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sm vol.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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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6

대 학 생

제6호 2013년 10, 11월 프리즘 편집위원회 주관 영화가 시대를 품는 법

국 제 시 사 저 널

국경 없는 내전, 시리아

프 리 즘 제 6 호 2 0 1 3 년

작품집, 도록, 교지, 단행본, 신문, 카달로그 포스터, 리플렛 등등 모든 디자인 제작, 광고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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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전 5도인쇄기 미쓰비시 대국전 5색기 Diamond LS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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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말 분쟁이라 해야 할지, 내전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차라리 국제전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시리 아의 현 사태가 중요하다는 점에는 쉽게 의견이 모일 것 같다. 90년대 페르시아만 침공과 2000 년대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이 일극 체제 속 일방주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면, 작금의 시리아 사태는 초강대국이 혼자 힘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도전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 이해가 얽 힌 중국과 러시아가 마침 경제적으로도 부상하고 있어, 이들의‘비토’ 는 미국의 의지가 아니라 미국의 지위 그 자체를 겨냥한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시리아 사태가 미국의 세계 전략 구상에서 줄곧 괴로움이 되었다면,《프리즘》에게 시리아 사 태는 다른 의미에서도 고민이 되었다. 끊임없이 보도되는 유혈 충돌, 쏟아지는 듯한 난민의 이주 실태, 국제 사회의 비협조와 요원한 해결, 이 가운데 통계 자료의 이면으로 사라져 들어가는 수 많은 존엄의 유린. 자료를 모으면서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하는 것은 방대한 정보, 그것도 방대한 고통의 정보다. 사태를 냉정하게 보려는 자세 때문에 체험할 수 없는 고통에 소홀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가시지 않는다. 시리아의 고통 자체는 기사의 초점이 아니지만, 분석적인 눈길이 궁 극적으로는 쓰는 이와 읽는 이에게 평화의 필요성을 한 번 더 설득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희망 한다. 여전히 많은 대학에서 중동의 역사와 정치, 언어를 충분히 배우기 어려운 상황에 있으며, 따라 서 편집위원들도 익숙하지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 늘 어려움에 봉착한다. 중동 역사에 낯선 것도 문제지만, 한국이 직접 연루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리아 내 어느 세력, 국제 사회의 어느 국가의 입장에서 사고할 것인가도 간단하지 않은 과제다.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첨예한 논쟁점이 많지만, 도식화된 이해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평가를 지양하고 심층적인 분석을 내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기획 기사들에서는 시리아 사태의 질적 전환과 평화의 전망이 밝지 않다고 진단하기도 하고, 미국이 화학 무기 논란에 미숙하게 대처한 점을 비판하며, 중동에서 국제적 규범의 기준이 이중적으로 적용되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시리아는 여전히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용이 낯선 ‘먼 나라’ 다. 이번 호를 통해 독자들과 더불어 이 나라의 문제에 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희망한 유전자 변형 식품 논란 등 미시적 소재까지, 다른 이야기들 역시 이번 호에서 먼 곳으로부터 곁에 다가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프리즘》 을 발간하는 데 노력해 주신 모든 노동자들께 감사를 드린다.

2013년 10월 편집장 최정훈

ⓒRene Magritte

다. 아울러 미국의 경제적 고민과 이란의 온건해진 손짓부터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공동 주거와


Contents 대 학 생 국 제 시 사 저 널 프 리 즘 Vo l . 6

01

편집장의 말

04

프리즘 우편함

06

오늘 세계는

10

세계인의 한마디

“두 분 선생을 옹호하다가

12

2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더라도”

기획 | 국경 없는 내전, 시리아

시리아는 어떻게 아랍의 겨울이 되었나

Rebels Without a Cause

뜨거운 감자를 더 뜨겁게!

이스라엘은 겨 묻은 개?

After Syria

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30

국제 시사

다가올 악수 혹은 악(惡)수

34

국제 시사

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불황 없다?

38

역사를 들이키다

한 병의 근대, 칭따오 맥주

40

혀로 맛보는 역사

우린 정말로‘미국’음식이에요

42

국제 시사

테러는 무얼 먹고 자랐나

44

국제 시사

GMO, 녹색 혁명의 끝자락에서

48

국제 시사

함께 사니 기쁘지 아니한家

52

세계를 듣다

영원한 레이디, 빌리 홀리데이

56

스크린의 국제정치

영화가 시대를 품는 법, 그 기억의 정치에 관하여

62 66

꿈인가 비전인가

70

독자 퀴즈

71

편집 후기

72

프리즘 사용설명서

권위적인 장사꾼의 평화

프리즘 책갈피

ⓒ김괜저(gwenshiri.egloos.com)

목차

3


Vol.6 대 학 생 국 제 시 사 저 널

편집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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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정부가 반군을 상대로 화학 무기를 사용하면서 2년 넘게 계속되어 온 시리아

수습위원 객원기자 표지 디자인 발행처 인쇄 제작·광고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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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훈 김만희 김영은 김주량 박정민 손현선 이근호 이인재 박새미 견세령 이인재 프리즘, 뿌리출판기획 대학생 국제시사저널 프리즘 (주)인쇄그룹형제 뿌리출판기획 02-741-6411 www.iroots.co.kr journal.prism@gmail.com blog.naver.com/prismjournal @Prismjournal facebook.com/Prismjournal

내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대량살상무 기를 사용한 시리아에의 보복 타격을 두고 미국과 러시아가 외교전을 벌였고, 시리아 의 화학무기금지조약 가입으로 사태가 마 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이슬람 테러단체들이 반군의 주도 세 력으로 떠오른 데다 종파 갈등과 각국의 이 해관계가 뒤섞인 상황에서 시리아는 여전 히 언제 게임 오버가 될지 모르는 혼돈의

간별 발행소 발행년월일 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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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희 마00062 2012년 12월 5일 대학생 국제시사저널 프리즘 격월간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길30 2013년 11월 4일 제6호

Copyrightⓒ 대학생 국제시사저널 프리즘 2013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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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등록번호 등록연원일 제호

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프리즘 우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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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제32회 하계올림픽 개최도시 선정 ⓒReuters

9월 7일 2020년 하계올림픽 개최지가 도쿄로 결 정됐다. 비록 도쿄는 첫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해 2차 투표가 이어졌지만, 60대 36으로 여유 있게 터키의 이스탄불을 따돌리며 개최지로 선정 됐다. 아베 일본 총리는 이날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후쿠시마를 둘러싼 우려에 대해선 보 증하겠다. 상황은 억제돼 있다” 고 발언해 도쿄의 방사능 위험성에 대해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틀 후《아사히신문》 에 의해 실시된 설문 조사에서 일본 국민의 95%는 원전 오염수 문제가 심각하다고 답해 아베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 었다.

ⓒAFP

노르웨이 총선 9월 9일 총선이 실시된 노르웨이에서는 장기간의 좌파 연정을 누르고 8년 만에 우파 연정이 집권했다. 보수당, 진보당, 기독민 주당, 자유당으로 구성된 보수 연정은 전체 169석 중 96석을 차 지했으며, 노동당을 필두로 하는 좌파 정당은 72석으로 내각에서 밀려났다. 보수당의 여성 당수이자‘노르웨이의 메르켈’ 이라 불리는 에르나솔베르그가 총리직을 맡게 되었 으며, 복지 예산 삭감, 이민제한 강화 등의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정부의 셧다운 ⓒLarry Downing

10월 1일 의회에서 예산안이 합의되지 못해 연방정부의 기 능이 일부 중단되는‘셧다운’ 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약 200만 명의 공무원 중 핵심 인력인 80만~120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시 해고 상태가 되었으며, 관련 업무도 중단됐다. 가장 중요 한 요인은 지난 2010년 시행된 복지 정책인 오바마케어다. 오 바마케어에 계속해서 반발해왔던 공화당은 다수석을 확보한 하원을 통해 오바마케어를 위한 지출을 포함하지 않은 예산안

을 통과시켰고, 민주당이 다수인 상원이 이에 합의하지 않으면서 예산안 확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셧다운 은 양당의 타협으로 16일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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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오늘 세계는

노벨 평화상에 OPCW 선정 ⓒReuters

10월 11일 화학무기금지기구가 노벨상 을 수상했다. 아사드정부는 화학 무기를 사용해 민간인과 반군을 학살한 일이 국 제 사회의 지탄과 미국의 압력을 받자 화 학무기금지조약에 가입했다. 현재 기구는 내년을 기한으로 시리아의 화학 무기를 해체 중이다. 이번 수상 결정은 국제사회 가 외교적 해결을 통한 대량살상무기 감

축을 지지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풀이된다.

메르켈, 사민당과 연정 구성 합의 ⓒSean Gallup

지난 9월 22일 총선에서 40% 이상의 지지를 얻어 3선이 확정된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제1야당인 사민당과 연정을 구 성하기로 했다고 10월 17일 밝혔다. 이는 비록 여당인 기독 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은 41%의 득표율로 제1야당인 사 회민주당의 26%보다 훨씬 앞섰지만, 연정파트너였던 자유 민주당이 의석 확보에 필요한 득표율 5%를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녹색당과도 연정 협상 이 결렬되면서 과거 2005년에 있었던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소위‘대연정’ 이 재현될 예정 이다.

보시라이, 무기징역 확정 9월 22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보시라이의 항소가 10월 25일 기각되면서 중국 대륙을 떠 들썩하게 했던 정치 스캔들은 한때‘잘 나갔던’보시라이의 완전한 몰락으로 끝났다. 보시라이는 뇌 물수수, 직권남용,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일각에서는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한 ⓒFeng Li

현 정권의 의도가 숨어있다는 지적이 많다. 현지 언론들은 현 정권의 다음 화살이 보시라이의 후견인이었던 저 우융캉을 향할지 조심스럽게 지켜보 고 있다.

오늘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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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핵실험 참여 장병들 위한 보상 논의 10월 29일 과거 핵실험에 참여했다가 피폭된 영국 장병들의 보상이 논의된다( 《인디펜던트》 의 10월 27일 자 보도). 1950~60년대에 영국은 호주 인근 해역에서 반복적으로 핵실험을 진행했으며, ‘영국 핵실험 참여 장병협회’ 에 따르면 여기 에 동원된 장병 수만 2만을 헤아린다. 당시 군 당국은 장병들에게 피폭에 대한 어떠한 사 전 언급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당시 장병들 은“반바지에 슬리퍼 복장으로”핵폭발을 구 경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영국 정부는 피폭 자들의 건강 이상이 핵실험과 직접적인 연관 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보상을 미뤄왔었다.

미 정보당국의 도청 스캔들 10월 28일 《월스트리트저널》 은 미 국가안보국이 지난 몇 년 간 다른 정상들의 전화를 도청해왔으며, 익명 의 한 미국 고위관계자가 이를 처음으로 시인했다고 밝혔다. 관계자에 따르면 백악관은 지난 여름 내부 점검 단을 통해 위와 같은 도청 사실을 알게 됐으며, 여기에는 메르켈 총리와 같은 미국의 우방국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 역시 미국에 한국 대통령의 도청 여부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으나 최종 답변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다.

천안문에서 위구르인의 자살 폭탄 테러 10월 28일 중국 천안문에서 위구르인들이 탄 차량이 폭발해 5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쳤다. 차량 내부에 있 던 위구르인들은 차가 난간을 들이받았음에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차 뒤쪽에 펼침막이 달려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중국 정부의 위구르 통치에 반발하기 위해 계획된 자살테러일 가능성이 높다고 현지 언 론들은 전했다. 현재 인구 900만의 신장위구르 ⓒReuters

자치지역에서는 중국의 자치구 통치에 반발심 을 갖는 위구르인이 많으며, 중국 공안 당국은 위구르인의 독립 운동에 무력 진압으로 강경 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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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김만희

Prism


2013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지만 아직 대선을 앞두고 있는 국가들이 있다. 바로 칠레와 온두라스다. 중남미를 뜨겁게 달굴 두 대선에 대해 살펴 보자. ⓒ expressnews

11월 17일 칠레 대선 오는 11월 17일 예정된 칠레 대선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첫째는 유력한 두 후보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지지율에서 가장 앞서는 바첼레트 후보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직을 지낸 적이 있는 칠레 최초의 여성대통령이기도하다. 그녀는 중도좌파연합인 ‘누에바 마요리아’ (Nueva Mayoria)의 대선후보이다. 지지율 2위인 에벨린 마테이 후보는 우파 연합인‘알리안사’ (Alianza)의 대선후보다. 입소스(Ipsos)에 따르면 현재 바첼

마테이(왼쪽) 후보와 바첼레트(오른쪽) 후보

레트 후보가 지지율 32%, 마테이 후보가 20%를 얻고 있는 가운데 지지율 3위인 프랑코 파리시 후보는 14%에 불과한 지지를 얻고 있기 때문에 역대 두 번째로 칠레에서 여성대통령이 탄생할 확률이 크다. 둘째는 바첼레트 후보와 마테이 후보는 모두‘장군의 딸’ 로 어릴 적 친한 사이였지만 피노체트 쿠데타를 계기로 사이 가 멀어졌다는 점이다. 두 후보의 아버지는 모두 공군 장성으로, 친구 사이었으나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 이후로 운명 이 엇갈렸다. 바첼레트 후보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에서 공군 준장이었던 알베르토 바첼레트의 딸이다. 알베르토 바첼 레트는 피노체트 쿠데타에 반대하다 쿠데타 성공 후 피노체트 군사 정권 하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마테이 후보는 페르난도 마테이 공군 장군의 딸이다. 페르난도 마테이 장군은 피노체트 군사정권 하에서 보건부 장관을 지낼 정도로 핵심 인물이었으며 알베르토 바첼레트의 사망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즉, 두 후보 아버지들의 사이가 친구 에서 정적이 되면서 둘 사이도 멀어지게 된 것이다. 바첼레트의 중도좌파연합인 누에바 마요리아는 피노체트 군사정권 을 비판하고, 마테이의 우파연합인 알리안사는 피노체트 군사정권을 지지한다. 이번 칠레 대선은 두 후보가 속한 정당 연합의 군사정권 지지 여부와 함께 군사정권으로 인해 달라진 두 후보의 가정사가 맞물려,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가 이루어질 흥미진진한 대결이 될 예정이다.

11월 24일 온두라스 대선 ⓒlaestralla

온두라스에서 오는 11월 24일 대통령선거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온두라스에선 대선과 총선이 동시에 열린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시장선거 와 중미의회(Parlamento Centroamericano)에 파견될 대표단을 뽑는 선거도 동시에 치러진다. 유권자는 네 개의 투표를 한 번에 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나 대통령 선거다. 지지율에서 가장 앞서는 후보는 시 오마라 카스트로로, 그녀는 2009년 군부 쿠데타로 물러난 마누엘 젤라야 전 대통 령의 부인이다. 그녀는 2009년 남편의 실각 후 줄곧 남편의 복권 운동에 앞장서왔 다. 그녀는 좌파 자유당의 대선후보이며, 헌법 개정을 의회에 요구할 것임을 밝혔 다. 이는 그녀의 남편이 임기 중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단임 제한을 없애려고 시도하다 쿠데타로 실각했던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다. 단 아 직 그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헌법을 개정할 것인지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밝 히지 않았다. 지지율 2위인 후안 에르난데스 후보가 그녀의 뒤를 바싹 쫓고 있다는 점도 이 선

시오마라 카스트로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요소다. 그는 집권 국민당의 대선후보로, 현재 국회 이근호

오늘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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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한마디

“두 분 선생을 옹호하다가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더라도” 중국 신문화운동의 정신,‘데 선생’ 과‘사이 선생’ “우리는 오직 두 분 선생만이 중국을 정치, 도덕, 학술, 사상 상의 모든 암흑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만 약 이 두 분 선생을 옹호하다가 정부의 압박, 사회의 공격과 조소를 받는다면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더라도 모두 마다하지 않겠다.” 1919년 1월 15일 천두슈는 당시 신문화운동의 기지였던《신청년》 에「본지의 죄목에 대한 답 변서」 를 발표했다.《신청년》 을 정통 사상을 위반하는 이단과 역적으로 보는 사회에 대항해 자신들은 중국을 암 흑에서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일갈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토록 떠받들던 두 선생, 데 선생과 사이 선 생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신문화운동의 두 깃발 - 데모크라시와 사이언스

반대해야만 하며, 사이 선생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구 식 예술과 구식 종교를 반대해야만 한다. 또한 데 선

2천 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황제의 천하는 1911년

생과 사이 선생을 모두 옹호하자면 고유 문화와 구식

의 신해혁명으로 인해 그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문학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며 민주주의와 과학이 들

청 황조가 떠난 지배층의 빈 자리에 위안스카이 등

어설 세상에 중국의 구 체제가 설 곳이 없음을 딱 잘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복고세력과 마적이나 다름없

라 말하고 있다.

는 군벌들이 들어섰고, 민주주의의 도래를 기대했던 중국의 지식인들은 또다시 실망의 쓴맛을 봐야 했다.

《신청년》 과 신문화운동

신해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실 패의 원인이 봉건제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 국민의 의

“사회 또한 신진대사의 도리를 따라야 융성할 수

식 결핍에 있다고 보고, 문화와 사상 방면에서부터

있으며 만약 오래되고 썩은 자들이 사회를 가득 채우

봉건 의식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봉건

면 그 사회는 곧 망하고 만다.”진화론에 깊이 빠졌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치켜든 것이 바로‘데 선생’ 과

천두슈는 인체 내에서 신진대사가 이루어지는 것과

‘사이 선생’ 이라는 두 사상의 기치였다.

같이 사회에서도 젊은 청년들이 구식 인사들을 대체

‘데 선생’ 은 민주(데모크라시)를 가리키며,‘사이

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청년들을 계몽하면 머지않아

선생’ 은 과학(사이언스)을 말한다. 민주주의를 널리

중국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

알리면 사람들이 자연히 봉건 전제주의의 문제점을

두슈는 1915년《청년잡지》 를 창간했고, 1916년 이

알게 되고, 과학을 선양하면 옛날의 미신과 어리석

를《신청년》 으로 이름을 바꿨다.《신청년》 은 연이어

음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어 복고 세력의 논리에 쉽게

중국 사회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글들을 게재했

물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천두슈는「본

고,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사상의 물결이 일기 시

지의 죄목에 대한 답변서」 에서“데 선생을 옹호하기

작했다. 신문화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위해서는 유교, 예법, 정절, 구식 윤리, 구식 정치를

10

대학생국제시사저널

신문화운동은‘4제창, 4반대’ 를 주요 내용으로 하

Prism


며 모두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지향하고 있다.“첫째,

모두 무효로 한다고 밝히며 중국에 적극적으로 구애

민주주의를 제창하고 전제주의를 반대하며, 둘째, 과

했고, 일본의 산둥반도 침탈로 마음이 상해있던 중국

학을 제창하고 어리석음을 반대한다. 셋째, 신 도덕을

은 제국주의와는 상반되는 사회주의 노선에 깊은 감

제창하고 구 도덕을 반대한다. 넷째, 신 문학을 제창하

명을 받았다. 천두슈와 같은 이들은 마르크스-레닌

고 구 문학을 반대한다.”봉건사회의 모든 지식과 관

주의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고, 주요 편집부 인사들

습을 배척하는 이들의 급진적인 태도는 보수 인사들의

이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1920년 9월《신청년》 은완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하지만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

전히 공산당 기관지로 편입되었다.

회는 신문화운동으로 인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절반만 옳았던 혁명? 절반만 옳았던 평가? 내용도 형식도 바꾸자, 백화문운동 《신청년》 의 주요 인사들이 사회주의 선전에 막대 후스는 1917년 1월《신청년》 에 발표한「문학개량

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에서 신문화

에 대한 소견」 에서 문학개량을 위해서는 고인을 모

운동은 자산계급 급진민주주의자들의 운동으로 정의

방하지 말고, 전례와 고사를 일삼지 말며, 속어를 피

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군벌 정부에 대해 적극적

하지 말아야 한다며, 당시의 글짓기 방식을 전면적으

인 반대 운동을 펼치지도 않았고, 제국주의를 정면으

로 부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시대의 흐름으로 이어져

로 비판하지도 않았다는 점, 전통 사상에 대해서는

《신청년》 은 백화문(구어체)를 사용하고 현대식 문장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서양 사상에 대해서는 전격적

부호를 쓰기 시작했다. 신지식인들이 구식 윤리를 가

인 지지를 표명한 점 등이 신문화운동의 편향성을 보

르치던 경전에서나 사용되던 고문을 버리고 실생활

여준다” 고 말한다. 역사를 사회 발전단계에 맞추어

에서 쓰이는 백화문을 사용하는 것이 현실과의 괴리

해석하는 중국에서 신문화운동은 그저 프롤레타리아

감을 좁히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18년 5

트 혁명의 준비 과정 정도로 인식될 뿐이다.

월 루쉰은《신청년》 에 중국 현대문학의 첫 번째 백화

현대 중국에서《신청년》 과 신문화운동을 저평가하

문 소설「광인일기」 를 발표한다. 루쉰은 구식 윤리를

는 또 한 가지 이유는《신청년》 의 발간인인 천두슈가

사람을 먹는 관습에 빗대어 표현하며 아직 구식 윤리

1927년 우경기회주의자로 몰려 공산당 총서기 직무

에 물들지 않은 어린 청년들을 구하자고 호소했다.

에서 밀려난 것과 관련되어 있다. 제1차 국공합작 중

“사람을 먹지 않은 아이가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

쟝제스의 배신으로 공산당이 큰 타격을 입자 당시 공

을 구하라.”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까지 완전히 새로

산당의 총책을 맡고 있던 천두슈가 총대를 메고 하야

운 백화문을 제창함으로써 구식 문화와는 완전히 선

한 것이다.

을 그은 것이다. 백화문은 젊은 층의 전폭적인 지지

그러나 이러한 회고적 평가와 관계없이《신청년》

를 얻었고 1920년에는 북양군벌정부도 어쩔 수 없이

이 당시 중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아무도

백화문을 국어로 채택하게 되었다.

부인할 수 없다. 사건은 때로 그 순간의 시각에서 평 가되어야 한다. 많은 청년이《신청년》 을 통해 서양

보편 이념으로서의 볼셰비키주의

문학과 사상을 접했으며, 지식인들은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얻었다. 수천 년을 내려온 황제의 시대가 끝

1918년부터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신청

나고 제국주의자들이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던 1910

년》 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만연하게 되었다. 1918년

년대,《신청년》 은 그 자체로 사회의 사상 부재를 메

11월, 리따짜오는「볼셰비키주의의 승리」 에서 말했

운 위대한 선생이었다.

다. 볼셰비즘의 승리는 바로 20세기 인류가 깨우친 정신의 승리이다!”자신과 연대할 사회주의 국가가 절실했던 소련은 이전에 중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견세령 (한국외대 법학) milyee@naver.com

세계인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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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기획 국경 없는 내전, 시리아

시리아는 어떻게 아랍의 겨울이 되었나 14 Rebels Without a Cause 18 뜨거운 감자를 더 뜨겁게! 22 이스라엘은 겨 묻은 개? 26 After Syria 29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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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는 어떻게 아랍의 겨울이 되었나 프랑스혁명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고 불렸던‘아랍의 봄’ 은 결코 봄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는 무 바라크 집권 당시 인사들이 돌아옴과 함께 무슬림형제단은 불법정당이 되었으며 튀니지에서는 벤 알리 의 사퇴를 이끌어낸 엔나흐다 당이 이끄는 연정이 사퇴했다. 예멘에서는 알 카에다가 기승을 부리며 리비 아는 이슬람주의에 몸살을 앓고 있다. 아직까지 정권 타도의 단계조차 벗어나지 못한 국가가 있다.‘중동 의 핵’시리아다. 시리아는 아랍의 봄이 실은 기나긴 겨울의 시작이었음을 알리는 산증거다. 시리아 내전 이 아사드 정권의 압제에 대항하는 위대한 민주화 혁명이라는 환상은, 안타깝게도 2년 반쯤 늦은 환상이 다. 내전은 장기화되며 수니와 시아 간 종파갈등이 되었고,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와 이란의 대 리전이 되었다. 여기까지 한 줄도 빠짐없이 문제없이 읽을 수 있었다면 당신은 중동정치 수업을 들었거나 중동에 지대 한 관심을 갖고 있거나 우리말에 능한 아랍인일 확률이 크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시리아 내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그전에 먼저, 중동의 두 축을 형성하는 이슬람의 두 종파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International Financial Consultants

모래 위의 장벽, 수니와 시아 이슬람 내 종파는‘예언자를 따른다’ 는 뜻의‘수니’파와 당파라는 뜻을 가진‘시 아’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세계 무슬 림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수니이며 나머지 10%를 차지하는 소수가 바로 시아 다. 정통성을 겨루는 이 두 종파의 갈등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망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함마드 이후 이슬람 세계를 지 도할 정통성을 이어받은 이를‘칼리프’ 라 부른다.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 리 네 명의 정통 칼리프가 있었고 이 중 예 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촌이자 처남이 던 알리만을 정통 칼리프로 인정해 갈라

초록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GCC. 이 중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최근 격변하는 중동의 정세에 관한 주도권을 두고 경쟁 중이다.

