고 그 열쇠는 연극지도 교사인 그 여선생님이 가지고 있었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은 강당 무대의 뒷면으로 분장실이었다. 나와 남학생은 방과 후 배고픈 줄도 모르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강당 뒤 나무숲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여선생님이 나타나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금 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우리 담임 선생님이 나타났다. 선생님은 잠깐 사방을 둘러본 뒤 재빨리 강당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와, 봤지 봤지!" 남학생이 내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응! 정말......" 나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 올랐다. 떠도는 소문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에 흥분도 했지만, 그보다 담임 선생님께 배신당한 것 같은 분한 감정이 되었다. 이상한 소문이 반 아이들 입에 흘러다닐 때만 해도 나는 설마 그런 일이 있으랴 싶었다. 훌륭하고 미남으로 생긴 우리 담임 선생님이 부랑배들이나 하는 그런 연애 짓거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자 나는 분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얘, 우리 가까이 가서 보자. 틀림없이 키스를 할 거야." 남학생이 다시 내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 선생님이 그런 더러운 짓을 할 것 같아?" 나는 화가 나서 쏘아 주었다. "더러운 짓? 하하하, 키스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남학생은 코웃음을 쳤다. "빨리 이리 와 봐." 나는 따라 갈까말까 몇 번이나 망설이다 호기심이 발동해 남학생을 따라갔다. 뒷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 너무 서둘지 말아요." 여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의 눈이 실내의 어둠에 익숙해지자,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우리 선생님이 여선생님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놀라 가슴이 빠르게 두방망이질했다. 선생님은 소리가 날 정도로 여선생님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손을 여선생님의 스커트 밑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우리 선생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안 돼! 안 돼요, 선생님!"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학교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이후 담임 선생님 얼굴을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본 일이 없었다. 순진하던 국민학교 시절의 한토막 추억을 떠올리며 나는 빙긋 웃었다. 그 뒤 우리 담임 선생님은 그 여선생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발이 저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하이힐을 벗어 들고 일어섰다. 현관 쪽으로 소리나지 않게 다가갔다. 문을 밀어보았다. 다행히 잠겨 있지는 않았다. 나는 도둑 고양이처럼 현관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거실로 올라섰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는 아래층 화장실을 지나 주인 부부가 쓰는 안방 쪽으로 갔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갈까 하다가 겁이 나서 옆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빈 방인데 조 변호사가 허드렛방으로 쓰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있는 헌 소파에 앉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뛰는 가슴을 달랬다. 마치 큰 죄라도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남의 집에 주인 몰래 들어 왔으니 죄는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동안 쉬고 난 나는 약간 대담해졌다. 이렇게 숨어만 있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그 방을 나왔다. 이번에는 안방 문 손잡이를 쥐고 살그머니 돌려 보았다. 쉽게 방문이 열렸다. 손잡이를 쥔 손이 덜덜 떨려 하마터면 소리가 날 뻔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안에 들어섰다. 작은 전등 하나만 켜진 방은 굉장히 커 보였다. 엄청남 값을 주었을 법한 장롱과 문갑 등이 어울리게 장식되어 있었다. 화장대, 텔레비전, 장식대, 동양화 그림 등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침대는 보이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양 여사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좀더 대담해져 방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보았다. 이것 저것을 만져보고 감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났다. 여자의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귀를 곤두세웠다. 여자의 신음소리 같은 것이 옆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옆방이 아니라 벽에 붙어 있는 도어 저쪽에서 난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장롱 곁의 벽에는 으리으리한 조각품으로 된 도어가 하나 있었고 그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신음소리는 그곳에서 들렸다. 나는 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눈앞에 복도 같은 좁은 길이 보였고 복도 옆에는 수백 벌이나 될 법한 여자의 옷이 걸려 있었다. 그곳은 옷창고인 동시에 침실로 들어가는 복도였다. 건너편 문도 없는 침실에는 옅은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신음소리는 그곳에서 나왔다. 안방, 즉 거실격인 큰방을 지나면 탈의실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침실이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는 집이었다. 나는 소리나지 않게 발을 옮겨놓으며 침실 입구까지 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저앉아 침실 안으로 얼굴만 조금 들이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악!'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곳에는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양 여사의 동물적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발가벗은 양 여사가 낯모르는 사나이와 어울려 넓직한 침대 위에서 정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양 여사 위에서 시뻘건 등과 히프를 드러내 놓고 정사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양 여사는 그 사나이 밑에 깔린 채 사지를 뻗어 사나이를 휘여감고는 환희의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짓에 열중해 있는 탓에 누가 들어가 춤을 추어도 모를 지경 같았다. 나는 너무 쇼크를 받아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차 정신을 가다듬고 두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몸을 뒤척일 적마다 바라보이는 남자의 옆모습은 분명히 이 집 주인인 조철구 변호사가 아니었다. "아니 저럴 수가!" 나는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언젠가 양 여사가 외간 남자와 통화하는 것을


엿들은 일이 있었다. 저 남자가 혹시 그때 그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가 부서지도록 몸부림을 쳐대는 양 여사는 나이답지 않게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탄력이 넘쳐 보이는 유방이며 약간 살이 찌기는 했으나 희고 윤기나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자기집 안방에, 그것도 대낮에 남자를 끌어들여 저짓을 하는 여자라면 밖에 나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상되고도 남았다. 세상에 불륜스런 일이 있다는 것을 신문이나 잡지 같은 것에서만 읽었지 이렇게 현장을 목격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갑자기 두 사람의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지고 이젠 남자까지 짐승 같은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양 여사...... 양......" 남자가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으으......" 양 여사는 발음이 되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방 안은 이제 폭풍으로 모든 것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뜨거운 폭풍은 나까지 숨막히게 했다. 얼마나 되었을까? 침실은 다시 조용한 태풍 뒤의 평온을 되찾았다. 벌거벗은 두 중년 남녀는 침대에 나란히 널부러진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양 여사!" 사나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조금 전 숨 넘어가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응?" 양 여사는 한쪽 팔을 남자의 가슴에 얹으며 대답했다. "조 변호사 언제 온다고?" "응? 아이 무드 깨게 그이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거부 반응부터 보였다. 저 정도로 양심을 팽개친 여자라면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은 식은 죽 먹듯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후. 조 변호사 와 보았자 별볼일 없다면서? 양 여사 같은 불덩어리를 달래줄 만한 실력이 없다면서? 후후후." 사나이는 만들어낸 웃음을 흘리며 양 여사를 껴안았다. "왜 이래요? 또......" "그 일은 어떻게 돼 가지?"


"걱정 말라고 했잖아요. 우리 변호사 양반이 다 처리해 놓았어요." "나와 같이 한다는 얘기는 했나요?" "물론이지. 나 혼자 무슨 돈이 그렇게 있겠어요?" "동업이라......" 사나이는 벌거벗은 채 일어나 담배를 찾아 물었다. 나는 차마 정면으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침실에서도 동업한다는 얘기는 안했겠지. 히히히." 사나이가 다시 음흉하게 웃었다. "변호사님 알았다가는 우리 두 사람 다 사형감이에요." "사형? 하하하. 남녀가 사랑했다고 사형당하는 일은 동서고금에 없어." "우리 변호사님은 꼭 그렇게 만들고 말걸요. 그이의 독점욕이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구요. 아마 자기 목숨을 걸고라도......" "나도 목숨 걸고 양 여사 사랑하는데......" "거짓부렁......" 양 여사는 마치 소녀처럼 아양을 떨었다. 나의 눈에는 그것이 더 징글맞게 보였다. "이러다가 이 집에서 또 살인사건 나는 것 아닐까?" 나는 바싹 긴장해서 귀에 온 신경을 모았다. "아이 기분 잡쳐. 그 얘긴 제발 좀 집어치워요." 양 여사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나보고 누굴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겠지?" "예? 아이 기분나쁜 얘긴 그만하자니까요. 별의별 년이 다 들어와 집안 망치려고 그래." "양 여사 나 여자 잘 죽이는 것 몰라? 후후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긴장감을 느꼈다. 저 남자가 정화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침대 위에서라면 여자 얼마든지 죽이지. 내 밑에 깔린 여자치고 몇 번씩 까무러치다가 죽지 않은 여자 못 봤으니까. 후후후." "아이그, 천하의 플레이보이...... 앞으로는 나 말고는 아무도 죽이지 말아요. 호호호." 양 여사가 사나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가정교산지 뭔지 하는 아이 괜찮게 생겼던데......" "그만두자니까. 당신이나 난 그 애 얘기 꺼내지 않는 게 신상에 좋아요. 우리 샤워해요." 양 여사가 사나이의 손목을 끌고 옆방 도어를 열고 들어갔다. 그곳이 욕실인 모양이었다. 곧이어 샤워 물소리에 깔깔거리는 음탕한 남녀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사나이가 벗어 놓은 옷을 찾았다. 웃저고리, 안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 금방 지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돈 아닌 수표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사나이 것으로 보이는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샤워하는 남녀가 나올까 봐 겁이 나서 재빨리 침실을 나왔다. 나는 처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숨을 죽여가며 현관으로 다시 나갔다.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문을 열고 큰길로 나왔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길을 걸으며 문제의 명함을 꺼내 보았다. '거인개발 대표이사 배갑손.' 그리고는 깨알만한 글씨로 사무실 주소와 전화번호가 씌어져 있었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슨 개발이니 부동산회사니 하는 것은 거의 규모 큰 복덕방 정도라는 상식밖에 없어서 '거인개발'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이거 장을자 씨 아니오?" 갑자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걸었다. 나는 보고 있던 명함을 감추며 그를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조석호였다. "아, 조석호 씨." 나는 나쁜 짓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정면으로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석호 씨 집에 갔다가......" 나는 말끝을 흐려 버렸다. 그 집에 숨어 있은 지가 한 시간도 넘었는데 지금 대문 앞에서 만났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누가 시간을 따진다면 어쩌나 하는, 제 발 저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오늘 밤 어디 가서 신나게 몸 좀 풀까요?" 조석호는 내 의견도 듣지 않은 채 나의 허리를 덥석 껴안고 오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웬지 나는 그의 팔에서 벗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9. 거액의 수표 "우리 어디 그럴 듯한 데 가서 한잔 할까요?"


조석호는 슬그머니 내 허리를 안고 걸으며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답지 않은 은근한 행동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묵시적으로 동의를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88 택시를 세웠다. "잘 모시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에 올라탔다. "아저씨 강변도로로 해서 육삼빌딩 앞까지 갑시다." 그는 말을 할 때마다 내 허리를 조금씩 더 죄어 왔다. 차 안에서는 자기 옆구리에 내 허리를 완전히 밀착시키다시피 잡아당겼다. "석호 씨, 숨 좀 쉬어야겠어요." 나는 참다못해 그의 팔을 걷어내면서 말했다. "무슨 힘이 그렇게 세어요. 갈비뼈 다 으스러지겠어요." "하하하, 미안합니다. 을자 씨가 도망갈까 봐 꼭 붙드느라고 그랬나 봅니다. 근데 숙녀 입에서 갈비뼈니 으스러지니 하는 용어를 쓰는 건 어울리지 않는데요." 나는 조석호가 덜렁이면서도 꽤 섬세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나야 꼭 붙들지 않아도 도망갈 날개가 없는 여자예요. 하지만 정화나 꼭 붙들지 그랬어요." 차가 강변도로로 접어들었다.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강건너 불빛이 아름다웠다. "정화? 하하하, 없는 사람 얘기는 우리 뺍시다. 그건 과거잖아요." 조석호는 뜻밖에도 약간 불쾌한 말투였다. "과거 없는 사람이 있나요? 근데 도대체 정화는 누가 그랬나요?" 말꼬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재빨리 물었다. "제가 그랬습니다." 조석호는 덤덤하면서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석호 씨가요? 정말이에요?" "물론입니다. 정화의 처녀를 훔친 건 접니다. 아주 괜찮았어요." "예? 뭐라구요?" 나는 어이가 없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기막힌 몸매였어요.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답게 잠자리 매너도 괜찮았어요." 나는 조석호가 나와 처음 만나던 날 나에게


처녀냐고 묻던 무례함을 다시 상기시켰다. 아무 말이나 마구 뱉어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악의 없이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는 남자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었다. "그래서 죽였나요?" 나도 엉뚱한 방향으로 좀 가고 싶어서 비수처럼 한마디를 던져 보았다. "죽여요? 하하하." 그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너털웃음을 웃다가 조용히 말했다. "침대 위에만 가면 나 여자 잘 죽입니다. 한 시간에 열 번은 죽여 주지요. 하하하." 나는 그의 음탕한 말을 피하여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는 안 듣는 척했다. "저리로 내려갑시다. 선착장 말입니다." 자동차가 육삼빌딩 앞에 와서 닿자 석호가 강둑을 가리켰다. 택시는 곧 선착장에 닿았다. "우리 오늘 배 좀 탑시다. 한강 위에 낭만을 뿌리면서...... 히히히." 우리는 유람선의 가장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요즘 민훈이 자주 만나나요?" 그는 배가 강 가운데로 나올 때까지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래 되었어요. 만난 지가......" 슬그머니 손을 빼내면서 나는 대답했다. "훈이는 을자 씨의 애인 아니에요?" "애인이라구요?" 나는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섰다. "조심해요. 넘어져요." 그때 배가 흔들려 일어선 내가 기우뚱거렸다. 그가 재빨리 일어나 나를 붙들었다. 붙든 게 아니라 껴안았다고 해야 옳았다. 나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엉겁결에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나를 안아 의자에 다시 앉히고는 재빨리 내 입술에서 키스를 훔쳤다. 번개처럼 재빠른 행동이었다. 기습을 당한 나는 두툼하고 찝질한 그의 투박한 입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왜 이래요. 술 취했어요?" 내가 정색을 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뇨. 입술에 취했어. 을자 입술 멋진데." 내가 한껏 화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는 오히려 능글맞기만 했다. 나는 그러는 그가 어쩐지 그렇게


싫지 않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만용을 부리는 듯한 거친 행동 속에 숨은 그의 사나이다운 매력인지도 몰랐다. 민훈은 깔끔하고 사리를 잘 판단하는 지성인이니만 야생화 같은 거칠고 신선한 맛은 없었다. 배는 곧 뚝섬 선착장에 도착했다. "자, 부두에 닿았습니다. 내립시다요." 석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내 팔을 잡고 입구로 나갔다. 한강변의 밤바람은 꽤 쌀쌀했다. 우리는 길게 뻗은 시멘트 계단을 말없이 한참 걸었다. "저기 벌써 달이 떴군요." 묵묵히 걷던 조석호가 나직한 톤으로 말했다. 다혈질이고 직선적인 조석호에게 뜻밖의 모습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두번째였다. 첫번째는 신촌 어느 조용한 카페에 들어갔을 때였다. "석호 씨답지 않은 모습을 가끔 느끼게 되네요."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나도 덕수궁 돌담길이나 눈쌓인 고궁 뜰, 달뜬 한강변을 연인과 함께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끝없이 걸어다니는 낭만도 안답니다." "호호호." "왜 웃어요?" "요즘 젊은이답지 않아요. 너무너무 안 어울리고 구식인 거 있죠?" "구식? 하하하, 그러는 을자 씨는 요즘 젊은이 아녜요?" "호호호." 나는 금방 기분이 풀어져 유쾌하게 웃었다. "어때요? 오늘 저녁 내가 처년지 아닌지 감별을 좀 해 드릴까요?" "뭐라구요? 나 원참!"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시를 해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렇게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싫으면 그만둬요."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도 미안하다거나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얼마를 걸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어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든지." 그가 강변의 시멘트 계단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약간 돌아선 채 물었다.


"그날 밤 정화를 어떻게 한 거예요. 허정화 말입니다." "예? 허정화? 그날 밤이라구요?" "8 월 3 일 밤. 조석호 씨 집 2 층 정화의 방에 들어오셨잖아요." "그랬나요?" "왜 이러세요? 정화가 죽던 날 밤 기억 안 나세요?" 나는 홱 돌아서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아, 그날 밤 말입니까? 가만 있자......" 한참 생각을 더듬는 듯 말이 없다 입을 열었다. "그날 밤 정화 씨는 조금 이상했어요. 술을 좀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예? 술을 먹어요?" 나는 그날 밤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정화의 태도가 여느 날과는 좀 다르다고 느꼈었다. 가슴과 허벅지가 다 보이는 듯한 잠옷을 입고 요염함 포즈로 민훈 앞에 누워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술이 취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요?" 내가 곁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면, 무슨 약물에 취했는지도 몰라요. 정화는 좀 흥분해 있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흥분한 여자를 어떻게 했어요?" 그를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 어두워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싸늘한 비웃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죽여 주었지."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나왔다. "예?" "죽여 주었어. 왜?" "그럼 석호 씨가......? 나쁜 사람!" 나는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근데 말야. 정화는 죽을 때마다 왜 그렇게 요란한지 모르겠어."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등을 할켜 손톱자국이 얼마나 났는지 몰라. 그뿐 아냐. 환희와 고통의 비명을 얼마나 질러대는지 옆방에 들릴까 봐 식은땀 난다니까." 나는 그제야 이 사나이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지 눈치챘다. "지금 농담하자는 것 아녜요." "나두야. 농담하는 것 아니라구. 한바탕 전쟁이 끝난 뒤 우리는 패잔병처럼 방바닥에 사지를 뻗고


누웠지." "그래서요?" "정화도 맥이 다 빠졌는지 반듯이 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나는 그대로 잠들면 아침에 곤란하게 될 것 같아 옷을 들고 그냥 내 방으로 건너가려고 하는데......" 그는 담배를 피워 물며 말을 계속했다. "그때 누운 채로 내 발목을 잡으며 말했어." "뭐라구요?" 나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어쩐지 석호 씨를 마지막 보는 것 같다던가 뭐 그런 말을 했어." "마지막 본다구요?" "꼭 그 말인지 아닌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좌우간 그런 뜻의 말을 했어. 이제 생각하니 자살을 하려고 이미 결심하고 있었던 것 같아." "자살을 하려구요?" "그럼, 정화 씨가 자살한 것 아냐?"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마지막 본다고 했을 때 뭐라고 대답했어요?" "내일 밤에 또 죽여 줄 테니 푹 쉬라고 했지. 그리고 그 방을 나왔어. 내방에 가서는 정신없이 쓰러져 잤을 뿐이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정화가 왜 자살을 했을까요?" 그는 내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거꾸로 물었다. "정화는 자살한 게 아니에요." "예? 을자 씨가 어떻게 알아?" "형사들이 그랬어요. 난 범인을 꼭 잡고 말 거예요." 나는 입술을 악물고 걷기 시작했다.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요?" 석호가 뒤따라 오며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후후후. 달도 밝다." 그는 나를 끌고 강둑으로 올라섰다. 그 다음날, 나는 무슨 단서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배갑손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양윤임 여사의 침실에서 훔친 명함에 씌어진 주소대로 종로 2 가의 거인빌딩으로 간 것이다. 4 층짜리 오래된 건물의 입구를 들어서자 요란한 간판들이 계단 옆 벽에 붙어 있었다. 비뇨기과 의원, 치과, 무슨 부동산 등의 잡다한


간판 틈에 '거인개발 4 층'이란 간판이 보였다. 나는 걸어서 4 층까지 올라갔다. 4 층에는 다른 사무실이 없는지 입구에 거인개발이란 커다란 플라스틱 간판만이 걸려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머리를 요란하게 퍼머한 아가씨가 앉아 있다 내게 시선을 주었다. 얼굴에 비해 너무 크게 보이는 입으로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지요?" 그녀는 나의 아래위를 기분 나쁠 정도로 훑어 보았다. "배갑손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사장님을요? 어디서 요셨지요?"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남해콘도에서 왔어요. 사업 관계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남해 콘도요?" 그녀는 다시 내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 표정이었다. "잠깐만 거기 앉으십시오. 사장님께 여쭈어 드리지요." 그녀는 재빨리 사장실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말했다. "들어가 보세요." 내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배갑손 사장은 와이셔츠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아주 거만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나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장을자라고 합니다." "남해콘도서 왔다구?" 그는 내 모습과 직업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조금 앉아도 될까요?" 나는 그의 질문을 무시하면서 말했다. "아, 예 앉아요. 아가씨......" 그제야 그는 탁자에서 다리를 내리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나는 한자리 건너 소파에 앉았다. "실은 콘도회사 같은 데 다니는 것이 아니구요......" 내가 말을 시작하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죽은 허정화의 친구랍니다." "응? 허정화라니?" 그의 얼굴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예. 허정화 말입니다." "허정화가 누구요? 혹시......" "예. 맞습니다. 조철구 변호사님댁 가정교사를 하던......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면 양윤임 여사의 딸인 조희숙 양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얼마 전에 피살된 허정화 있죠. 그녀와 같이 그 집 가정교사를 하던 장을자라고 합니다.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죠?" 나는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똑똑하게 되었나 하고 내심 놀라워했다. "그래요? 그 집과는 좀 아는 사이긴 하지만...... 내가 뭐 그 집 가정교사까지야 알 턱이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오셨는지...... 장을조라고 하셨나?" "을잡니다." 나는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했다가 하는 그의 당황스런 태도를 보며 분명히 허정화를 잘 아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정화한테서 사장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생긴 분인가 하고......" "정화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구? 그래 뭐라고 했어요?" 이젠 그의 얼굴색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낭패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양 여사와 사업을 벌인다고 자랑을 했다더군요. 무슨 사업을 하시나요?" "응? 그런 이야기를? 사업이야 뭐...... 양 여사가 부동산에 손을 좀 대었기에 자문을 해줄 정도였지. 뭐 대단한 건 아닌데...... 아니 미스 허가 그런 이야기를 했단 말이야?" "양 여사와는 각별한 사이인 것 같다고 했어요." "각별한 사이?" "글쎄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그런 것을 연애라고 하거든요." "뭐? 연애? 하하하. 내가 양 여사와 연애를 한다고? 하하하. 그런 소문 잘못나면 조 변호사한테 혼나요 혼나. 하하하......" 배갑손은 너털웃음을 웃긴 했으나 얼굴빛이 거의 흙빛으로 변해 갔다. "그야 뭐 정화가 농담삼아 해본 소리 아니겠어요." "그런데 미스......" "장이에요. 장을자." "음, 미스 장이 나한테 온 용건은 뭐야?" 배갑손이 정신을 가다듬은 듯 점잖게 말했다. 그때


