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sm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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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연세대 편집위원회 주관


편집장의 말 아시아-태평양의 지도가 새로 그려졌다.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의 리더십이 교체됐고 조만간 일본과 한국의 지도자가 새로 선출된다. 가깝게는 6자회담의 구성원들이며 멀게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에 서 마주쳐온 이웃들이다. 이들이 우리 삶에 행사해 온 규정력을 감안하면 권력 교체에 모아지는 관심이 당 연하다. 세 차례 전쟁 각각을 전후해‘이웃들’ 은 우리 없이도 조선반도의 분할까지 논의했다. 아니,‘조선반 도’ 라는 말조차 껄끄럽게 만드는 것도 분단시대 국제정치의 규정력이 아닌가. 이번 호에서도 다루듯 안동소 주와 호떡조차 국제정치의 찬 바람을 타고 온‘이웃들’ 이 전해준 것이다. 주변 정세는 역설적이게도‘천천히 빠르게’변하고 있다. 오바마는 재선, 푸틴은 3선 대통령이다. 시진핑 외교의 기본 원칙은 후진타오 임기 초에 이미 예고되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선군정치를 계승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정권의 재집권이야말로 익숙한 현상이다.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도 정책 공약에서 정치 적 선배들을 언급하고 있고, 제3세력 안철수 전 후보조차 김대중-노무현식 대외 정책을 계승하려 했다. 돌 발사태는 없었다. 2012년의 격변이 반드시 급변으로서 체감되지는 않을 것이다.“아시아로의 귀환” ,“소강사회 건설” ,“러 시아의 부활” ,“제3의 개국” ,“강성국가 건설” 의 슬로건이 권력의 정상마다에서 선언적으로 외쳐졌지만, 정 상에서의 외침이란 먼 곳에서 듣기 위한 게 아닌가. 목소리가 도달할 만한 곳에서 미리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큰 소리에 선뜻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변화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돌아올 때까지 길게 울릴 것이다. 새 시대의 시작을 전환점이 아니라 전환국면으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있을 상시적 놀라움에 대비하고 싶었 다. 창간호부터 작은 재주로 큰 주제를 다루려고 애쓴 셈인데, 모자란 부분은 독자들의 질정을 거쳐 앞으로 오롯이 메워지기를 희망한다. 어쩌면 그런 뒤에야《프리즘》 의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창간호가 발간되기까지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발간을 위해 후원해 주신 분들과 중요한 조언을 아끼 지 않고 해주신 여러 대학의 학생자치언론에 감사드린다. 창간 취지에 공감하고 협력해주신 뿌리기획의 직 원들께도 사의를 표한다. 로고와 레이아웃 디자인을 위해 애써주신 용인대의 김도영 씨, 동덕여대의 이연재 씨, 서울시립대의 고문혜 씨, 문수영 씨, 박지애 씨, 양지은 씨, 이유나 씨, 국민대의 김형준 씨께도 감사의 말 씀을 전한다. 독서 모임을 함께 해 오면서 저널 발간에 매진해 준 편집위원들에게도 늘 고맙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 주시는 모든 노동자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0년 11월에는 G20 정상회의가 열렸고 연평도 사건도 발생했지만 이에 못지 않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같은 시기 일부 편집위원과 처음 시작한 독서 모임에서는 전쟁이 낳은 철학자라는 투키디데스를 읽었 다. 제대로 이해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국제정치를 겪고 참아내는 능력은 승자의 힘과 지혜뿐 아니라 패자 의 절박함에도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프리즘》창간호는 이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출발이어야 할 것이다. 약자 또한 강하고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의식을 학살을 자행한 이들이 아니라 학살을 당한 이들에 대 한 공감 위에 세울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프리즘》 은 이 문제 의식이 낳은 하찮은 결실이지만 향후 성취해야 할 진전의 약속이기도 하다.

2012년 11월 편집장 최정훈


Contents 대 학 생 국 제 시 사 저 널 프 리 즘 vo l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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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계는

중국·일본 | 댜오위다오·센카쿠 갈등

북한 | 재개된 남북갈등

이스라엘·팔레스타인 | 가자, 지옥으로

시리아 | 끝나지 않는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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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 유로존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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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로 맛보는 역사 겨울이면 생각나는 간식,

호빵과 호떡에 숨겨진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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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들이키다

역사를 음미하다, 안동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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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

미국 대선, 주요정책 일지

투명해질 수 없는 두 권력과 시들어가는 북핵 문제

1981년에 멈춘 공화당의 시계

13억의 미래, 용의 꿈을 꾸는 판다

한반도 리더십은 어디로 가는가

Focus in | 북방한계선, 혹은 합의의 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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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2013년

40

서평

선거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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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퀴즈

42

세계인의 한마디

“나는 젤리도넛입니다!”

44

특 집

한일 관계 외교전

국제사법재판소, 어떤 곳일까?

56

지갑에서 꺼낸 근대인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

58

꿈인가 비전인가

5.16, 자주와 자립의 정치 비전

62

국제 시사

해적, 기근, 전쟁의 나라, 소말리아

중동 오일머니를 한반도로

70

스크린의 국제정치

고담시의 일그러진 계급 혁명

74

세계를 듣다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미국 투어 이야기

78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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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소개

80

구독 및 후원 방법

“우리는 우리 음악을 들려 주려 간다!”

3 ⓒ김괜저 gwenshiri.egloos.com


오 늘 세 계 는

댜오위다오 / 센카쿠

9월 11일 |‘국유화’ 가 몰고온 파장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의 영해기선 선포에도 불구하고 댜오위다오 국유화 절차를 종료. 일본 정부는 10일 센카쿠 열도의 5개 무인도 가운데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3개 섬을 국유화하기로 한 데 이어 이날 예비비 20억 5천만 엔(약 300억 원)을 동원해 3개 섬 소유자와 매매계약을 체결. 9월 18일 만주사변 81주년. 일본인 2명이 댜오위다오에 상륙. 중국정부는 추가 보복조치를 경고. 9월 19일 | 시진핑, 차기권력의 대응 시진핑-파네타 회견에서 시진핑이“일본 측은 정신을 차리고 중국의 주권과 영토완정을 해하는 모든 잘못된 언행을 중지해야 한다” 고 주장. 파네타 미 국방부 장관,“미국은 본 영유권 문제에서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 으며 도발적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당부한다.” 9월 21일 시진핑, 평화발전과 주변외교를 지속할 것이라면서 주권, 안보, 영토완정을 수호하고 우호적 협상으로 이웃나 라와 분쟁을 해결할 것이며,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발언.

ⓒ준신넷

9월 25일 노다 총리, 유엔에서 국제법에 의한 댜오위다오 문제 해결 주 장. 후진타오-원자바오, 항공모함 랴오닝함 취역식에 참석. 양제츠 외교부장, 겐바 고이치로 외상과의 회견에서 일본의 댜 오위다오‘국유화’조치는 반파시즘 전쟁에 대한 부정이며 일 방적 행위에 맞서 영유권을 수호하겠다고 발언. 댜오위다오 해 역을 항해하던 대만의 어선단, 순시선이 일본의‘영해’로 진 입해 일본 측과 물대포를 주고받으며 정면충돌. 군사 충돌로 확산되지는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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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노다 개조내각이 1일 저녁 외교 정책의 기본 방침을 결정함.“우리나라 주권과 영토, 영해를 지키는 책무 를 국제법에 의거해 완수한다” 는 내용을 새로 포함.“국제사회의 법의 지배 강화에 공헌한다” 는 내용을 포함.

ⓒ뉴스타운 / 연합뉴스

중국과 일본

10월 2일 | 일본, 새로운 외교원칙?

10월 13일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중국과의 전쟁 불사” 발언.

이시하라 신타로 / 겐바 고이치로

10월 17일 자민당 아베 신조 총재, 도쿄 야스쿠니 신사 참배. 10월 23일 중국 해양조사선‘과학 3호’ , 댜오위다오 내 일본‘영해’ 로부터 12해리 떨어진 인접 해역까지 진입. 중국 군 함 3척, 오키나와 인근 해협에 출몰. 10월 25일 중국의‘주권 수호 순찰편대’ , 댜오위다오 인근 상비 순찰. 인근 일본 해상보안청 선박에게 물러가라고 요구. 중국, 16번째 북두 항법 위성 발사에 성공. 북두 위성 항법 시스템의 2단계 전략 목표가 실현된 것. 10월 26일 |‘시진핑 시대’ 의 시작

댜오위다오 / 센카쿠 갈등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의 전국인민대표 자격 박탈. 중앙정치국 회의는 9월 28일 보시라이의 공직을 박탈하고 출당시켰음. 11월 1일 공산당 17기 중앙위원회 7차 전체회의 개막. 11월 8일 제18차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 11월 14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 차기 총선은 12월 16일에 치러지게 됨. 11월 20일 원자바오, 오바마와의 회담에서‘중요한 경제 발전의 시기에 장기적 안정이 필요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지키 는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겠다’ 고 발언.

김푸름누리, 최정훈

오늘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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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 북방한계선에서 재개된 긴장 자들의 최후무덤으로 만들 각오”하라며 서해상 긴장 조성.

조선인민군 서남전선사령부, 남측이 북방한계선 인근에서“우리 어선이 아닌 다른 나라 어선”에 발포하고

9월 27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박근혜 후보가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에서 독재는 북한의 위협에서 안보를 지키 기 위해서였다는 상황논리를 들자“당시(6, 70년대)로 말하면 4월인민항쟁과 7.4공동성명발표로 북과 남에 평화통일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넘쳐날 때였으며‘북의 위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주장. 7.4공동성명 직후 사회주의헌법으로 김일성 독재가 강화된 내용은 언급하지 않음.

9월 29일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10.4선언에 명기된 조선서해에서의 공동어로와 평화수역 설정 문제는 철두철미 ‘북방한계선’자체의 불법무법성을 전제로 한 북남합의조치의 하나”라고 주장.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 인 후보의 공식 입장과는 상충되는 일방적 주장이었음.

10월 8일 |‘북방한계선’공방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차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에게‘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 발언했다고 주장해 여야 간 공방 이 시작됨.

10월 18일 이명박 대통령, 연평도를 방문해“우리 군은 통일이 될 때까지는 NLL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발언

10월 21일 북측 최전방 포병 부대, 임진각을 겨냥해 자주포와 견인 곡사포를 사격 진지까지 전진 배치. 이틀 전 조선인 민군 서부전선사령부가 22일 예정된 남측의 대북삐라 살포 계획을 비난하며“괴뢰들의 삐라살포지점으로 공개된 파주시 림진각과 그 주변은 우리 군대의 직접적인 조준격파사격대상”이며“림진각과 그 주변의 남조 선주민들은 있을수 있는 피해를 예견하여 미리 대피할데 대하여 알린다”고 경고한 데 따른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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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비난.‘다른 나라’를 중국이라고 적시하지 못한 것은 중국 측의 반발을 우려한 것으로 생각됨.

