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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 산업진흥원 2013 <우수출판기획안 지원> 사업 선정작

현 디자인 연구소


차례 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 이다

머리말 006 재해석되어야 할 한국의 전통문화

一. 단순함의 비밀

달 항아리는 피카소다

一. 미스테리한 도자기

극도의 단순함 014

희한한 도자기의 등장 069

모던Modern 신라 018

달 항아리의 인기 070

비장한 시대 023

이상한 달 항아리 075

고도의 정신성 & 단순한 조형 025

양식적 경향 081

二. 비례의 마술

二. 서양미술의 찌그러짐

다비드와 감은사지 탑 032

구상과 추상 085

통합으로서의 비례 041

고전적 단계와 회화적 단계 087

三. 자연을 향함

三. 왜 찌그러졌을까?

기하학적 조형의 한계 044

달 항아리의 배경 092

자연을 향한 지붕 047

생명으로의 진화 093

묵직한 덩어리감 051

대교약졸의 미학 096

자연의 흐름과 하나 되어 056

둥글었던 이유 099

四.달 항아리와 현대 디자인


고구려 철갑옷은 포드 자동차다

一. 고구려의 철갑기병대

독락당은 현대 건축이다

一. 문화를 담은 건축

석굴암은 파르테논 신전이다

一. 그리스에서 온 비례

한반도 남부의 철갑기병대 126

건축은 기술과 예술의 총체 188

철저한 비례 체계 250

입증된 철갑기병대 129

초라한 한국 건축 190

석굴암의 황금 비례 254

아름다움보다는 기능 136

현대 건축의 출현 194

수학적 비례의 전통 258

대량생산과 기능주의 디자인 147

二. 중세 서양 갑옷

二. 서양 건축을 뛰어넘는 낙수장

二. 로마에서 온 석굴

낙수장의 인기 198

돔 구조 268

VS 고구려 철갑옷

자연과의 조화 199

석굴에서 석굴암까지 270

중장기병의 등장 152

낙수장의 한계 204

로마의 돔 272

국가의 등장 155 군사편제 시스템 156

三. 서양 디자인 역사의 오만

三. 낙수장을 뛰어넘는 독락당 담벼락의 의미 210

중국에서 온 비례미 276

자연과의 경계가 모호한 계정 215

크기는 인도에서 282

산업혁명과 대량생산의 신화 160

자연과의 합일 219

전쟁과 표준화 164

뛰어난 터잡이 223

고구려의 대량생산 170

건축을 넘어서 자연으로 227

과장된 서양의 산업혁명 173

三. 인도,중국에서 온 본존불

四.독락당과 현대 디자인

四.세계문화의 융합, 석굴암

맺음말 르네상스의 신화 290

색인

292


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 이다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

있었던 것은 당시의 불교 정신을 조형적으로

종으로 횡으로 복잡한 비례 체계가 구사될 수

전체의 통합을 얻으려 한 것이다 이 . 처럼 탑 하나에

그대로 닮았다 개 . 체의 자유를 유지하면서도

감은사지 탑의 비례 체계는 화엄과 화쟁 사상과

感 恩 寺 址


一 .단 순 함 의 비 밀 극도의 단순함 경주에서 동해안 쪽으로 큰 산을 하나 넘어, 대종천 쪽으로 한참 내려가 거의 바닷가에 다다를 즈음이 되면 왼쪽 언덕으로 아주 멋진 탑 두 개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뒤에는 아담한 산이 탑을 감싸며 포근한 공간을 만들고 있고, 앞에는 수평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듯한

008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언덕이 성벽처럼 탑을 받쳐 주고 있다. 언덕 위에 솟은 탑은 마치 두 개의 이빨처럼 멀리서 보아도 시각적으로 대단한 포 스를 내뿜고 있다. 이 두 개의 탑이 서있는 곳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일본으로부 터 신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염원이 서려있는 감은사가 있던 터다. 비록 절은 소실되었지만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가 앞의 탁 트인 경관에 터질 듯 가득하다. • 문무왕 신라 제30대 왕으로, 통일신

