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f a fr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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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육필원고展 조병화 육필원고展

개구리의 명상

개구리의 명상 Meditation of a Frog

2017



조병화 육필원고展

개구리의 명상 Meditation of a Frog



청와헌에서 조병화 시인, 1990



『개구리의 명상』육필원고展 을 기획하며 조병화 시인은 교직에서 퇴임한 후 귀향을 위하여 1987년 편운재 옆에 새 집을 짓고 이 집의 당호를 청와헌(聽蛙軒)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난실리 들판에서 자 욱이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는다는 명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집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창작활동을 이어 가며, 버스정거장, 마을 쉼터를 비롯하여 어린이놀이터를 만들고,‘우리 난실리’시 비, 장승,‘꿈’깃발을 세우는 등 다시 만난 이웃들과 고향 가꾸기에 힘을 기울였습 니다. 정부에서도 이 점을 기리기 위하여 난실리를‘문화마을’ 로 지정하였습니다 (문화부 제90-2호, 1990년 6월 13일). 이와 같이 청와헌은 조병화 시인의 노년의 명상과 고향 사랑의 터가 된 기념물입니다. 올해는 청와헌 준공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조병화문학관에서 는 청와헌에서 쓰인 시편들을 모아 출간된 시인의 제40시집『개구리의 명상』육필 원고전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개구리의 명상』 은 시인의 철학 중에서도 인간과 고향,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명 상이 전개된 시집입니다. 이 속에는 시인의 남다른 애향정신이 담겨있어 뿌리를 잊 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됩 니다. 특히 이 시집의 초고로서 한 획 한 획을 정성들여 써 나간 육필원고가 발굴되 어, 이 또한 시인의 예술혼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판단되어 전시를 통해 독 자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이 책자 좌측에는 초간본에 실린 시를, 우측에는 육필원고를 실었습니다. 육필원 고와 초간본 사이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병화 시인 이 어떤 고민을 통해 시를 완성시켜 나갔는지 시인의 시 방법론을 짐작해 보는 즐 거움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2017년 5월 조병화문학관 관장 조 진 형


개구리의 명상 |차례|

머리말 육필 원고 1 나의 사투리를·13 2 개구리(A)·15 3 네가 그렇게 울어대면·17 4 장마·19 5 개구리(B)·21 6 우리의 사랑은·23 7 낙엽을 걸으며·25 8 가을·27 9 어머님은 절마다·29 10 어머님이 내 마음 안방으로·31 11 고향산천을 오가며·33 12 나의 종교에는·35 13 사랑과 꿈·37 14 午睡(오수)·39 15 하늘·41 16 사랑하며, 배우며, 가르치며·43 17 어느 아침·45 18 사진을 추리며·47 19 시간·49 20 병원·51 21 허수아비·53 22 一秒(일초)사이·55 23 나의 시는·57 24 바람은·59 25 죽음은 차례로·61 26 섬·63 27 6월·65 28 길을 가면서·67 29 초여름 아침·69 30 1993년, 아카시아·71 31 찔레꽃·73 32 나는 움직이는 작은 절·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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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람이 사는 길·77 34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보내며·79 35 문을 닫고 사는 사람에게·81 36 내가 어느 날 나에게·83 37 自我(자아)·85 38 하얀 원고용지·87 39 원고용지에 시를 쓰며·89 40 파이프를 피우며·91 41 오늘은 어머님 忌祭祀(기제사)·93 42“평화의 댐” 을 돌아보고·95 43 동해 모래사장에서·97 44 외섬·99 45 오해·101 46 나의 꿈엔·103 47 옷고름·105 48 어느 비 내리는 오후·107 49 위대한 고통·109 50 어느 저녁 T.V를 보며·111 51 추석달·113 52 秋夕곞休(추석연휴)·115 53 비어가는 나의 주위·117 54 惠化洞(혜화동) 로타리·119 55 꽃꽂이 꽃·121 56 어제 내가 나에게 하는 말·123 57 이제서야·125 58 조국이라는 이름의 이 생존·127 59 눈내리는 날, 난로가에서·129 60 어느 날의 도시풍경·131 61 12月·133 62 먼 세월·135 63 고전지(古戰地)를 돌며·137 64 기도 아닌 기도·139 유사하면서도 다른 순수문학 계열의 시인 조병화 / 강정구·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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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개구리의 명상』64편은 나의 제40宿(숙)이 되는 시집입니다. 제39숙 『잠 잃은 밤에』 이후의 작품들입니다. 片雲齋(편운재), 나의 고향집엔 聽蛙軒(청와헌)이라는 사랑방이 있습니다. 주위 논밭에 6월이면 귀가 따갑게 개구리들이 울기 때문에 청와헌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시들은 이 청와헌에서의 작품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나는 오래도 살고 있으면서 쉴 새 없이 시를 벗삼아 써 왔습니다. 이것밖엔 나의 길은 없었고, 위안도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살아있는 아무런 이유도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로 시를 사는 길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무이한 길이었으며 그 보람이었 습니다. 이렇게 시는 나의 유년기였으며, 청춘이었으며, 노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나의 그 만년이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시는 나에게 많은 고독을 주었습니다만, 많은 기쁨 과 그 혼자 사는 아름다운 마음의 고향을 주었습니다. 시는 나에게 있어서 언어가 아니라 살아가는 힘이었으며, 보이지 않는 꿈 이었으며, 변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나는 오로지 이 긴 세월을, 그 힘과 꿈과 사랑으로 어머님이 주신 내 인 생을 흔들리지 않고 다해 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맑게 살아온 것은 고독이라는 마음 속의 보석을 맑게 닦아 왔 기 때문이었습니다.

1994. 안성 편운재(片雲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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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 1994,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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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

나의 사투리를 아는 사람은 다만 나의 고향 사람들뿐이옵니다

아, 그와도 같이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뿐이옵니다.

(1993.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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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

유월 초여름 밤천지를 개구리들은 세상 모르고 웁니다

하늘이 주신 하늘의 목소리로 한낱 거리낌 없이 청명하게 온 천지를 진동시킵니다

그 소리에 취해 어느덧 나도 나도 모르게 소리 나지 않는 오열로 울고 있었습니다

오, 천진무구한 약한 자들의 티 없는 목숨들이여.

(1993. 6. 20. 청와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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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

네가 그렇게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네가 그렇게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아, 네가 그렇게 흐느껴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네가 그렇게 슬피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난들 어떻게 하라고.

(1993.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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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쏟아지는 소리 물 밀리는 소리 벽 무너지는 소리 퀄, 퀄, 흙탕물 몰아치는 소리 사방이 물, 물, 물, 번쩍 하늘이 갈라지는 빛, 치자 꽝,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그제도 비, 어제도 비, 오늘도 비, 아, 내 마음도 비.

