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다
Human Story
라울(RAI RAHUL) 탄카 (KHADKA TANKA BAHADUR)
산디(LIMBU SANDESH)
저는 네팔에서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한국 와서 처음 일
한 곳이 대성오토입니다. 한국어가 서툴러서 6~7개월은 많
이 고생했지만, 그 후는 조금씩 편해지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참 착한 것 같아요. 제가 운이 좋아서 한국에
서 만난 분들이 모두 좋았습니다. 휴일에는 문산과 파주에
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 쇼핑도 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일하면서 허리와 팔이 아파서 고생했는데 인
터넷을 통해 병원 정보를 얻고 치료를 잘 받았어요.
저는 10년 정도 한국에서 일한 후에 네팔로 돌아가서 녹차
회사를 세우고 싶어요. 네팔에는 좋은 차가 많이 있습니다.
좋은 차를 상품으로 개발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
어요. 일하는 게 가끔 힘들어도 제 꿈을 생각하면서 하루하
루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저는 네팔에서 피트니스 트레이너로 일하다가 한국에 이주
노동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어 한국 생활이 힘
들었는데, 이제는 많이 적응이 됐어요. 제가 한국말이 서툴
때 베트남 친구가 일을 많이 가르쳐 줬어요.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면 네팔에 땅을 사고, 대 성오토에서 배운 기술로 카센터를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습 니다. 네팔은 아직 수동차가 많아요. 그래서 사장님과 동료
들에게 자동차 조립 과정부터 모두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배 우고 있어요. 한국은 정말 시스템이 잘 되어있고, 사람들이 법이나 규칙 을 잘 지키는 나라예요. 길거리에 쓰레기를
저는 2023년에 한국에 왔어요. 함께 일하는 산디가 제 고향
친구예요. 네팔에서는 농장에서 일했고, 한국에 와서는 금
속 판금 일을 하다가 대성오토에서 자동차 부품 조립을 배
우고 있어요.
한국 자동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죠. 그런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어 자부심이 큽니다. 네팔에서도 한국 자동차
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요. 네팔은 아직 자동차를 자체 생산
하지 못하는데, 한국에서 자동차 기술을 열심히 배워서 네
팔에 자동차 공장을 만들고 싶어요. 너무 큰 꿈 같지만, 힘들
게 일하는 만큼 큰 꿈을 꾸고 싶어요.
사장님과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은 모두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이런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 참 좋습니
다. 한국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만, 그중에서도 한국 날씨
는 너무너무 좋습니다.
제 주변에도 이주노동을 했던
일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와의 인연이 오 래되다
일 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제가 모아둔 돈을 다 썼지요. 그때 돈은 사라졌지만, 사람은 살려냈습니다. 나중 에 그 친구들의 본국 대사관에서 자국민을
둘은 그렇게 연인이 되
어 1년을 사귀었고, 캄보디아에서 가족들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양가 모두 형편이 좋지 않아 로타 씨
부부는 2019년 다시 한국으로 나왔고, 아내는 농장
에서, 남편은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 6년 차 부부에게 귀한 새 생명이
찾아왔다. 그러나 벅찬 감격도 잠시, 로타 씨는 임신
35주 차에 아기를 조산할 위기에 맞닥뜨렸다.
어떤 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가게 되셨나요?
임신하고 몸이 좋지 않아서 바로 농장 일을 그만뒀어요. 잘
쉬고 잘 먹고 하니까 괜찮았어요. 7개월쯤 됐을 때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픈 거예요. 그때 너무 무서웠어요. 당시에 친구
부부랑 같이 살고 있었는데 친구가 병원에 데려가 줬어요.
의사 선생님이 바로 입원해야 된다고 했어요. 남편이 일하
다가 연락받고 바로 달려왔어요. 그때 남편이 더 놀란 것 같 아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어땠나요?
제가 아픈 것보다
캄보디아에 있는 가족들 이 걱정하지 말라며 매일 연락을 해줬어요. 그 순간에는 돈
걱정보다 마음이 안심됐어요.
병원에서 저희 사정을 봐주셔서 병원비가 많이 줄었어요.
