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sm vol.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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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학 생 국 제 시 사 저 널 프 리 즘 제 3 호 2 0 1 3 년 4 · 5 월

Vol.3

제3호 2013년 4·5월 프리즘 서강대 편집위원회 주관 국제 구호 개발 현장 활동가들과의 인터뷰

대 학 생 국 제 시 사 저 널

핵 Iran 무엇인가?


편집장의 말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학생에게‘역사’ 란 언제나 곁에 두어야 하는 사실의 다발이지만, 이번 호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이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물론 인간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밖에 생각할 수 없기에, 어떤 저널이라도‘역사’아닌 것을 다룰 수 없는 건 필연이다. 이번 호를 준비하며 유독‘역사’ 에 시달린 기분이 드는 건 아마도 그것이 오늘의 문제 와 가장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우호의“여성 지도자와 복지국가” 는 유럽 복지국가의 가까운 과거를 다루지만 그의 진정한 궁금증은 복지국가가 여성 집권자의 존재만으로 가능할까 하는 현재적 문제 의식에서 나왔다. 이 호기심이 대처의 부고에서 촉발된 논쟁과 닮아 있다면, 김영은의“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은칠 레에서 좌절된 하나의 꿈을 다루며 베네수엘라에 잠든 또 한 사람의 기억을 건드린다. 개인적으 로도 영화〈지슬〉 을 보면서, 조봉암에 대한 또 한 편의 해석을 읽으면서, 노태우와 각료들의 글을 읽으면서, 이들이 평가가 조심스러운 소재인 만큼 신중하게 다룰 방법을 고민했다. 그렇지만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역사의 평가에 맡기자’ 는 식의 유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 이다. 사태가 닥쳐 오는 현장에서는 어떻게든 주어진 고뇌를 겪어내며 선택을 내려야 한다. 우리 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태를‘역사’ 라 부르지만, 사실‘역사’ 의 현장에 있는 일에게 학문 적으로 회고할 만한 가치란 부차적인 문제다. 그들에게는 당대의 작은 일까지도 실존적 과제로서 어깨 위에 무겁게 느껴졌으리라. 4·3의 현장에 있었던 제주도민에게도, 재판장에 출석한 조봉암 에게도, 학생 시위에 직면한 노태우에게도, 우리가 지금‘평가하기 어렵다’ 고 유보하는 그 모든 문제가 생각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골칫거리였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당대를 살아낸 장본인이 아닌 이상, 글을 쓰며‘회고하는 이’ 의 관조하는 특권을 누렸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모 든 갈등이 종합을 향해 나아가는데도 당장은 종합보다 고뇌를 신경 써야 했던 당대인의 주관적 인식에 공감하고 싶었다. 이번 호 특집“핵 Iran 무엇인가?” 을 비롯해 견세령의“다 함께 차차차 CHASEAN” , 이진주의 “새 아버지(Papa)가 나타났다” , 오창동의“ ‘악한 독재자’ 와‘저항하는 민중’ 의 서사” 는 관조적 특권을 누리는 그 우리가 선별한‘우리 시대의 고뇌’ 인 셈이다. 후일의 사가들이《프리즘》 을혹 인용하게 된다면, 그것이 역사의 대종합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했다고 평가할지 알 수 없는데, 앞으로 발간할 글에서 눈앞의 문제에 천착할 소임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학기 중인데도 평소보다 열심히 편집 활동에 임해 준 편집위원들과 새 식구가 되자마자 열성 을 다한 객원 기자들께 감사 드린다. 지난 2호가 발간된 이후 창간호보다 많은 숫자의 독자와 후 원자가 애정 어린 피드백을 해 주셨다. 앞으로도 주저 없는 격려와 질타를 부탁 드린다. 끝으로 이번 호를 만드는 데 노력해 주신 모든 노동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13년 4월 편집장 최정훈


Contents 대 학 생 국 제 시 사 저 널 프 리 즘 Vo l . 3

2

01

편집장의 말

04

프리즘 우편함

06

오늘 세계는

08

국제 시사

키프로스에 무슨 일이?

10

역사를 들이키다

뜻 깊은 순수 가솔린, 마오타이

12

특집 | 핵 Iran 무엇인가 이란 핵, 그리고 미국의 심정

1인자의 속내

이란과 불편한 이웃들

Focus in│핵무기도 다다익선?

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24

지갑에서 꺼낸 근대인 마오만 나와도 놀라지 마오

26

국제 시사

30

국제 시사

다 함께 차차차 CHASEAN

34

국제 시사

여성 지도자와 복지 국가의 관계?

38

세계인의 한마디

박물관을 불태워라!

40

국제 시사

새 아버지(Papa)가 나타났다

44

국제 시사

‘악한 독재자’와‘저항하는 민중’의 서사

48

혀로 맛보는 역사

‘코끼리’의 향긋한 한 끼

50

스크린의 국제정치

54

세계를 듣다

58

꿈인가 비전인가

보통사람, 체제를 만들다

62

인터뷰

국제 구호·개발 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

태양절의 불안한 침묵 뒤에서

절망적인 희망의 끈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66 프리즘 책갈피 70 독자 퀴즈 71

편집 후기

72

프리즘 사용설명서

ⓒ박연서

목차

3


♣ 대학생 국제관계학회에서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Vol.3

대학생 국제관계학회에서는 국제정치사상, 이 론, 역사의 고전을 읽는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 습니다. 세미나는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서강대 에서 진행되며, 모든 분들에게 개방돼 있습니다. 5월 5일 : 루소의 『영구 평화를 위한 외로운 산책자의 꿈』 5월 12일 : 레닌의 『제국주의론』 5월 19일, 5월 26일 :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6월 2일 : 이용준의『게임의 종말』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시각과 장소에 변동이 있 을 수 있으니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사전에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름학기부터 세미나에 함께 참여하실 신입회원을 모집합니다. 여름 방학 세미나는 원 칙적으로 주 1회 진행됩니다. 학회 가입을 희망 하시는 분들은 meliandialog@gmail.com으로 이 름, 소속 대학, 전공, 지원 동기(A4 2매 이내)를 적어 보내주세요. 1차 합격자들께는 추후 면접 일자를 공지해 드리겠습니다. 문의: 회장 최정훈 (010-4233-8227)

♣ 프리즘에서 학회, 동아리 소식을 전해

대 학 생 국 제 시 사 저 널

편집장 편집위원 객원기자 표지 디자인 발행처 인쇄 제작·광고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발행인 등록번호 등록연원일 제호 간별 발행소 발행년월일 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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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김만희 마00062 2012년 12월 5일 대학생 국제시사저널 프리즘 격월간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길30 2013년 4월 30일 제3호

Copyrightⓒ 대학생 국제시사저널 프리즘 2013

드립니다. 프리즘 이메일로 광고하고 싶으 신 내용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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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훈 김만희 박연서 손현선 이근호 이인재 이진주 견세령 김영은 오창동 정우호 박연서 프리즘, 뿌리출판기획 대학생 국제시사저널 프리즘 (주)인쇄그룹형제 뿌리출판기획 02-741-6411 www.iroots.co.kr journal.prism@gmail.com blog.naver.com/prismjournal @Prismjournal facebook.com/Prism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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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사를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프리즘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프리즘》과 함께 할 수습위원 및 객원 기자를 모집합니다 수습위원 지원 안내

객원 기자 지원 안내

지원 자격 1. 수도권 4년제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2학기 이상 활동 가능 하신 분 2. 학기 중 주 1회(일요일 오전) 회의, 방학 중 주 1회 회의 및 주중 스터디에 참여 가능하신 분 3. 국제 시사에 관심 있으며 열정과 책임감이 충분하신 분

지원 자격 1. 수도권 4년제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2학기 이상 활동 가능 하신 분 2. 한 학기에 3번 발간되는 《프리즘》에 1호당 1개 이상의 글을 기고하실 수 있는 분 3. 국제 시사에 관심이 있으며 열정과 책임감이 충분하신 분

지원 방법 프리즘 블로그에서 지원서 양식을 다운로드, 작성한 뒤 프리즘 메일로 보내주세요.

지원 방법 1. 프리즘 블로그에서 지원서 양식을 다운로드, 작성 2. <국제 시사가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의 자유로운 글 (A4 1장 이내)

블로그: blog.naver.com/prismjournal 메일: journal.prism@gmail.com 지원 마감 6월 21일 금요일 자정 수습위원 시험 6월 23일 일요일 오후 1시 서강대학교 * 수습위원 시험은 논술과 면접으로 진행되며, 구체적인 사항은 추후 안내 예정입니다. * 선발된 수습위원들은 여름방학 동안 진행될 국제 시사, 역사 스터디에 반드시 참여하셔야 합니다. (주중 1-2회 예정)

위의 두 가지를 journal.prism@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지원 마감 6월 21일 금요일 자정 * 객원 기자 면접은 추후 개별 안내 예정입니다. * 객원 기자로 선발되시면 각 호 발간 회의에 2회 이상 참여하셔야 합니다. * 방학 중 스터디 참여는 선택이며, 역시 5호부터 참여하시게 됩니다.

문의 편집장 최정훈 010 4233 8227 이인재 010 9490 8932 프리즘 우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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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마라톤 테러 ⓒAP/Boston globe

4월 15일 미국 동부 보스턴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서 폭탄이 터져 세 명 이상이 사망하고 180명이 넘 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폭탄은 압력밥솥과 못 등을 이용해 제작되었고, 결승선 지점에 설치되어 우승자 가 결승점을 지난 지 3시간 후에 두 차례에 걸쳐 폭 파됐다. 경찰은 용의자인 체첸 공화국 출신 형제 두 명을 추격했고, 격렬한 총격전 끝에 형 타멜란과 경 찰 한 명이 사망했다. 도주한 동생은 테러 나흘째인 20일 붙잡혔다. 용의자들의 출신지인 체첸은 러시아 남서쪽에 위치한 러시아의 지방공화국으로, 독자적

인 언어를 사용하며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는다. 소련 해체 이후 완전 독립을 주장하며 꾸준히 무력 시위를 했 으나 러시아는 이에 군사 행동으로 강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나 체첸 반군이 불만을 갖는 대상은 미국이 아닌 러시아라는 점에서 이번 보스턴 테러는 체첸과는 무관한 듯하 다. 오히려 용의자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가 테러와의 연결고리라는 시각이 설득력 있다. FBI는 용의자들이 알카에다 같은 이슬람 무장세력의 사주를 받았거나, 테러단체와의 접점 없이 자발적으로 테러를 감행하는‘외로운 늑대형’ 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미국 내에서 9·11 이후 수그러들던 테러에의 공포와 반(反)이슬람 분위기가 다 시금 팽배해질 것으로 보인다.

뉴질랜드 동성결혼법 통과

쓰촨성 강진

미 총기규제법안 부결

4월 17일 뉴질랜드 의회는 찬

4월 20일 2008년 대지진이 발생해 수많

4월 17일 미 상원은 오바마 미 대통령

성 77 반대 44로 동성결혼법

은 사상자를 냈던 중국 남서부 쓰촨성에

이 강하게 밀어붙였던 총기 규제 강화

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뉴질랜

서 규모 7.0의 강진이 또 발생했다. 180

법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공격용 반자

드는 전세계에서 동성 간의 결

여 명이 숨지고 6700여 명이 다쳤으며,

동 소총 거래 금지, 대용량 탄창의 거

혼을 합법화한 13번째 국가가

39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현지 언론은 전

래 금지, 총기 밀거래 처벌 강화, 총기

되었다. 법안이 통과되자 의원

했다. 중국 지도부는 즉각 군인과 경찰을

구매자의 전과 조회 등 네 종류의 법

들이 일제히 기립해 뉴질랜드

동원하며 구호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통

안은 공화당과 일부 보수적 성향의 민

원주민의 민요인‘포 카레카레

신 시설이 파괴되고 산사태로 도로 곳곳

주당 의원들의 반대로 전체 투표에도

아나(Po Karekare Ana)’ 를제

이 끊긴 데다 구호 물품까지 부족해 구조

회부되지 못했다. 전미총기협회(NRA)

창했는데, 이 동영상이 인터넷

에 난항을 겪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

가 법안 부결을 위해 결사적으로 로비

을 통해 퍼지면서 큰 화제가 되

난 2008년과는 다르게‘능력과 물자가

공세를 편 데다,‘총기를 자유롭게 사

었다.

충분해 당분간 국제 사회의 도움은 필요

용해야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

치 않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는 미국 특유의 정서가 뒷받침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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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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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Photos/Landov

4월 8일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지병인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영국 국민들은 전 총리 의 죽음을 두고 한쪽에서는 정치계 의 큰 별이 졌다며 애도를 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마녀가 죽었다’ 며 축하 시위를 벌이는 상반된 모 습을 보였다. 대처가 주도했던 신

오늘 세계는

마가렛 대처 사망

자유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후세의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그러나 그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녀를 기점으로 영국 사회가 크게 변화했다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다. 보수 진영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대처리즘’ 을 두고 영국 사회를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끌어낸 개혁이라 칭송한다. 이들에 의하면 노조와 노동당은 자신들의 잇속을 위해 사회 를 좀먹는 존재이며, 이들을 끌어내리는 것은 비록 보기에‘더러울’ 지라도 누군가는 꼭 해 야만 하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메스로 살을 도려내는 이 과감한 수술 덕분에 휘청이던 영 국 경제가 빠른 시간 안에 회복됐다는 것이다. 반대측에서는 대처리즘이 근본적인 사회 개 혁이 아닌 임시 처방에 불과했고, 장기적으로 빈부격차와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대 처리즘은 일부 계층에 게 부담을 강제로 전가 하여 상황을 타개하고 자 했기 때문에 도덕적 인 결함을 가지며, 결국 경제 성장률도 대처 집권 말기에 다시 줄어들었다 는 것이다.

김만희

오늘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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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에 무슨 일이? ⓒGoogle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가 3월 25일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 앙은행, 국제통화기금)와 구제금융안 에 합의했다. 합의안에 따르면 유럽 연합은 90억 유로, 국제통화기금은 1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키프로스 정부는 130억 유로(한화 약 19조원)의 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 해야 한다. 이로써 키프로스는 디폴 트(채무불이행)와 유로존 탈퇴를 면 할 수 있게 되었다. 100억 유로의 구 제금융은 2500억 유로(한화 약 369 조 원)에 달한 그리스 구제금융에 비해 상당히 작다.

입된 자금이 많다. GDP는 180억 유로 규모에 불과

그럼에도 키프로스 구제금융이 큰 화제가 된 것은 유

한 반면 은행 총 예금액이 GDP의 4배에 달하고 은행

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이 3월 16일 처음 내건

의 총자산은 GDP의 8배가 넘는 기형적인 경제 구조

조건이 전례 없는 예금자 과세안이라는 점과, 모든

를 가지고 있었다. 자국의 경제 규모가 워낙 작기에

예금에 대한 과세는 피했으나 결국 고액예금은 보호

은행들은 풍부한 자금으로 친숙한 그리스에 투자해왔

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다. 2010년 키프로스 은행들이 보유한 그리스 국채가

키프로스는 금융과 관광 산업으로 먹고 사는 섬나

GDP의 1.6배에 달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라다. 그리스와 지리적으로 근접하고, 80만 인구의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그리스에 투자한 돈을 환수할

80%가 그리스인이다. 조세피난처이기에 해외에서 유

수 없게 되자 키프로스 은행들은 재정난에 빠졌고, ⓒ야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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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키프로스는 구제금융을 받을 처지에 몰렸다.

행은 폐쇄하고, 키프로스 은행은 구조조정을 당하게 된다. 이 구제금융안은 금융위기 해결을 위해 3월 22

예금에서 세금을 떼간다고?

일 의회에서 통과된 은행 구조조정 법안의 테두리 내 에서 실행 가능하기 때문에 별도의 의회 승인 절차가

키프로스는 이미 작년 6월에 구제금융을 신청해놓

필요 없다.

은 상태였다. 그런데 키프로스가 세간의 관심을 받기

한숨 돌린 키프로스, 그러나

시작한 것은 올 3월 유로그룹이 예금자 과세를 구제 금융의 조건으로 내건 직후였다. 유로그룹은 키프로 스가 구제금융 상환을 위해 10만 유로(한화 약 1억 5

이로써 키프로스에서 발생한 급한 불은 꺼졌다. 키

천만원)가 넘는 예금에는 9.9%의 세율로, 10만 유로

프로스 정부는 보유한 금을 매각하는 등 130억 유로

이하의 예금에는 6.75%의 세율로 세금을 부과하라고

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은행

요구했다. 10만유로 미만의 예금은 보호해준다는 EU

이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다. 키프로스 경제의 근간은

의 예금자보호원칙을 깬 것이다. 이자를 받아야 할

조세를 피해 유입된 해외 자금이었다. 이번 일을 계

예금에 대해 오히려 세금을 부과한단 소식은 즉각 키

기로 외국인들, 특히 러시아인들은 예금을 대거 인출

프로스 국민들의 반발을 샀고, 구제금융안에 반대하

해갈 것이다. 또 더 이상 해외 자금이 신뢰를 잃은 키

는 시위가 발생했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구제금융안

프로스 은행들을 찾아오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反) 독일 시위

은행 산업이 무너지는 것이다.

도 발생했다. “예금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이는 불공정하고 위험한 결정” 이라고 밝혔다. 탈세와 돈세탁을 노린 러시아 부호들의 돈이 조세피난처인 키프로스에 상당히 많

ⓒ유럽연합이사회

러시아도 나서서 반대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 들어가있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은행들의 예금액 680억 유로 중 240억 유로 이상이 러시아인들의 예 금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제금융안대로 키프로스가 예금에 대해 과세한다면 러시아인들은 20억 유로 가 량의 자금을 잃게 된다. 키프로스 의회는 3월 19일 구제금융안을 부결했 다. 그러나 유로그룹은 예금자들에게 분담금을 부과

키프로스 구제금융 사태는 유로존 전체에 시사하는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고수했다. 특히 독일의 경

바도 크다. 우선 EU의 예금자부담원칙이 앞으로 깨질

우 자국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 재정 긴축, 세율 인상, 금

세금이 다른 나라를 지원하는 데 쓰이는 것도 불만인

융 규제 강화에 더해 이제는 예금자에 대한 분담금 부

데, 그것이 러시아 부호들의 뒷주머니로 들어가게 되

과도 구제 금융의 조건으로 등장했다. 은행이 더 이상

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일 리 없다.

단순히 안전한 보관소가 아닌 것이다. 예금은 사실상

결국 모든 예금자에게 과세해 분담금을 물리는 방

은행에 대한‘투자’ 다. 그렇기에 은행이 망하면 투자

안은 철회되고, 10만 유로 이상의 예금액에 최대

금액을 잃게 된다. 키프로스 사태를 통해 유로존 회원

40%의 분담금을 부과하는 방안에 트로이카와 키프로

국민들은 이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스 정부는 합의했다. 고액 예금자들은 작은 화를 피 하려다 더 큰 한방을 맞은 것이다. 유로그룹도 이 구 제금융안을 승인했다. 부실자산 규모가 큰 라이키 은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newroot2@hanmail.net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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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들이키다

뜻 깊은 순수 가솔린, 마오타이 1915년, 파나마운하 개통기념 국제박람회, 증류주

는‘국주’ 로 인정받게 되었다.

에서 곡주까지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술들이 서로 자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고량주라고 불리는 마오타이,

신을 뽐내고자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의 코냑, 스코

청나라 초기에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마오타이라는 거

틀랜드의 위스키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는 가운데 정

리에서 수수를 원료로 하고 밀누룩을 써서 일종의 소

적을 깨고 술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직후에 들

주를 양조한 것이 시초였다. 그 후 개량을 거듭하여

리는 탄성은 술잔이 깨진 것에 대한 놀람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발효기간이 길어서 9개

깨진 술잔에서 풍기는 진한 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월이나 걸리며, 그 후 다시 2∼3년 숙성저장한다. 맛 은 짙으며 향은 오묘하고 마신 후 입안에 단맛이 남는

ⓒdelcampe-static

다고 알려져 있다. 알코올 함량은 약 53%. 소주, 맥주 일변도, 비싸게 먹어봐야 위스키가 끝인 한국의 술문 화에선 쉽게 선택받기 어려운 술이기도 하다.

홍군과의 인연 중국 남쪽에 위치한 구이저우성 쭌의(遵義)는 마 2010년 상하이 expo 파나마 마오타이 기념엽서

오타이의 원산지이자 공산당의 성지이기도 하다.

BC 135년, 한나라의 무황제가 귀주 모태주(마오

1934년 가을, 장개석의 제5차 공산당 토벌작전에

타이)를 최고의 술로 명명, 즐기면서부터 마오타이는

쫓겨 대장정에 나섰던 홍군이 1935년 1월 쭌의에 ⓒWordpress

중국 8대 명주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2000 년의 역사를 지닌 마오타이는 파나마 국제박람회에서 는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당시 중국의 낮 은 국격과 소박하다 못해 궁색한 포장은 심사위원들 의 눈엔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우연이었을까 의도 였을까 마오타이가 든 술잔이 깨어지는 작은 사건으 로 말미암아 중국의 숨은 명주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고, 단번에 금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국제 박람 회에서 코냑과 스카치위스키에 이은‘3대 명주’ 로이 름을 날리면서 이후 중국 국가 주요행사마다 사용되

10

‘순수가솔린’마오타이를 호쾌하게 원샷했던 닉슨, 사진에선 웃고있지 만 1992년 한중수교에 나선 노태우 대통령에게‘마오타이를 조심하 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대학생국제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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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다. 80만 대군으로 출발한 홍군은 채 5만도 남지않은 채 괴멸직전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4차 토 벌전 이후 홍군 지도부에서 밀려나 있던 마오쩌둥이 이곳에서 열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했다. 기

꿩 대신 닭 먹기

존 지도부의 실책을 비판하며 지지를 얻은 그는 결

술의 알콜 농도가

국 쭌의에서의 회의를 통해 중국공산당의 지도권을

57.15도씨가 넘어가

장악하게 되었다.

면 불이 붙는다고 한

마오쩌둥이 이끌었던 홍군은 쭌의의 마오타이거리

다. 마오타이는 이에

인근 적수하를 4번이나 건넜다. 그때마다 주민들은

약간 못미치는 53도

술을 갖고 와서 병사들을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홍군

를 자랑한다. 과연 순

은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쳤고 중국 공산혁명 역시 마

수가솔린이라 불릴만

침내 성공한다. 마오쩌둥 리더십의 출현과 마오타이

하다. 그렇다면 직접

의 위로가 있는 쭌의, 홍군은 중국전역을 장악한 이

마오타이를 시음해보

후에도 쉽게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 소매가격 35만원. 최근 시진핑의 사치척결 정책에 힘입어 16만원으

미중 수교를 향한 건배

로 떨어졌다고 한다. 떨어지면 뭐하나, 소주 한병 시키는데도 손이 떨리는 대학생에게 마오타이는

1971년 냉전, 힘이 강해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꿈에서나 먹을 술이다.

미국의 노력으로 본격적인 미중대화의 바람이 불었

하지만 술은 맛으로 먹는게 아니라 의미로 먹

다. 극비리에 파견된 키신저의 중국 방문으로 철의

는다고 했던가, 마오타이 대신 중국인 친구로부터

장막을 넘어 양국 정상의 만남이 주선되었고, 닉슨

한중대화의 의미로서 선물받아 개인적으로 소장

대통령은 당시 병상에 있던 마오쩌둥 대신 참석한 중

하고 있던 중국의 백주를 독자들을 위해 시음해보

국의 국부 저우언라이와 공식 환영 만찬을 했다. 미

기로 했다.

중의 공식적인 첫 만남의 건배주로는 국주 마오타이 가 제의되었다.

