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마을(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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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교육의 요람 향교가 있는 마을 교흥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1) 마을의 위치 무장면 교흥리는 지방도 796호를 이용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아산면을 거쳐 공음면, 법성포 방향으로 약 12Km 거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성내리 내동 그리고 동쪽으로는 원촌 서쪽으로는 한재산 줄기인 석산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교흥리는 본래 일동면 지역인데 1914년 교촌(郊村), 궁동(弓洞), 덕흥(德興), 월구(月句), 내동(內洞) 등을 병합하여 그 중심 마을 교촌과 덕흥에서 따 교흥리라 하여 무장면에 편입 되었다. 교흥리의 분리(分里)는 덕흥, 교촌, 궁동으로 되어있다. 교촌은 무장면소재지의 동북 방 쪽 22번 지방도 우측 마을길에서 1.5Km 거리에 위치하 고 있고, 덕흥은 무장면소재지의 동북 방 쪽 15번 지방도에서 우측 마을길 따라 1Km거리 에 위치하고 있다. 궁동은 면소재지의 동북쪽 15번 지방도에서 우측 마을길 2.5Km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교흥리에 으뜸가는 마을로 향교가 있는 생기교촌(향교 교촌) 그리고 생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충현사가 있는 서우내(서운서원, 덕흥), 서우내 동쪽 길가에 무장 향교 의 하마비가 있었던 마을 는

하마등(下馬洞), 생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궁동, 생교 동쪽에 있는 마을인 동교, 하마등 북동쪽에 있는 마을 유도리(柳道里) 등이

있다.

2. 마을의 자연환경과 지명 무장면은 북서는 높고 동남은 낮아 전체적으로 북서에서 동남으로 기울어져 있어 노령산맥 이 등마루 구실을 하고 있다. 대체로 노령산맥의 말기복의 얕은 산지이며, 구황산의 한 가 닥인 삼태봉에서 갈려나와 덕림의 촉태봉을 이루고 또 한 가닥은 북쪽으로 가다가 망치봉으 로 다른 한 가닥은 왕재산이 되었다. 왕재산을 지나 두 가닥으로 갈리니 한 가닥은 무장읍내를 지나 송현의 한재산에 이른다. 바로 이 한재산 줄기에서 깊은 골이 형성되었고 그곳에 취락이 형성되었다(지나면 또 갈리 어 한 가닥은 비학산을 거쳐 구황봉에 이르고 다른 한 가닥은 쳥룡산 선운산을 거쳐 경수산 에 이른다. 왕제산 이후 다른 한 가닥은 공음 방면과 해리 방면으로 갈리었고, 해리쪽으로 간 줄기는 무장면에서 제일 높은 송림산이 되고 있다) 1) 자연환경 (1) 마을의

산과 골짜기

- 한재(제)산?(석산) : 학체, 표고 209.7m로 송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며 면소재지에서 3.5km 거리에 있다. 학생들의 소풍지로 산세가 편편하고 녹음이 좋으며, 봄, 진달래와 기암이 산재해 있다. 또한 사두봉의 전설이 얽혀 있는 산으로 황새 형국이라 한다. - 당산 : 향교 뒤에 있는 산, 해마다 음력 정월 2일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이농현 상으로 급격하게 마을 인구가 줄면서 당산제는 자취를 감추었다.


- 신당매(뫼) : 하맛등 북쪽 길가에 있는 낮은 산, 과거에 신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확인할 수 없고 일반 주택 3가구가 살고 있다. - 한재(한치) : 궁동 북쪽에서 해리면 고성리 고성동으로 가는 높고 큰 고개 - 한재산골 : 한재산 줄기의 골짜기로 골이 깊고 궁동들 앞을 지나 주진천으로 합류된다 - 한재골 : 한재산골 줄기에서 형성된 골짜기 - 지내실(설)골 : 덕흥리 지내실에 형성된 골짜기, 지내실에는 현재 무장 진씨 - 논비낄골 (2) 마을의 들과 하천 - 유도리들 : 무장에서 고창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무장농원 지나 왼편에 펼쳐진 들 - 덕흥앞들 : 서우내 (충현사) 앞에 형성된 들 - 교흥들 : 덕흥 마을회관 뒤에 형성된 들 - 궁동들 : 궁동 마을 앞에 형성된 들 - 천금쟁이들 : 동교마을 앞에 형성된 들 - 궁동천 : 경지 정리로 일부는 메꾸어지고 일부 궁동 마을 앞으로 흐르는 천 (3) 방죽과 샘 - 여희제 : 한재산골 아래에 있는 방죽 - 덕흥제 : 덕흥앞들에 있는 방죽 - 연수제 : 천금쟁이 들 앞에 있는 방죽 - 한제 : 궁동 북쪽 한재 아래에 있는 방죽 - 생교시암 : 향교 앞에 있는 우물로 향교에서 제사를 올릴 때 이 물을 길어다 준 샘으로 현재 마을사람들은 천수정이라 하고 있다. - 약시암 : 생교 서쪽 산 아래에 있는 약샘으로 물이 바위틈에서 새어나오는데 맛이 좋고 대단히 차며 속병에 좋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경지정리로 흔적을 찾아볼 수 가 없다. - 약시암 거리(논) (4) 유도리교 - 교촌과 유도리를 이어주는 다리 (5) 여단 - 나라에 역질이 돌때에 여귀에게 지내던 제사. 봄철에는 청명에 가을철에는 7월 보름에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냈던 단이다 지금은 향교 뒤 그 터만 남아있다. 2)지명의 유래 교촌은 1500년경에 광산김씨에 의해 형성되었고 풍수지리학 상으로 뱀 모양의 사주혈이라 고 하여 용호마을로 불리웠다. 조선 세종 2년(1420년)이 마을 뒤 등에 향교가 설립되므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예의범절과 행동이 다른 마을사람들에 비하여 모범이 된 곳이다.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 또는 생기촌이라 불린지가 500여년이 되었다. 일제 강점 기인 1914년 이후에는 교흥리의 분리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덕흥은 1500년경에 형성되었으며 조선 선조 22(1589)년에 이 마을에 충현사가 건립되어 서우내 즉 서원이라 부르다가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산당이라 개칭되었고 인교로 부르다가 1950년대 하마등, 신당매, 유도리, 지내실 등 크고 작은 마을을 합하여 덕흥으로 부르게 되었다. 궁동은 1400년경 김해김씨가 형성하였으며 풍수지리학 상으로 활형국이라 한다 궁동 마을은 풍수상 활과 같은 지형으로 아랫마을 동교 마을과 합하여 궁동이라 부르게 되


었다. 뒷등에 해리면과 경계를 이룬 해발 209m 의 한재산이 있고 전설에 의하면? 마한시대 에 임금이 피신한 산이라고 한다. 한재산 아래에 있는 동교마을에는 고인돌 1기가 있다.