밖에 있던 아가씨가 인삼차 두 잔을 가져왔기 때문에 잠시 말이 끊어졌다. 배갑손은 불결한 시선으로 내 몸매를 여기저기 훔쳐보고 있었다. "정화의 죽음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왔어요." 나는 따끈한 인산찻잔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말했다. "미스 허의 죽음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니까...... 혹시나 하고. 양 여사가 무척 귀여워했었거든요. 양 여사가 배 사장을 은근히 사모했듯이......" "지, 지금 큰일 날 소릴 자꾸 하는구먼...... 그래 뭘 알고 싶은 거야?" 배갑손은 양 여사 이야기만 나오면 쩔쩔매는 모습이 역력했다. "미스 허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혹시 양 여사는 한집에 있었으니까 아는 게 없나요?" "글쎄. 난 별로 들은 것이 없는데...... 미스 허는 자살을 했다고 하던데......" "정화와 양 여사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그건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누군가가 정화를 죽였다고 생각해 본 일 없어요? 어떤 두 사람이 은밀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가 그것이 들키자 입을 막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세상엔 가끔 있거든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배 사장의 표정을 살폈다. "누가 그런 은밀한 짓을 저질렀나요?"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다는......" "이봐! 아가씨!" 그때 갑자기 배갑손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는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누구한테 공갈치는 거야?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하잖아? 아가씨 정체가 도대체 뭐야? 진짜 미스 허의 친구야? 아니면 허튼 수작이나 하러 다니는 공갈꾼이야? 아 여자 공갈꾼 있다는 말 처음 들었네. 유치장 맛 보기 전에 썩 꺼질 수 없어!" 그는 벌떡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흥분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담뱃불을 붙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그가 돌변해서 펄펄 뛰는 바람에 겁이 나서 그냥 일어섰다. "실례했어요. 저는 그냥......" "빨리 꺼져!"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더욱 기세를 올렸다. 나는 도망치다시피 그 방을 나왔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와 큰길로 나섰다. 무엇인가 감추고 있는 것이 배 사장과 양 여사, 허정화 사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을자 씨, 오랜만이야?" 내가 차를 타기 위해 지하도 입구로 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추 경감이었다. "아니, 경감님." 나는 뜻밖이라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여기는 웬일이야?" "경감님이야말로......" "하하하. 우리 커피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할까? 난 미녀와 같이 마시면 커피 맛이 좋더라." 우리는 옆에 있는 지하 다방으로 내려갔다. "그래 배갑손 사장은 전부터 알고 지냈나?" 추 경감이 순진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는 나를 미행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를 미행하셨나요? 경감님은 제가 허정화를 죽인 범인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시는 거죠?" "하하하. 그건 꼭 그렇지 않습니다. 미스 장을 미행한 것이 아니라, 배갑손 사장을 지키고 있었다고 할까요." "경감님도 배 사장을요?" "허정화와 배갑손이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 경감은 수첩을 꺼내 메모한 것을 보면서 말했다. "배갑손은 허정화에게 무엇인가 약점이 잡혔거나 아니면 사업을 같이 구상했거나 한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나는 잔뜩 긴장해서 되물었다. "허정화의 통장 속에 거액의 입금이 있었는데, 그것을 조사해 보았더니 뜻밖에도 배갑손이 발행한 수표였단 말입니다." "돈이 얼마나 되었는데요?" "삼천만 원." "예?" 나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배갑손이 허정화에게 삼천만 원을 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배갑손에게 접근하고 있던 중이랍니다."


추 경감은 불 켜지지 않는 지포라이터를 계속 철거덕거렸다.

10. 동반자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는 말이 있듯이 민훈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그가 불쑥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을자 씨 살아 있었어?"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반가워했다. 약간 햇볕에 그을은 듯한 건강한 얼굴색에 화려한 티셔츠와 연두빛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그 차림새가 평소의 민훈 같지 않았다. 좋게 보면 멋을 약간 부린 서글서글한 모습이고, 좋지 않게 말하면 바람기가 서린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화사한 면모에서 문득 허정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정화와 함께 저런 화사한 모습으로 바람을 잡으러 다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를 무조건 반갑게만 맞을 수 없었다. "웬일이에요? 직장은 이제 집어치웠나요? 대낮부터 여자 집이나 찾아다니고......" 그러면서도 나는 우선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찌든 블라우스에 입고 자던 구겨진 바지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자 앞이라고 부끄럽게까지 한 내 모습이 우스웠다. "오늘 일요일이잖아요. 세월가는 줄도 모르나 보죠? 을자 씨 우리 바람쐬러 나가요. 오늘같이 화창한 날 방에만 박혀 있을 거에요?" 그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딜......" 나는 어느새 그에게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오랜만에 북한산성에 한 번 가봐요. 어때 내 아이디어?" "북한산성......?" 그렇다. 북한산성은 민훈과 나만이 아는 장소였다. 아니 북한산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서울에 얼마나 될까마는, 그곳은 우리 두 사람에게 확실히 예사일 수 없는 장소였다. 오래 전,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기 시작하고 두어 달쯤 되었을 때였다. 찌는 더위가 한창인 여름날이었다. 우리가 교외로 하룻동안 피서를 가기로 하고 마땅한 장소를 물색한 곳이 북한산성이었다.


우리들은 소풍나온 국민학교 학생들처럼 즐겁게 걸어 성벽 위까지 올라갔다. 땀이 비오듯 흘러 얼굴이 온통 물에 젖은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올라서자 멀리서 불어오는 녹색 바람이 온몸을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나는 양 팔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 시원한 바람을 한껏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마!" 그러다 발을 잘못 디뎌 성벽 위에서 기우뚱했다. "조, 조심해요." 민훈이 재빨리 나를 붙잡았다. 균형을 잃은 우리는 끌어안은 채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숲속에 팽개쳐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에 보니 나는 민훈의 품 속에 꼭 안겨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일어서려 했으나 좀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형......" 나는 그의 팔을 내 가슴에서 빼내려고 애를 썼으나 꼼짝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민훈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나를 꼭 부여잡고 있었다. "형! 민 형!"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훈이 기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 그거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인공호흡을 하면 깨어난다고 하던 체육선생 말을 생각해 냈다. 나는 잠든 듯 평온한 민훈의 코를 오른손 엄지와 인지로 꼭 쥐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찝질한 염분이 그의 입술에서 느껴졌다. "어맛!" 그때였다. 갑자기 민훈이 두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고 내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 그는 기절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몸부림을 치면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나빠요. 형!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할 수 있어요?" "하하하, 을자 씨 입술은 찔레꽃잎같이 향기롭던 걸......"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가슴이 갑자기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북한산의 허물어진 성채 너머 붉은 노을이


떠오를 때까지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왔다. 우리들의 야릇한 감정의 싹은 그때부터 트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때? 북한산......" 나는 갑자기 민훈의 얼굴이 밉게만 보이지 않았다. "또 기절한 척하려구요?" 나는 말하며 빙긋 웃었다. "잠깐 기다려요. 나 옷 좀 갈아입을 테니 밖에 나가 기다려요."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북한산성 길로 접어들었다. 나와 정화가 함께 산 엑셀을 내가 운전했다. 우리들은 엄청난 자가용의 홍수 틈에 끼여 굼벵이 걸음으로 차를 몰았다. 내가 땀을 비오듯이 흘리자 그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었다. 그의 손수건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너무 고약하여 매우 거북살스러웠으나 그의 친절을 물리칠 용기는 없었다. 우리들은 근 두 시간이나 걸려 북한산성 주차장에 도착했다. "저기 성터로 가볼까?" 우리들은 전날 넘어졌던 옛날의 그 돌성 아래로 갔다. 그리고 나란히 앉았다. "민훈 씨 정말 정화와 섬씽 없었단 말이에요?"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건 오해야. M 이 꼭 나라고 생각할 수 없잖아." "좋아요. 그 얘긴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한 가지만 물어보겠어요." 나는 불쾌한 이야기를 더 계속해서 조금이나마 전환된 내 기분을 도로 잡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꾸었다. "배갑손이라고 혹시 아세요?" "배갑손? 배중손은 아는데......" "배중손은 누구예요? 배갑손의 동생이에요?" 뜻밖이란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다. "배중손은 고려 때 장군이야. 몽고에 항거해서 싸우던 삼별초의 우두머리였지." "호호호......" 나는 어이가 없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아니고 양윤임 여사의 애인 말이에요." "양윤임 여사?" 민훈은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정화와 내가 가정교사 하던 집 사모님...... 아니 조석호 씨 어머니 말이에요." "응, 그 사모님에게 애인이 있어요?"


민훈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좌우간, 그 배갑손이란 이름 들어보았어요?" "아니오." 민훈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배갑손인지 배중손인지가 어쨌다는 겁니까?" "배갑손 씨가 허정화에게 거액을 주었는데......" "얼마나 되는데요?" "3 천만 원." "3 천만 원? 가만 있자, 그 이야기 미스 허한테서 들은 것 같은데......" "예?" 내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배갑손이 아니라 희숙이 어머니한테서 3 천만 원을 받았다고 하던데......" "정화가 양 여사에게서 3 천만 원을 받았다구요?" "응." "좀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아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석호와 미스 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한잔 하고 나오다가 맥주값을......" "뭐 나는 빼고 셋이서 한잔 했다구요? 기분 좋았겠어요. 두 남자와 한 여자라......" 나는 갑자기 비위가 상해서 비꼬아 주었다. "이야기를 들어봐요. 처음엔 나와 석호만 만났는데 미스 허가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던 겁니다." "흥, 그래서요?" "미스 허가 술값을 내겠다고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는데 시퍼런 수표가 보이지 않겠어. 그게 웬돈이냐고 석호가 묻자 양 여사에게서 얻었다고 했어요. 3 천만 원이라는 말까지." "왜 얻었대요?" "글쎄, 나는 그 말이 농담 같아서 더 묻지 않았어." "나도 모르는 일인데 참 이상하지 않아요? 추 경감은 배갑손의 3 천만 원 수표가 허정화의 통장에서 발견되었다고 했거든요." "그럼 양 여사에게서 3 천만 원을 받고 배갑손 씨에게서도 3 천만 원, 그러니까 6 천만 원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요?" "아니면 배갑손의 3 천만 원짜리 수표를 양 여사가 허정화에게 주었을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제법 그럴 듯한 추리를 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양 여사와 배갑손인가 중손인가 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정화에게 거액을 주었느냐


하는 거요." "그렇군요. 두 사람이 정화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요? 시달리다 못해 그들은 정화를......" 나와 민훈은 함께 서로를 쳐다보았다. 생각의 일치를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정화가 죽음을 당할 만큼 증오스럽게 배갑손 씨나 양 여사를 괴롭힐 그런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나는 친구를 의심하는 것이 죄스러워 변명을 했다. "하긴...... 하지만 그들 사이에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지." "돈까지 주면서 무마를 하다가 잘 안 되니까 죽인 것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몰라. 양 여사가 보통 여자가 아니란 건 나도 옛날부터 알았어요." "지금 제가 정화 살인 용의자로 쫓기고 있다는 것 민훈 씨는 아세요?" 나는 몇 번이나 망설이던 말을 해버렸다. "나도 용의자로 보는 것 같던데...... 강 형산가 뭔가 하는 촐랑대는 형사가 나한테 두 번이나 왔다가 갔거든." "그랬어요?" 나는 의심을 받는 것이 나만이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강 형사가 민훈을 쫓아다닌 것은 처음 알았다. "우리 정화와 양 여사, 그리고 배갑손의 관계를 좀더 밝혀내요. 양 여사와 배갑손 관계는 내가 목격했지만......" 나는 희숙이네 안방 침실에서늬 동물적 남녀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목격했다구요? 무엇을 봤어요?" 민훈이 다잡아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만 의심받지 말고 양 여사를 우선 만나 좀 캐보는 게 어때요?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어요." 내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좋아요. 을자 씨 말대로 합시다. 그대신 오늘은 을자 씨가 콤파니언이 되는 겁니다." 민훈이 슬그머니 내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나는 뿌리치지 않고 그냥 걸었다. "콤파니언이라뇨?" "응. 영어로 동반자라는 뜻인데......" "나도 그건 알아요." "근데, 일본에 출장 갔을 때 본 것인데, 일본 여성


중에는 콤파니언이라는 직업이 있어요." "......?" "남자들끼리 상담(商談)을 하거나,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 기생 대신 참석해 주는 여자들인데......" "그게 게이샤 같은 것 아녜요?" "게이샤는 아니고...... 뭐라고 할까.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기 위해 있는 것인데......" "같이 술도 따라 마시고 지저분하게 몸도 이곳저곳 만지고 음담패설이나 내뱉고 그러는 거에요?" 나는 이죽거려 주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말 상대만 해줄 뿐입니다. 손목을 잡아서도 안 됩니다. 콤파니언을 거느린 회사들이 있는데...... 말하자면 일종의 용역회사지요. 거기에 등록된 아가씨들은 회합의 주문을 받고 참석합니다. 돈은 물론 시간당 얼마씩입니다. 호스티스나 게이샤와는 전혀 다른 건전한 직업여성들이라고 할까요." "그거 재미있는 직업이군요. 좋아요. 오늘은 제가 콤파니언 노릇을 해드릴 테니까 우선 희숙이네 집부터 가요." "거긴 왜?" "양 여사를 만나서 좀 캐보아야겠어요. 무엇 때문에 정화에게 3 천만 원씩이나 주었는지 말이에요." 민훈이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을자가 언제부터 그렇게 변했느냐는 시선이 역력했다.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따지기 싫어서 손해보고 마는 성미의 내가 양 여사에게 무엇을 캐러 간다니까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걱정 말아요. 나도 이제 남은 건 악뿐이랍니다. 좋은 친구가 죽음을 당한 것도 슬프고 억울한 일인데 친구를 죽인 혐의까지 덮어쓰고 있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나는 민훈을 끌다시피 하고 희숙이네 집으로 갔다. 마침 조석호가 집에 있었기 때문에 민훈은 그 방으로 가고 나는 안방 거실에서 양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약간 상기된 얼굴에 자기 체중을 못 이겨 하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앉았다기보다는 반은 누운 자세였다. 홈드레스 밑으로 넙적하고 허연 허벅지가 다 나와 있었다. 쌍꺼풀 진 눈과 진하고 곡선이 유연한 눈썹은 그녀의 매력이기도 했다. 젊을 때는 꽤 미인이란 소리를 들었음직했다. 그래서 형제간에 목숨을 걸고 다투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숙의 아버지와 삼촌, 즉 형제가 양 여사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다 삼촌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을자 양 오랜만이야.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양 여사는 내가 들어가도 자세를 바꿔 앉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싹 무시하는 태도로 마지못해 인삿말만 했다. "정화 생각도 잊을겸 해서 종로게 나가 보았어요." "종로?" "예. 거인 부동산인가 거인 개발인가 하는......" "응? 거인 부동산?" 나는 양 여사의 놀라는 모습을 흘깃 보면서 마음 속으로는 악마의 웃음을 흘렸다. 너무 고소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변해가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곧 뒤따랐다. "혹시 사모님도 아세요? 배 사장이라고. 배갑손 사장이라던가......" 나는 놀라는 양 여사가 신통해서 더욱 깊이 비수를 찔러보았다. 곧 비명이 나올 것을 기대했다. "이봐. 지금 네년이 나한테 공갈치는 거냐?" 너무나 뜻밖이었다. 양 여사가 시뻘겋게 변해 가지고 천장이 무너질 듯이 고함을 질렀다. 나는 뜻밖의 반응에 겁이 더럭 났다. "너 아주 못쓰겠구나! 우리 희숙이 공부 좀 가르친다고 오냐오냐 하고 출입하게 해주었더니 나한테 공갈을 쳐? 그래 배갑손 사장이 어쨌단 말이냐? 배갑손 사장이 나하고 간통이라도 했단 말이냐? 뭐야 도대체. 무슨 공갈 협박을 하려고 하는 거야? 다리 몽댕이가 꺾이기 전에 거기 앉아 이야기 좀 해봐라! 어물어물 했다간 봐라! 거기 앉지 못해!" 나는 양 여사가 너무나 호통을 치는 바람에 엉거주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짱도 저쯤 되어야 남편 따돌리고 대낮에 불장난 저지르는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 나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차분하고 분명한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사모님! 사모님은 지금 제 얘기도 들어보지 않고 화부터 내시는데요......" 그때야 양 여사는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자기가 너무 일찍 넘겨 짚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무슨 이야긴지 들어보자." "제가 우연한 일로 배갑손 사장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분이 사모님 말씀을 하더군요. 그냥 아는 사이라고......"


"그럼 장 양은 어떻게 배 사장을 만나게 되었나?" 양 여사가 반신반의하는 투로 물었다. "그건...... 죽은 정화의 재산 중에 배갑손 사장 이름으로 된 수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추적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뭐야? 그럼 장 양이 형사 노릇도 하고 있는 거야?" "호호호 사모님도. 제가 무슨 형사 노릇을 합니까? 그냥 그 회사를 알아서 찾아가 본 것이지요." "그래 배 사장이 왜 수표를 주었다고 하던가?" 양 여사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모른다고 딱 잡아떼던 걸요. 아마도 그 수표는 다른 사람 손을 거쳐서 정화에게 간 것 같아요." 나는 말하면서 양 여사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녀는 아주 태연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 수표에 대해 형사들도 알고 있나?" "잘 모르겠지만 아마 모를 겁니다." 나는 넌지시 거짓말을 했다. "글쎄 누가 그 수표를 주었는지 잘 모르겠구먼. 뭐 이상할 거야 없잖아. 누구 수표든 바꿔줄 수도 있는 것이고......" "하긴 그래요. 하지만 정화는 3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가지고 있을 아이는 아니에요. 어쨌든 밝혀지겠지요 뭐. 그건 그렇고, 배 사장님은 사모님과 동업하는 일이 있다고 하던데 잘 돼 가나요?" "동업? 응, 뭐 동업이랄 것까진 없지만 내가 땅 사는 일을 좀 도와 주었을 뿐이야." "배 사장님도 정화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우리 집에 가끔 왔으니까......" "요즘은 안 오세요? 전에 이 방에서 잠옷바람으로 있는 걸 본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안해야 될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쏟아놓은 물이 되었다. "뭐야? 장 양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양 여사가 갑자기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본 것이 아니고 정화가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어요. 거짓말 했는지도 모르죠 뭐.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세요." 나는 이것이 바로 병주고 약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년이 뒈지면 곱게 갈 일이지, 무슨 거짓부렁까지 부렸단 말야. 그년 생사람 잡겠네. 그럼 내가 배 사장하고 더러운 일이라도 저질렀단 말이야?"


그녀는 계속해서 펄펄 뛰었다. 어쩌면 저렇게 시치미를 잘 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양 여사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대강 그 자리를 수습하고 민훈과 함께 나와 버렸다. "그래 뭐 좀 알아냈어?" 자동차에 나란히 앉은 그가 기어를 잡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3 천만 원을 양 여사가 준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배갑손이 주었단 말이요? 배갑손과 미스 허가......"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요. 정화는 그럴 아이가 아니란 말이에요."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나타내지는 않았다. 내가 그의 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였다. "잠깐 들어왔다가 가요. 남자가 끓여 주는 커피 맛도 괜찮을 텐데......" 그 말을 듣자 나는 갑자기 그의 방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서 나는 그의 하숙방에 들어섰다. 방 안에서 야릇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남자 혼자 있는 방의 독특한 냄새였다. 방 안은 비교적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웃목에 아무렇게나 쌓인 책들을 빼고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의 빈틈없고 성실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앉아요." 그는 내 손목을 잡고 방석에 앉도록 권했다. 내가 방석에 앉는 순간 그는 갑자기 나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아니......" 내가 무어라고 말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는 아주 거칠게 나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아 버렸다. 그리고 그는 억센 손을 갑자기 내 치마 밑으로 집어넣어 팬티를 파고 들어왔다. "왜 이래요. 이거 놔욧!" 나는 그의 부랑배 같은 행동에 놀라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무리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떠밀어 냈다. 도저히 민훈과는 어울리지 않는 갑작스럽고 거친 행동이 나를 당혹하게 했던 것이다.

