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김민정 X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Page 1

INTERVIEW



작가와의 대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김민정 저도요! 마침내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네. 지금은 어디에 계세요? 프랑스 생폴드방스에 있는 제 작업실입니다.

당신의 삶은 지형들 사이에 놓인 것 같습니다. 오래전 한국을 떠났고, 다양한 곳에서 살았기 때문이죠. 그동안 뉴욕과 베니스, 밀라노 등 여 러 도시에서 어떻게 작업해왔는지 말해주세요. 저는 28살에 이탈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23년 정도를 살았습니다. 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후 프랑스로 옮겼고 뉴욕에도 거처를 마련했어요. 이탈리아는 더 이 상 제 생활의 터전이 아니고 그곳에 자주 가지도 않지만, 저는 아직 베니스에 스튜디오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생폴드방스에서 주로 작업하고 일 년에 두 달 정도는 뉴욕에서 지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이 궁금해요. 한국에서 어떻게 미술을 접했나요? 미술

큐 | 레이터

이 어떻게 당신에게 다가갔나요? 작업의 시작에 대해 들려주세요. 유치원 시절 많은 미술 대회에 참가했고, 늘 상을 받았습니다. 제 어 머니는 ‘이 아이는 재능이 있다. 작가가 될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 어요. 그 때부터 어머니는 저를 수채화, 서예, 피아노 수업에 보냈어 요. 어머니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작가가 될 수 있는 완벽한 교육을 시 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실, 작가가 되기로 한 건 제 스스로의 선택 이라기보다 이런 식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당신의 아버지는 인쇄소를 운영했죠. 당신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종 이와의 만남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쇄소와 종이의 접점에 대해 말해 주세요. 지금과 다르게 당시에는 오프셋 프린트 같은 건 없었고 인쇄는 고전 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인쇄소에서는 실크스크린을 사용하 거나 수동적인 방법으로 인쇄했고 책도 만들었는데 일반적인 종이를 사용하기도 하고 아주 얇고 멋진, 한지에 가까운 종이를 사용했어요.


그곳에는 항상 잘려진 종이들, 남겨진 종이들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시 한국의 경제적 발전 상황에서 제가 해온 종이와 관련한 작업은 지

저는 그 종이들을 가지고 놀았고 그것들로 카드 같은 것들을 만들었

극히 당연한 것이었어요. 저는 아직도 이러한 공예 작업을 계속하고

어요.

있지요. 우리는 우리의 가장 자연스러운 속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 니다. 때로는 그것이 다른 이들의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예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당신은 서예와 같은 전통 문화 가 남아있는 광주에서 자랐어요. 오늘날 많은 전통은 멸종될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만드는 것과 사유하는 것의

미래는 종종 과거의 파편으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하죠. 당신은 서예와

관계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관한 사회적 비평을 담은 책 『장인』

수묵화의 역사를 비롯해 과거에 관한 많은 공부를 했어요. 서예의 역

을 펴내기도 했죠. 우리는 만듦으로써 생각하고, 생각함으로써 만듭

사에 관해 무엇을 배웠나요?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서예 역사처럼 상

니다. 저는 당신이 유년 시절부터 접했던 서예와 공예가 어떤 연결점

이한 역사가 당신의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한

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국의 서예는 매우 특별하고 독창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죠. 이것이

서예란 붓을 다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붓은 동물의 털로 만

얼마나 중요하며, 당신은 이러한 서예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나요?

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붓을 물이나 잉크에 담그면 매우 자유로

서예에서는 가장 먼저 붓을 다루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것이 능숙해

워집니다. 펜과는 다르죠. 팔을 사용하며 집중하고 골몰하는 방법을

지면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고를 수 있어

배우는 것이 붓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중하면 붓을 펜처럼 사

요. 이 경지에 다다르면 서예가 점점 회화적으로 되기 때문에 작품

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서예는 장인정신보다는 온전한

이 누구의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성을

집중과 더 관련이 있습니다. 붓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관한 것이죠.

갖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완전히 익혀야 합니다. 저는 일본과 중국의

보통 먹으로 글을 쓰고 나면 먹은 물로 희석됩니다. 그러면 이는 마

서예를 배웠고, 정말 많이 봤어요. 서예를 배울 때는 항상 한자로 연

치 오랜 고사를 재현한 문인화처럼 보이게 돼요. 서예를 하려면 재료

습을 하는데, 한자 자체가 매우 회화적인 문자입니다. 때문에 붓은

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잘 알아야해요. 이것은 동양미술에서 중요한

자연스럽게 문자를 그리게 되죠. 여기서 해야하는 것은 계속해서 연

지점이기도 합니다.

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아요. 만일 바흐 의 피아노곡을 연주한다면, 당연히 손을 먼저 훈련시켜야 해요. 제게 서예를 연습하는 것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손을 훈련시키는 것과

이는 또한 공예에서 질적, 차원적인 ‘느림’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같습니다.

