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 logo

Page 1

성경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

김영익 교수 편저


머 릿 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과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기 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 사실의 흔적을 찾아 성경이 진실 임을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뜻을 둔 탐험가와 연구가 들에 의하여 그 흔적들이 알려 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고고학에서는 그 분들이 찾아 낸 흔적과 연구 결과들을 살 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문 성경고고학 연구 서적이 아니고 본 총 회 신학교 학생들의 성경고고학 교재로 만들었음을 밝혀 둡니다. 이 책은 김 성 교수의 강의와 인터넷의 자료들과 본인이 새새로 모 은 자료들로 엮었음을 밝혀 둡니다. 이 책으로 공부하는 여러분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역사적 사실임이 확신되어 생명과 권능의 역사가 공부하는 여러분들에게서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2004년 8월 28일

김 영 익


◎ 차 례 ◎

제1장 서론 /6 1. 고고학 /6 2. 성경 고고학 /7 3. 성경고고학의 연구 범위 /8 4. 고고학적 발굴방법론과 유물분석 /9 5. 성경고고학의 연구 역사 /13 6. 성경고고학의 시대 구분 /16

제2장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 /22 1. 베로소스의 바빌로니아학 /22 2. 고대 바빌로니아의 홍수설화 /22 3. 고대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 /24 4. 아다파의 전설 /26 5. 창세기의 안식일과 바빌로니아의 안식일 /27 6. 레이야드의 니므루드 발굴 /28 7. 메소포타미아의 셈족 등장 /29 8. 족장시대의 성경배경 /30 9. 에블라 발굴과 성경의 진실 /34

제3장 출애급과 이집트 /40 1. 이집트 학 /40 2. 힉소스 민족과 히브리 족장들 /45 3. 출 애급기의 행적 /54 4. 출 애급 이 후의 애급 /62

제4장 정복과 정착 /64 1. 여리고성의 함락 /64 2. 정복당한 가나안 성읍들 /65 3. 가나안 정복 당시의 애급 왕조 /66

- 3 -


4.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 /69 5.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73 6. 고대 가나안의 엘 신과 바알 신 /80 7. 가나안의 3대 여신 /82

제5장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84 1. 사사시대의 배도 /84 2. 사울 왕 시대 /84 3. 다윗 왕 시대 /85 4. 솔로몬 왕 시대 /86 5. 분열 왕국 시대 /89 6. 바벨론 포로와 귀환 시대 /96 7.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발굴 /102

제6장 예루살렘 고고학 /104 1. 지명 /104 2. 지리적 배경 /104 3. 주거 역사 /105 4. 지하 급수 시설 /107 5. 윌슨과 워렌의 예루살렘 지하 탐사 /111 6. 페르샤 시대의 예루살렘 /113 7. 그리스 시대의 예루살렘 /114 8. 로마 시대의 예루살렘 /115 9.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 /118 10. 시온산 /120 11. 실로암 /122

제7장 신약시대 고고학 /125 1. 신약성경관련 고고학적 발견 /125 2. 베들레헴 성탄 교회 /126 3. 찌포리 문화설 /129 4. 갈릴리 호수 /132 - 4 -


5. 맛사다 /135 6. 바울의 고린도 체류 /145

제8장 사본 /149 1. 시내 사본 /149 2. 에프라임 사본 /149 3. 시리아 사본 /154 4. 나그 하마디 문서 /155 5. 에블라 원문 /155 6. 사해 두루마리 /158 7. 맛소라 사본 /176 8. 사마리아 사본 /178

- 5 -


성경고고학 제1장 : 서론 1. 고고학 고고학(Archaeology)이란 말은 두 개의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고 대"라는 뜻을 가진 "알카이오스"(archaios)라는 말과 말씀, 사건, 기 사, 강연 등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 된 것이다. 고고학이란 "고대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연 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거의 인류가 생활 행위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 수 집하여 인류의 역사ᆞ문화ᆞ생활 방법 등을 구명하는 학문이며, 광의 의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해석으로 인류의 과거 생활 및 문화의 변천 을 밝히는 과학이다. 인류의 과거를 구명하는 실마리로는 유적ᆞ유물과, 문자로 쓴 문헌 사료(文獻 史料)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고고학이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문헌 사학 즉 협의의 역사 학이다. 고고학은 문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선사 고고학(先史考古學)과 역사 고고학(歷 史考古學)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이 없는 시대는 고고학의 독무대이며, 문헌이 완비된 시대는 문헌 사학의 독무대이다.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고대를 탐구하려고 한 시도는 기원전으로 거 슬러 올라간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부 나이드 왕(556-538B.C.) - 6 -


이 바빌로니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샤마슈 신전(神殿)을 발 굴하여 아카드 시대의 신전 자리를 발견한 것이 고고학 연구의 효시 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간간이 고고학적인 발굴은 있었으나 근대적인 학술로 성장 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고물(古物)에 대한 관심은 16세기 후반부터 고조되기는 했으나 고고학이라고 할 만한 연구는 독일의 J. J. 빙켈 만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가 광범위하고 왕성하게 진행 된 것은 그리스ᆞ로마의 미술품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이며, 이런 종 류의 연구에 대해 독일의 C. G. 하이네는 고고학(arkhaiologia)이라 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는 고고학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 전의 시기였고 20세기 들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에 이 르는 동안 고고학의 연구 조사는 일대 약진을 이룩하였다. 많은 나라 와 지역에서 대규모 발굴이 있었고,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조사법 과 보존법도 눈부신 진전을 이룩했다. 고고학의 연구는 연대 결정부터 시작되는 데 상대연대(相對年代)의 판정법에는 형식학적 방법(Pottery Typology)과 층위학적 방법 (stratigraphy)이 있고, 절대연대의 판정의 방법에는 문헌을 연구하 는 것과 탄소14법(카본 데이팅), 피션트랙법, 연륜연대법 발열분석법 (Thermoluminescence), 분광분석법(Spectographicanalysis), 중성 자 활동계산법(neutron activation)등이 있다.

2. 성경 고고학 성경고고학은 성경 시대, 즉 성경의 시대적 배경과 성경 지역, 즉 성 경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지리적 배경에 해당되는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 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고고학은 성경학의 여러 분야 중 하나라기 보다는 고 고학의 한 분야로 분류된다. - 7 -


오늘날 성경고고학은 성경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초학문 분야로 자리 잡았고, 성경이해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으며, 나날이 증가하 는 현장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의 축적으로 끊임없는 성경의 재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경 고고학(聖經考古學/Biblical Archaeology)은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의 기술(記述)과 사실(史實)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으로서 불교 고고학과 더불어 종교 고고학의 일부를 구성하며, 시간적으로는 성경학이 전승과 역사의 최초의 정합성(整合性)을 인정하는 B.C. 2000년 기부터 신약성경이 성립되어 끝날 때까지, 즉 청동기시대부 터 로마 시대까지를 주로 다룬다. 성경 고고학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Biblical Archaeology](Philadelphia:Westminster,1962)의

저자인

라이트

(G. E. Wright)는 "성경 고고학은 고고학 발굴 결과 얻어진, 성경을 이해하는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3. 성경고고학의 연구범위 시대적 범위에서 성경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경 시대 즉 초기 청동 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까지의 고 고학이

된다.

성경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성경고고학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팔레스타인에서 농경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 (서기전 8500-4300년)부터 신약성경의 배경인 초기 로마시대 (서기전 63-서기 135년)까지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는 주로 이스 라엘로 국한되며,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인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 이란, 키프로스, 그리스, 및 이 탈리아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 연구 범위에 대해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 성경 고고학의 연구는 고대 근동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 - 8 -


에 이르는 지역과 러시아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 남단에 이르는 지 역까지 성경과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 한다"고 말한다. 즉 신약성 경 시대에 대해서는 로마제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역이 관심의 대상이고 구약성경 시대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메 소포타미아 계곡과 페르샤(현대의 이란)까지 포함하는 지역인 것이 다.

4. 고고학적 발굴 방법론과 유물분석 성경고고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론인 발굴을 수행하고 나서는 밝 혀진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분석 및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고 고학에서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들은 첫째,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무엇인가(What)”라는 구체적인 정의와 묘사에 관한 것이고, 둘째 는, 출토된 지점과 원래의 출처가 “어디인가(Where)”라는 유적과 유물의 지리적 기원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발굴물의 시대적 기 원에 관한 “언제인가(When)”라는 질문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마 지막의 유물들의 연대추정에 관한 물음은 고고학적 연구의 최종적 결론인 동시에 성격상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다행히 같은 지점에서 발견된 역사적 문서 및 기록물들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연대추정이 가능하지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는 달리 발굴현장에서 기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서는 자연히 기록물 다음으로 연대 추정의 기준이 될만한 특정 유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 텔이란 무엇인가? 성경의 배경 지역들은 대략 오늘날의 중동지역과 많은 부분이 일치 하는데, 이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고대의 유적지들은 독특한 형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폐허의 언덕을 아랍어로 텔(tell)이라 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 시작할 때에는 다음과 같 은 몇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선택하였다. 첫째, 근처에서 쉽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 둘째, 주위에 경작할 수 있는 비옥한 들 - 9 -


판이 있는 곳, 셋째,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

넷째,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

등이다. 텔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등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텔이 언덕처 럼 높아진 이유는 대부분 흙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2-30년 만에 한번씩 허물어지고 다시 외부에서 돌과 흙벽돌을 가져와서 새로 짓 기 때문이며 무너진 잔해를 완전히 성벽 밖으로 치우지 않는 한 도 시의 지반은 점 점 높아지게 된다. 텔은 한 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제한된 발굴 지역에서 수천 년의 주거 역 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서로 얽힌 건물의 기초 벽들을 일일이 확인해주어야 하는 등, 매우 복잡한 주거 층 론 (stratigraphy)을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역사적으로 서기전 6세기 이후부터는 고대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더 이상 성벽을 갖춘 “언 덕의 도시”를 유지할 명목이 없어졌고, 특히 그리스 시대(서기전 330-63)에 들어와서 그리스 폴리스의 영향으로 텔 근처의 평지에 계획된 그리스-로마식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시 대에도 텔은 그 위치 상 군사적 요새 겸 관망대나 그리스-로마식 신 전 등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2) 발굴 발굴이란 문자 그대로 유적지의 땅을 파는 작업인데 파묻혀 있던 유 물들을 수집하고 유적을 보존하며 파내려 가는 작업이어서 대부분 사람들의 손에 의해 진행된다. 성경고고학에서는 특별히 로마시대의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흙 언덕인 관계로 독특한 과정을 통해 축적된 텔의 발굴이 주된 방 법론이다. 발굴 목적에 부합되는 텔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 표조사(surface survey)를 통하여 그 곳의 주거 연대를 확인해야 - 10 -


한다. 다음은 발굴 예산을 확보하고 현장 지도와 분석을 맡을 고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스탭 진과 발굴 작업에 직접 종사하는 일반인들 로 구성된 발굴단을 조직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진행되고 있는 텔 발굴은 대부분 건기인 4-11 월 사이에 이루어지며 일반 및 대학생 자원 봉사자들의 참여로 발굴 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발굴이 여러 해 동안 지속되는 만큼 한 해의 수집된 유물들을 충분히 분석할 수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고려하여 매해의 발굴 기간이 결정된다. 발굴은 사방 5미터의 정사각형 단위로 진행되며 한 발굴지역 당 4-10개의 정방형(Square)을 파고 전체 텔의 발굴에서는 예산과 규 모에 따라 3-6개 정도의 발굴지역(Area)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 기간은 규모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부분 연간 4-10주 정도이고 공사 중 파헤쳐진 구원 발굴(salvage excavation)의 경우 외에는 주 로 5-10년 정도의 장기적 계획 하에 발굴이 진행된다. (3) 발굴 방법론 성경고고학 발굴의 초창기에는 텔을 발굴할 때 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후시대의 주거 층의 전체를 한 겹씩 벗겨나가는 식으로 파내려 갔지만 한번 발굴된 것은 이미 그 역사적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특 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요즘에는 텔의 몇몇 중요한 부분들을 선정 하여 수직으로 파 내려가서 특정지역의 시대적 연속성을 규명해 보 려는 발굴을 주로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텔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성벽 및 성문 지역, 텔의 중심부 약 간 높은 곳에 있는 궁전과 신전 및 부속 창고들, 그 외의 일반 주거 지역 등을 중점적으로 발굴하게 된다. 고고학적 발굴은 문자 그대로 땅을 파는 작업인데, 조금씩 파내려 가 면서 주거 층의 흙바닥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건물의 기초들을 보존 하고, 그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온갖 종류의 유물들을 수집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대부분의 구약시대 도시들의 집들은 돌로 쌓은 기초 위에 흙벽돌로 - 11 -


써 벽을 올리고 나무 가지를 걸쳐서 지붕을 엮었기 때문에 집의 무 너진 잔재를 발굴하게 되면 불에 탄 지붕재료, 무너진 흙벽돌의 퇴적 층, 집 바닥에 널려있던 토기 조각 및 기타 유물들, 그리고 단단하게 눌리어진 집 바닥층 등의 네 층으로 구분된다. 이 네 층을 모두 합쳐 서 고고학적 용어로 한 주거 층(stratum)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산악지대에서는 돌을 많이 사용하였고 저지대나 광야지역에서는 흙벽돌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 문에 약간 다른 발굴 방법론이 적용되기도 한다. (4)성경고고학의 연구 방법론 성경고고학의

독특한

가지

연구

방법론은

주거

(stratigraphy), 유형론(typology), 그리고 토기 연대추정(pottery chronology)이다. 주거 층 론은 텔 자체가 여러 개의 주거 층(stratum)으로 구성되었 다는 전제 하에 상대적으로 밑의 주거 층이 위의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연대추정을 가능케 한다. 유형론이란 주로 발굴에서 수집된 유물에 적용되는 방법론으로서 겉 모양이 비슷한 것끼리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지리적 시대적 기원 과 발전 등을 유추하는 분석의 한 방법론이다. 이 유형론은 특별히 토기 분류에 결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토기 연대추정은 토기의 모양 중에서도 특히 아구리 부분(rim)이 시 대적으로 자주 변천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50년의 단위까지 세분하 여 상대 및 절대 연대의 추정이 가능한 일종의 토기 유형론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론이다. 19세기 말 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된 이스라엘 여러 지방의 다양한 시 대의 토기들의 유형으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토기 달력(pottery calendar)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라 도 비교적 정확하게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성경고고학에서의 가장 믿을만한 시대판단의 기준으로 서 ‘비교 토기연대’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토기제작 시기 (서기전 - 12 -


6000년)이래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30-50년 내외의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5. 성경고고학의 역사 초기의 성경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경의 여러 가지 사건들의 역사 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했다. 본격적 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경의 지명들 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작업을 수행했다. 성경고고학이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 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재구성 된 역사 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성경 고고학은 아마도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애굽을 침략했을 때 발견된 로제타 바위(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부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세 줄로(헬라어, 애굽의 상형문자, 후기 애굽의 필기문자의 세 줄)쓰여 졌는데 진 프랑소와, 샴폴리온에 의해 해독되었다. 나폴레옹이 애굽에서 고대 기록들을 발 견하게 된 것은 이 나라에서 더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이게 하는 자극 제가 되었다. 1865년에

영국에서

결성된

‘팔레스타인

탐사재단(Palestine

Exploration Fund)’은 성지의 고고학, 풍속, 지리, 자연환경 등을 연구하기 위해 당시의 영국 여왕을 후원자로 하여 모금하기 시작했 다. 이 기금으로 설립된 학회의 목적은 이 연구단체가 발행하는 학회 지에 “성경의 쉬운 이해를 위한 성지의 역사, 고고학, 지리학, 관습 등의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라고 요약돼 있다. 과학적 고고학이 팔레스틴에 이르게 된 것은 1890년에 영국의 W. M. 플린더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그의 연구 방법인 "연속적 연대의 연구"를 위한 성층연구법에 따라 수행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견해와 19세기 미국의 E. 로빈슨이 성경 속의 지명을 - 13 -


실지 조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성경의 라키쉬(라기스) 로 착각한 페트리는 이집트에서 쌓은 발굴 경험들을 토대로 주거 층 에 따른 토기 모양들의 변화에 착안하여, 주거 층 론과 토기 연대추 정을 확립하였다. 페트리를 이어 다음 단계로 발전시킨 사람은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 헤브론 서쪽인 텔 베이트 밀심(Mirsim)을 발굴하였는데 (1926-1932), 세심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그릇들의 발 전 과정을 완벽하게 확립했다. 성경 고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성경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가 1930년대부터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기의 형식에 의해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영국의 페트리가 텔 엘 헤시 발굴 때 도입하고 올브라이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라이스너와 피셔(C. S. Fisher)가 사마리아에서 새로운 발굴 기술로 발굴

작업(1931-1935)을

벌였으며,

1952년에는

케더린

케년

(Kenyon)이 여리고와 그 외의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성경 고고학(또는 팔레스틴 고고학)의 성립은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발전한 과학적 연구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 동양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의 교수였던 피셔와 올브라이트의 공 헌이 컸다. 올브라이트의 텔 베이트 미르심 보고서는 과거의 연구 방 법에 나타나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도 이를 연구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라이트는 스승의 고고학적 입장을 견지함과 아 울러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신학에 접목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러한 그 의 노력은 독일계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고고학적으로 증명 된 성경의 기록만을 진실 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역사에 서의 계시"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성경 고고 - 14 -


학은 미국의 성경신학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난항을 겪게 되 었고 1970년대가 되면서 그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올 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 주장되었던 성경 고고학이라는 용어 대신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 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성격도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입장에서 고대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 연구라는 일반 고고학적 입장으로 변모하였다. 페트리의 발굴 이후에 계속해서 젤린(E. Sellin)의 타아낙(Taanach) 발굴(1902-1904), 마칼리스터(R.A.S. Macalister)의 게제르(Gezer) 발굴(1902-1909) 젤린(E. Sellin)과 바찡어(C. Watzinger)의 여리고(Jericho) 발굴 (1907-1909) 하바드 대학팀의 사마리아 발굴(1908-1910) 시카고 대학팀의 므깃도(Megiddo) 발굴(1925-1939) 펜실베니아 대학팀의 벳샨(Beth Shean) 발굴(1921-33), 페트리의 텔 엘-아줄(Tell el-Ajjul) 발굴(1930-1934) 스타키(J. Starkey)의 라키쉬(Lachish) 발굴(1932-1938) 등이 이 어지면서 발굴 방법론이 점차 발전했다. 2차 대전이후 영국적 발굴방법인 소위 휠러-케년(Wheeler-Keny on)식이 케년(K.M. Kenyon)의 여리고 재 발굴(1952-1958)에서 적용되어 텔의 가장자리에 깊은 홈(trench)을 파서 주로 주거 층들 의 수직적인(연대적인) 상관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규명할 수 있게 됐 으며, 한편으로 라이트(G.E. Wright)가 중심이 된 미국 팀의 세겜 발굴(1956-1964)에서는 텔 전체에 산재한 주요 건축물들의 시대적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수평적 개념의 발굴방법이 강조됐다.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의 게제르 재 발굴 (1964-1973)에서는 앞의 두 방법론을 적절히 조화시켰으며, 특히 삼차원적으로 규정한 특정 위치의 임의의 공간을 “로쿠스(Locus)” - 15 -


로 독립시킴으로써,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을 위상에 따른 체계적 분 류 및 분석이 가능하게 됐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그때까지 축적된 발굴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많은 유적지에서의 대규모 발굴을 수행했다. 야딘(Y.

Yadin)의

하솔(Hazor)

발굴(1955-1958)과

맛사다

(Masada) 발굴(1963-1965)을 통하여 고고학 발굴 역사상 처음으 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한 발굴이 체계화되었다.

6. 성경고고학의 시대구분 일반 고고학계의 시대구분은 전통적으로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도구 의 재질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로 나뉘어 지는데 성경고고학에서도 이 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단지 신석기 시 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일종의 금석 병용시대인 동석기 시대를 별 도로 구분하고 있다. (1) 신석기 시대(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4300). 토기이전 신석기 시대 : 서기전 8500-6000. 토기 신석기 시대 : 서기전 6000-4300. (2)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3) 청동기 시대(Bronze Age: 서기전 3300-1200).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50. 중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2250-1550. 후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1550-1200. (4)철기 시대(Iron Age: 서기전 1200-586). 서기전 586년의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끝나는 철 기 시대 이후의 고고학적 시대구분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점령 통치 했던 주변 강대국들에 따라 각각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16 -


바빌로니아 시대(서기전 586-530), 페르시아 시대(서기전 530-330), 그리스 시대(서기전 330-63), 로마시대(서기전 63-서기 330), 비잔틴 시대(서기 330-630)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성경고고학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고고학의 시대구분의 기준에 따라 철기 시대까지만 범위로 넣고 있으며, 그 이후 시대는 역사학과의 밀접한 교류에 따른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포함하는 독립 적인 고전 고고학(Classical Archaeology)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전 고고학의 중심지는 역시 현재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성경고고학의 전통적인 시대를 서기전 586년으로 한정시키는 경향도 있다. 좀더 세분된 성경고고학의 각 시대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6000). 이 시대의 문명은 나투프 문명(Natufian Culture)이라고도 불리며 소위 팔레스타인에서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여리고)가 건설되었고, 농업혁명으로 인한 정착경제의 발전과 목축업이 시작되 었다. 2)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6000-4300). 이 시대의 문명은 야르묵 문명(Yarmukian Culture)이라고 불리우며 이때부터 비로소 처음으로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토기가 특정지 역의 고유한 민족 집단에 의해 독특하게 제작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대구분 및 인종집단 구분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3)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이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금속 인 구리가 도구제작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석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요단 건너편 지역 사해 북부의 텔레일랏 가슐(Teleilat Ghassul)에 - 17 -


서 이 시대의 거주흔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명을 가슐 문명(Ghassulian Culture)이라고도 부른다. 특별히 엔 게디 남 쪽의 미슈마르(Mishmar) 동굴에서 발견된 436점의 구리제품은 이 시대에 벌써 고도의 구리 제련 술이 발달되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4) 초기 청동기 I 시대(EB I: 서기전 3300-3050) 이 시대는 고대근동 전체에 있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고 이의 여파로 정착경제가 가속화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 이집트와의 문물교류가 이루 어졌음이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이집트 토기를 통하여 밝혀졌다. 5) 초기 청동기 II 시대(EB II: 서기전 3050-2700) 이 때부터 본격적인 도시문명이 근동지방 전체에서 발달되기 시작하 였다. 이집트에서는 소위 제 1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의 영향으로 가나안 지방에서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6) 초기 청동기 III 시대(EB III: 서기전 2700-2250) 이 시기는 도시문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이며, 조직적인 국제무역 의 흔적을 토기나 장신구 등의 물질문명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 때 번창했던 도시들로는, 하솔, 벳 예라크, 벳샨, 므깃도, 아이, 여리 고, 야르뭇트, 텔 엘헤시, 텔 에라니, 텔 할리프 등을 들 수 있다. 7) 중기 청동기 I 시대(MB I: 서기전 2250-2000) 서기전 2250년을 전후하여 가나안의 초기 청동기 도시들이 파괴되 었고 그 이후 250여 년 동안 일종의 쇠퇴기를 맞게 되며 이집트의 제1중간기(제7-11왕조)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 시대는 수직갱 무덤 (Shaft Tomb)이라는 독특한 매장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성 행했던 유목민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8) 중기 청동기 II 시대(MB II: 서기전 2000-1550) - 18 -


이집트의 중 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역사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 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다. 물질문명의 척도인 토기 제작 면에서 도 고속물레(fast wheel)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멀리 이 집트까지 수출되었고 파이안스(faience)와 알라바스터(alabaster) 용기들도 가나안 자체의 기술로 대량생산되었다. 9) 후기 청동기 I 시대(LB I: 서기전 1550-1400) 이집트의 제15왕조인 힉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국가 들이 대부분 파괴되면서 약 100여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집트 신왕국의 제18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집트는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0) 후기 청동기 II 시대(LB II: 서기전 1400-1200) 아마르나(Amarna)시대라 불리는 서기전 14세기의 가나안은 이집트 를 종주국으로 그 지배 하에 근처의 마을들을 통치하는 도시국가들 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굴을 통하여 이집트 식 신전 및 궁전이 므깃 도와 벳샨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이집트가 이 도시들에 총 독부를 두고서 가나안을 직접 다스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1) 철기 I 시대(Iron I: 서기전 1200-1000) 서기전 1200년을 전후해서 고대 근동지방에서 암흑기(Dark Age)라 고 불리는 문명의 위기가 발생하는데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는 등의 기상 이변이 가장 중요한 문명붕괴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지 중해 연안을 휩쓴 해양민족의 이동으로 막강했던 헷 제국이 몰락하 고 시리아와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파괴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의 유입이 발생하고, 가나안 지역에서는 주변의 권력공백 을 틈탄 약소민족들이 각각 아람, 페니키아,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목 이음 항아리(collar rim jar)”의 추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 - 19 -


의 가나안 진입과 주거분포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12) 철기 II 시대(Iron II: 서기전 1000-586). 다윗왕조의 수립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명이 발전되었으며, 비 교적 구약성경의 역사서의 기록과 발굴을 통한 주거분포가 일치하는 등 이 시대는 성경고고학의 중심시대로 간주된다. 북쪽의 단(Dan)에 서부터 남쪽의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와 쿤틸랏트 아즈루 드(Kuntilat Ajrud)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독특한 양식의 요새가 많이 건설되어서, 이스라엘의 실제적 통치영역과 고유의 물질문명의 지리적 분포를 쉽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13) 농업 혁명(agricultural revolution): (서기전 10,000-8,000) 서기전 1만 년경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야생 농작물의 재배와 야생 동물들의 가축화가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된 다. 대규모의 수확이 가능하고 기본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밀과 보리 등의 곡물류의 재배는 연중 강수량이 500밀리미터 이상인 지중해변 과 자그로스 산악 지역에서부터 시작됐다. 서기전 1만년경 이 곳의 거주민들은 오랜 기간의 구석기 시대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야생 으로 자라던 밀과 보리를 계절에 따른 농사를 통하여 대량으로 수확 하면서 농사를 근거로 하는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이러한 생업의 변 화를 농업혁명이라 부르며 이 때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다. 또한 정착 생활에서도 쉽게 짐승들을 얻기 위해서 사냥에서 생포한 야생 동물들을 가축으로 길들여서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근동 지방에 서 역사상 최초로 길들여진 가축들은 다음과 같다. 개: 서기전 11,000년경, 염소: 서기전 8,500년경, 양: 서기전 8,000 년경, 돼지: 서기전 7,500년경, 소: 서기전 7,000년경, 고양이: 서기 전 7,000년경, 당나귀: 서기전 4,000년경, 말: 서기전 2,000년경, 낙 타: 서기전 1,200년경(아라비아 광야) 14) 도시혁명(urban revolution): (서기전 4000년경) - 20 -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의 발달은 농업혁명의 결과 대규모의 관개사 업과, 잉여 농산물의 교환 등을 주도하는 세력이 자연스럽게 건설한 요새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고학적 관점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서 성안에 사람들이 주거지로 사용했던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착지로 규정된다.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근처의 농경지의 실 소유주로서 농사와 목축을 관장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처하며, 농산 물의 교환을 주도하는 통치세력을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최초의 도시는 왕을 중심으로 일종의 도시국가(city state)를 형성하였다. 신석기시대부터 원시적으로 발전했던 종교는 도시 안에 건설된 신전 을 중심으로 제사장이라는 특정 계층을 탄생시켰고, 이제 신들은 해 당도시의 수호신 개념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도시혁명의 결과 교 환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품의 목록과 수량의 기록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로부터 단순한 기호들이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 본격적인 문자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 과 제 ▣ 1. 고고학이란? 2. 성경 고고학이란? 3. 성경고고학의 연구범위를 쓰라 4. 텔이란? 5. 성경고고학의 연구방법론을 쓰라 6. 성경고고학의 시대구분을 쓰라

- 21 -


제2장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 1. 베로소스(Berossos)의 바빌로니아학(Babyloniaca) 서기전 340년경 바벨론에서 태어난 후 에게 해의 코스(Cos) 섬에 정착한 베로소스는 모두 세 권으로 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편찬 하였다. 하지만 베로소스의 원본은 유실되었고 단지 오늘날 남아 있는 부분 은 서기전 1세기 알렉산더 폴리히스토르(Alexander- Polyhistor) 의 저서에 인용된 것과 서기 4세기 초 유세비우스에 의해 재인용된 것뿐이다. 베로소스의

바빌로니아

학은

요세푸스에

의해

인용된

마네토

(Manetho)의 이집트 학(Aegyptiaca)과 비교될 만큼 아마도 천지 창조에서부터 페르시아 시대까지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일목요연 하게 정리했으리라 추정된다. 제 1권은 창조 신화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존재 인 오아네스(Oannes)가 바벨론 강변에 도착하여 여전히 야생 짐승 들의 생활을 하던 인간들의 조상이 되었음을 다루고 있다. 제 2권은 천지 창조 때부터 나보폴라사르(서기전 747-734) 시대까 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대홍수 이전의 왕 명단은 수메르의 왕 명단과 비교될 정도로 신빙성이 있다. 제 3권은 나보폴라사르 시대(서기전 747-734)부터 자신의 시대까 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2. 고대 바빌로니아의 홍수 설화 - 죠지 스미드(George Smith: 1840-1876)와 홍수 설화(1872)죠지 스미드는 원래 지폐 조판공이었지만 독학으로 메소포타미아에 - 22 -


관한 연구를 한 끝에 26세에는 쐐기문자에 관한 해설 책을 펴낼 만 큼 이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28세인 1868년부터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앗시리아부(部)에서 조수로 취직하여 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토판문서들을 정리하며 읽던 중 홍수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영국인

홀므즈

랏삼(Hormuzd

Rassam)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25,000개의 점토판은 영국의 대영 제국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 박 물관에서 독학으로 구약 성경을 공부하던 소년 조지 스미스(George Smith)가 깨어진 수많은 점토판을 맞추고 스스로 깨달은 설형문자를 판독하다가 1872년 그 점토판 중에 하나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 시리아의 홍수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다. 1872년 12월 3일 영국 런던의 성경고고학회 세미나에서 대영 박물 관의 죠지 스미드(George Smith)는 앗시리아판 노아의 홍수에 관한 토판문서의 내용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것은 길가메슈의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라는 12판으로 된 것 중 11번째 판에 기록되었다. 고대 우룩(성경의 에렉 - 창 10:10)의 왕이요 영웅인 길가메슈가 고생을 무릅쓰고 조상 우트나피 쉬팀(Utnapishitim)을 찾아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답할 때 우 트나피쉬팀이 들려 준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 것이다. 우트나피쉬팀은 바로 성경에서 노아가 겪었던 홍수 이야기를 거의 비슷하게 진술하 고 있다.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의 홍수 이야기도 자기들의 스스로 기록이 아 니요 아슈르바니팔 왕이 그들보다 먼저 메소포타미야 하부에 들어와 살던 세계 역사의 최고 민족인 수멜 사람들의 기록을 전래한 것이다. 기원전 1967년 또는 기원전 2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홍 수 기록(니플의 문서)이 발굴되었다.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여러 지방 사람들에 의해 와전되기는 했으나 태고로부터 홍수에 관한 이 야기가 전래되었음이 확증된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인 키슈(Kish)에서 파낸 점토 기록은 거의 - 23 -


기원전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홍수 전에 살았던 통치자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런 후에 홍수가 세상을 휩쓸었다. 홍 수가 휩쓴 후에 왕권이 다시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는데 첫째로 키슈 에 왕권이 임했다"고 적혀있다. 노아의 대홍수가 참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 여러 곳에서 저들의 다신교적인 정치 색채로 와전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대로 조상의 전승을 따라 보전되어 내려와서 오 늘날 우리로 성경의 노아 대홍수를 확신하는데 문자적인 뒷받침을 하게 되었다. 이 길가메쉬 서사시는 창세기의 노아와 필적할 만한 신의 선택자인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 도중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홍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왕조시대로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는 보수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구약성경의 신빙성을 증명할 증거로 여겨 지면서 영국의 국민적인 관심이 들끓었다. 당시

영국의

최대

일간지인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지는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찾는데 1,000기니아 (guinea)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당연히 스밋트는 이 모험을 자처하 고 나섰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한 끝에 티스리스 강변의 모술에 도착하여 고대의 니느웨로 여겨지는 쿠윤직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 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스밋트는 384개의 토판 문서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 중에는 물론 잃어버린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3. 고대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 -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홍수 설화 점토판을 발견한 스미스는 1876년 그가 수집한 아슈르바 - 24 -


니팔 도서관의 점토판으로부터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사와 흡사한 고대 바빌로니아 설화를 찾아내었다. 이 점토판은 기원전 1700여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하무라비 대왕 (1728-1686 BC)이 자기 나라와 자기들의 신인 말둑(Marduk)을 높이기 위하여 그 이전부터 니플, 앗시리아 등 여러 곳에 있던 기록 을 개편하여 쓴 것을 아슈르바니팔 왕이 자기 도서관에 보관하여 둔 것이다. 이 서사시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말로 시작 된다. 그 뜻은 "태초에"(When above)라는 것으로서 7개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어 창조의 7일을 나타낸 듯이 보인다. 성경 외에도 고대 여러 나라들이 저들의 조상들이 전해 준 창조의 이야기를 불완전하 고 왜곡되게 간직하고 있다. 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사실이 객 관성이 있는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에 관한 신화는 아카드어로 기록된 에누마 엘리 쉬로서 지금까지 니느웨(Nineveh), 앗슈르(Ashur), 키쉬(Kish), 술 탄 테페(Sultan Tepe) 등에서 발견됐다. 이들의 기록연대는 서기전 900-200년까지로 다양하며 신화 자체는 7개의 토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1100줄에 달한다. 이 신화의 제목인 ‘에누마 엘리쉬’는 첫 두 단어로서 ‘높이서 --할 때’ ‘When on high’라는 뜻이 며 신들의 태어나는 태초의 시간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 다. ‘저 높은 곳의 하늘이 명명되기 이전에 저 낮은 곳의 땅이 이름 불려지기 이전에’ 제1세대 : 압수(Apsu): 민물 <--> 바닷물: 티아맛(Tiamat) 제2세대 : 라크무(Lakhmu): 진흙 <--> 갯벌: 라카무(Lakhamu) 제3세대 : 안샤르(Anshar): 구름 <--> 안개: 키샤르(Kishar): 제4세대 : 아누(Anu) 제5세대: 누디무드(Nudimmud)=에아(Ea) <--> 담키나(Damkinna) 제 6세대 : 마르둑(Marduk) 제 1-3 세대의 신들은 각각 쌍을 이루면서 자연현상을 대표하는데

- 25 -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늪지대를 연상시킨다. 압수(Apsu) 는 젊은 신들의 소란함 때문에 편안히 쉴 수가 없어서 그들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알아차린 에아(Ea)가 압수를 결박하여 죽 여 버렸다. 이 때부터 압수는 에아의 전통적인 거처가 되었다. 이야 기는 남편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티아맛 진영과 이에 대항하는 에아 의 아들 마르둑과의 전투로 전개된다. 티아맛은 킹구, 후부르와 함께 그녀가 만든 11 괴물들을 동원하였고 마르둑은 활, 곤봉, 번개, 화염, 그물, 폭풍으로 무장했다. 마르둑은 우선 폭풍으로 티아맛을 제압한 다음 활을 쏘아 죽였고 그녀의 시체와 킹구의 피로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다. (1) 하늘과 땅, (2) 하늘의 성좌: 매달 3개의 성단 (constellation): 36 성좌, (3) 달과 태양, (4) 유프라테스와 티그리 스: 티아맛의 눈물, (5) 인간: 킹구의 피 에누마 엘리쉬는 전형적인 바빌로니아의 문학 작품이다. 이것의 집필 의도는 마르둑(Marduk)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며 자연과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기전 1750 년경 함무라 비가 바빌론을 새 왕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수메르 시대부터 미미한 존재였던 마르둑이 출세하기 시작하였고, 서기전 1120년경 느부갓네 살 1세가 신년축제를 통하여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켰다. 에 누마 엘리쉬는 신년축제(아키투 축제) 제 4일에 마르둑 신상 앞에서 낭독되었다. 앗슈르에서 발견된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마르둑 대신에 앗수르가 들어가 있다. 바벨론의 마르둑교(Mardukism)는 도시, 신 전, 신상, 그리고 제의문인 에누마 엘리쉬까지 갖춤으로써 메소포타 미아 역사상 최고로 발전된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 아다파의 전설 - 타락의 역사, 유혹의 장면 니느웨에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 창세기 3장의 아담의 타락과 유사한 아다파의 신화(The Myth of Adapa)가 발견되었다. 모두 4개의 점토판에 씌여 있는데 3판은 니느웨 도서관에서, 4판은 - 26 -


이집트의 아마르나 왕궁 보관소에서 나왔다. 아다파는 신에게서 지혜 를 받아 그 신(Ea)의 성전을 다스리는 자로 임명을 받았으나 실수하 여 나중에는 생명의 물과 빵을 먹는 특권을 거절함으로써 내어 쫓겨 영생을 빼앗기고 질병과 불행을 겪게 된다. 아담의 타락 이야기를 반 영하는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야 지방 사람들 이 쓰던 원주형 도장에 눌려 찍혀진 부각에는 창세기 2장의 유혹의 장면을 보여주는 암시가 있다. 그 그림에는 거룩한 나무를 가운데 두 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데 하와로 보이는 왼편 사람의 뒤에는 뱀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창세기 2장의 사실을 묘사한 바벨론의 고대 전설로 여겨지는데 이를 "하와의 유혹"이라 부르고 있다.

5. 창세기의 안식일과 바벨론의 안식일 창세기 2장 1~3절에는 안식일의 기사가 나온다. 안식일은 큰 복의 날이다. 그런데 로린슨이 판독한 고대 바벨론의 한 점토판에는 아래 와 같이 적혀 있다. "제7일은 마르둑과 자르파니트의 축제일이다. 그 날은 악한 날이다. 위대한 백성의 목자는 연기 나는 숯불 위에 구운 고기를 먹지 말 것 이니라. 그 몸에 겉옷을 갈아입지 말 것이요 깨끗한 것을 입지 말지 니라. 그는 희생 제물을 드리지 말지니라. 병거를 탄 왕은 달리지 말 것이요. 그는 승리를 말하지 말 것이라. 선견자는 거룩한 곳에서 신 탁을 말하지 말라. 의사는 환자 위에 그 손을 얹지 말 것이요, 악담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느니라. 밤에 왕은 마르둑과 이슈타 앞에 그의 제물을 드릴 것이며 관제(灌際)를 부을지니라. 그의 손을 쳐드는 것 은

때에

신들에게

기뻐함이

것이라"

(Rawlinson's

Cuneiform Inscription of Western Asia Ⅵ, 2nd ed., pl. 32, lines 28-38).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창 2:1-3; 출 20:8-11; 신 5:12-15) 성별하신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훼방을 엿볼 수 있는 흥 미 있는 자료가 된다.

- 27 -


6. 레이야드(Austen Henry Layard: 1817-1894)의 니므루드(Nimrud) 발굴 레이야드는 1839년 7월 10일 런던을 출발하여 인도로 가는 도중에 육로로 유럽 대륙과 소아시아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을 여행 하면서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탐사를 이루고자 하였다. 1840년 4월 10일 모술(Mosul)에 도착하여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니느웨라고 알려진 쿠윤직(Kuyunjik)을 탐사하였다. 1842년 7월 10일 콘스탄티노플의 영국 대사관에서 그간의 여행과 탐사의 능력을 인정받아 대사의 비서로 1845년까지 3년 동안 일하면서 모닝 포스 트, 모닝 크로니클, 몰타 타임즈 등의 해외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레이야드는 27살인 1845년 11월 8일부터 니므루드 발굴을 시작하 였다. 레이아드(Henry Layard)는 1845년 메소포타미야 북부지방에 있는 니므롯 언덕(The Mound of Nimrud)을 파헤쳐 창세기 11장 10절 의 도시 갈라를 찾아내었다. 이 도시는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창 10:8)이 건설한 도시이다. 그곳에서 레이아드는 지금의 앗시리아의 유명한 왕이었던 아슈르나 서르팔(Ashurnasirpal; 884-859 BC)의 궁전 및 살만에셀 Ⅲ세 (Shalmaneser Ⅲ)와 에살핫돈(Esarhaddon) 왕의 궁전을 발굴했다. 살만에셀 Ⅲ세는 이스라엘 왕 예후와 접촉했고 에살핫돈은 성경 여 러 곳(왕하 19:36, 37; 대하 32:21; 사 37:37, 38)에 등장하고 있 다. 앗시리아의 잔인한 왕인 아슈르나서르팔이 니므롯(창세기의 갈 라)에 있는 그의 궁전 입구에 세워 두었던 154줄로 된 기념비가 발 굴되었다. 이 비문에는 그의 정복 활동 및 건축 활동이 적혀 있다. 그의 새 궁 전을 헌당할 때 69, 574명의 손님에게 10일간 베푼 큰 잔치의 식단 도 쓰여 있어 다니엘 5장의 벨사살 및 에서더 1장의 아하수에르 왕 - 28 -


의 잔치 기록의 신빙성을 보여주고 있다.

