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다가 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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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7



지구랑 친구하기 UPCYCLE HAND MADE SHARE

‘지구랑 친구하기’ 는

환경과 건강을 살리는 지속 가능한 생활소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회용품 사용을 되도록 줄이는 생활실천이 곧 <지구랑 친구하기> 생활소품의 시작입니다. 휴지보다는 손수건을, 종이컵보다는 개인물통을,

비닐팩보다는 재활용천으로 만든 가방사용을 권장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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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 4


덜 벌고 , 더 노는 세상을 꿈꾸며.

<놀다가,> 5


This is the end Beautiful friend

<놀다가,> 6


This is the end My only friend, the end The Doors - The End

<놀다가,> 7


겨울이 오고 있다. ‘왕좌의 게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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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is the Beginning is the End The Smashing Pumpkins

<놀다가,> 9


차례

contents 2014년 12월 24일 / 7호

표지 그림: Kazimir Malevich, Black Square, 1915

여는글

꾸준

11p

놀다가 책

끝,까지 마지막,까지

14p

놀다가 음악

0

주제파악 놀다가 아트 놀다가 영화 놀다가 묵상 놀다가 사진

Vi(d)e

세상의 끝

인터퍼스널

나에게 쓰는 편지

<놀다가,> 10

13p 22p 30p 39p 47p 52p


여는글

꾸준 힘들었습니다. 오래간만에 하려니까 뭔가 꾸준히 한다는건 참 좋은 일이지만, 그걸 몰라서 꾸준히 안 하는 건 아니죠.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 알면서도 꾸준히 못하는 것만 꾸준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꾸준히 못 하는걸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관성인지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겠습니다. 물론, 속도는 느리고, 성과는 별로 일 거예요. 하지만, 많이 놀 수 있잖아요?

<놀다가,> 11


<놀다가,> 12


주제파악

억지로 시작 했지만, 지금 이 순간 부터는 내 의지야. 우리 여기서 끝 내 자.

<놀다가,> 13


2014.10.3 / 진도 팽목항 / 주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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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 책

끝, 까지 마지막, 까지

나는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비겁한 인간이다. 글이 공허하다. 창피하고 동 시에 부끄럽다. 그러나 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존 재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잊지 않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기록한다. 부끄러움을 기록하 는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해서다. 수치심 그 자체를, 쉽게 망각하는 나의 비겁함 그 자체 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다. 나는 살아 있고, 부끄럽게도, 잘 지내고 있다. 올해는 계절이 달력이라도 본 듯하다. 12월의 1일을 알렸던 혹독한 추위의 기억이 선 명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던 만큼, 사정없는 추위가 몰아닥쳤다. 12월이다. 많은 것 들이 마무리되어가는 계절, 그리고 정체되고, 얼어붙는 계절. 무엇보다도 춥고, 또 춥 고, 지독히도 추운 계절. 나는 다만 한껏 웅크리고 견디고 있다. 연말에는 소위 단통법이라고 하는 법과 더불어 화제가 되었던 도서정가제의 영향으 로, 나 또한 꽤 많은 책을 샀다. 단통법과 도서정가제의 차이라면, 원래 아주 잘 팔리던 물건을 일시적으로 안 팔리게 만든 정책과 원래 거의 안 팔리던 물건을 일시적으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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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게 만든 정책이라는 차이가 아닐까 싶기도 할 정도로. 나는 인터넷 서점의 주문 폭 주로 인해(이것은 정말로 처음 겪은 일이었다) 주문한 책을 거의 2주가 되어서야 받아 보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예전처럼 다시 핸드 폰을 많이 사게 될 것이고, 예전처럼 책을 잘 사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올해 이런저런 일들로 책장에 채워 넣은 책들을 둘러보다가, 그리고 2014년과, 지난 계절들, 그리고 마침내 12월, 마지막과 끝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마도 매년 해 오 던 일이다. 한해를 되돌아보며, 올해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 그러나 올해는 유독 그 것이 잘 되지 않는다. 아니 잘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올해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것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럴 때뿐이다. 충격과 슬픔으로 잠들지 못하던 밤 같은 것은 이제 없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그나마도 가끔, 그저 구호처럼 되새기고 있는 것만 같기도 하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뭔가 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저 지켜봤을 뿐이다. 마음속으로 응원했을 뿐이다. 기도했을 뿐이다. 기도 밖에 할 게 없다는 핑계로 스스로의 무력함을, 수치심 을, 비겁함을 변명하며 합리화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시작과 희망 끝과 망각

