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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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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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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내가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난 것이 벌써 30여년이 다가오고 있다. 한

인도불교성지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처음 인도 땅에 발을 디

국에 초청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인도 다람살라를 찾았던 것이다. 그

딘지도 어언 40여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수십 차례 불교성지를 순례

당시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델리에서 버스를 타고 갔는데, 정말 험난

했지만, 항상 갈 때마다 느끼는 감동이 새롭다. 이미 웹사이트에 올려 져

한 길이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 갔고,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우

있지만,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는 불자나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음에서 책으로 엮게 되었다. ‘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나 ‘인도불교성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는 이제 한국에도 낯설지가 않다. 한국과는

는 인터넷 신문, 매일종교에 연재했던 것이다.

다양한 채널이 가동되고 있고, 일부는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 시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2017년 3월 8일

한국인으로서는 초창기에 친견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때의 감정을 그

해동세계불교연구원

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 ‘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를 정리해 본 것이

보검 이치란 합장

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친견했고, 몇 년 전에도 공식석상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달라이 라마는 항상 자비스러운 미소와 소박한 행동에 변함 이 없었지만, 주위를 둘러싼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서도 달라이 라마를 하나의 종교적 흥행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해서 뭔가 왜곡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달라이 라마를 순수하게 보는 초심을 잃 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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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책을 내면서 / 4

• 인도불교성지

• 화보 / 9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 사원 / 98

• 달라이 라마

부처가 최초로 법륜을 굴려 불교역사가 시작된 사르나트 / 110

달라이 라마 초청 대법회 추진에 얽힌 이야기 / 26

부처의 상수제자들,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와 영산회상 / 120

달라이 라마 칭호 - 몽골 통치자, 알탄 칸이 부여 / 32

불교학의 출발지 날란다 불교대학, 당나라 현장법사 유학 / 130

세계평화운동가로서 노벨 평화상 수상 / 42

바이실리, 제2차 경전결집회의와 유마거사의 재가불교 / 140

리틀 라싸, 다람살라 / 52

부처가 25안거를 보낸 슈라바스티, 《금강경》의 무대 / 150

달라이 라마의 성장 역정 / 62

부처가 무여열반에 든 쿠시나가르 / 160

티베트 전통문화보존 / 72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 168

티베트인의 디아스포라와 교육 / 82 칼라차크라 대법회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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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북부 히마찰 프라데시 주의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 주석 궁(宮)에서 우리 일행을 접견하는 제 14세 달라이 라마 (텐진 갸쵸) 聖下. 강대관 금강경독송회장(우측), 이치란 박사(중앙)와 故 박동기 회장. 1992년 5월.

달라이 라마께서는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하면서 기념촬영에 응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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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델리 간디기념관에서 종교지도자들과 함께한 달라이 라마. 필자 이치란 박사가 뒤에 서있다.

간디기념관에서 의식을 집전하는 불교 각 종파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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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붓다는 왕사성 시내에 탁발을 갔다 와서 이 죽림정사 연못에서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잡고 설법을 하셨다.

고타마 붓다께서는 죽림정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온천에서 가끔 목욕을 하셨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많은 사람들이 온천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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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재세 시에 이곳 온천에서 목욕을 하셨는데,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목욕도 빨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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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염화미소(拈華微笑)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불법의 진수를 보이신 영산회상(靈山會上). 앉은 순서 좌로부터 정념스 님(조계종 종회의원), 보선스님(대흥사 조실), 진월스님(미국), 뒤에 서 있는 필자(좌측)와 염정호(광주국제영화제 상임이사)

날란다 대학 현장법사 기념관 뜰에서 필자(맨 우측 이치란 박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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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의 한 공원에서 세계종교지도자들이 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다메크 스투파(Dhamek Stupa)는 아소카 대왕이 기원 전 249년에 붓다의 사리를 봉안했던 탑으로 기원 후 500년경, 다시 건축된 탑으로 붓다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서 보수하여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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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축제에서 악사들이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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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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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갠지스 강에서, 강가에는 100여개의 가트(계단Ghats)들이 건물과 함께 있다. 죽은 자는 이곳 에서 화장하여 한줌의 재로 갠지스 강에 뿌려지는 것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는 생과 사가 공존하는 삶의 현장이다. 필자(이치란 박사)2013년 1월.

인도 전역에서 이곳 갠지스 강에 와서 목욕을 하고 있는 힌두교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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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 찻집 아저씨

바라나시 강가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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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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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라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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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한 박물관에 비치된 물 항아리

인도의 거리에는 이런 노점 찻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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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카트만두의 기념품거리에서

각종 불교기념품으로 가득한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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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노인들이 한가롭게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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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초청 대법회 추진에 얽힌 이야기

계불교지도자들이 모여서 창립한 세계불교기구이다. 쉽게 말하면, 불교 의 유엔과 같은 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현재 본부는 태국의 수도 방 콕에 소재하고 있다. 전 세계에 3백여 지부를 거느리면서 매 2년마다 대 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1990년 10월 한국에서 제17차 대회를 개최 한바 있고, 지난 2012년에도 한국에서 두 번째로 유치한 바 있다. 1990년, 한 국에서 WFB 대회를 개최하면서, 달라이 라마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 했다.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이기도 했던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의

나는 지난 30여년이 넘게 국제 불교 활동을 하면서 세계불교계의 많은

정신적 지도자의 위치를 넘어서 세계적인 평화운동가로 부상하고 있었

불교지도자들을 만난 적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

다. 당시만 해도 한.중 수교 직전이어서 달라이 라마의 초청과 방한은 그

자이신 달라이 라마 성하(聖下)를 친견한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리 어려워 보이지가 않았다.

이 설렌다.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티베트 망명정 부를 이끌면서 티베트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던 인도 북부 히마찰 프라데

WFB 한국본부는 달라이 라마를 초청해서 대법회를 개최하기로 결정

시 주의 다람살라를 찾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여정이 아니었다. 지금

하고, 방한추진 작업에 착수했다. 박 회장과 나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

이야 많은 한국불교인이나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가는 길이 트였지만, 당

원장 초청장, 동국대학교 총장 초청장을 휴대하고 다람살라로 향해서 달

시만 하더라도 그리 간단한 노정이 아니었다. 나와 故 박동기 회장은 일

라이 라마를 친견하고, 초청장을 전달하고 방한을 수락한다는 즉답을

본 동경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연락사무소(동북아대사관 역할) 다와

받았다. 우리는 날라 갈 듯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귀국해서 성하(聖下) 방

(Dawa) 대사의 안내를 받아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했다. 달라이 라마를

한을 추진하면서 정부와 접촉, 비자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자, 그러

친견한 목적은 간단했다. 한국에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달라이 라마 성

면 방한 추진 문제는 잠시 접어 두고 여기서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

하를 친견하게 된 배경을 조금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티베트 불교 겔륵파 또는 황모파의 수장

한국불교로서는 1990년 세계불교도우의회 대회를 개최하기 전 까지,

(首長) 승려이다. 한국불교식으로 말하면, 종정에 해당하는 직위를 말한

대형 국제 불교 행사를 여법하게 치러본 적이 없었다. 세계불교도우의회

다. 그러나 종정의 지위와는 조금 다른 것은 달라이 라마는 전생 달라이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WFB)는 1950년 5월 스리랑카에서 세

라마가 전세(轉世)하여 환생한다는 것이다. 현재 달라이 라마는 제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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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며 이름은 텐진 가쵸(Tenzin Gyatso)이다. 달라이(Dalai)는 몽골어

티베트불교에는 4개의 종파가 있는데, 닝마파(Nyingmapa), 가규파

로 ‘대양(大洋)’이란 의미이고, 라마(Lama)는 티베트어로 스 ‘ 승’이란 뜻이

(Kagyupa), 사캬파(Sakyapa)와 겔륵파(Gelugpa)가 그것이다. 이 파

다. 그러므로 대양과 같은 스승이란 뜻을 함유하고 있다. 여기서 라마는

는 인도로부터 경전의 번역에 따른 구별이다, 닝마파는 가장 오래된 종

산스크리트어 '구루(guru)'에서 온 말인데, 스승이나 멘토르와 의미가 일

파로서 인도에서 온 파드마삼바바와 산타락치타라는 대학승이 창종

치한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는 은유를 지니고 있다.

한 종파이다. 파드마삼바바는 연화생상사(蓮華生上師)라는 칭호를 갖

이 타이틀은 몽골제국의 칸으로부터 부여된 칭호이다.

고 있으며 부탄과 티베트에 딴뜨라 불교를 전했고, 아미타불의 화신으 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파의 라마들은 홍모(紅帽)를 착용하는 것이 특

티베트 불교는 5세기부터 인도에서 승려가 왔었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징이다. 그리고 이 파의 경전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른다. 가규파는 명상

7세기부터이다. 당시 손챈 감포(松贊干布;c569-649) 왕 치세 때, 네팔과

위주의 종파로서 가장 유명한 스승은 티베트 출신인 밀라레파(Jetsun

중국을 거쳐서 불교가 수용됐다. 손챈감포 왕은 티베트를 통일하고, 중

Milarepa(c.1052–1135)이고, 이 파의 라마들도 홍모를 착용하지만, 경전

국 당과 네팔에서 온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중국에서는 티베트를 토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사캬파는 1073년에 창종되었고, 홍모를

번(吐藩)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토번국의 33대 왕으로 주변 왕국을 정복

착용하고 경전은 신역이라고 부르는데, 이 파를 발전시킨 분은 사캬 판

하여 최초로 토번을 통일하였다. 비단길과 쓰촨(사천성) 방면을 공격하

디타(Sakya Pandita 1182–1251)이다. 이 파는 불교학문을 중시 여긴다.

여 토번 세력을 확대하여 당을 압박했다. 634년, 당에 공주와의 결혼을 요청하였으나 당이 이를 거절하자, 토욕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20

다음은 겔륵파이다. 달라이 라마는 바로 이 겔륵파 소속이다. 겔륵파

만 대군을 이끌고 당의 국경을 공격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손챈감포 왕

는 개혁성향의 종파이며, 불교논리학과 토론을 강조한다. 겔륵파는 종가

과 당 공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네팔도 비슷한 경우로, 네팔공주와 결

파(Tsongkhapa 1357–1419)에 의해서 창종되었다. 종가파는 학행일치(學

혼하고 네팔을 통해서 인도불교를 수용했으며, 카시미르에서는 문자를

行一致)를 강조했다. 이 겔륵파의 정신적 수장을 간덴 트리파(Ganden

도입하고 중국의 한역불교(漢譯佛敎)인 대승불교도 들어왔지만, 나중에

Tripa)라고 불렀고, 종가파로부터 연유하는 자체의 정신적 수장인 간덴

는 마가다의 날란다 대학에서 직접 불교철학과 모든 학문을 직접 수입해

트리파의 법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102대까지 이르렀다. 임기는 7년

서 모든 경장(經藏)을 번역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 대승불

이다. 이 간덴 트리파는 달라이 라마와는 다른 개념이다. 달라이 라마

교인 금강승(밀교) 딴뜨라 불교가 압도하게 되었다.

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몽골 제국의 칸이 부여한 전세(轉世:세상을 바꾸어서 환생)의 의미가 있다. 겔륵파는 황모(黃帽)를 착용하며 신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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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한다. 계승된 달라이 라마는 신정(神政)의 지위로써 17세기 중반부터

요했다. 다시 달라이 라마의 방한 추진 문제로 돌아가 보자. 1991년 이후

1959년 까지 티베트를 통치했다. 현재 제14세 달라이 라마는 1950년에

나는 1992년 박 회장과 함께 다시 다람살라를 찾게 되고, 달라이 라마의

신정의 최고 수장에 올라서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현재까지 그 지위를

방한 문제가 가시화되어 가는 듯했다. 한국방문에 즈음해서, 우리는 방

유지하고 있다.

한준비 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치.종교간의 지도자들과도 접촉하였다. 일

이밖에 사캬파에서 갈라진 조낭파(Jonangpa)가 있었으나 1658년 겔

본 주재 달라이 라마 연락사무소 다와 대사가 여러 차례 한국에 왔었고,

륵파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이 조낭파는 닝마파 가규파 사캬파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는 야당 지도자)의 요청으로 만나기도하고 강

와 더불어 겔륵파의 독주에 반발하고 티베트 동부 지역인 지금의 중

원룡 목사도 우리와 함께 만난 바 있다.

국 청해성 사천성 감숙성 더 나아가서 몽골지역까지 일종의 초종파운 동이라고 할 수 있는 리메(Rime)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최근 14 세 달라이 라마는 조낭파의 수장인 제 9대 젭춘담바 쿠투쿠의 취임식 에서 조낭파의 성장을 격려했다. 젭춘담바 쿠투쿠는(Jebtsundamba Khutughtu,1932–2012)는 제 8세 젭춘담바 쿠투쿠였던 몽골의 신정 왕 복드 칸의 환생이다. 티베트 불교전통에서 정신적 지도자로서 서열 3위 에 해당한다.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젭춘담마 쿠투쿠이다. 젭춘 담바는 겔륵파의 법맥에 의한 몽골 불교의 수장이다. 1936년 몽골의 신 정 왕으로서 카간이었던 복드 칸의 환생이 확인되었지만, 1990년 까지 비밀에 붙여졌다가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불교 종파는 아니지만, 티베트 고유의 민속 종교인 ‘본’교가 있 다. 하지만 불교의 다른 종파와 더불어 불교의 한 종파로 인정되었다. 이 본교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 집중해 보겠다. 지금까지 달라이 라마를 이해하고 소개하기 위해서 장황한 설명이 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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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칭호-몽골 통치자, 알탄 칸이 부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3시간 동안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오찬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다와 대사는 강 목사님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감탄했다. 우리는 종교지도자 모임에서 강 목사님을 좌장으 로 모시기로 잠정 결정하기도 했다. 사실, 이 무렵 달라이 라마는 유럽과 미국에서 세계적인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면서 한창 인기 절정에 있을 때였다. 미국은 달라이 라마가 필요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로 계시면서도 달라이 라마께서 한국

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중국의 인권문제와 관

을 방문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달라이 라마와 만나려고 동북아 대사를

련하여 달라이 라마 카드를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

접촉했던 것은 노벨 평화상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고, 세계평화 운동가를

국의 CIA가 1959년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길에 관여했다는 비화가 나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중에 밝혀지기도 했지만, 달라이 라마는 중국 견제용 카드로 그때그때

평화상을 수상해서 달라이 라마와 평화상 수상동지가 되었고, 이후 만

사용됐음은 사실이었다. 최근 AFP 통신사가 바티칸 발로, 로마에서 노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강원룡 목사께서도 동북아 대사를 수유리 크리스

벨상 수상자들의 모임이 있으나 교황께서는 당초의 계획을 바꿔 달라이

천 아카데미 하우스에 초청해서, 다와 대사와 우리 일행 3명은 강 목사

라마를 만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눈치를 보

와 대담을 나누었다. 알고 보니 강 목사님은 일본에서 신학대학을 나왔

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달라이 라마의 행보는 전 세계에서 민감한 반응

다고 했으며 영어가 유창했다. 목적은 달라이 라마가 오시면 한국 종교

을 보이고 특히 중국 당국에서 그렇다.

인들과의 모임을 갖고 달라이 라마와 세계평화에 대한 덕담을 나누자는 것이 취지였다.

이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강원룡 목사님 같은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추진위

강 목사께서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자 한 분

원회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오시면 잠실운동장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달

이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 하도 자랑을 해서

라이 라마 환영대법회’란 주제로 집회를 열 것을 계획하고, 잠실운동장

도대체 달라이 라마는 어떤 분인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에 온다는

현지답사를 수차례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방한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

뉴스를 듣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3시간 정도 오찬을 하면서

자 우리는 방한에 대한 일정과 구체적인 방한절차를 협의하기 위해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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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살라로 재차 향했다. 이번에는 故 박 회장과 금강경 독송회장인 강대

는 생전에 그가 제2세 달라이 라마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는 네 살 때 1

관 사장과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갔다. 일본에 있는 동북아 대사는 인도

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공포되었다. 1세나 2세의 전기(傳記)를 소개

에 먼저 가서 달라이 라마와 망명 정부 그리고 인도 정부하고도 사전 협

하려면 내용이 상당히 길다.

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 정부 수반으로서 인도정부의 신변보호를 받는 망명 정치인 신분이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달라이 라

제3세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갸쵸(Sonam Gyatso,1543–1588)로서, 그에

마로 집중해보자. 도대체 ‘달라이 라마’ 라는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

게 처음으로 ‘달라이 라마’란 칭호가 부여된다. 이 칭호는 1578년 몽골국

자로서 신정(神政)의 왕과 같은 지존의 성하로서 하나의 제도가 된 배경

의 통치자 알탄 칸(Altan Khan)이 소남 갸쵸에게 부여했다. 알탄 칸 자

과 역사는 무엇인가를 소개해 보겠다.

신이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이 환생했다는 것을 소남 갸쵸가 선포해 준 선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소남 갸쵸는 비로소 달라이 라마가 되고, 제

전회에서 잠깐 소개했지만,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정신적 지도자 서

1세와 제2세 달라이 라마는 사후에 추존됐다. ‘달라이 라마’ 칭호는 이렇

열은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젭춘담바 쿠투쿠(복드 칸)라고 말

게 몽골 통치자의 정략적 필요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제3세 달라이 라

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는 대승불교에서 자비보살인 아바로키데스바라

마인 소남 갸쵸는 2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라고 선택된 다음, 라싸에

(Avalokiteshvara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며,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

있는 유명한 드레 펑 사원(Drepung Monastery)에서 판첸 소남 드락파

의 화신이다. 그리고 제3 서열인 복드 칸은 몽골과 관련이 있다. 먼저 차

(Panchen Sonam Dragpa1478-1554)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한다. 판

례로 알아보자. 이런 사전 지식이 없으면 달라이 라마나 티베트 불교를

첸 소남 드락파는 겔륵파 전통의 정신적 지도자인 제 15대 간덴 뜨리파

이해하기가 어렵다.

(수장)였다. 겔륵파 소속으로는 3개의 사원 대학이 있었는데, 드레 펑 사 원은 그 중 하나였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 된 판첸 소남 드락파는 겔

제1세 달라이 라마는 겐둔 드룹(Gendun Drup 1391–1474)이며 그는 사

륵파를 창시한 종가파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1539년 ‘툴쿠’라고 하는 화

후에 제1세 달라이 라마로 추존(追尊)된 분이다. 이 분은 목동 출신이었

신(化身)으로 즉위한다. 판첸 소남 드락파는 2세와 3세의 스승이었고, 계

는데 지금 서장(西藏) 자치구 시가체시에서 네팔 가는 방향으로 15km

속해서 판첸라마 환생의 법맥을 이어가게 된다.

정도 거리에 있는 나탕 사원에서 라마가 되었고, 후에 주지가 된 분이다. 나탕사원은 우장 지역에서 네 번째 큰 사원이다. 제2세 달라이 라마는

내용이 조금 딱딱하게 진행되었는데, 달라이 라마와 판첸라마의 연원

겐둔 갸쵸 팔장(Gendun Gyatso Palzangpo 1475–1542)이다. 그러나 그

을 캐다보니 내용이 다소 복잡하게 얽힌 것 같다. 이제 간단히 정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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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란 칭호는 몽골 제국의 후예인 알탄 칸이 부여한 칭호이며,

세웠는데, 이를 북원(北元)이라고 불렀다.

판첸라마는 2-3세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 환생한 서열 2위의 지위로 보 면 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지난 90년대 인도 다람살라에서 링 린포체라

하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황금가지 직계인 쿠

고 하는 꼬마 라마가 한국에 온 것을 알 것이다.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에

빌라이 후손이었지만 몽골 국민들은 확실하게 믿어주지 않았다. 이런 문

서 일종의 스승의 개념인데, 상사(上師) 또는 화상(和尙)이란 의미 정도

제가 항상 북원을 통치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능력 있는

다. 큰 스님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때로는 재가(在家) 린포체도 출현하

장군으로서 여러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다스려서 북원을 세워 권태중래

기도 한다. 링 린포체는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라마가 환생

의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황금가지에 대한 불신으로 민심을 얻

한 분이다. 티베트 불교의 서열 2위인 판첸라마의 환생 맥은 현재 중국본

는데 다소 장애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칭기즈칸의 황금가지라고 증명

토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하는 어떤 극적 명분이 필요했다.

다시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래서 그는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는 정통성 입증이 필요했던 것이 다. 그렇게 하려면 티베트 불교의 고승으로부터의 황금가지 정통성을 증

이렇게 해서 제3세 달라이 라마가 명실상부하게 탄생하게 되었는데,

명하는 의식이 필요했다. 알탄 칸은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종가파가 창종

여기서 몽골 국의 알탄 칸과의 관계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몽골제

한 겔륵파를 선택하고, 당시 겔륵파의 수장인 소남 갸쵸를 몽골 고원에

국은 칭기즈칸 이후, 소위 황금가지 출신인 왕족이 아니면 몽골의 통치자

초청하여 국민들에게 법문을 내려달라고 했다. 소남 갸쵸는 알탄 칸이

가 될 수 없었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이후 몇 개의 칸 국으로 나누어지

쿠빌라이 칸의 환생임을 선포했고, 알탄 칸은 소남 갸쵸에게 ‘달라이 라

고, 칭기즈칸 막내아들인 툴루이의 아들이었던 쿠빌라이가 몽골제국의

마’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전임의 두 분에게도 제1세와 제2세의 달라이

제5대 대칸이 되면서 중국과 몽골지역에 대원제국(원나라 世祖)을 세웠

라마 칭호를 추존했다. 알탄 칸의 통치는 중국 북부 지역을 비롯해서 티

다. 몽골제국은 1206년부터 1368년까지 존속하다가, 한족(漢族) 출신으

베트까지도 영향력이 미쳤던 것이다.

로 한 때 승려였던 주원장이 원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세워서 몽골의 잔존세력을 몽골고원 사막 북쪽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이에 앞서서 알탄 칸은 1569년부터 소남 갸쵸를 초청한 바 있었으나, 소남 갸쵸는 응하지 않다가 티베트 밖의 나라에서 통치자의 후원이 필요

알탄 칸이 등장할 때 까지 몽골제국은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로 접어들

하다는 데에 측근들과 인식을 같이하고 또 알탄 칸으로부터 티베트 불

었다가 알탄 칸에 의해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다시 몽골제국인 원을

교의 포교를 허용한다는 조건 제시에 1571년 사절단을 몽골에 보내서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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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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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토록 했다. 하지만 당시 몽골의 현실은 너무나 북방 민족으로서의 야

탄 칸의 직계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제4세 달라이 라마 욘텐 갸쵸

수성에다가 동물살생을 밥 먹듯이 하는 등, 생명경시와 고위층의 남편이

(Yonten Gyatso 1589–1617)는 몽골에서 태어났으며, 제3세 달라이 라마

죽으면 아내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 측근들에 의해서 제 3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이런 사 실을 티베트에 통보하고 욘텐 갸쵸를 옆에서 보호하게 된다. 욘텐 갸쵸는

이에 사절단은 이런 풍습을 중단하고 동물 살생을 자제하는 등의 조

알탄 칸의 증손자뻘이 된다. 욘텐 갸쵸는 10세 때인 1599년 티베트를 향

건을 내세웠지만, 알탄 칸은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끝내 소남 갸

해서 출발하게 되고, 티베트와 몽골은 더욱 가까워지면서 티베트 불교는

쵸 겔륵파 수장이 직접 와야 한다는 강한 요청에 의해서, 별로 긴 여행

몽골 지역에 뿌리내리게 된다.

을 내키지 않은 소남 갸쵸를 측근들이 설득하여 1577년 몽골을 방문하 여 권위를 맞교환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 4세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도착해서 겔륵파의 수장에 의해서 제4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고, 드레 펑 사원 대학에서 제4세 판

이후 알탄 칸은 황금가지로서의 신분을 확실하게 인정받고 통치하다가

첸 라마의 제자가 되어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되면서 1614년 구족계(비구

1582년에 서거 했다. 소남 갸쵸는 제3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여 신정에

계)를 받는다. 그리고 나중에 드레 팡 사원의 주지가 되기도 하지만, 많

가까운 권위가 부여됐다. 1585년에 다시 몽골에 와서 몽골 국의 왕자들

은 티베트인들은 그가 몽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과 부족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는데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제3세 달라이

않고 그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616년 동굴사원에서

라마는 명나라로부터도 중국에 남아있는 몽골 족을 위하여 콜(초청)을

특별 수행정진을 하다가 1617년 27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역대 달라이

받는 등 주가가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3세 달라이 라마는 명나

라마 가운데 가장 막강했던 제5세 달라이 라마로 환생하게 된다.

라 방문을 앞두고 1588년 45세의 나이로 몽골에서 티베트로 돌아가는 길에 입적하게 된다. 티베트는 몽골과 지리적 교통로가 뚫려있었다.

제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 달라이 라마는 명실상부한 신정의 지위에

당나라 때도, 당번고도(唐藩古道)라고 해서, 지금의 사천성 지역이 아

오른다. 롭장 갸쵸(Lobsang Gyatso, 1617-1682)인 제5세 달라이 라마는

닌 청해성의 시닝(西寧)을 지나서 청장고원(靑藏高原)을 넘어 토번(吐藩

귀족 가문 출신으로 내란에 휩싸인 중앙 티베트를 통일시키고 막강한 권

티베트)의 서울 라싸로 갔던 것이다. 당나라 때, 문성공주가 송챈 감포

력을 행사하고 독립국으로서의 티베트 주권을 확립하고 중국과도 외교

왕에게 시집갈 때도 이 당번고도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 3세

관계를 수립하고 유럽의 탐험가들도 만나 주어 견문을 넓힌 분이다. 그

의 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다만 제4세 달라이 라마는 알

래서 그에게는 대(大) 제 5세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가 붙는다. 제5세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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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와 신정의 왕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40 년간 종교와 행정수반으로서 통치했다. 다음 회에서 좀 더 상세히 소개 하기로 하고, 다시 제14세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 일행 3명은 1992년 5월 인도 수도 델리를 경유하여 다람살라에 도착해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했다. 두 번째 친견(親見)이어선지 달라이 라마께서도 아주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친견을 마치고 우리는 보다 구 체적인 방한일정과 프로그램을 갖고 성하(聖下)의 비서진과 동북아 대사 와 인도정부 공안 담당 등과 사안별로 실무 논의에 들어갔고, 무려 일주 일 동안 세부일정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논의 결정하고 최종안을 성하 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귀국해서 문제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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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운동가로서 노벨 평화상 수상

있다. 그것은 전회(前回)에서 살펴봤던 알탄 칸의 달라이 라마 칭호 부여 에 의한 몽지(蒙地)에 티베트 불교가 뿌리내렸고, 여진족(女眞族)인 만주 족이 명(明)을 무너뜨리고 청(淸)을 세워, 장전불교와 몽골불교를 거의 국 교(國敎) 수준으로 신봉(信奉)했기 때문이다. 티베트 족은 만주족과는 직 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몽골족과는 사촌정도의 종족(種族)으로 여겼기에 몽골인들의 종교가 된 장전불교를 자신들의 종교로 수용했던 것이다. 조 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산중으로 가 있어야 했다. 그나마 있던

달라이 라마는 항상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된다. 그의 동정(動靜)은 세계

여러 종파(宗派)들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시켜, 중국의 한전불

인들의 관심사이다. 그가 티베트 불교 지도자이기만 했다면 아마도 관심

교(漢傳佛敎)와 선종불교(禪宗佛敎)에 경도(傾倒)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크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히

었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불교에는 인도의 금강승(金剛乘) 불교가 장전

말라야의 티베트 고원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종교적 순수성과 나

불교를 통하여 우리 불교에 용해된 밀교적 요소가 깊이 스며있다. 각설하

라를 잃었다는 망명 지도자에 대한 동정(同情),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

고, 달라이 라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주의자로서의 세계평화운동가로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에 관심과 인 기가 증폭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실은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

다람살라 방문에서 돌아온 우리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

용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그의 덕목은 자비와 지혜를 겸비

로는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지만, 이미 노태우 대통령 시

한 히말라야의 성자(聖者) 같은 모습이 아닌가한다.

