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어린가슴에 사랑의 선물을-이원수-방정환 기억과 기록

Page 1


방정환 선생님에 대한 기억과 기록

어린 가슴에 사랑의 선물을

이원수 (1911~1981)

동요 <고향의 봄>으로 널리 알려진 동시인,동화작가,평론가.

잡지 <어린이>를 애독했으며, 마산 신화소년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글은 1965년 신구문화사에서 발행한 <<한국의 인간상>>(전 6권) 중 3권에

실린 ‘방정환’ 편에 이원수가 쓴 글이다.

환등 상영

학대 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동화집 『사랑의 선물』서문에서)

국판 반절의 조그만 세계 동화집 한 권에는 그 첫머리에 이런 서문이 씌어져 있었다.

이 글 뒤에는 피 끓는 심정이 스며 있다. 그 심정의 주인공이 곧 소파 방정환이다.

소파는 가난한 집의 외아들이었다. 나이 열 살 때, 영민한 이 소년을 귀여이 생각한

미술가 한 분이 불우한 그의 사정을 알고 양자로 삼고 싶어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외동아들인 그가 남의 집 양자로 갈 수는 없었다. 미술가는 그를 위해서

장난감 하나를 주었다. 이 소년에게는 분에 넘치는 고급 장난감이었는데, 그것은

반사적 환등기였다. 그림엽서는 물론이요, 종이에 그림을 그려 기계에 넣으면

커다랗게 그 그림이 영사막에 어린다. 물론 천연색 그대로다. 서대문에 있던

대고모네 집은 넓고 방도 여럿 있어서 소년은 그 집에서 공부를 하고 지냈다.

그런데 이 환등기를 얻어 가지게 된 후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재미있는 기계를 가지고 혼자 즐기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동네 아이들에게

구경을 시켰다. 구경을 시킨다면 수없이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집이 장터처럼 될 테니 입장료를 받기로 하자. 입장료를 받으면 수입도 된다. 이런

생각을 한 소년은 두 살 아래인 사촌 동생을 문간에 세워 표를 받게 하고 환등 상영을

시작했다 입장료는 성냥 열 개비씩이었다.

성냥을 내고 환등 구경을 오는 아이들로 집은 터질 듯 했다. 소파 소년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받쳐 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어 갔다. 활동 사진의 변사 같은 것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참으로 구수하고 재미있었다.

구경꾼 아이들은 환등의 그림과 같이 그 이야기에 반해서 한 번 높인 환등과 한 번 들은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달라고 야단이었다. 아이들 뿐 아니라 우연히 왔다가

본 어른들도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으로 알았지만 그 이야기에 끌려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잊을 정도였다 동화 구연가로 뒷날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그는 하나의 이상주의자이기 전에 몸으로 체험하고 생활에서 절감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어떤 자리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또 어떠한 생활을 하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것이다

풍습에서 볼

소파의 소년 운동은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때 하나의 큰 혁명이었다 어린이 문제는 헤쳐 볼 생각조차 하지 않던 때의 일이니 실로

불우한 시절

소파의 소년 시절은 불우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모든 일이 곤궁함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한 가난은 청년이 된 이후에도 계속된 셈이었지만, 그는 그 가난한 생활에 대해서

아무 에게도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친구들 이외에는 그가 어떤 생활을

해 오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털끝만큼의 비굴한 언동도 없었다. 그는 현실이 주는 시련에 묵묵히 견디어 나갔고

조금도 현실에 때묻지 않았다.

야주개에서 자라며 처음에는 보성소학교에 입학하였고 뒤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상업학교에 입학하던 것만 보아도 가정의 형편을 짐작 할 수 있지만 그나마 졸업조차 하지 못하고 2년 뒤에는 싼 월급을 바라며 취직을 해야

했던 것은 청운의 뜻을 가슴에 품은 소년으로서는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취직한 곳은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국이었다.

그 때 나이 열일곱 살. 꿈 많은 소년은 일개 사무원으로 자기의 이상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을 하며 그날그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그의 이상은 어떤 현실적인

행동에의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생활을 타개하는 실리적인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에게는 지상의 사명이라 할 민족적인 것, 사회적인 것에의

행군이었다. 소파가 관계하게 된 천도교청년회, 뒷날 잡지 편집자로서 특이한 존재가

되게 한 개벽사, 소년운동의 뒷받침이 된 천도교소년회 등 천도교와의 관련은 경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않았다는

, 호강

스럽게 자라는 어린이의 불행까지도 꿰뚫어 보는 눈을 갖게 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관찰자였다.

천도교가 배양척왜와 제폭구민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나섰던 만큼 어디까지나 민중의

힘으로 억압자에 대항하려 한 것은 1919년 3.1 운동에 중요한 소임을 한 손병희의

활동에서도 나타나 있는 것이다.

