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in 2024 by ALDA Collective for the Creators Spaces project.
Editor – Sun Chung, Jimin Lim
Design – Sun Chung
Translation – OpenAI ChatGPT
Translation Proof – Sun Chung, Jimin Lim
Cover image – David Clode from Unsplash
Back image – Kier in Sight Archives from Unsplash
Contributions - Boeyon Park, Eunseong So, Cheyon Woo, Areum Parkkang
Note to editing - Minimal editing has been done in order to preserve the tone and the integrity of the individual’s writing.
Note to translation – All translations from Korean to English and English to Korea are by Open AI ChatGPT. No major modifications during proofing process unless the meaning was significantly altered from its original text.
The artists contributing to Creators Spaces retain copyright on their individual works (writings and works of art) presented in this collection.
This publication is licensed under CC BY-NC-ND 4.0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NoDerivatives 4.0 International).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 licenses/by-nc-nd/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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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과 공생의 돌봄
Care in the Form of Contamination and Collaboration
정선희 / Sun Chung
Creating Fine Roots Through Art and Empathy by Migrants
임지민 / Jimin Lim
내 속, 안
Inside of My Insides
박보연 / Boyeon Park
Creating without Making Art
우채연 / Cheyon Woo
움직이는 글쓰기
Writing in Motion
소은성 / Eunseong So
나, 몸, 카메라 I, Body, Camera
박강아름 / Areum Parkkang
사람과 인간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더욱이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아야 한다. 또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사람의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1
김현경은 그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2015)에서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인에 대한 조건적 환대
또는 환대의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들이 돌아갈 다른 곳’은
재일조선인들의 ‘조선’과 같이 종종 허구적인 것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 속의 ‘장소’이기도 하다.2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외국인이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으며 필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마치 신생아가 태어남과
동시에 사회에서 환대를 받듯, 외국인이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원권을 부여하는데 충분해야 하며 동화나 적응을 조건으로
내걸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3 이미 해당 사회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
개인이 그 사회에 도달하기까지 투쟁해야 했던 무수한 고난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특정 사회를 뒤로하고 타지로 이동하는 이유는 이민자의 숫자만큼이나 많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이주는 흔히 한 개인에게 익숙한 문화적, 사회적, 언어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낯선 사회로의 진입을 통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주민들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기회와 성장 가능성의 경험 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깊이 외부인 및 소수자로서 차별을 피할 수 없이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복적으로 겪게 되는 정신적, 정서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소외의 경험은 개인을 사회의 변두리로 주변화 한다. 사람이라는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매 순간 요구되는 개인의 효용성 증명 과정은 평생 동안
지속되며, 임시적으로 허가되었던 환대가 언제 어떻게 철회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삶은 유지된다.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제 이주 성별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4 젠더 감염과
여성과 이민자
통상적으로 여성은 지금까지 가족 재결합을 위해 남성과 함께 이주되는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1980년대 이후 젠더와 페미니즘 이론의 발전과 함께 여성의 국제
이주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이주 노동자로서 독립적으로 이주하는 여성이 증가하고 전체 여성 이주자의 수 역시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규범에 의해 생물학적 성별에 특정 역할과 기대를 부여하는 사회와 같이 이주 역시
남성 중심으로 묘사되고 구조화되며 정책화 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질적인 다양한 이주민 그룹이 겪는 다양한 교차적 차별은 가시화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주민의 이주 결정, 궤도 및 경험을 보다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이주의 구조화 및 정책화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주와 젠더 간의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차적 요소들의 고려는 필수적이다.5
김현경은 여성과 이민자라는 범주에 따라다니는 차별과 폭력을 오염 또는 오염의
메타포라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설명한다. ‘순수에 대한 집착은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결국 ‘‘더럽다’는 말은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으며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하게 된다’고
말이다.6 가부장제도 하에서의 여성과 같이 결국 보이지 않고,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비가시화된 이민자만이 ‘깨끗하고’, ‘순수한’ 이민자가 된다.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 신화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이민자가 가시화를 요구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더럽고’, ‘급진적이며’, ‘과격하고’, ‘침범하는’ 부류로 전락하게 된다.7 이렇
듯 인종간,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발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제도적
불평등은 이민자, 난민 등 사회적 소수자 및 취약계층의 희생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8
여성 이주자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공간, 자원과 기회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특히나, 제한적이고 구속적인 이주 경로는 젠더화된 이주 노동의 취약성을 악화시키며
여성의 사회 진출에 큰 장벽이 된다.9 경력이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등의
비자발적 경력 단절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은 대다수 이민자들의 자립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임신, 출산과 육아에 대한 책임이 이주 여성들에게 전가되며 가중되는 돌봄
노동은 현지에서의 경력과 전문성의 개발과 연구에 큰 제약을 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저임금의 서비스직 또는 단발성 고용 형태에 비자발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수입 구조를 가지는 문화예술 창작 활동 또한 이러한
제약을 피해갈 수 없으며 이는 창작 활동에까지 큰 제한을 가하는 악순환으로 연결된다.
무엇보다도 이민자들은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자신이 새로이 속한 지역
사회를 포함한 사회문화적 환경과의 다양한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환대받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안심하고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란 지극히 어렵고
이러한 사회적 소외는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언어와 시공간을 한없이
축소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안전한 시공간의 부재는 수많은 이주 여성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구조적으로 배제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선입견 없이 이들의 잠재된 가능성을 소리 높여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북돋아 주고 서로를 돌보고 치유할 수 있는
연대의 공간인 지역 커뮤니티의
조직들은 단발성 행사 주최에 주력하고 있으며, 파견 정부 기관들은 본국의 정책적 기조에 맞추어 외국인 대상인 공공외교 행사 기획에 주력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주 여성 디아스포라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재외동포들에게 주어지는 관심과
자원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물론 근래에 들어 문화예술 콜렉티브와 같은 느슨한 협력
및 연대 조직체들이 많이 생겨나 활동하고 있지만, 이 또한 한정된 자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연속성 있게 지속되지 못하거나 일반인들의 접근성 또한 낮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알다 콜렉티브ALDA Collective는 아시아 디아스포라
커뮤니티내에 속해 있는 다양한 그룹 및 개인들이 어떻게 정방향 또는 양방향이 아닌
리좀적 방사형 관계를 맺고 균사체적 네크워크를 형성하며 가치의 생산에 참여하고
공유하며 상생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숙고하며 형성되었다. 비난과
판단보다는 서로가 지지해 줄 수 있는 긍정과 공감이 바탕이 되는 예술적 교류가
가능한 공간, 각자의 존재 방식을 인식하고 이를 존중하며 서로와의 관계를 돌보는
세심함이 바탕이 되는 비물질적이고 정동적affective인 시공간을 상상하며 말이다.
