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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Troubleshooter) - H-51 작 다이애나 해밀턴 출판사 : 신영미디어 1 이모젠은 누비이불 아래에서 기지개를 쭉 펴면서 얼굴에 늘어진 숱 많은 은빛 금발을 양손으로 쓸어올렸다.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앞으로 3 주 동안을 위해서 요 며칠간 일만 한 끝에 아침이면 출근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녀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떠 보았다. 잘 정돈된 아담한 아파트의 가구들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초가을의 아침 햇살이 연두빛의 사과색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눈썹을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3 주의 연차휴가 동안 톨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틴 앤드 샌다운 광고회사를 떠나야 하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일 따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며칠 간은 푹 쉬어야지.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로브를 걸치고 허리띠를 맸다. 실크 천이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감싸고 부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길고 날씬한 다리에 찰랑거렸다. 우편함에 든 아침 신문을 쟁반 위에 얹어서 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톨리와의 점심 약속 외에는 아무 일도 없으니 느긋하게 쉴 생각이었다. 베개에 등을 기대고 침대 옆에 커피 쟁반, 무릎에 신문을 얹은 이모젠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렸다. 런던의 호텔 정문 앞을 나서는 톨리와 그녀의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는 그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사진기자는 두 사람이 가장 친밀한 분위기였을 때를 포착한 것 같았다. 톨리의 눈을 올려다보며 웃는 그녀의 표정은 조명 때문인지 완전히 톨리에게 얼이 나간 듯 보였고 톨리의 팔은 마치 그녀가 자기 것이라도 된다는 듯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기자의 의도대로 사진은 완벽했다. 이모젠은

기사를

재빨리 읽어나갔다.

쿡쿡거리는

웃음을

참느라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거의 영국 방문을 하지 않던 억만장자이자 백화점 소유주 아나톨 크리스토로로 데벤코 씨(69 세). 이번 그의 체재가 길어지는 것은 이모젠 페이지 양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올해 25 세인 그녀는 요 몇 주 동안 데벤코 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자의 질문에 페이지 양은 수줍은 듯 이렇게만 대답한다.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아름다운 이모젠은 데벤코 씨의 재산이 두 사람의 나이 차를 좁힐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기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멍청한 짓이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돈만 아는 여자라는 기자의 얘기를 믿지 않을 것이다. 또 톨리가 이 쓰레기 같은 기사를 읽었다면 잘 생긴 얼굴을 뒤로 젖히면서 폭소를 터뜨렸을 테지. 하지만 어쨌든 그가 자기 사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전세계에 유통망을 갖고 있는 백화점 체인이 그의 사업이었다. 데벤코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은 대부분 아름답고 희귀하고 값진 것들이기로 유명했다. 데벤코 체인은 그야말로 쇼핑의 새로운 경지를 전세계의 고객들에게 제시했다고나 할까. 그 외에도 고급 레스토랑, 호화 부티크, 헬스 센터 등을 탄탄한 경영 아래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이모젠의 가슴은 울렁거릴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벤코. 그리고 그 주인인 톨리가 그녀를 뽑아 준 것이다. 전세계 데벤코 체인의 모든 광고와 선전을 책임지는 자리에. 그것도 보수와 조건은 여태껏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정도의 대우로. 아마도 아주 무거운 책임이 될 터였다. 이모젠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할 때가 된 것이다. "언제나 당신은 아름답군요" 웨이터가 물러가자 톨리의 갈색 눈동자는 즐거운 듯 반짝였다. 테이블 너머 조용히 앉아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입매에는 아직도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이 레스토랑은 상당히 화려했다. "새 옷이로군, 그렇죠? 완벽한 차림이오. 그 심술쟁이 언론을 골려주기엔 말이오" "읽으셨군요?" 그의 웃음이 모든 답변을 대신했다. "불쌍할 정도던데요" 이모젠도 웃어 보였다. 톨리는 셰리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맛을 음미했다. 그의 눈치는 대단히 빨랐다. 오늘 아침 그녀는 치장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일부러 숱많은 금발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우아한 목선을 강조하고 그녀의 크림빛 피부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돋보이게끔 연출했다. 옷차림 역시 값비싼 의상에 연한 빛깔의 자수정 장식을 달아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마치 으깬 팬지꽃잎 같이 촉촉해 보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나한텐 아첨으로도 보이더군. 이렇게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과 내 이름을 로맨틱하게 연관지어 준다는 건 내 나이에는 상당히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이니까 말이오" 이모젠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69 세인 톨리는 아직도 매력있는 남자였다. 그의 철회색 머리는 아직도 가지런하고 숱이 많았으며 자세는 꼿꼿했고 언제나 값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시네요" 그녀는 코스의 시작으로 나온 월도프 샐러드를 먹으면서 말했다. 요 몇 주 동안 톨리와 가깝게 지냈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서른 여섯 살 된 외아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지금 유럽의 데벤코 지사들을 둘러보는


중이라고 했다. 알렉산더라는 이름으로 백화점 체인망의 재정 책임을 맡고 있으며 언젠가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예정이고 지금 육촌 여동생과 약혼 중이다……. 이모젠이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또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사생활을 중시하는 타이프였으므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주위에 거의 하지 않았다. 부모가 큰 소리로 싸우고 문을 쾅 닫고, 이후 며칠 동안 집안에 흘렀던 거북한 침묵. 그녀가 어린 시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대충 이 정도였다. 지금 부모님은 이혼해 각각 재혼하여 어머니는 그리스, 아버지는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었다. 이모젠은 혼자서 열심히 자기 삶을 꾸려야 했고 여간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물론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톨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당신에게 이런 언론의 소문들은 아주 진저리나는 일이겠지요"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그 점에서 당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또 당신이 침묵을 지켜 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 사실 아나톨 데벤코는 영업상태가 악화된 백화점 구매를 협상하러 런던에 온 것이었다. 그가 사려는 백화점은 위치가 좋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사고 있었다. 만약 톨리가 그 백화점을 사려 한다는 것이 소문난다면 아마 경쟁이 붙을 것이었다. 그와 아들과 재정 고문들 몇몇만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모젠 역시. 그녀는 말했다. "약속은 지킬 거예요"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그녀는 그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아침에 보니 내 제안이 거의 받아들여질 것 같더군. 그쪽 사람들과 마지막 회의가 남았는데 그것만 끝나면 다 잘 될거요. 그렇게 되면 우리 관계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겠지" 웨이터가 접시를 치우고 다음 음식을 날라오는 동안 그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편히 앉았다. 이모젠은 생각했다. 일 얘기로군! 흥분과 두려움이 다시금 그녀의 내부에서 타올랐다. "물론 알고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만 말했다. 결정을 내릴 때까지 좀 찬찬히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약간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대답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앞으로 10 분 정도면 적당한 시간 아니겠소? 어쨌든 지금은 식사나 합시다" 식사는 했지만 음식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녀의 생각은 몇 주 전으로 거슬러올라가고 있었다.


톨리를 만난 것은 마틴 앤드 샌다운 사가 새로 개업한 <주얼스>의 판촉 사업을 열 때였다. 18 개월 동안 이모젠은 젊은 층의 패션의류를 주 사업으로 하는 주얼스의 일에 매달려 왔었다. 그 광고의 전반을 담당했던 상사인 고객주임은 얼마 전 은퇴한 상태였다. 이모젠은 전부터 주임이 하던 업무를 넘겨받고 싶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특히 그의 건강이 나빠졌던 12 개월 동안은 이모젠 혼자서 <주얼스>의 모든 판촉 사업에 대해 책임지다시피 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되리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신출나기 남자 직원이 그녀를 제치고 업무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마치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감독이란 남자가 해야 한다는 통념을 꺾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고 스스로가 여자라는 점이 사회생활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러나 이모젠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계속했다. 어릴 때의 쓰라린 경험으로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지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톨리는 그들이 만난 다음날, 이모젠과 사업적인 문제를 상의하고 싶으니 묵고 있는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자는 초대를 비서에게 전해 왔다. 그의 인상이 워낙 깊었기 때문에 이모젠은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다루는 데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의 초대는 거절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왠지 들었다. 또 그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만나도 별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별 문제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의했다. 자기는 지금 인력스카웃 중으로 <주얼스> 홍보에서 보여준 이모젠의 능력에 감탄했으며 데벤코 체인의 선전홍보를 맡아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데벤코 체인의 선전을 각국의 지사에서 따로따로 광고회사를 선정하여 맡기고 있었으나 결과는 톨리의 말에 의하면 참담했다고 한다. 이것을 한꺼번에 책임져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는 이모젠이 이 역할을 맡아 주길 바랐다. 그녀는 든든한 지원 팀과 여러 통역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었고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보수를 약속받았다. 그런데 왜 지금 이렇게 망설이는 걸까? 그녀는 마틴 앤드 샌다운 회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지위까지는 다 오른 셈이었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앞으로 승진할 기미는 없을 것 같다. 또 책임을 맡는다는 일이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고 일에도 자신은 있었다. 또 그녀는 톨리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요 몇 주 동안 톨리의 식사나 쇼 관람 초대를 여러 번 같이 하면서 그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었고 주말에는 관광지를 안내하기도 했다. 전혀 업무와 관계가 있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아나톨 데벤코는 그저 런던에 관광객으로 왔을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믿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며 생각했다. 아마 내가 좀 고지식한 게 아닐까? 그녀의 지론에 따르면 성공이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고 여태껏 그녀가 성취한 모든 것들은 스스로가 땀흘려서 쟁취한 것들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은 서로 싸우고 물건을 집어던지기에 바빠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자기 딸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녀가 직업을 선택할 때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톨리의 제안은 여태까지 그녀가 받은 대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이었다. 너무

쉽게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닌가

싶고

이렇게

빨리

성공한다는

어딘지

꺼림칙하기도 했다. "당신이 내 제안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 같으니 화제를 잠깐 돌리지요" 톨리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그 웃음을 보자 그 자신 때문에 그녀가 제안을 망설이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세련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성에게 내가 사려는 집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싶소만" "집이요?" 이모젠은 놀라서 물었다. 평생을 미국에서 산 사람이 일흔이 다 된 지금 이민을 온다고? "여기, 런던에요? 여기서 사시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윈저 근처가 어떨까 하는데. 이곳에 새 백화점을 세울 동안 근거지가 필요하니까요. 이젠 나이도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대서양을 날아올 수는 없고 그렇다고 호텔에서 시중이나 받으며 살자니 또 그렇게까지 늙은 건 아니고 말이오. 또 런던에 우리 광고대행사가 개업할 테니 당신에게 이것저것 조언도 해 주고 싶고.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그의 갈색 눈동자는 따뜻했다. 아예 그녀가 제안을 이미 수락했다고 믿고 있는 투였다. 그는 이모젠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또 아들녀석이 결혼하면 집을 장만해야 하니까. 어차피 그녀석의 사업은 주로 유럽 쪽이기 때문에 런던 근처에 집을 얻는 편이 그애나 카트리나한테도 좋은 일이오" "그렇다면 이런 상담은 제가 아니라 그 두 분에게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모젠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서른 여섯살이나 먹은 남자가 손수 집 구할 권리도 없다니 꽤나 겁쟁이로군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억만장자 아버지의 외아들이라면 뭐든지 아버지한테 헌신하는 데 길들여졌을 테고 스스로를 위해 뭘 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겠지. "하지만 알렉스가 언제 유럽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거고" 톨리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카트리나는 바하마 제도에 친구들이 여럿 있으니 집은 아마 거의 내 차지일 거요. 또 집 장만이란 건 내 아이디어니까.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오" 그는 포도주의 마지막 모금을 마시고 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집을 마련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서 둘을 맞이한다면 아마 이번에야말로 결혼날짜를 잡지 않겠소? 그건 내가 줄곧 바랐던 바요. 커피, 드시겠소?" 이모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요" 생판 모르는 카트리나라는 여자는 탓할 수 없으니

제쳐두고라도

알렉산더

데벤코는

너무

무능한

아닐까?

"그럼

아직도

결혼날짜를 잡지 않으신 건가요?" 사실 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 톨리의 제안에 답해야 할 순간을 되도록이면 미루고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다오" 톨리는 손바닥을 펴 보였다. "카트리나는 내일이라도 식을 올리고 싶어하는데 알렉스 녀석이 너무 바빠서 말이오. 하긴 결국은 결혼할 테지만. 둘은 서로 무척 사랑하고 있으니. 사실 내 사촌인 카트리나의 엄마 스타샤와 나는 전부터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 굳건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를 궁리했던 차였지요. 결론은 결혼만한 게 없다는 거였소. 그래야 사업도 더 탄탄해질 수 있을 테니. 카트리나는 제 어머니가 갖고 있는 데벤코 가문의 유산 상속녀니까 말이오" 톨리의 집안 이야기는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었던 톨리의 아버지는 1920 년 미국으로 와서 6 년 뒤 톨리를 낳았다고 했다. 숙모를 따라 미국에 온 사촌 아나스타샤는 미국인과 결혼을 했고 그는 데벤코 집안의 가게에 많은 돈을 투자해 여기서부터 경제거물 데벤코 집안의 역사가 비롯되었던 것이다. 톨리가 이 결혼에 그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모젠이 보기엔 아들과 카트리나가 서로 사랑한다고 톨리 스스로가 믿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말로 보건대 카트리나는 지금 스물 네 살이 되었다고 한다. "집까진 차로 한 30 분쯤 걸릴 거요" 톨리는 말했다. "당신이 나와 같이 집 구경을 하러 가 준다면 기쁘겠소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요?" 이모젠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은근한 구식 예절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식탁 너머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다. "고맙소. 항상 그렇지만 당신의 말벗이 되는 특권을 주셔서 영광이오" 그 순간 그들의 뒤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면 저도 같이 어울리고 싶군요" "알렉스!" 한 순간의 놀라움 뒤 톨리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잽싸게 일어나 젊고 키 큰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반가움에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모젠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겁쟁이'나 '무능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지? 알렉산더 데벤코는 아주 남자답고 원하는 것은 기어코 성취하고야 말 듯한 인물이었다. 성공과 쟁취라는 단어가 몸 전체에서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와 넓은 어깨에 수제품의 고급 구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복종을 받는데 익숙한 사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언제 영국에 도착했냐?" 톨리는 물었다. "왜 나한테 알리지 않은 게야?" 톨리가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마치 꼬리치기를 멈추지 못하는 강아지 같았다. 알렉스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내린 결정이었어요. 오늘 아침 파리에서 급하게 날아왔거든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마치 벨벳 천의 감촉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하자 이모젠은 웬지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이었다. "오자마자 아버지가 계신 호텔로 연락했더니 비서가 여기 계신다고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곧바로 왔죠" 매력적인 그 목소리를 이모젠은 계속 듣고 싶었으나 톨리가 말을 잘랐다. "만나서 기쁘다. 얘야. 같이 커피라도 마시자꾸나. 그리고 … … ." 그는 뭔가 주저하듯이 말을 꺼냈다. "이모젠, 늦었지만 내 아들 알렉산더를 소개하겠소. 알렉스, 이쪽은 내 친구 이모젠 페이지 양이다" 그녀는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미소를 알렉산더에게 지어 보였다. 그러나 경멸이 가득 담긴 그의 눈초리 앞에서 그녀의 미소는 싹 사라져 버렸다. 그의 입매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페이지 양" 그는 차갑고 적대적인 시선으로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음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표시받았던 적은 처음이어서 이모젠은 당황했다. 그러나 톨리는 이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커피를 새로, 그것도 큰 주전자에 주문하면서 말했다. "오후엔 같이 지내자꾸나. 이모젠과 나는 윈저에 집을 보러 가려던 참이었단다. 네 의견도 듣고 싶구나" 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들과 조카딸의 결혼이 벌써부터 눈 앞에 아른거리는 표정이었다. 이모젠은 알렉스의 얼굴에 냉소가 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말을 꺼내는 그의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로군요" 그의 아버지가 대답에 만족한 뒤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의 눈매는 더욱 가늘어졌다. 알렉스의 어조는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아버진 당신 뜻대로 하시게 놔두면 도대체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게 행동하시곤 하죠" 이모젠의 호흡은 목에서 걸려 버렸고 등줄기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몇 분 전까지 알렉산더 데벤코에 대해 가졌던 의견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겁쟁이이긴 커녕 너무나 남자답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표정만은 그렇지 않았다. 거만하고 냉정하고 지긋지긋한 작자다! "당신 아버님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유능한 사업가세요. 당신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는군요. 게다가 그분은 매력적이고 매너도 훌륭하신 분이에요" 원래 화를 잘 내지 않는 타이프였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분노로 상아빛 피부 위에 홍조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여태껏 감정을 이성으로 억눌러 왔지만 이번만은 참을 수 없다. 그는 여기 있을 권리가없었다. 그의 착 가라앉은


호박색 눈동자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아버지가 망령이 들어서 돌봐줘야 한다는 투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는 몹시 약하신 것 같아서 한 말이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잘 생겼지만 호전적인 용모에는 준엄한 빛이 감돌았고 주름 하나 없는 세련된 양복은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취향과 재력을 남김 없이 드러내보였다. "노인 치고 판단력이 제대로 박힌 사람 본 적 있소? 게다가 난 아버지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돈만 아는 싸구려 미녀가 아버질 웃음거리로 만드는 꼴을 방관만 하고 싶지 않소" 이모젠은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혈관이 분노로 마구 뛰놀기 시작했다. 이모젠은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앉아서 듣고 싶지 않군요" 그녀는 재빠르게 말했다. "아버님께 제가 밖에서 기다리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면 좋겠네요" 빨리 사라져 버려라! 이모젠은 화를 부글부글 끓이면서 생각했으나 그의 강철 같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다 앉혔다. "이 말은 듣고 나가는 게 좋겠소, 아가씨. 그게 나을 것 같으니까. 난 외국에 나가면 항상 영국 신문을 삽니다. 당신과 아버지가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라는 기사를 읽자마자 난 모든 걸 중지하고 날아왔소. 아버지에게서 손을 떼요. 그게 당신에게 좋을 거요" 이모젠은 고통에 못이겨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맥박은 미친 듯이 뛰었고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던 평소의 태도는 깡그리 잊은 지 오래였다. 마침 톨리가 테이블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과 호흡을 가다듬는 일은 어려웠다. 만약 그녀가 자기 아들과 입씨름을 주고 받는 광경을 본다면 톨리는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 뻔했다. 이모젠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화를 참는 동안 알렉스는 톨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주소를 가르쳐 주시면 나중에 거기서 만나기로 하죠. 내가 도착할 때 까지 기다려 주세요. 아버지는 워낙에 물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값을 치르시니까 말이에요" 그는 아버지에게 웃어 보였으나 이모젠을 향해 냉담한 눈길을 던지는 걸로 보아 그녀에 대해 은근히 빗대어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서 뵙지요. 페이지 양.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 운전기사가 모는 리무진은 슬론 가의 모퉁이에 주차하고 있었다. 톨리와 함께 식당을 나온 이모젠은 안락한 차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앉았다. 옆에 앉은 톨리에게 <아드님께선 원래 그렇게 기분 나쁘게 행동하나요?>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물론 그럴 순 없었다.


오후에 톨리와 행동을 같이 하겠다고 승락한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말하면서 약속을 취소하지? 당신 아드님처럼 거만하고 자기 잘난 척만 하는 남자와 만나는 건 지긋지긋해요…… 라고? 이모젠에게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고맙게도 톨리는 부동산 회사에서 내놓은 매물에 정신이 팔려서 이모젠이 평소와 달리 말이 없고 화가 나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매물의 사진들을 보며 큰 소리로 설명을 읽어내려갔다. "침실 6 개, 3 개는 욕실이 붙어 있고 나머지 욕실 2 개는 따로. 거실, 서재, 대형 부엌, 실내 정원도 있고 … … . 이것 봐요, 이모젠" 그는 마음에 드는 매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모젠에게 책자를 내밀었다. "2 에이커 넓이의 잘 다듬어진 정원에다가. 아주 가족적인 집이오. 괜찮을 것 같군" 이모젠은 희망 가격을 보고 외쳤다. "괜찮을 것 같지 않은데요?" 하긴 거스름돈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억만장자에게는 괜찮겠지만. 이모젠은 톨리를 만나기 몇 년 전 데벤코 체인의 회장 아나톨 크리스토포로 데벤코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호로 뭐든지 황금으로 바꿔 버리는 자수성가형 인물! 그때 그는 자기 아들과 조카딸을 결혼생활에 정착시킬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들에게서 태어날 손자에게 21 세기를 이끌어 갈 데벤코 기업을 계승시키기 위해서도 그 결혼은 필요한 것이었다. "또 별채도 있다는군요" 톨리는 마치 굴러들어온 행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완전 난리였다. "가정부와 정원사 부부에겐 이 이상의 집은 없을 거요. 카트리나는 주부형은 아니니 꼭 유모를 둬야 할 테니까 안성마춤이군" 혼자서 너무 서두르시는 게 아닐까? 이모젠은 가죽 좌석에 몸을 파묻으며 생각했다. 알렉산더 데벤코와 만약 억지로 약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면 나라도 바하마 제도로 도망가서 시간을 벌겠어! 그녀는 생각을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톨리에 대해서 아직은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이었고 또 나이 든 사람의 장미빛 꿈을 망칠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창밖만 바라보며 그녀의 냉소적인 의문점들을 가슴 속에만 담아둘 수 밖에 없었다. 항상 길이 막히는 런던 외곽인데도 능숙한 운전 덕분에 리무진은 1 시간 안에 윈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무진은 앤 여왕 양식의 집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이모젠은 여태껏 이렇게 귀여운 집을 본 적이 없었다. 톨리는 차가 거의 멎기도 전에 허겁지겁 내려서 마치 이모젠이 공주라도 되듯 그녀 쪽의 차문을 정중히 열어 주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약속한 중개인이 기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중개인이 집 안내를 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기다릴 수가 없군요!" 톨리는 생일선물을 받고 들뜬 소년처럼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귀여워서 끌어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사업적 수완과 성공과 재산에도 불구하고 톨리는 아주 건전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런 아버지 밑에서 그런 기분나쁜 아들이


태어났을까? 의례적 인사를 중개인과 나누고 이모젠은 양해를 구한 뒤 정원으로 나왔다. 집은 아주 아름다웠으며 손질도 말끔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가 자기 부인과 살 집인데 내가 왜 관심을 갖겠어? 톨리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하겠지. 그녀는 보지도 못한 카트리나란 여자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분명히 압력 때문에, 집안 때문에 결혼을 강요당했을거야. 이모젠은 우아한 형태의 정문에 등을 기댄 채 상쾌하고 청명한 가을 대기를 들이마셨다. 이모젠은 우아한 자태로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별채 쪽으로 다가갔다. 나뭇잎은 슬슬 낙엽 빛깔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블럭이 깔린 별채 앞마당에 은빛 재규어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 사람이다! 그 기분 나쁜 인간! 그녀는 돌아가려 했으나 깊고도 매력적인, 한편 강철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더 빨랐다. "급하게 굴지 말아요. 당신에게 얘기가 있소" 뛰는 것 처럼 보이진 말아야지. 특히 자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안 된다. 이모젠은 찬찬히 그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도 고전적인 세련미 때문에 그녀는 마치 매사에 무관심한 듯이 보였다. 그는 별채 건물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짙은 황금빛 눈동자는 따지는 듯한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의 우아하고 값진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이모젠은 갑자기 얼굴에 홍조가 퍼지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이렇게 경멸조의 시선을 받는 건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닌데 왜 이럴까? "다 둘러보았소?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확인하니 흐뭇하오?" 싸움을 일으킬 의도였다면 그는 정확한 시도를 한 셈이었다. 그녀는 그의 첫마디에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분노는 그녀야말로 그의 표적이라고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차갑고도 오만한 태도로 한쪽 눈썹을 치켜 떴지만 그녀의 머리 속 혈관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마구 달렸고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그녀는 빌었다. 하느님, 제가 냉정하고 용감한 척이라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는 아까 레스토랑에서 분명히 도전해 왔고 그녀는 도망가거나 못 본 척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제 노인이오. 이제는 아버지 일은 곧 내 일이기도 하오" 그는 그녀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이모젠의 키는 그의 턱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이에 서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뚜렷이 느껴졌다. 알렉스는 검은 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서 있었다. 다리는 길고 손은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찌른 채 양복 윗도리 단추는 풀어헤친 채였으며 조끼 길이는 그의 날렵한 허리선에 딱 맞았다. 그의 어조는 비단처럼 부드러웠지만 몹시 위험해 보였다.


"아버지는 회사의 총수요. 그렇지만 내가 뒤에서 항상 대기하면서 모든 걸 감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만약 아버지가 집을, 혹은 여자를 사려고 하신다면 그건 곧 나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오" "그래서 중지시키나요? 질투심에서 말이죠?" 그녀는 가능한한 분노를 꼭꼭 숨기고 차갑게 맞받았다. 얼마나 자신이 화가 났는지를 그에게 들킨다면 그건 최악이다. 사실 이성이나 위엄은 아까 식당에서 잃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감정을 억제하지 못 하는 건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다. 결코 남에게 감정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 "질투심?" 알렉스는 새삼스레 분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에게? 난 돈에 팔리는 여자 따윈 싫소. 그런 부류를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요?" 그의 날카로운 모욕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고 안색을 불타게 했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의 눈빛은 보랏빛이 짙어져 검은 색이 되어 있었다. 강철 같은 두 개의 손이 뻗어나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채 늘씬하고 탄탄한 육체로 끌어당겼다. 조롱하기 좋아하던 그의 어조가 지금은 속삭이듯 했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가요. 전에도 당신같은 여자를 만난 적이 있소. 난 아버지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요. 내가 짖기만 하고 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감독하는 건 나요" "그렇다면 지금은 당신이 왕좌 뒤의 실권자로군요, 그렇죠?" 이모젠은 그의 조롱을 받아넘기기로 했다. 눈에는 눈으로. 이것이 그녀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의 손아귀 아래에서 가만히 있었다. 저항해도 소용없었다. 그의 힘은 그녀보다 강했다. 육체적으로 그에게 굴복함으로써 만족감을 주고 싶진 않았다. "당신이 지긋지긋해 할 수록 난 방해자란 명칭이 좋소" 더욱 힘이 들어간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를 파고 들었으며 입매에는 짓궂은 표정이 감돌았다. "그러니 좀 분별을 가져주길 바라오, 아가씨. 날 화나게 하지 마시오. 내 아버지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리시오. 지금 당장" 그녀는 그의 날카로운 황금색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도 차가운 분노로 굳어져 있었다. 무슨 권리로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거지? 그 쓸데없는 싸구려 기사 하나 봤다고 사람을 이렇게 다뤄도 된단 말인가?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톨리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그녀를 놓아 주고 뒤로 물러섰다. 마치 전염병 환자라도 대하는 듯한 기세였다. 그의 준엄하고 잘 생긴 얼굴은 혐오로 이그러져 있었다.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내 말대로 해요. 그러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손을 쓰겠소" 분노에 차서 노려보는 그녀를 남긴 채 그는 아버지가 부르는 쪽으로 다가갔다. 자신감에 찬 유연한 몸짓이 그의 남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지긋지긋한 작자! 위협까지 하다니. 게다가 대답은 듣지도 않고 질문과 요구만을 퍼부어 대다니. 그녀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숨이 찼다. 이제라도 알렉스를 쫓아가 톨리의 앞에서 좀 전에 일어났던 기분 나쁜 일들을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 거만한 악마같은 남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사실을 알아달라고, 그녀의 결백함을 증명받고 싶은 생각도 없다. 처음부터 만나선 안 되는 관계였던 것이다. 그녀는 알렉스와 톨리가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는 냉정을 되찾아 평소처럼 감정을 완전히 자제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자수정빛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분노는 길고 짙은 속눈썹 사이에 감추어졌다. 두 남자는 대화에 열중해 있었지만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본 톨리의 눈이 빛났다. "거기 있었군요. 길을 잃은 줄 알았소"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이모젠은 그에게 팔을 둘렀다. "멀리 가진 않았어요" 알렉스 데벤코의 돌 같은 차가운 시선에 깃든 경멸로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의 시선에 그녀는 또 다시 호흡이 가빠졌다. 예전엔 보여준 적 없었던 이모젠의 친밀한 태도에 놀랐는지 톨리는 기뻐하며 그의 팔 위에 얹힌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톨리는 내 말을 믿어줄 것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렇지 않다. "알렉스와 얘기하던 참이오. 이 집을 사게 된다면 런던에 사무소를 내기 전까진 본부로 써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지요. 이 녀석과 카트리나가 결혼해서 살게 되면 내가 물러나야겠지만" 그는 굳어진 표정을 한 아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모젠은 알렉스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나와 같이 쓰기 위해서 톨리가 이 집을 사려고 한다고 여기고 있었겠지. 톨리는 자신을 제외한 둘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이모젠. 중개인은 이제 가야 한다니 열쇠를 돌려주러 갑시다" 아마 알렉스는 곧 자기 아버지와 이모젠의 진짜 관계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러나 그때까지는 혼자서 부글부글 끓게 놔 둬야지. 할 수 있는 한 그의 날카로운 위협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굴어야겠다. 계속 톨리의 곁에서 맴돌 거라는 인상을 주고, 톨리의 팔에 매달려서, 톨리의 재산이 주는 보답을 바라고 아양떠는 여자의 역할을 연기해 보자. 알렉스의 피가 솟구치는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이모젠은 톨리의 곁에 일부러 붙어 섰다. 물론 톨리는 거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지나친 친밀감으로 상대해 주는 그녀를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모젠은 억지로 짓는 미소 때문에 얼굴이 뻣뻣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해도 이모젠은 그의 턱 힘줄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잇었다. 톨리와 그녀보다 앞서 계단을 오르는 그의 어깨는 성미를 이기지 못해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자, 어떻게 생각하냐?" 톨리는 알렉스가 정문을 잠그고 열쇠를 돌려주자 말을 꺼냈다. "나쁘진 않군요" 알렉스의 벨벳 같은 목소리는 이모젠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보복의 의미에서 그녀는 달콤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버지께 받는 결혼 선물인데 그렇게 말하면 되겠어요?" 거세고 격렬한 분노가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나타났으나 그는 곧 무관심으로 표정을 바꿔 버렸고 마치 그녀의 신랄한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덤덤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또 장점도 있구요" "겨우 그 정도냐?" 톨리는 빙긋 웃으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운전기사는 이미 리무진에 시동을 걸고 톨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채도 있으니 조금만 고친다면 우리 사무소로 쓰기에는 아주 안성마춤이지" 알렉스가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는 것에 이모젠은 별채 앞에서 이루어졌던 좀 전의 아름답지 못한 만남을 되새겼다. "그렇지만 나중에 한 번 더 얘기하도록 하죠" 그러나 톨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집어치워라. 집에 대해서 잘 알려면 여기 살면서 지내는 게 최고야. 또 방랑의 길을 나설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알렉스는 대놓고 아버지를 거역하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즐거운 표정을 한 이모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를 얼려버릴 듯한 기세였다. "아마 페이지 양은 이런 자리는 지루할 텐데, 차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그는 굳어진 얼굴로 제안했다. 그러나 톨리는 이모젠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모젠은 곧 런던에 세워질 데벤코 사무소에 관여할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아니다. 난 이모젠이 우리와 이 일에 대해 같이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경멸이 가득찬 적대적인 시선을 받자 이모젠은 다시금 화가 치밀었으나 일부러 보란 듯이 경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이젠 충분히 알렉스를 놀려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은 이전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짓궂은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모든


대화를 주의깊게 들었으며 자신의 의견을 몇 마디 제시하기도 했다. 몇몇 군데만 잘 손보면 완벽한 사무소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런던 시내에 사무실을 얻어서 임대료를 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알렉스는 말했다. 사업의 본질적 문제에 들어가자 두 남자 모두 단도직입적인 명쾌한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어쩌다 느껴지는 적의를 빼고는 알렉스는 아예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런던 시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될 겁니다. 또 필요하다면 윈저에서 여러 장관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지요" 알렉스는 커다란 멋진 창문이 나 있는 벽을 올려다 보며 덧붙였다. "피에르 비네에게 말을 꺼냈더니 우리와 합류하겠다고 답을 주더군요" "피에르는 파리에 있는 데벤코 지사의 직원으로 광고계에선 첫손 꼽히는 인물이지요" 톨리가 이모젠에게 설명해 주자마자 알렉스는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아버지와 이모젠 사이에 더 이상의 의견 교환은 없어야 한다는 듯.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그는 새 광고대행사의 책임자에 아주 걸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도 훌륭하고 왕실에 출입하는 사람들과도 교분이 있는데다 머리 좋은 걸로 꽤 인정을 받고 있어요" "나도 피에르를 새 대행사에 합류시키는 데 찬성한다. 우린 벌써 그에 대해 얘기를 나눴단다" 톨리가 말을 꺼내자 이모젠은 숨을 삼켰다. 다음 순간 알렉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이모젠은 숨을 죽이고 그의 고함소리를 기다렸다. 톨리는 말했다. "그렇지만 책임자 자리는 이모젠에게 권했단다. 이모젠만 승낙한다면 난 대행사의 책임자 자리를 그녀에게 맡길 생각이란다" 알렉스는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잠시 얼어붙은 듯 보였고 황금색 눈동자는 마치 이모젠의 마음 속을 살피는 듯 가늘어졌다. 침묵과 동시에 분노와 긴장이 느껴졌다. 순간 이모젠은 여태껏 받은 모욕을 전부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실행에 옮겼다. "톨리.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그 자리는 제게 맞을 것 같아요" 톨리는 환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충동적으로 내린 그녀의 결정에 알렉스 데벤코가 지키는 침묵은 곧 패배의 표시였다. 그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승리의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참고 그가 조용히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알겠습니다. 축하하오, 페이지 양" 그러나 그의 가늘어진 눈매는 그 자리에서라도 그녀를 없애버리고 싶다는 기분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고 이모젠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알렉스가 가볍고 무관심한 어조로 톨리에게 말할 때 까지는.