져나온 것이 바로 현재의 시아 파다. 현재 수니 파의 총본산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

아를 중심으로 1981년, 페르시아 만의 친미 온건파

디나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다. 강대한 사우디아라비

수니 파 산유국들인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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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CIA World Fact Book

가 바로 시아 파 조직이며, 시리아의 아사 드 정권은 이란이 헤즈볼라에게 각종 무 기를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해 왔기 때문 이다. 헤즈볼라가 창설 당시 충성을 서약 한 대상이 바로 1979년 이슬람혁명을 주 도한 이란의 호메이니다. 또, 시아 파 국 가들은 대체적으로 반미, 반이스라엘을 표방하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스라엘 이 이란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반발하 는 것, 또 이스라엘 북부에 자리잡은 헤 즈볼라와 적대관계인 것이 이로부터 연유 한다. 이들 국가는 반이스라엘을 표방하 는 가자의 하마스와도 친밀한 관계다. 한 편, 수니 파였던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전 쟁을 통해 축출된 후로 시아 파인 말리키 총리가 집권하면서 이라크에는 다수인 시

중동에서의 시아 파의 분포현황. 수니 파 국가에서 시아 파는 탄압의 대상이다.

아 파가 소수인 수니 파를 통치하는 형태 의 정부가 들어섰는데, 이로써 이란에서

레인, 쿠웨이트, 오만의 6개국이 모여 결성한 것이 걸

헤즈볼라까지 시아 파가 영향력을 점한‘시아 벨트’

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GCC)이다.

(Shia Crescent)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천연가스와 석유로 모은 엄청난 재원은 중동 의 정세를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다. 예컨대

‘분쟁’ 에서‘내전’ 으로

지난 8월 이집트에서 무르시 대통령 축출 후 GCC는 신정부에게 120억 불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원조했

2011년 1월, 아랍의 봄의 불씨가 시리아로 옮겨붙

는데, 이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제공하는 연 원조액인

어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시작된 시위는 분명 미약한

30억 불의 4배에 해당하는 금액으로써 미국이 이집

것이었다. 바트 당의 독재, 5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국

트에 제공하는 15억 불의 원조가 중단된 상태에서도

가비상사태법, 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아버지

신정부의 집권을 용이케 하고 있다. 아랍의 봄과 시

인 하페즈 아사드 당시부터 이어져 온 50년간의 권력

리아 내전에서도 GCC의 원조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을 비난하는 고작 수백의 시위대였다. 3월에 시위대

었다. 또 GCC는 휴먼라이츠워치를 비롯한 각국 인권

가 수만으로 늘어나자 아사드는 정치범의 석방과 내

단체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자국 내에서 시아 파를 탄

각의 총사퇴, 공무원 급여 인상, 국가비상사태법 철폐

압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이

등 유화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

다. 한편, 수니 파 테러조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알

되었고 62명의 사망자가 생겨났다. 터키, 요르단과의

카에다다.

국경은 봉쇄되었고, 미국과 EU는 시리아 정권을 비난

이슬람 소수인 시아 파의 총본산은 이란이며, 전

하며 UN의 시리아에 대한 제재 조치를 주장했다. 6월

세계 시아 파 대다수가 이란에 거주하고 있다. 또다

시리아 반정부세력이 야권연합인 시리아국가위원회

른 시아 국가로는 시아 파에서 갈라져나온 알라위 파

(Syrian National Council, SNC)를 결성했다.

가 집권하는 시리아가 있으며, 레바논 역시 시아 파

1년이 넘도록 시리아에서는 유혈충돌이 계속되었

와 무관하지 않다. 레바논 남부를 장악한,‘국가 안의

다. 2011년 10월과 2012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중

국가’ 라고도 불리는 중동 최대의 무장정파 헤즈볼라

국과 러시아는 시리아에 대한 비군사적 제재를 골자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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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s

훌라 학살 사망자들의 집단 장례식. 생존자들이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다

내전에서 방치로

로 하는 UN 결의안을 거부했다. 2012년 3월, 시리 아 정부가 UN 시리아 평화특사인 코피 아난이 정부 와 반정부세력에 제안한 6개항 평화안을 수용함으로

훌라 학살 이후 시리아 내전 문제에서 가장 목소

써 평화가 오는 듯했으나 아사드 정권은 평화안을 이

리를 높이는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시리아 내전

행하지 않고 유혈진압을 계속했다. 2012년 5월까지

개입을 소리높여 외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13,000명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UN은 시리아에서 자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 역

행되는 폭력에‘내전(civil war)’ 이라는 이름을 붙이

시 크게 작용했다. 시리아 반정부군을 군사적으로 지

기를 주저했다. 내전 대신에 붙은 이름은 시리아‘분

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공화당 후보 롬니를 제압하

쟁(conflict)’ 이었다. 서방이 발만 구르는 동안 러시

기 위해 오바마는 평화적으로 시리아 내전을 해결할

아는 시리아의 타르투스에 해군을 파견했다.

방법을 모색했고, 5월 말 캠프데이비드에서 당시 러

‘분쟁’ 이‘내전’ 이 된 계기가 바로 2012년 5월의

시아 외무장관이던 메드베데프와 접촉한다. 미국에게

훌라 학살(Houla Massacre)이다. 정부군과 그 민병

있어 시리아는 이란을 잡는 덫이었고, 시리아 내전

대에 의해 홈스 인근 훌라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에서

종식에 러시아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이란의 비핵화

10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이 중 83명이 여자와 아

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

이였다. 아사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봇물쳤다.

적이다. 여기서 미국은 아랍의 봄 당시 예멘의 살레

결국 7월, 전쟁 피해자 보호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을

대통령의 퇴진을 염두에 두고, 전후 시리아에서 러시

수호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시리아‘분쟁’ 을‘내

아의 이권을 보장해 주되 아사드의 퇴진을 목표하는

전’ 이라 규정했고, 국제형사재판소는 아사드를 전쟁

‘예멘 모델’ 을 제시한다. 그러나 6월 말 UN이 중재

범죄로 기소 및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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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부와 반정부군 양측에서 온건파만을 기용한 신

Prism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제네바 회담( ‘제네바 1’ )직

살에서 아사드는 공격을 극구 부인했으나 구따 학살

전, 미-러 타협은 실패한다.

을 통해 아사드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

사실 미-러 타협의 실패 없이도 제네바 회담은 코

쳤다. 미국은 UN 안보리 동의 없이도 시리아 폭격을

피 아난의 실패한 이상주의였다. 러시아는 제네바 1

감행할 태세였다. 당시는 시리아 내전이 갖는‘대리

타협안의 초안이 신정부에서 아사드의 배제를 전제

전’ 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위험천만하게 드러난 시기

한다는 데 반발했고, 이후 개정된 제네바 1 타협안은

였다. 러시아가 미국을 말렸고 이란은 이스라엘을 치

아사드의 복귀 가능성과 거부권 행사권을 열어 놓았

겠다고 경고했으며 이스라엘은 전국에 미사일방어시

다. 이에 반정부 세력이 반발해 협상에서 빠지고, 코

스템 아이언 돔을 배치했다. 시리아를 빠져나가는 난

피 아난은 사임하며 시리아 내전은 점차 언론에서 모

민들이 줄을 이었다. 금방이라도 폭격이 이루어질 것

습을 감추게 된다.

처럼 보였다.

러시아처럼 물적 지원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러시아가 미국과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함

반군에 알 카에다가 개입했다는 사실 때문에 서방

으로써 시리아는 폭격을 면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의 반군에 대한 지원은 미미했다. 서구의 방치 상태

시리아가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서명하고 올해

로 1년이 지나가며, 그동안 미국이 방치한 자리를 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

운 것이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수니 파 정권

가입하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으며 오바마는 국민들

수립을 목표로 하는 이 산유국들은 반군을 적극적으

은 물론 우방인 영국마저 반대하는 또다른 중동 개입

로 지원하며, 이 과정에서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

을 감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현재 UN의 OPCW가

람 원리주의 세력은 FSA와 비등한 수준으로 성장하

시리아로 들어가 2014년 중반을 데드라인으로 화학

게 된다. 이것이 현재 시리아 내전의 핵심 문제 중 하

무기를 조사, 제거하고 있다.

나가 된다.

미 합참의장 마틴 뎀시는 시리아 내전이“두 집단 간 갈등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집단 간 갈등” 이라고

구따, 라타키아

말한 바 있다. 실로 옳은 말이다. 아사드 정권에 반대 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은 지난 11일, 휴먼라이츠워치

또다시 방치된 시리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8

가 라타키아에서 반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에 관한

월 21일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 구따 마을에서 발생한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다시 흔들릴 기미를 보이고 있

사린 공격 때문이었다.400명 이상이 사망한 구따 학

다. 시리아는 아랍 전체를 겨울에 몰아넣으며 극심한 진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이 사산으로 이어질지,

ⓒiUN Photo

아니면 기대하지 않았던 민주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질 지는 오랫동안 두고봐야 할 문제다. 그러나 지금으로 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6901@naver.com

10월 1일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OPCW 조사관들.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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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els Without a Cause 시리아, 민주화에서 종파 내전으로 2011년 3월에 아랍의 봄을 타고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분명 아사드 정권의 퇴출을 촉구하는 비폭력 민 주화 운동이었다. 2년 반 동안 10만 명이 사망하고 정부군에 의한 학살과 최근의 화학무기 참사까지 잇따 르며 바샤르 알 아사드와 그 배후의 이란과 러시아가 히틀러에 버금가는 악한이라는 인식은 더욱 확고해 졌다. 반면 미국이 올해 6월부터 자유시리아군(Free Syrian Army, FSA)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5월 공화당 중진 맥케인 상원의원이 터키와 시리아를 방문, FSA의 지도자 살림 이드리스를 만나며 시리아 반군은 ‘자 유진영의 지지를 얻고 있다’ 는 후광마저 업게 되었다. 그러나 내전이 장기화되며 민주화 운동이었던 시리 아 내전은 종파분쟁으로 급격히 변모했다. 시리아 정부군에는 시아 파 테러단체 헤즈볼라가 가세했으며 반정부군의 중심세력이 된 것은 다름아닌 수니 파 테러단체 알 카에다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자. 이것 이 정말 민주화인가?

ⓒ Graphic

사탄은 누구인가 이집트 출신으로 카타르에 거주하는 수니 파 성직 자 알 카르다위는 금세기 가장 유명한 이슬람 성직자 중 하나다. 그는 10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고 알 자지라는 그에게 매주 금요일 전용 채널까지 제공하 며 그 시청자는 천만 명을 훌쩍 넘는다.《포린 어페어 스》 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전세계 수니 파 무슬림들 에게‘교황’ 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그런 그가 6월, ‘싸울 수 있는 자는 모두 시리아로 가라’ 고 말했다. 카르다위는 전세계 수니 파 무슬림들에게‘사탄의 손

쿠사이르는 레바논과의 국경지역에 인접하고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를 잇는 교통의 요지다.

에 도륙되는 시리아인 형제 옆에 서라’ 며 시리아 내 전에 참전할 것을 촉구했다.

러 시리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 홈스와 다마스쿠스

올해 중순까지 시리아 내전은 반군의 승리로 돌아

를 잇는 도로를 끼고 있다. 시리아 전역으로의 물자

갈 것처럼 보였다. 반군은 시리아 최대 상업도시 알

보급을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인 것이다. 시리

레포와 홈스, 북부의 이드리브를 차지했으며 수도

아 관료들은“쿠사이르의 승리가 곧 내전의 승리다”

다마스쿠스에서 정부군을 위협해 왔다. 이 흐름을

라고 말한다.

뒤집은 것이 바로 5월의 쿠사이르(Qusayr) 탈환이

쿠사이르 탈환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바로

다. 반군의 통치 아래 있던 쿠사이르는 레바논 국경

레바논의 시아 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다. 올해 6월

과 러시아의 해군기지 타르투스과 인접해 있을 뿐더

EU에 의해 테러단체로 지정된 헤즈볼라는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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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IRNA

알 카에다의 화려한 부활 2년 전 미 국방장관이 었던 레온 파네타는 카 불에서, 미국이“알 카에 다에 전략적으로 승리하 기 직전” 이라고 거들먹거 렸다. 파네타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알 카에다는 약 화되기는커녕 전술적으로 도 규모상으로도 더욱 발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좌),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중), 전 이란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 드(우). 바야흐로 시아 삼각편대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일으킨 폭탄테러로 미 해

전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바로 알 카에다

이라크지부(Al Qaeda in Iraq, AQI)다.

군 241명의 사망이라는 결과를 낳아 레바논 내전에

반군 세력의 주도권을 쥔 것은 세속주의 온건세력

서 미군을 철수시킨 전력이 있는, 이란의 후원을 받

인 FSA가 아닌, AQI와 알 카에다 연루단체들이다.

는 중동 최대의 테러단체다. 헤즈볼라가 탈환한 쿠사

처음에 AQI는 이라크 국경이 시리아와 맞닿아 있다

이르 역시 이란에서 헤즈볼라로 가는 무기 공급로의

는 점을 이용해 시리아로 들어가 반군에 합류했는

길목이었다. 헤즈볼라는 내전 초기부터 시리아 내전

데, 급진주의 반군에게 지원이 갈 것을 우려한 서방

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5월 말 헤

이 FSA에 대한 지원을 미루면서 AQI는 FSA 이상으

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는“헤즈볼라는 완전히

로 성장했다. 알레포의 군 기지 확보 등 내전에서 중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나는 승리를 약속한다” 고

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강력한 시리아 반군세력인‘알

말하며 시리아 내전의 공식적 개입을 선언했다. 이는

누스라 전선(Jabhat al-Nusra, JAN)’ 이 바로 AQI

헤즈볼라가 이제껏 반이스라엘 노선으로 아랍 세계의

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AQI는 JAN과 연계해 시리아

지지를 얻어 온 레지스탕스에서 시아 파 무장단체로

내전에 개입해 왔다. 올해 5월 AQI는 JAN의 일부를

재탄생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헤즈볼라는 홈스

병합해‘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of

를 비롯, 시리아 전역에서 정부군과 함께 싸우고 있

Iraq and Syria, ISIS)를 수립했다. 10만 명으로 추

다. 카르다위가 지칭한‘사탄’ 이 바로 아사드가 아닌

산되는 반군 중 ISIS는 8천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

나스랄라다.

들은 내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다. 이미 아

내전에 개입한 시아파는 헤즈볼라만이 아니다. 이

프카니스탄 전쟁에서 지하드를 겪어 본 이들이 주력

스라엘에 따르면 이란공화국혁명수비대의 특수부대

을 이루기 때문이다. 현재 FSA와 이슬람주의 반군 간

인 쿠즈 부대(Quds Force)의 사령관인 카셈 술레이

차이는 극명하다. 세속주의적인 FSA와 달리 JAN과

마니가 내전을 지휘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갔다.

ISIS는 시리아 전체에 이슬람법인 샤리아 적용을 주

또 시아파가 통치하는 이라크 역시 휘말리고 있는데,

장하며, 내전 종식 후 신정부의 주도권 문제를 놓고

《로이터》 에 의하면 매달 200명 정도의 이라크 시아

계속해서 충돌을 빚어 왔다. 올해 7월 ISIS가 FSA의

파가 시리아로 유입된다. 레바논, 예멘, 아프가니스

사령관을 사살하며 표면화된 갈등은 알레포에서의 반

탄, 심지어는 인도에서까지 위기에 처한 시아파를 구

군간 전투로 이어졌다. 이어 9월에도 ISIS는 FSA와

하러 시리아로 달려온다.

의 충돌에서 승리해 FSA 장교들을 살해하고 시리아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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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아자즈를 빼앗았으며 시리아 중부에서도 충돌했

트와 싸우고 있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번

다. 이 외에도 7월에 파키스탄탈레반(TTP)이 수백 명

UN총회에서 시리아 외무상 모알렘은 아사드 정권의

의 탈레반군을 시리아로 보냈다.

적이“정치적 적수” 가 아닌“테러리스트” 라 표현했

결국 문제는 반군이 아사드 축출이라는 단일한 목

다. 시리아 내부에서는 사실 아사드가 ISIS의 배후에

표를 지닌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는 데 있다. 지난 9

있다는 음모론조차 확산되는 상황이다. 또, 최근 미

월, 삐걱이던 반정부 세력은 끝내 분열했다. JN과

국-이란 간 관계의 급진전으로 양국이 시리아 문제

알-타우히드 여단을 포함한 주요 이슬람 원리주의

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면서 11월에 개최

반정부세력 11개가“서방 세력과의 결탁” 을 이유로

될 2차 제네바 회담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여기서 정

FSA의 정치조직인 시리아국민연합(Syrian National

치적 해결책이 타결된다면 FSA는 반군의 절반도 대

Coaliton, SNC)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들은 샤리아

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게

법 적용을 주장하며 스스로를“이슬람주의자 연합

다가 분열된 반군은 군사적으로 아사드를 이길 수도

(Islamist Alliance)” 이라 칭하기 시작했는데, 여기

없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게 된

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시리아 최대 상

다. 설사 내전이 반군의 군사적 승리로 끝난다 하더

업도시인 북부 알레포를 거점으로 활동한다는 데 있

라도 시리아는 FSA와 ISIS를 비롯한 다자간 내전으

다. 시리아에서 알레포를 차지한다는 것은 국가의 부

로 돌입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수니 파에 의한 알라

를 차지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들

위파의 학살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시리아 반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SNC의 분열 전에도 FSA는 본부가 내전의 중심인 시

“WHO’ S THE BOSS?”사우디 VS 카타르

리아가 아닌 터키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사 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FSA의 정치적 입지는 미국

시리아 반군의 분열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부유한

이 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 제거를 대가로 폭격을 취

수니 파 왕정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다. 이들의

소하면서 더욱 좁아졌다.

목적은 시리아의 민주화보다는 이란에서 헤즈볼라로

반군간 분열은 현재보다도 다가올 미래에 더욱 문

이어지는 시아 벨트의 차단에 가깝다. 시리아에 수니

제시된다. 먼저 ISIS의 존재는 아사드에게, 테러리스

파 정권이 수립된다면 이란과의 뿌리깊은 종파갈등에

ⓒ Daniel Etter for The New York Times

서 승기를 잡는 것과 같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방의 정보부와 협력해 FSA에 게 대전차미사일 등 무기들을 제공했지만 사우디 왕 정을 타파하고자 했던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알 카에다를 지원하지 않는다. 대신 사우디의 지원은 알 카에다에 대항할 수 있는, 또다른 급진 이 슬람주의자들인 살라피주의자들이 이끄는 강력한 리 와 알-이슬람(Liwa al-Islam, LAI)에게 집중된다. 최근 사우디는 40개의 시리아 반군 단체를 통합해 LAI의 지휘 하에 편입시켰다. 내전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어 사우디와 경쟁 관계 인 카타르의 노력은 더하다. 카타르 관료들은 2년 반

FSA의 수장 살림 이드리스 대령. 서방은 이드리스 대령이 세속주의적 이며 아사드 정권의 관료 일부를 내전 후 구성될 신정부에 포함할 가 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드리 스 대령은 반군 일부로부터는 싸울 줄 모르는‘교수’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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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동안 시리아 반군에 지원한 금액이 30억 불에 달한 다고 말한다. 미국이 한 해 이스라엘에 제공하는 원 조액과 같은 금액이다. 1인당 GDP 세계 2위인 중동 의 강소국 카타르는 시리아 정부 출신 전향자들에게

Prism


ⓒWest Point

고 있다. 내전이 장기화 될수록 시리아에 몰려드 는 외국인 지하디스트들 의 수가 1만 명을 넘어갈 확률은 커진다. 이 내전 이 10년 후에 타오를 어 떤 불씨가 될지를 생각해 야 한다. 이미 아랍의 봄 에는 리비아 내전을 겪은 이슬람주의자들이 말리로 건너갔다는 선례가 있다. 구따 학살 후 일부는 시리아를 보스니아에 비 유했다. 그러나 대륙 끝 중동 전역에서 시리아로 모여드는 지하디스트들의 주요 경로. 리비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대다수의 외국인 지하디스트들이 유입된다.

에 붙어 있던 보스니아 와 달리 시리아는 중동 한 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정

는 한 해 5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이른바‘돈 공세’

치적, 종교적, 인종적 다양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보

를 펴고 있다. 또 카타르는 FSA를 지지하지만 알 카

스니아와 비할 수 없다. 11만 명의 사망과 잦아들 기

에다 역시 비공식적으로 후원하는데, 카타르는 리비

미를 보이지 않는 폭력이 시리아의 이 다양성의 충

아 내전 당시 알 카에다 마그레브 지부(Al Qaeda in

돌에서 기인한다. 마치 수류탄과도 같은 이 다양성

the Islamic Maghreb, AQIM)과 맺은 돈독한 관계를

이 국제사회로 하여금 시리아에 손을 놓게 했다. 그

이용해 자국뿐만 아니라 리비아의 무기까지 시리아로

러나 시리아가 방치되었을 때 알 카에다가 가장 빨리

실어나른다.

성장했고 가장 많은 사망자와 폭력과 난민이 생겨났 다. 장기화되는 시리아 내전에 국제사회의 관심과 중

21세기 최대의 지하드

재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10년 후 시리아라는 국가가 존재할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이미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 파갈등의 불은 헤즈볼라의 레바논, AQI의 이라크로 옮겨붙어 크고작은 폭력의 원인이 되고 있다. 더 우 려되는 것은 시리아 내전의 미래다. 시리아 내전은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6901@naver.com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결집한 무자헤딘 이후로 이슬람현대사에서 첫 번째로 큰 지 하드다. 10년간에 걸친 소련의 침공 기간에 1만 명 의 무자헤딘이 아프가니스탄에 결집했다. 이 무자헤 딘에서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탄생했고 이는 10년 후 9.11로 이어졌다. 그러나 시리아에 비하면 아프가니 스탄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현재 시리아 내전이 진행 된 2년 반 동안 지하드를 수행하기 위해 60개 국에서 5천 명 이상 모여들었으며, 속도는 점점 더 가속화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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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를 더 뜨겁게! 9월 28일 미국과 러시아가 시리아와 화학무기 처리에 대한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합의했다. 버 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UN 안보리 결의안은 국제사회의 큰 승리” 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오바마의 이런 평가는 일면 공허하게 느껴진다. 합의안에 다다르게 된 과정과 합의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과 국 제사회의 승리라기보다는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의 승리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 Business Insider.

팽팽한 줄다리기

비상사태에 대한 선택지를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이 에 대한 준비가 돼 있다” 고 밝힌 데 이어, 8월 26일

8월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해 자국민을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

대량으로 학살하는 동영상이 웹상에서 퍼지면서 순

기 사용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이라며“반드시 책임

식간에 시리아의 화학무기 문제는 핫 이슈가 되었다.