종종 우리는 어떤 장소place가 우리의 것이고, 우리가 그 곳에 속하고, 심지어 거기서
왔기 때문에 어떠한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 장소에 묶여 있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옳은 장소right place라고 간주하는 이러한 장소들을 통해 자아를 재확인함으로써 안정된 자아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재 반영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신이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잘못된 장소wrong place라고 인식하는 장소는 낯설고, 혼란스럽고, 불안정하고, 심지어 위협적인 장소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와의 불안전한 관계는 결국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일관된 감각을 구성하는 주체의 능력에 해롭다고 간주한다고 권미원Miwon Kwon은 이야기한다.10
루시 리퍼드Lucy Lippard에 의하면 공간space은 풍경landscape을 정의하고, 공간space은 기억과 결합되어 장소place를 정의한다고 한다. 지역local에는 장소place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장소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특정한
위치location의 공명'으로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통해 매개되는 외부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장소와 그 장소가 구현하는 문화 및 역사에 묶여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자발적 또는 강제적 이주를 통해 특정 지역 문화와 장소에서 우리의 삶이 뿌리째 뽑히는 것은 우리 자신을 찾는 능력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한다고 말이다. 그는 장소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이며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장소에 대한 감각sense of place의 결핍은 ‘우리가 자연과의 접촉 상실, 역사와의 단절, 영적 공허함, 자아의식으로부터의 소외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11 하지만 교환, 이동 및 의사소통에 있어 물리적, 시간적, 공간적 장벽이 사라져가는 현대의 삶의 조건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장소에서 이탈해 있다. 또한 우리는 오프라인, 온라인, 가상현실 등 너무나 많은 장소들을 동시에 점유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불필요하게 끊임없이 올바른 장소와 잘못된 장소를 구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구분이 자아를 형성하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12 이에 대해 권미원은 오히려 개인이 길을 잃고 잘못된 장소 또는 예상치 못한
곳에 도달함으로써 얻는 시공간적 이탈의 경험은 전통적 자아의식의 붕괴를 통해 해방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잘못된' 장소와의 만남은 '올바른'
장소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자아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새로운 자극과 위험에 적극적으로 취약하게 만들고, 이러한
취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체성의 발견, 구체화 그리고 확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13 사실상 우리가 어떠한 장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장소에서 우리의 위치나 그 장소와의 실제 관계를 반드시 반영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장소에 대한 개인적 관계는 우리를 형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이자 집단으로서 우리 또한 역으로 장소를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14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장소들은 옳은 동시에 틀리며, 매 순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잘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낯선 것이 사람 속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들을
살려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누가 이런 것을 유나에게 말해주었을까? 네가 태어난 집에 가치를 두지 말라. 네가 너의 탄생을 기억하고 싶거든 멀리로 계속 가라.’ 15
익숙함의 상실은 낯선 세계 혹은 이제까지 인식에서 배제되었던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즉, 낯선 외국어를 배우고 말한다는 것은 모국어라는 하나의 언어에 고착된 제한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의문의 계기와 동시에 다양한 관계 맺기의 가능성 또한 제시하게 된다.16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은 개인의 내적 본질 및 특정한 속성들의 집합체가 결코 아니다.
더불어, 흔히들 정체성이란 세월이 흘러 쌓여온 이러한 불변의 내적 본질의 근원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실제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고,
언제나 생성 과정에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포지셔닝의 과정이다. 즉,
단일하고, 완성된 존재의 상태가 아니며, 평생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17 결국은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공간과 장소 사이의 어딘가에 진동하며 존재한다. 이 둘의 양극단에서
서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관계 속에서 말이다.
이는 유목nomadism과 정주sedentariness, 공간space과 장소place, 온라인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Like와 오프라인 악수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순처럼 보이는 범위와 그에 대한 모순적인 욕망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미원은 강조한다. 즉, 반대처럼 보이는 것들이 결국 서로 지탱하고
지속하는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 목적, 장소의 혼종적인 관계의 맺음이 무궁한 현대적 삶 속에서 더이상 정체성
규정에 장소, 사람, 언어의 일치는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이렇 듯 장소의 탈영토화는
장소에 얽매인 정체성의 제약을 유동성으로 대체하고, 우연한 만남과 상황에 기초한
다양한 정체성, 연대, 의미의 생산 가능성을 도입하는 해방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바로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가 리좀적 노마디즘rhizomatic nomadism에서 묘사한 유동적인 주체성, 정체성 그리고 공간성과 동일하다.18 이는
뿌리나 줄기가 땅속에서 무질서하게 퍼져 나가는 것처럼, 중심이나 위계구조 없이
다양한 지점들이 서로 연결되고 확산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탈중심적이고
비선형적인 균사체적 네트워크mycorrhizal network와도 유사하다. 감염과 공생을 통한 돌봄
홀로바이온트는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협력은 항상 경쟁과 협동의 혼합이다. 모든 공생체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이보그'라는 용어 사이버네틱 유기체의 약어 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기술의 융합을
설명한다면, 우리 역시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심보그, 즉 공생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공생적 관점에 대한 기초적인 논문의
저자들은 이 점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들은 선언한다. "우리는 모두 이끼다." 19
우리의 몸에는 자연을 비롯한 선대의 지식과 트라우마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균과 미생물 등이 깊이 축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은 지금까지
다양하게 변화되어 온 역사와 사회적 시스템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이렇듯 겹겹이
쌓여 있는 무수한 얽힘의 관계들을 인식하는 순간, 현대의 탈경계적 정체성들을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 ‘우리-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사유체계가 무의미한 것을
깨닫게 된다.20 예를 들어 녹조류algae와 균류fungi의 공생으로 존재하는
지의류lichen는 복합 유기체로써 이도 저도 아닌 동시에 이 것이기도 하며 저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의류의 존재와 삶은 또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하나이자 다수이고 부분이자 전체이며
혼종적이고 비선형적인 존재 방식으로 상호의존적 공생에 바탕을 둔 돌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돌봄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량이지만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돌봄의 상품화를 통해 우리의 상호연결성과 의존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21
지속가능한 돌봄에는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도 돌봄을 받고, 돌봄을 받는 자도 돌봄을 제공하는 자가 될
수 있는 순환적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비인간에 속한 그 모든 개체와의 관계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더 케어 콜렉티브는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는 것을 ‘난잡한 돌봄의 윤리ethics of promiscuous care’라고 일컬었다. ‘난잡하다’는 것은 ‘차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현재 기준에서 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을 연구 및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난잡한 돌봄’은 가족을 넘어 공동체, 시장, 국가뿐 아니라 비인간도
아우르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규모의 사회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말이다.22 성장만을 목표로 앞만 보고 달려온 착출적extractivist 신자유주의 사회를 뒤로하고 우리는 이제 우리가 인식하지 않고 있었던 주변을 천천히 둘러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변으로의 관심과 주목notice을 통해 미확정되고 열린 다방면의 만남, 연결 그리고 관계를 만들어 나가며 끊임없이 공생적 진화를 하며 변화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염contaminate시키고 변화해 가며 다양한
방향으로 사회 또한 수정해 가며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감염은 다양성으로의 길인 것이다.23
불안정성precarity은 타인에게 취약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 안정된 공동체 구조에 의존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집합체 속에 던져져 서로를 재정의한다. 현상 유지에 의존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변동 중이고 우리의 생존 능력도 포함된다. 불안정성을 통해
사고하는 것은 사회 분석을 변화시킨다. 불안정한 세계는 목적론이 없는 세계다. 계획되지 않은 시간의 본질은 두렵지만, 불안정성을 사고함으로써 불확실성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24
사람과 사회는 통상적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것, 명확하게 틀에 맞출 수 없는 것, 가변적인 것을 마주하면 대개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더더욱 말이다.25 지금까지 난잡함promiscuity, 불안정성precarity, 취약함vulnerability,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 불확정성indeterminacy, 집합assemblage, 교란적/분열적disturbance 등의 가치들은 언제나 축소되고 주변화되고 비판되어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불안정한
시대적 조건에 대항하여 필요한 가치, 체계성 또는 조직성이 바로 지엽적이고, 하찮고, 핵심에서 벗어난 바로 이러한 가치들이라고 안나 칭Anna Tsing은 강조한다.26 세상의
모든 것은 유동적이며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은 끊임없이 만물을 변화하게 만든다.