절부터 북방외교정책으로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모색을 하고 있었다. 다람살라에서 귀국하자마자, 우리는 큰 기대를 갖고 달라이 라마 방한

역사적으로 한국과 티베트는 고려이전 시대에는 직접적인 외교관계나

추진을 본격화하기 위해서 막 기지개를 켜려고 하던 차에 제동이 걸리기

교류가 거의 없었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원(元)나라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그의 방한을 추진한다는 언론

티베트 불교인 장전불교(藏傳佛敎)와 티베트 라마들과의 접촉이 있었고,

보도가 나가자 외무부에서 난색을 표하자, 고 박 회장과 나는 외무부를

청나라 때는 티베트의 장전불교와 몽골불교와의 접촉과 교류가 있었다.

방문, 상황 설명을 했지만, 국가의 외교 정책을 반(反)하기는 어려운 입장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에 몽골불교와 장전불교가 소개되고

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총무원과 동국대에서도 소극적이었다. 일단

있다. 청나라 때는 장전불교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음을 알 수

우리는 조용히 방한을 추진하기로 작전을 변경 했다. 94년 세계불교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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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대회(WFB 19차)를 한국에 유치해서 개최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이

막 인증(認證)으로, 제4세로부터의 환생임을 확정했다. 이후 사원대학

대회 때 달라이 라마를 기조 연사(keynote speaker)로 모신다는 계획아

(寺院大學)에서 제4대 판첸 라마인 롭장 쵸기 갈첸Lobsang Chökyi

래, 수면 아래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계획은 94년 조계종 개혁사태

Gyaltsen,1570-1662)으로부터 롭장 갸쵸란 법명(法名)을 부여받고 그의

때까지 추진되었고, 이와 관련된 스토리 또한 많지만, 일단 이 정도에서

지도하에 타쉬룬포 사원(Tashilhunpo Monastery)에서 겔륵파의 전통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문제는 일단락을 짓고자 한다. 그러나 달라이 라

에 따른 정교하게 체계화된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인도 날란다

마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 보자.

대학 학풍을 전수받은 닝마파와 가규파의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특별 수 행과정까지 완수했다. 학행일치의 과정을 마스터한 것이다. 게다가 세속

전회에서 소개했듯이, 제5세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본토에 있는 포탈

적 통치를 위한 제왕학(帝王學)까지 연수했다.

라 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더 전개해보고자 한다. 제5세 달라이 라마 인 롭장 갸쵸(Lobsang Gyatso, 1617-1682)는 실질적으로 티베트 고원을

그의 스승인 롭장 쵸기 갈첸은 제4대 판첸라마로써 아미타불의 화신

통치했던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신정(神政) 왕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는

이라고 인정된 분이었다. 이후 차기 판첸라마는 대대로 타쉬룬포의 주지

내전에 휩싸인 중앙 티베트 지역인 티베트 고원을 통일하고 실권(實權)을

(住持)로 계승해 가게 된다. 이 사원은 라싸의 3대사원인 간덴, 세라, 드

장악하여 종교적 세속적 권력을 행사했고, 이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레 펑 사원과 함께 겔륵파 4대 사원으로 불리며, 여기에 칭하이 성(省)의

신정 왕으로 환생하여 세습(世習)할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한 분이다. 그

쿰붐 사원과 간쑤 성 라브랑 사원과 함께 겔륵파 6대(大) 사원이라고 불

는 24권에 달하는 불교와 다양한 주제의 학술서적을 직접 써서 간행할

린다. 4대 판첸 라마 부터는 이곳에서 정치와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

정도로 학구적이기도 했다. 제5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쿵가 링포라

다. 시가체 시 거리의 서쪽에 있는 니세리 산(尼色日山)의 산허리에 지어

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고, 이 가문은 일찍부터 닝마파. 가규파와의 밀

져 50개 이상의 경당(經堂)과 200개가 넘는 객방(客房)을 가진 유명한 사

접한 관련 속에 있었다.

원이다. 1959년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지만, 제10대 판첸라 마는 그대로 티베트에 눌러있었다. 1989년 입적 이후, 11대 판첸 라마는

어린 쿵가 링포는 환생을 확인하기 위한 어려운 테스트 과정인 모(mo)

두 명으로 공표(公表)되었다. 한 명은 제14세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또

란 직관적(直觀的) 관찰(觀察) 의식을 거쳐서 제4세 달라이 라마의 환

한 명은 중국 정부가 발표한 분이다. 달라이 라마가 인정한 제11대 판첸

생(還生)임을 관찰자들에 의해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제4세 달라이 라

라마는 6세 때인 1995년부터 공중(公衆)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국 정

마의 시봉(侍奉)이었던 소남 쵸펠(Sonam Choephel,1595-1657)의 마지

부에서 발표한 11대 판첸 라마가 공식 석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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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세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종교적 사건과 역사는 너무 많고 또한

가는 도중, 지금의 칭하이 성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성격이 자유분방

알탄 칸의 후계자와의 정치적 관련 속에, 지금의 신강(新彊) 지역인 중가

하고 시(詩)도 짓고 낭만적인 분으로 여자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은 분이

르에서의 역할 등이 있지만, 다음은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을 소개하

었다고 하는데, 역대 달라이 라마 가운데 미스터리한 분이다. 제7세 달라

고자 한다. 제5세 달라이 라마는 송챈 감포 왕 시대의 티베트 수도였던

이 라마부터 제12세 달라이 라마까지의 소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라싸로 다시 수도를 옮긴다고 선포하고, 라싸에 그의 정부를 설치하고,

소개하기로 하고, 현재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전생인 제13세 달라이 라

1645년 포탈라 궁을 짓기 시작했다. 드레 펑 사원과 세라 사원 중간쯤에

마를 소개하고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생애와 평화운동 등을 소개하려고

위치한 그리 높지 않은 산 정상인데, 이 언덕 산의 포탈라 궁에서 라싸

한다.

시내를 내려다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위치이다. 1649년 제5세 달라이 라 마는 그의 각료들과 함께 포탈라 궁인 정치 행정 담당인 백궁(白宮)으로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툽텐 갸쵸Thubten Gyatso(1876-1933)이다.

옮겼다. 이 포탈라 궁은 관세음보살이 항상 계신다는 의미에서 보타낙가

1878년에 제12세의 환생으로 인정되어 등극했으나, 1895년까지 정치적

산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도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을 보타낙가산

파워를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제정러시아와 대영제국의 빅게임 사이

으로 부르는데, 이곳에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기 때문이다.

의 전당표(典當票)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던 분이

제5세 달라이 라마는 1682년 65세로 입적하지만, 정치 행정담당 수

다. 1904년 영국 원정대가 침입하자, 13세 달라이 라마는 지금의 몽골 국

상(首相)은 이 사실을 일반에게 공표하지 않고, 포탈라 궁의 공사를 계

의 수도 울란바토르(당시에는 우르가,Urga)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 진행했다. 포탈라 궁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는 3천여 개의

2400km 떨어진 몽골의 우루가의 왕 후레 사원에서 1년간 머물렀으며,

금.은.동 불상과 각종 보물들이 즐비하다. 이 포탈라 궁에는 제5세 달라

몽골인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지내고, 몽골 불교의 정신적 수장으로서 티

이 라마로부터 제13세 달라이 라마의 부도(무덤)가 봉안(奉安)되어 있고,

베트-몽골 불교전통 서열 3위인 제8대 복드 게겐(칸, 왕) 젭춘담바 쿠툭

다만 제6세 달라이 라마의 부도는 이곳에 없다.

투와 수차례 회동(會同)하기도 했다. 제8대 복드 칸은 제12세 달라이 라 마가 공인하여 등극한 몽골 불교의 정신적 수장(首長)이었다. 복드 칸은

제6세 달라이 라마는 창양 갸쵸(Tsangyang Gyatso(1683–1706)이다. 창양 갸쵸는 지금의 인도 아루란찰 프라데시 주의 몬족 지역인 타왕 사

티베트 출신이었다.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서열 3위인 복드 칸은 누구인 가 알아보자.

원 근처에서 태어났다. 티베트와 인도 국경지역으로서 해발 3천 미터나 되는 곳이다. 1697년 제6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해서 1706년 북경으로 46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티베트-몽골 불교의 서열 3위인 복드 칸(몽골불교최고지도자)의 탄생 47


을 추적해보자. 제1대 복드 칸은 활불(活佛)인 젭춘담바(活佛)로 추앙하

진 곳이다. 1911년부터 1924년까지 몽골의 왕으로 재위했던 역사가 그대

는 자나바자르(Zanabazar1635-1723)이다. 자나바자르는 티베트 불교의

로 보존되어 있다.

조낭파(Jonang school)의 대학승(大學僧)이었던 타라나타(Taranatha

다시 제13세 달라이 라마 이야기로 돌아가자.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

1575-1634)의 화신(化身)으로 여긴, 할하 몽골의 통치자였던 투친 칸 곰

나라는 제13세 달라이 라마를 면직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티베트가 청

보도르지의 아들이다. 12세기에 티베트에서 성립한 조낭파는 유가파(唯

소유라고 주장했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칭하이 성 등 중국 영토에서

識)였는데 나중에는 티베트 불교의 다른 파들에 의해서 견제를 받은 바

전전하다가 1908년 티베트 라싸로 돌아와서 내각을 다시 구성하는 등,

있다. 제2대 활불(젭춘담바)로서의 복드 칸은 칭기즈칸 후손에서 출현했

주권을 되찾으려 했다. 청나라는 다시 군대를 라싸에 파견했고, 제13세

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1758년 칙령 발표 이후에는 몽골인이 아닌 티베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였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

트인 가운데서 젭춘담바의 화신(化身)이 발견되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고 1912년 청 군대는 티베트에서 철수했다.

갖고 있는 복드 칸은 1911년 청조의 멸망과 몽골국의 독립과 맞물려서 제8대 복드 칸으로 불리는 젭춘담바(1869–1924)가 티베트처럼 신정(神 政)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1913년 인도 다르질링(현재는 부탄)으로부터 라 싸로 돌아왔고, 중국정부는 청나라의 행위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지위를 복권한다고 하자,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

제8대 젭춘담바는 실제는 티베트 정부 고위층 아들로 태어난 티베트출

부의 지위 복권에 관심이 없다고 대답하고, 그는 자신의 티베트의 신정

신이다. 그는 소년시기에 티베트에서 제7대 젭춘 담바의 화신으로 발견되

의 지위를 확인시켰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내각인 카샤그(議

어, 라싸의 포탈라 궁에서 제12세 달라이 라마와 판첸라마가 입회한 자

會)에만 맡기지 않고 주변국인 인도의 마하라자(대왕)와 시킴의 브리티시

리에서 제8대 젭춘담바로서 복드 칸으로 의식(儀式)을 치루고 공인되었

정치 관료와 네팔 왕과 직접 외교문제를 논의하는 친정(親政)에 나섰다.

다. 그는 1874년 우르가(Urga)라고 불렀던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그리고는 1913년 2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티베트 국기를 새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제8대 젭춘담바인 복드 칸은 바로 몽골의 근대역

로 제정하고 우표와 은행 수표 등을 발행했다.

사 그 자체로서 국외자(局外者)에게는 흥미진진한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신정 왕으로서의 왕권 강화와 법률과 제도를

인공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가본 분들은 시내 남쪽에 위치한

정비하고 그동안 무질서와 부패를 척결하고 납세를 의무화 하는 등 쇄신

자이산 가는 길 옆 우측에 복드 칸의 겨울 궁(冬宮)과 사원을 볼 수 있을

책을 펴서 간신히 정부를 정상화 시켰다. 신(新)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4명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명소로 알려

의 유학생을 영국에 파견했다. 영국 미국 일본인들의 외국인의 티베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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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환영했다. 그는 세계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전기를 설치하고 전화 를 가설했으며 자동차를 수입했다. 그러나 그는 1933년 임종하기 전 티 베트는 겉잡을 수없는 어두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입적 하게 된다. 1932년 칭하이 성 무슬림과 사천 성 한족 군인들은 제13세 달라이 라 마가 티베트 영토인 칭하이 성과 티베트 캄 지방에 있던 시캉 성을 지키 려하자, 중국-티베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제13세 달라이 라마 는 인도에 있는 브리티시 정부에 긴급 전통(電通)을 보내자, 브리티시 정 부는 남경(南京)의 중국 정부에 항의하여 전쟁이 중단되었다. 제13세 달 라이 라마는, 앞으로 티베트의 운명이 간단치 않을 것이며, 위대한 후계 달라이 라마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입적(入寂)에 들었다. 이로써 제13세 달라이 라마의 시대는 가고, 제14세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쵸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된다. 제14세 달라이 라마를 소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 다. 그만큼 티베트 불교와 달라이 라마 제도는 간단히 이해될 수 있는 내 용이 아니다. 이제 제14세 달라이 라마 聖下에 대해서 본격적인 탐색에 들어가겠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달라이 라마 추종자가 많이 생겼고, 또 한 친중파(親中派)도 많아졌다. 내가 처음 성하(聖下)를 친견하고 방한 (訪韓)을 추진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상황이 이렇게 변하다니 제행무 상(諸行無常)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격세지감을 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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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싸, 다람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다람살라는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1959년 망명 처(處)로 정해지기 전 에는 조그마한 타운으로 크게 주목받는 곳이 아니었다. 물론 브리티 시 인디아(대영제국 인도식민지 통치)시기에는 인도 총독의 여름 임시관 저 겸 휴양지의 별장 정도였다. 인도 독립 이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 었다. 인도 북부 지역인 히마찰프라데시 주 캉그라 구에 있는 작은 지자

나는 3회에 걸쳐서 달라이 라마의 제도(制度)에 대해서 그리고 달라이

체 타운이다. 상주인구는 3만 명 정도이지만, 성하께서 주석하는 사원

라마의 전세(轉世)에 의한 환생을 통해서 역대 달라이 라마를 주마간산

과 티베트 망명 정부와 티베트 난민촌이 있는 멕그로드 간지(McLeod

격으로 간단하게 살펴봤다. 달라이 라마 제도는 몽골(北元)의 알탄 칸이

Ganj) 등지의 인구는 공식적으로 3만 명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방문객

정치적 목적으로 부여하여 티베트 불교의 제도와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

등을 포함하여 십만 명이 넘는 꽤 북적 거리는 국제 타운 형 소도시쯤으

었음을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곳은 해발 평균 고도가 2천 미터나 된다. 고산지 대로서 여름에도 시원한 지역이다. 사람들은 이곳 멕그로드 간지를 “리

나는 달라이 라마 성하를 직접 다람살라까지 가서, 친견하고 성하께서 방한하겠다는 약속아래, 달라이 라마 방한을 직접 추진했던 경험담과

틀 라싸(Little Lhasa")라고 하고 티베트인들은 다람살라를 줄여서 “다사 (Dhasa)"라고 부른다.

더불어서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로 망명하기 전 까지, 성장하고 정교일치 의 신정 왕으로서 집무하셨던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까지 가서 촬영한 사진까지 공개한 바 있다.

“리틀 라싸”로 부르는 이곳은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는데, 이유는 단 하나, 달라이 라마가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90년대 초 그 곳에 갈 때만 해도, 방문객들 대부분이 서구인들이었고, 한국인들은 극

이제 달라이 라마 聖下에 대해서 본격적인 소개를 하려고 한다.

소수만이 방문할 정도였다.

제14세 달라이 라마를 소개하려면 먼저,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현재

2천 년대 이후, 이곳은 한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명소로서 많은 불자

주석하고 계시는 현장인 인도의 다람살라(Dharamshala)를 먼저 알아

와 일반들이 찾고 있을 정도며, 개중에는 방까지 얻어서 기거하는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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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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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있다. 어원상으로 다람살라는(Dharamshala)는 다르마(dharma)와

달라이 라마의 공식 직명은 제14세 달라이 라마(The 14th Dalai

살라의 합성어로써, ‘초인(超人)이 사는 곳’ 또는 신 ‘ 성한 곳’ 정도의 의미이

Lama)이다. 그렇지만 이 직명 앞에 성하(His Holiness)를 붙여서 ‘聖下

다. 이름값이라도 하듯, 세계적인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주석

제14세 달라이 라마(His Holiness The Fourteenth Dalai Lama)‘라고

하게 되고, 세계의 많은 구도자(求道者) 기인(奇人) 탐험가와 영적 목마름

호칭한다. 종교적인 이름은 텐진 갸쵸(Tenzin Gyatso, 1935-)인데, 제춘

에 뭔가 찾고자 하는 여행객들이 이곳에서 정신적인 득력(得力)과 깨달음

잠펠 나왕 롭상 에쉐 텐진 갸쵸를 줄인 이름이다. 태어날 때 아명은 라모

을 얻고자 저마다 진지한 모습으로 반(半) 도인(道人) 같은 구도행각(求道

돈드룹(Lhamo Dondrub)이다. 또는 톤둡이라고도 불렀다. 1935년 7월 6

行脚)을 하는 그야말로 성스러운 초인(超人)들의 타운이다.

일생으로서 현재 만 83세로서 역대 달라이 라마 가운데서는 가장 장수 를 누리고 있으며, 티베트 겔륵파 종파의 수장(首長)이기도 하다. 그는

그런가하면 보다 학구적인 사람들은 티베트 문서 및 아카이브 도서관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그의 주된 활동은 티베트의 독립을 주

(The Library of Tibetan Works and Archives)에서 지식의 욕구를 충

창(主唱)하고, 동시에 세계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제 그의 생애를

족하고 있다. 이 도서관은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직접 설립하신 도서관

단계적으로 탐색해 보자.

으로 1970년에 오픈했는데, 세계의 티베트 관련 도서관 가운데 아주 중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인들에게 암도라고 알려진 지금의 칭하이 성,

요한 티베트 도서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聖下가 1959년 망명 올 때에

탁체르에서 태어났다. 티베트는 네팔과 인도 쪽의 우짱 지역과 운남.사천

라싸에서 가져온 불교 필사본과 티베트 역사, 정치, 문화 및 예술 관계

성과 인접한 캄 지역 그리고 청해성 지역인 암도 지역으로 3분된다. 제13

기록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8만 점 이상의 필사본, 기록문서와 도서

세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고 난 2년 뒤에, 그는 제13세의 환생으로 선택된

와 6백점 이상의 오래된 당가(탱화)와 6천 점이 넘는 불상과 예술품이 보

다.

관되어 있고, 이곳에선 티베트어 강좌와 리서치 활동 등이 한 린포체 게 쉬(박사) 도서관장의 지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라모 돈드룹(또는 톤둡)은 부모가 평범한 농부로서 농사도 짓고 말(馬) 무역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7남매가운데, 하나이다. 큰 누나

1974년에는 3층에 박물관을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달라이

는 그에게 18세나 위였다. 그의 큰 형인 툽텐 지그메 노르부는 8세 때,

라마 성하는 티베트 라싸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으며 신정(神政)의 왕으

한 고승인 린포체의 화신으로 인정되었다. 그의 누이동생 젯순 페마는

로 등극했다. 이제 무대를 다시 중앙 티베트 라싸로 옮겨서 그의 환생 선

다람살라의 티베트 어린이 마을 프로젝트에 평생을 바치고 지금은 은퇴

택과 성장, 교육과정과 활동을 살펴보자.

했다. 어린 달라이 라마가 화신으로 선택되었을 때, 그는 신장(新疆)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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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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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방언을 구사했다고 한다. 신장방언은 일종의 만다린(北京官話)으로

하고 있다. 이 지역은 당나라와 티베트 간에 항상 다툼의 영역이었는데,

서, 감숙성 난주와 청해성 시닝 등지의 중국어 방언을 말한다. 중국은

일찍이 몽골 계통 유목민족으로 선비족 모용씨로 부터 내려온 부족이

이 무렵, 무력으로 이 지역을 중국에 편입시켜서 통치하고 있던 상황이었

이 지역의 초지(草地)에 정착하여 3세기부터 토욕혼(吐谷渾)을 건국하고

다.

663년 토번의 침공으로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 존속한 유목 민족국가 가 있던 곳이다. 티베트 왕국의 손에 넘어간 다음, 항상 당과의 분쟁지역

제13세의 환생을 찾는 조사단은 제13세가 입적(入寂)하여 방부처리 할

으로서, 티베트인들이 점령하고 살았다. 티베트계 탕구트 족은 서하( 西

때, 얼굴이 분명히 남동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환생을 찾으려고 친견했

夏 1032-1227)를 세웠는데,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사막 남으로는 난

을 때 보니, 불가사의 하게도 얼굴이 북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당시 섭정

주 동으로는 황허 서쪽은 둔황의 옥문관에 이를 정도로 강성했다. 국교

(攝政)이었던 린포체는 정좌하고 명상을 한 결과 라모 라 초 호수 위에

는 불교였으며 자체 서하문자를 갖고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가

상서로운 구름이 일면서, 한 농가 주택으로 빛이 향하는 것을 느꼈다. 예

졌었으나, 칭기즈칸에 의해서 멸망당했다. 한때 둔황석굴(莫高窟)은 서하

시해 준 그 농가 주택에 가서보니 두 살 된 어린이가 있었다. 조사단은 전

의 통치하에 있었다.

통대로 조사절차에 의해서 직관적 관찰과 시험을 통해서 이 어린이가 제 13세의 환생임을 인지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제13세에게 속했던 물건

이후 송(宋)을 거쳐 원(元) 나라 통치시기에는 티베트-몽골 족이 공생

하나와 다른 여러 개의 물건들을 함께 그의 면전에 놓았는데, 톤둡은 단

하는 형국이었고 명-청을 거치면서 티베트 중국 간에는 영토에 대한 크

박에, “이것은 내 것이야! 이것은 내꺼야!”라고 하면서 움켜쥐었다고 한

고 작은 분쟁이 그치지 않았던 지역이다. 티베트는 외부로 통하는 관문

다. 환생으로 선택되면, 라싸로 옮겨 가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 네팔을 경유하여 인도로 향하는 길과 카시미르와 중앙아시아로 통하

이 지역의 군벌로써 지역 사령관이었던 마 부팡(馬 步芳1903–1975)은 이

는 서쪽 길과 북동쪽의 칭장고원을 통해서 중국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같은 선택에 제동을 걸면서 라싸 행을 방해했다. 은 10만 냥을 요구했다

그리고 험하긴 하지만 스촨성 청두(성도)로 가는 길과 운남성으로 나아

는 비화가 전해진다.

가는 길이 있다.

칭하이 성은 고대 시대부터 티베트계 부족이 많이 살던 곳으로서, 중

이런 역사적 배경에 의해서 1930년대 중국은 이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

국에서 가장 큰 칭하이 호수가 있고, 해발고도 3천 미터가 되며 티베트

했고, 당시 이 지역의 군벌인 중국 뚱간(回族) 무슬림 장군인 마 부팡은

북동남단에 위치하고 있고 대부분의 영토는 칭장고원(靑藏高原)에 위치

라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환생 라마가 칭하이 성에서 라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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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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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것을 지체시켰고 은화 10만 냥을 노골적으로 챙겼다고 한다. 달라

라브랑(Labrang,拉卜楞寺 1709년 설립)에서 온 티베트 라마 유학승, 외

이 라마는 라싸에 간 다음, 6세 때부터 23세 때 까지 17년간 집중교육을

몽골과 내몽골에서 온 라마 유학승들이 대부분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받았고, 교육과목은 필수 5과목과 교양 5과목이었다. 필수는 논리학, 티

고 한다. 지금도 수 백 명의 라마 학승들이 공부하고 있다.

베트 예술문학 산스끄리뜨어, 의약과 불교철학 등이다. 불교철학은 5개 범주로 나뉘는데, 반야(般若Prajnaparimita),중론(中論Madhyamika),율

간쑤성 난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아헤(夏河)에 있는 라브랑 사원도

장(律藏Vinaya),아비다르마(俱舍論Abidharma, 불교형이상학), 프라마나

겔륵파의 6대 사원 가운데 하나로서 수천 명의 라마들이 공부하던 유명

(인식논리학 Pramana)이며, 교양 보조과목은 시 음악 드라마 점성학 작

한 사원대학이 있었다. 큼붐 사원이 역사는 더 오래되었지만, 한때는 쌍

문 등을 수업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1959년 23세 때, 라싸의 조캉

벽을 이루는 사원대학이 이 라브랑 사원에 있었고, 근세에는 중국 무슬

(대소사) 사원에서 마지막 시험에 합격, 불교철학박사학위와 동등한 게쉬

림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티베트 독립과 관련한 분신(焚身) 등의 사

(geshe 善知識)학위를 받았다.

건 등이 있지만 민감한 문제이기에 더 이상 언급은 자제하려고 한다. 타 베트 불교는 중앙 티베트만이 아닌 칭하이성 간쑤성 스촨성과 몽골에도

간쑤성 칭하이성 스촨성 운남성 등지에는 티베트 족과 티베트 사원이 존재하고 있다. 칭하이 성의 성도(省都) 시닝에는 겔륵파의 6대 사원 가

티베트 사원을 세워서, 장전불교(藏傳佛敎)를 전파했고, 이 지역에 뿌리 내렸다.

운데 하나인 큼붐(Kumbum) 사원이 있고, 겔륵파를 창종한 종가파(쫑 까파)가 이 사원 근처에서 탄생했으며. 제14세 달라이 라마 또한 칭하이

대개 사람들은 티베트 불교가 라싸나 인도의 다람살라에만 있는 줄

성에서 환생한 것이다. 이 사원은 1583년에 협곡에 건립되었으며, 이 사

알지만, 아직도 이들 중국영내의 티베트 권에는 장전불교가 활발하게 활

원은 라싸에 있는 드레 펑 사원의 수말사(首末寺 직속사찰)가 되었고, 라

동하고 있다. 필자가 직접 이들 사원들을 방문해 본 결과, 큼붐사원은 중

싸에서 온 티베트 고승이나 달라이 라마가 몽골이나 북경에 갈 때는 이

국과의 어느 정도 상생을 하면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보였

사원에서 유숙하는 것이 관례였다.

고, 라브랑 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듯했다. 지금도 수백 명의 라마와 빅슈니(여자 라마)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었고, 수많은

1958년 이전만 하더라도 5천여 명의 라마가 있었고, 산하에 4백여 개 의 암자를 거느린 대형 사원이었으며, 티베트 동북부 지역에서는 가장

티베트인 몽골인 중국인들이 참배하고 순례하고 기도하는 불도량(佛道 場)이었다.

큰 사원 대학이었다고 한다. 이 대학의 전성기에는 간쑤성 난주 지역의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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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서는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여 신정의 왕으로서의 섭정(攝政) 과 중국정부와의 관계 그리고 1959년 라싸에서 일어난 봉기(蜂起).폭동에 대해서 살펴보고, 망명(亡命)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대의 긴박했던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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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성장 역정

논해야 했고, 정부의 내각과 각부 장관과 관료가 근무하는 정부 청사의 역할을 했고, 홍궁은 종교적인 역할을 했는데, 선대(先代) 달라이 라마들 의 부도(무덤)와 불상과 삼장(三藏)을 봉안하고, 불교도들을 접견하고 설 법을 하며 기도하고 수행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내불당(內佛堂)이 건물 각 코너에 있을 정도로 사원 분위기 를 풍긴다.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1959년 인도로 망명간 이후, 포탈라 궁

달라이 라마는 2세 때, 제13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선택된 다음,

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하지만 포탈라 궁은 달라이 라마 성하가 떠난 그

라싸로 옮겨서 포탈라와 노블링카에 살면서 6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교

시점에 그대로 멈춰져있다. 달라이 라마가 사용하던 집무실을 일반에게

육을 받기 시작했다. 전세영동(轉世靈童:환생한 아이)의 어린 달라이 라

공개하고 있었는데, 책상이라든지 의자 비품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

마는 정궁(正宮)인 포탈라(Potala) 궁에서 13세의 환생임을 확인하는 의

다(2001년 기준). 이제 포탈라 궁은 박물관이 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

식을 치루고 하궁(夏宮)인 노블링카(Norbulingka) 별궁(別宮)에서 잠시

산등록지가 되어있다.

