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복음이야기(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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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 이야기 2020.4

복음으로 사는 삶을 찾아서 샬롬복음연구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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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이야기

복음으로 사는 삶을 찾아서 Shalom story about

‘Seeking life with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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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1.코로나 19와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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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루더호프:노래하는 사람들

19

3. 다른 곳, 다른 사람들, 다른 예배: 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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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63

5. 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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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의해야 할 모습, 그 안에 담긴 헌신

119

7. 샬롬복음 연구의 배경과 목적

125

8.연구소 프로그램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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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구소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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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이야기 복음으로 사는 삶,그 길의 친구 찾기

주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님께 소식을 전합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 19로 고요한 난리 중에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 하는 분들과 치료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힘주시 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서 동역자님들의 삶과 가정이 주님 안에서 안전과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샬롬복음연구소를 2018년에 시작하고 벌써 3년째가 되었습니다. 복 음이 무엇인지, 복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고 그대로 살고 싶었는데,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를 사는 것 같으면서도 삶은 이전보 다 더 치열하고 버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좀더 욕심을 내서 올해부터는 연구소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집과 카페를 오가며 성경공 부와 강의 준비를 했었는데, 지난 2월 말에 집 앞 상가 2층에 20평 남짓 연구소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책상과 책장만 있는 사무실이지만 주중에 는 꼬박 꼬박 출근해서 책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 다. 이번에 발간하는 샬롬복음이야기는 최근에 쓴 글들을 모았습니다. 그 와중에 샬롬복음연구소 사역 목표, 원칙, 계획도 정리했습니다. 사실, 혼 자 이것저것 하느라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홀로 혹은 함께 읽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누린 소망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복음에 초 점을 맞추는 삶을 찾는 친구들과 함께 누리 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이 봄 날에 우리의 모든 삶에 복음이 깊이 뿌리내리고 샬롬이 피어나기를 소망합니 다. 샬롬복음연구소, 서진 목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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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코로나 19와 복음 코로나 19와 복음

<2020.4.2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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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와 복음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멈춤 것 같습니다. 거리에 사람과 자동차는 한적 하고 학교를 오고가는 길을 가득히 메우던 아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매 주 가던 교회도 이제는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온라인으로 핸드폰과 TV에서 정말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집 주변 상가들도 하나 둘 임대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온세계 확진자는 곧 100만명을 돌파할 거 라고 합니다.

1. 온 세상에 전파됨 실로, 코로나 19가 온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불과 몇개월전에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전 세계가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우한 폐렴이라고 부르며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코로나 19라 는 이름으로 나와 가까운 곳에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있고, 혹여 그 바이러스에 노출될까봐 염려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만의 안위를 넘어 서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습 니다. -9-


온 세상에 전파된 것을 생각하니, 복음이 떠오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로마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에 대 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 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1:8)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그들의 믿음은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 복음 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이며,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방인들에 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롬1:9,16)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보고 싶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동역자가 되 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하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의 이런 바램과 이유와 동일한 마음으로 우리 역시 보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함께하시는 신비를 알아채는 주 경외함 (fear of God)을 공명하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폭풍수다를 떨며 하하호 호 웃고 기쁨의 눈물을 원없이 쏟아놓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셨고 이 세상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 을 보며 우리 안에 있는 은사를 불일듯 하게 하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코로나 19와 복음, 복음과 코로나 19는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2. 복음은 코로나 19와 비슷하다. 복음과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온 세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모든 영역에서 나라 안밖으로 다양한 변화가 요청되고, 실제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유사점은 그 전파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고난을 당했고, 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6개 국가에서 4만명 이상이 코로나 19로 사 망했습니다, 2020. 4.2 통계) 그 전파 과정을 차단 하기 위해 먼저 그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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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받은 사람들을 격리 하라는 사회적 요구가 있었지만, 완벽하게 그 영 향을 차단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과 코로나 19의 전파 경로는 국가와 문화, 인종과 언어를 초월합니다. 복음이 전하는 자가 없이 는 들을수 없는 것처럼(롬10:14) 코로나 19도 감염된 사람을 만나지 않 고는 전파될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만났다고 무조건 그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애매합니다. 복음과 코로나 19 모두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미움이 아니라 사 랑을 필요로 합니다. 복음은 그저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가 나를 구원했다 는 사실만을 알고 믿는 것이 다가 아니며, 필연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 체(요13:34), 원수를 사랑하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마5:44) 코로나 19 역시 그 예방수칙을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 코로나 19에 대한 두려 움으로 확진자들을 기피하려는 본능을 거스르는 의료진과 공무원들의 헌 신과, 의식있는 시민들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 외에도 복음과 코로나 19의 유사점은 그 정체성, 영향력에서도 나타 납니다. 조금은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면인데, 우리 주변에 누가 그 영향권 안에 있는지 좀처럼 구분이 어렵습니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 있는 데,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당장은 구별이 되지 않아 혼란스 럽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이 의심하기는 때에 따라서는 무증상 전파자도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정작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지 못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심지어는 자신은 복음이 나 코로나 19를 경험해봤고, 지금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장담하다 가 다시 그 영향 아래에 있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조금더 안타까운 공통점은 자신이 복음이나 코로나 19 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진단검사를 통해서 최대한 정확한 진단으로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복음에 양 성, 코로나 19에 음성으로 나오다가 시일이 지난뒤에 그 결과가 뒤바뀌기 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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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로나 19와 복음은 다르다. 하지만, 이런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코로나 19와 본질적으로 전 혀 다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코로나 19 는 걸린 사람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특히 약자에게 있어서 복음은 생명을 주고,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19는 고통을 주 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하며 사회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갈등과 차별 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복음을 전하고 싶어합니다. 누군가 는 나는 복음이 좋고, 내가 그 복음을 아는 것이 좋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구지 전하고 싶지 않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진단검 사를 통해 양성 반응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관찰 및 재검사가 필요 한 상태이리라 생각합니다. 역사상 복음을 가진 사람이 자기 혼자 복음을 독식하고 그 흐름을 막으려 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19는 복음과 마찬가지로 온세상에 전파되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코 로나 19를 가진 사람은 그 바이러스를 전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파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나 코로나 19는 그 속성상 다른 두려움을 불러 일으킵니 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감염될지, 내가 그 바이러스 에 노출이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나 마 발빠르게 대응한 한국이 내놓은 백신과 질병예방정책이 효과를 발휘하 며 전세계에 모범이 되고 도움이 되고 있지만, 아직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는 우리 안전 을 위협하며 두려워하게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다른 차원의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감정을 억누르라는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인정하고 주 경외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 경외 함은 (유진피터슨의 성경연구에 의하면) “Fear of the Lord”으로 번역되 -12-


지만 한 단어처럼 사용되는 관용어구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표지가 됩니다. 유진 피터슨은 창조의 실재로서의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하지 만, 그 실재에 적합하고 적절하게 주 경외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계 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키에르케고르와 칼 바르트의 경 고 - “소위 의로운 삶, 자신의 취향에 맞춘 경건에 익숙해지면서 두려운 떨 림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들을 그럴듯하게 이용하 는 불경이다”-를 유지하기 위해 안식을 지키라고 권합니다. 실제로 코로나 19로 인해 전 세계는 강제적인 쉼에 돌입했습니다. 아이 들은 학교도 학원도 안가고 집안에만 머물다보니 오늘이 몇요일인지 헷갈 려 하고, ‘오늘이 꼭 토요일 같다’고 합니다. 세상과 친밀해지고 주 경외함 을 회복하기 위해 제안된 안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순종적인 안 식이 아니라 코로나 19로 인해 강제적으로 임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 이고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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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하나님이 명령하신 안식은 일로부터의 쉼이며, 다시 일로 돌아가며 그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헤아리는 시간과 공간의 예배였습니다. 하지 만 우리는 일로부터의 쉼의 주도권을 빼앗겼고, 지금의 쉼이 언제 다시 일 로 돌아갈수 있을지를 헤아리지 못해 쉬지 못하는 쉼의 시간을 보내고 있 습니다.

4. 코로나 19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으로 살까?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집중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안전입니다. 이 안전은 복음과 대치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에 대한 책임있는 돌봄에 해당합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제시하는 예방 수칙 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권세에 복종하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믿 음과 구원의 확신으로 목숨을 걸고 죽어도 괜찮다고 예방 수칙을 무시하 고, 예배나 기도회로 모이자고 하는 사람이나 참여하는 사람은 그 믿음과 구원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입니다. 내 목숨을 내어놓 는 일과 상대방의 생명과 삶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19로 인해 벌어진 재앙을 멈추고 사람들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려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으로 이나마 우 리의 삶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안전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지키 는 것 만으로는 담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수고에 깃든 하나님의 은혜를 볼수 있다면, 앞으로 더욱 필요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 아가는 우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필요합니다. 최전방에서 사 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과 공무원들이 지치지 않고 바른 판단을 할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직접적으로 고통받는 환자들 과 간접적으로 2차 3차 피해를 입고 있는 경제와 문화를 비롯한 사람들 의 몸과 마음에 소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응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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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학교, 목사와 교사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피부로 와닿는 삶의 지경은 교회와 학교입니다. 매 주일 가던 교회를 안간지가 3주째 입니다. 학교는 3개월이 넘도록 방학입 니다. 교회에서는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고, 학교도 EBS 방송을 보거나 온 라인으로 과제를 내주고 곧 온라인 개학을 한다고 합니다. 한주, 두주가 지 날 때는 비상상황이기도 하고, 임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 날수록 비상이 일상이 되다보니 답답함이 생깁니다. 교회와 학교는 시공간의 단절, 만남의 부재 속에서 대부분 수동적으로 대 처하는 듯 합니다. 인터넷으로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 한계를 어쩔수 없 다고 인정하고 다시 상황이 바뀌기만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일부 교회들 이 고집스럽게 주일 예배를 드리자, 헌금 때문이라는 의구심 섞인 비난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교회는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 면서 주일 낮예배 한번만 드립니다. 이를 두고 미국의 한 학자는 이제 한국 사회도 CEO 성도(크리스마스Christ-mas, 부활절Easter,헌금 Offering만 참석하는 성도)가 급증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실 제로 우리 아이들은 가정예배를 드리다가 인터넷으로 어른 낮예배 예배 를 드리자고 하니 다들 난색을 표했습니다. 이는 교육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마련한 과제와 활동들이 온라 인을 이용하도록 통보할뿐 아무런 대처 방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 의 부재와 수업이 없는 선교지 같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아이들은 EBS를 이용해 자기 주도학습의 기회를 갖기를 바라지만, 공부는 더 부담 스럽고 까다롭게 느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학교 역시 학교의 존재감 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창의적인 접근 페이스북에서 본 어떤 목사는 유튜브로 아이들과 만남을 시도하고, 예방 수칙을 준수하면서 아이의 집에 치킨을 배달하며 평소보다 더 적극적인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의 한 교회는 “그래 이때다!”를 외치며 필사 -15-


성경을 해보자, 예방수칙을 지키면서 할수 있는 심방과 예배(거동이 불편 하고 홀로 사시는 권사님을 심방하고, 기도 장소가 아니라 기도 시간을 정 해 릴레이 기도를 하고, 각 가정별로 가정예배 드리기, 3-4 가정 예배 드리 기, 사역자와 장로들이 찾아가서 예배드리기)를 시행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먼저 미사 중지를 시행했고, 온라인 예배(미사)를 적극 홍 보하고, 예방수칙과 집에 머무는 것을 재치있게 알렸습니다.

1. 홍수가 왔을 때 노아와 가족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집에(방주) 2.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을때 그는 어디에 있었나요? 집에 3.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장자를 죽였을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 있었나 요? 집에 4.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어디에 있었나요? 집에 5. 아나니아가 바울을 보러 왔을때 바울은 어디에 있었나요? 집에 6. 지금처럼 역병이 창궐할때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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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 중에서도 카톡으로 알림만 보내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 이상 전화 로 학부모와 통화하고, 아이의 목소리를 확인하며 진도는 잘 따라오고 있 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상황을 묻습니다. 이런 모습을 접할 때 성도와 아이 들을 향한 소명과 적극적인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때, 아니 아무것도 할수 있는게 없다고 생각할때 우리가 하려던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고 그 본질을 추구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는 방법을 창의적으로 찾아내기를 바랍니다. 그런 바램으로 당장 온라인 개학을 맞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지식 전달 이상의 관계(사제, 친구)를 형성해 가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도 이번 참에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참된 안식과 예배에 대한 고민을 통해 성도들이 예 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도록 하는 목양이 이뤄지기 를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5.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 예전에 가뭄이 계속 되던 때에 빌립보서 1:1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시원한 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제게 성경을 가르쳐주던 선배에게 이 런 말을 들었던게 기억납니다. “서진 형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수 있어요. 그냥 있던 사람은 이 비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가뭄의 때에 비 오기를 기도 했던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줄을 알 겁니다” 코로나 19와 복음, 복음과 코로나 19는 우리의 의도와 바램으로 어찌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의도와 바램을 중단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마음을 모 아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에이, 기도한다고 되면 하죠~ 할수도 있지만, 기 도한 사람은 분명히 알겁니다. 방역과 진단, 치료, 백신 개발, 일상을 회복 하는 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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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루더호프:노래하는 사람들

브루더호프 :노래하는 사람들

Darvell Bruderhof community -19-


브루더호프: 노래하는 사람들

저는 첫째 아들과 함께 2020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7박 8일 동안 영국 남동쪽 로버트브리지(Robertbridge)에 있는 다벨 브루더호프 공 동체(Darvell Bruderhof community)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짧 은 생활이 여전히 여운이 남습니다. 가기전부터 다녀와서는 글을 써야지 했는데, 자연스레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졌습니다. 연구소 블로그를 통해서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왜(why), 어떻게(how) 방문했는지, 브루더 호프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다녀온 뒤에 내 삶에 어떤 자극이 되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사랑으로 사는 삶을 찾아서 개인적으로는 2014년 12월에 교회를 사임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큰 전 환점이 만들어졌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고, 마치 흑암이 깊음위 에 있다는 창세기 1:2의 말씀처럼 어둠속에 홀로 존재하며 아무것도 헤아 려지지 않아 답답하고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것 같은 혼란과 불안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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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이전에 함께 동역했던 선배 목사를 통해서 브루더호프 이야기 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먼저 본인이 다녀온 뒤에 온 가족이 3개월동안 브 루더호프에서 살다와서는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참된 교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언급이 되었고, 브루더호 프가 정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건강한 예시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습 니다. 그 뒤로 브루더호프에서 나온 책들을 통해서 이런곳도 있구나 싶은 감동이 있었고, 듣고 읽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10월에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다음 사역으 로 뉴욕으로 청년대학생을 대상으로 선교공동체를 이루는 선교사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선교단체 대표와 함께 뉴욕에 탐방을 하게 되었습 니다. 마침 뉴욕에서 가까운 우드크레스트에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있어 서 일정을 조율해서 방문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와 관련된 일정 이 변동되면서 결국 브루더호프에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선교훈련을 받으며 단순히 교회나 선교단체라는 기독교 기관으 로서의 공동체를 넘어, 함께하는 것(the with)이 복음과 깊은 관계가 있 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선교학, 이전에 경험했던 교회와 선교단체가 복음과 공동체(함께함)라는 주제로 통합되는 관점을 갖게 되 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정과 교회, 사회로 나타나는 함께하는 삶의 어려 움들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 브루더호프가 보여준 진실하고도 간절한 말씀에 순종하려는 모습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100년 역사 동안 에 어느 다른 공동체처럼 흑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용서와 사랑을 가 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힘이 있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개인적인 이유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첫째 아이에게 복 음을 소개하는데 아빠의 말과 행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한계를 극복하려 는 시도였습니다. 21세기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은 돈이나 지 식이 보이지 않는 계층을 나누고 끝없이 노력해야 하기에 불안하면서도 권태감을 느끼는 세대로 여겨졌는데 연구소를 통해 복음으로 사는 삶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아들이 유튜브와 게임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것을 -21-


마냥 지켜볼수만은 없다는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내가 다 이루고 가르치 려 하지 말고 함께 가보자는 생각으로 아내와 의논했고, 아들과 단 둘이 서 사랑으로 사는 삶을 찾아 브루더호프를 탐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간 곳은 영국의 다벨 브루더호프 공동체였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아부다비를 경유해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비행기로 이동했고, 튜브(지하철-피카디리 line)를 타고 레스터스퀘어에서 내려서 Charing cross station(기차역)에서 로버트브리지(Robertbridge)로 기차로 이 동했습니다. (한국에서 영국까지 15시간(경유),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브 루더호프까지 4시간 정도 걸렸네요) 미리 약속한 브루더호프 호스트인 클라스(Klass)가 기차역으로 마중나 와주었고 한 십여분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저 언덕 위에 옹기종 기 자리잡은 브루더호프 마을이 보였습니다. 영국의 1월은 일찍 해가 져 서 금새 어두워졌지만 저 멀리 보이는 브루더호프에 대한 첫인상은 시골 마을, 낯선 외국의 느낌이었습니다. (사진을 못찍은게 아쉽지만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네요)

2. 브루더호프에서의 삶 내가 만난 브루더호프를 표현하자면 "그들은 노래하는 사람들"입니 다. 도착한 다음날 점심에 처음으로 공동체 구성원 전부가 함께 모였는데 그들이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론 찬양 집이 있지만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어른들까지 모두가 이미 외우고 있는 것처럼 한 목소리로, 동시에 근사한 화음으로 나뉘어 아름답게 노래했습 니다. 어떤 노래를 부를까 묻기도 하는데, 그때 노래의 선곡은 어린아이부 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제안하면 다 같이 부릅 니다. 반주를 하기도 한다는데, 보통 모이면 그냥 노래를 부릅니다. 아카펠 라 합창 같은 느낌으로 너무 핏대를 세우지 않고 잔잔하게 자신의 목소리 가 들리면서도 전체 목소리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노래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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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단순하지만 새로운 이 노래가 새롭게 느껴지고 여운이 남는 감동으 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 노래를 부르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어떤 분위기였 습니다. 솔직히 그들의 노래가 전해준 감동은 높은 음악적 수준 때문은 아 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옆에 앉은 분은 음정이 안맞기도 했거든요. 그들 이 노래하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 사람들(공동체 멤버들)에 대한 추구 함과 연결됨 같은 분위기가 안개처럼 모임을 채워주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일을 할 때도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다 같이 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일상에서 콧노래를 부릅니다. 이 모습을 여기 저기서 보면서 유 진피터슨이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왕업(Kingship)을 행하는 사람들 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휘파람을 불며 일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맡겨 진 일을 할때 흔히 나타나는 수동성을 능동으로 바꾸어 살아내는 표지가 이런 노래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 현장을 경험하고 함께 일할수 있어서 덩달아 찬송가를 흥얼거렸답니다. 1) 노래 하는 사람들의 일상: It is simple. 우선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특징은 단조로움입니다. 대체로 아침6시즘 일어나서 6시30분즘에 아침식사를 하고, 아이들은 7시30분에 학교로 오 라는 종이 울립니다. 어른들은 오전8시부터 12시까지 오전 작업을 하고,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오후 작업(아이들은 학교에서 오후 활동)을 합니 다. 도중에 오전 10시가 되면 티타임을 갖습니다. 휴게실에 모여서 홍차 나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이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 는 모습이 어릴적 시골마을에서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루에 한끼는 꼭 공동식사로(점심 혹은 저녁)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먹 습니다. 그 외의 아침식사와 다른 한끼의 식사는 각자 집에서 간단히 먹습 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합니다. 저는 호스트 가정 에서 주로 식사를 했고, 한국인 멤버 가정의 초대로 함께 주일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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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일주일에 한번은 멤버들끼리 기본적으로 공동체 모임을 가지 며 특별한 안건이나 행사가 있으면 더 자주 모이기도 합니다. 식사와 모임, 작업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습니다. 악기를 배우거나 연주하 기도 하고, 애완용 가축을 키우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 고, 산책을 하고, 카드게임을 하기도 합니다(여기서 처음 알게된 게임도 곧 소개할게요^^). 길가에 망원경을 세워놓고 달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공동체 예배는 주일오전에 한번 드리는 것 같습니다(정확히 확인하지는 않았네요). 하지만 그 예배가 한국에서 보통 드리는 예배와는 다릅니다. 일 단, 예배로 모이는데,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입니다. 모 여서 또 노래를 부릅니다. 외국어로 따라 부르는 찬양이라 쉽지는 않았지 만 별다른 악기나 반주 없이, 그리고 지휘자나 별도의 싱어(singer) 없이, 각자 자기의 목소리로 화음으로 어우러져 부르는 찬양이 아름답게 들려 서 낯선 마음보다는 신선하고 매력있게 들렸습니다. 그 뒤에는 성경 본문을 읽고 약간은 낯설게 설교가 아닌(?) 짧은 이야기 를 듣고는 끝이 났습니다. 설교나 나눔을 기대했는데 노래와는 달리 너무 싱겁고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어색한 예배가 제게 보여준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집중해 있었고, 각 자의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에 안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에 와서 이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이런 예배와 일상은 내가 그토록 바 라던 삶과 많이 닮아 있었는데 왜 이리 어색했을까 싶은 질문이 계속 내면 에서 들락날락 거립니다. 2) 스페셜 미팅 Special meeting 제가 머무는 동안에 평소에는 없던 2가지 특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하 나는 새로운 브루더호프 멤버를 받아들이는 모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 혼 25주년을 맞은 부부를 축하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두 모임 모두 브루더 호프의 삶의 자세(spirit?)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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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가 된다는 것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은 멤버와 멤버가 아닌 사람이 함께 살 아갑니다. 멤버 미팅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구체적인 차이가 있 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경계는 어떤 제약이 아닌 삶의 내용으로 구 분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멤버는 하나님이 자신을 공동체로 부르심을 확인하고 자신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살겠다고 자발적으로 헌신한 자라고 합니다.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21세 이상이어야 하고, 목사와 함께 성경을 읽으며 질문과 답변을 통해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일정시간을 갖고,자신의 의지 로 공동체 멤버로 살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 전원의 동의 로 멤버로 허입되어야 합니다. 제가 머무는 동안 3명의 청년들이 멤버가 되었는데, 본래는 이 청년들이 멤버가 되기 위해 목사와 부르심을 확인하는 시간들을 가졌다고 보고만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보통은 공동체가 멤버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을 일 정기간 지켜보며 허입여부를 검토 하는데, 이번에는 그 보고하는 자리에 서 한 분이 '이들의 의사가 분명하다면 우리가 왜 이 일을 오늘 당장 할수 없겠는가?'라고 질문해서 모든 사람의 동의하에 다음날 저녁에 멤버 허입 식을 가졌습니다. 공동체 멤버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한명 한명 개인 의 의사를 확인하고, Elder들이 와서 안수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공동체 멤버들과 일일이 인사를 했습니다. 마치 세례식 같기도 하고, 결혼 식 같기도 한 영적으로 깊이 연결되고 하나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방문객으로서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참여할수 있다는 것은 소중 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자라면서 세례와 결혼을 직접 참여자 가 되기도 하고 참석자로 있어보기도 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는 부분들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신앙고백과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과정에 대한 거룩을 간직하고 그 안에서 넘쳐나는 기쁨과 축복, 사랑과 격려가 자 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가능하다면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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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리고 내가 속한 예수 공동체가 이런 따듯한 교제를 나눌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덧붙여서 저의 호스트와 나눈 이야기를 좀 소개하자면, 이전에는 공동체 외부에서 공동체로 함께 살겠다는 사람들이 멤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 합니다. 요근래에는 공동체에서 자란 2세, 3세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 에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믿음을 추구하는 부모의 삶이 계승되는 면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 동체 밖의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너무 자신의 공동체 안에 함 몰되어 있는건 아닌지 성찰한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다음세대에게 신앙 과 삶이 계승되는가에 대한 우려와 세상으로 떠나고 세상에서 돌아오는 자들의 숫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생각할 때, 이런 브루더호 프에 관심이 갑니다.