우리의 생존 능력을 포함하여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불안정성의 표출은 서로의
연약한 부분들을 인식하고 감싸며 함께 공생할 수 있는 진화적 기회의 포착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성의 표출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상징하는 것들은 더 이상 부정적이며 주변화되는 가치들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비차별적indiscriminatory이고, 실험적experimental이며, 모험적adventurous이고, 변혁적transformative이며 다양한 자극stimulation과 사변speculation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동적 얽힘affective entanglement과 열린 모임들open-ended gathering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신자유주의 성장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부작용에 응답하는 대안적 가치들인 것이다.
의식하기 위한 길 잃음
가장 사소한 걸음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잘 알려진 랜드마크와 지점을 따라
조종하고 있다. 일상적인 경로를 벗어나더라도 주변의 방향을 마음에 담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길을 잃거나 방향을 잃어버려야 비로소 자연의 광대함과 낯섦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잠에서 깨거나 다른 생각에 빠질 때마다 나침반의 방향을
다시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을 찾고,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인식하게 된다.27
보통 고향을 떠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길을 잃은 사람들 또는 길을 잃은 것과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리고 헤맨다고 하여 삶과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역시 길을
잃어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짜 누군지, 어떠한 관계들로 연결되어 있는지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다.28 이러한 길 잃은 삶 또는 비선형non-linear적 삶은 균사체적mycelial
삶과 닮아 있다. 무한히 뻗어 나가며 예상 밖의 만남들을 구축해 내고 그 과정 속에서
우연적이지만 필연적으로, 의도하였든 하지 않았든, 찾던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29 그리고 이러한 사방으로의 균사체적 확장 과정의 핵심은 지금까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관심 받지 못하던 주변을 깊이 의식하고 돌보는 것이다. 즉,
조용히 깊이 그리고 자세히 듣는다는 것은 바로 개인의 직관, 직감 및 감각을 깨우고
작고, 소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민감하게 집중하고 반응하며 이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얽힘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살핌을 통해 서로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알아가는 과정은 결국 자신, 주변 환경 및 세계의 변화를 인지 및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공생적 진화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주위를 향한
깊은 경청과 관찰의 자세와 작은 변화들에 대한 인식은 결국 연대와 관계의 회복으로 연결된다.30 균사체적 예술적 실험
야스민 오스텐돌프-로드리게즈Yasmine Ostendorf-Rodriquez는 진정성authenticity을 바탕으로 도움을 주는 존재들과 도움을 받는 존재들이 동시에 서로를 도우며 돌봄을 행사할 때 ‘도움’이라는 행위에 종속되어 있는 권력 관계가
비로소 해체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래transaction적 관계가 아닌
공동체community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상호성reciprocity과 공감empathy에
기반을 둔 ‘애정과 돌봄의 네트워크network of affections and care’가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31 엘크 크라스니Elke Krasny 역시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은
일종의 돌봄의 형태로써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직면하는 직접적인 사회적
투쟁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를 큐레이팅의 연장선상에서 보았다.32
<창작자의 공간> 역시 이러한 가치를 중심에 두고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이는 공생체적
돌봄과 치유를 중심으로 2024년 한해동안 네 번에 걸쳐 진행된 문화예술 실험으로
이를 통해 새로운 연대와 공동체의 재구성을 모색하고 있다. 아시아 여성 디아스포라
창작자들 각자가 축적한 고유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겪은 상실, 소외 및 경계의 경험과 고민을 예술적 언어와 실천으로 전환하고 공유함으로써 상호 돌봄과 치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참여자 개개인들의 무의식과 마음 속에 가둬두었던 예술, 사회 그리고 자신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창작자-참여자-기획자 모두가 각자의 공간속에서 당면하고 있는 고민들을 함께 탐험해 보며 가치를 생산해보는 자리였다. 특히나 문화예술적 돌봄을 일시적이고 단순한 물리적 지원이나 감정적 위안으로 축소하지 않고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가치적 공동체 형성이라는 목적성을 가지고 장기간에 걸쳐 신뢰와 관계를 쌓고자 노력하였다.
프로그램 기획에 있어서 돌봄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는 크게 세 가지의 축인 기획의 형태, 매체의 확장성 그리고 다면적 관계형성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형의 화이트
큐브 전시를 위해 소모되는 자원과 비용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의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시도를 통해 기존의 전시 및 전시 연계 프로그램들의 한계에
대해 고심하였다. 통상 전시 연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되는 스튜디오 방문, 창작자 토크, 아뜰리에 등은 제한된 소통과 함께 정방향적으로 기술, 지식 및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러한 습관을 전복하며, 전시 연계 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전시에 부속되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순환적 관계의 실험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개인을 취약하고, 예민하고, 민감하게
만든다고 인식되어 왔던 넓은 스펙트럼의 모든 감정들과 정동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누며 서로를 돌보는 예술의 돌봄과 치유적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대안적 예술의 시도가 어떻게 지역 커뮤니티의 생성 및
활성화를 촉진하고 또 다른 연대의 확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비물질성, 운동성, 혼종성, 관계성 등이 어떻게 예술적
매체의 확장성으로 연결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사유하고자 창작의 근간이 되는 ‘내 속, 안’과 ‘움직이는 글쓰기’와 같은 수행적 행동성, ‘미술하지 않고 창작하기’라는 개념적 유희 및 ‘나, 몸, 카메라’의 관계성 자체를 매체로 설정하는 시도를 하였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자들만을 위한, 기획자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닌 모두를 위한 가치 생산적인 순환적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무형의 시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기획자가 참석자가 되고, 참석자가 창작자가 되고, 창작자가 참석자가
되고 또다른 역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순간들을 생산해내는 순환적 다면적 관계
형성의 기회를 내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다양한 글과 이미지로 모인 이 책은 이러한 시도의 기록으로 일기이자 에세이며
무형의 전시 카달로그이기도 하지만 역시나 하나의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안에는 정갈하게 완성되어 보여지는 작품과 의미 대신에 창작자들이 지나가고 있는 현재의 자신들의 여정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렇듯 <창작자의 공간>은 각자가 아시아 여성 디아스포라이자 창작자로서 점유하고 있는 현재의 공간 및 장소에서 어떻게 호흡하고 반응하며 자신을 변화, 확장시키고 진화해 나가는지 함께
교류하고 소통하고자 하였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써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지금 이 시공간에서 우리는 어떠한 고민을 하고 불안해하며 진동하는지, 그리고 익숙함의 상실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있고 어떠한 해방에 이르게 되었는지 말이다. 이렇 듯 아시아 여성 디아스포라의 비가시화된 잠재적 가능성과
자신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있는 시공간 속에서 우리의 불안정성, 불완벽함 등을 공유하며 서로를 돌봄으로 어루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치유, 연대와 무한한 가능성의 얽힘으로 한발짝 나아가게 된다. 이제는 인식하지 않았던 주변을 관심있게 응시하며 미확정 되고 열린 만남과 관계의 가능성을 열고 이러한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 및 조직들과 균사체적으로 얽히며 가치 기반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불안정하고, 난잡하고 연약함을 연습practice precarity할 필요가 있다. 예측 불가능한 만남 속에서 우리를 변화시킬 연대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33
정선희
알다 콜렉티브, 문화예술기획가, 지역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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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p. 46, 90
2. Ibid., p.109
3. Ibid., p. 99
4. ‘1980년대 여성의 국제 이주에 관한 연구에서는 특히 이주 노동자로서 독립적으로 이주하는 여성이 증가함에 따라 이주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90년대에는 이주 젠더 연구에 비판 없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주의 여성화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할 이유는 국제적으로 여성 이주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했음은 사실이나,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이주 성별의 격차는 증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4 국제 이주 보고서>에 의하면 국제 이주 여성의 비율은 2000년 이후 49.4%(남성 이주민 8,800만 명, 여성 이주민 8,600만 명)에서 2020년 48.1%(남성 이민자가 1억 4600만 명, 여성 이민자가 1억 3500만 명)로 감소하였으며 국제 이주 여성과 남성의 격차는 2000년 1.2%포인트에서 2020년 3.8%포인트로 늘어났다. Gender and Migration: Trends, Gaps and Urgent Action’, World Migration Report 2024,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Switzerland, 2024, p.3-4
5. Ibid., p.31
6. 김현경, 2015, p.121
7. Ibid., p.118
8. Yasmine Ostendorf-Rodriquez, Let’s Become Fungal! – Mycelium Teachings and the Arts, Valiz Amsterdam, 2023, p.129-130