11. 과거


"정말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나는 은밀한 곳으로 밀고 들어오는 침입자, 민훈의 손을 온힘을 다해 끄집어 내었다. 그리고 깔린 몸을 뒤척여 필사적으로 빼낸 뒤 발딱 일어나 앉았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내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가 꼭 일을 저질르고 싶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을자는 번번히 나를 민망하게 만드는군. 언제 함락되려는 거야?" 민훈은 몹시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함락된다구요? 남녀 관계가 꼭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성립되어야 하나요?" 나는 끌어내려진 팬티를 다시 추스려 올려 입기 위해 일어서면서 말했다. "을자가 그렇게 만드는 것 아니야? 지금......" "천만에. 먼저 공격과 수비의 관계를 만든 것은 민훈 씨예요. 틈만 있으면 여자를 공격하려는 본능적인 인간이 남자 아닐까요?" 나는 내가 하는 말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고 내뱉었다. "우린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이렇게 싸우면서 지내는 거야?"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결혼식이라뇨?" 갑자기 나온 그의 말에 나는 다소 충격을 받으면서 반문했다. "우리 결혼할 것 아니야?" 이번에는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민훈은 나를 장차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뿌듯한 자부심 같은 것이 심장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민훈과 정화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건 잊어버렸다. "정말 우리가 결혼하는 거예요? 민훈 씨 마음대로? 흥!" 나는 갑자기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이 나오고 만 것이다. "난 을자 씨와 꼭 결혼하고 말걸." 민훈은 침착하게 담배를 피워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그런 시시한 논쟁 그만두고 어디 카페에나 가요."


나는 백을 집어들고 앞장서 방문을 나왔다. 말없이 한참을 걷고서야 우리는 골목 모퉁이에 있는 카페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민훈 씨, 정화와 배 사장 사이에 섬씽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섬씽?" 나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추악한 불륜관계......" 나는 옛날에 정화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불결한 상상을 해보았다. 배갑손 사장이 혹시 정화가 말하던 그 치사한 유부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민훈이 위스키를 탄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옛날에 정화한테서 아주 치사한 남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남자가 꼭 배갑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치사한 남자를 본 적 있어?" "내가 보았으면 배갑손인지 아닌지 왜 모르겠어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어요?" 내가 쏘아붙였다. "하긴 그렇네. 그래 그 치사한 남자 이야기 좀 해봐요." 나는 몇 년 전에 들은 허정화의 기막힌 경험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상상만 해도 억울하고 분해서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남자들은 치사하다 못해 도적 떼들이라니까......" "아냐, 적어도 이 민훈만은 도적 떼가 아니라니까...... 자 그 이야기 좀 해봐요. 뭐가 그렇게 치사한 일인지......" "좋아요. 이 커피 마신 뒤 들려줄께요." 나는 커피를 숭늉 마시듯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허정화가 순결을 잃은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허정화는 고등학교 2 학년 때 실습을 나갔다. 그녀는 집안 형편상 대학 가는 것을 포기하고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었다. 그 학교는 2 학년 때부터 학생들을 은행이나 큰 기업체에 실습을 내보냈다. 실습을 보내는 목적은 일을 익힌다기보다 그쪽과 인연을 맺어 떠맡기다시피 취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화는 재벌인 기업그룹 계열사인 건설회사 경리부에 실습배정이 되었다. 정화가 그 회사에


실습생으로 나간 지 일주일만에 경리부장이라는 사람이 부정사고로 그만두고 경리담당 이사라는 사람이 부장직을 임시로 겸무하게 되었다. 배 이사라는 사람은 사내 여직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여사원마다 배 이사를 평가하는 견해가 달랐다. "생기긴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꼴값 하느라고 여자 호리는 귀신이래. 정화야 너도 배 이사 조심해야 한다." 경리부의 고참 여사원이 어느 날 정화에게 들려준 정보였다. "배 이사 참 멋진 분이야. 생기기도 핸섬하게 생겼지만, 우리 회사에서 제일가는 페미니스트거든. 젠틀맨이구...... 그런데 사모님과 사이가 나빠 늘 저렇게 우울하신가 봐. 하지만 우수에 젖은 듯한 그 얼굴이 더 매력적이야. 호호호." 어떤 여직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 베스트 드레서를 뽑는다면 그야 단연 배 이사 아니겠어." "배 이사는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래?" 하여튼 배 이사에 관한 이야기는 하루종일 경리부의 화제가 되었었다. 정화가 보기에 젊게 보면 40 대 후반, 늙게 보면 50 대 초반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여사원들은 워낙 점잔을 빼서 그렇지 실은 40 대 초반일 거라는 평도 했다. 그러한 배 이사는 특히 허정화를 귀여워했다. 가끔 불러서 점심도 사주고, 용돈을 주기도 했다. 정화는 그를 아저씨처럼 삼촌처럼 따랐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습이 두 달쯤 되어갈 무렵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정화가 지나가는 말로 배 이사에게 청을 넣어 보았다. "이사님. 우리 망년회 안해요?" "망년회?" 배 이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정화를 쳐다보았다. 망년회란 말이 몹시 반가웠던 모양이다. "망년회 해야지. 어때 오늘 밤 우리 둘이서 먼저 하는 게......" 그는 부드러운 웃음을 그치지 않고 넌지시 말했다. "둘이서요? 좋아요. 그럼 이사님과 제가 망년회 리허설을 하는 겁니다." 정화는 별 생각 없이 떠들었다. "좋아. 그럼 이따가 6 시 정각 퇴근 시간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내 기다릴 테니까......"


"어머, 그렇게 할 것까지 뭐 있어요. 여기서 이사님과 함께 차타러 나갈래요. 퇴근 때." 그러자 배 이사는 아주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 모가지 날릴 일 있어? 이따가 딴 사람 눈에 안 뜨이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정화는 그 순간 무엇인가 쌈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6 시 정각, 정화가 컴컴한 지하 주차장으로 혼자 내려갔을 때 배 이사가 갑자기 튀어나와 정화의 소매를 끌어 자기 차에 태웠다. 마치 누가 보면 큰일 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런 그가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정화는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거리의 차량홍수 속에 묻힌 뒤에야 물었다. "아주 근사한데 가서 우선 맥주로 목을 축인 뒤에...... 정화 노래 좋아하지? 클래식." "예." 배 이사와 정화는 대학로에 있는 클래식과 맥주의 집인 하이델베르그에 마주 앉았다. "자 한잔 정도는 숙녀의 예절이거든." 배 이사는 정화의 컵에 거품이 넘치도록 맥주를 따랐다. "자 쭈욱 들이켜요. 이건 술이 아니고 유럽 사람들 음료수야." 정화는 난생 처음 맥주를 입에 대보았다. 찝질하고 썼다. 그러나 숙녀의 예의라는 바람에 억지로 한잔을 마셨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흐느끼듯 귓전을 스쳤다. 가슴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하하. 소질 있는데. 장차 희망 있겠어. 자, 한잔 더......" 배 이사는 다시 맥주를 거품이 넘치도록 따라주었다. "이사님. 이젠 못 마시겠어요." 정화가 용기를 내어 거절을 했다. "무슨 소리야. 이 좋은 밤에 마시지 않다니. 저 차이코프스키의 흐느낌이 안 들려? 이럴 때 마셔서 가슴을 달래지 않는다면 어찌 지성인이라고 하겠어? 자 지성인답게, 세련되게......" 정화는 잔을 들지 않으면 무식한 여자가 될 것 같아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연거푸 넉 잔을 마시고 나자 정신이 몽롱했다.


드볼작 곡이 유행가로 들리기도 했다. "아이 답답해, 우리 밖으로 나갈까?" 맥주 세 병을 비운 뒤 배 이사가 제의를 했다. "밖은 춥잖아요. 그냥 여기가 좋은데요." 정화는 정말 그곳이 좋았다. 분위기 있는 은은한 조명과 발바닥의 촉감을 자극하는 나무바닥, 멋진 음악,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회사 최고의 멋쟁이 사나이를 바라보는 몽롱한 의식이 좋았다. "배 이사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정화는 술기운이 오르자 약간 대담해졌다. 두 뺨이 발그레 상기되고 눈은 꿈꾸듯 깊어졌다. 그녀는 청바지 입은 다리를 포개어 꼬고 앉았다. 당돌하고 깜찍해 보였다. "응, 뭐든지, 에브리싱 오우케이." 배 이사는 정화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어, 사모님 예뻐요? 이사님만큼 멋쟁이예요?" "사모님이라......" 그는 갑자기 긴장한 듯 한참 아무 말도 않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과 나 사이는 이미 남극바다야. 다 식었어. 별거한 지가 언젠데...... 우린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는 한숨까지 쉬면서 말했다. "예? 별거를 한다구요? 그럼 그 소문이 정말이군요." 정화는 공연히 생기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우리 그런 따분한 이야기 집어치우고 밖으로 나가자. 아이 답답해서 미치겠군 이거......" "이사님 답답하시다구요? 여기가 얼마나 아늑하고 로맨틱해요. 그런데 답답하다구요?" 정화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화야. 제발 좀 일어나. 우리 찬바람 쌩쌩 부는 거리로 드라이브 좀 하자. 이곳은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어." 배 이사가 너무 간곡하게 말하는 바람에 정화는 마지못해 그를 따라나와 자동차에 탔다. "자 그럼 한강으로 나가 한바퀴 돌자." 그는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아 서울의 겨울밤을 가로질러 한강변을 타고 송파로 갔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김연자의 뽕짝 노래를 들으며 정화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갑자기 졸음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 정화야 자면 안 돼. 그래 가지고 집에 가면 어머니에게 혼나. 정신 차려."


배 이사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는 정화의 뺨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정화가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고 있을 때 차는 어느 장급 여관 앞에 멎었다. "자 내려요." 배 이사가 정화를 부축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정화가 눈을 비비며 건물을 쳐다보았다. 빨간 온천 마크의 네온이 빛났다. 여관이란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났다. "이사님 여긴 왜요?" "응.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자. 너 그래 가지고 집에 들어갔다간 혼날 것 아냐. 여기서 한 시간쯤 쉬어. 술깬 뒤 데려다 주마." 그는 정화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화는 남자와 함께 이런 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본능 같은 것이 살아나 그의 오금을 붙들었다. "저 그냥 집에 갈래요." "무슨 소리야. 내 시키는 대로 해." 정화는 하는 수 없이 여관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조그만 방 머리맡에 초라한 물주전자와 휴지통이 놓여 있었다. 어쩐지 불결하고 두렵게 보였다. 배 이사는 이부자리를 척척 펴며 "정화야 여기 편안히 누워 한두 시간만 자거라." 했다. 그러나 정화는 남자와 단둘이 밀폐된 방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겁이 덜컥 났다. 벽 쪽에 쪼그리고 앉아 꼼짝도 안했다. "나는 이쪽 끝에서 잠깐 잘 테니 요 위에서 눈 좀 붙여." 배 이사가 간곡히 권하는 바람에 정화는 요 위에 얌전하게 누웠다. 배 이사는 조금 떨어져 누웠다. "답답할 테니 옷 단추 좀 풀고 누워 있어." 배 이사가 이번엔 엉뚱한 걱정을 했다. "술 먹은 뒤 꼭 끼는 옷을 입고 있으면 술이 깨지 않는 법이야. 단추 좀 풀어. 배가 조이면 술이 안 깬단 말야." 그 말에는 정화도 모른 척했다. 그러나 배 이사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거 청바지 단추 좀 풀어." 그래도 정화가 꼼짝 안하자 벌떡 일어나 쫓아온 그가 정화의 청바지 단추를 풀려고 했다. "어마 이사님!" 정화가 깜짝 놀라 자기 배에 닿은 배 이사의 두 손을 꽉 쥐었다.


"왜 이렇게 답답하게 하고 있어. 이것 풀어." 배 이사는 억센 힘으로 정화의 청바지 단추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자크까지 주욱 풀었다. "어때? 시원하지?" 정화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달랐다. 정화는 아무 말 않고 다시 바지 자크를 올리고 단추를 잠갔다. "아니, 이러면 답답해서 술이......" 그는 다시 정화의 바지 허리춤을 쥐고 늘어졌다. 청바지를 두고 이상한 공방전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서로 엉긴 자세가 되고 숨결이 높아졌다. 아무리 순진한 정화라도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실갱이를 하던 정화는 문득 그대로 맡겨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야릇한 호기심이 치솟기도 하고, 이런 남자와 사랑을 해보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화가 맥이 풀린 듯 몸을 맡겨 두자 그는 익숙한 솜씨로 단번에 정화의 청바지를 벗겨 버렸다. 하얀 팬티 조각이 아슬아슬한 곳만을 겨우 가렸을 뿐 눈부신 하체가 이글거리는 사나이의 목전에 전개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단추 풀린 정화의 블라우스를 쉽게 벗겨냈다. 부끄러운 나신이 모두 드러났다. 그는 한동안 황홀한 듯 정화의 나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자신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거친 숨결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손이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정화를 끌어안았다. 정화는 최후의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뿌리쳤다. 다리를 오무리고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싼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님, 저 책임질 수 있어요?" 정화는 꼭 이런 다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생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책임? 그래 책임지고 말고......" 그는 너무 쉽게 대답하고는 정화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겨 던졌다.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경험하면서 정화는 눈물을 흘렸다. 호기심 반, 술기운 반으로 순결을 바친 정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뒤로 정화는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배 이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것이 여자의 길인가 하는 환멸과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멋진 남자를 사랑한다는 생각에 흐뭇하고 즐거운 기분이 가슴에 살아나기도 했다. 몇 달을 그렇게 지내자 배 이사는 차차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주 짜증을 내고 정화를 피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정이 가까울 무렵 정화는 참다못해 배 이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이었다. "여보세요. 삼성동입니다." 전화기 속에서 나온 여자의 음성은 무척이나 명랑하고 아름다웠다. "저......" "말씀하세요." "저어...... 거기가 배 이사님 댁인가요?" "그런데요. 어디라고 여쭐까요?" "저어 여기 회사인데......" "녜, 잠깐 기다리세요. 여보오......" 여보라니? 그러면 그 행복에 겨운 듯한 목소리의 여자가 배 이사의 아내란 말인가? 별거한다는 아내가...... 정화는 갑자기 정신이 멍했다. "누구야?" 수화기에서 퉁명스런 배 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정환데요. 허정화......" "뭐야? 너 정신이 있니 없니? 지금이 몇 신데 남의 집에 함부로 전화질을 하고 난리야!" 청천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예?" "전화 끊어!" 그리고는 정말 끊겨버렸다. 정화는 그 자리에 푹 주저앉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을 다 바친 그가 이렇게 돌변할 수 있단 말인가? 행복에 젖은 듯한 여자의 목소리와 화난 배 이사의 목소리가 양쪽 귀에서 그를 괴롭혔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하고 허무해 그녀는 며칠간을 굶으면서 울었다. 그녀는 그 길로 실습생활을 집어치웠다. "나쁜 놈 같으니, 그래 그 배 이사란 자가 배갑손일지 모른다는 거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민훈은 갑자기 흥분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야.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하지만 아닐 거예요. 배갑손은 한 여자가 순결을 바칠


만큼 멋진 사나이는 아니거든요." "모르는 소리. 사랑에 눈이 어두우면 모개도 복숭아로 보이는 법입니다." "호호호......" 나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화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군요." 나는 민훈의 비꼬는 듯한 말이 거슬렸다. "정화가 어떻게 행동했단 말이에요?" "그럼 정화가 단정한 행동만 했단 말인가요? 조석호 조윤호 사이를 왔다 갔다 한 것이 정상적인 일이란 말이요?" "그래서 민훈 씨도 곁들여 즐겼나요?" 나는 공연히 화가 나서 트집을 부렸다. 아니, 그게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거기에 내가 왜 끼어듭니까?" "누가 알아요. 정화의 그 허리춤, 민훈 씨도 붙들고 늘어졌는지......" "정말 말 다했어요?" 민훈이 벌떡 일어섰다.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농담도 못해요?" 나도 벌떡 일어서며 마주 소리쳤다. 민훈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히죽 웃었다. "아이 답답해, 우리 밖으로 나가지." 민훈은 내 말도 들어보지 않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렇다면 배갑손이 정화한테 3 천만 원을 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묵묵히 걷던 민훈이 말을 걸었다. "배갑손이 배 이사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시달리다 못한 배갑손은......" "시달리다뇨?"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군. 몇 년 만에 예기치 않은 집에서 정화와 부딪친 배갑손이 얼마나 당황했겠어? 정화를 죽일 만한 동기가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민훈의 추리에 수긍이 가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집 안에서 정화를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나도 장을자 책임지면 안 될까?" 민훈이 슬그머니 내 허리를 껴안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이구, 이 엉큼......" 나는 피식 웃었다.


12. 복수 "을자 씨, 나 조윤호요." 그것은 뜻밖의 전화였다. 나는 샤워를 하던 중이어서 전화를 받고 처음엔 조금 당황했다. 그것이 전화이기는 하지만 벗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예, 저예요. 근데 윤호 씨가 웬일이세요?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나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나의 나신을 바라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동그스름하고 하얀 어개마 퍽 매혹적이었다. 간격이 거의 붙다시피한 두 유방이 여자 눈에도 탐스러웠다. 공중 목욕탕에 가보아도 자기만큼 양쪽 유방이 가깝게 붙은 여자는 별로 없었다. 처음에는 유방끼리 너무 붙어 혹시 나만 이렇게 생긴 기형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외국 영화에 나오는 일류 배우들도 자기처럼 생긴 유방이 더러 있어 안심했다. 또래의 다른 여자들보다 볼륨이 있어 보이는 유방이 나는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처녀 유방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보이고 자랑할 수도 없어 자신만 아는 비밀로 치부해 두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난 뒤나 목욕탕 탈의실에서 보여지는 나신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이러다가 나르시스 전설 같은 비극이나 생기지 않을까 하고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저 바쁘지 않으면, 시간 좀 내주십시오." 조윤호의 목소리는 의외로 사무적이었다. "무슨 일인지 용건부터 말씀하셔야 시간을 내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어요?" 나는 조금은 가시 돋친 말투로 대꾸해 주었다. "꼭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학교 끝나면 좀 만납시다." "지금 전화로 물어보면 안 될까요?" "심각한 일이니까요. 학교 몇 시에 끝나나요?" "오늘 수업 없어요. 꼭 만나야 한다면 오늘 오후 2 시께 히야신스 호텔 커피숍으로 나오세요. 시간 엄수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을 걸요." "좋아요. 그때 봐요." 조윤호는 딸깍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인삿말도 없었다. 나는 공연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할 일 없이 방에 누워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두 시께 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다. 이것저것 옷을


걸쳐보며 거울 앞에 섰다가 결국 물방울 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 막상 시간을 십여 분이나 어긴 것은 나였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미안해요." 나는 미리 와 앉아 있는 윤호를 향해 약간 웃어 보였다. 탁자 위 재떨이에는 담배 꽁초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핼쓱한 얼굴에 초조한 빛을 띤 채 그는 여전히 담배를 물고 있었다. "뭐 시원한 것 한잔 하시지요." 그는 내 의견도 묻지 않고 주스 한잔을 시켰다. "무슨 일 있어요? 희숙이는 잘 있구요?" 나는 근 한 달 동안 희숙이 공부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이 나서 물었다. "잘 있지 못하답니다." 조윤호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누가요?" "누군 누구예요. 희숙이 말입니다." "희숙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나는 심상찮은 윤호의 표정을 읽으면서 되물었다. "희숙이가 없어졌답니다." "예? 없어지다니요?"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걸 물어보려고 미스 장을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우리 희숙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까?" "아니, 자세하게 얘길 해보세요. 희숙이가 언제 어떻게 없어졌단 말입니까?" "그저께 아침 전화를 받고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양 여사 말로는......" 조윤호는 자기 어머니를 늘 양 여사라고 불렀다. "양 여사 말로는 미스 장의 전화 같았다고 합니다." "예? 제가 전화를 했다구요? 통활 하긴 했어요. 희숙이가 걸었어요. 이틀 전에......" "그럼 틀림없군요. 그래 희숙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조윤호는 갑자기 눈빛을 빛내며 나에게 다그치다시피 물었다. "희숙이 그날 내게 전화해서 느닷없이 서울 대학은 꼭 가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 어떻게 했어요?" "그뿐이었어요. 별 이상한 질문도 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은 네 마음이라고 대답했죠." "만나자고 한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양 여사는 미스 장이 희숙이를


데려다 감추어 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기가 막혔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집에서 허정화가 죽었으니까 그 복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는지......" "그럼 윤호 씨도 내가 희숙이를 감추어 두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양 여사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어요. 나는 다만 을자 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을 뿐입니다." "뭐예요?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나는 더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잘못 짚으셨습니다. 경찰서나 가 보시죠?" 나는 탁자 위에 꽂혀 있는 계산서를 뽑아 들고 찬바람이 날 듯한 매정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걸어나왔다. "아니 저, 을자 씨......" 조윤호는 커피숍 손님들이 다 듣고 쳐다볼 정도의 큰 소리로 나를 불렀으나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어 나와서는 재빨리 차값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집으로 돌아와 누워 있었으나 분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차를 거칠게 몰아 희숙이네 집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마침 양 여사는 집에 있었다. 나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인사 아닌 인사를 했다. "너 마침 잘 왔군. 이리 좀 올라오너라!" 양윤임 여사도 나를 잘 만났다는 태도였다. 나는 거실 소파에 거칠게 앉으며 핸드백을 팽개치듯 탁자 위에 놓았다. "너 우리 희숙이 빨리 내놓아라! 순순히 말할 때 듣는 게 좋아!"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희숙이를 내가 불러냈다고 생각하세요." 나도 지지 않으려고 목청을 돋구었다. "너하고 전화한 뒤 곧장 나갔단 말야. 을자 언니 을자 언니 하면서 전화하는 것을 내 이 귀로 똑똑히 들었단 말야." "나 원! 전화했다고 내가 불러낸 건가요?"


