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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김래성 추리소설 ----- 차 례 ----I. 비밀(秘密)의 문(門) 1. 괴도의 그림자 2. 세 사람의 구혼자 3. 불길한 예감 4. 무명의 편지 5. 무서운 협박장 6. 정각 12 시 7. 목적은 달했다 8. 애인을 위하여 9. 어둠속의 그림자 10. 그림자의 정체 II. 이단자(異端者)의 사랑 11. 사랑의 집 12. 붉은 침실 13. 사화장 14. 첫사랑 15. 안해를 죽이기까지 16. 수밀도를 따는 날 17. 인육을 먹는 사나이 18. 과학자의 사랑 III. 19. 20. 21. 22. 23. 24. 25. 26.

악마파(惡魔派) 강자와 약자 제 1 의 악마파 제 2 의 악마파 악마의 가무 악마의 축전 걸작 '빈사의 마리아' 유작전시회 시승지옥

IV. 백사도(白蛇圖) 28. 정체없는 화가 29. 미모의 청년 30. 황혼의 소녀 31. 무녀춘랑 32. 백사와 이야기하는 여인


33. 34. 35. 36. 37. 38.

사녀의 연가 제 1 차의 공포 제 2 차의 공포 황금색의 악몽 난무하는 격정 복수의 노래

V.벌처기(罰妻記) 39. 범죄사실 40. 범죄동기(犯罪動機) 41. 범죄발각

I. 비밀(秘密)의 문(門) 1. 괴도(怪盜)그림자 '그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던 무서운 도적이 서울 장안에 나타나서 한 개의 커-다란 흥분을 시민들에게 던져준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 그 때도 요즈음처럼 종로 네 거리의 아스팔트가 엿 녹듯이 녹아 나가던 팔 월 중순, 뜨거운 태양이 바로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불타듯이 이글이글 내려 쪼이던 무더운 삼복더위였다. 여러분도 아시다 시피 그림자는 실로 기상천외한 재주를 가진 도적이었다. 누군가 그를 가리켜 그림자라고 불렀는지 영예스러운 이름을 조금도 훼손치 않으리 만큼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지고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나타나서 그림자처럼 사라지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도 역시 그림자라고 불리우는 것을 결코 불명예라고는 생각지 않음인지, 그는 협박장 맨 끝에는 반드시 "너희들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사나이로부터---." 라고 서명이 박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실 사내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누구하나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시커먼 그림자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곤 하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는 반드시 타이프라이터로 박은 편지로 미리 예통을 한 후에야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림자는 아무 날 아무 시 아무 장소에 나타나서 무엇 무엇을 가져가겠다고 꼭 통지를 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경비를 엄중히 하여도 그날 그시 정각만 되면 그림자가 가져 가겠다던 물건은 감쪽같이 없어지곤 하였다. 그것은 실로 요술사와 같은 무서운 재주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림자가 서울에 나타나서 약 한달 동안에 훔처간 금품은 물경 수백만 원에 달하였고, 금품 이외에 유명한 미술품 같은 것도 수 없이 없어졌다. 유명한 탐정들이 수십 명씩 모였으나 그림자는 그 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년이 지나고 이테가 지나고 삼년이 지난 이즈음에 와서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는 벌써 옛말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다시 평화와 안식 속에서 그날 그날을 즐거이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군이여, 이야기가 여기서 그쳐서는 아니될 것이 아닌가? 마술사와도 같은 그림자의 후일담(後日譚)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청운동에서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아담한 양옥이 한채 외인편 숲 새로 바라다 보이는 것을 제군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거들랑 지나든 길에 장난 삼아 한 번 그 조그만 숲 샛길로 들어서서 양옥 정문 앞까지 걸어보라. 그러면 세파-드를 정문 앞에서 발견할 것이다. 세파-드는 고 뾰족한 두 귀를 바짝 추겨 세우고 앞 발을 한 번 적숙 굽혔다가 훅하고 일어서자마자 제군을 향하여 컹컹 짖으면서 쏜살같이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제군이 만일 악인이 아니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세파-드를 맞이하라. 그리고 만일 제군이 그 어떤 흉악한 마음을 품은 자라면 곧 발굼치를 돌려 도망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세파-드는 제군의 채리채림과 제군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핌으로써 가슴속에 품은 제군의 마음을 곧잘 헤아릴 수 있는 실로 놀라울만한 동찰력을 가진 영리하고도 사나운 개였다. 엉거주춤 하니 앉아서 그 집 정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것을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자기의 떳떳한 직책으로 알고 있는 가장 충실한 짐승이다. 그러니까 선량한 마음을 가진 제군이라면 조금도 서슴지 않고 정문까지 걸어가도 괜찮을 것이며 거기서 제군을 대리석 문패에 강세훈이라는 글짜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니 그때야 비로서 제군은 [하하, 그랬던가!] 하고 머리를 끄떡일 것이다. 강세훈 박사--- ! 그렇다. 제군은 신문지상이나 혹은 잡지 같은데서 살인광선(殺人光線)연구자로서 유명한 알고 있을 것이며 다년 간 연구중에 있던 그 무서운 살인광선이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거의, 거의, 완성에 가까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줄로 믿는다. 제삼차 세계대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즈음,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앞을 다투아 가면서 신병기 발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즈음에 강세훈 박사의 살인광선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비단 우리들만의 자랑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경이의 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해외의 신문지는 구라파 어느 나라에서 살인광선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때때로 전하지 마는 그것은 모다 허위의 풍설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세계각국이 서로 먼저 이 무서운 병기 살인광선을 틀림없는 사실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극히 소규모의 것임으로 실전쟁에 사용하기까지는 아직 기나긴 시일을 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증거로 이번에 일어난 세계 대전에서 아직 살인광선을 사용한 나라는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그간의


소식을 넉넉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근래의 전쟁은 과학의 전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마지노선이 그처럼 쉽사리 격파된 것은 첫째로는 불란서의 작전상의 오산도 오산이려니와 무엇 보다도 정예한 독일의 기계화 부대의 힘이 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여튼 그처럼 전세계가 충혈된 눈동자로 연구 도중에 있는 살인광선이 극히 대규모로 완성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전세계가 몸부림칠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강세훈 박사의 노력이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그의 반생을 피눈물로 적시어버린 실로 비장하고도 눈물겨운 희생의 선물이었다. 강세훈 박사는 벌써 오십의 고개를 넘어선 중늙은이로서 그 불타는듯한 연구심과 견고한 의지는 그로 하여금 삼십 년 동안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오로지 살인광선 연구에 바쳐 왔었다. 오륙 년 전까지는 그래도 S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인제는 그것 마저 그만두고 밤이나 낮이나 컴컴한 대학 연구실에 파묻혀서 전심전력 거의, 거의 완성되어 가는 자기의 연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강 박사도 역시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아무데도 쓸모 없는 하나의 비참한 낙오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 온 사람이다. 그의 청춘은 연애라는 것을 몰랐고 그의 사회생활은 친구라는 것을 몰랐고 그의 노년은 가정이라는 아기자기한 낙원을 몰랐다. 컴컴한 연구실이 그의 생활 전부를 점령하였고 번쩍번쩍 빛나는 연구 도구가 그에게 있어서는 애인이요 친구요 자식이었다. 따라서 과학자로서의 그의 냉정한 피는 그의 가정을 쓸쓸한 사막처럼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맺게 된 것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것이다. 2. 세 사람의 구혼자(求婚者) 영채(英彩)는 강 박사의 무남독녀


외딸이건만 지금까지 통 아버지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도 처음에는 다른 집 가정과 어딘가 공기가 다른 자기네 가정을 저윽히 기이하게도 여겼었으나 그러나 철이 들어 아버지가 세상 사람의 존경을 한몸에 걸머 쥔 훌륭한 과학자라는 사실을 알자, 영채는 자식으로서의 애정을 아버지에게 느낀다는 것 보다도 먼저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의 존경을 가지고 아버지를 우러러 보는 습관을 갖게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린 영채의 가슴 속에는 다만 "아버지는 훌륭한 학자이시다." 뚜렷이 도사리고 있을뿐, 다른 애들이 항상 아버지에 대해서 품을 수 있는 그러한 친애의 감정을 통 모르고 자라난 영채였다. 그것은 다만 영채 뿐만이 아니라 남편에게 대하는 영채의 어머니의 감정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다른 부부들과 같은 애틋한 정이란 대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영채의 어머니로서는 통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채의 어머니는 남편에 대해서 불평이라던가 불만 같은 종류의 감정을 품은 적은 꿈에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남편으로 하여금 그의 맡은바 직책을 충분히 다 할수 있도록 자기의 모든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와같은 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영채로서도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존경을 다하여 아버지를 대해 왔었던 것이다. "영채야, 너의 아버지는 훌륭하신 학자이시다. 세상 사람이 모두 우러러 보는 그와 같은 아버지를 모신 너는 오죽이나 행복이냐. 너두 부지런히 공부를 해서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돼야한다. 아버지의 낯을 더럽히지 않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하는거야." 그러한 말을 어머니의 입으로부터 들을 때면 영채는 그 영리한 눈동자로 어머니의 기색을 잠깐 동안 살피고 나서


"네---." 그러나 영채가 여학교 일학년 때 어느 날 작문 시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쓴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라는 제목이었었는데 그 중의 한 구절을 소개해 보면 이러하다. "......나의 아버지는 세상이 모다 우르러 보는 훌륭한 학자라고 한다. 나의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나도 역시 그렇게 믿고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감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리고 그와같은 훌륭한 아버지를 가진 나로서는 당연히 행복을 느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훌륭한 아버지를 갖고 싶지 않다. 일요일이면 나와 동물원엘 가 주시고 밤이면 나에게 옛말을 싶다......." 이와같은 영채의 글을 읽은 담임선생은 그 후 어떤 기회에 강 박사를 만나 영채의 쓸쓸한 심정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강 박사는 빙그레하고 한번 웃으면서 "전해주신 말씀 잘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물원 구경으로 말미암아 하루동안을 소비하고 옛말로 하루 저녁을 지날 그러한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고 차디찬 대답으로 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채는 슬픔을 눈물로서 위로하는 달콤한 감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모든 슬픔과 모든 곤경을 어디까지든지 자력으로서 개척하고저 하는 가장 이지적이고 가장 건전한 성격의 나아가서 슬픔과 곤경을 웃음으로서 위로하고 개척하고저 하는 일종의 풍자적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영채의 성격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 서정시(敍情詩)에 한숨을 짓는 감상 많은 소녀들을 비웃었고 실연의 고배를 마시고 눈물짓는 동무들을 비웃었다. 이리하여 삼년 전, Y 전문학교 문과를 나온 영채는 가장 명랑한 [아이로니스트]로서 동료간에 알리워졌던


것이다. 전문학교를 나온지 벌써 삼년---영채는 올해 들어 스물 셋이다. 혼담이 비오듯이 내리는 금방석 위에 올라 앉은 영채이건만 그러나 영채는 통 결혼할 의사를 표시하지 서글프게 하였다. 그것도 가만이 방안에 들어 앉아서 시집을 안 가겠다고 발버둥을 친다면 또 모르거니와 영채에게 남자동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어머니는 더한층 걱정하였다. 방임주의를 취하는 강 박사는 영채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던 통 내 알바가 아니란 듯이 그저 그 컴컴한 연구실 안의 세계를 향락할 뿐, 영채의 어머니가 아무리 걱정을 하여도 "그저 다 저 될대로 되는거요. 내버려 둬요." 하고 통 딸의 행동에는 조그마한 간섭도 할 생각을 갖지 않는 남편을 어머니는 무척 나무래는 것이었다. "그래두 어디 그렇수? 처녀의 방에 보구만 있을 수가 있어요? 그 애는 어미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걸요. 일을 저지르기 전에 어서 당신이 좀 톡톡히 타일러 보구려. 그래두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열 마디의 한 마디쯤은 귀담아 들을지두 모를 테니까---." 그래도 강 박사는 모다가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돌리는 것이었다. 사실 영채에게는 남자 동무가 너무나 많았다.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도 영채가 가장 가깝게하는 청년이 세 사람 있었다. 그 하나는 강 박사의 연구실에서 조수 노릇을 하는 윤정호라는 독실한 청년학도였다. 강 박사는 비록 자기 딸 영채에게 그것을 입 밖에 내서 말한 적은 없었으나 마음으로는 은근히 이 윤정호를 영채의 어머니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얘, 영채야. 여자란 혼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법이란다. 아버지두 그렇구 나두 그렇구, 인제 한 번이라두 네가 싫어하는 혼담을 강권한 적이 있드냐? 어서 네 마음대로 누구든지 한 사람 고르려므나.


---그런데 얘 영채야, 말이 났으니 말이지, 너희 아버지께서는 비록 그런 말씀을 하시진 않아두 저어 아버지 연구실에 있는 윤선생을 무한 눈여겨 보나 부더라. 그리구 너두 그처럼 윤선생을 가까히 하는걸 보니...... 그래 너는 그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나야 뭘 아니, 그저 네가 좋다면 좋은줄 알지." 하고 어머니가 무릎 걸음으로 다가들면 "아버지가 좋으시면 제게도 좋죠 뭐......." 단지 그것 한마디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좋다면 영채에게도 좋다는 말에 어머니는 조금 샐쭉해 졌다. 어째 그러냐 하면 어머니는 저 남일 은행 두취의 아들 김중식이란 청년이 마음에 꼭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제일 마음 놓구 교제할 수 있다는 김중식이란 사람은 어떠냐? 부자의 아들 치고는 여간 착실한 사람이 아니라구 네가 늘 칭찬하던 그 사람 말이다. 그래 그 사람이면 결혼하고 싶으냐? 여기 놀러 오는걸 나두 여러 번 보았지만 정말 그런 사위를 한 번 맞아보구 싶더라." 그러면서 어머니가 딸의 얼굴 빛을 살필 "어머니께서 좋으시면 뭐 제게도 좋죠 뭐."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잠깐동안 어이가 없어서 잠자코 있다가 이번에는 인자한 웃음을 얼굴에 띠우면서 "오오, 이제야 내가 네 마음을 알았너니라. 그래 너는 저 가난뱅이 이야기꾼 백일평이라는 사람을 그 중 좋아 하는구나." 하고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니두, 참! 소설가라구 그렇게 알려 드렸는데두 그냥 이야기꾼이라구만 그러셔!" "그래 그 소설가 말이다. 그 이가 네게는 제일루 마음에 드는구나. --- 그야 뭐, 가난하면 어떠냐? 네가 좋다면 의사가 있느냐?" 그러나 영채는 웃으워 죽겠다는 듯이 "아이, 어머니두 참! 누가 결혼하겠다구


그런것 같으셔? 전 아직 아무허구두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리고는 벙벙해하는 어머니를 힐끗 쳐다보고는 제 방으로 건너가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어머니로서 딸의 마음의 갈피를 통 잡을 수가 없었다. 윤정호도 그렇고 김중식도 그렇고 또 백일평도 그렇고, 모두가 다 영채에게 대한 열렬한 구혼자임을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으며 영채로서도 그 세 사람을 특별히 가깝게 하고 있는 것을 매일처럼 목도하는 이즈음이었다. 3. 불길(不吉)한 예감(豫感) 제군이여, 용서하라! 필자는 이때까지 탐정소설 답지 않은 이야기를 너무 지리하게 했나보다. 이러다가 어느 대중작가의 서푼 짜리도 안 되는 연애소설이 될 것이 아닌가?...... 탐정소설을 즐기는 제군이여. 그러나 안심하라! 삼년 전에 서울 장안 칠십만 시민을 흥분과 공포 속에 쉽쓰러버린 저 무서운 그림자가 우리의 자랑과 존경을 한 몸에 걸머진 강세훈 박사의 살인광선을 노리기 시작한 것은 바루 이러한 때였다. 강 박사가 사나운 세파-드를 문지기로 세워 놓은 것도 그러한 위험을 방지하고져 한 때문이며 조수 윤정호를 거의 매일처럼 침실에서 밤을 세우도록 한 것도 실은 살인광선의 설계도(設計圖)를 도난으로부터 구할 의향에서 부터였다. 강 박사는 아침부터 밤까지 대학 연구실에서 연구의 결과를 실험하고는 집으로 돌아올 때는 성실한 조수 윤정호를 동반하여 그 비밀설계도를 자기가 몸소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비밀설계도는 강 박사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었으며 만일 자기의 생명과 바꾸는 한이 있을지라도 이 설계도 만은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채의 생일 날을 바로 사흘 앞둔, 어느 무더운 밤이었다.


그날 밤---영채는 사흘 후 자기 생일에 곧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늦게 연구실로부터 돌아온 강 박사와 윤정호는 저녁을 먹은 후에 영채의 어머니와 세 사람이 응접실에서 과일을 깎으면서 한담에 꽃이 피어 있었다. 그러나 열 한시가 거의 가까웠을 때, 윤정호는 먼저 자야겠다고 하면서 침실로 돌아갔는데 영채가 외출로부터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십분 후의 일이다. "아버지!" 영채는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 오면서 그렇게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이상한 사람이......." 무엇에 놀랬는지 영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었다. "이상한 사람이라니?......" "이상한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니고 무슨 시커먼 그림자가 쑥 지나 거겠지요. 저편 아버지의 서재 들창 밖에서......." "시커먼 그림자?" 옆에 앉었던 어머니는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한 번 되풀이하면서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시선으로 늙은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엿 보았다. "시컴헌 그림자가 서재 들창 밖에서?......" 서재의 들창 밖이라는 한 마디는 사실 강 박사에게 커-다란 충동을 던저 주었던 것이다.조금아까 연구실로부터 가지고 온 가방---저 살인광선의 설계도가 들어있는 가방이 서재 테이블 위에 놓여있지 않는가!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강 박사는 마치 총알에나 얻어맞은 듯이 후닥닥 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채도 아버지가 말한 그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서 깨달은 듯이 새파랗게 변한 얼굴을 무섭게 긴장시키며 "아버지, 설계도...... 설계도를 빨리......." 하고 고함을 치면서 아버지보다 먼저 응접실을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딸의 뒤를 따라 아버지도 뛰어 나갔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머니도 뛰어 나갔다. 응접실 바루 옆방이 강 박사의 서재였다. 그리고 그 서재 바루 옆방이 윤정호와 강 박사가 자는 침실로 서재로 뛰어 들어간 영채는 무엇 보다도 먼저 뜰에 면한 들창을 바라 보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들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 테-블 우에는 여전히 가방이 놓여 있었다. 강 박사는 뛰어가자 가방을 열고 설계도를 조사하였다. "있다, 있다!" 기쁨에 넘치는 강 박사의 부르짖음이다. 삼십년 동안 피눈물로 빚어놓은 결정---살인광선의 설계도는 온전하다. 그때야 비로서 옆방 침실에서 자고 있던 윤정호가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쑥 들어 오면서 "대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일동을 바라 보았다. 서재 안을 드려다 보드라구...... 영채가 그것을 보았다구---." 영채의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면서 설명하였다. "시컴한 그림자가요?" 깜짝 놀라는 윤정호의 목소리다. 사람들은 들창을 열어 재치고 우거진 숲 새로 청운동 일대를 내려다 보았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는 다만 캄캄한 어둠과 살랑살랑 숲 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만이 있을 뿐이다. "영채야, 네가 잘못 본게 아닌가?" 이으코 강 박사가 침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영채는 아무 대답도 없이 드넓은 시선으로 이잡듯이 뒤지고 있을 뿐이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무슨 불행이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4. 무명(無名)의 편지


이상한 불안 속에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강 박사 부부는 마침내 자기 딸 영채의 생일날을 마지하게 되었다. 저번날 밤, 서재 들창 밖에서 무엇인가 시커먼 그림자가 바람처럼 쑥 지나 가더라는 말을 영채에게서 들은 후부터 그렇지 않아도 평시에 자기 주위를 무척 주의하던 강 박사는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불길을 신변에 느끼고 한층 더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 박사는 충실한 조수 윤정호를 자기와 곡 같은 침실에서 재웠으며 저 귀중한 살인광선의 설계도는 어떠한 일이 조그마한 금고 속에 넣어두고 자물쇠를 굳게 잠궈 두었다. 그리고 그 금고의 열쇠는 언제든지 자기 벼개 밑에 감추어 두었다. 영채의 생일날은 왔다. 영채의 늙은 어머니는 그날 저녁, 딸이 가장 가까이 하는 동무들을 십여 명 청하게 하고 간단한 만찬을 베풀어서 하루 저녁을 즐겁게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늙은 어머니로서는 남자 동무들 중에서도 영채가 가장 친하게 지나는 세 청년---강 박사의 조수 윤정호와 남일 은행 두취의 아들 김중식과 그리고 저 가난뱅이 이야기꾼 백일평, 이 세 청년을 청하게 하여 한 번 더 자세히 자기 눈으로 사위감이 될 만한 사람을 것이다. 만찬은 여섯 시가 좀 지나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날 만은 강 박사도 일찌기 연구실에서 돌아와 그들 젊은이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즐거이 저녁을 나누으며 담화를 바꾸었다. 이날 저녁 여기에 모힌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화제를 가지고 만찬회를 리-드하다시피 한 것은 김중식이었다. 재작년 T 대학 경제과를 마치고 지금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보고있는 김중식은 한마디로 말하면 교양있는 현대 지식층을 대표할 만한 건실한 청년이다. 그의 정확한 상식과 고상한 취미와 세련된


화술은 이날 저녁의 만찬회를 가장 명랑하게 하였고 즐겁게 하였다. 성격을 가진 것은 윤정호였다. 사회생활과는 거의 절연하다 싶이한 강 박사의 성격을 한 점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본받은 것 같은 윤정호는 가져다 주는 요리를 한편 구석에서 묵묵히 먹어 치울 뿐, 묻는 말 이외에는 단 한 다미라도 자진하여 이야기를 꺼내는 적이 없는 청년이다. 소설가 백일평은 김중식과 윤정호의 중간을 걷는 성격으로서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섬세한 감정과 예민한 동찰력이 항상 떠돌고 있었다. 영채는 그들 세 사람의 청년을 번갈아 바라다 보며 지나간 날, 그들 세 청년이 자기에게 준 똑같은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내 목숨 보다도 더 한층......." 그런 말을 영채에게 하소연할 때,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쩍거리던 것을 영채는 다시 한 번 회상해 보았다. 그러나 영채의 이 호화로운 회상은 그때 어멈이 들고 들어온 한 장의 편지로 말미암아 그만 무참히도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편지인뎁쇼." 그러면서 어멈은 주소 성명을 타이프라이타로 찍은 한 장의 흰 봉투 뒷등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뒷등에는 발신인의 성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데서 왔을까?" 강 박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봉투를 일동은 잠깐 동안 식사를 중지하고 강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고?...... 처음에는 무심중 들여다보던 늙은 강 박사의 주름 잡힌 얼굴이 점점 긴장미를 띠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그 어떤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버리질 않았는가! 편지를 든 두 손이 키질 하듯이 와들와들 떨린다. "아버지!"


하고 영채가 불안스러운 얼굴로 불렀을 때 옆에 앉은 윤정호가 "선생님, 무슨 편지길래.......?" 하고 목을 늘여 강 박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 박사는 혼란한 흔들고 나서 "아, 여러분 ,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잠깐 착각을 해서 그만...... 어서 식사들이나 하시우." 하고 일동을 불안으로부터 수습하려는 듯이 "나이를 먹으면 그만 때때로 정신에 혼란이 생기는구먼......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나 강 박사의 웃음은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이 아니었다. 어딘가 한편 구석이 텅 비인 웃음, 어딘가 한편 구석에 공포를 실은 웃음이었다. 강 박사는 총총히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는 먼저 실례하겠소. 천천히들 잡수시우." 그리고는 밖으로 나갈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다 보며 "윤 군과 김 군, 그리고 백 군, 식사가 끝나거든 날 좀 봅시다. 서재로 좀 와 주시우." 강 박사는 편지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5. 무서운 협박장(脅迫狀) 이윽고 식사는 끝났다. 영채는 자기 동무들과 안방으로 들어가고 윤정호와 김중식과 백일평은 제각기 긴장한 얼굴로 강 박사의 서재로 갔다. 그들이 서재로 들어 갔을 때, 늙은 강 박사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심각한 공포의 표정을 양미간에 그리고 있었다. "아, 거기들 앉으시우." 강 박사는 그들에게 앉기를 권하였다. "선생님, 대체 무슨 편지옵니까?"


저번날 밤, 시컴헌 그림자가 들창 밖으로 지나 가더라는 말을 영채에게서 들은 윤정호는 호기심과 불안을 억제하지 못하고 강 박사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고 강 박사는 길고도 깊은 신음을 한 번 한 후에 "여러분,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소?" 하고 강 박사는 젊은이들의 힘과 지혜를 빌고저 하는 듯이 애원하는 시선을 세 사람에게 던졌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요." 하고 김중식도 상반신을 테이블 위에 내밀었다. "음---." 하고 강 박사는 다시 한번 신음하고 나서 "제군은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 그림자라는 무서운 도적이 서울에 나타났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요." "그림자?" 부르짖었다. "그렇소! 그림자는 실로 무서운 재주를 가진 도적이라는 사실을 제군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 그림자는 다시 서울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의 살인광선을......." 강 박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엣?" 하고 세 사람은 일시에 외쳤다. "그림자가...... 살인광선을?......." "그렇습니다. 이것을 보시오!" 그러면서 강 박사는 주머니에서 아까 그 편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펴 놓았다. 그들은 제히 충혈된 눈동자로 그림자에게서 온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줄이 강세훈 박사여! 삼가 귀하께 아뢰우노니, 오늘 밤 열두 시 정각에 귀하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히 여기는 물건을 소생이 가져 가겠사옵기에 미리 그 뜻을 전달하여 두노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귀하에게 다져 둘 것은 귀하가 만일 경관의 보호를


원한다면 그때는 한층 더 귀하에게 있어서 나쁜 결과를 맺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양해하여 두시기 바라노라. ---너희들이 나를 가리켜 그림자라고 부르는 사나이로부터---. 협박장을 읽고난 세 사람의 청년은 "음---그림자가 살인광선의 하고 중얼거리며 극도의 불안에 잡겨있는 강 박사의 비장한 얼굴을 쳐다 보았다. "제군도 알다싶이 그림자는 불가능이라는 것을 모르는 괴도다. 그는 자기가 하고져 하는 일에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자다. 저번 날 밤, 그는 이 서재 들창 밖에서 살인광선의 설계도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 날 밤이라고요?] 일동은 놀라며 황급히 물었다. "바루 사흘 전, 외출로부터 밤 늦게 돌아오던 영채가 서재 들창 밖에서 무슨 시커먼 그림자가 바람처럼 쑥 지나가는 것을 보았지요. 그때 나는 삼년 전 서울 바닥을 헤매던 괴도 그림자를 불연듯 그는......." 그리면서 강 박사는 서재 한편 구석에 놓인 조그마한 금고를 한 번 돌아다보구 나서 "그런데,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 그 놈은 오늘 열두 시 정각에 가져간다고 했는데......." 그때 김중식은 "그래 그 설계도는 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강 박사는 잠깐 동안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저 금고 속에 있습니다." 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때 영채가 동무들을 돌려 보내고 서재로 들어왔다. 영채는 불안 속에 둘러보며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고 물었다. 옆에 앉었던 백일평이 그림자의 편지를 묵묵히 영채에게


내주었다. "아그머니나! 아버지!" 편지를 읽자마자 그렇게 부르짖으며 "그림자가!......." 하고 웨치는 영채의 얼굴이 종이장처럼 핏기를 잃어 버린다. 그때 강 박사는 "떠들지 마!" 하고 손을 들어 딸을 막으며 "하여튼 제군의 의견을 좀 들려 주시우. 편지에는 경찰에 알리면 더 나쁜 결과를 맺는다고 협박을 했는데, 그렇다고 그대로 아니요?" 그때까지 잠잖고 있던 백일평이 "하여튼 한시 바삐 경찰에 알리는 것이 좋겠지요. 더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일종의 협박에서 더 지나지 못할 것이니까요." 하고 대답하였을 때 "아닙니다! 그림자는 결코 거짓 협박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는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말을 그대로 실행하는 무서운 놈입니다!" 하고 대답한 것은 강 박사의 조수 윤정호였다. "그래요. 그 놈은 자기 말을 거역한 우리들에게 어떠한 악착한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알아요? 경관이 오던 안 오던 그 그저 그의 말대로 순순히 복종해야죠. 아그머니, 이 일을 어찌하나?" 하고 영채도 윤정호의 의견에 가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의 의견은 경찰에 알리자는 파와 알리면 안 된다는 두 파로 나누어 졌으나 결국은 그림자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경찰에는 알리지 않고 될 수 있는대로 자기네들이 몸소 살인광선의 설계도를 저 그림자의 손으로부터 보호하기로 되었다. "그러면 제군! 수고로운 대로 오늘부터 나와 같이 우리 집을 좀 지켜 주시요!" 그 어떤 비장한 결심이 늙은 강 박사의 주름잡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강 박사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


보았다. 여덟 시 반이다. 그림자가 나타나겠다는 열두 시 까지는 아직 세 시간 반이나 남었다.

