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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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Magazine 2013 Au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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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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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다가 흐려지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유려한 선 먹빛 하나로 창조해내는 수천의 세계 , 한국의 미술로 독립을 말하다


CONTENTS 2013.8_ VOL.306

국민과 함께하는 독립기념관

11 COVER STORY 8월은 방학과 휴가를 맞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산과 계곡, 바다 등으로 떠나 일상의 피로를 덜기에 좋은 달입니다. 그런데 아시나요?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는 다양한 주제를 가진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는 것을요. 피서지 가까운 곳에서 전시물, 예술작품들을 찾아보세요.

04

어느덧 더위가 저만치

창을 열다 손끝으로 그리는 열정의 흔적

물러나 있을 겁니다.

06

마음을 보여주다 미술, 시대의 상흔을 담다

08

세상과 마주하다 한국화의 부흥을 시작하다

10

내일을 바라보다 이중섭, 소의 눈에 숨은 이야기

2013년 8월호 제26권 통권 제306호 발간등록번호 11-B370008-000001-06 ISSN

1227-5883

등록일

1988년 3월 19일·천안라00001

발행일

2013년 8월 1일

발행처

독립기념관

발행인

김능진

편집인

박장혁

편집

신하윤(sunny@i815.or.kr, 041-560-0244)

편집위원

이용학, 신충석, 임공재, 이성배, 황민용,

이미영, 송현석, 김형목

www.i815.or.kr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독립기념관

27

12

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36

우리의 영토를 찾아서

32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 영유권(2)

16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여행 ‘캠핑’

34

하나. 독립군 무기구입 비사 ‘왜놈보다 더 무서운 모기떼’ 둘. 낙산의 채석장에서 떠낸 화강석

20

기념관 서재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안희제

22

일제의 수탈

24 26

36

신택리지 백제의 꿈, 부여

40

따뜻한 우체통 하나. 비와 아버지, 그리운 노래 둘. 일본에 전해진 우리 문화

44

독립기념관에 가다 하나. 다시 찾은 독립기념관 캠핑장

전시관 이야기 새나라세우기_제6관 첫 번째 이야기

세상을 읽는 눈 화장하는 남자, 요리하는 남자

엽서로 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사연

나를 살리는 습관

둘. 필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46

기념관 소식

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들보 강영소

30

숨결 따라 걷는 길 웬일인지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이 복받쳐 울음만 나옵니다

※ 본문에 실린 외부 집필자의 글은 독립기념관의 공식적인 입장과 일치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매품) ※ 월간 독립기념관 은 창간호(1988년 3월호)부터 이번 호까지 독립기념관 홈페이지(www.i815.or.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04

국민과 함께하는 독립기념관

● 창을 열다

글. 편집실


05

August 2013 | vol.306

손끝으로 그리는 열정의 흔적 미술은 화가가 바라보는 사물이나 현상의 묘사뿐만 아니라 화가가 활동한 시대의 보편적인 시선이기도 했다. 20세기 전반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류 문명의 부조리와 인간성 상실의 허무를 예술로 구현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등 새로운 미술 사조가 등장했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제의 수탈과 민족사의 고난에 대한 저항의식을 미술작품에 담아 표현해냈다. 집요하고 서슬 퍼런 탄압 속에서도 절대 붓을 꺾을 수 없다는 각오로 열정의 손끝을 투쟁의 도구로 삼았던 일제강점기 우리 화가들.


06

글. 홍경한 미술평론가·경향아티클 편집장

국민과 함께하는 독립기념관

● 마음을 보여주다

미술, 시대의 상흔을 담다 01

20세기 초 서구 화단은 새로운 세기에 걸맞게 춘추 전국시대를 열고 있었다. 그야말로 과거 그 어느 때보 다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실험을 시작했고 미술가들은 소재와 형식만이 아닌 아이디어 면에서도 이전과 다 른 양상을 내보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무력을 앞세운 경술국치는 민족 모두를 침통한 현실에 직면토 록 했고 우리나라의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반만년

02

역사 틈에서 자란 미술의 고유한 맥마저 끊어 놓았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은 미술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좌절감에 의욕을 상실했

한데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 이후 확연히 달라진

으며 활발하게 움직이던 서구미술의 다양성을 받아들

다. 예술 주권이 상실되어 현실적인 제약을 받으면서도

이는 데도 한계를 느껴야 했다. 이에 1910년대의 우리

민족적 자긍심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가시

나라 미술은 확실히 ‘동면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 되었으며 예술로서 독립의지를 표현한 저항의식이

그러나 이러한 정체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근본

담긴 미술작품들이 다수 태어나게 된다. 민족의 예술혼

적으로 우리나라가 식민통치를 당한 일제강점기에도

을 되살리자는 ‘자각’이 비로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장

민족성만큼은 시들지 않았고 곧 침잠에서 깨어나 지독

르를 불문하고 창궐했던 것이다.

하게 전신을 휘감던 무력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가 중반을 넘어서며 우리나라 작

사실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술가들은 망국

가들 사이에선 그 어떤 것보다 민족적 자각과 새로운

의 슬픔 속에서 힘없고 어둡고 비참한 현실을 미술로

양식의 창조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시대

잊으려던 양태가 다분했다. 그렇기에 잠시 허망한 기

의 상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국민으로서의 자긍심

운이 겉도는 작업들이 종종 선보이곤 했다.

을 높여주는 미적 태도가 나타났고 어떤 억압적 환경


07

August 2013 | vol.306

전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당 대 명성을 얻은 작가들은 더 이상 일제라는 통로를 거 친 습득과 타성과 자조 섞인 매너리즘에 안주하지 않 았다. 민족미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형식주의에서 절망과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특수한 현실에서도 우리 미술가들은 희망을 갈구하고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했다.

벗어나 새로운 수묵을 태동시키려는 몸짓을 드러냈으 며, 이종우나 임용련처럼 일본을 통해 수용할 수 있었 던 서구 미술의 한정성에서 탈피해 유럽에서 직접 배 우고 익혀 국내에 전파하려는 야심만만한 작가들도 적 지 않았다. 이밖에도 많은 작가들이 일본으로부터 일 방적으로 유입 및 수용되던 ‘아류’ 화풍에서 ‘독립’하

에도 굴하지 않는 자세를 내보이게 된다. 이러한 예술

려는 뜨거운 움직임을 선보였으며, 절망과 고통을 느

적 자각을 이끈 당시 대표적인 작가로는 동양화(왜색

낄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특수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풍의 온존성에 대한 반발로 현재는 한국화로 부른다)

갈구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정신성과 메시지의 투영

의 이상범과 변관식, 서양화에선 고희동·김관호·이

은 잊지 않았다.

종우·이쾌대·박수근·김인승·나혜석·이중섭 등을 꼽 을 수 있다. 이중 사실주의 화풍으로 창의적인 세계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이인성이나 인상주의 화풍의 그 림으로 남다른 예술세계를 일구려 노력한 오지호, 자 신만의 시각에서 표현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구본웅과 이중섭, 추상주의 그림을 그렸던 김환기와 유영국 등 은 일제강점기 전습된 양식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초기 회화를 새로운 물결로 이끈, 눈에 띌만한 작가라 해도 그르지 않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끄는 작가는 이쾌대였다. 그는 경상북도 칠곡 출생으로 일본에서 유학하여 서구미술 접목기에 활동했던 서양화가로서 일부 작가들이 왜색 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서구의 근대화법에 우리의 전통

03

적 양식과 결합시키기 위해 고민하던 사이, 자주적이 며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서양화를 끌어낸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 「푸른 두루마기를 입 은 자화상」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이쾌 대는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데, 여기서 푸른색은 웅비하기 위한 민족적 의식을 상징하며 두루마기는

사진자료 01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02 김환기 「꽃과 항아리」 03 이쾌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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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함께하는 독립기념관

글. 김순녀 미국 카네기 멜론대 석사, 미술평론가

● 세상과 마주하다

한국화의 부흥을 시작하다

큰 세력으로 자리 잡은 서양적 가치관에서 한국화를 보려고 하며, 한국화의 개념 규정에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대다수는 박수근 화백이 한국화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서양화가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 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지극히 한국적인 요소 를 담아내고 있지만, 현재 미술계가 보편적으로 사용 하는 서양 분류 체계는 사용된 재료가 기준이 되기 때 문에 유화를 사용하는 박 화백은 서양화가로 분류된 다는 것이다. 서구적 시각으로 한국 미술을 기준 짓는 현 상황에서 이런 논란과 함께 한국화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놓여있다는 점도 논의대상이 되고 있다. 전통

한국화의 사전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한국의 전통

에 얽매인 한국화는 현대 미술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기법과 양식에 의해 다루어진 회화’라고 명시돼있다.

현대적 요소를 가미한 한국화는 기존 서양화와 차이

한때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동양화라 불리기

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서양화법의 기준을

도 했지만 우리 색깔을 찾자는 목소리가 반영되면서

받아들인 한국 미술계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우왕

1980년대 들어 ‘한국화’란 공식 명칭이 사용됐다. 그

좌왕하며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러나 이런 영광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고 이따금씩 회자되는 역사 속 뒷이야기로 남고 말았다.

그러나 도무지 변화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던 한국 화가 최근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현대 한국화’의 새로

미술계는 발전보다 전통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한 이

운 움직임이 그려지고 있다. 전통적 자연관이 대세를

당시를 ‘반짝했던 한때’로 평가한다. 동양화에서 한국

이루던 화폭은 작가 내면의 자아를 담아내기 시작했고

화로 명칭만이 바뀌었을 뿐 한국적 요소를 부각시키기

산수화 속에는 현대적 건물이 들어섰으며 먹과 몇 개

위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지만 동양화에서 한국화로,

의 천연 빛깔은 화려한 색채로 바뀌어 전통을 말한다.

그리고 현대 한국화로 넘어가는 시기의 기준을 조심스 럽게 제시해볼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의 전통’을 축적하고 있는 현대 한국화에 고운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즉 한국화는 전통 회

여하튼 한국화로 이름을 바꾸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확장된 소재의 범위다. 과거 이상적인 것을 주로 그렸다면 한국화 시대에는 현실세계의 모습을 담는

예전 것만 좇는 어리석음도, 전통을 모르고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재료가 개방된 모습

그저 휘젓기만 하는 붓질도 진정한 한국화가

을 꼽을 수 있는데 종이와 먹을 주로 사용했던 방식에

아니라는 데에서 현대 한국화가 시작돼야 한다.