"여러 말 할 것 없어. 따끔한 맛 보기 전에 희숙이 있는 곳을 대란 말이야!" "말도 아닌 소리 그만하세요. 정 이러시면 무고죄로 고소하겠어요." 나는 참고 있던 말을 뱉었다. "뭐야?" 그녀는 나를 잠시 노려보다가 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년 이것 보통년이 아니구나! 무고죄로 고소를 한다고? 이년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 좀 보여 주마." 이성을 잃고 있던 양 여사는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내게 덤벼 들었다.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선제 공격을 당한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머리털이 빠지는 듯 아파 비명만 질렀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으나 비명만 나올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년 어디 바른말 불 때까지 살아 있는지 두고 보자!" 양 여사는 어디서 그렇게 힘이 솟았는지 내 머리채를 끌고 거실 구석으로 갔다. "뭐야?" 그때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마음대로 돌릴 수 없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없었으나 그것이 배갑손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배 사장! 이년 닥달 좀 해요. 희숙이 있는 곳을 댈 때까지 혼 좀 내야 해요." "응! 그 맹랑한 계집애군. 어디 나한테 맡겨요." 배갑손을 내 팔을 비틀어 뒤로 꺾었다. "아얏!" 나는 아파 눈물이 나왔다. "아프다고? 어디 더 아픈 맛 좀 보여주겠다." 양 여사가 내 머리채를 놓았다. 그녀의 두 손에는 내 머리가 뽑히어 한 주먹이나 쥐어져 있었다. 나는 꺾인 팔이 아파 그것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골방으로 데리고 가요!" 양 여사가 배갑손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아파요. 이거 놓고 말해요. 말로 하잔 말예요." 내가 악을 썼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젠가 내가 그들의 대낮 정사를 지켜보고 있던 방 속의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제발 이 팔 좀 놓고 얘기해요." "이게 아직 맛을 덜 봤군!"


그는 내가 말을 할 적마다 한 번씩 팔을 더 비틀었다. "엄마!"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고함과 울음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여기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구원해 줄 사람 없어! 희숙이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부지 못하거나 하게 될걸!" 배갑손의 협박 소리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 병신 되기 전에 희숙이 있는 곳을 대!" 양 여사가 계속 윽박질렀다. 나는 아파서 정말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몰라요. 정말 모른단 말이에요. 나를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요?" 나는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었다. "이년이 맛을 더 봐야겠어요." 양 여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배갑손은 왼팔로 나의 목을 감았다. 팔을 뒤튼 것보다 더 죽을 지경이었다. "음...... 음......" 나는 숨이 막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자, 숨 끊어지기 전에 빨리 희숙이 있는 곳을 대!" 배갑손이 내 귓전에 대고 말했다. 내 머리가 그의 가슴에 뒤로 안긴 채 목이 조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렸다. "크윽!" 나는 마침내 숨이 넘어 가는 것 같아 사지를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대란 말야!" 그러나 댈 것이 없었다. 내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허우적거리자 그는 약간 팔을 늦추어 주었다. "지독한 년이군. 순순히 입을 열 것 같지 않아." 배갑손의 생각이 더 무섭게 변해 가는 것 같았다. "정말 전 몰라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사모님 좀 살려 주세요." 나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고 말 것 같았다. "이게 맛을 덜 봤군! 자 이년 옷을 전부 벗겨요." 배갑손이 다시 내 목을 조이며 양 여사에게 말했다. 양윤임은 꼼짝 못하고 있는 나에게 덤벼들어 원피스의 단추를 풀었다. 곧이어 허리에 맨 장식용 허리끈을 푼 뒤에 어깨로부터 원피스를 뱀 허물


벗기듯이 벗겨 내려갔다. 나는 금방 속옷 차림이 되었다. "이것도 벗겨내요." 배갑손은 왼손으로 내 목을 조인 채 오른손으로 슈미즈를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그것도 금방 벗겨버렸다. 나는 손바닥만한 팬티와 브래지어만 남은 채 완전히 알몸이 되어 배갑손에게 목을 조인 채 안겨 있는 꼴이 되었다. "흥! 몸 하나는 미끈하게 잘 빠졌군." 양 여사가 나의 나신을 바라보며 빈정댔다. "거 담뱃불 좀 붙여 줘요." 배갑손은 나신이 된 나의 허벅지며 아랫배를 슬슬 만지면서 말했다. 담배까지 피우면서 나에게 수모를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목이 조여 숨이 넘어가는 것에 비하면 나신이 놀림감 되는 것쯤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하고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를 허정화처럼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갑손은 양 여사가 붙여준 담배를 입에 문 뒤 우악스럽게 내 브래지어를 뜯어서 집어던졌다. 내가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 두 유방이 멋모르고 봉긋하게 솟았다. "흠! 제법 쓸 만하군!" 배갑손은 내 젖무덤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야 나는 목조이는 것보다 더한 수모감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부끄럽고 분한 마음 같은 것은 싹 달아났다. "이 예쁜 유방에 담뱃불 자국을 낸다면 조금은 후회가 되겠지!" 그때야 나는 그가 담뱃불을 붙여 달라는 이유를 알았다. "안 돼요! 살려줘요." 나는 발가벗은 채 다시 발버둥을 쳤다. "희숙이 있는 곳만 대면 괜찮아요. 이 젖통도 벌집이 되진 않을 것이고...... 머리 나쁜 애가 젖통만 크다고 하더니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군! 머리가 조금만 돌아간다면 고생 덜해도 되겠는데......" "으악!" 배갑손의 담뱃불이 내 가슴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외마디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빨리 대지 않으면 이곳만 망가지는 게 아니야. 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겠는데 희숙이는 어디 있지?"


"빨리 대. 그러면 온전히 보내 줄 테니깐." 침대에 걸터앉아 잔인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양 여사가 독촉했다. "......"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없군!" 배갑손의 담뱃불이 가슴으로 점점 다가왔다. 정말 살이 타는 것 같은 공포가 전신을 휩쓸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나는 무턱대고 소리만 질렀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배갑손의 왼팔이 더욱 나를 조여왔다. "윽!"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발가벗긴 채 담뱃불 고문 위협을 받던 내 몸을 만져보았다. 옷이 입혀져 있었다. 유방을 만져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제야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순간 나는 갑자기 섬ㅉ한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그 흉악한 배갑손이 내 몸을 어떻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밖으로 나왔다. "놀러 왔구먼!" 누군가가 말을 걸어 쳐다보았다. 이 집 주인 조철구 변호사였다. 그는 내가 집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잔잔한 눈매에 양쪽 볼이 약간 처진 점잖은 중년 신사 스타일이었다. 조 변호사가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자 양 여사가 나타났다. 나는 겁이 나서 몸을 움츠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내가 고문을 받지 않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스 장, 일어났구먼! 이리 좀 와 봐요."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전 다그치러 갈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안방에 들어서자 그는 서랍을 뒤적이더니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미스 장 미안해요. 그 배 사장이 뭘 잘못 알고 그만......" "예? 잘못 알다뇨?"


내가 의아해서 물었다. "글쎄 희숙이가 나타났지 뭐유." "예? 희숙이가 나타나요?" 나는 놀라 고함을 질렀다. "응! 글쎄 고것이 공부에 회의를 느꼈다면서 나쁜 친구하고 셋이서 부산으로 마산으로 쏘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니까 나타났지 뭐야. 고삼병이라는 것 있잖우? 희숙인 고 삼도 아니지만......" 양 여사는 민망하고 미안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일을 가지고 남을 의심해서 죽음 직전까지 몰고가는 고문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태도가 금방 이렇게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 배 사장이 한 짓은 잊어버려요. 아이가 없어지니까 제정신이 아니었던가 봐." 그럼 배갑손 사장만 나를 괴롭히고 자기는 말렸단 말인가. 이해가 안 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더욱 분통이 터졌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학비에 보태쓰구...... 그리고 배 사장 일은 싹 잊어버려요, 응? 미스 장." 그녀는 나에게 봉투를 쥐어 주고 등을 다독이며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나는 그녀가 쥐어준 돈 봉투를 방바닥에 던져 버렸다. 두께로 보아 백만 원은 됨직한 만 원짜리 현금이었다. "정말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 남기고 안방을 나왔다. 현관으로 뛰어나와 신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에 기대 서서 한참 울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한참 울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인간적인 그들에게 인간의 마음을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준 돈을 무엇 때문에 팽개치고 왔단 말인가. 그것을 가지고 가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로 현관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올라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양 여사가 겁에 질린 듯 슬그머니 일어섰다. 나를 윽박지를 때의 거칠고 무섭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아까 그 돈봉투 도로 주세요."


"응? 그것? 그래, 그래." 그녀는 부리나케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돈봉투를 가지고 왔다. "자......" 나는 그녀의 손에서 돈을 빼앗다시피 받아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복수야! 복수. 사람 같지 않은 짐승들한테는 짐승의 마음으로 대해 주어야 하는 거야."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자동차의 악셀을 밟았다. 그러나 나의 그 중얼거림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떳떳치 못한 내 행동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말이란 것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며칠 동안 착잡한 심정으로 집에서 뒹굴었다. 민훈을 만나 모든 걸 이야기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돈을 받았다는 떳떳치 못한 생각이 들자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데려다가 고문을 하면 큰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것들을 경찰에 고발해서 혼을 내야 해. 돈? 돈이야 돌려주면 될 것 아냐! 아니지 안 받았다고 딱 잡아 떼면 될 것 아닌가.'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우선 강 형사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물론 돈 받은 이야기는 쏙 빼버렸다. 강 형사는 크게 흥분했다. "경찰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얘깁니다. 갑시다, 내 이것들을 혼을 내고야 말 테니까." 우리는 양 여사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강 형사가 준엄하게 그들의 죄를 따졌다. 그러나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지금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요? 나는 우리 미스 장을 딸처럼 귀엽게 보고 있다우. 그런데 담뱃불이니 고문이니 하는 게 다 무슨 말이유?" 사람이 이렇게 시치미를 뗄 수 있단 말인가?

13. 또다른 검은 손 허정화를 죽인 범인을 두고 나의 의심은 점점 희숙의 집안에 쏠렸다. 어쩐지 그 집만이 가지고 있는 듯한 음울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류층 집안의 단란한 가족 같은 모습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무엇인가 개운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는 희숙 아버지대의 형제간 비극에서 내려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정화가 죽은 것은 어쩌면 그 음울한 분위기 뒤의 무슨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마저 스쳤다. 희숙이 발작하듯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타나는 일도 정상적인 사람의 짓은 아니었다. 밖에서는 명사로 통하지만 집안에서는 수수께끼의 가장인 조철구 변호사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양윤임 여사는 더욱 그러했다. 상류사회의 극성 사모님처럼 보이기도 하고, 타락한 중년 부인의 표본 같기도 했다. 어떤 때는 당당한 여류 사업가로 보이다가도 약한 어머니의 일면이 나타나기도 했다. 무엇인가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조석호, 조윤호 형제는 더욱 그랬다. 특히 조윤호의 행동은 집안 사람 같지 않아 나를 의아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성적이고 차분한 젊은이로 보이다가도 갑자기 모자라는 부잣집 장남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런 이상한 측면은 조석호가 더했다.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오만함이며 저돌적인 행동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그러나 행동이나 말보다는 오히려 순진한 면이 엿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타입의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내 곁에 있을 때는 꼭 고슴도치가 무릎에 앉은 것 같은 불안함이 항상 나를 긴장시켰다. 그 조석호가 뜻밖에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꼭 허정화를 죽인 범인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마침 집에 있었군요. 지금 뭘하시오? 막 샤워하고 들어와 팬티 입는 중이오?" 거침없이 저질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렸다. "밤중에 웬일이세요? 그간 별일 없으셨어요?" 나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요? 별일 많지요. 숙녀를 처녀 감별 해주느라 바빴어요. 근데 을자 씨는 왜 요즘 내 눈에 안 띄어요?" "용건이 뭐예요. 간단히 말씀하세요. 나 지금 바쁘걸랑요." "아따, 껴안아 줄 남편도 없는데 초저녁에 바쁘긴


뭐가 바빠요. 그건 그렇고 내일 우리 좀 만나야겠어요." "예?" 그는 마치 자기 아내에게 명령하는 듯한 무식한 남편 같은 말투를 썼다. "내일 용인 별장에 갑시다. 아침 열 시쯤 만나 슬슬 가다가 고속도로변서 점심 먹고 우리 아버지 별장에서 하루 놀다 오지 뭐. 요즘 그곳 뜰의 단풍나무도 꽤 볼 만할 꺼고......" "내일은 좀......" 나는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나 말이 미처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좀은 뭐가 좀입니까? 그럼 내일 10 시 롯데월드 커피숍에서 만나요. 시간 지키고...... 을자 씨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섹시한 옷으로 입고 나오시요. 그럼 잘 자요."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딱 끊어버렸다. 언제나처럼 자신 만만한 폭군이었다. 내가 자기에게 무엇이기에 이런 무레한 전화를 한단 말인가? 나는 은근히 화가 났으나 다시 전화를 걸어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허정화의 죽음에 관한 무엇인가를 캐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딴 별장에 단둘이 있게 되면 그 무뢰한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의 거친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나를 곱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민훈을 떠올렸다. 민훈으로부터 친구인 조석호와 언젠가 용인 별장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금세 민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훈 씨 내일 뭐해?" 나는 그의 목소리를 확인하자 대뜸 질문부터 했다. "나? 글쎄...... 근데 밤중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 없으면 용인 좀 와 줘." "용인? 거긴 왜? 우리 속담에 살아서는 서울,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엉뚱한 얘기하지 말고...... 용인 조석호 씨네 별장 알지?" "별장? 응, 언젠가 가본 일 있어. 용인이 아니고 양지라는 데야." "내일 그곳에 좀 가보아 줘." "그곳은 왜?"


"그런 건 묻지 말고. 오후 2 시쯤 거기로 좀 가보란 말야." "아, 무엇 때문에 거길 가야 하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뚱딴지 같은 요구였다. "어쨌든 그곳에 가야 돼. 이유는 묻지 말고 2 시 정각이야." "나 참!" "갈 꺼야 안 갈 꺼야?" 나는 일부러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알았어. 갈께......:" 이튿날 나는 약속시간보다 15 분쯤 늦게 차를 몰고 갔다. "여기야 여기!" 내가 왁자한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조석호는 여러 사람이 다 쳐다볼 정도의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거리낌없는 버릇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조금 창피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와 마주 앉았다. "빨리 가요. 내 차로 가는 겁니다."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섰다. "그 똥차보다는 내 차가 몇백 배 나을걸." "듣기 싫어요." 나는 그의 큰 소리를 무시하고 내 차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우리가 용인 읍내에 들어가 점심으로 냉면과 갈비를 먹고 난 뒤 양지 별장에 도착한 것은 1 시 10 분께였다. 가파른 산 중턱 졸졸 흐르는 개울 옆에 별장이 있었다. 붉은 벽돌과 파란 기와가 퍽 유치한 컬러의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었으나 내부는 아주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육중하게 보이는 커튼을 젖혔다. 제법 도타운 가을 햇살이 거실을 비추었다. 조석호는 웃옷을 벗어서 아무 데나 집어던지고는 오디오 스위치를 넣었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조석호의 모습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이었다. "저 혹시 허민정이라고 알아?" 조석호는 간이 홈바에 가서 양주와 글래스 두 개를 가져와 따르며 물었다. "허민정이라구요?" 나는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거 왜 죽은 허정화 언니 말야, 시집간 언니......" "녜, 알아요. 정화 언니 말이죠."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냥 언니라고만 했지 이름이 민정인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하하하, 웃겼어." 조석호는 위스키 두어 잔을 스트레이트로 삼키며 혼자 웃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그 여자 남편이 우리과 선배거든. 체육과 나와서 지금 중학교 선생 노릇 하고 있는 박팽수라는 사람이야. 이름이 특이해서 학교 후배들이 박팽년 박팽년 했지." "그런데요?" "허민정이 느닷없이 날 찾아왔어." 조석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자기가 그 여자보다 절대적인 우위에서 만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왜요?" "글쎄 나하고 술 한잔 하자나. 좋지. 아무리 선배의 이거이긴 하지만......" 그는 이번엔 새끼손가락을 펴면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조석호는 덥지도 않은데 셔츠까지 벗어 버려 상체의 벌건 맨살이 그냥 드러났다. 나는 그의 잘 다져진 근육질 상체를 흘금 훔쳐보고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보고 있기가 민망스러웠다. "어이 시원해. 을자 씨도 좀 벗어요.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단추 꼭꼭 잠그고 있을 것 없잖아요." "가장 불량한 남자가 보고 있는데 보는 사람이 없다뇨. 내 걱정은 말고 얘기나 계속해 봐요."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창 쪽으로 걸어갔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1 시 30 분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허민정 씨를 만나 주었지요. 동생 허정화도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허민정 씨야말로 정말 빼어난 미인이더군요. 미인일뿐 아니라 갑자기 정이 팍 드는 그런 모습, 뭐랄까, 고상한 말로 해서 끼가 있는 여자였어요. 우리는 금방 친해져서 레스토랑을 나온 뒤 맥주집으로 또 발걸음이 가지런히 옮겨졌어요." "그래서요?" 조석호가 슬그머니 일어서서 내 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도로 소파로 가서 앉으면서 물었다. 오디오의 전원 교향곡은 벌써 끝나 있었다. "그래서 진탕 마셨지. 하지만 허민정을 데리고 호텔에 갈 필요는 없었어. 왜냐하면 그녀가 내 선배의 아내라는 것보다는 처녀가 아닌 것이 뻔하니까 감정할


필요가 없었거든. 우리는 호텔 대신 디까룸으로 갔지. 신나게 한판 붙었어. 발바닥에 불이 났지. 이렇게 말야."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아 끌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거머리 같은 손을 어깨에서 떼어내 뿌리쳤다. "그래 미인계를 쓴 그 언니의 목적이 무엇이었나요?" 나는 다시 창 쪽으로 걸었다. "목적. 바로 그것이 있었지. 죽은 허정화의 비밀을 캐려고 한 것이었어." "예? 정화의 비밀을 캐려고 하다뇨?" 나는 귀가 솔깃해 돌아서서 조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울퉁불퉁한 근육질 상체는 정말 볼 만했다. "허정화가 거래하던 은행이 어느 은행이냐, 정화한테 은행 거래에 관한 이야기 들은 것 없느냐 뭐 그런 것이었어요." "정화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나 그런 것을 알려는 것이었나요?" "글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보단 뭔가 허정화가 감추어 놓은 것을 찾아내려는 것 같았어. 그게 뭔지 모르지만......" 조석호는 또 슬그머니 내 허리를 껴안았다. 나는 이제 더 피해 다닐 수도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었다. 그는 얼른 자기 입술을 내 얼굴에 들이밀며 왼손으로 내 목을 껴안았다. 벗은 상체에서 역겨운 남자 냄새가 비위를 거슬렸다. "우리 점잖게 얘기해요." 내가 그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이 경고했다. "여긴 우리 둘뿐이야. 무슨 짓을 해도 비밀이 보장되거든." 그는 내 경고를 무시하고 더욱 세게 목을 죄어왔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으로 그의 어깨를 물어버렸다. "으악!" 그는 덩지 값도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호호호." 나는 그 모양이 우습기도 했지만 통쾌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아이고 어깨야. 피 나는 것 아닌가?" 그는 물린 어깨를 매만지며 엄살을 부렸다. "강아지만 사람을 무는 줄 알았는데 여자도 남자를


무는군." 조석호는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이왕 버린 몸 이대로 물러설 수야 없지 않겠어? 을자 씨!" 조석호는 정말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위스키 병을 들고 나팔을 불듯 꿀꺽꿀꺽 술을 마셨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시계를 보았다. 거의 2 시가 되었다. 그러나 구세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허민정 씨 부부가 찾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들과 허정화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조석호의 관심을 돌려 놓을 양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 건 나도 몰라! 아니 그건 이담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리 멋진 시간을 만들자구." 그는 반 병 정도 남았던 위스키를 다 마신 뒤 나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눈동자가 고정된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무서운 공포를 느꼈다. 이번에는 정말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 분명히 장을자를 감정해 주지. 처녀인지 아닌지 말야. 준비는 되었겠지?" 그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 있다 무겁게 발을 떼어놓았다. "야만스런 짓은 싫어요!" 나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고함을 질렀다. 전번 배갑손이 나에게 행한 횡포보다도 더 무서운 모멸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오늘 일만 잘 되면 우리는 결혼할 수도 있단 말야. 너는 허정화하고는 달라. 허정화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 남자가 정화를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온몸을 엄습해 왔다. "석호 씨, 이러지 말아요. 제발!" 나는 여차하면 꿇어 앉아 빌고 싶은 심정으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호!" 그때였다. 예정된 기적은 일어났다. 문이 드르럭 열리며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별장 안에 울렸다. 민훈이었다. 그는 정말 때를 맞추어 나타나 주었다. 백마를 탄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어? 훈이 너 웬일이야? 야, 너 참 묘한 시간에 나타났군! 얼른 들어와."