9. World Migration Report 2024, 2024, p.31
10. Miwon Kwon, One Place After Another – Site-Specific Art and Locational Identity,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Cambridge, 2022, p.160. 163-4
11. Lucy R. Lippard, The Lure of The Local: Senses of Place in a Multicentered Society, The New Press, New York, 1997, p.7-10 & Miwon Kwon, 2022, p.158
18. Miwon Kwon, 2022, p.165 / Félix Guattari & Gilles Deleuze, A Thousand Plateau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19. Merline Sheldrake, Entangled Life – How Fungi Make Our Worlds, Change Our Minds, and Shape Our Future, Penguin Random House, 2020, p.103 / 번역 OpenAI ChatGPT
20. Yasmine Ostendorf-Rodriquez, 2023, p.39
21. The Care Collective, The Care Manifesto: The Politics of Interdependence, Verso, 2020, p.13, 23, 36, 45-49
22. Ibid., p.92, 95, 98
23.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pp.22-3, 27, 29
27. Henry David Thoreau, Walden,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171 / 번역 Open AI ChatGPT
28. Rebecca Solnit,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Canongate Books, 2006
29. Yasmine Ostendorf-Rodriquez, 2023, p.19, 29
30. Ibid., p.30-34, 166
31. Ibid., p.82-5, 93, 307
32. Elke Krasny et al (ed.), Radicalizing Care – Feminist and Queer Activism in Curating, Sternberg Press, 2021 pp.10-27
33. “'불안정성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논의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이러한 결정이 '생활 방식의 선택'으로서 특권의
위치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선택적으로 불안정성을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의 특권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며, 그로 인해 수반되는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수용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덧없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며, 현재의 중요성을 재인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놀라움의 가능성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Yasmine Ostendorf-Rodriquez, 2023, p.262-3
이질적이고 대립되는 것들의 지속적 공존과 상호작용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GASTON BACHELARD 가스통 바슐라르
한 곳에서 잘 자라던 나무가 새로운 땅에 옮겨 심어지면 다시 뿌리내리기 위해 평소보다
4배의 악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나무를 지탱하고 있던 잔가지와 잔뿌리들을 다 잘라내고
왔기 때문에 새 땅에 적응하려면 몇 배의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이 때 정원사는 적응하느라 고생하는 나무에게 수액을 맞혀서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해요.
이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잔가지를 다 잘라내고 새로운 나라에 정착한 우리에게는 나무의
수액주사 같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잔가지
이민자들의
익숙한 공간, 익숙한 관계, 익숙한 언어의 상실이라는 공통의 경험, ‘이민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여러 겹의 상실은 무의식의 수준에 굉장히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외국에서 잘 적응하고 만족스럽게 생활한다 해도, 이주한 땅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minority)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수자가 되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 받게 되고 우리에게는 존재 이유와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집니다.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잔가지도 없어서 서러운데, 먹고 사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이 어려운 미션까지 수행해야 한다니! 이렇게 이민자로서 한없이 취약하고 표류하는 존재가 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 이 혼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이 부차적인 감정들은 계속 미끄러져 무의식 속에 쌓이게 됩니다. 마치
와인병 아래 침잠해 있는 앙금처럼요.
알다 콜렉티브를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그리고 상담가로서 가장 많이 들었던
코멘트는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 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적응 잘 하고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라고 다들 한번쯤 생각해 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단언컨대, 외국생활 힘들지 않다는 사람 아직 못 봤습니다.)
처음 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정신건강 상태와 학력은 현지인들의 평균보다 높지만, 문화적응 과정에서 정신건강이 급격히 악화된다고 합니다.1 참으로 슬픈 연구 결과이면서도 이해가 됩니다. 문화적응과 언어장벽에서 오는 스트레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학위 및 경력에서 오는 자신감 저하, 그리고 환상의 베일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정착한 나라에 대한 환멸과 실망으로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우울감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이민자의 우울감과 고립감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언어화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요, 심리학에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언어화’, 즉 감정 라벨링 (affect labeling)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2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불안해’라고 말함으로써 마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언어화하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언어화가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거나
즉각적인 행동(충동)을 지연시킬 수 있게 되고, 이 때부터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에 언어화는 치유의 가장 첫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화가 반드시 ‘말’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리고 찰흙을 만지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던 것처럼 예술로서의 표현은 그 언어화의
1차적이고도 가장 원시적인, 직접적인 출발점입니다. 이 원초적인 감각이 다시 상기되고 느껴질 때, 우리는 깊은 곳에 침잠되어 떠오르지 않고 있던 태초의 감각, 바로 무의식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창작자의 공간>은 바로 이 언어화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시간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해외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창작자의 작업공간을 방문하여 작업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문화예술이 주는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프로그램인데요, 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다른 개성과 히스토리를 꺼내어 창작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강렬한 접촉의 장이었습니다. 예술을 통해 연결된다는 것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혼자만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오히려 자유롭게 꺼내 놓아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심리상담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해 이 나라에 왔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나이가 얼마인지에 상관없이 횡적으로 평등하게
교류하게 됩니다. 놀이터에서 모두 함께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처럼요. 창작활동을 하며 어느덧
서로가 서로의 잔가지가 되어주었고,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내가 적응 못하고 약해서가 아니었어’를 확인하는 것은 큰 위안과 안도감을 선사하며, 그 다음 날을 힘내고 살아갈 의지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다른 영양소들이 아무리 풍부하고 넘쳐나도 어느 한 영양소가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으면
식물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 (Liebig’s law of minimum)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민자들에게 학력, 언어실력, 직업 등 아무리 표면적인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어도 정신건강이라는 자원이 부족하면 전반적인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없습니다. 일상에 큰
문제가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공허하고 자주 짜증이 난다면 감정의 언어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나누는지가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치유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문화예술은 쌓여 있는 감정을
창의적이고 비폭력적이며 비파괴적인 방향으로 승화시켜 주는 도구입니다.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한 공감을 통해 나의 잔가지를 뿌리내리고 또 누군가의 잔가지가 되어준다면 어느덧 ‘여기도 꽤 살 만하다’라는 충만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올해의 시작을 알다 콜렉티브의 첫 <창작자의 공간>과 함께 하게 된 것은 정말 큰 영광이었다. 나의 내밀한 공간과 생각을 공식적으로 내보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아 작업을
팔지도 전시를 선뜻 하지도 못하는 내가 나 스스로도 지겨워지던 시점과 잘 맞아 떨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수다보다는‘진지한 교류와 대화’가 사람들의 창의성과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생각으로, 이를 구체화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려던 참이었기에 지체 없이 나의 작업실 문을 활짝 열었다.