3. 마을의 인문환경 1) 시대별 특징 무장면 교흥리는 고인돌이 5기가 발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 기 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시대 무장은 송미지현과 상노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 어 양현에 운속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송미지현을 무송현으로 상노현 을 장사현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조선시대 태종 17년(1417)무송과 장사의 양현을 무장현으 로 통폐합하였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무장현이 무장군으로 승격되어 전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도 제 실시로 잔라남도에 속했으며 1913년 전라북도로 다시 편입되었다. 1895년 이후 행정구역에 따른 지명을 보면 일동면에는 덕흥리, 궁동리, 송현리, 신촌리, 정동리, 도산리, 죽림리, 월구리, 교촌리, 금곡리, 통정리, 양곡리 등 12개의 리가 속해 있어 현 교흥리는 일동면에 속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광무 10년(1914년)에는 군면 폐합에 따라 무장현 지역은 무장군이 되고 일 동면 이동면 무장면으로 탁곡면, 백석면이 석곡면으로 동음치면, 와공면이 공음면으로 상리 면 하리면이 상하면으로 오리동면 청해면이 해리면으로 성동면 월송면이 성송면으로 대제면 대사면, 장자산면이 대산면으로 심원면은 그대로 고창군에 통합되었다. 2) 마을의 인구와 성씨 (1) 마을의 성씨 교흥리 마을의 성씨는 김해김씨와 광산김씨가 들어와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김씨가 아닌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성씨 분포를 보면 金氏 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성씨별 분포 김해

광산

진주

여양

밀양

전주

달성

김씨

김씨

강씨

진씨

박씨

이씨

배씨

교촌

4

6

1

1

4

3

덕흥

5

4

1

3

5

4

궁동

8

3

2

1

6

3

마을별

기타

2

12

33

1

7

30

5

28

(2) 마을의 인구 총 182명(남자 94명, 여자 88명)으로 91가구가 있다. 무장면 법정리 가운데 마을의 규모 가 무장면 소재지에 인접해 있는 성내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교흥리에는 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벼농사를 짓고 살아가고 특작을 하 는 가구는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농가에서는 고추, 복분자, 홍화 등을 소규모로 재배하고


있다. 교촌 마을에 한우를 키우고 있는 축산 농가가 있다.

1가구와 인삼밭을 경작하는 1가구가

마을의 인구는 8 년 전 고창의 마을유래를 편찬할 2003년 당시와 비교해서 가구수

와 인구수가 덕흥 마을이 많이 줄어들었고, 연령별 인구 분포를 조사해 본 결과 유아, 청장 년층은 거의 없고 50대부터 7~80대까지 노장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교촌 마을에는 다문화 가정이 한세대 있다. 한국인 임연규와 중국 연변에서 온 조 선족 백설 부부이다. 이들은 임연규씨가 대리석 기술자로 중국 청도에 있는 한국기업에서 일하면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도에 있는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시부모님이 하던 김제 인삼밭을 돕다가 독립하여 무장 교촌 마을로 들어와 4천 5백여평 규모의 인삼밭 을 운영하고 있다 자녀는 2명을 두고 있다. 중국 사람인 부인 백설은 다문화센터를 통하여 한식자격증 등을 따면서 우리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데 매우 열심이다. 또한 교촌 마을 사람 들이 인심이 좋아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은 느끼지 못하고 산다고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해주었다. * 교흥리