6. 정각 십이 시(正刻十二時) 영채는 아버지의 얼굴을 무서움에 찬 눈동자로 힐끗 바라보며 "아버지, 정문을 잠궈야죠. 그리구 뒷문도 잠그구......." "음---윤 군, 자네가 나가서 모두 잠그고 들어오게. 그런데 영채야, 여자 손님들은 다 돌아 갔느냐?" "네, 벌써들 돌아 갔어요." "어머니는 안방에 계시냐?" "네, 어머니는 벌써부터 주무셔요." "음, 그러면 어머니는 깨우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리구 너두 네 방으로 건너가 있거라. 아무 염려 말고 빨리 가거라." 그러나 영채는 온 몸을 보들보들 떨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를 무척 두려워 하였다. "아버지, 무서워서...... 어떻게 혼자......." 그러나 그림자가 나타나겠다는 서재에 있는 것 보다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영채로서는 안전할 것이었다. "암말 말구 어서 건너가 자거라. 여기는 도리어 위태하니까---" 김중식과 백일평도 강 박사의 말을 옳다 여기고 자기 방으로 건너가기를 영채에게 권하였다. 이리하여 영채는 하는 수 없이 자기 방으로 건너가고 이윽코 윤정호는 정문과 뒷문을 엄중히 잠그고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금고 속에 들어 있는 설계도를 훔쳐갈 수는 없는 것이다. 윤 군, 현관도 잠궜는가?" "네, 모두 엄중히 잠궜습니다." "정원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던가?" "없습니다. 정원을 한바퀴 돌아


봤습니다만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음, 그러면 김 군, 저 들창도 잠그게. 커-튼도 내리우고......." 강 박사의 명령대로 김중식은 돌아 가면서 들창을 전부 잠그고 커-튼을 내렸다. 그리고 복도에 접한 [도어]까지도 안으로 굳게 잠궈 버렸으니 서재는 마치 뚜껑을 덮어 논 모말과도 같았다. 그림자가 사실 무슨 공기처럼 문 틈으로 새어드는 재주를 가졌으면 모르거니와 이처럼 물샐 틈도 없이 밀패한 방안에 제 어찌 감히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있으리요. 더구나 방 안에는 혈기왕성한 세 사람의 청년이 지키고 있다. 깊기 쉬운 여름 밤은 어느덧 아홉 시가 되고 열 시가 가까웠다. 세 청년은 흥분된 얼굴로 두 시간 후에 이 서재에서 일어날 그 어떤 무서운 광경을 제각기 머리에 그리며 묵묵히 앉었을 뿐이다. "선생님, 그런데 설계도는 분명히 금고 속에 넣어 두셨습니까?" 하고 그 때 윤정호는 불안에 넘치는 시선을 강 박사에게 던졌다. "분명히 넣어 두었어." 그렇게 대답은 하였으나 그러나 신경이 무슨 실수나 저지르지 않았나 하고 포켓트에서 열쇠를 끄내어 서재 한편 구석에 놓인 금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금고 속에서 조그만 서류함을 끄집어 내어 테이블 위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설계도는 틀림없이 들어 있다. 그 때 소설가 백일평이 테이블 위에 펴 놓은 설계도를 들여다 보면서 "설계도는 분명히 이것이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말에 강 박사는 눈을 부비며 펴 놓은 설계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나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틀림 없소!" 김중식도 혹시 그것이 가짜 설계도나 아닌가 하고 강 박사에게 다시 한 번 다졌으나 강 박사는 누구가 알겠소?" 하고 대답한 후에 다시 금고 속에 넣고


자물쇠를 굳게 잠궈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그 때 열한 시를 뗑뗑 쳤다. 나머지 한 시간---한 시간만 지나면 저 그림자는 금고 속에 깊이 넣어 둔 설계도를 감쪽같이 가져갈 수가 있을것인가?....... 무슨 재주로?...... 무슨 힘으로?....... 건너 방으로 건너간 영채는 인젠 잠이 든 모양인지 조금 아까까지도 켜져있던 불이 꺼졌다. 아니다. 영채는 잠이 든 것이 아닐 게다. 열 두 시가 가까왔으므로 불을 끄고 영채는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을 것이다. 열한 시 반이 되었다. 열한 시 사십 되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집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들창밖 꽃밭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한가히 들려올 뿐이다. 시계의 바늘은 일초도 거침 없이 정각 열두 시를 향하여 돌아간다. 오십 삼 분, 오십 오 분, ---사람 들은 말이 없다. 다만 비상한 긴장 속에서 서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고 있을 뿐이다. 김중식은 그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커-튼을 열어 재치고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캄캄한 어둠의 장막이 드넓은 정원을 덮어 눌렀고 머얼리 희미하게 보이는 정문 외등 밑에 세파-드가 그림자 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엉거주츰하니 앉아있다. 김중식은 그렇게 혼잣 말로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쳐다 보았다. 열한 시 오십 팔 분이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그림자가 이 분 동안에 나타날 수가 있을까?....... 흥!" 윤정호와 백일평도 김중식이 옆으로 걸어가서 바깥을 내다 보았다. "그림자가 제 아무리 귀신같은 재주를 가졌대도 오늘 밤만은 안 될껄!" "벌써 오십 구 분! 정문에서 여기까지 걸어만 올래두 일 분은 걸릴 텐데---" 사람들이 그런 말을 주고 받고 하는 동안에 시계는 정각 열두 시를 뗑뗑 치기


시작하였다. "열두 시다!" 7. 목적은 달했다.(目的은 達했다) "그림자가 나타나겠다던 열두 시다!" 강 박사는 그 순간, 복도로 통하는 문을 향하여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림자! 들어 오너라! 네가 가져 가겠다던 열두 시다!" 그러나 문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시계는 마침내 열두 시를 다 쳤건만 나타나겠다던 그림자는 나타나질 않는다. 일 분, 이 분, 삼 분, 사 분--사람들은 흥분과 긴장 속에서 열두 시 십 분, 열두 시 이십 분, 그리고 마침내 열두 시 삼십 분을 맞이했으나 그림자는 통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때야 비로서 긴장과 비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생님, 금고 속을 한 번 다시 조사해 봅시다." 하는 윤정호의 말을 강 박사는 웃음으로 넘기면서 "윤 군을 이때까지 과학자로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대단한 신비주의잔걸!" 그리고는 포켓에서 열쇠를 꺼내어 금고를 열었다. 서류함은 그대로 있다.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아까 꺼내 보았던 설계도는 여전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도 인젠 늙었나 보군! 하하하......." "하하하......."" 사람들은 비로서 그림자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마음껏 웃었다. 복도로 나갈려던 윤정호가 "이게 뭔가?" 하고 부르짖으며 문 밖 자기 발뿌리에서 한 장의 봉투를 발견하였다. "그림자다!" 윤정호는 봉투를 줍자마자 다시 한번 그렇게 외쳤다. "뭐, 그림자?......." 봉투에는 여전히 타이프라이터로 [강 박사전]이라고 찍혀 있다. 강 박사는


부리나케 봉투를 떼었다. 편지에는 단 한 줄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강 박사! 나의 목적은 달하였다. "목적을 달하였다고?......." 강 박사는 일동을 돌아 보았다. "목적을 달하다니?....... 그러면 여기 있는 이 설계도가 가짜란 말인가?....... 천만에!"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백일평이 긴 복도를 통해 저편 건너방을 향하여 비조처럼 달려가는 것이다. 이윽코 건너방의 문이 열리며 "영채씨!" 하고 부르짖는 백일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짝하고 영채의 방에 불이 켜진다. "앗! 영채씨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야 사람들은 욱하고 영채의 방으로 밀려갔다. "영채야!" 아무리 집안을 뒤져 보았으나 영채는 보이지 않는다. 그 때 백일평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강 선생, 그림자는 설계도를 가져가지 않고 영채 씨를 가져 갔습니다.!" 제군이여! 그림자의 편지를 제군은 기억하는가? 그림자는 강 박사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물건을 가져 가겠노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아아, 저 마술사와도 같은 그림자는 마침내 강 박사의 무남독녀 영채를 붙들어 갔다. 강 박사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이냐?....... 영채냐? 설계도냐?....... 강 박사는 그때야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음---" 하고 강 박사는 길게 한 번 신음하면서 그 순간까지도 착오된 길을 걷고 있던 자기 자신을 쓰라리게 뉘우쳤다. 자기 생명보다 귀중히 여기던 설계도! 그러나


그 설계도 보다도 한층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중풍환자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야 비로소 안방에서 자고있던 영채의 어머니가 "영채가...... 영채가......" 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치며 뛰쳐 나왔다. "이 일을 어찌하노? 여보! 영채가...... 영채가 없어졌구려! 영채가......" 그러면서 늙은 강 박사의 팔을 흔들며 "그러나 그림자는 대체 어디로 어떻게 들어 왔을까?......" 하는 한 개의 커-다란 의문이 사람들의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틀림없이 정문을 엄중히 잠궜었는데-----" 그러면서 윤정호는 그것이 자신의 실수인 것처럼 무안해 하며 방을 뛰쳐나가 현관으로 달려가 보았다. "앗! 현관 문이 열리었구나!"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이번에는 정원으로 뛰어 나가 정문으로 가 보았다. "정문도 열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노릇인가? 분명히 내 손으로 잠겄었는데-----" 아아, 그림자는 사실 귀신같은 재주를 정문과 현관을 어떻게 열고 영채를 붙들어 갔을꼬?....... 그 뿐만 아니라 정문 안에는 사나운 세파-드가 지키고 있지를 않는가? 그림자는 사실 무슨 그림자처럼 문틈으로 새여 들어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한시 바삐 경찰에 전화를 해야 겠습니다!" 하고 그 때 김중식이가 강 박사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강 박사는 사건을 경찰에 알리기를 무척 두려워 하였다. 경찰에 알리면 한층 더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그림자의 말이 또다시 머리에 떠올랐던 때문이었다. 그 때였다. "앗! 그림자의 편지다!" 하고 고함을 치며 영채의 책상 위에서 한 장의 흰 봉투를 발견한 것은 소설가


백일평이다. "뭐? 그림자의 편지?......" 사람들은 욱하고 백일평을 둘러쌌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강 박사여, 귀하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는 순간, 귀하의 사랑하는 딸 영채의 생명은 위험하리라. 그림자로부터

8. 애인을 위하여(愛人을 爲하여) "아그머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요! 영채가...... 영채가......."" 영채의 어머니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세 사람의 청년을 향하여 "여보, 젊은이들! 내 딸을 구해주우! 제발 경찰에는 알리지 마시우! 원 이런 변이 어디 있을라구?" 하며 딸을 살려 달라구 울구불고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생각한 끝에 하여튼 당분간은 경찰에 알리지 않고 그림자로부터 다시 무슨 지시가 있기를 조용히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것이 영채의 생명을 온전히 보호하는 가장 적당한 이리하여 공포와 비애의 하루 밤은 끝났다. 날이 밝자, 세 청년은 근방 일대의 숲 새와 기타 그림자가 잠재해 있을만한 장소를 샅샅히 뒤져 보았으나 그림자는 물론, 영채의 간 곳을 통 알배 없었다. 영채의 어머니는 미친듯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방 안과 넓은 정원을 정신병자 처럼 헤매이었다. 점심 때가 기울어도 그림자로부터는 아무런 통지도 오지 않었다. 그러나 저녁 여섯 시가 거의 가까웠을 때, 배달부는 마침내 한장의 흰 봉투를 현관에 던지고 지나갔다. "그림자다!" 그것은 틀림 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편지를 떼었다.


강 박사여! 귀하의 딸 영채는 무사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나의 요구를 귀하가 무시할 때, 영채의 생명은 없어질 것이다. 오늘밤 열두 시 정각에 귀하가 가장 아끼는 살인광선의 설계도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교환조건으로 귀하의 딸을 인도하리라. 장소는 한강 인도교 다리 목에서 하류로 오백 메돌, 거기 회중전등을 든 사람이 서 있을터이니 그에게 설계도를 내 주라.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 둘 것은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와도 아니되며 무기를 들고 와도 아니된다. 이 조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거역하면 영채의 생명은 물론, 가지고 온 자의 생명도 즉시로 없어질 것이다. 편지를 읽고 난 강 박사는 한참 동안 묵묵히 앉았다가 돌연 "안 된다. 안 되!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설계도만은 못 내놓겠다!" 하고 고함을 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각한 고민의 빛이 그의 얼굴을 덮어 늘은다. 아니, 그것 보다도 만일 설계도를 가지고 간다면 대체 그처럼 위험한 곳에 누가 가겠는가가 문제였다. 늙은 강 박사 자신이 갈 수는 물론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영체의 어머니가 갈 수도 없었다. 영채의 어머니는 애원하는 듯한 눈동자로 앞에 앉은 세 사람의 청년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세 청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불안과 긴장 속에 파묻혀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면 갔지 진짜는 못 내놓겠다!" 는 말을 하였을 때는 사실 세 사람의 청년의 입은 무겁게 다문체 통 열릴 줄을 몰랐다.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오는 때는 영채의 생명뿐만 아니라 가지고 온 자의 생명도 즉시에 없어질 것이다" 라고 한 그림자의 한마디가 무척 마음에 걸리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보! 원 제 자식이 죽게 되었는데 설계도가 다 뭐란 말이요?" 하고 영채의 어머니가 절반은 애원하는


듯이, 절반은 원망하는 듯이 말하였을 때에도 설계도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 박사의 굳은 결심은 좀체로 풀어질 줄을 차디찬 강 박사의 마음이었다. 강 박사는 한참동안 세 청년의 불안에 찬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검토하듯이 둘러보고 나서 마침내 무엇을 결심한 듯이 "내가 가지. 이 몸이 아무리 늙었다 하여도 염려 없어!" 하고 말하였을 때 윤정호와 김중식은 "선생님,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동시에 입을 열면서 "그러나 선생님, 만일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면 영채씨의 목숨이 위태합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역시 설계도 보다도 따님의 생명이 더 귀중할 것이 아닙니까?" 하고 두 청년은 진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서 무사히 영채의 몸을 구해 가지고 오기를 강권하였으나 마이동풍, 강 박사는 그러나 그때까지 한편 구석에서 잠자코 앉았던 백일평이 "강 선생,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선생의 연구를 일개인의 목숨과 바꾸기는 너무나 귀중합니다. 설계도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림자에게 뺏겨서는 아니되지요. 선생님,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백일평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심이 알알히 떠 올랐다. 이리하여 깊기 쉬운 여름 밤은 아홉 시가 지나고 열 시가 지나고 열한 시가 되였다. "그러면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백일평이 가짜 설계도를 한 장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말하였을 때, 강 눈동자로 쳐다 보았다. 세 청년 가운데서도 가장 허약한 몸을 가진 백일평---그와 같은 백일평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 내고서 단신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고 저 무서운 도적 그림자와 만나고져 하는 그 타오르는 듯한 정열에서 강 박사는 비로서 과학으로서는 엿볼 수 없는 인성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던 것이다.


"백군! 진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게! 그리고 그림자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말고 설계도를 곱게 갖다 주고 영채를 곱게 구해 주지! 영채, 오오, 내딸 영채!" 그러나 백일평은 그것을 굳이 거절하였다. 자기가 그림자의 손에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설계도를 뺏끼지 않고 영채도 구하고......, 그것이 백일평의 결심이었다. "설계도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영채 씨를 죽이겠다고 하지만은, 그것은 일종의 협박에서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채씨를 죽인다는 것은 그림자에게 있어서 설계도를 빼앗는 수단을 잃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백일평은 청운동 강 박사의 집을 나왔다.

9. 어둠속의 그림자 그러나 백일평에게는 그림자의 손으로부터 영채를 무사히 구해 낼 어떤 신통한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자기와 같이 허약한 몸의 소유자 --- 열세 관이 될락말락한 수척한 몸으로 어찌 완력을 가지고 그림자에 대항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또 무슨 명탐정과 같은 신통한 계략이 있은것도 아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야 겠다는 불덩어리 같은 열정뿐이다. 커--다란 흥분만이 그의 정신을 덮어 눌렀다. 무섭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돌팔매하듯 자기의 그 여윈 몸둥이를 그림자 앞에 내던지면 그만이었다. 잡아타고 열두시가 가까운 밤거리를 화살처럼 몰아 대는 백일평이었다. 한강 인도교 다릿목에서 택시--를 멈추었을 때는 정각 열두 시까지는 아직 십오분이나 남았을 때였다. 인적이 끊어진 한강 다리는 무슨 커--다란 마물처럼 허공에 솟아 있었다. 군데군데 서 있는 희미한 전등불이 캄캄한 한강 냉대를 수비하는 듯이 지키고 있다.


백일평은 잠깐 동안 사방을 돌아다 보고 나서 어두운 언덕 비탈을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 '한강 다릿목에서 하류로 오백 메돌, 거기에 회중전등을 든 사람이 서 있을테니 그에게 설계도를 내 주라'---는 그림자의 편지를 다시 한번 되풀이 하여 모래밭을 한걸음 두걸음 하류를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중전등의 불빛은 통 보이지 않는다. 밤 바람이 이나부다. 강물이 철렁철렁 들린다. 멀리 상류에서 발동선의 통통통통 하는 엔진 소리가 들릴뿐,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림자는 어디 있는고?...... 그림자! 그림자!" 그는 마치 무슨 열병 환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꿈꾸는 사람같이 하류로 하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꼬? 백 메돌, 이백 메돌, 삼백 메돌---이니, 사백 메돌은 넉넉히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다릿목의 전등 불이 멀리 등 그때였다. 그가 서 있는데서 약 백 메돌쯤 되는 장소에 반짝하고 조그마한 불빛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림자가!" 백일평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눈을 브릅뜨고 어둠의 장막을 바늘 끝으로 꼭 뚫어 놓은 것과 같은 한점의 불빛을 꿈결 같이 바라 보았다. 사실 백일평은 자기가 지금 허황한 꿈 속의 사람이 아닌가고 자기의 넙적다리를 한번 힘껏 꼬집어 보았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이렇다 할 계략도 세움이 없이 맨손으로 저 무서운 도적 그림자를 맞이하고저 하는 이 너무나 무모한 자기의 행동을 그는 비로서 깨달았던 것이다. 갈래야 물러 갈수 없는 백일평---에게 남은 단 한 가지 길은 눈을 딱 감고 자기의 여윈 몸둥이를 그림자에게 내 던질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든지 상대자를 죽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불빛은 통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 움직일 줄 모르는 불빛을 향하여 마치 몽유병자 처럼 백일평은 걷기 시작하였다. 백 메돌에서 팔십 메돌, 팔십 메돌에서 오십 메돌---그러나 어둠속의 불은 차츰차츰 커질뿐, 땅바닥에 얼어붙은 듯이 움지기질 않는다. 백일평에게는 공포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물에 빠진 자식을 건지려는 광란의 어머니 처럼 그의 모든 사색은 한 개의 몸둥이 뿐이었다. 그림자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고?......그림자의 가슴 속에는 지금 어떤 종류의 무서운 계책이 도사리고 있는고?...... 백일평과 그림자의 간격은 한걸음 한걸음 좁아져 간다. 사십 메돌, 삽십 메돌, 이십 메돌--이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간격이 십 메돌 이내로 좁아졌을 때였다. 어둠을 헤치며 불빛을 향하여 비조처럼 나라가는 백일평의 몸둥이---- 자기 자신을 돌팔매하듯 회중전등을 향하여 내 던진 백일평의 몸둥이는, 그러나 다음 순간, 허공을 부여잡고 회중전등 위에 퍽삭하고 쓰리지고 말었던 것이다. 회중전등 만이 반짝이고 있을 뿐이 아닌가! "속았고나!" 하고 외치면서 모새밭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는 벌써 늦었다. 시컴헌 그림자가 백일평의 등 뒤로 쑥 나타났던 때문이다. "앗!" 하고 부르짖은 백일평은 그 순간 휙하고 뒤로 돌아 서면서 맹수처럼 그 시커먼 그림자를 향하여 덤벼 들었다. 그림자는 역시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두개의 몸둥이는 불꽃이 튀리만큼 맹렬히 서로 부딪치면서 캄캄한 모래밭 위에 쓰러졌다. 10. 그림자의 정체(正體)


제군이여. 필자는 지금 모래밭에 쓰러진 두 개의 몸둥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청운동 강 박사의 집으로 붓끝을 돌리고저 한다. 백일평을 떠내 보낸 강 박사 이하 일동은 극도의 불안과 초조 가운데서 열두 시를 맞이하고 새로 한 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두말도 할 것 없고 영채를 구하러 간 백일평조차 돌아오지 않었다. 두 시가 지나고 세 시가 지나고, 새기 쉬운 여름 밤은 어느듯 네 시, 다섯 시가 되었다. 동편 하늘에 먼동이 훤하게 터 오기 시작하여도 백일평은 통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겼고나!"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 어떤 불길한 상상을 머리에 그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이 밝자 윤정호와 김중식은 기다리다 못해 그림자가 만나자던 한강 모래밭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었다. 다릿목에서 약 오백 메돌쯤 떠러진 하류 백사장 위에 사람들의 발자욱이 서로 엉키고 감기여 난잡히 인백혀 있는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백 군은 어떻게 되였을꼬.......?" "그리고 영채 씨는.......?" 이리하여 두 청년이 어두운 얼굴로 다시 청운동으로 돌아 온 것은 오정이 거의 가까웠을 때였다.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하고 늙은 강 박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바로 그 때였다. 어멈이 한 장의 속달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편지?......." 사람들은 그 순간, 그 어떤 불길한 뉴-쓰를 각오하면서도 또 한편 기적에 가까운 광명을 기대하면서 강 박사의 옆으로 달려갔다. "영채다! 영채의 글씨다!" 봉투 겉봉에 쓰인 것은 틀림 없는 영채의 필적이었다. 그 순간


"영채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기쁨이 일동의 얼굴을 점령하였다. 영채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불초 영채를 용서해 주십시요. 남만 못지 않게 길러 주시고 남만 못지 않게 교육을 시켜 주신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 천벌을 맞을만큼 괴롭힌 영채올시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는 어렸을 때 부터 부유한 가정에 태어난 몸으로서 무엇 한 가지 남부럽지 않게 자라났습니다. 지필묵(紙筆墨)이 없어서 고학을 하는 동무를 볼 때마다, 그리고 방탕한 아버지와 정숙하지 못한 어머니 때문에 고생하는 동무들을 볼 때마다, 소녀의 조그마한 가슴에는 분에 넘치는 행복으로 가득 차곤 하였습니다. 더구나 세상이 모신 소녀의 행복은 더 한층 컸었습니다. 아니, 더 한칭 커야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그와 같은 행복이 넘처 흘러야 할 소녀의 연약한 가슴속 한편 구석에는 구멍이 펑 뚫린것 처럼 항상 허룽하고 항상 텅 비인것 같은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소녀의 마음 가짐이 잘못인 때문일까요? 아버지는 훌륭하신 과학자이십니다. 그러고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시고 과학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처럼 사랑하시는 과학에 소녀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질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녀로부터 아버지를 빼앗어 간 그 차디찬 과학을 질투했습니다. 소녀의 어린 살인광선을 증오했습니다. 소녀의 손으로부터 아버지의 자애스라운 사랑을 여지없이 박탈해 간 아버지의 연구를 저주했습니다. 아버지의 그 차디찬 가슴 속에는 따뜻한 가정도 없고 사랑하는 안해도 없고 귀애하는 딸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혈관에는 피가 돌지 않고 다만 언제든지 냉각한 강철이 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리석은 소녀 영채를 힘껏 꾸지람 해 주십시오. 소녀는 마침내 소녀의 손에서 아버지를 빼앗어간 원수 ---살인광선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살인광선이 귀하냐, 딸이 귀하냐? 아버지에게 이와같은 시련의 기회를 드리고저 소녀는 마침내 저 무서운 도적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은 살인광선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께 증명해 드리고저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훌륭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침내 진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는 말을 백일평 씨로부터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역시 저를 가장 귀해 하셨습니다. 고맙소이다. 이 기쁨은 소녀에게 한 줄기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소녀가 이번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한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님께서도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소녀에게는 세 사람의 열렬한 씨, 백일평 씨---이 세 분은 다 같이 저를 자기 생명 보다도 더 귀해 한다고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을 소녀의 귀에 속삭일 때는 그들의 눈동자는 타올랐고 그들의 온몸은 정열의 덩어리로 변하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을 어찌 거짓이라 생각할 수 있으리요? 그것은 실로 그들의 폐부를 뚫고 나오는 참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어서 말하기 보다 더 쉬운 것이 어디 있으리요. 행동이 말을 증명할 때, 비로서 그것이 참된 말의 자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 가난뱅이 이야기꾼은 세 분 중에서도 가장 허약한 몸을 가진 분입니다마는,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은 행동을 가진 말이었던 것을 소녀는 비로서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 이즈음 며칠동안 걱정을 시킨 소녀 영채를 너그러히 용서하시기 바라오며 여러분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지음에는 소녀는 저 가난뱅이 이야기꾼과 함께 인천행 열차 속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인천 월미도에서 며칠동안 해수욕을 하여 튼튼한 몸을 만들어 가지고 오겠사오니 그리 하량하여 주십시요. 그런데 어머니! 가난뱅이 이야기꾼이 지금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의 이 사건을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로 써서, 그 원고료로 제게 약혼반지를 사 주시겠다고요. 그리고 소설의 제목은 '괴도. 그림자 일담(後日譚)'-----

II. 이단자(異端者)의 사랑 11. 사랑의 집 죽첨동 고개를 넘어서면 독자 제군은 바로 눈 아래 인가가 즐비해 있는 연희장 일대를 나려다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서운 이야기가 시작된 오륙 년 전만 해도 그저 쓰러져 가는 초가가 제멋대로 여기 한 채 저기 한 채 잘팡하니 앉았을 뿐, 서울 장안의 문화와는 죽첨동 고개를 사이에 두고 멀리 격리해 있는 쓸쓸한 산골짜기였다. 허나 그처럼 초라한 풍경 가운데 단 한 채 오고 가는 사람의 시선을 멈추는 소위 문화주택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그것은 연희장에서 이화여자 전문학교로 넘어가는 고개 중턱에 탐탁하니 자리를 잡고 발밑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초라한 풍경을 마치 비웃듯이 송림 사이로 내려다보고 있는 한 채의 조그마한 방걸로-풍의 문화주택이 바로 그것이다. 새빨간 슬레-트 지붕이 석양 햇볕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리며 하-얀 담에는 측넝쿨이 제법 여름이나 되면 꼬리를 저으면서 뻗어 올라가곤 하였다. 초라한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산골작 사람들은 그 집을 선당이라고 불렀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선인이라고


불렀다. 실상 그들의 눈에는 이집 주인 부부가 무척 마음에 걸린 것 만은 사실이었다. 슬그머니 산으로 올라 가서는 슬쩍슬쩍 눈치를 보아 가면서 방걸로-안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제 아낙네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집 주인은 뭐 글을 쓴데나 시를 쓴데나 하는 문사라는데 머리를 길게 길르고 마치 해골처럼 살이 쭉 빠진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사나이라는 것이다. 이 사나이는 언제든지 자기 안해의 옆을 떠날 줄을 모른다고. 산보할 때도 같이하고 노래 부를 때도 같이 부르고 심지어 뒤깐엘 가드래도 반드시 계집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다. "아이 참 숭해! 뒤깐에 까지 안 따라간들 뉘가 제 계집 잡어 먹을테나?" "글쎄 말이지. 언제 한 번 재밤중에 보야지." "하하하......." "히히히......." 아낙네들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노상 온 몸이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계집은 나이가 스물 다섯도 못되어 보이도록 젊었으나 언제나 해말숙한 예쁜 얼굴에는 마치 백납으로 만든 인형처럼 핏기가 없고 태반은 사나이의 팔에 몸을 기대이고 긴 치마 자락을 잘잘 끌며 뜰 안을 걷고 있었다. "이것 좀 봐요. 아까 산엘 올라 갔다가 그 사람들을 보았는데-----글쎄 계집의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종이짱 처럼 하얗담! 그런데 이것봐요. 계집이 그때 갑자기 기침을 몇 번 쿨렁쿨렁 깃드니 토하겠지. 아이참 무시무시해." "피?' "그래, 피야 피. 하-얀 비단 치마에 새빨간 피가 주루루 흘러 내리는게야." "폐병이라는게 아닌가?" "글쎄 폐병 같애. 내가 보기엔 앞날이 길지 않어. 며칠 못 되어 죽을 사람이야." "그래 어찌 되었어?" "사나이가 깜짝 놀래며 손수건으로


계집의 입을 막어 주며 계집을 등에 업고 방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가 버리는 게야." "아이, 가엾어라. 뒤깐에 까지 따라 다니는 사나이의 마음이 오죽하겠수?" "그런데 내 말 좀 귀 담어 들어 봐요.----요즘 며칠째 이상한 사나이가 매일처럼 그 집을 찾아오는 게야. 못 "못 봤어." 나이나 한 설흔댓 되어 보이는 점잖은 신사가 요즈음 며칠째 매일처럼 방걸로-를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찾아 와서는 곧 안으로 들어 가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고 한참동안 방걸로- 주위로 돌아 다니면서 집안을 이리저리로 살피기도 하고 혹은 안에서 들려 나오는 주인 부부의 말 소리에 가만이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그냥 가 버리는 날도 있고 혹 어떤 날은 주인 사나이를 대문깐 까지 불러내서 무엇인가 수근거리다가 때로는 좀 안으로 들어 가자느니, 아니, 들어오지 말라느니, 가라느니 안 가겠다느니, 한 번만 만나 보자느니 안 마침내는 그냥 쓸쓸히 방걸로-를 등지고 산을 내려오고 마는 이상한 사나이의 됫 그림자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단 대낮에 만이 아니고 때로는 재밤중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밤중에 찾아 와서 만나 볼 사람을 만나 보고 가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열두 시쯤 해서 어깨를 축 늘어 뜨리고 풀이 죽어서 집 앞을 지나가는 그 이상한 사나이를 여러 번 보았다고 한다.