(199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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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

초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밤하늘을 무논에서 목청껏 세상모르고 울어대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나는 텅 비어가면서 눈물이 돕니다

어쩌면 저렇게도 순진한 울음소리가 있으리 하늘의 목소리 다하여 밤새워 온 천지를 진동시키는구나

나의 슬픔은 그곳에 숨어 있는 거 오, 순수 무구한 無常(무상)의 희열이여 생명을 가진 자들의 오열이여

어머님, 지금 어머님 묘소 앞 무논에서 천진무구한 개구리들이 세상모르고 부처님이 주신 목소리 다하여 유구한 세월, 이 한 순간을 목청껏 울어대고 있습니다.

(1993. 6. 20 청와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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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6

우리의 사랑은 맑은 공기처럼 긴 세월을 서서히 살아가는 맑은 호흡 이옵니다

고요히 흘러가는 세월에 고요히 흘러가는 사랑, 시가 되고, 수필이 되고, 그림이 되고, 예술이 되는 맑은 호흡,

아, 조물주여 감사합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요, 생각하는 것이요, 새로움을 찾아가는 것이요, 내일을 찾아가는 것이요,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하루하루를 즐겁게 이겨가는 맑은 공기이며, 맑은 호흡이옵니다.

(199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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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7

수시로 죽음에 끌려 나가는 도시 이 아스팔트 수많은 발길에 밟힌 낙엽을, 툭, 툭 차며 혜화동 쌓인 세월을 걸으면 낙엽은 채는 대로 비켜나며

me today you tomorrow,

어이없이 물러나는 처량한 모습,

아, 계절의 이 종말 풍경 휘날리는 것이 이별이며 쌀쌀한 것이 적막 이것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인가

부딪치며 비키며 나는 오래 너무나 많이 눈물을 살았구나

비둘기들, 해마다 그 자리 바삐 자리를 기며, 날으며.

(199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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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8

어머님 묘소의 풀을 깎다가 잠시 산소 옆에 앉아 있노라니 푹, 하고 도토리 한 알이 떨어지며 알로 굴러갔습니다.

(199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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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9

어머님은 돌아가셔서 큰 집에 사신다

생전에 그렇게 가난하게 고생하시며 일그러져 가는 작은 집에 사시더니 돌아가셔서는 온 세계 이 자리 저 자리 절이 있는 산마다 큰 대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큰 집에 사신다

석가님 오신 날이면 의례히 이렇게 이 절 저 절 찾아뵈면 맑은 산수로 세수를 하시곤 “어서 오너라”하시며 그윽한 향내 풍겨 나오는 큰 대문 열어 놓으신 큰 집 안방에 계신다

어디선지 천년 묵은 꾀꼬리 소리, 산꿩 소리, 숨어서 우는 뻐꾸기 소리,

아, 어머님은 돌아가셔서 이런 산 속 큰 집에 사신다.

(1993. 5. 23. 석가탄신일(5. 28)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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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0

어머님이 내 마음 좁은 안방으로 들어오시면 돌연, 내 마음 좁은 안방은 훤하게 넓어진다

훤하게 넓어지면서, 나는 그 훤하게 넓어진 방 안에서 칠십이 넘은 철없는 아이가 된다

아, 어머님은 나의 평화, 나의 자유, 눈물 많은 나의 행복, 훤히 넓어지는 충만한 공간,

언제나 그곳에 아늑히 계시며 나는 순수 무구한 아이가 된다

회갑을 넘어도, 고희를 넘어도, 세월을 넘어도, 외로운 이 좁은 내 마음,

어머님이 내 마음 좁은 안방으로 들어오시면 돌연, 내 이 좁은 마음의 안방은 환하게, 한없이 한없이 넓어진다.

(199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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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1

내가 비어 있는 고향산천을 꾀꼬리와 뻐꾸기가 지켜 준다

번갈아 날아들면서 조상 대대로 살아오는 텅 빈 고향산천을 대를 이어가면서 꾀꼬리와 뻐꾸기가 숨어서 지켜준다

지금은 어머님 묘소 곁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고 가까이 가까이 어머님의 소식을 전해준다

“두려워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다 살고선, 때가 되면 그렇게 스스로, 스스로 죽어가게 마련이란다”

아, 어디선지 나직이 전해오는 어머님 말씀, 나이 들면서 더욱더 선명해지는 낯익은 그 목소리

꾀꼬리에서든가 뻐꾸기에서든가.

(199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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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2

나의 종교에는 어느 종교처럼 교리나 주장이 없습니다 그저 실재가 있을 뿐 이옵니다 그 유일한 實在(실재)는 그저 어머님 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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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3

사랑은 存在(존재)의 宿所(숙소)이며 꿈은 사랑의 糧食(양식) 이옵니다.

(199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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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4

가을 잠자리 한 마리가 텅 빈 듯한 고요한 하늘 어디 메에서 날라와선 겁없이 늙은 손등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또 살며시 어디론지 날아갔습니다

날아갔다간 무엇을 다시 생각했는지 다시 돌아와 다시 살며시 앉는 것을 보았는데 눈을 떠서 보니 다시 어디로인지 흔적 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쩡, 하니 세상천지에는 나만 남고.

(199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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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5

가을이 날로 점점 높이 하늘을 몰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날로 점점 높이 날아가는 하늘을 솔개가 따라 가다가 너무나 허망해서 다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아, 한정 없이 가벼워지는 나의 무게

바람에 따라 구름이 날리는 중간 턱에서

멀리 당신으로 가던 내 마음은 그곳은 너무나 멀어 구름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애타던 것도 애타다 말고 그립던 것도 그립다 말고 속절없이.

(199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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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6

사랑하며 배우며 가르치며 찬바람 심한 이 거센 세월을, 서로 잠시 비켜서 쉬어가기 위하여 외로움, 즐거움, 그리움,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옵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 서로를 갖고 싶을 정도로 사무치게 짙어지면, 서로 괴로워지니 서로 갖고 싶은 마음 애달프게 쓸쓸해지면 마음 아파도 그저 빙그레 웃으시오 사랑은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살아가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이 외로워지면 질투하는 마음으로 어두워지고 질투하는 마음이 고이거든 마음 공허하더라도 숨어서 혼자 울으시오 사랑은 질투가 아니기 때문에

아, 살아가면서 서로가 한없이 사랑이 뜨거워지면 서로 소유하고 싶은 마음, 질투하는 마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잠시도 견디기 어려운 마음, 어찌 생기지 아니하리오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한없이 곱고 뜨거운 그리움이어서 그리운 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그저 그만큼 그리움으로 숨어서 우는 일이옵니다.

(1993. 9. 30.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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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7

너무나 적적해서 끊고 있던 파이프에 담배를 담고 성냥을 찾아 모처럼 만에 불을 그어대고 보니 성냥갑은 스위스랜드 어느 산골 마을, 식당의 것이었습니다

아, 그때 그 얼굴 가을 하늘같이 티 없던 스위스랜드 소녀의 차를 나르던 그 미소 생각나면서, 이 아침 혼자 차를 마십니다

그 사람은 가고, 그 사람도 가고 이제 머지않아 나도 갈 나이 혼자 남아 있다는 건, 고통스러운 벌이옵니다

어머님, 당신도 그러하셨겠지요만.