기거하면서 조캉 사원에서 삭발을 하고 사미(예비승려)가 되어 스승들의 특별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포탈라의 별궁으로서 하궁 기능을 한 노블링카(의미:보석공원)는 라싸 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제7세 달라이 라마가 1755년에 건립을 시

포탈라 궁은 제5세 달라이 라마인 나왕 롭상 갸쵸(1617-1682)가 1645

작해서 1783년에 완성하여 세속적 정사(政事)와 종교적 종무(宗務)를 본

년에 짓기 시작해서 1649년에 백궁(白宮:정치행정담당)인 보트랑 까르포

포탈라의 별궁이었다. 2001년 유네스코세계유산등록지가 되었다. 노블

(Potrang Karpo)로 옮겨서 정사를 본 건물이다. 포탈라는 아바로기테스

링카는 제13세와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특히 주석하였고, 1959년 라싸봉

바라인 관세음보살이 상주(常住)하는 집을 의미한다. 달라이 라마는 관

기 때, 중공군의 공격으로 상당한 손상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음보살의 화신이기 때문에 기거하는 집의 이름을 포탈라 궁으로 명명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길을 떠날 때도 이곳 노블링카에서 병

하였다. 라싸의 포탈라는 왕이 사는 일종의 왕궁 개념이지 사원이 아니

사(兵士)로 위장하여 중공군의 눈을 피해서 탈출한 사건은 너무나 극적

다. 하지만 세속적 왕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수장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이다.

건물인 홍궁(紅宮:종교기능)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백궁은 세속적 정사를 62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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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1940년 제14세 달라이 라마를 승인함과 동시에

을 건국하여 분단되었다. 이로써 몽장위원회는 중국 대륙에 거주하는 소

즉위식에 국민당 정부 대표로 지역 사령관인 장군을 파견하여 축하했다.

수민족에 관한 업무가 사실상 중단되었지만, 타이베이로 천도한 중화민

장 카이석 정부는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이 지역

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정부라는 의미로 이 조직을 그대로 2011년

군벌 무슬림 사령관인 마 부풍에게 요청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중국과 티

12월 31일까지 유지했으며, 이런 근거로 달라이 라마는 1997년과 2001년

베트는 국경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간헐적으로 발생했고, 한편 중국 국

에 이어서 2009년에도 대만을 방문했으나 2012년 이후에는 아직 실현되

민당 정부는 일본과도 싸워야 했지만, 공산당과도 내전을 치러야 하는

지 않고 있다.

등, 중국은 그야말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이 무렵 티베트의 정치는 행 정부인 카샤그가 주도했다. 카샤그는 1721년 청(淸) 정부가 만들어서 1751

중국에서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면서 티베트 문제는 크

년 건륭황제 때부터 시행된 티베트 행정부이다. 수상과 4명으로 구성된

게 꼬이기 시작해서 드디어, 중국 해방군은 캄 지방을 공격하는 등, 라싸

칼론(내각장관)이 종교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등을 각각 담당해서 달라이

까지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다. 1950년 10월 8만 명의 중국 해방군이 라

라마와 협의하여 정치 행정을 집행하는 정부이다.

싸로 진군했다. 1950년 11월 17일 달라이 라마는 15세의 나이로 제14세 달라이 라마로 공식적으로 즉위하여 티베트의 통치자로 등극했다. 제13

중화민국은 몽장위원회(蒙藏委員會)를 설치해서 몽골과 티베트를 컨 트롤하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을 때, 몽

세 달라이 라마가 입적(入寂)한 후에는 티베트는 카샤그(내각)의 수상과 장관에 의해서 섭정되고 있었다.

장위원회는 주로 소수 민족 종교 관련 사무에 종사했고, 몽장위원회는 1940년 티베트에서 14대 달라이 라마 즉위식이 열렸을 때, 이를 축하하

달라이 라마는 두 명의 수상을 임명한 바, 라마인 롭상 타쉬와 민간인

기 위한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 후 몽장위원회 사절단은 1948년

한 명을 더 임명해서 집정토록 했다. 또한 사절단을 구성해서 미국 영국

티베트 정부에 의해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중화민

네팔에 티베트의 원조를 위하여 파견했으나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으나.

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駐 )티베트 대표처 라는 이름으로 1948년까지

그 후 미국CIA는 달라이 라마가 1956년 인도에 왔을 때 은밀히 접촉하

주재하였다.

여 콜로라도의 한 캠프에서 티베트를 위한 티베트인들로 구성된 게릴라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가 1959년 인도로 망명할 때, 게릴

중국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패하자 중화민국은 정부를 난징에서 타

라들은 미국 특수요원(CIA's Special Activities Division)과 인도 부탄을

이베이로 천도하였고,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을 수도로 중화인민공화국

경유하여 티베트에 들어가서 달라이 라마를 호위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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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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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가《나의 조국 나의 국민 My Land and My People》1962년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이미 합의한 대로 실천하고

출간에서 티베트 게릴라를 언급하였으나, 이들이 미국에서 훈련받았다

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라싸로 돌

는 사실과 CIA의 SAD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밝혀

아와서 6백만 티베트인의 안전과 국가의 보위를 위해서 고심에 찬 나날

진 사실이었다.

을 보내야만 했다.

달라이 라마는 1950년 인도국경 시킴으로 잠시 망명했다가 중국과 티

달라이 라마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대각회 大覺會)로부터 1956년 인

베트가 1951년 5월 23일 17개 조항에 합의하자, 달라이 라마는 그해 8월

도 보드 가야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 초청을 받게 된다. 대각회는 스리

라싸로 돌아왔다. 중국에서는 십칠조협의(十七條協議)로 표현한 것으로,

랑카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라는 분이 인도불교성지 유적 보호를

양측이 베이징 시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양측

위해서 1891년 설립한 단체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 때 인도에 가서 네루

의 정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수상을 만나서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네루 수상은 1954년 인도-중국

담고 있었다.

과의 조약체결로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이 무렵 CIA는 달라이 라마를 돕겠다고 접촉, 비밀 암약을 했으며 콜로라도의 헤일 캠프에서 티베트에

달라이 라마는 제10대 판첸 라마와 함께 1954년 9월 27일 베이징에 가

파견할 게릴라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게 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뽑히기도 했다. 달라 이 라마는 처음 베이징에 가면서 중국의 철도라든지 근대화된 모습을

나중에 암도와 캄 지역의 공산군을 공격하고 중앙 티베트로 밀고 들

보고 상당히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그의 저서에서 술회하고 있다. 베

어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1956년 사천성 캄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이징에서는 마오쩌둥 주은라이 덩샤오핑 등과 만나고 특히 마오쩌둥과

데 암약을 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행사에 참석한 다음, 불교 성지

는 여러 차례 회동을 하게 되는데,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과 자치

순례를 계획했으나, 티베트에서 소요사건이 발생하는 등, 정정(政情)이

권을 요구하면서 중공군의 퇴각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

불안하자 라싸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방문 중,

은 달라이 라마의 입장설명이며, 과연 중공이 강제로 점령한 상황에서

마침 인도를 방문한 주은라이와 몇 차례 회동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을

가능했겠느냐는 추측이다.

요청했다고 하나,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달라이 라마의 친형이 강력 하게 요구했다고 달라이 라마는 그의 비망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달라이 라마를 설득해서 양측의 정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66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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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10일은 라싸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한편, 달라이 라마가 라싸를 탈출하고 난 뒤인 3월 19일에는 라싸의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일어난 반(反) 중국, 반공산주

주요 사원에 대한 포격을 포함한 전투가 시작됐다고 한다. 티베트군은

의 봉기였다. 이 봉기는 1956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티베

인민해방군에 비해 숫자와 무장이 빈약해, 이 전투는 이틀 만에 종료되

트인에 의한 무장 반란의 연장선상이었다. 중공정부는 티베트 동부 지역

었다고 하며, 티베트 망명정부의 추정치에 의하면 1959년 봉기 때 티베트

에 인민해방군을 증파하고, 라싸에 진주한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마을

인 약 8만 명 이상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중국

이나 사원에 대해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인민해방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

정부는 이 주장에 반대 하고 있다. 라싸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공군의

릴라 부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고

폭격에 의해서 심한 손상을 입었고 약탈, 파괴되었다고 하며, 라싸에 남

위협하면서 거리를 좁혀 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비밀

은 달라이 라마의 무장경비원과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티베트인들은 무

리에 피난 준비에 들어갔고, 3월 17일 달라이 라마의 궁전 근처에 인민해

장 해제가 되어 공개처형 되었다고 망명정부는 주장한다.

방군이 발사한 2발의 포탄이 명중해, 이것이 그의 인도 망명행과 망명정 부 수립의 결정타가 되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아직까지 한국방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만, 성하께서는 2005년 만해평화대상을 수상했다. 필자가 중간 역할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병사로 위장하여 노블링카를 은밀히 빠져나와

했고 8월12일 수상식에 참석하도록 동분서주했지만, 비자가 발급되지 않

그의 측근과 가족과 호위병으로 구성된 망명단이 인도 망명길에 올랐다.

아서 못 오시고 일본주재 동북아대사가 대신 수상했으나, 달라이 라마

수천 미터의 산을 넘고 강을 건너 3월 30일 티베트 인도 국경에 도착하

성하께서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나는 수상자론, ‘달라이 라마, 지혜와

고 4월 18일 아삼 지역에 도착하여 네루 수상이 제공한 기차로 머스우리

자비의 바다’를 쓴 바 있다. 그의 수상소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라는 데에 까지 가서 다람살라로 향해서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1956 년 달라이 라마가 인도 방문 시에는 네루 수상은 달라이 라마의 망명타 진에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으나, 막상 달라이 라마가 인도 국경에 도착

“저를 2005년 만해대상 평화부문 수상자로 결정하고, 초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자 네루 수상은 망명 환영 전보를 쳐서, 달라이 라마와 그의 가족과

저는 만해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합

일행의 망명을 허용하고 지원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수백 명의 국내외신

니다. 티베트 문제를 비폭력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저의 노력을 인정해

기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신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국민들도 티베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사회의 변동을 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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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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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으며, 유사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풍부한 불교 전통을 잘 보존하려고 애써 온 한국 법우님들의 결의와 헌 신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한국국민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 달라이 라마 -” 지금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 비서실은 한국불교계와 여러 채널을 통해 서 달라이 라마 성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교류하고 있으며, 중국정부 는 매우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를 매일종교 신문에 연재하자마자 안티 달라이 라마 측(슉덴 Dorje Shugden=金剛護法神신봉자)에서 반응을 보이고, 한국의 불교 언론계 와 추종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티벳 하우스 코리아는 이 문제에 대 해서 홈페이지에서 묘한 뉘앙스(슉덴추종자=중국정부)를 공지하고 있다. 다람살라에서 성하를 친견하고 방한 초청장을 전달한지 어언 27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 땅에서 추종자와 안티가 논쟁하는 것을 보고 세월의 무 상함을 절감한다. 나는 순수한 입장에서 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의 경험과 그 분의 활동 을 통해서, 성하의 덕 높으신 자비와 지혜를 갖추신 큰 스님을 존경하는 뜻에서 가능한 보편적 객관적 시각에서 글을 쓰고 있음을 밝힌다. 그 분 의 세계평화활동과 승려로서의 보살행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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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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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전통문화 보존

의회와 자체 사법부 기능을 두는 3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달라이 라 마는 망명 3개월 후인, 1959년 6월 20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중공 정부와의 맺었던 17개 조항을 포기하고 부인하면서 망명정부를 공식적으 로 내외에 선포하게 된다. 달라이 라마 망명 정부는 1960년 3월 10일 티베트 봉기 1주년을 맞아 서 기념행사를 하고, 이 행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티베트 망명 정부

달라이 라마 성하는 인도로 망명과 동시에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되었

의 가장 중요한 정치행사가운데 하나이며, 티베트 문화 전통 보호가 망

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 직후, 네루 수상과 회담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명정부의 핵심 정책이기도 하다. 달라이 라마 망명 정부는 유엔과도 적

둔 것은 티베트 난민들에 대한 교육 문제였다. 티베트 어린이와 청소년들

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59년 61년 65년 세 차례에 걸쳐서 티베트 독립

을 위한 인도정부 교육부 산하에 독립 부서를 설치해주고 모든 비용을

과 자유 인권문제에 대한 유엔 본회의 결의안을 도출해 내기도 했다. 달

부담해 줄 것을 요청하자 네루 수상은 즉각 동의했다.

라이 라마는 2011년 정치적 수장의 지위를 그만두기까지 50여 년간 망명 정부의 수장으로서 매우 적극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셨고, 현재는 티

자와할랄 네루(1889-1964) 수상은 인도의 독립 운동가 겸 정치가로 사

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란 위상에서 설법(說法)을 하면서 세계의 많은 사

회주의 성향으로서 비폭력, 평화주의자였으며 그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람들과 만나고 있다. 그는 1959년 인도로 망명하면서 네루 수상을 시작

마하트마 간디와는 달리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했

으로 세계의 수많은 정치수뇌와 종교지도자 과학자 사상가 등을 만났으

던 인도정치가이다. 인도독립이후 초대 인도총리를 역임한 분이고 그의

며, 공식 비공식적으로 세계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과도 만나서 정신적

딸인 인디라 간디 수상, 외손자인 라지브 간디 수상 등, 인도 현대 정치

영감을 나누었다.

사의 주역들을 가족으로 두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네루 수상과는 수차 례 만났으며, 인디라 간디 수상과 라지브 간디 수상과도 각별한 교분을

달라이 라마 성하가 1954년부터 지금까지 만났던 세계의 주요 인사들

유지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가 망명 정부를 구성하면서, 전통적인 티베

은 그야말로 세계 현대세계인물사라고 할 정도로 현대 국제무대의 주연

트 내각인 카샤그 정부 형태를 지양하고, 현대 정치제도에 의한 정부체

급 인물들로서 흥미진진하다. 망명 전에는 마오쩌둥 덩샤오핑 주은라이

제를 갖추었는데, 공보, 교육, 내무, 안전, 종교와 경제 부서를 편성하고,

등 중국 공산당 정치 지도자들을 만났고, 인도에서는 네루 수상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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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디라 간디 수상 등 인도의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고 1966년에는 태

주창하고 있다. 세계평화와 환경문제에 직접 발 벗고 나서고 있다. 평화

국에 초청되어 태국 국왕과 태국불교의 최고 수장인 썸뎃 냐나상와라

와 환경문제라면 세계 어디라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는 평화메시

승왕(僧王), 수상 장관 등을 만났으며, 1967년에는 바티칸에 초청되어 교

지를 발표하고 비폭력을 강조하고 종교 간에도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서

황을 만났으며 이후 73년에도 교황을 만났고 이후에도 역대 교황들과는

로 존중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도자들은 민족주의를 초월해서 우주

수차례 만났으나 지난 2014년에는 바티칸에서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적(세계) 책임과 자비(사랑)를 가져야 한다고 메시지를 주면서, 자신은 소

만나주지 안았다는 의심을 산 가운데, 노벨평화상 수상자들과의 모임에

박한 보통 라마(승려)임을 강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

참석했다가 만남이 불발되어 세계 평화주의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기도

을 보인다. 그에게서는 권위와 위엄보다는 친근감과 자비스런 도인의 모

했다. 198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해서 국

습이 풍긴다. 그리고 단순하지 않는 무한한 영감을 지닌 성자 같은 모습

왕과 수상 장관 등을 만났다.

이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만든다. 안티 달라이 라마 주의 자들도 그를 한번 만나보면 달라이 라마의 진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나서 그의 보폭은 더 넓어졌으며 1990년부터

이 글을 쓰면서 안티 달라이 라마 주의자들이 제법 있다는 것을 감지

는 더 많은 세계각계의 지도자들과 만났는데, 미국의 대통령들에게는 단

했고, 이들의 배후가 누구이며 어디인지 알 필요도 알려고도 하지 않지

골손님이 될 정도로 대통령들과 차례로 만났고, 62개국을 방문하면서 많

만, 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는 성자와 같은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

은 지도자 일반인들과 만나서 정신적 영감을 주면서 히말라야의 성자란

리고 싶다.

칭호를 받기도 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과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 다. 이유는 우리가 추진했던 달라이 라마 방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

달라이 라마가 정치 수반으로 망명정부를 이끌 때 그의 정치노선을 중

말 아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나는 항상 이 점을 지금도 매우 아쉽게

도주의(中道主義)라고 불렀다. 중도란 불교의 용어인데, 간단히 정의하면

생각하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극단주의적인 폭력이나 무력에 의한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일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비폭력

달라이 라마 성하는 왜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무저항주의를 택했는데, 이 같은 노선은 불교의 중도사상과 맥을 같이

콜을 받는가이다. 힘없는 하나의 망명정부 수반이며, 티베트 불교의 지

한다. 이런 정치노선 때문인지 망명정부는 티베트 독립을 위해서 무장

도자일 뿐인데 세계의 많은 지도자와 일반 시민들은 그와의 만남을 영광

게릴라전 같은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평화적인 방법에

으로 생각한다. 중국정치지도자 말고는 말이다. 달라이 라마는 평화를

의한 정치 메시지를 중국정부에게 보냈고, 티베트 전통 문화 인권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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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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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를 세계에 호소해 왔다. 그렇지만 근래 티베트 자치구에서 분신

교적 수행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하지만 종교 간의 조화와 이해는

사태가 발생함으로 인해서 그는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자제를 당부한 것으

중요하며, 서로가 서로의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

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분신으로 인한 티베트인들의 저항에 민감

하다고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와 상호이해는 절대 필요하

하게 대처하면서 다람살라의 망명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달

기 때문에 종교 간의 모임이나 대화에는 주저하지 않고 만나는 것을 즐

라이 라마가 정치일선에서 은퇴했다고 하지만,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분

거움으로 삼고 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종교는 인류에게 해로울 뿐이

위기이다.

라고 강조하신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더 이상의 정치적 이슈는 자제하려고 한다. 한국에 도 친중파(親中派)가 많이 생겼고, 경제교류에 따른 중국과의 관계는 시

개인에게는 하나의 진리만이 하나의 종교만이 필요하고 인정될지 모르

간이 갈수록 긴밀해지고 있다. 불교계의 일부에서 달라이 라마 방한을

지만, 인류라는 큰 공동체는 여러 개의 진리 여러 개의 종교가 필요하다

재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정작 불교제도권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는 기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성하는 티베트인이고 달라

보일 뿐이다. 그만큼 한국정부나 제도권 불교계가 달라이 라마 방한 추

이 라마란 이름을 갖고 있으니, 티베트의 불교문화를 평화롭게 비폭력적

진에 대한 기류가 20여 년 전과는 상당히 변해있다는 것을 필자는 피부

으로 보존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감에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구호성 분위기를 몰아가면서 일방적 추진은 자

는 84개의 상을 받고 여러 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72권

유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어가면서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방안을 모

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색해가는 불교 자체 내의 공감대 형성이 급선무라고 본다. 2011년 3월 19일 티베트 봉기 52주년(1959년 3월 10일) 티베트 국민 대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인생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 가지 좌우명

표자대회에서 정치적 지도자로서 은퇴를 선언하고 달라이 라마로서의

을 갖고 있는데, 첫째가 인간가치추구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임무만 수행한다고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후 티베

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아주 소박한 인간관을 갖고 있다. 종교인이 아니

트인들의 직접 민주적 선거인 투표에 의해서 2011년 4월 27일 3명이 입

라도 누구나 행복을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자

후보해서 젊은 롭상 상가이(1968-)를 티베트 망명 정부의 제13대 총리로

비를 베풀고 용서하고 관용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회적 윤리덕목이라

선출했다. 롭상 상가이는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으로 법학자이면서

고 강조하신다. 자신은 이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기 위해서 이 같은 덕목

정치가이다. 제12대 총리는 롭상 텐진 린포체였다. 티베트인들은 젊은 롭

을 첫째 삶의 지표로 삼는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자신은 종교인이기에 종

상 상가이를 선택해서 뭔가 개혁적인 정책을 요구한다는 표심을 나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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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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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있다. 2001년부터 제12대 총리직을 수행해왔던 롭상 텐진 전 총리는

에는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티베트중앙대학으로 선포되고 모든 재정지

37.4%를 얻었지만, 55%를 득표한 젊은 롬상 상가이에게 자리를 내주어

원은 설립당시부터 인도 중앙정부에서 받아 오고 있다.

야만 했다. 제3후보는 6.4%에 그쳤다. 이 대학의 설립은 달라이 라마의 자문과 요청에 의한 네루 수상의 도 움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젊은 난민과 히말라 롭상 텐진(삼동 린포체 1939-)전 총리는 티베트의 대학승(大學僧)으로

야 국경의 티베트계 젊은이들을 위한 인재양성에 따라 이 대학 설립에 상

서 사라나트(녹야원)의 티베트 대학 총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신 분이다.

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미 인도에서는 사라진 산

그는 교수 라마 삼동 린포체로 더 잘 알려진 분이다. 달라이 라마와는

스크리트 불교전적(佛敎典籍)을 티베트어에서 산스크리트어와 힌디어를

매우 가까운 사이이며 티베트 망명 정부를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비롯한 다른 인도 언어로 번역하는 것도 이 대학 설립목적의 하나이다.

간 쌍두마차로 이끌어 왔다. 롭상 텐진은 티베트 동부지역에서 출생했으 며, 한 린포체의 화신으로 인정되어 라싸의 드레 펑 사원으로 옮겨져 사

인도에는 지금 16개 공용어가 있을 정도로 다언어 국가이다. 한문으로

원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중관학(中觀學)의 대가(大家)로 알려져 있

도 산스크리트어 본(本) 불경이 많이 번역되었지만, 산스크리트어에서 티

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으며, 인도내의 여러 티베트 학교

베트어로 번역된 불교경전 등 기타 전적의 번역에 비교하면 그 양이 적

교장을 거쳐서, 1988년부터 인도 사라나트에 있는 티베트중앙 고등연구

다. 산스크리트어 불교관련 전적의 90%가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원(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다가 2001년 총리로 옮겨가면서 총장직을 사직

하는데, 이제 티베트어 본(本)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역번역(逆飜譯)되고

했다.

있는 것이다.

필자도 그가 총장으로 계실 때,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으며. 한국에서

티베트 중앙정부는 어떤 나라로 부터서도 주권정부로 인정되지 않고

불자들을 인솔해 가서 이 대학에서 연수를 받기도 해서, 롭상 텐진 린포

있지만, 다른 나라들의 정부나 국제기구로부터 인도내의 티베트 망명 난

체는 잘 알고 있는 사이이다. 이 대학은 1967년에 설립되었고, 문화부 산

민들의 복지사업을 위한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1998년 달라이 라마 망

하의 티베트학 고등연구교육기관이었다가 1977년부터 인도 중앙정부 교

명 정부는 1960년대부터 미국 중앙정보부(CIA)로부터 매년 170만 불을

육 문화부 산하 자율고등교육 기관으로 1988년부터는 인도정부로부터

받아왔다고 밝힌 바 있다. 콜로라도의 헤일 캠프에서 티베트 게릴라 부

티베트학 불교학 히말라야학 분야의 연구대학으로 인정받았고, 2009년

대가 훈련을 받아 왔음도 발표했다. 티베트 중앙정부는 네덜란드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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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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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991년 2월 11일 대표 없는 국가 민족 기구(Unrepresented Nations

베트어로 번역되어 있다면서 매우 전문적이고 학구적인 진지함을 나타내

and Peoples Organization, UNPO)의 설립에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

시면서 강조하셨다.

기구는 원주민, 소수민족, 미승인 국가, 점령당한 국가를 자칭하는 정치 단체, 정부의 국제기구이다.

아마도 우리가 한국에서 왔기에 특히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 제로 달라이 라마께서는 유식계통의 이 주소(注疏)를 연구하셨다고 당 시, 망명정부 공보차관인 까르마 유톡 라마가 들려주었다. 2009년 호주

달라이 라마는 금년에 80세가 된다. 이제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에서 그리고 2010년 인도 등지에서 들은 그의 영어 연설은 대단하셨다.

무리한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망명 이후, 수없는 공식 비공식 만남을 해

원고 없이 즉흥적으로 불교철학은 물론 시사문제나 과학적인 문제에 이

왔었고, 수십 개국을 방문하면서 세계평화와 환경운동을 해 오고, 설법

르기까지 그의 영어실력은 수준급이라는 것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평가

여행(說法旅行 Dharma Tour)을 해왔다. 활동을 자제하라는 의사의 권

하고 있다.

유에도 불구하고 2015년에도 최소한의 활동 스케줄은 가득 잡혀있다. 올해 첫 행사로 기자들과 신년 인터뷰를 시작으로 1월 2일에는 구자랏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아침 식사 후 6시부터 9시까지는 불교 경전이

주, 수랏 시에서 수여하는 평화상시상식(사진)에 참석하는 등, 여전히 활

나 과거 고승들이 남긴 주석서(원측의 해심밀경소 포함)등을 읽고 연구

동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는 시간을 갖는다. 점심은 11시 30분이며 주로 채식이다. 그리고 오후

달라이 라마는 평소에 비교적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가능한 일찍 업

에는 먹지 않는다. 오후불식(午後不食)의 계율을 지키신다. 오후에는 주

무를 끝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다람살라에 계

로 측근들과 토의하거나 손님을 맞이하든지 인터뷰 등을 한다. 대개 손

실 때에는 새벽 3시에 기상하시어, 샤워를 하시고 새벽 예불을 드리고 5

님은 12시 30분부터 3시 30분 사이에 만난다. 다섯 시에는 차 한 잔을

시까지 명상을 하신다. 5시 후에는 잠깐 산책을 하시고, 아침은 5시 30

하시며 저녁 예불과 기도 명상을 하시고 7시에는 하루 일과를 끝내신다

분에 드시고, 아침 메뉴는 대개 따끈한 보리죽과 빵 차를 마신다. 아침

고 한다.

을 드시면서 영국 BBC 라디오 세계뉴스를 듣는다고 한다. 필자가 80년 대 영국 유학시절 그의 영어법문을 들은 적이 있고, 내가 1991년 달라

2014년부터는 손님 만나는 것을 많이 줄이고 있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이 라마를 직접 친견해서 대화를 나눴을 때, 신라 출신인 원칙스님의《해

경우에만 접견하고 선별해서 만난다는 전언이다. 그동안 수없는 분들을

심밀경解深密經》주석서인《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를 영어(Sutra of the

만났기에 이제는 연로하시기 때문에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은 순리

Explanation of the Profound Secrets)와 산스크리트어를 섞어가면서 티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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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인의 디아스포라와 교육

이고 세 번째는 1996년부터 현재까지이다. 대체로 3단계의 물결로 티베 트 디아스포라가 발생했는데, 1959년에는 약 8만 명 정도가 티베트 본토 를 빠져나와서 인도 네팔 부탄 등지에 흩어졌다. 첫 번째는 중국 해방군 의 박해로 탈출한 것이고, 두 번째는 1980년대 중국정부와 군대의 압박 으로 행해졌고 세 번째는 특히 티베트 라마들에게 타이완을 최종 망명 지로 정하고 탈출했다.

