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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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우 김민지 윤형준 김민화 류효정 김기웅

김준석 오승연 최고운 여인규 김창진

완전한 사육


완전한 사육 초판발행 2018년 12월 23일 편집자 윤형준 참여작가 김근우, 김민지, 윤형준, 김민화, 류효정 김기웅, 김준석, 오승연, 최고운, 여인규, 김창진 ⓒ 씀-화이트, 2018. Published in Seoul, Korea


완전한 사육

트레바리 2018년 9-12시즌

씀-화이트 릴레이 소설


김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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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사정 지금의 난 꿈과 현실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먼저 꿈에 가까운 얘기를 하자면 우린 평범하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자세히 그녀를 관찰했다. 정수리에서 어깨까지. 어깨에서 손끝, 손끝의 동선까지. 우린 늘 건너편으로부터 만났다. “조심히 건너” 멀리서 늘 그녀는 입모양으로 당부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사랑을 자랑했던 시절이 있었다. 독기를 품으며 사랑했고, 옷 맺 음 후엔 늘 상기됐다. 이제 현실에 가까운 얘기를 하자면 언젠가부터 나는 선천적인 시신경 질환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점차 그녀의 입모양을 점차 볼 수 없게 되었고, 두 눈으로 바라보던 그 녀의 모습을 기억에 의존하게 됐다. 그럼에도 그녀는 꽤 긴 세월을 내 곁에 쭉 오래 머물러 줬고, 여전히 우린 서로의 사랑을 자랑했다. 6개월 후 나는 시력을 완벽하게 잃고 말았다. 그 시절을 1년 가까이 보냈고, 마침내 내게 안구를 기증해줄 사람이 나타났다. 교통사 고로 목숨을 잃은 그의 장기는 여러 사람의 생명의 일부이거나 전부가 되었고, 그의 두 눈 은 나의 일부이자 빛이 되기로 했다.

수술 시간은 무척 길었다. 도중에 긴 꿈을 꿨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내게 이 광경이 꿈이라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 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기나긴 수술이 끝났으나 난 좀처럼 의식을 찾지 못했다. 어지러운 정신 뒤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눈을 뜨기도 전에 눈물이 쏟아졌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한 두려움에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김민지

2


눈을 떴다. .... 흐릿한 형체가 윤곽을 잡아간다. 내 앞에 정체 모를 여자가 서있다. 목소리는 익숙한데...왜인지 낯설다. 처음보는 얼굴이다. 누구세요?

여자의 시선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 사랑했기에 내 모든걸 주고 싶었다. 그런 그가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뭐든 해주고 싶은데,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다. 1개월, 3개월, 6개월 초조하다. 불안한 마음이 불쑥 불쑥 솟아오른다. 그래도 내가 그를 보살필 수 있고


그가 내게 기댈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아가고있다. 이제 그는 나 없이 일상생활이 불편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 없이는 살수 없다. 시력을 잃은 그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이 함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전보다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관계로 변한것 같다. 그가 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프지만, 저 아름다운 눈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쳐다보는 것은 참을 수 없기에, 내 선택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저.. 눈은 오직 내거여야만 하니깐! 오빠가 내 마음에서 멀어지는고 있는 걸 지켜보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왜 나를 이전과 다르게 쳐다보는거지? 왜 나 아닌 다른 여자를 보는거야? 나를 볼게 아니면 차라리 그 눈은 없어져버렸음 좋겠어! 그가 자주마시는 카모마일 차에 시신경을 죽이는 약을 조금씩 넣었다. 이윽고,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얻었다. 우리는 이제 결혼만 남아있었다. 웨딩데이는 앞으로 한달도 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 . . 내 완벽한 계획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기증자가 나타났다. 눈이 생기면 또 다른 여자한테 가버릴수도 있을텐데... 흠...어떡하지..... 아! 그래!! 그 방법이 있겠다!!! 남은 시간은 17일뿐이다


윤형준

3


남자의 시선 “오빠, 일어나셨군요?” 처음 보는 여자가 나보고 오빠라고 한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여자로부터 시 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병실이 아니라 어딘지 모를 낡은 원룸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벽지에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가구와 인테 리어 소품들로 미루어 봤을 때, 이 여자의 집인 듯 했다. 혼란스럽다. 이건 꿈인가? 아니, 이렇게 생생한데 꿈일리 없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오빠, 눈은 어때요? 이제 잘 보이시는 거죠?” 이제야 생각났다. 이 목소리, 이 어투... 나는 치켜뜬 눈으로 다시 내 앞의 여자를 응시 했다. 그러고 보니 모습도 어딘가 익숙했다. 내 눈이 나빠질 무렵이었으니 아마 1년하고 도 6개월 전 쯤부터였을 거다. 이상하게 자주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자주 눈에 띄는 정 도를 넘어, 아예 가는 곳마다 마주칠 정도였다. 처음엔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려니 했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집과 사무실로 이상한 우편물이 배 달되기 시작했다. 필적을 알아볼 수 없게 잡지의 글자를 덕지덕지 오려붙인 편지였다. 너 무나 조잡하고 흉물스러워서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략 ‘첫눈에 반했다. 당신과 결 혼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기분 나쁜 편지였다. 그 뒤로, 보이는 족족 불태워 버렸다. 그 랬더니, 이번엔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전화의 내용은 편지와 비슷했다. 전형 적인 스토킹이었다. 먼저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던 건 내 약혼자인 미정이었다. 애써 아무 렇지 않은 척 했지만, 나도 내심 겁에 질려있던 터라 못 이기는 척 스토커를 경찰에 신고했 다. 경찰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요컨대 증거가 부족한 데다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