멤버 모임 장소 가운데 놓인 테이블 -26-


결혼 25주년, Silver wedding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는 결혼 25주년이 되면 온 공동체 멤버들이 실버 웨딩을 축하 합니다. 마침 제가 그곳에 머무는 동한 한 부부가 결혼 25주 년을 맞았습니다. Silver wedding이라는 이름처럼 마치 새로운 결혼식 같이 부부를 꽃 아치로 장식된 테이블에 앉게 하고는 근사한 저녁식사가 나왔습니다. 평소에도 맛있기는 했지만 검소한 메뉴들이었다면 이날은 두 툼한 Pork stake가 나온 파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예배는 아니었지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시간이 있었고, 하나님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축하 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의 자녀들을 시작으로, 중년의 친구들이 나와서 축하 노래를 부르 고, 연극과 꽁트를 하고, 초등학생들과 청년들이 축하하는 공연과 합창을 근사하게 선보였습니다(브루더호프 학교에 간지 며칠되지 않은 지용이도 이 부부에게 음료를 전달하는 순서에 참여했어요^^). 마지막 즈음에는 이 부부가 25년전에 결혼한 사진들이 스크린으로 나왔고 그 사진들이 로 비에 전시가 되었습니다. 아들만 5명(?) 있는 부부였는데, 아내는 예전에 유산한 딸을 기억하며 천국에서 만날 날을 기대한다고 소감을 나누었습니 다. 한 부부의 결혼 기념일은 축하할만하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헤아릴 법 하면서도 이토록 온 공동체가 축하하는게 인상 깊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 었더니, 그만큼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연스럽게 어린이와 청년들에 게 그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귀뜸해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20년 이상의 이혼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데, (나 자신이 부부가 되어 25년을 사는 것을 아직 상상해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함께 살아온 날들을 헤아릴수 있고, 친구들과 교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할수 있다 면 정말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혼인 지속기간 20년 이상의 이혼이 전체 이혼의 33.4%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 로 4년 이하 이혼이 21.4%를 차지했습니다. 이혼부부의 평균 혼인 지속기간은 15.6년으로 전년대비 0.6년 증가했습니다. (2018년 혼인,이혼통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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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과 섬김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 브루더호프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노래만 부르는게 아니라 실제로 먹고 마시고, 땀흘려 일하고 대화하며 살아갑니다. 만났던 사람들을 다 소개 할 수는 없지만 일주일동안 머물면서 교제를 나눈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들 의 삶의 태도에서는 사랑과 섬김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특히 호스트가 되어서 공동체 생활의 시작부터 떠나는 길까지 함께해준 클라스 부부 이야기를 안할수가 없습니다. 이제 20대 후반의 신혼 부부인 데 섬세하게 숙박과 식사를 챙겨주고, 공동체 이곳, 저곳을 소개해주고, 사 람들을 소개시켜주어서 공동체가 낯설고 어색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려 해주었습니다. 그저 맡겨진 책임 때문일까? 호기심도 생겼지만 이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브루더호프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공동체와 신앙에 대해 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정말 주안에서 한 형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브루더호프에 머무는 동안에 저는 가구공장에서 일을 했고,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큰 아이는 브루더호프에 있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주일을 제외 하고 겨우 한주일 머물렀지만 일하는 가구공장에서도 공부하는 학교생활 에서도 이들의 사랑과 섬김에 대한 태도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먼저 가구 공장은 Plaything이라는 어린이용 가구를 만드는데, 저는 잠 시 머무는 게스트라서 그냥 나사를 조이거나, 포장하는 일 같은 단순한 작 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만난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두번 세 번 검수하며 꼼꼼하게 작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흔히 이런 공동체 생활에서 자신의 이익이 없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고 책 임감을 갖지 않을 것 같은데,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지만 전혀 기계처럼 일하지 않으면서도 여유와 성취감이 드러날 법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 습니다.(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책임감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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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만드는 가구들

그 가운데 섞여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일하다 보니 한국에서 다녔던 교회 에 있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쁘고 열악한 상 황속에서도 누가 시켜서, 누구라도 해야하니까 하는 것 이상의 애정을 가 지고 자기 집보다 더 사랑으로 교회를 돌보고 가꾸던 그 귀한 분들이 모여 사는 것 같았습니다. 머무는 동안 몇번을... 이게 가능할까? 왜 이렇게 헌 신할까.. 하는 놀람과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구를 만드는 이 공장 에 아침부터 오후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80세를 훌쩍 넘긴 어르신도 나와 서 사소한 일이라도 거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일의 결과와 효율성을 넘어서는 사람의 존재감이 넘쳐흘렀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 내에 있는 학교는 공동체 멤버들을 위한 학교입니다. 단지 아이를 돌보거나 공부를 가르치는 것 이상의 가치(어린이에 대한 사 랑과 소망)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와 함께 브루더호프에 간 큰 아이는 영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주일동안 학교를 다녔습니다. -29-


가기전부터 학교에 잘 적응할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담당 교사가 먼저 찾 아와서 아이들과 어울릴수 있는 기회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영어를 잘 못하니 수업도 참여하기 어렵고, 아이들과 활동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은 데 직접 아이에게 그리고 부모인 저에게 의사를 물어가며 어떻게 하면 좋 을지를 선택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제 아들은 이번 영국 여행에서 제일 좋았던 곳이 브루더호프라고 답합니다. 어쩌면 어린 아이에게도 한 사람으로 온전히 대우하는 서양의 문화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면서도, 지식 습득 이외에 친구와 선생님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아서 함께 오길 잘했다 싶고, 다음에 는 온 가족이 같이 가보면 좋겠다는 욕심까지 생깁니다. 이들의 사랑과 섬김의 태도가 느껴지는 또 다른 기억은 어린이들을 양육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맞이한 주일 예배 후에 마 차 를 타고 동네 한바퀴 돌고 올건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초대를 받았습니 다. 궁금하기도 하고 시차적응도 할겸 나갔더니, 4-5살 정도 되보이는 딸 아이를 데리고 마차를 타고 동네 한바퀴 돌고오는 길에 저와 아들이 함께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빨간머리 앤에 나오는 것 같은 마차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Robertbridge 끝까지 다녀왔는데 (이런 마차는 처음이라) 너무 신났습니다. 공동체로 돌아와서 마차를 정리하면서 말들에 씌워진 마구를 벗기길래 제가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이 아이가 부모를 도울수 있는 법을 배울수 있는 기회를 뺏지 말아달라"고 해서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 켜보니 이 작은 꼬마 아가씨가 무거워 보이는 마구를 땅에 끌면서 헛간까 지 날랐습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이런 태도는 학교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었습니 다. 아이들은 오전에는 교실에서 주로 영어, 역사, 수학을 공부하고, 오후 에는 공동체에 필요한 작업들을 한다고 합니다. 너무 힘든 일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것을 당연스럽게 배울수 있도록 건초 를 나르거나, 장작을 패는 일 같은 작업들을 한다고 합니다. -30-


실제로 공동체에 머무는 동안에 오후에 길에서 아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 니다. 장화를 신고 외발수레를 끌고 아이들과 함께 가길래 어딜 다녀오냐 고 하니 장작을 날랐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밭에 가자고 하면 힘들어서 싫 다던 녀석이 옷에 진흙을 뭍이고도 싱글벙글이었습니다. 대안학교에서는 농사를 짓는 수업이 있다던데 그런 비슷한 차원일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공동체가 내에 있는 학교

4)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브루더호프에서 머물면서 느껴지는 또다른 주요한 특징은 바로 '하나님 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단순히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모든 재정을 공동체 가 함께 사용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들이 공동체로 모여사 는데 필요한 멤버로 서약하는 과정부터 결혼, 진로에 대한 부분에서 그런 태도가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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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앞서서 ( 2)스페셜 미팅, 멤버가 된다는 것에서) 멤버로 서약하는 과정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들은 멤버가 되려는 목적, 동기를 아주 중요하 게 여겼습니다. 단순히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살기 위해 모여 사는게 아니 라,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삶을 살기 위해 멤버가 된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 런 모습은 자칫 공동체로 모여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질수 있지만, 이 부분에서 바로 하나님을 신뢰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기에 각자가 자신의 인생 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살피도록 한다고합니다. 부모님이 여기 살고 있고, 내가 여기서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공동 체로 부르셨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멤버 로 살기로 서약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공동체에 남아주기를 바라면서도 자녀가 자신의 부르심을 공동체에서 찾지 못하면 온전히 그 결정을 존중 하는 이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 이야기 브루더호프에 머물면서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고, 머무는 동안 여러 사람 들에게 질문해본 문제가 바로 결혼 문제였습니다. 우연찮게 호스트 부부 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이 어떻게 결혼하는지를 들었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남녀 단 둘이 만나는 개인적인 만남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년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가다가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목사에 게 찾아가서 상담을 한다고 합니다. 그럼 목사가 정말 그 형제, 그 자매가 내게 돕는 배필인지, 내가 그를 위한 배필로 부름을 받았는지를 점검할수 있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그 뒤로 그런 마음이 어느정도 확실해지면 목사 의 허락을 받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전화통화나 카톡도 아니고 편지를 통해 마음을 주고 받는데, 어떤 경우에는 서로 다른 공동체에 떨어 져 있어서 한번 연락하는데 몇달이 걸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 우 리 부모님 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 2020 원더키드 시대인 오늘날에 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어서 무척 놀라웠습니다. -32-


실제로 한 형제는 자기 아내가 자기 이전에 다른 형제를 좋아했었는데, 목사와 상담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내가 그 형제를 좋아하는 이유가 우람 하고 힘이 있어 보이는 남성미에 끌린 것이었지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을 아는 것이 혹시 기분 이 안좋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자신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자기 그대로를 돕는 배필로 여기는 것이라서 기쁘다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결 혼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이 참 소중해 보였 습니다. 물론 그래도 살면서 갈등을 경험하기에 때로는 아이들 때문에 때로는 부 부 사이의 문제로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이혼 을 금하기에 이혼을 한다면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고 함) 하지만 이런 일을 두고 뒤에서 수근거리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들의 어려움과 그들의 선택 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다른 공동체 에 머물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하고, 할수 있으면 갈등이 있는 부부가 회복 할수 있도록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돕는다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가정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쉬운 한국교회 의 현실과는 참 다른 면이라서 새로웠고, 가정과 공동체가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살려고 하는 모습이 참 도전 이 되었습니다. 맡은 역할과 소명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또 다른 본보기는 "직업"입니다. 공동체 안에 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목사도 있고, 학교 교 사도 있고, 공장 엔지니어, 텔레마케터, 세일즈맨, 요리사, 운전기사, 농부 를 비롯해서 공동체가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일들을 나누어서 합니 다. 여기서 놀라운 신비가 현실로 바뀌는데, 바로 순종과 소명에 따라 그 일을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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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목사는 자신의 소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목사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아 목사가 됩니다. 어릴적부터 봐오며 목사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사 람을 추천하고 공동체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도 당연히 목 사 가정으로 목양 사역에 집중합니다. 요청을 받은 사람이 거절하기도 하 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는지를 확인하고 응답하는 의미로 수락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목사를 하고 싶다고 할수 있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한 공동체에 1-3명의 목사가 있다고 하니 그 공동체 안에서의 끈끈한 관 계가 헤아려집니다. (재세례파 특징을 가졌기에 예배를 위한 목사가 아니 라 목양을 위한 목사) 비인가 신학교에서 양성되는 정체불명의 목사들이 난무하고, 신학교도 사학재단으로 영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다른 모습이어서 더 새롭게 보였습니다. 목사 이외에도 다른 직분도 동일한 원칙으로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본인이 수락하는 과정을 통해서 역할이 정해집니 다. 개인 의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본인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공동체 멤 버는 공동체의 요청에 순종하는 것이 멤버라고 하니, 일차적으로는 소명 을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순종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5) 공동체에서 자란 다음 세대의 진로 일상을 단순하면서도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브루더호프 공 동체는 다음세대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교육에 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어른들을 일깨우는 책들도 출간되어 있습니다. 브루더호프에게서 느낄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소명과 순종의 삶의 방 식은 자녀들의 진로에 있어서도 동일했습니다. 너무나 상식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이상적이라고 느껴졌던 부분이었 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합니다. 최소 2년은 공동체 밖에서 생활하도록 하는데 이 때 다양한 선택을 할수 있습니다.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하거나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 생활한다고 합니다. (이때 이후로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 -34-


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학교나 진로를 정하는 기준이 공동체의 필요 를 채우기 위한 결정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공동체에 있는 할머니와 장애우를 위해 물리치료학과나 재활학과에 진학하고, 공장설비를 보강하 기 위해 기술학교에 진학하고, 공동체 내에 있는 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교 대에 진학하는 겁니다. 공동체 생활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것이 아 니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하라고 하는데 이런 결정을 한다는 게 신기했 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즐겁고 사랑하는 것,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 지가 드러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릴 적에는 '아픈 할머니를 돕기 위해 의사가 되겠다'고 하고, '우리나라 를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좀 처럼 그런 꿈을 만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꿈꾸는 미래는 누구와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 "내 삶은 누구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돈과 성공이 직로 선택의 기준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 아니 이 시대에 도 전이 되는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번 여행에 함께 동행했던 아 들과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우었는데, 자신은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만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 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저 자신의 바램이기도 했고, 아들 에 대한 기대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을 이미 현실로 살고 있는 브루더호프 가 참 귀하다 싶습니다. 6) 안식 있는 삶 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삶의 또 하나의 보물은 바로 "안식"있는 삶을 살 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육체로 일하는게 서툰 저에게는 공장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는게 약간 버겁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에 매몰되지 않고 노 래를 부르며 일하는 모습과 일하는 도중에 갖는 티타임과 점심시간, 그리 고 5시면 일과를 마치고 저녁시간과 주말에는 개인적인 독서나 취미활동 을 하거나 가족과 공동체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35-


실제로 주변에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게 아니라 그저 가족의 생계를 위 한 책임으로 밤늦게까지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주일에도 예배를 드리 고 다시 직장으로 가야 하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직장이 아니더라도 금 요일 저녁 기도회부터 토요일, 주일을 교회에서 보내는 분들도 적지 않습 니다. 한국교회의 독특한 문화 안에 있는 특수성이기도 하겠지만, 목사로 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가 안식이라고 우기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 말 쉼이 있는 삶, 회복의 여백이 리듬감을 갖는 삶이었습니다. 함께 나누는 음식이 단순한 식사로.. 먹는 일로 그치지 않고, 서로의 사랑 을 나누는 자리가 되고, 자연스레 삶을 나누고 함께 즐거워하는 자리가 되 는 삶은 언젠가 경험해본적이 있었지만 분명 일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 만 이 공동체에서는 그런 삶이 일상이 되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하나 됨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외부자의 시선이라 그 리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수고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배우고 연주하고, 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산책을 하며 하하호호 웃는 모습은 너무나 좋아보였고, 그 안에 함께 머무는 것이 좋았 습니다. 한국에 귀국할 때즘에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 덕분에 지금 한국은 강제 안식중입니다. 따뜻한 봄이 되었지만 학교는 개학을 1주, 다시 2주 더 미루었고, 직장도 무급 휴가로 전환하여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교회에 모이기에 열심이었던 한국교회가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대 체하거나 오전예배 한번만 드리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주어진 이 여백에 많은 분들이 허전해하지만 한주 두주 지나면서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안 식, 가정에서 가족끼리 얼굴을 마주보며 누리는 안식을 경험하는 것을 보 게 됩니다. 물론 어서 이 어려운 시간들이 지나서 교회에 마음껏 모여서 뜨 겁게 예배하기를 고대하고, 얼른 학교로 직장으로 달려가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채우기를 바랍니다. 다만, 너무나 할일이 많고 바빠서 그저 마음 으로 느끼는 안식으로서의 은혜나 위로가 아니라 시공간 안에서 몸과 관 계들이 이완되고 편안해지면서 누리는 안식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 한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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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과 함께 Pet(애완동물)으로 키우는 젖소와 돼지

7) 공동체로 살아가는 삶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브루더호프 이야기는 바로 "공동체"입니다. 제 가 공동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점은 "거짓 공동체"와 "나와 너, 우리 와 그들의 하나됨"입니다. 여기서 공동체 이야기 전부를 하려는 것은 아니 지만, 분명히 브루더호프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는 근 거들을 짚으려고 합니다. 브루더호프는 이전에 지도자의 위선으로 어려움을 겪던 역사가 있었습 니다. 보통 사람들은 흑역사를 감추고 싶어하고 어떻게든 미화하려 하지 만 이 공동체는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고난의 당사 자였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오히려 그런 역사를 지나서 용서로 상 처를 치유하고 삶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성경이 노아 의 술취한 모습, 믿음의 조상들이 거짓말하는 모습,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 린 모습을 감추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벨에 머무는 동안 전체 모임이 있을때 한쪽 편에서 소란이 있었습니 다. 한 분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고, 다른 한분이 찾아가서 말을 했지만 끝내 화를 냈던 분은 모임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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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불편한 분위기를 외면하려 하지 않 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스캇 펙의 설명을 빌리자면, 거짓 공동체는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외면하 고 없던 일로 만들려고 하거나 그런 분위기를 만든 사람을 비난하는데 초 점을 맞춥니다. 나의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것, 나의 바램을 이야기 하는 것 은 공동체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우리)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할수 있습니다. 수년 전에 스캇펙의 "Different drum"이란 책을 통해서 거짓 평화에 대해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의 몸된 교회,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가정이 거짓 공동체로 가짜 평화만을 유 지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고 정말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바랬습니다. 끝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어느 한순간 진실하게 마주한다고 영구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버거웠습니다. 그 진지한 사랑 과 배척이 뒤엉키는 것을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할수 있을까?! 교회가 정 말 그런 진정한 한 몸됨을 경험할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브루더호프에 가기 전부터 그런 면에 있어서 관심이 있었고 이미 놀라운 용서의 이야기, 회복의 이야기를 접했지만 다시 한번 브루더호프는 참된 공동체의 면모, 그 다름과 불만을 억누르지 않고 대면하고 진지하게 대화 하고 다음으로 함께 나아가는 모습이 참 반갑고 응원이 되었습니다.

