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B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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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神鍾

1 덕성은 여자의 몸을 가졌으며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여자는 아이를 가 질 수 있다 했고, 낳을 수 있다 했다. 또한 어미가 되면 몸은 다시 한 번 변하기 마련이라 했다. 삼 십 결結의 논밭을 가진 황에게 시집갈 때만해도 덕성은 많은 사람들의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 었다. 임신은 두려우면서도 고통스러웠지만 아직 신비했다. 농가는 일손을 필요로 했고 자식은 재산이었다. 달이 지나 덕성의 배가 불러올수록 황의 식구들 은 들떴다. 황의 집안은 대대로 형제가 많았기에 덕성이 낳는 아이의 성별은 중요치 않았다. 아이 는 또 들어설 것이고, 대대로 한 가지 성별만 내 리 낳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식구들은 모두 즐 거운 마음으로 출산을 기다렸다. 해거름이 내리기 전부터 일가친척들이 마당에 모여 탁주를 마시고 부침개를 뜯었다. 방안에서 덕성은 천 조각을 입에 물고도 고소한 냄새를 맡 을 수 있었다. 방안에서는 격려하는 소리가, 방밖 에서는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은 저물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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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덕성의 눈앞은 하얗기만 했다. 마당에서는 미 덥지 않은 달빛과 화톳불에 의지해 노래를 이어 갔다. 덕성이 방에서 비명을 지를 때마다 식구들 은 마당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부침개가 떨어지 고 사람들도 지쳐갈 무렵 방안의 비명이 사그라 지고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산파가 방문을 느리 게 열고 나왔다. 사람들은 아들인가 딸인가를 물었다. 산파는 고 개를 저었다. 산파의 손에는 피만 묻어있었다. 황 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산모는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늘어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산파가 슬며 시 방구석을 가리켰다. 비단 포대기가 있었다. 움 직임도 울음도 없었다. 덕성은 아들인가 딸인가 물었다. 황은 고개조차 젓지 못했다. 황의 식구들은 불운에 강했다. 농사를 짓다보면 흉년도 찾아오는 법이다. 그들은 기다릴 줄 알았 다. 일 년 반이 흐르고 덕성은 다시 임신했다. 식 구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덕성을 조심스럽 게 대했다. 그녀 앞에서는 시정잡배도 거친 말은 커녕 흰 소리도 하지 않았다. 출산일이 되었지만 전처럼 잔치를 열지 않았다. 식구들은 조용한 달 빛을 맞으며 기다렸다. 그러나 황은 비단 포대기 한 벌을 더 버려야했다. 덕성이 가랑이에 피를 머금고 울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황은 마루에서 내려와 흙바닥에 무 릎을 꿇고 아비에게 빌었다. 산기슭에 있는 초가 에서 작은 땅을 일구며 살겠다고, 어쩌면 사람이 부대껴 저런 줄도 모른다고, 삼 년만 살아보겠다 고,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아이를 가져보겠다고, 여러 소리를 분주하게 늘어놓았다. 아비는 고개 를 돌렸지만 귀는 돌리지 않았다. 황은 덕성을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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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집을 나왔다. 황은 아비에게 고한 말을 그대 로 덕성에게 말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는 다시 들어섰지만 기쁨은 들 어서지 않았다. 아기를 낳던 날, 황은 산파를 둘 불렀다. 그 중 강 할머니는 황을 받았을 뿐만 아 니라 마을 장정 여럿을 받아 그 솜씨와 운수를 자 랑했다. 게다가 목소리도 우렁찬지 강 할머니가 고함을 칠 때마다 나무들이 뿌리를 움츠렸다. 황은 어두운 밤 좁은 뜰에서 홀로 기다렸다. 방 에서 비명이 멈추고 강 할머니가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그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주받 은 년. 산파는 둘 다 손을 씻고 머리를 저으며 떠 났다. 황은 얼이 빠져 한참 비단 포대기를 바라보 았다. 포대기에는 아무 소리도 담겨있지 않았다. 황이 쓰다듬고, 꼬집고, 때려도 포대기는 아무 소 리도 내지 않았다. 황은 포대기를 열고 울음을 넣 어보았으나 소리는 포대기 밑으로 줄줄 흘러내렸 다. 황은 포대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을 나갔 다. 저주받은 년. 할머니의 커다랗고 날카로운 목소 리가 방에 남아 산모의 귀를 찔러댔다. 덕성은 귀 를 막을 힘도 없었다. 저주받았다는 말이 자신의 귀를 파고 들어와 머릿속의 모든 소리를 씹어 삼 켰다. 넌 어미로 자라지 않았다. 어미가 될 수 없 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나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낼 수 없는 몸이다. 저주받았다. 저주받았다. 강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녀가 평생 들어온 소리 를 몽땅 집어먹고도 배가 고파, 귀로 들어오는 소 리마저 족족 집어먹었다. 덕성은 밤을 새웠다. 