마오타이를 처음 맛본 닉슨의 보좌관의 마음이 이랬을까, 높은 도수에 지레 겁을 먹고 뜯어보지

당시 마오타이 주는 서방에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도 못했던 백주를 설레는 마음으로 뜯었다. 뜯자

이에 긴장한 닉슨의 보좌관들은 앞서 음용해본 뒤 높

마자 풍겨오는 그윽한 향, 알콜 속에 느껴지는 구

은 도수와 익숙지 않은 맛과 향에 강한 충격을 받았

수한 향이 방을 가득 채운다. 한중 수교의 풍미를

고, 닉슨에게 시늉만 하고 술을 마시지는 않도록 권

느끼며 한잔,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둔 긴박한 시

유했다. 회담에 동행했던《타임》 의 막스 프랑켈기자

기에 책상 앞에서 혼자 먹는 술이지만 옆에 마오

는 마오타이를 먹고 그 엄청난 도수에 놀라, 불 붙을

쩌둥과 닉슨의 웃음짓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것 같이 뜨겁다 라는 의미로‘순수 가솔린’ 이라는 표

중국에서 건너온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하면서 다

현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좌관들의 우려에도 불

시 한잔, 한나라 무황제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감

구하고 닉슨은 건배와 동시에 마오타이를 호쾌하게

격스러움 때문인지 목이 쓰려서인지 잘 모르겠지

들이켰다. 잠깐 얼굴을 찡그렸을 뿐, 곧 웃음을 되찾

만 눈물이 시야를 흐린다. 백주가 그냥 커피라면

은 닉슨. 닉슨의 시원한 원샷은 미중관계 호전의 신

마오타이는 티오피일 것이다. 티오피면 어떠하고

호탄이 되었다.

그냥 커피면 어떠하리 내 입에는 중국의 어떤 명 주보다 맛있는 백주였다.

박연서 (건국대 경영) aronax09@naver.com

역사를 들이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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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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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특집 핵 Iran 무엇인가?

이란 핵, 그리고 미국의 심정 14 1인자의 속내 18 이란과 불편한 이웃들 20 Focus in│핵무기도 다다익선? 22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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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핵, 그리고 미국의 심정 1, 2기 통틀어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월 22일 이란의 핵무장을 용 인해선 안 되는 이유 네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이란의 핵무장은 핵 테러 위협을 증가시키고 핵 비확산 체제를 약화시키며, 중동 지역에서의 군비경쟁을 초래하고, 무책임한 정부(이란 정부)를 대담하게 만들 것” 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오바마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오바마가 제시한 네 가지 이유는 얼핏 원론적인 이야기로 보이나,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이란 핵개발 문제의 본질 등 여러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

이란 핵무장 = 핵 테러 위협 증가?

들을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또 미국은 9·11 테러 당시 이란이 알 카에다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우선 오바마는 이란의 핵무장은 핵 테러 위협을 증

고 본다.『9·11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The 9·11

가시킨다고 했는데, 이는 이란 정부가 테러리스트들

Commission Report)』 는 이란 국경 경비대가 9·11

을 지원한다고 보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한다. 실제

테러 비행기 납치범 8명 이상의 미국행을 도왔다고

로 미국은 이란을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한다. 1979년

밝혔다. 이란의 핵 무장이 핵 테러 위협의 증가로 직

이후 이란 혁명수비대는 주변 지역의 테러단체를 지

결되는지에 대해선 이란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

원한다고 알려져 왔다. 이란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라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미국의 입장에선 이란의

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도 지원하고 있는데, 미국은 이

핵 무장은 분명 핵 테러 위협을 증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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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NPT가 흔들흔들

체적으로 우라늄을 농축한 권리를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바마는 다음으로 이란의 핵 무장이 핵 비확산 체 제 약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은 핵확산금지조

누가 군비경쟁을 초래했나?

약(NPT)가입국이다.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한 핵 비 보유국의 핵무장은, 그 국가가 어느 국가이든 상관

중동 지역의 군비경쟁을 초래한다는 논리 또한 이

없이 핵 비확산 체제를 흔든다. 그렇기 때문에 오바

란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논리 자체만

마의 발언은 공연해 보인다.

본다면 오바마의 발언은 타당하다. 이란의 핵무기 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

발은 이스라엘에게 위협으로 다가가고, 이스라엘은

활동인데, 이 자체는 사실 핵확산금지조약에 위배되

핵무기를 포함한 군비를 증강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 않는다. 문제는 이란이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국의

군비 증강은 또 다시 같은 이유로 이스라엘에 적대적

의무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시설 사찰을 불

인 주변 아랍국가들의 군비 증강을 낳을 가능성이 높

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부터 국제원자력기구

다. 중동 지역 전체가 군비증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 는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발언 이면에는 이란을 바라보는 미국의 이중성이 깔려 있다. 바로 이스라엘 의 핵무장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적대적 아랍국가들에 둘러 쌓여 있고, 영토의 크기도 작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느끼는 안보 위협은 상당하고,‘최강의 무기’ 나 다름없는 핵무기 를 통해 안보를 확보하려 했다. 이스라엘은 비록 핵 무기 보유를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으나 이스 라엘의 핵무기 보유는 국제사회에서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고, 미국은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줄곧 대이 란 적대시 정책을 펴 왔다. 이런 이유로 이란은 핵무

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이란에게 핵

기 개발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시설 사찰을 요구해 왔다. 특히 핵실험 의혹이 제기

그런데 미국은 두 나라의 핵개발에 대해 다른 대

된 파르친 기지에 대한 사찰 요구를 거듭하고 있다.

응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50년대 후반 이스라엘

하지만 이란은 파르친 기지는 재래식 군사시설일 뿐

의 핵무기 개발 움직임을 파악한 이래 지금까지 이스

이고, 자신들의 핵 프로그램은 원자력 발전과 의료목

라엘의 핵무기 개발은 묵인해주고 있는 반면, 이란

적의 사용 등 평화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며 이를 지

의 핵무기 개발 의혹에 대해서는 유엔 안보리를 통한

속적으로 거부해 왔다.

제재나 자국 국내법을 이용한 제재 등 강경한 대처를

이란의 사찰 거부는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핵문제

보여주고 있다. 이란의 핵무장이 중동 지역의 군비

에 대해 떠올리게 한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

경쟁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란의 핵무

찰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면서 은밀히 핵무기 개발을

장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이스라엘의 핵무장이라고

진행했다. 북핵 문제로 골머리를 이미 썩고 있는 미

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오바마의 이란을 향한 이 발

국이 이란의 사찰 거부를 곱게 볼 리 없다. 그렇기에

언에는 이스라엘의 핵무장 이란의 핵무장을 각기 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원자력발전에 필요한 사용전

른 시선으로 보는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핵연료봉을 제공해줄 것이니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이란은 핵연료를 외국 에서 들여오게 되면 해당 국가에 종속되게 되므로 자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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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국일보

지하 핵실험 의혹을 받고 있는 파르친 기지

대담해질 이란

이란이 북한보다 상대하기 어렵나?

마지막으로 오바마는 이란의 핵무장이 무책임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우리에게 북핵 문제를 상

정부를 대담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을 자국

기시킨다. 현재 상황만을 봤을 땐 북한이 이란에 비

민과 다른 나라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표현했는데, 이

해 핵무기 완성에 더 다가가 있기 때문에 북핵 문제

는 국민들이 경제 제재로 인해 피해를 보는데도 서방

가 이란 핵 문제보다 미국에게 더 까다로운 문제일

국가들의 요구인 핵시설 사찰 허용과 우라늄 농축 시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땐 이란의 핵 문

설 폐기를 거부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함으로써

제가 더욱 부담스럽다. 이란에게 핵무기가 가지는 의

다른 나라에 피해를 입히고 있는 점을 비판한 것이

미는 북한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보유는

다. 현재 이란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핵무장한 이

기본적으로 북한에게 안보 강화의 수단이지만, 하나

스라엘로 인해 안보 위협에 처해 있다. 이란이 핵무

의 협상 카드이기도 하다.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북

장을 한다면 안보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것

한은 핵무기 개발을 두고 협상 테이블 위에서 그것을

이고, 이를 배경으로 이란은 과감한 대외정책을 펼

포기시키려는 미국에게서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얻

수 있다. 말 그대로 대담해질 수 있고, 헤즈볼라나 하

어낼 필요가 있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조금씩 포

마스 등에 대한 지원도 강화할 수 있다. 미국은 이 점

기하는 대가로 경수로, 중유 지원 등 경제적 이익과,

을 우려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등 정치적 이익을 얻어내려고 시도해왔다. 미국은 북한의 요구를 들어 줌으로써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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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한의 핵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강력

의 핵 시설을 선제공격하자고 주장한다. 이란도 선제

한 제재를 통해 북한을 옥죄어 북핵 포기를 이끌어

공격에 대해선 강하게 보복할 것임을 시사한다. 하메

내는 옵션도 있다. 북한의 가난이 대북 제재의 효과

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3월 21일“이스라엘이 군사

를 증폭해주기 때문이다.

공격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이스라엘의 도시 텔아

반면 이란은‘협상 수단으로서의 핵무기 보유’ 가

비브와 하이파를 궤멸시킬 것” 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아닌‘안보를 위한 핵무기 보유’ 만을 목표로 한다.

선제공격은 곧 전쟁을 의미한다. 전쟁은 그 자체만

미국의 적대적 자세와 핵무기를 다량 보유한 이스라

으로 지양해야 할 대상이다. 세계 경제에 몰아칠 후

엘에 맞서 안보 추구를 위한 핵무기가 필요한 것이

폭풍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미국은 이미

다. 때문에 미국은 경제적 유인을 통해서는 이란이

이라크전에서 실패를 겪었고, 그로 인한 극심한 재정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하기 힘들다. 실제로 이

적자를 떠안고 있기 때문에 전쟁은 선택지에서 배제

란은 핵 개발 프로그램 포기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고

될 것이다.

있지도 않고, 협상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어내려고 하 지도 않는다.

우선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 중이라는 확실 한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오바마가 제시한 네 가지

미국이 강력한 경제 제재라는 수단으로 이란의 핵

이유들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

포기를 유도하고는 있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다. 만

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확실하게

성적인 빈곤국가인 북한과 달리 이란은 경제 규모,

밝혀진 것은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아

영토, 자원 측면에서 훨씬‘강한’나라이기 때문이

니라, 농축 우라늄을 비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란

다. 이란의 GDP는 약 4900억 달러로, 북한 GDP

이 핵무기를 원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기정사실화

400억 달러의 10배가 넘는다.

되고 있지만, 이란은 자신들의 우라늄 농축은 평화적

앞서 말했듯 북한은 가난이라는 약점이 있기에 핵

이용을 위한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확실한

무기 개발이 최종적으로 완료되더라도 북한을 통제

증거가 없기에 이란의 이런 발뺌 앞에서 미국의 주장

할 수단이 있다. 그러나 이란이 일단 완성된 핵무기

이 힘을 잃는 것이다.

를 보유하면 미국으로선 그것을 포기하게 할 마땅한

미국으로서는 이스라엘이 공세적 자세를 누그러뜨

방책이 없다. 그렇기에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리게끔 외교적 노력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실적

완수하기 이전에 이란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노력할

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는 것

것이다.

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이스라엘이 주변국의 안보 불 안을 야기하지 않도록 종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란

미국, 핵 확산을 막아라

을 직접적으로 위협해 이란에 핵무기 개발 동기를 제 공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핵무장과 공세적 태도이기

경제 제재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

때문이다.

다. 미국과 EU의 경제 제재로 물가가 1년 새 40%나 치솟고 리알화 가치가 폭락했음에도 이란은 버틸 힘 이 충분하다. 비석유제품 수출을 대폭 늘렸고, 중국 과 인도 등은 여전히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P+1(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과의 협상 테이 블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경제 제재를 더욱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이 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수하기 전까지 그 효과가 나타 날지도 미지수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한 혹자들은 이란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newroot2@hanmail.net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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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의 속내 4월 6일에 있었던 이란과 안보리의 핵 협상은 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이란 대선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전문가들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입김이 대선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서방과의 외교 문제와 핵 문제는 신임 대통령이 떠맡게 될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AFP

ⓒEPA

ⓒIslamic Republic News Agency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샤이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은 최고 종교지도자와 대통령이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정부 형태를 갖게 되었다. 보통의 입헌군주정과는 달리, 이란의 최 고지도자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와 외교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이자 종신 직책이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며, 국민 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최고지도자에 의해 승인 받는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며, 현 대통령은 강경 보수파인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맡고 있다.

계속된 불발

권력자들의 우정

지난해 8월과 올해 2월 회담이 모두 결렬되고, 미

현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는 후보 시절부터

국을 비롯한 유엔 안보리가 크게 기대를 걸었던 4월

강경한 보수주의자였고, 검소하고 겸손한 이미지를

6일 회담조차 무위로 돌아가면서 서방 국가들과 이

적극 활용해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일

란의 관계는 더욱 냉랭해졌다. 캐서린 애슈턴 EU 외

반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2005년 당

교안보 고위대표는“서로 견해차만 분명히 확인할 수

선 직후부터 서구, 특히 이스라엘에 대해 공격적인

있었다” 며 의견을 좁히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의 강경 외교는 단순히 말에서

특히 이번 회담에서는 안보리 측에서도 고농축우

그치지 않고 우라늄 농축 강행과 핵 프로그램 진전

라늄의 제한적 생산을 허가하는 등의 양보안을 제시

등의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는데, 때문에 이란은

했음에도, 핵 개발 권리 등을 완강하게 주장하는 이

국제원자력기구 및 서방 국가들과 꾸준한 마찰을 빚

란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란 핵 문제

어왔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에 대한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

암묵적인 지지와 동조가 뒷받침되어있었다.

가 나오고 있다. 국제 사회는 6월에 있을 이란 대선이

그러나 2011년 접어들면서 최고지도자와 대통령

교착 국면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돌파구가 되기를 기

사이의 갈등이 점차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하메

대하고 있다.

네이 역시 대외적으로 강경책을 추구하고 대내적으로 는 보수 노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아흐마디네자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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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정치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갈등은 오히려 권력

로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가 쥐고 있다. 최고지도자

이 최고지도자와 대통령에게 불균등하게 배분되고 대

는 대선 후보 등록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

통령이 이에 반감을 가지면서 생겨났다.

며, 동시에 행정부를 제외한 모든 부처(사법부, 군부

이란에 대한 미국 및 국제사회의 제재가 그 수위를

포함)를 통솔하기 때문이다. 하메네이가 마샤이의 후

높여가면서 악화되는 경제 상황에 책임질 사람이 필

보 등록을 반대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최고지도자가

요하게 되자, 하메네이는 비난의 화살이 자신이 아닌

강경파 종교지도자들과 군부를 은근히 지원하고는 있

대통령을 향하도록 유도했다. 최고지도자의 입장에서

지만, 동시에 권력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 역시 크

는 평소 아흐마디네자드의 도발적이고‘튀는’언행

게 경계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근 하메네이는 대통

이 불편하기도 했다. 반면, 아흐마디네자드는 최고지

령에 대한 의회의 심문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아흐마

도자 쪽으로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과 언제든 토사구

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메네이의 강력한 입

팽 당할 수 있는 본인의 처지에 불만을 느꼈고, 이를

지는 강경파 종교 지도자들의 독주를 막을 수도 있지

극복하고자 자신의 권력 기반을 새로이 다지기 시작

만 동시에 새 대통령의 자율성을 제한할 수도 있어,

했다. 종교 지도층과 군부 전통주의자들은 이를 좌시

‘대통령이 누가 되든 결국 하메네이의 뜻에 모든 것

하지 않고 일찍이 그의‘이단성’ 과 부패를 거론하며

이 좌우되는 게 아니냐’ 는 말도 나온다. 최고지도자

점차 현 정부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 헤시마톨라 팔

의 의중에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하메네이는

라하트피셰 전 이란 국회의원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파 싸움이 국익을 저해하고 있다’ 는 모호한 입장

“이란의 모든 대통령들은 기존 정치 파벌의 도움으로

만을 취하고 있다.

임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권력을 쥐고 나면 자신만의 파벌을 만들게 되고, 말로는 자신들이 국민을 대표한

국제사회는 신중히 접근해야

다고 주장한다” 며 비꼬았다. 이라크와의 전쟁 직후, 피해 복구와 경제 발전에

열쇠는 1인자의 손에

대한 이란 국민의 기대에 힘입어 1997년 당선된 모하 마드 하타미 전 이란 대통령은 미국 및 서방과의 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강경파 종교

계 개선을 모색했다. 국내 강경파와의 알력을 겪으면

지도자들과 군부 전통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최근 아

서도 그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대화를

흐마디네자드는 사돈지간이자 전 부통령이었던 에스

원한다’ 는 진지한 의도를 클린턴 정부에 전달하는 데

판디아르 라힘 마샤이를 차기 정권 후임자로 내세우

성공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서방과의 대화를 묵인하

고 지지자를 끌어모으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마샤

는 듯했던 하메네이가 태도를 강경하게 바꾸면서 상

이는 과거‘이슬람으로서의 이란보다 국가로서의 이

황은 다시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개혁파

란이 우선’ 이라는 발언으로 인해 강경파 종교지도자

의 의도를 완전히 좌절시키고 국내 강경 보수파의 입

들로부터“국가 안보를 해치는 중대한 범죄자” 라는

지를 크게 강화시킨 것은 9.11 테러 이후 이란을‘악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세계에 이란의 적국은 없으

의 축’ 으로 규정한 부시 행정부였다.

며, 심지어 이스라엘과 미국도 이란의 친구” 라고 밝

현재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저지하려는 각국의 노

혀 서방 세력으로부터 기존보다 유연한 외교 정책을

력은 마치 안개 속을 헤집는 듯하다. 특히 모든 권력

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받는다. 강경 보수파인 아

이 최고지도자의 손에 있음에도 그의 속마음을 알 길

흐마디네자드가 이러한 마샤이와 손을 잡는데는 마샤

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뿐만 아니라, 확실한 아군을

그러나 국제 사회는 이 답답함으로부터 섣불리‘강

만들고 지지기반을 온건파 및 개혁파까지 넓히려는

경’ 이라는 답을 내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의도가 숨어있는 듯하다. 이 복잡한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열쇠는 전적으

김만희 (고려대 국문) manhee87011@naver.com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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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불편한 이웃들 중동 국가 중에서 이란은 인구도 많고 땅덩이도 두 번째로 크다. 페르시아 만을 끼고 있고, 중동 지역에 서도 가운데에 위치해 사방으로의 통로 구실도 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 으며, 특히 석유가 풍부해 전세계에서 이란이 차지하는 석유 공급량은 5%에 달한다. 이는 이란 혼자서도 세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큼의 비율이다. 이란은‘이란 혁명의 수출’ 을 대외정책의 기조 로 삼고 있다. 이란 혁명은 서구 세력으로 대표되는‘지배층’ 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정치적인 이 데올로기면서, 동시에 시아파 이슬람교의 전파라는 종교적인 목적도 포함한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완전 박멸을 위해 굳건히 존재한다”이란 합참의장 “이란의 핵 보유는 용납할 수 없다”이스라엘 합참의장 “우리가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해 세계 3차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다”이란 공군참모총장 “이란 역시 지도에서 사라질 것임을 깨달아야”이스라엘 부수상 “(이스라엘에) 발사될 미사일의 개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이란 공군참모총장 “국제사회가 이란을 멈추지 못한다면 우리가 단독 군사행동 나설 것”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이스라엘과 미국 역시 우리의 친구”에스판디아르 라힘 마셰이 “비이성적인 발언이다”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오랜 숙적 이스라엘

대해 이란은“오만의 세계(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 하는 모든 세력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 며, 하마스에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란 혁명 이후 줄곧 적

대한 경제적·기술적·군사적 지원의 정당성을 주장

대적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들의 땅

했다. 현재까지 양국의 본토에서 공개적으로 전투가

을 빼앗아 사리사욕을 채우는‘악성 종양’ 이며, 하루

수행된 적은 없었고, 무력 충돌에 의한 사상자는 대

빨리 중동 지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분 하마스나 헤즈볼라 등 제3의 테러단체를 지원

이란의 태도는 완고해서, 1979년 이래 이러한 입

하거나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2010년 이란의

장에서 벗어난 대통령과 최고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

핵물리학자들이 수 차례에 걸쳐 암살되는 사건이 벌

었다. 반대로 이스라엘은 이란이 팔레스타인 무장 테

어졌는데, 정황상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모사드’

러 단체인 하마스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국제

가 주도했다고 추측된다. 이란은 그 보복으로 각국의

테러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이스라엘 대사관에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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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김흥식,『세상의 모든 지식』(서해문집, 2007)

수니파와 시아파 분포

가깝지만 먼 이웃들

리아와 레바논 역시 시아파 국가였지만 둘 다 외부 상 황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특히 시리아는 소수지만

이란은 이슬람교의 분파인 시아파가 정권을 잡고

집권층이던 시아파와 다수지만 피억압세력이던 수니

있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다. 시아파는 전체 이슬

파 사이의 내전이 장기화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 이

람교도의 10% 정도만을 차지하며, 그 대부분이 이란

란의 버팀목이 되어줄 아군은 사실상 없다.

과 이라크에 거주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이슬람 국가들이 모두 지리적으로도 인접해있고 문화도 비

이란의 지푸라기

슷해보여 얼핏 형제지간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수 니파 국가들에게 시아파 이란은 매우 거북한 존재다.

중국과 러시아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속되어 있으

수니파의 선봉장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는 미국

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노선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이

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란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미국의 경제 제재

분쟁에 대해서도 대체로 미온한 입장을 취한다. 특

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 두 나라는 이란과의 거래를

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지역의 비핵화에 찬성하

지속해왔고, 이는 결과적으로 제재의 효과를 크게 감

며, 지역 내 이란의 영향력이 줄어들기를 바라고 있

소시켰다. 동시에 미국의 압박은 미국을 견제할 새로

다. 30년 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으로 인해 이란

운 패권 블록의 등장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중국과

과 국교가 단절되었던 이집트는 최근 친미 무바라크

러시아에게는 이러한 정치적인 요인 외에도 경제·

가 퇴임하고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면서 변화의 조짐

기술 분야에서의 교류를 통해 동반 성장을 꾀하겠다

을 보였다. 그러나 국가 주도로 시도되는 관계 회복

는 의도가 있다. 특히 석유 수요가 나날이 증가하고

이 민간에서는 종교 분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오히려

있는 중국에게, 이란의 갈 곳 없는 석유는 구미가 당

큰 반발을 사고 있다.

기는 아이템이다. 외교룰 통해 이란 핵 문제를 타개

이라크의 경우 신도 수는 시아파가 50%를 차지 하지만, 40%의 수니파가 정권을 쥐고 있다. 거기에

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1980년 이란-이라크전 이후 양국은 매우 불편한 관 계에 있다. 서로 상대국 내부에 있는 반정부 무장단체 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시

김만희 (고려대 국문) manhee87011@naver.com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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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 cus in ⓒDvar Dea

핵무기도 다다익선? “핵무기 확산: 많은 게 낫다.”언뜻 듣기에 황당한 이 말은, 사실 유명한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가 1981년에 발표한 글의 제목이다. 냉전의 종식은커녕, 소련의 1979년 아프가니 스탄 침공으로 인해 이른바‘신냉전’ 에 대한 우려가 팽배하 던 시절이었다. 개혁·개방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기까지도 아직 4년이나 되는 시간이 남았다. 그런 시절에 월츠는 용감하게도,“핵을 가진 국가가 더 많으면 세계의 장 래가 더 밝아지리라고 믿을 만한 증거를 여럿 발견했다” 면서 “이런 보기 드문 결론” 의 근거를 여섯 가지 제시했다. 도대체 어떤 논리를 댔을까?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

더욱 안전해질‘핵 있는 세계’

형” 을 더더욱 깰 수 없게 된다.

이유 하나, 국제 세계는‘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

지를 줄인다. 다극 체제, 그러니까 강대국이 여럿 존

긴다’ 는 원칙이 가장 철두철미하다고 알려져 있다.

