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리뷰잡지
MAR 2019 03 04 APR. Vol.19 .
기 획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대구 인터뷰 화가 김찬주의 공존의 공간
2019 mar. apr. VOL.18
값 4800원 03
9 772586 219008
ISSN 2586-2197
2019 소헌 문화예술아카데미 Sohen Culture & Arts Academy
대구 수성구 화랑로 134-5 (만촌동 1330-33) T053.751.8089 http://blog.naver.com/sohen106
PH
날리는 매화꽃은 겨울 겪었나 의심스럽고 춤추던 버들 꽃도 봄을 놓지 못한 걸 알겠네. 飄疑梅蘂曾經臘 舞認楊花未放春 - 황준량 금계집 외집 제5권중 일부
Essay
문화예술리뷰잡지
서기 2019년 03-04월 호 (통권 19호) ‘사각’이라는 네이밍은 대구의 상징인 사과의 먹는 소리인 ‘사각사각’의성어로 문화예술을 즐긴다라는 행위에 ‘먹는다, 소화시킨다’라는 의미를 더해서 문화를 건강 히 소비하고 표현하는 리뷰잡지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라는 의미이다. 또 무대와 캔버스등 문화를 표현해내는 장소와 ‘모든 세상은 네모나다’라는 의미로 사각이라는 프레임 속에 움직이는 문화생산활동을 잡지에 담아내겠습니다.
NO.19 photo by Dot.K
2016년 11월 7일 재등록 대구중, 마00007 격월간지 발행일 2019년 3월 10일 발행인 강금주 관리총괄 조성희 편집부장 박현정 객원취재기자 박현정 양준혁 손현민 발행처 사각디자인팩토리 인 쇄 부경인쇄 053.257.8830
sagak@naver.com http://blog.naver.com/sagaknews https://www.facebook.com/sagaknews @sagak_story @sagaknews @sagak_story ★
사각문화뉴스 http://sag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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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대구
연극 인형의 집 뮤지컬 영웅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
인터뷰
렉처 오페라 버섯 피자
16 작업실릴레이 김찬주의 공존의 공간 화가 김찬주
44 볼로냐 국제 일러스트 원화전 20 특별기고 - 김결수 22 음악이야기1 클래식 쉽게읽기 - 박소현 24 음악이야기2 기획자 - 송힘 26 한국의 아름다움 - 박세호 30 미술과 놀기 - 장민 32 대중 음악 - 황희진
토니 크랙展 포스트 공동체‘ing’展 3. 1 운동 100주년 기념 1919년 3월1일 날씨 맑음展 김성룡展 윤영화展 기억의 온도展
34 전시리뷰 - 김경란
화 56 아트로드 - 군산, 근대문화역사의 거리를 걷다.
tc. 1 포토에세이 43 포토리뷰 차정보개인전 52 작고작가기획展 : 소헌 김만호 역사는 우리의 일부 61 포토프리뷰 권정호전
62 classic album 63 연극 뭐볼까? 64 ‘대구뮤직’ 66 영화리뷰 68 책 소개
*본지에 실린 컬럼이나 리뷰는‘사각’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책자에 실린 사진은 본지의 허락을 받고 사용해야 합니다.
기획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1919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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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 동 3.8 만 동
청라언덕, 대구
.
100 100
. 대구
대화
.
일제시대 대구역 사진을 각색했습니다.
Intro 1919
대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과 생각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판단한다. 특히 우리가 옳다고 믿는 원칙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고 결 정되고 있다. 반대로 우리가 정의한 원칙들이 미래에서는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과거에 아무렇지도 않거나, 치부로 받아들여 꽁꽁 싸매어 두거나, 뭉개고 없애버린 것들이 지금 우리는 다시 찾거나 연구하면서 우리 앞으로 소환하기도 한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빼앗기면서 식민지하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하는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근대역사의 흔적을 보수하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각 도시로 퍼져가고 있다. 근대시기의 역사의 흔적이 비단 대구에만 있지는 않았다. 전국 여러 도처에 흩어져 있고, 우리 생활 속에 같이 묻어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 지역 대구에서 근대에 대한 복원사업과 연구가 먼저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래서 본 지에서는 우리 지역이 근대 시기 특히 1919년 즈음 대구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예술인들은 그 시기에 어떤 생각 과 행동으로 치열하게 살다 갔는지에 대해 한 번 더 조명해보았다. 다행히 우리 지역은 근대 예술의 연구가 활발한 편이다. 권원순 미술평론가, 손태룡 음악평론가를 통해 당시 미술과 음악 구술을 채록해서 정리해보았다. 또, 김태곤 대백갤러리 큐레 이터는 이번 호를 시작으로 해서 본 지에 6회에 걸쳐 근대 미술을 심층 있게 다룰 예정이다. 우리는 일제의 잔재를 없애자 라고 늘 이야기한다. 일제 식민지의 역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우리 후손들 에게도 담담히 알려줘야 할 중요한 역사이다. 철저하게, 상세하게, 과학적으로 그때의 역사를 복원하고 냉정하게 기록으로 남 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반복이고 순환이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를 기록할 때 객관적으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지만, 절대로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는 싶다. 역사의 기록은 어찌 보면 주관적 부분이 더 강하기도 하다. 그것을 우리가 정확히 인지 할 필요는 있다. 사실 이러한 부분이 역사학에서도 그것이 딜레마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흔히 역사를 수레바퀴로 비유를 한다. 예로 어떤 민족도, 어떤 나라도 흥하고 망하고 반복이었다. 고구려가 강했다면 대한제국은 암흑기이고 고통이었다. 그 암흑기를 살아온 우리 근대역사는 우리가 가장 최근에 고통받았던 역사 중의 하나이다. 결국 역사라는 것은 현재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이 과거 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결국 미래에게 답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고 하겠 다. 글 편집부
Sa: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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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근대시기의 역사가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까지의 대구 미술계
1919
대구
알다시피 1905 년에 을사늑약 ,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고 , 나라가 망국이 되었다 .
1919 년 3 월 1 일에는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데 , 그 해에 이상정 장군 ( 李相定 , 1897~1947, 이상화 시인의 형 ) 이 일본 국학원 대학 ( 고쿠가쿠인 대학 , 國學院大學 ) 을 졸업하고 ,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던 해다 . 이 때 이상정 장군이 서양화를 처음 갖고 들어 왔다 . 대구 서양화는 1919 년에 시작된 것이다 . 이상정 장군은 잠시지만 계성학교 미술 선생을 했다 . 내가 계성학교 에 찾아가서 역대 미술 교사들을 쫙 보고 왔다 . 19 년에 기록되어 있었다 .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12 년에 일 본 유학 갔다가 1915 년에 귀국한 춘곡 ( 春谷 ) 고희동 (1886~1965) 선생에 의해서였다 . 원래 동양화를 하던 사람인데 나라를 뺏긴 설움으로 유학을 떠나가지고 서양화를 처음 가지고 들어왔다 . 그때는 전부 다 일본이다 . 4 년 차이를 두고 대구는 서울과 관계없이 직접적으로 일본에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 이것은 대구 미술의 독자성이다 . 이상정 장군은 계성학교에 있다가 1923 년에 중국으로 간다 . 그때는 장개석 ( 蔣介石 , 장제스 , 1887~ 1975) 정권이었다 . 그 밑에서 해방될 때 별이 3 개였다 . 대단했다 . 그때는 국민군이다 . 귀국하고 얼마 안 있다 사망했 다 . 3.1 운동이 일어나니까 조선총독부에서 문화 융화 정책을 세운다 . 그래서 3 년 뒤인 1922 년에 조선미술전람회 ( 朝鮮美術 Sa: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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展覽會 , 1922~1944, 총 23 회 ) 를 개최한다 . 이것은 한반도 전체다 . 한국인 작가도 있고 일본인 작가도 있고 . 이후에는 이 조 선미술전람회에 비판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신인이 화단에 데뷔하려면 여기밖에 없었다 . 그리고 가장 권위가 있었다 . 조선미술 전람회 1 회 때 대구의 서화가 석재 ( 石齋 ) 서병오 ( 徐丙五 , 1862~1935) 가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마든다 . 왜 만들었는가 하면 석재가 조선미술전람회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을 때 의재 ( 毅齋 ) 허백련 ( 許百鍊 , 1891~1977) 이 사람이 출품을 했다 . 그 러면 의재와 심사위원으로 간 석재는 천지 차이인데 대구 시민이나 행정 당국에서 석재 선생에 대해서 조명을 안 하고 , 평가도 없고 , 그래서 묻혔다 . 서울은 근대에 의재 허백련을 6 대가에 들이고 , 석재는 이름도 성도 모른다 . 그래서 2012 년에 내가 석 재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 서화가를 뽑아서 천만 원 상금 주고 개인전 열어주고 . 그게 지금 6 회까지 하고 있다 . 그래서 전국 에 석재를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 석재가 중국에 갔을 때 청 말에 유명한 작가인 포작영 ( 포화蒲華 , 1839 ~ 1911) 이 아파서 누워있어서 진맥을 해서 처방해주니까 나아버렸다 . 그래서‘식물 중에도 기이한 식물이 있다더니 사람 중에도 기이한 사람이 있 다 .’라고 훌륭한 교양인으로 평가받았다 . 워낙 이름이 나니까 두산만 ( 頭山 滿 , 도야마 미쓰루 , 1855~1944) 이 제약의 우두 머리인데 석재를 초청해서 갔다 . 석재 선생이 시 ( 詩 ), 서 ( 書 ), 화 ( 畵 ), 그리고 장기 , 바둑 이 두 개는 국수였다 . 한반도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 그 다음에 거문고를 잘 탔다 . 의학에 출중하고 제약에도 훌륭하고 이래서 8 능 ( 八能 ) 거사라고 했다 . 근데 일본에서 뇌졸중으로 귀국해서 얼마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오사카 신문에‘반도의 꽃이 지다 .’라고 그랬다 . 그렇다 . 17 살 때 하도 유명해서 대원군이 불러서 올라갔다 . 키가 180 센티에 인물도 잘생겼다 .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서예 잘하고 , 시작 ( 詩作 ) 을 잘하지 , 난초 사군자도 잘 그리니 대원군이 놀랐다 . 그래서 대원군이 석재 선생한테‘압록강 동쪽에서는 너를 깨트릴 사람이 없다 .’라고 했다 . 17 살 먹은 애인데 중인 출신이라 벼슬을 못하니까 아깝 다고 했다 . 그 정도로 동북아시아 중국 , 한국 , 일본에 떠들썩하게 위명을 떨쳤는데 진작 출생지인 대구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 다 . 그래서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만들고 제자들 전시회도 열고 강연도 하고 서예 진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이때 제자인 운강 배효원 ( 裵孝源 , 1898~1942), 죽농 서동균 ( 徐東均 , 1892~1978), 긍석 김진만 ( 金鎭萬 , 1876~1933) 과 같은 유명한 서예 인들이 나왔다 . 근데 죽농은 뒷날에 63 세 이후는 농 ( 農 ) 자 뒤에 사람 인자를 붙인다 . 그래서 농자 뒤에 인이 붙어있으면 서동
균 선생이 63 세 이후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 그 다음에 1923 년도에는 대구미술전람회라고 해서 교남시서화 연구회 회원들 그리고 서양화가들도 함께 굉장히 큰 전시를 했다 . 대구 상공 장려관에서 열었다 . 1923 년 11 월 달에 . 지금은 흔 적도 없다 . 다음이 교남시서화연구회 . 대구 지역에서만 활동한 게 아니고 한반도 전체였다 . 평양 , 원산 , 개성 , 서울 , 광주 , 전 주 , 경주 , 안동 , 서화가들이 다 모였다 . 대구가 당시로는 한국 시 , 서화의 중심지였다 . 그만큼 굉장히 컸다 . 그 다음에 1953 년 에 제자인 죽농이 그걸 이어받아서 영남서화원으로 바꿔서 돌아가 시기 전까지 경영을 했다 . 죽농하고 석재하고 나이 차이가 40 살 차이다 . 죽농이 17 살 때 석재 선생이 불러서 갔다 . 그때 석재 57 살이었다 . 석재 선생의 16 살 아래가 긍석 김진만 선생이다 . 1927 년에 이상춘 ( 李相春 , 1910~1937) 이라는 사람은 조금 사회주의자인데 대구 상고 재학 시절에 이 젊은이가 주최해서 영 과회 (0 科會 , 1927~1929) 를 만들었다 . 카탈로그를 보면 청소 년들을 위한 문예활동이다 . 그림부도 있고 , 동화부도 있고 . 그 때 화가로서 서동진 (1900~1970), 박명조 (1906~1969), 최화수 (1902~ 미상 ) 등등이 찬조 출품을 했다 . 그 당시에 대구에 있는 일본인 작가들이 대구 미술가협회를 만들어서 활동을 했다 . 대구
만
아니다 . 지금의 미
술가협회랑은 다르다 . 한국 작가들이 발표할 곳이 없으니까 몇 몇이 거기에 참여했다 . 그 다음 경북 미술가협회라고 대구뿐 만 아니라 경북 전체에서 일본인들이 경북 미술가협회를 만들었 다 . 거기까지도 한국 사람들이 참여했다 . 이러다가 서동진 선생 이 조선 사람들끼리 만들자고 해서 만든 것이‘향토회 ( 鄕土會 , 1930~1935)’다 . 그 때가 1930 년도다 . 대구 사람만 했던 것이 다. 서동진 선생은 누군가 하면 대구 미술사를 하고 있었는데 순수 미 술은 아니고 마크 , 응용 미술 쪽이었다 . 디자인 회사를 하고 있었 는데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가 옆에 쪼그마한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데 너무 잘 그리는 것이다 .‘이름이 뭐꼬’하니 이인성이라 그 러는 것이다 . 이인성은 너무 가난해서 11 살 때까지 학교를 못 갔다 . 집이 막걸리 집이다 . 국밥 팔고 . 자기 아버지는 술만 마시고 어머니가 일하고 . 너무 가난하니까 동네 유지들이 학교 안 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11 살에 수창 국민학교에 입학한다 . 수창국민학 교에 이인성의 학적부를 보러 내가 갔었다 . 도화 ( 미술 ) 가 1 학년 때만 9 점이고 졸업할 때까지 만점이다 . 그때부터 그림을 잘했 구나 . 그 외에도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 보니까 음악도 1 학년 7 점이고 내내 8 점이다 . 향토회는 서동진 , 박명조 , 최화수 등등이 중심이 되어 발족했다 . 그런데 소속된 많은 작가가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특선하 고 야단법석인 것이다 . 그 당시 동아일보에 대구에 이만한 작가들이 있다는 게 정말로 놀랍다는 기사가 났다 . 지역에서 제일 많이 입선했고 질도 높았다 . 1930 년대 한국 근대 미술사를 논할 때에는 대구 미술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 평단에서
도 그렇게 말하고 . 이인성은 1938 년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최우수상을 탔다 . 27 살에 . 한 반도 전체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 최우수상이 창덕궁 상이다 . 천재가 났 다 . 그 뒤에는 다른 사람들은 입선 , 특선하려고 내는데 이인성은 추천 작 가다 . 그 작품 이름이 경주의 계곡 ( 경주의 산곡에서 ) 이다 . 그게 아마 서울의 삼성에서 하는 리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그 뒤에 김용조 ( 金 龍祚 , 1916~1944) 라는 사람이 있다 . 달성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또 가 난해서 중학교를 못 갔다 .
이인성 _ 경주산곡에서 _1935년 (제 14회 조선미술전람회 창덕궁상) 캔버스에 유채 _129x191cm _ 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김용조는 그때 담임선생님이 원화 여자 중 · 고등학교를 세운 동요 작가 이응창 ( 李應昌 , 시인 , 아동문학가 , 1906~1973) 이었다 . 선생님이 김용조의 재주를 알아봤다 . 옛날에 원화여고가 어디 있었 냐 하면 달성공원 들어가기 전 왼편에 커다랗게 건물이 있었다 . 그게 원화여고였다 . 신라 시대 때 화랑이 있었고 여자는 원화를 했다 . 거기 강당 위에다가 이응창 선생이 자기 처제 ( 그 당시에 하이힐을 처음 신었다고 한다 ) 모자를 딱 쓰고 양장 입고 모델 로 해서 그리라고 했다 . 그 뒤에 무영당 백화점 주인이 불러서 취직해서 일하고 그림 그리고 이러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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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데 이인성의 뒷 코스를 다 밟았다 . 그렇지만 최우수상까지는 못 갔다 . 김용조는 28 살에 죽었다 . 일본에서 고생하다가 건
Sa:Gak
대학은 못 가고 학원 같은 곳에 다녔다 . 낮에는 그림 그리고 저녁에 학원 다니고 . 김용조도 이인성보다는 후배다 . 4 년인가 후 강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죽어버렸다 . 당시에는 폐병 ( 폐결핵 ) 으로 죽은 사람이 거의 다다 . 요새는 암으로 죽는다고 하면 그 당시는 영양실조 많고 , 약 개발 안 됐고 , 그냥 죽는 거다 . 김용조가 28 살에 죽는데 동산병원에서‘발이 시리다 . 이응창 선생 의 양말을 좀 갖다 다오 .’해가지고 급히 가져다가 양말을 신고 죽었다 . 발이 시리니까 양말을 신어야 되겠는데 얼른 생각난 게 이응창 선생이다 .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 이인성은 어떻게 죽었나 하면 만 38 살에 . 27 살에 한반도 전체에서 최고였다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존심이 높았다 . 1950 년도에 포장마차 같은 곳에 술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가지고 오는데 경찰이‘누구야 !’그랬다 . 총을 가져다 대니까 이인성이‘대 한민국의 이인성을 몰라봐 !’라고 고함을 질렀더니 경찰이 놀래서 굉장히 높은 사람인 줄 알고 죄송하다고 그러고 갔다 . 가고 나서 경찰이 포장마차 주인한테‘저 사람이 누구냐’그러니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그랬다 . 그러니 경찰이 화가 나 따라가서 이인성의 집 마당에서 이인성이 나와서 신발 신는데 총 땡겨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 비명 했다 . 향토회는 주동이 서동진 , 박명조 , 최화수 등등이다 . 뒤에는 이인성 , 김용조도 들어오고 , 배명학도 들어오고 . 이렇게 봤을 때 대구 초창기 도입자는 이상정 장군이고 미술 발전의 기반을 만든 사람은 서동진 씨라고 본다 . 그리고 박명조 선생을 알아야 한 다. 박명조 선생은 대구 사람으로서 최초로 조선미전에 입선한 사람이다 . 그러니까 1926 년도 , 제 5 회 조선미전에 . 그해 9 월에 약령시장에 옛날 제일교회 있는데 바로 맞은 편에 빨간 벽돌 이층집이 있다 . 교남기독청년회관이다 . YMCA. 자기가 입선했던 1926 년 9 월에 거기서 최초 개인전을 열었다 . 대구
로
박명조가 이인성보다 훨씬 선배다 . 자기는 내내 입선만 계속했다 . 그런데 이인성은 급상승하고
어린 것이 최우수상도 받았다고 하니까 한계를 느끼고 붓을 꺾었다고 한다 . 박명조 선생의 취미가 정원 가꾸기다 . 그 양반 흔적 이 수성못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호반 레스토랑이 있다 . 요새는 커피점 ( 탐앤탐스 수성못 호반점 ) 하더라 . 그게 자기가 만든 거 다 . 후에 아들이 콘크리트로 해서 변형이 되었다 .
