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26호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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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제26호

2015. 12

유신을 돌아보다

www.laborparty.kr

값 10,000원

유신을 돌아보다

특집

기획 ■ 키워드로 보는 2015년 진보정치 열전 ■ 4.16연대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소장 박래군을 만나다 “어떤 죽음도 익숙한 죽음은 없어요”


표지 이야기

“어떤 죽음도 익숙한 죽음은 없어요” 4.16연대 상임이사, 인권재단사람 소장 박래군을 만나다

미래에서 온 편지 제26호 발행인 구교현 편집인 이장규

박래군, 그 이름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시민맏상제’ 라는, 명예인지 슬픔인지 모를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 세월호 투쟁의 맨 앞에서 싸우다

위원회 강남규 김건담 김일란 김철 김혜연 안효상 양솔규

이승원 정정은 현린

지난 7월 구속된 후, 110일 만인 11월 2일 보석으로 풀려난 박래군 인권

교 열 김혜연 정정은

재단사람 소장을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만났다. 옥살이로 시작한 대화는

디자인 고미숙

자연스럽게 세월호로 이어졌고, 세월호로 흘러간 대화는 또 다시 자연스 럽게 죽음과 인권과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를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충실하게살아가고동시에 미래를그리는사람이었다.

발행일 2015년 12월 1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지속적인 교육운동, 실천운동을 계속 만들어 가야하고, 그렇게 할 거

사진 : 정정은 편집실장

전 화 02) 6004-2006, 2007

예요. 해나가야죠. 안 그러면 운동이 또 소멸돼요. 우리 사회의 무기력감

팩 스 02) 6004-2001

을 보태주는 거죠. 이렇게 해도 안 됐다, 그런 생각 하지 않도록 4.16운동

이메일 laborzine@gmail.com

은 실패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같이 슬퍼하고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아파했던 일인데,‘이렇게 해도 안 됐는데’할까봐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요. 아주 더디긴 하지만,‘아 할 수 있네’하고 느끼고, 뭔가 달라지고, 그 러면서사람들이상호연결되는것만으로도좋아요. 축적해가야죠.” *박래군 소장의 인터뷰 전문은 66~76쪽 <진보정치 열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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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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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나선형의 진보|<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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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모집

지금+여기 노동당 6

노동자 권리 찾기 상담소를 시작합니다|박종만

특집 ■ 유신을 돌아보다 12 유신체제와 민주주의|김정한 18 유신의 기술-어떤 씻김굿도

그의 유령을 쫓아낼 순 없었다|김성윤 24 뿌리 깊은‘효율성’ 의 신화-

다른 체제는 가능한가?|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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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열전|4.16연대 상임이사, 인권재단사람 소장 박래군을 만나다 “어떤 죽음도 익숙한 죽음은 없어요” |강남규

78

노동르포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대구지부 경북대병원분회, 민들레분회 인터뷰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가는 것은 노동조합의 정신입니다|서분숙

지역에서 현장에서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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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칫둠칫 두둠칫, 웃음이 넘쳐나는‘몸치’ 들의‘연대’ 기|김세현


2015년 12월 제26호

・목차

기획 ■ 키워드로 보는 2015년 32

메르스 메르스 사태의 경과와 교훈|임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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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헬조선|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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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표절의 풍경들|최태섭

46

셰프 냄비만 끊을 뿐 노동이 거세된

‘셰프 전성시대’ |김이준수 50

난민 인류의 관점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할 때|안효상 53

기운 혼, 기운, 우주…한국 사회의 거울|이장규

57

장기투쟁1 2015년 겨울의 노동현장|박점규

61

장기투쟁2 국가행정에 저항하다|박정경수

90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았다|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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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⑳ 지우마 호세프와 우파|션 퍼디(Sean Purdy)

삶과 문화 103

화요일의 약속 한상훈 대구 민예총 사무처장 오오극장에 판타지는 없다|현린

112

성정치칼럼 옷장 밖으로 나온‘우리’ 들의 권리 찾기|백시진

118

오덕칼럼 수학자와 과학자의 집착은 언제나 매력적인가?|나동혁

123

메아리공업사⑥ ‘비치코밍’ 으로 가재 치고 도랑 잡기|화덕헌

126

만화 파견의 품격?|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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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개헌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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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나선형의진보

시대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합니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이 조준발사한 물대포를 맞은 백남 기 농민은 생사의 기로에 서계십니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이나 경찰청장은 사과를 하기는커녕 집회 참가자들을 IS에 비유합니다. 게다가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를‘불허’ 하겠다고 말합니다.‘불허’ 란허 가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우리나라 법률상 집회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입니다. 공권력이 앞장서서 법 을 위반하는 셈입니다. 위법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통행을 방해하는 차벽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 결이 있었음에도, 차벽은 11월 14일에도 여전히 설치되었습니다. 시위대의 복면을 금지하겠다는데, 그 전 에 경찰의‘복면’ 부터 금지해야 합니다. 현행법상 경찰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때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 을 밝혀야 합니다. 시위를 진압하거나 채증하는 경찰부터 실명을 공개해야 합에도 불법을 저지릅니다. 그러다보니,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과 맞물려 시대가 유신독재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박근혜 개인의 정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보 고 배운 것이 유신시대의 청와대니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독재로의 회귀 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김대중, 노무현 시절은 지금과 달랐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도 집회참가자나 노동자들은 숱하게 죽어갔습니다. 무엇보다, 정리해고며 한미FTA며 각종 민영화 등등‘시장’ 과‘국익’ 만을 앞세우고 노동자 민중의 이익은 무시하는 정책들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시대가 거꾸 로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현 사회의 반영이기도 합니다.‘국익’ 을 위해 개 인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성소수자 등‘혼이 비정상’ 인 사람을‘교화’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박근혜 개인뿐만 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퍼진 사고방식입니다.‘시장’ 의 논리에 따른 승자독식의 사고방식이나 여성 및 약자 혐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거꾸로 가는 듯해도, 유신시대처럼 사람을 함부로 고문해 죽이거나 사법살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그간 의 신자유주의를 반성하고 노동자의 권리나 불평등문제에 주목하는 흐름들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7,80년 대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한참 진보했습니다. 진보는 일직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패배합니다. 하지만 큰 흐름을 보면 결국 역사는 진보합니다.‘나선형의 진보’ 를 믿으면서 올해를 마감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2015년 12월 1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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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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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노동자 권리 찾기 상담소를 시작합니다

11월 27일 청량리 역 앞에서 노동삼담소를 진행 중인 이지환 비정규실 국장 (사진 : 하윤정)

박종만 노동상담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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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45년 전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평화시장을 달려가며 외친 말이다. 이 외침은 큰 울림이 되어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으로 이어졌다. 70년대 민주노조 건설 투쟁, 87 년 노동자 대투쟁, 95년 민주노총 건설.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노동 자들은 45년 전 그날과 똑같은 구호를 외친다.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자들은 더욱 파편화된 일상을 살아가고, 10퍼센트를 겨우 웃 도는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이미 정리 해고라는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박근혜 정부는‘노동개혁’ 을 앞세워 더욱더 쉽게 노동자를 자르려고 한 다. 이마저도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뜬구름 같은 소리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법조차 무시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그나마 노동조합이라는 버팀목이 있지만, 미조직 노동자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법무법인, 노무법인들은 돈이 안 된다며 노동자 사건을 맡지 않으려 하고, 의지할 데 없이 혼자 노동청에 찾아가면 근로감독관으 로부터 증거를 가져오라며 핀잔을 듣기 일쑤다. 죄 지은 이들은 따로 있는데 내가 죄를 지은 양 마냥 주눅 이 든다. 자본이 지배하는, 거기다 자신들의 착취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 신자유주의 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권리를 찾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귓전에 여전 히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울린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현장에서 당한 부당한 일을 바로잡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체불된 임 금을 받아내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기댈 곳 없는 이들이 기댈 수 있고 하소연 할 데 없는 이들이 하 소연 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이에 노동당이‘노동자 권리찾기 상담소(이하 노동상담소)’ 를 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노동현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해결책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때로는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수도, 아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 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노동상담소는 노동자와 함께 계속해서 고민하고 싸워나갈 것이다.

노동상담소, 어떻게 준비해왔나

노동상담소의 준비과정은 2015년 상・하반기로 나뉜다. 최승현 부대표의 공약이었던 노동상담소는 4 월 제2차 전국위원회에서 사업계획이 통과되면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내의 통합・독자 논쟁이 과열되면서 전당적인 흐름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이런 와중에도, 노동상담소에 관심을 가진 당원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7월부터 8월까지 진행 했다. 노동당에서 노동상담을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상담역량의 기초가 되어줄 근로기준법 지금+여기 노동당 7


노동당 노동상담학교 첫 시간. 배동산 노무사가‘진보정당에서의 노동상담’ 을 주제로,‘노동법 총론’ 에 대해 강의했다. (사진 : 김일안)

부터 산업안전보건법까지 관계법령을 학습하는 시간이었다. 이 교육을 통해 노동법 교육에 대한 당원들 의 수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당원들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새로운 대표단이 선출되고, 잠시 멈춰있던 노동상담소 준비도 다시 시작되었다. 상반기를 평가하면서 노동상담소의 계획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각 시도당 및 당협에서 상담사업을 계획하는 데 좀 더 수월할 수 있도록 중앙차원에서 노동상담소를 먼저 시작하기로 했다. 준비주체도 노동상담에 경험이 있는 당원들로 바뀌면서 실무능력이 강화되었다. 대표단 선거 이후 노동상담소 기획단을 구성하어 세 차례 회의를 가졌고, 2015년 남은 기간 동안의 목 표를 설정하고 본격적인 출발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노동상담소 기획단에서 설정한 2015년의 목표는, 본격적인 운영을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운영체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온라인상담소를 열어 12월 말까 지 시범적으로 운영하기로 하고, 거리상담소를 통해 시민들에게 홍보하기로 결정했다. 11월 초에 진행한 ‘헬조선 탈옥선’순회투쟁에서 노동상담소 홍보명함을 전국에 뿌리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이미 몇 차례 상담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노동상담소 준비를 위한 전문가 간담회

노동상담소의 위상을 준비주체들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다. 이러한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노동상담소에 조언해주실 만한 분들을 찾아가 간담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음성노동인권센터의 조광복 노무사를 만났다. 조광복 노무사는 민주노동당 시절 8


부터 지역에서 노동상담을 진행해왔다. 그는‘청주노동인권센터’ 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안착화시키고, 이 제 음성으로 자리를 옮겨 노동인권센터를 확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음성은 10만 정도의 인구 중 4~5 만 명이 노동자다. 특히 정부당국의 관리감독이 허술해서 다른 지역에서 공장들이 이전 중이라고 한다. 현재 2천 개의 공장이 있는데, 21개의 산업단지 중 12개가 조성이 완료되었고 9개가 계속 조성 중이라고 한다. 충북 공업단지의 핵심으로 부상 중인 음성에 노동인권의 씨앗을 심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간담회에서 노동상담소를 어떻게 준비해왔는지를 설명하고, 노동인권센터를 통해 느꼈던 점들이나 노 동상담소 운영계획에 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조광복 노무사는“ ‘상담 속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는 것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고 있다” 고 한다. 정책・사회인권・법률인권・조직화까지, 사소하게 여겨질 지도 모를 하나의 상담이 어떻게 나아갈지 알 수 없기에, 느슨하게라도 내담자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운영 중인 상담소의 방대한 사례들을 한 데 모아 재구성하는 역 할을 노동상담소에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노동상담소가 그만큼 신뢰할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그는 전사회적으로 진보정당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데, 노동상담소가 그런 인식을 바꾸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노동상담소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기획단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런 간담회 자리를 가지며 부족한 부분들을 하나하 나 채워나가려고 한다. 적어도 월1회씩 전문가를 초청하여 조언을 듣고자 한다. 12월에는 17일에, 민주노 동당 시절부터 민생상담의 일환으로 노동상담을 담당해왔던 배동산 노무사와의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다.

11월 18일 진행한 음성노동인권센터 조광복 노무사와의 간담회 (사진제공 : 노동당 노동자 권리찾기 상담소 기획단)

지금+여기 노동당 9


11월 27일 청량리역 앞에서 진행한 거리상담소 (사진 : 하윤정)

앞으로 할 일들

2015년의 끝자락에서 노동상담소가 할 일은 본격적인 출발을 위한 준비를 완료하는 일이다. 지난 11월 20일, 노동당 홈페이지에 온라인상담소를 열고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홈페이지 첫 화면과 대부분의 게시 판에서 노동상담소의 배너를 확인할 수 있다. 노동상담소 홍보를 위해 신촌, 강남, 청량리 등지에서 거리 상담소를 진행할 계획이다. 거리의 시민들을 만나며 홍보물을 나눠주고, OX퀴즈도 풀고, 즉석에서 노동 상담도 진행할 예정이다.“30초로 알아보는 노동권리 체크” 라

노동당 노동자 권리찾기 상담소

는 이름의 명함판 홍보물도 만들어, 시민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

상담신청 방법

가려고 노력 중이다.

홈페이지 : www.laborparty.kr 상담전화 : 02-6004-2030 이 메 일 : nodongtalk@gmail.com

노동상담소의 정식 명칭은‘노동당 노동자 권리 찾기 상담 소’ 이다. 법에 국한된 노동자로서의 권리만이 아니라 법에 나와 있지 않은 권리까지, 침해당한 우리들의 모든 권리를 되찾는다

는 적극적인 의미에서‘권리 찾기’ 라는 말을 사용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이제 막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한 노동상담소에 당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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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근래에 들어와‘유신’ 이란 말이 정치적 공간에 심심찮게 불려나 온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인 박근혜가 이 나라를 통치 중인데 다, 그녀가 보이는 행보가 유신독재체제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어서일 테다. 누군가는‘이러다 한국 사회가 유신시대로 되돌 아가는 거 아니냐’ 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박정희 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난 듯 보였지만,‘유신’ 은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우리 사회의 정 치・사회・문화 영역 곳곳에 지금도 들러붙어 있다. 우리에게 ‘유신’ 은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유신’ 을 완전히 떨쳐내고 지금 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을까? 다른 체제는 가능한가?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11


1972년, 10월 유신을 발표 중인 김성진 당시 청와대 대변인 (사진 : 경향신문사)

특집 / 유신을 돌아보다

유신체제와 민주주의 유신체제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현존하는 민주주의에 들러붙어 있다가 언제든 현실화할 수 있는 그림자이자 유령이다. 오늘날 박정 희와 유신체제를 넘어서려면, 아직 상상하지 못한 혁명을, 또는 전례 없는 민주화의 길을 발명해야 한다.

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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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제2의 쿠데타

선진국가에서 대체로 쿠데타를 주도하는 인물은 고위 장교와 하위 장교의‘중간’ 에 있는 대령계급이 다. 쿠데타는 아니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 늘 말썽을 일으키는 이도 대개 대령이다. 기성체제에서 기 득권을 누리는 장성급은 아무리 불만이 많더라도 쿠데타의 위험을 감당할 유인이 약하고, 필요한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는 지휘서열에 있는 하사관의 쿠데타는 상상하기 어렵다.1) 물론 (반)주변부 국가에 서는 그‘중간’ 이 다소 상향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와 1979년 12.12쿠데타를 실행한 전두환의 당시 계급이 대령보다 한 급수 위에 있는 소장이었다. 쿠데타는 일상적인 정치가 실패한 상황에서 그 정치의 공백에 대응하여 특정한 장교집단이 빈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고‘국가 의 위기’ 를 해결하겠다는 일련의 조직적인 행위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12.12쿠데타가 계엄사령관인 참모 총장을 연행하는 하극상을 위해 교전까지 무릅쓰고 군부 내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한 반면, 5.16쿠데 타는 박정희의 거사계획이 반(半)공개적으로 알려진 상태에서 쿠데타를 진압해야 할 지휘계통에 있는 고 위 장교들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체포를 포기하는 등‘직무유기’ 를 함으로써 손쉽게 성공했 다. 참모총장실에 나타난 박정희가 거기에 모인 진압 군인들에게 구국혁명의 당위성에 관해 연설을 하자 상황이 정리되었다.2) 이는 사실상 쿠데타에 대한 암묵적인 동조, 그리고 장교들이 나서서 변화를 이끌어 야 한다는 열망이 군부 전체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보여준다. 쿠데타 직후 초기 박정희 정권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건 진보적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관 련해 손호철은 박정희 정권을 세 시기로 구분하고“제1기 ( 군정기 : 1961년 5월 쿠데타 ~ 1963년 말‘민정’이 양, 제2기‘민정기’: 1963년 말 민정 이양 ~ 1972년 10월 유신, 제3기 유신통치기 : 1972년 10월 유신 ~ 1979년 3)

10.26” ) , 제1기 군정기의 국가성격을 민족민주(ND)국가로 규정한다. 요컨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을 보면, 수출주도형이 아니라 수입대체형 산업화를 통한 자립경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장면정권의 수출상품 생산을 통한 외향적 산업화 전략과 다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나세르주의와 유사하게 민족주 의적이고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하는 민족민주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압 력과 재벌의 저항에 부딪혀 제2기에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하는 수정안으로 바뀌고, 이 때문에 박정 희 자신이 군사혁명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종속적 자본주의 노선으로 선회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제 2기 민정기와 제3기 유신체제는 큰 차이가 없이 연속적이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함여유신’ (咸與維新, 모두 새롭게 한다)에서 유래하는‘유신’ 은 조선시대에도 꽤 사 용되었던 용어로 일반적으로 유교국가의 개혁을 뜻하지만, 박정희는 특히 일본을 극동의 강국으로 만든

1)《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에릭 홉스봄 지음 | 김정한・안중철 옮김 | 도서출판 길 | 2008, 248쪽 <20세기 정치에서 문민과 군부> 2)《박정희 평전 :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관한 전기적 연구》전인권 | 이학사 | 2006, 197쪽 3)《해방 60년의 한국정치 1945-2005》손호철 | 이매진 | 2008, 139~140쪽 <박정희 정권의 국가성격 : 시기별 변화를 중심으로>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13


‘메이지유신’ 을 한국의 모델로 삼았다.4)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과 정 당활동의 중지를 명령한 가운데 헌법개정에 관한 특별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박정희는 1인의 권력독점과 영구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제2기에도 반복되었던 비상계엄, 위수령, 국가비상사 태 선포, 휴교령 등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던 의회민주주의의 외형을 아예 폐기한 것이다. 제2의 쿠데타였 다. 그리고 열흘 후인 10월 27일에는‘10.17특별선언’ 에 따른 일련의 모든 작업을‘10월 유신’ 으로 통일해 부르겠다고 발표한다. 10월 유신의 목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통한 국가안보의 강화와 근대화 의 추진이었다.

유신체제를 인식하는 개념들

왜 10월 유신을 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간신히 이기고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신민당이 개헌저지선을 훌쩍 상회하 는 당선자를 배출하자 더 이상 의회민주주의와 선거로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체로 지배적이다. 게다가 1970년대 경제상황이 인플레이션, 국제수지 악화, 경기침체로 접어들 었고,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이 상징하듯 민주노조운동과 도시빈민투쟁이 급 속히 싹트기 시작했다. 또, 사법파동, 대학교수 자주화선언, 천주교의 집회 등 각계각층에서 반독재의 목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유신체제의 확립을 박정희 개인의 장기집권에 대한 야욕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박정희의 삶 을‘심리적 고아’ (psychic orphan)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전인권은, 박정희의 가족적 배경에서 유래하는 ‘고아 의식’때문에 박정희가 역사는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며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비상한 각오와 용 기 및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 이라고 본다.5) 끊임없이 국가안보의 위기를 역설하는 이유 가 여기에 있으며, 이와 같은 상상적 비상사태(imaginary emergency)에 대처하기 위해 항상 비상대권을 갈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심리적 해석은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데에는 필요할지라도 정치체계의 작동을 분석하기에는 부족하다. 과거 국가론 논쟁에서는 관료적 권위주의, 과대성장국가, 파시즘 등의 개념들이 유신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관료적 권위주의론은, 수입대체산업이 한계에 도달해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하려면, 관료집단과 국내외 자본이 연합하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압하는 정치체제가 필요하다는 논지를 담고 있다. 과대성장국가론은, 탈식민국가의 경우 식민지 제국주의의 유산으로 남겨 진 강력한 국가기구들이 시민사회를 통제하는 조건에서, 다시 말해 약한 시민사회에 비해 과대하게 성장

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한홍구 | 한겨레출판 | 2013, 48~49쪽 5) 전인권, 같은 책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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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으로 억압적 정치체제가 등장한다는 내용 이다. 파시즘론은“후발 종속국에서 선진국과 경쟁하며 산업화를 하기 위해 필요한 초과착취가 억압성의 근원” 이라는 관점에서, 유신체제 또한 민중배제적인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종속적 파시즘 이라는 입장이다.6) 또한 1980년대 이후 확산된 신자유주의를 고려한다면, 1970년대의 국가성격은 신자 유주의와 달리 발전주의를 추구하는“발전국가형 종속적 파시즘” 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료적 권 위주의론은 이미 박정희 정권이 제2기 민정기에 수입대체산업화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채 라틴아메리카의 사례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 자본주의의 발전경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과대성장국가론은‘국가=억압, 시민사회=민주’ 라는 이분법을 전제하면서 시민사회 내부의 계급갈등을 간과한다는 한계가 있다.7) 또한 종속적 파시즘론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기초하여 그 상부구조의 필연 적 억압성을 전제하는데, 이는 국가의 민주화 과정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오래 전부터 세계체계 론에서는, 독일식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아니라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미국식 법인자본주의가 헤게모니 적 경제체제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고가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국가에서는 초과착취와 불평등이 심각하며, 그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 을‘예방’ 하기 위해 국가의 억압성이 증대한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산업화는 생산에 참여하는 노 동자들의 구조적 힘을 양적/질적으로 강화시키지만, 그에 부합하는 사회적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부여되 지 않을 때‘독재의 위기’ 가 발생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으로 비정규 직을 양산하여 노동자들의 구조적 힘을 체계적으로 무력화해왔다. 과거 국가론적 차원의 설명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최근에는 유신체제를 설명하는 대중독재라는 개념 이 추가되었다.8) 유신체제는 대중적 지지기반이 없는 억압적인 체제가 아니라, 새마을운동이 시사하듯 대 중의 동의를 이끌어내고 적극적인 협력을 동원하는 체제였다는 것이다. 대중독재론은, 유신체제의 대중 이 억압당할 뿐인 수동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경제성장과 근대화에 동의하고 능동적으로 지배받기를 욕망 하는 주체였다는 비판적인 함의를 담고 있지만, 억압과 동의 또는 협력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논법으로 인해 유신체제의 모순과 변화를 실감하기 어렵게 만든다.9) 이와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찍이“개발동원체제” 로 규정한바 있는 조희연은 국가와 국가지도자, 그 리고 국민을 하나로 일체화하고 남북대결 상황에서 군사적 측면을 강화하는“군국주의적 훈육국가” 의면 모가 유신체제에서 출현한다고 지적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기하강식의 도입,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 모에 대한 효도를 고무하는 충효정책, 도덕적 목표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도덕주의의 선도, 민족문화의 창

6) 손호철, 같은 책 149쪽. 유신체제 이전은 의회민주주의의 외양을 유지했다는 점에서‘이완된 종속적 파시즘’ 이고, 유신체제는 ‘본격적인 종속적 파시즘’ 이다. 7) 이와 유사한 비판으로는《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이광일 | 메이데이 | 2010, 303~335쪽을 읽어볼 만하다. 8)《근대의 경계에서 독재를 읽다 : 대중독재와 박정희 체제》임지현 외 | 그린비 | 2006 참조 9)《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 민족주의와 발전》김보현 | 갈무리 | 2006, 346~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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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 계발을 주창하는 국사교육의 강조, 국가지도자에게 국가의 가부장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하고 경제적 동원에 이어 마음까지 통제하려는 당시 박근혜의‘새마음운동’등이 197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 그 주요 사례들이다.10) 또한 강정인은 박정희식“개발독재 패러다임” 을 사상적 차원에서 다듬는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반공(국가안보)과 경제(근대화)라는 국가적 목표를 수립하고 실행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권위주의 통치)을 결합한 것으로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고“한국적 민주주의” 를 주창하면서 정치적 민주

주의를 거세했고, 국가를 앞세우는“반자유주의” 로 인해 정치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성장을 지체시켰 으며, 민족의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가장 우선시하는“반공 근대화 민족주의” 를 제시하여 국가주의를 강 화했다.11) 이처럼 서로 유사하면서도 조금씩 초점이 다른 개념들은 유신체제를 파악하기 위한 총체적인 관점과 이론이 난항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흥미로운 지점은,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운“영원한 긴급 상 황” (permanent emergency)에서 생존하기 위한“준전시체제” 로 유신체제를 규정하는 전인권의 논의이 다.12) 그가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현재를 항상적인 긴급 상황 또는 비상사태로 인식한다면 적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체제가 궁극적으로는 필

유신체제 내내 존속되었던 긴급조치9호는

수적일 것이다. 이는 독일의 헌법정치학

정치적 활동만이 아니라 생각과 발언 자체를

자 칼 슈미트의 사상과 상당히 유사한 인

금지시키고, 법을 초월한 무차별 폭력을 정 당화했다. 정치를 적과의 전쟁으로 전환시키

식이다.13) 슈미트는 정치의 핵심이 적과 친구를 구별하고 적을 절멸시키는 데 있 다고 말한다. 또 이를 위해 주권자는 예외

는 예외상태는, 비상계엄령보다 오히려 긴급

상태(Ausnahmezustand, 비상사태)를 결

조치법을통해만들어졌던것이다.

정(결단)함으로써, 법질서 자체를 유지하 기 위해 실정법을 중지시키는 비상명령권

을 갖고 주권적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결단주의’ 를 주장했다.14) 그리고 이는 실제로, 유신체제에서‘긴 급조치’ 라는‘법을 중지시키는 법’ 으로 나타난 바 있다. 아감벤이 말하듯이, 법이 중지되는 예외상태에서 인간은 아무 권리도 없이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는‘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으로 전락한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선포되어 유신체제 내내 존속되었던 긴급조치 9호는 일체의 정치적 활동만이 아니라 생

10)《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조희연 | 역사비평사 | 2007, 218~220쪽 11)《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강정인 | 아카넷 | 2014, 347~355쪽 12) 전인권, 같은 책 254・287쪽 13) 유신헌법의 기초자 중 한 명인 갈봉근 교수가 슈미트의 영향을 받고 원용했다는 논의로는,《한국정치연구》제17집 제1호 259쪽, 최형익 <입헌독재론 : 칼 슈미트의 주권적 독재와 한국의 유신헌법한국정치연구>가 있다. 14)《정치 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칼 슈미트 지음 | 김항 옮김 | 그린비 | 2010;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칼 슈미트 지음 | 나종석 옮김 | 도서출판 길 | 2012;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김정한 | 소명출판 | 2013 중 <폭력과 저항>; 《문화과학》84호(2015 겨울호), 김정한 <지젝의 슈미트 해석과 비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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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과 발언 자체를 금지시키고, 법을 초월해 자행하는 무차별 폭력을 정당화했다. 정치를 적과의 전쟁으로 전환시키는 예외상태는, 비상계엄령보다 오히려 긴급조치법을 통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

유신체제 7주년이 되는 1979년 10월 17일을 그 마지막 기념일로 만들고자 했던 부마항쟁으로, 유신체 제는 급속히 무너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10.26사태는 또 다른 미완의 쿠데타였을 뿐이며, 이는 곧바로‘성공한’12.12쿠데타로 이어졌다. 박정희 체제에서 육성된‘박정희의 아이들’ 이유 신체제를 계승한 것이다. 박정희 사후에도 군사정권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13년이 더 연장되었으며, 1993년이 되어서야‘문민’ 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부가 출범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는 박정희 체제가 32년 지속되었고, 본격적인 민주화는 21년 정도 진행된 것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15) 유신체제는, 특히 1970년대 후반‘긴급조치 시대’ 에 통치자의 자의적인 주권적 폭력으로 정치를 불가 능하게 만드는 극단의 정치(ultra-politics)를 일상화했다. 적과 친구를 구별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고 의 회민주주의는 이를 구별하는 데 무능력하다고 비판하는 슈미트가 옳다면, 유신체제와 같은 예외상태는 사실상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주권국가 정치의 정상적인 본질이자 궁극적 준거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재는 민주주의의 예외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같은 동전의 이면이다. 일 국적 주권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재가 필수적인 것이다.16) 오늘날 현대정치에 민주주 의 제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원리가 소실되면서 국가폭력이‘정상화’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독재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독재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신체제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존하는 민주주의에 들러붙어 있다가 언제든 현 실화할 수 있는 그림자이자 유령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현대정치의 궁극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유해보자면, 오늘날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넘어선다는 말은 아직 상상 하지 못한 혁명을, 또는 전례 없는 민주화의 길을 발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5) 강정인, 같은 책 345쪽 16) 이와 유사하게 고전적 맑스주의에서는 민주주의(국가형태)보다 상위의 범주로서 계급독재(국가유형)를 설정한 바 있다. 그러나 하나의 계급독재(부르주아독재)를 또 다른 계급독재(프롤레타리아독재)로 전환시키는 것은 주권국가들의 세계체계에서 나타나 는 주권적 폭력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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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의 들놀이 퇴폐풍조 계몽활동

특집 / 유신을 돌아보다

유신의 기술-어떤 씻김굿도 그의 유령을 쫓아낼 순 없었다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려는‘씻김굿’ 이 언제나 실패하는 이유는, 그 시대에 돌출했 던‘공동체 효과’ 를 대체하지도 추월하지도 못하는 패착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그 때 그 사람’ 을 그리워하는 정치적 퇴행은 그 자체로 문제지만 말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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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의 문화적 풍경을 떠올리면 몇 가지 상투화된 이미지들이 있다. 귀 덮인 장발족들을 잡아 머 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짧은 치마 위로 자를 대 치마 끝이 무릎 위로 20센티미터 이상이면 즉심에 넘기던 시대. 군부의 전제적 지배를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하는가 하면, 어니언스・키보이스・바니걸스를 양 파・열쇠소년・토끼소녀로 강제 개명시키던 시대. 그 시대엔 그 어떤 문화적 삶도 불가능했을 것만 같다.