재하는 체제라면 각각의 강대국은 다른 강대국끼리

국가의 존망과 같은 국익 문제를 위해 세계 정부라는

서로 손을 잡을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한다. 하

공권력이 출동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월츠는 이럴 때

지만 양극 체제라면 미국과 소련이 주판을 두드리며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의 영향력이 막대하게 작용하

머리를 싸맬 일은 없다. 이 세상에는‘나’ 와‘너’ 만

리라고 봤다.‘경찰’ 까지는 아니라도‘보스’ 쯤 된다

있을 뿐이니까. 물론 소련으로부터 안보 불안을 느낀

고 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나 소련은 핵확

영국·프랑스 등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게 되

산 방지를 위해 뛰어다니기보다는 신중하게 행동하는

었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데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행동할 리는 만무하다. 여전히 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이유 셋, 전략적 차원에서 양극 체제는 오판의 소

이유 둘, 미국과 소련의 핵탄두는 이미 너무 많다.

미국의 역할은 압도적이라, 서유럽은 계속해서 미국

소련은 197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핵전력을 무섭게

에‘매달리는’형국이니까. 결국 양극 체제에서 핵이

따라잡아, 설령 미국의 핵 선제타격을 받는다고 해도

확산된다고 해 봐야 세상이 불안해지지는 않는다.

보복이 가능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됐다. 이를‘2

이유 넷, 핵무기는 파괴력이 너무나도 막대하기 때

차 타격 능력’ 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미·소 간에는

문에 핵을 가진 국가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물

‘내가 핵을 쏘면 상대도 나에게 쏘겠지’하는“공포

론 전쟁으로 얻을 게 있었던 시절에는 다른 나라에게

의 균형” 이 생겨난다. 이 균형에서 강대국 미·소도

피해를 입힌다는 건‘남는 장사’ 였다. 봉건국가에게

감히 뒤흔들 수 없는“평형” (equilibrium)이 생겨나

부의 원천은 대개 토지였으니까 말이다. 자국의 토지

며, 그보다 못한 약소국은 핵을 가진다고 해도 이“평

생산성 향상을 기다리느니 다른 나라에게 상처를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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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고 토지를 빼앗아 오는 일이야말로 뛰어들 만한 모

도’ 다. 현실을 반영하는 척하지만 현실의 정확한 모

험이었다. 그러나 핵무기를 쓰면 재래식 무기와는 비

습을 파악하는 데는 무용지물이란 소리다. 월츠의

교도 안 되는 피해를 입히게 될 텐데, 그렇게 피해를

‘대축척 지도’ 가 미처 보여주지 못하는 세부 문제,

입히고 나면 도대체 뭘 얻을 수 있나? 이유 다섯, 핵무기는 사실상 방어용 무기다. 어떤

즉 정책결정자의 사소한 실수나 기계의 오작동으로 핵전쟁이 시작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들은 한 나라가 총칼이나 미사일로 공격 받을 때, 핵무기로 그 무기와 부딪뜨릴 수 없기 때문에 핵

그래도 내 말이 맞다니까

무기는 방어용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핵무 기는 보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안전을 담보할 수 있

하지만 자신의 오랜 주장을 수정하지 않기로 유명

다고 볼 수도 있다. 핵을 가지고 있으면 외국에서 감

한 월츠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태도다. 후대의 역

히 그 나라와 싸워 이기겠다는 생각 자체를 단념하기

사가가 오늘날의 핵확산 방지 이슈를 서술하면서, 월

때문이라는 것이다. 월츠는 어찌 보면 핵무기야말로

츠의 통찰력에 얼마만큼의 점수를 줄지는 미지수지만

“방어의 이상” (defensive ideal)에 도달할 수 있는 방 법이라고까지 말했다. 이유 여섯, 새로 핵을 보유하게 될 나라들은‘학습

말이다. 월츠는 지난 2012년《포린 어페어스》7·8월 호 에 기고한 글에서도 언뜻 도발적인 제목의 주장으로

효과’ 를 나타낸다. 월츠에 따르면‘신생 핵국가’ 는

눈길을 끌었다.“이란이 핵폭탄을 가져야 하는 이유”

결코 책임감 없이 행동하는‘문제아’ 가 될 수 없다.

(Why Iran Should Get the Bomb)였다. 냉전이 끝

이미 핵을 개발한‘선배 국가’ 의 사례를 참조하면서

난 뒤에도 중동의 지역 안정을 위해서는 자신의 오랜

그 자신도 핵 개발과 보유를 추진하면서 조심스러운

주장이 계속 유효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란이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국제 세계에

핵을 가져야 이스라엘과 서로 억지력을 가질 테니 이

는 국가도 대중교육 기관도 없지만, 여전히‘선배 국

란에게 핵을 주자는 게 그의 논지다. 자신의 눈에는

가’ 의 모습을 따르면서 나름대로의‘사회화’ 가 진행

핵 보유 이란이 가꿀 중동의 안정이 선한데, 왜들 불

되는 셈인지도 모른다.

안해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다.“아랍 세계, 유럽,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의 정책결정자들과 시민들은

여행자가 쓰기엔 불안한‘대축척 지도’

핵 능력이 생겨나는 데는 안정도 생긴다는 점을 역사 가 보여왔음을 상기하고 안심해야 한다.”그는 1981

케네스 월츠는 오늘날까지도‘핵이 많아질수록 세

년에 쓴 자신의 논문 제목을 알게 모르게 인용하며

상이 안전해진다’ 는 주장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있

이 글을 마친다.“핵무기라면, 늘 그래왔듯이 지금도,

다. 경제학에서 인간을‘합리적 동물’ 로 보듯이, 월

많은 게 낫다.”

츠는 국제 세계의 국가를‘합리적 인간’ 과 유사한 것 으로 본다. 어떤 나라가 설령‘불량 국가’ 라 하더라 도, 모든 나라는 기본적으로 전쟁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합리적 인간’ 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핵이 확산될 수록 세계 국가들이 서로를 성급하게 공격할 가능성 이 낮다. 그의 주장은 직관과는 반대되지만 크게 보 면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된다. 물론 이런 주장에도 난점은 있다. 가장 흔한 반박 은‘이론은 이론일 뿐’ 이라는 말이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린다면 사회과학 연구란 기껏해야‘대축척 지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intransigere@gmail.com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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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속에서 꺼낸 근대인

마오만 나와도 놀라지 마오 ⓒWikipedia

1999년 중국에서 5차 인민폐가 발행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화폐에 보이는 얼굴은 전부 마오쩌둥뿐 이다. 1위안, 5위안, 10위안, 20위안, 마지막으로 100위안까지.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존경 받는 줄은 알았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Serbagunamarine

단조로운 앞면과 달리, 5차 인민폐의 뒷 면에는 각기 다른 중국의 명소들이 그려져 있다. 100위안의 뒷면에는 인민대표대회 당, 20위안의 뒷면에는 계림 산수가 그려 져 있는 등 앞면보단 뒷면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4차 인민폐의 뒷면에도 마찬가 지로 황하 등의 명소가 그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1893년 후난 성에서 태어나 1920년

동력 중심의 공업화는 목표한 경제성장을 가져다 주

대부터 공산당의 핵심인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 못했고, 공업노동력을 위해 농민들을 강제로 차

1934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1937년 2차 국

출했던 것이 결국 농업생산량의 급감을 가져왔다.

공합작 이후부터 항일전쟁을 전개했다. 일본의 항복

결국 수천만 명의 아사자만 남긴 채 대약진운동은

후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1949년,

실패했다.

‘중화인민공화국’수립을 선포하였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당의 주도권을 쥔 실용주의

마오쩌둥은 1958년 중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대약

노선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축출하기 위해 마오

진운동을 시작하는데, 노동집약적 공업을 중심으로

쩌둥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 사회주의 운동을 일

공업생산력을 증대시켜 경제력으로 영국, 미국을 따

으켰다.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그는 반

라잡는 것이 그 목표였다. 하지만 기술 발전 없는 노

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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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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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중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었고 중화

장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마오쩌둥에 대

인민공화국을 수립했기에 중국인에게‘국부’ 로 추앙

해 비판적이었던 덩샤오핑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받는다. 그러나 칭송의 목소리가 높은 만큼 그에 대

점을 들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5차 인민폐가 건국

한 비판도 많다. 마오쩌둥 사후 대약진운동은 중국의

50주년을 기해 발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건국

경제와 문화를 진보시키기는커녕 엄청나게 퇴보시켰

을 기념하는 만큼‘국부’ 나 다름없는 마오쩌둥이 빠

다는 비판을 샀다. 문화대혁명도 마찬가지로 비판의

질 수 없을 것이다. 또 건국을 기념하며 중국의 통합

대상이 되었다. 1981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문

을 꾀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의도도 작용했다. 화폐

화대혁명을“극좌적 과오” 로 규정하고“이러한 과오

를‘마오쩌둥으로 대동단결’ 시킴으로써 국민들의 통

가 오래 지속된 데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에게 있다”

합을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이‘그랜드슬

고 발표했다.

램’ 을 달성한 5차 인민폐가 다양한 소수민족 일반인

이러한 비판을 반영해서인지, 덩샤오핑 집권기 동 안 화폐에 미치는 마오쩌둥의 지배력은 미미했다.

들의 초상이 그려진 4차 인민폐보다 중국의 통합에 더 기여할지는 의문이다.

1987년에 발행된 4차 인민폐에서는 마오쩌둥이 아 닌, 일반인들이 주인공이었다. 50위안 지폐에는 노 동자·농민·지식인의 초상화가, 10위안, 5위안, 1 위안, 5쟈오, 2쟈오, 1쟈오 지폐에는 한족, 티벳족, 부이족, 조선족 등 중국의 다양한 민족의 인물 초상 화가 그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100위안 지폐에 등장 하는데, 그나마도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와 함 께 그려졌다. 초상화도 아닌, 옆모습 부조상이 그려 져 있다. 4차 인민폐 시절을 생각하면 5차 인민폐에

Tip

현재 중국에서는 4차 인민폐 와 5차 인민폐를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4차 인민폐는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다.‘위안’이 기본 단위 로 사용되지만‘쟈오’와‘펀’도 있다. 1위 안=10쟈오=100펀 이다. 그러나‘펀’은 사용되지 않는다.

서 마오쩌둥의 위상은 중국의 경제적 부상만큼 엄청 이근호 (연세대 정치외교)

나게 올라갔다. 그렇다면 5차 인민폐에서 마오쩌둥이 모든 지폐를

newroot2@hanmail.net

지갑 속에서 꺼낸 근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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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절의 불안한 침묵 뒤에서 ⓒ로동신문

연설 중인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사진은 2012년 12월 21일의 모습

4월 15일. 김일성 출생 101주년이었지만 눈에 띄는 사건은 없었다.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추가 도발 을 이야기하던 정보 기관과 언론의 예측은 빗나갔다. 1년 전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열병 식 연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태양절’기념 행사 역시 의외로 조용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번에는 공개 석상에서 연설을 하지 않은 것이다. 2012년 4월처럼 논문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그가 입을 열기까 지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의제를 제시하라,‘에세이 정치’

‘사회생명체’ 로 상상하는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는 흔히‘뇌수’ 에 비견된다. 나라가 인체라면,‘수령’ 은

지난 2012년 4월, 김정은 제1위원장은 4월 15일

그 인체를 조종하는 중앙통제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연설 전후로도 꽤 활발하게‘로작’ 을 발표하는 행보

곳에서 최고 지도자는 진리를 발견해낼 수 있는 독점

를 보이기도 했다.‘로작’ 이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적 지위를 점유한다.‘로작’발표는 사상을 통제하고

발표하는 말글을 이르는 말로, 당과 인민을 위한‘강

정치적 권위를 재확인하면서, 정책적 의제를 던지는

령적 지침’ 을 담고 있다고 선전된다. 국가를 일종의

기능까지 한다. 북한의 정치는 어떤 의미에서‘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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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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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치’ 인 셈이다.

설을 행하기도 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4월 6일“위대한 김

우리는 김 제1위원장의 이러한 말글이 2013년에

정일 동지를 우리 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높이 모시고

어떤 의미를 띠게 될지를 알기 위해 잠시 2012년 겨

주체혁명위업을 빛나게 완성해나가자” 는 글을 발표

울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했다. 4월 13일‘광명성 3호’발사와 4월 15일 태양 절 행사 직후인 4월 20일에도 그는“위대한 김일성

수령이 지도하는 고구려 민족

동지는 우리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령이시다” 라는 글 을 펴냈다. 물론 이 글의 전문이《조선중앙통신》 에서

수령의 말글이 사상과 정책을 지도하는 모습은 지

6월 12일 뒤늦게 공개됐기 때문에, 정말로 김정은 제

난해 말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사태

1위원장이 이를 4월에 작성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를 포착하지 못하는 국내 언론의 오보가 혼란을 가중

하지만 이 두 편의 글을 발표함으로써 그가‘선배

시켰다. 작년 12월 경 국내 일부 언론에서는 영국 등

수령들’ 을 우상화하면서 자신이 그 적통을 이을 후계

외신을 인용해 북한이“유니콘 은신처” 를 찾았다고

자임을 자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김 제1위원장은

발표했다고 전했다. 심지어《조선일보》 는 온라인 보

4월 20일에 발표했다는 논문에서“수령님께서는 혁

도에서“유니콘은 유럽에서 힘과 순결을 상징하는 가

명위업계승에서 기본은 수령의 후계자문제라는것을

공의 동물로…… 전설 속 동물이기 때문에 세계 어디

천명하시고 이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시였다”

에서도 유니콘의 서식지가 발견된 적은 없다” 고‘친

고 선언했다.“혁명전통을 순결하게 계승발전시키며

절한’설명까지 부연해 놓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하

새 세대들을 혁명의 계승자로 튼튼히 준비시키는 사

나의‘해프닝’ 이었다. 실제 북한 언론에서는‘유니

업에 큰 힘을 넣으시여 훌륭한 결실을 가져오게 하시

콘’ 이라는 표현조차 쓰지 않는다.

였다. 수령님의 뛰여난 선견지명과 현명한 령도에 의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조선중앙통신》 에 따르면

하여 혁명위업계승문제해결의 빛나는 모범이 창조될

지난 해 11월 29일,“최근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수 있었다.”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이 김일성이 마련

연구사들이 평양의 모란봉 청류벽일대에서 고구려의

한 후계의 원칙에 이미 마련돼 있었다는 논리다.

시조왕인 동명왕(고주몽)의 기린굴을 재확인하였다”

2012년 5월 8일《조선중앙통신》보도에 따르면,

고 보도했다. 이 기관은 2011년 8월에도 동일한 주장

김정은 제1위원장은 4월 27일에도 정책적 성격의 담

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재확인’ 이라는 표현이 사용

화인“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의 요구에 맞게 국토관

됐다.

리사업에서 혁명적 전환을 가져올 데 대하여” 라는 연

당시 사회과학원의 보도 내용은‘기린’ 이나‘유니 콘’ 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실

ⓒwikimapia

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려사』 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전해오던 동명왕의 기린굴의 위치가 어디인지 재확인했다는 것이었다. 해 프닝은 이 보도를《가디언》 과《텔레그래프》등 영국 유 명 일간지에서 왜곡해 인용 하면서 시작됐다.‘기린’이 라는 상상 속 동물을 옮길 영 어 단어가 없던 영국 일간지 들은 대신 ‘유니콘’이라는

김일성의 지시로‘복원’된 평양의 동명왕릉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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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를 사용했고, 이를 국내 언론들이 그대로 재인용

실제로 사회과학원에서‘기린굴’위치 확인을 재

하면서 친절히 유니콘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인 것이

확인한 지 3일 뒤인 12월 1일은 사회과학원 창립 60

었다. 물론 기린굴을 재확인했다는 북한의 주장이 사

주년이었다. 이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아

실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사회과학원은 김일성의 지

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역사와 사회과학 연구에

시로 1993년‘단군릉’ 의 위치를‘과학적 증거’ 를대

서‘철인 군주’역할을 철저히 했고 이런‘철인군주’

어가며 날조한 기관이기도 하다. 사회과학원의 존재

의 철학을 따르는 것, 즉“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는 북한에서‘수령의 철인 군주로서의 지위’ 를 입증

을 발현하는 게“사회과학자들의 제일생명” 이라고 강

하는 사례인 셈이다. 사회과학원의 연구자들은 수령

조했다.“참으로 김정일동지는 인민대중의 자주위업

이 어떤 이념과 주장이 옳다고 말하면 이걸 학문적으

과 자주시대의 사회과학발전에 불멸의 공헌을 하신

로 뒷받침하기 위해 무슨 거짓말이든 해야 하는 이들

위대한 사상리론의 영재이시고 사회과학의 거장” 이

이기 때문이다.

었던 것이다. 따라서 11월 29일 있었던‘기린굴’재

고조선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에 관해서도 마찬 가지였다. 북한의 역사 학계는 늦어도 1992년부터

확인은‘유니콘 서식지’ 와 같은 몽환적인 주장과는 큰 괴리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700년사가 아니라 1000년사로 주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철인 군주’김정은 제1위원

장했는데, 배후에는 김일성의 교시가 있었다. 평양의

장에 대한 사회과학자들의 집단적 충성 맹세로 보아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한 이런‘역사 조작’ 의 시도는

야 할 것이다. 이 행동은 실제로는 12월 1일 전에 사

유물 발굴 분야에서도 시도됐다. 1994년 평양의 사

회과학원에 도착했을, 김정은 제1위원장이 보낸 서한

회과학출판사에서 간행된『동명왕릉에 관한 연구』 에

의 한 대목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다.“당과 수령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미“1974년 1월 23일 주체의 력

대한 충실성은 사회과학자들의 제일생명입니다. 과학

사관에 기초하여 동명왕릉은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과학자들의 신념에

평양으로 옮겨올 때 시조묘를 옮겨다 쓴것이라고 교

는 국경이 있고 자기의 혁명진지가 있습니다.”김일

시”했으며“그리하여 동명왕릉의 성격은 새롭게 과

성-김정일 시대에 이 충성 맹세가 단군릉과 동명왕

학적으로 해명되게 되였다.”평양 사회과학출판사에

릉 복원으로 이어졌다면, 김정은 시대에는 기린굴 복

서 1990년에 간행한『평양전설』 에서도“옛날 사대주

원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에 극도로 물젖었던 량반통치배들이 나중엔 자기 나라 시조왕의 무덤도 몰라보게 되여 잘 거두지 않은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라

때가 있었다” 고 적고 있다. ⓒ가디언

김일성이‘주체사상’ 이라는 이데올 로기로 이미 1967년에 전체주의 사회 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그 아들 김 정일은 국방위원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전인 1970년대부터‘주체사상을 해 석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 를 보유 해 왔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김정일 을“사회과학의 거장” 으로 받드는 데 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다. 김정일은 1974년,“최근에 한 사회과학자가 주 체철학과 관련하여 자기의 의견을 적 은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그 편지내용

영국 일간지《가디언》에‘북한 유니콘 서식지 발견’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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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을 보아도 아직 우리 학계에서 주체철

Prism


ⓒ연합뉴스

연구성과로써 강성국가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는 참된 김정일애국주의자 가 되여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아버지를 거 론하면서 동일한 충성을 자신에게 바치도록 요 구한다. 고구려 1000년 역사를 강조하는 선대로 부터의 전통이나, 경제 보다 군사를 우선시하는 특유의‘윤리관’자체에 서 북한이 곧장 탈각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4월의 불안한 침묵 속에서 미사일의

김일성의 지시로 1993년 복원된 단군릉

움직임 못지않게, 가려 학에 대하여 정확한 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수 없습

진 데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 펜대의 촉을 함께 주

니다” 라고 특정한 사회과학자를 겨냥해 비판하기도

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충분하다. 논문 발표는

했다. 1982년에도 그는“사회과학자들은 주체사상

핵과 미사일에 비한다면 비용이 압도적으로 적게 들

의 원리들과 지도적원칙들, 주체사상에 의하여 밝혀

면서도, 군사력과는 다른 의미로 전사회적 파급력을

진 모든 사상리론들을 전면적으로 연구하며 주체사상

보여준다는 점에서 글로 된 폭탄이며 나침반이기 때

을 구현하여 혁명과 건설에서 우리 당이 이룩한 업적

문이다. 2012년과 마찬가지로 4월의 말글이 5월, 6

과 경험을 깊이 연구하여야 합니다” 라고 사회과학자

월에 가서야 뒤늦게 공개될 가능성도 여전하다. 김일

들의 연구 과제를 지도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김정

성의‘주체’ 와 김정일의‘선군’ 을 이어 받을 세 번째

일은 1990년, 1996년에도 논문을 발표해 사회과학

총대철학, 세 번째 정치 이데올로기가 어떤 모습으로

자들이 주체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강하게

등장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이‘철인 군주’ 를 달리 상

비판했다.

대해야 할 것이다.

4월의 침묵 속에서

(※이 글은 2012년 12월 3일《프리즘》온라인판에 게시 된 기사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12월 1일의 서한과 그에 앞선‘기린굴’보도를 통해‘계몽수령’ 이자‘철 인 군주’ 로서 사회과학원을 상징적으로 장악하는 데 이미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언은, 정치 권력 과 군사력을 독점하는 데서 나아가 선대의‘수령’ 들 처럼 사회과학자들의 지식이 흘러갈 방향까지 장악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기에 그는“사회과학 자들은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고귀한 혁명유산인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을 끝없이 사랑하고 높은 과학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intransigere@gmail.com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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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통신

4월 7일, 보아오 포럼에서 만난 중국의 시진핑 주석(우)과 훈센 총리(좌)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다 함께 차차차 CHASEAN 아세안(ASEAN)은 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 국, 베트남 10개국이 결성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다. 아세안은 총인구 6억여 명 중 15~29세 인구가 약25%에 달할 만큼 젊은 노동력이 풍부해 중국을 이을 차세대 생산기지로서 투자매력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미국,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가 아세안과의 협력을 도모하는 가운데 중국도 아세안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매력을 계속해서 어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에게 끊임없

는 핵심지역이다. 중국이 아세안에 대한 접근을 강화

는 위협과 압력을 받아왔다. 20세기 초 청 황조가 멸

하는 이유는 아세안이 글로벌경제위기에도 흔들리지

망할 때까지 주변국들은 천하질서에 편입되어 황실에

않는 경제동력을 갖춘 매력적인 투자대상이라는 점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때로는 직·간접적인 지배를

이외에도 이 지역이 태평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지정

받기도 했다. 냉전 시기 중국공산당은 아세안 국가에

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는 장차 중국

서의 공산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여 아세안 내 민주국

이 미국과 해양패권을 다툴 잠재적 분쟁지역이 될 가

가들의 원성을 샀고, 탈냉전 후에는 중국이 군사력을

능성이 높고, 이 보이지 않는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

대폭 증강하면서 아세안 국가들에서는‘중국위협론’

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아세안을 포섭하는 것이 급선

이 횡행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렇게 아

무다. 중국은 먼저 아세안에 대한 투자·지원을 확

세안에 대한 접근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대하며 환심을 사고 있으며, 경제협력을 점차 강화한

중국에게 아세안은 단순한 주변지역이 아니라 경

후 최종목표인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제·외교·안보 면에서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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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중국의 매력공세, 아세안을 녹이다

다. 범아시아 고속철도의 전체구간은 2020년 이후 완공될 계획이며, 철도가 완성되면 중국은 인도양으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중국은 태국과 인

로 바로 진출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게 돼, 아세안

도네시아에 직접적인 금융지원을 하고 캄보디아, 라

도 물류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다. 작년 10월, 라

오스, 미얀마에는 부채탕감을 해주는 등 적극적인 지

오스 국회는 특별회의를 열어 중국에서 70억 달러를

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뭄에 단비 같은 중국의 도움

빌려 수도 비엔티안의 철도와 중국-라오스 국경지역

은 아세안에 만연했던‘중국위협론’ 을 크게 희석시

구간의 철도를 수리하기로 결정했다. 범아시아 고속

켰고 중국에 대한 적대감도 완화되었다. 이러한 긍정

철도의 공사대금은 아세안 국가들의 재정부족으로 대

적인 기류는 곧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1997년 12

부분 이렇게 중국에 차관을 내어 마련할 것으로 보이

월 개최된 제1차 아세안+1 정상회담에서는 장쩌민

는데 과도한 차관으로 인해 아세안이 경제적으로 중

주석이‘선린동반자관계’형성을 제안하고 아세안이

국에 예속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에 동의하면서 중국과 아세안의 관계가 급진전하

윈윈의 경제협력

기도 했다. 현재 중국은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

2010년 1월 1일부터 중국-아세안 자유무역협정

성도 쿤밍 사이에 1100km에 달하는 석유·가스관

(CAFTA)가 개시되어 EU와 NAFTA를 잇는 세계 3대

이 연결될 예정이며 이 수송관을 통해 중동에서 운송

자유무역지대가 출범했다. CAFTA는 중국이 외국과

되는 석유(연 2200만 톤)와 미얀마에서 생산되는 천

체결한 첫 번째 FTA이며, 인구 19억, 무역총량 4.5

연가스(연 120억 ㎥)가 더 싸고 빠르게 쿤밍으로 수

조에 달하는 개도국 간 최대 FTA이다. 2012년 중국

송될 전망이다. 수송관 외에도 차우크퓨에 항만을 조

과 아세안의 무역액은 4천 억 달러를 넘어섰고, 중국

성하여 쿤밍까지 육로로 연결하는 공사를 진행 중인

은 4년 연속 아세안의 최대 무역국 자리를 지키고 있

데 완공되면 그간 말라카 해협을 경유해야 했던 무역

다. 2015년에는 아세안의 후발 4개국인 캄보디아, 라

경로가 크게

오스, 미얀마, 베트남에서도 CAFTA가 전면 발효되어

단축된다. 중

CAFTA의 무역규모는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신문

고 있다. 5월 말 미얀마 차우크퓨 가스전과 윈난 성의

범아시아 고속철도 노선도. 중국과 아세안을 연결하는 철도는 총 3개 노선으로 구성되는데 모두 쿤밍에서 출발한다. 중선은 라오스를, 동 선은 베트남을 가로지르며, 서선은 미얀마를 관통해 모두 싱가포르로 향한다.