그 리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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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밝아와 방안을 비추자 덕성은 허벅지를 보 았다. 밑에 깔린 붉은 천과 방구석의 비단 포대기 를 보았다. 그녀는 방안에 널브러진 천과 비단을 그러모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에 갔다. 그 것들을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 부지깽이로 천을 뒤적이며 숨을 불었다. 불은 살아났다가 비단이 머금은 걸쭉함에 수그러들곤 했다. 비린내가 났 다. 코가 매웠다. 눈도 매웠다. 코와 눈에서 나오 는 물을 덕성은 꾸역꾸역 삼켰다. 기침도 하지 않 고 숨을 불어넣었다. 불이 붙었다. 덕성은 계속 숨을 불었다. 아궁이에 얹힌 가마솥이 비어있었 지만 덕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숨을 불었다. 피 가 마른 무명천이 타올랐다. 덕성은 가슴에서 골 골한 숨과 콧잔등에서 어그러진 숨을 함께 토해 냈다. 숨을 불고 있는지 지난밤처럼 비명을 지르 고 있는지 들리지 않아 알 수가 없었다. 비단의 엉긴 부분이 타지 않고 버텼다.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붉은 천이 세차게 타올랐지만 비단은 한 곳에 뭉쳤다. 까맣게 타들어 공처럼 남았다. 공은 불을 마주하여 싸우고 있었다. 그 공은 그림 자로 꽉 차있는 듯했고, 그림자는 불이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공의 표면에 묻은 번 질번질한 핏기를 불이 핥았다. 핏기가 바싹바싹 말라갔다. 덕성은 숨을 불었다. 공은 핏기를 흘리 며 그을린 비단을 꽉 쥐었다. 불길은 공의 껍질을 악착같이 하나씩 벗겨서 씹더니 척척하고 물컹한 덩어리마저 몽땅 삼켰다. 그 뒤에도 덕성은 한참 동안 아궁이에 숨을 불어넣었다. 여전히 코와 눈 에서 나오는 물을 삼켰지만 이미 목까지 꽉 찬, 숨인지 물인지 소리인지 모를 답답함을 힘겹게 밖으로 흘려보냈다. 아궁이에서 까맣게 연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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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올랐다. 황이 버리고 간 그 집에서 덕성은 혼자 살았다. 둘이 살던 살림이라 혼자 살기에 부족하지 않았 다. 마을과도 거리가 있었고 나그네가 지날만한 골목도 아니었으며 황의 식구들은 찾지도 않았 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덕성은 철저하 게 혼자였다. 덕성의 하루는 매일 똑같았다. 마을 에서 전쟁이 나고 맹수가 출몰한다고 해도 덕성 은 알지 못했고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 사람도 맹수도 귀신도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낼 필요가 없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2 낙엽이 수북하게 길을 덮어 나아가기 힘들었다. 박은 나뭇가지를 주워 그것으로 낙엽을 헤치고 길을 열었다. 산길이라 횃불을 지니고 오가는 이 하나 없었다. 달빛을 반사하는 바위에 의지해 길 을 더듬었다. 박은 자주 드나드는 길이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읽을 줄 알았다. 이리저리 휘두르는 가지에 낙엽들이 맥없이 흩어졌다. 박은 길을 여 는 데 마음 쓰지 않았으나 가지는 점점 힘을 더해 낙엽을 쳐냈다. 밀랍 녹인 자리에 쇳물만 부으면 될 일을. 박은 중얼거렸다. 황토를 가라앉혀 주물토를 만 들었다. 모래도 곱게 구워놓았다. 뼈대에 밀랍을 발라두었고 공장工匠들이 태운 왕겨와 구운 굵은 모래를 반죽했으며 겉에 바를 거푸집도 준비해두 었다. 스승이 이미 선대 때 시행했던 공정工程이 며 그 때의 공장들이 그대로 징집에 응해 작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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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었다. 낙엽을 후려치던 나뭇가지가 툭 부 러졌다. 박은 한숨을 내쉬고 다른 가지를 집어 다 시 낙엽을 걷었다. 팔월에 대아찬 김융이 난亂을 일으켰다. 그를 제압한 김양상이 공로를 인정받아 상대등으로 올 랐다. 박은 골품이 낮고 궁과 멀기에 안심했으나 상대등의 세勢가 그에게도 미쳤다. 새로운 상대 등은 난을 제압하고도 목이 말랐고 힘이 남았다. 종鍾은 선왕의 지시 이래 무관심 속에서 십 년을 방치되어 있었는데 상대등은 새삼스레 만월부인 을 부추겨 공사를 다시 일으켰다. 상대등의 호들 갑은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에 이르렀고 공장부 의 유사有司를 거쳐, 다시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 인 박에게까지 달했다. 박은 기회라 여겼다. 봉덕마을 뒷산에 선대에 썼던 야철지가 있었다. 박은 상대등의 명을 받들 어 세 달 전부터 각 지방에서 공장들을 야철지로 불러 모았다. 장날에만 몇몇 사내들을 내려보내 먹을거리를 장터에서 사오게 했다. 야철지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올랐으나 마을까지 어떤 소리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야철지 를 장날 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박은 종에 몰두 했다. 스승이 한 번 물러서야 했던 공사를 다시 해볼 수 있음이 기뻤으며 유례없는 소리를 만들 어보려는 오만도 조금 품었다. 그러나 상대등의 명은 박의 뜻보다 더 집요했다. 박은 멀리 있는 명을 고칠 수 없었고 그 사이 명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아기를 던지라. 박은 나뭇가지를 던졌다. 곱게 흙을 쓸어둔 마 당에 들어섰다. 촛불이 갑장지문 안에서 휘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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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짚신에 낙엽이 여럿 붙었다. 