7. 메소포타미아의 셈족의 등장 ‘셈족(Semitic, Semitisch)’이라는 용어는 1871년 독일의 쉘쪄 (Schelzer)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셈족은 시대별로 다음 과 같이 발전하였다. 서기전 4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민족, 서기전 3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서부 셈어족, 서기전 12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아람 민족, 이스라엘 민족, 서기전 200년 이후: 나바테야 민족,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서기 600년 이후: 무슬림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오늘날 셈족의 후예인 모슬렘 아랍 민족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 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비롯한 북부 아프리카 등 광활한 지역에 살고 있다. 서기전 1 만년 경에 발생했던 농업혁명은 북부 메 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지의 야산지대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자연 히 이 주인공들이 셈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농업혁명 이후 그 장본인들이 계속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주인공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셈족은 시리아 광야를 고향으로 하는 아모리 족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시리아 광야, 또는 북부 아라비아 광 야를 셈족의 지리적 고향으로 보고 있다. 1) 도시국가(City State) 시대 (서기전 4000-3000)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들은 남쪽의 수메르 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기전 4000 년경부터 이 곳에서는 우룩(Uruk), 라가쉬(Lagash),

- 29 -


우르(Ur), 니푸르(Nippur), 슈루팍(Shuruppak), 키쉬(Kish) 등의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2) 왕국(Kingdom)시대 (서기전 3000-2000)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가장 강력한 도시를 중심 으로 동맹을 맺어 일종의 왕국을 형성했으며, 대표적으로 남쪽의 수 메르 왕국과 북쪽의 아카드 왕국으로 분류된다. 3) 제국(Empire)시대 (서기전 2000-330) 서기전 2000 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은 좀 더 북쪽으로 확 장되었고, 서기전 1800 년경부터는 하무라비왕이 바빌론 도시를 중 심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고, 북쪽의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는 샴시-아다드(Shamshi-adad)왕이 앗수르 도시를 중심으로 앗시 리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두 세력이 함께 경쟁하며 발전하다가 서 기전 1100 년경부터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 치하기에 이르렀으며, 서기전 612년에는 신 바빌로니아(Neo-Baby lonia)가 그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서기전 539년부터는 이란지역의 페르시아가 이 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서기전 330년경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함으로써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8. 족장 시대의 성경 배경 (1) 아브라함과 우르 아브라함은 70여년을 살아온 본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길 에 아버지 데라의 만년을 위해 하란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부친을 장 사지내고 75세 되던 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믿음으로 떠났다 (창 11:31, 32, 12:1-5; 히 11:8). 그 때가 기원전 1875년 경으로 구속의 역사의 새 기원이 되어 이 때부터 215년 후인 기원전 1660년에는 야곱이 애굽에 들어갔고 그 - 30 -


후 215년 후인 기원전 1445년에는 출애굽이 있었다(갈 3:7; 출 12:40). 부조시대를 215년으로 계산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때가 75세이고(창 12:4) 그가 이삭을 낳은 때가 100세였으며 (창 21:5) 이삭이 60세 되던 해에 야곱을 낳았고(창 25:26) 야곱이 애굽에 들어가 바로 앞에 선 때가 130세였다(창 47:9). 여기에서 산 출된 햇수, 즉 25 + 60 + 130을 합하면 215년이 된다. 아브라함의 살던 도시 우르가 1853년 영국인 테일러(J. Taylor)에 의하여 '텔 엘-무카이야'(Tell el-Muqayyar)를 발굴함으로서 드러 났다. 후에 대영 제국 박물관과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 합동 발굴대가 울리 박사(C. L. Woolley)의 지휘 아래 1922-1934년 사이에 본격 적으로 발굴하여 아브라함 시대를 밝게 보여 주었다. (2) 우르의 생활 모습 우르를 발굴한 결과 아브라함 시대에 해당되는 기원전 1,900년 경의 거주지에서는 해에 말린 고운 진흙 벽돌로 지은 이층집의 폐허가 드 러났다. 도기로 깐 안 뜰, 물통과 대야가 놓인 로비, 붉은 도기 배수 관을 가진 화장실, 화로와 맷돌이 놓인 부엌,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식 층계, 10여개의 방을 가진 이층, 이 모든 것이 현대식 문화 주택 처럼 편리한 구조였다. 이러한 편리한 도시와 안락한 집에서 살던 아브라함이 "너는 너의 본 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 는 큰 믿음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울리 박사가 지휘한 1924 년의 발굴에서 지구랏(Ziggurat)이라 부르는 벽돌로 쌓은 고탑신전 (高塔神殿)을 찾아냈다. 이것은 월신(月神)을 비롯한 우상을 섬기던 장소로 메소포타미아와 여러 나라의 도시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 굴되고 있다. 이것은 노아 홍수 직후에 시날 평지에 쌓았던 바벨탑에 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창 11:1-9). (3) 아브라함의 애굽 피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 온

- 31 -


후에 그 땅에 큰 기근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창 12:10). 이러한 사실을 밝혀 주는 역사적인 증거가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인 기원전 1,900년경 이집트 동부 사막 지방의 고급 관리였던 크놈헤텝 (Khnumhetep)의 베니 하산에 있는 무덤 벽화에서 드러났다. 그 무 덤 벽화는 영롱한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37명의 셈족 계통의 아 시아 사람들이 이브샤라고 부르는 지도자를 따라 팔레스틴 쪽에서 이집트로 들어오고 있다. 크놈헤텝은 자기 생전에 겪은 인상 깊은 사 실을 자신의 무덤 벽화로 남긴 것이다. 큰 강이 없는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들면 아시아 사람들은 나일강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집트의 동부 쪽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음이 여러 기록에서도 밝혀졌다. 이 벽화가 그려진 같은 시대에 산 아브라 함도 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 내려와 기근을 피했다. 거기에서 이집 트 대신들과 접촉했고 바로 왕도 알현했다(창 12:10-18). 후에 족 장 야곱도 아브라함처럼 기근을 피하여 일가를 이끌고 이집트에 들 어왔다는 사실은 당대의 역사와 자연스럽게 조화된다(창 43장). (4) 함무라비 법전이 밝힌 아브라함의 가족 문제 1901년 12월과 1902년 1월 사이에 모르강(Jaques de morgan)이 지휘하는 프랑스 발굴단은 페르샤의 옛 수도 수사에서 8피트 높이에 검은 색 섬록암 입석으로 된 함무라비 법전을 발굴했다. 그것에는 39단, 3,624행으로 된 282조의 고대 법문이 새겨져 있었다. 바벨론의 아모리 왕이었던 함무라비(1728-1686 BC)의 법전은 바 로 아브라함 시대를 전후해서 모세의 법보다 200년 이상 앞선 것이 다. 이 법전이 발굴됨으로써 아브라함 등 족장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후에 쓰인 모세의 율법(민법)의 역사적, 사회적, 법적 타당성이 상대 적으로 입증되었다. 함무라비법 145조에 보면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 면 남편은 그와 이혼하든지 낮은 신분의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으 며, 아내 스스로가 자기 여종 중에 하나를 택하여 남편에게 첩으로 주라는 규정이 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그의 여종 하갈을 남편

- 32 -


에게

첩으로

것은

후자를

택한

당시의

사례인

것이다(창

16:1-3). 후에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준 것도 같은 사례이다(창 30:3). 함무라비법 제 170조에 보면 "만약 어떤 사람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그의 여종도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가 자기 생전에 종의 아들들을 '나 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본 부인에게서 난 아들처럼 간주하 면 그가 죽은 뒤 본 부인의 아들들과 여종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 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규정이 있다. 이러한 규정이 있었으나 사라는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 기업을 주지 말자고 하였다. 아브라함 은 이 부당한 요구와 불법적인 처사 때문에 주저하고 깊이 근심하였 다(창 21:10, 11). 메소포타미야 여러 곳에서 기원전 2천년 안팎의 연대가 씌여진 점토 계약 문서에서 아바라마(Abarama) 아바암라암(Abaamraam) 등으 로 불리우는 당대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났다. 아브람(창 12:1), 후 에 개명된 이름인 아브라함(창 17:4, 5)은 모두가 당대의 구음에 어 울리는 실제적인 인명 이였음이 입증되었다. (5) 구술(口述) 축복 이삭의 만년에 야곱이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받기 위하여 아 버지를 속였다(창 27:24-30). 속은 사실을 나중에 깨달은 이삭이 왜 에서에게도 야곱처럼 축복을 되풀이 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는 것 이다. 그런데 누지의 점토판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구술 축복은 절대 유효해서 법정에서도 효력을 가진다고 했다. 누지의 사례에서 탈미야 (Tarrmiya)라는 청년이 주루리쉬타란 처녀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 의 형들이 반대했다. 탈미야는 아버지가 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고 구술로 약속한 사실을 법정에 호소하여 합법적인 허락을 얻었다. (6) 장자권 매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버린 이야기가 있다(창

- 33 -


25:27-34). 누지의 법규 가운데 장자권은 합법적으로 타인에게 양 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출토된 점토 문서의 한 예에서 장자 권을 친 형제가 아니라 양자로 된 형제에게 양도한 예가 나온다. 또 다른 예에서 친 형이 양 세 마리를 받고서 동생에게 장자권을 넘겨 준 것이 나온다. 야곱은 에서가 극도로 배고픈 때를 이용하여 싼 값 에 장자권을 샀다. 그 당시의 사회법으로는 합당한 것이었다. (7) 양자 상속법과 야곱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도망하여 떠날 때 라반이 뒤쫓아 왔다 (창 31:20-23). 그는 야곱을 만나 외손자(야곱의 아들들)들을 가리 키면서 그들은 자기의 자식이라고 주장했다(창 31:43). "이 자식들 은 내 자식들이"라는 주장은 무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1925년 누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서 그 근거가 나타났다. 이 기록들 은 그 시대(2000~1500 BC)를 포함하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어 떤 사람이 누구를 양자로 하면 그는 양자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낳은 손자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했다. 누지 법에는 데릴사 위가 낳은 자식들은 그 외할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외할아버 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어야 했다(창 31:28, 43). 라반의 주장은 그 당시 법으로는 정당한 것이었다. (8) 드라빔과 라헬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도망하여 나올 때 부인 라헬이 아버지의 가신 상(家神像)을 훔친 사건이 있다(창 31:31-36). 드라빔은 당시의 가 속신(家屬神)으로 조상과 신의 개념이 섞여진 조상신이었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드라빔을 지니는 것은 그 집의 상속권 을 가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라헬이 아버지 집의 가신상인 드라빔 을 들고 나온 것은 불법이었으므로 이를 숨기려고 거짓말을 했다(창 31:30-32)

9. 에블라 발굴과 성경의 진실

- 34 -


(1) 텔 마르딕 현재까지 메소포타미아를 고대 히브리인의 문화적 발상지로 간주 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잊혀진 시리아 제국의 잿더미에서 발굴된,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셈 어(語) 점토판들이 그보다 천년 전에 있었던 고대 세계를 하나하나 벗겨 주고 있다. 필시 에 블라 족이 히브리인의 조상이라면, 당연히 에블라 문화는 히브리 인의 모(母) 문화가 된다. 이것은 성경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칠 것 이며,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끼칠 영향도 엄청날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1964년 로마 대학에서 근동 지역 고고학 교수로 있던 파울로 마티 에가 일단의 고고학 팀과 함께 시리아에 도착하여 고고학적 전망 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역, 곧 시리아의 북서 지역의 언덕(텔)을 탐 사하고 있었다. 이 텔은 폐허가 된 고대의 마을을 의미한다. 동료 들은 그에게 이 북서 지역의 '초승달의 옥토'에 관심을 쏟도록 자 극하였다. 반면 당시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지역 은 흔히 고대의 궁벽했던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24세였던 마티에는 오늘날의 알레포시 남 방 30마일 지점에 위치한 가장 큰 텔을 파기 시작했다. 현지인들 은 이곳을 텔 마르딕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시리아의 평지보다 50 피트 정도로 위로 돌출되어 있는, 그 넓이가 140에이커나 되는 거 대한 텔이었다. 이곳은 일찌기 4000년전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에 이르는, 아니 그 이상의 지역을 지배했던 전설적 대 제국 에블라 의 수도였다. 이 젊은 이탈리아 고고학자는 이곳을 파내면서도 이 곳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에블라 시의 한 왕이 세운 비문을 발견하였다. 텔 마르딕은 고대 에블라임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 았던 에블라가 고대 역사가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났다. 가장 초기

- 35 -


의 메소포타미야 제국을 이룬 아카드인들은 쐐기 문자 점토판의 입을 빌어 그들이 에블라라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 대의 수많은 타 지역들이 우연한 주목을 받고 있는 동안 에블라는 큰 마을 이상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텔 마르딕을 10년에 걸쳐 팠을 때, 마티에와 그의 팀은 도자기와 도구, 그리고 보석 장신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발굴하였다. 1974년,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42개의 쐐 기 문자 점토판을 캐내었다. 같은 해 그들은 두 개의 방을 발굴했 는데, 그 속에는 놀랍게도 16,000개의 점토판이 쌓여 있었다. 이곳 은 왕실 문서 보관소였다. 마티에 교수는 로마 대학의 언어학자인 그의 동료 기오 나토를 불렀다. 그는 점토판에

한다는 것은 불가

식 꽤 읽 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 언어에 대한 지

티나토는 곧 수메르어를

왜냐

에블라는 수메르의 성은 아니었다.

읽 난후 고

어 나

능할

발전되어

다.

프 테 약 퍼센 른

하면 수메르는 유

남단 500마일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 달하는 점토판을

해하게 그려진 쐐기 문자들을 판

하기 시작하였다. 1세기 이전 것을 해

있었기 때문에,

바 페

티나토는

20

수메르어와는 전혀 다

스 트

쐐기 문

자를 발견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 북서 지역의 셈어를 '고대 가나안어'라고 언어의 전달

썼 의

음이

바탕

틀림

매체

없다.

이 되었

명명

했다. 에블라의 서기들은 그들의

를 들면 알파

듯 말 이

이 영어는

자료를 근거로 이 언어를 기

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구

앞 잡 서

을 빌어

물론

불어와

일어

이다.

이탈리아 팀은 그들이 발견한 고고학적 지

형식

로서 수메르에서 발달된 쐐기 문자

~

과 점토판에서

전 2400 2250년대의 것으로

성경의

초 기록을 1000년 정도

았다. 더우기 그것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한 지역에서

- 36 -


출토되었다. 그

다면 에블라에서 발견된 이름과 지

초로 기록된 구

몇책

성경의

과 제도는

들과 중요한 관계가 있을 것이

다.

페 분 말 분류

마티에와

지 부

티나토는 시리아의 북부 지역 일대와 텔 마르딕의 나

을 탐사하고, 모

것이라고

자료들을

석하려면 200년은 걸

한다. 지금도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왕실 기록

역하여

하고 있다.

가장 많았다. 에블라에서 출토된 점토판들은

명 곡물 특산물

세서, 세금 의 수출

부,

축 섬 류 업

과 가

인 금속과

들을

정에 관한 것이 배급과 재고

문서들이었으며, 어

이러한 것들은 에블라의 상

행 식량 떤 무 명 준

상은 했지만 경제와

에 대한 국제

것은 에블라

과 정치 영역을 보여

세서였다.

다. 그 영역

은 놀랍게도 시나이와 남서부의 이집트 국경으로부터 동부 메소포 타미아와 북부의 티그리스강 상

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광범

학자들은 역사의 초기에 이와 같이 에 대하여 상상조

하지 못했었다.

만 나

말 뉘

물론

이 많은 사

어 있었다.

는 '

물 엘

의 사

들을 수도 없이 제

에 대하여 부

른말 엘 뜻

이스라(과 겨룬 자)' ' 가 하나

과 같은가'를

'과 '미카

-엘

았을 터이지

도시와 아

도시로

들이 거주하였다.

공 준 해

물론

는 실제적인

그 이름은 어

이었으나, '

이기도 했다.

(하나

법 또

다. 그들의 신 가운데는 '일',

'이라고 불리는 신이 있었다.

이라고 기록되어

도시에는 정부 관리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아

일 수 있는 그들의 일반적인

하나

게 두 지역,

으로 이 에블라 점토판들은 성경과의 있을

연관

들이 제국 전역에

이다. 에블라 시는

도시에는 그

람 크

어진 것

명 흩 져살 즉윗 랫

한 점토판에서는 당시 에블라의 인구가 260,000 있다.

위한 교역이 이

)'을

한다. 이와

뜻 똑

신에게도

'은 히브리인들이

를 들면, '이스라

한다. 한

'미카

같은 이름들,

'이 에블라 점토판에 나와 있다.

- 37 -

'은 '

누 - -

'은 '

'이스 라


말 훼 Yahweh 원 말 복군 렘 통 할 Ya 갑 등 엘 엘 - -웨 -웨 분명 표 말 엘외

성경에서 하나

틀림

이다.

없이 이

님 말

을 위한 가장 엄위한 의 어

나와 있다. 에블라의 정 신의 이름으로서

자기

주 에브

'와 '미가

외 담

한 이 점토판에는 성경

윗 외앞 물론 명 Ebrum , 이

이 나와 있다. 다. 동

, 아브라함, 이스마

이들이 성경의 인

살펴 읽힌

) 왕의 이름을

다면, 이 이름은

하게

에서 알려

'(

(

스, 시

(

(

)과

같은

다면 이

은 '

성경의 지

를 들면, 에블라 점토판에는 소

은 성경

의 다

과 고모라가 불과 유

고, 하

)이

역이 된다.

또 살렘 멜 돈 악 솔 ,

아니

-루-움 Eb-ru-um

)으로

(

기세

, 가사, 돌, 시내, 아스다

- 38 -

들이

과 고모라가

되자,

은 소알

데 소알 역시 점토판

므깃

도, 비블로

, 그리고

도 나

의 성), 라기스,

와 있다.

것에서는 처음으로 나

으로 파

세기 19장)이라는 도시로 피하였다. 그

에 나와 있다.

세기 10장과 11장에 나오는 히브리인의 조상

기록되어 있다. 이 지

이라는 이름

보자. 에블라어로는 그의 이름은

의 비평학자들이 신화적이라고 주장해

것이다. 소

엘 물 결코

물 벨 Ebel 똑 - -움 Eb-ri-um 읽혔 말 헤 번

)로

나와 있는 점이다.

, 에서, 사울, 그

과 동일 인

다. 만일 에브

이름이다. 만일 에브 리

류 Heb-rew

과 미가

이요 아브라함의 6대조가 되는 성경의 인

(

'로

은 고대 이스라

서 언급했지만 이스라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로

온 창

과 미가

에는 전혀 발견치 못했던 에블라 시

이인이다.

에브럼(

대부

)'가

가 없었다고 간주되어 왔었다.

리고 다

때 '야(

장한다. 그리고 이스라

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

)'

이 에블라 점토판에

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야'라는

(

에 해당되는

같은 이름이 그 때부터 '이스 라

은 '야

욥바


루 틀림 '우

사리마'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

예루살렘 할 잘

'과 같은 이름임에

없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발굴

알려지게 된

우르는 그 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이 때 소 수의 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고향이 북부의 어

다. 고대에는 우르라는 도시가

이었음이

면 에블라의 한 점토판에 의하면 '초생달

즉 란 갈 하

확 형

지역이라고 했었

실한 것 같다.

왜냐

의 옥토'인 북부 지역,

에 우르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으

때 에블라 근처에 있는 하

란 머물 에

렀었다. 이

렇 볼 게

아브라함의 고향은 아마도 남부의 우르가 아니라 북동부의 우르일 것이다.

한 가지 구

성경과 유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왕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에블라의 과

땅 태양 창 켰 증 분 과

과 달이

서대로 일으

차례 른

조되었다. 다

다는

연대학

좀 분명 물론 돔 예루살렘 얼 결론 더

프 원

그것은 기

슷 순 홍 특 공 줄 잡 노엘 볼 한

이 대

협회 회 린 " 건 추산 결코 또 "

브라이트

는 2,000년으로

을 내

수를

없이 제

다.

1. 길가메슈의 서사시에 대하여 쓰라 2.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설화에 대하여 쓰라

- 39 -

이상과 같이

할 특

인정

한 부조들,

▣ 과 제 ▣

4. 텔 마르딕에 대하여 쓰라.

에 대하여 학자들이 기

정되어야 한다

3. 셈족의 시대별 발전 상황을 쓰라

장인 데이비드

한 것을

전 3,000년에 속한 것이다.

함은 같은 연대로

틀림

과 고모라는 연대를 더 이전으로

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

전 1,000년

세기와 비

의 신

한 자료들을

리드만 교수는 이와 같이

우리는

하자면

언이 있다. 에블라의 발굴은 성경학자들에게

야에 대한

것이다.

조 기사를 보면 하늘

즉말 창 폭풍 엔린

점토판에는

것이다. 부조들은

대로,

수 없다.

히 아브라


제3장 출애굽기와 이집트 1. 이집트학(Egyptology)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인두스(Indus), 황하와 함께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손꼽힌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집 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0년경에 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고등문명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왜 냐면 인두스는 서기전 2600년부터 1000년 정도 지속되다가 인도 본토로 그 중심 무대가 옮겨졌고, 황하 문명은 이보다 훨씬 더 늦은 서기전 160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자를 사용하는 고등문명의 차원에 도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사방으로 개방되어 시대에 따라 주인공들이 여러 번 바뀐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트는 광야에 둘려 쌓여 외부와는 고립되었고 오직 나일강이라는 단일 교통로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그 들은 고대 이집트 3000년 역사를 통하여 단일 민족과 문화의 동질 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양문명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그리 스 문명의 뿌리가 다름 아닌 고대 이집트라는 사실이 하나 둘씩 밝 혀지면서 이집트 문명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1) 이집트 학의 기원과 발달 이집트 학이란 고대 이집트의 언어, 문학, 지리, 역사, 고고학 등을 다루는 총체적인 ‘지역연구’이며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과 탐사 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798년 5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은 지중해를 통하여 인도에 이르는 영국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대규모의 함대와 3만 5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집트 정복 에 나섰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의 유적들을 탐사하기 위한 학자들이 175명이나 포함되었고 그들은 자연과학자, 지리학자, 지도제작자, 건

- 40 -


축가, 동양학자, 화가, 그리고 역사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1799년에 지중해변의 엘-라쉬드(로제타)에서 높이 가 1.1미터에 달하는 현무암의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를 발견 했다. 서기전 196년 3월 27일 기록된 것으로 밝혀진 이 석비에는 프톨레 마이오스(Ptolemaios) 4세의 대관식에 세워진 일종의 기념비로서 그의 공적이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 상형문자의 흘림체인 민 용 문자(demotic), 그리고 그리스어(greek)등 세 부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석비는 프랑스 군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1801년에는 영국의 전리품이 되었지만 이 석비의 탁본을 참고로 프랑스 학자들 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 던 탐사단은 프랑스에 돌아와서 약 20년(1809-1828)에 걸쳐 그 결과를 이집트 묘사(Descrption de l'Egypte)라는 제목으로 모두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집으로 편찬하였다. 1822년 프랑스의 샹폴 리옹(Jean Fran ois Champollion)이 로제타 석비에 나타난 이집트 상형문자 부분의 카르투쉬 안의 왕의 이름인 프톨레마이오스와 다른 비문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들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중복되

는 알파벳의 음가를 하나씩 발견해내면서 비로소 서기 395년 이후 잊혀졌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1400여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 이집트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이름들: 케멧트, 미쯔라임, 이집트, 콥 트의 어원 : 1) 케멧트(Km.t)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케멧트(Km.t), 즉 “검은 땅”이 라고만 불렀다. 검은 땅이란 다름 아닌 나일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충적토를 말하며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검은 색은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검은 땅 케멧트는 “붉은 땅”을 의미하는 데쉬렛트(Dšr.t)와는 대조를 이루는데 데쉬렛트는 - 41 -


이집트의 광야가 주로 누런색과 갈색을 띤 풍화된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 미쯔라임(‫ים‬‫צ‬) 오늘날 아랍어로 이집트를 “미쎄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같은 셈어 계열에 속하는 성경 히브리어의 미쩨르(‫ר‬)와 연관이 있다. 히브리어로 미쯔라임은 “두 개의 미쩨르”, 즉 “두개의 이집트”를 의미하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북쪽의 하 이집트와 남쪽의 상 이집트 를 한꺼번에 지칭하기 때문이다. 3) 이집트(Egypt) 고왕국 시대(서기전 2575-2134)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수도인 멤피 스를 그 곳의 신전 이름을 따라 “훗트-카-프타(Hut-ka-Ptah)”, 즉 “프타의 영혼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신왕국 시대에는 멤피스를 “히-카-프타(Hi-ka-Ptah)”로 불렀고, 서기전 14세기 아멘호텝 3세와 4세의 외교 문서인 아마르나 편지에서는 멤피스가 아카드어 (Akkadian)로 “히-쿠-우프-타(Hi-ku-up-ta)”로 기록되고 있 다. 서기전 8세기경 이집트가 그리스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 작하면서 그리스어로 “에-기-프토스(Αι-γυ-πτος)”로 발 음되었고, 라틴어로 에깁투스(Aegyptus), 즉, 이집트(Egypt)로 발전 되었다. 훗트-카-프타 --> 히-카-프타 -->히-쿠-우프-타-->에-기프토스-->에깁투스-->이집트 4) 콥트(Copt) 오늘날 콥트(Copt)는 이집트의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기독교인들과 이집트 기독교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명칭은 이집트의 라틴 어식 이름인 에깁투스의 아랍어식 발음에서 비롯되었다. 서기 640년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이슬람 세력의 무슬림들은 이집트 를 점령하여 카이로를 건설했고, 그들은 이집트를 “다르-알-깁트 - 42 -


(Dar al-Gibt)”, 즉 “이집트인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점령 당 시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의 한 식민지로서 국교가 기독교였던 만큼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깁트(Gibt)”로 부르게 되었으며 나아가 “콥트(Copt)”로 발전되었다.

후-카-프타-->에깁투스-->다르

-알-깁트-->깁트-->콥트 5) 나일강 이집트는 북부 아프리카의 거대한 광야에 자리 잡고 있어서 원래는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지역이었는데 중부 아프리카 고원지대에서 북 쪽의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 강 때문에 그 강변을 따라 사람들이 살 기 시작했다. 나일강은 고대 이집트어로는 이아테루(I3tr.w)라고 불 렸는데 그리스 시대에 들어와 네일로스(Νειλος)로 불리며 오늘 날 나일강의 어원이 되었다. 나일강은 전체 길이가 67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나일강의 전체 중 오직 1/5만이 이집트 지역을 통과한다. 나일강의 배수유역은 300만 평방킬로미터 에 달한다. 나일강의 원류는 열대 우림 지역으로서 비가 많이 오지만 이집트는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광야 지역이다. 오늘날에는 아스완 댐 의 영향으로 홍수기인 7-8월을 제하고는 연중 일정한 양의 물이 흐 르지만 그 이전에는 갈수기에는 초당 방류량이 120입방미터, 그리고 홍수기인 7-8월에는 약 75배인 초당 9,000입방미터에 달하는 등 연중 수량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졌다. 또한 범람 지역과 나일강 하류 의 삼각주의 토양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 결과 연평균 1밀리미터의 충적토가 쌓인 것으로 드러났다. 나일강의 물은 7월 초부터 서서히 불어나서 8월 중순 최고 수위에 달했다가 그 후 줄어들기 시작하여 11월 말부터 갈수기에 이르면 1-2월에는 최저 수위에 도달하게 된 다. 나일강은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지이자, 해마다 7-10월의 범람 으로 새로운 흙을 실어다 주고, 나아가 유일한 교통로로서 이집트 전 역을 통일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일강은 지중해로 흘러 내려오면서 해변에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여 넓은 농경지에서 일찍부터 농경 및 목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대부분이 광야 - 43 -


이지만 나일강 변과 특히 강 하구의 삼각주 지역에는 해마다 여름철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토로 기름진 경작지를 형성한다. 6) 상 이집트(Upper Egypt)와 하 이집트(Lower Egypt)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강 유역을 따라 전체 국토를 양분했는데, 상 이집트가 나일강 상류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 이집트는 지중 해 쪽의 삼각주 지방을 일컫는다. 이 두 지역의 경계는 현재 카이로 남쪽 20 킬로미터 지점의 멤피스(Memphis)이며, 두 지역을 효과적 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집트 고왕국 시대부터 멤피스는 정치적, 종교 적 수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두 개의 이집트 개념은 고대 히브리어 에서 이집트를 미쯔라임(‫)מצרים‬, 즉 두 개의 미쩨르(‫ = מצר‬이집트)로 표기한데서도 그 유래를 잘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상 이집트는 22개 그리고 하 이집트는 20개의 주(nome)로 구분되어 있으며 멤 피스는 하 이집트의 첫번째 주에 속하였다. 서기전 3000년경 상 이 집트 세력이 하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통일 이집트 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 후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상징물을 이용하여 그들의 왕권을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지 금까지 부조와 조각들을 통해서 밝혀진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상 징들은 다음과 같다.

상징동물

상징식물

상 이집트

독수리

연꽃

하 이집트

코브라

파피루스

왕명상징

상징왕관

등심초(sedge) 흰 왕관 꿀벌

수호신 셋트(Seth)

붉은왕관 호루스(Horus)

7) 하 이집트(Lower Egypt) = 나일 삼각주 이집트의 농경지는 삼각주와 나일강 변을 따라 양쪽으로 띠 모양으 로 형성되었으며 이 면적은 전체 100만 평방 킬로미터 중에서 3퍼 센트의 땅인데 오늘날 이 곳에 전체 인구의 96퍼센트가 나일강 변에 거주하고 있다. 삼각주는 전체 면적이 22,000평방 킬로미터이며 이 - 44 -


지역은 흙과 물과 태양이 일년 내내 충분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농작물도 경작이 가능한 낙원 같은 곳이다. 삼각주 지방의 중요한 고 대 도시들의 유적은 해마다 나일강의 끊임없는 범람으로 인한 퇴적 층의 증가와 농경지 개발로 대부분 파괴되거나 땅속에 묻혀버렸다. 상 이집트와는 달리 이 곳에는 석재가 귀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흙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잘 보존되지 못한 점도 있다. 오늘날까지 약 20여 군데의 유적지에서 이집트 왕조 시대와 그리스-로마 시대에 건설된 도시들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2) 이집트 역사의 시대 구분 1) 초기 왕조 시대 (Early Dynastic Period): 제 1-3 왕조 (서 기전 2920-2575) 2)

고왕국

시대

(Old

Kingdom):

4-6

왕조

(서기전

2575-2134) 3) 제 1 중간기 (First Intermediate Period): 제 9-11 왕조 (서기전 2134-2040) 4) 중왕국 시대 (Middle Kingdom): 제 11-13 왕조 (서기전 2040-1650) 5) 제 2 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 제 14-17 왕 조 (서기전 1650-1540) 6) 신왕국 시대 (New Kingdom): 제 18-20 왕조 (서기전 1540-1070) 7) 제 3 중간기 (Third Intermediate Period): 제 21-24 왕조 (서기전 1070-712) 8) 후시대 (Later Period): 제 25-30 왕조 (서기전 712-332) 9) 그리스-로마 시대 (서기전 332-서기 395)

2. 힉소스 민족과 히브리 족장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집트가 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피난처로 - 45 -


제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었을 때 일년 내내 물이 풍성한 이집트로 내려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신약시대 예수의 가족은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노예로 팔려 갔다가 총리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요셉이야말로 성경의 이집트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 이후 이 집트를 여행했던 유럽 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요셉의 곡식창 고’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저지대인 파윰 오아시스의 호수로 흐르는 하천을 아랍어로 ‘바흐르 유셉’, 즉 ‘요셉 하천’이라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했다 기 보다는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 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 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했다. 이 도시의 아피온 (Apion)이라 불리는 한 이집트인은 ‘유대인들에 대항함’이라는 글 을 통하여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 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 를 모셔다 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 항하여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고 그는 이 글에서 서기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 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편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라는 인물 은 서기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그리스 시대까지 자 기 나라의 역사를 모두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 가였다. 비록 그의 역사책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요세푸스에 의해 부 분적으로 인용되었지만 ‘힉소스’라 불리는 이방민족이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 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 힉소스 민족은 북쪽에서부터 쳐들 - 46 -


어와서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 민족을 학살했 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가 아 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나중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날 때는 그 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갔으며 유다 지방에 강력한 요새인 예루 살렘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1824년 영국의 윌킨슨(G.Wilkinson)은 이집트 중부 지방의 한 유적 지인 베니하산에 들러 절벽의 중턱에 만들어진 바위굴 무덤들을 조 사했다. 모두 39개나 되는 이 무덤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왕국 시대인 제 11왕조와 12왕조 시대의 이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었다. 이 중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영주의 무덤 벽에는 농사짓는 모 습과 사냥을 하는 장면, 다양한 동작으로 두 사람이 레슬링을 하는 모습 등 당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이 매우 생동감 있게 잘 표현되 어 있었다. 그는 벽화 중에서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 한 턱수염과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 을 주목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 그 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림의 위쪽 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윌킨슨은 바로 이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비롯한 창 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무덤은 서기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어서 어느 정도 연대 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 의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히브리 족장들 중의 하나인 야곱은 스캐럽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도 장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최고신은 태양신 라(Ra)였다. 이른 아침에 짐승의 똥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서 굴리고 가는 말똥구리를 그들은 태양신의 운반자로 여겨서 풍뎅이 형상을 부적으로 만들었으며 도장으로 새겨서 반지에 끼고 다녔다. - 47 -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되어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로 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분명하게 상형문자로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의 것과 거의 같은 모습 을 보여준다. 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 야곱은 서기전 1750년경의 인물로 밝혀졌다. 또한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제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 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나타난다. 그는 힉소스 왕조의 제 2대 왕으 로서 서기전 1600년경 통치했었다. 우리는 이 조그만 도장들을 통하 여 야곱은 당시 가나안의 왕족들에게 주어진 흔한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1900년경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서른일곱 명의 힉소스들, 서기전 1750년경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한 도시의 왕 야곱, 그리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서기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가 창세기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비록 창세기에는 요셉이 총 리대신으로 등장하지만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 장들은 파라오로서 약 1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식민지로 통치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 가 될 필요가 있다. (1) 애굽에 팔려간 요셉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때보다 40년 전 쯤에 기록된 애굽의 파피루스 문서가 최근에 알려졌다. 이 조각난 기록은 감옥 문서인데 그 당시 감옥 제도가 쓰여 있고 뒷면에는 어떤 애굽 집에 속한 75명의 종들 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 45명은 아시아 사람으로 애굽에 팔 려 온 종들이다. 요셉도 그 후에 이들처럼 팔려 온 것이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 온 요셉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을 - 48 -


까? 이를 뒷받침해 주는 뚜렷한 역사가 있었다. 번영하던 애굽의 중왕국(12, 13왕조)이 갑자기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통치자들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힉소스(Hyksos; 목자 왕들, 이국의 통치자)라는 셈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시아 팔 레스틴 쪽에서 말과 병거를 몰고 쳐들어 왔다. 그 때가 기원전 18세 기 중엽으로 그 때부터 약 150년간(약 1720-1570 BC) 애굽의 두 왕조(15, 16 왕조)는 이민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들은 수도를 동 부 아바리스에 정하고 애굽과 서부 아시아를 다스렸다. 이 때에 요셉 은 애굽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창 39:4)가 되었다. 그러나 무 고(誣告)를 입어 투옥되었다(창 39:20).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원 전 13세기쯤의 애굽의 세티 Ⅱ세(Seti Ⅱ) 때 기록된 파피루스(d' Orbiney)에 두 형제 아누비스아와 바티스 (Anubis and Bitis)이야 기에서 다른 형태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창

40:1-23)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직분은 애굽어를 히브리어로 풀어 서 쓴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궁중 관리의 직분이었음 이 애굽의 고대 문서에서 확증되었다. 감옥의 총무가 된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였다. 꿈 이야기에서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 리에 있고…위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각종 구운 식물이 있"(창 40:16, 17)다. 이 설명은 고대의 애굽 무덤의 모형 목각에 뚜렸이 나와 있어 성경의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요셉은 2년의 옥중 생활 끝에 총리직과 아울러 "곡식 창고장"까지 겸 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창 41:40). 이러한 직책은 당시의 직분이었 음이 증명되었다. 요셉과 관련된 수레(또는 병거)와 말에 대한 이야 기가 나온다.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힉소스 족들이 애굽에 쳐들어오 기 전에는 병거나 말을 타는 습관이 소개되지 않았다. 이것은 힉소스

- 49 -


의 시대인 것을 분명히 입증한 것이다. 요셉은 애굽인 바로가 아닌 이스라엘과 같은 셈족인 힉소스 민족이 애굽을 통치할 때 그 밑에서 총리를 지낸 것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지어 준 애굽 이름인 "사브낫바네아"(창 41:45)는 당시에 통용되었 던 인명이었다. 근대의 애굽 발굴물 중에서 이 이름이 드러났다. 총리와 곡물 총 책임자가 된 요셉은 7년의 풍년기 동안 전국의 곡식 을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창 41:46-49). 기원전 15세기에 속하는 고대 애굽의 수도인 테베의 한 무덤의 벽화에서 추수한 곡식을 기록 하는 관리들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어 이 사실을 입증시켜주 고 있다. 요셉이 섬기던 힉소스 족속의 바로는 제 16왕조에 속한 키 안 또는 카안(Khian 또는 Khayan)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이름이 애굽의 상형문자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7년 대풍년에 이어 7년 대흉년이 이집트와 팔레스틴 전역에 극심해 졌다. 이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두 차례에 걸쳐 요셉의 형제들에게 귀한 예물을 주어 이집트 총리를 방문하여 양식을 구해 오도록 하였 다(창 42, 43장). 야곱의 열 아들들은 이집트에 도착해서 총리가 된 이복 아우 요셉을 몰라보고 그 앞에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한다 (창 42:6, 43, 26).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15세기 테베에 있는 세벡 -헤텝의 무덤 프레스코 벽화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 벽화 에는 팔레스틴(시리아 지방)에서 온 셈족 계 아시아인들이 그들 땅 의 예물들을 손에 들고 이집트 궁전에 와서 바치고 있다. 이러한 모 습은 요셉의 형들의 당시 사건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야곱은 애굽에 와서 17년을 살았으며 147세에 죽어 장사되었다(창 50:1-3). 야곱의 장례법은 그 당시의 애굽의 장례법을 그대로 나타 낸 것이다. 요셉의 "수종의사"(창 50:2)가 나오는데 당시 애굽에는 고도의 의술을 가진 의사가 있었다고 희랍의 기록에 나온다. 요셉은 야곱의 시체, 즉 "향 재료를 아비의 몸에 넣게" 했다. 그것을 넣는데

- 50 -


40일이 걸렸다는 것은 당시 애굽의 특수 장례법, 즉 미이라를 만드 는 과정이었다. 애굽의 초기 역사에는 향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시체 를 그저 말려서 처리했다. 제 11, 12 왕조와 힉소스 통치 때에는 발 달해서 시체를 소금과 천연 탄산소오다로 처리했다. 죽은 사람의 내 장을 제거하고 그곳에 고무진이나 방부제를 채워 넣는다(창 50:2, 3).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붕대로 감고 미이라 모양을 만들었 다. 그 후에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나무 상자에 넣고 난 후에 다시 2-3개의 직사각형 나무관 속에 넣어 바위를 깎아 만든 굴무덤에 장 사했다. 무덤에 장사할 때 그가 평소에 쓰던 물건들도 함께 넣었다. 미이라를 만드는 데 40일이 걸렸다. 애굽의 습관대로 70일을 울었 다. 요셉도 110세에 죽은 후에 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치루었다(창 50:26). 이와 같은 기록은 당시 애굽 장례 풍습에 정확하게 일치하 는 것이다. (2)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 창세기 50장과 출애굽기 1장 사이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잃어버린 시 간이 존재한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고향을 떠나 이집트에 체 류하다가 모세의 지휘 아래 출애굽을 감행했다. 당시 요셉을 알지 못 하는 새 왕은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를 건설하면서 히브리 노예들을 가혹하게 부렸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출 1:11). 그들은 이집트 감독들의 엄한 감시 아래 흙을 이겨서 벽돌을 만들어 국고성을 건설 했다. 영국의 이집트 탐사재단은 바로 이 흙벽돌로 만들어진 고대 이 집트의 국고성의 흔적을 찾기 위해 1882년에 처음으로 설립됐다. 1873년 겨울철 어느날 아멜리아 에드워스(Amelia Edwards)라는 한 영국인 여류 수필가는 친구들과 함께 펠루카라 불리는 전통적인 돛단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하여 이집트 탐사에 나섰다. 나일 강을 따라 두 달 동안 이집트 전역을 여행한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 온 후 ‘나일강 천 마일을 거슬러’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여행기를 출판했고 이는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며 이집트에 대한 대단한 향수를