았기 때문에 처벌이 힘들고, 굳이 처벌한다고 하더라고 형벌이 가벼워 오히려 스토커를 더 자극하게 될 거라고 했다. 경찰서를 나오며 ‘편지를 태우지 말 걸 그랬나’하고 생각했 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 스토커로부터의 위협은 뜸해졌 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신경쓰지 않도록 미정이가 사전에 차단해줬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앞을 못 보게 되고 나서, 미정이는 항상 내 주변에서 나를 돌봐주었다. 스토커로부터 의 전화나 우편물도 미정이가 먼저 처리했을지 모른다. 정확한 경위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스토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된 듯 보였다. 그 후로 스토커는 내 기억에서 빠르게 잊 혀져 갔다. 후련했지만, 마음 한 편에서는 ‘눈이 이러니 스토커도 관심을 끊는구나’하는 씁쓸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분명 그랬었는데... 그 스토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헤어스타일과 화장법이 변해서 처음엔 못 알아봤지만, 틀림없다. 무엇보다 이 상황이 그 증거다. 나는 납치당한 것이다.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여자 뒤편의 빨래 건조대엔 명인대학병원 간호사 유니폼이 걸려있었다. 명인대학병원... 내가 각막 이식 수술을 받았던 병원이다. 이제 대 충 어찌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어찌됐든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힘으로 이 상황을 돌파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마취가 덜 풀렸는지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누워있는동안 저 여자가 어떤 약물을 주입했을지도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여자와 대화를 시도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저...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러시면 안 되요. 이거 중범죄라고요. 그리고 저는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어요.” “그 여자는 이미 오빠를 떠났어요.”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 병이 깊어지면서, 미정이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는 걸. 하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달릴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미정이에게 미안했다. 눈이 낫게 되면, 남은 여 생을 미정이를 위해 희생하리라 다짐했다. 그 때까지만, 미정이 날 기다려주길 바랐다. 마 침내 난 눈을 되찾았고, 우린 이제 막 다시 시작할 참이었다. “당신... 무슨 소릴 하는거야?”


여자는 대답 대신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엽서 한 장을 휙하고 던졌다. 자세히 보니, 엽서가 아니라 청첩장이었다. 일순간, 방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난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날 내려다보며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설마하는 심 정으로 천천히 청첩장을 펼쳤다. ‘장태산 · 이화영의 장남 현우 이수인 · 김은희의 장녀 미정’ 내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틀림없는 미정의 이름이었다. 더 당황스러운 건 신랑 측이었다. 장현우... 현우가? 미정이랑?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 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청첩장 하단엔 결혼식 날짜가 적혀 있었다. ‘12월 16일 오후1시’ 앞으로 17일 남았다.


김민화

4


미정의 시선 기증자가 나타나다니...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일군 우리의 사랑인데 이렇게 쉽 게 끝이 나버리다니...오빠의 실명으로 인해 영원할 것만 같던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끝나 버리고 마는것인가...나는 고뇌했다. 5년 전이던 21살에 오빠를 만났다. 내가 아는 여자들 중 오빠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남자들에게도 여자들에게도 인기있는 타입이었다. 온갖 우연과 계획을 동원하여 오빠를 내 남자친구로 만들었을 때, 난 그때가 내 인생의 황 금기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고뇌의 연속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만큼 오빠한 테 빠져있었다. 오빠와 헤어진다면 이렇게 다정하고 잘생긴 연인을 다시 만나는 것은 결 코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실명을 하기 전 오빠의 주변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항상 주소록에 빼곡이 저장되 어 있던 여자들의 목록...늘상 걸려오는 여자인 친구들의 끊임없는 전화....나와 가장 절친 했던 여진이가 오빠와 단둘이 여행간 걸 걸린 적도 있었다...둘은 그저 단순히 여행만 다 녀왔다고 했고, 나는 여진이와 오빠를 모두 잃지 않기 위해 그 말을 믿는 척할 수밖에 없었 다. 시력이 점점 흐려져가면서 오빠의 바람기는 내 계획대로 잠재워졌고, 점점 더 나에게만 의지해갔다. 이런저런 여자인 친구들에게서 오는 전화나 문자량도 대폭 줄어들었다. 모두 내가 예상한 바였다. 오빠에게 기증자가 나타난 순간, 나는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시력이 회복된


다면 이전처럼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을까 두려웠다. 이전에 오빠의 잘생긴 외모 덕에 이런저런 스토커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오빠가 수술을 받는 그 명인대학교 대학병원 안과 간호사였다. 요즘들어 뜸해졌던 그 여자 스토커에게 내 가짜 청첩장과 함께 오빠의 수술 사실을 슬쩍 흘렸다. 가짜 청첩장에는 오빠와 요즘 소원해진 친구이자 눈이 멀기 전 라이벌이었던 현우 오빠의 이름을 넣었다. 오빠는 본인은 여자인 친구들을 그렇게 많이 만나면서 내가 남자인 친구들과 이런저런 전화통화를 한다거나 만나는 걸 매우 싫어했다. 질투심이 강해 특히 라이벌인 관계였던 현우오빠와 내가 죽이 맞아 내가 현우오빠의 농담에 웃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눈이 멀면 서 현우오빠와 오빠의 관계는 멀어졌지만 라이벌 의식은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연락을 먼저 하지는 않을 현우오빠의 이름을 청첩장에 내 상대로 넣었다. 오빠의 승부욕 이 되살아날 것을 기대하며. 그냥 이대로 아무일 없이 눈이 떠진다면 오빠는 나를 떠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나만 바라본 적은 우리가 사귄 지난 5년 중 눈이 멀었던 지 난 1년 6개월뿐이었으니까. 청첩장에 적힌 12월 16일까지는 앞으로 17일 남았다. 과연 오빠는 어떻게 행동할까?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지켜질 수 있을까?