조석호는 실망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금방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금까지 한 짓이 순전히 장난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자 슬그머니 화가 났다. 어쨌든 우리 세 사람은 오후 한때를 어색하게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나는 허정화의 언니 부부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혹시 그들이 허정화의 죽음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정화의 주변을 다시 체크해 보았다. 정화는 자취방을 얻어 놓고 있었지만 실제로 생활하기는 희숙이네 2 층방에서 했기 때문에 그의 일상 용품은 두 군데로 갈라져 있었다. 몇 권 되지 않는 책과 옷가지 그리고 트렁크, 핸드백 몇 개, 구두 몇 켤레 등 보잘것없는 살림을 남겼다. 당시 그의 모든 유품들은 경찰에서 체크를 다했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무엇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3 천만 원의 거액을 배갑손으로 추측되는 인물로부터 받은 것이 뒤에 확인된 정도였다. 나는 평소에 안면이 있는 정화의 언니 허민정을 찾아갔다. 그간의 인사를 나눈 뒤 내가 머뭇머뭇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을자는 우리 정화와 친했으니까 정화가 하던 일은 뭐든지 알고 있겠구나." 그녀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개인의 깊은 비밀이야 알 수 없겠지만 나한테 숨긴 건 별로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랬을 거야." 그녀는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며 내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정화가 평소에 어느 은행을 거래했는지 모르니?" 그녀는 이렇게 말해 놓고는 속이 들여다보인다고 생각했던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뭐 재산을 찾아내자는 야비한 생각 때문에 묻는 건 아니야. 학생이 돈을 예금했으면 얼마나 했겠니, 다만......" "상업은행 중부지점 통장을 갖고 있었는데요. 가끔 나하고 같이 가서 돈을 찾기도 했거든요." 나는 선뜻 가르쳐 주었다. "응, 그 통장은 시골 어머님이 가지고 계셔. 그 은행 말고 거래한 곳은 모르니?" "글쎄요." "혹시 귀중한 물건이나 서류 같은 것을 어디


맡겼다든지 하는 이야기 들은 것 없니?" "글쎄요." "기억을 잘 더듬어 보아." 허민정은 초조해져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걔가 간첩 암호문이라도 가지고 있었나요?" 나는 심술이 뒤틀려 쏘아주었다. 핏줄을 나누었다는 형제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지는 않고 재산 따위나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괘씸했기 때문이다. "아냐. 사람 일은 알 수 없지 않아. 혹시나 해서......" 그녀는 나의 일격에 분명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 부부가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헤어져 나오며 여러 가지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평소 정화가 그들이 탐내는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것이 정화의 유품 중에 없자 어딘가 감추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거래했던 은행을 자꾸 묻는 것일까? 그렇다. 그 비밀스런 것을 은행 금고에 맡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에 맡긴다면 돈이 상식적인 대상물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그것은 꼭 돈이라고만 할 수 없었다. 돈 아닌 것도 은행에 예금(?)이 되는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귀중품이나 문서 따위를 은행에 맡기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김종희가 생각났다. 급하게 차를 몰고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 주차하기가 힘들어 한참을 헤매다 겨우 지하 3 층에 차를 세우고 은행 지하다방에 종희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반가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만나는 셈이었다. 그녀는 곧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함박 웃음을 띠며 말했다. 방송국 PD 로 일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면서 그 남자를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동안 그녀의 너스레를 들어준 뒤 나는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은행에는 말야, 돈 말고도 예금이 되는 거지?" "돈 말고 예금? 음, 뭘 맡길려고 그러는 거지? 그건


예금이 아니라 예수라고 하는데......" "예수?" "응, 그리스도란 뜻이 아니고...... 물건이나 문서 같은 것을 돈을 받고 보관해 주기도 하지. 그것을 보호예수라고 해." "절차가 예금하는 것과 어떻게 달라?" "응. 돈 아닌 것을 은행에 맡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조금 전에 얘기한 보호예수 제도이고 또 하나는 대여금고라고 해서 은행 지하에 있는 개인 금고의 열쇠를 빌려주는 일이야. 왜 지하철역이나 서울역 같은 곳에 물건 넣어두는 박스가 있잖아. 그것 비슷한 것이야." "그럼 금고를 빌렸을 때는 키를 가지고 있겠구나. 그 키를 잃어 버린다든지, 당사자가 갑자기 죽었다든지 하면 야단이겠군." "그야 예금통장 분실했을 때와 같은 절차로 다시 찾을 수 있어. 보호예수를 했을 경우엔 보호예수증서라는 통장 같은 것이 있거든. 그것과 도장을 가지고 와서 본인이나 가족이 확인되면 찾을 수 있어." "어떤 예금자가 갑자기 죽었을 때 어느 은행에 보호예수나 대여금고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이상한 질문도 한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냥 상식으로 알아두려고......" "그건 은행에 가서 확인해야 할걸.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는 나의 진의를 몰라 난처한 듯 말했다.

14. 죽은 자의 일기 나는 분명 허정화가 무엇인가 비밀스런 것을 남기고 죽었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갔다. 그것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인 허민정 언니 부부 외에도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 여사라든지 배갑손 사장한테서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우선 정화가 남긴 유품 중에서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자동차 서랍에 넣어두었던 그녀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나는 일기장을 들고 와서 샅샅이 뒤져 보았다. 책표지와 뒷장 등에 써놓은 낙서도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별다른 단서는 찾지 못했다. 우정·사랑·섹스 같은 단어가 의미없이 나열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잠시 책을 덮어 놓고 책 표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문득 표지에 2 라는 숫자가 쓰인 것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C.H.H2 라는 글자가 일기장 표지에 쓰여 있었다. C.H.H 라는 것은 허정화라는 이름의 약자임이 분명했지만 2 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렇다. 이 일기장은 2 권째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일기장 제 1 권을 찾아보면 거기에 무엇인가가 씌어져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찾자면 정화가 남기고 간 모든 책과 유품을 다 뒤져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언니 허민정의 말로는 통장을 시골 어머니에게 보냈다고 했다. 일기장도 혹시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시골 정화의 어머니에게 가서 유품을 다 보자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더구나 지금껏 그것을 불태우거나 버리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나는 문득 강 형사를 생각해 냈다. 그가 허정화의 유품 리스트와 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시경으로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동차가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고물이라서 이제 고장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자동차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엔진 밑에 기름 같은 것이 흥건히 흘러 있는 것을 찾아냈다. 어디엔가 고장이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아 타고 시경으로 갔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 길에서 삼사십 분이나 헤맸다. 러시아워도 아닌데 웬 택시 잡기가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그것도 간신히 합승을 해서 여기저기 들러 시경 앞에 닿았다. 시경에서도 강 형사를 만나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을내라, 용건이 무엇이냐, 미리 연락을 했느냐, 더구나 두 사람이 어떤 관계냐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면회 신청을 해야만 했다. 나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냐고 묻는 담당자의 말에 비위가 거슬려 그냥 나와 버렸다. 그는 마치 내가 강 형사의 애인이 아니냐는 눈으로 나의 전신을 이리저리 훔쳐보았던 것이다. 나는 시경 건물 옆에 있는 지하 다방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에 준 명함을 핸드백에서 꺼내 쉽게 그와 전화 연결을 할 수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강 형사가 지하 다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점퍼 차림에 후줄근한 바지와 더부룩한 머리가 노총각 티를 일부러 낸 것같이 보였다. 그는 환한 웃음을 담았다. "이거 을자 씨가 웬일이십니까? 이 노총각을 다 찾아오고......"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나는 공손이 일어나 인사를 하고 다시 앉았다. "물론입니다. 을자 씨가 무사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웃으면서 한 강 형사의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심코 던진 말이 무슨 뜻인가를 금방 알았다. "아직도 나를 감시하고 계시군요. 하지만 그런 헛수고 그만 두세요. 나는 도망갈 곳도 없고 도망치지도 않아요. 진짜 범인이 잡힐 때까지 얌전히 있을 테니까 그런 시간 낭비 그만 하시지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그냥 형식입니다. 장을자 씨를 혐의자로 보지는 않습니다." 강 형사는 당황해서 두 손을 이리저리 저으며 변명을 했다. "괜찮아요. 강 형사님도 명령받아서 하는 일 아녜요?" "제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내 얼굴은 을자 씨가...... 아니 우리 딴 얘기 합시다." 강 형사는 또 실수를 했다. 그는 내가 얼굴을 아니까 다른 형사가 나를 감시한다는 말을 꺼내다가 곧 말머리를 바꾸었던 것이다. "차 가지고 오셨습니까?" 강 형사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뇨. 그 고물 이젠 폐차나 시켜야겠어요. 시동이 걸리지 않지 뭐예요." "후후후, 제 차도 그렇습니다. 시동이 안 걸릴 때는 발로 엔진을 서너 번 걷어차 보시죠. 그러면 녀석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드는지 시동이 덜컥 걸리거든요." "하지만 난 발길질이 약해서......" 하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 고물차가 효잡니다. 택시나 지하철 타려고 해보세요. 출근 때 지하철에 가면 오징어 공장이 여기구나, 내가 어떻게 저 속에서 살아남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택시 이거 고스톱판에서 스리고하기보다 더 힘듭니다. 하늘에 별따는 것이 뭐 어려운 일입니까? 빈택시 한번 잡으면


장원급제한 겁니다. 장원......" 강 형사는 온갖 비유를 다 가져다대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 그래요. 우리 나라처럼 택시 타기 힘든 나라도 없을 거예요.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 우스개 소리로 택시 시리즈라는 것이 있는데 아세요?" 나는 강 형사의 마음을 더 누그러뜨려 목적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부드러운 화제를 꺼냈다. "참새 시리즈, 개구리 시리즈, 식인종 시리즈는 들어도 택시 시리즈는 못 들었는데요......" 강 형사는 몹시 흥미가 있는 듯 입술에 침을 묻히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리즈 1 번. 어떤 사람이 택시를 타고 가서 목적지에 닿았을 때 요금이 천 원이 나왔대요." "그래서요?" "그런데 그 손님은 3 백 원만 내고 내리더래요. 그래서 운전사가 왜 3 백 원밖에 안 내느냐고 따지니까, 여보슈 내가 탈 때 보니 벌서 미터기에 7 백 원이 나와 있던 걸요." "하하하......" 강 형사가 손뼉까지 치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어떻게나 크게 웃었던지 카운터에 있던 레지가 눈이 둥그래서 달려왔다. "강 형사님 무슨 일이에요?" 이야기를 들은 레지가 따라 웃으며 돌아섰다. "시리즈 제 2 번. 이번에는 좀 멀리 가는 손님이었나 봐요. 택시 미터기에 2 천 원이 나왔걸랑요." "옳지, 이번에는 1 천 3 백 원만 내겠군 그래." 강 형사가 앞질렀지만 그건 바보 같은 추리였다. "1 천 원만 딱 냈지요. 그랬더니 아니 여보슈 왜 택시값을 반만 내슈 하고 따지지 않았겠어요. 그랬더니 손님이 이것 봐요, 지금 여기까지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 함께 타고 왔잖아요. 반반씩 아녜요?" "우하하하, 와하하......" 이번에도 강 형사는 차 테이블을 치면서 웃었다. 그러나 레지가 뛰어 오지는 않았다. "그래 시리즈 3 번은 뭡니까?"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고 난 강 형사가 재촉했다. "강 형사님, 내가 묻는 것 이번엔 대답 좀 해주세요."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꺼냈다. "예. 뭡니까?" 그는 국가 기밀이라도 말해 줄 듯한 표정이었다. "저어 허정화 말인데요?"


"......" "걔가 남긴 유품 목록을 그때 작성하셨죠. 내가 본 것 같은데요......" 강 형사는 금방 웃음을 거두고 양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을 생각할 때 하는 버릇 같았다. "예. 그랬어요. 리스트를 만들었죠." "그거 좀 보여줄 수 없습니까?" 내 말이 떨어지자 그는 몹시 놀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안 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왜 그래요? 내가 뭐 강 형사님과 결혼이라도 해달라고 했나요?" "예? 저하고요?" "호호호. 그건 농담이구요. 어때요? 보여줄 수 있지요?" "그보다, 조금 전에 한 말 농담 아니면 안 되나요?" "아이구 강 형사님도. 난 아직 학생이에요." "학생은 연애하면 안 되나 뭐......" 그는 히죽 웃었다. 좀 겸연쩍은 모양이었다. "근데 왜 그걸 보여 달라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아니 또 있었어요? 나 말고......" "그럼요. 양윤임 여사와 배갑손이라는 사람......" "예? 사모님과 배 사장이 그랬단 말입니까?" 나는 너무 놀랐다. 정화의 언니 외에도 그것을 노리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허정화가 무엇을 숨기고 있었습니까? 을짜 씨는 알 테니까 좀 얘기해 보세요." 강 형사가 말을 빨리 할 때는 나를 을짜라고 발음했다. "나도 몰라요. 정화의 언니와 형부가 있는데......" "허민정 씨 말이죠." "알고 계시군요. 그 민정 언니가 날 찾아와서 이상한 걸 물었어요." "이상한 것이라뇨? 무얼 물었습니까?" 강 형사는 바싹 긴장한 모양을 했다. "정화가 어느 은행에 거래했느냐고 자꾸 물었어요." "음......" 강형사는 다시 양미간을 찡그리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허정화가 뭔가를 가지고 있었던 건 틀림없는 것 같아. 그게 무엇이었을까?" 강 형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그 리스트 중에 일기장이라든가, 용도를 알


수 없는 열쇠라든가, 보호예수통장 같은 것 없었나요?" 내가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그렇게 자세하게 적어 놓질 않았어요.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의 사진과 목록만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보호증명 뭐라고 하셨죠? 정화 씨가 예수를 믿었나요?" "그게 아니고 보호예수라고 은행에 물건을 맡겼을 때 받는 통장 말이에요." "하하하, 난 또...... 그런 건 못 본 것 같아요. 좌우간 내가 그 '수사메모장'을 가지고 올 테니까 차 한잔 더 마시며 기다리세요."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일어서서 나갔다. 그는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별게 없어요. 피묻은 옷가지, 트렁크, 책보따리, 예금통장 5 개, 타이프 라이터, 핸드백...... 뭐 그런 평범한 것들인데요." 강 형사가 수사메모장이라는 노트를 넘겨보였다. "형사님들은 이런 걸 다 작성하나요?" "아닙니다. 이건 나만이 쓰는 수사 방법의 하나죠."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았으나 특별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여기 통장 다섯 개라고 했는데 어느 은행인지는 기록 안 했어요?" "그건 해서 뭣합니까?"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정화가 혹시 그 무엇을 은행에 맡기지 않았을까요?" "글쎄......" "왜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찾고 있는지 짐작이 안 가요?" "나는 오늘 을자 씨 얘기를 듣고야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지금부터 수사 초점을 거기에 맞추어 보겠습니다." 강 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천장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여름날 뭉게구름처럼 많은 양의 연기가 퍼져 올라갔다. "정화 유품들은 다 어디 두었는지 기억납니까?" 강 형사가 물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마 모두 시골 어머니에게 가 있지 않을까요? 아니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모두 불태워 버렸는지도 모르구요." 나는 허민정 언니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민정 언니는 시골에 가서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았는지도 모른다. "어때요. 그곳에 같이......" "맞았어. 우리......" 나와 강 형사는 동시에 말이 나왔다.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그럼 어디 가서 간단히 점심 때우고 갑시다." 강 형사가 서둘러 일어섰다. "고물이지만 제 차가 나을 거예요." 강 형사가 앞서 걸었다. 우리는 명동 입구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허름한 경양식 집에서 샌드위치 하나씩을 먹었다. 지독히 맛이 없어 나는 소스만 잔뜩 발라 그 맛으로 겨우 하나를 해치웠다. "자, 그럼 출발합시다." 우리는 시경 뒷마당에 세워둔 강 형사의 차에 올라 탔다. 빽빽하게 들어선 차 중에 강 형사의 차는 금방 표시가 났다. 여기저기 쥐어박히어 만신창인데다 세차를 하지 않아 볼 모양이 없었다. 자동차들 중에도 거지가 있다면 강 형사 차가 바로 거지 차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근 한 시간이나 걸려 서울을 벗어나 수원으로 가는 국도에 들어섰다. "왜 고속도로로 안 가고 이 길로 들어섰어요?" 나는 강 형사의 긴장을 풀어줄 양으로 말을 걸었다. 그는 마치 백미터 단거리 선수가 웅크리고 앉아 출발 총소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긴장해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운전대를 꼭 잡고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운전을 했다. 그 모습이 어떻게나 진지한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고속도로 가면 돈내야 하잖아요. 하하하...... 그건 농담이고 이 길이 훨씬 좋아요. 위험하지도 않고." 강 형사는 보기보다 간이 작고 매사를 안전제일주의로 처리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덜렁덜렁하고 성미 급한 말을 자주 하지만 그 뒷면에는 이런 꼼꼼한 모습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 가본 길이 아니라서...... 한두 시간 걸릴걸요. 평택군 북청면이라고 했지요?" 밖은 이제 단풍이 한창 어우러져 있었다. 벼들도 거의 베어지고 몇 군데만 깎다 만 아이들 머리처럼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시골은 역시 가을이 좋은 것 같아요." "그렇지. 먹을 것도 많고......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홍시하며......" "아이구. 시골 가을 풍경 하면 좀 낭만스러운 것을 연상해야지, 겨우 먹을 것이나 챙겨요? 호호호." "아니 한라산도 식후경 아닙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한라산은 왜요?" "금강산은 갈 수 없으니까 식후경이 될 수 없지요." 강 형사의 굳은 표정이 좀 풀어졌다. 그러나 앞을 응시하는 고개는 그대로 빳빳했다. "강 선생님 연애하던 얘기 좀 해봐요." 나는 그의 굳은 목을 풀게 하려고 말을 걸었다. "연애? 하하하. 나 같은 형사 나부랭이하고 누가 연애합니까?" "형사면 형사지 나부랭이는 뭐예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계속했다. "꼭 한번 있었지요." "누군데요?" "여자하고요." "아니 그럼 남자가 남자하고도 연애하나요?" "뭐 그렇게 미인은 아니지만 꽤 귀엽게 생긴 여자였어요." "지금은 어떻게 됐나요?" "그때 내가 경찰서 계단을 급히 뛰어오르다가 그만 넘어졌죠. 어느 시골 경찰서 갔을 때인데...... 계단을 내려 오다가 발에 뭐가 걸려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지요." "뭐가 걸렸어요?" "여자 핸드백이었어요. 어떤 아가씨가 경찰서 계단에 퍼질러 앉아 있었어요. 끈이 긴 핸드백을 단속하지 않아 멀찌감치 떨어져 구르다가 내 발에 걸렸지요. 나는 정강이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겨우 일어나 앉았지요. 그런데 아가씨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멀거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자, 그때야 정신이 든 듯 쫓아와서 나를 부축하더군요. 그리고......" 그 아가씨는 강 형사를 부축하면서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하더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만......" "왜 그렇게 정신이 없어요." 강 형사는 통증을 참으며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귀엽게 생긴 얼굴에 당황과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서무 서너 살쯤 된 것 같았다. "난 이제 망했어요." 그녀는 경찰서에 하소연을 하러 왔으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앞일이 막막해서 그냥 주저앉아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새마을 공장에 경리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푼푼이 모은 돈으로 의정부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샀는데 그것이 알고 보니 주인이 두 명이나 있는 집이었다.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몽땅 날리고 홀어머니와 갈 곳이 없게 된 사정이었다. 그녀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하소연을 했으나 아무도 나서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경찰서에 와서 호소했으나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아가씨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난 강 형사는 아픈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섰다. "이런 나쁜 놈들이 있나. 어디 내가 도와줄 테니 염려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강 형사는 그 아가씨를 앞세우고 다니면서 근 2 주일이 걸려 그 사기꾼으로부터 돈을 다 받아주었다. 두 남녀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2 주일씩이나 함께 다니다 보면 서로 정이 들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아무런 바람도 없이 순전히 의협심에서 남을 구해 준 일은 상대방을 감격케 하고도 남았다. 두 사람은 그 뒤 여러 차례 같이 만나 식사도 하고 영화 구경도 다녔다. 강 형사는 난생 처음으로 그를 생각해 주는 사람을 만나 무척 행복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맞대 놓고 결혼하자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통속적인 말은 한번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눈만 마주쳐도 흐뭇했었다. "그런데 왜 결혼하지 않았어요." 나는 강 형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불쑥 질문부터 했다. "그런데, 서로 좋아하긴 했지만 길이 서로 달랐어요." 강 형사는 조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데 길이 하나뿐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녀는 똑똑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새마을 봉제공장의 노조위원장이었습니다. 단단히 의식화된 여성 꾼이었지요."


"꾼이라뇨? 그건 야비한 말이에요." 내가 듣기 거북해서 쏘아주었다. "하여튼, 그 아가씨는 나보다는 그녀 나름대로의 정의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헤어지셨군요." "헤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도망쳤지요. 처음엔 그녀의 과격한 생각을 좀 고쳐보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우리 민족을 착취하는 나라라든가 군부 독재가 이룩한 지금 정권은 처벌받아야 된다든가......" "됐어요. 그 얘긴 그만하시고, 그래 그 아가씨 지금은 뭘해요?" "전혀 소식을 모릅니다. 아마 시집 가서 잘 살겠지요. 그런 건 한때의 열병 아니겠습니까?" 강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쓸쓸히 웃었다. 우리는 두어 시간 걸려 북청에 도착했다.

15. 이상한 숫자 농사를 짓고 있다는 허정화네 집을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문이 없는 흙담 집이었다. 담 밑에는 코스모스 몇 송이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계십니까?" 강 형사가 앞장 서 들어갔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섰다. 갑자기 집안에서 섬뜩한 느낌이 새어나왔다. 텅빈 마당에는 삽살개 한 마리가 졸다 깜짝 놀란 듯 눈을 말끄러미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삽살개는 짖지도 않고 꼬리를 감춘 채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을 쳤다. "실례합니다!" 강 형사가 좀더 큰 소리로 말했으나 집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사람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앉아서 기다리려다 옆집으로 가보았다. "정화 어머니 말입니까? 평택 병원에 갔을걸요. 원 세상에 그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요?" 이웃집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뜻모를 말을 지껄였다. "날벼락이라뇨?" 내가 성큼 나서며 물었다. "아니 그럼 그걸 모르고 오셨단 말입니까?"


