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채색의 여인

민정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국수
옷장 문을 열자, 색색의 스카프들이 먼
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부
터 원색이 섞인 대담한 무늬가 대부분이
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
을 색상이다. 스카프는 물론 옷조차도 무
늬 없는 단색이나 어두운 계열만 즐겨 입
었다. 매일 옷을 바꿔 입어도 남들은 알아
채지 못할 만큼 늘 비슷한 색과 스타일이
었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거나 의
식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미술 동아리에서 한 동료가 “오
늘도 무채색의 여인이 등장하셨군.” 하며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호감은 있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이였다. 역시 미술
전공자라 색감에 민감하다며 대수롭지 않
게 여겼는데, 그때부터 나의 모습에 신경
이 쓰이기 시작했다. ‘옷 색상 때문이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의미를
품은 말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
두운색의 옷을 즐겨 입는 것을 말하는 것
인지, 자신을 뚜렷하게 내세우지 않는 성
격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림의 스타
일을 말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늘 원색 쓰기를 주저
했다. 어떤 색이든 흰색이나 다른 색을 섞
어 썼기에 분위기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개성 있다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색상이나 어떤 색의 옷
을 주로 입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
이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나이 차가 많은 다섯
오빠 속에서 자란 나는, ‘여자는 사기그릇
과 같아서 함부로 취급하면 깨질 수 있다’
라는 어른들 생각의 틀 안에서 과분한 보
호를 받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지나친 보
호는 의존성과 소심함으로 이어졌고, 또래
의 아이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제때
알지 못하는 늦된 아이가 되기도 했다. 그
러다 보니 사교성도 부족해 관심 있는 사
람에게 다가가지도, 먼저 말을 걸지도 못
했다. 늘 마음으로 삭이다 보니 가슴 깊이
우울의 습지가 생겨났고, 자존감은 아래로
향했다. 그런 성격이 표정에도, 옷을 고르
는 취향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자문해 본
다. 만약 나를 소개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
할 수 있을까. 그저 현재 주부이자 두 아이
의 엄마라는, 외적인 배경 외에 나를 설명
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내가 나를 온전히
정의할 수 없듯, 타인의 시선 속에 비친 내
모습 또한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내 인
상이 차갑고 어둡다고도 했고, 어떤 이는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
두 면모가 모두 나인 것을 인정하지만, 정 작 나도 내 본질을 잘 알지 못한다. 내 안
에는 여러 모습의 내가 있어, 가끔 나 자신
도 놀라는 이면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
이다. 마치 여러 색깔이 혼합되어 무슨 색
인지 알지 못하다가 불현듯 한 색깔이 튀
어나오는 것처럼.
내 안의 이 복잡한 파동을 어떻게든 분
류해 보고 싶어서였을까. 요즘 유행하는
MBTI 테스트나 별자리, 심지어 사주 명리
같은 것에 나를 대입하여 성격유형을 알아
보기도 한다. 같은 종의 나무라 해도 가지
의 형태와 뿌리의 깊이가 단 하나도 똑같
지 않듯, 개개인의 성격이 몇 가지 유형으 로 분류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많은 이
들이 성격유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만
큼 무의식 속 자신의 내면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싶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환경과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페르소나
를 드러낸다. 따라서 겉모습이나 이미지, 일상의 행동과 말만으로 그 사람을 안다
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결국 보이
는 모습은 내면과 전혀 다를 수 있으며, 일 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빙산의 일 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은, 그 거대한 빙산 아래 가려진 진짜 나를 찾고 싶기 때 문이 아닐까. 아마도 이 물음을 통해 지나 온 생의 궤적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앞으 로 나아갈 삶의 방향과 가치를 찾기 위함 일 게다. 사람은 살아가며 조금씩
의해, 관계로 인 해, 때로는 스스로 선택한 의지에

반현향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먹는 날
마을 사람들 모여 대 솥 걸고 삶아내는 국수
기뻐서 슬퍼서 지쳐서 맺은 깐부를 평생을 찾아다닌다 이 손 다음 손들이 밀어낸 칼국수 가마솥에 풍덩 담가 빨간 고추가 어른거리는 가을 하늘에 양념장을 한다
세월 가도
이름 칼국수를 시장 골목 끝에서 찾는다 양철 대문에 쓴 이름 ‘칼국숫
위한 표면
타 인의 거울에 밝게 비치고 싶은 또 하나의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스카프를 매개로 나를 표출하고 내면의 변화 또한 꾀해 왔지만, 아직도 나는 어두
운색의 옷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어둠은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 줄 고유한 배경이라는 것을.











1995년 4월 23일, 청년 오동찬은 이
불 한 채와 베개, 라디오가 든 가방 하
나를 들고 소록도 땅을 밟았다. 조선
대 치대를 졸업한 스물일곱 살 공중
보건의는 다른 의사들이 꺼리던 그
섬을 스스로 택했다. 전남 고흥에서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가 언젠가 들려
준 말 때문이었다. “소록도엔 아프고
외로운 사람이 많다.”
당시 소록도에는 한센인 1500여 명
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눈에 흙
이 들어가면 가라”며 말렸다. 스치기
만 해도 옮는다는 터무니 없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한센병에 대한 공포
가 여전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1년만
근무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1년은 31년이 됐다. 그는 소록도에
서 청춘을 보냈고,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도 그곳 주민들 곁에 있다.
오동찬(58) 국립소록도병원 의료
부장은 올해 삼성 호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소록도에서 30여 년간 한
센인의 곁을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았
받을 일 아니다”
받은 상금은
써와궧궧 ‘편견의 병’ 한센병 가혹했던 차별의 역사 “소록도 어르신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
다. 그런데 그는 처음엔 상을 고사했 다. “의사가 한 병원에서 오래 일했다 고 상 받는 법은 없다”는 이유였다. 호 암상은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로, 상금이 3억원에 달한다.

왜 거절하려 했을까. “제게 상을 준다는 건, 아직도 우리 사회에 한센 어르신들에 대한 차별과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
편견이 남아 있다는 뜻 같았습니다.”
3시간가량의 인터뷰 동안 그는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보다 더 열악한 시절 소록도를 지킨 의료진과 직원들이 있는데, 자신이 그들을 대 표하듯 상을 받는 게 송구하다고 했 다. 세상을 떠난 소록도 주민들에게 도 미안하다고 했다. “계실 때 더 잘해 드렸어야 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더 이상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평생을 집 한 채 없이 산 그는 소록
도에서 살아온 세월을 자신의 ‘욕심’
이라고 했다. “우리 어르신들이 가끔 ‘ 오 부장은 고생만 하는데, 왜 여기 있 어?’ 물어요. 그러면 ‘저는 받은 게 많
아서요’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너
무 즐겁게 잘 살았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향하다 -상을 준다고 할 때마다 사양하셨다 고요. “물론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의사 가 환자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요. ‘내가 소록도에서 상을 받을 정도 로 대단한 일을 했나’란 생각이 들었 습니다. ‘힘든 데서 고생하니까’ (상 을) 주겠다는 건데, 저는 고생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