서 유화·캔버스·비디오 아트까지 서양적인 시도가 한국화의 범주에 들어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한국화를 개념화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즉 현재 미술계는 이미

1) 법고(法古) : ‘옛 것을 토대로 본받다’는 뜻 2) 창신(創新) : ‘새 것을 창조하여 변화시키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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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01

1)

화로서 지금까지 자리잡아온 그만의 방식, 즉 ‘법고’

전통의 법’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전통’을 확립한 결

가 존재 하는데 이를 제대로 익히지 않은 채 현대화를

과, 한국화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추구하는 작가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연적·초

한국화의 세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법고에 집착하면

상·신선화 같은 소위 전통적 소재도 완벽하게 그려

바보가 되고 창신에 집착하면 깡패가 된다’. 예전 것만

냈던 단원 김홍도처럼, 해서와 같은 전통 서체도 흠잡

좇는 어리석음도, 전통을 모르고 그저 휘젓기만 하는 붓

을 데 없이 구현한 추사 김정희처럼 미술사에 길이 남

질도 진정한 한국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에만 얽매

은 이름을 살펴보면 모두가 법고를 제대로 지킨 사람

여 발전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머무르다 이제 새로운

2)

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창신’ 을 해냈던 한국

시대상을 반영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한 현대 한국화. 전

화가만이 새로운 전통의 흐름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통 회화가 지닌 심미적 가치를 바탕으로 현대의 사조를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실학사상이라는 시대

풍미할 한국화의 힘찬 붓질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적 변화를 충실히 담아냈으며 추사 김정희는 조형성 이 강조된 글씨체를 선보여 서체의 역사에 파격적인 변화를 이끌었던 예가 이를 뒷받침한다. ‘충분히 익힌

사진자료 01 청전 이상범 ‘산가(山家)’ 1950년대 중엽 02 소정 변관식 ‘부항춘일(釜港春日)’ 1960년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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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편집실

국민과 함께하는 독립기념관

● 내일을 바라보다

이중섭, 소의 눈에 숨은 이야기

이중섭은 ‘소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소를 즐겨 그렸다. 맑은 큰 눈망울과 시선, 순하고 선한 일생, 때로는 씩씩 거리며 분노하고 저항하는 무서운 힘. 이중섭은 이러한 소의 여러 표정과 자세를 화폭에 옮겼다.

“이중섭은 소・어린이・꽃・가족 등 전통적인 소재들을 자주 그렸어요.” 이중섭은 일제의 압제에서 시달리고 저항하는 민족혼의 상징으로 소를 선택한 화가이다. 대표 작인 「흰소」에서처럼 힘찬 붓놀림, 생동감 있는 강한 선, 절제된 색상으로 큰 몸집을 가진 힘센 소의 격렬한 움직임이 실감나게 드러나 있다. 소 의 골격과 동세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소 의 마음 속 기세까지 포착한 것이다. 소를 바라보 는 이중섭의 시선은 그의 유일한 시로 알려진 「소 의 말」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곱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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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선에서 우리민족의 저항의식이 보이지 않나요?”

순한 눈망울 속에 담긴

강렬한 저항의식 이중섭이 소년 시절에 다녔던 오산학교는 남강 이

새도 맡아보았다. 훗날 이중섭은 “한두 번 본 것은 그

승훈 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적

릴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인 분위기가 매우 강한 곳이었다. 오산학교에서 이중

나중의 일이지만 이중섭은 소에게 민족적이고 신화적

섭은 그림 능력뿐만 아니라 민족정신까지 거침없이

인 성격을 부여하다가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전쟁과

받아들였다. 소년의 눈에 민족의 슬픈 현실이 보이기

가족의 이별, 그리고 화가로서의 자괴감 등 개인적인

시작하자 점차 무엇인가 희망찬 저항을 하고 싶다는

아픔을 표현하는 자전적인 의미까지 덧입힌다.

생각이 들었고, 그때 그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 이 바로 소였다.

여하튼 이중섭의 그림 속에서 묘사된, 당당한 눈빛 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힘차게 울부짖는 소의 울음

소는 가축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큰 동물이지만 다

소리는 슬픔에 울부짖는 소리나 분노의 소리가 아니

른 동물과 싸우는 법이 없다. 평소에는 순한 소이지

다. 그것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만 까닭 없이 공격을 해오거나 자신을 해치려는 경우

착취, 민족상잔의 아픔과 가족이 헤어지는 고통에 익

에는 달라진다. 커다란 눈망울에선 칼날 같은 번뜩임

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자신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이 보이고, 커다란 콧구멍에선 불같은 콧김이 뿜어져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부당한 힘에

나온다. 그리고 사자후를 토해내며 상대를 제압한다.

눌려 쉽게 자신의 당당함을 포기하는 모든 시대의 사

사람도 소가 화를 낼 때만큼은 접근이 어려워지는데

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소뿔에 한번 차이면 생명이 위험해지기까지 한다. 순 한 소이지만 싸움을 할 때는 어디에 그런 힘이 숨겨 져 있었나 싶게 엄청난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소의 특성에 반한 이중섭은 매일같이 황소를 따라다녔고 들에 나가 해가 지도록 소만 바라보며 관 찰을 거듭했다. 만지고 쓰다듬고 눈 맞추고 함께 걷고 소의 등에 기대어 보기도 하며, 말을 걸거나 소의 냄

“이중섭은 40세의 이른 나이로 요절한 천재 화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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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글. 박민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 자료. 독립기념관 소장

● 우리의 영토를 찾아서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 영유권(2)

대한제국의 영유권 행사와 일제의 간도 강탈 일본이 우리나라 고유 영토인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과거 다른 나라와 민족 침략을 국시로 삼았던 일제의 군 국주의 역사 인식의 계승이요 연장이라는 점에서 특히 우리의 공분(公憤)을 자아내고 있다. 일제는 한국 병탄 직전인 1909년에 북방 변경의 간도를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륙 침략을 위해 중국에 일방적으로 넘겨준 전력이 있 고, 우리나라는 일제의 국권침탈로 말미암아 대한제국이 영토로 간주했던 간도의 영유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는 통한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다. 이에 한 세기 전 백두산 정계비를 둘러싸고 우리 민족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던 간 도 영유권 분쟁의 실상을 살펴봄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와 일제가 자행한 국권침탈의 한 단면, 그리고 영토 수호의 당 위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한다.

1885년, 1887년 연이어 열린 청국과의 간도 영유권

墾局) 관원이 한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병사들을 동원

협상이 입장 차이로 결렬된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백

하여 한인 이주민들을 감금・구타하고 재물을 토색하

두산 정계비문의 정계(政界)에 따라 간도에 대한 실질

는 등 갖은 악형을 가하던 실상을 비롯하여 청나라 비

적 영유권을 행사하였다. 관원을 파견하여 간도 이주

적들이 무산간도로 들어와 한인을 총살하고 한인학교

민의 호적과 지적을 정리한 것이 그것이다.

를 급습하여 교사와 학생들을 가해한 사실, 1890년 청

두만강 대안의 이주민들은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

나라 관원이 종성간도의 화룡곡(華龍谷)에서 자행한

임에도 불구하고 현지 중국 관원들과 비적들에 의해

작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작폐에 대

신체·재산상 핍박을 받게 되자, 정부에다 자신들을

한 정부의 근본적 대책을 촉구하고, 아울러 한국의 영

보호해줄 관원을 파견해주도록 청원하였다. 이에 정부

토인 간도와 현지 이주민들이 청나라의 압제를 받고

에서는 1902년 5월 이범윤(李範允)을 시찰원(視察員)

있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으로 임명하여 간도로 파견하였다. 시찰원 이범윤은

이러한 보고를 접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이범윤에

간도 이주민 1만 3천 호를 대한제국에 입적시키는 등

게 시찰원보다 더 큰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는 관리사

주민보호와 생활안정에 노력하였다. 또한 1902년 8월

(管理使) 직함을 내려주었다. 당시 내부대신 김규홍

과 1903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

(金奎弘)은 이범윤을 관리사로 새로 임명하면서 “강

을 살상하는 등 청나라 관헌이 함북 무산과 종성 대안

토의 경계에 이르러서는 정계비 아래로부터 토문강 이

을 비롯한 간도 일대에 거주하던 한인을 핍박하던 실

남에 이르기까지를 우리나라의 경계로 확정하여 관청

상을 내부에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 가운데는 종성간

을 설치하고 세금을 정해야 할 것이다. 다만 수백 년

도(종성 대안 간도를 지칭함)에 있던 청의 무간국(撫

비워둔 넓은 지경으로 갑자기 결정하는 것은 너무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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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게 벌이는 일인즉, 불가분 우선 보호관(保護官)을 특

이범윤의 업적 가운데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백두

별히 두어 관리(管理)라 이름하여 그곳 간도에 체류시

산 정계비와 간도 영유권에 대해 학문적으로 체계화

켜 사무를 전담토록 하겠다”고 광무황제에게 상주한

작업을 이룩한 것이다. 인문지리학자 학음(鶴陰) 김노

대목만 보더라도 당시 조정에서는 간도를 대한제국 영

규(金魯奎, 1846-1904)로 하여금 『북여요선(北輿要

토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곳

選)』을 편찬케 한 것이 그것이다. 김노규는 함북 경원

을 즉시 영토로 편입하고 관청을 신설하게 되면 청나

출신의 유생으로 그의 부친도 『관북지(關北志)』를 편

라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 대신에

찬한 역사지리학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관북 변경지대

간도 한인의 생명과 권익을 대한제국 정부 차원에서

를 두루 탐방하면서 그곳의 인문·역사·지리·생태

보호하기 위해 현지 파견관의 성격을 띤 관리사를 특

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해왔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주

별히 임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범윤은 1903년

체적 관점에서 이를 인식하고자 노력한 학자였다. 만

8월 간도 관리사에 임명되어 유척(鍮尺)과 이두마패

주 독립군의 탁월한 지도자였던 서일(徐一)을 비롯하

(二頭馬牌)를 제수받았다.

여 유수한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것은

관리사 이범윤은 청의 비적들로부터 이주민의 재산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과 생명 등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사병집단인

김노규가 문하생들인 최상민(崔相敏)·오재영(吳

사포대(私砲隊)를 편성하여 충의대(忠義隊)라 불렀

在英) 등과 함께 편집한 『북여요선』은 간도 정계(定

다. 매 20호마다 포수 한 사람을 뽑고 매 5호마다 포병

界) 문제를 역사지리학적 관점에서 현지를 조사하고

한 사람을 거두어 부대를 조직하였으며, 영장(領長)·

관련 자료를 모아 종합 정리한 자료집의 성격을 갖고

부영장 이하 검찰·참리(參理) 등의 간부를 두어 부대

있다. 이범윤이 시찰원으로 간도 현지에 파견되었을

를 운영하였다. 충의대는 누차 청의 비적을 소탕하고

때, 그는 이주 한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간도 영유권을

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는 등 이주민의 생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

명·재산 등 권익 보호와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절실히 필요하였고, 이러한 작업을 김노규에게 요청하

러나 청나라에서는 관리사 이범윤의 활약에 불만을 품

였던 것이다. 경원·종성 등 두만강 변경지대에 거주

게 되었고 급기야 청국 공사 허태신(許台身)이 계속

하면서 이 일대의 역사·인문·지리학에 조예가 깊던

우리 정부를 힐책하여 그의 소환을 요구해오자, 대한

김노규가 국경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제국 정부에서는 부득이 1904년 말 이범윤을 소환하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 않을 수 없었다.