세대와 인구

마을명 교촌

덕흥

궁동

년도

세대

총인구

2003년

31

78

32

46

2011년

33

65

34

31

2003년

43

111

55

56

2011년

30

60

30

30

2003년

25

62

30

32

2011년

28

57

30

27

* 교흥리 연령별 인구 연령별(2011년) 마을별

1 0 세

2 0 세

3 0 세

4 0 세

5 0 세

6 0 세

7 0 세

7 0 세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상

교촌

1

10

2

12

6

9

10

15

65

덕흥

6

8

0

4

8

15

11

8

60

궁동

2

1

0

9

8

17

20

57


(3)마을조직 마을별

3) 마을의

마을 조직체 이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교촌

김순호

정문호

박정순

덕흥

문만주

김공연

서천례

궁동

김주남

정만용

강신화

문화유산

(1) 무장향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가 현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 록되어 있다. 향교는 성균관과 함께 전통교육기관으로 백제 때는 오경박사를 두어 경서를 가르쳤고 고려 태조 13년(930) 평양에 학교를 설치하여 6부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문묘(文廟)를 세웠으며 성종 6년(987) 12牧에 학교를, 주군(州郡)에 학사를 세웠고 충숙왕 6년(1314)년 이곡을 각 주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시켰다. 조선 태조 원년(1392) 각 도 안찰사에게 명하여 향교의 흥폐(興廢)로 그 지역 수령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세웠다 태종은 향교의 수학 성과를 수령의 평가 기준으로 삼았고 13년(1413) 향교에 학전(學田) 을 지급하여 유지 관리 비용에 충당케 하였다. 무장향교지에 의하면 세종 2년 (1420)에 무장현 이동방 교흥리 현 위치 좌상방에 향교를 창건하여 공자(孔子)를 주향(主享)으로 ,안자(顔子), 증자(會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배 향(配享)하고 , 주염계(周濂溪, 敦頤-돈이),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회암(周晦菴), 홍유후(弘儒侯), 문창후(文昌侯-崔致遠), 문선공(文成公-安裕)을 종향(從享)하여 춘추 중월 상정 자시에 배향하였다. 중종 12년 정유 9월에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종향하였다. 임진란에 회신(灰燼)될 때 당시 본향 명유(名儒) 손직장(孫直長) 홍립(弘立)이 병화(兵禍)를 예측하고 위판(位版)을 선운산 도솔암으로 옮겨 모셨다가 선조 33년 경자에 대성전 명륜당 동서제 내외삼문을 현 위치에 중건하여 환안(還安) 향사(享祀)하였다. 광해 2년 9월에 문경공(文敬公) 한회당(寒暄當)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鄭 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제(晦齊)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종향하였다. 숙종 8년 임술 5월에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우계(牛溪) 성 혼(成渾)을, 동43년 5월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종향하였다. 영조 32년 병자 2월에 문정공(文正公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문정공(文正公 ) 동춘 (同春) 송준길(宋浚吉)을 종향하고 동40년 갑신 5월에 문순공(文純公 ) 현석(玄石) 박세채 (朴世采), 정조 20년 병자 11월에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종향하였다. 헌종 6년 11월에 명륜당이 화재로 회신(灰燼)되어 2년 후 헌종 8년 봄에 중건하고, 철종 3년에 東齊가 회신(灰燼)되니 이듬해 4년에 중건하였다.


고종 20년 계미에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峰) 조헌(朝憲)을 문경공(文敬公) 신독제(愼獨齊) 김집(金集)을 종향하였다. 본 향교는 창건 이후 후진 양성의 교육도장으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유림의 정성과 정부의 지원으로 무수히 개보수 보존하고 1985년에 지방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향교제장을 광무 10년에 직원으로 개칭하고 구품위에 봉했던바 광복 후 전교로 개칭 하였다. 약 570 여 년간 춘추(春秋) 중월(仲月) 상정(上丁) 정오(正午-現今)에 석탄제(釋尊祭)를 봉 향하며 (오륜입강)正倫立綱의 도장으로 삼고 있다. 현재 향교 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제 및 서제 등 4동의 건물이 있다. 가. 대성전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 107호 1985. 8. 14) 대성전은 內三門 내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유물이다. 주초는 원주형으 로 다듬었는데 조선 초기의 양식이다.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공포는 初翼工 형식으로 매우 세련되었다. 대성전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조선 세종 2년(1420)에 창건되었으며 선조 33년에 중건 되었다. 그 후 현재까지 3차에 걸쳐 중수되었다. 즉, 1차 중수는 1929년에, 2차 중수는 1961년에 그리고 3차 중수는 1966년에 각 각 행하여 졌다. 현재의 건물은 1966년에 대대 적으로 중수된 것이다. 나. 명륜당 명륜당은 앞에서 소개한 대성전의 전면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공포는 익공형이며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명륜당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조 33년에 중건되었다. 그 후 헌종 6년(1840년)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2년 뒤인 동왕 8년(1842)에 2차 중건되었다. 그 뒤 현재까지 3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그러나 건물이 너무 頹落(퇴락)하여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다. 현재 명륜당의 5칸 중 양쪽 1칸씩은 방을 만들어 有司室 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3칸은 청사로 이용하고 있다. 다. 동제 동제는 명륜당의 동쪽에 있는 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柱礎는 자연 석을 이용한 덤벙 주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동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선조 33 년에 향교가 중건될 당시에 건립되었다. 그 후 철종 3년(1852)과 해방후인 1956년에 각각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56년에 건립된 것이다. 현재 5 칸 중 1칸은 典敎室, 2칸은 校任室로 각각 사용되며 나머지 2칸은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라. 서제 서제는 명륜당의 서쪽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주초는 자연석 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며 기둥은 평기둥이다. 서제는 선조 33년(1600)에 중건된 이래 3차례 의 중수를 거쳤다. 현재 5칸 중 1칸은 掌儀室로 사용되며 나머지 4칸은 각각 2칸의 청사와 교생실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1 >무장향교

<사진 3 > 무장향교 대성전

<사진 2 > 무장향교 외삼문

<사진 4 > 무장향교

<사진 5 > 무장향교사적비 라. 무장향교 소장 문헌(文籍) 해제(解題) - 交案(교안) : 본 안은 1881년부터 1910년까지 30년 동안의 무장향교 임원명단을 소록 한 것으로 이 안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81년이다. 그후 계속해서 1910년까지 매해 추록 (追錄)하였다.


- 규답구폐완문(奎沓絿弊完文) : 본 완문은 무장현감 김진화(金鎭華)가 향교에 발급한 것이 다. 당시 규장각답(奎章閣沓)은 백성들이 분배받아 경작하였는데 도조(賭租)를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도조가 지나치게 높이 책정되기도 하고 백징(白徵), 족징(族徵), 이징(里徵)등의 폐 단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지자 현감은 이러한 폐단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관에 서 300량을 출급(出給)하였다. -완문(完文): 무장현감이 충현사에 내린 것이다. - 무장현 배(排) 결속(結還) 절목(節目) : 본 절목은 암행어사가 현감에게 보낸 것으로 본 현의 還費(환비)를 백성들로부터 남렴(濫斂)하지 말도록 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구폐절목 이다. - 성전주룡금송절목(聖殿主龍禁松節目) :