9월 22일

조선인민군 서남전선사령부, 북측“령해와 령토에 단 한점의 불찌라도 떨어진다면 그즉시 조선서해를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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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북한 연평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10월 22일 파주 경찰서, 관광객의 임진각 출입을 일부 통제하고 삐라 살포를 저지시킴. 민간인통제구역 주민 820여 명 대피. 오후 북한군 태세가 느슨해지자 남측에서도 통제 완화. 통일부 대변인,“민간에서 했던 풍선 날리 기와 같은 행사에 대해 남북관계 상황 등을 감안해 자 제했으면 좋겠다”고 발언.

재개된 남북 갈등

주민들을 대피시켜 텅 빈 임진각

10월 29일 9월 8일을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던 리설주가 김정은과 함께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방문하고 제 12차 인민체육대회 남자축구 결승전을 관람.《로동신문》은 26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김정숙(김일성의 아 내)의 모자이크 벽화가 걸렸다는 소식을 보도했으며, 27일 김정숙이 평천리 운동장을 찾아가 체육경기를 장 려한 일화를 보도해 김정숙=리설주 상징조작을 시도.

11월 8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박근혜 후보의 대북정책이“리명박역도의 대북정책보다 더 위험천만한 불씨를 배태하고있는 전면대결공약,전쟁공약”이라며“박근혜는 대세와 민심을 바로 보고 현‘정권’과 같은 수치스러 운 전철을 밟지 않는것이 상책일것”이라고 발언. 11월 24일 《로동신문》,통일부가 금강산관광재개를 위한 회담을 제안하자“관광을 끝끝내 파탄시킨 장본인이 바로 남 조선보수패당”이라며“리명박일당은 허튼 말장난은 그만두고 민심의 준엄한 심판이나 기다리는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

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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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공습

11월 14일 이스라엘 군의 전투기 폭격으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군 최고사령관 아흐마드 알 자바리가 사망했 다. 이스라엘 군은 자바리가 타고 있던 차량을 전투기로 정밀 폭격했고, 자바리는 즉사했다. 이번 이스라엘의 로켓포 사격이 계속되었기에 가자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고 밝혔다. 이에 하마스는“지옥의 문 을 선포했다. 이튿날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에 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에 대한 공격도 이틀 째 이어져 최소 19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스라엘 군 은 예비군 3만명의 소집을 승인하고, 탱크와 병력을 접경지대에 배치한 것 으로 알려졌다 폭격을 받고 불탄 하마스 군 최고사령관의 차량

이스라엘 편드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아랍권 11월 17일 이스라엘-하마스간 충돌이 나흘 째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 백악관이“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이 충돌을 촉발했 다” 며“이스라엘은 충분히 참다가 공격을 가한 것” 이라며 이스라엘을 옹호했다. 아랍연맹은 긴급외무장관회 의를 열어“팔레스타인과 결속을 다지겠다” 고 발표했다. 11월 18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공격 작전을 대폭 확대할 준비가 되어있다” 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예비군 소 집 규모를 7만 5천명으로 늘리기로 결정하고 지상전 준비 태세를 강화하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이스 라엘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서도 가자 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는“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 이라며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14일 이후 지속돼온 충돌은 이날까지 75명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를 냈고 3명의 이스라엘인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이스라엘의 자바리에 대한 정밀 폭격의 이유는? 11월 18일 14일 발생한 하마스의 군 최고사령관 자바리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격이 하마스의 이란제 장거리 로켓 파즈 르-5 의 공급책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고 뉴욕타임즈가 보도했다. 자바리는 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이후 하마스 군의 화력 사거리를 늘리는 데 힘써왔다. 특히 파즈르-5는 예루살렘까지 사거리가 닿기 때문에 이스라 엘이 그간 위협을 느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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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포 공격을 가했고, 이스라엘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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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이 열렸다” 며 이스라엘에 대해 전쟁

가자 지구에 대한 공습으로 자바리를 비롯한 11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은“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유러피언포토에이전시

이 스 라 엘 과 팔 레 스 타 인

이스라엘을 향해 발사되는 하마스의 미사일

이스라엘-하마스 정전 협상 난항 11월 18일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의 주재로 카이로에서 열린 정전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 측은 하마스의 무 장 해제와 접경 지대 보안 장벽 접근 금지 등을 요구했고, 하마스 측은 가자 지구 봉쇄 해제, 지도부에 대한 암 살 및 군사 작전 중단을 국제사회가 보장하는 것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자 지, 옥으로

11월 20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이스라엘을 방문해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만나 회동했다. 직후 기자회견 에서 클린턴은“미국은 가자 지구에서의 지속적인 평화 협정을 추진할 것” 이라고 밝혔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양측의 무력 충돌로 팔레스타인에서는 130명이 넘는 사망자를 비롯한 13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이스라 엘에서는 5명의 사망자를 비롯한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스라엘·하마스 극적인 휴전 합의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휴전에 합의했다고 모함메드 카멜 아므르 이집트 외무장관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 장관이 카이로에서 21일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양측은 모든 공격행위를 중지하기로 했고, 이스라엘 은 가자 지구 봉쇄를 완화하기로 약속했다. 휴전은 현지시각으로 21일 밤 9시부터 발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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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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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남동쪽 악차칼레 마을에 시리아 정부군이 쏜 포탄이

ⓒAFP

10월 3일 | 시리아-터키 갈등 날아들어 터키인 5명이 사망. 터키 영토에 시리아 정부군 의 포탄 공격이 행해진 적은 이번이 세 번째지만, 터키인 사망자가 나온 것은 처음. 터키는 즉각 포탄이 날아온 곳을

향해 보복 공격을 했고 시리아 정부군 5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짐. 이후 현재까지도 양국은 국경 지대에서 간

헐적으로 포격을 주고받고 있음. 터키는 국경지대에 전투 기와 탱크를 배치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 10월 11일, 터키가 모스크바 발 시리아 민간 여객기를 앙

카라 공항에 강제 착륙시키고 조사를 벌임. 이 여객기는 5 시간 만에 풀려났으나, 이튿날 터키 정부는 군사통신장비와 탄약 등 군수물품을 압수했다고 발표함. 이에 시 리아는 10월 14일에 터키 여객기의 시리아 영공 통과를 금지함.

10월 7일 알 자지라 방송은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과 그 일족이 대표적인 아사드 정권 지지 국가인 러시아로 망명할 계 획을 세우고 있으며, 러시아도 이를 대비해 아사드 일족이 살 곳을 마련해 놓았다고 보도.

10월 17일 | 시리아 사태에 레바논도 휘말리나? 레바논 정부 당국자에 따르면 10월 17일 밤, 신원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레바논 북부의 한 마을에서 시리아 를 향해 기관총을 쏨, 이에 시리아 군인들이 기관총과 탱크로 맞대응.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레바논 마을 주 민들이 대피하고, 레바논 군의 경계태세가 강화됨. 10월 19일에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차량 폭발 테러가 발생해 8명이 숨기고 80명이 다침. 사망자 중에 는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을 반대해온 위삼 알-아산 레바논 정부군 준장이 포함되어 있어 레바논 언론은 이 테러가 시리아의 소행이라고 주장.

10월 20일 레바논 총리,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테러는 시리아와 연관돼 있다고 밝힘.

10월 24일 | 이슬람 희생제기간 동안 휴전? 라흐다르 브라히미 유엔-아랍연맹 공동 시리아 특사가 시리아 정부와 반군이 이슬람 희생제 명절 기간 (26~29)일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 시리아 정부군도 이튿날 국영 TV를 통해 명절 기간 동안 군사 작전을 전 면 중단한다고 발표. 하지만 양측의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나흘의 명절 기간 동안 시리아 전역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하여 4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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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

시리아 터키와 시리아

10월 30일 시리아 국영 방송이 공군 장성이 반군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발표. 시리아 사태 발생 이래 처음 으로 수도 다마스쿠스에 정부군의 전투기 폭격이 가해짐. 이날 시리아 전역에서 12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

끝나지 않는 분쟁

10월 31일 이스라엘, 시리아 사태에 개입?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음. 11월 11일 골란 고원에 위치한 이스라엘 군 기지에 시리아군 이 잘못 쏜 박격포탄이 날아와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향해 경고사격을 함. 그러나 이튿날인 12일 또다시 시리 아군의 박격포탄이 날아들어 이스라엘군이 탱크를 동원해 시리아 장갑차를 포격, 시리아 정부군 2명이 부상 을 입음.

11월 6일 러시아 외무장관, 러시아는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서방의 퇴진 요구를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밝힘. 같은 날 데이비드 캐머룬 영국 총리,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의 망명을 돕겠다는 뜻을 밝힘. 이에 덧붙여 시리 아에서 안정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아사드 대통령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것에 찬성한다고 밝힘. 박연서,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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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유로존 재정위기 해결을 위해 유로안정화기구(ESM)가 출범했다. 유로안정화기구는 채권 발행으로 자

금을 확충하여 구제금융 대상국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금 확보가 가장 시급한 문제임에도 아

유럽의 경제 위기

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고, 구제 방안에 대해서도 회원국 간 이견이 많은 상황이다. 10월 18일부터 19일 이틀간,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 는 지난 6월 재정통합 구상을 위해 논의된 은행 연합 방안과 관련하여,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존 17개국의

6000개 은행을 감독하는‘범유럽 단일금융감독시스템’ 을 설립하는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영국, 비유로존 국 가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고, 독일은 자국 은행에 대한 개입에 대해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시행 시기를 설정하지

않아, 은행연합체제의 진행을 지연시키고 있다. 더불어 이번 회의에서는 스페인과 그리스의 구제금융과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큰 성과가 없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더불어 EU예산을 현 수준에서 한 푼도 증액할 수 없다는 영국의 완강한 방침에 독일이 속을 끓이고 있다. EU의

예산을 GDP의 1% 이내로 묶자는‘독일합의안’ 에 영국은 회원국들은 긴축재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EU 예산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대하고 나섰고 특별 회의도 예산 합의 없이 끝나 난 항이 계속되고 있다.