유신을 통한 위기관리

대중문화 영역에서 유신시대는 보통 도덕적 엄숙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로 특징지어진다. 도덕적 엄 숙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라 함은, 각각 유교적 관습과 전통적인 것을 통해 대중문화에서 비롯되는 품행 을 규율하고자 했던 관행들을 가리킨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여기에는 가부장제, 군부독재, 반공주의 등 얼핏 봐도 이데올로기적인 공작이 결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세는 1975년 대마초 파동과 긴급 조치 9호 등으로 정점을 찍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을 통틀어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유신체제 들어 대중문화 통제정책에 미묘한 차이점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중문화 영역에서의 국가권 력 개입은 정치적 검열과 진흥이라는 차원에 머물렀다. 왜색이나 감상(sentiment) 풍조가 강한 대중문화 작품들이 금지되는 등 반일감정과 산업화 의욕을 고려한 조치가 대부분이었지만, 실질적인 마지노선은 반공주의 이념과 군사독재의 위풍에 위해를 끼치는가 여부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유신헌법의 공포로 4공화국이 열린 1970년대에 와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통치적 관심이 절정에 치닫는다. 1968년 1월에 있었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과 김신조 일당의 남파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되 면서, 유신으로 가는 길이 더욱 빨라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대내적으로 는 독재의 장기화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대외적으로는 (유신 직후에 터진 오일쇼크에서 드러났듯) 고도성장의 한계가 노출됨에 따라 정치경제 다방면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과 국민교육 등 국민들의 일상적 품행에 깊숙이 개입하는‘총동원 체제’ 가 수립되었음은 모두 가 배워서 아는 바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자면,‘TV의 시대’ 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처럼 산업화의 대량(mass)체제가 대중 (mass)매체의 저변을 확장시켰고, 이는 가요와 영화를 넘어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을 변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 대중문화, 그리고 거기에 숨어있던 자 유주의적 감각은 군부독재 정권 및 노동집약형 산업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불화를 일으키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문화적 삶에서 시각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감에 따라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기조도 부분 적으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이 시기에 있었던 장발 단속과 미니스커트 단속, 그리고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억제정책 역시 이와 같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만 파악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쟁점들은 1970년대가 정치・경제・문화 다방면에 걸친 모종의 위기상태로부터 시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19


작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한편, 그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선 대중들의 문화적 삶을 통제하는 일이 급선무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어떠한 정책을 시도하든, 그것은 이념과 현실, 당위와 실제, 그리 고 과거와 현재 사이 등에서 적잖은 동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유신시대의 문화사적 측면 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곤란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오직 가능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에 준하는 언어들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초자아의 외설적 실체

유신시대의 도덕적 엄숙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이었다. 단적으로, 검소하고 소탈했 던 이미지의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엥카와 시바스 리갈을 끼고 있는 풍경은 당대를 억누르던 초자아 가 얼마나 외설적이었던가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 장면은 유신시대 문화지형 자체에 내재된 구조적 모순 의 규모와 범위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도덕적 엄숙주의는 1970년대 호스티스 문화, 카바레 열풍, 그리고 고고장 성행 등과 얽혀있기도 했다. 한 마디로, 서로 양립하기 어렵다고 보이는‘금욕’ 과‘쾌 락’ 의 원리들이 공존했던 때다. 한때 문화평론가들은 이러한 대중적 욕망의 분출을 국가권력에 대한 상징 적 저항에 준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으나, 이 같은 쾌락적 게토들이 검열당국의 용인 속에서만 가능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 금욕적인 신체를 생산할 필요가 있었던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 역시 요구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문화적 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한국적 민주주의나 국민교육 등을 강조했지만, 이는 1960년대부터 지속되어온 민간 무속문화의 대대적 탄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민속문화가 가진 주술적 세계관과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동했던 군부-엘리트들의 지향점은 근본적으로 상반된 것이었다. 민족적인 것과 근대화는 그만큼 원리적으로 상충되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규 율된 신체와 의식의 합리화를 위해 미신타파를 중요한 기치로 내걸었고, 결과적으로는‘하층민 중심’ 의 상당수 문화유산들이 파괴・소실・억압되었다. 그 결과는 명약관화다. 국민동원에 필수적인 정신적 가치 로서, 민족적이고 전통적 요소들은 주로 근대화 논리에 부합했던‘지배 엘리트 계층 중심’ 의 민족문화와 전통으로만 초점이 맞춰졌다. 결국 관건은 이와 같은 모순적 요소들을 공존시키면서도 발전주의 기조에 위배되지 않을 통치 감각이 었을지 모른다.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대중적 지지가 필수적인데, 여기에는 언제나 이중적 태 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으로 복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거기에 위배되는 대중정서를 분리시 킴으로써 권력을 영속화하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금욕적 근대화 논리와 감정-편향적 민간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배치 전략이 관건이었다는 이야기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통치기술이 일정 부분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후자를 전자에 부속시키면서 모순적 원리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고, 그럼으로써 국민들에게 경제 20


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발전 도상에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통치기술 말이다. 오늘날에도 그의 유령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걸 보면, 유신시대의 문화적 공세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의‘유령’

이 시대를 둘러싼 두 가지 기억체계가 대립하고 있다는 것쯤은 역사적 상식이다. 한 쪽에서는 유신을 통해 질서를 보고, 다른 한 쪽에서는 억압을 본다. 서구화와 근대화의 물결이 격동을 일으키던 시기에 애 매하고 불쾌한 것들을 전통적 권위를 통해 정리해주니 어찌 조화롭지 않았을까. 그런가 하면, 자유의 단 맛과 개인의 소중함을 알아가던 시기에 새롭고 희망적인 것들을 주권적 권력을 통해 가로막아버렸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았을까. 한국사회에서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은 각각의 완결적 회로를 가지고 있고, 대 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양자택일하여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인식틀을 구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좋든 싫든 우리는 박정희의‘유령’ 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근 수 십년간 그래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 럴 것이다. 여기서‘유령’ 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존재를 이른다. (어쩌면 노무현과 더불어) 박정 희가 딱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너무 많은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적으론 도무 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에 맞닥뜨리곤 한다. 생물학적으로 그는 죽었지만 상징적으로는 건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령은 허상에 불과할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이니 무시하면 될까.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 들이 있다면, 그들을 허깨비에 놀아나는 무지렁이라고 내몰면 그뿐일까. 문제는 세상사가 순리대로만, 논 리적으로만 돌아가진 않는다는 데 있다. 그의 유령을 불러내는 소환술은 어떤 과학조차도 꿰뚫을 수 없는 강력한 주술성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유령이, 그리고 유령에 홀린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까닭에 관점을 바꿔볼 필요도 있다. 만약 사람들이 허위의식의 포로가 아니라 한다면, 절대빈곤 해결과 사회질서 확립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매력 요소가 유신시대에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시절 엄청 난 노동 강도와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가족과 국민경제를 위해 희생을 감내했던 노동자들을 생각 해보자.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굳이 청년 전태일을 떠올리지 않더 라도, 우리는 오늘날의‘금준미주(金樽美酒)’ 와‘옥반가효(玉盤佳肴)’ 가 이 당시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노동 자들의‘천인혈(千人血)’ 과‘만성고(萬姓膏)’ 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잘 알다. 그럼에도 그들은 피복공장의 노동자로,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또 때로는 개발도상국의 농민이나 도시빈민으로 살면서 성장의 뒤안길 에 유폐되어야만 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50~60대를 넘긴 이들 중 상당수가 지금보다“박정희 시대가 더 좋 았다” 고 회고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분명 물질적 분배 체계에서 배제되거나 침묵해야만 했던 경험들이 적 지 않을 텐데 왜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것일까. 몇 가지 확실한 사실들은 이렇다. 박정희와 그 시절에 대한 애착은 단순히 경제적・물질적 차원으로 소급시킬 수 없고,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의 주관적 감정과 의식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21


상태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다. 나아가 그에 대한 과학적 해명을 시도하는 한, 그들의 향수를 단순한 허 위의식의 소산으로 폄훼할 순 없다.

그때보다 더 예속적인 현재

어쩌면‘더 좋았다’ 는 것은 경제적 복리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예컨대 ‘막장인생’ 인줄로만 알았던 광부들에게 어느 날 대통령이 찾아와 임금이며 복지며 후생을 물어보고 그들 을 국민경제의‘산업전사’ 로 불러준다면, 복잡한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달리 말해, 박정희에 의해‘의미 있는 존재’ 로 부름 받고 인정받았다면 말이다. 다른 어떤 직업, 혹은 직업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존재론적 근거가 명확했다고 술회되곤 하는데, 만약 이들이 오늘날에 와선 존재론적 소 재지를 상실했다면, 정확히 말해 의미 있는 존재로 부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분명해진다. 지금 이 그때보다 좋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맥락에서 유신시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여태껏 진보적 지식인들이 기술해왔던 내용과 달리, 국왕-가부장으로서 권위를 발산하던 대통령과 그의 살뜰한 부름과 보살핌을 받는 평등한 국민들로 이뤄 진 세계를 단순히 억압적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의 사회정책과 국민개조 문제 는, 독재구축을 위해‘말 잘 듣는 국민’ 을 규율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단순폄하하기도 어렵다. 이런 이해방 식은 당시의 국민들을 예속적이고 복종하는 인간으로만 묘사할 뿐인데, 몇몇 역사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당시 국민들이 비할 데 없을 정도의 능동감 또한 지니고 있었음이 명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신을 전후로 실시된 각종 사회정책들-사회복지사업법(1970), 고교평준화(1974), 직장의료보 험제도(1977) 등-에는 단순히 독재체제를 위한‘당근’ 으로만 축소 해석할 수 없는 논점들이 있다. 일련의 계기들을 통해 국민들 사이에선, 개인들뿐만 아니라 사회가 보호되고 있으며 성원들의 평등 역시 수호되 고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실현한‘근면・자조・협동’ 의 국민 참여 및 동원은 더 주목할 만하다.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마을공동체가 정비되고 발전하는 모습을 봤다면, 그 성취감이 평생에 걸친 자기 서사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기록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든 정황들의 시발점이었을지 모르는, 1968년에 정신적인 면에서의‘개조’ 를 내걸고 등장 했던‘제2경제론’ 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까지 진행되었던 산업 주도적 발전주의 드라이브와는 달 리,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체제의 형성을 본격화한다는 의미가 감지되기 때문이 다. 그때까지 요구되던 인간형이 생산라인에 붙은 금욕주의적 인간으로서의‘산업전사’ 였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선‘새마을지도자’ 든‘부녀회원’ 이든 이러저러한‘완장’ 을 가지고 각자의 생활전선에서 자기 스스 로 지역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의 발전에 참여하는 인간형이 요구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로 인한 국민동원 효과는 (물론 유신독재로 귀결되긴 했지만) 초월적 존재가‘나’ 를 불러주었기에 가지 게 되는 상징적 안도감, 그리고 그 이상의 실질적이고도 수행적인 능동감을 제공했다고 재평가할 수 있 22


다. 사회적 동원 과정에 의해서였건 무엇에 의해서였건 간에, 이들은 더 이상 통치의 객체로만 머무르지 않고 통치의 참여자로서 자기 위치를 격상하는 경험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누군가 박정희를 여전 히 향수하고 그 시절로부터 헤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과거보다 현재에 와서 더 예속적 체험을 하고 있을 공산이 크지 않겠는가.

유신시대의 자장

물론 이렇게‘만들어진’좋았던 시절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아이러니로 이어졌 다. 이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던 적잖은 사람들은 국민으로 개조된 덕분에‘민족중흥’ 이나‘인류공영’등 으로 제 스스로를 연결시켜 공적주체가 되었고, 그 결과 유사 이래 비견할 데 없는 정치적 에너지를 분출 하기도 했다. 또한 새마을운동을 비롯해‘국민을 동원함으로써만’가능했던 이 시기의 사회정책 체계는 (발전주의적 욕망의 일반화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역량강화라는 트로이의 목마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단기적

으론 통치의 비용을 동원된 국민들에게 분담 또는 전담시키는 성과를 거뒀지만, 장기적으론‘하면 된다 정신’ 으로 무장하고 통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시민사회의 역량을 신장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날 그 효과는 다소 불균등하게 나타나고 있다. 민족주의의 시효가 마감됨에 따라 과거와 같이 보편성을 지닌 공동체적 범주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따라서 정치적・경제적 전망에서 공적인 것 을 불러내기란 점점 더 소원한 일이 되어간다. 그에 반해 자본과 시민사회의 역량은 날로 강해져, 오늘날 국가권력은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처럼 오로지 민관파트너십 같은 형태를 통해서만 통치의 불가능성을 돌파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요컨대 사회를 안정시켜줄 이데올로기적 범주가 불확정적인 가운데 시장권력 이 전제권력으로 대두하고,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시민사회의 재량이 상대적으로 늘어났다는 이야 기다. 지금의 이러한 세력 상황이 오늘날의 정치를 어떤 지평으로 이끌지는 실로 예측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오늘날 우리가 유신시대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망령을 떨 쳐내려는‘씻김굿’ 이 언제나 실패하는 이유는 그 시대에 돌출했던‘공동체 효과’ 를 대체하지도 추월하지 도 못하는 패착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그 때 그 사람’ 을 그리워하는 정치적 퇴행은 그 자체로 문제겠지 만 말이다. 그의 유령은 과거로 퇴행하고자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섞여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도 연결된 듯하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성격이 여전히 유효함은 물론이거니와, 자본과 시민사회를 동원함으로 써만‘신’ 성장동력을 얻어 통치가 가능하다는 상상력이 불현듯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 방법 외에는 파국의 출구가 없다는 듯, 좌파와 우파 모두 채근 당하는 형국이지 않은가.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든 다.‘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라는 유신시대의 질문에 가장 잘 부응하고 있는 이들은 어쩌면 오늘날의 소위 진보진영이 아닐까라는.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23


세월호 사고 당시 구조작업 중인 언딘 (사진 : KBS 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특집 / 유신을 돌아보다

뿌리 깊은‘효율성’ 의 신화다른 체제는 가능한가? 10월 유신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효율성을 위해 희생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극단적으로 줄여나갔다.‘효율성의 신화’ 가 여전히 존재하 는 2015년, 유신체제가 현재의 정치사회적 측면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지 보려면 세월호 참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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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시대다. 여기서‘유신’ 이란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구축한 노골적인 독재체제를 일컫는 말로, 1979년 그의 사망과 함께 끝났다. 그러나 오늘날에도‘유신’ 은 정치의 공간에 심심찮게 불려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물학적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어서일 테다.‘유신’ 은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도를 갖고 꺼내는 단어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 으로 전부인가? 오늘날‘유신’ 이란 단어가 대세를 이루는 상황은 누군가의 의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단어가 지금의 상황에 뭔가 잘 들어맞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이 단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자기표현을 거듭하는 중이다. 여기서 유신체제의 근본적인 속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10월 유신은‘효율성의 신화’ 를담 고 있다. 이 체제를 경험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효율성을 위해 희생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극단적 으로 줄이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세태는 2015년의 현재에 와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를 보면 이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다소의 비약이 필요하지만, 유신체제가 현재 의 정치사회적 측면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보려면 세월호 참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체제적 열등감에서 비롯된‘효율성’ 이라는 신화

10월 유신은‘중화학공업화’ 와 한 쌍이다.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 직후 1973년 1월 발표된‘중화학 공업화’ 는 다분히 방위산업의 발전을 고려한 위기극복 방안의 성격이 짙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고도성장 의 한계로 인한 내적 모순과 미국의 새로운 대외전략이었던‘닉슨 독트린’등으로 주한미군이 감축되어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중화학공업화’ 를 통한 현대적 무기의 대량생산체제 구 축과‘국민의 과학화’ 를 통한 기술자 및 기능공의 육성으로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안보를 위한 자주국방 실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당시 국제정세를 반영한 판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결국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확실한 우 위를 점하기 위한 선택으로도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성립 직후부터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북 한체제와의 군사적・경제적 대결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닉슨 독트린’ 으로 상당한 규모의 주한미군 감 축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다분히 북한체제를 의식한 정책을 내놓은 것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하다. 중화학 공업화는 정작 1972년 발표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돼있지 않았고, 이런 발표가 따로 있으 리라는 사실 자체를 아는 내각인사도 거의 없었다는 정황이 이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어떤 관점에서 이 상황은‘체제적 열등감’ 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등감 은 단지 북한과의 관계에서만 확인돼온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미 남한의 확고한 우 위가 점해졌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기의 체제적 열등감은‘중진국’ 이니‘개발도상국’ 이니 하는 어휘들을 통해 세계경제를 대상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중화학공업화 천명 후, 군사병기를 포함해 정밀기계부터 초대형 제품까지 모든 것을 한 곳에서 만들자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25


는 계획으로 구상한 창원산업단지를 개발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모든 것을 히타치보다 크게 만들라” 고 지시한 일화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히타치는 일본의 주요한 종합기계메이커다. 최소한 그 정도 는 이길 수 있는 규모의 산업단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재정상황이나 생산성 등을 면밀하게 계산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 아니다. 그냥‘의지’ 와‘당위’ 다. 그 의지와 당위를 구성하는 추진력의 원동력 역시 체제적 열등감으로부터 왔다. 이러한 체제적 열등감의 서사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명박 정권이 한국의 OECD DAC(개 발원조위원회) 가입과 G20서울회의 유치 등을 두고“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의 전환” 이라는 등의 수사

를 붙여 홍보한 일은 체제적 열등감에 기초한 서사의 화룡점정이다. 이‘수원국에서 원조국으로의 전환’ 이라는 표현은 사실 고도성장기 말미에서부터 계속 어떤 염원처럼 등장해왔다. 6.25전쟁 이후 붕괴된 경 제를 붙들고 무리를 해가며 고도성장을 이룩해 다른 나라들과의 격차를 줄여나갔고, 끝내는 그들을 앞질 러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로 성장했다는 감동적 스토리가 담겨있다고 하겠다. 이명박 정부는 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도식을 반복해서 제시했는데, 이 역시‘효율적’고도성장 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한 산업화 시대, 희생을 나름대로 만회한 민주화 시대, 그리고 무언가를 희생하 는 형태로 다시 자본축적을 시도하는 선진화의 시대가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식의 서사이다. 이 를 통해 좀 더 사고를 확장해본다면, 국가주도의 수출중심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부터 오늘날의‘안전불감 증’ 에 이르기까지. 이 과정을 꿰뚫는 체제적 열등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효율성의 추구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1997년 외환위기를 회고하며“대내균형과 대외균형이 충돌할 때에는 대 외균형을 우선해야 한다” 고 말한 일은‘효율성의 신화’ 를 거시경제정책에서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는 물가의 폭등을 감수하고서라도 환율관리 등의 정책을 통해 경상수지를 방 어해야만 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발언이 단지 경제정책의 어떤 효과를 언급하려는 의도라면, 상식적 수준에서 하나의 주요한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강만수 전 장관은 1997년 외환위기를 성공 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트라우마를 가진 경제관료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당시의 위기는 대내균형을 위해 대외균형을 희생한 결과라는, 어떤 정책적 결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 논리 뒤에 숨은 신화의 정체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고도성장이 포기해버린 것들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공업화가 10월 유신과 함께 발표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은 이러한‘한국적 효율 성’ 의 증거다. 당시 중화학공업화를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한 오원철 당시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 은 퇴임 이후“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 면서 유신과 중화학공업화가 사실상 동전의 양 면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고도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했다는 결정적 증언으로 받아들여진다. 26


고도성장이 포기해버린 것들은 단지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1970년대는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 을 공부하고 돌아온 인사들이 KDI(한국개발연구원) 등을 통해 대거 관가로 유입된 시기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도 개발정책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며,‘안정・개방・자율’ 로 요약되는 사실상의 신자유주의 도입, 이른바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번번이 박정희 대통령 본 인의 의사에 의해 무력화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잠시 빛을 보는 듯했 으나, 재계의 반발과 정치권력 내부에서의 혼란 등을 겪으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야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이들이 주장한‘이상적’경제모델이 안착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환경이 강 력하게 존재했으며, 앞서의 민주주의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도‘시기상조론’ 에 의한 유예가 적용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고도성장 이외의 다른 것은‘일단’유예하거나 포기하자는 사회적 욕망들의 존재를 드 러낸다. 이 사회적 욕망들을‘효율성의 신화’ 를 유지한 원동력으로 본다면, 세월호 참사의 기원에 대한 하 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겨난다. 체제적 열등감이니 뭐니 하지만, 결 국 유예한 일들을 이제라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시장원리에 맞는 경제정책을 펴서 체제를 정상화시키면 되지 않나? 하지만 이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문제는, 하는 게 당연한 일을 현실에서는 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온다. 앞서 언급한 오원철 전 수석의 발언은 이런 차원에서 의미심장하다. 당시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포기’ 를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되 기 때문이다. 즉, 중화학공업화는 10월 유신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10월 유신이 없었다면 중화학공업화는 가능하지 않았다. 10월 유신으로 일어난 권력구조의 변동이 중화학공업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고도성장을 위한 체제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반복해서 실패해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가 크다.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매혹된 일부 관료들이 금융실명제와 금융자율화를 추진 했으나 하나 같이 실패했다. 이‘일부 관료’ 들의 선두에는 김재익 당시 경제수석이 있었는데, 그는 전무후 무한 군인 출신 독재자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는 말까지 들으며 사실상 경 제정책에 대한 전권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정책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앞서 인용한 오원철 전 수석의‘중화학공업화 와 10월 유신은 동전의 양면’ 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국가주도의 수출중심 자본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고도성장과 김재익 수석 등이 밀어붙였던 이상론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양립할 수 없으며, 동전의 양면으로서도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공적 영역마저 시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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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관련서적을 뒤적여 위의 내용을 소개한 이유는 세월호 참사와 이후 구난과정에서 같은 구조가 반복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서다. 참사 당시 일각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전형적 통탄’ 을 다뤘다. 자본주의 사회가 안전을 도외시하 고 오직 이윤추구에만 집착했기에 오히려 체제 그 자체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얘기다. 세월호 참사는 체제 의 위기를 불러올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므로, 그간 이어져왔던 형태의 체제는 이제 더 이상 작동을 유지 할 수 없다는 게 이런 주장의 핵심이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체제는 세월호 참사 때문에 위기를 맞지 않 았다. 위기는커녕 오히려 이 참사를 눈앞에 두고서도 한 치의 망설임이나 어려움 없이, 그야말로 매끄럽 게 작동했다. 해양경찰은 세월호 침몰 직후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이미 상당 부분 기울어진 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없었다고 주장했다. 선체의 전복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세월호 선내 로 진입하기 위한 장비 등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점은, 그렇다면 해양경찰의 장비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지금껏 정부 는 대형사고의 인명구조를 민간에‘아웃소싱’ 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추진해왔다. 2012년 시행된 수난구호 법 개정안이 대표적 사례다. 이 개정안의 핵심은 한국해양구조협회라는 민간기구가 해수면에서의 수색구 조, 구난 등의 업무를 정부에 협조해서 수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재난상황에서의 구조 자체를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겨레21>은 제1011호의 기사를 통해 2011년 해양경찰 청장의 고백을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국회에 출석해 수난구호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던 중, 해양경찰청 의 고위관료가“저희들이 장비를 보유하고 있을 때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네트워킹을 잘 만들어놓고 활성화를 시키면 예산도 절감되고…” 라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정부가 재난구조에 대한 자 신감을 상실함과 동시에‘효율성’ 을 위해 국가의 대표적인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포기했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고도성장 시기의 체제적 열등감이 선진국과의 격차가 엄청난 상황에서 북한과 체제경쟁을 해야 했던 처지에서 비롯됐다고 한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체제적 열등감은 정부가 실패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연 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기에“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고 말했 다. 당시 맥락을 살펴보면, 이 발언이 세간에서 회자되듯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백기투항을 의미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다만,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이 발언은 분명 시장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후 이어진 발언들에“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시장에서 비롯되고 시장에서의 여러 가지 경쟁 과 협상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정부는 시장을 어떻게 공정하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중소기업 들도 함께 갈 수 있는 대책이 있어야겠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이뤄져야지 정부의 정책적 간섭 을 통해서는 잘 되지 않을 것 같다” 는 내용 등이 포함돼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제 정부가 시장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셈이다! 이러한 체제적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부는 공공적 영역을 사실상 포기하고 시 28


장에 떠맡기면서‘작고 효율적인 정부’ 라는 허상에 스스로를 가둔다. 정부가 포기하고 시장에 내준 공공 적 영역은 시장의 본능대로 오로지‘돈’ 을 위한 공간으로 재편된다. 이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돈이 지 사람의 목숨이 아니다. 세월호 사고 직후 민관의 대응은 이런 천박한 체제의 민낯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보여줬다.

세월호 참사는 체제의 위기가 아니다

사고 직후 구조당국은 매우 능숙하게도 구조 및 구난 업무를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이하 언딘)라는 구난 업체에 신속하게 위임했다. 언딘이 국제구난협회(ISU)의 정회원 자격을 지닌 국내 유일의 업체이므로 전 문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제구난협회는 인명구조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 해상에서 사고 가 났을 때 사후처리를 말끔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회사들의 전문성을 보증하는 일종의 이익단체 다. 해상에서의 사고는 반드시 보험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데, 보험에서는 사고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실력 있는 업체가 최대한 이 책임을 명확한 형태로 가릴 수 있도록 구난작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보험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업체가 실력이 대단한지를 상시적으로 알고 있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사고는 모든 바다에서 일어나므로 전세계의 구난업체를 모두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험사의 입장에서는 국제구난협회를 통해 구난업체를 선정하는 게 일처리에 있어서 효율적이다. 세월호 사고 직후 언딘이 구조작업을 사실상 독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딘은 어떻게 국제구난협회의 정회원 자격을 취득했을까? 국제구난협회의 정회원 자격은 회원 2개사 가 동의하면 얻을 수 있다. 국제구난협회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2개사의 동의에 무엇이 작용했는지를 추측해볼 필요는 있다. 언딘은 이전까지 다소 어려운 입장에 처해있었으나, 2010년 천안함 침몰 이후 구조작업에 참여하고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녹색성장’ 과 관련한 기술들을 개 발하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이뤘다. 국제구난협회 정회원 2개사가 언딘의 전문성을 평가했다면 바로 이런 부분을 주되게 다뤘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추리가 가능해진다. 천안함 침몰 이후, 구난과 관련한 전문성을 갖춘 업체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부 또는 유력한 관계자가 언딘 측에 일종의‘배려’ 를 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국제구 난협회의 정회원이 되는 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술의 개발을 다양한 경로로 지원한다거나, 정부 가‘투자’ 의 형태로 지원을 해주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중간에 누군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만일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그 누군가의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 겠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도 명분이 없는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우리나라도 이제는 제대 로 된 구난업체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지금 해양구난에서 다른 나라에 뒤처지면 영영 따라갈 수 없지” 라는 식의 명분이 작용했다면, 언딘에 어떤‘배려’ 를 해주는 데 국가가 망설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구조작업과 관련해 언딘에 대한 의혹이 대중적 차원에서 강하게 불거져 나오지 않았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29


다면 상황은 이들이 의도한 대로 순조롭게 흘러갔을 것이다. 세월호 내부의‘에어포켓’ 에 생존해 있으리 라 여겨졌던 실종자들은 사고 직후 사망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됐을 테고, 선체의 인양작업이 신속하게 진 행됐을 것이며, 최대한의 보험금 수령을 위한 다양한 작업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세월호 참사 직후 구조당국의 지휘 아래 신속하게 언딘이라는 구난업체가 구조작업을 전담하다시 피 한 이유는, 이후 보험처리와 관련한 과정을 최대한 무리 없이 진행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글로벌 경제라는 관점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체제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위기 의식이 국제구난협회 정회원 자격을 가진 업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고, 자신감을 잃은 국가가 당연히 맡 았어야 할 구조작업을 시장에 떠넘기면서 시장화 된 형태의 사고 뒷수습에만 체제의 관심이 쏠리게 됐으 며, 결국‘인명의 구조’ 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돈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문제만 남게 된 것 아니냐는 생각 도 해볼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 과정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속한 체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 이다. 말하자면 세월호 참사는 체제가 감당하지 못하는 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람 목숨에 관한 문제만 빼면 재난이 체제의 일부로서‘효율성’ 의 이름 아래 무리 없이 소화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하겠다. 다시 말해, 세월호 참사는 체제의 위기가 아니었다.

효율성의 신화는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모든 쟁점에서 등장한다. 세월호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 해 배의 안전성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배의 평형을 유지해주는 평형수를 화물을 더 실어야 한다 는 이유로 충분히 주입하지 않았고, 화물들은 평형유지를 위한 정밀한 배분방식을 따르지 않고 적재됐다. 배의 균형 유지를 도와주는 스태빌라이저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로 방치됐다. 배의 안정성을 해 치치 않는 범위 안에서 이뤄졌어야 할 개조 및 증축은, 이런 판단 기준을 완전히 무시한 채 진행됐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기구가 상시적으로 관리해야 할 것들이 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 로 취급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안전에 다소 위해를 가하더라도 실제 사고가 날 확률이 적다면, 실제 사고가 났을 때의 리스크보다 규정을 어겨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크다. 이 이득을 취하기 위해 관료들 이 다양한‘꼼수’ 들이 동원했다는 게 정설이다. 해운사와 관료들의 부적절한 네트워크와 관행은 1962년 박정희 정권이 본격적인 형태의 경제개발계획에 시동을 걸고 국가주도의 해운산업을 육성할 때부터 이미 형성되었다. 이렇게 보면 유신체제가 반영하는‘효율성의 신화’ 는 이미 우리나라에선‘뿌리 깊은 나무’ 이다. 이로 인한 폐해는 바야흐로 전사회적으로 나타난다. 진보정치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선과 가치를 말하 기 전에 재정과 의원 숫자부터 말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규정과 절차를 원칙이란 이름하에 박제화 하는 것도 문제지만‘우리끼리’ 라며 효율만 따지는 것도 문제다. 이런 진보정치가 집권하면, 과연‘효율성의 신 화’ 를 극복한‘다른 체제’ 를 만들 수 있는가?‘유신’ 이 어느새 유행어가 된 오늘, 우리 스스로에게 가혹하 게 던져봐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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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늘 그렇듯 다사다난한 한 해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미래에서 온 편지>가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지 난 2015년을 돌아보았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자리한‘장기투 쟁’ 에 대한 기사를 보며 의아해 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 니다. 콜트콜텍이, 고공농성이, 밀양이, 강정이 어디 2015년만 의 얘기인가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이곳의 이야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2015년 이전부터 있어왔고, 어쩌면 2015년 이후에 도 사라지지 않을‘오늘’ 의 이야기입니다. ‘메르스’ 부터‘난민’ 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한 해를 돌아보는 <기획> 기사 전체를 다 보면‘헬조선’ 의‘기운’ 이 느껴집니다만, 곧 다가올 2016년에는“온 우주가 도움” 으로“혼이 정상” 인 한국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 서 2016년 12월에는‘장기투쟁’ 이란 키워드가 사라진 기획 기 사를 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31


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메르스”

메르스 사태의 경과와 교훈 임석영 건강위원장

5월 2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메르스 감염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두어 달 동안 메르스 감염자는 나날이 확산되었고, 메르스 감염은‘사태’ 가 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불안해했고, 각종 모임과 행사는 취소 또는 연기되었다. 일부 유치원과 학교는 휴업을 하였다. 시민들의 외부활동이 줄어들자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활동도 덩달아 위축되었다. 6월 말 황교안 국무총리는 메르스로 인한 경 제손실이 10조 원으로 추정된다고 말했고, 외국 주요 국제투자기관들은 메르스 사태 때문에 2015년 한국 의 경제성장률이 최소 0.15퍼센트 포인트에서 최대 1.0퍼센트 포인트 하락할 거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이처럼 시민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메르스 사태. 하지만 메르스 사태가 어떻게 발생하였고, 어떻게 진정되어 갔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에야 공개된 질병관리본부의‘메르스 역학조사 보고서(Middle East Respiratory Coronavirus Outbreak in the Republic of Korea, 2015)’ 를 통해 우리는 메르스 사태의 주요상황을 보다 정확한 정보로 확인할 수 있었다.