리처드 세넷은 “현대 경제는 순이익, 순간적인 거래, 그리고 빠른 유 동성에 특권을 부여합니다. 공예의 고정적인 역할의 일부는 경험을 객관화하고 노동력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빠

한국에서 학생이었을 때 제작한 초기작들을 아직 갖고 있나요? 당신

른 거래나 쉬운 승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잘 하기 위해

의 초기 작품은 무엇인가요? 저는 예술가의 카탈로그 레조네가 어디

필요한 시간을 들이는 느린 속도의 공예는 개개인에게 심오한 안정감

에서 시작하는지 항상 궁금합니다. 당신의 카탈로그 레조네에 첫번째

을 줍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느린 속도’가 개개인을 안정시킬

로 등장할 작품은 무엇인가요?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세넷은 장인 정신이 “지속되는, 인간 의 기본적인 충동”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관해 어떻게 생 각하나요? 오늘날 우리의 가속화되는 세계와 비교하면, 당신의 유년 시절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 인터뷰를 읽어보니, 당신의 어린시절은 매우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맞아요.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었고 현대화된 기계도 부족했어요. 특히 지방에서는 많은 것을 손으로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

104

첫 작품은 홍익대학교에 다닐 때 만들어졌어요. 그 작품은 일본 채색 화 같은 다채로운 색의 사실적인 그림이었어요. 저를 지도해주신 교 수님 중 한 분이 일본 회화를 전공한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사 실적인 회화에 많이 사용되던 분채와 같은 일본 재료로 작업하길 좋 아했어요. 풍경화와 초상화, 구상 회화로 시작했습니다.


초기작들을 보관하고 있나요? 그럼요. 모두 가지고 있어요.

였어요. 이렇게 멀리 떠나왔는데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어 무척 우 울했어요. 그 때 마우리지오 보타렐리 교수님을 만났어요. 교수님은 제게 “‛봄’을 추상적으로 표현해보라”고 조언하며, 몇 가지 실마리를 주셨죠. 물감의 얼룩을 활용해보라고 했고, 또 아카데믹한 방식에 익

한국을 떠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저는 스위스 출신입니다. 스위스는

숙했던 제게 더 자유로워지라는 말을 해주셨어요. 저는 수채 물감과

작은 나라죠. 작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나라를 떠나는 것에 대한 추동

화선지를 이용한 작품들로 서서히 추상 회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

력은 꽤 크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거기엔 어떠한 ‘편협함’이 있기 때

니다. 브레라국립미술원에 다니는 동안 제가 가야할 길을 찾지는 못

문입니다. 백남준 작가는 항상 제게 한국을 떠나는 것의 필요성에 대

했지만, 노력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밀라노의 꽤 큰 갤러리와 일을

해 말했어요. 저는 당신의 생각도 듣고 싶어요. 석사 학위를 마치고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부터 저의 붓을 다루는 기술과 서양에 대한

밀라노로 떠나 브레라국립미술원에 입학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떠

관점을 결합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태운 종이로 콜라주 작업

나게 만들었나요? 백남준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간 것이었나요?

을 하고 있죠. 제가 학교에 다닌 것은 5년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흡수

제 개인적인 삶에서 비롯됐어요. 어릴 적부터 저는 잘 알려진 예술가

하고 제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15년에서 20년의 세월이 걸렸어요.

가 되겠다는 야심찬 꿈이 있었죠. 저만의 큰 커리어를 이루는 것 말 이에요. 하지만 나라가 그러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 못하면 그런 꿈

한국에서는 서예를 비롯한 전통적인 작품으로 시작했고, 이탈리아에

을 이루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또 저는 언제나 미국

와서 20세기 현대미술과 르네상스를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

보다는 유럽을 동경했어요. 당시 대부분의 제 동료들은 뉴욕으로 떠

신은 ‘그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고요.

났어요. 그렇지만 저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가기로 결심한거죠. 플랑드르나 이탈리 아 예술도 무척 좋아했고요. 이탈리아를 제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여 전히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해요.

저는 많은 시리즈 작업을 제작합니다. 이 중에서도 <Mountain> 시리 즈가 전통과 추상이 만난 좋은 예시입니다. 전통과 서구적인 영향을 단순화하여 결합한 작업입니다. <Pieno di Vuoto>라는 시리즈에서는 한지를 잘라내고 모서리를 태워 다채로운 색의 콜라주를 만들었어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작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이탈리아에 몇 년도에 도착했죠? 1992년이요.

실제로 작품에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한국미술의 영향이 있 었고 이후에는 이탈리아로 떠나 르네상스를 공부했어요. 또한 당신은 현대미술의 역사나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어요. 스위스 출신인 제게도 파울 클레는 어린 시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 말이죠. 당신의 작품 에는 동서양이 함께 어우러져 보입니다.