창작의 행위는 생각보다 특별한 게 아닌, 작가가 느낀 감정을 물질화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감정들이 포착된 흔적들이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인류가 가졌던 감정의
역사들이 집적된 공간인 것이다. 작업실은 내 이야기와 감정을 발굴하는 아주 사적인 곳이다. 그 곳에서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흙과 마주앉아 오랜 시간 기 싸움을 하고 있다.
도자기가 가지고 있는 순수예술과 공예 사이 이중적 아이덴티티에서 나는 나의
모습을 본다. 닮았다는 것을 내가 아무리 거부해도 안 닮을 수 없는 나의 엄마처럼. 어릴 적부터
관계를 쌓기가 매우 어려웠던 어머니가 도예를 하셨기에 아마도 닮고 싶었던,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으로 큰 고민 없이 내가 대학에서 도예전공을 선택한 것 같다는 생각을 꽤 최근 들어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학부만 마치고 도자기를 그만해야겠다 생각하여 나의 나라, 나의 전공, 부모님을 떠나 프랑스로 와서 문화프로젝트 전공을 하고 한국에 잠깐 돌아가 찾은 일도 그
분야의 사무직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흙이 그리워 다시 도자기를 시작했지만 10년
이상의 환기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도예, 실용성의 틀에 갇혀 있었다. 누구에게
쓸모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살았고, 쓸모가 없어도 가성비가 없어도 예쁘지 않아도
인정받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하기에 충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온전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흙도, 나도. 그래서 순수하게 올라오는 감정 자체에 온전히 몸을 던지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남편 및 부모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부부상담과 심리상담을 다각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내 안의 축이 변하기 시작했다. 매체가 정하는 내용이 아닌, 내용을 매체에 실어내는 방법으로, 그리고 도자기의 특성상 저 아래 바닥에 있는 진짜 아이덴티티에 초점을 맞췄다. 전통적으로 도자기라는 것은 흙으로 기물을 만들고 말리고 굽고 하는 과정에서 생산효율성과 사용성을 높이기 위해 기물의 모든 곳이 다 두께가 비슷해야 하고 가벼워야 하며
유약으로 거의 모든 곳을 덮어야 한다. 단, 유약이 녹으면 가마 바닥에 달라붙기 때문에 작품의 바닥 면은 유약을 닦아낸다. 그래서 숨겨진 도자기의 속살은 그것이 놓여 있는 위치와 직접 맞닿아 있으며, 작품의 본질(흙의 본색, 유약의 종류, 창작자의 서명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만지고 돌려보면서 작품과 만나야 한다.
나는 기물의 굽에 일부러 많은 흙을 남겨 굽 칼과 조각도를 다양하게 사용하며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조각을 한다.
얇은 부분이
판단되지 않는 것에 안전함을 느낀다. 작은 컵으로 시작했던 작업은 (2018-2021) 기물 하단의
조각을 더 크게 할 수 있는 굽이 큰 제기, 접시 등으로 ‘멍석’을 키워갔고 (2022), 상단 성형
작업까지 그 영역이 넘어오면서 (2023) 궁극적으로는 의도적으로 기능적 용도를 파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가 매체를 잊게 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중이다. 그 덕에 나에게는
'코끼리 발목에 묶어놓은 끈'같은 도자기의 경계선에서 한걸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물레로
작업을 하면 그 어떤 형태도 회전체일 수밖에 없는 숙명이 있다. 3차원 작업을 하고 난 후에
머릿속에서 그 단면을 잘라 2차원 작업을 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2차원 작업을 한 후에
머릿속에서 회전하며 3차원 작업의 가능성을 계산하기도 한다. 2차원 단면 꼴라쥬의 주재료는
도자기 흙 가루, 수채화, 파스텔, 색연필을 사용한다.
<창작자의 공간>에서 내 작업을 소개하는 것뿐 아니라 아뜰리에를 진행한 것은
나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그 동안 상상만 하고 있던 실험적인 방식의 워크샵을 실현할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지하공간에서 작업을 하면 종일 해를 보지 못한다는 큰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 단점을 장점으로 극대화해서, 시각을 온전히 차단하고 흙을 만나는 체험을
제공해보고 싶었다.
내가 작업실에서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흙덩이(porcelaine, grès blanc, grès noir)를
각자의 앞에 두고 둘러앉았다. 불을 끄기 전에는 세 덩어리의 다른 색을 보았고, 불을 끄고 난
뒤에는 세 덩어리의 다른 촉감에 이끌려 손으로 누르고 자르고 늘리고 붙이고 굴리고 섞었다.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들이 더 살아나고 무의식이 고개를 들며 움직이는
양손의 흙에 그것들의 흔적이 남게 된다. 시각이 지배적일 때 버릇처럼 하던 행동들이
낯설어지고, 찰흙이라는 물질은 내 불안과 호기심과 생소함을 온전히 받아 나에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비 언어적인 표현으로 내 영혼을 뱃속에서 꺼내 보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1개의
목소리가 가이드를 했지만 불을 켜고 나서 봤을 때 6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나와 있었다. 어떤
감정과 생각에 이끌려 그런 손의 움직임을 하게 되었는지 각자의 생생한 설명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아들과의 소통에 문제를 겪은 시간에 대한 한 참가자 분의 이야기가 나에겐 아직도
저릿하다.
국제결혼을 하고 타지에서 아이를 낳고 혼자 어린아이와 종일 지내는 절대적인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단절의 시간이 얼마나 힘든 지, 나도 그때 생각만 하면 진절머리가 난다.
아뜰리에 불이 꺼지자 그 참가자 분은 길고 좁은 터널을 지나던 그때 그 시점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분의 어린 아들은 자기의사표현의 방식이 남달랐다. 훈육을 위한
‘안돼’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며 하루에도 여러 번 끊임없이 배변이 가득 담긴 기저귀를 던지고 손으로 움켜쥐어 벽에 칠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표현했다. 그 행위를 제지하면 할수록
아이는 숨어서까지 영역표시를 했다고 한다.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도 아이와 연결된다는 느낌보다 벽을 마주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고 하셨다. 심지어 프랑스에 살기에 아이가
“하하, 미디어 아트는 또 아닌 것 같고… 보여드릴 순 있는데, 뭔가 민망하네요. 제가 하는 게
아름답거나 막 멋있거나 그런 건 아니어서…(구구절절)”
“아… 오… 신기한 거 하시네요.”
저는 제가 하는 작업이 과연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늘 품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관객에게 설득력 있는 작품을 만들기 이전에, 제 작업을 제 자신에게 설득시키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는 다른 차원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쓰레기를 만들었구나!” 라는 자책을 하면서도 제가 창작을 하는 이유는 분명
존재합니다.
저의 창작물들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현실과 똑 닮아 있습니다. 이렇게 작업을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저는 그림을 못 그리고 (정말로
못 그립니다.) 시각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창작은 하고 싶고 그럼에도 작업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늘 ‘미술’과는 거리가 먼 ‘창작’을 하는 제 자신을 한심해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작업을 이어나갑니다. 관객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예술 작품과는 다른 제
작업을 마주하고 갸우뚱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꽤나 머쓱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렇기에 <창작자의 공간> 에서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걱정보다는 드디어 저의 요상한 작업에
대해 해명과 소명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떴습니다.
작업을 통해 우리 모두의 공통된 경험을 보여주기 위해 개인의 서사부터 꺼내기 시작하는데요,
이 때문에 제 창작물의 가장 주된 재료는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사건이나 경험입니다.
