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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문인사기획전 4



지금 여기 박완서


문인사기획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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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목차

박완서의 시간은 싱싱하고 영원하다 - 이경자 전시

기획글 - 김소원 1. 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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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 10

거주 공간별 작품 연대기

12

박완서의 서가

18

작가의 말

32

2. 기억, 상상, 복원

42

부재의 고고학

44

소박한 개인주의자

66

사늘한 낮꿈

76

3.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김도희, 이은주, 조민숙, 한승훈,

112 114

참참참그래픽, 윤소라X정민아 참여 예술가 인터뷰

132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6.25 체험_ 권명아

146

여성_ 이정숙

154

중산층/자본주의_ 고명철

160

노년/말년_ 이선미

166

상실/참척 _ 신형철

174

목차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186

다시 하나의 집으로 - 호원숙

202


싱싱하고 영원하다

문인사기획전 4

박완서의 시간은

이경자 (소설가,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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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1931년, 지구별에 왔다가 2011년 1월 흰 눈이 세상을 덮은 날 새벽 이곳을 떠난 소설가 박완서.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서 당신의 시간을 살아낸다. 지구별을 떠나기 전엔 아치울 마을의 노란색을 칠한 집에 살았지만 지금은 우주 모든 곳에 산다. 그래서 박완서라는 생명의 시간은 사람의 능력으론 셀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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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같다. 그가 살아생전 혼신의 힘을 다해 허리 굽혀 써냈던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사건들의 직조(織造). 사람들은 책이라는 그릇에 문자로 옮겨진 박완서의 마음, 생각, 슬픔과 행복과 희망까지, 그 낱낱을 먹고 마시고 향기 맡으며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을 섞는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1950년 전쟁과 휴전과 분단. 혁명과 쿠데타와 경제개발과 소비가 미덕이 된 사회의 천함과 허위의식들. 그리고 끝내 교감한 흙에서 나고 자란 아주 작은 것들까지. 그가 미워하고 사랑하고 거부하고 포용한 모든 존재와 혼란들까지. 독자(讀者)라는 그리움들이 자기 생으로 변주(變奏)해 내는 무수한 박완서의 이야기들. 그래서 박완서의 시간은 여전히 싱싱하고 또 싱싱하다.


문인사기획전 4

기획글 - 지금도, 여기에도, 박완서 1. 지금, 여기, 박완서 2. 기억, 상상, 복원 3.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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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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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지금도, 여기에도, 박완서 김소원 (성북문화재단 큐레이터)

‘문인사 기획전’은 성북의 훌륭한 문인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전시로서 올해는 소설가 박완서(1931~2011)를 조명했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의 수상은 물론 보관문화훈장까지, 박완서는 작품성과 업적 면에서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작가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진가는 작고 후 8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놀랄 만큼 열정적이고 고른 팬층을 가졌다는 점, 숨은 팬층이 끝없이 발견되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무수한 팬들은 그를 떠올리며 두 눈을 반짝였고, 아이처럼 웃었다. 박완서 팬덤(fandom)이다.

40세에 『나목』(1970)으로 등단한 그는 상업적인 글이 아니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6.25 전쟁과 남북분단, 근대화 시기의 사회적 모순, 소외된 약자로서의 여성문제 등을 독특한 사적 체험과 진솔한 자기대면 속에서 풀어냈다. 지식, 관념, 상상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자신과의 싸움’, ‘진을 빼는 일’, ‘진을 빼기에 가장 살맛나는 일’, ‘겨우 발견한 출구’, 모두 글 쓰는 일에 대한 박완서의 절절하고 애증어린 고백들이다. 글을 쓰는 일이 이처럼 그에게 떼어 낼 수 없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저리고 아프면서 끓어오를 때 써지는 것’을 평생지기로 삼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산고(産苦)일지 떠올려 보게 된다. 자전적 소설 속에서 자신에 대한 묘사를 가족이나 타인에 비해 모호하게 처리하는 관성을 냉정하게 성찰하는 모습 또한 경외감을 일깨운다. 그저 작가 개인의 자기 위안이나 옛날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오는 문학, 박완서 문학의 힘이다.

문인사기획전 4

기획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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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지금 여기 박완서>展은 무엇보다 ‘저항마저 포획되는’ 이 시대에 더욱 소중한 박완서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들이다. 특정 이데올로기나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은 박완서의 정신은 오로지 자신을 자신답게 표현하는 일을 속박하는 모든 종류의 것들에 항거하는 것에 기반한다. 철저히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외침으로 일관하며 옳지 않은 것에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단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억누르는 모든 것에 숙명처럼 맞서 싸워야 하는 문학이 유독 남녀 사이의 억압구조에는 눈감아 버리는 행태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여성의 입장에 서서 ‘아름답고 낯익은 미풍양속(美風良俗)이란 탈’을 벗겨 본색을 밝히려한 자신의 노력이 설령 독자들의 차가운 무관심이나 강도 높은 비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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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다 해도. 또한, 지배하는 자들의 무자비한 힘의 과시와 사회 곳곳의 부조리 등을 통찰하고 낱낱이 밝혀내려한 의지는, 특정 시대와 장소가 한정하는 사고를 넘어서 폭넓은 공감대와 현재성을 확보하게 만들었다.

전시 역시 박완서를 단일한 프레임에 덧씌우기 보다는 균형감 있게 만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전시장 1층(‘지금, 여기 박완서’)은 박완서에 대한 프롤로그 공간으로 구성했다. ‘거주 공간별 작품 연대기’, 초판본을 중심으로 저작들을 한데 모은 ‘박완서의 서가’, 그의 직접적이고 생생한 언어를 담은 ‘작가의 말’ 등을 통해 박완서에게 다가갈 준비를 돕고자 했다. 2층(‘기억, 상상, 복원’)은 한 층 더 깊이 박완서를 만나는 공간으로서, ‘부재의 고고학’, ‘소박한 개인주의자’, ‘사늘한 낮꿈’의 소주제로 나누어 여성과 6.25,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 순수와 관조의 세계를 다뤘다. 박완서의 장녀 호원숙을 비롯 여러 인사들의 인터뷰 영상, 작고 1년 전의 박완서 강연 영상 및 1953년도 결혼식 영상, 한승훈의 영상설치, 김도희의 벽면설치, 윤소라&정민아의 낭독극 등,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아카이빙 자료들과 다양한 해석이 담긴 예술작품을 종합적으로 구성했다.

천천히 전시장을 돌고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가 왜 지금도 박완서를 가슴 떨림 속에 애정하고 찾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그가 필요한지를 각자의 말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운명처럼 딱 들어맞는 말을 찾기에 온 힘을 쏟은 그의 문장들을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것에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 여기에서 박완서를 만나보는 일, 그의 문학이 가진 힘의 근원을 느끼는 일은 연구자나 평론가의 잘 정리된 말을 통해서가 기획글

아닌 우리 스스로가 해볼 일이다. 자신을 위로해 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바랐고, 재미와 뼈대가 함께 있는 소설을 소원했던 그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어 놓은 그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1.

'지금, 여기, 박완서' 전시 전경 @성북예술창작터 1층

지금, 여기, 박완서


· 거주 공간별 작품 연대기 · 박완서의 서가 · 작가의 말


문인사기획전 4

· 거주 공간별 작품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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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박완서 소설은 자전적 성격을 특징으로 한다. 때문에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간은 단순히 작품의 배경으로서뿐 아니라 박완서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공간에 따른 연대기를 통해 박완서의 삶의 궤적과 주요 작품의 속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3


1931 1938

1938 1944

경기도 개풍군

현저동

묵송리 박적골

내가 태어난 고장은 개성에서 남서쪽으로 20리가량 떨어

더럽고 뒤죽박죽이었다. (...) 집이라기보다는 아무렇게나

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이라는 이십 호가 채 안

쏟아놓은 상자갑 더미의 상태를 달리 고쳐볼 엄두를 못

되는 벽촌인데 마을 사람들은 개성을 송도라고 불렀다.

내고 체념한 주변머리없는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을 만큼

(...)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하고 삼촌들만 송도에 다닐 수

의 먹이를 물어들이기 위해 가까스로 내놓은 통로가 길

가 있었다. 그게 딴 집하고 우리 집하고의 차이였다. 여자

이었다. 상자갑만 한 집들이 더러운 오장육부와 시끄러운

가 송도에 못 가는 집이 박적골에서 우리 집 말고 또 한

악다구니까지를 염치도 없이 꾸역꾸역 쏟아놓아 더욱 구

집이 있었다. 두 집 다 박가였고 서로 친척이었다. 근데도

질구질하고 복잡한 골목이 한없이 계속됐다. (...) 더욱 어

마을 이름은 박적골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는 양반이고

처구니없는 것은 그 상자갑을 쏟아놓은 것처럼 담 쌓인

그들은 상것이라고 했다. (...) 박적골엔 이렇게 두 양반집

집들 중의 하나나마 우리 집이 아니라는 거였다. 현저동

과, 열여섯인가 열입곱 호의 양반 아닌 집이 있었지만 지

에서도 상상 꼭대기에 있는 초가집의 문간방에 엄마는 세

주와 소작인으로 나누어져 있진 않았다. (...) 땅을 독차지

들어 살고 있었다.

한 집도 땅을 못 가진 집도 없었다. 다들 1년 먹을 양식 걱

- 「엄마의 말뚝 1」, 『엄마의 말뚝』, 세계사, 2012, 38-39쪽.

정은 안 해도 될 자작농들이었고 부지런했다. 그런 고장 에서 여덟 살까지 자라는 동안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 이가 따로 있다는 걸 알 기회가 없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2012, 14-15쪽.

개성 지도_ 1: 100,000_ 호원숙 소장

다시 찾은 현저동, 1992, 사진제공: 호원숙


1944 1953

1953 1961

1961 1980

1980 1988

1988 1998

1998 2011

돈암동,

종로구

보문동

잠실의 아파트

방이동

구리시

삼선교 등지

충신동 한옥

한옥

방이동 아파트(1985년~)

아파트

아치울

성북동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삼선교, 돈암교를 거쳐 우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61번지의 1. 18평짜리 한옥은 아버

북적거리는 세월이 잠깐이더라구요. 불평 많이 했는데 지

변두리에 있는 전형적인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우

수리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집의 재발견

5월에 이사를 했다. (...) 실상은 이 동네에다 집을 한 채 장

리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을 우리는 그때 안감내라고 불

지가 할머니와 함께 사시던 집인데 아버지가 측량기사로

금은 후회가 돼요. 원래는 보문동의 한옥집에 살았어요.

리 부부와 아이들이 먼저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

이었다. 우리집은 삼층이라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

만한 지도 10년이 넘는다. 옷가지나 물건도 충동구매를

렀다. 안감내는 수량이 풍부하고 맑아서 동네 사람들은

토목 공사에 따라다닐 때 받은 월급을 모아 샀다고 했

그게 열 식구 산 집이죠. 겨울이면 안방에 모여 아랫목에

면서도 목가적임은 향수라고밖에 달리는 부를 수 없는 것

은 겨우 면했지만 안에서 내다볼 전망에 대해서는 입주할

한 적이 거의 없는 내가 명색이 집을 충동적으로 장만하

큰 빨래만 생기면 그리로 들고 나갔다. 개천과 나란히

다. 작은 집이었지만 지내기에는 무난하였다. 종로5가에

발만 집어넣었어요. 교육적 설교 없이도 학교에서 어쩌구

이기 때문이다. (...) 떠나온 동네 생각만 간절하다가 새 동

때부터 기대를 안 했다. (...) 거실 유리가 이중창으로 돼 있

게 된 것은 내 고향집 동네와 절묘하게 닮은꼴 때문이었

난 천변 길은 인도와 차도가 따로 있을 정도로 너른 한길

서 동숭동 쪽으로 효제국민학교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저쩌구하면 그게 다 가족 간의 대화고 아이들이 무슨 생

네에 정을 붙이긴 (...) 실로 조그만 발견에서부터 비롯됐다.

고, 안쪽이 간유리로 돼 있어 밖이 잘 안 보이는 구조에 대

다. (...) 남편은 토박이 서울사람이다. (...) 발전성이라고는

이고 개천 쪽으로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어 차가 많지

낙산 밑이었다. 낙산엔 산꼭대기까지 판잣집들이 들어차

각을 하는지도 알고 그랬어요. 할머니까지. 그게 좋았어

주로 전철만 이용하다가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와서 동네

해서도 불만이 없었다. (...) 그러나 새로 낀 시원한 통유리

없는 동네에다 부동산을 사고 싶어하는 나를 한심하게 여

않은 당시에는 다른 동네 사람들끼리 일부러 산책을 올

있었고, 무너질 듯이 지어진 무허가 판잣집들에 비해 작

요, 지나고 보니.

앞에서 내렸을 때였다. 분명히 우리 아파트 앞인 줄 알고

를 통해 들어온 풍경은 그게 아니었다. (...) 어쩌다 손자들

겼다. 그러나 나는 급한 마음에 우선 내 마음대로 했고,

내렸는데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근대화의 첨단을 가는 아

하고 놀이터에 갈 적에나 지나다니지만 아파트마다 명색

아이들을 다 결혼시키고 난 뒤 둘이서만 거기 가서 조용

파트 단지와는 얼토당토않은 거였다. 버드나무와 미루나

으로 붙어 있는 정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저 그런 마당이

하고 소박한 노후를 즐기자고 그를 꾀는 건 그 다음 문제

무의 아름드리 고목이 첩첩이 양쪽에서 짙은 녹음을 드리

었다. 그런 마당이 삼층에서 바라다보니 전혀 딴판이었다.

였다. (...) 내가 서울과 바로 붙은 동네에서 1930년대의 고

운 가운데 빈터엔 옹기전이 자리잡고 있었고 길가 쪽 땅에

(...) 이렇게 좋은 마당이 그렇게 지척에 있었건만 그동안은

향마을을 본 것 자체가 환상이었다.

닿을 듯이 휘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엔 흙바닥에 그대로 참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가까이 있는 것하고도 관

외, 수박, 복숭아를 쌓아놓고 파는 과일장수가 있었다. 나

계를 맺지 않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우리 마당

는 잠시 도시의 소음을 잊고 아찔하고 망막한 기분으로 시

도 처음부터 거기 있었건만 십 년 후에나 알아보았다. 십

골 소도시에서 한적한 들판으로 빠져나가는 지점쯤에 서

년 후에 비로소 유리창을 새로 갈아끼웠기 때문만이 아니

있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착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라 내 마음이 마당을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정도로 한적하고 낭만적인 길이었다. - 『그 남자네 집』, 세계사, 2012, 19-20쪽.

은 기와집은 대궐같았는데, ㄷ자 형의 전형적인 서울집 으로 화초담까지 있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1961년까 지 살았다. - 호원숙,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웅진지식하우스, 2011, 87-88쪽.

- 『박완서의 말』, 마음산책, 2018, 146쪽.

어릴 적 보문동 한옥집에 살고 있을 때였다. 집 가까이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에 우리 소유의 또 하나의 집이 있었다. (...) 우리는 그 집을 공장집이라고 불렀는데 오래된 일본 식으로 된 허름하고 허술한 이층집이었고 아버지가 가내 공장을 하기 위해 사놓은 집이었다. 특히 여름엔 슬레이트 가건물 지붕이 어찌나 무더웠는지 모른다. (...) 엄마는 그 집 2층에서 『나목』을 쓰셨다. 1970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달, 2015, 123-124쪽.

- 「우리들의 실향」,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문학동네,

- 「옛날」, 『두부』, 창작과비평사, 2002, 39-41쪽.

- 「전망 좋은 집」, 『한 길 사람 속』, 문학동네, 2018, 214-218쪽.

2015, 294-297쪽.

삼선교 한성대 근처의 친정집 주변에서,

충신동 집 골목에서 시어머니와 큰 딸 원숙, 그리고 박완서,

1960년대 초반, 사진제공: 호원숙

1950년대 후반, 사진제공: 호원숙

보문동 한옥집에서 딸들과 함께, 1979, 사진제공: 호원숙

잠실아파트, 1975, 사진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방이동 아파트 서재에서 박완서, 1993 ⓒ이은주

구리시 아치울집,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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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공간별 작품 연대기> 설치 장면


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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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사기획전 4

· 박완서의 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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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박완서는 1970년 마흔의 나이에 장편 『나목』으로 데뷔하여 타계하기 직전 해인 2010년 발표한 단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총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다수의 산문집, 동화집, 꽁트집 등의 풍성한 문학적 유산을 남겼다. 박완서의 문학은 해외 다수 국가들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는데, 우리 정부의 번역 사업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들의 자발적 요청으로 비롯되었다. 한자리에 모은 박완서 저작의 초판본과 해외 번역본의 콜렉션을 통해 새삼 박완서 문학의 다채로운 너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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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를 실감하게 된다.


번역본 목록

초판본

문인사기획전 4

초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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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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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서가


문인사기획전 4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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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문학의 출발이자

세 편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1988년 불의의 사고로

기원이다. ‘벌레의 시간’이었던

박완서의 ‘엄마’ 이야기다.

막내아들을 잃고 써내려간

전쟁통의 서울, 미군부대 PX

‘말뚝’은 어머니가 평생

신을 향한 피맺힌 절규의

초상화부에 근무할 당시 만나

추구해왔으나 누리지 못한,

기록이다. 훗날 2008년

교우한 박수근 화백과의

그럼에도 딸에게만큼은 누리게

인터뷰에서 박완서는 한없이

인연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해주고팠던 ‘새끼줄 길이만큼의

낮고 비루해지니 그제서야

자유’를 암시하고 있다.

비로소 신이 보이더라 술회했다.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파편적으로 다뤘던 박완서

‘부덕’(婦德)과 ‘미풍양속’이라는 미명하에

본인의 자전적 체험을 “순전히 기억력에만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당대 남성 가부장 문화를

의지해서” 총체적으로 다시 쓴 자전소설

비판한 여성주의 3부작이다. 이들 연작을 쓴

2부작이다. 1931년 출생 이후부터 1953년 결혼

배경에 대해 박완서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과

직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관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지금 여기 박완서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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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여자』 일본어판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수록, 영어판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외 1편 수록, 프랑스어판

박완서의 서가

『엄마의 말뚝』 프랑스어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독일어판 「겨울 나들이」 수록, 영어판


문인사기획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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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인큐베이터』 독일어판

「닮은 방들」 수록, 영어판 『나목』 영어판

『어느 이야기꾼의 수렁』 수록, 독일어판.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영어판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영어판


지금 여기 박완서

25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스페인어판

먹었을까』 대만어판

수록, 독일어판

박완서의 서가

ในความทรงจำา,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태국어판 「엄마의 말뚝」 수록, 영어판 「배반의 여름」 수록, 스페인어판


문인사기획전 4

26

『마른꽃』 영어판

『엄마의 말뚝』 네덜란드어판 「엄마의 말뚝」 프랑스어판

ő

『나목』 중국어판

Ű

『그 남자네 집』 중국어판

『엄마의 말뚝 1, 2, 3』 헝가리어판


지금 여기 박완서

27

『휘청거리는 오후』 중국어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외

스페인어판

1편 수록, 포르투갈어판

박완서의 서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먹었을까』 영어판

프랑스어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수록, 영어판


문인사기획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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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의 사흘 동안」 수록,

「친절한 복희씨」 수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일본어판

먹었을까』 프랑스어판

『너무도 쓸쓸한 당신』 영어판

『친절한 복희씨』 러시아어판

프랑스어판

『엄마의 말뚝』 영어판


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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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일본어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독일어판

먹었을까』 루마니어판

박완서의 서가

『친절한 복희씨』 중국어판 『친절한 복희씨』 베트남어판 「닮은 방들」 수록, 영어판


문인사기획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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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일본어판

있었을까』 우즈베크어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영어판

먹었을까』 중국어판


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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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서가


문인사기획전 4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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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등단 이후 박완서의 집필 활동 기간은 40여 년에 걸쳐 쉼 없이 지속된다. 장편을 기준으로 데뷔작 『나목』(1970)에서 마지막 장편 『그 남자네 집』(2004)에 이르기까지의 ‘작가의 말’을 한자리에 모아보았다. 여기에는 박완서 문학의 핵심 주제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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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적으로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작가의 방대한 문학적 타임라인이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문인사기획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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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설치 장면


지금 여기 박완서

망가지고 흩어진 걸 복원하는 데 있어서 제 조각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딴 조각으로 메운 걸 진정한 복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설사 그 딴 조각이 금이라 해도 말이다. 나는 말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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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다. 그 사실로 뭐가 어떻게 달라지길 바라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게 사실이니까, 끔찍하지만 그래도 그게 진상이니까, 잘못 알고 있다면 가르쳐줘야 할 것 같았다. -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작가의 말, 1989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 보았다. 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보았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집의 규모와 균형을 위해선 기억의 더미로부터의 취사선택은 불가피했고, 지워진 기억과 기억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 주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억이라는 것도 결국은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작가의 말, 1992


01.

『나목』은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전기나 실화가 아니다. 『나목』을 소설로 쓰기 전에 故박수근 화백에 대한 전기를 써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그를 알고 지낸 게 그나 내가 가장 불우했던 전쟁 중, 1년 미만의 짧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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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4

시간이었기 때문에 전기를 쓰기엔 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렇지만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나목』, 열화당, 1976.

02.

나는 요새 건망증이 매우 심해 가족들한테 핀잔도 받고, 더러는 실수도 한다. 그러나 6.25의 기억만은 좀처럼 원거리로 물러나주지 않는다. 아직도 부스럼딱지처럼 붙이고 산다. 훗날, 딱지가 떨어지면 좀 더 걸러지고 정돈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일단 한 권의 책으로 선보인다. 나의 부스럼딱지가 개인적인 질병이 아닌, 한 시대의 상흔일진대, 그대로의 모습으로 독자와 만나자는 것도 아주 뜻 없는 일만은 아니겠거니 싶어서이다. 『목마른 계절』, 수문서관, 1978.

03.

『휘청거리는 오후』는 나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지만 신문 연재로는 처음이었다. 후반으로 접어들자 독자로부터의 상당한 간섭이 있었다. ‘여자들을 왜 불행하게 하느냐.’ ‘허성 씨를 너무 가엾게 하지 마라......’ 주로 이런 간섭이었다. 그런 간섭은 독자가 내 작품을 그만큼 애독해준 결과로 유쾌하게 여겼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작중 인물에게 내가 그들을 창조하면서 지워준 운명대로 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실상, 내가 독자가 관심 있게 봐주기를 바란 것은 누가 행복하게 되고 누가 불행하게 됐나보다는 어떠어떠한 것들이 허성 씨가의 조용한 몰락에 작용했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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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보통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과 양심의 몰락을 통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정직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휘청거리는 오후』, 창작과비평사, 1977.

04.

문학의 싸움을 걸 상대의 힘이 터무니없이 커졌을 때라던가 종잡을 수 없이 간교해졌을 때도 그런 싸움을 중단하거나 후퇴시켰던 적은 없고, 그럼으로써 문학한다는 게 본인에게만 보이는 훈장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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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나 싶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이런 억압의 관계만은 별로 문학의 도전을 안 받으면서 보호 조장돼왔던 것 같다. 내가 감히 그런 것들에게 싸움을 걸어보려 했던 것은 내가 여자라는 것과 무관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전예원, 1980.

05.

참 듣기 싫은 소리지만 독립투사의 후손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못 받아 지지리 못살고, 반대로 친일파의 후손은 다 잘산다는 얘기가 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대립되는 두 가계의 후손으로 태어난 두 젊은이가 그런 더러운 상식에 각기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항거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내가 낳은 그 두 젊은이를 사랑했기에 그들이 오만의 시기를 넘고 겸허를 얻기를, 몽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바라고 지켜보았다. 『오만과 몽상』, 한국문학사, 1982.

06.

분단은 오래 전에 피 흘리기를 멈추고 굳은 딱지가 되었고, 통일을 꿈꾸지 않은지도 오래입니다. 통일이란 말은 도처에 범람하고 있습니다만 산 채로 분단된 자의 애절한 꿈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작가의 말

만들어낸 구호로서 행세하고 있을 뿐입니다. 통일이 직업인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구호를 만들어내어 분단을 치장하면 되겠지만 진실로 통일이 꿈인 사람은 끊임없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 흘리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막 난 채 아물어버리면 다시는 이을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말뚝 2』 이상문학상 수상소감, 1981.


이 소설은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6.25 때 헤어진 ‘수지’와 ‘오목이’라는 이산 자매 얘긴데 불행히도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이산가족찾기’ 운동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쪽이 보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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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못 본 척했기 때문이다. 만남이란 일방적으론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그런 못 본 척 이야기다. 오랜 세월 그리던 혈육이 만나는 걸 볼 때마다 눈물짓고 나서 생각하니 우리가 정말 울어줘야 할 것은 만남의 기쁨이 아니라 아직 못 만난 사람들의 통한이 아닐까 싶다. 아직 못 만난 사람들이 혈육의 이름을 크게 쓴 표지판을 든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고 그 얼굴엔 오랜 세월의 신산과 기다림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민음사, 1983.

08.

이 글을 「떠도는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주부생활>에 연재하면서 <주부생활>의 독자가 얼마나 보수적인가를 통감해야 했다. 결혼이란 제도는 어떤 풍파든지 견디고, 종당엔 해피엔딩을 맞아야 한다는 독자들의 극성스런 바람은 나에게 적지 않은 압력이 되었다. 당초의 의도대로 어머니 세대의 결혼은 아내가 온갖 굴욕을 참고 자신을 죽이면서 그 제도를 지키는 걸로, 딸 세대는 아내만이 일방적으로 그 제도를 지키는 일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과감히 혼자가 되는 걸로 결말을 맺어,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하기가 나로서는 무척 힘 드는 일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통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혼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나 없나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결혼이 과연 행복할 수 있나 없나,라는 내 딴엔 좀 새로운 문제였다. 독자는 거기서부터 비롯된 똑똑한 여자의 중대한 착오를 깊게 봐주셨으면 싶다. 『서 있는 여자』, 학원사, 1995.

09.

지척에 둔 고향 땅(개성)을 이 세상 끝보다도 더 멀게 느끼면서 살아온 지도 어언 40년째가 된다. 도저히 어째볼 수 없다는 무력감, 풀 길 없는 분노 때문이었을까,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만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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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 이 소설을 탈고하자마자 여지껏 내 이야기의 풍부한 원천이었으며 또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던 어머니를 여읜 것도 통한으로 남는다. 어머니, 어머니 보기엔 비록 초라한 이야기책이오나 삼가 영전에 바치오니 어여삐 여기소서. 『미망』, 문학사상사, 1990.

10.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 보았다. 쓰다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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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보았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집의 규모와 균형을 위해선 기억의 더미로부터의 취사선택은 불가피했고, 지워진 기억과 기억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 주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억이라는 것도 결국은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1992.

11.

우리 동네엔 공원이 많다. 그러나 내가 마음에 두고 사랑한 공원은 공원이라는 이름도 붙지 않은 작은 동산이었다. 꼭 밤송이 절반을 엎어놓은 것처럼 동그랗고 소복한 동산이 철 따라 옷 갈아입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웠고, 흙 밟고 싶을 때 숲을 헤치고 올라가 보는 것도 나만이 아는 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동산이 불도저에 의해 뭉개지는 걸 보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거기 그 동산 말예요. 그 예쁜 동산을 꼭 그렇게 만들어야 했을까요? 그러나 아무도 호응을 안 한다. 거기가

작가의 말

동산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 예쁜 동산을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불도저의 힘보다 망각한 힘이 더 무섭다. 그렇게 세상은 변해간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출판, 1995.


현대문학이 창간한 지 50주년을 맞게 된다는 소리를 듣고부터 그때에 맞춰 소설책을 한 권 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0년대 초, 내가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한 동네는 좁고 꼬불탕한 골목 안에 작은 조선 기와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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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처마를 맞대고 붙어 있는 오래된 동네였다. 출구가 보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답답하기만 한 시절,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한 동네 낡은 조선 기와집에 ‘현대문학사(現代文學社)’란 간판이 붙었다. 워낙 살기가 어려울 때라 살림집도 길목만 좋으면 한쪽 벽을 헐고 구멍가게를 내는 일이 흔했다. 그런 동네 구멍가게와 다름없는 집에 그 간판이 붙자 그 집뿐 아니라 그 골목까지 갑자기 찬란해졌다. 그 남루하고 척박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게 그렇게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때 문학은 내 마음의 연꽃이었다. 진흙탕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이었고, 범속하고 따분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었다. 이건 물론 ‘현대문학사’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문학에 바치는 헌사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남아 있는 거라고는 살아남기 위한 아귀다툼밖에 없던 시절, 문학이 그 누추한 삶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전후 최초의 문예지를 창간한 현대문학사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도 한번 근사하게 나타내고 싶었다.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사, 2004.

13.

지금의 사오십 대는 전쟁을 치르고, 가난을 견디고, 어렵게 부(富)와 근대화를 이룩한 주역이니만큼 그들이 터득한 삶의 방법에 자신만만하고,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그 방법으로 젊은 세대를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때 그들이 그들 자신을 만들었듯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도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가려는 걸 막을 순 없다. 아무리 부모에겐 신앙이라도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정신으로 승복할 수 없을 땐 타개해야 할 미신 대접밖에 못 받는다. 『도시의 흉년』, 문학사상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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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14.

이건 대단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한 평범한 여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직도 꿈을 못 버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꿈으로부터 배반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창출해내는 게 어찌 여자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인간의 운명이지요. 무사안일한 일상이 계속되어 남들이 행복하다고 봐줄 땐 솔직히 말해서 쓰는 일이 지겨웠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뜻하지 않게 닥쳐온 무서운 고통과 절망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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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발견한 출구는 쓰는 일이었으니까요. 아니지요. 출구라기엔 아직 이릅니다. 출구를 찾아내기 위한 정신의 물리치료법이랄까, 워밍업이라고 하는 쪽이 조금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에게 닥친 가혹한 재앙이나 불행은 보다 큰 글을 쓸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더러 계신 듯합니다. 혹시나 그런 기대로 이 책을 읽는 분이 계실까 봐 민망한 마음으로 드리는 변명입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삼진기획, 1989.

작가의 말


2.

'기억, 상상, 복원' 전시 전경 @성북예술창작터 2층

기억, 상상, 복원


· 부재의 고고학 · 소박한 개인주의자 · 사늘한 낮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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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재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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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가장 많은 나라가 단일 연합군으로 참전한 전쟁이자 가장 긴 휴전이라는 기록을 가진 6.25는 분단을 고착화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남북을 합쳐 약 200만 이상이 사망했으며 사망자 중 민간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는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들에는 여성의 입장에서 경험한 참혹한 6.25의 모습이 생생한 일기처럼 그려져 있다. 이 공간에서는 전쟁이 가져온 피폐함과 남성의 부재, 그와 관련한 여성의 삶을 살펴보게 된다. ‘박완서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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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의 여성들’이라는 소주제로 구성했으며, 관련 문장, 인터뷰 영상과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었다.


체험에 기반한 글쓰기를 특징으로 하는 박완서 문학 속에는 가족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아버지는 산골 마을에서 기껏해야 맹장염을 진단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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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와 가족

못해 허망하게 죽어가야 했고, 이 사건은 근대적 삶을 향한 어머니의 욕망에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가장의 역할과 책임을 짊어져야만 했던 오빠 역시 전쟁통의 서울에서 비참하게 말라 죽어가고 말았다. 이제 남은 건 어머니 홍기숙 여사뿐이었는데, 그녀로부터 박완서가 받은 영향은 심대하다. 박완서가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예외적인 어머니의 서울 입성에의 의지 덕분이었다. 소설가로서의 기질 역시 어렸을 적 경험한 이야기꾼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박완서는 자신과 어머니의 상호 모순적이고 다층적인 관계를 ‘말뚝’에 비유한 바 있는데, 이는 말뚝(엄마)의 새끼줄에 묶인 염소(박완서)가 그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가리키는 탁월한 메타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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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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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집에서 박완서와 어머니, 1979년, 사진제공: 호원숙

“제가 그때에 의식한 건 아니지만, 지금 소위 말하는 페미니즘, 지금도 이런 데 대해 이론적으로 잘 모릅니다만, 그런 꼬투리가 『나목』에도 있었어요. 오빠하고 저하고 있다가 오빠를 잃었는데, 많은 식구들 중에서도 공교롭게 잃은 사람이 다 남자였어요. 그럴 때 남자들이 다 죽고 여자들이 살아남은 데 대한 어떤 이상한 시선 같은 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고...... 사실은 그로 인한 여주인공의 일그러진 정신세계 같은 걸 쭉 끌고 나갔는데, 그것이 그 뿌리를 부재의 고고학

캐 올라가면, 자기애가 굉장히 강한 주인공이 자기하고 엄마하고 살아남았을 때 엄마가 자기가 살아남은 걸 보고 “집안이 바로 되려면 네가 죽고 오빠들이 살아남았어야 했는데” 하는, 그리고 이런 때의 어떤 전율 같은 것, 그리고 그것이 쭉 그 여자의 정신세계를 심하게 일그러뜨리면서 거기서 다시 본연의 자기를 찾기까지의 과정 같은 것이 제가 아주 굵은 줄거리로 깔아놓은 건데, 사실은 그것이 아주 주의 깊게 읽혀지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 『박완서의 말』, 마음산책, 2018, 79-80쪽.


문인사기획전 4

가족앨범

48 박완서 숙명여중입학후, 1944년

결혼전 돈암동 친정집 골목에서, 1953년

결혼식 기념사진, 1953년

충신동 집 앞에서 큰 딸 원숙과, 1954년

층신동집에서, 1950년대 충신동 집에서 시어머니와, 1950년대 중반


지금 여기 박완서

49 충신동 집 골목에서 시어머니와 큰 딸 원숙과, 1950년대

보문동 골목길에서 아이들, 1970년

삼선교 한성대 근처의 친정집 근처, 1960년대 초반

보문동 한옥에서 딸들과 찍은 사진, 1979년

부재의 고고학 보문동 집에서, 1979년

보문동 집에서 딸들과, 1979년


1953년 박완서는 PX에 근무할 당시 만났던 호영진과 결혼한다.

결혼식

서울 소공동의 아서원이라는 고급 중식당을 빌려 꽤나 공들여 한 결혼식이었다. 결혼사진뿐 아니라 영상으로 기록하여 당시의 결혼식 풍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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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아버지는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은 1953년이었고 그 당시 고급 중국요릿집인 소공동 아서원에서 결혼식을 올리셨는데 그날을 영사기로 찍어 남겨놓으셨다. 그 필름은 육십 년 가까이 간직하고만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MBC 스페셜> 팀이 와서 추모특집 촬영을 끝낸 후 필름을 꺼내 보이면서 복원을 할 수 있는지 간곡히 부탁을 했다. 고맙게도 소중하게 가져가 복원해주었고 CD로 구운 엄마의 결혼식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무성영화이지만 자막이 있는 소중한 자료였다.” -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달, 1995, 142-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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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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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고고학


문인사기획전 4

호원숙 인터뷰 촬영 및 편집 박동명 인터뷰 질문 구성 및 진행 신형은 영상 구성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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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감수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_ 36분25초_ 2018, 영상 설치 장면

신형은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依然) 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 박완서, 『나목』

1. ‘엄마’ 박완서 Q. 기억 속 ‘어머니’ 박완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A. 저는 어머니 작품을 보면서, 제 기억의 어머니와 작품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요. 왜냐면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작품 속의 엄마보다 더 아름답고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기억 속의 엄마의 모습들, 엄마가 걸어 다니시던 거, 또 하시는 말씀, 특히나 제가 유년 때 어머니가 하시던 글 쓰시기 전의 모습들이 있잖아요? 그 모습을 기억하려고 굉장히 애를 써요. 그리고 어떤 때 작품 속에서 어머니 모습의 단편들을 볼 때, 이건 더 섬세하게 표현을 하니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Q. 서울에 오셔서는 성북구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련한 기억을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A. 어머니가 처음에 결혼해서는 충신동에서 살았어요. 7년 내지 8년 정도를 산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국민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으니까요. 거기서 딸들을 다 낳았어요. 저와 동생은 집에 산파가 와서 낳았어요. 저는 동생이 산파가 와서 아기를 낳는 날까지 기억합니다. 바로 밑에 동생은 기억을 못 해도 셋째 동생은 기억을


지금 여기 박완서

해요. 그랬다가 애들이 크는데 방이 없어서 딸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보문동 집으로 이사를 온 거예요. 어머니로서는 굉장히 주장을 하셔서 그리로 옮긴 거예요. 왜냐면 우리 할머니나 아버지는 ‘문안’에서만 살기를 원했어요. ‘문안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문안을 떠나본 적이 없는 거예요. 문안에는 넓은 집이 없었죠. 다 작은 한옥이어서, 문안에서는 그런 집을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보문동이 그때는 신설동이었어요. ‘신설(新設)’이라는 것은 ‘새로 건설된 동네’라는 뜻이잖아요. 신설동으로 이사를 온 것이 어머니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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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혁신적인 일이에요. 할머니나 아버지는 서울 문안에서만 살았고, 아버지는 옥인동에서 태어난 아주 서울 사람이셨으니까요. 그 길로 조금 넓은 한옥으로 왔는데, 우리들이 방을 둘이서 하나 정도 쓸 수 있는 그런 집이었죠. 뜰도 있고. 어머니가 보문동 집에서 20년을 사셨고, 거기서 데뷔를 하셨죠. 61년인가 그리로 와서 70년에 데뷔를 하셨으니까, 거기서 작가로서 굉장히 치열한 생활을 하신 게 81년까지죠. 그리고 돈암동, 성북동, 그쪽이 어머니의 친정, 나의 외갓집이었죠. 삼선교, 돈암동, 그런 곳이 『그 남자네 집』을 보면 성북경찰서나 그런 배경이 나오죠. 굉장히 친숙한 공간이죠. 그 공간, 그 언저리 동네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많이 있죠. 정릉 쪽이나 수유리 같은. 우리는 어렸을 때 정릉이나 수유리 쪽으로 많이 놀러 갔어요. 옛날에는 한복을 입고 올라갔어요. 지금은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죠. 산을 올라가는데 솥을 가지고 가서 바위에 걸어 놓고 불을 때서 밥을 지을 때예요. 지금은 상상을 못 하죠. 그때는 버너나 코펠이 없으니 솥을 가지고 가는 시절도 있었어요. 어머니는 한복을 입고 산에 올라갔어요. 그래도 그런 피크닉 같은 것을 굉장히 앞서서 즐겼다고 할까요? Q. 어머니가 글을 쓰게 된 계기에 친정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부재의 고고학

A. 저희 외할머니는 『삼국지』, 『수호지』, 『옥루몽』 이런 고전들을 줄줄 외우시는 분이셨어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죠. 글씨 모르는 사람들 편지도 대필해주셨고, 지금으로 치면 굉장히 크셨어요. 그리고 예지력이 아주 앞서가셨죠. 그러니까 어머니도 외할머니를 굉장히 힘들어하셨어요. 외할머니의 눈높이를 따라가는 것을. 그러면서도 아주 가족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고요. 제가 기억하는 건 옛날에는 어려우니까 하숙을 치시고 그랬는데, 하숙생들이 전부 무릎 꿇고 와서 밥을 먹었어요. 하숙집 주인이


할머니라고 하대하고 그런 게 아니라, 도리어 무릎 꿇고 나와 밥을 먹던 기억...... 지금은 상상을 못하죠. 할머니의 그 당당함. 키도 크셨어요. 옷 태가 나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굉장히 유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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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 높으시니까. 서울대 학생들도 있고 그랬는데도, 하숙집

있으셨고요. 저는 할머니와 외갓집에 많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계속 애들을 낳으니까 거기 가있으라고 하면 할머니랑 많이 놀았죠. 화투놀이를 해도 할머니는 한 수 위에요. 나는 도저히 못 찾아내고, 어릴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할머니는 머리가 좋아서 나는 못 따라가는구나 하는. 심심하면 할머니랑 같이 게임, 놀이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아주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어릴 때는 어른들 옷 만들고 남은 천으로 솜저고리를 해서 보내주시고 그랬어요. 겨울 내내 입는 거예요. 그게 지금도 굉장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외할머니는 침선에 능숙하셨고, 친할머니는 침선은 잘 안 하셨는데, 음식 같은 것은 도리어 우리 할머니가 서울 특유의 음식을 굉장히 철저하게 하셨죠. Q. 작품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 ‘호영진’ 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A. 우리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머니 문학에 있어서, 물론 남편이니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만, 작품으로써 그렇게 중요한지는 제가 최근에 알았어요. 알았지만 자꾸 느끼게 돼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모습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처음 나목에서는 PX에서 만나는 사람의 모습으로서 아버지를 묘사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했잖아요. 그 사람과 결혼한 건 리얼한 거예요. 다른 것은 ‘픽션’이라도. 그래서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모습이 많은 단편에서 나오고, 또 장편은 『휘청거리는 오후』라던가, 물론 아버지와는 다르지만 그 초라한 모습이나 초라할 수 있는 모습 같은 것들, 그리고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도 물론 아버지는 그 소설과 다르지만 맨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인데, 아버지가 그리울 때 그런 책들을 펼쳐볼 때가 있어요. 약간의 픽션도 있지만, 거기서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많이 읽은 『자전거 도둑』 같은 것은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아버지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했던 일들, 장사들, 조그마한 공장들, 그런 데서 일어났던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작품 속에서 나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글을 한 번도 보시지 않았어요. 책은 안 보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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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신문은 보셨어요. 신문 연재하실 때의 어머니 소설을 보셨는지도 모르겠는데, 아마도 안 보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많이 변형을 시키며 이 시대를 표현하고, 이 시대를 살았던 여러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자전거 도둑』의 경우 아버지가 경험했던 것인데, 거기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만드실 수가 있을까. 저는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도덕이란 무엇인가, 가진 자가 무엇인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못 가진 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걸 보면 정말 감탄해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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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버지가 작품의 소스가 된 것이지요. 그 작품의 모티브를 어머니는 길어 올리신 거죠. 그리고 아버지는 엄마밖에는 모르셨죠. 모든 것이 자꾸 아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돼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그런 것들로 글을 쓸 수가 있었다라고 생각.