메르스, 발생부터 확산까지

보고서에 따르면, 5월 20일 첫 환자가 진단된 이후 7월 5일까지 총 186명의 환자가 메르스 감염으로 진단되었다. 이 중 98퍼센트인 178명이 의료기관 내에서 감염되었고, 1명은 가정에서, 3명은 이송구급차 와 관계되어 감염되었다. 4명은 아직까지 그 전염경로가 모호하다. 11월 13일 현재, 이 중 37명이 사망하 여 사망률은 19.9퍼센트다. 주된 증상은 발열과 오한이었고, 소화기 증상도 감염자의 약 13퍼센트에서 나 타났다. 186명의 메르스 감염자 중 입원환자가 82명(44.1퍼센트)으로 가장 많았고, 가족 또는 고용간병인 이 61명(32.8퍼센트)으로 두 번째로 많았다. 의료인은 25명(13.4퍼센트)이었으며, 그 외 방문객이나 병원구 급요원 등이 18명(9.7퍼센트)이었다. 이번 메르스 사태는 다행히 병원 사이 전파라는 이전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다만 응급실에서 많은 감염자가 발생하여 병원 감염에서‘응급실’ 이 중요한 공간임을 드러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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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역학조사 보고서는 메르스 감염병 확산 전파 과정을 잘 보여준다. 첫 번째 환자가 확진된 5월 20일 이전인 5월 15일에서 17일 사이, 평택성모병원에서는 이미 26명의 환자가 2차 감염되었다. 이 중 첫 번째 환자를 확진하고 역학조사를 진행한 20일까지, 발열 등의 첫 증상이 나타난 환자는 최소 13명이었다. 질병관리본부는 애초 매뉴얼의 지침보다 범위를 확대하여 같은 병실의 입원환자, 병실을 드나들었던 의료인, 간병인(가족 또는 고용간병인)을 밀접접촉자로 보고 초기격리를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26명의 2차 감염자 중 일부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건당국은 밀접접촉자 외 일상접촉자에 대해 서는 수동/능동감시 대상자를 선별하지 않았으며, 별도의 모니터링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에는, 첫 번째 환자의 일상접촉자(수동/능동감시 대상자) 명단도 없었고 평택성모병원에 대한 향후 관련 지침도 없었 다. 5월 28일, 초기 격리조치에 포함되지 않았던 환자 중에서 메르스 감염 확진자가 나타났다(6번째 환자, 여의도성모병원에서 확진). 이에 따라 28일 평택성모병원에 대한 2차 역학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사결과에

따라‘같은 병실’ 에서‘복도를 공유하는 같은 병동’ 으로 밀접접촉의 기준이 확대되었다. 이에 첫 번째 환 자의 일상접촉자 명단조차 없었던 보건당국은 새로이 접촉자 명단을 작성하고 접촉자를 역추적했다. 그 러나 첫 격리조치에서 제외되었던 2차 감염자 중 8명이 다른 병동으로 옮겨져 28일에 이미 10명의 새로 운 3차 감염자를 발생시킨 후였다. 거기다 몇몇 접촉자는 5월 28일 이전에 이미 평택성모병원에서 퇴원 한 상태였다. 퇴원한 환자들에 대한 역추적이 이루어졌다. 수일이 지난 후에야 퇴원환자의 위치가 모두 파악되었는데, 이미 7개 병원에서 3차 감염이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었다. 삼성서울병원은 그 중 하나였 다. 5월 28일부터 6월 초순까지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 혼란의 실체는 이러했다. 보건당국은 병원명을 공개하여 접촉이 의심되는 환자 및 보호자들이 자발적으로 신고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행정인력을 통 해 역추적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는 수일이 걸리는 과정이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이루어진 대 량의 3차 감염 사태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행정력으로 밀접접촉자를 역추적하고 격리하는 일이 불가능하 다는 것을 인정하고 병원명을 공개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일부 병원의 코호트격리와 광범위한 자가격 리조치가 이루어졌다. 전파경로가 비교적 명확한 182명의 메르스 감염자 중 89명(전체 환자의 47.8퍼센트)이 삼성서울병원에 서 새로이 발생했다. 이들에 의한 12명의 4차 감염자까지 고려하면, 삼성서울병원은 101명의 환자(전체 환 자의 54.3퍼센트)와 관련된 셈이다. 6월 13일 부분폐쇄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감염자가

발생한 7월 5일까지 지속적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는 감염자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서울병원은 병 원 내 의료진에 대한 예방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방사선사가 새로이 감염되는 등 문제점을 드러냈고, 관련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직도 삼성서울병원의 감염 사 태가 왜 장기화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원인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33


메르스 앞에서도‘각자도생’ 해야만 했던 국민과 의료진

불행히도 메르스 사태는 작년 세월호 참사에 이어 시민의 안전을 나라가 지켜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각자도생” , 사람이 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도모한다는 그 말이 한국 사회를 살아 가는 지혜가 되고 말았다. 또한 메르스 사태는 병원 감염에 취약한 한국 보건의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 냈다. 병원 감염에 취약한 다인 병실, 가족 또는 고용간병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입원환자 간병, 고밀화된 응급실 환경, 3차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되는 현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의료쇼핑 행태, 주치의 역할 을 하지 못하는 1차 의료의 현실, 병원 의료진에 대한 취약한 감염예방 대책 등등이 그러하다. 또한 보건 당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조차 적절한 때에 제공받지 못해, 의료기관과 의료진 역시 메르스 감염 사태 앞에서‘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되돌아보면, 91.3퍼센트의 대부분 환자는 새로운 환자에게 전염을 일으키지 않았 다. 역학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감염전파의 83.2퍼센트가 다섯 명의 환자(수퍼전파자)와 연결되어 있었는 데, 총 153명의 메르스 환자와 2606명의 격리자가 이들 5명으로부터 감염되었다. 이들은 폐렴 증상이 있 고, 특히 심한 기침을 하였으며, 진단되기 전까지 여러 병원을 거쳐 갔고, 좁은 공간에서 많은 환자와 접촉 할 수 있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과 같은 공간에 며칠 머물렀다는 특징을 보였다. 초기대응 시에 감염자가 격리 및 감시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진단이 늦어졌고, 이런 상황이 감염에 취약한 한국 보건의료의 조건과 만나면서 외국사례에 비해 대량의 전파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메르스 사태가 지속되고 시민들의 불안이 커지면서 정부의 조치 역시 과감해졌다. 병원 폐쇄 및 코호 34


트격리, 1만 6천여 명의 접촉자에 대한 2주간 자가격리조치가 내려졌다. 그런데 자가격리자의 인권이 제 대로 보장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홀로 생계와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이들에 대한 보건당국 의 조치는 허술했고, 생계비지원도 사태의 중간쯤에야 이뤄지기 시작했다. 많은 지자체에서, 시설과 인력이 열악한 공공병원들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정부지정 격리병상 수가 제한되고 자가격리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입원이 필요한 자가격리자 및 경증환자들은 공공병원 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덕분에 감염전파를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6월 중순 이 후 수원병원을 경증환자 담당병원으로 개조・전환하여, 이를 바탕으로 메르스 감염자의 중증도에 따른 의료전달체계를 만들고 민간병원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이는 향후 지자체 수준에서 의료대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비교적 모범적 사례로 평가된다. 메르스 사태가 적어도 공공병원이 왜 필요한지를 시 민들에게 보여주는 역할은 한 셈이다.

메르스 사태는, 신종 감염병 등 공중보건 관련 사태에 적절히 대응할 만한 인적・조직적 인프라가 우 리 사회에 부족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렇다면 제2의 메르스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보건의 료의 인적・조직적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현재의 체계를

메르스 사태는, 우리 사회 공공보건이 가진 인

개선하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

적・조직적 인프라의 부족함을 확인시켜 주었

만 불행히도 박근혜 정부의 생각은 다 른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개선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실 제로는 실질적인 후속조치를 전혀 하

다. 제2의 메르스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보건의료의 인적・조직적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계획을세우고현재의체제를개선해야한다.

지 않고 있다. 그나마 정부조치에서 유의미하다고 평가받은 역학조사관 확충안 역시 정부 예산안에는 1원도 반영하지 않은 상황이다. 신종 감 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 기구를 키워야 한다는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과 공공병원을 확충하고 후진 적 보건의료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또다시 묻히고 있다. 그리고, 메르스 사태를 지 나온 환자와 자가격리자, 지역사회, 의료인, 의료기관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다.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35


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헬조선”

헬조선 하지율 가장자리 인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2015년을 논할 때‘헬조선(지옥+조선)’ 을 빼놓을 수는 없다. 한국의 사회적 모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헬조선은 앞으로도 얼마간 화두가 될 전망이다. 여기에 진보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이제 중간 결산 을 할 때다. 헬조선은 어떻게 탄생했고, 이를 외치는 청년들의 감정 흐름은 어떠하며, 진보의 과제는 무엇 일까?

청년의‘우디르급 태세전환’당황한 조중동

헬조선은 디씨인사이드 주제별 게시판 중 하나인 역사갤러리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역사갤러 리는 친일・혐한 성향의 갤러들이 자주 극성을 부려, 이를 꾸짖는 갤러들과 걸핏하면‘키보드 배틀’ 이붙 는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헬조선’ 을 외쳤고, 문득 이 말에 카타르시스를 부르는 마력이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나라꼴 돌아가는 걸 보니‘정말 지옥이 맞는 거 같다’ 는 역발상이 생겨났다. 즉 의무는 많고 권 리는 없는‘노잼 사회’ (재미없는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헬조선, 이제 실드 쳐주기도 지겹네!’식으로 해소 해버린 쾌감이 청년의 마음을 애국주의에서 사회비판으로 돌렸다. 이후 사이버공간 곳곳에 전파된‘헬조선’ 은 완전히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태어났다. 불특정 다수의 청 년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읽어내며‘미개한 헬조선!’ 을 외쳤고,‘헬조선의 현실.jpg’ 하는 식의 풍자물 을 올리기 시작했다. 진보언론은 이에 대한 시사분석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독자들은 이슈를 확산시켰다. 그리고 한층 계급의식이 뚜렷해진‘수저계급론’ (금수저 대 흙수저)까지 등장했다. 사람은 당황하면 도리어 큰 소리를 치거나 횡설수설하거나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조중동이 이를 증 명이라도 해주려는 걸까?‘조선’ 은 사회 문제를 개인 탓으로 모는 사설들을 쏟아냈고,‘중앙’ 은 박정희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지향했었다고 주장하다 청년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동아’ 는 딱히 주목할 만 한 기사가 없다. 그들은 진보언론의 시사분석들을 쫓아가지 못했다. 헬조선은 애초부터 분명한 사회비판 성과 참신성을 지닌‘질적으로’차별화된 코드였기에, 자신들의 맥락으로 탈취할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 36


이다(그런 점에서‘창조경제’ 나‘경제민주화’ 와는 다르다). 거대자본 미디어들과의 이슈쟁탈전에서 청년과 진 보언론은 간만에‘작은 승리’ 를 거뒀다.

헬조선의 재난 같은 미개함 … 청년 초인 ‘들’ 의 불벼락

노오력, 꼰대, 수저계급론, 지옥불반도, 미개감시탑, 탈조선, 죽창…. 헬조선 유행어들은 한 데 모아놓으면 그 뜻을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찬찬히 살피면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청년의 감정을‘날 것 그대로’보여준다. 청년들의 삶은 기약 없는‘노오력’ 의 굴레다. 10대에는 입 시, 20대에는 학점과 알바・취업, 30대에는 결혼과 주거 지옥을 겪지만, 이렇게‘노력을 해도 계층상승이 어렵다’ 는 인식이 81퍼센트,‘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심각한 편’ 이라는 인식이 90.7퍼센트에 달한다(8월 현 대경제원 설문 : 전국 성인남녀 810명 대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이 어쩌다 한 번‘힘들어 뒈지겠네’하소연하면,‘니 노~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걸 남 탓 하지 마!’ 식으로 응수하는 꼰대들은 어디에나 있다. 꼰대의 버전은 다양하지만, 명불허전은 보수꼰대와 진보꼰대다. 보수꼰대는 문제를 개인 탓으로 후려치지만, 정작 개인의 고유한 고통은‘별 것 아닌 것’ “세월호는 ( 그냥 교통사고” )으로 뭉갠다(ordinary one). 반면 진보꼰대는 구조적 모순에 주목하는 데 에는 성공하지만, 온통 자신들의 강한 이념과 자의식에 중심을 맞춰 해결하려 든다. 이때 차별화된 맥락 을 경험한 청년들이 (변증법적으로) 부딪혀오면,‘평등하게’집단정체성을 조정하기보다 자신들만의 똑똑 함과 연대 경험을 계몽하듯 내세우며‘권위’ 부터 받 아들이라 강요한다(one of them). 그래서 청년은 양쪽 모두로부터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모멸감’ 을 느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악셀 호네트 교수는《인정투쟁》 에서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 인정욕구는‘아, 더러워서 못 참겠 네!’ 로 출발하는 투쟁의 감정적 자원이 되면서 때때 로 사회진보를 이끈다. 그러나 헬조선에서 이 욕구 는 거부당한다.‘누구나 고통 하나쯤은 있다’ 는식 의 꼰대질은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일상과 직장 어 디에서나 볼 수 있다. 헬조선은 친절마저 스펙이 된 사회이므로, 청년은 일단 친절을 가장하며 감정을 삭이는 전략을 취한다. 이런 감정이 계속 쌓이면‘울화병(鬱火病)’ 에걸

지옥불반도와 죽창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37


리게 되고, 억눌렸을망정 사라지진 않은 감정이 사이버공간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분출되기 시작한다. 여 기서 왜‘불(火)’ 의 이미지로 소환되는‘지옥불반도’지도가 인터넷에 대유행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흥미 로운 건, 불 말고도‘죽창’ 이라는 무기도 같이 소환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금수저(기득권)’ 들의 방약무 인(傍若無人)한 막말이나 사회 부조리를 다룬 뉴스에“역시 죽창밖에 답이 없다” “죽창 앞에서는 너도, 나 도 한 방. 모두가 평등하다” 는 댓글을 다는 식이다. 이‘죽창’ 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은 늘 저항을 갈구하는 진보좌파의 직접적 이해관계와도 맞닿아 있지 만, 쉽지 않은 난제다. 여기서 경향신문 박은하 기자와 본인의 해석이 갈린다(해당 기사들은 모두 다음 (DAUM) 메인에 실렸다).

박 기자의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오오력이 부족해>는 장안의 화제였다.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기업과 공동으로 헬조선 담론 지형을 그려 신뢰성을 높였고, 풍부한 인터뷰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중에 서도 박 기자는‘죽창’ 에 대한 인터뷰를 많이 반영하며,“죽창은‘저항’ 보다는‘자기파괴적’모습에 가까 웠” 으며 좌절 가득한 현실에서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로 찌르며 함께 파국적 결말” 을 맞는 모습이라고 진 단한다.“죽창 앞에서는 너도, 나도 한 방. 모두가 평등하다” 라는 말에서‘너도, 나도’ 에 주목하는 셈이다. 반면 본인은‘너도, 나도’ 보다‘모두가 평등’ 에 주목한다. <헬조선 최후의 탈출구 죽창은 분풀이에 불 과할까>에서도 사이버공간 특유의‘진정성’ 과 (데이터로 잡히지 않는)‘사진 콘텐츠(지옥불반도 지도)’ 의 중요 성을 강조했다. 갈등 상황에서는 복잡한 감정들이 공존하기 마련인데, 의식 차원에서는 이것들이 뭉뚱그 려‘화!’ 로 해석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리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릴 수는 없기 때문에, 의식적인 인터뷰보다 감정을 날 것 그대로 전시하는 사이버 공간을 관찰하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본인은 한 트위터리안이 제작한‘지옥불반도’ 에 등장하는‘미개감시탑’ 을 함께 고려할 때,‘죽창’ 의비 밀이 풀린다고 본다. 청년들이 사이버공간을 통해 헬조선의 노예화된 삶과 사회 부조리를 조망하며‘미개 함이 재난’ 이 된 현실을 포착하는 태도가 종말영화 감상자와 무척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트위터리안 이카무스메가 온라인게임의 게임맵을 패러디해 만든‘헬조선 지옥불반도 지도’ (좌)와 이에 해설을 덧붙여 필자가 재구 성한 지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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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영화들의 다양한 주체는 결국 구원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주체가 속한 세계가 지닌 문제로부터 탈출과 해결을 의미한다. 수용자들은 종말 영화 속에 나타난 극복과 좌절의 이미지를 통해, 실제 문제적 현실에 대한 불안을 대리해소한다. 또한, 이것은 현실 속 인간이 맞닥뜨린 문제적 상황을 파멸시키고 새 로운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욕망의 반영이기도 하다.” (오은정 <종말영화 내러티브의 행위소 분석> 중)

“헬조선은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잿더미에서 새로운 질서가 탄생해 세상의 기반을 모조리 흔들어놓을 것이다!”(크로***)

“금수저 은수저는 뜨거운 불에 녹아내렸고, 흙수저는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야 한다”(Hod*****)

‘불(火)’ 의 이미지는 결국 자기파괴를 넘어서, 기존의 미개한 것들을 싹 쓸어버리는‘정화’ 라는 이중적 가능성을 가진다. 즉‘저항’ 조차도 넘어서는‘불벼락’ 과 같다. 영화 《설국열차》 에 빗댄다면 열차 안에 서의 영원회귀가 아닌, 열차 밖으 로의 탈출과 닮은 셈이다. 헬조선 의‘미개함’ 은 청년들에게 극복해 야 할‘인재(人災)’ 다. 헬조선을 감 시탑을 통해(랜선과 와이파이로) 조 망하는‘초월적 존재’ 인 청년들은, 한반도에 불벼락을 내리는 콘텐츠 들을 제작하고, 공유하며, 자지러 지게 웃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은 자기파괴적이라기 보다는 ‘메시아적’ 이되, 이 신들은 여전히 사이버공간에서만 위용을 뽐낸다. 일상 진출은“사회를 바꿀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다 쥔” (211.213.*.*) 꼰 대들에 의해 막혔으며, 현실에서는 이들도‘지옥불반도’한복판에 서 있다. 불안하다. 그들은 이제 집단

자연재해와 헬조선 코드를 결합시킨 콘텐츠 (사진 : fmkorea 갈무리)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39


적 자위권을 발동하고,‘죽창’ 을 집어 들며 자위(自慰)와 자위(自衛)의 갈림길에 선다.

헬조선이 진보에게 남긴 과제

나날이 들려오는 소식들은 독재 회귀의 그늘을 드리우고, 희망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남들의 꿈이 아닌‘자신들의 꿈’ 을 가질 기회조차 어려서부터 빼앗겼던 청년들이 이제는 스스로를 찾겠다며‘탈조선 (이민)’ 을 말하는 걸 말릴 순 없다. 그러나 정치는‘탈조선’ 조차 어려운 다수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고,

‘탈조선’ 의 현실적 의미를 후진성에 대한‘탈출(피)’ 로 재해석한다. 그래서 요 근래 노동당의‘헬조선 탈옥 선’ 은 꽤 진일보한 선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후진성의 책임을 보수와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다면 언제든지 수백수천 가지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청년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면 그들의 감정선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직은 정당으로 나아가기에는 상처가 깊은 청년들에게, 행여나‘진보꼰대’ 로 비추어지지 않도록 감수성을 잃지 말자. 게 다가 보수의 맥락을 빼앗아 차별화된‘꿀잼’콘텐츠로 재생산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고의 유연성까 지 친근히 닮을 수 있다면 더 좋겠고.

참고한 글(동시에 추천하고픈 글) •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자크 랑시에르 / 길 / 2013 / 2만원) • 《구별짓기》(피에르 부르디외 / 새물결 / 2005 / 2만7000원) • 《인정투쟁》(악셀 호네트 / 사월의책 / 2011 / 2만3000원) • 《반시대적 고찰》(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05 / 2만7000원) • 《한국인의 심리학》(최상진 / 학지사 / 2011 / 1만7000원) • 《화병연구》(민성길 / 엠엠커뮤니케이션 / 2009 / 1만5000원) •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 2015 / 1만2000원) • 《감정독재》(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 2013 / 1만5000원) •<종말영화 내러티브의 행위소 분석> (오은정 / 한양대학교 학위논문(석사) / 2014) •<폭력 그리고 진리의 정치 : 벤야민과 지젝의‘신적 폭력’ 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김현 /《민주주의와 인권》제14권 2호 /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 2014) •<이제는 국가 앞에 당당히 선‘일베의 청년들’ > (천관율 / 시사IN / 2014.9.29)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박노자 / 한겨레 / 2015.9.26)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해>(박은하 / 경향신문 / 2015.9.4) •<지옥불반도의 베일을 벗겨보자> (하지율 / 오마이뉴스 / 2015.9.24) •<헬조선 최후의 탈출구 죽창은 분풀이에 불과할까> (하지율 / 오마이뉴스 / 2015.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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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표절”

표절의 풍경들 최태섭 문화불평가

표절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합의된 표절의 기준 같은 것이 없다 는 점이다. 작가, 고위공직자, 연예인, 예술가, 학자, 기업, 디자이너 등등 수많은 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 고 표절논란에 휩싸인다. 그 수많은 의혹들은 따지고 보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대체 로 표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나면 명암을 가릴 시간도 없이 비난과 잡아뗌이 난무하는 싸움판이 벌어 진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우리는 매번 마땅한 기준도 없이 싸우고, 그 싸움에는 마땅한 결 말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지리멸렬한 표절과 그것을 둘러싼 소란이야 말로 우리들의 문화가 놓여있는 어떤 곤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표절자들

왜 표절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걸까? 물론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이득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 어 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번 만들어진 것을 모방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 들어내는 노력에 비해서는 훨씬 간단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표절은 이미 검증된 것들을 베끼기 마련 이다. 다른 사람의 성취를 대가를 치르지 않고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것을 시도했을 때의 위험부담과 비 용을 줄이고, 이익을 도모한다는 그야말로 완벽한 이기적 기획이다. 한국의‘근대화’그리고‘산업화’ 는 따지고 보면 표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그 표절마저도 일본 에 대한 표절이었다. 일찍이 일본이 표절에 의해서 근대를 만들어냈고, 한국은 그런 일본을 표절하여 근 대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전자제품을 소니가 베꼈고, 그 소니의 제품을 삼성이 베꼈다. 지금은 삼성과 애 플의 제품을 중국의 기업들이 베낀다. 인터넷을 떠도는‘대륙의 기상’ 시리즈는 중국이 급속한 산업화-자 본화 과정에서 보이는 표절의 관행들을 비웃는다. 물론 이런 웃음은 얼마 안가 다른 사람이 올린‘반도의 기상’ 을 보며 쓴웃음으로 바뀐다.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41


이런 표절의 표절 같은 씁쓸한 말장난은 어떤 시차를 드러낸다. 서구의 발전된 자본주의국가를 모델로 하는 하나의 길이 있고, 그 길을 질주하는 여러 명의 주자들이 있다. 그들은 서구를 추월하길 바라지만, 서 구의 자본주의 국가는 그 자체가 기준이자 심사위원이지 주자는 아니다. 결국 이 주자들 중 아무도 원하 는 바를 이룰 가능성은 없다. 이 타임라인에서 표절은 그 시차를 극복해보려는 가련한 몸부림이거나, 혹 은 그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절하게 복제된 미래(즉 서구-자본주의국가)의 맛을 보여주고 돈 을 버는 기회주의적 행태다.

지적재산권과 권력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변하는 타이밍은 서구가 위기에 빠지거나, 쫓아오던 비서구가 더 이상 무지하 지 못할 만큼 성장했을 때 혹은 둘 다이다. 서구가 부여하는 것은 지적재산권이라는 이름의 소유권을 인 정하고 실행할 의무이다. 그간 암묵적으로 공짜로 제공해왔던 아이디어들을 이제부터 팔겠다는 선언이 다. 이것은 일견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어떤 사람의 탁월함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자는 것이 니까. 가령 수많은 비운의 천재들에게 저작권이 있었다면 그들은 행복한 여생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함정이 있다. 새로운 것들을 생각해 내는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함한 많은 자 원이 필요하다. 또한 그 자원에는 과거의 아이디어들과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주인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것들에 자물쇠를 걸고 유료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먼저 적응하고, 먼저 축적한 이들에게 유리한 게임이 시작된다. 가령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다국적기업 들의 악행을 생각해보자. 게임은 공정한 경기장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자들 은 남의 것을 약탈해 놓고, 저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주장하는 시공을 초월하는 일도 가능하다. 요컨대 모든 아이디어에 소유권과 가격을 붙이자는 공평해 보이는 주장은 실제로는 공평하지 않다. 표 절의 문제 역시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자장 속에서 이리저리 왜곡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법과 더 가깝고, 더 많은 자원이 있는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식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한 개인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지재권이 보호해서, 그를 벼락부자로 만들어 주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오 히려 일반적인 풍경은 사들인 수 천 개의 특허로 무장하고 약자에게 소송을 휘두르는 다국적기업의 폭거 이다.

반도의 기상

물론 이런 논리가 곧바로 한국에서 아직도 공공연한‘표절관행’ 을 옹호하는 논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표절문제는 언제나 개개인의 도덕성의 문제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것이 가능 42


하게 했던 권력의 불균형, 경제성의 논리, 창작에 대한 무시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 제는 하나의 창작물이 너무 아름답고 탁월해서 자기도 모르게 베끼는 그런 감화적인 형태의 표절이 아니 다. 남의 것이거나 말거나 당장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주로 정부, 기업 등에서 행하는 채굴형 혹은 약탈형 표절이 근본적인 문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표절을 설명하는 방법으로“저런 것 좀 만들어 봐” 주의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 다. 어디서 무언가를 보고 사장이‘저런 것 좀 만들어 봐’ 라고 말한다. 그러면 저런 것을 만들기 위해 원본 을 가져다 놓고 이리저리 굴리며 궁리를 해 요소요소를 조금씩 바꾼다. 결국 매우 비슷하고, 법적으로는 표절이라고 말하기에 애매하지만, 표절임을 모르기가 어려운 그런 얼토당토않은 결과물이 등장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명한 것을 베끼면 표절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마추어들의 창작물을 가져와 짜 깁기하는 방식이 유행중이다. 유명 게임회사들에서 아마추어들의 그림을 무단으로 가져와 사용하다가 들 키거나, 공모전 등에 제출되었던 내용을 몰래 상업화하거나,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허락 없이 사용하는 등 사례는 끝도 없이 많다. 일단은 빨리 만들면 그만이고, 만약에 걸려도 어차피 개인들이니 윽박지르거 나, 합의금이나 몇 푼 쥐어주면 된다는 생각이고, 무엇보다도 안 걸리면 장땡이다. 게다가 만에 하나 돈을 준다고 해도 열정페이가 되기 십상이니, 창작자들은 모두‘대륙’ 으로 넘어갈 방법을 찾기에 바쁘다. 기왕 에 인정받지 못할 공로라면 돈이라도 더 많이 주는 곳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횡행하는 표절문제의 핵심 역시 창작자에게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지 않는 구조이지 지 재권의 문제는 아니다. 이 두 개는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지재권이 관심 있는 것은 모 든 아이디어와 창작물에 소유권을 두는 것이고, 그 과정이 어떤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 과정에 투 여할 자원들이 많은 기업이나 국가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당장 하루하루 일하고 먹고살기도 바쁜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법리적 싸움을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게 다가 기업과 국가는 계속해서 새로운 대응방안을 찾을 수 있다. 오랫동안 창작자들에게 강요되었던 저작 권양도관행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을 지재권이 보호해줄 수 있을 리 없다. 관행을 만들어 내는 힘의 불균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 저작물은 어디까지나 해당 기업의“지적재산” 일 뿐이기 때문이다.

표절의 반대자들

상황이 이렇다보니 표절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반응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것은 주로 예 비창작자나, 혹은 그 분야의 열렬한 소비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은 표절을 범죄라고 규정하고 때 로는 지나치게 가혹한 기준과 방식으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들을 몰아세운다. 이들이 느끼는 것은 창작자 로서의 자신의 미래와 자신이 애호하는 분야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이다. 그러나 표절, 아니 그에 앞서 창작에 대해 이들이 갖는 인식은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창작의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43


고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의 작품과 창작물들이 무언가를 참조하고 있다는 사 실을 종종 표절의 문제와 혼동한다. 아쉽게도 혼자만의 영감으로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식의 천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천재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든 영향을 받으면서 생겨난다. 그 러므로 어떤 고유성에 지나친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창작 그 자체에 대한 금지행위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권리보호가 오로지 지재권을 지켜야 한다는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우려의 요소다. 창작 물을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면서도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돌아가는 방식 같은 것을 고민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업이나 국가 같은 거대 조직의 약탈에 맞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있지 는 않을까? 더 확실한 상업화와 더 확실한 저작권 관리만이 해법일까? 물론 이런 책임을 이들에게 지우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국가는 오히려 앞 장서서 창작자들의 성과물을 약탈하기에 바쁘다. 이런 약탈은 결국 미래에 대한 약탈이고, 국가, 시장, 노 동 모두를 예정된 실패로 몰아가고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싸움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 모든 혼란스러운 이야기는 우리가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기준을 잡기 어려운 것은 그 행위 자체가 너무나도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표 절의 주체도 국가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표절의 대상도 다양하며, 표절의 양상 역시도 그렇 다. 무엇보다도‘어떤 것’ 까지를‘누군가의 것’ 으로 규정할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저작권 보 호기간이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나는 데는 어떠한 과학적인 이유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다국 적 기업들의 로비와 압박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섣불리 결론을 내는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진짜와 가짜, 원본과 복제를 구분하는 문제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은 녹록치 않다. 오래된 TV쇼 <진품명품>을 생각해보자. 몇 대에 걸친 소중한 가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단돈 몇 천 원짜리 모작임이 판명 나는가 하면, 집에서 굴러다니던 애물단지가 진품임이 밝혀져 갑자기 엄청난 가격 의 보물이 된다. 진짜를 구분하는 감별사들이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하면, 가짜를 만들어 내는 위조범들도 첨단 과학기술을 속아 넘기는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한다. 그러니 자신 있게 어떤 것이 진짜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어쩌면 오늘날 사기꾼의 새로운 기준은 자신을 비롯한 어떤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도 당당하게 진짜라고 말하는 능력이 아닐까? 하지만 진짜와 가짜가 구분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이 변기는 마르셀 뒤샹의‘샘’ 진품이다’ 라는 진술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왜 그것과 똑같은 모양의 변기에 비슷한 싸인을 하면 안 되는 가? 혹은 그것과 전혀 다르게 생긴 변기에 우리집 강아지 이름을 써넣는 것은 왜 안 되는가? 루브르박물 44


관의 모나리자와 내 방 티슈 곽에 그려진 모나리자, 혹은 구글 이미지에서 찾아주는 수많은 고화질의 모 나리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자를 뒤집어 쓴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의 길거리 연주를 외면했던 이들은 어떨까? CD 음질과 MP3의 음질을 구분하지 못했던 음향전문가들은 또 어떤가? 어쩌면 진짜라는 것은 그저 일종의 형식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상황도 진짜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한다. 뒤샹의 샘은 1917년 분실되었고, 1964년 이탈리아의 슈바르쯔 갤러리에 의해서 8개가 복제되었는데, 97년 소더비에서 그중 하나가 176만 2,500달러에 팔렸다.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들도 진품대접을 받으며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고 소장된 다. 화제를 몰고 다녔던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도 자신의 작품이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 고, 대신 미술시장을 이용하기로 했다. 물론 이런 거래에는 기묘한 경제논리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미술작품이 자본의 투기적 자산목록에 올 라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때때로 많은 돈을 주고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 자체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단지 돈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런 천문학적인 가격 들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못 견뎌 하는 것이 진짜의 가치 없음이나 의미 없음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도 모른다. 즉 진짜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8개이거나, 아니면 다른 변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는 사실이야 말로 사람들이 가장 회피하고 싶어 하는 진실인 것은 아닐까? 표절을 둘러싼 소란 역시 이런 진짜에 대한 도착적인 태도가 어김없이 등장하고, 그것은 논의를 제자 리에서 맴돌게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 도착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고유성에 대한 의심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증된 진짜들에 나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나의 고유성을 확인받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진짜라고 믿고 있었던 무언가가 표절을 통해 만들어진 가짜라는 사실은 덩 달아서 내가 진짜인가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표절에 대한 과잉반응은 한 때 내가 사랑했던 것이 가짜라는 사실에 대한 배신감과 동시에 그것과의 분리를 통해 나의 고유성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가 련한 영혼의 몸부림이기도 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신경숙의 표절논란이 한창이었을 때 어떤 이들은 오로지 논란에 끼기 위해 해당 소설 을 읽기도 했다. 우리가 이런 오지랖을 부려야 하는 이유는 나를 빼고 세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고,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태풍 속에 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진짜라고 여 겨지는 역동성에 나를 투영하고 나의 자리를 얻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 불안과 몸부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어쩌 면 이것이 표절의 기준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45


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셰프”

냄비만 끊을 뿐 노동이 거세된 ‘셰프 전성시대’ 김이준수 노동자협동조합‘적정기업 ep coop’대표노동자

음식을 먹으면서 남자 셋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셰프가 잠시 화두로 나왔다.“며칠 전 초등학생인 우리 아들이 장래희망으로 셰프를 말하더라고요. 이전에는 과학자라고 하더니 바뀌었어요.”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아, 우리 아들도 아빠가 요리를 하다 보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셰프를 하겠다고 노래를 불러요. 아빠가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하.”내가 말을 받았다.“꼭 직업적으로 요리를 하지 않더라 도 음식 만드는 것을 배우고 습득하는 것은 필요한 것 같아요. 남자의 자격에 이제 요리도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요리 못하는 남자는 남자가 아닌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하하.” 며칠 뒤 나온 설문 결과는 그것을 입증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4년 전국 초등학생 6만 3,862 명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다. 여학생은 교사(17.8퍼센트), 연예인(11.2퍼센트)에 이어 요리사(8.5퍼센트)가 3위, 남학생은 운동선수(21.1퍼센트), 과학자(10.5퍼센트), 의사(7.9퍼센트) 등에 이어 요리사가 6위였다. 앞선 2013년 조사에서 요리사는 순위권에 없었다. 올해 조사에서 요리사는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할 것이다. 지 금 헬조선에서 요리와 음식은 불구덩이를 잊게 혹은 견디게 하는 아이템이며 셰프는 그‘창조주’ 로서 스 타 자리를 꿰찼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아니었다. 새로운 스타와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방송(자본)의 속성 이‘스타 셰프’ 라는 트렌드를 탄생시켰다.‘요섹남’ (요리 잘하는 섹시한 남자) 등과 같은 조어에서도 요리사 에 대한 호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우리는 먹방(먹는 것을 보여주는 방송), 쿡방(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 셰프에 냄비 끓듯 열광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셰프가 되겠다는 아이들의 장래희망에 대해 어떤 이 야기를 해주면 좋을까.

셰프, 어느덧 입에 달라붙은 이름

한마디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이자‘(방송과) 케미 폭발’ 이다. 스타 셰프는 지금 아이돌에 버금가는 존재 46


가 됐다. 적당한 허세 섞인 칼질 신공은 기본, 원물의 식재료를 현란하고 맛깔 나는 요리로 둔갑시킨다. 우 리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침이 고인다. 눈과 뇌는 급격하게 요동을 친다. 미식을 넘어 탐욕이 부글부글 끓 는다. 셰프는 그 모든 것을 조율하는 만신전의 위치에 올랐다(물론 스타 셰프를 발굴하고 방송에 노출시키는 PD나 방송자본이 또 그 위에 있겠으나!).