소파가 나라를 위해 처음으로 일한 것도 손병희를 도와 구국 운동에 나선 것이 첫

스타트였다. 물론 무력이나 실력 행사로 나라를 되찾는 일은 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나 그늘에서 지하에서 민족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떳떳이 내놓고 큰소리 치며

하는 일보다 얼마나 힘들고 또 귀중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조국애의 첫걸음

1919년의 3.1 운동 때에 소파는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한때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이어 보성전문학교에 다니었는데, 그 학교 교장이던 윤익선은 《독립 신문》

사장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자《독립 신문》이 나오자 경찰은 이 신문사를

수색하고 사장 윤익선을 체포해갔다. 이 신문은 천도교 안에 있는 보성사 인쇄소에서

박아 냈는데, 윤 사장이 구금되면서부터 《독립 신문》은 인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독립 신문》의 관계자들은 비밀히 의논을 하여 등사판으로 신문을 박아

비밀 배부를 하기로 했다. 이때 이 등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바로 소파였다 외신은

무전 장치를 가진 외국 선교사들에게서 얻어 오고 소식은 학생들이 동원되어 이

학생에게서 저 학생으로 릴레이 식으로 전해다가 실었다. 그리하여 재동에 있는

소파의 뒷방에서 등사판으로 비밀 발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것도 3주일을 계속하는 동안에 경찰이 눈치채게 되어 종로서 형사대의

그러나 이 집에서 신문이 인쇄되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온 그들은 소파를 연행하여 모진

매로 취조를 하기 시작했다.

난 모르오 신문을 박은 일이 없소.”

누가 그런 걸 했는지 모르오.”

네가 안 했으면 한 사람을 대란 말야 대지 않으면 너는 중죄인이 된다는 걸 모르나?”

엉큼스런 소리 마라 이렇게 해야 말을 하겠나?”

형사들은 소파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다 주전자의 물을 부었다. 그런 고문에도 자백을

하지 않으니까 손가락을 불로 지지기도 했다. 몽둥이로 정강이를 때렸다. 팔을 비틀었다.

그러나 끝끝내 모른다. 로 일관한 소파는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감방에서 일주일을

지내다가 풀려 나왔다. 자백과 증거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려 나온 소파는 곧 비밀 장소에서 계속 독립

3.1 운동이 아픈 상처를 남긴 채 그 처참한 불길이 수그러지자 소파는 단출한

꾸려 가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다. 일본은 우리 강토를 점령하고 우리 민족을

지배하는 나라다. 피지배 국민의 쓰린 심정이나 괴로운 생활은 그것이 오래 가면 갈수록

습관화하고 어떤 체념까지 갖게 하여 예속 국민 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떠나 지배자나 제삼자의 자리에서 자기 민족을 바라보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소파는 일본에서 공부하며 내 민족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3.1 운동의 결과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무력 앞에 맨손으로는 어떤 투쟁도 승리의

날은 약속해 주지 않는다 그 많은 동포들이 불에 타 죽고 칼에 찔려 죽고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여 죽거나 혹은 병신이 되었다. 3.1 운동이 그 정신의 숭고함에 비춰 얻은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관념을 버리고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하는 운동 아이들을 바르고 아름답게 기르는 운동 아이들을 부모의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제 세 국민을 씩씩하고 진실한 인간이 되게 하려는 운동, 이런

일을 해야 겠다는 것이 바로 소파의 가슴에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소망이었다

과거부터 많은 혁명 지사들이 국내에서 또는 국외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빛나는 활약을 해왔고 또 남모르는 희생적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걸음 앞서서 민족의

새싹부터 바르고 튼튼하게 길러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믿음직한 민족이 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굳이 찾으려면 교육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파가 생각하는 어린이에 관한 새로운 운동은 건민강병 健民强兵 을 위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어떤 예속된 생활을 하지 않고 뚜렷한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길러서 독립 정신이 강한 인간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어린이는 부모의 심부름꾼이나 종속물처럼 순전히 부모를 위해, 그 요구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부모의 기쁨을 위해 완롱물처럼 존재해야 했었다.

어린이의 인권을 무시하는 부모의 사랑은 옳은 사랑이 아니다.

이러한 신념이 굳어진 소파는 우선 어린이의 애호, 부당한 어버이와 자식의 애정부터

바로 잡는 운동을 전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1921년 그가 스물세 살 때 방학으로 서울에 돌아와 처음 시작한 것이

천도교소년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소년회라는 것은 그 즈음 이미 몇 군데에 만들어져

있기는 했다. 진주, 광주, 안변 등지에 소년회가 있었지마는 서울에서 깃발을 올린 것은 이 천도교소년회가 처음이었다

3.1 운동 후 민족의 자각으로 청년 운동이 팽배히 일어나고 있던 터라 이 소년회의 취지는

가지 활동을

일반에게서도 지지를 받아 이 소년회는 소년 소녀들로 조직되어 그들의 자주적인 여러

말이 없던

우리나라는 어린이를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는 오랜 폐습에 젖어 있었다. 어른

에게 공대하는 미덕만을 내세워 가르쳤지, 어린 사람을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들대로의 대접을 하지 않은 유교적 습관에 마땅히 피리어드를 찍어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지방 순회 강연, 소년회 지도와 더불어 소파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집을 엮었다.