작품이 제 독창성의 징후이거나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는 저만의 ‘언 어’라고 느꼈어요. 이러한 이유로 이 두 연작을 언급하고 싶어요.

우리는 종종 산을 영원한 것이라 여기지만, 당신은 산을 비영구적인 것으로 표현했죠. 또한 산이 당신의 유년 시절과 관련이 있다고 말 하기도 했어요.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 화가인 에텔 아드난은 타 말파이스 산에 바치는 헌사이자 자신이 자란 레바논의 기억을 담 은 저서 『타말파이스 산으로 떠나는 여행 (Journey to the Mount Tamalpais)』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시간, 자아, 비영구, 우주 자연, 예술의 정신적 차원에 관해 다루고 있어요. 아드난은 ‘우리가 필멸의

맞아요. 제가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학교는 사진이나 영상, 퍼포먼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미래의 광활함에 눈을 뜰 것이다. 그

스에 굉장히 열정적이었어요. 저는 소외된 느낌이 들었고, 제가 물리

리고 절대로 인지할 수 없는 시간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라고 했습니

적으로나 심적으로 이 학교와 커리큘럼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

다. 불가리아 출신의 작가이자 문화평론가 마리아 포포바는 이 책에

할 수 없었어요. 자신감을 잃고 있었죠.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을

대한 인상적인 서평을 남기기도 했죠. 현재 90대 중반에 접어든 아

까? 제가 할 수 있는 건 서예와 수채화, 그리고 기술적인 구상 회화

드난은 여전히 산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당


신의 산도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좋은 친구일 거라 생각 하는데요. 이 산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것들은 왜 비영구적일까요? 산을 그리는 이유는 제가 한국을 무척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제 그 림에 등장하는 산은 제가 가봤던 실제의 산이 아닙니다. 한번은 몇몇 한국 사람이 제게 ‘당신의 산은 분명 지리산이네요!’라고 하기도 했어

당신은 한지 위에 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콜라주를 만들고 작은 종이 조각들을 전통적인 밀가루 풀을 이용해 붙이기도 합니다. 이는 글을 수없이 겹쳐서 쓴 고대의 필사본을 연상시키기도 해요. 언제부 터 이런 작업들을 시작했나요? 닥나무로 만든 종이부터 밀가루 풀에 이르는 과정도 말해주세요.

요. 사실 어머니가 지리산 자락에 3년 정도 사셨는데, 저는 그곳에 관

한지는 주로 서예에 사용되고, 작품이 완성되면 전통 액자 제작자에

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그리는 산들은 어쩐지 한

게 보내집니다. 그들은 작품 뒤에 또 다른 종이를 배접하여 작품을

국의 산을 닮았어요. 돌로미티산맥 같은 서양의 산들과는 다르죠. 산

좀 더 고르고 견고하게 만들어요. 이 과정에서 밀가루나 다른 자연

은 우리의 정체성이나 감정처럼 형체 없는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우

재료로 만들어진 풀을 사용합니다. 밀가루 풀 혹은 전분 풀이라고도

리가 어딘가에 정착했다는 느낌이죠. 제가 왜 그토록 산을 그려왔고,

불러요. 저는 전분 풀을 직접 만들어 써요. 이 풀은 아주 얇게 발립니

그에 집중했는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산에 대해 자

다. 보통 이 풀은 배접을 위해 종이 두 장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하는

주 생각하며 이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어요. 제게 산을 그린다는 것은

데, 한지를 자르고 태우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전통 풀을 작업에 사용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해보고 싶었어요. 종이로 작업한 지 너무 오래되어 그런지 가끔 단순 히 그리기만 하는 것은 지루했어요. 그래서 종이의 가장자리를 태웠 죠. 제가 항상 찾던 자연적인 선을 만드는 방법을 발명한 거에요. 모

한지는 <Mountain> 시리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에서 사용되고

든 것은 순차적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났어요. 그리고 지금은 잘

있습니다. 당신은 항상 한지로 작업하고, 콜라주를 하거나 여러 다른

아시다시피 종이의 층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결코 계

형상을 만들고 있어요. 동양의 종이는 전통적인 서예를 포함해 각기

획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할지 의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매우

다른 분야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죠. 예를 들어, 전통 한옥의

자연스럽게 진행됐어요.