을 물을 것” 이라고 개입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러시

곧 미국은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 가능성을 내비쳤

아가 어깃장을 놓았다. 다음 날 알렉산더 루카셰비치

다.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25일“대통령이 모든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UN 안보리의 승인 없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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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사 개입을 하기 위해 근거 없는 이유들을 만들어 낸

명분을 잃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시리아 정부가 결

다면 재앙적 결과를 낳을 것” 이라며 강력한 반대 의

의안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마땅히 미국이 취할 수 있

사를 내비쳤다. 미국도 꽤나 단호해 보였다. 함께 군

는 조치가 없는 것이다. 시리아 정부는 시간을 벌었

사개입을 주장했던 영국이 의회의 표결에 의해 군사

고, 미국은 되려 손발이 묶인 셈이다.

조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도 8월 30일 척 헤이

이처럼 미국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 채 러시아

글 미국 국방장관은“군사 제재가 필요하다는 미국의

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 간 결과가 나온 것은 미국의

입장은 그대로” 라며 군사 개입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군사 개입이라는 카드에 대한 확신의 부재에 기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뉴욕 타임즈》 에

다. 미국 내에서는 오바마가 군사 개입이라는 카드

미국의 군사개입을 만류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없었던 데다 국내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자 러시아의 반대에 못 이기는 척 합의

러시아 원하는 대로

를 본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적당히 몸을 사린 것이다. 시리아 내전이 기존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

미국의 시리아 군사개입을 놓고 미국과 러시아 간

에서 헤즈볼라나 알 카에다 등 다양한 외부 세력들이

팽팽한 외교적 긴장이 이어지다 결국 9월 14일 양국

개입한 종파 분쟁으로 변질된 상황이다. 미국이 지지

은 시리아 화학무기 처리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게

하는 반군세력이 더 이상 미국이 대변하는‘선’ 이라

된다. 결과는 러시아의 승리였다. 합의안에 따르면 시

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적으로 합

리아 정부는 화학무기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20일까지

의된‘악’ 인 화학 무기 문제가 터져 군사 개입 카드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 제출해야 하고, 11월에

를 내비쳤으나 선뜻 그 카드를 내밀기가 부담스러웠

OPCW의 화학무기 생산시설 조사 및 해체를 허용해야

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전략적으로 시리아를 포기할

하며, 내년 상반기까지 모든 화학무기를 폐기해야 한

수 없는 러시아가 버티고 서 있었다. ⓒWorld Tribune

다. 이 합의안으로 인해 군사개입 가능성을 강하게 내 비치던 미국은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폐기할 때까지는 시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정당성을 잃었다. 러시아와 미국의 줄다리기는 14일 합의한 내용을 시리아가 이행하도록 UN 안보리에서 결의하는 과정 에서 다시 시작됐다. 2라운드였다. 쟁점은 UN 헌장 7조 42항에 규정돼 있는 자동 군사 개입(트리거) 조 항이었다. 결의안에 트리거 조항이 포함된다면 시리 아가 결의안에 따른 의무사항 불이행 시 추가적인 안 보리 결의 없이도 시리아에 대한 군사 조치가 가능한

러시아-시리아, 너는 내 운명

것이다. 미국은 트리거 조항을 포함시키길 원했고, 러시아는 배제하길 원했다. 결과는 또다시 러시아의

러시아는 중동이 미국의 완전한 영향력 아래 놓이

승리였다. 결의안엔 러시아의 뜻이 관철되었다. 시리

는 것을 원치 않는다. 시리아 정부가 무너져 내린다

아가 결의안을 이행하지 않으면 UN 헌장 42항이 규

면 러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의 헤

정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군사 개입이

즈볼라로 이어지는 시아 벨트가 끊긴다는 것을 의미

필요할 시 또다시 안보리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는 단

한다. 시리아에 시아 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서방 수

서 조항을 달았다.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폐기하지 않

니 파 정부가 들어선다면 중동에서의 판도는 미국과

더라도 UN 안보리에서 러시아가 군사 개입에 반대하

이스라엘에 급격히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란에 대한

면 합법적인 군사 개입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적

압박도 더 강해질 것이다.

어도 내년 상반기까지 시리아 사태에 미국이 개입할

게다가 시리아는 러시아의 오랜 군사동맹국으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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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cker 지중해에 면한 시리아의 항구 타르투스. 리비아 내전으로 친러 정권이던 카다피가 축출되면서 벵가지를 러시아 해군기지로 사용하려는 크렘린 의 계획이 무산된 현재, 타르투스는 구소련 밖의 유일한 해군기지다.

로, 러시아의 해군기지인 타르투스항을 보유하고 있

기 힘들다는 것은 반대로 시리아가 미국에게도 전략

다. 타르투스 항은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 해군기지라

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시리아에

는 점과, 지중해로 나가는 통로라는 점에서 러시아에

친서방 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을 가로지르는 시아파

게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크다. 시리아 정부가 무너져

벨트를 차단하고 우방국인 이스라엘의 안보를 확보함

동맹이 깨지고 타르투스항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과 동시에 중동 지역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된다면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

약화시키는 것을 원한다. 중동 지역의 풍부한 천연자

이다. 또 시리아는 전통적인 러시아의 무기 수출 시

원을 생각했을 때도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배제

장이다. 시리아는 내전 발발 이전 전체 구매 무기의

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50% 가량을 러시아에서 수입했다.《로이터 통신》 에

2000년대 초반 부시 행정부 시기 대통령과 네오콘

따르면 내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러시아는 2년 동안

들은 군사력을 통해 중동 전체를 미국의 영향력 아래

약 10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시리아에 수출했다. 시

놓으려 했다. 하지만 당시 초강대국 미국은 2003년

리아 정부가 무너진다면 러시아는 커다란 무기 수출

이라크 침공에서 4조 달러가 넘는 비용을 썼다. 너무

시장을 잃는 것이다.

많은 역량을 투입한 미국은 그 후폭풍으로 최근 재

사회적 연대관계를 들여다 봐도 러시아가 시리아

정 위기를 맞게 돼 오히려 중동 문제에 대해 어느 정

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러시아와

도 손을 놓은 채 아시아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리아

시리아 내에 냉전 기간 동안 결혼한 러시아-시리아

의 경우 초기엔 민주화 운동이었으나 사태가 점점 외

국제결혼 부부가 2만 쌍에 달한다.

부 세력이 개입한 종파간 내전으로 변질되자 최근 1 년 여 동안은 시리아를 미국이 슬그머니 방치해 두는

미국에게도 중요하긴 한데…

형국이었다. 그런데 화학무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 르며 미국이 다시 시리아 문제에 열을 올렸다. 화학

하지만 미국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중동 지역의 정

무기 사용 의혹은 1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고, 그

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러시아가 시리아를 포기하

간 화학무기가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 정부군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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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사망한 시민 수는 화학무기로 인해 사망한 시민 수를

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리아 사태에 대해 이랬다

훨씬 상회한다. 그럼에도 1년 간이나 가만히 있던 미

저랬다 반복하는 것이다. 까다로운 문제라는 이유로

국이 왜 화학 무기에 펄쩍 뛴 것일까?

미국이 시리아를 방치해 두는 동안 내전의 양상은 복

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된 시리아 사태에서 미국은

잡해져 시리아 사태는 더욱 풀기 어려운 문제가 돼었

‘민주주의의 전도사’ 로서 반군을 줄곧 지지했기에,

다. 그런 와중에 미국이 민감한 부분이 화학 무기 문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비록 사라진 것이나 진배없더

제가 대두되자 강경책을 꺼내드는 듯 하더니, 의회의

라도 쉽사리 시리아 사태에 손을 놓긴 힘들었다. 여

반대, 러시아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적당히 러시아

기에 화학무기 사용 문제가 논란이 되니 대량살상무

와 타협함으로써 스스로 손발을 묶은 셈이 돼버렸다.

기에 민감한 미국이 다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반

확실히 영향력을 행사해 아사드 정권을 축출할 계

민주 세력’이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것이니 초기

획이었다면 외부 세력이 개입해 서방국의 입장에서

‘민주 세력’ 을 지원했던 미국이 가만히 있기엔 모양

도 선악구도가 불분명해 지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조

새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치를 취했어야 한다. 여력이 부족하기에 직접 개입을

또 내전에 외부 테러리스트 세력들이 개입한 만큼

피하고 지켜볼 계획이었다면, 허용 가능한 범위와 허

화학무기가 테러리스트 세력들의 손에 넘어가거나,

용 불가능한 범위를 명확히 정하고 시리아 정부군의

이란 등 미국의 적대국들로 밀반출되는 것을 방지하

행동이 허용 불가능한 범위에 다다를 때 취할 행동에

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화학무기사용에 대해 강경하

대한 엄밀한 지침을 세워뒀어야 한다. 그 지침은 시

게 대처함으로써 비슷한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를 개

리아를 둘러싼 역학관계를 충분히 재단한 뒤에 만들

발중인 이란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볼

어져야 하고, 의회의 반대나 러시아의 반대에도 흔들

수도 있다. 이왕 나서는 김에 말 안 듣는 이란도 느끼

리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전략 자체가 부재

는 바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한 미국은 그 어느 방향도 선택하지 못했고, 사태는

미국이 대규모 양적 완화로도 쉽사리 살아나지 않는

이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해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를 군사 개입이라는 카드를 통해 회복시키려고 했을 수도 있다. 미국 경제에 군수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군사 개입이 현실화돼서 군수산 업에 활력이 불어넣어지면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칠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Newroot2@hanmail.net

거라는 계산인 것이다. 실제로 시리아를 미국이 공습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생산하는 레이시온 사의 주식이 폭등하기도 했다.

이유가 없는 게 이유 문제는 1년여 동안 방치해두다시피 한 시리아 사태 에 대해 화학무기문제를 계기로 미국이 갑작스레 정 책방향을 선회한 데에 확실한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이 시리아 문제, 그리고 중동 문제에 있어 확실한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미국이 시리아 사태에 대해 보이고 있는 행동은 좁게는 시리아, 넓게는 중동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할 대전략이 근저에 깔린 것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 은 대전략 없이 상황 대응적인 외교정책만을 펴고 있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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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겨 묻은 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던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 무기 사용은 미국이 사태에 무력으로 개 입하지 않는 대신 시리아가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가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바샤르 알-자파 리 시리아 유엔 대사는 9월 12일, 협약 서명을 공표하는 유엔 연설에서 이스라엘을 거론하며,“시리아의 화학 무기는 단지 이스라엘 핵 전력을 억제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시리아 정 부가 CWC에 가입함으로써 대량살상무기(WMD)를 반대한다는 의지를 표현했기 때문에… 국제원자력기 구(IAEA) 역시 이스라엘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시킬 책임이 있다” 고 덧붙였다. WMD 축소의 불똥 이 이스라엘을 향해 튄 셈이다.

ⓒUN 바샤르 알 자파리 유엔 주재 시리아 대사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력적인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장 꺼려한 것은 아사드 정권에 대한 이란의 지지와, 시

이스라엘의 대 시리아 입장은 오묘했다. 현재의 아

리아의 화학무기가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손에 흘러

사드도, 테러단체와 결부된 현재의 반군도 그다지 매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사태가 시리아의 CWC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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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Stuster

입으로 결론지어지자, 이스라엘은 일주일 여의 침묵 을 깨고“WMD 사용은 큰 대가를 치를 것임을 국제 사회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고 입을 열었다. 지난 4월 직접 시리아 무기 호송차량을 타격하기도 했던 이스라엘 정부 일각에서는 미국의 합의를 내심 무책 임한 것으로 보고“미국의 적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그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는다” 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CWC 가입 결정 이후 이스라엘의 태도에 대해 러시아와 중동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 난은 거세지고 있다. 이스라엘 역시 WMD를 거의 확 실히 보유하고 있고, NPT와 CWC에도 가입 혹은 비 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푸틴은“시리아의 화학 무 기가 이스라엘 핵무기를 대항하기 위함임은 잘 알려 진 일” 이라고 언급하였고, 이란 공영 방송《알-알람》 은‘시리아의 화학 무기 문제 이후 이스라엘의 WMD 로 새로이 관점을 옮겨야 한다’ 는 요지의 기사를 발 표했다. 서방 언론 역시 이스라엘의 입지 축소와 미 국의 편파적 침묵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뉴욕타임 즈》 는“이스라엘 핵에 솔직해지자” 는 제목의 기고문

로널드 레이건 라이브러리에서 발견된 CIA 기밀 문서

에서“다른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바마 역시 이스 라엘의 WMD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있으며, 이 터부가

때,《포린 폴리시》는 9월 9일자 기사를 통해“이스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막고 있다” 고 전했다.

라엘은 핵 전력을 보완하려는 목적으로 비밀리에 화 학 무기를 비축했다” 는 내용의 미 중앙정보부 보고

나는 원한다, 고로 나는 소유한다

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화학 무기 개발 및 비축이 1970년대 이후 이미 완료되었으며, 이러

이스라엘은 과연 WMD를 보유하고 있을까? 이스

한 사실이 미 중앙정보국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묵인

라엘 당국은 한 번도 자국의 핵무기와 화학 무기에

되었다는 것이다. 발견된 기밀 보고서는“1976년 1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모호

월에 (화학 무기) 실험이 감지되었고, 1982년에는 스

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핵 보유는 각국의 조사

파이 위성을 통해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화학 무

와 내부 고발로 인해 기정사실화되었다. 1986년 이

기인 신경 가스를 생산하는 시설과 저장소로 보이는

스라엘의 핵 시설을 영국 언론을 통해 고발한 핵무기

건물이 확인”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 드에 납치되어 반역죄와 간첩죄로 징역 18년을 선고

줄어가는 명분

받았으며, 그 중 12년은 독방 감금이라는 혹독한 처 벌을 받은 바 있다. 바누누에 따르면 핵무기 시설은

보고서는 이스라엘이 화학 무기를 개발하게 된 이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에 핵발전소로 위장한 채

유로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1973년 욤 키푸

운영되고 있다.

르 전쟁을 꼽는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 아랍 국가들

이스라엘은 화학 무기 역시 보유한 것으로 예상된

로부터 소련제 화학 무기 장비들을 노획하면서 자신

다. 국제 여론의 화살이 이스라엘로 향하기 좋은 이

을 둘러싼 다수의 아랍 적국들이 화학 무기를 사용할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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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on Reed

스라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시리아의 화학 무기도, 이집트의 화학 무기도 아닌 이란의 핵 개발이다. 네타냐후는 시리아 사태에 대해 언급할 때도“시리 아 사태가 갖는 메시지가 이란에게도 분명히 전달 되어야 할 것” 이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로하니와 이란의 행보에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 은 것은 사실이며, 과연 이란이 핵 개발을 포기할 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강경한 태도는 중동 지역의 불안함과 이스라엘의 고립을 야기하고 있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 국가들은‘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리는 항상 타의에 의해 많은 걸 포기하지만 이스 라엘은 예외인 것 같다’ 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러

러한 시선을 의식하듯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한 불안감이 이미 핵 전력을 보유한 이스라엘로 하여

은 9월 30일, 화학무기금지조약기구가 있는 네덜란

금 화학 무기 개발에도 손을 대게 했다고 생각된다.

드 헤이그를 방문해“이스라엘은 세계 모든 나라들을

그러나 오늘날의 중동에 이스라엘이 우려할 만큼

향해 조약 가입을 호소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요

강력한 WMD를 보유한 국가들은 많지 않으며, 오히

청을 검토할 것” 이라 언급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려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비대칭전력이 중동 지역의

CWC 가입을 두고 명예직 취급을 받는 이스라엘의 대

불균형과 불안을 야기한다는 의견이 많다. WMD를

통령과 강경파 실권자 네타냐후 총리의 생각이 얼마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던‘악의 축’이라크

나 일치할지는 미지수다.

는 애초에 화학 무기를 보유하지 않았거나 혹은 미국

이스라엘이 먼저, 그리고 스스로 평화적 제스처를

에 의해 제거당했고, 시리아는 CWC에 가입함으로써

취하길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특히 이란, 시

원칙적으로는 2014년까지 모든 화학 무기가 제거될

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의 요구대로 이스

예정이다. 핵 전력을 보유하지는 않았으나 대 이스라

라엘이 NPT에 가입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실현 불가

엘을 명분으로 다량의 화학 및 생물학 무기를 비축한

능한 공상에 가깝다. 이스라엘의 강경책 저변에는 뚜

이집트는 시리아 사태로 인해 중동 지역 WMD가 다

렷한 기준 없이 자국의 이해관계와 역량에 따라 설정

시 구설수에 오르자 9월 28일 유엔 총회에서“이집트

되는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깔려

도 생물 및 화학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겠다” 고 밝혔

있기 때문이다. 중동이라는 황야에서 스스로의 힘으

다.‘모든 국가들이 진전을 이뤄낸다면’이라는 단서

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강한 자기의식은

를 단 것과, 같은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NPT 가입을

미국의 이해관계와 불완전하게 일치하고 아랍 국가들

촉구한 것으로 보아 이집트의 발언은 이스라엘에 여

의 안보 추구와 맹렬히 충돌하면서 중동 평화라는 유

론의 비난을 집중시키고 이스라엘이 WMD를 포기할

토피아를 더욱 요원하게 만들고 있다.

의사가 있는지 떠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김만희(고려대 국문) manhee87011@naver.com

이스라엘의 고독 요즘 이란 험담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처럼 보인다. 그는 최근 로하 니 이란 대통령의 평화적 제스처에 대해“양의 탈을 쓴 늑대” 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사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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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After Syria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에서만 최소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내전 은 시리아뿐만 아니라 중동의 인근 지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난민은 200만여 명에

ⓒMuhammad Hamed

올해 시리아 내전으로 최근 2년간 발생한

달한다. 주변국들의 난민 캠프는 포화 상태이며, 난민이 가장 많이 유입되고 있는 레바논, 요르단, 터키, 이라크 등 시리아 인근의 중동 국가들은 대부분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레 바논은 현재 가장 많은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고 있으며, 난민의 수 가 전체 인구의 15~20%에 달한다. 급속히 증가한 난민으로 레바논 은 일자리 부족, 물가 상승, 범죄율 증가 등의 사회 문제를 겪고 있 다. 난민 캠프 건설에 국제 사회의 지원도 많이 부족한 상태다. 터키 의 경우, 난민 캠프 20개를 짓는 데 15억 달러를 사용했으나, 이 중 UN의 지원 액수는 1억 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내전 종식이 요원해 지면서 앞으로 난민의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갈등의 불꽃이

ⓒBilal Hussein

시리아 내전이 시아와 수니 간 종파 분쟁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이라크와 레바논으로 옮겨 붙고 있다. 후

세인 정권 아래 소수의 집권 수니파와 다수의 피지배 시아파가 대 립했던 경험이 있는 이라크는 현재 시아파인 말리키 정권으로 교체 된 이후에도 종파간 갈등과 분쟁이 잦았다. 시리아 내전 이후 이라 크 내 종파 간 대립으로 인한 폭탄 테러나 총격 사건은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이로 인해 올해에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 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비율이 비슷하며 기독교도들의 숫자도 상 당해 모자이크 국가라 불리는 레바논 역시 상황은 비슷하며, 심지어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까지 깊이 개입되어있다.

사우디아라

ⓒGetty Images

걸프 지역의 리더이자 미국의 오랜 동맹국인

비아가 UN이 제시한 2년 만기의 UN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 국 자리를 거절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앞서 아무런 해명 없이 예정 되어있던 UN 연설을 취소하기도 했다. 이는 중동 지역의 갈등, 특히 최근 시리아 내전에 대한 UN의 대처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면서 반군을 지 원하던 수니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방 세력들의 노력을 좌절시 켰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사일 타격을 주창했던 미국마저 러시아와 타협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족 내에서 불거진 불만이 표출된 것으 로 보인다.

김만희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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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악수 혹은 악(惡)수 고대하던 악수는 없었다. 대신 전화통화가 이루어졌다. 미국과 이란 간 마지막 정상급 접촉은 444일 간 이어진 1979년의 미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로, 카터 미 대통령과 레자 샤 팔레비 이란 국왕 사이에 이 루어진 접촉이었다. 1979년 호메이니가 이끈 이슬람혁명 이래로 미국과 이란은 쭉 적대적인 관계를 유 지했고,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팔레비 왕조의 유물인 핵 프로그램을 이어받으며 이란은‘악의 축’ 이 되었 다. 아마디네자드의 9년간의 집권을 거치며 이란 핵 제거는 미국의 과업이 되었지만 68대 UN 총회를 계 기로 양국간 관계는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한 아랍 학자는 오바마와 로하니의 통화를“베 를린 장벽의 붕괴” 라 평하기까지 했다. ⓒREUTERS/ White House Handout via Reuters and Adrees Latif

“매력 공세”

다. 이스라엘 일간지《하레츠》 는“우리가 파티를 망 쳤다” 며“세상이 듣지 않는다” 고 탄식했고 이란의 신

이번 UN 총회의 주인공은 단연코 하산 로하니 이 란 대통령이었다.《뉴욕 타임즈》 는 로하니가“솔직하

임 외무상 자리프는“네타냐후는 UN에서 가장 외로 운 사람이었다” 고 말했다.

고 매력적” 이라는 기사를 헤드라인에 내세웠고《포

실제로 로하니는 지난 몇 주간 전임자였던 아마디

린 폴리시》 는“로하니가 팬클럽을 만들고 갔다” 고평

네자드 집권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들

했다. 이에 반해 가장 고립된 것은 로하니가 양의 탈

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인권변호사와 야권 지도자들

을 쓴 늑대라며 경고하는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였

을 포함한 정치범 91명을 석방했고 외무장관에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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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파 자바드 자리프(Javad Zarif)를 임명했으며 핵 협

최고종교지도자‘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지지를 업고

상권을 최고국가안보위원회(SNSC)에서 외무부로 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하메네이의 정적인 라프산자니

전해 대통령에게 직속 보고를 올리게 했다. 대외적으

계보의 정치인임에도 불구, 6월 대선에서 700명의

로는 더 놀랄 만한 모습을 보였다. 오바마와 서신을

후보 중 하메네이가‘간택’ 한 6명 중 하나였고 이번

교환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트위터로 유대인

에 미국에서 보인 개방적 태도 역시 하메네이의 승인

명절‘로쉬 하샤나’ 를 축복했으며 미국 언론사 편집

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메네이는 정치

장들과 식사를 했다. 언론 플레이도 잊지 않았다.《워

범 석방에 동의했고“위대한 유연성을 보여야 한다”

싱턴 포스트》 에 시리아 내전을 중재하겠다는 글을 실

며 로하니의 유화책을 지지했다. 또 로하니의 대외노

었고 NBC와 가진 인터뷰에서는“핵 협상에 관해 전

선을 못마땅해할 공화국혁명수비대(IRGC)의 언론기

권이 내게 있다”고 말했으며 CNN과의 인터뷰에서

관 세파에“세파가 이란 정치를 수호할 필요는 없다”

는“홀로코스트는 인류에 대한 범죄” 라 말해, 전임자

며 정치 연루를 금했고 이란 공영방송 IRNA와 사법

아마디네자드의 홀로코스트 조작설을 부정했다. 또,

부, 금요예배 모두에 침묵을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이란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파르스 뉴스》 와《카이한》 ,《레살라트》등 보수 언론

다” 는 그의 발언도 놀라운 것이었지만“협상을 빠르

들도 입을 다물었다. UN총회 후“로하니 대통령의

면 3달 안에 시작할 수 있다” 는 발언은 낙관론자들을

대외노선을 지지한다” 는 내용의, 이란 국회의원 290

춤추게 했다. 외무상 자리프는 로하니보다 더 나아갔

명 중 230명의 공동성명 역시 하메네이의 지지가 있

다. 그는 존 케리와 마주앉아 비공식 회동을 가졌으

었기에 나온 것이다.