2. ‘작가’ 박완서 Q. ‘엄마’에서 ‘작가’로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셨는지요? A. 엄마가 작가가 됐다는 그 순간은 저희 집에 아주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어요. 외부에 노출이 안 된 ‘스위트 홈’에서 어머니가 작가가 됨으로써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 충격적이었죠. 그렇지만 그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나름대로 정신적으로 성숙했기에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던 때였거든요. 어머니가 작가가 된 그 순간은 충격이었지만 받아들이고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엄마와 우리 가족과 우리 집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한 설렘도 있었지만 아주 허전한 그런 것 있잖아요, 엄마가 떠난 것 같은. 엄마가 우리의 파라다이스를 떠난 것 같은 그런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이 있었어요. 부재의 고고학

Q. 어머니 ‘박완서’와 작가 ‘박완서’의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A. 어머니는 이미 작가였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면에서. 항상 책을 보셨고, 다른 엄마와 우리 엄마는 다르다고 생각했죠. 지식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제가 아주 어릴 때, 한글을 잘 모를 때도 『현대문학』 또는 『사상계』 그런 책들을 보고 계셨고, 모든 사물을 보는 눈도 다른 엄마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회상해보니 엄마였을 때도 엄마는 ‘작가’였다는 생각을 해요. 일기도 안 쓰셨는데,


살고 계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Q. 박완서 작가만의 글 쓰는 습관이나 방식 등에 대하여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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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쓰시지 않았을 뿐이지 머릿속에서는 항상 문학적인 궤도 속에서

싶습니다. A. 제가 저희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루틴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루틴이 없어 마음대로 하셨다는 건 아니지만요. 보통 소위 유명한 분들을 보면 나는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자고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항상 때에 따라서, 물론 아침에 일찍 일어나시고 했지만, 어머니가 어느 때에 밤에 가족들이 다 잠든 사이에 글을 쓰실 때도 있었고, 그걸 저는 보지도 못한 때가 있었고, 작은 상에서 엎드려서 쓰실 때도 있었어요. 처음 책상을 가지신 게 85년도에요. 저 책상이에요. 처음 책상이자 마지막 책상이에요. 그전에는 상에서 쓰시고 그랬어요. 그 이후에도 새 책상을 사시면 어떻겠느냐 해도 그냥 쓰시던 거를 쓰셨죠. 의자는 몇 번 바꾸기도 했지만. 그리고 글 쓰시는 시간 같은 건 자신의 컨디션에 맞췄어요. 주로 나이 들어서 혼자 계실 때는 오전에 많이 쓰신 것 같아요. 일찍 일어나셔서 오전에 쓰시고, 약속이 있다거나 그러면 외출하시고 그랬는데, 아주 쫓기어 쓰실 때도 있었죠. 연재소설 같은 것을 쓰실 때. 그럴 때는 밤을 새워 쓰시기도 했고, 잠을 못 주무셔서 힘들어 하실 때도 있었죠. 여기 아치울집에 와서는 주로 머릿속으로 쓰시는 것 같아요. 머릿속으로 쓰시다가 컴퓨터에 앉으셔서 집중해서 쓰시죠. 그리고 계속 또 수정하고 고치시고. 그런데 옛날에도 보면 파지를 많이 내시거나 그러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물론 파지는 나오지만. 그리고 컴퓨터를 쓰실 때 수정 많이 하시죠. 그렇지만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그 리듬이 항상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걸 나는 참 좋아했어요. 굉장히 딱딱하지 않았고, 만약에 글을 써야 하는데 가족에게 일이 생기면 거기에 맞춰서 할 수도 있고. 항상 유연했다는 것? 그런 것이 제가 느끼기에는 자신감인 것 같아요. 유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아주 작은 것도 틀리지 않으려고 사전 같은 것을 보며 항상 확인하시고, 사전에 없는 말이나 틀린 말이 아닐까 확인하시고 썼어요. Q. 박완서 작가는 각양각색의 출판사에서 다수의 작품을 발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연유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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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A. 그런 경우가 많았고요. 조그만 출판사나 시작하는 출판사도 있고, ‘창비’라던가 ‘문학과지성사’, ‘현대문학’, ‘문학동네’는 어머니가 거기 계간지나 월간지에 단편을 내고, 추후에 책으로 내는 경우였고, 그 문학 출판사에 대한 신뢰가 있으셨어요. ‘민음사’ 같은 경우는 『나목, 도둑맞은 가난』 같은 책은 굉장히 오래 전에 나왔는데, 아직도 나오고 있거든요. 하나하나 출판사마다 인연이 있었어요. ‘현대문학’은 어머니가 글 쓰시기 전부터 잡지에 대한 애정이 있으셨기 때문에 거기서도 책을 내시고, 마지막에 또 『못 가본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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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라는 아름다운 책도 내셨고요. 그런저런 인연으로 한 군데에 몰아내지 않으셨죠. 그래도 나중에는 정리를 해야 되겠다 생각하셔서 단편집은 ‘문학동네’, 장편은 ‘세계사’ 이렇게 내셨어요. ‘문학동네’는 시작할 때부터 젊은 문인들과 가깝게 지냈고, 단편 전집은 살아계실 때부터 냈고, 산문집은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절판된 산문집을 정리하는 의미로써 계속 내고 있고요. 그 하나하나에 다 인연이 있었어요. 그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작은 출판사나 큰 출판사나 좋은 관계를 맺으셨어요. ‘내가 아무리 좋은 글을 쓰면 뭐 하니? 누가 책을 내줘야지’, 또 ‘책을 내면 뭐 하니? 읽는 사람이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항상 있으셨어요. 출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항상 그런 비즈니스를 굉장히 좋게 하셨어요. 왜냐면 다 젊은 문인들 아니면 출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문학 쪽인 사람들이 많으니까. 가깝게 지내고, 신생 출판사를 키워주고, 그런 인연들이 있었죠. Q. 책을 엮으시던 과정에 대한 이야기,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책을 내실 때 저와 의논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서는 장편 전집은 제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서 완결을 시켰죠. 거기에는 전부 옛날 초판본의 서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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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서 넣었어요. 그러니까 그 전집은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역사가 들어가죠. 초판본, 그리고 중간 개정판이 있는 것은 개정판까지, 서문들을 다 집어넣거든요. 『노란집』 같은 경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출판 안 된 원고들, 발표는 했지만 출판 안 된 것들이 있었어요. 그것들을 모아 낸 건데 여기(아치울집) 사실 때 쓰신 글이에요. 그래서 제가 『노란집』이라는 제목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그래서 그 제목으로 하게 되었고. 외국에서 출판하는 것도 그쪽 번역자들이나 출판사들이 저하고


정말 거기 있었을까』 독일어 판을 내는데, 원제목을 바꾸고 싶어 하더라고요. 저는 원제목을 그냥 했으면 좋겠다 해서 몇 번 오가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원제목으로 하게 됐고, 표지도 박항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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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논을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아까도 보여드렸지만 『그 산이

표지로 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더니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독일어 판도 그렇게 나왔고. 콜롬비아 대학에서 나온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영어판은 제가 표지의 사진이 작품 이미지하고 안 맞다고 했는데도 그냥 그쪽에서는 이게 맞다고 해서 낸 경우도 있고, 다 다르죠. 그리고 이번에 나온 중국어판의 경우에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원제목대로 하지 않고 소동파의 시에서 딴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3. 지금, 여기, 박완서 Q. 요즘, 어느 때 ‘엄마’가 가장 많이 떠오르시나요? A. 가장 어머니를 떠올릴 때는 좋은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어서 알리고 싶을 때죠. 그리고 좋은 미술작품을 봤다던가, 재밌는 드라마를 봤다거나, 새로운 문학작품을 봤을 때처럼 새롭고 감동적인 것을 보았을 때도 그렇구요. 또, 굉장히 세상이 안 좋을 때 어머니는 이걸 어떻게 보실까 할 때도 있죠. 저의 어머니는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문학은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런 것을 다른 독자들도 느꼈으면 하고요. 저희 어머니는 항상 미래를 향해 있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또 창의적인 것에 대한 존중감, 그래서 독자들도 책을 읽으면서도 남들이 본 시선으로 보지 말고 창의적인 나의 시선으로 작품을 보았으면 한다고 제가 대신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여유, 어떠한 낮은 사람한테도 존중하는, 어떤 높다는 사람한테도 기죽지 않는 그런 당당함, 문학에서나 실제 생활에서나 항상 일치했던 어머니의 그런 태도, 정조,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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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스틸컷

부재의 고고학


전쟁통의 서울은 남성이 부재한 공간이었다. 남과 북의 이념이 극한적으로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남자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도 못했고, 그저 쥐죽은 듯 숨어 지내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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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의 여성들

했다.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생계 활동을 이어간 이들은 대개가 여성이었다. 박완서 문학 속에서도 당시 생계 전선의 끝자락에 내몰린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삯바느질, 품팔이, PX 근무, 좌판 장사, 그리고 기지촌 여성들을 상대로 한 보따리 장사 등 그 당시 여성들의 고생스러웠던 삶의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박완서의 PX 근무, 올케의 기지촌 보따리 장사, 어머니의 삯바느질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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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박완서의

초상화부는 그 앞에서 얼쩡거리는 미군을 적극적으로 꼬셔야만

PX 근무

비로소 한 건 올릴 수 있는 장사였다. 초보적인 외국어 실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마디도 못 하고 한 건도 못 올리고 온종일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은 자리만 지키면서, 화가들의 비난의 눈초리와 불평의 웅성거림을 견딘다는 것은 단 며칠도 할 짓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화가들의 노골적인 원성을 통해 나는 우리 식구 말고도 내 어깨에 이삼십 명의 식구가 더 실려 있다는 걸 실물의 무게처럼 절박하게 느끼곤 했다. 나는 일주일을 견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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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말문을 열게 됐다. 일단 말문이 열리자 수치심이 사라졌고, 수치심이 사라지자 이 군 식의 엉터리 영어가 술술술 잘도 나왔다. 굴복했다기보다는 무너진 것 같은 자포자기였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세계사, 2012, 265-268쪽.

동화백화점 PX, 1950년대, 출처 미상

부재의 고고학 PX 앞에서 박완서와 동료들, 1952년, 사진제공: 호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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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케의 기지촌 보따리 장사

62 1965년 경기도 동두천 미군 기지촌 앞 모습, 사진출처: 조선DB

올케는 동두천 쪽으로 보따리장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올케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여자가 이 바닥에서 돈을 벌려면 일선 장사만 한 게 없더라는 거였다. 기지촌의 양색시를 목표로 보따리장사 나가는 걸 올케는 일선 장사라고 했다. 일선 장사는 하루에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하룻밤, 길면 사나흘도 걸렸다. 그날도 올케는 사나흘 우리를 기다리게 해놓고 밤늦게 돌아와 돈을 세고 나서 밥상을 받았다. 숟갈질을 하던 올케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수챗구멍에 얼굴을 틀어박고 웩웩 토하기 시작했다. “너,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게야? 응? 설마 양놈한테 욕을 본 게 아니라면, 시장 바닥에서 어느 놈하고 눈이 맞았단 말이구나.” 엄마는 다리를 사시나무 떨듯 하더니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올케의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이글이글해졌다. 그러나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님, 제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가르쳐드릴까요? 제일 물건값 안 깎고 돈 잘 쓰는 게 입으로 검둥이 받는 양갈보라더군요. 입으로 사내를 받으면 애도 안 밸 테니 얼마나 좋아요. 그렇지만 같은 갈보끼리도 그것들은 사람으로도 안 치고 돌려놓나 봐요. 그것들끼리만 따로 모여 사는 동네가 있는데 이번엔 거기까지 들어갔지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구지요. 그것들도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그 짓 한 걸 우리는 바가지를 씌워서 벗겨먹었으니, 누구 짓이 더 더러운 짓인지는 아마 하느님도 헷갈리실 걸요. 그 바닥에서도 따돌림을 당해서 그런지 그것들은 보통 양갈보들보다 더 어수룩하고 인정도 있어요. 기껏 에누리 한 푼


지금 여기 박완서

안 하고 물건 팔아주고 나서도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우리를 붙들지 뭐에요. 같이 점심 먹자구요. 사람에 주려서 그랬는지, 부득부득 같이 먹자고 즈네들 비벼 처먹던 양푼에다 숟가락 꽂아놓고 조르지 뭐에요. 그것들 한 짓을 생각하면 욕지기가 나는 걸. 요다음 또 벗겨먹을 생각으로 억지로 같이 먹어주는 척했더니 아직까지 속이 느글거리는 거예요. 내 오장육부가 그것들 것보다 더 깨끗할 것도 아니면서 안 받네요. 그렇게 된 거예요. 이제 아셨어요? 아셔서 속 시원하세요?”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세계사, 2012, 249-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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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우리 어머니가 주입시켰던 거는, 딸까지 서울에 데리고 와서 남녀

삯바느질

차별도 심했던 세상에서 어머니가 원했던 거는, 그 마을에서도 독특했지만 그때로서는 서울 사람으로서도 독특했던 거 같아요. 그냥 시집 잘 가라는 게 아니라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어머니가 아마 바느질품 팔면서, 자기 바느질을 자기가 해 입던 그 옛날에 비단 옷을 삯바느질 시키는 사람은 대개 기생 같은 사람이었어요. 기생 바느질 한다 그랬죠. 얌전하게 바느질을 해서 기생한테 갖다 주면서 굴욕감도 많았을 거고, 여자가 벌어서 공부시키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 예술사 구술 총서 005 『박완서』, 수류산방, 2012, 47쪽.

부재의 고고학 박완서의 어머니, 사진제공: 호원숙


한국전쟁기 미군 PX 초상화부 근무

<나무와 여인>

시절 만나 교우한 박수근 화백은 박완서 문학의 원형이자 기원이다. 전쟁통의 암울했던 시기를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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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한 예술가의 초상을 어떡해서든 증언해내고픈 강한 의지가 박완서로 하여금 데뷔작 『나목』(1970)을 써내도록 이끌었다. 박완서 문학이 개인적 원한에 사무친 ‘복수(復讐)의 글쓰기’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망각된 시대와 인간을 복원하는 ‘증언의 글쓰기’로까지 나아가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어 주었다.

미군부대 px 초상화부 근무 당시의 박수근(왼쪽에서 3번째), 사진제공: 박수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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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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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나무와 여인, 1956, 46x37cm, 옵셋판화, 소장: 박수근미술관

박수근 화백이 그린 겨울나무들은 벌거벗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늠름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그러나 혼자 서 있는 나무는 거의 없다. 그 곁엔 늘 여인들이 있다. 여인들은 머리에 뭘 이고 어디론지 총총히 가고 있지 않으면 아이를 업고 있다. 남자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나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아 곤궁하고 암울한, 희망 없는 시대였다. 그래도 여자들은 희망을 부재의 고고학

잃지 않았다. 날품팔이라도 해서 열심히 식구들 먹을 것을 날랐다. 겨울나무들 곁을 지나가는 여인들의 걸음걸이는 그래서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결코 궁상맞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비록 헐벗었지만 열심히 봄을 준비하고 있는 나무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무 곁에 여인들이 없었어도 그 이파리 하나 없는 나무가 그렇게 살아 있는 나무로 보일 수 있었을까. 나무와 여인은 똑같이 봄이 멀지 않다는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서로 그렇게 조화롭다. -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 소중한 것」, 『노란집』, 열림원, 2013, 263-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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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박한 개인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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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칭했지만 ‘내가 중하니까 남도 중한 거지’라고 덧붙일 만큼 공정한 태도로 일관되어 온 박완서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소박한 진실을 그만의 편안한 말로 풀어낸 점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 속에 있다. ‘소박한 개인주의자’ 박완서의 공정함과 굳은 심지는 제2차 세계대전, 가난, 해방, 6.25 등을 겪으며 마치 500년은 산 것 같다는 그의 엄청난 체험 부피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어둠 속에서도 개인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었던 힘은 냉철한 자기대면과 모든 종류의 억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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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한 데 있으며, 이는 가부장제에 근거한 ‘미풍양속’과 ‘출가외인’의 개념, ‘자본주의와 중산층의 허위’를 꼬집은 작품들 속에서도 고스란히 녹아난다. 이 공간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거부감과 이론이 아닌 삶의 체험들 속에서 자연스레 발현된 문제의식들을 보여 준다.


1980년대는 박완서의 여성주의 시대라 칭할 만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 『서 있는 여자』(1985), 그리고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로 이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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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양속, 출가외인, 신여성

소위 ‘여성주의 3부작’이 이 시기에 발표됐다. ‘부덕’(婦德), ‘미풍양속’ 그리고 ‘출가외인’이라는 기울어진 말을 통해 기혼 여성이 감내해야만 했던 남성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야말로 이 시기 박완서가 정조준한 비판 대상이었다. 이것은 공부를 많이 해서 ‘신여성’이 되어야 한다던 어머니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머니의 ‘신여성 되기’ 프로젝트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딸 박완서가 학교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는 지향점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미풍양속

언젠가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애독자라는 분이 방문해온 일이 있다. 청년이었다. 청년은 내 이름을 대면서 만나러 왔다고 하기에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애독자라고만 했다. 청년은 침이 마르도록 나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청년의 찬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여성의 본분인 한국적 부덕(婦德)을 지키며 사는 태도에 놀랐다는 거였다. 나는 유치하리만큼 남의 칭찬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청년의 찬사에는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나는 청년이 말하는 소위 한국적인 부덕이라는 것에 넌더리를 내면서 사는 사람에 속한다. 청년은 앞으로 쓸 작품 계획 같은 걸 물어보면서, 대작(大作)을 기대한다고 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긴 있는데 그건 여성해방운동이라고 대답했다. 즉흥적으로 그런 기발한 대답을 하고 만 것은 소위 부덕에 대한 넌더리 콤플렉스, 이런 것의 발로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후 나는 가끔 “내가 앞으로 참으로 하고 싶은 건 여성해방운동이에요”라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게 됐다. - 「자유인에 대하여」,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 문학동네, 2015, 96-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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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어 사전> 설치 장면

* 박완서 소설어 사전 한국어의 보고라 평가받고 있는 박완서의 소설 속에는 현재의 관점에서 생소한 어휘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한국문학 연구자 민충환은 박완서와 “능소화가 3번 피고 지는 동안”에 걸친 긴밀한 협업을 통해 『박완서 소설어 사전』(2003)을 펴낸다. 이 과정에서 박완서는 민충환과 교류하며 다수의 친필 메모를 남기게 되는데, 그 흔적의 일부를 전시에 공개하였다. 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 ‘미풍양속’에 대한

소박한 개인주의자

개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름답고 좋은 풍속이나 기풍’으로 동일하나, 예로 든 소설 문장이 기존 미풍양속의 개념을 꼬집고 있어 박완서의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일요일 아침이라 마냥 늑장을 부려가며 아침상을 차렸는데도 어머니는 TV 앞을 안 떠나시고 드라마에 열중하고 계셨다. <해 뜨는 언덕>이라는 농촌 드라마였다. 문중에서 칭송이 자자한 종부가 친정 동생이 교통사고로 위독하단 소리를 듣고도 남편이나

문인사기획전 4

출가외인

시댁 어른들한테 알리지 않고 그냥 여름휴가 겸 다녀오는 친정 나들이를 가장한다는 얘기였다. 어머니는 첫아이를 배셨을 때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부모님이 태중의 아이에게 해롭다고 친정에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눈물은 당신의 한이 이 어지럽게 발전한 현대에도 충분히 공감의 여지가 있다는 걸 확인한 감격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내가 눈시울을 붉힌 건 어쩌면 그런 어머니가 딱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인 혈연에의 애정이나 의무까지를 극단적으로 억제하고 남편 쪽의 사돈의 팔촌에까지 공경과 의무를 다하는 위선을 부덕(婦德)으로 미화할 것인가. - 「출가외인」,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문학동네, 2015, 233-236쪽.

충신동 집에서 시어머니와, 1950년대 중반, 사진제공: 호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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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신여성

천자문을 떼고 책걸이로 떡까지 해먹은 지 며칠 안 되어서 서울 가신 어머니가 처음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나까지 서울로 데려다 공부를 시키겠다는 것이었고 어른들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이 처음엔 숫제 상대도 안 하려들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것 같지 않다는 걸 차츰 깨닫기 시작한 어른들은 막말로 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어느 날 어머니와 나는 할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가 세 들어 살고 있는 현저동 꼭대기의 허술한 초가집 문간방은 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어머니는 그 문간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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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품을 팔면서 근근이 살고 계셨다. “넌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공부 많이 해서 신여성이 돼야 한다. 그게 엄마의 소원이란다.” “신여성이 뭔데?” “신여성은 머리를 쪽지지 않고 히사시까미하고, 치마는 짧은 통치마로 입고, 버선 대신 살색 비단 양말 신고, 고무신 대신 뾰족구두 신고, 한도바꾸 들고 다닌단다.” “신여성이란 또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 이치에 대해 남자들처럼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 신여성, 신여성 그저 말끝마다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때 겨우 여덟 살밖에 안 된 내가 그 신여성 속에 농축된 한 많은 구식 여자의 꿈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 문학동네, 2015, 98-102쪽.

소박한 개인주의자 박완서 숙명여중 입학 후, 1944년, 사진제공: 호원숙


박완서는 스스로 인정하기도 하였던 바 ‘중산층 작가’였다. 이는 때로 비판받는 지점이 되기도 했는데, 박완서가 중산층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문인사기획전 4

자본주의와 중산층

하지만 박완서만큼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그려내는 데 있어 정교하고 치밀한 태도를 끝까지 견지한 작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휘청거리는 오후』(1977)와 같은 작품들에서 박완서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급속도로 형성된 한국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이후 박완서는 『미망』(1990)에서 천민자본주의와 차별화된 “좋은 의미의 자본주의”를 그려내고픈 욕망에 가닿게 되는데, 이에 대한 현실적 근거로 그가 주목한 대상이 바로 고향 개성의 상인들과 그들의 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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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박완서가 꿈꾼

제가 중산층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에는 언제나

‘좋은’ 자본주의

승복합니다. 그렇지만 저소득층 여성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실감으로 와닿지가 않아요. 그래서 현장 취재도 해보았지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취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작품이 잘 안 써져요. 그러나 제가 중산층적 한계를 지녔다고 사람들이 매도할 때는 좀 듣기 싫어요. 가장 잘 아는 것밖에 쓸 수 없는 것이고, 제게 있어서 소설이란 뭔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저리고 아프면서 끓어오를 때 써지니 참 곤란하고 어렵네요. 저는 자신이 골수 중산층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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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전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데에 나름대로 적극적이지요. 이렇게 자인도 하고 변명도 합니다만, 저의 작업 또한 그 위치에서 얼마간의 의의가 있다고 봐주세요. 저는 중산층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저 계층이라고 봐요. 다만 이런 말을 하는 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중산층의 허위의식, 안이한 태도, 속물근성, 기회주의적 속성 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저는 노동자들이 노동쟁의를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중산층으로 올라서려는 몸부림이고, 우리 어머니들이 밀어 올리려고 목표한 것도 중산층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중산층적 삶이 어떻게 확립되어야 하는가가 아주 중요하다고 봐요. - 『박완서의 말』, 마음산책, 2018, 66-67쪽.

『미망』에서 저는 좋은 의미의 자본주의에 대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돈에도 인격이 있다는 것, 돈을 버는 데 피땀을 흘렸기 때문에 천격스럽게는 쓰지 않는다는 태도 같은 것 말이죠. 우리 근대 자본주의의 선구자들이라 할 개성상인들의 나름의 풍속과 자부심 같은 걸 그리고 싶었습니다. -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달, 2016, 84쪽.

소박한 개인주의자


박완서와

박완서의 생애 주기별 거주 공간을 되짚어 나가다 보면 한국 중산층의

중산층: 거주

일반적인 이동 경로와 겹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 현저동

공간의 이동

판잣집의 쪽방에 가난하게 세 들어 살고 있던 박완서 일가는 어머니의 강렬한 ‘문안 의식’에 따라 사대문 안팎을 오간다. 1953년 종전이 되던 해 박완서는 결혼을 통해 분가해 나가고, 197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은 본격적인 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산업화 과정 속에서 서울의 영토가 점점 확장됨에 따라 문안과 문밖의 구별 의식은 옛말이 되어 간다. 이 시기 박완서는 사대문 밖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거친 뒤 마지막으로 고향인 박적골의 정경을 빼닮은 구리시 아치울 전원주택지에 정착한다.


오르다가 다시 첫 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리막길을 만나고

그 중간에 비켜선 층층대 위의 초가집

앞에서 엄마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 동네서도 초가집은 드물었다. 그

집이나마 우리 집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여기가

서울이야?” 나의 항의 섞인 물음에 엄마는

뜻밖에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여기는

서울의 문밖이란다. 느이 오래비가 이담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면 우리도 그때 가선

버젓이 문안에서 살아보자꾸나.” 엄마가

이렇게 좋은 말로 달랬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수 있는 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때부터 대처로의 출분을 꿈꿨다. 마침

오빠의 소학교 졸업을 기화로 그 꿈은

구체화됐다. 엄마는 아버지의 삼년상도

받들기 전에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맏며느리로서 시부모 공양하고 봉제사라는

신성한 의무를 포기하는 대신 엄마는

아무런 재산상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엄마는 나까지 대처로

데려가기 위해 나타났다. “너도 서울 가서

학교 가야 돼. 학교 나와서 신여성이 돼야

해. 알았지?”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2012[1980], 21-34쪽.

- 「엄마의 말뚝 1」, 『엄마의 말뚝』, 세계사,

2012[1992], 191-194쪽.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목욕탕까지 있는 집이었다.

같은 기와집이었다. 그때로서는 드물게

새로 지은 반들반들하고도 반듯한 고래등

사람이 된 것이었다. 지대만 좋을 뿐 아니라

집을 샀다. 엄마가 그렇게도 소원하던 문안

집값이 비싸다는 광화문 근처 신문로에다

보태준 돈을 합해 당시에도 서울서 가장

우리는 개성 집 판 돈에다 작은 숙부가

신문로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더 꼬불대며

생손앓이처럼 쉽게 째고 도려내고 꿰맬

2012[1992], 50-52쪽.

계속됐다. 사람들이 겨우 비비고 지날 만한

여자란다.”

허위단심 꼭대기까지 올랐는데도 동네는

양의사에게만 보일 수 있었으면

현저동

엄마는 아버지를 죽게 한 병이 대처의

박적골

2015[1980], 61-62쪽.

- 「엄마의 말뚝 1」, 『엄마의 말뚝』, 세계사,

매동학교였다.

사직동에 있었고 내가 가야 할 학교는

기류계는 그 댁으로 옮겨졌다. 그 댁은

그런 친척을 기어코 찾아내고 말았고 내

댁을 수소문해 나서기 시작했다. 엄마는

건 금지돼 있었다. 엄마가 여기저기로 친척

있어서 함부로 타동네 학교를 지원하는

들어가는 시절이었지만, 학구제라는 게

우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도 시험 쳐야

문안에 있는 초등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학교를 갑자기 타박하면서 나를 꼭

가게 돼 있는 무악재고개 너머에 있는

말았다. 엄마는 그 동네 아이들이 다

소학교 보내는 일에 큰 변경을 가져오고

절절해졌다. 그 절절한 소망은 불시에 나를

동네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은 한층

감옥소가 있는 문밖 동네에서 문안

사직동

준다. 2003, 45-46쪽.

- 「옛날」, 『두부』, 창작과비평사,

푹 자고 난 것처럼 깊은 평화와 안도감을

숲은 고달픈 타향살이에서 마침내 돌아와

고향 동네와 너무도 닮은 야트막한 밤나무

때마다 지척에 바라다보이는, 내 어릴적

섭섭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침에 눈뜰

벗어나 경기도 사람이 됐다는 게 문득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서울을

나에게 스며든 엄마의 단단한 손힘이

말리는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었던 못

하나로 당시의 관습이나 남의 이목을

자식들을 서울에다 말뚝 박게 하려는 일념

서울로 왔으니 60년 만이었다. 오직

실감했다. 여덟 살에 경기도 촌구석에서

옮기면서 비로소 경기도 사람이 된 걸

이사 오고 며칠 있다가 주민등록증을

구리시 아치울


문인사기획전 4

· 사늘한 낮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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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우리가 익히 아는 박완서의 틀을 더 확장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가치를 찾아내는 장이다. 박완서에게 노년은 종합과 완성의 시기가 될 수 없는데, 낭만적 회고나 감상주의로 빠져들지도, 참혹했던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꿈꾸기는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는 밤꿈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낮꿈이다. 그의 꿈꾸기는 그래서 ‘사늘’하다. 서늘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꿈꾸기이다. 작고 1년 전의 강연 영상과 1931부터 2011년까지를 모두 담은 구술총서 등 회고적 성격의 자료가 박완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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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트랙 같은 동화와 한 쌍을 이루며 이 공간에 구성될 수 있는 이유다. 동화쓰기는 1970년 『나목』 이후 늘 떠밀려 원고를 쓰던 순간마다 다짐하던 그의 숙원사업이기도 했다. 꿈을 꾸고 그것을 이뤄 나간다는 것은 인생의 어느 때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박완서는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박완서는 1970년 등단한 이후 7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동화를 써낸다. 특기할 만한 점은 청탁에 의한 발표가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쓰고 싶어서 쓴 작품들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문인사기획전 4

박완서와 동화

대해 박완서는 그것이 “7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와 관련이 있으며 “소설로는 못 풀어낼 답답한 심정을 동화라는 형식에 의탁하고자 했을 것”이라 고백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현재 박완서 동화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박완서의 동화 중 『7년 동안의 잠』은 7년여 동안 잠들어 있던 매미 애벌레를 발견하고 온갖 갈등과 고민 속에서도 그 애벌레를 지켜내는 개미들의 이야기를 그린 대표적인 그림동화로, 2015년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다국어판(베트남어, 중국어, 캄보디아어, 영어)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박완서와 동화> 설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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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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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동안의 잠』 중국어판, 베트남어판, 캄보디아어판, 한국어판 (좌부터)

사늘한 낮꿈


박완서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건축,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 5인과 진행한 인터뷰로, 각자의 기억 속 박완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완서와 만난

문인사기획전 4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직접적인 경험부터 그의 문학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그리고 각자가 아끼는 박완서의 작품들을 직접 낭독하는 등의 입체적인 인터뷰를 통해 박완서를 다각도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_ 싱글 채널 비디오(5편)_ 49분30초_ 2018, 영상 설치 장면

인터뷰 대상자

촬영 및 편집 박동명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심윤경 │ 소설가 이근혜 │ 문학과지성사 주간

인터뷰 질문 구성 및 진행 김호진

이지민 │ 동네마당 뜰안 센터장

영상 구성협력·자막·감수

이하린 │ 건국대학교 리빙디자인과 교수

신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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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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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수 편>>_ 6분12초_ 2018, 스틸컷

Q. 간단한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생들과 공부하는 박철수라고 합니다. 서울 태생이고요. 주로 학생들과 공부하는 내용은 서울의 주거 문화사, 서울의 공간 변화 역사, 이런 것들을 주로 주목해서 학생들과 공부하고 있습니다. Q. 어떻게 박완서를 접하고 좋아하게 되었는지요? A. 사실 딱히 박완서 선생님을 좋아했다기보다는 한국의 많은 작가들에 대해서 적절한 관심을 갖고 있고요. 다만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 특별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박완서 선생님 작품에 늘 등장하는 서울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서울에 대한 모습을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개성 박적골에서 서울로 들어오셨다가 말년에 아치울 마을에서 돌아가시게 되는 궤적을 찾아가면, 소위 제가 공부하는 서울 주거사의 여러 풍경들을 복원할 수 있어요. 한 4-5년쯤 전인가요? 대학원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박완서 선생님의 전작 읽기를 했습니다. 그 덕분에 박완서 선생님의 여러 가지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늘한 낮꿈

Q. 박완서 선생님이 그리고 있는 ‘서울’은 어떤가요? A. 특별히 박완서 선생님은 서울 중산층의 살아가는 풍경을 아주 깨알같이 묘사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완서 선생님 스스로는 자신이 내는 모든 작품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문학적 묘사와 치레가 붙은 서술보다도 날 것 있는 그대로의 풍경 묘사에 다른 작가와는 다른 시선을 가지셨기 때문에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이 제가 공부하는데 특별히 유용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A.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단에서의 선생님의 작품 평가와 제 의견은 약간 다를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모습 혹은 풍경이라고 하는 묘사가 제게 늘 와닿는 것이어서 제가 고른 소설은 박완서 선생님이 발표하신

문인사기획전 4

Q. 소개하고 싶은 박완서 선생님의 책 또는 구절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가(家)』라는 소설인데요, 집가자의 가입니다. 이것은 주로 질곡의 서울 근현대사 혹은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소위 어머니들의 어떤 생명력,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땅, 부동산이 어떻게 삶을 지탱했는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어서, 제가 한 쪽만 낭송하겠습니다. “집이야말로 교하 댁에겐 황금알을 낳은 거위였다. 그때만 해도 집을 사고팔 때 기와집인가 초가집인가 양기와집인가, 굴도리인가 납도리인가, 서까래 굵기가 애 종아리만한가 장정 종아리만한가에 따라 건평의 평당 가격이 매겨질 때였다. 대지 평수는 집값에 별로 큰 영향을 못 주었고 특히 땅값이 헐한 청량리 밖은 그게 더했다. 교하댁이 산 천 원짜리 집도 대지는 백 평이나 되어서 푸성귀는 실컷 심어 먹을 수가 있었다. 일제가 말기로 접어들면서 식량난이 심해지자 부지런한 교하 댁은 그 땅을 충분히 이용했을 뿐 아니라 집도 몇 칸을 더 늘려 지었다. 폭격의 위험을 피해 도심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그쪽 셋방이 동이 날 때였다. 남편 조 씨가 징용을 당해 나가고도 굶어 죽지 않고 너끈히 남매를 중학교까지 보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집 덕이었다. 마당에 물맛 좋은 우물까지 있어 아침저녁 정갈한 소반에 정화수 떠놓고 서방님 살려만 달라고 빈 덕에 해방되던 해 겨울에 징용 나간 조 씨가 성한 몸으로 돌아왔다. 비록 어디가 부러지거나 못쓰게 되진 않았지만 쉰이 아직 멀었는데 머리는 반 넘어 세고 허리는 굽고 눈은 어두워져 전체적으로 그림자처럼 넋 나간 등신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들어앉혀 놓고도 편안히 봉양할 수 있었던 것도 집 덕이 컸다.” - 『가(家)』 中 Q. 박완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A. 사람들마다 작가의 작품을 읽거나 작가를 선별하는 취향이 다르겠지요. 그런데 적어도 우리가 기억 못 하는 오래전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복기할 수 있는 것은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이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살아오셨던 삶의 공간,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렵게 견디신 시절을 자식들이 다시 한번 회고하고 그 풍경을 연상하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만 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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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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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편>>_ 12분9초_ 2018, 스틸컷

Q.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심윤경이고, 72년생이고,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사랑이 달리다』, 『사랑이 채우다』 등을 썼습니다. Q. 어떻게 박완서를 접하고 좋아하게 되었는지요? A. 첫 시작은 독자로서였죠. 아주 어리고 미숙한 독자로서였습니다. 저희 집이 책이 많은 환경이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책을 좋아하셔서요. 그 많은 책들 중에 실제로 어머니가 손에 들고 있는 모습, 킬킬거리면서 읽으시는 모습, 그리고 사가지고 와서 굉장히 뿌듯해하시면서 접하시던 모습을 본 책은 박완서 선생님의 책들이었고, 그런 모습들이 조숙한 꼬마였던 저에게 저게 뭐길래 엄마에게 저렇게 재미있을까?, 어른 책인데 내가 봐도 되나? 그런 생각으로 조금씩 읽었는데, 거대한 동경으로 남았어요. 이런 이야기를 쓰시는 분이 있구나, 우리가 살면서 보는 풍경들이 이렇게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책 속의 장면으로 아로새겨지는구나, 그런 놀라움? 동경으로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됐고요. 사람 박완서를 보게 된 것은 당연히 등단한 이후였습니다. 저는 되게 낯을 가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제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 사늘한 낮꿈

작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생기는데 굉장히 힘들었던 편에 속해요. 제가 등단하고 소설가로 활동하면서도 내가 소설가가 맞나? 왜 소설가지? 왜 이렇게 힘들지? 특히나 문학 행사나 독자들을 만나는 것, 동료 문인들을 만나는 것에서 굉장히 알 수 없는 부대낌을 많이 느꼈었는데...... 박완서 선생님을 만난 날, 내가 작가구나, 이분을 만나서 인사드리고 ‘윤경아, 윤경아’하는 말씀을 듣고, 이분 댁에 초대받아서 세배를 드리고 하면서 ‘내가 작가구나’하고 와닿는 감격과 정체성을 주시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기억은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바라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A. 제가 아는 박완서 선생님은 그런 걸 정말 표를 안 내는 분이세요. 그분이 연배가 높으시기도 하고 제 어머니보다 연배가 높으신 할머니뻘이라고 해도 괜찮은 분이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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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박완서 선생님이 심윤경 작가님을 애정 어린 눈으로 많이

