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 magazine 2017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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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bridges

캠퍼스를 연결하는 9개의 다리에 이름을 올릴 UNIST 대표 과학기술자를 만나봅니다

시대에 간절히 필요한 연구, 그걸 하는 나는 행운아!

“야간근무를 하다 미끄러져 한쪽 발이 유기용매가 담긴 통에 빠졌죠. 큰 화상은 아니었는데 치료가 잘못돼 조직이 손상되면서 결국 피부이식까지 하게 됐습니다.” 1977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에서 화학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청년 이재성은 삼성석유화학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국가로 발돋움하던 시기이고, 삼성석유화학도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었다. 1979년 공장이 완공되자 그는 울산으로 내려가 공정 엔지니어로 스타 트업(start up) 업무를 맡았다.

공장 사고로 피부이식수술 받아 “스타트업이란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을 찾는 과정입니다. 어찌 보면 꽤 위험한 시기죠.” 원료를 넣고 특정 조건에서 반응을 시킨 뒤 결과를 본 다음 내용물을 빼내고, 다시 원료를 넣고 조건을 조금 바꿔 반 응을 시키고 결과를 본 뒤 내용물을 빼내고… 이런 식으로 최적의 조건을 찾는 실험이 이어지다 보니 현장은 온통 물 바다였다. 작업자들이 고인 물을 쉽게 빼려고 쳐놓은 펜스를 치운 게 화근이 돼 뜻밖의 사고가 났다. “두 달 동안 입원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공부를 더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선뜻 동의해 본격 적인 유학준비를 했죠.” 사실 그가 회사에 들어간 건 가정을 빨리 이루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던 시절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려고 1975년 졸업과 동시에 입사했다. 회사의 배려로 한국과학원에서 석사를 받은 뒤 결혼했 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준비기간이 짧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입학통지서가 왔습니다.” 1980년 유학길에 오른 늦깎이 대학원생 이재성은 외국 생활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특히 그가 염두에 뒀던 바 이오공학 분야 교수가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걸 알고 실망했다. 또한 영어구사력이 현지인 수준이 안 될 경 우 실험실에서 버티지 못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촉매 실험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촉매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삼성석유화학의 공장은 미국 회사와 합작해 지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른 기술은 다 공개해도 유독 촉매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더군요. 보내준 자료가 한 더미였지 만 촉매 부분은 한 페이지에 불과했습니다.” 회사원 시절 화학반응공정에서 촉매가 핵심이라는 걸 간파했던 이재성 교수. 그는 ‘촉매를 연구하는 게 운명’이라 고 생각했고, 열심히 노력해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지도교수가 공동설립자인 촉매회사에 들어가 연 구를 이어나갔다. “하루는 퇴근해보니 한국과학원 은사인 김영걸 교수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와 있더군요. 새로 생긴 포항공대 (POSTECH)로 같이 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얼마 뒤 김호길 POSTECH 총장이 한인 과학자 유치작업을 하러 미국에 왔고 김 총장의 달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 는 포항공대에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물론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은사님의 선택과 김호길 총장의 비전을 믿어보기로 했죠.”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이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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