류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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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자의 시선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놓쳤다. 손을 뻗어 다시 잡아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숨이 차고, 몸이 저려왔다. 이제 내 몸은 구제불능인건가... 그런데 잠깐만... 나 지 금 읽은 건가? 방금 청첩장에 쓰인 미정과 현우의 이름을 내 눈으로 똑똑히 읽어냈다. 선 명했다. “오빠 봤어요?” 놀란 마음을 서둘러 감췄다. 읽을 수 없던 예전의 나인 것처럼 행동했다. “.... 청첩장 같네요. 결혼 하시나봐요?” “오빠 안 보여요? 진짜로?” 딸깍. 그녀는 능숙하게 검안경을 켰다. 내게 아주 가까이 다가와 내 눈을 이리저리 살핀 다. 그녀에게서 나는 이 향기도, 어투도, 억양도 어딘지 모르게 너무나 익숙했다. 분명히 안다.... 누구지? “우연석씨, 자 이 빛 보세요. 쭉 빛을 따라오세요... 흠... 자 저기 달력 글씨 보여요? 12월 16일이 무슨 요일이죠?” 12월 16일 월요일. 읽을 수 있는 내가 너무 반가워 대답할 뻔 했다. 하지만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못하겠어요. 아파요. 아직은 모든 게 다 흐릿해요... 다...”


심장이 미친듯이 빨리 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안 보였던 나는 어떤 얼굴을 지 녔던 건지 모든 것이 헷갈린다. “이상하다... 초첨 있었는데... 수술도 잘 됐다고 했는데? 아이고... 오빠도 참... 딱하 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그 여자, 이미정. 결혼해요. 아니, 그렇게 나를 전혀 모르는 척 하더니, 자기 필요할 땐 기억이 돌아오는 거야 뭐야... 나한테 주더라고요. 이 청첩장을.” “미정이... 언제 만났어요?” 어이가 없었다. 이 스토커를 그토록 경계하더니. 이 여자의 손에 이걸 쥐어주는 저 마음 은 무엇이었을까. “어제요. 어제니까 11월 30일. 근데 누구랑이 하는지 안 궁금해요? 오빠도 아는 사람 이라던데. 무슨 현우였어요.” “장현우” “오빠 아는 사람 맞구나. 그렇게 우리 연석 오빠, 연석 오빠할 땐 죽고 못사는 거 같더 니. 역시 남녀사이, 청첩장 찍을 때까지 가봐야 하는 건가...” 여자는 청첩장을 주워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바로 옆 간호사 유니폼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오늘은 나이트 근무라며 계속 궁시렁 대더니 이제 나갈 참인가 보다. 핸드폰 을 몇 번 들여다 보다 서랍 안에서 약을 꺼낸다. 그 약이 맞다. 내가 아침에 먹었던 약. 동그랗고 지름 2mm 크기에 쉽게 가루가 떨어지 는 질감... 눈이 좋았을 때도, 나는 한번 본 것은 사진처럼 기억했다. 결코 잊지 않았다. 눈 이 멀었을 때도, 시각을 제외한 촉감, 후각 등 모든 것으로 다 기억할 수 있었다. 저 약은 분명, 내가 아침에 먹고 바로 잠들었던 그 약이다. 기필코 삼키지 않으리. 그녀가 부엌으 로 간다. 약을 타는 그녀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아 근데... 미정이를 알아요? 당신이 어떻게?” “나 처음에 강남역 안과에서 일 했어요. 그때 걔가 그 빌딩 1층 카페에서 알바했어요. 내가 왜 기억하냐면... 카페 계산대에 우리 병원 봉투가 있길래.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서 챙겼어요. 그게 손님용 약봉투가 아니라 제조사에서 받는 병원으로 주는 그런 직 원용 봉투였거든요. 내 껀 줄 알았지.... 열어보니까, 발사르탄이 치사량으로 들어 있는 거에요. 그거 매일 먹으면 사람 완전 맛 가는데... 너무 놀라서 등골이 서늘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네.... 근데 그 때 이미정이 막 달려와서 내 손등을 탁 치더니 가져가는 거에요. 와 진짜... 유니폼 위에 그 명찰 다 기억 나. 그 전에 그 여자가 또” “그... 그.. 그거 약... 약 어떻게 생긴 건에요?” 미정이가 알바를 했던 때가... 그래 2년 정도 전이다. 내가 조금씩 눈이 멀어가고 있을 때... 자기가 더 많이 벌겠다고 시작했던 알바였다. “약? 뭐 발사르탄? 캡슐이고 그 안에 가루가...” “오렌지 향이 나고 조금 신맛 나는 건가요?” “오렌지? 신맛은 맞아요” “....그.... 그거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찌이이이이잉. 찌이이이이잉. 찌이이이이잉. 책상 위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기웅