티베트인들은 해발고도 4천 미터의 고원에서도 살아가는 고산족들이

현재는 티베트 부모들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동반 탈출하여 어린 자

다. 거의 대부분이 티베트 자치구인 티베트 고원과 현재는 중국의 성(省)

식들을 인도나 네팔 등지의 티베트 학교에 입학시켜, 티베트의 전통문화

으로 편입된 칭하이성 간쑤성 스촨성 윈난성 등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부모들은 다시 티베트로 돌아가는 식의 탈

다. 티베트어계(語系)는 시노-티베트어계(漢藏語系)에 속하지만, 더 좁히

출이다. 대개 이들은 인도나 네팔 불교 성지 순례를 목표로 어린 자식들

면 티베트-버마어족계에 속한다. 티베트어를 구사하는 인구수를 대개 8

을 동반해서 티베트를 벗어나서는 자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

백만 정도로 보고 있다. 버마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약 4천만 정도 된다

해주고 다시 돌아가는 교육을 위한 탈출이다. 현재 망명 티베트인은 15

고 보는데, 티베트-버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약 5천만 정도라고 하겠

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것은 티베트 망명정부가 발행한 그린 북

다. 티베트 자치구 영역과 인도 네팔 부탄등지에 사는 티베트 인구를 대

(green book=일종의 티베트인 신분증명서)의 통계에 따른 것이다. 하지

개 6백50만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2014년 인구 통계

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한다.

에 의하면 티베트 자치구와 중국영역에 사는 티베트 인구가 7백50만 정 도라는 인구조사 발표가 있었는데, 기존의 추정수치에서 백만 명 정도가

티베트인들의 공동체는 미국 캐나다 영국 스위스 노르웨이 프랑스 타

더 증가했다고 보는데, 문화생활의 향상과 티베트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

이완과 호주 등지에 분포되어 있고, 달라이 라마 망명 정부 연락 사무소

로 타당성 있는 증가라고 여겨진다.

인 사실상의 대사관 역할을 하는 곳도 델리(인도),뉴욕(미국),제네바(스위 스),도쿄(일본),런던(영국),캔버라(호주),파리(프랑스),모스크바(러시아),프리

티베트인들의 현대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1959년 달라이 라마의 망명

토리아(남아메리카)와 타이베이(타이완)에 두고 있다. 달라이 라마 聖下

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 첫 번째 탈출물결이었고, 두 번째는 1980년부터

는 자신이 사원대학에서 티베트 불교 전통방식(인도 고대 날란다대학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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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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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과정)으로 17년간 집중 교육을 받은 바 있기에, 망명하는 순간에도 망

학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최대사원대학이다. 이 티베트 사원대학은 티베

명 티베트 어린이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네루 수상에게 어린이들과 청소

트 사원교육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해서 불교교학(敎學)을 공부한다는 데

년들(어린 라마승려 포함)의 학교부터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너무

에 큰 의미가 있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에서 7세기 무렵부터 전해졌는데,

나 현명한 판단이었다. 망명 티베트인이 15만 명인데 초중고학생이 만 명

이때만 해도 티베트는 말(언어)만 있었지 문자가 없었다.

이다. 티베트 망명 타운인 다람살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71곳의 학교 와 초급대학과 중앙종합대학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라마들을 위한 사원 교육은 티베트 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실시되고 있다.

그래서 산스크리트어에 의거해서 문자와 문법서를 창작하여 7세기부 터 9세기에 걸쳐서 대부분의 산스크리트 본(本) 불서를 티베트어로 번역 해서, 13세기가 되면《티베트 대장경》을 성립시킨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특히 라마들을 위한 사원대학 교육은 정평이 나있다. 인도 남부 카르

쇠망해가고, 인도 후기 불교의 불경과 논서(論書)들을 티베트어로 번역한

타나카(마이소르) 주의 샌달 공원에 있는 남드롤링 사원 대학은 매우 유

것이어서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티베트어역

명하다. 이 사원대학은 티베트 본토에서도 유명한 사원대학의 전통을 갖

은 충실한 직역(直譯)이어서 의역(意譯) 위주인 한역(漢譯)보다도 티베트

고 있는데, 이곳 남인도에서는 1963년 티베트 닝마파 6대 사원 가운데

어역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原典)을 복원시키는데 결정적 자료 구실을

하나인 팔율사원의 두 번째 서열이었던 캽제 페놀 린포체(1932-2009)에

한다는 점에서 학자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의 닝마파

의해서 설립됐다. 이 사원대학에는 비구 비구니 라마 승려 5천여 명이 중

는 인도 날란다 대학의 산스크르트어 본 불경과 논서 등을 직역했고 티

고등 과정에서 대학 과정까지의 교과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망명 티베트

베트에서는 구역(舊譯)이라고 불릴 정도로 원전에 충실했기에 산스크리

라마승들은 물론 티베트 본토와 네팔 부탄 라다크 몽골 등지의 티베트

트어로 복원시키는데 더 유리한 입장이다. 한편 아티사 디팡카라 스리즈

불교 권에서 유학을 와서 사원 기숙사에서 공부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

나나(980–1054 CE)는 벵갈 팔라 왕조의 고승으로서 티베트와 수마트라

의 전통 사원 교육을 ‘쉐드라(Shedra)’라고 한다.

에 대승과 금강승(Vajrayana)불교를 전파했으며, 티베트에 사르마(新譯) 학파를 형성시켰다.

교육장소란 뜻을 갖고 있는 이 단어는 인도의 날란다 대학의 전통을 이어 받은 사원교육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에서는 남녀 라마가

티베트 전통사원교육과정은 학맥과 교수 방법론이 사원에 따라서 다

따로 쉐드라에서 공부했었는데, 이곳 남인도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상 함

양하다. 하지만 대체로 일치된 기본 텍스트는 인도 날란다 대학의 총장

께 공부하는데, 전 세계 불교 권에서 버마의 만달레이에 소재한 사원대

을 역임한 대학승인 나가르주나(150–250 CE)의 저작인《근본중론송(根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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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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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論頌)》이나 날란다 대학의 교수였던 찬드라기르티(월칭 600–650) 비구

아 등지에서 유학승이 와서 공부했었다. 당나라 현장법사나 의정법사가

가 저술한《입중론入中論》등이다. 이 텍스트들은 고오타마 싯다르타(부처

이곳에서 공부했고, 신라에서도 몇 명의 유학승이 이곳에서 공부했으며,

님)가 깨달은 중도(中道)에 대한 연구이다. 이 텍스트 외에 문법 시(詩) 역

혜초도 이곳을 방문한 여행기를 남겼는데, 12세기 터키계 무슬림 장군

사와 예술과목을 포함한다. 텍스트를 철저히 암송하는 교육방법을 통해

(Bakhtiyar Khilji)이 이끌던 군대에 의해서 파괴되고 도서관이 6개월간

서 텍스트를 통째로 외우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 겔륵파를 창종한 쫑가

불에 탈 정도로 많은 장서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파(1357–1419)라마가 5개 과목을 선정해서 교과과정을 정했다. 1.파라미 타(반야사상=대승불교)2.마디야마카(Madhyamaka-중도사상=철학)3.

이처럼 유명했던 날란다 학풍이 고스란히 티베트로 전해진 것이다. 7

프라마나(Pramana- 논리학=인식론) 4.아비다르마(Abhidharma-심리

세기부터 12세기까지 거의 5백년간 인도불교가 티베트로 전해졌다고 봐

학) 5.위나야(Vinaya-사원규범) 등이다.

야한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북부 인도나 중앙아시아 서역을 거쳐서 중국 한나라에 전해졌는데, 이것을 한전불교(漢傳佛敎) 또는 한역불교

겔륵파의 사원교육은 티베트의 세라 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인도

(漢譯佛敎)라 부른다. 중앙아시아 서역 승려들이 북부 인도나 중앙아시

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겔륵파 사원교육의 전통은 찬드라기르

아에서 배운 불교에 의해서 산스크리트어나 서역어로 된 경전을 한역한

티의《입중론入中論》과 미륵의《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또는《반야경론현

것이다. 8백년간 번역을 했다. 티베트의 경우는 인도에서 바로 산스크리

관장엄송般若經論現觀莊嚴頌》, 지금 인도네시아인 스리비자야 출신인

트어 본에서 인도 승려들이 직접 와서 번역을 했고, 티베트에서 파견하여

다르마키르티(7세기)의《프라마나위니사챠》과 와수반두(Vasubandhu世

날란다나 다른 불교대학에서 유학을 한, 티베트 출신들에 의해서 번역이

親 4세기)의《아비담마구사론 阿毗達磨俱舍論》, 율장(律藏)을 집중해서

이루어졌다. 날란다불교대학 이외에도 5개의 유명한 불교사원대학이 있

학습한다.

었고, 불교 이전에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인 간다라에는 기원전 6세기에 이미 탁실라 대학이 있었다. 부처님 당대에 인도에는 이미 이런 종합대학

불교 사원교육의 모델은 인도의 날란다 사원대학이다. 날란다는 큰 절

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도 태자 시절 왕궁에서 다른 로열패밀리 자제들

이란 의미의 (마하비하라)내에 있었던 사원교육기관이었다. 5세기부터 12

과 교육을 받았는데, 탁실라 대학의 교과과정과 동일한 과목을 이수했다

세기 까지가 전성기였다. 기원전부터 사원학교로 존재해 왔었지만, 종합

고 한다.

대학 성격의 대규모 사원대학이 된 것은 굽타왕조시대부터이다. 이후 팔 라왕조시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티베트 중국 한국 중앙아시 86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인도의 고대 대학교육은 그리스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역사가 매우 깊 87


다고 하겠다. 여기서 길게 논의할 주제는 아니지만, 대승불교흥기를 헬레

이다. 중국 한국 일본 월남 대만 등의 대승불교는 바로 이 쿠샨왕조의

니즘과의 교섭에 의한 영향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고대인도 북부에는 그

그레코-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스 식민지 국가인 박트리아가 있었고, 이 국가는 한 때 불교가 국교였 다. 박트리아(Bactria,255-139BCE)는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북부 발흐

지금 티베트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56년이 되어 가고 있다. 달라

(Balkh)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계 왕국이었다. 기원전 183년 박트리

이 라마 성하의 뛰어난 점은 망명지에서도 교육정책을 잘 세워서 성공

아의 드미트리우스 1세는 간다라, 펀자브와 인더스 계곡을 정복하였다.

했다는 점이다. 특히 라마들을 위한 불교교육은 너무나 훌륭하게 성공

이 그레코-박트리아 지배 시에 여러 왕조가 그 도시를 수도로 하여 지배

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티베트 디아스포라의 공동체

하였다. 도시는 여러 교역 길드에 의해 독립적으로 조정되고 스스로 이

도 이제 변화의 물결이 불고 있어서 주목된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자신

득을 얻었다. 그는 현재의 동 이란과 파키스탄을 정복하였고 인도-그리

들의 정체성과 진로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망명정부나

스 왕국을 만들어 냈다.

공동체에서는 세대교체와 새로운 티베트인의 정체성 확립에 고뇌하는 젊은 디아스포라의 어떤 움직임을 보면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이

그레코 불교(Greco-Buddhism)는 그리스가 소아시아, 페르시아와 인

들에게서 티베트의 미래를 예감한다.

도에 그리스 왕국을 세우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박트리아를 비롯해 서 그리스-인도 왕국이 세워진 서북부인도의 간다라 지방인 탁실라를 중심으로 해서 융합된 문화이다. 특히 쿠샨왕조에 이르러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사실상 쿠샨왕조는 그리스계라기 보다는 페르시아 계에 가 깝지만, 박트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리스-인도 왕국을 계승함으로써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인도의 불교를 동시에 받아 들인 타림분지의 초원 출신의 월지 민족이다. 쿠샨왕조는 양 문화를 융 합하여 그레코 불교문화를 재창조함으로써 불교사(佛敎史)에 회기적인 분수령을 만든다. 쿠샨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장악하면서 동 시에 불교문화를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아시아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 게 된다. 가장 중요한 대승불교를 탄생시켜 동아시아로 전해준다는 사실 88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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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차크라 대법회

준비할 정도로 달라이 라마의 움직임에 신변보호를 해주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1967년 처음으로 태국과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태국은 왕국으로서 승왕(僧王)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신정분리(神政分離)의 불 교왕국인 태국은 남방불교국가이다. 인도나 실론(스리랑카)의 고대 남방 상좌부 불교 전통을 버마와 함께 가장 잘 보존하고 승가공동체가 아직 도 살아있는 나라이다. 티베트 불교는 대승불교로서 7세기부터 12세기까

티베트불교는 외부 세계에 매우 신비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지리

지의 인도 후기 대승불교철학과 금강승 탄트라(밀교)가 그대로 전달되었

적으로나 교통문제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구촌의 외딴 곳이었다.

으며, 인도불교 전통사원대학인 날란다대학 학통을 그대로 전수 받았다.

그러므로 세계인들에게 티베트는 한번 가보고 싶은 미지의 나라로 인식

티베트 불교 또한 승가공동체가 인도에서 강하게 살아있다.

되고 있던 차, 달라이 라마의 망명으로 세계인들은 더욱 관심과 동정심 을 갖게 되었다. 특히 달라이 라마의 망명이전에는 티베트는 서구사회에

물론 티베트 자치구나 중국영역 티베트권의 사원도 승가공동체가 어

는 머나먼 히말라야의 고원에 있는 제정일치의 불교나라이고, 라마 신정

느 정도 살아 있다고 본다. 이런 상좌부와 대승불교의 수장(首長)끼리의

(神政) 왕이 다스리는 정도의 불교왕국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만남은 불교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남방 상좌부의 수장 (승왕)비구와 대승불교의 수장(법왕)빅슈가 만난 것은 현대 세계불교사에

전회에서 소개한바와 같이 달라이 라마는 1959년 3월 인도로 망명한

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태국에서 최고 국빈 대

후, 15년 정도 인도 다람살라의 망명정부를 이끌면서 10만 망명 티베트인

우를 받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정부에서는 극진한 대우를 했고, 일본

들의 정착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기간이 달라이 라마에게나 모든 티베

불교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고 연락사무소(대사관역할)도 개설할

트 망명 난민들에게는 고난과 시련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다행하게도 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등, 이후 달라이 라마는 수차례 일본을 방문해

도정부는 망명티베트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자립할 수 있는 지

오고 있다.

원을 했으며, 달라이 라마에게는 망명정부의 수반 대우를 해주고 있다. 인도정부는 지금도 달라이 라마에 대한 예우는 변함이 없다. 다람살라

이때 한국방문도 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티베트 대장경 전

에서 델리로 또는 다른 지역으로 갈 때, 달라이 라마를 위한 특별열차를

질을 동국대에 기증한 바 있다. 1990년대 망명정부의 공보차관인 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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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유톡 겔륵 장관(라마)이 한국에 왔을 때, 당시 동국대에 근무했던 故

배경으로 한 설법여행을 하게 된다.

박동기 박사의 안내에 의해서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 보관한 티베트 장경 을 열람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성하는 한국불교에 이런 애정을 보이

달라이 라마는 망명이후, 인도 다람살라나 보드 가야(부처님 성도지=

셨는데도 달라이 라마에게 한국방문 비자가 발급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

깨달음을 얻은 곳)에서 정기적으로 설법을 해 왔다. 노벨평화상 수상 이

불자들은 일본이나 인도 다람살라를 직접 방문해서 그의 법문을 듣고

후에는 그의 설법여행은 유럽, 남북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와 이스

있다.

라엘까지 그 영역은 전 지구촌이라고 할 정도로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불교설법이었으나 나중에는 매우 전

달라이 라마는 1973년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문적인 불교형이상학을 설명하는 칼라차크라 법회를 주관하고 있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영국, 서독과 오스트리아를 방문하고서 유럽 의 선진문화와 문명에 많은 감동을 받으면서도 환경과 세계평화문제에

주로 인도에서 행해지던 칼라차크라 법회는 1980년대부터는 미국을 비

대한 주제로 서구 사회에 많은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롯한 캐나다 등 유럽까지 확대된다. 칼라차크라는 시간을 뜻하는 칼라

1959년 망명이후 20년 만에 중국정부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1987년 9월

(kala)와 바퀴를 뜻하는 차크라(chakra)의 합성어로, 산스크리트어로 시 '

21일 미국의회 연설에서 ‘티베트문제에 대한 5개항의 평화계획안’을 발표

간의 바퀴', 시 ' 간의 순환'을 의미한다. 한역에서는 시륜(時輪)이라고 번역

했다. 이어서 1988년에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유럽의회에서 ‘티베트 문

했다. 칼라차크라는 티베트 불교에서는 매우 복잡한 가르침과 수행이며,

제해결안’을 제안하는 연설을 했다.

상당히 높고 깊은 단계로서 난해한 밀교의 가르침으로 전해지고 있다.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많은 대중 앞에서 이런 칼라차크라 대법회를 개

미국과 유럽에서 한 연설은 티베트 문제에 대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

최해 오고 있다.

으켰고 공감을 얻은 제안으로 평가되어 ‘1989년 노벨평화상’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상했다. 달라이 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 그의 행

제14세 달라이 라마는 제1차 칼라차크라 대법회를 1954년 5월에 티베

보는 보다 더 세계평화와 환경문제에 메시지를 던지면서 보폭이 넓어진

트 라싸에서 제2차 법회는 1956년 4월 라싸에서 개최했고, 그 후 망명으

다. 세계 각국의 비정부기구(NGO)들과 각 종교단체와의 교유를 넓히고

로 중단되었던 법회를 제3차 대법회는 1970년 다람살라에서 개최한 이

힘을 함께 보태서 세계평화와 환경 인권문제 등에 목소리를 내면서 비폭

래 2014년은 34차로서 인도 북부 라다크에서 15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력 비핵화 운동 등을 전개해 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티베트 불교를

개최됐고 2015년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다고 한다. 인도가 아닌 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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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제7차는 1981년 7월 미국 위스콘신 주 메디슨에서, 10차는 1985

중국어 통역이 된다고 한다.

년 7월 스위스에서, 제13차는 1989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16차는 1991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제22차는 1995년 8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제32차는 2011년 7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바 있다.

나는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사무국장이었던 1991년에 시작했던 달 라이 라마 방한 추진을 2012년까지 사실상 진행했다. 1991년과 1992년에 성하를 친견하고 2005년 만해평화상과 2006년 세계종교지도자대회와

칼라 차크라 대법회는 티베트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종교행사이다.

2012년 세계불교도우의회 총회에 참석하시도록 몇 차례 친견한 바 있다.

심오한 밀교의 진리를 전수하는 자리인 만큼 진지하고 경건한 분위기이

2011년에도 인도 델리에서 친견하고 방한을 위한 비자문제에 대해서 노

다. 또한 일반 불자나 외국인들에게는 구경거리이면서 축제 분위기 같은

력했으나, 비자문제는 너무나 높은 벽이 되어버렸다.

느낌을 받게 되고, 티베트 불교의 어떤 실상을 보는 것 같은 종교적 감동 을 받는다. 한국의 불자들도 칼라 차크라 법회에 다수가 참석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대법회이다.

중국과 한국은 경제적으로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중국정부로서는 달 라이 라마 문제는 태풍의 눈일 수밖에 없다. 이제 나는 달라이 라마 성 하 방한을 추진하는데 일선에서 활동은 하지 않지만 성하의 방한을 진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다양한 일자와 장소에서 설법을 하시며 특강

심으로 바란다. 존경하는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한국불자들의 성원과

과 공중 강연 등을 자유스럽게 하신다. 대개 인도가 아닌 외국에서는 설

관계없이 원측 스님의 나라인 한국을 정말 오고 싶어 하셨다. 겸손하시

법을 듣기 위해서 티켓을 구입해서 참석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행사

고 자비가 넘치시고 항상 미소 짓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대승보살행을 실

비용과 성하의 체제비 등에 대한 경비로 충당된다. 하지만 인도의 다람

천에 옮기시는 달라이 라마 성하는 나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존재할 것이

살라에서 행해지는 설법은 누구나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 매년 티베트

다.

력(曆)으로 1월 16일(대개 양력 2-3월)에 춘절 설법특강이 있게 된다. 이 설법은 15일 정도 진행되며 FM 채널로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통역이 진 행된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영어가 유창하시지만, 이날은 만 명이 넘는 많은 티베트인들이 오기 때문에 티베트어로 진행된다. 지난 수년간 은 성하께서는 타이완과 한국의 불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특별히 소규모 법회를 열기도 했다고 하며, 이런 대법회 때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한국어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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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불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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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

다음은 사르나트인데, 바라나시 남쪽 12km 지점에 있는 녹야원(鹿野 園 사슴동산)이라는 곳인데, 보드가야에서 직선거리로 2백km가 넘는 거리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정각(正覺)을 이룬 다음, 자신의 도반(道伴) 이었던 다섯 명의 비구들을 찾아가서 최초로 설법하여 이들을 제자로 삼았다. 불교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 은 후, 혼자만이 그 깨달음을 만끽하면서 전법포교하지 않았다면 불교란 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이 최초의 설

모든 종교는 창교자(創敎者)와의 관련된 사적(史跡)을 갖고 있다. 창교 자의 고향일수도 있고, 처음 그 종교를 열개된 장소나 어느 특정한 사건

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르나트를 불교 4대 성지에 포함시키고 있 다.

과의 관계된 지역이 될 수도 있다. 불교에 국한해서 보면, 교조(敎祖) 석 가모니 부처님과 연관된 지역은 인도(네팔 포함)가 된다. 불교에서는 부처

다음은 4곳의 특별 부가성지이다. 라지기르(Rajgir), 산카사

님과 관계된 성지를 4대(大) 주요 성지(聖地)와 4곳의 특별 부가성지(附加

(Sankassa), 스라바스티(Sravasti)와 바이샬리(Vaishali)를 말하는데, 라

聖地)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 4대 성지라고 하면, 보드가야, 쿠시나가르,

지기르는 왕사성(王舍城)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주로 머무르시고 설법

룸비니와 사르나트를 일컫는다. 보드 가야(Bodh Gaya)는 인도 비하르

한 당시 16 개국 가운데 강대국의 하나인 마가다 나라의 수도(首都)였다.

주에 있고,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곳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

이 왕사성에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하는 영취산이 있고, 부처님은

道)하고서 부처(覺者)가 되었다. 쿠시나가르는 보드 가야로부터 2백 km

성도한 후, 이곳 산정의 토굴에서 명상을 하면서 제자들을 지도했고, 중

이상 떨어진 북쪽인 웃따르 프라데시 주(州) 고락푸르 시에서 50km 떨어

국 한국 일본 선종불교에는 매우 상징성 있는 산이다. 부처님 당대에 도

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처는 보드가야에서 성도한 후, 45년간 설법

보로 보드가야에서 반나절이면 이곳에 이를 수 있는 곳이었다.

(說法)을 마치고 고향 근처의 당시 큰 나라의 도시인 코살라국의 스라바 스티(사위성)로 가던 도중,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이곳에서 빠리닙빠나(대

보드 가야의 강가나 영취산에는 당시 많은 출가(出家) 무소유(無所有)

열반)에 들었다. 이곳 쿠시나가르에서 인도 네팔 국경을 지나면 룸비니가

의 사문(슈라마나)들이 도를 닦던 곳이었다. 산카사는 델리와 스라바스

있다. 부처는 이곳에서 탄생했다.

티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처님께서 아비담마(불교심리학)를 설 했다고 알려졌으며, 어머니인 마야 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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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천도한 곳으로, 아소카 왕이 이곳에 석주(石柱)를 세웠고, 한 때는 승

음을 우선시한다. 세계 각 나라의 출가 사문이나 불자들은 인도의 불교

원(僧院)과 대탑(大塔) 등이 있었고, 많은 비구들이 살았었으나, 지금은

성지 가운데서도 보드 가야를 가보고 싶어 한다. 이곳의 지명이 말해 주

석가족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스라바스티(舍衛城)는 부처님 재세(在世)

듯이 부처님의 각신(覺 身)이 이곳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처님

시(時)에 코살라국의 수도였으며, 부처님 45년 설법 기간 25안거(安居)를

께서 성도하고 열반(入寂)한지가 어언 2559년이 되었지만, 부처님께서 정

이곳 기원정사에서 보내시고, 이곳에서《금강경》을 설한 것으로 전해지고

각(正覺)을 이룬 이곳 보드가야에서 뭔가 그 깨달음에 대한 기운을 받고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대에 크고 부유한 도시였

영감을 얻으려는 불교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고, 부처님이 열반하기 전, 최후의 설법을 한 곳이다. 이상의 8곳을 불교 8대 성지라고 말한다. 부처님과 직접 관련된 장소들이다.

여기서 잠깐 부처님 생몰연대에 대해서 알아보자. 올해가 불기 2559년 인데, 이 기년(紀年)은 입멸(入滅)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부처님은 기원

차례로 소개하기로 하고, 이밖에도 부처님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곳으

전 563년에 태어나서 기원전483년인 80세에 돌아가셨다. 기원전 483년

로는 데바다하(Devadaha), 가야(Gaya), 카필라와스투(Kapilavastu), 케

부터 기산하면 올해가 2559년이 되는데, 인도나 스리랑카에서는 부처님

사리라(Kesaria),코삼바( ·Kosambi), 날란다(Nalanda), 파와(Pava), 파

께서 입멸한 해를 1년으로, 태국은 0년으로 기산해서 1년 정도의 차이가

탈리푸트라(Pataliputra)와 바라나시(Varanasi)가 있으며, 후에 불교와

난다. 아무튼 불기 2559년은 탄생년(誕生年)이 아니고 돌아가신 입멸년

의 관련이 있는 주요 불적지인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바라바 석굴

(入滅年)이라는 것을 참고로 알아두었으면 한다. 많은 분들이 혼동을 하

(Barabar Caves), 바르훗(Bharhut), 엘로라 석굴(Ellora Caves), 랄릿트

는데, 불기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입멸(入滅)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을

기리(Lalitgiri), 마투라(Mathura), 판다블레니 석굴(Pandavleni Caves),

기억했으면 한다. 열반(니르바나)을 중시한 연유에서다.

피프라화(Piprahwa),라트나기리( Ratnagiri), 산치(Sanchi), 우다야기리 (Udayagiri)와 비크라마실라 등이 있다.

인도라는 나라는 역사기록에 둔한 사람들이었다. 인도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나 중국 그리스 로마에서 소스를 찾기도 한다. 기원전

불교에서는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8대 성지가 있고, 그 밖의 불교관

3천 년 전에 어쩌면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리안이라고 하는 침

련 유적지가 많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지는 단연 부처님이 성도한

입자들이 이란 고원을 경유하여 인도 평원을 점령하여 원주민을 노예로

보드 가야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달음을

삼아 정착한 나라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비(非) 아리안이라는 설도 대

제일로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세계의 여러 전통의 불교 종파에서도 깨달

두하지만, 서구의 학자들에 의하면 인도유럽어족의 아리아인임이 정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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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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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다. 대체로 부처님과 당대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인도 마우리

(불교)이며, 고타마 싯다르타(부처님)와 인도 고대시대 불교, 부처님 열반

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 세운 석주나 바위에 새겨진 칙령 등에 의거해

이후 경전결집(經典結集) 역사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서에 근거해

서 연대를 추정한다. 그리고 가장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사서(史書)는

서 보드가야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인도 남단의 섬나라 실론에서 빨리어로 기록된《마하왕서(Mahavamsa 大史)》,《디파왕서(Dipavamsa島史》와《Mahavamsa》를 이어서 기록된《쭐 라왕서 小史》이다.