저는 언제나 그분 앞에서 어려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었거든요. 절절매고. 그런데 그렇게 조용히 있으면 선생님은 친절하게 ‘윤경아, 네 소설 잘 읽었다’라고 격려를 해주실 법도 한데, 한 번도 안 하셨어요. 정말 호원숙 선생님이나 다른 분들께서 ‘네 작품을 좋아하신다, 아끼신다, 기대를 걸고 계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을 때마다 ‘진짠가? 맞나?’ 생각했어요. 실제로 뵈면 제가 굉장히 어려워했고요. 제가 지금 되게 후회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선생님이 지금 계신다면 그렇게 안 할 텐데. 선생님에게 더 안겨들고 친밀한 손녀처럼 굴 수 있을 텐데. ‘선생님 제가 이런 걸 좋아했고요. 이런 건 어떻게 하나요?’ 하면서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늘 얼어 있었던 생각밖에 안 나요. 한데 딱 한 번 선생님 댁에 가서 방에 수많은 책들이 있는데 그중에 제 책이 보이더라고요. 선생님께서 제 책을 아끼고 사랑하셨다면 보통은 『달의 제단』을 이야기하셨는데, 그 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을 하신 적이 없었고, 그 책꽂이에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꽂혀있더라고요. 그것도 제가 생각하기에 선생님의 일상과 굉장히 가깝게 느껴지는 자리에서. ‘선생님! 이 책 읽으셨어요?’ 그랬더니 ‘그럼 여러 번 봤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쿵 하고 나와 내 작품을 아끼시는구나 그렇게 직접 느꼈었습니다. Q. 박완서 선생님 작품 중 소개하고 싶은 책과 좋아하는 구절을 들려주세요. A. 박완서 선생님의 책들에는 굉장히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언제나 저에게 가장 강력하게 처음과 똑같은 충격으로 다가오는 책은 『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세 권입니다. 선생님의 실제 삶이 날 것으로 많이 드러난 작품들, 그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굉장히 경탄해요. 『엄마의 말뚝』은 좀 더 소설화, 예술화한 쪽이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좀 더 사실에 치중한 기록일 텐데, 양쪽이 똑같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예술화를 거치면 좀 더 화려해지고 튀던가, 이쪽이 아름답다면 담담하게 서술한 쪽은 밋밋하거나 평이 할 수 있는데, 그 양쪽 색은 다르지만 똑같은 무게로 사람을 친다는 것에 늘 경이를 느끼고요. 저에게 언제나 굉장히 좋은 공부가 되어줍니다. 삶을 작품으로 옮긴다는 것에 대해서요. 그리고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부분을 찾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그 순간부터 찾는 게 아니라 그냥 다시 빠져들어 읽게 만드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찾고 있었다는 목적을 잊고 다시 빠져드는, 여러 번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하면서 읽게 만드는 그 박완서 선생님의 한결같은 힘을 이번에도 또 느꼈어요. 제가 고른 부분은 박완서 선생님이 전쟁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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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좌우의 극한 대립 속에서 양쪽 모두에게서 의심과 추궁을 당하면서 이념에 대해서 넌더리를 내는 젊은 박완서의 악다구니가 있는 그 부분입니다. 악다구니하면서도 슬픔에 빠져있는 그분의 성격이 참 잘 보이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우리 집안은 빨갱이다. 우리 둘째 작은 아버지도 빨갱이로 몰려 사형까지 당했다. 국민들을 인민군 치하에다 팽개쳐 두고 즈네들만 도망갔다 와 가지고 인민군 밥해준 것도 죄라고 사형시키는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죽여라, 죽여. 작은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소주를 과 멱였으니 죽어 싸지. 재강(술찌꺼기) 얻어먹고 취해서 죽은 딸년의 술 냄새가 땅속에서 아직 가시지도 않았을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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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지리도 못난 족속이다. 이래 죽이고 저래 죽이고 여기서 빼가고 저기서 빼가고, 양쪽에서 쓸 만한 인재는 체질하고 키질해서 죽이지 않으면 데려가고 지금 서울엔 쭉정이밖에 더 남았냐? 그래도 뭐가 부족해 또 체질이냐? 그까짓 쭉정이들 한꺼번에 불 싸질러버리고 말지." 대강 이런 소리를 입에 거품을 물고 퍼부어댔다. 사설은 무한히 목 받치는데. 시간과 목청은 모자라 눈앞이 아득하면서 현기증이 왔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고 내가 한 말 중 가장 가슴을 저미는듯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中 Q. 박완서의 팬분들 또는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신가요? A. 제 아이가 ‘엄마, 나 이번 방학에 뭐 읽을까?’ 했을 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책을 권했습니다. 한 사람이 작품으로 이렇게 정밀한 기억력과 표현력, 그리고 작가의 시선을 풀가동해서 인생을 건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경이로운 일입니다. 후배이자 독자가 할 일은 그 작품을 잊지 않고 그분을 잊지 않고 늘 손에 두는 것, 우리 아래 세대에게까지 그분의 작품을 읽도록 권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주신 많은 것들이 있는데, 하나하나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제가 선생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인 것 같습니다. 언제든지 제 책꽂이 가장 가까운 곳에 선생님의 책이 있는 것, 생각날 때 그분의 책을 펴두는 것, 그분이 그렇게 그런 형태로 제 곁에 늘 있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 박완서 선생님과의 인연에 관한 덧붙임 제가 사직동에 살아요. 경복궁역 근처에 있는. 그리고 제 딸이 매동초등학교를 나왔어요. 그 당시에 제 딸이 매동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 무렵에 선생님이 저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어요. 딱 한 번 오셨는데. 그날 제가 정말 기쁨과 환대에 넘쳤어요. 선생님을 저희 집에 모시게 된 게 너무 기쁘고 또 제 딸의 하늘같은 선배님이시기도 하다는 게 개인적으로 너무 북받쳐서, ‘선생님, 이 아이가 제 딸이고 선생님 후배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의 그때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어요. 제가 생각했던 ‘오, 그렇구나. 네가 내 후배구나’가 아니라 정말 슬픈 표정이었어요. 그때야 이곳이 선생님께 굉장히 슬픈 곳이구나 하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어요. 그리고 제 마음으로는 날씨가 좋으니 식사를 같이하고 옛날에 다니셨던 매동초등학교에 같이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오늘 뭘 그렇게까지 하니, 그냥 여기 있다가 가자’ 하고 식사 잘 하시고 가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말씀 들으니까 혼자서 그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에서 현저동 골목으로 내가 올라갔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표정이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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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혜

문학과지성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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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혜 편>>_ 12분9초_ 2018, 스틸컷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올해 창사 43주년을 맞은 문학과지성사에서 2000년 5월에 편집자로 입사했다가 편집장을 거쳐 현재 주간지를 맡아 일하고 있는 이근혜라고 합니다. 문학 인문 출판사의 주간이 대개 그러하듯이 저자분들, 작가분들, 역자분들의 원고를 마무리하고 말씀을 청해 듣고 하는 일들이 거의 대부분인지라, 교정지로 저자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해야 할까요, 독자분들보다 조금 먼저. 그런 일들로 15년~18년 남짓 편집자 생활을 오래 해왔습니다. Q. 박완서를 어떻게 접하고 좋아하게 되었는지요? A. 제가 2000년부터 편집자로 입사해서 쭉 여러 책들, 여러 작가들을 뵈어왔는데, 2007년 문지에서 선생님 10번째 소설집이 되는 『친절한 복희씨』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어요. 책임 편집자로 선생님 책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해 여름부터 책이 나온 10월까지 구리에 있는 아치울 댁을 서교동 출판사와 오가면서 책을 준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Q. 『친절한 복희씨』를 준비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A. 단편적으로 많은 편인데요. 선생님 책이 나오기 전 출판사에서 책을 묶어내면서, 박완서 선생님이라는 너무 내로라하는 작가분의 책을 출간하는 것이고, 선생님으로서는 9년 만에 내는 신작 소설집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를 정하는데, 가장 먼저 후보로는 ‘대범한 밥상’이라는 단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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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였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왠지 이 제목으로 가면 책이 한국문학 소설 코너가 아니라 요리, 수필 에세이 코너에 꽂힐 것 같다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건네시기도 했고. 꼭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패러디해서만이 아니라 ‘친절한 복희씨’ 라는 제목이 선생님께서 이 책 단편 단편에 하고 싶으셨던 당신의 속내랄까? 유머랄까? 혹은 좀 찡한 삶 냄새? 이런 것들을 편안하게 담은 제목이 아닐까 싶어서 ‘친절한 복희씨’로 결정해서 책을 냈어요. 실제로 책이 나온 직후에 언론사 기자분들도 그렇고 독자분들이나 서점의 MD 분들, 도서관 사서 분들께서 ‘친절한 복희씨’라는 제목을 이야기하시는 게 분명한데, ‘행복한 복희씨’, ‘친절한 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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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목을 헷갈려 하시면서 문의를 하시는 거예요. 그 때마다 저희들끼리 이런 것도 재밌다, 종이책을 만들어내면서 편집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 중에 하나가 아닌가? 했어요. 실제로도 나중에 선생님 관련 인터뷰 기사를 검색해보니까 기자분들도 보도자료에 나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복희씨’라는 표제로 이 책을 많이 언급하셨던 게 기억나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선생님 책이 나오고 나서 평화방송에서 저자분을 모시고 한 시간짜리 라디오 방송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 책이 나올 때가 선생님이 희수, 77세셨으니까, 밤 녹음을 부담스러워하셔서 담당 편집자인 제가 대신 나가게 되었는데요. 성함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함께 패널로 참여하셨던 한 국악인이 계셨는데, 그분과 진행하시는 분과 제가 책 후일담, 감상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국악인 개인의 경험과 박완서 선생님 책 속의 어떤 인물 이야기가 교차되는 부분이 커서 방송 중에 약간 오열을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게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녹음을 하는 방송이었는데, 한동안 두고두고 그분의 오열하던 장면들이 잔상처럼 오래 남았던 기억이 있어요. 나중에 박완서 선생님께 그 말씀을 전해드렸더니 희미하게 웃으시더라고요. Q. 소개하고 싶으신 박완서 선생님의 책과 좋아하는 구절을 알려주세요. A. 아무래도 선생님 책은 너무 많아, 소설만도 20권이 넘고 산문으로도 많은 독자분이 친숙하실 텐데, 저는 담당 편집자로서 『친절한 복희씨』에 더 많은 애착이 가는 편이고요, 이 중에서도 「후남아, 밥먹어라」라는 단편이 있어요. 그 단편은 특히 이런 초겨울, 춥고 따뜻한 것을 찾을 법한 이런 시기에 친구도 좋고 가족도 좋고

사늘한 낮꿈

도란도란 한 번쯤 같이 읽어도 좋은 책이 아닌가 싶어서 추천 드리고 싶어요. “녹물은 안 들었는지 몰라도 밥 뜸 드는 냄새에는 무쇠 냄새도 섞여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연기가 벽의 균열을 통과하면서 묻혀온 흙냄새도, 그 모든 냄새와 어우러진 밥 뜸 드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아 이 냄새, 이 편안함, 몇 생을 찾아 헤맨 게 바로 이 냄새가 아니었던가 싶은 원초적인 냄새, 이열치열이라더니 음식 때문에 뒤집힌 비위를 부드럽게 위로하는 이 편안한 냄새. 어머니는 왜 아무 연고도 없는 이리로 왔을까. 나는 또 생전 처음


후남이는 알맞게 부숭부숭하고 따끈한 아랫목에 편안히 다리 뻗고 누웠다. 그리고 평생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았다. 밥 뜸 드는 냄새와 연기 냄새와 흙냄새가 어우러진 기막힌 냄새가 콧구멍뿐 아니라 온몸의 갈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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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아보는 이 냄새가 왜 이렇게 좋은가.

틈새로 쾌적하게 스며들었다. 잠깐만, 어머니가 후남아 밥 먹어라, 다시 한 번 불러줄 때까지 잠깐만 눈붙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리라.” - 『친절한 복희씨』 中 Q. 마지막으로 박완서 작가님의 팬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A. 『친절한 복희씨』의 맨 앞에 실린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라는 말을 소설 화자가 이야기합니다. 그런 그립다라는 느낌을 어떤 특별한 때와 장소가 아니라 일상의 틈틈에서 느낄 수 있는 것?, 그 느낌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그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닌가?, 소시민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닌가?, 아마 그 말씀을 박완서 선생님께서 평생 하고자 하셨던 게 아닌가 싶은 기억이 있고요. 이 책의 마지막에 선생님이 작가의 말을 굉장히 고심하시면서 여러 번 수정하셨는데, 여기 말미에 ‘나를 위로해 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쓰셨어요. 그게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고, 소설을 쓰는 이들의 이유이기도 하죠. 그거 이외에 달리 뭐가 더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거장 박완서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값진 말씀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말씀, 메시지 그대로 이 책은 출간된 지 11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 독자들한테도 새롭지만 자연스럽게 그 위로의 말이 받아들여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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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이지민

동네마당 뜰안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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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편>>_ 8분21초_ 2018, 스틸컷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이 곳 ‘뜰안’을 운영하고 있는 이지민이라고 하고요. 고등학교는 동선동에 있는 성신여고 나왔고요, 여기 다시 이사 오게 된 것은 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Q. 어떻게 박완서를 접하고 좋아하게 되었나요? A. 박완서 선생님의 책들을 읽으면 1990년 정도에, 그것보다 조금 빨랐을 수도 있고요, 그분이 너무 작가 같지 않은 동네 언니나 동네 아줌마 같은 모습으로 인터뷰하시는 걸 보고 책을 찾아 읽게 되었죠. 그리고 선생님의 그 편안한 문체, 거기에 매료되었어요. 자서전적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와 비슷한 점도 많고, 제가 사는 동선동, 학교 다닐 때의 동선동 거리를 생각나게 해서 그때부터 선생님 작품을 읽고 선생님을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Q. 박완서 선생님 작품을 읽고 사셨던 곳이나 소설에 나온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하셨다고 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사늘한 낮꿈

A. 『그 남자네 집』에는 소설 중간중간 성북천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거기도 걸어봤고요. 신안탕이 어딘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제가 바로 여기 근처에 살았는데도 신안탕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동네 어르신들한테 여쭈어서 굴뚝, 그 당시 제가 찾을 때는 굴뚝이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남아있는 그곳까지 찾아가서 투어도 해보았고요. 그리고 저희 아이들이 어릴 때 선생님 작품을 아이들에게 소개하고 읽혀주면서, 이곳이 바로 선생님이 스무 살 때부터 살았던 곳이고, 이곳에 전차가 다녔고, 이 태극당 앞에서 선생님이 전차를 타셨을 거다, 이런 이야기들을 해줬고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예쁜 그림이 많이 나오잖아요.


함께 박수근 씨 작품도 보고. 이 분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노력하고 시대를 잘 만나니 이런 화가가 돼서, 지금 너희들이 화가 지망생이나 꿈들을 꿀 수 있게 하는 작가가 되었다. ‘너희들도 꿈을 꾸어라’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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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그 당시 박수근 화가를 만났을 때. 그 화가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많이 해줬던 것 같아요. Q.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읽으시면서 본인과 어머님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모습이 생각나셨을까요? A. 저희 어머님이 박완서 선생님 어머니만큼 아주 극성스러우셨어요. 넉넉하진 않았지만 저희 4남매 모두를 대학 공부를 가르치신다며...... 저희 아빠가 사업 실패하고 어려울 때는 봉지쌀 먹던, 봉투로 쌀을 사가지고 와서 그걸로 한 끼 먹으면 끝나고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것이 철두철미하셨어요. 박완서 선생님은 어머님을 이중적인 잣대로 세상을 사는 분이라고,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고 싶을 때는 이렇게 생각하시고 억척스러움이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많잖아요? 하지만 선생님이 나이가 들어서 뒤돌아봤을 때 그 당시에 어머님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하시잖아요. 저도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니 그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거예요. 저희 엄마가 왜 그랬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죠. 결혼하고 철들면서 아이들이 6-7살일 때 한창 이 책을 읽을 시기였거든요. ‘아 우리 엄마와 너무 닮았어. 우리 엄마도 이렇게 극성이었는데, 나도 이렇게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죠. 또, 제가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이 선생님 엄마와 닮게 아이를 극성스럽게 반듯하게, 내 아이가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것, 크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손주가 ‘할머닌 어땠어?’하고 물으면 증손자까지는 내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그런 할머니로 살고 싶다는 생각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많이 이야기해주고, 또 우리 아이들도 이다음에 커서 그렇게 되기를 교육시켰던 생각이 나네요. Q. 박완서 선생님 작품에 대한 첫 기억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A. 책 제목이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장편으로 된 선생님의 책인데요, 여성들이 좀 깨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너희들 삶이 달라진다. 박완서 선생님은 옛날 사람이었지만 그때도 이렇게 살았다. 저희에게 어떤 엄마로 살아야 될지를 제시해 준 소설이었다고 생각해서 그 작품을 계기로 계속 읽었던 것 같아요. Q. 소개하고 싶은 박완서 선생님의 책이나 구절을 알려주세요. A. 저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이 책을 한 서너 번 읽었던 것 같고요, 맨 마지막 구절을 가장 좋아하는데, 저희 어머님과 같은 선생님의 엄마, 저희 엄마와 너무 닮아있으셔서요. 제가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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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 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한 일이었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中 Q. 마지막으로 박완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팬과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만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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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팬이나 독자분들이 꼭 한 번쯤 읽어야 하는 자전적 소설들,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쓰셨던 단계별 소설들이 있잖아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남자네 집』. 이런 것들을 전부 차례대로 읽어 나가시면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떤 삶이 나에게 가장 맞는 삶인지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어려운 세상이잖아요. 늘 그 시대마다 어떻게 하면 그 시기를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으니, 지금 엄마들이나 아니면 젊은 세대들도 다시 한 번 꼭 되짚어서 읽어보시면 어떨까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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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사기획전 4

이하린

건국대학교 리빙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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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린 편>>_ 11분26초_ 2018, 스틸컷

Q. 간략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이하린이고, 현재 건국대학교 리빙디자인과에서 도자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과는 이웃이었죠. Q.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시나요? A.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먼저 친해지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그 자리를 채웠던 것 같아요. 이웃이자 친구 같이. Q. 가까이서 지켜본 박완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A.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책은 그렇게 많이 접하지 않았었는데요. 어머니 통해 알게 되면서 집에 많이 놀러 가기도 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댁에 자주 놀러 가고, 선생님도 저희 집에 놀러 오셨고, 밥도 먹으러 다니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이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지만, 저는 그분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 그런 사이였습니다. Q. 박완서 선생님의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A. 예전에 제가 선생님 사진을 인터뷰에서 기사로 보고, 굉장히 온화하게 생기셨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얼굴을 보고 받았던 인상과 처음 만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굉장히 다르긴 했어요. 온화하시고 편하시고 인자하시고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대화를 해보니까 그분의 목소리는 얼굴과 이미지가 다르긴 했어요.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하이톤이시고, 굉장히 예의 바르셨고, 뭔가 편하게 해주시지만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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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퍼센트 편하게 해주시지는 않는 이미지? 저는 오히려 그게 더 편했던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선망의 대상이었겠죠. 저도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책을 읽으면서 더 존경심이 커지기는 했죠. 굉장히 자신감이 있으신 분이시고, 굉장히 겸손하셨지만 또 겸손하지 않으셨고, 그랬던 분이셨던 것 같아요. Q.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 중에 소개하고 싶은 책이나 구절이 있다면 낭독 부탁드리겠습니다. A. 워낙 책이 많으셨기 때문에 그걸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계속 읽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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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구절들은 다른 여러분들께서도 소개해주셨을 것 같고, 저는 저희 아버지가 전에 책을 쓰신 적이 있는데 서문을 박완서 선생님께 부탁드렸어요. 짧게 서문을 써주셨는데, 그중에서 한 3줄 정도 인상이 남는 구절이 있어서 그걸 읽어보고 싶습니다. “실용적인 사람들한테 추억은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추억이 밥 먹여주나 일지 모르지만, 예술가에게는 추억으로부터 받는 기가 매우 중요한 에너지원이라는 걸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 아버지가 쓰신 책이 아버지의 인생과 작업을 하시면서 화가로서 겪어왔던 세월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 부분을 박완서 선생님께서 잘 압축해주신 것 같아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합니다. Q. 이전에 아버지(고 이두식 화백)와 박완서 선생님은 친분이 있으셨는지요? A. 아버지와 친분은 별로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일 처음 인연은 박완서 선생님이 예전에 쓰신 장편 소설 표지를 저희 아버지가 그리셨더라고요. 그게 저희 아버지가 서른에 그리신 것인데 『도시의 흉년』이라고 1977년에 나온 책입니다. 저도 그 그림도 굉장히 좋아해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의 이야기가 수필집에 나오기도 했었고, 심지어 저희 외할아버지 얘기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더라고요. 그 두 분은 친분은 없으셨는데, 동시대에 같은 학교를 다니셨고, 전쟁이 났을 때 저희 외할아버지께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이었는데,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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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신기하기는 했어요. Q. 해외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보고 느낀 감정이 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A. 제가 미국에 살면서 일을 하고 있었을 땐데,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나 미국에 계속 남아있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시기에 『그 남자네 집』을 읽었거든요. 그 내용 중에 시어머니께서 아들과 남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시는 구절이 몇 페이지에 걸쳐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먹어보고 싶다, 저 음식들을. 지금은 그 구절을 소개하기보다는 어머니가 아들한테 약간 집착을 하면서 했던 부분이 재미가 있어서 그 부분을 한 번 읽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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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갑자기 너무 배가 고파졌고,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나는 그의 어머니가 처음 보는 처녀에게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들반들한 집과 융숭한 대접이 탐탁함을 넘어 눈부셨던 마음이 열적게 느껴졌다. 내 속마음을 넘겨짚고 자기 아들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의 말처럼도 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 노인 앞에서 민호가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패게 하고 꽁치나 고등어로 반찬으로 밥 한 사발을 비우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열정적으로 끓어 오르는 것이었다. 얌전한 처녀답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일어섰다. 그의 어머니는 대문까지 따라 나오면서 멀리 가는 아들 배웅하듯이 어깨에서 먼지도 털어내고 옷매무새도 다독거려주면서 나에게 또 이상한 말을 했다. “야는 단추 하나도 바로 못 낀다우. 꼭 첫 단추는 끼워줘야 해.” - 『그 남자네 집』 中 이 부분이 굉장히 재밌게 느껴졌던 게, 제가 겪은 저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모습 때문이에요. 저의 어머니는 아들을 그렇게 챙기는 분은 아니셨고, 언제나 여기 나오는 주인공 처녀 같은 모습으로 사셨기 때문에 대비를 이루는데, 보통의 어머니는 이런 분이시지 라는 게 느껴졌어요. 또 나중에 생각해보니 박완서 선생님이 이 책을 쓰셨을 때는 주인공 처녀의 입장에서 쓰셨겠지만, 어머니가 자식을 챙기는 모습이 꼭 선생님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Q. 박완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팬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A. 저는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일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가끔 영화나 그런 데서 보면 맛있게 음식을 먹으면서, ‘아,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너무 다행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저는 약간 그런 기분을 다른 데서는 많이 못 느꼈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 사람이 아니면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할 내용들이 너무 많이 있고, 정말 내용이 정화되어 있는 그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에, 모든 책들이. 그래서 저는 굉장히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작가가 나왔고, 묻히지 않고 큰 명성을 얻으면서, 그분이 쓰신 모든 글들을 후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게 저는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모든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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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늘한 낮꿈


<나는 왜 작가이고 가톨릭 신자인가?>라는 주제로 2010년 4월 29일 대구가톨릭대에서 박완서의 강연이 진행되었으며, 타계 1년여 전 기록영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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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마지막 강연

강연은 총 2부로 나뉘어 진행됐으며, 6.25전쟁의 경험, 그리고 개인사적 아픔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담겨있다. 이번 전시는 귀로 듣는 동시에 눈으로도 읽을 수 있도록 두개의 채널로 구현했다.

<박완서의 마지막 강연>_ 70분_ 2채널 비디오_ 강연(2010) / 자막(2018), 영상 설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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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박완서의 마지막 강연>_ 2채널 비디오 中 강연(2010),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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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29 방금 소개받은 박완서입니다. 저는 목소리도 크지 못하고 연설조의 얘기를 잘 할 줄 몰라요. 그래서 극구 사양했던 건데 아나운서의 집요한 설득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근데 제가 이런 자리를 피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병이 있어요. 고혈압 같은 게 있어서 오래 서 있다든가, 꼿꼿이 서 있진 않더라도 사람 많은 백화점 같은 델 간다고 한다든가 하면 핑하고 어지러워지는 증이 있어요. 그래서 그냥 앉아서 하겠다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에 비해서는 몇 배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는 걸 감안해서 양해해주세요. 교수님들이 하는 것하고는 다르다, 그냥 할머니한테 얘기 듣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주세요. 저는 ‘소설가’를 쉬운 말로 풀어서 ‘이야기꾼’이라고 말한 적이 꽤 있어요. 저도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야기꾼’에 대해 폄하하는 말로써가 아니라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읽으셨겠지만 성경도 이야기고, 예수님도 사늘한 낮꿈

비유를 통해서 많이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나이가 많다 얘기했는데, 제가 올해 팔십이에요. 굉장히 많이 먹었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괴물 같겠지만 할머니는 오백 년을 산 것 같다’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근데 요새는 천 년을 산 것 같다는 느낌이 나요. 그건 제 육체적인 나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저를 스쳐 간 문화의 부피를 생각할 때, 이 눈부신 변화를 예전 사람들이 천 년을 살아도 이걸 다 겪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여한 없이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하고. 또 가끔은 더 살면 무슨 꼴을 볼까 이런 생각도 많이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할아버지가 다 한 집에 데리고 살았어요. 옛날엔 다 그랬어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유학자셨어요. 나중에 중풍에 걸려서 집에 계실 때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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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주 보통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적골이라는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어려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한문을 가르치시고. 그러니까 동네 유지죠, 동네 유지. 우리 오빠와 저 중간에 애가 셋이나 있었어요. 어머니가 5남매를 뒀는데 셋을 다 잃었나 봐요. 셋을 잃고 오빠와 저만을 건졌기 때문에 중간에 오빠와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납니다. 오빠는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다니고 저는 집에 있고, 그러니까 (제가) 유일한.. 숙부들이 다 애를 나중에 낳고 그때 못 낳았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저를 줄창 데리고 있었어요.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은 게 다 유학 교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자기가 아는 유학의 논리로 집안을 다스린 게 나중에 생각하면 그게 다, 나중에 제가 가톨릭에 영세하기 전에도 성경을 즐겨 봤는데, 성경의 가르침과 유학의 가르침이 닮은 게 많아요. 우리 집 사랑에도 할아버지가 써서 붙인 ‘경천애인’.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좀 존경받는 마을 어른이니까 우리가 다른 집에 가더라도 겨울에 어디를 가면 아랫목에 앉으라고 하고. 그 전엔 윗자리가 아랫목이에요. 존경받는 집 손녀니까, 혼자밖에 없는 딸이니까 아랫목에 앉히려고 하고. 그리고 당신 자식이 어느 잔칫집에 간다고 할 때 할아버지가 항상 아랫목에 앉고, 또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좋은 자리에 앉을 때도 절대로 밑의 자리에 앉아라, 윗자리에 덜컥 가지 마라, 니들이 윗자리에 덜컥 안 가고 아랫자리에서 겸손하게 있어도 다 그 댁에서 너에게 대우를 한다. 절대로 윗자리, 좋은 자리를 넘보지 마라. 그런 걸 항상 배웠어요. 또 네가 원하지 않는 걸 남에게 시키지 마라. 그것도 할아버지가 병풍에 써 붙였던 건데,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문자가 있어요. 논어에 나오는 문자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 걸 남한테 절대 시키지 마라.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랑’이라든가 ‘자비’라든가 ‘연민’이라든가, 이런 것도 다 모든 종교에, 불교나 어디에나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상투 틀고 늦게까지 기독교라는 것은 모르셨을 거예요. 나중에 중풍에 걸려서 그 마을을 못 벗어나셨으니까. 아마 야소교라든가 천주학이라든가. 천주학도 아마 할아버지가 천주‘학’이라 그러지 않고 천주‘악’이라 그래서 참 나쁜 건 줄 알았던 생각도 나는데요. 그 정도지 종교 교육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는 도리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안 계신 대신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나중에까지 저에게는 충분한 종교 교육이 됐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 저에게는 문학 교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도 물론 언문, 옛날엔 한글을 언문이라 그랬어요. 한문은 진서, 진짜 글씨라고. 언문은 여자들이 쓰는 속된 글씨라고 해서 언문이라 그러고. 할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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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할아버지는 한글을 한 번도 한글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어요. 겨우 언문을 깨치고, 또 깊이는 모르지만 자기 남동생이 배우는 어깨너머로 한문도 배운 어머니였는데, 어머니가 문학 애호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시집 오실 때 우리가 말하는 전래동화 같은 것, 전래동화도 다 옛날이야기죠. 춘향전, 장화홍련전, 심청전, 여러 전으로 내려오는 것도 있지만, 많습니다, 그런 책이. 책을 베낀 거. 어머니는 삼국지연의도 베꼈다고 하니까요. 그 베낀 것을 한 궤짝을 가져왔대요. 물론 혼수도 해왔겠죠. 시골의 보통 양반댁이었으니까. 근데도 우리 할아버님께서는, 그전에는 공부가 든 며느리를 좋아하지 않을 때예요, 옛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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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 않을 때였는데도 그것을 펴보시고 좋아하셨대요. 그리고 자기 친구 분이나 동네 사람한테 자랑을 하셨대요. 다른 혼수에 대해선 자랑을 안 하셨는데. 우리 며느리는 필사한 이야기책을 한 궤짝을 가져왔다. 근데 내가 펼쳐 보니 그 필체가 구슬 같더라. 그러니까 글씨를 잘 썼단 뜻일 겁니다. 그 필체가 구슬 같더라고 동네방네에 자랑을 했더라고.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맏며느리를 너무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좀 미웠던지, 저 양반은 속도 없이 그런 걸 자랑하고 다닌다고 좀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가끔 시골에서는 농번기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이야기책을 서로 읽는 거, 독서의 계절이죠, 이를테면, 그런 계절이 있어요. 그러면 동네 아녀자들이 와서, 우리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소리도 들었지만, 동네 아녀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책을 읽어줍니다. 그러면 그게 옆에서 들으면 참 읽는 소리가 듣기 좋아요,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근데 그런 경험보다도 특이한 경험이, 동네 새댁들이 있어요. 한 해면 두 셋씩 시집을 오잖아요. 시집온 새댁들도 가을이면 우리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와요. 어머니가 글씨도 예쁘게 쓰거니와, 이야기책도 잘 읽고 그러니까 편지를 잘 쓰리라 생각했나 봐요. 지금은 편지 쓸 때 자기가 생각한 대로 쓰면 되지만 그전에는, 제가 너무 옛날이야기를 하는데 1930년대라고 생각해주세요. 얼마나 오래전인가. 일제 시대고, 일제 강점기지만, 일제 말기 2차 대전도 나기 전 어느 정도 평화로운 시골이었습니다. 그러면 편지를 써달라고 어머니에게 옵니다. 자기는 배운 게 없어도 편지는 유식하게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옛날 편지엔 처음에 어머니 전 상사리, 부모님 전 상사리, 기체후일향만강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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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편지 투가 있어요. 그러고 나서 할 말을 하는 거죠. 그런 게 잘 안되는 거죠. 다 문맹은 아니에요, 그때도. 개성 지방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웬만치 사는 사람들인데도. 글씨도 쓸 수 있고 그런데로 어머니에게 멋있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싶은가 봐요. 그럼 셋이나 둘이 같이 모여 와서, 그냥 빈손으로 와요. 우리 윗방에는 지필묵이 다 있어요. 갈아서 쓰는 것. 우리 어머니가 먹 갈고. 그래도 어머니가 막 쓸 수는 없잖아요. 안부는 누구누구 하고, 어떻게 사는진 다 알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들어서 쓰죠. 그 사람들이 써달라는 대로 제대로 써줬나


꾸며서 쓴 얘기가 아닌데도, 우리 엄마가 자기 사연을 다 쓰고 읽어주고 나면, 우리 어머니가 목소리도 좋으셔요, 읽어주는 걸 들으면 그 사람들이 다 울어요. 그전엔 한복을 입었는데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는 거예요. 그땐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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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읽어줘요. 그러면 그 새댁들은 자기가 한 이야기를 우리 엄마가 썼지,

그 정도로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그걸 내가 아랫목 쪽 등잔불 밑에서 그런 광경을 볼 때 참 엄마가 위대해 보였어요. 엄마는 무언가를 써서 저 여자들을 울렸다. 그것이 듣기가 좋았고. 엄마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또 어떤 이야기의 힘 같은 걸 느낀 게, 자기 말을 했는데 우리 엄마가 그걸 썼는데 그걸 듣고 저 사람들은 울었다. 그러면 내가 그때 완전히 느낀 건 아니지만, 똑같은 말을 글로 잘 정제해서 썼을 때 자기 이야기인데도 자기를 울리게 하는구나, 이런 거. 신기하기도 하고, 저 사람이 말한 걸 엄마가 썼는데 왜 우나 이런 느낌도 있고. 그런 것이 저에게 아버지가 안 계셨지만 엄마를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이 결국 나중까지도 이야기라는 건 참 좋은 거라는 걸 느끼게 한 게 아닌가. 그렇지만 그때 어머니가 이야기책을 갖고 오셨다 해도 이야기를 쓴 작가가 따로 있다는 걸 엄마는 알지도 못하죠. 옛날이야기에 어떤 작가가, 춘향전을 누가 썼다는 게 있는 게 아니죠. 심청전을 누가 썼다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그걸 전달하는. 책 읽어주는 사람이라는 직업도 옛날에 있었을 지경이니까, 그랬다 뿐이지. 어머니가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제가, 딸이 자라서 소설가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 하셨겠죠. 소설가란 직업이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저한테 바란 게 있어요, 무언가. 어머니가 오빠를,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애를 중학교는 서울서 공부시키겠다고. 교육열이 강한 엄마였어요. 엄마가 교육열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알고 보니까 맹장염인데 돌아가신 거예요. 아주 건장한 분이셨고, 마을에서도 유능한 농사꾼이고 농촌 지도자 같은 분이었는데 어느 날 그냥 배가 아프다 해서, 데굴데굴 댓돌에서 구를 정도로. 그런 걸 할아버지는 옛날 시골 선비가 그렇듯 약재를 사랑에 매달아 놓고 있으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약도 많이 지어주셔요. 선비의 교양이었다 그래요. 홍역 걸렸을 땐 뭐, 급체에는 뭐. 그래서 할아버지가 엉터리로 한약을 지은 걸 먹이고. 또 할머니는 처음에 사관을 튼다고 하잖아요. 피 내고. 나중에 그래도 안 되니까 할머니가 무당도 불러다가 하는 사이에 이삼일이 지났는데, 막 배가 부어올라서 그때서야 이게 보통 병이 아닌가 싶어서 달구지에 싣고 이십 리나 되는 개성 시내로 가서 수술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땐 복막에 벌써 고름이 찬거죠. 그때만 해도 일제 강점기 때 항생제가 있기 전이에요. 수술이 잘못 돼서 고름 오면 죽습니다. 그래서 그냥 혼수상태에서 집으로 실려 와서 돌아가셨다고. 근데 우리 어머니만 해도 그걸 안 거예요. 이건 서울에서만 살았어도, 도시에만 살았어도 결코 죽을 병이 아니다. 그때도 맹장은 얼마든지 수술할 수 있으니까. 신식 병원에만 갔어도 안 죽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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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엄마는 개성 사람이 아니고 서울 사람도 아니지만, 서울 교외에 지금으로 치면 고양군 쪽입니다. 고양군 벽제면 출신이에요. 그래서 서울 외갓집 쪽은 부유해서 외사촌들과 서울에 가서 지내곤 했는데, 외사촌들은 다 숙명 다니고, 진명 다니고. 엄마가 학교 그러면 숙명, 진명이에요. 우리 오빠도 아버지들처럼 소학교만 나오면 그만이고 집안 형편도 그 정도밖에 안 되는데, 엄마가 극구 데리고 서울에 중학교를 보내겠다고. 그래도 오빠는 집안의 장남이니까 할아버지도 용납을 하셔서 오빠를 데리고 서울에 갔는데, 얼마 있다가 저까지 데리러 오셨어요. 난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 땐데, 오빠도 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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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갔는데 절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겠다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주 노발대발하셨어요. 전 그때 시골의 풍속에 따라서 종종머리라고 땋고 있을 땐데. 그때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여봐란듯이 저를 단발머리를 시키셨어요, 집에서. 그때의 그 수치감을 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때 단발머리는 지금과 달라요. 지금 같으면 시골 머리도 예쁜 머리인데, 그때는 소학교 간 애들이 다 머리를 치켜 깎습니다. 뒤통수까지. 치켜 깎고 뒤통수를 하얗게 밀어요. 앞머리는 단발, 하얗게 하고. 근데 전 본 적도 없는 머리를 엄마가 서울에서 보고, 그렇다고 이발소를 데려간 것도 아니고 저를 그렇게 시켰어요. 그러면서 너는 어떡허든지 공부를 많이 해서.. 그전에도 오빠하고 방학해서 내려오면 저한테 말하는 게 있어요. 서울 가더니 엄마가 달라진 게 뭐냐 하면, 너는 서울 가서 공부를 많이 해서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오빠를 데려가 서울의 빈촌에서 살며 바느질품을 팔아서 오빠를 중학교 공부시키면서. 오빠는 장남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그 마을에서는 우리보다 부잣집도 많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을 엄마가 한 거예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저를 딸이라고 차별 안 하신 것 중의 하나는, 나중에 동네 아이들을 데려다 한문 가르칠 적에 남자애들 다 놓고 가르칠 때 저를 앞에 놓고 가르쳤어요. 제가 서울에 오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떼었는데, 얘는 이렇게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 애들 야단을 치시고 저를 본으로 잡으시고 그럴 정도였지만, 서울에 데려가서 소학교를 보낸다는 건 아들 손자도 안 그랬던 걸 저한텐 상상도 못 하셨죠. 엄마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면서 그만큼 자유로워진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하겠다고, 돈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할아버지가 염낭에 찬 주머니에서, 옛날에 50전 짜리가 큰 돈이에요. 하얀 돈. 다른 1전 짜리는 다 노란데, 그걸 저한테 쥐어주시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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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던져 주셨어요. 던져 주시면서 에이, 고얀지고. 아주 고약하다고. 어떻게 계집애 머리가 뒤에도 얼굴이 달렸냐 그러셨어요. 높이 깎아서 뒤가 허여니까. 그걸 면도질을 해야 되는데 엄마가 가위로 막 하얗게 만들어서 쥐 뜯어 먹은 것 같은 게, 얼마나 흉했겠어요. 저도 뒤가 너무 허전해서 뭘 두르고 싶은데 엄마가, 서울 가면 애들이 다 그러고 있다 그러면서. 되레 막 꽁지머리하고 가면 더 이상하다고. 할아버지가 아주 보기 싫어하시고 섭섭해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옛날에 서대문형무소 건너 쪽에 시골서 온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 물도 안 나오고. 높은 산동네에 자기 집도 아니고 셋방에 들어서 바느질품을 팔고 계셨어요. 그렇게 살면서 저를 그리로 끌어들인 거예요,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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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서울 서울 해서 얼마나 좋은가 했더니, 현저동, 지금은 물론 좋은 데지만,

그래서 저를 부자동네 학교에 집어넣은 거예요. 인왕산을 넘어서 사직동으로 가서 매동초등학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때 매동, 제동, ‘동’자 붙는 학교가 명문이었어요. 다섯 개 학교가 있었는데 함부로 보낼 수가 없거든요. 학군을 위반했어요. 저는 사직동에 사는 친척 집에, 그때는 기류계라고 해요, 주민등록을 그리로 옮기고 저를 거기다 보냈습니다. 제 유년기는 서울 와서는 굉장히 소외되고 불행했어요. 엄마는 좋은 학교에 절 보낼 생각만 했지. 좋은 학교 애들은 다 옷을 반듯하게 입고, 깡통 치마에다 예쁘게 하고 학교에 오는데, 저는 그냥 촌뜨기처럼 해서, 물론 서울 와서 이발소에 가서 단발을 새롭게 하긴 했지만, 그때도 한복 입고 다닌 애 별로 없는데 까만 치마를 좀 짧게 하고 버선 신겨서 학교엘 보내니까, 참 힘들었고. 제일 힘든 거는, 저는 할아버지로부터 엄하게 받은 게 정직해야 한다는 것, 거짓말 시키는 걸 가장 안 되는 걸로 교육을 받았는데 또 하나의 가짜 주소가 생긴 거예요. 사직동에 누구누구 집. 그럼 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어보면 사직동 누구누구라고 해야지 현저동 아이라고 하면 안 된다. 이런 것도 저의 유년기에 굉장한 스트레스가 됐습니다. 또 거기 애들은 다 공부도, 일본 글도 깨쳐서 오는데 저는 언문밖에 모르는 애가 가서 2, 3학년 때까지 공부를 지지리 못하고. 학교 가기 싫어하는 열등생이었어요. 그러다 엄마도 같이 공부를 해가면서 저를 가르치고. 또 엄마가 선생님이 되라는 게 하도 강하니까. 그리고 그때는 선생님이 되려면 미리 사범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사범학교 경쟁률이라는 게 굉장히 셉니다. 엄마가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고 느꼈던 게, 엄마가 바느질품을 팔아 공부를 시키면서 보니까, 엄마가 주로 바느질해다 주는 건 기생 바느질을 많이 해다 줬어요. 기생들. 여성들이 돈을 버는 유일한 직업은 기생. 그것 외에 여성도 존경을 받고 남자와 같이 대우를 받는 것. 월급을 받고 엄마처럼 불행한 경우가 되더라도 직업을 가지면 떳떳하게 살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게 엄마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사범학교에 갈 실력이 못 돼서 엄마가 동경했던 숙명을 가고. 또 그때 오빠는 서울에서 공립 상업학교를 나와서 좋은 자리에 취직을 해서 집도 사고, 오빠와 제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오빠가 먼저 성공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도 면하고. 숙명 다닐 때 엄마는, 숙명에서 공부를 잘하는 애는 일본 유학을 시켜준다더라. 일본의 고등사범이나 일본의 나라 고등사범, 동경 고등사범 이런 데까지 있는 걸 알고, 너는 공부를 잘해서 가야 된다 그랬는데, 나라 고사나 동경 고사 갈 새 없이 숙명 2학년 때 해방이 됐습니다. 숙명 가서는 공부도 잘했으니까 엄마의 소원대로. 6.25만 안 났더라면 제가 아마 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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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됐을 거예요. 점점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가 됐다 그래도 엄마의 소원이 강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뭐 소설을 써서 돈을 번다 이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그냥 문학 애호가였고. 그냥 6.25가 안 났더라면 학교 선생님, 학문도 좋아했으니까 선생님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6.25가 나고. 6.25가 나기 전에 오빠가 좌익 사상을 가졌었어요. 인민군이 들어와 패해서 갈 적에 오빠는 또 이북에서 도망을 왔어요. 우리 집안은 오빠 때문에 빨갱이 집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또 도망을 왔고. 여러분은 그때 1950년 한국 근대사를 모른다면 저의 이야기가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는데, 50년에 6.25가 났다가 또 1.4 후퇴가 있고 그런 동안에 서울이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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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이나 인민군 세상이 됐다가 또 수복이 됐다가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좌익 세상이 됐다가 우익 세상이 됐다. 6.25때 우리 오빠도 죽고, 우리 삼촌은 국군이 들어왔을 때 검거돼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우리 식구 중에 오빠와 숙부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저는 여자였기 때문에 끌려가진 않았어도, 서울대학생이었고 하니까 저도 만만한 대상이 아니죠. 제가 온갖 수모를 겪고. 그때 저를 지탱시켜준 게 뭐냐면, 제가 이걸 그냥 재미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제가 그때 온갖 수모를 당할 적에, 물론 당할 수 있는 데까지 당했죠. 매를 맞거나 이러진 않았어요. 여러 가지 회유도 당하고 그러면서 제가 그래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전 서울대학교 1학년 국문과 학생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이것을 당하지만 이 상황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그래서 언젠가는 이것을 증언하자. 그래, 내가 언젠가 소설을 쓰리라. 저것들을.. 저것들을, 저 돼먹지 않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내가 소설 속에 등장시켜서 악인을 악인으로 그리고. 이것을 내가 언젠가는.. 내가 절대 잊어버려선 안 된다, 내가 굴욕스럽다고 해서 이 순간을 잊어버려선 안 된다, 내가 너희들을 언젠가는 소설로 쓰리라, 너희들은 다 내 소설의 까머리(?)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까지 학자가 되고 싶었고, 선생이 되고 싶었던 아이가 왜 별안간 그런 생각이 났을까. 그때 그 어려운 상황을 저를 지탱시켜 준 게 하필이면 왜 문학이었을까. 다른 것일 수 있잖아요. 내가 언젠간 권력을 쥐어서 저 인간 같지 않은 것들에게 복수를 하리라, 그런 생각들 많이 하잖아요. 법대에 간다, 권력을 쥔다, 부자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겠다. 이런 것이 아니라 왜 하필 그 보잘것없는 문학이었던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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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어떤 이야기의 힘을 믿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이야기의 힘 중에는 어떤 증언의 욕구 같은 것도 있습니다. 내가 겪은 경험, 내가 겪은 시대, 나를 스쳐 간 시대를 내가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똑똑하게 기억했다가 언젠가는 이 더러운 시대를 증언하리라. 이런 강한 욕구 때문에 내가 ‘인간 이하의 인간’ 앞에서 다만 어떤 권력을 가졌다는 명목하에 괜한 양민을 괴롭히는 인간 앞에서 버러지처럼 기라면 기고, 어쩌라면 어쩌라고 다 하면서도 내 마음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닐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마지막 자존심이, 당하되 기억하자.