바닥이나 창문 재료로도 쓰였고 출판 분야에서도 활용되었습니다. 닥 나무로 만들어진 이 놀라운 종이를 사용하고 계신 이유를 말씀해주 세요. 그리고 이 종이는 절대 같지 않죠, 매 해 다릅니다. 맞습니다. 한국의 대학에서는 첫 해에 조각이나 판화에 사용하는 다 양한 매체를 배우게 했어요. 이후에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과목을 선 택할 수 있었죠. 저는 당연히 전통적인 재료를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동양화과를 선택했어요. 제가 어린 시절부터 해온 것들을 계속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에 대해 설명한 적도 있어요. 반복하는 행위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역동적이기도 해 요. 당신은 이런 생체역학적인 생각과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우 차분하며 동시에 생체역학적인 방식으로 작은 한지 조각을 조합 하는 실제 과정에 대해 알려주세요.

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한지는 투명할 정도로 얇고, 연약하고, 쉽게

작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저는 제 자신이 매우 자유로우면서 자연의 섭

손상될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강한 재료입니다. 아마 누군가는 한지

리를 따르는 영적인 상태에 있기를 바라요. 이러한 위치에 이르려면

가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성격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낄 겁니다. 그

명상이나 요가 같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제게 반복이란 자신을 잃는

리고 저는 재료를 제 힘으로 손쉽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것이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게 들어가는 행위예요. 물론 예술 작품의

요. 제가 조각을 했다면 큰 돌이나 무거운 장비들을 옮기지 못했을

결과물은 여러 방식으로 아름다워야 하지만, 자아를 무화하기 위해서

거에요.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겠죠. 저는 재료가 제 피부와 몸

는 이런 행위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참선이나 명상을 실천하는 방

에 완벽히 호응하길 원했어요. 재료가 마치 제 자신이 되는 것 같은

법이죠. 몇시간이고 반복하다 보면 자신을 둘러싼 현실마저도 사라져

느낌 말이에요. 한지는 제 피부와 같습니다. 저는 이 재료와 저 자신

요. 이 과정을 통해 더욱 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런 느

이 아주 긴밀하고 친근하다고 느낍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

낌은 중독성이 있어요.

의 반세기를 종이와 함께 했어요. 이 재료와 함께라면 저는 늘 편안 합니다. 이것이 종이를 택한 가장 큰 이유에요.

106


<Phasing> 시리즈에 관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빈 종이에 우선 추상적

과 상반되는 두 의도를 확인할 수 있어요. 이렇듯 반대되는 두 가지의

인 획을 그린 후 그것이 마르면 그 위에 다른 종이를 얹어 이 획을 연

성격이 하나가 됨으로써 더욱 완결된 우리의 자화상이 만들어지죠.

필로 따라 그리는 긴 과정을 시작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밑에 깔린 종 이의 획과 작은 잉크 얼룩의 테두리까지 따라 그리고, 불을 붙인 향을 이용해서 위에 있는 종이에 구멍을 뚫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첫

우연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도 우연에 대해

번째 종이에 그려진 형상이 두번째 종이에 재현되는 것이죠. 이처럼

말했죠. 「브루클린 레일」 인터뷰에서 당신은 〈Order and Impulse〉

<Phasing> 시리즈를 제작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해요. 하지만 언제나

(질서와 충동)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결코 계획할 수 없을 것

작업은 텅 빈 종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이고, 예술은 계획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종이를) 접는 행위를 할 때 일종의 충동이 행해지지만 그 행동은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

<Phasing> 시리즈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획을 그릴 때 빠르고 거칠게 하는 것은 제 안의 힘있고 남성적인 부분이 작동하 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안에는 분리할 수 없는 반대의 성질이 있어 요. 다른 측면의 저는 좀 더 섬세하고 사색적입니다. 두 상반된 모습 이 한 곳에서 만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측면을 함께 놓을

니다. 즉 우리 행위의 다른 두 측면이죠. 이탈리아 개념미술가 알레기 에로 보에티도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 언급했어요. 이것은 질서와 무 질서의 충동, 즉 계획과 우연의 충동과 관련 있어 보여요. 이것에 대 해 얘기해 주세요. 우연의 역할이란 무엇이며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계획할 수 있나요?

때, 합일이 이루어져요. 이 과정이 일어난 후에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 종이를 동그랗게 자르는 순간은 질서를 따르는 것이지만 종이를 접 을 때는 다양한 방향을 만들 수 있어요. 어떻게 접을 것인지 결정하 는 마지막 순간은 우연입니다. 여러 다른 방향을 만들고 다르게 접으 면서 조화를 찾게 되죠. 하지만 처음에는 무질서합니다. 그 순간에는 규칙 없이 손이 가는 대로 접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런 작품을 만 들기 위해 그런 양가적인 성질을 보여줍니다.