3. 내가 본 것, 그리고 내가 찾는 것 7박 8일 동안 다벨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머물면서, 아니 그 전에 공동체 방문을 희망한다고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부터 기대했던 것들을 많이 확인 했습니다. 짧지 않은 이 글을 통해서 그 내용들을 하나 하나 기록하고 하 니 속이 시원합니다. 다시 천천히 돌아봐도 브루더호프는 이 세상의 허물 을 다 싸매는 유일한 답은 아닌게 분명합니다.(그대로 한국의 어떤 교회 나 가정에 적용할 대안과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목할만한 하 -38-


나의 건강한 모델이라고 여겨집니다. 모델이라는 말이 상실해버린 인격성 을 다시 회복해서 생명력이라고 부를 만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섬김의 마음이 따뜻하게 살아있는 노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를 분명히 보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목마름으로 찾아 갔었는데 잘 왔다. 잘 다녀왔다 싶습니다. 하지만 더 큰 갈증을 느낍니다. 이번 방문 일정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닌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너무 겉만(좋은 점만) 보고 온 건 아닐까 아쉬움이 있습니다. 동시에 다음에는 5식구 모두 함께 가서 공 동체로 살아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더 분명하게 모아지는 초점은 '지금 내 가 살고 있는 삶을 어떻게 살까'입니다. 사랑과 섬김을 목표로 삼고, 하나 님을 신뢰하며, 진정한 공동체로 한 몸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 었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는 나를 어렴풋이라도 보게되어 기쁩니다. 이제 내가 찾는 것은 이런 '나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 그렇게 살아갈 내 가족, 내 친구, 내 형제, 내 교회, 우리 교회, 모든 사람입니다. 주님을 경외 하며 예수님을 따라가며 샬롬을 노래하는 또 하나의 삶, 우리의 삶을 기대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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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 다른 사람들, 다른 예배: 교회 이야기

다른 곳, 다른 사람들, 다른 예배 : 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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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 다른 사람들, 다른 예배 : 교회 이야기

1. 들어가는 말: 주일은 잘 보내셨나요?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요일이 찾아옵니다. 일요일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달 콤한 쉼을 누리는 날(?)이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교회 가는 날 입니다. 한동안은 기독교 사장님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들이 "주일은 쉽니 다"라는 안내문구를 걸어놓고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바쁘고 치열한 삶으로 치닫는 현대인들에게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날은 도리어 생계를 위해 돈을 벌기 좋은 날이 되었습 니다. 안식과 충전의 시간은 줄어들고 못다 한 공부나 일을 보충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날의 정체가 헷갈렸습니다. 일요일을 맞이하면 체감상으 로는 일주일의 마지막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이 날을 한 주의 첫 날, 주일 로 소개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이 헷갈리는 명제의 양 쪽을 오락가락 했지만, 결국 저에게 일요일은 주일이 되었고, 교회 가는 날, 예배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나중에에 책이나 강좌를 통해 본래 유대인 이 지키는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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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후 첫날 모이던 것이 주일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일은 단순히 교회에서 하루를 보내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쉼과 회복을 누리는 안식일이며,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날이라고 알지만, 정 작 어떻게 그런 주일을 보내야 하는지는 늘 고민입니다. 목사가 된 뒤로 주일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졌습니다. 주일 낮예배를 대 예배라 부르고 그 예배를 참석하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분들이 적 지 않았습니다. 그 일주일에 한번의 예배 마저도 늦게 오거나, 예배가 끝나 기 전에 자리를 뜨면서도 헌금을 하고 졸더라도 설교시간에 교회에 있으 려고 애쓰시는 성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바쁘고 피곤하다면 그 냥 하루 쉬시지.. 아니면 오후에 나오시든지.. 하는 안쓰러움과 얄미운 마 음도 들었다가,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와야 산다고 악착같이 예배에 참여 하는 헌신의 자세가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편 에서는 그 분들이 어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예배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주신 안 식일, 혹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주일은 어떤 날로 보내야 할까요?!' 여행 중에도 주일에는 머물던 영국과 네델란드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 에 참여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공간도 낯설고, 함께 예배 드리는 사람들 도 다양했고, 예배 형식도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주일과 예배 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소감을 나누고자 합니다.

2. 브루더호프,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일상으로서의 예배 먼저, 영국에 도착해서 처음 맞은 주일은 다벨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보 냈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이미 100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 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 어하는지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정 교단에 속해 있지는 않는 것 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구지 구분을 하자면 재세례파 전통 아래에 있습 니다. 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진정한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사 람들이 다시 진정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43-


출처: 브루더호프홈페이지

그들은 어린이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받는 유아세례를 인정하 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침례교처럼 회중교회(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성도들이 더 중심이 되는 형태)라는 점입니다. 예배, 시간과 사람 그리고 공간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그런 면에서 그들다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일 오전 10시30분이면 예배가 시작되지만, 이미 15분 전부터 사람들 은 모두 모여 있습니다. 외부인도 환영하지만, 주로 마을에 모여 함께사는 멤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갓난 아이와 그들을 돌보는 이들을 빼놓 고는 어린아이부터 연로한 어르신까지 모두 모입니다. 말하자면 전세대 통합 예배입니다. 그들은 모일 때 둥글게 둘러 앉습니다. 어디가 앞인지 구 분할 수 없고, 어떤 사람이 사회를 보며 주도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어떤 노래를 부를지, 어떤 성경 본문을 읽을지를 안내하고 참여하지만, 한국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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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찬양을 인도하는 리더, 예배 순서를 알려주고 마이크를 독점하는 리더 가 없습니다. 기도 역시 회중이 함께 기도하기도 하고 한 사람이 기도하기 도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공동체 전체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곳에 모여서 아름다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성경본문을 읽고, 몇몇 사람이 이야기를 하더니 예배가 30분만에 끝납니다. 그 이후에 소감 나눔이나 다른 활동을 기대했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흩어졌 습니다.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점심 전후로 사람들은 혼자 혹은 여럿이 산책길에 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집에서 가족과 어울리 며 화단을 가꾸거나 소풍을 간다고 합니다. 내심 이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릴까 기대했는데, 예배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습니다. 더 이상 모임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뒤에 너무 허전하고 어색 해서 저를 챙겨주던 호스트에게 이게 끝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무 엇을 해야하냐고 반문했습니다. 한국에서 참여하던 예배와는 다른 예배, 너무나 다른 주일에 어색하고, 실제적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 르는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호스트가 이런 저의 반응을 알았는지, 바람을 쐬러 나가는 친구와 동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에는 이미 20년전에 브루더호프에 정착한 한국인 가정이 저와 아들을 초대해 주셔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카드놀이와 대화를 하며 교 제를 나누었습니다. 평범하지만 중요한 일상 브루더호프에는 한국 교회에서 진행하는 성경공부나 훈련 프로그램이 없다고 합니다. 멤버가 되기 전에 목사와 함께 성경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유일한(?) 프로그램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삶을 보면 분명히 한국 성 도들보다 성경을 무척 가까이합니다. 가정에서 식사를 하기 전, 식사를 한 후에 노래를 부르거나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책을 읽기도 하 는데 대체로 5분 내외로 짧은 글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너 무 간단하지도 않고, 너무 부담되지도 않을 정도의 대화 시간이 있습니다. 검소하면서도 정성어린 식탁에서의 대화는 자연스러운 성경과 찬양을 통 -45-


해 하나님께로 주의를 돌리고, 다시 함께하는 가족, 친구에게로 관심이 흘 러갑니다. 함께사는 사람들의 일상 예배 이런 공동체의 분위기가 익숙해지니 주일 예배의 특징이 더 선명해졌습 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함께하는 삶이 주일에도 동일하게 이 어지는 것입니다. 주말에는 공장과 학교를 쉬지만, 이미 저녁 일과 후에 가 족과 친구와 시간을 보내거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위해 홀로 시간을 보내 던 모습이 주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살수 있는 환경은 이들만의 독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생계를 함께 책임 지고, 모든 일상을 함께 보내기에 그런 리듬을 가질수 있겠다 싶습니다. 주일이면 예배를 위해, 각 부서별 활동을 위해, 점심식사를 위해 목회자 와 봉사자들이 다시 일(?)을 해야하는 한국교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에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지금까지 보내던 주일과는 다른 톤의 안식과 사랑 을 느낄수 있던 소중한 주일이었습니다. 일상을 주일처럼 주일을 일상처 럼 하나님과 보내는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3. 국제장로교회, 같지만 다른 예배 영국에서 두번째로 맞이한 주일에는 선배목사의 소개로 국제장로교회 (International Presbyterian Church) 소속인 Ealing 교회에 갔습니 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생소한 교단인 국제장로교회(이후 IPC) 는 라브리를 시작한 프란시스 쉐퍼가 세운 개혁주의 장로교회입니다. 첫 IPC 교회가 바로 이 교회(Ealing church)였고, 이후에 영국과 유럽, 한국 에 IPC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영국노회(13개 교회)와 유럽노회(6개 교 회), 한국어노회(9개 교회), 한국노회(4개 교회)의 네 개의 노회가 구성되 어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IPC는 스스로를 개혁주의, 복음주의 교회라고 소개하고 있고, 지역 사회에 기반하면서도 국제(international)적인 구성 원들을 포용하려고 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한국에도 IPC 소속 목사와 교 -46-


회들이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승장, 박득훈, 박대영 목사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모두 건강한 교회,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기도 합니다. 예배, 시간과 사람 그리고 공간 Ealing 교회는 주일에는 2번의 예배가 있는데 아들과 함께 오전 11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머물던 숙소에서 1시간 30분정도 걸려서 지하철 과 버스로 이동하고 다시 5분여를 걸어서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예배시 작 30분 전즘에 도착했는데 10시에 있는 주일학교(어린이, 어른 양육 모 임)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은 있었고, 예배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더 모여서 예배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구성원은 정말 international 답게 여러 아시안계, 라틴계, 유럽계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 었습니다. 교회는 공원 앞에 위치해 있었고 건물은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단층이었 습니다. 그 안에는 100명 남짓 사람들이 모일법한 커다란 예배 공간과 주 방, 어린이들을 위한 방이 있었고 중앙에는 로비가 있었습니다. 출입구 쪽 에는 화장실과 소그룹실, 사무실이 위치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화장실 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공간은 아담한데 깔끔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린이도 이용하기 쉽도록 배려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외에도 건물 안쪽으로는 작은 정원이 있어서 예배실 옆으로 전면 유 리창을 통해서 보이는 초록 생명체들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낄수 있 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영국에 살던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교회 안쪽에 는 도로와 차단된 넓은 공간이 있어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마음껏 뛰놀수 있다고 합니다. 예배실 안에는 나무 의자들이 두 그룹으로 정면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있 었고, 첼로와 피아노 연주자들이 한켠에서 아름다운 찬송가 멜로디로 자 연스레 예배에 마음을 집중할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주보는 A4 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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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 안, 성찬이 준비되어 있다

를 3장 겹쳐서 총 12페이지짜리 였는데, 그 안에는 모든 예배 순서(찬송, 기도, 교독문)와 교회 안내와 광고가 빼곡히 적혀있었습니다. 예배는 광고-예배로의 부름-찬양-기도-성경봉독-교독문(죄의 고백과 용 서의 은혜에 대한 확신)-찬양-헌금기도-헌금(첼로연주)-찬양-설교-찬양-성 찬-찬양-축도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찬양이 좀 많았고 일어서고 앉는 횟수 가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낯설기는 했지만, 장로교 예배가 가지고 있는 예전(예배 형식)을 통해 감동있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설교였습니다. 사실, 이 교회를 가면서 내심 어 떤 설교를 들을까 기대했습니다. 이 교회를 소개해준 분 때문이기도 했고, 예배 전에 잠깐 만난 목사에게서 풍기는 유쾌하고 진지한 면이 그 기대를 더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오전 예배는 다른 기관 사역을 소개하기 위해 외 부 설교자가 설교를 했고, 그 내용은 환난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역에 동 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려는 건 알겠는데 본문이 짜맞춰 -48-


져서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설교, 검증할수 없는 체험들을 나열하는 설 교가 주는 밋밋함과 공허함이 아쉬웠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성찬 그래도 이 예배에서 참여해서 좋았던 점을 하나 꼽자면 성찬식이었습니 다. 마침 방문한 주일에는 성찬식이 있었는데(모든 성도가 참여할수 있도 록 2주마다 한번씩 오전, 오후를 번갈아 가며 성찬을 한다고 합니다) 성찬 은 목사가 주관하지 않고 장로가 인도하고 장로와 집사, 사모로 구성된 성 찬위원들이 진행했습니다. (아마 돌아가면서 하는 것 같습니다) 장로가 성 경을 읽고 빵 한덩어리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여러개의 큰 잔에 담겨있 는 포도주와 함께 성찬위원들에게 건네주어 회중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자 리에 앉은 청중들은 성찬위원들로부터 빵 조각을 건네 받아서 직접 빵을 떼고, 한 줄씩 옆으로 잔을 넘기며 모두가 함께 마셨습니다. 이전에 선교훈 련을 받으면서 앞으로 나가서 한 빵과 한 잔으로 하는 성찬을 경험했었는 데, 그 때 못지 않은 낯설음과 한 몸됨의 의미를 실감하는 성찬이었습니 다.(한 사람이 마실 때마다 닦긴 하는데 그래도 위생이 걱정되긴 했음) 낯설지만 편안하게 함께한 예배 이 교회의 담임 목사인 Paul과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는 흰색 와이셔츠 에 넥타이만 메고 사람들을 만나서 인사를 건냈고, 다른 사역자들도 자유 로운 캐주얼 복장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인 사역자인 유키 전도사는 동양계 사람들을 챙겨주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고 자신과 교회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예 배 후에는 차와 쿠키를 나누며 대화를 나누었고, 별도의 식사 없이 그렇게 모임을 마치고 나면, 저녁 6시에 다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영어로 진행되는 예배여서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앞줄에 앉은 노부부와 여러 사 역자들이 처음 온 방문객이 어색하지 않도록 잘 챙겨주었습니다.(근처의 맛있는 식당도 소개해주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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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짧지 않은 예배였음에도 장로교 예전이 가지고 있는 진실한 말씀과 찬양에 대한 자세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역자와 직분자가 예배 순 서를 함께 담당하는 모습이 새로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목사가 주도 하고 장로나 안수집사가 참여하는 성찬과 예배를 이루는데, 평상복 차림 의 장로와 집사, 사모까지 함께 예배 순서를 맡아 진행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부분은 서구 문화권에서 보이는 개인주의 성향, 평등의 가치가 반영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목회자, 직분자 중심으로 예배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 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이렇게 진행하려고 하면 성도들이 더 어색해 하리 라 여겨지지만..)

4. 런던 힐송교회, 전혀 다른 예배 콘서트 Ealing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맛있는 점심을 먹고, 3시에 있는 힐 송 예배에 갔습니다. 힐송 교회(Hillsong church)는 런던 내에서도 다양 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찾아간 곳은 뮤지컬 '위키드' 공연을 하 는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이었습니다. 이 극장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한번(수, 토요일에는 2번) 공연을 하는데, 주일에는 공연을 하지 않고 힐송 교회가 예배하는 장소로 공간을 내어준다고 합니다. 다음주는 도미 니언 극장(이집트 왕자 뮤지컬 장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걸 보니, 상황에 따라 예배 장소를 변경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배, 전혀 새로운 사람과 공간 힐송교회는 본래 호주에서 시작된 오순절 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와 같 은 교단)로 Brian Houston(브라이언 휴스턴) 부부가 1983년 호주 시드 니 Hills(힐스)지역의 학교강단을 빌려 시작해서 지금은 전세계 주요도시 에 캠퍼스(지부교회)를 두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특히 찬양사역이 특화되어 있는데, 힐송이라는 앨범을 녹음하면서 전세계적으로 호응을 얻 었습니다. 찬양 때문인지 지교회를 개척할때는 나이트클럽이나 뮤지컬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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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빌려서(음향의 이유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수 있습 니다. 실제로 극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축제같은 분위기(나이트는 안가봐서 모 르겠고;;;)였고, 예배 전부터 압도적인 음향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 다. 찬양팀의 찬양이 시작되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신나게 찬양을 했 습니다. 한국에서 이미 접했던 음악들이었지만 실제로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느껴지는 감동은 새로웠습니다. 한국에도 어노인팅, 마커스, 예수전도 단, J워십 같이 좋은 찬양팀들이 존재했지만, 대학시절 선교단체에서 전국 수련회때 혹은 콘서트장에서 경험했던 전문적이고 잘 준비되어서 회중들 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모습은 분명 달랐습니다. 이 시간의 예배 찬양팀은 여성이 리더었는데 한국의 예배와는 다른 분위기여서 그렇겠지만 파워풀 하고 열정적인 목소리와 몸짓으로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이런 예배를 드릴줄 기대하고 왔긴 했지만, 마흔을 넘긴 목사라서 그런지 너무 현란한 조명과 지나치게 큰 음향이 어색했던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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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지고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려는 진정성을 충분 히 알아챌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함께 갔던 아들이 눈을 번쩍뜨고 폴 짝 폴짝 뛰면서 찬양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왜 가야 하는건지, 자신은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에 가기 싫다고 하면서도 착한 아 들 노릇하느라 교회로 예배로 데리고 다녔는데, 처음으로 수동적인 자세 에서 능동적인 자세로 전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 이외에도 주위에 앉았던 사람들을 보면, 찬양이 시작하기 전에는 낯 선 사람들 투성이었습니다. 오후예배여서 그런지 어린아이는 볼수 없었고 (어린이 주일학교도 있음) 머리색이 다양하고 피어싱을 하고 화장과 옷차 림이 평소에는 볼수 없었던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하지 만 찬양이 시작하고 나자 모두 찬양으로 하나가 되고, 눈물을 흘리며 손을 들고 찬양을 했습니다. 순간 천국에 가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할까? 하 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연결, 찬양 + 설교 찬양이 끝나고 설교자가 등장했는데, 60살이 넘은 목사였는데 찢어진 청 바지에 모자를 눌러쓰고 체인목걸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예 수님이 소경의 눈에 침을 뱉고 두번에 걸쳐서 눈을 뜨게 해준 본문을 가지 고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자의 태도는 자신이 가진 한계를 내려놓고 런던 중심가에서 젊은 세대에 게 다가가려는 모습이 긍정적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설교 내용은 지 나치게 긍정을 강조하는 것이 이 본문의 메시지와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 구심이 들어서 조금 힘들었습니다.(순복음의 특징일수도 있지만;;) 하지만 함께 동행했던 청년은 자신에게 큰 힘이 되는 메시지였다고 소감을 나누 는 것을 들으면서 내가 판단하는 한계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 하며 힐송교회와 사역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지지하기로 맘먹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힐송교회 같은 비슷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뉴스기사: 홍대앞 욕망의 거리서 드리는 찬양) 2005년에 나이트에서 일회성 집회 를 열거나 청년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즈음에 천주교에서도 홍대 길거 리 미사를 드려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요 뉴스에서도 소개가 되었고 -52-


대형교회도 나름 소신있게 추진했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예배 장소의 부적절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혹감과 우려를 표현했고, 더 나아가 반 대와 비난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지금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카페 예 배 정도가 받아들여지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그 예배와 미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반응은 새로운 시도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였던 것으 로 기억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태도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힐송 예배에 함께 갔던 아들 은 흥분어린 목소리로 ''무료로 콘서트에 다녀온 것 같다, 예배가 너무 좋 다'고 엄지척!을 했고, 그때 이후로 BTS노래와 비슷한 빈도로 찬양을 듣 기 시작했습니다.(교회에서 드럼을 배우겠다고 하구요) 아들 이외에도 그 때 함께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을 봐도 힐송 예배는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 주어서 그들이 쉽게 하나님께 나아올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하나 놓는 일 을 감당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소비되는 예배를 넘어 교회되기 2시간 넘는 예배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데 런던 시내에는 이미 깜깜함 이 짙게 내려 있었습니다. 위키드 공연을 하는 곳에서 콘서트 같은 예배를 참여하고 나오니 무척 새로웠습니다. 다시 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 니다. 예배 도중에 찬양이 끝나자 뜨겁던 열기가 급격히 사그러드는 모습 이 아쉬웠고, 예배 후에 다시 수많은 대중 속으로 끼리 끼리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 예배가 실제로는 감동이나 위로를 위해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남았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콘서트 같은 찬양에 특화된 예배 만이 아니라 결국은 (서 두에 이야기한 고민 처럼) 예배와 하나님에 대한 관념적인 비인격성이 만 들어내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힐송 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이런 부분 을 보완하기 위해 예배 후 공동체 모임(또래별, 지역별?)을 통해 교제와 양 육, 봉사가 연결될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를 알수 있는데, 꽤 잘 하는 것 같 아서 좋아보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소비되는 예배, 하나님과 성도에 대 해 인격성이 상실되는 문제는 어떤 예배 형태를 갖더도 나타날 수 있습니 -53-


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할수 있도록 돕고 실제로 성도들과 소 통하며 관계를 맺게 하는가가 중요한데, 힐송예배는 찬양이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5. 이준기념교회, 이민교회의 일상과 선교 마지막으로 소개할 교회는 네덜란드 덴하그에 있는 이준기념교회입니 다. 이 교회는 네델란드 한인 교민들이 주축이 되어 개척된 교회인데, 2007년에 기독교대한감리교회를 통해 헤이그이준기념교회가 되었습니 다. ('이준'은 구한 말 개화파로 독립협회와 감리교회에서 활동했고, 1907년 네덜란 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국차회의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밀사로 파견되었지만 실패했고, 이 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었습니다. 그는 이 임 무를 실패한 후에 네덜란드에서 죽어서 헤이그에 묻혔고, 1963년에 한국으로 봉 환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감리교에서 이준 기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저는 이미 5년전인 2015년 1월에 이 교회에 한달여 출석했었습니다. 처 형네가 네덜란드에 살고 있어서 방문했다가 목사님의 배려로 한주 설교 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번에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가기전에 다시 방문 했는데, 낯설기보다는 익숙하고 편안했습니다.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 면서 느꼈던 편안함은 이미 알고 있는 곳에 와있다는 이유일지도 모릅니 다. 하지만 그 편안함을 헤집고 들어가보면 전형적인 이민교회의 매력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외국 땅의 한국교회 이민교회는 자연스레 한국인이 주축이 됩니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현 지인, 외국인들도 그들의 가족으로 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언어적 장벽 이 존재하고, 문화적 다양성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민교회는 앞서 언급한 IPC교회가 추구하는 문화적 다양성과는 다릅니다. 한국적 정 -54-


이준기념교회

서(한국을 떠난 시점에 가지고 있던 주관적 가치)가 기초부터 교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렇기에 예배도 한국에서 드리던 예배와 거의 같습 니다. 부분적으로 헌금과 광고, 설교의 순서가 달랐지만 찬양팀, 성가대, 특송, 설교, 광고 모든게 익숙합니다. 외국에서의 한국어 설교와 한국어 찬 양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사실 이런 류의 편안함은 이민교회가 아니더라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일수록 더 뚜렷한 특징이 됩니다. 분명히 구성원은 다양한데 한쪽에 그 모멘텀이 쏠려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모이고 있는 주요 멤버들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동화되기는 어렵습니다. 개독교 논란 과 가나안 성도를 양산한 한국교회가 도전받는 부분도 자신들의 편안함 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복음이나 하나님의 뜻이라 포장하는 것과 연관 된 경우일수 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워하고, 나 아닌 타인과 관 계 맺기에 서투르거나 거부하며, 자신의 편안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 -55-