유럽의 다이어트와 부작용? - 포르투갈의 경우, 국제 금융기구의 긴축 요구를 적절히 이행해왔지만, 지난달 페드로 파소스 코엘료 총리 정부 가 노동자의 부담을 증가시킨 사회보장기금 긴축 계획안을 발표하면서 1만명 이상 규모의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 어졌다. - 이탈리아의 지난 9월 실업률이 10.8%를 기록해 200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여 경제가 위기 속에서 허덕이 는 가운데 이탈리아 전 총리인 베를루스코니가 탈세 혐의와 관련, 이탈리아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형을 선고받 았다. 이후 총리직에 오른 마리오 몬티는 20일 침체에 빠진 이탈리아 경제가 몇 달 안에 회복기미를 보일 것이라 고 밝혔지만 긴축 정책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 그리스에서는 9월 초부터 각계각층에서 파업이 산발적으로 이어져 긴축 재정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 계 속되는 가운데 그리스가 국제 채권단과 새로운 재정 긴축 패키지에 24일 합의했다. 135억 유로(약 19조 원) 규모의 ⓒglobal post

새 긴축안은 긴급 자금 수혈과 함께 긴축 목표 시한을 20152016 회계연도까지 2년 연장하 는 대신 IMF와 EU, ECB등‘트 로이카’ 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 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트 로이카와 유로존 국가들은 향후 10년간 그리스의 부채감축 시한 등에 합의하지 못해 차기 구제금 융 집행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 리스에서 경제위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라가르드 리스트’ 가 The euro zone's real crisis: weak leadership, Ken Maguire, December 8, 2011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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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legraph

공개되었다.‘라가르드 리스트’ 는 2010년 당시 의 재무장관이던 라 가르드 IMF총재가 그리스의 탈세 를 막기 위해 그리스 재무장관에

유럽

게 전달한 탈세 혐의자 명단으로, 그리스 하원의장과 재무부 직원, 변호사와 의사 등 사회 지도층 인 사 2000명이 포함돼 그리스 전역 을 발칵 뒤집어놨다. - 스페인에서는 27일 발표될 내 년 예산안과 경제개혁안에 항의 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려 시민들

Debt crisis: as it happened - November 2, 2012 , By Rebecca Clancy 4:55PM GMT 01 Nov 2012

이 경찰과 충돌을 빚었다. 스페인 은 전면적인 구제금융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만, 이번달 S&P에 의해 국가신용등급이 BBB-로 2단 계 강등된 상태이다. 한편 10월 12일 노벨위원회는 EU가‘유럽의 평화와 화해, 민주주의, 인권 증진’ 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노벨평화 상을 수여하여 논란이 일었다.

프랑스 vs 현대 기아차 지난 8월 25일 프랑스 정부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한-EU 자유무역협정에서 금지하고 있는 덤핑 조건으로 판매 량을 늘려왔다고 EU에 조사를 요청했다. 이는 한국산 자동차를‘우선감시 대상’ 으로 지정하여 수입에 제한을 가

유로존 경제위기

하기 위한 것으로, EU의 사전 동의가 요구된다. 이에 대해 10월 2일 프랑스 시시주간지 렉스프레스는 20년간 프 랑스에서 디자인, 모델을 통해 점유율을 3%로 높여온 한국의 현대기아자동차를‘악역’ 으로 지목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오히려 한국인들을‘잠재적인 동맹상대’ 로 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어 10월 4일 EU는 프랑스 내 한국산 자동차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지 않았으며, 유럽에서 조립되고 있다 는 점을 들어 프랑스가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입장을 밝혔다. 결국 10월 22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는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프랑스의‘우선감시 대상’지정 요청을‘법적 요건 미달’이라는 근거로 거부했다. 현 대기아차는 프랑스 자동차 시장에서 10월 동안 선전을 하고 있다고 프랑스 자동차 공업협회(CCFA)가 11월 2일 발표했다.

과거사 문제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최근 과거사 관련 행보가 주목할 만하다. 먼저 영국은 지난 7월 식민지 시절 케냐인에 대한 고문 행위가 있었음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이어서 이번 달 영국 고등법원은 1950년대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한 케냐인들이 영국 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을 내려서 화제가 되고 있다. 영국 외무부는 민사소송 시한을 훨씬 넘겼고, 핵심 인물이 이미 사망하였다고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상태 이다. 한편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1961년 파리에서의 알제리 독립 시위 당시, 알제리인에 대한 학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손현선, 이진주

오늘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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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의 /창 혀로 맛보는 역사

겨울이면 생각나는 간식, 호빵과 호떡에 숨겨진 이야기들 11월 어느 날. 종일 과제와 수업에 시달리다 밖이 어 두워지고 나서야 학교에서 빠져 나왔다. 지하철을 타 러 가는데, 춥다. 학교 이름이 쓰인 까만 바람막이를 꼭 여며보지만, 그래도 너무 춥다. 학교 앞에는 데이 트 하는 연인들이 가득하다. 더 춥다. 울적한 마음으 로 집에 가는 길, 따뜻한 캔커피라도 하나 손에 쥐고 갈까 싶어 들어간 편의점에서 팔고 있는 호빵.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 샀다. 달디 단 팥소 맛을 떠올리 며 크게 한 입 먹었는데, 앗, 너무 뜨겁다. 세찬 바람 을 맞으며 호빵을 먹고 있으니, 과제와 시험으로 정신 을 잃은 사이 가을이 다 갔네, 싶다. 겨울이 왔다. 안에 소를 넣어 찐 빵’ 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처럼 쓰 모두 모여 즐겁게‘호호호’ ,

이게 되었다. 호빵은 1971년 삼립식품에서 기존에

뜨거울 때‘호-호‘ 불어먹는 호빵

분식집 등에서 만들어 팔던‘찐빵’ 을 상용화하여 내 놓은 것이다. 빵을 주로 만들어 팔던 삼립은 비수기

뜨거울 때‘호~호~’불어 먹는다는 뜻의 이름을

인 겨울에 팔 수 있는 상품을 고심하던 중, 일본 길거

가진‘호빵’ 은 겨울에 생각나는 여러 간식들 중 하나

리에서 파는‘앙망(あんまん)’ 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

이다. 겨울 간식이니 만큼 1년 중 가장 추운 1월에 많

어 제품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 팔릴 것 같지만, 의외로 11월에 판매량이 제일 높

앙망(あんまん)은 팥소(あん)와 만두(まんじゅう)

다고 한다. 연중 기온이 가장 낮은 때는 1월이지만,

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인데, 우리가 단팥호빵, 피자

심리적인 요인 때문인지 찬바람이 처음으로 불기 시

호빵이라고 하듯이 일본어에서도 피자망(ピザまん)

작하는 11월에 제일 인기가 많은 것.

처럼 안에 들어간 재료 뒤에‘망(まん)’ 을 붙여서 부

‘호빵’ 이라는 이름은 삼립 식품이 제품 출시 과정

른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음식을 통틀어‘중화만두’

에서 만든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 자체가 하나의 상표

라는 뜻의 츄카망(中華まん)이라고 말하며, 이 음식

다.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밀가루 반죽

이 중국 계열의 간식이라는 보편적이라고 한다. 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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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한국에서는 호빵을 일본에서 왔다고 하고, 일본에 서는 중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은 좀 재미있 다. 우리는 호빵을 ‘빵’ 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음식 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만두로 분류된다. 만두의 기 원이 중국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마 호빵 역 시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실제로‘대량 생산 제품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 는 일본에서 가져왔을지 몰라도 우리 나라 호빵의 원 조는‘찐빵’ 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 루가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 밀가루를 소비하기 위해 서 혼분식 장려 정책이 시행되어 밀가루로 만든 음식

해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다. 이에

들이 많이 판매되었다. 찐빵도 그 중 하나로, 먹을 것

따라 청 상인들은 이전에 개항장 부근에서만 통상을

없던 시절 다른 먹거리보다 저렴하고 배도 부르니 이

할 수 있던 것에서 나아가 서울 양화진 등 내륙에도

만한 간식도 드물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주로 작

점포를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은 분식점에서 팔던 찐빵은 인기 있는 간식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청이 주둔시킨 군인들과 함께 많은

그것을 가정에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청 상인들이 국내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때 서울

호빵이라고 볼 수 있다.

에 들어온 중국 상인들이 명동 등에서 팔기 시작했던 것이 호떡이다. 그러나 호떡의 기원은 실제로는 중국

오랑캐들이 파는 떡, 호떡

이 아닌 중앙아시아다. 요즘에는 인도 카레와 함께 많이 먹는‘난’ 이 중앙 아시아에서 유래 되었고, 그

겨울 길거리 음식 하면 또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것이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면서 지금과 같은 형

호떡이다. 똑같이 ‘호’ 자가 앞에 붙는데다 둘 다 겨울

태가 되었다는 것이다.‘난’ 도, 중국식 호떡에도 지

에 많이 먹는 음식이니 뭔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

금 우리가 먹는 보통의 호떡들처럼 단 흑설탕 같은

각을 하기 쉽지만, 전혀 아니다. 호떡의‘호’ 는 오랑

것이 들어있지는 않은데, 이는 떡을 조청에 찍어 먹

캐 호(胡)라는 한자다. 오랑캐, 즉 청나라에서 들어온

듯 달콤한 간식을 즐기던 한국 사람들의 취향이 반영

떡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것에 오랑캐‘호

된 듯 하다.

(胡)’ 를 붙인 것은 호떡만이 아니다. 호주머니, 호박, 호밀 등의‘호’ 도 같은 한자다. 이들 모두 중국에서

중고등학교 때 겨울이면 친구들과 학교 매점에서

들어온 물건이나 음식이었기에‘호(胡)’자가 붙었

호호 불며 먹던 호빵, 엄마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길

는데, 호떡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온 물건들이 이렇게

에 한 봉투씩 사오던 호떡. 그 기원과 유래는 많이 다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였다.

르지만, 우리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간식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이용해 재집

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주머니가

권을 시도하였고, 민비는 난을 피해 궁녀 복장으로

가벼워도 부담 없이 집어먹을 수 있어, 모두들 호빵,

궁을 빠져나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1876년

호떡과 관련된 따끈한 추억 하나쯤은 있다는 것도 그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조선 내에서는 정치, 경제적

렇다. 11월, 찬바람 불고 추워지면 붕어빵과 오뎅에

영향력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세력 다툼을 하고 있

만 눈길 주지 말고, 한번씩 고민해보시길 바란다. 호

었다. 청나라는 이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민비의

떡이냐, 호빵이냐.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대원군을 납치해 본국으로 데려갔다. 이 사건 이후 조선 내 정 치적 입김이 세진 청은 경제적인 영향력을 키우기 위

이인재 (이화여대 국문) gilraen@naver.com

혀로 맛보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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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의 /창 역사를 들이키다

역사를 음미하다, 안동소주 ⓒwww.silk-road.com

소주 한 병이요! 소주를 받자마자 흔들고, 밑둥을 치고, 가끔은 독을 뺀다면서 병목을 쳐 내용물을 약간 버리는 행동. 무 조건 해야 되는 술자리의 불문율처럼, 혹은 위엄 있 는 의식처럼 거행되는 이 독특한 행위의 기원은 제4 공화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 이전의 소주는 코르크마개를 사용했다. 가 끔 코르크 찌꺼기가 소주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밑둥을 쳐 코르크 찌꺼기를 위쪽으 로 모아 약간 버리는 행위를 하였는데, 그것이 아직

로웠기 때문에 두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직접 만

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뚜껑이 바뀐 지금, 습관

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린 몽골군이 자기

처럼 소주의 밑둥을 치고 병목을 쳐 소주를 버려내는

전, 증류주로 피로를 풀어버렸던 것은 공부에 지친 대

건 정말 미련한 행동이다. 물론 재미있는 전통인 것

학생, 야근이 끝난 직장인들이 소주로 피로를 날리는

은 부정할 수 없다.