"내가 직접 페이지

양을 런던으로 모셔다

드리는

낫겠어요.

앞으로


데벤코에서 일을 하려면 우리 회사에 대해 더 많이 알아 둘 수록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제부턴 페이지 양 없이도 아버지 혼자 괜찮지 않겠어요? 우리끼리도 얘기를 충분히 했고" 그녀만이 알렉스의 말 뒤에 숨겨진 의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톨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가려무나. 그렇지만 자동차 속도 기록을 또 갱신하진 말거라. 나도 우리 직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건 좋다고 생각한단다" 그녀는 피부 밑에서 뭔가 공포가 치닫는 것을 느끼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이모젠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새로운 보스가 될 남자에게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이 굴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앞으로 닥쳐올 이 불길한 드라이브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알렉스의 언어적 폭력 앞에 노출되더라도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별 걱정이 없었지만 그와 단 둘이, 그것도 그의 차 안에 있게 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3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톨리를 남겨두고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은 몹시 붐볐으나 재규어는 마치 사냥에 열중한 맹수처럼 미친 듯한 속도로 길을 뚫었다. 알렉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입이 딱딱한 선을 그리고 표정이 굳어져 있는 것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이모젠 역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터였고 그의 얼음장 같은 적개심과 마치 후광처럼 그의 주위에 감도는 음험한 힘이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긴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워낙 차의 속도가 빨라 제대로 그에게 들릴 지도 의문이었다. 그녀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꼿꼿한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알렉스의 아버지는 벌써 전부터 그 일을 제의했었고 우리는 공통점이 많은 데다 쉽게 마음이 맞았기 때문에 우정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톨리가 나의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도 한다고. 그러나 그녀는 한편 그를 화나게 해서 자신에 대한 그의 감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톨리의 보호 아래 있을 때는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악마같이 심술궂은 얼굴을 한 남자와 단둘이 있게 된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게임을 계속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녀의 머리 속에서는 벨이 울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존심 상하게도 이 부루퉁한 사람과 사과를 주고 받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두 사람은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것이고--그렇게 가까운 관계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런 괴상한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못 될 것이었다. 마침내 상식이 승리를 거뒀고 이모젠은 상세한 설명을 그에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재규어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고 그는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으며


으르렁거렸다. "어디로 갈까요? 당신 집? 아니면 내 사무실?" 그는 이모젠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주었다. "내 생각보다 사태는 훨씬 더 나쁘더군요. 당신의 전리품 목록에 설마 일자리까지

들어 있으리라곤 생각을

했었지만.

권력을

쥐어야겠다는

건 당신

아이디어였소?" 그의 육감적인 입매는 경멸로 뒤틀려 있었다. "그 점에 관해서 얘기를 해야겠소. 내가 설득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차근차근 설명을 해서 알렉스의 오해를 풀려던 이모젠의 결심은 난로 위의 눈송이 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분노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로 젖혔다. "당신이 전지전능한 뭐라도 되는 듯하군요. 하지만 당신이 그 일자리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도 소용 없어요. 또 당신 아버지와 나의 우정을 손상시키려는 계획도 다 헛수고예요!" 앞쪽만 노려보면서 이모젠은 그의 분노를 견뎌내려고 노력했다. 그가 나를 떼어내려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아마 이 사람은 내가 가장 최악의 상태가 되기를 기다려서 결투를 하려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반격과 조롱은 오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매사에 무관심하다는 투였다. "알겠소. 당신은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거로군요. 하긴 전에도 날 과소평가한 사람들이 몇몇 있긴 했었죠. 지금은 아주 후회하며 살아가고들 있지만" 차는 날듯이 달려 치즈위크 근방 고속도로까지 와 있었다. 해머스미스로 접어들면서 알렉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신 집? 아니면 내 사무실로 갈까요?" "됐어요. 아무데서나 내려 주세요" 이모젠은 짧게 말했다. "집에는 알아서 돌아갈테니" 1 초라도 더 이상 알렉스에게 모욕을 받으며 가느니 차라리 백 마일을 걷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주소를 일러주지 않으면 내가 묵는 호텔로 모셔 가겠소" 할 수 없이 이모젠은 셰퍼즈부시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 이름을 퉁명스레 알려 주었다. 만약 그가 또 설득이 어쩌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와 이모젠을 떼어놓으려고 한다면 차라리 집에서 당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모젠은 열쇠로 문을 열면서 침묵을 지키자고 다짐했다. 그의 위협적인 몸이 압도하듯 바로 그녀의 뒤에 있었다. 그를 과소평가한 사람들이 지금은 피눈물을 흘리며 산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리라. 그러나 그녀는 항복하고 싶지 않았다. 더더욱 나는 돈에 눈먼 금발미녀가 아니예요--라며 자신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였다. 아파트는 혼자 살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런던 시내에서 넓은 집의 세를 물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지금의 크기가 이모젠에게는 딱 맞았다.


마치 그녀의 돈 밝히는 흔적이 어디에라도 남아있나 살피는 양 알렉스는 작은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난 또 당신의 값비싸 보이는 이미지에 걸맞게 아버지의 돈으로 집을 꾸며놓았을 줄로 알았는데. 어때요, 아직도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갈 결심이 서지 않았소?" 이모젠은 작은 가죽 핸드백을 의자 위에 던졌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런 끝도 없는 모욕을 받는 것도 이젠 지쳤다. 그의 엉뚱하고 악의 넘치는 상상을 북돋워주고 고쳐주지 않는 것도 이젠 지겨워졌다. 그런 장난을 해 봤자 결국 상처입는 사람은 이모젠일 뿐이었다. "당신은 신문 기사를 전부 믿으시는 건가요?" 그녀는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이 짙은 보랏빛으로 빛나면서 피부색과 대조를 이루어 돋보였다. "특정 부분에서는 그렇소" 그는 그녀를 경멸하듯 바라보았으나 그 매력적인 시선은 그녀의 숨을 멎게 했다. 이모젠은 팔짱을 단단히 끼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손을 그냥 뒀다가는 아무래도 그의 뺨을 철썩 갈길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작자! 그는 준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빛 두 눈 사이로 주름이 잡혔다. "당신은 날 두려워하고 있소. 나는 아버지의 사업 감각에 내 모든 것을 걸고 있소. 아버지는 현명해서 여자친구들을 사업에 연관시킨 적은 아직껏 한 번도 없었소. 내가 알기로는 그랬지. 그런데 당신은 특권과 일자리 두 개를 다 요구하고 있소. 이번에는 아버지도 노망이 드신 게 확실하다고 생각되더군" "그럼 당신은 아버지께서 내 능력 때문에 일자리를 주신 게 아니라고 굳게 믿겠군요?" 이모젠은 나직하게 물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짙은 네이비 블루의 소파 색깔이 마치 그녀의 머리칼을 얇은 은색 비단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이를 악물듯 말했다. "물론 믿지 않소" 그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모젠은 어깨를 살짝 움츠려 보였다. 방어한답시고 헛수고를 떠는 건 손해라는 걸 이제 깨달았다. 알렉스는 톨리의 입에서 직접 들어야만 믿을 것 같았다. 독립

광고대행사를

세워서

데벤코를

전세계에

홍보한다는

것은

톨리의

독자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는 시야를 넓게 볼 줄 알았고 프로젝트를 계획에 옮길 때가 되자 팀을 이룰 훌륭한 인재들을 발굴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때 마침 그는 <주얼스> 홍보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모젠의 능력이 자신이 구상하는 데벤코 광고대행사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일자리를 제의했었던 것인데……. "그래서 원하는 건 얼마요?" 그는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고 그의 넓은 어깨선은 딱딱했다. 이모젠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계속하면서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순진한 왕눈이 흉내를 내도 소용없소.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척 연기하진 마시오" 그는 그녀의 곁에 앉더니 갑자기 강철 같이 단단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의 비난하는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장 그 일에 관여하는 걸 그만두시오. 아버지를 더 이상 갖고 놀지 말아요. 보상은 충분히 해 줄 테니" 그의 냉정한 시선 아래에서 이모젠은 몸을 떨었다. 그의 손가락이 길고 갸름한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자 그녀의 호흡은 목구멍에 걸려 버렸다. 그의 마지막 말투는 전혀 매력적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모젠의 몸은 떨렸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은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의지와는 반대로 감각이 제멋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여태껏 이렇게 거만하고 심술궂은 사람은 처음이었으나 또한 이렇게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 이런 생각이 그녀를 더욱 더 떨리게 만들었다. "벙어리가 됐소? 아니면 더 돈을 긁어낼 생각을 하고 있는거요?" 음량이 풍부하고 깊은 목소리가 그녀의 의식을 돌아오게 했다. 그의 음성은 매혹적이었다. 만약 그의 목적이 그녀를 홀리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효과는 백 퍼센트 이상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복잡한 감정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낚아챘다. 그녀의 부드러운 윗도리를 통해 그의 손가락이 강철처럼 그녀의 피부에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그의 몸에 밀착된 이모젠은 전혀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길은 그녀의 눈동자를 불태울 듯 뜨겁고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감정상태를 그가 눈치챘다는 것을 느꼈다. 이모젠은 감정의 혼란 속에서 그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두운 그의 눈동자와 딱딱한 입매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감돌았다. 갑자기 그는 그녀를 놓아 주었다. "맛있는 커피를 만들 솜씨는 있소?" 그의 감정 역시 혼란되어 있구나,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두 사람의 접촉이 뜻하지 않은 효과를 거둔 것에 대해서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놀랐듯이. 다시금 두 사람의 입장은 동등해졌다. 동점 대결. 적어도 그녀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혼란스런 반응을 그도 보였으니까. 하지만 나쁜 경험만은 아니었어, 커피를 끓이러 부엌으로 가면서 이모젠은 생각했다. 적어도 저 막대기같이 뻣뻣한 사람에게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적이 있다니. 아주 유용한 지식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러나 커피를 가져와 보니 그는 평소 때와 다름없는 침착을 찾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안락의자 곁의 테이블에 이모젠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커피를 권하자 그는 머리를 약간 까딱하더니 잔을 들었다. "자, 가격을 불러 봐요. 내가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이자 실수가 될 거요" 그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줄곧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못박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그녀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너무 과잉반응하지 말자. 자신이 내뱉은 모욕을 즐기게끔 그냥 내버려 두자. <나는 당신 아버지에게 아무런 흑심도 품고 있지 않아요, 여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라고 알렉스에게 설명하는 편이 옳겠지. 그러나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을 꺼냈다. "톨리가 젊은 여자를 일에 끌어들이는 걸 왜 그렇게 반대하는지 이상하네요" 이 반격이 잘못이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모젠에 대한 그의 반감만 높여 주었을 뿐으로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들렸다. 여태껏 그녀가 말을 끝낼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 이모젠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분이 낭만적으로 행동하신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나요? 뭐 그렇게 나이드신 것도 아니잖아요.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여요" 찻잔받침에 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말을 이으려 했으나 전화벨 소리가 아파트 안을 가득히 메우며 방해했다. 이모젠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으나 그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는 힘들었다. 톨리였다. "알렉스하곤 연락이 안 되어서, 당신에게 제일 먼저 알려 주는 거요. 그 집을 샀어요. 런던의 데벤코 광고회사는 만사형통이라오! 축하로 저녁 식사를 같이 합시다. 아까 그 집을 스튜디오로 쓰는 데 대해 당신의 생각도 듣고 싶고 말이오. 괜찮겠소?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관여했으니 좀 더 포괄적인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겠지요. 1 시간 이내로 차를 보내리다" 이모젠은 천천히 주의깊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몸을 돌려보니 알렉스의 가늘게 뜬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모젠의 심장은 다시금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전화 내용을 전부 들은 것 같았다.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오늘 밤 아버지를 만나려는 거요?" 그는 날렵한 태도로 일어나며 호박색 눈동자를 계속 그녀에게 못박았다. "좋도록 하시오" 그

말은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몰라도

이제까지보다는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알렉스는 조용히 현관문을 나가 버렸다. 아무 말도 없는 그의 뒷모습은 더더욱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예언자와도 같아 보였다. 갑자기 이모젠은 한기를 느꼈다. "저녁 날씨가 좋습니다" 운전수는 리무진의 뒷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던졌다. 이모젠은 그에게 웃어 보이며 그렇다고 말을 했으나 사실 마음 속은 그다지 편치 못했다. 알렉스 데벤코와 대결을 펼칠 시간이 자꾸자꾸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좋은 저녁일 수가 있을까?


맑은 저녁 날씨였다. 바람 한 점 없고 공기는 차가웠다. 서리가 내릴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이모젠은 하얀 캐시미어 윗도리와 까만 울 니트 드레스를 입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 바쁘게 몸치장을 하면서도 이모젠은 오후에 알렉스와 벌였던 그 쓰디 쓴 전투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톨리에게 알렉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게 좋겠다. 하지만 이모젠은 부자지간에 불화가 생기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저 그녀와 톨리의 관계가 알렉스의 생각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도록 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낫지 않을까? 데벤코에서 일하게 된 건 생애 최고의 모험일 뿐만 아니라 생애 최악의 사람과 접한다는 것과도 일치했다. 톨리가 묵고 있는 방 바깥에서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미소를 억지로 띤 채 벨을 눌렀다. 문은 곧 열렸고 톨리는 다정한 환영의 표정을 떠올리며 그녀를 맞아들였다. 그가 우정의 표시로 이모젠을 가볍게 포옹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톨리의 야단스런 영접에도 익숙해졌고 그의 선조들의 고향 우크라이나의 손님 접대 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코트를 주시지요, 페이지 양" 이모젠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고 뱃속이 꽉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알렉스가 오늘 저녁 주위에서 어슬렁거린다면 그녀가 톨리에게 조용히 얘기해 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될 텐데. 디너 정장에 검정 타이를 한 알렉스는 더욱 무자비해 보였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는 거라면 좋으련만. 이모젠은 어디라도 좋으니까 제발 다른 곳으로 가 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는 거냐, 응?" 톨리는 아들에게 가볍게 잔소리를 했다. 이모젠은 알렉스가 등 뒤로 와서 서기도 전에 윗도리를 벗어 알렉스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는 알렉스 가까이 있게 되거나 그의 손가락 하나 그녀에게 닿기를 원치 않았다. "오후부터 이모젠은 우리 팀의 일원이 되었잖냐" 알렉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거의 가족의 수준이겠죠" "맞아, 맞아!" 가끔 톨리는 눈치가 없을 때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자기 아들의 속셈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알렉스는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니 따뜻하게 환영해 줘야죠" 그러더니 팔을 뻗어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을 자신의 강한 육체로 끌어당겼다. 그의 검은 머리가 수그러들더니 육감적인 입술이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그는 동작을 멈추고 호박색 눈동자로 이모젠의 놀란 보라색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왔다. 피하기에 그의 입술은 너무나 부드럽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흥분이 이모젠의 혈관을 타고 마구 달렸다. 그는 갑자기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더 이상의 것을 갈구하는 듯 벌어져 있었고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갑자기 이모젠은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를 깨달았다. 톨리는 크게 웃으면서 "브라보!"를 외쳤다. 만사가 전처럼 평온하게 돌아갈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악마가 오늘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종일 이모젠은 알렉스의 엉뚱한 오해를 받아 모욕을 견뎌내야만 했고 톨리가 진상을 설명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다가 이 묘한 포옹은 완전히 기대 밖이었다. 이 일로 이모젠의 마음은 완전히 흐트러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톨리가 동 페리뇽 포도주잔을 건네 주고 있는 판이었다. 톨리는 "런던의 데벤코 사와 새 광고대행사를 위하여!" 라고 말하며 축배를 들었다. 순간 이모젠의 눈은 알렉스의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입술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고 전율만이 남았다. "그럼 사업 얘기를 합시다, 단 딱딱하지 않게!" 톨리는 이모젠과 함께 리젠시 스타일 소파에 앉으며 빙긋 웃었다. 객실의 손님맞이용 방은 리젠시와 바로크 스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우아했으나 편안함도 고려한 방이었다. 알렉스는 몸을 돌려 옆의 번쩍거리는 의자에 앉았다. 저렇게 차가운 황금색 눈동자로 노려보지만 말았으면! 이모젠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으나 알렉스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한 뒤에 새로이 접근하는 이 태도는 이모젠의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 했다. 심지어 그의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알렉스를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다가는 논리고 뭐고 다 떠나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절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톨리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몸을 깊게 묻으며 아버지다운 인자한 미소를 이모젠에게 보였다. "내 계획으로는 내년부터 사무소를 열었으면 하는데, 그러려면 지금 곧 마틴 앤드 샌다운 회사에도 당신 입장을 밝혀야겠지요. 그동안에라도 우리 일을 해 주면 좋겠고. 당신은 부지런하니까" 자신의 철회색 머리를 한 손으로 찌르며 그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보였다. "당신은 팀을 짜서 일하게 될 거요. 다른 곳에 있는 매장들도 다 돌아봐야 할 거고. 여러 매장들을 동시에 홍보하는 시스템이니까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물론 컴퓨터에 능통한 비서도 채용할 예정이오. 그러고 보니 이 얘기를 빼먹었군" 그는 주의 깊게 얘기를 듣고 있던 아들 쪽으로 눈썹을 치켜 떠 보였다. "알렉스는 윈저에 사무실을 꾸미는 걸 찬성하지만 이모젠, 당신은 어떻소?"


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하길 바라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저도 좋아요" 톨리는 아들 쪽을 슬쩍 건네다 보며 만족한 듯 말을 이었다. "좋아요. 모든 게 완벽하군. 당신은 혼자서도 잘해 나갈 타이프고 아마 금방 일에 익숙해지겠지요. 당신은 조만간 데벤코 홍보의 총책임을 맡게 될 거요. 전세계 홍보망의 책임자 말이오. 또 이사회의 일원도 될 거고" 이모젠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건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는 너무나 엄청난 대우였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알렉스의 반응을 살펴 보았다. 아버지의 애인 주제에 회사 내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을 단단히 화낼 법 했다. 배타적인 가문 독점의 기업에서 이사 자리를 준다니. 그가 분노로 이를 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미소짓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미소는 상당히 기쁜 듯 해서 이모젠은 눈을 의심했다. 알렉스가 톨리의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저런 표정을 할 리가 없었다. 톨리는 말을 계속하면서 장난기 어린 눈을 아들에게 돌렸다. 마치 이 폭탄선언에 당연히 아들의 반대가 뒤따를 거라고 믿는 투였다. "사실 알렉스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녀석이고 상당히 추진력이 있지요. 처음에는 때때로 충돌할 지도 모르지만 아마 결국은 두 사람이 잘 해나갈 거라고 믿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알렉스는 끼어들더니 더욱 따뜻하고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운 고급 드레스 아래에 숨겨진 그녀의 몸을 죽 훑어내려 갔다. "사실은 아주 즐거울 거라고 믿는데요. 이모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심일까? 설마. 그렇다고 딱히 대답할 말도 없어서 그냥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다행히도 웨이터가 딱 제시간에 왔다. 요리와 새로 딴 샴페인 병을 창가의 테이블 위에 늘어놓느라 잠시 세 사람의 대화는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촛불이 테이블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톨리는 그녀를 에스코트해 자리에 앉혔다. 알렉스도 자리를 잡고 앉아 이모젠이 무슨 메뉴를 고르면 좋을지 망설이자 러시아산 검은 캐비어와 양념한 방콕식 닭고기를 권했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신경을 쓰면 쓸 수록 톨리의 존재는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이모젠에게만 말을 걸었고 그의 눈동자도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다. 버터스카치 소스를 친 달콤한 바닐라아이스크림이 디저트로 나올 때쯤에는 이모젠의 머리는 완전히 혼란 그 자체였다. 알렉산더 데벤코의 매력은 아주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이모젠은 톨리가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약간 혼란스러워 보였고 눈썹을 모은 이마에는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톨리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나만큼이나 혼란스럽진 않겠지.


알렉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셰퍼즈부시에 있는 당신 아파트 말이오. 이번 일자리는 여행도 많이 가고 한마디로 중노동일 텐데 윈저로 옮겨 올 생각은 없소?" 이모젠은 머리를 저었다. 안 그래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데벤코의 일자리를 받아들이면 당연히 보수도 많아질 테니. "글쎄요. 딱히 지금 사는 곳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마틴 앤드 샌다운 회사에 취직해서 링컨에서 올라왔을 때는 그곳이 최적지였어요. 뭐 물론 윈저 부근에도 집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요" 질문한 건 알렉스였지만 이모젠은 일부러 톨리를 향한 채 말했다. 식사 내내 알렉스는 의식적으로 줄곧 톨리를 대화에서 제쳐 놓은 채였고 이모젠은 그것에 대해 슬슬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톨리는 반가운 듯 달려들었다. "좋은 생각 아니오?" 알렉스 역시 유연하게 반격에 나섰다.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윈저의 그 별채 말입니다. 당신에게 꼭 맞을 거라고 생각하오만" 알렉스는 이모젠의 잔에 샴페인을 다시 채우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의 미소는 정중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아버지도 반대는 않으시겠죠?"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상하게 긴장된 분위기였다. 잔에서 보글거리는 샴페인 거품 소리마저 들릴 듯 했다. 톨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운치는 않았다. 톨리의 장미빛 미래 설계에 차질이 생긴 셈이었다. 거기에 가정부와 정원사 부부를 입주시켜서 가정적이 아닌 카트리나의 일손을 돕겠다는 톨리의 계획은 어쩌고? 이모젠은 부드럽게 이의를 내세웠다. "말씀은 고맙지만요,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이모젠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재빨리 내려놓았다. 더 이상 알콜을 섭취하면 안 된다고 머리 속에서 경고벨이 울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한꺼번에 일어났다. 알렉스의 어처구니 없는 비난, 그의 모욕적인 언사, 계속 미뤄오다가 일자리를 단번에 받아들인 그녀 자신의 갑작스런 결정, 그녀의 의견에 날카로운 독설을 퍼붓는 그의 듣기 좋은 음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에 대한 태도를 갑자기 돌변한 그의 속셈은 무엇일까? 모든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빨리 결정되어 버린 감이 있었다. 톨리가 말을 꺼냈다. "상당히 바쁜 하루였소, 이모젠. 전화로 차를 불러 드려도 좋겠소?" 이모젠은 피곤한 표정으로 미소지어 보일 뿐이었다. 빨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오늘 하루의 사건을 곰곰히 되새겨볼 기회를 갖고 싶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필요 없어요. 제가 그녀를 집까지 태워다 주겠어요" 알렉스는 벌써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에서 일어서는 그녀의 팔꿈치를 붙들고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제의한 일자리를 그녀가 받아들였으니 이제부터 우린 가까운 동료 사이가 될 것 아니겠어요? 저도 그러길 바라고……. 좀 더 그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군요"


그의 손이 살며시 그녀의 등 뒤로 미끄러져 어깨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의 길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 위에서 원을 그리며 갑작스런 친밀을 표시했다. 그녀의 혈관은 활활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 원치 않았던 이런 접촉은 그녀의 평정에 뭔지 모를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톨리가 알렉스의 그 말을 듣고 이마에 주름살을 잡은 것을 눈치챈 이모젠의 눈은 쇼크로 커졌다. 그냥 운전수더러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알렉스가 그녀보다 더 재빨랐다. 그의 목소리는 놀리기라도 하는 듯 가벼웠다. "괜찮겠죠, 아버지?" 그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오만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톨리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갈색 눈은 놀란 듯 했다. "물론이다. 바래다 드려라. 의논할 게 몇 가지 있으니 내일 아침에 만나자꾸나" 이모젠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이든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아마도 분명히 알렉스가 오늘 식사 때 자기를 대화에서 소외시킨 것을 뚜렷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모젠만이 세상에 유일한 여성인 양. 또 알렉스가 쓰다듬었을 때의 이모젠의 반응을 톨리가 놓쳤을 리 없다. 알렉스는 저녁 내내 그녀를

능숙하게

다뤘다.

거의

눈으로

삼킬

듯이

그녀만을

바라보면서. 하지만 그는 톨리가 손수 골라준 카트리나라는 약혼녀가 있지 않은가. 톨리는 알렉스가 이모젠을 모욕하고 경멸했다고는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사회의 자리를 따내려고 안달하는 금발미녀라고 그녀를 비난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이모젠은 한기를 느꼈다. 마치 깊고 어두운 바다에 빠져서 헤엄칠 수 없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렉산더 데벤코가 주도하는 묘한 게임의 꼭두각시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조심성있게, 그리고 현명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녀를 완전히 매장시켜 버릴 지도 모른다! 4 이모젠의 아파트로 가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 이모젠의 기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짜내 버린 것 같았다. 알렉산더 데벤코와 맞서는 일은 이제까지 이모젠이 가진 적도 없었던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했다. 게다가 그는 지칠 줄도 모르는 정력의 화신인 것 같았다. 때문에 이모젠은 내내 손을 맞잡고 잠자코 있었다. 제발 아파트 건물 바깥에 그녀를 혼자 내려 주었으면! 그렇게 된다면 아파트로 기어들어가 그날 하루의 사건들을 조용히 곱씹어 볼 수 있을 테니.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지금 가장 열망하는 것이었다. 거의 절망적으로 그녀는 그것을 갈구했다.