렇다고 이 부분을 질책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 다. 해외에 있는 한인 중심의 이민교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될수 밖에 없는 환경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오고 가는 사람, 맞이하고 보내는 사랑 이민교회는 유학생들과 주재원들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동시에 빠져나가 기를 반복합니다. 새학기가 되면 유학이나 교환학생으로 온 청년들로 청 년부가 부흥하기도 하고 정 반대로 위축되기도 합니다. 주재원으로 온 가 정은 몇년 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올때는 어린이(주로 학령기 전이나 초등학생)들이 이민교회 어린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데, 이들이 떠나가면 청소년기는 주로 친구들이 다 떠납니다. 결국은 교민 자녀들만 남게 되고 외로운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이렇게 사람이 오고 가는 상황에 서 그들을 맞이하고 다시 떠나 보내다보면 다양성을 우선시하기가 어렵습 니다. 잠깐 있다 가는 사람에게는 추억이지만, 교회 건물 운영비를 감당하 고, 밥을 해먹이는 일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 아래서는 건강한 교회일수록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민 성도들 도 끝없는 환대와 사랑을 베풀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여기서 헤아려지는 어려움은 정서적인 문제입니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안전해야 하고, 보 내기 위해서도 역시 안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교회들, 굳어져서 새로운 가치들이 수용되고 시대에 맞게 복음을 통역해내기 어려운 부분 도 이런 부분(정서적인 안정을 원함)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주체로 서 교회의 멤버가 되어 자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모 임을 이루기 위해서 당연히 그들이 자신의 공간을 열어 환대하기 위해 그 들에게 익숙한 안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상적인 목표로는 기존에 이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 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되는 교제, 풍성한 관계를 누리며 안전하게 느끼 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 되고, 나의 익숙함이 주 는 편안함을 넘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있는 샬롬을 누린다면, 얼마 든지 변화할수 있고 포용하면서 자신을 내어줄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56-


이 교회에서 그런 모습도 보았습니다. 5년만에 다시 만난 목사님은 이전 보다 더 사랑이 흘러 넘쳤고, 모든 것을 내어줄것 같은 열정을 쏱아내고 있 었습니다. 마침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교환학생으로 머물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청년이 인사를 했는데, 목사님께서 회중앞에 소개하고 기도를 하는데 듣는 제 마음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정말 축복하는구나 싶어 고맙 고 따뜻했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님께 인사를 건네니 반가운 얼굴로 식사 를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한주 들렀다 가는 내게도 이토록 사랑을 베풀려 고 하시는 모습이 대단하게 여겨졌습니다. 처형 내외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목사님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교회를 위 해 수고하고 진실하게 동역하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마음에서 사랑어 린 응원이 나왔고,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목사님과 성도들이 지치지 않도 록 자신들을 돌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생겼습니다. 한계 속에 빚어내는 최선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눈여겨 보았던 점은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 리는 부분이었습니다. 모든 연령대가 함께 예배드리다가 마지막 설교 시 간에는 어린이, 청소년들은 별도 공간으로 이동해서 따로 모임을 합니 다.(교사들은 1부 예배를 따로 드린다고 합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 니, 간단한 성경공부(?)를 하고 자유롭게 게임도 하고 나가서 동네 아이들 과 축구도 하며 즐겁게 놀았다고 합니다. 사역자가 목사 한명 뿐이고, 교사 가 부족해서 어쩔수 없기도 하겠고, 한국에서 온 열정있는 봉사자 덕분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교회 주변이 공원이라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안전 한 공간이 충분하다는 점도 그 즐거움의 한 부분일 것입니다. 이민교회를 보고 한국교회를 생각해보면 일상과 선교가 크게 다르지 않 구나 싶습니다.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이루었는데 그곳은 한국에 서는 교회를 찾지 않던 이들에게 낯선 타국 땅에서 만날수 있는 문화적 편 안함을 제공합니다. 그 것이 징검다리가 되고 오고 가는 이들이 복음을 듣 고 신앙을 갖게 되는 통로가 됩니다. 어쩔수 없는 인적 물리적 한계들을 가 지고 있는 일상이지만, 목회자와 성도들이 자신 안에 있는 사랑과 시간과 -57-


열정을 하나님의 사람들(교회로 모이는 모든 이)을 위해 내어 놓는 일상을 채웁니다. 이것이 그들의 일상이며, 그들의 선교였습니다. 이런 교회를 보고 한국의 교회를 보면, 한국교회 역시 크든 작든 언제나 한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혼자 잘한다고 부흥할수 있을까 싶은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막상 봉사자는 적고, 실제 예배나 훈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 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사람) 안에, 그 예배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함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안에서 누리는 샬롬),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편안 함이 있다면 우리의 일상도 하나님 앞에 함께 하는 선교가 될수 있지 않을 까 싶습니다.

예쁜 꽃을 찍었는데 교회가 있네요:) -58-


6. 나가는 말: 나의 예배, 우리의 예배 겨우 20여일 남짓의 여행 동안에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 한 형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각각의 예배마다 느끼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예배 한 것이 하나님이라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모든 공동 체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뻔한 결론이 되어버린것 같습 니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속한 교회, 내가 드리는 예배가 가진 단점, 약점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는 신실한 성찰을 요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게 되고 마음이 떠나 고 민하게 만드는 교회에도 장점이 있다는 희망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내 주변의 교회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비교적 교세가 강합니다. 어떤 분들은 장로교 아니 면 이단이라고 하는 분도 계실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단이나 교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저 집주변에 있는 교회, 친구가 오라고 초대 한 교회에 다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다른 교파 라고 하더라도 예배를 참여할때 느끼는 정서적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목 사들 세계(?)에서는 신학적 차이를 가지고 자유주의자, 근본주의자 운운 하며 자신이 더 옳다고 정색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성도들은 교파보다는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에 따라 자신들의 영역을 구분합니다. 이런 정 서 아래서 한국교회는 한편에서는 만인제사장의 기치를 강조하며 자유 민 주주의 흐름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아버지 나 군주 형태를 모방한 담임목사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조직으로서 의 교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 안에서도 각 교회마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합니다. 한국교회가 무엇이 잘못되었다 어떻게 해야한다 진단하고 처방하는 이야기는 많습니 다. 필요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예배가 어떤지, 다른 이들은 어떤 예배를 드리는지 볼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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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는,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싶 은지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마주한 온라인 예배 시대 최근에는 코로나 19를 계기로 온라인 예배가 대중화되었습니다. 일부 대 형교회들에서 지교회에 영상을 송출하던 형태로 기존에 사용되던 방법이 었지만,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 때문에 모임을 자제해야 할 필요에 의해 자 발적으로 시작되었고,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 성적으로는 이해하고 수용하려 하는데, 정서적으로는 어색하고 어려워하 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설교를 예배의 핵심(또는 신앙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 로 여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목사님 설교를 온라인으로 많이들 들어왔습 니다. 저 역시도 그냥 틀어놨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집중하게 될 때도 있 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경험 과 사회적 흐름과 별개로 온라인 예배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합니다. 예배 가 단순히 어떤 모임에 참여하고 어떤 행위를 하는 것 이상의 초월적 신비 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모여도 대부분의 성도는 보고 듣는 수 동적 행위가 대부분이지만, 스크린을 통해서 단절된 시공간에서 온라인으 로 보고 듣는 수동적 예배는 그 본질적 가치(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 가운 데 하나님이 임재하심)는 어려움을 갖습니다. 물론, 그래도 설교에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혼자 예배하던 때처럼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잘해나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사람 없는 예배, 삶으로 소통되는 일상이 빠져버린 예배, 혹은 그 안에서 풍성하게 되는 복 음은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체감하기로는 현란 한 광고지 같은 헛헛함을 느낍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밀란의 대주교, 마리 오 델피니라는 분이 빈 성당에서 회중없이 방송 미사를 집전하며 한 이야 기를 읽게 되었는데 참 공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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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것과 TV 미사를 시청하는 것의 차이는 따뜻하고, 빛 이 나고, 기쁨을 주는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것과 불 사진을 보는 것의 차이와 같 습니다."

예배, 그리고 사람들, 교회 이야기 이 글을 통해서 나누고 싶은 내용은 주일과 예배 가운데 존재하는 사람 과 사람, 그들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과 누리는 사랑입니다. 그 가운데 온전하게 자리잡는 샬롬이 핵심입니다.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다양한 사람들 과 같은 시공간에 함께 하며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쉬운 부분 한계가 없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느껴지는 예배를 기억하며, 그 순간을 사랑하고, 함께 했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목사도 성도도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의 한계에 대한 판단이 너무 엄격한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습니다. 아니 어쩌면 정 반대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너무 너 그럽기만 한 분도 있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그 안에 작동하는 나 중심성을 인정하며 내 모습을 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모습을 바라는지를 헤아리고 대화와 소통, 연대와 협력이 자연스레 진행 되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연구소를 시작하고 나니 복음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붙들고 지 내다보니 복음 아닌 것들이 복음 행세를 하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내게 익숙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일뿐 그게 과연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아닐수 있다는 것을 알고나니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나 면 내가,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할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어린 마음을 갖 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고, 한 교회로 만난 타인에 대한 사랑 을 주고 받을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19가 확산되던 첫 주는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렸습니 다. 브루더호프에서처럼 산책을 하고 카드 놀이도 했습니다. 또 한주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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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교회에 가서 목사님과 성도님들과 마스크를 쓴 채 오직 눈빛으로만 사랑을 주고 받았습니다. 함께 여행했던 큰 아들과 힐송 라이브 예배를 보기도 하고, 반주하러 간 아내를 빼고 남자들끼리(세아들 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설교를 하기 도 했습니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드렸던 예배들이 내 삶의 예 배에도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이 보시는 사랑을 누립 니다. 나와 다르지만 나 같은 그 사람과 함께 웃고 떠들며 먹고 노래하는 일이 참 좋습니다. 이것이 나의 예배였고, 우리의 예배이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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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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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질서의 비밀, 복음으로 읽기

1.들어가는 말: 신세계 질서의 비밀과 기독교 5-6년전에 교회에서 사역할 때, 한 권사님이 제게 책을 한 뭉치 가져오셨 습니다. 직접 읽으셨던 책, 새로 산 책들이었는데, 그 책들을 보면서 권사 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나에 대한 아껴주시는 마음을 느낄수 있어습 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 책(신세계 질서의 비밀)의 제목이 수상쩍었고 목 차를 보고는 실망감이 컸습니다. 이름부터 포스가 남다른 이 책은 제가 보 기에 음모론에 관한 책입니다. 기독교에서 나름 신실하고 영험하시다는 분들이 열변을 토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저 역시도 어렸을때 무서워하면 서도 알아야 한다(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접하면서 자연스레 그런 음모론이나 강경한 주장들이 갖는 한계를 인식하고는 그런 이야기를 구지 찾아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연구소로 책을 옮기면서 이 책을 다시 보았습니다. '이제 그만 휴지통으로 보내자' 생각했는데, 순간 이 책을 주셨던 권사님의 얼굴 이 어른거렸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온 뒤에 연락을 따로 드린 적은 없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권사님의 순수하고 신실한 신앙 과 성실과 애정이 뭍어나는 삶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 권사님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앞으로 내 자녀가 내 친구가 읽어볼지도 모르는 주 제이니 제대로 한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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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반나절이면 읽을수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는 동안 이 책의 저자가 느꼈을 불신과 두려움이 그려졌습니다. 그 마음을 생각하 니 도리어 제 마음이 먹먹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말씀을 붙들지만 동시에 그 말씀이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경험하지 못하 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류의 음모론으로 사람을 휘두르는 것이 이단이나 사이비종교의 전통이나 철학, 사상만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도 깊이 베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우리는 저마다 혹은 함께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경 험합니다. 이때 한편에서는 나의 무능력과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서 답을 찾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모든 책임과 원망을 외부에서 찾고자 합니다. 음 모론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 면 그냥 순응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문제를 해결 하려는 시도들을 합니다. 그런 개혁의지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열망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제시하는 것이 종교이고, 이용하는 것은 이단 사이비입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주목받게 된 신천지 같은 이단 역시 (자신들의 탐욕을 담은) 신세계 질서를 꿈꾸고 있고, 그 일을 은밀히 진행 하려 한다는 점에서 신세계 질서의 비밀의 한 아류라고 볼수도 있을 것 같 습니다. 하지만,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는 이런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소망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명으로 받아 들입니다. 이 간단해 보이는 내용이 당연해 보이고 그래서 어떻다는건지 의문이 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내용이 음모론/신세계 질서에 대한 우려를 벗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수 있는 기초가 됩 니다.(복음은 어렵지도 않고 비밀도 아닙니다 ㅠ.ㅠ) 이 글을 통해서 음모론을 소개하는 책 내용을 짚어보고, 이런 음모론의 한계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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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세계 질서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 책이 말하는 신세계 질서의 비밀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가지 고 있는 음모'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같은 조직 들이 말하는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삶을 피지배층으로 만들고, 자유를 박탈하려 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지배 자가 적그리스도이다는 내용의 음모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머리말 에서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주인공 네오에게 찾아와서 겉으로 보 이는 현실과 그 이면에 움직이는 실제의 삶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는 장면 을 인용하며, 음모의 실체를 알라고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목적은 이렇습니다. 이 책은 누가 프리메이슨인지, 어던 단체가 신세계 질서를 따르는 지를 폭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는, 이러한 거대한 음모가 추상적이고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매우 폭넓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정 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속기 쉽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애썼다. 무엇보다 예수께 서 말씀하신 바 "하늘의 모습은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들은 놓치는 위선자"(마 16:3)들이 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썼다. (p.8 머리말)

이런 목적을 가진 이 책은 이 음모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음모를 꾸미 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음모를 실현하려고 하는지를 설명합 니다. 2-1. 세상에 드러난 음모? 먼저, 그 음모의 내용은 비밀조직 일루미나티가 재앙과 사고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밀히 실행되는 계획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요? 저자는 이것이 소설과 카드게임을 통해서 세상에 밝혀졌 다고 합니다. 그들이 은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테러와 재난, 재해, 정치권과 언론의 매수, 개인정보 수집,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것, 병 을 만들어 돈을 버는 제약회사, 인구 조절(대량 살상 계획), 에너지 위기 유 발, 기독교배제, 인본주의 역사와 진화론 과학 주입, 개인의 자유와 권리 억압, 적그리스도의 등장, 3차 세계 대전을 통한 세계정부 수립 같은 내용 -66-


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이 음모가 일루미나티 소설과 카드게임, 덴버공항 벽화, 자연재해를 통제하는 무기, 원인모를 질병과 연관된 구름 같은 것입 니다. 그들의 계획이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세상에 드러났다고 합니다. *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일루미나티의 계획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 고 있기도 합니다. 2-2.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 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런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데, 저자는 이런 음모를 꾸미는 세력으로 저자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뉴에이지, 장미십자회를 지목합니다. 프리메이슨 프리메이슨은 중세교회나 성곽을 건축한 석공 조합에서 유래했지만, 16 세기 종교개혁으로 석공 건축이 쇠퇴하면서 일반 단체로 전환되었다고 합 니다. 저자는 이 프리메이슨이 겉으로는 친목 봉사단체를 표방하지만 이 집트 신비주의 종교와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를 믿고, 비밀리에 운영되 는 거대 음모 세력이라고 소개합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의 50%가 프리메 이슨 소속이고, 미국의 대부분의 언론사 CEO, 이사, 편집장, 기자, 앵커, 금융, 자원, 에너지, 농업, 식품, 유통, 제약, 통신, IT, 군수, 미디어 관련 대 기업도 대부분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그래서 세상을 움직 일 수 있다는 논리인듯 합니다) 프리메이슨의 흔적을 찾는 기준은 피라미드(삼각형), 독수리, 호루스(이 집트 신화 속 인물), 전시안, 오각별, 육각별, 햇살, 횃불, 여신, 666,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나올때마다 그 세력의 일부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세력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모르고 몸에 지니고 다녀도 악마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해설: 하지만 이집트 사람 들은 호루스의 눈을 치유의 부적으로 사용했다고 하죠) -67-


프리메이슨 로고

호루스의 눈

전시안

이외에도 경제문제를 프리메이슨의 음모로 봅니다. 선진국인 미국의 빈 익빈 부익부 현상, 연방준비은행(FRB), 빚, 경제공황, 물가상승, 달러화의 몰락 예측 같은 내용을 프리메이슨과 연관시킵니다, 그 이유로 미국 경제 에 주요한 영향을 끼치는 로스 차일드 가문, 록펠러 가문, J.P. 모건이 프리 메이슨이라는 식입니다. 프리메이슨이 하려고 하는 일은 무시무시(?) 한데, 저자는 전직 MI-6(영 국 정보기관) 요원이었다가 프리메이슨 연구가가 된 존 콜먼이 제시한 '프 리메이슨 300인 위원회가 다음과 같이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통합운동 을 하고 있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1) 300인 위원회의 감독 아래 통일된 교회와 금융제도를 가진 단일세계정부One World Government를 확립한다. (2) 모든 국민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철저히 타파한다. (3) 마인드 컨트롤과 브레진스키가 말한 '테크노트로닉스Technotronics, (감시 사 회)를 이용하여 모든 개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4) '탈공업화 성장 제로 사회'라는 정책에 근거하여 모든 공업화와 핵에너지에 의한 전력 생산에 종지부를 찍는다. 컴퓨터와 서비스 산업은 예외다. (5) 마약 복용을 부추기고 합법화시킨다. 포르노를 '예술' 로 널리 받아들이게 하고 마침내 일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6) 대도시 인구를 격감시킨다. (7) 과학 발전은 300인 위원회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제외하고 억제한다. (8) 선진국에는 국지전을 일으키며,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전염병을 퍼뜨리고 기근 을 일으켜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30억의 사람들을 2050년까지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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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량 실업을 일으켜 국민의 도덕심과 노동자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린다. (10) 위기 상황을 연달아 일으키고 이를 '관리' 함으로써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 운명 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11) 새로운 '컬트' 들을 들여오고 이미 제 몫을 하고 있는 록 그룹 같은 것들을 밀어 준다. (12) 세계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정치적인 혼란을 빚게 한다. (13) UN,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국제사법재판소ICJ와 같은 초국가 적 제도를 강화시키고 국지적인 기관들은 약화 혹은 폐지시킨다. (14) 모든 정부의 중추에 침입하여 정권을 타도하고 정부가 대표하는 국가 주권을 내 부에서부터 파괴한다. (15)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단체를 조직하고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그들과 교섭한다. (16) 미국의 교육을 통제하고 철저히 파괴한다. (p.155-156 프리메이슨의 조직과 운영)

일루미나티 일루미나티는 예수회 소속 교수가 프리메이슨 사상과 계몽주의 사상(루 소)을 결부시켜 1776년에 창립했다고 합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모든 왕 정과 시민사회와 종교와 가족제도와 사유재산을 말살하고, 루시퍼를 믿 는 종교 하의 단일 정부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독교에 기초한 유럽 왕조를 타도하는(계몽주의로 대변되는 인본주의와 자유, 평등을 내건 혁명사상을 확산시켜 전통적 토지 귀족을 밀어내고 근 대 정부를 세우는) 시도를 한다는 겁니다. 일루미나티가 일으킨 혁명으로 유럽의 왕정 국가에 혼돈을 주자 일루미 나티는 반역집단으로 여겨져 1984년에 금지 해산되었는데, 일루미나티 조직원이 소지하고 다니다 벼락을 맞아 죽은 뒤에 발견된 <시온의 정서 (The Protocols of Elders of Zion)>로 인해 세계 정복 비밀 전략이 노 출되어 박해를 받았고, 그 이후에 프리메이슨 조직으로 숨어 들어와서 상 층부를 점령하고 있다고 합니다.(역사가들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온의 정서'라는 책 자체가 오히려 유대인을 박해하려는 음모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리메이슨 하부 멤버는 이 사실을 알수 없고, 음모들을 추진하는 고위직은 모두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핵심 지도층?)라는게 -69-


저자의 설명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이 하려고 하는 일로 제시된 7대 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개별 국가의 파괴 (2) 모든 종교의 파괴 그러나 사탄주의는 제외 (3) 가족제도 폐지 (4) 사유재산 제도 폐지 (5) 고율의 상속세로 상속권의 폐지 (6) 애국주의 파괴 (7) 일루미나티의 통제를 받는 국제 연합 아래 세계정부 창조 (p.164 사탄의 빛을 받다, 일루미나티)

뉴 에이지 New Age 뉴 에이지는 유일신을 부정하며, 범신론적이고, 개인이나 집단의 영적 각 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인데, 저자는 이를 '과학주의, 진화론, 유물론적 인 생명관을 토대로 한 인간 중심의 낙관적인 생활철학과 무신론을 골자 로 하는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결과로 신본주 의에서 인본주의로 변질되었고, 윤리관이 무너졌고, 범죄와 이혼과 자살 이 급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마인드 컨트롤, 최면술, 요가, 명상, 마법 등을 통해 세 계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종교통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 가 꼽는 이들의 활동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WCC(세 계 교회 협의회)를 비롯한 기독교계에 침투하여 타종교와 대화를 하게 한 다고 합니다. 특히 이런 흐름에 있는 목회자로 로버트슐러(LA 수정교회, 최근에 파산한 대형교회), 릭워렌(새들백 교회,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한 국에서도 유행), 조엘 오스틴(레이크우드 교회, 긍정의 힘 저자)을 의심하 고 있고, 이중에서 로버트 슐러 목사는 통일교(교주 문선명이 프리메이슨 이라고 함)와 교류 했었고, 릭워렌은 프리메이슨 멤버라고 강조합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뉴 에이지(New Age)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습니다. -70-