6


현우의 시선 난 ‘미정’이가 좋았다. 비록 ‘미정’이가 ‘연석’이와 죽고 못 사는 사이였지만 난 ‘미정’이 가 좋았다.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어려서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조각 미남은 아니지 만 서글서글한 외모에 수영 선수를 하며 다져진 몸매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여 유 있는 집안에 공부까지 잘했던 나는 구김살 없는 따뜻한 성격으로 모든 여자들의 시선 을 독점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게 느껴졌다. 주위에 늘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외로움을 몰랐 다.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거나 파티를 열 일이 있으면 누구랑 함께 갈지가 항상 고민이었 다. 헤어져야 누군가를 새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와 언제까지 관계 를 유지할지도 늘 고민거리였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헤어지는 방법은 내가 오랫 동안 연구하고 있는 주제였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지금까지 두 개의 폰을 사용하 고 있다. 하지만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신경 쓰이는 녀석들이 나타났다. 멀리서 봐도 빛이 나던 녀석 ‘우연석’.. 그리고 그 녀석 옆에 붙어서 나를 별로 신경도 안쓰는 ‘이미정’.. 우리는 스쿠버다이빙 동아리에서 만났다. 동아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우연석’을 보았을 때 나 도 모르게 다시 방문을 닫고 나가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이 좁은 공간에서 녀석과 함께 있 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방안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친 상태 였고 어정쩡한 상태로 인사하는 내게 선배들의 강권으로 그 자리에서 가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리 중에 있던 ‘이미정’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딱히 ‘미정’이에게 감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옆에 있는데도 ‘ 미정’이의 선택이 ‘연석’이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자극이 되었다. 또 그 유명한 ‘연석’이가 ‘미정’이를 오래 만나고 있다는 것도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그녀는 물론 명량 하고 씩씩하면서도 청순미까지 느껴지는 매력적인 친구였으나... 그정도로 대단해 보이 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연석’이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다 하고 신경안썼는데 둘의 만남이 지속되면서 궁금증이 커져갔다. ‘그렇게까지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이녀석.. 혹시 양다리인가?’ ‘아 너무 궁금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매력이 있는 건가?’ 날 더 집착하게 만든 점은 내가 여자에 대해 모르는 무언가를 ‘연석’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연석’이가 ‘미정’이를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미정’이에게는 내가 모르는.. 연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매력적인 친구를 ‘연석’이 혼자 독점하고 있다니...’ 연석이가 나쁘다는 생각마져 들었다. 그렇게 그 둘을 지켜보면서 ‘미정’이에 대한 내 마 음은 점점 커져갔다. ‘연석’이 대신에 ‘미정’이 옆에 내가 서고 싶었다. 그녀의 옆에서 함께 하루를 보내는 기분은 어떨까? 동호회 사람들 없이 그녀와 단 둘이 리버보드를 타고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그녀의 연인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그녀에게서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을까? 만약 내가 정말로 ‘미정’을 가로챌 수만 있다면 ‘연석’을 밀어내고 독보적인 1등이 될 수도 있었다. 뭐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도 아닐 거 같았다. ‘미안하다 연석아...’


어제는 자려고 하는데 물빠진 청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아 내가 더 좋은 청바지를 사줄 수도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집어들고 그녀의 카톡 프사를 키웠다가 줄였다가. 그녀의 인스타 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사진을 키웠다가 줄였다가. 어떤 놈들이 댓글을 달았는지 이리 보 고 저리 보다가... 나는 생각했다.

‘아.. ‘미정’이가 보고 싶다.’


김준석

7


미정의 과거 나는 그렇게 예쁜 외모를 갖고 태어나지 못했다. 쌍커풀 없는 그냥 그런 눈매, 모나지 않았다는 정도로 만족하는 코, 작고 뚜렷한 입술속의 삐뚤빼뚤한 치아들. 뭐 크게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연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시장 한 켠의 작고 초라한 공간에서 나를 키워내셨다. 사람들이 시장에서 으 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물건은 모두 갖다두고 파셨다. 대체로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은 그 범주 안에서 해결했다. 우리 부모님의 시장 밖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늘 부족했다. 할 수 있는 것은 학교에서 사야 한다고 하는 교복이나 교과서. 그 투박한 책을 담아야 하는 큰 책가방. 밖으로 나가야 하니 신어야 하는 신발. 추우니까 입어 야 하는 두꺼운 점퍼. 그게 내가 가질 수 있는 전부였다.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파는 천원 짜리 떡볶이는 엄마 의 떡볶이 맛과 어떻게 다를까.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화장실의 울림과는 다른 소리 가 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작은 시장, 그 안의 작은 방, 그 안의 작은 책상에서 그저 교과서만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단점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는 걸까. 뉴스에서나 보던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 고 대답하는 수능 만점자가 되어 대학을 가게 되었다. 물론 장학금을 받게 된 덕분에 누리 는 사치다. 아무튼 그렇게 입학한 캠퍼스는 겉으로는 여유롭고 아름다워보였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나처럼 빠지고, 도망가고, 숨기 바쁜 사람들을. 누군가에겐 천국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여전히 삶의 연장선 인 곳. 그 곳에서 이 남자들을 만났다. 장현우, 그리고 우연석. 둘 중 어느 하나 빠질 구석이 없 는 사람들. 누구라도 탐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기필코 이 둘을 모두 갖고 말겠다.”


오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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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의 전화 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륵. 무섭게도 울리는 휴대폰을 찾으려 나도 모르게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며 일어섰다. 책상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드니 “내 사랑 미정이 ♥” 라고 저장된 문구가 선명하게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통화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 여보세요..?” “...” 아무말 없는 전화기 너머로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밖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고 늦가을 마지막 비가 무겁게도 내리고 있었다. “... 미정이야? 여보세요..? 미정이지? 미정아? 어떻게 된거야, 너 지금 어디야? 아 니, 난 지금 어디고.. 이게 다 어떻게 된거야, 여보세요?” “...오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이 미친 스토커 여자가 혼자 자작극을 펼치는지, 정 말 미정이가 현우 그 자식이랑 갑자기 결혼을 하는건지, 그 약은 또 뭔지.. “미정아, 나 지금 수술하고 눈을 떴는데 말이야,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 왜 날 스토킹 했던 여자가 지금 내 앞에 있는데.. 갑자기 청첩장을 쥐어주고 이상한 소리를 하 잖아.. 이 여자가 진짜 미쳤나봐 미정아... 미정아 너 지금 어디야? 지금 신고를 해야할 것 같아, 난 어딘지 모르겠어 여기가..”