이 감은사지의 두 탑은 우리나라 탑 중에서도 건립 연대가 분

라를 이룩한다. 하지만 그 후에 주변국과 의 긴장감이 계속되고 이러한 정세 속에 서 죽음을 맞이한다. •• 시원 양식 始原樣式 시작이 되는 처 음의 형식을 일컫는 말. • 위용 가득한 감은사지와 탑

009

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이다

명히 밝혀진 흔치 않은 탑이다. 신문왕 2년(682년)에 만들어 졌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라가 막 통일한 시점이다. 이 탑은 한국 탑의 시원 양식••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한국 석탑의 원조이다. 이 감은사지 탑을 시작으로 한국의 석탑은


일정한 유형을 유지하면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 인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국 석탑에 대한

• 고딕 시대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설명들은 이 정도에 그친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주

화려한 파리 노틀담 성당

목 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탑의 미니멀한 외형이 지닌 의미 다. 가까이서 보면 장식도 하나 없는 맨몸의 심플한 탑이다. 그러 나 그 단순함에서 우러나오는 숭고함은 여느 장식적인 조형 물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거대한 돌을 섬세하게 잘라서 우람한 몸집의 탑들을 조성한 솜씨를 보면 기술의 부재 때문에 이 탑의 외형을 단순하게 만 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탑을 조성할 당시 신라는 통일 과정의 고충을 통과하고 통일 이후 의 프리미엄을 구가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 한국 석탑 양식의 흐름

<정림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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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감은사지 삼층석탑>


• 미륵사지 석탑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

모던Modern 신라

면 기양리 미륵사 터에 있는 백제 말기 의 석탑. 건립 연대는 백제 말 무왕 때인 600~640년대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 력하다. 일제 강점기 때, 붕괴가 우려되 콘크리트를 발라 훼손된 것을 2001년 10월 해체 ·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충청남도 부여

당시 신라는 통일신라로 거듭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토 는 넓어졌고, 정치는 안정되었으며, 문화는 찬란했다. 감은 사와 탑은 바로 이런 시기, 이런 분위기에서 만들어졌다. 이 슬람 학자의 저술 속에서, 신라는 비단과 금이 많은 나라로

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 터에 있는 백제 의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 (基)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한 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에 매 우 귀중한 자료이다.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경상북도 경 주시 안강읍 옥산리 정혜사 터에 있는 통

묘사되고 있고, 신라 사람은 비단 의복과 금실로 수놓은 천을 걸치며 금으로 만든 식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보통 서양 역사를 보면 사회가 전성기에 이를 때 반드시 기념 비적인 건축물이 세워졌다. 반면 통일신라의 전성기에는 화

일신라시대의 석탑. 13층이라는 층수와 더불어 기단부와 1층 몸체의 양식, 탑신 과 옥개석이 한 개의 돌로 조성되는 등 통 일신라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특이 한 석탑이다.

려하고 거룩한 탑이 아니라 미니멀한 탑이 만들어졌다. 대표 적 예로 감은사지 탑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 심플 한 탑의 시작점이었다. 서양과 신라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 된 것일까?

<석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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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이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다비드와 감은사지 탑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석탑의 단순 한 형태를 말하면서 비례의 아름다움을 언급한다. 감은사지 탑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모양의 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복잡 한 비례다. 높지 않은 삼층석탑이라 각 층마다 높이와 폭의 차이, 탑의 지붕과 몸통 간의 비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 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부분과 전체가 하 나의 융합체를 이루는 화엄이나 화쟁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와 비례를 통해 탑에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른쪽 그림을 통해 감은사지 탑에 숨겨져 있는 비례의 세계를 파악해 보자.