(1)이 계획의 주된 목표는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단일세계종교와 단일세 계정부를 세우는 일이다. (2) 이 운동은 비밀스런 의식, 마법, 신비주의, 바빌론 종교를 부활시킬 것이다. (3) 이 계획은 뉴에이지 메시야 즉, '666' 이라는 숫자를 지닌 적그리스도가 육신 으로 와서 통합된 뉴에이지 종교를 이끌고 '신세계 질서'를 이룩하게 될 때 완성 될 것으로 믿는다. (4) 영적 안내자들은 인간이 뉴에이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적그리 스도가 세계적인 대스승으로 인류에게 존경을 받는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5) 이 운동의 표어는 사랑, 평화, 단결이다. (6) 이 운동에 대한 교육은 전 세계의 모든 사회 계층까지 전파되고 진행될 것이 다. 특히 모든 학교에서 뉴 에이지 교리를 주입시키고 교실은 뉴에이지 교육장으 로 사용될 것이다. (7) 모든 인류에게 '인간 자신이 신령한 신'이라고 믿도록 교육한다. (8) 과학과 뉴 에이지 세계종교는 하나다. (9) 이 운동의 지도자들과 신봉자들은 예수는 신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님과 기 독교의 교리는 배척해야 함을 전해야 한다. (10)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은 뉴에이지 세계종교에 종속되어야 한다. (11) 이 계획을 거부하는 자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특히 반대하는 크리스천들은 모두 몰살시켜서라도 세계를 정화시킬 것이다. (p.173 성공의 유혹, 뉴에이지)

장미십자회 저자에 따르면 장미십자회(Rosicrucians)는 1400년대에 독일 귀족 크 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고대 종교와 카발라, 연금 술과 기독신앙을 혼합한 중세 유럽의 오컬트적인 비밀 결사라고 합니 다.(오컬트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으로 물리적 영역 이외의 다른 영 역에 대한 탐구를 하는 형이상학적인 과학이라 할 수 있으며, 영성주의 또 는 영성과 관련이 더 깊다. 출처: 위키백과) 이 단체의 상징을 보면, 십자가는 구세주의 지혜(구속과 부활)를 상징하 고, 장미는 연금술에서 더러움을 정화시켜 완전으로 가는 작업을 의미한 다고 합니다. 이들은 장미 십자가를 통한 명상으로 절대적 신성과 만나는 신비 체험을 할수 있다고 여겼고,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17세기 -71-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끼쳐서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학을 결합시켰다고 합 니다. 19세기에 와서 프리메이슨이 장미십자회의 사상을 흡수했다고 하 는데, 장미십자회의 궁극적 목적은 개개인의 영화(spiritualization, 영적 인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유사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실제로는 비전(비밀리에 전수되는)의 원리를 따른다고 합니다. 저자가 우려하는 이 단체의 특징은, 영성의 추구가 영적 연금술을 통해 초월적 존재가 된다는 생각(신일 합일 또는 일반 인간이 모르는 신의 경지 에 이르게 된다고 여기는 신비주의, 성경보다는 주로 체험에 근거함, 단학, 증산도, 타 종교들도 이런 체험을 이야기함)이며, 영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비밀 지식 전수에 관한 부분입니다. 장미십자회 계열 오컬트 교단 중에 AMORC (Ancient andMystical Order Rosac Crucis)가 25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국제조직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합니다. AMORC는 12개의 계급을 갖는데 10-12계급은 여러차례 환생을 거쳐 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2-3. 신세계 질서의 구체적인 모습 앞에서 이 비밀스러운 음모를 진행하는 주체로 지목받은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뉴 에이지 세력(?)과 장미십자회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목적 을 설명했지만, 저자는 이들이 하려는 구체적인 내용도 소개하고 있습니 다. 그것은 세계정부수립, 베리칩, 마인드 컨트롤 노예, 인구축소계획, FEMA수용소, UFO를 통한 미혹, 종교통합, 세계정부 통치자(적그리스 도)입니다. 세계정부수립 먼저 이 음모세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정부의 수립입니다. 세계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위기감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각 나라들을 통제불능의 혼 란으로 몰아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루미나티의 비상체제를 수용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국제적인 기구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활동 과 그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모든 행동을 음모세력으로 간주합니다. 그래 -72-


서 UN은 물론이고,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 국제통화기금 IMF, 국제형사재판소(세계법정, 대량학살, 반인륜 범죄, 전쟁 범죄, 공격범죄를 다룸), G-20, EU, 아시아연합, 아프리카연합, 아메리카 연합에 대해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음모론자들은 어 떤 어려움이 생기는 것 자체, 혹은 그로 인해 국제적인 도움을 받거나 연대 를 하려고 하면 비밀세력의 세계정부수립을 떠올립니다) 베리칩 베리칩은 사람 몸 안에(피부 밑에) 삽입하는 작은 칩으로, 의료정보와 그 외에 정보들을 넣어 ID 구별을 하게 해주는 칩입니다. 음모론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 칩은 앞으로 단일세계정부가 세워졌을 때 국민에 대한 감시 와 통제 수단이 될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또한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온 짐승의 표 666이 될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 계 시록의 666은 로마황제를 돌려 표현한 것일뿐, 문자적 의미로 실제 어떤 표를 받는게 아니라고 설명했고,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어떤 표를 받는 것 같은 외부적 형태에 의해 결정되는지도 의문이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 각합니다) 마인드 컨트롤 노예 마인드컨트롤 노예에 관련된 내용은 만약 사실이라면 무척 심각한 이야 기입니다. 캐시 오브라이언('뜨거운 역사, 추악한 진실'의 저자)이라는 여 성이 미국의 정부기관 마인드 컨트롤 연구에 이용되었고, 그 결과로 성적 인 대상으로 삼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 컨트롤에 대해 저자가 소개한 부분을 읽어보면 그 공포감을 헤아려볼수 있습니다. 캐시는 항공우주국NASA이나 군사 기지에서 모나크 프로젝트[정신을 해리(의 식,기억,정체감,지각 등의 붕괴)시키는 잔혹한 충격기반 마인드 컨트롤]에 따른 마인드 컨트롤 훈련을 받았다. 전기 충격으로 고통이 가해지고, 최면이나 고주파 로 기억과 인격이 분리되면 무의식 상태가 되어 자유의지와 사고 능력을 잃게 되 며, 명령받은 일을 의문 없이 수행하게 된다. (p.220 마인드 컨트롤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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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제시하는 마인드 컨트롤은 일루미나티가 단일 세계정부를 세우 기 위해 개발한 인간의 정신과 행동 통제기술이라고 합니다. 일루미나티 의 마약 운반, 매춘, 포르노 촬영, 대중 음악, 암살, 변태 성행위 등에 사용 할 노예를 만드는데 적용되고 있다고 확언합니다. 그런 가능성을 엿볼수 있는 유사한 사례로 LSD(환각제)를 활용한 심문 시도, CIA와 미군 실험 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뇌칩 그 외에도 두뇌칩을 통해 인간의 뇌파를 읽고 프로그래밍 된대로 사물을 조종할수 있게 되었다는 BBC뉴스를 인용하면서, 이 기술을 역으로 이용 하면, 외부전자기파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조종할수 있다고 주장 합니다. 그 사례들로 레이디 가가, 비욘세,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팝스타 들(첨가: 한국은 설리, 최진실의 죽음을 그들의 조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도 있습니다)이 마약, 알코올, 이혼하는 삶을 사는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이런 모습이 그들이 조종 받고 있거나 그 조종 받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 도라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스타들을 일루미나티와 연 관지어 보려는 시도는 이들의 뮤직비디오 같은데서 호루스 전시안이나 마 귀 뿔 싸인, 피라미드 모양 같은 (앞서서 언급했던 문양들) 장면들이 나오 기 때문입니다. 인구축소계획 인구축소계획은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로버트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기인하는데, 지구에 살기에 적당한 인구수를 30억명정도로 추산합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질병이나 재해를 일으키고, 혹은 강압적으로 학살해서 라도 인구를 축소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고 합니다. 저자와 음모론자들은 엘리트들이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생물학 무기를 개 발한다고 의심합니다. 예를 들면, AIDS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고, 신종 전염병(신종플루와 사스, 슈퍼박테리아)이 생기고 있고, 백신들이 효과가 미흡하거나 부작용을 일으키고, 식품첨가물(아스파탐 : 설탕의 200배 단 맛을 내는 화합물질로 껌, 과자, 다이어트 음료, 막걸리, 소주, 코크-제로 -74-


등 5천종에 달하는 다이어트 식품에 사용되고 있다) 역시 '두통, 현기증, 정서장애, 구토, 구역, 복통, 시력저하, 설사, 발작, 경련, 기억상실, 피로, 허탈감, 수면 장애, 두드러기, 심박동 변화, 생리 주기 변화'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충치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불소 성분이 인간의 몸에 유해한데 도 이런 것들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속이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겁 니다. 이외에도 식량 생산을 감축하고 곡물 가격을 올리고, 석유 가격을 올 려서 국제적인 분쟁을 유발해서 인간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음 모 세력이 이런 일을 꾸미는 목적은 인구를 줄이는 것과 세계 정부 수립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FEMA 수용소 이외에도 미국의 정부기관인 FEMA(연방비상관리국)를 세계정부 계획 의 일환으로 바라봅니다. 본래 FEMA는 핵전쟁 발발시 미국 연방정부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고안되었고, 2차적으로 지진, 홍수, 허리케인 등 재 난 상황에 치안과 구조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상사태 시 군, 경찰, FBI 등은 FEMA의 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이 FEMA가 정말 그런 단체인지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종종 목격 되는 소속이 쓰여지지 않은 비밀 헬리콥터들을 이 기관의 소속이라고 추 정합니다. 음모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 기관이 미국 헌법 위에 있는 것 이라고 보며, FEMA 수용소 건물 외곽에 둘려있는 철조망 담벽락이 안쪽 방향으로 되어 있는 점을 볼때, 외부의 진입을 막는 게 아니라 내부의 탈출 을 막는 용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 수용소가 세계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자들을 격리수용하는 감옥일 것이라고 의심을 보냅니다.(이 음모론은 저 도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우리나라 독재시대 삼청교육대 같이 될거라고 보는 듯 함) UFO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 미확인 비행물체, 외계인이 사용 하는 우주선을 가리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존재 여부와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들이 있고, 종교집단화 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 UFO가 신세 -75-


계 질서와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저자가 갖는 의혹은 크게 2종류입니 다. 먼저는 UFO가 실제로 존재하며 외계인들과 거래를 통해 과학기술의 진보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UFO와 외계인 세력을 등에 업고 힘으 로 세계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전개됩니다. 또 다른 의혹은 UFO는 실제로는 없는데, UFO로 보이게 하는 위장 기술을 통해 세계적 인 위협을 가하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세계정부를 수립하려고 한다는 주장입니다. 양 극단의 전혀 다른 시나리오지만, 이 두가지 모두를 의심하 는 증거는 ET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로 문화에 젖어들게 해서 사람들이 외 계인에 대해 익숙하게 여기도록 한다는 점을 제시합니다.(없는데 있다고 믿게 하거나, 악한 존재인데 선한 존재일거라고 세뇌하는 용도로 보는 듯 합니다) 종교통합운동 저자는 신세계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세계종교통합 을 꼽습니다. 2000년 8월 UN본부에서 13개 종교 대표들이 세계종교 화 합을 명목으로 모인 것과 UN의 평화 정책을 위해 종교 역량을 지원하는 단체인 세계종교지도자위원회에 대한 우려의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 교계에서 UN역할을 하도록 고안된 종교연합기구(United Religion Organization)가 세계평화와 지구의 신성함을 보호하려는 목표를 가지 고 있지만, 2000년부터 종교연합계획(United Religious Initiative)으 로 바뀌면서 세계 78개에 기반을 가진 종교간 화합 조직인척 하면서 사실 은 사람들을 단일 종교의 우산 아래 끌어들여 그들이 단일 정치체제 하에 들어갈수 있도록 만들려고 한다고 의심합니다. 심지어 이런 일련의 운동에 핵심인물은 사탄숭배자들이 관여하고 있다 고 하는데, 기독교 단체를 통해 세계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뉴에이지 단체 를 통해 신비주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교육계를 통해서 자아발견과 자기 계발로 인간의 신격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운동에 UN과 그린 피스, 앰네스티, 유니세프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세계정부 수 립과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합니다.(이런 종교간의 교류와 국제 단체의 지 원을 모두 음모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듯 합니다) -76-


저자는 그런 종교통합운동의 한 사례로 세계교회 협의회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후 WCC)를 의심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교회 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운동(쉽게 이야기하면 같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 백한다면 함께 할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대화를 나눠보자는 모임) 이 목적이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이면에서는 초자연적 현상과 생명 공동체, 사회 윤리, 공동선교,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다 더 반대하고 우려하는 것은 그 모임 안에 함 께 하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를 보면서, WCC가 공산주의와 타종교 역시 하나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을 가질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 다. 이런 일련의 의심은 WCC가 종교통합을 위한 프리메이슨의 하부 조 직이라고 보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교단이 WCC 반대 성명을 낸 것을 근거로 삼아, WCC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의 무오성 부인, 정 통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거부, 변질된 성령론 주장, 개인 영혼 구원의 중요 성 관과, 종교 다원주의 신학에 근거, 동성애 용인, 복음전도와 선교를 통 한 구원의 간과를 문제 삼았던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식 이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고 여깁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기 에 오히려 정말 그러한지 살펴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WCC안에 있는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본인들도 이런 내용들을 다 동의하고 지지하는게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신학적 스펙트 럼이 다양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런 다양성(서로 다름)을 열어두고 대 화해보자는 취지라고 합니다. 물론 WCC반대 성명을 낸 합동교단은 신학 적으로 좀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음모의 세력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모론을 추종하시는 분은 WCC의 취지를 신뢰하지 않 으며 음모를 꾸미는 세력의 일로 여깁니다. 그 외에도 UN에 있는 이해의 사원(Temple of Understanding, 종교 간 평화를 위해 설립된 비정부조직 NGO이자 UN의 자문기관)에 대해서 도 비슷한 이유로 우려의 시선을 보냅니다. 이해의 사원의 목적이 종교적 다양성을 이해시키고, 건설적인 사회를 촉진하며, 세계 시민의식을 교육 -77-


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그 공간의 바닥이 피라미드 같은 사디리꼴 모양으 로 되어 있다는 점, 프리메이슨 관련 기관들과 연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타 종교에서 사용하는 오컬트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종교 통합을 위한 시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세계 정부 통치자, 적 그리스도 음모론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바로 적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요 한계시록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경배하지 않는 유대 인과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모든 사람에게 짐승의 표를 삽입해 감시할 것 이라고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베리칩을 666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예 전에는 바코드, 신용카드를 666이라고 했었죠) 성경에 나온 적그리스도 는 일곱머리와 열뿔을 가졌는데, 이 열뿔에 해당하는 나라들을 EU 중에서 도 서유럽연합 10개국이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합니다. 또한 적그리스도 출현 가능성을 프리메이슨의 수장을 맡고 있는 영국왕 실로 지목하는데(이미 브렉시트로 가능성이 희미해졌겠지만?) 그 근거들 은 런던 시의 문장과 찰스 황태자의 문장입니다. 런던시의 문장은 템플 기사단과 비슷하고, 방패 양쪽에 용 두마리가 있 고, 그 밑에 'Domine Dirige Nos 신이여, 우리를 인도하소서'라는 글귀 가 쓰여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용이 성경에서 사탄이니까, 여기서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라고 해석합니다) 찰스 황태자의 문장에는 방패 좌우에 왕관을 쓴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사자가 표범의 몸과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하고 있어서 계시록 13:2의 적그리스도 예언과 일 치하고, 오른쪽 유니콘은 계시록 20:1-2의 천사에게 쇠사슬로 잡힌 사탄 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계 13:1–2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 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 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78-


계 20:1–2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 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 하여

런던시 문장 (출처: flicker)

찰스 황태자의 문장(스코틀랜드 외).

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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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찾아보면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연합해서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공식 명칭도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입니다. 연합의 개체인 잉글랜드는 사자를, 스코틀랜드는 유니콘을 상징으로 사용 합니다. United Kingdom이 되면서 문장이 합쳐졌는데, 지금도 스코틀 랜드 내에서는 여전히 유니콘만 있는 문장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찰스 황 태자는 66년째 황태자인데 언제 왕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고, 그의 나이 때문에 어쩌면 그의 아들이 곧바로 왕위를 이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즉, 이 음모론이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는거죠. 2-4. 음모론자들의 현실과 삶의 자세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저자는 지금을 성경의 예언과 일루미나티의 세계 통치 계획이 현실로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앞서서 책의 내 용을 소개한 것처럼 모든 것이 신세계 질서를 향해 척척 들어맞아 진행되 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저자와 생각을 같이 하는 이들에게는 이 런 상황에 선택할 길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런 음모세력의 의도 에 순응해서 짐승의 표를 받고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삶을 이어가다가 심 판을 받는 것(심판 이전에는 음모세력에 가담한다면 부와 권력을 누릴수 도 있겠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음모세력에게 박해를 받다가 심판때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여전히 악이 득세하려는 세상이 무섭고, 그 사실 을 알아차리지 못할까봐 두렵고, 내가 그 일부가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래 서 이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보이는 첫번째 반응은 이런 세상에서 싸우 려고 합니다. 이 싸움을 하기 위해서 힘(사람들, 돈,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 각합니다. 돈이 없어서 못살고, 실력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못살고, 빽이 없어서 못살겠다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교회 안밖에서 볼수 있듯이, 상위 1%가 되면 안전하다고 느낄 것 같 지만, 도리어 그들은 더 높은 장벽을 쌓고 자신이 도태될지 모르는 미래를 두려워 합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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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보이는 또 다른 반응은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 고 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은 모든 신자의 바램이지만, 현 실을 외면하고 종교생활 안에 갖혀버립니다. 교회안에서 믿는 자들과의 관계안에서 위로를 받는 것, 예배를 통해 은혜를 누리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들에게는 천국에 가기 전까지 이 땅은 지옥이거나 지옥으로 향하는 시험과 유혹의 공간이자, 환난과 핍박의 시간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무한 경쟁속에서 힘과 효율에 목말라 있는 모습이 이 두가지 반응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다거나 힘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니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모든 것을 걸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자는 겁니다.

3. 정말 그러한가? 이제는 이 책이 다루는 음모론의 한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짚어보겠습니 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들은 그동안 살면서 한번쯤은 접해봤던 이야기입 니다. 아마 지금까지 접해보지 않으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10년 내에 '어 머,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정말인가?' 하고 귀가 솔깃하는 순간을 만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음모론을 추종하는 분들은 이 음모론을 사실 로 여깁니다. 그래서 아주 진지하고 영혼 사랑과 구원의 열정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음모론은 거짓뉴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 내에도 이런 음모론 추종자들과 비슷하게 아 주 진지하고 구원을 위해 극렬하게 반응하지만, 거짓 뉴스를 검증하지 못 한데서 기인한 반응이라 카톡교가 아니냐고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전문가와 신학자들이 나서서 이 음모론에 대해 연구하고 진 실을 밝혀도, 그들의 의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동원 된 논리들을 반박하며 좀더 진화를 거듭하곤 합니다. 물론 이런 음모론 중 에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있을수 있고 그 진위를 분별하는 것은 무척 -81-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음모론이나 거짓 뉴스를 접할때마다 느끼는 불 안감은 정말 그러한지 사실을 확인(팩트체크)하기 버거운 경우에 생깁니 다. 그대로 믿기도 애매하고, 안믿기도 찜찜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가지 방법으로, 음모론(혹은 거짓뉴스)들이 갖는 특징들을 이 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음모론의 특징을 기독교 신 앙의 본질에 비추어 교정하면 다른 삶의 태도를 가질수 있습니다. 3-1. 선과 악에 대한 오해, 순수 악에 대한 환상과 본질 이 책에서 나타난 프리메이슨 300인 위원회 계획이나 일루미나티의 7 대 목표를 보면, 소수의 엘리트로 여겨지는 특정 집단이 인간의 생명을 위 협하고 빼앗고,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인간성을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에 자연스레 그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며 악랄한 존재들이 됩니 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떤 선한 것도 기대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를 가리켜 순수 악이라 할수 있습니다. 순수 악은 선과 대항하는 개념으 로 절대 악의 개념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를 빛과 어둠으로 바꾸어 혼용하 기도 합니다. 이런 선과 악의 대립 구조는 많은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매 우 보편적인 생각이며, 성경 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개념입니다.(다음 성 구들 이외에도 많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46)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3-1-1. 순수 악이라는 환상 (1) 인간의 어두운 악의 한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이 현실 속에서 순수 악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순수 악은 내가 상상하는 환상입니다. 악은 분명히 존재 하지만, 순수 악은 없습니다. 포스트모너니즘 시대에 극렬하게 드러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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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 안에 있는 선, 선 안에 있는 악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르고 휴 전상태에 있기에, 이전에는 북한을 늑대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는 그들이 굶주려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고 그들이 선이라거나, 그들이 행한 악을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악을 행하는 이들 안에도 그들 나름의 이유와 선한 부분도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 안에도 악이 존재할수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안에도 내가 좋 아하지 않는 면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대표적으로 가족 안에서 무수히 경 험합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서로 사랑하는게 분명한데도 어느 때 에는 죽일듯이 미워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이 잘못되었고 악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더 성찰적인 경우에는 내가 잘못 한 부분을 알아차리며 나의 악함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말 성경 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2) 사단의 본질적 악의 한계 이런 논의를 좀더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서도 악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악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선이신 하나님 과 동등하게 대적할수도 없습니다. 악은 언제나 선이신 하나님의 심판/통 치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이 사단에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악랄함을 꾸미고,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려고 한다고 해도, 그 런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만물의 절대자이십니다. 사실, 그 악의 주체라고 할수 있는 사단도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다가 자기 자리 를 떠난 자입니다(유다서 1:6). 이것이 무서워 보이는 사단의 악함의 한계 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듯한 장면들이 등장하지 만, 결국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로 구원과 회복을 이루십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등장하는 바로(애굽 왕,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박해 함)나 하만(유대인을 말살하려다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 의해서 실패함) 은 분명히 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편에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 은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이나 에서를 비롯한 이스라엘 주 -83-


변의 이방민족도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지는 않았고, 문제가 많았지 만 그들 역시도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함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훼방하지 못합니 다. 하나님의 통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원죄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선 악과를 먹게 유혹한 뱀도 사단이 분명하지만, 그(뱀)도 본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의 일부였습니다(창 1:31, 3:1a). 또한 그는 자신의 악함으로 인간이 범죄하게 했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과 겨루어 싸우지 않 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뱀(사단)이 원수가 되는 것 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자와 후손입니다. 그마저도 여자의 후손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겨우 발꿈치를 상하게 할뿐입니다(창3:15). 사 단도 순수 악, 절대 악이 아니라면, 사단의 사주를 받고 그에게 능력을 받 는다고 의심받는 음모세력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3) 성경이 말하는 악 도덕적인 악행이나 사람에 대한 억압, 종교적 혼합의 시도는 분명히 악입 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악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은 예 물을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마냥 기뻐하고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암 5:21-22). 성경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 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두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 우상숭배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악이고, 가인에게 죄를 피하라고, 죄값을 받으라고 하는데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고 떠나는 것이 죄이며, 그 상태가 악입니다.