이렇게 역사적으로는 정리가 되었는데 평론가의 입장에서 활동을 볼 때 예술가는 숨 쉬고 발 딛고 사는 현재 또는 현실의 부조리 를 고발하거나 , 시대정신을 대변하거나 , 또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해야 한다 .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작가들이 그림을 그렸는데 민족정신을 고양한다든지 , 독립정신을 환기한다든지 , 일제에 항거하는 작품이 없다 . 우리나라 전체에 . 이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도 마찬가지다 . 6.25 전쟁은 우리 민족끼리의 전면전이었다 . 한반도가 완전히 황폐화 되었다 . 유사 이래에 그 런 처참한 비극을 보고도 그걸 주제로 한 소설이 제대로 없다 . 남겨지지 않은게 아니라 작가들이 안 쓴 거다 . 미술이나 문학이나 마찬가지로 작가로서의 사명이 없었다 . 박정희 시대에 김지하 시인은 오적에 대한 글을 썼다가 감옥에 갔다 . 그런 저항적인 , 시대 의 부정 , 부조리에 저항하는 그런 정신이 없었다는 거다 .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었다 . 이인성도‘그림을 잘 그리는 기술자지 지식인은 아니었다 .’라는 평가를 받는다 .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 일제강점기 지나고 6.25 를 지나면서도 시대를 고발한다든지 , 시대를 담아내는 작품이 없었다는 건 지식인이 없었다는 거다 . 우리나라 전체가 마찬가지다 . 결론은 서양화계를 볼 때 초창기 도입단계다 . 배우는 단계 . 동양화는 입체감이 없었다 .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서양화 기법을 체득 하느라 거기에 작가들이 많은 시간을 보냈다 . 로
화
수
처음 서양화가 들어올 때는 신 ( 新 )
미술이라고 그랬다 . 동양화에는 대부분 수묵화인데 색채에 대해서는 없는 거다 . 컬러뿐만 아니라 색 ( 색정 , 여색 , 색사 따위 ) 을 바빴다 . 즉 , 명암 처리 , 원근법 , 채색법 , 발색 등 기본적인 기술면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거기에 치우쳤다 .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식을 환기시키고 , 독립정신을 나타내고 , 항일정신이라든지 저항정신이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 .
화
대
1922 년에 조선미술전람회가 생겼다고 했다 .
바로 전년도에 조선인들끼리 모여서 하는 단체가 있었다 . 그 단체를 조선총독부가 없애고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어버렸다 . 그러 니까 이인성도 처음부터 해방될 때까지 조선미전에만 그림을 출품했다 . 그래서 평단에서 친일파라는 소리도 들었고 , 기술자지 지 식인은 아니었다 .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미술전람회에만 몰두했다는 지적도 있다 . 순응해버린 거다 . 요새 친일파 이야기를 많이 한다 . 이완용이 매국노라고 이야기한다 . 어느 누가 그 자리에 앉았어도 매국노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 그 당시에 살기 위해서 . 이광수부터 안익태도 . 이 사람들이 선구자였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먼저 탄압할 거 아닌가 . 자기들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복종해 야 했단 말이다 . 일제강점기가 35 년인데 한 사람의 일생이다 . 그때 사업했던 사람들은 어째 . 일본 관리들에게 아첨해야 한다 . 국 채보상운동 했던 서상돈 씨의 아들은 엄청난 친일이었다 . 큰 사업을 했었다 . 후에 민족학교라고 해서 대륜중 · 고등학교를 세우 는데 이상화도 국어 가르치고 서동진도 미술 가르치고 그랬다 , 무료로 . 거기 운영이 어려웠을 때 서상돈 씨 아들이 돈을 지원해서 학교 살렸다 . 그러니까 하나만 가지고 친일파라고 하기 어렵다 . 정리하면 신미술이란 이름으로 서양화가 들어올 때 서양화가 갖는 특징 , 명암 처리 , 원근법 , 발색 , 붓 터치도 . 우리는 평필인데 납작하니 . 이러한 새로운 기법과 방법 , 그리고 물감과 붓이라는 회 화 도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 기법 표현 도구를 다루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거기에만 열중하다 보니까 시대 의식을 가지지 못했던 점이 지금 보면 단점이다 .
원
인터뷰 손현민 / 정리 박현정 손현민
9 Sa:Gak
억제했다 . 신 ( 新 ) 미술이란 이름으로 서양화가 도입되었다 . 그 당시는 새로운 기법인 서양화의 조형 방법 , 표현 기법을 익히기
귀신통이라고 불렸던 대구최초의 피아노가 사문진으로, 근대 대구 음악계 이야기
1919
1945
대구
대
대구 최초의 피아노가 1900년 3월 26일에 화원 사문진을 통 해 들어온다. 만세 운동 전인 1917년에 박태준의 형인 박태원 (1897~1921, 곡‘클레멘타인’의 노래 가사를 지은 음악가)이 제 일교회에서 선후배 20명을 모아 곡‘할렐루야’로 합창 발표를 한 다. 박태원은 대구 최초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고 이상화 시인에 게 영향을 끼쳤다. 1919년에는 일제 강점 하에 총독부에 의해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자유롭게 음악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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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교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발표회를 가진 것이 대구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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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920년대에 대구 제일교회(경북지방 최초의 기독교회)에 다 의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서양 음악이 신문물이었다. 교회를 중 심으로 미국의 단순하고 동요 성격을 띠는 노래를 독창이나 중 창으로 주로 불렀다. 1920년도에 계성학교를 나온 선후배들 4 명이 모여 4중창을 만들었다. 그것이‘교남4중창단’이다. 성가 대 멤버들이자 노래를 정말 잘하는 신지식인으로 이루어졌다. 일 종의 선교단이었다. 지역에 다니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 박태준 (1900~1986), 김태술(1899~1979), 현제명(1903~1960), 권영 화(?~?)가 그들이다. 김태술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MIT 공과대 학을 다녔던 사람이다. 음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계성학교에서 트 럼본을 연주했다. 그리고 현제명은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가이다. 또 한명은 베이스를 맡았던 권영화이다. 동산 병원 약제과장을 했 는데 35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장례 식을 치룬 사람이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은 완전히 말살된다. 일제에 의해 학교 음악교육에서 국악이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클래식과 같은 전문 국악인 들의 판소리나 민요 등은 가끔 공연되었다. 그래서 노래도 하고 극도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뮤지컬 같은 창극으로 바뀐다. 주로 대 구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대구에는 창극을 공연하는 팀이 없었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1920년대의 활동이 활성화된다. 서울, 평양, 러시아, 일본 등 외부에서 음악가들이 공연을 하러 왔다. 1940
청라언덕에 있는 박태준연보 박태준과 대구근대음악은 길을 같이한다.
년대에도 외부에서 공연을 하러 많이 왔다. 선교사가 미국, 호주에서 왔지만 대부분 미국의 장로교파 선교사였다. 그들이 와서 음 악을 전파시켰다. 1937년도부터 1940년도 초반까지는 대동아 전쟁으로 음악 활동이 위축된다. 그러다 해방된다. 들이 많아지자 1912년과 1914년에 각각 교회가 분립된다. 옛날에 대구에 있었던 성의 서문에는 서문교회가 그리고 남산에는 남 산교회가 생겼다. 교회가 분립되어 활성화되고 1920년대 후반이 되면 대구 출신의 신여성, 신남성이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 선교사들이 지원하는 학비를 받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데, 부산에서 배를 타면 일본에 들렀다가 하와이로 가는데 2개월 이상 이 걸린다. 입국 심사도 굉장히 까다롭다. 유학을 끝낸 이후 1930년대 초반에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온다. 대구에는 학교가 거의 없어 자리 잡기가 어려웠기에 서울이나 평양으로 간다. 대구에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가 1952년 한국전쟁 기간에 생긴다. 유학 다녀 온 그 분들이 활동을 하면서 간간이 대구에 왔다. 박태준의 경우에는 1924년부터 총 3번에 걸쳐서 계성학교에 12년 동안 근무를 했다. 이점희도 나중에는 영남대학교에서 정년을 다한다. 김문보, 현제명, 권태호 등 향토 출신 음악가들은 어 느 곳에서 근무를 하든 주기적으로 와서 공연을 했다. 대구가 재해를 입으면 지원을 하기 위해 공연을 여러 번 했었다.
인터뷰 손현민 / 정리 손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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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1900년도 3월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오고 찬송가 및 간단한 미국 노래가 제일교회를 통해서 불려졌다. 제일교회의 신자
대구 근대미술 연구 김 태 곤 | 대백갤러리 큐레이터 기획자
지난 20세기 우리의 근대사는 개항과 함께 서구 열강에 의한 침탈이 본격화 되던 시기 로서 서양문물의 유입이 가져다 준 개방성과 굴욕의 역사가 공존했던 시기였다. 36년간 지속된 암울했던 역경 속에서도 우리민족은 자주독립의 강인한 항일의지를 대내·외적 으로 표출했었다. 특히 올해는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려는 의지의 표상인 3·1운 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이루어진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조선미전 관람(이화여전 여학생)
어느 민족이던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와 아픈 흔적들을 숨기거나 왜곡하기 보다는 이를 통해 오늘의 교훈으로 삼고, 나아가 미래의 긍정적인 삶을 설계하는 표지로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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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보는 우리미술 역시 전통미술의 단절과 서양문물의 유입에 비롯된 서양화의 보급 및 대중화는 조선시대까지 이어 오던 시각예술의 새로운 전환기로 인식할 수 있다. 서양미술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을 통해 직접적인 교류로 유입된 미술문 화라고 말하기 보다는 식민지배하에 일본을 통한 왜곡된 서양화의 보급은 오늘날 한국미술의 전개와 역사서술에 있어 적잖은 어려 움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사항의 특별한 인식 속에서 우리의 근대미술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동안 숨겨져 있 거나 왜곡되었던 사건과 인물들을 발굴조사하며 연구해 나가는 것 역시 오늘날을 살아가는 미술사학자가 담당해야할 책무일 것이 다. 이번 연구는 그동안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서술에 있어 소외시 되었던 대구근대미술의 중요한 시대적 의미와 미술사적 가치를 다양한 시각과 자료발굴을 통해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국근대미술에 있어 서양화의 유입이 이루어지던 시대적 배경과 화가들의 활동부터 살펴보며, 이어 대구에 서양미술이 본격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환경과 주요인물, 주요전시 중 심으로 시각을 확대해 보고자 한다. 1920년대 전후 서양미술 도입기에 활동했던 다양한 서양화가들과 전통 서화가, 일본인 화가들 을 총망라한 조사와 연구는 그동안 한정된 자료들을 통한 선행연구의 한계점과 편협한 인식에서 비롯된 모순점을 찾아보는데 중점 을 두고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기록 자료와 작품, 유품(사진, 서신, 기록물 등) 발굴과 수집에 주력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일본방문을 통해 근대 화가들의 흔적과 활동상에 관한 조사도 함께 이어갈 예정이다. 비록 한정된 지면을 통해 연재되는 제약 은 있지만 이러한 연구를 통해 대구근대미술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다룬다는 긍정적 의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에 의해 본격적인 서양미술이 도입된 건 일본 동경미술학교 유학을 마치고 1915년 귀국한 서 울의 고희동을 꼽을 수 있다. 반면 대구의 서양미술 도입은 1917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상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상 정에 의해 도입된 서양미술은 서울의 서양화 도입과는 불과 2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일본을 통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생적 으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대구 서양화의 전통성과 독자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울과 평양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은 있었지만
제2회 향토회전 기념사진 - 앞줄 왼쪽부터 서병기,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 뒷줄 왼쪽 배명학 순(1931)
왼쪽부터 시계방향) 대구미술전람회 리플렛(1923)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조선총독부발행(1924) 제2회 영과회전 리플렛(1928) 제1회 향토회전 목록표(1930) 제3회 영과회전 팜플렛(1929)
좌) 조선미전 입선관련 기사(동아일보.1928.5.14) 우) 제16회 조선미전에 새로이 추천작가가 된 이인성과 김은호를 보도한 신문기사(1937년)
전문적인 교육기관의 다양화 추세에 따라 서화계에서도 후 진 양성기관의 필요성과 전통서화계의 발전적 의식변화를 위해 대구 출신의 서화가 석재 서병오에 의해「교남시서화 연구회」가 1922년 조직되었다. 이는 1922년 1월 대구의 유지들과 서화애호가 등 수십 명 의 발기에 의해 결정된 단체의 설립배경과 함께 신진양성과 서법, 문인화법을 지도하기 위한 서화가들의 노력이 대구 근대미술을 뿌리를 내리는데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가도 조심스럽게 연구되어져야 할 부분이다. 대구근대미술에 대한 선행 연구를 통해 1920년대 초 전통서화 가들과 함께 시작된 서양화라는 미술문화는 서울화단의 아무런 관습 없이 지역 문화인들의 교류와 대구 거주 일본 미술인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정과 박명조, 회』(赭土會:아까쯔지)에 이어 한국인들로 구축된『영과회』는 독자적인 대구 미술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 다. 하지만 아직까지 영과회 활동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자료들 이 추가로 발굴되지 않아 기존 발표된 사실에 입각한 정리와 분 석에 머물고 있는 점 역시 지역미술사 연구의 한계점으로 여겨 진다. 하지만 이어지는 향토회의 활동 등을 통해 영과회와 향토 회가 대구미술은 물론 당시 국내화단에 어떠한 위치와 영향력 을 끼쳤는지를 보다. 더불어 구체적이고 정밀한 자료조사와 발 굴을 통해 조명을 받지 못했던 주요화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헌조사 작업을 병행해 나자고자 한다.
상) 향토회전 1회 관람모습(1930) 하) 서동진이 운영했던 대구미술사 ( 앞줄 왼쪽부터 죽농 서동균, 서동진, 이인성 등)
대구미술은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대구·경북 은 물론이고 한국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 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이번 연재로 이러한 화가들의 예술적 발
자취를 통해 미술의 본질과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 이 글의 시작은 3월을 맞아 근대대구를 돌아보는 기획으로 시작하지만 6회에 걸쳐 연재 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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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의 개인전에 이어 일본미술인 미술 서클로 결성된『자토
작업실릴레이 1
김찬주 의 공존 共存의 공간 共間
서양화가 김 찬 주
자연과 동물을 소재로 그리는 작가 김찬주를 만나러 경북 영천에 위치한 그의 작 업실을 방문했다. 김찬주의 작업실에는 그가 그리는 공존의 이야기들로 가득했 다. 작가가 직접 내려주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기소개 한다면 자연과 동물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공간을 만
드는 40대 중반의 작가다. 작품의 소재는 동물과 어린아이가 대부분이다. 잃어버린 순수성과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동화적으로 표현한다. 상상할 수 있고 공감이 일 수 있는 몽환적인 공간을 연출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대구에서는 2년 정도 작업실을 가졌었던 적이 있다.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했고 고향이기도 한 영천에 정착했다. 김찬주가 생각하는 공존 예전에는 공존을 표현하기 위해 어두운 그림을 많
이 그렸다. 예를 들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살찐 동물과 황폐한 배경을 어둡게 그려낸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자연환 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비판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작품들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근데 지금의 공존은 다르다. 공존은 말 자체가 서로 맞춰가면서 공생하는 관계를 얘기하는 건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점차 밝아졌다. 김찬주 공존, oil on canvas, 130x96, 2012
영화‘라이프 오브 파이’와 느낌이 비슷하다. 혹시 영화를 보았나? 봤다. 그렇
지만 매체를 접할 때 비슷한 부분은 피해가려고 노력한다. 작가는 특이성 을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경우는 단일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보다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해서 이야기를 하나 더 만들어나가기를 원한다.‘라이프 오브 파이’말고도 아내가 영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추천해줬 었다. 게다가 영화 말고도 가끔 특이한 곳에서 느낌이 온다. 예를 들면 신문을 보다가 사진의 중심이 아닌 그 뒤의 배경에 나온 사 람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식으로 일상에서 느낌이 온다. 항상 자신만의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작가로서의 개성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좋아하는 음악은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근데 지금은 라디오도 고장이 났다. 그냥 조용히 작업하거나 다큐멘터리 소리가 살짝
들리게 틀어놓고 작업을 한다. 최근에 드라마‘미스터 션샤인’수록곡인 가수 이수현의‘소리’라는 노래를 들었는데 좋았다. 스트레스 푸는 법 스트레스는 안 받으려고 매우 노력한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편은 아니다. 작품에 전념한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사람을 자주 못 만난다. 대신 그림을 완성하면 성취감이 크다. 가끔 아내랑 같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의 하 나다. 친한 사람들과 커피 한잔할 때도 좋다. 그렇지만 90% 이상의 시간을 그림에 투자한다. 동물과 소통
대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다. 동물은 계속 함께 있었다. 현재는 장모님이 개 여덟 마리를 키우신다. 예전에는 집
에서 동물을 키웠는데 계속 작업실에 와 있고 잘 돌봐주지 못해서 대구에 계신 장모님 집에 보냈다. 대신 장모님 집에 가서 동물들 을 자주 본다. 개와 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 개는 워낙 애교가 많지만, 고양이는 무관심한 척하다가도 한 번씩 다리를 감고 지나가는 것이 굉장히 매력 있다.