󰡔『북여요선』 2권 1책은 1904년 서울에서 활자본으

이범윤이 거느린 충의대가 이주민들의 권익 신장에

로 1백 부 간행되었다. 앞서 1903년 초에 편집이 완성

크게 기여하는 상황에서 간도 이주민과 변경지대 주민

되자, 이범윤은 당시 내부에 보고할 때 그 고본(稿本)

들은 이범윤의 소환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그 부당성을

을 첨부하여 제출하였다. 여기에는 내부대신 이건하와

성토하기까지 했다. 이때 이범윤은 충의대를 거느리고

공부대신 김가진 등 고관의 서문이 붙어 있고, 끝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러시아군을 도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

간도시찰원 이범윤의 휘하에서 활동한 ‘간도수약위원

였으며, 1905년 러일전쟁 종료 후에는 연해주로 넘어

(墾島修約委員)’ 이병순(李秉純)의 발문이 붙어 있다.

가 최재형 등과 함께 한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1910년 경술국치 후 『북여요선』은 두 번 간행되었

전을 수행하게 된다.

다. 1925년 이창종(李昌鍾)이 현토본(懸吐本)으로 간


14 행한 것이 그 첫 번째이며, 1927년에는 독립운동 지도

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부상되어 있었다. 장지연과

자 박용만(朴容萬)에 의해서도 간행되었다.

같은 언론인은 물론, 이승만과 같은 민족 지도자, 용계

박용만은 『북여요선』을 간행할 때 자신이 찬술한

(龍溪) 유기일(柳基一)처럼 초야에 묻혀 지내던 선비,

『제창조선문화일이어(提唱朝鮮文化一二語)』와 박은

심지어는 문석환·신보균과 같이 일본의 대마도에 끌

식이 지은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 우리 역

려갔던 의병에 이르기까지 민족 구성원 모두가 간도

사와 문화의 자존을 역설하는 문류를 부본으로 합철하

영유권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았을 뿐만 아니

였다. 당시 『북여요선』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라 당연히 영토 수호의 차원에서 간도 영유권을 인식

국권회복 내지는 독립운동을 위한 교재의 성격을 지

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 침략으로 말미암아

니고 있었음을 실증해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박용만

국권이 유린되던 상황에서 대한제국 영토의 일부인 간

이 직접 쓴 이 책의 서문에도 발간에 이르게 된 경위와

도까지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감에서 비

함께 강토 회복이 조국 광복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

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간도 영유권 문제가 일제

이 강조되어 있다. 『북여요선』은 또한 언론인 장지연

에 의한 국권유린 상황과 습합되는 가운데 민족의 자

이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영토

존 수호문제로 부상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문제를 다룬 『대한강역고』를 간행하면서 백두산 정계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망국

비와 간도 영유권 문제를 학술적으로 정리할 때 그 저

의 전초 을사조약이 늑결된 뒤 간도 영유권 문제는 일

본이 되기도 하였다.

변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간도를

백두산 정계비에서 연유한 간도 영유권 귀속 문제

한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고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그

는 한민족의 자존에 직결되는 사안으로 전 민족의 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 강점을 위해 서 울에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가 뒤이어 1907년 8월 23 일 간도 용정(龍井)에다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臨時 間島派出所)를 둔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간 도는 한국의 영토이고 간도 이주 한인은 청나라 정부 에 대한 납세 의무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간도 영유권 의 장래가 우리 민족의 주체적 의지와 결단을 떠났음 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일제는 간도문제를 교섭해 오다가 1909년 9 월 4일 청나라와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함으로 써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 탄광 채탄권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전문 7개 조로 되어 있는 간도협약 은 제1조에 “청·일 양국 정부는 두만강을 한·청 경 계로 상호 성명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경계선으 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한·중 국경선은 두

01

만강 상류인 석을수로 확정되고 말았다. 정계비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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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상류이며 따라서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우리의 주장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 대신에 일제는 대륙침략 에 필수적인 철도, 곧 만철(滿鐵)의 평행선인 신민둔(新民屯)-법고문(法 庫門) 간, 대석교(大石橋)-영구(營口) 간의 철도 부설권을 비롯하여 북 경-심양 철도(京奉鐵道)의 연장, 심양-안동 철도의 개축 등의 권리를 확 보하고 또 대륙 침략의 에너지원인 무순(撫順)·연대(煙臺) 일대의 탄광 채탄권을 획득하는 실익을 챙겼다. 장차 만주침략을 기정사실로 설정하고 정책을 수립하던 일제로서는 더 이상 만주의 일부인 간도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셈이며, 대신에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고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가던 일 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곧 일 제의 대륙침략정책에 따라 간 도는 우리 민족의 의지와 상관 없이 희생되고 말았다. 간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한중 양국 이 관련 문헌과 현지 조사에 의거하여 합리적인 결론에 이 르지 못한 상황에서 일제가 그 동안 한국이 영토로 간주해온 간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 방적으로 중국측에 팔아넘긴 셈이다. 이로써 간도협약은 이 듬해 경술국치에 앞서 대한제 국의 영토 일부를 망실하게 한 일제의 국권 침탈 행위였다. 일제는 간도협약 체결과 동 시에 용정의 통감부 간도파출 소를 폐쇄하는 대신 그 자리에 총영사관을 두어 이후 간도에 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을 탄압 하는 중추기관이 되었다. (끝)

사진자료 01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1927년 중간

한 『대한북여요선』 표지. 해외 한인들 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교재로 활용하기 위해 박은식의 『대동고대사 론』과 박용만 자신이 정리한 『제창조 선문화일이어』를 합편하여 간행했다. 02 간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된 대한제국

지도(1908년 박문서관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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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독립군 무기구입 비사

‘왜놈보다 더 무서운 모기떼’ 상하이에서 무기를 숨겨오다 1920년 2월 김승학은 무기구입의 밀명을 띄고 안동 현에 도착하여 이륭양행 내에 비밀리 설치되어 있는 임시정부 교통국 안동지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휴대하 고 있던 무기자금 전액을 사장인 조지 엘 쇼에게 맡겨 상하이의 이화양행으로 송금토록 한 다음 이륭양행의 선박에 탑승하였다. 73시간 만에 상하이 황포탄 부두 에 정박하여 법조계 보창로 보강리로 가서 제50호 집 에서 안창호를 만나 은밀하게 무기구입을 추진하였다. 김승학은 7월 말까지 상하이에 머물며 비밀리에 무

01 김승학

기 240정과 탄환 수만 발을 구입하였다. 이를 수송하 기 위해 철궤 4개를 사서 내부를 변조하고 그 속에 무 기를 가득 채운 후 나무상자로 다시 포장하였다.

6일 후 쇼가 다시 와서 물품은 무사히 양륙하였고 2

중국 상인 장하이펑(張海峰)을 만나 만주의 누에

일 전 장하이펑이 철궤를 목선에 싣고 압록강 상류 쪽

고치를 사다 팔면 이익이 많다고 설득시키고 가는 길

으로 떠났으니 걱정하지 말고 상하이로 회정하라는

에 이 철궤를 관전현 장음자에 사는 조병준에게 전하

것이었다. 쇼의 말은 아마도 무슨 정보가 있었는지 일

면 그가 누에고치를 많이 사줄 것이라 약속하였다. 조

경이 이번 배를 각별하게 주시하고 양행 소속의 선박

병준은 김승학의 스승이자 평북독판부 독판으로 있던

들까지 일본 경비정이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뿐만 아

터였다. 장하이펑과 같이 이륭양행의 배편으로 안동

니라 이륭양행 문앞에도 사복 경관이 주야로 지키고

현에 도착하였는데 일제의 경비정이 선박 주위를 맴

섰다고 한다. 김승학으로서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만

돌고 있는 것이었다. 양행에서는 한국인은 절대 상륙

약 상륙하지 못하면 수송한 무기가 관전현까지 무사

하지 말고 상하이로 회선하라는 것이었다. 김승학은

하게 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저간의 사정을 모

배에 올라 온 쇼에게 철궤 4개를 사온 사정과 장하이

를 것이요, 만일 잘못된다면 우리 독립운동선상의 중

펑과 동행하는 이유를 밝혔다. 쇼는 화물은 전부 우리

대한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하여 부득이 상륙할 것을

양행에 두었다가 2~3일 후에 상륙하라고 했다.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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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은 권총을 한 자루 차고 이튿날 새벽 뱃사공 에게 은밀히 작은 배를 대게 하여 육도구 방면으로 상 륙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날은 안개가 짙었다. 그 러나 낌새를 차린 일경의 추적으로 할 수 없이 배를

金承學

버리고 압록강변의 옥수수밭으로 무조건 뛰어 들었 다. 경비정에서 내린 일경이 벌써 작은 배에 올라 뱃 사공을 구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네 명의 일경 이 추적해 왔다. 옥수수밭으로 알고 들어갔더니 옥수

한 발에 왜적 한 놈씩 잡아라

수 사이에 콩을 심었는데 콩 넝쿨이 얽혀서 헤치고 나

며칠 후 조병준을 비롯한 광복군사령부 간부들이 숙

가기가 곤란했다. 10여 고랑을 지나서는 아예 콩 포기

소에 모였다. 그날 밤 청년들로 외부를 엄밀히 경계하

를 안고 누워 버렸다. 일경들은 밭으로 들어오지는 못

도록 하고 철궤을 열었다. 그 속에서는 권총과 장총을

하고 도주할 만한 곳을 차단한 채 옥수수밭을 지키고

비롯한 무기 240정과 탄환 수만 발이 나왔다. 좌중(座

섰다.

中)은 의외의 광경에 놀라고, 청년들은 사기가 충천하

얼마쯤 지나서는 난데없이 경찰견 두 마리가 달려

였다. 이것이 서간도 무기구입의 효시였다. 독립군 병

들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권총을 빼어들고 개가 오면

사 수십 명을 동원하여 각 사람마다 10여 정씩의 무기

쏠 작정을 하고 누웠다. 그러나 개는 옥수수밭 가운데

를 휴대케 하고 밤을 이용하여 백 여리 되는 길을 걸

를 이리저리 다니다가 나가 버렸는지 조용해졌다. 이

어서 광복군사령부 주둔처인 관전현 수혈립자(水穴砬

미 해는 중천에 떠올랐다. 김승학은 밭을 빠져나가려

子)로 운반하고, 그곳에서 광복군사령부 소속 군인들

고 동정을 살폈으나 동쪽과 남쪽은 압록강이요, 서쪽

에게 무기수여식을 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과 북쪽은 일경들이 지키고 있어 난감했다. 별 도리 가 없이 옥수수밭에서 이틀 밤을 보내는데 일경의 경

제군들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피와 땀을 모아서

계는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이틀 밤을 지내는 동안 가

마련한 것이며, 내가 몇 번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면서

장 곤란한 것은 갈증이 심하여 기침이 자주 나는 것과

모집하였고 상하이를 왕래하며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구입

모기떼가 인정사정없이 달려들어 뜯어먹는 것이었다.

한 것이다. 제군들은 그렇게 알고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

그 정경이 하도 무료하여 시를 지었다.