(199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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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8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던 농부가 가을이 되어, 스스로의 가을을 추수하듯이 긴 세월을 살아 온 나의 생애에서 실한 것들만 추려서 사진들을 가려내고 있습니다 실로 많았던 그 세월들, 그 시간들, 그 장소들, 그 사람들, 그 사건들, 가물가물 한 여자가 나의 그늘에서 생글생글 가려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으나 그런 일이 그곳에서 그들과 그렇게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아물아물 시간의 아지랑이처럼 뿌옇게 떠오르며 아, 이젠 간 세월, 간 시간, 간 사람들 다시 갈 수 없는 그곳,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득한 인생, 많이도 만났고, 많이도 헤어졌고, 즐겁고, 기쁜 것보다는 그립고, 슬펐던 것이 더 많았던 험준하던 나의 안개 깊었던 고개, 고개 아, 이젠 혼자만이 남은 길 하늘이 너무나 높고 넓고 텅 비어 있습니다 어머님, 그곳이 아득하기만 하옵니다. (199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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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19

시간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아득한 實在(실재)이옵니다 귀로 들리지 않는 아득한 실재이옵니다 손으로도 만져지지 않는 아득한 실재이옵니다 다만 마음으로 느껴질 뿐이옵니다

시간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시간은 줄지도 불어나지도 않습니다 시간은 늙지도 않습니다 영원에서 무궁으로 그저 자욱히 무량하면서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를 부단히 찾으며 방황하며 유랑하며 시달리며 한량없이 기다리다가 스스로의 목숨대로 소멸해가는 變化無常(변화무상)한, 시간의 고독한 덧없는 과객 이옵니다

시간의 좁은 문으로 들어왔다가 시간의 좁은 문으로 소리 없이 빠져 나가는 아, 무량한 침묵이옵니다.

(199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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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0

병원은 거대한 항구 이옵니다 떠나는 사람, 머무는 사람, 번잡한 쓸쓸한 거대한 어두운 항구이옵니다 이곳에서 떠나는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질 못하옵니다 남은 사람은 마지막 그 작별을 해야 하옵니다 잘리며, 혹은 절뚝거리며, 혹은 썩어가며 눈을 감아가는 이 마지막 목숨, 아, 인생의 이 종말은 다 이런 거라 하지만 어찌 이 작별을 눈물 없이 돌아서리요 이 세상 구경하러 나왔다가 얼마 구경하지 못하고 떠나는 어린 생명, 구경할 것 없이 다 구경을 하고 이제 떠나는 나이든 사람들, 바라보며 나는 이 거대한 항구의 난간에 서서 내가 떠나야 할 나의 시간표를 찾고 있었습니다. (199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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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1

가을을 걷어드린 늦은 들판에 한 허수아비가 양팔을 들고 홀로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내 자신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아, 그렇습니다 나는 그 옛날 한 여인을 어쩔 수 없이 슬프게 헤어져야 했었습니다.

(1993. 10. 16. 호남선 새마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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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2

작별의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방금 떠났다는 소식, 전해 들으며“아차”했습니다

한 번 떠나면 주소 없어 만날 수도 없는 이 인생의 자리

아, 그렇게들 떠나는 자리에 지금 나는 남아 있습니다

가을이 가고, 가을이 오고.

(199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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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3

나의 시는 쓸쓸한 가슴 들판에 홀로 피어 있는 작은 들꽃이옵니다

먼 길을 가면서, 외홀로 가면서 바람처럼 가면서, 구름처럼 가면서 가끔은 뒤돌아보는 쓸쓸한 들판에 맑은 눈으로 피어있는 작은 들꽃이옵니다

칼칼한 생존의 들판을 지키면서 존재의 위안으로 보이는 이에게만 보이는 드물게 눈에 띄는 작은 들꽃이옵니다.

아, 나의 시는 황막한 어두운 가슴에 멀리 떠 있는 작은 별들이옵니다 캄캄한 길을 가는 쓸쓸한 눈에게만 띄는 먼 작은 별들이옵니다

(199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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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4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지나갈 때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보이옵니다

바람은 너의 머리카락이 나부낄 때 너의 머리카락이 나부끼면서 보이옵니다

바람은 넓은 호면을 지나갈 때 호면의 잔물결이 살랑거리면서 보이옵니다

아, 그리고 바람은 찬 겨울 밤, 문풍지를 빠져 지나갈 때 홀로 숨어서 우는 소리로 보이옵니다

그와도 같이 내 마음은, 너를 위해서 먼 그리움으로 달아오를 때, 숨어서 보이옵니다

찬 겨울밤을 호, 호, 긴 편지를 쓸 때 연필 끝을 따라가면서 숨어서 혼잣소리로 보이옵니다.

(1993.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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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5

죽음은 누구에게나 차례가 되면은 오는 것, 그리 서둘 것은 없지 않은가 미리미리 서둘면서, 이 세상을 그저 빈 틈 없이 살아 온 나의 생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까지를 서둘 것은 없잖는가 서둘지 않아도 죽음은, 때가 되면 차례차례 순서대로 오는 것, 서둘러서 되는 일은 아닌 게 아닌가 미리 겁을 먹어서, 스스로 스스로의 마지막까지를 더 큰 불행이 오기 전에 정리하고 떠나려는 심사,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견디는 것이다 어머님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고통까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고통하면서 “어머님, 이젠 저의 고통 다 했는지요” 살며시 여쭈어 보면서.

(1993.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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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6

저런 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하는 의심스러운 작은 섬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엔, 어디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면서 인생이라는 그리움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가물가물, 고개를 넘어 가는 길 아득히.

(199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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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7

6월은 장미 타오르는 생명

작열하는 태양 냉랭한 푸른 하늘 투명한 영원 아, 나의 6월은 보이지 않는 희열 목숨으로 타옵니다

들에서, 울타리에서, 너의 가슴에서 너울거리는 사랑의 향기 잡히지 않는 그리움 황홀한 모순으로 타옵니다

오, 장미여 6월의 얼굴이여.

(199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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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8

낯선 큰 도시 한 모퉁이에, 내가 잠시 쉬었다 갈 만한 찻집이 하나 있구나

이른 아침, 나는 왜 이곳까지 왔나, 어디로 또 가려나, 생각하며 파이프를 문다

참으로 많은 길을 왔다 만나며 떠나며 만나며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분주한 풍경들 속에서 나는 외톨이다

사람 만나면 즐겁고 세상은 사람이 사는 곳인데 내 마음은 까닭 없이 외톨이구나

찻잔 옆 여름 꽃이 참으로 곱구나 곱다 한들 어찌 오래 내가 곁에 있으리 헤어진다는 것이 인생인 것을 식은 차를 든다

이별이 서서히 걸어오는가.