앞선 시대, 셰프는 주목받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셰프가 되고 싶은 청소년을 위한 사설 학 원 프로그램이 생기고 일부 요리전문학교는‘스타 셰프 양성학과’ 라는 커리큘럼을 만들 정도다. 이게 가 당키나 싶지만, 셰프가 그만큼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을 받는 대상이 됐음을 방증한다. 2013년 개봉했던 영화《족구왕》 의 주인공이 다니던 식품영양학과는 극중‘찌질한’남자들이 전공 대신 공무원시험을 준비 하는 학과였다. 그러나 지금은 풍경이 달라졌다. 호텔(외식)조리, 푸드스타일리스트, 식공간연출 등 조리 관련과는 인기과다. 지난해 경기대 외식・조리학과 경쟁률은 30 대 1이 넘었고 경희대 조리산업학과의 지난해 수시 경쟁률은 17 대 1에 달했다. 2년 혹은 4년제 대학 조리학과만 해도 230개가 넘고 요리전문고 등학교와 직업전문학교, 사이버대학 등을 합하면 그 숫자는 300개 이상이다. 요리학원을 비롯해 사설 요 리강습을 하는 클래스의 숫자도 계속 늘고 있다. 한 방송사 인기드라마였던《파스타》 는‘셰프’ 라는 단어를‘본격적으로’퍼뜨렸다.

이라고 외치

던 드라마의 풍경을 이제는 일상이나 방송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사실 1970년대 초만 해도 조리 사란 호칭도 없었다. 80년대 들어서야‘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대신‘조리사’ 라고 불렸다. 그러니 요리사, 셰프라는 호칭이 통용된 것은 오래지 않는다. 그것뿐이랴. 요리의 공간, 즉 주방이나 부엌은 가림막이나 베일에 가려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조리노동을 하는 요리사는 얼굴 없는 존재였다. 신비주의 때문이 아니 었다. 요리(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낮았고, 이 땅의 대부분 육체노동이 그러하듯 조리노동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더구나 먹는 것을 원초적으로나 여길 뿐 문화로 인식하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 다. 그렇다면 셰프가 한껏 위상을 높이고 먹방과 쿡방이 방송의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음 식문화나 요리노동자의 위치는 나아졌는가.‘셰프 전성시대’ 는 맞는 말인가.

노동을 배제한 전성시대는‘거짓’

‘스타 셰프’ 들은 방송뿐 아니라 CF도 접수했다. 그들의 책도 봇물이 터졌다. 주방을 나온 스타 셰프들 이 둥지를 튼 곳은 대중이라는 활주로였다. 그 길에 바퀴를 처음 내린 사람은 2009년 에드워드 권이었다. 두바이 부르즈(버즈) 알아랍호텔 수석총괄주방장 출신이라는 명함. 더불어 빼어난 외모와 말솜씨까지. 대 중은 혹할 만했다. 학력과 경력 위조 의혹에도 에드워드 권은 스타 셰프의 시대를 열었다. 셰프들은 거듭 미디어의 호명을 받았고 탄탄대로를 걸었다. 맹점은 거기 있었다. 방송이 보여준 스타 셰프의 화려한 외양만 부각됐다. 요리업계의 실제 모습은 거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47


세됐다. 저임금불안정 노동, 치열한 외식업계 경쟁 등 구조적인 문제는 가려졌다. 분명하게 말하자. 스타 셰프도 노동자다. 예비 셰프들도 마찬가지. 불과 칼 등을 다루는 위험하고 고된 조리노동의 현장이 그들 의 진짜 모습이 있는 곳이다. 방송에서

미디어에서 만나는 셰프나 요리사의 세계는

만나는 셰프의 모습은 가공되거나 표백

표백제를 뿌린 세계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

된 경우가 많다. 특히 주방에서‘간지작

다. 오늘도 스타 셰프는 곳곳에서 요리를 만들

렬’ 하면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셰프 의 모습은 대중이 현혹되기 쉬운 풍경

거나 이야기를 건넨다. 스타라는 이름을 얻었

이다. 셰프는 요리사들의 수장으로 단

지만그들은여전히노동자다.

한 명에게 주어지는 주방의 권력이지만 주방에는 셰프 아닌 요리사들이 더 많

다. 스타 셰프가 얻는 인기는 극소수에게 주어지는 열매일 뿐이다. 절대 다수의 요리사는 열악한 노동 조 건에 노출돼 있다. 호텔이나 일부 고급 레스토랑은 빼고 외식업계의 80퍼센트 이상인 일반음식점과 레스토랑 요리사들 은 매일 최소 10~12시간 이상 일한다. 새벽 장을 보고 점심과 저녁 장사, 청소까지 마치자면 그렇다. 그것 도 선 채로 대부분 노동한다. 노동일도 주 5일보다 주 6일이 일반적이다. 주방의 노동환경도 열악하긴 매 한가지다. 위험한 불을 직접 다뤄야하는 것도 어려운데 연기도 마셔야한다. 환기시설이 열악한 경우도 많 아서 기관지 질환과 만성폐쇄성 폐질환 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화상이나 칼에 밴 상처 등 몸 곳곳에 는 요리노동의 고단함이 새겨져 있다. 또 남들 먹을 때 일하고, 식사시간도 짧고 불규칙하다. 남들 잘 먹이 겠다고 요리를 하지만 정작 자신은 잘 먹지 못한다. 5~10분 만에 목구멍으로 밥을 밀어 넣는다. 그야말로 슬픈 노동이다. 이런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구, 요리직군에서 노동조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일부 호텔에 소속 된 요리사나 조합원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해외에는 열악한 조건의 요리사들이 서로 힘을 모아 (노동자)협 동조합을 만든 경우들이 있다. 요리사는 일반 회사원 다음으로 숫자가 가장 많은 노동자 군임에도 그렇 다. 영세하기로는 제일이다. 5인 이하 사업장이 대부분이고 폐업하는 비율도 가장 높다. 4대보험 가입이 나 산재 처리도 쉽지 않다. 경기에 민감하다보니 임금 체불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떼이는 일이 있어도 어 쩔 수 없이 넘어가는 일도 많다고 한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협업이나 협동, 노조활동 등에 취약하 거나 좁은 바닥에서 계속 일을 하려면 권익구제를 위한 활동을 하기 보다는 포기하는 일이 잦다는 것이 다. 임금은 그 열악함에 하나를 더 보탠다.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10년이 지나도 연봉 3000만원이 쉽지 않다. 표준임금도, 요리사를 대변하는 산별노조도 없다. 비정규직 비율(83퍼센트)도 높 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부가조사에 의하면 숙박음식점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131만 명 가운데 비 정규직은 109만 명으로 도매소매업(110만 명)에 이어 비정규직 수가 두 번째로 많았다. 돈 냈다며 왕 대접 48


을 요구하는‘진상’ 들도 또 하나의 고충이다. 미디어에서 만나는 셰프나 요리사의 세계는 표백제를 뿌린 세계다. 방송이나 미디어는 요리가 중요하 지 않다. 먹방, 쿡방, 스타 셰프 등은 미디어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든 허상이다. 요리사 대다수는 비정 규직인 데다 실직 불안에 시달린다. 저임금노동임에도 숙련을 향한 기술 습득 부담도 안고 있다.‘글 쓰는 요리사’박찬일 셰프는“내게 요리는 노동” 이라며 요리사는 고통스럽고 취약한 직업이라고 말했다.1)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지만 최악의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요리사라는 것. 물론 요리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의 경제지 <포천>이 2015년 최악의 직업을 발표했는데 요리 사는 4위였다(최악의 직업 1위는 신문기자!). 프랑스에서는 위계에 의한‘주방 내 폭력’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오늘도 스타 셰프들은 곳곳에서 요리를 만들거나 이야기를 건넨다. 그러나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스 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다. 그들을 바라보며‘열정페이’ 를 지불하는 예비 셰프를 비롯해 대다수 요리사들은 다른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노동자와 같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하는 임금노동자다. 전성시대니 대세니, 그것은 허상을 감추기 위한 레떼르다. 문제는 노동뿐만이 아니다. 먹방과 쿡방 등을 통해 교묘하게 접붙인 PPL(간접광고)은 대중의 무의식에 자 연스레 스며든다. 음식을 보여주는 카메라 워킹은 또 어떻고. 일상에서 결핍으로 치닫고 있는 인민의 정 치경제적 갈망은 미식으로 포장된‘푸드 포르노(Food Porno)’ 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 다. 허기가 채워지는 것 같은 착각은 의식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아빠처럼 셰프가 되거나 장래 요리사가 되고 싶은 아이들에게 품격 있는 조리노동을 할 수 있는 환경 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은 요리사만의 일이 아니다. 그들의 요리를 먹고 생각하고 활동하는‘먹는 존재’ 도 함께 해야 한다. 노동이 한 사람, 한 직군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냄비만 끓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 그들이 건강해야 우리도 더 좋은 음식을 만날 수 있다. 커피에 스페셜티가 그러한데,‘스페셜 푸드’ 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1)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인터뷰 “ < 내게 요리는 노동이다” > http://www.huffingtonpost.kr/institute-for-better-democracy/story_b_78083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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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난민”

인류의 관점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할 때 안효상 편집위원

인간이라는 동물종은 공간과 관련해서 상호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중성이 있다. 자기가 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착(patriotism)이라는 강한 보수성을 보여주는 한편, 지표면의 거의 모든 곳에 거주하게 된 결 과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한 이동성을 동시에 보인다. 이동성은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위협적인 상황 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주가 이루어지고 이는 다시 애착을 가져온다. 오늘날‘난민 사태’ 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거시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때‘인류’ 라는 관점에서의 해결책 을 찾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51년의 제네바 협약에 따른 난민 규정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 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및 이들 사 건의 결과로서 상주국가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종전의 상주 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 로 인하여 종전의 상주 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만이 난민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 실제 로 위험에 노출된 상당수가 난민일 수 없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난민 사태’ 로 가보자.

‘시리아 난민 사태’

오늘날‘시리아 난민 사태’ 로 불리는 사건이 커다란 관심사로 떠오르고 연민과 연대를 불러일으킨 것 은 지난 9월 2일 터키 휴양지인 보드룸(Bodrum) 바닷가에서 세 살짜리 시리아 어린아이의 주검이 발견되 면서이다. 이 일로 인해 이미 쏟아져 들어오고 있던 시리아 난민에 대해 갑론을박하던 유럽 주요 나라들 이 난민 수용에 대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에 난민을 분산 수용할 수 있는 구속력 있는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고, 9월 9일 유럽위원회는 16만 명의 난민 분산 수용 쿼터안 50


을 발표했다. 동유럽 나라들이 이에 반발했지만 유럽연합 각료 회의는 유럽의회의 승인을 거친 분산 수용 안을 통과시켰다. 이와 함께 난민 관련 예산 증액, 각국에 대한 재정 지원, 터키와의 협조, 유럽 국경 감시 기구 강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런 공조 이외에도 몇몇 나라는 자발적인 분산 수용안을 내놓기도 했 다. 독일,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각자 수만 명씩 자발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대책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지는 미지수이다. 우선 적지 않은 나라가 분산 수용에 반대 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고, 스페인, 아일랜드, 스웨덴, 리투아니아가 동조하고 있지만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덴마크 등은 이를 거부하고 이는 실정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있었 던 파리 테러로 인해 난민에 대한 거부감까지 확산되고 있으며, 기왕에 난민 수용을 반대하던 정치세력과 언론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난민의 규모 자체가 사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및 중동 지 역을 거쳐 입국승인 서류 없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주자의 숫자가 크게 는 것은 2014년부터이다. 올해인 2015년에는 유례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늘어나 이미 80만 명 이상이 들어온 상태이다. 이 가운데 시리아 출신 이주자는 2014년 4월부터 2015년 6월 사이에 15만 명 이상이다. 그런데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발생한 난민이 400만 명 정도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유럽행을 택할 난민은 훨씬 많을 것이 라고 예측할 수 있다. 전체 난민 숫자에 비해 유럽으로 들어온 난민의 비율이 낮은 것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하나는 다수의 난민은 우선 인접국으로 피신했다가 자국의 사태가 나아지면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이후 발생한 시리아 난민 400만 명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은 터키, 레바논, 요르단에 머물렀다. 하지만 시

2015년 1월부터 6월 30일까지 유럽연합(EU)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에 망명을 신청한 사람들의 국적분포 .. (Maximilian Dorrbecker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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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난민의 규모가 이들 네 나라가 수용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장 기적인 정착을 위해 유럽행을 택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난민 사태’ 가 유럽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다. 2014년 유엔 난민고등판무소(UNHCR)의 보고에 따르면 전체 난민 신청자 수는 180만 명이며, 이 가운 데 유럽에서 신청한 사람은 90만 명 가량 된다. 한마디로 말해 난민 신청자의 절반은 유럽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국경을 넘지 못한 지역 내 비자발적 이주자 수 3200만 명을 고려하면‘난민 사태’ 는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해야 한다.

이주의 위기

우선‘난민 사태’ 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넓게 보면 인간의 이동성, 즉 이주를 부추기는 요인 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을 말한다. 가장 큰 요인은 중요한 송출 요인(push factors)인 전쟁이 라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서만 해도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아랍의 봄에서 시작된 여러 내전, 아프리카의 내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통상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경제적 이주도 신자유주의 하의 세계적 양극화와 경제적 위기 속에서 크게 늘고 있다. 끝으로 미국의 카트리나 피해, 아이티 대지진,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쓰나미 같은 커다란 자연 재해도 한몫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송출 요인 자체를 줄이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이 자기가 나고 자란 땅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이주의 위기와‘난민 사태’ 를 없애는 길일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당장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 근본적인 질서의 재편이 필요할 것인데, 이는 근대 전체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유럽(과 미국)이 만들어낸 자본주의 세계경제 속에서의 식민지의 지위, 자의적으로 그어진 국경이 말해주는 무책임한 탈식민화 과정, 계속해서 이어지 는 양극화와 종속이라는 포스트식민적 상황, 자국의 필요로 따라 이루어지는 강대국의 개입, 이 전체 과 정에서 재구성된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젠더적 갈등 등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프로세 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면적인 만큼 다층적인 과정일 것이다. 국가 간 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와 지역의 변화, 지 구적인 새로운 거버넌스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는 모양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 분은 불가피하게 국가 단위의 변화일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는 그 주체를 필요로 하는데, 근대의 정치적 주체는 국가별 시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이주가 위기가 되는 것 또한 이 지점에서 발행한다고 할 때 개방적인 시민성을 구성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바로 어제도 터키의 한 해안에서 네 살짜리 여자아이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세나’ 라 고 한다. 그 이름처럼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위대한 출발의‘영예’ 가 그에게 돌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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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기운”

혼,기운,우주…한국사회의거울 이장규 기관지위원장

과연 박근혜의 개인 자질의 문제인가?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다 도와준다.” “(역사) 교과서가 그런 (잘못된)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은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독특한 어법이 화제가 되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이 흔히 쓰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쓰 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혼이 비정상’ 이라거나‘기운이 온다’ ,‘온 우주가 나서서’등의 독특한 표현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냥 조롱하는 수준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좀 더 진지한 반응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혼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독 재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있었고, 논리나 이성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중시하는 왕조시 대적 사고방식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또한 이런 용어 사용은 박근혜 대통령이 심취해있는‘국선도’ 에서 자주 쓰는 용어이며‘국선도’ 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는 블로거도 있었다. 모두 약간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이런 어법 그 자체가 독특하기 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박근혜의 개인 자질 문제로만 손쉽게 비판하고 넘어갈 문제일까? 이른바‘정상’ 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소수자 등 자신이 생각하기에‘비정상’ 인 사람들을‘교화’ 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박 근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생각 아닌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느낌으로 타인을 쉽 게 혐오하는 것 또한 오히려 최근의 우리 사회가 어떤 측면에선 과거의 전통시대보다 더 심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국선도라는 일종의 종교적 영향 또한 대형교회의 기록적인 성장이 보여주듯이 현재의 한국 사회 자체가 종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한 것을 생각해보면 박근혜만의 문제는 아니다. 특히 최근의 보수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53


기독교계는 성소수자 등 타인에 대한 불관용과 지나친 전도 시도 등‘비정상’ 을‘정상’ 으로 교화하려는 욕 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박근혜는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나?

또한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가 우리 사회를 박정희 독재시대로 되돌리려 한다거 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왕조시대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다는 비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나 문제의 핵심 을 은폐하는 주장이다. 주로 보수야당 지지자들이 선호하는 이런 주장은 박근혜에 비해‘민주적’ 이고‘자 유주의적’ 이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이 훨씬 더 좋았으며 박근혜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 통치 시절 을 완전히 단절된 시대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박근혜와 김대중, 노무현은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 물론 박근혜가 좀 더 심한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본질적인 사고방식은 동일하다. 단순히 노동자 민중에 대한 억압이라는 사회경제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김대중이 정리해고를 도입하면서 또는 노무현이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주장했던 논리들을 생각해보라. 모두‘국익’ 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며 일부 급진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내 세워 이를 반대하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리해고나 한미FTA가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즉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체 국민을 위해서는 당시의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 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과‘비정상’ 인 사람들을 국정교과서 등을 통해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김대중과 노무현도 정리해고를 도입하고 한미FTA를 추진할 때,‘국익’ 을 위해‘불가피하다’ 고 얘기했다. 일부가 반대해도 전체 국민을 위해서는 당시의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이나‘비정상’ 인 사람들을 국정교과서 등을 통 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나, 사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사진 : 연합뉴스 TV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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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방식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물론 이들은 박근혜에 비해 사회문화적으로는‘자유주의적’ 이었다. 하지만 그 자유주의는 두 가지 핵 심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많이 지적되었듯이 이것이‘시장의 자유’ 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 었다는 점이다. 김대중, 노무현은 시장에 너무 손쉽게 굴복했다. 김대중은 IMF에, 노무현은 삼성에 대해. 그리고 이런 시장에의 굴복은 민중들의 삶을 이전보다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박근혜에 대한 지지의 상당 부분은 이와 관련이 있다(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두번째는 대부분의 논자들이 간과하고 있 는데, 사회문화적 자유주의가 개인의‘취향’ 을 절대시함으로써 소수자나 약자 등 타인에 대한 혐오조차 개인의 취향 문제인 양 생각하는 분위기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나 장애인을 혐오하는 것도 개인 의‘취향’내지는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른‘입장’ 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은 이명박 시대 를 거치면서 더 확대되었다. 기업인이며 기독교 장로인 이명박은 철저하게 시장의 입장과 보수기독교의 입장에 서 있었다. 결국 박근혜는 단순히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확대된‘국익’ 과 ‘시장’ 의 기묘한 결합 및 왜곡된 자유주의에 기반한 혐오 내지‘교화’노력의 결정판이다. 겉으로 보기엔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전 정권의 역사를 계승하고 강화시키고 있는 것 이다.

왜곡된 공공성 내지 정의 실현 욕망

박근혜의 여러 가지 문제 발언들은 이전 정권부터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온 현재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 단지 박근혜 개인의 자질 문제가 아니다. 온갖 실정(失政)에도 불구하고 박 근혜의 지지율이 여전히 높은 것이 단지 박정희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박근혜는 현재 대중 들의 욕망 중 어떤 부분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 욕망의 핵심은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내용 즉 ‘국익’ 과‘시장’ 의 기묘한 결합 및 왜곡된 자유주의에 기반한 혐오 내지‘교화’노력인 바, 한 걸음 더 나아 가면 이는‘왜곡된 공공성 내지 정의 실현’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IMF사태 이후 민중들의 삶은 계속 악화되었다.‘국익’ 과‘시장’ 을 앞세운 전 정권들의 논리가 문제의 핵심이었음에도, 이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갖지 못하고‘국익’ 과‘시장’그 자체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 자신의 삶을 개선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세계시장 등 시장에서 성과를 내서 이를 국가와 국민 전 체를 위해 쓰는‘능력 있는’정부가 그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일 뿐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처럼 (사 실은 시장에 굴복했지만) 시장을 적대시하면서 경제만 더 어렵게 만든‘좌빨’ 도 아니고 이명박처럼 국가나

국민 전체의 이익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이는 인물도 아니었다. 즉 박근혜 지지자들에게 박근혜는 시장과 국익 나아가서 자신의 악화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일종의‘공공성’ 을 담보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공공성은 시장과 국익 그 자체에 대해선 전혀 의심하지 않는데 따른 왜곡된 공공성일 뿐이지만.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55


여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교화’노력도 이런 왜곡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가령 일베 이용자의 경우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는‘정의’ 를 실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꼴페미’ 나‘김치년’ 들은 노력 은 하지 않고‘무임승차’ 를 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하는 반면, 자기들은‘팩트’ 에 입각해서 공정한 주장을 한다고 믿는다. 자신들의 혐오가 개인 취향이라고 옹호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곧 정 의라는 것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보수기독교의 혐오도 마찬가지다. 동성애 혐오는‘성경’ 에 따른 진리인 것이다. 이런 왜곡된 정의 실현의 욕망은 국정교과서를 통해‘혼이 비정상’ 인 사람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박근혜의 욕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리 사회 상당수가 박근혜를 닮아 있기에, 박근혜의 지지율이 그 리 높은 것이다.

어떤 공공성이며 어떤 정의인가를 따져야

그리고 이는 우리 진보세력에게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단지‘공공성’ 이나‘정의’ 를 강조하는 것만으 로는 이제 진보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나 박근혜를 닮은 저들조차도 자기 나름대로는‘공 공성’ 과‘정의’ 를 실현한다고 믿고 있기에. 어떤 의미에선‘공공성’ 이나‘정의’ 는 아무런 내용없는 기표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어떤 공공성이라야 하며 어떤 정의인가를 따져 묻는 것이다. 한두 마디 구호로 정리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이긴 하지만, 이 과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좌파는 본질적으로 계몽주의 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최근의 국정교과서 사태에서도 단순히 이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어떤 공공성인가를 따져 물어야 한다. 가령 일부 좌파단체에서는 국정교과서의 대안으로 교과서 자유선택제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내 용이 교과서에 들어가야 하는가를 따져묻는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주장이 다. 좌파가‘국가’ 가 싫다고‘시장’ 을 택할 수는 없듯이 국정교과서가 싫다고 자유선택을 택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자라면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가령 내용에 대한 토론이 전제되지 않고 그냥 교사와 학생이 알아서

‘자유’ 롭게 선택할 경우 일부에선 지금보다 진보적인 교과서가 채택되겠지만 전체적으론 지금의 검인정 교과서보다 더 보수적이거나 극우적인 교과서가 훨씬 많이 채택될 수도 있다. 당장 보수기독교 계통의 재 단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교과서가 채택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교과서는 어차피 제도교육을 전 제로 한 것이며, 제도교육에서는 일정한 가이드라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 가이드라인이 어때 야 하는지를 따지고, 그 가이드라인 속에 소수자 인권이나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 들어갈 수 있도 록 노력하는 것이 계몽주의자로서의 좌파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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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장기투쟁1”

2015년 겨울의 노동현장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 비닐천막이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때 이른 눈보라에 위태롭게 펄 럭이는 비닐 안에 한 노동자가 곡기를 끊은 채 앉아있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콜텍지회 이인근 지회장이 다. 같은 회사의 인천공장에서 일했던 방종훈 콜트악기지회장이 단식 45일 만에 병원으로 실려가자, 투쟁 을 멈출 수 없다며 단식을 이어받았다. 2007년 정리해고에 맞서 싸운 지 12월 1일 현재 3226일. 햇수로 9 년이다. 세계 유명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이 겪었던 9년은 이 땅 노동자들의 수난의 역사다.

신자유주의

“콜트의 Global Supply Chain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와 중국 대련에 각각 소재한 최첨단 생산 공장 으로부터 연간 100만대에 육박하는 기타를 생산 수출하고 있습니다. 콜트는 50여년의 농축된 악기제조 경험과 최첨단 자동화 설비의 만남으로 기타 제조업 역사의 혁명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콜트 홈페이지 회 사 소개)

2007년 콜트는 세계 전자기타 시장 점유율 30퍼센트였고, 10년 동안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더 싼 값에 기타를 만들어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던 회사는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공장을 설립했다. 생산물량을 해외 공장으로 몰아준 후 국내 공장이 어렵다며 정리해고에 나섰다. 위성라디오와 네비게이션을 만들던 기륭전자도 구로 공장을 없애고 중국 공장을 만들었다.‘신자유주의 세계화’ 라는 이름으로 국내 공장을 없애 직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떠날 때 한국 정부가 한 일은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잡아 가두는 것이었다. 지난 9월 3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콜트악기와 콜텍 이런 회사는 모두 이익을 많이 내던 회사인데 강경 노조 때문에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고 말했다. 김무성처럼 보도했던 동아일보는 허위보도라는 대법 원 판결로 2011년 9월 19일“콜트악기 부평공장의 폐업은 노조의 파업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용자 측의 생 산기지 해외 이전 등의 다른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고, 노조의 파업은 대부분 부분파업이어서 회사 전체의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57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는 정정 보도를 냈다. 잘 나가는 회사가 하루아침에 국내공장을 없애고 해외로 날라도 무탈한 나라,‘먹튀’자본으로 수백명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여당 대표가 대놓고 거짓말을 지껄여도 무방한 나라, 2015년 대한민국이다.

정리해고

2007년 콜트 자본이 국내 공장을 없애기 위해 정리해고를 강행할 때‘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는 어디에 도 없었다. 흑자가 계속되고 있었고, 재무상태도 좋았다. 콜트악기 박영호 사장은 한국 부자순위 120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2년 대법원은 콜트악기 자본의 정리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돌아가야 할 인천공장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자본은 다시 그들을 해고했다. 대전공장의 경우 대법원은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가 없 었더라도 앞으로 다가올 경영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재판부가 지정한 회계 법인에서도 경영상의 위기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지난해 11월 13일 대법 원은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도 정당하다며, 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대림자동차, 포레시아 등 노동자들이 승소한 대법원 판결에서도‘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는 인정됐다. 대법원은‘매우 다급하고 절 박하다’ 는 뜻의‘긴박한’경영상의 위기를 미래의 경영상의 위기로 등치시키며 정리해고의 요건을 완화시

새누리당사 앞에서 노숙・단식 농성을 이어가는 콜트-콜텍 노동자를 지지하기 위한 화요문화제 (사진 : 정정은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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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왔다. 2015년, 이 땅의 노동자들은 법원이 단어의 뜻까지 바꿔가며 자본에게 해고의 자유를 만끽하게 해주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극한 투쟁

정리해고에 맞선 싸움은 힘겹다. 콜트악기의 한 노동자는 제 몸에 기름을 부어 분신을 시도했다. 양화 대교 인근 송전탑에 올라 고공 단식농성을 벌였고, 콜트악기 본사에 들어가 농성을 하다 경찰특공대에 끌 려나오기도 했다. 2015년 겨울, 늙은 노동자가 시멘트 바닥에서 45일을 굶고, 건강이 좋지 않은 또 다른 노동자가 이어서 단식을 하고 있다. 부산의 택시노동자와 막걸리 회사 생탁 노동자가 부산시청 앞 광고탑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한 지 12 월 1일부로 230일이다. 매출액 전국 2위 생탁의 일하지 않는 40명의 사장들이 매달 2천만 원을 가져갈 때, 100여 명 노동자의 월급은 150만원 남짓 받아야 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단순한 요구에도 박근 혜 정부와 부산시장은 눈썹 하나 꿈쩍 하지 않는다. 법원에서 불법파견이기 때문에 기아자동차 정규직이라고 판결받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서울광장 광 고탑 고공농성도 174일이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대재벌 현대기아차그룹을 상대로 비정규직 노동자 들이 목숨이 위태로운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야당과 언론도 조용하기만 하다. 지난 10월 24일 풀무원 노동자 두 명이 서울 여의도 광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법원은 고공농 성을 하면서 경찰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화물연대 조합원 7명을 구속했다. 끌려가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두 명의 노동자가 38일째 서럽게 투쟁하고 있는데 고공농성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공농성의 역사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가 작성한 고공농성 연표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고공농성 이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하거나 구속되면 연대파업으로 맞섰다. 생산을 멈춰 탄압에 맞섰 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은 극심했지만, 저항과 연대는 강력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정리해고법과 파견법이 만들어지고, 정규직이 일하던 일터에 비정규 직과 사내하청이 들어서면서 투쟁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의 힘이 약화되면서 희망을 찾지 못한 노동자들이 극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08년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의 94일 단식과 2015 년 스타케미칼 해고자 차광호 대표의 408일 고공농성은 이 나라 노동자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풀무원 고공농성을 포함해 2000년 이후 109건의 고공농성 중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78건으로 72퍼센 트였다. 나머지는 해고 철회와 복직(48건), 노동조합 인정(32건) 등이었다. 고공농성자들이‘하늘 감옥’ 에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59


서 보낸 시간은 4813일로 13년 2개월이었고, 그들이 오른 높이는 4196미터로 서울 여의도 63빌딩 22개 높이였다. 김대중 정권에서 빈발하기 시작한 고공농성은 노무현 정권까지만 해도 대체로 단기간 진행됐다. 2003 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129일), 기아특수강(현 세아베스틸) 굴뚝농성 132일을 빼면 대부분 50일 이내 였다. 많은 고공농성이 노동계가 앞장서서 싸우고, 정부와 시민사회가 나서면서 해결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이후 고공농성은 장기화됐다. 정부는 고공농성을 외면하거나 무시했고, 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노동 자들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스타케미칼 차광호(408일), 한진중공업 김진숙(309일), 현대차 비정규직 천의봉 최병승(296일), 유성기업 이정훈 홍종인(259일) 부산 생탁택시 송복남 심정보(230일) 등 200일을 훌쩍 넘긴 고공농성은 모두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에서 진행됐다. 이명박 정부 이전엔 기업이나 정치인들이 고공농성을 무작정 방치하진 않았다. 2008년 이후 정치가 기업 쪽으로 급격히 쏠리면서 기업의 대응 양상도 달라졌다.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금은동메달을 모두 한 국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무기력한 총노동, 실종된 노동정치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절박한 고공농성, 극한의 단식농성이 계속되고 있지만, 총노동의 대응은 여 전히 무력하다. 금속노조를 비롯해 산별노조는 위력적인 연대투쟁으로 맞서지 못하고 있다. 2006년 완성 차가 결합하기 전 4만 규모의 금속노조가 오리온전기, 현대하이스코, 기륭전자, KM&I 등 장기투쟁 사업 장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파업을 벌인 이후 의미있는 연대파업이 벌어지지 않았다. 총노동의 빈자리를 희망버스가 채웠다. 2011년 6월 11일 시작된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노동자와 시 민들의 마음을 모아 출발한 이후 그 해에만 다섯 차례의 희망버스를 통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철회시 키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사히 땅을 밟게 만들었다. 현대차 비정규직 희망버스, 유성 희망버스, 스타케 미칼 희망버스와 밀양 희망버스 등을 거쳐 지난 9월 12일 거제(대우조선 비정규직)와 부산(생탁 택시)으로 향 하는 희망버스로 이어졌다. “지는 건 안 무서워요. 졌을 때 혼자 있는 게 무섭지. 그냥... 곁에 있어요. 그거면 돼요.”최규석 웹툰 원작 드라마《송곳》 의 버스노동자 차성학이 주인공 이수인에게 한 말이다. 2015년 겨울, 악덕 사용자와 더 악랄한 정권에 맞서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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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키워드로 읽는 2015년

“장기투쟁2”

국가행정에 저항하다 박정경수 평화활동가, 평택평화센터 운영위원

요즘처럼 날씨가 부쩍 추워질 때면 먼저 생각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한 편에 천막과 비닐을 둘러서 야무지게 만들어놓은 농성장. 혹은 공사를 위해 오고가야 하는 길목에 지어놓은 비 닐하우스. 크지 않은 농성장의 난로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추위를 이겨내는 사람들. 언젠가부터 쫓겨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집에서, 고향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일일이 노력하 지 않으면 기억하기도 힘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쫓겨났습니다. 쫓겨나지 않으면 빼앗깁니다. 삶의 보금자 리에 거대한 괴물처럼 철탑이 들어서고, 군사기지가 들어섭니다. 괴물을 마주하며 사람들은 다시 조용했 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고향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자란 친구, 함께 땀 흘리던 기억까지 몽땅 빼앗아 갑니다. 소유권이 생존권보다 앞서는 사회. 공익이라는 거짓이 국민보다 중요한 사회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국 가행정에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기지 건설과 송전탑 건설. 국립공원 케이블카 건설. 국가라는 이 름으로 거대한 괴물이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지만 지금은 해도 해도 너무 너무합니다. 벼랑 끝까지 사람들을 몰아넣고는 가진 것을 몽땅 내놓으라고 합니다. 강도가 따로 없습니 다. 노골적입니다. 그래도 공익이니 법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빠트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정부가 앞장서서 강도짓을 하니 빼앗기는 사람들은 기댈 곳도 없습니다. 정부가 가장 쉬운 방법만 찾을 때 사람들의 고통 은 커집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국가행정이 아니라 국가폭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포기하지 않으면 아직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겨울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내년 겨울에는 좀 더 따뜻한 곳에 서 가족들과 겨울을 보내길 바라는 사람들이 올해는 농성장을 꾸립니다.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현장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사연들이 너무 많습니다.