"영문을 좀 말씀해 주세요." "글쎄 그 양반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며칠 전이었죠." 노인의 설명은 정말 뜻밖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가기 바로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정화 어머니는 밭일을 보러 나가 집에 없었다. 그녀 아버지 혼자 마당에서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웬 남자가 들어 오면서 다짜고짜 정화 아버지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쳐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노인은 쓰러진 채 밭일 나갔던 정화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놀란 정화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아 경운기에 노인을 싣고 평택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답니까?" 이야기를 듣고 난 강 형사가 물었다.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허 노인같이 착한 사람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웃집 노인은 몇 번이나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평택 어느 병원에 있습니까?" 강 형사가 수첩을 꺼내며 물었다. "그게 이름이 뭐더라? 차 외과라고 하던가......" 우리는 잠깐 망설이다 그곳을 떠났다. 정화의 유류품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빈집이라, 주인 허가도 없이 집안을 뒤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근 한 시간이 걸려 평택의 차 외과를 찾아갔다. "아이구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우리 집하고 무슨 원수진 일이 있길래......" 정화 어머니는 나를 보자 어깨를 붙잡고 통곡했다. 정화가 자취하고 있을 때 서울에 가끔 왔기 때문에 나와는 친숙한 사이였다. 나도 자꾸 눈물이 나와서 정화 어머니를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얼마 동안 울고 난 정화 어머니는 얼굴을 가다듬고 강 형사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정화 아버지도 정신이 들었는지 붕대 감은 얼굴을 자꾸 치켜들며 일어나려 했다. 강 형사는 신분을 밝히고 침대 곁의 철제 의자에 앉으며 질문을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때 그놈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까?" "얼핏 보기는 보았는데 똑똑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남자라는 것만 알겠는데...... 갑자기 머리에서 불이 번쩍 나며 넘어지고 말았으니까......" "집안에서 뭐 없어진 것은 없었나요?" 강 형사가 어머니를 보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우리 집 같은 데 가져갈 게 뭐 있겠어요? 그놈이 온 집안을 들쑤셔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지 뭡니까. 글쎄 뭐가 나올 거라고......" "예? 집안을 뒤졌어요?" 내가 끼어들어 물었다. "말도 마라. 장롱이랑 광이랑 전부 뒤져 뒤집어 놓았다니까." 나는 강 형사르르 쳐다보았다. 강 형사도 나를 보며 의미있는 눈짓을 했다. 그렇다. 누군가가 정화의 유류품을 찾기 위해 뒤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 없어진 것은 없나요?" "알 수야 없지. 뭐 가져갈 것도 없지만...... 텔레비나 자전거 같은 게 그냥 있는 것 보면 패물을 찾은 모양인데, 우리 같은 살림에 무슨 패물이 있어야지. 도둑놈도 눈깔이 멀었지. 사람만 이렇게 상해 놓고......" 우리는 범인을 잡는 데 필요한 물건을 찾는다는 설명을 간곡히 하여 정화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다시 북청에 도착했을 때는 짧은 가을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저어, 정화가 쓰던 물건은 어디에 두었습니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질문을 나는 눈 질끈 감고 했다. 딸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행동이나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이 부모를 괴롭히지 않는 일이란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가 여기 나타난 것부터 그 터부를 깬 것이 아니던가? "그거 다 불살라 버렸지. 그런 걸 뭣하러 남겨 두겠어. 그것만 보아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미안합니다. 공연한 말을 해서......" 내가 미안하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크게 실망했다. 불에 태우다니! "뭐, 책가지 같은 것은 혹시 몰라. 보관한 게 있긴 있는데......" 정화 어머니는 내가 크게 실망하고 있는 것을 눈치라도 챈 듯이 말했다. "예? 책은 그냥 두었다고요?" 나보다 더 눈을 크게 뜬 것은 강 형사였다. "책도 있고 무슨 공책이나 상장 같은 것 그런 거죠.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겠어요? 박사증이 있다고 한들


다 속절 없는 노릇이지......" 갑자기 센티해진 정화 어머니가 어둑어둑해진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화 어머니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전번 철주 에미가 왔을 때도 그걸 물어보던데......" 정화 어머니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철주 어머니가 누구예요?" "정화 언니 말야." "민정 언니 말이에요? 민정 언니가 여기 와서 정화 책을 찾았어요?" 나와 강 형사가 눈이 둥그래졌다. "응! 하지만 깜박 잊고 모두 불태웠다고 얘기했었지. 지금 생각하니 그 책가방이 남아 있는 걸 모르고...... 근데 참 요상한 일이군. 무엇 때문에 죽은 아이 물건을 그렇게들 챙기나......" 정화 어머니의 의문은 당연했다. 강 형사가 범인을 잡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꼭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 그걸 좀 보여주시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도둑이 먼저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초조했다. "저기 장독에 있어." 그녀는 장독대 가운데 있는 큰 단지를 가리켰다. 강 형사가 가서 뚜껑을 열었다. "있어! 정말이야!" 강 형사가 장독 속에서 책가방 하나를 끄집어냈다. 내 눈에 익은 정화의 보라색 가방이었다. 어떻게 보면 핸드백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책가방 같기도 했다. 그녀가 평소 학교 다닐 때 늘 들고 다니던 가방이었다. 나는 그 가방을 보자 정화의 쾌활한 모습이 떠올라 반가워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정화의 모습을 본 듯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눈이 흐려졌다. "맞아요. 그건 정화 가방이에요." 나는 강 형사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돌아서서 말했다. "좀 열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강 형사가 가방을 들고 좁은 툇마루에 앉았다. "열어 보시구려." 어머니도 가방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 속에서는 그녀가 쓰던 책과 노트 등이 여남은


권 나왔다. 정치학 개론, 경제학 개론, 교양국어...... 그리고 그녀의 앨범이 나왔다. 그녀의 성적통지서, 등록증, 학생증, 심지어 합격 통지서 같은 것도 차곡 차곡 개켜진 채 고무줄에 묶여서 나왔다. "이거 일기장 아냐?" 강 형사가 두툼한 노트를 꺼내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찾고 있던 'C.H. H1'이라는 일기장이었다. "좀 봐요." 내가 뺏다시피 받아서 일기장을 넘겨보았다. 깨알 같은 글씨가 노트 3 분의 2 까지 씌어져 있었다. "이걸 좀 가져가야겠어요." 나는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통장 같은 것은 안 보이는데......" 가방을 샅샅이 뒤진 강 형사가 실망한 듯이 말했다. "그 일기장에 뭔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강 형사가 끄집어낸 책들을 도로 넣으면서 말했다. "저어, 앨범도 좀 가져가요." 나는 강 형사의 손에서 앨범을 집어들었다. 우리들은 착잡한 기분으로 귀경길에 올랐다. 어머니를 평택의 차 외과 병원까지 다시 태워다 주고 평택 시내 돼지 갈비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때운 뒤 서울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울적한 기분이 된 나는 돼지갈비의 느끼한 맛이 오래 남아 있어 개운치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나와 강 형사는 다방에 들러 차 한잔을 마시면서 가지고 온 일기장을 대강 훑어보았다. 그러나 특별한 내용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앨범은 그녀의 학창 시절 모습이 대부분이었고 앞 부분에는 나를 만나기 전 유년 시절의 사진이 몇 장 있었다. 돌 사진에서부터 학교 입학하기 전 사진도 보였다. 나는 그녀와 내가 나란히 있는 사진을 볼 적마다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강 형사가 앨범의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숙녀가 밑천을 다 내놓고 이렇게 사진을 찍어서야, 하하하." 강 형사가 가리킨 사진은 정화의 두세 살 때 사진이었다. 발가벗은 채 밥그릇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 봐요. 이때부터 몸매가 비범하잖아요. 허정화의 몸은 늘씬한 미인이었거든."


강 형사가 계속해서 농담을 했으나 나는 유쾌하지 않았다. "이만 집에 가봐야겠어요. 오늘 고마웠어요." 내가 갑자기 일어서자 그는 다소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시계를 들여다본 뒤 따라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잠도 자지 않고 정화의 일기장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 본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려면 할 수 없다는 변명으로 죄책감을 달랬다. 내가 미처 몰랐던 그녀의 사생활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희숙이네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기 이전부터 조석호와 조윤호 형제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더욱이 조윤호와는 여러 차례 육체 관계까지 가졌다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그녀는 조윤호나 조석호와 데이트 한 일을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느낌까지 적어 놓았다. 조석호는 그의 거친 성격과는 달리 여자를 다루는 매너가 섬세하고 침대에서는 예절이 바르다는 식으로 적어 놓았다. 조윤호는 그와 반대로 침실에서는 야생동물처럼 덤벼 엄벙대다가 서툴게 일을 끝내고 물러서는 타입이라는 것을 여러 군데 적어 놓았다. 나는 그녀가 형제를 두고 누구와 결혼할까 테스트중이라는 말을 평소 반신반의하며 들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붙어 살다시피한 그녀가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이 한 여대생의 타락인지, 아니면 지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 비하면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해보았다. 나는 아직도 민훈에게조차 내 몸을 열어 준 일이 없었다. 일기장에는 민훈에 관한 이야기도 몇 군데 나와 나를 긴장시켰다. 정화는 민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남성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인품은 물론 육체에 이르기까지 가장 동경하는 남성이라는 구절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괘씸한 것 같으니라구.' 나는 끓어오르는 질투를 느꼈다.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혹시 이것들이 진짜 섬씽이 있은 것은 아닐까?' 나는 갑자기 커다란 의혹이 바위가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읽던 일기장을 덮어 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질투로 타오른 가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심호흡을 하며 잊으려고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민훈과 허정화가 야비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얽혀 있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괘씸한......' 나는 몇 번이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길거리로 나가 근 30 분 동안 여기저기를 미친개처럼 쏘다녔다. 도저히 집에 들어앉아서 내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거의 자정이 가까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나는 겨우 마음을 좀 진정시킬 수 있었다. 민훈이 갑자기 나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내일 꼭 고백할 거야. 그리고 나의 모든 문을 열어 줄 거야. 그를 내 속에 들어오게 한 뒤 가두어 버릴 거야.' 나는 이런 유치한 다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일기장 'C.H.H1'을 다시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다 뒷표지 안쪽에 낙서처럼 쓰인 이상한 숫자를 발견했다. 006-01-387-512 150-05-094553 22907-86036887 이것은 무슨 암호일까? 우선 전화번호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그런 전화 번호는 있을 수가 없었다. 우선 006 이나 150 으로 시작되는 전화 번호는 없었다. 외국으로 거는 국제 전화 번호는 00 이 붙긴 하지만 그건 001 로 시작된다. 지역번호로도 있을 수가 없다. 숫자 세 줄 중 위 두 줄은 11 자씩으로 되어 있고 밑의 숫자는 13 자로 되어 있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새벽 3 시께나 되어 겨우 잠을 이루었다. 이튿날 나는 부리나케 민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가지 상의도 하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정화와 섬씽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고야 오늘이 일요일이란 것을 알았다. 나는 다시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직 자고 있는 그를 깨운 뒤 나에게 오라고 했다. 민훈은 반가워하면서 12 시까지는 갈 테니 외출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민훈을 만난 것이 수백 번도 더 되지만 이번만은 공연히 가슴이 설레었다. 나는 대강 화장을 하면서 거울을 보고 혼자 웃었다. 열두 시가 가까워지자 민훈이 왔다. 막상 민훈이 내 앞에 앉자 나는 기다릴 때의 태도와는 달리 전혀 다른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속마음과는 다른 내 표정이 못마땅했다. 대강 인삿말을 나눈 뒤 그 문제의 일기장을 내밀었다. "이 숫자가 무엇인 것 같아? 전화 번호는 아니고...... 분명 무슨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민정 언니나 다른 사람들이 이걸 찾으러 다닌 것 아닐까?" 내가 손으로 가리키는 석 줄의 숫자를 한참 보고 있던 민훈이 입을 열었다. "우리 오늘 송추에 드라이브나 갈까? 운전은 내가 할께." 빙긋 웃으며 엉뚱한 말을 하는 그가 갑자기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이것부터 풀어놓고 노는 얘기해요, 우리." 나는 웃으면서 아기를 달래듯 말했다. "이건 벌써 다 풀었어." 민훈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눈이 갑자기 불룩한 내 가슴에 못박혔다. 나는 손을 살며시 빼냈다. "뭔지 알아요?" "그럼. 이것은 은행의 온라인 구좌번호야." "예?" 그제야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걸 몰랐다니.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회사서 하는 일이 밤낮 이런 건데 그걸 모르겠어?" 그는 담배를 한대 꺼내 물고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가 뿜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부채질하며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이 첫째줄 열한 자의 숫자는 국민은행의 통장번호야. 숫자가 네 토막으로 되어 있지 않아? 두번째 열한 자는 상업은행, 농협 등 여러 은행의 숫자야. 이것은 숫자가 세 토막으로 되어 있지. 세번째 줄은 22907-86036887. 그렇지? 이건 서울신탁은행의 온라인 구좌번호야." 나는 민훈의 말에 감탄했다. "허정화가 이런 여러 은행과 거래를 하고 있었나?" 민훈이 숫자를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업은행은 통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농협은 가끔 시골 집으로 돈을 보낼 때 썼구요. 그러니까 두번째 줄은 농협이나 상업은행 번호 중의 하나일 거예요. 하지만 걔가 국민은행이나 서울신탁은행과 거래를 했다는 것은 처음 아는 일이에요. 혹시 그 두 은행 중 한 곳에 보호예수 같은 것을 해놓지 않았을까요? 민정 언니나 여러 사람이 찾는 그 비밀이 이 번호 속에 있는지 모르죠." "보호예수를 하자면 은행에 통장거래가 있어야 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구먼. 우리, 송추는 다음에 가고 이것부터 알아볼까?" 민훈이 일어서면서 서둘렀다. "오늘 일요일인데 은행문 열렸어요?" "아차, 그렇군. 그럼 송추에는 할 수 없이 가야 되겠는데......" 민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얼굴에 담긴 미소가 천진스러웠다. "먼저 나가서 내 차에 시동 걸어요. 나 옷 입고 나갈께." 나는 화장대 위에 있는 열쇠를 던져주었다. "이건 차에 가져 갈께." 민훈이 정화의 일기장과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나갔다. 나는 다시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고쳤다. 야외에 나가자면 좀 진하게 화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마도 벗어두고 청바지를 입었다. 블라우스 위에 갈색의 니트 스웨터를 가볍게 걸쳤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심정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동차 앞에 민훈이 머리를 감싸 쥐고 쓰러져 있었다. "민훈 씨! 어찌된 일이에요? 어머 이 피 좀 보아." 움켜쥔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람 살려!" 나는 당황해서 부들부들 떨며 아무 곳이나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무 떠들지 말아요. 운전해. 병원부터 가자구." 민훈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차에 올랐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피나는 곳을 막게 하고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몰라. 내가 차에 오르려는 순간 누가 뒤통수를 쳤어." "일기장 어떻게 되었어요." "앗! 그걸 뺏어 갔구나!"


그때야 민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나는 평택에서 정화 아버지가 당한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16. 사랑놀이 나는 정신없이 차를 몰아 큰길로 나섰다. 사방을 살폈으나 얼른 병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저쪽에......" 한쪽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민훈이 왼쪽을 가리켰다. 길 건너에 병원을 표시하는 파란 십자가가 보였다. 나는 신호을 무시하고 차를 왼쪽으로 돌려 병원 앞에 세웠다. 환자가 차에 타고 있을 때는 긴급상태이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민훈을 부축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는 멀쩡한데...... 그래도 부축해 주니까 기분이 괜찮은데." 민훈은 허리를 껴안은 내 팔을 살그머니 잡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을자 씨 체온은 보통 사람보다 높은가 봐. 열오르는데......" "피를 흘리면서도 농담이 나와요?" 그의 여유 있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나는 더욱 팔에 힘을 주어 그의 허리를 껴안다시피했다. "아이구! 너무 껴안지 말아요. 열나서 걸을 수도 없어." 민훈은 응급실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은 뒤 병실로 옮겼다. 조그만 개인 병원이라서 공동으로 쓰는 병실은 없고 모두 일인용이었다. 의사는 혹시 모르니까 하루 입원해서 뇌파검사 등 머리의 정밀 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좁은 병실은 비교적 깨끗했다. 벽에 산소공급기 같은 호스가 걸려 있고 조그만 냉장고, 텔레비전 등도 있었다. "저기 좀 누워요." 민훈은 보호자용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나에게 침대를 권했다. "싫어요. 내가 뭐 환자인가?" 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떤 놈일까?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남자인 것 같았거든."


민훈은 붕대 감은 머리를 만져보며 말했다. "정화 아버지를 때린 사람일 거예요. 근데 그 노트를 뺏아간 것을 보면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들일 거예요." 나는 민훈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강 형사나 추 경감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될까요?" 걱정이 되어 내가 물었다. "내일 얘기하기로 해요." 민훈은 그의 이마를 짚은 내 손을 잡아당기고는 손바닥에 진한 입맞춤을 했다. 나는 갑자기 손바닥을 통해 심장으로 오는 감전 같은 짜릿한 충격을 느꼈다. "실례합니다." 그때 간호원이 들어왔다. 손에는 주사기와 거즈 등이 든 용기를 들고 있었다. "주사 좀 맞을까요. 침대 위로 올라가시겠어요?" 간호원은 눈으로 나를 쫓으면서 민훈을 재촉했다. 나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철썩 맞으며 주사맞을 민훈을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간호원이 나간 뒤 병실에 들어서자 민훈은 침대에 모로 누운 채 나를 손짓해서 불렀다. "아무래도 미스 허의 언니 부부가 수상하지 않아?" 침대 곁에 걸터앉은 내 손을 잡으며 그가 말했다. "희숙이 어머니와 그 배갑손인가 하는 엉터리 사장도 수상한 점이 많아요." 나는 얼른 능글능글한 배갑손의 모습과 그에게 안겨 요염을 떨던 양 여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꼭 나쁜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정화의 비밀을 캐고 있었나?" 민훈은 건성으로 질문을 하며 내 허리를 잡아당겼다. 나는 갑자기 중심을 잃고 누워 있는 그의 가슴 위로 넘어졌다. 그는 재빨리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껴안았다. 그는 침대에 편안하게 누운 자세이고 나는 그의 가슴 위에 엎어진 채 다리는 서 있는 모습이 되었다. 그는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의 이마를 감은 붕대가 내 이마에 닿아 까칠한 촉감을 주었다. 싫지 않았다. "민훈 씨! 여긴 병실이에요. 훈 씨는 환자이고." 나는 누가 들을세라 속삭였다. "환자는 사랑도 못하나?" 그는 다시 내 얼굴을 잡아당겨 자기 마음대로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제발......"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을자! 사랑한단 말야." 그는 시비조로 말을 하며 한손을 내 가슴께로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다. "그나저나 그 온라인 번호가 없어졌으니 어떻게 찾죠?" "국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이라고 했었지?" 그는 마침내 한쪽 손을 내 가슴께로 넣는 데 성공했다. 부드러운 그의 손이 노브라인 내 가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간지럼과 함께 짜릿한 감각이 피부에서 등줄기 쪽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을 웅크렸다. "걱정 말아요. 사랑해." 민훈은 갑자기 손으로내 유바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무엇을 걱정 말라는 뜻인지 애매했다. 나는 야릇한 흥분을 즐기면서 상체를 그에게 온통 맡겼다. "그 온라인 번호는 내가 다 외워 두었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는 그렇게 덧붙이며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내 유방 꼭지를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나를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빠뜨렸다. 그는 이어 뜨거운 입김을 내 귀로 불어넣었다. "아이 간지러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내 목덜미에 입김을 뿜으며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했다. 나는 가늘게 신음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그가 이번에는 나의 허리를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내가 버티고 있으면 위로 끌려 올라가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버틸 힘이 없었다. 허리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 이미 힘이 빠져 허물허물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 하체가 쉽게 그의 옆에 놓여지도록 도와주었다. "이러지 말아요. 민훈 씨는 환자 아니에요?" 몸은 그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응해 주면서 나는 말을 그렇게 했다. "누굴까? 그 노트를 뺏어간 사람말이야. 그 사람이 미스 허를 죽였을지도 모르지." 민훈도 말고 몸놀림이 전혀 달랐다. 그는 이제 더욱 대담해져 그의 오른손을 내 허리춤에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몇 번 청바지 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다 쉽지 않으니까 나의 바지 지퍼를 열고 그곳으로 손을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다. "범인은 희숙이네 집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희숙이네 집에서 죽었으니까요." 나는 이제 적극적으로 그의 입술을 즐기면서 말했다. 나는 그의 우람한 목을 껴안고 가슴을 포갰다. "사실은 아까 내 수첩에 은행 온라인 구좌 번호을 적어 두었어요. 그 커다란 노트를 들고 은행에 쫓아다닐 수는 없잖아." "그랬어요?" 나는 그의 용의주도함을 새삼 느꼈다. "어마! 왜 이래요." 나는 놀라서 허벅지를 오무렸다. 그의 집요한 오른손이 마침내 나의 블루진 바지의 팬티를 뚫고 은밀한 곳까지 침투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손에서 전기 충격 같은 것을 느끼며 더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잘했지? 내가 번호 적어 놓은 것 말이야." 내친 그의 손은 멈출 줄 모르고 비너스 언덕을 쓰다듬으며 쳐들어 오려고 했다. 나는 허리를 뒤로 빼고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애를 썼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 등뒤에 있는 것 같은 인기척을 느꼈다. "이봐요. 아주머니!" 그 소리에 우리 두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어 떨어졌다.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긴 신성한 병원이란 말예요. 그렇게 못 참아요?" 뒤에는 어느새 간호원이 들어와 서 있었다. "아주머니! 댁의 남편은 환자란 말예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부끄럽고 분한 마음으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바지 지퍼를 올리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벽 쪽으로 돌아섰다.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병실이지만, 아가씨는 노크하는 예의도 없어요?" 민훈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앉으며 간호원을 나무랐다. "뭐라구요? 참 기가 막혀. 댁 같은 파렴치한 사람하고 더 얘기하기 싫으니 빨리 나와요. 아래층에 가서 시티에스 촬영해요. 자 올 때 이것 들고 와요." 간호원은 차트를 침대 위에 휙 던지고는 히프를