김찬주 공존, oil on canvas, 89.4x130.3, 2018
공존, oil on canvas, 73x73, 2015
그림에 소녀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처음에는 동물만 그렸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보육원에 간 적이 있는데 아이들의 얼굴
에 그늘이 져 있는 것을 보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때 아이들을 그렸고 그 느낌이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른보다는 아이를 그리면 공감대 형성이 잘 되고 공존과 잘 어우러져 느낌이 극대화된다. 뒷모습을 그리는 이유는 상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 얼 굴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완결되어 버리고 시선이 쏠려버린다. 그림 속 피사체들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은 갈망이 담긴 눈빛 혹은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관람자와 그림 속 인물이 보는 방향이 같도록 설정 했다. 작품에 대해 추가로 말하면 사막의 펭귄, 버스 정류장의 코끼리는 우리가 어린 시절 한 번쯤 꿈꿔 본 장면일지도 모른다. 우 리가 잃어가는 동심과 순수성을 일깨워 공존하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간 것이다. 러시아의 추억 3년 반 동안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관광도시이기도 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참 아름다웠다. 공모전
참가 그리고 한국 미술계의 동향도 알아볼 겸 중간에 한번 한국에 들어온 것을 제외하면 계속 러시아에 있었다. 러시아는 여름에 백야가 멋지다. 백야가 있는 도시가 전 세계에서 다섯 군데 정도밖에 없다. 백야 때는 해가 1시쯤에 질 듯 말 듯하다가 4시면 다시 뜬다. 5월 초부터 시작하고 6월이 절정인데 정말 좋았다. 무엇보다 자연광에서 그림 그리기에 좋았다. 겨울에는 해가 늦게 뜨는데 그래서 우울증이 올 정도다. 그럴 때는 사람 성향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현재의 그림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고 한국에 와서 형성된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확고한 주체성이다. 작가에게는 이야기를 정체시키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나의 경우는 이야기식의 그림이라서 정체가 되면 물린다식상해진다. 그러지 않기 위해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매우 힘들다. 변화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 말고 다른 욕심은 별로 없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고 싶은 말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인터뷰 손현민 객원기자 사진 손현민 작품사진 김찬주작가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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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 COULMN
얼마 전‘자유정신을 말하다’로 대구, 부산,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특별한 모임을 했다. 구성원들 중에는 노재순 전한국미술협회이사장, 허종하 대한민국남부미술협회이사장을 비롯해 석점득 대학교수, 정연주 구의원, 김결수 감독, 이문하 미술잡지 출간 대표 등 70대에서 30대 작가들이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사람 사는 세상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고 생각이 서로 다른 작가들이 만나서 즐겁게 놀고 배우며 세월이 흘러 저승 사가 부르면 그때가자’고 의미심장한 연륜을 느끼는 인사말을 노재순 작가가 했다. 1960년대에는 거의 한 집에 가족들은 보통 7-8명으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모시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네어르신께 인사 잘하는 예의바른 아이 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인성교육이었다. 사는 곳에 따라 차이는 있게지만 놀이로는 구슬, 딱지, 자치기 같은 놀이를 하며 뛰어 놀았다. 그 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었고 미세먼지와의 전쟁이 없는 환경에서 동네 아이들과의 싸움은 오히려 즐거운 놀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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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웠다. 이렇게 성장한 우리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교육받으며 인적관계에 충실하였고 이 후 예술분야에 종사하며 창의적 사고로 지금의 우리세대 문화적 해택을 누리며 일반인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미술인이라는 직업이 특별하지는 않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다만 스스로 선택한 일이였기에 그저 감내 할 뿐이 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 예술의 시작이고 예술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요즘은 과거와 달리 미술가가 학생들 이 선망하는 상위권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 현장에서의 예술교육은 훌륭한 예술 작품을 보면서 일상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고 더 나아가서 실제 작품을 창작하는데 필요한 지원으로 상상력과 창조력을 길러주기에 충분한 교육은 아니었다 지금 작가들은 예술가로써 자가만의 창작으로 존재감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고 또, 자녀들에게도 예술이야 말로 과학이고, 과거 이고, 현재이며. 그리고 미래라고 전하고 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교육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야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생각 이나 그 사람이 사는 환경도 다르기에 서로를 인정하고 개인적 의사를 존중해야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고 돈 없으면 사람 취급 받기 어렵다. 권력과 돈을 앞세워 위세를 부리는 이들은 결국 돈에 인생을 망치게 되고 사람과의 신의와 관계를 소중히 하는 사람들은 삶을 행 복하게 영위하며 살게 된다. 인복에 가치를 두고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다들 안다. 재물이 아닌 인복을 얻어 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도 돈과 권력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한 해 동안 국내서 여는 미술전이 2017년 기준 7790회에 달한다고 한다. 척박한 미술시장에서 대구만 봐도 많은 전시회가 만들어 지고 있다. 그래서 미술인들은 삶이 전시회를 중심으로 만나는 비중이 아주 크다. 대구미술 문화의 발전을 위해 행정기관에서 종사하고 있는 여러 분야의 전문직, 미술인의 권익과 복지를 위한 여러 관변단체나 순수예술단체의 역할은 바로 작가로서의 정신, 돈과 권력이 아닌 순수 사람관계로 이루어진다. 우리 미술인 모두는 서로가 권위와 재물이 아닌 이런 인복이 많다고 자랑하며 살아보면 어떨까,
김결수 작
인복이 많은 사람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 행복이 배가되지 않을까, 인복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닌 후천적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한다. 해 왔지만 늘 부족하고 현실에 불만스러워 한다. 작업에 충실해야할 미술인들이 행정 관료에게 굽실거리고 공평하지 않은 일에 무작정 동조하고 박수치는 일들이 결국은 대구미 술의 현 주소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분명한 목적과 실천으로 건전한 비판과 올바른 사람관계로 시대적 변화에 따 르지 못하면 순식간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다”는 속담이 있다. 대구미술발전을 위해 작가들이 인복을 서로 나누는데 노력해보면 어떨까 싶다. 미술인은 이런 인복과 순수성을 기준으로해서 이제라도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연구와 작업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그래 서 젊은 미술인들에게 기존가치와 권위주의로 기성세대를 불신하며 파벌적이고 편파적인 비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 청년을 포용할 수 있는 생동력 있는 자세가 대구화단을 이끌어 갈수 있다. 일부 미술인들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줄서기에 기생하는 잘못을 거듭하고 그런 행동을 용인하는 풍토는 대구미술을 지 금보다 더 황폐하게 만든다. 향토미술계에는 젊은 나이에 예술의 혼을 꽃 피우지 못하고 요절한 작가들이 다수고 후배들에게 정신 적 스승으로 남으며 생을 마감한 원로 작가분들도 대구에는 많이 있다. “인생별거 있습니까, 한 인생 즐기다 가는 거죠”, 이러기엔 미술가로서 삶은 그렇게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5G로 상징되는 4차 혁명 변화는 증기기관 산업혁명보다 몇 배 빠르고 큰 변혁이고 여기서 쳐지면 앞으로 30년은 뒤진다고 한다. 실감나고 긴장되고 소름끼친다. 이런 세상에 정상회담 한다고 기차타고 60시간 넘게 남행하는 김정은 이야기로 온종일 시끄럽고 며칠 뒤면 3.1만세운동 꼭 백년 기념으로 지역마다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우리미술인들도 이제 세상이 어찌 변화는지 보고 미래 걱정보다는 누가 뭘 잘못했냐가 우선이 아닌 대구미술이 어떻게 변해 가야 하는가를 놓고 지금의 베트남 하노이 못지않게 진지한 토의로 지혜의 장을 마련해 보자. 미술인 모두가 감동적인 작품으로 서로 사랑 할 수 있는 사람관계로 인복을 재산으로 늘리는 시작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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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인들은 낡은 기성화단과 현실에 안주하는 문화행정을 타파하고 새로운 미술행정에 의한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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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 SERIAL COULMN klavier.s.park@gmail.com
흔히들 나누는 말에서 어떤 작곡가는 노력형, 또 어떤 작곡가는 천재형이라 고 평하기도 하는데 모차르트만큼 신동(神童)이라는 평가에 대부분의 이들이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 작곡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 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 ~ 1791)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고 전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며 35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600곡이 넘는 작품들은 몇 세기를 거쳐오면서도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의 대열에 있다. 이번 호에서는 그의 생애 전반을 몇몇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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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신동의 이미지로 유럽 음악계에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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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있었는데는 아버지의 노고가 매우 컸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 트 (Leopold Mozart, 1719 ~ 1787)는 자녀들이 매우 어렸을 때부터 음악교 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자녀 중 특히 뛰어났던 볼프강에게 큰 기대를 걸 었고, 모차르트가 6살이 되던 1762년부터는 당시 유럽의 잘 정비되지 않은 교 통 환경을 생각했을 때 혹사에 가까울법한 10년에 걸친 연주 여행을 다니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이면에는 출세라는 현실적이면서도 세속적인 목적이 존재하였지만 그와 별개로 연주 여 그림 설명 투어에 참가한 모짜르트 가족 : 하프시코드에 앉은 7살짜리 볼프강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버지 레오폴트, 누나 난네를를 묘사. 1763년 11 월에 파리에서 Louis Carrogis Carmontelle (1717-1806)이 최초로 그린 모차르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희귀한 그림이다. Carmontelle의 원 본 그림은 Chantilly의 Musée Condé에 있다. (독일어: Johan Georg Leopold Mozart, 1719.11.14. ~ 1787. 5.28.)는 작곡가, 음악 교육가이자 바이올 리니스트이다. 지금은 볼프강 아마 모차르트의 아버지로 더 잘 알 려져 있지만 당대에는 잘 알려진 작곡가였다. (독일어: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 7.30.~1829.10.29.)는 오스트리아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의 누나다. 나네를(독일어:Nannerl)이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렸다.
행을 통하여 모차르트는 당대의 여러 작곡가와 교류하며 그의 음악 세계를 만 들어 갈 수 있었다, 로 모차르트는 유럽 전역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지만 1769년부터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다녔다. 이 시기에 그의 천재성이 빛나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시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Miserere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절대 유출 불가의 신성한 곡으 로, 성당 내부에서만 연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악보를 외부로 유출할 경우 신 성모독으로 파문을 시킬 정도였는데, 1770년 모차르트는 이 곡을 한 번만 듣 고 무려 9성부에 달하는 악보를 그려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당시에 매우 큰 스캔들이었으나 막상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4세는 이런 모차르트의 재능 을 크게 칭찬하고 훈장까지 하사하였다고 한다.
로.. 연주 여행을 끝낼 무렵 모차르트는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동의 이미지를 벗고 여느 음악가들처럼 구직 활동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 왔다. 당 시 음악가의 삶은 대부분 궁정에 소속된 궁정 음악가 또는 교회 소속 음악가로 활 동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유럽 각지의 연주 여행을 통하여 넓은 세계를 경험한 모 차르트에게 그런 생활은 너무 답답한 것이었다. 안정적인 생활을 바랐던 아버지와 충돌을 겪었지만 결국 모차르트는 25세에 비엔나에서 전업 작곡가의 길을 선택하 고 그러한 그의 선택은 남은 인생 동안 작곡 활동에 있어서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대부분의 장르에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오페라이다. 이탈리아 연주 여행을 통하여 당대의 유행했던 이 23 Sa:Gak
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많이 접하고 공부할 수 있었던 영향과 더불어 오페라라 는 장르가 성악, 관현악, 무대 예술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한 종합 예술이라 볼 때, 모차르트의 번뜩이는 천재성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오페라였다. 모차르 트는 전 생애에 걸쳐 17곡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 니> 등 이탈리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곡들과 더불어“밤의 여왕”으로 유명한 < 마술피리>와 같이 독일어 가사를 가진 징슈필이 있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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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이란 짧은 생을 살다간 모차르트의 마지막 곡은 장송곡인데 이는 결국 미완 성으로 남긴 채 사망하였다. 이 곡에 대한 루머는 1984년 개봉한 밀로스 포만 감 독의 영화 <아마데우스> 덕분에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벌어진 독살설이 가장 유 명하게 퍼져있지만 실상은 과소비와 낭비로 과도하게 지게 된 빚을 탕감하기 위해 이미 병중이었으나 건강을 해칠 정도로 무리하게 작곡을 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레퀴엠 전곡은 미완성 부분을 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 (Franz Xaver Süssmayr, 1766 ~ 1803)가 마무리한 것이다. 신동에서 프리랜서 작곡가까지 일생을 파란만장하게 살다 간 그의 생애를 따라 작품을 감상해보면 천재라는 수식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상)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하)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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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필자는 수업 중에 질문으로 한국 클래식분야에서의 스타를 5명만 말해보라고 한다. 성악, 악기, 발 레…, 세부 분야를 나눌 필요 없이 클래식 전 분야에서 말이다. 3명이상을 답하는 학생이 드물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5명 을 얼른 생각해내기가 힘들 것이다. 한번 해 볼까? 아마 가장 먼저 조수미가 떠오를 것이다. 다음에 강수진 이나 최근 언론에 가장 HOT 했던 조성진, 금난새 여기까지는 그나마 쉽게 떠오른다.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장한나…. 이 정도까지 답하면 주변에서 감 탄사가 나온다. 많이 안다고…. 대한민국에서 한해에 졸업하는 예술전공 학생들은 차지하고라도 유학 가서 최고학위까지 받고 세계적 콩쿨에 입상해 오는 예술가 들만 가지고 이야기해도 지금 대한민국 클래식 분야의 스타는 터무니없이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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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클래식스타들은 어떨까? 티켓파워를 가지고 이야기 해보자면 20년 전 경북대 대강당에 정경화 리사 이틀을 보러갔었다. 티켓은 일주일도 안 되어 매진이 되었다. 10년 전 수성아트피아에 조수미 리사이틀을 보러 갔었다. 물론 금방 매진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들의 공연은 속도는 느려졌어도 매진은 되었다. 그러다 3년 전 아는 분을 통해 초대권을 받았 다. 조수미 리사이틀 초대권이었다. 매진이 안 된 것이다. 스타의 유효기간이 가장 긴 클래식 분야에서도 결국엔 내리막이 있다. 대중음악 공연 쪽은 더 빠르다. 4년 전 돕고 있는 복지센터의 간사님이‘대표님 공연 보는 것 좋아하시죠?’라며 건낸 초대권이 서태지 콘서트 였다. 작년엔 대전에서 이승철 콘서트가 티켓이 팔리지 않아 콘서트를 취소했었다. 공연 중에 가장 선호도가 높은 뮤지컬 분야는 어떨까? 대구의 지역방송국에서 주최를 한 유명 뮤지컬을 초대받아 갔었다. 관객석 의 반이 비어있었다. 나처럼 초대받아 간 사람까지를 생각해보면 반 이상 티켓이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방송국 주최이기 때문에 방송 홍보를 어마 어마하게 했을 텐데도 말이다. 스타든 뮤지컬 같은 공연계의 스타장르이든 영원히 잘 팔리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틈새시장을 본다. 필자는 최근 대구 아양아트센터에서 데이트콘서트를 기획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 에서 공연이 3일 남았는데 티켓은 이미 매진되었다. 홍보기간 안에 설 연휴가 끼어 있고 스타가 없는 것 치곤 선전 한 것이다. 거기 에 더해 공연을 SNS에 홍보한 것을 보고 다른 지역문화예술회관에서 같은 공연을 해 달라는 섭외를 받았다. 이런 일이 짧은 시간에 운이 좋아 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동안 브랜드를 만들려는 노력들이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 한 것이다. 예정된 글의 반 이상을 썼는데 이제야 본론이다. 브랜드화를 위한 노하우를 하나만 이야기 하려고 한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스타 & 컨텐츠 라는 말은 누가와 무엇을 이라는 말이다. 누가는 스타이다. 이문세 콘서트, 이은미 콘서트, 이승환 콘서트 스타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해왔던 노래들을 오랜 팬 들을 위해 공 연을 한다. 오래 된 방식이고 여전히 공연계 대다수의 시장을 차 지한다. 다음이 무엇을 하느냐는 시장이다. 스타의 비중보단 컨 텐츠 자체의 힘으로 대중을 모으고 설득하는 것이다. 내가 매니 지먼트 하는 비아트리오의 첫 콘서트 제목이 비아트리오 콘서트 당연한 결과다. 방금 만들어진 비아트리오 라는 연주팀을 뭘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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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티켓까지 사서 보겠는가? 시행착오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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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친구와 가족을 통한 강매 말고는 티켓이 팔리지 않았다.