며 유창한 영어로 ABC뉴스와 인터뷰를 거행했고 이 자리에서 홀로코스트를 인정했다. 이런 행보, 그리고

로하니, 설명 안 하니

핵 협상 관련 교착상태를 풀어나갈 계획을 3주 안에 제시하겠다는 호언장담은 로하니가 이란에서 실질적

당연한 일이지만 로하니의“3개월에서 6개월 내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협상을 시작하자” 는 발언은 이란에 가해지는 경제적

로하니는“매력 공세” (Charm Offensive)라는 별명

제재 완화를 앞당기려는 의도다. 실제로 작년부터 적

을 안고 본국에 돌아갔다.

용된 미국의 국방수권법과 EU의 이란 석유에 대한

로하니가 하타미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바로

금수조치는 석유 판매가 국가 수입의 8할을 차지하는 ⓒGetty Images

이란에 경제적 파탄을 가 져왔다. 석유 판매량은 하 루 250만 배럴에서 40% 로 떨어졌고 리얄의 가치 는 반토막이 났다. 미국의 제재가 이란의 에너지, 항 만, 운송 분야로 확대되며 경제적 난국은 더욱 심해 졌다. 이란과의 협상 재개에 있어 본질적 문제는 이란 의 변화가 진심인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말을

《타임》지에도 실린 이 사진은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뉴욕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9월 28일 귀국해 테헤란 공 항에 내리는 모습이다. 27일 로하니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역사적 통화가 이루어졌다.

국제시사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다. 가령 이란은 OPCW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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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NPT 회원국이지만 이란이 실제로 화학무기를 보

하니가 갖는 정치적 안정성 부재라는 현실적 이유가

유하지 않는지, 핵을 개발하지 않는지는 또다른 문제

있다.

다. 로하니는 이란의 우라늄 농축이 평화적인 것이며

이란 내부부터 살펴보자면 첫째, 이란 내 강경파의

에너지 생산을 위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의 말은 듣

반대가 크다. 로하니가 오바마와의 악수를 피한 것

기에는 좋지만 이스라엘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산을 파

은 종교계, 혁명수비대, 언론 등 국내 보수층을 의식

내 지하에 건설한 포르도 산 핵시설이나 당장 2014

한 것이라는 분석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로하니는 오

년에 완공되는, 플루토늄탄을 제조할 수 있는 아라크

바마와의 통화 내용을 트윗했지만 이후 보다 중도적

중수로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세계 5위의 석유생산국

용어로 내용을 수정했다. IRGC는 로하니와 오바마의

인 이란에 어째서 에너지원이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통화에 대해“전략적 실수” 라며 대외노선을 비판하는

또 로하니는 1989년부터 17년 동안 이란의 SNSC 의

듯한 태도를 취했다.《파르스 뉴스》 는 로하니가 유대

장을 맡았던 인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폭탄테러와 쿠

인들에게 로쉬 하샤나를 축복했다는 사실을 부인했

바르 탑 폭발사건 당시 지휘 계통에 있었으며, 2003

을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 인정이 CNN의 오역으로

년 핵 협상 당시 이란 측 수석 협상자였던 인물로

인한 결과라면서 CNN을 비난한 바 있다. 또 자리프

2002년 이란 핵프로그램이 탄로나기 전에도 아라크

가 뉴욕에서 이란을 믿고 싶어하는 외신들을 기쁘게

와 나탄즈 등 핵시설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 주는 동안 테헤란에서는 외무부 차관 아락치가 이

따라서 오랜 갈등에 지친 낙관론자들에게는 안된 일

란 보수파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아락치는“(오바마

이지만 로하니의 매력공세는 눈속임일 공산이 크며,

와의) 통화 한 번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뜻하지

이란이 원하는 제재 완화에 곧장 돌입할 수는 없다.

는 않는다” 며“결국 우리는 과거와 같은 노선을 유지

그런데 제재를 풀지 못하면 로하니의 매력공세도 끝

하게 될 것” 이라 말했다.

날 확률이 크다. 다시 말해 원점복귀다.

또, 하메네이의 지지가 이어지리라 확신할 수 없 다. 하메네이의 반미감정은 CIA의 1953년 친소파

Love the Way You Lie

이란 수상 모사데그를 축출한 쿠데타 사주로까지 거 슬러올라간다. 과거에도 하메네이는 개혁파 하타미

로하니의 온건 노선이 진심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를 지지했다가 아마디네자드를 내세운 일이 있다.

제재를 즉시 풀지 못하는 데에는, 이란 내부에서 로

서방으로부터 즉각적 제재 완화가 나오지 않는다면 하메네이가 노선을 변 Twitter@HassanRouhani

화시킬 가능성도 농 후하다. 서방과 대화 의 창이 완전히 단절 될 경우 이란의 핵개 발은 서방이 두려워하 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이란 은 2012년 이스라엘 이 제시한,“20%로 농 축된 우라늄 250kg” 라는 기준을 잘 지켜 왔지만 동시에 서방의 경제적 제재, 호르무

오바마 대통령과의 역사적 통화 후 로하니는 통화 내역을 트윗했으나, 얼마 후 보다 온건한 용어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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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즈 해협의 미 해군 배


ⓒGetty images

를 풀려면 28개국 전체의 동의가 필요한데,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 로 빠른 시일 내 이루어질 수 있 을지는 의문스럽다. 이란 유조선 에 보험을 끊어 금수조치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영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토리당 보수 중진들의 표심을 잡으려는 카메론 총리가 금수조치 완화에 동의할지는 불 확실한 일이다.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나탄즈 핵시설의 원심분리기를 시찰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이란대통령.

치라는 군사적 위협, 심지어는‘올림픽 게임’이라는

따라서 시험해야 하는 것은 이란이 실제로 국익 일

사이버 테러까지 받으면서도 2005년에 1400대였던

부를,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가의 여

원심분리기를 18,000대로 늘렸다. 이란이“레드 라

부다. 이를 시험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11

인”경고를 무시하고 핵개발에 박차를 가한다면 그

월 말의 2차 제네바 회담, 즉‘제네바 2’ 다. 이미 로

결과가 평화적일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다.

하니는 시리아 내전을 중재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한

크게 양보해서 이란의 핵개발이 순전히 평화적 의

바 있다. 제네바 2를 통해 이란 강경파가 로하니와

도만 가진 것이며 이란 내부가 로하니를 중심으로 대

갖는 관계, 그리고 하메네이가 로하니에 보내는 지

동단결한 상태라고 가정하더라도 서방이 갖는 한계

지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란과 미국은 시

역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국방수권법이라

리아 문제에서 반대편에 서 있는 입장이지만 시리아

는 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완화하려면 의회 동의가 필

국가 붕괴의 방지와 지하디스트들의 퇴치라는 두 가

요하다. 그러나 의회에는 맥케인과 그레이엄 같은 공

지 공통된 목적을 가진다. 공통의 적을 가졌을 때 이

화당 강경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며 최근의 정부

들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제네바 2에서 미국과 이란

셧다운까지 여야대립이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이다.

이, 아사드 축출과 알라위파 일부가 포함된 연합정

제네바에서의 P5+1 협상이 끝난 현재 백악관은 대이

부 구성에 합의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향후 핵 문제

란 제재 완화를 고려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의회

에 있어서 이란의 행로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게 할

전체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본래 제재를 느리게 푸는 국가다. 1997년 버마에 가한 경제제재는 작년에야 비로소 완 화되었다. 1981년 미국이 리비아에 가한 경제제재는

박정민(연세대 정치외교) jay6901@naver.com

리비아가 무장을 해제하고도 2011년까지 이어졌으며 그에 따른 보상도 느리기 짝이 없었다. 1974년 소련 과의 무역을 규제한 제재법안인 잭슨-배닉 수정안은 소련 붕괴 후 20년이 지난 작년에야 폐기되었다. 따 라서 이란의 경우, 하메네이가 바라는 경제제재의 빠 른 완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유럽의 경우는 더 난감하다. EU의 석유 금수조치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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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불황 없다?

축소하는 척하다 안 하기!

화를 축소할 것을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연준이 명확 한 정책방향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FOMC

9월 18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연방 공개시장위원회(FOMC)회의에서 월간 850억 달러

회의 이후에 버냉키 의장은 연말에 양적 완화 축소를 시행할 것임을 언급하였다.

규모의 현행 3차 양적 완화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으로 인해 글로벌 증시는 오름세를 보였

양적 완화가 대체 뭐길래

고 한국 증시도 소폭이지만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분

양적 완화는 중앙은행이 국채 등 금융자산을 매입

석이 많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지난

함으로써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이다. 미국의 경우 연

6월 경제상황이 나아지는 추세가 지속해서 보일 경우

방준비제도가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한다. 일반적으

금년 말부터 양적완화 축소를 시행할 것임을 시사했

로 불경기에 중앙은행은 금리를 낮춰 경기회복을 도

기에 시장은 연방준비제도가 이번 회의 이후 양적 완

모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취한다. 그런데 이미 금리가

ⓒReuter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 벤 버냉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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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이상 금리를 낮추기 어려워 중앙은행이 직접 시장에

ⓒBBC

낮아진 상태임에도 경기가 회복되지 않은 경우엔, 더 화폐를 공급하게 되는데 이를 양적 완화라고 부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금융위기 이후 장기화된 실 물경기침체가 두 차례의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호 전되지 않자 2012년 9월 매월 400억달러 규모의 주 택저당증권(Mortgage-Based Security, MBS)을 사 들이겠다는 3차 양적 완화 정책을 발표했고, 같은 해 12월 이를 매월 850억 달러 규모로 확대했다. 연준은 물가상승률이 2.5%를 넘거나 실업률이 6.5%를 하회 하게 되면 양적 완화를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그냥 금리 조정하면 안돼?

화끈하게 계속 찍어내주마!

일반적으로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중앙은행은 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연준은 3차 양적 완화의

리를 조정함으로써 시장에 개입한다. 통화량이 증가

종료 시점을 정해두지 않았다. 경기 회복이 되지 않

하면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게 된

는 한 양적 완화를 끊임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경제

다.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실물자

학자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중요한 점은 화폐를 정말

산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키는 요인이 된다. 인플레

로 무제한으로 찍어낼 것임을 경제 주체들에게 각인

이션율이 금리를 상회할 때, 현금을 은행에 보관하

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기 회복 유무와 관계 없

면 보유 현금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기에 개인

이도 화폐가치가 계속해서 떨어질 것이고 인플레이션

은 저축보단 투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지속될 것임을 인식시킴으로써 민간으로 하여금

여기에 더해 통화 가치 하락은 수출경쟁력을 높여 준

현금 보유가 아닌 투자를 선택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다. 투자와 수출의 증가는 고용의 증대를 낳고, 이는

또한 3차 양적완화에는 MBS의 대량 매입이 포함

다시 소비의 증가를 낳아 경제가 선순환하게 되는 것

되어 있는데, 이는 MBS를 대량으로 매입함으로써

이다.

MBS의 이자를 낮추고 이를 통해 주택에 대한 수요를

그렇지만 미국이 양적 완화 정책을 펴기 전 이미

늘려 주택가격 상승을 도모한 것이다. 주택시장이 활

금리는 제로 수준이었다. 초저금리에도 불구하고, 경

성화돼 주택가격이 오르면 자산가치의 상승을 맛본

기가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미래의 경제

가계는 소비를 늘리게 된다. 결국 이는 제품생산을

상황을 민간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호경기가 찾

활성화시키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올 것이라는 기대 없이는 아무리 금리가 낮아 저축

그렇다면 이번에 양적완화 축소가 연기된 이유는

할 동인이 없고, 보유 현금이 많더라도 가계의 입장

무엇일까.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양적완화 축소 연

에서는 소비를 늘리기가 어렵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기 이유로 실업률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과 물가

선뜻 투자를 결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승률이 목표치를 하회한다는 점, 그리고 주택담보

미 금리는 제로이기에, 미국은 양적 완화를 선택했

대출금리가 높은 점, 경제성장이 둔화돼 있다는 점을

다. 1,2차 양적 완화의 배경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들었다. 실업률이 하락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7.3%로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

목표치보다 높다. 실물경기가 만족할 만큼 개선되지

한 각국의 경쟁적인 통화량 증가, 다시 말해 환율 전

않고 있기에 양적 완화를 지속하여 실물경기를 회복

쟁만 초래했지 실물경기 침체 극복에는 크게 기여하

시키려는 것이다.

지 못했다.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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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Insider

연준 결정을 바라보는 신흥국

염두에 두고 연준이 정책결정을 해야 한다” 며“장기 적으로 신흥국 시장에서의 자본 유출이 계속될 것” 으

양적 완화 축소 연기는 신흥국들의 증시에 호재로

로 전망했다. 더욱이 인도, 터키, 인도네시아의 지속

작용했다. 이유는 외화의 유출이 방지되었다는데 있

된 경상수지·재정수지 적자, 브라질, 러시아의 지나

었다. 양적 완화가 축소되고 금리가 오르면 신흥국

친 원자재 수출 의존 신흥국들의 경제에 내재된 문제

통화 가치 하락과 외화 유출이 예상된다. 투자자들은

점들이 부각되면서 양적 완화 축소와 함께 이들 국가

금리가 다시 오르면 리스크가 큰 신흥국 금융시장보

들에 외환위기가 찾아오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다 안정적인 미국 민간 금융시장과 미국 국채에 투자

있다.

할 동인이 크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들의

끝나도 끝장나는 게 아니다

고성장세와 미국 등 선진국의 양적완화로 인한 화폐 유동성의 증가가 더해져 신흥국들에 대한 투자가 급

그렇다고 양적 완화가 지속되는 것이 마냥 좋은 것

속히 증가했다. 신흥국에 많은 외국자본이 유입된 것

은 아니다. 양적 완화 축소는 불가피하다. 영원히 화

이다. 이 같은 상황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미

폐 공급을 늘리기만 할 수는 없다. 달러 가치의 폭락

국의 양적 완화가 축소되고, 금리가 다시 오르게 되

으로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요동칠 것이고 이어서

면 신흥국에 유입된 투자 자본이 미국으로 회수될 가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할 것이다. 자산 가격에

능성이 크다.《월스트리트 저널》 은“시장의 동요를

거품이 낄 것이고, 세계적으로는 환율 전쟁이 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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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경제를 살리기 위해 통화량을

다.

무작정 늘리기만 했던 정책들은 모두 엄청난 후폭풍

양적 완화의 기본 목표는 총수요와 투자를 증가시

을 낳으며 경제를 오히려 수렁에 몰아넣었다. 이 점

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인데, 전체 인구에서 소수인

을 연준이 모를 리 없고, 실업률 6.5%, 인플레이션율

고소득층의 소비와 투자만 증가시키는 것으로는 목

2.5%라는 명확한 선을 그어 놓은 것이다. 결국 양적

표한 총수요의 증가를 가져오긴 힘들다. 예를 들어

완화는 언젠가 종료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택 시장에서 수요의 증가를 기대한다면 다수의 중

그러면 양적 완화의 축소 및 종료가 단행되었을

산층이 다수의 주택을 구입하길 기대하는 것이 소수

때 일부의 우려처럼 2000년대 중반의 멕시코나 아시

의 고소득층이 다수의 주택을 구입하길 기대하는 편

아국가들과 같이 신흥국들이 급격한 외화 유출로 인

보다 낫다. 소수의 고소득층이 필요 이상으로 주택

해 외환위기에 빠지게 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양

을 잔뜩 구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양적 완

적 완화가 축소되면서 어느 정도의 자본 유출이 예

화는 양극화를 초래하고 실질적인 총수요 증가 없이

상되기는 하지만 연준이 지속적으로 양적 완화 축소

자산 가격의 거품만 초래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

를 예고하고 있기에 시장은 그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다. 양적 완화가 실패해 경기가 회복되지 않은 채, 양

할 것이다. 또한 이번 결정에서도 미뤄볼 수 있듯 연

적 완화가 종료한다면 그 때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이

준은 실질적으로 미국 경기가 개선되고 있다는 확신

크다. 글로벌 유동성이 얼어붙은 채 신흥국들이 외화

이 들어야지만 양적 완화를 축소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출을 겪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경기 회복을 이뤄내고, 그 결과로서 시작되는 양적 완화라면 글로벌 금융시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이번 회의에서 축소 결정?

미칠 것이다.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인 미국의 경기 회복은 신흥국들의 수출 시장이 확대되는 것을 뜻하

10월 29일에 FOMC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

고, 다시 민간 부분의 신용 창출과 자본 투자를 낳을

양적 완화 축소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

것이며, 이는 인위적인 유동성의 공급이 없더라도 충

준이 쉽사리 양적 완화 축소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

분한 글로벌 유동성이 유지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진 않는다. 미국 연방 정부의 셧다운으로 인해 미 국 경제는 다시 한 번 타격을 입었다.《월스트리트 저

문제는 양적 완화 자체가 실패했을 때

널》 에 따르면 많은 전문가들이 양적 완화 축소가 내 년 상반기에나 이루어질 것으로 예견했다. 셧다운의

진짜 문제는 양적 완화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여파가 미국 경제에 어느 정도의 타격을 가져올지 불

이다. 양적 완화로 인해 초저금리가 지속되고 인플레

확실한 가운데 연준이 양적 완화 축소라는 정책변화

이션이 발생하더라도 일반 가계가 선뜻 대출을 받아

를 결정해 경제에 또 하나의 불확실성을 더하진 않을

투자를 하거나, 보유 현금을 지출해 소비를 증가시키

것이다.

길 기대하기 어렵다. 일반 가계는 과감한 투자를 결 정할 만큼 소득이 충분히 많지 않은 데다 금융위기로 자산가격과 증시의 폭락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위험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Newroot2@hanmail.net

을 회피하는 투자행태를 보이게 되고, 물가상승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돈을 맡겨 둘 개연성이 크다. 반대 로, 투자 위험을 감수할 만큼 부유한 고소득층은 주 식투자, 자산투자 등을 통해 양적완화로 인한 물가상 승과 증시 상승의‘단 열매’ 를 맛보게 된다. 결국 양 적 완화가 중산층, 저소득층의 재산은 줄어들게 하 고, 고소득층의 배만 불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이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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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들이키다

ⓒBlake Bergen

‘따거’ 들의 라거, 칭따오 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칭따오 맥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중국 맥주 중 하나다. 요즘에는 양 꼬치구이 전문점이나 중국 요릿집 외에 일반 편의점에서도 칭따오 맥주의 초록빛 병과 붉은 라벨을 쉽 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355ml짜리 이 작은 병에는 가볍고 깔끔한 4.7도의 필스너 스타일 맥주뿐 아 니라 중국 대륙의 묵직하고 서글픈 근대사가 함께 담겨 있다.

중국과 독일의 사생아

다. 1897년 11월, 구교 운동의 일환으로 독일인 선교 사 두 명이 살해되자, 독일은 즉각적으로 군대를 움

19세기 말의 중국은 누더기처럼 찢겨 있었다. 영국

직여 자오저우만과 칭따오(청도)를 조차하고 각종 이

의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제국 열강들은 ⓒtsingtao brewery

경쟁적으로 중국의 땅덩이를 점령하고 이권을 가져갔 다. 정부는 무력했고, 막대한 배상금과 서구 자본의 유입은 세금 인상과 물가 불안을 낳아 중국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대중의 반발심은 각 지역에서 기독교와 서구 세력에의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소위 이러한‘구교운동’ 은 보통 선교사들을 표적으로 삼았는데, 민중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서구 세력과 문 화를 상징 및 대표하는 것이었고, 선교사들 역시 자 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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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하켄크로이츠와 칭따오 맥주

Prism


권을 강탈했다. 칭따오는 항구를 개항하면서 곧 산둥

되지 않아 주로 해외 시장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적

제일의 무역도시가 되었고, 칭따오항을 따라 시장과

국이었던 미국으로의 수출은 원래 금지되어 있었지만

독일식 주택이 늘어섰다. 독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

1972년 닉슨 미 대통령의 파격적인 방중과 미중 수교

과 새로운 물건들이 바다를 건너와 칭따오항에 발을

덕택에 미국에도 처음으로 칭따오 맥주가 소개된 후,

디뎠는데, 그 중 가장‘독일스러운 것’ 이 하나 있었

붉은 라벨이 붙은 이 맥주는 지금까지도 미국 내에서

으니 바로 근대식 맥주 공장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중국 맥주가 되었다.

칭따오 브루어리(Tsingtao Brewery)는 1903년 8 월 15일, 영국과 독일의 합작으로 설립되었다. 공장

이제는 세계인의‘따거’ 로!

내 기계 설비는 대부분 독일에서 직접 들여온 것이었 ⓒverong.tistory.com

고, 맥주 양조의 전 공정을 관리하는 두 명의 독일인 ‘브루마스터’ 까지 두었을 정도로 창립자들은 먼 타지 에서 고향 맥주의 맛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 다. 당시 칭따오 맥주는 독일 본토의 맥주처럼 1516 년 제정된‘맥주 순수령’ 을 따라 보리와 홉, 물만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깨끗하고 맛 좋다는 칭따 오 라오샨의 광천수가 맛의 바탕이 되었다.

역사가 흐르는 대로 맥주도 흐른다 칭따오 브루어리는 1990년대 초 민영화되었으며,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손에 쥔

1993년 칭따오 지역의 다른 양조 회사들을 병합하면

지 20년이 채 못 되어 칭따오와 칭따오 맥주 공장을

서‘칭따오 브루어리 유한책임회사’ 라는 정식 명칭을

잃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 내 독일의

갖게 됐다. 비록 중국 내에서는 설화 맥주라는 새로

이권을 빼앗기 위해 1914년 독일에 선전포고를 감

운 경쟁자에게 1위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2001년부

행하고, 칭따오와 자오저우만을 공격해 산둥 지역에

터는 적극적으로 해외 자본을 유치하고 2008년 영국

서 독일을 몰아냈다. 이후 일본은 21개조 조항을 통

과 아일랜드 등 맥주 강국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세계

해 독일이 갖고 있던 이권과 영토를 자신들에게 이전

62개국에서 판매되는 국제적인 주류 브랜드로의 발

하도록 강요했으며, 중국의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자

돋움을 시도하고 있다.

신의 정치적 정통성과 권력을 보장받는 대가로 이를

칭따오 맥주는 깔끔하고 산뜻한 맛이 특징이다. 양

수락했다. 전쟁이 끝난 후 중국은 비록 승전국이었지

꼬치구이나 튀긴 돼지고기처럼 묵직하고 번들번들

만 반식민지 상태였던 까닭에 열강들에게 빼앗긴 영

한 안주를 삼킨 후 마시는 칭따오 한 모금은 마치 식

토를 돌려받지 못했고, 칭따오는 일본의 손에 그대

도의 찌든 기름때를 씻어내리는 매직블록과 같은 청

로 남았다. 칭따오 맥주 공장은 1916년 일본 군정의

량감을 준다. 그러나 그 청량감의 이면에는 고소하면

승인 하에 다이닛폰(대일본) 브루어리(Dai-Nippon

서도 쌉쌀한 대륙‘따거(형님)’ 들의 체취가 꿈틀대고

Brewery)에 처분되었으며, 1945년 항복 전까지 일본

있다. 근대사의 질곡을 오롯이 새기며 세계인의 맥주

에 의해 운영되었다.

로 거듭나는 그 모습이 강대국으로서 세계 무대에서

항복 후 국민당 정권 하에 칭따오 브루어리는 중국

부상 중인 오늘날 중국의 모습과 사뭇 닮아 보인다.

의 민간 기업이 되었으나, 공산 혁명을 거치고 중화 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다시 국유화되는 운명을 겪 었다. 중국이 맥주를 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954년 으로, 1980년대까지는 자국 내 맥주 시장이 활성화

김만희(고려대 국문) manhee87011@naver.com

역사를 들이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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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로 맛보는 역사

우린 정말로‘미국’음식이에요 외국으로 어학 연수를 다녀온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러 나라 학생들이 모여 각자 자기 나라의 전통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미국인 친구가 자기네 나라 전통 음식으로 피자와 타코를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고유하고 특이한 전통 음식들이 각광 받는 현대에, 그저 여러 나라 음식의 변형이 대부분인 미국 음식 문화 는 조롱거리가 될 때도 많다. 특히 식문화와 건강의 연관성이라는 주제 아래서 미국 음식은 완전‘악의 축’이다. 이러한 평 가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미국의 음식 문화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역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그대로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현재는‘스패니시 할렘’ 이 되었다고 한다. 한때 15 만 명이나 되는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모여 살았던 리 틀 이탈리아 역시 현재 크게 축소되어 그저 차이나타 운 북쪽에 위치한 맛집 거리가 되었다. 피자처럼 이탈 리아계 이주민들도 미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 흡수되 었기 때문일까.