것과 같다 하겠다.

소주의 기원

안동소주

국민 술, 소주. 그 탄생은 800년 전 고려 때로 거슬

소주의 뿌리가 내린 안동, 그곳에서 전해져 내려온

러 올라간다. 13세기 원나라의 고려 침략은 한국에 증

안동소주는 대한민국 소주계의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류라는 새로운 조주법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페

수 있다. 13세기 몽골군이 전파했던 증류방법이 긴 세

르시아의 연금술에서 비롯된 증류기술은 몽골군의 서

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만의 특색을 유지하고 있는

진과 동시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 기술은 광

것은 과연 주류계의 기적이라고 생각된다. 소주라고

대한 몽골군의 영토를 관통하여 자연스레 동아시아로

우리가 보통 마시는 처음이와 이슬이를 떠올린다면

흘러 들어왔다. 이 때 원나라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큰 오산이다. 도수 45도, 깊고 특별한 맛의 안동소주

안동에 병참기지를, 제주도에 전초기지를 세웠다. 당

는 위스키, 브랜디, 럼, 보드카 등 각국의 증류주들과

시 몽골군의 필수품이었던 증류주는 공수하기가 까다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국제적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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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과 짬뽕 그 이상으로 고민되는 두 안동소주. 이게 더 맛있다 저게 더 맛있다. 한잔 두 잔, 결국엔 글을 위함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뒷전이 되었다. 한 필진은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고 어떤 필진은 원 나라의 말 앞에 무릎을 꿇은 고려, 굴욕의 100년사를 상징하듯 지하철 앞에서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보 여주기도 하였다. 술의 품질은 다음날 숙취로 판단하 는 것. 참석했던 모든 필진에게 숙취는 없었다. 다음 날 되려 힘이 난다는 반응들이었다. 보통의 소주가 매일 아침 신문을 보는 느낌이라면 안동소주는 역사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장구한 시간 을 이어 내려온 한잔을 마시며 한국의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술. 한 잔으로 출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 이, 한글 창제 후 축배를 드는 세종대왕이 되어 볼 수 도 있다. 모든 술엔 나름의 특별한 탄생 배경과 독특 한 스토리가 있다. 지적 낭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다 양한 요소들. 술을 마시는 짧은 행위에까지 의미를 안동소주를 마치 양주처럼 샷과 온더락(on the

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태생의 본능인 듯싶다.

rock)으로 판매하는 신림의 'ㅁ'식당, 프리즘 집필진

같은 맥락에서 안동소주는 이야기를 담기에 멋진 술

은 13세기 몽골전사들처럼 거침없이, 포석정 앞의 귀

이다. 맥주, 소주, 소맥. 지루한 일변도에서 벗어나

족처럼 우아하게 안동소주를 주문했다. 안동소주는

짧은 이야기를 안주삼아 안동소주를 먹어보는 것도

1987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일상의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단 2명의 안동소주 조주 기능보유자가 있다. 조옥희 명인과 박재서 명인. 각 명인이 각자의 브랜드의 소 주를 판매하고 있으며 전통적 방식으로 생산된 안동 소주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판매된다. 시음기 처음 맛본 안동소주는 박재서 명인의 소주였다. 온 더락으로 차가워진 안동소주의 첫 맛은 시원하면서 도 그윽한 향이었다. 쌀을 오래 씹으면 느껴지는 달 지만 고소한 맛, 그리고 목 넘김 후 느껴지는 향긋함 이 오래 지속됐다. 반면 조옥희 명인의 소주는 처음 부터 강렬했다. 강렬한 쓴맛이 느껴지는 첫 맛과 다 양한 곡물에서 비롯된 독특한 향은‘톡 쏜다’ 라는 표

패기 넘치던 필진의 안동소주 시음

현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입안에 어떠한 맛도, 향 도 남지 않는 완벽히 깔끔한 느낌의 끝 맛은 놀랍도

박연서 (건국대 경영)

록 상큼했다.

aronax09@naver.com

역사를 들이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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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미국 대선 일지, 주요 정책 20 투명해질 수 없는 두 권력과 시들어 가는 북핵문제 22 1981년에 멈춘 공화당의 시계 26 13억의 미래, 용의 꿈을 꾸는 판다 28 한반도 리더십은 어디로 가는가 32 Focus in : 북방한계선, 혹은 합의의 한계선 36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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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화요일

1.3 아이오와 코커스로 공화당 경선 시작 이후 밋 롬니의 상승세 속, 뉴트 깅리치 와의 대결

2.13 오바마는 부자 증세[버핏세]로 세수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 2013 회계연도 예산안을 미 연방 의회에 제출.

3.6 10개 주에서 437명의 대 의원 자리를 놓고 진행되는 최대 규모의 경선. 롬니는 5곳에서 승리.

아프간 바그람 공군기지 에서 이라크전은 끝났고, 알카에다에 정의를 보여 줘야 하는 임무가 거의 달성되었으며 재건과 치 5.1 유에 에너지를 쏟아야 할 오바마의 때라 강조. 아프가니스탄 방문.

4.11 여성 문제 이슈화. 오바마 대선 캠프에서 롬니가‘릴리 레드베터 평등임금법’에 찬성의지 밝히지 않는다고 발표. 롬니는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92.3%의 여성 일자리가 사라졌다고 공격.

5.30 롬니는 텍사스주 프라이머리 승리, 대의원 과반을 차지, 공화당 후보로 확정.

그러나 피임약 구입시 건강보험 혜택을 의무화하는 정책에 가톨릭계가 반발, 소송 제기.

5.9 동성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던 오바마가 동성혼에 대한 지지를 선언. 동성혼은 현재 6개 주에서 합법적인 것으로 승인.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반대 여론이 우세. 수출 증대, 제조업 발전을 통한 100만 일자리 창출. 근로자 대상 교육, 훈련 프로그램 투자. 일자리 창출을 돕는 미국내 운영 회사들 세금 우대 조치.

일자리

버핏세로 연소득 100만달러 이상인 고소득층에게 최저 30%의 소득세율 적용. 이를 통해 1조 5천억 달러 세수 확보 목표. 해외 전쟁 종결을 통한 경비 확보, 교육, 제조업, 사회기반 시설 투자.

세금

‘오바마 케어’라고도 불리는 건강보험개혁법 추진. 건강보험 의무 가입을 통해 보험회사들의 전횡을 막고 노인 의료 보험 제도를 강화, 처방약 보험에서의 격차인 도넛홀을 없애고자 함.

의료

불법체류자 가정의 자녀들의 입학, 취업을 보장해주는 드림액트 이행, 다시 약속. 동성커플 결혼 공식적으로 지지. LGBT 미국인들의 동등한 권리 주장. 여성들의 임금 차별 릴리 레드베터 평등법에 서명했고 건강 보험 제도상의 차별 종식, 산아 제한 보장 등을 지속적으로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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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여성


미국 대선

일지, 주요 정책 2 6.15 오바마는, 불법 이 민자들 중‘16세 이전 입국, 5년 이 상 거주, 학생이거 나 고등학교를 졸 업한 30세 이하’ 인 조건을 충족시 킬 경우 추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 획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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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오바마의 중산층 공략. 백악관 연설에서 연소득 25만 달러 미만, 저소득 가정에 대한 감세정책을 1년 더 연장하겠다 고 발표.

7.25 오바마와 롬니측 외교, 안보정 책 참모 간공개적 대선정책 토 론회. 롬니측은 오바마 행정부 의 이란, 시리아 정책 공격.

8.20 롬니는 '북한 무장해제’정책 제 시. 오바마 행정부와는 달리 ‘동맹국과 함께 가혹한 대북제 재를 제도화’하여 핵문제를 해 결하겠다고 발표.

8. 27-31 공화당 전당대회 개최 롬니가 대선후보 지명을 공식적으로 수락

10. 5 8%대를 유지하던 미 국의 실업률이 44개월 만에 7%대로 떨어짐.

9.11 리비아 무장시위대가 리비아 주재 미국 영사관 공격, 4명 사망. 롬니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응을 비난.

10.3/16/22 오바마와 롬니는 경제 현 안, 외교 안보 관련 TV 토론을 세 차례 진행. 초 기에는 롬니가 우세했지 만 점차 오바마의 선전.

11.6 대통령 선거 일, 각 주에서 선거인단 선출. 오바마의 재선 성공.

한편 롬니의 비공개 선거자금 모금 모임의 '몰래 카메라' 동영상 유출. ‘유권자의 47%’를 정부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으로 묘사하여 논란.

10. 30 허리케인‘샌디’가 미국 동부지역 강타. 오바마는 모든 일정을 중단 하고 재난 대책 진두지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단 상 옆 빈 의자를 두고, 존 재감 없는 대통령은 그만 둬야 한다고 연설. ‘빈 의자’논란이 가열됨.

에너지 자립 통한 석유 수입 감소로 외화 절약, 일자리 창출. 적극적인 대외 경제 정책으로 수출 증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완수, 자유 무역 협정 체결, 중국 견제 포함) 모든 가정을 대상으로 고등교육과 일자리 교육의 기회를 확대.

예산안

개인세율은 20%, 법인세율은 25%로 영구히 상한. 부족한 세수는 공제 및 세금우대를 줄이는 방식으로 충당. 정부지출 GDP 20% 수준으로 하향. 예산 삭감은 오바마케어 폐기, 국철 민영화, 인문 예술 분야와 공영 방송 보조금 삭감, 해외 원조 삭감 등을 통해 실현.

서비스

수많은 규제와 보조금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있던 오바마케어 폐기, 유연하고 자유로운 의료 서비스 추구, 의료 서비스에 시장 경쟁을 도입, 소비자의 선택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

LG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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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 민주당 전당대회 개최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연설 이 화제가 됨.

6.28 미국 연방대법원이 오바마 대 통령의 건강보험 개혁법(오바 마 케어, 2014년부터 시행)에 합헌 결정. 롬니 측이 이 결정 에 대해 반발, 공화당은 법을 폐지할 것을 주장.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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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이민자 수 감소 목표, 국경 철조망 강화, 장기 체류자 색출 가능한 고용시스템 설치. 이민자는 고급 인력 위주로 수용. (비자 발급 기준 높이고, 수학,과학,공학 학위 보유자들 우대) 동성결혼, 산아제한에 대해 반대.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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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오바마는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 언론에서는 오바마의 동아시아 정책, 특히 대북정책에 관한 많은 기 사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오바마의 재선으로 재편될 미중, 남북 관계에 대한 온갖 추측성 보도들은 오히려 독자들을 혼 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외교적 상황이 점 하나만 옮겨도 순식간에 돌이킬 수 없는 판이한 결과를 낳을 만큼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AFP

중동에서 아시아로 : 미국의 성급한 퇴장?