그래도 저희 부부에게는 큰돈이라 걱정이 많았어요. 저희
가 지금까지 모아둔 돈이랑 친구, 동료들이 모아준 돈을 합
해도 병원비를 모두 내는 데는 부족했어요. 그런데 위프렌
즈와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저희를 지원해 주신다고 해서 병
원비를 전부 낼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떤가요?
다행히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저는 아이 낳고 조금
몸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퇴원하고 한 달 동안 매
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어요. 체력이 점점 좋아져서 지 금은 병원에 안 가요. 남편이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하고 정말 많이 도와줘요. 근데 요즘 아기가 밤에 안 자요. 아침에 자 고 밤에 계속 울어요. 그래서 좀 힘들어요. (웃음)
아기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나요? 또 앞으로 계획 은 어떤 건가요?
남편은 아기가 의사가 됐으면 좋겠대요. (웃음) 나중에 엄마
아빠 아프면 아기가 치료해 주는 꿈을 꾼대요. 저는 다른 거
없어요. 그냥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3~4개월 뒤쯤 저는 먼저 아기랑 캄보디아에 들어갈 거예
요. 아기가 있으면 남편이 잠도 못 자고 일하기도 힘들어요.
아기도 크면서 힘들 것 같아요. 남편이랑 떨어져 있어야 해
서 슬프지만 저희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리
고 먼 훗날에는 큰 땅을 사서 버섯농장을 하고 싶어요. 다 같 이 행복하게
“죽었구나
살았어요!”
솜삭 (태국 이주노동자)
세상에서 고구마가 제일 무섭다는 태국인 솜삭 씨.
그는 한국에 온 지 6년 차 이주노동자이다. 그동안
양계장과 축사 일, 밭농사 등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
해 왔지만, 끝도 없이 나오는 고구마 줄기를 캐내고,
무거운 고구마 상자를 나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고 한다. 고된 노동 탓일까, 올해 초 급성심근경색으
현재 건강 상태는 좀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어요. 근데 무거운 걸 들거나 격한 운동은 할 수
없어요. 빨리 몸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술 안 마시
고, 담배도 안 피워요. 커피도 안 마시고, 건강하게 밥도 잘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약도 빠지지 않고 먹고 있 어요. 다시는 아프고 싶지 않아요.
어떤 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가게 되었나요?
지난 설날이었어요. 집에서 평소처럼 생활하고 있는데 갑
자기 몸이 안 좋았어요. 처음에는 속이 안 좋아서 토를 했
어요. 배가 아프더니 점점 아픈 게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
면서 숨이 안 쉬어졌어요. 그전에는 이런 비슷한 증상도 겪
어본 적이 없었어요. 크게 아픈 적도 없었고요. 그래서 정말
놀랐어요.
너무 놀라서 119 이런 것도 생각이 안 나고, 친구에게 도와
달라고 연락했어요. 다행히 바로 친구가 와줘서 집 근처 병
원에 갔어요. 그런데 작은 병원에서는 안 된다고 해서 구급
차 타고 바로 큰 병원으로 이송됐어요. 제가 거의 숨을 못
쉬어서 도착하자마자 바로 급하게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
나왔어요. 1억이면 태국에 큰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엄청난 돈이에
요. 머리가 하얘졌어요. 아내한테도 너무 미안하고요.
그런데 저를 도와준 단체에서 병원의 사회복지팀과 이야기
해서 병원비를 정말 많이 감면해 주시고, 중간 정산 이후에
는 병원비를 분할로 납부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또 위프렌
즈에서 도와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쁘고 감사했어
요.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정말 앞이 캄캄했거든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해요. 매달 빠지
지 않고 병원비를 갚고 있어요.
아파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저보다 아내가 많이 힘들었죠. 저는 아파서 정신이 없고, 아
내가 저를 챙겨야 하는데 한국어가 서툰데 큰 수술을 받아
야 했으니까요. 다행히 주변 분들이 도와주셔서 빠르게 대 처하고 병원에서도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었어요. 정말 행 운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한 말씀
프엉 (베트남 이주여성)
K팝과 K드라마에 매력을
사람이 되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라서 좋아
요. 한국 음식도 맛있고 한국 생활도 마음에 들고요. 저는
운 좋게도 한국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처음 일을 할 때는 한국어를 잘 몰라서 소통하는 것이 힘들
었지만,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서는 특별히 힘든 점 은 없어요.