카펜터스는 왜‘잠발라야’ 를 불렀나 “Jambalaya and a crawfish pie and fillet gumbo For tonight, I'm a-gonna see my, my Cher a mi-oh”

피자 말고 ‘피자 헛’ 의 고향

70년대 미국을 휩쓴 팝 그룹 카펜터스가 부른‘잠발 19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남부에서 많은 이들이 미

라야(Jambalya)’ 라는 곡의 가사이다. 이 노래는 원래

국으로 건너온다. 이들은 초기에 뉴욕 맨하튼의‘이스

미국 루이지애나 지방의 민요를 1952년 행크 윌리엄

트 할렘’ 이나‘리틀 이탈리아’등의 구역에서 많이 모

스라는 가수가 불러 히트한 후, 1974년에 카펜터스 남

여 살았다. 이 이탈리아계 이주민들이 고향 음식인 피

매에 의해 다시 한 번 인기를 얻었다.

자를 만들어 팔면서 역사는 시작된다. 공식적으로 뉴

이 노래에 나오는‘잠발라야, 왕새우 파이, 필렛, 검

욕 최초의 피자 가게는 조반니 롬바르디에 의해 1905

보 스프’ 는 모두 루이지애나 주에서 많이 먹는 음식들

년에 리틀 이탈리아에 세워졌다. 1943년에는 시카고

이다. 이 중 특히 유명한 잠발라야는 쌀을 버터에 볶아

에 두꺼운 치즈 두께가 인상적인‘딥 디쉬 피자’ 로유

육수를 붓고 고기와 각종 해산물, 야채를 넣어 만든 요

명한‘우노’ 가, 1958년에는 우리도 잘 아는‘피자헛’

리다. 리조또와 빠에야의 사이쯤 되는 이 음식은 실제

이 설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미국의 피자 프랜차이

로 스페인, 프랑스 스타일의 음식에 중남미 카리브 해

즈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미국식 피자’ 는 원조인

스타일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나폴리 피자’ 만큼이나 사랑 받는 음식이 되었다.

‘루이지애나’ 라는 지명은 1682년 프랑스 탐험가

재미있는 것은, 초기 이탈리아계 이주민의 주요 거

‘르네-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 이 이 지역에 도달

주지로‘이탈리안 할렘’ 이라고도 불렸던 이스트 할렘

한 후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붙었다. 이후 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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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데, 1763년 프 랑스가 스페

ⓒDougsTech/Wikipedia

민지가 되었는

ⓒSerena Wolf/domestic me

은 프랑스 식

인에 양도하 여 40년간 스 페인의 식민지 였다가 1803년에야 미국 땅이 된다. 1700년대 중반에

이 치킨을 좋아한다” 는 말은 비아냥이 섞인 인종 편견

서 영국에 의해 추방 당한 아카디아(현재의 캐나다 노

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 5월 스페

바스코샤주)의 프랑스계 이주민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

인의 골퍼 세르히오 가르시아가 공식 석상에서“타이

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 덕분에 여전히 이 곳에는‘케

거 우즈를 식사에 초대해 치킨을 대접할 것” 이라는 발

이준’ 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며

언을 해 뭇매를 맞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영향도 강하다. 현대에 케이준은 이 지역 특유의 양

‘후라이드 치킨’ 은 백인 농장주들이‘로스트 치킨’

념 스타일로 더 유명한데, 잠발라야 역시 이러한 역사

의 가슴살, 닭다리 같은 부분을 먹고 버리면 흑인 노예

적 배경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케이준 스타일 음식이라

들이 닭 날개같이 살점이 많지 않은 부위를 뼈째로 먹

고 할 수 있다.

기 쉽게 튀겨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 한마디 에 호들갑 아니냐 하기에는 너무나 눈물 젖은 역사다.

후라이드 치킨, 흑인들의 소울 푸드? 새로운 땅의 오래된 음식들 소울푸드?‘영혼을 감싸주는 자신만의 특별한 요 리’ 라는 신조어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흑인 인권

이 외에도 타코와 같은 텍스 멕스(Tex-Mex, 텍사스

운동의 성장과 함께 1960년대부터 널리 쓰여 온 말이

식 멕시칸 음식), 일본 스시의 변주 캘리포니아 롤 등

다. 이 시기부터‘소울(Soul)’ 이라는 단어가‘소울 브

미국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메뉴들 대부분이 다른

라더’ ,‘소울 시스터’ 나 혹은‘소울 뮤직’등 흑인 문

지역에서 수입되어 미국식으로 변형된 것들이다. 유

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쓰였는데,‘소울 푸드’역

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시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 도착한 음식들이‘미국식 변형’ 을 거쳐 자리

소울 푸드는 더 자극적이고 투박하다는 작은 차이를 제외하곤 미국 남부 지방 요리와 거의 유사한데, 이는

잡은 후 다시 외부로 번져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미 국의 역사 그 자체다.

흑인들이 노예 해방 전 남부에 주로 거주했기 때문이

물론 이‘미국식 변형’ 이 대체로‘더 기름지게, 맛은

다. 그러나 1969년 발간된『Soul Food Cookbook』 의

더 달착지근하게, 칼로리는 더 높게’변한 것이라‘건

저자 밥 제프리스는“모든 소울 푸드는 남부 요리에 속

강에 나쁜 음식’ 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 역시 사실이

하지만 모든 남부 요리가 소울 푸드인 것은 아니다” 라

다. 그러나 변형이 많이 되었을지언정, 미국 음식의 뿌

고 말했다. 당시 흑인들이 먹는 음식에서까지 제약을

리는 이주민 초기 세대의 고향 음식과 닿아 있는 경우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차별로 가난할 수밖에

가 많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야 했던 이

없었던 흑인들의 식생활에는 어쩔 수 없는 제약이 있

주민들에게 이런 음식들은 그나마 익숙한‘오래된 음

었기 때문이다.

식’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왠지 짠

대표적인 소울 푸드로는 콘브레드, 맥앤치즈, 미국

한 정겨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식 족발, 후라이드 치킨 등이 있다. 대체로 값이 저렴 한 옥수수, 감자, 닭고기, 돼지고기 등을 이용한 음식 들이다. 특히 후라이드 치킨이 유명한데, 사실“흑인들

이인재 (이화여대 국문) gilraen@naver.com

혀로 맛보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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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는 무얼 먹고 자랐나 2005년 7월 7일 목요일 아침 9시. 출근하는 사람들로 꽉 찬 런던 시내 순환열차 써클라인 2대와 피카 딜리라인 열차 1대 앞칸에서 폭탄이 터진다.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짙은 연기와 어둠을 뚫고 한꺼 번에 지상으로 올라온 수천 명의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기다렸듯 런던 한복판, 타비스톡 광장(Tavistock Square)에서 30번 버스가 터지며 사상자는 더욱 늘어난다. 사망자 52명, 부상자 800여명. 지난밤 영국 의 2012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으로 한껏 들떴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전국에 슬픔과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BBC

ⓒterrortrendsbulletin 타비스톡 광장을 지나던 30번 버스 안에서 벌어진 폭탄테러

The easiest way to get a‘T’letter

내 이슬람 단체를 주시하고 관리’ 라는 일종의 경찰당 국의 후속조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영국 경찰당국이 기록하는 첫번째 자

영국 내 무슬림의 증가는 1950년대부터 이어진다.

생적 테러(Homegrown terror)다. 2001년 있었던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이민

9.11 테러 이후‘테러’ 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중동이

자들이 이주해 와 저임금 노동자로 일했고, 80년대

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훈련된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영국의 출산율이 급감하며 적극적인 이민정책이 이

과 유럽 등 테러 대상국에 투입돼 벌이는 대규모 폭

뤄져 영국 내 이주민 비율은 계속해서 늘어왔다. 늘

력행위였다. 이랬던 상황에서 영국 테러 사건의 범인

어난 이주민을 껴안기 위해 직업훈련과 주거권리

들이‘영국인’ 으로 밝혀지며 영국사회는 적잖이 당

보장 등 이민자를 배려하기 위한 정책 등이 있었으

황했고,‘자생적 테러’ 라는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냈

나 언어와 문화와 같은 근본적인 요소에서 이주민들

다. 하지만 테러사건의 범인들이 파키스탄과 자메이

이 그 장벽을 넘지 못하며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어

카 출신의 무슬림이었음이 밝혀지며 영국사회 내의

왔다. 7.7 런던 테러 이후 캐머런(Cameron) 총리는

분위기는 당혹감에서 일면‘그럼 그렇지’ 란 식의 안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샤리아(Shariah, 회교율

도로 바뀌게 된다. 이는‘영국인에 의한 테러가 자생

법)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고 말하며 영국 사

되는데 특별한 종교적 배경이 그 기제였다’ 는 식의

회가 이주민 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을 포용하는데

여론 조장과 범죄의 나름의 이유가 분석되며‘영국

실패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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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이후 테러범들이 범죄를 벌인 배경에 대해 극단적

언론은 그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총기난사’ 로 표현

집단 명분론과 테러 단체의 전술 변화가 주 요인으로

했으며, 체포될 당시 그의 모습과 입고 있던 붉은 제

꼽혔다. 영국 사회 내 마이너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복, 법정에서 그가 한 행동 등을 두고 그가 얼마나 비

형성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자신들의 문

열하게 웃는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를 논하는 데

화적 배경인 이슬람에 극단적으로 빠졌고, 집단적 명

만 열을 올렸다. 그의 개인적 소인을 통해서만 범죄

분에 입각하여 테러 행위를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 읽히고 해석된 것이다.

또한 이들이 실제 테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테러

하지만 이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행태 역시 런

범들이 잡지와 SNS 등을 통해 전술과 폭탄을 비롯한

던 테러범들과 다르지 않다. 런던 7.7테러의 경우 테

무기 제조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

러범들은 인종과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차별

다. 테러 단체들이 더 이상 대면적 접촉과 조직 내에

로 인해, 노르웨이의 브레이빅은 자신의 경제적, 사

서의 훈련을 통해 테러리스트를 양성하지 않고, 단지

회적 소외로 인해 좌절하고 사회에 분노했다. 그리고

프로파간다를 선전하는 일종의 브랜드로서 존재하며

그 분노가 엄청난 사상자를 낳는 극단적 폭력으로 나

위와 같이 테러 전술과 방법을 유포하고 있다는 분석

타났다. 여기에서의 차이란 그들의 행위를 이끈 구체

이다.

적 기제일 뿐이며, 두 사건의 테러범들 모두 자신들 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가까운 종교와 이념에 극단

포장만 다를 뿐, 뜯어보면 같은데

적으로 빠져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행위의 정 당성을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 테러 사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보고 있는 노르

이후 영국의 이민족 출신 무슬림들은‘싸잡아’집단

웨이. 박애주의에 기반한 복지천국이라 불린다. 그러

적으로 예비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당국의 주의대상

나 2011년 수도 오슬로 근처 우토야섬에 있었던 총

이 되었다.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인 것이다.

기 난사 사건은 런던 테러 때 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며 이‘천국’ 의 사탄을 집중 조명했다.‘브레이빅

범인은 이 안에 있다!

(Breivik)’ 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노 금년 1월, 영국《가디언》 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의

운데 경찰복을 입고 섬에 들어간 그는 70분간 무자비

수사당국 수석 교육감 토니 몰(Tony Mole)은 자생적

하게 총을 쏴 77명을 죽이고 800여 명을 다치게 했

테러와 관련해“단순히 특정 종교가 테러와 깊은 연

다. 노르웨이에서 나고 자란 이 백인은 다문화정책

관이 있다는 견해는 적절하지 못하다” 고 밝힌다 있

을 표방하는 노동당에 대한 반감으로 테러를 벌였다

다. 그는 주변의 인종적, 종교적, 이념적 극단주의자

스스로 진술했다. 범행 전 온라인에 올린 익명 메모

야 말로 테러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

‘2083 유럽독립선언’ 에 그는“맑시스트와 이슬람의

지만 그 예로 최근 위험지역으로 여행을 다녀 온 사

동맹을 막고, … 이슬람의 유럽 탈취를 저지하려면

람, 여행 후 수염을 기르거나 특정한 복장을 하는 사

신께서 유럽 기독교 세계의 우월성을 유지하려는 전

람들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공동체 내에서 소외되고

사들의 전투를 지켜줘야 한다” 고 적었다. 함께 사는

위험한 언행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감

아버지 외엔 교류하는 사람도 없고, 번번한 직업도

시와 적극적인 신고를 테러의 예방책으로 제시했다.

없어 집에서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사는 31살의 이

여전히 이 안의 범인이 될, 주시해서 봐야 할 누군가

노총각은 그만의 세계 속에서 이슬람 세력을 무찔러

는‘anybody’ 가 아닌 우리 안의‘somebody’ 이다.

ⓒunilang

르웨이 노동당이 주최하는 청소년캠프가 진행되는 가

야 할 의무가 있는 기독교 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의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자신이 만들어낸 정체성을 통 해‘정당하게’테러라는 행위로 표출된 것이다. 그리 고 이 사건에 대해 노르웨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김주량(이화여대 사회학) 90konan@naver.com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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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O, 녹색 혁명의 끝자락에서 미국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세계적으로 유전자변형 농산물 시장을 이끌어 온 미국이지만, 여러 주에서 잇따라 GMO 의 무 표시제가 도입되는 추세다. 지난 6월 메인 주와 코네티컷 주에서 만장일치로 의무 표시제 도입이 통과되었고, 하와이와 버몬트 주에도 법안이 상정되어 있다. 물론 미국 최대 주인 캘리포니아에서는 지난해 11월 이 법안이 부결되었지만, 그럼 에도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이미 의무 표시제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다. 국내외적으로‘소비자들의 알 권리 충족 및 정확한 정보 제공’차원에서 GMO 표시제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거센 탓이다. 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GM 식품 표시 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허술하게 운영되어, 여러 시민 단체들이 GMO 완전 표시제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Achim Raschka/Wikipedia

그래서 대체 GMO,“넌 누구냐”

칭되기는 하지만, 논란이 되는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대해서는‘GM 농산물’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 즉 유전적으로

좀 더 정확하다.

수정된 생물이란 뜻의 GMO는 한국어로는‘유전자

GMO는‘이식 유전자’ 라고 불리는 외부 유전자를

변형(재조합) 생물’ 이라고 하며, 사실은 농작물 등 식

해당 생물의 유전 형질에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원리

물뿐만 아니라 동물 및 미생물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금방 물러버리곤 하는 토

보통 언론 등에서도 GMO 식품이라고 뭉뚱그려 지

마토의 유전 형질에 잘 무르지 않는 성질의 외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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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전자를 주입하여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 진 토마토 세포를 배양하면‘쉽게 무르지 않는 토마 토’ 가 만들어진다.

경우가 아니면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용어 혼란이 더욱 심하다.‘유전자 조 작’ 이라는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조작’ 이라는

실제로 이‘덜 무르는 토마토’ 는 GMO 식물체 최

말이 주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GMO에 긍정적인

초로 상업적 목적으로의 판매가 허용되었는데, 그것

입장을 가진 쪽이나 정부에서는‘유전자 재조합’혹

이 1994년 개발된 미국 칼젠사의‘Flavr Savr’ 라는

은‘유전자 변형’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보

상표의 토마토이다. 이외에도 현재 콩, 옥수수, 벼,

건복지부에서는‘재조합’ , 지식경제부와 농림수산식

밀, 감자 등 대규모로 재배, 소비되는 농작물들 중심

품부에서는‘변형’ 을 사용하며 세부적인 정의도 제

으로 GM 농작물이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는데, 주로

각각인 등, 정부 내에서조차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특정 제초제 혹은 해충제에 강한 유전자를 삽입하여

있다.

만들어진다. 상용화된 것은 식물 위주이지만, 유전자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GM 식품의 표시와 관련된

조작 동물에 대한 실험도 이어지고 있다. 2011년에

규제시스템도 아직 없다. 각국이 개별적으로 관련 법

는 유럽에서 조류 인플루엔자를 퍼뜨리지 않는 형질

안을 마련하는 중이지만, 이 GM 식품 표시제는 국

의 닭을 만들어냈고, 국내에서도 서울대 농생명공학

내적 논란을 일으킴은 물론이고 국가 간 경제 협약

부에서 부리, 발, 머리 등에서 형광빛을 내는‘유전자

을 맺을 때에도 잡음이 생기는 지점이다. 캐나다-EU

조작 닭’ 을 만드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FTA 협정이나 미국-EU간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 협정(TIPP)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첨단을 달리는 과학, 따라가기 바쁜 사회 GMO 논란, 핵심 포인트 1 2 3 그러나 첨단을 달리는 이슈인만큼 법적인 측면 등 에서 통일된 용어나 기준은 아직‘확립되어 가는 중’

GMO와 관련된 논란에서 핵심이 되는 쟁점은 공통

이다. 명칭만 하더라도, GMO나 GM 식품 등의 용

적으로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소비자의 알 권리,

어가 제일 널리 쓰이는 편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안정성, 세계 빈곤 문제 해결 등이다.

‘GE(Genetically Engineered) Product’라는 말 도 꽤 사용되며, 간혹‘Biotech Product’ 라는 단어

먼저 GM 농작물은 물론 GMO가 사용된 식품이라

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GMO의 국가간 이동

면 이를 표시해야 한다는 골자의‘GM 식품 표시제’

을 규제하는 최초의 국제협약인‘바이오안전성에 대

는 현재 GMO와 관련된 논란 중 가장 뜨거운 이슈이

한 카르타헤나 의정서(2000)’에서는 GMO가 아닌

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GMO에 대한 불신과 두

‘LMO(Living Modified Organisms)’라는 용어를

려움이 팽배한 상황에서 이를 시행할 경우 GM 식품

사용하고 있다. 1992년의 생물다양성협약에서 사용

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만 더 부추길 수 있다고 말한

된 것으로 GMO보다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고 하

다. 즉 GMO는 문제가 없는데 이를 표시함으로써 사

지만, 사실상 이 용어는 카르타헤나 의정서와 관련된

람들이 이를 기피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 나 세계적으로 GM 식품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내는

ⓒ서울대

여론이 더 우세한 만큼 규제 강화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시행 이후 표시제가 제대로 실시, 감독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 다. 두 번째로, GMO가 안전한가에 대한 논란이다. 애 초에 GM 식품 표시제나 GMO 관련 용어에 대한 논 란 자체가 안정성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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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GM 식품이 상용화된 지 어 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GM 식품으로 인해 인체 에서 직접적인 알러지 반응이 일어난 사례 등이 보고 된 것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GMO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GM 식품이 일반 식품에 비해 특별히 어떤 문제를 더 일 으키거나 한 사례나 과학적인 근거가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GMO는 자연에서도 일어나는 자연적 유전 변형을 그저 인위적으로 압축 시킨 것이며, 오히려 현재의 유전 공학은 전통적인 교배 방식이 무작위로 서로 다른 두 식물의 유전자를 섞었던 것에 비하면

문에,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측 가능한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기본적으로 특정 제초제에 내성을 가지는 등의 GM

고등과학협회(AAAS), 세계보건기구(WHO) 등 몇몇

식품을 인간이 섭취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게 반대하

국제 기구들은 GM 식품이 특별히 더 위험하지는 않

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실제로 GM 식품을 섭취한 동

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물들이 일반 동물에 비해 사망률이 높아지는 문제를 보인 연구 결과가 몇 가지 알려져 있다. 일례로 스코틀랜드 로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전성 측면에서 흔히 간과되 는 지점은 증가하는 제초제 살포이다. 처음에는 특정

연구소의 푸스타이 박사팀

제초제에 내성을 지닌 GM 농작물을 심고 해당 제초

은 1998년 세계 최초로 GM 감자를 먹인 쥐의 질병

제만으로 방제를 해 농약 사용량을 줄이고자 했었다.

저항력이 떨어졌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 잡초들 역시 그 제초제에 내성을

발표 이후 푸스타이 박사가 해고되고, GMO 종자 특

갖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농약 사용량이 늘고 있다는

허권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몬산토 사(社)가 로

연구 결과도 적지 않게 보고되었다. 제초제를 사용하

연구소에 명분 없는 거액의 자금 지원을 한 것이 드

지 않는 유기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가는

러나는 등 일련의 추가 사태가 발생하여 영국뿐만 아

상황에서, 소비자들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가 절대 반

니라 유럽 전체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덕분에 이 실

가울 리 없다.

험 자체의 정당성 여부와 관계 없이 유럽 사회에서의 GMO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기는 했

미국과 몬산토, 앞에서는 반장 뒤에서는 일진?

지만, 어찌되었건 이후에도 이 실험의 결과를 완전히 뒤집는 실험이 나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몬산토 사의

세 번째로, GM 농작물이 국제적인 빈곤 문제를 해

자체 안정성 실험에서 GM 옥수수를 먹인 쥐들에게

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란이다. 이 주

서 부정적인 생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결과가 나왔고,

장은 시장을 주도하는 몬산토 사 등의 의견이기도 하

몬산토 사는 이를 숨기다 뒤늦게 언론에 발각되기도

지만 이를 비호해 온 미국 정부가 내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하다. 유전자 변형으로 생산이 수월하고 생산량도 많 은 농작물을 개발할 수 있게 되면 아프리카 등 여전

유전적인 안전함 or 벗어날 수 없는 제초제?

히 기아와 빈곤이 심각한 지역을 살릴 수 있다는 것 이다.

물론 이 실험들이 얼마만큼 다른 변수를 잘 통제하

하지만21세기의 빈곤 문제의 원인이 식량 생산량

여 유전자 변형 그 자체가 인체 혹은 동물에 나쁜 영

의 부족함 때문일까? 이는 GM 식품과는 별개로 논

향을 끼치는지를 검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힘들

의될 여지가 있는 복잡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기아

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 심각한 아프리카의 반대편에서는 먹고 남아 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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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처리하기가 곤란한 상황인 것은 누구도 부정

현실과 이상, 좁힐 수 없는 그 간극

할 수 없다. 애초에 현재의 빈곤 문제의 원인이 생산 량이 아니라면 GMO로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것 역시

감히 인간이 유전과 같은 대자연의 영역을 함부로

모순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GM 농작물이 장기적으로

손대도 되냐, 하는 GMO에 대한 윤리적인 물음은 이

는 생산성이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제 공허해 보인다. 그런 말로 과학적인 발전을 멈출

무엇보다도,‘빈곤 문제를 해결하겠다’ 고 말하는

수는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GM 농작

기업이 뒤에서는 악착 같이 자신들의 재산권만을 위

물이 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

한다는 것이 가장 비판 받는 점이다. 몬산토 사 등

는 애초에 먹는 사람이나 길러낼 자연을 생각한 것이

GM 농작물의 종자를 판매하는 기업들은 한 때 종자

아니라 재배, 생산의 편리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

에‘불임’ 혹은‘자살’ 유전자를 집어넣어 큰 비판

을 뿐이다. 현대 식량 생산을 급진적으로 확대해 준

을 받기도 했다. 이를‘터미네이터’기술이라고 하는

녹색 혁명 자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녹

데, 2대 이상 발아를 할 수 없도록 조작하는 것을 말

색 혁명이 가져다 준 풍요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

한다. 특허인 유전자 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것이 비록 빈곤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하더라

는 했지만, 소수의 기업이 시장의 절반 이상을 독점

도, 예전보다 훨씬 적은 넓이의 토지로 더 많은 사람

하고 있으며 몬산토 사가 종자 특허의 90%를 보유하

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농민들이 매번 자신들

때문이다.