필연적으로 저라는 사람에 대해 재차 설명해야 하는데요, 참 힘든 과정입니다. 아직까지도
작업으로 보여지는 저를 설명하는 일은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해서 작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숨거나 도망가기 바빴는데 <창작자의 공간>은 저의 작업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영상 작업 <ABG (Asian Baby Girl)>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작업은 제가 학생이었던 2020년에 제작한 영상으로, 아시안 여성으로서 경험한 유쾌하지 않은
일화들 그리고 헤테로 여성으로서 느끼는 내면의 솔직한 욕망을 풀어냈습니다. 저는 이 작업에 애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 날 것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제 모습을 마주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시아 이민자 여성 연대’라는 키워드로 모인 알다 콜렉티브의 <창작자의 공간>에서 이 작업으로 많은 이야기가
언제든 그 일을 하지 않을 핑계는 있기 마련입니다. ‘창작자의 공간’ 제의를 받고 몇 가지 핑계를 용케도 마련했습니다. 당시 저는 저를 작가로 여기지 않는 매일을
보냈습니다. 글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제 몇 가지 이유입니다. ‘글써야 하는데..’라는 마음으로 괴로우신 분들, 즐거이 읽어주세요.
첫째, 아무도 내가 글쓰는 사람인 것을 모른다.
‘몸은 프랑스에 머리는 한국에’ 상태로 몇 년째 살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저는 매일
이메일로 한국여성들의 글을 받아 피드백을 작성해 보냅니다. 그들이 편지를 보내고
저는 답장을 하는 식입니다. 종종 스카이프 앱을 통해 화상 수업을 합니다. 업무를
마치면 뉘엿뉘엿 해가 집니다. 그러면 대충 오늘의 야심을 모른 척 하기에 좋습니다.
제가 사는 작은 도시의 도서관은, 맙소사. 무려 18시도 되기 전에 사람들을 내보내곤
합니다. 제가 사는 중세도시의 석양은 왠만한 야심은 장밋빛으로 대충 물들여 버리는
힘을 지녔습니다.
아페리티브로 꿀색 맥주를 한 잔 따르면, 오늘의 고통과 행복 등의 글감도 ‘내일
써야지’ 하며 식도 뒤로 흘러 내려갑니다. 제가 사는 소도시에는 저를 에세이스트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요. 자유롭고 고독한데, 자유의 비율과 고독의 비율 중
무엇이 이기는가에 따라 그날의 기분이 좌우됩니다. 아무튼, 제가 그날 글을 쓰든 말든 그걸 상관하는 사람은 저뿐이고, 저는 저를 모른 척하는 데 베테랑입니다.
작가는 어정쩡한 직업입니다. 직업이라기 보다는 정체성이라는 게 맞겠지요. 외국인은
평생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데요. 그때마다 저는 저를 기자나 글쓰기 선생님이라고
소개했어요.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가 생기면 제가 누군지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졌지만
프랑스어로 ‘에세이스트’라고 하면 그게 뭐하는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소설가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는데, 이민자 언어학교에서 만난 한 친구는 “이민 온
사람들 이야기 많이 들으면 네 소설에 도움이 될 거야. 모두의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잖아!” 라고 말하더군요.
둘째, 프랑스에서 창작자로서 나의 공간이 없다. 한국에서의 저의 정서적 공간은 글쓰기 모임이었고, 물리적 공간은 공유작업실 혹은 카페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밖이 불편하잖아요.” 항상 집에서 과제를 한다는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맥주잔을 놓자 테이블이 덜컹, 흔들렸고 저는 폭소했어요. “탁자들이 늘 한쪽이 기울어져있지. 아니면 너무 작아서 어깨를 움츠러뜨리게 하거나.” 간단한 일기 정도는 모르겠지만 오래 글을 쓰기에 프랑스 카페들은 꽤 불편했어요.
(핀터레스트에는 카페 탁자에 수첩과 펜을 놓고 뭔가를 쓰는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많지만) 공유작업실은 한국에 비해 비싸고 수가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차에서 글을 쓰곤 했습니다. 한동안 저의 ‘창작자의 공간’은 기차였어요.
내 집의 기억과 스트레스가 없는 외부 공간, 들어오고 나가는 낯선 사람들이 주는 환기,
기차의 진동과 노이즈가 쓰는 행위를 자극했습니다. 기차에 사람들을 모아 글쓰기
아뜰리에를 여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셋째, 제가 파리보다는 바르셀로나가 가까운 프랑스 남부에 산다는 사실.
집에서 아주 아주 먼 파리를 떠올린 뒤, 저는 대답했어요. “갈게요.” 움직이는 글쓰기.
글쓰는 사람에게는 창작자의 공간이랄 게 없습니다. 공간이라면 전두엽 안의 몇
센티미터 정도? 그 뇌를 가지고 내 몸을 이동시킵니다. 움직이는 동안에 글이 쓰입니다.
저는 자주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결말을 떠올리는데요. 방사능에 피폭되어
몸이 죽은 주인공은 자신의 뇌를 AI로 만들어 영생을 얻기를 원합니다. 알렉사 모양의
작은 기계 속에 담긴 주인공은 결말부에서 가족들에게 인사합니다. “안녕, 저예요.” 한국의 나, 유럽 소도시의 나, 파리의 나. 그렇다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창작의 공간은
무한대의 수가 아닐까요.
저는 배낭을 메고, 작은 기차와 큰 기차, 그리고 전철을 갈아타며 파리의 카페로 ALDA Collective의 친구들을 만나러 향했습니다.
‘창작자의 공간’을 연 3월의 어느날, 우리는 파리의 한 카페 테라스에 둘러앉았습니다. 카페는 더할나위없이 고풍스럽게 아름다웠지만, 그날 저는 약간 기이한 기분을 느꼈어요. 현지인들로 가득찬 카페에서 여럿의 한국 여자들이 모국어로 글을
낭독하려는 참이었으니까요. 고국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할 때에는 참가자들의 내밀한 글쓰기를 낭독할 것을 고려해 늘 밀폐된 공간에서 했습니다. 그걸 떠올리니, 차라리 편해졌어요. 고독은 자유이기도 한 걸요. 누가 어떤 상처를 고백해도 이곳엔 알아들을 사람이 없을 거였습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제 에세이 <나는 소통의 비겁자가 되었어>를 돌아가며 조금씩 읽었습니다. 이민 온 첫 해에 만난 여러 나라 이민자들과 저의 언어적 고독에 대해 쓴 글이었는데, 타인의 목소리로 들은 건 처음이라 무척 좋았습니다.
“부디 나를 위해, 깊게 한번 상상해 줄 수 있겠어? 인간이 언어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굴같은 차갑고 어두운 고독을. 말을 할 때마다 내 앞에 선 누군가가 이맛살을 찌푸리는 광경을. 발음을 할 때마다 지적을 받아 결국 혀가 안으로 말려드는 압력을.”
이후에는 각자 글을 쓰는 시간이었습니다. 실제 글쓰기 시간은 어마어마하게 짧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친구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것처럼, 검열없이,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쓰게 하기 위해서인데요. 쓰는 동안, 걱정과 망설임이 들어도 절대 손을 떼지 않는 것, 그 망설임조차 글로 쓰는 것, 타이머가 울리면 바로 손을 떼어 미련을 버리는 것들이
우리의 규칙입니다. 이날은 각자의 행복했던 기억을 골라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이후에는 나의 오른쪽 사람이 내 글의 첫 독자가 되어 낭독을 했습니다. 나의 첫 독자가 내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을 듣습니다. 나도 비로소 내 글의 첫 독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내 문장의 리듬과 표현법이 어떻게 들리는지, 오감을 집중하여 듣습니다.