박은 낙엽을 떼지 않고 걸었다. 바람에 흙 쓸리는 소리가 물 흐르는 소리와 뒤섞였다. 멀리 마을 쪽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멀지 않은 야철지에서는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안에서는 뛰는 목소 리와 앉은 목소리가 부딪쳤다. 박은 마당에 서서 가만히 들었다. 해가 둘로 나뉘었으며 다리가 다섯인 암소가 나 왔네. 땅이 꺼져 오십여 척의 연못이 생겼고 그 물빛이 검었다지. 땅이 흔들리는가하면 대궐에 별이 떨어졌고 그 떨어진 별이 다시 솟아 흩어지 기도 했다하네. 왕이 황제에게 책봉을 받을 때, 서라벌엔 벼락과 우박이 떨어졌지. 궁의 모든 우 물과 샘물이 일시에 말라 사라졌고 호랑이가 나 타난 적도 있었다네. 올해 삼월에 내리는 흙비를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눈이 궁에서 멀어 보지 못했습니다. 집사성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은 알고 있겠지. 나이가 드니 귀가 어두워 듣지 못했습니다. 그 때 군대를 풀어 호랑이를 잡은 분이 지금의 상대등이시네. 반역을 누르셨던 게 아닙니까. 그렇지, 그것도 그렇지. 유사는 무릎을 쳐서 웃 음소리를 냈다. 작년 구월에 창궐한 메뚜기떼, 쥐 떼를 섬멸하여 가뭄에서 백성을 구하신 분도 그 분이시네. 박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산 아래 봉덕마을에서 들은 소문이 여기서 나오 고 있었다. 봉덕마을은 서라벌에서 일어난 해괴 망측한 소문들로 가득했다. 그 소문들은 마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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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며 몸집을 불렸다. 입과 입 사이에서 해는 셋 이 되었고 궐내에 나타난 호랑이의 머리는 여섯 이 되었다. 별이 떨어져 생긴 오십여 척의 연못은 잿더미가 되었다. 어떻게 메뚜기와 쥐가 가뭄을 몰고 왔는지, 상대등이 어떻게 구해냈는지, 구리 와 주석을 주물러온 박은 알 수가 없었다. 소문이 뭉쳐 진실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벌써 신종神鍾이라 부르고 있었 다. 분노하는 이는 왕이 아닌 하늘이다. 하늘이 벌을 내리고 있다. 하늘의 분노는 봄에는 태양으 로 땅을 말리고 여름엔 강으로 밭을 삼키고 가을 엔 삭풍으로 가축을 비틀고 겨울엔 눈으로 집을 덮는다. 빌어야한다. 하늘에 말씀을 올려야 한다. 우리는 하늘을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믿을 것이라고 소리 내어야 한다. 소리를 하늘로 올려 야한다. 마을과 닮은 목소리로 유사가 말을 이었 다. 소리를 맑게 해야겠네. 주종장鑄鐘匠이 할 일입니다. 그 소리는 장구히 이어져야 할 것이야. 주종장은 깊이 들으니, 해낼 것입니다. 또한 소리가 힘을 지녀야하네. 쇠의 울림이 그러할 것입니다. 재앙을 몰아낼 정도로 말일세. 그것은 하늘이 하실 일입니다. 반역을 일으킬 생각도 못하게 중생들의 마음을 말끔하게. 상대등께서 이미 제압하셨으니 탈 없을 것입니 다. 유사는 노인의 말에 또 무릎을 쳤다. 그렇지, 그 것이 상대등께서 하신 일이지. 그리고 상대등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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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하실 일이기도 하며, 상대등께서 바라는 일일 세. 스승의 앉은 목소리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유사의 들뜬 목소리가 말을 계속했다. 상대등께서 대국大國의 예例를 따르라 하셨네. 무위에 가뭄이 끊이질 않았다네. 그 때 태수가 종 을 만들었다지. 근데 그 종이 소리가 나질 않아 다시 만들었는데도 여전했다고 하네. 그래서 고 승高僧을 모시고 말씀을 드렸더니 소일물少一物 이 필요하다고 하시잖은가. 그래서 태수는 그 고 을의 아이를 도가니에 넣었고 청명한 소리가 가 뭄을 물렸다고 하네. 헛헛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 글쎄, 그렇지가 않 아. 주종鑄鐘에 그런 예는 없습니다. 소리가 구석 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아이처럼 맑게 하니 어찌 신종이라 하지 않겠는가. 어느 공장이 그런 허황을. 상대등께서 우리도 소일물이 필요하다 하셨네. 어느 고승께서 그리 말씀을. 지금 재앙이 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도 한쪽 눈도 잃고 주종에 실패했잖은가. 자네 실력 에 가당찮은가? 용납할 수 있나? 그건 자네 실력 탓이 아닐세. 그럼 그 때 징집한 공장들은 또 어 떤가? 그들 탓인가? 그들 또한 관영에서 이름난 자들일세. 그들이 정제를 못했겠는가, 거푸집을 헐겁게 짰겠는가, 풀무질이 서툴렀겠는가. 박종 일 그 자를 자네가 믿듯 나 또한 믿네. 얼마나 실 력이 출중한가. 그가 주종대박사에 오른 건 자네 덕만은 아닐세. 하지만 그가 모은 공장들, 저번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네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종이 소리가 나겠는가? 신기神器를 만들려면 숨을 넣어야하지 않아도 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 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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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의 말은 상대등의 명과 엉겨, 굳은 쇠처럼 단단했다. 뭉툭하고 빈 곳이 없어 아무런 울림도 내지 않았으나 무거웠다. 노인은 그 무게를 견디 며 여전한 소리를 내었다. 저는 공장을 떠났습니 다. 자네는 여전히 주종장의 스승이잖나. 주종장 이 대국의 예를 따르겠습니까. 찻잔이 상 위에서 뒤척이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김융이 모반하여 처형당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네. 