(1993. 5. 23. 일요일 아침 대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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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9

꾀꼬리는 어머님의 먼 소식을 알리는 심부름꾼인가 아침부터 분주히 푸른 동산에서 맑은 소리로 나를 찾아다닙니다.

동쪽에 솟아오른 햇살은 온 세상에 눈부시고 새로 피어오른 나뭇잎새들이 반짝이며 하얀 찔레꽃들의 향기가 온 산에 진동 하옵니다

아, 온 하늘은 어머님의 얼굴

이 맑은 초여름을, 어머님 어머님은 어디서 이 청명한 기별을 이렇게 보내시고 계시옵니까

저는 어머님 곁으로 갈 날만 기다리며 마음을 텅 비워 놓고 있습니다.

(1993. 5. 28 석가탄신일, 편운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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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0

해마다 이 산 저 산 피어 만발하는 아카시아는, 너울너울 향기로 너울거리며 무슨 미련이라도 남아 있는가, 자욱히 하늘에서 내려와 있었습니다

일 년 한 번 약속한 달, 약속을 잊은 그리운 님이라도 기다리고나 있듯이 초여름 긴 하루를 진종일 바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생명은, 이렇게 사람에 있어서나 동물에 있어서나, 초목에 있어서나 하잘 것 없는 미물에 있어서도 한없이 서로를 찾는 그리움,

아, 나의 생애는 한없던 그리움 이렇게 기운 세월을 살아가면서도 끝없이 외로운 것은 그리움이 아직 내 생명 꼬리에 붙어 있기 때문이려니 어머님, 이 그리움은 누구의 것이 옵니까.

(199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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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1

논밭에서 밤새 천진난만하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찔레꽃은 하얗게 피어 나옵니다

피어서 아침마다 이슬에 목욕한 꽃송이들은 하늘이 보낸 선물이런가

향기를 피우며 향기를 피우며 맑게 세월을 흐르는 천진무구한 이 실재 때 묻은 나의 영혼이 무거워 옵니다

아, 쉬임없이 수억 년 흘러내리고 있는 이 향기 나는 어지러워, 나를 잃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나뭇잎 사이에서 우는 꾀꼬리 소리에 어디론지 한없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199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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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2

나는 어머님을 모시는 움직이는 작은 절이옵니다 찾아주는 신도는 없어도 따라오는 제자는 없어도 공양드리는 중생은 없어도 어머님으로 하여 항상 가득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이는 작은 절이옵니다 항상 사방이, 넓게 열려있어 지나가는 것이 바람이고 구름이고 세월이오나 어머님으로 하여 항상 가득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절이옵니다 불경은 많이는 몰라도, 三寶(삼보)는 다는 몰라도, 대림정사나, 죽림정사나, 기온정사나, 娑羅雙樹(사라쌍수)가 있는 숲에는 가보지 못했어도 나는 어머님 한 분으로 하여 항상 가득한,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이는 작은 절이옵니다 이렇게 기둥이 삭아갈수록. (1993. 6. 23)

* 三寶(삼보) : 佛(불), 法(법), 僧(승) * 娑羅雙樹(사라쌍수) : 석가가 열반한 자리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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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3

인생은 어려운 것을 살려고 이 세상에 나왔고 어려운 것을 어렵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 이런 생각이 들면서, 숨어서 이 고통을 견디고 있습니다 실로 세상은 쉽고, 즐겁고, 아름답고, 기쁜 일보다는 어렵고, 고생스럽고, 쓸쓸하고, 슬프고 외로운 일들이 더 많은 곳,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인간의 숙명의 길이라고 칠십을 살곤 수긍을 하는 나의 진리입니다 석가모니가 출가 산문하여 고행을 하면서 얻어낸 진리도 이 길이요, 내가 지금 아직 인간에 갇혀서 인간의 숙명의 길을 걸으면서 매일매일을 이렇게 고행을 하는 것도 그 길이 아닐까요 오, 자비스러운 어머님, 인생을 자기 숙명대로 살아오는 인간의 마지막은 누구에 있어서나 이렇게 심하게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일까요, 인간은 어머님의 고통에서 탄생하여 어머님이 견디신 고통으로 마감하는 것이겠지요만. (199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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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4

세상을 평화스럽게 살려면 마음의 마귀를 물리치라 하셨습니다 아, 나는 얼마나 많은 마음의 마귀를 그동안 물리치며 이곳까지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던가 그러나 지금 이 자리, 어머님이 보이는 이 인생의 고지에서 보이지 않는 그 마귀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더 견딜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수시로 내란을 조작하는 죽음이라는 유격의 마귀, 그 유혹에 나는 어지러워집니다 그럴 때마나 어머님께 보이지 않는 밀사를 보내곤 했습니다만 어머님께서는 번번이 제가 보낸 밀사를 돌려보내시질 않았습니다 어머님, 이제 저에겐 어머님이 주신 식량도, 기력도, 용기도,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아, 공포의 절정으로 몰려드는 이 절대 空寂(공적) 캄캄한 어둠뿐이옵니다 어머님. (199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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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5

문을 닫고 사는 자네가 사람이 만드는 외로움에서 어찌 외롭지 않으리

세상은 사람과 사람, 서로 오가면서 싫으나, 좋으나, 서로 어울려서 살아가게 마련인 것을

자네같이 마음의 문을 꼭 닫고 한세상을 혼자서 살아가니 어찌 외롭지 않으련가

사람은 각자 살아가게 마련 이렇게 사는 것도 한 세상 저렇게 사는 것도 한 세상 어찌 자네만 같은 인생만 바라리

꽃이 핀다 한들 자네 뜻인가 꽃이 진다 한들 내 뜻인가

세월 훨훨 가는 세상 문을 닫아도 문을 열어도.

(199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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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6

슬프면 슬픈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아, 한없이 그리우면 한없이 그리운 대로 늙어가면서 사는 것이 사람의 길이거늘

어찌 슬프다, 아프다, 쓸쓸하다, 괴롭다, 한없이 그립다 하면서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부끄럽게도 장세월을 그렇게 어둡게 사노

부처님도 그러하셨고, 어머님도 그러하셨고,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했고, 그러하거늘 어찌 넌들 이 진리를 벗어날 수 있으랴

더욱 슬퍼해라, 더욱 아파해라, 더욱 외로워해라, 그곳에 훤히 하늘이 열리려니

그 끝에서 고통스러운 너는 사라지리.

(199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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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7

“마음의 문을 열어라, 그러면 편안하려니” 항상 이렇게 어머님의 전달이 있으시오나 마음 한구석 깨알만한 노여움이 숨어서 온 천지를 덮어 버립니다

열면 나를 잃고 닫으면 나만 남는 외생각 닫아서 외톨이 되는 이 생존의 원리

아, 세상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도 있고 저렇게 살아가는 방법도 있고 어지러운 장소라 알았지만 내가 살아가는 길은 왜 이렇게 외진가

“노여움을 버려라, 그러면 편안하려니” 어제도 생각하고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리.