"안까지 바래다 주겠소" 알렉스는 재규어를 아파트 건물 앞에 세우며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면서 이모젠은 말했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알렉스는 차를 완전히 주차시키고 재빨리 차 밖으로 나가더니 그녀가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차문을 열어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런데 왜 저항해야 하지? 이모젠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오늘 저녁 그가 이모젠과 톨리 곁에 내내 붙어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즉, 잘못된 신문기사에 대해 알렉스가 그녀에게 보인 엉뚱한 반응을 이모젠이 톨리에게 말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결국

그는

아직까지도

그녀가

노인네를

유혹하는

싸구려

금발미녀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톨리에게서 몇 마디 설명만 들었더라도 그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을 텐데. "커피 드릴까요?" 작고 아담한 거실로 그가 따라 들어오자 이모젠은 말했다. 그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미소짓자 그에게 진실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거세게 밀려들어왔다. 그의 눈길은 마치 따스한 애무처럼 그녀의 몸 전체를 떨리게 했다. 등을 꼿꼿이 세우면서 그녀는 재빨리 물러섰다. 알렉스는 여자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고 가장 나쁜 것은 그의 그런 방법이 악마의 수법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매력적인 태도를 남발하는 그의 품성은 카트리나가 그들의 결혼날짜를 잡는 데에 계속 반대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떤 부인이 다른 여자들이 자기 남편 말이라면 사죽을 못 쓰고 끌려다니는 것을 참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신랄한 생각을 하며 이모젠은 작은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필터에 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이 임박한 것과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모젠은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제발 그가 톨리와 자신과의 관계의 실체를 알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 간에 꼭 필요한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찻잔을 날라갔을 때 알렉스는 윗도리를 벗고 책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중앙난방을 아무리 최저로 해도 덥다는 듯 했다. 희고 빳빳한 와이셔츠 칼라 아래의 넓은 어깨가 그녀의 눈에 시리게 박혔다. 힘찬 그의 남성다움은 윤곽이 뚜렷했고 그의 등에서 늘씬한 허리에 이어지는 선과 날렵한 히프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모젠은 탁자 위에 쟁반을 소리나게 놓고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침착하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그녀의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아까 이곳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접촉과 반응이 생각나자 그의 그녀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의혹이


있는 한 둘 사이에 육체적 접촉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크나큰 재앙이 될 터였다. 그는 몸을 돌려 육감적인 입매에 천천히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아주 훌륭하군요" 처음에는 커피 얘긴지 책 얘긴지 종잡을 수가 없었으나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덧붙였다. 특유의 풍부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여전히 그녀를 이상한 기분에 젖게 했다. "아름다운 여성이 밤늦게 커피를 구실로 방에 초대할 때면 난 항상 기뻐진다오" 그의 말투는 너무나도 부드러웠고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애무하듯 응시했다. 이모젠은 생각을 모아 그의 말의 틀린 점을 지적하려 했다. 그녀가 커피를 대접한 것은 그가 생각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에서였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아예 더 대담하게 나오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는 유혹적인 몸짓으로 그녀 가까이로 다가왔다. "코트를 벗어요. 너무 덥지 않소?"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그에게 못박혔고 마치 방어라도 하듯 윗도리를 꼭 여며 쥐었다. 방 안은 답답했다. 갑자기 검은 색의 깔끔한 니트 드레스가 날씬한 몸에 착 달라붙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유혹적일까 하는 데에 이모젠은 생각이 미쳤다. "내가 벗겨 주겠소" 알렉스의 목소리는 유혹하는 듯 했다. 그가 부드러운 태도로 그녀의 손가락을 윗도리에서 하나하나 들어내고 다 알겠다는 듯한 미소를 짓자 그녀의 몸은 떨렸다. 알렉스의 몸은 너무나 가깝게 있었다. 하얀 윗도리를 살며시 벗겨내는 알렉스와 이모젠의 몸은 거의 닿을 듯 했다. 알렉스는 윗도리를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았다. 그리고 나서 그의 손은 이모젠의 금발을 묶어 놓았던 대모갑 핀을 벗겨 버렸다. 길다란 은빛 금발을 쓰다듬는 알렉스의 손길 아래에서 그녀는 간신히 중얼거릴 뿐이었다.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 뭔가가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나 자라나고 있었다. 빨리 더 이상 커지기 전에 멈춰야만 했다. 이미 사태는 그녀의 손아귀 밖에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즐기기 위한 순간의 쾌락은 물론이고 영속적인 관계, 결혼이란 것들은 일찍이 이모젠의 머리 속에는 있어 본 적도 없는 개념들이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부모의 결혼생활 내내 계속된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런 상태를 앞으로의 인생 속으로 끌어들일 생각 따윈 더더욱 없었다. 간신히 자신을 수습하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날씬한 몸의 곡선을 최대한 가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감각적인 입술은 이미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고 그녀는 겨우겨우 날카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 기사 말예요 … … . 톨리와 저에 관한 … … ." 그러나 알렉스는 손가락을 가져다 이모젠의 입술에 대었다. 호흡이 목에 걸려 버렸다. "그 얘기는 더 듣고 싶지 않소" 그리고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녀가 방어하듯이 입을 다물고 있자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애무하면서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녀는 이전에 결코 경험해 본 적 없던 육감적인 느낌에 점점 커지는 스스로의 욕구를 알고 당황했다. 키스가 깊어지고 그의 팔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더욱 거세게 끌어안자 그녀의 심장은 터져 버리기라도 할 듯이 세차게 뛰었다. 이모젠에게 밀착된 알렉스의 아랫도리가 뜨겁게 느껴지면서 그녀는 모든 저항력을 잃고 말았다. 머리 속으로는 이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멈출 수 없는 육체의 요구를 거부하는 데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감정의 물결을 멈추게 하느니 바다를 막는 편이 더 쉬우리라.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은 그의 목을 감았고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갈 수록 자신의 가슴이 그의 탄탄한 가슴에 밀어붙여지는 것이 뚜렷이 느껴졌다. 그의 혀가 너무나도 부드럽게 그녀의 혀를 어루만졌다. 이런 감각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신음하며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호흡은 뒤섞였고 그녀 역시 그의 목 깊은 곳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 역시 몸을 더욱 뜨거워지게 했다. 갑자기 그는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 눈동자는 욕망으로 불타올랐고 남자다운 뺨선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줄곧 당신을 원했소. 당신은 너무나 냉정하고 완벽해 보였지. 그래서 난 더더욱 당신을 원했던 거요" 그녀의 나른한 보라색 눈동자는 그에게 '좋아요'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벨벳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와 호박색 눈동자는 진작부터 그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손길이 그녀의 뺨을 소중하다는 듯 감싸쥐었다. 그는 가볍게 키스한 다음 쥐어짜듯 말했다. "그래, 난 알고 있었소" 그러더니 그녀를 부드럽게 떼어 놓았다. "이젠 정신을 차렸소. 가야 할 시간이겠지" 그는 윗도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그의 미소는 조롱하듯 했다. 그 조롱이 그녀에게 향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비웃는 것인지를 알 길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인생이 이전과는 결코 똑같을 수 없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침은 맑은 정신을 가져다 준다. 거의 맑은 정신을. 그러나 이모젠은 일어나서 샤워하고 커피를 마시면서도 계속 혼란스런 기분이었다.


정열의 세계를 경험한 뒤 남는 것은 전율과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 그것 뿐인가? 이모젠은 씁쓰레하게 생각했다. 정신적인 관계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상당히 회의적인 것이었다.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더더욱 그랬다. 여자의 몸으로서는 힘든 직업을 견뎌 온 것만 해도 그렇고 또 어린 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부모는 항상 서로 갈라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장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이모젠 때문이라고 부모들은 주위에 얘기하고 다녔다. 때문에 이모젠은 마치 자신이 누구도 원치 않는 존재이고 짐스러울 뿐이라는 느낌을 항상 받고 자랐다. 이모젠이 대학 1 학년 때 부모들이 마침내 갈라서자 그녀는 도리어 안도감을 느꼈다. 이후 그녀는 이성과 어떤 관련을 가질 때 가벼운 키스 이상의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육체적 욕망을 느낀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따져 보면 이런 감각이 일깨워진 건 다른 사람들보다 적어도 10 년은 늦된 것이었다. 어릴 때의 그릇된 인식이 이후의 생애를 황폐화시켰기 때문에 늦게 찾아온 그녀의 감각은 아주 괴롭고도 낯선 것이었다. 이모젠은 커피를 다 마시고 침실로 돌아가서 체리 빛깔의 블라우스 위에 줄무늬가 있는 진한 검정색 정장을 골라 놓았다. 얇은 검정색 실크 스타킹과 빨강 하이힐이 그녀의 모습을 더욱 완벽하게 해 주었다. 머리는 프랑스식으로 뒤로 넘겨 부풀려 빗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늘의 차림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마틴 앤드 샌다운 사에 가서 사직서를 쓸 생각이었다. 데벤코와 일을 시작하려면 빠른 편이 좋았다. 아마도 여태껏없던 상당한 모험이 될 것이고 그녀는 모험을 즐기는 편이었다. 알렉산더 데벤코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머리라도 찰싹 때려 주겠다! 때때로 그녀는 스스로가 내린 결정일 때라도 망설여지는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없이 전장에 나서야 했다. 용기를 갖고 나가면 언제나 일은 잘 풀리게 마련이었다. 굳이 스스로에게 알렉스는 평범하고 흔해빠진 호색한일 뿐이라고 타이를 필요는 없었다. 오래전부터 겨울잠을 자고 있어서 이제는 무력해진 줄만 알았던 감각을 일깨워버린 쓸데없는 작자! 게다가 그녀는 남자라는 존재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알렉스를 좋아하건 아니건 그가 그녀를 그저 돈만 아는 골빈 금발미녀로 취급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여자에게 데벤코의 이사 자리를 준다는 말에 어제 그가 책상을 뒤엎지 않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또 알렉스는 다른 여자와 아주 굳건한 약혼관계를 유지 중이 아닌가……. 그녀는 화장대 앞에서 불편한 듯 몸을 꼬았다. 거울 속의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풍부한 그녀의 입매는 꼭 다물어져 있었다.


그래, 그런 사실이 있었지. 왜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내질 못했을까? 그의 모든 태도는 그녀에게 이사 자리를 준다고 톨리가 말한 뒤부터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저녁 식사 내내 친절하게 대하다가 막판에는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고집을 피우고……. 그런 태도는 전부 결국 자기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위협과 뇌물이 듣지 않을 것 같으니 전술을 바꿔서 그녀의 감각을 정복하기로 한 것이겠지? 자신의 환상적인 매력을 쥐어 짜서 그녀를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거겠지?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 톨리에게 이모젠이 얼마나 값싼 여자인지를 폭로하려는 속셈이었을 거다. 현명해지자, 그녀는 생각했다. 보라색 눈이 주의깊은 빛을 발했다. 만약 그녀가 그의 얼토당토 않은 상상 그대로 돈에 팔리는 여자라면, 젊은 아들이 어떻게 만족을 시켜 주더라도 결국은 노인에게서 돈을 뜯는 데에 혈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가 때맞춰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쨌든 그녀는 오랫동안 프로로서 일해 왔고 지금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서 백을 어깨에 걸쳤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집에 다시 돌아온 것은 정오가 좀 넘어서였다. 문을 들어서자 마자 전화가 울렸다. 톨리였다. "겨우 통화가 됐군! 어디 갔었소?" "사직서를 제출하고 책상정리를 하러 갔었어요" 또 윈저에 아파트를 얻을 수 있는지 여러 부동산사무소에 전화도 했고, 그녀는 머리 속으로 생각했다. 톨리는 다정하게 말했다. "잘했소. 며칠 안에 우편으로 정식 통지가 당신에게 갈 거요. 문제가 있으면 알렉스와 얘기를 해 보시오. 녀석이 그런 건 해결해 줄 거요" "언제부터 일을 시작하면 좋을까요?" 이모젠은 의자에 앉으며 신발을 벗었다. 톨리는 음흉한 어조로 말했다. "벌써 오늘부터 월급 계산이 시작된 걸로 알고 있소만. 하지만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제대로 착수하기는 좀 힘들겠지요. 잡일을 할 사람들도 더 고용해야 하고 특히 그 윈저의 집을 잘 꾸미려면 말이오. 몇 주 동안은 푹 쉬면서 충전을 해 둬요. 아니면 알렉스와 함께 파리로 가봐도 좋지 않겠소? 그 녀석은 앞으로 당신이 거느릴 팀 멤버들과 만나기 위해 가는 거니까" 이모젠의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그러나 목소리에 마음의 동요를 드러내기에 그녀는 너무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었다. 영국 이외 유럽 대륙 각지에서 스카웃해온 인재들과 만남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시간이

텐데.

특히

앞으로

윈저에서

같이

일할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서먹서먹한 시작을 하느니 먼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다. "오, 그리고 잊기 전에 말해 두어야겠군. 알렉스와도 얘길 했지만 윈저의 그집에 있는 별채는 당신 마음대로 써도 좋소. 적어도 사무소가 정상가동될 때까지는 당신도 윈저에 기지를 갖고 있는 편이 낫지 않겠소?" 맞는 얘기긴 했다. 여러 부동산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본 결과, 이모젠이 원하는 조건의 아파트를 찾는다는 건 사막에서 소나기를 기대하는 격이었다. 그렇다고 셰퍼즈부시에서

매일매일 윈저까지

여행길에

나서기는

싫었던

차였지만 그렇담 톨리의 계획은? "별채엔 아드님 내외분을 위해서 고용인 부부를 입주시키겠다고 하셨잖아요?" 짧지만 의미심장한 침묵이 흐른 뒤 톨리는 황급히 대답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그런 사소한 일로 머리 썩이지 않을 거요. 그 문제라면 알렉스와 얘기해 봐요. 녀석도 오늘 아침 내내 당신과 통화하려고 애썼다오. 오늘 저녁 당신과 뭔가 계획이 있는 것 같던데" 아, 그래요? 이모젠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이번엔 무슨 음모이실까? 톨리의 말을 들으며 이모젠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집 구매 문제는 이제 한시름 놓았으니 다음 몇 주 동안은 미국에 돌아가 있을 예정이라오. 가끔 전화하리다. 당신이 윈저의 집을 따뜻하게 꾸며놓기를 바라겠소!" "뵙고 싶을 거예요" 이모젠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톨리와의 우정은 그녀에게 많은 의지가 되었는데. 톨리는 웃을 뿐이었다. "기쁘군요. 아름다운 아가씨가 날 그리워할 거라니. 어쨌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알렉스가 열심히 일을 할 테니 난 큼직한 지시만 내리겠소. 이젠 내 말은 소용 없소. 알렉스가 고집하면 그게 곧 법률이 될 거요!" 나한테는 아녜요, 생각하면서 이모젠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알렉산더 데벤코 씨, 몹시바쁘신 모양이로군. 톨리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 버리겠다 이거지? 돈만 아는 금발미녀의 손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교활한 계획이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을 준비 중일까? 지난 밤의 일이 치밀한 계획의 일부라는 건 이미 증명됐다. 스스로의 남성다움과 누가 봐도 확연한 성적 매력으로 그녀를 늙은 아버지에게서 떼어놓는 것. 하지만 그 수법에 다시는 넘어가지 않겠어! 눈썹을 모으면서 그녀는 벗어놓은 신발을 집어들었다. 침실로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다시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어젯밤 먼저 열정에서 정신을 차린 것은 알렉스였다. 그녀는 그가 가져다준 감각의 세계에서 완전히 자기를 잃은 상태였다. 아마 그가 멈추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런 생각은 그녀에게 수치심을 가져다 주었다. 좀더 신중해야겠다.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치 않을 것 같았다. 알렉스가 또 그녀와 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될 거다. 어떤 접근을 해 오더라도 결코 그녀를 유혹할 순 없으리라. 게다가 그는 마음 속에 카트리나라는 약혼녀를 담아 두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갑자기 옷을 모두 벗어 버리고 옷장 서랍을


열어 뒤지기 시작했다. 얇은 스웨터와 물 빠진 청바지를 찾아내 가벼운 속옷 차림 위에 입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쓸쓸함을 느꼈다. 5 "이것으로 끝입니다" 알렉스는 서류를 모아 잘 닦여진 책상 위에서 가지런히 하면서 말했다. "질문 있습니까?" 이모젠은 만족스런 미소를 살짝 띠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와 알렉스를 제외하고는 탁자 주위에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알렉스와 톨리가 데벤코 광고대행사를 위해서 손수 영입해 온 사람들이었다. 파리에 온지 이틀이 지났다. 당초 이모젠이 예상했던 시련은 커녕 매일매일이 기대와 흥분의 연속이었다. 팀을 짜서 협력 하에 일을 해나간다는 것은 이모젠에게 상당한 활력과 열정을 주었다. 게다가 알렉스와 톨리가 모았다는 인재들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젊었고 성공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분명 즐거울 것 같았다. 이틀 동안 데벤코의 사람들과 일하면서, 특히 알렉스와 일하면서 즐거웠다는 사실을 이모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톨리가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간 지도 4 주나 되었지만 그동안은 일부러 알렉스를 피해 다녔다. 톨리라는 방파제 없이 알렉스와 일을 한다는 것이 무척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동안은 여기저기 몰래 나다녔다. 낮에는 주로 마틴 앤드 샌다운 사에서 남은 일들을 처리했고 저녁이면 여자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나날을 계속하면서도 항상 두려워했다. 알렉스와 함께 파리로 가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그 사실을. 떠날 날이 다가오면서 마침내 마틴 앤드 샌다운 사를 완전히 그만 두었을 때 이모젠의 머리 속에는 두려움 뿐이었다. 파리로 미래의 동료들을 만나러 가면서도 그 느낌은 여전했다. 알렉스는 처음 만났을 때 처럼 날 또 모욕하려 들까? 아니면 그 혼란스럽고 위험한 유혹 게임을 계속할 생각인 걸까? 두 가지 전부 이모젠에게는 고역으로 어느 쪽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웬걸, 출발 직후부터 알렉스는 시종일관 그녀를 우호적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마치 아주 존경하는 동료를 대접하듯 했다. 몇 시간도 안 되어 이모젠은 완전히 포기했다. 이 사람과 그의 분위기는 수수께끼 같기만 했다. 그냥 지금은 이 우호적인 분위기를 단순히 즐기기만 하자, 그리고 요행에 감사나 드리자. 그것이 이모젠의 생각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에르 비네가 지적했다. 파리 사무소의 가장 유능한 직원이었던 재주꾼이었다.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는 짙은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에 엄격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지을 때면 여윈 몸 전체에서 프랑스 인 고유의 매력이 흠뻑 배어 나왔다.


알렉스가 원래 피에르를 런던 데벤코 광고대행사의 책임자로 내심 생각했다는 걸 떠올리고 이모젠은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단시간 내에 책임자의 자리에 그녀가 올랐다는 것에 피에르가 반발하면 어쩌나? 그러나 그런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피에르는 <주얼스> 홍보에서 이모젠이 보여준 재능에 감탄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그녀가 황송해질 정도였다. 이모젠은 피에르에게 웃으며 말했다. "좀 지루하실지 모르지만 이젠 우리 팀의 거취 문제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에요" 캐시 에임즈는 젊고 촉망받는 카피라이터로 맨체스터 에이전시의 직원이었다. 이모젠의 바로 아래에서 일하게 될 그녀는 곧 쾌활하게 말했다. "난 준비가 끝났어요. 애스콧 근처에 숙모가 사시는데 같이 살자고 하시거든요. 언제 일을 시작해도 상관 없어요" 피에르와 스테판 스타인이 문제였다. 스테판은 영어 외에도 이탈리아 어와 스페인 어에 능통하고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꺼냈다. "어디에 살아도 상관은 없지만요, 에바와 결혼하게 되면 정착할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걱정 말아요" 알렉스는 서류를 가방에 모두 넣고는 일어서며 말했다. "다 염두에 두고 있소. 그럼 처음에는 둘 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괜찮겠지요? 정착하는 문제야 차차 해결해 나가면 될 테고. 스테판, 당신은 천천히 시간을 갖고 앞으로 살 집을 구해 보도록 해요" 이모젠도 일어섰다. 알렉스가 주선한 오늘의 모임에는 하루가 꼬박 소요되었다.

새로운 광고대행사의 출범을

위해서

종일

토론을

하고 앞으로

벌일

홍보사업에 대해서 여러가지 안을 내는 데다가 어제는 도착 즉시 파리의 데벤코 백화점을 들러 보았기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대행사의 본부를 나중에 안내해 드리죠" 이모젠은 검정 가죽 가방을 팔 밑에 끼면서 말했다. "이제부턴 윈저 근처에 제가 묵을 곳을 찾아 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있을까요?" 피에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같이 지낸다면 아주 즐거울 텐데"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소." 알렉스는 무뚝뚝하게 끼어들었고 이모젠은 캐시와 스테판이 놀란 시선을 주는 것을 보았다. 피에르는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의자 등에 비스듬히 기대고 장난기 어린 웃음을 빙그레 지었다. 이모젠은 눈썹을 모았다. 아까부터 웬지 알렉스는 이 프랑스인에게 묘하게도 악의를 품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몇 주 전만 하더라도 피에르의 능력에 엄청난 찬사를 보낸 게 누구였더라? "모두들 내일 아침 식사 때 봅시다" 알렉스는 이모젠의 팔꿈치를 잡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항의하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이모젠은 꾹 참았다.


오늘 밤의 저녁식사는 멤버들 서로간에 지속되었던 긴장을 푸는 기회가 될 듯 했다. 새 사무소에 대한 끝없는 탁상공론 대신 일상적인 평범한 화제를 꺼내서 서로간의 친밀감을 돈독히 할 수 있는 찬스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면 그들과는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이모젠은 은근히 저녁식사를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전 일찍 샤를 드골 공항에 나가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침식사 때에는 서로가 개인적으로 알고 싶어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 알렉스는 물어뜯을 듯 말했다. "일 관계 이외라면 비네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게 좋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아까까지만 해도 알렉스를 완벽한 동반자이자 동료로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분은 싹 날아가 버리고 다시금 그의 성격의 어두운 면만이 뚜렷이 느껴졌다. "모르겠다고? 비네는 계속 당신에게만 눈을 주고 있었소. 자신감에 넘친 나머지 당신과 한 지붕 아래서 살자고까지 하지 않았소!" "그건 농담일 뿐예요" 그녀는 차갑게 맞받았다. 그럼 그렇지, 휴전이 오래 갈 리는 없었어. 사실을 알려준다고 해도 코웃음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그리고 난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예요" 이렇게 말하면 그녀의 얼굴에 대고 비웃음을 터뜨리겠지? 벌써 톨리와 자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혼자서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니, 또 자기 팔에 안겨 있을 때의 이모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도 잘 알고 있으니 오죽할까. 피에르 비네의 그 제안을 그녀가 받아들일 거라고 그가 믿기에는 여태까지의 증거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져 걸었다. 하이힐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차갑게 울렸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곁에 와서 섰다. "취미가 고상하지 못하시군" 그 화제를 물고 늘어지려는 것만은 분명하구나, 이모젠은 절망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깨져라 눌러대는 알렉스의 손길은 마치 피에르의 머리에라도 일격을 먹이는 것같았다. "어쨌든 당신이 살 곳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맙시다. 키너스턴에 있는 그 별채를 쓰도록 하시오" 키너스턴. 그가 그 집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모든 계획이 구체적으로 그녀의 피부에 와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을 사용한다면 아주 편하겠지. 그러나 알렉스는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톨리는 카트리나의 일손을 덜어줄 고용인들에게 주려고 그곳을 점찍어 두었었는데. 그러나 사실 톨리는 별로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모젠 자신도 그 뒤로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 문제를 화제로 삼는 것이 웬지 꺼려진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모젠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뒤부터 계속 정면만을 응시했다. "몇 시간 뒤 바에서 만납시다. 식사할 만한 곳을 찾아 보도록 하지요. 호텔 생활은 이제 지긋지긋하오" 이모젠은 망설였지만 짧게대답했다. "좋아요"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게 기대하지 말아요. 지나치게 흥분한 당신의 모습이 때로는 거북하니까" "당신이 저녁내내 내게 설교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눈곱만치는 기대가 되겠죠" 그녀는 거칠게 대답했다. 피에르가 농담으로 던진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믿는 알렉스가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졌다. 알렉스는 갑자기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지는 않을 거요. 더 재미있는 일이 많을 테니까" 갑자기 뭔지 모를 감각이 그녀의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왠지 저녁 내내 지루한 설교를 듣는 편이 더욱 안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의 방문 앞까지 와서야 그는 그녀를 혼자 놓아 주었고 이모젠은 방문을 꼭 닫은 뒤 문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알렉스 데벤코, 너무나도 불쾌하지만 또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람. 어떻게 이 두 가지가 한 사람의 성격에 공존할 수가 있지? 톨리가 작별 인사를 하러 전화했던 저녁을 떠올렸다. 그는 알렉스가 계속 이모젠과 만나고 싶어했다고 알려 주었다. 알렉스가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 모양이라고도 말했다. 그를 다시 만난다는 것, 특히 그의 유혹적인 손길에 반응한 직후에 금방 그와 얼굴을 맞댄다는 것은 공포스럽기 까지 했고 그 때문에 그녀는 곧장 알렉스를 피해 거리로 나갔었다. 몇 시간 씩 정처없이 거리를 걷다가 제목도 기억할 수 없는 영화를 혼자서 보기까지 했다. 아파트로 살금살금 돌아온 뒤에도 전등불을 모조리 끄고 전화 코드를 뽑아 놓기까지 하면서. 다음날 아침 7 시에 알렉스는 이모젠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잠을 방해했었다. "도대체 어제 어딜 갔던 거요? 내가 당신과 연락을 취하고 싶어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지 않았소? 파리 여행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의논하려면 저녁 식사 정도 같이 해야 하지 않겠소?" 호흡을 진정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를 침착하게 가다듬어서 대응했다. 약간 차가울 정도로. "죄송해요. 당신 전화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낭비하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아서요. 앞으로는 저와 연락을 취하고 싶으시면 비서에게 시키시는 게 나을 거예요" 전화기를 쾅 내려놓는 소리에 이모젠은 만족감을 느꼈다. 새로운 일 관계의


시작으로는 결코 좋은 게 아니었지만 이 사태를 자초한 건 바로 그였다. 그는 그녀를 모욕하고 위협했으며 톨리와 일자리에서 손을 떼라는 공갈까지 쳤다. 게다가 그녀를 육체적으로 유혹해 노인네에게서 몰아내겠다는 치사한 방법까지 쓰지 않았던가. 사실 알렉스에겐 아까의 대접도 너무 과분했다. 그녀는 우아하게 꾸며진 객실로 들어섰다. 알렉스와 단 둘이서 저녁을 한다는 것은 바라던 바가 전혀 아니었다. 그가 기분이 좋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다면야 아직은 그를 따갑게 의식하고 있지만 그런대로 감정을 숨길 수 있을 텐데. 그와 둘만 있으면서 그의 모든 기분을 받아줘야 할텐데 과연 그의 비난과 달갑지 않은 매력과 거기다가 육체적 욕망을 보기 좋게 물리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견뎌 내야 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는 데벤코의 일원이었고 톨리가 없을 때는 알렉스가 그녀의 직속 상관이니만큼 서로 잘 해나가야 될 게 아닌가. 만약 그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기분 나쁘게 굴지만 않는다면 그녀도 기분좋게 대해줄 자신은 있었다. 상처를 다시 들추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파리로 날아오기 직전에 만난 사람들처럼 정중하게 대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정도였다. 오랫동안 몸이 나른해지도록 목욕을 하고 난 뒤 이모젠은 짙은 청회색의 깔끔한 울 스커트와 점잖은 실크 셔츠를 입고 그 위에 하얀 캐시미어 윗도리를 걸쳤다. 검정색 가죽 부츠가 옷차림을 더욱 완벽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거울에 전신을 비쳐 보면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자신의 외모가 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이모젠은 알고 있었다. 진한 팬지꽃빛 눈동자와 표정이 풍부한 입은 일견 냉정한 모습 뒤에 감추어진 정열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모젠은 평소보다 공들여서 화장을 했다. 은빛 도는 금발은 뒤로 넘겨 부풀려 빗는 프랑스식 스타일로 했다. 그녀는 이 차림을 좋아했다. 이렇게 하면 좀 더 냉정하고 초연해 보일까. 결국 적당히 고전적으로 꾸민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면서 이모젠은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저녁을 알렉스와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문을 나섰다. 그는 먼저 바에 와 있었다. 놀랍게도 다른 동료들도 같이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은 멋진 칼라가 선 정장 때문에 두드러져 보였다. 캐시와 스테판과 피에르는 캐주얼한 청바지에 재킷 차림으로 어딘가 학생같은 분위기였다. 아무도 그들이 광고계에서는 알아주는 실력자들이란 사실은 짐작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은 웃으며


수다를 떠는가 하면 곧 차분해졌다. 이모젠도 그들 사이에 합류해서 즐겁게 지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젊고 소박했으며 알렉산더 데벤코의 주도면밀한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과 있으면 이모젠은 편안한 기분이었고 위협에서 보호받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알렉스와 있을 때에는 전혀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를 믿을 수도 없었다. 캐시는 알렉스의 얘기를 들으며 미소짓고 있었다. 이모젠은 피에르가 자신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려 놓자 생긋 웃어 보였다. 알렉스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피에르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늘밤엔 못 만날 줄 알았는데요. 난 역시 운이 좋은 놈이오" "우리가 운이 나빴지" 알렉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이모젠의 어깨에 놓여진 피에르의 손놀림에 못박혀 있었다. 이모젠은 화난 듯한 알렉스의 말투에 몸을 떨었다. 피에르의 다정한 포옹에서 벗어나고 보니 알렉스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에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 듯 했다. 그는 바에서 그녀를 끌고 나갔다. 마치 이모젠을 소유하기라도 한 듯 하지 않은가! 그에게는 이럴 권리가 없다. 그렇지만 모두들의 앞에서 꼴사납게 항의하는 건 더 이상하리라. 그들은 바보가 아니니 알렉스와 피에르 사이의 위태위태한 분위기를 벌써들 눈치챘을 것이다. 정말 톨리에게 요청할 수만 있다면 책임자를 갈아치워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호텔 밖으로 나가자 마자 이모젠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녀의 눈동자는 화가 난 나머지 불타고 있었다. "당신이 내 급료를 지불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아요. 하지만 근무외 시간엔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예요!" "내가 뭐라고 그랬소?" 그는 차갑게 캐묻듯 말했다. 그의 입은 꼭 다물어져 있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반격했다. "딴청 피우지 마세요. 당신 행동에 다 나타나 있어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내가 저들과 저녁시간을 보내는 걸 더 즐거워하리란 생각은 하지 못하셨나요?" 알렉스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 보행자들과 부딪치지 않게 했다. 그의 눈동자는 가늘어져 있었고 날카롭게 응수하는 그의 입매는 냉소로 뒤틀려 있었다. "당신 기분은 충분히 알겠소. 우리 두 사람 다 그 이유를 알고 있지. 비네가 당신을 얼빠진 듯 바라보는 걸 즐기고 싶다는 얘기시로군" 아무리 상사라지만 정말 진절머리나는 작자다! 이모젠은 더 이상 그의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육체와 닿아 있는 것도 원치 않았다. 화난 몸짓으로 이모젠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의 팔이 잽싸게 이모젠의 허리에 감겼다. 말을 계속하면서 그의 태도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바뀌었다. "잊어버려요. 오늘 저녁은 이대로 즐깁시다. 어때요?" 그는 이모젠과 나란히 보도를 걷기 시작했다. 빌딩과 가로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가을날의 저녁안개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모젠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고 결심했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완전히 항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모젠은 딱딱하게 말했다. "앞으로 근무시간 외에는 제가 자유로운 몸이라는 걸 기억해 주신다면 저도 화해하겠어요" "지금은 그런 논쟁 따윈 하지 맙시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맞추어 걸음걸이를 천천히 하면서 중얼거렸다. "끝도 나지 않을 언쟁 때문에, 아름다운 여성과 지내는 파리의 멋진 저녁을 망쳐버리긴 싫소" 그의 눈동자는 다정했고 미소는 그녀의 마음을 풀어지게 했다. 이모젠도 입술에 저절로 웃음을 띠었다. 그가 이렇게 그녀에게 웃어보일 때면 더 이상 화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맞춤을 하자 바보같이 그녀의 심장은 두근두근거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도덕적이고 엄격한 표정을 지어야 할 텐데, 아니면 적어도 삼가 달라고 그에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모젠은 생각했다. 그의 곁에 서서 거리를 걸어가면서 이모젠은 파리라는 도시가 마치 나비 날개처럼 살며시 마법을 거는 것 같다고 느꼈다. 서서히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카트리나와 약혼 중이고 이모젠이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싸구려 여자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그런 일들을 모두 잊고 이 사랑스러운

도시의

모든

것을

즐기고

싶었다.