잊어버리지 말자, 그것이 저에게는 그 시대를 견디는 데 힘이 됐습니다. 제가 그때 꿈꾼 문학은 ‘복수로서의 문학’이었습니다. 복수. 저것들을 문학 속에서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서, 좋은 소설을 꾸며서.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악당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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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이면 대개 그걸 잊어버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굴욕적이지만 이걸 절대로

끝끝내 따라다니는 형사라든가, 나쁜 놈, 이런 전형적인 나쁜 놈으로 형상화시켜서 재미있는 소설을 쓰리라, 이런 생각을. 그래서 그 시대를 내가 아주 버러지가 되지 않았어요. 아주 버러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순간에 인간적인 자존심을 아주 놓는 겁니다. 내 몸은 땅에 기더라도 자존심, 최소한으로의 인간의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 나는 아무리 괴로워도 이걸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그때 소설을 쓰지 않았지만, 소설을 쓰기 전에도 나에게, 이야기의 힘이 나에게, 내가 문학 애호가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많이 문학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야기라는 게 그렇게 큰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PX에 취직이 됐다고 하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이, 저 집 굶어죽을 줄 알았는데 이제 살아났구나 하면서 아주 다 부러워했어요. 거기 들어가면 금세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장으로 알아줬어요. 거긴 아주 잘 뽑아요, 사람들을. 잘 뽑는 건 뭐냐면, 잘 내쫓기 때문에 잘 뽑아요. 거기서는 블랙마켓이라고 해서 미군 물건들을 빼돌려서 팔다가 들키면 내쫓고, 또 새로 뽑고. 제가 그때 취직이 금세 된 것이, 전 국문과였는데 영문과라고 했어요. 영문과라고 하니까 단박에 절 뽑더라고요. 그래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절 데려가는 데가 호화로운 반짝거리는 매장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데, 커튼 같은 것이 쳐져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커튼을 열면 뒤에 화가들이, 보니까 화가들이 아니야. 중앙극장, 수도극장 같은 데서 간판 그리던 사람을 데려다 놓고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데예요. 초상화부에 절 데려간 거예요. 그렇다고 절 그림 그리라는 게 아니고. 저 같은 여자가 앉아서 미군들을 꼬셔야 돼요, 그리라고. 근데 다른 물건 파는 건 영어를 못해도 되지만 꼬시는 건 어떻게 합니까? 제가 보기에도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을 그려서.. 거기서 제일 비싼 그림이 인조 스카프 귀퉁이에 얼굴 그려주는 게 6달러였어요. 판에다 그려주는 건 4달러고. 그림은 그 사람들이 그리지만 나는 도저히 그걸 그리란 말을 어떻게, 대부분 쓱쓱 지나가지만 호기심 많은 졸병들은 구경도 하고 그래요. 그렇지만 무슨 수로 그림을 그리게 하겠습니까? 맨 처음에 책정한 월급도 많고 해서 내가 월급만 받아도 살겠다, 블랙마켓 안 해도 살겠다 했는데, 이건 뭐 도저히 안 되겠는 거야. 가만히 앉았어요, 내가. 앉아서 하루 종일 주문을 못 받는 거야. 그래도 화가들은 그리지. 그전에 받아놓은 주문. 그런데 받아놓은 주문은 자꾸 바닥이 나. 자꾸 찾아가고. 뒤에서 화가들이 난리가 난 거예요. 미스 박! 도대체 저렇게 벙어리가 앉아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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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우리는 뭐 먹고 사냐고. 그 사람들은 그려야하니까요. 저는 월급제지만. 그래도 난 속으로 그랬어요. 그냥 내가 미친 척하고 여기 앉아서 한 달 되면 월급만 받아서 그만두자. 근데 자꾸 아우성을 치니까. 보니까 그 사람들은 40대, 50대예요, 죄다. 그리고 다 가족이 딸렸어요. 나도 내 가족이 딸렸는데, 나도 다섯 식구가 내 어깨에 달렸는데. 그 사람들은 옛날에 애도 많이 낳잖아요. 그냥 다 몇 식구씩 딸린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막 나한테 독한 말도 해요. 누구 식구 목구멍에 거미줄 치는 거 보고 싶으냐. 별소리 다해요. 그러니까 책임감이라는 게 생기잖아요. 지나가는 사람한테, 너 참 잘 생겼다고. 졸병이나 그런 걸 듣지, 이렇게 기웃거리지. 장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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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런 데 기웃거리지도 않고 착착착 지나가지. 근데 어리숙해 보이면 잘생겼다, 너 걸프렌드 있지? 그런 걸 할 수 있잖아요. 그럼 이제 걸프렌드에게 이걸, 전선에 가 있다가 초상화를 그려 보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해서 자꾸 주문을 맡게 되고. 그런데 이 매장이 참 고약한 매장이에요. 왜냐하면 다른 건 그냥 팔면 그만 아니에요? 그런데 이건 찾으러 와야 돼요. 그렇잖아요? 찾으러 와서 자기가 그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는 애도 있어요, 걸프렌드를 그린 거. 그렇지 않은 애는 부쳐요. 부쳐 달라고 하면 부쳐줘. 그렇지만 아무튼 찾으러 옵니다. 찾으러 오면, 아이구, 이거 아니래. 더 예쁘다는 거야. 다시 그려줘야 되면 화가들은 또 손해예요. 내가 주문을 받게 되면서 거기서는 왕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내가 박 선생, 이 선생 이래도 되죠. 아저씨, 그래도 되죠. 아버지뻘 되는 분들이니까. 그런데도 내가 아주 깍듯하게 이씨, 김씨 그러면서 수모에 가까운, 모욕에 가까운 언사를 막 부리고 그랬어요. 나도 막 짜증이 나고. 그 나이에 내가 거기 가 있다는 게 내가 아주 밑바닥까지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났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중에 한 화가가 아주 두꺼운 화집 같은 걸 옆구리에 끼고 왔어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아유, 꼴값하고 있네, 지가 무슨 간판쟁이 주제에 저런 걸 끼고 다니고 그러나, 지가 화가나 되나 그랬는데, 그중에 하나를 펼쳐서 보여줬는데 그게 자기가 조선미술전람회, 일제 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때 특선한 작품이 실린 그림을 줘요. <절구질하는 여인>이라는 그림. 박수근이라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내가 그 사람을 알고 나서 거기 생활이 훨씬 수월해졌어요. 그분하고 전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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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 그러니까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섞여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너무 집중돼 있던 걸 남에게, 딴 사람에게도, 같은 동료들에게도 눈을 돌리니까 얼마든지 나하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 전쟁통에 할 수 없이 그렇게 된 사람, 뭐 여러 사람하고 사귀게 되고. 그 바닥에서. 살 만한 바닥이 되고, 또 동료들도 생기고, 나중에는 서울대 미대 들어간, 나하고 동기인 애도 오고 하면서 거기 생활도 즐거워지다가, 우리 남편도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결혼해서 살았어요. 소설을 쓰겠다거나 문학에 대한 것도 없고 애들을 여럿 낳아서 기르는 사이에 살림에 파묻혀 살림 재미로 그런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나서 그분의 유작전을 내가 68년인가 69년인가 보러 가서 깜짝 놀랐어요. 물론 지금 같은 비싼 그림값은 아니지만 굉장히 대우받는 작가가 돼 있었고, 아주 그림도 좋았고. 그때 제가 그림 하나를 소장하려해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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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못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은 끝끝내 아주 빈곤 속에서 살다가

수 없을 정도의 그림값을 호가하는데 정작 그 그림을 그 사람의 유족이 소장한 건 아니고 다 그림 거래하는 화상들이 소장한 것을 내놔서 유작전을 한 거였어요. 그래서 화상들이 내놓은 것도 아주 비싼 값이었고, 지금에 비하면 비싼 값도 아니지만, 그때로서는 꽤 비싼 일류 화가의 반열에 들었어요. 그걸 보고 제가 그때, 그 사람을 소설로 쓰고 싶다 생각을 했어요. 그 시대, 그 사람에 대한, 그 사람이 얼마나 소박하고 또 얼마나 훌륭한 화가였던가, 진짜 화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나. 그 사람은 곧 죽어도 이 붓을 갖고는 집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는 거예요. 화가에 대한 저의 절절한 존경과 애정, 이런 것이 처녀작 『나목』을 쓰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왜 작가인가 하는 이야기를 한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타고 났다고도 볼 수 있고, 팔자 같은 것도 있고. 어려서부터 작가로 길러진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합니다. 가톨릭 영세를 받은 것은 제가 작가가 되고 나서도 한참 후입니다. 제가 70년대 데뷔를 했는데 아마 85년도쯤일 겁니다. 제가 작가가 되고 나서 결혼 생활도 아주 순조로웠어요. 아주 편안하고 관대한 사람을 만나서 편안하고 관대하게 살고, 아이들 다 건강하게 키우고.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았습니다. 6.25의 어떤 공포, 전화를 그냥 정면으로 맞았어요. 요새 베이비붐 시대라고 나오잖아요. 베이비붐 시대라는 게 53년인가부터 63년까지를 정확하게 베이비붐 시대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54년에 첫애를 낳기 시작해서 63년에 단산을 했습니다. 하나 걸러. 두 살 터울이라고 하나? 이렇게 애를 다섯을 낳았어요. 막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 애들 치다꺼리를 하는 데서 놓여나고 나서 소설을 쓴 게 금세 당선이 되고, 그 이후에도 금세 인기작가 반열에 올랐어요. 제가 청탁을 다 감당 못하는 작가가 되고, 다작하는 작가가 되고. 그렇게 살면서 아이들이 다 건강하고, 척척 좋은 학교 다 들어가고. 같은 집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막내를 거기 보문동의 큰 한옥에서 낳아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한집에서 살아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을 ‘복가집’이라고 했어요. 복이 많은 집이라고. 애들이 명랑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예전엔 중고등학교까지 시험을 치를 때니까 시험 칠 때 학교 한 번도 안 떨어지고, 여러 애들이 쑥쑥 들어가고 잔병치레 안 하고 잘 자라는 집이 없다고 해서요. 우리가 그걸 팔고 아파트로 올 적에, 그때 한옥이 아파트 붐이 불어서 잘 안 팔릴 땐데도 복가집이라고 해서 금세 팔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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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기에 복 있게 봐주고 이럴 적에 저에게 이런 생각이 났어요. 나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될까? 근데 그것이 기분 좋은 게 아니라 어떤 예감이라고 할까? 사람이 불행할 때 종교에 의지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건 불행과는 다르지만, 나한테 왜 이렇게 많은 복을 누군가가 주실까, 이게 겁이 났어요. 이렇게 많은 복을 주면, 미리 종교를 갖는 게 이해가 돼. 나에게 이런 좋은 운명을 주시는 분에게. 사실 그때만 해도 마흔 살에 처녀작을 썼다는 것이 많이 화제가 됐어요. 문예 창작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가정에 있다가 인기 작가가 별안간 됐으니. 난 왜 이렇게 다 갖췄을까. 너무 좋은 일만 나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하게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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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겐가 감사해야 될 것 같았어요. 호사다마라고, 혹시 이러다 나에게 나쁜 일이 있으면 어떡하나. 미리 예방도 좀 하고 싶고. 그래서 참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남편이나 나나 가정적이고 별다른 취미도 없고 해서 같이 손 붙들고 교회나 성당에 가면 좋겠다 생각을 했어요. 말년에 그런 나이가 있는 것 같아요. 불행한 일을 많이 겪어도 의지하게 되고, 또 너무 잘 살았다 생각해도 거기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의기양양 받기만 하면 어떡하나 해서 맨 처음에는 가까이에 교회가 있어 교회에 갔습니다. 한번 교회에 얼굴을 비추니까 우리를 따라오고 뭘 적으라 하고 그래요. 우리를 끌려고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그건 싫더라고. 우리 집에 심방을 오겠다고 하는데, 나는 신앙도 자발적으로 하고 싶었어요. 등록을 하라고 하고, 어느 교회에서. 그다음 주일에 안 갔더니 누가 막 찾아오고 해요. 끌려가는 듯한 느낌은 싫어서 이번엔 성당엘 가봤더니 아무도 우리를 아는 척도 안 해요. 교리를 받았는데, 교리를 받으면 나에게 엄청난 뭔가가 올 줄 알았어요. 눈뜸이랄까,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신비체험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것도 없이 영세를 받았어요. 교리에 대해서는 아까도 내가 어려서 받은 좋은 유교적인 가정교육과 거의 비슷하더라고 했는데, 그런 게 자꾸 더 발견됐어요. 그래서 그 교리가 하나도 낯설지 않았어요. 제가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하니까 성경 이야기도 읽고, 성경을 그냥 아무 데를 들춰봐도 비유가 많이 나오고, 그런 것도 나에게 참 잘 맞았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영세를 받고 그다음에 저희 남편까지 받았어요. 내가 나에게 복을 주신 분에게 늘 감사하니까 나에게 이제 더 재앙은 없겠지. 팔자 좋은 내 팔자에 대해서 불안감을 갖게 된 것이 내가 성당에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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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발단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그리고 좀 안심이 될 것 같아. 너무 나만 좋은 것 같아서. 나는 욕망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큰 부자가 되고 싶다든가 하는 특별한 욕망이 없었어요. 아이들 잘 자라고, 현실적인 걱정 없고, 또 소설가로서의 이름에도 부족함이 없이 내 실력 이상으로 평가받고, 여기에 너무 감사했어요. 그런데 감사를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어디 가서 감사하고 하는 게 좋았어요.


저에게 너무도 큰 재앙이 겹쳤습니다. 그게 제가 성당 나간 지 한 삼사 년 됐을 때, 엉터리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좋은 취미로 나갔던 것 같아요. 그 재앙이라는 게, 아들을 잃기 전에 남편도 그해에, 88년입니다. 남편을 폐암으로 잃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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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리 찾아와서 감사까지 하니까 나에게 재앙은 안 닥치겠지 그랬는데, 사실

모든 고락을 같이 해왔고 여러 행복을 같이 해왔는데. 지금도 남편 잃은 얘기보다 아들 잃은 얘기가 먼저 나오는지만. 남편 죽었을 적에 정말 못 살 것 같아서 밤낮 남편 영정을 놓고 나도 데려가 줘, 나도 데려가 줘 그랬어요. 그렇게 비는 게 아닌데. 모든 기쁨.. 그땐 딸 넷을 다 시집 보냈고, 아들 장가만 안 보냈을 때인데, 레지던트만 끝나면 장가 보내려고 그때 그랬는데. 그랬을 적에 아들이 그렇게 되고 나니까 남편에게 나 데려가 달란 말도 쑥 들어가고 아니, 왜 날 데려 가랬더니 우리 원태를 데려갔냐고. 남편도 다 꼴 보기 싫고, 정말 그 견딜 수 없음을... 세상에 제가 별로 고통을 안 겪었는데 한꺼번에 겪는구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몸을 벽에 부딪쳐도 보고. 제가 장례도 못 봤어요, 내가 혼절을 해버려서. 그때가 88년이어서 한 해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중에는 상실감도 상실감이지만, 그 자랑스러운 아들을 잃고 나서 그렇게 부끄러워요. 사람들이 와서 위문도 하고 그러잖아요. 와서 어떡하냐 하고. 내가 못 먹고 드러누워 있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도, 교우들도 찾아오고 하니까 내가 너무 지겨워서 딸네 집으로 도망을 가서 있는데 거기까지 또 오고. 우리 딸들도 다 교우입니다. 그러니까 또 성당 친구들도 오고. 저 사람들 좀 안 오게 해달라고 해서 나 혼자 있어도 그냥 그렇게 창피해요. 어떻게 내가 그걸 못 지켰나, 걔를.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나에게 있나. 난 아주 떳떳하게 누구에게 나쁜 짓 하나 안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마음으론 누굴 좀 미워한 적도 있곤 하지만 내가 이때까지 남을 요만큼이라도, 손톱만큼이라도 행동으로 해코지한 일도 없건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십니까. 원망할 것은 하느님밖에 없고. 그리고 누가 와도 사람들이 다 나를 구경 오는 것 같아. 저 여자는 아주 착한 척 하더니 뒤로 뭘 잘못해서 저런 일을 겪나, 이렇게 다 수군거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때가 88년인데, 올림픽 할 때 아닙니까. 근데 올림픽 때 우리나라가 굉장히 잘 했잖아요. 그래서 텔레비전을 아파트에서 켜 놓으면 아래위층에서 와,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다 나를 조롱하는 소리 같고. 진짜 못 견디겠고. 밥 한 숟갈, 물 한 숟갈 못 넘기는데 사람들이 뭘 또 해 갖고 오니까 먹어도 토하고. 제가 부산에 딸이 하나 있습니다. 사위가 부산에 있는 대학에 나가는데 그래서 ‘엄마 이러면 안되겠다’고 당시 내가 가 있던 딸은 학교 선생님이었어요. 고등학교 수학선생인 애가 학교를 나가야 하는데 엄마를 누가 해먹이겠느냐, 자기가 봉양을 하겠다고, 굻어서 허청허청 하는 저를 끌고 며칠을 입원 시키겠다고 데려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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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 잘 먹으면 된다고 해서 부산 자기 집에 데려 갔는데, 속에서 전혀 음식을 받지 않아요. 그래서 억지로 먹는 척을 하면서 토하고. 그때 저는 사위하고 맥주를 많이 마셨어요. 그러는데 정신이 맑아지면서, 몸이 가벼워지면서 나는 아들하고 남편을 따라 죽고 싶다, 내가 이렇게 안 먹으면 언젠가 스르륵 죽을 것이다, 그런 느낌이 나요. 정신이 맑아지면서 몸이 뜨는 것 같은. 내가 이 몸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자주 왔어요. 난 벌레도 잘 못 죽이는데 나를 어떻게 끊겠는가. 아파트 10층이니까 뛰어내려도 되는데. 정말 살고 싶지 않지만 가만히 이렇게 있으면 죽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아들 남편 다 데려가셨으니 저도 좀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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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그러고 있는데, 부산 분도수녀원의 이해인 수녀님이 그 전부터 친구였습니다. 그 분이, 제가 있던 집은 해운대인데 가까우니까 저를 데리러 오셨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으니 자기가 데리러 가서 거기서 저를 데리고 있어 보겠다고 했어요. 아무튼 데려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딸이 엄마, 수녀님 따라 갈래?, 물어요. 저는 아무래도 그만이었어요. 거기 수녀님들 잡수는 거 봤는데, 깨끗하고 소박하긴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먹어서는 안 되는데, 딸이 수녀님한테 부탁을 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언덕방, 지금도 언덕방에 다니는데, 저는 거기를 해마다 갑니다. 금년에도 3월 말에 가서 4월 초에 왔습니다. 며칠 있다가. 거기가 제 마음의 고향 같아요. 혼자 있죠. 제일 살겠는 것이, 누구도 먹어라, 먹어라 하질 않아요. 저는 처음으로 거기서 혼자 지냈어요. 저를 위험 물질처럼 옆에서 보호를 하고 그러지 않아요. 언덕방이라는 방에는 손님방이 두어 개 있고는 응접실 같은 게 있고, 큰 집에 저 혼자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절대 고독입니다. 들리는 것도 없고, 수녀님들 숙소는 따로 있고. 손님방엔 저밖에 없어요. 제가 일생에 처음, 영세 받고 처음 하느님과 일대일로 대결해본 게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할 일도 없고 잠도 안 오고 해서, 소박하게 나무로 만든 십자가상 앞에서 제가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했어요. 밤이 새도록. 나에게 한 말씀만 하시라고요. 제가 나중에 『한 말씀만 하소서』란 책도 썼습니다. 한 말씀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되는지 한 말씀만. 꿈의 계시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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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든지,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거짓이어도 좋으니 신비체험을 나에게 해달라. 그래도 내가 열심인 신자였는데 나에게 이렇게 해답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 말씀만 나에게. 난 그 까닭을 모르겠다, 난 절대로 이렇게까지 무거운 죄를 짓지 않았다. 사후 세계는 있느냐, 아들을 만날 수가 있는가. 당신이 있긴 어디 있느냐, 포악도 부려보고, 온갖 짓을 다 해도 정말... 제가 그때 깨달은 건, 하느님은 침묵이에요. 아무것도 말 안 해. 절대 침묵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가슴을 쥐어뜯고 했는데도 전혀. 자다가도 꿈에 아들이라도 나타났으면 하는데, 꿈에도


들려오길 바랐어요. 그랬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거기서는 아침에 6시면 새벽기도라는 게 있습니다. 수녀들 다 모여서 성가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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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여요. 우리 이제 만날 테니, 그런 위로라도 해주길 바랐고 큰 목소리가 저에게

미사 드리고 나서 옆방으로 문 열고 나가면, 수녀님들은 다니는 식당으로 가고. 저는 문 열고 나가면 그 옆에 손님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따로 있어요. 거기서 저는 수녀님들이 겸상을 해줬어요. 겸상해서 잡수면서도 나보고 뭐 먹으라고 하지도 않아요. 그런 어떤 차가움 같은 것도 나에겐 좋더라고요. 성당이 교회보다 차갑다고 했는데, 그것이 저의 성미에 맞는 것 같아요. 자꾸 먹어라, 먹어라 하는 것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새벽 미사를 드리는데, 어디서 된장국 냄새가 났어요. 어디서 된장국 냄새가 휙 끼쳐 와요. 그러면서 뱃속에서 어떤 반응이, 왜 꼬르륵 소리가 난다는 것 있잖아요.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어떤 식욕 같은 게. 난 그때까지 안 먹었어요. 누구 보라고 괜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토한다든가, 뱃속에서 순환이 안 돼서 못 먹었어요. 근데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된장국 냄새가 나. 아, 된장국 한 그릇 먹으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이 날 정도로. 그날 아침 식당에 갔는데 진짜 된장국이 나왔더라고요. 밥하고 된장. 어떤 때는 빵하고 우유하고 커피하고 나온 적도 있는데. 아침에 국과 밥이 나왔어요. 아주 허둥거리면서 밥을 말아서 먹었어요. 한 반 공기쯤을. 겁이 나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밥이. 그리고 그날은 점심도 먹고. 이렇게 먹어도 괜찮은가? 그런데 나중에도 괜찮고. 그렇게 먹은 것이 내려가는 걸 내가 느꼈습니다. 식욕이 생기면서. 나는 의당 내 몸은 내 자식이나 남편을 따라 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곱게 수녀원에서 죽어도 좋다. 예쁘게 바스라져서 죽을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내가 아귀같이 먹으니 어떡하겠어요. 그렇다고 그걸 거스를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식욕이라는 건 못 거스릅니다. 밥을 먹고 그 다음날 배설도 잘 되고 하니까 내가 간절히 기도하던 하느님에게 막 포악을 부렸어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짐승같이 만드십니까? 그러면서 거기 들어가서 진짜 서럽게 울었어요. 그것도 혼자죠. 나는 아주 예쁘게, 약 먹지 않아도 남편 따라 아들 따라 잘 갈 줄 알았는데, 또 막 먹지 뭐예요. 그래서 난 거기서 밥을 이틀인지 먹고 나서는 수녀님, 고맙습니다 하고 나왔어요. 밥 먹는데 뭘. 우리 딸네로 와서 나 서울 간다 하고, 집을 고치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 아들과 남편의 장례를 치러준 신부님, 우리 성당 신부님이죠, 그 댁에 인사를 갔어요. 저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또 살아야지요. 그 신부님이 차를 한 잔 주시면서 사제관에 가 있는데. 사제관의 여러 장식품들 중에 도자기가 있어요. 그 도자기가 김수환 추기경님이 글씨를 써준 것이더라고요. 근데 거기 공교롭게도 ‘밥이 되어라’ 이렇게 쓰여 있어요. 밥이 되어라. 아마 사제한테 너희는 이제 밥이 되어라 하는. 아, 내가 간절히 바라던 주님도 밥이 되어서 나에게 오셨구나. 이 사제들의 임무도 아마 밥이 되는 것.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신 말도 밥.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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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주님의 말씀도, ‘너 밥이나 먹고 살아라’ 예요. 밥이나 먹고 살아라. 밥. 그래서 제가 체험한 주님은 침묵이고 밥입니다. 밥이 생명이고. 그것도 제가 어려서 받은 교육과도 관계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인자하셨는데도 수챗구멍에 밥알이 한 알만 있어도 그렇게 야단을 치시면서 하늘이 내려보신다, 이렇게 밥을 존중하던 생각도 나고. 밥이라는 게 우리에게 생명이고. 생명이요 진리요 길이 밥인 것 같아. 제가 수녀원에 안 들어갔으면 제가 무지 애들을 괴롭히고 그랬을 겁니다. 안 먹는다고 괴롭히고, 뭐 어째서 괴롭히고,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들한테도, 절 위로해준다는 사람들한테도 제가 온갖 추태를 다 부렸을 거예요. 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딸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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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사이에서 온갖 추태를 부릴 때 방패막이가 돼 주신 분도 그때 주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이만 할게요.

영상촬영 대구가톨릭대학교 인터넷 방송국 녹취 이종찬 영상자막 조혜영

사늘한 낮꿈 <박완서의 마지막 강연>_ 2채널 영상 中 강연(2010),스틸컷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문인사기획전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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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 김도희, 이은주, 조민숙, 한승훈, 참참참그래픽, 윤소라X정민아 · 참여 예술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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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며 자신의 삶과 예술의 깊은 상호성을 해석한 설치작업이다. 고향 부산 영도 깡깡이 마을의 노동, 소음과 냄새 질펀한 인간사의 풍경이 연동된 기억을 탐구한 김도희

문인사기획전 4

김도희_ <살갗 아래의 해변: 나목 裸木>_ 가변설치_ 연마기로 갈아낸 성북예술창작터 벽_ 2018

김도희 작가의 서정이 자라난 핵심적 장소에 적극적으로

작가는 낡은 선박의 따개비와 녹을 벗기듯 전시장 벽을 연마기로 갈아내고 먼지를 그 아래 해변처럼 쓸어 모았다. 진동과 먼지를 동반한 격렬한 과정을 거치며 모습을 드러낸 벽 아래의 중첩된 지층이 개인의 경험이 품은 미적 가치를 직관한다. 김도희는 박완서가 자신과 같은 나이에 발표하고 등단한 첫 장편소설 『나목』 전체에 깔린 짙은 상징적 이미지를 박완서의 정서적 원형으로 인식하고 깊이 공감하며, 청회색 계열의 페인트가 여러 겹 쌓인 기존 창작터 벽 위에 상처를 품고 새로 돋는 살결과 생명을 상상하며 색을 추가하여 올리고 작업했다. 자신의 몸에 깃든 경험을 후벼 파듯 깨움과 동시에 다시 새기는 김도희 작업의 특성은 박완서의 소설 쓰기와도 상통한다. 문학과 미술이 예술적 깊이 속에서 이해하고 만나는 순간이다.

김도희 김도희는 인간 경험이 신체적 작용과 연동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현재까지 ‘행위’, 촉각적 소리, 또는 시간에 변화하는 유기물을 이용, 작업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켜 공간에 에너지를 증폭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유’ 너머의 강렬한 삶을 말해 왔다. 홍익대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혀뿌리>(진화랑, 2017) 등 5회의 개인전과 <신여성 도착하다>(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7), <젊은모색 2014>(국립현대미술관, 2014)을 포함한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고, 2018년에는 고양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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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_<살갗 아래의 해변: 나목 裸木>_ 연마기로 갈아낸 성북예술창작터 벽_ 가변크기_ 2018, 설치 장면 세부

김도희_ <살갗 아래의 해변: 나목 裸木>_ 연마기로 갈아낸 성북예술창작터 벽_ 가변크기_ 2018, 작업과정 촬영영상(4분43초) 스틸컷


문인사기획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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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_ <살갗 아래의 해변: 나목 裸木>_ 연마기로 갈아낸 성북예술창작터 벽_ 가변크기_ 2018, 설치 장면


소말리아 난민촌을 방문했던 이은주 사진가는 소말리아 난민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가슴을 울리는 좋은 말씀으로 여정 내내 일행들의 스승이자 어머니가 되어 준 박완서에 대한

문인사기획전 4

이은주_ <박완서>_ Pigment Print_ 100x66.6cm_ 1993(2018 재제작)

1993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였던 박완서와 함께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 <박완서>는 「중앙 선데이」 ‘사진으로 만난 인연’의 연재를 위해 박완서의 방이동 아파트 서재에서 찍은 것이다. 박완서는 등단 이후 20년간 줄곧 만년필을 사용했지만, 90년대 디지털 매체의 새로운 등장과 더불어 집필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르모 전자 타자기를 사용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펜이 아닌 컴퓨터로 작업했다.

이은주 이은주는 대한민국 미술대전(1981)에서 대상을 수상 후, 지난 40여 년간 줄곧 세계적 거장들, 국내 최고 예술가들의 연주회와 공연 등의 무대 사진 전문 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각계 유명 문화예술인들의 초상을 촬영하며 따뜻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은주가 만난 108 문화예술인』, 『인연의 향기』, 『이은주의 사진 오디세이』 등 5권의 사진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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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_ <박완서>_ Pigment Print_ 100x66.6cm_ 1993 (2018 재제작)


이후 대나무로 여러 인물들의 얼굴을 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결한 대나무의 상징성에 입각하여 미학자, 철학자, 음악가, 건축가, 미술사가, 문학가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선각자들의

문인사기획전 4

조민숙_ <1310(박완서)>_ Mixed Media_ 61x75cm_ 2013

조민숙 작가는 십 년 넘게 동백나무를 이용하여 작업했으며,

얼굴을 표현하였다. 부조 작품 <1310(박완서)>(2013)에서는 8.15 해방과 6.25 한국 전쟁 같은 거친 시대 상황 속에서 고투하고 개인적인 상실을 겪으면서도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생활 속에서의 잔잔하고 세밀한 정서를 보여주었던 박완서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어두움 속에 빛을 내며 살아있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검은색과 흰색으로 표현된 작업이다.

조민숙 조민숙은 거제도 살이를 하다가 뭍으로 올라왔다. 거제도에 동백나무가 많다보니, 그 나무로 미니멀한 작업을 하였다. 이후 담양 부근에 살게 되어, 대나무로 얼굴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지금까지 아홉 번의 개인전과 스무 회 정도의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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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숙_ <1310(박완서)>_ Mixed Media_ 61x75cm_ 2013


남겨진 다양한 독서의 흔적과 석양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영상화한 <Re: Sunset>(2018)은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박완서가 사라져버리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문인사기획전 4

한승훈_ <Re: Sunset>_ 싱글 채널 비디오_ 12분22초_ 2018

도서관과 헌책방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박완서의 책들에

문자로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다면, 한승훈 작가는 그것을 이어받아 오래된 책의 흔적들을 다시 건져내고 그 증거를 디지털 영상으로 만들어 냈다. 시간을 견디어낸 물건들이 가지고 있는 세월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도의 시간이지만, 그 작은 안도와 공감이 모여 다시 읽히고 회자되는 것도 결국에는 석양처럼 붉게 타오르다 사라질지 모른다. 다시 그 시간들에 불을 피우는 것이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한 작업이다. 석양은 사라지지만 다시 새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물질로 된 책은 결국 소멸될지라도 박완서의 삶과 문학은 그를 기억하고 찾는 이들을 통해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한승훈 한승훈은 3D, VR, 홀로그래피, 미디어파사드 등의 경험으로 증강현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회화, 설치, 안무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협업하는 등 경계를 두지 않고 작업하고 있다. 시간 안에 숨어 있으나 쉽게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빛나는 순간이 되는 것들이 고단한 시간과 함께 빚어져 기어코 사건이 되는 것들을 발굴해내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끝없이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것을 향해 손을 뻗어 더듬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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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_ <Re: Sunset>_ 싱글 채널 비디오_ 12분22초_ 2018, 스틸컷 ⓒ한승훈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한승훈_ <Re: Sunset>_ 싱글 채널 비디오_ 12분22초_ 2018, 스틸컷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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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_ <Re: Sunset>_ 싱글 채널 비디오_ 12분22초_ 2018, 설치 전경


한옥집에 살았어요. 그게 열 식구 산 집이죠. 겨울이면 안방에 모여 아랫목에 발만 집어넣었어요. 교육적 설교 없이도 학교에서 어쩌구저쩌구하면 그게 다 가족 간의 대화고

문인사기획전 4

참참참 그래픽_윈도우갤러리 <1979, 보문동 한옥에서 박완서와 딸들>_ 240X220cm_ 혼합매체_ 가변설치_ 2018

“북적거리는 세월이 잠깐이더라구요. 원래는 보문동의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그랬어요. 할머니까지. 그게 좋았어요, 지나고 보니.” - 『박완서의 말』, 마음산책, 2018, p.146 이번 윈도우 갤러리는 “성북 문인사기획전 4 <지금 여기 박완서>”와 연계하여 진행하였다. 박완서가 보문동 한옥에 살았던 시절(1961-1980)에 찍은 오래된 사진과 그 집에서의 따뜻한 기억을 적은 박완서의 짧은 문장을 같이 레이어하여 설치하였다.

참참참 그래픽 CharmCharmCharm Grahpic 참참참은 그래픽 디자이너 박세연과 이민선이 운영하는 소규모 스튜디오이다. 디자인을 놀이로 보며 참(순수한), 참(진실된), 참(참신한) 디자인: Charm, Charmed, Charming Design을 추구하고 있다. 서울 성북동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디자인뿐만 아니라 인쇄, 영상, 웹 등을 매체로 하여 디자인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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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참참 그래픽_ <보문동 한옥에서 박완서와 딸들>_ 사진 및 텍스트_ 2018, 성북예술창작터 윈도우 갤러리 설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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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참참 그래픽_ <보문동 한옥에서 박완서와 딸들>, 윈도우 갤러리 내부 설치 사진(망점처리 된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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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진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낭독극으로 올렸다. 박완서의 전시가 진행되는 전시공간에서 오로지 목소리와 연주만으로 이루어져 아주 특별한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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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라X정민아_ 낭독극 <그 남자네 집>_2018

전쟁 전후 성북동의 정경과 가슴 아릿한 청춘의 이야기가

성우 윤소라가 읽고, 가야금 연주자 정민아가 연주하고 노래한 낭독극은 입말의 활력이 잘 보존된 글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박완서의 문학을 눈이 아닌 귀로 음미하는 좋은 기회였으며, 공간을 가득 메운 팬들이 다시금 박완서 팬덤을 실감케 했다.