1921년 스물세 살 때, 일본 도쿄에서 엮어 그 이듬해 봄, 서울에서 출판한 국반절의

조그마한 책 세계 명작 동화집 평범한 번역 서적이 아니었다.

참으로 어린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소년운동의 지사의 정성과 의욕이 담긴 책이었던 것이다.

그의 번역 문장의 곱고 부드러움, 표현의 자연스러움은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오늘의 스타일을 가져오게 한 첫 출발이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 시절의 일반 문장에 비해 소파의 문장은 고왔다.

그리고 그 번역 동화들은 웃음과 눈물을 흠뻑 가진 것들이었다. 그 눈물과 웃음이 억눌린 채

있도록 하려는 것이 그의 커다란 소원이었다.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이 『사랑의 선물』을 내면서 소파는 더 큰 일을 구상했고 동지의 규합에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이 잡지의 간행과 아동 문제 연구 단체에 대한 일이었다.

잡지는 1923년 월 일 창간된 월간『어린이』였다.

첫 호만은 도쿄에서 꾸며 서울로 보내와서 천도교소년회 이름으로 나왔다. 편 호는 그

체재도 타블로이드 판의 조그만 신문 같았지만, 그것을 손에 든 사람은 누구나 그 예쁜 편집과 내용에 정신이 온통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운동 기관지로서의 의의를 가진

도쿄에서 결성된 색동회야말로 잡지『어린이』를

오랫동안 구상해 오던 소년운동의 바탕이 된 것이다. 지금 그 당시 색동회 회원의 한 사람

이었던 조재호가 보관하고 있는 서력 1923년 색동회 기록을 보면 창립 당시의 사정을 짐작

할 수가 있다. 그 중의 3월 16일과 5월 1일 것을 옮겨 본다.

서력 1923년 3월16일 하오 2시, 부하 센다가야 온덴 101번지 오이누마 방 소파 방정환씨 댁

에서 제1회 회합을 개최하니 다음 제씨가 참석하다

방정환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진장섭 정병기

결의 사항

1, 취지: 동화 급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 아동 문제까지 로 할 사

1, 명칭: 추상적 혹 상징적으로 하여서 일반 회원이 각각 생각하여 가지고 제2회 집회 시에

결의하기로 함

1, 회원의 입회 형식: 회원 3인 이상의 추천이면 회원으로 인정함

1, 해외 회원의 추천: 해외에서도 우리 회의 취지에 찬성하여 연구하는 동지는 회원 추천에 의하여 회원으로 인정함

상기 사항을 의결한 후에 방정환 씨의 다과 향응이 있은 후 폐회하니 오후 5시 반이러라.

서력 1923년 3월 16일 위원 정병기

발회식

서력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에 만세이바시에 집합하여 가자고 스루가다이 미와 사진관 에서

기념 촬영하니 출석하신 회원이 여좌하다.

손진태 윤극영 정순철 방정환 고한승 진장섭 조재호 정병기

동일 오후 4시 니시니기마찌 나가세헌에서 축연을 개하고 우리 일동은 장래를 공고하게 맹세 하고 폐회하니 오후 6시 반. 7시에 일동이 진장섭 씨 댁으로 가서 씨의 성대한 주찬으로 9시 까지 재미가 진진하게 놀다가 각각 귀가하다. 서기 1923년 5월 1일 위원 정병기

가담했었다.

어린이날을 만든 동화왕

색동회가 조직되고 어린이 잡지가 창간된 1923년 5월 1일은 어린이날이 처음 생긴 날이다.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

이런 구호를 내세우고 전개한 어린이날 행사는 기념식, 어린이들의 시가 행진, 강연회, 동화회, 그 밖의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모임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행사는

그 후 경향 각지에서 소년회를 중심으로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사회운동과 결부되는 실로 뜻깊은 것이었다.

소파의 소년운동은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동화구연가로서의 특기 와 열성스런 실천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화회와

강연회를 열었는데, 특히 그의 동화는 그 화술이 어찌나 훌륭했던지

웃고 울며 동화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 들어가게

슬픈

무슨 말재주가 그렇게 대단한지 모르겠어.