12. 붉은 침실(寢室) 그러던 어떤 날 밤이었다. 사월 중순---달빛에 히미하게 내리는 연희장 고개에 이상한 신사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스프링 코-트의 깃을 세우고 중절모자를 푹 눌러 쓴 얼굴에는 어떻다고 헤아릴 수 없는 애수의 빛이 흐르도록


넘치어 있었다. 두말도 할 것 없이 방걸로-를 매일처럼 찾아 온다는 그 이상한 사나이에 틀림이 없을 께다. 신사는 고개를 넘어 연희장 골자기로 나려가면서 팔뚝시계를 들어 달빛에 비추어 본다. 열두 시 까지는 아직 이십 분이나 남았다. 올라가는 허엽스레한 외줄 길이 시컴언 솔밭 사이로 오볼꼬불 뻗어 있을 뿐,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멀리 들려올 따름이었다. 신사는 방걸로-를 삥 둘러싼 을파주 안을 기웃기웃 넘겨다 본다. 침실 비슷한 방안에 불이 환하니 켜저 있는 것을 보니 이 집 주인 부부는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다. 때때로 굻다란 남자의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 나온다. 이상한 신사는 그때 문득 을파주 밖에서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안에서 들려 나오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이상한 때문이다. 목소리는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배우가 하는 무슨 독백 처럼 길게 영탄하는 것도 같았다. 신사는 한참동안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더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황급한 발걸음으로 을파주를 뺑 돌아 정문 앞에까지 걸어왔다. 히미한 달빛을 통하여 보니 정문 한 옆에 [이추강]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독자제군이여. 제군은 이제야 이 사람의 집. 방갈로-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추강--- 그는 우리 문단에서도 가장 유명한 애처가요, 뿐만 아니라 이름 높은 서정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방방곡에서 젊은이들의 꿈 많은 피를 끓게하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닌가! 안해 신애련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까지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필자는 독자제군과 더불어 지금 추강의 집 정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서 있는 수상한 신사의 뒤를 따르기로 하자.


신사는 거기서도 한참 귀를 기울이고 서 있더니 이번에는 발자취 소리를 죽이고 대문을 가만이 밀어 보았다. 대문이 벙싯하고 열리었다. 신사는 잠깐 사방을 휘 둘러 본 다음에 조심스러히 대문으로 들어선다. 뜰에는 잘 보이지는 않으되 가지가지 꽃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고 조악돌을 곱게 깐 외줄 길이 현관까지 길게 뻗쳐있다. 신사는 길을 피하여 잔띠 밭으로 드러서서 새빨간 커-튼 사이로 불빛이 걸어 간다. 유리창은 모다 닫치여 있었다. 신사는 목을 늘이고 유리창 밖에서 커-튼 사이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침실임에 틀림이 없었다. 무엇 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침실안을 뺑 둘러싼 주홍빛 색채였다. 커-튼도 주홍빛이요 벽지와 천반자도 주홍빛이었다. 불타는 듯한 주홍빛 침실---이것이 시인 추강과 그의 안해 애련이 잠자리를 같이하는 규방이다. 그러나 창 밖의 신사는 별반 놀래는 표정도 없이 여전히 목을 느리고 방안에 버려진 이상한 광경을 눈 한 번 깜빡 않고 드려다보는 것이다. 이 두 사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빨간 담벽을 배경으로 하고 놓여있는 순백색 침대 우에는 분홍빛 파자마를 단정히 입은 애련이 고요히 누어있다. 모로 누은 것이 아니고 반듯이 천정을 향하고 누어있는 것이다. 애련은 잠든 모양이다. 추강은 침대 옆에 앉아 있다. 되는대로 허트러진 머리였다. 양눈이 해골처럼 음푹 드러갔다. 추강의 무릎에는 무엇인가 예쁜 상자가 놓여있다. 화장품 곽이었다. 그는 지금 고요히 잠들어 있는 애련의 얼굴을 자기 손으로 정성껏 화장시켜 보려는 모양이다. 추강은 먼저 콜드-크림을 솜에다 묻쳐 애련은 자는지 깼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남편이 하는대로 내버려 두려는 모양이다. 남편은 그 다음에 물분을 손바닥에 쏟아 가지고 그것을 안해의 얼굴에다 문질러 준다. 석고상(石膏像)처럼 하-얗게 변한 애련의 얼굴이었다. 추강은 정성껏 정성껏 안해의 얼굴을 문지른다. 물분이 곱게 퍼진 것을 본 추강은 '퍼프'에다 가루분을 찍어 그 위에 바르기 시작한다. 보-얀 분 가루가 새빨간 담벽을 배경으로 하여 물신 떠 오른다.

13. 사화장(死化粧) 추강은 눈썹먹을 들고 안해의 눈썹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앉아서 보고 이러서서 보고---추강이 그려놓은 애련의 눈썹은 그리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반월형의 눈썹이었다. 추강은 연지를 들었다. 애련의 하-얗게 분발린 입술이 점점 앵도알 처럼 빨개져 간다. 이윽고 추강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천사처럼 곱게 화장된 안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럼이 드려다 본다. 추강은 마음이 흡족한 모양이다. 그의 파리한 얼굴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추강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안해의 언제까니자 고요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창 밖의 신사도 눈 한 번 깜박않고 재밤중에 버려진 이 침방의 광경을 드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남의 침실을 창틈으로 엿보는 사나이의 행동도 수상하다 할 것이로되 그 보다도 잠든 안해의 얼굴을 화장시키는 추강에게서도 어딘가 보통 사람으로서의 상상하기 어려운 미치광이의 태도를 불연듯 연상시키는 그 무엇이 숨어 있는 듯 하였다. 이리하여 얼마 동안을 물끄럼이 안해의 얼굴을 노려다보고 있는 추강의 두 볼에는 은실과 같은 두 줄기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다음 순간, 그는 안해의 가슴에 얼굴을 시작하였다. "애련, 애련, 애련---." 얼마나 울었는지 추강의 거쉬인 목소리는 탁 터져나오질 못하고 거저 애련의 귀밑에서 속삭이는 것 같이 들리었다. "애련! 네가 나의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지도 벌써 오늘째 사흘이 아닌가. 이처럼 목이 쉬도록 부르는 내 목소리를 요건 왜 요처럼 못 들은채 하는게야. 아이 참 깜찍두 해. 또 언제처럼 나를 놀려 먹을 셈인가.---그래 그것이 언제였지?...... 아, 참 내가 너와 결혼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밤, 너는 자는 척하고 암만 불러도 대답을 안하다가 ---아이 부끄러워요! 하고 눈을 감은채 내 추강은 눈물어린 얼굴을 가만이 들고 안해의 양볼을 꼭꼭 손가락으로 찔러 보면서 "그래 영영 깨지 않을 셈인가! 사흘이나 잤으면 무던허지. 그래 그래 천년만년 잠만 자다가---." 추강은 그때 그 어떤 격정에 사로잡힌 것처럼 돌연 안해의 입술을 미친것 같이 빨면서 "아아, 천년만년, 천년만년!...... 너는 영원히 다시는 깨나지 못할 몸! 아아, 애련! 이 두 손으로 내가 너를 죽였단 말이지?---요 눈, 요 코, 요 입술이 며칠만 지나면 썩어 버린다는 말인가?......" 추강은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정신 내려다 본다. 벽에 걸린 시계가 친다. 하나, 둘, 셋, 넷, ......열두 시를 친다. 추강은 다시 얌전해 진다. 얌전해 지면 추강의 얼굴에는 눈물이 더 많이 흘러 내린다. 추강은 안해의 파자마를 벗긴다. 그리고 저편 옷장에서 안해의 새 옷을 끄낸다. 속옷도 하얗고 저고리도 하얗고 치마도 하얗다. 추강은 죽은 안해의 몸에 새 옷을


입힌다. 고히 잠든 천사였다. 추강은 두 팔로 안해의 몸을 안는다.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가 걸어가듯 천천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다. 그때까지 침실 안을 들여다 보던 들창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섬깃섬깃한 을파주밖에 몸을 웅크리고 뜰 안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이윽코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나드니 시체를 붙잡은 추강의 그림자가 희미한 달빛 아래 나타났다. 그는 잠깐 동안 현관 앞에서 주저하는 모양으로 사방을 둘러 본 다음에 잔디 밭으로 들어서서 을파주 옆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추강은 거기서 발을 멈추었다. 그때 자세히 보니 추강의 바로 발뿌리 앞에는 사람이 하나 들어 가리만한 커다란 구덩이가 패어 있는 것이다. 검으특특한 흙이 무뚝무뚝 쌓이어 있다. 이상한 신사는 을파주 틈으로 그 구덩이 안에 쌔한 관이 놓여있는 것을 보이여 준다. 안해의 시체를 안은 추강은 위태로운 발자취를 가다듬어 가며 구덩이 안으로 들어선다. 관속에 시체를 내려 놓은 추강은 거기서 또 한참이나 달빛에 비치는 안해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애련! 애련!" 하고 두어 번 안해의 이름을 부른 후에 살그머니 관 뚜껑을 덮는다. "숨이 맥혀서 답답할까 싶어서 이처럼 관에다 구멍을 뚫어 놓았지만, 뭐 흙을 덮으면 구멍도 그만 메여버릴 것을 ...... 공연한 짓을 했지." 추강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부삽 관을 덮기 시작하는 것이다. 흙은 무슨 가루처럼 보드러운 듯이 관우에 떨어지는 소리가 소르럭 소르럭 하고 들린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한 줌 한 줌 부어넣는 흙은 구렁지를 한 절반쯤 메웠을 때 추강은 문득 손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옆에 놓여 있는 부삽을 끌고 을파주를 따라 몇 걸음 걸어 가더니 무슨 나무인지는 알 수 없으나 키가 서너 너덧자 쯤 되어 보이는 나무를 뿌리채 떠다가 밑에 안해의 관이 묻혀있는 구덩이에다 심어 놓는 것이다. 나무를 다 심어 놓은 추강은 시커먼 흙을 질긴질긴 밟은 후에 잔디를 떠다가 그 위에 곱게 깔아 놓았다. 무덤 위에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나무 하나를 심어 놓고 거기서 한참동안 느껴 울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리어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거의 동편 하늘이 훤하게 동터올 지음이었다. 추강이 방안으로 들어간 후, 을파주 밖에서 추강의 행동을 유심히 엿보고 있던 이상한 사나이는 그때 살그머니 정문으로 들어가서 무덤 위에 심어놓은 이상한 나무를 들여다 보면서 "수밀도(水蜜桃)나무!" 하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우르러 달을 쳐다 보았다.

14. 첫사랑 사나이 하나에 계집 둘, 계집 하나에 사나이 둘---이것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나려오는 한개의 너무나 진부한 비극이라. 그러나 이것은 천년만년 이 우주가 끄치는 마즈막 날까지 우리 인생을 슬프게하는 영원히 새로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조물주로 하여금 한 사나이에게 한 계집을, 한 계집에게 한 사나이를 맡겨줄 수 있는 신령한 힘을 가지게 하였다면 이 세상의 이야기꺼리는 절반 이상이나 없어지고 말 것이다. 아아, 그러나 이야기꺼리 없는 인생이라면 그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이랴. 사람들은 그 단조로운 생활에 그만 추강의 안해 애련을 둘러싼 한 개의 비극도 한 계집에 두 사나이라는--- 이 영원무궁히 새로운 갈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삼 년을 과거로 기어올라 간다. 삼 년 전 봄, 의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안국동 네거리에, 개인병원으로서는 상당히 설비를 가추어 놓은 [금천병원] 원장 김철하는 개원한지 얼마 안 되어서 벌써 유명한 외과의(外科醫)로서 그 이름은 서울 장안에 마치 날개가 돋은 듯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의학박사 김철하는 그때 겨우 삼십을 넘어선 독실한 청년으로서 아직 속세에 더럽히지 않은 고매한 정신을 가지고 같이 돌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원은 날로날로 번창하여졌다. "애련, 우리 병원이 이처럼 잘 되어가는 것은 모두 애련이 정성껏 환자를 돌보아주는 탓이지. 참, 애련은 천사같이 마음이 착하고......." "아이, 선생님두. 그만 두세요. 그런 말씀은....... 제가 뭐 허는거 있어요? 모두 선생님의 훌륭하신 기술과 높으신 인격 때문이지요." 하-얀 간호복으로 가는 몸둥일 둘러싼 애련의 자태가 원장 김철하에게는 이 넓은 세상에 다시 찾아보지 못할 무슨 귀중한 보배처럼 보이었다. "애련!" 햇볕이 들창을 넘어 진찰실 안으로 가는 몸을 돌연 끼여 안으며 "애련, 나는 벌써부터 나 자신에게 여러 번 맹서하였어. 이 세상에서 내 안해될 사람은 애련 이외에는 없다고---." "선생님---." "애련, 우리 결혼해 응?" "선생님, 놓아 주세요. 사람이 보믄 어떻헐려구......." "보면, 어째? 내가 애련을 사랑하는데 무엇이 두려워?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열열히 애련을 사랑하는 사나이가 있다면 나는 그와 결투를 할테야! 내가 죽던지 그가 죽던지---." 그때 문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선생님, 손님---"


손님을 맞이하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문 밖의 손님과 문안의 애련이 문턱을 사이에 끼고 마치 발이 얼어붙은 듯이 서로의 얼굴을 반반히 쳐다본다. 그러나 그것은 한 짧은 찰나에 지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애련은 간호부로서 손님을 대했고 사나이는 환자로서 간호부를 대하였다. "어디 편치 않으셔서 오시었습니까?" "네. 저, 오른쳔 밑배가 갑자기 아퍼서요---." 환자는 곧 침대 위에 눕히었다. 철하는 한참동안 환자의 배를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하더니, 급성 맹장염이니 곧 수술을 해야겠다는 선언을 하고나서 물었을 때 "제겐 가족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고 환자는 대답을 하였다. 이리하여 맹장염 환자는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애련은 수술대에 오른 환자의 옷을 하나 하나씩 베낀 다음에 하-얀 까-제로 눈을 가리고 에-텔이 젖은 까-제를 코에다 대었다. 하나, 둘, 셋, ......열, 스물,...... 설흔, 설흔 하나...... 원장을 따라 거기까지 세고난 환자는 말이 없다. 이으코 수술은 끝났다. 환자는 강한 에-텔의 마취로부터 점점 깨나는 것이다. 환자는 무엇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가만있자, 애련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가. 원장 김철하는 옆에 서 있는 애련을 문득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애련은 말이 없다. 눈물을 흘리고 서 있는 것이다. 계집 하나에 사나이가 둘일때, 한 사나이가 기뻐하면 한 사나이는 반드시 슬퍼하는 법이다. 맹장염 환자의 이름을 이추강이라고 불렀다. 신애련과 이추강은 같은 고향 S 읍에서 자랐다. 애련이 열 여섯살 때 추강은 스물 셋, 애련과 추강이 처녀와 동정을 바꾼


곳이 바루 저 S 읍을 감돌아 드는 대동강 구비, 실버들깨지가 눈처럼 나리던 쌍동이 바위가 아니었던가. 두 젊은이 사이에 맺혀진 굳은 언약--그 꿀같은 연정---. 그러나 어떤 날 애련은 돌연 S 읍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추강은 놀랐다. 애련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추강은 매일처럼 하늘을 우르러 애련을 불렀다. 애련을 부르는 추강의 입에서는 어느듯 시가 흘러나온다. 추강은 시를 썼다. 추강의 시에는 반드시 '애련'---이란 이름이 있었다. 이리하여 애련을 그리워하는 추강의 아름다운 영혼은 쩌-널리즘을 통하여 조선 십삼도 방방곡곡이 흘러들어갔다. 그러던 어떤 가을--- 추강에게 한 통의 간단한 편지가 날러왔다. 서울서 붙인 애련의 편지였다. 그러나 애련의 주소는 추강은 꿈인가 싶어 자기 넙적다리를 꼬집어 보며 편지를 떼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 저는 그때까지 자기가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를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백정이란 가장 천한 사람의 딸인줄을 비로소 깨닫고 고귀한 신분을 가진 당신의 안해로서의 자격을 일조 일석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몸은 비록 당신의 안해가 아닐 망정 이 마음만은 언제까지나 당신의 안해일 수 있음을 행복하게 믿고 있삽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시를 아침저녁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행복을 느끼나이다.--- 하략 ---." 대개 이러한 의미의 편지였다. 추강은 그때야 비로소 애련의 출가가 무엇에 원인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애련의 선조는 백정이었다. 그것을 그때까지 모르고 자라난 애련이다. 추강은 그때처럼 양반이란 계급을 저주한 적은 없다. 그는 그대로 곧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애련의 그림자를 찾아 헤메이고 있었던 것이다.


15. 안해를 죽이기까지 그러던 추강이 우연히 금천병원에서 간호부로 변한 애련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원장 김철하라는 존재가 두 사람 사이에 엄연히 서 있지를 않았던가. 추강의 수술이 완쾌되어 병원을 나오는 날 철하는 추강과 애련을 앞에 세워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애련은 당신의 애인인 동시에 나의 애인입니다. 애련 없는 세상이 당신에게 있어서 암흑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도 암흑입니다. 저는 울고 싶습니다. 죽고 싶습니다.--추강씨, 제가 단 한가지 당신에게 청하는 일년에 단 한 번씩만 애련의 얼굴을 제게 보이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주먹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애원하는 철하의 가엾은 신세를 추강은 어느듯 지금까지 고독에 울고울던 자기의 신세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추강은 철하의 청을 승낙하였다. 한 해에 한 번, 철하는 추강의 안해 애련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이상한 계약이 여기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애련은 추강의 안해가 되었다. 연회장에다 사랑의 방걸로-를 지어놓고 추강은 애련을 애무하였다. 그때부타 애련은 때때로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했다. 가래에 피가 섞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결혼한 지 꼭 일 년만이었다. 그 날 철하는 추강 부부와 약 두 시간 동안을 이야기하다 돌아갔다. 그 다음 해에는 철하가 두 번 찾아왔다. 두 번이 세 번 되고 세 번이 네 번되고--애련이 죽기 바루 전에는 거이 매일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찾아 와서는 거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별로 신통치도 않은 이야기를 혼자서 주고 받고 하다가는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철하가 찾아왔다 가면 애련의 병은 눈에 띠이도록 심해지는 것이었다. 아아, 약한 자의 대명사를 여자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철하가 자기 가정에 나타날적 마다 보내고저 하는 철하의 쓸쓸한 그림자가 점점 깊이깊이 파고 들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 지금 가만이 돌이켜 생각하면 철하는 너무도 영리한 사나이가 아니었던가. 애련의 몸둥이만은 추강에게 맡기어 놓고 애련의 마음은 자기 것으로 만들 셈이 아니었던가. 몸둥이를 붙안은 자와 마음을 붙안은 자와 ---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승리를 의미하는고?....... 철하는 애련을 차강에게 내놓아줄 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최후의 승리를 얻고저하는 미묘한 계산이 숨어있었던 것이 아닐까?....... 자기가 그처럼 애련의 눈앞에 나타남을 따라 애련의 마음에 일대 변화가 생길 줄을 그는 미리부터 예측했던 것이 아닐까?....... 듣고 가슴이 선뜻하였다. "......선생님, 선생님, 저를 죽여 주세요! 철하 씨! 저를 꼭 안아 죽여 주세요!......." 추강은 온 세상이 눈 앞에서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감을 깨달았다. "패부!" 추강은 철하처럼 영리한 사나이가 못되었다. 질투가 그의 일상생활에 점점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는 애련의 얼굴에는 철하를 그리워하는 빛은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추강은 더 한층 안해의 가슴속을 의심한다. 도리어 철하를 그리워한다는 말을 안해의 입으로부터 것이었다. 그 지음부터 철하가 찾아와도 추강은 그를 집 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철하는 매일처럼 찾아온다. 찾아 와서는 방걸로-주위를 한참 동안이나 배회하다가는 그대로 가 버리기를 일과로


삼었다. "김 선생님이 어째 요즘엔 안 오셔?" 애련은 병상에서 그렇게 묻는 때도 있다. "바쁜 모양이지." 추강은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던 어떤 날 밤---추강은 돌연 안해가 자기 몸둥이를 껴안으면서 "선생님! 선생님!" 하고 외치는 안해의 흥분한 잠고대를 안해의 목을 꼭 껴 안으면서 "철하다! 내가 바루 그 철하다!" 하고 부르짖었다. 추강은 안해의 목을 놓아줄 줄을 잊어 버렸다. 추강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기 귀를 안해의 입가에 갖다 대어 보았을 때는 애련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애련을 죽였고나!" 추강은 "앗" 하고 이불을 차고 일어났다. 애련을 흔들어 보았다. 잡아 일으켜 보았다. 그러나 애련은 대답이 없다. "아아, 애련! 애련!" 추강은 애련의 시체 위에 쓰러져 사흘 동안을 울어 새웠다. 16. 수밀도(水蜜桃)를 따는 날 추강이 죽은 지 사흘이나 되는 안해의 얼굴을 정성껏 화장을 시켜 가지고 정원 한편 구석에 묻은 무덤 위에 수밀도 나무를 심어 놓은지도 벌써 사 년이나 되는 여름이었다. 추강은 침실 침대 위에 누어서 하로하로 눈에 보이듯이 익어가는 을파주 안의 수밀도를 바라보며 지나간 날의 애련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행복이었다. 안해의 무덤 위에 심은 수밀도가 열매를 맺은 것은 금년이 처음이다. 추강은 그것을 사년 동안이나 침대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 보면서 날을 보내고 해를 [인제 한 주일만 있으면 넉넉히 먹을 수 있으리라.]


수밀도는 전부 다섯 개밖엔 맺히지 않았으나 갓난애의 대가리만큼씩한 커다란 열매가 누러스레하게 늘어진 양은 실로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쩍 식욕을 돋우어 준다. 추강은 실로 이 날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안해의 죽임을 누구한테도 알리질 않았다. 때때로 친구가 찾아오면 병이 중해서 자기 친정으로 보내었다고 꾸미어 두었다. 그러니까 애련은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누구던지 추강의 안해가 죽은 줄은 모른다. "그렇다! 애련은 아직 살아있다. 저 수밀도 나무의 뿌리는 애련의 살과 피를 맺지를 않았는가! 애련은 년년 여름이 되면 저 탐스러운 수밀도로 변하여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쳐다 보리라!" 추강의 바라는 바는 실로 그것이었다. 추강은 어서어서 수밀도가 익어 주었으면 한다. 어서어서 저 수밀도를 먹었으면 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 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사년 동안이나 기다리던 저 수밀도를 따 먹으리라--- 추강은 그날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서둘러댔다. 정오가 가까워서 추강은 고은 접시를 들고 정원으로 나섰다. 추강은 따기가 아까운 듯이 나무 아래서 이리 쳐다보고 저리 쳐다보고 하면서 그 행복된 일순간을 길이길이 향락하려는 것이었다. 축 늘어져 있다. 추강은 키를 빼고 손을 내밀어 수밀도를 살살 어루만져 본다. 보수수한 솜털이 마치 애련의 뒷덜미에서 보던 그것과 같이 매력이 있다. "흐흐응---." 추강은 애처러운 듯이 콧 소리를 짓는다. 애련을 애무할 때도 그는 항상 그러한 콧 소리를 일수 잘 지었다. "애련!" 그는 수밀도를 어루만지면서 그렇게 정답게 불러본다. 애련의 피와 살이 수밀도 알에 옴푹 옴푹 숨어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그 중 가장 큰 놈을 한 알


따서 접시에 담았다. 그 노르끼리한 빛깔이 마치 애련의 핏기없는 얼굴빛을 또 한 알을 따서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어 방 안으로 들어 갈려고 한 바로 그 때였다. 을파주 밖에서 사람의 발자취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열린다. "추강 씨가 아니시오?" 하며 뜰 안으로 들어서는 사나이는 애련이 죽은 후 한 번도 찾아 온 적이 없는 의학박사 김철하 그 사람이 아닌가. "이거 참 오랫만---." 추강은 갑자기 말문이 잘 터지질 않는다. 철하는 한 손에다 '송죽매' 한 병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무슨 통조림통 같은 것을 서너너덧 개 농이로 얽어매어 들었다. "허어! 수밀도 거 먹음직하다. --나서 오랫만에 한 잔 나눠 볼까......하구, 하하하 --- 사람이란 살아 가노라면 밉던 사람도 때로는 무척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지 않아요?...... 항용 미욱한 사람들은 그런 귀중한 순간을 자기의 부질없는 의지력으로 억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 중에 놓쳐 버리고 말지요. 나는 그것을 대단히 슬프게 생각합니다. 밉고 보기 싫던 순간은 밉고 보기 싫게 대하고 그리운 순간은 또 그리운 대로 그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참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이야 불이야 이처럼 이 형을 찾아 왔습지요. ---" 철하는 그러면서 자기가 앞서서 방 안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흉금을 탁 않았다. 정다운 생각이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하여튼 잘 오셨습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오늘은 참 길일(吉日)인가 봅니다. 자아, 어서 이리로 올라 앉으시지요." 추강은 수밀도가 두 개 담긴 접시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철하와 마조 앉았다. "--- 대체 사람들은 고래 고기가 맛없다구들 허지마는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요리법 여하의 따라서는 다른 무슨 고기 보다도 맛이 좋지요." "그게 고래 고깁니까?" "고랩니다. 이 고래 고기에 한 번 맛을 붙여 놓으면 닭 고기나 소고기 같은 것은 전세계를 꺼꾸루 뒤집어도 중국 사람을 당할 리 만무허지요." "그럼 그건 중국 사람의 손으로 만든 통조림입니까?" 하면서 랫텔을 들여다보니 광동어 찬공사(廣東漁饌公司)---라고 쓰여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내 친구 한 사람이 광동서 부친 것이 좀 남았기에 가지고 왔지요. ---자아, 그럼 오랫만에 한 잔씩 나누어 봅시다." 이리하여 추강과 철하는 통조림통을 따 놓고 술을 데워서 마시기 시작하였다.

17. 인육(人肉)을 먹는 사나이. "그것 참 이상한 맛입니다." "아니, 고래 고기는 아직 처음이신 모양입니다, 그려?" "처음입니다.--- 그거 어디 처음 먹는 사람으로야 먹겠습니까? 질기긴 왜 이렇게 질긴지." 고기는 거무틱틱한 것이 소고기 같았으나 소고기 보다 퍽 질기다. 철하는 참 맛나게 먹는다. 술 한 잔이면 고기 두 점씩 먹어댄다. 그러나 추강은 철하가 그처럼 좋다는 것을......하고 마지못해 몇 점 먹었으나 어째 그런지 가슴이 텁텁하고 금방 먹은 것이 도루 기어 올라올 것처럼 메스꺼워지는 것이다. 수밀도에 손을 내밀었다. "벌써 수밀도를 잡수시우? 그거야 술을 다 먹고 나서...... 식후일과라니, 자아, 어서 그 잔 따시우." 원래 술에 그리 농하지 못한 추강은 벌써 얼굴이 홧홧 달아 올라옴을 깨달았다. 토할 것 같이 가슴속이 메식메식 해지는 것이었다.


"술은 그만하고 자아, 이 수밀도 한 개 들어 보시우, 사 년 전에 심은 것인데 올에야 처음으로 열매를 맺었답니다. --김 형이 그 고래 고기에 맛을 들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이 수밀도에 맛을 들였지요. ---대체 이 수밀도 맛이란 아는 사람이래야 참 맛을 알지요. 뭇 실과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화과와 수밀도가 어째 그리 좋으냐 하면---" 추강도 얼근히 취하였다. "그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육진(肉質)에 있습니다. 다른 과실처럼 입맛이 가뜬해지질 않고 무슨 고기를 먹는 것과 똑같은 미각을 주지 않습니까. 잉금이나 배를 깨물 때는 이가 싸늘하리 만큼 살강살강하지 마는 숙익은 수밀도에는 그런 맛은 조금도 없고 어딘가 이에 첩분첩분 붙는 미각이란 참 먹을 줄 아는 사람이래야 알지요. 자아 하나 들어 보시우." 그러면서 추강은 솜털이 보수수 난 수밀도를 먹기 시작한다. 먹으면서 그는 이 수밀도 속에 안해의 살이 들어 있음을 없는 가장 그로테스크한 환상 속에서 그는 가장 현실적인 육체적 향락을 맛보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혀끝으로 미끈미끈한 수밀도 씨를 질긴질긴 핥으면서 지나간 날의 애련을 연상하고 것잡을 수 없는 성적 충동을 온몸에 느끼는 것이다. "나는 애련을 먹는다." 그런 환상이 추강에게는 가장 리얼리스틱하게 느껴지었다. "철하는 물론 나의 이 혀끝에 비밀을 모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추강은 자기 혼자의 신비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혼자만이 마음껏 향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척 즐겨하였다. 세계를---전부는 아니라 치드래도 그 일단만이라도 철하에게 알리어 주고 싶은, 말하자면 비밀 폭로에 대한 이상한 충동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 참, 맛 좋은 수밀도로군." 하면서 먹기 시작하는 철하의 얼굴을 뻔히 쳐다 보면서 "이 수밀도가 김 형의 입에도 그처럼 맛있는 것도 그 실은 이유가 있는 것이랍니다.---" "이유......." 철하는 먹던 수밀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며 "이유라니요?......" "하하하---그 이유를 말하면 김 형은 저기 저 나무에 달린 세 개의 수밀도까지 두려워서......." 어리둥절해진 철하의 얼굴을 가장 흥미있는 눈으로 뻔히 쳐다 보다가 "---만일 말입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 칩시다. 그 시체를 파묻은 위에 저것처럼 ---." 하면서 추강은 을파주 안의 수밀도 나무를 손으로 가로키며 "수밀도를 심어 놓았다 칩시다. 나무의 수 많은 뿌리는 그 사랑하는 사람의 몸둥이 전부를 마치 무슨 기나긴 하-얀 벌레처럼 싸고 들 것이 아닙니까? 뿌리는 시체의 겨드랑이 아레로 혹은 입으로 코로 기어 들어가서 시체가 생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귀중한 액체를 빨아서 열매를 맺는다 칩시다. 그 열매를 따서 죽은 로맨틱한 사나이가 있다면---? 김 형은 그 사나이를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한 번 철하를 쳐다 보았다. "김 형은 과학자니만큼 혹시 그런 사나이를 미워할 것 같습니다만은 ---." "아니올시다!" 철하는 언하에 추강을 막았다. "아니올시다! 만일 그런 사나이가 사실 이 세상에 있다면 나는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꽃다운 찬사로 그를 찬양할 겝니다. 그런데 이 형---." 하고 그 때 철하는 돌연 추강의 팔목을 붙잡았다. "나의 육감은 인제 하신 이 형의 말씀을 어딘가 참된 사실이라고 나에게 속삭여 주는 것 같이만 생각되는데, 이 형! 혹시


않습니까?" 철하의 양 눈에서는 금시라도 불덩이가 튀여 나올 것만 같았다. "하하하, 하하하---." 추강은 가장 유쾌한 듯이 한바탕 웃어댄 후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하하, 김 형!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김 형이 자신 그 수밀도, 그것이 애련의 죽은 피와 죽은 살을 빨아먹고 자란 수밀도라면---? 하하하......." 추강의 호탕한 웃음 소리에는 어딘가 미친 사람의 웃음소리처럼 밑힘이 없다. 그리고 그 자제력을 잃어버린 듯한 밑힘없는 웃음 소리에는 또 어딘가 '자식 보아라!' 철하는 돌연, 술상을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살같이 뜰로 뛰어 나가서 을파주에 세워 놓은 부삽을 들고 수밀도 나무를 중심으로 하고 파기 시작하였다. "하하하...... 하, 하, 하---." 끊임없이 들려오는 추강의 웃음소리가 솔밭 사이를 깨어 허공 중으로 떠올라간다. 철하가 잡은 부삽이 달리는 기관차의 피스톤처럼 푸르럭 거린다. 철하는 말이 없다. 추강은 웃는다. 이윽코 회색빛으로 변색한 썩어져 가는 관이 드러난다. 그 순간, 철하는 부삽을 멈추고 우뚝 서서 퍼붓는 듯이 웃어대는 추강을 돌아 보았다. 수밀도 나무의 실뱀 같은 뿌리는 관을 동여매듯이 싸고 돌았다. "철하 씨! 사실은 애련이 폐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나의 이 두 손이 애련의 가는 목을 이렇게, 이렇게 꼭 눌러서---." "뭐?" "이렇게, 꼭 눌러서 죽인거야! 하하하....... 어리석은 자식!"