윤소라 성우 윤소라는 1982년 MBC 8기 공채 성우로 데뷔한 이래 애니메이션, 외화, 게임, 라디오 등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미셀 파이퍼, 맥라이언, 조디 포스터, 데미 무어 등을 전담하였다. 성우 활동 외에도 낭독극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변명”, “이것 좋아 저것 싫어” 등을 선보였으며, 현재 팟캐스트 “소라소리”를 진행하고 있다. 정민아 가야금 연주자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정민아는 ‘가야그머’라는 신조어를 만든 장본인이다. 홍대 인근의 인디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2004년부터 공연하여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4번의 정규앨범을 내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집 앨범 수록곡 ‘무엇이 되어’는 2011년부터 중학교 2학년 일부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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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라 ⓒ주하아린

정민아 ⓒ주하아린


인터뷰 및 글 이종찬

김도희

“영도의 기억”

2018년 12월 13일 저녁 박완서 문인사 기획전 오프닝 자리에서 김도희는 박완서와 어떤 공통의 지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청중에게 말을 건넸다. 그 날 그가 말했던 표현들 중 지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단어는 ‘혈육의 죽음’ 그리고 ‘토악질’이다. 김도희는 부산 영도 출신이다.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그곳에 머물렀다고 하니 아직 본격적인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이건만, 영도에서 보낸 시절은 그에게 그 무엇과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강렬한 원초적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해석의 틀이 그 시절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곳에는 영도 특유의 소리들이 있었다. 깡, 깡, 깡. “그때 영도는 다 조선업이었어요. 하지만 번듯한 게 아니라 이른바 ‘깡깡이’ 작업들이 대부분이었죠. 배를 만든다기보다는 수리나 도색을 하거나 부품을 바꾸고 물품을 조달하는 등의 일을 하는 동네였어요. 배는 2, 3년마다 페인트칠을 새로 해야 됩니다. 따개비며 오물 같은 것이 배에 붙으면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 떼어내야 했어요. 망치로요. 깡, 깡, 깡. 이게 나중엔 그라인더로 바뀌게 되지만요. 깡, 깡, 깡 하는 소리가 울리면 동네 전체에 배 냄새가 났어요. 특유의 냄새였죠. 용접하는 냄새, 녹슨 냄새, 그리고 철 타는 냄새.” 그에게서 영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몰래 어느 순간 영도가 하나의 장소이기를 넘어 그 자체가 고유한 인격체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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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예술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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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배 수리 현장 ⓒ김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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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영도는 좀 특이한 곳이에요. 영도에 대한 영화를 보면 정상적인 게 없습니다. 죄다 고립되어 있고 외롭죠. 기질적으로 잘 뻗어나갔으면 됐을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쩌다가 그만 영도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자신을 가둬두고 있으니까 나를, 그리고 남을 거칠게 대하게 되고요. 악순환입니다. 제 그림 중에 8미터짜리 오줌 그림이 있는데 그 악취가 말도 못합니다. 앞에 서있기조차 힘들어요. 묵은 지린내의 태풍이 밀려오죠. 사유가 마비되어 버릴 정도로요. 사유가 필요하지만 내가 놓여 있는 자리, 그것이 더 실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떠올리면 녹 냄새, 비린내, 오줌 냄새, 그리고 공간의 피 냄새 등이 같이 와요. 같이 오는 게 있어야 저는 비로소 경험했다는 걸 인지하게 되더라고요.” <살갗 아래의 해변: 나목 裸木>에서 김도희는 깡깡이 망치질의 변주를 시도한다. 다만 과거의 망치질은 이제 그라인딩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옛날 영도에서 어린 김도희가 보고 들었던 깡깡이 망치질이 낡은 선박에 달라붙은 따개비와 녹을 벗기는 행위였다면,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이제 어른이 된 김도희는 망치질 대신 전시장의 벽을 연마기(그라인더)로 갈아내고 있다. 시간적 간격을 두고 박완서와 김도희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차이적 반복은 우리에게 근사한 해석적 울림을 선사한다. “『나목』을 떠올리며 작업을 했어요. 전시장의 벽을 파보니 전체적으로 청회색 느낌이 나더라고요. 갈아낸 흔적이 마치 멍든 느낌 같았어요. 『나목』에서도 그러잖아요. ‘고목’처럼 보이지만 ‘나목’이라고. 살아 있다고요. 고통을 느끼니까 살아 있는 것이라고요. 생채기가 나고, 거기서 피가 흐르고 아프니까 살아 있잖아요. 상처의 색과 어울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건 내년에 열매를 맺으려고 떨어지는 거잖아요. 그런 색깔을 연상하면서 레이어를 하나 더 올리고 갈아냈어요. 너무 평화로운 느낌이 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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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상처의 색과 함께 합쳐졌을 때 의미가 풍부해질 수 있는

조심했습니다.” 너무 평화로운 느낌이 되지 않게 조심했다는 말을 하는 대목에서 김도희의 목소리에는 평균 이상의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박완서 선생님에게 김혜자 느낌이 있잖아요, 대중적으로. 그런데 그게 마음에 드는 한 부분만 증폭시켜 소비하는 이미지는 아닐까요? 박완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 어느 인터뷰어가 생각보다 까칠했다고 평한 걸 봤어요. 저는 마음에 들더라고요.” 오랜 시간 곁에서 박완서의 모습을 보아 온 이병률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박완서는 ‘사늘한’ 사람이었다. 사늘하다? 이것은 시인이 만들어낸 말인데 ‘따뜻한데 서늘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니까 따뜻한데 서늘한 사람, 박완서. 그동안 작가 박완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생각했던 우리의 입장은 이제 한 번쯤 진지하게 재고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쩌면 아직도 박완서와 박완서 문학에 대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 박완서를 다시 읽어야 할 시간이다. 김도희를 통해 새삼 다시 깨닫게 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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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_ <살갗 아래의 해변: 나목 裸木>, 작업과정 촬영영상 스틸컷 ⓒ김도희


“증언의 (불)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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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

도서관 책에 휘갈겨진 낙서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유형별로 분류해보면 어떨까. 가장 먼저 예상되는 반응은 도덕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여럿이 함께 보는 책에 몰지각하게 낙서를 하다니. 두 번째는 경제주의적 관점으로, 책 전체를 읽을 시간이 부족했는데 마침 누군가 남겨 놓은 흔적들이 도움이 되는 경우다. 그리고 세 번째는 수용자 이론의 관점인데, 이 경우 초점은 해당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찍히게 된다.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을 통해 구성된다. 한승훈 작가가 내놓은 <Re: Sunset>은 이 중 마지막 세 번째 가설과 가장 가까워 보인다. 박완서 문인사기획전에서 한승훈의 주제의식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증언’은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박완서 문학이 곧 ‘증언으로서의 글쓰기’에 다름 아니었음은 이미 여러 논자들을 통해 수차례 언급된 바 있다. 6.25 전쟁통의 서울에서 속절없이 감내해야만 했던 저 인간 이하의 경험들을 기어이 증언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이후 박완서 문학의 기원이자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한승훈의 <Re: Sunset>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던 박완서의 책들에 남겨진 밑줄이나 낙서들을 슬라이드 형식으로 담은 영상 작품이다. “흔적을 찾는 작업이었어요. 세대적 거리감이 있는 저에게 박완서 선생님은 이를테면 책이라는 물성으로 먼저 다가왔거든요. 그러다가 줄이 쳐져 있는 책을 보게 됐는데 거기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게 됐습니다. 그 쳐진 밑줄에서 어떤 공통감을 발견할 수가 있었어요.” “작품명에 ‘Re:’가 들어간 것은 ‘되풀이되는 것’, ‘뒤에 덧붙여 말하는 것’, ‘다시 말하는 것’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어요. 과거의 사건은 이미 지나갔지만 여전히 그 다음 세대가 이어가야 할 증언의 형태인 거죠. 책이라고 하는 매체도 비슷한 것 같아요. 책에 남겨진 접혀 있거나 구겨져 있는 흔적들. 하다못해 코피 자국도요. 다음 사람이 그 흔적을 보았을 때의 느낌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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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_ <Re Sunset>_ 싱글 채널 비디오_ 12분22초_ 2018, 스틸컷 ⓒ한승훈

여기서 방점은 ‘다음 사람’에 찍힌다. 누가 앞선 말에 뒤이어 덧붙여 말할 것인가. 그러니까 먼저 사람으로부터 다음 사람, 또 그 다음 사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열성이 중요해진다.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 증언의 가능성, 그 성패가 달려 있다. 이와 관련하여 책에 밑줄을 친다는 것, 밑줄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밑줄을 치는 행위는 아주 특별한 공동체의 존재를 개시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증언의 공동체’라 칭할 만한 그 공동체는 그러나 구성원 간 어떤 직접적 교류도 불가능하다. 교류는 커녕 다른 구성원들의 이름도, 얼굴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우리가 그것을 공동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들 모두 박완서 문학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확실히 ‘증언’이라는 키워드는 최근 한승훈의 작업을 설명해주는 열쇳말임이 틀림없다. 그는 얼마 전 네덜란드에 다녀왔는데, ‘전자 증언’(e-witness)이라는 주제로 열린 전시회에 참여 작가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었다. 전쟁 피해자들을 조명한 일종의 국제 전시였다고 한다. 어떤 작품을 출품하였는지 물어보자 그는 꽤 흥미로운 답변을 들려주었다. “네덜란드 전시는 나 자신을 스스로 증언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보통 전쟁 피해자라 하면 여성과 아이에 집중하게 마련인데 그에 대한


생각했어요. 저는 전쟁이 나면 바로 징집될 겁니다. 남자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폭력을 강요받으며 크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남자니까’ 하는 의식 같은 것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것에 문제의식을 갖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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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심 같은 게 있었어요. 내가 스스로 겪었던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고

않을까 하는 의문이 출발점이었어요.” 여성과 아이로 정리되곤 하는 ‘피해자성’의 전형을 살짝 뒤트는 발언이었다. 다만 이 말은 섬세하게 읽혀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그의 발언의 요지는 전쟁 피해자로서 여성과 아이의 위치성을 결코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시나 전쟁 피해자로서 남성이 가진 중층적인 맥락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로 읽혔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유사 사례를 들어보면, 80년 광주 당시 전남도청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들 중에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아니면 둘 모두인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한승훈_ <The BUCK STOPS here>, 설치 장면, ‘E-Witness’ Women and War전(Quartair & ISS, The Hague, 2018) 참여 작품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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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승훈은 인터뷰 말미에 네덜란드 방문 당시 경험했던 인상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해주었다. 네덜란드에는 이를테면 ‘블랙 산타’의 문화가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흑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한때 해양 강국을 자랑하며 수많은 식민지들을 경영한 바 있던 네덜란드의 폭력적인 근대사가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한승훈 작가의 미적 관심이 가닿는 자리는 대개 이런 것들로 보였다. 피해자성의 전형에서 벗어난 존재, 또는 백인 산타클로스라는 통념을 깨뜨리는 블랙 산타의 존재 같은 것들. 그러니까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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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은 현재 신당동에 살고 있다. 집에서 동대문까지의 거리가 도보로 10~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임을 힘주어 강조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산책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동대문이 가진 특별한 장소성 때문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낮과 밤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곳이 동대문인데 그 덕분에 시간의 제약 없이 언제든 자유롭게 신당동-동대문 코스를 오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야행성이라 밝힌 그의 말까지 듣고 보니 아주 깊은 밤 또는 새벽, 산책을 즐기는 그의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됐다. 이 야행이 그의 창작의 비밀 또는 근원은 아닐까.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사라지는 매개자”

문인사기획전 4

홍장오

‘문인사기획전’을 이야기할 때 홍장오라는 이름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적당히 입에 발린 수사가 아니다. 조지훈, 신경림, 황현산 그리고 박완서에 이르기까지 총 네 번의 기획전을 진행하는 동안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번의 전시에 모두 참여한 작가는 그가 유일하다. 문인사기획전에서 홍장오 작가가 담당한 영역은 공간 디자인이다. 실제로 그는 ‘장시각융합소’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공간 디자이너’와 ‘작가’라는 두 개의 정체성은 그의 작업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명확히 구분될 수 없고, 양자가 상당 부분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부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정체성을 헷갈릴 때가 많아요. 저 스스로는 그걸 크게 나누고 있지 않은데 사람들이 보기에 ‘작가’와 ‘공간 디자이너’는 크게 다른 것 같더라고요. 저는 똑같은 마음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디자인 ‘업체’가 참여하는 것 같은 뉘앙스로 전달될 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선명하게 입장을 취하기가 애매할 때도 있고요. 어떨 때는 작가의 정체성을, 또 어떨 때는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숨길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문인사기획전이라는 무대는 홍장오에게 ‘작가’와 ‘공간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이 (별개가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 발현될 수 있었던 마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가 열린 ‘성북예술창작터’는 1층과 2층 두 개의 전시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번 박완서 문인사 기획전의 전체적인 공간 컨셉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부드러움이었어요. 나름의 엄격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푸근한 느낌이랄까요. 화려하지 않은 느낌. 2층 설치물의 경우 형식적으로 정형화된 틀을 갖추기보다는 자유로운 느낌으로 진행하려 했어요. 딱딱하지 않게요. 구조물에 노끈을 매단다거나, 비닐을 쓴다거나 하는 아이디어도 박완서 선생님의 소박한 느낌을 반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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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하나의 목소리로 울부짖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켜켜이 쌓이고 응축되고, 참아내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런 감각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려 했습니다.” 박완서와 그의 문학으로부터 무언가 켜켜이 쌓이고 응축된 느낌을 받았다는 홍장오의 말은 자연스레 1층 공간의 구조물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박완서의 고향인 개성에서부터 서울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착했던 구리시 아치울에 이르기까지, 박완서의 생애별 이동 경로에 착안한 W자 모양의 구조물이 정확히 그것을 반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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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에 태어나 2011년 영면하기까지 굴곡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박완서의 파란만장했던 시간들이 층층이 쌓인 나무 판넬들을 통해 시각적으로 잘 구현되어 있는 작품이었다. “박완서 선생님은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질곡들을 겪어낸 분입니다. 그런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계속 쌓이는 느낌을 담아내려 했어요.”

홍장오, 1층 주요 전시구조물 스케치 ⓒ홍장오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홍장오, 2층 주요 전시구조물 스케치 ⓒ홍장오


물어보았더니 가장 첫 번째였던 신경림展을 꼽았다. 문인을 조명하는 형식의 전시가 처음이었던 터라 “가장 순수하게 공간을 대한”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전시장을 방문했던 관람객의 피드백도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문인사기획전 4

네 번의 문인사기획전 모두를 경험한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면 왜 그리려 하겠는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 말을 곱씹었다. 인터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홍장오에게 이런 말을 잠깐 흘렸었다. 언어로 이루어진 집을 점점 신뢰하기 힘들어진다고. 내가 전공한 문학보다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벌어지는 시도들이 나에게 더 많은 통찰력과 영감을 가져다준다고. 나의 이 말을 그는 허투루 듣지 않았던 것 같다.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나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야말로 시각적인 것을 신뢰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말을 역으로 되돌려주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고 반응하는 수많은 시각적 대상들이 나에게는 신뢰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이게 멋있다고? 내가 보기엔 아닌데 그렇게 소비되고 소통되는 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시각적 경험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신뢰해서는 안 되겠다는 이유에서 언어야말로 더 신뢰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이 짧은 몇 마디의 말이 ‘홍장오’라는 사람의 퍼스널리티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창작자 개인의 오리지널리티를 당연시 및 절대시해오던 분위기로부터 현대 미술은 점점 더 멀어져 이제는 협업의 메커니즘이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다. 이와 같은 경향은 좋든 싫든 앞으로 점점 더 심화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문인사기획전에서 홍장오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시 공간의 전체 컨셉을 조율하고 구성하는 역할은 필연적으로 전시 기획자들과 적지 않은 협업의 시간들을 함께하도록 이끌었다. 아마도 이것이 다른 참여 작가들과 그를 차별화시키는 대목일 것이다. 실제로 문인사기획전 프로젝트에서 그는 공동 기획자로서의 지분을 적지 않게 갖고 있다. 홍장오는 어쩌면 그다지 표가 나지 않았을지 모를 이 과정들을 네 해 동안 묵묵히 진행해온 사람이다. “저도 작가인지라 취향이 있습니다만 그걸 일일이 드러내다 보면 일을 못할 거예요. 중간에서 저는 최대한 제 목소리를 낮추면서 부드럽게 굴러갈 수 있게끔 일을 합니다.” 문인사기획전과 함께했던 적지 않은 시간들 속에서 홍장오는 하나의 항과 또 다른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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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혹은 그 이상의 항들을 매개하며 스스로 한 발짝 뒤로 빠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 같다. 그는 ‘사라지는 매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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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성북문인사기획전 신경림편' 전시 전경 @성북예술창작터 2층

예술가가 만난 박완서


문인사기획전 4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144


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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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론 글


전쟁상태적 신체의 탄생, 혹은 점령당한 영혼에 관한 보고서 권명아(문학평론가)

1. 전쟁상태적 신체의 탄생 그녀는 왜 달리는 것일까? 박완서의 『나목』을 다시 읽기 위해, 이런 질문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나목』을 읽다보면, 숨이 차다. 특히 주인공 경아의 동선을 따라, 그녀의 발걸음과 마음의 리듬을 따라 읽다보면, 읽는 내내 숨이 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라. 서울 충무로의 ‘신세계 PX’를 나서서, ‘번화가였던’ 충무로와, 중앙우체국을 지나서, 을지로, 화신 앞을 지나, 계동에 있는 집에 다다르기까지, 경아는 내내 달린다. 『나목』은 사실 PX에서 계동의 부서진 고가(古家) 사이를 왕복하는 그녀의 내달리는 발길, 그 숨가쁜 호흡에 실린, 어떤 마음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숨찬 발걸음을 따라, 그 시절, UN의 서울 수복(1950년 9월 28일) 이후 어느 날의 서울로 가보자. 그녀는 지금 퇴근 중이다. 그녀는 혼자다. 지금,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집 근처까지라도 동행할만한 친구” 한명을 찾는 것이다. 그런 간절한 눈길로, 그녀는 PX를 나서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누런 군복의 무리, 청소부 아줌마들, 이그조틱한 이름의 세일즈 걸들과 여러 종업원들. 이 짧은 퇴근의 순간, 경아의 눈에 포착된 풍경은 수복 직후 서울의 삶의 편린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수복된 서울에서 PX에 매달려, 겨우 삶을 살아가는 이들. PX는 이들에게 생계의 원천이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몸수색을 당하는 ‘정도의’ 모욕감은 감내해야 한다. 『나목』은 작가 박완서의 개인적 체험의 기록으로 평가되어 왔고,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에 논의의 초점이 모아졌다. 『나목』의 많은 부분이 박수근의 분신인 옥희도와 경아의 만남에 할당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나목』의 작품 세계는 PX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 집중되어 있다. 『나목』은 PX와 계동의 고가 사이를 왕복하는 경아의 동선을 따라 구성된다. PX와 고가는 경아에게 생존과 죽음이라는 두 축의 공간적 분할을 상징하는데 이 공간은 그 이면에서는 점령의 현실과 학살의 기억이라는 두 축을 따라 분할되어 있다. 이 두 공간은 『나목』의 세계에서 공간적으로 동시적으로 병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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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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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실상은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라는 시간의 축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점령과 학살, 점령자의 공간과 학살당한 자의 공간이라는 비화해적 형태로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을 달리는 경아의 가쁜 호흡에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떠는 어떤 마음의 움직임의 동선이 아로새겨져 있다. 먼저 경아가 달리며 마주하는 세계의 모습을 보자. 몸수색을 마치고, 길로 나선 경아의 눈에 비친 것은 “두터운 어둠”, 온통 어둠뿐이다. 그 어두운 거리로 나서기 전 그녀는 숨을 고른다. 그리고 자, 이제 달린다. 불빛이 있는 곳에서는 한숨 돌리고, 다시 거대한 괴물 같은 건물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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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리고 무너져 내린 건물들 사이를 달린다. 그녀는 달린다. 숨이 가쁘다. 한데 이 숨가쁨은 단지 달리는 데서 오는 호흡의 가쁨만은 아니다. 이 숨가쁨은 무섬증 때문이다. 그녀는 달린다. 달릴수록 무섭다, 아니 무섭기 때문에 더 달린다. 무서워서 달리지만, 달릴수록 더 무서워지는. 그녀는 무엇이 무서운 것일까? PX를 나설 때 경아는 조금 외로웠다. 뛰면서, 그녀는 문득문득 무섬을 타다가, 무서움의 강도는 가위눌림에 가깝게 상승되고, 마침내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쇼크 상태에까지 이른다. 사실 『나목』을 다시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무서움의 동선, 결국은 쇼크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무섬증에 시달리는 경아의 정신 상태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나목』 전체는 이렇게 무섬증에 시달리는 경아의 분열적인 정신 상태, 즉 무서움과 두려움, 때로는 저주와 증오와 광기로까지 내달리는 그녀의 정신 상태를 따라 달려간다. 그렇다. 실상 『나목』에서 경아의 내달리는 발걸음은 두려움과 증오와 불안과 공포로 미쳐 달려가는 그녀의 정신 상태의 동선과 일치한다. 『나목』은 박완서의 개인적 체험의 기록으로, 특히 박수근과의 만남의 기록을 담은 작품으로 주로 회자된다. 물론 『나목』은 작가 박수근에 대한 소중한 기록으로서도 가치를 지니고, 작가 박완서의 개인사적 체험의 기록으로서도 가치를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지닌다. 이와 함께 『나목』은 이른바 서울 수복 직후, 그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과, 그 학살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학살자 유족의 내면의 기록으로서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쇼크 상태에까지 이르는 경아의 무섬증은 이런 차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왜 이토록 ‘근거를 알 수 없는’ 무섬증에 시달리는 것일까? 소설 내내 그녀의 무섬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자세한 분석이 생략되어 있다. 전쟁 중에 오빠들이 폭격으로 죽게 되었고, 그 죽음에 경아의 책임도 있었다는 식의 설명이 부연되기는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예문을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보자. 달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읽어나가면, 우리는 그녀의 무섬증이 서울 거리를 달려가면서 점차 더 가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녀는 달려가는 거리의 표지들을 정확하게 읽어나가고 있다. 즉 이 거리는 그저 전쟁 이후의 폐허나, 어둡고 황량하다는 점에서


장소이다. 쇼크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는 무섬증을 일으키는 무엇, 어떤 기억들. 『나목』에서 또하나 살펴볼 지점은 경아의 의지로도 제어할 수 없이 환기되는 기억에 대해, 박완서는 그 기억을 통해 환기되는 어떤 사실들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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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비슷비슷한 그런 장소들이 아니다. 그녀에게 이 거리는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박완서는 『나목』에서 ‘나는 말할 수 없다’는 지표를 곳곳에 남겨두고 있다. 앞서 PX와 계동 집이 생존과 죽음, 점령자와 학살당한 자의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는 동시에 현재와 기억의 시간으로도 분할되어 있다는 점을 논한 바 있다. 또 PX에서 계동 집을 오가는 경아의 동선은 이처럼 생존과 죽음, 점령자와 학살당한 자, 현재와 기억의 시간 사이를 왕복하는 진자 운동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나목』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시간성은 경아가 살아내고 있는 어떤 시간의 양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뒤에서 살펴 볼 ‘전쟁상태적 신체의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상태적 신체의 시간은 과거로 자꾸 소급한다. 그 소급된 과거의 시간 속에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텅 빈 집”이나 “노오란 빛”이라는 이미지로만 현현된다. 『나목』 자체에는 그 기억의 원천을 읽어낼 표지가 없지만, 우리는 작가 박완서의 전쟁 체험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통해서, 이 무섬증이 서울 수복 직전 오빠가 살해된 과정의 기억, 그리고 그 와중에 부역자 가족으로 벌레 같은 시간을 감내해야 했던, 그 기억들이 여기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무섬증에 시달리며, 가쁨 숨을 몰아쉬고, 두려움과 증오와, 분노와 광기를 오가는 경아의 상태는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처럼, 여전히 전쟁 상태를 앓고 있는 어떤 신체의 증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하니, 『나목』의 경아는 다들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전쟁을 ‘살고’ 있는 신체의 전형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분열과 강박으로 가득 찬 경아의 존재 양태를 그런 점에서 전쟁상태적 신체라 불러봄직하다. 현실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녀는 전쟁을 여전히 몸으로 앓고 있다. 이런 몸을 전쟁 상태적 신체라는 말 외에 달리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전쟁상태적 신체에 대한 탐구가 박완서 필생의 작업이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상태적 신체에 대한 탐구와 자기분석이 이른바 한국의 근현대사를 전쟁상태적 신체라는 차원에서 고찰할 수 있게 된 동력이기도 할 것이다. 『나목』을 전쟁상태적 신체의 탄생에 대한 보고서라는 차원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중요한 독해의 열쇠를 얻게 된다. 그것은 『나목』이 실은 PX, 즉 미군 부대 내의 세일즈 샵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는 단지 박완서가 실제로 PX에 근무한 적이 있다는 개인적 체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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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왜 PX일까.

2. 왜 PX일까: 점령당한 영혼에 관한 보고서 『나목』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불쑥 내 코앞까지 뻗어와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드 속에서 긴 머리의 아가씨가 활짝 웃고 있다. 『나목』, 앞 책, 11쪽.

149 이 첫 문장은 매우 상징적이다. 앞서 경아라는 존재 양태가 전쟁상태적 신체의 표상이라고 논의한 것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그 전쟁상태적 신체가 어떤 모습으로 현현하는지를 그려보자. 경아/전쟁상태적 신체는 무엇을 대면하고 있는가? 이런 차원에서 첫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불쑥 내 코앞까지 뻗어와 멈추었다.” 즉 경아/전쟁상태적 신체는 “갈색 털이 무성한 손”, 그 손아귀에 거의 잡힐 것 같은 상태로 대면하고 있다. “갈색 털이 무성한 손”, 그 손은 그녀의 밥줄이고, 그녀/전쟁상태적 신체는 거기에 매달려 있다. 『나목』에서 경아가 “갈색 털이 무성한 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나목』의 세계가 전후에 만연한 인종 공포를 반성 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갈색 털이 무성한 손”과 경아/전쟁상태적 신체의 대면 관계는 점령자와 피점령자의 위치를 투영하는 것이다. 아래 예문은 이 두 위치 사이의 간극, 그 격차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크리스마스라고 PX에 근무하는 한국인 종업원들에게 파티라며 콜라와 팝콘 따위를 나눠주고 구경하는 ‘양키’들과, 이 와중에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아귀다툼을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벌이는 한국인 종업원들. 멀리서 포성이 아직도 들리는, ‘수복’ 직후 서울의 한복판 PX의 풍경은 전후 한국 사회의 원형처럼 보인다. 『나목』의 곳곳에서 우리는 미군 하우스 보이, 세일즈 걸들을 만나는데, 이들은 단지 미군 관련 업종 종사자라는 어떤 특수한 직업군의 양태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주민의 모습처럼 보인다. 죽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서울 거리에서 경아는 온통 세일즈 걸들, 하우스 보이들과 만난다. 오빠가 죽고 난 서울 거리에, 이제 하우스 보이들이 번성한다. 오빠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던 고가(古家)가 무덤과 다름없는 곳이 되어버린 대신, 곳곳에 ‘하우스’가 만연하다. 전쟁은 이처럼 오빠를 학살하고, 대신 그 자리에 하우스 보이들을 낳고 있다. 전쟁은 집을 무덤으로 만든 대신, 집이 있던 거리를 하우스 촌으로(군부대에서 기지촌까지) 변형시켰다. 그리고 이제 이 거리의 주민들은 모두 어떤 의미로든 하우스


『나목』의 중심 소설 공간인 PX는 단지 서울 충무로 신세계에 있던 미군 내의 PX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수복된’ 서울, 그곳이 바로 PX인 것이다. 그리고 그 PX의 주민들은 모두 전쟁 따위는 잊고, ‘양키’가 던져준 콜라와 팝콘에 몸을 던지며, 추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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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이고, 세일즈 걸들이다. 그들의 생존이 모두 ‘하우스’에 달려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다하지 않고, 저만 잘 살겠다고 달려간다. 경아는 PX에 매달려 사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주민들과 다르지 않지만, PX를 나서서 고가라는 무덤, 학살당한 자의 집, 학살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이 주민들과 같아질 수가 없다. PX의 주민들이 콜라와 팝콘에 몸을 던지며, 저만 잘 살겠다고 달려 나가는 것을 성장, 개발의 이름으로 합리화해나가지만, 경아는 학살당한 자의 집으로 계속 귀환한다. PX와 고가 사이를 달리는 경아의 가쁜 호흡, 그것은 이 둘 사이를 이동하는 특정한 주체 위치의 표상이다. 이 주체 위치는 PX 주민으로서의 위치와 학살당한 자의 유족으로서의 위치 사이의 비화해적 분열 속에서 구성되는 매우 특이한 위치이다. 일찍이 누구도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사회를 이러한 비화해적 분열의 주체 위치 속에서 탐색한 이는 없었다. 이것이 작가 박완서, 그녀의 독보적인 위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체 위치 속에서 박완서는 한국 사회를 전쟁상태적 신체의 시선 속에서, 그 양가적 진동 속에서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박완서’로의 초대 『나목』은 잘 알려진 작품이다. 박완서의 대표작이자, 작가의 개인사적 체험의 대표 사례로 『나목』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나목』을 잘 알고 있을까? 『나목』을 비롯한 박완서의 많은 작품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잘 알고 있다’는 것, 혹은 박완서의 작품들은 다 비슷비슷한 작가의 체험들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오빠의 죽음, 남겨진 모녀의 고통, 박수근과의 짧지만 애절한 만남, 『나목』은 이렇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어쩌면 우리는 ‘잘 알고 있다’는 그 인상으로 박완서를 반복해서 읽거나 읽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목』에 국한해서 말해보자면 실상 『나목』은 작가인 박완서, 그 자신에게조차 잘 알지 못하는 그런 텍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날, 서울 거리를 무서움에 시달리며 달리던 그날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후, 경아는 문득, 그 ‘그림’이 자기가 알던 그 그림과는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는 느낌을 곱씹는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때, 그날, 수복 후 서울을 달려가던 그 시간을 그려내는 박완서의 소설은 대부분 회고적 시점으로 종료된다. 그날에서, 오늘, 여기까지의 동선. 그리고 그 동선들 속에서 그때 그날의 이야기는 조금씩 변형되고, 다시 살아나고, 달라진다. 왜, 무엇 때문에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녀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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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이야기를 왜 그토록 오랜 세월 곱씹어왔던 것일까? 그때 그날들, 수복 직후의 서울 거리를 무섬증에 시달리며 구조 신호를 보내듯, 문을 두드리던 고가는 이제 허물어졌다. 남편 태수는 결혼을 하면서 제일 먼저 고가를 철거할 것을 주장했고, 경아 역시 그 뜻을 따른다. 그러나 고가를 철거하면서도, 은행나무들은 고스란히 남겨둘 것을 경아는 고집한다. 왜 은행나무일까? 앞서 그녀(경아/박완서)가 그날의 기억을 말하지 않는 대신, 그 말할 수 없음의 표지를 “노오란 빛”, 그토록 처절했던 은행나무의 노오란 빛으로 표상하고 있었다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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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몇십 년이나 묵은 은행이 그 가을엔 왜 그렇게 처절하도록 노오랬던가. 난 그것을 보며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를 번갈아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가. 지금도 그것이 궁금할 뿐 내 기억의 소급은 노오란 빛 속에 용해되어 다시는 헤어나질 못했다.”) 세상이 변하고 “살아서 잘 먹고 편히 사는 게 제일”인 시대가 되었지만, 그 “노오란 빛”, 그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녀 곁에 있다. 이 ‘평화로운’ 시대에 그녀는 여전히 그 은행나무의 “춥디추운 아우성”을 듣고 있다. 아니 그 “춥디추운 아우성”은 실은 “은밀한 속에서 울려나오는 또 하나의 나의 몸부림 소리”이다. 그렇다. 그 은행나무의 노오란 빛과 아우성은 경아의 집 마당을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아 그녀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여전히 자라고 있다. 그래서 “잘 먹고 편히 사는 게 제일”인 “당신들”의 세상에서 그녀는 몸 안에서 여전히 잎을 피우고, 낙엽을 떨어뜨리고, 다시 새 잎을 피우며 자라나는 그 은행나무의 “춥디추운 아우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이 평화로운, 당신들의 세상에서 여전히 전쟁상태의 신체인 채로, 아니 계속 자라나고 무성해지는 그 ‘몸’을 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이 경아, 그녀의 몸속에서 자라나고, 잎을 피우고, 다시 노오란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낙엽을 떨어드리는 그 은행나무를 통해, 박완서 그녀의 작품들이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그 비밀에 이르는 하나의 열쇠를 엿볼 수 있다. 그녀에게 ‘그때 그날’, 수복된 서울 거리를 무섬증에 시달리며 내달리던 그 숨 가쁜 호흡은 과거의 체험이 아니다. 그때 그날의 이야기는, 그녀의 몸속에서 계속 자라나고, 우수수 떨며 아우성을 친다. 우수수…창 너머로 나무들의 떨림만 보고도 나는 자꾸 그 소리를 듣는다. 『나목』, 앞책, 282쪽.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그 ‘비슷한’ 이야기들이 간절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결코 비슷하거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다. 박완서의 작품들에서 그때 그날,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박완서의 작품은 계속 다시 태어나는, 그때 그날의 이야기이다. 『나목』에서 말할 수 없음의 표지로만 남겨졌던 이야기들은, 그녀의 몸속에서 계속 살아가면서, 말을 얻어간다. 『나목』에는 흐릿한 형체로만 등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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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를 달려가던 경아의 이야기는 계속 다르게 ‘태어난다.’ ‘태어난다.’ 이 말은

오빠가 이후 작품에서 그 구체적인 윤곽을 얻어가거나, 오빠의 죽음의 내력이 더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적 정황 속에서 기술되는 것, 오빠의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들이 ‘빨갱이 가족’으로 어떤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 그리고 말을 얻지 못한 그 학살의 기억이 어떻게 살아남은 자의 삶을 파괴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는 아직 그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다 ‘비슷한’, ‘잘 아는’ 이야기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박완서, 그녀는 그 이야기를 채 마치지 못했다고도 할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학살되어 파괴되어버린 그녀의 깊은 곳에서 울음을 그치지 않던, 그 “춥디추운 아우성”을 우리는 끝내 다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 춥디추운 아우성을 듣기 위해, 이제 우리는 그녀, 박완서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이야기로 다시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그날, 수복된 서울 거리를 무섬증에 시달리며 내달리는 그녀, 경아의 가쁜 호흡 속으로 함께 들어가야 한다. 자, 이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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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완서 『나목』(세계사, 2012)에 수록된 원고를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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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박완서와 ‘여성’: ‘신화파괴자’의 아비투스 이정숙(국문학자)

1. ‘자유’와의 접속, 미래로서의 기원 가부장제를 체제로 규정하고 이 체제가 전 세계 여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자본주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점을 일찍이 설파한 사람은 마리아 미즈(Maria Mise)이다. 봉건적, 가부장적, 후진적 관계들을 일소하겠다는 근대성의 공약이 실현되었지만 유독 젠더 사이의 가부장적 관계가 끈끈히 남아 자본주의 재생산의 동력이 된다는 가부장제 체제론은(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최재인 역, 갈무리, 2014 참조) 전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이 존재해 온 방식에도 유용하게 적용된다. ‘남아선호’라는 표상으로 체제의 구조를 휘발시키는 전략이 오래 통용되었지만, 가부장제는 훨씬 구조화된 언어들로 한국 여성의 삶을 지배해왔다. 박완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일정 부분 천부적이라는 점을 최소한 인정하는 입장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여성의 감정과 사고방식과 판단이 이 세계를 구조화하고 인식하는 데 쓰임이 있다는 확신을 언어로써 증명했다. 1931년생이라는 세대적 특성과 문화적 경험이 여성에 대한, 여성의, 여성적 사유를 정체화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자명하다. ‘여성’의 관점으로 박완서의 작품세계를 사유할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의지이다. ‘여성’을 ‘자유’와 접속시키는 방식은 작가의 독특성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한 개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전기적 환상(illusion biographique)’과 단절하고 장(champ)의 궤적을 따라 이해하는 방법을 제안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의 독특성을 살필 수 있다. 박완서에게 이 궤적의 첫 출발은 박적골이라는 ‘신화적’ 세계로부터 송도, 서울로 유년기를 이끈 어머니의 결단에서 비롯한다. 대가족의 종부였던 어머니의 감행은 할아버지의 두루마기에 묻어 온 ‘대처’의 냄새를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으로 막연히 동경하던 박완서에게 현실적으로 자유를 구가할 조건으로서 지식의 세계와 접속해야 한다는 전망과 필요를 심어 준 것이었다. 거기에는 물론 가부장제 질서로부터 일탈을 감행한 어머니의 분노, 용기 그로 인한 ‘불화’가 전제돼 있다. 박완서는 이 불화의 진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가부장제의 장벽을 ‘간단히’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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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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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현저동 산꼭대기에 자리를 잡고 삯바느질로 일감을 교섭해 와 어린 딸이 명문사학에 다니도록 뒷바라지를 한 열정을, 그 ‘싸움’을 여러 차례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지식에의 추구가 전쟁으로 좌절됐을 때, 전쟁통에 닥친 가족의 죽음과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실존의 무게를 견뎌야 하고(『나목』) 허기를 채우려고 딸을 유곽에 내몰려는 광증에 가까운 천박함을 물리쳐야 하는(『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여성의 삶이 도처에 펼쳐졌다. ‘인지와 평가의 도식’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투스(habitus)의 차원에서 전쟁은 선입견들의 오류를 드러내는 기제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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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함으로써 박완서가 자기본위의 판단을 구축한 1970년대 여성 인물을 창조하게 만들었다. 그 중 하나로, 지식과의 접속에서 좌절한 박완서가 박수근과의 만남을 통해 순수예술의 깊이에 접속했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수복 후 텅 빈 폐허가 된 도시에서 오발 총상으로 오빠가 죽자 망연자실한 어머니와 홀로 남겨진 올케 그리고 두 어린 조카들의 가장이 되어 미8군 PX 초상화부에 근무했던 박완서는 초상화부 인부로 만난 화가 박수근의 가난과 예술가로서의 안타까운 운명을 증언하고자 등단작인 『나목』(1970년)을 썼다. 박수근 사후, 그림값이 예술가의 가난 위에 황홀한 영예로 수여될수록 “비감이 자라나서” 그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박완서,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박완서 문학앨범』, 1992, 웅진출판 참조) 비루한 초상화 인부로 오인했던 박수근의 예술적 수준과 차원을 만난 것이 점차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론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성문제’ 소설의 전조격인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그 사례다. 74년 발표작임을 감안하면, 세 번 결혼했고 이미 두 번 이혼했는데 이제 막 세 번째의 결혼마저도 끝내려고 결심한 주인공이 이혼에 대해 “내가 선택했고, 내가 생전 처음 어떤 선택을 행사했다는 데 기쁨마저 느꼈다.”고 말하는 당돌함이 비범한 것임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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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그녀는 남편이 “아아, 징그럽다”고 느끼면 기어코 이혼하게 되는 징크스를 갖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만 징그러워졌다. 이 징그러운 느낌이 언제 발현되는가에 소설의 주제의식이 있다. 약게 살면서 돈만 아는 중농이었던 첫 남편, 사실은 돈과 명예에 찌들려 있으면서 집 밖에서는 위선으로 일관하는 비겁하고 겁쟁이인 대학 강사, 이번에는 대놓고 허영과 허풍에 들뜬 소문난 장사꾼인 세 남편들이 지향하는 것은 겉보기의 출세이자 돈과 명예만 추구하는 속물적 가치관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속물근성에 질린 채 다만 밥을 굶지 않는다고 해서 타협적으로 살아질 수가 없는 주인공의 아비투스는 같은 여성끼리라고 해서 수용되지 않는다. “양갈보짓을 해서, 딸을 그 짓을 시키지 못해 환장을 한 어머니를 만족시키기도, 누나는 굶건 말건 저희들 배만 채우려는 아귀 귀신 같은 동생들을


책, 264면)에서 선택한 첫 결혼의 파국 이래 주인공은 도덕성의 심급을 위주로 세상을 파악해왔다. 그 근원에는 70년대 근대화된 현재를 비추는 전쟁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빛나는 미적 감동이 놓여 있다. 피난길 손수레에 피난 보따리와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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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양하기도 싫었다. 나는 내 희생의 덕을 어느 누구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같은

동생들을 태우고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 폐허 속에서 의연히 눈발을 맞으며 서 있는 ‘남대문의 비장미’가 주던 감동이 그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주인공은 세 번째 이혼을 앞둔 현재 시점까지 전쟁이 파괴한 인간성과 근대화의 속물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윤리적 준거로 삼아 온 것이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이제는 남대문의 ‘정기(精氣)’마저 퇴색한 속물화된 도시에서 이제는 먹고 살만한 중산층이 된 여고 동창들이 속물적 근성으로 ‘한번 보자’고 연락을 해 오는 바람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젠더적 가치관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남자만큼이나 부끄러움을 한낱 교양적 포즈로 가장하는 여자도 입장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소설의 주제에 ‘자유’를 붙일 수 있다면, 급변하는 사회를 눈썰미 있게 관찰하면서도 사회를 휩쓰는 속물적인 가치들을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제어하는 법을 알고 있는 윤리적 행위자의 행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여성이 아니라 ‘그런’ 여성이 긍정되듯, ‘모든’ 남성이 아니라 ‘그런’ 남성이 부정되는 것. 그것이 박완서가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이자 70년대 내내 추구한 젠더관이라고 할 수 있다.