우리의 ‘시작’이 되풀이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어떤 마지막, 끝이 필요하다는 것. 무엇인가 끝나지 않고는 무엇인가가 다시 시작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신은 우리에게 해가 떠오르고, 지고,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인간은 덕분에 매일 매일 어둠이 끝나고, 새롭게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광경을 지켜본다. 떠오르는 해는 캄캄한 어둠을 삽시간에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그 압도적인 광경에 넋을 놓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때문에 우리의 희망이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해의 모습을 닮 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종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경구 를 떠올리며, 좌절과 절망이 가득한 마음속에 희망을 품는다. 그럴 때, 우리의 희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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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해를 닮는다. 그 희망은 극적이다. 환상적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전의 모든 어두운 것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버리는 ‘새로 운 시작’을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의 새해. 아, 그러니 우습게도 이렇게 말해질 때, ‘희망’의 다른 이름인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필연적으로 선행될 ‘마지막’에는 ‘망각’ 이 있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종종 희망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우습게도 망각에 의존하고 있다. 망각을 전제하는 변화를 말하는 ‘희망’은 환상에 불과하다. 착각해선 안 된다. 그러나 한해의 마지막, 12월이 되면, 나 역시도 그렇듯, 많은 사람들은 많은 일 들에 무조건적인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한다. 우리는 한해와 새로운 한해가 만나는 시점 에 망각의 축제를 벌이고, 또 다시 무언가 ‘아주 없었던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싶어 한 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이 가는 길에 여러 번 금을 긋고, 여기까지, 여기서부 터 라는 의미 없는 말들로 수많은 끝과 시작을 새겨왔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올해의 마 지막이 유독 두렵다. 어떤 일에 의미 없는 종지부를 찍어, 끝내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 이다. 올해가 끝나도, 끝나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끝내서는 안 되는 일이. 없었던 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4월 16일, 이후 올해를 돌아보다 4월 16일의 그 날에서 멈춰 선다.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참혹한 사고 앞에서 슬픔에 빠질 틈도 없이 우리를 충격과 분노에 빠뜨린 것은 이것이 ‘사고’ 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을 구조하지 ‘못한’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구조작업 은 시작도 없이 끝났다는 사실. 한참이 지나서야 ‘수색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수색은 ‘수습’이 되었고, ‘수습’은 인양을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 온갖 거짓말들, 망언과, 그 비겁함과 악랄함을 땔감삼아 타오른 분노와 그 뒤에서 가라앉은 아이들, 희생자들을 향한 연민과 슬픔은 영원히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맹렬하게 뻗었던 분노의 손가락 끝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공 뿐 이었다.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 고, 대신 그 손가락을 이미 죽어버린 정체도 알 수 없는 한구의 시신으로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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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대상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슬픔과 연민은 어떤 이들에 게 권력이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동정심을 가지고 소위 ‘갑질’을 시작했다. 그들은 유 가족들의 슬픔을 조롱했고, 모욕했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다. 슬픔과 우울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무기력과 절망마저도 낙엽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매일 매일의 일상의 시간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우리와 우리의 슬 픔을 휩쓸었다. 달력의 숫자들에 집어 삼켜지는 그 날의 기억들과 상처들, 조금도 해결 되지 않은 모순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건들을 메워버리고,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불고, 또 다시, 따듯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나는, 우리는 금세 ‘일상’을 되찾았다. 누 군가는 그저 때때로 그 날을 ‘기념’하며, 종종 연민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감정들을 느 끼는 것으로 만족 하게 될 것이다. 일상으로,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가, 그러나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우리 중 누군가의 일상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황정은씨는 그의 에세이 ‘가까스로, 인간’에서 이렇게 썼다. 팽목항. 그 장소에서 칠십여 일 동안 바다를 향해 밥상을 차리고 그 밥을 먹을 딸이 뭍으로 돌 아오기를 기다리던 남자가 있었다. 마침내 그의 딸이 뭍으로 올라왔을 때 사람들은 다 행이라며, 그간에 수고가 많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일상으로. 사람은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끔찍한 것을 껴안고 살 수는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지. 잊 을 수 있지. 그런 이유로 자 일상이야, 어떤 일상인가, 일상이던 것이 영영 사라져버 린 일상, 사라진 것이 있는데도 내내 이어지고 이어지는, 참으로 이상한 일상, 도와달 라고 무릎을 꿇고 우는 정치인들이 있는 일상, 그들이 뻔뻔한 의도로 세월을 은폐하 고 모욕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 진상을 규명하는 데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지 않는 일상, 거리로 나와야 하는 일상, 거리에서 굶는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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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과 같은 마음으로 초코바, 초코바, 같은 것을 자신들에 게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느냐고 아니 그보다 내가 좀 살아야겠으니 이제는 그만 입을 다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밤이 돌아 올 때마다 그처럼 어두운 배에 갇힌 아이를 건져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 는 일상, 4월 16일 컴컴한 팽목항에서 제발 내 딸을 저 배에서 좀 꺼내달라고 외치던 때의 통증에 습격당하곤 하는 일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이 없어, 거듭, 거듭, 습격당하는 일상. 왜 그런 일상인가. 그의 일상이 왜 그렇게 되었나. 그의 일상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2014.10.16 / 전남 진도체육관 / 이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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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까지 마지막, 까지 올해 9월에 ‘눈먼 자들의 국가’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 있다. 이 책에는 계간 ‘문학 동네’ 2014년 여름호와 가을호에 ‘세월호 특집’으로 게재되었던 여러 작가들과 지식 인들의 글이 모아져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각자의 자리, 각자의 시간에서 세월호를 바라봤던 여러 시인, 작가, 지식인들의 기록이다. 위에서 소개한 소설가 황정은씨의 글 도 여기에서 발췌했다. 숙연하고, 무거운 책이다. 소중하고, 고마운 책이다. 덧붙여 나는 희망이라는 것은 조금 더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은 망각의 대가 로써가 아니라, 조금 더 치열한 어떤 것이어야 한다. 희망은 절망하지 않는다는 그 자 체이며,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망은 세계에 맞 서는 것이며,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끝나지 않는 것이다. 아니, 끝내지 않는 것이다. _대충 소설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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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

- 쓸쓸한 마음을 위한 인사 1.

