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아들이 자기를 쏙 빼 닮은 아들 노
아를 낳았다.
핏줄이라는 말이 이토록 또렷하게 다가
온 순간이 있었을까. 갓난아기의 얼굴에
스미는 눈매와 입가의 곡선에서, 시간을
건너온 아들의 어린 날을 만난다. 세월은
직선이 아니라, 이렇게 원을 그리며 우리
앞에 다시 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애는 어릴 때부터 인사를 참 잘했
다. 누가 가르쳐서라기보다, 사람을 향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목소리에 온기가
실리는 아이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
아오는 길, 집 앞 3거리 모퉁이에서 트럭
을 놓고 과일과 야채를 팔던 총각네 야채
가게는 늘 작은 정거장처럼 아들의 하교
길 발걸음을 잠시 붙잡아 두었다. “안녕하
세요!” 하고 밝게 인사하면, 총각 사장님
들은 초등학교 1학년 꼬마 아이의 인사성
이 귀엽고 신통하여 환한 미소로 답하며
참외 하나, 슬라이스 해놓은 수박 몇 조각
을 건네 주곤 하였다. 인사를 잘하는 아이
에게 세상이 내어주는 작은 보상 같은 것
이었다.
과일을 들고 집에 들어와 엄마에게 씩
웃으며 자랑하던 모습을 아내는 지금도 또
렷이 기억을 한다. 한 알의 참외나 몇 조각
수박이었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세상
과 맺는 아들의 태도였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고, 먼저 마음을 여는 일. 그 소박한
노아(Noah)에게
습관은 시간이 지나며 아들의 성품이 되 었고, 가정을 이루어 드디어 한 생명을 품 게 된 것이다.
그 아들이 자라 이제 아빠가 되었다. 그
리고 아이의 이름을 ‘노아’라 지어도 괜찮
겠는지를 내게 물어보았다. 노아라는 이름
과 만나는 순간, 방주를 짓고, 홍수속에서
도 생명을 품어 다음 세상으로 건너게 했
던 사람. 절망의 물결 위에서 희망을 띄웠
던 이름의 무게를 그대로 아이에게 얹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이 품은 의미
와 방향, 곧 생명을 존중하고 약자를 끌어
안으며,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도 희망의
자리를 비워 두지 않는 태도만은 꼭 간직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노아야, 너는 세상을 구하라는 사명을 지고 태
어난 아이는 아니란다. 다만 네 앞에 놓인
하루 하루를 성실히 건너며, 누군가의 오
늘을 조금 덜 무겁게 해줄 수 있다면 그걸 로 충분하단다. 인사를 잘하던 네 아빠처 럼,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마
음으로 말을 건네는 아이가 되기를 바란 다. 그 한마디 인사가 어떤 날에는 참외나
수박 한 조각이 되고, 어떤 날에는 메마른
마음을 적시는 시원한 생수가 된다는 사 실을, 삶을 통해 자연스레 알게 되기를 바
라는구나.
너의 아빠는 그렇게 자랐단다. 형과 우
애하며, 형을 닮아서 누구에게도 과시하지
않았고, 어딜 가든 인정받는 믿음직한 사 람으로 성실하게 살아왔단다. 교회 청년부
에서 너희 엄마를 만나 함께 유치부 교사
로 동생들을 가르쳤고, 졸업을 하고는 직 장인으로서 이민 1.5세라는 정체성이 핸디 캡이 아닌 어드밴티지가 될 수 있도록 더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하고 주위와도 소통 하며 직장과 자신의 가정을 꾸려왔단다. 두 아들을 키우며 절실히 깨닫는다. 아이 는 말보다는 눈으로 배우고, 훈계보다는 격
려로 자란다는 것을 이제 그 귀한 양육 의 시간은 아들들에게로 건너갔다. 아들의
손과 등이 첫 쌍둥이 손주와 노아의 산 교
과서가 되고, 엄마의 품은 아가들이 세상
과 마주하는 거울과 창이 될 것임을 안다. 세상은 편리하고 좋아지는 만큼이나 여
전히 불안하고 또 거칠기만 하구나. 하지 만 노아야, 너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
와 힘이 혹여 부모의 시선밖에 있는 순간 일지라도 너를 붙잡아 주기를 바란단다.
떠내려가지 말고, 필요한 것을 품는 사람
이 되기를, 높아지기보다 넓어지고, 앞서 기보다 함께 가는 길을 택하기를. 그렇게
크지 않더라도 너만의 작은 방주를 꼭 짓
는 사람이 되기를
노아야, 네가 우리 곁에 찾아와 준것만으로도 마음은 이토록 따뜻하구나. 희망이 필요 한 자리에 조용히 놓이는