- 51 -


불러일으켰다. 그 후 그녀는 계속해서 이집트의 유적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으며 특히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쓰러지고 황폐해지는 유적들에 대한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녀는 영국이 적 극적으로 나서서 이집트 중에서도 성경의 고센 땅으로 여겨지는 삼 각주 지역을 발굴해야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1882년 런던에서 ‘이집트 탐사재단’의 설립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 단체를 처음에는 ‘삼각주 탐사재단’으로 부를 만큼 초기의 이집트학자들 은 성경에 등장하는 고센 땅의 도시들의 흔적을 밝혀내길 원했다. 이집트 탐사재단은 그들의 첫 번째 발굴지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건 설노동자로 고생했던 국고성 비돔을 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넓은 고센 땅 중에서도 과연 비돔이라는 도시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 다. 이 역사적인 이집트 성지 발굴의 책임자는 스위스 출신의 에두아 드 나빌(Edouard Naville)이었다. 1883년 1월 나일강의 물이 어느 정도 줄어들어 삼각주 지역의 발굴이 가능해졌을 때 나빌은 그의 첫 번째 발굴에 나섰다. 그는 우선 고센 땅 자체가 삼각주 지방 중에서 도 되도록 가나안에 가까이 있는 북서지역임을 알아냈고 이곳에 널 리 흩어져 있는 기존의 텔, 즉 유적지들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텔 엘 -마스쿠타(Tell el-Maskhuta)를 비돔으로 여기고 발굴을 시작했 다. 원래 비돔은 이곳에서 출토된 비문에서는 고대 이집트어로 ‘페 르-아툼 체쿠’, 즉 ‘체쿠에 있는 태양신 아툼의 신전’으로 기록 됐다. 그런데 이집트어의 체쿠는 히브리어로는 숙곳으로 발음될 수 있고, 숙곳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출발한 장소(출 13:20) 이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비돔으로 확정짓게 된 것이다. 이곳은 현지 아랍어로 “우상들의 언덕”이라는 뜻이고 원래 여러 종류의 석상들이 널려 있었던 유적지였다. 또한 이곳은 히브리 족장 시대의 배경이 되는 이집트 제 15왕조 힉소스 민족의 중심도시였다. 이 곳은 파괴된 후 계속 폐허로 남아 있다가 서기전 610년경부터 로 마시대까지 요새로 재건됐다. 네코 2세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 - 52 -


는 나일강 하류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는데 비돔은 이 운 하 변에 위치한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3개월간의 발굴이 끝난 후 나빌은 1885년에 ‘국고성 비돔과 출애굽 경로’라는 제목 의 발굴보고서를 출판했다. 한편 비돔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국고성 람세스는 원래 람세스 2 세가 건설한 하이집트의 수도였던 ‘피람세스’를 말한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는 야곱의 가족들이 총리대신으로 출세한 요셉의 배려로 거 주했던 이집트의 한 지방을 고센 땅 중에서도 ‘람세스의 땅’(창 47:11)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람세스 2세의 고향이었으며 서기전 13세기에 그가 건설한 ‘람세스의 궁전’이라는 뜻의 ‘피람 세스’는 삼각주 지역의 가장 화려했던 왕도였다. 물론 지금은 폐허 가 되어서 그 옛날의 영화를 찾아 볼 길은 없다. 두 개의 국고성 중 에서 비돔은 지난 1883년에 나빌에 위해 처음으로 발굴됐지만 람세 스 도시는 유적으로서의 흔적이 거의 지상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 에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 이후 그 지리적 위치가 어렴풋이 확인 됐다. 1960년대 완공된 아스완 댐으로 삼각주 지역의 지하수면이 높 아지면서 웬만한 저지대는 일년 중 절반가량은 침수되는 상태였고 람세스 도시도 벼농사를 하는 논과 밭으로 경작되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이집트학자인 에드가 푸쉬(Edgar Pusch)는 독일의 펠리제우 스 박물관의 후원으로 1987년부터 나일강의 한 지류였던 펠루시움 강변에 위치한 칸티르라는 곳에서 대규모의 궁전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이 유적이 람세스 2세의 궁전과 신전 유적이며 따라서 이 곳이 ‘피람세스’, 즉 람세스 궁전이 있었던 출애굽기의 국고성 람세스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에드워스 여사와 나빌, 그 리고 푸쉬 등의 노력으로 구약성경의 신앙적 기초가 되는 출애굽 사 건의 현장인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 발굴을 통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 속에서 성경을 직접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 53 -


4. 출애급기의 행적 (1)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생활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셈족 계통의 아시아인들인 힉소스 족들은 애 굽을 침공하여 14왕조를 무너뜨렸다. 애굽은 약 150년간(1720-1570 BC) 이 민족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기간 동안 요셉 덕분에 기근을 피해 이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애 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일강 삼각주 동쪽의 고센 땅 지금의 와디 튜미랏(Wadi Tumilat)을 차지하여 번영을 누렸다(창 47:6). 그러나 요셉이 죽고 얼마 후 애굽에서는 대정변이 일어났다. 당시의 힉소스 왕 아포피스(Apophis)가 애굽인으로서 테베의 지방 장관이 였던 세켄레(Sekenre)를 죽인 사건을 계기로 그 아들들에 의해 독 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형 카모세(Kamose)에 이어 동생 아모세 (Amose)가 힉소스 왕국의 수도 아바리스를 빼앗았다. 힉소스족은 150여년 만에 애굽에서 쫓겨나서 남부 가나안 사루헨(수 19:6)에서 버티다가 애굽 군대에 의해 포위 3년 만에 패망하였다. 이 기록은 애 굽왕 아모세의 부하 군인 중의 하나인 아모세(왕의 이름과 같음) 장 교가 자기가 독립 투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운 기록을 네갑에 있는 자기 무덤에 글로 써 둔 것을 거의 4000년 만에 발굴함으로써 밝혀 졌다. 그는 독립 투쟁에서 세운 공로로 왕에게서 받은 19명의 노예 들의 이름을 무덤 비명에 써 놓았다. 그 중에는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셈족의 이름이 있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취급되기 시 작했다는 증거이다. 애굽의 독립 전쟁에서 성공한 제 18왕조는 힉소스 시대에 번영을 누 렸던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보복하기 시작했다. "요셉을 알지 못 하는 새 왕"(출 1:8)은 바로 제 18왕조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표현으 로 성경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

- 54 -


(2) 강제 노역과 모세의 출생 독립운동에 성공한 제 18 왕조는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을 두려워 하 고 증오를 느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는 강력한 정책을 폈다(출 1:9, 10). 이렇게 세워진 억압 정책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출 1:13, 14). 이런 상황에서 지은 국고성 비돔 과

라암셋이

1905-1906년

사이의

겨울에

페트리(W.

M.

F.

Petrie)에 의해 발굴되었다. 비돔은 와디 튜밀랏에서, 라암셋은 텔 엘 레타베(Tell el Ratabeh)에서 발굴되었다. 아모세가 죽자 그의 아들 아멘호텝 Ⅰ세(1546-1525 BC)가 왕이 되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애굽의 장군이며 그의 사 위인 투트모세 Ⅰ세(Thutmose Ⅰ; 1525- 1508)가 뒤를 이어 왕 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주로 외국 정복에 힘쓰는 한편 셈족 노예 들을 대대적인 토목 공사에 동원했다. 이 때 쯤 수도 테베에 끌려와 서 강제 노동을 하던 레위 족속의 부부인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준수한 아기 모세가 태어났다. 이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더 이상 번 창하지 못하도록 "남자가 나거든…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출 1:22)는 바로의 명령이 시행되던 때였다. 아기의 생명은 위험에 처하였다. 요게벳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 동안 아기 를 숨겨 두었다가 방수 진을 칠한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 갈대 숲 사이에 띄우고 누나 미리암이 망을 보게 하였다. 바로 이 때 하나님 의 섭리로 구원의 손길이 아기 모세에게 이르러 왔다. 애굽 왕 투트 모세 Ⅰ세에게는 핫셉섯(Hatshepsut)이라는 무남독녀 공주가 있었 다. 그가 바로 아기 모세를 건진 핫셉섯 공주였다. 모세는 바로(투트 모세 Ⅰ세)의 딸 핫셉섯의 양자가 되어 애굽 궁중에서 왕자의 대우 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3) 모세의 양모 핫셉섯 공주 애굽왕 투트모세 Ⅰ세에게는 무남독녀 핫셉섯이라는 공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모세의 양모이다. 투트모세 Ⅰ세가 친자식으로는 핫셉섯 밖에 낳지 못하자 세습 제도에 의해 왕위를 잇고자 소첩에게서 낳은

- 55 -


나이 어린 아들을 연상의 딸과 결혼시켜 다음 왕인 투트모세 Ⅱ세가 된다. 그러나 투트모세 Ⅱ세가 4년 만에 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요절 하자 과부가 된 핫셉섯은 자신이 남자의 모습을 하고, 이중 관을 쓰 고서 왕으로 군림했다. 그는 왕으로서 20년간(1504-1482 BC) "세 계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상하 애굽을 다스리며 번영과 평화의 시대를 이룩했다. 그의 유명한 건축물은 테베 가까이 데일 엘 바리(Deir el Bahri) 절벽에 맞대서 지은 흰 대리석의 시체 안치관인데 신전 형식으로 웅장하게 세워졌 다. 또한 그를 위해 카르낙에 세워진 두 개의 오베리스크(방첨비) 가 운데 한 개는 그 높이가 97.5 피트에 무게가 70만 파운드나 된다. 이 여왕을 양모로 한 모세는 당대의 최고 교육을 받으며 왕위를 계 승할 강력한 후계자로 등장했다. 핫셉섯 여왕은 후계 문제로 애굽의 지배 계급인 아몬신의 제사장들 과 반목이 심했다. 왕이 될 사람은 동시에 아몬신의 제사장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선조의 신앙을 고수하고 자 이를 거절했다(히 11:24, 25). 궁지에 몰린 핫셉섯은 제사장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죽은 남편의 소첩에서 낳은 아들을 자기의 딸과 결 혼시켜 후계자인 투트모세 Ⅲ세(1482-1450 BC)로 삼았다. 뜻 밖 에 왕의 후계자가 된 투트모세 Ⅲ세는 카르낙에 있는 신전 비명에 " 아몬신의 개인적인 개입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적어 놓았다. 그는 모 세와 왕위 다툼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위치가 달라지고 그의 유일한 보호자인 핫셉섯도 기 원전 1486년 경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민족적 자각과 사명감에 충동을 받아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감독관을 쳐 죽 인다. 그러자 진상이 탄로나자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쳐 40년간을 그곳에서 살았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친 뒤 얼마 후 핫셉섯의 근 신(近臣)들이 제거되는데 아마 투트모세 Ⅲ세의 추종자들에게 살해 된 것 같다.

- 56 -


(4) 가중된 이스라엘 백성의 노역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신한 후 사태가 악화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생활은 극도로 가혹해졌다. 오랫동안 계모인 핫셉섯에게 억눌렸 던 투트모세 Ⅲ세는 우선 계모가 세운 기념물들을 없애고 기록들을 지워 버린 후 대신 아버지(투트모세 Ⅱ세)와 할아버지(투트모세 Ⅰ 세)의 이름을 써 넣기도 했다. 그는 20여 년간 팔레스틴과 아시아를 원정하여 국위를 떨쳤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오면 가을에 걸쳐 카르 락에 있는 아몬 신전 증축을 비롯한 대 토목 공사를 일으켜 '역사상 최초의 대 제국 건설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토목 공사를 관할하는 수상 급의 관리를 두었는데 바로 그 레 크미레(Rekmire)의 무덤이 테베의 근교에서 발굴되었다. 그의 무덤 벽에는 자신의 경력을 말해 주는 그림과 글이 소상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노역했는가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글로 써 있다. 벽돌 찍는 광경, 벽돌 쌓는 그림, 돌 뜨는 사람들 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벽돌을 만들고 쌓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족속 으로 보이는 아시아인인 것이 차림과 색깔에서 명백하다. 그 옆에 레 크미레 노역 감독장이 작대기를 받치고 앉아 있는데 거기에 쓰여진 글에는 "포로들은 아몬 신전을 건축하기 위해 데려왔다." 또한 포로 들의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우리에게 빵과 맥주와 모든 좋은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감독이 말하기를 "채찍이 내 손에 있 으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는 경고도 적혀 있다. 애굽에서 강제 노 역에 동원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 밖에 먹을 것이 없을 때 먹는 것 으로 불평하던 것이 노예 생활을 그리워한 것이다(민 11:4-6, 21:5, 6). 이스라엘 백성이 벽돌을 만들던 과정이 한 무덤의 목각에서 나타났 다. 곡괭이로 나일강변의 흙을 파서 물을 퍼다 모래와 잘게 썬 짚을 섞어 이긴 후, 나무를 파서 만든 틀에 찍어서 햇볕에 말려 흙벽돌을 만든다.

- 57 -


나바이유(Naville)는 1883년, 키일(Kyle)은 1908년에 비돔성(출 1:11)을 발굴하면서 아래층에서는 약간의 뿌리와 그루터기를 섞어서 만든 벽돌을 발견했다. 그리고 위층에서는 아예 짚이 들어 있지도 않 은 벽돌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출애굽기의 진실성을 입증한 것이다 (출 5:6-18). 모세가 죽기를 기다리던 바로는(출 2:23; 4:19) 투트 모세 Ⅲ세(1482-1450 BC)이다. 그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는 동안 죽었다.

(5) 모세와 출애급 행적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투트모세 Ⅲ세가 죽었다. 출애굽이 있기 5년 전쯤인 1450년경에 죽었다(출 2:23). 그의 아들 아멘호텝 Ⅱ세(AmenhotepⅡ; 1450-1425 BC)가 바로의 자리에 오르는데 그가 출애굽 당시의 바로이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용맹하 였다. 그의 입상도 발견되었고 또 그가 암소 신으로 제 18 왕조가 섬기던 애굽 신인 하돌(Hathor)신의 머리 아래서 보호받고 있는 입 상도 발굴되었다. 최근 기자 지방의 스핑크스 가까이에서 석비 하나 를 발굴했는데 거기에는 그가 젊은 왕자 시절에 그의 북쪽 정원에서 3인치 두께의 아시아제 구리로 된 활 과녁 네 개가 35피트 간격으로 세워진 것을 보고 전통에서 화살 4개를 꺼내 말을 달리면서 연거퍼 쏴서 맞춘 무용담이 적혀있었다. 그의 미이라는 1893년 테베의 왕곡 에서 발굴되었다. 그의 유명한 활이 아직 그의 곁에 놓여 있으나 아 무도 그것을 당길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젊고 용맹한 바로 앞에 나이가 80세가 넘은 모세와 83세의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그는 '여호와가 누구관 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하였다. 모세와 아론 이 그 앞에 섰던 바로는 아멘호텝 Ⅱ세였다. (7) 열 재앙(출 7:20-12:30)

- 58 -


1) 첫째 재앙 - 나일강이 피로 변함 애굽 인들에게 있어서 나일 강은 예배의 대상이었다. 나일강을 위한 기도, 찬미, 예배가 드려졌다. 고대 나일강의 찬가가 발견되었다. "당 신은 가난하고 어려운 자의 주가 되십니다. 만약 당신이 하늘에서 뒤 집혀지면 신들은 망할 것입니다." 나일강은 애굽 신들의 총 본산이 다. 부활과 영생의 신 오시리스(Osiris), 나일강의 신 하피(Hapi), 홍 수의 여신 사테드(Satet), 그의 언니신 안퀘드(Anqut) 등이 첫째 재 앙에서 망해버린 것이다. 2) 둘째 재앙 - 개구리 이 재앙은 개구리로 나타나는 크눔(Khnum)신의 부인 헤큐트(Heqt) 를 친 것이다. 헤큐트(Heqt)는 개구리 여신으로 부활의 상징이요 비 옥의 표상으로 개구리가 거처에 나타나면 그 해의 길조라고 했다. 3) 셋째 재앙 - 이 지신(地紳) 셉(Seb)에게 내린 것이다. 그들은 지신 셉 덕분에 온갖 혜택을 입고 산다고 믿었다. 4) 넷째 재앙 - 파리 파리 중에서 맵시파리(Ichneumon Fly)는 거룩해서 신으로 섬겼다. 너무 극성스럽고 폐해가 심해 신으로 섬긴듯이 보인다. 5) 다섯째 재앙 - 가축 애굽에는 수많은 가축 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암소의 여신 하돌 (Hathor)이 으뜸이었다. 하돌은 출애굽 당시인 18왕의 주신이었다. 또한 황소신 아피스(Apis)를 잘 섬기면 내세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6) 여섯째 재앙 - 독종 이 재앙은 풀무의 재를 바람에 날려 독종을 일으켰다. 이것은 태풍과

- 59 -


전쟁의 신인 레슈퍼(Reshpu)와 퀘테슈(Qutesh) 슈렉(Sulech)에 내 린 것이다. 이 재앙으로 사람과 가축이 고통을 당해도 고칠 힘이 없 는 의약의 신 임호텝(Imhotep)을 친 것이다. 7) 일곱째, 여덟째 재앙 - 우박과 메뚜기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은 애굽인에게 풍요한 수확을 약속하고 경배를 받는 그들의 신들의 무능과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알게 하는 하나 님의 실력 행사이다. 8) 아홉째 재앙 - 흑암 아홉째 재앙으로 빛은 사라졌다. 몸을 굽혀 궁창을 만들고 있다던 하 늘 여신 누드(Nut), 하늘을 거처로 삼고 해로 얼굴을 나타낸다던 호 러스(Horus)신, 일월성신을 주장한다는 도드(Thoth)신, 불의 여신 세크멧(Sekmet), 일출신 프타(Ptah), 일몰신 테무(Temu), 주신인 태양신 라(Ra)가 흑암 재앙 때 완전히 패배 당했다. 9) 열째 재앙 - 장자 애굽의 주신인 라(Ra)는 태양신이다. 그는 때때로 암소의 첫 새끼 황소로 땅 위를 걷기도 한다. 또한 출생의 신 메스케밋(Meschemit) 은 바로의 장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리하여 애굽의 모든 신들은 아무것도 아님이 밝혀지고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이 폭로되었다. 열째 재앙에서 맏 아들을 잃은 바로는 아멘호텝 Ⅱ세이다. 그를 뒤이 어 바로가 된 투트모세 Ⅳ세는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였다. 애굽의 기 자 지방에 있는 스핑크스 가까이에 세워진 커다란 붉은 색 화강암 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 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스핑크스 모양으로 나타난 신에게서 꿈으로 통고 받았다. 참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신의 꿈 이 야기이다. 열째 재앙에서 황태자인 형이 죽자 뜻밖에 왕이 되었음을 무심결에 시인한 것이다. (8) 출애굽 연대

- 60 -


성경(왕상 6:1)에는 솔로몬 왕의 재위 4년 2월, 즉 출애굽한 지 480년이 되는 해에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솔로몬의 재위 4년은 기원전 966년경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출애굽 연대는 1445년경이 된다. 사사기(삿 11:26)에는 기원전 1,100년 경의 사사인 입다 당시로부 터 약 3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였다고 기록되었 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 40년을 가산하면 1440년경인 15세기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연대에 의하면, 모세는 투트모세 Ⅰ세(Thutmose Ⅰ; c. 1542-c.1524 BC)의 통치 기간인 기원전 1525년경에 태어 났다. 그는 합법적인 후사가 없자 정비(正妃)의 딸 핫셉섯(Hatshepsut)을 이복형제에게

출가시켜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투트모세

Ⅱ세

(Thutmose Ⅱ; c.1524-c.1504 BC)이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없 이 죽자 핫셉섯이 왕위에 올라 20여년을 다스렸다. 이 핫셉섯이 모 세를 양자로 삼아 후계를 삼으려 했던 바로 왕의 공주였다(출 2:1-10; 행 7:19-21; 히 11:24). 그러나 기원전 1486년 경 핫셉 섯은 제거되고 계모이며 장모인 핫셉섯의 섭정을 받던 투트모세 Ⅱ 세의 서자인 투트모세 Ⅲ세(Thutmose Ⅲ; c.1486-c.1450 BC)가 왕위에 올라 36년간 강력한 왕으로 군림한다. 모세가 두려워하여 미디안으로 피신했던 바로가 투트모세 Ⅲ세였을 것이다. 모세의 보호자였던 핫셉섯이 제거되자 모세도 불안을 느껴 기원전 1485년 경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것이다. 투트모세 Ⅲ세는 출애굽이 있기 5년 전쯤인 기원전 1450년에 죽었다. 그를 이어 젊고 용맹한 아들 아멘호텝 Ⅱ세(Amenhotep Ⅱ세; c.1450-c.1427 BC) 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모세와 출애굽 당시에 대결한 바로로 추정된 다. 그리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을 때 죽은 바로(출 2:23)는 그 의 아버지 투트모세 Ⅲ세가 된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의하면 출애굽 당시에 바로가 그의 군대와 함께

- 61 -


홍해에서 죽은 것처럼(단정적인 것은 아님) 언질 되고 있다. 그런대 그의 미이라가 여러 애굽의 왕들처럼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 다. 또한 그의 재위 기간이 기원전 1427년까지 연장되고 있어 연대 의 문제를 안고 있다. 참으로 그가 홍해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그의 말들과 군사들만 죽고 그는 뒤에서 독전했는지 모를 일이다.

4. 이 후의 애급 (1) 예레미야의 이집트 체류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다가 라마에서 느부사라단을 만나 석방되었다(렘 40:1). 그 후 그는 미쯔파(미스바)에서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의 꼭두각시 총독 그달리야와 함께 지냈다. 유다의 군대 장관이었던 이스마엘은 암몬 왕 바알리스의 사주를 받 아 그달리야를 암살하고(렘 41:2) 미쯔바를 파괴한 후 포로들을 잡 아 암몬으로 데려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요하난 일파 는 기브온에서 이스마엘 세력과 전투를 벌여서 포로들을 석방시켰고 이스마엘은 부하들과 함께 암몬으로 도망갔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 실은 바빌로니아에 대항했던 이스마엘을 물리친 요하난 일파가 바빌 로니아

세력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난가게

되었다는

것이다(렘

41:16-18).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예레미야는 부정 적인 견해를 밝혔다(렘 42:8-22). 하지만 요하난과 아자리야 등은 예레미야와 나머지 유다 거민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가게 된다. 예레미야는 삼각주 지역의 탁흐반헤스에 거주하면서 예언 활동을 계 속하였다(렘 43:8). (2) 이집트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 서기 4세기에 기록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II.16)에 의하면, 네로 황 제 시대(서기 54-68)에 예수의 제자 요한 마가에 의해 이집트의 알 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 제국 의 식민지였던 이집트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으며 이 곳에 정착했 - 62 -


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개종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기 150년경 콥트어로 기록된 요한복음서의 단편이 이집트 남부 지 방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마가의 선교 이후 100년이 되지 않아 서 기독교는 이집트 전역으로 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이집트의 기독교를 콥트교회(Coptic Church)라고 부르며 카 톨릭, 정교회, 개신교와는 구분되는 그들만의 신학과 제의를 지니고 있다.

▣ 과 제 ▣ 1. 이집트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이름들을 쓰라 2. 이집트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라 3. 모세의 양모에 대하여 쓰라. 4. 열 재앙에 대하여 쓰라

- 63 -


제4장: 정복과 정착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1. 여리고 성의 함락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후 제일 먼저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다(수 6:1-27). 여리고 성 의 폐허를 찾기 위하여 1907년 독일의 셀린 교수(E. Sellin)가 발굴 을 시작했다. 뒤이어 1909년 바찡겐(Watzingen) 교수가 합세하여 발굴에 성공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여리고 성의 파괴가 초자연적 임을 확인하였다. 1930-1936년 사이에 영국인 갈스탕(John Garstang) 박사에 의하 여 정밀 발굴이 계속되었다. 발굴 결과 제4층(D층)의 폐허에는 기원 전 1400년 경에 무너진 것으로 그 시대에 해당되는 토기와 갑충석 을 발굴해 냈다. 특히 성벽은 이중 벽돌 벽으로서 바깥 벽은 두께가 2미터, 안쪽 벽은 두께가 4미터나 되었고 성벽의 높이는 10미터 가 량 되었다. 두 성벽 사이의 간격은 약 5미터였다. 여리고 성의 면적 은 약 6에이커 정도로 협소하여 이 두 성벽 위에 나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집들을 짓고 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생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수 2:15)의 의미를 밝혀 준다. 그 성은 아주 거칠게 파괴 되었는데 외벽은 그산 비탈의 앞쪽으로 흔들려 무너져 내렸고 내벽은 그 위에 집들이 있는 두 벽 사이로 무 너져 앉았다. 불에 타서 붉은 빛을 띤 돌들과 벽돌이 재와 그슬린 목 재와 뒤섞여 있었다. 이 흔적들은 성이 무너질 때 큰 불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수 6:24)

- 64 -


2. 정복당한 가나안 성읍들 1887년 이집트의 나일강 중류에 위치한 아마르나(Tell el-Amar na)에서 어떤 애굽 여인이 350개나 되는 점토판을 발굴하였다. 이 점토판은 대영 제국 박물관을 위해 고물 수집에 나온 버즈(Ernest Budge) 박사에게 발견되어 82개는 대영 박물관에 나머지는 베를린 박물관에 넘어갔다. 이 점토판은 기원전 1400-1366년 사이의 기록들이다. 여호수아가 거느린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도시와 성읍들을 정복해 가던 당시 공 포에 질린 가나안의 여러 왕들이 종주국인 애굽의 아멘호텝 3세와 4 세에게 도움을 요청한 편지들과 진귀한 기록들이다. 애굽 여인이 점 토판을

파낸

곳은

옛날

애굽의

일시적인

수도였던

아케타톤

(Akhetaton)의 왕실 문서 보관소 자리였던 것이다. 이 점토판에서 가나안 왕들, 예루살렘 왕 압두헤바(Abdu Heba), 게 셀왕 밀키루(Milkilu)와 그 밖의 여러 왕들이 애굽의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 중에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예루살렘 왕 압두헤바가 애굽왕 아멘호텝 3세에게 보낸 편지들 중 한 편지(No. 296)에서, "나의 주 왕이여 당신의 종 압두헤바가 말씀드립니다. 나의 주 왕 앞에 일곱 번씩 엎드려 간구합니다 … 왕의 오래 사심을 비옵고 말씀 드립니다. 어찌하여 내 왕께서는 하비루(Habiru)인들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종 들을 미워하십니까? 저는 주 왕 앞에서 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땅들이 빼 앗기고 있습니다. 제가 왕의 앞에서 욕을 당합니다. 그러하오니 왕이시여, 왕의 땅을 돌보사 당신의 군대를 보내소서. 왕의 땅이 남아나지 않겠습니다. 하비루인들이 왕의 모든 땅을 약탈 합니다.

- 65 -


만일 올 해 안으로 군인들을 보내시면 왕의 땅은 남아 있을 것입니 다 … 왕의 모든 땅이 빼앗깁니다." 다른 편지(No, 278)에서는, "진실로 이 예루살렘 땅은 저희 부친께서 주신 것도 아니요 저희 모 친께서 주신 것도 아닙니다. 능하신 왕의 손이 제게 주신 것입니다. 진실로 왕은 왕의 이름을 영원히 예루살렘 위에 두며 예루살렘 땅을 결코 버리시지 못합니다.” 다른 편지(No, 288)에서는, "왕이여 왕의 땅을 돌아보소서 왕의 땅이 빼앗김을 당합니다. … 하비루 인들이 왕의 도시들을 빼앗고 있습니다. … 만일 금년 내로 군대를 보내시지 않으려면 왕이여 대리인을 보내셔 서 우리 형제와 저를 데려 가사 왕의 앞에서 죽게 하소서.” 다른 편지(No, 289)에서 예루살렘 왕은 세겜(Shechem)이 그 통치 자 라바야(Labaya)에 의해 히브리인에게 항복되었다고 보고하고 있 다. 이 기록은 성경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수 8:33). 이 밖의 편지들에서 가나안 도시와 성읍들이 점령되어가는 모습(No, 290 편 지에서는 베들레헴 점령을 보고함)이 상세히 나타나 있다. 기원전 13세기 중엽에 쓰여진 하름합 왕(Harmhap; 약 1353-1319 BC)의 무덤 부조에는 "외국인과 다른 사람들이 저들의 땅을 쳐들어 가 저들을 멸망시키고 저들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였다"고 쓰여 있다. 당시의 가나안 사람들은 애굽으로 피신하게 해 달라고 애걸하는 모 습도 그려져 있다. 일부 가나안 사람들이 애굽으로 피해 오는 도중 광야의 들짐승처럼 굶으며 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3. 가나안 정복 당시의 애굽 왕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가던 처음 40년간 이집트에서는

- 66 -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열째 재앙에 죽은 맏형을 대신하여 왕이 된 투트모세 4세를 이어 그의 아들 아멘호텝 3세가 즉위한다. 그는 18 왕조의 최고의 번영을 누리면서도 노쇠하고 병약하여 정치, 군사에는 관심이 없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때 아닌 종교 개혁에 전념한다. 아버지를 이은 아멘호텝 4세는 아버지 이상으로 정치, 군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종교 개혁에만 열을 올려 '인간 역사상 최초의 개성을 가진 이상주의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 전까지 애굽인들은 아몬신 을 비롯하여 수많은 다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다신 숭배 는 금지되고 유일의 태양신 아톤(Aton)만을 섬기도록 강요된다. 그 이유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 애굽 사건에서 참패한 것이 억울했기 때문이다. 열 재앙은 자신들이 섬겨온 거짓 다신들의 패배요 이스라엘 백성이 섬긴 유일신 여호와 의 승리였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왕은 '아몬신이 만족스럽다'는 뜻인 아멘호텝의 자기 이름을 '아톤신 에게 은총을 입은 자'라는 뜻의 아케나톤(Akhenaton)으로 개명해 버렸다. 그리고 옛 종교가 뿌리 깊은 수도 테베를 버리고 아마르나에 새 터를 잡고 수도를 옮긴다. 산비탈을 낀 벌판에 새 궁전과 새 신전 을 짓고 절벽을 깎아 무덤들을 수 없이 만들었다. 신전에는 우상도 없이 태양을 상징하는 원반 하나만 표시해 놓고 자신은 아톤신 숭배 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고금의 절세미인인 왕후 네퍼티티(Nefertiti)와 여섯 딸에 둘러 싸여 가정생활에 열중했다. 이처럼 종교와 가정생활에 열중하여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이 때 쯤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을 당하는 가나안 종속국들에서 는 계속해서 구원을 요청하는 점토판의 쓴 편지가 애굽 왕궁에 날아 왔다. 베이루트 북쪽 20마일 지점에 있는 구브라(Gubla, Byblos)의 왕 리브아디(Rib Addi)는 50번 이상이나 편지를 써 보냈다.

- 67 -


그 한 편지는, "리브아다가 왕께 … 나의 태양 나의 주의 발 앞에 일곱 번씩 일곱 번 엎드리옵니다 … 왕께서는 그의 한 도시를 그의 손에서 떠나게 하시고 계시군요 … 그들은 서로 반역을 도모하였고 나는 그들의 손에서 구출해 줄 사람이 없으므로 크게 두려워 합니다. 그물에 같힌 새같이 제가 구브라에 같혀 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땅에 등을 돌려대고 계십니까? 보시옵소서 제가 궁전을 향하여 글을 올리오나 당신께서는 제 말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나이다. … 왕이여 부디 당신의 땅을 돌아보소서. … 이 외로운 중에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보소서 이 같이 제가 밤낮 간구하나이다.” 또한 북 시리아의 튜닙(Tunip) 도시의 왕도 편지하기를, "나의 주 애굽 땅의 왕께 … 우리는 주의 발 앞에 엎드리옵니다 … 지금 우리는 20년 동안이나 우리 주 왕께 사람을 보내었사옵니다 … 그러나 지금 당신의 도시 튜닙이 울고 있으며 그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사오나 우리를 도울 자 없습니다. 우리 주 왕, 주, 애굽 땅의 왕께 20년간이나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한 말씀도 우리에게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이렇게 소동치고 있는 동안 애굽에서는 새 수도로 정한 아켄아톤이 자기가 직접 지은 것으로 보이는 아톤신 찬양의 시 를 지어 불렀다. "그대는 하늘 지평선 위에서 아름답게 떠오르누나 그대는 살아 있는 아톤 생명의 시작이시외다 당신이 동편의 지평선에 떠 오르실제 땅마다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시나이다." (중략)

- 68 -


그는 주문을 외우며 찬양하며 새 수도의 단장에 전념하며 아름다운 부인과 여섯 딸과 어울려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도 아마르나에 있는 그의 무덤 벽화에 그가 딸들과 입맞추며 아내를 포옹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에 세계의 대 제국이요, 이스라엘의 적수인 애굽의 왕들의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그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몰랐을지라도 여전 히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셨다. 아케나톤의 종교 개혁과 새 수도 천도는 그가 왕위에 오른지 20여년 만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죽었다. 왕위 는 사위 투탄카톤(후에 투탄카몬으로 개명함)에게 돌아갔다. 그는 장 인의 길을 버리고 옛 종교 아몬 숭배로 돌아갔다. 새 수도도 함께 버 렸다. 이 황폐된 수도가 1887년 애굽 여인이 궁전의 문서 보관소를 발굴하기까지 기억에서 잊혀졌다. 바로 그 문서 보관소에서 가나안 정복을 확증해 주는 기원전 1400 년경부터 1366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점토판을 통해 확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손길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간증이기도 했다(수 23:3, 5-10, 14-16)

4.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 구약성경의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에는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민족이 12 지파 별로 땅을 분배받아 정착한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성경고고학의 주제들 중에서 가장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킨 ‘정복과 정착’ 문제는 고고학적 관점에서 후기 청동기 II시대에서 - 69 -


철기 I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관한 연구와 철기 I시대(서기전 1200-1000) 자체에 관한 연구 등으로 분류된다. 특히 철기 I시대는 고대근동에 있어서 암흑기로서 힛타이트나 이집트 등의 강대국이 붕괴되는 틈을 타서 여러 소규모의 민족들이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서의 대표적인 왕국들로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그리고 요단 건너편의 암몬, 모압, 에돔 등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가설로는 정복설, 정착설, 그리고 반란설 등이 있다. (1) 정복설(the conquest theory)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대로 가나안의 도시들이 서기전 1200년경 파 괴되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파괴된 주거 층을 동시대의 것 으로 간주할 수 있다. 미국의

성경고고학자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남부 지역에 위치한 텔 베잇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을 발굴한 후 C2 주거 층이 서기 전 1220년경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올브라 이트는 이 유적지를 여호수아에 의해 군사적으로 정복된 도시 중의 하나인 드비르(‫)דביר‬로 보았다. 이 연대는 이집트 제 19왕조의 파라 오 메르네프타 시대에 기록된 소위 ‘이스라엘 석비’의 연대에 기 초한 것이다. * 여호수아의 정복과정(여호 6-11장) 1. 요단 계곡: 여리고 정복(여호 6:22-25) 전리품: 귀금속(금, 은, 구리, 철)은 야훼의 창고에 보관 2. 베델 산지: 1) 아이 정복(여호 7:2-8:29): 성의 주민 1만2천명을 모두 죽임 성을 불질러서 영원한 폐허(‫)תל עולם‬로 만듦 2) 기브온 정복(여호 9장): 아모리 다섯 왕 동맹과의 전투(기브온 전투): 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키쉬, 에글론 등 다섯 왕을 - 70 -


막케다 동굴에서 죽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통치권도 자연히 여 호수아에게 넘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3. 쉐펠라 1) 마케다(‫ )מקדה‬정복(여호수아 10:28) 2) 리브나(‫ )לבנה‬정복(여호수아 10:29-30) 3) 라키쉬(‫ )לכישׁ‬정복(여호수아 10:31-33) 4) 에글론(‫ )עגלון‬정복(여호수아 10:34-35) 4. 유다 산지: 헤브론(‫ )חברון‬정복(여호수아 10:36-37), 드비르(‫ביר‬ ‫ )ד‬정복(여호수아 10:38-39) 5. 이즈르엘 평야: 메롬 물가(‫)מי מרום‬의 전투 6. 갈릴리: 하쪼르(‫ )חצור‬정복(여호수아11:10-11) 정복하지 못한 땅(여호수아 13:1-6): 남은 땅(‫‘ = הארצ נשׁארה‬땅이 남았다’) 1. 해안 평야: 블레셋과 페니키아: 시돈과 그발(비블로스) 2. 골란 고원: 그슈르 민족의 땅 (2) 정착설(the settlement theory) 이스라엘 백성은 한꺼번에 일회적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했 다기 보다는 좀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민들의 축 적된 결과이다. 갈릴리 산악지방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착 흔적이 비교적 이른 시기인 서기전 1250년경부터 확인되는 점과 같은 중앙 산악 지대라 할지라도 북부지방보다 남부지방이 좀더 늦게 정착이 이루어진 점 등이 점진적인 이주 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알트 (A.Alt)는 특정 민족이 새로운 땅에서 정착하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 리며 기존의 정착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 했다. 또한 알트는 힉소스 시대(서기전 1650-1550)부터 후기 청동기 시 대(서기전 1550-1200)까지의 이집트 기록을 면밀히 분석한 다음, - 71 -


가나안의 주거 분포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착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 에 그리 큰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알트의 이러한 점진적인 정착 가설은 이집트가 가나안을 직접 통치 했던 후기 청동기 시대와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했던 철기 I시대(서기 전 1200-1000)가 매우 다른 형태의 정치-사회적 모습을 반영한다 는 관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지만, 그가 주장했듯이(Alt 1966: 169), 비록 후기 청동기 시대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중심 무대였던 중앙 산악지대는 이집트의 효율적이고도 철저한 식민지 통치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가설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1967년 이래로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앙 산악지대에 관한 체계적이고도 철저한 고고학적 발굴 및 지표 조사 들의 결과는 1920년대 알트가 감지할 수 없었던 이 지역에서의 새 로운 주거분포의 모습들을 하나씩 드러내주고 있다. (3) 반란 설(the revolt theory) 이스라엘 백성은 정복설이나 이주 설에서 주장하듯이 외부로부터 가 나안으로

유입된

것이

아니라

후기

청동기

시대(서기전

1550-1200) 이미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사회의 하층민 계 급에 속하는 농민과 노예들이 사회적 반란을 일으켜서 새로운 공동 체를 형성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시내 산에서 유래한 유일신 야훼신 앙을 자신들을 결속하는 종교적 이념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반란 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사회학적 관점의 분 석으로서 특정한 가설을 제시하여 그에 따라 현상들을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미쉬간 대학 교수였던 멘덴홀(G.E. Mendenhall)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을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분석한 다음 서기전 13세기 경 후기 청동기 시대 말기의 가나안 도시국가들에 대항했던 ‘농민 들의 반란’으로 규정짓고 있다. - 72 -


5.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증거 (1) 메르네프타(Merneptah) 석비와 이스라엘의 기원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 한 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창 32:28). 그런데 엘, 즉 하나님과 싸웠다는 뜻의 이스라엘의 기원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민족이 약탈당해서 더 이상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졌다는 고대 이집트의 한 절망적인 비문에서부터 출발한다. * 페트리의 이스라엘 석비 1896년 겨울 이집트 최대의 유적지 테베(Thebes)에서 한 파라오의 장례신전을 발굴하던 영국 출신의 이집트학자 페트리(W.F. Petrie) 는 높이 3.2m 폭 1.6m에 달하는 검은 화강암 석비 하나를 발견했 다. 당시까지 이집트 지역의 발굴에서 파라오의 업적을 새긴 전승비 와 기념비가 자주 출토되기 때문에 이 발견은 그리 대수로운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28줄에 달하는 비문의 내용을 해독하던 그는 27번째 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 군다나 이 단어의 끝에는 민족을 의미하는 한정사가 붙어있어서 특 정한 민족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경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이 최초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 메르네프타(Merneptah) 이 비문을 기록한 주인공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파라오 람 세스 2세의 열세 번째 아들인 메르네프타였다. 부친이 거의 90세가 넘도록 67년간이나 통치했기 때문에 메르네프타가 서기전 1210년경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이 넘어서였다. 부친의 오랜 통치기간 중 그 위로 열두 명의 형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 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메르네프타는 모두 10년을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를 괴롭혔던 남쪽의 - 73 -