“오빠.” 미정이는 너무 혼란스러운 마음에 횡설수설 하는 내 말을 자르고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단호함이 무엇을 의미할까 너무 두려워 가만히 선채로 마른침만 넘겼다. 부엌 탁자에 앉아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 여자는 미친것같다는 소리에 처음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아무말않는 나를 보고는 가는 미소를 띄었다. “...오빠. 나... 현우오빠랑 결혼하게 됬어...” 설마 설마했던, 제발 아니길, 속으로 그 짧은 순간안에 천만번 아니길 빌고 있었는데... 수술을 하기 전으로 되돌아간듯 눈 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러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 게 꼬인건지, 눈은 멀었었지만 귀는 열려있었는데, 볼수 없다는것 외에 그래도 모든 것들 을 느꼈었는데... 누가 내 기억을 토막낸 후 중간 부분들을 없앤 뒤 테이프로 엉성하게 붙 인 느낌이었다. “오빠, 나 오빠 여전히 사랑해. 진심이야, 나는 오빠밖에 없어.” 나를 사랑한다는 미정이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데 왜..? 도대체, 미정아 왜.. 왜 그러는거야?” “...오빠... 오빠 기증자... 현우오빠가 손 써서 오빠한테 가게 해준거야... 현우오빠네 엄청 부자다 알지? 나는 그런 집은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현우오빠가 오랜 만에 안부연락이 왔었어.. 밤에 만나서 술 한잔 하다가 오빠 얘기를 털어놨는데 자기가 힘 좀 써보겠다고 하더니 정말.. 오빠는 순위가 너무 뒤쳐져 있어서 기증자가 기적적으로 나 타나더라도 오빠 눈은 손 쓸수 없을만큼 상해있을거라고.. 빨리 수술해야 낫는다고.. 자기 가 도와줄테니까 그 조건으로 자기랑 결혼하자고... 그럼 오빠는 다시 볼수 있을거라고.. 미안해 오빠..”


최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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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의 탈출계획 믿기지 않는다. 눈 따위 때문에 미정이를 잃다니. 눈을 얻고, 미정이를 잃었다. 눈을 뽑 아버리고 싶다 눈이 보지 않아도, 미정의 따듯한 손길을 느끼고, 내 손으로 미정의 부드러 운 살결을 만지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만해도 충분했다. 미정이를 만나야 한다. 결혼을 막아야 한다. 여기서 탈출해야겠다. 오늘은 12월 2일. 똑똑. “연석 씨, 식사해요. 제가 오늘 카레를 했어요. 특별히 눈에 좋다는 당근을 많이 넣었어 요.” “고마워요. 하나만 물읍시다. 저를 왜 여기에 가둬두는 거죠? 저 너무 답답합니다.” “예쁜 물건 보면 갖고 싶은 적 있죠? 그거예요. 연석 씨는 잘 가공된 다이아몬드 같다고 할까. 그냥 보고만 있어도 황홀해요. 내가 잘 먹이고, 보살피고 싶어. 나만 연석 씨를 보고 싶어. 다른 사람하고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때를 묻히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래도 이렇게 저를 묶어 두는 건 너무합니다. 제가 개도 아니고, 이렇게 목 줄은 해두다니.” “연석 씨가 도망가면 안되니까. 이게 다 연석 씨를 사랑해서 이러는 거예요.” “저를 사랑한다고요? 저 이 목줄 때문에 음식물 삼키는 것도 힘듭니다. 안 나가겠습니 다. 제발. 제발. 이 목줄만이라도 풀어주세요.” “제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요?” “어떻게 하면 제 말을 믿어줄 건가요.” “글쎄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미치겠다. 저 여자는 계속 나와 거리를 유지한다. 내 손이 닿는 범위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다. 내 쪽으로 더 가까이 오게끔 해야겠다. 오자마자 목을 졸라버려야지.

미정의 진실 연석 씨와 현우 씨 모두 내 남자친구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나는 다자연애를 추구 하니까. 연석 씨와 함께할 때는 내가 보호자가 된다. 그의 손을 꼭 잡고 길을 걸으면서 내 가 보고 있는 꽃, 사람, 날씨를 묘사하면, 그는 잘 들어준다. 앉은뱅이 탁자에서 김밥과 라 면을 나눠 먹으며, 예능방송을 보며 웃는다. 현우 씨와 데이트 할 때는 내가 보호받는 기분 이다. 항상 나를 데리러 집까지 온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걸려있는 레스토랑에서 그가 빼준 의자에 앉아 푸아그라와 와인을 즐긴다. 두 남자와의 데이트는 정말로 상반된다. 난 그 각자의 매력을 즐겼다. 내가 이렇게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나를 바 람둥이라고 손가락질하겠지만 그런데 왜 이 땅에서는 남편을 한 명만 골라야 하지? 내 마음은 여러 개로 쪼갤 수 있 는데, 이놈의 제도가 못하게 막는다. 이제는 둘 중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 내 배 속에 있는 생명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양육자가 여러 명이면, 아이한테 더 좋을 것 같은데. 왜 꼭 남자 한 명에 여자 한 명만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는 거지?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른 다. 가족 구성 방법을 다양하게 만들면 내가 이런 선택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골치 아프 다. 나는 이 아이가 내 어린 시절처럼 힘들게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속물이 아니 다. 내가 진짜 속물이라면 애초에 연석 씨를 끊어냈겠지. 나는 내 2세를 제대로 안정된 환 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다. 연석 씨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 혼자서 키 울 자신도 없다. 그래서 나는 현우 씨랑 결혼해야 한다. 아이를 위해서.