로부터 종자를 살 수 밖에 없도록 하기 위한‘꼼수’

그러나 현재와 같은 방식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였다. 농민들의 반발때문에 1999년 이 기술을 사용

지금 인류는 풍요냐 빈곤이냐, 안전하냐 아니냐 라

하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이후에도 자사의 농약을 사

는 논란 속에 더 중요한 물음들을 잊고 있는 것은 아

용해야만 발아하는 트레이터 기술을 사용하거나, GM

닌가. 지금은 마하의 속도로 달리는 과학의 꽁무니를

농작물을 수확하여 얻은 종자를 재파종한 농민들을

붙잡고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춘 상태로 올

대상으로 거액의 특허 소송을 내는 등의 행동들로 큰

바른 방향과 가치관을 고민할 때다.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기업이기에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나, 이런 식으로는 빈곤이 해결되기보다 는 빈곤 지역으로 갔던 부(富)도 썰물처럼 미국과 대 기업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인재 (이화여대 국문) gilraen@naver.com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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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니 기쁘지 아니한家 ‘함께 살기’ , 새로운 건 아니다. 친족보다 더 가깝다는 아래, 윗집의 이웃사촌이 있었고, 그때의 학교 앞 하숙방은 친구들 과 모여 살던 우리의‘아지트’ 였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사는 곳이란 좀 삭막하다. 핵가족화 개념과 더불어 개인주의가 증 가했고, 사람들의 공간에는‘프라이버시’ 라는 높은 벽이 쳐졌다. 개인 생활의 보장은 동전의 양면처럼 사회에서 개인의 고 립과 소외를 불러일으켰다. 가정에서의 보육과 가사는 오롯이 각 가정이 해결해야할 문제가 돼버렸고, 달라진 생활양식과 맞벌이 가구의 증가로 그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 오늘의‘함께 살기’ 는 과거처럼 서로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필요성에서 탄생했다.

ⓒLILAC

가을맞이 파티가 열린 라일락 커뮤니티

네 것 내 것 없는‘모두의 마블’

의 개인화된 주거들로 인해서 얻기 힘들었던 사회적 인 상호작용과 협동으로 인한 이득을 장점으로 갖는

의도적으로 주거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는 것 중 하

주거형태이다. 기본적으로 공동주거(Collaborative

나가 코하우징(Co-housing)이다. 1970년대 덴마크

Housing)라는 의미로 쓰이며 보통 조합의 형태로

의 한 건축가에 의해 등장한 이것은 이전까지 도시

운영돼 협동주거(Cooperative Housing)를 뜻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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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으로 분할된 주택 단위의 주

ⓒLILAC

도 한다. 코하우징은 개별공 거공간과 단지 주민들이 다같 이 이용할 수 있는 커먼하우스 (Common house,공동 공간) 로 계획된다. 이곳에서는 주민 회의나 아이들의 방과후 교육, 코하우징 커뮤니티의 정기 식 사 등이 이뤄지며 주민들이 자 치적으로 계획하고 운영한다. 코하우징의 이러한 공동 공간 은 단지 내 거주민들뿐만 아니

라일락 커뮤니티의 동쪽 구역

라 지역사회나 커뮤니티를 방문 하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이뤄져 도시 안에서

지를 조성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정부 및 지자체의 보

보다 적극적인 공동생활의 영유가 가능하도록 한다.

조금과 은행 대출로 비교적 쉽게 조달 받아 커뮤니티

덴마크와 스웨덴을 중심으로 생겨난 유럽의 이

를 건설하였다. 이후 거주자인 조합원들은 지분을 나

새로운 공동주택은 1988년 맥커멘트(Kathryn

눠 갖는데, 조합원 각자가 출자한 금액에 따라 나눠

McCamant)와 듀렛(Charles Durrett)에 의해 미국

지고 조합원의 월 소득 35%를 출자해 대출금을 갚아

으로 넘어가 소개되며 그 거주자가 확대되었다. 현재

나간다. 한 채의 내 집이 아니라, 공동의 커뮤니티에

미국 내에는 220여 개 이상의 코하우징 단지가 건설

대한 지분을 갖는, 집에 대한 조금 다른 소유의 개념

돼 운영중이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도 코하우징이

인 것이다. 이를 통해 거주자의 입주비용은 줄고, 지

건설되어 최근 2~3년 사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주로서 사업상의 경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영국 전역에 형성된 공동주거 커뮤니티는 14개

또한 조합에 대한 지분은 조합원 각자가 커뮤니티의

에 이르고, 40여 개의 단체가 단지를 개발 및 건설

존속을 위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가 돼 공동주거에

중이다. 미국의 경우 넓은 택지 개발이 가능했던 덕

대한 책임을 부여한다.

에 코하우징 단지의 개발이 공동체 참여가 활발한 특 색 있는 마을의 건설이었다면, 영국의 경우는 도심

한 지붕 아래서 밥 먹는다는 것

내 택지가 적고 주거 비용이 높은 까닭에‘함께 살아 경제적 부담을 덜자’ 라는 전략적 측면에서 코하우징 커뮤니티가 발달하고 있다.

코하우징이 집 단위의 개인 공간을 보장한다면, 셰 어하우스는 방 단위다. 한 집을 개인 공간으로 둔다

영국 요크셔(Yorkshire) 지방 서부 리즈(Leeds) 지

는 점에서 코하우징의 수요자는 대부분이 가족 단위

역에는 옛 유치원 자리에 스무채의 집들이 열 십자의

이다. 이에 반해 셰어하우스는 청년층과 노년층의 1

보행로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지어져 있는데, 이들

인 가구 수요자가 중심이 된다. 이러한 셰어하우스

은 주거비용 문제의 해결은 물론, 주거의 지속가능성

의 특징은 거주자들이 주거 공간을 매개로 취미와 생

과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영향을 지향하며 세워진 라

활 양식을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한다는 점

일락(Low Impact Living Affordable Community,

이다. 주로 학생들의 기숙사 등으로 셰어하우스가 이

LILAC)이다. 지역에서 조달된 짚과 목재로만 지어진

용되는 유럽과 달리 일본의 셰어하우스는 하나의 도

라일락의 집들은 건물의 건축 방식 자체로 단열과 난

시형생활주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임대 비용이 일

방이 가능하도록 해 탄소의 배출량을 최소화하였다.

반 원룸에 비해 저렴한 것은 물론 일부 셰어하우스의

주거비 부담의 측면에서는 협동조합을 설립해 주거단

경우 당구장이나 헬스장, 아뜰리에와 도서관 등의 취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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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 sync akasaka 일본 셰어하우스

미, 오락 시설을 갖춰 입주자들이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 사는 식구들에게서 정과 유대를 느끼고자 하는

공유하는 적극적인 매개체로 활용되기도 한다.

일본인들의 욕구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일본의 셰어하우스 발달의 배경엔 유독 높 은 1인 가구의 비율이 있다. 2011년 기준 일본 전체

‘우주’ 에 발디딘 당신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율은 29.5%로 청년층과 노년 층에서는 물론 중장년층에서도 꾸준히 늘어가고 있

앞의 사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주

는 추세다. 일본 셰어하우스의 시작은 홀로 사는 독

거는 그 자체로‘핫’ 하다. 이번 정부에서만 3번의 부

거 노인의 외로움을 덜고 고독사를 막고자 시민단체

동산 대책이 발표됐고, 작년 한국의 키워드 중 하나

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최근에는 대기업 부동산 회

는 두 집이 땅콩처럼 연달아 지어진‘땅콩집’ 이었다.

사와 건설사들이 중심이 돼 셰어하우스 건설에 나섰

박원순 서울 시장도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취임 첫날

다. 종합 건설회사인 일본토지건물 등 건설 회사들이

영등포 쪽방촌을 찾았다. 주거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

셰어하우스 분야를 집중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내놓

중 청년 주거는 독립과 관련해 어정쩡한 자리매김으

고 2010년에서 2011년 사이 도쿄에서는 셰어하우스

로 적절한 복지 혜택과 사회적 관심에서 밀려나있다.

증·건축이 이어져 세타가야(Setagaya)구의 87실 대

최근 들어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시주택공사 등에

형 셰어 하우스처럼 대단위의 건물이 들어섰다. 사실

서 주거단지 건설과 임대를 통해 공급의 문제를 해결

도심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셰어하우스의 공급 배경에

하고자 하지만 주거의 문제가 단순히‘공간의 점유’

는 작년 3.11 동일본 대지진이 있다. 사건 이후 공동

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한국의‘함께 살기’ 는 이러

체에 대한 일본인들의 미묘한 변화는 다름 아닌 주거

한 청년 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

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서 움트고 있다.

가사와 육아 등을 공동으로 해결하는 여타의 코하

서울시 공유 기업 우주(WOOZOO)는 도심의 버려

우징과 달리 일본의 코하우징은 주택의 건설에 함께

진 한옥을 개·보수하여 이삼십대의 청년들에게 임

참여하는 범위에서만 이뤄져‘도주쇼(都住創)’ 란 조

대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은 단

금 다른 형태로 운영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

순히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기

인들에게 개인생활의 확보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않

업 우주의 홍보담당자 윤선호씨는“함께하는 공간

고, 내가 간섭받지 않기 위한 측면에서 꽤나 중요한

을 통해 즐거움을 나누고 이를 주거문화로 조성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함께 살

사회적 가치 창출” 이 집으로서 우주가 지향하는 바

기’ 에 나섰고, 그 수요를 기업이 책임지고 있다는 점

라고 말한다. 현재까지 총 8채가 지어진 우주는 모

에서 엄청난 재해를 겪고 난 후 동료나 이웃을 넘어

두 각기 다른 공간 구성의 컨셉을 가지고 있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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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 신청자들의 입주 여부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

을 산정하고 평균주택가격과 비교해 PIR을 산출하면

이 되어 함께 살 사람들이 가급적 공통 관심사를 두

9.7배. 즉 3천만원 초반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라면

고 모일 수 있도록 한다. 거주자들이 얼마나 잘 어울

월급을 하나도 쓰지 않고 꼬박 10년을 모아야 서울에

릴 수 있을지, 일종의 궁합을 보는 셈이다. 이렇게 입

서의‘내 집 마련’ 이 가능하단 얘기다. 혼자 먹는 저

주 절차를 거쳐 셰어하우스에 사람들이 모이고 난 후

녁 식사가 외롭고, 직장 다니며 분담해야 할 가사일

는 모두 함께 사는 사람들의 자치 규칙으로 셰어하우

이 걱정된다면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 함께 사는 것,

스가 운영된다. 함께 사는 친구들이 있어 같이 밥 먹

어떨까.

고, 놀 수 있다는 즐거움은 물론“우주에서 사는 우 피(Woopie)들과 정기적으로 만남으로써 생기는 넓은 커뮤니티는 이삼십대 사회초년생들에게 무엇보다 값

김주량(이화여대 사회학) 90konan@naver.com

진 자산” 이라고 윤선호씨는 전한다. 개인의 소외를 해소하고 취미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산다는 것이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 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계청의 연소득대 비주택가격비율(PIR)을 보면 전국 중간 정도 되는 평 균주택가격이 21,996만원, 중간소득가구의 연소득 은 4,429만원으로 집값의 1/5 수준이다. 서울의 집 값 사정은 좀 더 서글픈데, 대기업에 들어간 대졸신 입사원의 평균연봉 3,700만원 선에 맞춰 가구연소득 ⓒWOOZOO

우주 하우스 파티

국제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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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듣다

영원한 레이디, 빌리 홀리데이 하얀 치자꽃 여인과 노래하는 검둥개 사이 차가운 바람에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시린 계절이 왔다.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라면 역시 감미롭게 흐르는 재즈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재즈가 분위기 있고 낭만적인 음악이라 알고 있지만, 사실 재즈는 흑인 노예의 비 참한 삶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역사 때문인지 유독 재즈 가수들 중에서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이가 많은데,‘영혼 을 울리는 재즈 보컬리스트’빌리 홀리데이 역시 기구한 인생을 처절하게 살다 간 비운의 여인이었다.

ⓒBillie Holiday Authority

레이디의 탄생

고 있었던 것은 더 큰 시련이었다. 또 한 차례의 성폭 행을 당한 소녀는 모든 삶의 의지를 내려놓은 채 결

1915년 미국의 한 슬럼가에서 태어난 흑인 소녀는

국 사창가에서 몸을 팔게 되었고, 어떤 흑인의 성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10살이 되던 해 일을 하러 나간

요구를 거부하였다가 그의 밀고로 또다시 쇠창살 안

곳에서 40대의 백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였다. 경

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를 헤

찰에 신고하였지만,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매던 소녀는 한 나이트클럽에 들어가 댄서라고 속이

남성을 유혹한‘불량 소녀’ 라는 죄목으로 감화원에

고 즉석 오디션을 보게 되었지만, 춤을 한번도 배워

들어가야 했다. 2년 후, 세상에 나온 소녀를 기다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온갖 조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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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gue UK

으로서 설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던 아폴로 극장에서 데뷔하는 등 나날이 명성을 높여갔다. 또한 그녀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공연하면서 테너 색소폰의 1 인자 레스터 영과 친해졌는데, 빌리 홀리데이는 그를 ‘프레지던트 레스터’ 라는 뜻을 담아‘프레즈’ 라 불 렀고 레스터 역시 그녀를‘레이디 홀리데이’ 라는 의 미로‘레이디데이’ 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별명이 지금까지도 빌리 홀리데이를 지칭하는 애칭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노래를 부르던 레이디데 이에게 한 기품 있어 보이는 백인 여성이 다가와 노 래를 신청했다.“그 제목이 무엇이더라, 검둥이 시체 가 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섹시한 노래. 그 노래 좀 불러줘요.”

당시 빌리 홀리데이는 항상 머리에 하얀 치자꽃 한 송이를 꽂았는데, 이것은 후에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이상한 열매 1899년 미국의 조지아주 코웨타 카운티, 샘 호스

“노래는 어때?”바로 그 때 소녀를 가엾게 여긴

는 알프레드 크렌포드의 농장에서 일을 하던 흑인 노

피아노 연주자의 제안은 그녀에게 운명처럼 다가왔

동자였다. 하루는 임금 문제로 두 사람이 크게 다투

다.“노래라면 자신 있어요.”당시 지푸라기라도 쥐

었고, 크렌포드가 총으로 위협하자 샘 호스는 도끼로

어 볼 심산이었던 그녀가 피아노 연주에 맞춰 부른

맞대응하는 과정에서 그를 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래는‘Trav’ lin all alone.’이 날 소녀가 부른 한

문제는 이 다음에 발생하였다. 샘 호스가 주인을 살

곡의 노래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해한 후 크렌포드의 아내를 강간하고 그의 재산을 절

소녀의 이름은 일리노어 페이건, 바로‘미국 팝 보컬

도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하였고, 이는 지역 신문

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고 평가 받는 역사적인

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분노한 백인들은 체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의 본명이다.

포되어 이송 중이던 샘 호스를 기차에서 끌어내고 크

그날 이후, 빌리 홀리데이는 여러 클럽들을 오가며

렌포드의 집을 향해 행진하였다. 수천명의 백인들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 클럽에서 손님들은 가수나 댄서

각지에서 모여들었고, 그렇게 일종의 백인 공동체 의

들을 향해 팁을 던지고는 하였는데, 그녀는 팁을 주

식이 시작되었다. 샘 호스의 귀와 성기 등 신체 일부

우려 허리를 숙이면 가슴이 드러난다는 이유로 팁을

를 절단하고 얼굴 가죽을 벗겨낸 이들은 살아있는 그

받지 않았다. 이를 보고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를‘레

의 몸에 기름을 끼얹어 불에 태웠다. 이렇게 의식을

이디’ 라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그녀의 별명 레이디데

거행한 그들은 숯덩이로 변한 샘 호스와 함께 기념

이의 시초였다. 그렇게 빌리 홀리데이가 인기를 쌓을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의 신체 일부를 기념품 삼아

무렵, 음악평론가 존 하몬드가 그녀를 찾아와 스윙

팔기도 했다. 이후 재개된 조사 과정에서 크렌포드

재즈의 대가 베니 굿맨과 일류 매니저인 조 그래이저

부인은 강간이나 절도 행위는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를 소개시켜주었고, 1933년 빌리 홀리데이는 드디어

이처럼 당시 린치는‘일정한 절차와 의식을 갖춘

첫 번째 작품을 녹음하게 된다. 비록 이 첫 앨범으로

공동체 행사’ 였으며 1923년 로즈우드 사건, 1930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후 그녀는 듀크 엘링턴

토마스 쉽과 에이브람 스미스 사건, 1934년 닐의 음

의 영화음악 <심포니 인 블랙>의 보컬을 맡고, 흑인

경 절단 사건 등 인종 차별을 기반으로 한 잔인한 흑

세계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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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day

서의 그녀는 그저 흑인인 일리노어 페이건에 불과했 다. 그녀는 흑인 밴드와 공연할 땐 덜 검다는 이유로 얼굴에 검은 칠을 해야 했고, 백인 밴드와 공연할 땐 너무 검다는 이유로 얼굴에 분홍 칠을 해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순회 공연을 하는 내내 심각한 인종 차별을 당하였는데, 이는 당시 흑 인이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짐 크로우 법 (Jim Crow Law)’ 에 기인한 것이었다. 인 린치가 계속해서 행해졌다.

1876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의 남부 지역에서 시

빌리 홀리데이에게 백인 여성이 신청한 그‘섹시

행되었던 짐 크로우 법은‘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

한’노래는 바로 이러한 흑인 린치 사건을 보고 충

(Separate but equal)’ 는 사회적 지위를 흑인들에게

격을 받은 시인 아벨 미어로폴이 작사, 작곡한 노래

부여했다. 하지만 평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흑인들

‘Strange fruit’ 였다.

은 경제, 교육, 사회 등 현실의 다양한 측면에서 불평 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오히려 이 법으로 인한 합법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려요

적인 인종 간의 분리가 이루어져 인종 차별의 불씨는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더욱 심화되었다. 짐 크로우 법으로 주거지는 물론이

남부의 따뜻한 산들 바람에

고 학교, 호텔, 식당, 화장실 등의 공공장소, 군대, 대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거리지요 포플러 나무에 이상한 열매가 매달려 있어요 아름다운 남부의 전원 풍경 속에 튀어나온 눈과 뒤틀린 입

중교통에서 백인과 흑인은 엄격하게 분리되었고, 이 는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으로 법의 효 력을 상실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목련향은 향기롭고 상쾌한데 갑자기 어디선가 살 타는 냄새가 나요

ⓒAP

‘Strange fruit’중-

아직까지도 빌리 홀리데이의 불후의 명곡이라 일 컬어지는 이 곡으로 그녀는 단숨에 미국 전체의 주목 을 받게 된다. 흑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호소력 짙 은 목소리로 노래한 그녀는 미국 사회 안에서 일어 나는 인종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며《타 임》에 흑인 최초로 사진이 실리기도 하였다. 이 노 래는 당시 엄청난 논쟁에 휩싸였지만, 빌리 홀리데이 는 공연 때 항상 이 노래를 마지막에 부르곤 했다고

짐 크로우 법에 의해 흑인용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한 흑인. 짐 크로우 법은‘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라고 말했지만, 과연 저 두 식수대는 평등한가?

한다. 이 노래가 담긴 그녀의 앨범은 1939년 한 해에 만 1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였고, 이후 이 곡은 반

순회 공연 기간 내내 빌리 홀리데이는 공연이 열리

(反)린치 운동가(哥)로 인정받으며 1950년대와 1960

는 호텔의 정문으로 출입할 수 없어 부엌문으로만 겨

년대의 흑인 민권 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 출입이 가능하였고, 같은 단원들끼리 함께 식사 하는 것도 불가능하여 홀로 흑인 식당에서 밥을 먹었

노래하는 검둥개

다. 또한 공연이 끝난 후 단원들이 호텔에서 쉴 동안 그녀는 잘 곳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고 다녀야만 했

하지만 그녀가‘레이디’ 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다. 사람들이 빌리 홀리데이에게 환호하면 환호할수

무대 위의 빌리 홀리데이였을 때뿐이었다. 무대 아래

록 그녀가 느끼는 환멸은 커져만 갔다. 유명 가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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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ie Holiday Authority,

흑인이라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시선 속에서 도피처를 찾던 그녀는 결국 마리화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그녀가 유명해지고 나서 다시 연락 이 닿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다. 그의 병명은 폐렴, 흑인이었던 그에게 문을 열어 준 병원은 단 한 군데도 없었고 결국 병세가 악화되 어 죽은 것이다. 인종차별의 냉혹한 벽을 오롯이 겪 은 빌리 홀리데이는 이외에도 거듭된 결혼 생활의 실 패와 어머니의 죽음 등 비극적인 개인사를 겪으며 점 차 마리화나의 늪에 빠졌다. 그리고 어느 날, 집에서 혼자 마약을 하던 빌리 홀 리데이는 의식을 잃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 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한 병원을 찾아가지만, 병 원은 마약 중독자인 흑인 여성을 치료할 만큼 자비롭 지 못했다. 그저 고통의 소리를 듣기 싫어 진정제만 주사할 뿐이었다. 그녀의 환자 카드에는 일리노어 페 이건이란 본명이 적혀있어 당시 병원에 있던 그 누구 도 죽어가던 빌리 홀리데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

ⓒElliot

다. 그리고 1959년 7월,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그녀 는 44세라는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진료일지 에는 딱 한 줄의 기록만 있었다고 한다.“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방법: 없음” “사람들이 나를 검둥개라 불러도 나는 그저 노래 할 뿐이다” 라고 말했던 빌리 홀리데이. 비록 마약이 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지만, 빌 리 홀리데이를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다름아닌 흑백이라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을 울 컥하게 하는 그녀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무대 위의 레이디라 불리며 칭송 받았던 동시에 그녀가 겪어야 만 했던 인종 차별 사이의 괴리감에서 비롯된 고통과

빌리 홀리데이의 어린 시절과 그녀의 무덤

애환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

났지만, 그녀의 삶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진한

로 그녀의 노래를 그저 감미롭게만 들을 수 없는 이

메시지를 주고 있다.

유이다. 1987년 미국 의회는‘재즈가 미국의 값진 보석’ 이라 선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재즈는 미

김영은 (이화여대 국문) silver894@nate.com

국에서 만들어진 음악 장르이자 보석과도 같은 음악 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재즈 가 미국의‘자랑’ 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 연 이 시대에 또 다른 빌리 홀리데이는 없을까. 비록 빌리 홀리데이는 유언 한마디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

세계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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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국제정치

영화가 인물과 시대를 품는 법, 그 기억의 정치에 관하여 왕가위 감독 회고전, 그리고 <일대종사>

위대한 작가는 개인을 그리는 가운데 그 세계의 본질을 담아낸다. 단순히 작품의 배경에 특정한 시대를 끼워 넣는다거나, 구체적인 인물 혹은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식으로 해결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 다. 구태의연하지만, 우리는 여기서“작가” 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 역사적 고증 작업과는 달리, 앙드레 바쟁의 지적대로 내 용과 형식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화예술 작업에서 형식을 마주하는 작가의 자세는 곧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지극히‘사적인’영화는 주변 세계에 관한 일종의 단편 다큐멘터리로서‘공동의’영화가 되는 것이다.

ⓒ indiewire.com

작들을 오랜 기간 담당해온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 여전히“진부하다” 고 일축할지도 모르 겠다. 사실 1997년 무렵의 왕가위 감독 의 작품들 <아비정전>(1990), <동사서 독> (1994), <중경삼림> (1994), <타락 천사> (1995), <해피투게더> (1997)에 대해, 중국 정부로의‘귀환’ 을 앞둔“불 안한 홍콩인들의 심리를 담아낸 명작” 이라는 평론들이 쏟아져 나왔던 적이 있다. 1842년 아편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청 제국이 체결했던 난징조약으 로 영국에 할양되었던 홍콩 섬은, 99년 의 조차 기한을 채운 신계 지역과 더불 어 1997년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었고,

이제는 영화가 되어버린 1997년을 회고하며

《뉴욕 타임즈》 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들 홍콩의 미래 에 대한 과장된 비관론 혹은 낙관론을 유행처럼 퍼뜨

우리가 90년대 홍콩이라는 도시 국가의 모습을 탁

리고 있었다.