누비아와 서쪽의 리비아를 점령했고 북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평정 했다. 일명 이스라엘 석비로 불리는 메르네프타의 전승비는 바로 이 러한 그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르네 프타는 시적인 어조로 팔레스타인 정복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왕자들은 엎드려서 평화를 간구한다. 아홉 활(원수)중에서 아무도 고개를 드는 자가 없다. 이제 리비아는 폐허가 됐고 하티는 평정되었다. 가나안은 온갖 재난으로 약탈당했다. 아쉬켈론은 정복되었고 게제르는 사로잡혔으며 야노암은 더 이상 존 재치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의 자손은 더 이상 없다. 후루(팔레스타인)는 이집트 때문에 과부가 되었다.“ 메르네프타는 가나안 지역의 세 도시국가와 한 민족을 정복했다고 언급하는데 아쉬켈론, 게제르, 야노암 등은 모두가 땅을 의미하는 접 미사가 붙어 있어서 그들은 이미 정착한 도시국가 내지는 왕국을 이 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민족을 뜻하는 접미사가 붙어 있어서 당시 이 민족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유목민이었음 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비문을 통해서 이미 서기전 1210년경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막강했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 민족을 물리친 사건을 그의 승전비 에 기록할 만큼 위협적인 세력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2) 출애굽의 파라오는 누구인가? 당시까지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근거하여 람세스라는 도시를 건설했던 람세스 2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여겼 다. 하지만 1896년에 발견된 이스라엘 석비에서 메르네프타가 이스 라엘 민족을 무찔렀다는 언급 때문에 그가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이라고 여겼다. 더욱이 왕들의 계곡에 있는 메르네프타 - 74 -


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서 이상하게도 그의 미이라가 발견되지 않았 기 때문에 이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다 홍해에 빠져 죽었 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출 14:28). 하지만 1898년 왕들의 계 곡에 있는 아멘호텝 2세의 무덤에서 무려 16기에 달하는 왕족의 미 이라가 발견되었고 이 중에서 메르네프타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 가설은 더 이상 신빙성이 없어졌다. (3)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발견됐지만 당시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 적인 모습은 1840년대 니느웨에서 발견된 산헤립 왕궁 벽의 라키쉬 부조를 통해서였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메르네프타 석비에서와 마 찬가지로 이민족에게 점령당하고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페트리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석비를 발견한지 80년이 지난 1976년 시카고 대학의 유르코(F.J. Yurco)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을 카르낙 신전 부조를 통해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발표는 니느웨 궁전의 부조보다 무 려 500년이나 앞선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학 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집트 테베의 카르낙 마을에는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을 모신 대신 전이 있는데 신전의 한 마당의 외벽에 메르네프타가 가나안의 네 세 력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조는 당시까지 람세스 2세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됐지만 왕의 이름을 자세 히 분석한 유르코는 그의 아들 메르네프타의 전투장면이 추가로 삽 입된 것을 확인하였다. 유르코는 ‘3200년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논문에서 메르네프타가 그의 비문에서 아쉬켈론, 게제 르, 야노암, 이스라엘을 정복했다고 언급한대로 실제로 신전 부조에 서도 모두 네 가지 장면의 전투가 등장한다고 밝혔다. 비록 이 부분에서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민족과 전투하는 생 - 75 -


생한 장면은 서기 5세기경 로마인들이 근처에 세워진 한 오벨리스크 를 로마로 운반하기 위해서 벽을 허무는 바람에 일부가 훼손됐지만 역사적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투장면에서는 세 도시와는 달리 성벽을 지닌 도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서기 전 1210년경 아직 도시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바닥 에 쓰러져 있는 이스라엘 용사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길다란 턱수염 을 길렀으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들은 아쉬켈론, 게제르, 야노암 사람들과 복장과 생김새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원주민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4) 미케네 토기와 블레셋 토기 이 시대 연대 추정의 시금석이 되는 대표적인 토기는 블레셋 양색 (bichrome) 토기이며 미케네 III시대에 생산된 토기류의 한 부류 (Myc.IIIC1b)인 것으로 밝혀졌다. 가나안의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 토기들과는 달리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무늬를 그리고 광택을 낸 고급 토기인 양색 토기는 블레셋 민족의 가나안 정착을 결정하는 단 서가 된다. 이집트 테베스(Thebes)의 메디낫트 하부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장례 신전 벽의 부조에는 삼각주 지역으로 침입해 들어간 블 레셋과 체케르 민족이 이집트 군대와 전투하는 장면이 그림과 함께 새겨져 있다. 따라서 서기전 1190년 이후에 블레셋이 가나안에 정착 하게 되었고, 이 연대가 곧 블레셋 양색 토기의 최고 상한연대 (terminus post quem)가 된다. (5) 목이음 항아리(collar rim jar)와 네 칸 집(the four-room house) 이스라엘 민족출현의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는 물이 부족한 중앙산악 지대에 정착한 사람들이 서기전 13세기에 고안해낸 물 저장용 대형 항아리로서 몸통과 아구리 부분을 연결하는 이음새가 마치 옷깃 같 - 76 -


다고 하여 이름 붙인 목이음 항아리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 원은 후기 청동기 II-철기 I 시대의 전환기(서기전 1250-1150)에 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시대에 모두 네 개의 칸으로 구성된 네 칸 집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원래 유목민들이 사용했던 천막의 기 초부분에서 발전된 형태로 추정된다. (6) 철기 I시대(서기전 1200-1000) 가나안의 주거분포 사사시대로도 표현되는 철기 I시대에 새로 이주해온 이스라엘 민족은 주로 중앙산악 지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서기전 1550년경 힉소스의 이집트 탈출의 여파로 가나안에 일대의 정치적 혼란이 야 기되면서 중앙산악 지대에 위치한 일련의 도시국가들이 대규모로 파 괴된 후 후기 청동기시대(서기전 1550-1200)에는 이 지역에 사람 들이 거의 살지 않게 되어 새로운 이주민들이 주거분포가 밀집된 해 안평야보다는 자연히 중앙 산악지대를 선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초 기의 정착은 세겜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들 이 서서히 남하하여 유다 지방까지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7) 수콧 평야: 이스라엘 민족의 고향?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모압 평지에서 요단강을 건 너 여리고 쪽으로 진입한 것으로 여호수아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1980년대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서기전 1200년경 세겜 지역으 로 이동한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요단 건너편의 얍복강 변인 숙곳 평야로 추정되기에 이르렀다. 서기전 1250-1200년 사이에 같은 종 류의 토기를 사용하는 일련의 사람들이 숙곳 지방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겜 골짜기에 정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8) 여호수아의 에발산 제단 1986년 8월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의 한 소강당에서 이스라엘 고고학자 제르탈(A.Zertal) 박사는 자신의 발굴을 토대로 세겜에 있 는 에발산 중턱에서 여호수아에 의해 건설된 제단을 발견했다는 사 - 77 -


실을 발표했다. 3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국제구약학회의 성경고고학 분과모임에서 제기된 이 폭탄선언은 곧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유럽 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로마 대학의 권위 있는 구약학자인 소진(A.Soggin) 교수는 강단으로 올라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 후 제르탈의 제단은 다름 아닌 근처의 농부들이 만든 망대라고 주장했다. 그의 너무나도 강한 어조 때문에 한동안 강의실이 술렁거려 더 이상 순서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80년부터 세겜을 중심으로 하는 므나세 지역의 철저한 고고학적 조사를 진행하던 제르탈은 해발 940미터 높이의 에발산 중턱에 위치 한 한 돌무더기를 주시했다. 돌이 많은 산지에서 포도밭이나 올리브 밭을 가꾸기 위해 치운 돌을 모아 놓은 많은 돌무더기들은 그리 이 상할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유난히 에발산의 것이 이 고고학자의 눈에 띈 이유는 바로 근처에 흩어진 구약시대의 토기조각들 때문이 었다. 성경고고학의 달력이라 일컫는 토기조각들은 그 지역이 곧 어 느 시대에 번창했던 주거지였는지를 시사해주기 때문에 주변과 구분 되지 않는 흙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유적지 조사에서 결정 적인 역할을 한다. 1982년부터 2년간에 걸친 발굴을 통해 이 돌무더기 아래에서 철기 I시대(서기전 1200-1000)에 건설된 제단 구조물이 발견됐다. 한 변의 길이가 8-9미터 정도의 직사각형의 제단은 벽의 두께가 1.4미 터나 되는 단단한 구조였다. 이 제단의 한 가운데 바닥에는 여러 개 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 2미터 정도의 원형 화로가 놓여있었다. 구약 시대의 다른 제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부터 제단위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있었다. 제단 위에서 짐승을 불에 사르는 제사를 지내기 위 해 제사장들이 올라가는 이 경사로는 길이가 7미터 폭이 1미터 정도 였다. 제단 주위로는 거룩한 장소임을 구분하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고 한쪽에는 출입구까지 만들어졌다. - 78 -


내부에 채워진 흙과 불에 탄 재 사이에는 여호수아 시대의 토기 조 각들과 동물들의 뼈가 많이 출토됐다. 짐승 뼈들에 대한 분석 결과 이들은 대부분 섭씨 400-600도 정도의 불에 태워졌고 소, 양, 염소, 사슴 등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사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레위 기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희생 제사물이다. 원래 희생 제사는 가축 의 도살권을 가진 제사장이 특정한 장소에서 가축을 잡은 후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잘라서 불에 굽는 행위인데 여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제의적인 요소가 첨가됨으로써 고대 종교의 중심적 인 행사로 정착됐다. 모세는 요단 건너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세 겜에 있는 에발산에 제단을 만들 것을 명령했고(신명기 27:4-8), 이 에 따라 여호수아는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들로 제단을 쌓았고 열두 지파를 절반으로 나누어 한 부류는 그리심 산 쪽으로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에발 산을 향하게 한 다음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차 례대로 낭독하였다(여호수아 8:30-35). 이 제단이 여호수아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발견된 토기류의 70퍼 센트를 차지하는 ‘목이음 항아리’, 즉 물이 부족한 산악지대의 이 스라엘 민족이 멀리 떨어진 샘으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긷 기 위해 대용량의 항아리가 필요했는데 너무 커서 몸통과 아구리를 분리해서 만든 다음 목 부분을 이은 것들이며 정착시대(서기전 1200-1000)의 특징적인 토기로 분류된다. 람세스 2세-3세 시대 (서기전 1279-1153)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양식의 스캐럽 도 장이 발견됐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민족적, 종교적 출발지는 예루살렘이라기보 다는 세겜이다.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세겜이었고 비록 출애굽 후 여리고를 먼저 점령했지만 아직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 - 79 -


지 않은 길갈을 제외한다면 첫 번째 종교적 중심지는 세겜의 에발산 제단이었다. 한편 이 제단을 발굴했던 제르탈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 리적 기원을 요단 건너편의 얍복강이 흐르는 숙곳 평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 나루터를 건너 파라(Farah) 골 짜기를 따라 세겜 분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9) 종교 중심지와 법궤의 이동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온 후 야훼의 상징인 법궤가 안치된 곳이 바로 종교적 중심지였다. 맨 처음 여리고 근처의 길갈에서 시작된 야훼 성소는 세겜의 에발산 제단, 실로의 야훼의 전 등으로 이동하다가 서기전 1050년경 에벤에셀(Eben-ezer) 전투에 게 블레셋 군대에 패하여 법궤가 전리품으로 탈취 당함으로써 그 막 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블레셋의 한 도시인 아쉬도드의 다곤 신전에 모셔진 법궤 때문에 재앙이 내리자 가드와 에크론을 거쳐 7개월 만 에 블레셋 민족은 다시 법궤를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려보냈다(삼상 5-6). 법궤는 한 동안 키리앗트 예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서기전 1000년경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윗은 잃어버렸던 야 훼의 상징인 법궤를 모셔온다. 법궤의 이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스 라엘의 중심지가 세겜으로부터 시작해서 남하했다는 사실은 철기 I시 대(서기전 1200-1000) 시대별로 주거지의 발달이 점점 남쪽으로 영향을 끼친 점에서도 입증된다.

6. 고대 가나안의 엘(El)신과 바알(Baal)신

88 월 밭갈 농 1 2 년 3 던

부가 보

그 곳은 고대 전부터

샴 Ras shamra 습끝 채 큼 막 무덤 팔 틴최 릿 원 원 크 번 원 후 건 애굽 암 Ⅱ 원

북 시리아의 해안 도시 라스

레스

재하다가 기

라(

한 고대

고의 도시 우가

전 14, 15세기에는

)에서

들을 발견했다.

이었다. 기 게

전 1360년 경에 큰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이다. 그 되어

족속과

의 라

세스

전 2000년

영했으나 기 다시 재

세의 지배를 받다가 기

- 80 -

전 12


세기 이

에는

전히 망해

버린

도시이다.

윗 분

이곳에서 발굴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하나는

알 신전, 하나는 다

곤 백

에서 2개의 신

신전) 사이에 있는 고대 제사장

의 집 도서관인데, 그곳에서 수 기

냈 벳 쓰 릿 벳 원 따져본즉

개의 점토판을 파

형태

전 14, 15세기의 것으로 쐐기 문자

다. 그것은

의 알파

으로

문서들이다. 이것은 역사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우가 데

우어(

H Bauer .

경에 나오는 히브리 알파 기

전 15세기에 어

전의 가나안의

흥 종

잠잠

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나

미 있는 것은 여

썼겠느냐 온 복 직

게 그토록 발달된 문자로 오경을

교를

최 엘 El

다. 그 근

알파

과 거의 같은 것으로 이제까지 모세가

불신하던 많은 비평가들을 록들 중에 가장

풀렸

) 교수에 의해

여진

수아가 가나안을 정

하기

실히 알게 해 주는 문서들이었다.

쓰 님 키 본 님 섬겼 엘 흘 좋 폭군 른 협박 노 ; Uranus 쫓 죽 딸 벤잔 난 또 겸누 셋씩 또 녀 혹 온 람 버 린 짓종 통 참 님 호 악 선 왜곡 킨 례 고대 가나안의 가리

는 '

(

고의 신은 놀랍게도 구

)' 신으로

신들을

아내고 자기 아들을

이고

전하고

Lord 버 엘

그는 아

인 하나

음이

리기를

아하는

)를

두고

의 아

하여

를 유

하나

의 성

와 속성을

알'인데 그

은 서북 셈족어

노릇 쪽 먼 높 산 Baal-Shamem 루 벨 키 표 틀림 바 높 산

를 이어 '북

하늘

을 한다.

를 두었다고 했다. 그를 '하늘의 주'(

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 -

한 기

이다.

' 신의 아들 '

' 신의

다.

지'로, 신들의 조상으로 불

)로서 그는 가나안 신들을 다스리는 왕

지 '

인한 신으로 나타

이를

교를

가나안의 주신은 ' 로 '주'(

을 목

다. 그러면서도 '사

다. 사단은 거

'은 피

하고 그 부신(우라

한 부도덕하여 부인

사도 나

성경에

래는 그들도 한 하나

드러났다. 그러나 가나안의 주신인 ' 으로 다

을 가리

없다(사 14 12 14). 그리고 지방마다 지방

- 81 -

'에 보

)라고 부르

현임에

알이 있어

이 에


서 제사했다. 이 지방 비와

폭풍

알 위에

엘 질투 8:

전 9세기 북방 이스라

세라 여신이 아나드를 으로

고의

의 신'으로서 그의 목소리는 천

고 했다. 그의 부인은 그의 기

장한다(왕상 1

바 둥

알이 있었는데, 그는 '

칠 때 하늘에서 들

이이기도 한 아나드(

에서는

하여

래 '

Anath

)였는데

' 신의 부인이었던 아

으로 제치고 그

자리에 부인

19).

7. 가나안의 3대 여신

롯 Asherah 잔

가나안의 3대 여신들은 아나드, 아세라, 아스다

이다. 아나드는

바 누 롯 Astarte Ashtaroth 란 특징 종 습 준 바 끈질 싸 sex 쟁 식 낳 산 질 악 람 죽 쟁 쿠 슈 Qudshu 별명 붙 녀 룩 뜻 매춘 징 샴 식 매춘 섬 식 쁘 창 男娼; Gadesh 할 : ; : : : 또 창 娼妓; Gadeshah 할 : 8; 호 : 섬 종 식 용 매춘 행 믿 최악 락 예 매춘 행 뱀 숭 물 바 홍 돔 죄악 복 님 엘백 손 알신의

이와 부인으로 나타나는데 아세라(

(

,

)과 함께 음

지어진 가나안

교의 모

)과 전

은 포

다. 아나드와 아세라는 서로

기게

운다. 이 여신들은 모두 성

의 여신들로 자

하여 사

와 아세라는 ' 거

한 자'라는

)라는

기(

기는

려운

', '

부'로서 부도덕한

라에서 발굴된 금걸이 장

(

기는 의

)들이 역

)도 역

교 의

의 타

였다. 이는 '처

에서

에서 그를 기

을 했는데, 그들을

왕상 14 24, 15 12, 22 46)이라고 불렀다.

의 내

을 했다(신 23 1

이 부도덕한

상이었다. 그들의

하며 아이들을 제 고모라의

이 라스

의 신이면서

의 신도 된다. 아나드

부'인 이 여신들을

게 하기 위하여 남

게 하는 다

이다. 그러면서도 '신성한

나왔다. '신성한

'미동'(신 23 17

을 많이

이기도 하는 전

'(

일을 했다. 이들의 상

인성으로

을 보여

알신의 부인이 되려고

(

과 부도덕과

), 아스다

의 반

이었다. 하나

빌려 그들을 심판한 것이다.

- 82 -

4 14). 그들

위였다.

배는

치는 것이었다.

한 여

위와

기 어

수 전 세상과 소

께서 이스라

성의

과 을


▣ 과 제 ▣ 1. 여리고성에 대하여 쓰라 2.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정착에 관한 가설들을 쓰라 3.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과정을 쓰라 4. 가나안의 3대 여신을 쓰라.

- 83 -


제5장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1. 사사 시대의 배도 여

때까지 라

엘 "

다.

죽 후

수아가

부터 사울이 이스라

무질 므 람 통

400년간은

에 왕이 없으

로 사

렸 삿 : 다(

솔 철병 이

때문에

: - 8; 삼

17 16 1

거 900승을 이

에서는 기

드보라와

이스라

바락

를 다

들이

엘 철병

고 이스라 기와

당했다(사

기를 불레

님 삿 :

이 하나

하였

을 20년간 다스 거를 가지고 있

:

:;

1 19,

4 3

과 기

에서 발굴하였으나

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연

5 19). 1937년 동

양 층

아래서 200개 정도의 아름

합군 군 의

연구소 발굴단은

전 12세기에 속하는 지

루 찾 냈

함께 궁전 마 들을

은 대로

이스

수 전

레스

전 1000년 이전의 것은 출토된 것이 없다.

도에서 대파했다(

식품 루

상 13 19 22). 고고학에서 밝혀진 발굴

를 발굴하여 기

끌 철

셋 람 엘 압 : 철 셋

1100년경에 속하는 많은

이 각기 그 소견에

선택될 " 행

치하였다.

4 3). 당시 불레

었기

의 초대 왕으로

서와 배도의 시대였다. 이 기간은

당시에는 사사들이

가나안인 하

므깃

므 도

에서 대 화제의 흔적과

게 조각된 상아와 금

할례

받은 포로

관계를

해 주고

다. 그 중 하나는 가나안 왕이

는 조각이 그려

대를

있어 당시의 이스라

있다.

2. 사울 왕 시대(1050-1011 BC) 이스라

의 초대 왕은 사울이다. 그의 집은

기브아에 있었다( 기의

첫 번째

:

:

: -

예루살렘 쪽 : 얼 북

에 있는

상 15 24, 10 26, 22 6, 23 19). 그는 이곳을 자

수도로 정했다. 1922년 1933년 사이에

- 84 -

브라이트


(

W F Albright 박 곽 찾 냈 크 곽 砲郭 형식 건물 접 용 .

.

)

벽은 포

다. 그것은

(

)

×

기가 57 52 미터의 성

중에 제일 큰 방은 3.7

곳은 왕의

견실로 사

×8

술 빠짐 에

1906년부터 보가

형 술

즈코

께 대한 불

?

는 '

죽 늙

상 2

러(

: ; 8:

상 16 23

1

은 사

10, 11).

한 여자를 만나 강신

7 25). 고대에 신

)는 고대

접술

이 유

은 여자가

을 가진

은 여자들이 이

다. 사울이 만났던

로 이 사실이 입

지방의 가나안 사

의 영'의

족속의 수도였던

되었다. 설

전 2000여년 경 이미 마

되고 있었는데 주로

은 사

오는데

삼 접

돌의 신

이를 발굴했는데 거기서

윙클 Hugo Winchler 헷 바 증 원 술 접 늙 맡 원 릿 람 접 람 뜻 용 샴 런 훈 베풀 엔 무녀 삼 8: 술

1400년 경의 우가

순종 엔 삼 8: -

문자로 된 기록에 의하면 기 이 시

×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다

으로 망하게 된다(

하고 있었는가

외곽

로서

미터 되는 방이었는데 그

울 왕을 위하여 수금을 타던 곳일 것이다(

으로 된 작은

으로 지어졌는데 벽 두께가 2.7 3.5 미터였

다. 그

사울은 하나

층 채

사가 이 곳을 발굴했다. 그는 2

아서 했다. 기

들 사이에는 '신

어가 라스

영을 가지고 교

돌의

(

과 신

상 2

한 자'

라 문서에서 나

7)도 강신

었다는 것이

사였다.

3. 다윗 왕 시대(1011-971 BC)

윗 예루살렘 다

후 복

이 왕이 된 을 정

제일

먼저

한 일은 여부스 족속이 지

하여 수도로 정한 일이다.

피트의 고지에 위치하였으며 천연

무 빼 낸채 난공 락 새 온 윗 엘백 빼 " 올 뜻 무엇 뜻 예루살렘 아

도 불

이 성을

앗을 엄두를 못

의 요

석을 이

앗을 때

다. 19세기까지 이

이 밝혀졌고 당시

하여 성벽을 쌓아

살 온 아

람 예루살렘 삼 : 런 윗 " 삼 :8 령

성을 놀려대었다(

수구로

고 있는

은 해발 2500

400년간이나 여부스 인들이

였다. 그래서 여부스 사

과 이스라

예루살렘 용

라가서 (

들은

하 5 6). 그

하 5

) 점

을 치러

데 다

하라고 하였

인지 알지 못했다. 고고학에 의해 이

의 급수 시설을 알게 되었다.

- 85 -


8

공병

렌 Charles Warren 물공 예루살렘 찾 공 윗 예루살렘 공격 산 벨 예루살렘 바깥 접 골짜 솟 샘 샘 혼 : - ; : 엔 겔 :;삼 : 1 67년경 영국의 젊은 가나안 지방의 는데 성

(

)이 고대

급 제도를 연구 중

의 수로 시설을

했다. 다

장교 와

언덕)에 위치한

에서

1 40 45

렌 벌써

하던 당시의 이

성은

개의

대하 32 30)과

에 연

가지고

해 있는 두

있었다.

(수 15 1

지(오

(왕상

하 17 13)이다.

결 예루살렘 람 원 밖 물 길 물 길 특 밖 혼샘 샘 또 녀샘 쪽 뚫 쪽 쪽 물 옛 결 켜놓 뚫 직 박 물 길 바깥 샘 흙 막 무 놓 렌 갱 Warren s Shaft 른 윗 예루살렘 할 무 압 디 듣 올 침 공 므 복 예루살렘 빼 삼 :와

발굴한

들은

러 나가지 않고도

수도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성 는 처

굴을 이

어(수

을 수 있는

굴) 그 위에서 두레

동굴

을 포위

(성 마리아

으로

입하는데 성

앗아 수도로 정한 것이다(

아서 아

-

윗 확

아내어 그 위치와 구조를

도 모르게

)이라고 부

사 중의 하나인 요

고 이리로 기어

로 400년간이나 정

1923 1925년의 발굴에서 다

을 수 있게 했다.

'

때 그의

으로 수평으로

고 45피트의 굴을

(

서 이 급수로에 대한 정보를 하

으로

은 입구를 돌과 의 수

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동굴에다 연

았다. 이 수로를 와

다. 다

2000여년전부터

에 있는 기

24피트 북

을 성 안에 있는

그리고 해

이라고도 함)이 있는 동굴에서 성 안

어 36피트 서

위로

라가 성 안

치 못했던

하 5 6 10)

이 쌓았다는 다

성(

:

하 5 9)을

인했다.

4. 솔로몬 왕 시대(971-931 BC)

엘 통 솔 몬 버 존 번 키

이스라

속된다. 보

하고

솔 몬 약 윗 무력 확 킨 변 맹 체결

일 왕국 시대는 사울부터

은 아

영시

지 다

기 위해 주

으로

나라들과 동

- 86 -

까지

120년간 계

장시

영토를 계속

했다.


맹 굳 을

주를 왕비로

).

은 국토방위를 위해 기마

4 2). 기

아들여 아내가 700

: -8 솔 몬 : 병 예루살렘 : 상 11 1

결혼 맹 맺 명 첩

게 하기 위하여

, 하

이었고

병 양 을

성하고

,

아내었다. 하

에서 발굴된 것도 다

솔 몬 건물 므깃 솔 몬 행 병 용할 외양 말 둥 말뚝 솔 몬 무 8; : : - ; : 온 Nelson Gleuck 8돔땅 솔 몬 광 채 솔 몬 공 송 용광 풍 련 련 술 휴 건축 양식 증 조가 같은 로

의 제5

이다.

1

9 13,

10 10 22 미국에

14,

에서

흔하게

유니

로 여기에서 구리 굴된

글류크 풍

대학의

20년을

재위 4년

이 입

석을

으로 보

수 있다.

;

다.

:

대하 4 17,

기록되어

있다(왕상

을 탐사하

을 여러 개

았다.

에서 발

소에서 제

하여

하였다.

를 달구었고,

다 남은 구리와 니

아 기

자들과

하였다(왕상 7 13, 14).

유다의 남

450마리

넬슨 글류크 편 광산 찾 바 온 벨 련 련 용 풀무 쓰 철 광 페 키 술 :

소의 여러 시설들은

임을

학장이었던

을 이

장치의 폐허의 부근에는

인 기

굴되었다. 그것은 에시

돔 쪽 쪽 철광 찾 냈 솔 몬 건축 냈 째 원

부한

1940년 사이에 요단 동

로는 북동

교수는 에

관 장치가 구비된 제

석까지 나왔다. 이 제 의 기

곳의

다고

당시의 구리

석이

여기에서 발굴된 도가니, 제

진장으로(왕상 7 46, 47

) 교수가 193

다가 에

지에 두었다(왕상

물통 볼 : 썼

대하 1 15).

(

은 구리를

히브리

렀다(왕상

간을 발굴해 내었다. 그 폐허에

27) 금, 은을

있는

도는 13에이커나 되는 큰 성으

수 있는

을 메어 두었던 돌기

성경에는

말 길 :

정 구역의 중심지였다. 그 곳에서

거 150승을 수

이었다(왕

솔 몬 건축 건물 른 건물 양식

고고학의 발굴로 위에 언급된 여러 곳에서

거가 1400대(왕상 10 26)나 되었다.

9 15 19).

이 300

병 솔 므깃 등 략 충

이 1만 2천이요

이것들을

었다. 이방 여러 나라의

지방인

은 그의

네 통

지방에

치 기간의

반인

게브 사

다. 13년 동안은 그의 궁전을 지었고 그의

전 966년부터 7년간은

- 87 -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다


: 8 예루살렘 엘 체 페 키 람 술 낫 Tell Tainat 페 키 솔 몬 람 솔 몬 맡 증 : ; : 솔 몬 양 막 형 분 규빗 cm 산 길 높 : 건축 약 람 명 람 담 (왕상 6 37, 3 ). 아니고

1936년

성전은 이스라

아 사

타이

들의 설계와 기

(

의 성전을

2 13, 14 로

성전의 모

아 시리아의 성전

은 성

을 50

과 15만

솔 몬 죽

의 모

로 계

과 같고 부

하면 성전의

정도의 가나안 사

BC 통

자(931

)

살렘

시자인 시

궁과 성전의 보

이 기록은 성경

애굽

이는 30미터, 3만

들이 가

했다.

일 왕국 시대는

세가

레스

거기에는 시

Nemareth

하였다. 그는

과 금방

도 가

에 그가 세운

것이

므깃

다. 시

:; 준높 예루살렘

세(대하 12 2

)에게 만들어

틀림

대되

10미터,

의 이스라

막 베냐

나고 나라는 두 토

왕이

이 쌓아 두었던 왕

도의 전승 기

새긴 명 비

의 제22

라 와서

다(대하 12 1 9

신전의 벽돌에

앗았다고

삭Ⅰ

다. 이것은 시

일대에 쳐

왕상 14 25).

비에서 발견되

에서도 나왔다. 그

의 미이라가 1939년

니스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금을 입

자들

이 되고 유다 지파와

들을

의 카르

는 150성을

(

무섭 애굽 삭Ⅰ 팔 틴 올 예루 읍 노략 솔 몬 물 패 져갔 :-; :

과 여러 성

었고 상

을 두 배로

지파는 남방 유다가 되었다. 5년이 지나기

왕조의

하는 것이다(대하

에는

이 났다. 북방 10지파는 북방 이스라

이 보

아 지었다는 사실을 입

이 15미터였다(왕상 6 2). 성전

원 건축 양식 낸 술

성전들과

왕상 7 13, 14).

었다.

발굴된

의 성전과 같다. 이 사실은 두로 왕 히

건축 양식

로 지어졌음이 드러났다.

)에서

1200 900년 사이에 지어진

애굽

힌 또 : 네 렛 쯤 팔 쌍 져온솔 몬 돌관 속에 있었다.

왕상 14 25)가 자기 아들

이 3인치 에서 가

없다.

5. 분열 왕국 시대 - 88 -

의 타

의 금

찌 한

도 나왔

의 금으로 만


(1) 북방 이스라 오

력 등외

므 엘 룩

과 오

리는 북방 이스라

가장 강 아

리 왕조

의 6대 왕이다. 그는 북방 이스라

한 왕조를 이

였다. 그는 그 때까지 사 서 사서

과 오

리의

지 않던 사마리아

:

수도로 정했다(왕상 16 24). 하

사마리아 폐허 발굴 없다는

람 살

엘 " 므 바

쳐 앗시리

이라고 하

을 세

람 살 이

에게

드 대학의 발굴 팀의

리 궁전의 기초 이상 더 오

거로 보아 그 전에 사

왕 중

떨 땅" 산 멜

하였다. 그는 국위를 세계에

국이 당대 역사에는 이스라

랜 증

지 않던 곳임이 입

것이 되었

다.

편 력 므 난 공 바 압 뒷 침 강

한 오

지 엄청 모

리는 모

을 정

하여 아들인 7대 왕 아

:

치게 했다(왕하 3 4). 이 사실은 아

때까

당시의

왕이었던 메사가 세운 비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어 성경

의 역사성을

(2) 메사 왕의 모

8 8 8월 쪽

1 6 년 해 동

19일

하고 있다.

압 독

석 일의 의료

선 클 압 원 교사인

12마일 지점에 있는 모

금의 다반)의 폐허에서

은 현

무암

F A Klein 디본 cm cm

라인( .

.

)이 사

지대이며 성경의

이 1.2미터, 넓이 60

, 두께 35

(지

되는

을 발견하였다.

합 8 -8 BC 압 : 런 용 " 압 디본 람 버 압 렸 버 후 린 … 엘 므 압 억압 후 압 누 말 렇 말 원 엘 … 말 느 엘 빼 이 비석은 이스라 모

의 7대 왕인 아

( 74

)과 같은 시대의

왕이었던 메사가 세운 것이었다(왕하 3 4, 5). 거기에는 이

이 적혀 있었다.

메사이다. 나의 아

지 을

에 내가 다스

나는 그모스의 아들이며 모 지가 30년 이상 모

이스라

왕 오

왕인

을 다스

고 나의 아

리가 여러 날 동안 모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이 그를 이어 왕이 된

도 '나도 모

르리라'고

했다. 내 시대에 그가 그

지만 나는 그와 그의 집을 이기고 영 다

53

그모스가 내게

하기를 '가라

- 89 -

히 이스라

보를 이스라

그 했

을 망하게 했

에게서

앗아


라.' 그래서 나는

녀 종 바쳤 … " : ; : 고 남

3 4, 5

들 모두 7000

벨 돈 엣바 엘 퍼뜨

은 그의 부인 이세

고 하나

은 시

뚜렷

님 선 의

많은

딸 바 죽

리고

연구소 주관 하에 시

알의

지자들을 거의

시대의 지

엘 멸

이 입

그것을

타 그모스에게

한 것이다(왕하

왕 가운데 가장

로서 시집

알과 아세라

때 가

지자

져온 바 8 명 50

알과

을 두

였다.

므깃 냈 린 숭 얼

된 사마리아 부근의

에서 당대의 아스다

물 바 져죽 바 로

과 함께 이스라

서는 이 신전의 제

담긴

싸워 슈 증

을 쳐부수고 이를 이

이 사실은 성경의 기록을

아세라를 이스라

양 합

벽부터 정오까지

의 상아궁과 북방 이스라

다. 이세

1 1).

(3) 아 아

.

에 가서

아리를 발견했다.

도 발굴에서

신전을 파

다. 그 부근에

임을 당한 어

알과 아세라

아이들의

배가

마나

뼈 끔찍

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190

8-

1910년에 걸쳐 사마리아가 하

대학, 영국 고고학 아

지 오

합 람군

다. 아 아

회등

드 대학,

예루살렘

의 히브리

의 주관 하에 발굴되었다. 거기에서 아

: 합 병 묻 병 씻

리가 처음 쌓은 왕궁의 기초(왕상 22 39)가 발굴되었

과 여로보

대와

암Ⅱ

세가

확 후

장한 궁전과, 아

우다가 전사한

그의 피

:8

거를 타고

거를

었다는

사마리아 연못도 발견했다(왕상 22 3 ).

-

의 상아궁의 진상이 1931 1933년 그리고 1935년 이

:

계속된

사마리아 발굴에서 밝혀졌다(왕상 22 39). 상아 궁은 상아를 조각 해서 벽장

의 타일처럼 벽에

상아 궁에서 발굴된

8 M E L Malawan

1 45년 (

. . .

레이어드가

였음이 밝혀졌다. 그

어진 상아 조각

파내고

근인

) 교수가 팠던 니

- 90 -

품 꼭 과

데 아

같은 상아 조각

1957년

므롯

(성경의

후 갈

해서

합 품

의 이

말 완 라

라로 앗시리아


의 초기 수도)의 앗시리아 궁전에서 나

그 이유는 한 때 아

의 상아궁의 벽에

전 722년 이스라

냥버 또 완

들을 그 다.

합 엘

이 망

리고 가서

최 므롯

것과

사한 것이다.

어 있던 상아 조각

때 앗시리아가

것이

에 있는 앗시리아 왕궁의 벽에

때 정

의 상아 궁 발굴 때에 화장

색 담 합 움푹

하는

을 수 있는 작은

떼 갔

한 국가에서 다시

과 화장

:

을 배

합할 검

다.

썼 접 빨

정, 초록,

이진 곳이 있었고 가운데는 이것들을

파인 곳이 있었다. 거기에는 아

도 불그스름한

이 남아 있었다.

암 Ⅱ c -c 바친 편 명 바 섞 즉 바 므 바 갈 바 등 겔 " Egeliou " 뜻 벧엘 섬긴 말 준 : - ; 죄" :

사마리아 궁전 발굴에서는 이스라

BC 의

) 때부터

왕 여로보

( .793

성들이 왕궁 곳간에 세금으로

납 쓰 바 바 바 또 른 " " 호 송 애굽 송 : " 암

아비 다.

세 문서에

알,

단에

인 인

알사알,

그 의미가

알라,

문서에는

와는

의 신인

15 34). 이것은

8

알사

리오 (

여로보

것을

어 있었다.

, 메리

)라는 이름도 나왔는데

아지 라는 우스운

아지를

으로 발굴되기도

알 이름이

오,

.753

기름과 포도주

세 지불 문서가 10여 개의 히브리 도기 파

했다. 이

이다. 그들이

다(왕상 12 25 33

(왕상 13 33)이다.

Henry Layard 므롯 살 셀 Ⅲ 8 -8 BC 흑색 첨 첨 살 셀 엘등팔 틴 복 공 등 림 겼 런 예후 번째 엎 공 바 습 선명

1 45년 영국인 레이어드( 시리아왕

만에

이곳에서

는 일

)가 니

세( 59

24

레스

단에

드리어 조

- 91 -

비석에서

나라들을 정

그의 승리를 기록하고 그

가 두

을 발굴하다 앗

)의 궁전을 발견했다. 그는

비를 발견했다. 이 방

는 시리아와 이스라

시와 조그마한 석함이 나왔다(왕하 9 30). 거기에는 강

내어 부서진 것

초의 발굴에서 그 조각들이 나

전한 것은 니

것이다. 앗시리아가 망

으로 남 을

만에

하고 조

다. 그

치는 모

3세

을 받

데 이곳에

하게


바친 물건

부조되어 있고

예후 열 :- : -

황 명 물 : -

과 상

왕기의 주요 인

-

이 쐐기 문자로

: ;

이다(왕하 9 20

쓰 : ;

여 있다.

왕상 19 16

왕하

9 1 10, 9 11 26, 30 37, 10 11 31).

이 방

비의

리아)왕 하사 사가

을 정

: 8 -c 8 예루살렘

에는 앗시리아가 기

하고 중한

지 받은

19 15)였고

42

원 8 람 복 벌 무 공 물렸 엘 엘 엘 람 벤 닷 8: - ; 후 8: 엘 c 올뿐 침공 협 : 8 아래 부

여 있다. 이 하사

것을

맨 엘

된(왕하

국 함

포로가 되어

되었다.

14,

만에

셀Ⅴ

물 곤Ⅱ 코 밧 른

다. 역사에서 실제 인

( . .

)에 의하여

적을 쓴 비문 가운데 던 사마리아 사

또 코

르사

에서

불리는 기록에는 27,290

7 13

하사

이다( . 하여

:-8 른 곤Ⅱ 잔 살 든

세(왕하 17 7 1 )에

람 "

"

나의

27,290

발굴된

사르

인하게

세(사

해당하

로 취급 받지 못하고 오

8

프랑

세의 궁전이 1 43년

르사

에서 그의 석고로 된 부조와 많은 다

업 살

15)

왕이

더러 한 때 유다를

성은 가장

성경에만(사 20 1)나와 있던 사르 사

다는 기

리사에 의해 아

탈자로 앗시리아의 왕위에 오

20 1)에게

(시

하였다(왕하 12 17, 1 ).

의 수도 사마리아가

게 포위된

41년 아

2세의 고급 궁중 관리(왕하

왕이

엘 후찬 : 결 락 갔 : 람 따 P E Botta

북방 이스라

거운 조

리야와

. 05). 그는 성경에 계속 나 까지 위

직 스

에서 발굴되었다. 그 곳

기록들이 나왔는데 그의

린첫 "

치 시작, 다스

을 데리고

'전시비문'(

해에

거기에

났다 고 기록되어 있다.

Display Inscription 워싸 빼 살

나는 사마리아를 에

)이라고

앗아 거기서

거민을 데려갔다. 그들 가운데서 50대의 병거를 모아들

였고 다른 사람들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고 나의 관리들을 그들 위에 두어 그들에게 이전 왕의 조공을 부과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어 성경의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왕하 17:5, 24). 북방 이스라엘은 19대 호세아 왕 9년(호 14:2, 3) 앗시리아의 포위 - 92 -


3년 만에 멸망했다. "북방 왕국에 내린 파멸은 하늘에서 직접 내린 심판이었다. 앗시리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신 단순한 도구였다".

(4) 유다 왕국과 히스기야 왕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이 앗시리아에게 포위당했을 경우 성 안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수로 공사를 했다. "히스기야가 또 기 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 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 였다"(왕하 20:20; 대하 32:30). 히스기야는 성 밖의 기혼샘과 성 안의 낮은 실로암 못을 잇기 위하여 굳은 바위를 양쪽에서 지하로 뚫어 길이 1,749피트(약 530 미터), 넓이 2피트(60cm), 높이 5-15피트(1,5-4,5m)의 지하 동굴을 뚫어 실로암 연못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 실로암 연못은 지금도 여전히 물이 나오며, 예수님께서도 지적하신 못이다(요 9:7; 눅 13:4). 1880년 실로암 연못에서 물장난하던 어떤 소년이 우연히 연못 입구 에서 19피트쯤 안으로 들어간 이 동굴 입구의 벽에서 아름다운 고문 체의 히브리어로 쓰여진 6줄의 비문을 발견했다. 그것은 터널이 맞뚫 리던 날의 감격을 쓴 것이다. 세아스(A. H. Sayce) 교수에 의해 아 래와 같이 판독되었다. 굴 뚫는 일이 마쳐졌다. 이런 방법으로 이 굴이 뚫린 것이다. 석공들 이 반대 방향에서 도끼로 그의 동료 석공들이 있는 쪽으로 뚫고 있 는 동안, 뚫자면 아직도 3규빗이나 더 남아 있었을 때 상대편을 부르 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그 바위 우편에 갈라진 틈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이 굴이 뚫리도록 석공들이 서로 서로를 향하여 도끼와 도끼 를 마주 대고 쪼아댔다. 그러자 도끼가 서로 마주쳐 물이 (기혼)샘에 서부터 (실로암)못까지 흘렀다. 길이는 1200규빗, 그리고 석공들의 머리 위의 바위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후에 터키 정부는 이 비문 을 그 벽에서 쪼아내다가 이스탄불 박물관 창고에 방치하여 잃어졌

- 93 -


던 것을 앤드류스 대학교의 혼(Siegfried H. Horn) 박사의 감정으로 다시 진열되었다. (5) 산헤립의 유다 침공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Ⅱ세(722-705 BC)는 군인 출신으로 왕위를 찬탈한

자이다.

