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dney Christian
예언과 종말 23
단 9:26 주해: 메시야의 끊어짐 26절 주해 26절의 개역개정은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 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 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 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 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고 번역하였다. 상반 절은 메시야의 죽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카라트’는 레 7:20; 시 37:9; 잠 2:22절에서 사형집행의 의미를 표현하며, 욥 14:7; 사 55:13절에서 ‘자르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 20:20절에서는 ‘작벌하다’로 렘 11:19 절에서는 ‘죽다’의 의미로 쓰였다. 메시야 예언인 이사 야 53장은 특별히 메시야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내용 을 보도하고 있다. 그 중 8, 11, 12절은 ‘카라트’를 사용 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메시야가 죽임을 당했음을 보 여주고 있다. 그의 죽음은 24절의 70이레에 있을 일들 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백성의 허물과 죄악 때문 에 그는 고난과 죽임을 당했으며, 그 스스로 의로운 종 임에도 불구하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어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였고, 자기 지식으로 많 은 사람을 의롭게 하였다. 다시 말해 그의 죽음은 예루 살렘과 그 백성을 위하여 허물, 죄, 죄악을 끝나게 한 소극적인 부분과 의를 가져오게 한 적극적인 부분을 가능케 한 죽음이었다. 그리하여 본절의 메시야의 끊어 짐은 신약의 증거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메시야의 죽음은 69 이레의 기간 안 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26절의 첫 서두 는 ‘육십이 이레 후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런데 26절의 번역 구절 중에서 ‘그 성읍과 성소’(히. 베 하이르 베학코데쉬)에서 ‘학코데쉬’를 그 성소로 번역 하는 것은 그 성읍이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성읍’과 ‘그 거룩한 물건’ 또는 ‘그 성읍’과 ‘그 거룩한 자’ 등은 어색하다. 왜냐하면, 일반적 주거 지역으로서 의 성읍과 종교적 행사 영역으로서의 성소가 개념적으 로 잘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소(혹은 여호와의 집)와 성읍(예루살렘)이 대구를 이루며 쓰인 예들이 있다 (시 79:1).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은 다음에 ‘오 는 한 왕의 백성’이 파괴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 에 의해서도 예언된 바다. 이 정체는 누구인가? 대부분 의 학자들은 이것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파괴와 관 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 때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다 파괴되었다. 성전에 관하여 여기서 성전에 관한 언급이 잠시 필요하리라 본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거주한 이후 솔로몬에 와서 이동식 성막이 성전으로 건축되었다. 그의 통치 제 4년, 주전 966년경에 그 건축이 시작되어 7년 6개 월만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예 루살렘이 멸망할 때 성전도 파괴되었다.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때는 주전 587/6년경이었다. 이 스라엘은 포로로 사로잡혀 갔으며, 70년간 이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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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를 당하였다. 그러다가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와 함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등이 귀환하여 주전 536년 경에 제 2 성전이 착공되었다. 이 건축 사업은, 본고에 서 이미 다루었듯이 대적들의 반대로 미루어졌다가 주 전 516/5년에 완성되었다. 이 성전은 69 이레가 경과되 는 기간인 주전 20년까지 있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입 지를 강화하려는 헤롯에 의하여 다시 제 3 성전이 착공 되었던 것이다. 헤롯은 이 성전의 완공을 보지 못하였 다. 이 성전은 주후 63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 다. 이 성전은 헤롯 대왕이 바친 금 세공 포도나무와, 이집트의 톨레미(Ptolemy) 왕이 보낸 거대한 입상 등으 로 건축된 장엄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주후 70년, 로 마의 디도 장군과 그 군대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 다. 디도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독수리 휘장이 새겨 진 그들의 군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꽂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오는 한 왕의 백성’은 디도와 그 군대를 의미할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 다. “그리고 그의 끝은 그 홍수 속에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니). 황폐가 결정되었다.” ‘그의 끝’은 무엇일까 ‘그의 끝’은 이 성전의 결국을 의미할 것이다. 성전은 홍수와 그 범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휩쓸려 떠내려 가듯이 심히 많은 군대의 공격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 다. 유대의 반란군들은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무참히 패배 당하였으며, 약 백만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하였다. 홍수는 11:10,22,40절의 ‘물의 넘침’과 같은 비유적 표 현이다. ‘노아의 홍수’라는 역사적 사실은 예언서에서 자주 심판 모티프로 사용된다 (사 54:9 참조). 예언서 에서는 주로 이방 군대들의 이스라엘 침입을 홍수에 비 교하고 있다(예, 사 8:7). 물론 시편에도 이러한 표상이 자주 나온다. 이어서 나오는 전쟁은 1차적으로 주후 70년에 있 었던 유대인과 로마인의 전쟁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70 이레가 끝날 때까지 있을 전쟁들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10-11장의 예언은 바사-헬라 시 대를 걸쳐 나타나는 전쟁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그것은 종말의 환난, 즉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환난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확실히 역사의 끝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전쟁-환난이라고 봄이 마땅하다. 26절의 한 왕의 백성과 관련하여 유다 사람들에 게 환난이 있을 것이나, 이런 환난을 유발케 하는 전쟁 은 지속적으로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것을 10-12장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는 한 왕의 백성’의 정체를 밝히고 난 후 에 하나의 생각해 볼 점이 남아 있다. 이 ‘한 왕의 백성’ 의 역할은 무엇이며, 다니엘서의 문맥에서 이 ‘한 왕의 백성’의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한 왕의 백성’이 성읍과 성소를 파괴하 는 사실을 보며 이것이 하나님에 의한 하나의 심판임을 예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니엘서 전체의 문맥에서
예루살렘 성읍과 그 성소의 파괴는 곧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적 조치였기 때문이다. 이 것은 이미 다니엘의 기도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다. 좀더 나아가 예레미야의 문맥을 참조하면 이러한 이해가 쉬워진다. 렘 32:1절에,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 렘을 에워싼다. 예루살렘은 칼과 기근과 염병의 재앙 을 받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거민의 시체는 새와 짐승 의 먹이가 될 것이다. 바벨론의 군대는 성을 쳐서 불사 를 것이며, 유다 성읍들은 황무하여 거민이 없을 것이 다. 이 경우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는 누구인가. 바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갈대아인들이다. 단 9:26절에서 성읍과 성소가 훼파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다. 우리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 괴로 이 예언의 성취를 볼 경우에, 주후 70년 그 사건 이 있기 전 즈음에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소를 더럽혔 음을 역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마태 복음 23장에 보이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에 대 한 예수님의 준엄한 책망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예루살 렘 멸망의 예언을 주후 70년의 사건의 성취로 볼 경우 에도 이 단정은 빗나가지 않는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 뿐만 아니라 그 들이 선지자들, 아니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 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므로 그 죄악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참 성전이요, 예루살렘의 주인이신 메시야를 끊어버릴 그들에게 외형적 헤롯 성 전과 외형적 도성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이유 가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 때에 이러한 성읍과 성전이 훼멸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끊어진 이후에 성읍과 성전은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즉, ‘한 왕의 백성’은 예레미야 때의 바벨론 왕과 갈대아인들처럼, 패역한 예루살렘의 종교적 상황과 그 백성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한 도구였음이 드러난다. 62 이레 후에 메시야가 끊어진 다음에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던 예루살렘과 그 성소가 훼파된다는 예언의 메시지를 가브리엘이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MTh 논문 발췌).
최영헌 목사 알파크루시스대학교 구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