2. ‘글쓰기의 정치성과 글읽기의 당파성’ 사이에서 박완서를 오마주하면서 그의 맏딸 호원숙이 쓴 한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춘다. “글 쓰신 지 15년이 지나서야 겨우 어머니만의 책상을 갖게 되었다.”(호원숙,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어머니 박완서』, 『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2, 60면)는 문장이다.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겸양의 깊이를 가늠해 보게 되는 동시에 ‘작가’의 정체성이 결코 ‘생활’의 정체성을 앞질러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경이롭게 새겨진다.(더구나 다작의 작가가 아닌가!) 박완서 선생은 등단 후 “여류작가는 안 되리라, 어떡하든 그냥 작가가 돼 보리라 다짐했었다.”고 한다.(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평민사, 1977, 60면) 등단시절 ’여류’라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고, 여성이 쓴 소설은 깎아내려서 읽힌다는 대결 의지가 있었으며 그것은 곧 스스로(와)의 싸움이었다는 얘기다. 1970년대 한국문학사에서 박완서가 이룬 업적은 이 싸움이 어느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는지를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작가로서 출발한 장(champ)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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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아』였기도 하거니와, 특히 등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성문단’의 호출을 활발하게 받게 된 박완서가 80년대에 이르러 신문 및 여성잡지와 여성신문에 여성문제를 다룬 장편을 잇달아 연재한 것은 ‘장’의 의미를 (재)구축하려 시도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소제목으로 삼은 ‘글쓰기의 정치성과 글읽기의 당파성’은 새겨보면 뼈아픈 말이다. 박완서가 1980년대에 주로 쓴 ‘여성문제’ 소설은 담론진영의 평가에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80년대 박완서의 존재방식을 적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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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파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해당 표현은 그때까지 나온 박완서 문학에 대한 언급이 담겨있는 비평(담론)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세워놓고 여성해방주의적 관점에서 일갈한 기념비적인 평론 속에 담겨있다.(조혜정, 『박완서 문학에 있어 비평이란 무엇인가』, 『작가세계』1991년 봄호, 세계사, 1991, 3.) 이 평론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편견에 사로잡혀 여성억압에 (알게 모르게) 가담한 남성평론가들의 글뿐만 아니라 여성의 체험을 외면하는 ‘여성해방문학비평’진영까지도 비판한다. 그런데 그중 ‘남성적인 시각’으로 박완서를 솔직하게 읽은 한 남성평론가의 글이 역설적으로 박완서 소설의 정치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짚으면서 이 남성평론가의 독법이 곧 당파성의 전형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일반 독자들은 어땠을까. 최소한 여성독자들은 ‘읽기의 당파성’에 편승하지 않았던 것일까? 질문을 이렇게 돌리는 이유는 ‘여성문제’ 소설이 잘 담론화되지 못한 데는 고정관념들과의 싸움이 한 축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통 상황을 다소 추상화하면 쓰는 자의 의도와 읽는 자의 의도가 대화적 상황을 갖지 못하는 부조리한 양태 속에 80년대 박완서의 ‘여성문제’ 소설이 놓여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해방문학진영으로부터는, 여성문제를 다룬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세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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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날의 시작』(1979년 『동아일보』 연재), 『서 있는 여자』(1984년 『주부생활』에 『떠도는 결혼』으로 연재),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년 『여성신문』 연재)에서 제기한 젠더 이슈는 ‘결여’의 언어로 치부되었다. 80년대의 담론 환경에서 민족과 계급 문제에까지 가닿지 못한 중산층 가정 중심의 젠더 이슈는 적절한 독법을 만나지 못하고 미리 폄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작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일반 여성 독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들어야 했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의 단행본(전예원, 1980) 후기에서 작가가 썼듯, “목청 높은 비난 아니면 냉랭한 무관심”이 돌아왔다. 재현 여건의 측면에서 작가가 무려 10년에 걸쳐 ‘여성문제’ 소설에 천착한 점은 하나의 싸움이었다. 실제 이 소설들을 읽다보면,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제안한 것처럼 문장에서 ‘여성’ 대신 ‘남성’을 넣어 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바꾸면 이렇다. “아니,


아무리 배우지 못했기로서니 서방을 패다니.”(『서 있는 여자』, 세계사, 2012, 279면 ) “나는 직업을 가진 남성을 좋아하지. 우수한 제자 중 남학생은 대개 장가가면 사라지는 게 화도 나고. 네가 여자도 어려운 일을 잘해 내는 게 대견스러울 때도 많고.”(『서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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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얀 년을 봤나. 제 년이 감히 내 새끼한테 손찌검을 해? 어떻게 기른 아들이라구.

여자』, 370면) “그 애에게 거는 저의 가장 찬란한 꿈이 뭔줄 아세요? 여자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남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능멸해도 된다는 그 천부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운 신종 여자로 키우는 거죠.”(『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삼진기획, 1989, 162면) 그런데 사실 당대 대중의 젠더 감수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여성학 교과서로 통용될 정도로 호응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억압의 구조 내지는 여성해방의 방법론에 대해서 ‘여성문제’ 소설들이 얼마나 잘 짚어냈는지가 당대 페미니즘 비평의 검증 대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 장편은 가정 내부에서 여성들이 실제 부딪치는 가부장제의 억압과 폭력을 정조준해서 겨냥한다는 실감을 준다. 아내에 대한 구타를 포함해 혼외의 성적 방종, 생식능력의 주도권뿐만 아니라 몸의 욕망에 대한 주도권이 남성에게 있음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남성 아비투스가 서사화된 것이다. 중산층 가정의 여성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은 당대 비판의 소지를 제공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여성성에 대한 중산층적인 이상화를 해체하고 (시)어머니들이 내면화한 가부장제의 규범과 가치들이 곧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가부장제를 존속시킨다는 점이 조명될 수 있었다. 이 소설들에는 ‘부덕(婦德)’이라는 단어가 어김없이 나온다. ‘부덕’은 가정주부에게 요구된 도덕률이지만 박완서에게 이 도덕률은 그 불평등과 허구성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데 활용되었을 뿐이다. 자기보다 똑똑한 아내는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라고 이해하는 남편 때문에 학업의 길을 포기하고 새로이 경제적 자립을 일구어내는 청희의 고난(『살아있는 날의 시작』), 기자로서의 직업생활이 결혼한 여성에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는 연지(『서 있는 여자』), 애초에 싹수가 없는 남자를 인생에서 차치하고 과감히 홀로 낳아 기른 아들을 빼앗으러 온 남자로 인해 법정에 서는 고난을 맞이한 싱글맘(『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고통은 이 고통과 결별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다름 아닌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뿐이라는 귀결로 간다. 이때 ‘자유’는 상상력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에 가닿는, 현실적으로 ‘이혼’을 통해(서만) 뼈아프게 쟁취할 수 있는 삶이다. 물론 이혼한 여성에게만 나쁘게 적용되는 현실은 쟁취해서 얻은 ‘자유’조차 끊임없이 위협받는 ‘결혼’ ‘바깥’의 현실을 보여주지만 이들은 직업적인 소명으로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기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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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해방담론은 1975년 ‘세계 여성의 해’가 선포되고 한국 정부가 UN의 조약 비준에 참여함으로써 여성 정책을 입안할 의무를 갖게 된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1979년의 한 대담을 보면 진보적 여성운동가들은 여성해방운동이 대남성투쟁 중심이 아니라 인권 차원에서 계급간의 연대로 접근해야 한다는 당위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요원했다. 박완서는 75년 전후로 소위 여권운동의 허상에 대해서 여러 차례 글을 썼다. 정작 시장에서 만나는 평범한 여성들에게 여권운동은 현실감이 없어서 외면받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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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비판했다. 특히 빈곤층의 여성일수록 여성해방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꼬집었다. 당시 마산수출공단에서 일본인의 여공 추행 사건이 있었는데, 캐치 프레이즈나 바자회 같은 과시적 운동에 열중했던 여권운동이 이 사건에 대해서는 별무반응인 데 대해 강한 어조로 실망을 피력하기도 했다.(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평민사, 1977년 참조) ‘세계 여성의 해’에 맞춰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번역 소개되고 루이제 린저가 방한하는 등 여성해방과 관련한 언어들과 정치적 상상력이 한국의 담론공간에 유입됨으로써 젠더 감수성이 한 단계 나아간 점이 있지만,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존속되는 가부장제 문화가 사회생활에서도 연장되고 여성은 진입장벽 속에서 끊임없이 소외되는 현실에는 돌파구가 없었다. 박완서는 십 년 동안의 싸움을 통해 이점을 여성담론의 한 역사로서 기입하는 역할을 해냈다. 따라서 1984년 창립된 『또 하나의 문화』의 대담에서 박완서가 관념적인 어사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것을 의식화의 전단계처럼 이해하는 것은 오류이다. 분단 및 계급 불평등의 상황 속에서 젠더 불평등의 이슈를 언어화하고 사유한 작가로는 박완서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88년 남편의 죽음에 잇따른 아들의 죽음 뒤에, 그는 아들이 사준 워드프로세서로 중단했던 『미망』 연재를 새로이 재개한다. 그 후기 격으로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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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에서 박완서는, 가까이서 멀리서 지극히 보살피는 자녀들의 각별한 배려에 대한 고마움과 별개로 ‘자유’와의 결속이 자신을 수호한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남겨진 자유가 소중하며 그 안에는 자식들도 들이고 싶지 않다.”(박완서, 『자전에세이 나의 길-남편과 아들을 가슴에다 묻고』, 『동아일보』, 1991,3,10, 8면) 이 단호함은 80년대의 힘겨운 시간 끝에 고백한 작가적 아비투스의 요체일 것이다. 박완서 선생은 글쓰기로 구원을 찾음으로써 1990년대라는 ‘전성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투쟁 같은 글쓰기가 현재 여성(독자)들과 여성작가들이 큰 목소리와 존재감으로 서 있게 된 기원이자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할수록 다행한 일이다.


박완서가 포착한 한국 자본주의 정동(情動)의 미망(迷妄) ― 『휘청거리는 오후』, 『미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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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자본주의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1. 경제 만능주의 속에서 붕괴되는 사회경제 윤리 감각 우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외환보유고의 부족으로 국가부도의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른바 IMF체제로 들어서게 된 이후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이 흡사 쓰나미처럼 불어닥쳤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이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켜켜이 누적된 한국형 자본주의의 총체적 문제점이 한꺼번에 곪아터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그 발단은 경제 분야에서 촉발되었지만 경제 만능주의로 수렴된 한국 사회의 왜곡된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그 실제는 사회 전 분야에 팽배해진 부정부패의 구조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후 한국 사회의 참담한 고통과 각고의 노력으로 IMF체제를 벗어났다. 하지만 우리가 겪은 IMF체제의 경험은 한국 사회의 일상 자체를 전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IMF체제 이후 한국 사회의 버팀목이었던 중산층의 삶의 안팎에 대한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더욱 경제 만능주의 사회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는데, 종래 한국 사회를 지탱시켜주던 사회경제 윤리 감각, 가령 빠르고 늦는 정도의 시기가 문제일 뿐 열심히 착실히 노력하면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회경제 윤리 감각이 붕괴돼 버린 것이다. 그 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한 어린애의 장차 꿈을 묻는 질문에 대해 그 어린애는 빌딩의 건물주가 돼 편안한 삶을 사는 게 자신의 꿈임을 천진난만히 웃으면서 답변했다. 이 어린애의 답변은 작금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빌딩의 건물주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애의 꿈 자체가 속물적 성격으로 성급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이러한 꿈을 꾸게 된 어린애가 놓인 한국 사회의 성격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토록 다양한 꿈들 중에서 어린애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경제적 삶을 선택하는 꿈을 당당히 드러냈을까. 여러

*본문에서 두 작품의 부분을 인용할 때는 『휘청거리는 오후』(세계사, 2003년 2판)와 『미망』 상·하(세계사, 1996)을 활용하며, 별도의 각주 없이 본문에서 해당 작품의 (쪽수)만을 명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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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겠으나, 어린애가 무심결 자주 접하는 일상 속에서 이와 연관된 경제의 현상들이 어린애의 입장에서는 장차 행복한 삶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원대한 이상으로 다가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작금의 한국 사회의 경제 현상에 대해 대중이 피부로 접하는 면모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신의 유무형의 노동을 투자하여 경제적 성취를 얻는 것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한국 사회가 IMF체제로부터 벗어났으되 갈수록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노동의 가치가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한층 가속화되는 경제 만능주의가 야기하는 물신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위 어린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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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유사한 꿈들이 주류를 차지할 날이 멀지 않을 수 있다는 음울한 생각을 하곤 한다. 이처럼 지금, 이곳 한국 사회를 접하면서 박완서의 두 작품인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1977)와 대하소설 『미망』(1990)이 그려내는 모습들은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경제 윤리 감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21세기 지구화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삶과 현실은 어떠한 사회경제 윤리 감각을 벼려야할까. 『휘청거리는 오후』와 『미망』은 이에 대한 소설적 전언을 한국 사회에 타전하고 있다.

2. 왜곡된 욕망의 풍속도― 『휘청거리는 오후』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를 읽는 일은 이 장편이 집필된 시기인 1970년대 중반 무렵 한국 사회의 세태를 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세태를 이해하는 것은 그 시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달리 말해 한 시대의 지배적 욕망의 구조와 그 실제에 대한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촉수를 곤두세워야 할 것은 세태를 그려내는 소설이 그렇듯이, 박완서가 명민하게 파악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을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통과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삼투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가 배태한 욕망의 구조와 실제의 구체적 양상이다.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는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대중에게 매우 친밀한 일상의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휘청거리는 오후』의 중심 서사는 작중 인물 허성 씨의 딸들의 결혼과 연관된다. 전직 교감 출신으로서 소규모의 가내 공업 공장을 꾸려나가고 있는 허성 씨는 장녀 초희의 결혼과 연루된 일들로 혼란스럽다. 초희와 아내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인 양 결혼을 사회경제적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여긴 채 허성 씨를 전직 교장 출신으로, 게다가 수출 전망이 좋은 중소기업 사장으로 거짓되게 부풀린 채 초희를 상류사회 부잣집으로 시집보내려고 한다. 허성 씨는 그의 아내가 딸을 둔 어미로서 기왕이면 경제적 여건이 나은 집으로 딸을 시집보내려고


주체적 인식을 가졌다고 생각되었던 딸이 사랑의 가치를 애써 부정하고 “부자들의 생활의 재미”(67쪽)를 동경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딸의 속물적 욕망을 대하고 크게 실망한다. 심지어 초희는 자신의 이런 생각이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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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하지만, 어미와 달리 대학교육까지 받은 여성으로서

우리 젊은이들의 공통의 허점”(68쪽)임을 직시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 시대 탓”(68쪽)으로 돌리는 “딴사람처럼 빳빳하고 거만하고 황폐한 모습”(68쪽)을 보인다. 허성 씨는 초희의 결혼관이 사회경제적 신분 상승의 욕망과 철저히 연루된 것을 우두망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초희의 이런 결혼관을 대할 때마다 허성 씨는 괴롭고 혼란스럽다. 초희와 아내가 지금의 허성 씨의 집안을 경제적 빈곤 때문에 부끄러워한다고 하지만, 허성 씨는 그의 왼쪽 손끝이 새끼 손가락을 제외하고 잘려나가는 신체 장애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그의 노동으로써 소규모의 가내 공장일망정 정직하고 성실하게 공장을 운영하면서 집안의 안녕을 유지해온 자긍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희는 이런 허성 씨의 삶의 안팎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거짓 수단을 통한 결혼을 통해 허성 씨의 삶과 전혀 다른 상류사회의 삶으로 진입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비정상 속에서 재력이 막강할수록 사회의 모든 유무형의 권력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부자들의 생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사회의 왜곡된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기 때문이다. 박완서는 한국 사회의 저변에 짙게 깔려 있는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왜곡된 세태 속에서 왜곡된 욕망의 풍속도를 결혼에 초점을 맞춰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결국, 초희는 그와 어머니가 꾸민 허성 씨의 거짓 신분이 탄로되면서 파혼을 겪는다. 하지만 초희는 또 다른 재력가인 공회장과 결혼을 하여 자신의 꿈을 성취한 듯 보이지만, 초희의 결혼 생활은 그가 평소 꿈꿨던 상류사회의 품격 있는 도도한 ‘생활의 재미’이기는커녕 천박한 자본주의의 사업가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남편 공회장과의 불화로 인한 신경안정제의 과다 사용과 급기야 약물 중독에 걸려 임신중절의 상처를 입는 등 불행한 삶의 감옥에 갇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박완서의 세태비판은 정곡을 찌른다. 그토록 결혼의 형식을 통해 사회경제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고 싶어한 초희는 자신의 꿈과 욕망을 이뤘을까. 특히 1970년대 중반 한국 자본주의가 도달한 과정을 통해 헤아릴 수 있듯, 한국전쟁 이후 이렇다 할 경제의 자력갱생 기반이 갖춰져 있지 못한 한국 경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초희의 결혼 상대자인 상류사회 재력가들이 자본주의 사회경제의 윤리 감각이 함양되지 않은 채 경제 만능주의에 집착한 맹목화된 자본축적의 욕망은 초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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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중의 삶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상류사회 재력가에 대한 초희의 비판적 인식이 결여된 것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박완서에게 비쳐진 1970년대 중반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세태는 사회경제 윤리 감각이 빈곤한, 심하게 진단하면, 이후 이러한 세태가 지속될수록 결혼을 비롯한 각종 일상이 왜곡된 자본주의 및 그러한 자본주의에서 사회경제 윤리 감각이 결여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하여 『휘청거리는 오후』는 맹목화된 자본축적 욕망의 복마전이 일상화될 수 있는 끔찍한 현실을 겨냥한 예지적 비판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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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휘청거리는 오후』의 마지막 장면이 경고하는 소설적 전언은 자못 흥미롭다. 허성 씨는 초희의 이 같은 결혼 생활이 파탄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터에 초희 동생의 결혼식 날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어기면서 진행했던 일이 부실공사임이 결국 드러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이윤을 남기기 위해 일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부정행위가 초래할 파국을 작가는 징후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3. 역사의 미망에 응전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정동(情動)― 『미망』 『휘청거리는 오후』가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진행된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바탕으로 한 욕망의 왜곡된 풍속도를 대중의 일상과 긴밀히 접속돼 있는 결혼을 중심으로 풀어갔다면, 『미망』은 그러한 한국 사회의 세태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역사적 통찰로서 긴 호흡을 갖고 써내려간 대하소설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망』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소설이 다루는 시기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개화기 전후를 포함하여 일제 식민체제와 한국전쟁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을 대상으로 하고, 다루는 공간은 개성(옛 송도)-경성-만주/중국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일본 등 동아시아시를 두루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시공간이 중요하되, 특히 예의주시할 공간은 개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완서가 개성에 주목한 이유는 정치행정적 중심지인 서울의 한양과 달리 개성은 고려시대의 그리고 “조선팔도의, 아니 청국, 아라사, 일본과 물산과 돈이 집산하는 중심지였고 한바탕 꿈을 펴보기에 손색이 없는 대처”(상:172쪽)로서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던 상업도시로서의 번영과 영화”(상:172쪽)가 면면히 내려온, 말하자면 상업자본주의의 맹아가 싹 튼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성은 고려시대부터 인삼을 주거래 상품으로 한 송상(松商)의 상업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으로, 박완서는 『미망』에서 한국의 근대적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통찰을 이곳 송상의 내력을 중심으로 서사화한 것이다.


널리 분포돼 있는”(상:32쪽) 마을의 가난한 소작농 출신인 소년 전처만은 향반 이생원으로부터 아비가 당한 수모를 목도하고는 이생원처럼 몰락한 향반의 권위를 부여잡고 무고한 양민 위에 군림하는, 즉 “의롭지 못하게 비롯된 새로운 왕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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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에서 우선 주목할 인물은 전처만이다. “개성에서도 가장 삼포(蔘圃)가

나아가 벼슬을 함으로써 망국의 한을 더욱 욕되게 하느니 차라리 돈을 벌자, 새로운 왕조의 이념인 유교가 가장 능멸하여 거들떠보지 않는 장사꾼이 되어 돈을 벌자고”(상:46쪽) 굳게 맹세한다. 그러면서 전처만은 상업활동 중 특히 인삼과 관련한 상업에 매진하여 개성 상인을 대표하는 거부(巨富)로 성공한다. 분명, 전처만이 이룬 경제적 성공은 애초 향반 이생원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그는 “돈으로 하여금 도리(道理)를 잃게 했을 때 저절로 부를 누릴 자격이 없어진다는 걸”(상:193쪽) 자신의 파란만장한 상업 활동의 경험 속에서 깨닫는다. 그리하여 전처만이 경계하고 질책하는 대상은 상도덕(商道德)을 어기고 시장의 질서를 유린하면서 오직 돈을 버는 데만 집착하는 상업 활동이다. 그래서 전처만은 아무리 자기 자식이되 “그의 아들 이성이가 얼마나 파렴치한 방법으로 왜놈과 결탁하고 관을 매수해서 돈을 벌었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마지막으로 역성들어야 할 것은 자식이 아니라 송방의 계율”(상:194쪽)임을 몸소 실천한다. 이것은 박완서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근대적 자본주의 이전 상업자본주의 맹아 단계에서 보이는 사회경제 윤리 감각의 한 전형이다. 여기서, 비록 전처만도 이성이처럼 한때 인삼 밀무역을 통해 돈을 벌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자신의 상업활동이 더 이상 존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성찰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전처만은 그의 손녀 태임에게 각별히 기대한다. 이것은 개화기에 직면한 시대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적 유교질서가 지배적인 가부장 중심제 조선조 사회는 개화기 무렵 각종 근대의 문명이 서구로부터 유입되면서 그것에 대응하여 근대적 제도가 생겨났는데, 여성에게도 신교육의 기회가 개방되면서 주체적 개인으로서 자기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저간의 흐름을 전처만은 주시하고 있었다. 전처만의 총애를 받은 태임은 이러한 개화기 신문명의 흐름을 자신의 방식으로 섭취함으로써 송상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새 세대의 송상 역할을 맡는다. 말하자면, 태임은 어엿한 여성 경영자로서 거듭난 셈이다. 그리하여 여성 경영자로서 태임이 관리 및 수행하는 ‘인삼 농사-송농(松農)’과 ‘인삼 상거래-송삼(松蔘)’은 할아버지 전처만의 경영방식보다 진전된바, ‘고려인삼’이란 상품브랜드 가치를 신장시키기 위해 홍보 및 광고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상행위 형식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자본이 잠식해온 국내 인삼 시장에서 “새로운 살 길”(하:111쪽)을 개척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 제국의 식민지 자본과 맞서 길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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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본의 움직임으로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기실, 『미망』에서 태임과 같은 이러한 민족자본의 움직임은 태임의 남편 종상과 그 아들 경우에게서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태임의 경제 활동이 그 조부 전처만 세대보다 한층 본격적 상업자본주의로서 민족자본의 모습을 보인다면, 종상은 가내공업으로서 양말공장과 본격적 공장제 공업의 형태를 띤 방직공장을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돈을 만주와 중국 일대 항일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고, 경우는 일본 유학을 통해 배운 고무 화학 기술을 활용하여 고무 관련 제조업 공장을 운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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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활동에 열심을 보인다. 이렇듯이 태임과 종상 부부 그리고 그 아들 경우는 일제 식민지의 경제적 억압과 착취의 엄혹한 현실의 역사 한계 안에서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는 민족자본의 존재 가치를 보증한다. 이것은 전처만의 아들 이성이와 친일협력자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박승재의 삶과 대비시킬 때 보다 뚜렷해진다. 『미망』의 제목이 고스란히 말해주듯, 박완서는 개성 상인 전처만을 필두로 한 태임을 중심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식민지 자본주의의 파고(波高) 속에서 어떻게 생성 및 성장하는지 그 험난한 도정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추적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 한국 사회의 현실이 웅변해주는바, 전처만 가계의 경제 활동은 식민지 근대 속에서 난경(難境)을 겪으며, 말 그대로 미망(迷妄)에 놓여 있다. 이 역사의 미망 속에서 태임 집안의 경제 활동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그 남동생 태남의 아들 경국이 과연 고향 개성을 떠나 강화도에서 인삼 농사를 어떻게 안착시킬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경국이 역시 그 전 세대가 헤쳐온 또 다른 역사의 미망 속에서 경제 활동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정동(情動)은 이렇게 역사의 미망에 대한 응전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성숙한 미래의 지평을 쉼 없이 모색하리라. (끝)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기억이 담겨진 몸, 늙음의 형상과 소설가의 말년/성 이선미(국문학자)

1. 기억의 덩어리, 늙음에 관한 사유 42년간 소설을 썼던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소설을 쓴 지 30년 되던 때, 작가로서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1980)을 발표한다. 소련의 체코 침공 후 공산치하에서 폐지압축공으로 살아가는 한 노인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늙은 노동자인 주인공은 책을 압축기로 분쇄하는 작업을 하면서 책을 가려내고 책을 읽어 교양을 쌓게 된다.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되었고.”,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1] 노작가는 자기 경험인 듯이 늙은 노동자를 통해 공산 치하 체코에서 인류가 살아온 궤적으로서 ‘앎’을 부정하고, 통제하고, 폐기하는 사회적 과정을 보여준다. 삶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의 실물인 ‘책’이 불필요한 ‘앎’으로서 폐기되는 현실과 그 지식(책)을 ‘기억’으로 담아낸 늙은 몸을 통해 공산치하의 폭력에 저항한다. 이 늙은 노동자의 몸은 시간이 쌓이듯이 폐기된 ‘지식’이 기억으로 쌓인 실물이다. 이 노동자의 늙은 몸은 정신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이 몸에 스며들어 뇌와 심장을 적시고 혈관을 타고 스며든다. 몸은 기억의 저장고인 셈이다. 지식을 말살하는 세월을 견뎌온 늙은 몸은 많은 기억(지식)을 흔적으로 담고 있다. 뇌와 몸으로 담아내는 시간의 흔적으로서 ‘늙음’을 사유하는 소설이다. 늙는다는 것은 흔히 육체적 기능이 떨어지고, 유기적 존재로서 물질성, 또는 감각적 성질이 퇴화해가는 것으로 말해진다. 육체성의 퇴화와 소멸에 걸맞게 정신이 온전함을 읽어가는 것으로 규정한다. 늙는다는 것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향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폐지로 만들어 없애버리는 일을 하는 이 늙은 노동자는 물질로서의 책을 없애면서 지식을 읽는 행위를 통해서 지식을

[1] 브후밀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2016, 9-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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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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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몸에 담아낸다. 책이라는 물질이 읽는 행위를 통하여 ‘지식을 기억하는 몸’이라는 물질로 이전하며, 시간이 쌓이듯이 읽는 시간에 따라 기억이 쌓여간다. 시간의 흐름을 기억이라는 잔여물로 전환하여, 기억이 쌓여가는 몸으로 ‘늙음’을 구성해낸다는 점에서 늙음을 기억의 덩어리로 인식한 셈이다. 박완서 소설에서도 늙음은 갈피갈피 단편적인 것들로 의식되는 기억을 저장하여 깊은 지층을 이루듯이 담고 있는 몸으로 형상화된다.[2]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들은 감각을 매개로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을 통해서 과거의 경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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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닥뜨린다. 감각적 기억이 우연적으로 연상되는 자극을 받아들일 때마다 노년의 서술자는 유유자적 떠돌듯이 여러 시간의 기억들 사이를 배회한다. 오래 살았다는 사실은 기억의 지층도 두텁고 깊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기억들 사이를 배회하는 일은 끝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늙음은 수많은 기억이 저장된 몸이다. 그러나 기억은 흔적이기에 인과적이지 않고 단편적으로 의식될 뿐이다. 기억을 쫓아서 떠도는 과정은 의도한 것도 아니고 목적도 없기에 유유자적하는 듯 드러난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감각적 기억 때문에, 평화롭고 유유자적하는 늙음의 일상적 나날들은 불안감이 스며있는 극적 긴장과 얽혀서 표현된다. 경험한 오랜 세월의 흔적이 감각의 기억으로 담겨있는 몸으로서의 ‘늙음’. 박완서는 1991년 연작소설집 『저문 날의 삽화』를 발간하면서 이 늙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서사화한다. 현역작가를 꿈꾸었고, 오랜 과거를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지금 여기에 작동하는 과거를 다룬다는 점에서 언제나 현역이었던 박완서 소설에서, 늙음의 형상 역시 “지금-순간” [3]의 것으로 드러난다. 과거를 행복한 경험으로 회상하고 역사적 연속성으로 파악하는 관조적 태도가 아니다. 기억이 지층처럼 쌓인 덩어리로서의 늙은 몸. 말년에 접어든 박완서의 소설에서 부각된 ‘늙음’은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이 덩어리로서의 몸, 신체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적 사유의 한 자락이다. 작가 자신의 기억에서 출발하여 한국사회의 역사적 과거가 기억되는 방식을 문제삼는 박완서 소설은 시간이 축적된 몸으로서 늙음을 문학적으로 주제화할 때 더 큰 긴장과 울림을 발휘한다. 한국사회에서 ‘늙음’은 경험적 과거를 망각해야 하는

[2] 1986년에 발표된 박완서의 소설 「꽃을 찾아서」에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허물어진 흙더미로서의 땅속 지층으로 켜켜이 쌓여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땅속의 지층이 시간의 흔적으로 공간화되듯이, 시간의 흔적으로서 기억이 서술자의 늙은 몸으로 실물화된다는 비유로 볼 수 있다. [3] 발터벤야민이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며, 이때 구성의 장소는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으로 충만된 시간이”라고 말할 때의 지금 순간의 의미이다. 발터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해여, 폭력 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길, 2008, 345쪽.


소설의 구성은 더 복잡해지고, 단편적 일화들이 연결된 삽화적 구조가 강화된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노년의 일상이 급작스럽게 흐트러지고 산만하게 풀어헤쳐지는 구조는 늙음 자체를 연속적인 연대기로 구성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망각 메커니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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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현재)’과 대결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늙음을 다룬

관련된다.[4] 박완서 소설의 늙음은 평화로운 노년의 판타지와 잠복된 감각(기억)의 돌출로 인한 내적 충돌의 (신체)증상으로 형상화된다.

2. 저문 날의 삽화 : 냉전 사회의 기억과 ‘늙음’의 형식 나이 마흔에 등단한 작가로서 박완서의 소설은 2011년 작가가 생을 마치기까지 줄곧 이어졌기에 어떤 작가의 소설보다도 노년의 서술자나 주인공이 많이 등장한다. 198791년까지 발표된 소설의 서술자나 주인공은 늙음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사화된 소설들을 모아서 연작소설집 『저문 날의 삽화』(1991)가 만들어진다. 이후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부터는 본격적으로 ‘늙음’을 테마로 한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며, 마지막 단편소설집 『친절한 복희씨』(2007)는 칠순을 넘긴 노평론가의 작품해설까지 곁들여 박완서 소설을 ‘노년문학’의 대표로 상찬하기도 한다.[5] 『저문 날의 삽화』 연작집의 소설들은 늙은이의 현실과 그 현실을 성찰하는 시선을 통해서 ‘늙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1986년에 발표된 단편소설 「꽃을 찾아서」부터 「저문 날의 삽화」 연작 다섯 편에 이르는 작품들은 한 편의 소설인 듯이 한 평생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평온한 일상이 전경화된다. 퇴직한 남편이 아내를 도와 부엌일을 하는 장면부터 아내가 꽃밭을 가꾸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노년의 판타지 같은 장면으로 이어져 누구나 꿈꾸는 노년의 평화를 ‘현실’로서 구체화한다. 「저문 날의 삽화」 연작을 포함한 노부부의 소설들을 계기로 박완서 소설에서 노년, 혹은 늙음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그저 노인이 등장해서라기보다는 노년의 판타지 같은 삶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들에는 젊은 날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서 벗어나,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4] 한국전쟁기에 자행되었던 민간인 학살과 같은 피해들은 희생자들이 희생자임을 말할 수 없는, 망각되어야 하는 정치적 규범을 만들어낸다. 기억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배제와 처벌의 명분이 되는 사회에서 망각은 생존의 방 식이었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이것을 “기억과의 전쟁”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망각의 메커니즘은 이런 정치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김동춘, 『이것이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2013 참조. [5] “원숙한 세계인식”, “지혜와 관용과 이해의 정서”라는 평가를 중심으로 박완서 문학의 ‘늙음’을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한 비판적 독서가 필요하다. 이선미, 「박완서 소설과 ‘비평’: 공감과 해석의 논리」, 『여성문학연구』, 2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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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평범한 일상의 자유와 평화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하는 볼거리들이 넘쳐난다. 평온한 일상적 장면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극단적인 감정과 어우러져 노년의 여유로운 일상을 향하는 성숙한 통찰을 깊은 울림으로 이끌어낸다. 푸르른 잎이 무성한 여름의 나무들이 한낮의 땡볕을 받아 빛을 발하는 순간을 가장 독기가 오른 것으로 표현한다거나 매미소리를 “낭자한” 것으로 표현하고, 그 절정의 상태를 “허무의 극치”로 표현한다.[6] 가장 절정인 순간에 그 스러짐을 상상하고 허무를 느끼는 세상의 이치를 향한 성숙한 사유이다. 평온함의 한 가운데에서 극단의 허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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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기에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노년의 판타지로서 더 그럴듯하다. 죽음을 앞에 둔 늙음의 시간이 주는 자유로움과 평화, 그리고 소멸을 향한 허망함과 쓸쓸함의 정서는 가을날의 현란함을 드러내는 단풍잎이나 바람 한 점에 떨어지는 낙엽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노년의 평화로운 일상을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는 자연현상으로 표현함으로써 감상적 애상과 허무의 정서를 극대화한다. 늙은 촌부의 화려한 화장처럼 어색한 치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늙음’을 해석하는 낭만적 아우라를 생성시키는 원천이 되는 자연묘사이다. 허무를 향한 성숙한 시선은 사십 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한 노부부들이 느끼는 ‘혐오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미시적이고 사사로운 감정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일상의 현실성을 배가시키며, 늙음의 시간을 자각하는 성찰의 깊이를 더한다. 오랜 시간 같이 살았다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모습조차 함께 했기에 같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유일한 타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또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지기도 한다. 같이 한 시간이란, 견디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받아들였기 때문에 같이 한 것은 아니기도 한 복잡한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노부부는 같이 한 시간 속에서 느끼는 혐오감을 알고 있기에,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이 지나온 시간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성찰한다.[7] 비애와 혐오를 날 것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의식까지도 노년 판타지를 증폭시키는 성찰적 태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타지와 같은 노년의 평화롭고 자유로운 일상은 삽화적으로 배치되어 그것을 산산조각내거나 뒤흔들어버리는 극적 사건들을 내포한다. 평화로운 일상은 극적 사건들로 인해서 그저 배경처럼 물러날 정도로 불안감의 표지일 뿐임이 드러난다. 연작소설 『저문 날의 삽화』는 다섯 개의 소설 모두 은퇴 후의 자유롭고 평온한

[6] 박완서, 「저문 날의 삽화 5」, 『저문 날의 삽화』, 문학과지성사, 1991, 160쪽. [7] 박완서, 「저문 날의 삽화 3」, 위의 책, 115쪽.


긴장을 만든다. 「저문 날의 삽화1」에서는 아들에 대한 욕심으로 데려다 키운 아들이 혼외자인 것을 알고 운동권이라는 것을 빌미로 내쳐버린 것에 대한 자의식이 노년 서술자의 감각적 기억으로 떠오른다. 어린 손주들을 돌보는 한가로운 일상 속에서도

문인사기획전 4

노년의 일상을 전면화한 가운데, 그 평화를 뒤흔드는 단편적 기억이 불현듯 솟구쳐

운동권 의붓아들의 존재가 그늘을 드리울까 노심초사하는 극단적 불안감은 파문을 일으키듯이 일상을 흔든다. 이 작은 파문은 노년 서술자의 어릴 적 엄마가 용수를 뒤집어쓰고 끌려가는 독립운동 관련 죄수들의 행렬을 못 보게 하려고 자신의 눈을 가린 기억과 연결되어 역사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년 서술자인 ‘나’의 것과 한통속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 근대화의 보신주의, 가족이기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심성(망탈리테)’이다. 물론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마음들은 식민지적 근대화와 반공주의의 정치권력이 작동하는 사회적 마음이다. 트라우마처럼 늙은 몸 안에 담겨져 봉인된 기억이기에 연속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이다.[8] 불현듯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일상적 사건들과 내면적 상황은 조각난 파편처럼 단편적인 삽화로서 재현된다. 소설은 그런 모양 그대로 기억이 흔적으로 쌓여있는 실체로서 늙음과 늙은이들의 일상을 지금 여기의 삶으로 배치한다. 한국사회의 늙음(저문 날)은 삽화로써만 이야기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구성이다. 단편적 기억으로 인한 불안과 긴장은 치매 같이 정신적 노화가 극심해지는 상태에서 분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90년대 작품인 「환각의 나비」(1995)와 「꽃잎 속의 가시」(1998)는 정신의 퇴화, 자기의식의 상실로서 ‘치매’를 늙음의 한 극점으로 형상화한다. 기억의 덩어리로서 늙은 몸은 노화가 극단화된 치매 상태가 되면서, 오히려 증상으로서 나타나는 파편적 기억을 이어 맞추어 그 기억으로 회귀한다. 트라우마의 전면화인 셈인데, 침묵으로 봉인된 늙은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늙음의 극단적 상태인 치매 상태에서 파편화된 기억들을 복원하는 것이다. 치매에 걸려 길을 잃을 때마다 아들과 처음 살던 집 주변에서 발견되는 「환각의 나비」의 늙은 여성, 미국사람들의 화려한 수의를 아메리칸 드림의 완성인 듯이 착각하고, 그 옷을 입을 날을 꿈꾸었던 이민생활의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수의에 집착하는 「꽃잎 속의 가시」의 치매 걸린 노파.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박완서 소설의 늙음은 자유롭고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근대화 세대의 봉인된 기억, 지층으로 쌓여 덩어리가 된 기억이 담겨진 병든 몸으로 표현된다. 이 노인들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냉전 사회적 규범이 강력한 가부장적

[8]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플래닛 2007 / 다우어 드라이스마, 『망각』, 에코, 20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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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살아온 근대화의 주역이었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또는 이민도 애국이 되는 사회에서 국가의 규범을 의심 없이 내면화하여 살아남은 노인들이다. 강압적인 규범사회에서 경제적 성공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노인들은 딸들을 소외시키고,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내쳤던 말 못할 기억을 품고 있다. 풍요로운 노후의 평온한 일상을 누리면서도 늙은 몸은 그 시간의 기억을 담고 있는 실물이다. 치매라는 정신적 퇴화를 겪으면서 몸에 담긴 기억이 실체를 드러낸다. 평온한 듯한 노년의 일상이 무너져 자기를 상실할 때, 파편화된 채로 묻혀진 기억이 역설적으로 복원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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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사실을 은유한 형상이다. 기억이 담긴 늙은 몸은 한국의 냉전사회적 징후가 그대로 나타난 증거물로서의 실존이다.

3. 늙은 몸의 기억에서 사회적 담론으로 : 소설가의 형식 실험과 말년/성 “나이듦이란 무언가를 경험하고, 지혜를 획득하고, 사랑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더라도 자기 모습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는 것” [9]이라는 최근의 통설은 노년을 향한 판타지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생물학적 생존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사유는 다각도로 이루어진다. 멀리는 기원전 키케로의 『나이듦에 관하여』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현대철학에서는 시몬느 보봐르의 『노년』이라는 두툼한 저서에 이르기까지 늙음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었으며,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잘 늙어가는 것과 관련된 담론은 점점 무성해진다. 문학 역시 늙음 그 자체의 속성으로서 정신적 노화나 탐욕 등을 적나라하게 다루거나 그런 늙음을 성찰하는 성숙한 내면의식을 다루는 경향들도 늘어나고 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늙음의 한 가운데에서 소설을 썼던 현역작가 박완서의 문학은 당연히 작품 곳곳에 ‘늙음’과 관련된 상황이 넘쳐난다. “순전히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10] 쓴 소설이라고 강조하며 자전소설을 발표한 것처럼 박완서 소설은 기억과 긴밀히 연관된다. 기억이 지층으로 쌓여진 기억의 덩어리로서 늙은 몸은 박완서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적 원천이다. 늙음이 기억의 덩어리로서 실물화되고, 서사적 가치를 갖는 것은 침묵으로 봉인된 기억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참혹한 편가르기식 전쟁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발설할 수 없는 ‘트라우마’로 간직하며 냉전의 시간을 살아야 했던 몸, 망각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파편화된 채 봉인된 기억의 덩어리인 ‘늙음’이기 때문이다.

[9] 마사 누스바움, 솔 레브모아,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에크로스, 2018, 8쪽. [10]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1992, 작가의 말.