그가

전쟁터에서

죽자

그의

아들

산헤립

(Sennacheribe; 705-681 BC)이 왕이 되었다. 그는 기원전 701년 유다의 반역을 다스리고 팔레스틴의 다른 나라들의 탈선을 막기 위 해

대군을

거느리고

쳐내려

왔다(왕하

18:13-19:36;

대하

32:1-21; 사 36, 37장). 산헤립은 제3차 원정에서 유다를 침공한 사실을 그림과 글로 남겼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궁전에서 6각으로 된 테일러의 프리즘이 라고 부르는 점토각주를 발굴했다. 이것은 산헤립의 정복 활동을 기 록해 놓은 전승 기념비이다. 이 6각주의 각주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부를 소개하면, "유대인으로 나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은 히스기야에 관하여는 내가 그의 강한 성벽을 가진 도시들 중 46개와 그들 이웃의 수많은 작은 도시들을…(중략) 포위하고 점령했다. 200,150명의 남녀노소와 말과 노새 당나귀와 낙타와 가축과 양들을 수도 없이 거기서 끌어내었고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자신에 관하여는 내가 그를 새장에 갇힌 새같 이 그 왕도인 예루살렘 안에 가둬 두었다…(중략) 나는 이전의 조공 에 부과해서 그에게 매년의 지불 즉 나의 주를 위한 선물 형태로 세 금을 물렸다…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에 부과해서 보석과 안티모 니 진주…모든 종류의 값진 보물과 그의 딸들, 그의 처첩, 그의 남녀 음악인들을 나의 왕도 니느웨 나에게로 그것들을 가져 왔다." 이

기록은

성경의

기록과

빈틈없이

어울리는

내용이다(왕하

18:13-19:37).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의 첫 공격 시 산헤립의 요구대 로 금 30달란트를 바쳤다. 단지 은의 중량이 다른데 아마 그것은 다 른 노략물의 값을 은으로 환산한 것을 가산한 것 같다.

- 94 -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만 했지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 았다. 그는 포위를 풀고 즉시 물러갔는데 이유는 기록하지 않았다.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터스는 들쥐가 해를 입혀 흑사병(학자들은 선 (腺)페스트라고 함)이 일어난 것으로 쓰여 있다. 성경은 그날 밤 한 천사가 내려와 18만 5천의 앗시리아 군사를 죽였다(왕하 19:35; 사 37:36; 대하 32:21)고 하였다. 산헤립은 결국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살해당하고 다른 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되었다. 에살핫돈이 기록한 비문에는 그 사실 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니사누 달 축일에 내가 왕궁에 기쁨으로 입 궁하였다. 그 곳은 두려운 장소로 거기에 왕들의 운명이 머무르고 있 다. 나의 형들 위에 견고한 결정이 임했다. 그들은 신들을 버리고 악 을 꾀하여 난폭한 짓을 했다. 왕위를 얻기 위하여 자기 아버지 산헤 립을 죽였다.”성경의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된다(왕하 19:37; 사 32:38). 유다가 앗시리아에 포위되어 가장 어려운 때에 유다 백성들의 일부 는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하는 퇴폐풍조에 빠져 있었다. 당시의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사실을 책망했다(사 22:9-14). 특히 히스 기야의 국내 대신으로 재무 대신 격인 셉나가 자신을 위해 높은 곳 에 호화로운 바위 무덤을 팠다(왕하 18:18, 26, 37, 19:2). 이것이 당시에는 큰 비난을 받았다. 1870년

프랑스

영사인

클레르

몽뜨

까노(Charles

Clermont

Ganneau)가 힐완 골짜기 한 바위 무덤의 입구에서 두 개의 무덤 돌 을 발굴하였다. 그 중 하나인 상인방석에 적힌 히브리말이 1953년 아비가드(Avigad)에 의해 판독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 다. "이것이 국내 대신 셉나의 무덤이다. 여기에는 은도 없고 금도 없고

- 95 -


단지 그의 뼈와 그와 함께 그의 종, 부인 뼈만 있다. 이것을 열기 위 해 부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 참으로 이사야서의 기별과 경고가 생생하게 입증된 것이다.

6. 바벨론 포로와 귀환시대 (1) 바벨론 포로 바벨론은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기원전 605년에 제1차포로(단 1:1-13), 기원전 597년 3월 16일에 제2차 포로로 일만 명을 잡아 갔다(왕하 24:10-16; 대하 36:9, 10; 겔 1:1-3). 바벨론 성의 정문인 이슈타 게이트에서 가까운 행정관에서 수많은 점토판이 발굴되었다. 그 중에는 외국 포로들의 급식 문서가 나왔다. 그 점토판 중에는 기원전 597년 제2차포로 때 잡혀간 유다 왕 여호 야긴과 그의 5명의 아들들과 다른 8명의 유대인 이름이 적혀 있어 성경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왕하 25:27-30; 렘 52:31-34). 바벨론 연대기가 1956년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점토판 중에 서 발견되어 판독되었다. 이 기록에는 바벨론이 애굽과 앗시리아 패 잔병의 연합군과 싸운 칼케미슈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원전 605년에 느브갓네살이 아버지 나보포랏살의 급서한 후 왕위에 오른 사실도 적혀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절에는 기원전 597년 3월 16일 예루살렘이 두 번 째로 바벨론에 함락된 사실과 유다왕 여호야긴과 에스겔 등 1만여명 의 포로들이 바벨론에 잡혀가고 시드기야를 왕으로 인명한 사실이 적여 있다. 이것은 유다 역사의 최후를 밝혀주는 귀한 사료가 된다 (왕하 24:10-17; 대하 36:10). 그런데 '여호와 증인'들은 70년 포로 기간을 계산함에 있어서, 제1차 포로 석방 령이 내린 고레스 원년, 즉 기원전 537년에서 70년을 소

- 96 -


급하여 기원전 607년을 산출한다. 그리고 기원전 607년 10월 1일을 유대 나라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잡혀감으로써 유다 역사가 끝 나고 이 해부터 '이방인의 때'가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해당도 안 되 는 다니엘 4장(단 4:31, 32, 16)의 '일곱 때'를 360×7=2,520으로 계산하여 기원전 607년에서 2520년이 지난 1914년 10월 1일에 '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예수께서 공중 재림 하시고 '여호와 왕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56년 판독 출판된 앞의 바벨론 연대기에는 분명히 기원전 597년 3월 16일에 느브갓네살이 시드기야를 유다 왕으로 임명했다 고 쓰여 있다. 성경 역대하 36장 11절에는 시드기야가 11년간을 재 위해 있다가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갔다. 유다가 멸망된 기록에 의하여 보더라도 에스겔 21장 25-27절의 사건은 기원전 607년이 아니라 기원전 597-11=586년으로서, 그들의 기산연대 계산이 역사에 무근 하고 성경 기록에도 어긋난 것이 성서 고고학으로 판명된 것이다. 예루살렘은 포위 2년 가까이 계속되다가 시드기야 왕 제11년 기원전 586년 오늘날 8월 15일 또는 18일(왕하 25:8-12; 렘 52:12-15) 에 함락되었다. (2) 유다의 멸망과 회복 기원전 605년 다니엘과 다른 왕족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면서 70 년간의 포로 시대는 시작되었다(렘 29:10; 사 44:26-28; 45:1-7, 40:1-11). 기원전 537년 가을 페르샤 왕 고레스가 제 1차 석방령 을 내림으로(스 1:1-4) 포로 생활의 역사는 끝난다. 하나님께서 이 포로 기간 동안 유다 백성을 위하여 본국에는 예레미 야 선지자를 남겨 두셨고(626-586 BC 이후까지 40년), 바벨론 현 지에는 에스겔 선지자(593-571 BC까지 약 22년), 바벨론 궁중에 는 선지자 다니엘(BC 605부터 70년간 봉사)을 두셔서 백성을 위로 하며 하나님의 기별을 전달하게 하셨다.

- 97 -


(3) 바벨론 성 발굴 신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벨론 성이 현대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60마일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1899년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간 로버트 콜더베이 (Robert Koldewey)교수는 독일 동방학회의 사업으로 바벨론 성을 발굴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13:20-21, 14:1; 렘 51:37) 지금 은 폐허로 남아 있다. "오직 들짐승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 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 이며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사 13:21, 22) 발굴 결과 바벨론 성의 규모는 내외 전장(全長)이 15마일 정도이고, 느부갓네살 이후의 전 도성의 둘레는 하궁에서 옛 왕궁까지 유프라 테스강 전면을 포함해서 10마일 정도였다. 강 동편의 내성을 두른 2 중 성벽은 바깥 것이 22피트, 안의 것은 12피트였다. 바벨론 전 성 읍을 바깥으로 두른 성벽 역시 2중 성벽인데 바깥 것은 26피트, 안 의 것은 24피트였다. 폐허 중에 제일 높은 부분이 이슈타 게이트로 서 48피트 가량이다. 본래 성안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은 300피트 가 량의 신전 탑 '에테메난키'(Etemenanki)였다. 그 폐허에서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직위가 찍혀진 평방 12인치 반 의 벽돌이 발굴되었다. 가장 높은 건물은 주문(主門)인 이슈타 게이 트인데 그 성문의 벽돌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용의 머리, 사자의 몸, 독수리 뒤 발톱을 가진 복합 짐승이 문각 되어 있어 다니엘 7장 의 표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다니엘의 세 동무가 던져졌던 풀무는 벽돌 굽는 가마였다. 원추형으 로 생긴 이 가마 속에 진흙과 벽돌을 쌓고 원유와 짚 또는 겨를 섞 어 연료로 사용했다. 다니엘 3장에서 분노한 왕이 7배나 뜨겁게 하 라던 것은 원유가 섞인 연료를 7배만 더 넣으면 된다. 또 우상이 세

- 98 -


워졌던 '두라 평지'(단 3:1)는 지금의 힐라 언덕 5마일 아래에서 유 프라테스 강으로 들어가는 한 지류의 입구에 있는 '나르 두라'(Nahr Dura)이다. 다니엘 6장의 사자 굴은 고대 제국의 왕들이 스포츠로 사자 사냥을 위하여 사자를 가둬 두었던 곳이다. 이와 같은 사자 굴은 앗시리아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사자 굴을 인봉할 때는 그 입구를 돌로 맞 고 그 둘레를 젖은 석회로 바른 뒤 원통 모양으로 문각 된 도장을 굴려서 직사각형의 인상(印象)을 남겨 아무도 뜯지 못하게 했다.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이 마지막 잔치를 했던 큰 홀은 느부갓네살이 지은 남궁에 있다. 그곳 중앙에는 보좌가 있는 넓은 방이 있는데 길 이가 173피트, 넓이 57피트, 높이 66피트이다. (4) 바벨론의 마지막 왕 - 벨사살 역사가들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을 나보니더스(Nabonidus)라고 주장 했다. 그러나 성경은 벨사살이라고 말한다(단 5장). 이 논쟁은 최근 까지 해결되지 않다가 1924년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가 대 영 박물관 소장의 고대 문서에서 이른바 '나보니더스에 관한 이야기' 를 출판하고 그 밖의 여러 다른 점토 문서를 발견함으로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더스가 기원전 522년경 서부 아라비아의 테마에 원정을 떠나기 전(혹은 화란의 성전을 준공한 후) 왕권을 그의 장자 벨사살에게 물려주고 떠났음이 밝혀졌다. 바벨론 성이 함락되던 당시 바벨론 성의 왕은 벨사살이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기록은 틀림이 없을 뿐더러 가장 정확한 역사적인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5) 고레스의 제1차 석방령 바벨론은 유다 백성을 포로에서 석방하지 않자 약속된 70년 기간(렘 29:10)의 예언은 성취될 가망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 약속대로 페르샤의 고레스를 일으켜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바 벨론 성을 함락시켰다(사 44:26-28). 고레스는 기원전 539년 10월

- 99 -


29일에 개선 입성했다. 고레스는 자기의 숙부이며 장인인 메데 왕 다리우스(단 6장)를 이어 페르샤의 왕이 되었다. 그는 다니엘 6장의 사자굴 사건, 고레스에 관 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1, 12, 29:10), 다니엘 5장의 사건 해석 등에 감명을 받고, 그의 통치 원년 즉 기원전 537년 가을 에 제1차 포로 석방 령을 내렸다. 고레스의 제1차 포로 석방 조서가 에스라 1장에 기록되어 있다. 바 벨론 폐허에서 고레스 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길이 9인치의 기념비 (圓住 記念碑)가 발굴되었다. 그 내용은 그가 아무 싸움도 하지 않고 바벨론을 함락시킨 사실과 선대왕(先代王)들의 악을 보상하기 위해 외국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돌려보내서 저들 신들의 신전을 재건하도 록 도와 준 이야기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에스라 1장의 것과 방불 하여 에스라서의 정확성을 입증한다. 고레스의 무덤은 파살가대 (Pasargadae)에서 발굴되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석방 령이 내려졌 지만 이 때에 돌아 간 백성들의 수는 종을 제외한 42,360명에 불과 하였다(스 2:64, 65). (6) 다리우스 1세의 제2차 석방 령 제1차 석방 령이 내린지 약 17년 만인 다리우스 1세 제2년 기원전 520/519년에 제2차 석방 령이 내렸다(스 4:24-6:15). 선지자 학개 와 스가랴는 이기적인 백성들을 책망하고 격려하여(학 1:3-10) 성 전 건축을 서둘렀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수에로 때의 위기를 미리 보 시고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에서 속히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했다(슥 2:6-9). 학개는 '만국의 소망'(학 2:7)이신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언하였다(학 2:6-7). 제2차 석방령을 내린 페르샤 왕 다리우스 1세(522-468 BC)의 보 석 인장이 테베에서 발견되었다. '위대한 왕'이라고 찍혀 있다. 또한 펄스 포리스(Persepolis)에서 발굴된 높이 8피트의 석회석 부조(浮

- 100 -


雕)에는 다리우스 1세가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스에르 왕이 아버지로 에스더의 시 부이다. 다리우스의 제2차 석방령이 내렸지만 1차 석방령에 무감각했던 유대 인들은 무관심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는 동안 사태가 악화되어 유대 인 전멸령이 내리게 되었다. 사단의 조종을 받은 하만의 모략에 의하 여 유대인들은 올무에 걸린 것이다(에 3장).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때를 위하여 에스더를 왕후가 되게 하셔서 사태가 해결된다(에 4:16). 1884년-1886년에 걸쳐 불란스 사람 듀라포이(Dieulafoy)에 의하 여 에스더가 살던 수산궁이 계속 발굴되었는데 거기 에스더 4장 2절 의 '대궐 문', 5장 1절의 '알뜰', 6장 4절의 '바깥 뜰', 3장 6절의 '부 르'를 발굴 확인했다. 6. 아닥사스다의 제3차 석방령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아하수에로(486-465 BC)왕 때 하만의 모략에 걸려 전멸할 위기를 벗어났으나 국제 정세 와 국내 사태는 계속 악화되었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혜미야의 수고 로 제1차 석방령이 내린 후 80년이 되어 가던 기원전 457년에 마지 막 석방령이 내렸다(스 7:7). 아닥사스다(Artaxerxes I Longimanus; 465-423 BC)는 에스더의 의붓아들로 아하스에로 왕의 셋째 아들이다. 2300주야의 기산점이 되는 기원전 457년의 석방령이 내림에 있어서 에스더의 감화가 컸음 이 확실하다. 석방 령이 내린 뒤 에스라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리 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실망 적이었다(스 8:1-14). "집들 과 땅들을 마련한 많은 사람들은 저들의 소유를 희생할 마음이 없었 다. 그들은 안일과 평안을 사랑하였고 그저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였

- 101 -


다. 저들의 모본은 믿음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기로 선택한 자들에게 걸림이 되었다". 출발을 위하여 아하와 강변에 모였을 때 회중 가운데 레위 자손은 한 사람도 없었다(스 8:25). 결국 출발은 지연되었고 에스라는 개인 설득을 벌이고 긴급 초청을 발하여 약 40명의 제사장과 220명쯤의 행정가, 교사들을 모아서 출발했다. 19세기 말엽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대한 고등 비평의 공격이 집 중되었다. 이 때 독일의 저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메이어(Edward Mayer) 교수는 에스라서의 역사성을 적극 옹호하면서 만약 당대의 페르샤 문서가 어디서인가 발굴되기만 한다면 그 문서의 기록과 에 스라서의 기록은 틀림없이 일치할 것이라고 1896년에 선언했다. 1904년-1908년에 걸쳐 나일강의 한 작은 섬인 엘레판틴에서 수많 은 페르샤 공문서와 개인 편지 등이 발견되었다. 그 기록은 기원전 5 세기 경 아닥사스다 1세와 다리우스 2세 때에 아람어로 쓰여진 것으 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록과 너무나도 어울리고 있어 성서 신앙 의 일대 개가를 올렸다.

7.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발굴 영국인 홀므즈 랏삼(Hormuzd Rassam)은 1853년 12월 22일 메소 포타미아의 "텔"인 쿠윤직에서 앗시리아 말기의 왕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669-629)의 왕립 도서관을 발굴하였다. 그곳에서 부조와 약 25,000개의 점토판을 파내었다. 그전에 레이어드가 발굴 한 곳은 니느웨의 느보(Nebo) 신전이었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고대 최초로 최대의 도서관을 세우고 그의 서기관들과 관리들을 고대의 여러 도시와 나라들, 즉 앗시리아, 바벨론, 구다, 니플, 악카드, 에렉 등지에 파견하여 기록들을 수집하여 보관하였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성경 창세기와 흡사한 창조와 홍수의 사실을 태고부터 알고 있었다 는 것이 입증되었다.

- 102 -


고대 최대 강국의 하나였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612 BC에 함 락)가 1853년 영국인 랏삼에 의해 발굴 확인되기까지 2000년간이 나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훔 선지자가 나훔서를 기록할 당 시에도(나 3:1-3) 앗시리아는 망할 수 없는 나라처럼 강하고 흥왕 했다. 당시 니느웨는 세계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치리자들을 세계 사 방으로 보내어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에티오피아까지 북으 로는 흑해, 동으로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일대를 다스린 대제국의 수도였다.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 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나 3:7)는 하 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 예언은 졸지에 성취되었다. 기원전 612년 앗시리아의 압박 밑에 서 신음하던 신바빌로니아 메대와 스키디아의 연합군에 의해 니느웨 가 함락되었다. 그 후 2300여년을 바로 모술 건너편 티그리스 강 동 편의 쿠윤직과 요나의 무덤으로 알려진 두 폐허의 흙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니느웨의 발굴로 아슈르바니팔 도서관과 느보 신전을 발견하 여 엄청난 창조와 홍수 기록을 찾아냈다. 또한 발굴 결과 니느웨 성 은 둘레가 7.5마일이었다. 당시로는 최고의 성읍이었다(요 3:3, 4). 니느웨 발굴로 성경의 진실성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 과 제 ▣ 1. 사울 왕이 첫 번째 수도로 정한 곳은? 2. 예루살렘에 대하여 쓰라. 3. 솔로몬의 성전에 대하여 쓰라 4. 아합의 상아궁에 대하여 쓰라 5. 바벨론성에 대하여 쓰라 6. 석방 령들에 대하여 쓰라.

- 103 -


제6장 예루살렘 고고학 1. 지명 고대근동의 역사기록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서기전 1900년경 이집트 문서에서였다. 대부분의 이집트 학 자들은 서기전 1900년경 기록된 저주문서에 나타난 상형문자 표기 인 ‘아우샤멤’을 예루살렘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이 단어에는 도시 를 나타내는 한정사 대신 지역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어서 이집트인 들이 예루살렘을 한 지역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기전 14세기에 기록된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아카드어로 ‘우루샬 림(Urušalim)’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기전 701년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침공 기록에는 ‘우르살리무(Ursalimmu)’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지명 ‘예루샬라임(‫’)ירושׁלים‬은 우가릿 신화에 등장하는 새벽과 여명의 신, 샬렘과 관계가 있으며 ‘샬렘 신의 기초’라는 뜻 으로 풀이된다. 다윗 이전 시대 예루살렘이 ‘여부스’로 불렸다는 사실은 이집트 및 고대근동의 자료에 그 지명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근거가 희박 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예루살렘이라고 알려졌으며 아마도 이 도시에 여부스라 일컫는 민족이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으 로 밖에 볼 수 없다. 칠십인 역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어 표기인 ‘히에로솔뤼마(‘Ιε ροσολυμα)’는 히브리어 지명의 음역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 도시의 ‘거룩성(히에로스)’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2. 지리적 배경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산악지대의 분수령 - 104 -


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산악 요새로 개발되었다. 예루살렘은 연중 강수량이 500밀리미터 정도로 겨울곡식인 밀이나 보리를 충분히 경 작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비록 동쪽으로는 유대광야가 이어지지만 북쪽의 베냐민 산지, 남쪽의 베들레헴, 그리고 서쪽의 쉐펠라 등 예루살렘은 농사와 목축이 가능 한 살기 좋은 지역에 속해 있다. 다윗 성이라 불리는 최초의 예루살 렘은 기드론 골짜기 위쪽의 해발 700미터 높이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솔로몬이 건설한 성전은 해발 743미터의 완만한 봉우리에 위치해 있 으며 히스기야 시대부터 확장된 서쪽 언덕은 해발 773미터에 달한 다. 예루살렘의 지리적 위치의 결정요인은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한 기혼 샘이다. 해발 645미터 지점에 위치한 기혼 샘은 석회암 지역의 바위 굴 속에서부터 품어 나오는 전형적인 카르스트(karst) 샘으로서 계 절에 따라 하루에 최소 200에서 최대 1000입방미터의 물이 솟아 나 온다. 다윗 성은 북쪽의 성전 산 부분을 제외하고는 동쪽의 기드론 (Kidron) 골짜기와 서쪽의 티로포에온(Tyropoeon: 치즈 제조자) 골짜기, 그리고 남쪽의 힌놈(Hinnom) 골짜기 등 삼면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비록 면적은 작지만 힌놈 골짜기를 중심 으로 소규모의 야채농사가 가능하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지에서는 과수원이 발달했었다. 하지만 밀, 보리를 재배할만한 골짜기 평야는 북쪽과 서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항상 이 지역을 통치해야만 식량자급이 가능한 상태였다.

3. 주거역사: (1) 가나안 시대(청동기 시대) 100년이 넘는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 다윗 성 지역에 서만 동석기 시대부터 십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에 달하 - 105 -


는 주거 층이 드러났다. 예루살렘 최초의 주거 흔적은 다윗 성 지역의 바위틈에서 발견되었 으며 동석기 시대인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본격적 인 건물이 들어선 것은 서기전 3300년경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이며 이 시대의 무덤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성벽이 건설되어 본격적인 도시의 모습을 갖춘 것은 중기청동기 IIB시대인 서기전 1800년경부터이다. 중기 청동기 시대의 특징적인 키클로포스 스타일의 이 성벽은 길이가 1미터가 넘 는 큰 바위들을 이용해서 기초를 쌓았으며 성벽의 두께는 평균 2.5 미터에 달한다. 다윗 성에서 기혼 샘으로 통하는 소위 ‘수문(water gate)’ 근처에는 망대의 기능을 위해 보강된 부분이 있다. 서기전 16세기 후기 청동기 I시대의 예루살렘의 주거흔적은 아직 발 견되지 않았지만 올리브 산의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교 회 내에서 발굴된 수십 기의 무덤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후기 청동기 II시대인 서기전 14세기부터 예루살렘은 동쪽과 서쪽의 골짜기 부분에 대규모 축대를 쌓아 면적을 넓히는 등 매우 중요한 요새로 건설되었다. 당시 이 도시의 중요성은 예루살렘의 왕 아브디-헤파(Abdi-Hepa) 가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텝 3세와 4세에게 보낸 6통의 아마르나 편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철기 I시대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촌락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건물들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당시 이곳은 견고한 시온 성 으로 불려졌고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삼하 5:6-7) 고고학적 발굴 에서도 이를 반영하는 철기 I시대의 축대 등이 발견되었다. (2) 왕정시대(철기 II시대) 이스라엘 왕정시대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에는 본격적인 왕궁과 신 전 등이 건설되었다. 특별히 이곳에서 발견된 원(原)-에올리아식 (Proto-Aeolic) 기둥머리는 사마리아, 므깃도, 하솔, 라맛-락헬에서 - 106 -


출토된 것과 마찬가지로 왕궁 건축에만 사용되는 장식으로 밝혀졌다.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은 북쪽의 상부 도시와 남쪽의 하부 도시로 구 분되었으며 상부도시는 왕궁과 창고를 지닌 요새, 즉 ‘다윗 성’으 로 불렸으며 하부 도시는 일반 주거지로 개발되었다. 다윗 성은 역대기에서는 오펠(Ophel) 요새로 표현되기도 한다(대하 27:3; 33:14). 솔로몬 시대에 다윗 성 북쪽의 바위 언덕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그 사이의 낮은 부분을 채웠고 이를 밀로(Millo)라 불렀 다. 이스라엘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가 1980년대 후 반에 발굴한 두께가 1.4미터에 달하는 성문 구조는 다윗 성에서 성 전으로 올라가는 성문인 동시에 밀로궁의 한 부분일 가능성도 있다 (왕상 9:15). 서기전 721년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많 은 피난민들이 남 유다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예루살렘도 서쪽으로 그 면적을 확장시켰다. 특히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벽을 보강하고 장기간 포위에 대비하여 지하급수시설을 완비하였다. 서쪽 언덕에서는 히스기야야 시대에 건설된 두께가 7미 터에 달하는 성벽이 65미터나 발견되었으며 발굴자 아비가드(N. Avigad)는 이를 ‘넓은 성벽(Broad Wall)’이라고 명명하였다. 다윗성 발굴 지역 중 ‘G 구역’으로 불리는 곳에 위치한 공문서 보 관소로 보이는 한 방에서는 모두 51개에 달하는 불라(bulla: 도장자 국)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에서는 ‘사반의 아들 그마리야’라는 이 름도 있어서 왕정시대 인물의 역사성을 확인하게 되었다(렘 36:11).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파괴된 흔적은 예 루살렘의 여러 발굴 지역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넓은 성벽 근 처의 ‘이스라엘 망대(Israelite Tower)’에서는 화살촉이 발견된 두껍게 쌓인 파괴 층이 발견되었다.

4. 지하급수시설 예루살렘의 지하급수시설은 유일한 수원지인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 107 -


샘의 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워렌 수직통 로(Warren's Shaft), 실로암 수로(Siloam Channel), 그리고 히스기 야 터널(Hezekiah Tunnel) 등 모두 3종류에 달한다. (1) 워렌 수직통로 워렌의 수직통로는 1867년 예루살렘 탐사 임무를 수행하던 영국 공 병대의 찰스 워렌이 처음 발견하였다. 전체 구조는 지상에서 54미터 길이의 경사진 터널을 통해서 밑으로 내려간 다음 마치 우물에서 물 을 긷는 것처럼 12.3미터 높이의 수직통로가 기혼 샘의 물길과 연결 되어 있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워렌 수직통로는 원래 파여진 자연 동굴과 바위틈을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성경학자들은 워렌 수직통로는 바로 요압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타고 올라갔던 ‘물 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찌노르)’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삼하 5:8; 대상 11:6). 하지만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므깃도, 하솔, 게셀, 기 브온, 이블르암)의 경우에서와 같이 워렌 수직통로는 서기전 10세기 왕정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2) 실로암 수로 실로암 수로는 기혼 샘의 물을 저지대의 힌놈 골짜기에 저장하기 위 해서 건설된 400미터 길이의 수로이다. 실로암은 원래 히브리어 ‘실로악흐(‫’)שׁילוח‬의 그리스어 음역이며 물을 ‘흘려보낸다’는 뜻 을 지니고 있다. 실로암 수로 중 일부는 바위를 파서 만든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수로의 중간 부분에는 여러 군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근처의 밭으 로 물이 공급되도록 하였다. 실로암 수로의 단점은 바로 이 수로가 성 밖에 위치해 있어서 전시에 예루살렘이 적군에 의해 포위당할 경 우 물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기혼 샘의 물을 성안의 실로암 저수 장까지 흐르도록 바위를 파서 터널을 만들 었다.

- 108 -


(3) 히스기야 터널 히스기야 터널의 전체 길이는 525미터인데 비해서 터널 양쪽 끝의 고저 차이는 겨우 32센티미터로서 기울기가 0.06퍼센트에 달할 정도 로 매우 정교하게 시공되었다. 히스기야 터널은 특히 실로암 저수장 부분에서 발견된 실로암 비문을 통해서 오늘날의 터널 공사와 마찬 가지로 양쪽에서 파 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중간에서 만났을 당시의 광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혼 샘과 실로암 저수 장 사이의 직선거리가 315미 터에 불과한데 적들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525미터나 되는 구불거리는 터널을 건설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히스기야 터널은 기존에 물이 흐르는 바위 틈새를 따라 건설되었다 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터널임에도 불구하 고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정확하게 중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4) 실로암 비문 실로암 비문은 서기전 701년 앗시리아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 비하여 히스기야가 행한 일련의 방어전략 공사 중의 하나인 지하수 로 터널 벽에 기록된 것이었다. 서기전 701년 산헤립이 앗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을 때 (왕하 18:13-16; 대하 32:1-8), 비록 성경에는 히스기야가 지하터 널을 팠다는 기록은 없지만 “성밖의 샘들을 막고 흐르는 물줄기를 차단했다”는 구절(대하 32:3-4)을 통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당시 예루살렘의 지하급수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수원지인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전체 길이가 525미터에 달하는 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의 수준 높은 토목 공사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터널의 출발지인 기혼 샘은 도착지인 실 로암 못 보다는 오직 32센티미터밖에 높지 않아서 전체 터널의 평균 기울기는 0.06퍼센트에 불과하다. 이 밖에도 터널과 관계된 가장 신 비로운 두 가지 의문점은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 리로 315미터인데도 불구하고 구불구불하게 파여져 525미터나 되 - 109 -


며, 어떻게 양쪽에서 파들어 간 인부들이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었 는가 하는 점이다. 첫 번째 의문에 관한 구약학자들의 답은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었던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될 때 지질 학자인 단 길(Dan Gill)의 정밀 조사 결과 이 터널지역이 원래 4만 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즉 히스기 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파 다보니까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고 당연히 도중에서 양쪽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실로암 비문은 1880년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하던 팔레스타인 아이 들에게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히스기야 터널의 실로암 쪽 출구에 서 안쪽으로 10미터 들어간 지점의 왼쪽 벽, 즉 동쪽 면에 바닥에서 1.5미터 지점에 기록된 이 비문은 모두 6줄에 200자의 고대 히브리 어가 기록돼 있었다.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만인 1890년 한 도굴꾼 이 이 비문을 터널 벽에서부터 떼어 내는 과정에서 비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현재는 23개의 글자 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예루살렘 의 한 골동품 상인에게 팔렸던 이 비문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 고 있던 오스만 터키 당국에 의해 압수되어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 관으로 이관됐고 오늘날까지 그곳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의 히브리어 전문과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 בעוד ]מנפם החצבם את‬.‫ הנקבה‬.‫ דבר‬.‫ היה‬.‫ וזה‬.‫( ]דבר[ הנקבה‬1) ‫ ק‬.‫ אשׁ‬.‫ קל‬.‫ להנ]קב נשׁמ[ע‬.‫ אמת‬.‫ שׁלשׁ‬.‫ ובעוד‬.‫ רעו‬.‫ אל‬.‫ אשׁ‬.‫( הגרזן‬2) ‫ ה‬.‫ ובים‬.‫ מימן ומ]שׁמ[אל‬.‫ בצר‬.‫ זדה‬.‫ הית‬.‫ כי‬.‫ רעו‬.‫ אל‬.‫( רא‬3) ‫ וילכו‬.‫ ]ג[רזן‬.‫ על‬.‫ גרזן‬.‫ רעו‬.‫ לקרת‬.‫ אשׁ‬.‫ החצבם‬.‫ הכו‬.‫( נקבה‬4) [‫ ומ]א‬.‫ אמה‬.‫ ואלף‬.‫ במאתים‬.‫ הברכה‬.‫ אל‬.‫ המוצא‬.‫ מן‬.‫( המים‬5) ‫ החצב]ם‬.‫ ראשׁ‬.‫ על‬.‫ הצר‬.‫ גבה‬.‫ היה‬.‫ אמה‬.‫( ת‬6) (1) 굴착 [공사], 굴착 공사는 다음과 같다. [인부들은] 도끼를 - 110 -


(2) 서로 [마주쳤다]. 아직 3아마(큐빗)를 더 파야함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부르는 사람의 (3) 목소리가 들렸다. 왜냐면 암벽의 오른쪽과 왼[쪽에] 틈새가 있었 기 때문이다. 굴착 (4) 당일에 인부들은 맞은편 동료 쪽으로 파 들어갔다. 도끼와 도[끼 가] 서로 겹쳤다. (5) 물이 수원지로부터 연못까지 1200아마(큐빗)를 흘러갔다. (6)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의 머리 위로 100아마(큐빗)였다.

5.

윌슨(C.

Wilson)과

워렌(C.

Warren)의

루살렘 지하탐사 예루살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이 도시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한 영국의 한 모임에서부터 출발했다. 1864년 5월 런던에서 개최된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연례모임에서 물의 오염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 안의 전염병 발생의 심각성이 논의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 루살렘 수질개선 협회’가 결성되었다.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에 기혼 샘이 있기는 하지만 성문으로부터 가파른 경사를 한참 걸어내려 가야하고 그나마 여름철 건기에는 수 량이 부족해 모든 주민이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집집마다 바위 바닥을 파서 지하 웅덩이를 만들고 겨울철의 빗물을 저장했다가 여름철 건기에 사용하곤 하였는데 문제는 한번도 청소하 지 않은 이들 지하 물 저장소의 오염으로 인한 전염병의 발생이었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모두 성안의 좁은 공간에 모여 살다보니까 일 단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퍼져나가 많은 사람 들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유럽 인들의 선교활동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마침 영국의 대도시에서는 콜레라 같은 수인성 전염병을 상하수도 정비를 통하여 어느 정도 퇴치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 에 자연히 수질 개선의 묘책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물

- 111 -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쪽의 베들레헴 근처에 위치한 ‘솔로몬의 연못’이라 불리는 수원지로부터 수로를 설치해서 물을 끌어오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수로 공사를 위한 지형조사와 측량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영 국 공병대의 윌슨 대위는

1864년 10월초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본

격적인 측량을 시작했다. 예루살렘의 지하 수로공사는 영국공병대보 다 2천년이나 앞서 이미 서기전 2세기 하슈몬 왕조시대부터 건설되 었기 때문에 윌슨은 성전 산 지하에 있는 고대의 물 저장소와 수로 들을 따라서 성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10개월에 걸친 성공적인 탐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의 측량탐사’라는 보고서를 제

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골고다의 성묘

교회와 바위의 돔

(Dome of the Rock) 등에 대한 자세한 평면도와 단면도가 등장하 며 건축학적인 분석도 시도되었다. 또한 그는 헤롯 궁전에서 성전 뜰 로 향하는 교량의 받침대를 발견했고 오늘날 이 부분을 ‘윌슨의 아 치’라 부른다. 마침 1859년에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항하여 성경과 교회의 권 위를 지키려는 신앙적 운동에 휩싸인 영국은 윌슨의 성공적인 예루 살렘 측량 소식에 힘입어 전문적인 성지 탐사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65년 5월 12일 런던에서 ‘성경을 조명 하기 위해 성지의 고고학, 지형학, 지질학, 지리학, 자연사, 풍습과 전 통들에 대한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를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탐사재단(Palestine Exploration Fund)’이 설립되었다. 비록 윌슨 이 최초로 예루살렘의 지하를 파고 들어가 발굴하였지만 메소포타미 아에서 출토된 것 같은 화려한 박물관 전시용의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이 재단은 단순한 지형조사보다는 중요한 성지에 대한 발굴 을 목적으로 1867년 또 한 명의 영국 공병대 장교인 워렌 대위를 파견했다. 워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루살렘의 성전 산을 발굴하 - 112 -


여 솔로몬 성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골고다 의 성묘교회가 과연 신약시대의 성벽 밖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일이 었다. 하지만 성전산은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바 위를 보호하기 위한 ‘바위의 돔’이 서 있는 이슬람교의 삼대 성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발굴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워렌과 그의 일행이 성전 산의 남쪽 축대 지하를 파고 내려 가 성전 쪽으로 향하는 거대한 통로를 발견하였는데 돌에 부딪치는 그들의 연장소리 때문에 발각되어 기도하던 아랍인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를 한 적도 있었다. 할 수 없이 워렌은 성 바깥으로 나가서 성전 산 축대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을 파기 시작하 였다. 그들은 수직으로 24 미터 정도 파 내려간 뒤 성전 쪽으로 수 평으로 파 들어가 비로소 신약시대 성전의 축대 기초를 조사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으로 이어지는 길이 525미터의 지하 수로를 조사하다가 기혼 샘 부근에서 수직으로 뚫린 통로를 발 견하게 된다. 즉 전시에 성 바깥의 기혼 샘을 이용할 수 없을 경우 성안에서 물을 길을 수 있도록 터널을 뚫은 지점을 발견하게 된 것 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통로는 ‘워렌의 수직통로’로 불리며 서기 전 1000년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요압이 몰래 올라갔던 지하 ‘수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예루살렘 당국의 반대로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대규모 수로 공사는 좌절되었지만 영국의 공병대가 파견한 두 장교는 예루살렘의 정확한 측량과 발굴을 통해 성경시대의 예루살렘을 드러낸 최초의 고고학자들로 인정받게 되었다.

6. 페르시아 시대(서기전 539-332)의 예루살렘 70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바벨론으로부터 돌아 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다윗성에 정착하였다. 페르시아 시대에 유다는 예후드(‫)יהד‬라 - 113 -


불리는 ‘에베르 나하르(Eber Nahar)’ 주의 한 식민지였다. 유다의 총독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휘 아래 유다의 장로들은 서기 전 520년 성전재건을 시작하였고 예언자 학개와 스가리야의 격려에 힘입어 서기전 515년에 준공하였다(에스라 5:2; 6:14). 서기전 445 년에 임명된 유다의 총독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파괴된 성벽을 재 건하였는데 당시의 성벽이 다윗 성 발굴에서 부분적으로만 확인된 바 있다.

7. 그리스 시대(서기전 332-63)의 예루살렘 서기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 한 후 예루살렘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 다. 하지만 서기전 200년경 이후로 예루살렘이 셀류코스 왕조에게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그리스 적인 폴리스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특 히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 를 물리치고 유다 지방을 차지한 후 예루살렘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개명하고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하였 다.

요세푸스는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12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기전 175년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야손은 안티오코스 4세의 허락 하에 예루살렘에 김나시온과 에페베이온을 설립하여 그리스 식 교육 기관 및 스포츠클럽을 운영하였다(2마카 4:9). 서기전 168년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성전의 보물을 약탈하였다. 이에 항거하는 유 대인들을 진압한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에 ‘아크라(Akra)’라 불리는 요새를 건설하였다. 서기전 167년부터 시작된 마카베오 혁명은 164년 성전을 정화함으 로써 막을 내렸지만 그리스 용병들의 아크라 요새는 서기전 141년에 가서 비로소 유대인들에게 점령되었다. 하슈몬 왕조 시대에 예루살렘 의 성벽이 보강되었고 특히 알렉산더 야나이는 북쪽에 새로운 주거 - 114 -


지를 만들고 이를 감싸는 제 2성벽을 건설하였다. 예루살렘 주민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남쪽의 베들레헴 산지로부터 물을 끌어 오는 새로운 수로가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서기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3개월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함으 로써 로마 시대가 시작되었다.