잔 당은 아직 많겠지. 노인은 종루처럼 무게를 버티 며 신음했다. 어느 어미가 아이를 내놓겠습니까. 박이 목을 눌러 소리를 내었다. 유사 어른, 스승 님, 박종일 왔습니다. 장지문이 열렸다. 유사는 아랫목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머리를 밀고 천으로 한쪽 눈을 가 린 노인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박은 허리를 굽 혀 두 어른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 았다. 박은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박이 앉자 노인이 물었다. 들었는가. 예. 유사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둑한 방에서 빙긋 이 웃음을 띄었다. 아기는 수일 내로 도착할 걸 세. 내, 다 준비해놨으니 걱정일랑 말게. 마을 백 성들도 사정을 알고 있으니 욕하지 못할 걸세. 자 네가 할 일은 두 가지뿐이네. 하나는 아기를 적당 한 곳에 두어 이 마을의 아기로 믿게 하는 것, 하 나는 아기의 소리를 종소리로 만드는 것. 상대등 께서 내리신 명일세. 박은 감히 말하지 못했다. 상대등도, 아기도 박 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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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물었다. 어째서 이 마을의 아기로 믿게 해야 합니까. 유사가 말했다. 상대등께서 보내는 아기일세. 대궐의 일이니 알아서 좋을 게 있겠는가. 자네는 법의를 입었으니 법도에만 따르면 되네. 대승大 乘의 법도를 말일세. 3 덕성이 논둑에서 물을 길어오는데 집 앞에 황새 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황새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는지, 정말 황새였는지 덕성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집 앞에서 물통을 들고 멍하 니 쳐다보고 있었다. 황새건 아니건 간에 집에 다 른 생물이 들어온 적은 처음이었다. 황새는 종종 걸음으로 좁은 마당을 걷다가 실마루 위에 비단 포대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덕성과 눈이 마주쳤다. 황새는 부리를 벌려 뭔가 얘기하는 듯했으나 덕성은 듣지 못했다. 황새는 덕성 쪽으로 뛰어오더니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날아가 버렸다. 덕성은 물통을 부엌에 두고 실마루에 놓인 포대 기 옆에 앉았다. 비단을 풀어보려 다가갔다. 아기 가 자고 있었다. 덕성은 움츠렸다. 만져도 되는 걸까. 죽은 아기가 아닐까. 손가락을 콧잔등에 가 져갔다. 덕성과 함께 숨을 내쉬었다. 슬그머니 안 아보았다. 덕성과 맥이 같았다. 아기는 여전히 잠 들어 있었다. 덕성은 아기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 았다. 오가는 이 없었고 찾는 이도 없었는데 덕성이 아기를 키운다는 소문은 마을까지 닿았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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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황은 이미 다른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아이도 둘 낳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을 사람 들도 그녀가 아기를 어떻게 얻었는지 누구의 아 기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마을은 저승사자 도포자락마냥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마을에 아기는 많았으나 모든 어미는 아 기를 숨겼다. 자랑스럽게 장터에 데리고 다니던 아기들은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혹은 죽었다고 이웃에 알려졌다. 뒷간에서 자식을 기르더라도 죽었다고 말해야 했다. 마을 곳곳에서 아기 울음 이 들려도 발정이 난 고양이 소리라고 서로에게 말하며 모른 척했다. 소문을 듣지 못한 단 한 명 의 어미만이 이 마을에서 아기를 키웠다. 덕성이 마을에 나타나는 일도 드물었거니와 그 아기를 본 사람도 없었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덕성이 아 기를 키운다고 말했다. 아기가 마을엔 없어야 했 고, 덕성에겐 있어야 했다. 덕성은 탈 없이 아기를 키울 수 있었다. 아이를 세 번이나 사산死産한 몸은 넘치는 모유를 갖고 있었고 뿌리 뽑힌 마음은 새 싹을 돌보듯 아기를 아꼈다. 아기를 돌보게 된 뒤로 덕성은 부지런해 졌다. 너른 논밭에서 추수하고 남은 짚을 주어모 아 판벽만 있던 초가에 바지벽을 둘러 바람과 비 를 막았다. 아기가 걸음을 걸을 때를 대비해 토단 을 깎아 계단을 만들었고 실마루 주변에 너절하 게 널려있던 날카로운 돌들을 치웠다. 전에는 논 두렁에서 뜬 물을 흙만 가라앉히고 마셨는데, 이 제는 산속을 헤집어 상류에서 길어왔다. 아기가 먹는 것은 어미가 먹는 것 밖에 없기에 음식을 더 따뜻하게 만들었고 나물을 더 깨끗이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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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 년을 가까이 돌보았지만 아기는 걸음 마는커녕 울지도 않았다. 덕성은 그저 자신이 들 을 수 없기 때문이라 여겼다. 오히려 밤중에 아기 가 울 때 자신이 못 일어날까 하여 아기의 손목과 자신의 손목을 실로 묶었다. 하지만 덕성이 깬 일 은 없었다. 덕성은 아기의 생일을 알 수 없었기에 일 년이 지난 가을날, 아기의 돌을 치렀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고,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잔치에 미역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덕성은 산에서 캔 고사리를 바 다의 미역이라 여기고 푹 쪄서 아기에게 내주었 다. 