관객이 필요로 하는 공연컨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공연 컨텐츠가 태교음악회, 가족음악회. 데이트콘서트, 북콘서트...등이다. 결과는 성공적이 었다. 덤으로 비아트리오라는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많은 공연들을 통해 나름의 스타성이 생긴 것이다. 현재 비아트리오 라 는 이름은 최소한 영남권에 한해서는 공연관계자와 클래식매니아들 사이에선 꽤 알려졌다.‘컨텐츠에서 스타’로의 이동이 생기 고 있는 것이다.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결국엔 스타를 보기 위해 관객은 돈을 지불한다. 하지만 날 때부터 스타는 없다. 스타도 결국엔 노래 든 춤이든 연기든 컨텐츠를 통해 인지도를 쌓아 스타가 된 다. 관객이 오기 원하는가? 그럼 관객을 연구하라. 그리고 관객을 기쁘게 만들어라. 그럼 관객이 여러분들을 스타로 만들어 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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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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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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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탑곡 제 2마애불상군 탁본작업 -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탁본한다.
탁본은 바위나 비(碑), 나무등에 새겨진 명문이나 서체 또는 그림이나 문양을 먹으로 찍는 것을 말하며, 기록된 내용을 남기거나 새로운 예술품으로 재탄생 시키는데 다양하게 응용되어 사용되어 왔다. 당(唐)시대에는 타본(打本) 또는 탑본(榻本)이라 하였으며, 송대(宋代)에는 탁본(拓本)이라 하였다. 탁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용을 조사 하여 기초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그리고 탁본이 가능한 여부에 따라 종이의 두께와 크 기, 탁본 방망이의 종류와 크기를 판단한다. 종이는 잘 찢어지지 않는 전통한지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조각되거나 새겨진 표면 에 이끼나 불순물을 제거한 후 위에 종이를 대고 물을 뿌린 후 조심스럽게 눌러 대상물의 양각·음각에 따라 종이가 도드라지게 한 다. 그리고 난 뒤 종이 위에 먹이나 잉크 등을 솜방망이에 묻혀 돌출된 곳에 두드려 검게 나타나게 한다. 이때 표면의 양각 부분은 검게 되고, 음각 부분은 희게 남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탁본은 실물 크기와 똑같은 정교한 복제물을 얻을 수 있어 사진술이 고 도로 발달된 지금에도 고고학이나 미술사 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탁본은 일반적으로 본인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조각했거나 새긴 표면을 복사하는 데 쓰인다. 하지만 본인이 새겨서 미술품의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창작물에 응용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
탁본하는데 쓰이는 도구들 , 솜방망이가 필수이다. 세심한 곳에는 솔도 쓰인다.
한 탁본의 목적은 인쇄와 같은 반복적인 재생복제와 작품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 있기도 하며. 예술품의 또 다른 세계를 표현하 기도 하는 것이다. 탁본은 습탁(濕拓)과 건탁(乾拓)의 두 종류로 구별되는데, 습탁은 탁본하고자 하는 것에 물로 종이를 밀착시킨 다음 묵즙(墨汁:먹 물)을 솜방망이에 묻혀서 종이 위를 조금씩 두드리면 음각부분 즉 들어간 부분은 희게 나타나고 돌출된 부분은 검게 나타나 문자 나 문양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건탁은 대상물체에 물을 쓰지 않고 고형묵(固形墨)을 종이 위에 문질러서 파이지 않은 부분에 탁본은 주로 습탁을 많이 하고 있으며, 습탁은 다시 오금탁(烏金拓), 선익탁(蟬翼拓), 격마탁(隔麻拓) 등으로 구별된다. 오금탁(烏 金拓)은 고급 먹과 종이를 사용하여, 아름답고 섬새한 묵색(墨色)이 나타나서 진한 먹색이 마치 까마귀 날개가 반짝이는 모양과 같 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익탁(蟬翼拓)은 먹색을 엷게 하여 굵은 방망이를 사용여 두드리면 마치 매미 날개같이 작고 촘촘한 공 백이 생기게 하는 방법이며, 격마탁(隔麻拓)은 거친 석질로 인하여 마치 마줄기가 얽힌 것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탁본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1442년(세종 24) 5월 병술일(丙戌日)의 기록에는 일찍이 각도 사 사(寺社:절)의 비명을 인쇄하여 서법을 삼고자 이들을 모인하여 바치게 하였는데, 이 날에 이르러 모인한 것을 대소신료에게 하사 하였다고 되어 있다. 성종대에도 법첩을 만들고 당나라 태종의 서(書)에서 집자(集字)한 흥법사진공대사비(興法寺眞空大師碑)의 묵본을 만드는 일이 계속되었고, 후대에 내려와 낭선군(朗善君)이우(李俁)가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인행(印行)하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청나라 고증학풍의 영향을 받아 전국의 저명한 금석문을 조사 하였다.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존 되어있는 국보 제3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서울 북한산(일명 三角山) 남쪽 승가사(僧伽寺) 서남방에 위치한 비봉(碑峰) 꼭대기에 있었는데,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무학의 비’또 는‘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 시 이듬 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비로소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여 비를 판독하고 그 내용을 고증한 바 있다. 오경석(吳慶錫)의『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은 삼국 이래 금석문의 목록과 몇가지 금석문의 판독문 전문 을 싣고 이를 고증했다. 이밖에 금석문을 수집, 연구한 대표적 인물로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조인영(趙寅永), 정약용(丁若鏞)을 들 수 있다. 일제시 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금석문을 6년 동안 조사하여 탁본 1천여 점을 제작, 조사하고 그 결과 1919년『조선금석총람(朝鮮金 石總覽)』을 간행했다. 탁본의 대상물이 되는 비석들은 현재 훼손 된 것도 많이 있는데, 자연적인 것도 있지만 주로 인위적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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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 묻게 하는 방법이다. 어릴적 동전을 종이로 덮어 연필로 문질러 그림이 나타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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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40cm x 35cm 기와 탁본에 글씨 _ 탁본·글씨 박세호
많다. 탁본에 의한 것으로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자들이 인위적으로 파손을 하는 것이다. 이유인즉, 비석 글씨가 좋다고 소문이나니, 걸핏하면 그것을 관리하는 현지 지방관한테 부탁해서는 탁본을 떠서 보내라고 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탁본의 고통에 시달린 현 지 주민들이 도끼로 깨뜨려 버린 것이다. 처음에 깨뜨려서 탁본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후에 그 파편들이라도 탁본해서 보내라는 명령이 자주 내려왔다. 결국 그 파편들조차 아 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몸통이 사라진 고대의 비석들에서 우리는 탁본의 얼마나 힘들 고 고통스러운가를 알 수가 있다. 군위 인각사비도 이러한 이유로 훼멸되었다.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원이 역주한《조선불교통사》제4권에 실린 내용으로 탁본이 얼 마나 힘든가에 대한 글이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탁본이지만 지금까지도 꾸준히 전해져 내려고 있다. 탁본은 글자선 등 새겨진 미묘한 부분이 그대로 표출됨으로써 현대의 사진으로는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 까지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탁본을 실시하고 있다. 탁본은 서체를 연구하 는 서예가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기술이며, 금석학을 연구하는 고고학자, 문학가, 역사학 자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탁본은 서예가들에게는 옛 선현들의 서체(書體)와 필법, 운필 등 연구와 법첩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다. 역사가들에게는 옛 역사를 복원 고증하는 데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금석학은 인류가 남긴 유물 중에서 새겨진 연대에 의거 해서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아울러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학문인 것이다. 금석류에 문자나 문양을 새기는 것은 고 대로부터 행해져왔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금석문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 법으로 탁본이 발달되었던 것이다. 금석문 연구는 고고학적 목적과 서체의 연구 등 여러 가지 학문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학자들이나 호사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취미로 하고 있다. 과거의 시간을 영원 히 기록하는 기술인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제1면 탁본 경주남산 탑곡제2불상군 탁본 작업하는 박세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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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탁본 요구에 지친 백성들이 비를 동강내다> 단목端目스님이 김생의 글자를 모아 「백월선사비白月禪師碑」를 썼다. 본래 봉화군 타자산 駝子山 석남사石南寺에 있었는데, 절이 폐허되고 비만 남은 지 오래되었다. 영천군수 이항 李沆이 그 필적을 보배처럼 아껴, 정덕正德4년(1509) 8월 영천군 자민루子民樓 아래로 옮 겼다. 원·명 이래 중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매번 다 인출印出하여 돌 아가 지극한 보배로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도강渡江하고 제일 먼저 김생 글씨 의 시詩를 물으니, 이는 곧 『영천읍지永川邑誌』에 말한 바대로 명明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조선 땅에 찾아와 먼저 「백월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1천 장을 인출하여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후 (인출하는 일이) 백성들의 고충이 되자, 비를 두 동강 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숙종 19년(1693)에 다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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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_ 민들레 Dandelion, 2018, 생활그릇, 철 구조물 Used Kitchenware, Steel structure, 9MØ
봄이구나라고 체감이 들 만큼 추위가 많이 가신 최근이었다 . 봄이 오면 개나리나 민들레같이 많은 꽃이 필 텐데 일찍이 가을부터 겨울까지 이미 MMCA 서울관에서는 민들레 꽃이 피고 숲도 무성해있었다 . 먼젓번부터 서울관에서는 최정화의‘꽃 , 숲’전시가 진행 중에 있었는데 , 서울관에서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연계해 최초로 열리 는 뒤샹의 전시 열이 워낙 뜨겁다 보니 현재도 같은 장소에서 전시 중인 최정화의 전시는 비교적 언급이 적다 . 내가 MMCA 서울관을 방문했을 때 최정화의 전시를 본건 도합 10 회가량은 될진대 , 그 만큼 전시 기간이 길기도 했고 많이도 봤 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이 이야기를 쓰는 게 조금은 겸연쩍기도 하다 . 최정화의 전시는 플라스틱 바구니 , 빗자루 , 풍선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하지만 그 용도를 다했거나 버려진 소모품들을 반복적이고 불규칙적인 조합을 통해 다채로운 설치작품들을 선보인다 . 폐품과 쓰레기라는 소재로 만들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꽃이나 숲 , 씨앗 같은 제목의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이러한 최정화의 작품들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모품들을 이용하여 친 숙한 외관을 띄면서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폐품과 꽃을 재료와 작품이라는 관계로 병치시킴으로써 색다른 재미를 준다 .
최정화, _꽃숲 Blooming Matrix, 2016-2018, 혼합재료 Mixed materials, 가변설치 Dimension variable 출처 M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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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관의 지하에 마련된 공간에 최정화의 전시명이자 작품명 < 꽃 , 숲 > 전시는 펼쳐져 있다 .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여러 가지 폐품과 공산품들로 만든 꽃탑 146 개를 관람객의 동선에 맞추어 늘어놓고 마치 산책길을 걷는 듯 숲을 형상화해놓은 공간 설치 작품이다 .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텔링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한 장치로 귀뚜라미 소 리 나 바람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스피커를 통해 흘려보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은은한 조명 빛이 밝기를 조절하며 강하게 혹 은 약하게 쬐기를 반복한다 . 최정화가 폐품들로 만든 이 가상의 숲에서 관람객들은 어느새 이것들이 폐품임을 잊고 잠시나마 짧 은 산책을 즐길 수가 있는데 , 최정화가 의도했듯이 쓸모 없어진 물건에 꽃과 식물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을 공간형 체험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 서울관 마당으로 나가보면 최정화의 초대형 설치작품인 < 민들레 > 가 우두커니 서있다 . 이 작품을 위해 최정화는 지난해 3 월 부터 서울 , 부산 , 대구 등지를 돌며 < 모이자 모으자 > 프로젝트를 통해 약 7 천 점의 생활용품을 시민들에게 기증받았다 . 그 결 과 높이 9 미터 무게 3.5 톤의 초대형 고철 설치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 시민들이 기증한 생활용품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함 으로써 시민들이 작품 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용도를 다하고 버려진 소모품들로 시작과 생명의 상징인 민들레와 그 씨앗을 형상한 작품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었다 . 그야말로 공공에 의한 공공을 위한 공공의 미술에 딱 들 어맞는 작품이다 . 언젠가 최정화의 민들레 앞에서 약속 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 민들레를 둘러싼 그 공간에는 가족과 연인 단위의 사람들 이 많이도 모여있었다 . 이 작품의 향후 행방이 어떻게 될진 모르겠으나 나에겐 이 광경이 퍽이나 기억에 남아 괜스레 아쉬움이 남는다 . 주말을 끝으로 마지막 겨울 산책을 나가보는건 어떨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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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혼자 사는 시대다. 국내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20%대를 차지하고 있다. 강제로 동원돼 ‘떼’를 짓는 게 불편하고 불쾌해 혼자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그 러면서도 떼를 갈망하는 게 인간이다. 요즘 촛불집회나 태극기집회는 떼를 짓고 싶어 하는 욕구의 한 발로일 수 있다. 혼자는 불편하고 불쾌한 것은 피할 수 있어도, 한편으로는 사는 데 불리할 수가 있다. 저마다의 빛깔을 내며 음악계를 부유하는 별 같은 존재가 바로 뮤지션들이다. 그런데 이 들은 이따금 모여 의기투합한다. 빛을 모아 더욱 강한 빛을 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게 여러 뮤지션의 곡이 담긴‘컴필레이션’앨범이다. 지난 한국 대중음악사를 살펴보 면, 다채로운 빛을 낸 걸작도 있지만, 실은 흥행을 위한 떼 짓기 기획이었던 경우도 적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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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가장 기념비적인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꼽힌다. 1984년에 나온 1집과 함께 2집(1987), 3집(1988)을 묶어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힘을 합쳐 존재감을 알린 앨범이라는 의미가 있다. 기존 대중음 악 업계에서 뮤지션을 발굴하고 스타로 키우는 방식과 궤를 달리 했다. 우리노래전시회 1집의 음악감독을 자처하며 앨범 제작을 주도한 사람은 그룹‘들국화’멤 버 최성원이다. 중요한 점은 이 앨범이 만들어진 시기가 최성원, 전인권, 주찬권이 들국화 1집(1985)을 내기 1년 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노래전시회에서의 실험이 없었다면, 한국 대중음악사 명작 반열에 늘 오르는 들국화 1집도 있을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아울러 신인 박주연을 비롯해 시인과 촌장, 어떤날, 이광조, 강인원 등의 뮤지션들도 이 앨범 이후 작품 세계를 더욱 활짝 피웠다. 로 우리노래전시회 같은 컴필레이션 앨범 발매는, 마음이 통하는 뮤지션들이‘뭉쳐서 살기 위한’의지를 담아 이따금 이뤄졌다. ‘언더그라운드’보다‘인디’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인 1990~2000년대에 특히 그랬다. 인디가‘독립적’이라는 뜻의 인디펜던트(Independent)를 줄인 단어이고, 앨범 제작 전반 을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뮤지션들이 표방한 개념인 만큼, 혼자서는 앨범 제작에 필요한 자 본을 충당하거나 투자받기 힘든 인디음악 뮤지션들이 뭉쳐 앨범을 내는 움직임이 잇따른 것이다.
