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아우라지에서 한강을 향해 달리다

Page 44

50명 정도인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관립 영어학 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방문할 때까지 관립 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부당한 간섭을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을 돕는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헐버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교사 활동도 부지런하게 했다.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고 관립중학교 제 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했다. 1905년 11월,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 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조선인들은 분노했고 이에 항의하는 군 중의 시위가 잇따랐다. 특히 대한문 앞에서 일본을 규탄하고 무효 를 주장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은 헐버트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이는 조선을 강탈하는 야만적 행위다.’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적이고 무효라는 사실을 서구 열강들 에게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의 친서를 받아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헐버트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고종을 설득하였고 그 결과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이 밀사로 가게 되었다. 헐버트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 제4의 헤이그 밀사로 불렸다. 밀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결국 이준 열사는 분사했고 헐버트는 미국을 거쳐 헤이그로 날아가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야만성과 침략

3부 아우라지에서 한강을 향해 달리다

235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