하룻밤만이라면

상처입지

않아도

되겠지……. "헤밍웨이가 여기서 시를 낭독했다는군요" 알렉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리에서 그녀를 다정하게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예술가

차림을

사람들과

아코디언

연주자들이

바글거렸다. "또 사르트르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글을 쓰곤 했다고 해요" 두 사람은 카페로 들어갔다. 이모젠은 소음과 담배 연기가 가득 찬 내부로 들어서며 눈을 깜빡거렸다. 거울이 반짝이는 사면이며 놋쇠로 가장자리를 두른 테이블에 등받이 없는 주홍빛 의자를 보니 마치 영화 세트장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빳빳하고 바닥에까지 깔리는 앞치마를 두른 웨이터들 외에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구경거리인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있었다. 해군 베레모자를 쓰고 담배를 피우는 나이든 프랑스인, 수수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비쩍 마른 여인, 하얀 한랭사 드레스를 입은 젊은 아가씨에게 눈길을


던지고 있는 비즈니스 슈트 차림의 중년 남자 … … . 이모젠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알렉스는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곳 노천 카페들은 하루의 마무리를 하기에 좋은 장소지요. 파리 사람들은 원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꼭 예술가처럼 보이는 데다, 이런 곳에 와서 술과 식사를 하고 떠들면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또 스스로가 구경당하는 것을 몹시 즐기는 인종들이죠. 자, 우리도 즐깁시다" 이모젠은 그렇게 했다. 주위의 환경과 그녀의 파트너 덕분에 너무너무 즐거웠다. 오늘 밤의 알렉스는 재치 넘치고 정중하며 아주 매력적이었다. 조금, 아주 조금은 그가 좋아지지 않을까? 아주 잠시, 하루 저녁 뿐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달랬다. 알렉스는 블랙 커피와 최고급 포도주를 주문하면서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정하고 생기가 넘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준엄하고 잘 생긴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소르베를 먹어보지 않겠소? 이곳 것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오만" "그러고 싶지만 배가 터질지도 몰라요" 이모젠은 체면을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알렉스는 빙긋 웃었다. "알아요. 이곳의 풀코스를 먹으면 1 주일 동안은 음식 생각이 나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양파 수프를 들기 시작했다. 바삭바삭하고 맛있는 빵조각이 뿌려져 있고 그 위에 말랑말랑한 치즈 조각이 두툼하게 올려져 있다. 타임 풀로 향을 낸 양고기 구이와 신선하고 아삭거리는 샐러드 뒤에 벨롱 산 굴이 나왔다. 입맛을 돋구는 적포도주가 너무 강했던지 이모젠은 미소를 멈출 수가 없엇고 그녀의 몸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나른함으로 풀렸다. 알렉스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마저도 대답을 다 해 버렸다. "왜 결혼을 하지 않았소?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달라붙는 남자들을 쫓아 버리기도 귀찮았을 텐데" 경고벨이 울리는 것도 이모젠은 깨닫지 못했다. 오늘 밤만큼은 그와 얘기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탁 터놓고 대답했다. "우리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보니까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내 경력을 쌓는 게 더 즐거웠고 적어도 그건 내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거든요" 알렉산더 데벤코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하고 이모젠은 유쾌하게 생각했다. 알렉스는 또 물었다. "유감이로군. 그렇게 생각지 않소?"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의 긴장도 반쯤은 풀어져 있었다. 브랜디 컵을 손 안에서 돌리는 그의 눈동자 색은 정말 녹아내린 황금 같았다. 이모젠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입술을 모으고 좀 더 심각하게 보이려고 했다. 사실은 스스로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우리 부모님은요, 절 임신하셨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하신 거예요.


결혼 이후엔 내내 싸움만 하셨죠. 그분들은 항상 저 때문에 갈라서지도 못 한다고 말씀들 하셨지만 좀 더 일찍 헤어지셨으면 모두한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끄러운 부모가 두 분 다 계신 것보다는 한 분만 있더라도 조용한 쪽이 나으니까요" "요즘도 부모님을 만나고 있소?" 알렉스는 나즈막히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터가 다가와 커피 잔을 채워 주었다. 이모젠은 대답했다. "아뇨, 각자 재혼하셔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셨어요. 두 분 다 외국에 계세요. 가끔 편지는 하지만요. 두 분 모두 별로 절 보고 싶어하진 않으시니까요. 찾아오란 말도 하신 적 없어요. 가끔 잊지 않을 정도로 연락만 하는 정도죠" 그녀는 코냑을 조금 마셨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눈을 크게 떴다. 몸 안이 확 불붙는 것 같았다. 거의 녹아내릴 것 같군, 알렉스에게 활짝 웃어 보이면서 이모젠은 생각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결혼 생활 따윈 아예 관심에서 제쳐놓았군요. 경력에만 매달리면서 애인을 고르는 데에나 열중해 있고" 톨리를 말하고 있군, 이모젠은 느꼈다. 요 며칠 동안 고맙게도 알렉스는 그녀가 새 광고대행사 조직에 대해 내놓은 계획들을 진지하게 검토해 주었다. 이런 태도는 이모젠에게 팀을 이끌어나갈 능력이 있고 새로운 일자리에 걸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신호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톨리가 단지 침실 노리개감으로서 보상하는 의미로 일자리를 그녀에게 준 것은 아니라고 알렉스가 눈치챘을 법도 한데. 하지만 알렉스는 여전히 굳건하게 이모젠과 톨리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톨리에게서 뜯어낼 수 있는 한 모조리 긁어내려는 심보를 가진 여자라고. 이모젠은 나른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녀가 베갯머리에서 톨리를 이리저리 쥐고 흔드는 요부라고 그가 믿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괜히

바보스러워졌다.

톨리는 아주

친절하고

기분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그와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은 눈곱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알렉스 스스로가 혼자서 짜낸 시나리오에 우스워져서 이모젠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코냑을 마구 홀짝거리면서. 알렉스는 말렸다. "그만 마셔요!"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그녀는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가 몹시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것 역시 우습게 느껴졌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컵에 코를 들이박고 계속 마셨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녀의 손에서 컵을 빼앗은 뒤 뜨거운 커피잔을 밀어놓았다. "그걸 마셔요. 데려다 주겠소" 이모젠은 머리를 갸웃이 기울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보기 좋은 입매는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우습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이모젠에게 화가 난 것 같이 보였고 마치 아주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아주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는데, 이모젠은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카페의 모든 손님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저녁 내내 그녀에게만 눈을 못박고 있었다. 마치 이모젠이 아주 특별한 공주님이라도 된다는 듯이. 이모젠의 커다란 눈동자는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그녀가 한 것이라곤 조금 킥킥거린 것 뿐인데. 아마도 때가 안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이었을까? 알렉스는 유연한 태도로 일어서더니 주머니에서 프랑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는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도우러 다가왔다. "걸을 수 있소? 아니면 택시를 부를까요?" 그는 캐시미어 윗도리를 이모젠의 어깨 위에 걸쳐 주며 물었다. 저항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그녀는 그의 남자다운 따뜻한 몸에 얼굴을 비빈 채 만족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걸을 수 있어요. 취하지 않았다는 걸 당신도 아시잖아요. 그저 기분이 좋아서 그래요" "그 말이 반갑군" 그는 딱딱한 어조로 내뱉았다. 잘 생긴 입매는 뒤틀려 있었다. 이모젠의 커다란 눈동자는 갈구하듯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지금 원하는 건 그의 키스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순 없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 새침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기분이 좋아졌다고 해서 아무 남자에게나 입술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게다가 그는 다른 여자랑 결혼할 거잖아, 그 대단한 사촌 카트리나하고. 이모젠은 테이블 사이를 몹시 주의하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바닥에 발을 꼭 딛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가엾게도 속고 있는 카트리나는 자기 약혼자가 다른 여자들을 식사에 초대해서 술을 퍼먹이는 걸, 그 여자들의 마음을 혼란할 정도로 휘저어 놓는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아니면 위험한 여자를 자기 아버지에게서 떼어놓기 위해서는 그 여자와 언제라도 사랑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적어도 알고 있겠지? 이모젠은 금방이라도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거리로 나오자 알렉스는 그녀를 부축하며 곁에 바싹 붙어 섰다. 그러자 울고 싶던 기분은 싹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깊고도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고 발은 보도 위에서 춤추듯 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낭만적인 도시 파리에 지금 있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와 함께. 오늘밤만은 그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망쳐져 버린다.


이모젠의 호텔로 두 사람이 들어설 때 그녀의 눈동자는 빛났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호화로운 복도는 몹시 조용했고 이모젠은 알렉스가 과연 의례적인 작별 키스만으로 오늘밤을 끝낼 것인지가 의심스러워 졌다. 이모젠의 입술은 기대에 부풀어 저절로 열렸지만 알렉스는 그녀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 문을 열어주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술을 많이 마시지 않게 제대로 감독하는 건데 그랬소. 겉보기 만큼 세련된 건 아니로군" 낭만적인 대사는 확실히 아니지, 이모젠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입을 비쭉거렸다. 발이 비틀거렸다. 재빨리 뻗친 그의 팔에 의지하면서 그녀는 그의 가슴에 완전히 기댔다. 그리곤 단추가 열린 그의 윗도리 안으로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주 좋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호흡은 가빠졌고 그 역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갑자기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젠은 고개를 들었다. 목은 활처럼 부드럽게 휘었고 눈은 알렉스의 육감적인 입매에 못박혔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젖혔다. 미간 사이에는 주름이 잡혔고 그의 말은 짧았다. "쓰러지기 전에 앉아요" 침대 곁의 비단으로 겉을 두른 의자에 무너지듯이 앉은 그녀의 눈동자는 혼란스러웠다. 알렉스는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츠를 벗겨 주고 다시 일으켜 세우더니 마치 인형이라도 다루듯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모젠도 그를 도우려 했지만 너무나 기운이 없어서 차라리 가만 있는 게 그를 돕는 것이겠다 생각하고 포기했다. 그녀의 실크 셔츠 단추를 열자 엷은 레이스 브래지어에 감싸인 아름다운 가슴이 드러났고 그것을 본 알렉스는 숨막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이모젠의 뼈는 마치 녹아내릴 것 같았다. 아까까지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약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이모젠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자신의 감정을 속삭이려 했다. 그러나 새로이 알게 된 스스로의 감정이 겨운 나머지 무릎이 꺾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렉스는 가쁜 호흡 사이사이로 중얼거리며 그녀를 안아올려 침대에 눕혔다. 황금빛 눈에 준엄한 표정을 띠고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이모젠의 눈은 커졌다. 나와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구나, 이모젠은 몽롱하게 생각했다. 심장은 갈비뼈 너머로 튀어나올 듯이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느낀 마법 같은 오늘 밤이 결국은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결말을 맺게 되다니. 그러나 레이스 속옷이 모두 벗겨지자 그는 일어서더니 스탠드를 끌어당겨 그녀의 턱을 비췄다.


"알렉스?" 그녀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그에게 팔을 뻗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굽혀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는 검은 머리를 흔들었다. "오늘 밤은 아니오, 아가씨. 난 술 취하지 않은 여자가 좋소" 그는 등을 쭉 펴고 방문 쪽으로 갔다. 그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그녀의 눈물을 자아내는 뭔가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그대로 푹 자요. 장담하지만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 못할 거요" 6 알렉스의 장담도 헛수고였다. 다음날 아침 이모젠은 모든 걸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술기운을 빌어 평소의 자제력을 버렸던 것이나 알렉스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들이. 이모젠은 개트윅 공항의 터미널 빌딩 밖에서 알렉스가 차를 몰고 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희미한 가을날의 햇살 아래 창백한 얼굴로 등을 쭉 폈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는, 비행기 안에서 처럼 파리에서 일한 기록들을 살피는 척 하면서 정중한 침묵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꾸려나가야 할 관계가 두려웠다. 지난 밤 그녀의 행동은 그의 경멸만 더욱 부추겼을 뿐일테니. 위 부근이 고통스럽게 들썩거렸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지? 그런 지긋지긋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기까지 하다니! 난 그런 사람이 아냐, 그것 보다는 분별이 있어. 재규어가 미끄러지듯 그녀 앞에 와서 멈췄다. 알렉스는 내려서 잠깐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트렁크에 둘의 짐을 실었다. 이모젠은 재빨리 조수석에 앉아 자신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불안과 자기혐오는 우선 잠재워 두자. 어젯밤 그녀의 경박한 행동에 대한 어떤 암시도 그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옷을 벗겨내릴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그에게 아주 크나큰 약점을 잡힌 셈이다. 이모젠은 생각을 안 하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알렉스가 미끄러지듯 그녀의 옆 좌석에 앉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공항 도로로 차를 몰면서 악의 없는 가벼운 투로 건네는 그의 말에 그녀는 정신을 집중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직 생각나는 건 알몸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지난 밤의 기억에 당황하며 몸부림쳤던 아침의 일 뿐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망치로 두들기는 것 처럼 머리가 아팠고 아침은 커녕 커피도 마실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 이모젠은 여럿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러 나섰다. 식욕이 없는 이유를, 있지도 않은 비행 공포증이라고 둘러 대면서 그들의 수다에 동참했다. 그러나 알렉스 쪽을 바라보는 건 내내 피한 채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홍당무가 될 것은 뻔했다.


캐시가 이런 말을 꺼냈다. "난 저녁 때까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파리까지 와서 쇼핑을 안 한다는 건 죄짓는 것 같아서요. 캉번 거리의 앙드레아 피스터 가게에 가 보려고요. 너무너무 좋고 값도 적당한 구두가 있다더군요. 비행기표를 바꿀 수 있으면 함께 가 보지 않겠어요, 이모젠? 엄두도 못 낼 값진 물건들을 구경이라도 할 시간이 있다는 게 어디예요?" 아주 끌리는 제의였다. 파리에서 윈도우 쇼핑이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무리해서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알렉스의 말동무로 가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해요" 피에르가 끼어들었다. "스테판은 점심 때 뮌헨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내가 두 아가씨들을 에스코트 하겠소. 우리나라의 여러 풍물들을 보여드리지" 그러나 알렉스가 차갑게 끼어들었다. "이모젠은 파리를 돌아다니면서 시간낭비할 겨를이 없소. 새해까지는 대행사가 완전 가동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월급을 받고 있는 거니까" 예전 같았으면 이모젠은 그의 독단적인 방식에 발끈 화를 냈을 것이다. 그가 모든 일을 총괄해야 하는 상사라 하더라도 이건 너무 지나친 참견 아닌가. 그러나 몸도 마음도 너무나 녹초가 되어 있는 터라 캐시와 피에르에게는 사과의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기회에 할게요" 이제는 알렉스가 물어 왔다. "두통은 괜찮소?" 이모젠은 거의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난 밤의 그 바보짓을 그가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과를 해야 하겠지? 그녀의 바람둥이 같은 짓거리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그는 말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그것만은 그가 틀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이모젠이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술을 너무 마셨다는 것 외에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시늉을 한다면 앞으로 다시 만나더라도 기죽을 필요 없지 않은가. 마른 입술을 축이고 그녀는 간신히 대답했다. "어젯밤에는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많이 마셨죠. 그렇게 취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는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그런 건 포도주 탓이니 사과할 건 없소. 그렇지 않소?" 아픈 기억을 찌르고 있어, 그녀는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녀가 기억한다면 곧장 받아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모젠은 입을 다물고 무시해 버렸다. 대신 정면에 있는 바람막이 차양만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 쪽을 즐거운 듯 바라보며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살펴보는 눈길이 뼈아프게 의식되었다. 아주 쓰디쓴 패배의 장면이군. 이모젠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미웠다. 그러나 그가 백 배나 더 미웠다.


계속 창문 너머만 바라보는 이모젠을 두고 아침식탁에는 묘한 침묵이 두텁게 흘렀다. 이것 또한 그녀를 숨막히게 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알렉스는 속으로 나를 한껏 비웃고 있겠지? 어제 내가 했던 바보짓들을 곱씹으면서 역시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만족하고 있겠지? 고통스런 생각에서 벗어나 간신히 현실로 돌아와 보니 알렉스는 차를 세우고 내리려 하고 있었다. 어느 틈에 윈저 근처에까지 와 있었다. "셰퍼즈부시가 아니잖아요" 당연히 그녀를 집에까지 태워 줄 줄 알았다. "물론 아니지요. 표지판에도 씌어 있으니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필요한 게 좀 있어서.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는 작은 가게로 들어가더니 불룩한 골판지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이모젠은 물었다. "뭘 하려고요?" "키너스턴에 가서 봅시다" 그는 운전석에 앉으며 엔진을 걸었다. "찬찬히 둘러보면 될 거요. 전엔 바깥에서 한 번 밖에 보지 못했지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그의 말동무라는

고통스런

위치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당황스러움과 자기 혐오를 해결짓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옳았다. 몇 주 안으로 이사갈 집을 봐 둔다는 것은 적절한 생각이었다. 어떤 가구가 여분으로 필요한지도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셰퍼즈부시의 아파트는 아주 기본적인 필수품 이외에는 뭘 갖다 두기가 너무 좁았다. "괜찮겠지요? 아니면 오늘 저녁에 중요한 데이트라도 있는 거요?" 그의 어조에 초조함 비슷한 날카로운 기색이 느껴져 이모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네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모젠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았다. 윈저의 거리를 떠나면서 내뱉는 엔진의 으르렁 소리는 마치 알렉스의 기분을 반영하듯 했다. 기쁘지도 않은데 일부러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집을 봐 둔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알렉스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지금으로서는 훨씬 더 좋았다! 키너스턴에 도착하자 알렉스는 벽돌로 둘러싸인 안마당에 재규어를 주차시켰다. 본채는 광고대행사로 쓰이기 위해 개조 중이었다. 망치 소리와 누군가가 유행가를 휘파람으로 부는 것이 들려왔다. 널찍한 방들이 사무소와 스튜디오로 쓰이기 위해 나뉘어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열쇠를 건네 주었다. "공사장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올 테니 둘러봐요. 이번 주까지는 일을 다 끝낼 계획이고 늦춰진다면 그 이유를 따져야지. 월요일부터는 일을 시작하기로 실내장식가를 고용했으니 저 사람들이 그 때까지 어슬렁거리면서 공사를 하긴 원치 않소" 그는 성큼성큼 걸어 멀어져 갔고 이모젠은 몸을 떨었다. 11 월 초순이라 해는 흐릿한 붉은 색으로 낮게 하늘에 걸려 있고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그러나 지금 이 떨림은 나쁜 날씨 탓이라기 보다는 알렉스 때문이었다. 아주 위협적이지 않은가. 그의 오만한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차마 하늘도 도와 주지 않는 걸까? 유쾌하게 휘파람을 부는 공사장 사람들이 스케줄을 못 맞춘다면 정말이지 가엾을 뿐이다. 열쇠를 꽉 쥐고 이모젠은 벽돌담 바깥으로 뻗어 있는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다리가 조금 휘청거렸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않아서 배는 고팠고 이제는 공복감 때문에 머리조차 멍했다. 별채의 문에 열쇠를 꽂을 때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좁은 복도로 들어섰다. 눈에 띄는 문들을 이모젠은 전부 열어 보았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컸다. 침실 두 개에 거실, 욕실, 부엌. 널찍한 집에서 사는 건 즐거운 일이겠지. 또각거리는 부츠의 굽 소리가 아무것도 깔지 않은 바닥에 울렸다. 거실 창문의 깨끗한 부분을 문질러 보면서 앞마당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 알렉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사오기 전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소" 이모젠은 펄쩍 뛸 듯이 깜짝 놀랐다. "그렇게 살금살금 다가올 필욘 없잖아요? 놀라서 죽을 뻔 했잖아요!" 그는 빙긋 웃으면서 다가와 이모젠의 코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 주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빛났다. "오래 전부터 이 방법은 아주 잘 먹혔소. 아름다운 여성한테 살금살금 다가가서 귀에다 대고 '왁!'하면 결국은 전부 내 팔에 안기게 마련이었지" "그 누군 빼고 말이죠!"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알렉스의 반대편으로 멀찍이 떨어져 섰다. 벽난로 쪽 선반을 유심히 살피는 척 하면서 괜히 한 번 열어 보았다. 그는 바로 그녀의 뒤에 있었다. 그의 매혹적인 목소리는 낮고 다정했다. "그래서 내가 전술을 바꿔야 한단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이모젠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자신의 탄탄한 육체 쪽으로 돌려 세우려 했다. 그에게 전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에 애써 저항하느라 그녀의 몸은 굳어졌다. 그의 손이 닿는 것 만으로도 그녀의 맥박은 줄달음질 쳤다. 육체적 매력 때문에 일어나는 이 반응은 정말 불변의 법칙이었다. 또한 인생에 있어서 반갑지 않은 사실이기도 했다. 이것이야 말로 그녀가 단단히 고삐를 잡고 억제해야 할 감정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또다시 그녀에게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확연한 남성적 매력을 써서 이모젠을 톨리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수법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그의 속셈이 얼마나 뻔한지 그녀가 깨닫지는 못했다고 생각한 걸까? 이모젠은 바보가 아니었고 그의 태도가 위협적인 모욕에서 성적 유혹으로 바뀐 이유를 오랜 시간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뼈아프게 의식할 뿐이다. 육체적으로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그것에 관한 수치스런 증거는 두 가지나 있다. 그는 두 차례나 그녀를 제 정신이 아닌 욕구로 몰아세웠으며 두 번 모두 도중에 그만두고 나가 버렸다. 그의 손에 완전히 바쳐진 셈이었는데도 냉정하게 거절한 것이다. 몸을 떨며 그녀는 선반의 문을 쾅 닫아 버리고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빠져 나갔다. 그러자 그는 물었다. "충분히 구경했소? 그럼 본채로 가 봅시다. 여긴 어슬렁거리기엔 너무 춥군" 물론 여기에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자신의 참을성 없음을 책망하며 그녀는 알렉스의 뒤를 따라 나갔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와 잔디밭 사이를 지나가며 그녀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단순히 그가 곁에 있기만 해도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그녀만의 공간인 아파트로 돌아가서 이것저것 만들어 식사를 한 뒤 따뜻한 침대로 기어들어가 메모한 노트를 읽어 보면서 지난 24 시간 동안의 일들을 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모젠이 지금 목마르게 갈망하는 일이었다. 회색 안개가 엷게 깔리고 있었다. 알렉스가 정문을 열어줄 때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더듬어 스위치를 켜자 홀은 불빛으로 흘러 넘쳤다. 그는 앞서서 걸어들어가 모든 문을 열어 젖혔다. 어디나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완벽하고 우아한 가구들로 장식되었고 카펫은 발 밑에서 푹신했으며 중앙난방의 온기가 뼛 속 깊이 스며들었다. 결심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믿어지지가 않네요" 바이올렛빛 눈동자를 크게 뜨며 이모젠은 중얼거렸다. "지난 번 봤을 때는 아주 썰렁했잖아요……. 텅텅 소리가 울리고 선반은 텅 비어 있고 말예요" "그건 4,5 주 전 일이오. 우리 주문대로 맞추느라고 그 사람들이 얼마나 헉헉거렸는지 눈에 보이지 않소?" 알렉스는 만족스런 듯 웃었다. "자, 이리 와 봐요. 위층엔 뭐가 있는지 봅시다"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이모젠은 그를 앞질러 침실이 딸린 객실로 들어가 보았다. 호화롭게 장식되고 연한 노랑빛과 미색을 기조로 한 가구가 딸려 있었다. "톨리의 취향이 참 대단하군요. 모든 게 완벽해요. 지나치게 사치스럽지도 않고요" "이번 일은 아버지완 관계가 없소" 알렉스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호가니 문에 등을 기대면서 말했다.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 그의 태도는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벌써 미국에 돌아가신 게 4 주나 되지 않았소, 잊은 거요?" 그랬었지. 이모젠은 섬세한 화장대를 들여다 보았다. 크리스탈제 화장용기들이 화장대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 집을 산 건 톨리지만 가구를 고르는 건 순전히


알렉스에게 맡겼었지. 알렉스가 카트리나와 결혼해서 이 집에 살게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다. 왠지 너무나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욕실은 이쪽이오" 알렉스는 쪽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행 뒤니 기분 전환을 하는 게 좋겠지요? 차에서 뭘 좀 꺼내 오겠소. 부엌에 있을 테니 준비가 되면 거기로 와요" 길다란 속눈썹 사이로 그녀는 그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차라리 아예 만나지를 말았다면. 결코 느끼고 싶어하지 않던 감정을 바로 알렉스 때문에 맛보게 되었다. 또 그녀를 바람둥이고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는 그의 생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 또한 문제였다. 언젠가, 아마도 빠른 시일 내에 그는 카트리나와 결혼해서 이 아름다운 집에서 살림을 차릴 테지만 그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터였다. 그를 만난 뒤부터 그녀의 감정은 스스로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시절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린애일 때 이미 그녀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면 상처입을 뿐이라는 걸 배웠던 것이다. 이젠 다시금 감정을 제어해야 할 때다. 그렇겠지? 어깨를 쭉 펴면서 이모젠은 산뜻한 초록빛과 흰 색으로 장식된 욕실로 들어갔다. 정장 윗도리를 벗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알렉스 데벤코는 전에 만났던 남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녀가 이곳에서 그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마 그녀에 대한 그의 영향력도 얼마 가지 않아 사그러들 것은 뻔하다. 세월이 지나면 그녀 역시 이 때를 즐거운 추억으로 반추할 수 있게 되겠지. 지금 그녀가 되새겨야 할 것은 그가 다른 여자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뿐이다. 만약 그가 그런 입장이 아니라고 해도 별 차이는 없다. 아마 이모젠을 잘 포장해서 선물로 갖다 바친다 해도 그는 전혀 소유할 마음이 없을 테니까. 어젯밤 그녀가 사랑해 달라고 애원했는데도 그냥 나가 버린 게 그 뚜렷한 증거 아닌가! 10 분 뒤에는 기분이 나아졌고 머리도 많이 식혔다. 윗도리를 팔에 걸고 이모젠은 부엌으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손을 댄다면 큰 소리로 분명히 말해 줘야지. 자기 아버지를 싸구려 금발머리한테서 지키려고 그렇게까지 헌신할 필요 없다고. 아버지를 구한다는 의도 외에 그가 그녀에게 접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마 그에게는 엄청난 구원이 될 거다 … … . 여러 가지 점에서! 그는 커피를 거르고 있었다. 향기로운 커피 내음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따뜻했다. "앉아요. 커피는 금방 끓을 거요. 배고프지요? 나도 그렇소"


그는 아까 가게에서 가져온 상자를 풀었다. 치즈, 빵, 샐러드 재료의 포장을 벗기는 그의 능란하고 길다란 손가락을 바라보자니 지난 밤 똑같은 손놀림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던 일이 떠올랐다. 아주 부드럽게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던 길다란 손가락……. 이모젠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생각을 지우려 했으나 반갑지 않은 기억은 자꾸 그녀의 뇌리를 파고 들었고 그럴 수록 더욱 볼은 물들었다. "좋은 부엌이네요" 그녀는 정중하게 말했다. 자꾸 감도는 긴장감을 떨쳐버리려 하다 보니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샐러드 재료를 씻을까요?" "내가 하겠소." 그는 두 간으로 나누어진 스테인레스 스틸 싱크대로 양상추, 토마토, 셀러리를 날랐다. "내일이면 난 이사를 와야 하니까 빨리 부엌 시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소." 차가운 물소리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고 그는 소나무로 만든 선반을 열어 샐러드 그릇을 찾았다. "호텔 생활은 진절머리가 났소. 또 모든 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감시할 필요도 있고" 상대가 누구더라도 재치있고 재미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이모젠이었지만 알렉스는