한껏 흔들며 나가 버렸다. "을자 씨 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러나 사랑은 부끄러움이 없는 겁니다. 하하하......" 그는 멋적게 웃으며 빨갛게 물든 내 얼굴을 장난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아주머니치고는 젊은 아줌만데 하하하......" "웃음이 나와요? 아이 창피해. 난 죽어버릴 거야." 나는 벽으로 돌아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눈물을 펑펑 쏟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훈의검사 결과는 2-3 일 뒤에 나온다고 했다. 그동안 하루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난 오후 늦게 병실을 나왔다. 더 이상 사랑 장난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병실을 나오며 나는 그와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튿날 나는 민훈으로부터 받은 온라인 번호를 가지고 강 형사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막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나요 나."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라니요?" "어허, 이제 애인 목소리도 잊었구먼. 조석호요 석호." "애인은 아니지만, 아는 분이군요. 조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주제넘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것이 그의 매력이었다. "어허 그 동안에 애인이 선생으로 변하다니, 아무리 세상이 야박해도 글쎄......" "아이, 용건부터 얘기하세요." 내가 재촉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난 아직 장을자를 처녀 감정도 해보지 못했으니까 하긴 애인 자격이 없는 거지요." "용건부터 말씀하시라니깐요." "민훈이 입원을 했다구요?" 어느새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좌우간 오늘 좀 만납시다. 점심 같이 하는 게 어때요. 열두 시 삼십 분에 판도라 호텔 커피숍으로 와요. 그곳 14 층에 있는 뷔페가 괜찮아요." 그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아니 남은 약속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럼 만나서 얘기해요. 안 나오면 후회하게 됩니다. 나한테 중대정보가 있거든요. 그럼 이따가


봅시다." "아니 저어......" 그러나 그는 전화를 딸깍 끊어버렸다. 나는 떨떨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우선 강 형사를 만나 은행 구좌를 뒤져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시경으로 갔다. 그러나 강 형사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백화점 옷가게에 들어가 얼쩡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혼자 은행에 가볼 생각을 하고 근처에 있는 서울신탁은행으로 갔다. "이건 구로동 지점의 번호 같은데......" 창구의 아가씨는 내가 주는 온라인 번호를 들여다보더니 그렇게 말하며 나의 아래 위를 살폈다. 무엇인가 수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입금을 시킬려고 하는데......" 22907-86036887. 이 숫자만으로 어느 지점에 원장을 둔 거래자인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맞아요. 구로지점의 고객 허정화라고 나오는군요. 예금액은 별것 아니군요." 아가씨는 컴퓨터 단말기에 나오는 내용을 수다스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쪽으로 가보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죄지은 사람처럼 은행을 얼른 나와 버렸다. 시간을 보았다. 11 시 45 분. 여기서 구로동까지 가자면 30-40 분 걸릴 것이고, 그때는 점심시간이라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핑계이고 실은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를 허정화의 보호예수물품을 혼자 보기 겁이 났던 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조석호 씨가 기다릴 텐데......' 나는 자꾸 그쪽으로 신경이 쓰였다. '중대한 정보가 있다고 그랬지......' 내가 그 호텔 커피숍에 도착한 것은 열두 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어이 을자, 여기야 여기!" 내가 들어서자마자 그는 벌떡 일어서서 두 손을 한껏 쳐들고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조금은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른 그의 자리로 다가갔다. "좀 얌전하게 인사할 수 없어요?" 나의 말소리는 자연히 매끄럽지 못했다. "너무 반가워서 그래요. 반가운 사람보고 소리 좀 지른 게 잘못되었나요? 그렇다면 미안해. 자 우리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여기서 차 한잔 마시면 공연히 돈만 더 들고......" 그는 내가 채 자리에 앉기도 전헤 내 핸드백까지 들고 벌떡 일어났다. "어딜 가는 거예요? 숙녀에게 무얼 먹겠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거예요?" 내가 불만스럽게 말했으나, 마음속은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됐나요? 여자야 남자 먹는 것 따라 먹으면 그만이지 무슨 입맛 가려서 밥먹습니까? 하하하. 하지만 우리 을자 씨에게는 선택권을 드리지......" "좋아요. 그럼 덴뿌라 먹으러 가요." "뭐 덴뿌라? 그거 보통 비싼 음식이 아닌데......" 통 커 보이는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평소 그는 사람이 활달하고 성질이 급할 뿐 아니라 통이 큰 사람이어서 그의 너무 어울리지 않는 짓을 보고는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 덩지 크고 통 큰 사람이 엉뚱하게 자질구레한 경우가 있기는 했다. 조석호도 보기와는 달리 섬세하고 째째한 일면이 있는 것 같았다. "돈 아까우면 우리 더치페이로 해결하기로 해요." 내가 금방 촉바른 소리를 했다. "아냐 아냐요. 속 좀 쓰리지만 내가 남자니까 내기로 하지요. 호랑이도 양을 잡아먹기 전에는 배불리 먹게 놔둔다고 하더군요. 이 호텔 8 층에 일식 덴뿌라집이 있어요. 자 갑시다." 그는 엄벙덤벙 걸어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뭐라구요? 호랑이가 양을 어떻게 한다구요?" "아니 그건 우리 얘기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동물의 세계 얘깁니다. 하하하." 나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8 층의 일식집에서 배부르게 이것저것을 실컷 주워먹었다. "자, 이제 배를 불렸으면 잡아먹혀야지." 조석호는 먼저 일어서면서 말했다. "야비하게 뭘 잡아먹는데 자꾸 그런 말만 하는 거예요?" 나도 따라 나가면서 물었다. "아직 오후 2 시도 안 되었으니까 어디 가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어둑어둑해져야 잡어먹든지 말든지 할 텐데......" 나는 조석호의 유치한 말에도 웬지 화가 나지 않았다. "우선 커피 한잔 하면서 얘기해요."


우리는 다시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그래 뭐예요? 중대한 정보가 있다고 하잖았어요?" "응, 두 가지야. 이봐, 아가씨 여기 커피 두 잔." 그는 곁에 온 레지의 히프를 툭 치는 천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첫째는 우리 형 조윤호 씨가 장가를 간다는 것이고......" "예? 윤호 씨가 결혼을 해요?" "왜 놀라? 혹시 조윤호 씨 짝사랑하는 건 아니겠지?" 나보다 조석호가 더 놀라는 것 같았다. "짝사랑 좋아하시네." "혹시 조윤호와 섬씽 있는 건 아니겠지? 나보다 먼저 말이야." 나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 신부감은 누구에요?" "누구라면 알 만한 여자지. 법무부 장관 지내다 순직한 사람의 딸이라면 어느 집안인지 알겠지? 그 돌아가신 장관은 아버지의 친구였으니까 말야." "그래요?" 물론 알 만한 집안이었다. "예뻐요?" "여자들이란 그저 제일 관심사가 예쁘냐 아니냐에 두는 것 같군.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분명히 대답하지만 장을자 씨보다는 안 예뻐요." "호호호. 고마워요." 나는 그의 말투가 너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두번째 정보는 뭐예요? 조윤호 씨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은 미안하지만 나에겐 아무런 정보도 되지 않아요." "두번째는 배갑손이라는 사람에 관한 겁니다." 그는 배갑손이라는 말을 하면서 나를 흘깃 보았다. 배갑손이란 이름만 들어도 나는 불쾌했다. 희숙이 가출했을 때 나에게 한 행패를 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죽기라도 했나요?" 내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자 그는 다소 조심스럽게 말했다. "배 사장이 장을자 씨를 꼭 좀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나를 만나겠다고요? 아직도 나한테 볼일이 남았대요?" "글쎄입니다. 저번 일을 사과하려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작자가 우리 마더의 애인이라는 걸 저도 모르지는 않지요. 어때요. 우리


마더 나이면 애인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요." "예?" 나는 조석호의 태연한 말에 조금 놀랐다. "그런 건 나하고 상관 없는 일이에요. 근데 왜 그 능글맞은 늙은이가 날 만나자는 겁니까?" "잘 모르긴 해도 죽은 허정화 씨에 관한 일 같더군요." "예? 정화 일이라구요?"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정화 씨에 관한 것을 묻다가 막히니까 을자 씨 좀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정화에 대해 무엇을 물었나요?" "정화 씨의 시골 집 주소 같은 것을 물었어요. 그리고 정화 씨의 가족관계 친한 친구 등을 묻다가 을자 씨 대목에 이르자 꼭 좀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전부터 그 늙은이 잘 알고 지냈나요?" "석호 씨 말처럼 양 여사와 가까우니까 알았을 뿐이에요. 그 늙은이 생각하면 밥맛 없어요. 날 만날 이유도 없고. 정보라는 게 겨우 그거예요?" 나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배갑손도 정화의 언니네처럼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날 거예요 안 만날 거예요? 만나겠다면 종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전화하면 됩니다." "싫어요. 난 그딴 사람 처음부터 몰랐던 것으로 할 거예요." 나는 커피를 한꺼번에 꿀꺽꿀꺽 소리내며 마셨다. "자, 그럼 슬슬 보내러 갈까요?" 조석호가 다시 일어서면서 나의 겨드랑에 손을 넣었다. 나는 살그머니 그의 손을 뿌리치며 따라 일어섰다. 배갑손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보낼 것 없이 지금부터 수원으로 갈까요?" "수원은 왜요?" "거기 유명한 수원성이 있지요. 문화재인 수원성 옆에......" "그래서요?" "그 문화재 옆에 스프링 좋은 호텔이 있죠." 나는 기가 막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17. 레인보우 오브 나이트 "그 스프링 좋은 호텔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난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나중에 갈 테니까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보턴을 누르면서 내가 말했다. 조석호는 내 몸 이곳저곳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틈만 나면 만져보려는 게걸스런 태도를 계속 보였다. "나중에 언제 옵니까?" 그가 상기된 듯한 나의 목덜미와 가슴께를 뚫어지게 보는 모습이 복도의 거울을 통해 보였다. "한 일주일 뒤에......" "뭐라구요?" 그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내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때리고는 내 허리를 껴안았다. "안 돼! 오늘은 나한테 납치된 거야." 그가 팔에 힘을 주자 나는 순간에 중심을 잃고 그에게로 넘어지다시피 기대게 되었다. 옆에 섰던 외국인들이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인신매매범이라고 하겠어요." 나는 그에게서 떨어져나와 때마침 멈춰선 엘리베이터에 냉큼 올라탔다. 내가 타자마자 엘리베이터는 만원이 되어 뒷사람이 더 탈 수 없게 되었다. "어어 내려 내려!" 조석호가 당황해서 소리를 쳤지만 나는 미소로 인사를 보내고는 떠났다. 곧바로 호텔 앞에 서 있던 중형택시를 잡아타고 종로 2 가 거인 개발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습니다." 나는 다짜고짜 사장실로 들어서면서 소파에 앉아 전자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배갑손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어찌된 일인지 꼬치꼬치 캐묻던 사냥개 같은 비서가 그날은 없었다. "아니! 미스 장 아니야! 마침 잘 왔군. 그렇지 않아도......" 배갑손은 뜻밖이란 듯이 눈이 둥그래졌다가 곧 반갑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또 목을 졸라 죽이려는 건 아니겠죠?" 나는 그때 일을 잊지 않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냐 아냐. 그건 오해였으니까 제발 잊어 주어요. 자 좀 앉아요. 어이 미스 박!" 그는 밖을 향해 소리를 쳤다. 비서에게 차를 시킬 모양이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얘가 또 빨빨거리며 어딜 갔군. 이번엔 정말 모가지다. 쬐그만 년이 벌써 암내를 내가지고 사내


꽁무니 따라다니느라......" 나는 그의 상소리를 듣기 거북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미안해. 숙녀 앞에서 기집년 욕을 하다니...... 우리 밖에 나가 목 축이면서 얘기 좀 하지요." 그는 반말도 존대말도 아닌 말을 하면서 슬리퍼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었다. 나는 배갑손을 따라 종로 뒷골목의 조그만 지하 바로 들어갔다. 대낮인데도 깜깜해서 실내에 눈이 익숙해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는 자기가 마시다가 보관해 둔 시버스리걸 병을 가져오게 하고 스테이크류의 안주 한 접시를 시켰다. 내게도 스트레이트로 한 잔을 권했다. "그래 저를 보자고 했다는데 용건이 뭐에요?" 나는 씁쓸한 술맛을 혀 끝에 느끼며 물었다. "뭐 별건 아니고...... 전에 친구였던 허정화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고...... 미스 허하고는 가장 친한 친구였지?" 그는 한껏 미소를 띠고 애써 부드러운 인상을 보이려 노력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는 정화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렀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그 정도로 외고 있다는 것은 보통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끔 했다. 자꾸 이 음흉스러운 사나이가 정화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8 월 3 일 저녁. 그러니까 정화가 살해되던 날 아래층 그 비밀스런 안방에는 어쩌면 배갑손과 양윤임 여사가 함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배갑손이 무섭게 느껴졌다. "정화는 죽었어요. 누가 죽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엉겁결에 술을 홀짝 마셔 버렸다. 그가 다시 술을 따르며 말했다. "미스 허는 자살한 것 아닌가?" "누가 그러던가요? 경찰에서는 살해된 거라고 하던데......" 나는 차츰 대담해져 말이 빗나갔다. "혹시 배 사장님이 죽인 것 아녜요?" "뭐라고? 흐흐흐, 난 여자를 사랑해 주기는 해도 죽이지는 않지." 뜻밖에 그는 내 말을 태연학 받아넘겼다. "양 여사님은 혹시 범인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흐흐흐...... 그 사람도 그런 끔찍한 일을 알고 있지는 않을걸."


나는 내친김에 그의 아픈 곳을 찔러 보았다. "동업자라고나 할까?" 그는 약간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무슨 사업을 하시기에 동업이라고 하시나요?" "흐흐흐. 이 아가씨가 오늘 나를 심문하러 온 모양이군. 마치 여자 형사 같은데......" "미안해요. 버릇없이 굴어서. 근데 조석호 씨 보고 저를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나는 포크로 안주를 집어 아작아작 소리가 나게 씹었다. "그 허정화에 관한 얘긴데 말이야......" "사장님은 평소에 허정화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나요? 정화는 죽기 전에 사장님에 관한 얘기는 한번도 한 일이 없었거든요."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정말 정화가 내게 배갑손 사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 몰래 이 음흉한 사나이와 무슨 거래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해 봐요. 혹시 미스 허가 핸드백 같은 것을 어디 숨겨 둔 것은 없는지? 아니면 물품 보관소 같은 곳에...... 요즘은 은행에 그런 걸 잘 맡겨 두거든......" 배갑손은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집요하게 물었다. "도대체 허정화가 보석덩어리라도 갖고 있었단 말입니까?" "보석? 미스 허가 그랬나?" 배갑손은 내가 무심코 한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배 사장님과 정화는 어떤 사이였나요? 그건 말해 줄 수 없나요?" 나는 그것을 말해 주면 정보를 줄 수 있다는 듯한 뜻을 비쳤다. 물론 그에게 은행 구좌 번호를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양 여사 집에 드나드니까 안면이 있을 뿐이야. 그러다가 어느 날 종로 네거리서 우연히 만나 같이 저녁 한끼 먹은 일밖에 없지" 배갑손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정화가 사장님의 귀중한 물건을 가져갔다 이겁니까?" "뭐 꼭 내 것이라기보다...... 그래 그런 것을 알고 있나?" "그게 무슨 물건이에요?"


나는 내가 생각해도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있는 곳을 대보아."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배갑손 사장은 담배를 한 대 꺼내들며 뜸을 들였다. 쉽게 꺼낼 이야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혹시 허정화한테 이런 것 들은 일 없나 해서......" "무슨 말인데요?" "혹시 비밀리에 거래하던 은행이라든지......" "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소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그것을 찾고 있단 말인가! "뭐 놀랄 것은 없고...... 혹시 미스 허가 남겨둔 유품 중에 무슨 물건이나 문서를 숨겨 놓은 것이 없나 해서......" 그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도대체 허정화가 무엇을 가지고 있었길래 그렇게 야단들이에요?" "뭐야? 야단들이라구? 그러면 나 말고도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있단 말이야?" 배갑손은 갑자기 놀란 표정이 되었다. 나는 안할 말을 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쏟아놓은 물이었다. "정화 언니도 그런 걸 찾고 있었어요." "허민정이 말이야?" "민정 언니도 아세요?" "아니, 안다기보다는......" 그는 말을 얼버무렸다. 분명 무엇인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 그게 무엇입니까? 사장님이 찾으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뭐 특별한 것은 아니지."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다만 민정 언니가 그런 걸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정화는 아무것도 숨겨놓고 죽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혹시 그런 게 있으면 사장님께 먼저 알려 드릴께요."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고 일어섰다. 배갑손은 나를 더 붙들고 무엇인가를 캐내려고 했으나 나는 그냥 달아나다시피 나와 버렸다. 재가 서울신탁은행 구로동 지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 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은행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은행원들을 쭈욱 살펴보았다. 한쪽 구석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착해 보이는 젊은 행원을 발견했다. 나는 그쪽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상담을 좀 하러 왔는데요." 나는 한껏 부드럽고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그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아, 예. 좀 앉으시지요." 그는 벌떡 일어서며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나한테 호감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나의 미소 작전이 적중한 것 같았다. 학생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온라인 번호와 허정화라는 이름을 대고 혹시 보호예수 구좌가 있는지를 물었다. "본인은 어딜 갔나요?" 청년은 약간 의심스러워했다. "사실은 지난 여름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걸랑요." "예? 돌아가셨다고요?" 청년은 놀란 표정을 지엇다. 그러나 곧 사무적인 얼굴로 돌아왔다. "알아보지요." 그는 이곳 저곳 캐비닛을 뒤지더니 컴퓨터 단말기를 두드렸다. "여기 보호예수한 것이 있습니다. 보관증은 가지고 계십니까?" "예? 이 은행에 맡긴 것이 있다구요?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너무 반가워 큰 소리로 물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은행금고에 맡겨둔 것이 있습니다. 열쇠와 보관증이 있으면 찾을 수 있지요." 청년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보관증도 열쇠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 청년도 아주 곤혹스런 얼굴로 한참 있다가 뒤에 앉은 대리에게 가서 무엇인가를 말했다. 대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건너다보았다. 한참만에 청년이 돌아와 아주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절차를 밟아서 예수한 물건을 찾을 수 있답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예수 예수 하는 것이 생소하게 들렸다. "우선 허정화 씨가 사망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 인수자가 본인의 직계 존비속, 또는 유족이라는 증명을 하시고, 공증할 만한 사람의 입회 보증으로 예수물품을 인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서 있다가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은행을 나왔다. 강 형사에게 연락하고 그와 함께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중전화에서 시경으로 전화를 걸었다. 강 형사의 명함을 찾느라 핸드백을 다 뒤지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래요? 서울신탁은행이라고 했지요? 내가 필요한 협조의뢰 공문을 만들어 놓을 테니 내일 아침에 만나요. 아니 10 시 정각에 이리로 와요. 고물이지만 내 차를 타고 가지요. 그것도 공무니까." 나는 강 형사와 약속을 한 뒤 병원으로 민훈을 찾아갔다. "어? 노크 좀 하고 들어오시지." 민훈은 웃통을 벗어 가슴을 벌겋게 드러낸 채 환자복 바지만을 입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침대에 팔을 걸치고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근육이며 가슴에 난 무성한 털이 사나이다운 풍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볼 만하군요. 뵈기 싫으니까 빨리 입어요." 나는 침대 발치에 걸쳐 있는 환자복 웃도리를 집어 던져주었다. "어때? 섹시하지?" 민훈은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땀이 밴 살결에서 싫지 않은 냄새가 났다. "이거 왜 이래요. 또 간호원에게 망신당하려고......" 그 순간 나는 번개 같은 그의 입술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간호원이라고 말하지 마, 혼난다고. 간호사라고 불러야 해." "근데 할 얘기가 있어요." 나는 그의 포옹에서 풀려나며 간호의자에 앉았다. "뭔데?" "찾았어요. 그 보호예순가 뭔가 하는 것 말야!" "정말? 어디서 찾았어?" "그 은행이 맞아요. 정화가 맡겨 놓은 물건이 있는데 서류를 만들어 오기 전에는 내줄 수 없대요." 나는 그간의 경위를 대강 이야기하고 내일 강 형사와 함께 간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우리들은 병원에서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민훈이 허정화와 섬씽이 있지 않았나 해서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허정화의 미모에 무척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 대목에서 느낄 수 있었다.