무장향교 대성전뒤의 내룡(즉, 산등성이)과 基地

(향교터)의 소나무가 함부로 절벌되어 그곳이 교촌민의 장목지(장목지)로 이용되기도 하며 혹은 채마전(菜麻田)이 되어버리자 동 지방의 유림들 사이에서 “직송금호(植松禁護)”를 주장 하는 의논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당시의 무장현감 임기상(任箕常)이 위 문제와 관련된 첩(帖)을 내렸고 향교에서는 그 첩을 근거로 해서 본 절목을 작성하였다. - 향약계완문(鄕約稧完文) : 본 완문은 무장현감이 향교, 양사제(養士齊), 사마제(司馬齊) 및 현내 16방에 발급한것으로서, 당시 경비부족등을 이유로 하여 행해지지 않고 있던 鄕飮 酒禮(향음주례)를 부활시키기 위해 관에서 800냥을 출급(出給)해 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 혁폐절목(革弊節目) : 본 절목은 무장현감이 각 면에 내린 것으로서, 수미(需米)를 수봉 (收捧)할 때는 반드시 15두를 일석(一石)으로 할 것이며 매 석두(每石頭)에 전 5전을 더하 여 거둬들이는 예와 오창서가(五倉書價)를 부과하는 예를 혁거(革袪)하고 속오방점전(束伍防 點錢)의 징수에 있어서는 南8面은 8전, 北8面은 1냥을 정식으로 하도록 하고 있다. - 堂長案(서원에 딸린 남자 하인) : 향교 서제에 소속되어 있는 당장들의 명단으로 모두 21 명이 수록되어 있다. - 흥학계중설완문(興學稧重說完文) : 이 완문은 무장현감이 사마제에 발급한 것으로서, 게 속되는 흉년으로 1887년에 조직된 사마제 흥학계가 점점 규모가 줄어들어 제 기능을 발휘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이에 그 계를 부흥시키기 위해 그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 유안(儒案) : 이 안은 1910년 이전에 작성된 무장향교의 유안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 는 것으로 여기에는 무장지방의 유생 170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2) 충현사(忠賢祠) 충현사는 무장면 교흥에 있는 석탄(石灘) 이존오(李存五),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경 암(警菴) 손홍립(孫弘立)을 모신 사우(祠宇)이다.


우리 군에서 가장 오래된 사우이고 유일한 사액 사우이다. 대개의 서원 사우가 후손이 있 어 유림과 함께 유지 운영하는데 충현사는 창건부터 대동훼철 뒤 중건에도 사림의 성열로 이루어졌고 전후 수백 년 동안 수시 보수하여 보존 만전을 기했는데 년전에 건물이 頹落하 여 사판을 교궁에 이안하였다. 충현사에는 심원록(尋院錄)이 있어 문화재이다. 영조 27년부 터 훼철될 때까지 120년에 걸쳐 1480명이 參謁한 奉審錄이다. 新恩과 지방관이 이 고장을 지날 때 하마등에서 하마하여 현신의 예를 올린 것은 임금(선조)의 사액이 걸린 사우이기 때문이다. 무장 읍지에 의하면 선조 22년(1589)에 무장면 원촌 한치에 창건하여 고려 충신 이선생 존오를 존향했으니 주장한 분은 경암 손선생 홍립이고 협력한 분은 감사 윤두수였다. 국운이 비색하여 창건된 지 3년 뒤 임진란이 발발하고 정유란(丁酉亂)에 호남이 유린되면 서 교궁과 함께 본사가 회신(灰燼)되어쓴ㄴ데 이에 앞서 경암 선생이 교궁과 본사 위패를 선운사 절벽 중에 이봉하여 화를면했고 란 후 선조 41년 경암 선생이 참의 오희량 사인 오 전과 이원보 정명 문뭉규 문몽조 김광해 김순 제장보(諸章甫)와 더불어 교궁 전등에 중건했 는데 이때 전후 방백 최권 윤안성은

재력으로 돕고 현감 임서가 녹봉을 보탰으며 을사 명

현 미암 유선생을 병향하니 二先生이 일찍 본향에 부임하여 감당의 은혜가 컸기 때문이다. 익년 사인(舍人) 오전이 상소하여 청액하고 이듬해 충현사의 어필이 내려 현존하니 사우로 는 전국에서 일곱 번째 사액이고 본향에서 유일한 사액 서원이다. 경암 선생은 정조 5년에 도내 장보(章甫) 백여인 연명으로 충현사에 추배할 것을 상주했고 이에 앞서 판서 민종현 수선 임한호가 전(傳)과서(序)를 지어 백세의 스승으로 사우 향사 못 함을 개탄했는데 광복 후에야 사론(士論)이 제발(齊發)하여 향천 도천을 거쳐 성균관에서 보 양하고 사액서원이어서 윤대통령의 윤허를 받아 지난 을묘년(1975) 본사에 배향하였다. 가. 충현사 연혁 1589년(선조22년) 경암 손홍립이 고려 충신 석탄 이존오를 받드는 사당을 무장면 원촌에 세워 석탄사라 이름하다. 1597년(선조 32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8년(선조41년) 경암이 향사와 함께 교궁 앞 등에 재건하여 기사명현(乙巳名賢) 미암 유희춘을 병향(竝享)하다. 1609년(광해 1년) 손정숙(孫廷肅) 등이 사액을 청하여 이듬해 선조어필로 충현사 액자가 내 려지다. 1657년 (효종8년) 원장(院長) 오첨선(吳添善) 등이 신실과 강당을 보수하다. 윤허 1721년(경종원년) 원장 김수(金澍) 등이 사우를 보수하다. 1858년(고종5년) 사원대동훼철령이 내려 3년 뒤 1871년 기어이 훼철되다 이후 단향(壇享) 으로 모셔 오다가 1955년 전교 정익환이 향사의 성금을 모아 옛터에 중건하고 중건사적비 를 세우다. 1975년 경암 손홍립을 윤보선대통령의 윤가(允可)를 얻어 충현사에 추배(追配)하고 묘정비 (廟庭碑)를 세우다. 2005년 제장(齊長) 이돈우가 군비(郡費)를 얻어 교궁 앞에 규모를 새로이 중건하고 석탄 미 암 종중의 후원으로 중건비를 세우고 다시 군비를 얻어 단청을 마치다. 나. 충현사 묘정비명 우리 무장 고을에 선현을 사우향사(祠宇享祀)하는 곳으로 그 수가 하나가 아닌데 충현사의