군사기지 건설에 저항하다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61


지난 9월 16일 제주도에 거대한 군함이 들어왔습니다. 해군은 기지의 해상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었다 는 사실을 알리려는 듯 제주도 강정마을에 길이 160미터가 넘는 거대한 이지스 구축함 세종대왕함을 보 냈습니다. 이유는 항만과 부두시설의 안전점검을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거대한 전함은 누가 보더라도 해 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마을주민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강정마을은 해군기지 건설이 발표된 이래로 9년째 투쟁 중입니다. 2007년 5월 당시 제주도지사가 해 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주민 80여 명만 불러서 진행한 마을총회가 주민들을 9년째 고통에 빠트리고 있 는 것입니다. 도정이 잘못 끼운 첫 단추가 9년째 계속된 셈입니다. 해군기지 건설은 2011년 공사장 주변 을 펜스로 치고, 2012년 공사현장에 발파하기 위한 화약을 옮기는 과정에서 주민과 활동가들, 그리고 해 군 사이에 많은 물리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연행된 사람들만 연 인원 700명이 넘습 니다.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재판에 넘겨졌고, 구속자 38명을 포함해 모두 4억 원이 넘는 벌금이 선고되 었습니다. 최근에는 해군 쪽이 공사지연 때문에 시공업체에 지급할 273억 원의 배상금을 예산으로 먼저 주고 주민과 활동가들에게 받아내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해군기지 반대 투쟁은 벌써 3000일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은 벌써 3000일을 넘긴 지 오래입니다. 9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분명해진 것은 해군이 제주주민들을 지켜 주지는않을거라는사실입니다.

넘긴 지 오래입니다. 9년이라는 시간이 흐 르며 분명해진 것은 해군이 제주주민들을 지켜주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해군이 군사기지 건설을 계속해 왔듯이, 강정마을도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쉬지 않았습니다. 마을에서는 여전

히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가톨릭 신부님들을 중심으로 미사가 매일 진행되고 있습니다. 평화를 기도하 는 발걸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을활동가들도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도우며 해군기지 건설에 반 대하는 선전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마침 이지스함이 마을에 들어오기 직전 9월 5일에는 마을주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5층 규모의 강정 평화센터 건립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문정현 신부 의 국가배상금으로 땅을 산 강정 평화센터는 가톨릭 신자 6,800여 명이 모금해 건물을 완성했습니다. 이제는 주민들과 활동가들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가 아니라 건설되는 해군기지를 없앨 때까지 싸우겠 다고 이야기합니다. 강정 평화센터는 그런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지방정부도 중앙정 부도 주민의 편에 서서 지켜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괴물 같은 철탑과 싸우며

지난 10월 29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신고리 3호기의 운영허가를 승인했습니다. 신고리 3호기는 지난 해 준공 직전 납품업체의 케이블 시험성적서 위조가 확인되면서 논란이 되었고, 가스 누출 사고에 따른 62


작업자 사망 사고로 허가 절차가 미뤄졌던 곳입니다. 게다가 신고리 3호기가 가동되면 부산과 울산은 무 려 7기의 핵발전소가 있는 세계 최대 핵단지가 됩니다. 신고리 3호기는 함께 건설된 신고리 4호기와 함께 밀양에 765킬로바이트 초고압 송전탑을 건설한 이 유이기도 합니다. 765킬로바이트 송전선로는 우리가 흔히 보는 154킬로바이트 송전선로보다 18배나 많 은 전기를 보내는 초고압 송전선로입니다. 문제는 이런 위협적인 송전탑이 마을에 너무 가깝게, 그리고 삶의 터전인 논밭 위로 지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는 초고압 송전탑 아래는 사람이 전자레인지 속에 들어 가 사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밀양에서도 핵마피아의 이권과 UAE 수출을 위해 수천 명의 공무 원과 경찰이 동원되었고 주민의 삶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2012년 1월에는 밀양에서 74세 이치 우 노인이 스스로 분신했습니다. 2013년 12월에는 71세 유한숙 노인이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습니 다. 같은 달에도 마을주민 한 명이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2013년 7월‘밀양 송전탑 인권침해조사단’ 은 밀양 4개 마을주민의 71%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고 발표했 습니다. 이는 9・11 사태 당시 미국 시민보다 4.1배, 레바논 내전을 겪은 시민보다 2.4배나 높은 결과로 강압적인 국가행정으로 사고・전쟁・해고 등과 같은 심리적 외상과 충격을 겪는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2014년 9월 밀양 99번 송전탑을 끝으로 52개 공사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밀양 주민들의 싸움 이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활동가들도 떠나지 않았고, 주민들도 아직 철탑 아래 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철탑을 모두 뽑아내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마침 밀양에서 멀지 않은 영덕에서 뜻밖의 승리 소식이 들렸습니다. 11월 이틀간 영덕에서 진행된 주 민투표에서 주민 1만 1209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무려 91.8퍼센트가 영덕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했습니 다. 관의 도움 없이 순전히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진행된 주민투표 자체가 기적이라고 이야기합 니다. 무엇보다 이제 영덕도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 주민들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 습니다. 밀양도 영덕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무자비한 행정권력에 맞서는 방법은 결국 시민들의 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말 못하는 생명의 편에 서서

8월 28일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가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을 승인했습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건설할 수 없다고 두 차례나 부결시켰던 사안을 결과 그대로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추진 과정 에서 법 취지와 절차는 철저하게 무시됐습니다. 설악산 국립공원은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에 속한 산양의 서식지이며, 유네스코의 생물권보전지역입니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자 천연보호 구역이며, 백두대간보호지역에도 들어갑니다. 설악산 국립공원의 중요성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 기획 키워드로 보는 2015년 63


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지난해 10월 박근혜 대통령이 케이블카 건설을 지시하면서 뒤집어져버렸습니 다. 설악산 케이블카 승인은 전국의 국립공원의 개발을 모두 해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더군다나 정부는 산 정상에 관광호텔과 식당까지 짓도록 규제완화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비슷한 산지 개발사업을 앞다투어 추진할 계획입니다. 정부는 관광 활성화를 위해 산을 적극적으로 이용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산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자연을 파괴해 이권을 챙기는 모습이 흡사 4대강 사업의 그것과 무척 닮아있습니다. 또 단 사흘 동안의 동계스포츠를 위해 500 년 된 숲의 5만 그루 나무가 잘려나가는 강원도 가리왕산의 활강스키장 예정지와도 닮았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말 못하는 생명의 편에 서서 공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경활동가들과 산악 인들. 그리고 자연을 생각하는 시민들. 아직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그렇게 생명의 편 에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최근 11월 10일 국토교통부는 제주 제2공항을 성산읍 일대에 2025년까지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 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을주민 누구도 모른 채 공항 건설이 발표되었습니다. 언제나 정부는 먼저 발표하고 주민들에게 양보를 구합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번에는 항공기 소음을 참으 며 살아야 합니다. 또 6월에는 수원공군비행장 이전이 승인되었습니다. 여주시와 화성시는 유력한 이전 후보지로 거론되 자 지자체는 바로 반대했습니다. 또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성 환읍은 2007년 이전한 평택 대추리의 새 마을 바로 앞이기도 합니다. 군사기지로 세 번 이전했던 주민들 에게 네 번째 불행이 닥칠지 걱정입니다. 2015년 겨울 여전히 투쟁 중입니다. 이제는 정부가 발표를 할 때마다 주민들은 숨을 죽여야 합니다. 그 저 불행이 내게 오지 않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추운 겨울에도 농성장을 꾸려야 합니다. 정부가 바뀌지 않 는 한 장기투쟁도 끝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제 다시 겨울이 시작됩니다. 봄이 올 때까지 따듯한 응원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함께 봄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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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열전

4.16연대 상임이사, 인권재단사람 소장 박래군을 만나다

어떤죽음도익숙한 죽음은없어요 박래군, 그 이름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시민맏상제’ 라는, 명예인지 슬픔인 지 모를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 세월호 투쟁의 맨 앞에서 싸우다 지난 7월 구속된 후, 110일 만인 11월 2일 보석으로 풀려난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 을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만났다. 옥살이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세월 호로 이어졌고, 세월호로 흘러간 대화는 또 다시 자연스럽게 죽음과 인권과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고 동 시에 미래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인터뷰・정리 : 강남규 편집위원 속기 : 김혜연 편집실 부장 사진 : 정정은 편집실장

진보정치 열전 67


다섯 번째 옥 생활,“내가 내 일하다 간 거죠”

강남규(이하 강) : 다섯 번째 옥 생활입니다. 박래군(이하 박) : 감옥에 몇 번 갔다 오니 익숙합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인데, 그 전엔 다 짧게 짧게 살 았어요. (이번에 머물렀던) 서울구치소는 5년 전에도 들어갔던 곳이라 굉장히 익숙했어요. 그래서 적응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체력적으로 한계점에 도달했다 고 아주 절실하게 느끼는 시간을 처음에 가졌죠. 한 달 정도는 운동하다가 피곤하면 잤어요. 그 뒤 재판을 기다리는데, 재판이 또 늦게 잡혔어요. 석 달 만에 잡혀가지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죠.

강 : 건강은 어떠신지? 박 : 꾸준히 운동하고 술 담배 안 했더니 좋아졌는데, 나오자마자 망가지고 있는 중이에요. 활동을 떠 나서 건강하게 사는 게 되게 좋잖아요.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는데, 일주일에 아침운동 두세 번은 하자고 마음먹었죠. 자전거 타고, 아내랑 딸이랑 운동기구 있는 것도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강 : 출소하자마자 광화문 농성장부터 방문하셨던데요. 박 : 당연히 가야죠. 분향소 가서 분향하고, 술집에서 조촐하게 환영행사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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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유가족들이 어떤 말씀들 하시던가요? 박 : 자기들이 미안해하죠. 자기 일을 대신하다 갔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제가“그러지 마라. 내가 내 일하다 그런 거지. 세월호 참사가 당신들만의 일은 아니지 않냐.”그렇게 말씀드렸어요.

강 : 옥살이 하면서 새롭게 정리하게 된 생각 같은 게 있나요? 박 : 110일이 아니라 더 있었으면 그랬을 텐데, 그냥 이런저런 생각하다 나온 것 같아요. 특히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많이 생각했고요. 원고 쓸 게 있어서 쓰고 나오려고 했는데 못 하고 나왔죠. 나와서는 이어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사람들하고 얘기도 많이 나누고. 그래서 정리 좀 해 볼까 싶어요. 우리 사회의 운동론 같은 게 정리가 안 된 면이 있는데, 4.16운동을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세 월호를 다룬 책들을 들여와서 감옥에서 봤는데, 대충 열 권 정도 본 것 같아요. 세월호는 단순히 사건 하나 참사 하나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으로 봐야 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 정이 결국 우리 사회를 바꿔가는 과정이죠. 그런 전망들을 보여주기에는 우리가 아직 많이 부족하지 않 나. 인문사회학자들도 그런 쪽으로 많이 연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저는 활동가니까 운동 쪽으로 정리하고 싶고요.

세월호 특조위,“조건 탓 말고 차라리 부딪혀 깨져라”

강 : 세월호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 죠? 박 : 특조위는 굉장히 어려운 조건이죠. 이제야 사건 신청 받고 조사하려고 하는데, 저는 아직 자세하 게는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몰라요. 특조위 위원들도 억울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정부 를 탓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인 상황이지만 그런 조건들을 탓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불만만 성토한 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특조위의 역사적 사명이 있잖아요.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 근데 그걸 지 금 정권에서는 완전히 하기 어려운 상 황이니, 이 정권 뒤에도 제대로 조사할

“앞으로 청문회를 하는데, 왜 특조위가 필요한

수 있는 근거들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

지를 국민들한테 보여주고 인식시켜주는 청문

하겠죠. 전략적으로 해야죠. 앞으로 청문회를 하는데, 가장 중요 한 것은 특조위가 왜 필요하냐를 증명 하는 거죠. 그래서 왜 특조위가 필요한

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검찰의 엉터리 수사, 축 소 수사, 실제로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 에드러내는청문회가되어야해요.”

지를 국민들한테 보여주고 인식시켜주 는 청문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검찰의 엉터리 수사, 축소 수사, 실제로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드 진보정치 열전 69


러내는 청문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조건에서 어려운 조건을 탓하지 말고, 차라리 부딪혀서 깨져라.

강 : 검찰 수사 얘기는 어떤 얘긴가요? 박 : 해경 쪽에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한 사람인가요? 그 뒤의 라인은 하나도 기소 안 됐어요. 국정원과 관련된 관계 부분도 국정원 쪽 해명만 받고, 검찰수사는 하지 않았고요. 사고의 원인이 뭐냐를 밝히는 것 이 가장 기본인데, 주요하게 대두된‘급변침’ 은 대법원 재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만큼 검찰의 수사가 굉장히 허술하다는 거죠. 정부가 내놓은 중요한 부분들은 삭제되고, 조작되고. 이런 것들에 대해 수사하지 않아요. 수사의 기본에도 못 미치고 있어요.

“어떤 죽음도 익숙한 죽음은 없어요”

강 : 늘 죽음의 곁에 계셨어요.‘시민들의 맏상제’ 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죽음에 익숙치 않은 제 생 각으로는 죽음 자체가 익숙해질 법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드는데요. 박 : 문제가 있는 질문이에요. 어떤 죽음도 익숙한 죽음이 없었어요. 다 그만한 크기의 상실과 고통, 아 픔이 있습니다. 익숙한 죽음은 없는데, 워낙 많은 죽음을 보고 겪다보니 초기의 충격은 사실 많이 없죠. 그 러나 하나하나의 죽음들, 내가 겪는 죽음들이 일상의 죽음이 아니라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굉장 히 끔찍한 죽음, 잔인한 죽음, 분신, 이런 것들이란 말이에요. 충격이 발생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죽음을 놓고 뭘 밝혀야 하고, 이런 데서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곧바로 들어갈 수 있죠. 하지만 역시 어떤 죽음이든 익숙하고 가벼운 죽음은 없습니다. 한 인간의 인생이 종결되는 것이니까. 죽음은 늘 힘들 죠.

강 : 동생(박래전)의 죽음 이후로 인권운동으로 방향을 트셨죠. 기존의 노동운동을 더 강화할 수도 있었 을 텐데요. 박 : 내가 의도를 해서가 아니고요.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 받고 방황하다가 전국민주화운동유가 족협의회(유가협)에 나갔고, 결정적으로 의문사진상규명 농성에서 유가족들을 본 거죠. 의문사와 관련된 전국 최초의 농성에서요. 1988년 10월에. 활동을 못 하고 있었던 때인데 10월에 종로구 기독교회관에 가게 됐고,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어요. 당시 10월 11월 넘어가면서 의문사를 알리고, 아이들의 영정을 코팅해서 달고 다니면서 서명 받고, 각종 집회현장 돌아다니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주무시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이 짠한 거예요. 너무 안 쓰럽고. 우리는 그래도 열사라는 이름으로 대우받고 그러는데, 이분들은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실종된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걸 풀어야 되는데 세상이 안 알아주잖아요. 매일 울고 다니는 분들 70


을 보면서 정서적으로 가까워지게 됐고, 그러면서 (인권운동을 하게) 된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노동운동이 더 폼 날 것 같긴 하지만(웃음). 거기서 일하면서, 의문사 진상규명이나 이런 부분이 정치적인 투쟁만 갖고는 어렵다 생각했고, 그래서 찾은 게 인권이었어요. 인권이 좀 먹힌단 말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인권운동을 하게 된 거지, 무슨 생각을 갖고 딱 하게 된 것은 아니란 거죠.

“진보는 늘 바뀌어야죠”

강 : 사회 전반에 무기력함이 가득합니다. 이번 민중총궐기 이후로도 그런 징후가 보이고요. 특히 청년 세대의 무기력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박 래군은 1988년부터 지금까지, 무기력을 어 떻게 극복해왔나요? 그런 적이 있긴 한가 요? 박 : 일로 극복하고 그러는 거죠. 일이 워낙 많으니까, 한가롭게 무기력하고 이럴 시간이 없었던 게 저의 비극이죠. 상황 때 문에 무기력해진다기보다는 사람에서 무기 력해지는 것 같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과 의견이 안 맞고, 뒤통수 때린다든지… 말하 자면 배신, 이럴 때가 진짜 힘들고 운동 때 려치우고 싶다 생각하기도 하죠. 아무튼 인 권 쪽은 활동가가 굉장히 적어요. 그래서 일은 넘치는데 활동가는 적어서, 그럴 새 없이 쭉쭉 달려왔던 던 것 같아요. 운동 전체가 무기력하죠. 굉장히 힘든 상황이에요, 지금 같은 때가. 정부나 기득 권의 문제도 있지만 우리의 문제도 있어요. 힘이 없는 거죠. 아직도 낡았어요. 혁신이 없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2000년대의 진보

“운동전체가무기력하죠. 굉장히힘든상황이에 요. 정부나 기득권의 문제도 있지만 우리의 문제

정당 운동도 사실 실패한 거죠. 다시 방향

도 있어요. 힘이 없는 거죠. 아직도 낡았어요. 혁

도 잡아야 하고 재구성도 해야 해요. 이 변

신이 없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2000년대의 진보

화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거기에 대응하

정당운동도사실실패한거죠.” 진보정치 열전 71


는 우리의 운동 자체는 우리가 못 만들어낸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80년대의 사고 틀이 아직도 유지되 고 있고. 조직방식이나 이런 것들이 그래요. 세상이 벌써 21세기인데! 물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하고 있다. 정체돼 있어요. 청년들이 운동에 이입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학생운동의 흐름이 깨지면 서. 이런 문제들을 진작부터 얘기했어야죠. 청년들, 학생들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죠.

강 : 어떻게요? 박 : 제일 좋은 건 모임이라도 만들고, 교육도 하고, 그런 조건을 만들어주는 거죠. 옛날처럼 일방적으 로 사람들 모아서 가르치고 이런 건 안 되잖아요. 자발적으로 주체가 되는 과정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 까요. 진보정당을 하고 실패하면서 운동사회가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못 받는 거잖아요. 운동조직에 훌륭 한 지도자가 있다고‘나서서 나를 따르라’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지도자도 안 보이고. 대중 의 신뢰를 얻으려면 사실 말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노조 쪽에서 가끔 보이는 성차별적인 말 들 등등. 이런 것들 다 바꿔야 해요. 진보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변화가 가장 늦는 거죠. 진보는 늘 바뀌어 야죠. 그래야 진보가 되죠. 언어나 문화, 이런 것들이.

365기금,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향한 또 한 번의 걸음

강 : 활동가들이 적고 일에 치이고 이런 얘기들 하셨는데,‘인권활동가를 위한 365기금’ 이라는 사업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어떤 내용이고, 삶의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추진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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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재단사람의‘365 기금’소개와 홍보 웹자보 (사진출처 : 인권재단사람 홈페이지)

박 : 재단 만든 게 올해로 11년이에요. 인권운동 쪽은 시민운 동에 비해 워낙 구멍가게 수준이에요. 다들 필요한 일들을 하는 데 그러다보니 재정문제가 심각하죠. 조그만 단체가 그걸 해결 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그런 단체를 지원하고, 인권운동 및 활 동가 지원하는 걸 목표로 재단을 만든 겁니다. 인권센터를 만들 면서 본격적으로 이 재단의 목표를 높여가는 중이에요. 기금은 올해 만들었고요,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반까지 인 권활동가들의 경제적인 실태를 조사했어요. 어렴풋이 대충은 알고 있지만 객관적인 자료 한 번 만들어보자고. 76명 인터뷰 에 10명 심층인터뷰. 그 결과를 발표하면서 인권운동가를 지원 하기 위한 기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정리하게 됐죠.

강 : 조사결과가 어땠어요? 박 : 인권운동가들이 남들의 생존권은 잘 얘기하면서 사실 최저임금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해요. 평균임 금이 99만 원. 이것도 아예 임금 못 받는 사람은 다 뺀 값이니까 실제는 훨씬 더 떨어지겠죠. 우리가 이런 걸 너무 잘 알아요. 나도 그런 생활을 해왔고. 그럼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지 못하고 중간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이런 경제적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전망을 세워나가지 못하는 것이에요. 체제가 안 갖춰져 있는 거예요. 진보정치 열전 73


일단 경제적인 부분을 풀기 위해 기금을 조성 중이에요. 다른 과제는 활동가들이 자기전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학습 및 재충전의 프로그램인데, 한 번에 할 수 없으니 하나하나 하고 있습니다. 활동가들을 지 원할 수 있는 이런 활동들을 계속 해나가는 거죠. 지속가능한 인권운동. 청년 얘기도 아까 했지만, 인권운 동가가 되고자 하는 청년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일도 하고 싶고. 사실 올해 하려고 했는데 감옥 가느라 못 했어요(웃음). 좀 지연됐지만 내년부터 다시 시도해야죠. 한 번에 다 할 수 없겠지만. 다른 데는 후배 활동가들이 꽤 있는데, 인권운동은 한명 한명이 되게 소중해요. 그 한명이 없으면 그 운 동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잡을 용기가 안 나 죠. 괴롭죠. 가끔 술 먹고 저한테“형님 죄송합니다”이러면 얼마나 눈물 나요. 활동하고 싶은데 여력이 안 되고 조건이 안 되는 거잖아요. 활동가들도 최저임금 이상을 받아야 해요. 인권운동계에서 최저임금 이상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게 급선무겠죠. 그러려면 돈을 많이 모아야 하는데 우리 같은 재단은 굉장히 힘들어요. 보통 잘되는 재단 은 다 구호성 재단이에요. 동정심을 자극하고 그런 건 돼요. 하지만 인권운동가를 지원하는 곳은 모금하 기 힘들죠. 이 센터 지을 때 9억 5천 모금했는데,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2년 반 모금해서 지었는데 그 만큼 힘들어요. 하지만 꼭 불가능하진 않다고 생각해요. 작년에 삼천만 원 정도 인권운동가들 지원했어 요. 많이도 아니고 한 단체에 삼백 정도 지원하면 행사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올해 한 오천만 원, 내년에 일억 정도. 좀 더 나가면 최저생계비 이상을 다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쉽진 않겠지만 뭐, 언제는 뭐 쉬웠 나(웃음).

강 :“공간의 힘” 을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재단 센터를 운영한 지 2년 정도 됐는데, 공간의 힘을 실감 했나요? 박 : 공간을 만들어놓으니까, 한 달에 30~50건의 행사나 회의가 소화돼요. 대관비는 되게 싸요. 시간 당 만 원.1) 인권단체들이 같이 연대회의 할 때는 무료로 제공하고. 아지트 같은 경우는 (평소에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하고. 곳곳에서 작고 큰 모임들이 한 달에 30~40개씩 이루어져요. 자연스럽게 이 공간을 중 심으로 사람들이 만나게 되고, 각자 활동사항을 공유하게 되고요. 공간운영에 대한 막연한 상만 있는 게 아쉽기도 했는데, 하다 보니 상들이 점점 잡혀가요. 곳곳에 작더라도 우리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또 했죠. 세도 굉장히 비싸고 그렇잖아요. 세 나가는 거 너무 아까워요. 그 월세랑 보증금(한숨). 그러 느니 좀 고생을 해서 조그만 집들이라도 마련하면 어떨까, 그게 그 지역의 근거지(거점)가 되도록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역의 운동이 기획되고 모색되는 공간. 전국 곳곳, 특히 서울 지역에 많 았으면 좋겠어요.

1) 편집자 주 : 1층 모임방 사용료가 시간당 만 원, 2층의 다목적홀 한터의 사용료는 시간당 삼만 원이다. 소규모 모임을 할 수 있 는, 지층의‘아지트’ 는 자발적 기부로 운영한다. (공간안내 www.hrcenter.or.kr, 이용문의 02-363-5855 인권재단사람 운영 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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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강 : 좀 본질적인 질문 해볼게요. 박래 군에게 인권이란? 박 : 인권은요, 통칭해서 약자들이 인 간해방을 이루기 위한 무기죠. 부자들이 나 지배세력은 사실 인권이 필요 없죠. 인권을 부정하는 게 좋은 사람들이죠. 하 지만 약자들은 그게 아니에요. 내가 인간 답게 존중받고 살 수 있는 무기 같은 거 죠. 인권에다가 무기 같은 말을 쓰면 그 게 또 이미지로는 안 맞는 거긴 한데, 다 시 말하면 그런 수단이라는 거죠. 실천적 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드러나는 것이 인 권이라고 봅니다. 문서상의 조항은 아무 런 소용이 없어요.

강 : 구체적인 맥락이라면? 박 : 인권과 관련된 문서는 굉장히 추 상화되고 명제화되어 있지만 그런 식으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인권재단 사람’

론 (권력관계가) 안 드러납니다. 노동자란 자본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약자라는 관계가 드러나요. 가부장제하에서의 여성과 남성, 어린이와 어른, 장 애인과 비장애인, 다 마찬가지죠. 사람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해자가 항상 피해자는 아니라는 거. 관계 속에서 약자가 강자가 될 수도 있어요.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폭력을 행하는 거 죠. 자기가 하는 건 잘 모르거든요. 관계 속에서 파악을 해야 인권운동이 참모습이 드러난다고 보죠.

강 :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운동 사이의 거리라거나 관계, 그런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 : 정당과 시민사회는 같이 발전해야 합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관계를 90년대부터 실험을 해온 건데, 아직 관계정립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시절에 정당들이 굳이 집회현장에 매번 깃발 들고 사회단체처럼 참가하는 게 맞아요? 그 시간에 지역에서 진보정치 기초를 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생활공간은 새누리당이 다 장악했는데, 우리 기반이 너무 약해요. 그런 일을 지역 진보정치 열전 75


에서 해야 하는 거지, 꼭 집회 때마다 와서 깃발 들고, 발언 하고, 이름 내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 어요. 그러면 정당이 다른 단체들하고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멀리 보면서 실제 대중들 속에 뿌리내리는 정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운동도 그렇게 가서 만나야 하는 거죠. 시민사회 운동의 역량이 다 정당으로 가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시민사회는 계속 (한 방향으로) 가야하는 것도 있고. 같이 가되, 서로 만나는 걸 어떻게 만나야 할지, 힘을 주고받는 걸 어떻

게 해야 할지를 해결해야죠. 그걸 아직도 못 하고 있는 거고. 저는 분명하게 나의 포지션은 여기(인권운동)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민사회에 있다가 비례대표 받 고 국회 가는 것에 부정적이고, 그게 사회 불신을 낳는 부분도 있고. 저는 계속 인권운동 쪽에 있을 거고, 정당에 들어가는 일은 안 합니다.

강 : 앞으로의 세월호 투쟁은 어떻게 될까요. 박 : 내년 2주기에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집중될 겁니다. 인권선언 풀뿌리토론 한 90회 한 것을 토대로 인권선언 만들어 대중화할 거고요. 세월호 인양, 진상규명, 특조위 등등 계기와 함께하는 것과 더불어 지 속적인 교육운동, 실천운동을 계속 만들어 가야하고, 그렇게 할 거예요. 해나가야죠. 안 그러면 운동이 또 소멸돼요. 우리 사회의 무기력감을 보태주는 거죠. 이렇게 해도 안 됐다, 그런 생각 하지 않도록 4.16운동 은 실패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같이 슬퍼하고 아파했던 일인데,‘이렇게 해도 안 됐는데’할까봐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아주 더디긴 하지만,‘아 할 수 있네’하고 느끼고, 뭔가 달라지 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상호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축적해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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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가는 것은 노동 조합의 정신입니다 공공운수노조의료연대대구지부경북대병원분회, 민들레분회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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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비정규직노동자와함께가는 것은노동조합의정신입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대구지부 경북대병원분회, 민들레분회 인터뷰

서분숙 기록 노동자

‘人命至上(인명지상)’ 대구 도심에 있는 경북대병원 본원 입구에는 가로 길이가 사람 키 만큼쯤 되는 바위가 있다. 누군가 기증한 기록이 있는 이 바위에는‘人命至上’ 이라는 한자어가 검은색을 입은 채 새겨져 있다. 아픈 몸으로 병원을 들어설 때, 혹은 가족이나 지인을 문병하러 들어설 때, 의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만나는 글귀다.‘사람의 목숨이 최고다.’참 숭고한 말이다. 개교한 지 백 년이 넘었다는 경북대 의과대학과 병원. 건물 여러 채 중에는 긴 세월만큼 고풍스런 외관을 지닌 근대식 건물도 눈에 띈다.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과 죽음을 맞이했을까. 국립병원인 경북대병원은 대구에서뿐만 아니 라 경상도를 벗어난 먼 지역에서도 찾아올 만큼 이용하는 환자들의 범위가 넓은 병원이다. 병원의 오랜 역사만큼은 아니겠지만 나이테가 제법 많을 듯한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진다.‘人命至上(인명지상)’ 이 새겨진 바위 밑으로도 잎들이 쌓인다.

위기는 항상 올 수 있다

노동법 개정이 휘몰아칠 때마다 위기도 늘 함께 왔다. 1996년과 97년에 정리해고 도입 을 막기 위해 1・2차 총파업을 했을 때에도 지금처럼 힘들었다. 또다시 노동법 개정을 앞둔 2015년, 경북대병원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의료연대 대구지부 이정현 지부장은 이십 여 년 전 노동법 개정의 바람이 몰아치던 그때만큼 힘들다고 한다.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탄압이 심하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에 시작해 올해 초까지 이어 78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퇴출제 저지를 위한 경북대병원분회 중식집회에서 발언 중인 이정현 지부장 (사진출처 :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홈페이지)

진 장기간의 파업이 미친 진동도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듯하다. “2014년 경북대병원이 파업을 했는데, 여기에 대한 패배의식이 있는 거죠. 병원장도 정부와 입장을 맞 춰서 그대로 밀어붙이고는 끝까지 갔어요. 그러고 나니까 파업을 해도 합의가 안 되고, 거기서 오는 위기 감이나 패배감 이런 게 작년에 이어 올 초까지. 힘이 많이 약해졌어요. 노동조합이 뭘 해도… 이런 생각이 많이 깔려버린 거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보온병에 담아온 맑은 차를 따라준다. 노동법 개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서울서 내려온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데다가, 계속되는 집회와 일정이 그의 남은 하루 속에 빼 곡히 담겨있다. 나를 만난 시간도 점심시간 즈음이었다. 남들은 피해가는 시간대를 인터뷰 시간으로 약속 해준 그가 고마웠다. 점심밥을 먹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노동현장의 현실을 알리고 나누고자 하는 그의 의 지가 느껴졌다. 감잎차일까.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색을 닮은 차를 그가 다시 따라준다. 따뜻하다. 긴장했던 몸이 조금씩 풀린다. 안팎으로 벌어지는 싸움 속에서도 그의 호흡은 가파르지 않았다. 삼십여 년 동안 그의 몸에 물든 노동운동의 관록은 깊고 단단하다. 서두르거나 낙관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현 장을 바라보는 섬세함이 느껴진다. 최근 경북대병원에서는 임금피크제를 실시하기 위해 취업규칙을 어기고 노동자들 개개인에게 동의서 명을 받는 일이 있었다.