되니

어른들의 평판이었다. 일찍이 보지 못한 동화 구연의 신묘한 기술에 감복하여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런 찬사를 하기 전에 그냥 완전히 동화 세계의 동반자가 되어 웃음과 감격과 눈물의 나라로 같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소파의 동화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정신적인 융화 정감의 일치를 구연자와 청중 사이에

나타내었다 이야기해서 들려준다기보다는 이야기 속에 함께 몰입하는 것이라 할 만했다

동화회에서 나와서 감시를 하던 경관이 처음엔 큰 소리를 하며 방정환이가 무엇하는

작자냐?” 고 뻐기다가도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나서는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 깍듯이

존대를 해 주며 감격해 하기가 일쑤였다. 소파가 『어린이』 잡지에 실었던 소년 소설 「쫓겨 가신 선생님」이 총독부 도서 검열에 걸려서 잡지는 압수되고 게다가 서대문 경찰서에 붙들려 가서 갇히게까지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감방에서 열흘 동안 있으면서 같이 있는 죄수들에게도

천도교의 이돈화라는 분이 숙직 날 밤에 소파를 초대해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자고 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방정환의 동화에는 형사까지도 눈물을 흘린다는 소문이 났는데

과연 그런가 내가 한 번 시험해 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한 이 교인은 숙직실에 과자와

약주를 사다 놓고 소파를 불러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자네 동화엔 누구나 울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데 그게 정말인가? 나를 울릴 수 있다면 세상 소문이 거짓은 아닐

테지 어디 한 번 나를 울려 보게.” 술 기운에 소파는 이 친구의 청을 들어 주기로 하고,

산드룡의 유리구두」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다니 커다란 어른이 그까짓 동화에 눈물을 흘린 단 말이 될 법이나 한

소린가? 난 끄떡도 안 해 어림 없지.” 이런 생각을 하며 소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돈화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소파는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면 스스로 그 슬픈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 슬픈 사람의

것이다. 그의 동화는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 자기의 창작동화, 그리고 외국의 동화들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했지만, 구연동화가들이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야한 제스처나 말씨가 없고

순박하고도 섬세하며 경쾌하고도

전에 그는 서울서

청년구락부 주최로 동원령>이라는 신극을 했고, 천도교 주최로 자신의 각본과 연출인

동학당> 5이란 극을 전국 각 지방으로 순회 공연한 바 있었다. 문학에는 목성이라는 필명으로 잡지『개벽』에 몇 편의 소설을 발표한 바 있었으나, 그보다도 그를 문학사상에 빛나게 한 것은 아동문학의

뚱뚱한 몸집에 깃든 다정다감한 그의 마음에는 벅찬 애정 세계도 없지 않았다. 김일엽,

신줄리아 등 그 시절 신여성들과의 교제는 그에게 사랑의 불꽃을 솟구치게 하였다. 어떤

때는 그들 여성과의 교분에서 아름다운 시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플라토닉

러브로 일관하는 가운데서 소년 운동이냐 사랑이냐?”의 기로를 과감히 통과하여,

모든 사랑은 어린이를 위한 운동과 어린이를 위한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어린이운동의 정신은 어린이날 부형에게 호소한 그의 삐라에서 능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923년 첫 번째 어린이날에 뿌린 이 삐라들이 가진 의의는 자못 큰 것이라 하겠다.

1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1 , 어린이를 가까이 하사 자주 이야기 주시오.

1 ,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해 주시오.

1 ,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 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1 , 잠 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1 ,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1 ,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1 ,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1 ,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1 ,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경하고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1 ,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1 , 길가에서 떼를 지어

유지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책 구석구석에 넘쳐 있는 애정의 물결은 독자와 편집자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아 실로 우리나

라 잡지 사상에 뛰어난 이상적 편집으로서 길이 기념될 사실이었다.

초조와 피로, 거기서 오는 건강의 해는 마침내 신장주치의 이또오 박사는 그에게 캠플 주사를 주어 임종을 보아야 할 사람들을 오도록 했다. 이튿날 저녁에 소파는 갔다 새까만 말이 끄는

새까만 마차를 타고 영원한 동화의 나라로.

평소에 유달리 눈을 좋아하던 소파. 우스운 동화를 할 때는 허리가 부러지게 듣는 사람을 웃기

다가도, 슬픈 동화를 할 때 눈물 바다를 이루게 하던 그. 그는 밑 바닥에 슬픔을 지닌 사람이었

을까. 그의 호기, 동요에 슬픈 노래가 많은 것도 그의 센티멘털한 면을 말해 주고 있다.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 납니다.

눈 의 한 부분

이렇게 그의 동요에는 눈물이 어리는 것들이 많았다. 이러한 곱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그렇게 열혈의 운동 선상에서도 사나운 점은 없었던 것이다. 그 대담하고 태연자약한 성격

에도 불구하고 성내어 남과 싸우는 일이 없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눈이

소년운동이 좌익 세력에 의해 자기의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어린가슴에 사랑의 선물을-이원수-방정환 기억과 기록 by 한국방정환재단 - Iss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