18. 과학자(科學者)의 사랑


철하는 멈추었던 부삽을 다시 잡고 관을 동여맨 수밀도 나무의 뿌리를 끊었다. 관 뚜껑에는 못이 박히지 않았다. 뚜껑은 쉽사리 열리었다. "앗!" 그 순간 옆에 섰던 추강이 그렇게 외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관 속의 시체는 어디로 갔는고? "시체, 시체가 없어졌다? 애련이 없어졌다." 추강은 미친듯이 고함을 치며 철하의 손으로부터 부삽을 빼앗아 가지고 관을 드러낸 후에 시커먼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뿐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모양으로--그러나 아무리 파 보아도 애련의 시체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추강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부삽을 나르고 있다. 그 순간 돌연 "하하하, 하하하...... 어리석은 자식!"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벽력같이 떨어졌다. 추강은 획하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추강! 아무리 파 보아도 없는 시체가 나올 수 있겠나? 하하하, 하하하 ---." 이번에는 철하 편에서 미친 것처럼 웃어대는 것이다. 그 웃음 가운데 숨어있는 승리감! "그대는 시인이고 나는 과학자가 아닌가. 빨아먹고 맺힌 수밀도를 먹을 것으로 사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기다렸지만 어디 과학자야 그런 것에 취미를 가질 수 있겠나? 이 형이 애련을 이 구렁이 속에 파 묻은 후에 수밀도 나무를 심어 놓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 내가 애련의 시체를 가져 갔거든! 하하하....... 가져다가는 어떻겠는가고?---" 그 순간 추강은 "앗!" 하고 부르짖으며 철하의 몸둥이를 향하여 덤벼 들었다. "고래 고기다! 고래 고기가 그 것이다!" "하하하, 하하하 ---"


"고래 고기다! 통조림이다!" III. 악마파(惡魔派) 19. 강자(强者)와 약자(弱者) 이 한 편의 이야기는 나의 가장 사랑하던 누이 동생 루리의 기구하고도 눈물겨운 일생기인 동시에 루리를 중심으로하고 나의 화유(畵友) 백추와 노단 사이에 벌어진 무서운 투쟁기(鬪爭記)입니다. 루리! 그렇습니다. 나는 루리의 그 너무도 무참한 죽음을 회상할 때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함이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이며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음이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어렸을 때 양친을 여읜 루리--- 가장 그리고 드물게 보는 미모의 소유자인 루리였기 때문에 루리는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불행과 가장 큰 무서움 속에서 그 짧은 일생을 마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루리---아아, 너의 그 무서운 최후를 회고하는 이 오빠의 온 몸둥이에는 지금도 오그라질 듯한 소름이 끼치는구나! 한 계집에 두 사나이--- 그렇습니다. 백추와 노단이 루리의 신변에 나타난 것은 거의 동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와 루리가 동경으로 건너 가서, 나는 모미술대학교에로 루리는 모음악대학교에 입학하여 적을 두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 상야공원에 피었던 베꽃이 구슬픈 봄비에 우수수 우수수 지어갈 여덞살이었던가 봅니다. [와세다.츠루마키쵸오]에 하숙을 정하고 나와 루리는 새로운 희망에 꽃봉오리와 같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는 나대로 화필을 들었고 루리는 루리대로 [바이얼린]을 들었고---노단과 백추가 우리들 사이에 뛰어든 것은 바로 그러한 아담한 생활이 얼마동안 계속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노단은 나와 같은 평안도 사람이었으나


백추는 경기도 태생이었습니다. 노단은 몸이 이십 관이나 되는 비대한(肥大漢)인데다가 머리를 버리둥지처럼 왜자자하게 기르고, 게다가 자기의 영웅주의를 [심볼]한다는 턱석뿌리 수염을 항상 어루만지는 버릇을 가진, 어느 어색하지 않게 표현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노단에 비하면 조물주의 장난이란 참 우스운 것으로서 백추는 열두 관이 겨우 될락말락하는 여윈 몸에다가 오른 편 다리가 조금 짧아서 걸을 때마다 잘룩잘룩 하였지요. 백추의 말을 들으면 그는 자기의 이 절름발이를 비관하고 열 여섯 살 때에 죽을려고 목을 맺던 일이 있다던가요. 노단의 야생적인 성격에 반하여 백추의 성격이 퍽 내약한 것은 그와 같은 불구에서 오는 자비심(慈悲心)이라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마는 하여튼 백추의 해골처럼 창백한 얼굴에는 언제든지 음침한 빛이 사라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처럼 정반대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노단과 백추의 [유-모러쓰]한 [콘트라스트]가 처음부터 벌써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입니다. W 미술학교 입학식날부터 벌써 노단과 백추는 한 개의 피치 못할 숙명적 싸움을 연출하였지요. 그 날 넓은 강당에서 입학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제각기 떠들면서 밖으로 몰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마는 그 때, "조선서 온 학생들은 잠깐만 강당에 남아 있어 주시오." 하는 호령 소리가 등 뒤에서 떨어지길래 불연듯 돌아다 보았더니, 유달리 몸집이 부한 학생 한 사람이 겅충겅충 강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노단의 그 거대한 육체와 그 야생적인 음성은 우리들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로 하여금 조그만 반항심도 품게할 여지를 남기지 않고 약 십여 명의 가까운 조선 학생들을 강당 한 구석에 얽어 놓았던만큼 그만큼 노단의 야수(野獸)적 풍체는 그


순간부터 우리들을 무섭게 압박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 노단은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떠나온 우리들인 만큼 친밀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일 모시 모처에서 친목회를 열 테니 회비로서 각자 이원씩을 지참하라는 ---다시 말하면 서로 의논하는 것이 아니고 벌써 한 개의 지휘자로서의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물론 노단이 제의한 친목회에 군맹(群盲)을 잘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노단에게서 일종 영웅적 [타잎]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의 너무 소극적 인생관을 속으로 비웃어까지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찬성한다는 의미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이의없다는 것을 표시하였습니다마는, 그 순간 어찌된 셈인지 노단의 양편 볼이 푸르럭하고 경련을 일으키지 않았겠습니까. "당신, 이리 좀 나오소!" 노단은 군중의 일각을 손으로 가르키며 강단에서 뚜벅뚜벅 내려 오지요. 우리들은 일시에 노단이 가리킨 일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면 날아날 듯이 수척한 체구의 소유자, 백납처럼 해말쑥한 얼굴에 동공(瞳孔)이 쉽게 말하면 해골과 같은 인상을 주는 학생 한 사람이, 자기 앞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걸어오는 노단을 묵묵히 쳐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노단은 다가오면서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습니다. "백추라고 부릅니다." 백추는 허리를 굽히며 신중한 태도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백추?......." "네, 흰 백자, 가을 추자입니다." "그래, 손을 들지 않는 것을 보니 당신은 이번 친목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이죠?" "네, 구태여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자리에 같이 모여서 서로 친목하자는 것이 군의 비위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지?"


노단은 눈을 뚝 부릅뜨고 백추를 노려다 보았습니다.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것 보다도....... 그렇지요. 결국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백추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든지 침착하였고 그의 얼굴에는 별반 이렇다 할 표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어째 비위에 안 맞는다는 말이야? 그 이유를 설명해 보아!" "비위에 안 맞는다는 것은 아무리 설명을 한댔자 결국 비위에 안 맞는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이유를 말해 보라면, 아무리 한 자리에 앉아서 않는 친구가 갑자기 비위에 맞을 리는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말하면 당신과 같은 친구와 한 자리에 앉아서 술 추념을 백 번 한댔자 내 비위에 맞을 리는 만무하니까요." 그 순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리들은 몸이 오싹했습니다. 그가 그처럼 노단에게 대드는 것을 보니 백추에게도 육체적으로 상대자를 이길만한 무슨 전술이 있는 것 같아서 일종의 [스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뭣이 어째서? 이 자식 건방지게!" 하고 외치는 노단의 짐승같은 목소리와 더불어 그의 커-다란 주먹이 백추의 콧등을 내 갈겼을 때, 그리고 백추의 해골같은 몸둥이가 인형처럼 맥 없이 쓰러졌을 때, 또 그리고 백추의 종이짱처럼 쌔애한 얼굴이 코피로 말미암아 시뻘겋게 물들었을 때 백추의 그 계산없는 반항이 나에게는 무척 어리석게 뵈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 제 1 의 악마파(惡魔派) 그러나 그것은 나의 순간적인 관찰에서 지나지 못했지요. 내가 보다못해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어 쓰러진 백추를 잡아 일으켜 가지고 [토일렛]으로 데리고 가면서 "다리를 다쳤구만요" 하고 적룩거리는 그의 다리를 들여다


보니까, "하하, 그건 내가 어머니 뱃 속에서 나올 때부터 가지고 나온 병신다리지요." 하고 입맛이 쓰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 백추란 학생에게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마치 쇠힘줄과 같은 그 무엇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 부자유한 몸으로 노가다 같은 그런 [토일렛]에서 백추의 피투성이 얼굴을 씻어 주면서 나는 그렇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취미지요." 그리고 백추는 입으로 흘러 들어가는 코피를 튀튀 내 뱉으면서 "이렇게 한 번 얻어 맞고 나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걸 어떡합니까. 그러나 이거 참 추태로군요 추태야! 오늘따라 코피가 더 많이 나오는군요. 그 작자, 주먹 힘이 꽤 센걸요! 단 한 대에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미안합니다." 사람에게 얻어 맞는 것을 취미로 안다는 백추의 괴상한 성격을 당시의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나에게 이원이라는 회비를 낼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이 그 모르지요." 퍼러우리하니 퍼진 콧구멍에다가 신문지를 꽁꽁 꿍쳐서 틀어막은 백추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문을 나서면서 그렇게 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아니, 그렇게 구차하시우?" 하는 나의 물음에는 대답을 피하고 "오늘은 정말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형이 아니드면 그 작자에게 매맞아 죽었을 지도 몰랐었지요. 보시는 바와 같이 이처럼 허약한 몸이니까 그 작자의 주먹이 한 번만 더 들어 닿았던들 지금쯤은 황천객이 되어 버렸을 겝니다." 그리고 그와 나는 서로 통성명을 한 후에, 그럼 나는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헤어지고자 하는 그에게 가시지요. [츠루마키쵸오]인데요." 하고 그를 끌었더니만, "[츠루마키쵸오]면 정말 여기서 가깝겠구만요. 혼자 계십니까?"


"내 누이 동생과 같이 있습니다." "아, 누이 동생이 계십니까? 그러면 더욱 갈 수 없습니다. 김 형의 누이 동생이라면 반드시 예쁘고 반드시 착한 분일 테니까, 그런 분 앞에 콧구멍에다 신문지를 꽂고 어떻게....... 더구나---." 하고 그는 말끝을 채 맺지 못 했습니다 마는 더구나 이런 절름발이의 더러운 몸뚱이를 젊고 어여쁜 여성 앞에 어떻게 내놓겠느냐?는 말일 줄을 깨달은 나의 가슴 속에는 그 어떤 애틋한 감정의 실마리가 숨어 들었습니다. 하는 나를 붙잡고 "김 형네 집엔 후일 가기로 하고 오늘은 내 집으로 놀러 갑시다." 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도저히 거역하지 못할 그 어떤 강렬한 매력을 느끼었습니다. 조선 학생이 많이 거주하는 [간다] [Y.M.C.A] 근처, 어떤 조그만한 양화점 이층이 그의 숙소였지요. 이층은 이층이라도 하루 종일 가야 햇볕 한 점 볼 수 없는 북향 삼조 방에는 고물상에서 사 온듯한 조그마한 책상 위에 미술에 관한 서적이 몇 권 놓여 있고 한편 구석에 자취도구가 너저분하니 널려져 있었습니다. "뭐, 대접할 것이 있어야죠." 간장 접시와 함께 무슨 신문지 뭉치를 끄집어 내다가 펼치면서 "이걸 이렇게 간장에다 찍어서 먹으면 맛이 괜찮습니다. 자아." 하고 나에게 권하였습니다. "이 것이 뭡니까? 아, 누룽지?" "네, 누룽집니다. ......들어 보시우." 그는 간장을 바른 누룽지를 버적버적 깨물면서 [다다미] 위에 길다라니 누워 버렸습니다. 그 때 나는 문득 벽 위에 걸린 한 장의 이상한 그림을 발견하고 "허어,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걸 이번 제전(帝展)에 출품해 볼려구요."


그의 무기력한 대답이었습니다. "아, 제전에? 그럼 이게 백 형의 그림이로구려!" "네---왜, 가망이 없습니까?" "아아니---." 나는 그 때 나의 눈 앞에 걸린 그 괴상한 그림이 제전에 입선될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그러한 문제에 관심할 여유를 갖지 못하리만큼, 그림 전푹에서 떠오르는 강렬한 귀기(鬼氣), 일종의 잔인한 악마적 [스릴]을 전신에 느끼고 브르르 떨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투쟁(鬪爭)]이라는 제목을 붙인 그림인데 한 개의 [마이트(權力)]을 상징하는 악마와 같은 거인(巨人)이 배리배리 말라붙은 글자 그대로 해골처럼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거인의 그 커다란 발 밑에서 소인의 복부(腹部)가 마치 행인의 발에 짓밟힌 개구리처럼 시뻘건 내장(內臟)을 배앝어 버리면서 툭 터져 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인의 얼굴에는 힘과 분노와 악이 엉킬대로 서로 엉키어져 있었습니다마는, 그러나 거인의 발바닥 아래서 무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그 작은 사나이의 얼굴에서 나는 그러한 순간에 우리들이 보통 상상하는 비참한 공포의 표정을 발견하는 대신에 조소---창백한 입가에 떠도는 쇠힘줄같은 비웃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서운 그림! 무서운 필치!" 중학시대에서부터 가지고 온 나의 아름다운 이상---선(善)의 미(美)에 입각한 [로맨티시즘]은 백추의 이 너무나 혹독하고 강렬한 악마주의적 경향에 접함으로써 뿌리채, 송두리째 갈피갈피 찢어져 버리고 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실로 나에게 있어서는 한 개의 경이(驚異)인 동시에 또한 무서운 협위가 아닐 수 없었지요. 얼마동안 머엉하니 그림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 백추는 누룽지를 쩝쩝 먹으면서 "취미지요. 나의 취미래두 그르셔?" 하고 그는 아까 노단에게 얻어맞은 콧등을 한 번 쓸어 만져 보면서


"배에서 시뻘건 내장이 터져 나오는 것이나 코가 터져서 시뻘건 코피가 흘러 나오는 것이나, 말하자면 결국 같지요.---그런데 김 형은 [스테파노]라던가---그런 사람들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나는 그들의 작품을 대단히 즐기지요. 더구나 황막한 전장(戰場)을 달리는 사인마(死人魔)의 난무를 그린 것과 같은 작품 중에는 참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괴기파, 악마파 중에서도 [뭉크]의 [임종실(臨終室)]같은 것이 으뜸가는 걸작이 아닐까요?......." 백추는 그리고 태서화가들의 괴기파적, 악마파적 작품들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한참동안 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종류의 그림에 관해서는 하등 이렇다 할 흥미도 없었을 뿐더러 나의 유치한 지식으로서는 도저히 백추의 의견에 참가할 자격이 없는 것을 깨닫고 "글쎄요, 그럴까요?" 하는 대답밖에 못 하였습니다.

21. 제 2 의 악마파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그림에 대한 경향은 서로 달랐으나마 나와 백추와는 가끔 만났고 우리들의 친분은 나날이 두터워 갔습니다. 노는 날 같은 때는 반드시 나의 하숙으로 와서 저녁을 같이 먹기를 무척 즐기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노다느이 이야기를 잠깐 기록할 필요를 느낍니다. 어째 그러냐하면 나는 노단에게서도 역시 백추의 경향과 같은 악마주의적, 괴기주의적 경향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노단으로 말하면 백추와는 정반대로 집이 퍽 부유하듯 싶어서 그가 하숙하고 있는 [아파아트]만 해도 무척 호화로웠지요. 않은 흥미를 느낀 것은 백추가 약자로서의 표본물인것과는 정반대로 노단은 강자로서의 표본물인 때문이었습니다. 노단은 어떠한 곳, 어떠한 [그릎]에를


가던지 그는 반드시 그 곳, 그 [그릎]의 [헤게모니]를 쥐는 왕자였습니다. "김 군, 누이 동생이 퍽 미인이라지?" 어떤 날 방과 후, 노단은 어디서 어떻게 주어 들었는지 그 우렁찬 음성으로 나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그래 나는 그저 빙글빙글 웃고 서 있노라니까, "요---시! 오늘은 내가 한 턱 할테야. 먼저 김 군을 함락시켜 놓아야만 되거던. 자아, [가구라자카]로 가세!" 여전히 빙글빙글하고 서 있는 나의 팔을 [택시-]를 멈추질 않겠습니까. 거 참 재미있는 양반이라, 속으로 생각하면서 구태여 그만두자고 거절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음으로 허허하고 웃으며 [택시-]에 올랐지요. 그 날 밤, 노단과 나는 [가구라자카] 어떤 [카페]에서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거의 한 시가 가까웠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면 나의 [비너스] 루리 양은 후일 가서 뵙기로 하고 오늘 밤은 늦었으니 내 집에 가 자세." 취중이라 아무리 거절해도 들을 리 만무한 노단에 끌려 [이이다바시] 근처에 있는 노단의 [아파아트]로 갔던 것입니다. 그 날 밤 나는 노단의 [아파아트] 벽에 발견하고 이처럼 성격이 판이한 백추와 노단 사이에 어딘가 일맥의 공통성이 있는 것을 저윽이 의아하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사면 벽 위에 걸린 그림, 그림, 그림---물론 복사에 지나지 못하는 그림이었습니다마는 [쿠우핀]이라든가, [롭쓰]라든가, [보슈], [피이터어] 등의 악취가 무륵무륵 떠올라 오는 추괴하고도 잔인한 회화가 벽이 좁다는 듯이 붙어있질 않았겠습니까. "김 군, 나는 그 중에서도 저기 붙은 [고야]의 [전쟁의 폭행도(戰爭暴行圖]를 제일 가는 걸작이라 생각하네. 거기에는 힘의 승리---[마이트], [헤게모니이]의 저릿저릿한 승리미(勝利美)가 나타나


우중(愚衆)들은 이 그림을 그리켜 추악하다고 부르지만, 아니다! 그것은 힘의 승리에 공포감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약자들의 부르지즘 이외의 아무것두 아니다! 힘이다! 아아, [뮤우즈]여! 나에게 힘의 미를 그려낼 화필과 [캔버스]를 주십시오. 아-멘!" 노단은 주먹으로 침대를 두드리며 혀끝이 마음대로 잘 돌아가지 않음을 무척 안타까워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노단, 백추도 역시 군과 똑같은 경향을 가진 악마파라네." 나도 얼근한 김이라 무심 중 그런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백추가?......." "음---백추는 벌써 그런 경향의 그림을 출품한다는 거야." "벌써 그렸다!" 질투에 타오르는 노단의 얼굴이었습니다. "백추는 말하자면 천재야. 중학을 갓 나온 몸으로서 그만큼 대작을 그렸으니까. 노단, 군도 뭘 하나 만들어 보았는가?" 하고 묻는 나의 말에 노단은 충혈된 눈동자를 번득이면서 "음---아직, 아직 아무런 것도......." 하고 신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노단은 말하자면 같은 악마파라도 강자로서의 취미를 가졌고 백추는 반대로 약자로서의 취미를 가진 것이라고---. 그것은 하여튼, 이러한 노단과 그러한 백추가 동시에 내 누이 동생 루리를 무서운 비극의 단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나는 까만히 생각하여 보는 때가 있지요. 대체 루리가 누구를 더 따르고 좋아하였던가?......를---. 루리더러 물어보면 루리는 반드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오빠가 좋다면 나두 좋지요, 뭐." 이 글 맨 처음에도 말한 것과 같이 어렸을 때 양친을 잃은 루리로 말하면 나를 하늘처럼 믿고 온 것은 사실이었지요. 나의 판단은 곧 루리의 판단이 될 수 있었으며


나의 결론은 곧 루리의 결론을 이룰 수 있었더니만큼, 그리고 루리의 성격이 너무 착하고 너무 약하였던 만큼, 루리는 좀체로 자기 자신의 판단을 못 내린다느니 보다도 그것은 바로 백추의 그림이 제전에 입선되었다는 보도를 받은 날 밤이었습니다. 나와 루리는 이 불우의 천재화우 백추를 위하여 비록 호화롭지는 못할 망정 입선축하회를 의미하는 조그마한 만찬회를 열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나의 하숙에서 주반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한 석상에 노단이 참석한 것은 생각하게 달려서는 적지 않게 부자연하였습니다마는 그러나 어떠한 [그릎], 어떠한 회합에서든지 반드시 대장격인 노단인 만큼, 그리고 백추와 노단 사이에 가로막힌 악감정을 이러한 기회에 서로 융합시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어떨까 하고 머리를 기울이는 루리의 말을 무시하고 노단의 참석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22. 악마(惡魔)의 가무(歌舞) 과연 노단은 왔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술잔을 높이 들고 "천재화우 백추 군 만세!" 를 솔선하여 부른 것도 이 노단이었지요. 축하회는 백추의 입선작을 중심으로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나 백추는 조금도 기뻐할 줄을 모릅니다. 백추의 시선은 항상 무릎 위에 떨어져 있었고 노단의 시선은 매양 루리의 얼굴을 따릅니다. "자아, 백 군, 한 잔 들게." 얼근히 취한 노단의 호탕한 목소리에 백추는 술잔을 받아 말 없이 들이키는 것이었습니다. 창백하던 백추의 얼굴에도 발가우리한 홍조가 떠돌기 시작합니다. "백 군, 미남인 걸!" 뜻하지 않았던 노단의 말에 백추의


시선이 번쩍 들리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모욕에 귀밑까지 새빨갛게 변해버린 백추였습니다. "어서 노 군, 그 술잔이나 마셔! 그리고 돌아 가면서 목침돌림으로 여흥이나 하나씩 하세. 자아 노 군부터---" 하고 그 때, 노단의 입을 막노라고 내가 그처럼 여흥을 제의한 것이 나중에 생각하면 크나큰 실책이었지요. "그래, 그래, 거 참 재미있어!" 하고 옆에 앉은 루리도 손뼉을 치면서 찬의를 표한 때문에 노단은 에헴! 하고 하였습니다. 창 밖에 국화심어 국화밑에 술빚어 놓고 술 익자 국화피자 님 오시자 달도 뜨니 동자야 국화주 걸러라 취코 노자 우리들은 손뼉을 쳤습니다. 나는 아리랑을 부르고 루리는 [바이올린]으로 [아베·마리아]를 켰고 다른 동무들도 제각기 노래도 하고 요술도 하였습니다마는 백추만은 아무것도 할 생각없이 묵묵히 앉아 있습니다. "뭐든지 한 가지 하세요." 루리가 그렇게 청하였으나 백추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데요." "백 군은 춤을 춰야 제격이야." 하는 노단의 악의에 찬 말에 "그래 그래 춤......." 하고 루리는 손뼉을 두 서너 번 치다가야 비로서 백추가 절름발이란 사실을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자기 입을 꽉 막아 버렸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늦었습니다. 한 손에 저를 들고 또 한 손에 술병을 들은 백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 서면서 "좋다, 좋다, 좋구나 좋다!" 를 계산이소리처럼 거치러운 목소리로 연발하며 아아, 그 추악한 절름발이의 엉덩이를 들석거리질 않겠습니까. "좋다, 좋다! 잘 춘다 백추!" 이것은 또 노단의 목소리었지요.


이것은 절로 술병을 치면서 돌아가는 백추의 거센 목소리였습니다. "백 군, 그만 두게!" 그 순간, 나는 온 몸이 오싹함을 느끼면서 그렇게 외쳤습니다마는, 마이동풍, 통 들은 체 만 체하는 백추였습니다. "아이, 그만 두세요!" 루리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감돌았습니다. 그러나 백추는 한칭 더 그 보기흉한 엉덩이를 내저으면서 "노단, 어서 소리를 하게나!" 하고 목메인 고함을 칩니다. "자아, 그럼 한 마디 더 하지." 하는 노단에게 하고 막는 나를 한 손으로 물리치며 "가만 내버려 둬! 이게 모두 우리들의 취미니까--- 나는 나로서의 취미를 즐기는 것이고 백추는 백추로서의 취미를 향락하는 중이니까---" "좋다, 좋다, 좋구나 좋다!" "---자아, 내 소리를 하마. 백추, 정신차려 춰야 하네." "얼씨구, 좋다. 얼씨구 좋아!" "---청산도 절룩절룩(사실은 절로절로다) 녹수라도 절룩절룩......." "노단! 그만 두래두 그래?" 나는 보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단의 입을 손으로 꽉 막았습니다. 그러나 원채 힘이 세인 노단이라 나는 그의 휘젓는 팔고비에 검부락지처럼 쓰러지고 말았지요. "악---." 하고 울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좋다, 좋다, 얼씨구 좋아!" "--- 산 절룩 수 절룩하니 산수간에 나도 절룩, 어려서 병 있게 (사실은 병 없이로 되어 있다) 자란 몸이 늙기라도 절룩절룩......." "좋다, 좋다, 절룩절룩!" 백추의 목소리는 우는 것 같았으나 그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백추는 백추대로 끝끝내 춤을


추었고 노단은 노단대로 끝끝내 소리를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백추는 학교를 또 그 이튿날도 운동장 한편 구석에 높다랗게 솟아 있는 느티나무 밑에서 항상 머어나 먼 하늘가를 바라다 보며 호올로의 사색을 즐기던 백추의 쓸쓸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마침내 사흘이 잡히는 날 방과 후 [간다]로 백추의 하숙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만 삼십이 될락말락한 주인 마누라가 나를 반가이 맞이하여 "아이 참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학생의 그림이 제전에 입선되었다지요? 아이 어쩌면 그렇게 재주가 있담! 그런데 학생은 어딜 가서 오늘도 돌아 오시질 않습니까?" 하는 말에 나는 "에?--- 안 돌아 오다니?" "아, 글쎄 신문사에서는 매일처럼 학생을 만나러 찾아 오는데 대체 어딜 가서 오늘도 안 돌아 오신담! 오늘이 사흘째입니다. 사흘---" 가만 있자! 사흘이면....... 그렇다! 우리 집에서 입선축하회가 있었던 날 밤부터 백추는 어디론가 행방불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나는 불이야 불이야 이층 백추의 방으로 뛰어 올라가 보았으나 방에는 이렇다 할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자취도구와 쓰러져 가는 책상만이 쓸쓸히 놓여 있을 뿐입니다. "백추는 죽었다!" 그 순간 나는 불연듯 그렇게 생각하였으며 내 말을 듣던 루리도 역시 과연 우리들이 추측하는 것과 같이 백추가 자살을 하였다고 가정할 때 그 죽엄에 대한 책임은 두 말도 할 것 없이 절름발이 백추에게 춤 추기를 권한 노단과 그 노단의 말에 주책없게도 찬의를 표한 루리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노단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백추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존재였다. 내 신변에 백추와 같은 인물의 존재를 감촉할 때, 나는 항상 삶에 대한 보람을 느끼었으며 생에 대한 환희가 오주주하니 나의 전신을 습격하였으니까." 하고 그는 여전히 강자로서 백추의 행방불명을 섭섭히 생각한다는 것을 표시한 후에 제전에 입선된 백추의 작품을 "백추는 말하자면 모든 점에 있어서 나에게는 한 개의 강렬한 자극제였다. 그 작품은 나의 무기력한 화필을 채찍질 하리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우연히도 백추의 경향과 나의 경향이 같은 이상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백추의 그림에 지지 않을만한 걸작을 내야만 될 숙명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니까---" 무엇이 숙명적 입장인지 나는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하여튼 그의 요청대로 백추가 남겨 놓고 간 그림을 노단에게 양도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루리는 우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의 판단, 자기의 결론을 짓기를 두려워 하던 루리는 자기 일신에 관한 모든 일을 오빠인 번도 내세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23. 악마(惡魔)의 축전(祝電) 노단과 나와 그리고 루리가 동시에 학교를 졸업하는 해 봄, 노단과 루리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루리는 백추에게 한 없이 동정은 할 망정, 결코 백추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고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백추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우리들의 머리 속에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리고 매일처럼 졸라대는 노단이었기 때문에, 또 그리고 굴러가다가 멎는데가 저 살 곳이라는 태도의 루리였기 때문에 결국 나는 노단과 루리를 결혼시켰습니다마는--- 아아, 어리석은 실책을 채찍질하여 주려므나!