끝은 쉽게 오지 않는다. 한 해의 마지막을 말하고, 이제 곧 한 살 더 먹을 나이에 대해 서 말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2014년이 끝난다고 해도 삶은 이어지고, 졸업과 퇴사, 이사에도 관계는 이어진다. 나의 20대 혹은 30대가 지난다 해 도 다른 국면을 맞이할 뿐이며, 사실 어떤 변화 없이도 시간은 이어지기 마련이다. 엄 연한 의미에서 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끝’들에 대해서. 진정한 ‘마지막’이란 흔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끝이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아 픈 사랑의 끝, 생에 몇 번 없길 바라는 관계의 끝, 결국 찾아올 생의 끝. 흔하지 않기 때 문에 이 ‘끝’이 그리도 묵직하고 지독한 냄새를 갖게되는 것이다. 흔하지 않으나, 아 프고, 쓰리다. 결국 연말은 끝 같지만 끝은 아닌 시즌이고, 다만 돌아보고 정리를 하게 되는 시기이 다. 송년회다 파티다 모임은 많지만, 혼자서는 말이 줄어드는 시기이다. 마음은 가득 차거나, 혹은 비워지거나, 비우려고 하는 시기. 추워서일까. 몸도 움츠러들고, 추위에 떨다가 마침 돌아보게 되는 빈 자리에 마음은 널뛰기를 한다. 하지만 그 비어있음이 끝 은 아니라고, 네 앉은 그 자리 위로 찬란한 겨울 태양이 있다고, 위로의 말을 나에게 너 에게 전하면서 편지를 쓴다. 다른 이들의 그림으로. 그래, 이 모든 이야기는 이 그림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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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아트 Edward Hopper, Sun in an Empty Room, Oil on Canvas,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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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경 Nighthawks>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9821967)는 건조한 도시의 풍경을 주로 그렸던 작가이다. 등장인물은 절대 많은 법이 없 고, 몇 명이 나오더라도 크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 않다. 그들은 각자의 할 일이 있다. 사무실에 앉아 있든 책을 읽고 있든 멍하니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든, 각자의 고독에 빠 져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호퍼의 시선. 풍경화 역시 마찬가지 이다. 미국식 모델하우스처럼, 생기와 온기보다는 집의 건조한 생김새가 먼저 눈에 들 어온다. 야심찬 서사의 대형 작품보다, 도시의 작은 이야기에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지 나치고 있을 도시의 사사로운 풍경에서 호퍼의 걸음이 멈춘다. 호퍼의 도시 풍경을 좋아라 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그의 유명한 몇몇 작품들과 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호퍼 후기의 그림 두 점, <빈 방의 햇살Sun in an Empty Room> 과 <바다 옆의 방Rooms by the Sea>. 현대식 건물의 내부이지만 사람도 도시의 느낌 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비어 있다. 연극이 끝난 무대의 뒤편같기도 하고, 살던 사람 도 다 떠난 빈 집 같기도 하다. 그저 덩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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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Hopper, Rooms by the Sea, Oil on Canvas,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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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다시 보면, 저 공간은 비어있으나 비어있지 않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 햇살 그래 햇살. 손을 뻗지 않아도 저 온기는 분명한 것이다. 누군가는 떠났을 수 있겠다. 빈 방이라고 그저 이름 붙여도 무리 없을 수 있겠다. 그 러나, 그럴 수 없다. 작가에게 붓을 잡고 자신의 공간을 캔버스에 창조하는 일은, 빛과 벽과 사물을 하나씩 세우는 일일테다. 빛을 채우고, 텅빈 공간을 창조하는 일. 아예 붓 을 잡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붓을 쥔 손에게 텅 빈 공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완 성을 외칠 때가 있겠지만 작가의 손에 붓이 들려있다면, 언제나 쉬이 끝을 말할 수 없 는 법이다. 4.

호퍼의 그림을 보며 나는 그림 속의 공기가 되었다가 작가가 되었다가 한다. 텅 빈 공 간이라 하여도 그 안의 충만한 햇살에 눈을 감았다가, 또 조금은 지쳐있다 할지라도 여 전히 붓을 손에 쥐고 제 딴에 열심히 붓질을 하고 있다. 캔버스가 되기도 한다. 이따금 내 몸에 와 닿는 그분의 붓질을, 느낀다. 내가 너무 허술하게 칠해졌거나, 스케치가 명 확하지 않은 것처럼 느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텅 빈 공간이란 없다. 텅 빈 가운데의 충만함이 있다. 완전한 끝을 말하기 이전에, 그 사 이를 채우는 빛이 있다. 그 사이를 가득 매우는 대기가 있다. 5.