그런데 린이 태어나고 나니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
어요. 이제는 어디를 가든 아기들이 가장 먼저 보여요. 무엇 보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정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리 고 린이 베트남 아이라고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한국에서 임신과 출산하는 과정이 힘들진 않았나 요?
임신 사실 후 처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스
트레스가 많았어요. 유튜브로 여러 가지 필요한 정보를 찾
아서 공부했고, 의사 선생님도 산모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
셔서 무사히 출산을 할 수 있었어요. 나오미센터에서도 필
요한 정보를 많이 알려주셨어요. 건강보험이 없었는데 희망
의친구들 WeFriends Aid에 가입해서 아기가 아플 때 의료
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어요.
린은 어디가 아팠나요?
아기가 열이
사랑의 실천, 이주민의 건강을 지키다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위프렌즈의 이주노동자 순회 진료 활동이 현대자동차 그룹의 후원을
이주민 의료 지원 20년의 추억
한양대학교구리병원은 예전부터 남양주의 이주노동자 환자
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만 해도
의료급여제도가 지금 같지 않아 저소득층 환자들은 병원 입
원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물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
주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 딱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 교수
는 병원 차원에서 위프렌즈와 협력하여 이주민의 건강권을
지원할 수 있도록 병원을 설득했다.
“우리 대학의 설립 취지가 ‘사랑의 실천’ 아니냐, 우리 병원에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오는데,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설립 취지에도 걸맞고,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병원으로 존경
도 받을 수 있으니 병원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원
장단 회의에 들어가 프레젠테이션까지 했어요.”
이렇게 병원 단위의 지원 체계가 만들어지고 나니 직원들도
이주노동자들을 돌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인지 의사뿐
만 아니라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병동의 간호사들까지 다양
한 직종의 의료인들이 너도나도 위프렌즈 이주노동자 순회 진
료 활동에 선뜻 나서주었다.
“무료 진료소나 순회 진료 현장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은 대
체로 젊고 건강한 분들이에요. 비록 한국에 와서 힘들게 일하
고 있지만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기쁘다는 눈빛을 느낄
수 있죠. 그래서 저희도 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들을
대했던 것 같아요.”
포용적 의료 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40만 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의
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한 교수는 우리 사회가 좁은 시각
에서 벗어나 이주노동자를 위해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주노동자 대다수가 젊고 건강한 상 태로, 이들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는 매년 흑자를 달성하여 건강보험 재정에 기여하고 있다. 이들이 건강할 때 건강관 리를 할 수 있도록 사전 건강검진 시스템
현재 위프렌즈의 활동이 이주민 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 각합니다. 위프렌즈는 기업이나 재단의 후원으로 이주민 의 료지원을 하고 있는데,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대한민국. 이주노동자들에겐 어떨까? 그들이 ‘죽고 싶
다’는 생각이 들 때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
구가 한국에 있을까? 위프렌즈 ‘이주노동자 자살예방
사업’은 이러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이 사업을 함께하
고 있는 안병은 수원시자살예방센터 센터장을 만나
이주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증진하고,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취약성도 다양한 이주노동자 정신건강 문제
“이주노동자들이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해서 같은 문제를 가
진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한국어가 서툰 이주노동자는 고립
될 가능성이 더 크고, 여성이거나 낮은 교육 수준, 아동기 트
라우마와 같은 추가적인 취약성을 가진 이주노동자에게 더
욱 각별한 관심이 요구됩니다. 자국에 돌아가더라도 따뜻하
게 맞아줄 가족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는 완전히 달라요.”
실제로 이주노동자 중 가족으로부터 본국에 돌아오지 말고
한국에서 돈을 벌기를 바란다는 말을 듣고 충격과 상처를 받
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례가 있다. 이처럼 복합적이고 다양
한 취약성을 지닌 이주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위해 무엇을 먼
저 시작해야 할까.
“이주노동자들도 우리랑 똑같아요. 우리도 힘들 때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잖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
는 게 가장 중요하죠.” 이주노동자들이 지닌 심리적 문제는
다양할 수 있지만, 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경청’에서 시작된다
는 것이 안병은 센터장의 생각이다.