결혼식은 서울로 돌아와서 거행하였습니다. 부민관 중강당이 터져 나갈 듯이 모여든 손님이었지요. 풍채가 유달리 늠름한 노단과 배꽃처럼 청아한 루리와 ---이 두 사람의 신랑신부가 늙은 주례 앞에서 백년해로를 서약할 즈음에 나는 한 장의 기나긴 전보를 받고 놀랬습니다. 노단, 너는 기쁘리라. 너는 이겼으니까. 그리고 나도 기쁘다. 나는 졌으니까. 결국 이것은 우리들의 취미다. 루리를 사모한 애당초부터 나는 너한테 져야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강자로서의 쾌감을 향락하면 될 것이고 나는 그러니까 결국 너와 나와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시내전보였습니다. "백추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너무나 혹독한 말씀입니다마는, 나는 그 순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백추를 기뻐하기 보다도 먼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말미암아 눈 앞이 아찔해짐을 깨달았습니다. 식이 끝난 후 루리에게는 차마 보일 수 없었으나 노단에게는 감추지 못했지요. "백추! 음---백추가 살아 있다? 백추가 죽질 않았구나!" 아편중독자가 눈 앞에 아편을 보는 것처럼 점점 생기를 띠는 노단이었고 나 같은 노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보를 친 백추의 그 후 소식을 우리들은 통 모르고 있었지요. 삼청동 아담한 양옥에다 살림을 차려 놓은 노단과 루리의 신혼생활이 어떠 했는지 자세한 것은 알 바 못되되 노단이 루리를 무섭게 사랑한 것 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인 듯 하였습니다. "무서운 사람, 무서운 사람! 노단은 악마야, 악마!" 어떤 날 나를 찾아 온 루리는 노단을 악마라고 부르면서 그와 같은 집 안에서 기거하기가 무엇인가 똑똑히 지적할 수는


없으나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 무서움이 뭔지 지적할 수 없느니만큼 루리에게는 더욱 무시무시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노단의 악마적 열정이었지요. "어쩌면 글쎄 변소에까지 따라 다닌담....... 그는 나라는 한 개의 인간을 마치 이 잡듯이 연구해 본다는 거지요. 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미(美)를 그는 자기 [캔버스] 위에 재현하겠다는 듯이 한밤 중에 자다가 눈을 번쩍 떠 보면 그는 그 [에네르기슈]한 얼굴로 나의 몸을 뚫어질 듯이 내려보고 앉았지요. 아아, 그 무기미한 얼굴, 눈동자! 그는 지금 나를 [모델]로 백추의 그림을 능가할만한 대걸작을 낸다고요. 그런데 그 [모델]의 조건이......." 루리는 흐득흐득 느껴우는 것이었습니다. 노단이 루리의 몸뚱이에서 발견한 미란 결국 한 개의 보편적 미가 아니고 미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그처럼 귀여워하고 그처럼 아끼는 루리를 학대하고 괴롭힘으로서 느끼는 일종의 [사디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단이 루리에게 제출한 [모델]의 조건 ---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가장 성스럽고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를 그리되 [마리아]의 그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가지고는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악마의 힘, 그리고 결국 그 악마를 공포하고 그 악마의 팔에 매어 달려 구원을 받고저하는 [마리아]를 그리어 악의 승리를 표현하겠다는 것인데 그 [마리아]의 [모델]을 루리더러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해하려는 무서운 악마 앞에서 종일 [모델]대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가 아닌 루리가 어찌 그러한 심각한 표정을 능히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얼마 동안은 그래도 하라는 대로의 [포-즈]를 하고 [모델]대에 섰던 루리였습니다마는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루리는 루리대로 이 노릇에 싫증이 났었고 노단은 또 노단대로 어색한 루리의 [포-즈]에 화를 내어 화필을 여러 번 꺾어


버리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면 노단은 이틀이고 사흘이고 이불을 쓰고 들어 누운채 충혈된 눈동자로 미친 사람처럼 멀거니 천정을 쳐다 보면서 "백추는 나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적(敵)인 동시에 예술의 적이다! 그렇다! 따를 재주가 없고나!"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에 걸린 백추의 작품---이년 전 제전에 입선되었던 [투쟁]과 마주 앉아서 시간 가는 줄도 잊어 버리고 들여다 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노단은 모든 것에 있어서 지금까지 백추에게 이겨 왔습니다마는 단 한 가지 백추의 예술에는 아무리 아득바득 하여 보아도 이길 수가 없었다는 것만은 술김 수 없는 사실인 듯 하였습니다.

24. 걸작(傑作) '빈사(瀕死)의 마리아' 이리하여 노단과 루리가 그러한 결혼생활을 약 석달 동안이나 계속한 그 해 가을, 루리가 마침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는 이상한 사건이 돌발하였습니다. 그 때 노단 부부는 못했던 신혼여행을 겸하는 의미로서 금강산 가을 풍경을 향락하고저 약 한 달 동안 해금강 어떤 조그마한 절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어떤 날 아침, 잠깐 산보를 나갔다 온다던 루리가 어디로 갔는지 나간 채 통 돌아 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노단의 말을 들으면 불이야 불이야 사람을 내세워서 근방 일대를 수색해 것이었습니다. 전보를 받고 나도 달려가 보았습니다마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지요. 결국 소할 경찰서에 수색원 한 장을 제출하고 꿈결처럼 돌아왔을 따름이었습니다. 나의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루리의 이 뜻하지 않은 도회(韜?)로 말미암아 받은 노단의 비탄은 참말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컸었습니다. 그렇게 비대하던 노단의 육체는 날로날로 수척해 갔고 루리를 찾아 헤매이는 노단의 영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슬프게 울었을 겝니다. 낮이 가고 달이 오는 동안에 노단의 영웅주의와 악마적 기질은 점점 그 그림자를 감추었고 그 대신 노단의 용모를 [페시미즘]이었습니다. "루리, 루리!" 노단은 미친듯이 루리의 이름을 부르며 서울장안을 싸 돌아 다니다가는 "이번에 가서는 기어코 루리를 찾아 와야지." 그러면서 밤이고 낮이고 생각만 나면 정거장으로 뛰어 나가서 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가곤 하였지요. 그러던 것이 이듬해 오월---노단은 마침내 지나간 가을 루리와 함께 투숙하였던 해금강 절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떤 높다란 바위 위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절간 주지의 말을 들으면 그 날도 노단은 루리를 찾으러 나간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지나도 돌아오질 않음으로 근방을 찾아 보았더니 그 모양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체 옆에는 독약을 마신 듯한 조그마한 양주 [켜]이 한 개 놓여 있었고 [켜]에는 아직 극약 XXXX 가 조금 남아 있었지요. 성내병원에서 해부한 시체의 위에서도 역시 치사량(致死量)의 XXXX 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여튼--- 아아, 이 어찌된 일입니까? ...... 노단의 죽엄으로 말미암아 루리의 죽임을 확신하고 눈 앞이 아찔했습니다. 아아, 불쌍한 루리! 아아, 무서운 노단! "루리를 죽인 것은 노단이었구나!" 그렇습니다. 루리를 죽인 것은 노단 그 놈이었던 것입니다. 오십호 가량 되는 한 장의 그림을 발견하고, "악---" 하고 외쳤습니다.


"루리다! 루리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림 가운데 인물은 틀림없는 루리였습니다. 그러나--- 아아,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루리였으며 참혹한 루리였습니다. 나는 그 [빈사의 마리아]라는 그림에서 무엇을 보았나?...... 죽음에 직면한 루리의 무서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림 속의 루리--- 그것은 깎은 듯이 높다란 벼랑 기슭에 돋아난 조그마한 대추나무 뿌리에 죽어라 하고 매어 달린 루리였습니다. 루리는 그 키 낮은 대추나무 점점 빠져 나오는 대추나무 뿌리와 자기 발밑에 감감하니 내려다 보이는 푸른 물결과를 비교해 보았을 겝니다. 아아, 그 순간의 루리의 얼굴! 공포와 절망과 애원의 눈동자여! 악 물은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실뱀과도 같은 가느다란 핏줄기여! 대추나무 뿌리를 부여잡은 루리의 힘없는 손가락이여! 벗겨진 손톱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 내리고---....... 아아,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아아......' 라는 감탄사를 백 번, 천 번 불러도 시원치 않도록 격정에 휩쓸린 나의 마음이며 그 순간의 루리의 무섭고 때 나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화산처럼 쾅하고 터져 나갈 것 같이 쓰리고 아프고 저립니다. "악마 노단의 예술의 희생이 된 불쌍한 루리!" 독자제씨여! 필자에게는 이 이상 더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할 용기가 없음을 용서해 주시요. 그것은 다만 쏟아져 나오는 비장한 눈물과 터질듯한 격정으로 말미암아 이 귀중한 기록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맺을까 접하오니---....... 결국 루리는 노단의 예술적 희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점에 있어서 백추에게는 강자이던 노단이 예술에 있어서는 도저히 백추에 따르지 못하는 약자였지요. 생각컨대 그는 제전에 입선된


자기의 무기력한 창작욕에 채찍질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을 지라도 백추를 능가할만한 걸작을 내고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언젠가 루리의 입으로부터 들은 바 있거니와 그의 [아브노오말]한 창작욕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안해 루리를 [모델]로 하여 악마의 힘을 공포하고 악마의 팔에 매어달려 구원을 받고저 하는 성모 [마리아]의 그 무참하고 무섭고 비굴한 얼굴을 그려서 악의 승리를 외쳐 보고저 하였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단은 루리의 얼굴에서 그러한 참된 공포와 신념을 잃어버린 진정의 비굴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마침내 금강산 신혼여행을 구실로 삼고 버림으로서 참된 공포를 루리의 얼굴에서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루리의 행방불명 후에도 노단이 생각만 나면 밤낮으로 금강산엘 찾아가고 하였던 것도 후에 이르러 생각하면 거기서 [뎃상]만 만들어 놓은 자기 그림을 완성시키고저 하였던 것에 틀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자 노단은 인간으로서의 자책을 느끼고 루리가 무서운 최후를 마친 문제의 별아 위에서 자기의 예술---[빈사의 마리아]를 들여다 보면서 독약을 마셨던 것입니다.

25. 유작전람회(遺作展覽會) 노단이 죽은지 석달 후, 그러니까 그것은 그 해 칠월 중순이었지요. 노단의 유작(遺作)전람회가 열린 것은 W 백화점 오층 [갤러리]였습니다. 애당초부터 나는 이 유작전람회라는 것에 반대였습니다마는 노단의 죽음이 대단히 엽기적인데다가 루리의 최후를 그린 [빈사의 마리아]가 사계의 일류 대가들로부터 찬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오지 못한 노단의 유작이 예상 이외에 많았음으로 작고한 노단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그의 화우들의 간절한 성의를 물리칠 바 없어 나는 본의 아닌 노단 유작전람회를 열기로 했던 것입니다. 날이었습니다. 약 이십점에 가까운 노단의 그림이 여기저기 보기좋게 붙어 있었으며 예의 악취미적 경향의 작품이 그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노단의 유작전람회는 이리하여 서울 장안 인기를 끌대로 끌었고 사람들은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노단의 최후의 작품인 [빈사의 마리아]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두려워하고 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사람들 틈에 끼어 새로운 감회로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마는 그 때 나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면서 "김 군이 아닌가?" 하는 낯익은 목소리에 불연듯 힐끗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아, 역시 김 군이로군!" 그렇습니다. 그것은 삼년 전에 동경서 헤어진 절름발이 백추였으며 여전히 해골처럼 파리한 얼굴을 가진 백추였습니다. "이게 대체 웬 일인가?" 이 뜻하지 않은 백추의 출현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노단이 죽었다지?" 여전히 무기력한 백추의 음성이었으며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그였습니다. "음--- 그것은 하여튼......." "자살이라지?" "음, XXXX 을 마시고....... 그런데---" 백추는 나와 대화를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항상 그림에만 쏠리었으므로 나는 "불쌍한 루리씨!" 백추의 입으로부터 불연듯 그러한 중얼거림이 울어 나왔습니다. "불쌍한 루리!" 백추의 창백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립니다. 그 눈물 어린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음, 가엾은 루리였어! 예술보다도


인생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노단의 그 미친듯한 심정을 이해 못하겠는걸. 어떻게? 악마야! 노단은 정말 짐승같은 악마였어!" 백추의 부드러운 음성에 접함으로서 점점 격화해지는 나의 감정을 나는 도저히 억제할 바가 없었습니다. 하는 나의 말에 백추는 "음---." 하고 한 번 신음한 후에 "이 작품에 대한 세평이 어떤가?" 하고 묻습니다. "대단한 평판이네. ---아까도 화월 선생이 오셔서 보고 갔는데, 격찬이야, 격찬!" "음--- 그런가!---그런데 노단이 정말 루리 씨를 [모델]로 하고 이 그림을 그렸다면 루리 씨의 시체는 지금 일본해 바다 속에 있을게 아닌가?" "벌써 고기밥이 된 지 오래겠지." "불쌍한 루리 씨!"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백추는 [갤러리]를 나와 점심을 같이한 후에 가 보지 않겠나?" 하는 백추의 말에 "아, 참 집이 어딘가? 그 동안 서울 있었는가?" 하고 비로서 그의 거처하는 데를 물었습니다. "서울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하여튼 같이 가세. 청량리 근처야." 전에도 그러했지만 백추의 그 나즈막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거절하지 못할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쌓였던 이야기도 듣고 할겸, 전차를 탔습니다. 백추의 집은 청량리 전차 정류장에서 한참 동안 대학 예과 옆 신작로로 걸어 들어 가다가 또 오른 편으로 꼬부라진 산골자기 길을 얼마동안 들어가면 무성한 숲새로 보이는 오막살이 초가였습니다. 재작년 초가을에 대금 칠십 원을 던져서 샀다는 이 초가집은 그래도 교외니만큼 뜰 가운데 화초도 보이고 묘하게 꼬부라진


솔나무도 있고, 게다가 몸채 뒤로 보이는 토굴같은 한채에는 유리창에 [커-텐]까지 내린 것을 보니 아무리 보아도 [아틀리에]인 모양이었습니다.

26. 시승지옥(屍蠅地獄) "이거 뭐, 누추해서---." 하고 인도하는 방은 그가 침거하는 방인듯이 떼국이 조르르 흐르는 이부자리가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고 벙싯하니 열린 부엌 문으로 거무틱틱한 놋그릇이 두서너개 선반에 놓여 있는 것이 보이였습니다. 그처럼 구차한 산림인데도 불구하고 언제 사다 두었었는지 월계관 [독구리] 한 병에다 쇠고기 [통조림] 한 통을 부엌에서 가져다가 "자아, 이게 얼마 만인가? 찬은 없어도 술은 있으니 한 잔 하세." 하고 권하면서 "사실은 오늘 전람회장에서 군을 만날 것 사 가지구 나온 것이네." 하였습니다. 나는 사양치 않고 커다란 유리 컵으로 마셨습니다. 원체 술을 잘 하지 못하는 백추는 [독구리] 한 병을 둘이서 등분히 마셔 버렸을 때는 눈알이 풀어질대로 풀어지고 혀끝이 까부라져 말을 못할 지경이었지요. "이거, 웬 파리가 이처럼 많은 게야?" 시퍼런 청파리, 샛노란 금파리, 시커먼 쉬파리 들이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어디서 몰려 오는지 쇠고기 [통조림] 위에 다닥다닥 붙습니다. 날려도 또 쓰러 모이고 날려도 또 쓰러 모이곤 합니다. 그러나 백추는 그저 무엇이 기쁜지 조는 듯한 눈을 힘써 부릅뜨며 미친 사람처럼 "거 파리를 너무 학대하지 말게. 내 유일한 친구거든. 이처럼 쓸쓸한 외따른 산막에 나를 찾아 줄 자가 누군가 말이야? 파리만은 나를 잊지 않고 이처럼 나를 맞이하여 주거든. 파리, 파리,---오오, 똥파리, 쉬파리, 청파리, 금파리. ---또


무슨 파리가 있는가?....... 옳지, 쇠파리, 말파리 또 또------." 백추는 젓가락으로 술상을 치면서 흥이 나서 주절대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가지고 "그런데 김 군, 내 전 생애의 대표작이 될만한 작품을 완성해 놓았는데, 군이 한 번 감상해 주게." 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백추는 엉덩이를 들썩, 들썩하며 걸을으로 나를 몸체 뒤에 있는 유리창 달린 토굴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몸채에서 토굴까지 가는 좁은 길 좌우에는 봉송화, 백일홍, 채송화 할 것 없이 가지각색의 화초가 만발하였는데, 그 때 나는 내 주위에서 돌연 "왕--- 왕---." 하는 벌떼 소리에 놀래어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지요. 꽃에 앉았던 벌떼가 우리 두 사람의 뜻하지 않은 습격으로 말미암아 놀래인 모양인가 하고 주위를 돌아 보았더니, 의외에도 그것은 벌떼가 아니고 파리떼였습니다. 화초 위에 앉은 새카만 파리떼! 앉았다 날았다, 앉았다 날았다. 왕--- 왕--왕---. 없이 사면 팔방에서 습격해 오는 파리, 파리, 파리---. "괜찮어, 괜찮어." 백추는 얼굴을 찡그리고 놀라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토굴문까지 와서 "자아, 이리 들어 오게." 하고 나를 힐끗 돌아다 보며 나무떼기로 만든 토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갑니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 갔지요."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악---!" 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렬한 일광 속에서 갑자기 컴컴한 토굴 속으로 들어간 나의 눈동자 앞에 어렴풋이 보이는 티끌 같은 물건! 왕--- 왕--- 왕--- 나의 고막을 찢을 나의 콧구멍을 찌르는 이상한 냄새! 동물이 썩어진 구역나는 냄새!


"악---!" 하고 다시 한 번 부르짖으면서 토굴 밖으로 나오려는 나의 팔목을 꽉 붙잡고 백추는 미친듯이 외쳤습니다. "루리다! 저게 루리다!" "엣? 루리?......." 오싹하고 달려드는 공포! "노단의 안해 루리다!" 시커먼 [커-텐]을 통하여 들어오는 연약한 광선은 거의 썩어 떨어져 가는 한 개의 여인의 시체와 그 부시(腐屍)를 그린 듯 싶은 약 백호 가량이나 되어 보이는 커-다란 [캔버스]를 간신히 비추어 줍니다. "루리?......." 덮어 누르는 그 어떤 무서운 의혹! "삼년 전, 이 절름발이에게 엉덩이 춤을 추인 루리다!" 그때까지도 아직 그의 말을 믿지 못하던 나는 백추의 입으로부터 이 한 마디를 들은 순간, 나의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여인의 송장이 틀림없이 루리라는 것을 짐작하였습니다. 우왕--- 우왕--- 우왕--- 우왕---. [커-텐]을 통하여 들어오는 일광에 반사되어 마치 황진(黃塵)처럼 나의 앞을 가리우는 수천 마리, 수만 마리의 파리떼를 손으로 헤치며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을듯이 무룩무룩 떠오르는 악취를 무릅쓰고 나는 무아몽중으로 달려가서 [커-텐]을 걷어 올렸습니다. 하얗게 수놓은 구데기, 구데기, 구데기---. "앗, 루리다!" 육체는 비록 썩어져 떨어졌으나 그 썩어진 육체를 가리운 것은 틀림없는 루리의 옷이었습니다. "루리다, 루리다!" "핫, 핫, 핫, 핫......." "악마, 악마, 악마!" 그렇게 외치면서 미친듯이 웃어대는 백추의 그칠 줄 모르는 웃음 소리를 토굴 속에 남겨 놓고 그 무서운 시승지옥(屍蠅地獄)을 꿈결처럼 탈출해 나온 나였습니다.


27. 걸작(傑作) [부시도(腐屍圖] 악몽에서 깨난 것처럼 이튿날 아침 내가 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나에게는 한 장의 편지와 함께 백 호대(百號大)의 그림 한 점이 배달되어 있었습니다. 두말 할 것 없이 그것은 백추의 편지요, 백추의 그림이었지요. 나는 무엇보다 먼저 포장을 끌르고 [부시도(腐屍圖)]라는 제호가 붙은 그림을 펴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불연듯 "오오, 백추여!" 하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루리의 그 참혹한 최후를 조상하기 보다도 백추의 무서운 필치에 감탄하고 놀라지 "백추는 천재다!" 그것은 단지 한 개의 썩어진 송장을 그린데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는 백추의 창백한 정열의 한 오락, 한 오락이 화면 전폭에 조약되었고 정신없이 화면을 들여다 보는 나의 고막에는 저 무서운 시승군(屍蠅群)의 우음(羽音)이 왕--왕--- 하고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동안 황홀한 정신으로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던 나의 사념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나는 쥐고있던 백추의 편지를 들었습니다. 김 군! 예술가로서의 가장 행복된 순간을 느끼면서 나는 죽노라. [부시도]는 나 있는 가장 큰 보물 중의 하나일 거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아아, 예술가로서의 가장 행복된 순간을 지닌 나는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가장 큰 불행을 걸머지고 지금 마악 황천객이 되려 한다. 루리와 나, 나와 노단, 그렇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피치 못할 하나의 숙명적 관계였다. 노단에게 대든들 이길 수 없는 나였으며 루리를 사모한들 보람 없는 짝사랑---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 나는 왜


노단과 경쟁을 하였으며 루리를 사모했을까?....... 이것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선천적 성격이라 볼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나의 이상한 성격에 않음으로 지금 마악 내 위 속에서 발악을 하려는 극약의 기운이 채 퍼지기 전에 걸작 [부시도]의 유래를 간단히 적어 보겠노라. 김 군! [부시도]의 [모델]은 틀림없는 루리였다. 군은 지금도 기억하리라고 믿는다마는 노단과 루리의 결혼식 날, 나의 전보에 쓰여 있던 문구를 설사 잊지는 않았을 게다. "우리들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리를 그리는 나의 애처로운 심정, 그러나 루리의 마음을 살 수 없는 나의 질투--- 그것은 내가 루리를 사모하게 된 애당초부터 예기했던 결과이다. 세상 사람들은 루리를 죽인 것이 노단이라고 믿지마는, 그리고 지금 [빈사의 마리아]가 노단의 작품인 줄로 알고 있지마는 실상은 나의 작품이다. 루리를 죽인 것도 이 백추다. 작년 가을, 그림을 한 장 그려 볼 셈으로 금강산엘 갔다가 어떤 날 아침, 화구를 메고 [스케치]를 나갔던 나는 어떤 벼랑턱 위에서 우연히도 루리를 발견하고 놀랐던 것이다. 루리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 때 만일 루리가 나를 발견하지 못 했던들 나는 나의 이 추한 몸뚱이를 숲 새로 감추어 버렸을 게다. 그처럼 자기가 사모하고 그리는 루리에게 엉덩이를 들석거리며 걷는 나의 더러운 몸둥이를 보이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죄악이니까. 그러나 사태는 그와 반대로 진전되었던 것이다. 발가우리하니 홍조를 띠우는 양볼을 바라보는 순간, 아아 어리석게도 나는 나의 추한 몸둥이를 망각했던 것이다. 언제든지 가라앉을 줄만 알고 언제든지 쥐구멍만 찾던 나의 영혼은 그것이 루리의 속세적 [센티]에서 우러 나오는 하나의 애도인 것을 깜박 잊어 버리고 그만 그


어여쁜 루리의 손목을 덤벅 쥐고--- 아아, 조물주여! 주는 무엇을 착각하였기에 어쩌면 그리 고은 손목과 어쩌면 이리 더러운 손목을 창조하셨소? "아이, 놓아요!" "옛?......." 그러나 그 때, 어리석게도 흥분되었던,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이래 처음으로 비약했던 나의 영혼이 다시 쥐구멍을 찾을 사실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나의 더러운 손목을 뿌리치고 발딱 바위 위에서 일어서는 찰나, 루리가 그 때까지 밟고 있던 조그만 바위가 그만 빠져 나가면서 벼랑 기슭으로 털석 떨어져 내려가던 루리의 몸둥이가 앉은뱅이 대추나무 가지를 붙잡은채 넝쿨에 매어달린 수서기와처럼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질 않는가. "앗! 빨리 손을! 아, 앗! 백추 씨! 빨리 손을 잡어 주세요. ---어째 그리 바라만 보는 게야요? 어서 손을 내밀어요! 어서 어서, ......앗, 당신은?...... 당신은?...... 뭘 헐려구?...... 삼각(三脚)은 뭘 헐려구 세우는 거요?...... 백추 씨, 백추 씨! 김 군! 나는 역시 악마였다. 참된 공포의 얼굴---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다시 얻을 수 없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와드득하고 습격해 오는 창작욕! 걷잡을 수 없는 공포미! 이년 전에 동경서 절름발이 나에게 엉덩이 춤을 추라고 박수하던 루리를 생각한 것은 약 한 시간 동안에 [데쌍]을 끝내고 난 후였다. 아아, 독약이 뱃속에서 발악을 시작한다. 빨리 써야겠다. 루리의 몸둥이가 떨어진 벼랑 밑은 노단이 죽은 벼랑과 장소가 다르다. 산골자기에 떨어진 루리를 볼 때 나에게는 또 하나의 창작욕이 무륵무륵 떠 올랐던 것이다. [부시도]의 [힌트]를 얻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교묘한 수단으로 루리의 안치하여 두고 한편 [빈사의 마리아]를 완성시킨 것이 바루 금년 봄의 일이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데상]을 가지고 다시 금강산엘 찾아가 루리가 떨어진 벼랑 위에서 [빈사의 마리아]를 완성시킨 것인데, 바루 완성한 날, 나는 우연히도 돌아오는 길가에 솟아 있는 어떤 절벽 위에 루리가 도망한 줄로만 믿고 독약을 먹고 자살한 노단의 시체를 발견하고 놀랐던 것이다. "오냐! 일석이조(一石二鳥)!" 내가 죽기 전엔 발표할 기회가 없던 [빈사의 마리아]를 세상에 내놓을 [찬스]를 얻었던 것이다. 그 뿐인가. 그것을 노단의 시체 옆에 놓아 둠으로써 세상은 루리를 죽인 것이 노단이란 착각을 가질 것이 아닌가! 아앗!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나. 눈 앞이 보이질 않는구나. 손이 떨리는 구나. 그러나 한 마디만 더 써야 한다. 김 군! [부시도]를 꼭 세상에 발표해 주기를 ...... 바라며.......

IV. 백사도(白蛇圖) 28.정체없는 화가(畵家) 이 한편의 무서운 이야기는 一九三 X 년 유월 초순에 열린 선전(鮮展)---조선 미술전람회---의 특선작품 [백사도(白蛇圖)]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경복궁 후원에 신축된 회장 제 ×실이라면 가장 컴컴한 방으로서 북향 유리창 밖에는 철 찾은 가지각색의 수목이 우거져 있었고 무르익은 풀 냄새가 방안을 가득히 점령하고 있는 그러한 장소였습니다. 물론 장소의 관계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여기서 이야기 하고저 하는 방 안의 공기는 대단히 음침하여서 한 발자욱 장내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로 심담을 떨리게 할만한 그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사도]는 장내에 들어서면 바루 맞은 편 벽 한 복판에 걸려 있었습니다.