보드 가야는 우루벨리라고 알려진 네란자나 강둑에 위치하고 있다. 부 처님이 입멸한지 2백년 가량 지나서 인도 亞 대륙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 조의 아소카 대왕이 처음 이곳을 방문하고 아소카 석주를 세우고 사원

《Mahavamsa》는 실론의 왕들에 의해서 빨리어로 쓰여 졌다. 기원

을 세워서, 비구들이 거처하게 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63년에

전 543년 인도 벵갈에서 실론으로 온 비자야 왕자이야기부터 실론 아

지금의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해서 29세 때 출가하여 6년 후인 35

누라다뿌라의 마하세나 왕(334-361)에 이르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

세인 기원전 534년에 대각을 이루고 부처가 되었는데, 정각을 이룬 장소

다.《Dipavamsa》는, 기원후 3세기에 편집된 것으로서 실론과 인도 고대

가 바로 이곳 보드가야 네란자나 강둑 보리수 아래서이다. 이 보리수 아

사가 기록되어 있고, 불교의 부파(종파)에 대한 기록 등이 있는 아주 중요

래의 장소를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hila)라고 한다. 아소카 대왕은 이

한 사서이다.《Mahavamsa》를 이은《Cuiavamsa》는 《Mahavamsa》의 연

보리수를 의지해서 대탑(大塔) 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속적인 사서이다. 기원후 4세기부터 1815년까지의 기록이다. 6세기에 마

는 다른 장소에서 거의 6년간 고행을 하다가 이곳 보드 가야의 보리수

하나마 라고 하는 비구가 기록한 사서로서《Mahavamsa》와 함께 실론의

아래로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숭고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아서 성

2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상좌부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필독서

도(成道)를 이룬 것이다. 깨달음의 내용은 불교의 교리적이고 철학적인

이다.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연기법(緣起法)과 중도(中道), 고집멸도(苦集滅道) 의 사제(四諦 진리란 뜻의 제로 읽음), 삼법인(三法印)인 무상대도(無上大

독일의 윌리엄 가이거라는 학자가《마하왕서》는 1912년에 《쭐라왕서》는

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나중에 불교교리 발달과 사상의 전개가 심원해

1930년에 번역을 완료했고, 영역되어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발행되어

졌지만, 당대로서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전지(全知)의 경지로서 깨달은

영.독어권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영역서는 1837년에 출간되어 실론의 직

자로 숭앙(崇仰)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할 식민 통치에 활용되었다. 이 역사서는 경전(經典) 텍스트는 아니지만, 상좌부(上座部) 불교를 공부하는 데는 필독서이다. 실론의 초기 종교사 102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고타마 싯다르타가 처음 고행을 시작할 때, 다섯 명의 사문들과 함께 103


했는데, 6년간 고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영양 상태

회에서는 이슬람 지하드 그룹의 인도 무자헤딘의 책임으로 결론지은 바

가 극도로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그로기 상태에서 겨우 우유

있었다.

죽을 공양 받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진한 끝에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부 처의 지위에 올랐다. 보리수 아래서 명상을 할 때, 전에 같이 수행했던

보드 가야 대각사의 역사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성도한 기원전 5세기에

도반들이 찾아와서 고타마 싯다르타의 모습을 보고서 그들은 이제 고타

서 기원후 5세기 약 1천 년 간을 1기로, 기원후 5세기에서 1420년경 까지

마는 극도의 고행을 버리고 손쉬운 명상을 한다면서 곁을 떠나 어디론가

를 제2기, 1420년경부터 현재 까지를 제 3기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가장

가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성도한 다음, 이들 비구들을 찾아서 녹야원까

전성기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

지 가서 이들을 제도하여 제자로 삼았지만, 보드 가야 시절에서는 어쩔

로 15세기부터 보드 가야 대각사는 모든 사람들의 시야에서 묻히고 말

수 없는 사건이었다. 또 당시 인도에서의 수행자들은 극도의 고행을 수행

았다. 보드가야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세기 브리티시 인디아의 고

의 방법으로 삼았는데, 하루 한줌의 물과 음식과 수면을 조금 밖에 취하

고학 발굴 때문이었고, 보드 가야 대탑(대각사)이 다시 불교도들의 귀의

지 않으며 나무 이래나 동굴 등에서 생활하고 몸도 헝겊 조각을 이어서

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실론(스리랑카) 출신 불교 지도자 아나가리카 다

만든 옷을 입을 정도였는데, 이 옷은 나중에 분소의란 가사가 되었다.

르마팔라의 인도불교성지 복원운동 단체인 대각회 활동 때문이었다.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 대왕이 이곳 보드 가야의 부처님 성도지(成道

근현대의 보드 가야 역사에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란 인물을 빗겨

地)를 참배하고 부처님의 위대함을 칭송하여 기리기 위해서 최초로 대각

갈 수가 없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실론 출신으로서 미국의 신지학

사(大覺寺 Mahabodhi Temple)를 세운 이후, 지금에 이르기 까지 마하

회(神智學會) 회장인 스틸 올코트 대령의 근대불교운동의 영향을 받았

보디 사원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의 모습으로 세계불교도

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브리티시의 저널리스트이며 시인이었던 에

들 앞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원은 인도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

드윈 아널드의 도움을 받아 1891년 대각회(Maha Bodhi Society)를 창립

를 같이 했으며 인도 종교사의 살아있는 증표처럼 불교사원에서 힌두사

했다. 창립목적은 인도불교의 소생과 고대불교유적지인 보드 가야(Bodh

원으로 힌두사원에서 이슬람의 파괴로 다시 힌두 승려들의 관리 하에 다

Gaya), 사르나트와 쿠시나가라 등지의 불교유적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시 불교도들의 손에 들어오기 까지 그야말로 온갖 시련과 험한 상황을

그러면 왜 실론 출신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이렇게 불교성지를 복

견디면서 지탱해 왔다. 2013년 7월 7일 새벽에는 폭탄이 터졌는데, 다섯

원하려고 대각회(大覺會)를 창립하게 되었는가.

명이 다치는 등, 자칫했으면 큰일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인도정부 조사원 104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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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인도에서 거의 소멸한 다음에는, 일부 불교도들조차도 자신들

충격을 받게 되는데, 불교도의 사원인 대각사가 힌두 승려의 손에 들어

이 ‘불교도’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만큼 인도불교계는 심각한 상황이었

가 있었고 불상은 힌두교의 한 신상(神像)으로 변해서 한쪽 구석에 안치

다. 그나마 인도에서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라다크 불교협회, 전

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잠겨있는 빗장을 열고 들어가서 참배할 정도

(全)아쌈불교협회, 히말라야불교회와 달리츠(불가촉천민) 불교운동 등에

였다. 이에 그는 흥분했고, 이들에게 항의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에게

주목해서, 이들을 이끌어 줘야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실론에 돌아와서 즉각 콜롬보에서 대각회를 설립 했고, 이듬해인 1892년 캘커타로 본부를 옮겼다. 캘커타는 당시 브리티시

아나가리카란 말의 뜻은 ‘집 없는 자’의 의미이다. 집이 없는 자란 바로

인디아의 수도였다. 첫째 목적은 보드가야의 대각사를 비롯한 사르나트

출가 수행자를 의미한다. 다르마팔라(Dharmapala)는 불법을 보호하고

쿠시나가라 룸비니 등의 관리 운영권을 힌두 승려에서 불교도가 되찾는

지킨다는 법호(法護)란 뜻 정도의 의미이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에서 아

것이 목적이었다.

나가리카는 출.재가(出在家)를 막론하고 집을 떠나서 수행의 길로 들어선 구도자(求道者)를 이렇게 불렀다. 불교가 아사직전이었지만, 오랜 역사를

다르마팔라는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여러 단체로부터 초청을 받

간직한 실론불교에는 이런 수행자들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출가 비구와

기도 했다. 하와이에서는 카메하메하 (Kamehameha the Great 1738-

재가 신도사이의 중간 정도의 신분인 우리식으로 말하면 포교사나 법사

1819) 대왕의 후손인 마리아 E. 포스터 여사를 만나서 엄청난 액수의 보

(法師) 정도의 위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신도는 5계를 지키고, 출가

시를 받게 되는데, 그가 받은 백만 루피는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거의

비구는 227계(대승에서의 빅슈는 250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나가

미화 3백만 불 상당이다. 그는 이 돈으로 대각회 운동에 크게 활용했다.

리카는 8계(戒)를 지키도록 되어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한국에서 인도로 가서 공부한 승려들을 인도구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황색 가사는 입지 않았고 삭발도 하지 않았

법승(求法僧)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가장 먼저 간 분이 중국 동진 시

지만, 8계 이상의 계율을 지키면서 실론의 곳곳을 누비며 수행과 불교

대의 법현(Faxian 337–422)법사 이다. 그는 399년부터 412년 까지 13년

부흥운동을 했다. 입적을 얼마 앞두고 비구가 되긴 했지만. 아나가리카

간 지금의 신장자치구인 타림 분지를 지나서 인도에 들어갔고, 보드가야

다르마팔라는 에드윈 아널드 경(Sir Edwin Arnold )의《아시아의 빛(the

를 포함한 인도의 여러 불적지를 참배하고 실론 섬까지 가서 당시 유명

light of Asia)》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노래한 담시(譚詩)에 감화를 받

한 아바야기리(무외산사)라고 하는 큰 절에서 연구한 다음, 해로(海路)로

아서 1886년 인도 보드 가야 행(行)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큰

사경을 헤매면서 중국으로 돌아와서《법현전》이란 책을 남겼고, 7세기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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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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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현장법사(Xuanzang 602–664)는 629년부터 645년까지 타림분지 의 천산의 오아시스로(路)인 실크로드를 통과하여 인도 날란다 대학에 서 16년간 공부하고 육로로 귀국해서《대당서역기》를 남겼다. 그 후 중국 에서는 의정법사(義淨,Yijing635-713)가 해로를 통해서 지금의 인도네시 아 수마트라 섬을 거쳐 인도에 갔고, 해로로 귀국했으며, 25년간의 여정 을 기록한《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과 인도 등지에서 유학한 중 국 한국 일본 등의 구법승들을 기록한《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 法高僧傳》등을 남겼는데, 날란다대학에는 신라에서 온 유학승들이 여 러 명 있었다고 이름을 남기고 있다. 혜초(慧超704-787)는 신라 성덕왕 때의 고승이다. 혜초는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와《왕오천축국전(往五天 竺國傳)》을 남겼다. 그의 인도기행문이 1908년 둔황에서 발견되어 동서 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필자는 그동안 보드가야를 80년대 초부터 가기 시작해서 현재 까지 수 십 차례 가봤는데,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고 어떤 영감 같은 것 을 강하게 느끼곤 한다. 보드 가야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사원들이 즐비하다. 부처가 성도한 후 2천 5백년이 지난 지금, 보드 가야는 각 나 라 지역 문화와 전통의 옷을 입은 형형색색의 불교가 다 모여서 국제 불 교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계 각국 불교의 모습을 볼 수 있 다. 만일 부처가 이 모습을 보노라면, 뭐라고 하실지 모를 일이지만, 아 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겉모습은 바뀔지라도 깨닫겠다는 의지만은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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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최초로 법륜을 굴려 불교역사가 시작된 사르나트

다. 깨달음의 사회화가 요청되는 불교란 종교의 성격이 여기에서 확연하 게 드러난다. 적어도 일정기간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의 훈련이 있었다 면 반드시 사회(중생)에 회향하는 전법포교의 보살행이 실천되어야 한다.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한국불교는 이런 사명에 더 투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타마 붓다는 법륜을 굴린다고 결심하자, 마음이 홀가분해 졌지만,

​​사르나트(Sarnath)는 녹야원(鹿野園사슴공원)이란 의미이다. 녹야원

동시에 45년간의 또 다른 고행이 그 앞에 놓이게 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은 불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와 상징성을 갖는 불교성지다. 불교역

법륜을 굴린 이 순간부터 열반(입적)에 들 때까지의 45년간을 중생들에

사가 여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보드 가야의 보리수

게 그가 깨달은 법륜을 굴리면서 지혜광명을 주신 것이다. 고타마 붓다

아래인 금강보좌(金剛寶座)에서 ​무상대도(無上大道)인 정각을 이루었지

는 보드 가야에서는 법륜을 굴리지 않고, 사르나트까지 오게 된 것은 그

만, 고타마 붓다는 21일정도의 기간 동안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자신

의 최초 고행시절 도반이었던 5비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고타마 붓다

의 깨달음을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남에게도 베풀 것인

는 깨달음을 이룬 다음, 사문의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 자신에게 명상

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 때문이었다. 깨달음에 대한 점검과 동시에 이런

을 지도한 두 스승을 관(觀)해 보았는데 이 분들은 이미 열반에 들고 이

깨달음의 사회화에 대한 망설임 속에 있을 때, 하늘(梵天)에서 권청(勸

세상에 없었다. 다음은 5비구가 보드 가야에서 작별할 때 녹야원으로

請)의 향연 소리에 고타마 붓다는 전법륜(轉法輪)을 결심한다. 법륜(法

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성도 후, 5주 만에 길을 나섰다.

輪)을 굴린다는 뜻이다. 그들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변 모래사장에 있을 것으로 영감이 스쳤

​ 불교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만족했다면 정각

다. 고타마 붓다 시대에는 많은 무소유(無所有)의 사문들이 히말라야 기

을 이룬 부처는 있을 수 있지만, 불교역사는 존재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슭이나 갠지스 강변 또는 숲속에서 도를 닦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들 사

점에서 불교는 깨달음을 사회화 하는 종교가 되는 이유근거가 된다. 이

문들은 주로 큰 도시에서 멀지 않는 이런 곳에서 수행을 했는데, 그것은

문제는 불교 2천6백년사에서 부단하게 제기되는 화두(話頭)가 된다. 깨

탁발하여 음식을 걸식해서 연명해야했기 때문이다.

달음지상주의는 당위적인 과제이면서 동시에 경계해야할 궁극적 목적이 110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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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붓다는 보드 가야를 출발해서 도보로 직선거리 2백km 가 넘

하고, 최초로 안거(安居)인 우기(雨期)를 여기서 보내게 되고, 이후 이 지

는 길을 혼자서 가기 시작했다. 갠지스 강변 모래사장에는 많은 고행자

방 유력한 자의 아들인 야사(Yasa)와 그의 친구들이 비구가 됨으로 인

들이 모여 있었다. 고타마 붓다가 나타나자 고행자들은 고타마 싯다르타

하여 약 60명의 비구로 불어난 승가로 성장했다. 60명의 승가 공동체가

가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覺者)가 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경전에서는 말

형성되면서 공동체의 규범이 되는 계율(戒律)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탈리

해주고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논전(論戰)을 걸어온 자가 있었지만, 고타

폿야자 잎으로 만든 신발을 금지하고 특정한 육식(肉食)을 먹지 않도록

마 붓다는 가볍게 논박(論駁)해서 말문을 막아 버리고는 5비구의 행방을

했다. 이후 227개의 계율이 제정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이 최초의 안거기

물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이곳을 떠나 지금은 사르나트(사슴공원)에 있

간에《전법륜경》을 비롯해서 10개의 경을 설했다고 전해지며, 안거가 끝

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갠지스 강변에서 13km 정도 동북쪽의 거리에

나자 고타마는 영취산이 있는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왕사성)

위치한 숲 속이었다. 고타마 붓다는 묵묵히 이들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

로 향했다.

작했다. 한역(漢譯) 대승 권에는 교진여라고 알려진 콘단나(Kondanna) 등을 만나서 최초의 설법을 하고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불교 공동

그 후 사르나트에는 승원(僧院)이 더욱 커져서 많은 수의 비구들이 수

체인 승가(僧伽 Sangha)가 결성되면서, 법륜(法輪=佛法)을 굴려서 불교

행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사서《마하왕서 Mahavamsa》는 기록하고 있

역사가 시작되었다.

는데, 기원전 2세기 경, 실론의 아누라다뿌라의 대탑(大塔) 기공식에 이

이런 역사적 대(大) 사건이 일어난 이 장소가 바로 사르나트(녹야원)인

시빠따나(사르나트)에서 1만 2천명의 비구들이 담마세나 대장로의 인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가 최초의 설법한 진리를 전법륜경(轉法

아래 참석했다고 한다. 7세기 당나라 인도 구법승 현장이 이곳 사르나트

輪經Dhammacakkappavattana Sutta 담마차까빠와따나)이라고 경전

의 성지를 찾았을 때, 1천 5백 명의 소승(테라와다 상좌부) 비구들이 수

결집(經典結集)을 했다. 고타마 붓다는 최초의 설법에서 고집멸도(苦集

행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승원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지붕은 금으

滅道)인 사성제(四聖諦), 중도(中道), 삼법인(三法印)과 연기법(緣起法)을

로 장식되어 있고, 법당 중앙에는 고타마 붓다가 법륜을 굴리는 소상이

설한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사르나트는 미가다야(Migadiya)라고 해서

있었다고 그의《대당서역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현장법사는 또 인도 최초

사슴공원의 뜻이 있고, 빨리어 경전에서는 이시빠따나(Isipatana)란 뜻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의 아소카(Ashoka Maurya 304–232BCE))대왕은

으로 성인(聖人)이 발을 디딘 장소란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고타마 붓다가 열반한지 약 2백년 후, 탄생지 룸비니, 성도지 보드 가야, 열반지 쿠시나가라와 설법지인 이곳 이시빠따나인 미가다야(사슴공원)

고타마 붓다는 5비구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여 승가 공동체를 형성 112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를 방문하고 석주와 바위에 고타마 붓다의 성도와 활동을 찬탄하는 비 113


문을 새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담)》에도 바라나시가 자주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바라나시는 힌두의 시바신이 세웠다고 하며, 힌두 서사시《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영웅인

사라나트의 인근에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바라나시라고 하는

판다바들이 방문했으며, 힌두교의 7대 성지가운데 한곳이다.

고대시대부터의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사르나트와 바라나시 는 불교가 흥성했으며 불교예술의 센터 역할을 했고, 이것은 굽타시기

기원 전 마우리아 왕조시대에는 지금의 파키스탄인 탁실라에서 마우리

인 4세기에서 6세기경까지 이어졌는데, 이 도시에는 왕들과 부유한 상

아 왕조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현 파트나)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인들이 많았고 불교를 적극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라나시 주위

바라나시는 이 간선도로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12세기 말 경,

를 둘러 본 현장은 이 지역에는 모두 30여개의 승원과 3천명의 비구

터키 무슬림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게 되기도 했다. 터키 무슬림 통치자

들이 수행하고 있었다고 기록을 남겼다. 초기 18부파 가운데 독자부

는 1천개의 불교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도록 했고, 3세기동안 암흑기를 거

에서 분파한 정량부(正量部 Sammatiya)의 본산(本山)이 사르나트에

쳐서 아프칸의 점령 이후인 13세기부터 다시 사원들이 복원되기 시작했

서 교세가 강했으며, 나중에는 금강승(밀교) 수행이 퍼지기도 했다. 이

지만, 대부분이 힌두사원이었다. 하지만 14세기 말경에 이르면 힌두 사원

렇게 불교가 흥성했던 곳이 12세기 말 경, 터키의 무슬림에 의해서 파

은 또 파괴당한다. 무슬림 지배하에 있었지만, 바라나시는 중세시대 지식

괴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이후 사르나트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

인과 철학자들의 활동무대였다. 박티(Bhakti헌신)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다가 19세기 영국의 군인.고고학자인 알렉산더 커닝엄(Sir Alexander

이곳 바라나시에서 출생했다. 1389년에 탄생한 성자 시인 카비르(Kabir

Cunningham,1814-1893)경이 1871년 고고 조사국 장관이 되어 인도의

1440–1518))는 박티 운동가였으며, 15세기 인도의 신비주의자이자 사회종

유적과 유물을 발굴할 때 발견되었고, 실론 출신 인도불교성지 복원 운

교 개혁가인 그루 라비다스(Ravidas 1450–1520)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동을 펼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 의해서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인도전역에서 많은 학자 설교자들이 바라나시를 찾았고, 힌두교와 이슬 람의 융합 종교인 시크교의 창교(創敎)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도 바라나

바라나시는 기원 전 1200년경부터 형성된 도시이다. 바라나시의 이름

시다. 그루 나낙(Nanak 1469–1539)은 1507년 바라나시의 마하 쉬바라트

은 강의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3천여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여러 개

리(Maha Shivaratri)축제에 참가했다가 영감을 얻어서 펀자브에서 시크

의 이름을 갖게 된 이 도시는 고타마 붓다 시대에는 카시라고 했다.《리

교를 창종(創宗)했다.

그베다》에서도 카시라고 했는데, ‘빛나는 도시’란 뜻을 갖고 있다. 베다시 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가 바라나시이다. 불교경전인《자타카(본생 114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

16세기 무슬림 무갈 왕조의 황제 악바르(Akbar1542–1605)가 바라나 115


시를 방문하고 시바와 비슈누 힌두 사원을 건립하도록 했다. 바라나시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는 많은 계단과 건물들이 지어졌는데, 이것은

는 고대시대부터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성지로 유명하다. 16세기 북인도

갠지스 강에서 힌두 신에게 침례(浸禮)의 정화의식(淨化儀式)을 거행하기

에 수리 왕조를 세운 술탄 세르 샤 황제는 콜카타에서 페샤와르까지 바

위한 가트(Ghat)라는 계단이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을 찾는 많은 관광

라나시를 경유하는 간선도로를 건설, 통치의 효율화를 이룩하기도 했다.

객들은 아침 일찍 인도의 전역에서 몰려 온 힌두교도들의 목욕하는 장

나중에 브리티시 통치 때는 이 도로는 중요한 기간도로로 활용되었다.

면을 보려고 이곳을 찾는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숨이 붙어있지만, 오직

타지마할을 세운 샤 자한의 아들로 52년간 제6대 무갈 황제였던 술탄 아

내생에는 좋은 지위로 태어난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체념한 시

우랑제브(1618-1707)는 1656년 힌두사원과 모스크를 파괴하도록 명령하

신이 있다. 그나마 가난하기 때문에 좋은 장작이 아닌 보통의 나무 장작

는 등, 바라나시는 홍역을 치루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역경 속에서도 바

더미 위에 누워서, 부자의 시신이 오기 전 막간을 이용하여 화장을 기다

라나시는 인도에서 영성(靈性)의 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한 것은 바라나

리는 인간의 마지막 숨결을 보면, 누구나가 ‘인생의 허무함’속에 생과 사

시가 3천 년 간 인도의 성시(聖市)이며 종교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를 생각하면서 선(善)하게 살아야지를 다짐하게 되는 순간을 맛보게 된

힌두 자이나 불교의 성지였기 때문이다. 자이나교의 사원도 바라나시에

다. 3천년의 시공(時空)이 혼재(混在)하는 영감(靈感)의 거리에서는 누구

소재하고 있고,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空衣派) 소속의 나신(裸身) 승려

나 성자가 된다.

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아소카 대왕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Chandragupta Maurya 340 BC–298 BC)는 자이나 교도였

바라나시는 이런 종교적인 도시이면서 교육도시이기도하다. 바라나시 힌두대학은 힌두철학과 문학연구로 유명하며 산스크리트대학 등이 있

다.

고, 티베트 중앙종합대학도 사르나트에 있어서 학구적인 도시이기도 하 아우랑제브가 죽고 나자, 인도의 대부분 지역은 힌두 왕들의 동맹이 되었고, 지금의 바라나시의 모습은 이 기간에 지어진 건축물들이다. 18

다. 인도를 찾는 방문객들은 바라나시의 갠지스강변을 보고서야 비로소 인도를 봤노라고 말하게 된다.

세기 특히 동부 인도의 힌두 왕 부미하르와 서인도의 마라타 황제에 의 해서였다. 본격적인 브리티시 통치는 1775년부터 1947년까지였지만, 브리

인도마니아로 유명했던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

티시 인디아 정부는 허수아비이지만 형식상의 힌두 왕과 무갈 왕을 인정

1910)은 “베나레스는 역사보다도 더 오래되고, 전통보다 더 오래되었고,

해 줬다.

전설보다 더 오래된 그리고 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두 배나 더 오래된 도시다.”라고 찬탄했다. 브리티시 인디아는 1910년 바라나시(영국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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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로 부름)를 인도의 하나의 주로 만들었다. 사법권은 없었지만, 바라나시 주의 본부를 람나가르성(城)에 두고 카시 나레쉬 왕이 살도록 했다. 나레쉬 왕은 시바신의 화신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다. 바라나시는 1948년 인도연방으로 인정되었고, 비부티 나라얀 싱 왕이 죽고 2000년 그의 아들 아난트 나라얀 싱은 명목상이나마 왕으로 등극해서 바라나시 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축제 등의 의무를 이어가고 있다. 사르나트에는 보드 가야와 마찬가지로 인도와 해외에서 세계의 많은 불교도들과 일반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고타마 붓다의 활동과 최초의 설법에 귀 기울인다. 주변에는 스리랑카 태국 일본 티베트 미얀 마 부탄 한국에서 세운 사원들이 자기 나라의 전통과 문화라는 건축의 옷을 입고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관람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녹야 원의 숲에는 사슴까지 기르고 있는데, 옛 역사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눈 요기가 충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타마 붓다의 최초 설법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여주는 사라나트 박물관이 바로 녹야원 앞에 있어서 모든 것 을 유물로서 말해준다. 다음은 고타마 붓다가 최초의 설법과 첫 안거를 마치고 마가다의 수도 였던 라자가하(왕사성)로 갔던 길을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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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상수제자들,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와 영산회상

불의 숭배를 버리고 고타마 붓다 승가로 개종(改宗)했다. 교법(敎法 사성 제 등)을 설하고 머리를 깎도록 했다. 그의 5백 명의 제자들도 차례로 고 타마 붓다에게 귀의하여 고타마 붓다 승가(공동체)의 제자가 되었고, 다 른 두 형제 카사파들도 무리와 함께 귀의했다. 고타마 붓다는 가야(Gaya) 市 근교의 가야시사란 곳에서 카사파 3형 제와 1천명의 비구와 살았는데, 그들에게 일체는 불처럼 타고 있다는 불

고타마 붓다는 녹야원에서 첫 안거(安居)를 보내고, 라자가하(왕사성)

에 비유한 ‘불의 법문’《아디따빠리야야》을 설했다. 고타마 붓다는 이들에

로 가기 전에,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룬 보드 가야의 네란자라 강둑인

게 높은 수준의 법문을 하였고, 이 내용은 불교 심리학인 아비담마의 내

우루벨라란 곳으로 향했다. 라자가하(현재 라지기르)로 향하기 전에 해야

용이었다. 제자들은 모두 지혜가 열렸고 진정한 사문이 되었다. 나중에

할 일이 있었는데, 이 근처에는 우루벨라 카사파라는 불(火)을 숭배하는

일어난 일이지만 고타마 붓다의 사촌이었던 데바닷타가 이곳 가야시사

장발 신선(神仙) 3형제가 약 1천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이곳에서 수행

에서 5백여 명의 비구들을 꾀어서 반기를 들고 승단을 별도로 만들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데, 빔비사라 왕을 축출한 아들 아잣타사투 왕이 데바닷타를 위해서 이 곳에 큰 사원을 지어 준 곳이다. 고타마 붓다는 카사파 3형제를 비롯한

큰 형인 우루벨라 카사파는 500여명의 제자와 우루벨라에, 가운데인

비구들과 함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가다의

나디 카사파는 3백 명과 함께 강가에 그리고 막내인 가야 카사파는 2백

수도 왕사성에서 고타마 붓다가 제자들과 함께 온 다는 소식을 들은 빔

명을 거느린 수행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타마 붓다는 밤에 우루벨라

비사라 왕은 신하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영접을 나왔다.