국은 안정적인

미국은 동아시아 경제통합이 자신을 배제한 채 중

에너지자원을

국의 주도로 진행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2009

확보하기 위한

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가를 선언했다.

정책의 일환으

TPP는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의 3개 대륙을

로 차우크퓨

아우르는 거대한 단일 시장을 만드는 것을 그 골자로

공사에 적극적

하고 있으며,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전략의 경제적

인 기술지원과

수단이다. 3월 15일 일본이 자신을 TPP의 폴 메카트

투자를 하고

니라 자부하며 참가의사를 밝힘으로써 협상 추진에

있다.

큰 동력을 얻게 되었으며, 한국과 필리핀 등도 TPP

중국과 아

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정책결정자들과 학자

세안을 연결할

들은 TPP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TPP를

범아시아 고

경제적으로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의도라고 간주

속철도 사업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연구원 션밍후이

중국 정부의 대

는 격월간《당대아태》 를 통해“TPP의 실시는 아세안

대적인 지원 하

과 동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을 미국의 ‘아시아로의

에 이뤄지고 있

회귀’ 정책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유도할 수도 있으며,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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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유, 무력불사용, 협의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의 모색, 국제법 준수 등의 내용을 약속했다. 그러나 작년 4월 황 옌다오 부근에서 중국과 필리핀 함정 이 3주간 대치하여 긴장이 고조된 바 있고, 올해 3월 20일에도 중국 군함이 시사군도 부근 해역에서 조업하던 베 트남 어선에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 하는 등 남중국해에서의 충돌은 현재 까지 계속되고 있다. 영유권 분쟁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동아시아 주요 경제블록 추진 현황. TPP는 미국의 중국 봉쇄 전략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중국은 TPP에 대응하기 위해 RCEP협상에 참여하고 있다.

주권과 관련된 문제로서 단기적인 해 결이 어렵다. 더구나 남중국해 문제는 6

이 경우 이들 국가와 중국의 사이는 멀어질 수 밖에

개국이라는 복잡한 행위자와 복잡한 국가이익 그리고

없다. 이는 중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지위를 크게 위협

복잡한 이슈가 복합된 문제로서 모든 국가가 만족하

할 것이므로 중국은 TPP의 잠재적인 지정학적 함의

는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영유권 분쟁

에 유의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 중국과 아세안 국가의 협력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

중국은 자신을 견제하고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

용하지는 않을까?

대하려는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신 국내 경제 발전과 아세안과의 경제협력에 주력해 역내 주도권

내겐 너무 매력적인 그대

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의 견제에 맞설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이 선택

중국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것은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이다.

소비능력이 급증하고 있는 아세안 시장을 확보하기

RCEP은 아세안(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위해, 또 아세안 국가들이 가진 풍부한 노동력과 천

뉴질랜드, 인도 총 16개국이 참여를 추진 중이며, 중

연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아세안과의 접근을 강화할

국은 RCEP을 통해 아세안과의 상호의존도를 심화시

것이며, 외교·안보 면에서는 미국에 맞서 자신의 힘

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되어줄 동맹국을 확보하기 위해 아세안에서의 영 향력을 확대하고자 할 것이다. 또한 아세안에게 중국

분쟁의 불씨, 영유권 문제

은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을 가진 투자자이며, 거대한 소비시장을 갖춘 수출대상국이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는 자원이 풍부하고, 원유 수

서로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이 큰 현 상황에서

송이 이뤄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세계 해양 교통

중국과 필리핀, 베트남을 비롯해 영유권 분쟁을 겪

의 1/3 이상이 남중국해를 통과한다. 남중국해는 교

고 있는 국가들이 대규모의 무력충돌을 일으킬 가능

통·군사상의 요지인데다 유전과 가스전이 대량 매

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경우

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중국, 대만, 베트남, 말레

를 살펴보면 무조건적으로 장밋빛 미래를 기대할 수

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6개국이 남중국해에 위치

없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이 다오위댜오를 두고 대립

한 난사군도, 시사군도, 황옌다오 등을 두고 영유권

각을 세우기 시작한 1970년대 초반부터 2010년까지

분쟁을 벌이고 있다.

양국은 경제적 이익을 고려해 암묵적으로 분쟁의 확

2002년 중국과 아세안은 남중국해 당사자 행동선

대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2010년

언을 채택하고, 남중국해에 대한 항해 및 항공의 자

또다시 영토 분쟁이 불붙자 중국은 일본에 대한 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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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연합뉴스

나이 국왕과 가진 것은 중국이 그만큼 아세안을 중시 한다는 의미라고 말하며, 영토분쟁에 관해서는“중국 은 관련국가들과 우호적 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 고자 하며 분쟁이 해결되기 전까지 아세안 국가와 계 속적인 대화를 하며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 하겠다” 고 밝혔다. 시 주석은 또한 4월 7일 열린 보 아오 포럼에서 훈 센 캄보디아 총리와 만나“중국은 아세안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중시하고 있으며 아세안과의 상호 신뢰와 단결을 통해 지역협력을 강 화하고 싶다” 고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 다. 시 주석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중국은 영유

남중국해는 교통·군사상의 요지인데다 유전과 가스전이 대량 매 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중국, 대만,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 핀, 브루나이 6개국이 남중국해에 위치한 난사군도(영어명: 스프 래틀리 군도), 시사군도(영어명: 파라셀 군도), 황옌다오(영어명: 스카보러섬)등을 두고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권 분쟁은 대화를 통해 천천히 해결하고, 경제적 협 력을 먼저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세안은 투자매력도가 높은 까닭에 중국 외에도 미국과 일본, EU 등 여러 나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

류 수출금지 조치를 내려 일본을 당황케 했다. 영토

는 처음으로 미얀마에 국빈 방문하며 미국의‘아시아

분쟁이 기존의 외교적 공방에서 벗어나 실제적 타격

로의 회귀’ 를 대외적으로 표명한 바 있고, EU는 아

을 주는 단계로 전환된 것이다.

세안 국가들과 개별적으로 FTA를 추진하고 있다. 일

중국과 아세안의 관계도 언제 중일 관계처럼 국면

본은 최근 미얀마에 500억 엔의 차관을 제공하고 부

의 전환을 맞을지 모른다. 어느 한 쪽의 상대방에 대

실채권을 탕감해준 바 있으며, 캄보디아의 최대 원조

한 의존도가 월등히 높아지면, 즉 의존의 균형이 깨

공여국이기도 하다. 여러 나라들이 아세안의 환심을

지면 의존도가 낮은 쪽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자신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일견 아세안의 선택범위가

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대방을 조종하게 된다. 중국과

넓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세안도 각국의 접근 의

아세안의 관계에서 현재와 같은 차관·지원이 계속

도가 협력을 앞세운 영향력 확대임을 누구보다 잘 알

된다면 시간이 갈수록 아세안이 중국에 의존하는 형

고 있으므로 쉽게 어느 한 나라를 택하지는 않을 것

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고, 중국이 때가 되었다고

으로 보인다. 단기적으로는 여러 나라의 지원을 받으

느낄 때 영유권 분쟁은 실제 충돌로 나타날 것이다.

며 두루두루 잘 지내는‘어장관리’ 를 하면서 장기적

그렇다면 충돌을 피하고 협력을 지속하기 위한 양쪽

으로 자신들의 국력을 키워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향

의 전략은 무엇일까?

상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핵심 외교전략 중에 구동존이(求同存異) 전

아세안에 러브콜을 보내는 나라들 중 중국은 가

략이 있다. 구동존이란‘차이점을 인정하며 같은 것

장 매력 있는 파트너임이 분명하다. 중국은 아세안에

을 추구한다’ 는 뜻으로 중국에게 있어 아세안과의 구

장기적으로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을 해왔으며 이미

동존이란 영유권 분쟁이 존재하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CAFTA가 실시되어 무역의 규모와 이익이 날로 증가

위해 협력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

하고 있는 만큼 영유권 분쟁을 슬기롭게 잘 해결해나

례로 중국과 아세안은‘비전통안보 부문에서의 협력

간다면 중국과 아세안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도움이

에 대한 중-아세안 공동선언’ 을 채택하고 경제부문

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 비전통안보부문에서의 상호의존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4월 5일 시진핑 중국 주석은 하사날 볼키아 브 루나이 국왕과 만나 자신이 취임 후 첫 면담을 브루

견세령 (한국외대 법학) milyee@naver.com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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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지도자와 복지국가의 관계? 타르야 할로넨과 핀란드, 인권 복지의 길 세계 30여 개국이 이미 여성 최고 지도자를 경험했고, 현재는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전 세계에 8명 의 여성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게 된 여성 지도자. 그들에게서 우리는 흔히 모 성과 감성의 리더십을 연상한다. 이러한 연상은 자연스레 복지국가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지난 대선의 여러 공약들 중 최대 이슈가 복지 정책이었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나오는 복지 정책마 다 사람들의 시선과 이목이 집중된다. 아직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박근혜 정부의 선진국가형 복지 정부.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한국을 복지 선진국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인가? ⓒEPA

지난 18대 대선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중앙선대

적임자라고 강조했다.

위 총괄본부장은 박근혜 후보를 밀면서 그가 북유럽

소위‘여성 대통령론’ 과‘복지국가’ 의 시너지에 대

의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들처럼 대한민국을 훌륭히

한 이상적인 예로 핀란드의 전 11대, 12대 대통령 타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북

르야 카리나 할로넨(Tarja Kaarina Halonen)을 들어

유럽국가를 세계 최고의 행복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볼 수 있겠다. 핀란드는 할로넨 대통령의 임기 동안

것은 출산과 육아, 노후보장 등 사회복지 분야에 남

세계 제일의 복지·교육국가,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

성 지도자들보다 더 큰 관심을 두었고, 삶의 질 향상

은 나라라는 평을 들어왔다. 과연 할로넨이라는 여성

을 중시하고, 여성의 덕목인 진실된 노력을 기울였기

지도자가 어떤 리더십을 선보였길래 핀란드가 전 세

때문” 이라며 한국에선 바로 박근혜 후보가 그 역할의

계에서 가장 부러워할 수준의 복지국가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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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그가 여성이었기에 핀란드의 복지가 완성된 것일까?

대통령으로서 뽑히기도 한 타르야 할로넨은 별명답게 핀란드 전국민의 어머니로서 인정받는다. 그녀의‘어

어머니의 리더십‘무민 마마’

머니 리더십’ 에서 잘 드러나듯 그녀는 재임기간 중 소외 받는 국민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 방면으로 많은

‘무민’ (Muumi)은 핀란드 여성 작가인 토베 얀손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표적인 것이 인권에 관한 것

이 탄생시킨 동화다. 한국의 뽀로로만큼이나 인기 있

으로 특히,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인권에 관심이 많

는 캐릭터로, 북유럽의 숲 속에 사는 전설의 동물 트

았다.

ⓒ조선일보

‘여성의 1유로는 80센트’ 핀란드는 1906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여성들에게 보통선거권과 평등선거권을 부여하고 또 제일 먼저 피 선거권을 부여한 나라다. 이처럼 일찍이 여성의 정치 적 권리 신장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낙후된 농업 중심 의 산업구조 하에서 실질적 권리 신장은 실현되지 못 했다. 여전히 여성은 남성에 비해 불공정한 대우를 받 으며, 남성과 대등한 지위를 갖기 위해선 남성보다 더 욱 많은 성과를 거두어야만 한다.‘여성의 1유로는 80

무민 마마와 무민 파파를 손에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타르야 할로넨. 그녀 는 무민 마마처럼 포근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대통령이었다.

센트’ 라는 핀란드 말은 이러한 현실을 잘 나타낸다. 할로넨은“복지사회란 성(性)에 대한 민감성이 높 은 사회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불공평한 대우를 많이

롤을 귀엽게 탈바꿈시켰다. 겁이 많지만 항상 긍정

받는 여성들을 위해 자녀 양육, 노인 부양 정책을 만

적이고 착한 성격의 소유자인 무민. 그런 무민의 엄

들 때에도 여성 위주로 더 지원하고 도와주는 방향으

마가 바로‘무민 마마’ (Muminmamman)다. 그녀는

로 설계 해야 한다” 고 말했다. 그녀는 생물학적으로

무민 가족의 정신적 지주로, 언제나 가족의 모든 질

여성의 삶이 보육과 가족 부양에 더 많은 연관성을

문에 명쾌한 해답을 내려준다. 케이크를 썰 때면 가

가진다고 보았다. 그 결과, 그녀의 재임기간 동안 여

족 모두 공평하게 딱 잘라 분배하며, 가족 간에 분쟁

성 인권을 위한 정책으로 직장 여성의 출산휴가(최장

이 일어날 때도 훌륭한 중재자 역할로 가족을 이끈

105일) 및 직장 복귀가 보장되었고, 결혼으로 인해

다. 왜 쌩뚱맞게 만화 이야기냐고? 바로 무민 마마가

직업을 포기하는 여성들이 거의 생기지 않게 되었으

타르야 할로넨의 별명이기 때문이다.

며, 직장은 자아실현의 장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핀란드의 가장 훌륭한 인물 10인’ 에 최초로 현역

그로 인해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과 여러 분야에서

ⓒMoomin Characters Ltd

의 두각이 나타나고 있다. 여성들의 각료 진출도 높아졌다. 핀란드는 1926년 사회부 장관에 처음으로 여성이 임명된 후, 1991년 7 명, 1995년 5명(29.4%), 1999년 7명, 2006년 8명, 2008년에는 12명의 여성 각료가 활동 중이다. 더욱 이 핀란드 국회에는 국회여성네트워크(NWFP)라는 여성 정치인들의 모임이 따로 있을 정도다. 할로넨은 이처럼 양성평등을 복지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매우

무민가족들. 왼쪽부터 무민 마마, 무민 파파, 무민 트롤 (주인공), 스노크 메이든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다.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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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의 옹호자

는‘어머니 복지’ 다. 핀란드가 강소국(强小國)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권 복지에 있었다.

한편, 그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대 통령이었다. 그 자신이 미혼모로서, 2000년 대통령

그전부터 복지국가였는데?

에 당선될 때‘강한 어머니’ 의 이미지가 여성들의 전 폭적 지지를 얻어냈다. 할로넨은 국회의원 시절 국회

물론 핀란드가 복지국가로 유명해진 것은 할로넨

에 딸을 데리고 등원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부터 스

집권 이전부터다. 핀란드의 복지는 제2차 대전이 끝

웨덴 계였던 아버지가 핀란드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나고 난 후부터 이미 시작됐다. 스웨덴으로부터 북유

설움을 겪는 것을 보며 자라왔다고 고백한 적도 있

럽 복지국가형 사회제도를 도입한 이후, 경제 성장에

다. 사회 개방화가 진행되던 대학 시절, 집단의 가치

따라 꾸준히 자신들의 복지를 발전시켜 왔다. 타르야

못지않게 개인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걸 깨달으면서

할로넨 대통령의 소속당이기도 한 사회민주당(Social

할로넨은 소수자의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성소

Democratic Party, SDP)은 저임금 도시 근로자, 봉

수자들을 위해 1980년대 남성동성연애자협회 회장까

급생활자와 남부 산업지역의 지지를 받고 있는 중도

지 맡았다가 동성애자로‘몰리기도’했던 그녀는“동

좌파 정당으로, 다른 당과의 연립정부를 통해 핀란드

성애 문제는 인권의 문제이며 성 소수자들도 삶의 질

의 복지를 이끌어왔다. 특히, 1982년 사회민주당 당

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재임 기

수인 코이비스토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최

간 동안 동성애자 차별금지에 힘을 쏟아 부었다.

초로 좌파계 대통령이 탄생하였는데, 이후로 내리 두 명의 대통령이 사민당에서 배출되었다. 즉, 핀란드에

타르야 할로넨에게‘복지’ 란?

서의 복지는 할로넨 대통령 이전부터 이미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복지가 여성 최고의 친구’ 라는 그의 말은 여성과

보통 할로넨의 여성 복지를 이야기할 때 국회에서

남성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보

의 여성 비율을 언급한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여성

았다. 양성평등에 관한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여성,

의원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는 것. 하지만 이것 역

남성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시 엄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07년 최초 국회

대우받는 것이 모든 국민이 복지국가를 누리는 길이

선거에서 총 200석 중 19석을 여성이 차지한 이래

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 임신을 하더라도 직장에

1991넌 77명 (38.5%), 1995년 67명 (33.5%), 1999

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핀란드 정부는 국민의

년 74명(37%), 2003년 75명(38%)에 이어 2007년에

임신, 출산 및 육아로 인한 수입 손실분을 수당으로

84명(42%)의 여성이 국회에 진출하였는데, 2000년

보상해준다. 중간 소득계층에 속하는 가정은 이에 거

할로넨 대통령이 당선되고 그 상승 비율이 그다지 높

의 실제 수입의 70%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여성은

아졌다고 보기는 사실 어렵다. 또, 직장 여성의 증가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로 노동시장에서의 양성평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잘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한 것도 그녀가 추구하는 복

실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일을 하고 동

지국가의 방향을 보여준다. 구성원 전부를 어머니의

등한 교육과 업무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남녀 직장인들

관점에서, 누구 하나 낙오하지 않고 같이 안고 가려

간의 급료 차이가 2005년에 23%로 여전히 격차가 있

는 그녀에게 열 자식 모두 굶기지 않으려는 모성의

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리더십이 잘 드러난다. 그녀는 선별적 복지보다 보편

2003년에는 그녀의 소속정당인 사민당이 제1당의

적 복지가 좋다며,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자리를 마티 반하넨이 이끄는 중도당에게 내주었는

가난한 상태에서 혜택을 받는 것보다 그들의 사회 진

데, 총리직에 오른 반하넨은 안정적인 외교안보정책

출을 돕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스스로 설

추진, 고용 증진(2007년까지 일자리 10만 개 창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 바로 그녀가 내세우

경제성장 및 사회적 연대 강화를 통한 국민복지 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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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Ministry for Foreign Affairs of Finland

을 주요 정책 목표로 추진하였다. 이원집정부제의 핀

품이 든 바구니를 들고 살림살이가 팍팍한 주부들의

란드는 보통 외교, 국방 등 대외정책은 대통령이 주

표심을 자극했다. 그 결과 보수당은 승리를 거둘 수

관하고, 총리는 내정을 담당하는 것으로 봤을 때, 복

있었다. 이처럼 대중은 여성 지도자에게 남성 지도자

지정책의 업적을 꼭 할로넨 대통령만이 이룩한 전유

가 가지지 못한‘가정’ 의 이미지를 기대한다. 물론

물이라고 보긴 힘들다. 즉, 김무성의 발언처럼 핀란

대처는 당선 후에‘철의 여인’ 이라는 이미지로 180

드의 복지가 마치 타르야 대통령이라는 여성 지도자

도 변신했지만.

덕택에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만 보는 것은 조금 비약이 라고 할 수 있다.

새누리당 역시 작년 대선에서‘여성 지도자’ 의이 미지를 적극 내세웠고, 결국 박근혜 후보는 대한민국

물론 할로넨 대통령의 업적을 결코 폄하할 수는 없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제 그 이미지를 복

다. 과거 재임시절 88%의 지지율(2003년)은 그녀가

지 정책과 연관시켜 타르야 할로넨 같은 전국민의 어

대중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보여준다. 여성지

머니 같은 대통령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성

도자가 주는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를 잘 살린 그녀

격의 정책을 펼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는 어쨌든 핀란드 전국민의 어머니로 여겨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는? 2013년 4월 8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 지도 자 마가렛 대처가 사망했다. 여성 리더로서의 대명사 와 다름없는 그녀는‘남성보다 더 남성적인’이미지 의 여성 지도자였다. 그녀의 강성정책은 대중이 여성 지도자에게서 바라는 따뜻한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 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1979년 총선 유세 때, 식료

정우호 (서울시립대 영문) jnhyde4@gmail.com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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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한마디

박물관을 불태워라! 마리네티의‘미래주의 선언’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 산텔리아의‘새로운 도시’그림 중 하나

“우리, 나와 내 친구들은 밤새 깨어있었다.”정말 로 밤새 깨어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일간신문《피가로》1면에 실린 강렬한 선언의 첫 문장은 유럽 전체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 3. 부동성과 수면만을 강조한 전통문학을 부정하고 주먹치기와 따귀 때리기를 권장한다.

이탈리아의 젊은 작가 마리네티는‘미래주의 선언’ 이 라는 멋진 이름으로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미래에 대

4. 속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전통미의 상징인 사

한 예찬과 동시에 과거와 전통에 영원한 이별을 고한

모트라케의 니케를 부정하고 폭발적인 경주용 자동차

다. 많은 느낌표들로 끝맺음 된, 지극히 선동적인 문

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장들은 원색적인 단어들과 조화를 이뤄서 극단적인

글의 전형을 보여준다. 미래주의 선언에 대한 지지

9. 전쟁, 군국주의, 파괴행위, 여성들에 대한 경멸을

여부와는 관련없이 모든 읽는 이들의 가슴을 들끓게

찬미한다.

만든다. 정신나간 글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드는 선언들.

10. 박물관, 도서관등 모든 종류의 아카데미를 파괴

그러나 크게는 미술사조를 흔들어 놓았고 간접적으로

하고 도덕주의, 합목적성, 페미니즘과 사욕에 기인하는

는 파시즘의 부흥으로 이어진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모든 비겁함에 맞서 싸울것을 다짐한다.

선언은 20세기 역사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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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도시 이탈리아, 골목 골목마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서있고 장엄한 유적들이 사방천지에 널려있

ⓒmoonbattery.com

미술사의 반항아들

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젖은 탓이었을까, 20세기 초 의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늦게 국민국가 를 이루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발전이 더딘 이탈리아를 탄식하며 마리네티를 비롯한 젊은 엘리트 들은 이탈리아의 낙후된 사회 기반을 예술 운동을 통 해 뚫고 나가고자 했다. 미래주의자들은 기계문명으로 이룩한 현대 도시의 운동성과 속도감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규정했다.