아기는 덕성의 입으로 식혀진 미지근한 고사 리를 튀어나온 입술에 걸었다. 덕성은 산속 폭포 주변에서 물을 긷곤 했다. 돌 이 지나자, 물을 기르러 갈 때 아기를 업고 갔다. 물이 쓸려 내려가면서 이는 바람이 상쾌했다. 우 레와 같은 폭포 소리를 그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아득한 높이에서 낙하하는 물벼락은 지축과 그녀 의 몸을 함께 뒤흔드는 듯했다. 덕성은 폭포를 보는 대신 아기를 보았다. 혹시 아기가 싫어하는데, 아기가 우는데 자신이 못 알 아챌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아기는 울지 않았다. 아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도 동그랗게 모았 다. 덕성은 아기가 폭포를 따라하고 있다고 생각 했다. 자신이 들을 수는 없어도 아기는 폭포와 같 은 소리를 내며 바람을 부르고 있는 듯했다. 덕성 에게 숨을 불어넣는 듯했다. 덕성은 아기를 꼭 껴 안았다. 폭포처럼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아궁이 불 빛보다 더 환하게 반짝이는 폭포수를 떠서 돌아 왔다. 그 뒤로 폭포에 갈 때마다 아기를 데려갔고 아기는 항상 입을 오므린 표정이었다. 그런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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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덕성은 즐겨보았고 그런 덕성을 외눈의 노인 이 보았다. 덕성의 집은 산기슭에 있어 마을과 멀었고 야철 지에서도 멀었다. 공장들은 그곳에 초가가 있는 줄 몰랐으나 외눈의 노인은 알았다. 그리고 그곳 에 아기가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덕성은 실마루 밑의 디딤돌에 푹신하게 짚을 깔고 있었다. 아기 와 손잡고 디딤돌을 넘어 논두렁을 걷길 바랐다. 올 가을엔 추수도 넉넉하게 해서 두 입이 먹기에 부족하지 않을 듯했다. 짚을 깔고 허리를 펴자 마 당에 손님이 들어왔다. 덕성은 노인을 한참 바라봤다. 노인의 한쪽 눈 에는 흰 천이 둘러져 있었고 머리는 삭발했다. 회 색빛 옷이 두꺼워 보였다. 탁발을 받을 광주리나 보따리가 없는 걸로 보아 수행 중인 스님은 아닌 듯했다. 덕성은 합장으로 인사했고 스님은 받았 다. 스님의 입이 벙긋 거리는데 덕성은 들을 수가 없었다. 덕성은 자기 귀를 가리켰다가 고개를 저 었다. 스님은 몇 마디를 더 했지만 덕성이 계속 같은 행동을 하자 한숨을 쉬었다. 덕성은 스님을 지나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을 방향을 가리 키며 스님을 보았다. 스님은 신발을 신은 채로 실 마루를 밟고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덕성이 뛰어 들어와 실마루에 오를 때 스님이 방에서 나 왔는데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또 뭔가 말했 다. 덕성은 손사래를 쳤다. 아기를 넘겨받으려고 다가가니 스님이 뒤로 물러섰다. 덕성은 거칠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아기를 빼앗았다. 스님은 다 시 한숨을 내쉬고 서 있다가 이내 합장을 하고 돌 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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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스님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덕성은 마당에 심은 장독이 얼어 깨 지지 않게 짚을 덮었다. 초가의 판벽을 더 촘촘하 게 엮었다. 엮은 짚을 방바닥과 문 앞에도 매달아 오가는 바람을 잡았다. 아기는 짚에서 일어난 가 닥 사이에서도 뒤채지 않고 잘 잤다. 덕성은 산에서 얼음을 깨고 물을 떴다. 폭포는 겉이 얼어 거대하고 투명한 새의 날개처럼 보였 다. 덕성은 폭포 앞에서 빨래를 했다. 집으로 돌 아와 아궁이에서 언 손을 녹이며 저녁을 만들었 고 따뜻해진 손으로 아기의 이부자리를 폈다. 가 느다란 실이 아이의 팔목과 어미의 팔목을 이었 다. 덕성은 시험 삼아 몇 번 당기고 아기가 깨진 않았는지 들여다 본 다음, 자신의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아침이 오면 덕성은 눈을 뜨기 전에 그 실부터 당겨보곤 했다. 실의 팽팽함이 덕성을 눈 뜨게 했으나 그 날은 느슨함이 그녀를 깨웠다. 아 기가 없었다. 아기를 덮고 있던 이불이 방구석에 치워져 있었 다. 바닥에 깔려있던 요에 아기가 누웠던 자리가 눌려 있었다. 어미는 홑옷 바람으로 문지방을 넘 었다. 까끌까끌한 찬바람이 어미의 옷을 파고들 었다. 어미는 들을 수 없어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미는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초가 를 뒤졌다. 아궁이에는 불씨가 아직 살아있었다. 찬장에는 그릇들만 올라 있었다. 마루 밑에는 미 리 짜두었던 아기 짚신과 자기 짚신만 가득했다. 창고에는 벼와 농기구만 있었다. 어디에도 아기 는 없었다. 텅 빈 마당에서 어미는 우뚝 서서 찬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집을 나와 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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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먹을거리를 사러 갔던 공장들이 서라벌과 당나 라의 소문을 잔뜩 안고 야철지로 돌아갔다. 그들 의 손은 평소처럼 돌과 철과 구리를 만졌으나 목 소리는 사그라졌다. 옆 공장이 까닭을 물으면 품 고 있던 소문을 꺼냈다. 소문이 퍼져갈수록 많은 공장들이 목소리를 낮추었고 그들의 손은 분주해 졌다. 그들의 식구들은 야철지에서 멀었다. 식구 가 서라벌에 있는 자도 많았다. 멀리서 오는 소식 앞에서 듣는 자는 소리와 헛소리를 가리지 못하 고 믿었다. 소문은 독처럼 모든 공장들에게 퍼졌다. 그들은 낮추었던 목소리를 일제히 높였다. 