카사파의 장소를 방문해서 신성한 화로(火爐) 터로 알려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우루벨라 카사파가 그곳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고 경

빔비사라(Bimbisara 558–491BCE)는 마가다의 왕으로 50년간 재위했

고했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는 밤에 법력(法力)을 사용하여 이 독룡을 굴

다. 빔비사라 왕은 고타마 붓다의 보호자였고 친구였다. 그는 동부의 앙

복시켰다. 그러자 우루벨라 카사파는 감탄하면서 그의 음식을 공양했다.

가(Anga) 왕국을 병합했고 라자그리하(Rajagriha)의 새 왕도(王都)를 건

고타마 붓다는 이곳에서 며칠간 더 머물렀다. 그리고 이후에도 몇 가지

설했다. 왕사성은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서 기원전

법력을 더 보여줬다. 그러자 우루벨라 카사파는 드디어 코타마 붓다에게

천 년 전부터 왕도였다. 지금은 라지기르로 부르지만 고대시대에는 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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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하 또는 라자그리하로 불렀다. 빔비사라 왕은 아들 아잣타삿투에게 왕 위를 찬탈당한 바 있다.

고타마 붓다가 왕사성 죽림정사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낼 때, 아버지인 숫도다나(Suddhodana 정반왕) 왕은 아들이 자각(自覺)을 했다는 소문 을 듣고, 10명의 대표단을 파견해서 카필라와수투(Kapilavastu)로 돌아

아잣타사투 왕은 마가다의 수도를 파탈리푸트라(현 파트나)로 천도하

올 것을 요청했다. 9번째까지 보낸 대표단은 부왕의 메시지 전달에 실패

고 영토를 넓히고 불교를 장려했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은 고

하고 모두 승가에 귀의하여 비구가 되었다. 그리고는 수행하여 다들 아

타마 붓다가 성도(成道)하기 전, 왕사성에 처음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었

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열 번째 대표단을 이끌고 간 사람은 고타마 붓다

다. 빔비사라 왕은 고타마 붓다의 설법을 듣고 틈틈이 수행한 결과, 4단

의 어릴 때 친구였던 칼루다이(Kaludayi)인데, 그도 비구가 되어 나중에

계의 깨달음 가운데 첫째 관문인 수다원(Sotapanna)인 예류(預流=入流)

아라한이 되었지만, 부왕의 메시지는 고타마 붓다에게 직접 전달할 수가

의 단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빔비사라 왕은 고타마 붓다에게 불교 최초

있었다. 고타마 붓다는 성도 2년 후인 어느 날, 비구들과 도보로 두 달

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헌증했다.

걸려서 사카족이 사는 자신의 고향인 카필라와수투에 도달했다.

고타마 붓다가 라자가하를 방문할 때 두 명의 위대한 수제자를 만나게

비구들이 걸식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숫도다나 왕은 고타마 붓다에게

되었는데, 최초 5비구 가운데 한 사람인 아싸지(Assaji)의 설득으로 다른

접근해서, “우리집안은 전사(戰士) 계급의 혈통을 갖고 있다. 전사는 홀로

수행단체 소속이었던 사리뿌따(Sariputta사리불)와 목갈라나(목련)를 만

음식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에 붓다는 “걸식하는 것은 아버님

나게 되는데 이들은 고타마 붓다의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된다. 고타마

의 왕실 혈통은 아닙니다만, 붓다 혈통의 관습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붓다는 이들과 함께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에서 3년간 안거를 보내게 된

에 숫도다나 왕은 모든 비구들을 왕궁으로 초청해서 공양을 올리고 법

다. 마하 카사파(대가섭, 보드 가야 3형제 카사파와 다름)또한 이곳에서

문을 들었다. 이후 숫도다나 왕은 예류과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간

만나게 되고, 영취산 독수리 봉 아래서는 함께 3년간 3개월씩 우기동안

에 많은 수의 왕실 사람들이 승가에 들어왔는데, 사촌인 아난다와 아누

하안거를 했고 명상수행을 하면서 염화미소로 고타마 붓다의 심인(心印)

루다는 십대제자에 들 정도로 유명했고, 7세 된 아들 라훌라(Rahula)도

을 마하 카사파에게 전수 했다. 사실성(史實性)을 떠나서 이 전설은 중국

사미가 되어 나중에 십대제자에 올랐으며 이복동생 난다(Nanda)도 비

선종불교(禪宗佛敎)의 상징이 되었다. 이밖에도 대승 권에서는 부처님이

구가 되어 아라한과를 얻었다. 고타마 붓다의 가장 상수 제자들은 사리

이곳 영산회상에서《반야심경》과《법화경》을 설했고,《능엄경》과《금강경》까

뿌따. 목건련. 마하 카사파. 아난다 .아누루다였고, 십대제자에는 우빨리.

지도 설했다고 하지만, 영취산은《법화경》의 무대가 되고 있다.

수부티. 라훌라와 푸나가 포함된다. 고타마 붓다는 왕사성 기사굴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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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봉) 아래의 동굴에서 2,3,4차 안거를 보냈고, 이후에도 8안거를 왕

후에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제3차 경전결집이 이루어졌다.

사성 죽림정사에서 보냈다. 다섯 번째 안거는 베살리(바이샬리)에서 맞이 왕사성은 자이냐 교의 수행자들의 터전이기도 하다. 자이냐 교의 역사

했다.

는 불교 보다 더 오래되었다. 제23대 티르탄카라(최고 정신적 수장의 지 왕사성은 불교역사에서 성지로서의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빔비

위, ‘나루를 건넌 자’)인 파르스바(877–777 BCE)가 실존 인물로 확인된 것

사라 왕이 헌증한 최초의 불교사원이 있고, 중국선종불교의 기원의 상징

에서 자이냐 교의 역사를 짐작할 수가 있다. 고타마 붓다 보다 먼저 태어

성을 갖는 영산회상과 코타마 붓다 열반 후에 마하 카사파의 주도로 최

난 제24대 티르탄카라인 마하비라(Mahavira 599 BCE–527 BCE)는 사

초의 불전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삿따빠니Sattapanni Cave) 등이 있

실상 자이냐 교의 개혁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마하비라는 위대한 영웅

는 고타마 붓다와 상수제자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불교성지다. 고타마 붓

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는 바이샬리에서 태어나서 주로 고타마 붓

다가 열반에 드신지 3 개월 후에 아잣타사투 왕의 후원아래 제1차 불전

다의 영역과 겹치는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러므로 사르나트 라지기르 바

결집회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에서는 주로 고타마 붓다께서 승가 공

이샬리 등지에는 자이냐 교의 성지도 불교성지와 공존하고 있다.

동체의 규율인 율장(律藏)과 교법을 설하신 경장(經藏)이 성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불교에서《법화경》을 소의(所依)로 하는 법화계열의 신생종파인 일 본산 묘법사를 창종한 니찌닷추 후지(藤井 日達1885–1985) 스님에 의해

이 최초의 불전결집총회를 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타마 붓다가 열

서 1947년부터 평화탑 건립운동이 시작된다. 그는 1931년 마하트마 간디

반 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바다(Subhadda)라고 하는 비구가 이

(인도독립운동가 1869–1948)를 만나서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감동하고,

제 계율 같은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상

평생 무저항 주의운동에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결정적인 것은 일본

수 제자인 마하 카사파의 주도로 결집회의가 개최된 것이라고 한다. 수바

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다음, 그는 세계도처에 평화탑을 건립해서 불교정

다 비구는 나이가 들어서 늦게 출가한 고타마 붓다의 열반 직전에 승가

신에 의한 세계평화운동을 실현한다는 목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

에 들어 온 비구였다. 늦게 출가했으면 더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스승의

고, 1947년부터 영취산 정상에서 시작한 평화탑을 마하트마 간디 탄생

부재를 이유로 규율을 해이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에 마하 카사파는 부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에 완성했다. 이후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과 말씀하신 진리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서 현재까지 세계도처에 80개의 평화탑을 건립해서 세계평화운동에 기

필요를 느껴, 결집총회를 개최했고, 이후 100년이 지나서 제2차, 200년

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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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성은 불교 8대 성지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의 불자

것 같다. 부처님 승가가 결성된 후, 2천 6백년이 지난 지금도 남방 상좌

들은 이곳 영취산의 독수리 봉인 영산회상(靈山會上)을 각별하게 생각

부는 부처님 승가 공동체와 유사한 승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볼

하고 이곳을 참배한다. 선종불교에서는 보드 가야와 영취산 독수리 봉

때, 승가공동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증좌일 것이다. 중국 한국 일

을 꼭 보고 싶어 하는 까닭은, 보드 가야는 깨달음의 장소였고, 영취산

본 베트남 대만 등의 한역대승불교(漢譯大乘佛敎) 권은 룸비니, 보드 가

은 염화시중(拈華示衆)으로 부처가 가섭에게 심인(心印)을 이심전심으로

야, 영취산, 날란다, 쿠시나가라와 스라바스티(사위성)를 꼭 참배하고 싶

전한 상징성 때문이다. 일본의 법화계열 종파에서는 부처가 이곳 영취산

어 한다. 티베트 불교 권에서는 보드 가야와 날란다를 선호한다. 달라이

정에서《법화경》을 설했다는 믿음 때문에 다른 불교성지보다도 더 선호한

라마는 한동안 보드 가야의 티베트 사원에서 매년 1월에 특별법회를 개

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영취산은 고타마 붓다가 직접 토

최할 정도로 관심을 집중했고, 보드 가야 대탑의 오체투지(五體投地) 수

굴에서 명상을 했고, 자주 이곳 산정에 와서 머물렀다는 역사적 사실 때

행자들은 거의가 티베트 라마(여승 포함)나 티베트 불교신자들이다.

문에, 선종불교 이전의 중국 동진 시대의 구법승 법현 법사는 그의《불국 기》에서, 이곳 영취산을 방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당나라 현장법사 또한 영취산을 찾았다고《대당서역기》에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한역(漢譯) 권 불자들은 날란다를 특별하게 생각한다. 현장법 사가 이곳에서 16년간 공부한 날란다 대학 유적이 있고, 현장법사 기념 관이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는 날란다 대학에서 후기 대승불교 교

대개 불교성지를 찾는 세계 각 나라의 불자들의 성향을 보면, 그 나라

학과 밀교가 전수 되었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 개혁가 쫑가파(1357–1419)

불교의 전통을 엿볼 수가 있다. 부처님과 관련된 불교성지가 다 성지로서

의 영향으로 깨달음에 치중하는 전통이 확립되어서 보드 가야를 더 선

의 상징성이 있지만, 각 불교전통에 따라서 반응은 조금씩 다르다. 세계

호하는 것 같았다. 한국 불자들은 보드 가야, 영취산, 쿠시나가라, 사위

각 불교의 성지순례에 대한 성향을 보면 보드 가야와 룸비니는 공통적

성과 룸비니인 것 같다. 몽골불교인들은 인도보다는 오히려 티베트 라사

으로 다 참배하고 싶어 하는 성지다. 남방 상좌부 불교인 스리랑카 태국

의 포탈라 궁과 겔륵파 5대 사원을 더 순례하고 싶어 한다.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불자들은 사르나트(녹야원)를 의미 있는 불교성 지로 생각하는 듯 했다.

한국의 선종불교는 중국 숭산 소림사를 위시해서 3조 4조 5조사와 6 조 혜능 대사나 조주 선사의 백림사를, 정토불교 전통에서는 구화산 오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전법포교(傳法布敎)를 의미 있게 보고 있으며,

대산 보타낙가산과 서안 등지의 사원을 가보고 싶어 한다. 작년부터 날

최초의 5 비구에 의해서 승가(僧伽) 공동체가 형성된 데에 대한 관점인

란다 국제대학이 라지기르에 문을 열어서 석.박사과정 20여명이 공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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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전 하버드대 교 수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1933- )박사를 총장으로 초빙, 2020년까지 캠퍼스 모습을 갖춘다는 계획이다. 다음 회는 날란다 대학 유적을 가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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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의 출발지 날란다 불교대학, 당나라 현장법사 유학

320-550 CE) 시대이다. 굽타왕조는 인도 亞 대륙의 북부를 거의 커버하 고 있었다. 날란다의 전성기는 굽타왕조에 이어서 지금의 우타라 프라데시의 하 르샤 왕국(590–647)과 팔라 왕조(Pala Empire 8-12세기CE)시대이다. 날란다 사원 대학의 최전성기는 5세기에서 12세기까지이며 티베트 중 국 한국과 중앙아시아에서 유학승이 올 정도로 유명했으며, 7세기 당 나

날란다(Nalanda)는 마하비하라(Mahavihara大寺)가 있던 지명이다.

라 인도 구법유학승(求法留學僧)인 현장법사에 의하면 학생이 1만 명, 교

날란다는 라지기르(왕사성)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며 파탈리푸트라(현 파

수가 2천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4세기 말 5세기 초, 중국 동진의 인도

트나)에서는 95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날란다는 고대인도 불교사원대

구법승 법현 법사가 왔을 때에도 사원대학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

학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원대학이 세워지기 전에, 고타마 붓다는 이곳

다고 한다. 대승불교 중관파(中觀派)의 대가이며 8종(宗)의 조사(祖師)

망고 숲에서 가끔 유숙한 바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곳은 왕사성에

로 일컫는 나가르주나(龍樹 150–250CE)가 학장을 지냈고, 그의 제자 아

서 바이샬리로 가는 간선도로여서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고 수행자들 또

리야데바(Aryadeva 提婆170~270)가 나가르주나의 학통(學統)을 이어서

한 이 길을 통해 다녔다. 고대시대에는 동부 인도에서 서북 인도로 가는

발전시켰다.

대로(大路)가 이곳을 지나갔으므로 일찍부터 요충지였다. 게다가 이곳에 는 망고 숲이 있고 연못이 있어서 수행자들에게는 쉼터나 다름없는 안

날란다 마하비하라(大寺)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 대왕에 의해서 사

식처이기도 했다. 고타마 붓다의 상수(上首) 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리불 존자의 사당이 있던 자리에 최초로 사원을 세웠지만, 큰 규모

이곳 출신이다. 사리불은 이곳에서 열반했으며 지금도 사리탑이 보존되

로 확장해서 발전시킨 것은 굽타 왕조시대이다. 굽타 왕조는 브라만 왕

어 있을 정도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는 이곳에서 14년간의 우기

조였지만, 대승불교의 대철학자 바수반두의 영향으로 나라싱하굽타

(雨期)를 보낼 정도로 두 종교의 교주(敎主)가 좋아했던 곳이다. 날란다

Narasimhagupta Baladitya 495–?CE) 왕 때 크게 발전시켰다. 바수반

는 연꽃 줄기란 뜻을 갖고 있듯이 이곳에는 연못이 있어서 항상 연꽃이

두(Vasubandhu ; 世親 316-396CE)는 친형인 아상가(Asanga 無著)와

피어 있었다. 이런 역사적 연유로 이곳에 큰 절이 세워졌고, 사원대학이

함께 유식학파(唯識學派)의 창시자들이다. 대승교학(大乘敎學)은 중관파

생겼다. 학문연구 중심지로 체계가 잡힌 것은 굽타 왕조(Gupta Empire

의 나가르주나와 유식학파의 바수반두에서 시작됐다. 중관. 유식은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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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중앙아시아와 중국 티베트에 전해져서 불교철학의 양대 산맥이 형성

파가 세계 불교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바수반두는 지금의 파키스탄

되었고, 현재까지도 불교철학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령인 간다라 지방의 브라만 가문에서 차남으로 태어났고, 맏형은 그와 같이 사상가로 유명한 아상가(Asanga無着 300-390CE)이다. 처음에는

나가르주나의 생애에 대해서는 타림분지인 중국 신장성 쿠차 출신인

유부(有部)에 속하였으며, 카슈미르와 간다라에서 유부를 비롯한 여러

쿠마라지바(Kumarajiva 鳩滅什 334–413 CE)가 중국 장안에서 한역(漢

부파 불교의 학설을 수업하고 이들 학설의 요강서(要綱書)인《구사론俱舍

譯)한《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현장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티베트

論》을 지었다. 나중에 아상가의 감화로 대승으로 전향하여 아상가 및 그

역의 부톤의《인도불교사》등에서다.

의 스승 마이트레야(彌勒 270-350CE)의 저서에 주석을 붙여《유가유식 설瑜伽唯識說》의 완성에 힘썼고,《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저술하였다.

용수는 마하라슈트라의 동부 지역인 비다르바에서 브라만의 아들로

더욱이 그 입장에 서서 반대설을 깨뜨리고《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을, 또

태어났다. 용수는 불교의 초기경전을 연구하여 고타마 붓다의 중도사상

한 유식설 입문서로서《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을 지었다.《유식

인 중관(中觀 Madhyamaka)을 깊게 연구하였다. 고타마 붓다의 중도에

삼십송》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여러 주석서가 나왔고, 후일

대한 근본적인 논문인《중론송Mulamadhyamakakarika)》을 저술, 대승

현장이 호법(護法)의 주석을 중심으로 10대 논사(十大論師)의 여러 주석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을 파악하여 공(空). 연기(緣起). 중도(中道)는 같다

을 합쳐서 번역한《성유식론成唯識論》은 중국 불교의 법상종(法相宗)의

는 이론을 정립했다. 용수의 저작은《대지도론大智度論》, 《中論頌》、《十二

근본경전이 되었다. 바수반두(세친)의 저술은《구사론俱舍論》, 《유식삼십

門論》, 《회쟁론》《십주비바사론十住毗婆沙論》, 《大乘二十頌論》, 《보리자

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

량론菩提資糧論》등이다. 대승불교철학의 중관사상을 정립하는 데는 필

論》, 《대승오온론》, 《대승성업론》, 《삼성론三性論》, 《섭대승론석攝大乘論

독서들이다. 티베트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대승교학 연구의 텍스트

釋》등이다.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에서의 대승교학 연구의

들이다. 용수의 제자인 아리야데바(Aryadeva 提婆 170~270CE)는《백론

텍스트들이다.

(百論)》을 저술하였다. 중관파는 물론 중국의 삼론종 천태종 등은 용수 와 그의 제자를 의거하여 성립된 종파이다.

아상가(無着)는 인도 대승불교의 사상가로서 수행중,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나서《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장엄대승경론莊 嚴大乘經論》을 전하고 강설(講說)했다고 한다. 아상가가는 유가행의 스

대승불교 철학사상사(哲學思想史)의 흐름에서 나가르주나의 중관파와

승이었던 마이트레야 彌勒 270-350CE)에게서 받은 학설로서, 그는 유

바수반두의 유가행(유식학)파는 쌍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도 이 두

식설을 조직·체계화한《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밖에《육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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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순중론석의順中論釋義》,《현양성교론顯揚聖敎

우고 귀국해서 중국 역경사(譯經史)에서 신역(新譯)이라는 한 획을 그어

論頌》,《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金剛般若經論》등을 저술

동아시아 불교에 큰 충격과 불교사상사의 큰 물줄기를 돌린 학승이며 역

하여 유가행파의 대표적 논사(論師)로 꼽혔다.

경사(譯經士)이며 여행가이기도 한 고승이다.

일반 대중들이 소화하기에는 너무 학술적인 소개가 되었지만, 날란다

현장 삼장은 629년 장안을 출발해서 고비사막과 천산남로(天山南路)

사원대학을 소개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다. 대승불교철학의 양대 산

타림분지를 지나 카이버 고개를 넘고 훈자 계곡을 가로질러서 인도에 들

맥인 중관파와 유식학파를 이해하지 않고선(禪) 불교사상사(佛敎思想史)

어가 불적지(佛跡地)를 순례하고 날란다 사원대학에서 논리학(因明學)

의 전개를 이해할 수 없고, 중국 한국 일본의 동아시아 불교의 교학(敎

문법 산스크리트어와 유가행파(Yogacara)의 철학을 학습했다. 특히 당

學)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기에 이런 학술적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을

대 날란다사 주지이며 대학승인 실라바드라(戒賢 529–645CE)로부터 유

수 없다. 또한 당나라 현장법사와 의정법사 그리고 한국(통일신라)의 혜

가행파(瑜伽行派=唯識學派)의 논서(論書)를 집중해서 직접 배웠다. 실

초(慧超 700-787)를 비롯한 현태(玄泰) 혜륜(慧輪 반야발마) 혜업(慧業)

라바드라 논사(論師)는 아상가 바수반두 디그나가(Dignaga 陳那論師

스님 등이 날란다사원대학에서 공부했다. 현태는 티베트를 경유하여 인

480–540CE)와 다르마팔라(Dharmapala 護法 530-561CE)로 계승되는

도에 들어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왔고, 혜륜은 제자 현유와 함께 사자국

유가행파(瑜伽行派)의 대학승이다. 유가행파의 근본 경전은《해심밀경解

(실론)에 까지 가서 종신(終身했다. 의정법사에 의하면 혜업의 산스크리

深密經》이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미륵(彌勒)의《유가사지론瑜伽師

트어(梵本) 저서를 직접 봤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했는데 그는

地論》과 무착(無着의《섭대승론攝大乘論》과 세친(世親)의《유식이십론唯

날란다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날란다에는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티베

識二十論》·《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십지경론十地經論》·《섭대승론석攝

트 등, 인도 이외의 나라에서 많은 외국 유학승들이 와서 공부한 국제대

大乘論釋》이 유가행파의 주요한 소의(所依=기본텍스트) 논서이다. 또한

학의 명성을 갖고 있었다. 중국 한국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친 현장법사를

세친의《유식삼십송》에 대한 문하의 십대 논사의 학설을 호법의 학설을

소개해 보자.

중심으로 하여 현장(602-664)이 번역·편집한《성유식론成唯識論》도 주요 한 텍스트에 포함시킨다.

현장(Xuanzang 602–664)삼장법사(三藏法師)는 중국 당 나라 때 승 려로, 한역(漢譯) 불전(佛典)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직접 인도에 가서 날

인도 불교의 유가행파에 상응하여 중국·한국 또는 일본 불교의 종파로

란다 사원대학에서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삼장(경율론)을 16년간 배

는《십지경론》을 소의 논서로 하는 지론종(地論宗),《섭대승론》을 소의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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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하는 섭론종(攝論宗),《성유식론》을 소의 논서로 하는 법상종(法相

僧傳》에 따르면 대강당이 8개 강의실이 300개인 주 건물만 4만 평 부지

宗:자은종·유식종)이 성립됐다.

위에 있었고, 수백 개의 부속건물과 숙소 등이 있었다고 하며 1만 명의 학생가운데 중국 등지의 학승이 2천 명이었다고 한다. 티베트 소스에 의

현장 삼장은 646년 16년 만에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598-

한 교과과정은 경.율.론 삼장의 기본 골격에, 상좌부인 설일체유부의《아

649CE)황제의 요청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현장삼장은 귀국해서 경전번

비담마비바사론阿毗達磨大毗婆沙論》,경량부(経量部)의《이부종윤론異部

역에 여생을 마쳤는데, 장안 흥복사에 역경원(譯經院)을 설치하고 후에

宗輪論》과 대승철학인 나가르주나의《中論頌》과 무착 세친의《유가행(唯

대자은사(大慈恩寺)로 옮겼고,《대반야경大般若經》번역을 완성하고 입적

識)》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으며, 기타 교양과목 등으로 조직됐다고 한다.

했고, 문하에 규기(窺基632–682CE)와 신라출신 원측(圓測613–696CE) 등 많은 제자를 두었고, 법상종(法相宗)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현장 삼

불교학 연구의 중심지로서의 세계 최고최대(最古最大) 사원대학이었

장은 많은 경전을 옮겼고, 구법순례기인《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겼

던 날란다는 1200년 터키계 무슬림 장군 키질(Bakhtiyar Khilji?-1206)

는데 이 책은 중세 서역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대한 1차 자료로서 중요한

에 의해서 결정타를 맞고 파괴되었으며 도서관의 도서가 불타는데 6개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장삼장의 자서전 격인《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

이나 소요됐다고 한다. 다행하게도 날란다 교과과정과 학통은 중국과 티

恩寺三藏法師傅》을 제자 혜립(慧立)이 664년에 찬했다. 프랑스에서 중

베트 불교로 전수됐다. 8세기 말에 설립된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

국연구가 스타니슬라오 애낭 율리우스(Stanislas Aignan Julien 儒蓮

超戒寺) 대학에서 밀교가 티베트에 집중적으로 전수됐다고 할지라도, 중

1797–1873)가 1857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영역(英譯)은 동양학 학자 사

관.유식은 날란다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무엘 빌(Samuel Beal 1825–1889)이 1884년《대당서역기》를, 1911년에《대 자은사삼장법사전》을 발간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도는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아주 먼 옛날 《베다》시대부터 구루쿨 (Gurukul)이란 기숙사 型 학교가 있었는데 기원 6세기에 탁실라대학은 정치 경제 군사 의약 등으로 매우 유명했다. 당대 왕족의 자제들이 이 탁

날란다에는 또 한명의 유명한 삼장법사가 유학했는데, 그 분은 의정

실라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마가다의 아잣타사투 왕, 코살라의 파세나

(義淨 635–713) 삼장이다. 의정삼장은 25년간 중국과 인도 날란다를 오

디 왕과 아소카 대왕의 할아버지 찬드라 굽타 왕이 탁실라 대학 출신들

가면서 유학했는데, 그는 스리비자야( Srivijaya 650–1377 현재의 인도네

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부처님)는 가정교사를 왕궁에 초빙하여《베다》교

시아 말레이시아)국에서 산스크리트를 배우고 673년에 날란다 사원대학

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날란다 불교사원대학은 탁실라대학에서 영

에서 가서 14년간 유학했다. 의정의《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

향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신(나바) 날란다 대학은 인도 초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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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젠드라 프라삿드 박사(His Excellency, Dr. Rajendra Prasad)가 1951 년 옛 날란다 대학의 명성을 되살려 나바(新) 날란다 대학을 설립하도록 발의해서, 자그디쉬 캬삽(Bhikshu Jagdish Kashyap 1908-1976) 빅슈 가 1955년까지 초대 학장 겸 이사장을 역임했다. 다수의 동남아 중국 등 지에서 온 석.박사 과정학생들이 인도 고대사와 불교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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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살리, 제2차 경전결집회의와 유마거사의 재가불교

던 암바빨리카(Ambapalika)가 고타마 붓다에게 귀의하여 정원을 헌증 하고, 아라한이 된 곳이기도 하다. 바이살리는 히말라야 기슭과 연결된 수행자들의 도시이기도 했다. 중국 동진의 법현법사는 4세기에 당나라 현장법사는 7세기에 이곳을 찾았다고 여행기에 남겼으며, 1861년 브리티 시 인디아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험(Alexander Cunningham)이 바이 살리 유적을 발굴했다.

바이살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직접 관련이 깊은 곳이다. 고타마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향인 카필라와스투(Kapilavastu)를 떠나 출가할

가 다섯 번째 안거(安居)를 이곳에서 보냈으며 생전에 수차례 들려서 설

때, 바이살리에 들려서 당대의 두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푸트라 우드라카

법한 곳이고, 말년에 쿠시나가라로 가기 전, 최후의 설법을 한 곳이다.

(Ramaputra Udraka)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에게서 명상 기

고타마 붓다가 열반하고 100년 후인 기원전 383년에 칼라소카 (King

본기를 익히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홀로 수행에 나선 바 있다. 이

Kalasoka) 왕의 후원으로 제2차 경전결집(經典結集)을 한 곳이기도 하

후 큰 깨달음을 성취하고 이들에게 한 차원 높은 심인(心印)을 전하려고

다. 바이살리는 고타마 붓다 당대에, 16대국 가운데 하나로서 밧지(Vajji)

했으나 이 분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고타마 붓다는 왕사성 죽림정사에

족과 리차비(Licchavi)족 등, 8개의 종족(種族)이 연합하여 세운 공화국

기거하면서 바이살리 왕실 초청으로 자주 방문했고, 비구 승가를 조직해

이었다. 고대인도의 유명한 산스크리트 문법학자인 파니니(4세기BCE)가

서 승단을 형성했다.