파시즘 미학을 대표하는 선전 그림들

매끈한 강철의 경주용 자동차, 둔중하면서도 빠른 움 직임의 탱크와 날아다니는 쇳덩어리인 비행기의 모습

표되는 파시즘 미학은 미래주의의 파시즘 지지가 그

에서 새로운 미학을 발견했다. 특히 산업, 에너지, 속

시초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빛의 감각 등을 전달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졌 으며, 그들이 상상하는 미래는 과거의 문화 및 사회와

느리게 걷자

완전히 결별하는 역동성의 추구에 기초했다. 이러한 경향은 미술관이나 도서관의 파괴운동을 벌일 정도의

자극적인 것들은 휘발성이 강하다. 미래주의와 마

과격한 것이었고 일부는 파시즘 미학에 영향을 주었

리네티를 추종하는 예술가들은 1920년대가 되자 자

다. 실제로 몇몇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전쟁을 유일한

취를 감추게 된다. 마리네티의 생애는 모순으로 가득

위생학이라고 규정하고 파괴를 찬양하는 선언의 9번

하다. 그는 파시즘적인 국수주의자이면서도 국제적

항목을 충실히 이행,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활동을 펼쳤으며, 여성과 결혼을 비판하는 동시에 혼 인해서 잘 살았다. 종교와 전통에 대해 비판적이었으

정치의 미학화

면서도 라테란 협정 후 종교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예수를 미래주의자라고 선언하며 가톨릭 교회를 인정

마리네티는 제1차 대전(1914~18)이 발발하자『세

했다. 마리네티의 생애처럼 모순으로 가득찬 미래주

상의 유일한 위생법, 전쟁』 이라는 훌륭한 책을 내어

의, 자연과 전통만 존재했던 예술사에 새로운 시각을

공식적으로 전쟁을 환영하고 이탈리아의 참전을 독촉

던져준 것은 뜻깊지만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용

했다. 파시즘 당원이 되어 무솔리니와 가까운사이가

서할 수 없는 행위들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되었고, 전쟁에 사관으로서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산한 박물관과 사람으로 가득찬 자동차 전시장,

전쟁이 끝나고 꾸준한 당 활동으로 1928년엔 파시스

그림 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는 법은 모르면서 만화

트 저작 조합 서기장을 지냈다.

의 속도감에는 도취된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마리

유럽에 등장한 파시즘 체제는 급진적 경향의 아방

네티의 머릿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과거를 파괴하

가르드 미학을 억압하고 사회를 군국주의에 도취시키

고자 했던 미래주의가 만연한 지금. 간과했을지 모

기고자 노력했다. 민족영웅을 미화하고 전쟁의 숭고

를 과거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습관이 필요한 때다.

함을 강조하는 예술을 생산해냈다. 정치와 자본의 후 원으로서 이루어지는 예술의 타율성이 파시즘 미학의 본질이었고 이러한 경향을 벤야민은‘정치의 미학화’ 라고 명명했다. 후에 광기어린 나치의 선전영화로 대

박연서 (건국대 경영) aronax09@naver.com

세계인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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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아버지(Papa)가 나타났다 3월 13일 저녁 7시 6분,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날 저녁, 새 교황이 선 출되었음을 알리는‘하베무스 파팜’ 이 발표되고 베드로의 266번째 후계자로 새로운 교황 프란치스코가 세상에 등장했다. ⓒGetty Images

프란치스코 교황

강했다 약했다 요동치는‘아버지’ 의 역사

련하면서 크게 향상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 지위에 있는 교

으로 종교의 영역을 넘어 세속의 영역까지 확대되었

황이라는 직책은 처음엔 단지 로마의 주교구를 관할

다. 이 시대에 교황은 십자군 전쟁을 주도하기도 하

하는 자리였다. 당시 로마의 주교구들은 아버지를 뜻

고, 교황권에 복종하지 않는 군주를 파문하고 폐위할

하는 라틴어‘papa’ 라는 말로 불렸고 이 말이 오늘의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

교황을 일컫는‘pope’ 의 기원이 되었다. 초기 교회

왕조가 성립함에 따라 교황권은 왕권의 도전을 받기

조직의 고위 성직자에 불과한 로마 주교는 로마 교회

시작했고 14세기 교황이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후,

를 세운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믿음에 따라 다른 주교

로마에 또 다른 교황이 등장하면서 교황권은 쇠퇴를

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통해 교회의 지도자로 자리매

거듭했다.

중세 교황의 지위는 초국가적인 교회 조직을 바탕

김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지위는 교회가 게르만족에

르네상스 이후 쇠퇴의 흐름은 더욱 거세졌다. 독일

게 로마 문화를 전달하여 서양 중세문화의 기반을 마

에서 루터를 필두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이어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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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종교개혁이 이어지면서 유럽 곳곳에서 신교도들

한 교황은 없었다. 실제 베네딕토 16세가 교황 자리

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교회의 보편적인 이념

를 물러나게 된 이유는 사실 다름 아닌 교황청 내의

은 사라지고, 교황은 기독교 세계 리더의 지위를 잃

부패 때문. 그가 교황청 내 핵심 참모들과 주고받은

었다. 시간이 지나 과학이 발달하고 합리주의가 지배

서신들이 알려지면서 권력 다툼과‘돈세탁’등 각종

하면서 교황의 종교적 영향력은 계속에서 줄어갔다.

부정행위로 얼룩진 교황청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교황청 내부의 권력다툼과 부패상은 지난해 1월 이 탈리아의 탐사보도 기자인 잔루이지 누치가 쓴『교황

진짜 교황과‘세속적 교황’

성하: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비밀 편지』 라는 책에서 폭로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청 ⓒ연합뉴스

내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교황청 내 참모들과 주고 받은 편지가 교황의 개인 비서였던 파올로 가브리엘 레를 통해 유출되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문서 유출 혐의로 지난해 5월 체포된 가브리엘레는 교황청 조사 관들에게“교회의 곳곳에 퍼진 사악함과 부패를 보고 스스로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며“언론에 폭로 해 교회를 올바른 길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고 말했다.

3월 9일 바티칸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맞이하는 교황 프란 치스코

위키리크스를 모방해 바티칸의 폭로를 담당하는 ‘바티리크스’역시 가브리엘레의 공헌으로 교황청 내

흔히 교황은 유엔 사무총장과 비교되곤 한다. 유엔

의 부패상을 알리고 있다.‘바티리크스’에 따르면,

사무총장에게 붙여진 별명 중에 하나인‘세속적 교

교황청의 일부 고위성직자들이 친밀한 업체와 주요

황’ 은 종교적 영역이 아닌 세속적 영역에서 교황과

계약을 하며 계약가격을 시장가격보다 두 배 가까이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유엔 사무총장의 정치적인 입

부풀렸으며, 교황청 은행들이 돈세탁을 했다는 의혹

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교황’ 이라는 단어는 군대 하나 움직일 수 없이 실질적인 권력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한편, 국경을 넘어 전 세 계에 미칠 수 있는 외교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유엔 사무총장이 종교와 상관없이 세속 영역에서 전 세계에 외교적 혹은 도덕 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반면, 진짜 교황은 주로 가 톨릭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다. 그나마 있는 영향력도 가톨릭 내의 부패 문제가 불거지면서 약화 일로를 계속해서 걷는 중이다.

빛 좋은 개살구, 교황청 새로운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배 격인 교황 베네딕 토 16세는 육체적으로 직무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 을 이유로 교황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교황 자 리를 스스로 내놓은 5명의 교황 중 이런 이유로 사직

클레르몽 공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노 2세 (Council of Clermont)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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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Entertainment

등이 있다. 가브리엘레는 지난해 10월 재판에서 징역 18월을 선고 받았지만 몇 개월 뒤 교황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숙제를 잔뜩 떠안은 프란치스코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전 교황도 해결하지 못한 교황청의 부패 문제를 떠맡게 되었다. 많은 부패 중

영화〈천사와 악마〉중 콘클라베 장면

에서도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는 성추문. 미국 과 유럽을 아울러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사제들의 성

하게 관리하라” 는 목소리가 높지만 전임 교황은 이를

범죄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감당하지 못했던 가톨

거부했다.

릭의 문제 중의 문제였다. 각국에서 주교들이 공개 사과하고 합의금으로 무마하고는 있지만, 성추문이 라는 이슈는 가톨릭의 도덕성에 먹을 쏟아 부은 격이

‘라틴 파워(Latin Power)’가톨릭을 구할 수 있을까?

었다.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톨릭의 성추문보다는 지역 내 빈곤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성추문으로

이번에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

얼룩진 가톨릭의 이미지가 그의 등장과 더불어 쇄신

은 약 1300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 출신 교황이자 최

이 가능할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초의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이다. 호르헤 마리오 베

성추문 문제와 더불어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주어

르고글리오이라는 본명을 가진 새 교황은 1936년 아

진 또 하나의 숙제는 교황청의 돈 문제. 20세기 내내

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화공학도

교황청의 비밀 금융계좌들은 돈세탁과 검은돈의 온

시절을 보내고 20대 초반에 신학교에 입학해 성직자

상이라는 비난을 받는 와중에 2010년 바티칸은행 계

의 길 끝에 오늘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좌에서 3000만달러가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베네딕

남미 출신인 그가 교황의 자리를 얻은 것에 대해

토 16세의 측근이던 고티 테데시 바티칸은행장이 공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남미 출신 교황을

금을 빼내간 정황이 드러났지만 테데시는 2년을 버티

통해 유럽의 식민지배에서 시작한 남미 가톨릭 교회

다 지난해에야 물러났다. 80억달러는 넘을 것으로 추

가 전 세계 가톨릭을 주도할 것이라는‘라틴 파워’ 의

산되는 비밀계좌의 돈에 대해“국제기준에 맞춰 투명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점이 나오고 있다. 실 제로 남미인들이 현재 가톨릭 교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출 이 가톨릭을 주도할 새로운 세력으로 남미의 영향력 이 커지고 있는 것을 반영한 결과라는 것. 반면, 부모 가 모두 이탈리아인 교황의 배경을 근거로 바티칸의 주류세력에게 새 교황이‘차선의 선택’ 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유럽 일부에서 는 그를 가리켜‘이탈리아 뿌리를 가진 교황’ 이라고 부르고 있다. 라틴 파워를 주도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의 등장으로 부패로 얼룩진 가톨릭의 영향력이 새로 이 부상할 수 있을까? 카톨릭에 새 바람을 몰고 올 프 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아지 고 있다.

종교 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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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쇠로 잠근 방,‘콘클라베’ 새 교황을 내놓지 않으면 가둬놓으리

새 교황이 선출되면 시스티나 성당의 지붕 굴뚝에 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는‘열쇠가 있어야 들어

침내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다. 가톨릭의 수장을

갈 수 있는 방’ ,‘걸쇠로 문을 잠근 방’ 을 의미하는

뽑는 이 같은 방식 덕분에(?) 13세기에는 무려 3년간

단어로,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시스

콘클라베가 진행된 사례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3년

템이다. 추기경단의 3분의 2가 동의하여 다음 교황의

의 악몽 때문인지 근 100년 동안 콘클라베는 닷새 이

자리에 오를 사람이 결정될 때까지 콘클라베는 멈추

상 열린 적이 없다.

지 않는다. 이렇게 무기한 계속되는 콘클라베의 결과 는 이 기간 하루 두 번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피

‘봉화’ 로만 연락하는 콘클라베

어오르는 연기의 색깔로만 판단할 수 있다. 새 교황

투표가 끝날 때까지 인터넷과 전화 등 모든 유무선

이 선출되면 흰색, 미정이면 검은색이 각각 피어오르

통신수단이 차단되는 콘클라베에서 굴뚝 연기는 새

며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유일한 통신 수단이

교황의 선출을 알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유일한 방법

연기의 색이기 때문에 콘클라베 기간 동안 세계의 언

이다. 그러나 지난 콘클라베 동안 이 연기가 제대로

론은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오지 않거나 색을 분간할 수 없어 전 세계 종교계

콘클라베의 또다른 주요 특징 중의 하나는 정해진

가 혼란에 싸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정한 후보가 없다는 것이다. 전세계에 포진한 80세

콘클라베의 연기를 만드는 데에는 총 2대의 난로

미만의 모든 추기경들은 다음 교황이 될 수 있는 자

사용된다. 이 중 총알 모양의 낡은 난로는 투표용지

격을 가지고 있고, 자동적으로 교황이 될 수 있는 후

를 태우는 데 쓰이고, 이 후에 더해진 두 번째 난로가

보가 된다. 그리하여 이번 콘클라베의 후보자 역시

결과 발표를 알리는 연기의‘색깔 제조’ 를 담당하고

115명이라는 높은 숫자를 기록했다.

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연기 색이 결정되면 담당자

콘클라베가 실시되는 첫날 오후에 차기 교황을 뽑

는 이 두 번째 난로에 콘클라베를 위해 특수 제작된

은 첫 번째 투표가 실시된다. 이 날 투표에서 결정되

약제 카트리지를 태워 각각의 색을 낸다. 이 난로에

지 못하면 둘째 날 이후부터 1일당 오전 2회, 오후 2

서 만들어진 연기는 투표용지를 태우고 난 연기와 만

회로 합계 네 차례 투표가 실시되고, 3일째가 되어도

나 더욱 크게 피어 오르게 된다.

결정되지 않을 때는 하루 동안 투표를 중지하고 부제

현재와 달리 예전에는 콘클라베 연기 색을 내기 위

급 추기경의 최연장자에 의한 강화가 이루어진다. 7

해 투표용지를 물에 젖은 짚과 함께 태우는 방식을

회차 투표로 넘어가면 다시 투표를 즉각 중단하고 이

사용했었다. 그러나 짚이 젖은 정도에 따라 숯의 양

번에는 사제급 추기경의 권고를 거친다.

이 불규칙해지는 탓에 회색 연기를 내보내는 사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7회차 투표에서도 차기 교황이

잦아 교황이 선출되었는지 아닌지 모를 일대 혼란을

결정되지 않을 때도 같은 방법이 반복되어 이번에는

빚은 일이 생기도 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70년

주교급 추기경의 연장자에 의해 강화가 이루어진다.

대에 사용된 연막탄은 성당을 연기로 채워버렸고, 그

여기까지 와서도 교황이 누가 될지 결정이 내려지지

이후 도입된 화학첨가물은 추기경들의 호흡곤란을 일

않으면 3명 이상인 후보자가 있을 경우 최소 득표자

으켜 문제를 낳기도 하는 등 연기에 관한 에피소드가

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마지막엔 2인의 후

무궁무진했다.

보자에 투표를 하며 무조건 3분의 2이상 득표자가 나 올 때까지 선거를 계속한다. 이러한 과정 끝에 결국

이진주 (이화여대 불문) 9781399@naver.com

국제 시사

43


‘악한 독재자’ 와 ‘저항하는 민중’ 의 서사 ⓒPA

2011년 시작되었던 아랍의 민주화 운동은 그 누구

되며, 악한 독재자를 축출하면서 시민이 승리하게 된

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랍 세계 전

다. 이러한 관점을 좌파적 관점과 연계하여 아랍 혁

체로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대사건이었다. 리비아, 이

명을 분석한 한 논문은 그 전형을 보여준다. 두 나라

집트를 필두로 한 몇몇 국가에서는 정권을 무너뜨리

의 혁명이 보편적 사회 계층이 참여하는“전 국민적

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혁명’ 까지 일어났

혁명” 이었으며, 혁명 이후에 민중은“친제적인 군부

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많은

가 주도하는 낡은 지배계급과 기회주의적인 이슬람주

사람은 암묵적으로 특정한 프레임을 전제하고 논의

의자들의 야합” (이집트)이나“제국주의 하수인이 주

를 전개했다. 리비아, 이집트 등지의 혁명이‘강압적

도하는 혁명의 왜곡” (리비아)에 맞서서 투쟁해야 한

인 독재자에 맞서 일치단결한 민중들의 항쟁’ 이라는

다는 것이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혁명은 강압적인 독재 자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자들의 대결로 압축

44

대학생국제시사저널

혁명 이후 2년의 시간이 지났다. 과연 이러한 관점 은 적절했는가?

Prism


이집트, 궁정 쿠데타와 배반당한 혁명

리비아, 치열한 내전과 지역-부족의 연립방정식

2011년부터 이집트 혁명은‘민중에 의한 혁명’ 이

민주주의를 향한 리비아의 고난 역시 이집트만큼

자‘군부의 궁정 쿠데타’ 였다. 시민들의 민주화 운

이나 치열하면서도 복잡한 상황이다. 민주화를 요구

동은 분명 이집트의 지배체제에 충격을 가져다 주었

하는 대중 시위를 카다피가 강경하게 탄압했고, 이

다. 하지만 직접 정치적 동맹자였던 무바라크에게 압

과정에서 시위가 점차 내전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

력을 넣어 사임하게 하고, 군부최고평의회(Supreme

였다. 문제는 이러한 내전 구도에 단순히‘저항하는

Council of the Armed Forces, SCAF)를 통해 정치

시민’ 과‘무자비한 독재자’ 의 구도를 넘어선 요소들

적 주도권을 획득한 것은 군부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부족’ 과‘지역’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이집트의 정치적 주도권을 쥐

이다. 리비아 동부와 서부의 경계는 내전에서도 그대

고 있었고, 무슬림 형제단 계열의 모하메드 무르시가

로 나타났으며, 내전은 단순한 시민과 독재자의 대결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

을 넘어서 카다피의 지지기반 부족들과 반대 부족들

면서 독주 체제를 완성하고자 했다.

간의 전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르시 대통령의 승부수를 기점으로 상황

‘지역’과‘부족’이라는 요소는 카다피가 사망하

은 일변한다. 이집트 국경 수비대 십수 명이 테러

고 국가과도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리스트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을 문책하는 과정에서

NTC)가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 리비아를 괴롭히고 있

SCAF의 수장이었던 모하메드 탄타위를 해임하고 정

다. 카다피군 최후의 보루였던 리비아 서부의 중심지

치적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트리폴리가 함락되고, 카다피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

무르시는 탄타위의 해임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회

고 카다피를 지지하던 부족들은 지역 단위로 NTC에

복하면서도, 탄타위를 비롯한 해임 군부 장성들에게

저항했고, 2012년 말까지 리비아는 사실상의 내전

대통령 자문위원이나 각종 군사업체 사장 직책을 맡

상태였다.

겼다. 무르시가 이는 SCAF로 대표되는 군부의 정치

더 큰 문제는 동부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연방주의

관여는 거부하되, 그들이 이집트 사회와 경제에서 지

움직임이다.‘하나의 리비아’ 를 지향하는 NTC와는

니고 있던 이권을 보장하는 형태의 타협에 성공했다

달리 석유와 석유 수출항, 석유 정제소 가운데 상당

는 점을 의미한다.

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부는 동부의 자치권을 보장하

걸림돌이 되었던 군부를 정치적 동맹자로 포섭하고,

라 요구했으며, 중앙정부 인사들에 대한 테러행위까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평화 협상까지 주도하면서 정치

지 발생했다. 인구 비례의 원칙을 따르는 의회 선거

적 리더십을 보여준 무르시의 행보는 거칠 게 없었다.

와는 달리 제헌위원회에서는 동부, 서부, 남부가 동

‘파라오 대통령’ ,‘세자리즘’ 이라는 비판 속에 대통령

등한 대표자들을 갖도록 하는 정부의 중재안이 나오

의 결정에 사법부가 딴죽을 걸 수 없도록 초법적 권한

고서야 분리주의 운동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총선

을 보장한 헌법 선언문을 발표했다. 시민들의 광범위

에서 패배했던 이슬람주의자들이 재결집하고 자유주

한 반발이 계속되자 이러한 헌법 선언문을 폐기하기는

의 성향의 내각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여전

했으나, 무슬림 형제단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대표하

히 민주주의 리비아의 정치는 혼란스럽다.

는 제헌위원회를 구성했고 그렇게 구성된 새로운 헌법 을 국민투표에 회부했다. 무르시 대통령과 이슬람주의

혁명이 끝나고 벌어지는‘왕좌의 게임’

세력으로 대표되는 이집트의 집권 세력들 앞에서 세 속주의-자유주의 성향의 시민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

혁명 이후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다양

다.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새로운‘규칙’ 을 받아

한 조건이 필요하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들이고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2년 만에‘배반당한 혁

기본권이 지켜지는 것이 필수적이며, 헌법과 법 제도

명’ 을 되찾기 위해서 다시 들고 일어날 것인가?

라는 틀을 통해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의 룰을

국제 시사

45


ⓒDaryl Cagle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의 독주가 계속되자‘파라오 대통령’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설정하고, 행위자들이 그것을 준수하도록 할 수 있어

민주화를 추구하는 두 나라가 겪는 시행착오 역시

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

이러한‘민주주의 이행론’논의의 연장선 상에 있다.

의 공고화는 사실상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려운 경우가

이집트는 혁명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를 시도하는 군

많다.

부와 대통령 사이의 치열한 파워게임이 펼쳐졌으며,

권위주의 시기의 한국도 평균 4년 간격으로 헌법이

군부를 억제하는 데 성공하자 무르시와 무슬림 형제

개정되었으나, 그 헌법에 따라 권력 계승이 이뤄진

단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주의 집권 세력을 견제할 수

경우는 드물었다. 세력 간의 우열이 불명확한 경우를

있는 대안적 정치 세력의 부재가 문제로 떠올랐다.

제외하면 제도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강자의 이해관계

자유주의나 세속주의적 경향의 정치 세력들이 계속

가 고스란히 반영된다.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집트는 지금의 헌법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이행 과정에서 경합하는 정

이 굳어지고 이슬람주의 세력들의 장기집권 구도에

치 세력 간의 역학 관계다. 반체제 세력들이 혁명 이

접어들지도 모른다. 리비아의 경우 극단적이고 폭력

후에 군부와 같은 구 권위주의 세력들을 억누르거나

적인 내전을 통해 구체제 세력들 상당수가 사라졌지

타협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지, 그리고 혁명 이후 집

만, 앞으로 제정될 헌법과 그를 둘러싼 권력 경합은

권한 정치세력들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된

이집트 못지않게 치열할 전망이다.

대안 정치 세력이 존재하는지에 따라 민주주의 공고 화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46

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근대국가 만들기

구체제의 그림자

그런데 이러한 민주주의 이행론의 관점에서 본 문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집트와 리비아 모두 새로운

제점들을 넘어서, 더욱 근본적일 수도 있는 소재가

국가의 모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체제의 짙은 그

있다.‘근대국가 만들기’ 의 문제이다. 이슬람 사회는

림자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에서

우리가‘민주주의’ 를 논의할 때 은연중에 전제하는

혁명을 통해 무바라크를 추종하던 구체제 세력들은

‘유럽적 근대 국가’ 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부족주의

물러났지만, 새로운 집권 세력인 무르시 대통령과 무

와 이슬람주의, 지대추구국가 문제 때문이다. 독립된

슬림 형제단은 군부와의 전략적 제휴관계 속에 그들

주체로서 살아가는‘개인’ 과 그에 기반한 시민(혹은

에게 유리한‘게임의 룰’ 을 설정하며 독주하는 중이

국민)들 간의 연대가 아니라 부족에 기반을 둔 정체

다. 물론 현재의 이집트를 제대로 된 선거나 정당 결

성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이 다수일 경우 민주주의가

사조차 금지되었던 무바라크 체제와 비교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슬람 문화가 내재한 여성이나 소수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군부와의 동맹관계를 기반으로

자, 인권에 대한 태도들 역시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

반대 세력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점에서 무르시의 이

란 걸림돌이다. 국가 기구가 시민의 정치적 지지와

집트는 지지기반만 기업가 집단에서 이슬람주의 세력

세금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석유나 천연가스

으로 바뀌었을 뿐, 무바라크의 구체제와 비슷한 국가

와 같은 자원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것도 민주주의 정

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착에는 부정적이다. 봉건적 왕정의 그림자나 군부의

리비아는 아직까지 권력 구도와 헌법이 명확해지

강한 영향력 역시 이러한 이슬람적 특수성을 구성하

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국가 체제의 지향점을 정의

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 볼 수 있다.