(1993.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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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8

아직 시가 지나가지 않은 하얀 원고용지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아무도 걷지 않은 해안선 하얀 모래사장이 머리에 펼쳐집니다

이제 내가 걸어가면 나의 발자국이 남아가려니 나의 발자국은 너무 엷어서, 어이없이 바닷물이 밀려오는 대로 지워지려니

오, 존재여 누구의 망각도 아닌 이 망각이여.

(199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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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39

하얀 원고용지에 발자국을 남기며 나의 어린 시가 하얀 모래사장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닷물이 밀려들 때마다 나의 시의 어린 발자국은 바닷물에 지워져 가며, 지워져 가다 남은 반쯤 남은 발자국엔 작은 게가, 밀리다 자리를 잡고 놀고 있습니다

게가 자리 잡고 놀고 있는 반쯤 남은 발자국 물에 푸른 하늘이 가득 고이고, 지나가다 머문 시간이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아, 나의 편지를 실은 원양선은, 겨우 수평선을 멀리 지나가면서.

(199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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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0

넓고 좁은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파이프 밖엔 없어서

담배를 담뿍 담고 불을 그어대면 순직하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담배연기를 마시며 나를 놓아 버립니다

강하게 빨아들이면 강하게 약하게 빨아들이면 약하게 아, 한없이 정직한 담배연기

무소유, 무정처, 空(공)은 공이로되 亦不空(역불공), 존재한다는 것이 일체 空(공), 이러다가 말 것인데

생각을 하나 생각을 하지 않으나

담배를 깊이 빨으며 뿜으며.

(199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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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1

어머님은 줄곧 내 머릿속에서, 가까이 꺼지지 않는 별로 돌고 계시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먼 곳에 계시며 귀로 들리지 않는 먼 곳에 계시옵니다

그러나 오늘 밤엔 걸어서 일 초도 걸리지 않는 곳에 아주 가까이, 하얀 모습으로 제 곁에 와 계시옵니다

어머님, 먼 걸음 하셨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두운 밤에 촛불을 그어대면 어머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상머리에 낡은 사진만 고요히 앉아 계시옵니다

아, 30년 세월, 어머님이 제 곁에서 훌쩍 떠나신지 30년 세월, 어머님 말씀대로 저는 아직도 철이 들지 않는 아이로 이렇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철이 들면 어머님 곁으로 가게 될까요.

(1993. 7. 20 제사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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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2

길을 잃고 산간을 헤매는 장마철의 안개구름은 굽이굽이 높은 봉우리 사이에 흐르고 내가 넘어야 할 길이 멀리 희끗희끗 축축한 고개를 넘는다

차창 밖으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죽은‘평화의 댐’ 은 이북의 금강산댐에 맞서 산 아래 깊이 내려 앉아 지금은 말이 없다

네 가슴 내 가슴이 이렇게 가까우면서 굳어서 서로 멀리 아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이 恨(한)을 남박사, 신박사,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 하오,

소주로도 풀 수 없는 이 한 꾸불꾸불 산을 타고 내려오니 남한 땅, 맑은 화천호수외다.

(1993. 7. 24. 토요일)

* 남박사 : 南相烈남상열 박사(방사능 생물학 박사, 경희대 교수) * 신박사 : 申裕恒신유항 박사(곤충학 박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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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3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모래사장을 보면 공연히 걷고 싶어집니다

그와도 같이 하얀 원고용지를 보고 있노라면 글씨를 쓰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글씨를 쓰고 있노라면 어디선지 시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정신을 잃고 목소리를 따라가노라니 슬프고도 어두운 나의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993. 7. 1. 강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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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4

그때도 그랬으리 한 만 년 전에도 그랬으리 바다가 밀어도 밀어도 더는 밀려나지 않는 곳에 孤絶(고절)한 절벽의 섬이 있고, 세월이 있었으리

내일도 그러하리 한 만 년 후에도 그러하리 바람이 쓸어도 쓸어도 더는 쓸려나지 않는 곳에 고절한 절벽의 섬이 있고, 내일이 있으려니

아, 이 생명, 덧없는 포말,

두고 갈 세월이여, 먼 내일아.

(1993. 8. 3. 수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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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5

그 순간, 너는 내가 북으로 간 줄 알고 나는 네가 남으로 간 줄 알았지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나는 네가 남에서 너의 애인을 만날 줄 알고 너는 내가 북에서 나의 애인을 만난 줄 알았겠지 그리고 또 그 다음 순간, 너는 내가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고 나는 네가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 아, 그렇게 서로 한동안 소식이 뜸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는 이 세상이라 하지만 어찌 내가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리 아무리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어지러운 세상이라 할지라도 생각이 될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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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6

나의 꿈엔 먼지가 없이 맑은 별 밭에 숨어서 삽니다

나의 꿈엔 사람의 이끼가 없이 맑은 물속에 숨어서 삽니다

아, 그렇게 나의 꿈은 보이지 않아 한 평생을 쫓아 돌아도 잡히질 않습니다.

(199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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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7

옷고름은 긴 세월 여인들의 순결한 사랑의 문이옵니다

야들야들 바람에 긴 옷고름은, 오랜 세월 우리네 여인들의 순결한 굳은 사랑의 문이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열려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겐 풀리지 않는 비밀스러운 오랜 사랑의 굳은 문,

아, 바람에든가, 입김에든가, 너울너울 긴 옷고름

옷고름은 긴 세월, 이 강산 여인들의 순결한 굳은 정조의 문이옵니다.

(199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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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8

어느 비 내리는 오후, 침침한 저녁 무렵, 동에서 서로 무섭게 달리는 서울올림픽대로 트럭 위에 늙은 젖소 한 마리가 묶여서 비에 젖은 채 이리저리 정신없이 기우뚱거리고 있었습니다

흰 소는 석가님의 영물이라는데 이건 너무나 심한 이 나라 사람들의 처사 이옵니다

무엇을 잘못 했는지 어디로 묶여서 가는지 나도 이 나라 백성이어서 알 만하여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머님, 그저 나무아미타불이옵니다.

(1993. 9. 16. 비, 아내 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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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49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의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다는 알리요

어머니의 견딜 수 없었던 고통으로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그 탄생 어찌 그 위대한 인고를 다는 알리요

살아가면서 인생이라는 희, 로, 애, 락을 살아가면서 아, 인생이라는 이 희, 비극

어찌 여성들의 곡절 많은 그 눈물을 다는 알리요.