시 정책은 실질적인 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서 단지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

오바마는 지난해 11월 호주 의회 연설에서 미국이

임기 초 오바마는 부시 전 대통령부터‘물려받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역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먼저 부시가 일으켰

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시아를 중심축으

던 중동 전쟁을 나름대로‘책임감 있게 완수’ 하기 위

로 하는 (Pivot to Asia) 정책기조는 오바마 행정부

해 이라크에서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2011년 12월

가 그동안 여러 차례 강조해왔던 것이다. 힐러리 클린

까지 19개월에 걸쳐 철군을 감행했고, 이를 통해 생

턴 국무장관은《포린 폴리시》 에 기고한 글에서 앞으

겨난 여유 자원을 활용해 파키스탄에서 군사 작전을

로 10년 동안 국정운영의 주요 업무는, 외교적, 경제

수행하고 알카에다 지도부를 공격했다. 오바마의 전

적, 전략적인 투자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고정시키

략은 부시와 달랐다. 중동 지역의 자립성을‘비교적’

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미국의 주요 활동 무대를

존중하고, 국가보다 특정 테러 세력에 초점을 맞추어

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기는 것이 미국의 리더십, 이익,

공격했다. 그 결과 빈 라덴을 사살하고, 알카에다 세

가치를 진전시키기 위한 최적의 판단이라고 자부했

력의 중심부를 파괴하는‘성과’ 를 얻을 수 있었다.

다. 그러나“미국의 태평양 세기” (America’ s Pacific

이후 오바마는 중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Century)로 지칭되는 오바마 1기의 아시아 지역 중

지속적으로 철수시키고 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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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오바마 2기의 동아시아 정책

투명해질 수 없는 두 권력과 시들어가는 북핵 문제 들이 아직도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중동 지역에서의

서 대체로 중국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 문제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간 및 파키스탄 정부와의

얼마나 비중 있게 다뤄질 수 있을지는 더욱 미지수

협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다. 그동안 오바마 1기의 대북정책은‘전략적 인내’

핵무기 보유를 추진하고 있는 이란은 미국에게 가장

인지 단순한 공백인지 논란이 일만큼 부재한 것으

위협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바마는 유럽,

로 보였고, 그의 경제 위기 해결 속도만큼이나 더디

중국, 러시아 등과 협력하여 외교와 제재를 통해 이

게 흘러왔다. 앞으로의 오바마가 어떠한 정책을 펼쳐

란과의 협상을 이끌어 내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남겨

나갈 수 있을 것인지는 선거 과정 중의 발언 혹은 민

두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도 팔레스타인과 이란에 대

주당 대선 강령 속에서 아주 기초적인 틀로서 접근할

한 평화 기조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강경파들과 적절한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기본

협력관계를 유지해나가야 한다.

적인 틀이 상대주자 롬니가 내놓은 북한에 대한‘무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 2기에 과연 아시아 중시 정책

장해제’(Disarm) 전략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우리 입장에서 오바마의 당선이 조금이라도 다행스러

견이 많다. 최근《뉴욕 타임즈》 에서는 오바마가 1년 전

울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대북정책에

호주 의회에서 선언했던 발언이 점차 태평양 지역에

대한 오바마의 전략에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 것

서의 병력 증대를 통해 구체화되어 오고 있다고 전했

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다. 내년 봄에는 중국 해군을 감시할 전함이 싱가폴에

오바마는 2012년 민주당 대선 강령에서, 핵무기 사

배치되고, 호주에 주둔하는 해병대원은 2014년까지

용과 확산 방지를 주요 골자로 세계와 미국의 안전

2500명 상당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외에도 미국의 다

보장을 위해‘지속적인 노력’(continuing effort) 을

양한 무기, 전함을 중동지역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이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지속적인 노력이라는

동시키고 합동 군사훈련을 지속적으로 전개시킬 예정

것은 사실상 그의 정책 노선의 연속일 뿐인 것으로

이다. 그러나 일각에서 이는 단지‘일시적 변화’ 일뿐

비춰진다. 미국의 원칙론적 입장이 지속됨에 따라 북

이라고 지적하며, 실질적으로 중심축이 중동에서 아시

핵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해법 구상보다는 대치상황의

아로 옮겨가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

방치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 무엇보다 1기에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국내 일자

지난 2008년 대선 강령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

리 창출, 경제위기 해결에 중동, 이란 문제까지 중첩되

그램을‘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종식’ 시키기 위해‘뒤

어 있기 때문에 오바마의 의지만큼 아시아-태평양 지

늦은 외교적 노력’ (belated diplomatic effort) 이더

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라도 지원할 것이라고 했고, 특히‘직접외교’ 와‘6자 회담’ 의 방식을 언급했다. 오바마는 초선 때부터 부

오바마의 변화 없는 전진

시를 제외한 여타의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 로는‘핵무기 없는 세상’ 을 천명하였다.‘전 세계적

오바마가 아시아-태평양 중시정책을 성공적으로

인 핵무기 제거’ 라는 주요 목표를 위해 국가 간 협력

진행시킨다고 하더라도, 이는 경제적, 전략적 측면에

을 지속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후 2차에 걸친 핵안

기획

23


보 정상회의를 통해 이를 구현시키고자 했다.

고 있다고 토로한다. 무엇보다 적성국교역법이 북한

핵확산 방지라는 미국의 뚜렷한 원칙은 올해 대선

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되면서 각종 경제 제재 조치들

정강에서도 북한을 압박하는 기본 틀이 될 것으로 보

이 취해지고 있다. 북한은 이와 같이 말과 행동이 다

인다. 차이가 있다면 직접대화와 6자회담과 같은 외

른 미국의‘뿌리깊은 대조선 적대관념을 송두리째 들

교적 수단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이

어내지 않는’ 다면‘조선반도비핵화는 료원’ 해질 것

비핵화를 위한 검증 가능한 조치 (verifiable steps)

이라고 경고한다.

를 취하지 않는다면 한층 강화된, 혹은 역사상 가장

즉 북한은 전쟁 이후 미국의 대조선 적대정책이

가혹한 국제적 고립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보다 강

지속되어 오면서, 경제 제재와 같은 각종 조처들이

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2008년의 대선 강령

취해진 것을 원인으로 삼아 자신들의 핵보유 권리

과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상 취임 이래 오바마가 지속

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핵 보유는 대가를 위한 전술

해온 대북정책의 원칙주의적 노선과 연속선상에 있는

적 선택이 아니라‘세계최대의 핵보유국인 미국’ 이

것이다. 즉 핵과 미사일 기술에 있어서 관련된 국제

각종 경제 제재 조처 등을 통해 자신들을‘먹으려 하

적 규정을 무시하는 한 북한은‘가혹한 선택’ (stark

기’때문에‘부득불’요구된 것이다. 반면 미국은 경

choice)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009년 북

제 제재 조처가 북한이 핵을 보유한 결과로 이루어진

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핵실험 이후 미국의 유엔

것이라고 압박하고 있다. 경제 재재와 핵보유라는 것

안보리를 통한 대북 결의 채택과, 2012년 4월 북한

이 행위의 원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결과이기도 한 이

의 장거리로켓 발사로 인한 대북 영양지원 합의 결렬

상한 구도 속에서, 두 국가의 논리 구조는 지속적으

에서 반복되고 있는 도발과 책임 추궁, 제재의 구도가

로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당분간은 오바마와 김정은

더욱 악화된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두 지도자 모두 안보 보장과 생존이라는 목적 하에

한편 오바마가 재선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되고, 오

각각의 입장을 조정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바마 캠프 핵심 인사인 제프리 베이더가 오바마 2기 에는‘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설’수 있다는 발언을

적도 파트너도 아닌, 미중 간의 불투명한 공생.

한 것으로 미루어 일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 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유

중국의 경우는 확연히 다르다. 오바마 정부는 아

예, 우라늄 농축활동 중단’ 이라는 선조건의 구도가

시아-태평양 중시 정책으로 호주, 일본, 한국, 필리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공화당이 하

핀 등과 동맹 관계를 강화시키면서도 가장 민감하게

원 의석 과반을 차지한 구도가 적어도 오바마의 임기

반응하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

반에 해당하는 시기동안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하고 있다. 부시 정부에서 대중국정책의 핵심은‘컨

강령에 내건 전진(Moving Forward)은 실질적으로

게이지먼트’ , 혹은 봉쇄와 관여의‘양면 전략’ 이고,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일 협력 강화를 통한 중국 견제였다. 그러나 오 바마의 경우‘오바마-바이든 플랜’ 을 통해 협력관계

‘북핵 변주곡’속의 북미 관계.

(cooperative relationship)를 강조했다. 임기 첫 해 후진타오 주석과 공동성명에서 중국의 강대국 부상을

북한은 바로 이러한 제재를 본인들의 행동 근거로

인정했고, 보호주의적 무역, 인권과 관련된 부분에서

뒤바꾸고 있다. 7월 20일 외무성 비망록에서 북한은

는 중국의 국제적인 역할 증대에 따른 책임 있는 행동

평화의 장애 조건인 미국의‘대조선적대시정책’에

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이후 미중관계는 힐러리 클린

관해 길게 부언하였다. 여기에서 북한은 1950년대

턴 국무장관이 언급한‘포괄적인 대화’추구와‘경쟁

미국이‘리념과 제도가 다른 쏘련’ 을 비롯해 많은 동

적이지만 협력적인 관계’노선으로 점철되어왔다.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었음에도, 오

그런데 지난달, 오바마는 롬니와의 3차 대선 TV

로지 북한만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

토론에서 중국에 대해‘적이기도 하지만, 잠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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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으로도 경제적, 외교적 분야에서 손을 잡은 것도, 또 잡지 않은 것도 아닌 모호한 파트너십을 지속할 것 이다. 표면적으로 미국은 중국에게 국제 규범 준수 를 계속해서 요구할 것이고, 중국은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동맹 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끊임없 이 견제할 것이다. 그 가운데 태평양의 강력한 세력 (Pacific power)임을 자임하는 오바마 2기의 미국은,

모호한 파트너십의 미중관계, 과연 손을 잡을 것인가?

아시아 지역에서의 경제적 이권, 외교적 리더십을 유 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전략적인 움직임을 단계적으로

파트너이기도 하다’(both an adversary, but also

이행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a potential partner)고 발언해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오바마 2기에 펼쳐질 외교정책들은, 힐러리 클린

는 시종일관 중국과의 대결 구도를 강조하며 자신이

턴의 인용대로‘기존 권력과 새로 부상하는 권력이 만

당선되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여 본때를 보

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의 문제로 수렴되는

여주겠다던 롬니의 강경 발언보다 더 주의를 끌었다.