노동르포 79


경북대병원 취업규칙에는“병원은 취업규칙을 비롯하여 조합원과 관련된 제규정, 규칙을 변경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조합과 협의해야 하며, 현행보다 불이익하게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조합과 협의해 야 한다.” 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병원 경영진들은 노동조합과 협의를 하는 대신 노동자 개개인을 불러 서명을 받는 식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려고 한다. 취업규칙은 회사와 노동조합의 약속이다. 그런데도 2014년에 이어 올해도 취업규칙을 강제로라도 변 경하려는 이유는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법을 현장에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노동조합이 힘 이 약할 때에 조합과 협의하지 않고 조합원 한명 한명을 불러서 법 개정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아 취업규칙 을 변경하려는 것이다.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노동조합을 이끄는 그의 힘듦을 알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좀 더 가까이서 바 라보고 싶었다. 노동조합의 간부들은, 그 간부의 대표들은 이럴 때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는가. 나는 그의 이 야기가 듣고 싶었다. “저는 오랜 활동을 하다 보니, 항상 사용자는 (이럴 수 있다고)… 다른 사업장들도 이보다 더한 위기를 맞고 있고, 노동자들에게는 항상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올 수 있는 상황이라고 준비는 하고 있는데, 막상 닥치면 위축되고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고 어떻게든 제가 중심을 잡고 잘 버텨야 하니까….” 버틴다는 그의 말이‘견딘다’ 는 뜻보다‘믿는다’ 는 말로 다가왔다.‘이 또한 지나가리라’ 가 아니라‘분 명 지나갈 수 없으리라’ 는 믿음. 어떤 시련이 와도 노동조합을 삼키는 태풍은 이곳을 지나갈 수 없으리라 는 강한 낙관. 이정현 지부장은 경북대 간호학과에 입학한 스무 살 무렵부터의 삶을 대부분 경북대병원에

11월 5일‘임금피크제 강제서명! 취업규칙 불법적 개정! 경북대병원 고발 및 노동청 규탄 기자회견’ (사진출처 :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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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보냈다. 현장 곳곳에 있는 환자와 노동자들의 고충을 병원장보다도 훨씬 더 잘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 에게 지금처럼 힘든 시간이 전에도 있었다면 그 시간을 건너온 힘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전에는 IMF 시기에 노동법 개악 투쟁 총파업 때. 위원장 오르고 5개월 만인 12월에 총파업에 들어 갔는데 파업 이후에 탄압이 심했어요. 대정부 투쟁이다 보니 파업 참가한 노동자들에 대해 탄압 들어오 고, 그때 조합원들도 많이 탈퇴하고 노조간부들도 많이 떨어져나가고. 그 후에 2000년 파업 때 비정규직 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투쟁을 할 때도 힘들었어요). 당시 IMF 이후에 현장 구조조정하고, 노동 강도 올리고, 비정규직 확대시키고 이런 식이었죠. 그러니까 현장 부서 부서마다 거의 3년, 4년씩 비정규직으 로 고용되어 있던 후배들이 있었던 거죠. 그 후배들에 대한 선배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투쟁으로 만들었던 싸움이었죠. 힘든 시간을 건너온 힘이라면 상호교감,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었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상호교감이 힘든 시간을 건너온 힘이었다니….‘人命 至上(인명지상)’병원정문 입구 새김돌의 글이 다시 떠올랐다. 이정현 지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그 글씨에 담긴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병원에 관한 단상

내 어머니의 생업은 길 위에서 갈치를 파는 일이었다. 경북대병원 본원에서 걸어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에 있는 칠성시장이 어머니의 노점이었다. 그 곳에서 어머니는 삼십오 년 동안 갈치를 팔았다. 노점을 금 지하는 정부의 정책이 십 수 년 시장바닥을 내려치던 시절이었기에 절반의 시간은 쪼그리고 앉아 갈치를 팔고, 절반의 시간은 단속반원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생선‘다라이’ 를 들고 달아나며 먹고산 세월이었 다. 두들겨 맞고, 끌려가고, 물건을 빼앗기는 날에는 돌려달라고 경찰서 앞 차가운 도로에서 소리 지르고, 뒹굴고, 울던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많이 아팠다. 수시로 몸살이 나고 걷지도 못할 만큼 다리가 붓는 날에도 어김없이 새벽이면 생선 다라이를 이고 어머니는 칠성시장으로 향했다. 먹고사 는 일은 그렇게 무서운 일이었다. 아파 죽겠다고 수백 번도 더 말했지만 단 한 번도 병원을 간 적은 없다. 먹고사는 일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노점철거에 시달리고 얼어붙은 냉동생선을 떼어내느라 족히 십 킬로는 넘는 생선상자를 들고 바닥에 내리치던 일을 반복하던 어머니의 몸이 쉴 수 있었던 때는 허리뼈가 무너지고 난 뒤였다. 순식간의 일이 었다. 아프다는 전화를 받고 대구 집으로 달려가 보니 어머니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꼬부랑 할머니처럼 허리가 완전히 기역자로 꺾여 있었다. 꺾인 허리보다 더 무서웠던 건 고통스런 비명이었다. 겉으로 봐도 뼈가 생살을 찌르는 형국이었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을까. 병원에 가서 수술을 했다. 수술 후에도 보행기 에 의지해 다니기는 했지만 일상생활은 조금씩 할 수 있었다. 엑스레이 사진으로는 큰 이상이 없었지만, 얼마 안 가 어머니는 또다시 허리의 통증을 호소했다. 저번 처럼 허리가 꺾인 것도 아니고 걷기도 곧잘 걷곤 했지만, 아프다는 호소는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병원에 노동르포 81


서는 다시 수술을 권했고 일곱 시간의 긴 수술 후 어머니는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수술한 병원이 아 닌 다른 병원의 의사에게서 들은 말로는, 두 번째 수술은 고령인 어머니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리 한 수술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병원에서는 두 번째 수술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수술이었다고도 했다. 뒤늦은 진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머니는 이미 예전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심한 통증과 과다한 약 물 사용 탓인지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밤낮없이 떼를 쓰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의 몸을 가른 긴 수술 과 그 이후에 몸으로 흘러든 엄청난 양의 약들. 그것이 어머니에게 정말 필요한 처방이었을까. 어머니는 수술비로 수백만 원의 돈을 병원에 지불했다. 그 많은 치료비를 내고도 오히려 심각하게 건 강을 잃어버린 내 어머니는 정말 그냥 운이 없었던 걸까? 잘 걷기 위해 한 수술이었지만 수술 이후 어머니 는 스스로 걷지 못한다.

돈보다는 생명

병원을 운영해서 돈을 버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먼저 눈앞에 떠오르는 방법은 환자에 게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수술, 혹은 꼭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약을 권하는 과잉된 처방이다. 내 어머니의 고통도 과잉된 처방 때문이라고 믿는다. 돈을 버는 또 다른 방법은, 병원에 들여오는 재료를 가능한 단가 가 낮은 걸로 정해서 경비를 줄이고 나머지는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인건비를 절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방법들은 모두 병원에서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결과들은 곧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병원은 절대로 영리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적자라는 말 이 쓰여서도 안 되는 곳이다. 초중등학교나 군대처럼 나라의 토대로 지켜져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곧 개 정을 앞둔 노동법은 기업뿐만 아니라 병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최전방 경계선인 공공병원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공공기관이니까 정부의 지침을 가장 먼저 수용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경북대병원은 메르스 거점병원이다. 내가 병원 본원을 찾아간 날도 응급실 입구에 선별진료소라고 적 힌 하얀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메르스가 종식되지 않았던 때라, 혹시 모를 감염환자를 선별하고 격리해 서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현실은 늘 영화보다 놀라운 장면을 직접 보여준다. 메르스가 한반도에 도착하기 이 년 전인 2013년 6 월에 개봉한《감기》 라는 영화는 더 이상 상상 속 영화가 아니다. 전염병은 영화에서보다도 더 빠른 속도 로 퍼졌다. 그리고 영화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속도보다 거리보다 무서운 사실은, 실제로 죽임을 당하 는 사람이 영화 속 배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확진을 받을 수 있고 내 가족이 감염환자가 되기도 했 다. 교육청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들의 항의가 드세게 날아갔고,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 기침이라도 하면 금방 싸늘해진 눈빛을 던지며 몸을 피하는 일이 예사였다. 확진환자와 같은 목욕탕에서 몸을 씻은 사람을 찾느라 통장과 반장까지 나서서 골목골목을 누비는 일은 더 이상 해프닝이 아니었다. 확진환자와 조금이라도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심장이 멈출 듯 공포스러운 일이 82


었다. 적당히와 대충이 있을 수 없는 영역이‘병’ 을 다루는 곳이다. 메르스 사태 하나만 봐도 병원이 왜 영 리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소강상태를 보이던 메르스 사태가 1일에 이어 2일에도 또다시 신규 확진자(184번 환자・24)가 발 생하면서 다시 확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보건복지부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는 2일“1 일에 이어 또 다른 삼성서울병원 간호사(184번 환자) 한 명이 메르스에 감염된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고 밝혔다. (2015년 7월 3일자 동아일보)

삼성서울병원은 의료진 중에서 메르스 감염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은 의사나 간 호사가 메르스 환자를 치료한 것이 감염원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 실제로 삼성병원에서 감염된 간호사들 중에는 20대가 많았다. 이 사실은 전문직종일수록 숙련된 노동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증명이다. 인건비 를 절감하기 위해 고호봉의 숙련된 노동자를 퇴사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메르스를 통한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 강릉의료원에서는 고경력의 숙련된 의료진이 감염된 경우가 있는데, 감염원인 중 하나가 숙련된 노동 력이 부족한 탓에 장시간 노동을 한 피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강릉의료원 간호사들은 최대 10일 동안 12시간 맞교대를 하며 환자를 돌봤던 것으로 전해졌다. 간호사 의 이직이 잦아 숙련된 교대인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중증 환자가 발생했지만 음압격리병상은 기본 장 비만 갖춰 대응이 불가능했고, 병원 간의 연계도 원활하지 않아 대형병원으로 이송하는 데에도 5시간 이상이 걸렸다. 여기에 동승했던 간호사는 결국 24일 확진 판정을 받았다. (매일노동뉴스)

무엇보다도 메르스 확산과 방지 과정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용역업체 노동자들과 파견노동 자였다. 삼성서울병원이 국민 앞에 고개 숙이고 부분폐쇄 결정을 내리게 만든 것은 환자 이송요원인 137번 환 자가 관리대상에서 누락된 채 업무를 계속해왔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137번 환자는 삼성서울병원에서 일 했지만 삼성서울병원의 직원이 아니었고, 관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병원이 비용절감을 이유로 환자이송 업무를 외주화했기 때문이다.

143번 환자는 대전 대청병원에서 일하면서 메르스 환자에게서 전염되었으나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 사・격리 대상에서 누락되었다. 이 환자 역시 외부업체에서 파견된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일 하지만 병원노동자로 인정받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도 감염성 질환에 취약하고, 결국에는 병원 및 지역사회의 건강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민중 건강과 사회) 노동르포 83


청소나 이송 등의 일을 하는 용역과 파견업체의 노동자들은 그 자신 스스로를 감염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 감염이 되었어도 감염사실조차 알지 못하거나 증세가 나타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본인도 모른 채 2차・3차의 대규모 전염을 초래할 수 있다. 이번 메르스 사태 때도 감염이 확인된 외주업 체 노동자들의 동선을 파악하느라 허둥대는 모습이 연일 뉴스에 나왔다. 메르스 전염 때문만 아니라 용역업체 노동자들이나 파견노동자들의 일상은 늘 위험하다. 울산대병원 에서는 지난해 청소 일을 하는 여성노동자가 에이즈환자에게 사용한 주사바늘에 찔리는 사고가 있었다. 감염여부의 결과를 확인하기까지는 한 달도 더 걸렸다. 그 시간이 그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감염이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저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 었다. 이미 몸과 마음이 깊은 상처를 받은 후였다. 주사바늘에 찔린 후 혹시나 모를 감염을 막기 위해 독한 약을 먹느라 자주 구토가 일었다. 밥을 먹기조차 힘들었다. 혹시 모를 일들에 대비하느라 마음은 무겁고 우울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위험한 일이 그의 일터에서는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이번에 는’감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기쁨만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가는 것은

경북대병원 접수창구 맞은편에는 피켓을 든 노동자들이 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대구지부 민들 레분회 노동자들이다. 민들레분회는 주차현장, 청소현장처럼 병원 곳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가입한 모임이다. 농성 중인 사람들은 주차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의료연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가입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하는 노동조합 을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이정현 지부장은“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가는 것은 노동조합의 정신” 이라고 말한다. 정규직 노동조합이 힘이 셀 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힘이 실리지만, 지금처럼 노동조 합이 힘이 약할 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도 잘 풀리지 않는다. 인력감축에 반대하는 주차노동자들 을 새로운 업체가 고용승계하지 않으면서 시작된 싸움이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정부의 지침대로라면 경북 대학교 병원은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용역업체 노동자들의 인력감축을 막고 업체가 바뀌어도 고용승계가 되도록 감독해야 한다. 퇴직금과 밀린 임금도 떼인 채로 오 년, 십 년 일하던 일터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 자들은 그들의 호소에 경북대학교 병원이 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人命至上(인명지상)’생존을 향한 목소리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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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둠칫 단원인 쥰쨩이 두둠칫의 단원들을 그린 일러스트

지역에서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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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둠칫둠칫두둠칫, 웃음이 넘쳐나는 ‘몸치’ 들의‘연대’ 기 김세현 두둠칫 단원

1) 엄혹한 시대이다.‘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라 하였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남한사회의

모순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세상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 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는 정치가 필요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 는 이곳, 노동당에 모였다. 많은 당원들이 사회의 곳곳에서 노동당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밤 낮없이 노력 중이다. 하지만 모든 당원들이 당의 이름 아래 모이고, 당의 이름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당의 역량이 축소되고 당원들이 유실되는 과정에서 당 조직과 당원들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다. 각 당원들이 진행하는 운동의 성과가 당으로 모이기 위해서는‘당원인 운동가’ 들이‘당 운 동가’ 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좋으니, 나부터라도 당의 이름을 걸고 당과 함께 활동하고 싶었다. 나에게는‘몸치패 두둠칫(이하 두둠칫)’ 이,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곧 당의 활동이 되는 실천을 할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당의 이름을 걸고 우리의 정신 과 가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두둠칫의 활동은 당 깃발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덕분에 당 활동이 더 즐거워졌고, 내 활동의 기반이 당이 되었다. 두둠칫에서의 활동은 우리의 연대가 곧 당의 연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값진 경험들이다.

열정으로 뭉친 이름값 하는‘몸치’ 패

두둠칫은 올해 초 서울시당 대의원대회 사전행사를 위해 조직되었다. 청년당원들의 대화

1)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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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준비를 위해 모인 두둠칫 단원들 (사진 : 백상진 두둠칫 매니저)

방에서 반쯤 농담 삼아 당에 몸짓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 현실이 되었다. 한 명 한 명 단원을 모아 일곱 명의 청년당원들이 함께 <바위처럼>과 <새물> 두 곡의 춤을 추었다. 나는 학교에서 몸짓패를 해보았 다는 이유로‘춤 선생’ 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반년. 그동안 두둠칫은 당 행사와 문화제, 집회현장 등 많은 연대공연에서 열심히, 그리고 즐겁 게 춤을 추었다. 시간이 맞는 날에는 단원들끼리 모여 연습을 하고, 공연이 끝나면 반드시 그날의 공연을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잘못한 점을 고쳐나갔다. 덕분에 춤 실력도 늘었다. <바위처럼>은 이제 다들 능숙 하게 출 수 있게 되었고, 아예 동작이 맞지 않았던 <새물>의 춤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래퍼토리도 많이 늘 었다. 집회의 성격에 맞는 공연을 하기 위해 <진짜사장이 나와라>나 <단결투쟁가> 등의 춤을 배웠고, 세 지역에서 현장에서 87


서울중앙우체국 전광판에서 고공농성 중인 강세웅(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조합원)・장연의(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연대 팀장) 씨를 위한 공연을 마치고, 전광판을 향해“강세웅 장연의 투쟁” 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어 보이는 두둠칫과(사진 : 백상진 두둠칫 매니저) 그 모습을 전광판 위에서 찍은 사진 (상자 안, 사진 : 강세웅 조합원)

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의 춤을 배우기도 했다. 단원도 열 세 명으로 늘었다. 단 원의 면면도 다양하다. 많은 단원들이 지역운동에서, 부문운동에서, 그리고 당직자로서 활동 중이다.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해프닝도 있었다. 4월 4일 명동 서울중앙우체국 전광판 아래에서 열기로 한 SK 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직 연대문화제가 취소되었다. 두둠칫도 공연을 약속했는데, 공연 장소 에 도착해서야 문화제가 취소됐음을 알았다. 당황도 잠시. 두둠칫은 그날 두 분의 고공농성자만을 위해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춤을 추었다. 두둠칫의 역사적인 첫 연대공연이었다. 약속한 재능교육 투쟁 연대공 연이 해고노동자들의 복직합의가 성사되어 취소된 기쁜 기억도 있다. 연대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매번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득이하게 공연이 취소되는 때도 있 고, 바쁜 단원들이 시간을 내어 공연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맞지 않아 요청에 응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래 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여건이 되면 춤춘다” 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렇듯 넘치는 열정과 더불어 치밀함까지 지닌 두둠칫이지만, 아직까지는‘몸치’ 패로서의 역할을 훌륭 하게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두둠칫의 공연은 여전히 감탄사보다 웃음을 더 많이 자아낸다. 날카롭고 정 확한 동작, 일사불란한 멋은 없을지라도 두둠칫의 공연장에는 항상 웃음이 있다. 지치고 힘든 농성장에 서, 많은 분들이 두둠칫을 보고 웃으며 좋아해주시니 큰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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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둠칫,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친구가 되다

모든 연대공연이 소중하지만, 특히 공연이 잘 되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춤을 추면서도 즐겁고, 동작 이 평소보다 잘 맞는 것 같고, 무엇보다 관객들의 표정이 밝을 때다. 지난 11월 3일에 진행한 콜트콜텍 연 대공연이 그랬다. 11월 3일은‘콜트콜텍 기타노동자 친구들의 집중행동의 날’ 이었다. 이날은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이‘미 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경영위기’때문에 해고된 지 3200일 가까이 지난 날이자, 새누리당의 노동개악 추 진과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김무성의 근거 없는 비방에 맞서 방종운 콜트악기 지회장이 단식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 30일이 지난 날이었다. 많은 당원들이 연대하기 위해 농성장이 있는 여의도 새누리 당사 앞에 모였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정리해고 투쟁사업장. 한 노동자의 30일의 단식. 듣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 는 문구들이다.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싸워온 시간이었다. 자본과 정권 에 대항하는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앉아있었다. 두둠칫은 오후 일곱 시부터 시작되는‘연대의 밤 문화제’ 에서 공연을 했다. 무거운 싸움의 현장에 우리 같은 몸치패가 어울릴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걱정과 달리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여섯 명의 두둠칫이 무대에 올라, <바위처럼> <새물> <단결투쟁가>에 맞춰 연달아 춤을 추었다. 문화제 참가자들은 곳곳에서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며 우리를 응원해주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올랐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친구들의 집중행동의 날’홍보 웹자보와(왼쪽) 콜트콜텍 투쟁을 지지하는 두둠칫의 캐릭터‘냥아치’ (오른쪽) (웹자보・캐릭터 제작 : 쥰쨩 두둠칫 단원)

지역에서 현장에서 89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친구들의 집중행동의 날’문화제에서 공연 중인 두둠칫. 이날도 두둠칫은‘몸치’ 패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 다. (사진 : 나동혁 두둠칫 단원)

다. 환호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올 때에는, 몸이 뜨거워진 만큼 마음도 뜨거웠다. 엄청난 일을 한 것은 아니 었지만, 우리의 연대가 여기 모인 이들을 웃게 만들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한번 피웠 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멋진 춤 동작을 보여주지도,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보여주지도 못하 지만, 우리의 춤에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하는 마음이 담겼다. 두둠칫의 이런 마음이 투쟁하 는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날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두둠칫이 춤을 춘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민중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 이 사회의 착취와 차별, 배제와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두둠칫은 춤을 멈출 수 없다. 두둠칫 의 춤을 보며 누군가가 웃을 수 있다면, 더불어 노동당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여건이 되는 한 즐겁게 춤을 출 것이다. 우리의 춤이 이 사회를 바꾸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그 래서 노동당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기를, <새물>의 노랫말처럼 우리가“조금씩 내 딛는 한걸음” 이“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두둠칫은 노동당의 당원으로서 기꺼이 그 길에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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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서울시 대중교통요금개선 TF, 6개월의 보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

서울시 버스준공영제가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 배경에는 상반기 요금 인상 반대운동으 로 인한 서울시 거버넌스의 개입이 있다. 원래 예정되었던 올 하반기 버스협약도 미뤄진 상 태고, 준공영제 조례제정도 기정사실화된 상황이다. 이번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에서는 서울시당에서 지난 6개월 동안 참여한 서울시‘대중교통요금개선 TF’ 의 진행 과정을 살펴 보고,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시사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시민청구 공청회, 시장 면담 그리고 요금 인상

상반기에 서울시당은 대중교통요금 인상안에 대한 주민공청회 청구 및 6월 12일 1차 서 울시 물가대책위원회의 안건보류 활동 등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서울시장과의 면담이 주 선되었는데, 6월 17일에 진행한 시장 면담 자리에서는 네 가지 사항이 주되게 논의되었다. 그 내용과 배경은 다음과 같다.

1. 5,000명 넘게 서명한 시민들의 의지를 위로할 수 있는 사과 표명을 한다. 사후적이 라도 구체적인 과제를 만들기 위한 제대로 된 시민참여 공청회를 개최한다.

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실제로 시민들을 직접 만나 조직한 공청 회 청구서가 서울시의 완고함(요금 인상 시기 연기 불가) 때문에 백지화될 처지에 놓였기 때 문이다. 따라서 요금 인상안에 대한 최소한의 형식적 합의가 있으려면, 공청회 개최를 요구 한 시민들에게 사과를 할 필요가 있었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1


2. 버스정책 시민위원회 등 거버넌스에 이용자시민과 노동자 참여를 보장・확대한다.

현행 버스요금 심의 과정을 보면, 시의회 의견청취 후 버스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물가대책위 원회로 상정된다. 물가대책위원회가 일반적인 공공요금을 다루는 까닭에 교통요금 인상에 대한 타당성과 적절성을 검토하는 데 버스정책시민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요금 인상 과정에서는 아예 버스정책시민위원회가 개최되지도 않았다.

3. 시민안전을 위해 버스정비노동자들의 처우를 운전직노동자와 같이 실비정산으로 전환한다.

현행 버스노동자들의 처우를 보면, 운전직노동자의 경우에는 실제 고용인원에 맞춰 정액으로 임금을 지원하지만 정비직노동자에 대해서는 버스 1대당 단가로 계산하여 지급한다. 이 때문에 기준인원보다 적 게 고용하고 나머지 차액을 사업자가 경영이윤으로 전용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졌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비직노동자의 처우도 실비정산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4. 관계기관협의 전에 시민들이 먼저 참여하는 시민합의기구를 만들어 요금 결정 과정의 민주적 절 차를 만든다.

수도권 통합요금제의 결과로, 서울시 대중교통요금은 사전에 인천시와 경기도 그리고 철도청과 관계 기관협의를 진행한다. 문제는 이런 관계기관협의 이후에 요금이 조정될 여지가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아예 시민합의절차를 선행하고, 관계기관협의에 따른 협의안은 서울시가 행정적으로 부담하는 방안이 필 요하다고 보았다. 현행제도는 관계기관들이 모여 150원 인상을 합의하면 이를 각 지역별로 절차를 거쳐 이행하는 방식 이다. 여기서 서울시만 다른 인상폭을 결정한다면 그 차액에 의해 차등요금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제안은, 시민합의로 100원 인상을 결정했지만 관계기관협의에서 150원 인상으로 결정이 난다면 50원의 차액을 서울시가 재정지원을 통해서 보충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요금 결정에 시민합의의 구속력을 높 이는 제도다.

시장 면담 다음 날이었던 6월 18일 물가대책위원회를 통해 대중교통요금 인상안이 통과되고, 바로 다 음 날인 6월 19일 각 지하철 역사마다 요금 인상 공고문이 붙었다. 이와 함께 지난 5월부터 구성한 대중교 통 경영혁신 TF의 이름을‘대중교통요금 개선과 경영혁신 TF’ 로 변경하고, 시장과 면담했던 주요 단체들 의 담당자들을 TF위원으로 추가했다. 올해 논란이 된 다양한 대중교통 관련 쟁점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는 92


임시기구가 사실상 만들어진 것이다. 이 TF 참여는 그동안 진보정당의 당직자로 활동하면서 공공기관의 각종 거버넌스에 공식적으로 참여 할 수 없었던 한계를 극복한 첫 번째 사례다.‘노동당 서울시당’ 이라는 직함에 TF위원들이 모두다 참여 필요성을 인정했는데, 이는 상반기에 실시했던 시민청구 공청회 사업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버스 등의 대 중교통체계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해왔던 당 활동에 따른 것이다.

대중교통요금 개선 TF의 운영 현황

이에 따라 구성된 대중교통 경영혁신 TF는 대중교통요금 제도를 버스와 지하철로 구분하여 논의하였 다. 5월에 개최한 첫 번째 회의에서는 버스준공영제의 갱신을 위한 표준운송원가 연구 용역에 착수하겠 다는 계획이 제출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해왔던 방식대로 각 버스업체가 제출한 자료를 통해서 평균비용 을 산출하여 작성하는 방식으로는 반복적으로 지적된 버스업체에 대한 보조금의 과다지출 및 전용 문제 를 해결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기존 버스준공영제에 따른 표준운송원가 체계 자체가 버스 업체 간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가장 상황이 나쁜 업체에 맞춰진 최소한의 기준으로서 만 역할을 하게 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유사한 길이의 노선을 운영하는 두 개의 회사가 있는데 사용하는 기름값은 두 배 이상 차 이가 났다. 당연히 더 많은 기름을 사용하는 버스업체의 과다사용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지만, 현행 표준 운송원가 체계는 실제로 사용한 비용에 대한 사후 정산이 원칙이기 때문에 그대로 지급된다. 이 경우 만 약 비용이 적게 나온 회사가 적정운영을 한 회사고 비용이 많이 나온 회사가 일부러 과다사용을 해 보조금 을 전용한 회사라면, 시간이 갈수록 어떤 회사도 적정운영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자신이 운영하거 나 관계를 맺은 가스충전소와의 이면거래에 대한 유인이 발생한다.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에 해당 TF에서는 표준운송원가 산정 용역을 맡은 회계회사에 진행경과에 대한 정기적인 보고를 요 청했다. 그리고 2004년 버스준공영제를 도입할 당시 실시한 두 개 회계법인의 보고서를 별도로 요청했 다. 이는 2014년 기준으로 시행되는 표준운송원가 산정 내용이 과거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6월에 개최한 2차 회의에서는 주요 안건을 TF 논의 전에 검토하는 실무협의체를 마련하고, 7월 3차 회 의 때까지 부대수익 극대화를 골자로 하는 지하철 경영혁신 방안과 차량 내 광고면수를 확대한 버스조합 의 경영혁신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부대사업을 골자로 하는 수익증대 방안은 대중교통의 공공성 확보라 는 맥락을 고려하기보다는 요금 외 수익을 확대해서 운송기관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경제적 수단에 불과 했다. 따라서 부대수익 확대 역시 중요한 수단이지만 절대적으로 요금에만 의존하는 대중교통체계의 한 계를 먼저 짚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특히 버스준공영제를 운영하는 한, 다양하게 지적된 버스준 공영제의 표준운송원가 체계 개선을 우선할 필요가 있었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3


서울시 대중교통요금 개선 TF 개최 현황 차수

일 시

1

5. 19

2

6. 18

3

7. 23

- TF 운영방식에 대한 합의 - 위원 인사 및 차기 회의 안건 협의 - 운송원가 합리화 방안 - 지하철, 버스 실무협의체 신설 - 지하철 경영혁신 추진 방안 - 버스교통 진단 및 미래버스 비전 - 시민대토론회 개최 방안

4

8. 20

- 실무협의체 회의 결과 보고 - 버스준공영제 개선 추진 방안 - 시민대토론회 결과 보고

5

9. 23

- 실무협의체 회의 결과 (지하철 : 부대수익 극대화 방안) - 대중교통 적정요금 책정 기준 토의

6

10. 22

7

11. 16

- 대중교통 적정요금 책정 기준 - 실무협의체 회의 결과 보고 - 버스 실무협의체 회의 결과 보고 (버스조합 및 운송기관 의견)

이 과정에서 시민참여형 공청회 계획이 마련되었고, 8월 20일에 열린 4차 회의에서는 8월 26일 실시 하는 대중교통 시민토론회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5차 회의에서는 대중교통요금 책정과 관련한 자체 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해오라고 서울시에 제안했지만, 서울시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다. 실제로 지난 5 차 회의에 서울시가 준비해온 내용은, ①대중교통 재정문제의 해결 방안은? ②현 대중교통요금의 원가보

서울시 대중교통요금 및 경영혁신 TF 5차 회의자료의 일부. 서울시 지하철의 요금 결정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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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율 산정 방식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서울시 대중교통 적자가 심각한 수준이며 이를‘수익자 부담의 원칙’ 에 의해 요금으로 충당할 필요가 있다는 기존의 입장을 가져왔다. 원 가보전율 산정 방식의 개선에 대해서도 운송기관 운영의 경상비뿐만 아니라 시설투자의 재원 역시 요금 을 통해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위의 지하철 원가보전율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운송비용의 요소값을 합산하는 방식이 아니 라 총 비용을 총 이용자로 나누고 이를 총 요금수익과 대비해 적자를 산정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통상적 인 원가 산정 방식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이용자의 증가는 운송기관의 노력에 따른다기보다는 서울시 의 일반적인 사회정책에 좌우되고, 무엇보다 상권의 형성이나 새로운 부도심의 활성화와 같은 환경적 요 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외생적 변수에 따라 좌우되는 원가 개념에 의해 만들어진‘적정요금’ 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대중교통의 운영부담을 전적으로 이용자시민에게만 전가하는 방식에 불과했다. 따라서 자동차교통에 있 어 주차장과 도로 건설비용을 자가용 이용자에게 배타적으로 징수하지 않듯이, 대중교통 인프라와 관련 된 비용은 재정투자 분으로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또한 65세 이상 노인층에 적용 되는 지하철 무임승차를‘비용’ 으로 보고 유료 이용자에게 부담을 전가하기보다는, 사회보장정책의 시행 에 따른 복지투자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서울시의 경우는, 민간기업을 보조해주는 방식인 버스준공영제와 공사가 운영하는 지하철 간에 재정보조의 범위가 상이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다시 말해, 버스준공영제는 개별 66개 버스업체의 손실 분을 보충해주는 방식이지만, 지하철은 해당 부담이 공사의 회계상 적자로 남겨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 서 실제 건설공사에 따른 잔존부채 비용을 제외하면 운영상 흑자를 보는 지하철이 만성적인 적자를 나타 내는 반면, 만성적인 적자 상태인 버스업체들은 보조금을 통해서 최소한의 이윤까지 보장받는 상태가 되 었다. 이런 보조금 구조의 차이점은 자연스럽게 기존 버스준공영제 체제 하의 표준운송원가 적절성에 대한 쟁점으로 옮겨갔다. 이어진 10월의 6차 회의와 11월 7차 회의는 표준운송원가 구조상 12개 개별항목의 개 선 방안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특히, 복수의 회사에 등기임원으로 등재되어 임원급여를 중복으로 수령 하는 사례, 보조금으로 차량을 구입해주었음에도 이의 폐차수입을 업체가 별도수입으로 가져가는 부분 등은 버스사업자조합과 입장 차이가 분명했다. 이 때문에 7차 회의에서는 버스사업자조합이 실무협의체 에서 사전논의한 주요 항목에 대한 사업자 입장을 별도로 정리해왔다.