완전히

예외였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이모젠은 쓰디 쓰게 생각했다. 따뜻하고 널찍한 부엌을 여유있게 오가는 그의 매력적인 입가에는 만족스런 웃음이 살며시 스쳐갔다. 진한 오렌지빛 리넨 커튼을 쳐서 11 월의 회색빛 풍경을 아늑하게 가리고, 주방 가운데 놓인 소나무 탁자에 접시와 나이프와 포크를 늘어놓는 광경을 보면서 이모젠은 낯익은 불안감이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이모젠에 대한 영향력을 정확히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다. 아마도 그 덕분에 더더욱 우월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자신을 두려워하는 희생물 앞에서 야수가 어떤 쾌감을 즐길 지는 뻔한 노릇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그런 만족감을 선사할 의도는 없었다. 등을 꼿꼿이 펴면서 이모젠은 치즈와 빵을 늘어놓고 커피를 따르며 샐러드 그릇을 내려놓는 알렉스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를 소유하게 놔 두진 않겠다. 좀 더 신중했더라면 어젯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도 곧 이런 사실을 알게 될 거다. 이제부터 둘의 관계는 순전히 비즈니스적으로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모젠은 따뜻한 우유를 저어서 마시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2 주 안으로 아파트에서 나오려고 해요. 곧바로 여기로 이사올 수 있을까요?" 아무런 장애는 없었다. 짐도 얼마 없고 칠은 이사 오고 난 뒤에 해도 될 것 같았다. 그저 그녀는 화제를 돌려 그가 입에 붙은 모욕적인 언사로 다시 그녀를 정복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 뿐이었다. 또 어젯밤의 일은 그녀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도 알려 줘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편에 앉아 빵을 잘라 건네주는 그의 얼굴은 온화했다. 그는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이곳은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살 준비가 갖춰지지 않을 거요. 천정에 습기가 차는 걸 보니 지붕을 보수할 필요도 있소. 배선도 아직은 사용하기가 위험해요. 이사오려면 아직은 몇 달을 기다려야 할 거요. 치즈는?" 이모젠은 입을 꼭 다물고 분노로 불타는 눈동자를 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즉시 이곳으로 옮겨 오라고 제의한 건 바로 그 자신이 아니었던가. 대행사를 세우는 데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을 즉각 처리하자면 그 편이 더 편리할 거라는 암시까지 하면서. 그런데 이모젠이 이미 셰퍼즈부시의 아파트 임대인에게 통보를 한 지금, 2 주일 안으로 아파트를 비워 줘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아무 문제가 될 건 없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는 빵에 버터를 바르며 상냥하게 물었다. 이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모든 문제를 야기할 거라는 걸 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이모젠은 그의 태평스럽고 온화한 태도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위선 떨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략에 빠져 자기를 잃는 일은 다시는 있어선 안 된다. 이모젠은 일부러 사탕 같은 달콤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겠죠" 그리곤 접시의 음식을 먹는 데에 열중한 척 했다. 식욕이 없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그가 그녀의 입맛을 떨어지게 했다는 걸 알려 만족을 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도대체 이 2 주 동안에 윈저 근처에서 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때 알아본 결과로는 사하라 사막에서 고드름 찾기였는데. 알렉스가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내게 말해요" 이모젠은 성급한 대답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마술이라도 부릴 건가요?"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의 미소는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었으나 지금 그녀는 도저히 마음을 풀 기분이 아니었다. 곤혹을 느낀 나머지 치즈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매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였고 그 때마다 이모젠은 말려들어 곤욕만 치렀다. 유일하게 상식적인 행동이란 가능한 한 그가 멋대로 하지 못하게 막는 것 뿐이다. 그녀는 시계를 황급히 들여다 보고 일부러 놀란 듯한 표정을 했다.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걸 몰랐네요. 이제 가야 돼요"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띠면서 일어났다. "바래다 주지 않으셔도 돼요. 택시를 부를게요" 더 이상 그의 말상대를 참을 수 없었다. 마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의 존재를 견딜 수 없었다. 그에게 키스하고 싶고, 또 그를 발로 차 버리고도 싶다. 그녀는 혼란 속에서 두 가지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중요한 데이트로군요, 그렇지요?" 알렉스는 매력적인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 "아버지가 이곳을 비울 때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이 데이트를 하는지 도대체 아버지는 알고 계신 거요?" 이모젠은 얼굴을 붉히고 그에게 지긋지긋하다는 시선을 주었다. 만약 데이트에 대한 그의 예상이 틀렸다는 걸 지적해 준다면 그를 패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의 비난에 대해 틀렸다고 말한다면 믿어 줄까? 지난 밤 그에게 자신을 내어 준 건 바로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모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노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지만 꾹 참았다. 커다란 소나무 옷장 곁에 있는 전화기 쪽으로 다가가면서도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의 손이 뻗어나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나꿔챘고 그녀는 놀란 데다가 아파 숨을 헐떡였다. 아무 기색도 없이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온 그는 이모젠의 귀를 물어뜯을 듯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데려다 주겠소.

게다가

누가

알겠소?

갔다가

당신

주위를

얼쩡거리는

얼간이에게 충고라도 한 마디 던져주게 될지" 알렉스는 감각도 없어진 그녀의 손에서 수화기를 받아 쥐었다. 그녀에게 말을 계속하는 그의 얼굴은 차갑고 준엄했다. "차를 집 앞에 댈 테니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어 둬요" 그에게서 풀려나자 이모젠은 재빨리 손목을 어루만졌다. 멍든 살갗을 비비는 그녀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는 반항의 빛이 떠올랐다. 그도 그녀만큼이나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모젠은 휙 돌아섰다. 명백한 분노의 몸짓이었다. 그가 방을 나갈 때 입매가 굳어져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음식을 냉장고 안에 넣고 있자니 몸이 떨려 왔다. 이모젠과 톨리의 관계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알렉스이니만큼, 톨리가 없는 동안 그녀가 다른 남자와 놀아날 거라는 그의 생각은 달나라에 가더라도 변하지 않을 게 뻔했다. 아마 자기 아버지가 그녀를 잘못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겠지. 그러나 자기 생각이 맞았으면 환호성이라도 질러야 할 텐데 그는 이상하게 격노한 것 처럼 보였다. 알 수가 없는 작자야! 알렉스는 몇 분 뒤면 차를 몰고 올 것이다. 이모젠이 앞으로 살 집에서 본채까지 차를 몰고 오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재킷을 입고 홀에서 기다리는 동안 마음을 좀 진정시켜야 겠다. 그의 악의 섞인 모욕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보여 줘야 겠어. 그러나 알렉스는 이모젠이 접시와 컵을 싱크대에 넣기도 전에 돌아왔다. 그의 존재 만으로도 그녀는 벌써 혼란스러워졌다. "오늘 밤은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소. 밖에 나가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거요.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야 겠소"


7 "난 여기 묵지 않을 거예요" 이모젠은 짧게 말했다. 알렉스를 믿을 수 없다. 그는 산 채로라도 그녀의 가죽을 벗길 작정인지 계속 혹독한 말만 해 댔고 그녀는 벌써 그와 같이 있는다는 고통을 충분히 맛보았다. 그녀가 지금 바라 마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작은 집에서 갖는 자유로운 시간과 평화, 그리고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소" 그는 가볍게 대답하며 분노가 물결치는 이모젠의 눈동자를 느릿하고 온화한 미소로 맞받았다. "직접 보면 알 거요" 그는 옆으로 비켜나 천천히 '그럼 먼저 살펴보시지요' 하는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이모젠은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을 흘긋 던지고 주방을 나서서 복도를 가로질러 큰 홀로 나갔다. 묵직한 현관문을 열 때 그는 바로 그녀의 곁에까지 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충격적인 놀람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조롱하듯 바라보았다. 짙고 어두운 회색 안개가 두꺼운 모포처럼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이모젠의 뒤편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간신히 안개를 뚫을 뿐이었다. 아주 조용하고 몹시 추웠다.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충격으로 무너지기 직전 그녀는 자신을 추스리고 딱딱하게 말했다. "당신이 재규어를 타고 모험을 하지 않겠다는 심정은 이해가 가네요. 그럼 전화로 택시를 부르겠어요" 그가 비웃듯 낮게 킥킥거리자 그녀의 화는 더 끓어올랐다. "이런 날씨에 당신을 태워주고 싶어하는 택시가 있다면 나도 내내 빨간 깃발로 위험 표시를 해 드리지" 물론 그가 옳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그녀를 더 씁쓸하게 했다. 그녀는 유치하게 화를 냈다. "전부 당신 탓이에요!" 발작적으로 오한이 왔다. "만약 내가 안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당신과 같이 있는 괴상한 즐거움을 누리려고 내가 안개를 불렀다고 여긴다면, 당신 머리는 어떻게 된 게 아니오?" 그는 재빨리 받아 쳤다. 그는 한 손으로는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차갑고 축축한 안개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당신이 여기 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몇 시간 전에 집에 도착했을 거예요" 이모젠의 항의하는 목소리는 단단한 그의 가슴에 부딪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윗도리를 입지 않은 그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열기에 그녀는 갑자기 당황해 버렸고 코튼 셔츠를 통해 전해지는 그의 온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이 곳에서 그냥 머물고 싶다, 알렉스의 단단하고 따뜻하며 남자다운 몸에 접촉하고 싶다는 욕구는 너무나 강했다. 그러나 이모젠은 양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밀면서 그를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그의 손가락이 어깨에 파고 들었다.


날카로운 어조였다. "데이트를 위해 모든 게 안락하고 편안하게 준비되어 있는 집으로 말이지! 안됐지만 오늘은 나와 데이트를 해야만 할 것 같소"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 얼음장 같은 적개심이 어린 것을 보고 몸을 떨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제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존경받고 싶었다. 그의 호의를 원했다. 절망적이리만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그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어떻게 알려 준단 말인가? 그의 지나친 상상력이 꾸며낸 완전 허구라고 어떻게 그를 납득시킬 것인가? 이모젠에겐 도덕관념이 없다고 의심치 않는 그의 믿음은, 쉽게 무너뜨리기엔 너무 견고했다. 그리고 사실 납득 같은 것은 지금의 그녀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가까이 느껴지는 그의 따뜻하고 강한 남성적 육체가, 그녀의 어깨뼈를 다정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모젠은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모두가 오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고 그녀의 몸은 부드럽게 그의 품 안에서 휘었다. 그녀의 몸무게가 알렉스에게 실리자 그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자조하듯 쓰디 쓰고 매몰찼다. "내가 유혹되지 않은 건 아니오. 하지만 난 침실 파트너는 스스로 고르는 주의라서" 모욕을 받은 이모젠은 혈관 속에서 분노가 불붙는 것을 느꼈다. 기운이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분노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내 생각엔 전부 탄탄한 증거가 있소" 손에 힘을 풀면서 그녀를 밀쳐내는 알렉스의 입매는 냉소로 일그러졌다. "아버지와의 관계, 비네와 시시덕거리던 것, 당신이 안달하던 오늘 밤의 데이트. 이걸로도 모자란다면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도 증거로 댈 수 있소. 당신은 아주 간청하다시피 했지" 차갑고 날카로운 눈길을 준 뒤 알렉스는 주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모젠은 닫힌 문짝에 축 늘어지다시피 기대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를

경박한

바람둥이라고

믿는

알렉스의

신념을

고쳐주기란

맨머리로

벽돌담

부수기였다. 몇 주 전만 해도 톨리의 도움으로 알렉스에게 진실을 가르쳐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했다. 알렉스가 계속 그녀를 나쁘게 생각하는 한 이모젠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뛰어든 꼴이었다. 그의 달갑지 않은 매력에 홀려 사랑을 애걸했던 일을 생각하면 스스로를 저주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녀는 간신히 문에서 떨어져 똑바로 서면서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편견이나 계산된 모욕에도 불구하고 그의 매력이 점점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 아주 치명적인 문제였다. 육체적 욕구란 아주 엉뚱한 괴물 같아서 그의 눈길 하나,


가벼운 미소, 고갯짓, 말 한 마디에도 금세 불붙기 마련인데다 점점 더 크고 강렬하게 자라났다. 이모젠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천천히 열까지 세었다. 침착한 태도를 다시 유지해서 그와 얼굴을 맞대야 한다. 그의 눈에 나타나 있을 경멸과 대면해야 한다. 저 짙은 안개 속으로 나가면 좀 기분이 나아질까?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이모젠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알렉스는 싱크대에서 더운 물로 접시를 씻고 있었다. 그가 일하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

사이로

목청을

높이려

애쓰면서

이모젠은

말했다.

"차

열쇠

주시겠어요?" 그리곤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물에 담근 채 고개를 돌렸다. 짧게 터뜨리는 그의 웃음 소리는 경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신이 차를 운전하게 내가 놔둘 걸로……." "정신 나간 게 아니에요" 그녀는 차갑게 말허리를 잘랐다. "냉정하게 생각 좀 해 보시죠. 난 그저 트렁크 안에 든 짐을 꺼내려고 할 뿐이에요" 당황하는 그의 표정을 보자니 만족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는 금방 무표정이 되었고 수건으로 손을 닦을 때는 평소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갖다 주겠소. 커피나 더 끓이고 있어요. 이렇게 길고 지루한 밤은 난생 처음일 것 같군" 그가 의미하는 바를 굳이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또 그가 짐을 날라오면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낭비할 것 없이 잘 준비를 마쳐 버려야겠다. 길고 지루한 밤은 혼자서나 지내시라지! 재빨리 손을 놀려 접시를 씻고 건조기에 잘 늘어놓은 다음 커피를 찾아 되는 대로 커피메이커에 넣었다. 알렉스와 싸우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변덕스럽게 태도를 홱홱 바꾸는 것도 진절머리 났지만,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자신에게는 더더욱 짜증이 났다. 그리고 지금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물어 보았다. 하지만 대답을 생각해 낼 틈도 주기 전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복도를 걸어오는 힘찬 발소리도 뒤에 이어졌다. 주의 깊게 이모젠은 표정을 다듬었고 알렉스가 주방으로 들어와 짐을 내려놓을 때에는 무표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모젠은 아주 예의바르게 "고마워요" 라고 말하고 다가가 짐을 들어올렸다. 스스로를 방어하듯이 알렉스와 자신 사이에 짐을 방패처럼 쌓고서 커다란 바이올렛빛 눈동자를 그의 왼쪽 어깨 너머 허공에 고정시킨 채 그녀는 말했다.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자러 갈까 해요. 어느 방을 쓰면 좋을지 알려 주시죠"


"빨리도 도망을 가는군" 이모젠이 파악하기 어려운 뭔가가 그의 느릿느릿한 말투 아래 숨겨져 있었다. 이모젠은 다시금 싸울 의지가 생겨났으나 억눌러 버렸다. 오늘처럼 하루가 긴 날은 이제껏 없었다. 빨리 끝내 버려야지.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짐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짧게 말했다. "내 방을 쓰라고 한다면 당신 기분이 어떻겠소?" 그가 한 말 자체보다 그 뒤에 숨겨진 어조가 무관심을 가장한 그녀의 표정을 무너뜨렸다. 눈썹을 모으고 알렉스를 바라본 순간 이모젠은 그의 눈동자에 불붙은 정열이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위에 얇은 회색 실크 셔츠만을 입고 있던 그녀라 검은 레이스 브래지어가 비쳐서 유혹적인 그림자를 만들고 있을 터였다. 이런 생각을 하자 그녀의 흰 피부는 불타오르듯 했다.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와 닿자 가슴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치심을 느낀 이모젠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분명 알렉스는 지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을 것이다.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뿌리박힌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장은 갈비뼈에 부딪히기라도 할 듯 격렬하게 뛰었다. 그녀의 피부는 마치 그의 손이 닿기라도 한 듯 따끔거렸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깊었지만 무언의 욕구는 미친 듯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둘 뿐이었다. 서로를 날카롭게 의식하면서, 안개 뿐인 세상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두 사람. 방어하듯 들었던 짐은 어느새 이모젠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고 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모든 마법을 깨버렸다. 알렉스의 정열적인 표정은 금세 자취를 감췄고 입매에는 달갑지 않은 듯한 딱딱한 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내뱉듯 말했다. "노란 방을 쓰시오" 작별 인사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알렉스 앞에 있을 수가 없었다. 허겁지겁 짐을 챙겨들고 이모젠은

황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위엄 있는

태도는

커녕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힘들었다. 아까 보았던 노란 방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잠그자 마자 이모젠은 축 늘어져 좀 전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 대한 알렉스의 영향력은 아주 불길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그녀는 그를 원하게 되고 말았다. 그를 만난 뒤부터 감정의 자제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혹시 알렉스를 사랑하게 된 게 아닐까? 그녀의 피는 얼어붙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얼굴을 정리하고 침대로 다가가 깔끔한 노란 이불을 젖혀 보았다. 고맙게도 모든 준비가 다 돼 있었다. 알렉스가 고용한 실내장식가는 빈틈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침대 시트를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또 알렉스와 맞닥뜨리는 불행한 만남을 다시 갖고 싶지는 않았다. 방에 붙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으려니 편안해졌다. 가방에서 잠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은빛 도는 길다란 금발을 빗질하면서 이모젠은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았다. 대행사의 운영을 준비하는 데다가 셰퍼즈부시의 아파트를 나온 뒤에 살 곳을 마련하고. 알렉스와의 뒤틀린 관계는 제외하더라도 문제는 산더미였다. 두 사람은 앞으로 협조해서 일해야 했고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그의 성적 매력에 대해 둔감해 질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는 말이지. 지금 그에게 품고 있는 이 감정을 발전시킨다는 건 문제만 크게 할 뿐이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고 믿지 않는데다 다른 여자와 결혼할 사람 아닌가. 그의 약혼 사실이 이제서야 생각나다니, 이모젠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주 단잠을 잤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엷게 걸린 안개만 빼고는 하늘은 청명했으며 이모젠의 정신 역시 맑았다. 일어나면서 그녀는 알렉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이 방법만이 가장 확실하고 올바른 길이야. 화려하고 두툼한 하얀 양탄자를 밟으며 이모젠은 가방 쪽으로 걸어가 캐주얼 바지와 거기에 어울리는 윗도리를 꺼내 입었다. 파리에 가지고 갔으나 한 번도 입을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도 울 섬유는 구겨진 자국이 나지 않았고 밝은 파랑색이 그녀에게 잘 어울려서 평소보다 눈동자 색깔은 짙고 피부 역시 부드러운 흰 색으로 보였다. 캐주얼하게 보였지만 사실은 무척 억제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긴 머리칼을 목덜미에서 묶으며 이모젠은 결심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접근을 해야 할지를. 만약 이모젠이 알렉스의 영향력에 대항한다면, 의지에 배반해서 반응하는 그녀의 육체에 대항한다면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써야 하리라. 침착함,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고력만이 그녀가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카드였다. 이모젠이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끓이고 있으려니 알렉스가 주방으로 내려왔다. 그는 새로 면도를 해서 아주 생생하고 활기차 보였다. 검은 머리는 샤워한 뒤라 젖어 있었다. 그의 육체적인 매력을 대하자 그녀의 어리석은 심장은 또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렇게 들뜨는 것은 그녀가 원했던 바가 아니었다.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이모젠은 쌀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안개가 걷힌 걸 보니 반갑네요" 커피를 따르면서 침착하게 말하는 그녀를 알렉스는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토스트가 다 됐어요. 식사하면서 찬찬히 얘기 좀 하죠" 그녀는 식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토스트에 버터를 발랐다. 그렇지만 그의 검은 눈썹이 모아지는 것을 놓치진 않았다. 식탁에 앉는 그의 호박빛 눈동자에는 즐거운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무시하고 토스트를 먹는 일에 열중한 척 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그녀의 맥박은 빨라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즐거운 듯한, 한편 주의 깊은 시선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 찬찬히 얘기해야 할 일이란 뭐요?" 그녀는 나이프를 식탁 위에 쨍강 떨어뜨렸다. 등골을 타고 찌르는 듯한 감각이 전해져 왔다. 깊고 매력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그녀를 이런 상태로 몰아넣었다. 목소리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이모젠은 재빨리 자신을 수습하고 정신을 그러모아 알렉스에게 딱딱한 대답을 했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요" "알겠소" 그는 천천히 말했다.

"어떤

관계?

본질적인 걸

말한다면 물론

변화가

필요하겠지요"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한쪽 팔은 의자 등받이에 걸친 채였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매우 주의 깊었다. 그런 그의 반응은 둘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을 그 역시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모젠의 시선은 어느 새 또 알렉스의 육감적인 입매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질문하면서 입가를 살짝 비틀었다. "그래서, 어떤 변화를 결심한 거요?" 그는 그녀를 너무나 똑바로 바라보았으므로 이모젠은 다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뜻하는 변화란 게 뭔지 이모젠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항복하고 자기 아버지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란 데 대한 증거를 또 하나 얻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토스트를 조심스럽게 씹으면서 이모젠은 몰래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뭘 바라고 있는지 알고 있다. 또 그의 계산적인 두뇌가 무슨 일을 꾸미는 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곧 실망하게 될 걸! 침을 꿀꺽 삼키고 이모젠은 그에게 냉랭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공적인 관계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로 같이 지낸다는 게 어떤 건지를 알아 둬야 하겠죠"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커피잔에 손을 뻗으며 그는 이모젠의 눈동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요, 아니면 비유해서 하는 얘기요?" 그의 미소는 완전 조롱하는 듯 했고 순간 그녀는 입술을 벌린 채 그를 응시했으나 고개를 흔들어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었다. "물론 비유하는 얘기죠"


"날

실망시키는군"

그렇지만

춤추듯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에는

실망의

기색이란

털끝만큼도 없었다. 나른하고 즐거운 빛만이 감도는 그의 눈빛이 다시금 그녀를 들뜨게 했다. 이모젠은 커피를 몇 모금 마시며 반격에 필요한 힘을 모았다. 완전 자제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모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관심한 척,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우리 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 얘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몇 주 동안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요" 손바닥에 가득 고인 땀을 바지에 닦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여태껏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 상관 없다든지 감정을 앞세우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와 싸우려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가 그녀의 마음 속에 빚어놓은 혼란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혼란을 억제하는 길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놓고 그런 감정이 있었다는 자체를 무시하는 길이다. 마지막까지 해치워 버려야지, 이모젠은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여러 번 의견이 맞지 않았죠" 그녀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흙탕물을 다시 휘젓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따져 봤자 소용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이전까지의 일들은 전부 묻어 두고 새로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비즈니스적인 관계만 유지하되 될 수 있으면 사이좋게요. 그렇지 않는다면 같이 일을 해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아주 논리적이로군" 알렉스는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입매는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고 그를 본 이모젠은 두 눈 사이에 희미하게 비난의 빛을 띠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함께 일하는 걸 위해서라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 아니겠소? 그러고 나서야 좋은 사이니 어쩌니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입을 꼭 다물었다. "난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소" 그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식기와 접시를 모아 싱크대로 가지고 갔다. 그대로 등을 보인 채 그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 개다가 당신에겐 도덕 관념이 전혀 없다는 걸 내가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런 일들을 전부 카펫 아래에 쓸어버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여기자는 거군" 돌아선 그의 눈은 분노로 거의 충혈되다시피 했고 이모젠은 주춤했다.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고 있어요!" 그녀는 외쳤다. 이전의 결심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비웃음을 띠었다. "내가 틀렸소? 10 분 안으로 난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일 수도 있단 말이오"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고 이모젠은 손을 내려다 보았다. 주먹을 하도 세게 쥐어서 관절이 새하얗게 보였다. 수치스럽게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짓밟아 버리기로 작정한 듯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아무리 변장을 하려 해도 소용없소. 난 속지 않으니까. 난 꿰뚫어볼 수 있소. 그러니 함부로 거짓말 하지 마시오" 이모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언제나 이 사람과는 모든 일이 꼬여 버린다. 하도 변덕이 심해서 종잡을 수가 없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잊어버리려고 했던 그녀의 생각, 아니 적어도 덮어둘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또 실제적인 일 관계에 있어서만은 앞으로 잘 해 나가고 싶었던 희망,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억제하려고 했던 시도 모두가 헛수고였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손을 펼쳐 보이면서 패배의 몸짓을 했다. 마치 이 행동으로 그녀에 대한 혐오가 조금은 잠재워진 듯 알렉스는 약간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한 제의는 논리적으로 물론 옳은 것이오. 서로 신경만 곤두세운다고 나아질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의 미소는 어색했고 재미있다는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찬성이오" "찬성한다고요?" 이모젠의 눈동자는 커졌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노골적이고도 심한 모욕을 이젠 더 이상 않겠다는 뜻일까? 계산된 비난과 육체적 접근으로 그녀를 항복시키려던 시도도 이젠 끝났다는 걸까? "완전 찬성이오" 그는 좀 전의 격렬했던 비난은 접어두기로 작정한 듯 했다. 그녀는 다시 위 부근에 뭔가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무시해 버렸다. "그럼 앞으로 우리 관계는 완전히 비즈니스적이고 사이 좋게 지내는 거요" 그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합시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모젠은 그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도 그의 손아귀에는 전혀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을 놓은 뒤에도 계속 피부가 예민해져 있는 자신을 이모젠은 느꼈다. 따뜻한 손에서 전해지는 육체적 감각을 그녀의 피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 이모젠은 짐을 가지러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노란 방을 둘러보자니 뭔가가 가슴 속에서 콱 막히는 기분이 들면서 이상하게도 목이 메었다. 얼마 안 되어서 알렉스는 이 아름다운 집에 약혼녀를 데리고 오겠지. 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꾸짖으며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문을 쾅 닫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속일 수는 없었다. 현실에 직면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솔직해 져야만 한다. 그녀를 경멸하고 불신하는 남자를,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그녀는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계단을 꼿꼿이 내려갔다. 홀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렉스는 그녀의 손에서 짐을 받아들며 한 쪽 눈썹을 치켜떴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소?" 그는 평범한 어조로 물었다. 재빨리 표정을 감추며 이모젠은 거짓말을 했다. "침실 문에 팔꿈치를 찧었거든요" 그는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좀 더 신중해져야겠소. 행동하기 전에 꼭 생각해 보고 나서 움직이도록 해요. 그러면 많은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거요" 암시하는 말 같은데? 경고일까? 아니면 그저 친절한 충고일 뿐인 걸까? 그녀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비즈니스적으로, 사이좋게. 이제부터 둘의 관계는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집 앞 오솔길을 걸어 어제 주차시켜 둔 차 쪽으로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면서 이모젠은 생각했다. "당신이 아침부터 여기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소" 그는 차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안전벨트를 매면서 말했다. "일이 아주 많을 테니까" 그는 별관 쪽을 고갯짓해 보였고 이모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는 당장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설비와 비품을 주문해야 하오" "네, 물론이죠" 그녀는 스스로도 최고라고 여기는 비즈니스적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집 문제 때문에 치를 떨었다. 제발 살 집을 마련하게 하느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려나? "그리고 우리 관계가 완전히 새로 시작되었으니 말인데 한 가지 이성적인 제안을 해도 괜찮겠소?" 알렉스는 재규어를 주도로로 빼면서 유연한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대답 따윈 기다리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저 별채가 완전히 꾸며질 때까진 당신이 키너스턴으로 옮겨 와 살면 좋겠소" 그와 같이 산다고? 한 지붕 아래서? 이모젠의 머리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사이 좋은 관계 치고는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을 바꾸거나 잠재우기에 결코 바람직한 기회는 아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더라도 힘들 판인데 말이다! 이모젠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떨렸고 자신의 귀로 듣기에도 거의 히스테리 기운이 감돌았다. "제 생각엔 톨리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여긴 그분 집이니까요" 차는 벌써 도심으로 나와 신호를 대기하며 정차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핸들을 톡톡 튕기고 있었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준엄했다. "만약 내가 당신과 한 집에 산다면 아버지가 뭐라고 할지 걱정되는 거요?" 그녀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다. 알렉스는 톨리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에 대한 나쁜 기억을 전부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의 화해는 이모젠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불안정한 상태인 것 같았다. "키너스턴은 톨리의 재산이니까 말이에요. 당신이 날 그 집에 초대했다는 얘기를 적어도 톨리가 먼저 들어 두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모젠은 요점을 말했으나 그는 신호가 녹색으로 변하자 차를 휑하니 발차시켰다. 엔진 소리와 함께 그의 말소리도 그녀의 가슴에 와 꽂혔다. "한 가지 점은 확실히 합시다. 키너스턴을 산 건 나지 아버지가 아니오. 그러니 아버지한테 이런 저런 보고를 할 필요는 없소.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초대할 권리가 있소. 그러나 이모젠, 말해두지만 난 당신을 초대하는 게 아니오" 그는 엄격한 시선을 그녀에게 주었다. "우리의 새로운 관계 개선에 따르면 하등의 문제는 없을 거요. 당신은 방 하나를 할당받을 수 있을 거고 필요하다면 주방 시설은 얼마든지 써도 좋소. 그렇게 되면 당신 집에서 여기까지 출근하느라 매일 매일 몇 시간을 길에다 버리지 않아도 되겠지. 당신은 월급을, 그것도 많이 받고 있으니 우리가 원할 때 항상 대기하고 있는 편이 좋겠소" 그는 말을 끊었다. 이모젠은 모든 걸 이해했다. 집을 산다는 아이디어는 톨리의 것이었지만 집의 소유주는 알렉스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신부를 위해 이상적인 가정을 꾸미고 싶었겠지. 알렉산더 데벤코의 자존심으로 보건대 앞으로 자기가 살 집을 장만하는데 아버지가 돈을 치르게 내버려 두었을 리는 없었다. 그는 카트리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녀에게 줄 선물이니까 남의 돈을 빌리지는 않겠다는 자존심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또 그는 카트리나의 취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실내장식가에게 세세한 지시를 내리는 것만 봐도 확실했다. 그녀를 굳이 데려오지 않고도 침대 시트나 목욕 수건 색깔까지 전부 지정하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어깨가 축 늘어진 그녀에게 알렉스는 말을 건넸다. "아무 반대도 없겠지요?" 아주 공적인 화제일 뿐이라는 듯한 그의 말투에 이모젠은 정신을 차렸다. "그럼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았다. 그와 몇 달 동안이나 한 집에 살게 되었다. 아마 알렉스의 말대로 그녀가 살 별채가 완성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들 것 같았다. 그동안 아마 이모젠은 인내심을 끊임없이 요구받게 될 것이다. 아마 방에 들어설 때마다 미래의 환상이 눈 앞에 펼쳐지겠지. 이 집안의 모든 복도와 정원을 카트리나와 알렉스의 아이들이 웃음소리로 채우고 행복으로 물들일 광경이……. 8 "너무 멋져요, 홀린스 부인!" 이모젠은 서재 문을 등 뒤로 닫으며 크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에 경탄의 눈길을 주었다. 통통하고 회색 머리를 한 파출부 홀린스 부인은 새빨간 리본을 끝맺음으로 트리에 단 뒤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내가 봐도 나쁘진 않네요.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게 장식하라고 데벤코 씨께서 말씀하셨거든요. 페이지 양을 놀라게 해주고 싶다고 말이에요. 뭐 저도 아이가 다섯이고 손자가 일곱 명이나 되니까 크리스마스 트리를 어떻게 장식해야 한다는 것쯤은 많이 익혀 뒀죠" "그런 것 같아요" 감격에 겨워 이모젠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혔다. 알렉스가 그녀를 위해서 트리를 주문해 줬다. 그녀에게 명절 기분을 맛보게 해 주려고. 그녀가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것을 알렉스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을 돋궈 주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한 것이다. 그는 2 주일 전에 미국으로 떠났다. 데벤코 백화점의 사업은 유럽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그가 떠나버리자 이모젠은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키너스턴으로 옮겨온 이래 같이 일하면서 그녀는 그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느라 몹시 괴로운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 개선에 동의한다고 말한 이래 쭉 그대로 행동했고 그와 일하는 것은 이모젠에게는 새롭고도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줄곧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더더욱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크리스마스를 미국에서 톨리와 함께 지내겠다고 했을 때 이모젠은 오히려 그것이 지금의 고통을 덜어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카트리나의 이름을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크리스마스를 약혼녀와 보낼 것은 당연했다. "그럼 일이 끝났으니 전 돌아가 보겠어요" 홀린스 부인은 앞치마를 풀었고 이모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일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이모젠은 서재에서 준비해 온 것을 내밀었다. 카드와 수표를 넣은 봉투였다. 홀린스 부인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러실 필요 없는데. 페이지 양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섣달 그믐날 파티 전까지 며칠 동안은 들를게요. 혹시 그 전에 제 일손이 필요하시면 전화 주시고요" 홀린스 부인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이모젠은 방긋 웃었다. 알렉스가 어디서 어떻게 홀린스 부인같은 귀중한 인재를 데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키너스턴의 안팎 살림을 전부 관장하고 있었다. 이모젠이 이곳으로 옮겨온 다음날로 즉시 홀린스 부인은 일을 하러 왔다. 소리나지 않는 실내화와 청결한 앞치마, 큼직한 플라스틱 가방을 갖고 온 홀린스 부인은 곧 집안의 모든 살림을 파악했으며 모성애 넘치는 가사일에 익숙해있지 않던 이모젠을 금방 감탄시켰다. 이모젠은 홀의 한가운데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 주위를 천천히 돌아 보았다. 반짝이는 금색과 은색의 유리공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 보고 리본을 다시 고쳐맸다. 어렸을 때


