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17〜18절 개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
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
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
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자신의 사도 직분을 경시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사도로
서의 자기 사역을 천거하는 것으로 고린도후서 3장을 시작합니다.
이뿐 아니라, 그런 고린도 교인들이야말로 자신을 천거하는 더없이
좋은 추천서라고 말합니다( 2절 ). 이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워 섬기게 하신 영광스러운 복음을 주장할 토대를 마련합니다 ( 6절 ). 탁월한 어떤 것을 주장할 때, 우리는 보통 그 자체로 탁월한
다른 것을 예로 들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예로 든 그것보다 훨
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보임으로 그렇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3장 전체를 통해 자신이 맡은 복음 사역을 구약 성경의 율법 사역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맡은 복음 사역을 천거합니다.
사도는 먼저 율법보다 뛰어난 복음만의 독특한 특징 몇 가지를
나열하고 복음을 율법과 비교합니다( 6절 )
(1) 복음 사역은 옛 언약의 율법이 아닌 새 언약을 섬기는 일입 니다.
(2) 복음 사역은 율법 조문이 아닌 성령의 사역입니다.
(3) 복음 사역은 죽이는 율법 조문과 관련된 사망의 일이 아니라,
살리시는 성령과 관련된 생명의 일입니다.
복음의 탁월한 영광을 설명하는 추론들
바울은 복음만의 이런 특징에서부터 복음의 탁월한 영광을 더 자
세히 설명하는 추론들을 이끌어 냅니다.
(1)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다
면( 7절 ), 다시 말해 ( 생명이 없는 글자나 말과 같이 ) 아무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고, 오직 사람들의 마음을 그 율법이 새겨진 돌 판과 같이 굳어
지게만 하는 율법에 대한 문자적이고 단순한 지식도 영광스러웠다
면( 유대인들 스스로나 그들 주변 나라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8절 ) ? 고린도 교인들을 먹으로나 죽은 문자로가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
의 영으로 쓴 편지라고 말하는 3절에서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습
니다. 사람의 마음 판에 새긴 영으로 쓴 이런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돌과 같이 굳게 하는 돌 판에 쓴 율법의 죽은 조문이 하는 것과 달
리, 사람의 마음을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고 전인을 새
롭게 하여, 율법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합
니다( 2절 ). 그리스도께서 심비에 새겨 놓으신 신령하고 은혜로운 편
지에 걸맞은 삶을 통해 그들은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의 편지로 드
러납니다.’ 이런 사역( 율법의 사역이 아닌, [갈 3:2] ) 을 통해 사람의 마음
과 삶에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영광의 영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이런 사역은 율법이 하는 일
보다 더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2)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이라고 말하는 9절에는 또 다
른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고( 갈 3:22 ) 사망을 선고
한 말씀이 영광스러웠다면, 사람들을 의롭다 하는 말씀은 더 영광
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정죄하는 것보다 더 영광
스럽고, 생명을 멸하는 것보다 생명을 주는 것이 더 영광스럽기 때
문입니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요( 잠 19:11 ),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 있는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합니다( 롬 9:23 ).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그들의 입을 막아 핑계할 수 없게 하고, 정
죄하는 것으로 영광을 삼는 율법은, 이런 점에서 훨씬 더 탁월한 복
음의 영광에 가려져 아무 영광도 얻지 못합니다. 율법의 혹독함과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의와 만족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고 하
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3) 11절에서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
으로 말미암았은즉”, 즉 새 언약이 주어짐으로 옛 언약은 비로소 옛
언약이 되고( 히 8:8 ), 흔들리고 변하여 사라졌으므로( 히 12:27 ),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진동하지 않고
길이 있게 될 새 언약이고, “영원한 복음”입니다( 계 14:6 ).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때, 이전 것은 더 이상 기억되거나 떠오
르지도 않는 것처럼( 사 65:17 ), 또한 하나님의 이전 역사와 나중 역사
를 비교할 때, 탁월한 나중 역사에 가려 이전 역사는 기억되지도 않
는 것처럼, 복음이 율법에 대해 그렇습니다.
(4) 계속해서 사도는 복음이 율법에 대해 가진 또 다른 탁월함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사역과 교리가 가진 명증성과 위로 넘
치는 단순함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
노니”( 12절 ). 이와 관련하여, 복음 사역이 율법이 하는 일보다 탁월 한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13〜15절 ).