전문성보다 손을 내미는 따뜻한 마음이 더 중요해
“저는 현장에서 상담하는 분들이 정신과적 응급상황이 아
니면 정신과 의사에게 너무 의지하거나 이주노동자 상담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살 위험이 있
는 내담자를 만나는 건 물론 쉽지 않죠. 게다가 언어 장벽
이 있는 외국인이잖아요. 그렇지만 먼저 잘 들어주고, 실제
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함께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자살 예
방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자살 위험이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해
그 상황 안에 갇힌 거예요. 죽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는
생각에 갇힌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평소 이주민 산모들을 많이 접했던 우먼피아 여성병
원(이하 우먼피아) 한동익 원장은 2008년 협력의료
기관 가입을 위해 먼저 위프렌즈의 문을 두드렸다.
이주민들은 협력병원과 연결이 되어 진료를 받다가도
뭔가 불편하거나 힘들면 내원을 쉽게 포기하는데, 한
원장이 운영하는 우먼피아는 경기 북부 협력병원 중
에서도 이주민 이용률이 유독 높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의정부에 위치한 우먼피아를 찾아가 한 원장과 그간
의 소회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오늘도 병원 대기실에 이주여
성 산모들이 꽤 눈에 띄네요.
저희 병원은 분만 산모의 15% 정도가 이주민 산모예요. 예전
에는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산모가 많았는데, 요즘
은 베트남, 태국 산모가 대부분이고, 특이하게 나이지리아 산
모도 제법 있어요. 주로 이주민지원센터와 연결되어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주민지원센터 분들이 통역을 비롯해 여
러 가지로 많이 도와주세요. 사람이 먹고 자고 아이 낳고 사
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건데, 우리나라도 옛날에 형편이 딱
한 아이에게는 ‘젖동냥’도 해주고 온 마을이 같이 보살폈잖
아요. 타국에 와서 돈도 없고 너무 막막한 상태에 놓인 산모
들을 보면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요. 다행히 동
료 원장님들도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시고 적극 참여
해 주셔서 감사하죠.
이곳에서 출산한 이주민 산모들의 후기를 보면 마
음이 참 따뜻해져요. 캄보디아에서 온 코나 씨도
원장님께서 세심하게 챙겨주셔서 위기를 잘 넘겼다
고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몰라요.
네, 기억하죠. 우리 병원에서 출산하고 1주쯤인가, 아기 심
장 판막에 구멍이 생겨서 큰 병원으로 전원해야 하는 경우
였어요. 언어소통이 힘드니 병원 찾느라 헤맬 게 뻔한데 그
냥 ‘대학병원 가세요’ 하고 내보낼 수 없잖아요. 또 출산 병
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옮길 때 보통 32주 전에는 잘 안
받아주려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의정부 성모병원
에 전화해서 이주민이니 좀 받아달라고 사정을 했죠. 다행
히 잘 이해해 주셔서 그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우리도 외
국에 나가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잖아요. 낯선 곳에
서 아파서 병원을 가면 어떤 지원이 있는지, 도움을 주는 단
체도 알 수가 없고. 특히 오랜 기간 비용이 많이 드는 치료
필요할 때는 병원비를
송지원
(고려대학교 안산병원
의료사회복지팀 팀장)
연결된 사람들
“코로나19 때 절실히 느꼈던 게, 사회라는 건 어느 누구도 건
강하지 못하면 다 아프게 된다는 거예요. 전염병도 그렇지
만,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 자살을 해도 충격을 받는 게 사람
이라는 존재잖아요. 그렇다면 결국에는 이 사회에 나와 연결
되어 있는 모든 사람이 잘 사는 게 내가 잘 사는 거거든요.”
고려대학교 안산병원(이하 고대안산병원)에서 19년째 사회
복지사로 활동 중인 송지원 선생의 말이다. 고대안산병원은
경기 남부지역의 거점 병원 중 하나로 안산뿐만 아니라 시
흥, 화성, 오산에서 오는 이주민 환자들도 많다. 송 선생은 이
들과의 따뜻한 연대 속에서 공생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외국인이 가장 많은 곳이 안산이지만, 근래 안
산에서 공단이 빠져나가면서 이주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찾
아 시흥과 화성으로 이동했어요. 그래서 요즘 외국인 노동자
가 많은 곳은 화성, 외국인 아동청소년이 많은 곳은 시흥이
에요. 시흥시 교육청에서 깜짝 놀랄 만큼 매년 급증하고 있
어요. 어제도 화성서부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화성에는
대학병원이 없으니 고대안산병원에서 좀 받아 달라고...”