하기는 어렵다.‘영토 내에서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

지금 이슬람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국가는 이러

점하는 집단’ 이라는 베버의 국가에 대한 정의를 상

한 이슬람 특유의 전근대적인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기해 보면, 작년 말까지 카다피를 추종하는 부족들을

긍정하고, 부분적으로 부정하면서 근대 국가와 접합

소탕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리비아는‘과거의

시켜 만들어진 키메라에 가깝다. 혁명을 통해서 무너

국가 체제를 완벽히 무너뜨리지도 못한 상황’ 인지도

진 무바라크 정권이나 카다피 정권 역시 마찬가지였

모른다. 지금은 내전 양상은 거의 종결되었지만, 부

다. 무바라크 정권은 물리적 억제력을 지닌 군부와의

족 단위로 무장한 민병대들을 정규군에 편입시키거나

전략적 협력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세력을 억누르면서

무장 해제시키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유지되던 체제였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외면적으로는

‘단결한 민중’ 의 프레임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상

과거의 봉건적 왕정 체제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라는

상하는“독재자의 가혹한 탄압에 맞선 강철같은 민중

근대적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리비아의 여

의 의지” 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이나 사

러 부족을 견제하고 포섭하는 부족적 권력정치를 통

회적 특수성에 따라 분열된 집단들이 벌이는 권력 다

해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툼이야말로 혁명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결정짓는 중

그러나 혁명으로 전근대와 근대가 혼재된 과거의

요한 변수라는 것, 그것이 이집트와 리비아 혁명이

국가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혁명 이후의 지도자들

주는 교훈일 것이다. 결국, 구체제의 유령에 맞서서

에게는 새로운 근대 국가의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만

진정 새로운 리비아와 이집트를 건설하는 것은 두 나

한다는 과제가 주어졌다. 안정적으로 민주주의를 공

라 시민과 정치인의 냉정한 정치 게임에 달려 있다.

고화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구체제가 억누르고 있었던 부족주의나 이슬람주의와 같은 정체성들을 근 대 국가와 조화시키는 과제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것. ‘이중의 과제’ 가 이집트와 리비아가 직면해 있는 어 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오창동 (연세대 정치외교 석사과정) lamancha91@gmail.com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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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로 맛보는 역사

‘코끼리’ 의 향긋한 한 끼 ⓒ김동규

인더스 문명만큼 오래된 커리의 역사

근래 불명예스러운 사건들로 연일 세계의 언론을 달구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인도는 중국과 비교되는 아시아의‘거대한 코끼리’다. 인구 수로는 세계 2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메가스테네스는 기원전 4세

위, 영토 크기로는 세계 7위에, BRICs(1990년대 말

기 경 인도에 파견되어 인도의 여러 문화를 기록한

부터 빠르게 성장한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을

『인도지(Ta Indika)』 라는 견문록을 썼다. 이 견문록은

이르는 말)의 한 축으로 여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지만 후대의 서적에 인용된 것

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은 놀라운데, 1974년

중에는“상 위에는 황금색의 음식이 놓여 있다. 그것

부터 이미 핵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이며, 우주

을 밥에 붓고 거기에 각종 고기를 얹어 먹는다.” 는인

산업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마이크로소

도의 음식에 대한 언급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이‘황

프트사나 애플사의 직원 중 70%가 인도 출신이라고

금색의 음식’ 이 커리의 원형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

할 정도로 IT 산업에서의 경쟁력 역시 세계적이다.

다. 파키스탄 카라치 지역의 인더스 문명 유적지 모헨

최근 요가, 명상 등 정신 문화에 관심을 가지며 인도

조다로에서도 겨자씨, 펜넬, 큐민 등의 향신료가 발견

를 찾는 사람도 늘고 있으며,‘발리우드’영화 역시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여러 향신료를 조합해 먹는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채식 열풍에 힘입어 인도의

전통은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음식 문화 역시 더욱 관심을 받고 있으며, 특히‘커

이러한 인도 음식 문화와 향신료들은 불교 수도승

리’ 는 전 세계 어딜 가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메뉴 중

들에 의해 버마,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하나이기도 하다.

시아는 물론 중국까지 전해졌다. 무굴 제국이 세워진

그런데‘인도 음식’ 하면 모두가 당연히‘커리’ 를

16세기 초부터는 북부 인도 요리가 크게 확산되기도

떠올리지만, 사실 90년대 말 출간된 책 제목처럼‘인

했다. 그 영향으로 현재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도 커

도에는 카레가 없다’ 는 말이 맞다. 인도에는‘커리’

리를 찾아볼 수 있는데, 태국의 레드 커리, 그린 커리

라고 불리는 특별한 요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 대표적이다. 반면 한국의‘카레’ 는 조금 다른 루

향신료를 조합하여, 채소나 육류, 해산물 등과 함께

트로 전해지게 되었다. 19세기 영국에서 커리는 굉장

요리해 난이나 짜파티 같은 밀가루떡 혹은 밥과 함

히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전

께 먹는 여러 음식들이 있을 뿐이다. 유럽인들이 인

해지면서 그들의 발음에 맞게‘카레(カレ―)’ 라고 불

도에 진출했을 때, 인도인들이 먹는 이런 음식에‘커

리게 되었고 맛 또한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변형된

리(curry)’ 라는 이름을 붙이며 서방 세계에 소개했다

다. 우리의‘카레’ 는 여기서 다시 우리 식으로 조금

는 것이 널리 알려진 설이다.‘커리’ 는 인도 북부 타

더 변형되어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밀어로‘소스, 국물’ 을 뜻하는‘카리(kari)’ 에서 온 것이었다. 물론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커리’ 로 알고

세상 어디에도 있는‘커리’

있기에 인도에서도 편의 상 이 말을 쓰는 일이 많기 는 하다.

전세계적인‘커리’ 의 인기는 요즘 세계에서의 인 도의 위상을 보는 듯하다. 경제력 뿐만 아니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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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적인 면에서까지 이미 인도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

책이 그리 많지 않다.

진 나라가 되었다. 한국에만 하더라도 동네마다 요가

“인도는 코끼리와 같다. 느리지만 일단 움직이면

학원과 인디안 레스토랑 하나쯤은 있는 곳이 많다.

누구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다.”만모한 싱 인도 총

인도 바라나시에는 한국말 좀 하는 인도 인들이 꽤나

리는 2012년 3월《중앙일보》 와 인터뷰에서 이런 말

있을 정도로,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대학생들 역

을 남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코끼리의 뒤를 겨우

시 굉장히 많다. 한국 기업들 역시 인도 진출을 위해

쫓을 것인가, 옆에서 동행할 것인가.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2013년은 한국과 인도가 수교를 맺은 지 4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는 여전히 인도의 문화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인재 (이화여대 국문) gilraen@naver.com

무식해서 용감한 커리 만들기 원래는 열심히 공부해서 짠! 하고 멋진 레시피를 소개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르기는 힘들다고, 글로 배운 요리를 처 음부터 잘 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자타공인‘이쉐프’ 인 필자인지라 실패담을 쓰는 것이 살짝 부끄럽긴 하지만 정직한 매체인《프 리즘》 이기 때문에, 솔직한 경험담을 적어보았다. 1. 재료를 준비한다.

4. 팬에 기름을 두른 뒤 냉장고

향신료: 월계수 잎, 강황 가루,

에서 숙성시킨 커리와 양파, 토마

통후추, 넛멕 가루, 칠리 가루(혹

토, 그리고 물을 더 넣어 끓인다. 불

은 고춧가루), 정향(Clove), 카다몸

이 너무 세면 타고, 닭가슴살은 익

(Cardamom), 계피, 코리앤더 씨, 머

지 않을 수 있으니 약불에 섞어주

스타드 씨, 펜넬, 큐민 등. 바스마티 라이스, 닭가슴살, 양파, 토마토, 요거트나 코코넛 밀크.

면서 충분히 끓인다. 어느 정도 끓 이면 맛을 보고 소금 간을 해준다. 너무 뻑뻑하거나 매우면 요 거트나 물을 더 붓는다.

향신료들은 이태원의 외국 식재료 마트에 가면 구할 수 있 다. 하나씩 구매하는 것은 보통 무리일테고, 마트를 잘 뒤져보

5. 식당에서 쓰는 그릇은 없

면‘가람 맛살라’ 라고 해서 커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향신료 몇

지만, 어쨌거나 모양은 그럴듯

가지를 모아 놓은 봉지들이 여럿 있다. 보통은 가람 맛살라와

하게 완성!

커리 파우더, 칠리 가루 정도면 커리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시식 후기 일단은 너무 매 2. 칠리와 강황 가루는 밥 숟가

웠다. 게다가 필자는 현지에서

락으로 2수저씩, 나머지 향신료는

하듯‘고수(실란트로) 잎’ 도 잘라 넣었다. 그 결과 '무식하면 용

티스푼으로 1-2수저씩 되도록 덜

감하다’ 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

어내어, 이것을 모두 요거트(혹은

었다. 호흡 곤란 올 정도로 매운데다 견디기 힘든 고수 향까지,

코코넛 밀크)와 함께 믹서기에 갈았

이틀 걸려 만든 음식이지만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다. 잘 갈리고 섞인 소스와 씻어 놓

사실 집에서 커리를 즐기는 방법에는 이보다 쉬운 것들이 많

은 닭가슴살을 버무려 냉장고에 넣어 숙성시킨다. 3시간 이상

다. 이태원 마트는 물론이고, 요즘은 백화점 수입 식료품 코너

넣어두면 된다고 하는데, 필자는 넣어두고 이틀 뒤 요리했다.

에서도 쉽게 여러 종류의 커리 페이스트를 구할 수 있다. 물론 필자처럼 요리가 취미이며, 호기심과 시간이 많은 분들은 한번

3. 밥을 한다. 바스마티 라이스를 사용한다면 일반 밥솥에

이렇게 직접 모든 향신료를 구해 만들어보시기 바란다. 처음부

보통 때보다 100ml 정도 물을 더 넣고 해도 되고, 냄비에 해도

터 잘할 수는 없지만 몇 번 하다 보면 맛있는 레시피를 찾을 수

된다.

있을 것이다.

혀로 맛보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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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국제정치

절망적인 희망의 끈 오멸 감독,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2013) 4·3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반란이었다고도 하고 폭동이었다고도 한다. 항쟁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모든 이름은 평가다. 이들 규정이 나름의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으니, 교과서에서는‘4·3사건’ 이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으로 갈등을 피하기도 한다.

우리는 4·3이라는 날짜를 이름 삼아 제주도의

아니, 제주도 출신이 아닌 이들에겐 그들의 말부터 외

비극을 떠올리지만 이 역시 완전한 인식은 아니다.

국어처럼 낯설다.〈황산벌〉에서 호남어와 영남어의

4·3의 비극은 1948년 4월 3일 하루에만 일어난 게

구분은 나와 적을 가르는 생사의 구분선이었지만, 모

아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4·3 이전에도, 이후에도

든 관객이 이‘사투리’ 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었다.

친공과 반공의 이분법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지슬〉 을 자막 없이 보고 이해할

노무현 정부에서 2007년 5월 17일 공포한‘제주4·3

수 없다. 반대로, 서울말 대사에도‘굳이’딸려나오는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에

자막이 혹 제주도민에게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서는“4·3사건” 을“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

‘과거는 다른 나라’ 라는 말은 역사적 과거를 너무

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나도 친숙하게 여겨 앞 시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공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

감하지 말라는 의미로 흔히 쓰인다. 하지만 어떤 과거

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으로 규정했다.

는 우리 곁에 있어본 적조차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기

영화의 배경도 4월이 아니다. 눈이 내린다.‘빨갱

에 오늘날 제주도의 멘탈리티가 어떻게 형성돼 왔는

이’ 를 한 명도 사살하지 못한 군인이 추위 속에서 알

지를‘육지’ 에서는 떠올릴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벌을 받으며 떤다. 제주도에서 진행된‘초토화

그곳의 생각은커녕 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지낸

작전’ 은 한국 정부의 1948년 10월 17일 소개령과 11

다. 현재는 그렇게 낯선 나라로서 머문다.

월 17일 계엄령으로 시작됐다. 이 작전은 1949년 2 월까지 진행됐다. 영화가 개봉된 직후,‘초토화 작전’

누가, 왜 먼저 총을 쏘았는가?

이 미군정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제작진의 영화 정보 소개조차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실제로 당

〈지슬〉은 한국 현대사를 다루면서 으레 벌어지는

시 한국 정부는 미군의 개입을 가급적 배제하려고 노

정치적 실랑이, 즉 책임론을 피해간다.‘누가 먼저 총

력했다.

을 쏘았는가?’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이 물음은 비단 4·3뿐 아니라 해방과 분단, 그리고 건국에 이

현재는 낯선 나라다

르는 현대사 서술에서 빠지지 않는다. 1946년 10월 대구의 비극에 대해서, 1950년 신천의 비극에 대해서

세부 사항에 관한 한 오류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도 같은 물음이 되풀이됐다. 1947년 3월 1일,‘누가

우리에겐 여전히 과거가 낯설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먼저 총을 쏘았는가?’이 물음은 1948년이 되면‘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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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리필름

가 먼저 조국을 분단시켰는가?’하는 확대된 책임론

영화에서는 해방 직후 그리고 분단 직후라는 정치

으로 계승됐다. 4월 3일 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운 무

적 상황조차 감지되지 않는다. 이승만이나 김일성의

장 봉기의 명분은 이 책임론과 분리할 수 없다. 나

이름도 우리는 들을 수 없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

중에는 이 모든 책임론이 무엇보다도 1950년 한국

장하는 해설 자막에서만 이승만 정부의 공권력과 미

전쟁의 발발을 둘러싸고 가장 격렬하게 제기되었다.

국이라는 두‘배후’ 를 짤막하게 서술하는 정도다. 영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하는 물음은 러시아에

화는 폭력 행사의 진정한 주체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

서 비밀문서를 공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논란

는다. 그러기에〈지슬〉 은‘누가?’ 라는 물음을 던지

거리였다.

지 않는다. 영화는‘초토화 작전’ 에 투입된 군인과

하지만 영화에서 그러한 물음은 다뤄지지 않는다. 폭력을 가하는 자와 그것에 희생 당하는 자 모두 아

제주도민이 처한 상황적 맥락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왜?’ 라는 물음으로도 나아가지 않는다.

픔의 정치적 근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아니, 아 예 그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정치적 상황에 철저히

실존으로서의 4·3

무지한 듯 그려진다. 실제 4·3의 희생자들이 저렇게 까지 정세에 아는 게 없었을까 싶을 정도로,〈지슬〉

영화는 죽음의 공포와 학살의 참혹함, 그리고 인간

은 삶과 죽음으로서의 4·3과 제주도를 그리는 데 주

성의 파괴라는 즉물적인 소재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력할 뿐이다. 군인들은‘빨갱이’ 에 대한 맹목적 증오

다. 죽기 싫다는 외침, 살기 위해 좁은 구덩이나 동굴

에 타오르기도 하고 회의와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에서 여럿이 갑갑하게 부대끼는 몸부림, 화면이 어두

한다. 상황의 비정상성에 이성적으로 회의하는 것은

워지면서 울려퍼지는 총성. 이 장면이 간헐적으로 반

서울 말씨를 쓰는 일부 군인에 국한된 듯 보인다.“저

복되면서 관객은 긴장하게 된다.

여자도 폭도입니까?”

군인들은 민가에 들어가 널부러진 시신을 수습하

스크린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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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않고 과일을 깎아 먹는가 하면, 시신 곁에서 볼

식을 듣고 동굴로 피신해 지내기로 한다. 무동은 모

일을 보기도 한다.‘닦을 것’ 을 가져오라는 명령과

친에게 함께 떠나자고 설득하지만, 거동이 곤란한 모

아직 죽지 않은‘빨갱이’ 를‘제대로 처리’ 하라는 명

친은 그게 오히려 짐이 될까 우려하며 집에 남기로

령은 같은 어조로 내려진다.‘빨갱이’혐의자를 붙잡

한다. 모친은 무동에게 난리를 피하는 동안 먹을‘지

아 시신을 버려둔 곳에 가두는 일도 벌어진다. 군인

슬’ 을 건네지만 무동은 지금 지슬이 문제냐며 화를

들이 몰려가 민가를 불지르는, 차분하고도 긴반한 롱

내고 만다.

테이크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파괴되는 인간성

순덕의 모친이 챙겨 온 지슬은 고난을 함께 하는

이라는 하나의 소재에 주목함으로써,〈지슬〉 은 4·3

제주도민들이 나누는 희망의 상징이다. 하지만 지슬

을 기록하기 위한 육하원칙의 물음 가운데 단 하나의

은 절망 속에서 간신히 붙잡는 역설적인 희망이기도

물음을 취사선택한다.‘무엇을?’죽음을, 공포를, 살

하다. 무동은 모친의 신변이 걱정돼 마을로 돌아가지

인을. 그러기에 낯선 나라인 현재는 분석의 대상으로

만 이미‘빨갱이’ 로 몰려 살해된 상황이었다. 지슬이

서는 복원되지 못하지만, 공감의 대상으로서 복원되

대수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무동은, 이제 어머니

어 실존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기에‘누

의 피가 묻은 지슬만을 챙겨 동굴로 돌아간다. 난리

가?’ 와‘왜?’ 를 묻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이지

통에 지슬이 대수냐는 분노는 당신께서도 함께 살아

만 결점은 아니다.

야 한다는 외침이며, 피난길에 지슬을 챙겨가라는 조 언은 너라도 살아야 한다는 배려다. 그러기에 지슬은

지슬 혹은 산다는 것

산 자의 죽음이며, 죽은 자의 삶이다. 속사정을 모르 는 주민들은 무동이 챙겨온 지슬을 먹으며 살 수 있

그러면 영화에서는 죽음만 그려지고 있을까.

다는 희망의 끈을 계속 잡으며, 이‘음복’ 을 매개로

‘초토화 작전’ 이 전개되면서 제주도 중산간지역의

죽은 자들의 기대를 업게 된다. 그 자체로 부여 받아

주민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피난을 가게 된다. 영화는

야 할 삶의 의미가 곁에 누워 있는 죽음에 의탁해 부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서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여 받아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현대사를 일관되게 관

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군이 학살을 자행한다는 소

통해 온 비극이 아닐까. 삶은 절망적 희망에 기 ⓒ시사제주

대야 간신히 유지되는 것 이지만, 모르는 사이 무 섭게 추구될 정도로 맹목 적인 것이기도 하다. 죽 은 자의 지슬을 먹는 이 모티프는 현기영이 『순 이 삼촌』 에서 좀 더 섬뜩 하게 보여줬던‘고구마’ 의 모티프와 공명하고 있 다.“순이삼촌네 그 옴팡 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 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 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어 치운 다음에야 고구 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 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

지난 65주년 4·3 위령제에 참석한 정홍원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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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이기도 한‘지슬’은‘감자’를 뜻하는 제주도말이다.

장 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

하다” 고 평가했다. 현기영의 소설이 은폐의 시대에

했다.”

4·3의 숨은 진실을 고발하기 위한 글이었다면,〈지 슬〉 은 화해의 시대에 4·3의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

절망을 넘어 화해로

하기 위한 영화로 역할하게 될 것이다. 결국 4·3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의 삶이란, 죽어

김대중 정부에서 4·3의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노

간 이들에 기대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이며 어떻게

무현 정부에서 조사 결과를 받아들여 대통령이 2003

든 기억되고 말리란 무서운 진리를 확증하는 시공간

년 10월 31일“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 을 인

인지도 모른다. 이로써 현대사에서 스러져간 모든 삶

정함으로써 4·3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이 비로소 위

은 비극적이지만 종래에는 비극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로 받게 되었다.

영웅적인 비장함을 얻게 된다.

1978년, 박정희 정부 말년 작가 현기영이『순이 삼 촌』 을 출간했을 때, 책은 금서가 되었고 그는 중앙정

그러기에 이 영화의 부제는“끝나지 않은 세월” 이 다.

보부의 탄압을 받았다.‘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을 위한 시행령은, 박 근혜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지난 3월 23일부터 시행 되고 있다. 지난 65주년 4·3 위령제에 참석한 정홍 원 국무총리는 추도사에서“박근혜 대통령께서 약속 하신 바 있는‘4·3사건 추념일 지정’ 과‘4·3평화 재단 국고지원 확대’ 를 차질없이 추진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린다” 며“4·3 위령제가 열리고 있 는 이곳은 민족 분단이 빚어낸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극복해낸 역사의 현장이기도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intransigere@gmail.com

스크린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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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icphotos

세계를 듣다

동료들과 함께 전투를 준비하는 아옌데 대통령. 그는 마지막 연설에서“확실히 이번이 제가 여러분들께 연설하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칠레 만 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라고 외쳤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칠레의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통령의 마지막 고별 연설이 흘러나왔다. 군인들은 대 통령 궁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고, 이에 대통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하늘은 유난히도 맑았

령은 경호원들을 궁 밖으로 내보낸 뒤 직접 소총을

다. 하지만 수도 산티아고의 공영 라디오에서는 알

들고 군에 저항하다 결국 그 총으로 자살했다.“산티

수 없는 방송이 계속되었다.“지금 산티아고에는 비

아고에 비가 내린다.”이는 군부 쿠데타의 행동 개시

가 내립니다.”탱크를 앞세운 무장 군인들이 대통령

암호였다.

궁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하늘에는 전투기가 위

당시 칠레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내세

협적으로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때, 군인들에게 점령

운 인민연합 세력이 집권하고 있었다. 이는 세계 최

당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유일한 국영 라디오에서 대

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사회주의 정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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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수립된 아옌데 정부는 미국에 의해 통제되던

그에게 기타와 칠레의 전통 민요들을 가르친 것도 그

구리 광산을 국유화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펼쳐

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자연

나갔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의 선택에 의해 사회

스레 칠레 민요 및 연극 등 칠레의 전통 문화에 대한

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운명처럼 남미 전

이를 견제하고자 1972년 구리 비축 물자를 한꺼번에

통 민요의 거장 비올레타 파라를 만나게 되었고, 그

시장에 내놓아 국제 구리 값을 폭락시켰다. 칠레 경

녀의 권유로 빅토르 하라는 음악에 매진하기로 한다.

제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를 기회 삼아 피노체트

이후 그는 칠레 민요 그룹인‘꾼꾸멘(Cuncumen)’ 의

장군이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쿠데타가 바

일원으로 활동하고, 비올레타 파라가 운영하는 음악

로‘산티아고에 내린 비’ 였다.

카페에서 노래하는 등 점차 가수로서의 활동 영역을

이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는 무참히 무너졌으며,

넓혀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빅토르 하라는 드디어

1974년 6월 피노체트는 대통령으로 취임, 무려 16년

‘누에바 깐시온’ 에 합류하게 된다.

간 군부 독재 정치를 펼치게 된다. 이 때 피노체트는

스페인어로‘새로운 노래’ 라는 뜻의 누에바 깐시

아옌데에게 협력했거나 인민연합과 관계된 사람들에

온은 칠레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펼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른바‘누에바

졌던 음악 운동으로, 아르헨티나의 아따우알빠 유빤

깐시온(Nueva Cancion)’ 이라는 새로운 노래 운동에

끼,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가 미국 상업음악에 대항해

참여한 음악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

남미의 민속 음악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시작되었

이 바로 칠레의 전설적인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다.

다.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안데스 인디오 의 전통 문화에서 찾고 이러한 인디오 음악의 부활과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현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누에바 깐시 온은 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적 전통을 지키려는 문

1932년 9월 23일, 빅토르 하라는 산티아고 부근의

화 운동에서 나아가 음악을 통한 사회 변혁을 이루려

론켄이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

는 사회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어났다.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버지가 일찍이 가출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빅토르 하라는 1969년 제 1

뒤 어머니가 홀로 자식들을 키웠는데, 빅토르 하라의

회 누에바 깐시온 페스티벌에 참가하여‘한 노동자에

어머니는 음악적 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처음

게 바치는 기도(Plegaria a un labrador)’ 라는 자작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빅토르 하라는 ⓒAP

아예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당시 착취와 억압 속에 가난했던 민중을 찾아 다니며 노래 부르 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며, 특히 민중의 삶을 서정적 으로 그려낸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평화롭게 살 권리’ ,‘내가 일하러 갈 때’ 와 같은 그 의 대표곡들은 지친 민중들을 위로하며 인기를 얻었 다. 동시에 그는‘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이라는 누 에바 깐시온의 구호처럼 자신의 노래가 가진 힘을 믿 으며 민중의 단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빅토르 하라는 단순한 문화 운동을 넘어 정치 운동에까지 동 참, 1970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인민연합의 아옌

“예술가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그 본질 자체로부터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 위대한 소통 능력 때문 에 게릴라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존재가 바로 예술가인 것이다.”