빛은 그렇게, 어떤 사물의 존재로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존재감을 가진다. 20세기의 호 퍼에서 넘어와 정보영의 그림에서도 그 빛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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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영, 세우기 Lighting up, 2014

정보영, Appearing, or disappearing,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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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교도소 생활에서 겨울보다 여름이 더 끔 찍하다고 하였다. 열악하고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더라도, 겨울에는 적어도 서로의 존 재가, 내 옆에 있는 36.5도의 생명체가 위로가 되지만, 여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 저도 모르게 내 곁의 열덩어리를 증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겨울이 좋은 이유는, 그 한기 때문에 온기를 바라게 되고 빛을 바라게 되고 사람을 바라게 된다는 점이다. 겨울 은 ‘비어있음(vide)’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텅 비어있는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 때는, 역설적으로 충만의 지점과 멀지 않을 것이리라. 비어있을 때만큼, 던져지는 빛 한줄기와 온기에 소스라치게 반응하는 때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대, 비어있다면 충 만함에서 멀지 않은 것일테다. 그러니, 쉬이 끝을 말하지 말 것. 그리고 찬란한 겨울 햇 살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 볼 것. _꽤 애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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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음악

0 0.

우리가 맞는 모든 순간은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

‘더 라스트 오브 어스 (The Last of Us)’라는 게임은 내게 인류 마지막의 순간을 체험 하게 해주었다. 게임 속 인류멸망의 묘사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대부분이 죽 거나 좀비로 변한 세상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부는 도적이나, 게릴라가 되었고 아 직도 정부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누군가는 군인들을 동원해 감염자를 색출하고 통 제하는 세상이다. 조엘(주인공)은 이 암울한 세상에서 모두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 이고, 도와줄 사람도 믿을 만한 사람도 없다. 스 스로 자신의 목숨을 지켜내야 하며 게임 속 챕터제목의 표현대로 ‘짐짝’ 같은 엘리( 또 다른 주인공)도 책임져야 한다. 게임은 시종일관 폐허와 지하도, 모두 떠나고 좀비 만 득실거리는 마을과 학교를 누벼야 한다. 이 글에서 게임을 분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워낙 유명하고 여기저기서 상도 많이 받은 게임이다. 이 게임의 비평은 이미 인 터넷에 넘쳐 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게임은 나에게 인류 마지막의 체험을 선사 했다. 괴 바이러스로 인 해 사람들이 오직 식욕만이 남은 좀비가 된다는 설정은 이미 흔한 소재지만, 나는 왠지 이런 세상이 조만간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이미 슬그머니 와있다고 생각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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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물론 게임에서처럼 갑자기 서울 한 복판에 좀비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 만,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바이러스는 많으며 인류 스스로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를 조 작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런 영화 같은 날이 절대 오지 않을 거라 믿는 것도 영화 같은 일이다. 뉴스에서, 인터넷에서 이미 우리는 좀비들을 보고 있다. 다만 그 좀비들은 인 간의 살을 먹는 대신 돈을 먹을 뿐. 2.

결혼할 때부터 아기는 내게 어떤 숙제 같은 것이었다. 평생 안 낳고 살 자신은 없지만, 낳아 기를 자신도 없는. 아기를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낳기로 결정 하지도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흘렀고 아이가 생겼다. 아내의 임신소식을 알았을 때, 나는 이제 적어도 어떤 고민 한 가지는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기 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마음. 태어날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 야 할 세상이 그리 좋은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을 다 건다 해도 세상이 좋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에 더 미안했다. 왜 이렇게 패배주의 적이냐고? 나는 찬란한 미래, 좋은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이 상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갑자기 수질이 좋아질리 있겠는가? 갑자기 지구 온난화가 멈추고, 기온이 자기자리를 찾으며, 빙하가 녹기를 멈추겠는가? 갑자기 노 동자들의 권리가 안전하게 보장을 받으며, 성, 인종,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차별이 사 라지겠는가? 갑자기 모든 나라들이 전쟁하기를 멈추겠는가? 이 모든 일들이 그대로 인 채로 과연 찬란한 미래가, 좋은 미래가 가능 하겠느냐고. 나는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류는 지금 마지막을 향해 질주 하고 있다. 아니, 인류 의 태동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질주이고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울하지만 현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질주를 멈추는 일 이 아니라, 그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일일 것이다. 아이와 함께 살며 새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 있다. 내 아이를 보면서, 그리고 주위에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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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가는 모든 아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부모, 선생, 어른 따위의 꼰대 같은 마음들을 버려야 한다. 아이들은 멸망해 가는 인류의 마지막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다. 3.

내가 밴드 Rachel’s 를 처음 알게 된건 1996년 음반 <Music For Egon Schiele>를 통 해서 였다. 앨범 재킷이 에곤실레 그림이었는데, 당시 에곤실레 그림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커버를 보는 순간 ‘사야 겠구나’ 생각했다. 이 앨범은 음반 매장에 ‘록’ 코너에 꽃혀 있었고 나는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 밴드 정도로 이 밴드를 생각했 다. 집에 와서 처음 씨디를 듣는데 충격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밴드가 전혀 아닌, 피아 노, 비올라, 첼로로 구성된 클래식에 가까운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실내 악 같은 음악이 나에게는 굉장히 새로운 록음악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이 밴드를 좋 아하게 되었다. 2003년 음반 <Systems / Layers>는 이들의 현재까지의 마지막 앨범이자, 이 밴드의 곡중 유일한 보컬 곡 ‘Last Things Last’가 수록 되있는 음반이다. 이곡은 Shannon Wright라는 가수가 보컬로 참여 했으며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앉아 있다. 기승 전결 이라 부를수 있는 드라마틱한 구성을 가진 곡도 아니며, 고음의 보컬도, 현란한 연주가 있는 곡도 아니다. 고요하고 우울한 3분 37초짜리 곡이다. 우울하고 고요하게 3분 37초를 보내는 일은 꽤 힘든 일이다. 그리고 요즘처럼, 10초, 아니 5초만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몸은 스마트폰을 향하지 않던 가.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면서 과자를 씹는 동시에 가려운 등을 긁는 일은 자연스러 울지 몰라도, 아무것도 안하고 음악만을 3분 37초 듣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한 번 실험해 보시길!) 그런데 음악은 그렇게 들어 볼 일이다. 핸드폰, 태블릿으로 걸어 가며 음악을 듣는 것이 요즘 아주 흔한 풍경이지만, 집중에서 음악을 들을 때 오는 감 동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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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곡에 나오는 피아노,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가수의 목소리는 합쳐진 하나가 아닌, 각 각 독립된 하나로 3분 37초를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인생처럼. 그리고 3분 37초 후에 오는 것은 침묵이다. 4.