비례는 대체로 수학적 질서를 가진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쉽다. 수치에 따라 기계적으로 배열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 만 우리의 눈은 기계가 아니다. 눈은 착시현상이 매우 심하기 때문에 비례 관계가 복잡해지면 수치만 가지고는 안정된 비 례감을 얻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긴다. 이 탑에서도 2층의 높이를 두고 그런 고심을 했다는 것을 느 낄 수 있다. 만약 1, 2층의 높이를 4:3으로 했다면 탑의 위쪽 이 너무 작아 보일 위험이 있었다. 3층까지의 높이가 9.5m니 일반 건물로 치면 적어도 3층 이상의 높이다. 사람의 눈높이 에서 본다면 3층 꼭대기는 너무 높아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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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 멀리서 보면 머리가 살짝 크고, 가까이서 보면 괜찮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 2층의 높이를 3층과 같게 해주어 아래에서 보더라도 이상이 없는 감은사지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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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탑은 심플하지 않다


달 항아리는 피카소다



一 미 . 스테리한 도자기 064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희한한 도자기의 등장 많은 전문가들은 18세기 전반 무렵의 백자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특히 하얗고 둥근 달 항아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 나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모양이 좀 이상하다. 몸통은 과도하게 둥글둥글하며, 상하로 좁은 입구와 받침대가 있다. 이 작은 받침대로는 좌우 로 튀어나온 배를 감당하기 벅차 보인다. 게다가 몸통 전체는 제대로 둥근 것도 아니고 기우뚱하게 둥글다. 현재 남아있는 달 항아리 중에서 좌우가 대칭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니 더 이상한 일이다. 도자기 위에 어떤 무늬도 넣지 않았다는 사실 은 여기에 비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더욱 황당한 것 은 이 항아리를 어떤 용도로 썼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용도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기가 큰 것은 높이가 40cm가 넘었다고 하니 대형에 속하는 도자기인데, 용 • 숙종 대에 오면 조선은 왜란과 호란의 상흔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중국에 서 도입한 성리학을 완전히 조선에 맞게 재해석한다. 이념이 완전해지면 그 다음 은 문화의 발전이 따른다. 조선은 숙종 이 후로 영조, 정조 대까지 자기 문화에 대한

도도 불분명한 도자기를 왜 그렇게 크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달 항아리는 숙종 말과 영조 대에 걸쳐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가 정조 사후로 사라져 버린다. 마치

자부심을 바탕으로 찬란한 전성기를 구 가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의 문화는 어 느 나라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조선의 고 유성을 확보하였으며, 내용과 형식에 있 어서 뛰어난 완성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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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항아리는 피카소다

외계인처럼 17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백 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조선에 반짝 나타났다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이른바 조선 후기 문화의 최전성기였다.•


난 뛰어 있어 에 있다 . 수 측면 고칠 가지 쉽게 여러 라 며 , 아니 적이 특히 이 활동 부분 , 어서 고 있 한 는 가볍 ’에 어느 했다 . 만드 다 . 만 산성 옷은 있었 으로 할 생 적 고 ‘ 고 철갑 공예 가지 이라 지만 으로 하나 성을 상품 어났 뛰 성 공정 하나 기능 로 기능 서도 개의 단 손으 있어 여러 럼 최첨 에 처 지 기능 치면 갑옷 기까 의 하는 으로 이르 서양 에 수행 요즘 은 를 작업 하다 . 조각 전투 하는 은 용이 철판 완성 도 는 갑옷 되 리 보관 옷을 이 우 갑 고 된 모듈 그리 인 부터 서 었다 . 기본 디자 의 업에 인이 로 작 갑옷 디자 모듈 이 드는 만 있는 을 했다 . 수 할 철판 탁월 라 생산 로 아니 적으 것이 분업 어서 나누

鐵 甲 騎 兵 隊 고구려 철갑옷은 포드 자동차다



중장기병 철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병사

환도수 칼을 든 병사

부월수 도끼를 든 병사

창수 창을 든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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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고구려의 군사편제 다음은 안악 3호분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 의 군사편제 시스템이다. 보병과 기병은 육군의 주력이었는데, 보병은 갑옷을 착 용한 중장보병과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경장보병으로 구성되었고, 기병은 말과 병사를 모두 철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중 장기병과 병사만 갑옷으로 무장한 갑주 기병, 그리고 갑옷을 입지 않은 경장기병 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도끼병인 부월 수와 창을 든 창수, 칼을 가진 환도수, 활 을 쏘는 궁수 등이 뒤를 따랐다.