우리노래전시회 1집 앨범 커버 아우어 네이션(Our Nation) VOL.1 앨범 커버 Mp Hip Hop Project 2000 超 앨범 커버
왼쪽부터) 우리노래전시회 1집을 주도한 들국화 최성원 / 90-2000년대 인디 대표그룹 크라잉넛 / 내일은 늦으리 2집 참여진 - 당대 장르불문 유명가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 시초로 한국 인디음악 초창기인 1994년 서울 홍대 앞에 문을 연 클럽 드럭이 1997년 발매한‘아우어네이션(Our Nation) VOL.1’이 꼽힌다. 클럽 드럭 무대에 서 온 크라잉넛과 옐로우키친의 곡들이 아우어네이션 시리즈 첫 앨범에 실렸다. 이 앨범은 1 만장 이상 팔리며 흥행했다. 이어 아우어네이션 시리즈를 통해 노브레인, 레이지본, 위퍼 등의 밴드들이 존재를 알렸다. 아우어네이션을 계기로 클럽이 직접 클럽 무대에 서는 뮤지션들의 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또 다 른 홍대 클럽 마스터플랜은 역시 마스터플랜에서 공연해 온 힙합 뮤지션들의 곡을 수록한‘Mp Hip Hop Project 2000 超’(엠피 힙 합 프로젝트 2000 초) 앨범을 2000년에 발매했다. 한민국’이 나오기도 했다. 힙합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시절,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 가릴 것 없이 선호한 형 식이 바로 컴필레이션 앨범이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결국 컴필레이션 앨범은 흥행할 수 있는 형식으로 퍼졌다. 음반사들은 사용 권리를 가진 히트곡들을 골라 담고, 인기 연예인 화보 를 앨범 표지에 인쇄해 CD 몇 장짜리 앨범으로 만들어 팔았다. 음반사가 다른 앨범 홍보를 위해 한두 곡씩 발췌해 수록하는 샘플러 앨범과는 분명 기획의도가 달랐다. 이후 오버그라운드 음반사들의 컴필레이션 앨범 소재로‘7080’등 추억의 가요 모음이 유행하 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인디음악계에서는 기획사들이 소속 뮤지션들의 음악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 몇몇은 신선한 반응 을 이끌어냈다. 이렇듯 컴필레이션 앨범은 내용만 다를 뿐‘흥행’이라는 같은 목적을 두고 형식의 반복을 거듭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1992~1995년 짧은 기간 등장한‘특이한’컴필레이션 앨범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내일은 늦으리’이다. 그 첫 시리즈인‘92 내일은 늦으리’는 015B(공일오비),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 윤상, 넥스트 등 당 시 대중가요계를 주름잡던 뮤지션들이‘환경보호’를 주제로 쓴 신곡으로 합동 콘서트를 하고, 앨범으로도 발매한 것이다. 뮤지션 들이 사회적 이슈를 거론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더구나 곡 주제, 노랫말, 심지어는 음향에까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다채로운 아이디어를 녹여냈다는 점이 놀랍다. 가령 유명 가수가 공익광고에 출연해 몇 마디 하고 마는 게 아닌, 블록버스터 급 환경보호 캠페인이었던 것. 내일은 늦으리 시리즈(콘서트+앨범)는 1995년까지 매년 진행된 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1985년 마이클 잭슨, 신디 로퍼, 밥 딜 런 등 미국 뮤지션 45명이 모여 아프리카 난민 자선기금을 마련코자 불렀던 곡‘위 아 더 월드’나, 역시 같은 해 에티오피아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해 퀸,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등이 영국 런던 및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벌인 공연‘라이브 에이드’같은 분위기가 한국에선 1990년대 중반까지만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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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에서 대중가요 전체로 범위를 넓혀보면, 1년 앞선 1999년 한국 힙합 초창기 뮤지션 37명이 참가한 프로젝트 앨범‘1999 대
REVIEW
화 2018. 12. 1. ~ 2019. 3.31 대구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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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알렉스 카츠 _ 대구미술관
날씨가 입춘, 우수를 지나 역동하는 해동이 있는 봄의 소리가 시작됐다. 봄의 속삭임이 필자를 대구미술관으로 이끌었다. 미술 관에서는 총 3가지의 전시를 하고 있었고 그 중 2가지 전시가 회화전이었다. 더구나 두 전시 모두 백수를 바라보는 노화가들의 집념 어린 회화가 전시되었다. 먼저 알렉스 카츠의 전시를 살펴보자. 나의 어설픈 편견 알렉스 카츠는 소품 위주의 갤러리가 좋아하는 상업적인 작가라는 편견 이 서려 있었다. 카츠의 작품은 아트페어나 갤러리 소품전의 단골손님이라는 나의 생각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전시가 이번 전시였 다. 대작 위주의 작품은 소품에서는 볼 수 없는 스케일과 시원함이 느껴졌다. 알렉스 카츠의 대작은 사진처럼 컷을 다루는 방식이 흥미롭다. 인물의 머리 윗부분을 적당히 잘라내고 줌인(Zoom-in) 하여 포 커스를 맞추는 방식이 회화를 사진처럼 다루는 것이 매우 재미있다. 또 같은 얼굴을 한 화면에 조금씩 다르게 2컷 혹은 3컷씩 넣 는 방식도 연속적인 셔터를 누르는 것 같은 느낌에 사진과 닮아 있다. 미국의 현대 회화의 대가, 가장 미국적인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알렉스 카츠는 유화물감의 깊이에 도전하는 것 같다. 깊 은 느낌이 아니라 가벼운 느낌으로 회화의 깊이를 탐구해 온 많은 전설적인 화가들에게 한 방을 먹인다. 이렇게 얇게 그려도 이렇 게 좋은 느낌이 난다라는 걸 알려준다. 처음 보면 아크릴화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오일컬러가 주는 특유의 느낌이 얇고 가 벼운 느낌을 더 깊이 있는 느낌처럼 마술을 부린다. 어떤 사람은 이런 느낌 때문에 유화는 이렇게 그리는 게 아니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미술은 전통적인 이런 생각을 부숴 버린다. 그래서 그가 미국의 현대 회화의 대가인 것이다. 미술관 2층에 올라가니 대구 근대미술의 전설이 된 전선택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 작가 들과 작품은 서로 비교되기도 하고 대조되기도 돼서 아주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대구에서 그림 좀 본다는 사람들 중에 전선택 작가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매우 성공한 작가이며 근대에서
전선택 _ 대구미술관 전시전경 ⓒ 전선택
현대까지 백수를 누리면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 운 좋은 몇 안되는 작가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의 근대는 식민지와 전쟁으로 얼룩진 암울한 역사 였다. 기록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가난한 모습의 한국이 대구가 이런 작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차체가 아주 기적적이다. 평안남도 정주 출신, 필자의 친할아버지와 고향이 같다. 이북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더욱더 친근감이 가는 그림들이었다. 늘 이북 사람들이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남쪽으로와 성공한 경우 사람들이 참 강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선택이라는 노화가도 집념 어린 작품 활동을 한 세기 가까이 이어오는 것이다. 추상과 구상을 왔다 갔다 하는 경향이 있어 아마도 평론가들은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런 구상과 추상을 섞는 것이 더 재 미있어 보인다. 시도는 다양할수록 좋은 것 같다. 전시 리플렛에는 이런 추상적인 그림들을 반구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피 카소도 반구상을 그렸다. 많은 작가들이 구상에서 시작해 반구상 추상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다시 신구상으로 돌아가는 전선 택의 선택은 현대미술의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연세가 많으시고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하시면서 다양성은 늘어가고 실험에는 한 계가 없이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좋은 그림이며 깊이 있는 그림이다. 사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그렇지만 깊이와 울림이 있는 그림이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못한다고 한다. 금방 질려하고 시들시들해 한다. 한 가지 일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몰두한 두 명의 노 작가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라.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전진하고 나아가 라. 회화는 싸움이다.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 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작업량이 많은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나이만큼 싸워 온 그들의 투쟁 끝에 회화의 꽃이 핀다. 미술의 꽃은 누가 뭐래도 회화이며 미술관 의 핵심도 회화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전시가 알렉스 카츠와 전선택 전시이다.
전선택 _ 대구미술관 전시전경 ⓒ 전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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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인형의 집 2019.01.25. ~01.26. 대구시립극단, 어울아트센터 함지홀 연출가 손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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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립극단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곳은 공무원처럼 국가에서 배우들에게 월급을 주고 관리하는 단체이다. 많은 배우에게 있어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일 것이다. 배우 대부분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연기를 하고 있고 어떻게든 생활을 영위하며 연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구시립극단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정기적인 공고를 통해 채용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필요하면 뽑는 데 일할 자리 자체가 잘 나지 않는다. ‘인형의 집’은 2019년을 시작하는 어울아트센터와 대구시립극단의 첫 공연이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인형의 집’홍보 깃발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데 보통 이런 정도의 홍보는 대형뮤지컬 공연을 할 때나 하기에 많은 사람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공연이 준비되 었을 것이다. 드디어 첫 공연 날, 사람들이 자리의 80% 정도를 채웠고 무대 위는 레고로 만들어진 집이 바로 눈앞에서 휘황찬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무대를 보며 기대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자 공연은 시작됐고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엔 첫 대사 한 마디면 충 분했다. 일단 비교적 앞자리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안 들릴 때가 종종 있었고 대사 실수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연기를 못했다.
레고같은 세트가 인상적이었던 인형의 집
공연을 보며 지금도 대구에서 활동하는 수 많은 배우들이 생각났다. 그들에게 이런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하라고 하면 어떤 공연을 좋았다. 소극장이 아닌 이상 마이크를 쓰는 게 좋은데 그러지 않은 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명하고 실력이 출중한 배우들도 마이 크를 쓰는 데 말이다. 공연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철밥통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이번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아마 큰 변화 없이 앞으 로도 같은 수준의 공연을 보여줄 것이다. 공연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인형의 집’은 헨리크 입센의 작품으로 인간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회복적인 메시지를 다뤘다. 방법 적인 얘기를 추가하자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편안함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일상의 편안함에 푹 빠져선 결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 노라는 따뜻한 밥과 난로가 있는 가부장적인 남편의 집에서 벗어나 춥고 배고프지만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 해 달콤한 생활을 포기한 것이다. 대구시립극단의 공연 의도는 관객들 또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지 점검해보는 기회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극단 단원들 또 한 연기자로서 주체적인 삶을 사는지, 따뜻한 밥에 안주하며 현실에 눈을 감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 란다. 대구시립극단은 1998년 12월 4일 연극‘무지개’를 창단공연으로 시작했다. 벌써 20주년이나 지난 것이다. 이번 공연은 46 회 정기공연이다. 대구시립극단의 공연이 소극장에서 많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이런 큰 무대의 공연은 대구의 다른 극단에도 무대 에 설 기회가 돌아가길 바란다.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많은 극단에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대구시립극단은 소극장에서 많은 실 력을 쌓길 바라고 앞으로도 대구 공연계의 대표 극단으로써 자랑스럽게 예술성과 공익성, 대중성을 가치로 삼아 극예술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인형의 집’은 무대가 참으로 포근하고 보기만 해도 배부른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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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줄까? 적어도 대사 실수는 안 할 것 같다. 물론, 대사가 잘 안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제외한 배우들의 발성, 기본기 등은
뮤지컬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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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 2. 22. ~ 3. 2. 계명아트센터 프로듀서 양영일, 연출 안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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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절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많은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대한민국이다. 2017년 뮤지컬 영웅이 최초공연을 대구에서 한 이후로 2019년 공연도 대구에서 시작했다. 올 해의 뮤지컬 영웅 좀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주최 측에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좀 더 각색을 했다고 전해온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역사를 각색한 것이다. 영웅을 보지 않은 사람도‘누가 죄인인가’라는 넘버는 너무 유명해서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온 몸이 전율로 뒤덮히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외에도 여러모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눈이 즐거운 공연이었다. 무대연출에 관심있는 사람은 꼭 이 공연을 봐야할 것이다. 특히 열차씬은 이 공연을 또 보고싶을 정도로 멋진 장면이었다. 또, 극 초반에 있었던 일본순사와의 추격씬은 007같은‘첩보영화’를 방불케하는 박진감 넘치는 무대연출이었다. 필자가 눈에 가장 38
연출이 정말 멋져서 좋지만 배우들, 특히 앙상블의 연기력도 눈부시다. 합이 잘맞는다고 할까? 주연들의 연기는 첫 공연의 긴장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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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는 씬을 꼽으라면 초연에서도 눈길을 끌고 호평을 받았던 ‘열차씬’그리고 건물들이 어울어지는‘추격씬’이다. 문이었는진 몰라도 예년과 같은 평이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앙상블에게서는 당시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보통은 그 반대인데 말이다. 배우들의 연습량을 가히 짐작해 볼만하다. 그들에게 박수를…. 우리는 독립투사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인해 누구나 마음껏 글을 쓰고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을 하나 하나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큰 공을 세우셨던 안중근 의사는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 많은 관객들이 공연을 보며 눈물을 훔치 기도 하고 새삼 선조들의 희생에 감사함을 느끼며 역사를 잊지 말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3.1절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사업이 열리지만 말그대로 지자체 홍보사업일 뿐이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진정 나라를 위해 싸운 그들을 죄인 취급하는 건 사후 대우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은 못 사는 사람이 많고 친일파 후손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심지어 유공자 선정에서도 가짜 유공자가 많다. 다행이도 국가보훈처에서 는 2023년까지 독립유공자 1만 5000명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해 검증한다고 하지만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진 지켜봐야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 강점기는 이완용같은 자로 인해 왔다. 우리는 그런 자를 마땅히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론 경계하기는커녕 그런 자에게 빌붙거나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수없이 많다. 왜 그런걸까? 그건 만 일 지금 다시 일제강점기가 다시 온다면 친일파로 행동할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란 나약하기에 지금도 불법적인 일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것은 크건 작건 간에 독립운동가들도 거기서 자유롭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선은 있다. 다들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생각하듯 그 선은 명확하다. 이완용과 같은 사람은 무슨 생각 을 하는지는 그의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이게 다 조선의 평화를 위한거다.’본인의 일신을 위하였고 그럴듯한 말로 가치관을 흔 들며 자기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사람이 이완용같은 자다. 그분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신 걸까? 대한민국은 그분들을 담기엔 그릇이 너무 작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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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사가 집행하는 법정에서 재판 받는‘안중근’의사, 잘 알려진‘누가 죄인인가’넘버를 부르는 장면 하얼빈역을 재현한 장면 안중근 열사가‘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 사진 파워엔터테인먼트 제공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 ‘
로 2019. 2.15 ~ 2.17 소향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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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는 1909년 런던을 배경으로, 주인공‘몬티 나바로’는 가난 하지만 어찌어찌 잘 살아온 사람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갈지 고민하다가 미스 슁글이라는 어머니의 오랜 편지친구에게서 자신이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8명이 죽 어야하는 상황! 백작이 되는 그 과정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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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4년 토니 어워드 10개 부문 노미네이트가 되었으며 최우수 뮤지컬, 최 우수 극본, 연출 의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 2014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에서 최우수 뮤지컬 상, 최우수 뮤지컬 극본 상, 최우수 작사 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 2014 외부 비평가상, 최우수 뉴 브로드웨이 뮤지컬 상, 최우수 뮤지컬 극본 상 등 4개 부문 수상, 2014 드라마리그어워드에서 최우수 뮤지컬 프로덕션 상 수상, 2015 그래미어워드에서 베스트 뮤지컬 씨어터 앨범 상 노미네이 트가 될 정도로 이미 검증된 블랙코미디 뮤지컬이다. 이 작품을 안볼 이유가 없다는 것! 감히 말해보기를, 지금껏 봤던 뮤지컬 중에서 이렇게 짜임새있고 탄탄하게 흘러가는 작품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모 든 배우들이‘완.벽.그.자.체!’였기에 지금껏 이렇게 맘 놓고 공연을 본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음향이 극 장이 흔들릴 정도로 빵빵하지도 그렇다고 종이 한 겹도 아닌 여섯일곱겹은 올린 것 마냥 먹먹하지도 않게‘적당’했다. 그러니 까 어제의 3시간은 그냥 완벽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무엇하나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았고 너무나도 잘 만들어진 집합체 를 보고 왔다. 정말 눈물나게 웃다가 나왔는데 그렇다고 가벼운 웃음이 아니고 굉장히 풍자적인 요소가 많아서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나 오는 그런 작품이다. 특히 세트를 최소화 하고 영상을 활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암전을 없애 집중도를 높였다. 거기에 베테랑 배 우들의 노래와 연기, 디테일한 표정과 제스쳐 그리고 귀에 쏙쏙 박히는 딕션은 공연장을 천국으로 만들었다. 영상을 활용한다고 해서 그게 작품에 도움이 되는 케이스를 그렇게 보지는 못했는데 이 작품은 잘 사용했다. 영상에 나오는 것들이 그냥 일반적으 로 생각했던 것들이 아니고 굉장히 입체적이며 신박하고 신선하고 장면 장면마다 잘 어울렸다. 모든 장면과 넘버들이 좋았지만 그 중에 굳이 뽑아보자면 <결혼할 거야, 그대랑>! 이건 베스트 넘버 및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공연장을 나설 때, 내 입술에 맴도 는 멜로디였고 연출도 정말 좋았다고 생각한다.