끝내 나는 시무룩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다고 딱 꼬집어서 민훈과 허정화의 섬씽을 나무랄 만한 대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나는 강 형사와 함께 구로동 지점으로 갔다. 강 형사는 지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가지고 온 여러 가지 서류를 내주었다. "그러면 조금 기다리시지요. 고객의 예수품을 반출해 오겠습니다." 어제 내가 본 그 대리가 필요 이상의 어려운 말을 쓰면서 나갔다. 한참만에 그가 커다란 서류봉투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이겁니다." 봉투에는 은행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고 도장이 찍히고 사인도 있었다. 봉함했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 "이건 정화 사인이에요." 나는 눈에 익은 그녀의 사인을 발견하고는 반가워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눈물이 왈칵 솟으려는 감정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제가 봉함을 뜯겠습니다." 강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누런 대형봉투를 뜯었다. 안에서는 조그만 통이 흰 종이에 싸인 채 나왔다. "이게 뭘까?" 강 형사가 조그만 상자를 들고 흔들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 형사가 다시 조심스럽게 종이를 벗겨 내자 빨간 색의 예쁜 상자가 나왔다. "이건 금반지통 같은데......" 은행 대리가 먼저 아는 척했다. 그러고 보니까 친구가 결혼예물로 받던 보석상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 형사가 뚜껑을 열자 이번에는 조그만 색동 주머니가 나왔다. 다시 그것을 열었다. "아니 이건!" 모두가 깜짝 놀랐다. 거기서는 찬란한 보석이 튀어나왔다. 엄지손가락 마디만한 무지하게 큰 다이아몬드였다. "이건 다이아 아닙니까? 와 이렇게 큰 다이아도 있나!" 강 형사가 입을 딱 벌렸다.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면 틀림없이 족보가 있을 겁니다." 대리가 아는 척했다. 강 형사가 인수증에 도장을 찍어주고 그 다이아몬드통을 가지고 나왔다.


"왜 정화가 이런 어마어마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강 형사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올시다. 허정화 언니 부부나 배갑손 사장은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겠지요. 또 허정화 아버지를 습격한 정체불명의 사나이나, 민훈 씨를 때리고 일기장을 탈취해 간 사람도 이 보석을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정화가 이런 어마어마한 물건을 감추어 두고도 나한테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는 것에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런 일 외에도 나를 속인 일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민훈과의 관계도 나를 속인 부분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괴로웠다. 이튿날 시경의 강 형사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게 틀림없는 다이아몬드였습니다. 놀랄 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적인 물건이랍니다. 어때요. 시내 나오시면 제가 전주 비빔밥 정도는 살 수 있는데요." 강 형사의 목소리는 아주 명랑했다. 사건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럼 12 시쯤 해서 롯데호텔 로비에 서 있겠습니다. 차를 지하 주차장에 가져다 두고 로비로 오세요. 10 층 음식 백화점에 가면 전주 비빔밥 잘하는 집이 있어요." 덤벙대는 성격에 비해 꼼꼼한 점도 있는 사람이 강 형사였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해서 전주 비빔밥집 구석자리에 마주 앉게 되었다. "그건 말입니다. 유명한 보석이에요. 미스 장도 들은 기억이 있을 겁니다. 세계적인 보석인데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이 신문에 난 일이 있는 것 같아요. 보석 감정사들의 말이 그것은 더 레인보우 오브 나이트란 보석이랍니다." "레인보우 오브 나이트?" "예. 밤에 뜨는 무지개라는 뜻이지요. 싯가를 매길 수 없지만 20 억 원 정도는 간다고 합니다." 강 형사는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예? 20 억이라구요?" 나는 정말 입이 딱 벌어졌다. 정화가 20 억씩이나 나가는 보석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밤에 뜨는 무지개라...... 보석 이름이 참으로


낭만적이네요. 그래 그게 어떻게 해서 정화가 가지고 있게 되었단 말예요?" 그때 돌솥그릇에 담긴 비빔밥이 나왔다. 구수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곧 알아내게 될 겁니다. 워낙 유명한 보석이라 유통 루트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거든요." 나는 문득 그 보석이 배갑손 사장의 손을 거쳐 정화에게 넘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갑손 사장이 무슨 대가로 그것을 정화에게 주었거나 아니면 정화가 배갑손으로부터 그것을 훔쳐내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배 사장이 정화에게 그것을 무슨 대가로 주었다면 그것이 무슨 대가란 말인가? 워낙 대담하고 엉뚱한 짓을 많이 해온 허정화라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정화가 배갑손의 약점을 잡고 그것을 미끼로 갈취해 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 허정화를 살해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협박을 당했을까? 혹시 양윤임 여사와의 불륜 관계 때문은 아닐까? "그 보석은 어마어마한 재벌들이나 만질 수 있는 것 아녜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가정교사 여학생 손에 그게 들어갔을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며 강 형사의 표정을 살폈다. "허정화란 아가씨는 보통 여학생이 아니랍니다." 강 형사는 말하면서 내게 빙긋 웃어보였다.

18. 어릿광대 나는 며칠 동안 민훈의 병실에서 살다시피하다 그가 퇴원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집을 나와 혼자 지내던 자취방을 처분하고 집으로 들어갈 결심을 했다. 며칠 전 어머니의 예순두번째 생신을 맞으며 일생 동안 장사에 시달린 어머니의 얼굴에서 너무나 고생스러운 세월을 읽었기 때문이다. 시집갈 때까지는 어머니 곁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대문 시장 옷가게를 집어 치웠으면 좋겠다는 말을 어머니는 여러 번 되뇌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가게를 치우고 어머니를 편히 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빨리 결혼해서 어머니를 편히 모셔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 그렇다. 이제는 민훈을 떠나서 산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민훈과 결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아직 한번도 민훈에게는 정식으로 결혼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내일은 꼭 그에게 이 말을 해야지. 그리고 나를 바칠 거야.' 나는 이불 속에서 이렇게 결심을 굳혔다. 갑자기 허정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와 민훈이 포옹한 환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없어. 정화가 아무리 많은 남자들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더라도 민훈 씨만은 아닐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좀체 정화의 환상이 떨쳐나가지 않았다. 능수능란하고 어른들 뺨칠 정도의 수단을 가진 정화가 내 머리에서 좀체 떠나지 않았다. 정화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 조석호, 조윤호 형제, 배갑손, 민훈...... 그녀는 그 많은 남자들과 아침에 만나 악수하듯이 몸을 나누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냥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밤에 뜨는 무지개'란 그 어마어마한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해서 배갑손으로부터 정화에게 넘어 갔을까? 나는 게걸스런 웃음을 흘리며 미련한 배를 흔드는 배갑손이 양윤임 여사 아닌 정화의 나신 위에서 씩씩거렸을 모습을 상상하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안 돼, 민훈 씨의 품에서 정화를 찾아내야 해. 그냥은 안 돼......' 시계를 보았다. 밤 1 시 25 분이었다. 나는 불을 켜고 민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예요. 을자." 민훈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야? 지금 몇 시지? 아니 무슨 일 생겼어요?" "나 지금 민훈 씨 만나야 돼. 그리로 갈 거야. 아파트 앞에 나와 있어. 30 분 내에 도착할 거야." "무슨 일이야? 을자 씨!" "가서 얘기할께요. 급하단 말예요."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엑셀 운전대에 앉았다. 루즈를 다시 바르고 한번도 써보지 않았던 선물받은 향수를 겨드랑이와 목덜미에 약간 뿌렸다. 나는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민훈의 아파트로 갔다. 그는 충실하게도 내 말대로 아파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야 이 밤중에......" 그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잡으며


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요." 나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그를 끌다시피하여 그의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방에는 생소한 냄새가 났다. 자다가 빠져나온 침대에는 찌든 시트가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방 안이 이 모양이야. 남자 혼자 살다 보니까......" 겸연쩍어하는 그를 나는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민훈 씨 나 사랑하지?" "그럼! 그래 무슨 일이야, 얘기해 보아요." 그는 부드럽게 나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는 거지? 농담 아니에요." 나는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약속하지. 근데 무슨 일이 생겼어? 빨리......" 나는 내 입술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의 억센 포옹을 즐겼다. "그럼 말할께요. 민훈 씨, 오늘 나를 가져요. 오늘을 넘기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달려온 거예요." 나는 단숨에 이 말을 해버리고 그의 목을 더욱 거세게 껴안았다. 가슴이 콩볶듯이 뛰기 시작했다. "사랑해, 을자!" 민훈도 달아오른 듯 나를 침대도 아닌 방바닥에 쓰러뜨렸다. "침대로 가요." 나는 내 입에서 참으로 대담한 말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침대에 누여진 채 민훈에 의해 천천히 여자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손끝에 마지막 속옷이 벗겨진 뒤 나는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얼굴에 와서 닿았다. "을자야. 다음달에 결혼하자 우리......" 그의 뜨거운 손이 내 등밑으로 파고들어왔다. 다음 순간 나는 여자의 중심부에서 생전 처음 겪는 고통을 느꼈다. 다음날, 민훈과 나는 추 경감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달라진 사이를 느꼈다. 하룻밤만에 두 사람 사이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가족 사이처럼 느껴지도록 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남녀의 일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배갑손이 자백을 했습니다."


추 경감이 우리를 보고 말했다. 강 형사가 종이컵 커피 넉 잔을 자판기에서 뽑아 가지고 들어왔다. "허정화 양의 살인범이 배갑손 사장이란 말씀이죠?" 민훈이 커피를 훌훌 마시며 말했다. "아직...... 아직 그건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틀림없습니다." 강 형사가 대답했다. "아니 자백했다고 하신 것은......" "아하, 그건 배갑손이 사람을 시켜 평택의 허정화 양 아버지를 습격한 것과 민훈을 습격하고 일기장을 뺏어간 것 등을 자백했습니다. 그 거대한 다이아몬드는 배갑손의 손에서 허정화에게로 건너갔던 것입니다." 추 경감이 지포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켜려고 철거덕거렸다. "나쁜 녀석. 미스 허를 죽인 것도 그 녀석일걸." 민훈은 상처났던 머리를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배 사장이 왜 보석을 정화에게 주었어요? 정화가 훔쳤나요?" 내가 물어보았다. "약점을 잡힌 거죠. 아니 약점이라기보다 허정화의 함정에 빠진 거죠." 강 형사가 말했다. "함정이라뇨?" "허정화가 배갑손을 유혹했을 겁니다. 이게 웬 떡이냐고 유혹에 걸려든 배갑손은 나중에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겠지요. 대가를 내놓으라고 할 때에야......" "거 저속한 표현 좀 쓰지 말게. 떡은 무슨 떡이야. 그리고 그런 불확실한 추측을 해서는 안 돼. 증거도 없는 일이잖아." 추 경감이 지포라이터 켜는 일을 포기하고 강 형사를 나무랐다. "민훈 씨를 부른 것은 피해자 조서를 받기 위한 것입니다. 배갑손이 사람을 시켜 민훈 씨에게서 그 일기장을 뺏어 오라고 했던 것을 자백했습니다." 추 경감이 사무적인 말투를 썼다.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틀림없이 그 사람이 허정화도 즉였을 것입니다." 민훈이 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상당한 혐의점이 있습니다. 다만 동기가 아직 불투명하고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합니다." 추 경감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틀림없어요. 이제 사건은 끝난 것입니다. 그 녀석이 허정화를 건드려 놓고 책임질 수 없으니까 처치한 것이지요 뭐. 우리가 이 짓 한두 번 했습니까? 척 보면 삼천 리 아닙니까? 허정화가 보통내깁니까? 배갑손 같은 늙은이에게 그냥 바칠 것 같습니까? 얼마나 악착같은 여잔데...... '밤에 뜨는 무지개'까지 주어가면서 달래보았지만, 더 견딜 수 없으니까 없애 버린 것 아닐까요." 강 형사는 두 팔을 휘저어 제스처를 쓰면서 설명했다. "쓸데없는 탁상공론 그만하고 민훈 씨 조서나 받아." 추 경감이 다시 나무랐다. "살인미수, 폭행으로 할까요?" "평택 건은 살인미수가 될지 모르지만 민훈 씨 건은 안 돼. 폭력교사." 추 경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나갔다. 민훈이 조서를 끝낼 동안 나는 구석의 낡은 나무의자에 앉아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그 동안에 석간 신문이 배달되었다. 이곳저곳을 뒤적이다 사회면 구석의 조그만 기사에 눈이 갔다. 여대생 살인범 체포 범인은 불륜관계 부동산업자 이런 제목이 눈에 띄었다. 기사를 읽어 보았다. 조철구 변호사 집에서 피살된 여대생 가정교사의 범인이 사건 발생 40 일 만에 체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부동산 업자인 배갑손이 그 집에 드나들며 여대생과 불륜관계를 맺은 뒤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약물중독을 가장, 독살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이런 저런 일들을 마치 결론이 난 듯이 단정적으로 씌어져 있었다. 나는 추 경감이 이렇게 발표를 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서 작성을 마친 민훈과 나는 롯데 쇼핑 센터 식당가에 올라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우리 언제 결혼하죠?" 안동 칼국수 한 그릇을 후딱 해치운 나는 느긋하게 웃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는 민훈에게 물었다. "어젯밤은 황홀했어."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이 짓궂기도."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어쩔 줄 몰라 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황홀했다는 표현이 나의 경우는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다. 그러나 그런 돌발적인 미친 짓이 나와 민훈을 한 티케트로 묶는 일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이제 꼼짝 없이 민훈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다. "나 민훈 씨에게 꼭 따져두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뭔데? 결혼식 올리기 전에 끝내자구." "좋아요. 정화 얘긴데......" 나는 한참 동안 정면으로 민훈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과 선명한 콧대가 그를 사나이다운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미소를 머금은 그의 표정은 믿음직스러웠다. "정화?" 그는 입을 벌린 채 나를 응시했다. "정화 같은 아이가 당신 같은 멋진 남자를 그냥 두었을 턱이 없어요. 용서해 줄 테니 바른 대로 대요. 정화하고 섬씽 있었죠?" 나는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으나 이 대목에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바보!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아이 같아?" 그도 내 흉내를 내서 아이란 말을 썼다. 나는 그의 말이 비록 거짓일지라도 믿고 싶었다. 든든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민훈을 결혼 대상자로 결정하자 웬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결혼 생활을 생각하며 정신없이 며칠을 보낸 뒤였다. 강 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허정화 사건으로 의견을 들을 것이 있으니 좀 만나자고 했다. 허정화 사건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진데 강 형사가 그것을 핑계로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것은 딴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평소 그의 눈짓이 보통 남자와는 다르다고 느꼈었다. 어쩌면 나를 은근히 좋아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틈만 나면 자기가 노총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장가를 못 간 것이 아니라 마땅한 신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나는 견해가 달랐다. 별볼일 없는 말단 형사에 생김새도 그저 그랬다. 나이도 30 대 중반이나 되었는데 누가 시집가겠다고 선뜻 나서겠는가?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오시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멋진 곳으로 안내하죠."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웃을 뻔했다. 넥타이 언더셔츠 깃 좁은 양복저고리 그리고 가슴에 꽂은 손수건. 기름을 발라 번들거리는 머리. 시골뜨기가 멋을 낸 모습처럼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어릿광대의 인상을 그대로 퐁겼다. "오늘 멋 좀 내셨군요." 나는 미소를 억지로 지어보였다. 우리는 강남에 새로 생긴 큰 호텔의 옥상 뷔페 식당에 갔다. 강 형사는 즐거운 모습이었다. "배갑손을 체포했으니까 사건은 끝난 거군요. 왜 죽였대요? 역시 '밤에 뜨는 무지개'를 도로 찾기 위해서였죠? 아니면 정화가 돈을 더 내놓으라고 했었나요? 안 내놓으면 혼인빙자 간음으로 고소한다고 했나요? 걔는 그런 것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거예요." 내 말을 듣고 있던 강 형사가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그럼 정화가 배갑손과 양윤임 여사의 불륜관계를 알아 냈었나요?" "아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 강 형사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혹시 그랬나 해서예요." 나는 일단 시치미를 떼고 딴 소리를 했다. "밤에 뜨는 무지개를 되찾으려고 민훈 씨를 습격하게 하고 허정화의 아버지를 습격한 것은 배갑손 집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살인미수 등으로 기소될 것입니다. 그러나 허정화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예?"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럼 범인은 누구예요?" 강 형사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조석호 씨예요? 조윤호 씨예요?" 강 형사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범인에는 흥미가 없는 듯 내 젖가슴과 히프께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범인은 양윤임 여삽니다." 한참 뜸을 들인 강 형사가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범행을 자백하고 지금 검찰청으로 송치되었습니다. 오늘 미스 장을 초대한 것은 사건


해결을 기념해 제가 한턱 내려는 것입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예? 양 여사가 범인이라구요?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요? 왜 그랬대요? 뭣 때문에......"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정화의 쾌활하고 낙천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동기는 아주 엉뚱한 곳에 있었습니다. 조희숙의 삼촌, 그러니까 양윤임 여사의 시동생에 대해 들은 일이 있죠?" "예." "양윤임 여사 처녀 때의 일 말입니다. 지금 남편인 조철구 변호사가 총각일 때 그들 형제가 함께 양윤임 씨를 사랑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요.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라이벌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양윤임 여사가 조철구 씨와 결혼하게 되니까 동생이 자살해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런 비극을 안고 출발한 희숙이네 집에서는 항상 어둡고 침울한 안개가 가득차 있는 것 같았어요. 다른 유복한 가정과는 달랐어요. 그 집에 가정교사로 처음 갔을 때부터 섬뜩하고 불행한 그림자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조철구 변호사의 주변이나 양윤임 여사의 얼굴에서 원한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느꼈다면 대단한 육감입니다. 나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끼지 못했었지요. 그런데 양윤임과 조철구, 두 사람, 그 세대에 있었던 비극이 또다시 대를 물려 싹트고 있었습니다." 강 형사는 훈제한 양고기를 두 접시째 가져다 먹었다. "그렇군요. 조석호, 조윤호 형제와 허정화...... 어쩌면......" 나는 그 비극이 2 대에 걸쳐 일어나려고 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끼쳤다. 운명의 신도 너무 장난이 심하지 않았는가? 허정화는 남편감을 고른다는 핑계로 두 형제를 함께 농락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양윤임 씨는 자기 세대의 비극을 자식대에 넘겨 주고 싶지 않았겠죠. 처음엔 조윤호나 좋아하는 줄 알고 결혼을 반대했으나 나중엔 두 형제가 다 허정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양 여사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지요. 허정화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 형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날 밤, 그러니까 허정화가 피살되던 8 월 3 일


밤이었다. 저녁 8 시쯤 잠옷으로 갈아 입고 막 침대에 들어가려는 순간에 조석호가 불쑥 정화 방에 나타났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다짜고짜 정화의 몸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정화가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윤호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실험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몰랐다. 바싹 달아오른 조석호는 강제로 정화를 가지려고 덤볐다. 그러나 정화가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서로 잡고 방 안을 뒹구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정화의 검시 때 목 왼쪽, 어깨, 무릎 등에 울혈 현상이 있은 것은 이때 생긴 상처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육체적인 공방전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조석호는 그대로 정화의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 조석호가 정화의 방에서 옷이 흩어진 모습으로 나오는 것을 마침 복도를 지나던 어머니 양윤임 여사가 목격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화 제거를 노리고 있던 양 여사는 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집안을 구할 수 없는 비극의 심연에 빠뜨리기 전에 정화를 빨리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 침대 밑에 깊숙히 감추어 두었던 독약 비소병을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친정 친척에게 부탁해 비소를 구해 두었었다. 이것은 뒤에 추 경감이 낱낱이 밝혀 내 살인증거로 확보되었다. 양 여사는 비소를 음료수에 타 가지고 정화 방으로 갔다. 비소는 냄새나 색깔이 없을 뿐 아니라 좀체 성분 검사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음료수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정화는 다시 잠을 청하려다 친절하게도 희숙 어머니가 손수 들고 온 음료수를 고맙게 받아 마신 뒤 잠들었던 것이다. 뒤에 그녀의 피부에서 약물 중독 현상이 나타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 그 타이프 라이터로 친 유서 같은 것은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물었다. "양윤임 씨는 음료수를 마시고 혼수 상태에 있는 허정화 앞에 타이프 라이터를 가져다 놓고 허정화의 팔을 들고 허정화의 손가락으로 타이프 라이터 키를 치게 했지. 그러니까 거기엔 허정화의 지문만 선명하거든." "나쁜 여자야. 남편 몰래 배갑손과 더러운 짓을


하더니......"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떨었다. "이거 데이트를 방해해서 미안한데......" 그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뜻밖에 민훈이 우리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아니......" 나는 공연히 나쁜 짓하다 들킨 어린이 같은 기분이 되었다. "강 형사님 오랜만입니다." 민훈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사건이 해결되었기에 장을자 씨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나......" 강 형사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누가 뭐랬나요? 그 옷 참 잘 어울립니다. 찰리 채플린이 멋을 낸 것 같군요. 하하하." 민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자 식사 끝났으면 갑시다. 오늘 반지 맞추기로 했잖아요. '밤에 뜨는 무지개' 같은 다이아몬드는 아니지만......" 나는 강 형사에게 고개만 끄떡 하고 끌리다시피 민훈에게로 갔다. '이 남자가 내가 여기 온 걸 어떻게 알았을까? 결혼하고 나면 꼼짝도 못하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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