실질적인 대중교통 개혁을 위해

지난 7차 회의에서는 두 가지 사항에 대해 제안을 했다. 하나는 이 TF 논의가 지나치게 각론 중심으로 진행되는 까닭에 전반적인 대중교통체계에 대한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요금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95


의존형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정수준의 재정투자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제껏 논의 된 방향은 요금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부대수익을 높여야 한다는 제한적인 논의에 한정되었다. 현행 교 통시설특별회계를 통해 대중교통 이용자에 대한 재정투자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TF 제안 안으로 시장에게 제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결정은 시장의 몫이지만, TF는 최대한의 선택 지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연말까지 진행하기로 한 TF의 논의를 다소간 연장하더라도 제대로 된 논의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월 1회씩 7차례의 회의를 가졌지만, 토론은 늘 2시간을 넘겨 진행되었다. 그만큼 지난 10년간 유지된 대중교통체계의 쟁점이 많았던 탓이다. 더구나 단순하게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좋겠다는 식의 두 리뭉실한 제안이 아니라, 조례제정이 필요한 부분은 조례제정안을, 구조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명확한 구 조개선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7차 회의에서 제기된 66개 버스사업자의 광역화 방 안은 중요한 진전이다. 실제로 현행 버스준공영제는 66개의 상이한 버스업체의 평균에 기준을 두며, 실질 적으로는 가장 최저의 업체가‘지속적으로 유지 가능한 수준’ 으로 지원했다. 이에 대한 명분은“버스업체 간 사정이 다르니 이를 일률적으로 재단할 수 없다” 는 논리였다. 하지만 보조금 구조에도 불구하고 한계기업이 퇴출되지 않고, 이에 따라 전혀 경영상 요인이 발생하지 않음에도 이윤을 보장해주는 현행 버스준공영제는 한계가 분명했다. 또 그동안 우리가 주장해온 공영제 를 위한 전 단계로서, 버스업체들의 퇴출과 한계기업에 대한 조정이 전제될 필요가 있었다. 노선을 폐지 하지 않는 한 이를 유지하는 노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승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난립한 사업자 구 조의 개선을 중심으로 재편 방향을 명확하게 만들 수 있다. 요금 결정 구조에 대한 사항과 대중교통정책에의 시민참여 방안은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성과가 있다면, 지난 10년간 서로 적대시했던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오랜 시간에 거쳐 논의에 논의를 거듭 해왔다는 점일 것이다. 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상반기 대중교통요금에 대한 대응사업의 결과로, 서울시의 구체적인 정책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수준의 개입을 하는 셈이다. 지난 10년간의 서울시 대중교통체계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 가능성을 만든 것은 당의 지속적인 투쟁이었다. 이 TF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는 모르지만, 지난 8월 공청회를 통해 약속했던‘개선안에 대한 후속 토론회’ 는 반드시 개최하게 되어있 다. 12월인가, 1월인가만 남았을 뿐이다. 지난 봄 시작된 일련의 흐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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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 ⑳

지우마호세프와우파 글 : 션 퍼디(Sean Purdy) 사회주의와 자유당(PSOL) 활동가 번역 : 안효상 편집위원

2002년 브라질 노동자당(PT)의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환호 속에 지켜본 사람들이 라면, 그가 사회개혁을 수행하면서도‘신자유주의적’정책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약간은 놀랐 으리라. 그래도 당시에는 유리한 세계 경제 환경 속에서 브라질 경제가 성장하면서 당장 크게 뒤집 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룰라의 뒤를 이어 2010년에 대통령이 된 지우마 호세프에게는 그런 운마 저 따라주지 않았다. 2008년에 시작된 경제위기는 브라질에도 예외 없이 닥쳤고, 이 속에서 노동 자당 정부도 다른 곳의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여기 에 브라질의 고질적인 부패문제가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 사 태로 터지면서 지우마 호세프는 사면초가에 몰리게 되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변화는 글로벌 자본주 의 시대에 개혁적 좌파가 가야 할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한편, 좌 파정당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지지 기반과 유리될 때, 다시 말해 민주 주의적・윤리적 기제가 작동하지 않을 때에는 기성 정치질서의 일 부로 편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취임식에서 룰라로부터 대통령 띠를 넘겨받는 지우마 호세프 (사진 : Fabio Rodrigues-Pozzebom)

이 글의 필자인 션 퍼디는 상파 울루 대학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운 동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노

동자당 왼쪽에 있는 사회주의와 자유당(PSOL)의 활동가이다. 이 글의 게재를 허락해준 션에게 감 사하다. 원문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www.jacobinmag.com/2015/10/dilma-rousseff-impeachment-pt-petrobas-bra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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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지난 6개월 동안 세 번째로, 브라질 우파가 전국에서 거리로 나와 정치적 부패를 비난하고 브라질 대통령인 노동자당(PT)의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의 탄핵을 요구했다. 이 시위는 브라질 우파의 자신감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반영하는데, 이는 2003년부터 브라질을 통치 중인 노동자당 정부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된 데서 비롯되었다. 노동자당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채택했 을 뿐 아니라 노동자당의 선출관리와 공무원들이 부패를 저지름으로써 우익 반대파의 힘을 강화시켰고, 노동자당 지지자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켜 우파가 정치적 의제를 주도하게 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반동적인 운동을 이해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것이 진보파에게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노동자당이 자신의 노동자계급 기반을 공격한 것에 대한 분석도 마찬가지로 중요 하다. 정치적・경제적 위기에 대한 좌익적 해결책은 반동적인 탄핵운동과 노동자당 연방정부의 반노동자 정책 모두에 대한 반대를 포함한다.

반대파

현재 국영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Petrobras)의 광범위한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데다 깊은 경제침체 에서까지 벗어나야 하는 노동자당 정부는, 정부를 구하기 위해 당의 전통적인 기반인 대중운동・노조운 동・사회운동에서 등을 돌리고 대신 연합정당들 내의 권력 브로커와 거래를 하기로 했다. 이에 대한 대가 가 친기업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일련의 조치들이다. 이런 정책들은 우익을 약화시키기보다는 탄핵지지운

3월 상파울루에서 있었던 호세프 탄핵지지시위에 모인 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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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 강화하고 있다. 보수적인 정당들은 야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아웃소싱과 불안정한 노동계약을 확 대하고 정치운동자금을 사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여지를 확대하는 일련의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8월 16일 시위는 올해 초에 있었던 첫 번째 대중동원-3월에 상파울루에서 21만 명이 행진을 벌였다보다 규모도 작고 활기도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브라질에서 가장 큰 도시인 상파울루에서 13만 5천 명이 모였고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리아, 벨로 호리존테, 포르투 알레그레, 기타 주도에서도 수만 명의 시위 대가 모였다. 시위대의 숫자가 꼭 우익이 성장 중이라는 지표는 아니지만, 반대운동의 조직화 규모가 꽤 크고, 1964년 군사쿠데타 직전에 벌어진“대중적”시위 이래 처음으로 동원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 여준다. 8월 20일에는 8월 16일 운동에 대응한 전국적인 반시위가 있었다. 이는 노동자당이 승인하고 홈리스 노동자운동(MTST), 단일노총(CUT), 전투적인 노동조합 연합(Intersindical), 좌익야당인 사회주의와 자유 당(PSOL), 기타 사회운동이 조직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시위 규모가 작았지만, 상파울루에서는 5만 명 이상이 행진에 참여했다. 친정부적 슬로건, 연설, 깃발(단일노총, 노동자당, 연합정당의 지지자들) 등과 호세프의 사회 프로그램 삭 감에 대한 강력한 비판(홈리스노동자운동, 사회주의와 자유당, 독자적인 노동조합 활동가)이 뒤섞인 이 행진은 경제위기, 대담해진 우파, 친노동자정당이라고 불리는 세력의 집권이라는 맥락 속에서 브라질 좌파와 사 회운동의 심원한 모순을 보여주었다. 3월과 4월의 시위와 마찬가지로, 8월 16일 상파울루에서 있었던 우익집회에도 백인과 중간계급이 압 도적으로 참여했다. 사회과학자인 파블로 오르테야두(Pablo Ortellado), 에스테르 솔라누(Esther Solano), 루시아 나데르(Lucia Nader) 등이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65퍼센트가 대학교육을 마쳤고 73퍼센트가 백인이며(브라질 국민의 50퍼센트는 흑인이거나 유색인이다) 70퍼센트가 중간 또는 중상계급의 소득수준을 가졌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페트로브라스 부패에 대한 반대가 시위자들의 주된 관심사이긴 했지만, 참 여자들의 사회적 보수주의 또한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압도적인 다수가 인종쿼터제와 마리화나 합법화 에 반대했고, 형사책임연령 하향화를 포함한 더 강력한 범죄대응조치를 지지했다. 또한 3월 시위 이후 모든 시위마다 규모는 작지만 극우파가 눈에 띄었다. 왕당파, 인종주의적 스킨헤 드, 군대개입을 요구하는 조직들이 그들이다. 3월과 8월 시위에서는 시위에 반대하는 개인과 언론인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는데, 리우에서 있었던 8월 시위에서는 시위자들이 흑인 청소부를 정부 지지자로 오 인하고 인종주의적 공격을 하기도 했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경찰은 좌익시위대보다 우익시위대에 더 호 의적이다. 우익집회에서는 많은 시위대가 경찰과‘셀카’ 를 찍는다. 통상 보안대가 좌파시위대를 폭력적으 로 다루는 것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8월 16일 시위에서는 특히나 비열했는데, 경찰암살단이 이틀 전 에 상파울루 광역시 내의 가난한 두 교외 지역에서 무고한 열아홉 명을 살해했다. 사회권과 관련해서, 시위대는 대개 주요 야당의 입장을 반복한다. 하지만 사회보장정책에 대해서는 야 당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및 주요 저항조직과 입장이 다르다. 8월 16일 시위 참가자를 대상으로 한 같은 여 먼 좌파 이웃 좌파 99


론조사를 보면, 놀랍게도 96~97퍼센트가 보편적인 무상의료제도를 지지했고 97~98퍼센트가 보편적인 무상공공교육을 선호하며, 절반이 무상공공교통서비스를 지지했다. 그리고 정치운동에 사적으로 자금을 모으는 데 다수가 반대했고, 최근에 야당이 의회에서 밀어붙인 법률을 철폐하기를 원했다. 분명 시위의 중심 쟁점은 노동자당의 부패였지만, 참여자들은 부패한 야당 정치인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런 결과는, 보수적인 정당들과 집회 조직자들이 복지국가를 없애기를 원할지라도 우익의 일반 지지 자들은 제대로 된 사회서비스를-이는 2013년에 있었던 좌익시위의 요구였다-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모순적이긴 하지만, 이는 우익운동 지도부가 사회복지제도 및 정치적 대의제를 둘러싼 불만을 노동자 당 정부에 반대하는 전반적인 반부패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최근 시위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세 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더 많은 미제스, 더 적은 마르크스” 라는 플래카드로 요약되는 자유시장 철학을 공유한다. 거리로(Vem Pra Rua), 자유브라질운동 (Movimento Brasil Livre), 반란의 온라인(Revoltados Online)이 그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13년 6월 운동-교통요금 인상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의 풀뿌리적이고 비당 파적 성격에 영감을 받은 이 우익그룹은 주로 지지자들의 소액기부금과 티셔츠 및 용품 판매로 돈을 모았 다. 물론 이들은 자유시장 싱크탱크와 연관된 부유한 기업가들에게서도 상당한 기부금을 받았다. 세 그룹 모두 전통적인 정당체제와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주요한 조직자들 가운데 일부는 오랫동안 부패했던 정당들과 과거의 연이 있다. 실제로 부패로 복역했거나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심지 어 페트로브라스 스캔들에 연루된 일부-상당수 정치인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덧붙여 정당인사들 상당수가 시위에서 발언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제1야당인 브라질 사회민주당 (PSDB) 대표는 벨로 호리존테에서 있었던 집회의 주요 연설자였다. 브라질 사회민주당 당원인 전 대통령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두주(Fernando Henrique Cardoso)도 호세프에게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대중미디어는 동원된 우파를 거의 일방적으로 좋게 다루었다. 주요 민영 텔레비전 방송과 신문은 올해 있었던 세 번의 시위를 공개적으로 장려하고, 이들의 탄핵요구를 증폭시켰다. 주요 텔레비전 방송 가운데 하나인 글로보(Globo)만 예외이다. 이 방송은 8월에 탄핵을 피하기 위해 노동자당 정부와 중도정당들이 한 협상을 지지했다. 글로보 텔레비전 직원들은 리우에서 있었던 8월 시위에서 시위대에 의해 쫓겨나기 도 했다.

윤리적인 정당

강력한 우파가 없었다 하더라도 호세프 정부는 폭풍우에 직면할 것이다. 많은 부분 자초한 것이다. 당 의 핵심 지도부가 뇌물과 배임 등에 휘말리면서, 노동인민을 존중하는“윤리적 정당” 이라는 노동자당의 전통은 계속해서 약화되었다. 페트로브라스 사태는 몇몇 노동자당 당원을 감옥에 보낸 2005년 선거자금 스캔들에 뒤이어 터졌다. 전직 각료와 당 창립멤버가 정치를 억만장자 정치 컨설턴트에게 맡긴 일은 노동 100


자당이 더 이상 좌파정당이 아니라는 생각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다른 주요 정당들도 부패에 깊이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은 조사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 지 난 십 년 동안 마지못해 노동자당 정부를 받아들였던 대중미디어는 오로지 노동자당에만 초점을 맞추고 모든 전통적인 브라질 정당들에 만연한 부패를 축소한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모순적인데, 2002년 노 동자당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배출한 이래 주요 언론이 재정허가 및 연방정부 홍보 계약으로 수십억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당을 가장 손상시킨-그리고 보수적인 운동의 분출에 실질적으로 동력을 준-원인은 노 동자당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의제와 정치의제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의 브라 질 경제호황기에는 노동자당 정부가 금융자본과 농공업자본에 이익을 주는 정통 재정정책을 유지하면서 도 온건한 사회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역사가인 링컨 세코(Lincoln Secco)가 주장하듯이 노동자당은 권력을 장악한 후에“금융시장 이데올로그들” 에게 헤게모니를 양도했다. 농산물과 광물 수출에 기초하고 있는 브라질 경제에 세계 경제가 우호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부자들이 혜택을 보면서도 정부는 국제채 무의 대부분을 갚고 집중적인 구호 프로그램을 통해 브라질 극빈층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여러 중도정당 및 우익정당-다수는 1964~1985년 군사독재와 연관되어 있었다-과 연합했기 때문에, 노동자당은 의회를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자기 의제의 일부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1~2012년의 세계경제위기가 이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20년 동안 계속해서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로 변모한 노동자당은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노동권을 줄이 면서 파멸적인 고금리정책과 정통 재정정책을 고수했다. 이는 은행부문이 바라는 일이었다. 이자율은 세 계에서 가장 가파르게 올랐고, 정부 수입의 거의 절반이 현재 주로 브라질 은행들이 보유한 국채를 지불 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높아지고 임금은 줄어드는데, 수행되는 정책은 브라질의 금융부문을 위한 것 이다. IMF에 따르면 2013년 브라질 4대 은행의 이윤은 83개 나라의 GDP보다 더 컸다. 2014년 11월에 힘겹게 재선에 성공한-이 승리는 막판에 노동자당의 노동자계급 및 대중기반이 움직 인 데 따른 것이다-호세프는 전직 은행가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그의 첫 번째 정책은 교육・의료・주 택・도시서비스 등의 지출을 대규모로 줄이는 것이었다. 사회정책을 보자면, 호세프의 전임자인 노동자 당 창립자 룰라의 제한된 이니셔티브마저 없어지거나 뒤집어졌다. 무토지 농촌노동자 운동이 정부를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무토지 노동자를 위한 토지정착정책도 노동자 당 정부 하에서 갑자기 바뀌었다. 연방정부는 다수가 극도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원주민을 위한 토지할당 도 마찬가지로 크게 줄였다. 거기다 반동적인 농기업가를 농업부 장관에 임명한 것은 농촌노동자와 원주 민권리운동의 뺨을 때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노동자당은 최근에 사회운동을 옥죌 수 있는“반테러리즘”법안을 가지고 치안을 강화 중이다. 권위주의의 전통과 일상적으로 시위대를 공격하고 대도시 변두리 지역에서 흑인과 빈민을 살해하는 야만 먼 좌파 이웃 좌파 101


적인 경찰력이 있는 이 나라에서 이는 명백한 후퇴이다. 2009년에서 2013년 사이에 브라질 경찰은 하루 평균 여섯 명을 살해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경찰 중 하나가 되었다. 탄핵운동이 커지는 것에 대응해, 노동자당 정부는 자신의 지지층에게 우익에 맞서 움직이라고 소극적 으로 호소하는 데 그쳤다. 도리어 이들은 상원의 연립정당들, 대중미디어, 그리고 지배계급의 핵심인사들 과 밀실에서 사태를 봉합하기를 원한다. 정치적 위기가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대자본의 대표들-상파울루와 리우의 기업협 회와 전국농업기업협회-은 탄핵을 피하는 정치적 해결책을 촉구했다. 마찬가지로 거대 은행들도 자신들 의 기록적인 이윤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정치적 불안정을 원하지 않는다. 8월 초, 오랫동안 부정부패로 유명한 상원지도자인 레난 칼레이로스(Renan Calheiros)가 정부를 지지 하는 대가로 신자유주의적 정책패키지를 제안했다. 토건산업을 확대하고, 환경규제를 완화하며, 기업이 노동법을 회피하기 쉽도록 하는 것이 이 제안의 내용이다. 호세프는 즉각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좌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우파와 노동자당 정부 모두에 반대하는 좌파는 해야 할 일이 많다. MTST의 전투적인 홈리스 활동가들 과 PSOL지부는 8월 20일 시위에 참여해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우파에 반대했다. 자율주의 운동, 전투 적인 노동조합 활동가, PSOL 내의 여러 분파는 공개적으로 탄핵에 맞서 호세프를 옹호하기만 하는 집회 를 비판했다. 원래 전국적인 집회를 위한 모임에서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반대에 초점을 두기로 했으나, 노동자당 지지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정부지지 집회로 바꾸려 했다. 그럼에도 MTST와 좌익 반대파는 리우데자네이루를 포함한 다섯 개 도시에서 노동자당 지지자들의 집회와 분리해서 시위를 벌였다. 상파울루에서 있었던 가장 큰 시위에서도 노동자당 정부 지지자들이 숫 자는 많았지만 노동자당 정책에 대한 반대가 두드러졌다. 단기적으로 반정부 좌파는 긴축을 강화할 뿐인 노동자당과 중도정당들의 거래를 막기 위한 반대를 조 직해야 한다. 이 전선에서 이미 행동이 시작되었다. MTST는 정부가 공공주택 프로그램을 확대한다는 약 속을 저버릴 경우 대중시위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두 개의 좌익노동조합 중앙-전국투쟁위원회 (Conlutas)와 전투적인 노동조합 연합(Intersindical)-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파업

행동에 대한 지지를 확대 중이다. 중단기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힘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강인하고 통합된 좌파가 브라질에 필요하다. 심각한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우파와 노동자당 정부에 반대하는 사회운동과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이 사 회복지 프로그램과 노동권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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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의 약속 - 세 번째

오오극장에 판타지는 없다 한상훈 대구 민예총 사무처장 사진・글 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대구에 하나밖에 없다는 독립영화전용관‘오오극장’ 에서 나는 영화 대신 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가 깝게는 그 날의 오오극장에 관하여, 멀게는 백 년 전 대구역에 관하여 세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각자 다른 시간을 산다. 누군가는 타임라인을 따라 숨 가쁘게 달리고 있지만, 또 누군가는 백 년 전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대를 배 신하지 않았는데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를 배신한 것은 앞에 있 는 그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속도가 만들어 낸 상대에 대한‘판타지’ 였을 뿐인데도 우리는 자신의 속도를 높이려고도 낮추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상대에게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기 바쁘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 삶과 문화 103


는 고속열차 안에서 깜깜한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도 속도를 높이거나 낮추려고 하지 않을 때 서로를 다시 만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득 떠오른 한 음절 단어에 나는 웃었다.

예술대학이 가장 많은 도시, 대구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 여기 오오극장이라는 곳은 언제 만들었나? 한상훈(이하 한) : 독립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대구에는 그 영화들을 보여줄 공간이 없었다. 서울에는 세 개 정도 있지만 서울 외 지역은 여기가 처음이다. 대구에서 가장 빨리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지역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지원을 바라고 있었지만, 대구는 절대로 (지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냥 우리가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미디어핀다, 대구 민 예총, 세 군데가 설립추진단체가 되어 영화관 의자 한 석을 50만 원씩에 팔고, 1만 원, 2만 원씩 후원금을 모았다. 큰 극장들이 판타지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면, 오오극장은 자기 이야기를 보여준다. 김성근 감독이 나 오는《파울볼》 (2014) 같은 영화는 야구부에서 많이 보러 오고, 호스피스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면 호스피 스 할머니들이 30년 만에 영화를 보러 오는 식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보잘것없는 영화라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를 더 많이 상영할 계획이다.‘내 인생의 영화’ 라는 타이틀로, 구두닦이 아저씨가 좋아했 던 영화가 있으면 그 아저씨를 초대해서 토크쇼를 하고 상영을 하고 싶다.

대구 오오극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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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오오극장 내부

미 : 대구는 인디문화도 활성화되었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한 : 대구는 일제가 병참기지로 쓰기 위해 만든 계획도시였고, 부자들이 많았다. 대구가 한국 사진의 중심도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진이 무척 비싼 예술 아닌가. 사진기가 집 한 채 값이었는데, 그런 사진 기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현대미술작품도 많이 거래될 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계명대부터 시작해서 예술 관련 대학들도 많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예술대학이 가장 많은 도시가 대구일 것이다. 사상적으로도 자유로운 지대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다른 지역은 점령군에 따라 좌우로 왔다 갔다 하 면서 학살도 벌어지고 했지만, 인민군이 대구까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밖에서 보면 대구가 보수도시라고 생각하지만, 대구에서 진보단체들이 집회한다고 탄압하거나 하지 않는 다. 민예총 전신으로‘예술마당 솔’ 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대중강좌와 문화재 탐방 같은, 당시로서는 진 보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사업을 워낙 잘 했다. 유홍준 선생의《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도 그 결과물이었다. 요즘 구도심 살리기, 골목투어 많이 하지 않나? 그걸 제일 먼저 했던 곳도 대구다. 거리문화시민연대의 권 상구씨라고, 우리가 봤을 때 심각한 오타쿠인데, 이 양반이 20년 동안 골방에서 일본서적, 미국서적 들춰 가며 대구근대사 연구를 했다. 그 양반이 하면서 이슈가 되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삶과 문화 105


이 삶 안에서, 이 시장 안에서 대안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미 : 민예총에서는 언제,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한 : 민예총에는 2003~2004년 즈음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민예총 소식지 내는 거 도와달라고 해서 편집간사로 들어왔다. 민예총 하기 전에 유시민 씨가 했던 개혁국민정당의 대구 실무자로 일했다. 대구지 하철참사 대책위에서 활동했고 단병호, 심상정 씨가 의회로 진출한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을 했다. 그 후 대구 민예총 사무처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 10년은 된 거 같다.

미 : 학교 다닐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나? 한 :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형 영향이 컸다. 형이 91학번인데 학생운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 가서는 운동을 안 했다. 총장퇴진운동이 일어났는데, 선배들이 수업 거부하고 집회 나 가라고 했다. 왜 나가야 하는지 설명을 요구했더니 화를 내고 욕을 하더라. 그 선배의 태도가 자기가 싸우 겠다는 사람들의 그것과 너무 같다고 생각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안 따라 나갔다. 그 뒤 내 가 영화동아리 회장을 할 때 자신들이 인권영화제를 하겠다고 해서 프로그램 만들고 상영까지 해줬는데, 약속했던 비용을 떼먹더라. 당시 교내 운동권들은 문제가 있었고, 같이 어울리기 싫었다.

2015년 8월에 열린 제1회 저항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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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 예총이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던 사람들 위주였다면, 민예총은 동아리 활동을 했던 사람들 위주 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문에 민예총이 진보적 문화예술 활동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예총 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민예총이 보수화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 : 예총 입장에서 봤을 때 민예총은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예총에 기술자들이 많았다면, 민예총에는 기획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총 행사 기획을 민예총에 맡기기도 했었다. 보수화 문제는, 민예총이 30년 됐다. 어떤 조직이든 30년 동안 한 조직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보수 아닌가? 그리고 민예총의‘민족예 술’주창한 사람이 김지하였다. 그걸 주창한 사람이 맛이 갔는데 이 단체가 맛이 안 가는 게 이상하지 않 나?(웃음) 대구 민예총도 94년에 생겨서 20년 정도 됐다. 바꿔야 할 것이 많다. 저항예술제를 제안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민예총에서 민족예술제라는 축제를 매년 했는데, 자 기위안용의 초라한 축제였다. 민예총 멤버들이 올드해졌으면, 본인들이 끼지는 않더라도 젊은 예술가들 의 저항성을 보여줄 수 있는 판을 깔아주고 그걸 확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미 : 저항예술제가 과연 저항적이었는가라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박근혜 패러디에 관해서는 과연 패 러디인지 단순한 모방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한 : 그런 평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에서 비슷한 행사를 했었는데, 실패해도 괜찮다는 개 념으로 진행했다. 예술가들을 보면, 관객들 적게 와서 지원금 못 받으면 어쩌나, 이런 거 해보고 싶은데 망

2015년 8월에 열린 제1회 저항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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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저항예술제에서의 한상훈 처장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다.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실험하고, 그 안에서 서로 통하는 동류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민중미술이라는 게 중간에 길을 잃었다. 민중미술이 과거에는 사회주의 혁명 전선을 위해 복무한 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민중미술가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삶 안에서, 이 시장 안에서 대안을 만 드는 게 중요하다. 아직까지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과정으로서 운동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판화가들은 자기 판화에 에디션 번호를 매기지 않았다. 그걸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운동을 하 는 거였고, (자신의 판화를)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걸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번호를 매긴다. 팔 아야 하니까. 신학철 선생님이 그린, 재벌 목 따는 그림 같은 걸 삼성이 1억 씩 주고 사 간다. 민중미술 화 풍 안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니까, 나중에 10억 되고 100억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하던 선생님 들도 시장에 다 편입됐단 얘기다. 이미 큰 싸움에는 졌다. 그 이후에 무엇을 할지가 문제다. 판화라는 게 많이 전파하기 위해서 선택한 매 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즘의 카드뉴스가 민중미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조금 리버럴하지만 이철 수 선생님 작업이 재미있는 게, 민중미술 화가 중에 유일하게 팬시샵에 작품을 전시한다. 그 안에 옅게나 마 메시지들이 들어있다. 나머지 민중미술 화가들의 그림은 거의 다 소위 시민사회 내지 노동계 안에서만 유통된다. 이철수 선생님은 화랑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판다. 예전에 이철수 선생님 전시를 준비하다가 꾸중을 들었다. 전시장에 큰 방과 작은 방이 있었는데, 비용 을 아낀다고 작은 방에 에어컨을 안 틀었다. 그랬더니 그러시더라.“운동한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서비스 업 한다는 생각도 가져라. 다른 사람은 서비스를 받으러 오는데 너는 운동하고 있잖아.”전시장에 오는 사 108


람들 대부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사람들을 문화예술운동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 이 있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술’자체가 진보적인 활동 … 넓게 만드는 일도, 깊이 파는 일도 하면 된다

미 : 과거에는 문화재탐방이라든가 도시탐방 같은 것을 진보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지역마다 지자체나 지역의 문화재단의 지원 아래, 많은 경우 경제적 득실 계산 아래 이런 활동들이 진 행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역의 문화예술사업도 정치적 입장을 보다 선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 깊이와 넓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태일문화제의 경우, 선배들이 자문을 부탁했을 때 처음에 는 하지 말자고 했다. 저쪽에서 이승복 내세우는 것처럼 이쪽에서 전태일을 내세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 다. 대신에 더 대중적인 사업을 제안했다. 대구의 대표인물이라고 하면 이병철, 박근혜, 전두환, 노태우 같은 슈퍼히어로 권력자와 재벌 아닌가? 그래서 보통사람의 영웅으로서 전태일을 내세울 수 있겠다 싶었 다. 운동권의 언어‘전태일 열사’이런 말보다는, 48년생이니까‘1948년 대구생 전태일’ 이라고 하고 48년 생 대구사람들을 찾아서 그 시절의 이야기, 전태일의 이야기를 같이 하는 것이다. 전태일을 가지고 지금의 노동현실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면 된다. 그런데 깊어져야 한 다면서 넓어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넓게 만드는 일도 하고 깊이 파는 일도 하면 된다. 골목 투어도 지금 많이 넓어진 건데, 깊어지는 것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저건 안 된다고 할 필요는 없다. 골목 투어는 민중생활사적인 역사를 배우는 과정이다. 위인전기보다 훨씬 낫다. 이게 뾰족하게 보이지 않는다 면 뾰족하게 보이는 사업을 하면 된다.

미 : 그런 뾰족한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당원들이 아닐까? 한 : 지금 노동당은 너무 슬로건중심 사업밖에 못 하고 있다. 권상구 같은 인물이 왜 중요하냐면, 그가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는 데다 그 성과를 우파도 활용할 수 있고 좌파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노동당은 그 성과를 낳지는 못하고 활용만 하고 있다. 섹시한 슬로건들은 뽑아내지만 그것들이 빨리 휘발된다는 느낌이다.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일하려면 어떤 한 영역에서 오랫동안 우물을 파듯이 깊게 파 야 하는데, (노동당이 하는 사업은) 지금 우물을 파는 중인데 물을 바로 길어 가는 것과 같다. 골목투어도 ‘전태일 투어’ 라고 쉽게 이름 붙이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메커니즘을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 대개 품 이 많이 들어가고 전문적인 영역이다. 그런 일들을 노동당이 붙어서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하는 걸 봐서 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미 : 민예총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적 노선으로 고민한 적은 없었나? 한 : 민예총의 정치적인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새누리당에 가까운 사람부터 사회당보다 더 좌파인 사 삶과 문화 109


대구 오오극장 갤러리에서 열린 전태일 시전 <울타리 밖의 전태일>

람까지 다 있다. 그래서 한때는 우리가 전선조직으로서 정치적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 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 큰 조직이 될 수 없겠더라. 예술인 네트워크로서, 적어도 새누리당은 아니라는 최소한의 지향 정도만 지키기로 했다. 한편으로는‘예술’자체가 진보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런 활동을 하는데, 당 색깔이나 이름을 드러내야만 할까 의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역에서는 서로의 성향을 잘 안다. 그리고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예술가들도 같이 계속 몸으로 부대끼면 바뀐다. 세월호 사안의 경 우 그런 성향이 아닌데도 합류한 예술가들이 있었는데, 부대끼면서 신뢰를 쌓으니까 우리 쪽으로 들어오 더라.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자기 현실을 보면 결국 좌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 고 돈을 많이 못 번다. 정부정책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동질감도 느낀다. 그렇기 때문 에 관계 맺기를 잘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와 좋은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업자하고 뭘 하자고 하면 힘들다. 하지만 예술가하고는 그렇지 않다.

창작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야‘자립’ 이다

미 : 요즘 예술가들에 대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두고 말이 많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지원금을 가지고 예술가들을 검열하고 통제한다는 비판도 있고, 지자체나 문화재단 좋은 일 하는 데 예술가들이 동 원된다는 지적도 있다. 급기야 지원금을 거부하고 자립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 : 자립은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진짜 능력 있는 1퍼센트는 자립이 가능하겠으나 나머지는 힘들다. 보통 자립하고 지원금 받지 말자는 분들은 이미 혼자 선 분들인데, 그 분들도 혼자 서기까지의 과정이 있 110


었다. 지금 자립하지 못하고 겸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아마 예술 비중을 줄이고 다 른 일을 더 할 것이다. 그게 자립인가? 자기 인생에서 자립은 될 수 있겠으나 예술가로서의 자립은 아니 다. 진짜 자립이란 정책적인 지원까지 포함한 것이라 생각한다. 관공서에서 돈을 안 받는다고 해서 자립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자립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산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창작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때를 말한다. 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예술행정가, 예술단체, 예술정책전문가들의 몫이다. 오오 극장 만든 것도 악으로 깡으로 한 거다. 그런데 올해 50만 원 씩 낸 사람이 한 60명 되는데, 그 사람들한테 다음에 또 50만 원 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계가 있다. 그 우물이라는 게 마를까봐 늘 걱정이다. 지금은 예술가를 지원하라고 나온 돈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제대로 갈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목소리를 내는 일이 중요하다. 지원금을 받지 않는 게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원을 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 체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권력의 들러리가 아니라 제대로 예술가를 지원할 수 있는 방식들, 예술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 돈을 떳떳하게 받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거리공연을 하더라도 예술가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가 안 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문화재단을 변화시켜야 한다. 예술가들이 시로부터 직접 지원 받을 때는, 아니꼽긴 했지만 절차가 간소했다. 지금은 시가 재단에 지원사업을 외주로 주고는 감사를 하니까 재단이 자율적으 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대구문화재단이 전국문화재단 평가 1위다. 서류를 너무 잘 만들어서 그렇다. 그 런데 그럴수록 예술가는 힘들다. 재단에 민간 인력들이 더 들어가서 재단을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미 :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활동이 있다면 들려 달라. 한 : 대구에 필요한 단체는 민예총보다도 문화연대 같은 문화예술 관련 정책그룹이라고 생각한다. 민 예총에는 생활예술에 대해 전국적인 노선이나 예술교육에 대한 전국적인 노선, 현장예술에 대한 전국적 인 노선이 없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한다고 할 때 필요한 ABC를 개발해서 공유해야 한다. 지금은 실제 필 요한 일을 못 하고 대선 어떻게 할 거냐, 박근혜 정부 어떻게 할 거냐, 세월호 연장전 어떻게 할 거냐 고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적 탄탄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너무 간과하고 있다. 민예총은 이런 걸 하기에 너무 바쁘다.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별도의 기관이 필요하다. 예술가의 네트워크로 민예총이 아닌 다른 형식을 고민하고 있기도 하다.‘민족예술’ 이라고 얘기하기도 힘들고 편견들도 있어서 민예총에 가입하라고 하기 힘들다. 그리고 민예총이 국가에서 원하는 사단법인 체제 하에 있다. 이사장이 있고, 이사가 있고, 피라미드 조직으로 국가가 통솔하기 좋은 형태이다. 예술가 하고는 안 맞는다. 예총하고 똑같은 형태로 예총 대응조직을 만들었는데, 하는 일마저 예총 같으면 안 된 다. 예술가들이 더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네트워크 조직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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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치 칼럼

옷장밖으로나온 ‘우리’ 들의권리찾기 백시진 성정치위원

벌써 11월이다. 이제는 자연스레 11월 13일을 떠오르게 만드는, 그‘11월’ 이다. 45년 전, 전태일 열사는“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를 외치며 분신해 스스로 목 숨을 끊었다. 그는‘바보’같았지만 바보가 아니었고, 그의 첫 걸음은 지금 노동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7년 11월경에는, 성소수자들이 밀실(옷장) 밖으로 나와 권리를 외치기 시작 했다. 여기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퀴어인‘내’ 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기존 사회에서 성소수자 존재 자체를‘무시’ 하던‘사실’ 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사랑을‘어떤 잘못된 것’ 으로 규정하는 세간의 시선에 일침을 가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권리란 무엇일까? 성소수자를 위한 권리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성소수자는 시민으로서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지금부터 차별금지법을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 들의 권리 찾기 … 차별금지법

2003년‘차별금지법제정추진위원회’활동을 시작한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국가인권정책기본계 획 수립을 위한 성적소수자인권 기초현황조사>를 시행하고, 2006년 국무총리에‘차별금지법’ 제정을 권 고했다. 이에 2007년 10월 2일 법무부는 차별금지법 입법을 예고하고 20일간의 수렴기간을 공고한다. 하 지만 이는 얼마 안 가‘누더기 법안’ 이 되고 만다. <동성애자차별금지법안 저지를 위한 의회선교연합>의 반대로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에서‘성적 지향’ 을 비롯한 일곱 개 항목을 삭제한다고 (비공식적으로) 결정했 기 때문이다. 이 항목에는 성적지향, 학력, 병력, 출신국가, 언어, 가족 형태 및 가족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이 들어갔다. 112


누더기 차별금지법, 무엇이 문제인가?