「브루클린 레일」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제 가 왜 이걸 하냐고요? 묻지마세요. 저는 그저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 할 뿐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제 자신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죠. 마침 내 저는 그걸 이뤘어요.” 작품을 제작하면서 ‘자신을 잃는다’는 개념 은 굉장히 흥미로워요.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미술관와의 인터뷰에서 는 또 이렇게 말했죠. “작업을 하면서, 종이를 다루면서, 머리를 비워 야 합니다. 아무 생각을 갖지 않고 불에 시선을 두기 위함이죠. 제게 이건 명상과 같아요.” 이에 관해 말해주세요. 저는 항상 스스로의 의도나 계획에 대해 생각해요. 인간의 능력은 극 히 제한되어 있죠. 우리는 우리 지적 능력 이상의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없어요. 편견으로 가득 차있는 인간의 한계치 때문에 우리는 스 스로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우주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제가 지적 능력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못 할거에요. 저는 제 자신이 저를 통해 무언가를 예술로 만드는 매개체인지 궁금 해요. 제가 제 능력을 사용한다면 분명 한계에 부딪힐 거에요. 그렇 Phasing , 2019

지만 자신을 잃게 된다면 정신성이나 영감과 같은 제 자신보다 거대


한 어떤 것에 가까워지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저는 ‘매개자’가 되어

자신을 제한함으로써 저는 재료를 더 잘 다루게 되고 더 자유로워졌

그 무언가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죠.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어요. 제한 속에서 저를 표현하는 게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수 없지만 이러한 영감을 계속해서 얻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상태를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테크닉을 구사할지 알고 있기 때문

유지해야 해요.

이죠.

그 우연의 개념은 불과도 연결되어 있죠. 당신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당신의 작품에는 색도 등장합니다. 종종 색을 사용하죠. 예를 들어

선을 그릴 수 있는지 찾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어요. 사실 선은 당신

<Story>나 <Pieno di Vuoto>같은 작품입니다. 색채에 관해 말해주

의 작업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해요. 당신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선

세요.

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냈고, 그 초자연적인 힘이란 바로 불의 힘입니 다. 불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만 당신은 불 을 사용하죠. 이 불에 우연이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매우 ‛통제된 우연’이기도 한데요, 작가님은 그것을 ‘협업’이라 고 부르더군요. 이 협업에 관해 이야기해주세요.

<Pieno di Vuoto>는 색으로 가득 차 있어요. 종이를 동그랗게 자르고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마치 도넛처럼 만듭니다. 그 후 양 옆면을 태우 고 원 모양을 하나씩 쌓아가기 시작해요. 기본적으로 저는 ‘비움’을 이용하는 거에요. 종이에 만드는 구멍이 이 ‘비움’을 상징합니다. 이러 한 비움을 모두 함께 배치하여 이들은 ‘채움’이 돼요. 비움으로 가득

물과 불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가졌습니다. 불은 실로 엄

찬, 비움의 채움이죠.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해요. 이는 불교 이론에

청난 힘을 갖고 있어요. 저는 불을 매우 얇은 종이와 함께 사용해요.

서 가져온 것인데, 이 세상이 색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불의 힘은 종이를 단번에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불과 종이의

색은 그 자체로 텅 빈 것이라는 거죠. 형상은 공(空)이고, 공(空)은 곧

중간에서 그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 돕도록 합니다. 저는

형상입니다. 제 작업에서 형상은 색채를 대변합니다. 그리고 재료를

중간에 자리하면서, 이 초자연적인 힘을 인간이 발명한 가장 연약한

통해 이를 해석하는 것이죠. <Pieno di Vuoto>는 불교 철학에 기반을

발명품인 종이에 사용하는 것을 즐기고 있어요. 이러한 자리에 있다

둔 이론을 제 방식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에요.

당신은 훌륭한 스승과 참선과 명상을 수행하는 불교의 스승이 있습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새로운 전시에 관해 얘기해보죠. 2017년에 갤

니다. 당신은 그들이 ‘반(反)’ 이론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다고 말했

러리현대와의 첫번째 개인전인 《종이, 먹, 그을음: 그 후》를 개최했습

죠. 음양과 흑백처럼 이 세상엔 언제나 반대되는 개념이 존재하고 이

니다. 이 전시에 대한 미술비평가 로레나 무뇨스알론소의 리뷰를 다

것이 긴장과 균형을 만들어요. 철학적인 면에서 당신이 이로부터 무

시 읽어봤어요. 로레나는 당신 작품에서의 ‘제약’을 언급했죠. 미국의

엇을 배웠는지 말해주세요. 또, 당신의 불교 스승은 누구인가요?