듯하다. 오바마 행정부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사실 지난 7월, 오바마는 중국이 미국산 자동차에 33

면 상호간‘투명성’ 을 확보(increase transparency)

억 달러의 관세를 부과하여 무역관련 규정을 위반했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장 미국부터가

다는 혐의로 WTO에 중국을 제소하기도 했다. 롬니

투명성을 담보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와의 대선 경쟁에서 중국, 시리아를 비롯한 여러 국

오바마는 재선 이후 첫 번째 해외순방을 태국, 미얀

가들과의 외교정책에서 리더십 부재로 수세에 몰린

마, 캄보디아로 정했고, 이를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

오바마의 전략이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

역에서의‘재균형’(rebalancing)이라는 목표를 수행

적으로는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미국의 이익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침해하는 경제적인 불공정 행위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이‘재균형’ 이라는 것이 과연 서로간의 공존을 기반

대처하겠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으로 설정된 것인지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이후 <뉴욕 타임즈>의 대선 토론‘사실 확인’

미국이 애매한 수식어를 내세우며 실질적으로는

(fact-check)란에서 전문가들은 미중 무역에 관한 두

자신을 지역 내 유일한 권력(the only power)으로 해

후보의 입장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중국과 미국은

석해나가고자 한다면, 중국은 미국의 관여를 봉쇄,

경제적으로 훨씬 더 상호의존적인(interdependent)

압박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의 불안정한 공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시진핑

생 관계마저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매우 약한 것

의 5기 지도부는 이를 잘 알고, 또 활용할 것으로 예

이다. 오바마가 진정 전진하고자 한다면 아시아-태

상된다. 시진핑 지도부는 대체로‘실용주의적 ‘인 인

평양 지역에서 중국의‘평화적인 부상’ 과 미국의 기

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제임스 스타인버그 전 국무부

존 권력이 충돌하지 않는‘투명한’전략들을 고민해

부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시진핑은‘경제성장·번영

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들은 미국이 중국에게

을 지속하려는 열망’ 이 크기 때문에 미중 간‘원만한

요청하듯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러 국가들의 기본

관계’ 가 지속될 것으로 예측했다.

적인 권리들을 보장하는 가운데‘건설적인’방식으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빠르게 경제 대국으로 부

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오바마는 아시아

상하고 있는 중국이, 그에 합당한 국제적인 의무와

지역으로의‘귀환’ 이라기보다는 후퇴로 그의 임기를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

마치게 될 것이다.

하고 있다. 중국과의 협력 관계라는 것은 미국이 보 기에‘보편적인’가치를 중국이 보장해주지 않는 한

손현선 (이화여대 사학)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중 관계는 앞

iamthemis@hanmail.net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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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imes

의 이익 확보로 직결된다는 단순한 제로섬 법칙은 이 제 현실성이 떨어진다. 더군다나 아무리 패권국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와 일관된 대결 국면을 장기간 유지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지금의 공화당은 과연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 고 있을까.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로 출마했던 롬니 의 대외 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미국의 세기(An American Century)’ 였다. 그 안에는 미국을 자유민 주주의의 메시아와 동일시하는‘미국 예외주의’ 가짙 게 녹아있다. 공화당은 전세계적으로 미국의 영향력

‘소련에 맞서고 냉전을 종식시킨 로널드 레이건의

을 확대하고‘미국의 세기’ 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

국가안보 접근 방식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다.’미

로 여전히‘레이건스러운’수단을 그대로 채택하고

국 공화당 홈페이지의 대외정책 소개란에 가장 먼저

있다. 과거의 잣대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은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미국의 공화당 출신 전 대통령

잊은 듯하다. 1981년과 2012년은 분명히 다르다.

로널드 레이건이다. 레이건은 적대국가, 특히 소련의 영향력 자체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요인이

부시의 무책임함

라고 판단했으며, 때문에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세계 각국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미국의 이익을 고수하

2000년의 공화당과 부시 정부 역시 적극적 대외정책

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공화당은 레이건을 소

이라는 기존의 밑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행보를

련을 붕괴시킨 장본인으로 추앙하며 아직까지도 그의

보여줬다. 특히 2003년 유엔 안보리의 동의 없이 감행

대외 전략을 일종의‘정석’ 이자‘지침서’ 로 여긴다.

된 이라크 침공을 보면 공화당이‘자국의 이익’ 이라

20세기의 냉전은 비슷한 국제적 영향력을 가진 두

는 단어를 얼마만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지 알 수 있

국가 사이의 알력 위에 존재했다. 소련은 정치적 이

다. 그러나 이 중요한 대외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부

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미국은 이를

시 행정부에게 신중함이 결여됐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자국의 이익에 대한 위협 요인으로 인지했다. 공산권

2008년 상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부시는‘이라크의 무

이 붕괴된 후 소련의 바톤을 이어받아 미국의 라이벌

기 프로그램,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관성 등에 대한

로 새로이 주목받게 된 국가는 중국이다. 그러나 지

스파이 에이전시들의 부정적 의견을 무시하고 보유 기

금의 중국은 국제사회 전반에 그토록 깊숙이 개입할

밀을 과장’ 함으로써 불필요한 전쟁을 자행했다. 공화

역량도, 의도도 아직 없다. 중국이 과거 소련 수준의

당과 부시가 무리수를 강행한 이유는 이들이 당시 지

패권국 지위를 갖기에는 이르다. 거기에 오늘날의 국

니고 있던 두 가지 그릇된 태도에 기인한다.

제 정세에서는, 단순히 양분으로만 향하던 30년 전과

하나는 이들이 국제정세에 대해 지나치게‘도덕적’

는 달리 국가 간 상호의존성이 크게 증가했고 그 관

인 측면에서만 접근했다는 것이다. 공화당만의‘도덕

계망도 훨씬 복잡해졌다. 적국의 영향력 감소가 자국

기준’ 이 전쟁을 정당화시킬 만큼 올바른 것인지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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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후광을 입은 롬니?

1981년에서 멈춘 공화당의 시계 한 국내적·국제적 합의도 없었지만, 접근 방법 자체

을 적극적으로 견제

도 국제 정세라는 맥락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부시

- 북한의 무장 해제와 한미일 협력 체제 강화

는 2002년 1월 공식 석상에서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 이스라엘과의 협력 강화와 이란 핵문제의 강경 대처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2년 9월, 한 TV 좌담 프로

- 적극적인 무력 지원을 통한 시리아 사태 해결

그램에서는 부통령 딕 체니가 이라크를‘이웃국가를 두 번이나 직접 침략’ 한 악질로 묘사했다. 이로써 악

그러나 그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제시된 정책을 구

을 쳐부수고 민주주의의 깃발을 드높여야 한다는 당

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와 관련한 논의가 부족하

위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전쟁 비용이나 국제 여

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롬니의 대외

론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정책은 위험할 정도로 모호하” 며,“냉전시대를 연상

다른 하나는 공화당이 국제사회, 특히 자신들이 악

케 하는 그의 외교안보 정책의 점수는 C학점” 이라고

의 축이라 규정한 일부 국가들의 움직임에 과민했다

밝혔다. 이를테면 롬니는 북한으로 하여금 어떻게 핵

는 것이다. 공식석상에서 이라크가 거론될 때는 항상

개발을 단념시키고, 대북 지원과 규제는 어떻게 조율

최악의 경우가 상정되었고, 이는 대중과 공화당 자신

할 것이며, 다자 회담 테이블에 북한을 어떻게 끌고

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정책에 대해 이성적

올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그저 북한의

인 논의가 진행될 여지를 막아버렸다. 결과는 무책임

무장 해제만을 주장한다.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

했다. 막상 이라크의 뚜껑을 열어본 결과, 세계적으

정하겠다는 주장도 미중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로 위협이 될 만한 대량살상무기는 실재하지 않았다.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보수층의 표를 얻기 위한 인기 영합성 발언이었다. 다른 주장들도 완고해 보이

롬니의 모호함

는 언어 구사만 한 겹 걷어내고 나면 구체적인 정책 실천 부분은 오바마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이라크 전쟁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의 공화당 은 어떨까. 표면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그리 달라진

레이건을 그만 놓아주어야 할 때

것은 없어 보인다. 공화당 후보들은 전당 대회서부 터 레이건과의 접점을 찾아내어 부각시키는 데 골몰

레이건이 임기를 마친 후 23년이 지났다. 그동안 국

했다. 이는 보수층 유권자들로 하여금‘그 때 그 시

제 정세는 놀랄 만큼 큰 폭으로 변해왔지만, 이를 받

절’ 을 회상하게끔 하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현실적

아들이고 해석하여 대안을 제시해야 할 세력은 왜인

이고 균형 잡힌 대외정책을 수립하는 데는 실패했다.

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비판적인 고찰의 과정

이번 대선에서 주요 외교 쟁점에 대해 롬니가 제시했

없이 과거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보수적인

던 청사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것이 아니라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다. 공화당은 롬니 의 패배를 통해 자신들의 대외정책에서 근본적으로

-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통해‘미국의 세기’ 를 유지, ‘벌벌 떠는’미국은 안 돼 - 중국의‘환율 조작’ 에 대한 강력한 항의, 중국의 부상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김만희 (고려대 국문) manhee870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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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새로운 중국의 입장

중국에서는 미국 대선과 유사한 시점인 11월 8일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가 개막돼 지도 권력이 교체됐다. 세계 제2 위의 경제대국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서방’ 에서도 궁금한 눈치다.‘서방’ 에서 최근 주된 관심을 보이는 문제 는 중국 지도부 내부의 파벌 갈등, 보시라이 사건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고위 관리의 부정부패, 티베트 등 소수 민족 자치 요구, 인터넷 검열, 민주주의와 인권 등이다. 한국의 언론도 이런 보도를 따라가다 보니 독자들의 관심사도 비슷해진다. 하지만 실제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수행해 나갈 역할의 큰 그림은‘세부사항’보도만으로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큰 그림은 중국공산당이 지난 세월 걸어온 역사와 앞으로 걷겠다고 천명한 역사에서 더 잘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미 후진 타오 시대에 정치 엘리트의 합의로 중국의 미래상이 제시된 마당에, 시진핑의 젊은 시절 개인사 보도가 미래 예측에 과 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후진타오가 당분간 군권을 계속 쥐고 있을지의 문제가 중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이해하는 데 과 연 얼마나 핵심적일까?

미국과의 대결의 시대였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과

미중시대, 대결의 1막과 화해의 2막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북진하자 중국 중국 공산당은 2차대전의 세월 동안 국민당과 일본 제국주의라는 두 적과 싸웠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

공산당은 한반도에 파병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 쟁은 1951년이 되자‘미중전쟁’ 이 되었다.

