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드리아해의 미풍이 야자수 잎을 흔든
다.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한 항구와 말끔히
정비된 해안 산책로. 모던하고 세련된 해안
휴양지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현대적인 거리 한편에 줄지어
선 고풍스러운 건물이 왠지 심상치 않다.
무려 1천700년 전 로마의 디오클레티
아누스(244∼312) 황제가 퇴임 후에 거주
할 목적으로 지은 궁전이다. 고대와 현대
가 인접한 이 특이한 앙상블이 이곳의 매 력이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북서쪽으로 200여㎞ 거리에 있는 스플리트(Split)다.
◇양배추 농사에 빠진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근처 살로나에서 태어났다. 하층
민 출신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가다가 전임
황제의 경호대장을 거쳐 황제가 됐다.
그는 제국 방위를 위해 사두정치 체제
를 창안했고 기독교를 탄압한 황제로 알
려져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은퇴 후 삶을 꿈꾼
보기 드문 황제였다.
고향 근처 스플리트에 개인 황궁을 건
설했으며, 재위 21년이 되는 305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이 궁전에서 새로운 삶 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채소를 가꾸 며 살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은퇴 후 로마 정정이
불안해지자 사람들은 그의 황위 복귀를 간 청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직접 심은 양
배추를 당신의 황제께 보여드릴 수 있다면, 황제께서는 감히 내가 이곳의 평화와 행복
을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폭풍으로 대
체하라고 제안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휴양지 스플리트의 아름다움은 디오클
레티아누스가 이미 발견한 것이었다.
탐욕스러운 권력욕 대신 고향으로 돌아
와 평화로운 채소 가꾸기를 선택한 황제의
심미안이라면 현재 스플리트가 가진 가치
는 1천700년 전에 찾고도 남음이 있음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스핑크스의 머리는 어디에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동서 181m, 남북 215m 규모다. 높이 20m, 두께 2m 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마치 요새를 방불
케 한다.
사방으로 4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은 바 다 쪽으로 통한다. 바다에 면한 쪽으로 황
제와 가족들이 살았고, 북쪽에는 700명의
하인과 병사들의 거처가 있다.
궁전에서 가장 큰 광장은 열주광장 (Peristyle)이다. 황제가 회의나 행사를 주
재한 장소로, 16개의 웅장한 대리석 기둥
이 황제의 압도적 권위를 대변한다.
광장 안에 있는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은 원래 구조를 유지하며 사용되고 있는 세계

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성당이다.
바로 옆 57m 높이의 종탑은 좁은 계단
을 통해 오를 수 있다. 올라가면 로마네스
크 양식의 아름다운 기둥 사이로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스플리트 구시가의 붉은 지붕
들과 아드리아해, 항구에 정박 중인 크루즈
선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다.
궁전에는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12
개의 스핑크스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
아있는 것은 3개뿐이며, 그중 하나가 열주
광장에 있다.
또 하나는 광장 근처 주피터 신전 앞에
있는데, 이 스핑크스는 이교도의 조각상이
라는 이유로 머리와 앞발이 잘려 나갔다.

열주광장에는 이집트의 도시 이름을 딴 '룩소르'라는 카페가 있다. 황제의 광장 안 에 있는 카페라니. 명당 중에서도 최고의 명당 아닌가. 가격은 조금 비싸도 룩소르에서 커피 한
잔 마신 뒤 광장 계단에 앉아 먼 고대 로마
로 상상의 날개를 펴보자. 스플리트 여행 에서 생략할 수 없는 여정이다.
◇엠마누엘 비도비치
열주광장에서 남쪽 계단을 올라오면 돔 모양의 건물에 로마의 판테온처럼 지붕에 원형 구멍이 뚫린 특이한 공간이 나타난 다. 황제의 알현실인 베스티뷸(Vestibul)
이다. 마침 이곳에선 ‘클라파’(Klapa)라고
크로아티아인들이 모국어로
볼
있도록 투쟁한 인물로 존경받는 종 교 지도자라고 한다. 시간을 짜내 엠마누엘 비도비치 (1870∼1953)의 갤러리에 들렸다. 스플리트 출신인 비도비치는 유럽 현대 미술의 거장이다. 그가 초기에 인상주의와 점묘법으로 그린 아드리아해 연안 풍경 그 림이 꽤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고향인 스플리트 항구 그림을 보 고 놀랐다. 거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희미한 불빛만이 명멸하고 있다. 유럽 최고의 일조량을 자랑하는 밝고 투 명한 아드리아해의 햇살은 어디 갔는가. 그 의 마음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