그녀는

크리스마스를 싫어했었다. 불행했던

그녀의

가정은

명절만

돌아오면

더욱

신경질적이 되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모두 끝났다. 이제는 크리스마스가 싫지 않았다. 단지 외로울 뿐이었다. 트리에서 몸을 돌려 이모젠은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가서는 후드가 달린 낡은 아노락과 장화를 꺼냈다. 정오가 지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새해 초에 대행사가 오픈할 준비는 이제 모두 끝났다. 지금부턴 그녀가 몰두할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다. 하늘이 캄캄할 정도로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산책을 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큼직한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트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지. 절대로 비참한 기분에 잠기진 않을거야! 바깥은 춥고 조용했다. 하늘은 회색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후드를 푹 뒤집어썼고 지금이라도 집에 틀어박혀 불이라도 피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만 계획했던 일인데. 이모젠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운동을 좀 하는 게 필요해. 또 지금 다른 일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운동 밖에 없었다. 돌담벽에는 문이 하나 나 있었다. 거기로 나가면 몇 마일이고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올 것 같았다. 수풀을 밟으며 이모젠은 나무 사이를 헤쳐나갔다. 본채의 스튜디오는 이제 완공되어 탁자와 타이프라이터와 팩스 기계를 모조리 갖춰 놓았고 이모젠은 즉시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벌써 캠페인에 활용할 아이디어를 몇 개나 생각해 두었고 알렉스도 거기에 대해서 적극 찬성해 주었다. 설날맞이 파티 이후에 새로운 직원들이 오기로 되어 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이모젠과 한 팀을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이고

그녀의

아이디어에 살을 붙여 완벽한 계획을 만들 것이다. 확실히 새로운 일자리는 이모젠에게 딱 들어맞았다. 너무 바빠서 알렉스에게 품고 있는 이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을 제대로 되새겨볼 시간도 없었다. 그녀가 사랑을 애걸했던 그 부끄러운 순간의 기억만 없다면 이 감정을 서서히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망치 소리는 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커졌고 이모젠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음정이 맞지 않는 휘파람 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모젠이 쓰게 될 별채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오늘같은 날 공사를 계속할까?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인데. 불과 몇 주전 알렉스는 말하기를 별채에서 살게 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최근 공사장 인부들은 죄다 야근을 하는 것 같았다. 알렉스와 카트리나의


결혼이 임박한 것이 틀림없다. 이모젠이 그때까지 키너스턴에서 미적거린다면 그들의 보금자리에 방해가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의문이 풀렸다.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몰라. 알렉스가 신부를 집에 데려오는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반갑지

않은 절망감을 느끼면서 그녀는

나무 사이로

몸을

내밀어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녀가 앞으로 살 집의 창문은 활짝 열려져 거기서 불빛이 흘러나왔으며 회반죽이 담긴 양동이가 텅 빈 채 집 앞에 놓여 있었다. 잠깐 집을 둘러보고 갈까? 결국 여기서 살게 될 테니까. 계단을 올라 이모젠은 문을 열었다. 인부 한 사람이 엎어놓은 양동이 위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 앨프!" 이모젠은 인사했다. 깜짝 놀랐는지 차를 엎지른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어이구, 페이지 양이시군요. 괜찮아요. 차는 많으니까. 드시겠어요?" "아니, 고마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잠깐 들렀을 뿐이니까요. 설마 오늘도 일할 거라곤 생각 안했거든요" "그분께선 내일까지 일하라고 하셨는걸요. 뭐,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설날 전에 일을 끝내면 보너스를 듬뿍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앨프는 일어서서 페인트칠을 계속했다. <그분>이란 알렉스를 이르는 말이겠지. 그러니까 내가 하루라도 빨리 키너스턴에서 나갔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거로군! 언짢아진 기분을 숨기고 이모젠은 일부러 명랑하게 물었다. "날짜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앨프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신출내기 페인트공에게 지시를 내리곤 이모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30 일까지는 모든 걸 다 말끔하게 해 놓아야죠. 여기서 살게 될 외국인들이 그때까지는 와야 된다니까요. 그렇지만 상관없어요. 그분은 일에는 엄격하지만 보수는 아주 후하시거든요. 어때요, 한 번 둘러보시겠어요?" 이모젠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에 뭔가가 콱 걸렸지만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비네와 스타인이 여기서 살게 된다고요?" "맞아요. 그분께서 말씀하신 게 그런 이름들인 것 같아요. 정말 둘러보지 않으시겠어요?" "아니에요……. 난 그저 산책을 하다가 들렀을 뿐이에요" 이모젠은 문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으나 가슴 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앨프는 다른 방으로 옮겨가며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바람이 많이 부니까 아주 추울 거예요" 문을 살짝 닫고 돌계단을 내려오는 이모젠의 다리는 덜덜 떨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별채에서 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건 그녀가 아닌가. 예정이 바뀌었다고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담벽에 나 있는 문을 지나가며


이모젠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졌다.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해 보려 했으나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저 별채는 독신 남자 둘이 살기에는 딱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알렉스는 계획을 바꿨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을까? 그와 카트리나가 결혼한 뒤에도 이모젠이 키너스턴에서 지내는 것은 그들 부부에게 달갑지 않을 터였다. 물론 키너스턴에서 사는 것은 일시적인 계획이었다. 별채로 이사갈 수 있을 때까지만. 게다가 비네와 스타인이 살 집을 구했느냐고 이모젠이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알렉스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사이 좋은 관계란 말 뿐이었고 알렉스는 어떻게든 그녀를 그의 삶 바깥으로 밀어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이모젠과 톨리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는데다 피에르 비네에게 주려 했던 책임자 자리를 그녀가 부당한 방법으로 가로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날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거야, 이모젠은 떨면서 생각했다. 전에 알렉스는 자기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과거에 그랬던 사람들이 지금은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가도 얘기했었다. 얼마 전에는 행동하기 전에 꼭 생각해 보라고 충고까지 했었다. 그때 이모젠은 뭔가 비유가 섞인 얘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키너스턴으로

옮겨온

것은

실수였다.

그녀

스스로의

자립을

포기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회사에서 내쫓긴다면 이모젠에게는 갈 회사도, 집도 없었다. 이렇게 상상조차 못할 일을 해치우는 악마같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했을까?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이모젠은 비참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겼다. 매서운 바람이 그녀를 꿰뚫듯 몰아쳤다. 사랑은 논리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그녀 자신에게도 알렉스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불가사의했다. 어떻게 하고 많은 사람들 중 유독 그 남자만이 그녀에게 이렇게 깊은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의 앞에만 서면 그녀는 감정을 전혀 자제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린 시절 내내 주의깊게 쌓아올렸던 자신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비참한 기분으로 이모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어두워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너무 멀리까지 걸어나왔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멋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징조였다. 그러나 같이 크리스마스를 지낼 사람이 없는 이모젠은 가슴에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알렉스를 원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운을 내야지. 피에르와 스테판에게 별채를 할당할 거란 얘기를 알렉스에게서 직접 듣지 않았으니 적어도 아직


여유는 있는 셈이야,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그녀는 키너스턴까지의 먼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벽돌담에 난 문을 지나갈 때에는 완전히 꽁꽁 얼어 있었다. 눈송이는 이모젠의 후드 속으로 마구 날려들어왔고 치마는 완전히 젖어 다리에 달라붙었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낮은 돌담을 넘을 때 잘못해서 다리에 생채기가 났다. 간신히 집에 도착했을 때 이모젠의 손가락은 추위에 완전히 곱아 있었다. 그녀는 흠뻑 젖은 외투를 벗어 스팀 위에 걸쳐 놓았다. 앨프를 만난 이후로 절망에 잠긴 마음은 따뜻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우울한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이건 다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여기려 했다. 그렇게 멀리까지 산책나가선 안 되었다. 날씨가 어떤지 미리 잘 살폈어야지. 또 알렉스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마음쓸 필요가 있었을까?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아까 입은 상처도 치료하고 난로에 불을 피워서 느긋하고 안락한 저녁을 맞아야지. 그렇게 하면 마음 속에서 알렉산더 데벤코를 지워버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알렉스의 생각을 제대로 몰아내기도 전에 전화벨이 세차게 울려댔다. 순간 이모젠은 기대로 가슴을 부풀렸다. 그러나 그것은 톨리였다. 뉴욕에서 건 전화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크고 똑똑히 들렸다. 흠뻑 젖은 장화를 벗으며 이모젠의 마음은 다시 내려앉았다. 분명 알렉스가 건 전화라고 생각했는데. 크리스마스인데 이런 작은 소원조차 이루어지지 않는걸까? "여긴 다 잘 있어요. 호젓하게 크리스마스를 즐기게 돼서 참 기뻐요" 이모젠은 톨리에게 대답하면서 다시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요" 톨리는 웃었다. "우린 가족이 전부 모여서 파티를 하고 있는 중이라오" 이모젠은 갑자기 눈물이 치밀어올라 눈을 감았다. 톨리는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고독이라는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되었다. 광고대행사의 운영에 대해서 이모젠이 자세히 대답해주고 나자 톨리는 말했다. "정말이지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어 근질근질하군요. 새 매장에서 일할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을 휘어잡아야 할 텐데. 그런데 알렉스 녀석이 나보고 그럴 필요 없다는 거요. 너무 피곤할 테니 쉬라나? 하지만 말도 안 되지. 난 아직 한창때란 말이오!" 톨리는 아주 유쾌한 듯 웃었으나 이모젠은 다른 생각에 잠겼다. 톨리를 런던에서 떼어놓으려는 알렉스의 의도가 과연 그것 뿐일까? 돈만 아는 금발미녀의 손아귀에서 아버지를 지키려는 갸륵한 효자로서 그러는 게 아니고?


순간 이모젠은 톨리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톨리가 알렉스에게 사실을 알려준다 해도 이모젠이 시킨 거라고 알렉스가 생각한다면 효과가 없을 거다. 게다가 어쩌면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부자 사이가 나빠질 지도 몰랐다.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잡은 것도 잠시일 뿐 톨리가 작별 인사를 한뒤 덧붙인 말에 이모젠은 숨을 들이켰다. "그럼 다음주 설날맞이 파티 때 봅시다. 참, 잊을 뻔 했군. 그때 카트리나를 데려갈 테니 그애를 위해 제일 멋진 방을 골라놔 줘요" 예상치 못한 건 아니잖아, 이모젠은 마비된 머리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멋진 방을 준다 해도 카트리나는 잠잘 수 없을 텐데……. 알렉스가 같이 있다면……. 멍한 상태로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모젠은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이 신기할 뿐이었다. 알렉스가 약혼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참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소식에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건 없어, 이모젠은 스스로를 달래며 욕조로 들어갔다. 카트리나가 이 집의 여주인이 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스코틀랜드에 사는 친구들에게 찾아가서 크리스마스와 설을 보낼 걸 잘못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서 앞으로 닥쳐올 가슴 아픈 순간을 맛봐야 한다. 사실 아테네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명절 동안 찾아가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키너스턴에서 열릴 설날맞이 파티 진행을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이모젠은 일부러 이를 악물고 즐거운 기색을 띠면서 욕실 벽에 붙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본 뒤 목욕용 로브를 걸치고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다. 혼자서 지내는 저녁인데 옷을 갈아입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냥 이것저것 섞어서 식사를 하고 난로불을 피운 홀의 안락의자에 앉아 트리를 보면서, 전날 윈저에서 산 두툼한 신간이라도 읽는 게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비프 샌드위치는 통 먹을 맛이 나지 않았고 평소엔 좋아하던 작가의 작품이었지만 책은 한 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쾌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장작불은 되레 집안의 적막감을 강조하는 듯 했고 반짝이는 트리에 알렉스의 생각만 간절해질 뿐이었다. 잠이나 자야지, 이모젠은 생각했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그때 현관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키너스턴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몇몇 사람 뿐이었다. 도둑이면 어떻게 하나? 값진 골동품도 여럿 있었고 알렉스가 구입한 명화들도 몇 점 걸려 있었다. 그가 몇 년 동안 모아서 파리의 은행에 맡겨 두었다가 여기로 옮겨오면서 가져온 그림들이었다. 경보 시스템을 작동시켜 두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이모젠은 뭔가 무기가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것은 알렉스였다. 그의 검은 머리와 양가죽 외투는 눈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갑자기 안도의 눈물이 솟아나와 이모젠의 목소리는 떨렸다. "당신이었군요!" "누구라고 생각했소? 산타클로스?" 그의 미소는 뼈까지 녹여버릴 듯 했다. 그저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온 몸에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한 뒤였기 때문에 아직 그녀는 충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건네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난 도둑인 줄로만 알았어요. 당신이라서 너무 기뻐요" "도둑보다는 반가운 환영을 받는 거요?" 외투에 쌓인 눈을 바닥에 털어내면서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알렉스는 여전히 웃음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살펴보는 눈길은 침착했다. 로브를 입은 이모젠의 가냘픈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당신을 놀라게 했나보군" 알렉스는 쉰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생각이 부족했소. 공항에서 당신에게 전화를 하는 건데. 그렇지만 당신을 놀라게 해 주려고 했었지" 그는 이모젠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겁줄 생각은 없었소" 그녀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충격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팔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풀더니 젖은 외투를 벗었다. "여기 불가로 와서 앉아요" 그는 안락의자를 가리켰다. "브랜디를 좀 갖다 주겠소" "아니예요" 이모젠은 고개를 저었다. 연한 빛깔의 머리칼이 얼굴 주위에 늘어졌다. 알콜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알콜보다 더한 효과가 있으니까.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을 또 취하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 아픔과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그녀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또 그 일을 떠올리게 하는 걸까? 좀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하더니, 왜? "젠장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얼굴에서 떼어놓았다. "왜 그러는 거요, 이모젠?"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몇천 마일을 날아왔는데, 당신에게 겁만 주고 말았군. 용서해 주겠소, 이모젠?"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팔목 안쪽을 다정스럽게 감쌌다. 그의 눈동자와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모젠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지금 혹시 잘못 들은게 아닐까? 그녀와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기 위해 알렉스가 미국에서 날아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톨리와 카트리나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아마 런던의 데벤코 지사에서 뭔가 급한 일이 생겨서 온 거겠지. 그래, 괜한 기대 갖지 말고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자. 이모젠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웬일로 왔어요?"


"말했잖소" 그는 나즈막히 말했다. "당신을 만나려고 왔다니까"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그윽하게 응시하다가 그녀의 손을 가져가 입술에 댔다. 양손바닥에 부드러운 키스를 받자 이모젠의 열망과 흥분은 점점 커졌다. 그에게 바싹 끌어안기자 가슴을 통해 그의 심장고동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고 이모젠은 그가 키스하려는 것을 알았지만 막지 않았다. 막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은

유혹하듯

벌어졌다.

입술이

거칠게

밀어붙여지자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몸이 그에게 더욱 밀착됨에 따라 이모젠은 육체적 욕망에 온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렇게도 원하던 사람과 함께 있다니, 그를 사랑하며 그의 곁에 있다니. 마치 꿈 같았다. 그의 떨리는 손길이 이모젠의 로브를 거칠게 풀어젖히고 드러난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이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가슴에 그의 입술을 느끼자 이모젠은 무의식적으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유혹하듯 활처럼 몸을 휘었고 그를 원하는 욕망 앞에서 모든 것은 잊혀졌다. 그의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어느새 완전히 벗겨진 로브를 난로 앞 카펫에 깔고 그녀를 눕혔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알렉스는 한쪽 팔꿈치로 바닥을 짚은 채 곁에 누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장작불이 따스하게 비치는 이모젠의 부드러운 몸을 더듬어 나가고 있었다. "당신을 이렇게 바라보는 꿈을 얼마나 꾸었는지 몰라. 밤마다 미칠 것만 같았지" 그녀의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는 알렉스의 정열적인 입매에 가서 멎었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날 원했나요?" 사랑에 빠진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씩 묻는 고전적인 질문이었다. 알렉스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손이 그녀의 날씬한 허리선을 쓰다듬었고 그가 일깨워준 새롭고도 놀라운 감각 때문에 이모젠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신문에서 읽고 파리에서 곧바로 날아왔을 때 난 스스로가 너무나 혐오스러웠소. 그렇게까지 나 자신이 질투심에 사로잡히다니! 그것도 친아버지를 질투하다니 말이오." 허벅지 안쪽에 천천히 키스를 계속하는 알렉스에게 이모젠은 속삭였다. "톨리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날 믿어야 해요" "알아요, 알고 있소. 내 사랑" 그의 입술은 그녀의 배 위를 방황하면서 열정적인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에게 미안할 뿐이오. 이제 그런 건 다 잊어버립시다"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그것은 다만 옷을 벗기 위해서였다.


다시금 그녀를 끌어안는 그의 목소리는 앞으로의 열정과 환희를 약속하는 그 무엇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려 하자 알렉스는 입술을 겹쳐오며 중얼거렸다. "아무 말도 필요없소. 내 사랑. 아직 우리에겐 할 일이 많소" 9 이모젠은 행복한 꿈에서 서서히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꿈이 아니지, 그녀는 생각했다. 그건 꿈이 아니라 멋진 현실이었다. 알렉스에게 사랑받았던 황홀한 밤. 어제 알렉스는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와서 밤새 그녀와 사랑을 나눴다. 그녀의 감각은 불타올랐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위의 아름다움에 몇 번이고 비명을 질렀다. 침대 속에서 나른하게 몸을 움직이며 이모젠은 아직도 자고 있는 알렉스를 살며시 껴안았다. 지난 밤 그는 몇 번이고 그녀를 사랑했으며 그녀의 애무를 받으면서 격렬한 신음을 내뱉었다. 지난 밤은 마치 믿기 어려운 마법 같았다. 그의 검은 머리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이모젠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샤워 아래 뜨거운 물이 뿜어나오자 이모젠의 머리는 맑아졌다. 큼직한 초록빛 타월로 몸을 감고 나오려니 약간 한기가 들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빨리 일어났다. 그녀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그의 손길은 너무나도 황홀했다. 그는 항상 그녀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원하게 만들었고 어젯밤은 그 감정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그들은 너무나 절망적으로 서로를 갈망했기 때문에 제대로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하긴 아무것도 토론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필요한 것은 사랑의 속삭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톨리와 친구 관계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렉스에게 인식시켰다. 이모젠이 느끼기엔 그랬다. 비록 어젯밤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마치 톨리와 이모젠과의 관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듯 아예 그녀의 얘기를 듣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가슴 부분에 타월을 매듭지어 침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두 손은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채 알몸으로 알렉스가 그녀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육체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정말로 남성다움을 느끼게 하는 힘찬 육체였다. 이모젠의 입은 바싹 말랐고 그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팔다리에서 다시금 힘이 빠져 나갔다. 다정하게 말을 꺼내는 알렉스의 한쪽 눈썹은 활처럼 휘었다. "다시는 그렇게 빠져 나가지 말아요. 당신이 도망가 버린 줄 알았소. 이제부턴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당신이 내 곁에 있기를 바라니까. 자, 이리 와요"


분명 유혹적인 암시였지만 그녀는 따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엔 혼란스런 감정이 어렸다. 그는 옆으로 비켜나며 침대 한켠에 자리를 만들었다. 털로 덮인 그의 늘씬한 다리가 시트 사이로 보였다. "자, 이리 오라니까" 그는 옆자리를 토닥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가 잘못됐는지 얘기해 주겠소?" 이모젠은 다가가 그의 따스하고 안전한 팔에 몸을 맡겼다.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면서 은빛 금발을 쓰다듬는 알렉스의 목소리는 다정스러웠다. "내 사랑, 얘기해 봐요" "카트리나 때문이에요" 이모젠은 중얼거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목에 뭔가가 콱 걸렸다. 카트리나와는 상관 없이 두 사람의 연인 관계는 계속 지속할 수 있다고 알렉스가 말하더라도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애를 달래듯 머리칼을 조용히 쓸어줄 뿐이었다. 이모젠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설마 벌써 간밤의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약혼자를 배신한 것에 스스로를 책망하려는 걸까? 용기를 내어 이모젠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그녀의 약혼자잖아요" 그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감정을 갖게 된 자신이 미웠다. 절망적으로 그를 필요로 했고 결국은 거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울지 말아요" 그는 이모젠의 젖은 볼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소리죽여 울고 있었는데도 알렉스는 그녀의 눈물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가 뉴욕에 갔던 건 약혼을 파기하기 위해서였소" 그녀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유의 몸이다. 그를 사랑하는 데에 더 이상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사랑이 넘치고 있었다. "약혼이란 처음부터 해서는 안 되는 거였소. 우리보다 부모님들께서 더 원한 거였지. 난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으니까. 아버지는 약혼을 몹시 반가워하셨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더 이상 마음쓰지 말아요. 여태까지 난 한 번도 일생을 함께 보내고 싶은 여성을 만나지 못했었소. 그렇기 때문에 카트리나와 결혼하는 건 어느 모로 보아도 아주 상식적인 결정이었지. 그녀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침착해서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이상적인 아내가 될 사람이오. 그렇지만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혼을 그렇게 오래 끌었던 거요. 또 우리 둘 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고"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는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내려오자 이모젠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녀를 부드럽게 침대에 눕히면서 알렉스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내게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당신과 언제까지나 함께 살고 싶소" "연인으로서 말이에요?" 이모젠은 입술을 떨며 물었다. 이건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물론 그녀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싫증을 내서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그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에게 의지하는 정도도 커질 것이었다. 만약 그를 잃게 된다면 그 상처는 더더욱 커질 테지. 알렉스는 그녀의 턱을 주먹으로 쓸어 주었다. "당신은 회사 일에도 힘써야 하니까 여기서 계속

살아줬으면

하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당신을 안지

못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몰라" "그래서 별채를 피에르와 스테판에게 주기로 했군요?" 이모젠은 일부러 화가 난 듯 주먹으로 알렉스의 넓은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자립을 원한다는 걸 완전히 무시하려는 거죠?" 이제 모든 걸 알 것 같았다. 왜 별채를 그들에게 주기로 했는지. 알렉스는 벌써 그녀를 애인으로 만들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알렉산더 데벤코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남자니까! 이런 생각이 들자 이모젠은 갑자기 몸을 떨었다. 그녀가 떠는 것을 본 알렉스는 보랏빛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벌써 알고 있었군.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결혼으로 올가미를 씌울 생각은 없으니까. 자, 잊어버려요" 알렉스는

갑자기

그녀를

침대에서

안아올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그렇지,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소" 크리스마스! 이모젠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창가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에게 결혼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남은 생애동안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가 인생에 가져다준 빛과 기쁨을 함께 영원히 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카트리나와의 약혼은 사실 오랜 기간 여러 가족들에 의해 공인된 사실이 아니었던가. 또 전에 이모젠은 부모님의 불화 때문에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혹시 알렉스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더더욱 그녀를 애인 상대로 적격이라고 생각한게 아닐까? 그러나 그가 묵직한 노란 커튼을 젖히자 이모젠은 잡념을 젖혀두고 눈 앞의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방에 함박눈이 쌓여 있었다. 이른 아침 햇살이 살짝 얼어붙은 눈에 반사되어 핑크와 황금빛 광채를 만들었다. 알렉스는 말했다. "완벽하게 아름답군. 동화에나 나올 듯한


크리스마스 아침이오.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된 경치로 생각합시다" 바보같이 이모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하느님도 두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는 거야.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지내는 크리스마스니까. 특별한 날이니까.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될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녀는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은. 알렉스가 말했다. "옷을 입어요. 나보다 먼저 아래층에 내려가서 아침 준비를 한다면 보상을 하겠소." 그녀는 알렉스의 따스한 분위기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이모젠은 부드러운 크림빛 바지와 헐렁한 진자줏빛 털스웨터를 골라 입고 엷은 금발은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두었다. 눈 주위에 살짝 화장을 하고 부드러운 핑크빛 립스틱을 발랐다. 몸치장에 그렇게 시간이 걸린 건 아니었으나 내려가 보니 알렉스는 벌써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방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이모젠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눈은 열망으로 빛깔이 짙어졌다. 감정이 깃든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느림보로군. 하지만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소. 자, 저 상자를 풀어 봐요." 자그마한 상자는 부엌 탁자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상자 위에 장식된 주홍색과 은색 리본은 정작 상자보다도 더 큼직했다. "자, 풀어 봐요." 알렉스는 이모젠이 리본을 보고 생긋 미소짓자 재촉했다. 상자를 연 순간 이모젠은 호흡을 멈췄다. 타원형의 아름다운 자수정이 빛나는 금사슬 끝에 달려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알렉스는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어 넣으며 스스럼 없이 물었다. 하얀 벨벳이 깔린 상자에서 목걸이를 들어올리며 이모젠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사랑이 넘치고 있었다. "아름다워요."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지만 난 당신한테 드릴 선물이 없는걸요." 이모젠은 미안한 감정을 느꼈으나 알렉스는 그냥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달걀을 휘젓던 스푼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이리 와요, 아가씨." 다가간 이모젠에게서 목걸이를 건네 받은 알렉스는 그녀를 돌려 세우고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딱 맞는 색깔이라 산 거요. 물론 당신 눈동자보다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없지만." 파리에서 꽃장수에게 산 장미를 그녀에게 건네줄 때도 그는 비슷한 말을 했엇고, 그날 저녁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벅찬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들어 이모젠은 알렉스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알렉스는 한 손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낮게 말했다. "당신에 내게 준 선물에 비하면 목걸이는 시시한 거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내게 선물로 줬잖소.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인 거요."