월하게 표현하는 대가로 왕가위(왕자웨이) 감독을 활

15년 이상이 지난 이 시점에 왕가위 감독 작품의

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대표

스토리 구조와 인물 하나하나에 중국정부, 홍콩,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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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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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단선적으로 끼워 맞추는 오류를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의 영화가 영국 에 의해 자본주의화된 화려한 도시 국가로

ⓒ In-Gear Film

국의 삼각관계를 대입시키며 현실에 영화

서의 홍콩의 과거 모습을, 어떤 방식을 통 해 품을 수 있었던 것인지 다시금“회고” 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9년만에 신작 <일 대종사>로 돌아온 왕가위가, 이제는 영화 속에 남겨진 90년대의 홍콩과 보통선거 문제로 중국과 이따금씩 마찰을 빚고 있는 오늘날의 홍콩특별행정구의 시공간적 좌 표 속에서 시도하는 영화 창작법이 무엇인 지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왕

로 보이지만, 왕가위 감독 자신은 아화가 어떤 생각

가위의 형상화 방식은 의도적으로가 아니라 필연적으

을 가진 인물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로 현실과 접합되어 있다. 작가의 비정치성이 정치성 으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왕가위는 아화가 어떤 것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인 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다음 작품이자 진정한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아비정전>에서“아비”(장국영

공간은 곧 배우이다

분)라는 인물을 추적해나간다. 당시 갱스터였던 친구 와 홍콩 거리에서 보냈던 어린 시간들로부터 영감을

보통 영화 감독들의 연인이자 동시에 페르소나로

얻은 영화 속 인물들은, 왕가위에 의해서 홍콩의 화

불리는 대상은 배우이다. 그러나 왕가위 감독의 진정

려한 거리와 뒷골목, 클럽, 술집 등의 영화 속 프레

한 연인은 카메라가 돌아가는‘공간’ 인 듯하다. 왕가

임에 방생되어 살아간다. 그가 안토니오니 감독에게

위는 프랑스 영화잡지《스튜디오》 의 기자인 로랑 티

서 배웠다고 언급했듯, 홍콩은 그의 영화 속에서 인

라르와의 인터뷰에서, 시나리오 작업 중 가장 우선

물들과 소통하며 이들을 배양해내는 중요한 또 하나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공간이라고 강조했

의 배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영화적 공간에

다. 공간은 그에게 어떤 인물이 무엇을, 왜 하고 있을

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아비의‘이유 없어 보이는’삶

지를 선사하는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이러한 비작위

은, 천안문 사태와 덩샤오핑에 의한 영·중 정상회

성은 동시대의 수많은 감독들과 그를 구분하는 중요

담 이래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정처없이 헤매던 당시

한 기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공간 속

홍콩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

에서 인물들이‘살아가게’만든다. 그의 작품들에서

던 것이다.

카메라가 인물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이 앵글 숏 (high-angle shot)이 전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복수의 흩어진 주연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사실도 이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가위에게 운명이 정해진‘영화 속 인물’ 이란 개념은 없는 듯

공간 속에서 현실화된 인물들은 항상 복수로 존재

보이며, 오히려 인물들이 감독의 작업을 이끌어가고

하며 왕가위의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다. <동사서독

있다. 그렇기에 그는 <열혈남아>에서 20대 갱스터인

>의 사막 한가운데서 마주치는 무사들이 저마다 품

“아화” (유덕화 분)를, 70년대와의 연장선상에서“현

고 있던 이야기들은 시간을 넘나들며 중첩된다. 또

대판 무협영화” 라고 여겨지던 액션 영웅물들의 전형

한 <아비정전>에서 수리진(장만옥 분)과 루루(유가령

적인 캐릭터로 박제하지 않았다. 첫 영화이기에 장르

분)의 이야기는 사실상 대부분의 작가들이 관심 밖에

적 특성을 불가피하게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

두는, 주연 배우가 스쳐 지나간 인연에 관한 부록일

스크린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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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다. 그러나 왕가위 감독은 보이스 오버(voice-

는 여러 군상들, 곧 홍콩인들 자신으로 맞이할 수 있

over) 기법을 통해 이들에게도 내레이션을 허용하며,

었다.

관객들에게만큼은 낯선 주연의 자리를 내어준다.

‘정체성 없음’ 이라는 정체성의 상품화

<일대종사> 이전의 영화 속에서 왕가위는 이와 같 은 복수의 주연들이 향하고 있는 종착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각자가 자신이 속한 공간 속에서

90년대 홍콩인들에게 덩샤오핑과 마가렛 대처가

모종의 길을 따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에게 진정

1984년 협상한 1국 2체제와 향후 50년 현상 유지라

한 선택이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루루는 떠난 아

는 원칙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었다. 1989년 천안문

비를 잊지 못해 필리핀으로 쫓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태 이후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대한 홍콩인들의

었고, 자신을 발없는 새로 여겼던 아비는 떠돌던 삶

불신은 더욱 커져 100만 명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고,

을 죽음 이외의 것으로 마무리하지 못하게 된다. <동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와 같은 홍콩의 주요 언

사서독>에서 구양봉(장국영 분)을 만나러 온 인물들

론사가 중국 자본의 영향 아래로 넘겨지고 있었다.

을 비추던 새집의 그림자는, 철창 같으면서도 바다의

영국계 자본은 빠른 속도로 홍콩 밖으로 빠져나갔고,

물결처럼 클로즈업 된 인물들의 얼굴 위에서 흐른다.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들 모두가 파도 위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면서 어디

발이 묶인 일반 홍콩 시민들은 다가오는 시기를 그저

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갇혀버린 것이다.

위태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들에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사회주의 독재 체제에 의 ⓒ Scholar Productions

한 자본주의적 자유의 구속이라는 압박과 함께 1997 년 이후 물밀듯 몰려들 것으로 걱정되는“중국다움” 에 대해 내세울만한“홍콩다움” 을 미처 준비할 여유 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60년대 상하이에서 옮겨온 쇼 브러더스와 70년 대 케세이 그룹의 지원을 받던 골든 하베스트와 같 은 거대 자본의 기업들에 의해 제작되던 무협, 코미 디 장르의 상업적인 영화들로 점철되었던 홍콩의 영

그렇기에 표류하던 아비의 죽음은, 니체가 말하는

화사만 봐도 알 수 있듯, 홍콩은 세금의 제약이 극소

그리스 비극의 숙명적인 황홀경과는 다르다. 그들은

화된 채 거대 자본들이 활개치던 정치 부재의 자유방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고립 상태에 있으며, 그

임적 자본주의 국가였다. 그 안의 내용물들은 국제적

것 자체가 곧 결정이 되어버린다. 그저 행위의 다발

인 무역, 금융 기업들의 활발한 거래 결과로 유입된

들로만 이어지는 인물들에 관한 묘사는, 타인이 선택

서구 문물로 부지런히 채워졌다. 사물들로 사람들의

한 종착지점(1997년)을 향해,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경삼림>에서 등장하는 주

하는 것인지 미처 결정하지 못한 채 끌려가던 90년대

크박스, 배경 음악인“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홍콩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으로 읽혔다. 특히 왕가

Dreaming)” ,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레인코트와

위는 한 영화 속의 인물들을 다른 영화 속 인물들과

금발의 가발을 착용한 하이힐을 신은 여성, 유통기한

겹치게 하여 서로 간섭하게 만든다. 즉 그는 영화 저

이 찍혀져 나오는 가공식품들, 서구식 바와 술집들은

편에 단지 텅 빈 스크린의 그림자가 아니라 또 다른

외부의 온갖 문화들로 넘쳐나는 홍콩의 단발적이고

영화들을 빼곡하게 나열시켜, 마치 거대한 시네마테

혼합적인 이미지를 극대화시킨다.

크를 관객들의 현실세계와 대치시키는 듯하다. 이러

그런데 당시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된

한 왕가위의 영화 세계 속에서, 당시의 수많은 관객

무협-코미디 영화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개 의리를

들은 복수의 주연들을 자연스럽게 이 시대를 살아가

중시하는 인물을 둘러싼 화려한 액션 기술들만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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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t Tone

없는 초침 소리가 홍콩을 뒤덮고 있다. 2047년이라 는 집행 유예기한에 대한 기대도 잠시, 인민해방군 8 천여 명 이상이 홍콩에 주둔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북경어와 인민 원화가 광동어와 홍콩달러를 밀어내 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또 행정장관 직선제 문 제를 놓고 벌어지는 중국과 영국의 기싸움에서 홍콩 인들이 이따금씩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9년만에 돌아온 왕가위는 신작 <일대종사>로 중국 대륙에서 총 560억 원의 수입이 라는 성과를 올렸다. 중국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 되면서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홍콩의 출

복하며, 작품 내적으로 홍콩다운 것으로부터 빗겨나

품작으로 선정된 <일대종사>는‘중국 영화이자 홍콩

있었다. 왕가위 감독은 오히려 이러한 홍콩 영화의

영화’ 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영화 산업에서도 홍

전통적 기법과 도식들을 벗어남으로써 홍콩의 영화를

콩과 중국 사이의 국경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

만들어냈다. 즉 그의 창작법에서 파생된“정체성을

이 실감된다.

잃은”인물들이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며,“정

홍콩이라는 도시가 안팎으로 여전히 시끄러운 상

체성 없음” 이라는 홍콩인들의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황에서, 왕가위가 엽문, 나아가 당시의‘일대종사들’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은 몇 번의 환불 소

을 그리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시선은 <천 개

동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설적인 정체성에 앞장서

의 고원>에서 들뢰즈가 프랑수아 쳉을 인용하는 맥락

서 환호했다. 이는 아마도 1997년이라는 명시된 시

과 맞닿아 있다. 문인화가들은“유사성” 이나“기하

점을 세기말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던 홍콩의 드라마

학적 비례” 가 아니라“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선과 운

틱한 상황이 오히려 운 좋게 여겨질 정도로, 지나치

동만을 지니고 있다가 뽑아낸다.”이들에게 어떤 대

게 신속하게 모든 일들을 과거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

상을 정확한 비례와 기하학적인 구도로‘재현’ 해내

었던 전후 세대들의 억압된 심리가 반영된 것이 아

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일 뿐이다. 단지 그 대상이 갖는

닐까. 1990년대는 많은 외부‘손님’ 들의 폭력과 내

움직임, 느낌만이 세계의‘법칙’ 을 담고 있으며,“그

부적 혼란을 겪어온 한국의 정체성 확립 노력이 좌절

러한 법칙을 담고 있는 움직임의 선(理)” 을 그 대상이

된 시점이었다. 따라서 신기루 같은 홍콩의 자유분방

‘되어’포착해내는 것, 이것이 문인화가들의 일차적

함은“캘리포니아 드리밍” 과 같은 감각적인 곡에 실

인 수련방법이었다.

려져 당시의‘현대인’ 들을 들뜨게 만들었을 것이다.

왕가위 역시, 영춘권을 구사하는 엽문(양조위 분)

그리고 특히 식민 정책으로 역사적 단절을 경험해야

의 일생을 그대로 읊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하는

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정체성 상실이라는 테마 속에

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서 시간과 공간이 점차 소멸되어가는 듯한 홍콩을 더

는 엽문의 움직임을 중국 고대의 문인화가들처럼 포

욱 판타지화하며 적극적인 대리만족형 관람객들이 되

착한다. 엽문의 신체에서 시작된 진동은 땅 위에 고

었다.

인 빗물 위로 전달되면서 더욱 선명해지고, 궁이(장 쯔이 분)가 만들어내는 동작들은 쌓인 눈을 흐트러뜨

문인화가가 영화를 찍는 법에 대하여

리며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물결과 눈이 신체의 선 을 시각적으로 극대화시키는 훌륭한 도구로 쓰이고

이제 1997년은 지나갔고, 덩샤오핑이 홍콩에 대

있는 것이다. 나아가 몸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선의

해 1국 2체제를 유지할 것으로 약속한 50년의 기한

궤적은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타고 흘러가며, 외부

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아비정전>에서처럼 쉴새

사물들이 반응하게 만든다. 이 때 어떠한 선을 만들

스크린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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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내느냐는 것은, 그 인물이 어떠한 정신을 갖고 있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의 황금기에

느냐와 같은 문제가 된다. 어렸을 때 사부가 묶어준

서 떨어져 나온 편린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리끈에서부터 시작된 수련자로서의 정신이, 훗날

공화루에서 펼쳐지는 대가들의 결투 장면을 뒤덮었

손과 발끝의 세밀한 움직임들을 결정짓게 되는 것이

던 찬란한 금과 밀도 높은 화려한 색감이 관동군벌시

다. 그렇기에 궁보삼(왕경상 분)은 엽문과 생각으로

기 이후에는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버린다. 사실 영

겨루고자 했고, 무림을 천하로 확대한 엽문의 빼어난

화 속에서 조명되는 1930년대는 <아비정전>의 1960

통찰이 곧 무공에서의 승리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즉

년대와 같이 왕가위에 의해 만들어진 과거이다. 그리

왕가위는 대가들의 무술에서 파생되는 활동적인 선들

고 그가 만들어낸 이 시기의 중국의 정신이라는 것은,

을 영상화하여, 그들이 지닌 정신을 화폭이 아닌 스

오늘날의 중국이 말하는“융합·발전” 으로 대변되는

크린 위에서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왕가위

“동화” 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홍콩인들에게 다가갈

의 독자적인 영상 언어는 1990년대에 그랬듯, 시대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주변의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

와 절묘하게 맞닿아 다양한 정치적 독법의 여지를 남

에 대한‘심각한’염려에서 비롯된, 구심력 구축을 위

기고 있다.

한 중국 정부의 지난한 작업과는 다른 것이다. 엽문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무술인들이 지녀야 할

과거의 중국을 통해 다시 보는 홍콩의 현대사

정신은, 나를 보고 세계를 둘러보며 중생을“돌아보 는”과정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 정신의 위대

홍콩으로 건너온 엽문에게서 이어지는 정신의 정

함은 지속성을 통해서 판명된다. 즉“수평과 수직” 의

체는 바로 1930년대, 즉 대륙으로 밀려들어온 제국

싸움에서, 수직으로 남아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

주의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횡기 초엽에, 대가들에

기에 어떤 대상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정신이라는

의해 아직까지는 보존되고 있었던 중국 본래의 정신

것은 진정한 정신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 그 대상이

ⓒ Block 2 Pictures, Jet Tone, Sil-Metropole

부재하게 된 시점에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기 때문 이다. 각종 텍스트로 채워진, 무엇인가에 반하는 정 신의‘발명’ 은 사실상 대부분의 근대 국가들이 자신 의 국경을 지켜온 가장 중요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 러나 왕가위의 엽문은 소명감에 사로잡힌 항일투사가 아니다. 어떤 특정한 것을 목적에 두지 않고, 가장 큰 위협인 일상을 살아가면서 단지 보존함으로써 가능해 지는 연속성이 그 정신의 고매함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마삼과의 대결이 가장 큰 난제였던 궁이와는 달리, 엽문은 자신의 진정한 적수였던 일대 종사들과 중국에 난입한 일본군들이 모두 과거로 흘 러간 이후에도, 홍콩에 넘어와 대가들의 정신을 이어 간다. 그는 항구반점 공회에서 제자들에게 권법을 가 르치면서, 죽는 순간까지 그가 쌓아올린 무술의 경지 를 전수하고자 했다. 여기서 왕가위가 엽문을 통해 정신의 위대함을 다루는 방식은, 정체성으로 넘쳐나 는 중국과 정체성의 부재로 골머리를 앓는 홍콩을 연 결하는 근본적인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로부터 살아남아 진정한 <일대종사>가 된 엽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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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 Block2 Pictures, Jet Tone, Sil-Metropole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매순간 사 라지는 일상 속에서 하지무(금성무 분) 또 한 비디오 카메라로 아버지의 모습들을 기 록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는 되감기와 재생을 반복하며, 빠른 속도로 흩어지는 기억들을 붙잡고자 한다. 여기서 기억은 언제나 현재의 순간을 붙잡는 일에서 비롯 된다. 우리가 항상 잊는 것은 과거가 아니 라,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현재인 것이다. 그리고 붙잡혀 기록된 우리의 수많은‘현 재들’ 은 또다른 현재와 만나 새로운 방식 으로 기억된다. 왕가위가 엽문을 기억하는 방식 또한 일차적으로 기록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늙고 쇠약한 실제 엽문이 죽기 3일 전까지

서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중국과 홍콩이 직면한 현재

영춘권의 108가지 동작들을 시연해내는 모습을 담

는, 다른 두 가지 정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즉 필연적

은 다큐멘터리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왕가위는 엽

으로 강대국인 중국에 홍콩이 귀속될 수밖에 없는 시

문 스스로가 남겨두고자 했던 과거의‘현재’ 를 통해

점이 아닌, 중국으로부터 홍콩으로까지 그 명맥이 이

그가 무술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태도를 배우며, 그

어진 과거 중국 정신의 정수를“돌아보며” , 나아가

러한 면모를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은 채 그려내고자

이어가야 할 시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상해인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는 왕가위가 언급한“홍

방식의 이야기 구도와 자극적인 대사를 상상해내는데

콩을 중심에 두고 바라본 중국의 근대사” 라기보다는,

힘을 쏟지 않는다. 비록 창작이라는 최소한의 틀을

‘과거의 중국을 통해 다시 보는 홍콩의 현대사’ 일지

벗어날 수는 없지만, 왕가위는 마치 하지무가 사랑하

도 모른다. 왕가위가 만든 가공의 시대들은 언제나

는 아버지의 지금 그 모습들을 그대로 남겨두고자 했

홍콩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듯, 엽문에게 현재였던 바로 그 순간들을 관객들이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가위의 품격

수없이 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이 과거의 시대를 그 려내고 사라진 인물들을 불러내며 정치를 논하고 있

왕가위는 <일대종사>를 통해 현대 문화 속에 기

지만, 그 품격의 부재가 아쉽다. 반면 왕가위는 가장

생하고 있는 부유하는 감정이 아닌, 이어지는 정신

고상한 방식으로 언젠가 현재였던 사람들과 공간, 그

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을 기억하게 하

리고 시대를 우리에게 기억시키고 있다. 우리는“다

는 방식에서 왕가위의 이전 영화들은 상속되기도 하

시는 볼 수 없는”홍콩의 과거 모습과 엽문을 그의 영

고 변주되기도 한다. <타락천사>에서 그는“곧 사라

화를 통해 본연의 모습에 가깝게 기억하게 된다. 그

질 사람들” , 그리고“곧 없어질 거리들” 을 기억하고

렇기에 동시대에 제작되고 있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자 한다. 홍콩의 거리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잡히는

“수평” 으로 스러져 갈 때, 그의 영화는 오롯이“수

감각적인 인물들의 리듬은 매우 굼뜨지만, 그들도 별

직” 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수 없이 서로의“과거로 흘러간다.”도로 위의 차들 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지나가며, 왕가위가 말하듯 실제로 <타락천사>에서 촬영한 대부분의 장소들은

손현선 (이화여대 사학) iamthemis@hanmail.net

스크린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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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사진포털

꿈인가 비전인가

권위적인 장사꾼의 평화 노무현,『성공과 좌절』 , 학고재, 2009. 노무현,『진보의 미래』 , 동녘, 2009. 노무현,『운명이다』 , 돌베개, 2010.

노무현 시대를 공정하게 평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이 미 수없이 내려진 것도 사실이다. 당선된 순간부터 퇴임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평가 문제 때문에 벌어 진 싸움만큼 심한 싸움도 없을 것이다. 학문적 평가가 어려운 것은 과거와의 충분한 거리감이 부족하고, 핵심이 되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둘러싼 최근의 공방은, 사료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으면 거리감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경이로운 발상의 결과다. 사료의 진본성에 대한 애정은 사료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좌우 모두의 외면

라는 용감한 제목의 책을 냈는데, 그 서문에는 제목 보다 용감한 거짓말이 실렸다.“2004년 초가을『해

보수를 자임하는 일부 세력은 노무현 시대를 위협

방전후사의 인식』 을 읽고‘피가 거꾸로 흘렀다’ 는노

이라고 봤다. 그들에 눈에 그것은 진보의 시대, 좌파

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지면을 통해 접하고, 우리 사

적 비전의 시대였다. 일단의 학자들은 80년대 사관

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

에 맞서겠다면서 2006년『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이

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사학 논문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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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집권 세력의 비전을 공격했다.

큰 실책이었다.

“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은…… 그 책을 학습한 세대가 현 집권 세력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

외교정책결정은 민주적일 수 있는가?

히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노무현의 5년은 진보라 불리는 지지 세력에게도 실

이라크파병은 동북아시아 외교, 특히 북핵 문제의

망과 환멸의 시대였다. 그의 당선은 2002년 두 중학

해결을 위해서 타협이 불가피한 문제였다. 거기에는

생의 죽음이 불러온 그해의 반미 정서와 분리해서 생

옳고 그름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무

각하기 어렵다. 그가 취임했을 때는 이라크전이라는

언가를 되받기 위한 흥정의 선택지가 있을 뿐이었다.

소용돌이가 불어닥쳤다. 노무현은 파병을 선택했다.

노무현은 친미와 반미의 이분법을 이겨내고 타협으로

한미FTA를 추진할 때도 그에겐 일말의 고민도 없는

서의 외교라는 개념을 설득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것 같았다.

에 따르면 청와대 내부에도 7천 명 이상 파병하자는 쪽과 파병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지만,

친미이면서 반미?

결국은 비전투 임무를 띤 3천 명을 비교적 안전한 곳 으로 보내게 되었다. 노무현은“어쩔 수 없이 보내는

노무현의 외교가 보수의 적개심과 진보의 실망을

것이긴 했지만 당시 파병 외교는 아주 효율적인 외교

낳은 것은, 냉정한 국제정치 속에서 진보적 가치를

였다” 고 자평했다. 이 증언 이외에 당시의 내막을 상

실현할 길을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노

세히 알려주는 자료가 드물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

무현은 물론 지지 세력도 이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

말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과의 파

했다. 노무현은 취임사에서‘자주’ 라는 한국 지도자

병 협상이 성공적인 만큼 여론과의 협상이 성공적인

의 오랜 꿈을 이렇게 표현했다.“우리 한반도는 동북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대통령

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지정학적

의 잘못인지, 통치를 이해하지 못한 지지자의 잘못인

위치가 지난날에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지는 확답하기 어렵다.

러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21

그러나 적어도 노무현에게 그 대답은 명확했다. 외

세기 동북아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우리에게 요구하

교정책에 관한 한 대통령의 결정은 굳이 민주적일 필

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9·11을 겪은 부시 행정

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헌법재판소는 이

부의 일방주의 외교 앞에서 한국의 선택지가 많을 수

라크파병 결정이 통치행위라고 대답함으로써 이 원칙

없다는 것을 노무현은 곧 깨닫게 되었다. 노무현 역시 이라크 파병 요구 앞에서 권력자로서 필연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것은“고약하지만 ⓒ오마이뉴스 권우성

수령을 거절하기 어려운 취임 축하선물” 이었다. 그의 회고는 상식적인 진술로 되어 있다.“이라크 파병 문 제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봐도 역사의 기록 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 나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 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문제는 이 필연성 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반미를 도덕적 가치처럼 여기는 분위기에서 당선된 그였기에 대규모 반대 집회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파병안 논란을 계기로 정권이 진보에게는 친미 혐의를, 보수 에게는 반미 혐의를 남기면서 지지를 잃어버린 것은

꿈인가 비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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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사진공동기자단

ⓒ노무현사료관

을 지켜냈다. 노무현은 대북송금특검법안 역시 김대중

날의 입장에서, 노무현이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스타

이 대북송금이 자기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일은 진보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노무현 외교 자체

면 이 역시 통치행위로서 시비 걸 수 없다고 했다.