3-1-2. 순수 악의 본질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앞선 논의에서 언급한 '순수 악'을 상상하 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84-


순수 악을 상상하는 배경에는 우리는 악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악하다는 실존적 상황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을 다루는 정상 적인 방법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만 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 그리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런데 하나님 없는 세상, 내가 하나님이 되는 세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악을 다루기 위한 다른 방법으로 내게 들어온 악의 유혹과 무게를 순 수 악에게로 투사시킵니다. 어쩌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악의 화신으로 여 기기도 하지만, 대개는 타인에게 원인이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며 그를 순 수 악으로 상정합니다. 이것이 제가 정의하는 '상상속에 존재하는 순수 악 의 본질'입니다. (전자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것이고, 후자는 타인 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 것입니다) (1) 기독교의 악에 대한 반응 실제로, 우리가 이미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삶에서 마주하는 악을 생각해보 면 어떻습니까?! 훌륭했던 목사님들이 노년에 추문에 휩싸이고, 건강한 교회로 알려졌던 교회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 기업, 집단, 국가가 한편에는 악을 온전히 밀어 내지 못하고 끌어 안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그들의 가 식적인 모습, 이중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고, 분노하고 절규합니다. 이 지점 에서 음모론을 추종하는 분들은 그런 모든 오류들을 프리매이슨과 연결지 어 나, 우리 라는 정체성에서 벗겨내고 싶은 것이 이 음모론의 동기이자, 가상의 순수 악을 떠 올리는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꼭 음모론자가 아니더 라도 우리 주변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악을 저지른 그들이 원래 구원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보는 견해를 갖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 악으 로 투사하는 것입니다. (2) 성화의 과정에 경험하는 실존적 악 하지만,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 안에도 크고 작은 죄들이 끝 없이 솟아나는 것을 마주하게 됩니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지만 여전히 걷어내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우리 -85-


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느 특정 순간을 기점으로 거룩한 완전체가 되 지 않습니다. 성화가 이루어져 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화의 완성은 하나 님 앞에서는 그 날에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고(딤전1:15), '바울 이 스스로를 곤고한 자(롬7:24)'라고 절망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그 를 순수 악에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며 알듯 이, 죄를 짓기 원하지 않았지만 죄를 지었던 과거(또는 현재)에 대한 성찰 적 자세에서 나오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우리가 선 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 시고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수 있고(요8:12), 실족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다"라는 말은 개인이 아니라 너희, 팔복의 말씀을 듣는 예수님의 제자 공 동체,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소금과 빛으로 여기셨으니 그렇 게 살라는 의미이지, 우리(인간) 자체로 소금이나 빛이라는 의미나 빛이나 소금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3)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거룩함이 빛나 는 예배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존적으로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상하고 통회하는 모습, 그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이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실존적 악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안 짓는 자가 되어 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죄인에게 -86-


구원자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회복할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피조물로 삼으셔서 새 삶을 살게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죄와 악을 거절하고 나와 세상을 개혁하려고 애쓰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 고통하는 우리의 삶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진정한 하나님의 구 원이 임하며, 그 구원의 복음으로 샬롬을 누릴수 있습니다. 3-2. 자유에 대한 혼란, 소중한 자유와 위험한 자유 음모론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자유에 대한 혼란입니다. 먼저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세계단일정부가 들어서고, 666을 받게 해서 통제하거나 죽일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좀더 극단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뇌 를 당하거나 조정당하는 노예가 되는 것을 걱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유를 빼앗기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염려가 전혀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 제 인류 역사에 노예제도가 존재했었고, 오늘 날에는 노동력을 돈으로 환 산하면서 노동력을 넘어서서 노동하는 주체로서의 사람을 기계처럼 이용 하려는 시도들과 그에 대한 부당함이 충돌하며 갑질 논란을 일으키고 있 습니다. 또한 이 세대의 인류는 점점 편리하고 부요한 삶을 살기 위해서 스 스로 자신의 자유를 기계나 시스템에 맡기고 의존적으로(수동적으로) 살 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리하지 않고, 주로 자신이 신뢰하는 정부와 기업에게 그리 합니다. 때로는 훌륭한 목회자, 정치인, 기업가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려고 하기도 하고 좋은 교회, 좋은 회사, 좋은 집안(?) 에 맡기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를 상기해야 하며, 내 자 유가 상실 되는 것을 분명히 염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음모론 이 힘을 잃는 부분은 바로 이런 일련의 행동에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자유 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박탈 당하는지의 여부를 염두 해야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이 선택할수 있고, 선택 -87-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원치 않는 경우에는 그 동일한 자유로 우리의 자 유가 침해 받는 것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음모론자들은 이 부분이 그럴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점을 부각시키지만, 실제로는 우 리의 의지가 들어간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3-2-1. 영적전쟁,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 성경은 영적인 존재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 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 본문에서 말하는 바를 오해하면 김기동의 귀 신론이나 세상에서 진리처럼 숭배되는 능력대결로서의 영적전쟁의 개념 을 갖게 됩니다. (이는 다시 선악 세계관, 힘의 세계관과 맞물려서 왜곡되 고 비틀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점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 이 아니라 그 영적인 싸움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는 '우리의 싸움'인 것 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사단은 그 자체로 악해서 악한 일을 꾸미고 실행해서 홀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단은 인격(지정의)을 갖춘 악한 영으로 인간을 속이고 고소하고 두려워하게 함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복음을 차단합 니다. 사단의 주요 전략은 속임과 고소 하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 답게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속이거나 사실과 거짓을 교모히 섞어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고후11:14 광명의 천사로 가장함, 창 3:1-5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함, 계 12:10 참소/고소 하던자). 하나님과 대적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힘이나 성 공을 추구하도록 유혹합니다. 선교현장(또는 일상에서도?)에서 종종 나타나는 귀신들림의 문제는 성 경이 말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음과 그 영향력을 분명히 확인하게 해줍니 -88-


다. 상담분야에서도 정신병리와 귀신들림을 구분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고민은 바로 이미 구원받았다고 여겨지는 예수님을 주님으 로 모신 자들이 귀신들림이 가능한가하는 지점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내림이 있어서 무당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TV 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고, 목회자나 성도의 일탈이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악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신 들림 역시, 우리가 상대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수 있는가?의 문제는 하나님과 사단의 힘 대결이 아니라, 유혹과 속임에 기초한 악한 영과 사랑과 신실하신 하나님 사이에 서 내 안에서/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내가 어느 것을 선택할지 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선택은 귀신들림까지도 누 구를 주님으로 여기느냐의 문제, 통치권의 문제이며,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누적된 결과로 귀신 의 영향, 악의 영향력 아래 있던지, 하나님의 샬롬 아래에 있는지가 드러나 게 됩니다.이와 연관된 근거로 뇌과학에서 언급되는 뇌 가소성(brain plasticity: 뇌 가소성이란 뇌가 외부의 자극, 경험, 학습에 의해 구조 기능 적으로 변화하고 재조직화 되는 현상)을 들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음란 물에 중독되거나, 점점 더 폭력적으로 되고, 우울감이 깊어지는 이유는 그 런 선택을 반복한 것이 나를 그런 삶을 살게 한다고 설명할수도 있습니다. GMTC(한국선교훈련원) 이태웅 박사가 소개한 "영적전쟁"에 대해 이렇 게 이야기 합니다. "현대 신학의 흐름을 보면, 이전에는 주로 귀신 들림(Demon Possession, 귀신 이 사로잡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귀신에게 영향을 받 음(Demoniz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자라는 의미도(예, 마8:16), 귀신에게 사로잡혀 꼼짝할수 없는 상태인 것 같지만, 예수님 에 의해서 해방되고 자유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볼때, 귀신 들림은 그 영향 아래에 있던 상태라고 볼수 있다. 사단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 감정적으 로, 사회적 관계를 비롯해 전방위적으로 위협하거나 유혹한다. 조상의 죄, 개인의 죄, 과거의 충격(트라우마), 마귀의 활동에 부주의하게 참여함, 하나님의 섭리가 사단의 이런 활동의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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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웅 박사는 선교사들에게 귀신들림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는 '어떤 특 정한 공식(기계적인 방식으로 몰아내는 의식, 기도문 같은 방법론)이 아니 라 하나님이 주인됨을 분명히 하고 영적인 권위를 갖는 것'을 강조 합니 다. 동시에 어떤 특정한 기질이나 은사의 형태를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 시하며 그에 맞추려 하는 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을 헤아 리며 선교지의 특수성, 개인의 차이를 창조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합 니다. 3-2-2. 내 삶의 주체성, 자유와 선택 오늘날 사람들의 언어 표현을 보면 "XX가 나를 화나게 해!", "XX가 우 리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는 내 자유와 선택이 박탈 당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은 여전히 내가 선택할수 있고, 선택한 것을 두고 자신의 주체성을 빼앗긴 것으로 왜곡하는 표현입 니다. 백소영 교수는 복음과 상황에 실린 [4차 산업혁명 시대, '4세대 그리 스도인'의 소명]이란 글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특징으로서 창조성, 주체성, 관계성을 꼽았습니다. 그녀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갖 는 주체성에 주목한다면, 하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케 하시는(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자로서의 나/우리는 자신의 자유의 지로 선택할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할건 지를 결정하면 됩니다. (1) 창조 때 주어진 자유 성경 서두에 기록된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우리에게 지상명령(창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 고, 정복하고, 다스리라)을 주셨습니다. 자신이 지은 세상을 보며 심히 기 뻐하신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아담을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마 넘치는 기대로 그리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떤 특수한 일(사과나무를 심고, 그 뒤에 비료를 주고, 풀을 뽑아라 같 은... 구체적인 명령)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에게 주신 것은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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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라(창2:16)는 자유를 주셨습니 다. 또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그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부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을 (내가 보기엔 못미더운) 인간에게 (과감히) 맡기셨고, 그 선택(이름)을 그대로(부르는대로 그 이름 이 되도록) 되게 하셨습니다.(창 2:19)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 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 는 것 이외에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사랑의 지점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자발적인 순종을 기대하며 제공한 자유였지만, 그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어길수 있는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라고 준 것은 아니 지만, 그런 극단의 선택까지도 할수 있는 주체성을 허용하셨습니다) (2) 위험한 자유를 품는 사랑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찾아와서 말을 거 시고, 자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알려주셨지만, 그들이 선악과 를 먹는 순간에 나타나서 막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은 것을 두고 분해할때도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라고 알려주셨지 만, 그가 들에서 아벨을 쳐죽이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그들이 아내를 누이라 속 이고, 형과 아버지를 속일 때에도(그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을게 분명하 지만) 그들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편을 들며 구원 으로 인도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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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에 와서는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선하다는 개념을 용 인하기 힘든 이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1,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을 보며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악을 허용 하여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하는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가?하는 의문) 하지 만,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악을 택하고 행한 것은 사람이고, 그 악에게 고통당하는 순간에 누구보다 함께하시고 가슴 아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점을 간과할수록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 유를 허용하시며 기대하시는 것은 온전한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아가는 것입니다. '싫어도 까라면 까!'라는 식의 복종이 아니라 '사랑해서 구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순종'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이지만, 그 통치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통해 이루시려는 그분의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 만의 고유한 권한이라 할수 있는 자유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는 소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타 인을 위협할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경험하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하 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거함으로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위험한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 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다시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다시 그 자유를 우리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 기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이 세상을 사랑하기를 기대 하시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대로 음모론 세력이 우리의 자유를 박 탈하는 일을 염려하는 것은 의미있으면서도 의미가 없음이 분명해졌습니 다. 우리는 자유를 가지고 있고, 바른 선택, 온전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영의 유혹과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sinful nature)은 그럴수 없는 한계를 여 지없이 드러내지만, 그럴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얻는 구원을 -92-


소망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좀 더 온전한 의미로 하나님과의 사랑에 집 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주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삶을 하 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 온전히 나의 행복과 세상의 행복 이 어우러지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만날수 있을 것입니다. 3-3.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 마지막으로 저자를 비롯한 음모론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일루미나티, 뉴 에이지, 장미 십자회 같은 음모세력들이 자신들만 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 들을 노예화 하거나 통제하려고 해서 얻는 그들의 유익이 우리의 위협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일은 안타깝게도 음모세력의 진위 여부와 상관 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함몰된 독 재자(혹은 그런류의 독선적인 사람)가 한 나라/기업/가정/교회를 장악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염려를 뿌리칠 수 있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앞 서 말한 우리의 자유, 소중한 자유가 이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런 일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저항을 선택하 고 개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한번 저항한다고 바뀌지는 않지 만, 분명히 이 세상은 그런 수많은 저항들과 개선의 노력들을 통해서 개선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 이 처음에 완벽한 창조를 한 곳에서도 일어난 일이었고, 예수님이 재림하 실때까지 각종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될 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인으로서 우리는 악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세상, 하나 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세상을 살도록 우리의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음모론에 대한 염려를 상쇄할수 있는 다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 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 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함몰되어 사람들을 수 -93-


단화 하는 이들이나,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모두 자신의 안전과 행복이라는 가치가 그 기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음모론자들 의 주장대로 보더라도 프리메이슨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신세계 질서 (New world order)는 자신들이 보기에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는 특징 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악한 존재로 의심할만한 신천지나 JMS, 통일 교 같은 사이비 이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 나름대로는 자신들 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만족보다는 새로올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제시합 니다. (결코 인류 보편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 다) 그 안에 거할수록 가정과 개인의 삶이 망가지는데도 그 망상을 벗어나 지 못하고 현실도피적으로 일상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혼란과 악영 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현실을 회피하는 일부 기독교의 모습과 도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3-3-1.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 비록 이들의 행태가 건전하다고 보기 힘들지만,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바램 자체는 사실 모든 인류의 것입니다.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본능이 있 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안에서 온전함(샬롬)을 누릴수 있음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온 전한 생명(영생), 풍요로운 삶(성공, 건강, 타인과의 관계, 자존감)을 원하 는 어리석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1) 철학, 이데올로기, 종교와 기독교 ACTS(아세아 연합 신학대학교)의 안점식 교수는 이런 점을 주목하며 " 종교와 문화는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이라고 합니다. 인 생 가운데 만나는 고통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 희노애락, 삶과 죽음의 문 제를 설명하고 답을 찾다보니 종교가 나오고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말입니 다. 안교수는 그런 관점에서 '삶의 문제에 대해 철학은 설명하지만, 이데올 로기는 변화시키려고 하고(행동적인 측면이 강조됨), 종교는 세상을 설명 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세계관으로 사람의 삶을 -94-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세계관이 가장 중심에 있고, 그 세계관에서 기인한 가치체계가 형성되어서 사람의 사고를 결정하고, 그 가치체계에 따라 말 이나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철학과 이데올로기, 종교는 모두 세계 관과 연관되어 있지만 결국 세계관의 틀로 그 진리됨의 가치를 비교할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안교수는 그런면에서 고등종교들은 나름의 깊이 있 는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나름의 구원을 제시하지만, 기독교의 세계관의 독특함, 탁월함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1) 흰두교, 불교 같은 종교는 의식을 강조하고, 유대교, 이슬람, 유교는 질서를 강 조하는데, 오직 기독교만이 관계를 강조 합니다. (2) 흰두교는 자신을 신이라고 하고, 불교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하는데, 기독 교는 성령이 '나'와 함께 합니다(현실의 나를 고스란히 인정함). (3)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다르게 고통을 부정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며, 선악 과를 따먹은 원죄(그 외의 죄)를 하나님과의 질서를 깨뜨린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뜨린 것으로 바라봅니다. (4) 성경은 질서를 정하는 계약이 아니라 관계를 설정하는 언약을 말합니다. (5) 기독교는 주인이 누구인가가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만 되고, 주인 안될 수는 없습니다. (6) 유일신 종교(유대교, 이슬람, 기타 타종교)는 성육신 모델을 가지고 있는데,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성육신은 대속을 위 해 오셨다는 점에 있어서 독특합니다. (7) 모든 종교가 자신의 체계(세계관)을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그 가르침이 아니 라 십자가가 중심에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산상수훈만 있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2) 우리의 모습(현실 기독교)와 진리의 가능성 기독교의 이런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습, 기독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안교수의 평가에 따르면 19세기는 행동양식을 전달하는데 치중하 는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병원과 학교를 짓고 자기와 유사한 교회를 짓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20세기에 대해서는 가치체계, 교리를 전 하는 선교를 했다고 보는데, 이런 모습이 '예수님이 구원이라고는 알면서 도 삶에서는 변화가 없는 신자'를 양산하는 원인으로 진단했습니다. 이런 -95-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는 씁쓸한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 예 로,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예배 자제 권고에 대해 종교탄압을 염려하는 분들을 보면, 표면적 행동양식을 기준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 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기독교 진리의 탁월함”입니다. 음모론 세 력이든지, 세상 정치가든지 자신의 행복을 바라며, 더 나은 세상,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이 안전한 세상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눌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지, 내가 살고 싶은 삶 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각자가 설명하고 정말 그러한가 서로 비교하는 것 입니다. 신천지처럼 속이고 관계로 유혹하는 방법으로 목적, 결과를 위해 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짜 복음으로의 왜곡이 아니라, 빛가운데 행 하는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고, 우리가 알고 믿는 기독교 복음 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초대하며 함께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자는 것입니다. 그럴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3) 현실, 하나님의 세계 지금까지는 음모론자들을 비롯해서 세상이 만들려는 새로운 세상, 신세 계 질서는 현재 느끼는 한계, 나에게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환경을 개선하 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구원을 바라는 존재적 소망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그 이면에서 놓쳐버린 것들을 주목할까 합니다. 바로 현실이 하나 님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 만물이 타락하였고, 회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롬 8:1819).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이며, 하 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무엇이든 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고,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 속되다고 하며, 하나님 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 14:14, 17) 무엇을 하고 안하고, 무엇을 바꾸는 -96-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나 라는 어떤 행동 하나에 기초하는 (A를 하면 B가 되는 기계적인 결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새상을 개선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체성, 자 유로 지속할 일이지만, 그것이 복음과는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고 이 세상에 있는 죄와 악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억제하고 개선하기 위해 세상 법 조항을 바꾸고, 교단 법을 제정하는 일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 다. 분명히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계속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뒤에도 여전히 새로운 형태로 우리의 죄와 악이 드러 날 것입니다. 믿는 자의 성화처럼 이 세상 역시 온전함을 다 회복하는 일 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목 해야 할 점은 (앞서 말한대로) '기독교는 고통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하나 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 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 의 십자가 구속이 복음의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 스도를 통해 의인이라 여김받으며 샬롬을 누리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유진 피터슨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라는 책에서 제러드 맨리 홉킨스의 소네트(14행 시 As kingsfishers catch fire)의 마지막 행을 기독교적 삶의 모든 세세한 면모를 들추어 내기 위한 은유적 이미지로 사용해서 영성을 설명 합니다.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영성신학이란 '우리 삶을 사려깊게 그리고 순종 가 운데 일궈가는 것', ' 우리 삶이, 성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로서 의 삶, 성자 하나님을 따라 걷는 희생 제사로서의 삶, 성령 하나님의 공동 체를 포옹하는, 또 그 공동체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서의 삶이 되 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창조와 역사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놀이하고 계시 다는 사실을 뛰어난 솜씨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놀이한다는 것은 제목에 나온 play를 번역한 것입니다. 다르게 번역하자면 활동하신다 정도로 해 도 무난할 듯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현실을 긍정하고 즐겁 -97-