해가 떠오를 때마다 신종을 완성해야 한다는 고함이 들렸고, 달이 떠오를 때마다 아기를 잡아와야 한다는 외 침이 울렸다. 주종장이 스승의 암자로 찾아가 구 리와 주석의 양, 과거의 제작 방식에 대해 얘기하 는 사이, 유사는 아기를 넣어야 한다며 공장들의 불안한 목소리에 풀무질을 했다. 거푸집도 준비 되었고 구리와 주석도 충분히 모았다. 이제 거푸 집의 밀랍을 녹여내고 수십 개의 도가니에서 쇳 물을 끓여 거푸집에 부어넣으면 제작은 끝난다. 빈 도가니를 볼 때마다 공장들의 눈과 귀는 작고 힘없는 것에 자꾸 기울었고 결국 주종장이 명하 지 않은, 크기가 다른 도가니를 하나 만들었다. 스승의 초가에 다녀온 주종장은 야철지에 놓인 도가니를 보고 얼어붙었다. 구리와 주석의 양을 세밀하고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 보통 도가니는 사람 머리통만 했다. 그런데 이 도가니는 어른 몸 통 크기였다. 달빛도 차가웠고 큰 도가니가 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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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도 차가웠다. 겨울이 되면 쇠에 바람이 낄 터인 데. 주종장은 낮게 중얼거렸다. 공장들은 날이 밝자 손을 비비며 큰 도가니 주 변으로 모였다. 큰 도가니에는 주종장이 걸터앉 아 있었다. 신종을 만들 도가니에 걸터앉다니 무 슨 짓입니까, 주종장. 한 공장이 소리쳤다. 박은 슬며시 일어나 물었다. 무슨 짓을 하시려고 만드 신 겁니까, 이런 도가니는 쓸모가 없을 터인데. 공장들은 박과 도가니를 에워쌌다. 우리도 소문을 들었소. 주종장께선 당연히 아시 겠지, 서라벌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먼 곳의 일은 모르오. 난 눈앞에 있는 이것 의 쓸모를 묻고 있는 것이오. 우리는 신종을 만들러 왔소. 나도 그렇소. 신종은 재해를 쫓을 것이오. 나도 바라오. 온 누리를 평안케 할 것이오. 나도 바라오. 모든 평안은 저 도가니에서 자라날 것이오. 박은 밖에서 들은 말을 안에서 들어 씁쓸했다. 아침 해가 구름을 헤치고 나왔다. 자신의 그림자 를 향해 침을 뱉었다. 박은 해가 떠오르듯 느리게 말했다. 왜 아무도 아기를 녹이는 도가니라고 말 하지 않으시오? 대꾸가 없었다. 우리가 모인 것이 신종을 위함이오, 살인하기 위함이오. 지난번 종은 울리지 않았소이다. 그것이 아기의 탓이오, 쇠의 탓이오, 나의 탓이 오, 자네 탓이오, 내 스승의 탓이오,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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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 입에서 상대등이 머물렀으나 나오지 못했 다. 공장들은 도가니를 보며 말했다. 된다하지 않소, 당나라에서도 그리 했다잖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더 없지 않소, 전과 다를 바 가 하나도 없지 않소, 소리가 나겠소, 이래서야 쇠가 크게 울겠소? 공장들은 나아갈 길만을 생각했다. 그들은 박에 게 앞 다투어 손을 내밀며 따졌다. 그들이 좁혀오 는 거리만큼 박의 숨은 답답했다.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사방에서 공장들의 울음이 들 렸다. 울음 사이에서 박은 소리 내어 말했다. 인청동을 넣어보려 하오. 저번에 넣으시지 않았소. 그 양이 문제요. 마을에서 인청동을 더 얻어 넣 고, 쇳물을 더 뜨겁게 하고, 풀무질을 서서히 하 면서 거푸집에 단숨에 흘려 넣는다면 쇠에 든 바 람도 빠지기 쉬울 뿐더러. 넣어보지 않았소이까, 주종장! 공장들은 거리를 좁혀와 어느새 도가니를 잡았 고 박의 팔을 쥐었다. 박의 한쪽 눈에 이슬이 맺 혔는지 햇살에 반짝거렸다. 공장들의 손도 떨리 고 있었다. 신종을 만드는 일이오. 숨이 필요하지 않겠소. 만파식적은 적병의 숨을 빨아들여 그 신 통함을 유지한다 하지 않소. 박은 대답하지 못했 고 그들은 박의 두 팔을 잡았다. 그리고 낮게 속 삭였다. 넣읍시다, 숨을 불어넣읍시다, 주종장. 박의 두 팔이 덜덜 떨렸다. 몇몇 공장들은 이미 저쪽에서 구리와 주석을 다른 도가니에 채워 넣 고 있었다. 울음은 소리고, 숨은 혼이었다. 아기의 숨은 공장의 숨이 아니기에 그들의 울음은 종의 울음이 될 리가 없었다. 박은 두 팔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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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하늘이란 말이오. 무엇이 신종이란 말이 오. 아이를 먹고 배불러 내는 소리가 신종의 소리 란 말이오. 그 소릴 듣고 부처가 웃는단 말이오. 하늘이 기뻐한단 말이오. 아니 그 전에 당신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기뻐할 수 있단 말이오. 후대에 뭐라고 할 작정이오. 당신의 아이에게 구리와 주 석을 섞는 양을 가르칠 때 아기를 꼭 넣으라고 할 참이오. 소리가 덜하면 아기를 둘, 셋 더 넣을 셈 이오. 소리의 결을, 울림을 가다듬는 일을 아기의 수로 결정하고 싶은 게요. 그 손으로 신종에 들어 가는 주물을 만지겠단 말이오. 그 손으로 식기와 제기를 빚겠다는 말인 게요. 불은 지펴졌다. 박의 주변을 둘러싼 공장들은 고개를 숙여 침묵하면서도 다른 공장들을 말리지 않았다. 공장들은 불을 소문만큼 크고 세게 지폈 고 땀 흘리며 풀무질을 했다. 깊게 판 구멍에 거 푸집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도 불은 지펴 졌고 거푸집을 뜨겁게 했다. 박을 둘러싸고 있던 공장들이 박을 끌어내고 큰 도가니에 구리와 주 석을 채웠다. 박은 힘이 빠져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 자들이 왜 작업을 시작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자신이 말한 인청동도 없었고 그들이 원한 아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밀 랍을 녹여내고 도가니를 달궜으며 쇳물 길을 닦 았다. 풀무질에 힘이 더해갈수록 도가니는 달아 올랐고 구리와 주석이 벌겋게 녹아 섞였다. 박은 마을로도 가지 못하고 공장들을 막지도 못했다. 큰 도가니가 세차게 열을 뿜을 때 외눈의 스님 이 박이 앉은 자리를 지나 큰 도가니 앞으로 나아 갔다. 