흔한 게임이나 영화처럼 마지막은 그렇게 극적으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릇, 늦게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르듯 그렇게 서서히 마지막으로 갈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을 향한 그 끝없는 질주를 멈출 수 없다면, 나는 그 질 주 안에서 최대한 빈둥거 리고 싶다. 그 질주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살고 싶다. 흙을 매만지는 일이 즐거운 일임 을, 사람들과 만나서 수다 떠는 것이 의미 있는 일임을, 집에서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거리는 일이 얼마나 깊이 있는 일인지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며 같 이 경험 하고 싶다. 오늘 만져보지 못한 흙 위로 내일 아스팔트가 덮일지도 모를 일이고, 오늘 못 만났던 사람이 내일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나갈지도 모를 일이니까. 오늘 빈둥거리지 않으면 ‘여유’를 모른 채 매일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참, 같이 경험 하고 싶은 또 한 가지 세상의 모든 음악 끝에 오는 침묵도 추가. 0.

우리가 맞는 모든 순간은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_거의 편집장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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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영화

세상의 끝

다들 살기에 바쁘다. 사는 모양새는 다 다르지만 참 이래저래 다양하게 바쁘다. 올 한 해를 돌아보니 많이도 분주했고 애는 많이 썼는데 그만큼의 성과가 있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알겠다. 바쁜 날들이 지속되면 육체는 지치고 정신적으로 피로가 쌓 인다. 피로가 쌓이고 여유를 잃으면 황량한 마음이 되어버린다. 가족들의 넘치는 사랑 과 연애의 떨림이 겨우 위로가 되어 날을 이어갈 수 있게 한다. 야근하고 집에 돌아가 는 버스의자에서 문득, ‘예수는 언제오시나, 오신다더니, 올 기미를 보이신 게 언젠데 아직도 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중얼거렸다. 집에 와서 그 생각을 친구에게 전했다. 예수가 속히 오면 좋겠다고 그러면 다 끝나지 않겠냐고 말이다. 친구는 예수가 다시 온다는 건 세상 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걸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은연중에 이 지지부진한 삶의 고투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것을 예수 를 핑계로 그만두고 싶어 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그저 세상의 끝을 바란 것이다. ‘세상 의 끝’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저 인류와 지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인가. 인간들 은 끊임없이 죽음과 세상의 끝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세상의 끝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터스텔라>의 지구는 황폐하다. 기상이변으로 흙먼지가 온 땅을 메워서 숨을 쉬는 것도 어렵다. 해를 가리고 모래바람이 불어 척박한 땅은 겨우 옥수수만을 생산해 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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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이 바닥나는 것은 시간문제라 인류의 미래는 뻔하다. 전직 우주비행사 쿠퍼는 장 인어른과 큰아들 톰, 작은 딸 머피와 산다. 그들 가족은 옥수수 농장을 운영하는데 농 장을 운영하는 쿠퍼의 눈은 땅을 향해있지 않고 늘 상 하늘을 향해있다. 그의 초점을 알 수 없는 눈빛은 그가 단순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과거에 속했으나 다시 갈 수 없으리라는 것, 하지만 자신 이 속할 곳은 언제나 그 곳이라는 미래에 대한 간절함이 그 초점 잃은 눈 속에 보인다. 그러던 중 쿠퍼와 그의 딸 머피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해석하다 사 라진 줄 알았던 미항공우주국을 찾게 된다. 그들은 인류가 이주할 새로운 행성을 찾 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고 딸 머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쿠퍼는 그의 눈이 간 절하게 쫓던 우주로 향한다. 그것은 그의 가족과 인류를 위한 것이었지만 머피는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 새 행성을 찾기 위해 먼저 파견된 동료들이 보낸 신호를 쫓아 쿠퍼 일행은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시간의 속도가 다른 우주에서 그들은 중력과 시간 을 다투며 어떻게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애쓰지만 인간들이 있는 곳에 당연히 존재하 는 거짓과 욕망이 그들의 미래를 뒤틀어버린다. 볼 사람은 다 봤을 것이므로(천만 관 객 달성이 코앞이라니)영화의 결말을 공개하면 해피엔드라 할 수 있다. 곧 죽을 위기 에 처했던 지구는 재생에 성공했고 지구와 같은 대기권을 갖춘 새 행성도 찾았다.(앤 헤서웨이가 분한 브랜드 박사가 그의 연인의 무덤 곁에 앉아 숨 쉬던 장면을 기억한다 면) 쿠퍼가 블랙홀에서 구조되어 머무르고 있는 우주정거장은 그간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보여준다. 늙은 딸은 그토록 그리던 아버지를 만났고 젊은 아버지는 딸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지구의 멸망도 인류의 멸종도 막아내었고 선택받은 인간들은 블랙홀 의 신비를 풀고 그들의 힘으로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해내었다. 이 어마어마한 해피엔 드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내내 기분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세상의 끝을 극복한 인류를 보고도 딱히 기쁘지 않은 이 석연치 않은 기분은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딸 머피는 왜 자기 이름을 머피라 지었느냐 아버지에게 따진다. 머피의 법칙의 머피라 니 그래서 자신이 운이 없는 거라며 툴툴댄다. 쿠퍼는 머피의 법칙은 안 좋은 일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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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고 답한다. 쿠퍼의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지구의 종말 앞에 그 종말을 불식하 고 해결할 키가 머피와 쿠퍼에게 있음을, 그래서 그들에게 일어날 일들 이를테면 그들 이 초자연적인 게시에 이끌려 결국엔 우주로 향하고 우주 가운데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상을 구할 해답을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 말이다. 쿠퍼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일어 날 일을 일어나게 하는 존재들이 그들을 우주로 이끌었고 그 주체가 존재함을 끊임없 이 전제한다. 그리고 그 힘이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하 여 그 해결의 열쇠를 전하는 순간 그들을 이끌어낸 힘도 그 열쇠에 감추인 비밀을 풀어 내는 힘도 결국엔 자기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 자신이 그 힘 자체임을 고백 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몸이 움찔했다.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자 존재자체인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그 힘 자체도 그 힘을 이끌어내는 주체 도 인간과 그들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섬뜩하게 느껴졌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 말을 반박할 생각은 없다.