하여 한 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한 발에 왜적 한 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사냥개 오는 것은 두려울 것 없으나 모기떼가 덤벼드니 이건 가장 무섭구나

그 후로 독립군 병사들은 국내로 들어가서 일제의

목마를 때는 오줌으로 목을 축이고

기관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하였는데 수개월 동안에

배가 고프면 생 옥수수 그냥 씹네

막대한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일제의 기관에서 발표 한 것만으로도 교전 횟수 78회, 주재소 습격 56처, 면

사흘 만에 겨우 경계망을 뚫고 탈출한 후 우여곡절

사무소와 영림서 소각 20여 처, 일경 사살 95명이 되

을 겪으면서 관전현 장음자 조병준 집에 도착했다. 때

었다. 이로써 압록강 연안 일대와 평안북도 지역은 일

는 1920년 음력 8월 보름께였다.

시 전쟁터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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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허영섭 한국일보 논설위원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낙산의 채석장에서 떠낸 화강석

본격적인 일제 침략의 교두보가 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로 살펴보는 일제의 야욕과 꺼지지 않는 조선의 민족혼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에 쓰인 건축자재는 대부분 조선 땅에서 직접 조달되었다. 이로써 공사비 절감에도 도 움이 되었지만 건물도 튼튼히 지을 수 있었던 것이 다. 과거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과 원산·인천이 차례 로 개항된 직후 일본 사람들이 원산 영사관을 지을

을 짓는 데도 쓰이게 된다. 이에 앞서 덕수궁 석조전

때만 해도 일본에서 모든 건축자재를 실어왔다는 사

과 조선은행 청사를 짓는 데에 쓰였던 화강석도 대부

실을 감안하면 뒤늦게나마 조선 자재의 우수성을 깨

분 여기서 캐낸 것이었다.

닫게 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

대리석은 황해도 금천군 고동면(古東面)과 평산군

청사 신영지(新營誌)」는 “본 청사는 조선의 중앙 정

의 서봉면(西峰面), 경기도 양평군 운악면(雲岳面),

청(政廳)이기 때문에 건축상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전

평안도 순천군 자산면(慈山面) 등 모두 아홉 곳에서

부 조선산 건축재를 사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라고

캐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압록강 국경 너머 중국

기록하고 있다.

션양(瀋陽) 근처의 샤마탕(下馬塘) 대리석도 들여다

총독부 청사의 겉벽에 사용된 화강석은 당시 행정

썼지만, 어디까지나 구색용에 지나지 않았다.

구역으로 경성부 동부출장소 창신방(昌信坊)의 낙산

특히 이들 대리석은 광택이 우아하면서도 각양각

(駱山) 채석장에서 떠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창신동

색의 문양을 띠고 있었다. 캐낸 지역에 따라 색깔과

에 자취가 남아 있는 돌산이 바로 그곳이다. 산 전체

문양이 제각각이었다. 황해도 고동면 대리석이 엷은

가 화강석으로 노출되어 있어 떠내기가 편리했고 석

구름 무늬를 띠고 있었다면 경기도 운악면 대리석은

질도 뛰어났다. 더군다나 은은한 윤택마저 감돌았으

선명한 뱀껍질 무늬를 나타냈다. 평안도 자산면 대리

니 겉벽 마감재로는 더없이 훌륭한 편이었다.

석은 팥보라색, 황해도 서봉면 것은 흰색을 띠었으므

돌을 뜨는 데는 이미 그 시절에도 공기 압축기가 사용되었다. 당시로서는 최신식 기술이었을 것이다.

로, 각각의 대리석을 적당히 배열함으로써 표현하고 자 하는 문양을 자유롭게 나타낼 수가 있었다.

낙산의 채석작업은 총독부 골조공사를 맡았던 시미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떠낸 대리석은 바닷길로 서

즈쿠미(淸水組) 회사가 직접 운영을 맡았다. 시미즈

해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용산 포구까지 운반

쿠미는 옛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서 전차로 경복궁의 공사

을 캐내고 있었다.

현장까지 실어 날랐다. 총독부의 요청으로 경성전기

낙산의 화강석은 총독부 청사에만 들어간 것이 아 니었다. 뒤에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과 조선신궁

회사가 전철 지선(支線)을 깔아 놓은 덕분이었다. 낙산에서 캐낸 화강석 운반을 위해서도 청량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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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이르는 전차선에 지선이 놓여졌다. 채석장에서 전

나무 말뚝은 모두 1만여 개에 이르렀다. 땅바닥에 소

차 지선을 통해 실어낸 화강석을 육조 거리의 칭경기

나무 말뚝을 박아 넣은 것은 육중한 화강석 건물의

념비각 앞까지 운반해 오면 여기서부터 총독부 공사

무게를 지탱하려는 것이었다. 청사의 건물 하중은 대

현장까지 또 다른 지선으로 화강석을 실어 나르도록

략 10만 톤 정도에 이를 것으로 여겨지던 터였다. 여

되어 있었다.

기에 말뚝 하나가 땅속에 박힌 채로 견뎌낼 수 있는

이밖에 콘크리트에 섞이는 자갈과 모래는 한강변

무게는 15톤 정도로 추산되었고, 따라서 1만 개의 말

에서 채취했고, 벽돌은 마포의 관립 연와(煉瓦) 제작

뚝으로는 최소한 15만 톤 정도의 무게를 떠받칠 수

소에서 구워냈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탁지부 건축소

있다는 계산이었다.

소속으로 설치되어 벽돌과 기와・토관 등을 찍어내던

그러나 정확하게는 이 가운데 9,388개의 말뚝이 청

공장이었다. 관급 공사에 들어가는 벽돌은 대체로 여

사의 기초공사 항타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총독

기에서 만들어 조달했던 것이다.

부가 청사 공사의 전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청사

이러한 자재에 앞서 청사 부지 다지기에 사용된 소

신영지」는 이런 내용까지도 자세하게 말해주고 있다.

나무 말뚝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신의

물론 완공 단계에서 몇 가지 장식품목은 수입해서

주 영림창이 백두산 주변의 원시림을 파헤치고 나무

조달하기도 했다. 집무실 바닥에 까는 카페트를 비롯

를 마구 잘라낸 것이었다. 이미 이 일대의 벌목 작업

해 커튼 레이스, 창문 틀 등의 일부 재료는 수입에 의

을 통해 총독부가 자체의 수입을 늘려가던 터였으니,

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체에 비해서는 극히

백두산 삼림이 여지없이 훼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든 저렇든 조선 백성들

총독부 청사 땅 다지기를 위해 이렇게 잘려 온 소

의 입장에서는 수탈당하기는 매일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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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 기념관 서재

교류와 소통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전념하다 불법적인 을사늑약은 백산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 가왔다. 약육강식·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안희제 ( 이동언,2010)

질서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였다. 변 화에 부응하는 방안은 신학문을 통한 실력배양임을 절감하는 동시에 사립흥화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와 이어 양정의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 맺 은 인간관계는 향후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펼치는 밑 거름이었다. ‘교류와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한 백산은 계몽운동 에 앞장섰다. 재학 중 교남학우회나 교남교육회 등을 비롯한 계몽단체 참여는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고향에 세운 의신학교・창남학교와 부산 구명학교 교

백대사표(百代師表)로 재평가를 받다 광복 이후 부산 시민들은 백산 안희제 추모제를 거행

장으로서 활동도 대동단결의 밑거름을 구축하려는 의 도였다.

하고 있다. 이는 암울한 식민지시기 백산상회를 근간으

서상일·김동삼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로 항일운동을 주도한 ‘백산정신’을 되살리기 위함이다.

도 조직하는 등 일제 침략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독립운동을 이끈 심산 김창숙(金

않았다. “단원은 반드시 피로써 맹세한다”라는 단규

昌淑)은 백산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團規)처럼 국권회복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데

“선생의 일생은 우리 반제(反帝) 민족선구자로서의 모습으로 거룩하고 당당함이었다. 마음에 사기(私氣) 가 있었던가. 어디까지든 정대(正大)했으며 사람을 용 납함에 협량(狹量)했던가. 어디까지든 관대 활달했으 며, 일을 꾀함에 견해가 짧았던가. 어디까지든 정확 원 대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적의 고문과 그 찔기찔기한 각양의 박해 밑에서도 꺼지지 않고 매진하는 용감성 등 엄연하여라. 어찌 우리 겨레의 백대사표의 기상이 아니 겠는가.” 혁명가의 경험과 진정성에서 나오는 ‘인간 안희제’ 를 이처럼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또한 동지인 ‘경주최부자’ 최준(崔俊) 회고에서도 자신에게 엄격한 모습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본문 「경교장의 통고소 리」 참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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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기지로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다 국망(國亡) 이후 망명한 백산은 북간도 등지를 거 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신채호·이동 휘·이갑 등을 만나 다양한 항일운동 방략을 모색하 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항 일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였다. 이를 위한 국 내외 항일세력 긴밀한 연대와 활동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 확보는 우선적인 당면과제로서 다가왔다. 귀국하여 부산지역 자본가인 이유식(李有植)·추 한식(秋翰植) 등과 백산상회 설립은 이러한 목적을 관

백산상회의 모습

철하기 위함이었다. 국외에서 전개되는 항일운동을 지 원하기 위한 국내 연락망이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

인재 양성이 독립국가 건설의 초석이다

하는 독립운동기지는 바로 백산상회였다. 백산상회는

백산은 우수한 청소년을 선발하여 국내외에 유학시

무역주식회사로 회사명 변경과 동시에 각지에 지점이

킬 목적으로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였다. 해외로 유학

나 연락소를 개설하였다.

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전진한·김범부·안호상·이

3・1운동 결과로 조직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극로·신성모 등이었다. 민중 계몽과 경제적인 향상

는 항일운동 구심체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연

을 위한 부산예월회와 협동조합운동도 전개하는 한편

통제·교통국·지방선전부 등을 통하여 국내 항일세

「중외일보」 사장으로 항일언론의 필봉을 휘둘렀다.

력과 연대를 강화하였다. 백산무역회사 지점은 사실상

만주사변 이후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어렵게 되자

국내로 파견된 특파원 활동 지원과 아울러 독립운동

영안현 동경성에 독립운동기지로서 발해농장 경영에

자금 공급처나 마찬가지였다. 곧 연통제 국내 지부인

착수했다. 이곳으로 대종교 총본사를 이전하는 등 대

셈이었다. 단둥(安東)에서 이륭양행을 운영하던 조지

종교를 통한 대동단결을 도모하였다. 이주한인의 권

엘 쇼와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리를 옹호하는 동시에 독립정신의 지주로서 대종교 신봉에 열성을 다하다가 결국 임오교변으로 이역만리 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百代師表

일본인 망언을 경계하다 부산 용두산공원에는 멀리 현해탄을 건너 일본을 응시하는 백산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 미래지향적인 양국 관계를 훼손하면서 망언을 일삼는 오늘날 일본 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잘못 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고 일갈을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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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독립기념관 소장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 엽서로 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사연

한 장의 엽서 안에서 민족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읽는다. 꼭꼭 눌러 쓴 필체 속에 희망적인 내일을 꿈꿨던 그들의 미소가 담겨있다.

