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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일체감은, 곧 조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고 하자. 만일 처음부터 끝까지 도음만 계속하거나 아니면 미음만 계속한다면 그것은 소나타도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서로 전혀 상관없는 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룬다. 그것을 우리는 음악이라고 한다.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소화의 울림이다. 이 조화의 울림이 내 영혼의 들림에 일치할 때 나는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 그저 피아노 소리만 듣거나 무작정 도취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의 본질이 "울림과 들림"의 음악성이라는 일체감 내지는 공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화의 본질 또한 일체감 내지는 공감에 있다. 그러므로 "나"만을 고집할 경우이거나 또는 "너"만을 주장할 경우에는 대화의 형태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대화가 자신의 모습을 상실하면 그것은 "소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한 송이 장미꽃이 있다고 하자. 잎과 줄기와 가시와 꽃이 건강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장미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한 송이 장미꽃을 우리가 아름다운 장미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대로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한 송이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그 본질을 생명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야말로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꽃처럼 생명을 본질로 한다. 생명은 일체감이자 공감이다. 단지 형식에 불과하여 겉치레에만 그치는 말을 우리는 대화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한다. 벌레가 우는 것을 벌레 소리라 하며 기계가 돌아가면서 내는 음을 기계 소리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에 살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력있는 대화"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우리는 물질 문명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이 물질을 더욱 발달시키고 금전이 금전을 더욱 풍요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피아노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 붓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실상 오늘날의 물질 문명 사회에서 모든 것은 기술로 전락된 느낌을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을 위한 수단 내지는 기술이 된 느낌을 준다. 삶의 목적은 오늘날 과연 어디에 있으며 삶의 의미는 또한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삶의 의미를 그리고 세계의 의미를 체험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 반성"을 근거로 한 대화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대화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로 대화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두번째 대화는 나와 너 사이의 말이다. 세번째로 대화는 "세계 원리"의 표현이다. 첫번째 의미의 대화는 일상적인 말이다. 이것은 "지껄임"이며 "지나침"이다. 지껄임과 지나침으로서의 말은 허위와 기만을 특징으로 가진다. 제아무리 조리가 있고 제아무리 질서 정연할지라도 어떤 이의 말이 내용을 결여하고 있으면 그것은 결국 지껄임이요, 지나침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동하는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나와 너 사이의 말은 반성이다. 나와 너 사이의 말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하여 나아가서 서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나와 너를 넘어선 사회나 세계의 의미를 밝혀주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연인들 사이의 말과 우리들의 말은 서로의 이해를 안겨다주고 긍정적이며 달콤하기는 해도 냉정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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