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중국은 1950, 60년대가 되자 이념, 국가 운영, 안보

하지만 이어지는 냉전의 세월은 국민당을 지원했던

의 문제로 소련과도 분쟁의 세월을 걷게 된다.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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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차 전국인민대표회의, 평화적인 패권의 부상?

13억의 미래, 용의 꿈을 꾸는 판다 을 견제해야 한다는 이해가 맞아떨어진 중국과 미국

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언론에서 기대하는 중국

은 1971년의 핑퐁외교와 1972년 닉슨의 방중을 계기

의 역동적 변화는 실제 원칙의 안정성과 거리가 있

로 1979년 수교했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탈냉전이

다. 이 원칙은 한 명의 독재자가 단독으로 내놓은 것

시작된 1989년, 천안문 시위가 무자비하게 진압되자

이 아니라 공산당 내부의 의견 조율을 통해 장기 전

‘서방’ 은 인권 탄압에 항의하며 경제 재제로 응수했

략으로 수립된 것이다. 시진핑이 지난 9월 모습을 감

으나 관계가 냉전 수준으로 경색되지는 않았다. 2010

춘 이유를 추측하는 것보다 후진타오 시대 중국 정부

년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세계 2위로 부상하자 1978년

의 주요 입장 발표가 더 중요한 이유다.

시작된 개혁개방의 성과는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후진타오는 2008년 12월 18일 개혁개방 30주년 기

세계의 관심은 이‘부상’ 의 최종 귀결이 무엇이냐

념 연설에서“우리의 최대 목적” 으로“우리 당 창건

는 데 있다. 중국과 국제사회는 상호 의존 못지 않게

100주년이 되면 십수억 인구가 더 나은 수준의 소강

갈등과 대결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미중시대

사회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 과“신(新)중국 건국

의 3막은 대결의 1막으로 회귀하는 걸까? 아니면 2막

100주년에 기본적 현대화를 달성해 부강, 민주, 문

이 열어 놓은 협력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걸까?

명, 조화의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세우는 것” 이라 고 말했다. 공산당 창건 100주년과 신중국 건국 100 주년은 각각 2021년과 2049년을 가리킨다. 후진타 오는 2002년 제16차 전인대에서 총서기로 선출돼 10

이미 제시된 큰 그림

년간 하나의 시대를 운영했다. 2012년 제18차 전인 중국의 대외 정책은 한미동맹, 북한의 비핵화, 중일

대로 개막한 시진핑 시대의 최우선 과제는 바로 이

영토 갈등 등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더 나은 수준의 소강사회” 를 만드는 데 있는 셈이

하지만 국내 언론은 미국의 언론과 연구기관을 따라

다.“소강사회” 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돼 기본적

최근 중국 정치 엘리트 간의 내부 기싸움에 주로 관

복리가 달성된 사회를 말한다. 후진타오는 지난 11월

심이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한반도에 영향을 미칠

8일 제18차 전인대에서도“중국특색 사회주의의 길

중국의 전반적 행동 원칙은 가까운 과거로부터 근본

을 따라 전진해 소강사회를 전면 실현하기 위해 분투 하자” 라는 제목의 정치보고에서 동일한 목표를 제시 ⓒ중국외교부

했다.“소강사회”실현의 기한이 2020년으로 설정된 것을 제외하면 2008년 연설과 큰 차이는 없다. 기존 논의대로 중국 공산당은 외신에서 이야기하는‘내부 잡음’ 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대원칙을 예고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가 정책 기조가 내부 분열로 불안정해지는 현상 은 오히려 민주 사회에서 더 두드러진 특징이다.‘내 부 잡음’ 에 대한 관심에는 중국 민주화라는 기대가

후진타오 전 공산당 총서기

투영돼 있는 걸까?

기획

29


ⓒ중국외교부

이런 중국의 외교 정책은 제18차 전인대에서도 확 인되었다. 11월 8일 정치보고에서 후진타오는“중국 은 계속 평화와 발전, 협력과 상생의 기치를 높이 들 고 세계 평화를 수호하고 공동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힘을 다할 것” 이라며“중국은 시종일관 화평발전의 길을 걸으며 평화적 외교 정책을 펼 것” 이라고 말했 다.‘서방’ 에서 제기한 중국 위협론을 의식한 듯 후 진타오는“중국은 각종 형태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며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히 대외 팽창을 하 지 않을 것” 이라고도 덧붙였다( 《연합뉴스》 ). 국제사회에서 주로 우려하는 것은 중국의 이런 평화

시진핑에게 과제를 이양하는 정치보고의 현장

적 외교가 지닌‘단호함’ 이다. 중국이 반대하는“각 종 형태의 패권주의” 는 부분적으로 미국을 겨냥한 발 언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은“핵심이익” 이라는 말로

미지의 제3막, 강경한 평화 외교?

국내 체제와 안보, 주권, 영토, 경제발전은 양보할 수 시진핑 시대 동아시아 정책은 어떻게 될까? 2020년

없는 주요한 가치라는 점을 최근 몇 년 간 강조해 왔

까지 중국은 미국, 한국, 북한과의 잠재적인 갈등 요

다. 후진타오는 정치보고에서도“우리는 그 어떤 외

소를 무력 충돌 없이 안정적으로 관리하려고 할 것이

부적 압력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고 국가 주권과 안보,

다. 하지만 앞으로 미중 관계와 동아시아가 상호 이

발전 이익을 단호히 수호할 것” 이라고 재차 공언했다.

해와 존중을 정립해 싸움 없는 국제 체제로 정착될지

중국의 진로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대개 이 비타협

는 더 지켜봐야 한다. 시진핑은 지난 2월 15일 미중

성의 본질이 뭐냐는 것이다. 중국은 최근 남중국해에

관계의 미래상으로“21세기의 신형 대국 관계” 를제

서 주변국과 영토 갈등을 빚으면서“주권” 의 이름으

시하는가 하면 양제츠는 그 연속선상에서 10월 16일

로 단호한 대처를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

“신형 국제관계” 를 거론했다. 그 구체적 양상도 아직

재까지는 이런 자세가 패권 추구 행위가 아니라‘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서방’ 과 중국의 적지 않

세적’ 인 태도라고 볼 이유가 있다. 중국으로서는 최

은 정치학자들이 이런‘레토릭’ 에도 불구하고 동아

소한 2020년까지는“화평발전” 을 이룩하기 위해 직

시아의 잠재적 갈등이 싸움으로 비화될까 우려하는

접적인 무력 충돌로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 동기가 없

것은 이 때문이다.

다. 후진타오의 정치보고처럼“중국은 국제 분쟁을

후진타오 시대 대외정책의 기본 원칙은 2004년에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한다.”

제시한“화평발전” 이었다. 2020년까지의 국제 환경 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울 것이며 그때까지“소강사 회” 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계속 평화적이어야

수세적인 문제에는 타협하지 않는다

한다는 게 공산당의 판단이었다. 그러려면 중국 자신 의 대외 정책도 평화로워야 한다. 본래 2003년에는

시진핑 시대 중국은 후진타오 시대와 마찬가지로

“화평굴기” 의 슬로건을 제시했으나 외국에서“굴기”

주변국과 평화적이고 호혜적인 교류를 진행하되“핵

라는 문구를 위협적으로 볼 우려가 제기되자 이를 이

심 이익” 에는‘단호하게 수세적’ 으로 나설 것이다.

듬해“화평발전” 으로 바꿨다. 평화적으로 발전하겠

지난 9월 4일 양제츠 외교부장은 클린턴 미국 국무부

다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우려가 계속되자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중국과 미국이 서로 얽힌 이

2005년 후진타오는“조화세계” 라는 이름의 비교적

해를 가진다는 점은 계속 확인된다” 며“대립으로 양

부드러운 원칙을 제시했다.

측이 피해를 볼 지점에서 협력한다면 양측은 이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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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볼 것” 이라고 발언해 미중 협력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며“관련국이 조선

양국이 갈등의 소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양제

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화를 유지하고 증진하기

츠 외교부장은 또“각자의 핵심 이익과 주된 관심사

위한 노력을 지원한다” 고 원론적 차원에서 발언했다.

에 대한 상호 존중은 양자 관계의 지속적이고 부드러

북핵에 반대하되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미의 위협에

운 발전의 중요한 선제 조건” 이라고 말해“핵심 이

도 반대한다는 입장이 담담하게 표현돼 있을 뿐이다.

익” 에 대한 침해를 지양하자는 입장을 다시 한 번 밝

발상을 전환할 수는 없을까? 한미동맹은 중국의 안

혔다. 시진핑 역시 9월 19일 파네타 미국 국방부 장

보를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핵심이익” 인

관과 만난 자리에서는“댜오위다오의 주권에 관련된

안보를 지켜낼 수 있는 요소라고 주장하는 지혜가 필

문제에 관여하지 말 것” 과“긴장을 고조하고 상황을

요할지도 모른다. 한미동맹이 중국에게도 잠재적 위

복잡하게 만들 어떤 행동도 자제할 것” 을 주문했다.

협인 북핵을 풀기 위한 도구라고 설득할 수 있을 때

최근 몇 년 간 중국 지도자들은 한국과 일본을 향해

북핵 문제는 미중 양국의 안보를 모두 위협함으로써

서도 비슷한 요청을 해 왔다. 서해상 한미 합동군사

적대적일지 모르는 두 강대국을 화합시키는 가장 강

훈련에 대한 중국의 항의나 댜오위다오에 대한 단호

력한 지렛대가 될 것이다.

한 발언이 제2의 미중전쟁과 청일전쟁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갈등은 평화의 계기다 야누스의 문은 절반만 열려 있다

시진핑 시대의 과제는“화평발전” 의 번영을“핵심 이익” 의 갈등에서 지켜내는 데 있다. 병존하는 두 슬

실제로 중국은“핵심이익”이 위협을 받으면 군사

로건이 결국은 전쟁으로 귀결되리라는 예측에는 두

훈련과 정찰 등 무력 시위로 대응하되, 동시에 외교

원칙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경직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

채널로 대화를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댜오위다오

다. 세계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실제 아시아는“핵심

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심해지자, 지난 9월 10일 중

이익”갈등을 역설적으로“화평발전” 을 굳건히 하는

국 외교부는 성명에서“중국 정부는 영토 주권이 침

초석으로 삼게 될 것이다. 미중은 전쟁이 군사적으로

해 당하는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하

나 경제적으로나 막심한 손해라는 데 인식을 공유한

지만 외교부는 동시에“일본은 양측이 도달한 이해와

다.“핵심이익” 은 양보할 수 없다는 중국의 말은 역

공통의 입장으로 진정성 있게 돌아와야 하며 분쟁에

설적으로 양보하는 강대국 관계를 요청하고 있다. 칸

관한 협상 트랙으로 복귀해야 한다” 고 말해 무력보

트가 말했듯 전쟁으로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사회에서

다는 대화를 통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

전쟁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평화를 합의하는 계기가

다. 2012년 중일 간의 영토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

된다. 평화를 좀처럼 장담할 수 없는 아시아는 이런

측은 외교적으로 잦은 회동을 가졌다.