젠틀맨스 가이드 , 사진제공 쇼노트
시벨라 역할의 임소하 배우님, 첫 등장에서 거울 들고 딱 서있던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글린다(뮤지컬 위키드에 나오는 역할) 같았 다. 만약에 시벨라를 너무나 발랄하고 백치미 있게 연기해냈다면 결말이 이해가 안됐을 것 같다. 몬티를 사랑하는 듯 안하는 듯 적 내셨음. 이 작품으로 이미지 변신 성공하신 것 같고 정말 재능 많은 배우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인 9역을 해낸 이규형 배우님께 진심어린 큰 박수를 보낸다. 배우 본인도 이 역할을 맡은 것과 역할을 해낸 것에 엄청난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유연석 배우님은 처음 뵈었는데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라는 작품을 혹시 안하셨으면 해보시는 것 은 어떠신지,,, 목소리가 정말 좋고 차분하게,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이게, 열정적이면서도 과하지 않게 정말 잘하셔서 좋았다. ‘한번 봐야지, 봐야지’하다가 서울 갈 일이 잘 생기지 않아서 못보고 있었는데 부산 공연 일정이 떠서 무작정 떠난 부산. 결론 적으로 부산 공연 보길 잘한 것 같다. 재연하면 또 볼 의향 당연히 있고, 대구 공연을 해줬다면 대구 사람들에게도 좋은 공연을 관 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방공연에서는 보기 힘든 오케스트라까지 와서 정말 최상으로 관람했는데, 소향씨어터는 단차도 좋고, 음향도 적절히 좋았다. 하지만 대구에는 뮤지컬을 하기 좋은 극장이 없다는 게 아쉽다. 그나마 공연이 많이 올라오는 계명아트센터는 음향이 좋지 않기로 소문이 나 있고, 소리가 먹먹하여 대사 전달,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동 굴 극장이라 불리운다. 부산에 곧 개관할 뮤지컬 전용 드림씨어터처럼 대구에도 뮤지컬 전용 극장이 생겼으면 좋겠다. 뮤지컬의 도시인데 음향이나 시야 가 좋은 극장이 없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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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을 잘 컨트롤 하시며 신비로움을 뿜어내어 시벨라가 떠났음에도 몬티가 그녀를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이 잘 표현해
렉처 오페라 버섯 피자 2019. 2. 22.~ 2. 23. 대구오페라하우스 별관
REVIEW 원
공연사진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4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죽는다면 이 오페라는 희극일까, 비극일까? 2월의 마지막 금요일에 대구오페라하우스 별관 카메라타 에서 공연된 렉처 오페라‘버섯피자’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철우 연출가가 마이크를 잡고 희극과 비극에 대한 짧은 Sa: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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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을 한 뒤 오페라‘버섯피자’가 공연되었다. 1989년에 발표된 현대적인 오페라‘버섯 피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기 위한 오페라다. 백작 부인 볼룹투아는 애인 스콜피 오와의 사랑을 위해 독버섯을 넣은 피자로 포르마조 백작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하녀 포비아가 백작 부인의 계획을 엿듣고 자신이 사랑하는 백작에게 일러바친다. 스콜피오는 백작저에서 숨어있다가 백작에게 들키게 되고, 백작은 버섯 피자를 스콜피 오에게 먼저 먹기를 권유한다. 스콜피오가 피자를 먹었음에도 멀쩡하자, 백작은 포비오를 죽인다. 백작 부인이 눈치 빠르게 독 을 와인에 탔기 때문이다. 백작은 와인을 마시고 혼미한 상태로 스콜피오를 총으로 쏜다. 스콜피오는 다친 상태에서 백작이 자 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어 아버지와 본인의 명예를 지키고자 백작 부인을 죽인다. 4명이 죽는 과정을 굉장히 코믹하게 그려냈 으며, 등장인물은 죽은 뒤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고 노래로 무대를 유쾌하고 풍성하게 채운다.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 비극적인 상황을 아주 희극적으로 풀어낸 작품이었다. 희극(comedy)과 비극(tragedy)은 극예술의 극점을 담당하고 있다. 희극(comedy)은 그리스 희극 코모이디아(komoidīa)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행렬(코모스, komos)하면서 부르던 노래(오이데, oide)의 합성어다. 오페라는 16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음악극을 일컫는다. 오페라 역시 비극과 희극으로 양분되는데,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는 정가극으로 서정적인 비극을 의미한다. 오페라 세리아의 반대말은 오페라 부파(opera buffa, 희가극)로 희가극이라고 해서 무조건 밝고 재 미를 추구하는 장르는 아니다. 우리가 아는 현대의 코미디, 개그와 비슷하고 웃기기 위한 장르는 파르스(farce, 소극)라고 이해 할 수 있다. 파르스는 18세기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으며, 관객을 웃기면서 막과 막 사이를 지루하지 않게 연결하던 막간극에 서 발전되었다. 오페라‘버섯 피자’는 파르스에 속하는 짧은 오페라로 볼 수 있다. 오페라‘버섯 피자’를 작곡한 세이무어 바랍(1921~2014)은 단막 오페라를 30편 이상 작곡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비올라 주자이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오페라‘버섯 피자’를 포함해 상반기에 렉처 오페라를 3편 준비하고 있다. 근·현대의 음악극의 흐름을 알리고 오페라를 어렵게만 생각하지 않도록 고심한 흔적으로 보인다. 렉처 형식으로 오페라의 어려운 개념을 풀어내고 짧은 단막극이나 창작 오페라를 소개하므로써 문화를 즐기고자 하는 현대인의 요구에도 맞춰가는 행보로 보인다. 오 페라가 대중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될 때까지 렉처 오페라 시리즈는 계속 기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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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아트피아
차정보 개인전 전시전경 _ photo by dot.k
2019. 2.26 ~ 3.10 수성아트피아 전관
REVIEW
화
볼로냐 국제 일러스트 원화전
2019. 2. 15. ~ 4. 28. 대구 MBC 특별 전시장 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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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많은 건물들, 그중에 하나, 마천루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건물 꼭대기를 보 자. 자세히 보면 정체가 밝혀진다. 단순히 첨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청새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코를 높이 쳐들고 있다! 건물의 정체를 알아버렸다고 섣불리 도망가 서는 안 된다. 도로 위에 문어가 도로 위로 머리를 빼꼼히 내어 놓고 우리를 보고 있 다! 이쪽 길도, 저쪽 길도, 서로 조금씩 엇갈려 있는 것이 이상한데…, 아뿔싸! 하릴없이 갇혔구나! 도로의 정체는 문어의 다리들이다! 이번 전시회의 전시된 다비드 보나치(Davide Bonazzi)의 작품이다. 현장에서 작품 을 설명하시는 도슨트 분의 추천으로 본 그림이다. 작가는 도시의 요소들을 동물들로 44
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건축물은 철골물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것뿐이다. 이번 전
Sa:Gak
표현했다. 수컷 공작의 화려한 깃은 놀이공원의 대관람차로 표현했다. 단순히 과학적 시회의 예비 관람객을 위해 필자가 준비물을 제안한다. 바로‘아이 같은 마음’이다. ‘볼로냐 국제 일러스트 원화전’은 대구 MBC 특별 전시장 엠가에서 오는 4월 28 일까지 열린다. 볼로냐 국제 일러스트 원화전은 1964년부터 시작된 볼로냐 국제아 동도서전의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며, 이번 전시회는 2018년 볼로냐 국제 일러스트 원화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전시되어 있다. 권위있는 전문가 5명이 매년 80여개국 3000여명이 제출한 15000 여 점의 작품들 중에서 300~400 가량의 작품을 고른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수작들만 고른 것이다. 주최측에서는‘볼,국,일,원 (볼수록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전시, 국내에서 오직 대구 에서만 관람이 가능한 전시, 일본 5개 도시, 중국 3개 도시, 한국은 대구에서만 진행
다비드 보나치(Davide Bonazzi)의 작품
되는 순회전시 원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정성을 함께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일러스트 전시)를 표어로 내걸고 있다. 한중일 3국 중 2개국은 수회 열리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단 한 번 전시회가 열리며, 특히 오직 대구에서만 진행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2층에는 2017년 나미 콩쿠르에 수 상한 작품들 또한 특별전으로 전시하고 있다. 전시되는 작품은 주로 아동도서의 일러스트이므로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 전시회가 의도한 주제의식은 문을 들어서자마 자 여실없이 드러나 있다. 공간 한 면에는‘일러스트레이터가 작업을 할 때 아이는 글을 해독할 수 없고 오직 일러스트에 의존하는 점을 항상 당부해야합니다(When illustrator work, they should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child cannot decode the words and must rely only on the illustrations).‘ 라는 말이 적혀있다.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예술가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작품 안에 예술가의‘우주’ 가 수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칫‘소우주가 과도하게 팽창’한다면, 다시 말해 작가의 자의식이 과잉이 된다면, 수용자는 희미한 단서로 작품을 해석해야하는 과제만이 남는다. 그러나 아동도서 일러스트는‘아이들을 위한 그림’이 되어야 하므 로, 작가는 수용자를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에서 는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작가의‘따뜻한 배려’를 작품 곳곳에서 볼 수 있 다. 소재부터 표현기법까지. 순수함과 창의력을 잃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겠다. 어쩌면 순수성을 잃은 우리 세대가 실낱같은 희망으로
사라 게라 루스코니(Sara Guerra Rusconi)의 ‘엄마 고래(Mother whale)’
후대에게 빌어 염원하는‘마지막 주술’일지도. 아이를 위한 배려로 우리가 수용자의 지위에서‘방관자’로 격하된 것은 아니다.‘아이’란 연속성에서, 우리는 어른으로 존재하 (Sara Guerra Rusconi)의‘엄마 고래(Mother whale)’는 엄마 고래와 그 옆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아기 고래를 그렸다.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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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아이 고래’가 되어 있다. 또한 2층에 전시되어 있는 나미 콩쿠르 수상작인 알베르틴 쥘로(Albertin
Sa:Gak
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한때는 아이였기에, 어른이면서도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사라 게라 루스코니
Zullo)의‘내 작은 아이(Mon tout petit)’를 보면 겨드랑이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웃음을 준다. 작품들이 시계방향으로 시간적으로 배열되어, 이를 따라가다 보면 다시 첫 일러스트로 눈이 돌아가게 되는데,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가 서 있다.. 우리 어머니도 내가 결혼 하면 쓸쓸하시려나.‘아이의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행간의 의미.‘아이의 마음‘을 기억하 면서도‘세월’을 인지할 수 있는,‘탁월’한 시각을 가진 어른 또한 특별한 수용자다. 이 글을 보고 전시회를 간다면 전시회에‘메기고 받는’옷차림새 또한 고려해보는 것은 어떨까? 며칠 전 칼 라거펠트가 세상을 떠났다.‘패션은 일종의 태도(Fashion is an attitude).’라는 말을 남긴 이 패션 거장의 말을 뒤집어,‘태도는 일종의 패션’이라 면, 우리의 감성을 패션으로 표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전시회를 거닐고 있는 당신은 소년이신가? 빵모자에 나비 넥타이, 반바지에 흰색 타이즈는 어떨까? 혹은 소녀이신가?‘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입고 나올 법한 드레스를 입고 전시회를 가보시라. 물론,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주인공 같은‘애티튜드’또한 챙기는 것을 잊지 말자.
알베르틴 쥘로(Albertin Zullo)의 ‘내 작은 아이(Mon tout pet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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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크랙 展
로 2018. 11. 8.~ 2019. 2. 2. 우손 갤러리
Sa: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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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크랙전 _우손갤러리전경
토니 크랙은 영국의 조각가이자 판화가다. 토니 크랙은 1970년, 1980년대 오브제들을 모으고 쌓아 만든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 고무 연구 실험실 기술자로 일했으며 이후에 작가로 전향했다. 1970년대 후반에 가진 첫 개인전에서 대량 생산과 소비로 인한 생활 폐기물을 직접 주워 모아 설치하는 작품을 통해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1977년부터 독일 부퍼탈에서 거 주하며 뒤셀도르프의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현재는 세계각지에서 전시회를 열며 작가로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 다. 작품은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른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동물의 뼈 같기도 하고 용암이 응고한 모습 같기도 한 작품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게 만든다. 색깔과 모양이 다채로웠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토니 크랙 은 보는 이마다 다르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이번 작품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나의 사건과 대상에는 무수히 많은 시각과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면 앞면을 바라볼 때 뒷면을 바라볼 수 없고 뒷면을 바라볼 때 앞면을 바라볼 수 없는 한계에 대해 언급해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삶의 유한성을 암시하는 하나의 장면으 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작품의 자유로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만 하다. 작품은 일정한 형태를 갖지 않은 채 자유로이 형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형성되 어 있다는 말처럼 이미 정해진 형태를 갖고 있기에 멈춰진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자유로운 부자유를 보는 것과 같 다. 자유로운 부자유는 우리의 인생과 닮은 점이 많기 때문에 조금 불편한 느낌을 준다. 정적인 자유로움이 답답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본 기자는 토니 크랙의 작품을 보고 매달리고 싶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치 놀이 기구처럼 매달려서 가장 높은 곳까지 도달 하고 싶었다. 불규칙한 형태의 작품에 올라가 꼭대기를 짚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진정한 자유가 작품이 아니라 즐거운 공상 속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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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공동체ʻingʼ展 2019. 1. 8.~ 3. 31. 수창청춘맨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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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공동체 ’는 수창의 두 번째 기획전이다. 2019년 새해 첫 전시이기도 하다.‘공동체, 도시, 시공간, 미디어, 청년, 과정, 도약’을 핵심 키워드로 전 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지영 기획의 B동 1층에는 김민정, 백지훈, 신혜정, 장 은경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의 주제는‘~ing’이다. 특이한 점은 한 번 설치하고 나면 고정되는 형태의 전시가 아니라 전시 기간 동안 작품이 변 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전시라는 점이다. 신경애가 기획한 A/B동 2층에는 김상현, 김선문, 마루오카 아키코, 서상희, 조현수, 임지현 작가의 전시가 진행 되고 있고 주제는‘Here we are’이다. 어떠한 전시를 만들지 정해두지 않고 과정에 초점을 두는 것이 전시의 취지이다. 김미련이 기획한 A/B동 3층에는 Celine Struger, 곽아름, 시혜진, 심은영, 윤보경, 이승희, 이한솔, 임봉호, 정 47 Sa:Gak
재봉, 정진경, 최수환, 허찬미 작가의 작품이‘Common City’라는 주제로 전 시되어 있다. ‘포스트 공동체 ’의 포스트는 영어로‘이후의, 다음의’라는 뜻이다. 과거의 공동체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 즉, 미래의 공동체라는 의미이다. 그 리고 ing는 진행 중인 과정을 의미하며 1은 하나의 공간 위에서 이루어짐을 의 미한다. 지난 전시인‘수창, 청춘을 리노베이션하다’의 핵심 단어가‘청춘’이 었다면‘포스트 공동체 ’의 핵심 단어는‘과정’이다. 공간이 흘러가는 과정 그 것은 다르게 말하면 시간이다. 즉, 공간에 시간을 담아내려고 한 것이다. 전시장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지난 전시보다 조금 더 준비성이 있고 능숙하다 고 느껴진다. 하지만 석연치 못한 부분도 있다. 전시가 조금 황량하고 빈약해 졌다. 빈약하다는 말의 의미는 작품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작품 각각은 매우 좋았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기획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수창청춘맨숀은 타지에서도 찾아올 만큼 대구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고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고 미술을 감상하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예쁜 사진을 찍기 좋은 공간은 많이 늘었지만 흩어진 청춘의 고뇌를 담을 그릇을 찾 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청춘이기에, 청춘만이 할 수 있는 지난하고도 심각 한 그리고 진지한 고민에 대한 논의의 부재는 청춘들의 텅 빈 마음을 채우지 못 했다. 변화해나가는 한 장면만을 포착한 후 때 이른 비평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 겠지만 수창청춘맨숀이라는 좋은 모임의 장이 단지 공간과 과정만을 다루기에 는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수창 낯섦을 마주 할 때, oil on canvas, 지름 30cm, 2018 기획: 이지영, 신경애, 김미련 참여 작가: 김민정, 백지훈, 신혜정, 장은경, 김상현, 김선문, 마루오카 아키 코, 서상희, 조현수, 임지현, Celine Struger, 곽아름, 시혜진, 심은영, 윤보 경, 이승희, 이한솔, 임봉호, 정재봉, 정진경, 최수환, 허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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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운동 100주년 기념 1919년 3월1일 날씨 맑음展 기획: 권미옥, 이계영 참여 작가: 강요배, 권하윤, 김보민, 김우조, Byron Kim, 배성미, 손승현, 안은미, 안창홍, 이상현, 이우성, 정재완, 조동환+조해준
2019. 1. 29.~ 5. 12. 대구미술관 2,3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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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 외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어 역사적 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3.1 운동 이후 100 년이 흘렀다 . 3.1 운 동은 1919 년 3 월 1 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 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 100 년이 지난 오늘에 3.1 운동이 갖 는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해‘1919.3.1. 날씨 맑음 展’을 보고 왔다 . 100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1919.3.1. 날씨 맑음 展’에서는 드로잉 , 타이포그래피 , 설치 , 사진 , 영상 등등의 방식으로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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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 입장하자 입구에는 커다란 글씨가 보였다 . 입구를 장
Sa:Gak
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 식하고 있는 문구를 읽기 위해 멀리 떨어져 서야만 했다 . 작가
정재완_‘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한글 레터링_Dimension variable_2019
정재완의 타이포그래피 문구는 39 여 년의 인생 동안 옥살이만 17 번을 한 저항 시인 이육사의 시‘절정’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 1940 년도 그가 세상을 떠나기 3 년 전이었다 . 1945 년 광복이 일어나기 5 년 전이기도 하다 . 시의 앞 구절을 고려해보았을 때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문장에서 차갑고 딱딱한 부정적 상황 중에도 화자는 무지개와 같은 희망의 의지를 가진 것으로 추측해본다 . 또한 , 사진에 회화를 적용한 작품‘아리랑 2017`1 기념사진’도 눈여겨볼 만하다 . 희미하지만 사람들의 단 체 사진이 있고 그 위에는 총알구멍이 연상되는 검은 점과 핏자 국이 휘갈겨져 있다 . 잔혹한 역사의 사건들을 사진 한 장으로 보
안창홍_아리랑 2017`1 기념사진 _ photo on panel acrylic drawing ink _ 240x417_ 2017
여주는 것이다 .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슴 아픈 역사가 주는 의의는 무엇일까 ? 우리는 그것들을 왜 반복해서 보고 기억해야만 하는 걸까 ? 아프고 슬픈 역사도 결국에는 역사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미술관을 나오며 이육사시인의 절정을 되새겨본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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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展
수 2019. 1. 17.~ 3. 31. 봉산문화회관 제 4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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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공작소 기획 김성룡 展을 보기 위해 봉산문화회관의 제4 전시실을 방문했다. 전시장에 들어가니 다른 작품에 시선을 빼 앗기기도 전에 발기한 고흐의 모습에 시선이 간다. 을씨년스 러운 수풀 아래에 발기한 고흐가 서 있고 그의 앞에는 해골이 있다. 최근에 본 작품 중에 가장 파격적이었다. 작품의 이름은 ‘고흐의 숲 2’였다.‘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라는 궁금증 을 던지면서 다른 작품들을 감상해보았다. 작가 김성룡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 체적인 분위기로 보면 스산하고 기괴했다.‘고흐의 숲 2’에서
봉산문화회관 제 4전시실 김상용展 전시전경 _ 봉산문화회관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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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쥐고 있다. 해골 앞에 서 있는 고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결단이라도 내린 인간처럼 보인다. 고흐는 왜 그곳에 서 있는 걸까? 한 명의 인간이자 위대한 예술가였던 고흐에 대 한 공감일까? 선망일까? 아니면 질투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점프 슈트 아래에 튀 어나온 성기는 매우 답답해 보인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좌절된 느낌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진지한 고뇌 중에도 인간의 욕구는 존재하며 그것이 부정당했 을 때의 분노가 고흐를 통해 표현된 느낌이다. 결연한 의지가 있어 보인다. ‘고흐의 숲 2’이 처음에 강하게 다가왔다면 마지막에 시선이 가는 작품은‘소년’ 이었다. 유성 볼펜으로 10여만 번을 그어서 완성한 작품이다. 소년의 모습은 약해 보인다. 그리고 정면이 아닌 오른쪽 아래쯤을 응시하는 것으로 보아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잔인한 상상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곁에 그려진 꽃도 그렇 다. 꽃은 보통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데‘소년’의 꽃은 다르다. 소년과 마찬가지로 어쩐지 잔인함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김성룡 소년,종이에 유성볼펜과 아크릴물감, 2003 _사진 손현민
이런 작품을 만들었고 본 기자는 왜 이 작품에 끌린 것인가?‘소년’을 한참이 나 들여다본 후에도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김성룡 그는 누구인가?‘완성된 한 장의 그림도 허공으로 날아가는 붓과 같아서 흩어지면 먼지일 뿐이다. 나는 지금도 이 세계의 토양 위에서 여전히 1초의 진전도 없이 혼자서 멈칫거리고 있다.’김성룡 작가 자신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 로 17살 때 미술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화로 시작했고 커다란 거울을 앞에 두고 자화상을 주로 그렸다. 그리고 그는 적막한 산동 네와 겨울 풍경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20대 초에는 실존주의와 불교철학과 서양철학을 공부해 한국의 근현대 사회를 그려내는 역사화를 만들었다. 10년 정도 역사화를 그리다가 최근에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리고 자유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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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화 展 2018. 12. 31.~ 2019. 1. 16. 갤러리 문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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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주제는‘윤영화 2006-2017/그리드-유산’이다. 2006 년과 2017년 사이의 주요작품인 사진, 사진 회화, 평면 오브제 등을‘그리드’-‘유산’연작으로 전시했다. 인간 존재와 만물에 내재한 생과 사멸의 흔적에 대한 자연의 은유와 예술적 사색을 보여주고자 한다. 초점을 잃은 사물은 부정확한 형태로 평면 위 를 부유하고 그것에 격자의 철망을 덧대서 희미한 느낌이 강화 된 작품이 주를 이뤘다. 그러한 작품이 어두운 경향을 띠는가 하 50
를 알 수 없는 형태를 등장시켜서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느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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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것과는 대조되는 작품도 있다. 뿌연 평면 위에 희미한 실체 주는 작품도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작품 도 있었다. 소금을 이용한 작품이다. 바다의 유산인 소금과 불의 흔적인 종이 재를 작품에 담아낸 작품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 엿보인다. 1992년도에 프랑스로 건너갔던 윤영화 작가는 2002년도에 귀 국한 뒤 16년 동안 부산에서 활동해온 작가다. 초기에는 종교적 인 도상들을 시도하다가 후에는 자연에 깃든 성스러움을 추구하 면서 작업을 해왔다. 회화 작업을 주로 했지만 다양한 전시 경험으로 인해 설치와 영상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작가 윤영화는 전시에 관해‘2006년도에 3일간의 의식불명 상태를 경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했던 2008년도 퍼포먼스의 잔재가 작품으로 만 들어졌다. 삶과 죽음에 관한 종교적 체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평면 위주의 작업을 통해 미디어가 지배하 는 시대에서 사진과 회화의 연관성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열었다.’라고 말했다. 미술 평론가 최태만은 지면을 빌어‘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내용을 지시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해체된 이미지의 흔적을 본다. 결 국, 이런 것을 통해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지가 걸어 놓은 마법은 언제나 덧없으며, 그 너머의 것을 관 조하려는 종교적 명상의 세계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작가 윤영화는 불확실한 이미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염원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본 기자의 경우에는 그 동경과 염원이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흔들리는 피사체가 주는 가시 적인 불안함 혹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약간의 메스꺼움을 주었다. 작가 윤영화의 이번 전시는 쉽고 편안한 전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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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온도 2018. 12. 12.~ 2019. 01. 25. 021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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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들어서면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는 듯 온화한 분위기에 사로잡힌 다. 부드러운 느낌의 작품들에 둘러싸이자 감정이 차분해진다. 중간마다 포 인트처럼 있는 LED 상자들도 전시장의 분위기에 맞게 빛을 살며시 보여주 고 있다. 최은혜 작가가 작가 노트를 통해‘감각이 수집한 순간적이고 유동적인 것 과 실재하는 것 사이에서의 움직임. 나의 작업은 이 둘 간의 관계에 대한 관 심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물질적인 에너지, 즉 유기적인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두 세계의 끊임없는 교감을 시각화한다.’ 라고 밝혔듯이 이번 전시에서는 두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현실에서는 보 지 못한 그렇지만 현실에서 본 듯한 이미지들이 둥둥 떠다니는 공간을 걸어 다니면서 작가의 감각이 실재의 세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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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보았다. ‘Echo of light’라는 작품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향하는 복도 위에 관람 자를 위치시킨다. 복도 끝의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세계와는 다 른 고차원의 공간처럼 보인다. 궁금해서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든다. 실재하 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관계와 교감은 초 경험적 차원의 세계를 연 상시키고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이는 것이 진실인지 보이지 않는 것이 진실 인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작품이다. 사물의 궁극적인 실재(절대자, 무한 자, 신)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입장에서 바라보아 도 좋을 작품이다.