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자들, ‘예 수’ 믿는 자들에게 운명과 예정은 익숙한 개념이다. 신의 뜻이 있고 그 뜻에 의해 정해 진 것이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그 운명과 예정이 지칭하는 일어날 ‘일’이란 어떤 ‘사건’의 예정 이라기보다는 어떤 ‘방향’의 예정을 의미한다. 종말로부터 세상을 구 하기 위한 ‘일’이 어떤 예정된 ‘사건’에 의한 우연한 결과로써의 ‘구원’이 아니라 ‘구 원’과 ‘회복’이라는 방향으로서 예정되어 있어서 그들의 방식과 무관하게 그 결과에 이르도록 인간을 이끌어낸다는 의미다. 하지만 구원의 주체가 그들 자신이 될 때에 ‘ 일’은 ‘방향’이 아니라 ‘사건’이자 ‘결과’가 되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존재를 부정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힘과 존재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며 신을 긍정하던 영화는 갑자기 신을 끊어내고 그 자리에 인간과 그들의 의지를 끼워넣는다.(사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것은 이미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터스텔라>에는 사랑이, 그것도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존재한다. 자기 자신 에 대한 사랑, 동료와 연인에 대한 사랑, 가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끊임없이 언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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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수많은 언급 속에서도 관객이 그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지는 확신 하기 힘들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쿠퍼와 브랜드 박사가 탄 우주선의 연료는 제한적이다. 그들에게 남은 연료로는 남아있는 두 행성 중 한 행성을 선택해서 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선택지는 명확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행성과 신호가 간헐적이어 서 믿을 수 없지만 브랜드 박사의 연인이 있는 행성, 이렇게 두 곳이다. 브랜드 박사는 사랑을 택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전 행성에서 겪은 실패로 박사는 이성보다는 사랑을 믿는 것이 방법인 것 같다고 연인이 있는 행성에 가자고 애원한다. 그 바람에도 불구하 고 그들은 이성적으로 확실한 신호를 보내는 행성으로 향하는데 막상가보니 그 신호 는 거짓이었고 덕분에 또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 밝혀지지만 브랜드 박사가 ‘사랑’이라고 말한 그 행성은 미래의 지구가 될 적합한 땅이다. 이 단순 한 구조가 불편했다. 사랑이 마치 하나의 개념인 것처럼, 이성과 욕망의 반대말인 것처 럼, 몹시 유치하게도 연인이 있는 곳은 사랑의 땅이 되어 지구의 미래가 거기에 있다는 설정을 받아들여도 좋은지 모르겠더라. 이성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 같겠지만 그 덕에 너희는 또 다른 개인의 이성과 욕망으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협, 이 1차원적 인 메시지를 <메멘토>, <인썸니아>, <배트맨> 시리즈물에 <인셉션>까진 만든 놀란 감 독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이런 끝없는 사랑타령에도 불구하고 그들 이 뱉어내는 사랑이라는 언어로부터 사랑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 인류의 미래란 결국 자기 자녀들의 미래다. 쿠퍼는 톰과 머피를 위해 우주로 간다. 이 미 그의 눈은 끊임없이 우주를 향해있었는데도 그의 입술은 톰과 머피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우주에 간다고 말한다. 그렇게 쿠퍼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인 류애와 부정(父情)이 넘치고 직관과 판단력이 훌륭한 인물로 비춰진다. 그의 부정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억지스러워 보는 것은 나하나 뿐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우주 를 향한 것을 오로지 사랑에 근거해 해석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많다. 쿠퍼는 자신이 우 주에 속한 것에, 머피는 그 우주의 신비를 푼 것에 그들의 삶의 이유를 두고 있다. 그들 의 힘으로 블랙홀의 비밀을 풀고 인류를 구원한 늙은 머피와 젊은 쿠퍼의 만남,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도 그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는 선택받은 인간들의 영웅적인 응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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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느껴진다. 지구도 인류도 구원받았지만 그 기쁨은 마치 둘 사이의 정서처럼 내게는 몹시도 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들 삶의 완성은 부녀지간의 사랑의 완성에 있지 않고 그 들 각자의 성취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때문에 구원받은 세상의 이미지는 사 랑 없는 황량한 공간에 불과해 보인다. 영화가 말하는 일어날 ‘일’이란 결국 인간들의 의지와 스스로를 이끄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사건이다. 때문에 그들 세계에 신은 없다. 기이한 것은 세상 끝에서 구원받은 지구가 내게는 이미 끝나버린 세상으로 읽힌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 계, 인간들이 그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우주의 신비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간주될 때, 내게는 그간의 감추어졌던 생의 내밀한 섭리와 삶을 지탱해주던 그 세심한 힘들이 의미를 잃고 시시해져 버린다. 인간들이 몹시도 진지하게 자신들의 나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 우리 자신이 곧 우리를 이끄는 섭리 자체라는 통찰을 던지는 것이 내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세상의 끝’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인류라는 종으로 지 구에 존재하기만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믿음이 나는 없다. 사실 그럼에도 쿠퍼를 연기한 매튜 매커너이의 연기는 마음을 움직이게 할 만큼 훌륭 했다. 어느 기사에서 보니 완벽하게 노력하지 않은 영화를 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놀란의 연출은(극본도 그가 쓴 건지 잘 모르겠다만) 영화가 일군 물리적 성취와는 별 개로 그다지 완벽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세상은 신이 없는 것처럼, 누구도 심판받지 않 을 것처럼 돌아간다. 이 신이 없이 구는 세상 속에서 이토록 거대한 스크린이 그 사실 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해주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더 서글픈 것은 그 영화 를 보고 느낀 불편함의 이유를 한참 후에야 깨달은 것이다. 나에게 세상의 끝은 신이 없다는 가정 자체였다. 신이 없는 세상을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일에 자신이 없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영화에 공포를 느꼈다. 멀쩡한 영화를 보고 이렇게 허무맹랑한 설명을 하게 된 것이 좀 민망하긴 하지만. _다르덴 자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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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묵상