1센치
흔들리는 촛불 아래 허물어진 꽃잎
달빛이 비수처럼 파고들던 밤 먹먹함이 숨통을 짓눌렀다
오래 가두었던 피를 흘려보냈다 잘 익은 노을 냄새를 맡았다
마른 침을 삼켰고 오한이 엄습해 왔다 푸르스름한 시골 응급실 네온 빛 멀리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1센치라고 했다 1센치만 빗나갔으면···
끝내고 돌아오는 길

빗방울에 명치가 촉촉해졌다 다 끝내고 돌아가는 길 그래도 헝클어진 발자국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스무 살의 나이로 오십을 앓던 나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시절 새벽은 늘 멀리 있었다













등을 논의했다는 보도를
듣고 BC주 수상 이비는 외국에 가서
캐나다를 분열시키기 위해 도움을 요
청하는 것은 treason (반역)이라고 극
단적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이 발언
후 앨버타의 분리주의자들을 국가적
반역자 들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
조사를 했는데 캐나다 국민의 71%가
반역적이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는 응
답이 나왔다. 최근 캐나다는 대공황
이래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시점 인데 분리주의자들
은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더니 급기야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앨버타 분리주의는 주로 경제적 불
만, 연방 정부와의 권한 갈등, 정치 문
화적 소외감에서 비롯된다. 분리주
의자들은 연방 정부가 탄소세, 환경
규제 강화, 송유관 건설 지연 및 취 소, 기후 변화 대응 정책 등을 통해 앨버타 경제를 약화시켰다고 공격한
다. 캐나다는 국가적 재정 형평을 위 해 부유한 중. 서부의 주들에서 겉은 세금으로 동부의 주들을 보조해주는 Equalization Payments (재정 형평화 제도) 때문에 앨버타는 캐나다 전체
인구의 약 11.6% 정도인데 전체 연방 세의 약 16~17%를 부담한다고 불평 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더 많이 내
고 그 대신 혜택은 덜 받 는다는 인 식이 불만을 고조시켰다. 정치 권력 이 오랫동안 온타리오·퀘벡에 집중 되어 있어서 서부 의 소외감이 고조 되어 있는 데다 상대적으로 보수 성 향이 강한 앨버타인들은 최근 수년

간 진보적 인 자유당 정부가 연방 정 부의 정권을 장악한 것에 대한 불만 도 강하다. 캐나다는 분리주의 운동에 이미 역 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1960년대 퀘 벡이 전통적인 가톨릭교회 중심 사 회에서 세속적 복지국가 체제로 전 환하기 위해 급속한 사회·정치·경제 개혁을 도모했는데 이를 Quiet Revolution 이라 한다. 조용한 이라는 표 현은 폭력 없이 제도 개혁을 통해 사 회가 급변했기 때문이다. 이 혁명은 퀘벡인들에게 민족적·영토적 정체 성을 일깨웠으며 퀘벡 분리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퀘벡 당은 1980년 퀘벡의 독립을 주민투표에 부쳤다.
분리주의 자들은 주민투표 문항을 퀘벡 주민이 거부할 수 없도록 의도
적으로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들었는
데 내용은 캐나다로부터 정치적으로
는 독립하되 경제적으로는 캐나다와
연합한다는 소위 주권연합(Sovereignty-Association)을 제안했다. 그
러나 결과는 찬성 40.5%, 반대 59.5%
로 독립은 실패로 끝났다. 15년 후 다
시 두 번째 주민투표가 1995년에 있
었는데 결과는 49.4% 찬성, 50.6% 반 대였다. 찬반의 득표수 차이는 무효 표의 수보다도 적은 것이었다. 두 번 에 걸친 주민투표는 결국 실패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