궁수 활을 쏘는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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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철갑옷은 튼튼하지 않다

Ⓒ 유라시아 디지털문화유산연구소 박진호 소장 제공 일러스트 최경원


이런 현대적인 시각으로 서양 중세 갑옷을 다시 보자. 중세

•• 중량과 움직임에서 불리한

갑옷의 모양이 전투를 수행하는 데 기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중세 갑옷은 독특한 형태의 이미지 덕분 에 여러 미디어에서 강한 전투력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과장 된 채 인용되어 왔다. 실상은 반대였다. 우선 무거운 중량 때문에 기동성이 매우 떨 어진다. 그리고 로봇같이 몇 개 안되는 관절로 움직여 야 하기에, 신체의 유연한 움직임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런 갑옷을 입고는 어기적거리며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매우 불리하다. 이러한 중갑은 게임처럼 1:1이나 소규모 집단 싸움에 서나 유리한 것이지 1천 명 이상의 정규군이 격돌하는 전면전에서는 매우 취약하다.

• 현대 군인들의 군복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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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서양 중세 기사들의 갑옷


스피드가 떨어지면 아무리 강한 철판으로 막고 있어도 소용 이 없다. 갑옷 틈새로 얼마든지 날카로운 칼이나 창이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면 가야의 갑옷은 서양의 중세 갑옷과는 매우 다 른 행보를 보였다. 과시적인 형태보다 전투 기능에만 집중했 다는 것은 이 갑옷에 담겨 있는 구조나 기능적 특징을 찬찬히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가야의 갑옷 구조는 투구와 목 가리개, 몸통 보호용 갑옷, 다 리 가리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분을 잘 살펴보면 모

• 가야 갑옷의 일반적인 구조

두 기능성에 입각해서 디자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투구 목 가리개

몸통 보호용 갑옷 팔 가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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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철갑옷은 포드 자동차다


독락당은 현대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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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독 락 당은 지어 여러 진것 될 채 은 로 수 중 이루 흐르 있는 종 어진 고그 2년 건물 7으 주 은 계 로 택 곡 독 낙 자연 전체 을훼 락당 수장 과의 를가 에부 손하 과는 조화 리 지 속 무 키 된 않 려 를 는 세월 고 계정 건축 말이 50여 건물 의간 이라 0년 적목 다 을지 극이 는 낙 의 . 적 수 정 은 차 으 무 장 자 이가 점에 로삼 색할 과대 건물 서는 난다 았다 만큼 비가 의일 낙수 는 하 낙 . 곽 점 지 수 이 장 에있 만건 장과 다 과동 이 . 건 어서 물바 흡사 일한 물이 는 하다 로 건 옆 축 으로 적유 . 계곡 전자 이 를 가 지고 있다 .

獨 樂 堂

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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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먼 쪽으로 안채를 앉혔고, 물의 방향과 나란히 독락당이 라는 사랑채를 위치시켰다. 그래서 이 독락당은 정자인 계정과 사랑채, 안채의 삼각구도 로 디자인되었다. 자연과 소통하는 가장 외곽에는 계정이 최 전방을 이루고, 사랑채인 독락당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바 깥의 개천과 나란한 관계를 이루었으며, 안채는 바깥과는 완 전히 분리되어서 아늑하고 조용한 독자적인 공간을 꾸리고 있다. 그래서 계정에서는 물소리를 비롯한 자연의 모든 모습 들이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고, 독락당에서는 바깥 자연이 한

• 물이 휘돌아 가는 위치에

단계 정제되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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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들어선 계정


안채

독락당

계정

독락당 안쪽에서 보이는 낮은 담이 바로 바깥에서 건물의 안을 가리던 그 담이다. 시선만 차단할 뿐 바 깥 공간을 단절하는 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낮은 담이긴 하지만 담 너머의 바깥의 풍경이 계정에서처럼 독락당 안쪽으로 바로 들어오 지는 않고 있다. 이곳은 조용히 학문에 매진하려는 집주인의 개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담 위의 나