기타무라가 서재필에게 보낸 엽서 서재필기념재단 기증 1900년 8월 기타무라가 필라델피아에 거 주하고 있는 서재필에게 안부를 전하는 우 편엽서이다. 엽서에는 후지산과 도쿄의 정 원, 고베의 호텔 사진 등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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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일제의 수탈

조선총독 관저 1908년 서울 용산에 건립된 조선총독 관저 사진엽서이다. 한국인들에게 웅장 한 관저를 통하여 복종을 강요하기 위 해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으나 총독 하세가와는 지리적인 접근성 등으로 잘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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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글. 이미영 교육센터 학예사 / 자료. 독립기념관 소장

● 전시관이야기

새나라세우기 제6관 첫 번째 이야기

이번 호에서는 제6관 새나라세우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말살에 맞서 우리말과 글, 역사와 문화를 지켜낸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3·1운동 이후 청년·학생·여성·농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우리말의 수난과 수호

대중화를 확산시켰던 민중의 항일운동

일제는 우리민족에게 학교와 공식모임에서 한글사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

용을 금지하였습니다. 한글말살을 꾀하며 일본어

중추기관이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를 ‘국어’로 강요하고 우리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 시키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학자들은 일제 의 언어동화정책에 항거하며 우리글과 우리말이 민

시기별 활동들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들 중 이번 시간에는 민족문화 수호운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족정신의 핵심이라는 자각을 바탕으로 민족문화 보 존을 위해 한글보급운동과 국어학운동을 전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6년 11월에는 훈 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여 가갸날(1928년부 터 한글날로 개칭)을 제정하였습니다. 주시경의 제 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였습니다. 또 한글강습회를 열어 문 자보급운동을 전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민족교육운동 3・1운동이 이후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 확산

● 『한글원본』

되면서 사회 각층에서는 민족의식 배양을 위한 민

조선일보사에서 문자보급운동을 위해 발행한 교재

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식민지교육정책에

입니다. 1920년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이

대항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 같은 한국인에 의한 한

방학기간에 농촌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연과 문맹퇴

국인고등교육기관 설립운동이 국내는 물론 국외의

치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29년 조선일보사는 제

동포사회까지 번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회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을 시작으로 1934

그리고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이 계속되는 가 운데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농민・노동자·여

년까지 남녀학생을 모집하여 농촌지역에 파견하였 습니다. 이 자료는 그 당시 사용한 문자보급 교재입 니다. 농촌지역에 파견된 학생들은 문맹퇴치와 농

성·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과 사설강습소 등의

촌경제 활성화를 위한 협동조합의 결성 등 농촌계

비정규 교육기관이 만들어져 우리말과 우리글, 우리

몽운동을 펼쳤으나 1935년 조선총독부의 탄압으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로 중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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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 오산학교 제2회 졸업기념 1911년 오산학교 제2회 졸업기념 사진입니다. 오산학교는 1907년 남 강 이승훈이 평안북도 정주에 민족 정신 고취와 인재양성을 위해 설립 한 민족교육기관입니다.

국학과 민족사학 한국 근대역사학은 한국 역사의 독자적 발전과 내 ● 『조선통사』 원고본 이 책은 1941년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안재홍이 쓴 것으로 단군

적 발전을 부정하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한국 사의 주체적인 발전을 밝히고 민족사를 수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조선으로부터 부여와 삼한 시대의

1910년대와 1920년대 민족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

문화와 풍속을 다른 한국 고대역사

를 민족으로 설정하고 한국사에서 한민족의 실체를

서의 원고입니다. 기존 식민주의 사

찾는데 주력하였습니다. 민족의 자주성 고양을 위

관에서는 소외 되었던 단군조선과

해 단군을 중시하고 발해를 한국 고대사 영역에 포

부여 및 삼한사회의 독립적인 문화

함하여 식민주의 사학을 부정하였습니다.

발달에 주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역사와 문 화의 고유성·특수성 나아가 세계성과 보편성을 탐 구해 민족정신의 고양을 목표로 한민족의 자주와

● 『조선사연구』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정인보는 우리말과 글·역사·문화에 담긴 조선 의 얼을 찾아내서 지키고 발전시키 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인보는 역 사의 원동력을 ‘얼’로 파악하고 우리 나라 5천년 역사를 ‘얼’ 사관에 입각 하여 새롭고 체계적으로 서술하였 습니다.

독립을 달성하려 한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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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일교 학예실 학예사 / 자료. 독립기념관 소장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 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들보 강영소(姜永韶) 1886.2.18 ~1934. 8. 24

姜永韶

주요공적 ・1909년 국민회 결성 발기인 참여 ・1913년 흥사단 창립 시 평안도 대표로 참여 ・『신한민보』 시카고 지국장으로 독립운동에 매진

01

독립기념관은 광복회·국가보훈처 와 공동으로 강영소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하게 되자 하 와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국권회복 운동을 도왔고 미주 본토로 이주한 뒤부터는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언론 활동과 국어교육, 한인 이민자 관리와 독립자금 모금 등 미주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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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02

03 01 강영소 선생 02 호놀룰루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회관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다. 03 1907년 결성된 한인합성협회 회원들이 개천절을 기념하여 찍은 사진이다. 한인합성협회

에서 선생은 총무와 서기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선생은 앞줄 오른쪽 끝에 있다.

한인단체 ‘한인합성협회’ 총무·서기로 활동 선생은 1886년 2월 18일 평안남도 증산에서 부친 강명화(姜明化)와 모친 송씨 사이의 6남 1 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03년 증산군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1905년 4월 부친을 따라 미국 하 와이로 이민한 선생은 에와농장에서 설립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서 설립한 공진회 등에 주도 적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국권회복운동을 후원하고 교민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합동하 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할 때 선생은 총무와 서기 등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09년 2월 한인 합성협회와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결성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와 기관지인 『신한국보』의 사무원과 재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28 04

05

04 1919년 5월 2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발행한 대한인국민회원 최석칠에 대한 독립의연금 영수증이다. 선생이

재무로서 확인하고 있다. 05 19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사진으로 강영소・홍언・최정익(왼쪽부터)은 대한인국민회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06 1913년경 샌프란시스코 오크가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본부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서부터 8번째가 선생이다.

안창호의 흥사단에 창립회원으로 참여 국민회가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확대된 이후 선생은 신문사와 지방총회의 직임을 그만두고 1910년 10월 미주 본토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신한민보사의 총무로 일하면서 대 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재무와 중앙총회의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대의 원 등을 역임하였다. 1913년 5월 선생은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에서 단우번호 2번 으로 평안도를 대표한 창립회원으 로 참여하였으며, 선생의 집에서 창립식이 이루어졌다. 1916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 로 선출되어 국어교육의 강화·새 이민자 관리·실업부 설치·스티 븐스 처단사건으로 형 집행 중인 장인환의 석방청원서 제출 등 다 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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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독립운동단체의 통합하는 데에 매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특파위원으로 하 와이로 파견되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0년 11 월 다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 되었다. 1923년 시카고로 이거 하여 임시정부재정후원회 위원, 『신한민보』 시카고 지국장 등을 역임하 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뇌출혈로 별세하였다. 2011년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부친 강명화 선생과 동생 강영문 선생이 각각 2012년 건 국훈장 애족장, 동생 강영각 선생이 1997년 건국포장을 받은 독립운동 의 명문가문이다. 07

08

07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 1930년 11월 1일 창립 내역과 1931년의 활동기록을 남긴 다이어리이다. 선생은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장을 역임하였다. 08 대한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강명화(강영소 선생의 아버지)가 안창호에게 1912년 수여한 위임장이다.

강영소 선생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활발하게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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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 숨결 따라 걷는 길

글.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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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인지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이 복받쳐 울음만 나옵니다. 남몰래 남승룡과 함께 붙들고 몇 번인가 울었습니다. 동포들이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 - 베를린 올림픽대회 우승 후 손기정 선생의 인터뷰 중에서

손기정 (孫基禎, 1912. 10. 9(음력 8. 29) ~ 2002. 11. 15) 1931년

1935년

1936년

조선신궁대회에서 평안북도 대표로 출

3월 도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

8월 9일 오후 3시 제11회 베를린 국제올

전, 5천 미터에서 2위에 입상하다.

26분 14초(비공인 세계신기록), 4월 조

림픽대회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선육상대회에서 2시간 25분 14초(비공

19초 2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다.

1932년

인 세계신기록), 11월 3일 메이지신궁대

동아일보 하프마라톤대회에서 2위에 입

회에서 2시간 26분 42초(공인 세계신

상하고 육상명문 양정고보에 입학하다.

기록)으로 우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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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인숙 문화칼럼니스트

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 나를 살리는 습관

캠핑아웃도어진흥원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캠핑 인구는 약 130만 명에 달한다. 캠핑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현재 1천 개를 넘어섰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10대 히트 상품에 캠핑이 포함됐을 정도로 그 인기는 대단하다. 그만큼 대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의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여행

‘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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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자연은 현대문명의 해독제

끽하길 권한다. 그날의 날씨와 함께 가는 사람들, 주변 환경에 따라 매번 색다른 기분을 즐길 수 있어 전혀 지 루하지 않다.

캠핑은 자연과 어울리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캠핑을 갈 때는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은

대표적인 힐링 여행이다. 특히 도심에서 극심한 스트

데, 그러기 위해서는 짐을 쌀 때 필수품과 그렇지 않은

레스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품목으로 나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초보자들의

숲 속 캠핑은 최고의 휴식이 된다. 휴양림 캠핑장의 풍

경우 짐은 많은데 정작 필요한 물품이 없는 건 이런 과

부한 피톤치드는 스트레스와 긴장을 완화시켜 숙면을

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짐을 싸서 캠핑장

돕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며, 인체의 면역

을 나올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와 똑같이 주변을 정리

력과 자연 치유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또한 대자연

해놓고 나오는 것이 매너다.

의 품에 안겨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의 별을 보거나,

힐링이 되는 캠핑을 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공기와

텐트 밖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고, 편의시설이 잘

울이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게 마련이

갖춰져 있는 곳을 택한다. 야외에서 찾기 쉽고 오가기

다. 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오롯이 자연과 내가 하

편리한 위치로 더위를 식히며 편하게 쉴 수 있는 산림

나가 될 수 있는 시간이자 공간인 것. 수많은 캠핑족들

지가 적당하다. 아울러 텐트를 설치할 수 있는 데크와

이 휴일만 되면 캠핑장을 찾는 것은 이처럼 온전히 자

취사장·샤워장·화장실 등 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곳

연과 교감할 수 있는 캠핑의 매력 때문이 아닐까? 게

을 선택한다.