구성할 수 있는 ‘늙음’을 서사적으로 압축한 표현이다. 노부부가 만들어가는 평온한 일상은 이 잠복된 기억의 덩어리를 침묵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 불안정한 조건부적 상황이다. 이 불안정한 평화의 한 가운데에서 침묵으로 봉인된 기억의 덩어리인 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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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날의 삽화”는 조각조각 흩어져 어떤 감각, 단편적 인상으로만 기억을

몸은 냉전 사회를 입증하는 유일한 실물적 존재이고, 간신히 도달한 노년의 평화로운 일상과 늙은 몸이 담고 있는 파편적 기억의 공존을 표현하는 미적 방법이 “저문 날의 삽화”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박완서 소설에서 다룬 늙음의 서사가 노년의 성숙한 시선이 압도하는 가운데 단절적인 삽화들이 끼어들어 산만한 구조를 취하는 것도 작가의 미적 방법론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특이하게도 2009년에 발표된 「빨갱이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노년의 서술자는 늙은 몸에 담긴 기억, 트라우마에 가까운 깊은 상처인 빨갱이 가족으로서의 기억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근대화의 주역으로서 냉전 사회의 규범을 따라 성실히 살아온, 고향 땅에 시골집을 지닌 평화로운 노년 세대로서 서술자는 혼자만 간직한 기억이 마당에 파묻혀 있다. 아버지가 북에서 내려온 삼촌을 삽으로 쳐서 죽이고 고향집 마당에 묻었다는 어릴 적 기억이 담긴 늙은 몸은, 고향집 마당처럼 기억을 파묻고 침묵한 채 살아낸 몸이다. 소설가로서 말년기에 해당하는 70대 후반에 발표된 소설에서 노년의 서술자는 그 마당이 파헤쳐져 안정적으로 살아온 생애와 일상의 평화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약자로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말하고, 소통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소설은 각기 말 못 할 사연을 지닌 세 명의 여자들의 세 가지 사연이 삽화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이 삽화들은 구술을 풀어놓듯이 서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침묵으로 봉인된 몸의 기억을 파편적인 상태로 드러내는 삽화적 구성과는 다르다. 사회적 공론화를 위해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연대를 시도하는 각자의 이야기로 들린다. 기억을 담고 있는 늙은 몸은 기억을 소통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공통성을 지닌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기를 원한다. 침묵으로 기억이 봉인된 몸에서 타자와 공감하고,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비약할 꿈이 드러난 소설 형식의 변화이다. 박완서 문학에서 늙음의 서사는 그 사회 역사적 관계를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실험의 장이 되고 있다. 예술작품의 형식적 특성과 인생의 주기로서 노년의 창작 정신과의 관계를 논의한 『말년의 양식』은 예술가의 말년에 나타나는 형식실험, 혹은 그를 향한 실험정신의 발현을 ‘양식’으로 특화하여, ‘말년성’으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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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맞게 늙어가는 것으로서의 ‘시의성’”에서 벗어나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작품과 사상이 새로운 이디엄” [11]을 얻는 것을 말년의 양식이라 지칭하기도 하며, “조화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않은 긴장,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비생산적인 생산력을 수반하는” 것을 말년의 양식으로 탐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에서 벗어나 자발적 망명” [12]으로 설명되기도 하는 말년의 양식은 노화에 따른 성숙미나 관조적인 태도를 뒤엎는 파격과 반전의 창작을 양식으로 개념화하고자 하는 시도라 할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보이는, 노화에 따른 성숙이나 관조적 태도를 뒤흔드는 늙은 몸의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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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으로 해석해 봄직하다.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11]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 마티, 2008, 28쪽. [12] 에드워드 사이드, 위의 책, 40쪽.


고통의 현상학과 구원의 발생학 ―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 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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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참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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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연하게도 우리는 한 번만 살 수 있고 또 나로만 살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고 편협하다. 이 어리석음과 편협함은 개별 성격의 결함이 아니라, 제한된 삶이 필연적으로 산출해내는 무지의 결과일 것이다. 이 무지를 극복하려면 일회적이고 일인칭적인 경험의 한계 밖으로 나가 삶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별한 가치가 있는 그런 지식들은 대체로 ‘명제적 지식’이기보다는 ‘비명제적 지식’에 가까울 것이다. 전자가 “사실에 대한 지식”이라고 간단히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어떤 상태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전자는 습득과 전달이 상대적으로 쉽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사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는 법이나 수영하는 법처럼 말이다. 그런데 자전거나 수영보다 접근하기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인생이어서, 그 인생에 대한 비명제적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문학을 읽는다. 이를테면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마음, 그러니까 참척(慘慽)의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감히 알아내기 위해서.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응석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2]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나머지는 전부 내다 버리는 이런 문장을 박완서는 쓴다. 작가는 1988년에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었다. 당연히 글쓰기는 중단됐고 “통곡

[1] 매튜 키이란, 『예술과 그 가치』, 이해완 옮김, 북코리아, 2010, 150쪽 [2] 『박완서 소설전집 15-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1999, 239쪽.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괄호 속에 쪽수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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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린”(172) 일기만이 가능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작가는 이 글들에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제목을 붙여 1990년 9월부터 1년간 연재한 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비롯한 그 무렵의 단편 소설들과 함께) 1994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했다.[3] 일기니까 단순하고 직설적인 글일 것이라고, 그래서 소설보다는 못한 원재료 정도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작가 자신도 이 ‘일기’를 정규 작품집에 수록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이를 오롯한 작품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실제로 「욥기」 이래로 참척의 고통과 직간접적 관련이 있는 기존 작품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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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해 보아도 감동이 크다. 아서 프랭크는 우리의 아픈 몸에는 서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를 ‘복원(restitution)’, ‘혼돈(chaos)’, ‘탐구(quest)’의 서사로 분류하였고 이것들이 실제로는 서로 섞여 나타난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4], 박완서의 이 작품이야말로 전적으로 그렇다.

2. 혼돈: 고통의 현상학 작가가 슬하의 5남매 중 막내였던 외동아들의 장례식을 치른 후 자신을 내팽개쳐두고 있을 때 이를 보다 못한 맏딸이 어머니를 부산의 제 집으로 모셔간 것은 1988년 9월 11일이었다. 이후 9월의 일기 내내 작가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 어떤 종류의 경험인지를 묘사한다. 고통스러운 내부에서 시작되는 고통이 한없이 낯선 외부를 향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대목들을 참척의 고통에 대한 현상학적 묘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9월 12일 아침 부산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작가는 아들이 죽었는데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구역질을 견디기 어려웠고, 살겠다고 부산에까지 따라 내려온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음식을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받아들이지 못해 먹는 족족 토해내는 자신의 육체를 보며 그는 차라리 안도감을 느낀다. “나에게 지금 희망이 있다면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뿐이다.”(176) 아들이 죽었는데 세상이 그대로라는 사실도 끔찍했다. 하필 당시는 88서울올림픽 개막 직전이었는데, 아들이 떠났는데도 올림픽의 열기로 떠들썩한 이 나라가 저주스러웠다. “아아,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176) 이처럼 변함없는 세상을 향해 느끼는 배신감도 고통이었지만, 불가능한

[3] 『한 말씀만 하소서』(솔, 1994). 이 책은 정규단편집으로, 『저문 날의 삽화』(문학과지성사, 1991)과 『너무도 쓸쓸 한 당신』(창비, 1998) 사이에 놓여 있는 작품집이다. 이후 「한 말씀만 하소서」는 『박완서 소설전집 15』(세계사, 1999) 에 수록됐다가 이후 별도의 단행본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 2004)으로 분리됐다. [4]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최은경 옮김, 갈무리, 2013.


열 명을 모두 한 번에 잃고 그 자신마저 참혹한 피부병에 걸렸을 때, 그를 위로하러 멀리서 온 친구 셋은 막상 욥의 참혹한 몰골을 보고는 할 말을 잃는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 처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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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객체가 되어야 하는 고통도 컸다. 구약의 「욥기」에서 욥이 가축과 종과 자식

입을 열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2:13, 대한성서공회 표준새번역 개정판) 그들은 7일 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어설픈 위로의 말은 도리어 욥을 격노하게 만들 뿐이었다. 욥의 친구들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이들 앞에서 작가는 “그 자리에서 당장 꺼지고 싶은 마음밖에”(177) 없었노라고 적는다.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잊으라는지. 세월이 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격렬한 반감이 솟구칠 때도 없다.”(177) 고통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만으로도 이 작품의 인식적 가치는 크지만, 이 작품은 이제 곧 등장할 종교적 질문을 품으면서 「욥기」 이래의 지혜문학 계보 속으로 편입돼 들어간다. 그 오래된 질문은 이것이다. ‘죄 없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5] 이 억울함과 원통함을 욥은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평안히 살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나를 으스러뜨리셨다.”(16:12) 비극적 사건 이후 작가에게도 「욥기」를 읽으라고 권하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는 본래부터 「욥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인을 속여먹는 속임수 같았다.”(183) 욥의 고난이 애초 신과 사탄의 내기로 시작된 것이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저 ‘속임수’라는 말 속에는 이 텍스트가 욥이 던진 중요한 질문에 책임 있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는 힐난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욥기」에 답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혼란스럽고 논쟁적인 텍스트이기는 하나 최소 세 가지 정도의 선택지는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첫째, 당신의 고통은 무죄한 고통이 아니라 처벌이라는 것.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4:7) 둘째, 고통 속에는 교육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36:15) 셋째, 고통에 대한 보상이 언젠가는 주어져 신의 정의로움이 입증되리라는 것. 작품 말미에 욥이 신의 보상을 받듯이 말이다(42:10).[6] 작가는 이중 세 번째 선택지를 기각한다.[7] 그러므로 남는 것은 앞의 두 선택지다. ‘이 고통이 벌이라면 내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인가?’ 혹은 ‘이 고통이 신의 메시지라면

[5] 이 간단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긴 버전으로 바꿀 수 있다. ‘선하고 전능한 존재로 알려진 신이 죄 없는 자가 고통 받는 현실을 바로잡을 의사가 없거나 그럴 능력이 없다면 이는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는 증거일 텐데, 그런 신은 존재할 가치가 없거나 적어도 믿을 가치가 없지 않은가?’ 주지하다시피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반론을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부른다. 「욥기」는 반(反)신정론적 질문에 대한 신정론적 해결을 모색하는 텍스트이 며, 특별히 이런 목적과 구조를 갖는 텍스트를 우리는 ‘「욥기」 계열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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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인가?’ 그리고 작가는 이 일기 내내 이 질문들을 내려놓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처럼 다가오는 초반부 에피소드는 인상적이다. 딸의 권유로 부산 해변에 나간 작가는 한 노파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돌을 주워 포대에 담는 고된 노동을 행하는 장면을 본다. 기념품 제작 업체에 팔기 위해서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 격심한 노동을 기꺼이 행하는 노파가 자기 한 목숨 부지하자고 그 일을 하는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문득 “몹쓸 병이 들거나 술주정뱅이”(185)인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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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거니 하고 짐작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작가는 그 헐벗은 노파가 하염없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제 아들이 너무 훌륭해서 세상의 많은 별 볼일 없는 자식들을 둔 어미들을 은밀히 동정하기도 했다. “뇌성마비로 태어난 남의 자식을 보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걸 하는 모진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186)[8]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자식들을 둔 어미들이 미치도록 부럽다. 바로 그때 작가는 자신의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내부의 교만이 무너진 자리”(185)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이 교만이 나의 죄였던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벌을 받는 것인가. 그런데 이내 다음과 같은 분노의 반문이 터져 나온다. ‘나는 죄인이라 치더라도 불쌍한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하는가?’ “이 에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란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젯거리로 되살아난다. 사생결단 죽이고 또 죽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다 죽일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최대의 극치인 살의(殺意), 나의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6]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정론의 핵심 논리 중 셋을 단순화한 것이기도 하다. 로날드 그린(Ronald M. Green)에 따르면 신정론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1)자유의지 신정론(응보의 신정론), (2)교육적 신정론, (3)종말론적 신정론(보상의 신정론), (4)연기된 신정론(고통의 미스테리), (5)교제의 신정론. 이중 (1)~(3)은 본문에서 언급한 ‘「욥기」의 세 가지 선택지’라고 부른 것과 겹친다. (4)는 신이 주재하는 인간 고통의 이유를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 는 끝내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그래서 신의 정의로움에 대한 입증이 ‘연기되는’ 논리이다. (5)는 (3)과 일견 유사한데, 인간은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신과 강하게 ‘교제’할 수 있게 되므로 고통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신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소개는 다음 논문을 참조. 손호현, 「다원성과 모호성―구약 성서의 신정론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2권 1호, 2012년 7월. [7] “「욥기」 속에 하느님은 욥에게서 빼앗은 걸 고스란히 또는 두 배로 돌려주셨지만 현실 속의 의인이 부당하게 빼앗긴 걸 돌려받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는 물론 의인도 아니지만 의인이라 해도 내 아들이 살아올 리 없다. 그게 확실한데 「욥기」가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183) [8] 이 문장은 몇 년 뒤 한 편의 소설로 확장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상상』, 1993년 가을호)이다.


애초의 질문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격렬해져서 “맹렬한 포악”이 되었다. 신에 대한 오래된 항의가 신정론에 맞서 이렇게 터져 나온다.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문인사기획전 4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186~187)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톨릭에 입교한 지 4년 되던 무렵에 겪은 참사였으므로 작가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지는 않은 다음 두 자아 사이에서, 찢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내가 당한 고통의 의미를 내가 저지른 죄를 통해 찾아내려는”(203) 종교적 자아, 그리고 무능하거나 악한 신에게 “살의”를 느끼는 독신(瀆神)적 자아. 물론 이 두 자아는 동전의 양면이다. 작가 자신도 알고 있듯이 “가장 강한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173)하기 때문이다. 믿고 싶은 자만이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화를 낸다. 믿을 필요가 없는 이는 자신의 믿지 않음에 대해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질문은 질문대로 가열되는데, 주변의 무의미한 위로를 더는 견디지 못하겠는 마음도 더해져서, 작가는 이해인 수녀가 권한 대로 부산 분도수녀원에 한동안 들어가 있기로 마음먹는다.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돌보는 딸에게는 상처가 될 일이다.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눈치 보지 않고 실컷 울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끝내는 신과의 담판을 끝내기 위해서.

탐구: 한 말씀을 향하여 “그래, 나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돼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 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224) 이 “한 말씀”을 얻기 위해 수녀원의 첫 사흘 밤을 바쳤지만 신은 답을 주지 않는다. 도대체 답이 있기는 있는가. 있더라도 한 번에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어지는 일기에서 작가는 수녀원에서의 에피소드 몇 개를 일어난 순서 그대로 나열하는데, 독자 편에서는 긴장감 속에서 읽을 수밖에 없다. 하나하나가 문학적으로도 인상적인 에피소드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한 말씀’을 향해 가는 도정의 불가피한 단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병든 노인의 똥을 변기에 받아 들고 나오는 젊은 수녀의 해맑은 얼굴을 보는 순간이 아마도 첫 번째 계시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기에 와서 똥을 싸고, 또 누군가는 여기에 와서 그 똥을 치운다. 누군가는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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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필요로 해서 오고, 또 누군가는 이곳이 자신을 필요로 하니까 온다. 작가는 여기서 “부르심의 힘”(227) 혹은 “안배의 신비”(228)라는 것에 대해 최초로 생각한다. 어쩌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그 힘과 신비가 아닌가, 하고. 이곳에 와서 저 수녀를 보고, 가족끼리의 사랑만이 있을 뿐 타인을 향한 순수한 박애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믿은 자신의 편견이 깨어지라고, 그러라고 신이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두 번째 계시. 작가는 어린 예비 수녀가 수녀원을 방문한 속세의 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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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을 우연히 듣는다. 그 수녀가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 수녀의 남동생이 지독한 문제아여서 집이 편할 날 없었다는 것. 그런데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러한가 하고 내내 원망하는 마음이다가 어느 순간 문득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저런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는데, 내 동생이 절대 그러지 말란 법이 있는가.’ 내가 뭐라고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자 오히려 동생과의 관계가 순조로워지더라는 이야기였다. 작가는 이 사고의 전환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에서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로의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다면, 과연 그럴 수만 있다면 거기에 “구원의 실마리”(237)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환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절벽 끝에서 다른 절벽 끝을 향해 심연을 건너뛰는”(237) 일과 같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 번째 계시. 그로부터 얼마 후 작가보다 몇 살 아래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수녀원을 방문한다. 딸이 무병(巫病)을 얻어 치료했더니 이제는 수녀가 되겠다고 해서 차라리 그러라고 보냈다는 것, 그런데 수녀원 안에서 또 무병이 도져 이렇게 딸을 데리러 왔다는 것이 그녀의 사연이었다. 그 여성은 밤새 잠 못 들다가 새벽에 작가를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불러내 이런 신세 한탄을 한 것이었는데, 작가는, 그 정도쯤의 일에 앓는 소리를 하는 여성에게 화가 나서, 자신은 외아들을 잃었는데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고 건조하게 되받아치고 만다. 그는 자신의 돌연한 반격에 미안해하던 그 여성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생기가 도는 것을 놓칠 수가 없었고 이에 도리 없이 상처를 받는다. 타인의 더 큰 불행으로 자신의 작은 불행을 위로받는 일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작가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었듯이 그 여성도 그랬다. 내 슬픔에 비할 바 없는 작은 슬픔으로 나의 위로를 받으려 하다니. 다음날까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던 작가는 식사 자리에서 그 여성을 다시 만나자 보란 듯이 과식을 하는데 그게 그만 체해서 한바탕 지독한 구토를 한다. 변기를 붙든 채 비참한 평온 속에 있던 때, 작가에게 문득 어떤 깨달음이, 어쩌면 고대하던 ‘한 말씀’일지도 모를 것이 찾아온다.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물로 남을 해친 적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모르고 잘못한 적은

문인사기획전 4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숙여 승복했다.”(245~246) 아마도 깨달음은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것이리라. “정답”이란 이미 충분히 묻고 또 물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일 테고, 그럴 때의 정답이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 깨달음의 순간은 우리가 본 대로 최소한 세 개의 사건을 계시처럼 경험한 이후에야 올 수 있었다. 시간적 연속이 아니라 누적의 결과라는 뜻이다. 세 사건에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는가? 작가 자신이 직접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셋은 근본적으로 같은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박애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이 작가의 냉소적인 믿음에 균열이 발생한 계기였다. 두 번째 사건은 비극적인 일이 내게는 일어날 수 없고 또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은연중 자신에게 있지 않았던가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다. 세 번째 사건은 타인의 불행보다 자신의 그것이 더 크다고 믿으며 타인의 슬픔을 낮추어보는 지금의 자신을 환멸스럽게 발견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 세 사건은 모두 지금껏 이 작가를 사로잡아 온 어떤 믿음과 그 속에 담긴 교만을 자각하게 한 체험이 된다. 그런데 교만에 대한 각성이라면 이미 작품의 초반부에 작가를 찾아온 적이 있지 않았던가. 내 아들이 세상 최고라고 믿은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는 대목 말이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왜 서로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인가. 이 둘을 소유(having)에 대한 교만과 존재(being)에 대한 교만이라고 분별해볼 수 있을까. 전자는 내가 가진 것(아들)에 대한 ‘비교적’ 교만함이었지만, 후자는 자신의 편협한 인식 틀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이의 ‘절대적’ 교만함이라고, 그래서 전자에 대한 각성은 수치심과 반성을 초래하지만 후자에 대한 각성은 존재 자체의 붕괴와 거듭남을 불러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고, 그렇게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신정론의 맥락에서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초반부의 ‘교만’은 (앞서 각주 6에서 소개한 신정론의 다섯 유형 중에서) ‘응보적 신정론’(1유형)의 층위에서 각성된 것이어서 작가에게 교만이라는 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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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처벌로 (참척의) 고통이 주어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 등가적 조치인지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낳게 됐다면, 후반부의 ‘교만’에 대한 각성은 ‘교육적 신정론’(2유형)의 층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가가 고통의 합당성 여부보다는 교육 내용의 호소력에 더 집중하였으므로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말이다.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설명처럼 느껴진다면,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그때는’ 되어 있지 않았던 준비가 ‘이제는’ 된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실제 일어난 일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많은 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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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듯이,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정답이 찾아오지 않고, 설사 찾아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수녀원에서 보낸 시간 동안 작가는 자신의 질문 속에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정답을 알아볼/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거꾸로 말하면, 이제는 정답을 얻어 놓여나도 좋을 만큼 충분히 고통 받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즉, 작가에게는 혹시 이런 설명이 괴롭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을 지옥에서 끌어내기 위해 서서히 그 지옥으로부터 걸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이 변기 앞에서의 체험을 작가는 “구원”(246)이라고까지 명명하는데, 이 구원은 그러므로 신에 의한 구원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의 피나는 자기 구원이기도 한 것이다.

복원: 다시 삶과 글쓰기 쪽으로 이 ‘구원’ 이후 작가는 달라진다. 다음 날 일기의 첫 문장이 “좋은 날이다”(247)인 것도 그러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날 이후의 변화를 작가는 자신을 찾아온 자연스러운 ‘허기’로 실감한다. 지금까지는 딸들이 성화여서 혹은 수녀님들이 걱정해서 억지로 먹는다고 생각해 왔던 터다. 실제로 식욕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기도 했다. “참척을 평론글 ‘다섯 가지 주제어로 본 박완서의 문학’

겪은 에미는 그래 마땅했다.”(250) 그래서 이러다 아들을 따라 죽을 수도 있겠거니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작가는 순수한 허기에 시달리며 맛있게 밥을 먹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이 발견이 기쁠 수는 없다. “나는 내 육신에 대해 하염없는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251) 그러나 몇 줄 뒤에, 짐승과 다를 바 없게 하는 본능이야말로 “신이 준 능력”(251)인데 무슨 수로 거역하겠느냐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일 때, 이제 작가는 다시 삶 쪽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중인 것이다.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252) 이렇게 끝나도 좋을 일기는 그러나 끝나지 않고 몇 페이지 더 이어진다. 일기의 남은 부분에서 작가는 미국에 다녀온 일을 적고 있다. 수녀원을 나와 서울 집으로 돌아온 이후 다시 ‘구원’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전 막내딸을 만나러 미국에 가려고 만들어둔 비자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 그때였다. 차라리 잘 됐다고, 자신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보자고 도망치듯 떠난 여행인데, 정작 그곳에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들에 포위되고

문인사기획전 4

영혼의 대지진을 경험한 사람에게 당연히 여진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비극이 일어나기

고립되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과 갑갑함을 견딜 수가 없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만약 어떤 피치 못할 운명이 나를 이 땅에 죽을 때까지 묶어두는 일이 생긴다면, 생전 호강을 보장해준다고 해도 아들을 잃은 고통 다음가는 고통이 되리라고.”(260) 이를 깨닫자마자 그는 서둘러 귀국한다. 이 여정이 왜 일기 전체의 에필로그처럼 덧붙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작가로 하여금 한동안 떠나 있었던 모국어 글쓰기의 세계로 귀환하도록 만드는 제의적 여행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조금씩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261)

3.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의 현상학에서 구원의 발생학에 이르는 참혹한 진실의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 오해할 수 있겠는가. 참척의 경험을 한 이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그저 이런 것일 뿐이다.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173) 그러므로 이 일기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되어야 하리라. ‘구원이란 극복되지 않는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약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이 따위 요약은 지금 자기가 다루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무겁고 깊은 것인지를 모르는 자도 얼마든지 뻔뻔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명제적 지식 중 하나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고통이라는 것이 있음을 실감하는’ 상태에 대한 지식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력한 비명제적 지식 중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서 살아가게 되는’ 상태에 대한 지식일 것이라고 또 나는 짐작한다. 극복될 수 없는 고통과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삶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짐작만 한다. 이런 짐작의 끝에 내가 한 생각은 뜻밖에도 이것이었다. ‘이토록 큰 고통을 주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 고통까지 알고 싶지는 않지만 이 사랑이 무엇인지는 알고 싶다.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 일이 내게 허락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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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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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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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담


사회: 이종찬 / 패널: 고명철(문학평론가), 이선미(국문학자), 임옥희(여성학자), 호원숙(수필가, 박완서 장녀)

문인사기획전 4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2018. 12. 20(목) 19:30 @라파엘센터

이종찬: 가벼운 질문으로부터 오늘의 좌담을

문제를 여성 화자가 정면으로 응시를 했구나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완서 문학으로부터

생각을 했어요. 이후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첫 스파크가 발생한 개인적 순간이 궁금합니다.

스터디 그룹에서 읽게 됐습니다만, 저에게 아주

‘첫 스파크’라는 의미는 조금 포괄적으로

강렬하게 와닿던 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생각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먹었을까』였습니다. 싱아라는 열매가 뭔지도

처음 손에 쥐었을 당시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솔직히 몰랐지만 그 어감이 굉장히 신선했어요.

될 수도 있겠지만 스파크의 계기는 나중에

싱아. 입에서 굴리는 발음이요. 그 작품이

사후적으로, 또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저에게는 처음으로 박완서 선생님이 손을 내밀고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손을 덥석 잡은 작품이었습니다.

고명철: 간단한 질문인데도 옛날 기억을 다시

이선미: 오늘 여기 오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 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제가

제가 박완서 문학으로는 처음으로 박사 논문을

90학번입니다. 대학가에서 90년대와 80년대는

썼습니다. 그러저러한 관계로 제가 박완서 문학에

명확하게 갈리면서 시대 인식이 달라지죠.

대해 다양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많이

국문과였으니까 여러 선배들로부터 박완서

가집니다. 오늘 이 자리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학을 접하지 않고 국문과 학생 명함을 내밀지

기대를 많이 하고 왔습니다. 박완서 문학은 한국

말라는 이야기는 귀에 꽂히도록 들었어요.

사회의 근현대 과정이나 전쟁 이후의 과정, 또

그런데 실질적으로 제가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관통하는 서사의 특성을

건드린 것은 92년도입니다. 3학년 때였죠.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 논문을 썼지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인데요.

박완서 문학에 대한 연구는 연구대상이 편향되어

그 작품이 제게 들어온 것은 ‘분단문학’이었기

있고, 연구의 관점도 어느 한 분야만 집중된

때문입니다. 분단을 여성 화자가 성장 서사로

경향이 있어서, 아직 별로 연구가 많이 안 되었다고

밀어붙이는 힘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지금은

할 수 있습니다. 돌아가시고 난 후 긍정적인 연구가

젠더적 시각이 한국 문학에서도 많이 각성되어

활발히 그리고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있지만, 여성 화자가 한국전쟁을 관통해서

그 범위가 국한되어 있었고 비판도 많았던

복잡한 분단의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작품은

과정들이 있어서 제가 연구자로서 긍정적인

그때까지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때까지 접해보지

말을 퍼뜨리고 다녀도 그다지 무리가 없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거라 생각하고,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이런

먹었을까』를 접하고서 충격이 왔어요. 분단의

자리에는 흔쾌히 참석을 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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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1번 질문을 주셨는데, 저에게는 강렬하게 어느 시기가 딱 있습니다. 제가 1996년 둘째를

박완서 문학이 저와 같은 여성 연구자들과 만나는

가지고 학계 활동을 잠시 쉬고 있던 여름에

지점이 굉장히 특별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는

박완서 소설을 엄청나게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작품입니다.

박사 논문을 원래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둘째를 갖고 힘이 들어 휴학을 한 상황에서 박완서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82년생 김지영』도 베스트셀러가 된 시대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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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임옥희: 저 같은 경우 여기서 가장 뜬금없이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문학 안에서 엄청나게 글을 쓴 것도 아니고, 박사

하지만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을

논문을 쓴 것도 아니에요. 누구 못지않게 박완서

하는데요. 15년도 훨씬 전의 그 시절에도 여자가

선생님의 소설은 열심히 읽었습니다만, 이 자리에

직장을 다니거나 공부를 하는 일은 ‘네가 감당할

저를 불러놓은 것은 페미니스트의 입장으로서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식이어서 육아와

박완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가사 일을 전담해야 하는 독박 프로젝트의 하나로

하는 취지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망설였지만 제가

인식되던 때였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그런

이야기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나가서 이야기를 해

상태에서 휴학을 하고 있었는데, 『살아 있는 날의

보겠습니다 하며 나왔습니다.

시작』이라는 장편소설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가벼운 질문인데, 저는 이게 가벼운 질문으로

그런데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펑펑 울었습니다.

다가오지 않아요. 이선미 선생님이 말씀하신

흡사 간증을 하는 듯한 정도로요. 자기 삶의 어떤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게 박완서

몫을 다해야 된다고 강제하는 여러 가지 규범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만났어요. 제 경우엔 「그 가을의

있잖아요. 그런 사회적인 규범 속에서 공부를

사흘 동안」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어떤 작가가

놓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던 시기에 박완서 소설을

하는 이야기가 나의 치욕과 폐부를 찌르고

읽으면서 네 마음 다 안다, 괜찮다, 너만 그렇게

뼛속까지 파고들어와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살 수 있다, 그렇게 말해주면서

발밑이 다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을

저를 너무 알아주고 안아주는 그런 느낌을 많이

만나기는 쉽지 않죠. 그렇지만 박완서 선생님의

받았습니다. 그래서 펑펑 울면서 그 여름에 제가

작품에 기복이 있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박완서 문학에 발을 깊숙히 들여놓기 시작했어요.

다시 읽었을 때 처음에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사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같은 소설들은

다가오기도 하고 해서 딱 한 작품만을 가지고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제가 읽을 때까지도, 또 지금까지도 연구가

나에게 스파크가 일었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

안 된 작품입니다. 대중적으로는 많이 읽혔지만

것 같아요. 박완서 선생님이 굉장히 다양하게

여성의 현실, 즉 전업주부와 관련된 삶의 일상이

글을 변주하는 것처럼, 저도 박완서 선생님의

굉장히 리얼하게 드러나는 소설이고 또 남편의

글을 읽으면서 그것이 어떤 시대냐에 따라서도

불륜 사건 이후 이혼을 감행하게 되는 치정과

달라졌던 것 같고요.

관련된 요소가 있다는 선입견 때문에 거의 연구가

제가 박완서 선생님의 문학을 본격적으로

안 됐어요. 그러다가 저 같은 전업주부의 경험이

이야기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80년대 문단이라고

있는 연구자들이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연구의

하면 소위 남자들의 판이었는데 당시에 젊은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과

여자들, 소위 말하는 석·박사 친구들이 모여서,

관련되어 여성 영역의 디테일과 리얼리티가

민족이냐 민주냐, 그래서 NL과 PD 이야기하던

구성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본격화되면서 이제

시절에 그것이 분단이건 민족이건 또는 계급이건,


글을 읽고 어떤 것을 느꼈을까 하는 서성거림.

같았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젊은 여성들이 모여서

당시 어머니가 제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순간을

누구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냐

항상 충격적으로 기억합니다. 스파크죠. 그때 나는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여성연구소라는 걸 잠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머니는 작가가

나갔었고, 그때까지 나왔던 박완서 선생님의

되었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소설을 읽는 스터디를 했어요. 요즘 입장에서

했습니다.

문인사기획전 4

거기에 여성의 관점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

본다고 한다면 그때 우리가 했던 논의라고 했던 것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하고 있었다고

이종찬: 박완서 선생님의 문학적 스펙트럼이

생각합니다. 민중의 관점, 민족의 관점, 계급의

워낙 넓습니다. 오늘의 좌담회를 위해 제가

관점이라고 하는 도식 하에서 그것을 ‘여성

키워드를 몇 개 뽑아 보았는데요. 이 키워드들을

모순’이라는 틀로 다시 읽어봤을 때 박완서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합니다.

선생님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그 첫 번째 키워드는 ‘6.25’입니다. 6.25 체험을

질문했어요. 하지만 그 논의에서라기보다는

빼놓고 박완서 문학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할

굉장히 개인적인 체험으로써 박완서 선생님과

것입니다. 좌익과 우익의 이념이 첨예하게

만났던 소설이라고 한다면 「그 가을의 사흘

충돌했던 전쟁통의 서울에서 납치와 학살, 폭격

동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에

등 일상적으로 만연한 죽음을 경험해야만 했으며

대해서는 잠시 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와중에 가까운 혈육인 오빠와 작은숙부가 비참하게 죽어나갔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호원숙: 저희 어머님의 작품을 처음 본

자신의 전쟁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평생

것이 『나목』이었는데 그때 제가 고등학교

동안에 걸쳐 반복합니다. 영면하시기 직전 해인

2학년이었어요. 학교 갔다 와서 보는데

2010년 발표한 단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여성동아》 부록에 나온 조그만 책이었지만

밟다」에서까지 이 이야기는 끊임없이 변주되고

그걸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됐어요.

있으니까요. 박완서 문학에 깊이 아로새겨진 저

끝까지 보기는 봤는데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6.25의 흔적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박수근이라는 사람을 소재로 해서 글을 쓰겠다고, 저녁 자리에서 어머니가 몇 달

이선미: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이후 제가 박완서

전에 이야기하셨는데 그게 소설이 돼서 나온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서 박완서 문학이 한국

거예요. 소설 속에 있는 내용이 다 소설이기를

사회 전체의 문제를 엮어내는 어떤 지점에 닿아

바라기도 했는데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산층, 여성,

것을 알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 집의

노년 등 박완서 문학의 소재로 분류되는 다양한

안온함이 사라지고 파라다이스에서 쫓겨나는

주제어들이 결국엔 한국전쟁이라는 경험이

것 같은, 내가 쫓겨나는 건지 어머니가 달아난

이후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직조하고 재편하는가

건지 하는 그런 느낌. 그러면서도 우리 어머니가

하는 것의 문제들과 연결돼서 주제화된다는

해냈다는 자랑스러움이 교차되었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서 제가 박사논문으로 연구를 해봐야

제가 충격을 받아서 식사 시간인데도 밥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먹으러 가질 못했어요. 어머니가 제 방문 앞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면, 사회학자

서성거리시더라고요. 내가 그 책을 읽고 있는 것을

김동춘 선생님의 『전쟁과 사회』라는 책이

아시고서요. 그때 어머니의 서성거림, 저 애가 내

있습니다. 사회학적으로 한국전쟁과 관련된 한국

188


지금 여기 박완서

189

사회를 분석한 책인데요. 대중적으로도 굉장히

자기에게 낙인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그 낙인은

많이 팔린 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계속 지금 현재 내 삶을 간섭하는 중요한 형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거의 유일한 소설이 박완서

같은 것으로 작동합니다.

소설입니다.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관점이 박완서

박완서 문학에서 전쟁 경험이

소설을 구성하는 큰 뼈대이기 때문에 그 긴밀한

『나목』에서부터 자전소설 2부작(『그 많던

연관성을 김동춘 선생님이 파악하고 계시다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생각했어요. 박완서 선생님 돌아가시고 첫해에

있었을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각각

저희가 ‘한국 여성 문학학회’에서 학술대회를 좀

다르게 얘기가 되는 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했는데요. 그때 김동춘 선생님과 조한혜정

변화된 현재 속에서 과거가 어떻게 현재를

선생님을 모시고 사회학자들이 보는 박완서

간섭하는가와 관련된 문제인데요. 이전까지는

문학과 관련된 파트를 마련했습니다. 그때 김동춘

말할 수 없었던 사실들을 다시 말하게 되는

선생님 말씀의 핵심은 전쟁이 단순히 과거에

거지요. 그래서 자전소설 2부작은 그 기억의

있었던 사실로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고 증언되는

전면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좌담의 타이틀이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인 것을 보고

그 과거가 계속 현재로 살아나는 사건이라는

깜짝 놀랐는데, 제가 논문을 쓸 때 방법론에서

거였습니다. 박완서의 소설들이 전체적으로 전쟁

길게 인용한 두 편의 소설이 『살아 있는 날의

이후에 전쟁이 여전히 관여하고 있는 사회적

시작』과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입니다.

양상을 보여주지만, 그중에서도 그걸 가장 여실히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인데, 실은 ‘복원

보여주는 몇 개의 소설이 있는데, 그것이 저는

불가능성’이야말로 복원에 대한 박완서 문학의

70년대 「돌아온 땅」과 돌아가시기 직전에 쓴 「빨갱이 바이러스」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온 땅」은 70년대 신원 조회에

전언(메시지)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복원이 불가능한 이유는 이제까지 살아온 사람들이 그 사실들을 다 조작해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죠.

걸려서 독일로 유학을 가려다가 못 가는 딸의

월북한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자기가 그 사람을

이야기입니다. 알지도 못했던 삼촌이 월북한

모른 척했던 건, 아는 척하는 순간 자기가 지금

사실 때문에 신원 조회에 걸린 거였습니다. 딸은

가족들과 맺어온 모든 사실들에 대해 그것이

아버지가 빨갱이에게 총살당해 죽은 걸로 알고

다 거짓말이었음을 까발려야 하니까요. 이미 다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있었고, 도대체 삼촌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있던 일들을 없던 것처럼 조작된 ‘사실’로 만들어

의문을 안고서 엄마와 함께 고향을 찾아갑니다.

살아왔기 때문에, 복원을 하려면 계속 진상을

고향에 가서 알고 보니 죽은 삼촌이 월북을

찾아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고, 또 그것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동네에 오래 살고 계신

다 들춰내야 합니다. 전쟁이 박완서 문학에서

어떤 분이 아버지와 삼촌을 헷갈려요. 아버지는

계속 얘기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빨갱이에게 총 맞아 죽었고 삼촌은 월북을

박완서 문학에 있어서 전쟁은 그냥 과거 사실인

했는데, 아버지가 월북을 한 것으로 헷갈립니다.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사실들을

이게 뭐냐면 그 당시에 전쟁이라고 하는 건 적과

조작한 경험들의 시간인 것이지요. 결국 한국

내가 그렇게 구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쩌다

사회를 관통하는 삶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편이 되고 저편이 되는 군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학살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는데, 그

임옥희: 박완서 선생님 하면 항상 6.25를

사실이 우연적인 상황에서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이야기하지요.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이 볼 때


유교 가부장제의 질서를 어떤 부분에서

정말 뼈저린 체험으로서의 6.25가 될 것 같습니다.

굉장히 변형시키면서 뒤집어놓을 수 있는 힘도

그런데 분단이나 전쟁을 그다지 전면에서

전쟁이라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아 보이는 작품에서조차

듭니다. 전쟁이 여성의 삶에 엄청난 고통과

박완서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바로 그 전쟁이라는

비참과 수치와 치욕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주제가 사실은 ‘전쟁터로서의 여성의 몸’이라는

다른 한편으론, 그래? 이거 괜찮은데, 여자들이

것과 결코 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전쟁이란

한 번 살아볼 만하네. 가부장을 무력화시키고

것은 결코 애도될 수 없고 내 안에 가시처럼

가‘모’장, 즉 엄마가 남근을 꿰차고 ‘말뚝’ 노릇을

남아 삼킬 수도 없고, 또 어떻게 뽑아낼 수도

하게 되는 부분이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없는 것으로 내 안에 납골당처럼 가지고 있는

속 시원하고 재미있는 지점으로, 가끔씩 신선한

것이죠. 죽었던 사람들을 떠나보낼 수 없는 그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전쟁이기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여성의 삶이라는 것을 엄청나게

호원숙: 저라는 사람은 아마 6.25가 아니었으면

바꿔놓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을 사람이에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흥미롭게도 강남의 중산층 이야기를 할 때 바로

만나게 된 것이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를

그 강남이라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줬던 것,

다니다가 한 달도 안 돼서 6.25가 나서

그 당시 80년대에 중산층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그 전쟁통에 PX라는 곳에서 초상화부에서 일을

해줬던 것이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전쟁이었다고

하던 중이었죠. 어머니한테는 학교를 다니던

생각합니다. 가령 독 안에 묻었던 남의 돈을

이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찮은 일이라

가져와서 포목점을 차릴 수가 있었던 것이죠. 『나목』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남자네 집』에 이르기까지 박완서 작품의 작중 여성인물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가부장적 질서가 있습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는데, 『나목』에서

생각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가족의 밥줄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해서 저희를 낳았어요. 저는 6.25 탓을 할 수가 없죠.(웃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6.25라고 하는 전쟁의 기억을 작품 속에서 변주하는 걸 보면서

엄마의 아들이 폭사를 당한 이후 엄마가 부처같이

저는 작가로서 존경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내보인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나목』을

그 기억이 돌아왔을 때 딸을 보고, 귀신은 뭐 하고

쓴 당시 1970년은 언론의 자유도 없었고,

있다가 딸을 안 잡아가고 아들을 잡아갔을까

남북 문제라든가 분단 문제를 자유롭게 쓸 수

하는 말을 던지죠. 딸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있던 때가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들었을까요.

어머니는 그걸 쓰기 위해서 픽션(허구)을 가져

전쟁 당시에 여자들이 어떻게 비루해지고

왔죠. 『나목』에는 굉장히 많은 픽션이 있습니다.

비천해졌는가, 어떻게 양공주가 되었는가,

두 오빠가 죽은 것도 사실은 리얼하지가 않죠.