상처를 치유하는 온기
지역적 변화와 함께 이주민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도 달라졌
다. 90년대 중후반에 한국으로 온 1세대 이주노동자들이 중
장년층이 되면서 간질환이나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미등록 이
주민들의 건강관리 의료지원이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다.
“확실히 과거엔 상해 환자가 많았죠. 제가 처음 만난 이주민
환자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데... 이분이 사장님한테 여러
어려움을 당하고 공장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복
수심에 마지막 날 공장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사다리에서 떨
어져서 응급실로 실려 온 거예요. 머리 뒤가 다 깨져서... 그
때 ‘아, 이게 이주노동자의 현실이구나’ 절감했죠. 그게 2007
년경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사장님 나빠요’가 많았어요.”
고용주가 나쁘면 고용된 사람도 나쁘게 반응하는 것이 인지
상정이다. 이를 지켜보는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은 다시 이주
노동자에게 전가되고, 이들의 고통은 사회의 고통이 된다.
누군가 나서서 상처 입은 이들을 따뜻한 온기로 품지 않으면
이 악순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기업과 병원들이
6개월을 넘기기 힘들어 보이던 명호는 병원의
되었고,
그룹홈으로 퇴원했다. 그룹홈 원장 님이 명호의 후견인이 되어 중국 대사관에 국적을 신청했고, 외국인 등록번호도 받을 수
원태린 활동가가
태국어 통번역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이 낯설고 버
거웠다.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마음이 눌릴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참기만 했다. 어느 날, 이주민 병원 동행을
위해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 그녀는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그날 이후 아
이스 커피는 그녀의 작은 휴식이 되었다. 여전히 바쁘
고 도전적인 일상이지만 오늘도 아이스 커피 한 잔으
로 활기차게 시작하는 원태린 활동가를 만나 보았다.
어떻게 이주민 통번역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는 평범한 주부였어요.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태국인 친
구가 병원에 가거나 일이 있으면 도와주는 정도의 통번역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의정부EXODUS에서 활동하는 지인
이 여기서 사람을 뽑는데 면접을 보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당
시 저는 이주노동자 상담에 꼭 필요한 노동법도 잘 모르고,
통번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어서 거절했어요. 대
신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태국인 노동자를 위해 그냥 봉
사를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바로 취직이 됐어요. (웃음) 처음
에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걱정이 많았어
요. 입도 잘 안 떨어지고. 그런데 같이 일하는 활동가들이 기
다려 주고 알려주셔서 여기까지 왔네요.
처음 병원 동행을 했을 때 어떠셨나요?
정말 떨렸어요. 임금 체불 문제로 사장님들을 만나는 것도
무서웠는데, 병원은 더 무서웠어요. 왜냐면 쓰는 말 자체가
다르거든요. 저도 병원 경험이 많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조건 받아 적었어요. 못 알
아들으면 의사나 간호사 선생님께 적어 달라고 하고 나와서
사전을 찾아보고 환자분에게 설명해 줬어요. 통번역하는 것
도 어려웠는데 병원비에 대한 개념이나 사회사업실이랑 소
통하는 법 등등 여러 면에서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았어요.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이주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저를 찾아오는 첫 번째 이유가 언어적 어려움이죠. 요즘은
통번역 앱도 잘되어 있지만 그래도 사람을 찾아요. 그러다
이영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 센터장)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를 찾는 이주민은 주로 어
떤 분들인가요?
노동상담과 의료상담이 필요한 분들이 항상 센터를 찾고
있습니다. 초기에 정착한 이주노동자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고 있어요. 또 요즘은 체류자격 변경
과 관련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센터를 찾는 분들도 많습
니다.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민자들이죠. 필리핀, 방글라데
시, 베트남, 중국 등의 커뮤니티가 잘 형성되어 있어요.
이 지역 분들에게
희망의 손길, 20년의 기적
발행일 2024년 10월 30일
사진 이규철, 양철모
디자인 하트비 www.heartb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