8. 로마시대(서기전 63-330)의 예루살렘 신약시대의 예루살렘은 새로운 정권 교체와 함께 시작된 로마 제국 의 영향과 로마의 후광으로 정권을 잡은 헤롯 왕조의 유대교 부흥 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 헤롯에 의해 성벽이 조직적으로 보강되고 새로운 귀족들의 주거지가 상부 도시에 건설되는 등 도시문명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당시 예 루살렘의 중심부는 오늘날 유대인 구역이 있는 상부 도시로서 발굴 결과 하려한 장식의 귀족 저택들이 여러 채 발견되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른 정결예식을 위한 미크베 목욕탕의 흔적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으며 집 바닥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 지만 율법에 따라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1) 헤롯 성전 서기전 37년에 왕이 된 헤롯은 기존의 성전을 헐고 대규모의 새로운 성전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탈무드에도 ‘헤롯의 신전을 보지 못한 자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보지 못한 자이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 도로 당시 화려했던 로마 세계의 건축계에서도 예루살렘의 헤롯 성 전은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로 인정되었다. 비록 서기 70년 로마 군대의 조직적인 파괴행위로 신약시대 성전 자 체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성전을 세우기 위해 넓혔던 성전 터와 이 를 받치고 있는 축대는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서 그 규모를 잘 알 수 있다. 헤롯은 북쪽의 솟아난 바위를 깎고 남쪽의 골짜기에는 축대를 쌓아 - 115 -


남북의 길이가 485미터, 동서의 폭이 315미터로 그 면적이 14만4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성전 터를 만들었다. 성전 터의 남쪽에는 일반인 들의 성전 출입구 역할을 하는 두 겹문(double gate)과 세 겹문 (triple gate)이 있다. 당시 성전 방문객들은 이 문들을 통해서 안으 로 들어서면 계단식 지하 터널을 통해 15미터 상부에 위치한 성전 뜰로 나올 수 있게 설계되었다. 서쪽 축대에는 성전 뜰로 향하는 육 교를 받치는 아취의 흔적이 두 군데서 발견되었고 처음 발견자의 이 름을 따서 각각 로빈슨(Robinson) 아취와 윌슨(Wilson) 아취로 불 린다. 또한 로빈슨 아취 북쪽에는 발견자의 이름을 딴 바클레이 문의 흔적 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헤롯 성전의 서쪽 축대의 일부는 오늘날 전 세계 유대인들의 최고의 성지인 코텔(일명 ‘통곡의 벽)로서 활용되 고 있다. 성전 터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이미 느헤미야 시대부터 ‘비라(‫ירה‬ ‫’)ב‬라 불리는 요새가 있었으며 그리스 시대의 ‘아크라(Akra)’를 거쳐 헤롯 시대에는 안토니아(Antonia) 요새가 건설되었다. 동쪽 축대 중 남쪽 모퉁이에서 32미터 떨어진 지점에는 각각 다른 공법의 축대가 만나는 이음새가 있어서 북쪽 부분은 이미 헤롯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 헤롯 성전 건물 자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략 오 늘날 이슬람교의 바위의 돔이 서있는 자리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추 정된다. (2) 헤롯 성전의 파괴 서기 70년 로마 제 10군단의 티투스(Titus)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 락하고 헤롯 성전을 불태워버렸다. 나아가 다시는 유대인 저항군들이 요새화 된 성전 산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성전 뜰의 모든 성벽을 무너뜨렸다. 지난 1967년 이후의 발굴을 통하여 성전 뜰의 서쪽 축대 바깥 아래쪽에서 30미터 높이에서 굴러 떨어진 잘 다듬은 돌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10군단은 헤롯 궁전 자리에 본부를 설치하 - 116 -


고 상부 도시 지역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이후의 예루살렘은 상부 도시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했던 로마 10군단의 영향 아래 있 었다. (3)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서기 130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파괴된 도시를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할 것을 약속했고 나아가 131년에는 할례, 토 라 연구, 안식일 등 전통적인 유대교의 의식 등을 법으로 금지하였 다. 이에 자극 받은 유대인들은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로마에 대항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원칙적으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 렘을 포함하여 유대아 지방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예루살렘을 자신의 이름(Publius Aelius Hadrianus)과 로마의 신전

언덕(Capitol)의

이름을

따서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개명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의 건축적인 모습은 요르단 의 마다바에서 발견된 서기 6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 지도에서 구체 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북쪽 성벽에 위치한 다마스쿠스 성문은 당시의 대표적인 세 겹 아취 성문으로서 중앙의 문이 양쪽보 다 큰 형태이다. 오늘날 다마스쿠스 성문의 동쪽 아래 부분에는 하드 리아누스가 건설한 세 겹의 성문 중에서 동쪽의 작은 문을 볼 수 있 다. 엘리아 카피톨리나에는 원칙적으로 성벽이 건설되지 않았다. 아 마도 로마 황제의 통제 하에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 대비책이라 고 추정된다. 다마스쿠스 성문 안쪽에는 직경 120미터 규모의 반원형 광장이 만들 어졌고 한 가운데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석상이 받쳐진 기둥이 세워졌다. 이 광장으로부터 로마식 도시의 중심축을 이루는 카르도 (Cardo)가 남쪽으로 450미터 길이까지 뻗어 있다. 카르도의 남부에 는 로마 10군단의 진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카르도의 폭은 12미터 로서 두 대의 마차가 충분히 교차 진행할 수 있는 2차 로이며 양쪽 - 117 -


에는 지붕으로 덮인 인도가 있고 인도 안쪽으로는 상점들이 배치되 어 있었다. 1976년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자 아비가드(N. Avigad)는 유대인 구역에 대한 발굴을 통해서 카르도 중 180m 부분을 찾아내 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비잔틴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 심 카르도 외에 다마스쿠스 성문 광장에서 성전산과 평행되게 남쪽 으로 내려가는 제 2의 카르도도 건설되었다. 새로운 로마식 도시의 중심은 골고다 언덕으로 정해졌고 이곳에 유 피터와 비너스 신상을 안치한 카피톨 신전이 건설되었다. 신전의 남 쪽에는 남북의 길이 250미터, 동서의 폭 150미터 규모의 포룸 광장 이 만들어졌다. 포룸의 동쪽으로는 카르도(Cardo)가, 그리고 남쪽에 는 데쿠마누스(Decumanus)가 각각 지나가고 있다. 이 중앙 포룸은 오늘날 성묘교회 근처에 위치한 무리스탄 광장에 해당된다. 중앙 포 룸 외에 성전 산 북서쪽의 안토니아 요새 터에 동서의 길이 130미터 남북의 폭 90미터 규모의 동부 포룸이 건설되었다. 이중 일부분은 오늘날 시온 수녀원 지하에 위치한 ‘리토스트로토스(Λιθοστ ρωτος)’, 즉 ‘박석’으로서(요 19:13) 기독교 전통에서는 예 수가 재판을 받았다는 빌라도의 법정 광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 만 이 부분은 서기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명에 의해 신약시대에 건설된 참새의 저수 장을 아취 구조로 덮은 다음 박석을 깔아 만든 동부 포룸의 일부분이다. 동부 포룸에는 서쪽 입구에는 세 겹의 승리 아취가 건설되었고 이 중에서 중앙의 것은 오늘날 사자 문에서부터 비아 돌로로사로 향하는 길 위에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으며 요한 복음서 19:5에 근거하여 라틴어로 ‘에케 호모(Ecce Homo = 보라 이 사람이로다)’ 아취로 불려지고 있다.

9.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은 ‘엘리아 카피톨리나’에서 이교도적 요 소가 배제된 ‘엘리아’로 불려졌으며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기본적 - 118 -


인 도시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서기 325년에 개최된 니케아 공 의회에서 예루살렘의 주교 마카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예 루살렘을 성지로 회복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수락한 헬레나 황 후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골고다 자리에 서 있던 카피톨 신전을 헐었다. 당시 인부들은 이 지역 발굴을 통해서 골고다 바위 언덕과 그리스도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두 성지를 포함하는 대규모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당이 카르도 서 쪽에 인접하여 건설되었다. 이

시대의 성묘교회는 동서의 길이가

130미터 남북의 폭이 60미터에 달하며 카르도 쪽의 입구에서부터 차례대로 아트리움(Atrium), 마르튀리온(Martyrion)이라 불리는 바 실리카, 트리포르티코(Triportico)라 불리는 사각형의 정원, 그리고 무덤자리에 건설된 아나스타시스(부활) 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비잔틴 예루살렘의 발전이 정점에 도달하였다. 당시 건설된 네아 교회는 동서의 길이 120미터 에 폭이 50미터에 이르는 대규모의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로서 예루 살렘의 남쪽 끝 카르도의 동쪽에 위치했으며 이 건물의 일부는 오늘 날 분뇨문에서 시온문에 이르는 성벽 부분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전체 길이가 4.5킬로미터에 달하는 성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 의하면 모두 20 개의 망루가 성벽에 건설되었고 6개의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로마 시대의 카르도는 남쪽으로 연장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기독교인 들은 유대인들의 성전 파괴를 본보기로 후세에 남겨두기 위해 성전 산은 폐허가 된 채로 방치해 두었다. 이 시대에 예루살렘에 건설된 대표적인 교회당은 성벽 안의 경우 골 고타의 아나스타시스 교회를 비롯해서 네아 교회, 베데스다의 성 마 리아 교회, 거룩한 시온 교회, 실로암 교회 등이다. 성벽 밖에는 우선 올리브 산 정상의 승천 교회를 비롯해서 엘레오나(올리브 정원) 교 회, 도미누스 플레빗(주님 눈물) 교회, 겟세마네 교회, 마리아 무덤 - 119 -


교회, 성 스데반 교회 등이 건설되었다.

10. 시온산 시온은 히브리어로 ‘찌욘(‫יון‬)’으로 발음되며 ‘건조한 땅’을 뜻 하는 ‘짜욘(‫יון‬)’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시온은 대부분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지칭하는 포괄적이고도 추상적인 명칭으로 등장하며 ‘시온의 딸’, ‘시온의 아들’ 등의 상징적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하지만 시온은 원래 다윗이 점령하기 전 여부스 민족이 살고 있었던 예루살렘 요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다윗이 점령한 여부스 도시가 ‘메쭈닷트 찌온’, 즉 ‘시온 의 요새’로 나타나며, 다윗의 시온은 ‘이르 다비드’, 즉 ‘다윗 성’으로 불려졌다(삼하 5:7).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역대기에 서도 예루살렘, 여부스, 시온 요새, 다윗 성 등이 모두 한 장소를 나 타내는 것으로 묘사됐다(대상 11:4-5). 성전공사를 마친 솔로몬은 다윗 성, 즉 시온의 한 장소에 안치됐던 야훼의 계약 궤를 성전으로 “올려놓았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 시대에도 여전히 시 온은 다윗성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왕상 8:1). 서기전 8세기 말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러서 시온은 더 이상 예루살 렘의 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을 지칭하지 않고 예루살렘 전체를 일컫 게 된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이, 그리고 “예루살렘”과 “시온산”이 동격으로 나타난다(왕 하 19:21,31). 시온의 딸이라는 집합적인 개념으로 미루어 시온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왕국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 도 있다. 제 2성전시대에 시온산은 예루살렘 중에서도 성전 산을 지칭한 것으 로 보인다. 따라서 서기전 164년 마카베오 혁명 당시 예루살렘을 점 령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시온산으로 올라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 했다(1마카 4:36-61). - 120 -


서기 70년 로마 군이 성전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이 혼란기에 접어들 었을 때 다윗 성의 위치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의 역사가 요 세푸스는 오늘날의 예루살렘 옛 성의 서쪽에 위치한 시온 산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다윗 성으로 보았고 이곳에 다윗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Bar Kochba) 반란을 진압한 로마의 하드 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인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재 건할 때 원래의 다윗 성 자리인 기드론 골짜기 근처의 왕들의 무덤 지역을 채석장으로 활용했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쫓아냈기 때문에 유세비우스(Eusebius) 같은 기독교 학자는 베들레헴에 다윗 의 무덤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기 11세기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은 시온 산에 다윗 의 무덤자리를 재확인하고 성지로 선포해서 오늘날까지 이 전통이 내려오게 됐다. 시온산에는 서기 1세기 말 임박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회당이 있었으며 이 회당은 나중에 “사도들의 교 회”로 불려졌다. 서기 382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이 회당 옆에 팔각 형 모양의 기념교회를 건설했고 이어서 서기 415년에는 “하기아 시 온(Hagia Sion)”, 즉 “거룩한 시온” 교회가 대규모 바실리카 (basilica) 양식으로 건설됐다. 이때부터 이 지역이 시온교회가 있는 언덕, 즉 시온산으로 오늘날까지 알려진 계기가 됐다. 십자군들이 서기 12세기 초 시온 산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건설할 때 사도들의 교회를 건물 안에 포함시켰고 오늘날 볼 수 있는 아래 층의 다윗의 무덤과 위층의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건물은 십자군 시 대의 아름다운 아취 형 건축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예루살렘 옛성의 성벽 밖에 위치한 시온산의 정상에는 1910 년에 완공된 독일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카톨릭 교회의 마리아 영 면교회(Dormition Abbey)가 자리 잡고 있으며 힌놈 골짜기 쪽의 - 121 -


비탈에는 “갈리칸투(Galicantu)”, 즉 닭이 운 것을 기념하는 베드 로 회개 교회가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관저 터에 지 어졌다. 1970년대 이후 발굴을 통해서 시온산 지역에 구약시대의 성 벽의 흔적과 신약시대 에세네 성문 등을 확인한 바 있다. 시온 산의 남서쪽 비탈에는 미국의 성지연구소에서부터 출발한 예루살렘 대학 과 그리스 정교회의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외 지역은 오늘 날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기독교인들의 묘지로 활용되고 있다.

11. 실로암 성경시대의 실로암은 실로암 수로와 실로암 못 등 두가지를 모두 의 미하고 있다. 실로암은 히브리어로 “보낸다”는 뜻의 동사 “‫שׁלח‬ (샬락흐)”의 명사형 “‫ח‬(쉴로악흐)”의 그리스어 음역에서 비롯 됐다. 실로암은 못으로 불려지기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만들 어진 수로의 명칭이었다. 따라서 이사야서(8:6)에서는 “천천히 흐르 는 실로아 냇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혼 샘에 서부터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마주치는 곳으로 흐르는 예 루살렘 최초의 인공수로였다. 실로암 수로는 덮개가 있는 수로부분과 군데군데 바위를 파서 만든 터널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길 이는 약 500미터에 달한다. 실로암 수로는 오늘날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마주치는

곳에

위치한

“하므라

저수장(Birkat

el-Hamra)”까지 기혼 샘의 물을 운반했으며 아마도 이 곳이 최초 의 실로암 못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실로암 수로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서 자동적으로 근처 골짜기에 위치한 “왕의 정 원”에 물을 효율적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초기의 실로암 못 과는 별도로 서기전 701년 히스기야가 거대한 토목공사를 통해 수로 터널을 뚫고 기혼 샘의 물을 한군데 모으면서 새로운 실로암 못이 생겨났다. 초기의 실로암 못(아랫 연못)과 구별되게 “윗 연못”이라 불렸던 이 저수장은 벤 시라서(48:19)에서 히스기야가 건설한 것으 로 나타난다. - 122 -


신약시대에 예수가 한 시각 장애인을 고쳐주었을 때 눈 세척 장소로 실로암 연못을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잘 알려진 저수장으로 볼 수 있다(요 9:1-12). 요세푸스는 실로암을 “분수대”로 표현했으며 티에로포에온 골짜기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했다(유대전쟁 5.4.2). 탈무드에 의하면(수카 4.9) 초막절에 실로암 연못의 물을 황금 잔에 담아서 수문을 통해 성전의 제단으로 가져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 다. 아마도 예수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언급한 흐르는 물에 관한 비유(요한 7:37-38)는 이러한 실로암의 물 긷는 전통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서기 333년경에 기록된 보르도 출신의 한 순례자의 기록에 의하면 실로암 연못에는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건축물 (quadriporticus)”이 있었다고 한다. 이 회랑은 아마도 서기 135년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로마 식 도시로 개조할 때 대 표적인 노천 목욕탕으로서 만들었으며 근처의 바실리카 건물과 함께 남녀가 별도로 목욕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 6세기의 순교자 안토니우스는 실로암에는 사방으로 건설된 회 랑과 함께 기념교회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제 작된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도 이 교회가 나타난다. 따라서 비잔틴 시대의 실로암 교회는 서기 5세기 유도키야 황후에 의해 건설된 것 으로 보인다. 실로암의 북쪽 회랑에 건설된 이 교회는 19세기 블리 스(F.J. Bliss)와 딕키(A.C. Dickie)에 의해 부분적으로 조사되었으 며 길이가 35미터, 폭 30미터 규모로 알려졌다. 오늘날 실로암 저수 장은 길이 15미터 폭 4.5미터 규모이며 기혼 샘 에서부터 525미터 길이의 히스기야 터널을 통과한 물이 이곳을 지나 기드론 골짜기로 빠져나가며 바닥에는 여러 개의 기둥 조각들이 흩 어져 있다. 또한 오늘날의 실로암은 “실로암 마을(크파르 실르완)” 로서 20세기 초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의 가파른 언덕 지역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주거지를 일컫는 지명이 기도 하다.

- 123 -


▣ 과 제 ▣ 1. 예루살렘 지명에 대하여 쓰라 2. 예루살렘의 지리적 배경을 쓰라 3. 예루살렘의 지하급수 시설들에 대하여 쓰라 4. 시온산에 대하여 쓰라 5. 실로암에 대하여 쓰라

- 124 -


제7장 신약시대 고고학 1. 신약성경 관련 10대 고고학적 발견

역사적

증돼

수와 성경의 역사성은 지

세기에 많은 사

왔다.

고고학적인 발견은 성경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한 작

쿰란

문서, 야고보 유

골 뤘

대 고고학적 발견을 다

(1)

튜린

의 수의(19세기)

혀지지 않았고 성경

(2) 신

약 편

이 발견

리스처

:예 님 수

스 사

본 ∼ (19

사해사

까지 계속 발굴

기록

의 수의,

성경 관

10

:

:

의적이다.

현재까지 5000여

른 본 사

은 요한

8

음 1 장

다.

고대의 가파르나

8∼ 8 형

47년)

움 버 움 (가

)에서 발견

9 년이었다. 그리스도 당시 기

이다.

피지에 기록된 고대 히브리 성서인

아리

에도

쿰란공 체 동

의 유

물 최 이

왔다.

(5) 빌라도 비문(1962년) 필라

주는

수의인지는 현재까지 밝

20세기)

했던 가정집의 전

동굴(1946

켜 귀 튜린 약 련

데이는

짜 매 회

의 진

쿰란 ∼ :양 ‘ 본’ 편 담긴 항 외 돼 (4)

해 입

다.

다. 제대로 발굴된 것은 196

인시

150년간의 신

문과 비교해보면

드로의 집(1906년)

교인들이 만나

다. 연대가 가장 이

(일부). 서기 125년

루 됐 쯤

성경 파피

는 파

(3)

크 너 투 등 난

이다. 미 교계 주간지

례 통

:

그리스도를 재판한 로마

스의 비문이 고대 카이사레아(가이사

- 125 -

총독 폰

티우스

) 마리티마에서 발견


다.

헤롯 : 헤 디움 됐 갈릴 분봉

(6) 견

유적

다.

마사다

퀴 폴 쪽 체험

(7) 스

리스(

벳쉐

했다.

8 예 님 깃 님 말씀

다. 주

배와 거의 같은

: 예 님

안)

의 유일한 도시.

8

장 방

에 이

시고

으로

(10) 야고보 유

공식 표 발

했지만

리)의 요르단

들도 치유의 기적

다를

대제사장) 유

속에서 발견

던 그 고

었다.

됐 깃

함(90년대 초)

인들은 부

활 믿 을

:

유대

었기 때문

했다.

함(2002년)

겨진 유

위더

전 20년부터 서기 70년

: ‘예 새 골 벤 링턴 박 등

로 기록된 비문이

의 배다.

상자로 기

장 방

수 있다.

리스(데가

리 북서

을 가르치고 주

된 석

유적들이 발

: 갈릴 쪽 펄 무 바 꾸짖 셨

배(19 0년대)

종류

당시 이곳 사

식 회암 원 매 식 활용됐 바 새 런 매 법 애용

려하게 장

고대 데카

(9) 카이아파스 대사제(가야

산 등 헤롯 련 엿볼

왕인 그와 왕조의 야망을

강 동

( )

성전

수의 동생 야고보 라고 아

상자. 이스라 사

정부가

많은 학자가 진

‘ 짜’ 가

라고

으로 인정

하고 있다.

2. 베들레헴 성탄교회 베들레헴은‘빵의 집’으로 불리는 기름진 곳이었고, 모압 여인 룻과 보아스의 밀밭에서의 사랑이 엮어졌으며, 이스라엘 최고의 왕 다윗이 태어났던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적한 동네였다. 하지만 신약시대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가 태어나면서 초기 기독 - 126 -


교인들의 이목이 집중됐고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서기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수 탄생동굴에 아도니스, 즉 탐무즈 신을 섬기는 제단을 건설함으로써 더 이상 메시아 전승이 전파되는 것을 막았다. 서기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되면서 헬레나 황후 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건인 탄생, 부활, 승천을 기념하는 대규모 의 기념교회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베들레헴에는 성탄동굴 을 중심으로 로마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당이 서기 339년에 준공됐 다. 서기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지진과 화재로 무너질 위기 에 처했던 기존의 건물을 헐고 새로운 교회당으로 재건했다. 사실 이 교회당은 다른 성지들처럼 서기 638년 이후 이 곳을 점령 통치했던 페르시아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될 뻔 했다. 당시 그들이 교 회에 불을 지르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는 순간 모두가 무 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했다. 이는 아기 예수에 대한 숭배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그들 머리위 벽화로 그려진 화려한 페르시아 복장의 동 방박사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모습이 그려진 교회당을 오히려 소중히 여기게 됐다. 이후로 이 곳은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종교 적 공존의 장이 됐고 현재까지 그 전통은 이어 진다. 오늘날에도 순 례자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맨 처음 눈에 띄는 광경은 이슬람 교 사원의 첨탑 끝에 달린 초승달과 교회당 종탑의 십자가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서기 1099년 6월 6일 유럽의 십자군들은 온갖 고생 끝에 꿈에 그리 던 성지 이스라엘에 도착하여 엠마오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최 종목표는 450년 동안이나 이교도들의 손에 들어가 더렵혀진 기독교 최고의 성지인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베들레헴으로부터 한 무리의 기독교인들이 엠마오 - 127 -


에 도착했다. 사라센 아랍인들이 성탄교회를 곧 파괴시킬 것 같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성탄교회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탄크리드 (Tancred)의 지휘아래 100명의 십자군 기사들은 밤새 말을 달려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도시를 장 악할 수 있었고 성탄교회 사제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예수 탄생동굴에서 무릎을 꿇었다. 약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성지 탈환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서기 15세기 이래로 성탄교회의 운명은 유럽의 카톨릭과 그리스-러 시아 정교회의 주도권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 스와 러시아 등 유럽의 열강들은 오스만 터키의 후광 아래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거룩한 성탄교회 내에서 폭력사태를 벌이기 도 했다. 성탄동굴의 예수 탄생 자리에는 1717년에 정교회 측에서 설치한 14꼭지의 별 모양의 은판이 있고, ‘동정녀 마리아가 이곳에 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라는 라틴어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바로 이 베들레헴의 은별은 1853년에 발생했던 러시아와 유럽 연합군 사 이에 치러진 크리미아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베들레헴에서의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1934년부터 시작되었을 때 교회 발굴사상 매우 드물게 성탄교회 내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제단을 장식했던 대리석을 들어내자 한가운데 원형과 세 겹의 팔각 형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구조의 초기 제단의 모습이 드러났다. 비잔 틴 건축의 전통에서 팔각형은 승리를 기념하는 것으로서 가버나움의 베드로 장모 기념교회, 그리심 산 정상의 마리아 기념교회 등에서도 발견됐다. 또한 이 교회당의 바닥을 파 내려가자 약 70센티미터 아 래에 온통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된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이 드러 났다. 교회 지하에는 여러 갈래의 동굴들이 있었는데 이중의 한 동굴 은 헤롯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어린 영혼들(마태복음 2:16)을 위한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신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서기 4세 기의 성경학자 제롬을 기념하고 있다. - 128 -


한편 이교도들이 점령한 그리스도의 무덤을 구하자는 슬로건으로 뭉 친 유럽의 십자군 운동 은 1099년부터 약 한 세기 동안 이 지역에 ‘예루살렘 라틴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그 꿈을 실현했다. 서기 1100년의 베들레헴의 성탄절은 매우 뜻 깊은 하루였다. 새로운 왕국 의 초대 왕 볼드윈 1세의 대관식이 바로 이날 밤 자정에 성탄교회에 서 거행됐기 때문이다.

3. 찌포리 문화설 1931년 여름 미국 미쉬간 대학의 워터맨 교수는 찌포리라 불리는 나사렛 근처의 한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을 시도했다. 당시 대부분 의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사마리아, 벳샨, 므깃도 등 유 명한 대도시들을 발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 는 초라한 폐허를 택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신약시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찌포리가 갈릴리 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정성스런 두 달 동안의 발굴 결과 서기 1세기에 건설된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식 극장과 별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비록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신약시대에 나사렛은 문명과는 고립된 촌락이 아닌 대도시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가 설과 함께 어린 시절 예수의 교육적, 문화적 배경을 이 도시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이해가 시도됐다. 그 결과 청중을 사로잡는 비유, 현실적인 율법의 해설, 그리고 심오한 사랑의 윤리 등은 보잘것없는 나사렛 같은 시골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걷히기 시 작했다. 하지만 소위 ‘찌포리 문화설’로 불렸던 이 가설은 중단된 발굴과 함께 얼마 못 가서 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1976년에 시행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유적조사에서 - 129 -


찌포리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됐고, 1985년부터 이스라엘의 히브리 대학과 미국의 듀크 대학 공동으로 본격적인 대규모의 발굴이 시작 됐다. 비록 1930년대에는 신약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복음서의 해 설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당 과 저택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이제 찌포리는 서기 3세기 동안 발전 했던 유대교 중심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찌 포리의 유적들은 대부분 신약시대 직후인 서기 2-5세기의 회당과 귀족들의 저택 등인데 특히 60여 군데서 발견된 모자이크는 갈릴리 지역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변을 감시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한 우뚝 솟은 언덕, 수량이 풍부 한 샘과 근처를 흐르는 하천, 비옥한 농경지, 그리고 사방으로 연결 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찌포리는 갈릴리의 중심지였다. 찌포리에는 서기전 7-5세기 경부터 사람들이 주거했던 흔적이 있지 만 서기전 1세기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이 지방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서기전 40년 헤롯은 로마군의 도움으로 찌포리를 선점 한 후 온 갈릴리를 점령했으며, 서기전 4년 그가 죽고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왕국의 분봉 왕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자연스럽 게 찌포리를 새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된 후 유대민족 최고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은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서기 200년경 찌포리에 설립되면서 이곳이 유대교의 중심지가 됐다. ‘기록된 토라’인 구약성경과 견줄만한 ‘구전 토라’인 탈무드의 기본이 되는 미쉬나가 최고랍비 유다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곳 도 바로 찌포리였다. 서기 3세기의 100년 동안 번창했던 찌포리는 유대교의 중심지가 티베리아스로 이동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됐다. 서기전 4년 헤롯 안티파스가 찌포리를 자율적인 도시라는 의미로 ‘오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로 명명하고 자기나라의 수도로서 건축공사를 시행했을 때 나사렛을 비롯한 근처의 마을 주민들이 이 - 130 -


공사에 대거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셉과 예수의 직업으로 알 려진 복음서의 ‘텍토노스(τεκτωνος)’의 좀 더 포괄적인 의 미는 단순한 ‘목수’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건축 노동자’라는 학 설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찌포리 건설 현장을 오갔을 것이고 어쩌면 이곳의 왕궁 부설학교에서 교육을 받 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예수는 찌포리에 있는 극장에서 서커스와 연극 등을 구 경했을 것이다. 그리스 고전에서 ‘휘포크리테스(υποκριτη ς)’는 ‘연극 배우’라는 뜻인데 오직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는 배 우보다는 ‘위선자’의 의미로 자주 쓰였다. 아마도 원래 예수는 겉 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이 배우 같은 자들아’라고 빗대어 꾸짖었 을 것이다. 실제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연기하는 찌포리 극장의 배우들을 염두에 둔 예수의 언어적 기법은 로마식 극장이 없었던 나 사렛 같은 시골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나사렛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성벽에 둘러싸여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왕궁의 일상생활도 예수의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잘 드러난다. 왕궁에 거하는 고급 의상을 차려입은 자들 (마태 11:8), 빚진 종을 용서하는 왕(마태 18:23-35), 혼인잔치를 베푸는 왕(마태 22:1-14), 왕과 왕이 전투를 벌이는 비유(누가 14:31),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들 중의 하나인 헤롯왕의 재무장관 아 내인 요안나(누가 8:3) 등은 모두가 찌포리나 티베리아스같은 왕도 와 동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서기 20년경 갈릴리 왕국의 수도는 갈릴리 호수 변에 새로 건설된 로마식 도시인 티베리아스로 옮겨갔다. 청년이 된 예수 자신도 이 건 설현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당시 대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아 스가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후대의 랍비적인 해석은 ‘하맛트’라 불리는 유대인 마을의 묘지를 헐고 그 위에 새로운 도 시가 건설되어서 유대인들이 정결 율법에 따라 일부러 이 도시를 피 했다고 전해 준다. 찌포리의 영화가 사라지고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 - 131 -


로 하는 티베리아스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직감한 예수가 자신의 선 교 중심지로 가버나움을 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4. 갈릴리 호수 (1) 16군데의 어항을 지닌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자리 잡은 엔게브 키부츠에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1920년대 이스라엘로 이민 온 그는 자신의 성을 ‘물고기’라는 뜻의 ‘눈’으로 바꿀 정도로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에 몰두했다. 나이 일흔이 다 되어 은퇴할 무렵인 지난 1971년부터는 그는 둘레가 66km나 되는 호수 변을 샅샅이 뒤 지며 고대 항구들의 흔적을 조사했다. 20년간의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한 그의 업적이 1992년에 출판됐을 때 모든 이들은 갈릴리 호 수에 자그마치 16군데의 고대 항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록 그가 유대교인 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나아가 ‘복음서에 나타난 고기잡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세하고도 정확했 다’는 그의 고백이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양식비평을 포함한 최근의 성경 연구방 법들은 대부분 복음서 내용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 능력에 의구 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행 4:13)는 것이 다. 그러나 이 어부의 발견은 이들의 의구심을 부끄럽게 했다. (2) 생선은 매우 비싼 식품 신약 시대 지중해 지역의 기본적인 식사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곁들인 빵과 생선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했던 갈릴리 호수 변 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도 빵과 생선이었으며 예수의 비유에서도 - 132 -


생선과 고기잡이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더운 지역에서 싱 싱한 생선은 항상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값이 비싼 편이었다.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생선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잡은 즉시 가공해서 보관해야만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고 연기로 훈제를 했고 작은 생선으로는 젖을 담갔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의 발굴에서 이탈리아 ‘쿠메’산 생선 젖이라고 기록된 항아리의 손잡이가 출토된 적도 있다. 국제무역을 통해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는 생선의 값은 더욱 비쌌다. 서기 1세기 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로마에서 훈제생선 한 수레의 가격이 ‘한 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양 100마리’와 맞먹는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이방인들에 비해서 이윤을 더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음식율법인 카슈룻트(신 14:9-10)를 지키기 위해 지중 해의 이방인 어부들보다는 갈릴리 호수의 유대인 어부들이 공급하는 생선을 원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루살렘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나흘 길을 마다 않고 판로를 개척했으며, 유대인 특수 때문에 호황을 누렸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군데에 항구가 발달되 고 어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3) 어족의 보고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대표적인 생선은 베드로 고기를 비롯해서 메기, 정어 리, 잉어 등이다. 정어리는 젖을 담그는데 오늘날까지도 대량으로 잡 히며 한해 어획량의 절반인 1000톤을 차지한다. 잉어는 정어리를 미 끼로 해서 낚시로 잡으며 정어리와 베드로 고기는 그물을 이용해서 잡는다. 베드로 고기는 지느러미가 빗같이 생겼다고 해서 아랍어로 ‘무슛 트’로 불리는데 길이가 40센티미터까지 자라며 어미가 수정된 알을 입에 넣은 채 치어가 될 때까지 2-3주 동안 보호하는 독특한 습성 - 133 -


이 있다. 따라서 이 물고기는 히브리어로는 ‘물고기를 돌본다’는 의미로 ‘암눈’이라 불린다. (4) 벳새다의 부유한 어부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는 분봉왕 헤롯 빌립 이 서기 30년경 로마식 도시 ‘율리아스’로 재건했으며 수많은 갈 릴리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자연히 생선의 수요도 늘어났고 근처의 가버나움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됐을 것이다. 실제로 벳새다 를 발굴했을 때 한 저택에서 수많은 그물추와 낚시 바늘들이 발견됐 다. 함께 출토된 로마산 고급 수입식기들을 통해서 이 집의 주인은 어업과 관련된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된다. 안드레, 빌립 등은 원래부터 헬라식 이름이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헬라 사람들과 대화할 정도로 고급문화에 익숙한 자들이었다(요 12:20-21). 시몬 베드로는 전문적인 어부로서 동생 안드레는 물론 이거니와 이웃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로서 두 척의 배 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고기를 잡았다(눅 5:10). 야고보와 요한의 집에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품꾼들도 있었다(막 1:19-20).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비교적 부유한 어부들로서 생업 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 의지대로 고기잡이를 떠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다. (5)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베드로는 왜 자신의 활동 중심지를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 까? 복음서에는 이 도시에 그의 처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갈릴 리 호수 어업현장에서 사업장의 위치는 곧 경제적 이윤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티베리아스 북쪽 5km 지점에는 신약시대의 어촌 막달라가 있는데 헬라어 지명은 ‘생선 가공공장’이라는 뜻의 타리케아(Tarichea)였 다. 좀 더 높은 이익을 올리려는 어부들은 생선을 잡은 즉시 타리케 아로 수송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가공용으로 넘겼다. 벳새다의 어 - 134 -


부들은 헤롯 빌립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 인 타리케아로 생선을 수송하면 가버나움 세관에서 막중한 통관세를 지불해야만 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어업의 근거 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가버나움은 타리케아와 같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이기 때문에 감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 이다.

5. 맛사다(Masada) (1) 지리적 배경 맛사다는 원래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해안 가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맛사다는 동쪽의 사해 변으로는 400미터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 는 주위의 계곡보다는 100미터 이상으로 솟아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맛사다 요새의 정상은 길이 600미터, 가장 넓은 곳의 폭이 300미터 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과 1960년대의 발굴을 통하여 맛사다 요새의 역사적, 고고학적 모습들이 상세하게 밝혀졌 다.

맛사다는

1838년

게디를

탐사했던

미국의

로빈슨(E.

Robinson)과 스미스(E. Smith)에 의해 처음으로 역사적 유적지로 확인됐다. 1842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월콧트(S.W. Walcott)와 영국 인 티핑(Tipping)이 맛사다에 직접 올라가서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였고, 1848년에는 미국인 해군 장교 린치(J.W. Lynch), 1851년에는 프랑스의 드 소시(F. de Saulcy), 1858년에는 레이 (E.G. Rey) 등이 차례로 맛사다를 탐사하였다. 나아가 1867년 영국 의 워렌(C. Warren)과 1875년의 콘더(C.R. Conder)에 의해 맛사 다의 구체적인 구조물들이 차례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2) 고고학적 배경 맛사다의 본격적인 발굴은 1963-1965년 동안 히브리 대학의 야딘 - 135 -


(Y.Yadin)의 주도하에 전 세계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체계 적으로 이루어졌다. 맛사다의 최초의 주거 역사는 동석기 시대(서기 전 4300-3300)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의 흔적은 남쪽 절벽에 위치한 동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에서 당시의 모직 천 조각, 거적, 토기 류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들의 주거는 유대 광야의 골짜 기 동굴에서 자주 발견되는 동석기 문명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왕정시대인 서기전 10세기 이후에도 북쪽 절벽 근처에 사 람들이 일시적으로 주거했던 흔적을 이 곳에서 발견된 당시의 토기 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맛사다는 서기전 150년경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에 의해 처음으로 요 새로 이용되었다. 이 후 헤롯 대왕(서기전 37-4)은 백성들의 반란 을 두려워하여 항상 대피할 수 있는 광야의 요새로서 맛사다를 계획 적으로 축성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비축해 놓았다. 서기전 40년 자신 의 적대 세력인 안티고누스와 파르티아 군대에 쫓기던 헤롯 가족들 을 맛사다에 숨겨놓고 동생인 요셉으로 하여금 800 여명의 군사로 이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당시 안티고누스에 의해 포위된 헤롯의 가 족 일행은 갑자기 쏟아진 폭우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알렉 산드리아를 통해 로마로 망명한 헤롯이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유 다의 왕으로 임명받아서 로마 군을 이끌고 유다 지방을 정복한 후 맛사다를 다시 찾은 헤롯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유대 민족의 반란과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공격 위협에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서 서기 전 37-31년 사이에 맛사다를 본격적으로 요새화 했다. 헤롯이 죽은 후 이 곳에는 소규모의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요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3) 고고학적 발견 물 1) 물 저장 시설: 서기전 150년경 헤스몬 왕조의 왕들이 맛사다를 본격적으로 요새화 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물 공급 및 저장에 관한 것이었다. 서기전 40년경 헤롯은 왕이 되기 전 반대파에게 몰려서 어머니를 비 - 136 -


롯한 가족과 부하들을 맛사다 요새에 숨겨두고 로마로 떠난 다음 무 사히 돌아와서 맛사다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빗물 덕분에 죽을 고비 를 넘겼다는 말을 전해 듣고 헤롯은 요새의 첫 번째 조건으로서 종 합적이고도 완벽한 물 공급 및 저장 체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맛사다 의 급수시설은 계곡의 댐과 수로 등의 물 공급 체계와 지하 저수탱 크들로 구성된 물 저장 체계로 크게 양분된다. 헤롯은 먼저 맛사다 서쪽의 유대 광야에 위치한 북쪽의 벤-야이르 골짜기와 남쪽의 맛사다 골짜기 등 두 곳에

댐을 건설하였고 이 곳

으로부터 맛사다의 북쪽 절벽의 중턱에 두 줄로 파 놓은 저수탱크까 지 수로로 연결하였다. 따라서 겨울철 우기에 유다 산악지대에 비가 내리게 되면 자연히 댐으로 막은 골짜기는 거대한 호수로 변하게 되 고 이 물은 폭이 1.4미터나 되는 수로를 통하여 맛사다의 저수탱크 로 운반되었다. 댐의 높이에 따라 맛사다 계곡에서부터 이어지는 수 로는 상부 저장 탱크들로 연결되었고, 벤-야이르 계곡의 물은 하부 저장 탱크들로 운반되었다. 물 저장 탱크는 정방형으로 파여졌으며 상부에는 8개 그리고 하부에는 4개가 배치되었고 탱크 하나 당 용량 은 약 4천 입방미터이고 전체는 약 4만 입방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400명의 군대가 10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에 해당되는 것 이다. 이 밖에도 뱀길(snake path) 근처와 정상의 여러 군데에도 7 개의 저장 탱크가 있어서 겨울철의 빗물을 저장하거나 북쪽 절벽의 12군데의 저장 탱크에서 끌어올린 물을 임시로 저장하기도 하였다. 2) 성벽과 요새: 맛사다는 북쪽의 궁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1400미터 길이의 성벽 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벽은 4미터 두께의 칸막이 성벽(casemate wall)으로서, 1.4미터 두께의 외벽과 1미터 두께의 내벽 사이에는 작 은 돌들로 채워져 있거나 수비대의 방으로 건설됐다. 맛사다의 성벽 은 70개의 수비대 방과 30개의 망대, 그리고 4개의 성문으로 구성돼 있다. 네 개의 성문은 모두가 동일한 설계로서 벤치로 둘러싸인 네모 난 방에 바깥쪽으로 통하는 외문과 안쪽으로 통하는 내문으로 구성 - 137 -


되어 있다. 네 개의 성문은 위치에 따라 각각 뱀 길 문, 서문, 남문, 수문 등으로 구분된다. 3) 창고: 맛사다의 창고는 공공건물로서 별도로 건설된 것과 특정한 건물에 딸린 것 등으로 구분되는데 대표적인 공공 창고는 바로 북쪽의 로마 식 목욕탕 옆에 위치한 것이다. 창고는 중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양편 에 폭 4미터, 길이 27미터의 방들이 건설되었으며 각방의 입구는 복 도를 향하도록 설계되었다. 당시 보관되었던 중요 식량들은 밀, 보리 등의 곡식류, 올리브유,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의 건과 류, 그리 고 포도주 등이었으며 각각 적합한 항아리에 담겨졌음이 발굴을 통 해서 밝혀졌다. 창고의 벽면과 천장은 석고로 덧칠해져서 방수의 효 과를 가져왔고, 특별히 들어가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의 방바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석고로 칠해진 웅덩이가 패여 있어서 이 곳이 포도 주나 기름 등의 액체 류를 부어 놓고 항아리에 담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삼층 궁전: 맛사다의 북쪽 절벽에는 삼층의 테라스에 각각 건설된 세 개의 궁전 이 있다. 이 테라스는 바위를 계단식으로 깎은 다음 돌로써 축대를 쌓아 완성하였다. 상궁전(upper palace)은 왕족이 주로 기거하던 곳 으로서 절벽 가장자리에는 반원형의 회랑이 딸린 전망대가 있으며, 이 곳에서 유대 광야와 푸른 사해, 그리고 건너편의 모압 산지를 잘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전망대의 뒤 쪽에는 온갖 진귀한 화초로 꾸 며진 정원이 있었다. 삼층 계단 중 한 가운데 위치한 중궁전(middle palace)은 이오니아 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정자를 건설하였고, 발굴에서 발견된 지붕 장식을 통하여 화려한 로마식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맨 밑의 하궁전(lower palace) 직사각형의 회랑과 한 가운데의 뜰과 부속 목욕탕이 딸린 연회장이 있었으며, 특별히 남쪽 벽에 그려진 채 - 138 -