(199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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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0

KBS, 6시 내 고향 장터 구경을 하고 있노라니 한우 쇠고기가 주렁주렁 걸려있는 앞에 한우 한 마리가 끌려 나와 큰 눈알을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구경꾼 앞에 겁을 먹고 묶여져 있었습니다

만약에 한우에도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다면 이러한 광경 앞에서 한우는 어떻게 생각을 하리

무정 무도한 인간들의 잔인한 이 처사 아무리 먹고 사는 장사라 해도 해도 너무한 이 심한 처사 부처님, 그저 부끄러울 뿐 이옵니다

한우야, 머지않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저승의 친구야,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무지막지한 족속들이란다, 이런 생각에

눈물이 핑 돌면서, 보고 있던 텔레비젼 화면이 흐리흐리 침침해져 갔습니다.

(1993.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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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1

아내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 마당에서 보는 추석달은 그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1993. 9. 10.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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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2

긴 추석 연휴, 가을 하늘 높고 맑고 청명하오나 갈 곳도 없어서 텅 빈 집에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누워 심심풀이로 텔레비젼을 틀으니 그곳 넓은 화면에 나타나는 한국 젊은이들의 광기로운 한마당, 세상 어지러운 꼴, 어지러워져서 다시 텔레비젼을 끄고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세상 변한다, 해도 이렇게 어지럽게 마구잡이로 변할 수가 있을까, 그저 대한민국만이 들떠서 세상 사는 것 같은 슬프고도 걱정스러운 나라 꼴 아, 젊은이들이여

민주라는 것은, 제멋대로 누구나 살 권리가 있는 것이라 하지만.

(1993.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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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3

담쟁이덩굴이 여름 내내 부지런히 흰 벽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이젠 기운이 지쳐서 그 걸음을 멈추어 버렸습니다

내 몸 속을 흐르는 혈관에도 혈액이 줄어든 듯이 혈맥도 고요해지고 대기에도 햇빛이 줄어들어 천지간 만물이 마냥 생기를 잃고 고요하기만 합니다

시든 햇빛을 타고 잠자리 한 마리가 어디선지 날아왔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또 어디로인지 소리 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저 내 주위는 텅 비어가기만 합니다.

(199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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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4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떨어져 깔린 가을 아침 길을 까만 수녀 세 분이 걷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들이 겁없이 가까이하면서

나는 한 반세기를 이곳 같은 시간에 같은 혜화동 로터리를 걷고 있습니다.

(199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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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5

뿌리가 잘린 들국화에 아침마다 물을 주어 왔습니다만 오늘 아침엔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꽃을 꽂아 준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더 오래 살아 주었으면 하면서 물을 줄수록 시들어가는 모양이 가련해졌습니다

아름다울수록 슬퍼지는 이 마음, 어찌 꽃뿐이겠습니까만 내 옆에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모두 나의 눈물이옵니다

며칠을 내 눈앞에서 살다가는 아, 가을 꽃송이들 그들은 말이 없어서 더욱 애절하옵니다

오늘 아침엔 고마운 마음으로 마지막 작별의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199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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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6

사는 날까지 그저 살아야 하는 겁니다

떠나는 것을 미리 서둘러서 생각하지도 말고 차례차례 다가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스러워하지도 말고 조바심을 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어머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대로 사는 날까지 그저 공손히 차례차례 보내며 차례차례 맞으며 그저 사는 날까지 살아야 하는 겁니다.

(199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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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7

약한 동물일수록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는 이치를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철따라 이리저리로 먼 곳 아랑곳없이 무리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생존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아, 이와도 같이 나도 하늘 아래 약한 인간인 것을.

(199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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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8

아름다운 청춘 같은 이름의 유고슬라비아는 산산히 쪼개지고, 불안한 조국

텔레비젼에 비치는 세르비아 텅 빈 광장에 이리 저리 낙엽이 휘날리면서

총탄이 지나간 광장의 구멍으로 스치던 어린 소녀의 얼굴 가을 풀꽃처럼 곱구나

아, 생존은 이러한 것인가, 분열한 조국 광장에 남은 것은 가을 풀잎들 전쟁의 애수처럼 앙상도 하다

생명은 슬퍼서 아름다운 것, 종말이 있어서 더욱 애련한 것, 이라 하지만 시인의 눈물로 어찌 그 다를 보겠는가

아, 조국이라는 이름의 이 생존,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199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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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9

눈 내리는 날, 난로가에서 헤르만 헷세의 묵은 시집을 읽고 있노라니 고향의 목소리를 만나는 것 같습니다 고향의 사투리를 만나는 것 같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산골마을 풍경, 화사한 봄날, 과수원 풍경, 시원스러운 여름, 물 내려가는 계곡 풍경, 나뭇잎 깔린 가을, 들 풍경, 길 가는 나그네, 주막의 등불, 잔잔한 인생의 고독, 나는 이러한 곳에서 헷세와 동행을 합니다

아, 인생은 끝없는 망향, 그리움, 고독하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옵니다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고, 나도 지금 어디로인지 가고 있습니다.

(199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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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60

개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거대한 아파트촌, 일요일 아침은 폐허의 침묵, 닫힌 유리창, 유리창에 햇살이 찹니다

어디로들 갔을까? 까마득히 올려다보이는 유리창마다 방, 방마다 번호, 번호마다 사람, 사람마다 쓸쓸한 가슴, 외롭다는 것은 사치입니다

어린이 놀이터 텅 빈 자리에 우수수 깔린 가을 잎새들 비들기떼들 보이지 않는 아침

아, 사랑아 다 주지 못한 사랑아 세월처럼 내가 남아 있습니다.

(199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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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61

멀리 가고들 있습니다 멀리들 간 자리는 텅 빈 고요뿐이옵니다

한 해의 세월이 지나가는 자리 여기저기에 낙엽이 바람에 휘날리며 me today you tomorrow, 작별들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이별의 풍경 속에서 아주 눈물이 많은 한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강가에서인지, 바닷가에서인지, 스산한 바람 속에서 마지막을, 살랑거리는 작은 풀꽃을 만지면서 그 애처로움에 스스로를 울고 있는 마음 여린 한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그러하거늘.

(199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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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62

대지로 침전하는 나와 창공으로 비상하는 내가 작별을 하고 있는 낙엽 깔린 이 대도시의 로터리 비둘기 떼들, 구 - 구 -

지구는 한량없이 무거워지며 우주는 걷잡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이 계절의 중간에서 마냥 허전해지는 나의 그림자

나는 어디로 가는 누구의 現身(현신)인가

아직도 남은 짐 하나, 언젠가 약속한 그 말 한마디 “소식 전하겠어요” 어쩔 수 없이 헤어지며 던진 그 말 한마디 아직 지키지 못한 그 약속 한마디

아, 바람이 차다 산산히 부스러지는 세월 날은 기울고, 내 길의 행방은 캄캄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199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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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63

승부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전쟁놀이를 하다가 다치듯이 천하대권을 꿈꾸던 어른들이 수 없이 전쟁을 하다가 쓰러져간 자리, 자리,

아, 남은 것은 말없는 고요, 매몰해 간 세월, 뜬 구름 살아남은 자의 기쁨도 죽은 자의 슬픔도 유구한 천지 속에 잠깐 바람에 쓸려 자취가 없다

비 내린 가을 땅 어디서 우는 깊은 벌레 소리, 찌, 찌, 어느 누구의 원귀 울음이던가.