상) 기억의 온도 전시장 전경 하)기억의 온도 Light drawing, plexiglass, laminating paper, LED, 36x36x36cm, 2015
‘Light drawing’이라는 작품의 맥락도 위 작품의 맥락과 닿아 있다. 빛의 근원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안에 근원이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빛의 근원이 실재하는 상자 속과 실재하 지 않는 상자 밖을 대비시키고 뿜어 나오는 푸른빛은 그것의 관계를 대변해준다. 은은한 빛은 상자 안과 밖으로 연결해주는 매개체 이기도 하다. 상자 안과 밖은 그로 인해 연결되며 무한하게 변화하는 느낌을 준다. 작가 최은혜는 2010년에 이화여자대학원의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이번 전시는 최 작가의 여섯 번째 개인전으로 대구에서의 첫 개 인전이기도 하다. 2011년에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조형적인 변화와 공간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으며 공간을 수집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최 작가는 전시에 관하여‘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통해 공간과 공간, 공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또한 평소 일상 속에서 여행과 산책을 통해 형태의 변화를 발견하기 도 한다. 비행기 이동 중 발견한 빛의 모호한 느낌이 영감을 주기도 했다. 우리의 삶은 빛과도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변하는 것으로 그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또 다 른 여정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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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작가기획전 : 소헌 김만호
꽃 피는 4월에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리는 소헌 김만호 기획전의 취재를 위 해 소헌미술관을 방문했다. 소헌미술관은 김만호의 아들 내외가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수성구 만촌동에 있다. 본 미술관은 2014년에 처음 문을 열었 으며 소헌 김만호의 작품과 유품, 서적 등 1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소 헌문화예술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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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태어났다. 수저를 쥐기 전에 붓 쥐는 법을 배웠던 그는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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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1908~1992)는 경북 의성에 위치한 오토산(五土山) 아래의 마을에서‘오토산의 신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다.‘10세전 명필’로 소문이 났고 16세 때 청송의 한시 백일장에서 1등 장원을 하기도 했다. 17세 때 훈장으로 초빙되어 한문과 붓글씨를 가르쳤다. 그렇지만 일 제강점기의 압박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는 시기에 부친의 권유로 전망이 있 는 의학의 길을 가기로 한다. 한의학의 지식을 섭렵한 소헌 김만호는 22세 때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하고 30세에 한의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이 듬해에 상주에서 한의원을 개업하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그 시기에 우 리 민족은 일제의 통치 아래 약탈과 압박에 시달렸다. 좋지 않은 불행의 시 기였다. 일본은 민족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 지 못하게 했다. 치욕을 느낀 소헌 김만호는 앞장서서 일제에 항거하다 심 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소헌 김만호의 나이는 36세였다. 그래도 민족 해방의 날은 찾아왔 다. 소헌이 나이 38세가 되던 해인 1945년에 우리 민족은 일본으로부터 나 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국내의 분위기는 다시 혼돈으로 빠져들 었다. 이 시기의 혼란에 대한 소헌의 감상은 이렇다.‘과거 기미년 3월 1일 의 독립운동을 회상하면 온 나라가 함께 일어났으나 명(命)이 운(運)과 합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중략) 땅은 불과 삼천리인 데 남북이 분열되고 사람은 불과 삼천만인데 좌우가 파쟁하고 있으니 어찌
홍익인간 _ 소헌 김만호
정한 이치라 하겠는가.’ 민족 해방의 해로부터 5년이 지난 1950년, 소헌이 43세가 되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소헌 김만호와 그의 가족은 두 달 동안 피난을 다녔고 피난 후 집으로 돌 아왔을 때 그곳은 이미 예전의 집이 아닌 폐가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소헌 김만 호와 그의 가족은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딛고 대구로 이주하기로 한다. 당시 소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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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46세였다. 그리고 소헌 김만호는 대구에서 다시 의원을 열었지만, 일제의 면허 증으로 이전 개업이 불가하였다. 어쩔 수 없이 48세의 나이에 독학으로 다시 면허증 을 따고‘상주한의원’을 차린 소헌은 생활이 안정되자 다시 붓을 잡게 된다. 50대 중 반 이후는 오로지 서예에만 몰두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소헌 김만호는 12세에 3.1운동을 겪고 43세에 6.25를 관통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 와중에도 전통을 고수하고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글씨와 태도에 담겨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글씨를 가르쳤던 문하생들에게‘서여 기인(書如其人)’을 강조했다.‘글씨는 곧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소헌의 글씨는 곧 소헌 그 자체이다. 소헌의 일부이자 그가 지나온 역사였다. 전시회 준비로 꺼내놓은 소헌 미술관의 발 디딜 틈 없이 덮고 있는 작품들 위에는 소헌이 걸어온 곧은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소헌이 걸어온 서도의 길은 그의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 그러한 면모는 하나의 글을 통해 볼 수 있다. 소헌이 80세이던 해인 1987년도에 매일 신문 에 연재된‘나의 회고’라는 이름 아래 쓰인 글이다. ‘70년대로 접어든 이후 예술계에도 상혼(이익을 추구하려는 상인의 심리)이 깃들고 있다. 서예계에도 예외 없이 상품화 바람이 일고 있다. 작품이 팔리고 작가가 돈을 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과 정신이 담긴 예술품 에 값을 매긴다는 것은 왠지 거슬렸다. 더구나 일부 서예가들이 인격과 정신을 제쳐 놓고 팔기 위한 작품을 만들어 내놓기도 해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 무렵 서예 작품의 상품화 현상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혹자
1. 2. 소헌 미술관 전시관 - 촬영일은 전시준비로 작품선별 작업중에 있었다. 3. 소헌 유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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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헌선생 생전 2. 소헌생전에 사용하시던 문방사우 3. 소헌선생의 낙관들
는 나를 고지식하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서도의 근본정신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소신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글씨를 받으러 가려면 지필묵(종이, 붓, 먹)을 사가지고 가는 것이 통례였다. 그것이 글씨에 대한 대가였던 것 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서예 작품에 값을 매긴다는 것은 도무지 못마땅해서 가끔 열을 올리곤 했던 것이다. 나는 동료, 제자 들에게 가끔 추사(김정희)의 일화‘기호선인(騎虎仙人)’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길을 가던 촌부(村夫)가 호 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도, 촌부도 서로 놀라 펄쩍 뛰는 바람에 촌부가 호랑이의 등에 얹히게 됐다. 호랑이는 더욱 놀라 촌부를 태운 채 들로 산으로 내달렸다. 동리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촌부가 장하고 재미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촌부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이 사뭇 다르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화에서 추사는 어려운 절대절명의 마음가짐 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소헌 김만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요즘 의 현실이다. 시대의 흐름을 맞춰나가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우리는 전통을 쉽게 잊어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아 무리 유행에 따라가고 세계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경쟁한다 해도 우리의 역사와 전통은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보 폭이 존재하고 그 보폭에 맞게 걸어야 한다. 일부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 지금의 우리를 더 낫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시일정안내 2019. 4.17.~ 5. 4.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 멀티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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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대구오페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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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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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피리 공연 중에서 대구오페라하우스 사진제공
대구오페라하우스는 2019년 3월, 전 세계 젊은 성악가들의 축제인 <제5회 대구국제영아티스트오페라축제>를 개최한다. 개막공연 <마술피리>가 3월 7일에서 9일까지 열리고 영아티스트 오페라 <사랑의 묘약>이 3월 29일과 30일 양일간 축제의 열기를 이어간다. 2019년 오페라 유니버시아드에는 국내 4개 대학(경북대, 안동대, 영남대, 계명대)과 해외 3개 대학(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악대학, 오스트 리아 모차르테움 국립음악대학, 이탈리아 로시니 국립음악원) 성악도들이 공연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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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근대문화역사의 거리를 걷다. 본격 문화여행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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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바다가 있는 도시이다. 바다가 없는 우리지역을 생각해보면 바닷가, 갯벌, 작은 배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 는 군산의 도심에 1900년대 건축물이 역사의 아픈 상처를 안고 부 둣길을 따라 줄지어 있다. 군산 내항 역사 문화 공간(장미동 일원/15만2,476㎡)은 1899년 대 한제국 개항 이후 초기 군산항의 모습에서부터 일제강점기 경제 수 탈의 역사와 근대 산업화시기를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놀라운 것은 관광코스를 거의 도보로 이동이 가능할 정도 로 한곳에 밀집되어 있다. 그래서 바쁘게 다니는 것보다 천천히 걸으 면서 근대의 흔적을 음미하기가 좋겠다. Photo by do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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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근대건축관 근대건축관은1922년 지어진 은행 건물로 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세운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현재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사용 중이며,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고태수 가 다니던 은행으로 묘사되기도 한 곳이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자본 침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으로 이곳에는 군산 근대건축물 미니어처 전시뿐만 아니 라 일본인들의 경제 침탈 상황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4층 건물 높이 이지만 2층 으로 되어 있어 천고가 엄청 높다. 금고 안쪽에는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민족은 헐벗 고 굶주려야만 했다는 문구가 눈이 띈다.
1 사진설명 1) 외부전경: 등록문화재 제374호로 지정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2층 건물로 지붕은 함석판을 이은 모임지붕으로 만들었다. 2) 지점장실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인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공간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을 두고 있다. ( 사진은 만세운동판결문 ) 3) 로비공간에는 다양한 시청각자료를 통해 일제 강점기군산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4) 유리벽으로 가려진 벽채는 과거의 벽채를 그대로 보존해뒀다. 5) 미니어처-근대건축관 복원과정을 담은 미니어처, 이밖에도 당시 다양한 건축 미니어처를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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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군산세관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인 옛 군산세관은 서울역사와 한 국은행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옛 군산세관 내에는 시대별 개청사 사진과 전 국 세관의 관인 도장을 진열장에 진열해 놓았다. 또 마약류 은익수법, 가짜상품 등 도 볼 수 있었다.
군산근대미술관 사람의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나가사키 제18은행 군산지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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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지방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출발한 은행이다. 초기에는 대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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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으로 우리나라의 미곡을 일본으로 방출하고 우리나라
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싼 이자로 대출을 해 주고 이 돈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 에게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으로 우리 농민들의 토지갈취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근대미술관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일제 수탈사 사진전과 18은행 건물역사 전시실,18은행 보수과정전시실이 상설되어있다.
장미동 구 일본인 창고 근대문화역사거리를 들어가기 전에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장미동 구 일 본인 창고이다. 이 건물은 시멘트 적벽돌 콘크리트로 지은 2층 창고로 해방 후에 는 호남제분공장을 설립해서 밀가루를 생산하기도 했다. 군산에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창고이자 우리나라에는 군산, 부산, 인천에만 남아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군산근대미술관 전시장과 별채 전시실 뒤쪽으로 난 문을 나가게 되면 일제강점기 금고전 시와 안중근 여순 감옥 재현 전시장이 있다. 일본의 건축 은 처마를 길게 뽑으면서 1층으로 보여주는 2층 건물을 지은 것이 특징이다.
2011년에 개관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당시의 건축물이 아닌 신축한 현대식 건물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 게 미래는 없다’는 모토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부분은 지금 우리에게 다양한 생각을 던지는 질문이다. 군산 지역의 해양 물류의 역 사, 독립운동 영웅의 이야기, 근대 생활관 등 다양한 군산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3층에 위치한 근대 생활관은 사람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인기 있는 곳이다.
입장권 5천원이상 구입하면 군산사랑상품권 을 증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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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에 쉴 만한 곳 정담카페 군산세관창고에 리모델링을 통해 문화예술 공연과 전시는 물론 인문 학 강의와 지역 캐릭터를 활용한 먹방이와 친구들에서 군산 지역 특 산품 등을 판매한다. 메뉴 중에 100년 전 고종황제가 마셨다던 커피를 그대로 재현한 커 피가 눈길을 끌고 있다. 빈해원 1952년 개업한 중식당은 군산시청이 선정한 ‘군산 기네스’에서 ‘가 장 오래된 중국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진: 이곳의 대표 메뉴인 짬뽕은 짜지 않으면서 칼칼한 것이 특징이다. 이성당 팥, 야채. 팥 앙금빵과 야채빵이 워낙 유명해서 이 두 가지를 찾는 손 님을 위한 대기 장소가 따로 마련돼 있다. 미즈상사/ 미즈카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쌀 수탈의 거점이 되었으며,1930년대 무 역회사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건축물은 현재 카페테리아, 근대문 학 소통공간으로 개.보수했다. 취재정리 편집부 / Photo by do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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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 있다. 그 곡이 탄생할 수 있게끔 영감의 원천이 된 풍경이 곡 속에 녹아 들어, 그 곡을 듣는 매 순간마다 가보지도 않은 어떤 곳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이 그러한 곡이다. 여기서는 녹음 중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 는 므라빈스키의 음반을 소개하겠다. 이 음반의 첫 번째 소절이 연주되는 순간부터, 감상자는 눈이 두껍게 쌓인 설산 앞에서 폭풍을 맞고 있는 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음악은, 음정의 배열로 절대적인 조화를 찾는 음악과 비교해 예 술적 순수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갖기 쉽다. 하지만 이 곡이 특정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그의 곡 이 예술 이외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므라빈스키에 의해 예술의 정수가 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을 설 명하기 위해서 표제 음악(본 곡은 표제 음악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많은 비평가들이 인정하고 있다.) 에 대한 조악한 비유를 들겠다. 곡을 작곡할 때 영감의 원천이 된 풍경이 있고, 음악은 그 풍경이 그려진 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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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녹음, 1961년 발매 레코드사 : 도이치 그라모폰 연주 :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지휘 :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자라는 것이다. 교향곡의 특성상, 그 풍경을 얼마나 마음에 바로 와닿게 구현하느냐는 지휘자에게 달려 있 다.