소설가인 해리 매튜와 책을 집필한 적이 있는데, 저는 늘 조르주 페 렉에 매료되었어요. 프랑스의 울리포 (잠재문학작업실) 시인들은 제 게 언제나 중요했지요. 울리포는 문학의 제약에 관한 연구의 선구자 들입니다. 이를테면 조르주 페렉은 알파벳 ‘e’를 제외하고 소설을 썼 어요. 이와 같은 시도는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자유가 있죠. 당신도 이 전시를 위해 종이와 먹, 불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러 한 제약은 30년이 넘은 것이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많은 불교 승려들이나 불교 이론을 공 부하는 사람들은 서예를 연습해요. 어린 시절 저를 가르친 서예 선생 님이 불자였어요. 선생님에게 불교 이론을 배웠죠. 그 가르침을 항상 새기면서 제 상황에 적용하려 했어요. 불교는 단순히 실용적이고 이 론적인 의미를 넘어 제 삶의 동향을 제시해주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말한 대로, 음양처럼 세상엔 언제나 반대되는 개념이 존재해요. 그들 은 긴장을 갖고 현상을 만들어요. 동서양 모두 반대되는 이항에 대한

제약이 있고, 제한적인 재료를 사용하면서 그 재료를 마스터하면, 더

비슷한 개념이 존재하죠. 이를 제 작업에 적용하는 것은 쉽기도 하거

자유로워지고, 망설이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 작가는 자신

니와 이는 언제나 제가 숙고하는 것이기도 해요. 이것이 바로 우리 인

이 사용하는 재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제약을 두고 저

생의 의미가 생겨나는 철학적인 지점이거든요.

108


2021년 2월에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Mountain>,

연작은 계속 진행중이지만 결국 같은 것입니다.

<Story>, <Timeless>, <Sculpture>, <Street>, <Pieno di Vuoto>, <Order and Impulse>등의 다양한 연작을 포함해 새로운 시리즈인 <Couple>이 공개될 예정이죠. 각기 다른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하기

우리는 이미 <Mountain>에 대해 얘기를 나눴어요. 이번에는

전에 저는 당신이 어떻게 항상 연작으로 작업하게 됐는지 질문하고

<Timeless> 연작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요. 당신은 특히 시간의 계층

싶어요. 초기 작업부터 시리즈 작업의 존재감이 굉장히 강했고 각 연

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죠. 당신은 평면 작업, 3D 작업, 4D, 5D 혹

작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Story>나 <Timeless>같은

은 그 이상의 차원의 작업을 할 수도 있겠죠. 아마 11차원이 될 수도

연작을 몇 년에 걸쳐서 계속하고 있다는 점은 굉장히 흥미롭기도 합

있겠네요. 이러한 차원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Timeless>

니다. 연작들은 계속되고 있고, 끝날 것 같지 않아요. 아마 계속해 나

시리즈로 이어졌는지 궁금합니다.

가겠죠. 이에 대해 말해주세요. 보통 다른 작가는 시리즈 작품을 하

<Timeless> 시리즈는 <Mountain> 시리즈에서 비롯되었어요. 초반에

더라도 그것이 끝나면 새로운 연작을 만들지만 당신의 시리즈는 계속

는 산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파도의 ‘소리’를 표현하려고 했어요.

진행 중입니다.

처음에는 바다 파도의 물결을 그렸어요. 그러다 그 모습이 파도보다

맞습니다. 시리즈들은 각자 다른 제목을 갖고 있지만 제 작품은 본질

는 산을 닮았다는 걸 깨닫고는 바꾸게 되었죠. ‘파도의 소리’라는 것

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요. 연작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다른

은 왔다가 가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물을 암시해요. 제게 파도의 소리

제목을 붙였죠. 저는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걸 좋아해요. 그건 마치

란 영원한 현상 같은 거에요. 산으로 바꾼 후에 이것을 잘라내고 종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작품의 본질은 같습니다. 몇

이 조각의 양 끝을 태우고 붙였어요. 마침내 저는 밀물과 썰물의 감

몇은 회화이고 다른 몇몇은 태우기와 붙이기로 만든 작품이죠. 이러

각을 추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어요. 이는 끝없고 영원한

한 점에서 같은 시리즈를 계속하면 단조로워질 수 있어요. 하지만 다

것입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최소한의 물결이지만 저는 여기에서 조류

른 제목을 붙임으로써 대체하는 서사를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제

와 끝이 없는 영원을 느껴요.

The Room , 2006


또 다른 시리즈 <Story>도 계속 진행 중인 작업입니다. 이 연작에서

이 부유하는 거에요. 당신은 천장까지 올라가서 자신의 육체를 보게

도 한지와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죠. <Story>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

돼요. 저는 제가 이 단계에 도달해서 공중부양을 하며 방을 바라보는

았나요?

모습을 상상했어요. 제가 실제적인 측량을 하지 않고 즉흥적인 드로

<Story>의 영감은 제 밀라노 작업실에 있는 큰 도서관에서 비롯됐어 요. 어느 날 도서관을 바라보는데, 책장에 책이 가득 꽂힌 모습이 형

잉으로 공간을 표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죠. <The Room>은 이렇게 책을 통한 상상으로 실현되었어요.