그는 커다란 함을 들고 있었다. 박은 황급 히 그 쪽을 돌아봤다. 함 안에 무명천이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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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싸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함을 기울였고 함에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무명천을 남기고 쇳물 속으로 사라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벌건 쇳물 위에 뜬 갈탄이 비틀거렸다. 그림자를 삼켜 세차게 오르는 쇳물의 열기가 박의 눈에도 확연 히 보였다. 노인은 함과 천을 내동댕이쳤다. 박은 스승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박은 여전 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옷자락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노인은 자신보다 어깨가 넓은 박을 감싸 안고 일으켜 세웠다. 박은 따르지도 뿌리치지도 않은 채 발을 끌었다. 공장들이 야철지에서 새로운 종 을 만드는 동안 노인은 박을 자신의 암자로 끌고 갔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그 아기가 어디서 온 아기 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종 또한 중요치 않았 다. 그 종이 좋은 소리를 낸다면 더욱 끔찍한 일 이었다. 종의 소리는 아기의 소리일 것이다. 그것 은 자비나 구원이 아닌 절규이며 경고다. 소리는 칼을 날려 생채기를 내고 소금을 뿌려 쓰리게 할 것이다. 신종 앞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은 깊이 가라앉을 것이며 땅 깊숙이 손톱을 박아 흙을 움 켜쥐고 괴로워할 것이다. 소리는 그들이 바란 대 로 산과 강을 넘어 널리 퍼질 것이나 듣는 이 모 두 그 비명에 잠들지 못할 것이다. 박은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어 멍하니 노인 을 따라 암자로 걸었다. 숲은 겨울이라 소리가 적 었다. 새소리, 벌레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나무 들 사이로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가 났다. 높낮이 도 없고 흔들림도 없이 곧게 뻗는 소리였다. 휘파 람은 울림과 멈춤을 일정하게 되풀이했다. 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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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품에서 벗어나 소리를 찾았다. 소리는 노 인의 암자에서, 방안에서 나고 있었다. 박은 디딤 돌에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섰다. 햇볕이 닿지 않는 구석에 이부자리가 펴져 있었 다. 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노인은 햇빛이 가득한 문가에 서 있었다. 박이 그늘진 이부자리 를 들여다보니 아기가 눈을 감고 입술을 동그랗 게 모아 젖을 찾고 있었다. 박은 맹인처럼 소리를 더듬어 아기 옆에 앉았다. 노인이 문밖에서 말했 다. 들리는 소리를 모두 믿을 필요는 없네. 박은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고 믿었다. 노인은 계속 말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억지로 믿을 필요도 없지. 박은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아기입니까. 그렇네. 마을에서 얘기하는 그 아기입니까. 그렇기도 하지. 그럼 스승님께서 그 여인에게 아기를 주셨습니까. 차박사 실력이 대 단하더이, 과연 공양상을 새긴 솜씨더만, 인청동 인 줄 알고 봐도 살아있는 아기 같았네. 노인은 아기를 안았다. 가만히 안아 올렸는데도 아기는 금방 울음을 터뜨렸다. 노인이 아기의 울 음에 장단 맞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말했다. 만두의 예도 있고 해서 꾀를 내봤네만, 마을 사람 들뿐만 아니라 그 어미까지 인청동을 아기로 믿 어버려 곤란했지. 자네가 돌려주고 오게, 아니 주 고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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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철지에서 연기가 멎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 처럼 아기를 안고 이웃과 인사를 나눴다. 아기들 의 생일은 모두 근래에 있었다. 신종이 겨울바람 으로 형태를 굳히는 사이, 박은 아기를 안고 어미 의 집에 갔다. 산기슭 집에는 휑한 바람이 가득해 천 조각만 어지러이 굴러다녔다. 아궁이의 불씨 는 이미 꺼졌고, 식기들은 부엌 바닥에 엎어져 있 었다. 마을 사람들은 덕성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 른 길은 산길뿐이었다. 항상 오르내렸는지 집 뒤 로 길이 있었다. 박은 귀가 들리지 않는 여인을 찾아 매일 산을 올랐다. 입동이 한참 지나 나무도 바위도 차갑게 얼었지만 박은 산행을 쉬지 않았 다. 마을에서 아침을 국에 말아먹고, 밥을 뭉쳐 산을 올랐다. 차갑게 식어 푸석거리는 주먹밥으 로 끼니를 때웠다. 나뭇가지에 긁혀 소매가 해졌 다. 숲으로 들어서면 알 수 없는 곳이 많았다. 박 은 오가며 피를 흘리기도 했고 발목을 접질리기 도 했다. 덕성은 소리를 듣지 못하니 박은 계속 걷고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걸음을 게을 리 하진 않았다. 박이 덕성을 찾는 것보다 덕성은 더 애타게 아기를 찾고 있을 터였다. 야철지에서 거푸집을 벗기고 신종의 소리를 시 험하는 날에도 박은 산행에 나섰다. 해는 멀고 바 람은 찼다. 