그의 품에 너무 오래 안겨 있었는지 뭔가 타는 냄새가 났다. 이모젠은 그의 팔에서 몸을 뒤틀어 빠져나와 프라이팬을 불에서 들어올리며 밝게 웃었다. "아침식사를 망쳐버리기엔 너무 배가 고파요." 이모젠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아무것도 망쳐질 게 없을 거요.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말이 옳았다. 완벽한 하루였다. 저녁 식사 때 이모젠은 샴페인을 마시며 하루를 꿈같이 되새겨 보았다. 난로불이 기분좋게 그녀의 곁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두 사람은 두툼한 아노락을 걸치고 장화를 신은 뒤 요정의 나라처럼 반짝이는 바깥으로 나갔다. 빈터에 괴물 같은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고 사소한 의견에 차이를 보이자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눈에 젖게 되자 두 사람은 서로의 팔에 자신을 맡기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눈보라 속에 어린애처럼 손을 잡고 집까지 뛰어 돌아오면서 이모젠은 오늘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보다 더 자신이 젊어진 것 같았고 근심걱정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만약 훗날 알렉스가 그녀에게 싫증을 낸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나 논리 못지 않게 인생에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알렉스에게. 두 사람 모두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목욕을 할 시간이 되자 알렉스는 같이 목욕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진담이 아니죠?" 이모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각하게 물었다. "뜨거운 물을 욕조 두 곳에서 동시에 쓴다고 나쁠 건 없잖아요?"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장난스런 웃음이 감돌았고 그가 으르렁거리며 대답하자 그 미소는 더욱 더 빛을 발했다. "이 한심한 아가씨!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한다는 자체가 내겐 아주 나쁘고도 고약한 거요." 목욕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붉은 포도주를 조금씩 나눠 마시고 저녁 준비를 했다. 이모젠이 혼자서 먹으려고 사 두었던 닭고기는 양이 적었으나 알렉스가 냉장고에서 꺼낸 훈제 연어에 홀린스 부인이 만들어 놓은 민스 파이를 곁들이니 보충이 되었다. 알렉스는 홀에 또 불을 피우고 거실의 정방형 탁자를 난로와 트리 사이에 갖다 놓았다. 샴페인 병을 따는 그의 시선은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모젠은 그를 위해 아름답게 차려입은 것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알고 만족했다. 예전 주얼스 홍보파티 때 딱 한 번 입었던 연회색 시폰 드레스는 그녀를 매혹적이고 신비스러워 보이게 했다. 디너 재킷을 차려입은 알렉스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근사해 보였다.


통나무의 마지막 조각이 불타버린 뒤 부드러운 잿더미 위에 약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알렉스는 테이블 너머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내 사랑. 침대로 갑시다." 이모젠은 일어섰다. 긴 드레스 자락이 마치 신비스럽게 자라난 이끼처럼 그녀의 날씬한 발목에 부드럽게 휘감겼다. 그녀는 알렉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내맡겼다.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까지라도 가고 싶고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다.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다.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며칠이 흘러갔다. 그렇지만 너무 빨리 지나가기도 했다. 마치 무심히 펼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이모젠은 설날맞이 파티를 대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워

두었다. 이

파티는

또한

광고대행사의 오픈과 데벤코의 런던 지사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초대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모든 것은 완벽했고 파티를 위한 일손도 전부 미리 고용해 두었다. 피에르 비네와 스테판 스타인은 별채에 머물면 될 터였다. 그때까지는 별채의 공사가 전부 끝나 있을 테니까. 그건 시간 문제였다. 캐시 에임즈는 파티날 밤은 여기 머무르겠지만 다음날이면 애스콧에 있는 숙모 댁으로 옮겨가면 된다. 묵고 갈 다른 손님은 런던의 데벤코 매장을 설계할 건축가 톰 피셔와 모니카 부부였다. 톰은 톨리의 개인적인 친구이기도 했다. 전부 완벽하군. 중얼거리던 이모젠은 방 할당 문제에 부딪치자 이마에 주름을 잡고 생각에 잠겼다. 카트리나가 오기로 되어 있었지. 그때 알렉스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몸을 굽혀 귓바퀴에 키스를 해 주고는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소?" 그는 별채의 공사가 끝났는지 점검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에게선 향기로운 목재의 냄새와 남자다운 향기가 풍겼다. 이모젠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톨리가 전화하셨는데 카트리나도 설날맞이 파티에 올거라고 들었어요."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일 카트리나와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알렉스가 말했던 대로 약혼 파기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던 걸까? "그녀 어머니 스타샤와 함께 올 거요." 알렉스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말투였다. "그런데 무슨 걱정을 하는 거요?" "방이에요."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머리카락을 손에 감아 빙글빙글 돌렸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더 좋다고 알렉스가 말했으므로 크리스마스 이후 계속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 두었다. "충분하지, 뭐." 알렉스는 양가죽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고 이모젠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리스트를 슬쩍 넘겨다 보았다.


"어디 봅시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서 번쩍 들어올려 자기 무릎에다 앉혔다. 리스트를 살피는 그의 눈길에는 관심이라곤 없는 듯 했다. "비네와 스타인에게 방을 하나씩 줬군. 둘이서 한 방을 쓰게 하고 캐시 에임즈에겐 작은 1 인용 침실. 아버지와 피셔 부부에겐 각각 방을 드리고 카트리나와 스타샤는 당신 방을 쓰면 되지 않소? 간단하군." 그는 세차게 그녀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벼댔다. 이모젠은 딱딱하게 말했다. "카트리나가 내 방을 쓰면 난 어디서 자나요?" "물론 내 방이지." 알렉스는 그녀의 귓볼을 살짝 물었다. "어디겠소?" 이모젠은 침묵을 지켰다. 숨쉬기가 답답해졌고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그는 이야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헐렁한 스웨터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그의 손바닥이 가슴을 완전히 덮어버리자 이모젠은 격한 열망에 사로잡혀 버릴 것만 같은 충동에 모든 것을 잊어버릴 지경이었으나 간신히 그의 손을 떨쳐 버리고 일어섰다. "윈저에 있는 호텔에다가 캐시를 위해 하룻밤 방을 얻어 줘야겠어요. 기분 상해 하진 않을 거예요." 이모젠은 침착하게 말했다. 알렉스의 눈동자에 감도는 조롱이 얄밉게까지 느껴졌다. "우리가 한 방을 쓰는 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선 말이에요." "어떤 상황?" 이제 알렉스의 황금빛 눈에는 조롱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의 눈매는 가늘어지고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카트리나와

파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톨리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분은……." 이모젠은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톨리가 그 결혼을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를. 장밋빛 꿈이 깨져 버린 데 대해 톨리가 얼마나 실망했을까를. 그렇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낸다면 알렉스는 죄의식에 빠질 것이다. 일어선 알렉스는 몹시 화가 난 듯이 보였다. "당신과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게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지?" 이모젠의 눈은 쇼크로 휘둥그래졌다. 예전에 싸우던 기세로 다시 되돌아간 거야! 그의 눈동자엔 격렬한 비난이 나타나 있었다. 설마 아직도 내가 톨리와 잤다고 생각하는 걸까? 설마! "아니예요." 그녀는 가냘프게 부정했다. 그가 그렇게 여기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조차도 싫었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럼 증명해 봐!" 알렉스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때릴 듯한 기세였다. 턱에는 힘줄이 불끈 솟아 있었다. 격한 혼란을 느낀 이모젠의 눈에는 눈물이 솟아났다. 자신이 이렇게 약해졌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자신이 싫어졌다. 알렉스는 그녀가 감정을 드러내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 관계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요?"


수치스러워? 그를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이렇게 자연스런 감정이 어떻게 수치스러울 수가 있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목 아래쪽에서 낮은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힘차게 안았다. "우리 감정을 숨기진 맙시다. 절대로! 당신이 내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주길 바라오. 난 그 사실이 자랑스럽고 당신도 날 사랑한다는 걸 자랑으로 여겼으면 하오." 이 언쟁 뒤에는 그와 한 침대를 쓴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이상 반론을 낼 수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모젠은 약혼 파기로 상심하고 있을 톨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방을 안내해 줄 때쯤 이모젠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와 알렉스가 한 방을 쓰는지 아닌지 밤중에 살펴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톨리는 그녀를 미워할지도 모른다. 약혼이 깨진 건 전적으로 이모젠 탓이니까. 톨리는 아들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건 바로 가족의 의무를 저버린 잘못된 처사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사실 알렉스는 이모젠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약혼할 때부터 약속하기를 만약 둘 중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라도 파혼을 원한다면 상대를 자유롭게 해 주자고. 그점에서는 쌍방에 전혀 문제가 없는 셈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방이네요!" 이모젠이 방문을 열어 안내하자 모니카 피셔는 탄성을 질렀다. 공작꼬리의 푸른색과 연녹색으로 장식된 방이었다. 큰 창문 두 개가 집 뒤쪽의 정원 쪽으로 나 있었다. 북쪽 담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다. 그녀의 남편 톰은 우아한 모니카보다 몇 살 많아 보였다. 그는 침대 발치에 짐을 내려놓고 시원스레 말했다. "알렉스는 항상 취미가 훌륭하니까. 한 10 년 전에도 매장 장식을 책임지고 했었지요. 비즈니스 못지 않게 그쪽으로도 감각이 있거든." "여자한테도 그렇죠." 모니카는 덧붙여 말하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이모젠을 바라보고 웃어 보였다. 더 이상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이모젠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푹 쉬세요. 1 시간 반 뒤엔 홀에 차 준비를 해 놓겠어요." 그들에게는 침착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그녀의 감정은 몹시 혼란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녀와 알렉스의 관계를 알았을까? 피셔 부부는 겨우 10 분 전에 톨리와 카트리나 모녀와 함께 여기 도착했을 뿐인데. 알렉스와 그녀의 감정은 누가 보더라도 눈치챌 수 있는 것이었나? 그렇지만 점심 전에 도착한 피에르와 스테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는데. 피에르는 여전히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아서 알렉스의 험상궂은


표정까지도 끌어냈는데! 만약 그의 보스가 새 대행사의 매니저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피에르가 알았다면 당장에 입에 올리지 않았을까?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면서 이모젠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피에르와 스테판은 오후를 스튜디오에서 보냈고 지금은 별채를 둘러보러 간 참이었다. 조금 뒤면 홀린스 부인이 준비한 영국식 차를 맛보러 돌아올 것이다. 파티 음식을 준비하려면 고용인들 모두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쁠 테지, 이모젠은 한숨을 쉬었다. 캐시가 탄 기차는 5 시가 넘어야 윈저에 도착한다고 했다. 캐시의 마중은 알렉스가 나간다고 했지만 이모젠은 자기가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이도 아버지와 좀 더 많은 시간을 갖는게 좋겠지. 아까 도착했을 때의 톨리는 몹시 지친 표정이었다. 홀에 내려간 이모젠은 너무나 바빠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불을 피울 나무가 더 필요하지 않은지를 살펴보느라 그녀는 누군가 팔을 잡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자 너무나 놀랐다. 카트리나가 소리 내지 않고 그녀의 곁에 미끄러지듯 와 있었다. 마치 뱀 같군, 이모젠은 생각하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카트리나는 사과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묘하고도 부드러웠다. 날씬한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뱀 같은 이미지가 한층 더 짙어 보였다. 이모젠은 고개를 저으며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카트리나는 이모젠에게

아주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전만

해도

약혼자였던

남성의

애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또한 알렉스와 카트리나의 사이에도 적개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아주 소중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여겼고 방을 보여주는 동안에도 톨리와 스타샤와 더불어 아주 반갑다는 듯이 대화를 나눴다. "내려오시는 걸 몰랐네요." 이모젠도 사과를 했다. "딴 생각을 하느라고요. 홀린스 부인이 종일 내내 자랑한 만큼 멋진 차 대접을 할지 기대가 되어서……. 토스트와 뜨거운 잉글리시 머핀에 꿀을 곁들여서 차를 마시는 걸 좋아하세요?" 그녀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카트리나의 초록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차가운 기색 앞에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모젠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5 분 정도만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말씀 드릴 게 있는데요." 카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말소리였다. "서재가 어때요?" 그녀는 앞장서서 홀을 가로질러갔다. 여전히 매니큐어한 손으로 이모젠의 팔을 잡은 채였다. 남의 양해를 구하지도 않는 태도에 놀라서 이모젠은 걸음을 멈췄다.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 지금 좀 바빠서요." 무례하게 보이고 싶진 않았다. 절대로. 하지만 카트리나의 미소 속에 담긴 뭔가가 이모젠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겨우 반 시간 전에 인사를 나눈 그녀가 이모젠에게 급히 할 말이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나중이면 너무 늦어요." 카트리나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시겠지만 난 당신한테 호의를 갖고 있어요. 난 항상 그랬죠. 처음 본 순간 이 사람이 좋아질지 아닐지를 알 수 있어요." 스스로의 묘한 성격에 자신도 놀랐다는 듯 그녀는 눈썹을 치켜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당신이 더 이상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알아 두세요, 앞으로 더 이상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다는 걸. 흥미 없는 얘긴가요?" 10 이모젠은 카트리나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방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느니 여기 서서 장난을 거는 게 낫다고 여겨서 이러는 거겠지. 카트리나와 함께 서재로 들어서면서 이모젠은 생각했다. 자, 이제 카트리나는 어떻게 할까? 깔깔 웃으면서 자신의 장난을 시인할까? 카트리나의 묘한 말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서재 문은 닫혔고 카트리나는 대형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이모젠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시간이 조금밖에 없어요." 이모젠은 말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카트리나는 너무 엉뚱한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모젠은 앉았다. 적갈색의 숱 많은 머리칼과 크림빛 피부, 신비로운 초록색 눈동자의 카트리나는 어디에서나 눈에 확 띠는 미인이었다. 알렉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가 날 사랑한다는 건 정말 자랑스런 일이야, 이렇게 생각하니 이모젠의 입술에는 따스한 미소가 감돌았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아마도 날 찾고 있을지도 몰라……. 카트리나가 말을 꺼낼 때도 이모젠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알렉스와 내가 약혼했다는 건 알고 있겠죠. 부모님들께서 사업적인 이유로 원하셨기 때문에 말이에요." "그 얘긴 들었어요." 이모젠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파혼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불가사의한 미소를 짓는다는 건 좀 이상해 보였다. 극히 친밀한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이라 해도. "물론 알렉스는 당장이라도 나와 결혼할 작정이었죠." 카트리나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정열적인

남자들이란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그때 난 너무 어렸어요. 다른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했죠. 그렇게나 빨리 가정에 매이는 걸 난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와 그이 아버지의 중재로 약혼 기간이 그렇게 길어지게 된 거예요. 물론 난 언젠간 그이와 결혼할


생각이었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이는 아주 잘 생겼고 돈도 많죠. 우리의 재산이 합쳐지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이는

정계에

진출했을지도 몰라요." 이모젠은 편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으려 했다. 그녀에겐 할 일이 많았지만 카트리나는 무의미하게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카트리나가 알렉스의 얘기를 하는 말투도 이상하게 거슬렸다. 이모젠이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카트리나는 자신의 풍성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리더니 연극배우조로 말했다. "하지만 결국 난 약혼을 깰 수 밖에 없었죠. 얼마나 그가 상처입을지, 또 부모님들께서 얼마나 상심하실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지속시킬 순 없었어요. 절대로 그런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죠." 알렉스가 한 말과는 다른데, 이모젠은 생각하면서 카트리나를 가엾게 생각했다. 물론 이 약혼이 깨지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누가 보더라도 이모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카트리나가 말하는 내용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이모젠을 단지 알렉스의 동료이자 오늘 파티의 여주인으로만 알고 있을텐데. 어째서 이런 얘기까지 하는거지? 알렉스를 <그런 남자>라고 부르는 건 더더욱 온당치 못했다. 정신을 수습하면서 이모젠은 카트리나에게 불신의 눈초리를 던졌다. "이젠 정말 가야 해요. 하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을거예요. 내 생각에 알렉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거고 파혼에 대해서 당신을 책망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공항에서부터 계속 친밀한 두 사람을 보고 솔직히 이모젠은 상당히 놀랐다. 이모젠은 일어서려 했으나 카트리나가 놀랍도록 힘찬 손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다시 의자에 앉혔다. 카트리나가 혹시 제정신이 아닌걸까? 이모젠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곳의 손님이었다. 그러나 말을 잇는 카트리나는 전혀 미친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잘 들으세요. 이건 당신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녀는 천천히 이모젠을 놓아주며 고개를 젓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하긴

참 어려운

일이지만요.

왜냐면

아직도

알렉스에게 일종의 우정을 갖고 있거든요. 하지만 참 여러가지 일이 있었죠."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당신을 만나니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눈동자의 초록빛이 갑자기 엷어졌다. "누군가에 대해서 얘기를 듣는 것과 그 사람을 직접 만나는 건 정말 다른 일이잖아요?" 이모젠은

카트리나를

응시했다.

커다란

보라색의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카트리나는 어디서 내 얘기를 들었을까? 새 광고대행사 얘기를 꺼내면서 나온걸까?


하지만 그게 지금 이 얘기와는 무슨 상관일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이모젠은 끼어들었지만 카트리나는 안됐다는 듯 웃어보였다. "물론 그렇겠죠. 그러니까 제가 지금 설명드릴게요." 카트리나는 부드러운 회색 가죽 소파에 편안히 기대면서 반쯤 눈을 감았다. "알렉스와 처음 약혼했을 때 난 그이를 좀 두려워했어요. 하지만 그뒤 내가 좀더 컸을 땐 자신감을 갖게 됐고 거절할 건 당당하게 거절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난 말했죠. 약혼반지를 낀다고 해서 그이와 잠자리를 같이 해야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이는 전혀 들어주지 않았어요. 제 말뜻, 아시겠죠?" 이모젠은 눈을 감았다. 질투심이 바늘처럼 가슴을 후벼 와서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녀도 알다시피 알렉스는 너무나 육체적으로 매력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약혼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카트리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알렉스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감정이 없어도 육체적으로 반응할 수 있으니까. 36 세가 되도록 알렉스가 육체적 관계 없이 지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의 걷잡을 수 없는 거친 성격을 겪고 난 뒤 난 생각했어요. 물론 그는 필요할 때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아주 위험한 사람이죠. 오, 물론 그이가 날 부당하게 취급했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결혼하면 엄청난 재산이 생긴다는 걸 그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카트리나는 날씬한 손을 허공에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난 그가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업적으론 물론이고 그 밖의 일들에서도요. 난 그런 방식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그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결심했어요. 바하마에 있는 친구 집으로 가서 모든 걸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했죠." 알렉스의 말과 결과는 같지만 과정이 다른 얘기를 들으면서 이모젠은 더더욱 카트리나가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이모젠은 알렉스를 사랑했다. 사랑은 믿음 위에서 가능한 법이다. 카트리나의 얘기는 허영심이 넘칠 뿐이었다. 약혼을 깬 건 알렉스가 아니라 자기 쪽이라고 떠벌이기 위해서. 그렇지만 다음의 얘기가 이모젠의 귀에 파고 들었다. "파혼하기로 결심하고 난 뉴욕의 어머니 집으로 갔어요. 크리스마스 때 가족파티가 열린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당연히 알렉스는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 말이죠. 난 그에게 얘기를 했어요 … … ." 카트리나는 망설이는 듯 했다. "그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충분히 상상이 가시겠지만. 그이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카트리나는 눈을 감았다. 마치 고통스럽기라도 하다는 듯이. 이모젠은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이 방에서 나가버리고 싶었다. 카트리나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의지에 거역하기라도 하듯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인

이렇게

말했어요."

카트리나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서

빠져달아나려 한다면 내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걸 반대하지 않겠군. 실은 거기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 있소. 꾀많은 금발 미녀가 아버지를 완전히 손아귀에 붙들고 있는데 더이상 그 일을 두고 볼 수 없소. 그녀가 얼마나 천박한 바람둥이인가를 아버지에게 폭로해야겠어. 난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여서 마침내는 내게 쏙 빠지게 만들거요. 아마 그러면 노친네도 눈을 뜨시겠지. 아버지가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하시도록 내버려 둘 순 없소. 사실 벌써 몇 주전에 해치웠어야 하는 일인데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미루고 있었지. 그렇게 덫을 놓는 건 내 취향이 아니고, 또 당신 볼 낯이 없었으니까> 내 기억으로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거의 틀린 데는 없어요." "거짓말이에요!" 이모젠은 비명을 질렀다. 알렉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가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는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이모젠은 일어섰다. 더 이상 앉아서 독약같은 거짓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문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카트리나가 앞을 막아 섰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놀랐죠? 물론 그럴 거예요." 카트리나는 동정했다. "그렇지만 내 말을 잘 생각해 보세요. 난 여기 도착하자마자 당신과 알렉스가 깊은 관계가 된 걸 눈치챘어요. 그이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어요. 얼마 안가 그이는 당신을 여기서, 회사에서 내쫓을 거예요. 왜 당신을 여기 살게 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편이 당신을 내몰기가 더 손쉬우니까 그런 거예요." 카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톨리가 어떤 관계인지, 또 당신이 결국 원하는 게 뭔지 난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이런 식으로 취급받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난 당신만을 염려해서 이런 건 아니에요." 그녀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톨리 때문이기도 해요. 알렉스가 모든 걸 폭로했을 때 톨리가 어떻겠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알렉스의 여자가 되어 그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에요. 충고하는데 여기서 나가세요. 이젠 끝났다고 알렉스에게 말하세요. 더 이상 사태가 나빠지게 전에 그만두라고 말이에요. 물론 일자리도 그만둬야죠. 어떤 방식으로든 알렉스는 당신을 해고하고 말거예요. 차라리 스스로 그만두는 게 더 낫지 않아요? 톨리 말로는 당신은 아주 유능하다던데 그렇다면 다른 일자리를 찾는게 어렵지는 않을 테죠?" 어떻게 서재를 빠져나왔는지 이모젠은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부엌으로 가는 중이었다. 모든 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차 준비를 홀에 하는 홀린스 부인을 도왔다. 카트리나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믿을 수 없다. 아니,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 백만년 뒤라도 믿을 수 없다. 카트리나는 영리하고 교활한 고양이일 뿐이다!


홀린스 부인을 도와 버터 바른 뜨거운 머핀 담긴 은쟁반을 나르면서 이모젠은 톨리가 나이 들고 지쳐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파혼이 톨리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걸까? 애인과 아들이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톨리가 기운이 없을 거라는 카트리나의 어리석은 이야기는 완전히 엉터리였다. 톨리와 그녀는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엉터리 가십에 쓰여진 얘기는 하나도 진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모젠은 톨리와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피셔 부부 및 카트리나의 어머니와 환담을 나누고 여주인 역할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카트리나의 어머니는 홍차를 마시며 피에르와 스테판과 함께 별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셋집이 비쌀 때는 그런 식으로 돈을 절약하는 게 에바와 스테판이 결혼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는 얘기였다. 은주전자에서 차를 따르는 이모젠의 엉덩이에 누군가의 손이 와 닿았다. 그녀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알렉스였다. 카트리나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렇게 알렉스가 와 닿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다 보면서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금빛 눈동자 사이에는 주름이 잡혔다. 그는 그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갔었소?"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안 보이더군." "그냥 카트리나하고 얘길 좀 했어요." 그녀의 귀에도 자신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평소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카트리나의

거짓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시간이 필요했다. "괜찮소?" 그의 눈동자가 계속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염려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이모젠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두통이 좀 있어요. 대단친 않아요." 그는 카트리나가 말한 것처럼 비열한 모사꾼이 절대 아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영국에 온 이래 그는 사랑과 다정함만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가 어느 방에서 자는 것 때문에 의견충돌을 빚은 것 외에는, 손님들이 도착한 뒤부턴 그녀가 그의 침대를 사용할 것인지를.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속삭였다. 그렇지만 이모젠은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다. 알렉스가 말했다. "지금부터 캐시를 데리러 갔다 오겠소. 10 분 뒤면 기차가 도착할 테니." 그리고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벌써부터 이 파티가 끝나기만 기다려지는군. 다시 당신을 품에 안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홀을 나섰다.


그의 등을 바라보는 이모젠은 마음 속에서 희미하게 감도는 나쁜 예감과 싸워야 했다. 오늘 이후로는 어떤 것도 예전과는 똑같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모젠은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차를 계속 따랐다. 몇 분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카트리나의 쓸데 없는 거짓말 따위는 머릿속에서 말끔히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자신을 달랬다. 톨리에게 두 잔째의 차를 따라 주면서 이모젠은 스스로도 다정하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환하게 띠었다. 카트리나가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차근히 살펴볼 최초의 기회였다. 톨리는 진이 다 빠져나간 듯 지쳐 보였고 몇 주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10 년이나 더 나이들어 보였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녀는 다정하게 물었다. "미국에서 좀 쉬시길 바랬는데요." 처음 만났을 때 런던에 새로운 체인을 열기 위해서 백화점을 인수하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톨리의 활기넘치던 모습에 비하면 지금의 이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은 그때의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애써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예전과 다름없는 따스한 말투로 대답했다. "당신이야말로 어때요? 이모젠. 알렉스 녀석에게 당신이 일벌레란 얘긴 다 들었소. 젊은 사람들이 날 한가롭게 은퇴시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혹시 아닌가?" "우리가 당신을 염려하는 건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예요." 이모젠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고맙게도 다른 사람들은 카트리나 주위에 모여서 바하마 제도의 멋진 스쿠버다이빙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든 친구와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최초의 기회였다. 과연 톨리가 지금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건 알렉스가 파혼했기 때문인지 아닌지 알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톨리는 재빠르게 말했다. "나중에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소, 이모젠. 당신의 장래, 알렉스, 그리고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말이오. 아주 중요한 일이오." "지금은 안 되나요?" 이모젠은 질문하면서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카트리나 말대로 톨리는 벌써 알렉스와 그녀 사이를 알고 있는 걸까? 두 사람이 연인이란 걸? 그렇다면 톨리는 자신이 그렇게도 찬성했던 알렉스의 약혼이 깨진 데 대해 그녀를 책망하려는 걸까? 그렇지만 톨리는 지쳤다는 듯 어깨를 들썩해 보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더 조용한 분위기에서 얘기해야 할 것 같소." 그때 톰 피셔가 스쿠버다이빙에 대해 얘기하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톨리에게로 다가왔다. "톨리, 자네와 알렉스와 함께 회의를 좀 했으면 싶은데. 새 매장 공사인부들과 회의할 안건에 대해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들과 협상하기 전에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으니까."