건축이 가장 앞선다. 이사우는 이석탄, 유미암, 손경암

三선생을 모셨으니 이, 유 二先生은

창사 때부터 배향하고 손선생은 오늘에 추배했다. 삼가 살피니 석탄선생의 위는 존오요 자는 순경(順卿)이니 경주인이다. 고려 충혜왕 2년 辛巳에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 힘써 배워 정포은, 李陶隱, 朴潘南(박반남), 諸賢과 서 로 잘 사귀면서 경의를 강론하여 거의 거르는 날이 없었다. 공민왕 9년 경자에 국자진사로 문과에 오라 수원서기에 제수되었다가 史翰에 뽑히고 여러번 감찰 糾正에 제수되었다. 丙午 에 右正言이 되었는데 때에 신돈이 당국하여 참람하기 그지없어 威福을 자행하여 그 세가 임금보다 더하되 조정에 있는 제신이 다 그 위세에 눌려 감히 말을 못했다. 이때 선생이 분에 겨워 攻斥하는 소를 지어 官衙에 나아가 동렬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요물 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아서는 안됙T다 하고는 소를 올림에 왕이 노하여 불사르라 명하고는 선생을 불러 면책할 때 돈이 왕과 형상을 마주하고 앉았는지라, 선생이 소리를 질 러 꾸짖어 말하기를 노승이 어찌 무례하기 이러한가 하니 돈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상에서 내려앉았다. 왕이 더욱 노하여 巡軍獄 하옥시키라 명하고 좌우에서 죽이려 했는데 목은선생 이 힘을 다해 구술하여 장사감무로 貶黜되니 국인이 칭송하여 참된 정언이라 말했다. 戊申에 벼슬을 버리고 공주 석탄에 퇴거하니 이로부터 조정에 언로가 막히고 돈의 위세는 더욱 성하니 선생이 분에 겨워 병이 났다. 병이 위급함에 이르러 좌우에서 부축하여 일으키 게 하고 돈의 위세가 아직도 성하느냐? 돈이 죽지 않고는 나도 못 죽겠다 하여 운명하기 전 에 이러하기 무릇 여러 차례였는데 마침내 공민왕 신해 5월 20일에 세상뜨니 나이 겨우 31 이었다. 그 뒤 3월에 돈이 伏誅했고 왕은 선생의 충직함을 생각하여 성균관대사성에 추증했 다. 이조에 아들 경절공 내의 귀로 資憲大夫에 추증하고 학림군에 봉했다. 미암선생의 위는 희춘이요 자는 仁仲이니 선산인으로 중종 癸酉생이다. 經籍에 널리 퉁하 고 학술이 정심하여 정유에 생원하고 무술에 별시에 뽑혀 槐院(괴원)에 들었고 史局으로 들 어와 侍講院說書(시강원설서)로 옮았다. 때에 인조가 덕을 기르고 동궁의 성학이 날로 진척 하여 선생이 輔導(보도-도와서 올바른데로 이끌어 감)로써 자신의 소임을 삼아 깨우쳐 게으 르지 않았다. 이윽고 弘文館修撰(홍문관수찬) 겸 사서를 제수했는데 선생이 오래도록 부모 모시지 못한 것으로 말미를 청하니 중종이 특별히 무장현감에 제수하여 봉양을 편히 하게 했다. 선생이 부임하여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庶務가 다스리고 힘을 다해 교화하여 일향이 흡족했 다. 甲辰에 인종이 즉위하여 수찬으로 불러들였는데 이해 7월에 임금이 昇遐(승하)하고 명 종이 즉위함에 선생이 시무십조를 바쳤다. 8월에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이듬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선한 분들이 큰 화를 입었으니 선 생은 종성으로 유배되어 무릇 19년을 풀려나지 못했다. 궁벽한 곳에서 괴로움을 이겨내며 萬卷書를 독파하면서 고을을 은혜롭게 했으니 이로하여 따라 배우는 이가 또한 몹시 많아 유풍이 크게 떨쳤다. 선조 초에 성균관직강에 제수되고 이윽고 홍문관교리로 옮았다가 대사성에 오르고 기가에 홍문관제학으로 우승지에 옮았다. 신미에 다시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체임되어 대 사헌에 뽑히고 얼마 뒤 예문과제학에 제수되었다. 을해에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丁丑에 정2 품으로 진급되어 특별히 자헌대부에 올랐는데 5월 15일에 졸하니 향년은 65세였다. 경진년 에 이르러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특별히 의정부좌찬성에 추증하고 문절의 시호를 내렸 다. 경암선생의 위는 홍립이요 자는 희원이니 밀양인으로 중종 정유생이다. 문예가 일찍 나아


가 어려서 이미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했으나 성품이 과거 공부를 좋아 아니하여 약관에 퇴계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배워 그 경의를 강론했는데 왕왕 사람들이 발견 못한 것을 발견 함에 退翁이 아름다이 여겨 칭찬하기를 湖南秀士라 했다. 명종 정묘에 도내 유림과 함계 상소하여 정암선생의 伸寃을 청했고 선조 갑신에 도백의 특 별한 천거로 司甕院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인끈을 풀고 결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사는 곳 원촌 後麓(후록-산기슭)에 집을 짓고 문을 열어 학도를 받아들여 강학하여 그치지 아니하니 학사에 다 수용 못할 정도였다 그의 가르침은 격물치지 정심 존심 양성과 성찰로 준칙을 삼 아 諪諪(정정)히 선도하여 성취한바 심히 많아 일시에 문풍이 蔚然(울연-무성하게 우거지 다)하고 풍속이 크게 변했다. 사호(沙湖 )오공은 선생의 오랜 친구라 일직 선생의 집에 쓰기를 “瀟灑(소쇄-기운이 맑고 깨끗하다)한 동성의 집은 의연한 처사의 삶이로다. 箇中(개중)에 참된 즐거움 있으니 언제나 聖賢書를읽도다”했으니 이로써 선생의 높은 발자취를 보리로다. 선조 24년 신묘에 선생이 이미 고령임에도 慨然(분개)히 석탄 , 미암 二先生의 사람됨을 사 모하고 또 이 二先生이 다 본 읍에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글을 지여 관찰사 梧陰 윤공에게 호소하여 사우를 세워 함께 배향했다. 정묘년에 이르러 倭盧가 재침함에 선생이 화가 사우 에 미칠 것을 헤아려 미리 位版을 받들어 도솔산 절벽 속에 이안했는데 얼마 안되어 사우가 과연 불탔으니 사람들이 다 그 선견지명을 말했다. 난이 진정된 뒤 戊申에 선생이 長姪 廷 肅과 吳參議 希亮, 吳舍人