색 벽화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하궁 전은 가파른 절벽에 돌로써 축대를 쌓고 건설되어서 당시 건축술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상궁전에서부터 중궁전을 통해 하궁전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직사각형의 기둥을 중심으로 계단이 사방으로 감아 내려가는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모든 계단은 지붕을 만들어 실내로 통하도록 설계됐다. 5) 서 궁전: 서 궁전은 이 요새의 행정과 의전을 진행했던 중심적인 공공건물로 서 3900평방미터 넓이로 맛사다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 궁전은 숙소와 집무실, 작업실, 창고, 사무실 등의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 다. 숙소는 한 가운데의 실내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둘러싸인 방 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개에 달하는 집무실의 바닥은 검은색과 붉 은 색의 돌들로 만들어진 매우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무늬와 포도, 무 화과 잎, 석류 등의 식물 모티브가 조화를 이루는 모자이크로 장식되 어 있으며 이 모자이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집무실 옆에는 욕조가 딸린 목욕탕이 있으며 건 물 외벽에 설치된 계단으로 미루어 서궁전은 이층으로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목욕탕: 헤롯은 북쪽의 궁전 입구에 화려하고도 웅장한 로마식 목욕탕을 건 설했다. 이 목욕탕은 마당과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당에는 모자 이크로 바닥이 장식되어있고 나바테아식 기둥들로 받쳐진 지붕으로 덮인 회랑이 있었다. 목욕탕 건물은 원래 로마식의 전통적인 여섯 종 류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방으로 소화하였다. ① 탈의실(apodyterium): 벽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고 바닥 에는 검은 색과 흰색의 삼각형 타일로 포장됐다. 이 방은 탈의실 및 기름 맛사지(untorium)의 기능도 담당했다. - 139 -


② 온탕(tepidarium): 이 방은 탈의실과 마찬가지로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타일로 마무리되었다. ③ 냉탕(frigidarium): 냉탕은 온탕으로 들어가서 오른편에 위치하며 계단식으로 된 욕조에는 방수 석고가 칠해져 있었고 항상 찬물을 채워 놓았다. ④ 열탕(caldarium): 열탕은 전체 목욕탕 건물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큰 방이다. 이 방에는 북쪽 벽의 아치형 홈에는 석영으로 만 들어진 얕은 욕조(labrum)가 있었고 남쪽의 사각형 홈에는 욕조 (balneum)가 설치되어서 납으로 된 파이프를 통하여 목욕탕 외 부에서 항상 찬물이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열탕은 항상 바닥이 뜨거운 관계로 물을 부어서 수증기가 일도록 하여 일종의 증기탕 (subartorium)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⑤ 난방 구조: 열탕을 항상 뜨겁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닥은 온돌 (hypocaust)의 구조로 되어 있었고 구들 밑의 바닥에는 높이가 65센티미터가 되는 200여 개의 특수한 내연벽돌로 쌓은 기둥들 이 구들장을 받치게끔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열탕의 벽과 천장 에도 네모진 토관으로 덮여 있어서 아궁이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 기가 이 토관들을 통해 순환됨으로써 열탕은 일종의 사우나 역할 을 하였다. 이 열탕의 독특한 온돌식 난방 장치와 벽의 네모진 토 관들은 발굴 결과 일부가 현장에 잘 보존되어서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신약시대 당시의 로마식 목욕탕의 자세한 구조를 일목 요연하게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7) 유대 전쟁(서기 66-73) 당시 열심당원들의 건축물 서기 66년부터 맛사다를 차지했던 열심당원들은 대부분의 건물들을 자신들의 숙소로 개조하기 위해 바닥의 타일과 기둥, 그리고 나무판 들을 뜯어내어 건축자재로 활용하였다. 북쪽의 삼층 궁전에서 화살촉 과 갑옷의 비늘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맛사다에서 가장 화려했 던 이 건물들이 열심당원들의 수비대가 주둔했던 막사로 활용되었음 을 잘 알 수 있다. - 140 -


서쪽 궁전은 헤롯 시대와 마찬가지로 행정적 중심지로 이용되었고 그 외의 건물들은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 곳에서는 요세푸스의 증언 대로 열심당원들이 자결하기 직전 가구와 무기들을 한 곳에 모아 놓 고 불로 태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열심당원들이 새로 건설했던 건물들은 임시로 지은 숙소들 외에 주로 종교적 목적의 회당과 정결 예식용 목욕탕인 미크베(mikveh) 등이다. 맛사다 요새의 북동쪽 성벽에 건설된 회당은 130평방미터 넓이의 규 모로 당시 유대 회당의 건축적인 전통에 따라 제단 방향이 예루살렘 이 있는 북서쪽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다. 즉 회당에 들어오는 예배자 들은 자연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북서쪽 모퉁이의 20평방미터 크기의 방에는 유리와 청동제의 그릇들 이 발견되었고, 회당의 바닥에서는 “마아쎄르 코헨(제사장의 십일 조)”이라고 적힌 오스트라콘(토기조각 기록), 신명기와 에스겔서 두 루마리 사본 조각이 발견되어서 이 건물의 용도를 분명하게 하였다. 다른 회당과 마찬가지로 맛사다의 회당 내부에는 네 단으로 된 벤치 가 둘러 싸여 있었으며 한 가운데는 두 줄로 이어진 기둥이 있어서 이층의 난간을 받치게끔 하였다. 맛사다에서 발견된 두개의 미크베 중에서 남쪽의 성벽에 건설된 것은 유대교 할라카에 의거한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미크베는 빗물이 모여서 고일 수 있게 한 저 수장, 정결 예식용 욕조, 그리고 실제로 몸을 씻는 장소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8) 중요 유물들 1) 동전류: 맛사다에서 발견된 650여 개의 동전들 중에서 가장 중요 한 것은 주조 연대가 새겨진 유대 전쟁 동전들이다. 이 동전들은 서 기 66년을 기점으로 제 1년부터 제 5년까지 주조되었으며, 특히 제 4년과 제 5년의 동전들이 다섯 개나 발견되어서 서기 70년 예루살 렘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스스로 동전을 을 알 수 있다.

- 141 -

주조할 만큼 여유가 있었음


2) 오스트라카(토기조각 기록): 맛사다에서는 모두 700여개의 오스 트라카가 발견되었으며 각각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 그리고 라틴 어로 된 기록들이었다. 특별히 이 중에서도 아람어와 히브리어 오스 트라카는 이들의 기록 시기가 정확하게 서기 66-73년 사이이기 때 문에 고문자학 비교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맛사 다의 오스트라카는 창고에서 발견된 물품 표와 식량 배급표, 주거 지 역에서 발견된 소유주 명패, 회당에서 발견된 제의 관계 기록, 그리 고 수문 근처에서 발견된 열심당원들의 지도자 벤 야이르 등의 이름 이 새겨진 12개의 추첨용 명패 등으로 분류된다. 3) 두루마리 사본: 맛사다에서는 창세기(46:7-11), 레위기(4:3-9), 신명기(33), 에스겔서(35-38장), 시편(81-85편, 150편) 등의 구 약성경의 사본들과, 벤-시라의 지혜서(39-44장), 요벨서 등의 외 경, 그리고 안식일 시편 등 모두 14 점의 두루마리 사본들이 발견되 었다.

(9) 로마군의 유적들 서기 70년 여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서 4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대 로마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던 로마 군은 당시 맛사다를 점령하 여 끝까지 항거하던 열심당원들을 일종의 광야 전투 훈련을 목적으 로 3년에 걸쳐 포위 및 정상 공격을 통해 완전히 섬멸시켜 버렸다. 로마 군들은 그들이 주둔했던 진지와 포위 돌담,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새 함락을 가능케 했던 경사로 등의 유적이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 되어 있다. 1) 로마군 진지: 모두 8개의 진지가 건설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맛사다 건너편 북서쪽 언덕에 위치한 요새 F는 로마 십군단의 실바 장군이 직접 지휘했던 본부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들 진지에서는 나바테야 토기가 발견된 - 142 -


점으로 미루어 요르단의 페트라를 수도로 한 광야의 전문가들인 나 바테야인들도 맛사다 점령에 용병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으며, 동 전 류가 서기 120년경에 주조된 것까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서기 73년에 맛사다가 점령된 이후에도 로마 군이 계속해서 주둔한 것으 로 추정된다. 8개의 진지는 약 9000여명의 로마군들을 수용할 수 있 는 규모이다. 2) 포위 돌담(circumvallation): 맛사다 주변의 진지들을 연결하는 폭 1.8미터, 길이 3.5킬로미터의 포위 돌담은 몰래 도주하려는 열심당원들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로마 군들의 철저한 전투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3) 경사로: 맛사다의 서쪽에 축조된 경사로는 지금까지 고대 로마 세계에서 건 설된 공격용 경사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된 것이다. 실 바 장군은 길이 200미터 높이 100미터의 경사로를 건설하고 30미 터 높이의 공성퇴 탑을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시켰다. (10) 비잔틴 시대의 유적 서기 5-6세기에 기독교 수도사들은 맛사다 정상에 교회당과 부속 건물을 건설하여 일종의 수도원을 운영하였다. 이 교회 건물의 바닥 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오늘날까지 잘 보전되어 있고, 요새의 이곳 저곳에도 당시의 수도사들의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11) 맛사다의 최후 서기 1 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Josephus)가 기록한  유대 전쟁를 통하여 맛사다가 헤롯의 요새 궁전인 동시에 유대전쟁 (서기 66-73) 당시 유대인들이 끝까지 로마 군에 항거했던 최후의 비극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서기 66년 유대 전쟁이 시작될 때 갈릴리 지방 출신인 유다의 아들 메나헴은 960명의 극우파 민족주의 - 143 -


자들인 “열심당원”들을 이끌고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 고 있던 맛사다 요새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이 곳에 저장된 물, 식량, 의복, 무기류 등의 보급품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여

로마 군에 대항하

는 새로운 거점을 확립하였다. 유대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 로 서기 70년 여름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맛사다는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유대인들의 보루가 되었다. 당시 맛사다의 지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당한 메나헴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엘리에제르였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 반란의 진압 목적을 이미 달 성한 로마군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 장군은 장차 아라비아 지역 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서기 73년 당시 유다의 총독이었던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로마 제 10군단을 이끌고 맛사다를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했 다. 로마 군은 2년에 걸친 무수한 정상 공격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자 요새 꼭대기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시키기 위해 공성퇴(battering ram)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돌 판으로 포장된 경사로를 6개월에 걸쳐서 건설하였다. 맛사다 요새의 유대인들의 격렬한 방해에도 불구 하고 경사로가 완성되어 공성퇴가 성벽을 무너뜨렸고 다음날 아침이 면 성벽이 파괴된 곳으로 로마 군이 진격해 올라올 운명에 처해졌다. 바로 이날 밤에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야이르는 모든 유 대인 전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 모든 일은 동족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이 러한 처벌이 적군인 로마 군에 의해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가 스스로 심판하도록 합시다. 따라서 내일 아침에 로마 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 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밤에 우리가 아직 자유의 몸일 때 스스로 영 광의 죽음을 택합시다.”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족의 가장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다음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여

열 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였고 남은 열 명이 한 명을 추첨하여 아 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했다.

- 144 -


6. 바울의 고린도 일년 반 체류 바울은 그의 선교여행 중 모두 60여 군데의 도시들을 거쳐 가는 동안 들리는 곳마다 길게는 한달 짧게는 3-4일 정도 머물렀다. 바울의 설교 를 들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이방인들의 반발, 그리고 이러한 소요사태를 방지하려는 지방 총독들의 제지로 한 곳에서 오랜 기간 머물 수가 없었 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무려 1년6개월을 머물렀다. 고린도는 어떤 곳이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 바울을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까? (1) 국제적인 대도시 고린도 비록 아테네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하지만 서기 1세기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국제적 인 도시였다. 해발 575m 높이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와 함 께 바닷가의 레카이온 항구를 동시에 지닌 고린도는 도시라기보다는 막 강한 왕국이었다. 일찍부터 고린도에는 유대인들이 정착했으며 바울은 자연스럽게 이곳의 유대인 구역에 머물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리스 도의 도를 전할 수 있었다. 한 도시에서 여러 외국인들과 교류하며 이를 통해 그의 선교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케아 지방에서 그를 시기하는 유대인들과 해당 로마 관리들의 저지로 구금되고 몰래 탈출하는 등 계획했던 만큼 선교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안디옥에 필적할 만한 선교의 본부 를 고린도에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고린도는 근처의 성소 이스트미아

에서 대규모 축제와 운동경기를 2년에 한번씩 개최했기 때문에 바울로서 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2) 이스트미아 경기 서기전 776년부터 시작되어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필적할 만한 이스트미아 경기는 서기전 580년경부터 시작됐고 고린도에서 동쪽 으로 9킬로미터 떨어진 이스트미아에서 개최됐다. 이 경기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소년 신 팔라이몬에게 헌정하는 축제로 열렸다. 포세이돈 신 - 145 -


전은 서기전 7세기에 최초로 세워졌고 이후 1300여 년 동안 파괴와 재 건을 거듭했다. 이스트미아에는 두 개의 스타디움이 있었는데 서기전 7 세기에 건설된 최초의 스타디움이 너무 신전과 가까이 있어서 대규모의 관중석을 만들지 못함에 따라 서기전 4세기경 남동쪽으로 350미터 떨어 진 곳에 새로운 스타디움을 건설했다. 서기 1세기 디오 크리소스톰은 이스트미아 경기를 관전하고 이 축제의 생생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축제가 시작되면 포세이돈 신전에는 많은 소피스트 철학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제자들은 시를 낭 송하며 서로 자신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마술사들과 점쟁이들은 신기한 요술과 재주로 손님들을 끌어 모았고 수많은 장사꾼들은 거리의 가판대 에서 온갖 물건을 팔았다. 돼지기름을 온 몸에 바른 선수들은 저마다 승 리를 장담했고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셀러리로 만든 승리의 면류관이 주 어졌다.’ 육상경기로는 달리기, 높이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등이 있었고 격투기는 권투와 레슬링 경기가 열렸다. (3) 바울은 천막업자였다. 바울이 이스트미아 경기에 참여하고자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기술을 활용해서 선교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선박 의 돛을 비롯해서 극장의 차일, 포룸의 천막, 노천상점 등 천막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천막업자는 중요한 직업 중 하나였다. 이중에서도 천막의 수요가 가장 많은 경우는 그리스 지역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축제와 운동 경기였다. 보통 축제는 일주일 정도면 끝나지만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이스트미아 축제나 4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올림피아 축제는 2-3개월씩 지속됐다. 축제에 몰려든 수만 명의 참가자들을 위해서 수백 개의 천막이 필요했고 수백 명의 천막업자들이 동원되어 몇 달씩 일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요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많은 천막업자들이 활동했고 로마에는 천막업자의 조합도 있었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통해서 네로 황제의 원 - 146 -


형경기장에는 푸른색 바탕에 별들이 그려진 천막이 지붕의 역할을 했으 며, 가정집의 안마당에는 붉은 색의 천막을 쳐서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바닥에 이끼가 잘 자라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막업자의 경우 수입은 괜찮았지만 일은 매우 고된 것이었다. 대부분 여름철의 뜨거운 햇볕이나 겨울철의 차가운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서 작 업을 해야했고 천과 가죽을 자르고 굵은 바늘을 이용해 바느질을 했기 때문이 손이 부르텄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바느질 작업으로 바울의 손이 매우 무뎠기 때문에 그는 글씨를 크게 쓸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갈 6:11). (4)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전문적인 천막업자들로서 로마 제국 내에서 대규 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며 일했다. 로 마에 많은 일감이 있었음에도 불굴하고 이 부부가 고린도에 온 이유는 서기 41년 클라디우스 황제가 내린 로마로부터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 었다(행 18:2). 바울은 이미 자리를 잡은 고린도의 아굴라 가족을 알게 됐고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했다(행 18:3).’ 이 부부는 바울과 1년 6개월을 같이 동고동락하며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스트미아 경기 특수 때 문에 사업도 번창할 수 있었기에 목숨을 내걸 정도로 바울의 선교 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롬 16:4). 바울의 선교로 이 부부는 에베소(고전 16:19)와 로마(롬 16:3-5)에 가정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서기 50-51년 고린도에서 일년 반이나 지내며 관전했던 이스트미아 경기는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경기의 전 과정이 끝난 후 우승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폐 막식은 그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운동 경기로 비유한 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운동경기에 참여하여 정당하게 경쟁을 했고 이제 막 달리기를 끝냈습니다. 나는 경기의 서약을 준수했습니다. 이제 남 - 147 -


은 것은 나를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이며 공정한 심판관이신 주님 께서 내게 수여하실 것입니다(딤후 4:7-8).’

▣ 과 제 ▣ 1. 찌포리에 대하여 쓰라 2. 갈릴리 호수에 대하여 쓰라 3. 맛사다에 대하여 쓰라 4. 고린도와 바울에 대하여 쓰라 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하여 쓰라.

- 148 -


제8장 사본 1. 시내 사본(Codex Sinaticus) 1844년 5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한 성경학자는 시내산 중턱의 성 카타린 수도원 구내 도서관에서 큰 바구니에 담긴 가죽종이 뭉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곳의 한 수도사는 이 뭉치 중 일부가 이미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던져졌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도 또 렷한 그리스어 대문자로 구약의 예언서들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었 다. 그는 대부분 구약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는 모두 129쪽이나 되는 이 가죽종이들을 하나씩 골라서 수도원 측에 건네주었고 그들은 답 례로 그에게 43쪽을 선물로 주었다. 1500년 동안 잊혀졌던 세계 최 고의 그리스어 성경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인 위업의 주인공은 복음서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대항할만한 물적 증거로서 가장 오래된 신약성경을 찾아 서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약관 29세의 티셴도르프(

C Tischendo .

rf 였다. 1815년 독일의 렝겐펠트에서 태어난 그는 라이프찌히 대학 )

에서 신약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1840년에 이미 자신의 독자적인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할 만큼 일찍부터 이 분야의 전 문가로 성장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기독교 국가답게 정통성 있는 최고의 성경 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 프랑스의 에프라 임 사본, 그리고 이탈리아의 바티칸 사본들이다. 하지만 프러시아 제 국은 이렇다할만한 고대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티셰도르프의 시내 사본은 커다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라이프찌히로 돌아 온 그는 2년 후인 1846년 삭소니 지방의 왕을

- 149 -


기념하여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 사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입수한 43쪽의 그리스어 구약을 출판했다. 하지만 당시 티센도르프 는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단지 이집트 근처라고만 얼버무렸 다. 많은 독일인들이 만일 영국인이 이것을 처음 발견했더라면 엄청 난 돈을 지불하고 즉각 구입하여 벌써 대영박물관에 갖다 놓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곧 이집트 총독의 주치의로 일하는 자신의 친구 프루너-베이(Pruner-Bey)를 통해 나머지 86쪽을 구입하려 했으나 이미 이 사본의 가치를 알게 된 수도사들은 더 이상 팔려고 하지 않 았다. 1852년 말 티셴도르프는 두 번째로 성 카타린 수도원을 방문하여 나머지 86장을 찾아 구입하려 했으나 수도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빈 손으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는 길에 팔레 스타인과 소아시아 그리스 등지의 수도원들을 방문하여 여러 점의 고대 성경의 사본들을 입수하는데 성공했다. 1859년 1월 그리스 정교회의 대부 격인 러시아 황제의 후원으로 티 셴도르프는 세 번째로 시내 산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성 카타린 수도원에 도착한 그는 일부러 수도사들을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애써 서 관심을 돌렸다. 그가 사귄 한 수도사가 그가 떠나기 사흘 전 그의 방에서 붉은 천으로 싸 보관했던 346쪽에 달하는 성경을 보여주었 다. 필체로 보아 이미 소유한 43장과 같은 저자의 것임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이 사본은 신약전체와 구약의 일부를 담고 있었다. 바티칸 사본이나 알렉산드리아 사본과는 달리 온전한 신약은 처음이었다. 그는 카이로 의 부속 수도원으로 이를 가져가서 베끼고 돌려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는 칠 일만에 카이로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던 수도원장에게 필 사허락을 부탁했고 그는 한번에 8쪽씩 건네받아서 베끼기로 허락을 받았다. 두 달 동안 그는 346쪽 모두를 베끼는데 성공했다. 모두 11 만 줄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 150 -


독일로 돌아온 그는 마침 성 카타린 수도원의 새로운 원장 선출이 늦어지는 것을 이용하여 그들이 스스로 러시아 황제에게 이 사본을 선물하도록 계획을 꾸몄다. 2월 24일 한 달 반 후에는 사본을 돌려 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3월 30일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 신이 몰래 갖고 러시아 황제에게 선사하고자하는 뜻을 비쳤다. 아무 리 그가 외교력을 동원했지만 수도원 측은 기증이 아닌 복사 본을 위한 임대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 해 9월 24일 그는 돌려주겠다는 편지를 수도원에 보낸 후 드디어 시내 사본을 임대해서 뻬쩨르부르 크에 도착했다. 1859년 11월 짜르코에-셀로(Tsarkoe-Selo)에 있 는 겨울궁전에서 그는 러시아 황제에게 시내 사본을 증정했다. 1862 년 10월 러시아 왕정수립 1000주년을 기념하여 모두 223부에 달하 는 복사 본을 출판해서 러시아 황제로 하여금 전 세계의 도서관에 기증토록 했다. 이중에 하나가 오늘날까지 성 카타린 수도원에 보존 되어 있다. 나중에 러시아는 수도원 측에 9000루블(1350파운드)을 지불했다. 시내 사본은 언제 어디서 기록되었는가? 기록 연대를 알 수 있는 확 실한 증거는 복음서 부분의 여백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일 련의 숫자 표시인데 이것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고안 한 것이므로 그의 사망 연도인 서기 340년 이후로 추정된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31 년 가이사랴의 감독이자 저명한 성경학자인 유세비우스로 하여금 그 리스어 성경을 50권 제작하여 제국내의 중요한 교회에 배포하도록 명령했다. 이 중의 하나인 시내 사본은 원래 가이사랴에 있던 것이 서기 638년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 그들의 박해를 피해 빠져나온 어느 피난민에 의해 성 카타린 수도원까지 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바티칸 사본도 필체로 보아 유세비우스가 제작한 50권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시내 사본의 내용상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쟁은 바로 마가복음서 - 151 -


의 끝 부분이 현재의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예수의 부활 기사(마가 16:9-20)가 없다는 점이다. 당시는 모든 신약학자들이 마태복음서 를 가장 초기의 기록으로 여겼기 때문에 티셴도르프는 자연스럽게 필사자의 실수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마가복음서가 최초의 기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20세기 초부터 복음서 논쟁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또한 티셴 도르프는 글씨체와 잉크 색깔의 차이로 요한복음 21장 25절이 후대 의 첨가임을 밝혔다. 당대의 많은 학자들이 이를 부인했지만 자외선 분석 결과 원래 24절로 끝을 맺고 ‘요한에 의한 복음’이라는 끝맺 음 제목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이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25절을 기록 한 것으로 밝혀졌다. 누가복음서 24장 51절 이하에도 예수의 승천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공산 러시아가 성립되면서 돈이 궁한 러시아 정부는 1933년 12월 27일 347쪽에 달하는 시내 사본을 영국에 10 만 파운드를 받고 팔아 넘겼다. 시내 사본은 전체가 약 730쪽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55퍼센트인 403쪽 정도만 발견되었고 이들은 현재 네 군데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인 347 장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있고 43장은 독일 라이프찌히의 도서관 에, 3장은 뻬쩨르부르크에, 그리고 아직 완전히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10여장이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 보관중이다. 1975년 5월 성 카타린 수도원 구내의 오래된 창고가 불이 난 후 이 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대 문헌들이 1,000여점 발견되었고 이 들 중에는 10여장이 넘는 시내 사본의 일부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현존하는 모든 사본들이 사도행전 8:5에서 빌립이 사마리아로 간 것 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시내 사본은 그가 가이사랴로 간 것으로 되 어 있다. 따라서 기록 장소는 가이사랴로 여겨진다. 또한 유세비우스 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50권의 성경을 만들었다면 그의 필사실 이 있는 이스탄불이 기록 장소일 가능성도 있다. 가죽종이에 기록하 - 152 -


여 신구약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장정했다는 사실은 당시 낱권으로 파피루스에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에 비해 괄목할 만한 로마 제국의 업적이었다. 비로소 실용적으로도 유대교의 구약과 기독교의 신약을 하나로 묶은 계기가 되어서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건을 구약의 예언 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다. 모두 14,800군데서 후대의 수도사들이 좀더 원본에 가까운 구절을 분석하기 위해 여백에 수정의 기록한 것 은 바로 교회사를 통하여 여러 번에 걸친 성경의 본문 연구가 치밀 하게 진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티셴도르프가 처음 입수한 43장중에서 에스더서의 끝부분에는 꽤 긴 분량의 참고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시내 사본의 수정 작업 은 오리게네스(Origenes)의 헥사플라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헥 사플라는 오리게네스와 그의 제자들이 20년에 걸쳐서 서기 245년에 완성한 것으로 모두 여섯 단으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 히브 리어의 그리스어 음역, 오리게네스 자신의 그리스어 성경, 그리고 당 시의 대표적인 세 가지 그리스어 사본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 후 차 례대로 안토니우스, 팜필루스 등이 수정을 가했으며 이 편집 본을 직 접 참고로 하여 익명의 수도사가 시내 사본에 수정 기록을 남겼다. 이는 시내 사본이 성 카타린 수도원으로 옮겨지기 전의 일이었다. 시내 사본은 신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헤르마스의 목자서와 바르나바 스의 편지 등의 외경도 포함하고 있다. 구약은 전체의 약 40퍼센트 정도만 보전되었고 신약은 전체가 남아있었다. 따라서 시내 사본은 바티칸 사본과 함께 그리스어 신약성경의 진수 를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시내 사본은 대문자 그리스 어로 기록되었고 장, 절이나 심지어 단어 사이의 공백도 없이 죽 이 어진 문장이었다. 그가 평생을 걸쳐 수집한 고대 성경 사본들은 오늘 날 영국 글라스고우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희귀 본인 1516년 출판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1520년 루 - 153 -


터의 독일어 신약성경의 초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서기 330년 헬레나 황후는 시내산 중턱 샘이 흐르는 골짜기에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와 모세의 불붙는 가시덤불을 보호하는 망대를 건설 했다. 성 카타린 수도원은 서기 548-565년 사이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됐다. 서기 726년부터 시작된 성상파괴 운동에 영 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원 구내에는 희귀한 고대의 성화들이 수백 점 남아 있다. 서기 9세기 700여 년 전 순교했던 알렉산드리아 의 성녀 카타린의 유해가 산에서 발견되었고 수도원의 명칭도 성 카 타린으로 바뀌었다.

2. 에프라임 사본(Codex Ephraimi): 서기 5세기경 그리스어로 기록된 구약과 신약 성경으로 나중에 훼손 된 후 낱장의 가죽종이들은 원래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른 문 서가 기록된 팔림프세스트 사본이다. 서기 12세기 에프라임 시루스(Ephraim Syrus)는 자신의 설교를 그 리스어로 이 위에 기록하였다. 모두 208쪽의 사본 중에서 구약은 잠 언, 전도서, 아가서, 욥기, 지혜서, 벤 시락서 등을 포함하는 63쪽이 며 신약은 145쪽으로 대부분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죽종이의 크기는 가로 25.6-26.4 센티미터, 세로 31.4-32.5센티 미터이며 한 쪽은 한 단으로 채워져 있고 한 단은 40-46줄로 이루 어져 있다. 신약은 원래 232-238쪽인 것으로 추정된다. 에프라임 사본은 맨 처음 이집트에서 기록된 후 서기 6세기 가이사 랴에서 첨가된 흔적인 있고 서기 9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또 한 차 례 첨가되었다. 이 사본은 서기 16세기 경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타린(Catherine de Midici)이 소유하고 있다가 프랑스로 함께 이 동되었고 오늘날 파리 국립 도서관(Biblioth que Nationale)에 소장 되어 있다.

- 154 -


3. 시리아 사본(Codex Syriacus):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성경의 사본은 1891년 캠 브리지 대학에서 벤슬리(R.L. Bensly)와 버킷(F.C. Burkitt)교수에 의한 사진의 판독으로 발견되었다. 문제의 사진들은 그해 이른 봄에 류이스(Agnes Lewis)와 깁슨(Margaret Gibson)여사에 의해 수도 원의 도서관에서 촬영된 것들이었다. 두 교수는 이듬해인 1892년 시 내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약 300쪽에 달하는 시리아 사본을 복사했 다. 시리아 사본은 전문용어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 불 리는 가죽종이 기록인데 원래 서기 5세기 중엽 시리아어로 신약성경 을 최초로 기록했고 나중에 누군가가 이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다른 문서를 기록해 놓았다. 따라서 팔림프세스트인 경우 한 면에서 두 종 류의 문헌을 확인할 수 있다. 켐브리지 대학팀은 1894년 ‘시내 팔 림프세스트로부터 필사한 시리아어 사복음서(The Four Gospels in Syriac transcribed from the Sinaitic Palimpsest)’를 출판했다. 이 시리아 사본은 시내 사본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서 끝부분의 부 활 기사가 빠져있었다.

4. 나그 하마디 문서 1945년 12 마

붙 이

월 느 어

토인에 의해 발견된 고대 사

타리

라는 도시로부터 북동으로

(

)라는

벽 아

'

10

면에

들 중의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그

의 초기 중심지였던

팔렸

스 판지에 있는 많은 언급들로 보아 그 당시 수도

에서 발생된 것임을 에게

따 돔 약 ㎞ 랫 표 원

부에 의해서 '하모라

디 벨 엣 프 Gebel et-Tarif 무덤

있는 수많은 동굴이나 들의 파피

들은 그 지역

마을 근처의 나그 하마

지점에 있는 게

집으로 나그 하

라는 현대 도시 부근에서 발견되었기에 그 도시 이름을

여진 이름이다. 이 사

을 것이고

암 결

케노

키온 Chenoboskion 본 골 품 넘 갔 보스

(

시해 주는데 아마 그 사 국은

상에

- 155 -

) 주위 지역

들은 중간 상인들

을 것이다.


1) 출판의 역사

융 본혹 사

잇 애굽 산 권 본 루 또 매편 8 루 둘째 획 완 말 " 디 The Nag Hammadi Library " 책 Tractates 선후 통 변증 은 사

본Ⅰ 벨 을

기에의 고고

상인 아

에서

것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어 1972년부터 1977까지 10 출판이 이

어졌다.

한 그것의 자

졌으며 1977년 나그 하마 의 소

문서(

자(

)로 구성되어 있다.

주의 수사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통 념 혼합

용 " 은

일성이 전혀 없다.

에서

2) 기

한 이문서는 여러

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그 하마

켰 볼

으며

영지주의 적 문제

교적 기

그 자

때 교리

교 사상과 비

문서가 제기하는

를 야기 시

과 비기

교적 기

독 논쟁 켰

교 전

몇 통

들을 야

다는 의미

교적 이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적당한가 아

이해되는 것이 적당한가에 대해

교로

이를 야기 시 교적 기

교와 대면했을 때 중대한 영향을 끼

것이

과 기

로 나그 하마

시서, 셈의 석의, 알로게 것들이다. 신

축복

논쟁

던 비기

받은 유그

개의 작

노 책

스서와 같은 그러한 소

이 되어 왔는데

문서이다. 이 수집

교적 요소를 지니지 않는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의적 구

에 관한 계속되어진

니면 초기 기

체 볼

때 중요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영지주의가 하나의 기

하는데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기

성에 있어 영지주의의 역

기 시

"

영지주의 적 이라고 하지만 전

가지 문제점들을 언급 의

400년경으로 보지만 여러 가지 의견

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문서의 내

하려고 이단자들의 문서를 필기하여 수집한 것이라는 의견을

가장

) 인 것으로 52개

들이 있다. 그중 정

출판이 197 년에 이

수되어 이것이 지금 우리가

이 문서의 수집에 대해

의 사

이 기

을 포함

스토스, 아

담묵

자들이 중요한

성서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사 받지 않은 영지주

자와 함께

전히 발전된 영지주의적 신화를 제시하고

- 156 -


물 독

있다. 수집

품 입

은 비기

증될 디 말할

교적 영지주의에서 기

만한 문서지만

하마 고

축복 독 명백 독 독

중에 중요시되어진

한 기

받은 유그

스토스 라는 작

교적 영지주의에로의 이

교적 영향이 전혀 없다. 나그

문서가 영지주의의 비기

교적 기

원 호 란 능 을 단

수는 없지만 고전적인 입장에 커다

하게 입

한다

성을 더해 주고

있다.

3) 유대교적 자료들 영지주의 학자들이 문 히 많은

양 창 형 통 의

안에 영지주의 기

세기 이야기를 사

은 영지주의의 교의 전

든 원론 체 뚜렷 혼합

이 되는 반 우주적 이

되었다고 생각

영지주의의 기 하마

디총

을 강조하는 유대

특 셋 체 통 히

영지주의의

파 유

계에 있어서

는 유대교적 전

으로부터

한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적인 과정 속에서 보면 나그

을 강조하고 있다.

디총 체 본

나그 하마

들이 가지는

4) 영지주의와 신

그 기

서는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두드러진

유대교의 역

현상 자

만한

체 할

기록들에서

문서들에서 발견하였다. 하지만 모 기

신화의 기초로 상당

하였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들

성에 있어서 유대교 자

의 요소들을 나그 하마

성서

서가

교사에 끼

양 독 빛

성과 다

에 있어서 비기

적으로 그 문제에

가장 중요한

성을 밝혀

공헌

은 영지주의

사실이다. 영지주의는

교 적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강화함으로 을 비

추 준 닌 어

다. 영지주의가 연대기적 의

미에 있어서 기

디총

서를 기초

로 해서는 입

되지 않지만 영지주의는 적어도 초기 기

교와 동

교 이전인지 아

증 추측 특 법 복

시대의 것으로 의 보다

지는 나그 하마

된다. 개개의 나그 하마

수한 방

이러한 사실은 도마

으로 신

디 책 소

자들은 여러 개

성서 연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음서의 경우에서 보면

다.

- 157 -

분명

하게 나타나 있


디 형 :

5) 나그 하마

① 주

경전의

문서의 중요성

획 무 준 즉 특 차

2세기는 정경역사에

은 정경

기적인 시대이다. 나그 하마

성의 한 과정의

대를 나타내며,

는데 필요한 이유를 보여 있으나 정경과

② 본 사

비평

디 본 차

나그 하마

올 복 본

때에

경의

수한

들은 기

들을 함께 사

:

본 충 난

문제들이 이 사

들 중에 나타

디 본 용 "첫 담" " 식 철 준 한

성과정에

이가

에서부터

다. 그것은

하지 못

리되어 나

히 도마와 빌

학자들은 여러 사

오늘날 사

된다.

할 예 님 말씀

연구에

문제들이 있었으나 이 여러

중에 기록되지

들에서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사

:

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럽 막 담" 또 노 틱 독

들을 조심스 마지

게 연구해 보면 신

약저 찍

이라는 그 사상은 일

던 지

에 근거한 것이며,

교인

학을 나타내지만 그들은 기

보여

성하

것이 과장된 것과 허실이 있지만 사실도 부

의 해석과 신학

이 나그 하마

결 결 본

이 사

으로 나타나 있어서 그

한 정경을

본 특별 노 틱

라어 사

을 수 있다. 그

들에서 해

않은 이야기를 대

경의

중한 자료들이라는 것이다.

비판적 문제들

④ 약

헬 준

적인

한 것을 보여주며,

성경 비평에 여러 가지 해

이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가 있었음을 보여

음 안에서 그 사실을

가 되는

:

다.

또 형

디 본 형 차

사상은

교의

본질

자들이

이 있었

적으로 비기

한 것임을

무암

에 조각된

어를 도

다.

5.에블라(Ebla) 원문 1) 텔 마르딕과 에블라의 관계 1955년 한 으르

부가 시리아의 어

거리는 사자

모래

바닥

에서 현

상 발굴과 동시에 제의(

- 158 -

祭儀

)에

쓰 잔 인


잔 행 애

발견했다. 이

고고학자 마티

진하는

는 이 제의

군병 회 잔 BC Tell Mardikh 과 연

.

장면으로 장

8

그리고 196 년에

"

되어 있다.

2000년대의 것으로

고 이 발견된 위치를 텔 마르딕( 하였다.

)이라는 것을

정하

"

에블라 가 곧 텔 마르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텔 마르딕 발굴이 시작(1964)된지 4년 만에 주전 2000년대에 속한 현 한 라

옷 잇

무암

무암 형태 람 빗림

을 발견하였다. 이 현

을 입은 인간상인데 이 사

의 왕이었다. 그러

은 '이

는 설

문자를 기록

'왕의 상으로

에블

로 '마르딕'과 '에블라'가 같은 것으로

인되었다.

변형 표IB "

2) '이블라' 이름이 '에블라'로

과정

처음에는 학자들이 설

" 즈코 - - e-eb-la-a-pa " 에

"

이'에서 발견한

아 파(

)

3) 에블라의 시작과

리안

문에

로 기록되어

) 라고 발음하였기

'(

에블라 가

에블라 로

주전

해졌다.

과 에블라의 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청동기 시대,

3000년대의 이곳 에블라에

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

망은

농촌

이 일어나고 도시가 구

쇠 헷 침략

성되었다가 주전 1600년경 문화가

망해진 것으로

족의

① 첫 번째

견해는 에블라 토판을 연구하며 연대

카고 대학교수이고 설

특 악키 히

드어와 아모리어처럼 비

로 히브리어에서

정하게 되

정을 했던 시

문자 언어학자중 가장 우수한 학자인 '

브'는 에블라어는 메소포타미아어(오늘날 중동어)와 것으로

때문이었다.

4) 에블라 토판 연구에 대한 두 가지 견해

그러

)

리 고고학 팀이 마티에 교수 지도 하에 큰 기대를 걸고 연구

를 계속한

ib " 웅낫 Artbur Vngnad 원 " " " -엡" " 칭 이브(

이블라 라고 불리어졌는데 1936년에 '

이 '보가

문자

매 떨 우

슷 말 한

우 가까운

이라고 지적한다.

어진 언어라고 주장한다.

- 159 -

과적으


로 이 견해는 에블라문서 발견이 성서학 연구에 고 보는 것이다.

② 번째 두

견해에서'

매 예 회

고 북방 셈어에 장한다. 미국 는

우 가까운

게 연

5) 토판에서 에블라

결 결

말 훗 좀

이며 히브리어에

학자인 다

더 나아가 에블라어는

언어이고,

우가

릿 Ugarit (

투툰 뭄 무덤 쿰란 카

만 여

)어보다

발견(1922),

이 모여서 장사했으며,

인구는

삼십 명 만

곡식

석이나 되는 보리 을

용 첫 물 용 한

로 금전을 작

대신 사

에블라 토판과 구

,

발견 중요

고는 54 ,500

은 천

이다. 에블라는 , 인

에게

위에

역사상 에블라가 처음으

한 것이다.

성경과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의

을 일으

" 즉

에브라임 ,

을 간단

윗등

히 두 이름

교수는 지금

도를 취하지만 에블라가

에블라의

- 160 -

논쟁

, 하와, 요나, 다

게 되었다. 마티

에블라와 성경과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

"

창 8 곡식 팔백 명 양 매매 행 농 물 즉 류

성경과의 관

벨 논쟁

자들,학

것이다.

들이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중에

발견된 초기에는

릿 욱

,기

을 하며 발전시

히 소개하면 그 이유는 성경 가운데 아

아브라함과 에

우가

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며 이것은 고

도시이다.