[1] 모세의 사역은 그의 사역에서 비치는 찬란한 빛을 견디지 못
하거나 율법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수 치스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정죄하는 등의 심각한 것이었습
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할
정도로 율법이 말하는 것은 희미하고 어두웠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 은 “모세의 얼굴에 쓴 수건”이라고 하는 모형과 그림자 때문에 모
세의 사역의 성격과 범위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3] 그들의 마음은 맹인과 같습니다. 모세와 그의 사역에서 볼 수
있는 그림자와 의식들에 착념하는 유대인들은 율법의 마침과 실체
1장 ┃ 고린도후서 3장 17〜18절 개관 11
가 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거부합니다. 이
는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덮고 있던 그림자와 의식이라는
수건이 아직도 이들의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달리 할 방도가 없습니다. 모세 율법의
모든 모형과 의식들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능한 한 가장 명
증하게 보여 주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 모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이 제거되었지만, 복음이 그 영과 능력으로 “그들의 마음을 가
리고 있는 수건”을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그들이 가진 본성
적인 맹인 됨과 완고함이 제해지지 않으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무
지와 올무에 매여 있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율법은 그들
의 눈먼 것을 제하기는커녕 눈멂을 더 악화시킵니다. “그들의 마
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14절 ).
희미하고 어두운 율법에 반해, 사도는 지금 명확하고 확연히 드러
난 복음, 두렵게 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복
음을 천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일들, 즉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영광을 항상 자유롭고 담대하게 바라봅니다.
(5) 더구나 모세의 사역 아래서는 아무리 율법을 읽어도 사람이
새롭게 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복음에는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능력이 매우 많아, 사람이 새롭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사
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고, 가장 합당
하고 신령한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계속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형상을 따라 자라 가게 합니다.
우리가
2장 성령의 의미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과 그 일이 불러오는 감미
로운 결과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영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영을 보내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
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영이십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이 ‘주님은 육체적 존재가 아닌 영이시다’라 고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이 말이 사실임에도, 본문에서 말하
는 영을 하나님의 신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 한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이시기라도 한 것처럼, 제삼위이신
성령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는 각각의 삼
위를 혼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영이라는 말을 제삼위께만
제한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성령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말도 아닙
니다. “주는 영이시니”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거나,
성령이 하나님이시라거나, 그리스도께서 성령이시라는 것을 뜻하
지 않습니다. 이 말은 특별한 때의 특별한 사역을 지칭하기 위한 것
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 직분 등의 여러 모양을 통해 교회의 주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영이십니다.” (1) 그리스도
는 그 영을 가지셨고, (2) 그 영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 되시는 이유
성령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충만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신령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성령은 모든 것이 되 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뭘 하시든, 항상 스스로 성령이 충 만하여 행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성령을 보내시고, 사
람으로서 성령을 받으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시고 또한 받으십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이신 성자에게
서 나옵니다. 하지만 동정녀의 몸에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성령은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복된 그리스도의
육신을 거룩하게 하시고 모든 은혜와 은사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넘치게 받으신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요 3:34 ).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보다 뛰어
나고 탁월한 방식으로 성령을 가지시고, 또 그렇게 가지셔야만 합
니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친밀한 연합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이십니다. 성령이 모든 피조물 안에 거하시는 것을 다
더해 놓은 것보다 더 충만하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니다. 모든 천
사와 모든 인간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보다 더 충만하게 거하십
니다. 그리스도께는 천사들이나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
는 신성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는 성령을 한량없이, 총체적이고 집약적으로 가지시
기 때문입니다. 모든 다른 피조물에게는 각기 분량에 맞는 은혜가
임하지만, 그리스도께는 무한한 은혜가 있습니다.
(3) 성령은 그리스도께 한결같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
게 임하시는 성령은 그 충만함에 있어서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더 충만히 임하시다가도 또 다른 때는 덜 임하시기도 합
니다. 비록 완전히 성령이 떠나가시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는 위로
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은혜의 측면에서도 영적으로 곤궁해지는 때
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만은 영원토록 한량없이 임하십 니다. 그래서 이사야 11장 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
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4) 교회와 관련한 그리스도의 직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
의 머리시요, 신랑이시요, 왕이시요, 선지자이십니다. 머리에는 보
고, 듣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모든 중요한 기능이 집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에 걸맞게 온몸을 제어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마
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온 세상의 정사를 짊어지셨 습니다. 생명이 뿌리에서 모든 가지로 뻗어 가는 것처럼, 모든 탁월
함이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지체들에게 나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령을 한량없이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스
도에게 있는 성령의 충만이 항상 흘러나는 샘의 충만함과 같다면,
우리가 누리는 충만은 그 샘에서 받는 웅덩이의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샘이고, 우리는 그 은혜가 흘러가는
도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은혜가 원천으로서의 은혜라면, 우리가 가진 은혜는 파생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부으신 기
쁨의 기름은 동류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 45:7 ). 기름 부음을 받은 그분을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말 그대로 물질
적인 기름 부음을 받아서가 아니라,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구별되
시고, 중보자의 직분으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인
성과만 관련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왕들과 제사장들
처럼 기름 부음을 받아 세움을 입은 자신의 모든 동류보다 우월하십
니다. 이런 분이므로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시요, 선지자 중의 선
지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동류보다 탁월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동류
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
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요 20:17 ).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맏형이시요, 모든 일에서 가장 탁월하십니다.