晪(전), 이원보, 丁銘 ,문몽규, 문몽정, 김광해 ,김순 등 여러 선

비와 함께 의논하여 교궁 남쪽에 移建하였다. 이듬해 己酉에 또 오사인과 함께 상소하여 사액을 청했고, 이듬해 경술에 특별히 충현사 三 字의 어필이 내렸다. 선생이 돌아가심에 閔尙書 鍾顯, 林修撰 漢浩가 傳과 序를 지어 백세 의 스승인데 아직도 제사의 의논이 없어 세도가 한탄스럽고 士習이 애석하다는 말이 있었으 니 백여인 연명으로 상서하여 선생을 충현사에 추배할 것을 청했으나 당시 有司가 깊이 살 피지 못하여 일이 잠자고 행해지지 못했다. 고종 무진에 이르러 충현사 또한 대동훼철에 들게 됨에 이에 一鄕士林이 의지할 곳이 없어 數尺 유허비를 세워 寓慕할 분이었으니 지나는 이 한숨 짓고 한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91년 지나 戊戌에 내가 외람되이 본향의 전교가 되어 그윽히 생각함에 지난 자취가 드디어 민멸될까 두려워 감히 임오년 復院의 綸音에 따라 중지를 모아 충현사 옛터에 세웠고 辛丑 년에 이르러 또 경암선생을 추배하는 뜻을 列郡에 輪通하고 도 四長官을 움직여 성균관과 윤대통령에게 仰告함에 모두들 한 목소리로 찬동하여 이언이 없는지라 을묘년에 이르러 비 로소 사우에 배향할 수 있었으니 아아 어렵도다 여러 대에 걸쳐 펴지 못한 뜻을 이루었다 말할 것이고 또한 공의는 더욱 도래 되어도 민멸하지 않는 줄을 보리로다. 오호라 석탄선생의 정충대절과 미암선생의 도학문장과 경암선생의 존현상덕은 다 족히 백세 의 사표가 될 만하여 집집마다 받들어 영원토록 그 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니 이 일이 비록 천추 뒤에도 누가 감히 그르다 하겠는가? 조정에 비가 있는 것을 古例라 오늘에 齊任 李鍾 判이 鄕士 成夏潤 孫淳培, 裵聖洙, 權寧奉과 함께 바야흐로 돌을 깎으면서 三先生의 전후 문헌으로 족히 고증이 될만한 것을 가지고 나에게 기록해 줄 것을 청하니 내 끝내 사양 못 하고 이에 감히 사실을 대충 위와 같이 엮고 이어 명을 했다 天長 地久에 三賢의 거룩한 자취는 길이 마멸되지 아니하여 歲久 月深했도다. 후학의 보은 이 감히 혹시라도 끊기리요 사우가 훤히 빛나 聖廟의 남쪽이로다. 우뚝이 정제됨 있어 빛나 는 어필은 풍상 우설에도 변함 없어서 춘삼월 추구월에 경건히 밝은 제사를 받들도다. 혹시


라도 불결함이 없을 것이고 옥돌에 갖추어 실으니 앞으로 영원토록 탈없이 지내리로다. 다. 충현사(忠賢祠)에 제향(齊享)된 세분 선생의 약전(略傳) * 석탄 이존오는 경주인으로 자는 純卿, 호는 孤山이라고도 하며 고려 충혜왕 복위 2년 경 기도 여주에서 출생했다. 공민왕 9년 문과 급제하고 공민왕 15년 右正言이 되었다. 고려말 에 불교가 성하고 신돈의 橫暴가 藉甚(자심)하매 왕 앞에서 그를 彈劾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長沙監務로 左遷되었다. 이때 공이 화를 면한 것은 牧隱 李穡의 辯護에 힘입은바 컸고 본향에 부임하여 문치에 힘써 공적을 쌓았다. 뒤에 공주 석탄에서 은거하다가 鬱憤으로 병 이 되어 卒했는데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一首가 전한다. 대사성에 추증되고 여주의 고 산서원 공주의 孔巖서원 부여의 의열사에도 亭祀되었다. * 미암 유희춘 善山인으로 자는 仁仲. 중종 8년 전남 담양군 월촌면 獐山里에서 출생했다. 중종 33년 문과 에 급제하여 湖當에 뽑히고 翰林을 거쳐 동 38년 무장현감올 부임했는데 儒風을 振作하고 문헌을 간행하여 무장읍지를 창간했다. 선조 초에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이 조참판을 지냈는데 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깊었으며 미암일기는 선조 1년에서 10년간의 공 사기록으로 국보제260호이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謚號가 文節이며 담양의 의암서원 鍾城의 종산서원에도 정사되었다. * 경암 손홍립 밀양인으로 자는 希遠, 호는 企翁이라고도 하며 광리군 兢訓(긍훈)의 后로 중종 32년에 출 생했다. 姿稟이 聰慧하여 문예가 夙就(숙취)하고 퇴계 이황에게 就正하여 호남수사로 칭했 다. 선조 17년 道伯의 薦으로 司饔院直長에 제수되었으나 未幾(미기)에 棄官歸鄕햇다. 무장 은 本是 이석탄 유미암의