다가 자연에서 직접 요리한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현대문명 의 해독제는 자연뿐이란 말처럼 자연은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최고의 처방약이고, 캠핑은 이를

여기! 올여름 캠핑하기 좋은 곳

실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제대로 즐기는 아웃도어의 매력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야영장 1만5천 평의 드넓은 공간에 화장실과 식수대, 산책로 등이 갖춰져 있으며 운동장·야구장 등의 체육시설도 있다. 화로와 바비큐그릴 등 사용이 가능하다. (문의) 041-560-0355

캠핑을 보다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캠핑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 여행의 목적을 정하고 가는 것이 좋

경북 봉화 청옥산자연휴양림 여름에 모기가 없고 밤이면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늘해 여름 피서지로는 최고로 꼽힌다. 오토캠핑장 107개 중 44개는 전

다. 유적지 탐방이나 숲 여행 등 나만의 관심사와 테

기시설이 갖춰져 있어 편리하다. (문의) 054-672-1051

마를 잡아 여행하는 식이다. 특히 가족과 함께 캠핑을

경기도 양평 산음자연휴양림

할 때는 야영지를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삼아 주변 관

프로그램 전문휴양림’이다. 풍부한 피톤치드로 삼림욕을 하

광과 여행을 겸하면 즐거움이 배가된다. 만약 캠핑이 목적이라면 캠핑의 매력을 100% 느낄 수 있는 방법으 로 하나의 캠핑장을 홈그라운드로 정해서 사계절을 만

국립자연휴양림 중 유일하게 건강증진센터가 있는 ‘숲 치유 기에 좋다. 치유와 캠핑이 어우러진 힐링 여행을 하기에 안성 맞춤이다. (문의) 031-774-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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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글. 윤진아 자유기고가

● 세상을 읽는 눈

만약 다윈이 현신한다면 ‘그루밍족은 남성 진화와 적자생존의 좋은 예’라고 할는지 모른다. 거친 남성이 승승장구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강인한 힘보다는 부드러운 감성을 지닌 남성이 대세다. 그루밍족·메트로섹슈얼·초식남·꽃미남 등등 달라진 남성을 지칭하는 신조어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그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는 방증이다.

화장하는 남자, 요리하는 남자

시대의 트렌드 된 ‘그루밍족’ 미(美)에 대한 기준이 시대마다 달라진 것은 누구나

아름다워지기 위한 욕망에 남녀 구분이 없어지고 남

아는 사실이지만,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미용시장

성들도 스킨케어·피트니스·패션 등 자신을 돋보이게 하

이 남성들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루밍족(패션

는 데 적극적이 됐다. 이는 전통적 성역할의 경계가 모

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자들을 일컫는 신조

호해진 사회현상에다,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약자로 인

어)이 늘고 외모도 하나의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확산

식되던 여성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현실도 한몫한 것으

하면서 남성 뷰티업계는 그야말로 활황을 맞고 있다.

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트렌드를 두고 ‘자본주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성 화장품 시장의 성장이다.

가 새로운 소비계층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문

남성 화장품 시장은 연 1조 원에 육박하며 매년 평균

화’라 치부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외모나 패션 등에

15~20%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뷰티용품 시장

무관심했던 남성들이 적극적인 소비층으로 부각했으니

뿐만 아니라 남성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자동차·패션·

썩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금기시돼왔던 원초

건강용품 등 전 분야의 시장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직

적인 욕구가 발현된 지금이야말로 어찌 보면 진정한 남

업군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성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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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남자들, 요리와 육아에 홀리다 요리하는 남자도 늘었다. 요리를 통해 여성에게 매

화장하고 살림하는 남자는 이미 그 세력을 점차 확

력을 어필하는 남성을 일컬어 ‘개스트로섹슈얼’이라는

장하며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됐다. 물론 그럼에도 ‘남

말까지 등장했는데, 이는 미식가를 뜻하는 ‘개스트로

자다움’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들리며 앞으

놈’과 성적 매력을 뜻하는 ‘섹슈얼’의 합성어다. 종전

로 더욱 다양한 의미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분

의 ‘메트로섹슈얼’이 다양한 관련 비즈니스를 창출한

명한 것은 2013년 현재 ‘예쁜 남자’의 인기는 단순히

것처럼 개스트로섹슈얼 또한 향후 다양한 비즈니스를

외모지상주의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

창출할 트렌드 코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모를 가꾸며 내적 자신감까지 키워 삶의 활력을 끌어

가정 내에서 존재감 제로였던 아빠들도 확 달라졌

올리려는 노력이야말로 적자생존을 위한 진화 수단이

다.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육아휴직을

아닐까. 관리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세상, 오늘도 뷰티

사용한 남성 공무원은 총 2,297명으로서 2009년 512

샵은 남성들로 차고 넘친다.

명에 비해 무려 4.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 구 같은 아빠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문화코드다. 아빠 와 자녀의 여행을 콘셉트로 내세운 TV 예능프로그램 이 인기를 끌며 공연·영화·레저·유통업계에도 속 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가하면 배낭처럼 보이는 기저귀 가방 등 아빠의 기호가 반영된 육아용품이 불 티나게 팔려나가고, 서점가에는 ‘아빠 육아’를 주제로 별도의 진열대가 등장했을 정도다.

Cook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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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성배 학예실 학예사

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 신택리지

혼자 떠나는 여행은 여럿이 함께하는 그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백제의 꿈,

지인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왁자지껄하며 즐기는 여행도 좋지만, 혼자서 무작정 떠나 예기치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듣는 여행 또한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이렇게

부여

夫餘

두근거리는 호기심을 안고 7월의 폭우를 가르며 백제문화의 터전, 충청남도 부여로 출발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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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02

03

꽃들이 떨어진 곳 ‘부소산성’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부여를 가로지르는 백마 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 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

백제공예문화관

한 산의 이름을 따서 현재는 부소산성이라 부른 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부소산성 뒷문으로 나오면 전통 한

산성 정문을 지나면 바로 마주치게 되는 백제

옥을 재해석한 예사롭지 않은 건물을 만나게 된

의 세 충신(성충·흥수·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

다. 이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것으로

해 세워진 삼충사(三忠祠)에서 참배를 드리고,

1970년부터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현

30여 분 정도 산길을 걷다 보면 깎아지는 듯한

재는 백제공예문화관으로 변경되었다.

절벽에 도착하게 된다. 이 절벽은 서기 660년 백

1층에는 도자·금속·회화 공방이 마련되어 있어

제가 무너지던 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

서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하고 관람객들이

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

직접 전통공예를 체험해 볼 수도 있다. 2층은 백

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

제3D영상관으로 구성하였는데 백제 무왕(武王)

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몸을 던진

인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서동 이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야기’, 사랑과 희생의 메시지를 담은 ‘사비의 꽃’ 등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강에 몸을 던진 궁

두가지 3D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있다. 최근 유행

녀들을 떨어지는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落花岩)

하는 4D 시스템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두 작품

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낙화암 꼭대

모두 수려한 영상과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으

기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고즈넉한 정자가

니 근처를 지나게 되면 꼭 한번 관람해보기를 권한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

다. 또한 한켠에 마련된 특별전시실에서는 백제 기

에 세운 것이다.

와를 주제로 한 전시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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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수 ‘정림사지’ 이렇게 연꽃의 향취에 흠뻑 취해 있을 때 즈음 갑자기 쏟아붓기 시작하는 비를 피해 정림사지박 물관으로 들어갔다. 박물관 로비에 빽빽이 들어서 있는 배흘림기둥을 지나 전시관에 들어가면 백제 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신문의 양식을 빌려 04

재미있게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월천 공덕(越川功德)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환기공간을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백제의 건축

최초의 인공 연못

과 공예 기술에 대한 전시가 펼쳐지는데 특히 전

궁남지

시장 한 가운데 위치한 석탑제작 재현모형에서는 백제인의 빼어난 석탑 축조 기술을 엿볼 수 있다.

궁남지(宮南池)는 무왕 35년(634년)에 만든 우리나라

제2전시관에 들어서면 거대한 정림사지 복원모

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 포룡정(抱

형을 통해 현재 터만 남아있는 정림사지의 화려했

龍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정자까지 나무다리가 놓여

던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외에도 정림사지 출

있다. 이곳은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의 출생 설화

토 자료들과 정림사지 연구의 성과 등에 대해 최

로도 유명한데, 무왕의 부왕인 법왕의 시녀였던 여인이

신 연출기법을 통한 전시가 되어있다. 특이하게도

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

정림사지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이

이가 서동이라는 것이다.

눈길을 끈다.

부여군에서는 궁남지의 2만 5천여 평의 광활한 습지에

어느새 비도 그쳐 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한 정림

다양한 연꽃을 식재하여 2000년도부터 매년 7월 서동연

사지를 걸어본다. 대부분의 건물은 유실되어 그 터

꽃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때는 축제 직전의

만 남아있지만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오층석탑만

시기였기에 다양한 행사들을 체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대

은 한 가운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마치 나지막

신 연꽃들을 다듬고 각종 구조물들을 세우면서 분주히

한 목소리로 자신이 지켜보았던 백제의 흥망성쇠

축제준비를 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끝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석탑 뒤에는 강당이 위

이 보이지 않는 연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여름의 무

치해 있고 이 안에는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담백한

더위도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마음에 고요함이 찾아옴을

모습의 정림사지석불좌상이 세상 모든 것을 포용

느낄 수 있다.

할 듯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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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부여를 들른다면 꼭 먹어봐야 할 연잎밥 비단 끝없이 연꽃이 펼쳐진 궁남지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부여의 주요 사적지 입구에는 대부분 연지(蓮池)라는 작은 연못이 있고 연지마다 각색 의 연꽃들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지를

05

발굴하게 되면 바닥면에서 연꽃의 줄기와 뿌리의 흔적들이 발견된다고 하니 백제인들의 연꽃에 대 한 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부여 곳곳에 연잎밥을 파는 식당을

올 여름 휴가는 부여로!

볼 수 있다. 나 역시 부여에 들른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모 예능방송의 출연진들이 들렀다는 식

부여에는 이 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웅장한 극락전과 석

당에 들어섰다. 주인이 정성들여 정갈하게 접어놓

탑, 석등을 품고 있는 무량사(無量寺), 찬란했던 백제역사

은 연잎을 펼치면 그 안에는 연근·은행·잣 등을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백제왕궁인 사비궁·능사·위

비롯한 다양한 곡물이 들어있는 찰밥이 나타난다.

례성·고분공원을 재현해 놓은 백제문화단지 등 의미 있는

연잎밥을 한입 베어 물고 같이 나오는 진한 된장국

장소가 많다. 한 도시 안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 곳이 또

을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으면 고소한 밥의 맛과 구

있을까 싶은 도시 부여. 올 여름 휴가는 부여로 떠나 백제

수한 된장국의 맛, 그리고 은은한 연잎의 향이 섞

인들의 발걸음을 쫓아 걸으며 도시 가득한 연꽃 향에 빠

여 몇 번이고 입을 우물거리게 된다.

져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자료 01 백제문화단지 02 부소산성(백화정) 03 백제공예문화관 04 정림사지(오층석탑) 05 궁남지(포룡정) 06 궁남지(연꽃)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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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경석 대전 동구 성남동

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 따뜻한 우체통 하나

비 와 아버지, 그리운 래 노

장마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제는 그토

짭짤한 장사였다. 따라서 나 또한 마치 한국문학 현진

록 혹독한 무더위를 몰고 와 만인을 괴롭히더니 어제

건의 『운수 좋은 날』에 나오는 동소문의 인력거꾼 김

부턴 다시금 그 본연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새벽인

첨지처럼 재수와 운수까지 좋아 우산을 수십 개나 파

지금까지도 그야말로 흡족하게 대지를 적시고 있다.

