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열감이 이마에서 이마 위로 전해진다. 숨을 쉬고 입을 여는 순간마다 너의 간격이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지척. 누군가에게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나누는 기준점. 고작 손가락 두 마디의 거리가 성패를 좌우한다. 그것이 경쟁사회의 잔혹함이지만, 동시에 사람들
이 이 경기에 빠져드는 이유기도 하다.
너의 손이 이 이야기를 지킨다.
나의 손이 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두 명 분의 열기가 열 명 분의 열기로,
열 명 분의 열기가 덕아웃으로, 그리고 무대의 관중들에게로 넘 어간다.
이 감정을 함께하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144경기를 함께한 주제에 느닷없이 이 이야기를 꺼내면 지루해할 것을 알고는 있지만, 너와 나의 이야기를 서술하려면 필히 과거를
짚고 넘어가야 했다. 혹시 아나. 행운의 여신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
고 감복하여 우리 앞으로 작은 행운을 전해줄지.
대관절, 네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바라본 것은 지난 2025년도
여름이 처음이었다. 광주가 사랑하는 신인왕 양지훈이 기사의 옷을
벗고 전사의 옷을 입는다는 소식에 야구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팬
들까지 모두 충격을 받았었다. 당연했다. 25년도 네 성적을 생각하
면 누구나가 충격을 받고도 남는다. 하지만 광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 위해 지금 당장을 달려야 했고, 금을 향해 손을 뻗기 위해
서울의 건아들을 데리고 와야만 했다. 그 결과 네가 빛고을을 나와
대한민국의 수도로 오게 되었다.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
을 해버렸다. ‘부럽네.’ 라고.
너도 알고는 있겠지만 그 당시 나는 타격 부진으로 1군에서 2군
으로 내려왔었다. 2군에서 타격감을 끌어올렸다 하면 1군에서 콜업
되고, 2군에서 휴식을 취한 베테랑이 다시 올라갈 즈음에 나는 다
시 짐을 싸고 2군으로 내려와야 했다. 베테랑을 대체할 수 있는 1순
위 야수. 힘은 세지만 출루율이 높지 않고 선구안을 안 좋은 어린
선수. 군필이어서 그나마 긁어볼만한 선수가 바로 나였다. 너무 매정
하게 말하지 말라고? 미안하지만 나도 이 정도는 알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이걸로 서운해 하지도 않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천에서 본 네 얼굴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가장 먼저 생각났었다. 이곳에 있는 녀석들과는 다른 세계
를 살아가는 천재. 금방 2군에서 말소되고 1군에서 활약하고도 남
을 투수. 차기 1선발. 그 이름 양지훈. 영화나 소설에서도 이렇게 쓰
면 밸런스가 맞지 않다고 욕을 하고도 남을 테다. 거기다 저 예쁘장
한 얼굴. 트레이드 당일 서울 워리어즈 유니폼을 입고 인사하는 기
사 사진이 SNS 등지에 떠다니는 것을 질리도록 보았다. 양자님 어서
와요. 서울의 왕자가 되어주세요. 서울 왕자님 사랑해요. 우리 팀을
부탁해요. 그 외 수많은 발언들. 평소 휴대폰을 많이 보지 않는 나
도 네가 어떻게 불리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너와 친해질 일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너는 은
퇴할 때까지 이곳에서 공을 던질 테고, 나는 당장에 2차 드래프트
로 넘어갈지 말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너답지 않게 부정적
인 생각을 많이 했다고? 여기 묶여봐라. 이런 생각 안 하나.
그러고 너의 2군 첫 경기.
너, 나, 우리, 그리고 세간 모두가 아는 그 사건이 터져버렸다.
이 전설의 사건으로 2군 야수들이 한동안 네게 말도 붙이지 못
했던 것까지 다 기억한다.
봄에 찾아온 이천은 어느 덧 낙엽을 맞이할 시기가 되었다. 가을
첫 날. 확장 엔트리 게시와 동시에 1군 콜업을 전달받았다. 내일 있
을 잔여경기부터 출전하게 되며, 운이 좋으면 선발 엔트리에 들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즈음부터는 중위권 팀과 상위권 팀이
극명하게 나뉘어 ‘버릴 경기’와 ‘버리면 안 되는 경기’ 역시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었다. 내가 나서는 곳은 버려도 되는 경기. 좋게 표현하
면 유망주들이 기회를 펼쳐야 하는 경기였다. 이 작은 자리 하나를
두고 어린 선수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것이 당시 나의 위치였다.
“1군에 간다며.”
그날 밤.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이동할 적 너의 목소리를 들
렸다. 그때 네가 무얼 하다 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손에 들린 수건과
이온음료를 보고 ‘운동을 하고 나왔다’는 정보만 대략적으로 파악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때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
지 않았다. 양자님이 말을 걸었다. 야수들과 친해지기는커녕 한 달 넘게 서먹해하고 있던 네가.