莅邑으로 政淸

刊簡하여 백성들이 頌慕하고 도학 절의로 백세

師表라. 공이 관찰사 梧陰 尹斗壽에게 具由

呈書하여 設亭했다. 정유재란에 位板을 도率산

절벽에 이봉하여 화를 면하고 란후에 종자 정숙으로 하여금 참의 오희길, 사인 吳晪과 함께 교궁 南麓에 祠를 移建하여 봉안하고 선조 40년 사액을 청하여 이듬해 충현사 어필이 내려 졌다. 정조 5년 도내 유림 백여인 연명으로 충현사에 공을 추배할 것을 상서했으나 사력이 미치니 못했고 1975년 종11대손 淳培 의 周旋으로 公議가 재발하여 도내 사림의 奏請으로 윤대통령의 題辭가 내려 본사에 腏享(配享)했다


<사진 6 > 충현사

<사진 7 >충현사중건비

<사진 8 > 충현사사적비

(3) 교흥리의 지석묘(支石墓) 지석묘란 일명 고인돌로 신석기, 청동기 두 시대에 이루어진 거석문화가 남긴 분묘이다. 몇 개의 굄돌과 한 장의 복석으로 이루고 그 가운데에 시체와 석기 토기 따위의 부장품을 묻고 있다. 교흥에는 3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2기는 월봉산 진석주 씨의 산 속에 1기가 있고 5년 전까지 있던 두곳의 지석묘는 찾을 길이 없다. 개간 용지변경 등으로 없어진 듯하 다. 또 1기는 교흥리 동교 논 가운데 1기가 있는데 김해김 씨 후손이 이순신 장군에 배종하 였다는 음각비로 각을 하고 있다. 교흥리 943번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아산~ 무장간 15번 지방도의 북측이며 734번 지방 도의 서측 궁동들 가운데 1기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현재 논의 경작으로 정확한 형태나 제 원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는 김해김 씨 후손이 이순신 장군에 배종하였다는 음각

비로 각을 하고 있다. 교흥리 산 49번지 청동기 시대 것으로 동교마을 북측 야산 사면에 지석묘 4기가 위치한 다. 이 곳은 한재산에서 남측으로 흐르는 능선 하단부의 정상부로서 현재는 인삼밭이 경작 되고 있다. 지석묘는 인삼밭의 가운데 수풀 내에 원형으로 분포하고 있다. 대체로 현 위치 를 유지하고 있다.


(4) 교흥리 유물분포지(교흥리 산 21) 궁동마을과 인접하고 있는 구릉의 동사면에 조사지역이 위치한다. 해발 50m내외의 저평한 지형으로, 현재 고추밭과 민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경작지로의 개간 당 시 수많은 기와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조사 당시에도 밭둑에서는 많은 기와편 분청사 기편, 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건물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5) 교흥리 사지(寺址) (교흥리 산 46)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추정한 절터가 있다. 궁동마을 동측 구릉상에 위치한다. 한재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으로 궁동들의 사이 구릉이 다. 해발 52m의 저평한 지형으로 하단부는 축사 1동과 비닐하우스, 신천강씨 선산등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정상부는 개간되어 고추밭, 인삼받, 묘목밭 등으로 이용된다. 정상부를 중 심으로 면이 고른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기와편, 자기편, 토기편 등이 흩어져있다. (6) 무장향교 은행나무(무장면 교흥리 358번지) 무장향교 은행나무는 1982년 9월 20일 고유번호 9-14-4 보호수로 지정받았다. 수령은 2011년 7월 기준으로 426년이 되었고 나무 높이는 20m, 그리고 나무둘레는 5.0m 이다. 그 많은 세월 동안의 향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지만 전할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민족의 정신사상적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교와의 인연이 깊다 생물학적 속성은 “살아 있는 화석‘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 해온 나무로 1속 1종으로 인척이 없는 외로운 존재이며 수나무 암나무로 구분되어 있지만 일반인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유독 서원, 고택, 정자, 성균관, 향교 같은 유교 관련 유적지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이 남 아 있는데 이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행단(杏亶)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암수 나무가 구별되듯이 음양오행의 도리를 알게 하고, 은행의 씨가 둘로 나뉘지 않고 하나 인 것은 충성과 지조의 상징이며, 은행나무는 벌레가 침범하지 않듯이 유생들이 향교에서 공부하여 입신출세 하더라도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는다고 한다. 이렇게 은행나무가 가지는 생물학적 속성과 유교의 정신이 이어지는 코드가 어울렸다. 즉 은행나무의 긴 수명과 친인척 하나 없다는 특징이 유교의 유구한 정신과 독자성을 드러 내기에 충분하다.

<사진 9 > 보호수 표지판

<사진

10 > 무장향교 은행나무


4) 마을의 이야기 (1) 기훈암(記勳嵓)의 전래(傳來) 구 무장군 이동면에 속해 있으며 현재 무장면 성내리와 인접한 교흥리 궁동 동교 마을 앞 논 가운데 자리한 바위(고인돌로 추정)가 옆으로 넓이 4m 정도, 높이 2m 50정도의 큰 바 위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서기 1597년 정유재란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 등은 14만 대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진격해 들어온다. 남원성에서 일본군과 맞붙은 조명연합군은 끝가지 싸우다 전멸하는데 이 전투에 서 무장면 송현리 김해 김씨

문중의 천록과 천귀 형제가 순절한다. 전쟁으로 아들 둘을 모

두 잃은 김씨문중의 비통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터 얼마 못가 천록의 아내인 연안이 씨 마저 마을 뒷산에서 자결하고 만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모의 잇따른 죽음에 분연히 떨져 일어난 위와 현은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휘하에서 싸우다 진도전(戰)에서 목 숨을 잃는다. 위화 현의 할아버지 수연은 노량해전에 출전해 먼저 간 아들과 손자의 뒤를 따라 장렬히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이로 인해 정유재란 때 한 가문에서 조부, 아들, 손자 3대가 순직한 희귀한 사건이라고 본 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보려고 마을사람들을 만나 보았으나 어 릴 적 바위 주변에서 놀았던 추억만을 되새길 뿐 증언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현재 고창에서는 ‘기훈암’의 진위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기훈암’ 측면에 새겨진 ‘통 제사 이순신 명(統制使 李舜臣 銘일)’이란 글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순 신 이름 아래 새길 ‘명(銘통)자가 선명한 것에 대해 이순신이 직접 새기지 않았을지라도 종 사관 등에게 명령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휘하에서 3대 가 순절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봐서 역사적으로 소중히 보존 관리 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한 현 상태로 방치 할 수 없으며 정부차원에서 영구 보존하여 후세의 유산으로 전수해야 할 것이다.