게 바라보도록 놀이라 번역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를 잘 반영한 것으로 보 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놀이는 창조때부 터 인간과 함께 하도록 계획되었고, 역사 속에서 함께 했으며, 공동체 안에 서 우리를 위하여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기독교적 삶, 전치사적 참여 이런 현실에 대한 긍정의 진정한 의미는 '긍정의 힘' 같은 낙관론과 자기 암시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긍정적인 노력도 예수 그리스 도를 대체할수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어떤 절망적이고 위험해보이고 의심스러운 상황도 예수 그리스도를 막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일은 우 리와 무관하게 저절로 일어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 받고 성령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이 자신의 자유 로 선택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유진 피터슨의 표현을 조금 더 소개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며, 소위 '더 깊 은 삶'을 계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적 삶에 참여하고 있 다. 그러나 이 삶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다. 또한 우리는 그 행위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몇몇 전치사들을 통해 여기에 포함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 와 함께 하신다(마 1:2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 하나님 이 우리를 위하신다(롬 8:31). 이 전치사들 - 함께(with), 안에(in), 위하여 (for)-은 모두 연결짓고 관계짓는 강력한 단어들이지만, 그 어느것도 우리 를 주어나 서술어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전치사구의 끄 트머리 단어일 뿐이다. ..... 우리가 기독교적 삶의 행위를 하도록 초대받고 명령 받은 것은 전치사적 참 여(prepositional participation)다.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지어 주는, 또 하나 님이 우리 안과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활동과 연결지어 주는 그 전치사들-함께, 안 에, 위하는-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지 금 하고 계신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방식과 수단의 문제일 뿐이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 p.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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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음모세력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모든 좋은 것, 우리의 평범한 삶을 파괴할 것 같은 그들 의 악함도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자 유를 빼앗을 것 같지만, 실은 여전히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들 혹은 우리의 자유가 위험스럽지만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우리에게는 박해가 될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바 로 우리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지금까지, 이 책'신세계 질서의 비밀'에서 저자가 말하는 음모론의 위협 과 그 한계를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4-1. 이 책이 말하는 대처 방법, 바르게 읽기 저자는 프리메이슨이과 일련의 비밀세력이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 해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있는 상황을 알리는 것이 두려움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가 제안하는 내용 은 3가지 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평안을 받으라 저자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다 박해 받는 삶은 예수님이 먼저 가신 길이고, 제자들에게도 핍박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평안을 받으라고 하셨 으니, 어떤 상황이든지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자고 합니다.(요 14:27, 16:33)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강조하는 것은 흠 잡을 부분이 없습니 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이 평안의 수여자시고, 실제로 자신의 삶 을 통해 그리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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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 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지만 조심스럽게 저자가 말하는 평안이 앞서서 지적했던 세상과의 분 리되는 모습으로 반영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 신 평안, 제자들에게 주신 평안은 이 세상과 분리된 평안이 아닙니다. 보혜 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 겠다는 말과 이어지는 단락에서 등장하는 평안(요14:26)이고, 제자들이 떠나가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알려주면서 제자들이 환난 속에서 도 누리는 평안입니다(요16:32).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 안에서 누리는 평안입 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은 이 세상에 현존하며,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알 고 믿음으로 누리는 평안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고통과 환난 을 벗어나려고 자신을 세상에서 분리하고 없애는 방식을 택하는데, 그러 지 말고 치열한 세상 안에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은혜 를 알고 샬롬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둘째, 어디로 가든지 주님을 따르라 저자는 일루미나티는 사람들을 극도의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거나 갖가 지 죄악으로 타락시켜 자신들이 내놓은 대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 들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정부와 기업이 시키는대로 하다가 뉴에이지에 물들고 세계화에 찬성하며 생체칩을 심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WCC가 종교통합을 위한 단체이니 경계해야 하고, 자유주의 신학교에 가면 안됩니다.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 물든 교회는 예수님이 아닌 자신들이 만든 방법으로 성장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 서 저자가 제시하는 삶은 결론적으로는 성경말씀에 중심을 둔 참 믿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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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살아야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의미입니 다) 저는 이 권면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긍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합니 다. 긍정하는 면은 말씀에 중심을 두고 참 믿음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 어 디로 가든지 주님을 따르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실제로 누군가 의도하는 음모 여부에 상관없이, 말씀에 중심을 두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건강하고 바람직한 신앙이며 기독교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그 기준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이러니하게도 전광훈 목사나 이단 사이비도 자기들이 성경말씀에 중심 을 둔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 들이 성경 말씀에 중심을 둔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헷갈 려 합니다.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말씀을 바로 알수 있는지가 혼돈스럽습니다. 게다가 신천지가 (복음방) 성경공부로 사람들 을 유혹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나온 주요 대책 중에 교회 밖 성경공 부를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신천지의 간계를 막는 긴급한 대 책은 될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도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저 응급조치일 뿐, 이단을 회심케 하지도 못하고, 성도들이 복음으로 살수 있게 하는 것도 아 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거나 신학을 공부하는데 꼭 목회자가 되거나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은 과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삶으로 순종하는데 그 뜻을 두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 순간 회심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교회 생활 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국은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어디로 가든지 주님을 따르라는 말이 맞습니다. 주님을 따르 려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고, 공부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다만,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연합해서 숫자를 불리고 힘을 모은다는 의미하는 게 전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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닙니다. 내가 보고 깨닫는 바를 나누고, 내가 전혀 보지 못하던 것을 듣게 해줄 다른 사람이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된 것 같이, 목사와 장로가 함께 해 야 하고,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당연히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 다름을 경계로 삶고 벽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 (요 13:34-3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 이 서로를 받아들이며(롬 15:7) 예수 그리스도가 선명히 드러나고, 우리 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셋째, 삶을 통해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 것인지 정하라 저자는 은퇴하는 목수에게 사장이 마지막으로 집을 지으라고 했는데, 그 집을 목수의 퇴직 선물로 주었다는 예화를 들며, 결과를 알수 없지만, 주어 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가 유익을 얻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살 아온 삶의 자취, 그 삶의 내용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을 유산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자가 권면하는 바는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 삶을 살 아서 하나님의 불(심판)을 통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기초가 되시니, 그 위에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지 생각하라' 고 합니다. 이 권면은 모든 사람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성찰하게 해주는 것으로 그 의미가 있고 유익하다고 동의가 됩니 다. 이 권면을 내게 적용하니, 더욱더 음모론에 심취할 일이 아닙니다. 오 히려 하나님께 집중하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족에게, 이웃에 게, 친구에게, 교우들에게 사랑과 섬김을 행해야 합니다. 4-2. 그리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 사랑, 사랑 마지막으로 강조할 우리의 삶의 모습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 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잘 보면,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아같이 우리 -102-


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온 인격, 온 생애를 통해 받아들이고 사랑 하는 것입니다. 책의 저자도 이런 부분을 많이 강조했고, 많은 교회들이 강 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 안에서 참된 복음, 샬롬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나를 사랑할수 있기를 바 랍니다. 내 삶에 얼룩진 죄와 악을 볼때, 애써 부인하면서도 괴롭습니다. 남을 탓하거나 자신을 자책하기를 자명종시계처럼 반복하며 신경증과 우 울증 사이를 오가지만, 우리의 구원은 우리 안에 있는 거룩이 아니라, 우리 를 거룩케 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나는 감히 나를 사랑할수 없더라도 나 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며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 며 그 안에서 온전한 샬롬을 누리기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다시 하나님께로, 그리고 하 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마주하게 될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 님의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던 것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아주고 사랑하자 는 말입니다. 내 기준에 어리석어 보이고, 틀려 보여도 순수 악이라 투사하 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의도를 보는 것이 사랑의 한 방법일 수 있습니 다.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입장이 달라도 각자의 삶의 지평에서 결핍된 것 을 채우고 개선하려는 굶주림을 보면 분노와 비난을 그치고 내 안에 있는 상한 마음이 공명하며 긍휼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지도 모릅니 다. 이 사랑은 구지 순서를 두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랑 받 음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타인을 사랑하 는 마음으로 확장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없이, 나를 사랑함 없이 타 인을 사랑하는 것은 기형적으로 황폐함을 가져옵니다. 이 순서를 좀 더 현실적으로 환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게도 나 아 닌 타인에게서 받습니다. 부모에게서 받기도 하고, 친구를 통해서 받기도 하지만, 나보다 먼저 그 사랑을 받은 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받습니 -103-


다. 조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되고 사랑받는 뒤에 그 사랑의 주체에 게 사랑을 하며 사랑을 배웁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 나 자신을 사랑, 이 웃 사랑은 서로에게로 끊임 없이 흘러가며 풍성해집니다. 이는 성부 하나 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하나됨에서 볼수 있는 상호 내재성(coinherence)과 다르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이해할수 있는 신비 이기도 합니다. 신세계 질서의 비밀 같은 음모론이나 카톡을 통해 전달받는 선지자적인 진단을 마주하면서 생겨나는 두려움과 염려들은 자연스레 우리를 위축시 키고 경계를 짓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 로 다스리시기를 원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고, 주실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그 사랑을 받은 나와 내 주변의 이웃을 사랑하며 샬롬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샬롬.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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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82년생 김지영

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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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으로 보는 영화 :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습니다. 처음엔 아내와 함께 손을 꼬옥 잡고 보기 시작해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 고 보며, 함께 울었습니다. 극장을 나와서 아내와 자연스레 영화 소감을 나 누면서 80년생 황호경을 좀 더 깊이 만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함 께 살았던 여자, 할머니와 엄마, 여동생이 생각났습니다. 매주 만날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교회 청년들과 집사님들도 머릿속에 떠올랐습니 다. 그래서 청년부 성경공부 모임에 제안해서 다시 한번 영화를 보았습니 다. 이 영화에 담겨진 아픔과 고통을 마주 하면서 연구소를 시작하면서 가진 질문(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으로 사는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서 어떻게 복음을 이야기 할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 다. 82년생 김지영에 담긴 주인공이면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 자들의 아 픔과 회복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 되면 좋겠습니다. -106-


1. 아픔과 고통 이 영화의 주인공은 82년생 김지영입니다. 그녀는 분명히 자신만의 고유 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속 주인공 김지영이 보여주는 삶 은 아내이자 엄마, 딸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평범한 여인을 대표합니다. 어릴적에는 미국에 가보고 싶은 평범한 어린이였고, 대학 졸업후 취업한 직장에서는 일 잘한다고 인정받던 직장인이었습니다. 남편과 결혼하고도 이어오던 직장생활을 출산과 육아를 위해 그만두고 벌써 26개월동안이 나 딸을 돌보고 있습니다. 가정을 돌보기 위해 헌신하는 엄마와 공무원 아 빠 사이에게 자란 1남 2녀중에 둘째이고, 부산에 있는 시댁 부모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착한 며느리 김지영입니다. (1) '지영아 네가 지금 아파...' 이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이 자라온 어린시절부터 학창시절과 직장시절, 신혼 초기까지 여자의 삶의 아픔과 고단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아픔을 크게 2가지로 나눠서 살펴보자면 먼저는 과거에 좀더 많았던, 하 지만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가족을 위해 직장을 선택하는 현실이고, 다 른 하나는 이전보다 많이 바뀌었지만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시댁과 직 장에 관련된 아픔입니다. (2) 내 꿈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 지영의 엄마는 국민학교때 형제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는데 오빠들 을 위해서 청계천 미싱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지영의 언니는 IMF때 아버 지가 퇴직하자 교대에 진학해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주인공 지영 역시 작가를 꿈꾸며 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취업을 선택했습니다. 가족을 위 해 직장을 선택하는 이유는 '돈'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꿈을 희생 하는 것이 요구되는 상황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요구를 책임있게 감당 했고, 지금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수는 없다"고 말하는 나의 부모님과 여동생의 일침이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107-


(3) 작은 것들을 위한 시 BTS가 부른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신나는 멜로디와 춤을 추며 '너의 상처를 돌보며 그저 널 지킬거야' 노래 합니다. 대한민국 '시댁의 시'에는 이런 노래가 너무나도 필요해 보입니다. 영화속에서는 명절에 대한민국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인데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주인공은 얼른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할일을 찾습니다. 시어머니는 '좀더 자지 그러니'라고 말하면서도 시 금치 삶을 것을 건네줍니다. 명절 당일 오후에는 처가로 출발하려는데 시 누이가 먼저 도착하니 시어머니는 그 시누이를 위해 전을 대피고 과일을 내오라고 하면서 너도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서 쉬라고 말합니다. 이 자연 스러운 풍경은 뭔가 불편함이 있음을 고발하면서도 이를 누그러 뜨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시누이가 지영의 딸의 옷을 여러벌 꺼내면서 틈틈히 샀 다고 하고, 자기가 음식 가져다 먹겠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제기하는 문제 는 명백한 차별에 대한 것입니다. 일을 똑같이 해도, 아니 일을 더 잘해도 여자는 결혼과 육아 때문에 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로 미리 배제 되는 것입니다. 무시할수 없는 엄연한 현실적인 지적입니다. 결혼을 늦추 거나 거부하는 요즘 세대가 내세우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을 초 월하고 일을 야무지게 해내는 슈퍼우먼은 직장에서 '독한 여자'로 통하고,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라는 말로 여자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주인공은 알바를 하려고 해도 할수가 없고, 회사에 복직 하려고 해도 할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도와주고 직장에서 환영을 해도 이 시대를 대변하는 82년생 김지영은 할수가 없습니다. 그녀에게 '네 전부 를 함께 하고 싶어'(BTS, 작은 것들을 위한 시에 나온 가사)라고 노래 불러 주는 이가 없어서일까요? (4) 불편한 현실과 어울리지 않은 웃음 영화는 이렇게 시종일관 사뭇 진지하게 직설적으로 모든 불편한 상황들 을 나열합니다. 기껏해야 남편이나 시어머니, 직장 상사들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여자 김지영의 삶이 얼마나 불 -108-


편한지 보여줍니다. 그런 불편함을 늘어놓고는 대중들을 위한 배려인지 웃긴 말장난 대화나 상황으로 불편함을 흐릿하게 합니다. '서울대 공대를 나온 이유가 아이 구구단 가르치려고 했나봐요' - 어린이집 엄마들끼리 차 마시는 자리에서 '너는 중전마마고 나는 무수리야 죽도록 일만하다 죽을꺼야' - 예전 직장 언니와의 만남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말들로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웃음이 커지지만 감독은 너무나도 금새 다음 장면의 적막을 통해 본래의 불편함에서 기인한 우울 함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이는 감독의 연출이 아닌 이 시대가 소리없는 절 규로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소리없는 신음은 아닐까 싶은 생 각이 듭니다.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를 해피라고 부르며 언제나 웃으라고 말하 는 엄마, 광대의 일을 하기에 'Don't forget to smile'이란 문구를 보며 직장을 나서야 하는 삶. 그 삶의 주인공 아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서 멈출수 없는 웃음이 그를 비극적인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 과 비슷한 언저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마주한 이 불 편한 현실에 그저 임기응변적인 순간적인 위로나 대안들이 조심스럽고 주 저하게 됩니다.

2. 복음의 가능성 이 영화를 보면서 수없이 되뇌인 질문은.. 그럼 이 여인은 어떻게 행복하 게 살수 있지?, 김지영의 아픔을 달래주고 행복하게 할 복음은 무엇일까? 그 복음은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직후부터 3년간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아내, 출산 이후에 직장을 그만둔 여동생, 여동생과 나를 키우 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근무하고 교장으로 은퇴한 엄마. 이 세명의 김 지영이 꿋꿋이 살아온 삶이 대견하고 새삼 고마우면서도 아픔으로 자신 -109-


을 잃어버리는 김지영과 같은 시대안에 있기에 함께 아플수 있다는 생각 에 문제를 그냥 멀찌기 내버려둘수는 없었습니다. (1) '아프지마 누나..' 이 영화는 내게 남자와 여차의 차이, 차별을 보여주었습니다. 온 가족이 아픈 지영을 위로하고 돕고 싶어하지만 누나가 좋아하는 크림빵 대신 단 팥빵을 사와서 미안해 하는 동생이 보여주듯이 그동안 살아온 세월 속에 서 짓눌려 있던 한 사람의 삶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 도 이렇게 아픈 현실을 두고만 볼수 없기에 할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무엇 일까 고민하니, 남녀평등이 적절하겠다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댁과 처 가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 직장에서 동일한 승진 기회, 능력에 의한 평가와 대우, 결혼과 육아에 대한 공동책임을 강조하면 될까? 교회에서 남녀 차별 은 무엇일까? 여성 목사 안수, 여성 장로가 있어야 평등일까? 뭔가 더 복 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2) 네델란드 행복육아 그래도 보다 평등한 사회가 대안이 된다면, 첫번째 대안은 얼마전에 만난 처형이 살고 있는 네델란드 이야기에 관심이 갑니다. 네델란드는 우선 육 아휴직이 자유롭고 가족 중심적인 사고가 당연하게 여겨진다고 합니다. 아이를 혼자 두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아이의 방학에는 부모중 한명이 무 조건 휴가를 낼수 있도록 법에서 보장하고, 근무 패턴도 주2일~주5일 사 이를 원하는대로 조정할수 있다고 합니다. 학력에 의한 임금 차이가 없지 않지만 그 격차가 우리보다 현저히 작다 고 합니다. 얼마전에 과정의 평등을 이야기 하면서 촛불을 들었던 서울대 촛불집회가 주목받는 대한민국에서는 한첨 멀리만 한 이야기 입니다. 하 지만 네델란드 역시 남여 임금격차나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은 난제로 여 겨진다고 하니 전 세계가 고민하는 문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110-


(3) 성경에서 말하는 평등과 사랑 그래서 나는 남녀 평등, 차별없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성숙되어가야 함에 동의하면서도 성경에서 발견하는 대안으로서의 사랑에 관심이 갑니다. 김 지영의 아픔에 필요한 복음은 평등이라기 보다는 사랑이며 진실함 같아 보입니다. 성경은 분명 평등을 강조합니다. 1) 하나님의 동등하심 먼저 하나님은 세분이지만 한분이라는 신비를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세분 하나님은 동등하시 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 보여주는 최초의 공동체 가정도 마찬가지입니 다.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 님이시다.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 답 6문)

2) 남자와 여자의 구분 성경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갈빗대를 꺼내 여자를 만들었다고 합니 다(창2:21-23). 그러니 남자를 먼저 만들고 여자를 만든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에 는 어떤 구분도 보이지 않습니다(창1:26-28).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 라 (창세기 2:21–23, 개역개정)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 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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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 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 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 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6–28, 개역개정)

3) 교회 안에서의 차별 없음. 신약에 와서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인이나 유대 인, 할례파나 무할례파,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 종이나 자유인 그 누구에 게도 어떤 차별이 있을수 없습니다.(골3:11) 로마 시대에 시민과 시민이 아닌 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명확하던 시기에 이런 편지가 돌아다녔던 교회는 확실히 시대변혁적인 혁명적인 것임에 틀 림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혁명을 하려는 게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따라 지 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골3:10)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 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 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 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로새서 3:10–11, 개역개정)

4) 동등함의 기초, 사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기인하는 이 동등함은 모든 권리를 동 등하기를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의 방식을 통해 작동합니 다. 먼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실제로 그 하나님 은 사랑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성령 하나님을 통해 일하십니다. 또한 성자는 언제나 성부 하나님께 의지 하고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영광을 차지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활동하며 성자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고, 성부께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자기 내어줌의 사랑이 -112-


차고 넘침이 하나님을 사랑이시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 의 이 원리를 따라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창1:26-27),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창조 직후에 연거푸 보기 좋다고 감탄하시던 분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돕는 배필을 만들어야겠다고 하시며 (창2:18),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창 2:22). 그 결과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 루게 하셨습니다(창2:24). 마치 세분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 같이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교회에 관심을 돌려도 동일한 원리가 나옵니다.(롬12:5)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열심으로 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롬12:4-11)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삼위일체 -113-


이 한몸됨 안에서 나타나는 동등함은 나의 권리를 쟁취하는 방식이 아니 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로서의 차별이 없 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를 좀더 사랑해달라, 사랑해야만 한다 는 주장이 아니라, 사랑하니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 의 차이를 가지고 누가 맞다 틀리다를 주장하기 보다 예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는 것(롬 15:7)이 서로에 대 한 동등함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받으신 것을 성경은 우리를 사 랑하셨다고 하고 그 이유에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 니다(요일 4:10-1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 로 받으라 (로마서 15:7)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 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 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 땅하도다 (요한1서 4:10–11)

그렇다면, 이런 사랑에 기초한 삶을 사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보다 구체 적인 실제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비, 직원으로 살아가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 심과 그 분을 섬기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골3:18-25)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시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나와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교회 도 이런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요?!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 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 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 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 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 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 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3: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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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원을 향하여 : 샬롬을 꿈꾸다.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은 언제나 환영 할만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 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 를 전파하게 하려 한다는 이사야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82년생 김지영과 나는 여전히 아픔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지만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설명 한 사랑의 원리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아픔, 타인의 아픔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적절한 도움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 아야 했습니다. 주인공을 돕고자 하는 남편이나 시어머니 역시 아내이자 며느리인 김지영을 돕고 싶어 하면서도,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따라주기 를 바랄뿐 정작 김지영이란 여인을 존재 자체로 봐주지를 않았습니다. 내 가 아픈줄을 모르니 도움을 요청할수도 없고, 타인이 아픈줄은 알지만 내 가 도움을 줄수 없거나 이건 그래도 안돼! 라는 것이 있기에 구원의 여정 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의 비극과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 런 우리 인생에 소망이 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 신다는 것입니다(롬8:26). 하나님은 우리보고 알아서 잘 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길을 갈때(선악과를 따먹을 때나, 아벨을 죽일때 등등) 우리를 직접 제압하시지 않으시지만 그냥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 다. 찾아와 말을 거시고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변화만을 기다리지 않고, 우 리가 유익하도록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고(사48:17),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 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 라 (로마서 8:26)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 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17) -115-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은 여리고 성을 들어가시다가 구걸하던 맹인 을 만나셨을때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 다. (눅18:35-43) '너는 맹인이니 눈을 뜨게 해주마..', '너는 구걸하는 자이니 돈을 많이 주 마..', '너는 함께 사는 가족이 없어 보이니 예쁜 아내를 주마.. ' 이렇게 말 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알아서 좋은 것으로 주겠다고 미리 정하지 않고, 그에게 원하는 것을 물어보시고 그가 원하는대로 보게 해주셨습니다. 거 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해주셨습니 다. 예수님이 82년생 김지영을 만났다면 그렇게 다시 물으시지 않았을까 요?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니?' 구원은 단순히 고통 없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히 차별없는 삶이 아닙니다. 82년생 김지영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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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넘어서 '나 엄마 닮았나봐.. 예쁜 딸이 나왔어..' 말하는 것 같은 하나 님이 형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본래 사람에게 주신..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주신) 샬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잃 어버린 그 샬롬을 회복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내가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 를 원하니?'라고 물어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은 하고 싶은 일을 하 고 살수는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공의 친정엄마가 말 하는대로 '너 하고픈 거 해'라는 말을 듣는 것인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말하는대로 다 해줄수는 없겠지만, 그 소원 만큼은 알아주고 함께 머물러 주면 좋겠습니다. 그 소원이 내 소원이 아닌 하나님이 심어두 신 소원일지도 모르니까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 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개역개정) 오늘도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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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의해야 할 모습, 그 안에 담긴 헌신