(5) 그리스도는 우리가 모두 따라야 할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우
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롬 8:29 ).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령과 모든 은
혜를 가장 탁월하게 가지셔야 합니다. 가장 탁월하고 장성한 그리
스도인들이 가진 은혜도 이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강한 자나 약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자의 모범과 본이 되십니다. 당시 모든 그리
스도인의 지도자였던 바울조차도, 자기 안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
혜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 가운데 하나였
을 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
질문. 언제 이런 성령의 충만함이 그리스도께 주어졌습니까? 그리
스도는 언제 이런 충만함을 받았습니까?
대답 1.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습니다. 연합과 기름 부음은 서로 나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연합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항상 함께 합니다.
대답 2.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온전히 드러나셨
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하신 바로 그때 성령을 받
으셨습니다. 막 복음 사역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였습니다. “주 여 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 61:1 ).
대답 3. 하지만 그리스도께 임하신 성령이 온전히 증언되고 드러
난 때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고 부활하신 이후입니다. 우리
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시고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잠시 가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온전히 고난을 당하신 지금은
더 이상의 낮아짐도, 그 영광을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
도 안에 있는 성령과 모든 영광이 드러날 뿐입니다. 영광의 왕으로
그의 보좌에 앉히셨고, 만물이 그 발아래 있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 드러났고,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부활과 함께 만유 의 주시요 왕으로 드러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영이 되시는지 살 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1) 모든 진리의 “영”이시고, (2) 인간에게 생명을 주
시는 모든 인간의 “영”이십니다.
(1) 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즉 뱀의 머리를 밟을 복된 후손에 대한 처음 약속에서부터( 창 3:15 ),
성경의 마지막 장까지 그리스도 외에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 니까? 그리스도를 빼면 성경이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율법은 그저
죽은 문자일 뿐이고, 그리스도 없는 복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
스도는 모든 성경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바로 “그 영”이십니다. 그
리스도 없는 모세는 몸이 없는 그림자요, 영혼 없는 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없애 보십시오. 놋 뱀이 다 무슨 소용이며, 법궤는 또 무
엇이며, 제사가 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없이 이 모든
것이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아닙니까? 구약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
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의식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도덕법은 우
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갑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영이십니다. 그
리스도 없는 성경은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그런 것처럼, 그저 죽은
책이요,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2)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의 모든 교회와 자녀들에게 신령한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항상 교회와 함께하셨고, 끝까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이 땅에 계시지 않는 것
은 교회에 전혀 손실이 아닙니다. “보혜사”이신 자신의 성령을 보내
셨을 뿐 아니라, 이 때문에 이 땅에 계실 때보다 승천하신 후에 더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즐거움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고 “자신의 “동류”보다 탁월한 은혜를 받으셨습
니다( 시 45:7 ). 하지만 이마저도 다 자신의 동류들을 위한 것이었습
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든, 무엇을 가지셨든, 모든 것은 다 그리 스도의 교회와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나셨고, “우리를 위해” 내줌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또한 교회에 하시는 모든 일은 성령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십니다. 삼위 가운데
제일위이신 성부로부터 ( from ) 만물이 비롯되고, 성자를 통해 ( through )
만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물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은 만
물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모든 일은 성부 하나님으로부
터 ( from ) 비롯되고, 성자를 통해 ( through ), 성령에 의해 ( by ) 이루어집
니다. 성부가 지혜로 계획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일들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영광스러운 상태로 우리가 지어져 가는 것도 다 성령에 의해서입
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과 사랑과 같은 모든 은혜로 역사하기로
정하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친히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자신의 공
로로 그렇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도 다 완전한 구원자로 드러나시기 위함
입니다.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만물에 역사하는 본질적인 생명력
과 효과적인 원리는 성령이십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그 가진 지
혜와 총명을 따라 일을 시작하고, 생명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수행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가 일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시고, 성부가 지혜로 뜻하신 일들을 성자가 시행
하시고, 성부와 성자의 능력이신 성령이 우리에게 그대로 역사하시
고 일을 이루십니다. 성령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라
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눅 1:35 ).