황금색이 찬연한 커-다란 틀에 들은 [백사도]는 약 오십호 가량이나 되어 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내가 장내에 들어갔을 때는 [백사도] 앞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였을 때였지요. 나는 사람들 사이를 어깨로 떠밀면서 부비고 들어 갔습니다. 과연 세상 사람의 평판은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지요. [백사도]는 걸작이었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기를 무서워 하는 것처럼 한 발을 뒤로 옮겨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때까지도 그러한 종류의 그림---소위 괴기파라던가 악마주의라던가 하는 그림을 많이 보아 온 사람의 하나이었었습니다 마는 이 [백사도]처럼 나의 온 정신을 빼앗게 본 그림은 아직도 없었지요. 오싹하는 몸서림을 온 몸에 깨달으면서 꿈결처럼 화면을 쳐다 본 나는 그 순간 그 무서운 필치에 일종의 귀기와 그 밑바닥에 흐르는 무한의 평화를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낭만파의 화가 [쨩. 지구]는 애급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의 오른 편 손목에 걸머놓은 그림을 그려서 고금동서를 통하야 완전한 육체의 소유자로서의 [크레오파트라]의 최후를 그렸지만 똑 같은 소재라도 [백사도]로 말하면 좀 더 [리얼리스틱]한 필치였던 때문에, 그만큼 더 강렬한 박진성(迫眞性)을 가지고 관중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회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백사도]를 평하야 한 개의 [그로테스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마는 나는 지금 그와 같은 문외한을 상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안식의 잠인지 또는 일시적인 가수상태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되 한 사람의 나체 여인이 고요히 잠들고 있었습니다. 깊은 저광(低光)있는 어두움---그 어두움을 배경으로하고 반뜻 땅 위에 누워서 고요히


잠들고 있는 그 방염(芳艶)한 육체---그 풍부한 사지를 이리저리 걸머놓은 뱀이 큰 것 적은 것 합하야 아홉 마리---어떤 놈은 누렇고 어떤 놈은 퍼렇고 또 어떤 놈은 꺼멓고.......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한칭 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하늘을 향하여 반듯이 누은 그 여인의 섬세한 목을 한 마리의 흰 뱀(白蛇)이 은빛과 같은 비늘을 번득이면서 꽁꽁 걸머놓고 놓아 주지를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여인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 고통을 달갑게 가지고 자기의 육체를 괴롭히는 같이 거기에는 고통도 없고 의심도 없고---사념(邪念)을 완전히 초월한 안심입명의 경지에 도달한 옛날의 성인의 죽음 그것과 같이 평화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일생을 그 더러운 수성(獸性)과 싸워 나간 하나의 여인으로서의 헌신적 노력---육체는 비록 그 추악한 짐승들에게 내맡기면서도 그 사음(蛇淫)의 무서운 유혹에 반항할 그가 아니었던 것일까?...... 나는 그 때도 그리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백사도]에 대한 나의 감상이 결코 어그러짐이 없다고 누구 앞에서라도 단언할 수 있습니다. 창립된 이후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의 하나로서 후세에 길이 길이 남으리라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한칭 더 세상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은 작품 그 자체의 가치는 잠깐 논외로 치더라도 과연 [백사도]의 작자인 동추(東秋)란 대체 어떠한 인물인고?...... 하는 가장 엽기적인 의문부였던 것입니다. 그처럼 뛰어나는 작품을 돌연 조선 화단에 내놓은 동추란 인물은 글자 그대로의 일개 무명의 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동추를 아는 자가 없었지요. 도하의 각 신문지는 [백사도]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찼었습니다마는 작자인 동추에 관해서는 믿을 만한 기사가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개제되었지요. 작자 동추를 그의 주소인 강원도 XX 군 XX 면 도화리(桃花里)로 여러 번 방문갔었으나 그 주소에서 동추라는 인물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도화리라는 곳은 조그마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쓸쓸한 촌락인데 기자가 찾아 갔더니만 그 대궐과 같은 커-다란 집의 대문이 열리며 나이나 스물 두 서넛되어 보이는 미모의 청년이 가장 겸손한 태도로 나와서 "이 집에는 그와 같은 성명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하고 단지 그것 한 마디만을 남겨 놓고 수상히 생각하여 여기저기 손을 뻗쳐 탐지해 본 결과 촌민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아, 그이 말이요?...... 이름은 백화(白華)라고 부르지요. 동추란 말은 듣던 배 첨인데요. 아, 그의 아버지 말입니까?...... 그의 부친은 예적엔 그래두 무슨 훌륭한 벼슬을 했던 사람이라는데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에 서울서 살다가 이리로 왔지요. 그 양반은 도무지 집 밖에라고는 나오지 않고 집 안에서만 살다가 이 년전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아들 백화도 아버지 모양으로 동리 사람들과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집에만 꾹 박혀 있지요. 듣건대 때때로 평양엘 들어가서 그림 그리는 자분거를 사 가지고 온다는데...... 예, 예, 백화는 그림을 썩 잘 그리지요......운운" 그래서 기자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한 번 더 백화의 집을 찾았으나 몇 번 불러도 집 안에선 대답조차 없었다.--대개 이와 같은 의미의 기사였습니다.

29. 미모(美貌)의 청년(靑年)


이 작자없는 작품 [백사도]는 단지 화단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 적지 않은 흥미를 던진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비매품]이라는 붉은 표를 붙인 그 [백사도]를 꼭 사고 싶어하는 사나이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그림에 남달리 많은 취미를 가진 필자 자신이었습니다. 나는 그 이튿날, 선전 사무소를 찾아가서 작자인 동추의 주소를 한 번 더 자세히 알아 가지고 그 길로 경성역으로 뛰어 나가 경원선 열차에 올랐습니다. 기차를 타고 약 사오 시간---XX 이라는 조그마한 정거장에 내린 것은 그날 오후 네 XX 역은 산골자기에 있는 극히 초라한 정거장인데 거기서 도화촌을 찾아 갈려면 약 두 시간 동안 산골자기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 좌우에는 삼방(三防) 근처에 원천을 둔 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일대는 말하자면 석왕사(釋王寺)에서 삼방에 연접된 명승지의 일부분이지요. 나는 석양 햇볕이 내려 쪼이는 산비탈 길을 걸으면서 "대체 동추란 인물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일까? 그렇지 않으면 J 신문의 기사로 미루어 보아서 그 백화라는 미모의 청년이 즉 동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처럼 젊은 사람으로서 것인가?......." 이윽코 산비탈 길은 점점 평평해 가고 그 길다란 산골자기 길이 그치는 머나 먼 수평선 저쪽에 수양버들이 우거진 하나의 조그마한 촌락이 바라 보였습니다. 태고로부터 기나긴 꿈을 꾸어 오는 듯이 보이는 촌락---현대 문명의 바람이 조금도 기어 들지 못한 자연 그대로의 자태를 지니고 있는 촌락 --- 그것이 틀림없이 목적지인 도화리일 겝니다. 푸른 버들 사이로 담홍색 복숭아 꽃이 어떤 데는 진하게 어떤 데는 연하게 보이는 도원과도 같은 촌락이었지요.


촌중은 죽은 것처럼 고요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소를 몰고 돌아오는 어린 목동이 보이길래 하고 물었더니 "아, 그 미친 자식 말이유?...... 저어기 보이는 저 기와집에 살고 있지." 하고 본척만척하고 지나 가려는 목동을 붙잡고 "어째서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느냐?" 하고 재차 물었습니다. "뱀의 귀신을 만났으니까, 미쳤지, 뭐......." 한 마디를 남겨 놓고 콧노래를 흥겹게 부르면서 목동은 가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목동이 가리킨 그 기와집을 향하여 걸어 갔습니다. 기와집은 대궐처럼 컸습니다마는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돌담은 보매 이러한 집에 사람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통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내가 그 집 대문을 두드린 것은 긴 긴 봄 해가 거의 거의 저물어 갈 즈음이었지요. 대낮이라도 대문을 항상 잠궈 두는 법인지, 한참 동안이나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노라니까 찌꿍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반만큼 열리며 이십 이삼 세 쯤 되어 보이는 미모의 청년이 얼굴을 기웃하고 내다 보는 것이었지요. 한 번 보고 나는 그것이 이 집 주인 백화인 것을 알았습니다. 실상 나는 그 때까지, 그처럼 어여쁜 얼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망연자약하여 내의(來意)조차 통할 생각도 수려한 청년이었습니다. "어떻게 찾으십니까?" 하는 주인의 말을 들고야 비로소 나는 내의를 간단히 전한 다음에 "아무리 생각하여도 [백사도]의 작자인 동추라는 사람과 당신이 같은 인물인 것 같이 생각됩니다." 하고 그의 긴 눈썹을 가진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한참동안 망설거리고 나서 무엇인지는 알 바 없으나 하여튼 마음 속으로 굳게 결심한 바가 있는 듯이 "하여튼 이처럼 먼 곳에서 찾아 오시고 또 날도 저물었으니까, 들어가서 하루 밤 쉬어 가셔야지요." 하고 나를 사랑방으로 인도하는 청년과 나는 어둑어둑한 사랑방에서 마주 않았습니다마는 나는 그 때 그 계집애처럼 긴 눈썹 밑에 나를 뚫어지도록 쏘아보는 그의 어여쁜 눈동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아아, 그 눈동자! 나의 전 신경을 동요시키는 매혹적인 눈동자는 조금도 어지러워짐을 보이지 않고 나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지요. 갸름한 얼굴 한 복판에 보기좋게 앉은 코, 지금 마악 앵도알 속에서 뛰어나온 것처럼 새빨간 입술---그러나 이 어찌된 셈인고?...... 그 계집애처럼 새빨간 입술이 조금씩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더니 돌연 이슬같은 눈물이, 그 어여쁜 얼굴을 주루루 흘러나리는 것이었습니다. 격정(激情)의 눈물인가?...... 뉘우침의 말조차 잊어 버리고 사람들에게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어오는 이 청년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이 미모의 청년의 무엇인가는 예측키 어려우나마 하여튼 심상치 않은 그의 신세를 생각해 볼 때 나는 이유없는 아름다운 애정의 실마리를 마음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째 우십니까?" 하는 나의 은근한 물음에 청년은 비통한 얼굴을 살짝 들며 "이 이상 더 무엇을 숨기리오. 제가 그 [백사도]의 작자인 동추 그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회화를 즐기어 항상 화필과 친히 해 오던 중 [백사도]는 지금으로부터 이년 전, 제가 열 아홉살 때에 그린 생각이 없이 책장 깊이 넣어 두었던 것을 어떠한 심경 변화로선지는 저 역시 알 수 없으되 하여튼 한 번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어 대방의 비판을 받고저 선전에 출품하였던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머금으면서 "그것이 특선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치 않았지요. 그러나 그것이 특선이 된 것은 나로서는 한 편으론 고마우나 한 편으로 어떻게 귀찮은지 --- 이처럼 매일 매일 여러 분이 찾아 오셔서 그림의 모델 관계를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곤 하니 나로서는 귀찮다느니 보다도 무엇인가 알 수 없으나 무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비매품]이라고 써 부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먼 길을 찾아오신 당신도 그림을 그림에 대하여 무엇을 탐지해 볼 양으로......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귀찮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서 사정이 이처럼 된 이상엔 한시라도 바삐 [백사도]의 유래를 이야기하여 수년래 소생의 심중에 울적해 있던 무서운 의혹을 풀고저 지금은 그것만이 소생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받아야 할 죄를 받고 풀어야 할 의혹을 푼 다음에야 내 한 몸이 어떻게 되던지 그것은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고 잠깐 말을 끊었다가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저 정체를 도무지 것잡을 수 없는 몽롱한 이야기를 통 털어 놓고 해서 당신의 정확한 비판을 받는다면 거기서 더 큰 기쁨은 없겠습니다. 받은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가뜬해 질 것입니다. 당신이 신문사에 계시는 양반이던 또는 경찰 관계에 계시는 양반이던, 그것은 추호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저 소생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실 수 있는 교양있는 분이라면 이야기하여서 결코 헛소리를 쳤다고는 생각치 않아요." 하고 그 때까지 내 앞에 공손한 태도로 안았던 그는 밖으로 나가서 저녁 상을 가져오며 "해 놓았던 저녁이 되어서 소찬입니다마는---" 하고 권하는 대로 "그러면---." 하고 나는 다음과 같은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져 술을 들며 "나는 사실 말이지 신문기자도 아니고


경찰서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백사도]라는 한 개의 위대한 예술 앞에 머리를 수그린 사람일 뿐입니다." 하는 나의 거짓없는 말에 청년은 한칭 더 감격하는 모양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30. 황혼(黃昏) 속의 소녀(少女) 나의 아버지는 XX 감사를 지난 관리로서 상당한 세력을 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마는 한일합병 이후에는 어떻게 된 셈인지 관직을 버리고 평안도 어떤 산간에 틀어박혀 살다가 거기서 또 황해도 어떤 조그마한 촌락으로 가서 일, 이년 살고 거기서 또 이번에는 함경도로, 함경로에서 또 경상도로, 경상도에서 또 전라도로--이렇게 한 곳에서 꾹 틀어박혀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거처를 옮긴데는 필시 무슨 연고가 있을 겝니다마는 나로서는 그것이 어떠한 연고에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것은 하여튼 제주도에서 이 도화리로 전입니다. 아버지가 한 곳에서 오년이나 눌러 살았다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지요. 아마 이 도화리가 아버지에게는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습니다. 아버지로 말하자면 대단히 울적한 성춤이어서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오년 동안이나 아버지는 이 산간으로부터 한 발도 내 놓질 않았지요. 동리 사람들과도 이렇다 할 깊은 친교가 없이 지냈고 심심하면 때때로 [귀신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조그마한 못으로 나가서 하루 종일 낚시질이나 즐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의 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받을 대로 받으면서 자랐습니다만 칠팔 세쯤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지요. 그러나 나의 성춤으로서는 아버지가


가르치는 그 곰팡이 냄새가 무륵무륵 떠 오르는 한문이 도저히 입맛에 맞질 않았습니다. 그 보다도 다른 한 개의 세계가 나의 어린 영혼을 꼭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았습니다. 그 다른 한 개의 세계---그것은 화도(畵道)였습니다. 나는 항상 글을 가르치시다 졸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장지에다 먹으로 커-다랗게 그리곤 하였습니다만 그런 때 아버지는 그림을 들여다 보시면서 "잘 그렸다. 신통하게 잘 그렸지만 너의 하고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으시곤 하였지요. 그림 그리는 사람을 환쟁이라고 경멸하는 관념을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아버지의 눈을 속여 가면서 그림 그리기를 무엇보다 좋아하였지요. 그것은 내가 열 한살 먹는 해 여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니까 자세한 것은 다 잊어 버렸습니다만 그러나 지금도 눈만 감으면 망막에 떠 오르는 하나의 아름다운 정경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이었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황해도 어떤 해변가에서 살고 있던 때지요. 점령해 버린 어떤 날 저녁이었습니다. 해변으로 놀러 나갔던 나는 그 황혼의 장막 속에서 열 대 여섯에 난 어떤 계집애의 벌거벗은 몸둥이를 보았지요. 멱을 감고 옷을 입을려고 발을 씻는 바루 그 때였습니다. "계집애란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는고!" 나는 그 순간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지요. 비단결처럼 보드러운 촉감을 가진 황혼의 장막 속의 나상(裸像)--- 나는 신비에 가까운 경건한 태도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뽕나무 사이로 바라 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계집애였더면 저 여자와 같이


남자로 태어난 나 자신을 얼마나 원망하였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항상 황혼 속에 꿈결같이 떠 오르는 그 신비로운 나상을 마음 속 한 구석에 품고 나의 한줌만한 가슴은 언제던지 날뛸듯한 환희와 한 없는 동경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붓대만 들면 언제든지 그 황혼 속의 나체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에 대한 나의 열렬한 동경은 그 후 한 사람의 후원자를 발견하고 한층 더 굳세어 졌습니다. 그 후원자의 이름을 박도원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사년 전, 우리가 이 도화리로 옮아 온 바루 이듬해였습니다. 풍문에 의하면 도원 선생은 십삼도를 편답한 분으로서 특히 묵화에 깊은 조예를 가진 선생은 어떤 날 표연히 이 도화리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스물 댓쯤 되어 보이는 도원 선생은 그 때 서당 하나도 가지지 못한 이 도화리가 너무 빈약함을 탄식하여 나의 아버지의 후원을 얻어 손수 [감학숙](感學塾)이라는 서당을 세우고 다년간 계속해 오던 방랑의 몸을 주저 앉혔던 것입니다. 한 이십 여명이나 되는 숙생(塾生) 가운데서 선생은 가장 나를 사랑하였지요. "화도(畵道)란 결코 천한 것이 아니다. 예도(藝道)에 정진한다는 것처럼 고상하고 가치있는 것이 또 무엇이냐?" 하고 도원 선생은 기회 있는대로 나를 독려하였으며 법이다. 말하자면 유치한 그림이지. 이제부터는 서양화를 배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고, 때때로 서울에 올라가게 되면 자기의 빈약한 주머니를 털어서 화구를 사다 주시곤 하였지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도원 선생은 참말로 나의 은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전심전력 화도에 정진하는 한 편 나는 도원 선생에게서 실로 이상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지요. 도원 선생은 항상 나로서는 전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한시(漢詩)를 노래불렀습니다. 어떤 때는 새벽 산 기슭에서, 또 어떤 때는 황혼이 보-얗게 깔린 넓은 들에서 사자처럼 우렁찬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 때의 선생의 음성에는 일종 헤아릴 수 없는 매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선생의 목소리는 꼭 어미 잃은 맹수(猛獸)의 목소리 같아요." 하고 선생을 쳐다 보면 선생은 항상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습니다만 그 웃음 속에서 나는 늘 일맥의 애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선생의 마음을 괴롭히는 무엇이 있구나. 그래서 선생은 그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처럼 노래를 부르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림에 대한 나의 정진은 날로날로 깊어가서 어떤 때 도원 선생은, "나에게는 도저히 너를 가르칠 만한 힘이 밖엔 없다." 고, 하면서 자신이 서양화에 정통하지 못한 것을 무한히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기울어져 가는 우리집 재산으로서 그림 선생을 초빙해 온다는 것과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니 만큼 결국 나의 그림 공부는 전연 자기류(自己流)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쨌든 이리하여 희망과 동경에 찬 그날 그날을 보내던 나의 일신상에는 전혀 예측도 하지 않았던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실로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이제부터 실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31. 무녀춘랑(巫女椿?) 아시다시피 지금도 시골서는 조혼의 폐풍이 실행되고 있습니다만 이 도화리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십 사오세 때부터 벌써 나에게는 여기 저기서 혼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습관으로 되고 보면 남달리 부끄러운


마음도 생기지 않고 나는 그저 부모가 물색하는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삼년 동안이나 사방 팔면으로 물색 중이던 나의 안해가 제발로 깡충깡충 우리 집으로 걸어 들어 왔다는 말이지요. 춘랑이라고 부르는 어여쁜 계집애가 우리집 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편입된 것은 봄이었습니다. 춘랑! 그렇습니다. [백사도]의 [모델]이야말로 바루 그 춘랑이었지요. 춘랑은 후조(候鳥)처럼 이리저리로 떠 돌아 다니는 애기 무당이었습니다. 춘랑은 어미,애비없는 불쌍한 고아였지요. 당시 열 아홉 살인 춘랑은 그 해 정월, 무당 패거리들과 함께 이 도화리에 흘러 들어 왔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근년 악몽(惡夢)으로서 고통을 받는 나의 아버지를 위하여 면액(免厄)의 굿을 춘랑에게 청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가련한 신세에 동정한 어머니는 춘랑을 자기 친딸같이 양육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춘랑은 실로 영리하고도 어여쁜 한 번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귀여운 계집애였지요. 듣건대 춘랑은 어려서부터 양친을 여윈 고아로서 여기저기로 돌아 다니면서 거지 비슷한 생활을 하여 오던 중 요행히 인정 많은 무당 패거리에게 구원을 받아 장래에는 하나의 훌륭한 무녀로서 나설 작정이었다고---그런 기구한 이야기를 하는 때면 춘랑은 일수 잘 구슬픈 두 눈동자에 눈물을 고여 가면서 나의 얼굴을 뜰어질 듯이 들여다 보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때 나는 마음 속으로 나 혼자서도 그래 보고, 혹은 입 밖에 내어 춘랑에게 들려주기도 하였지요. "아이, 불쌍도 해라! 그처럼 고은 얼굴을 가지구 어쩌면 거지 노릇을 한담!" "참말이에요? 전, 전 도련님의 얼굴이 더 고와 보이는뎁쇼." 하면서 서로서로를 칭송하기를 무한히 기뻐하게 쯤 된 우리들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정들기란 참 빠른 것이지요. 어느새 나는 춘랑이 보이지 않으면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춘랑이 아니면 난 장갈 들지 않을 테야!" 그런 철 없는 소리를 나는 어머니에게도 하고 아버지에게도 하였습니다. 애지중지하여 길러 온 자기 아들을 어데서 주어먹다 온 물건인지도 알 수 없는 춘랑에게 장가 보낼 그러한 부모가 어데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나를 감금하다시피까지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만 그러나 아들이 귀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귀한 아들이 날로날로 수척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해 가을 마침내 나와 춘랑의 혼인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실로 상식으로서 생각도 못할 대담한 인습의 타파였지요. 이리하여 춘랑과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만 나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하나의 미지의 세계---그 현란한 감각의 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놀라면서도 나는 춘랑의 야생적 애무에 심신을 바쳤지요. 하루고 이틀이고 창백한 꿈을 즐기면서 깊고 깊은 수마(睡魔)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측간에 앉아서도 건들건들 앉았다 일어서면 눈 앞이 아찔해져서 그냥 펄썩 주저앉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안해 춘랑의 벌거벗은 육체를 어느 때던지 한 번은 꼭 [캔버스] 위에 그려 보리라는 커-다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여튼 춘랑과의 결혼을 누구보다도 반대한 것은 그때까지 내가 최상급의 존경을 받치어 온 박도원 선생이었습니다. 어떤 때 선생은 부러 우리 집을 찾아 오셔서 "조혼은 백화군을 망치게 할 테니까, 그만 두시는게 좋을 둣 합니다. 더구나 춘랑은 신분도모르는 방랑인이 아닙니까? 백화군과 같은 천재와 그 무지 몽매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백화군을 춘랑의 신변으로부터 떼 놓는 것이 좋을 둣 합니다." 하고 강권하는 선생에게 아버지는 나는 나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하는 일에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딱 잡아 떼어 보냈지요.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동리에는 다음과 같은 풍설이 돌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달 밝은 밤, 우리 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귀신못] 옆을 두 사람의 남녀가 무엇인가를 수근수근 속삭이면서 걷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던가, 어떤 사람은 행길가 우물가의 수양버들이 우거진 밑에서 새벽같은 때, 남녀의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던가---하여튼 그것이 언제던지 도원 그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는 풍설이 풍설을 낳는다는 격으로 춘랑을 백년 묵은 여우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자아, 그것 보게나. 그러기에 무당같은 천한 몸으로서 그런 양반댁에 시집을 가는거야. [귀신못] 가라던가 우물가 수양버들 아래로만 찾아 다니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여우야, 여우!" 그러는 사람도 있고---하여튼 그들 동리 사람들은 우리들의 불행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였고 한 편 그것을 무척 두려워 하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마는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과 같이 그들의 부질없는 풍설은 하나의 괴상하고도 무서운 사실로 변하였습니다. 32. 백사(白蛇)와 이야기하는 여인(女人) 그런데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의 사랑하는 안해 춘랑에 관한 이야기를 좀 세밀히 말씀드릴 필요를 느낍니다. 그것은 춘랑과 내가 결혼한 이듬해 봄의 일이었습니다. 바루 후원에 임금 꽃이 소복한 여인처럼 하-얗게 핀 어떤 달 밝은 밤이었지요. 돌연 나는 이상한 노래 소리에 잠이 깨어 몽유병자처럼 허둥지둥 방을 나서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잡초가 무성한 황료한 뜰에는


창백한 달빛이 비오듯이 나리고 있었지요. "아아, 저 괴상한 노래 소리는 대체 어디서 들리는고?......." 나는 눈을 부비면서 귀를 귀울였습니다. 소리! 머나먼 천공 저 편으로부터 요백색(妖白色)달빛을 타고 내려오는 것과 같은 노래 소리! 나는 미친 사람처럼 노래 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하였지요. 집을 삥 돌아서 뒤란으로 나갔습니다. 을파주에 달린 조그마한 문을 열고 임금밭으로 나갔습니다. 임금 꽃이 하-얗게 땅을 덮었지요. 노래 소리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임금 밭 한 복판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정신없이 임금 나무 사이를 이리캐고 저리캐고 하면서 노래 소리를 따라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보았습니다. 조그만한 임금 나무에 몸을 의지하고 물끄러미 발 아래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어딘가 무녀들의 독특한 감상에 찬 연가(戀歌)같기도 하였습니다마는 한 번 곡조가 변함을 따라 거암(巨岩)에 부딪치는 파도와도 같은 ---사람의 영혼을 뿌리채 잡아 흔드는 거대한 음폭을 싣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저 질타하는 것과도 같고 애원하는 것과도 같은 노래 소리!"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함을 불연듯 깨닫고 우뚝 섰습니다. 무엇을 꾸짖고 무엇을 애원하는고...... 꾸짖는 이유는?...... 애원하는 까닭은?...... 불행히도 나는 춘랑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괴상한 노래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몰랐지요.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또 다시 우뚝 멎지 않을 수 없었지요. 춘랑의 바루 발 뿌리 앞에서 번쩍이는 것은 두자 가량이나 되는 흰 백(白蛇)의 눈동자였습니다. "앗, 서방님!" 하고 부르짖는 춘랑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떨어집니다.


"너는 무슨 이유가 있길래, 이런 재밤 중에 그 더러운 짐승과 희롱하는거냐?" 하고 외치면서 나는 임금 나무 가지를 꺾어 쥐고 흰 뱀의 잔 허리를 향하여 내려 갈겼습니다. "앗! 안 되십니다! 서방님!" 하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한 손으로 꾸물거리는 백사를 집어서 저 편 숲 새에 "서방님은 어쩔려고 그런 난폭하신 행동을 하신담!" 하고 애원하듯이 나의 손으로부터 채찍을 빼앗은 후에 "이 일을 어찌하노? 이 일을 어찌 하노?" 하면서 격정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의 조그마한 몸둥이를 정답게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흐득흐득 느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나와 춘랑은 잠자리에 나란히 드러 누었습니다만 나의 어린 머리 속에는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는 몽롱한 무서움이 전신을 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동리 사람들의 풍설과 같이 춘랑의 정체를 요수(妖獸)의 변신이 아닌가고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술법을 가졌단 말인가?" 하고 물었지요. 그러나 춘랑은 거기는 대답하지 않고 "뱀은 소녀의 수호신(守護神)---소녀에게 항상 신통한 영감을 내려 주시는 어른이올시다. ---그런 것을 서방님께서는 그를 모욕하시었습니다. 아아, 생각만 하여도 무서운 일입니다. 머지않아 무서운, 무서운 벌이---." 그러면서 춘랑은 이부자리 위에 단정히 앉아서 얼굴을 가다듬고 "저질러 놓은 일이니 할 수 없소이다. 일이 이렇듯 된 바에야 하루라도 속히 뭇 사족(蛇族)에게 면벌(免罰)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하고 무서운 비탄에 전신을 보들보들 그때 부터지요. 그것이 미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무척 무섭고 반드시 복수한다는 뱀의 성질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하루 밤을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이튿날, 아침부터 나는 춘랑의 말대로 산이란 산은 전부 뒤져 가면서 가지각색의 뱀을 살게 잡아다가 독사는 헝겁을 물리어 이를 빼어서 부모님 몰래 뒷뜰안 컴컴한 토굴 속에 잡아 넣었습니다. 이리하여 한 마리, 두 마리 잡아다 모은 것이 무려 오십 마리를 넘게 되었을 때부터 춘랑은 그 저릿저릿한 토굴 속에 들어가서 다음과 같은 괴상한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33. 사녀(蛇女)의 연가(戀歌) 토굴 안은 약 팔조쯤 되는 넓이로서 대낮에도 컴?하였습니다. 네모난 조그마한 들창으로 연약한 광선이 아물아물 숨어 들 뿐이었지요. 춘랑은 기뻐했습니다. 습기와 악취가 가득찬 그 음침한 토굴 안 한 복판에 단좌하여 뭔지 알 수 없는 주문(呪文)을 중얼거리는 안해의 모양을 나는 물끄러미 토굴 출입구에 서서 바라 보곤 하였습니다. 성단(聖壇)에 기도 드리는 성녀와도 같이 경건한 태도로 약간 머리를 숙이고 양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하였습니다마는 그런 때 그 무기미한 짐승들은 결코 춘랑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습니다. 감아 놓고 다리, 목덜미 할 것 없이 번쩍번쩍하니 빛나는 추괴한 짐승들은 제 세상인 것처럼 춘랑의 몸둥이를 이리 저리 기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면벌의 기도랄지도 안해 춘랑의 행동은 하도 기괴하여서 처음에는 그 어떤 공포가 오싹하고 나의 전신을 습격했습니다마는 그러나 한 번 두 번 보고남을 따라 아아, 이 어찌된 일일까요. 그 괴수(怪獸)들에게 농락을 받으면서 꼼짝 움직이지도 않고 엄연히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 춘랑의 그 너무나 참된 자세에서 나는 어떤 신비한 아름다움을 차차 발견할 수 있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추(醜)와 미(美)의 극단의 대조!" 어린 마음에 나는 저 하늘에 있는 천사가


보았다고 가정할 때 그것은 틀림없이 이와 같은 더러운 토굴 안에 정좌하여 대소무수의 마수(魔手)들에게 농락을 받으면서 싸워 나가는 하나의 순결한 여인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이야 말로 공상의 세계에서만 살고 있는 환상의 여인이 아니고 그것은 나 자신을 마음으로 사랑해 주는 좀 더 현실적인 천사라고 생각했을 순간, "그리자! 다시는 얻어 볼 수 없는 이 고귀한 정경을 그리자!" 맹열히 달려드는 그 어떤 위대한 힘에 지배되어 나는 음침한 토굴을 뛰쳐 나와 화구(畵具)를 가지러 질풍처럼 내 방으로 달음박질 치는 것이었습니다. 달음박질 치는 나의 심안(心眼)에는 바와 추호도 어그러짐이 없이 명확히 떠올라 고매한 정신과 한없이 비약하는 예술적 충동을 전신에 느끼면서 얼마동안은 마치 치인(痴人)과 같이 미(美)의 삼매경을 방황하는 것이었습니다. "춘랑! 의복을 벗어다고! 그린다. 그린다, 어여쁜 네 자태를 그린다!"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외치면서 토굴로 돌아오면 춘랑은 가만히 머리를 들고 "아이, 부끄러워!" 하고 수줍어 하는 것을 무시하고 "빨리 벗어! 그렇지 않으면 때릴 테다!" 하고 화구를 들러메면 춘랑은 잠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본 후에 "어쩌면 서방님은 성격이 그처럼 격하시담!" 없다는 듯이 옷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아아, 어찌된 셈일까요. 꿈꾸는 것처럼 풍요한 마음으로 [캔버스]를 향한 나의 눈 앞으로부터 홀연히 사라지는 순결(純潔)! 그리고 다만 더러운 악마들에게 패부를 당하여 마침내는 악마의 편이 되어 버린 하나의 요녀(妖女)의 자태를 눈 앞에 발견할 뿐이지요. 안해의 몸둥이를 칭칭 감아 놓고 안해를 학대하고 안해의 몸을 가지고 노는 마수들의 기쁨을 안해도 함께 기뻐하는 것


같은 사음(蛇淫)의 계집으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화필을 던집니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리웁니다. 허덕거리는 다리에 나오면 바깥은 눈부신 양광(陽光)의 세계가 무한한 넓이를 가지고 나를 맞이하는 것이었지요. 암연히 느껴 우는 영혼의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파괴된 미의 조각조각을 줏어 보곤 하였습니다마는 그런 때가 결코 한 두번이 아니었지요. 이리하여 춘랑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눈동자는 차차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산가?....... 인간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수성(獸性)을 가진 계집임에 틀림없었지요.