의 스타일은 어떨까? 더 많은 평화와 그 속에서 벌어

이것은 좋은 실적을 낼 수 있으면 폐쇄적인 의사

들일 더 많은 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또 19세기식

결정도 불사한다는 역대 대통령의 의지를 승계하는

부르주아의 꿈을 가졌다는 점에서 노무현은 진보적인

것이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노무현의 권위주의적인

외교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한미관계가

스타일은 하등 새로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그가 민

가장 나쁜 시절이었지만 돈이 된다면 FTA를 동시적

주적 절차를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 놓

이고 공세적으로 체결한다는 아이디어를 노무현 정부

은 데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결정이 아니라, 결정을

는 자랑스러운 것처럼 과시했다.

권위주의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서 갈등이 생겨났

이런 장사꾼의 면모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

다. 대외 정책을‘민주적’ 으로 만들 것처럼 해 놓고

은 대북정책이다. 2006년은 노무현이 집권하는 동안

서‘일반의지’ 를 발휘해서 만든다? 민주적 지도자를

북한이 가장 위협적으로 행동한 해였이다. 7월에는

자임하는 사람은 이‘일반의지’ 야말로 민주적인 것임

미사일 발사 실험이 있었고 10월에는 핵 실험에 성공

을 이해시키지 못할 때 문제를 일으킨다.

했다. 하지만 미사일과 핵이 한국을 겨냥한 게 아니

노무현의‘알고 있는 사람’ 으로서의 자신감은 한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위협일 수 없다는

미FTA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더 분명해진다. 그는

게 노무현의 생각이었다.“과연 북한의 로켓 하나가

‘모르는 사람’ 을 공격한다.“개방 문제와 관련해서

정말 온 세계가 떠들 만큼 그렇게 위험한 것일까?”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이후에 사실로 증명된 것이

노무현은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의 신뢰 구축

없습니다.”정책을 폐쇄적으로 결정하고 아래로부터

을 위해 언론과 야당의 공세를 받아가면서까지 2006

의 저항을 무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공

년에‘침착하게’대응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임기 말

허하게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돼서 흘러간 노래만 계

의 김대중이 그랬듯이 북핵은 북미 간의 문제라고 주

속 부르면 안 됩니다. 일부 고달프고 불평하는 사람

장했다.“우리의 권고나 조언이 받아들여지려면 신뢰

들을 선동해서 끌고 갈 수 있겠고 소위 강단사회주의

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 말고 우리가 지렛대로 가지

라고 불리는 급진 지식인들은 뭉쳐갈 수 있겠지만 그

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것이 책임있는 정답은 아닙니다.”

이 신뢰라는 이름으로 북핵 문제에 강경하게 나오 지 않음으로써, 노무현이 챙기려고 한 실리는 돈이었

돈이 되면 무엇이든지 한다

다. 2007년 그의 신년 국정연설의 논리는 이를 잘 보 여준다.“안보와 안전은 활력 있는 경제의 토대입니

진보가 독재, 반민주의 반의어처럼 인식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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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다. 평화가 위협을 받고 안보가 불안한 나라는 경제

Prism


에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국방비 또한 투자입니다.

건에서… 중간에 시범적으로 하고… 그렇게 돼야지

경제를 생각하는 안보 정책과 믿음직한 치안과 위기

지금은 아마…….”

관리가 필요합니다.”핵 위기 속에서도 안보를 위해 경제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위해 안보를

노무현이라는 어떤 픽션

관리한다, 무력에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교 류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평화를 지켜낸다. 이것

노무현을 묘사하는 스테레오타입은 많다. 그의 인

은 외교를 무역의 연장에서 사고하는 장사꾼의 논리

간적인 면모를 부각하려는 이들은 고졸, 인권 변호

다.“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안보가 아닙니다.

사, 바보, 서민적 지도자와 같은 수사를 동원하지만

경제에도 결코 이롭지 않습니다.”한미FTA를 추진

이런 말들이 그의 집권기를 설명하는 데는, 더욱이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김현종에게서 남북FTA를

그의 대외정책을 설명하는 데 정작 도움이 되지 않는

제안 받았으며, 개성공단의 착취적 분업의 생산품을

다. 다른 한편에서 그의 공과를 평가하려는 말들에

대한민국산으로 인정 받아 무관세로 팔려고 노력하

는 반미적, 친북적 인물이라거나, 침략전쟁에 가담하

기도 했다.

고 신자유주의를 적극 들여온 친미 우파라는 도식적 풀이가 있다. 이러한 표현에는 대통령이란 그래서는

돈으로 평화를 만들어낸다

안 된다는 당위가, 그것도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으 며 지킬 수도 없는 당위가 전제되어 있다. 노무현의

새로 공개된 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 실린 노무

외교적 비전의 약점은 도덕성을 전면에 내세웠던 정

현의 말들에는, 서로 돈이 되는 판에서 싸움을 걸어

권의 과오에서 비롯한 것일까, 순수한 정치를 기대한

올 인간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의 구상은 단

지지 세력에게 필연적으로 예고된 실망감에서 비롯

순한 NLL 인근 공동어로구역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

한 것일까? 노무현은 의지를 굴절시키는 정치의 전선

었다. 그는 남과 북을 대규모 협력지대로써, 돈으로

에서 타협해야 하는 전형적인 시기를 살았지만, 의도

써 연결시키면 대결의 문제는 사라진다고 봤다. 그에

를 사랑함으로써 수단을 무시하는 정치적 미숙아들의

따르면 북방한계선 문제의 해답은 간단했다.“근본적

낙담으로 몰락해 버렸다. 이런 미숙아들은 흔히 영웅

인 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평화, 경제협력 등을 합

적 패잔병이라는 훈장을 달고 좋아하기 마련이다. 김

의한 다음, 이를 위해서 NLL 문제와 관계없이 협력

대중, 노무현의 비전이 기반을 잃어 버리고 다른 경

하여 일정한 평화지대를 만들면, 크게 싸우지 않고

쟁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은 막기 어려운 일이 되었

분쟁의 소지를 예방할 수 있는 장치가 되지 않겠는

다. 임기 내내 장사꾼 외교를 펼친 노무현에 반대하

가? ……경제협력을 위해 서로 필요한 것들을 자유

는 새 기조가‘실용’ 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롭게 하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지만, 세일즈를 하면서 동시에 도덕가로 살려고 했던

그러면 자연스럽게 NLL 문제는 덮어놓은 채로 평화

무모한 꿈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적인 제도가 정착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노무현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면 개혁·개방의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는 다른 말, 그것도 실무적인 말들로 회담 중에 북한을 돈으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intransigere@gmail.com

로 묶어 놓을 제안을 쉬지 않고 던졌다.“전체를 서해 평화협력지대로 선포를 하고, 그 안에 한강하고 개 발. 해주공단… 그 안에 공동어로구역 만들고, 북쪽 에 생태평화공원까지 되면……”하고 말했을 때, 김 정일은 막대하고 빠른 아이디어에 당황하여 대답했 다.“그건 아니… 정전협정 문제가 우선… 풀어진 조

꿈인가 비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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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책갈피 안치영은 이 책에서“당-국가 체제의 불변에 의해 은폐되고 간과되지만 중국의 개혁 과정에서 경제개혁에 선행하여 이념, 가치, 규범 및 권력구조를 포함하는 정치체제 전 반에 걸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고 주장한다. 덩샤오핑 체제가“정치개혁 없는 경제개 혁” 을 추진했다고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체제가 등장한 배경에서는“경제문제 없 는 정치문제” 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은 화궈펑 체제-덩샤오핑 체제라는 두 단계의 전환을 겪었 는데, 문화대혁명(문혁) 급진파를 제거함으로써 경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당내 합의는 화궈펑 체제 내부에서 이미 마련되었다. 화궈펑 체제는 급진파‘4인방’ (이들은 마오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자임했다)과 대립하는 문혁 수혜자 집단이 문혁 생존자(피해자) 집단 과 연합하는 형태로 출범했기 때문에, 문혁을 계승하면서도 문혁을 부정하는 모순적 위 치에서 정당성과 지도력이 제약되었다. 문혁에서 사회 통합으로, 카리스마적 개인 지도 에서 집단지도체제로, 혁명 운동에서 건설로, 좌경 이념에서 실용 중시로의 이행이 진행 되기 위해서는 덩샤오핑 체제의 출범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자는 두 번째 전환 과정에서 있었던 정치적 갈등에 주목한다. 정당성이 불완전한 화궈펑 등 문혁 수혜자 집단은 문혁 생존자 집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덩샤오핑 등을‘평 반’ (平反), 즉 정치적으로 복권해야 했다. 화궈펑 체제는 마오의 교시를“이론적으로 절 대화”“兩個凡是” ( )하려 했으나 반문혁 평반 세력은 그 이론의 타당성은 실용성의 기준 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재해석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다. 화궈펑 체제가 단순히“마오 쩌둥에 의해 구성된 권력구조의 기초 위에서 4인방 체포를 통해 권력이 재분배된 체제” 였다면 덩샤오핑 체제의 출범은 실사구시에 입각한 지배로의 질적 변환이었던 셈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문혁이라는 균열을 수습하기 위해 평반 세력이 화궈펑 체제 내 에 또 한 번 균열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평반 세력은 마오라는 절대 권위를 직접 부정하 지는 못했으나, 문필영역에서의 논쟁으로 마오에 대한 교조주의적 수용을 비판할 수 있 었다. 이는 개인숭배 혹은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도 체제를 평화적으로 개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박해 하의 글쓰기” (스트라우스)로서는 현대사에서 모범적 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회고록, (본토가 아닌) 홍콩 간행물, 비공식 내부 자료를 구해 평반이라는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이런 자료를 참조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체제 이행기에 대한 중국의‘떳떳함’ 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다. 덩샤오핑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인 1978년의 중앙공작회의 및 11기 3중전회의 내용에 관한 분석은 저자가 중국을 포함한 해외 연구를 통틀어 가장 상세하 게 재구성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이는 대목이므로, 이 역시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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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훈

대학생국제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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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체제 전환을 복기한다 안치영, 『덩 샤오핑 시대의 탄생』, 창비, 2013.


북한의 경제적 고립과 국방 우선주의가 낳은 파국적 결과인 신체 왜소화 현상을 다 루는 책이다. 북한 정부는 이미 1970년대부터 신체 왜소화 현상을 의식하고 현상을 교 정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군사 문제를 최우선시하는 북한에서 식품 생산에 투자를 집중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북한은 저축은 장려하고 식품 구입을 포함한 소비 를 억제하는 등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을 강요하면서 권력층까지 신체왜소 현상이 확산 되도록 만들었다. 신체왜소를 극복하려고 키를 키우는 식품을 생산하거나‘키크기 운 동’ 을 장려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함경북도 길주 출신의 연구자가 삶에서 우러나온 문제의식에 입각해 쓴 이 책은, 국 내 연구 중에서도 북한 주민의 전 사회적 신체왜소화라는 보기 드문 현실을 처음 본격 적으로 다룬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람의 신체가“권력의 작용이 각인” 되는 자리라는 푸코의 생각을 북한 분석에 활용하겠다는 생각도 선행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괜찮 은 발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푸코의 이름을 제목에까지 달아놓은 이 책에서 푸코의 아이디어를 분석 틀로 서 잘 활용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푸코에 대한 저자의 이해 수준이 높지 않아 보인 다. 저자는 푸코의 권력론에 관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내용을 소개할 때만 원전을 참 조하고 있으며(68-70면), 푸코를 논의하는 다른 대목에서는 (들뢰즈를 제외한다면) 국 내 연구자의 2차 문헌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책에서 신체왜소화 현상에 관한 서 술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도, 푸코의 논의를 빌린 현상의 분석이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다. 저자는 논의가 책 전체 분량의 2할 정도 진행된 대목(2부 3장, 63-73면)에서

분석 틀은 있지만 분석이 없는 북한 연구서 김영희, 『푸코와 북한사 회: 신체왜소의 정치경제학』, 인간사랑, 2013.

푸코의 틀로 북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해 놓고는 아 무런 대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신체왜소화의 역사로 넘어간다. 저자는 논의의 8, 9할이 이미 이뤄진 다음인 5부 4장(308-314면)에서야 비로소 푸코의 권력론을 북한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타당성과,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함의를 다루고 있다. 저자가 푸코에 기대어 내세우는 주장 자체는 언뜻 나쁘지 않다. 북한에서도 주민 신 체의 유용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규율권력을 작동시키고 있는 바, 오늘날 북한 주민의 몸이란 식품이 부족한 환경에 맞게 적응하도록 권력이 훈육한 몸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이다. 다만 저자는 신체왜소화 자체는 권력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그 의도가 실패한 결과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저자도 자인하듯이 몸을 권력 의도가 각인된 결과로 파악한 푸코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푸코의 이름을 제목, 서문, 결론에서까지 거론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이 이름을 가지고서 현상을 다 분석하지도 못한 채 책을 마무리 한다는 뜻이다. 이 책은 현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한에서, 그리고 저자 자신은 그 아이디어 를 낭비해버렸지만 북한 사회의 미시적 소재를 푸코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아이 디어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후속 연구에는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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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 방향으로 진보하는가? 19세기, 서구 열강들은 근대화 의 불씨를 아시아에‘전파’ 하려 애썼다.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이 발견 한 진실의 불꽃이 정말로‘절대적’ 이라 믿었다. 오만하고 휘황찬란하 던 중국이 무너지고 중동이 쉽게 짓밟히자, 그들은 자신만만해졌다. 이 제 근대성은 확고하고 일원적인 목표가 되었고, 이 기준에 따라 세계 모든 국가와 민족이 문명과 야만으로 나뉘었다. 서구의 파도에 대항하 는 방식은 다양했다. 일본은 이러한 계층 구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또 하나의 제국이 되려 했다. 중국과 중동 국가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문 화적 토대 위에 서구의 근대성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한 번 결정된 계층의 피라미드 는 근대성의 정점을 향해 기어오르려는 아시아의 노력을 번번이 좌절 시켰다. 중국과 중동은 서구 열강이 자신들의 토지와 이권을 강탈하고

근대화의 여러 얼굴, 폭력의 같은 얼굴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망을 이루는 듯했

판카지마슈라, 이재만 옮김, 『제국의 폐허에서: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책과함께, 2013.

서구 열강에 의한 계층화 자체가 착취의 골을 더 깊게 만들고 있음을

던 일본 제국 역시 원자폭탄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알아프가니, 간디, 량치차오와 같은 당대의 아시아 사상가들은 곧 간파했다. 그들이 보기에 제국주의자들은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탐욕스러웠고, 서구식 근대화는 허무 가 그 종착역이었다. 욕망에 절고 오만에 취해 아시아의 모든 것을 파 괴하는‘푸른 눈의 악마들’ 에 대항해 당대의 사상가들은 종교와 민족

주의의 칼을 갈았다. 책의 저자는 이러한 사상가와 현실이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추적하면서 그들이 남 긴 통찰력의 자취를 좇는다. 저자의 여정에는 서구에서 제시하는‘근대성’ 이 결코 일률적이거나 보편적으로 적 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근대성의 전파는 제국의 확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위선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저자는 이렇게‘주어진’역사 발전을 거부하고 각 국가와 민족이 자신의 지역적 뿌리 위에서 대안을 찾을 것을 말한다. 중국과 터키가 그 바람직한 예로서, 이들은 서구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지역에 맞게 변화시키는 작업을 거쳤기에 그 사상적 토대가 매우 단단하다. 이렇듯 오늘날의 아시아는 제국주의 열강에 어떻 게 저항했고, 그들이 물러간 후 어떠한 사상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였는지에 의해 그 모습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아시아인과 서구인의 경쟁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을 끝까지 유지한다.‘제 국의 폐허’ 에서는 재건뿐 아니라 처절한 폭력도 자행되었고, 이를 단순히 재건을 위한 토대라고 보기에 그 비극 은 너무도 잔인했다. 중국은 국가를 재건하면서 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몰았고, 아시아로서 서구에 대항한다는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많은 피를 뿌렸다. 이슬람 내의 종파 대립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서구 세력을 향한 원 리주의자들의 증오는 맹목화되었다. 제국이 남긴 폐허에서 소위 재건을 부르짖는 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원수를 모방했고, 어떻게 재로 뒤덮인 황무지에서 아직까지 평화가 뿌리내리지 못하는지에 대한 섬세한 설명이 아쉽다. 김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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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과 편승. 국제 정치 무대에서 약소국이 강대국에 대해 시도하는 전략으로 보통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균형이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의 동맹 관계를 통해 강대국의 위협에 맞서는 것이라면, 편승은 강대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상대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경을 마주한 강대국에 의한 실체적 위협에 맞닥뜨릴 때, 이 두 전략이 약소국의 안보를 얼마만큼 보장해줄 수 있을까.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중부 유럽의 약소국 중 유일한 민 주주의 국가였고, 마사리크나 베네쉬 등의 수뇌부 인사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들을 잘 알고 영민하게 실행했다. 그러나 악조건이 너무 많았다. 첫째로 이들은 독립 당시 영토 면에서 요구한 바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절반은 체코인으로, 나머지는 슬로바키아인과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독 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가 되었다. 덕분에 이후 국경 분쟁을 유발하여 주변국과의 원활한 협력이 쉽지 않았다. 둘째로 마사리크와 베네쉬는 범게르만주의도, 범슬라브주의도 아닌 중유럽의 약소 국들이 협력하여 집단 안보를 꾀하는‘중부유럽’ 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 속에서 민주주의의 수호자 역 할을 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모든 주변국이 비민주 국가이며 국제연맹이 무력 한 상황에서,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능력을 벗어나는‘이상’ 일 뿐이었고, 심지어 히틀러와 나치가 체코슬로바 키아를 첫 번째 희생양으로 삼은 이유가 되고 말았다. 셋째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 프랑스 등과의 협력을 통 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지만, 그들은 서유럽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를 위해 독일과 맞서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는 강제로 독일에‘편승될’ 수밖에 없었다. 2차 대전으로 가는 길목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비 에트 연합에 자발적으로 편승한다. 건국 후 짧은 역사는 그것이 살아 남는 유일한 길이라는 교훈을 줬기 때문이다.

약소국의 길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음에도, 90년대까지 공산권에 속했던 탓인 지 체코에 대한 국내 학계의 관심과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상 황에서『체코와 국제정치』 는 꽤 반가운 책이다. 체코 학자가 직접 쓴 체코의 역사적 쟁점 및 최근 국제 정치 전략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담았다. 특히‘강대국 사이 약소국의 전략’ 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주 제이기에 더욱 주목할만하다. 전반부에서는 20세기 초 체코의 역사 를 다루고 있는데, 당시 체코의 국내외적 상황과 정치인들의 선택에

라디슬라프 차바다· 샤르카 바이소바 지음, 김신규 옮김, 『체코와 국제정치』,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13.

대해 자세히 쓰고 있어 체코는 물론 전간기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후반부는 공산권의 몰락 후 체코의 국제정치적 전략 및 노력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역자인 김신규 교수는 한 논문의 말미에서 체코가 집단안보체제나 인접국 혹은 강대국과의 동맹이라는 전략을 취한다는 면에서 과거와 현재가 별반 다르지 않으며, 과거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을 때 대안 이 여전히 없다고 지적했다. 책의 후반부에서 체코의 현 전략을 자세 히 분석하고는 있지만, 과거 전략과의 상세한 연계를 분석하거나 현 정책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나 대안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 다.

이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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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퀴즈 1. 1899년 미국 조지아주 코웨타 카운티의 흑인 노동자였던‘이 사람’은 임금 문제로 백인 농장주와 다투다 그를 살해합니다. 그러나 사건 이후‘이 사람’이 농장주의 아내를 강간하고 재산을 절도했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이에 분노한 백인들이 체포되어 이송 중이던‘이 사람’에게 잔인한 린치를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빌리 홀리데이의 불후의 명곡‘Strange Fruit’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사건의 주인공‘이 사람’의 이름은? 2. 근대 중국의 사상가 천두슈가 창간한 잡지《신청년》은 고문을 배제하고 구 어문인‘이 문체’를 사용하는 운동을 펼치며 1918년 5월에는 중국 현대 문학 에서 처음으로‘이 문체’로 쓰여진 루쉰의『광인일기』를 발표하기도 했습니 다.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에 따라 1920년 결국 북양군벌정부에 의해 국어로 정식 채택된‘이 문체’는 무엇일까요? 3. 영국의 대표적인 코하우징 단지로, 환경에 미치는 최소한의 영향, 적당하고 합리적인 주거 비용, 공동체 생활에 대한 관심 등 3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운영 되는‘이 주거 단지’의 이름은? 4.《포린 어페어스》는‘이 사람’을 두고“전세계 수니 파 무슬림들의 교황”이 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카타르에 거주하는 이집트 출신 수니 파 성직자로 지난 6월‘싸울 수 있는 자는 모두 시리아로 가라’,‘사탄의 손에 도륙되는 시 리아인 형제 옆에 서라’며 시리아 내전 참전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5. 몬산토 사 등 GM 농작물의 종자를 판매하는 대기업들은‘불임’혹은‘자살’ 유전자가 삽입된, 즉 2대 이상 발아할 수 없는 종자를 판매하여 큰 비판을 받기 도 했는데요,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사용이 중단된‘이 기술’은 무엇일까요? 각 문제의 정답을 모두 적어 이름, 연락처와 함께 11월 22일 금요일 자정까지 journal.prism@gmail.com로 보내주세요. 정답을 맞춰주신 분들 중 세분을 추첨 하여 문화상품권 1만원권을 보내드립니다. 이번 호에 대한 감상이나 의견도 함 께 보내주시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5호 퀴즈의 정답은 1. 멘델레예프 2. 하마스 3. 브라운 각서 4. 독일 5. 플 렉시테리언 입니다. 정확하게 답을 적어 보내주신 분 중 세분을 추첨했는데요, 당첨 되신 석유협회 님, 안은남 님, 이슬기 님께는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후기 이번 호는 비교적 순탄했다. 어디까지나 지난 호에 비해서 그렇게 느껴졌 다는 말이다. 처음으로 발간에 참여했던 지난 호에서 이스라엘이라면 아예 신물이 나, 정착촌의‘착’ 자만 들어도 헛구역질을 했던 반면 이번 호는 그냥 저냥 당연한 듯 매끄러웠다. 한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그랬다. 아마《프리즘》 에 익숙해진 게 가장 큰 요인이지 싶다. 회의가 있는 일요 일 한나절을 통째로 비워 놓는 데, 계획서를 쓰고 글을 고치는 데 익숙해졌 다(물론 결과물에 만족하는가는 또다른 문제다). 익숙해지고 나니,《프리즘》 에 필진으로 참여한 첫 몇 달 동안 마음에 돌덩이처럼 내려앉던 부담감도 줄 었다. 회의와 스터디로 여름이 꽉 찼고, 예전에는 관심도 없던 북방외교나 가 스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중동에 대해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점도 행복했 다. 그렇지만 가장 많은 걸 배운 것은 다른 필진들이 공부하고 글을 쓰는 방 식을 볼 때였다. 그렇게 남자친구와도 못 넘겨 본 100일을《프리즘》 과 넘겼 다. 물론 매번 즐겁고 뿌듯하지만은 않다. 특히 마감철이 되니 연희관에서 《프리즘》 을 처음 집어든 4월로 돌아가 내 손목을 콱 비틀어 버리고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프리즘》 의 일원이라는 데 익숙해진 지금,《프리 즘》 은 삶의 단단한 축이 되어 있다. 파업이니 인생의 실수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분명히《프리즘》 은 내 대학 생활 첫 해에서 가장 훌륭한 실수 임에 틀림없다. 지금 함께하는 편집위원들은 물론 앞으로도 들어올 사람들 과도 가치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뿌듯함을 공유하고 싶다. 1학년 1학 기를《프리즘》 으로 마무리했으니, 4학년 2학기도 똑같이, 다만 더 나은 글로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프리즘》 을 애독해 주시는 독자분들이 그 때까지도《프리즘》 을 읽어 주신다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일까 싶다. 그전까지 한 번은 꼭 파업을 할 거다. ⓒ이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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