인터퍼스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주 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8-9) 애애어른 할 것 없이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냐고 난리들이다. 심지어 유치원 아이들도 요즘 시간이 너무 빨라서 도무지 친구와 야쿠르트 한잔 할 시간도 없다고 아우성이다. 우리 어릴 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 때야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나, 언제 어른 이 되나 하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탓하며 오늘의 학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만 을 학수고대했다. 이와 반대로 옆집 40대 후반 노총각 아저씨는 일주일이 어떻게 가는 지 모르겠다며, 30대였을 때는 시속 30킬로로 달렸던 시간이 이제는 40킬로 아니 50 킬로 100킬로로 달리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상대성은 아인슈타인의 이 론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듯하다. 요즘 뭔가 이상하다. 마치 절대 시간 개념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처럼 우리 모두는 그 절대 시간의 속도를 동일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만으로는 설 명할 수 없는 이 현상이 나의 묵상의 질문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지구 중력과 다른 별의 중력의 차이가 시간에 주는 영향 을 설명해 준 이론이다. 중력은 다른 공간에서의 시간 차이와 속도의 개념을 깨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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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빛의 항속성(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 었다. 기본적으로 1초는 세슘 원자의 진동수, 더 간단히 말하면 빛으로 계산한다. 즉, 빛의 속도가 변하지 않는 이상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빛이 곧 시간을 나타 내는 단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예전에 1초는 지구의 자전에 의한 평균 태양일의 1/86,400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지구의 자전은 불규칙하므로 시간의 정확도를 보장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자시계가 발명된 이후 이를 이용해서 시간의 단위를 새롭게 정 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자시계와 태양시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오차를 보정하기 위하 여 윤초를 사용한다.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지만, 공간은 비틀어지거나 접히는 등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 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공간의 축을 마련해준다. 상대적 시간 개념은 과거 우리가 가 지고 있는 3차원적 공간에 시간 축 하나를 더하여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단지 수학이나 과학 분야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위의 말씀에서 시간의 변화를 일 으키는 제5의 요소를 본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축이다. 어떤 이들은 주님이 더디 오시 는 것 아니냐고 불평 섞인 목소리를 높인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이들에게도 한 계가 왔다. 로마의 핍박보다, 동족들의 멸시와 조롱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예수 그 리스도를 따랐던 교회 내부로부터의 불만과 의심들이었다. 마음은 더욱 닫혀가고 있 었고 의심은 확신으로 넘어서는 중이었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축의 인식이다. 사랑하 는 사람을 기다린다고 가정해보자. 기다림의 시간은 다른 시간적 차원을 달리게 된다. 이 사랑에 대한 시간 축이 단지 개인차에 의한 것이고 감정에 의한 착각이나 착시현상 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사랑은 실재하는 힘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물질에는 구체적인 물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꿈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던 것처럼 사랑을 통해 물리적인 공간의 뒤틀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것은 실제 우리 공간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목격된다.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시간 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 안에 있다. 천 년을 하루가 되게 하고 하루가 천 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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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늘어지는 놀라운 시간의 변형도 하나님 그분 스스로 사랑이시고 사랑이라는 축 변 화를 통해 만들어내는 시간 조절 능력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간(빛)을 주시고 그 것을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시간에 끌려다니기 시작했고 절 대적인 시간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오늘이라는 풍성한 시간 을 살지 못하면서 불평은 늘어가고 부족해진 시간은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푸념으로 이어진다. 이런 반응들은 요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에도 이런 생각들에 관 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 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 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 3:13-14) 히브리서의 이 부분에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오늘이 주는 시간의 느낌은 과거 혹은 미래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중첩되고 들뜬 상태의 원자의 진동. 즉, 세슘 133이라는 원자에 어떤 특정 주파수의 전파를 쬐고 세슘 원자가 바닥상태에서 들뜬 상태로 변하고 이 특정 전파의 진동수 9,192,631,770가 비 로소 차면 창조되는 1초. 그 1초가 더하여져 만들어 내는 오늘. 그 오늘, 우리는 인격과 인격 사이의 무한한 공간을 탐험할 것이고 또한 사랑이라는 중력보다 강한 힘이 만들 어내는 공간의 비틀림을 통해서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인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 다. 그 사랑의 힘을 믿는, 그리고 견고히 잡는 그 사람에게 반드시 사랑은, 그리스도는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랑의 힘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_시간의 속도, 은근한 태평씨_