34. 제 1 차의 공포(恐怖) 그런데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무서운 괴상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어떤 재방중의 일이었습니다. 동금하던 춘랑의 입김을 내 볼 위에 느끼면서 "이즘은 무척 우울해 보이는 안해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고 도원 선생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나의 마음 속을 춘랑은 빤히 들여다 보고 있지나 않는고?...... 그런 것을 이것저것 공상하고 있었습니다마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우리 방과 장지문 하나를 격한 저 편 있었습니다마는 그 캄캄하던 아버지 방에서 돌연 한 줄기 불빛이 새어 오질 않았겠습니까. 그 뿐만인가. 다음 순간, "앗!" 하고 외치는 아버지의 거세인 목소리가 들리어 오질 않았겠습니까?...... 나는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닫쳤던 미닫이를 열어 재쳤습니다.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새파랗게 변한 아버지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어두컴컴한 [램프]불 밑에 어머니의 시페가 무기미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들어 오지 말아라! 이 방에는 독사가 있다!" 무서웁게 떨리었습니다. 그 순간 전광과 같이 나의 머리에 번쩍인 것은 언젠가 달 밝은 임금 밭에서 본 적이 있는 백사의 눈동자였습니다. 나는 고요히 잠들고 이는 안해를 흔들면서 "춘랑, 어머니가,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하고 부르짖고는 밀물처럼 북받쳐 올라오는 슬픔을 금치 못하여 안해의 팔목을 붙잡고 어린 애처럼 울었습니다만 춘랑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애처로운 듯이 나의 연약한 몸둥이를 부둥켜 안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지요. 아버지는 한 눈에 그것이 독사에 물리워 죽은 것인줄 알고 침구라든가 의룽같은 일이뇨. 독사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요. 사면 문을 꼭 닫쳐버린 방 안에서 어머니를 물은 독사는 방 어느 구석에 있어야 할 것이지만 통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공포와 비탄 가운데서 하루 밤을 뜬 눈으로 밝힌 우리들은 이 무참한 괴변을 듣고 달려 온 조객들을 맞이하는데 분주하였으며 도원 선생이 놀래어 달려 온 것은 정오가 가까운 때였습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먼저 낸 말인지는 알 수 없으되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춘랑 같다는 풍설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었던 춘랑은 한층 더 원기를 잃고 자기 방에 틀어 박혀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 침울한 안해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탄도 비탄이려니와 사면초가(四面楚歌), 지금은 완전히 만인의 적이 되어 버린 안해의


심정을 생각할 때 애처로운 마음이 북받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만은 너를 믿고 있다! 면벌의 기도까지 드려서 우리 집안의 재액을 없애고자 한 춘랑이 아니었던가!" 하고 춘랑의 고독한 신세가 새삼스러이 불쌍해 보이어 무지한 촌민들의 미신을 혼자 속으로 웃어 보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나 역시 춘랑을 전연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밀폐한 방 안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미닫이 하나를 격하여 나와 한 자리에서 자고 있던 춘랑 이외에 누가 있었으리요. 아버지도 그 점에 생각이 미쳤는지 안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에는 벌써 의혹을 넘은 증오의 빛이 알알히 떠올랐습니다. 그 날 저녁 도원 선생은 나를 집 뒤란 임금 밭으로 불러 내다가 어제 밤에 생긴 일을 자세히 물은 다음에 "저번 날 밤에 본 흰 뱀의 이야기라든가 토굴 속에서 하는 춘랑의 기도를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시느냐?" 하고, 춘랑과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의외의 질문에 깜짝 놀랜 나는 "선생님은 그것을 어떻게.......?" 선생과 춘랑 사이에는 그 어떤 정교가 숨었었고나 하고 마음 속으로 의심해 보았습니다. 아아, 그 때의 내가 느낀 감정--- 그것이 소위 질투심이라고 부르는 것일 겝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하고 한 번 더 물어 보았으나 도원 선생은 그 말에는 대답이 없고 "백화 군, 그러면 군도 풍설과 같이 춘랑을 의심하고 있느냐?" 하는 실로 나로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에 나는 잠깐 동안 잠자코 있다가 "글쎄 선생님, 그 때 춘랑은 제 방에서 저와 함께 잠자고 있었는데요---" 하고 아무리 촌민들이 춘랑을 의심해도 나로서는 통 의심할 수가 없다는 얼굴을 "아, 정말 그랬었지!" 하고 선생은 밑 힘없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원 선생은 조금 후에 돌연 이런 말을 물었습니다. "백화 군, 군은 춘랑을 정말 사랑하는가?......" 고. --- 이 예상도 안 하였던 선생의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지를 몰라 얼마 동안을 선생의 얼굴만 빤히 쳐다 보다가 그만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선생의 춤 안에 쓰러져서 흐늑흐늑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원 선생은 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치면서 하고 말씀하였습니다만 사실 말이지 나 역시 나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머리 속은 의혹과 공포로서 가득 찼을 뿐이지요. 한시라도 바삐 춘랑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겠다는 마음과 아니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 사이에 끼워 진 나는 "선생님은 어째서 그러한 질문을 하십니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만 거기는 대답하지 않고 "군은 하도 모친님의 원수를 갚고 싶을 테지?......" 하고 묻길래, "그거야 선생님이 물으시지 않으시더래도  뮰갬?......" 하고 대답하는 나에게, "그러면 군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원수를 갚도록 하여 주마!" 하고 자신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그 놈을 아십니까?" "내일까지 기다려 주게!" 하고 저 편으로 가 버리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날 밤--- 아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랴! 중인감시 가운데서 저어 보이지 않는 요사(妖蛇)의 촉수(觸手)는 제 이의 희생자를 붙들어 갔었습니다.


35. 제 2 차(第二次)의 공포(恐怖) 그렇지 않아도 드넓은 음침한 집인데다가 그날 밤은 마치 죽음과 같은 암흑의 장막이 주위를 덮었었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방에는 나와 아버지와 춘랑과 그리고 도원 선생--- 이 네 사람이 앉아 있었고 활짝 열어 재친 미닫이 턱을 하나 넘은 저 편 방에는 촌민 몇 사람이 앉아서 투전 노름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미닫이를 활짝 열어 재쳤으니까 거기서 우리들이 앉았는 방 안의 광경은 빤히 내려다 보이었지요. 그런데 도원 선생도 역시 춘랑을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아까부터 선생은 춘랑의 태도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만 춘랑 편에서도 반항적인 눈초리로 도원 선생을 쏘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간에서 불꽃처럼 격렬히 부딪쳤다가는 떨어집니다. 아아, 이 만인의 사시(邪視)를 일신에 받아 가면서 춘랑은 지금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마음 속으로 안해의 애처로운 자태를 부드럽게 애무하여 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였지요. "뭘까?......" 하고 중얼거리면서 황급히 백포(白布)로 덮어 놓은 시체 편을 바라보며 "뭣엔가 손목을 쐤나부다! 벌렌가?......." 그러면서 자기 손목을 한 손으로 부비는 점점 흙빛으로 변해가고 입술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누가 그런 말을 하였는지 "독사가 아닐까......?" 하고 중얼거린 한 마디에 사람들은 놀래어 '악!' 하고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저마다 떠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리우면 안 된다!" "빨리 방 안을 뒤져 봐라!" "문을 닫쳤으니까 나갈 데는 없다!" 이리하여 방 안은 마치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만 아버지의 손목을 물은 독사는


어데로 갔는지 통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버지의 육체는 점점 무서운 독으로 말미암아 기운을 잃어 버리고 팔짝 방 바닥에 주저 앉아서 전신을 "춘랑의 ...... 춘랑의 몸을 뒤져 보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나는 그 순간 눈 앞이 아찔해짐을 깨닫고 아버지와 춘랑의 얼굴을 번갈아 쳐자 보고만 앉았다가 마침내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비틀비틀하는 걸음으로 한 발 춘랑의 곁으로 걸어가서 안해의 몸둥이를 정밀히 조사해 보았으나 그것은 단지 아버지의 기우에 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때 도원 선생은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된 바에야 한시바삐 손목을 자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는 것을 아버지는 간신히 막으며 "벌써 죽었어야 할 목숨 --- 손목을 자를 필요는 없네. 백화를 잘 돌보아 주게!" 그러고는 얼굴에 미소까지 띄우며 도원 선생을 바라 본 후에 이번에는 나를 향하여 "안해를 사랑하고 선생은 공경해야만 되는 법이다!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 말을 남겨 놓고 아버지는 영원히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36. 황금색(黃金色)의 악몽(惡夢) 이리하여 하루 이틀 동안에 양친을 잃어버린 나의 비탄이 얼마나 심각했었겠는가를 상상해 보십시요. 텅 비인 머리 속, 날로, 날로 수척해 가는 육체--- 마치 유령의 집처럼 넓고 음침한 이 집에서 안해 춘랑과 같이 나는 쓸쓸하고도 한 편 무시무시한 생활을 계속해 왔었습니다만 무엇 보다도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저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치는 독사뱀의 행방이었습니다. 양친의 그 무서운 괴사 사건(怪死事件)을 연상할 때마다 나의 아직 미숙한 사색은


점점 몽롱해 가는 것이었지요. 뱀은 대체 어디로부터 들어 와서 어디로 도망을 과연 저 흰 뱀의 무서운 복수였던가?...... 춘랑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지요. "저의 기도가 충분치 못한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춘랑의 이야기가 전연 하나의 미신인 것만 같이 생각되어 나는 춘랑과 도원 선생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습니다만 그것도 생각하면 나의 근거없는 의혹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돌아 가실 때 나는 춘랑의 몸을 세밀히 조사해 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한 편 그날 밤 도원 선생이 자기 몸 어느 구석에 독사를 감추어 가지고 왔다고 가정하더래도 약 한간쯤 떨어져 있던 선생이 어떻게 아버지의 손목에 독사를 물리워 놀 수가 있었겠습니까?...... 죄가 있기로 그처럼 무참한 죽음을 당했을까?......." 하는 나의 상상에 채찍질하여 준 하나의 조그마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사흘만에 나에게 어머니의 복수를 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도원 선생이 돌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도원 선생이 자취를 감춘 바로 그 전날 밤, 춘랑은 을파주를 사이에 두고 도원 선생과 뭣인가 한참 동안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실을 말하면 춘랑의 뱃 속에 들은 아이두 누구의 앤지 알 수 있나?" 날개가 돋은 듯이 동리에 퍼져 버리고 말았지요. 아, 아직껏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만 안해는 그 때 임신 삼개월이었던 것입니다. "나쁜 계집! 나쁜 사내!" 나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외쳐도 보고 입에 담아 자기의 귀에 들려도 주었습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다!" 하고 부정하는 것은 나의 입술 뿐이요 가슴 속은 울고 싶은--- 그 어떤 커-다란


물건을 하나 힘껏 깨쳐 보고 싶은 그러한 충동을 받았습니다. "나에게 대한 선생의 친절도 결국은 춘랑이 목적이었으며 달빛 어린 임금 밭에서 그 비애와 격정을 실은 춘랑의 노래도 지금 생각하니 정부 도원 선생을 아아, 그렇다! 도원 선생도 역시 그 굵다란 목소리로 나에게는 조금도 헤아릴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곤 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나는 고요히 잠든 안해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그럴 상 싶어서 그런지 꾸불거리는 생명의 충동을 손바닥에 감각하고 나는 하루 밤을 긴 한숨과 함께 새웠지요. "네 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같은 어린 놈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악마는 나의 귀 밑에 입을 가만히 갖다 대고 그렇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울고 싶어! 울고 싶어! 커-다란 도끼를 둘러메고 무엇이던지 괜찮으니 아무 것이던지 귀중한 물건을 하나 짓부시고 헤매이다가 뒷뜰 안으로 돌아간 나는 문득 눈 앞에 보이는 장독을 "에잇!" 하고 부셔댔습니다.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장물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섰는 나의 마음은 한결 편안한 것 같아서 방그레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새벽녘이었지요. 나는 실로 이상한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것은 뭣인지 명확히 지적할 수는 없었으나 대단히 몽롱한 배경속에 여잔지 남잔지 분간할 수 없는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습니다. 찬란한 황금으로 만든 침구와 암녹색 [싸파이어]로 된 벼개가 선뜻한 촉감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대리석으로 만든 인조인간(人造人間)이었습니다. 두 눈을 감고 있을 대는 전연 모르는 사람이었었습니다마는 빤짝하고 두 눈을 떴을 때 보니 그것은 춘랑이었습니다. 그 춘랑이 이번에는 어머니로 변하고 다음에는


또 아버지로 변모(變貌)하여 지는 것이었지요. 그것은 하여튼 그 때 그 암록색 [싸파이어]로 만든 벼개 속에서 이건 또 백납(白蠟)으로 되었다는 한 마리의 길다란 흰 뱀이 마치 무슨 액체처럼 어물어물 흘러 나와 거기 누었던 어머니의 손목은 깨물고는 다시 벼개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상처를 받은 대리석 손목에서는 새빨간 [루비]의 핏줄기가 "흰 뱀이다! 흰 뱀이다!" 하고 부르짖으면서 호박(琥珀)으로 만들었다는 도끼를 둘러메고 덤벼 들었을 때는 나는 벌써 꿈에서 깨어 자리 위에 앉아서 안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렇다. 춘랑은 독사를 어머니의 벼개 속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나는 다음 순간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양친이 살아 계실 때 계시던 다음 방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뛰어 들어간 나는 충혈된 눈동자로 양친의 이부자리를 분주스러이 펴 보았습니다마는 양친의 벼개는 통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 때야 비로서 다른 옷들과 함께 벼개를 불태워 버렸던 사실을 문득 생각하였습니다. "춘랑, 일어나!" 다시 내 방으로 돌아 온 나는 그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고 두 눈을 부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춘랑의 몸둥이가 희미한 요명(饒明) 속에서 허엽스레하니 빛나고 있었습니다.

37. 난무(亂舞)하는 격정(激情) 춘랑은 의아스럽다는 눈동자로 "서방님, 갑자기 어찌 되었습니까?" 하고 나의 얼굴을 쳐다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년! 나를 어린애라고 업수히


여기고...... 간부!" 하고 부르짖으며 극도로 흥분한 나는 선반에 얹어 두었던 선조 전래의 청롱도를 끄집어 내었습니다. "악!" 하고 안해는 놀래어 옷도 줏어 입을 새 없이 훤하게 먼동이 튼 뜰 안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나는 청롱도를 휘저으며 그야말로 춘랑은 포수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뜰 안을 호닥닥 호닥닥 뛰어서 잡초가 무성한 뒤란으로 도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춘랑 보다도 나의 걸음이 빨랐지요. 춘랑은 그만 하는 수 없이 예의 토굴 안으로 쫓겨 들어가서 안으로부터 문을 꽉 잠궈 버렸습니다. "열어라!" 문을 두드리는 나의 고함에 춘랑은 숨찬 소리로 "소녀가, 소녀가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사오나 이처럼 한 마디의 이야기도 없이....... 그건, 그건 너무도 혹하지 않으십니까?" 하는 말에 "듣기 싫다! 이 년! 양심이 있거든 대답하거라!" "아무리 대답하라고 하셔도...... 간부라고 꾸짖는 서방님의 말씀--- 소녀는 정말 설읍소이다!" 하는 목 메인 말에 "이 비겁한 년! 눈물로서 사람을 속일려는가?" 하고 고함을 치며 문을 힘껏 두드렸더니 "아무리 꾸짖어도 이 춘랑에게는 그러한 죄를 범한 적은 꿈에도 없소이다." 하는 것을, "음---그러면 하는 수 없다!" 하고 나는 들었던 청롱도로 널판자 문을 파괴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 보들보들 떨고 있는 춘랑을 향하여 청롱도를 번쩍 쳐 들었습니다. 받치고저 하는 이 목숨---그러나 죽기 전에 죽는 이유라도 알고 죽겠소이다." 하고 애걸하길래


"응---그러면 말하마! 너는 네 서방이 연소한 것을 불만히 생각하고 네 서방이 최고의 존경을 받치던 도원 선생을 유혹하여 불륜의 사이를 맺은 간부가 아니고 뭐냐?" 하고 외치기가 바쁘게 힘껏 내려 갈긴 청롱도를 간신히 막어내인 춘랑은 만신의 힘을 다하여 내 손으로부터 청롱도를 빼앗어 토굴밖 우물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하고 문 안에 세워 놓았던 뱀 채찍을 집어서 휙하고 한 대 내려 갈겼습니다만 채찍은 단 한 대에 오리오리 꺾어져 나가고 정은 격할대로 격하였습니다. 증오의 마음은 춘랑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 죽이고 싶었습니다. 땅 위에 쓰러진 춘랑의 등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어느새 기어 들었는지 흑광(黑光)이 미끈미끈하게 빛나는 뱀의 떼가 희롱하자는 듯이 춘랑의 발목을 칭칭 감어 놓는 것이었지요. 춘랑은 흐늑흐늑 느껴 울면서 "어떠한 증거가...... 어떠한 증거가 있길래 그러한 근거없는 말씀을 서방님은 하신담! 오해가 계시다면 풀어라도 드릴 것을...... 정(情)에 부닺쳐 리(理)를 잊는 것은 사내 사람의 수치올시다!" 하는 것을, "응--- 증거가 보고 싶거든 보여 주마! 걸어 다닌 것은 누구란 말인가?....... 우물가 수양버들 밑에서 선생과 속삭인 것은 어떤 계집이던가?...... 선생이 행방불명이 되는 바루 전날 밤, 을파주 안에서 눈물지으며 선생을 떠나 보낸 것은 네 년이 아닌가?...... 그래도 모르겠거든 네 년의 배 속에 든 새끼보고라도 물어 보거라!" 하고 질타하였더니만 안해는 눈물젖은 창백한 얼굴을 들면서 "서방님의 말씀은 천만 뜻밖이올시다. 서방님은 촌민들의 쓸데없는 풍설을 믿으시면 안 되십니다. 소녀가...... 도원 선생과 가끔 만난 것은 이유있는 행동--배 속에 든 어린애까지 의심하신다면......


아아!" 속이려는가?...... 이유란 간부와 짜 가지고 우리집 식구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뱀은 네 년의 수호신---면벌의 기도를 드린다고 나를 속여 가면서 그 실은 뱀으로 하여금 우리 어머니를 물게 하고 우리 아버지를 죽이게 한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몸은 떨리고 마음은 격한 나는 이 요녀를 벌주기 위하여 주위를 돌아 보았으나 아무런 자분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순간 나는 "이거라도---." 하고 내 다리로 무기미하게 기어 올라오는 뱀의 대가리를 잡아 쥐자마자 휙하고 춘랑의 몸둥이를 내려 갈겼습니다. "아무리 소녀가 요수의 변신이길래 어찌 해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소녀는 짐승의 변신(變身)도 아무것도 아니고 이 넓은 세상에서 다만 서방님 한 분을 사모하고 있는 틀림없는 인간--하나의 불쌍한 계집이올시다!" "흥! 애정에 눈이 어두워 어버이의 원수를 용서할 줄 아느냐?" 나는 뱀을 채찍삼아 정신없이 춘랑을 채찍질 했습니다. 채찍은 춘랑의 몸에 한 번 칭칭 감기었다가는 풀리곤 할 떠마다 새빨간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었지요. "너무 하십니다! 서방님은 너무 하세요! 무슨 증거가 있길래...... 무슨 증거가 있길래......." 하며 원한에 찬 눈동자를 들었습니다. "에이, 똥집까지 썩어빠진 년아! 벼개 아닌가!" 하고 외쳤더니만 그럴 상 싶어서 그런지 순간, 춘랑의 눈동자가 보르르하고 경련하는 것을 본 나는, "그 때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체 바로 머리 맡에 앉아 계시질 않았던가? 아버지의 손등이 무심중 벼개 모에 닿았을 때 독사가......." 춘랑은 잠시동안 눈을 깜박깜박하고 나를 쳐다 보다가 "그러면 그 벼개를 찾아 보시면 되지


않으십니까?" 하는 것을 "거짓말 말아! 벌써 불살라 버린 벼개를 어떻게 찾아 보라는 수작이냐?" "그러면 서방님께서는 소녀가 벼개 속에 아시었습니까?......." 하고 원망스럽게 쳐다 보는 춘랑의 눈동자를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통 몰랐습니다. 그것은 마치 원죄에 우는 십자가상의 성자같기도 하였으며 그 성자를 황야에 시험한 [사탄]같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나랄지라도 꿈에 보았노라고는 너무나 빈약한 근거---그저 나는 비늘 채찍을 열병 환자처럼 휘두를 뿐이었지요. 그러는 사이에 어찌된 셈인지 그때까지 쭈그리고 앉았던 춘랑의 쌔애한 상반신이 휫둑하고 꺾어지면서 마치 허재비처럼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쓰러지면서 춘랑은 "서방님!" 불렀습니다. "서방님, 소녀의 배 속에 든 어린애를 의심치 마십시오. 춘랑은 오로지 서방님 한 분의 안해였습니다!---사정이 있어서 자세한 것은 여쭙지 못하오나 서방님께 원수를 갚어 드린다는 약속을 하신 도원 선생은 마침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고충을 여러 번,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머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만 실인즉 박도원은 변성명을 하였을 망정 소녀의 육친 오빠올시다......." "엣, 육친 오빠......." "네, 틀림없는......." 그리고 춘랑이 영원히 세상을 떠났을 때는 동편쪽 조그마한 들팡으로 기어드는 아침 햇볕으로 말미암아 토굴 안은 훤하게 그 때 문득 나는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부터 기어 들었는지 토굴 안에선 통 볼 수 없었던 한 마리의 백사(白蛇)가 춘랑의 그 섬세한 목을 꼭 잘라매고 있었습니다. 동평 하늘은 이윽코 황금색 햇볕에 무르 녹았습니다. 그 황금색 햇발이 춘랑의 시체


위에 기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백납 같은 춘랑의 시체로부터 뭣인지 헤아릴 수 없는 그 어떤 고귀한 백광(白光)이 아지랭이처럼 발산하는 것 같았습니다. "춘랑!" 그때야 비로소 나는 그렇게 안해의 이름을 불러 보았습니다만 거기에 대답하는 것은 다만 가슴을 쑤시는듯한 고독 뿐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한 번 그렇게 불러 보았을 때, 나의 몽롱한 눈 앞에는 청청한 한 줄기 백도(白道)가 한없이 뻗어 있었습니다. 그 백도가 끊기는 머나먼 지평선 저쪽에는 또 한 개의 고독한 영혼이 대공(大空)을 날고 있었습니다. "춘랑!" 하고 세 번째 나는 안해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러 보았습니다. 그럴상 싶어서 그런지 춘랑의 입술이 방그레 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나의 위축되었던 영혼은 비탄으로부터 희열로 비약하였습니다. 나는 토굴 속으로부터 뛰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무아몽중으로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 고독도 없고 비탄도 없고--- 창조의 세계 ---다만 [뮤-즈]가 한없이 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화구를 짊어지고 다시 토굴로 돌아 왔습니다. 춘랑은 아직도 황금색 햇볕 속에서 연연(?然)히 웃고 있었습니다.

38. 복수(復讐)의 노래 기나긴 이야기였습니다. 산간의 밤은 깊을 대로 깊었고 뒤뜰 밖 임금 밭에서 때때로 뻐꾹새 소리가 "뻐꾹, 뻐꾹---." 하고 들리었습니다. 젊은 주인 백화는 "후후---." 하고 긴 한숨을 지으며 그 어여쁜 얼굴을 조용히 들어 [램프]의 심지를 조금 돋우어 놓은 다음에


"안해의 무덤은 뒷산 시내에 접한 조그마한 언덕 위에 있습니다. 괜찮으시거든 내일 아침에 저와 함께 올라가 보구 가시지요." "네에, 꼭 들려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안해도 무척 기뻐할 겝니다!" 하고 백화는 무던이나 고마워 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이슬 내린 풀밭 길을 헤치며 주인과 함께 춘랑의 무덤을 찾았습니다만 무덤은 맑은 시내를 내려다 보는 양지쪽 언덕 위에 있었는데 매일매일 손질을 하는 모양으로 새파란 잔디가 곱게 깔려 있었습니다. 나는 그 이상야릇한 일생을 마친 무녀 춘랑의 영전에 머리를 맑게 좁고 하룻밤의 환대를 중심으로 치사한 후에 "그럼 후일 다시 뵙겠습니다." 하고 헤어져 올려는 그 때, 있는데요." 하고 천재화가 백화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언덕을 내려 오면서 "벼개에다 뱀같은 짐승을 감추어 둘 수가 있을까요?" 하고 묻길래, "글쎄 올시다. ---그러나 전연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겝니다. 가령 대(竹)같은 데다가 뱀을 잡아 넣고 그 대를 벼개 속에다 넣은 다음에 양편 벼개모 한복판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놓고 그 위로 수(繡)놓은 극히 엷은 헌겁을 씌어 놓으면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다가 혹시 손이 벼개모에 가 닿을 때가 있을 터이니 그런 때 대 속에 있던 뱀이 엷은 헌겁과 함께 손을 깨물 수가 없지도 않을 그러나 나는 이런 부질없는 공상을 공연히 이야기 했다고 후회하였지요. 어째 그러냐 하면 내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백화의 어여쁜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마침내는 고민의 빛까지 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컨대 지금까지 믿고 있던 애처 춘랑의 존재가 다시 의심스러워진


탓이겠지요. 그래서 "그것은 나의 공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하고 백화의 얼굴을 엿보았으나 역시 어두운 채 조금도 명랑한 빛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헤어질 때 백화는, "이처럼 먼 길을 떠나오신 선생께 [백사도]를 양도해 드리지 못하는 나의 그리고는 그 폐허와 같은 자기 집을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XX 역까지 나오는 길에 나의 공상의 날개를 최대한도로 펴서 이 괴상한 이야기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꾸며 보았습니다. 백화의 아버지는 세력있던 관리였습니다. 그가 관직을 버린 후 한 곳에서만 틀어박혀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마치 쫓겨 다니듯이 돌아 다닌 것은 무슨 이유였겠습니까?....... 그는 필경 관직에 있을 즈음에 어떤 종류의 죄악을 저질러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그의 죄악의 희생자의 복수가 무서웠던 때문에 그처럼 처소를 이리 저리로 그 희생자의 자식에 두 사람의 남매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박도원이란 가명으로 필묵행상을 하면서, 또 하나는 춘랑이라는 이름으로 무녀들과 같이 조선 십삼도로 돌아 다니면서 원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원수를 만나 놓고 보니 천성이 선량한 박도원은 원수의 자식이나마 백화의 어여쁜 용모와 화도에 있어서의 천재적 소질을 가상타하여 백화를 도리어 귀여워 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박도원의 생활은 오뇌와 번민의 연쇄였습니다. 그가 사자처럼 굵다란 목소리로 한시같은 것을 노래 부르던 사실은 번민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요? 그러나 누이 동생 춘랑은 그렇지 거역해 가면서 원수의 자식 백화와 더불어 혼을 맺어 백 씨 일가를 천멸시킬 작정이었지요. 아니 춘랑이 백화와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박도원이가 백화의


용모에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춘랑도 역시 백화의 그 어여쁜 용모에 절반은 반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춘랑은 남편 백화에게 점점 깊어지는 애정을 느끼면서도 마침내 원수를 갚았습니다. 백화의 아버지는 죽을 때, '벌써 죽었어야 될 자기의 목숨'---이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요? 도원 선생이 백화에게 자기가 원수를 갚게하여 주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먼데로 떠나가 버린 것은 그가 후에 이르러 백화가 얼마나 열열히 춘랑을 사랑하는가를 알았던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은 하여튼 세상에는 실로 이상야릇한 사실도 있지 않습니까?---달 밝은 밤, 임금 나무 밭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흰 뱀과 마주 서 있던 무녀 춘랑의 행동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만 되겠습니까?.......