데의 당선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자 빅토 르 하라 역시 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후 그가 시

세계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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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래하는 건 노래를 좋아하거나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지 기타도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기에 난 노래 부르네 내 기타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갖고 있어 마치 성수와 같아 기쁨과 슬픔을 축복하지 여기서 내 노래는 고귀해지네 비올레따의 말처럼 봄의 향기를 품고 열심히 노동하는 기타 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어 의미를 지닌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 노래 부르며 죽기로 한 사람의 참된 진실들 내 노래에는 덧없는 칭찬이나 국제적인 명성이 필요 없어 내 노래는 한 마리 종달새의 노래 이 땅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지 여기 모든 것이 스러지고 모든 것들이 시작되네 용감했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노래일 것이네 - 빅토르 하라의 앨범『선언』중「선언」

신으로 발견된 것은 불과 5일 후였다. 빅토르 하라의

(Manifiesto)’ 이라는 오리지널 앨범으로 다시 빛을

양 손목은 고문으로 완전히 부러져 있었고 온 몸에는

보게 되었다.

총알 40여 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는 가혹한 고

문 속에서도 인민연합을 대표하는 노래‘벤세레모스

현재 빅토르 하라는 칠레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를 불렀다고 한다.

에서 전설적인 민중 가수로서 널리 칭송된다. 음악 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언제나

끝나지 않은 노래

약자를 위한 노래를 불렀고, 그의 노래들은 이제 자 유와 평등의 상징이 되어 민중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빅토르 하라의 노래를 두려워했던 피노체트는 그

불리고 있다. 특히 칠레에서 빅토르 하라는 피노체트

가 죽어서도 기타를 칠 수 없게 그의 손목을 부러뜨

정권에 희생된 5,000여명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상징

리고 그의 음반을 모두 소각 시켜버렸지만, 그의 부

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한때 수용소 역할을 했던 운

인 조안 하라에 의해 빅토르 하라의 노래들은 세상

동장의 이름을‘빅토르 하라 국립 스타디움’ 으로 개

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인이었던 그녀는 고국으

명한 것이나, 지난 1월 빅토르 하라의 죽음과 관련된

로의 망명이 허용되었고, 그 때 남편의 녹음 테이

군장교 출신 용의자 4명을 구속한 것은 이를 잘 보여

프 일부를 몰래 짐 속에 숨겼던 것이다. 이렇게 어

준다. 그는 이미 죽어 무덤에 묻혔지만, 그의 노래는

렵게 반출된 빅토르 하라의 노래들은 1974년‘선언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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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마토이어

1990년 3월 피노체트는 추가 적인 집권 연장에 실패, 영국으 로 망명했지만 1998년 런던에 서 체포되었다. 건강 악화를 이 유로 다시 칠레로 귀국한 그는 가택 연금을 당하였고, 인권 유 린 등 300여 건의 기소를 당했 지만 재판이 끝나기 전 2006년 에 사망하였다. 당시 칠레의 대 통령은 미첼 바첼렛으로 그녀는 피노체트 정권에서 고문으로 사 망한 바첼렛 장군의 딸이었다. 피노체트는 그녀의 거부로 국장 으로 치러지지 못하고 군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이 훼손될 것을 염려한 피노체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되었다. 한편, 2010 년 대통령 임기가 끝난 미첼 바

볼프강 마토이어의‘빅토르 하라를 위한 레퀴엠’

첼렛은 오는 2013년 11월에 열 리는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삼천리 옮김(2008)

칠레 민중 문화 운동에 헌신한 무용가이자 빅토르 하라의 아내이기도 한 조안 하라가 쓴 평전이다. 빅토르 하라가 남긴 편지와 말을 많이 담고 있어 그의 성장 과 변화를 면밀히 추적해볼 수 있다. 당시 칠레 상황에 대한 조안 하라의 생생한 경험들은 격변기 속에 잔혹한 모습으로 죽어간 빅토르 하라의 모습만큼이나 가 슴 아프다. 물론 책에 담긴 조안 하라의 개인적인 견해만으로 칠레의 격변기 상 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질문 을 던져준다. 다큐멘터리〈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헬비오 소토, 1975),〈칠레 전투〉3부작 (패트리시오 구즈먼, 1975-1979) 등과 함께 보면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 칠레의 역사를 더욱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은 (이화여대 국문) silver894@nate.com

세계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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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기록관

꿈인가 비전인가

노태우,『노태우 회고록』 , 조선뉴스프레스, 2011. 조갑제,『노태우 육성 회고록』 , 조갑제닷컴, 2007. 박철언,『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 랜덤하우스중앙, 2005.

보통사람, 체제를 만들다 1987년 선거의 승리자는 노태우였다. 선거의 뒷맛은 개운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그의 득표율은 36.6%에 불과했다. 이 사실 뒤에 으레 따라오는 하나의 가정, 즉‘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성공했 더라면…’하는 아쉬움은, 민주화 이후의 지도력은 민주화 세력에서 나와야 한다는 전제의 산물이다. 노 태우 시대의 권위주의를 생각하면 이 한탄은 언뜻 타당한 듯하지만, 전두환에 이은 이‘유연한 독재자’ 역시 국제 무대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취하는 데는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

두 개의 한국, 두 개의 자주

우는 박정희가 1973년, 6·23선언으로 할슈타인 원 칙을 폐기했을 때부터 자주 외교를 구상했다.“당시

자주(自主)는 노태우의 비전이기도 했다. 박정희

군에 몸담고 있으면서 국가안보를 걱정해야 하는 나

의 사전에서 자주의 마지막 두 어의(語義)는 미·일

로서는 남북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지를

과의 마찰까지 불사하는“한국적 민주주의” 와 핵개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곤 했다.”군인인데도 이른 시절

이었다. 한편 노태우에게 자주란 적과 수교할 자유였

부터 외교‘정책’ 을 구상했다고 하니, 그가 정치 군

다.“나는 냉전 시절부터‘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인으로 나선 것은 국가적 행운인 동시에 필연이라고

공산진영의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박정희의‘자주’ 가 10월의 총성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하고 생각했다.”이것이

과 함께 쓰러진 직후, 노태우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북방외교에 내재(內在)된… 기본 철학” 이었다. 노태

성공하고 1980년 8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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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식‘자주’ 인 북방외교의 실질적 시작이었다.

외교를 개시할 신호탄이었다. 노태우는 올림픽을 매

노태우는 북한이 개방의 길로 나오지 않는다면 동유

개로 공산권과 만남을 가지면서도 북한을 소외시킬

럽, 소련,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북한의 개방을 유

수 있었다. 노태우는 민족의 만남을 긍정했지만 북한

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 섣불리 접근할 생각은 없었다. 국내의 반대 세력

노태우는‘자주’를 실현하면서도, 전두환 시대 부터‘자주성’ 을 자임해 온 다른 이들,‘민족해방’

이‘올림픽 공동개최 투쟁’ 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차라리 노태우는 동유럽에서 동질감을 찾았다. 올

(National Liberation, NL) 세력과 싸워야 했다. 광

림픽을 개최하기 직전에 한국과 최초로 수교를 맺은

주학살은 일제식민지의 역사가 미제식민지의 역사로

사회주의자 헝가리를 말하는 것이다. 공산권과의 전

이어지는 증거라고 믿는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자주

방위 수교를 꿈꾼 노태우가 헝가리를 첫 상대로 정한

란 외세를 배격한 민족 간 단결이었다. 노태우가 선

것은, 후일 김대중이 자유무역협정 시대를 예감하면

거에서 승리하기 1년 전만 해도 전국반외세·반독재

서 칠레를 첫 상대로 정했듯이, 조심스러운‘예방 접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에는 대학생 2천 명이 모였

종’ 이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사후적 인상 비평으로

다. 현장에는 비슷한 숫자의 경찰이 더해져, 4천여 명

나마 헝가리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헝

이 얽혀 격렬하게 싸웠다. 검찰은 발족식을‘공산혁

가리는 몽골족과 친연성이 있다. …헝가리 사람들은

명분자 건국대점거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주동자

몽골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민

29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NL은 직선제 개헌

족의 특성을 민족의 등장 이전으로 소급하는 것이야

을 이끌어낸다면 대중이 빼앗긴 권리를 다시 손에 넣

말로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의 전형이다. 이번에는 이

어 신군부를 고립시키고‘반미자주’ 투쟁으로 나아가

서술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북방’ 을 향해 있었다.

리라 믿었다. 하지만 정작 직선제 선거에서 노태우가

“헝가리 언어도 우리 문법과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

승리하자 그들은 사회주의와도 손을 잡으려는 노태우

통이다. 헝가리 사람들과 만나면 뭔가 모르게 서로

식‘친미·친공적 자주’ 와의 대결에 나섰다.

통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감성적 요인도 최초의 수교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박철언

누가 민족주의자인가?

의 눈에도“헝가리 민족이 동양계인 마자르족으로 우 리와 정서가 비슷” 한 것으로 보였다.

노태우가 모든 반미를 좌익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

한편 가장 가까운‘북방’ 에서는 헝가리가 사회주

다. 그는 북한 찬양을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대통령

의 우방을 저버리고“남조선 괴뢰” 에게 구걸하는 처

후보 시절에 그는 미국에서 이렇게 말했다.“최근에

지로 전락했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같은 이유로,

는 극렬 좌경세력과 관계없이 반미 감정을 가진 세력

이 비난이 머잖아 한때의“수정주의자”소련과“교조

도 있다. 이들은 선조들이 받아온 외부의 억압과 간

주의자”중국에게 가해지게 된다.

섭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세력이다. …이들이 잘 다 듬어지면 국제사회와도 조화를 이루는 민족세력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창구

될 것이다.”그 자신도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 는 없었다.“재임 기간에 나는 줄곧 민족자존을 국정

김일성이 1972년에 민족문제의‘자주’ 적 해결을

지표로 세우고 그것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말했을 때, 그것은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했다. 이제

“민족자존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노태우는‘자주’ 라는 말로 민족 문제의 당사자 간 해

는 게 그가 댄 용산 미군기지 이전의 이유였다. 그는

결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을 대북 접촉의 유일한 통로

그곳이“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고부

로 만들었다. 미국도 북한과 직접 대화하는 모양새를

터 청나라군, 일본군, 그리고 지금은 미군이 사용하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 원칙은 잘 준수되었다. 노

고 있는 곳”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태우가 만들어 놓은 이 체제는 1차 북핵 위기가 터지

88올림픽은“민족자존” 을 과시하는 계기이자 자주

면서 비로소 산산조각난다. 노태우는 김영삼을, 아니

꿈인가 비전인가

59


이후의 모든 대통령을 겨냥한 듯 회고했다.“제6공화

88을 앞둔 7·7

국은 핵문제, 대북 협상 등 모든 외교관계에서 이니 셔티브를 다른 나라에 준 일이 없었다. 최근 북한 핵

6월 10일은 노태우의 인생에 영원히 기억될 날짜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이 소외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

였다. 바로 1년 전 전두환 정권 전체를 궁지에 몰아

것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넣은 날이 아닌가. 노태우는 1년 전처럼 위기를 돌파

‘통미봉남’ 이라는 말이 김영삼 시대에 처음 나온 게

할 것이었다. 상황은 전보다 유리해졌다. 1년 전에는

우연은 아니다. 그 말을 고안해낸 인물은 노태우의

대통령 직선제라는 타협 가능한 국내 정치적 규칙만

측근이던 노재봉이었다.

이 목표였다. NL도 이 목표를 위해 기꺼이 다른 요구

노태우는 국내적으로도‘하나의 창구’원칙을 끝

를 내려 놓았다. 이제 국제 체제에 형성된 불신의 구

까지 요구했다. 방북하기 위해서는 민간이 한국 정부

조 자체가 문제시되는 상황에서, 노태우만을 비난하

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항하는 이들이

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위원회

많았다. 88올림픽에서 남북의‘만남’ 을 요구한 대학

는 4월 4일, 노태우가 아니라 서울대 총학생회에 답

생 선언이 그 시초였다. 노태우에게 88올림픽이 북

신을 보냈을 뿐이었다. NL의 분노는‘파쇼’노태우

한을 고립시킬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의 상징이었다면,

를 향했지만, 그 노태우의 정치적 정당성도 바로 그

NL에게 그것은‘진정한’민족이 만나야 할 장이었

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1년 전 최루탄에 쓰러

다. 1988년 3월, 김중기와 유제석이 서울대 총학생

진 이한열의 비극은 여야 간 대타협으로 향하는 기폭

회장 후보로서“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

제였지만, 이번에 대의를 위해 기꺼이 할복한 조성만

개서한” 을 읽었다. 그들은“민족단결을 위한 남북한

의 노력으로도 국제 체제의 문제가 도저히 움직여지

청년학생체육대회” 를 열고“정치경제에서의 자주” 를

지 않았다.‘87년 헌법’ 을 위해 협력했던 노태우, 김

이루자고 했다. 4월, 연세대 총학생회에서 공개질의

영삼, 김종필이 이번에는 등을 돌린 채, 김대중만이

서를 채택해 이 주장을 이었다. 같은 달 올림픽공동

이상적인 수사로써 올림픽 공동개최를 지지했다. 조

개최와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를 요구하는 서울대 집

성만을 추모하는 집회에만도 무수한 인파가 몰렸는데

회에 3천 명이 모였다. 5월 14일 전국대학생대표자

도 말이다.

협의회가 연 결의대회에는 1만5천 명이 모였다. 6월 10일, 연세대에 2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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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1년 전 6·29선언으로‘누가 진정한 민 주주의의 옹호자인가’하는 물음에 이미 천재적으로

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대답했다. 노태우의 7·7선언 역시,‘누가 진정한 민

흡수통일 정책은 물론 교류와 포용정책의 시작이라

족주의자인가’하는 NL의 물음에 대한 천재적인 대

는 평가도 가능하다. 학자들은 여전히 노태우의 국제

답이었다. 그는“자주·평화·민주·복지의 원칙

정치적 비전이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를 놓고 갈팡질

에 입각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

팡한다. 6·15선언을“김대중-김정일의 반역적 합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심지어“이 선언은 미국 측

작품” 으로 생각한 조갑제조차 노태우와의 인터뷰 도

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구상한 것” 으

중에“북방정책이나 남북관계에 대한 노대통령의 설

로, 외세의존적이지도 않았다. 노태우는 선언에서 민

명을 들으니까 6공의 통일정책은 결국 김대중 대통령

족 간 인적 교류와“민족 내부교역” , 4대 강국에 의한

의 햇볕정책과 같다고 봅니다” 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교차 승인을 제시했다. 노태우는“동족뿐 아니라 미

아니다. 노태우는 신뢰구축-남북연합-통일민주공화

국·소련·중국·일본의 지도층을 청중이라고 생각

국으로 이어지는“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이“통일을

했다.”그리고 이 청중이 움직였다. 물론“6천만 동

하나의‘과정’ 으로 인식” 한 데서 비롯했다고 말했다.

포 여러분” 을 부르며 시작한 이 선언에 귀를 막은 이

통일이‘사건’ 이 아니라‘과정’ 이라는 이 말을, 우리

들은 다른 방법으로 만남을 추진했다.

는 후일 국가보안법과의 대결에 나선 송두율과, 대선

1989년 3월 20일, 황석영이 방북했다.“봄꽃은 우

출마를 앞둔 안철수에게서도 듣게 된다.“큰 통일”

리 나라 남쪽 끝의 한라산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하

이전에“작은 통일” 을, 그전엔“한반도 신뢰프로세

여 아무런 장애도 없이 휴전선 철조망을 넘어서 북의

스” 를 가동하겠다는 박근혜의 약속 역시 여기에 뿌리

백두산 기슭에 피어납니다. …저들의 재생력이야말

를 둔다. 노태우는 이미 1990년 고르바초프에게“군

로 이 무렵이면 우리 국토를 뒤덮는 외국군의 탱크와

사적 긴장 해소를 위해서는 남북한 간의 신뢰구축이

미사일을 이겨낼 위대한 힘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

선행되어야 할 것” 이라는 요지로 말했다. 노태우가

다.”3월 25일에는 문익환이, 6월 30일에는 임수경

1991년 유엔에서“통일문제는 우리 측의 한민족공동

이, 7월 26일에는 문규현이 평양을 밟았다. 노태우는

체 통일방안과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를 단계적

회고했다.“그들은 국가라는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는

으로 한꺼번에 묶어 논의할 수 있다” 고 말했을 때, 그

행동으로 일관했다. 한마디로 무정부주의자나 다름없

목소리는 1989년 김일성-문익환의 4·2 선언과 공

는 행동을 했다.”하지만 그들의 죄목은 무정부주의

명하면서 2000년 6·15 선언이라는 종합을 향해 있

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임수경은 정부의

었다.

허가를 얻은 박철언도 자신처럼 평양 세계청년학생축

노태우의 민족주의적 이상과 탁월한 현실 감각은

전 현장에 있었다며 국가보안법을 불공정하게 적용하

‘누가 민족주의인가’하는 물음에 대답하기 위한 NL

는‘체제’ 에 항의했지만, 이‘체제’ 를 만들어낸‘분

과의 경쟁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북방정책이 북핵

단 체제’ 의 불가항력적 원심력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

문제의 계기가 됨으로써 탈냉전 이전에 탈냉전을 선

했다. 정작 7·7에 시큰둥했던 김일성이 중국과 소

도한 것인지, 탈냉전 이후에 탈냉전을 가로막은 것인

련의 행보에 밀려 후일 이날의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지는 아직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가장 강력

남북대화의 기본 원칙이 만들어질 것이었다.

한 두 경쟁자가 노태우의 토양에 NL의 자양을 받아 들인 키메라로 등장하면서, 노태우가 여기에 대답할

노태우의 시대

의무를 덜게 된 것은 분명하다. 체제의 건설자 자신 은 87년에 분하게 패한 양김에게 이제 자리를 내줘야

과감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노태우의 시대,

만 했다.

노태우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 오늘날 대외관계의 기본을 그가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 대외관계의 변 화를 상상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상당 부분 그의 발 명품이기 때문이다. 노태우의 대북정책만 하더라도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intransigere@gmail.com

꿈인가 비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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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S/박병수

Inter view

캄보디아 라타나키리 주 타뱅끄로움 학교 공사 현장

국제 구호·개발 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 한국 JTS 활동가 오성근, 박병수 씨를 만나다 긴급 구호, 국제 개발 협력 같은 단어들이 낯설지 않은 시대다. 2010년 한국이 DAC(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해 결성된 OECD 산하 기구)의 일원이 되면서, 한국 내에서 개발협력 전문가에 대한 수요 역시 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다른 나라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인류 모두의 행복을 위한 다’ 는 말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다. 실제 국제 구호, 개발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에 대해 한국 JTS(Join Together Society) 해외 사 업장에서 일하시는 활동가 오성근, 박병수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재 오성근 씨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에 서, 박병수 씨는 캄보디아 라타나키리 주에서 2012년 한해 동안 사업을 진행했고 2013년에도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 다. 4월 초, 서초동 JTS 사무실 근처 한 카페에서 캄보디아로의 재출국을 하루 앞둔 박병수 씨(이하 병수), 인도네시아 에서 돌아온 지 나흘 된 오성근 씨(이하 성근)를 만나 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현지 상황에 대해 설명 부탁 드린다. 병수 캄보디아에 JTS가 처음 들어간 건 2009년이었

보통‘국제 개발 구호’ 라는 말을 많이 쓴다. 구호 와 개발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 당시 조사를 해 보니, 캄보디아가 초등 교육 이수

성근 일단 한비야 씨 덕분에 유명해진‘긴급 구호’

율이 많이 낮은데 특히 라타나키리 주의 초등학교 6년

는 재해 등으로 난민이 발생했을 때 들어가는 즉각적

이수율이 10%도 안 되었다. 그래서 2010년부터 본격

인 행동으로, 3개월 정도 잡고 들어가고 그 이상이 되

적으로 라타나키리 주에 들어가 사업을 시작했다.

면 실패했다고 한다.‘구호’ 는 지진 피해 복구처럼 그

성근 인도네시아에서는 2009년 빠당이라는 지역에서

이후에 3년 넘지 않는 기한 동안 하는 복구 사업이다.

지진해일 긴급 구호 사업을 한 것을 시작으로 그 지역

‘개발’은 한 지역에 종합적인 플랜을 가지고 진행하

에서 피해 복구, 농업 시설 개선 등의 일을 했다.

는 사업이다. 그런데 사실‘구호’ 와‘개발’ 은 정확하 게 나누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인도 JTS의 수자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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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카데미의 경우, 처음에는 인도에서 제일 가난한 둥게

동과 현지에서의 생활이 동떨어져 있는 NGO도 많다.

스와리 불가촉천민 마을에 대한‘구호’ 적인 성격을 가

하지만 JTS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여기서

진 사업이었다면 이제는 마을 전체에 대한 개발 단계

1달러 생활이 나온 것이었다.

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공적개발원조(ODA)와 JTS 같은 민간 단체의 활동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1달러를 쓰나 안 쓰나를 떠나 현지인처럼 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지 않나? 병수 사실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이다. 현재 사무실이

병수 한국에서는 국가 자체에서 직접 하는 ODA 사업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주도이기 때문에, 현지인

은 많지 않고, 대체로 ODA 예산을 민간 단체에 지원

들도 그나마 잘 사는 편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업을 진

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고 알고 있다.

행하는 마을들은 안쪽에 있는 곳들이라 정말 형편이

성근‘민간 단체 지원 사업’ 이라고 하는데, NGO들이

어려운 곳들이 많다. 그래서 사업장 안쪽으로 사무실

코이카에 사업 제안을 내서 선정이 되면 지원을 받아

을 옮길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러면 여러 곳에서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코이카는 자금을 지원해주

진행되는 일을 전체적으로 잘 꾸리는 데에 문제가 있

고, 모니터링 하는 정도이다. 이런 무상 지원은 코이카

다. 여기 사람들처럼 살려는 마음은 항상 있지만 분명

에서 하고, 유상 지원은 수출입은행에서 담당한다. 대

히 어쩔 수 없는 괴리가 있다.

기업이 입찰하는 공항 건설 같은 큰 몇 백억 짜리 사업

성근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활동 원칙이 있다면, 어

도 ODA에 포함 될 수 있는데, NGO에 지원되는 금액

떤 사업을 진행하든 주민들의 참여가 100% 이루어

은 거기에 비하면 아직 훨씬 적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져야만 하고, 여기에 보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ODA가 많이 들어가지만 NGO 통해서 하는 ⓒJTS/박병수

사업은 1년에 4개 정도밖에 안 된다.

JTS만의 활동 원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지난 번 미얀마 JTS 사업 설명회에서는‘하루 1달러 로 생활하기’ 라는 원칙이 언급되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나? 병수 사실 이 원칙이 나온 건 첫째로 후원으로 모인 자 금을 최대한 수혜자에게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JTS 는 전부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는데, 활동가들 에게 가는 최소한의 지원조차도 최대한 아껴 수혜자에

캄보디아 라타나키리 주 웽찬 마을 주민 회의

어렵지만,‘그만큼 아껴서 산다’ 는 데 의미를 둔다. 두

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자원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한편으 로는 당연히 노동의 대가를 지불 해야 한다고 보 는 시선도 있을 수 있지 않나?