피조 세계에 이루시는 창조와 섭리의 역사는 무엇이나 제삼위로
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집 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와 자녀들에게 하시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와 모든 일은, 단순히 제삼위로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으로
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먼저 그리스도의 인성을 충만하고
거룩하게 하신 그 영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
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바로 성령을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우리의 죄악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
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령을 힘입어 자신의 죽음과 고난으로 우
리를 성부와 화목하게 하신 후에야, 우리를 위해 피로 값 주고 사신
자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아담 안에 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결코
받을 수 없고,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인 첫째 아담에게 물려받는 것들
을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단순한 한 인간에
게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둘째
아담”에게 받습니다. 아담 스스로는 지금 우리가 받는 것과 같은 영
광스러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아담이 받
은 은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이 제삼위이신 성령에게서 각기 자신의
탁월함을 받아 가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서의 아담 자신이 받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실 뿐
아니라, 성자 하나님과 놀라운 방식으로 연합해 하나가 된 우리의
새로운 본성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에 의해 은혜를 받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
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 죽었다가 스스로 살아나신 그리스도
는 자신의 모든 지체도 살리십니다. 먼저 자신이 성령을 받으셔서,
그 성령으로 자신의 인성을 충만하고 거룩하게 하실 뿐 아니라, “자
기 몸과 같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 자신의 인성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신과
신비하게 연합한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고, 동일한 성령으로 거룩
하게 하십니다.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는 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성령을 우리
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1]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으로 역사
하십니다. 으뜸가는 동인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사람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하십니다. 사람
은 자신의 지평을 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고, 은혜로 역사하
거나 성령을 줄 수도 없습니다.
[2] 신성과 연합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로와 대속의
만족을 통해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받으셔서
나누어 주시고 부어 주십니다. 이 일은 아들 안에서 사랑받는 모든
자에게 성부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서 자신의 공로를 힘입어 성부와 함께 성령을 주십니다. 자신의 고
난과 만족을 통해 선물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제 일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서 영생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야말로 이제까지 임한 가장 위대한 선 물입니다. 그 다음이 바로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 성령은 모든 은사
와 은혜의 씨앗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를 통해 이 성령을 얻습니다.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시지만, 성령도 자의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입
니다. 삼위일체의 본성적인 일치와 동의를 통해 볼 때, 성부와 성자
가 성령을 보내시지만, 성령 역시 자의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3]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받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뿐 아
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봄 ( example ) 을 통해서도 성령을 받습니다. 그
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은혜의 표준적인 동인이십니다. 앞
으로 드러나겠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
으로” 변해 갑니다. 사랑하고 각별히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는 것처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려
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많은 일을 생각할 때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를 향한 사랑이 더해 가고, 그리스도를 더 자주 생각하고 닮아 가려
는 열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부활 후에 더 풍성히 임하신 성령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성령이 더욱 풍성히 임하셨습니다. 그리스
도는 부활하신 후에 가장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셨습니다.
정오의 태양이 가장 높이 떠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것처럼, 부활 후
에 그리스도는 가장 널리 풍성하게 그 빛을 비추셨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진
노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으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복된 선
물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오지 않으셨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요 7:39 ). 성령의 선물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일을
마치시고 영광으로 부활하심으로 만족하게 되신 하나님은 은혜의
선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2]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
에 계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회에 그 전보다 더 풍성히 성령을 주
십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피조물인 태양이 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있으므로 온 땅 구석구석이 햇볕을 받습니다. 우리가 태양을 지금
있는 자리에서 옮겨 우리 집이나 마당이나 뜰로 가져올 필요가 없
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온 지면에 열과 빛을 보내고, 낮은 곳에 있
는 모든 것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이 태양이 머물 가장 탁월
한 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높이 들리신 그 자리야말로 그리스도께
서 이전보다 성령을 더 풍성히 주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마찬가지
로, 지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이
땅에 계시면서 교회를 위해 일하시는 것보다 교회에 더 유익입
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새로워진 육체는 하늘에 계시지만, 그리스도
의 인격은 어디든 없으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정도로 풍성하고 한없는
은사를 주십니다( 엡 4:10 ). 복음의 장막을 넓히시고, 많은 사람을 자
신께로 불러 모으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해의 고도가 낮고 땅에
가장 가까운 겨울에는 춥고 모든 만물이 죽은 것 같지만, 여름에 해
가 높아져 중천에 이르면, 만물이 새로운 옷을 입고, 그 속에서 새 생명과 신선함이 돋아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성령의 생명력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하게 드러났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덕이 이전
보다 더욱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이 복된 의의 아들이 높아져 성부
의 우편에 좌정하셨을 때, 그리스도의 본성은 완전한 부요함 가운데
있게 되었고, 영광으로 가득한 모든 은혜로 완전하게 옷 입으셨습
니다. 그리스도의 밝은 빛과 뜨거움은 더해만 가고, 그 온기와 역사
가 곳곳에 미칩니다. 의의 태양이 비치는 영광의 빛이 온 지면을 달
리고, 복음의 빛은 더 많은 사람에게 닿습니다. 더 이상 차별이 없습
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대 위임 명령이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 말
씀과 함께 성령이 행하시고 사람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은
많은 사람이 교회에 더해집니다( 행 2:47 ).