박은 굵은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았 다. 바위를 딛고 나무를 붙잡으며 산길을 찾았다. 바위는 날카로웠고 나뭇결은 곤두서 있었다. 중 턱에서 밥을 먹고 퍽퍽함을 달래려 물통을 열었 다. 물이 없었다. 틈이 벌어져 샌 듯했다. 박은 통 을 버리고 눈을 퍼먹었다. 혀가 얼얼해 녹일 수 없어 뱉었다. 산길을 걸으면서도 목마름은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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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다. 땀이 나면서 오히려 갈증은 더 심해졌 다. 박은 귀를 기울이다 바람 소리 사이로 들려오 는 물소리를 잡았다. 소리가 낮고 깊은 것이 폭포 가 분명했다. 종과 마찬가지로 멀리 울려 퍼지는 소리는 이렇게 낮고 깊었다. 박은 소리를 따라가 폭포와 마주했다. 폭포는 얼음을 두르고 있었다. 폭포가 일으키는 바람이 갈라진 얼음 사이로 새어나왔다. 떨어지는 물은 고인 물을 깊이 파고들어 헤집었고, 밀려난 고인 물은 몸을 일으켜 하류로 걸음을 옮겼다. 떨어진 물이 고인 물과 뒤엉켜 하얗게 일어나는 그곳에 서 거대한 울음이 물방울을 타고 얼음 밖으로 튀 어나왔다. 박은 물방울에 옷을 적시면서도 몸을 굽혀 물을 마셨다. 겨울의 물은 보통 살을 에는데, 이 폭포 의 물은 달았다. 박은 울림 가득한 물을 퍼마시며 여리게 뒤척이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박의 귀에 익었다. 박은 물을 더 마셨다. 목을 축 이고 주위를 보니 스승의 암자와 멀지 않은 곳 같 았다. 왔던 길을 찬찬히 되짚어 가늠해보니 암자 와 야철지 중간쯤 되는 곳이었다. 폭포 소리가 귀 를 먹먹하게 했다. 물통이 없어 실컷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소리 하나가 숲을 쓰다듬었다. 폭포가 두 른 얼음의 가장자리가 바스러졌다. 먹먹했던 귀 를 흔들어 깨웠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눈처 럼 사뿐했고, 날아오르는 새처럼 흩어졌다. 소리 는 폭포 너머 숲에서 나무 위를 뛰놀다, 물에 빠 져 물장구를 치다, 박의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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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의 소리였다. 박은 야철지로 달렸다. 소리 가 온 방향, 아직 소리가 뛰어나오는 쪽으로 달렸 다. 박은 다급했다. 그 소리는 뛰어가는 지금도 박에게 날 수 있다는 맹랑한 희망을 품게 하면서 도 딛고 있는 땅을 고마워하게 했다. 들끓는 마음 을 냉수처럼 식히면서도 밥 짓는 연기처럼 푸근 하게 감쌌다. 마을과 야철지에서 부글거리던 얕 고, 가볍고, 거칠고, 지저분하고, 날카로운 소리들 을 신종의 넉넉한 단음이 덮었다. 소리는 바위마 다 울려왔고 박은 길을 잃었다. 이제 소리는 없었다. 해가 산을 넘었고, 숲은 노 랗게 물들었다가 이내 어두워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기엔 늦었다. 박은 잠자리 를 찾으며 잔가지를 모았다. 불을 피우지 못하면 바람이라도 막아야했다. 박은 큰 바위에 기대어 앉았다. 바위 앞에 잔가지를 부려놓고 하늘을 보 았다. 눈은 많이 내리진 않았지만 꾸준히 듬성듬 성 내렸다. 그가 올려다본 하늘은 쇠처럼 검은데 희고 맑은 눈을 뿌리고 있었다. 지친 그는 하늘에 서 내리는 눈을 보다 문득 잠이 들어 뉘엿뉘엿 바 위 위로 쓰러져갔다. 종이 울렸다. 낮보다 가늘었지만 확실히 울렸 다. 낮의 소리는 볕이 들듯 널리 퍼졌으나, 이 소 리는 산이 꺾이는 듯 땅으로 고꾸라졌다. 박은 벌 떡 일어났다. 소리는 가까웠다. 종은 한 번 더 울 렸다. 전보다 강했지만 크지 않았다. 박은 지팡이 로 삼았던 가지도 버리고 달렸다. 바로 위에 야철 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종은 한 번 더, 전보다 더 크게 울렸다. 박은 야철지의 공터로 뛰어들었다. 이미 많은 공장들이 신종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의 행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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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들이 놀라 부축했다. 박은 신종을 보기 위해 그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사람들은 길을 열었다. 박은 걸으며 물었다. 밤중에 종은 왜 울린 겐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박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차박사가 새 긴 공양상이었다. 꽃구름 너울거리며 내려온 천 녀가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신종을 따라 돌아가니 타종 자리인 당좌撞座가 보였다. 박은 떨리는 손을 당좌에 얹었다. 그 소 리가 이곳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닿을 것이다. 신종에서 단정한 음이 뛰쳐나와 사람들과 노닐 것이다. 소리가 폭포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들어 와 마음의 때를 모두 안고 흙으로 먼저 돌아가리 라. 박의 눈앞에 밤과 종은 어두웠으나 눈과 소리 는 밝고 맑았다. 당좌가 따뜻했다. 그리고 끈적거 렸다. 눈물 자국처럼 아래로, 아래로 이어졌다. 손 이 떨렸다. 공장들이 뒤에서 횃불을 밝혔다. 피가 흐른 자 국이 당좌에서 종의 밑동을 두른 하대下帶까지 이어져 있었다. 소리가 땅과 함께 울도록 바닥을 판 명동鳴洞에 천녀가 홑옷을 입고 내려와 잠들 어 있었다. 신종이 아직도 우는 듯 얇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무엇이 이 종을 울게 하는가. 박은 되뇌었다. 밤과 불 아래 주저앉았다. 목구멍에서 신종의 다섯 번째 울음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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