주의해야 할 모습, 그 안에 담긴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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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해야 할 모습, 그 안에 담긴 헌신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 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 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 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 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 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 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마가복음 12:38–44, 표준새번역)

아침에 당혹스런 뉴스를 보았습니다. 중앙일보 뉴스에 대구에서 500명 이 기도회로 모인것을 보도했습니다. 참석자 왈, 정기예배는 예방 수칙을 지키지만, 기도회는 안지켜도 된다고 하는 ... 어이없는.. 모습(기자가 그 면을 부각시켰겠지요)에.. 기독교인으 로서 당혹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아마도 나라를 위해 기도했을 것 같습 니다. 코로나 19가 멈추도록 기도도 했겠지요. 그렇지만, 그들의 말과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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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정 반대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해서 안타깝습니다. 그것도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가장 심각한 대구에서 그랬다니 더 속상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기독교, 교회라고 통칭되던 사람들이 다양함을 보게 됩니다. 뉴스에 보도된 이 모임을 보면 신천지 수준 같아 보입니다. 자기 중심성에 함몰되어서 자기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객관적인 판단이 안되 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기독교인만 이런건 아니겠지만, 기독교인중에 이 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심히 유감이고, 우려가 됩니다) 마가복음 12:38-44 말씀을 보는데, 이 내용이 이 뉴스와 연관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이 시대를 생각하게 되어 글로 정리해보려고 합니 다. 오늘 예수님이 언급하는 대상은 2사람입니다. 하나는 율법학자이고, 다 른 하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1. 율법학자 예수님은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지목하셨습니다. 바로 율법학자들입니 다. (원수도 사랑하라던 그분이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것은 의아하지만, 원수를 사랑한다고 해서 삶에 아무런 경계가 없거나 비판적인 시각 자체 가 잘못된 것은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1)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2) 장터(길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3)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4)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5) 그들은 과부들(사회적 약자)의 가산(재산)을 삼키고, 6)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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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오늘날 문자적으로 율법학자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면, 먼저는 일 부 신학교 교수들이나, 이스라엘의 랍비 정도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의도는 명백히.. 스스로를 높다고 생각하고 잘난 체 하면서 약자들을 우습게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좋아하 는 전*훈 목사나, 대형교회 일부 목사들이 생각납니다. 구지 대형교회가 아니더라도.. 교회들의 모임인 노회, 지방회에서 정치 한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시는 분들도 떠오릅니다. 민생이나 국익에는 관심없고, 자기 이익에 함몰된 정치인들도 마찬가지고, 사람을 일하는 기계나 돈으로 보는 세상 도 생각납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런 사람들이 엄한 심판을 받을거라고 하 셨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그냥 흘려 듣기가 뭐합니다.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는 세상에서 나도 내 안전을 위해,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누군가를 무시하거 나 억압하지는 않는지 조심스러워집니다.

2. 가난한 과부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학자에 대해 조심하라고 하면서도 가난한 과부의 일을 제자들에게 강조 하셨습니다.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도 아무말씀 안하시다가, 가난한 과부가 동전 2개를 넣은 것에 보고는, 제 자들을 불러다가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 더 많은 헌금을 드렸다고, 자 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언급하셨습니다. 1) 가난한 여인의 헌금의 의미 - 헌신 예수님은 부자들이 여유 있는 중에 드리는 헌금이 의미없다고 하지 않으 셨습니다. 다만, 이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처지에 과분하게 헌금했다고 하 셨습니다. 이 이야기에 뭍어나는 이 여인의 진정한 헌신이 핵심 인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을 칭찬하지 -122-


두 렙돈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냥 일어난 일을 보고, 예수님이 그 여인의 행동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가난해도 헌금해야 한다고 격려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이 과연 잘했다고 여기셨을까? 의문 이 생깁니다. 가난해도 전 재산을 드린 것을 칭찬하고, 코로나19로 위기감 을 느껴도 목숨을 걸고 예배 드리고, 기도회로 모여야 할까요? 물론, 진정성 있는 헌신을 알아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니... 이 과부의 헌금 이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서 과부가 헌금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율법학자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하신 것을 보면.. 이게 아닌 걸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 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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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내놓도록 한 율법학자에 대한 울분 섞인 예수님의 지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자 봐라.. 저 과부가 가진 것을 다 내놓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악한 율법학자의 횡포에 아무런 생각 없이 순종하고 있는 이 가난한 과부 의 모습이 목요 기도회에 참석한 신자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광 훈 목사의 교회나 신천지나 목회자가 성도들의 안전과 이 사회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휘두르는 횡포에 가난한 과부같은 약자들만 고통을 받습니 다. 과거의 내 모습을 생각해도 그렇고, 주위를 둘러봐도 목회자가 예배 드 리자고, 기도회로 모이자고 하면 이를 안하겠다고 거절할수 있는 성도가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목사님, 이런 시국에는 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지도 않고, 마 스크도 하지 않고, 예방 수칙도 지키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들이 모였던 그 예배, 그 기도는 혹시 오늘 본문처럼 쥐어짜진 두 렙돈은 아닐까요?! 율법학자에게 강탈당하는 가난한 과부를 생각하니 속상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높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할수 없습니다. 나도 그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 으로 지음 받은 자녀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제 스스로에게 바라는 점은 세가지 정도입니다. 내가 먼저 율법학자처럼 높은 체 하지 말고,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바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가난한 과부라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휘둘 려서 쥐어짜서 전재산을 바치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 던 십일조로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습 니다. 무엇보다도 율법학자보다 더 크시고 진정한 복음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알고, 복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온전케 하시는 샬롬을 사모합니다. -124-


7.

샬롬복음 연구의 배경과 목적

샬롬복음 연구의 배경과 목적 🤍

샬롬 복음 연구소는 복음으로 사는 삶을 연구 하고 추구 합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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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연구의 배경과 목적 "샬롬복음연구소는 복음으로 사는 삶을 연구하고 추구합니다"

복음으로 사는 삶을 연구하고 추구하는 샬롬복음연구소는 2018년 1월 에 연구대장 서진 목사가 시작한 1인 연구소입니다. 연구소에 대한 개인 적인 소명은 한계 상황에서 느낀 좌절과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 만 연구소 사역을 시작한 이래로 시대적인 상황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명 으로 전환되는 것을 느낍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나서 부터 설교나 글을 대할때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가 새롭게 들 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복음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달라지 는 삶의 양식(복음으로 사는 삶)의 다양성과 본질을 성찰하게 됩니다. 이 것들을 정리하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126-


1. 내가 살아온 세상의 복음 시대적 복음 대한민국에서 80년대 이후로 2000년까지 제가 자라오면서 경험한 복 음은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배운 복음 은 “인간은 죄인이며, 그로 인한 한계와 절망에서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그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천국"이었습니다. 자연스레 그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 대속에 대한 감사와 그 기쁜 소 식을 전하는 전도", 또는 "그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 다. 2000년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새로운(업그레이드 된?) 복음이었고, 그 복음으로 사는 삶은 "사후에 있을 천국에 대한 소망 만이 아니라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대하는 하 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가정과 교회, 직장,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적 상황 하지만, 현실에서 통용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이외에도 돈이 나 성적, 인정(인기, 명예), 효율성, 합리성으로 입증 가능한 것들에 부여되 는 세속적인 가치와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일 예 로, 전성민 교수(VIEW)는 "대한민국 사회는 평등사회"라고 일갈했는데, 몇평 아파트에 사는지, 몇등인지로 평가받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는 교 회 안과 밖을 관통하는 이야기로 시사성이 있는 평가라고 여겨집니다. 실 제로 교회의 성장이나 성도의 성공 이야기(건강, 사업, 가정의 회복), 선교 의 동원 및 평가에 있어서 현실성의 차원에서 세속적인 가치가 고스란히 적용되어 귀감이 되고 비전으로 삼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풍토 안에서 자신이나 세상이 부여한 기준에 성공하지 못한 경우에 는 구원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 면서도 실제 삶에서 행복이나 만족을 논하는 것은 일부 고상한 영성가들 의 몫으로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 -127-


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죄책감을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저 종교적인 위안만 찾을뿐 실제적인 복음으로 사는 삶은 외면하 고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범주를 벗어나서 교회나 선교단체들도 세상 가운데 놓여있는 실 존적 위치 때문에 자신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치들에 주목하면 서 정작 자신들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안타깝 게도 이에 대한 자성의 기회를 놓쳐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조롱 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에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 과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구원의 복음을 나누겠다 고 자처하면서도 이 세상의 소금이나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 속적 성공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드러난 한계 이런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자기 중심성의 한 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중심성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이나 목표 (때로는 절대적 생존같은 위기에 대한 대응이기도 함)를 위해 다른 것들을 배척하거나 수단화 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의 영향아래 서구 근대화를 이룬 대한민국 사회는 금융자본주의, 민주주의, 합리주의의, 실용주의 가 치를 주요한 것으로 보고 기독교를 그런 가치들의 열매나 결정체로 간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기적인 공동체성보다 무엇이 옳은지(내가 왜 옳은 지), 어떻게 목표를 이룰 것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지(성 공)가 주요해졌습니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풍토처럼 교 단이나 교파보다 개인 교회의 독립성에 함몰되어 있으며, 이 조차도 그 안 에 속한 성도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에 의해 분열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 습니다. 내가 중요하고 우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자기 중심성 은 타인과 세상을 보지못하게 했고, 더 근본적으로는 거기에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개인이나 교회는 자신의 이익(교회 부흥이나 개인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성도와 헌금이 유용되고, 법을 이용하거나 법을 회피하는 -128-


방식으로 기독교적 본질과는 대치되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분별하지 못 하거나, 알고도 거스르는 선택을 해왔습니다. 이런 모습은 2010년 전후 로기독교 기업이나 대형 교회의 선택이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 상식과 공 공성의 측면에서 성찰의 목소리가 거세졌습니다.(ex이랜드 비정규직 대 량해고, 삼일교회 전*목사의 성추문) 대형교회들의 건축과 세습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이 가운데 드러난 기독교의 은혜가 왜곡된 도덕적 해이, 자 기 중심적인 모습, 공교회성을 잃어버리고 개인적인 안위를 목적으로 하 는 성도들의 세속화가 많은 논란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외에도 가나안 성도라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 개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한 집단처럼 회 자되었는데 이 역시도 자기중심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의 노력 이에 대한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문제의식을 가졌고, 당연하게 여겼던 복 음과 삶에 대한 성찰과 갱신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진실하 게 구도자적으로 반성과 대안을 찾는 모습이 있었고, 학자들 역시 진단과 대안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비록 이런 일련의 반성과 갱신의 노력에 저 항하며 이를 기독교 박해로 여기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런 의견까지 포함 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의견이 소통되고 있는 것은 분명 이 시대 가 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마주한 한계들을 갱신하고 하나님에게로 성장하는 중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샬롬복음 연구소는 이런 반성과 대안을 찾는 노 력의 연장선에서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 다.

2. 복음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구원의 복음 이상의 복음 단연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모든 인간의 실존이 가진 한계에 대한 해결과 소망을 주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 -129-


니다. 하지만 그 구원을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시키거나 사회적 움직임으 로 만들 때 보이는 피상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복음으로 살아내는 삶 이 보여주는 한계들(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간과하는)에 대한 보완이 되 는 설명과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고려 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다른 층위의 복음을 샬롬복음이라는 용어를 제안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주목 그런 차원에서 샬롬복음이 주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을 통해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 그 이전과 이후에도 동일하게 주어진 복음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루었습 니다. 그 결과 이미 다양한 상황에서 환기되고 있는 구원 자체를 넘어서 ‘구 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구원을 베푸시기 이전부터 '사랑으로 대하신 하나 님'에 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회복)의 주 체가 되는 하나님 자체를 복음과 복음으로 사는 삶의 핵심으로 놓아야 합 니다. 이미 성경과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할 때 애초의 의도와 는 다른 세속화와 우상화를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주목과 집중의 요청은 일관된 성경의 이야기이고, 그 하나님에게서 다시 사람의 정체성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이 며, 하나님 나라라고 할수 있습니다. 관계의 복음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을 창조하심과 간섭하심으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 으로 만드셨고 그 사람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다스릴수 있는 권한과 자유 를 주셨습니다. 비록 사람이 하나님 대신 사단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대적 함으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을 예 비하시고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로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세상과 -130-


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주목할 때, 이 세 상의 존재의미와 인간의 삶, 내 인생의 소명과 가치가 자연스럽게 드러나 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갈 방향을 알수 있게 해줍니다. 샬롬 복음 따라서 샬롬복음은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세상이 바른 관계를 맺을 때 (롬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두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대 우 명제) 그 안에 주어지는 관계를 샬롬이라 정의하고, 이 샬롬을 복음으 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 샬롬은 때로는 기쁨과 감격이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와 소망이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과 애통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다 양한 감정과 상황들이 존재할수 있는데, 샬롬복음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 는 나와 내게 통치를 위탁하신 피조 세계의 관계가 올바르게 맺어져야 합 니다. 이는 복음이 복음되게 하는 자유와 사랑에 기초해 있으며 이익이나 성공 을 얻기 위한 것, 벌을 면하는 것보다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존재하며 내 삶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사실을 인 식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아니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고 함께 거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복음입니다.

3. 복음으로 사는 삶을 꿈꾸며 복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기대 그렇기에 샬롬복음은 최초의 창조부터 복음의 시작이었고, 인간의 타락 의 순간에도 이미 존재하는 복음이며,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을 통해 베풀 어주시려던 복음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삶에서 경험하 는 어떤 흥망성쇠의 순간에도 놓치지 않을 복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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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샬롬복음을 고려하면, 더 이상 결과나 과정, 의도에 담긴 어떤 합리성, 정당성, 효율성, 힘의 논리, 기계론적 유물론, 우상화를 경계할 수 있습니 다. 또한 그 반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통치아래 있음을 기억하고 그 일을 시작한 이들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선하 게 사용할 창조적인 가능성을 볼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목표 샬롬복음에 대한 연구는 이런 창조성을 기초로 세상 가운데서 세상을 위 해 일하는 그리스도인과 예수 공동체를 사랑으로 지지하며 간절히 원합니 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성공하기 위해서 살지 않습니 다. 우리를 지으신 분, 이 땅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다시 얼 굴을 마주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종교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의 양식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변화하고 성장하며 사랑을 만들어내고 생명을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차 원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고 그 삶의 자리에서 꿈꾸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연구소에서 혹은 연구소와 함 께, 혹은 연구소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의 자리, 우리의 삶을 가 꿔갈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바램이 앞으로 보다 명료해지고 구체화 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론을 정리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신뢰함으로 삶을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샬롬복음연구소는 이런 마음을 공유하는 분에게 언 제나 열려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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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연구소 프로그램 안내

연구소 프로그램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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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프로그램 안내

연구소 사역 목표 - 복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삶으로 산다.(성경, 현실영성) - 현실에서 예수 공동체로 함께하는 삶을 산다.(가정, 교회, 직장)

연구소 사역 원칙 -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사역은 하나님을 향해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 복음을 아는 것과 복음으로 사는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적용 과 실천은 필수입니다. - 하나님과 나 자신, 공동체에 대한 태도 3가지: (1) 진실함, (2) 알고자 함(소통), (3) 사랑하고자 함

* 성경연구, 성경공부 , 성경 강해 소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본 과정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삶의 실천 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훈련입니다. 이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지만, 인격 적인 신앙 형성을 목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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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성경연구

성경연구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이론을 배웁니다. 실습을 통해 방법을 익 히고, 과제를 통해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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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성경공부

성경선생을 통해 1:1로 성경을 공부합니다. 샬롬복음의 관점으로 신앙의 기초가 되는 창세기, 출애굽기, 로마서 과정을 먼저 공부합니다.(각 권별 약1년 과정/주1회 2시간) 신앙의 연륜에 상관없이 수준별 학습이 가능하 고, 개인별 성경적 코칭을 통한 성장을 목표로 합니다. 일방적인 지식 전달 이 아니라 대화와 삶을 교류하며 서로가 함께 성장하는 돌봄의 과정입니 다. 참여자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돌봄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과정을 마치 면 읽기, 쓰기, 말하기 능력이 향상되고, 건강한 삶을 위한 정서 개선에 도 움이 됩니다. 과정을 마치면 수료증을 받은 후에 성경선생의 자격을 가지 며 슈퍼비전을 통해 지속 성장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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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소그룹 성경공부

3명~6명의 멤버가 함께 성경을 권별로 공부합니다. 2020년 상반기에는 샬롬복음의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공부합니다.(오전반, 저녁반, 주말반 30 회, 주1회 2시간) 소그룹 성경공부는 연구소에서 추구하는 안전한 대화모 임을 기초로한 예수 공동체 모델이 적용됩니다. 이 모임은 성경 본문을 입 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내 생각을 표현하고,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듣기 가 요구됩니다. 이 과정을 마치면 경청과 말하기 능력, 소통 능력이 향상되 고, 창의력과 이해력 배양에 도움이 됩니다. 모임별로 닫힌 모임과 열린 모 임, 성경공부 이외에 교제 모임이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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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으로 보는 성경, 성경 Q&A

창세기와 출애굽기, 로마서를 샬롬복음의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그 내용 을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공유하고, 오프라인 강좌를 오픈하성경에 대 한 궁금증,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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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좌, 스터디 모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샬롬복음연구소는 샬롬복음의 관점에서 논의를 확장하고 복음으로 사 는 삶을 지원하기 위해 외부 강사를 초청해 강좌와 스터디 모임을 오픈합 니다.

* 독서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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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1 한달 한권

매월1권을 읽는 모임입니다. 정해진 책을 읽고 간단한 서평(A4 2-4페이 지)을 작성하여 모입니다. 발제와 토론을 진행합니다. 평일 오전에 월 1회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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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2 모여 읽기

한학기 동안 매주(월1회 휴강) 모여서 함께 책을 읽습니다. 별도의 과제는 없고, 모임에 참석해서 읽고 토론하고 헤어지면됩니다.

* 일상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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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복음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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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모여서 영화/드라마를 보고 대화를 나눕니다. 느낌을 담은 소감을 통 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인식합니다. 이를 통해 철학과 스토리로 입체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상매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 는 능력을 향상시킵니다. (주말 오후에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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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대화 모임*

이 모임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자기 성장 모임입니 다. 특히 복음이 함께 하는 삶의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 있음을 기초로 합니 다. 안전한 대화는 안전의 관점에서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대화입니다. 충 분히 감당할수 있는 상태에서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종합해서 나누는 대 화입니다. 관련 이론은 초기 2주차에 소개되고, 이후에는 정직함과 사랑, 용기를 가지고 참여하면 됩니다. 자기 돌봄과 자기 내어줌의 과정을 반복 하게 되고, 이를 통해 건강한 자기 돌봄, 가정과 직장에서의 소통 능력을 개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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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수다모임

이 모임은 식사나 차를 마시는 만남입니다. 하지만 먹는 일로서의 식사가 아니라 진지를 대하고, 패스트푸드가 아닌 슬로우푸드로서의 차를 마십니 다. 특별히 정해진 주제나 목표는 없고, 삶의 여백이 필요하거나 그 여백을 채울 꿈이 필요한 경우에 신청하시면 함께 할수 있습니다.

* 샬롬복음이야기 (소식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샬롬복음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들을 모아, 분기별로 발행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부득이 외부 기고를 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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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구소 소식 •

샬롬복음연구소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54961, 전주시 완산구 우전로 325 부영빌딩 202호 아직 여백이 많은 공간이지만, 복음을 찾는 이들과 복음으로 사는 삶 을 그리는 이들과 어울리는 공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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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사역을 응원해주세요.

글을 읽는 것, 피드백을 남기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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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 후원자에게는 진행하는 강좌와 모임에 할인 혜택을 제공합니다.

* 후원계좌 : 농협(서진) 302-1256-1071-91
 * 기부금 영수증 발급을 원하시는 분은 미션펀드를 
 통해 후원해주세요.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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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주세요.

샬롬복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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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찾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고, 징검다리가 되는 연구소 사역이 되도록

지역 교회와 대학생선교단체와 협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연구소 이사 및 동역자를 잘 세워가도록

연구소 프로그램과 계획들이 잘 진행되도록

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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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깨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샬롬을 누리도록

성경연구와 독서를 통해 기초를 튼튼히 쌓을수 있도록, 샬롬복음을 체 계적으로 잘 정리할수 있도록

건강과 체력을 잘 가꾸도록(고혈압, 운동부족)

가정과 연구소에서 복음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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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롬복음연구소

샬롬복음연구소(Shalom Gospel Reserch)는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추구합니다.

제2호

발행처 : 샬롬복음연구소

발행일 : 2020년 4월 3일
 발행인 : 서진

편집인 : 서진

샬롬복음연구소

54961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우전로 325 부영빌딩 202호

E-mail: seojin0719@gmail.com

https://shalomvi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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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복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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