어떤 방식으로 강간을 당하였는가, 그리고

『나목』에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단지 생존을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속 산부인과 여의사의

위해서 PX라는 공간, 그리고 전쟁 중 서울의

몸에 어떤 상처가 남았는가 등 어떻게 여자들이

공간을 왔다 갔다 하죠. 거기에 옥희도라는

자기 몸이 전쟁터가 되는 삶을 살아왔는가를

인물로 분한 박수근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박완서 선생님이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것으로 문학을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연결되는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첫 작품을 굉장히

문인사기획전 4

그것은 한국전쟁이지만, 박완서 선생님에게는

190


지금 여기 박완서

감사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렇지만 그 뒤에 시대가

전쟁 속에서 버려진 여성들이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바뀌면서 조금씩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을 때

찾아 어려운 난경을 자기 방식으로 살아내가는

과거 시절을 떠올리면서, 이선미 교수가 말씀하신

견디는 힘들이 있어요. 그게 기존 남성 작가들의

것처럼 복원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작품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압도적으로 많이

저는 작가로서 어머니를 그런 면에서 존경합니다.

보인 장면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죠. 한국의

191

고명철: 제가 1992년 대학 3학년 당시 한국

가부장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의 시선에

전쟁과 관련한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대면했을

의해서 전쟁통에 가장 참혹한 피해를 당했던

때 다른 분단문학과 비교되는 강렬한 계기가

사람들입니다. 물론 남성들도 많이 죽었죠.

있었어요. 임옥희 선생님이 80년대 문단 상황을

이데올로기 투쟁의 와중에 상당히 비참한 죽음도

이야기하셨지만, 저희 선배들입니다. 만나면 저는

맞이했습니다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더

문단 말석에 껴 있게 되는데 어찌 된 게 한결같이

처참한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자기 가족들을 다시

다 남성 작가들이었습니다. 남성작가 여성 작가를

이끌어야 했죠. 소녀 가장 내지 어머니 가장과

구분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당시 제가 대학 다닐

같은 모습들이야말로 분단이나 전쟁과 연관된

때는 구분을 명확히 했습니다. 남성 작가들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들을 제가 독서 경험상

중에서 분단문학을 대표적으로 썼던 분들이

접했을 당시 상당히 선진적인 문제의식이었다고

지금 기억으로는 김원일, 현기영, 조정래, 황석영

생각합니다. 저는 전쟁을 그런 방식으로 보고 싶은

같은 분들인데 여러분께서도 다 독서 경험이

측면이 있어요.

있으시죠. 60년대, 70년대, 80년대 각 시대별로

또 덧붙일 것은, 한국전쟁을 다룬 다른

한국전쟁을 접근하는 시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작품들을 보면 전쟁을 전쟁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특히 80년대 와서는 한국전쟁에 대해서 많은

다른 한편 일상 속에서의 전쟁들이 있죠. 가족

자료가 공개됐어요. 이데올로기 억압과 분단에서

간의 전쟁, 부부 간의 전쟁. 그런 부분들을 남성

비롯된 정치탄압은 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에

작가들이 정치적 또는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의

대한 반체제의 저항적인 문학 흐름도 아주

문제틀 속에서 다룬다면, 박완서 문학에서는

강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 남성 작가분들의

그것들을 보다 일상적으로 그려냅니다. 우리가

문학에서는 분단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를

살아가는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아주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구축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게 읽혔어요.

사소한 문제를 두고서 서로의 감정을 긁고 그것에

분단된 원인을 탐구한 다음에 어떤 새로운

대해 못 본 척하고, 때로는 그것을 눈감으려

국가를 건설하고 싶은 욕망도 슬쩍슬쩍 보이고요.

하지만 뒤에서는 손가락질하는 일상의 전쟁들

전쟁이라는 상황을 그렸지만 사실 전쟁 속에서

말입니다. 계속 악다구니치고 살아가는 모습들.

주된 주인공들은 다 남자들이에요. 아버지, 삼촌,

반드시 총을 쏘고 대포를 쏘고 하는 것만이

오빠. 그래서 제 선배 비평가들은 분단문학을

전쟁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분단 이후에 38도선

‘아버지 부재의 서사’라고 했죠. 오이디푸스

이남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이 전쟁이지요.

콤플렉스, 아버지 찾아 떠나기 등등. 그런데 박완서 선생님이 전쟁을 다룬 걸 보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하거나 어떤 권력의

저에게는 90년대 중반 이후 박완서 문학이 전쟁을 다루는 걸 보면 그런 부분들과 묘하게 겹쳐지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향방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새로운 권력이 어떻게 형성될까, 이런 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이선미: 고명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이후로 들어오니까 아예 쓰지를 않아요.

작가들의 문학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80년대에

이들 젊은 작가들에게서 공통되는 점이 이제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엄청 많이 팔리고

분단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산가족 찾기도 하는 시대였는데, 박완서 문학은

지금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박완서 선생님뿐만

분단문학에 미달하는 문학으로 아주 혹독한

아니라 다른 남성 작가들 포함해서 모두가 각자의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분단 극복의 의지가 없고,

분단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또 문학에 대해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사실 ‘왜 만나려고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 엄청난 골육상쟁의 상처들을 우리가 어떻게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예요. 남북 이산가족

치유하고 보듬고 안고 가야 되는 문제들은

상봉 전 해에 신문에 연재됐던 소설이죠. 왜

그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공유 지점들이거든요.

분단이 이렇게 지속되는가 하는 이유를 아주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요즘 작가들에게서는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보여주려고 하는 리얼한

그런 문제의식보다 38도선 이남, 휴전선 이남에

태도가 작동하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처해 있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80년대에는 분단 극복의 의지가 없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인지, 어떻게 한국 사회에서

함량 미달이다, 이런 소설로서는 분단이 계속

개인주의라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에 집중돼 있어요.

고착화되도록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비평이

문인사기획전 4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지금 남성

여기 오기 전에 성북예술창작터에 잠깐

굉장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단문학에

들러서 박완서 선생님의 전시를 보고 왔어요.

대한 기본적인 평가나 범주화, 개념화 문제와

그랬더니 박완서에 대해 ‘소박한 개인주의자’란

맞물려서 앞으로 박완서 문학도 재평가의 과정이

문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임옥희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해요. 박완서 문학을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어요.

비판했던 연구자나 평론가들이 그 이후 이렇다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개인주의, 소박한

할 해명이 없었고, 분단문학을 어떻게 설정할

개인주의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요. 2000년대

것인지를 둘러싼 후속 작업 또한 거의 없다고 할

이후의 작가들이 아주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수 있거든요. 현재의 정치적 국면을 감안했을 때

한국 사회에 언제 진정한 개인주의가 이뤄진

분단 극복이 굉장히 ‘다가온 미래’인 상황에서

적이 있었느냐고요. 한국 사회 속 개인들의

박완서 문학과 관련해서도 아주 예리하게 제기될

삶에서 툭하면 공동체, 툭하면 분단 모순, 툭하면

수 있는 논쟁적인 부분인 것 같습니다.

계급 모순 일색이었죠. 개별자적 삶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한국 사회가 얼마나 진정으로

고명철: 우리가 글로벌한 시대를 살고 있죠.

걱정하고 살아왔는가. 그게 2000년대 젊은

이선미 선생님의 말씀에 조금 덧붙이자면, 왜 한국

작가들의 공통적인 화두예요. 분단 문제에 대한

문학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분단문학이란 말이

관심도 측면에서 젊은 작가들이 선배 세대들

사라졌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작가들과는 상당히 양상이 다르지만, 저는 이

독서 경험 속에서 동시대 주류 작가들 중 분단을

괴리 지점들로부터 분단문학이라는 차원에서

소재로 한 작품들을 읽어보신 적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어떻게 박완서 문학을 읽어야 될 것인지를

이게 80년대와 90년대의 달라지는 점입니다. 제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젊은 작가들에게서 관심이

98년, 90년대의 끝자락에 등단했어요. 그 당시만

소원해진 분단의 문제들을 박완서 문학을 통해

해도 분단문학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아주

문제의식을 끌고 와 마중물이라면 마중물,

시들시들해지긴 했지만요. 그런데 2000년대

불씨라면 불씨 이걸 어떻게 지필 수 있을 것인가

192


지금 여기 박완서

193

했을 때 저는 기존 남성 작가들보다는 박완서

봅니다. 굉장히 격렬하게 싸웠죠. 비록 굉장히

문학에서 훨씬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다는

한정된 운동권 사람들만 싸웠다고 이야기할 수

거죠. 아까 그 ‘소박한 개인주의자’, 그 관점에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여성의 입장으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박완서 선생님을 구출해낼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개입하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할

이종찬: 박완서 문학의 두 번째 키워드는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던 시절입니다.

‘중산층’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이따금 중산층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계를 갖고 있다는 비판과 직면해야 했던 것

시점에서 돌이켜본다고 하면, 지금 우리가 어떤

같습니다. 이를 인정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기색을

식의 조롱을 받고 있느냐입니다. 그 당시 선배

숨기지 않는 모습을 비치기도 하였는데, 박완서

페미니스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작업을 두고

선생님만큼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결국은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고 아까

적출하고 비판한 작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기

제가 이야기했는데요. 민족이라고 하는 걸 먼저

때문입니다. 가령 『휘청거리는 오후』(1977)로

앞세워서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가지고서도 자

대변되는 계열의 작품들에서 박완서 선생님은

여기에 뭐가 함량 미달인 것 같아? 하면 여기서

국가 주도의 성장 자본주의 체제에서 급속도로

분단이라 하는 것이 함량이 좀 미달이고, 그 다음

형성된 한국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계급의 문제틀에서 보았을 때 자 여기에서는

묘사하였습니다. 나아가 『미망』(1990)에서는

뭐가 좀 함량 미달인 것 같냐고 말하면 굉장히

고향인 개성상인들의 모습을 통해 천민

중산층의 시각에 편향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자본주의와 차별화된 “좋은 의미의 자본주의”를

했어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당대의

그려내 보이기도 하셨지요. 중산층의 심리와

헤게모니 논쟁에 끌려 다닌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생활세계를 대상으로 쓰여진 박완서 문학의

이야기입니다. 그 입장에서 봤을 때 무엇을

성취와 특징에 대해 이야기 들어보고 싶습니다.

놓쳤는지를 그 당시 가장 잘 지적하신 분이 조한혜정 선생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요 모순,

임옥희: 80년대에 저희가 모여서 박완서 선생님

부차적인 모순이라고 하는 틀을 정해 놓고 거기에

세미나를 했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세미나를

맞춰서 작가를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문제

할 때 박완서 소설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제기하셨거든요. 그런데 논쟁이 있을 뻔하다가

남성 작가들이 분단을 보는 부분에 있어서

흐지부지 사라져버렸어요.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민족이었어요. 분단하면

아까 요즘 세대들이 분단에 관심이 없죠,

민족 모순이라는 것을 항상 먼저 이야기하면서

흥미가 그다지 없죠, 말씀하셨는데요. 90년대

끌고 나갔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모순을

IMF 체제를 맞이하면서 남한 안에서의 글로벌화

중심으로 해서 노동해방문학을 끌고 나가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남한 안에서 섬으로 사는 ’섬

흐름도 존재했고요. 그때 지나오신 분들은 알

의식‘이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졌을 뿐만 아니라

겁니다. NL과 PD. 임수경을 북한에 보내기도

가뜩이나 이 안에서조차 생존이 급급한 판에

하고요. ‘민족작가회의’라고 민족의식을 갖는

분단 같은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이미

것을 가장 주요 모순으로 잡고 있는 쪽과, 계급

우리는 독재로부터 해방됐다, 더 이상 빨갱이라는

모순이나 노동자 해방 연대, 노동해방문학 등을

낙인이 우리 삶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면 이

주장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죠. 그때처럼 열띠게

안에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될 것인지 고민하는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을 했던 것도 드물었다고

쪽으로 논의가 쓸려간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서


삶의 여유를 가능케 하는 자본을 좀 가진 자산가

기존의 문제틀이 전체적으로 다 밀려버렸죠.

그룹의 계층이라고 하면서요. 중산층이 실제 있고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들 중에서 그 부분을 정말

없고를 떠나 중산층에 대한 의식이나 감각이

잘 보여줬던 게 『도시의 흉년』이나 『휘청거리는

생겨나는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감각이나

오후』 그리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입니다.

의식이 실제로 한국에 어떤 일상생활의 문화적

이 작품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일군의

문제들로 드러나는가 하는 관찰 속에서 저는

사람들이 소위 강남 중산층이 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부동산 투자와 도시재개발을 할 수 있는

『휘청거리는 오후』가 나왔다 생각을 하고요. 그런데 이 돈의 흐름조차도 전쟁이 한국

가장 기본적인 돈을 마련하여 살아 나오는지,

사회를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돼

한국에서 계급이 재편성되는 과정 속에서

있다고 보는데요. 『휘청거리는 오후』나 『살아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살아남으면서

있는 날의 시작』이나 그 이후 1983년 『그해

생존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겨울은 따뜻했네』의 이산가족 문제로까지

계급, 젠더, 민족이라는 각각의 모순이 어떻게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중산층, 또는

그 안에서 관통하고 있는지를 다시 보면 깜짝

거기서 좀 더 진전된 것이라 할 수 있는 소시민

놀랄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계급의식 안에 근본적으로 작동하는 ‘못

그 당시 정해진 하나의 프레임을 씌워놓고 거기에

본 척하는 의식’이 속물성, 허위의식하고도 연결이

맞춰서 재단했던 부분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되고요. 왜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가

생각이 듭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작품을 다시 읽어내고

전쟁 사회를 겪으면서 갖게 되는 보신주의나 가족 이기주의, 이 모든 것들과 결탁되어 있어요. 그와

재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이른바 ‘복원되지 못한

관련한 작가의 말에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나의

것들’을 읽어내는 것이 관건으로 보입니다. 작품은

안일에 금이 갈까 봐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다.’ 그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작품이 살아

못 본 척하는 의식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

숨 쉰다는 문제, 당대에 어떤 식으로 재해석되고

수지가 동생을 못 본 척하는 것처럼 굉장히

하는가의 문제는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상상으로까지 이어지는 사회에 대한

몫입니다. 그런 면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이

진단이 있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자본의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다양한 목소리를 읽어낼 수

힘으로 구성되는 중산층이라고 하는 실체가

있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탁월한 것이 아닌가

한국 사회의 의식으로 연결된다는 주제야말로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작가 박완서의 탁월함으로 평가되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중산층 작가’라고 하는 평가가

이선미: 『나목』 이후에 가장 이름을 알린

작가에게는 싫은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작가의

소설이 『휘청거리는 오후』라 할 수 있을 텐데요.

계급성을 비판하는 맥락을 넘어서 생각한다면

『휘청거리는 오후』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과 핵심

저는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주제는 자본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70년대

문인사기획전 4

여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했던 입장들을 포함하여

1980년대에 『태백산맥』이 나오고, 임옥희

중반 한국 사회에서는 6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선생님이 이야기하셨지만 386세대의 사회운동

자본이 좀 축적되면서 중산층이 실제로

과정에서 ‘분단 극복 의지의 결함’과 같은

형성됐다기보다 중산층적인 감각들이 생겨납니다.

방식으로 비판이 되는 맥락이 있다가 90년대에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바캉스’라든가 ‘레저

들어서면서 다시 확 바뀌는 구조가 있습니다.

문화’라든가 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죠. 일상적

그 구조는 신경숙의 『외딴 방』 등이 나오면서

194


지금 여기 박완서

미시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담론이 바뀌는 국면과 관련이 있죠. 그 국면들이 베를린 장벽이

정직한 윤리, 정직한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고

무너지는 등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전쟁의 기억을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허성마저도 둘째 딸이

다시 재편해서 전면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결혼하는 와중에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윤리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제가 가장

저버리게 됩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비운의 결말을

기억에 남는 건 중공군에 대한 형상화예요.

맞이하게 되는데요. 그 작품을 처음 읽고 나서

중공군이 긴 빵을 베고 자고 또 그걸 뜯어먹어요.

많이 실망했어요. 한국의 중산층이 이것밖에 되지

이렇게 군인을 친숙하게 설명하는 표현은 사실

않는구나. 민낯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죠.

90년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전쟁의 이야기였다고

195

나름대로의 가정을 꾸리는 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IMF가 터졌습니다. 저희

생각을 합니다. 90년대로 넘어가게 되면서 ‘중산층

학번이 직격탄을 맞았어요. 보통 남자들이 군대

작가’라고 하는 레테르가 재평가되는 면이 있었지

갔다 오면 7년 후에 졸업을 하거든요. 96, 97년도

않았나 합니다.

졸업을 할 무렵에 갑자기 직장이 없어졌어요.

고명철: 좀 쉬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 동기들은 갈 데가 없어졌어요. 그때 당시

제 선배들은 술 먹고 놀아도 취직이 다 됐는데

『휘청거리는 오후』가 1977년도에 단행본으로

『휘청거리는 오후』가 회자됐습니다. 봐라, 박완서

발표됐는데 이번에 다시 보게 됐어요. 제가 대학

선생이 다른 남성 작가보다도 미래를 내다봤다.

다닐 때 도대체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이 무엇인가

이 모양 이 꼴이 한국 사회 중산층의 뼈저린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때 과 친구들과

민낯이다. 그러고 나서 애기됐던 게, IMF가 끝나고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과는 달리 문학에서

나서 10년, 20년이 지나더라도 『휘청거리는

한 번 접근해보자 해서 『휘청거리는 오후』를

오후』의 허성 씨와 같은 우리 아버지, 우리 삼촌이

읽었는데 누군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거

달라질까? 한국의 중산층에게서 건전한 중산층,

세태 소설이잖아. 뭔가 좀 그럴듯한 걸 찾고

건전한 자본가가 과연 가능할까? 아닌 게 아니라

싶었던 것이었겠죠. 그 당시 우리에게 익숙했던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는 것이죠. 최근에 영화

독법들이라는 것이, 예를 들면 한 편의 소설을

<국가부도의 날> 덕분에 다시 한 번 상기가 되고

읽고 난 후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세련된

있는데요. 저희들 90년대 학번이 『휘청거리는

담론을 소설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계몽화된

오후』를 읽고서 한국 사회의 중산층, 조금 더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담론들이었어요. 그런데 『휘청거리는 오후』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386세대에 대해 적잖이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허성 씨의 모습이 제 친구

실망했죠. 386세대의 민주주의가 양산해낸

아버지의 모습하고 똑같더라고요. 그리고

현재의 중산층 윤리에 대한 쾌락을 눈감으면서

거기 등장하는 허성 씨의 딸 초희는 대학 교육을

결국 그들도 이런 중산층에 합류하고자 하는

받았는데도 자기의 노력으로 입신양명을

또 다른 사회적 기득권을 누리고자 하는 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좋은 집에 결혼해서 그들의

아니었던가 하는 세대적 단절감이 아주 심하게

재산을 갖고 싶어 하는데 그 와중에 약물중독에

왔어요. 『휘청거리는 오후』를 읽으면서 말이지요.

빠져버리죠. 이상한 남자를 만나 억지로 결혼해서

솔직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비평가로서의

약물 중독에 빠져 있는 모습을 아버지가 보면서

말이라기보다는 우리 세대의 독후감이었습니다.

안타까워합니다. 허성 씨는 처음에 교사였는데, 70년대 산업화 시대의 와중에 조그마한 공장을

임옥희: <국가 부도의 날> 속 허준호라는

차리게 되죠.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어서

캐릭터가 허성 씨를 연상시키지 않을까 하는


입장에서 여성에 관한 논의들을 많이 하던 때,

정확히 20년이 지나고 난 다음의 모습인 것이지요.

그 10년 동안 이 작품들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물론 허준호를 두고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하기는

그 작품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당시에는 고마운

뭣하지만, 어쨌거나 조그마한 자기 공장을 가지고

줄을 몰랐어요. 다른 분단문학에 비해 여성

있으니까요. IMF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이른바

문제를 정면으로 이야기해보겠어 하며 목표를

‘글로벌라이제이션’된 이 시대에 한국 사회에서

잡고 나온 소설 치고는 뭔가 좀 미흡하다, 2프로

비즈니스를 하는 중산층이라고 한다면 외국인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

노동자를 또다시 착취해서 아무도 믿지 마라,

당시 핫이슈가 뭐였냐면, 지금은 여러분이 상상을

너희들만 살아남아라, 우리만 살아남자, 나만

못하시겠습니다만 그때만 하더라도 친권이

살아남자 하는 방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남자가 다른 여자와

몇 십 년도 전에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이 미래를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부인이 아이를 못 낳으면

보여줬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다시 옛날에 자기가 버린 여자가 키우고 있는 아이를 당연히 빼앗아 갈 권리가 있었던 것이죠.

이종찬: 박완서 문학을 특징 짓는 세 번째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이 친권의 문제라든지,

키워드는 ‘여성’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에게

이혼의 문제라든지, 호주제의 문제라든지 남성

1980년대는 가히 여성주의 시기라 칭할

가부장제의 구조적 문제들을 가장 섬세하게

만했습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

뼛속까지 와닿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했지만 그때

『서 있는 여자』(1985), 그리고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로 이어지는 소위 ‘여성주의

저희들이 했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성문제에만 집착을 하고 정형화되어 있어서

3부작’이 이 시기에 발표됐습니다. ‘부덕’(婦德),

리얼리티가 좀 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를 했던 것

‘미풍양속’ 그리고 ‘출가외인’이라는 미명하에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기혼 및 결혼을 앞둔 여성이 감내해야만 했던

이야기한다고 한다면 또다시 재해석될 수 있는

남성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야말로 이 시기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여기 물론 이선미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이 정조준한 비판 대상이었는데요.

같은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다음

80년대에 박완서 선생님으로 하여금 여성주의적

후속 세대들의 연구에서 조금은 등한히 되고 있던

문학 실천을 감행케 한 상황적 맥락 그리고 이에

게 아닌가 싶어요. 재해석할 부분에 있어서 박완서

대한 문학적 해석 및 평가 등을 둘러싼 이야기가

문학이 굉장히 중요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궁금합니다.

아니라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지 않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옥희: 박완서 선생님에게 당시 고맙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는데요. 당대의 핫이슈가 무엇인지

호원숙: 임옥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명민한 눈을 가지고 계셨어요. 당시 80년대의

제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소위 젊은 연구자들이 도전하고 싶었던 것이

‘여성 좌파’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무슨 의미로

있었습니다. 그것이 민족작가회의였든 뭐든 간에

쓰셨는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나라가

기존의 헤게모니를 완강하게 장악하고 있는 남성

섬으로 되어간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함께

문학집단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여성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좌파’의 시각을 가지면서 함께 연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화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임옥희: 1920년대 신여성을 보면 그들은

문인사기획전 4

생각이 듭니다. 77년에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면

196


지금 여기 박완서

197

경성에서 평양을 거쳐서 모스크바까지 갔던

호원숙: 저는 이것이 관점의 차이라고

사람들입니다. 대륙을 횡단하고 다니던 소위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섬으로

‘빨갱이 여자들’을 우리는 ‘월북 문인’이라고 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고, 우리나라가 세계의

87년 해금이 되기까지 그들에 대해 언급도 할 수

중심이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왜 섬이라고

없었죠. 허정숙? 허정숙이 누구야? 그런 시대를

생각하시는지 저는 굉장히 놀랍습니다. 아까

맞이하면서 살았어요. 80년대는 사실 이런 주제를

‘여성 좌파’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힘들었고요. 마르크스를

저희 어머니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읽어도, 아니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저희 어머니의 사상에 대해서 저는 굉장히

그 당시에는 감방에 가는 시절이었습니다. 빨갱이

가깝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콤플렉스가 엄청나게 있었을 때 분단과 민족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문학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어떡하면 빨갱이

작품을 통해서 어머니를 다시 압니다. 막연히

여성들의 유산을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알았던 것을 작품을 통해서 아 이거였구나,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하고 저는 압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좌파의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이라고 하는

하고 싶은데, 어머니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연속선에서

『자본론』을 깨알같이 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했던 거였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했냐면

어머니는 사회주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들 어휘를 잘 이해 못하실 수도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있는데 ‘어용 집단’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어요.

자유를 속박하는 집단적인 것을 굉장히

제도권에 들어가 있는 기득권을 우파 부르주아로

싫어하셨습니다. 아까 개인주의자라는 말을

이야기하고 그들과 어떻게 적대적 관계에서

하셨는데, 저희 어머니는 개인주의자입니다.

싸워낼 수 있을 것인가 질문했을 때 서 있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사상을

포지션이 소위 사회주의였던 거지요. 그리고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민족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반제국주의적 시각에

계속 여성 좌파여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니까

서 있었던 사람들을 두고 좌파라고 이야기했던 것

그 여자 맛이 갔어 하는 말들이 있었죠. 저는

같아요. 그 연속선상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옆에서 다 들은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맛이

그리고 ‘섬나라’라는 표현에 대해

간 게 아닙니다. 변화하는 세상을 읽으면서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말씀드리자면, 바로 대륙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자신을 찾은 사람입니다. 개인주의자입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못

자유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넘어 갑니다. 제가 캐나다에 갔을 때 처음으로

집단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 산이

이렇게 쉽게 국경이라는 걸 넘어갈 수 있구나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싶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우리는 아직도 못

어머니가 북으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왜 여기를

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륙으로 연결돼

선택했는가? 외할머니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있다는 생각이 완전히 잘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셨습니다. 임진강을 건너지 마라. 피난을

우리의 상상력도 분단으로 인해서 막혔다는 생각

가더라도 파주 정도까지 갔다가 다시 와라.

때문에 우리는 반도가 아니라 섬으로 살고 있다는

외할머니의 예지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여기를

생각을 많이 합니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선택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던가 하는 의미에서 그 말을

저는 그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썼습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소설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만 그걸 냈을 때 다 의미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은 신문 연재소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모를 모시면서

진경이라 할 수 있는 풍속 묘사의 내밀함과 인간 내면의 심리를 깊이 파고드는 넘나듦이 적습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은 좀 다르긴 하지만요. 이 소설들은 사실 박완서 문학을 많이 읽고

치매 걸린 할머니를 모시는 여자의 모습을 너무나

좋아하시는 분들도 얘기를 안 하고 슬쩍 지나가고

리얼하게 그리셨는데요. 그것을 어머니는 실제로

싶어 하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경험하신 것이고 그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이 소설들이 굉장히 대화적이고 현재성이 강한

식으로 쓰신 겁니다. 그것은 어머니 개인의 문제가

소설들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박완서

아니라 그런 상황에 있는 다른 여자들의 상황을

문학에는 당대와 소통하는, 자신이 지금 여기 있는

그 소설을 통해서 쓰신 겁니다. 정말 뼈저린

시점에서 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특징이 일관되게

소설입니다. 그리고 『서 있는 여자』는 여성잡지에

관통합니다. 매체나 그릇에 따라 독자와 어떻게

연재된 소설입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화할 것인가의 방식에 따라 다른 종류의 형식을

어머니의 계몽적인 소설입니다. 자신의 삶에 너무

쓰는 작가가 아닐까 해요. 세 작품이 실렸던

안주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매체의 성격이나 박완서 문학이 독자와 어떻게

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와 관련해서

만나려 하는가의 방식에 대해 제가 생각을 많이

《여성 신문》이 처음 발간됐을 때 소설

했습니다. 이 작품들을 간단히 폄하하고 말 것이

연재를 부탁하던 고정희 선생님이 저희 집을

아니라, 어떤 하나의 고정된 규범 대신에 이 글이

방문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때 아버지와

필요한 사람들과 허구적 장치를 통해서 어떻게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 속에서 도저히 글을 쓸

계속 소통하고 공감할 것인가 하는 문학정신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저희

이와 같은 소설들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런데 고정희 선생님이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고 있어요. 지난번

부산까지 오셔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학술대회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왔거든요.

했고 어머니께서는 붓을 드셨습니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노년 작품들에 비해

《여성신문》에 연재한 소설입니다. 다 그때

좀 못 쓰지 않았냐 이야기되는 작품이라고요.

그때마다 그것이 탄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어머니가 가정법원의 중재위원으로 봉사를 여러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 하셨습니다. 그때 이혼 사례들을 많이 알고

많이 했는데, 호원숙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니

계셨어요. 그 중에 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하나가 딱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빗대어서 소설을 만들었지만 그것도 저는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라는 박완서 문인사 기획전의 타이틀도 그렇고,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라는 좌담명도 그렇습니다. 제가 오늘

이선미: 호원숙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발터 벤야민이 쓴 ‘지금-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굉장히 많은 연구 논문이 왔다 갔다 한 것

생각을 했는데 박완서 문학 역시도 현실과 관계

같은데요. ‘여성주의 3부작’이라고 하는 소설들이

맺는 방식이나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 그런 것들이

사실 박완서 문학 연구 분야에서는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당대의 시대정신과

도외시되는 작품들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성이

호흡하면서 그때그때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고 구조가 너무 극적이라는

과거를 해석하고,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박완서 문학의

소설들이 박완서 문학이 아닐까요. 당대의 현실과

문인사기획전 4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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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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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하여 해석하지 않고 문학성의 측면에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속에서 노년의 양식을 이야기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한번 보십시오. 제가

대중적으로 굉장히 많이 팔렸지만 연구는 정말

왜 박완서 선생님의 500년을 산 것 같다는 표현이

안 된 소설들이거든요.

가슴에 와닿느냐 하면요. 한국은 너무도 빨리 성장했습니다.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이종찬: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박완서

빠른 속도였죠. 봉건주의(전근대)인가 했더니

문학의 네 번째 키워드는 ‘노년’입니다. 박완서

금방 근대가 오고, 어느새 또 포스트모더니즘

선생님은 말년으로 접어들면서 ‘노년문학’의

(탈근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주제들을 내비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과연 한국 사회의 노년들이 차분하게 자기

지점은 선생이 ‘노년’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삶을 반추하면서 여유롭게 젊은이들에게 자기

통념과는 반대되는 시도들을 내비친다는

삶의 어떤 지혜도 나누어 주고 할 만한 여유가

것입니다. 말년에 발표된 작품들을 통해 엿보게

있었던 것인가? 저는 비관적으로 봅니다. 박완서

되는 선생의 노년은 ‘종합’과 ‘완성’의 시기로

선생님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 수록된

파악되지 않습니다. 낭만적 회고나 감상주의로

작품들에서 저는 ‘수다’랄까요, 상당히 많은 말들

빠져들지도, 참혹했던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는

또는 조잘거리는 얘기들을 듣게 됩니다. 노인들이

것 같습니다. 대신 선생님은 과거와 현재의

차분하게 자기 삶을 성찰한다? 저는 박완서

근원적 화해 불가능성, 그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선생님이 정말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성찰하고 되묻는 태도를 견지하는 듯 보입니다.

사회의 노인들에게는 정치적 문제들과 똑바로

주어져 있는 손쉬운 해답 대신 부단히 재탐색

대면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숨 가쁘게

되어야 하는 인간적 삶과 역사의 진실이라는

자신들의 가정을 먹여 살렸고, 그게 사회의 어른이

무게를 감당해내는 것이지요. 그 안에서 어떤

담당해야 할 역할의 전부인 것으로 살았죠. 하지만

‘한 줌의 휴머니즘’이 어렵게 싹을 틔워냅니다.

노인들에게 돌아온 건 냉대와 냉소였습니다.

패널들께서는 박완서 선생님의 말년의 작품들을

손가락질이나 안 하면 다행이죠.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정리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노인들이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들을 느끼게 되는 계기들은 동시대 노인들과 나누게 되는 쓸데없고

고명철: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이라는

아주 사소한 말들 속에서입니다. 그게 일상의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개념이 떠오릅니다. 어느 산문에서 박완서

피와 살이 되는 거죠. 노인이 반드시 삶의 지혜를

선생님이 500년을 산 것 같다고 말하던 대목을

던져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주 사소한 것들

보고서 이것이 소설가적인 역사의 통찰이구나

속에서 삶의 근육과 삶의 피를 만드는 것처럼

싶었어요. 서구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 면에서

노인이 노인인 척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하강 국면입니다. 자본주의는 언제까지 계속

동시대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 저는 그게

불사신처럼 살아남을 생산 양식이 아니거든요.

한국 사회의 노년의 양식, 말년의 양식의

이미 서구는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이

가장 정직한 풍경이라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한국 사회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달려왔고,

그 과정에서 적응했던 사람들의 삶이 노년이라고

노인들이 스스로 자기 삶의 존재를 가다듬을

하는 은유적인 서사 양식입니다. 서구에서는 줄곧

시간적 여유와 정치적 여유가 주어지지 못했던

성찰이나 차분함, 그리고 나이든 노인들이 가질

상당히 리얼하고 솔직한 풍경이라고 얘기하고

수 있는 여유로움 또는 어른다움 등의 의미 계열

싶습니다.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처럼 잘 보여진 작품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전쟁통을 배경으로 할머니가 아닌 여성의 지혜와 자기 욕망을 이처럼 간결하고 유머러스하게

이선미: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에는

그려낼 수 있을까? 참으로 감탄스런 작품이라고

독특한 유머가 있어서 제게도 너무 인상적이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동화 같기도 하고 민담

재미있었던 소설이었습니다. 박완서 작가가

같기도 하고요. 마치 할머니의 이야기 같습니다.

마흔 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돌아가시기

극중 화자가 ‘~했다’에서 ‘~했드란다’ 하는 식으로

직전까지 소설을 쓰셨기 때문에 이 분이 갖고 있는

스타일 자체도 바꾸면서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문학창작의 중요한 특징인 현재성이라고 하는

들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이야기를 하고

문제는 사실 노년 서술자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있거든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환각의 나비」에서

없는 그런 소설의 구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60대가 될 무렵인 80년대

그렇게 오랫동안 애도하지도 못하고

중후반부터 노년 서술자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떠나보내지도 못하면서 가시처럼 삼키고 있어서

소설들이 죽 나오는데요. 그 첫 창작집이

체증으로 남아있던 자신의 과거와 드디어 화해를

『저문 날의 삽화』(1991)이고 『너무도 쓸쓸한

합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 자녀들과 함께

당신』(1998)입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

살던 집을 떠나 어딘가로 찾아갑니다. 열네 살

나왔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년문학을 여는

때 강간을 당한 ‘마금’이라고 하는, 점도 보고 무당도 하는 스님의 집에 어찌어찌 들어가 살게 되죠. 엄마도 여러 형태의 엄마가 있잖아요. 많은

작가가 아닌가 하는 평가들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친절한 복희씨』(2007)에서 정점을 찍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우 딸들의 노동을 팔아서 한 가족이 먹고살죠.

나이가 들면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고하고

그런데 자연 스님(마금)이라는 캐릭터는 생계를

추억처럼 얘기할 수 있다고 보는 우리의 일반적

딸에게 의존하면서도 그 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들과 저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굉장히 경멸하고 수치스러워하던 시절의 딸들

사실 어린아이들도, 어른들도 굉장히 다양하기

모습을 묘하게 연상시킵니다. 거기에 앉아서

마련인데 ‘노년’으로 범주화하는 것 자체가 노년

더덕을 다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치매 걸린

서술자가 등장하는 소설의 구체적 특징들을

노인이 아니라 드디어 세상과 화해를 한 듯한,

무화시켜버리는 것 같아요. 아까 ‘말년성’을

그래서 어깨에 눌려져 있던 역사의 무게와 삶의

말씀하셨지만, 이것이 ‘회고’나 ‘추억’이 아니라는

무게가 사라지고 나비가 돼서 날아갈 것 같은

점에서 박완서 소설의 노년 문제를 논의해야

기분이 들어요. 벌레가 나비로 변태를 해서 날아갈

한다는 비판의식이 있습니다.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 삶에 대한 노년의

저는 개인적으로 『저문 날의 삽화』 작품집을

화해의 방식입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미래와

제일 좋아해요. 박완서 문학의 여러 가지가

과거를 함께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집약되는 소설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있지요. 노년이 지혜를 전달해준다거나, 자신의

아까 여성문학 3부작이 당대 여성들의 삶과

과거와 반드시 화해를 하고 평화롭다거나,

교우하는 관계 속에서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젊은이를 위로한다거나 하는 식의 할머니가

것이라면, 『저문 날의 삽화』는 언제 꺼내서 읽어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들도 여자이고 성적 욕망이

그 문장들이 주는 울림이 큰 소설이라는 생각이

있고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모습이

들어요. ‘저문 날의 삽화’ 연작 중 1편 첫 부분을

문인사기획전 4

임옥희: ‘노인’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저는

200


지금 여기 박완서

201

보면 신부님한테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고백소

임옥희: 「엄마의 말뚝」 연작에서도 보면,

앞에서 줄을 서 있는 동안 자기보다 키가 작은

어머니가 부처처럼 늙어가지만 그 안에 무엇을

여자의 뒤통수를 보는 대목이 나옵니다. 머리가

감추고 있었는지를 너무 잘 보여주는 대목이

거의 없는 대머리 여자인데요. 굉장히 혐오스러운

나옵니다. 고관절을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모습을 하고 있군 하고 생각하죠. 고백소 앞에서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또다시 지옥을 보는 거죠.

줄을 서 있는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노년의 의미라는 것이 언제나

극적 긴장감을 나타내는 고백으로 시작을 하고

되돌아오는 기억과 역사적 상처로 인해서 굉장히

있어요. 이같은 태도는 「저문 날의 삽화 5」에까지

평온해 보이지만, 표면 아래 여전히 들끓고 있는

이어집니다. 이런 극적 긴장과 노년의 평온한

상처와 고통과 같은 것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일상 풍경의 대비가 노년 서술자의 일상을 깊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들여다보게 하는 장치가 됩니다.

이야기하는 퀴어한 느낌을 갖게 만들어주는

이 「저문 날의 삽화」 연작에 ‘노년’이라는 주제를 예비하는 게 모두 들어 있는데요.

지점들이 박완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현재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극중 노년 서술자의 성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나 평화롭고 자유롭게 노년과 노후를 즐기고

이종찬: 오늘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신

있는 와중에 노년의 판타지 같은 장면들이

패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오는데, 결국엔 이 모든 평화를 의심하고 흔들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나오지 않고 불쑥불쑥 파편적으로 튀어나오는 식이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조차 자신의 과거를 편안하게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하는 태도를 소설의 형식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문 날의 삽화 5」를 보면, 표면적으로 아주 평화로운 일상이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참척이라는 문제로

좌담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확 뒤집어지는 작품입니다. 그와 같은 문체와 극적 구조를 통괄하여 박완서 선생님은 한국 사회에서 노년이 갖고 있는 말할 수 없음의 영역에 대해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인과적인 연결로 이어지는 말이나 서사 구조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말이지요. 무언가 계속 과거의 경험과 기억, 현재의 평화를 연결해서 말하고 싶어하지만, 파편적으로 감각적으로만 떠올릴 수 있는 것, 이런 서술적 특성으로 노년의 불안정성을 실체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녹취 및 정리 이종찬


호원숙 (수필가, 박완서 장녀)

문인사기획전 4

다시 하나의 집으로

202


지금 여기 박완서

2018년 내내 진행되었던 성북문화재단의 문인사 기획 행사가 출판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지켜 보며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분들의 아이디어와 열정과 정성으로 어머니의 문학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다시 하나의 집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까요? 뜻하지 않은 곳 에서 맑은 물이 샘솟기도 하고 새로운

203

세대의 창의적인 생각과 수고가 모여 멋진 집이 되었습 니다. 그 집은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어머니의 문학으로 집을 지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한 작가의 문학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친숙했던 동네인 성북동에서 이루어진 <지금 여기> 전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한 일은 벽돌을 옮기는 것 같은 작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소상한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 더욱 뿌듯합니다. 무엇보다 지난 해 중책을 맡으셨으면서도 기획에서부터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 아름다운 서문을 써주시기까지 애써주신 이경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참여해주신 예술가들과 인터뷰를 남겨주시고 논문을 써주신 분,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성북문화재단의 스텝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문인사기획전 4 지금 여기 박완서

전시 기간 2018.12.13.(목) - 2019.1.22.(화) 전시 장소 성북예술창작터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23 참여 작가 김도희, 박동명, 윤소라X정민아, 이은주, 조민숙, 한승훈, 홍장오 공간 디자인 장시각융합소(홍장오) 디자인 파이카 pa-i-ka 기획 및 진행 김소원, 김주영, 김호진, 신형은, 안희상, 이종찬, 장유정 도록 편집 김소원, 이종찬, 장유정 인쇄 효성문화 주최 및 주관

*자료제공 및 전시에 도움을 주신 호원숙님께 감사드립니다.

ISBN 979-11-88979-23-3(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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