시간의 속도, 은근한 태평씨 : 모르겠어도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겁도없이 나선다. 종합 예술인을 꿈꾸던 학부시절 을 보내고 선천적으로 현실 감각이 떨어져 사회 생활하기가 녹록치 않지만 ‘에라 모르겠다’로 홀로 태평성대를 누리 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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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편지 조명을 끄고, 음악도 오프.

조용히 한 해를 정리해보려고 자리에 앉았어. 이제 한 달도 안남았더라고. 딱 일년 전 사진을 보고 있어. 찐한 대추차 한잔을 마시며, 어떤 이야기를 나눈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몇년 후 어떠한 모습으로 변했을지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몇 년 중 하나가 지났어. 뭐 작년이랑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점점 바뀌어가고 있을꺼라 생각해. 이렇게 만나는 것도 참 매력적이네. 생전 나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담에 언제 편지를 쓸 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누군가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 응? 안녕. _토리_

토리 : ‘토리’라는 별칭을 가진 사진쟁이. 주로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사진수업을 해서 수입을 얻고, 나머지 시간엔 다 큐멘터리 작업을 하며 살아간다. 참 토리는 ‘빅토리’, ‘외토리’ 아니고, 단순히 머리모양이 ‘도토리’같다고 해서 친구들 이 불렀던 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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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사진 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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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영화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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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is the End is the Beginning The Smashing Pump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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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FF * 거의 편집장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 으로는 먹고살기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아, 다른 노동으로 돈을 벌면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 을 심각한 취미 로 여기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남자 사람 노동자. * 꽤 애호가 무심하게 마침표 찍기 보다는 쉼표와 함께 생각하고 싶으며, 간단히 재단하기 보다는 시 간이 걸려도 상세히 이야기하고 싶다. 구불구불한 골목 어귀를 걸으며 긴 대화 나누는 것 을 좋아한다. 삶의 태도로써의 예술을 지향하고, 그것이 결국은 삶을 예술로 만듦을 믿는 다. 길을 잃었을 때라야 비로소 도시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듯이, 예상치 못하였던 시간 을 통해 즐거운 사람들을 만난다. 놀다가, 걷다가, 이야기하다가, 웃다가 하는 이 공간이 즐겁다. * 다르덴 자매 다들 행복하기만 한 거 같아서 불편했다. 그럴 리가 만무한 거 같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 다. 영화를 보면서 삶이, 행복이 무언지 조금씩 생각을 고쳐먹었다. 얇고 짧은 생이라 이 렇게 몇 자라도 쓰다보면 통찰이 돋아나는 날이 오겠지 싶어 <놀다가,>에 투신(?) 해 보 기로 했다. * 대충 소설가 적당주의자: 한탕주의적이고 무사 안일한 현실주의적 비관론자. 즉, 어차피 세상 사는 거 한번이고, 결국 로또는 누구한테든 터질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안될 것이고, 그렇지만 뭐, 모두들 어떻게든 살지 않겠어? 라며 하루하루 실실 쪼개며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 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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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문화잡지 월간 <놀다가,>는 덜 벌고 더 노는 세상을 꿈꿉니다. 혼자 놀기보다 같이 노는 세상을 꿈꿉니다. 완벽한 전문가 보다는 투박한 아마추어를 사랑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느낌, 생각, 이야기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같이 놀까요?

거의 문화잡지 월간 <놀다가,> 2014년 12월 24일 7호 http://noldag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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