V.벌처기(罰妻記) 39. 범죄사실(犯罪事實) 다음 기록은 피고인 모 중학겨원 허철수가 여류화가인 그의 안해 선우란을 살해한 범죄사실에 관하여 공판정에서 진술한 방대한 조서(調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골자만을 추려 내인 것이다. 재판장! 지금에 이르러서 또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그날 밤 제가 취한 저의 범죄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나 재판장,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자기의 범죄사실만을 숨김없이 고백하여 저의 죄상에 대한 벌을 받으면 그만이니까 그 이상 범죄에 대한 상세한 동기같은 것은 제발 물어 주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니, 아무리 재찬장께서 동기를 물으신대도 저는 절대로 내 입을 빌어 써 그것을 토하지 않겠사오니 그 점만은 미리미리 양찰하시고 저의 범죄사실만을 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고 재판장께서 머리를 흔드신다면, 정말 그러시다면 통 저는 함구불언, 이 사건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토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네? 아,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날 밤의 저의 범죄를 복장없이 아뢰겠소이다. 집을 나선 것은 오후 다섯 시 쯤이었을까요?....... 보오얗게 깔린 매연 속에서 세말에 가까운 거리, 거리는 그 더러운 몸둥이에다 마치 창부와도 같이 밤 화장을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올림피아]의 기록영화 [민족(民族)의 제전(祭典)]을 기어이 봐야 겠노라고 ---그것이 내 안해 란에 대한 나의 외출의 구실이었지요. "호오, 호오, 호오! 당신두 활동사진 구경을 할 줄 안담! 어느 틈에 그처럼 개명을 하셨수?" 그리고는 잠자코 있는 나에게 "참 해방두 하구 봐야 겠군요." 하고 여전히 빈정대기를 마지 사실 나의 입술은 그처럼도 보편화한 [영화]란 말을 그리 쉽사리 토하지를 못하지요. [영화]라는 것보다는 역시 [활동사진]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한층 감각적이었습니다. 그처럼 아직 [활동사진]이라는 십구세기적 언어를 청산하지 못한 나의 뒤떨어진 감각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목석과도 같은 감정을 핀잔과 멸시의 눈초리로 대하는 안해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안해 란이 예술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예술가이기 때문에 예술가가 못된 나의 감정 내지 감각과는 필연적으로 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비록 예술은 이해하지 못할 망정 예술가의 성격만은 이해할 수가


아니, 재판장! 이야기가 좀 탈선하여 부질없는 말까지 말씀드려 송구합니다. 나는 재판장께 다만 나의 범죄사실만을 이야기하겠노라고 그처럼 다짐을 다졌으니까요. 원래 같으면 안해를 동반하여 금년 국민학교 일학년인 내 귀여운 딸 소희를 데리고 같이 구경을 가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날 밤의 나로서는 나로서의 엉뚱한 계획이 심중에 서리어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화단에서는 그래도 당당한 규수화가인 란은 해방전 M 극장에서 이 [민족의 제전]을 봉절한 림시에 벌써 장안 명사들과 함께 시사회(試寫會)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날 밤 S 극장에서 재상연되는 칠 년 동안을 두고 시내 각 상설관에서 재탕 삼탕을 거친 낡은 필림이었지요. "항상 당신이 경멸하는 소위 헐리웃의 천박한 사상 밑에서 만들어진 그러한 영화가 아니고 당신이 일상 숭배하는 게르만의 정신과 손으로 제작된 영화니만큼, 당신이 무엇보다도 귀해하는 소희의 교육을 위해서도 한 도움이 될 것이라." 고, 굳이 소희를 데리고 가라는 안해의 권유를 나는 또 나대로 그것을 굳이 거절하고 "어린 것이 밤 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는 것이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가." 를, 역설하고 결국 혼자 몸으로 집을 나섰던 것입니다. 자기 아들의 생일이라나요. 저녁 준비를 일찌감치 해치우고 동대문 밖 자기 아들네 집엘 가노라고 바로 나보다 한 십분 전에 나가 버렸지요. 열시 쯤 해서 돌아 오겠다는 식모의 미안해 하는 말을 나는 잘 기억에 담아 두었습니다. "다섯 시간 동안에!" 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다섯 시부터 열 시 사이에 나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안해의 존재를 이 세상으로부터 없애 버려야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일부터 소희는 어미없는 소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떡 가슴에 치밀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하구 오시라구, 소희의 유난히 쌔애한 두 손이 어둑어둑한 현관 밖에서 나비처럼 나불거리었습니다. 아무리 패덕지자를 죽인다 손 치더라도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저 할 때 거기에는 도덕이라던가 법률이라던가를 멀리 초월한 하나의 엄연한 자연법칙(自然法則)에서 오는 죄와 벌의 공포를 깨닫지 못한 바는 아니 올시다만 그러나 당시의 나로서는 그러한 것까지에 개의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혜화동 정류장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사가에서 내렸습니다. S 극장은 바로 종로 사가와 오가 사이에 있는 더러운 삼류 극장이지요. 극장은 상하층을 막론하고 터져 나갈 뒤로 비비고 들어가서 사람들의 등두로 스크린을 바라보았지요. [민족의 제전]은 아직 시작이 안 되고 뉴-스를 이것저것 몇 가지 해치운 후에 거의 일곱시가 가까워서야 [민족의 제전]이 상연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민족의 제전]이 아무런 흥미도 없었습니다. 사실을 말씀 드린다면 나는 바로 그 전 날 밤에도 이 S 극장에서 이 용화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화면을 바라보지 않고 나 혼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치더라도 그 전날 밤에 본 기억으로서 충분히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가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한 개의 알리바이를 완전무결하다고는 나 역시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은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그것은 완전한 알리바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요. 어째 그러냐하면 내가 S 극장에서 [민족의 제전]이 한창 상연될 무렵에 극장으로 빠져 나와 혜화동 내 집으로 돌아와서 안해를 살해하고 다시 곧 S 극장으로 달려가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사진이 끝난 후에 극장에서 나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불안한 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우연(偶然)이 개입(介入)하지나 않을까?...... 하는 그것이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말하면 내가 극장에서 나와 내 집으로 돌아와서 안해를 죽이고 우연---즉 극장 안에 잠시동안 정전(停電)이 된다던가, 관객과 관객 사이에 대판 쌈이 벌어졌다던가 하는 사실입니다. 후일에 이르러 살인의 혐의가 내게로 쏠리게 되면 당국에서는 필연적으로 사건이 발생된 시각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가 문제 될 것이고 그것이 문제되는 한에 있어서 비록 [올림피아]의 기록영화인 [민족의 제전]의 장면장면을 말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때 전연 예산에 넣지 않았던 정전이라던가 싸움이라던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나의 입장이 대단히 위험할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와 같은 우연성까지를 미리 방지할 수 없는 나 자신을 깨닫고 모든 것을 천운에 맡겼던 것입니다. 가까웠을 즈음에 나는 마침내 S 극장을 살그머니 빠져 나왔습니다. 나올 때에 나는 어둠 속에서 미리부터 주머니에 준비하여 두었던 가짜 수염을 코 밑에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중절모를 푹 눌러 쓴 후에 때마침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아 탄 것을 무척 기뻐하며 혜화동 정류장에서 택시로부터 내리기까지는 단 오분 밖에 걸리지 않았지요. 거기서 내 집까지가 보행으로 역시 오분이면 도착할 수가 있으니까, 극장을 나온지 십 분만에는 넉넉히 내 집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정문 외등 불에 비추어 보니 팔뚝 시계가 여덟시 오분을 가리키고 있었지요. 수염을 떼 버리고 정문을 들어 서서 이층을 바라보니 내 서재에 불이 환하니 켜져 있질 소리가 들리며 안해의 목소리가 레코드에 맞추어 따르는 것입니다. "또 아베 마리안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즈음에 와서


안해의 음악적 취미가 변해진 사실에 다시금 부딪쳤습니다. 지금까지의 란으로 말하면 재즈가 아니면 트롯트, 기껏해야 블루스, 왈츠, 그런 종류의 것이 란을 기뻐하게 하였지요. 그것이 요즈음 며칠 동안에 돌연 [아베 마리아]로 변했고 저녁만 먹고 나면 반드시 내 서재로 들어가서 [아베 마리아]를 두 번 세 번 연거풔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내 서재(사실은 나와 안해의 공동서재이지요)를 통 안해에게 내 맡기고 나는 이튿날 학생들에게 가르쳐 온돌방으로 쫓겨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의 서재는 나의 서재라기 보다 화가인 안해의 서재였었다는게 마땅할 것입니다. 나는 항상 안해의 예술을 위하여 나의 서재를 전부 안해로 하여금 독점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서재는 조선 사람의 가정으로서는 어느 정도까지 호화로웠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호화로운 서재를 가질 수 있고 적으나마 아담한 양옥을 쓰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일개의 중학교 교원인 나의 수입으로는 바라도 못 볼 수작이지요. 모두가 안해의 친정이 부유한 탓이었습니다. 옆 방이 바로 란의 [아틀리에]인 이층 서재에는 수학과 교육학에 관한 나의 빈약한 몇 권의 서적 문학에 관한 수천권의 서적이 예술가인 안해의 예술적 감흥을 풍부히 배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다빈치], [베토벤], [단테], [입센] 등의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이 서재를 장식했었고 서편쪽과 남편쪽 모퉁이에 놓인 [코너테이블] 위에는 전화기까지 설비되어 있었고 바로 그 옆은 지금 [레코드] 소리가 들리느 커다란 전축이 그야말로 예술가의 서재를 장식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호화로움을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안해는 항상 그 커다란 전축 앞에 고요히 앉아서 세계 명곡에 귀를 귀울이며 창작의 구상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와 사회적 지위에 도취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나는 발자욱 소리를 죽여가며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아래층 온돌방에는 소희가 고스란히 잠들고 있었지요. 머리맡에는 서너 권의 그림 책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소희의 발가스레한 양 볼에다 입술을 갖다 대이며 "소희야, 네 아버지는 참 나쁜 사람이로구나. 네게서부터 네 어머니를 빼앗어 버리고져 하는 네 애비!" 하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 후에 이층으로 올라가니 과연 안해 란은 축음기 앞에 호올로 걸터 앉아 있다가 [레코드] [아베 마리아]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서 갈려다가 나의 모습을 보고, "왜 벌써 와요?" 하고 묻는 것이엇습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해의 톡 내쏘는 비웃음이 바늘처럼 내 귀밑에 떨어졌습니다. "오오! 둠프, 둠프!" 안해는 이즘음에 와서 날보고 곧잘 [둠프]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만 그게 대체 무슨 소린지, 검정 시험을 쳐서 간신히 중학교 교원의 자격을 얻은 나로서는 안해가 보라는 듯이 배앝는 외국어를 항상 바보처럼 빙글빙글 웃어 가면서 들어 넘길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만, 후일에 이르러 같은 학교 영어 선생께 [둠프]의 해석을 청했더니만 그것은 영어가 아니고 독일어로 [바보]라는 말이라던가요. 좀 더 듣기 좋은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예술적 민감이 좀 모자란다는 뜻이라고요. 바보처럼 벙글벙글 웃어 넘겼습니다. 안해는 오랜지와 다갈색의 굵다란 줄이 길다랗게 흘러내린 [파자마]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쌔애한 맨발을 전기 스토브 앞에 뻗치고 가장 고상하다는 심프손 머리 뒤에다 두 팔을 기지개하듯이 갖다 대면서 마치 배우가 무대 위에서 관중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오, 오, 평화는 장군을 죽이고 평범은 시인을 질식시킨다!" 그러면서 발딱 몸을 일으키는 바로 그 순간이었지요.


나는 미리부터 준비하여 두었던 안해의 쓰다 버린 헌 명주 목도리를 재빨리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자마자 안해의 등 뒤로 비조처럼 달려가서 힘껏 동여 매었습니다. 하는 안해의 목소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방안을 울렸습니다. 안해는 두 서너번 팔을 허공중에 추켜 올렸다가 그만 기운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다시 수염을 코밑에다 붙인 다음에 부살같이 밖으로 도망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컴컴한 골목을 혜화동 전차 정류장까지 달려오자 택시가 보이지 않음으로 할 수 없이 전차로 S 극장까지 도착했을 때는 아직 여덞시 사십 분이 채 못 되던 때였지요. 나는 아까처럼 역시 사람들의 등 뒤에서 [민족의 제전]을 끝까지 보았습니다만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무엇인가 한 가지 잊어서는 아니될 것을 꼭 잊어 버린 것만 무엇을 잊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잊은 것은 없었지요. 모자, 수염, 외투, 구두--- 모두 온전히 내 몸에 걸쳐 있었고 서재에 남겨 두고 온 것이라고는 지금 란의 목에 매어져 있는 안해의 헌 명주 목도리뿐이지요. 그러나 살인 현장인 서재 안의 풍경이 무엇인지는 꼭 지적할 수 없었으나 한 가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을 나는 내 눈으로 보고도 살인 직전의 전률적 흥분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기억 속에 적어 두지를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나는 지금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범죄로 하여금 발각의 단서를 갖게 한 중요한 점이라고는 생각하지요. 초상화가 거꾸로 달려 있었다던가, 전축의 위히가 약간 바뀌어 졌다던가, 테이블 위에 항상 놓여 있던 송죽매(松竹梅)의 조그만 화분이 보이질 않았다던가...... 하는, 그러한 일종의 불균형(不均衡)이 서재 안 어느 한 구석에 존재해 있었던 것만같이 생각되었습니다만 좀처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단념을 하고 설사 그러한 종류의 불균형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하등의 위협을 가져올 리는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의 불안을 위로하며 붙였던 수염을 다시 떼어내 버리고 사진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S 극장을 나섰을 때는 바로 열 시가 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돌아 온다고 하였으니까, 지금쯤은 시체로 변한 안해를 발견하고 울고 불고 하면서 경찰에 전화를 걸 것이라고, 나는 식모의 반 광란의 자태를 눈 앞에 그리면서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띄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마의 웃음은 비탄에 잠겨 있는 어린 소희의 가엾은 자태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소희야, 이 아비를 용서해라!" 나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하늘을 우러러 보며 두 손을 모두었습니다. 극장을 나선 나는 어째 그런지 곧 전차를 탈 생각이 나질 않아 종로 사가까지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집으로 곧 돌아 가기가 무척 무서웠고 그 보다도 식모가 돌아 오기전에 내가 먼저 집으로 들어 가서 생각하여도 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문득 머리에 떠 오른 것은 어디 집에다 한 번 전화를 걸어 보리라 하는 엉뚱한 생각이었습니다. 범죄자의 마음은 항상 범죄 현장으로 끌리어 간다는 그러한 심리일까요? 전화를 걸었다가 식모나 혹시 경관의 음성이 나오거던 뭐라고 말할까?...... 그러나 그러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막 극장에서 나오다가 음식점에 들러서 밤참을 먹고 가겠다는 말을 안해에게 전할 셈으로 전화를 걸었노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서는 아직 식모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만 같아서 전화를 건댔자 아무도 받을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이었지요. 나는 종로 사가 공중 전화통으로 들어가서 내 집 전화번호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두시 이십 분 경이었지요. 수화기를 귀에다 대고 있는 동안 마은은


한량없이 설래이고 손은 중풍환자처럼 떨렸습니다. 돈을 넣으라는 교환수의 고은 목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들리는 염라의 목소리와도 같았지요. "딸랑---." 하고 돈이 떨어졌습니다. 떨어지자 마자 "여보시오, 여보시오!" 하는 목소리가 저 편에서부터 들려 왔습니다. "에크!" 나는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 앉는 것을 전신에 깨달았습니다. 무서운 긴장으로 굳어졌습니다. 아아, 그것은 틀림없는 사나이의 굵다란 목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시요?...... 란을 불러 주시오, 란을......." 하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제하며 약간 어성을 높혔더니 사나이의 목소리는 당장 온유해 지면서, "아, 이 집 주인이십니까? 허 선생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허철수요. 당신은 대체 누군데......? 내 안해를 좀 대 주시오." "허 선생, 하여튼 곧 돌아와 주시오. 나는 T 경찰서 사법주임인데 부인께서 무참한 죽음을......." "옛? 뭐라구요? 안해가? ......아니, "하여튼 즉시로 돌아와 주십시오. 부인의 신상에 중대한 불행이 생겼습니다. 곧 돌아 오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대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타고 일로 혜화동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때야 비로서 나는 이제 전화통으로부터 T 경찰서 사법주임이라는 사나이의 굵다란 목소리와 함께 소희의 울고 있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던 것을 문득 연상하였습니다. "오, 오, 소희! 내 딸 소희!" 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애당초부터 소희의 비탄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 올시다만 어미없는 소희의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소희로부터 어미를 빼앗은 아비!" 그러한 이 아비는 과연 소희를 참답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겠습니까?...... 이윽코 자동차가 내 집 정문 앞에서 멎었을 때, 나는 사, 오 명의 경찰관이 내 집을 엄중히 지키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고,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수비하는 경관들에게 그렇게 외치면서 부리나케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아, 이 대체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이층 서재로 뛰어 올라가자 두 사람의 경관이 왈칵 달련르며 다짜고짜 나의 양 빠른 솜씨로 쇠수갑을 나의 두 손목에 철컥하고 채워 버리질 않겠습니까! "오오, 당신네들은 나를 어떻게 할 셈으로?......" 그 한마디를 던진 후에 나는 비로서 서재 안의 광경을 살필 셈으로 머리를 돌렸을 때 한편 구석에서 울고 있던 소희가 마치 다람쥐처럼 달려오자 "아버지, 어머니가......." 하고 고함을 치면서 왈칵 달려들어 쇠수갑을 찬 나의 두 다리를 부여 잡고 방 안이 터져 나갈 듯이 울어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경찰의(醫)는 저 편 전축 앞에 쓰러진 란의 시체를 열심히 검시하고 있었지요. 얼굴이 하나 경관들 뒤로 넘겨다 보이었습니다. 부인네들의 파마넨트처럼 머리를 굽실굽실하게 뒤로 넘겨재낀 젊은 사나이---. 오, 오, 그때야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비로서 깨다를 수가 있었지요. 그는 문단에 새로이 등장한 신진시인 정일호라는 사나이였습니다. 란이 생전 그의 시의 아름다움 보다는 그의 용모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던 정일호를 나는 란의 앨범 속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내 집엘 한 번도 찾아 온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것은 하여튼 나의 치밀한 살인계획에 어떠한 실책이 있었기로 그처럼 쉽사리 탄로가 되었는지?....... 그러한 커다란 의혹에 사로잡힌 채 나는 곧 경찰서로 40. 범죄동기(犯罪動機) 다음은 피고 허철수의 친구요 변호사인 심현도가 피고의 침묵을 대신하여 이 살인의 동기가 될 듯 싶은 사실들을 단편적으로 수직하여 진술한 기나긴 변론의 초록이다. 피고 허철수는 자기의 범죄사실만을 진술하여 죄에 대한 벌을 받으면 그만이니까, 그 이상 더 본 살인사건에 관하여는 일언일구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는 마침내 피고 허철수와 가장 절친한 사이에 있는 본 변호인으로 하여금 피고의 굳세인 침묵을 대신하여 본 살인사건의 동기가 될 듯 싶은 몇 가지 서게 만들었습니다. 약 십 년 동안을 계속해 온 피고와 본 변호인의 깊은 교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교분이 깊다 손 치더라도 본 변호인은 피고 그 자신이 아니니만큼 그의 안해 란을 살해한 피고의 동기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진술하고자 하는 본 변호인의 변론은 말하자면 피고의 동기의 몇 십분지 일에도 해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재판장 이하 수많은 방청 제씨에게 미리부터 양해를 구하는 바이올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피고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처럼 그의 범죄 동기에 관하여 통 함구불언을 언명하는가?...... 그것이 것이라고 본 변호인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자면 그의 교육자로서의 입장도 입장이려니와 또한 필연적으로 피고 허철수라는 인물의 성격이라던가 인품이라던가를 분석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피고 허철수---그렇습니다. 단 한 마디로 말하면 피고 허철수는 가장 평범하고 가장


충실한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데 그의 인격의 전부가 포함되리라고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그렇습니다. 그는 가장 충실한 시민이었습니다.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다함으로서 자기의 행복을 구하고저 하는 인물---그가 란을 살해한 동기에 관해서 절대로 설명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면 자기의 행동에 대한 이르기까지의 불평이라던가 불만같은 것을 소리를 높여서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를 감히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점이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교육자인 피고와 예술가인 피해자를 구별하는 가장 큰 중심점이라 생각합니다. 예술가에게는 말이 많습니다. 불평이 많습니다.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건전한 교육자에게는 불평이 적습니다. 자기의 할 바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이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보기로 하겠습니다. 피고 허철수는 본래부터가 중학교 교원이 아니올시다. 어렸을 때 양친을 여읜 가난한 소학교에 봉직하고 있을 때, 그의 안해도 역시 같은 소학교에서 교편은 잡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달게 여기면서 그는 가장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안해 란으로 말하면 그 평범한 생활에 싫증이 나면서부터 타고 난 재주를 이용하여 전람회에다 한 두번 그림을 출품하기 시작하였지요. 그의 그림이 심사원의 눈에 듸어 특선이 되자 란의 이름이 사진과 함께 신문에 발표되었을 때, 화단 한 구석에서는 그의 작품보다도 그의 어딘가 육감적인 용모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더구나 석암이라는 대가가 란의 작품을 P 신문에다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였을 때, 란의 그 꿈 많은 가슴 속은 오주주하니 딸꾹 뜬 눈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여보오, 내가 인젠 정말 화가가 됐구려!" 하면서 란이 남편의 두 어깨를 꼭


껴안았을 순간, 허철수는 무척 기쁘면서도 한편 란을 영원히 잃어 버리는 것 같은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각 잡지사, 신문사는 다투어 가면서 혜성처럼 나타난 규수화가 란의 사진을 내기를 즐겨 했으며 란은 란대로 한달에도 몇 번씩 포즈를 달리한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습니다 란은 외출이 잦아졌습니다. 어느 화가가 저녁을 같이 먹는다고요, 어느 소설가가 차를 같이 마시자고요, 어느 남성 화가와 미술에 관한 대담회를 연다고요.--미술가라기 보다도 그의 재치있는 대화와 글줄도 어지간히 쓸 수 있는 필재와 그리고 그의 미모를 이용하여 좁다란 화단에서 뛰쳐나와 널리 사회적으로 일약 출세의 기회를 엿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란은 그 때 바로 두 살 먹은 소희를 남편에게 맡기고 밤 늦게까지 싸돌아 다니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러한 때 남편 허철수는 성가시게 볶아대고 소희를 업고 열두시가 가까운 밤 거리를 헤매며 안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안해의 입에서 술냄새가 났으며 남성들이 가장 매력을 느낀다는 그의 두 눈자위가 벌거스레하니 붉어진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생활이 삼 년을 계속하자 란의 당당한 여류명사로서 자처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러하는 동안에 란의 단정치 못한 행동은 마침내 란으로 하여금 근무하던 소학교에서 쫓겨나게 하였고 그렇게 되자 그의 소위 예술가적 생활은 글자 그대로 무궤도를 밟기 시작하였고 남편의 존재는 더 한층 무시되어 갔습니다. 중학교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이 되어 현재 봉직하는 시내 B 중학 수학 선생으로 가게 된 것이 바로 란이 소학교를 쫓겨나는 직후였다는 사실은 실로 피고 허철수라는 인물이 어떠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란이 가정을 져버리고 사회적 출세를 꾀하던 삼 년 동안을 피고는 소학교 훈도로부터 중학교 교원으로 뛰어 오르는


피고를 가르쳐 노둔한 인물이라고 비웃을 사람은 비웃어도 좋습니다. 사람의 힘을 다하여 천명을 기다린 피고 허철수의 모습이 여기에 뛰노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여튼 대체 예술이란 무엇이며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피고 허철수는 예술을 모르고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의 속인이라손 치더라도 그는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건전한 도덕과 예의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란에게는 여자 동무보다도 남자 동무가 많았고 남자 동무는 또한 태반이 소위 예술이 아니면, 하루도 지날 수 없는 친구들 뿐이었지요. 란은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면서 담소화락(談笑話樂)하기를 즐겨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예술을 생각하였습니다. 란의 일신상에 그 때 또 한가지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란의 친정 아버지가 소위 적산을 가지고 일획천금의 몰이를 하자 란의 생활은 글자 그대로의 호화판을 이루워 명륜동 양옥에다 여류화가로서의 손색이 없으리만큼 훌륭한 아틀리에와 서재를 꾸미면서부터 남자 동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입을 하게 되었지요. 손님이 오면 철수는 반드시 소희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 옵니다. 그들과 함게 자리를 같이하면 반드시 철수의 얼굴을 확확 달아 오르게 하는 잡담과 추담이 안해와 그들 사이에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술은 독한 양주가 좋고 연애는 유부녀와의 그것이 으뜸이라는 둥---그 들 아니되는 성욕에 관한 이야기가 일수 잘 벌어집니다. 건전한 시민이면 반드시 입에 담기를 주저하는 화제를 그들은 일부러 그것을 끄집어내어 그것에서 윤리성을 박탈함으로써 스스로를 참다운 예술의 사도라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유치한 감정의 노출이 곧 예술가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재판장! 본 변호인은 예술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예술가라고 말한다면


예술가란 결국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패륜의 도를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피고 허철수가 그의 안해 란을 무궤도의 생활과 [러브헌터]로서의 요부의 생활이 좀더 구체화하였을 떠부터이라고 추측하는 바이올시다. 선후가 바꾸어 졌습니다만 아까 말한 석암---란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전을 한 석암과 란이 한주일 동안 어떤 온천에서 묵었다는 소식을 나는 적어도 허철수만은 모를 줄로만 알았었고 그외 모 신문인, 모 영화인, 모 문단인과의 애욕순례(愛慾巡禮), 애욕행진곡 등등....... 란의 행동이 전 조선을 휩쓸때도 적어도 그의 남편인 피고의 귀에만은 들어가지 않을 줄만 알았습니다만,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하니 나의 추측이 어그러졌던 것을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란을 둘러싸고 있던 패덕자에게 복수를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피고의 성격으로서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은 그가 왜 정정당당히 란을 살해하지 못하고 암암리에 살인행동을 취하고져 하였던가에 대하여 본 변호인은 단 한 마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고 이 변론을 마치고져 합니다. "피고는 소희로 하여금 고아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1. 범죄발각(犯罪發覺) 다음은 금만가의 아들이요, 미남의 평이 높은 신진 시인 정일호의 증언을 간단히 요약한 기록이다. 증인은 피해자 란의 부군이 진실한 청년 교육자라는 이외에는 그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와 란의 교재로 말하더라도 아직 이, 삼 개월도 못 되는 그러한 짧은


시일에서 더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맨 처음으로 란을 어떤 음악회에서 소개를 받은 순간, 여러가지 의미에 있어서 이름이 높은 규수화가였습니다만, 그리고 란의 얼굴로부터 그 어떤 강렬한 육감적 적어도 나만은 그와 반대로 단지 그의 용모에서 받은 인상은 한 개의 더러움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란의 용모를 깎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누구던지 한 번씩은 흥미를 느낄만한 그러한 종류의 용모이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그러한 용모에 단 한 번이라도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사나이도 있다는 것을 나는 어떤 기회에 란에게 고백한 적이 있지요. 그랬더니만 란은 대단히 좋지 못한 안색을 지었습니다. 란은 어떤 남성이던지 자기의 얼굴로 굴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을 잔뜩 품고 있는 모양이었던 만큼 적지 않은 모욕을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 란은 자주 나의 미루어 보건대 그는 자기에게 만만히 굴복하지 않는 남성을 어디까지나 한 번 굴복시켜 보려는 좀 향그럽지 못한 취미를 가진 것처럼 내게는 보였습니다. 란은 정말 귀찮으리만큼 나를 따랐습니다. 어두나 밤이면 나에게 전화를 몇 번이고 걸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 유치하기 짝이없는 십구세기(十九世紀)적 러브송을 부르지요. 나는 듣는척 할 뿐, 수화기를 테이블 위에 놓고 내 할 일을 계속하고 있노라면 왜 들어주지 않느냐고, 독촉 전화를 걸지요.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애걸을 하면 그럼 이번에는 레코드를 걸테니 들으라나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귀에다 대면 [재즈]가 나옵니다. [왈츠]가 [블루스]지요. 그래 그 야비한 음악적 취미를 좀 청산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라고 그랬더니, 참 당신은 [네로]라고, 뾰르릉 짜증을 내더니만 그래도 유순한 양처럼, 그러면 성스러운 [아베 마리아]를 들으라고요.


그날 밤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밤 우리 집 [둠프]가 [민족의 제전]을 구경하러 갔어요. 아주 개명을 했어요! 호호호---." 그런 이야기를 한바탕 하고나서 그 날도 [아베 마리아]를 걸었는데, 레코드가 끝나자, "왜 벌써 돌아와요?" 하는 란의 목소리가 들리겠지요. 뒤이어 "재미가 있어야지. 졸음만 오구." 하는 것을 들으니 남편이 극장 구경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돌아온 줄을 알았습니다. 이어서 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면서 특히 나를 좀 들으라는 듯이 높은 음성으로 영탄하였습니다. "평화는 장군을 죽이고 평범은 시인을 질식시킨다!" 란의 그러한 영탄이 끝나자마자 돌연 "악!" 하노 부르짖는 란의 숨 넘어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나는 필시 무슨 불길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래 나는 부리나케 전화통에다 입을 대고 란의 이름을 불러 보았습니다만,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집을 뛰쳐나와 혜화동으로 자동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란의 서재로 뛰어 올라가 보았더니 과연 나의 예상대로 란은 축음기 앞에 길다라니 뻗어 있었습니다만 만일 피고가 좀 더 침착하였더면 전화의 수화기가 [코너 테이블] 위에 떨어져 있는 사실을 발견 하였을 것이며 더구나 매일밤처럼 저녁만 먹고나면 나한테 전화를 걸고 레코드를 들려주던 란의 행동을 통 모르고 있었던 것이 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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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이단자(異端者)의 사랑 11. 사랑의 집 12. 붉은 침실 13. 사화장 14. 첫사랑 15. 안해를 죽이기까지 16. 수밀도를 따는 날 17. 인육을 먹는 사나이 18. 과학자의 사랑 I. 비밀(秘密)의 문(門) 1. 괴도의 그림자 2.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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