(1993. 11. 9 - 11. 14. 日本(일본) 역사문학 紀궋(기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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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64

어머님, 이제 저에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불교의 신자들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제가 어머님에게, 혹은 저 스스로에게, 숨어서 소리 나지 않게 가만히 하는 스스로의 기도이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고요했으면, 온 세상 만사가 그저 평온하기만 했으면, 아니면, 온 세상 매사가 무사했으면,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지극히 약한, 목숨이 아직 걸려 있는 약한 자의 촛불과 같은 기도이옵니다

무엇보다도 따지는 게 없는 텅 비어 있는 나의 사라져 가는 존재의 기도이옵니다.

(199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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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하면서도 다른 순수문학 계열의 시인 조병화 - 시집『개구리의 명상』을 중심으로

강정구

1. 평론가는 글을 쓰기 전에 세상을 들었다 놨다는 상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근거를 대지 않는다 는 점에서 맹랑한, 그러나 나름 비평의 감각으로 그럴 듯하게 엮는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상상 이지요. 선무당이면서도 나름 도를 닦는 그런 지점이랄까? 이런 지점에서 저는 조병화 시인을 말하고자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2주 동안의 청탁 시간으로는 광대한 조병화의 시 읽기가 마무 리 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조병화 시인은 해방기 문단에 처음 출현했습니다. 해방기란 누가 뭐라 해도 2좌1우의 이데올 로기가 지배하던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 가운데에서 1우(김동리·서정주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에도 잘 포섭되지 못할 정도로 그 세력이 미미한 김기림·박인환의 모더니즘 유파에서 시를 시 작했고, 첫 시집『버리고 싶은 유산』 (산호장, 1949)을 냈지요. 이 시기의 모더니스트들이 한국전 쟁으로 단명하거나 비판적·민족적 문학으로 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시인 조병화는 순수문학 계열에서 모더니즘 유파의 대표성을 띠게 되지요.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서 그 동안 조병화 시인은 순수문학=실존주의 혹은 순수문학=반공주의라 는 구도 속에서 평가됐지요. 그것도 정말 작품의 분량과 성과에 비해서 소수의 평가만 말입니다. 물론 언어의 조탁을 중시여기는 한국시의 풍토도 한몫 작용했지요. 제가 오늘 말하려는 것은 조 병화가 해방기의 순수문학 계열이 맞지만 유사하지만 다른 차이를 지닌 시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단적으로 말한다면‘일체의 현실적인 연관으로부터 해방되려는’순수지향성을, 김동 리·서정주로 대표되는 우파 쪽의 순수문학 계열을 의식하면서 좀 더 극단적으로 드러냈다는 것 입니다. 우파 쪽의 순수문학 계열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순수성을 보여준 시인이라는 것입니다.

2. 사실 조병화가 해방기에 설 자리는 우파 쪽의 순수문학밖에 없었죠. 1921년 안성의 가난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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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태어난 수재에다 엘리트가 되려는 욕망까지 지닌 청년의 입장에서는 좌파는 정말 거리가 멀었고, 그렇다고 지주·마름의 아들인 김동리·서정주와 섞이기에 어색했겠죠. 이 청년이 정말 우연히 조우한 집단이 바로 김기림·박인환의 모더니즘 유파였습니다. 해방기의 모더니즘 유파 가 2좌1우의 이데올로기를 꺼려했겠지만, 결국 우파 쪽의 이데올로기에 서 있은 것은 분명했지 요. 왜냐고요? 정치가 좌 아니면 우였으니, 별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해방기의 모더니즘 유파가 발생부터 우파 쪽의 이데올로기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것, 이 점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 하지요. 해방기 모더니즘의 이런 위치 설정은 조병화가 쓴 이 시기의 시「소라」 에 잘 나타나 있지요. “바다엔/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 란 구절에는, 2좌1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존재와 실존을 탐 구하는 자세가 잘 드러나 있지요. 이런 구절이 오늘 강연 대상이 되는 시집『개구리의 명상』 에도 유사하게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신기함을 넘어서서 조병화 시인의 어떤 일관성을 의미하겠지요. 고향에 돌아와서 쓴 시와 고향을 처음 벗어나서 쓴 시 사이의 시간적·공간적 거리가 바로 조병 화의 인생인데, 그 거리를 생각 못할 만큼의 묘한 공통점! 우선 시「개구리의 명상·21」 을 보지요. 가을을 걷어들인 늦은 들판에 한 허수아비가 양팔을 들고 홀로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내 자신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두 시의 공통점은 일체의 현실적인 연관으로부터 해방되려는 것입니다. 해방기의 현실에서 말 한다면 2좌1우에서, 그리고 시집『개구리의 명상』시절의 1990년대 현실에서 표현한다면 동시대 의 이데올로기에서 일정한 거리를 뒀다는 점이지요. 저는 이러한 일정한 거리는 2좌뿐만 아니라 1우의 이데올로기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지닌 현실적인 연관으로부터도 해방되려는 모더니즘 유파의 제스처와 의도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파 쪽의 순수문학 계열보다 더 순수지향성 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조병화의 순수지향성은 해방기의 모더니즘을 가로질 러서 1990년대까지 일관된 특성이 됩니다. 이 점에서 해방기의 모더니즘이 지향한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이 조병화인 것입니다. 이래서 제 강연 제목이 유사하면서도 다른 순수문학 계 열의 시인 조병화인 것입니다.

3. 한국의 순수문학은 김동리·서정주·황순원과 박재삼이 대표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들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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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에서 어머니는 참 논쟁적인 것이지요. 일체의 현실적인 연관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순수 지향의 시인·작가가 이런 지향을 잘 보여주는 소재는 가족, 그 중에서 어머니이겠지요. 이 때 어머니 표상은 사실 우파 쪽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각자의 계급성을 잘 보여줍니다. 부르주아 가문의 출신 황순원의 소설「별」 에서 어머니가 예뻐야 하는 것은 소년의 입장에서 당연하겠지요. 일종 의 부르주아적인 자존심·차별성이겠지요. 반면 박재삼의 시「추억에서」 에서 어머니가 심하게 고생하면서도 억세게 살아온 것은 하층민의 생존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 두 어머 니가 각자의 계급적인 입장에서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어머니상이 되었지요. 조병화 시인은 이런 어머니 표상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는 어머니 는 우파 쪽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어머니 표상과 거리를 두면서 좀 더 포괄하려는 기획을 보 여줍니다. 저는 일단 좀 더 순수하고 보편적인 어머니상 정도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조병화의 시를 읽고서 다시 말하겠습니다. 나의 종교에는 어느 종교처럼 교리나 주장이 없습니다 그저 실재가 있을 뿐이옵니다 그 유일한 實在(실재)는 그저 어머님이옵니다. -시「개구리의 명상·12」부분