“어, 내일 잔여경기부터 나가게 될 것 같다.”
“축하해. 거기서도 잘할 거야.”
“하하, 잘해야 하는데 말이야.”
가을 밤바람만큼이나 건조한 대화가 큰 기복 없이 이어지다 어정
쩡하게 잦아들었다. 가로등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정도였다.
“잘할 거야. 너 수비 잘하잖아.”
그 순간, 네 목소리가 가로등 불빛을 뚫고 튀어나왔다.
“내가?”
“한 번도 실책한 적 없잖아. 어려운 공도 다 받아주고.”
전부 기억하고 있었나? 아니면 빈말인가? 아니, 의심할 여지도 없
었다. 눈앞의 왕자님은 그런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난
한 달간 보았는데 어떻게 모를까. 그런 빈말이 되는 녀석이었다면 진
작 다른 야수들과 친해졌겠지.
“그걸 전부 기억하고 있었어?”
“전부는 아니고.”
“하하, 이럴 땐 빈말이라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야지.”
“다음엔 그럴게.”
이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나는 이제 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숙소
로 가야했다.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차로도 두 시간은
넘게 밟아야한다. 짐을 풀고 주중 훈련에 참여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나는 짐 가방을 고쳐들고 주차장으로 향하였 다.
“내년엔…….”
그 순간, 네가 무어라 말을 했었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너를 보려
고 했을 땐 너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를 보려
고 일부러 나온 게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김에 말이라도 건 거였나.
여기서 꼬리를 물기엔 지금 나는 너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서는 안
되었다. 내가 가야할 곳은 서울특별시. 팬들의 함성이 가득 채워진 곳. 그리고 언젠가 네가 중심에 서야 할 구장이었다.
이 해 겨울은 춘천의 함성과 함께 끝이 났다.
너와 나는 겨울의 냄새를 맡기도 전에 시즌을 마쳐야만 했다. *
선발투수 양지훈이 지난 경기 호투에 이어 이번에도 7이닝 무실 점을 하고 내려옵니다.
점수는 0:0. 양 팀 팽팽한 경기가 이어집니다.
8회 초, 타순은 1번부터 시작됩니다. 마운드에는…….
“지훈아.”
“…….”
“네게 승리를 안겨줄게. 거기서 기다려.”
선두타자는 아웃시켰지만 후속 타자들에게 장타, 그리고 단타를 맞았습니다. 아, 감독이 여기서 고의사구를 선언하였습니다. 클러치
능력이 좋은 베테랑 타자가 1루로 향합니다. 이 뒤에 있는 선수는
지난 6회 말 대수비로 나왔던 금강호 선수입니다.
금강우 슨슈, 2년 전에는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작년에는 프로의
쓴 맛을 얻었습니다. 올해는 과연 다른 모습을 보여줄까요.
1구, 볼. 금강호 선수는 투수의 볼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2구,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모서리에 찍혔습니다.
변화구가 실투로 들어갔어요. 이건 쳐야만 했습니다.
3구, 스트라이크. 이걸로 1-2.
금강우 슨슈, 도대체 무슨 공을 치려는 걸까요.
그날은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었다. 봄이 와서 그런가? 아니면 아
침에 맛있는 요리라도 먹었나? 솔직히 인과관계는 잘 기억나지 않
는다. 오직 심장이 평소보다 느리게 뛰고 머릿속이 유난히 맑았던
감각만이 선연하게 생각난다.
4구, 낮은 공을 쳐올립니다. 이 공이, 공이, 공이! 담장 밖으로!!!!
넘어갑니다!!!!!!!
금강호 선수 시즌 1호 홈런. 그리고 통산 첫 만루홈런을, 0:0 동
점 상황에서 만들어냅니다!
1루 베이스에 고정되었던 시야가 점점 멀어진다. 내 몸이 내 것 같
지 않은 감각. ‘금강호’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관객마냥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기만 하였다.
금강호 선수가, 광주에서 이적해온 동갑내기 선수를 구원해줍니
그제야 네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던 시
선이 나와 맞물렸다.
1루, 2루, 그리고 3루. 나는 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의 제2막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얕은 열감이 이마 위로 전해진다. 너의 숨소리가 들린다. 너의 박 동이 전해져온다. 손에서 귀가 아닌, 손에서 손으로. 배트 끝에 닿
은 공처럼 묵직한 진동이 되어.
얕은 열감이 이마 위로 넘어간다. 나의 숨소리가 들린다. 나의 박
동이 전해진다. 손에서 귀가 아닌, 손에서 손으로. 글러브에서 빠져
나간 공처럼 묵직한 울림이 되어.
나는 지척에서 너를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