6) 에블라 토판과 구

히브리어에

농민 공무원 술 킨 또

을 보관했고, 이

수 있는 큰

신 금전을 사

적으로

거 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상인들

대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였다. 에블라가 가진 큰

식 공 할

직접

발견(1947)들 보다 더

자들이 이 도시에서 고급문화 생 에블라 전

다고 주

수 있다. 에블라 토판이 이미 문서상 알려진 도

중심지를 실제로

수 있는 에블라 시대 배경

발굴은

한 발견이라고

만 해도

우 가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토판

은 로마 성경연구소 교수인데 그

(1929), 마리 문서 발견(1930),

시 문

관계가 없다

티나토'교수는 에블라어가 초기 가나안어이

티나토와 같은 견해에서

히브리어에 더 가

직접

금시대 왕이

세기


10장에

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북방 시리아의 는 하

" 벨" 련 매 명백

한 아브라함의 조상(7대조)인

란 Haran 섯 (

기록된 다

티나토 교수는

) 근처에 있다고

예 회 할뿐 좀 밀접

수 있다고 했다.

성경 관계가

신부인 다

아니라

Ur

교수는

성경을 더

욱확

)

세기 14장에

, 고모라, 소알(

Zoar

)을

티나토 교

더 적극적으로 에블라 토판과 구

창 매 밀접

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

했다는 것이다.

도시들이 에블라와 주전 2500년경

는 구

하게 아브라함

도시가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

수의 의견에 동의

되었을 것이

토인이라고 했다. 한 에블라 토판이 우르(

이 견해를 조금 시정하여 세 도시인 소

확 할

과 관

세기 14장에 기록된 한 경제관계를 가지

교수는 지금 에블라를 발견하여 우리

실히 역사적 문서라고 취급

수 있게 되었

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7) 에블라 토판과 성경 언어와의 유사점(아

① 담: 아

에블라 토판에 에블라의 14

이브

로 고유

(

하와(

아 와(

,

사인

④노 : 아

치자중 하나의

"repose" "

현한다.

)를 지니고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있다.

적으로 위에서 보는

아 와

) 이 나타났다. 에블라어는 야(

) 로

- -후키 i-na-huki 식 섬 란 말 -후 i-na-hu "노 noah "노 "

여기에

) 로 되고 히브리어는

한 야발은 에블라 토판에 처음으

에블라 토판에 이 나

기록되고

한 관계를

)

(

한다.

결론

) 와 같은 것이다.

세기 4장 20

발음인 와우(

의 지방

아)

)로 나타났다.

에블라 토판이

는 성경의 야발

, 하와, 야발,

- -무 a-da-mu : " - a-wa "란 말 표 " " hawah Eve " :창 절 말 명 " -바-룸 a-ba-lum " 첫 waw " ya " 변

이름이 아 다

② " ③

(

,안

(

)가

)

아(

,

성경과

밀접

아 가 된다.

와 같이 에블라 토판이 구

고 있다는 것을

충분 증 할 히

- 161 -

수 있다고

다.


6. 사해 두루마리 1947년 사해근방에서 발견된 '에세

본 독

마리 사

대교, 기 발견

1) 사

들과

들을

고 있는 사

들로 이 두

들은 성서와 유

들중 가장 중요한

월혹 월 Ta-amireh 베 호멧 엣딥 Muhammad ed-Dib 절 뚫 갔 ㎞ 높 약 ㎝ 너 ㎝ 량 항 항 격 루 담 은 3

에 타아미레(

(

현재는 그 두

75

,

비 25

마리 전부가 이스라

8

월 랑케

15일부터 3

고적 탐사국

정도의 지

아리들을

마리들이

8

소유로 되어 있다.( 개) 이

.

스터 하

)에 의해 수

딩 행

사이에 전

하게 되었다. 그

이 일

1949년

Ecole Biblique 백 헌 헌등 편 양 루 닉

과 성서학교(

)의 드 보

되었다. 이때에 수

경 그리고 그때까지는

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데 이 동굴은

5일까지 다시 동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요르단

R de Vaux 외 편 건 약 용 사

려 있

마리들이 아주 오래된 것이고 가치가 많은 것들임을 인정받게

어나 그 동굴의 과학적 조사가 불가

벽에

된 시기인 194 년 초에 아랍제국들과 이스라

두인 젊은이

다.(여리고 남방 14

아리 속에는 아마포로 쌓인 가

겨 있었다.

)족의

)이 사해의 서안

발견했다. 그

(

들의 발견

점) 거기에서 그는

2

의 문

이다.

는 동굴들 가운데 하나에 들어

공 체

파'

한 그것들과 함께 발견된 단

교의 초기 사

1947년 2 마

잘 항 루

알려지지 않은 여러 문

아리 파

200개 두

개의 성서문

들의

마리들로 이

의 단

으로 보아 판단하

어진 장서의 은

처로

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어졌다.

이 장서들은 이미 오래 전에 발견되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는 오리게 발견된

네 AD 8 희 편 난 쟁 스(

에서 일어 두

.

1 5 254)가 여리고 근방에 있는 한

랍어역 시 전

을 사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항 팔

아리에서 레스타인

때문에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자기 소유의 5개

마리를 미국으로

옮겼

8

다.(194 ) 그것들은 트레

- 162 -

와 브라운리


움 권

의 도 제1

을 받아

즈 플

로우

(1950)은 여러

에 의해 출판되었다.

레이트들과 두 개의 두

포함되어 있는데 그 필사

있으며

하나는 하

있다. 제2

(1951)은

두개(1

QS

국 처음 장에 대한 주석(1

「훈련 본」 형 교

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두

소유하고 있는 두

마리 속에

잘 존 보

케닉 후 딘 Hagenusoth》 감추 져 온 루 수

의 사

그의 아들 야

(

된 부

종말론 루

야서 두

쟁 묘 감 편 N Avigad 헌 업 행

적 전

마리와

있다. 아비가드( 록

이라는 문

서 해석하는 작 라

.

들의

마리 보

이 진

되었으며

로 제 1 동굴의 단

은 이

은 모두 수

이 이

들 가운데 일부만 포

마리(1

)와

의 아들

이사

가운데

은 소위

세기

들은 1955년

라는 제

한 동굴 남방 1

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히브리 대학교에

것은 그 당시

의 아들들과 어

임이 밝혀졌다.

1951년 여름이

)라는 제목으로 그 두

)와 함께 야

므 편 《Qumran Cave》 명 끝 무렵 명 8㎞ 무 바 그러

마리

《Osar Hamegilloth 물 루 빛 둠 루 QM 또 른 편 본 네 분 담 딘 「 멕 묵

사한 한 두

사 시

은 1954년에

마리들을 모두 출판하였다. 여기에는 들의

을 출판하였으며 이

어 1950년에 제 2

함하고 있다.

)을

시록이라고

수가 없었다. 194 년 9

들을 수록한 자신의

권 루

묵 믿 막 8 월 케닉 책 뒤 권 케닉 분

의 한

마리들 가운데 마지

펼 첫 번째 책

지 않고

성하고 있는 보다 작은 두

)를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라

상시

본 권 담 QpHab 담

마리의 필사

가운데 하나는 이사야서 전

지고 있는 것으로서, 5개 두 로는

의 한

개장들에 관한 미드

르텔레미와

, 그리고 사해 서방 3.2

다. 1952년 초 이들 동굴들의 탐사작

헌 닉 격 은

졌다. 이때에 거기에는 엄

한 마소라

- 163 -

에 의

몇 람 사

들이 이

지점에 있는 와

로운 단

업 용 양식

처로 사

밀 크

에 게재 출판되었다.

타아미레 부족들 가운데

아트의 두 동굴 속에서 발견한

시 시대는 다르지만 문

들을 제

하였

이 있었으며 이 동굴들 역 되었던 곳들이었음이 밝혀 의 성서사

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BC 8 .

세기의 소

트 하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

지점에 있는

속한 것들이다.

A D ∼8

.

4

키 벳 희 팔 르

한 수도

랍어와

루 월 쿰란

파피

스,

1952년 7 서들은

쿰란

그리고

언서들에

에 발견되었다. 와

동굴들에서

발견했다.

류 물 담 유

에 있었던 발굴 작

두인족은

Q

로운 사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는 요

들과

들이

관계가 없지

본 항 본

얼 떨 져 편 외 편 새 예루살렘 묘 마

)에는 성서 단

미르드의 문

하여 37개 동굴에서

으로

스와 유대

들이 발견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에도 역시 사

에 위치한 제 2 동굴(2

업 통

겨 있었다. 제 1 동굴에서 남

아트와

본 키 벳 직접 새

랍어

4

대에

여진 성서문

야인 파피

대한

디무 바

들은

근방의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지역에 있는 다

1952년 3

바테 희

세스

의 북동

레스타인 아랍어로

세기의 것들이다.

마르 사

미르드에서 발견된 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장소에서 나 교

루 팰림프 원 바 쪽 른 편 후 쓰 헌

언서들과 파피

들을

아리 들이

있지 않은 곳

경 단

서 일부와

들이 남아

사한

어 문서 하나가 있다.

약 ㎞ Q 람 쓰 편 말 루 담 키 벳 쿰란 편 편 Q 월 베 편 즉 외 든 져 져 외 종 례 본 외 둘 쿰란 Q Q ∼ 찬 양 후 키 벳 쿰란 회 양편 든 편 예루살렘 팔 그리고 제 1 동굴 북방 274개의 아 판 두

1.6

지점에 위치한 제 3 동굴(3

어와 히브리어로

마리를

고 있었다.

해 있는 제 4 동굴(4

여 진 단

)은 1952년 9

되었다. 이 동굴에서는 가장 많은 단 를 제

한 모

문, 그리고 그 다

7

다.

고도 두개의 동

정반대

에 위치

두인족들에 의해 발견

들이 발견되었다.

성서문서들, 당시에 알려

있지 않은 것들을 포함한 많은

)은

에스더

있는 것들과 알려

경문서들, 이

파의 주석, 전

의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부근에 있는 제 5 동굴(5

10 동굴에서와 마 자의 동굴들은

)과 제 6 동굴(6

가지로 이보다 적은 르

1955년에 발견되었다. 이 모

의 이

- 164 -

들은

)에서도 제

의 것들이 발견되었

토로 된

단구에서

레스타인


박물

관에 수집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것들은 국제적인 학자 단에

말끔 손질

의해

편찬

되고 정리되어

일 제 3 동굴에서

멀 떨 리

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제 11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이 안에는 상당히

관되어 있었다. 이 발견 개의 동판 두 연 히

결 산회

마리 이다.

되어 있는 것들로 그

되어

다. 이 작

.

이는

루 뒷 양 찬 감추 져 )이

그 보

234

들이

맨체

각에 두드러

가지로 이 두

이다. 이 구리판은

라내지 않을 수 없었

스터

으로

공 난

과대학에서 이

들로 이

있는

루 져 검 어

자들을

마리들은 보

루 있

사한

들의 목록과

있는 장소들을 기록하고 있다.

외형 분 몇 쉬 식 용 용 뿐 네 편 분 변 sh 쉬 법 본 식 물 죽 겉표 용 선 난외 공백 줄 체 쉬 루 BC 체 흡 예루살 렘 납골 체 흡 루 확 올 버 른바움 케닉 등 증 용 증 따 루 BC ∼ 항 헬 즘 말엽 루 외 탄 측 법 측 결 볼 AD 2) 사

마리는 모두 12개

제시했던 견해와 마

마리들이 보

래 이것들은 3개 동판조각 리

은 알레그로의 지도 하에

.

벽한 수 개의 두

어지지 않아 작은 조각으로

쿤 K G Kuhn (

들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들로는 두

원 길

어졌다(1956 57). 두개 두 다.

되었다.

들의

에서 밝혀진 기록연대

이 문서들 대부

의 언어는 고 히브리어이다. 단지

어가 사

히브리어

서 발견된

개의 단

.와 같은 미

들은 학

되어 있을

들은 흔한

나 히브리어 문

면을 사

는 나

파피

하여 필기를 위해 가로

스(

.

거들에

아리 조각들은

레니

에 의한

, 비

마리들 , 수

하였다.

마리들의 제작연대는 기

위의 시대와 동일한 시대이다. 이 두 소

사하거나

사하다. 이 두

브라이트, 트레

거들을 사

르면 이 두

을 그었으며

와 아주

와 아주

정하기 위하여

은 고문서학적

화사

을 그었다.

2세기) 필

당의 비문들의 필

의 제작연대를

다.

사들이나 상관적인 불

있는 서기관들에 의해 정교하게 필사되었으며 동

근방

이다. 하지만 제 4 동굴에

의 요소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 세로

개의 미

과로

- 165 -

.

1

2세기이

에 속한다. 그 시기는 대강 마리들의 아마포 때 그 연대는

피에 대

.

33년으


AD .

되는데

233년으로

의 발굴 작

그러나 이 모

BC 8

. 16 년에서

루 확 규명 충분 확 결 할 준 업 런 업 통 용 규 새 원 들이 이 두

마리의 정

한 것은 아니다. 연대를 보다 정

키 벳 쿰란 종 헤 람

인정

정된다.

키 벳 쿰란 든 찰

3)

200년

의 발굴 작

파의 중심지로 사

들이었다. 이

된 대

한 연대

수 있게 해

발굴 작

모의 요

화된 수도

BC 8∼ 시대에

:

여 진 한 목록(

15 62에 기록된 왔다. 구

이르 하

성서 사

BC 멜 」염

7.2

닌 m 폭 ㎝ 잘 존 지

,

(

이 25.9

가장

분량

즉 호 여

이 많은 필사

마리이다. 17개

마리들

이다. 이것은 모

이 지역은

수아

성)와 같은 곳이라고 주장하여

들 가운데 가장

것으로서,

수 있다.

트는 이곳이 요시야왕

639 609)에서 언급된,

동굴에서 발굴된 2개의 아사야 두 들을

분될 -

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성경 적으로)

7세기에는 대단히 큰 도성이었다.

하여 이

의 폐허들이 파

들이 거주했던 시기들은 다음과 같이 구

그 시기를 구

것은

들을

쳐졌다.

이곳에 사

든 루 두

은 제 1

장에 54개

첫 번째

것은

마리들 가운데 가장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BC ∼ 2

이가

1세기에 필

사되었다.

편 른 루 님 룩 표 용 체 체 쓰 져 무엘 편 BC 편 분 종 랑 명 편 창 등 편 본 복잡 윤곽 본 형태 양 난 본 몇 QIsb 찬 본 접 양식 무엘 편 원본 접 형태 또 이것보다 훨씬 오래된 것은 레위기 단

들로서 그것들은 다

해 두

한 이름을

마리들에서 때때로 하나

의 거

된 고 히브리어 필

와 동일한 필

음으로 오래된 것은 사

서 단

포도로 보아 이

이사야,

세기

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

들 가운데

히브리어

개는 1

현하는데 사

있다. 그것들 다

3세기) 이 단

했던 성서들은 신

들도

와 마

- 166 -

들의

기, 시

,

문전승에 관한 아주

들이 다

을 보이고 있다. 반면 사 문과 훨씬 근

들이다.(

파가 가장 사

이었다. 이 단

하게 나타

다.

가지로 마소라 사

서의 단

에 근

들은 70인 역의

를 보이고 있다.

한 사마리


혼합 양식 본 본 쿰란 분명 본 표준형태 접 눈 띄 AD 디무 바 본 본 표 형식 종결 준 람 외 및 편 본 - 틴 희 디 등- 밖 져 Q 편 옛 회 본 합 또 람 편 공 벨 종 본 즉 녹 Ⅰ Ⅲ-Ⅴ 분 약등 용 져 외 른 편 암 아어역과

었던 것이 이

문과 보다 일치된 사

하다. 하지만

2세기 전반에 속하는 와

모두가 마소라 발달이

문의

문을 대

들은

오피아역

카이로

문과 부

서와 아

어 토비트서의 단

있지 않은

들도 제

,

에 사

경문서들의 다

다음과 같은

알려

된다. 그리고 이 동굴은

언, 다마스커스의 계

들은 의

위경 단

어역,

있지

않았다.

당에서 60년 전에 발견된 히브리어

전도서

파에 의해 수개의 필사

아트 사

어로 되어 있는

들도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는 역

의 단

근하려는 경향

다.

이 동굴들에서는 히브리어와 아

6

에 있

하며 이 시기에 이르러 마소라

되었음을 보여

어역, 시리아역, 이

들도

한 히브리어 토비트

하고 있다. 요

,

의 부

서는 이

들, 레위의 유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

들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시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떤특 종 체 결 킬 외 쿰란 네 ㉡ 녹 따 따 용 본 종 환 담 책 명 능 농후 ㉢ 외 열 느 후 른저 쓰 ㉣ 노 등 물 른외 헌 존 분명 현재까지 그 어

운데 일부는 에

서는

교단

의 에세

로 사

는 아마도 인자의

레위의 유언을 제

은 다

한 이

고 있는 이

하고

파는 성서의

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있으며 그것들

고도 이

두 족장의 유언은 그 어

곳에도 발

일 다

들과 구

자들에 의해

과 같은 인

파에

여졌다.

을 중심으로 한 많

하다.

들에 관한 주석들도 만들어내

문을 의역한 요

하다.

재하였던 것이

책 본

이다. 이

한 제 2부

성이

들이

경 가

의 유

아, 족장들, 모세

경문

수 없는

되었던 문서들의 수집

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곳에는

부시

파 문서로 돌려야 한다.

상들을

를 모르고 있었을 가

독특

있다.

- 167 -

쉼 형 페샤림

서와 같은 미드라

한 주석의 유

이 이


바냐 등 예 본 절 절 따 절 「 」페 명 따 온 쉼 특 례 창 외 페샤림 박 새 양식 「프 릴 」 florilegia 본 본독특 증 증 본 테 testmonia 난 Q 애굽 무엘 편 엘등 프 릴 움 련 본 : 8- ; 8: 8- ;민: : - ; :8테 움 공 Q 절 이드라

속에는 이사야, 미가, 나

언서들의

문이 구

그 의미

5 2

29 1

쿰란

학적

국 주석이다.

로운

수집

문들인

스티모니아

메시야

, 다니

11)의

을 수

문들

(신

스티모니

하나를

페쉬

농업용 건물 쉬바 흐

카에 있는

부속 이

에 관한 고고

충분

강의에서

의되었으며, 1961년에 불어로 출판되었고, 1973년 개정 영역으

들에 사

쿰란

물 람 살 공 셀류코

들을 제

들이

하고 있다. 이 지역에

스 7세의

하게 밝혀

치와 아리스토불

루 증

렉산 얀 살

화들은 알

초로 사

을 주는

이 거주했던 상

치기간 중의 연 3년 동안에 주

수 있다. 요안

스 1세의

개의 주화들에 의해 입

드라

정하는데 도

스 왕조의 주화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이것들

조된 것임이 정

렉산

았던 시기가 언제인가를 밝혀주는 가치 있는

가운데 3개는 안티오

정착의 연대기를

들 가운데 상세한 연대가 적혀 있는 주화들은 이

은 11개의

출한

성서

거가 드 보에 의해 그의 1959년

많은 발견

들이 들어있다.

로 재 출판되었다.

에는

에서 발견된 경구함에는 랍비들이 지시한 것보

의 위치와 아인

다. 미드라

24 15 17 신33

다 더 많은 성서 구

위한

하나와

19

하고 있다. 4

3) 고고학적

)

라 각 구

하, 이사야, 아모스, 시

레기

1

과 같은

다.

기, 사

집한

(

하기

) 속에 나타

는 출

국, 스

의 것은 하

레기아

사상을

(

문이

경이며

, 하

기록되어 있고 그에

사로)라는 설

세기

문학

4

(

훔 박

스 히르카

스 1세

치에 관한 사실들은 각각 한

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143개의 주

나이우스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며, 하나는 알

로메와 히르카

에 의해, 4개가 안티고

스 2세에 의해, 5개가 히르카

스 마

따디 켈

대왕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다. 아

스 2세

아에 의해, 그리고 10개가 라오의

- 168 -

분봉 통

헤롯

치기는 6개 주


화에 의해 입

쿠 통

쟁 묘 을

펙투

에 주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사기지로 전

은 시

그러

쿰란 건물 또 른 차 쟁 참

정착지로 사 지

되어 그

입 없이

11개

이 두

성 있는 연대기

마소라 사 서

고하게 입

들이 남

마리들과 단

것들

여한

들을 제

BC 후 쟁 8 - 외 뒷 침 황 따른 확 할 2세기

반에

66 70년의 전

성이 있는 시기로는

동굴들은 에스더를 제

는 두

유대전

지역이

계속 점유되어

하여 이처럼

지역의

수 있는 신

재하여 왔을 것이라는 이

다. 고고학을

들의 유적들이 재 점유되었던 사실

거는

은 보다 더 가

부의

제2

차 차

들이 로

하고 있으며

한다.

로 고전학적

동의 제2

개의 주화들은

하에 일어

가들에 의해 이

을 입

1세의

년에 주조된 것들이며, 제4

되었던 사실을

의 지

유대

치와

되고 있다. 94개 주화들은 제1

용 증명 몬벤 코크바 휘 난 혁명 건물 증 므 증 분명 쿰란 용 후 AD -혹 능 AD 침 존 론 통 확 증 쿰란 옛 민 긴 루 빙 틀 확 될 쿰란 외 루 편 공 본 앞선 볼 마

통 프 립바

스들의

사하고 있는데 그것들 대다수는 이

에 주조된 것들이며, 소수가 제3

라이

치는 91개의 주화에 의해 그리고 아그

치는 7 개 주화들에 의해 입

유대전

되고 있으며 로마의

라토르들의

8

증 통

시까

6 년까지 전혀

된 상

해 주고 있

다면 이

마리들의 제작연대를

수 있다.

권 최 最古

한 히브리어 성서전

하여 왔다. 그것들은

들보다 1000년이나

에 해당하

고(

)의

것이었다. 유대역사의 관점에

때 성서를 기록한 사해문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

은 그것들이

하나의 전승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수개의 개정된 전승들을 보 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몇 입

개의 사

본 후 은

대의 마소라 학파들이

되고 있으며 다

것들은 성서의

최 담

히브리어 성서를 반영해 주는 문서들은 성서

문의 전승을

전수받은

야에서도

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던 점을 밝혀 주고 있다.

(4) 사해사

본 용 내

- 169 -

으로

랍어 역들의 기초가 되는

초의 것이다. 간단히

당한

본 」

해서

수 성이

쿰란 일성


예루살렘 괴될 무렵 엘 회 분 갈 져 크 분 프 따 바 란 력 쎄네 분 프 따 쎄 네 약 명 엘 흩 져살 공 체 활 예 능력 독특 복 행 특별 행 칙 키 끌 쎄네 술 8 난 캠 벤 즈 회 씌 “ ” 쎄네 무엇 확 후 번 분 써 8 분 존 옳 증명 1세기

성전이 파

리어

있었다.

역사가인 조세

고 작은 20여 개의

르면

4000

을 지니고 있었고 에

정도로 도시와 이스라

었다고 한다. 그들은 한

장과

파 라고 불리는 자 스에

전역에

동 수

파에 대한 학

다.

고 있어 당

고 있었다고 한다.

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중 카이

로에서 구입한 문서 가운데 서들 중에 중세시대

적인 기록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 96년 기록에 나타

어 진

록을 보면 이 에

고 있

견하는

을 지

시 역사가나 학자들에게 아주 많은 관심을 에

르면 에

을 하며 미래를

동, 그리고

파로

리세이파와 사두

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세

파는

는 여러

파들이 있었지만 당시

스와 필리니의 기록에

가이파가 커다 그마한

이스라

라 유대교

당에서 발견된 문

다마스커스 문서 라고 불리 우는 기

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히 알지 못하다가

비교

석함으로

설이

았던 것으로

에 사해 동굴 4

인지

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19 6년 처음 언급된 이

파의

재에 대한 가

되었다.

쎄네 공 체 활 프 용 준 쪽 엔 디 바 활 확 분 섞 든 항 독립군 또 공 체 섞 든 항 독립군 또 공 체 섞 쿰란 활 쎄네 공 체 차 쎄네 쿰란 공 쿰란 공 체 8 사해문서들은 에

파의

필리니가 기록한 내 에

들의

가 로마가 대 동

에서 생

다. 사해 서

해안지대

인된다. 학자들 간에 다소 이견이 있는 부

들의 문서들이나

그리스도교

스, 필로, 그리고

로 사해문서들이 발견된 동일한 지역이 이

도 있는데 사두가이파의 문서들이

여 있다

이 조세

과 일치함을 보여

지역까지

동지역으로

여 있다

는 초대 그리스도교 하던

의 문서들이 는 초대

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 문

서 간에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조

발견된 사해문서의 주인

하던

여있다는 주장들도 있다. 심지어

일반적인 학계의 시각은 에

들의 문서들이나

의 문서들이

한 에

가 로마에 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파가

이라는 것이다.

- 170 -

의 주인이었고 주위에서 동

는 서기 6


스파시안 장

때 함께 파

쩌 멀 면

이 로마

을 파견하여 유대인 반

리에서 다가오는 로마

쿰란 쿰란

나 다시는

압할

대를 보며 에

급히

쎄네 람 감추 디론 쎄네 공 확 할 확 할 사

들은 주

고 어

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에

의 시작과

수 있을

을 진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위 동굴에 가장 신성한 성경과 문서들을

수도

8

원건

설은 발견된 문서들로부터

아니라 1 97년 발견된 다마스커스 문서에도

그들

있다.

쿰란 만의

에서 발견된 2

독특

한 달

번째 루

력 따

줄 짜 산 식 원 C 엽 마리 문서는 115

을 보여주며 날

고 있는데 이에

르면 기

전 2

의 문서로

을 자세하게 기

하시모니아 왕국시대를

그 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로스(

마카

Frank Cross

)는 에

오의 동생인 요나

쎄네

파의 족보를 마카

마카

오 시대의 유다

오 때의 제사장에서 시작된다고

처음 주장한 학자이다.

수세기동안의

장은 유대사

있었다. 사

회 최 권력 독 윗 원 은 다

하고 제이

이에 생

황 손

이 안티오 에게 임

제였던 안티오

라서 제사장은

의 대제사

동했으며 거의 왕

을 하고

이 세

적으로

스 에피파

국인인

하고 있었다. 당시 그리이스

하여 대제사장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스에게 많은

제가 임

이 대제사장이 된지 4년

스를 설

예루살렘 노릇 후손 습

전 175년 오니야스 3세와 제이

이 승리하였다.

으며 제이

치 아래

시대의 대제사장으로 그

제가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경 시드 제국

으로

대제사장을 승계했는데 기

형 류 공

르시아와 그리이스

하는

을 제

로운 전

에 유대의 부유한 가문

을 사

써 네

- 171 -

뇌물

가문이 아

라우스가

닌 람 사

로운 대제사


장으로 임

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 사 의 세

었다. 이러한 내 으며 이에 대

과 메

부 세

란 분

뒤덮

으로

로 에

성전 주도 세

들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로운

파를 이

이 시작되

오 운동이었다.

취하자 왕과 대제사장

의 지도아래 모여

과의 내

스의 개입을 유발시

로 마카

오가 정치적인 승리를

라우스 세

인 안티오

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 으며

는 소요와 반

손 력 네 력 분 외 력 쿠 켰 항 독립 쟁 바 베 베 쟁 직 독차 황 바 쎄네 무 새 확립 예루살렘 력 외 력 “ 선 님 Righteous Teacher ” 종 루 쿰란 건

이게 되었고 제이

마카

파의 출현의

대였

으로부터 소

된 세

(

)

에 그들만을 위한 장소를

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규율 공 식 산 박 믿 헌 따 종류 렸 “ Anointed One ” 윗 후손 종 론 후손 식 또 빛 쎄네 둠 식 벌 른후 루 믿 원 공 체 활 율법 준 결례 바탕 쪽 침 맞 침 추 등 업 종 결침례 예절 공 식 후 후 업 활 밤 공 율법 혜 에 의

쎄네 공

공 체 회원

파의

들은 엄한

동소유를 실천했으며 메시아의 임

있었다. 문 는

르면 이들은 두

)와

의 아들들(에

이는 40년의 성전을 치

수도

의 생

는 신앙을 지니고 는데 이

) 라고 불리는 정치적인 메

교적인 메시아(아

한 메시아의 도래는

대해

사, 그리고 재

의 메시지를 기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시아(다

의 엄정한

)로 인

파)이 어

했다.

의 자

어진다고

들에

고 있었다.

수와 정

의 강조를

으로 하고 있다.

사해 동 배

에서 아

해를

여러 가지 작

기도를 시작으로 대

으로 이어졌고 오정에는

사를 한

에는 성경을

는 아

다시 오

부하고

과 지

야자 재

교적인 정

을 하는 생

을 하였다.

문학을 연구하였다.

쎄네 공 체 원 volunteer 원 감 독 overseer 따 악 림 빛 분 확 선 악 분법 따 선 즉 든 산 공 체 탁 공 체 활 난 매 에

(

는 자

자(

)들의 심사에

)만 받아들었다. 자

많다는 것이

의 그

인되도록 했으며

었다.

한자로 받아들여지는

였다.

은 그리 가

시 모

자보다

의 이 재

자들은

의 부

이 더

라 판단되

에 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 172 -


매 식 육류 난 람 식 멀 공 체 독특 태양력 용 누 예루살렘 용 직 용 씩 누 매 분 루씩 확 뉘 새 태양 별 창 따 절 명확 표 월절 첫 번째 절 번째 번째 식 따 절 월절 절 죄 막절 일

사는

와 와인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대의 가

들의 주

과는 거리가

고 아

까지 사

으며

4

르면 유대인

달에 14

금요일, 장

8분

파는

주기를

5 6년 마다 달

었다. 이

는 것이 성전과 달 사제가 의로운

큼 태양 공 력 템

기하

달에 14

기는 언제나 같 일은

시스

다. 이로

전주기보다

에 일주일을 더 때문에 유대교

삽 절

기 때

입해서 기를 지

사해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생을 가장 신성한 날인 속

일에

공격

태 키 한

했다는 것

수가 있게 된다.

쎄네 람 써 예루살렘 권 파 사

들은 비교적 젊었으며

적인 에

쎄네 회원 파

의 이야기를

로 하시모니아 왕과 대제사장들의

막 머

에서

돌다가

문다. 3년

했다. 조세

프 용

들에게도 적

예루살렘

사제 집안의

위를 부정하고 유대인 전반의 지지를

프 플 통 살펴볼 친척 람

고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요세

마간

들이

은 일요일, 속

40초만

쎄네 매 양 맞추 런 력 랐 써 선 명할

얼 류 원

과 달,

은 3

라서 유대인

은 수요일, 칠칠

의 한 해는 29시간 4

유대사

하게 52주로 나

은 수요일......

문에 에

기들은

날, 칠칠

이다. 이에

은 요일에 시작된다. 유

12달로 나

을 더했다. 일년은 정

날과 같은 방

해는 언제나 수요일날 시작했으며

고 있는데 유

을 설

성전에서 사

하고 있는 것이다. 한달을 30일

조된 날이었다. 성경에

쿰란

했는데 성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

었고 이것은

기마다 하

게 된다.

었다.

을 사

인다. 일년을 364일로 나

바누

스라는 사

기위해

외 쪽 떠 쎄네 공 체

수 있다.

인 16세 소년이 집을 을 만나 에

스가 기록한 이 일화는 아마 많은

- 173 -

라비우스가 기록한 전

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후예

으 나 에

바 합 쿰란 공 체 회 리세이파에 동


침새 랜 격 규칙 따 밤 / 활 결코 쉬 활 닐 뎌낼 느 좀 덜 격 쎄네 공 체 옮 공 묘 무덤 똑 형태 줄줄 똑 습 무덤 명 른 든 무덤 명 일 아

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오

를 하고 엄 는 생

위에는

한 에

같은

이 아

것이다. 비교적 젊은 사

으로 판

되었고 다

이 있는 것으로

같은 모

세를 기다리는

종 끊

다.

고 있 만

장된 것

파가 200년 이상 계속

쿰란 공 체 본 괴란 할 종말 믿 “ 동

대교의

부는

상상

이라고

믿

엘 몇몇 련

로운

회원

다.

것으로 여기고 전

배로

났다. 성전은 파

생과

쟁 괴됐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 저

유대인 고대사 의

수 있

들이 들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

었고

자인 조세

들은 유

프 플 책 스

망의 역사를 기록한

었다.

조세

이스라

세가

하게 파

라비우스는 스스로 유대인의 지었다고

새 준

임없이

란 패 끝 철저 괴

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 의

이 일어났을 때

있어서 성전파

으로 자리

들은 30세 이하에서

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서기 66년 대반

되었다.

그러나

쿰란 확 됐 잡 무덤 매

이 발굴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남자였다. 한

떻 긴박 말 풀

으며

들만

정도 나이가 들면 아마

오고 나가는 것이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해

겨가기도 했을 것이다.

와 비석도 없이

65세로 판

었던

지 세 개와 1200개의

다. 50개의

시간의 1 3은 도서관에서 보내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

르며

운 생

이 견

공 식

시간 일하며

스는

알았던

것이다.

니아(현재

남부 해안의 자그마한 마을인데 로마의 파

야브

)는

로부터 생

새 Rabbinic Judaism

의 랍비들이 성전이 없는 유대교의 기초를 이곳에서

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랍비 유대교(

의 시작인 것이다. 랍비들은 장 큰 아

파주의와

갈등

성은 지

켜 할 야

- 174 -

로 )

이 유대인 역사에 가

인 성전의 상실을 초래했다고 보고 어

더라도 유대인의 일

떠 희 한

생을 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믿

게 되


었다.

닌종 철저 차 논쟁 쎄네 력 란 즘 력 예 쎄네 예 루 파적 요소를 지

비록 사상의

파들은

이에 대한

은 계속 되었지만 비교적 미미한 것

이었다. 성전이 사라지자 에 교에 상대적으로 커다 비 유대이 인데 에

영향

하게 제거되었다.

파의 영향

이 유대교와 그리스도

쎄네 규칙 섯 번 규칙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에

을 보여주는

파는 성전에서

들이 있다. 이는

배하는 대신 하

파의 랍

적인 기도

에 다

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그리스도 교에 끼

또 산 는

된다. 사해사

영향은 신

상수

훈 선 의

은 구

성서에 의로운

교 내

성경

용 쿰란

외 약

선 님 생

의 사상을 비교

에 히브리어와 아

데 이러한 단어들이 신

이라는

현을

때 이해하게

어 단어들을 포함하는

성경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이스어로

약 “ sidqat el ” “율법 ma’aseh torah ” “ 님 회 gehal el ” “빛 bene’or ” 표 등 또 른 쎄네 친 회 직 찾 볼 회 공 체 활 떠 침 바 새 등 기록된 신

성서의

) ,

하나

의 교

이다.

향은 초대교 이나

초대교 미하는

쎄네

의로운 신(

(

수 있다. 초대 교

하는 그리이스어

쎄네 직책 파

한다고

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에

가까운 곳에 로 세

믿 례

해 이

쎄네

을 의

역한 것이다. 에 면

례 분

는 세 대부

하고

요한을

자는

의 학자들로부터 받아

자 그의 제자 중 일부는

- 175 -

력 례 쿰란 은 세

례 쿰란 몸담 잘 갈릴 예 님 따

다. 세

파에 대해서는

야고보

한다고 보

파의 초기 그리스도교 영향

어졌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의로

보기도

또 직

이다.

았으며 아마 적어도 한 때는

어진다. 적어도 에

자 요한이

쎄네 루

Episcopus 감독 번 쩌 예 될

을 그대로

에서 더 비

벽기도

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 내

) 이라 영

는 이도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아

의 아들들(

파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

한다고 보기도 한다.

요한의 제자들을

의 일들(

라보며 하는

절 런 용 예 님 뜻

)를

라는 에

도 있을 것이다. 이

선 님 James 칭

해를

의 지도자를

파에서 중요한

) ,

에서

오르는 아

회 overseer

(

) ,

요한은

에서

았을 것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리로


을 것이다. 신

성서에는 세

다. 유사한 토

자 요한과

예 님 수

의 비교 내

통 쎄네 쿰란 공 체 람 식 층 능력 회 건 랜 공 바탕 쿰란 람 분 람 듯 격 분법 따 군 군 별 람 써 차 력 바 공격 체 등 체 력 쿰란 공 체 저 물 별 원 Honio 감독 엘 저 감독 규칙 놓 온등 편 통 찾 바 쪽 나타

들을

해서 에

교에 유입되었을 것이다. 이었고 지적

은 입

의 조

들은 상당한 지

인 계

이었다. 도서관에서 오

동안

부하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들은 당시 대부

유대인사

아니었다. 그 반대로 엄 는 사

들로

파와

리사이파로부터 심한

2

한 이

이었다.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

을 연구했다. 그러나

들이 그러했 에

라 아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 세

에 관한

포, 구금

이 개방주의자들은 과 적

을 구

이었던 사두가이 을 당한 반

서들은 그들의 인

들에 대해

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지

자였던

리에

위반자 리스트를 만들면서

적어 파

르, 그리고

관이

았던 이름들인 요하나, 하나니아, 시게

들을

해 북서

해서

,

관이었

의 이름들만이

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들이

로 사

해안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수도자 들이었다

7. 맛소라 사본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 A.D. 500-1200)은 구약성서를 집중 적으로 연구하고 복사하여 또한 보존해 왔던 유대인 학자들, 즉 맛소 라 학파에 의해 편집되고 사용되었는데 그들이 사용한 본문의 기원 은 A.D. 1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에 본문은 자음으로 기록되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전 에 존재하던 자료들을 참조하여 기록되었지만 그것들보다 더욱 가치 있게 간주되었고 더욱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유대인들은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글을 썼으며, 구약성경의 내 용을 거의 암기하여 그것을 구전으로 후대에 전해 주었다. 그런데 시 간이 흐르면서 히브리어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고 대신 아람어가 통 용어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낭독했는데, 히브리어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자,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와 예 - 176 -


언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원전 7세기부터 자음만 있던 히브리어에 모음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 작업을 주도한 유대인 학자들을 '맛소라'라 불렀고 그들에 의해서 모음이 붙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맛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그 때까지 띄어쓰기도 없고 모음이나 억양 기호나 구두점도 없어 생 겼던 혼란과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으로 고정된 띄 어쓰기, 모음, 억양, 구두점 등을 붙여서 소위 맛소라 원문을 이루어 놓았다. 맛소라 사본은 후에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제일 완벽한 구약 사본으 로 인정되었다. 그 증거로 는 구약 맛소라 사본 그 자체의 이중 구절 들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시편 14편은 시편 53편에서 재현되며, 이사야 36-39장 의 대부분은 열왕기하 18-20장에서 볼 수 있고, 이사야 2 장2-4절 은 미가 4장1-3절과 동일하다. 또한 역대기의 대부분은 사무엘서와 열왕기 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구절과 다른 구절을 비교하여 관찰해 보면 실제적인 내용의 일치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거의 단어와 단어의 일치까지 보여주고 있다. 맛소라 사본의 정확성에 대한 또 한 가지 이유로는 고고학에서 얻을 수 있다. 에를 들면 로버 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과 윌리 암 얼브라이트는 성경 기록의 역사적인 정확성을 확인하는 자료들을 수없이 발견해냈다. 맛소라 사본의 완전성을 지지하는 가장 좋은 증거로는 70인역(LXX) 으로 알려진 구약의 희랍어 번역본을 들 수 있다. 70인 역은 예수님 과 사도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으며 신약에 나온 인용구는 대부분 그 책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맛소라 사본과 밀접 하게 일치되어 있으며 A.D.10세기의 히브리 본문에 대한 신뢰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1947년 3월 한 아랍 소년에 의해 이스라엘 사해 서북 연안 쿰란 (Qumran) 지역의 동굴들 속에 서 고대의 두루마리 책들을 발견하였 - 177 -


다. 여기에서는 구약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책의 사본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진 알려진 9세기 사본보다 천 년이나 더 낡은 것들이 라는 점에서 학계와 기독교에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특히 낡은 사본 들과 맛소라 원문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8.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성경의 모세 오경만을 그들의 유일한 경전으로 여기는데 이를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한다. 1616년 이탈리아의 한 여 행가가 다마스커스에서 처음 발견하였는데 단편들까지 합쳐서 150여 개의 두루마리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가장 최초의 것은 기원후 9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고 대부분은 14-15세기의 것들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꼽히는 사마리아 오 경은 세겜의 그리심산 기슭에 위치한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되어 있 는 것으로, 아론의 증손자 이름이 붙여져 아비샤 두루마리라고 불린 다. 아비샤 두루마리는 적어도 9명의 필사 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 로 여겨지며, 이 가운데 1149년에 기록된 것이 가장 최초의 것으로 밝혀졌다.

과 제

▣ 본

1. 시내 사 2. 에

라임 사

3. 시리아 사 4. 나그 하마 5. 에블라 6. 사해 두 7.

에 대하여

원 루

소라 사

본 디

에 대하여

에 대하여

문서에 대하여

문에 대하여

마리에 대하여

에 대하여

라.

- 178 -


♦ 저자 편저서 ♦ * * * * *

세계교회사 한국교회사 장로교회사 기독교 교리사 한국기독교 이단사

성경 고고학 2004년 8월 28일

인쇄

2004년 8월 31일

발행

편저자 : 김 영 익 발행인 : 이 신 재 발행처 : 총회신학교 출판부 150-031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1가 31번지 02)2631-6812~3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