는 날이면 그날이 바로 나로선 영락없는 잔칫날이었

개인적으로 장마를 좋아한다. 아니 차라리 ‘사랑한

다. 그런 날엔 만날 신김치에 꽁보리밥만 먹던 몹시

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게다. 왜냐면 장마는 지난 시

애면글면 어렵던 홀아버지와 나도 모처럼 돼지고기

절 나에게 있어선 대단히 요긴한 알바의 돈벌이 수단

내지고등어 등의 생선 따위 맛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즈음에도 소위 ‘진상’ 손님이 있었다. 모 통

사는 게 어려웠던 초등학교 시절, 일종의 아르바이

신회사에 전화를 하면 한동안 “사랑합니다, 고객님”

트 개념으로 우산 장사를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통

이라며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부작용이 속출하여 지

팔달의 관문인 나의 고향, 천안역 앞이 그 무대였는데

금은 응대 멘트가 바뀐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특히나 방금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주 고객이었다.

일부의 진상 손님들이 “진짜 나를 사랑한다고? 근데

그 즈음 비닐우산 하나는 5백 원이었는데 우산 한 개를 팔면 2백 원이나 남는, 그러니까 40% 이윤의 꽤

얼마나 사랑해?”라는 따위로써 마구 장난전화를 한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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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신은 천재를 시기하여 일찍 저 세상으로 데리고 간다 는 누군가의 주장이 그럴듯하게도 다가온다. 배호는 가수 생활 동안 20여 장의 음반을 발매했고, 300여 곡을 남긴 그의 히트곡 중에 요즘 같은 장마철에 걸맞은 노래 「비 내리는 경부선」이 포진한다. 배호의 마 지막 노래라고도 회자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이러하다. “경부선 고속도로 비가 내린다 / 이 몸 실은 차창가 에 부딪혀 흘러내린다 / 경상도 길 충청도 길 비 내리 여하간 그 당시에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 진상 손 님으론 단연 한창 장대비가 쏟아질 때 사간 우산을 날

는 천안 삼거리 /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는 떠난 님의 눈물인가”

이 환하게 개니 찾아와서 도로 물려달라고 하는 사람

내 고향인 천안삼거리가 등장하는 「비 내리는 경부

이었다. “아저씨, 이런 경우는 읍슈”라고 해봤자 이미

선」은 여전히 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밖에 없는 노

교양과 상식마저 잃은 그 진상손님에겐 마이동풍이었

릇이다. 지난달 죽마고우들과의 모임을 앞두고 천안

다. “미안햐, 근디 내가 시방 집에 돌아갈 차비가 읍

삼거리를 찾은 것도, 또한 천안에 갈 적과 돌아올 때

서서 이러는 겨. 그러니 이번 한 번만 환불해 줘!” 그

역시도 「비 내리는 경부선」을 계속하여 애청하였다.

렇게 진상 손님에게 우산 값을 물려주던 날의 더럽던

우리 속담에 씨도둑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기분은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아니라 그야말로 “징

과거처럼 굳이 육중한 체중의 전축을 통하지 않고도

그러워요, 진상 손님!”에 다름 아니었음은 구태여 사

손에 쥔 스마트폰만으로 어떠한 음악이라도 쉬 들을

족이다.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나는 오늘도 스마트폰을 이용

선친께서는 생전에 두 가수를 좋아하셨다. 그 두 가

해 배호의 노래를 듣고 있다.

수의 이름은 바로 남인수(南仁樹)와 배호(裵湖)이다.

경부고속도로에 비가 내리면 천안 삼거리 역시 촉

따라서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께선 ‘별표’ 전축을 집에

촉이 젖을 터이다. 한데 그 비는 아마도 너무도 일찍

들이면서 가장 먼저 두 가수의 노래가 담긴 레코드판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의 눈물이 아닐까 싶다. 불현

을 서둘러 구입하셨다. 선친께선 꼭두새벽부터 일어

듯 너무도 일찍 저 세상으로 가신 선친이 이 여름비처

나시어 동네가 떠나갈 듯 전축의 볼륨을 올리셨다. 그

럼 그렇게 흠뻑 그립다.

바람에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늘 부족한 잠을 호 소했다.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으로 스타덤에 오른다. 이밖에도 「꼬집힌 풋사랑」과 「감격시대」 등 숱한 히트 곡을 낸 그는 1962년 6월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배호는 남인수보다 24년 연하인데 그 또한 「누가 울 어」와 「돌아가는 삼각지」·「안개 낀 장충단 공원」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나 신장염으로 말미암아 만 29 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따라서 배호의 경우를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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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성욱 경남 밀양시 내이동

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 따뜻한 우체통 둘

일본에 전해진 우리 문화 얼마 전 3년간 생활했던 일본 나라현(奈良県)은 우

巧)』에는 아야 씨가 백제 안야계(安耶系) 도래인이라

리나라의 경주와 같은 분위기의 옛 도읍지이다. 일본

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정사(正史)로 인정받

고대국가가 세워진 곳으로 삼국시대 우리 조상들의

는 『속일본기(続日本記)』에는 야마토국의 수도였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일본 고대문화의 보고(寶庫)

지금의 아스카무라(明日香村)에 살고 있던 도래인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8, 9할이었다고 나와 있다.

우선 나라라는 지명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왠지 모

이게 무슨 말인가? 일본 토착민들이 아니고 한반도

르게 친근감이 들지 않는가? 나카지마 리이치로(中島

에서 건너온 백제계를 중심으로 한 우리 조상들이 당

利一郎)는 그의 저서 『일본지명학연구』에서 나라는

당히 주인으로서 도읍지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한국어에서 온 말로 국가라는 뜻이며, 한반도에서 온

렇다면 한자와 불교·유교 등 선진문물로 아스카시

도래인(渡來人)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붙였던 이

대(飛鳥時代 592~710년)를 열었던 우리 도래인들이

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국가·평야·궁전·왕의 뜻을 가지고 있던 나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일본의 역사책 『길비

라는 지명을 이곳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군사(吉備郡史)』를 살펴보면 나라에 자리잡은 야마

이 일대에서 만날 수 있는 아스카테라(飛鳥寺)는

토(倭 또는 大和)국이 아야 씨의 나라라고 하고 있

당시 집권자였던 백제계 귀족 소가노우마코(蘇我馬

다. 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쓴 『잡고(雜

子)가 소가 씨족 절로 세웠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당시 백제로부 터 사찰 건축가를 비롯한 다수의 기술자가 와서 건설 에 참여했으며 고구려 국왕은 황금 320량을 기증하였

아스카테라(飛鳥寺)

다고 한다. 도래인 도리(止利) 불사가 만든 석가여래 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근처의 이시부타이(石舞臺)는 소가노우마코의 무 덤으로 알려져 있다. 묘실의 길이 7.5미터, 폭 3.4미 터, 높이 7.7미터에 이른다. 또 무덤의 전체 크기는 50미터나 되고 폭 8.4미터의 호로 둘러져 있으며 돌 의 전체 무게가 2천 3백 톤에 달해 당시 그의 막강한 권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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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부타이와 함께 아스카의 상징인 타카마츠(高 松)고분도 있다. 이곳에는 일본 국보로 지정된 사신도 (청룡·백호·주작·현무)와 천문도(天文圖), 고구려 복식의 여인상 벽화가 등장하는데, 이는 고구려 고분 의 특징이다. 근처에는 키토라고분이 자리하고 있는 데 역시 사신도와 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이카루카쵸(斑鳩町)를 가면,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호류지(法隆寺)를 만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 양식이 합쳐진 절로서 고구려 승려 담 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목조 5층탑이 있으며, 중요

아스카대불

문화재급만 해도 2천 3백여 점에 이른다. 그 중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도 물 론 우리 조상들이 만든 것이다.

나라 지방을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고대 우리나라 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이곳 일본에까지 우수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고료쵸(広陵町)

문물을 전해 주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에는 아스카시대 최초의 왕실 사찰인 쿠다라오테라

우리 민족이 일본의 주류세력으로서 새로운 문화를

(百濟大寺)와 궁궐로 사용된 쿠다라오미야(百濟大宮)

창조하면서 당당하게 활동했음도 알 수 있었다. 이러

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쿠다라가와(百濟川)·쿠

한 조상들의 얼과 슬기를 이어받은 우리는 문화 민족

다라노(百濟野) 등의 기록도 함께 있어 이곳이 백제

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져야 하겠다. 그리고 대한민국

도래인들의 터전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지금도 백

을 더욱 좋은 나라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 선조들에게

제를 가리키는 ‘쿠다라(百濟)’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부끄럽지 않는 우리 후손들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

계속 남아 있다. 나라시대(710~784년)의 도읍지는 헤이죠쿄(平城京)로서 지금의 나라시 일대였다. 대표 적인 건축물인 세계문화유산 도다이지(東大寺)는 사 슴 천국으로 널리 알려진 나라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 는데,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금동비로자나불은 높이 15미터, 대좌 3미터이다. 역시 백제계 도래인 로벤(良辨)과 교키(行基)가 건립에 절 대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도다이지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 또한 신라계 도래인들이 장인으로서 중심적 역 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텐리시(天理市)에 있는 이소 노카미진구(石上神宮)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본 국보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것인데,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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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 독립기념관에 가다

다시 찾은 독립기념관 캠핑장, 이곳이 참 좋다 출처 : 써니사랑하기(http://blog.naver.com/tkvkfdbr03/130169470703)

피워 놓고 앉아 있으니 운치가 좋 았다. 한동안 앉아서 시원한 밤공 기를 맞으며 산책도 한 바퀴 돌아 봤는데 곳곳에 멋스러운 텐트와 캐 라반들이 꽤 많이 보였다. 이번에도 아무 탈 없이 텐트에서 아주 잘 자고 일어난 오누이. 아침 올해 들어 두 번째 캠핑을 다녀 자리를 잡아 봤는데 의외로 주변이 부터 해먹을 타고 비눗방울 놀이를 왔다. 뭐니 뭐니 해도 가깝고 저렴 멋스러웠다. 하고 시설 편한 독립기념관 캠핑

하며 아주 신이 났다. 이렇게 독립

텐트를 치고 타프를 치고 먹을 기념관 캠핑장에서 우리 가족의 1

장으로 말이다. 독립기념관 캠핑장 것을 장만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박2일 캠핑이 마무리되었다. 앞으 의 배치는 가·나·다·라 4구역으로 아빠를 기다리며 쭌이는 국기놀이 로도 우리 가족은 올 여름과 가을 나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다’구 에 빠졌다. 늘 그렇듯 조촐한 저녁 에도 독립기념관 캠핑장을 내 집 역 왼편에 있는 생태학습장 근처에 식사를 끝내고 둘러앉아 모닥불을 드나들 듯 다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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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독립기념관」에서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작성한 블로그 글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접수 : sunny@i815.or.kr)

필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출처 : 연느님(http://blog.naver.com/drttop/130172314142)

이번 캠핑은 독립기념관 캠핑장 조개구이와 치킨 등을 먹으면서 남

텐트로 돌아오니 친구들이 대부

에서 많은 친구들과 함께 했다. 막 자들만의 수다를 시작했다. 그렇게 분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서로 같 상 만나보니 온통 수컷같은 남자들 정신없고 어색했던 이날은 술 한 이 아침 겸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만 9명이 모인, 마치 1개 분대가 모 잔에 모두 친구가 되었다. 인 군대같은 캠핑이었다. 더운 날

식후에는 밥보다 비싼 드립커피를

아침 일찍 기상한 나는 숲으로 둘 마시면서 남자들의 여유로운 시간

씨와 내리는 장맛비, 첫 만남의 어 러싸인 캠핑장을 산책하며 각 사이 을 가졌다. 자리를 옮겨서도 또 옮 색함 모두가 좋은 추억이었다.