여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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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의 절규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껴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이와 결혼하겠다는 애인. 몇 년간 연락도 되지 않더니 갑자 기 애인을 뺏어간 오랜 친구. 자신을 감금하고 애완동물 취급하는 미친 여자까지. 마치 다 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다. 빛을 얻었음에도 볼 수 없는 것이 더욱 늘어만 났다. 이럴 바 에는 차라리, 평생 어둠 속에 사는 것이 나았을 텐데. “밥이에요.” 여느 때와 같이 간호사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식사를 놓고 간다. 나는 그녀를 간절한 목 소리로 불렀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요.” “목줄 풀어달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아니. 잠깐이면 됩니다. 이야기라도 좀 해요. 혼자 이렇게 갇혀있으니 미칠 것 같단 말 입니다.”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으며 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내게서 일정 거리를 두 는 것을 잊지 않은 채로. 참으로 빈틈없는 여자다. 나는 그제야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함 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쪽 이름은 뭡니까?” “새삼스럽네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모를 익숙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를 스토킹했을 때 말고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몇 번을 보아도 그녀의 얼굴은 낯설었다. 다만 그 목 소리, 어투. 방안에 감도는 미약한 향기까지. 이 모든 것에서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오빠, 어차피 말해도 또 까먹을 거잖아요?” “무슨 소리를······.” “괜찮아요. 전 오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요. 그 여자와는 달리 떠나지 않 아요.” “웃기지 마!” 피가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저년의 목줄기를 틀어쥐고만 싶다. 남을 이렇게 감금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미정까지 모욕하다니.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 왔다. “이거 빨리 풀라고! 막아야······막아야 한단 말이야!” “뭘 막아요?” “네가 직접 보여줬잖아! 그 결혼식······며칠 뒤에 있을 결혼식!” “아? 아아······. 그랬구나. 그런데 안 보이는 척은 이제 그만 뒀어요?” 여자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서 동정의 기색을 읽었다. 왜? 대체 왜 나를 저렇게 바라 보고 있지? 그녀가 나를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미정이의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아니, 그런 것과는 달랐다. 마치 비 맞아 죽어가는 강아지를 보는 듯한, 불 쌍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다. “불쌍한 우리 오빠.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봐요.” 여자는 그리 말하며 청첩장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그것 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12월 16일 오후1시’ 기억 속에 남은 그대로의 문구. 뭐가 다르


냐는 듯 여자를 노려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을 위로 향했다. 더 중요 한 것을 놓쳤다는 것처럼. “······어?” 황급히 벽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12월 2일 월요일. 그리고 2주 뒤인 12월 16일 또한 월요일. “오빠. 어떤 사람이 월요일에 결혼식을 올리겠어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첩장을 들었다. 그곳에 쓰여있는 몇 개의 단어. ‘12월 16일 오후1시’ ‘일요일에 XXX번지 CC웨딩홀 백합관으로 오세요.’ 왜 몰랐을까. 청첩장은 어제 받았다고 하기에는 묘하게 낡은 구석이 있었다. 마치 1년 은 지난 것처럼 이곳저곳이 헤진데다 색깔도 바랬다. 내가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 두 손으 로 얼굴을 움켜잡았다. 머릿속을 개미 떼가 헤집는 것처럼 쿡쿡 쑤셔왔다. “걱정 말아요. 오빠 정신은 멀쩡하니까. 간호사로서 장담할 수 있어요.” 차라리 미쳤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이 모든 것을 그저 외면할 수 있다면 어찌나 좋을까. 하지만 이해해버렸다. 깨닫고야 말았다. 12월 16일에 있는 미정의 결혼식. 그것은 이미 1년이 지난 일임을. “······너, 분명히 어제 미정이를 봤다고.” “보기는 봤죠. 아니면 어떻게 간호사 월급으로 오빠를 1년 동안 먹여 살렸겠어요? 갑 자기 가정부 해볼 생각 없냐고 했을 때는 뺨을 올려칠 뻔했지만, 오빠를 이렇게 볼 수 있으


니 만족스럽죠.” 아. 신음이 새어 나왔다.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고야 말았다. 내가 앉아있는 이 침대. 방 의 구조. 떠도는 냄새. 빛을 잃고 나서 살아왔던 나의 집. 더없이 익숙한, 그렇기에 구역질 마저 치솟는 장소. 1년 동안 자신을 돌보아준 것이 누구였는지, 왜 이따금씩 모르는 목소 리가 섞여 들렸는지. 일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정 혼자 어떻게 돌보아준 것인지. “아, 아아아아······!” “어쩜 저렇게 울부짖는 것도 멋있을까.” 빛을 얻었음에도 보지 못함에 슬퍼 울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통곡했다. 진실을 알 수 없음에 두려워 떨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목청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김창진