형색색의 추상화처럼 보였어요. 그리곤 각 책의 두께, 멋진 색감, 책 의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책에 기록하고 그것은 이야기가 돼요. 제 책장은 집중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을 담고 있지요. 이것이 제가 이 작업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작품 속 의 종이 조각들은 책을 상징해요. 책이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기 때 문에 제목을 <Story>라고 붙였어요.

레이어를 중첩하는 것은 작품이 평면에서 입체로 전환될 때 필수적 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2007년에 제작한 조각 작품 <Senza Gravit>에서 당신은 수많은 유리판을 에나멜과 함께 쌓았어요. 이렇 게 형성된 레이어가 3차원의 효과를 낳죠. <Senza Gravit>은 아마도 당신의 가장 조각적인 작품일 거에요. <Senza Gravit>은 제가 제작한 유일한 조각 작품입니다. 형태를 만들

<Sculpture>라는 작품도 있죠. 이 작품은 불을 사용하는 방식과 밀

기 위해서 편평한 판을 쌓아 올렸어요. 광학 효과를 통해 만들어진

접한 관련이 있어요. 이 작품들은 평면이지만 당신은 입체를 다루기

동그란 공 모양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 공은 레이어링으로 생긴 선

도 했어요. 2007년에 제작된 에나멜을 사용한 <Senza Gravit>이라

들로 이루어진 것이에요. 물결 같은 형상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는 작품이 대표적이죠. 또한 <The Room>에서는 3차원의 공간을 탐

만 사실 여기에 물결은 없어요. ‘중력의 감각’이 제 목표였죠. 제 ‘육

구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말해주세요.

신’의 존재로 인해 저는 이제껏 두통에 시달려왔어요. 우리에게 육체

회화 작가로서 3차원을 다루는 조각가를 동경하고 궁금해하곤 했어 요. 비록 제가 다루는 재료는 제한되어 있지만 종이로 조각을 만드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단순한 형태를 만들고 같은 간격으 로 계속해서 붙여나가는 행위를 반복하자 마치 타이어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어요. <The Room> 시리즈에서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선을

가 없다면 우리의 진실한 정체는 바로 ‘정신’일거라고 생각해요. 그렇 지만 우리에게 육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의 무게는 더 무거워지고 이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존재하 지만 존재하지 않는 상상을 해봤어요. 형상은 있지만 중력은 없는 채 로. 그것이 이 작품에 대한 제 접근이었어요.

만들었어요. 실험적인 과정이었죠. 이것이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 지만 재료의 한계로 인해 제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The Street>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군요. 이 작품의 제목은 어떻게 붙인 건가요? 아마 눈치챘겠지만, 저는 제 작품의 영감을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 얻

다시 <The Room> 시리즈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

어요. <The Street>은 제가 태국에 있는 상상에서 비롯되었어요. 제가

는 3차원적입니다. 이는 사실상 1990년에 세상을 떠난 인도의 신비주

어느 낡은 집의 3층 정도에 있고, 그곳에서 우산을 들고 길을 걷는

의자이자 라즈니쉬 운동의 창시자인 오쇼 라즈니쉬에 의해 촉발되었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순전히 상상이죠. 길에 우산이 가득 차있

습니다. 당신은 여러가지 명상에 관하여 쓴 오쇼의 책을 읽었지요. 이

는 장면이 영감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펼쳐진 우산처럼 동그란 모양

책에는 중력에 저항하고 방 속을 떠다니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을 만들었지만 이후엔 약간 타원형으로 만들면서 오히려 형상을 망가

이러한 생각은 <The Room>에 분명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요.

뜨리는 것에 집중했어요. 그 자체로 유기적인 형태를 부여하지만, 여

네. 그 책에서 오쇼는 명상이 성공적이라면, 당신이 앉아있는 공간에

전히 길에 대한 저의 독창적인 상상력과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서 다른 두 개의 결과를 얻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하나는 갑자기 당 신 자신이 엄청나게 커져서 공간이 작아지는 것이죠. 두 번째는 당신

110

당신의 생폴드방스 작업실의 작은 농장 정원은 갤러리나 미술관 밖에


The Street , 2020

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농장에 관심 을 갖고 있고, 저 또한 당신의 정원이 무척 흥미로워요. 나이지리아

그곳에는 매일 신선한 달걀이 있겠네요. 맞아요. 환상적이죠.