2007년 당시 법무부는 차별금지법 항목 삭제 선정 기준을 ① 둘 이상의 국내법에서 차별금지사유로 규정하거나 ② 세계인권선언 및 자유권규약에 차별금지사유로 규정된 사유에 근거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서 차별금지사유는‘예시적’ 이며 삭제대상은 적용・보호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에두른다. 법무부가 기준 선정 방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했지만, 이 방식은 실제 이 자체로도 객관성/합 리성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세계인권선언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보단 국제인권위원회와 각 규약위 원회의 해석이나 논평을 통해 구체화된다. 즉 구체적인 사례, 항목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게다가 UN인권위원회와 UN아동인권위원회 등은 성적 지향 등의 구체적 사례를 법적으로 포함해야 한 다고 판정한 바 있다. 더군다나 법무부는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하면서 특정 항목만 명문화시킴으로써 사례들 사이에 통일성 을 훼손시켰다. 성소수자・여성・장애인 인권처럼 명문화되지 않은 항목은 법률 해석의 차원에서 다루고 차별 여부는‘법관의 재량에 따라’적용함으로써,‘차별을 차별하게’되었다.1)

옷장 밖으로 나온‘우리’ 들

10월 30일 법무부가‘성적 지향’ 을 비롯한 일곱 개 법안을 삭제하겠다고 결정을 내리자, 다음 날 성소 수자를 중심으로 한‘성소수자 차별 저지를 위한 긴급 번개’ 가 결성된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옷 장 속에만 있던 성소수자들이 거리에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다른 인권・시민 단체와 연대하여 차별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국가인권위원회・법무부와의 질의응답, 플레시몹, 행진, 릴레이 일인시 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2) 하지만 정부는 누더기 법안을 국회에 제출해버린다. 이후 2008년 노회찬 의원이 국가인권위원회를 기본으로 한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한 데 이어, 2011년 박은수 의원이‘성적 지향’ 을‘성적 평등’ 으로 바꾸어 차별금지법을 발의한다. 2012년 말 통합진보당 김 재연 전 의원, 2013년 김한길, 최원식 의원이 차별금지법 발의를 하였지만 모두 철회/기각/폐기되었고, 아직까지도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 나름의 성과는 크다. 처음 문제를 제기할 당시 만들어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을 발족하였고, 2010년에는 성소수자단체를 비롯하여 이주・여성・장애・인권 단 체가 모여 <차별금지법제정연대>를 만들었다. 또한, 이후의 서울학생인권조례, 서울시 인권헌장 농성투 쟁, 대전시 성평등조례 대응 등도 이때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3)

1)《지금 우리는 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224~225p,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사람생각, 2008 2)《지금 우리는 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12p,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사람생각, 2008 3)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10~11p, 나영정,《진보평론》63호(2015 봄호)

삶과 문화 113


시민권으로 살펴보는 성소수자 인권

시민은 한 사회에서 동등한 자격을 갖고 사회구성원으로 행위 한다. 여기서 시민의 행위는 자율적이고 정당하다. 하지만 시민권은‘객관적이고 분명한’기준에 의해 부여되므로 누군가는 시민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시민권의 범위는 누군가 시민권에서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배제되면서 결정된다. 특히 국 가는 본질적으로 인종주의, 가부장제, 계급에 기초하기에 한 국가에 있는 시민이라도 인종, 젠더, 섹슈얼 리티, 계급에 따라 권리의 양상이 다르다. 따라서 소수자 또는 사회적 약자의 시민권은 기득권의 시민권 보다 깊이와 가치가 떨어진다.4) 이성애중심질서 안에서 이성 간 혼인은 합법적인 반면 동성 간 혼인은 아 직까지 불법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민권은 본질적으로 보편과 평등의 가치를 가졌기에, 시민의 행동/수행에 따라 시민권의 영역 과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평등의 문제를 강조할수록, 우리의 권리와 평등을 요구할 수록, 지금과는 다른 의미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 부벡은 이를 두터운 시민권이라 표현하면서, 사회구 성원이 능동적이고 사회와 개인이 상호의존 할 수 있는 정치공동체라 설명한다.5)

차별금지법을 중심으로 한 그간의 운동은 성소수자들의 시민권 획득을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성소수 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냄으로써 존재를 드러내고 시민의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얼마 전 숭실대학교 본부는 퀴어영화상영회가‘기독교 가치와 맞지 않는다’ 는 이유로 장소 대관을 취 소하였다. 성소수자・시민・인권 단체 등은 이에 굴복하는 대신, 함께 모여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 건물 앞에서 상영회와 문화제를 진행하는 당돌한 일을 벌였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는 가시성을 획득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있고, 이는 존재 자체가 박탈당한 상 태임을 의미합니다 … (숭실대의) 구성원들 중에서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섹슈 얼, 에이섹슈얼 등 성소수자도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당신들이 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기에 저와 같 은 성소수자가 잘 안 보일 뿐입니다. …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의 삶이 부정당했다고 마냥 주저앉지 않았으며, 옆에 있는 동료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가능성과 연대의 광장을 열어왔습니다”- 대관 취소 당일의 노동당 성정치위원회 장길완 전국위원 발언문 중

이처럼 성소수자운동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나서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이 물결과 함께 흐르며, 이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4)《시티즌십》17p, 키이스 포크, 참여사회연구소, 2005 5)《시티즌십》19~20p, 키이스 포크, 참여사회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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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을 영화들 52번의 화요일

소피 하이드 감독 | 오스트레일리아 | 2013년 | 109분 | 8회 여성인권

영화제・15회 퀴어영화제 상영작

트랜스젠더가 되기로 마음먹은 엄마로 인해, 일주일에 한 번 매 화요일마다 엄마 와 만나게 된 딸의 기록. 혼란스러워하는 당사자와 그 혼란을 함께 견뎌내야 하 는 여자아이의 섹슈얼리티가 우연히 만난 친구들로 인해 대폭발을 하게 되고, 주 변의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데…. 과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 시간을 보 냈을까요?

서컴스탠스 circumstance

마리암 케샤바르즈 감독 | 이란 | 2011년 | 107분 |

국내 미개봉, 뉘른베르크 국제인권영화제 상영작

경직된 이란 사회에서 사랑에 빠지게 된 두 여성의 시간. 이란 젊은이들의 파티에 개입하는 경찰,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는 주변의 남성들… 이란에서 여성을 사랑 하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지 살짝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

프라이드 pride

매튜 워처스 | 영국, 프랑스 | 2014년 | 서울프라이드영화제 상영작

1984년 마가렛 대처가 탄광을 점진적으로 폐쇄하자 영국석탄노조는 파업에 들어 간다. 이에 런던 내 게이레즈비언 인권활동가들이 모금운동을 벌이며 파업에 연대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후원을 거부하자, 활동가들은 직접 탄광마을에 찾아가는데…. 이 영화는 연대의 의미를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성과 HIV에 대한 논의 등 다양한 이야기 거리가 숨겨져 있어 러닝 타임 내내 즐겁다.

성정치위원회 첫 번째 세미나를 마치며 성정치위원회 최재혁 대의원

처음 백시진 위원이 퀴어세미나를 준비 중이라고 얘기했을 때에는, 큰 무리가 없는 기초교양 정도 의 세미나를 예상하고 부담 없이 세미나에 합류하겠노라고 얘기했다. 세미나를 시작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참가자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성정치위원회 회원을 비롯해 평소 퀴어 감수성을 높이고 싶었던 분들이 모이니 어느새 열 두 명의 인원이 모였다.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 다. 성정치위원회 재건을 위한 첫 사업이기도 하니, 많은 분들의 참여는 앞으로 진행할 위원회의 사업 에도 큰 동력을 제공하리라. 첫 번째 시간에는 퀴어와 관련된 개념들을 살펴보고 그와 관련한 토론을 진행했다. 난 어느 정도 기 초적인 개념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단어들은 더 깊이 알게 되고 몰랐던 단어들을 새로 알게 되면서 평소 퀴어와 관련된 내 생각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미나 멤버들의 퀴어 감수성과 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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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관련 지식들 또한 각자 달랐다. 그래도 관심과 열정만큼은 모두가 뜨거웠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 지만 정말이다. 두 번째 시간에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와 함께 트렌스젠더운동의 역사와 현재의 쟁점들 을 살펴보았다. 미국에서 시작된 트랜스젠더운동과 한국에서 벌어진 운동은 동서양의 차이만으로 설 명하기엔 분명 다른 결이 있었다. 60~70년대에만 해도 국내에서도 트랜스젠더를 언급하는 데 크게 거 리낌이 없었으나, 어느 순간 일간지에서도 방송에서도 트랜스젠더라는 존재가 깨끗이 사라졌다. 사람 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꺼내놓기를 거부하는 세상에 맞서 지금도 분투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으며, 어 떻게 하면 내가, 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을까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됐던 시간이었다. 세 번째 시간에 우리는 젠더에 대해 더욱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성애중심주의6)가 당연하다고 받아 들여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우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우리의 논 의에서 젠더를 초월하지만 그 과정에서 젠더를 어떠한 태도로 다뤄야 할까 등을 고민했다. 내가‘남자’ 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 성의 성기를 가졌다고 해서 나는 과연 남성 혹은 여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실제로 특정 성의 성기를 갖고 태어나지만 자신의 성이 그 성기와 반대된다고 인지 하는 사람이 트랜스젠더가 아니던가. 어찌 보면 선문답 같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 하지만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었던 저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 우리 모두의 젠더 감수성이 한층 더 나 아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네 번째 시간에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법’ 이라는 것이 원체 차가운 언어고 어려운 말이다 보니 모두가 세미나 속에서 방황했다(아마도 내가 제일 방황했던 것 같지만…). 그렇지만 국민이라면 모두가 보호받아야 할 법 안에서 배제된 존재들이 있고 거기에 성소수자가 포함되어 있다 는 것, 그리고 배제된 이유가 크게 납득이 되는 이유도 아니라는 점에 대해 우리는 분노했다. 이렇게 조금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마지막으로, 네 번의 퀴어세미나가 끝났다. 다수가, 힘을 가진 존재들이“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언제까지, 얼마나 다 양한 소수의 존재들이 세상에서 치워져야 할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퀴어들을‘벽장’ 이라고 지칭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서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왠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퀴어를 더욱 세게 벽장 안에 가둘 때, 우리는 퀴어들이 벽장 안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세상 속에서 고통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순간에서든 함께하는 법을 생각해야 한다. 나에게는 이번 퀴어세미나가 그 방법에 대 한 단서를 모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이번 세미나를 준비하느라 많은 고생을 한 백시진 위원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시진 씨 감사 합니다!

6) 이성애적 관계를 규범으로 보고 다른 모든 형태의 성 행위를 이 규범에서 벗어난 일탈로 보는 경향 (위키백과-이성애 규범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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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칼럼

수학자와과학자의집착은 언제나매력적인가? 나동혁 서울 마포 당원

《매드 사이언스 북》 (레토 슈나이더 지음, 뿌리와이파리, 2008년)은 실험이 과학적 방법론으 로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 벌어진 온갖 실험에 관한 이야기로, 과학지식이란 방대 한 지도에서 미지의 영역을 몰아내겠다는 집념과 열정이 가득한 책이다. 동시에 그에 뒤지 지 않는 광기도 살벌하다.‘mad(미친)’ 와‘science(과학)’ 의 조합은 열정과 광기의 간극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살짝 살짝 곁들이는 과학전문기자의 농담도 유쾌하다. 물론 어떤 농담은 여전히 낯설지만. 과학전문기자가 진득하게 한 분야에 전념할 수 있는 현실은 부럽기만 하다. 《매드 사이언스 북》 에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실험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병원균의 실체를 확인하게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는가 하면, 단두대에서 잘 린 사람 머리를 몰래 훔쳐와 전기를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 실험 가운데에는 유용한 발견으 로 이어지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수학자들의‘오덕스러움’ 은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감내해야 할 고통으로 미화되는 경우 가 많다. 일정 정도 이름을 남긴 수학자의 이야기만이 대중에게 소비되기 마련이므로, 결과 가 다분히 교훈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수학자도 사람 이다. 아무리 수학이 특별한 동기 없이도 지적요구를 자극하는 학문이라지만, 당대의 관념 을 초월한 채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학이 가르쳐준 집요함은 항상 그렇게 매끈하 게 작동하지 않는다. 삶과 문화 117


신비주의 교단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572?~492? B.C.)는 폐쇄적이고 비밀스런 신비주의 교단의 교주였다. 이들은 집단생활을 하며 대개 모든 성과를 스승에게 돌렸으므로, 피타고라스의 성과로 알려진 내용 대부분은 집단이 공유한 지식으로 보아야 한다.“만물은 수로 이루어졌다” 는 믿음을 공유했던 피타고라스학파는 모든 현상의 배 후에 수의 규칙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에 기초해 현악기에서 현과 현 사 이 길이비를 자연수비로 표현했는데, 서양 음악의 7음계가 여기서부터 유래했다(오늘 날 쓰는 음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뿐

만 아니라 우주의 운행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주는 거대한 악기와 같 은 구조로, 무질서 속에서 질서로 나아가 완 벽한 조화를 이루며, 이는 단순한 수로 표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주, 질서, 조화 등을 의미하는 코스모스란 단어도 이들이 처음 사용했다. 피타고라스가 살던 때는 신화의 시대였 다. 제우스가 분노하여 던진 창이 번개가 되 고 분노한 포세이돈이 폭풍우를 일으키던 시절이다. 피타고라스학파도 디오니소스를 숭배했다. 지진은 죽은 자들의 모임이고 천 둥은 죽은 자들이 산자를 겁주는 위협이라 는 식의 신화적 상상력을 폭넓게 동원하고, 로마 카피톨리누스 박물관의 피타고라스 흉상

인도와 이집트의 영향 아래 동양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도 받아들였다. 금욕주의적 자

기수양을 강조했고, 윤회설을 믿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근본적 질문들에 초보적 인 형태로 답을 내놓았다. 어떤 답은 아주 훌륭했지만 어떤 답은 아주 형편없었다. 여기에는 신비주의와 수학, 신앙과 이성, 동양과 서양 등 현재 상식으로는 자칫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 어 있었다. 유리수로 표현되지 않는 수를 발견한 피타고라스학파는 패닉에 빠진다. 유리수로 표현되지 않는 수의 존재는 자신들의 믿음이 토대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의미했다. 믿음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새로운 돌파 118


구를 찾아야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길을 택했다. 자신들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무리수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일원인 히파수스가 무리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했고, 그래서 동료들이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진위여부가 불분명하긴 하나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다.

합리적 태도와 신비주의적 태도의 공존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에서 합리주의 사조의 대표주자로 유명하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명제는 중세를 끝내고 근대를 열었던 이성의 승리를 상징하는 문구로 자주 인용된다. 르네상스 이후로 그 리스 정신이 부활하면서 신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로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철학자들은 대부분 수학자였 고, 논리체계도 유클리드의《원론》 에서 체계를 잡은 공리-정의-정리로 이어지는 수학적 논증방식을 채 택했다. 뉴턴의《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와 스피노자의《에티카》 는 물론 미국의 독립선언문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책과 문서들이《원론》 의 형식을 따라했다. 데카르트는 최초로 좌표를 도입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x축・y축을 설정해서 사용하는 가장 흔한 직 교좌표계를 영어로 Cartesian coordinate라고 부르는데, 이는 데 카르트가 만든 좌표계라는 뜻이다. 데카르트는 30년전쟁 당시 용병으 로 참여했는데, 병영침대에 누워있 을 때 날아다니는 파리의 위치를 설명하려고 좌표를 고안했다는 일 화가 있다. 좌표시스템과 함수개념 도입이라는 엄청난 변화는 이렇게 사소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도 당연히 삽질 을 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여러 종교에서 쉽게 발견된다. 서양에서 는 피타고라스-플라톤으로 이어지 는 신비주의 흐름이 초기 기독교로 이어져, 신화의 시대에서 유일신의 시대로 넘어가는 이론적 배경을 제 프란스 할스(Frans Hals)가 그린 데카르트의 초상화

공해주기도 했다. 이성을 강조하는 삶과 문화 119


경향은 대체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과 연결된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정신이 육체보 다 우월하다는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더 나가면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이성의 절대적 우위를 믿었던 데카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따로 존재하 는 육체와 영혼이 어떻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는지 설명해야만 하는 난처함에 처한다. 결국 데카르트는 육 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송과선이란 기관이 있다는 주장까지 하게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억지인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 문제는 지금도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여전히 설명이 쉽지 않은 지점 에 도달하지만, 과거에 설명이 되지 않았던 질문 대부분은 이제 뇌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수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천재, 미적분학과 근대 물리학의 창시자 뉴턴 역시도 비슷한 오 류를 범한다. 이 천재는 여러 분야에 걸쳐 숱한 업적을 남겼지만, 본질적인 정신세계는 신비주의자의 면 모를 갖고 있었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꼭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우한 가정사와 연 결시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떠났다가 열한 살 때 재혼해서 돌아왔다. 뉴턴은 양아버지를 매우 싫어했는데, 비참한 가정생활을 잊 게 해주는 유일한 낙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탓에 대학에서도 친구가 많 지 않았다고 한다. 뉴턴은 혼자 방에 틀어박혀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의 고대 철학자 들만 알았다는 비밀스런 연금술이 재발견되리라 생각했다. 평범한 금속을 금과 은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불멸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영약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믿었고, 직접 실험도 했다. 그런가하면 성경 속 에 신의 명령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뒤져가며 있지도 않은 암호를 찾으려 애썼 고, 수학적 방법을 동원해 신의 재림 날짜를 알아내려 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은 한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 으로 이어졌다.1)

객관 이전에 존재하는 의지

수학법칙을 흔히 진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조건 없이 참이라는 말이다. 수학이론은 항상 가치중립적인 포즈를 취한다. 그런데 그 동일한 결과도 써먹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결론은 완전 판이하다. 맬서스라는 유명한 고전경제학자가 있다. 맬서스는《인구론》 이란 책에서“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 가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는 이론을 전개한다. 쉽게 말해 식량은 100, 101, 102, 103, 104, … 이렇게 일정한‘양’ 이 증가하는데 인구는 1, 2, 4, 8, 16, 32, … 이렇게 일정한‘비율’로 증가한다 는 의미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엔 식량이 훨씬 많아도 시간이 흐르면 인구가 식량을 추월한다. 맬 서스는 이 이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 인구에 비해 식량이 모자라는 현상이

1) NGC에서 방영한《코스모스》3화 참고. 영화보다 더 재밌는 다큐멘터리이니 꼭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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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데, 이는 자연의 법칙이다. 따 라서 인간이 굶주리고 죽는 것은 사회나 경제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자연법 칙이다. 따라서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은 다시 균형을 잡아간다. 맬서스는 19세기 중반 영국 산업혁명 시기에 자본가 입장을 대변한 고전경제 학자다. 1842년에 도입된 광산법은 10 세 이하 아동노동을 법적으로 금지시켰 다.2) 이 말은 거꾸로, 당시에 10세 이하 의 아동노동이 횡행했다는 이야기다. 19 세기 런던 노동계급의 평균수명은 20세 를 넘지 못했다.3) 맬서스는 이런 잔혹한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 였다. 맬서스 인구이론은 19세기 영국에서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몇 십 년간 잘 들어맞다가 용도폐기 된 다. 일단 출산율이 일정하다는 가정 자

체가 맞지 않았고, 식량증가나 인구증가 패턴도 예상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견강부회식의 이론은 엄청나게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 이론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수학을 동원한다. 모든 실천 앞에는 의지가 먼저 존재한다. 객관은 가장 극단적인 주관 속에서 태어나기도 한다.‘오덕스러 움’ 과 광기는 한 끗 차이다. 아름답고도 싸늘한 이야기다.

2)《근대가족의 변모와 여성문제》p40. 조은, 이정옥, 조주현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 3) 5월 22일자 <한겨레> 소설 <반대편으로 걸어간 사람> 참조 http://i-soccer.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885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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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코밍’ 으로 가재 치고 도랑 잡기

메아리 공업사⑥

글・사진 : 화덕헌 마을기업 에코에코협동조합 아트디렉터, 부산 해운대구 당원

<바다상점>, 해운대 창업아이디어 공모전 1등 수상

지난 글에서 잠시 이야기했던, 해운대구가 주최한 창업아이디어 공모전에 에코에코는 <비치코밍 프로젝트 바다상점>이라는 제목으로 제안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저희의 제안서가 최우수에 뽑혔습니다. 에코에코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창업아이디어 공모전은 3개월간 공모를 실시하였고, 1차 서류심사를 통해 뽑힌 열 한 팀이 본선에 진출해 10월 27일 심사위원들 앞에서 치열한 분위기의 설명회를 가졌습니다.

공모전 설명회에서 폐파라솔을 활용한 비치코밍 사업에 대해 설명 중인 화덕헌 당원 (사진 : 화덕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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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설명회에 참여한 다른 창업 팀들과 함께 (사진 : 화덕헌 제공)

대부분 젊은 청년학생 창업가들이라서 그런지 발표내용이 매우 신선했고, 발표자료를 만드는 방법이나 발표내용을 설명하는 화술 등 발표기법 자체도 매우 세련되었습니다. 반면 에코에코를 대표해 나선 저는 조금 허둥거렸습니다. 연습이 부족해 주어진 시간에 발표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 중간에는 원고를 바닥에 흘리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에코에코와 함께 상을 탄 창업 팀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우수상은, 선박이 기울어져 침몰할 때 출입 문 쪽에 설치된 줄사다리 박스가 열리면서 사다리가 펼쳐져 승객의 탈출을 돕는 기발한 장치를 개발한 해 양대학교 학생 팀에 돌아갔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손목밴드형 교통카드를 개발한 팀과 거 스름돈으로 받는 동전을 적립하는 네트워크 플랫폼을 제안한 팀, 그리고 물에 녹는 콜라켄 성분으로 우려 먹는 차의 티백을 만든 팀은 각각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그밖에도 한지를 소재로 한 배냇저고리와 유기농 면으로 만든 아기 옷, 도시농업 교육사업, 아침식사 배달 플랫폼 사업 등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많았습 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에 기반을 둔 창업아이디어들은 정보통신에 문외한인 제 입장에서는 매우 경이 롭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우수한 청년 창업 팀들을 물리치고 최우수상을 받으니, 저희의 제안을 아이디 어 수준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해운대구 주민들에게 이익을 끼쳐야겠다는 남다른 책임감도 느낍니다. 제가 제안한 비치코밍 프로젝트는 우리말로 풀면‘해변의 넝마주이 사업’정도가 되는 말입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대로, 해운대구의 강과 바다의 연안에 쌓여있는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통해서 자원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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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고 돈을 버는 일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1등 수상을 하자마자 먼저 구정 전반을 논의하는 해운대구 확대간부회의 시간에 <바다상점> 사업을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청 소관 부서에 제안했습니 다. 부서장들을 개별적으로 일일이 만나 사업을 설명하고 설득하기보다는 공식적인 전체 회의 시간에 제 안을 하고 토론에 붙이는 것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고,‘비치코밍’자체에 대한 홍 보효과도 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사용한 플라스틱은 어디로 갈까

전 세계에서 1년에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양은 2010년 기준으로 대략 3억만 톤입니다. 플라스틱 생산 량이 매년 5.5퍼센트 정도씩 증가하고 있으니, 2015년에는 거의 40억 톤이 생산되겠지요. 지금 세계 인 구를 72억 명으로 본다면, 1인당 연간 54킬로그램의 플라스틱을 소비하는 셈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 평균 소비량의 두 배가 넘는 연간 110킬로그램 수준입니다.

▲바다에 떠다니던 쓰레기가 떠밀려와 쌓여 있는 하와이 카밀로 해변 ◀플라스틱 쓰레기가 고스란히 뱃속에 남아 있는 알바트로스의 사체 (사진 : Chris Jordan via USFWS Headquar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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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된 플라스틱 제품의 대부분은 수명이 1개월 미만인 일회용 제품입니다. 플라스틱이 재활용되는 비 율은 30퍼센트 정도로, 생각보다 낮습니다. 대부분이 소각・매립되거나 바다로 떠내려갑니다. 북태평양 바다에는 이렇게 떠내려 온 플라스틱이 모여서 커다란 더미를 이루고 있어, 이를 플라스틱 아일랜드라고 부릅니다. 플라스틱 아일랜드의 규모는 한반도 면적의 7배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 어서 당장에 우리의 실생활에 큰 불편을 주지는 않지만, 고래나 물개 등 대형 바다생물과 알바트로스 같 은 대형 조류들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해 고통 받는 문제가 이미 대두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도 와 햇볕에 잘게 부서지거나 바닷물에 녹은 마이크로플라스틱을 인류가 식재료로 쓰는 오징어 새우 고등 어 등의 소형 바다생물들이 섭취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어, 환경호르몬에 의한 생태계 교란이라는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 곳곳에 자리 잡은 플라스틱은 그 편리성 때문에 당장 생산이나 소비를 줄이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거나 재활용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재 활용 정책을 개선하고, 자원재사용 기술을 높이고,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일은 비 교적 적은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에코에코가‘비치코밍’사업을 하고자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해양폐기물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폐플라스틱이 바다 로 떠내려가기 전에 수습해서 자원으로 재 사용하고, 나아가 수거한 폐기물로 해양도 시 부산과 해운대구를 대표하는 관광기념 품을 만드는 일은 함께 고민해볼만한 가치 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재 치고 도랑 잡는다” 는 말도 여기에

<바다상점>의 사업을 설명한 그림. 강과 바다의 쓰레기를 줍는 ‘비치코밍’ 을 통해 모은 자원을 재사용해‘관광상품’ 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그것을 만드는‘체험교실’ 을 열고, 나아가 이를 전문 으로 하는‘비치코머’ 를 양성할 계획이다.

서 비롯합니다. 해양폐기물로 가재를 만들 어, 바다로 흘러드는 육지의 도랑을 단속하고 잡아, 해양쓰레기가 생겨나는 원천을 봉쇄하겠다는 뜻입니 다. 오늘 당신이 사용한 플라스틱이 어디로 가는지 주목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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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개헌을맞이하는우리의자세 양솔규 편집위원

친박이‘개헌론’ 을 들고 나왔다. 김무성 대표가‘개헌론’ 을 언급하자 청와대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서둘 러 진화하던 때와 비교하면, 상황이 완전히 급변한 듯 보인다. 친박 정권재창출론과 결합한‘불온한(?)’ 개헌론은 이미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었다. 이른바‘푸틴식 재집권 전략’ 이다. 일단 새누리당 내 총선 공천권이 중요해졌다.‘친박’ 이 기를 쓰고‘비박’김무성 대표의‘오픈프라이머 리’ 를 저지한 이유다. 친박독점구조를 구축하려면, 현역의원들에게 유리한 오픈프라이머리보다는 공천권 장악이 아무래도 더 낫다. 유승민 의원 등 대구 국회의원 물갈이설도 이런 맥락이다. 총선목표는 개헌선 인 재석의원 3분의 2에 최대한 가깝게 당선시키는 것이다. 설사 3분의 2선을 넘지 못하더라도 야당의원 일부와 다양한 사회세력들에게 넘겨줄 떡고물은 넉넉하다. 다음은 개헌과 동시에 추진되는 정권재창출이 다.‘원박’홍문종 의원은 이원집정제를 제기했다. 5년 단임제의 생명력이 끝났으며, 대통령외치/총리내 치의 시스템을 만들자는 말이다. 아직은 의견이 분분하지만‘분권’ 과‘중임’ 의 여부를 둘러싼 다양한 주장 들이 제기되고, 내년 총선이 끝나면 지체되었던 개헌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대통령선거 등 권력재창출 vs 정권교체 논의도 함께 진행될 것이다. 반기문대통령-친박총리설도 새누리당의 카드로 점 점 더 부상할 것이다. 이원집정부제, 내각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중임제에서 이른바‘외치’ 를 중점적으로 맡을 대통령의 역할 을 생각해볼 때, 반기문은 (안 그래도 정치권을 불신하는)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는 카드다. 반기문은 국회 내 에 자기세력이 있지도 않다. 때문에 친박은 반기문에게 대통령후보를 제안하면서 대통령 4년중임제 하 단임을 약속받을 수도 있다. 반기문 집권 이후 친박이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시나리오가 바로‘푸틴 식 재집권 전략’ 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혹자는‘음모론’ 으로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승민과 박근 혜의 싸움을 단순한 파벌 간의 권력쟁탈전이 아닌 지배계급의‘노선싸움’ 으로 본다면, 박근혜 정부의 일 련의 움직임을‘비정상적 대통령’ 의 히스테릭한 반동이 아닌, 제로성장시대・베이비붐 세대의 고령화와 노동시장 퇴출이 본격화되는 시대에 지배블록이 안정적 지배를 하기 위한‘정치적 프로젝트’ 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87년 헌법은 국회 보수여야의 합의하에 만들어졌다. 미흡했지만, 그 헌법은 6월항쟁의 결과물이다. 호 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슬로건은 대통령직선제로 집약되었다. 해방 후 민주화운동과 사회변화의 사상적, 정신적, 물질적 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체계를 바꾸자고 한다. 불행하게 도 그 키는 새누리당, 그 중에서도‘친박’ 이 쥐었다. 28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곳에 닥쳐오는 개헌시기 에 우리는 어떤 슬로건을 외쳐야 할까? 중요한 것은‘각도’ 다. 28년 지난 세월을 정리하고 향후 20년을 예 비하는‘날카로운 각’ 을 세울 수 있다면, 비록 당장‘발견성’ 을 획득할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대 항적 정치적 프로젝트의 시간지평에 안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128


표지 이야기

“어떤 죽음도 익숙한 죽음은 없어요” 4.16연대 상임이사, 인권재단사람 소장 박래군을 만나다

미래에서 온 편지 제26호 발행인 구교현 편집인 이장규

박래군, 그 이름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시민맏상제’ 라는, 명예인지 슬픔인지 모를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 세월호 투쟁의 맨 앞에서 싸우다

위원회 강남규 김건담 김일란 김철 김혜연 안효상 양솔규

이승원 정정은 현린

지난 7월 구속된 후, 110일 만인 11월 2일 보석으로 풀려난 박래군 인권

교 열 김혜연 정정은

재단사람 소장을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만났다. 옥살이로 시작한 대화는

디자인 고미숙

자연스럽게 세월호로 이어졌고, 세월호로 흘러간 대화는 또 다시 자연스 럽게 죽음과 인권과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를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충실하게살아가고동시에 미래를그리는사람이었다.

발행일 2015년 12월 1일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지속적인 교육운동, 실천운동을 계속 만들어 가야하고, 그렇게 할 거

사진 : 정정은 편집실장

전 화 02) 6004-2006, 2007

예요. 해나가야죠. 안 그러면 운동이 또 소멸돼요. 우리 사회의 무기력감

팩 스 02) 6004-2001

을 보태주는 거죠. 이렇게 해도 안 됐다, 그런 생각 하지 않도록 4.16운동

이메일 laborzine@gmail.com

은 실패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같이 슬퍼하고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아파했던 일인데,‘이렇게 해도 안 됐는데’할까봐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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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아주 더디긴 하지만,‘아 할 수 있네’하고 느끼고, 뭔가 달라지고, 그 러면서사람들이상호연결되는것만으로도좋아요. 축적해가야죠.” *박래군 소장의 인터뷰 전문은 66~76쪽 <진보정치 열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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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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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 ■ 키워드로 보는 2015년 진보정치 열전 ■ 4.16연대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소장 박래군을 만나다 “어떤 죽음도 익숙한 죽음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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