11


이야기의 결말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연석은 이제 흐느낌조차 없다. 여자는 문득 그의 인생이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오랫동 안 반복된 약 복용과 부족한 운동으로 가늘어진 팔과 다리. 말라버린 뺨. 큰 동요에도 크게 들썩이지 않는 어깨. 문득 그를 더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더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가 모르는 비밀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가 보여 주는 반응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제 좀 괜찮아요? 얼마나 울었는지, 나까지 힘이 다 빠지네. 오빠 근데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 거에요? 신기하네...예전 일들은 그렇게 기억 잘 하면서. 약이 되게 잘 드 나 봐.. 나도 이번에 외과에 새로 들어온 레지 괜찮던데 한번 키워볼까...” 그 때였다. “아아악..! 무슨짓이야 이거 놔! 으으윽...” 연석은 왼손 끝으로 희미하게 전해오던 감각에 집중했다. 말을 걸며 다가오던 여자의 목을 강하게 잡아 틀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신 알고 있는 거 빨리 다 얘기해. 안 그러면 난 당신 이대로 죽여버릴 수 있어. 어차 피 당신 꼭두각시잖아. 당신 하나쯤 없어진다고 해서 미정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사람 새로 구하는 건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어서 말해. 죽고 싶지 않으면!”


“으윽...미쳤어요? 오빠가 이런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어차피 또 기억 못하겠지만, 오 빤 또 실패 할거야. 오빠는 여기 절대로 못 나가. 이러는 거 다 소용 없다구요. 왜 상황 파 악을 못 해요?” “뭐라고? 또 실패한다고?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내가 눈 안보였다고 우습게 보여? 이제 너넨 내 손으로 다 죽여버릴거야” “아윽... 일단 이것좀 놓고 말해요.. 하... 이 짓도 오래는 못해먹겠다. 아이씨, 목 까졌 잖아...” 여자는 갑작스런 연석의 공격에 짜증이 나면서도, 그가 본인이 다음 내뱉을 말에 보여 줄 반응들이 내심 기다려졌다. 목줄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몇 걸음 물러서서 할 수 없다는 듯 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연석 오빠...당신..여기 있은지 4년 됐어요. 그래 4년. 내가 온지가 3년 6개 월 정도 됐으니까...”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난 분명히 얼마 전까지 눈 수술을 앞두고 미정이와 부 둥켜안고 울고 있었는데? 점점 저 미친 여자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에요. 내가 오빠 관리해 주면서 받은 돈으로 이것도 사고, 요 것도 사고. 웬만한 살림살이는 다 채운 것 같네” 여자는 새빨간 가죽 가방 속에서 열쇠고리들을 꺼내 올렸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 했다. “어차피 오빠는 기억 못 할거에요.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만 말고, 좀 기억 좀 해봐요. 그 러니 미정인가 하는 여자가 오빠 그 반응 재밌어서 계속 하는 거겠지. 물론 약 때문에 금방 또 잊겠지만.”


여자는 미정의 고용인으로서, 또 연석의 스토커로서 본인의 역할이 흥미로웠다. 가해 자로서의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않으면서도 연석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아니 이제 는 아예 연석이 자신의 말에만 집중하고 반응하는 모습이 재밌게 느껴졌다.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 이렇게 아는 척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놀리는게 어떤 재 민지. 아, 이 얘기는 원래 그 여자 몫이에요. 지금 오빠의 그 벌어진 입과 떨리는 눈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 여자 삶의 낙인데, 나도 모르게 가로채 버렸네...? 오빠 모르는 척 좀 해줄 수 있죠?” 연석의 가는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아까의 난동으로 손톱이 부러진 모양이다. 저 여 자가 혹시 말을 꾸며내는 건 아닐까? 지금 내가 상황 파악 안 된다고 장난치고 있는 걸지 도 몰라. 일단 정신 차리자. 저 여자가 입을 열었으니까, 일단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마요. 어차피 오빠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게 아니니까. 그리 고, 오빠는 똑똑하니까 잘 알거라 생각하지만, 오빠가 여기서 해야할 건 이 상황을 이해하 고 해결 하는게 아니에요. 여기 온갖 군데에 카메라가 오빠를 찍고 있고, 이 건물을 나가봤 자 허허벌판이에요. 그 여자, 생각보다 치밀해 아주. 미친 여자치고는. 오빠가 해야 할 건 그냥 그 감정. 사랑하는 내 여자를 구하고 말겠다는 그 왕자님 같은 표정, 그 말투, 그 간절 함을 보여주는 것 뿐이에요. 방금까지 했던 것처럼. 평-생” 연석은 불안해지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짓는 표정이 여자를 즐겁게 만 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 난 하루종일 이 방에서만 누워서 있어야 하는거야? 이 목줄을 메고?” “아뇨. 오빠 그래도 나름 잘 관리되고 있어요. 잘 생각해봐요. 어느 여자가 사랑하는 남 자를 그렇게 내버려 두겠어요? 오빠 그 머리하는 출장 미용사 값이 얼만데.” 연석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길지 않게 정돈된 머리, 살이 빠져 어깨 선