번째로는 JTS는 활동가들이 주민들과 최대한 밀착되

성근 나는 JTS의 현재 시스템에 동의한다. JTS는 기

어서, 그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활동한다는 게 원

본적으로 주민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참여할 수 있게

칙이고 목표다. 그들을 위해 활동한다고 하면서, 막상

한다. 즉 그들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그들을

생활이 그들과 동떨어진다면 별로 의미가 없지 않나.

불쌍하고, 도와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뭔가‘해주

성근 1달러 기준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 비용 문제도

는’것을 지양한다. 이제까지 많은 NGO가 그래왔다.

있지만 더 중요한 건‘주민들과 괴리되지 않은 삶’ ,즉

주민들의 의견과는 관계 없이‘이게 필요할 것이다’

현지 수준에 맞게 산다는 생각에서 나온 원칙이다. 활

라면서 뭔가를‘주는’것. 우리는 그게 아니라 주민들

게 보내자는 것이다. 하루 1달러는 사실 예전에 초창 기 인도 JTS에서 했던 것인데, 그 때도 굉장히 고생하 면서 지켰다고 한다. 요즘에는 현실적으로 좀 지키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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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낄 때가 많고 이해가 간다. 당장 오늘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다’ 는 숭고 한 목표를 위해서 아무 대가 없이 일하는 게 정말 쉬운 일인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돈을 조금이라도 줬을 때,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을 해야 한 다. 주민들에게 참여의 대가로 돈을 준다고 하면, 당장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 에만 맛을 들인다거나 하는 후유증도 분명 있다. 참 미 묘한 문제이고, 현장 활동가들은 이 사이에서 균형을

활동가 오성근 씨(좌)와 박병수 씨(우)

잘 맞추는 능력이 필요하다. 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들이 실제로 원하고 필요하다는

성근 전에 세계 은행에서 빈곤의 원인에 대해 몇 년간

사업을 진행하고, 이때 만약 정말 필요한 일이라면 주

조사를 했는데, 그 원인 중 가장 큰 게‘무력감’ 이었다

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

고 한다. 사실 우리가 일을 하는 가장 큰 목표 중 하나

다. 그런데 이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는 이‘무력감의 해소’ 이다. 건축을 하고 안 하고를 떠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서, 이 사람들에게 성취, 성공의 경험을 주는 것이

주민들이 정말 필요한 것을 알아보는 것 자체도 쉽지

다. 그런데 아무래도 돈을 주면서 하게 되면 스스로 했

않고, 주민들의 참여율이 낮아서 공사를 중단하는 경

다는 애착이나 자신감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우도 많다. 병수 기본 구상은 정말 이상적이다. 그런데 이상만 가

그 외에 또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나?

지고 어떻게 살아가나. 특히 여긴 진짜 말 그대로 먹고

성근 JTS가 ‘Join Together Society’ ,‘함께 가자’

사는 문제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주

는 의미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우리가

민들이 처음에 진짜로 원해서 마음을 모으더라도 힘들

갑이 되어서 주민들을 다그치고 있고, 또 주민들은 당

면 의지가 약해지고, 생각도 바뀌기 쉽다. 이건 당연하

당하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을이 되어

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설득하

변명하고 피하고, 그럴 때가 정말 서글펐다. 그리고 좀

고, 안되면 중단하고 기다렸다가 또 다시 시작하고, 그

모순되지만, 주민들이 전문 기술자가 아니기 때문에

러다 또 중단되고... 이러니 쉽지가 않다.

역설적으로 주민들이 참여를 많이 할수록 건물의 퀄리

성근 인도네시아의 다른 단체들은 우리처럼 주민들이

티가 떨어진다. (웃음) 늘 이런 것들이 모순된다. 우리

랑 직접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대체로 업체와 계약해

원칙을 지켜 일을 하는 것과 시간에 맞춰 결과를 내야

서 업체들이 자재 공급부터 짓는 것까지 알아서 다 하

하는 상황. 우리의 원칙과 건물의 퀄리티. 본부는 원칙

고, 단체들은 모니터링만 한다.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을 지키길 원하지만 주민들은 또 다른 욕구가 있다. 이

‘Cash for work’ 나‘Cash for food’ 처럼 수익이 워

런 상황에서 접점을 찾는 게 참 어렵다.

낙 없으니 공공근로처럼 일을 만들어 1달러나 2달러 씩의 돈이나 쌀을 주거나 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NGO가 많다. 보통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에 익숙한 주민들은 우리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려운 점이 많은데도 계속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병수 나는‘내가 이 사람들을 살리겠다’ 는 그런 숭고 한 정신으로 일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좋은 방향과

그런데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게 힘든 상황이니 까, 임금을 주는 게 어떤 시선에서는 더 합리적으 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의도를 가지고 일을 할 기회가 왔고, 내가 이것을 통

병수 나는 주민들을 항상 만나서 이야기하니까 그렇게

겠나. 성근이 형과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좋은 의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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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해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만족을 느낀다. 사실 내 가 여기서 일한다고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

Prism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좋은

향을 미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고민 없이

의도로 여기 왔다고 해서 꼭 좋은 결과를 줄 수 있다고

그저 로망을 위해서 하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

생각한다면, 그건 오만이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지

은 영향을 주는 일이다.

내면서, 도움은 주지 못할 망정 피해는 주지 말고, 그 러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은 거다.

한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나?

성근 솔직히 사람들 생각처럼 크게 보람을 느끼진 않

병수 관심을 갖는 게 역시 제일 중요하다. 우리 삶과도

는다. 비영리 영역에서 일하는가, 영리 영역에서 일하

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기부를 하고 안 하

는가 하는‘필드’ 의 차이일 뿐이다.

고는 2차적인 문제다. 성근 예를 들면 바이오디젤이라고, 옥수수 같은 걸 태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국제 구호, 개발 활동이 필 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워서 쓰는 대체 연료인데 이게 우리는 좋다고 쓰지만

병수 이미 혼자서는 일어서기 힘든 판이 되어버렸다.

에 있는 사람들은 더 힘들어진다. 또 팜유를 많이 쓰니

국제 구호 개발이 많이 이루어지면서 그 폐해도 분명

까 대기업에서 농토를 다 사서 밀고 팜나무를 심는데,

심하지만, 이면에서 분명히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힘도

이 팜나무가 물을 엄청 빨아들여서 주변 지역의 지하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 마르고 토지가 황폐화된다. 작은 일도 모두 상호작

성근 국제 개발이 분명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나 역

용이 된다는 걸 인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옥수수 가격이 올라가고, 상대적으로 빈국

시 지금의 모델로 가는 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주 ⓒJTS/오성근

는 사람과 받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는 것, 홍보 효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색 내기 위한 것이 되는 것. 그리 고 부국에서 빈국으로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공여국의 회사가 입찰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 고 나면 거기서 나는 이득이 다시 공여국으로 돌아가 는 것. 그러니까 지금은 부국에서 빈국으로 재원이 이 동하는 게 아니라 스쳐서 다시 부국으로 돌아간다. 결 국 이 사이에서 빈국 주민들은 구경꾼이 된다. 새로 운 방향이 필요하다. 사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우리

올해의 희망 사항은 무엇인가?

나라에서는 원주가 지역 공동체 운동이 잘 되어 있다.

병수 좀 더 주민들과의 거리가 좁혀졌으면 좋겠다.

70년대에 독일 카톨릭 교구에서 종잣돈(Seed Money)

성근 마찬가지다. 제일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을 지원해주고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사업을 발전시켰 는데, 한살림 같은 게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국제 개발이라는 게, 해외에서 들어가니까 ‘국제’ 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지역 운동이고 지역운동

이인재 (이화여대 국문) gilraen@naver.com

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JTS는 국제 기아, 질병,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활

해외 봉사나 구호, 개발 활동에 관심 있는 학생들 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성근 현실과 로망은 많이 다르다는 것. 밖에서 보는

동하는 NGO로, 현재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캄보디 아, 미얀마 등 동남아 국가들과 북한에서 구호 사업을 진 행하고 있습니다. 국내, 해외 자원 봉사자를 상시 모집하 고 있으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것, 잠깐 해보는 것과 직접 오래 일하는 것은 정말 많

자원 봉사 활동 문의 02) 587-8756 최기진 팀장

이 다르다.

후원 문의 02) 587-8995, jtsmember@jts.or.kr www.jts.or.kr

병수 뭔가를 직접 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일이 어떤 영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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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흔히 해방공간의 중도파이며 이승만에게 제거된 사회 민주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 에게서까지 버림 받은 중간파였으며 이승만과 협력한 이승만의 반 대자이기도 했다. 이원규는 오랜 자료 조사를 토대로 신념윤리의 정치 속에서 홀로 책임윤리를 실천함으로써 고립된 조봉암이, 이 역설적 상황을 5·10총선 참여, 농림부 장관으로서의 농지개혁 구상, 이범석 계열과의 타협으로 극복해 나가다가 두 차례의 대선 이후 제거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다. 저자는“리얼리즘 소설 을 써온 작가로서 그의 생애를 치장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쓰려 고 했다고 하며, 평전에서도 소설 문체가 남아 있어 읽기 쉽다. 김

조봉암평전

조이, 김이옥, 윤봉림, 송 마담 등 여러 여성과의 만남을 조봉암 내 면의 시각에서 살려내면서 정치인 조봉암 못지않게 인간 조봉암을

이원규 지음 한길사 펴냄 2013.03

그려내는 데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책임정치,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 이라는 조봉암의 3대“정치적 이상”이“오늘날 더욱 유효”해졌다고 말 하지만, 그 현재적 적실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 는‘그때 당선됐더라면…’ ,‘그때 사형당하지 않았더라면…’하 는 식의 무의미한 반사실적 가정에 머무르게 된다.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의 위험성과 진보당 탄압의 부당성은 입증하기 쉬운 문제지 만, 조봉암의 정치, 경제, 국제정치적 비전까지도 그로부터 곧장 타 당한 것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대안적 노선의 현실화는 오히려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 냉전 체제와 국내적 극우반공 체제를 냉정 하게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며, 따라서 이 평전을 흥미롭게 읽은 독자는 박태균과 서중석 등 조봉암을 시대 속에서 다룬 역사 학자의 선행 연구로 넘어가야 할, 아니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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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의 논의를 빌려와 북한의 정치적 권위를 세습적인 카리스 마로, 기어츠의 논의를 빌려와 그 국가의 성격을 극장국가로 규명 한 두 인류학자의 연구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읽힐 뛰어난 연구서 가 간만에 출간됐다. 북한이라는 근대국가가 전통적 가치를 향해 퇴행하기보다는, 반대로 전통적 가치가 근대국가에 맞게 동원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북한을 국제정치적 수준에서 파악 하기보다는 내재적 논리에 입각해 파악한다. 그러면서 항일유격대 정신을 대대로 세습한 총대철학의 구현자이며 도덕경제의 화신으 로서, 이‘유격대국가’혹은‘가족국가’ 가 혁명적 카리스마를 어 떻게 관례화하는 데 성공한‘극장국가’가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저자들은 북한의 선전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진정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로 이해하기 때문에, 권력의 정당성을 확 보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권력의 정당성을 잃어 버린, 이‘도덕적 으로 무능한 도덕 국가’ 의 상처를 치유하기란 쉽지 않음을 안다. 북한을 겨냥해‘해야 한다’ 거나‘바란다’ 는 말이 유독 많은 이 책 의 결론은, 실천적으로는 아무 함의도 없지만, 내부 특징에 입각해 북한을 파악한 서술 방식과 정합적이기는 하다. 혁명적 카리스마 를 세습하며 나름의 도덕을 체현한 국가라면 외부 세계의 어떠한 압력과 회유도 유의미한 독립변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극장국가 북한

지적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건국 초기의 진정한 영웅정신” , 즉 국가 건설 과정에 드러난 혁명적 카리스마의 회복이며 그 내용 은 국가와 사회 간의 유리가 아닌 단결이다. 두 저자는 김정은 체

정병호, 권헌익 지음 창비 펴냄 2013.02

제에서 보이는 조선로동당의 권위 회복 및 사회경제적 회복 의지 에서 대안적 리더십을 기대하지만, 최근《로동신문》사설에서 자 주 거론하는‘1970년대로의 회귀론’ 을 감안하면 앞이 캄캄하다. 1970년대에 대한 병적인 강조를 보고 있노라면, 북한이 공식적으 로 채택한 리더십이 1940-50년대 김일성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저자들이 말하는‘예술가’이자‘연출가’김정일의 1970년대식 극장국가 리더십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든다. 물론 이 책에서 제 시된 극장국가론의 높은 설명력이 깨지는 것이야말로 저자들의 바 람이겠지만 말이다. 와다 하루키, 찰스 암스트롱의 연구를 다시 들 춰보는 것도 좋지만, 막스 베버의 논의를 원용한 조윗의“소비에 트 신전통주의” 와 같은 러시아 연구와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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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이 제5공화국을 새롭게 연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대통 령 집권 활동을 회고한 책으로, 드골은 1969년 물러나 이 책을 쓴 1970년 사망했기에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저서이기도 하다. 역자 후기의 제목:“왜 다시 드골인가?”괜찮은 물음이다. 1970년에 간행된 프랑스 대통령의 회고록을 지금 다시 번역해 읽 는 의미는 무엇인가? 역자 심상필은“세월은 흘렀고 사람들의 국 가관도 변하”지만“조국에 대한 사랑”은“변치 않는 가치”라면 서,“우리가 드골을 회고하는 것은 그의 애국심, 충성심 그리고 국 가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략 때문” 이라고 한다.“한 민족 두 체 제, 두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에 게 그의 통치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는게

드골, 희망의 기억 Memoires d’ Espoir 샤를 드 골 지음 심상필 옮김 은행나무 펴냄 2013.03

번역의“명분” 이었다. 하지만 분단국가에서 겪고 있는‘정체성의 혼란’ 에, 1950-60년대 프랑스에서의‘조국에 대한 사랑’ 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인지는 잘 잡히지 않는다. 1936년생 역자 는 혼란스러운 한국현대사를 경험하고 1960년대에는 파리에서 유 학하며 드골 시대를 함께 경험했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남과 북 모두에서 여러 얼굴로 나타난‘자주’ 와‘애국’ 을, 드골의 얼굴에 서 새롭게 읽어내는 함축은 무엇일까. 역자의 불분명한 의도와 별개로 드골의 회고 자체는 흥미롭다. 핵개발로 상징되는‘자주성’ 의 면모가, 전쟁으로 상처 받은 자존 심과 빠르게 회복한 강대국의 자신감의 결합으로서 드골 자신의 목소리에서 전해진다.“프랑스가 자신을 포기하고 초국가라는 구 름 속에서 방황할 때, 안보와 정치와 운명을 대서양의 헤게모니에 맡길 때, 그리고 다른 나라에 영향력을 내줄 때, 제3세계와의 협력 과 우정을 다시 찾을 때, 나는 우리의 이웃들이 남의 국경을 존중 하기를 원했다. 거부하지 않으면서 보호자 관계를 물리치고, 협력 을 유지했고, 어디서 오는 침략이든 물리칠 수 있는 억제력을 갖 고, 무엇보다도 핵무기를 갖게 됐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독립과 광휘를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실현 되고 있다!”드골의 고백과 그를 추종하는 우파의 선전이 당시 프 랑스의 위상을 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서양주의 시대에 유럽 중심주의를 제창한 드골의 독특한 멘탈리티가 실제 유럽의 판도를 꽤 흔들었다는 점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1950-60년대는 전쟁으 로 상처 받은 동아시아에서도 자주와 반미가 현실적 필요와 타협 하는 갈등의 시기였다. 모든 회고록이 그렇듯, 저자의 자화자찬을 피해간다면 알제리 사태, 핵개발, 유럽 통합, 소련과의 긴장 등의 이슈를 놓고 벌어지는 정상 간의 힘겨루기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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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와 블라디보스토크』(서강대학교출판부, 2009)에서“한 국외교사를 열강 외교문서의 실증적인 분석에 입각한 집필은 당분 간 중단하기로 한다” 고 선언한 김용구 교수의 신간. 저자는 외교 사를 외교관 간의 교섭사가 아니라 정신문명 간의 만남과 충돌의 기록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탁월한 문제 의식과, 다양한 사료를 섭 렵해 재구성하려는 의지로 여전히 충만하다. 그간“조선과 열강의 수호조약 관련 문서들”을 새로 출간한 저자는,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으나“대한민국학술원 통신란(2009년 6월 1일)에 실린 한 글 에… 충격을 받았다” 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전통적 외교 사 저술을 계속해 달라는 이근욱 서강대 교수의 요청을 언급하며 “다시 한국외교사 집필로 돌아왔다” 고 선언한다. 하지만 본문의 적지 않은 대목이『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 사, 1866~1882』 (문학과지성사, 2001) 제2장의 반복이다. 저자는 “필자는『세계관 충돌과 한국외교사』 (2001) 제1장(제2장의 잘못인용자)에서 병인·신미양요 문제를 간략이(간략히-인용자) 서술 한 바 있다”,“『세계관 충돌과 한국외교사』에서 간단히 밝힌 병 인·신민양요(신미양요-인용자)에 관련된 여러 문제를 이렇게 한 책으로 세상에 내어 놓게 되었다” 고 말할 뿐, 이 책이 2001년 저 서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보강했는지에 관해 명확히 밝히지 않는 다. 이는 학문 윤리 상의‘자기 표절’문제가 한창 제기되는 최근 의 분위기와 관련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며, 독자에게 신간을 소개하는 저자가 보일 만한 충분히 적절한 모습이라고 보 기도 어렵다. 한 언론사에서는 이 책이 병인, 신미양요에 대한“새 로운 해석을 담은 연구서” 라고까지 보도했다. 저자는 2001년에는 ‘양절 체제와 한말 외교사’,‘‘세계’외교사와 한말 외교사’라는 후속작을 약속했다가, 2009년에는‘청일전쟁과 조선’ ,‘러일전쟁 과 조선’ 이라는 새로운 가제의 후속작 출간 의사가 사라졌다고 말 한 바 있다. 이번에 그는“ 『임오군란』2책,『갑신정변』2책,『영국 의 거문도 점령』1책,『청일전쟁과 조선』4책을 2015년까지 발간

약탈 제국주의와 한반도 김용구 지음 원 펴냄 2013.03

할 예정” 이라는데, 앞의 세 글은 저자가 이미 다른 제목으로 선을 보인 바 있다. 이미 출간한 원고를 다른 출판사에서 수정, 보강해 새로 내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글을 발표할 때마다 그것이 과거 자신이나 동료의 글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좀 더 명 료하게 밝히는 윤리적 태도를 후속작에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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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퀴즈 1. 미국의 상업 음악에 대항하고자 남미의 민속 음악을 수집하며 시작된 라 틴 아메리카의‘이 운동’은 문화 운동을 넘어 음악을 통해 사회 변혁을 이 루려는 사회 운동으로 발전했는데요, 스페인어로 '새로운 노래'라는 뜻을 가 지고 있는‘이 운동’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2. 중국은 아세안(ASEAN) 국가에 대해 영유권 분쟁과는 별개로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협력을 추구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데요, 이는 중국의 핵심 외교 전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실리 추구 정책을 대표하는 말로,‘차이점을 인정하며 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뜻의 사자성어는? 3. 이란은 대통령과 최고 종교 지도자가 동시에 존재하는데요, 보통 입헌군 주정과는 달리 이란의‘최고 지도자’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 외교에서도 강력한 권한을 갖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이자 종신 직책입니다. 그렇다면 현 재 이란의 최고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4. 장개석의 제5차 공산당 토벌작전에 쫓겨 대장정에 나섰던 홍군은 1935 년 1월‘이곳’에 도착했고,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기존 공산당 지도부의 실 책을 비판하며 지지를 얻어 지도자로 떠오릅니다. 중국 남쪽 구이저우성에 속한 곳으로, 공산당의 성지이자 중국 명주‘마오타이 주’의 원산지이기도 한‘이곳’은? 5.‘이 나라’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이 최초로 수교를 맺은 공산권 국 가로, 수교 직후 북한은 이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88올 림픽 직전 한국과 수교를 맺은‘이 나라’는? 각 문제의 정답을 모두 적어 이름, 연락처와 함께 5월 19일 일요일 자정까지 journal.prism@gmail.com로 보내주세요. 정답을 맞춰주신 분들 중 세 분을 추첨하여 문화상품권 1만원권을 보내드립니다. 이번 호에 대한 감상이나 의 견도 함께 보내주시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호에도 많은 분들이 퀴즈에 응모해주셨는데요, 정답은 1. 셰일 가스 (Shale Gas) 2. 푸시 라이엇(Pussy Riot) 3. 존 케리(John. F. Kerry) 4. 국방 군 5. 살라미 전술 였습니다! 정확하게 답을 적어 보내주신 분 중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섯 분을 추첨했습니다. 당첨되신 이슬기, 이현경, 여지연, 한희숙, 이윤재 씨께는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후기 이번 호에 실린 JTS 활동가 오성근, 박병수 씨와의 인터뷰 중, 분량 문제로 싣지 못 했지만 여러분께 꼭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박병수 씨가 들려준 일화다. “전에 한 사업장이 주민 참여가 너무 안되었다. 이를 두고 주민들과 일을 멈출 것이 냐 계속 할 것이냐 긴급 회의를 하는데, 서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신뢰도 무너져 버린 걸 많이 느꼈다. 끝내고 나오는데 내가 도대체 여기 이 사람들을 도우러 온 건지 괴롭히러 온 건지, 아니면 이 사람들이랑 싸우러 온 건지 모르겠더라. 그리고 나서 다른 마을에 가니 그날 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술 한잔 하고 가라고 붙잡길래 갔 더니 어느 집에 아이가 태어나서 축하하고 있었다. 내 또래인 아이 아빠가 술 취한 채 와서는 내가 우리 애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지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이 아이가 자라서 이 학교를 다니게 될 거다 하면서 한참을 고맙다고 하더라. 근데 그게 바로 우 리가 바라는 것이지 않나.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아이들을 위한 일인데, 잠깐 현실적인 문제에 치여서 그걸 잊고 있었나 하면서 그 동안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인터뷰는 필자가《프리즘》창간 시절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었다. 두 분이 상당히 짧은 시간 한국에 왔다가 돌아가시는 일정이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무산 위 기도 있었다. 그러나 두 분은 물론 JTS 관계자 분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사실 처음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어렵게 만든 자리이니만큼 좋은 이야기 가 나와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했다. 당연히 기우였다. 인터뷰 내내, 개인적인 이야기 에서부터 국제 구호 활동에 대한 의견까지 좋은 말씀을 정말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 제서야 고백하지만, 박병수 씨의 저 일화를 들을 때는 속에서 치미는 뜨거운 것을 조용 히 삼켜내느라 고생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나는 왜《프리즘》 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 가. 전자의 답을 먼저 드리자면, 이번 호의 인터뷰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고, 또 들 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분명히, 때로는 그 추하고 잔혹한 모습을 낱낱이 까발릴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필자는. 그런 걸 잘 할 자신은 없다. 사실 필자 말고도 잘 하는 이 들이 많기도 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이번 인터뷰와 같은 경험을 하면서 그리고 이 기분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겠다. 이것이 필자가 찾은 두 번째 문제의 답이다.

이인재


프 리즘 사용설명서 사용하시기 전에 아셔야 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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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은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힘을 합쳐 만드는, 대학생을 위한 국제시사 저널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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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은 한반도의 국제정치를 탐구하고, 국제 정치 이슈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을 소개하고 논의하려 합니다.

프리즘은 국제정치 현안과 역사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자고 제안하는 창구가 되고자 합니다. 국제 시사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는 동시에 대학 생의 젊고 실용적인 대안을 모색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프리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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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이란 빛을 분석, 굴절, 분산할 때 쓰는 유리와 수정 등으로 만든 다면체 의 광학 부품을 말합니다 프리즘은 세계의 이슈들이 한반도 내에서 가지는 굴절된 의미들을 분석하고, 이 에 대한 여러 스펙트럼의 시선을 소개하고자 하는 다짐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사용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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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은 2013년 4월 현재 건국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서울 지역 6개 대학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만나 뵙도록 노력하겠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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