내 나라에서 내 언어만을 사용하고 살아갈 때에는 이러한 모호가 덜했던 기억입니다.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언어. 하나의 행동에 대한 하나의 표현. 인생은 지금보다 심플했습니다. 둘 이상의 장소와 둘 이상의 언어. 그리고 더 많아진 표현. 나의 모국어는 구글번역체처럼 변화합니다. 프랑스어로 이뤄진 순간을 모국어로 쓰자면, 어쩐지 눈앞이 뿌옇습니다. 나의 나라에서의 수많은 일들이 이곳에서는 마치 전생처럼 느껴질 때도 있구요. 순간 순간 아찔합니다. 이 아찔함의 이름은 ‘불안’일 것입니다.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를 모두 사용하며 살아가는 저에게 글쓰기는 나날이 불안이 되어갑니다. 이러한 불안과 모호가 이민자의 창작과정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어를 점점 잊어서 글을 점점 못쓰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떡하죠.”
글쓰기 아틀리에에서 만나는 한국인 이민자분들께 늘 받는 질문입니다. 다음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민자들은 모국어로 일기를 쓸 테지만요, 그 일기에는 각자가 종일 사용하는 외국어의 구조와 표현법, 리듬 등이 섞입니다. (섞이지 않는다면 전두엽의 ‘억제’기능이
인류 최상위일 것이고요!) 온라인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이민자들의 에세이를 매주 검토하는데요. 약간 과장을 보태어, 5분 정도 읽어보면 어떤
외국어를 사용하며 사는 분인지 맞출 수 있습니다. 그만큼 외국어 사용은 나의
모국어에 크고 작은 흔적을 남깁니다.
저는 글쓰기 아틀리에를 하면서 작가 차학경의 책 <딕테>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는 라틴어, 한문,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를 혼용해 엑소포니 적인 책을 썼습니다.
엑소포니는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쓰거나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통해, 화자 혹은 작가는 언어, 문화적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소리와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엑소포니는 난해함이기도 합니다. ‘문맹의 상태’입니다. 차학경의 책을 본 당시
70년대의 미국인들이 느낀 기분이겠지요. 내국인들이 <딕테> 등의 예술작품으로
느끼는 난해함을 이민자 혹은 다국어 사용자들은 매일의 일상에서 느끼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이민자의 삶이 어쩐지 재미있고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내가 ‘이해’라고 생각했던 경계가 매일 무너지고 때로 넓어지던 경험. 모국어가 아닌 타국의 언어로 내 마음을 표현할 때, 나의 감정과 의견이 다른 결로 전달된 경험. 이전엔 몰랐던 자아와 은폐됐던 감정을 발굴해냈던 경험. 외국어로 자아를 표현하고자 안달복달하던 경험. 그 모든 경험은 나의 한국어 글쓰기를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듭니다.
‘번역투’조차, 내 글의 매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요.
‘창작자의 공간’에서 우리가 한 것은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입니다. 나의 마음을 ‘숨을 쉬듯’ 써내려 가는 것으로서 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글쓰기입니다.
이때는 문장구조의 완벽함이나 맞춤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과 그때의 내 감정 뿐입니다. 서사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 서사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심리상담과 유사합니다. 표현적 글쓰기의 심리치료
효과에 대해서는 제임스 W. 페니베이커의 연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책 ‘표현적 글쓰기-당신을 치료하는 글쓰기) “경험을 공개 혹은 노출하는 단순한 행동이
고통을 줄여준다. 공개야 말로 치료 결과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강력한 치료제인 셈이다.” (Mumford, Schlesinger, & Glass, 1983, Pennebaker, 1997). 글쓰기는 공개와
배출인 동시에, 정리와 조절이기도 합니다. 쓰는 동안, 내게 일어난 이전의 경험과
지금의 경험을 통합합니다. 나의 시각으로 ‘재해석’합니다. 더불어 나의 언어로 사건을
쓰면서 이 사건이 ‘다룰 만하다’고 느끼게 해 줍니다. 주도권을 나에게 되찾아오는
행위로서의 글쓰기겠지요.
이 모든 효과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날에는 글쓰기를 외면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나 자신에게 명랑의 구호를 외칠 때, 그 구호 안에 모든 슬픔과 고독과
나는 집 거실의 한편에 폭 160cm의 책상을 두었다. 책상 뒤에는 책장을 배치해 식사 공간과 구분을 지었다. 이 분리된 공간에서 나는 이런저런 작업을 한다. 나는 나를
창작자라고 정의하기 때문에 이곳은 내게 단연코 창작의 공간, 즉 작업실이다.
어느 날, 알다 콜렉티브의 “창작자의 공간”이라는 프로젝트 제안을 받고, 거실로
사람들을 초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나, 몸, 카메라”라는 제목의 짧은
창작 경험을 참가자들에게 제안했다. 내게 있어 카메라는 몸이고, 종종 몸은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흔한 셀피 영상이지만 다른 점이라면 카메라와 단둘이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내게는 이점이 중요했다. 카메라와 단둘이 있는 경험은
카메라를 통해 나 자신과 직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거실에 삼각대를 설치한 뒤, 카메라를 세팅하고 참가자들에게 간단한 작동법을 설명했다. 작동법은 단 세 가지였다.
1. 카메라 전원 켜기
2. 녹화 버튼 누르기
3. 녹화 버튼 끄기
설명이 끝난 후 참가자 중 한 명만 거실에 남고 나머지 참가자들과 나, 그리고 프로젝트 기획자는 모두 테라스로 나갔다. 거실에는 오직 카메라와 참가자 한 명만이 남는다. 이때, 카메라 옆에는 3분짜리 모래시계를 두었고, 카메라 앞에서 무엇을 표현할지 모를 수 있으니 이야기할 거리를 떠올릴 수 있도록 아래의 주제 목록을 제시했다. 나도 즉흥적으로 떠올린 주제다.
1. 내 이름의 뜻
2. 내 머리카락의 특징에 대하여
(예: 직모, 곱슬머리, 굵은 모발, 얇은 모발 등등)
3. 내가 가장 많이 아팠을 때
4. 지금 바로 먹고 싶은 음식
5. 요즘의 수면 상태에 관하여
6. 내 목소리에 관하여
7. 내가 좋아하는 신발
8. 오늘 낭테르에 오면서 지나쳤던 풍경, 사람들에 관하여
9. 내가 지금 프랑스에 있는 이유
10. 지금 그냥 떠오르는 말, 하고 싶은 말
11. 지금 떠오르는 노래
네 명의 참가자가 각자 촬영을 마친 후, 네 명의 참가자가 촬영한 상을 다 함께 보았다. 캄캄해진 거실에서 우리는 비슷한 대목에서 웃고, 비슷한 대목에서 함께 반응했다. 앞서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간단히 식사를 하며 대화했던 1시간 넘는 시간보다, 약 15분 동안 서로의 영상을 보면서 서로가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 내 작업실에 모르는 사람들을 초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작업실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이곳은 내가 외국인으로
삶을 버티고 있는 타국인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모국인 한국에서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 초대하는 일이 이곳에서는 훨씬 드물다. 그래서 이번에 내 작업실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내 영화 작업에 대해 소개한 경험이 내게 생경한 일이었다.
생경함은 늘 긴장감과 함께 새로운 감정과 생각들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 같다. 그날 내
거실은 잠시 동안 서로의 이야기가 스며드는 공동의 작업실이 되었다. 이 경험은 자전적
다큐멘터리라는 내가 선택한 작업에서, 창작자가 카메라와 단둘이 있는 방식이 단단한 형식으로 자리 잡는 데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었다.