이 시의 핵심은 어머니가 좌우 이데올로기 혹은 상하 계급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말로 모 든 것의 근원·본질쯤 되는 표상이라는 것이지요. 데리다의 표현으로 자궁을 뜻하는 이른바 코 라(cora)가 되지요. 좌나 우가 아니라 좌우 이데올로기를 품는 자궁, 그것이 코라이지요. 좌우 이 데올로기 이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인 것이지요. 이른바 만물생성의 근원 그 자체입니 다. 이런 이미지의 탐구란 순수문학 계열의 모더니즘 유파에서 시작한 조병화가 택할 수 있는 최 상의 길이겠지요. 서정주·김동리·황순원·박재삼 등과 유사하지만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는 그들의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다운 어머니 그 자체 혹은 코라를 상상해야 했겠지요. 저는 이 어머니 표상은 조병화 시인이 다른 순수문학가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지점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사실 조병화 시인이 시에서 보여준 존재·실존 표상은‘어머니’ 를‘존재·실존’ 으 로 바꾼 데에서 비롯된다는 생각마저 듭니다.“사랑은 存在(존재)의 宿所(숙소)이며/꿈은 사랑의 糧食(양식)이옵니다” (시「개구리의 명상·13」 )라는 구절에서 존재를 어머니로, 또한“나는 어머니 한 분으로 하여/항상 가득한, 눈에 보이지 않는/움직이는 작은 절이옵니다” (시「개구리의 명상· 32」 )라는 구절에서 어머니를 존재로 바꾸어도 뜻이 통한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저뿐이 아닐 것 입니다. 어머니는 해방기 모더니스트로 위치 설정한 조병화가 자기 시의 발전선상에서 발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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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최선의 표상인 것이지요. 조병화 시인에 대한 평가의 무게중심도 이 지점에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닙니다. 조병화의 시 가 효심이나 모성 같은 인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거나(이상호,「조병화 시에 나타난 유학적 상상 력 연구」 , 2015), 단독자의식을 지닌다거나(김삼주,「조병화 시에 나타난 단독자 의식 연구」 , 2014), 혹은 순수고독을 보여준다는(이재복,「순수 고독, 순수 허무의 시학 : 조병화의『넘을 수 없는 세월』 을 중심으로」 , 2012) 논의들 모두 어머니 혹은 존재 표상을 논의한 것이지요. 저는 이 런 기존의 논의들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존재는 인·단독자·순수고독 이기 이전에 모든 이데올로기를 포괄하는 코라의 이미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인문학적·세속 적인 비유로 말해보겠습니다. 어머니·존재 표상은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서 라캉 식의‘떠도는 기표’ 요, 포커 게임 속의 조커이지요. 무엇이나 될 수 있지만 그 무엇이기 이전에 그 무엇을 생 산해내는 근원이지요.

4. 조병화 시인이 인하대학교 퇴임 후 난실리에 귀향했다는 것은 참 문제적인 행위가 되지요. 조 병화는 말년의 자기 시에서 한국적인 개성을 찾고자 했는데, (조병화·김삼주 대담,「조병화, 우 리 시의 정체성」 ,『현대시학』1990.5.) 고향 소재의 시가 바로 그런 경우로 이해되지요. 순수문학 이든 참여·민족문학 계열이든 간에 한국문학자의 마지막 소실점은 한국적인 것의 세계성이었 지요. 백낙청의 경우에 한국적인 것이 (제3)세계적 저항을 매개한다고 말했다면, 김동리의 경우 에는 토속적인 것이 오히려 서구보다 보편적인 휴머니즘이 있음을 말했지요. 조병화 시인은 김 동리 쪽의 길을 걷지만, 뭐랄까 좀 더 치열하달까? 김동리·서정주가 소설『역마』 ·시집『질마재 신화』 에서 보여준 것보다 좀 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찾지요. 조병화 시인이 택한 방법은 바로 삶의 현실을 좀 더 지워버리는 것이지요. 참 문제적인 방식이 지요. 고향에 돌아와 쓴 조병화의 시는 고향을 소재로 해서 구체적일 것 같으면서도 철저하게 일 상적인 삶을 추상화해서 감성의 보편성을 얻어내지요. 일상의 세부는 지우고 대상과 행위·감각 을 남겨서 추상적인 보편성을 구하는 방식이지요.

유월 초여름 밤천지를 개구리들은 세상 모르고 웁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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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에 취해 어느덧 나도 나도 모르게 소리나지 않는 오열로 울고 있었습니다 오, 천진무구한 약한 자들의 티 없는 목숨이여. -시「개구리의 명상·2」부분

이 시에서 부각되는 것은 약자에 대한 레비나스적인 윤리, 즉 마주하면 차마 어쩔 수 없이 동 정과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윤리입니다. 이 때에 숨겨진 것은 그 약자의 정체성입니다. 구체적이 면서도 추상적인 것, 그것이 바로 알레고리이지요. 조병화는 현실을 추상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얘기한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을 생산하는 시인이지요. 가장 고향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적이 면서도 가장 일상적인 삶을 숨기어서 추상화·보편화시키는 전략, 이런 아슬아슬한 시소 속에서 균형을 잡는 시인, 한국의 순수문학이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가장 극단까지 밀고 가본 시인, 김 동리·서정주·황순원·박재삼보다 더 순수의 관념을 지향한 자가 조병화 시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지요. 조병화 시인은 순수라는 우파 쪽의 이데올로기를 좀 더 극단까지 밀고 가본 시인입니다. 이 점 에서 우파 쪽의 순수문학 계열에서 나름의 문학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겠네요. 순수문학의 극단자, 순수문학의 이형태자, 해방기 모더니스트의 전형적인 행로자. 이 점에서 조병화는 한국문학사에서 좀 더 분명하고 의미 있는 자리에 놓여야 합니다. 제가 말하고 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인 조병화가 좀 더 무게감 있게 들리셨는지요?

강정구(姜正求) 문학평론가. 1970년 강원도 춘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4년 계간『문학수첩』신인상 평론 부문, 2012년 계간『예술가』신인상 시인 부문으로 등단. 주요 평론‘계몽의 반성-박영근 걩’ ,‘신경림 시에 나타난 민중의 재해석’등이 있음. 2016년 편운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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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육필원고展

개구리의 명상 Meditation of a Frog

2017. 5. 13 ~ 10. 31

기획 조진형·김용정

진행 오정교·전호석

발행일 2017. 5. 13

발행처 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길14-1(난실리 337) tel. 031-674-0307, 02-762-0658 e-mail. poetcho@naver.com http://www.poetcho.com

인쇄 동진인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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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육필원고展 조병화 육필원고展

개구리의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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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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