알렉스와 카트리나의 파혼에 대해 톨리가 이모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이걸로 미루어졌다. 알렉스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 전에 그는 미국에서 관계를 청산하고 왔다고 했다. 그 말에 자신이 얼마나 안도했던지 이모젠은 회상했다. 누구의 눈으로 보더라도 톨리는 몹시 지쳐 있었고 며칠간의 휴식이 필요했다. 며칠 동안 푹 쉬어도 모자랄 듯 한데 사업적인 회의까지 해야 한다면 그건 과로를 더욱 더 부채질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상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휴식을 위해서는 알렉스가 힘쓸 수 밖에 없겠지. 홀린스 부인은 바쁘게 빈 찻잔들을 챙기고 있었다. 이모젠이 홀린스 부인을 돕는 동안 알렉스가 캐시를 데리고 돌아왔다. 완전히 들뜬 그녀의 목소리와 활기찬 성격은 모두를 즐겁게 했다. "이렇게 멋진 곳이라니!"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된다는 듯 이모젠을 보고 반가워했다. "월요일 아침에 일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여태까지 한 일 중에서 이번 프로젝트가 가장 재미있을 게 확실해요!" 캐시를 손님들에게 소개하고 방으로 안내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캐시는 지난번 이모젠이 파리를 떠난 뒤 일어났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고 오늘밤 파티에 입으려고 파리에서 샀다는 드레스까지 자랑했다. "괜찮겠죠?" 캐시는 흐르는 듯한 주홍빛 실크 드레스를 이모젠의 코 앞에 흔들어 보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세련됐더라구요. 난 오늘 파티에서 영국 생쥐처럼 보이고 싶진 않아요." "입어 봐요. 어느 나라 사람으로 보이든 생쥐처럼 보이진 않을 거예요." 이모젠은 방긋 웃었다. 캐시와 지내는 일은 참으로 유쾌했다. 그녀의 재잘대는 수다는 이모젠을 근심거리에서 잠시나마 해방시켜 주었다. "참, 그러고 보니 세련된 프랑스 사람이 여기 한 명 있네요." "맞아요, 맞아. 그 얘길 잊고 있었네." 캐시는 명랑하게 말하면서 그 화려한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파리에서 지낸 마지막 날 피에르랑 같이 점심에다 쇼핑도 하고 저녁식사까지 같이 했어요. 물론 그 사람은 치마만 둘렀다 하면 여학생이건 할머니건 상관 않는 바람둥이지만 말이에요. 그렇지만 나랑은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줄 생각이에요. 물론 그인 내 마음을 아직 모르지만." 결국 저 매력적인 프랑스인도 호적수를 만났구나, 생각하면서 이모젠은 캐시의 방을 나섰다. 조용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캐시의 정신없는 수다에서 빠져나오자 이모젠은 다시금 두통을 느꼈다. 마치 머릿속에서 단 한 가지 길을 찾기 위한 수백만 번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 중앙계단 쪽으로 향하자 알렉스가 방에서 나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가슴은 너무나 친숙한 느낌으로 뛰었다. 그는 너무나 다정하고 온화했다. 카트리나가 한 말은 전혀 믿을 수 없어. "계속 당신을 찾았소." 그는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주었다. "당신을 보지 못하고 있으면 너무 그리워진단 말이야." 잠시나마 그녀는 그의 팔 안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스웨터를 입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노라니 편안했고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그녀의 심장으로 전해져 왔으며 남성다운 그의 체취가 마음을 감싸 주었다. 그녀는 그를 원했다. 카트리나는 쓸데없는 거짓말쟁이라고 그가 말해 주기를 원했다. 그녀의 말은 한 마디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해 주기를. 그러나 카트리나의 말 중에는 이모젠이 혼자서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갑자기 오한이 일어나 그녀는 그의 팔 안에서 몸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아주 피곤해 보이는군."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멋진 음성의 유혹에 애써 저항하려 하며 그녀는 귀담아 듣지 않으려 했다. "난 괜찮아요." 그가 빨리 가 주었으면 싶었다. 알렉스가 주위에 있으면 도통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더듬어 딱딱해진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와 닿는 것은 긴장을 푸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도리어 더더욱 몸을 굳히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몇 시간 정도 자요. 모든 게 잘 진행되고 있는지 내가 살펴볼 테니까. 손님들은 자기 방이나 거실 난로 앞에서 쉬고 있으니 괜찮소. 그러고 나서 서재에서 톰과 톨리와 사업적인 얘기를 할 예정이오." 알렉스의 그 말에 이모젠은 황급히 생각이 나서 말을 꺼냈지만 평소 때보다 딱딱한 말투가 되었다. "그 모임은 좀 미루면 어떨까요? 톨리는 너무 피곤해 보이던걸요. 사업 회의 정도는 다음에 해도 되지 않아요? 당신 아버님인데 잘 보살펴 드려야죠." 그의 몸이 굳어지며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에 놓여있던 손을 떼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알렉스는 어딘가 화가 난 듯 했다. "누가 들으면 당신이 우리 아버지의 건강을 이상할 정도로 신경쓴다고 여기겠군.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난 그분의 건강을 항상 신경쓰고 있으니까. 물론 아버지가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지만. 회의를 하자는 피셔의 제의를 받아들인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소. 아버지는 새 매장을 세우기 전에 또 다른 일들을 추진하고 싶어하시는데 그걸 연기하자는 게 내 의견이오. 아버지는 너무 일에만 몰두해 계시니까." 그는 계단을 내려갔다. 2 층의 무거운 침묵 속에


그의 목소리는 더욱 더 퉁명스럽게 들렸다. "내가 하는 일이 뭔지 난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쓸데 없는 일에 신경쓰지 말아요, 알겠지?" 알렉스와 그렇게도 황홀한 밤들을 보냈던 침실에 들어오니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위 부근이 뒤집어질 듯 기분이 나빴다. 침대 곁의 작은 스탠드를 켜다 말고 이모젠은 방에 붙은 욕실로 달려갔다. 구토가 일었다. 간신히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스탠드 불마저도 신경에 거슬렸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그녀는 비참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마음이 거부하는 확실한 사실을 몸은 인정하고 있다. <누가 들으면 당신이 우리 아버지의 건강을 이상할 정도로 신경쓴다고 여기겠군>. 그의 이 말은 모든 상황의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는 마지막 열쇠였다. 더이상 카트리나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무시할 순 없었다. 그것은 악의로 포장되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조용히 어둠 속에 누워서 이모젠은 곰곰히 사실을 되씹어 보았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톨리와 자신의 관계가 한 점 부끄럼도 없다고 설명하려 했을 때도 알렉스는 그녀를 말리면서 속삭였었다. <당신에게 미안할 뿐이오. 이제 그런 건 다 잊어버립시다>. 그렇지만 그는 잊지 않았다. 아무것도. 자신의 입장을 명쾌하게 설명할 생각을 하지 않다니, 그에게 얘기를 들어 달라고 주장하지 않다니 난 얼마나 바보였던가, 이모젠은 생각했다. 카트리나가 말한 대로 알렉스는 이모젠을 이용했다. 그녀를 모욕해서 자기 아버지를 돈벌레의 손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모젠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할 때가 아니라고 말하자 알렉스가 화낸 것도 당연하다. 톨리가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놓쳐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가 처음 그녀에게 육체적인 관심을 보였을 때 이모젠은 그의 저의가 무엇인지 몹시 의심스러워 했다. 위협도, 돈으로 그녀를 매수하려던 시도도 실패하자 알렉스는 결심한 거다. 이모젠은 가격만 적당하다면 누구의 품에도 안기는 여자라는 걸 아버지에게 직접 보여 주기로. 전부터 그녀는 그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난 얼마나 바보였던가, 이모젠은 이를 악물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억지로 무시한 채 사랑에만 눈멀어 있었으니. 그녀는 누워 있는 채로 몸을 뒤틀어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사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베개에서는 알렉스가 항상 사용하는 고급 애프터셰이빙의 향기가 풍겼다. 이모젠은 일어나서 다리를 가슴으로 끌어모으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후회는 더이상 소용없다. 이모젠에게 중요한 건 미래였다. 알렉스는 그의 침대에서, 그의 집에서, 그의 회사에서 그녀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 카트리나에게는 감사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선 미리 그녀에게 경고를 받았으니까. 이모젠의 머리는 카트리나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마음 속에서는 전부 맞는 얘기라고 계속 외쳤던 것이다. 이모젠과 톨리의 관계가 의심받았던 것, 그에 대해 알렉스가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 알렉스가 그녀를 키너스턴에 살게끔 억지로 추진한 것, 그녀가 살기로 되어 있던 별채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버린 것. 이 사실들을 카트리나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렉스에게서 직접 듣지 않고서는 카트리나가 알 리가 없다. 이걸로 증거가 모두 확실해졌다. 그녀 스스로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11 "괜찮다면 역까지 태워다 줄게요." 캐시는 트렌치 코트깃을 여미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남자들한테 인사를 하고 올테니." 짓궂은 윙크를 하고 나서는 그녀에게 이모젠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택시를 부를 필요가 없겠네요."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는 것 이외에 대행사의 첫날은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알렉스는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다. 이모젠은 타이프로 친 사직서를 서랍 속에 넣었다. 그와 마주치기만

한다면

당장

건네

생각이었지만

계속

이렇게

만나지

못한다면

우편으로라도 보낼 작정이었다. 사흘 전 키너스턴을 빠져나오는 일은 놀랍게도 너무나 간단했다. 마틴 앤드 샌다운 사의 동료였던 친구 제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룻밤 묵을 수 있을지를 부탁했다. 그녀의 자그마한 아파트는 이스트엔드에 있었다. "소파에서 자면 될 거야. 네가 있고 싶을 때까지 지내렴." 분명 궁금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고맙게도 제니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또 대행사의 나머지 동료들 역시 그녀가 설날맞이 파티날 밤 키너스턴에서 사라진 것에 대해서, 런던에서 기차로 출퇴근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있었겠지만 오늘 하루 종일 그들도 아무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전화로 택시를 부른 다음 그녀는 황급히 짐을 꾸려 제니에게로 갔다. 알렉스에게는 침대 베개 곁에 메모 한 장을 남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그에게 남긴 메모는 아마 그녀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낸 마지막 경우가 될 것이었다. 쓰디쓴 어조로 씌어진 메모는 너무나 아픈 상처의 후유증이었다. <게임은 이제 끝났어요. 나는 이곳에서 나가겠어요. 다른 상대를 찾아 보세요. 당신은 너무나 비열해요. 손님들 앞에서 더 이상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떠나갑니다>


알렉스에 관해서는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리기로 했다. 앞으로 다시 그를 만나게 되든 그렇지 않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더이상 그는 그녀에게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벨이 울려 전화를 받았을 때 알렉스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벌써 이모젠의 마음은 심하게 고통스러워졌다. 왜 이렇게 호흡이 빨라지는 걸까? "말씀하세요." 이모젠은 정신을 수습하며 짧게 말했다. 난 더 이상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미워한다는 것도 감정의 일종이니까. 앞으로는 절대 내 감정에 관한 일에는 관련되고 싶지 않아. "10 분 안으로 데리러 가겠소." 차가운 말투는 대꾸를 전혀 용납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했다. "시간 낭비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 없을 테니까요." 그는 말했다. "제기랄!" 아주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증오감이 뿌리깊게 전해져 왔다. "아버지가 심장발작을 일으키셔서 오늘 아침 병원에 입원하셨소. 하루 종일 간호했는데 당신을 보고 싶다고 하시는군. 지금 거기로 가겠소." 그는 으르렁거리듯 마지막 말을 맺었다. "2 분 안으로 떠날 준비를 끝내요." 캐시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이모젠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태연한

애썼다.

"준비됐으면 나가요." 캐시가 말하자 이모젠은 대답했다. "미안해요. 나중에 기차를 타기로 마음을 바꿨어요. 내일 봐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하기도 벅찼다. 무의식중에 그녀는 코트를 걸치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단추를 채웠다. 그러면서 내내 자신을 달랬다. 톨리는 곧 괜찮아질거야. 하느님, 그분을 제발 돌아가시게 하지 마세요. 그녀는 소리내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카트리나와 알렉스의 파혼 소식을 듣고 발작을 일으킨 게 아닐까? 이모젠이 파혼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쓰러진 게 아닐까? 그녀는 파혼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톨리는 그녀의 정체를 벗기려던 알렉스의 치밀한 계획을 알지 못할 터였다. 그는 알렉스와 그녀의 장래에 관해서 그녀에게 얘기할 게 있다고 했었다. 그때 이모젠은 톨리가 파혼에 관한 얘기를 하려 한다고 여겼었다. 만약 톨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죄의식 때문에 이모젠은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녀에게는 죄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이 이제는 전부 메말라버렸다고 자신한 게 언제였던가? 알렉스가 다가오는 걸 보고 이모젠은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굳어진 데다 눈동자에는 피곤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감정을 송두리째 휘저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모젠은 그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입을 맞춰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마 지구상에 둘만 남는다 해도 그는 그녀의 위로를 거부할 것이다. "톨리는 어때요?" 재규어가 도로로 나가자 이모젠은 알렉스의 딱딱한 옆얼굴에 시선을 던지며 재빠르게 물었다. 왜 아직도 이 사람은 내 마음을 혼란시키는 걸까? 오랜 겨울잠 뒤 그가 일깨워준 그녀의 감정은 쉽사리 잦아들지도, 소멸하지도 않았다. "좋지 않소." 그는 준엄하게 말한 뒤 입매를 굳혔다. "염려하는 척 할 필요없소. 당신은 이기적인 자신의 욕심 이외엔 아무것도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잖소."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았다. 주먹으로 그를 때려 주고 싶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자제했다는 거짓말을 무너뜨리는 증거였다. 그에 의해 감정은 다시 피어났고 예전과 똑같이 지속되고 있다. 입을 연다면 그에 대해 품어왔던 실망과 증오, 회한, 고통 등이 전부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참자, 그녀는 생각하면서 재규어가 엄청난 속도로 겨울의 황량한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남았다는 듯 여전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너무 지쳐 있소. 게다가 당신이 파티날 밤 키너스턴을 빠져나간 게 더욱 치명적이었소. 당신이 믿든 믿지않든 간에 우리 둘의 관계가 아버지에게 영향을 미친 건 틀림없소. 다행스럽게도 당신이 내게 남긴 그 다정한 편지에 대해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지. 아마 그걸 보셨다면 그자리에서 졸도라도 하셨을 거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모젠의 심장에 칼날이 되어 꽂혔다. 재규어는 병원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이모젠은 알렉스를 노려보며 외쳤다. "톨리에게 일어난 일을 갖고 내 탓으로 할 수는 없어요!" 그는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의 어조는 통렬했다. "물론 그럴 순 없겠지. 돌덩이에서 눈물을 짜내는 게 더 쉬울 테니까. 당신은 그날 그렇게 냉정하게 떠나가지 않았소.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서 짓밟고 가버리는게 당신 아닌가?" 그의 손가락이 핸들을 꽉 쥐고 있었다. 이모젠은 가슴이 아팠다. 그런 비난을 하는 건 부당했다. 다른 애인이 생겨서 그를 버릴 수만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그가 그녀에게 안겨준 상처는 평생 씻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다음 말에 깃든 모욕에 그녀는 다시금 화가 치밀어올랐다. "당신이 부모님의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결혼을 안하겠다고 결심했다던 얘기는 다 눈속임 아니었소? 사실은 한 남자에게 결코 만족할 수 없어서 아니오?" 이모젠은

좌석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병실이나 가르쳐주고 빨리 돌아가시죠."

뛰쳐나왔다.

"시간낭비하지

마세요.

톨리의


결혼에 관한 알렉스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그가 거기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모젠이 바람둥이라는 걸 톨리에게 폭로하는 데 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그에게 따지러 여기 온건 아니었다. 사실 그에게 따지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런 곳에서 하루에 끝날 일이 아니었으므로. "잠깐만입니다. 그 이상은 안돼요." 흰 가운을 입은 병원 사람이 주의를 주며 톨리의 병실 문을 열었다. 톨리는 높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여러 기계가 호스로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이모젠의 가슴은 싸늘해졌다. 그러나 침대로 다가가니 다행히 톨리는 맑은 정신으로 눈을 뜨고 있었다. "와줘서 고맙소, 이모젠." "말씀하지 마세요." 이모젠은 다정하게 말하면서 의사의 경고를 되새겼다. 사실은 그날 키너스턴에서 그녀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 묻고 싶었다. 톨리에게서 듣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생각하면서 침대 가까이 의자에 앉아 톨리의 손을 쥐었다. "매일 보러 올게요." 그녀는 약속했다. "좀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셔야 돼요." "필요없소." 톨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말들은 집어치우고 내게 말해줘요. 왜 내 아들녀석에게서 떠나갔는지." 그는 숨쉬기가 괴로운듯 말을 멈췄다. 이모젠은 놀라서 간호사를 부르기 위해 호출벨을 찾았다. 그러나 톨리는 곧 자신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뭐가 잘못된 건지 말해 봐요. 난 알고 싶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이모젠은 주저하며 말했다. "흥분하시면 몸에 나빠요." "여기 누워서 걱정하는 건 몸에 더 나쁠 거요." 톨리는 굽힐 수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였다. "그렇게 심한 발작도 아니었소. 내일이면 퇴원할 거요. 자, 뭐가 잘못된 거요? 알렉스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당신은 그애에게서 떠나가면 안 돼요. 난 그애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걸 이전에 본 적이 없었소. 내가 구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모젠, 당신은 알렉스와 결혼해야 하오. 녀석은 당신이 결혼을 꺼린다고 말했지만 난 빨리 손자를 보고 싶다오." 생각보다 사태는 더 나빴다. 톨리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이모젠은 온화하게 말하려 했지만 절망감이 가슴을 후볐다. "걱정하지 마세요. 알렉스는 저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요. 단지 연극을 했을 뿐이에요." 톨리에게 더 이상 설명한다는 건 잔인한 것 같았다. "아마 제가 백만 달러를 휘감고 다닌다 해도 알렉스는 저와 결혼 안할 거예요."


"그만 웃겨요, 이모젠." 톨리는 웃음으로 헐떡였다. "내 아들녀석이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지난번 미국에 왔을 때 알렉스는 내게 모든 걸 털어놓았소. 처음엔 당신이 내 돈을 노리고 있는줄로 알고 미워했다가 결국은 당신한테 깊이 빠지고 말았다고 말이오. 녀석은 카트리나와 약혼을 파기해 버렸고 나는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 주었지. 그래서 알렉스는 아주 의기양양해 하면서 내 축하를 받고 런던으로 돌아갔소.

당신을

어떻게 키너스턴에

살게 했는지

알렉스는

내게 전부

얘기했다오. 나머지는 감정의 흐름에 맡기면 된다고 녀석은 말했지. 하지만 당신은 결혼을 원치 않을 거라고 하더군. 내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당신과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던 건 바로 당신을 내 며느리로 삼으려고 설득하려던 거였소. 그런데 당신은 그날밤 그곳을 나가버렸지. 아니,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그의 마지막 말에 이모젠은 자신이 입을 벌린 채 얘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벌린 입은 다물어질줄 몰랐다. 갑자기 오한이 솟구쳐오르면서 울고 싶어졌지만 이모젠은 참았다. "이 얘기들을 누가 카트리나에게 말해줬을까요?" 하나는 확실했다. 알렉스는 아니다. "내가 했소." 톨리는 눈썹을 치켜뜬 채 경악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린 같은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 왔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알렉스가 말했을

때처럼

그애가 행복해보인 적은

없었다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애의

행복이었으니까. 카트리나는 파혼을 별로 마음쓰는 것 같지 않았고 심지어는 바하마에서 깊게 사귄 남자친구들의 얘기도 해 줬다오. 그래서 난 지루한 여행을 좀 유쾌하게 하려고 당신과 알렉스의 얘기를 꺼낸 거라오. 어떻게 하면 내가 교회 통로로 당신 손을 잡고 알렉스에게로 안내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면서 말이지. 난 아주 유쾌했고 카트리나도 그 얘기를 상당히 즐기는 것 같았는데."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이모젠은 속으로 생각했다. 카트리나는 모든 상황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에 분명했다. 톨리에게서 들은 얘기를 잘 이용해서 이모젠과 알렉스와 관계를 망쳐놓기로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혼란스런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카트리나의 말을 믿을 수 있었지? 어쩜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했을까? 톨리는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과 알렉스는 서로를 위해서 태어난거요. 당신들 둘이 처음 만난 날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할때 난 벌써 느꼈다오. 그때 우린 데벤코 런던지사의 출범을 위해서 축배를 들었지. 이젠 두번째 축배를 들고 싶소. 당신과 알렉스의 결혼식 때 말이오." 그는 그녀에게 피로한 듯 웃어 보였다. "둘 사이에 틀어진 게 있다면 바로잡아요. 그리고 다신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말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이모젠은 약속하고 일어섰지만 다리에 힘이 쫙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톨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제 푹 쉬세요. 더이상 집안의 평화를 깨지 않겠다고 약속드릴게요." 가족. 이모젠은 병실문을 닫으며 혼란스런 머리로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다정한 이름인가! 그녀에겐 가족의 사랑을 느낄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끊임없이 싸우는 부모 밑에서 그런 건 사치나 다름없었고 가족의 사랑이란 게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환상이라고 여겼다. 이제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가족의 사랑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알렉스는 그녀를 사랑해주었고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두 사람은 다정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톨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친아버지 이상으로 애정을 주었을 텐데. 그렇지만 모든 것은 망쳐졌다. 그녀 때문에. 잠시 그녀는 복도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느꼈던 사랑은 그녀가 그를 버림으로써 이미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완전히 증오로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꼿꼿이 몸을 세웠다. 새빨갛고 두툼한 울 코트는 따뜻했지만 그녀의 몸은 떨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까 그녀가 말한대로 그냥 돌아가버린 게 아닐까? 떨리는 다리로 이모젠은 대기실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있는 알렉스를 보자 그녀의 가슴은 사랑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의 검은 머리는 숙여져 있었다. 잠시 멈춰서서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는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치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는 듯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모젠은 그의 눈에 깃든 피곤함을 씻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차가움만 더해질 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떻소?" 그녀는 어깨를 살짝 움츠려 보였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병실을 나올때는 좀 기운이 나신 것 같던데요. 병실에 안 가시겠어요?" 만약 그가 톨리에게 간다면 그녀는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영원히 기다릴 작정이었다. "아니." 알렉스는 일어서면서 의자에 걸쳐놓았던 양가죽 외투를 집어들었다. "아버지도 좀 쉬셔야겠지. 역까지 데려다 주겠소." 예전과 똑같이 그는 사실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곁에 있는 것조차 원치 않는 거였다. 사실을 알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바로 그녀가 해야할 일이었다.


이렇게 긴장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모젠은 떨리는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얘기 좀 할수 있을까요? 당신이 알아야 할 일이 있는데요." 그는 앞장서서 걸어나갔기 때문에 그녀의 중얼거리다시피 한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몸을 돌린 그의 검은 눈썹은 뒤틀려 있었다. "뭐라고 말했소?" 이모젠은 다시 말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신랄했다. "내가 뭘 더 알아야 한다는 거요? 난 지금 아주 지쳤고 당신이 하는 말이 들을 가치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소." "당신을 사랑해요." 이모젠은 주저하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험악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모젠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만은 없다고 느꼈다. "당신의 그 신물나는 사랑 없이도 난 살 수 있소. 차라리 다른 여자들의 적개심을 받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하겠소. 왜, 새 애인이 침대에서 만족을 시켜주지 못하던가?" 그는 혼자서 나가버렸다. 이모젠은 화가 나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뛰어가야만 했다. 하이힐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크게 울렸다. 주차장에서 그녀는 간신히 알렉스를 붙잡을 수 있었다. 숨찬 나머지 그녀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다. 이모젠은 말했다. "처음에 당신은 내가 톨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마지막에 난 카트리나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갔고요!" 그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준엄하고 무서운 표정이었다. "무슨 거짓말? 카트리나가 당신에게 뭐하고 말했소?" 기회가 왔다. 일생에 한번 뿐일지도 모르는 기회. 이모젠은 카트리나에게 들은 얘기를 전부 했다. 차가운 비바람이 두 사람을 몰아쳤지만 상관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들을 때까지 알렉스의 딱딱한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땐 그녀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톨리가 해준 말을 듣고 내가 바보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톨리가 해준 말>이라!" 알렉스는 쓰디쓴 어조로 외쳤다. "내 얘기를 들을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단 말이오?" "당신은

카트리나의 말을

직접 듣지

않아서

몰라요."

이모젠은

비참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차문을 열더니 짧게 말했다. "타요." 그녀는 그의 말에 따랐다. 마침내 사실을 그에게 밝혔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태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녀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시동을 거는 그에게 말을 거는 이모젠의 음성에는 절망감이 담겨 있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만약 그가 역으로 간다고 한다면 이제는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집으로."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하지만 기뻐하긴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아마 남은 짐을 꾸리게 하려고 키너스턴으로 가는 건지도 모른다. 짐을 다 꾸리면 나를 다시 역까지 데려다 주겠지. 아니, 택시를 부를지도 몰라. 나와 더 이상 같이 있기를 싫어한다면. 키너스턴으로 가는 도중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이모젠의 등은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도착한 뒤 그를 따라 거실로 들어간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무릎을 꿇고 난롯불을 피우는 알렉스의 모습을 여기 이렇게 서서 행복하게 바라본 적도 있었는데. 방은 따뜻했다. 중앙난방장치는 완벽했다. 일류의 시설과 설비가 모두 알렉산더 데벤코를 위해서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래의 아내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것을 거부한 건 나 자신이야, 이모젠은 생각했다.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중요한 파티날 밤 그를 저버리고 뛰쳐나와 버린 것이다. 알렉스를 바보로 만든 셈이었다. "코트를 벗어요." 알렉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면서 말했으나 여전히 얼굴은 굳어진 채였다. 양가죽 코트를 벗은 뒤 드러난 검은 니트 스웨터에 바지 차림이 그를 더더욱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의 지배에 굴복하고 싶은 어리석은 감정과 싸우면서 이모젠은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가겠어요." 단지 남은 짐을 꾸려가게 하려고 그녀를 데려온 게 분명했다. 더 이상 그의 모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분노 비슷한 감정이 떠올랐고 턱에는 힘줄이 솟았다. 그는 다가와서 억지로 빨간 울 코트를 벗겼다. "이젠 다시는 내게서 도망갈 수 없소." 그는 딱딱한 어조로 말하면서 그녀의 외투를 양가죽 외투 위로 던졌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소." 물어뜯을 듯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득였다. "무슨 사랑이 그렇게 신뢰가 없소? 내가 원했던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소." 이모젠은 다시금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내 감정을 혼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역시 알렉스 뿐이야. 그녀는 이 만남을 싸움으로 끌고 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말에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어떻고요? 당신이야말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사랑한다고 말했죠. 날 값싼 바람둥이로 오해하고 있었으면서도 사랑했다고요. 당신이야말로 내게 손을 뻗치기 전에 톨리에게서 사실을 확인받아야 했던 게 아닌가요?" 입밖에 낸 순간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혼란스런 눈동자로 그녀를 오랫동안 응시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술잔이 쨍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잔 두 개에 브랜디를 부어 그녀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당신 말이 맞소." 그는 건배하는 몸짓으로 잔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뭐라 이름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깔려 있었다. 이미 분노의 흔적은 사라져 있었다. "난 항상 내 관점에서만 사물을 보는 경향이 있지." 그는 인정하면서 브랜디를 잔 안에서 돌렸다. 그의 단단한 목선과 힘줄을 바라보자니 이모젠의 입은 바싹 말랐다. 그를 원하는 열망이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잔을 내려놓더니 눈썹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난 당신에 관한 나쁜 얘기를 너무나 의심 없이 믿어 버렸소. 하지만 또 당신만큼 원해 본 여자는 생전 처음이었지. 친아버지한테까지 질투를 느낄 정도였으니.

손이 닿기만

해도

당신이

정열에

사로잡힌다는 걸 알게 됐지만 난 자제하기로 했소. 값만 적당하다면 누구에게라도 안기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남자가 당신에게 미소만 지어도 난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소." 그의 입매는 쓴웃음으로 뒤틀려 있었다. 그는 방안을 빠른 걸음으로 이리저리 걷더니 난롯불 앞에서 멈춰섰다. 불빛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동자를 찾았다. "이 모든 걸 용서할만큼 날 사랑하고 있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벅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사랑받는 한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고 말고. "이리 와요." 그의 활짝 벌린 팔 안에 그녀는 안겼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치고 가만히 응시했다. 한없는 온화함과 사랑이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당신이 알아둬야 할 사실이 있소." 알렉스의 풍부한 목소리는 여전히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입술은 유혹하듯 벌어져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입술로 애무하는 그의 눈동자는 짓궂게 빛났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해야만 하오.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요. 내가 왜 사람들의 나쁜 면만 보는지, 왜 그들의 다른 얘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지 그렇게 된 이유를 털어놓고 싶소." 그는 양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이

깃털처럼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과 아버지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 난 너무나 두려웠소." 이모젠은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토록 강한 사람이 두려운 적이 있었다니.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의 말을 절대로 방해하지 말아야지. "전에도 아버진 그 비슷한 일을 겪으신 적이 있었소." 알렉스는 조용히 말을 계속했다. "아홉 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와 아버진 큰 타격을 입었소. 너무나 사랑스러운 분이었지. 6 년 뒤 아버진 재혼하셨지. 아버지의 절반 나이밖에 안되는 재니스는


아름다웠지만 열다섯 살인 내 눈으로 보기에도 돈을 노리는 여자였소. 하지만 외롭고 사랑과 결혼이 필요했던 아버지는 전혀 그 점을 깨닫지 못하셨지. 젊고 예쁜 여자가 아양을 떨면서 사랑에 응해 주었으니 아버지가 그랬던 것도 무리는 아니오. 하지만 그녀가 아버지에게서 사랑할 수 있었던 건 돈 뿐이었소. 그뒤 3 년 동안 재니스는 온갖 사치를 다 부리며 여기저기서 남자들을 끌어들였지." 절대로 그의 말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결심에도 이모젠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절한 톨리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알렉스는 낮은 소리로 계속했다. "그 아름다운 겉모습 뒤에 더럽고 천박한 본질이 숨어있다는 걸 아버진 전혀 깨닫지 못했지. 모든 사람들이 전부 뒤에서 수군거릴

정도가

되었는데도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소."

그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난 아버지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참을 수가 없었소. 난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소. 그래서 난 모든 걸 말씀드리기로 했지. 눈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발 살펴보시라고 말이오." 회상하기가 고통스러운 듯 알렉스의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다. "그날은 집에서 파티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소. 난 파티 직전 아버지에게 갔소. 손님들 중에는 당시 재니스가 새 애인으로 삼았던 삼류 영화배우가 끼어 있었지. 난 아버지에게 내가 알고 있는, 또 남들도 모조리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렸소. 그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는 날 때렸소. 사실 난 그때 벌써 아버지보다 키도 크고 힘도 셌지만 한 시간 뒤 파티에 참석했을 때까지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소. 하지만 파티에서 재니스가 역겨운 행동을 하는 거나 사람들이 뒤에서 아버지 얘기를 수군대는 거나 다 참을 수가 없더군. 그러더니 재니스는 그 삼류 영화배우를 슬쩍 불러내서 위층 방으로 끌어들였소." "난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갔지. 영화배우에겐 이 집에서 나가라고 얘기하고 재니스에겐 제발

아버지나

손님들

앞에선

추태를

부리지

말아달라고

했소.

그러자

영화배우--지금은 녀석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가 말했소. <질투하는 거냐, 애송아? 좀 참고 기다리라구. 네가 좀 더 크면 새엄마께서도 많이많이 사랑해주실 테니까>"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더군.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소. 난 그자에게 달려들었지. 남자 셋이 날 떼어놓아야만 했소. 톨리는 얼마 뒤 곧 이혼했고 몇 년 동안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 "당신이 그분을 도왔군요." 착한 톨리에게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니. 알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었지. 아버지가 인생에, 사업에 다시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건 카트리나와 나의 약혼 얘기가 나오면서부터였소. 아버지가 활기를 찾으시는 것 같아 난 찬성했소. 사실 카트리나는 아주 어린 나이였고 그땐 일종의 재미로 약혼이 추진됐던 거요. 실제로 결혼을 하려면 적어도 5 년 이상은 지나야 했을 거고 그동안 카트리나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 약혼은." 알렉스는 딱딱하게 말했다. "전혀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였지." 카트리나가 말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이모젠은 이제 그녀의 말 따위는 한 마디도 믿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렉스의 품에 파고들면서 이모젠은 속삭였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 꼭 알려야 했소." 그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내가 톨리와 당신의 신문기사를 보고 왜 그렇게 미친 듯이 화를 냈었는지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라오." "그렇지만 당신은 아직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았잖아요." 이모젠은 그의 턱선을 따라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당신 아버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직접 듣고 난 뒤에도 말이에요."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여기 도착했을 때 난 사실 당신에게 용서를 빌려고 했소. 당신은 너무나 다정하고 아름다웠지. 내 머릿속은 온통 당신이 내 것이라는 생각 뿐이었소. 당신은 아버지와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 하지만 난 더 이상 듣는 게 겁이 났소. 내가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하면 혹시 당신이 불유쾌했던 기억들을 되살리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오." 이모젠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열렬한 키스를 되돌렸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그녀의 가슴을 통해 느껴졌다. 숨가쁜 입맞춤 사이사이에 그는 속삭였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요. 영원히 날 떠나지 않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격렬한 키스를 퍼부으며 말하고 또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더니 거실을 나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내 생명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 알렉스의 이 말이야말로 이모젠이 그렇게도 듣고 싶어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입술을 댄 채 말했다. "당신은 내게 아직 한 번도 결혼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아세요?" 그러자 알렉스는 소리죽여 웃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건 당신이 꺼려했으니까. 이제부터 끈질기게 설득할 생각이오." 이모젠은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벌써 당신한테 설득 당했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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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모젠은 데벤코 씨의 재산이 두 사람의 나이 차를 좁힐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거의 영국 방문을 하지 않던 억만장자이자 백화점 소유주 아나톨 크리스토로로 데벤코 톨리의 눈을 올려다보며 웃는 그녀의 표정은 조명 때문인지 완전히 톨리에게 얼이 나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