언급할 정도로 바이살리는 번영을 구가했던 나라였다. 자이나교의 제24 대 티르탄카라(Tirthankara 정신적 首長)로서 자이나교의 실질적인 창

또한 불교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일은 비구니 승가를 처음 만들었는데,

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마하비라(Mahavira)가 이곳에서 기원전 599년에

그것은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Mahapajapati Gotama)를 위해서

탄생하여 자이나교 사원에서 성장한 도시다. 불교와 자이나교와 깊은 관

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마야왕비인 어머니를 잃고 마야

련이 있고, 아시아의 사자로 알려진 아소카 석주의 사자주두(獅子柱頭)

왕비의 동생이며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고

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타마 붓다의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이 죽고 왕실의 많은 사람들이 승가에

고타마 붓다는 생전에 이 도시를 자주 찾았고, 7천 7백 개의 공원과

귀의한 후, 마하파자파티 고타미는 5백 명의 왕실여인들과 함께 고타마

연꽃 못이 있을 정도로 부와 번영이 넘치는 곳으로 부유한 창부(唱婦)였

붓다 승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처음엔 고타마 붓다는 엄격한 계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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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아난다의 중재로 결국 받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바이살리 비구들의 진보성 못지않게

들였고, 이로써 불교역사상 비구니 승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재가불교 또한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던 것 같다. 이런 사정을 우리는《유 마경》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바이살리에 오면 쿠타가라살라 비하라(Kutagarasala Vihara)에 주로 머무르셨고, 리차비 족들의 전폭적인 존경을 받았다. 고

바이살리는 재가불교운동의 시발지로 보고 있다.《유마힐소설경 維摩

타마 붓다는 쿠시나가라에서 대반열반에 드시기 전, 최후의 설법으로

詰所說經》에 따르면, 유마거사(Vimalakirti 維摩居士)가 문수보살과 아

45년간 설법을 이곳에서 마감하셨다. 고타마 붓다 열반이후에도 승가는

라한에게 대승불교의 공철학(空哲學)인 불이사상(不二思想)을 설하고 있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100년쯤 지나서 제2차 경전결집회의가 이루어졌다.

는 내용이다. 사실성(史實性)을 떠나서,《유마경》은 동아시아 불교 사상사 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마힐(淨名)은 바이살리의 장자(長子)로서 재가

제2차 경전결집회의는 계율문제가 직접적인 이유였다. 십사비법(十事

불자(Upasaka 信男)로서도 수행하여 부사의(不思議)한 해탈(解脫)을 할

非法)사건이다. 계율에 있어서 10가지 불법(不法)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수 있다는 희곡적(戱曲的) 구성(構成)에 의한 대승불전의 초기 경전의 주

원로 보수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비구파와 다소 진보적인 대중부 비

인공이다.《유마경》은 승만부인을 주인공으로 한《승만경》과 함께 재가불자

구파간에 발생한 계율준수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일어난 일로 보수장로

가 주인공이다.

파와 진보 대중부파간의 분열이었다. 바이살리 제2차 경전결집 후, 100년 정도 되어서 파탈리푸트라에서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제3차 경전결집

결론적으로 말하면, 출세간의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의 불자도 수행하

회의가 열렸다. 바이살리가 불교 8대성지로 포함된 것은 고타마 붓다가

면,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유마경》은 인도

실제로 이곳에서 제5차 안거를 보냈고, 생전에 자주 찾았고, 양모로 인

에서 기원후 100년경에 성립된 대승불전의 초기에 속한 경으로 보고 있

하여 비구니 승단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80세 때, 쿠시나가라로 가기

는데, 선종불교(禪宗佛敎)의 텍스트인《벽암록》 第84則(칙) <유마불이維

전 최후의 설법을 했기 때문에 8대 성지로 선정된듯하다.

摩不二>의 선(禅) 공안(公案)으로 까지 등장할 정도로 동아시아에 영향

고타마 붓다 열반 후에도 바이살리는 고타마 붓다의 제자들에 의해서

을 끼쳤다. 이밖에도 바이살리는 아난다의 사리탑이 있다. 고타마 붓다

승가가 발전하고 많은 비구들이 승가에 들어와서 불법이 유통되고 있었

의 외사촌으로 고타마 붓다가 성도 후, 고향인 카필라와스투에 왔을 때,

지만, 이곳이 번화한 대도시이다 보니, 진보파 비구들에 의한 계율상의

승가에 들어와서 고타마 붓다 말년 20년간 사서실장(秘書)을 역임하고

변화를 가져오자, 제2차 경전결집을 통해서 고타마 붓다의 경율(經律)을

붓다 열반 후, 이곳 바이살리로 와서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고타마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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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후, 100년 정도 지나서 이곳 바이살리에서 제2차 경전결집이 열렸

칙령인 비문을 새겨서 널리 유포시켰다.

고, 제3차 경전결집은 파탈리푸트라(현 파트나)에서 아소카 대왕의 후원 으로 개최됐다.

제3차 경전결집은 파탈리푸트라 아소카라마 사원에서 기원전 250년에 개최됐다. 3차 결집의 가장 핵심은 승가의 부패와 가짜승려들 때문이었

고타마 붓다 열반 후에, 파탈리푸트라는 이제 막 시작되는 도시였다.

다. 목갈리뿌따 띠싸(Moggaliputta Tissa 327–247BCE) 대장로(大長老)

왕사성의 아잣타사투 왕이 기원전 490년 경, 갠지스 강 가까이에 조그마

비구와 1천명의 비구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아소카 대왕은 고타마 붓

한 요새를 구축함으로 시작됐다. 이후 파탈리푸트라는 북인도의 중심지

다 열반 후, 218년째 되던 해에 왕위에 올랐는데, 아버지가 했던 종교적

로서 여러 왕조의 수도로 발전됐다. 마가다 왕조(Magadha Empire), 난

숭배를 습관적으로 하다가 한 비구의 설법을 듣고 발심(發心)하여 불교를

다왕조(Nanda Dynasty 345–321 BCE), 마우리아 왕조(Maurya Empire

전적으로 후원하기에 이르렀다. 인도 전역에 8만4천개의 탑과 절을 세우

322–185 BCE), 숭가 왕조(Sunga Empire 187-78 BCE), 굽타왕조(Gupta

고 아들인 마힌다(Mahinda)와 딸인 상가미따(Sanghamitta)를 비구와

Empire 320-550 CE)와 팔라 왕조(Pala Dynasty 750-1174) 등이다.

비구니로 승가에 입문시켰다.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Chandragupta

이렇게 불교에 심취하고 승가에 관여하다보니, 승가에 별 가치 없는 존

Maurya 340–298 BC)가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왕조이다. 알렉산

재와 다른 견해(邪見)를 지닌 자들이 많이 스며들었다는 것을 파악했는

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의 그리스군대가 서북인도에

데, 이들은 아소카 대왕의 전폭적인 승가후원에 편승한 자들이었다. 이

서 철수함으로써, 기원전 316년 서북인도를 통일시켰다. 빈두사라 마우리

들은 아소카 대왕이 음식과 옷과 약과 쉼터를 제공하자, 신심도 없으면

아(Bindusara Maurya 320–272 BC)는 인도 남부 지역을 확보했고, 아소

서 모여든 것이다. 이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전연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견

카 대왕(Asoka the Great 304–232 BCE)대에 이르러서 동부와 북부 힌

해를 가진 자들이 승가에 들어와 있음을 알고도 처음에는 묵인했다. 하

두쿠시 산맥까지 영토를 넓혔다. 아소카 대왕은 칼링가(현 오리사 주)를

지만 전연 자격을 갖추지 않은 자들이 넘쳐나자 일부 정통파 비구들이

점령하면서 대량학살에 대한 참회로 불교에 귀의하고 승가를 적극 후원

매월 보름과 그믐에 행하는 포살(布薩 우포사타Uposatha) 법회를 이들

했다. 인도 亞 대륙의 남단과 실론을 그대로 둔 채, 전쟁을 포기하고 비

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소카라마 사원에 불참하는 사태가 발생

폭력(Ahimsa아힝사 非暴力) 정신을 수용하여, 사냥과 격렬한 스포츠 운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소카 대왕이 장관에게 명령하여 포살법회에 참

동 등을 금지하고 인도 전역에 아소카 석주나 마애(磨崖)와 바위(岩)에

가하도록 독려토록 했으나, 일부 정통파 비구들은 참가를 거부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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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장관은 그 사원에 가서 칼을 빼들고 협박하였으나 정통파 비구들이

불법의 전도인데, 삼장을 잘 암송하는 비구들을 9개 지역으로 보내서 불

거부하자 앞줄에 있는 몇 명의 정통파 비구들의 목을 차례로 베기 시작

법을 전파한 사실이다.

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는 아소카 대왕의 친형제인 티싸 쿠마라(Tissa kumara)비구가 있어서 마주 치자 차마 베지를 못하고, 대왕에게 달려와

아소카 대왕의 불법전도(佛法傳道) 프로젝트가 가장 성공한 지역은 실

서 보고하자, 아소카 대왕은 시키지도 않은 살생을 저지른 장관의 행위

론(스리랑카), 카슈미르와 간다라였다. 아소카 대왕은 이집트와 그리스

를 슬퍼하면서 목갈리뿌따 띠싸라고 하는 당대의 고승을 초빙하여 자문

까지도 전도단(傳道團)을 파견했는데, 요나(Yona 이오니아) 출신 다르마

을 구했다. 목갈리뿌따 띠싸 비구는 가짜들을 승가에서 추방하고 경전결

락씨타(Dharmarakiita) 비구를 그리스에 파견했다. 특히 그리스의 경우,

집을 개최해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음을 건의했

이 시대에 헬레니즘과 불교의 접촉으로 혼합주의가 태동했다는 사실이

다.

다. 알렉산드리아와 그리스도교 전(前) 시대 이집트에 있던 유다인 고행 수도자 단체인 테라페우테(therapeutae)에 불교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

제3차 경전결집은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가 의장이 되어서 회의를 주재했는데, 무려 6만 명의 정통 비(非)정통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아소

이다. 최근 학설에 의하면 ‘테라페우테(therapeutae)’는 불교 정통파 상좌 부 테라와다(Theravada)의 변형으로 보는 연구이다.

카 대왕도 친히 참석해서 참관하면서 시험을 직접 주관해서 옥석을 가렸 다고 한다. 즉각 정통 비정통 비구들을 가려내고 사이비는 추방하는 결

알렉산드리아에서 포톨레마이오스(Ptolemaic period)시대부터 법륜

단을 내려서 승가의 정화를 금방 단행하고, 경율(經律) 암송 시험을 거쳐

(法輪)으로 장식된 불교 승려들의 묘비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벨기에 출

서 1천 명의 정통 비구를 선발해서 9개월간 결집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신으로 선학자(禪學者)인 로버트 린센(Robert Linssen 1911–2004)의 책,

경율을 어느 정도 암송하는 비구들이라고 할지라도 세밀하게 들어가면

《살아있는 선 Living Zen》(Linssen, Robert. 1988. Grove Press. New

잘못된 견해를 가진 비구들이 있어서 이를 바로 잡아 편집한 책이《카타

York, NY)에 소개되고 있다. 기원후 2세기 기독교 신학자인 티투스 플

와뚜(Kathavatthu 論事》이다. 23장으로 구성된 상좌부 아비담마(論藏)

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150-215CE)는 박트리아 불교

의 칠서(七書) 가운데 다섯 번째 책이다.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는 아소

도(슈라마나Sramanas 사문)와 인도의 나체고행주의자가 그리스사상에

카 대왕에게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위하자와다(Vibhajjavada 分別說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했다. 인도 북부 펀자브에 존재했던 그리스 식민국

部)라고 말했는데, 인도와 실론의 초기 불교 상좌부 정통파 비구들은 자

인 인도-그리스왕국(박트리아)의 메난드로스 1세(Menander I 재위 165-

신들을 분별설부라고 불렀다. 이 3차 경전결집의 가장 큰 성과는 정통

130BCE) 왕은 그레코-불교도 왕이었고, 불교철학에 대한 나가세나 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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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의 문답을 내용으로 한《밀린다팡하(Milinda Panha》가 있는데, 한역

전어(經典語)가 프라크리트어(Prakrit 빨리어 等 諸語)와 산스크리트어

으로《밀린다왕문경(Milinda王問經)》또는《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Sanskrit 梵語)로 구분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인도 중앙아시아 중

이라 했고,《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국(漢譯)에서는 산스크리트어가 경전어가 됐고, 실론 및 동남아시아는 프

들은 실론의 역사서인《마하왕서Mahavamsa》에 기술되어 있다.

라크리트어의 하나인 빨리어가 경전어가 됐다.

이처럼 제3차 경전결집회의는 불교역사와 경전확립에 중대한 획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바이살리는 고타마 붓다와 직접 관련이 있

을 긋는다. 이후 4차 경전결집은 두 곳에서 열리게 됐는데, 실론에서

고, 아난다의 사리탑이 있으며 제2차 경전결집이 이루어진 곳이고 파탈

는 와따가마니 왕(King Vattagamani 재위103-77 BCE)때 탐바빠니

리푸트라는 아소카 대왕이 불교로 개종, 아소카라마란 사원을 세워 6

(Tambapanni) 사원과 인도 북부의 쿠샨제국에서이다. 실론에서는 빨리

만 명의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제3차 경전결집을 후원하고 그리스

어 삼장을 실론의 문자로 편집하였고 이후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8개

를 포함한 9개 지역에 전도사를 파견, 불교를 확장한 곳이다. 인도 불교

의 상좌부 국가에서는 자기 나라 말과 문자로 번역했으며 영국에서도 19

성지 순례자들은 대개 바라나시(사르나트)-보드가야-왕사성(영취산)-날

세기 실론 본(本)에서 전부 영역하였다. 5차(1871)와 6차(1954년) 경전결집

란다-파트나(파탈리푸트라)-바이살리-쿠시나가라-사위성-카빌라와스

이 버마(미얀마)에서 개최되었으며, 상좌부 국가에서는 대체로 이를 표준

투-룸비니(네팔) 순으로 또는 쿠시나가라-룸비니-카필라와스투-사위

삼장으로 인정하고 있다. 쿠샨제국에서 열린 또 다른 4차 경전결집은 상

성-산카사 순으로 코스를 잡는다.

좌부에서 분파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산스크리트어로 결집되었 으며, 이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번역되었다. 쿠샨제국은 본래 중국 서부 타림분지에 있던 월지족으로 기원전 135 년경 인도-그리스왕국 박트리아를 점령하여 세운 나라로서 4차 경전결 집은 인도 쿠샨 왕조의 제3대 왕인 카니슈카 대왕(Kanishka the Great 재위127–151CE)이다. 4차 결집에서 가장 큰 성과는《마하 비바샤MahaVibhasha 大毗婆沙論》라고 하는 불교철학의 대논서(大論書)이다. 불 교 삼장에 대한 연구의 방향이 남.북방으로 확연하게 갈리게 된 것은 경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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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25안거를 보낸 슈라바스티, 《금강경》의 무대

산스크리트어는 인도문화계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였다. 고 대인도 아리안어의 표준 통용어였다. 상좌부에서 분파했던 설일체유부 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결집(기원후 2세기)되었고, 이후 대승경전은 불교혼성산스크리트어(Buddhist Hybrid Sanskrit)로 결집했는데, 대표 적인 경이《프라즈나파라미타》이다. 한역으로《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 蜜多經)》이다. 원래 이름은《바즈라체티카 프라즈나파라미타 수트라》인 데, 한역은《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다. 줄여서 《금강경》

사위성(舍衛城)은 고타마 붓다가 25안거(安居)를 보낸 곳이고, 가장 많

또는 《금강반야경》이라고도 부른다. 사실성(史實性)을 떠나서, 대승 권

은 경전을 설한 곳이기도 하다. 사위성은 한역(漢譯) 이름이고 산스크리

에서는 《금강경》은 대승불교철학의 핵심인 공사상이 깊이 있게 다루어

트어로는 슈라와스티, 빨리어로는 사왓띠(Savatthi)라고 한다. 불교용어

진 대승불교의 대표경전인데, 고타마 붓다에 의해서 이곳 사위성에서 설

는 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대개 상좌부(上座

해졌다고 믿는다. 402년 중국의 쿠마라지바(鳩滅什)에 의해 한역되었고,

部)인 테라와다(Theravada) 삼장(Pali Canon:Tipitaka 경률론)은 경전

조계종 등 선종 계통의 종단은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어(經典語)가 빨리어(Pali)이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인 사르바스티와 다(Sarvastivada)는 산스크리트(Sanskrit)어이다. 빨리어는 인도유럽어

이곳을 상좌부에서는 사왓띠라고 부르며, 인도나 중국 티베트 권에서

계의 중부인도 아리안 언어로 프라크리트어(Prakrit:중부인도 諸語)가운

는 슈라와스티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인도의 불교관련 지명이나 인명 등,

데 하나이다. 부처가 실제 사용한 언어가 어떤 프라크리트어인지는 확실

모든 불교용어는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혼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치 않지만, 빨리어에 가까운 말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처의 가

불교에 문외한인 분들에게는 다소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뜻은 같다.

르침이 빨리어로 결집(結集)되었기 때문에, 부처의 사용언어로 보는 것이

바이샬리(바이살리)도 빨리어로는 베살리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 당시에

다. 빨리어는 문자가 없었던 구어(口語)였는데, 실론에서 제4차 경전결집

도 슈라와스티와 사왓띠가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슈라와스

때(기원전 1세기), 싱할라어(실론)문자로 표기(表記)되고 번역되어 삼장(三

티는 고타마 붓다와는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슈라와스티는 고타마

藏 Tipitaka)이 성립됐다. 산스크리트어는 1차로 힌두교의 예배언어이지

붓다 시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라로서 마가다와 함께 쌍벽을 이룬

만, 동시에 힌두교 불교와 자이나교의 철학(종교)언어이다.

코살라 국의 수도였다. 당시 왕은 파세나디(Pasenadi)로서 고타마 붓다 를 적극 후원한 재가제자였다. 5세기 상좌부 대주석가요 학승으로《위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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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마가Visuddhimagga 淸淨道論》의 저자인 붓다고사(覺音)는 말하길,

슈라바스티는 남 · 북방을 가리지 않고 많은 불자들이 찾는 불교 8대

슈라바스티는 5만 7천 세대가 사는 이름다운 도시였다고 묘사했고, 대승

성지가운데 매우 인기 있는 불적지다. 남방불교도들에게는 고타마 붓다

반야 중관사상의 대가인 나가르주나는, 슈라바스티는 90만이 사는 당대

가 25안거를 이곳에서 보냈고, 877경을 설했기 때문에 부처의 숨결을 느

6대 도시가운데 하나였고, 코살라 국은 8만4천개의 마을에 총 2백 만 명

낄 수가 있어서다. 북방 불교도들에게는《금강경》의 무대가 되고 있기 때

의 나라로서 마가다의 라자그리하나 밧지 족과 리차비 족의 연맹국인 바

문이다. 4세기 동진의 인도구법승 법현법사와 7세기 당 현장법사도 이곳

이살리 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고 하며, 고타마 붓다는 이곳 슈라바스티

사위성을 순례하고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에서 25안거를 보냈는데, 젯따와나(Jetavana 기원정사)의 물라간다쿠티

슈라바스티는 고타마 붓다가 살인마 앙굴리말라(Daku Angulimala)를

에서 19안거를 보냈고, 슈라바스티 근교 푸바라마(Pubbarama)의 미가

교화시켜 승가에 귀의하게 하여 아라한과를 얻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라마투파사다에서 6안거를 보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지고 있다.《테라가타 長老偈経》와 《마지마 니까야》의《앙굴리말라경》의 내 용을 보면, 앙굴리말라는 살인마로서 자기가 죽인자의 손가락으로 목걸

고타마 붓다가 슈라바스티에 처음 오게 된 것은 왕사성에서 슈라바스

이를 할 정도로 잔인한 자였고, 고타마 붓다까지도 해치려고 했지만, 고

티에서 온 부상(富商)인 아나타핀다카(Anathapindika 給孤獨)의 초청

타마 붓다의 법력에 감화되어 참회하고 승가에 들어와서 아라한의 지위

에 의해서다. 고독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분이란 의미로 이런 이름을 갖

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고타마 붓다 당시에 이곳에는 세 개의 승원이 있

게 되었는데, 수닷따Sudatta須達多)長子라고도 한다. 수닷따 장자는 젯

었는데, 고타마 붓다는 오전과 오후 두 곳의 승원을 번갈아 가면서 다니

따(Jeta) 왕자의 공원을 거금을 주고 매입하여 고타마 붓다께 젯따와나

셨고, 또 한곳은 비구니 승원이었다고 하며, 고타마 싯다르타의 부인이었

(기원정사)를 건립하여 헌증한 사원이다. 서구의 한 불교학자의 연구에

던 야소다라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정도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의하면, 네 니까야(Nikayas 漢譯 四阿含)의 경장(經藏) 871경 가운데, 기

슈라바스티는 8대 성지로서 세계의 많은 불자들이 순례하는 곳이다.

원정사에서 844경을 설하였고, 푸바라마에서 23경을 그리고 슈라바스

고타마 붓다는 이곳 슈라바스티에서 25안거를 보냈기 때문에 붓다의 체

티 교외에서 4경을 설했다고 한다.《디가 니까야(長部 Digha Nikaya, 漢

취가 남아있다는 믿음으로 여러 나라의 사원들이 건립되어 있다. 특히

譯 長阿含經》에 6경,《마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aya,中阿含經)》

티베트 중국 한국 베트남 대만의 불자들은《금강경》의 무대가 슈라바스

에 75경,《상윳다 니까야(相應部 Samyutta Nikaya,잡아함경(雜阿含經)》

티이기 때문에 이곳을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 고타마 붓다의 전생이야

에 736경,《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Anguttara Nikaya.增一阿含经》에

기를 모아 놓은《자타카(본생담)》내용에도 젯따와나(기원정사)가 많이 등

54경을 설했다고 구체적인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장하는 것은 고타마 붓다가 성도(成道) 후, 45년간의 생애에서 25안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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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슈라바스티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만큼 붓다와의 관련된 스토리가

판디타 마다바윗타 위제소마라는 비구가 와서 천일기도를 봉행하고, 불

많은 것이다. 또한 슈라바스티는 고타마 붓다의 고향인 카필라와스투가

교학교(Wijesoma Widyalaya)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은 네팔 령이지만, 룸비니나 카필라와스 투는 항상 인도권내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팔 지역에 속하기 때문 에 다음에 룸비니와 카필라와스투를 묶어서 소개하겠다.

산카사가 불교도들에게 어필되는 것은 고타마 붓다가 도리천에서 마 야부인인 어머니에게 아비담마(論藏 Abhidhamma Pitaka)를 설하고 지 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비담마란 불교경전인 삼장가운데 불교철학

불교 8대 성지에 포함되는 산카사(Sankassa)는 인도 고대시대, 특히

심리학 분야를 다룬 이론을 총 집약해 놓은 경전인데, 남방 상좌부 전통

고타마 붓다가 생존했던 시대에는 큰 타운은 아니었지만, 고타마 붓다가

에서는《법집론 法集論 》《분별론 分別論》《계론界論》《인시설론 人施設論

열반에 든 후, 아소카 대왕에 의해서 발전된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조

Puggalapannatti》《논사 論事》《쌍론 雙論Yamaka》《발취론 發趣論》등

그마한 타운이지만, 이곳에는 산카사 스투파(塔)와 아소카 석주가 있는

이른바 아비담마 7서(書)라고 해서 상좌부 비구들에게는 필독서이다.

데, 산카사 스투파는 고타마 붓다가 3개월간 도리천(하늘나라)에 계시는

북방으로 전해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장論藏은《품류론 品類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서 설법하여 아라한이 되게 했다는 전설을 갖고

論》《법온 法蘊》《시설론 施設論》《집이문론 集異門論》《계신론 界身論》《장

있다. 이런 전설이 있었기에 아소카 대왕도 이곳을 순례하고 이를 기념하

신론 識身論》《발지론 發智論》《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등이다.

기 위해서 이 타운을 발전시키고 이곳에 석주를 세웠다. 그리고 승원을 건립해서 많은 비구들이 이곳에서 수행하도록 했는데, 지금은 고타마 붓

이런 고차원의 불교철학 심리학을 하늘세계인 도리천이란 곳에서 돌아

다의 석가 족으로 알려진 후예들이 주로 이 지역에 집단으로 살고 있음

가신 어머니를 위해서 설했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기적적인 내용에 관심

도 특이한 일이다.

이 큰 것이다. 사실성(史實性) 여부를 떠나서, 이 내용은 불교의 우주론

특히 이곳의 아소카 석주의 주두(柱頭)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사자주

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매우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불교의 우

두 대신 코끼리 주두를 세웠는데,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순례

주론에 의하면, 도리천은 6욕천(六欲天) 가운데 두 번째 하늘(天)로, 수

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산카사는 오랫동안 파묻혀 있다가 1842년

미산(須彌山)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미산 정상에는 동서남북 4방

영국의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험(Alexander Cunningham)이 발견했

에 천인(天人)들이 사는 각각 8개씩의 천성(天城)이 있고, 중앙에는 제석

고, 한참 후에 실론출신의 인도성지복원 운동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천(帝釋天 Indra, 인드라)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어 33천이라고 한

(Anagarika Dharmapala)가 이곳을 방문한 후에, 1957년 실론 출신의

다. 도리천에 사는 천인들의 수명은 1,000세이고, 도리천의 하루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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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100년이라고 한다.

승을 왕사로 삼아서 정신적 의지자로 삼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재벌급인 거부 장자들도 이름난 철학가들인 이런 스승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

남방불교의 전설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죽은

다. 고타마 붓다가 대도(大道)를 이루고 당대 그 나름대로 이름 있는 철

뒤, 다시 태어난 곳이 바로 도리천이다. 고타마 붓다는 완전한 깨달음을

학가들과 쟁론(爭論)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타마 붓다는 이들의 사견

증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우기(雨期)에 도리천으로 올라가서 어

(邪見)을 격파하고 휘하로 받아들였다. 당대 고행수행자들은 서로를 보

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석 달 동안 설법하였고 또한 이 기간 동안 잠시

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정신적 경지의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었기에 결

지상에 내려와서는 10대 제자 중, 지혜 제일인 사리불에게 그 설법의 요

판은 쉽게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자이나교의 마하비라 같은 경우

약 을 설법했다고 하며, 이처럼 우기의 석 달이 지난 후, 고타마 붓다는

에는 고타마 붓다와 쌍벽을 이루는 지혜의 강자였는데, 자이나교는 이미

산카사(Sankassa)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는 전설 같은 내용이다.

어느 정도 체제가 이미 잡혀 있는 수행단체였다. 마하비라는 자이나교의

이야기가 조금 무겁게 소개되었는데, 불교란 종교가 출발할 때부터

중흥조(中興祖)였다.