2009-2011 프랑스 문화 전문가 및 중재 프로페셔널과정, 로렌 대학교 프랑스 메스 - 석사
2008-2009 미학, 예술 및 문화사회학 석사, 로렌 대학교 프랑스 메스 - 메트리즈
2007-2008 문화 프로젝트 기획 및 실행 전공, 로렌 대학교 프랑스 메스 - 학사
2001-2005 조형예술학부 도예전공, 이화여자대학교 대한민국 서울 - 학사
전시
2023년 <자연의 5가지 해석> 그룹전, 꺄레 데 꼬아냐르Carré des Coignard, 프랑스 노정 뉘르 마른 Nogent sur Marnes, France
2005년 <대한민국 미술대학 우수졸업작품전>, 단원미술관, 대한민국 안산
2003년 <굳세라> 그룹전 기획 및 참여, 블루갤러리, 대한민국 서울
경력
2023~현재 - 조형예술가
Maison des Artistes 파리 2016-2023 도예가, AOLO Paris 도예공방 운영 2011-2013 국제교류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대한민국 서울 2010 문화 행사 코디네이터, 유네스코 제2차 세계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대한민국 서울
# 이메일 park.boyeon@gmail.com
# 인스타그램 @boyeonpark
소은성 Eunseong SO
소은성은 치유적 글쓰기 워크숍 ‘소글’을 운영하는 에세이스트입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내면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을 함께하며, 서로 다른 문화와 경험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로 피어나는 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이들의 여정을
글쓰기로 동행하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간도서
- 감정표현 에세이 <어색하지 않게 사랑을 말하는 방법> - 자기 치유 글쓰기 안내서 <마음을 썼다 내가 좋아졌다> - 신경다양성 에세이 <A클럽 친구들에게>
글쓰기 워크숍 ‘소글’ 운영 - 이민자 대상 글쓰기 치유 프로그램 기획 및 진행
- 자기서사 쓰기 워크숍, 질병서사, 시니어 글쓰기, 북클럽, 문장 강화 프로그램 등 진행
- 저널리즘 글쓰기 워크숍 진행
- 팟캐스트 <마음을 썼다 내가 좋아졌다>
# 인스타그램 @sogeul.kr
# 트위터 sogeul_ws
# 이메일 sogeul.ws@gmail.com
학력
2022 석사,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
2020 학사,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
2016 서울예술대학교, 사진과 졸업
개인전
2021 <바로 여기>, 89 갤러리, 파리, 프랑스, 큐레이터: 김재영
단체전
2024 <Parallexe>, See 갤러리, 파리, 프랑스, 큐레이터 : 김리나
2024 <La forme à venir>, 59 리볼리, 파리, 프랑스
2024 <현대 미술 비엔날레>, 메종 데자르 플라스틱, 샹피니쉬르마른, 프랑스
2023 <The Third Place>, 주프랑스 한국문화원, 파리, 프랑스
2023 <Regards Croisés : Le Salon>, 라 빌라 아 데자르, 파리, 프랑스
2023 <Sol, Mur, Temps / Intrication>, 이카르 공간, 이씨레물리노, 프랑스
2023 <AJAC 40주년 기념전>, Space Sazic, 서울, 대한민국
2023 <불혹.유혹>, 김보성 아트센터, 서울, 대한민국
2022 <Être et Paraître>, 주프랑스 한국문화원, 파리, 프랑스, 큐레이터 : 전상아
2022 <Prix Paris 1 Pour l’Art Contemporain>, 바스티유 디자인 센터, 파리, 프랑스
2021 <무지의 정원>, 89 갤러리, 파리, 프랑스
2021 <Partout et Nulle part>, 89 갤러리, 파리, 프랑스
퍼포먼스
2023 "Ce dont je voulais parler", 주프랑스 한국문화원, 파리, 프랑스
상영
2024 제13회 OODAAQ 필름 페스티벌, ≪ABG (Asian Baby Girl)≫, 렌, 프랑스
수상
2024 제13회 OODAAQ 필름 페스티벌 선정
2024 제19회 현대 미술 비엔날레 샹피니쉬르마른 결선 진출
2022 제6회 Prix Paris 1 Pour l’Art Contemporain 결선 진출
# 이메일 woocheyon@gmail.com
# 인스타그램 @cheyon.woo
1982년 한국 전남 영암 출생. 15세 때 교회를 비판하는 영화를 제작해 교회에서 상영하며 영화 작업을시작했다. 청주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중·고등학교에서 강사와 교사로 활동하며 첫 장편 데뷔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2016)를 연출•제작했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IDFA) 신인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으며, 여성영화저널리스트협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다큐멘터리 상(AWJF EDA상)의 최종 후보 10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2015년 프랑스로 이주한 뒤, 노르파드칼레
미술학교에서 학사 과정을 마쳤고, 프랑스에서의 결혼 생활을 소재로 한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박강아름 결혼하다〉(2019)를 연출했다. 이 작품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옥랑문화상을 수상했으며, CPH:DOX와 DOK Leipzig에서 상영되었다. 현재 프랑스 낭테르에 거주하며 여행 가이드와 사진 작가로 일하며 파리 8대학 영화학과에서 영화 이론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박강아름 결혼하다〉 이후에는 단편 애니메이션 〈파리의 여행>을 제작했으나, 제작비 부족으로 중단된 상태다. 이 작품은 차기작으로 다시 포함될 예정이며, 장편 다큐멘터리 〈보리와 슈슈〉, <혜석〉(가제), 퍼포먼스 비디오 <캥거루를 찾아라>, <넌 사라지지 않아>와 함께 작업이 계획되어 있다. 다만 앞으로 2년간은 석사 논문 〈도미니크 카브레라 두 편의 영화에서의 감독의 몸의 출현〉 완성에 집중할 예정이다. 최근 2년 동안 여행 가이드로 생계를 유지하며, 지지부진했던 학업 과정을 일기로 기록해 메일링 서비스 “박강아름의 2년 후”를 운영했다.
필모그래피
연출
« 박강아름 결혼하다» (2019, documentary, HD, 86 minutes)
2022 제8회 펠로포니소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젠더 평등 (파트라, 그리스)
2021 제3회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장편 경쟁 (서울, 한국)
2021 제7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새로운 맛의 발견 (서울, 한국)
2021 제6회 런던동아시아영화제, 다큐멘터리 (런던, 영국)
2021 제20회 대만국제민족지영화제, 뉴 노멀스 오브 젠더 (타이베이, 대만)
2021 제42회 더반 국제 영화제, 다큐멘터리 공식 경쟁 (더반, 남아프리카공화국)
2020 제18회 욕야카르타 다큐멘터리 영화제, 국제 장편 경쟁 (욕야카르타, 인도네시아)
2020 제63회 독 라이프치히, 관객 경쟁 골든 섹션 (라이프치히, 독일)
2020 제9회 다람살라 국제 영화제(다람살라, 인도)
2020 제8회 디아스포라영화제, 디아스포라 인 포커스 (인천, 한국)
2020 제11회 익산여성영화제(익산, 한국)
2020 제8회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 어른들을 부탁해 (서울, 한국)
2020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K스펙트럼 (평창, 한국)
2020 제19회 독사 다큐멘터리 영화제(밴쿠버, 캐나다)
2020 제11회 CPH:DOX, 넥스트:웨이브 어워드 (코펜하겐, 덴마크)
2019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초청 (서울, 한국)
2019 제8회 광주여성영화제(광주, 한국)
2019 제10회 대구여성영화제(대구, 한국)
2019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다큐멘터리 옥랑문화상, 월드 프리미어 (서울,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