트와 데크를 둘러보았다. 탁 트인 잔 겨서도 마냥 좋은, 감성과 휴식이

부랴부랴 사이트 구축하고 휴식 디 사이트도 있고 원두막에 자연체 가득한 좋은 시간이었다. 을 취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 험 학습장까지 마련되어 있었고 예

문득 내리는 비도 반갑게 여겨졌

다. 컵라면과 커피로 허기를 달래 약인원이 600명이라니 정말 넓다는 다. 즐겁고 여유롭고 더웠고 유쾌 던 중 반가운 친구들이 하나둘씩 것을 느꼈다. 화장실도 깨끗한 편이 했던 아홉 남자들의 필링캠프, 기 도착하고 본격적으로 고기와 회, 었고 개수대와 샤워시설도 있었다.

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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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여주는 독립기념관

● 기념관 소식

가자! 독립운동의 숨결을 만나러 대학생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답사

독립기념관은 지난 7월 1일(월)부터 7월 5일(금)까지

장에서는 함께 동행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주용

4박 5일간, 전국 16개 사학과・역사교육학과 재학생

연구위원과 옌볜대 역사학과 김태국 교수가 당시 독

39명으로 구성된 ‘만주지역 독립운동유적지 답사단’

립운동가와 이들을 후원했던 조선족 동포의 삶에 대

이 중국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았다. ‘대

한 생생한 강의와 해설로 답사의 효과를 높였다.

학생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답사’는 미래 국가 핵심 세

이번에 참가한 학생들은 책에서 보는 역사와, 역사의

대인 대학생들에게 우리역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역사의 새로움을 느끼며,

국가관을 확립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매년 실시

옌볜대학생들과의 교류의 시간과 중국의 역사전문가

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번이 3회째이다.

김태국 교수의 독립운동사 특강을 통해 한국의 독립

출국 하루 전 독립기념관에서 만주지역 독립운동사

운동에 대한 다른 해석의 공존을 이해하고, 발전적

사전 교육을 실시하고, ‘간도’ 지역으로 불리는 옌볜

해석으로 나가도록 힘써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족자치주를 시작으로 청산리·봉오동 유적지 및

또한 학생들은 항일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한·중 관

선양(瀋陽)・단둥(丹東)・뤼순(旅順) 일대에서 독립운

계를 넘어 일본 학생들도 참여해 한・중・일 동아시아

동가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현

평화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자리로 발전하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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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사람들이 모였다 제3기 사이버홍보단 30명 위촉

독립기념관은 7월 9일(화) 제3기 사이버홍보단 스마

여하게 된 초·고등학생 삼남매를 둔 주부 허경숙씨는

인(Sma-In)으로 선발된 30명에 대한 위촉식을 가졌

“교육・체험학습에 관심이 많아 6년 전부터 꾸준히 독

다. 사이버홍보단은 내년 6월까지 1년 동안 블로그·

립기념관을 찾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독도학교 가족

트위터·페이스북 등 온라인 매체를 통해 독립기념관

캠프에 참여하였고,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독도에 많

에서 실시되는 전시·교육·학술·문화행사 등 다양한

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 블로그를 통해 독립

정보를 홍보하고 독립기념관이 국민들과 더 친근하게

기념관 전시·교육프로그램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할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것이다”라고 사이버홍보단으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이번에 선발된 사이버홍보단은 신문기자·우수 블로

독립기념관은 앞으로도 국민들과 보다 가깝고 친근

거·시민기자단·대학생·직장인·주부 등으로 구성되

하게 소통하기 위해 사이버홍보단을 지속적으로 활성

어 있어 홍보효과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에 참

화시켜나갈 예정이다.

※ 스마인(Sma-In) : 독립기념관을 홍보하는 스마트한 사람들 The smart people who promote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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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살아숨쉬는 독립기념관

● 기념관 소식

독도의 역사 이야기 책자 발간

지난 6월 30일, 독립기념관에서는 일본의 계속되는

작할 예정으로 현재 대학도서관 및 박물관 등 800

독도 영유권주장에 대응하며, 우리 국민들에게 독

여 개처에 발송하였고, 전국 초·중·고등학교 및 주요

도의 역사와 진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고자

관·공서 등에 무료 배포하여 많은 국민들이 쉽게 접

『독도의 역사 이야기』를 발간하였다.

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독립기념관은 지난 2012년 7월 외국인을 대상으로

『독도의 역사 이야기』 주요내용은 독립기념관이 그동

영어·일어로 제작된 『독도의 진실 이해를 위한 16포

안의 연구를 기반으로 우리 역사서·고지도에 나타난

인트』책자 발간하였으며, 2012년 8월에는 「일본근

독도가 한국 땅인 이유, 일본주요 역사서・고지도에

대교과서에서도 독도는 한국땅 자료공개」 , 2013년

나타난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닌 이유, 그리고 제2차 세

2월에는 「독도학교 개교」 등 독도가 대한민국 고유영

계대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 등 국제문건에 나온 독

토임을 알리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도가 한국영토임을 증명하는 자료 등으로 구성되어

우리 국민들에게 “독도가 어떤 이유로 한국 땅일까?,

있다. 이번에 발간한 『독도의 역사이야기』를 통해 독

일본의 주장은 왜 허구일까?”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도가 한국 땅인 역사적 증거를 살펴보고, 일본 독도

위해 발간한 『독도의 역사이야기』는 총 10만부를 제

망언의 허구성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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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3 | vol.306

방학특집 독립기념관 전시연계교육

따뜻한 우체통 원고모집 안내

교육기간 2013. 7. 30(화)~8. 18(일)

가슴 따뜻해지는 여러분의 소중한 이야기를

모집합니다.

※ 단, 월요일 제외

교육장소 독립기념관 2·3전시관 교육개요 교육명 : “대한제국을 지켜라!”

참여안내 주제 : 자유

대상 : 가족단위 관람객

시간 : 10시 30분 ~ 16시 30분

(교재 배부 15시 30분 마감)

보내실 곳 E-mail : sunny@i815.or.kr

접수방법 : 당일현장접수 (제2전시관 입구)

(330-813)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기타

참가비 없음, 체험활동 기념품 증정

삼방로 95 독립기념관

월간 『독립기념관』 담당자 앞

※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알림마당(교육) 참조

원고분량 : 200자 원고지 12매 이내

문의 : 교육센터 041-560-0264

안중근

※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합니다.

제2회 전국 청소년 댄스 페스티벌 개최

여름방학 기간 월요일 정상개관 안내

충남신문과 충남모바일방송이 주최하는 제2회 전국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역사 교육 현장 학습의 기회를

청소년 댄스 페스티벌이 독립기념관 겨레의집에서 성

제공하고자 정기 휴관일인 월요일에도 아래와 같이

대하게 펼쳐집니다. 꿈 많은 청소년들의 열정과 감동

정상 개관합니다.

을 함께하세요!

독립기념관 탐방과 함께 보람찬 방학을 보내세요!

개최일

2013. 8. 25(일) 오후 1시

개관일

2013. 7. 29 ~ 8. 26

장소

독립기념관 겨레의집

(7/29, 8/5, 8/12, 8/19, 8/26 총 5회)

주최

충남신문, CMB 충남모바일방송

주관

전국청소년댄스페스티벌 추진위원회



8 월 , 독립정신으로 지켜온 뜨거운 5천 년 역사를 만나다 독립기념관은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고 자존과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정신과 역량을 조명하기 위해 건립된 곳입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느끼며 체험을 통해 나라 의 소중함을 느껴봅니다. 광복절 기념행사 기간

01

2013년 8월 15일(목) ~ 8월 18일(일), 4일간

광복절 경축식

02

특별공연 ‘건곤감리’ _극단 서라벌

68주년을 맞은 광복절 경축식이 8월 15일 오전 10

대한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 말하는 나라사랑의

시 겨레의집에서 열려 그 날의 감격을 되새깁니다.

뜨거운 열정을 만나봅니다.

03

전통 공연

04

국가상징 체험행사

흥겨운 전통 남사당 놀이를 통해 서민들이 즐기

태극기와 무궁화 등 국가상징물 체험을 통하여

던 신명나는 문화를 만나봅니다.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도록 합니다.


책 속의 책 태극기 만들기로 만나보는 광복절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

‘책 속의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상징물과 문화를 배우고

다양한 참여를 통해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8월 15일은 광복절, 방방곡곡 태극기가 휘날리던 그날의 환희를 떠올려봅시다. 우리나라 국가상징물에 대해 알아볼까요?

태극기・국새・애국가. 또 뭐가 있을까?

‘국가상징물’이란 국제사회에 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자기 나라를 잘 알릴 수 있는 내용을 그림・문 자・도형 등으로 나타낸 공식적인 징표를 말합니다. 예를 들 어 프랑스의 경우 수탉을 국가상징물로 지정하고 있어 각종 경기에서 닭 모자를 쓰거나 닭 인형을 들고 응원하는 재미 있는 모습도 종종 목격되곤 하지요.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5대 상징물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지요? 가장 먼저 태극기(국 기)와 애국가(국가)를 들 수 있겠네요.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는 국권의 상징인 국새(나라도장), 대한민국 여권 에 웅장하게 새겨져 있는 나라문장도 국가상징물이랍니다.


태극기를 정확하게 만들어봅시다. 하얀 종이 또는 스케치북에 가로 24㎝, 세로 16㎝의 직사 각형을 그려주세요. 태극기를 보고 모양을 잘라서 붙여주세요. 위치와 크기를 주의하여 차근 차근 태극기를 만들어봅시다.

3(가로) 건괘(乾卦)

감괘(坎卦)

지름X1/3 지름X1/2

지름X1/2 지름X1/4 지름X1/2

직각(90도)

지름X1/2 2(세로)

지름 (세로X1/2)

이괘(離卦)

곤괘(坤卦) (가로:세로=3:2)



다양하고 재미있는 체험이 가득한 독립기념관

5천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사체험의 장이자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재미가 가득한 독립기념관으로 오세요

신기한 전시관 둘러봐요!

여기선 나도 독립군이죠!

책에서만 보던 거북선, 용맹한 이순신 장군! 모두 만날 수 있어요.

아슬아슬 아찔아찔 독립군 줄타기로 신나게 놀아요!

함께해요, 즐거운 나들이!

짜릿한 4D영상도 즐겨봐요!

귀여운 열차도 타고 예쁜 꽃도 보면서 즐겁게 나들이 해요.

온몸으로 체험하는 신기한 4D 독립운동 영상으로 주인공이 될 수 있어요!

www.i815.or.kr 관람문의 041-56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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