적용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는 영이시니”라는 말씀의 의미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독특하고 탁월하게
계시고, 그리스도는 그 성령을 주시고, 바로 그 성령을 통해 은사들
을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생명
과 힘과 감화는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무엇이나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가지신 것과, 하신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성령은 모든 충만으로 거하십
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우리가 이 진리들에서 유
지은이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년)
리처드 십스는 성공회 사제와 신학자로서 이른바 주류 청교도주의의 대표자였다. 서
퍽의 토스톡에서 마차 바퀴 제조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뜻과 달리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뛰어났던 덕에 독지가의 후원을 받아 18세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
트존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는다. 십스는 노리치의 성공회에서 사제
로 서임을 받고, 케임브리지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교구 목사, 런던의 그레이스인의
설교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서린 홀 학장의 직위를 계속 수행했다.
십스가 살았던 17세기 초 영국은 극심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의 시대였다. 청교도
에 대한 핍박이 거셌고, 많은 이가 신앙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십스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논쟁보다는 사랑을, 비판보다는 격려를 선택
했다.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로 대변되는 연약한 성도
를 향했고,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긍휼과 인내를 선포했다.
십스는 성도가 율법주의의 속박이나 절망감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복음의 위
로와 소망을 전했다. 십스의 저서들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도록
이끄는 힘이 있었다. 비록 당대의 권력자에게 때로는 오해와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온유함과 겸손함, 복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 었다.
리처드 십스는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빛을 밝혔던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 그의 삶 자체가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였으며, 그의 저작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동일한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 주고 있다. 그의 글
을 통해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금 발견하
게 될 것이다.
옮긴이 장호준
미국 트리니티 뱁티스트 교회(TBC) 회원으로 퓨리탄 리폼드 신학교(Th M.)를 졸업 했다. 현재는 TBC 파송 교회개척자로 전남 여수시에서 1689 런던 뱁티스트 신앙고
백에 따른 ‘트리니티 뱁티스트 교회’(tbcsk.online)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역서로
는 토머스 보스턴의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해설1』(부흥과개혁사), J C. 라일의 『거룩』, 존 머레이의 『구속』, 토머스 슈라이너의 『히브리서 주석』,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파 교의학(단권축약본)』 등이 있다.
소개글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 적 없는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 속에서 참된 기쁨과 자유를 잊고 헤
매고 있지는 않은가?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수많은 규칙과 의무의 무게에 지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부흥과개혁사가 리
처드 십스의 『율법을 초월하는 복음의 영광과 자유』를 번역하여 전자책으로 선
보인다.
이 책은 율법의 그림자에 가려진 복음의 찬란한 빛을 재발견하도록 우리를 인
도한다. 십스는 특유의 따스하고 목회적인 필치로, 우리를 얽매는 율법의 한계
와 역할을 명확히 밝히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자유
를 주시는 복음의 무한한 가치와 능력을 감동적으로 논증한다.
우리는 왜 율법 아래에서 신음하는 대신,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하는가?
십스는 마치 다정한 영혼의 의사처럼, 우리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 답을
제시한다. 그는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초등교사라면, 복음은 우리를 그리스
도의 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임을 선포한다. 더
이상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헛된 노력이나, 과거의 실수로 인한 죄책감에 발
목 잡힐 필요가 없다.
이 책의 초판은 십스가 죽은 지 4년 만인 1639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편집
자인 토머스 굿윈과 필립 나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와……이 땅
에서 누리는 은혜, 내세의 영광”을 잘 보여 주는 글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이
책은 “일찍 주의 뜻을 따라나선 이래, 끊임없이 그 길을 따라가는 모든 이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