<사진

11 > 기훈암

(2) 천수정의 유래(생교 시암) 기록 문헌이나 사기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구전에 의하면 고려 초 제 6대 성종(990년) 재위 시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 책을 실행에 옮겨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시키고 태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였으며 선비를 대량 양성시키고, 효도를 권장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많 이 발전시켰던 때이다. 이곳 용호 부족 마을에 김씨가 주를 이루어 터를 잡고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한 마을 가구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한 마을 가구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한 마을 가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을 절실히 염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전신이 내려와 용호마을 중앙 한 가운데 (현재위치)에 많은 석 수가 흐르고 있다고 알려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민들은 곧바로 조심스럽게 굴착을 해보니 역시 돌 사이로 많은 청강수가 있음을 확인하 고 온 동네 부락민이 환호하며 자연석축으로 견고하게 다듬고 ‘하늘이 주신 물’이라고 하여 우물 이름을 천수정이라고 칭하였다. 천수정은 심한 가뭄에도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마을 주민들이 무병장수하고 인물이 끊임 없이 배출되어 교촌 마을을 찾는 외지인들도 물을 담아 가는 일이 자자하였다 약 101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천수정은 오랜 기간 동안 돌을 밟고 두레박을 사용하여 지금도 우물 둘레석의 닳아진 흔적이 주민들의 삶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천수정은 새마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가정에 펌프식 우물과 수돗물이 보급되면서 마 을의 우물기능을 상실하여 방치되어 오다가 2008년 8월 교촌마을추진위원회에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교촌에서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 천수단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 여 제수를 장만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사진 12 >천수정

<사진 13 > 둘레석의 달아진 흔적

<사진 14 > 천수정


4. 마을의 시설과 행사 (1) 마을의 시설 마을시설로는 덕흥 마을회관, 교촌 마을회관, 궁동 마을회관이 각 1동씩 건립되어 있고 교촌에는 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현재 있는 모정에서 서쪽으로 구모정이 있었는데

너무 낡아 헐어버리고 2005년도에 현재 모정을 건립하였다. 궁동에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의 창고로 쓰였다는 건물하나가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현재는

개인이

<사진 15 > 덕흥마을회관

<사진 17 > 교촌마을회관

임대하여

비료창고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 16 > 궁동마을회관

<사진 18 > 마을창고

(2) 무장향교 체험관 교흥리 교촌마을은 추진위원회(위원장 김영문)를 구성하여 ‘무장향교 활성화 및 전통예 절 마을 가꾸기로 우리 동네 숨은 보물찾기 공모사업에서 2008년 5월 당당히 대상을 차지 했다. 2008년 5월 18일 무장향교(전교 정휴량)는 ‘전통예절 체험관’문을 열었다. 교촌마을 가꾸 기 사업 추진위원회와 무장향교가 주최하는 전통예절 학습 체험은 현대문명으로 모든 것이 편리하고 성장위주로 되어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 개인의 편의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현실 속에서 옛 것의 소중함과 선조들의 지혜를 체험 할 수 있는 전통문화공간이


다. 무장 향교 교육의 특징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자랑스러워하는 마음, 미안해하는 마음 그리고 감성 등의 기본 인성을 갖추어 항상 바른 심 성을 기르며, 부모님을 공경하고 어른을 존중하고 남녀노소의 질서에 맞는 예법과 공익으로 지켜야할 예법 등을 몸에 체득시켜 바른 행동을 하고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키 우는 교육이다. 향교에 도착하면 남·여 전통 한복이 각 60벌씩 120벌이 비치되어 있어 옷을 갈아입고 예 를 갖추어 전통적인 방식으로 입소 식을 하며 이를 비롯하여 모든 활동을 옛 선인들이 행하 였던 것과 똑같이 재연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한다. 또한 지역 탐방프로그램을 통한 우리의 옛것에 대한 소중함도 배우게 된다. 체험은 1일과 1박2일로 당일에는 초등부를 중심으로 한복입기, 사자소학 등 전통학습과 전통예절배우기, 물총과 대나무 딱총 만들기, 하늘이 점 지해준 천수정과 무장현 관아와 읍성 돌아보기 등이 치러진다. 1박2일 에는 당일코스에 지 역전설, 한자공부, 효도학습, 식사예절, 천연염색 체험 등이 진행되며 향교 내에 있는 동제 와 서제에서 옛 선인들처럼 단체 숙박을 한다. 무장향교 전통예절 체험관은 요즘 가정과 학교에서 실종 되어버린 인성교육을 통해 바르 고 진정한 사고와 예절, 단정하고 올바른 행동자세를 다듬어서 사회의 일원으로 보다 나은 인격체를 형성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사진 19> 임진왜란 공신 김축 의적비

<사진 20>

생교 부자 김시종 비각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문화』 고창문화원, 2005 『무장현 지역조사 보고서』전북역사문화학회, 2009 『고창군 역사 문헌자료집』고창학술문화 연구회, 2009 『무장읍지』 남극관, 1996 『고창군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전북대학교박물관, 1984 『충현사지』무장향교 전교 정휴량, 2010 『무장백년사』무장초등학교 총동창회, 2010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도움 주신 분 김종수(대한노인회 분회장, 무장 남극관 경노당 노인대학장) 문인주(덕흥 이장) 김순호(교촌 이장) 김주남(궁동 이장) 김영문(교촌마을가꾸기 사업 추진위원장) 이돈우(전 무장향교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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