앞에서 별 수 없이 거칠게 비유했듯이, 대부분의 차이코프스키 녹음을 들으면 액자 속에서 눈 덮인 러시아 의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탄생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감상자를 설산 바로 앞 으로, 그리고 차가운 가로등이 켜진 눈 내리는 모스크바의 거리로 데려갈 것이다. 음 하나하나에서 겨울의 공기를 느끼다가 마지막 음이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액자는 감상자의 마음 속에서 회상의 형 태로만 남는다. 감상자는 실제로 러시아의 모습을 보았고, 음악은 러시아에서의 경험에 대한 회상 그 자체 였던 것이다. 러시아적 센티멘탈리즘이 절절히 느껴지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러시아의 공기를 그대로 음색으로 뽑 아내는 므라빈스키의 지휘는 이 앨범을 예술의 정수로 만들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곡 전체에 걸 쳐 기본적으로 격정적인 감정이 베어 있다. 보통 격정적이라는 말을 쓸 때면 불꽃의 이미지나 뜨거운 온도 를 상상하지만 므라빈스키가 뽑아내는 음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겨울에 차가운 유리창을 볼 때 무의식적으 로 상상하는 공기의 진동이 들어 있다. 그는 음악의 디테일을 위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이끈 50년 동안 악기별로 지도 시간을 쪼개어 직접 원하는 박자와 음색을 뽑아내게끔 지도했다고 한다. 강박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그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서, 그의 녹음을 들으면 러시아의 차가운 공기와 차이코프스키의 격정 모두를, 서로에 대한 방해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더욱 강조하는 형식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성화 (작가, 객석 고전음악 연구원 회원)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Yevgeny Mravinsky / Yevgeny Aleksandrovich Mravinsky) 러시아의 지휘자.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아르튀르 오네게르, 클로드 드뷔시 등의 작곡가들의 작품에 치중했고 쇼스타코비치, 아람 I.하탸투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여러 작품을 초연했다.
2019. 3.13(수) – 03.16(토) / 19시 30분 장소 : 대명동 한울림소극장 작은 마을에 사는 베랑제는 카페에서 친구 장을 만나 대화를 하던 중 코뿔소가 달려오고 사람들 은 갑자기 나타탄 코뿔소에 대한 열띤 토론이 계 속되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다. 코뿔소가 무엇인 지 고민하는 사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코뿔 소로 변해가고, 믿었던 친구 ‘장’마저 베랑제의 눈앞에서 코뿔소로 변해버린다. 인류 최후의 인간으로서 베랑제는 과연 어떤 선 택을 할 것 인가...
한 취재를 하러 김 할머니를 찾아온다. 김 할머
는 용기와 힘이 되어 주는 이야기로 시대적 배경
니는 처음엔 거절하다가 기자의 집요한 질문에
이 잘 나타나 있어 어른들은 옛 학창시절의 추억
과거 위안부 생활을 회상한다.
을 느낄 수 있고,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의 교실에
그러나 이야기를 하던 중 일본사람들이 위안부
서 있을 수 있는 사건, 사고가 될 수 있어 어른들
사건을 없던 것으로 역사 속에 묻어버리려
과 아이들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한다는 얘기를 듣고 격분하고 용기를 내어 일본 의 법정에 까지 가서 한 증언하지만 비웃음거리 가되고 또한 믿었던 일본기자까지도 차라리 보
2019. 3.16(토) 16시 30분, 19시 30분
상을 받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2019.03.17(일) 14시, 17시
얘기를 하자 김 할머니는 더욱 분노한다. 김 할머니는 누가 뭐라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끝 까지 투쟁하리라 생각한다. 문의 : 053-424-9426
장소 : 대명동 우전소극장 직장인 극단인 극단 아띠의 제14회 정기공연인 연극 양덕원 이야기.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이 모이는 한 시골집.그런데 3시간 안에 돌아가신다는 아
문의) 한울림소극장 053-246-2925
버지는 3일이 지나도,석달이 지나도 아무련 변
티켓예매 : http://cafe.daum.net/hwl97/
화를 보이지 않는다.시시각각 들려오는 아버지
RrZc/1 (다음 한울림 카페)
의 임종 소식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가 족., 가족의 행복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 낄수 있는 연극이다. 문의 및 예약 : 010-9409-0256
2019. 3.15(금) – 4. 7(일) 평일 20시, 주말 16시 장소 : 대명동 소극장 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타도하고자 일어난 4.19혁명을 역사적 2019. 3.22(금) – 19. 3.31(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 시골 작은 학교에서 벌어
평일 : 19시 30분, 토 : 16시 19시, 일 : 15시
진 사건을 통해 당시 사회 모습을 비춰 보여주고
장소 : 대명동 예전아트홀 일본의 기자가 과거 일본군의 위안부 생활에 대
있다. 올바른 자세로 버틸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자유와 평등을 위해 소신있게 끝까지 싸울 수 있 정리 | 임종현 _ 대구공연정보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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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문화 어쿠스틱 밴드 ‘오늘도 무사히’
. SERIAL COUL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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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오늘도무사히’(이하 오무히)는 싱어송라이터 ‘엄태현’이 이끌고 있는 어쿠스틱 퓨전(혹은 + 모던록) 밴드이다. 지난 몇 년간, 특유의 감성적 음악 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어루만졌던 그들이 첫 번째 정규앨범을 발표했다. 초창기부터 자신들의 음악적 방향성으로 줄곧 ‘송곳같은 음악’으로 이야기해 왔었는데, 첫 번째 정규앨범의 제목 또한 ‘송곳’이다. 그 송곳의 날카로움은 이번 앨범 첫 곡에서부터 튀어나오는데, 필자에게 느껴지는 것은 ‘날선 감성’,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들여다보는 ‘조금은 불편한 세상의 현재 모습들’이다. 오무히가 주로 바라보는 곳은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새틀라이트’, ‘언저리에서’, ‘나의 배역’, ‘이런게 외 로움이구나’) 특별한 자신이라 생각했으나 ‘성공과 실패 언저리에서’ 헤매는 나약한 자신. ‘너도 정신차려야지’ 말하는 누군가의 시선은 낯선 존재로서의 자신을 경험하게 만들고, 자신의 시선에서마저 그런 스스로가 점점 낯설어진다. 그런 고립된 나를 지배하는 첫 번째 정서는 ‘외로움’이지만, 오무히의 음악 속에서 그 외로움은 그 자체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시선을 누군가에게로 향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살아온 자신의 터전을 재개발/재건축을 통해 빼앗기게 되는 어르신들의 회한(‘늙은 꽃’), 시대가 겪는/세대가 느끼는 ‘희망을 갖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공통의 경험(‘요즘 속담’, ‘남조선블루스’)까지, 오무히의 음악은 역시나 송곳 같은 날카로움으로 세상을 훑는다. 특히나 마지막 곡 ‘남조선 블루 스’를 통해서는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왜 올라야 하는지 모를 사다리’를 억지로 오르려다 ‘유리 천정’에 머리를 찧어야 하는 ‘시대의 세대’ 가 처한 상황을 좀 더 비판적이고, 지성적인 자세로 이야기해낸다. 시대의 화두와 같았던 사회과학적 용어들을 조금도 무겁지 않게 한곡의 음악 속에, 하나 의 맥락 속에 담아내는 저력은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 느끼는 낯선 부조리와 외로움 속에서 오무히가 나아간 길은 ‘위로’다. (‘그대로’) ‘외로움’으로만 그치고 말았다면 달랐을, 청자들을 그들의 음악으로 끌어당기는, 오무히의 음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정서는 결국 ‘이 삶과 외로움이 혼자의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듣는 이에게 는 위로가 되고, 계속되는 오무히와의 음악적 소통의 이유가 된다. ‘그대로’는 필자 개인적으로는 앨범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정서와 사운드를 들려준다고 손꼽고 싶은 곡으로, 제목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위로 하는 곡이다. 작사가로서 엄태현이라는 음악인이 가지는 가장 큰 미덕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자신 안에 더 이상 침잠하지도, 그렇다고 섣불리 누군가를 가
르치려 들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 곡 속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듣고 싶은 그 말(‘그대로도 괜찮아’)을 자신에게 먼저 던지면서 ‘있는 그대로’ 듣는 사람과
음악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오무히가 일구어내는 깊이와 경지는 결코 만만치 않다. 먼저 전체적으로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은 어쿠스틱과 국악의 퓨전 시 도는 꽤나 큰 성취를 이뤄냈는데, 특히나 첫 번째 곡 ‘늙은 꽃’ 안에서의 아쟁 연주자 전휘영과 국악타악 연주자 박희재의 농익은 연주는 앨범에 깊이를 더한 다.
음악인으로서의 오무히가 여전히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곡은 ‘언저리에서’라고 하겠는데, 이곡은 엄태현이 처음 오무히라는 이름을 들고 나오면서부 터 함께 했던 노래이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심상명이라는 뛰어난 편곡자의 어루만짐을 통해 더욱 더 음악적으로 깊이 있고 세련된 곡으로 다시 태어난 느낌 이다. (오무히에서 어쿠스틱기타 연주자로 활약한 심상명은 사실, 성악을 전공하고 솔로 어쿠스틱뮤지션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 유자이다.) ‘요즘 속담’은 가벼운 메이저 화성의 메이저 리듬으로 가볍게 친구와 대화하듯 노래한 곳으로서 오무히 음악의 기본 정서와는 조금 다른, 오무히의 음악적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 읽혀지는 곳이다. 이 곡 뿐만 아니라, 앨범전체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오무히의 베이시스트 하병구와 더불어, 전은총, 주병국이라 는 뛰어난 세션 연주자들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뛰어난 모던록 넘버 ‘이런게 외로움이었구나’와, 정통 블루스의 형식미를 그대로 차용한 ‘남조선 블루스’는 오무히의 음악적 지향의 한계없음과 가능성을 들려준다. (그 모든 것을 가로질러 음악적 성취를 극대화한 곡은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 해이긴 하지만….) 그리고 또하나 꼭 언급해야 할 점은, 이들의 음악적 성취에 있어 여러 멤버들의 역할과 함께 베테랑 디렉터 ‘최남욱’ 교수의 역할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 된다. 7년간의 활동, 두 장의 싱글앨범, 그리고 등장한 오무히의 첫 앨범에는 오무히의 ‘진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무히의 여정은 시작이라 하기엔 이 미 거대하고, 필자를 비롯한 많은 팬들이 이미, 그 여정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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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담백하게, 겸손하게 나누고 소통한다.
소 문화
화
영화 ‘마카담 스토리’
REVIEW
보편적으로 인륜지대사를 뜻하는 결혼이란 관례 앞에 수많은 어른이 갈등하고 있다. 이제 결혼은 더 이상 필수로 갖춰야 할 명분이 아니며 그저 선택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 이다. 혼인 관계의 상관없이 결혼에 대한 견해를 정립하기에 매우 훌륭한, 그래서 더 현 실적인 영화. B급 며느리.
영화의 시작은 영화감독이자 고부갈등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들 호빈의 시점으 로 진행된다. 아내 진영은 며느리로서의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시어머니와의 대립을 이어가지만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진영은 시어 머니가 바라는 며느리의 조건을 받아 드릴수가 없고 시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B급 며느리” 진영에게 분노한다. 호빈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어떻게 하면 고부갈등을 피할 Sa: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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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을지 물어보지만 명확한 해결방안을 찾을 수는 없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관객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혹은 현실에서 겪고 있는 또 다른 한명의 진영으로서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뱉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방적인 억압과 착취가 부당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것이 고부 관계에서 일어 나는 갈등일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어딘가 버릇없는, 상도를 모르는 자식이 될 것 같은 불편함이 그동안에 고부 관계에서 솔직해질 수 없었던 울타리를 만
다큐멘터리 한국 80분 2018 .1.17 개봉 감독 선호빈 주연 김진영, 조경숙
든 것 같다. 아들의 아내와 남편의 어머니는 과연 어떻게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타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바라 는 것은 이기적이다. 가족이라는 명분 하에 모든 것을 지배적으로 이끌 수는 없다. 나와 상대의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인지가 관계를 발전적으로 변화시키 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 다루기 어렵고 힘든 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부모는 아들이 꾸린 가정에 대한 배려와 이 해가 필요하다. 그들의 삶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결혼관이 존재하고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가장 우선은 가정을 꾸린 두 사람의 선택이다. 이점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진영은 자기의 방식대로 부당한 관계를 개선해 나간다. 비록 당장은 받아드리기 힘들고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일지라도 조금씩 서로의 변화에 익숙해지면 이전보다 훨씬 성숙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혼관과 상관없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 겪게 되는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기 좋은 영화임 이 분명하다. 영화를 통해 받은 투쟁적인 며느리에 대한 통쾌한 에너지 또한 각자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든 확장되었으면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진영이 더 어떤 급으로 규정되지 않는 주체적인 며느리가 되길 바란다.
소 문화
화
영화 가버나움
REVIEW 원
126분, 2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 시간이다. 인생의 고달픔과 분노를 표현하기에는 짧 은 시간이다. 제목 가버나움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명으로 이스라엘 갈릴리 바다 북 쪽에 있던 성읍이다. 성서에 의하면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문둥병을 치료하고 중풍 환 자를 낫게 하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한 곳이다. 이처럼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음에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 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6세기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 속 배경은 가버나움이 아닌 레바논이다. 생명이라는 기적을 돌보지 않는 부모의 죄악과 멸망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추측해본다. 게다가 제목 가버 나움은 프랑스어로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다. 뒤죽박죽 하고 잡동사니 같은 주인공의 상황을 암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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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주인공을 포함한 배우 중 몇몇은 연기를 배우지 않은 실제 난민이거나 불 법체류자라는 것이다. 특히 주인공 자인의 진지한 연기가 매우 훌륭했다. 영화 속에서 자인의 가족은 불법체류자다. 불법으로 구한 약을 팔며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나간다. 부모는 자인의 동생이 생리를 시작하자 돈을 받고 팔 듯이 결혼시켜버린다. 동생 사건 으로 분노에 찬 자인은 집을 나가고 마찬가지로 불법체류자 신분인 라힐을 만난다. 그 렇게 라힐 그리고 그녀의 아들과의 동거가 시작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라힐과의 동거 가 끝나자 갈 곳이 없어진 자인은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 자인은 환영
가버나움 Capharnaum, Capernaum, 2018 드라마 레바논 , 프랑스 126분 2019 .01.24 개봉 감독 나딘 라바키 출연 자인 알 라피아(자인),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라힐)
받지 못하고 최악의 소식까지 듣게 된다. 팔려 간 여동생이 죽어버린 것이다. 화가 난 자인은 그 길로 달려 나가 여동생이 팔려 간 남자를 칼로 찌른다. 자인 의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다. 어떻게 그런 불행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불행하다. 그 불행은 분노로 응집되어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단순히 한 아이의 분노로 끝나지 않는다. 라 힐의 등장과 함께 영화의 방향은 조금 꺾여버린다.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처절한 분노와 눈물로 인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화가 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정말로 처절하다.
레바논 출신의 감독 나딘 라바키는 자인의 변호사 역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나딘 라바키는 세 번째 영화인 가버나움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상을 받 기도 했다. 감독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일까? 그것의 커다란 근원은 난민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레바논은 시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난민 이 많이 유입되는 나라다. 몰려오는 난민의 수에 비해 정부의 대응은 미적지근하고 국제기구와 민간 기구의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로 인해 해마다 난 민은 늘어만 가고 자국민의 난민 혐오는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이 영화 가버나움을 만들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자인이 미소를 짓는 모습이 아련히 남는다. 우리는, 세계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소 문화
소
저 김규종 _ 경북매일신문, 2018 김규종은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다. 파안재(破顔齋), 깨뜨릴 파, 낯 안, 집 재. 얼굴을 깨뜨릴 정도로 웃 는 집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누구든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은 집의 이름이 다. 김규종 교수는 오랫동안 경북 매일신문에 칼럼을 연재해왔다. 책 ‘파안재에서’는 김규종 교수가 썼던 칼럼들 을 읽기 좋게 묶어 놓은 책이다. 김규종 교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논객이며 유쾌한 사람이기도 하다. 책 ‘파안재에 서’를 읽으며 그와의 가슴 설레도록 진지한 대화에 빠져보자.
저 이경순 _ 황금알, 2012 이경순의 시는 솔직하고 담백하다. 슬픈 면모도 있다. 설명 대신 작가의 시를 한 편 옮겨본다. Sa: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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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전화를 끊고’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비극을 만들고 관객도 없이 무대에 있는 배우처럼 공허한 것일까. 알면서도 막지 못하고 보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스스로 암울한 집을 몇 채 설계하고 그곳에 누워 / 이젠 햇살 드는 집 지어 보리라 결심하는 나는 늙은 건축자.”
저 에밀 졸라 역 최봉림 _ 책마루, 1885 프랑스 북부의 한 탄광촌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과 그들의 저항, 투쟁을 생생하고 사실적 으로 묘사한 자연주의 문학의 걸작으로, 노동자계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소설이다. 작품을 읽기 전에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작품에는 한참 마르크스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당시 마르크 스 사상을 서로 다르게 이해한 세 남자가 등장한다. 사회 구조 조정에 있어서 온건파와 강경파 그리고 이제 막 사회주의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주인공 에티엔. 그리고 지식이 전무한 채 자신의 삶에만 관심이 있 는 민중들. 그들이 투쟁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배고픔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비교해본다.
책 선정 및 리뷰 손현민 | 사각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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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구독해주시는 분들 김경호, 이범희, 김성수 , 이성우, 김종기, 권용성 , 김양동, 노성식, 손영인, 김영세 님 감사드립니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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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 Review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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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2017 vol 07
2017 vol 08
기획 공공미술: 벽화의 현주소
벽화마을의 벽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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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극작가 손호석 리
제 34회 대구연극제 참가작 국립현대무용단 렉처퍼포먼스 춤이 말하다 유리상자- 아트스타 2017 2017 JUL/AUG NO.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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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2017 JUL/AUG NO.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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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대구 인터뷰 화가 김찬주의 공존의 공간
2019 mar. apr. VOL.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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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86-2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