• 계곡과 나란히 삼각구도를 이루고

무 숲은 바깥의 풍경이 모두 다 들어오지 못하게 걸

있는 독락당의 구성

러주고 있다. 이 나무들도 일부러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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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이다


석굴암은 파르테논 신전이다

석굴암의 조형방식은 우리 문화의 전체적인 행보와는 반대방향으로 향했던

매우 이질적이고 특수한 것이었다 석 . 굴암에 구현된 수학적 접근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

이후 서양의 고전 건축물에서 아주 많이 쓰이게 된다.

그리스 건축을 대표하는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이 루트 비례로 디자인 된 건물이었다.

그리스시대에 발견된 미학적 태도를 정확하게 이해했고 반영한 결과이다 .

황금 장방형의 원리는 그리스 건축은 물론이고

石 窟 庵



수학적 비례의 전통 브루넬레스키 이후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은 이론가이자 건

• 알베르티 르네상스 건축의 이론적 배 경을 제시했다. 또한 자신의 인문학적 지

축가였던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로부터 전성기를 맞이한

식을 바탕으로 『회화론Della Pittura』, 『건

다. 그는 르네상스 건축의 원리를 수학적 질서에 따라 새롭게

권으로 구성된 『건축론』은 르네상스 건

정리한 『건축십서』를 출간했으며, 자신이 추구했던 르네상

축론Della Architectura』을 저술했다. 10 축의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다. 그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은 이후 바로크 건축에 강

스 건축 양식의 핵심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Chiesa

한 영향을 주었다.

di Santa Maria Novella의 건물 정면에 잘 표현했다.

••페디먼트 그리스 · 로마 건축의 입구와 지붕 사이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장식물

• 기하학적 형태와 비례 같은 수학적 특성을 중시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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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이 성당은 삼각형, 사각형, 원을 기본 단위 로 디자인되었다. 아치는 반원, 벽체의 패널 은 사각형, 벽기둥은 직선, 건물 맨 꼭대기 의 페디먼트••는 삼각형, 장미창은 원형이 다. 이처럼 건물 구조가 기하학적 기본 단위 를 벗어나지 않는다. 단순하면서도 엄격하 게 질서 잡힌 르네상스 건축물의 단단한 풍 모를 표현하고 있다. 여타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물도 이렇게 디자인되고 있다. 석굴암도 이러한 기하학적 형태가 두드러 진다. 오히려 알베르티의 건축이 세 개의 기 하학적 도형에 국한된 것에 비하자면 석굴 암에는 훨씬 더 많은 기하학적 단위가 적용 되었다. 요네다 미요지의 논문을 보면 석굴 암의 디자인에 기본적으로 정삼각형, 정사 각형, 정육각형, 정팔각형이 사용되었으며, 원기둥이나 구 등의 입체적인 형태도 쓰여 졌다고 설명했다. 그 뿐이 아니다. 본존불을 자세히 보자. 본 존불 뒤에는 마치 서양 종교화의 후광처럼 원형의 ‘광배’가 자리한다. • 여러 기하학 도형이 적용된 석굴암의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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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이다


二 .로 마 에 서 온 석 굴 돔 구조 석굴암을 보면 본존불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시선을 모두 흡수해 버릴 정 도로 정말 존재감이 강렬하다. 그러니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석굴암의 구조까지는 시선이 미치지 않는다. 자, 여 기서 본존불을 아래에서 올려다보자. 본존불 머리 위로 매 우 독특한 구조가 눈에 들어 올 것이다. 꼭대기의 둥근 돌을 중심으로 화강석 덩어리가 매우 정교 하게 조립되어 있다. 이들은 둥근 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정말 빈틈없이 만들어졌다. 이런 완벽한 설계 구조를 얻 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멋진 불상과 그 위로 드리워진 공간이 구조적으로 너무 • 본존불 위로 보이는 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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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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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탑은 몬드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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