작가 오토봉 엥캉가도 농장을 운영하죠. 당신의 정원과 농장에는 닭 과 신선한 달걀, 딸기, 어린 양도 있죠. 당신의 정원을 담은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봤거든요. 당신의 정원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이제 몇가지 질문이 남았어요. 이번 전시에서 당신은 <Couple>이라

전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자연의 부산물이란 인

는 새로운 연작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이 시리즈는 어떻게 시작된건가

공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 토마토가 열리거나 닭이

요? 작품의 계기와 <Couple>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달걀을 낳기까지 6개월의 시간을 기다려야 해요. 이는 기다림을 배

종이를 동그랗게 자를 때면 언제나 남는 부분이 있어요. 작품에 원형

우는 것이며, 서두르지 않고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제

조각들을 사용하는데, 무심코 원래는 버려야 할 남겨진 종이에 시선

성미를 다스려주고 속도를 재개념화합니다. 자연의 속도는 다르고, 느

이 갔어요. 저 자신에게 물었죠. ‘모두 같은 종이에서 왔는데 왜 동그

려요. 저를 진정시켜주죠. 저는 농작물을 기르는 게 특히 좋아요. 이

라미는 선택되고 남겨진 부분은 버려져야만 하는 거야?’ 그래서 저는

런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정원

남겨진 조각들에 좀 더 애정을 줌으로써 두 개의 작품을 만들기로 했

은 진짜 농장은 아니지만, 꽃을 기르는 대신 채소 같은 농작물을 길

어요. 하나는 선택된 것이고, 하나는 남겨진 것이죠. 둘은 같은 작품

러요. 채소가 꽃처럼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했어요. 또 제가

이고, 사이즈도 같아요.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커플’은 떨어져있는 상

기른 신선한 농작물로 지인에게 저녁을 대접할 때 무척 뿌듯해요.

태에서 서로 맞추면 딱 떨어지는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들을 떼어내면 둘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아직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들도 궁금하네요. 건축가들은 주기적으

저는 클래식도, 요즘 음악도 모두 좋아해요. 특히 타악기를 즐겨 들어

로 예정된 프로젝트들을 공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에 대해 알 수

요. 타악기는 제가 리듬을 얻는 하나의 출발점이 됩니다. 리듬은 멜로

가 있죠. 그렇지만 작가들은 아니에요. 혹시 당신에게도 이런 프로젝

디보다 중요해요. 기본적인 요소거든요. 타악기 음악을 들을 때면 제

트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너무 크거나, 너무 비용이 많이 들거나,

세상이 좀 더 선명해지는 듯 해요.

아니면 시간이 없었다거나 하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 말이 죠. 아니면 아직 작가님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프로젝트일 수도 있고요.

이 인터뷰의 마무리에 걸맞는 훌륭한 답변이네요. 이제 마지막 질문 을 드릴게요. 인터뷰 초반에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당신의

<Timeless> 작품으로 거대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마치 벽지처럼

작업에 대해 쓰는 글이 있나요? 아니면 시를 쓰나요?

요. 그리고 그 공간에 들어가면 시간의 본질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죠. 어떤 작품은 6개월에서 8개월 가량의 시간이 걸리는데,

네. 많이 써요. 저는 감성적인 사람이고, 혼자 살고 있죠. 함께 대화를

어떤 작품들은 몇 년이 걸리기도 해요. 미래에 작은 미술관을 열어서

나눌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제 생각을 써내려

이런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다른 하나는 조각에서 얻은 아이디어에

가요. 글쓰기는 예민한 작업이에요. 가끔은 로맨틱하기도 하지만 우

요. 베니스에서 설치 작품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각각의 판이 수면위

울한 일이기도 하고요.

로 올라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작품이었어요. 마치 환영처럼 나타났 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거죠. 하지만 소금기가 있는 물이어서 기계 가 지속해 작동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떠올랐다가 다시

시도 쓰세요?

가라앉는 바다의 형태를 띠는 공공미술 작품을 물에서 시도해보고

시도 써요. 제가 배운 것에 대해 수필을 쓰기도 하고요. 시보다 에세

싶어요. 이 또한 제 작품의 철학적 맥락을 아우르고 있죠.

이에 가깝겠네요. 제가 발견한 것이나 연구한 것에 대한 것들이죠. 그 나저나, 독일어 하시죠? Sehnsucht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조언을 담은 애정 어린 책을 썼죠. 당신은 2021년의 젊은 작가들에게 어떤

물론이죠, 그리움을 뜻하는 말이죠.

조언을 하고 싶으신가요?

맞아요. 요즘 같은 시기에 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젊은 작가들은 자신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알맞 은 재료를 선택해야 해요. 그건 금속일 수도, 종이나 세라믹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재료를 골랐다면, 계속해서 이를 발전시키고 연습 하여 숙달해야 해요. 예술가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자신의 생 각을 예술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거죠. 그런데 숙련되지 않은 재료 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충분히 표현해내는데 절대로 성공 할 수 없다는 뜻과 같아요. 다양한 재료를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 이 상적인 자신만의 재료를 찾게 될 거에요. 그 뒤에는 재료를 통해 능 숙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미국 작가 댄 그레이엄은 ‘예술가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알면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죠. 작가님은 어떤 음악을 듣는지 궁금 하네요.

112


Installation view of Timeless , Gallery Hyundai, 2021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