이 좀 남았지만 그래도 깔끔한 남색 셔츠. 허름한 방 치고 자신의 상태가 썩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어머, 벌써 세시가 다됐네. 이제 나갈 시간이에요. 그 여자 보러 갈 시간이라구. 일단 손부터 닦아요.” 여자가 건넨 휴지로 손가락을 감싸며 일어섰다. 여자는 목줄을 풀어주는 대신 손을 뒤 쪽으로 묶어 수갑을 채웠다. 수갑 끝 고리와 연결된 사슬을 여자의 허리 벨트에 걸었다. 여 차하면 여자를 들고 뛰어야 하나 생각하면서 연석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빠 외출할 땐 이거 차야 해요. 불편하겠지만 좀 참아. 그리고 알겠지만, 오빠 아까처 럼 또 난동 피우면 금세 카메라 보고 덩치들이 달려올 거에요. 와서 잠재우는 약을 놓겠지. 소용없다는 말. 그러니까 쉽지 않겠지만, 나한테 들은 거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오빠나 나 한테나 서로 좋아요” 그래 지금은 일단 상황 파악하는 데 집중하자. 저 스토커도 돈을 받는 고용인일 뿐 나한 테 악감정은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미정이를 사랑했던 스물네 살의 나처럼! 문은 두 개의 잠금장치로 되어 있었다. 방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전자식이었 다. 여자가 빨간 불빛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대자 문이 열렸다. 복도는 깨끗했다. 아마도 최근에 새로 인테리어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긴 복도에 노 란색 희미한 전등 몇 개만 있을 뿐이어서, 여자의 손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곳 곳에 빨간불을 켜고 작동하고 있는 카메라들이 신경 쓰였다. 나 하나 가두려고 이 고생을 한단 말이야? 이미정, 너 단단히 미쳤구나. 미쳤어. “오빠 있는 방도 좀 새로 꾸미면 좋으련만. 오빠랑 있던 그 기억들이 망쳐진다고 그 방 만 예전 그 집 분위기로 그대로 해놨어요. 덕분에 내 업무 환경만 별로고. 난 그 방 솔직히 오빠 아니면 들어가기 싫어요”


내가 있던 방은 지하 2층 정도에 있었다. 1층까지 지나쳐온 철문만 두 개다. 누가와도 찾기 힘든. 미정과 연애 할 때 봤던 영화가 떠올랐다. 눈이 나빠지기 전 마지막 본 영화였 다. 겟 아웃. 그래 나는 뇌를 바꾸진 않았으니까. 다행인 건가. 연석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 다. “빨리 와요. 우리 지금 늦었어.” 재촉하는 여자를 따라 미정이 있다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나마 창문이 있어 지하보다 는 나았지만 여전히 어두웠다. 가장 안쪽 방에만 불이 켜 있었다. 방 안쪽에선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우리가 온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교무실 앞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어색했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익숙함도 있었다. 이 익숙함은 연석에게 ‘이 여자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구나’ 하는 불편한 믿음을 주었다. “어? 뭐야, 아직 우리 차례 아닌 것 같네. 늦었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잠깐 기다려야 겠어요. 거의 끝난거 같긴한데. 근데 오빠 눈 아직 괜찮은가 봐요? 이 약도 내성이 생기 나. 나야 뭐 덕분에 2층까지 평소보다 빨리 올라와서 편했지만” 이상한 낌새에 매번 함께 나오던 물을 먹지 않은 탓이다. 약을 섞은 거겠지. 응? 그런데 저게 뭐지? 내가 잘못 본건가? 연석은 눈을 의심했다. 그건 마치 거울을 처음 본 원숭이의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 동안 ‘응당 그러했으리라’ 상상만 했던 모습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괴했다. 겨자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소파에 앉아 다소 격양된 표정으로, 채 30cm도 되지않 는 거리에 얼굴을 맞댄 여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기가 오늘 환자 모임에서 노래를 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워서 오랜만에 두근거렸다고, 피아노 반주를 쳐주던 15살


여자 아이는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눈이 불편했기 때문에 악보를 점자로 익혔다고, 노래 시간이 끝나고는 같이 새로운 음식 먹기 체험을 했는데, 오늘은 예전에 여자와 같이 갔었 던 베트남 하노이의 그 빨간 지붕 허름 했던 쌀국수 집 그 맛이었다고, 고수 향이 다른 집 이랑 달리 뒷맛이 달콤해서 우리가 좋아했던 그 맛이라 금방 생각이 났다고. 여자는 남자의 내려온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며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랬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사람들이 놀라지는 않았어? 우리 귀국하고도 그 맛 찾 으러 쌀국수 집이란 집은 다 돌아다녔는데 못 찾았잖아. 어떻게 구했대 그 사람들은? 신 기하다. 아참, 내가 눈 좀 마사지 해줄까? 오빠 저번에 내가 마사지 해 줬더니 그래도 답답 한게 좀 없어진다고 했었잖아. 자 이리 누워봐.”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남자는 불편하게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여자는 익숙 하다는 듯 손바닥을 입에 대고 입김을 불어 따뜻하게 한 뒤 남자의 눈 위에 올려 놓았다. 연석은 계속해서 익숙함과 낯선 그 경계의 감정을 느꼈다. 너무도 오랫동안 그려왔던 모습, 미정이 자신을 간호할 때 보살펴주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때의 자신들을 따라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여자는 손바닥에 다시 따뜻한 바람을 불며 이야기 했다. “오빠가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난 한편으론 오빠 눈이 아프고 나서 우리가 더 가까 워진 것 같아 좋은것도 있다? 내 얘기도 더 잘 들어주고, 내가 오늘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떤 향수를 뿌렸는지, 내 손이 건조한지 촉촉한지까지 신경 써주잖아? 눈이 보이지 않으 면 다른 감각들이 더 발달한다며. 그래서인지 오빠가 온전히 나한테만 집중하는 게 너무 좋아. 행복해. 우리 아기랑 오빠, 내가 평생 이렇게 보살펴줄게. 내 옆에 꼭 있어야 해, 알 았지? 약속해.” ‘띠링, 세시!’


작은 알람이 울리자, 여자는 껴안고 있던 팔을 풀어 탁자에 놓인 물 컵을 남자에게 내밀 었다. “오빠, 약 먹을 시간이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요. 빨리 좋아져야지” 날이 흐린 탓인지 복도가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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