교주인 고타마 붓다는 인간심리와 철학적인 고차원적인 형이상학을 담 론 형식으로 설파했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 이전에 이미 인도는 다양

고타마 붓다는 스스로 고타마 붓다 승가(수행공동체)를 창시했던 분이

한 사상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을 62견(見)이라고 했는데, 군소 이

다. 인도 철학사상에서 힌두 주류는 브라만교인 힌두교를 정통(아스티카

론가들이 일종의 수행단체인 제각기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추종자들을

astika)으로 불교와 자이나교를 비(非) 정통(나스티카 nastika 異端)으로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이런 군

정의하는데, 서양철학에서 정통(orthodox)과 이단(heterodox)을 구분했

소 철학가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자연적인 조건인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

던 것과 같다. 힌두 정통 6파 철학이 아닌 자이나교는 불교와 함께 공존

진 기슭이고 갠지스 평원이 풍요를 주는 이상향이었다. 세속적 부귀보다

했던 비정통 인도철학 종교였다. 불교는 인도 밖으로 퍼져 나갔지만, 자

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어떤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세계에 몰입

이나교는 아직도 인도 안에서 생존하고 있는 종교로서 존재하고 있다.

하여 전지(全知)의 지혜를 얻는 것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 수행자들

힌두-자이나교-불교를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인도철학사상의 근저를 파

이 무소유의 삶의 방식을 택해서 살아가기가 좋은 지역이었다. 주위에는

악할 수 있으나, 이제 불교 철학이나 사상은 인도를 떠나고 그 유적만 남

16대국의 큰 도시들이 있어서 탁발을 하기가 용이했고, 숲과 강을 갖춘

아있는 것이다. 불교사상이나 철학은 인도 밖으로 나갔지만, 그 토양과

자연공원이 있어서 이들에게는 너무나 적합한 수행공간이었다. 또한 당

유적은 인도에 남아있다. 그 유적이 불교성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대 군왕들은 이런 고행수도자들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지혜를 갖춘 스

가 불교성지를 순례하는 것은 어떤 정신적 영감을 얻으면서 불교신앙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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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이다. 특히 교주인 고타마 붓다의 숨결이 스며있다고 사실적(史實的)으로 확인된 불적지(佛跡地)를 고타마 붓다와 직접 관련된 불교성지로 인증하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와 직접 관련된 중 요한 곳을 4대 성지라고 하고 4곳의 부가성지를 포함하여 8대성지라고 하여 불교도들은 순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네팔에 소재하는 룸비니는 탄생 장소이고, 카필라와스투는 29세까지 성장한 고향이었다. 물론 이 두 곳도 고타마 싯다르타와 직접 관련된 곳으로서 의미 있는 성지이긴 하 다. 보드 가야도 깨달음을 이룬 장소이고 쿠시나가르는 열반한 곳으로서 의미 부여가 되겠지만, 왕사성(라자가하)과 사위성(슈라바스티)은 고타마 붓다로서는 담론을 설파했던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운영되었던 곳이다. 슈라바스티는 고타마 붓다가 25안거를 보낼 만큼 오랫동안 머무르신 곳이기에 그리고 많은 경을 설했던 곳이기에 8대 성지의 하나이지만, 의 미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하겠다. 더욱이 동아시아 불교권인 중 국 일본 한국의 불교에서 비중 있게 생각하는《금강경》의 무대가 되고 있 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더욱 가슴에 다가오는 불교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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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무여열반에 든 쿠시나가르

의 죽음은 단순한 육신의 소멸로서의 없어짐이 아니고 무여열반의 성취 로서 상주불멸(常住不滅)의 보편(普遍)의 존재로 승화되었다. 여기서 불교 는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사상의 종교가 되었고, 부처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법신불(法身佛) 사상으로 발전되어서 인도 밖의 세계종교로 전파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인간으로서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향하던 중, 뜻하지

고타마 붓다가 45년간의 설법을 끝내고 고향인 카필라와스투로 가던

않게 육신의 기력이 다하여 말라 족의 수도였던 이곳 쿠시나가르에서 영

중, 이곳 쿠시나가르 사라쌍수(雙樹) 아래서 빠리니르바나(Parinirvana

원히 잠이 들었던 것이다. 바이살리에서 한 설법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

般涅槃반열반)에 드셨다. 고타마 붓다가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은 유여

만, 마지막 설법이 되었고 고타마 붓다는 세수 80세 법랍 51세 설법 45년

열반(有餘涅槃)이고 죽음으로써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었다고 한다.

의 생애를 이렇게 마감한 것이다.

그러므로 쿠시나가르에서 돌아가신 것을 반열반(무여열반)이라고 표현했 다. 고타마 붓다는 숨을 거두는 순간, 삼사라, 카르마(Karma 業)와 환생

현재의 쿠시나가르는 우타르 프라데시 주의 동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

(還生)에서 자유로움은 물론 온(蘊khandhas)의 해체를 통해서 영원한

충지로서 룸비니가 그리 멀지 않는 네팔 국경 가까이에 있는 고락푸르

해탈을 이뤘다는 의미이다. 불교철학에서 이 온(蘊)의 이론은 매우 중요

(Gorakhpur)시에서 5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붓다 시대에 쿠시나가

하다. 인간이란 이 온(蘊)의 가합(假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

르는 말라 족들의 수도였는데, 라자가하(왕사성)와 카필라와스투의 중간 지점이었다.《앙굿따라 니까야 增支部》에 의하면, 쿠시나가르는 고타마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五)이란 말 이 있는데, 판차 스칸

붓다 시대, 인도의 16대국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

다인 오온(五蘊)은 인간 몸체와 정신의 구성요소인 색수상행식(色受想

가 반열반에 든 지점은 조그마한 타운이 있는 정글 지역이어서, 아난다

行識)을 말한다. 오온이 개공(皆空)이란 뜻은 결국은 인간=공이라는 등

는 고타마 붓다께, 왜 이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느냐고 아쉬워했지만, 후

식이 성립한다. 공(空)=중도(中道)=무아(無我)=연기(緣起)는 한 뿌리에서

세에 고타마 붓다께서는 세 가지 이유로 이곳에서 열반에 들게 되었다고

출발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대승불교의 중관(中觀).유식(唯識)사상도 여

해석한다.

기에 뿌리를 두고 발전된 사상의 발전적 흐름이다. 그러므로 고타마 붓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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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붓다가 이곳에서 열반에 든 세 가지 이유로서 첫째는《마하 수

을 건립했다고 한다.

다싸나 수타 Maha Sudassana Sutta》경을 설하기에 적당한 곳이고, 둘 째는 마지막 제자인 수바다(Subhadda)가 와서 법문을 듣고 비구가 될

중국 당나라 현장법사가 7세기 이곳을 순례했을 때, 고타마 붓다가 최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바라문 도하(Doha)가 이곳에

후를 맞이하고 장례식을 봉행했던 곳에 고타마 붓다 사리탑 사원을 목

와서 사리분배에 대한 교통정리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들

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한다. 고타마 붓다의 열반을 묘사한 남방 빨리어 경전은《마하빠리닙 빠나 수따 Mahaparinibbana Sutta 大般涅槃经》이고, 대승불전 漢譯 에서는《마하빠리니르바나 수투라 大般涅槃經》이다.

고타마 붓다의 사리는 탑을 세워 봉안하게 되었고, 사리신앙으로 발전 하게 되었다. 고타마 붓다의 몸을 화장 한 후에, 진주나 수정 구슬처럼

고타마 붓다는 쿠시나가르에서 최후의 숨을 거두기 전, 생전에 이곳

생긴 결정체가 많이 남게 되었다고 하며, 쿠시나가르의 말라 족은 붓다

말라 국의 수도인 쿠시나가르에 들른 적이 있었다. 고타마 붓다는 쿠시나

의 구슬 사리보다는 타고남은 재(灰)를 차지했고, 마가다의 아잣타사투

가르를 배경으로 두 개의 《쿠시나라 수타》경을 설했고,《킨티 수타(Kinti

왕을 비롯해서 코살라 국과 바이살리의 밧지 족들이 구슬사리를 이운

Sutta)》경을 또 설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 생전에 이 지역 사람

(移運)해 가서 사리탑을 세웠는데, 사리분배를 두고 전쟁까지 날 뻔 했으

들은 성격이 강렬하고 거칠어서 쉽게 교화되지 않았지만, 고타마 붓다에

나 바라문 도하(Doha)의 중재로 팔분(八分)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소카

게는 음식을 공양하고 존경의 예를 표했다고 한다. 고타마 붓다 열반 후

대왕은 인도를 통일하고 고타마 붓다의 사리를 전부 수거하여 8만 4천개

에 말라 족들은 고타마 붓다가 화장된 다음 구슬사리보다는 재와 흙이

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하며, 현재까지 가장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고타마

섞인 유해의 잔재를 전해 받아 이곳에 봉안하고 탑을 세웠으며 모두들

붓다의 송곳니가 스리랑카 캔디 왕궁사원에 봉안되어 있다.

불교로 개종해서 승원과 비구들이 오랜 세기동안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을 전승했다고 한다.

고타마 붓다의 사리는 불상(佛像)이 출현하기 전, 사리탑에 봉안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기능해 왔었고, 지금도 고타마 붓다의 분신(分身)이라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들자 사방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고타마

는 신앙적인 의미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타마 붓다에 대한 어

붓다는 화장(火葬)되었고, 고타마 붓다의 사리(舍利)는 팔왕분골(八王分

떤 형상으로서의 숭배는 기원 1세기 간다라에서 부터다. 신인동형(神人

骨)이라고 해서 여덟 명의 왕들이 나누어 봉안했다고 한다. 말라 국의 말

同形)의 불상이 출현하기 전에는 고타마 붓다의 족적(足跡)이 먼저 등장

라 족도 8분의 1양을 분양받았는데, 후에 이곳에 승원을 세우고 사리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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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붓다의 족적 시기를 지나서 바로 불상이 등장했는데, 서북인

이 혼합주의는 조각예술만이 아닌 사상의 혼합까지도 있었다고 보는데,

도의 간다라Gandhara) 와 북부 인도의 마투라(Mathura)지역이었다. 고

대승불교의 출현은 그레코-불교의 혼합주의가 다소 영향을 미쳤다는 서

타마 붓다의 아이콘(像) 신앙은 사리탑-족적-불상 순으로 발전되었는

구 불교학자들의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전개는 하지

데, 고타마 붓다에 대한 존경과 숭배는 고타마 붓다의 말씀인 경전이었

않겠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연구라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다. 빨리어 경전은 암송(暗誦)에 의해서 구송(口誦)으로 전승(傳承)되고

필자는 ‘그레코불교와 실크로드(계간 「시와 세계」)‘라는 논문을 통해서 이

있었다. 특히 전승의 주역은 출가 공동체의 멤버들인 비구들이었는데, 붓

문제를 집중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다와차나(Buddhavacana)라고 하는 ‘붓다의 말씀’에 집중했다. 고타마 붓 다가 쿠시나가르에서 최후를 맞는 순간, 아난다가 이제 제자들은 누구에

쿠시나가르는 수 백 년 동안 역사에서 묻혔다가 동인도 회사의 한

게 의지해야 하느냐고 묻자, 자신의 담론(談論)인 ‘법(法Dhamma)’에 의

간부였던 부차난(E. Buchanan)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1854년 윌슨

지하고 스스로 등불이 되도록 유계(遺誡)를 내린바 있어서, 승가에서는

(H.H.Wilson)의 측량조사로 확인되었고, 1861-1862년 브리티시 인디

전통적으로 어떤 형상에 대한 숭배사상보다는 ‘붓다의 말씀’에 비중을 두

아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험의 확인 작업을 거쳐서 1904-1906년 보겔

어 온 것이다.

(J.Ph.Vogel)의 영도 하에 발굴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현재는 불교 4대 성지로서 세계불교도들의 필수 코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 불교도들에게는 사리탑이나 족적은 경전보다도 더 현실 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했다고 봐야 하겠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인간에게 태어남과 죽음은 가장 큰 일이다. 물론 코타마 붓다에게는

점령으로 그리스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생사를 초월한 어떤 깨달음이 더 중요한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출가

알렉산더 대왕의 북인도 공격으로 그레코-박트리아와 인도-그리스 왕

제자나 재가 제자들에게는 고타마 붓다의 열반은 슬픔으로 다가왔던 것

국들의 출현이다. 그레코-불교예술이 발전되고 간다라 불교조각에 그리

이다. 그렇지만 항상 슬픔 속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고, 붓다의 분신

스의 예술적 기교 영향이 나타나게 된다.

으로서 사리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붓다의 살아있는 형상 대신 사리숭배 로서 만족을 느꼈다. 이런 연유로 사리숭배는 고타마 붓다 숭배 그 자체

그리스 조각의 특징인 파상(물결)의 머릿결이라든지 양어깨와 발과 신

인 신앙으로 발전되었고, 한 때 인도 전역에 사리탑을 세워서 많은 사람

발까지 덮고 가리는 장식과 잎(葉)장식인데, 이것은 열반을 상징하는 조

들이 공통으로 신앙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동시에 붓다의 족적(足跡)

각상의 예술성의 표현이었다. 그레코-불교의 혼합주의라고 표현하는데,

또한 사리신앙 이상으로 숭배되었다가 그리스 식 간다라 조각예술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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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으로 이미지화한 아이콘으로서 불상(佛像)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남방불교의 명상과 초기불교사상이 뜨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불교 1천 7백년사에서 불교의 여러 사상이나 명상이 소개되어 왔었

불상은 인도 이외의 나라로 전파되면서 경전과는 달리 각 나라의 문화

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런 사상이나 명상수행 전통이 과거의 일이 되어

예술성에 영향을 받아서 모습이 약간씩 변모하게 된다. 인도나 실론의

버리자, 현대인들은 또 다시 찾아나서는 것이다. 불자들은 불교성지를 순

불상과 버마나 태국의 불상을 비교한다든지, 아니면 중국 한국 일본의

례함으로써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신앙적 의지를 다지

불상을 비교해 보면 현격한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경전은 인도찬술의

고 어떤 영감을 얻으려는 소박한 종교 심리에서 성지순례라는 신앙 또는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는 붓다가 인도에서

수행의 한 과정으로서 고타마 붓다와 관계된 불적지(佛跡地 )를 찾게 되

설했던 것처럼 문학작품을 만들어 냈다. 특히 중국에서는《능엄경》《원각

는 것이다. 쿠시나가르는 열반사상이나 정토사상과의 관련 속에서 불자

경》《대승기신론》《금강삼매경》등을 저작했다. 인도 찬술은 아니지만, 인

들에게 더욱 종교적 의미 부여가 되는 것이다.

도에서 찬술된 것 이상으로 내용은 매우 고차원적이다. 이 문제는 원형 경전성립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불교사상사적인 면에서 점점 수용되고 있음 또한 특기할만한 일이다. 불교가 어떤 한 나라에 수용되어서 끝까지 순탄하게 지속되는 경우가 쉽지 않다. 중앙아시아에서 불교는 유적만 남아있고, 중국에서도 몇 차 례 법난(法難)을 당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에서 억불(抑佛)의 시련 을 겪었고, 일제치하에서는 왜색불교(倭色佛敎)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의 근대불교가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정상화의 길을 향한 진행형이 다. 이럴 때 불교의 원형을 생각하게 되고, 고타마 붓다 시대의 승가와 말씀에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태동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타 마 붓다와 직접 관련된 불교성지가 어필되고 고타마 ‘붓다의 말씀’에 불자 들의 관심은 고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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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탄생지 룸비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를 행했다는 전설과 함께 석가 탄생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런 신비적인 묘사는 종교 신화적인 상징으로 해석하고 이해했으면 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외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구호이고, 사방으로 칠보를 행했다는 것 또한 고타마 붓다가 45년간 주유천하(周遊天下) 하 면서 진리를 구현했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마야 데비는 무우 수(無憂樹:근심 없는 나무) 가지를 붙잡고 고오타마 싯다르타를 옆구리 로 탄생시켰다고 했는데, 이것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사

룸비니는 불교 4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서 네팔에 소재하고 있다. 고오

성계급 가운데 무사계급(정치)인 크샤트리아 출신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타마 삿다르타의 고향 인 카필라와스투 또한 네팔 땅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 당시에는 인도 땅이었지만, 현재는 네팔 땅이 되어 있는데, 파키스

당시 인도의 풍습으로는 신생아 출산은 친정집에서 하는 것이었는데,

탄 방글라데시와 네팔은 모두가 인도 땅이었고, 인도 권에 속했었지만,

왕비였던 마야 데비는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로 가다가 중간지점인

현재는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분리되었다. 네팔에서 고타마 붓다

룸비니 동산에서 그만 출산을 하고 말았다. 데바다하는 조그마한 공국

와 직접 관련된 곳은 이곳 룸비니와 카필라와스투 두 곳인데, 불교도들

(公國) 정도였고, 이 공국은 콜리야 족의 일원이었다. 마야 데비는 고오타

은 룸비니를 필수 코스로 여긴다. 고타마 붓다는 기원전 563년 4월 15일

마 싯다르타를 낳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죽고,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이모

(음력)에 이곳 룸비니에서 탄생하셨다.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은 불교

이자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고타마 붓다의 고향과 함께 의미 있는 성역으 로 믿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교주의 탄생지를 성지로 받드

룸비니는 고타마 붓다의 탄생지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마야 데비 사

는 것은 이런 종교적 이유에서다. 하지만 유교의 경유, 공자나 맹자의 사

원과 고오타마 싯다르타를 목욕시킨 연못, 무우수로 알려진 살 트리(Sal

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데, 아마도 그것은 중국의 사상과 문화에 따른

tree)와 아소카 석주 정도이다. 또한 2013년에 기원전 6세기 것으로 보이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는 목재가 발견되었다. 영국 네팔 합동 고고 발굴단은 이 목재가 바로 고 오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난 지점에서라고 하는데, 고오타마 싯다르타 탄

사실성(史實性)을 떠나서,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 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치면서 사방으로 칠보(七步)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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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때부터 건물을 지어서 기념해 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불교 고대 사연구가와 고고학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169


룸비니가 성역화되기 시작한 것은 버마 출신 우 탄트(U Thant 1909–

룸비니개발 프로젝트의 마스터플랜은 세 구역으로 나눠지는데, a)성역

1974) 제3대 유엔 사무총장(1961-1971 재직)이 1967년 룸비니를 방문하

정원(聖域庭園)지대 b)사원구역 c)뉴 룸비니 마을 구역으로 3분해서 개

고 네팔정부와 룸비니개발 프로젝트를 만들고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킴으

발되고 있다.

로써 추진력을 발휘하게 되면서다. 우 탄트 사무총장 방문 이전에 이미 네팔 마헨드라 (Mahendra) 국왕이 1956년 룸비니를 방문하고 세계불교

a)성역정원(聖域庭園)지대에는

도우의회 대회를 개최하도록 10만 루피를 희사하여 룸비니 개발을 위하

고타마 붓다가 탄생한 지점인데, 마야 데비 사원, 아소카 석주, 스투파

여 세계불교도들의 모임을 장려했고, 후계 왕인 故 비렌드라 왕의 적극적

들과 사당, 정원과 나무와 연못이 있는 곳이다. 룸비니에서는 가장 핵심

인 관심으로 네팔 정부 산하에 ‘룸비니개발위원회’가 공식 기구로 설립되

이 되는 공간이다.

었다. 이때부터 세계불교도들과 국가에서 호응하여 룸비니 성역화 작업 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b)사원구역에는 동서(東西)사원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동쪽 구역에는 상좌부(남방불

룸비니는 고타마 붓다가 태어날 때 매우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

교) 권인 버마 네팔 태국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사원과 위빠싸

었다고 묘사되고 있는데, 아소카 대왕은 기원전 249년에 이곳을 방문하

나 명상센터 등이 들어서고, 서쪽 구역에는 한국을 비롯한 15개의 대승

고 석주를 세웠고, 중국 동진의 법현법사는 5세기 초에 이곳을 방문했

불교권 사원이 들어서고 있다.

을 때, 아소카 석주와 승원을 봤다고 기록했으나, 당나라 현장법사는 7 세기에 이곳을 방문하고, 아소카 석주가 벼락으로 갈라져 있고, 황폐화

c)뉴 룸비니 마을 구역에는

되어가고 있었다고 그의 여행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후 룸비니는 수 세

호텔 등 숙박업소와 병원 학교 우체국 박물관 도서관 국제 불교 연구

기동안 흙속에 묻혔다가 1895년 독일의 고고학자인 퓨러(Alois Anton

소와 관광정보안내소 등이 들어 서있고 일본불교도들에 의해서 세계 평

Fuhrer) 박사가 우연히 아소카 석주를 발견하여 룸비니 성지가 모습을

화 탑이 건립되어 있다. 1998년에는 세계불교정상회의가 열렸고, 룸비니

드러내게 되었다. 발견된 아소카 석주에는 브라미 문자로 다음과 같이

는 ‘세계평화의 원천’이며 ‘가장 성스러운 불교순례지이며 평화를 사랑하

새겨져있었다. “삐야다시 왕(아소카 왕의 異名)이 이곳을 방문하고 예배

는 세계인의 중심지“라고 선포한 바 있다. 2004년에도 제2차 세계불교정

를 드리며, 여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했다.” 라고 씌어 진 것을 해

상회의가 개최되었으며 10개항 평화 실천 방안이 선포되기도 했다. 룸비

독해 낸 것이다.

니는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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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필라와스투는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고향이다. 29세 때 까지 양육

카필라와스투는 룸비니에서 북서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되고 왕위계승을 위한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고 출가하기 전까지 생활했

데, 인도-네팔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서 룸비니를 순례하고 바로 이곳 카

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8세기 경, 카필라라고 하는 유명한 고

필라와스투를 들려서 사위성으로 가는 코스가 되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

대인도 철학자가 살았던 곳으로, 지명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한

님 이전에 과거칠불이 있었는데, 다섯 번째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佛이

다. 기원전 7세기 경, 특히 히말라야 기슭에는 많은 자유 독립 국가들이

이곳에 주처(住處)했다고 한다.

출현했는데, 상좌부의《붓다왕사Buddhavamsa 佛陀史, 佛種姓經》전승에 의하 이 카필라와스투도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석가 족은 이곳에 자

면, 구나함모니불은 29佛 가운데 26번째 佛이고, 칠불가운데는 다

리를 잡고 부족단위의 조그마한 공국(公國)을 세워서 다스리고 있었다.

섯 번째이고, 현겁(現劫) 5佛 가운데서는 두 번째 佛이라고 설명한다.

기원전 1천경부터 남쪽에는 코살라 국이 있었고, 기원전 8세기 정도가

불교의 현겁 시간론에서 현겁의 첫 번째 부처는 구류손불(拘留孫佛

되면 코살라 국은 강대국이 되었다. 실론의 사서《마하왕사》에 따르면 카

Krakucchanda), 두 번째는 구나함모니 불이며, 세 번째 가섭불(迦葉

필라와스투는 고타마 붓다 시대에 코살라 국에 정복되고 합병된 것으로

佛.Kassapa), 네 번째는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불)이고 다섯 번째가 미륵

기록하고 있다. 중국 동진의 법현법사는 기원후 4세기 말, 이곳을 순례하

보살(彌勒菩薩 Maitreya 慈氏)인데, 미륵불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미륵

고 카필라와스투가 고타마 붓다 시대에 코살라에 병합됐고, 극히 소수의

보살은 지금 보살신분이지만 성도를 완성한 다음, 미륵불로 출세(出世)하

비구와 사람들이 기울어진 승원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왕궁 터를

여 순수정법(純粹正法)으로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불교내세론(Buddhist

봤다고 그의 여행기《불국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약 2세기 후 이곳을 찾

eschatology)이다. 불교의 메시아사상인 미륵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일찍

은 당 현장 삼장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처음 만들어진 성벽은 공고하게

이 들어와서 미륵신앙으로 발전, 승화되어 최근세까지도 영향을 미쳤던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들도 별로 없고, 황폐화된 마을 정도였으나, 땅은

불교 내세론(來世論)이다. 이런 경전적 근거에 입각하여 자칭 ‘미륵불’이

기름지고 풍요로워 보였다고,《대당서역기》에 기록 하고 있다. 이후 이 지

라고 사이비들이 가끔 일어나 혹세무민하기도 했다.

역은 힌두의 손에 들어갔다가 기원후 9세기가 되면 무슬림들의 손에 들 어가서 불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역으로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 로 사라지게 된다.

《붓다왕사Buddhavamsa》는 빨리어 경장(經藏)의 소부(小部 Khuddaka)의 14번 째 책으로 고타마 붓다와 24 佛에 대해서 설명한 것 으로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서구 학자들은 추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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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고타마 붓다에 대한 전기는 아슈바고사 馬鳴菩薩 80–150 CE) 의 《붓다짜리타 Buddhacarita》란 서사시 형식의 고타마 붓다 전기가 있

네팔정부는 룸비니를 성역화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고자 애쓰고

다. 마명이란 시인이 저작한 불타전기문학이다. 마명은 고대 인도의 시인

있다. 이런 노력으로 룸비니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잡혀가고 있고, 특히 평

이며 극작가인 칼리다사(5세기)가 출현하기 전, 최고의 시인으로 이 작품

화를 상징하는 중심지로 조성한다는 취지이다. 고타마 붓다의 평화 자비

은 고전 산스크리트어로 썼다고 한다. 서역 출신인 담무참(曇無讖 385–

생명 사상을 구현하는 세계평화도량으로 만들어서 불교도이건 비불교

433CE)이 한역했다.《붓다짜리타》는 인도와 동남아 등지에서 매우 인기리

도이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환영한다는 룸비니 성역화

에 널리 익혔다고, 인도와 실론 그리고 스리비자야 국(인도네시아.말레이

추진 프로젝트의 설명이다.

시아 지역)에서 활약했던 당나라 의정법사가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 다. 마명은《대승기신론》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으나, 이 논서는 최근 서구 불교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서 찬술된 책으로 보고 있다.

이런 취지아래 세계평화를 모색하는 국제 불교컨퍼런스와 세계불교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국제사원구역에는 각 나라 불교 사원 이 들어서서 불교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고타마 붓다가 룸비니

고타마 붓다가 카필라와스투에서 겪은 가장 극적인 일은 출가할 때 태

에 와서 본다면 스스로 놀랄 일은, “사르나트에서 법륜을 굴린 이후, 담

어난 아들 라훌라(障碍란 의미)와의 드라마이다. 고타마 붓다가 성도한

마(法)가 이렇게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내가 태어난 자리로 돌아오다니!

후 1년, 카필라와스투 왕궁을 떠나서 7년 만에 돌아온 그에게 전 부인 야

놀라운 일이로다.”라고 독백을 할지 모르겠다. 세계 여러 불교나라에 가

소다라는 라흘라에게 저 분이 너의 아버지이니 모든 유산을 물려달라

지 않아도 이곳 룸비니에서 각 나라의 불교전통을 눈요기할 수 있는 곳

고 요청하도록 하자, 라훌라는 고타마 붓다에게 다가가서 요청하자, 고타

이 바로 룸비니 성역이다. 한 성인의 탄생은 이렇게 인류에게 많은 것을

마 붓다는 답을 하지 않자. 라훌라는 계속 요청하면서 고타마 붓다를 따

남기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삶의 빛을 주고 있다(끝).

라 나서자, 고타마 붓다는 수제자 사리불 존자에게 라훌라를 승가 공동 체에 입문시키도록 말했다. 이로써 라훌라는 불교역사상 최초의 사미가 되었고, 7세 이상의 어린이도 승가에 입문하는 전통을 남겼고, 라훌라는 수행을 열심히 해서 고타마 붓다의 10대 제자에 올랐다. 고타마 붓다의 가족사는 모든 불교도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고, 후세에 전범이 되기도 했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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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 달라이 라마 저

자 보검 이치란 박사

펴 낸 이 해동세계불교연구(haedongacademy.org) 주

소 종로구 수표로 117 나스빌 709호

화 010-8705-0344 정 가 15,000원 전

본문 편집 및 인쇄 도서출판 상신 제 1판 제 1쇄 2017년 3월 ?일

※ 이 출판물은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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