의미에서 21세기형 영구평화가 가능한 최적의 실험

20년 가까이 풀리지 않는 북핵 갈등도 언뜻 보기에

장인지도 모른다.

는 미중 평화 정착의 과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듯하 다. 하지만“핵심이익”갈등은 타협이 아니라 협력의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계기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 후진타오 시대 10

intransigere@gmail.com

년 간 북한은 두 차례 핵실험에 성공했고 최소한 세 차례 서해에서 무력 도발을 일으켰다. 북핵은 중국의 골칫거리지만 미중 간‘완충제’ 이자‘동맹’ 인 북한 을 달래야 하는 사정도 있었다. 양제츠 외교부장은 9 월 4일“중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와 안정 유지를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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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12년 대선에서 대외 정책은 찬밥 신세였다. 쟁점은 과거사 해석, 정치제도 개혁, 경제 민주화, 복지, 북방한계선 정도 였다. 그나마 11월에 들어서자 북방한계선 공방이 전부였던 대외 정책 논의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팩트 공방 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격 살인 미수에 머물렀던 대외 정책 논의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양다리 연애’ 보다 어려운 미중 시대 외교

애’ 보다 어려운 과제다. 지난 2008년 5월 27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 친강은 정례브리핑에서“한미군사동

미중시대 한국의 딜레마는‘쇠락하지만 아시아로

맹은 지나간 역사의 산물” 이라며“냉전시대의 군사동

돌아오는 미국’ 과‘평화적이면서 비타협적으로 부상

맹으로 역내에 닥친 안보문제를 생각하고 다루고 처

하는 중국’사이에서 입장 취하기가 난처하다는 데

리할 수 없다” 고 비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방중하

있다. 하지만 후보들은 미중 양국과 동시에 우호적으

는 동안 나온 발언이라‘결례’논란이 일었다. 한국

로 지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입장이다.

외교부는 이날“ ‘한미동맹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 다’ 는 중국 정부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고 말했으나 5

박근혜 후보는“신뢰 외교와 새로운 한반도”공약

월 29일 친강 대변인은 27일의 발언이“완전한 것이

에서“한미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심화·발전

며 계통을 밟아 이뤄진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시키며, 중국과의 관계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에

이라고 말해 한미, 한중 관계의 심화가 양립하기 어

걸맞게 업그레이드하겠다” 고 밝혔다. 한미, 한중 관

렵다는 여운을 남겼다. 이명박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

계를 모두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양다리 연

석은 한중 관계를 2008년 5월 27일 전략적 협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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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2013년, 대선 주자들이 그리는 동아시아 ‘새 판’은?

한반도 리더십은 어디로 가는가 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가 향후

편향’ 을 겨냥하고 이를 조정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연루의 딜레마’ 에 미칠 영향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면 노무현 정부의“동북아균형자론” 이 야기한 한

한편 문재인 후보는 이명박 정부의 한미, 한중 관

미 간 갈등을 재생산할 우려가 있다.

계가 불균형적이라고 비판하며 미중 사이에서 한국

“동북아균형자론” 은 본래 동아시아의 냉전 질서를

이 균형 잡힌 외교로 선회해야 한다고 본다. 문 후보

해체하기 위해 미국이 나서서 갈등을 조정하려는 의

는『사람이 먼저다』 에 실린 인터뷰에서“이명박 정부

지가 중요하며, 미국의 적극적 태도를 이끌어 내기

는 한미동맹에만 지나치게 치우친 나머지 다른 주변

위해 한국이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는 논의였다. 하지

국과의 외교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다” 며“중국하고도

만 반미 정서 속에서 당선된 노무현 후보의 이미지,

협력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균형적 외교가 필

대북 정책에 대한 한미의 입장 차이, 오스트리아의

요하다” 고 말했다. 안철수 전 후보 역시『안철수의 생

메테르니히처럼 강대국으로서 주변 강대국의 이해를

각』 에 실린 인터뷰에서“우리 외교가 미국 쪽에 너무

조율하겠다는 야심적 어감의“균형자” (balancer) 표

치우치고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지적” 에 대한

현으로 한미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균형” 이‘내

질문을 받자“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너무 한쪽으로

입장을 조정한다’ 는 뜻의 자동사가 아니라‘너희의

치우치지 않게 어느 정도는 균형을 잡도록 노력해야

입장을 조정한다’ 는 뜻의 타동사로 읽히는 한 미중

한다” 며“균형 외교와 다자 외교가 중요하다” 고 밝혔

양국은 한국의‘헛된 야심’ 을 의심할 것이다. 문재

다.‘양다리 외교’ 의 어려움에 대한 구체적 대응이 없

인, 안철수 후보가 이명박 정부의 한미 FTA에 비판

는 점은 박근혜 후보와 마찬가지다.

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향후 한미 관계의 진로는 더욱

“균형 외교” 의 실체는 뭘까? 박근혜 후보가 한미,

흥미로워지게 됐다.

한중 관계를 모두 잡겠다고 공언했다면, 문재인 후보

그런데도 문재인 후보는“한미동맹의 근간이 충실

는 한미 관계에서 힘을 조금 빼면서“균형” 을 잡을

하게 유지된다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한미 관계에

가능성이 있다.“균형외교” 가 이명박 정부의‘대미

악영향을 줄 이유는 없다. 역으로 한미동맹이 중국과 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니” 라고 말해 ⓒ동아일보

어려운 과제에 낙관이라는 짐을 얹어 놓았다. 이 낙 관에 박 후보가 공감함으로써‘양다리 외교’ 의 짐은 무거워지게 되었다.

박근혜, 북한과의‘밀고 당기기’ 박근혜 후보는 11월 5일“신뢰 외교와 한반도”공 약 발표에서“안보부터 확실히 챙기겠다” 고 강조했 다. 박 후보는“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기 위해 한미 동맹을 포함한 포괄적 방위역량을 강화해 나가고,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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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공식 앨범

운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 상책” 이라고 말해 그의 당 선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수용했다. 안보와 동맹의 중 시가 대결을 위한 게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남북 관계 개선의 의지를 명확히 해달라는 요구를 받은 셈이다. 박 후보에게 이번 비방은 하나의 기회일 수 있다.

문재인,‘햇볕’ 을 부활시킬까 극복할까 2015년 전시작전권 전환을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 고

문재인 후보는 남북경제연합과 남북정상회담, 서해

도 말했다. 박 후보는 이 기본 원칙 위에서“우리의

공동어로를 추진하면 한반도 안보 문제가 해결되리라

대북정책도 진화해야 한다. 유화 아니면 강경이라는

고 자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내내 서해에서 충돌

이분법적 접근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대북정책을 추

이 없었다는 게 자신감의 근거다. 남북정상회담 추진

진하겠다” 고 밝혔다. 제3의 접근을 약속했지만 내용

위원장 경력이나, 전직 통일부 장관 및 대북 정책 이

상 김대중-노무현 정부의‘햇볕정책’ 을 부분적으로

론가들과의 관계망을 보면 정책의 추진력은 가장 신

부활시킬 의지를 드러냈다. 박 후보는“정치·군사적

뢰할 만하다. 하지만 개선된 남북 관계조차 북미 관

신뢰구축과 사회·경제적 교류협력의 상호보완적 발

계의 악화와 맞물릴 때면 여지 없이 긴장되어 왔다.

전을 통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반도 평화를 굳

‘퍼주기’ 라 불리는 무조건적 관여 정책이 미국과 국

건히 하겠다” 면서“기존 합의에 담긴 평화와 상호존

내 여론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

중의 정신을 실천” 하고“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라

북 관계의 진전은 장담하기 어렵다.

면 북한의 지도자와도 만나겠다” 고 말했다.

남북 관계의 개선은 북미 관계의 개선과 맞물려야

북한은 박 후보의 공약에 반감과 기대를 동시에 드

만 정착된다. 문 후보는 이를 위해 지난 10월 4일 발

러냈다. 북한은 이전까지 새누리당이 지난 5년 간 남

표한“문재인의 한반도 평화구상” 에서 북미, 북일관

북관계를 악화하고‘북풍공작’ 을 일으킨 장본인이라

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 등“포괄적 근본적 해결”

며 박 후보를 비난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을 구상으로 내놨다. 2013년에 한미, 한중, 남북정상

대변인은 박 후보가 11월 5일 대북 정책 공약을 발 ⓒ안철수 진심 캠프

표한 직후인 11월 8일 박 후보가“그 무슨‘억지’ 니, ‘안보우선’이니 하고 강변하였는가 하면 나중에는 리명박역도도 처음에는 감히 입밖에 내기를 꺼려하던 ‘북인권법’ 이니,‘탈북자’ 니 하는 역겨운 망발도 공 공연히 하였다” 고 비난했다. 하지만 박 후보의 공약에 북한은 관계 개선의 기대 도 드러냈다. 조평통 대변인은“남조선의 많은 사람 들이 리명박역도와 같은 대북정책이 지속되여서는 안 된다고 하고있으며 박근혜자신도 이번 공약에서 그 것을 인정하고‘국민이 공감’ 하는 방향에서의‘대북 정책의 진화’ 를 운운” 한 일을 긍정했다. 대변인은 또 박 후보의 대북 정책은“ ‘녀성대통령’ 을 바라보는 박 근혜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것이 못된다” 며“박근혜는 대세와 민심을 바로 보고 현 ‘정권’ 과 같은 수치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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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회담을 열어 2014년에는“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서의 통일’ 에 대한 기초적 인식이 눈에 띈다. 박근혜

위한 6개국 정상선언” 을 내겠다고 한다. 그의“균형

후보는“자유민주주의 질서에 기초한 민족공동체통

외교” 가 이로써 평화체제를 이룰 수 있을지는 알 수

일방안을 계승·발전” 시키겠다고 말해‘흡수통일론’

없다. 적어도 그의 전임 동료는 9·19 선언으로도 이

을 경계하는 북한의 비난을 사기는 했지만“작은 통

를 완수하지 못했다.

일에서 시작하여 큰 통일을 지향하겠다” 며“경제공

안철수 전 후보 역시 사퇴하기 전인 11월 8일“평

동체를 건설” 하는 일을“작은 통일” 이라고 봤다. 문

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 구상”공약에서 김대중-노

재인 후보도 공약인“남북경제연합은 경제 분야에서

무현 정부를 계승하는 대북정책을 제안했다. 정책 구

먼저 사실상의 통일로 나가겠다는 구상” 이며“남북

상에 관여한 이봉조 씨는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차

공통의 통일방안에 따라서 통일의 길로 나가는 초석”

관을 지냈고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진보 성향의 북

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전 후보는『안철수의 생각』 에

한 전문가로 2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을 지냈

실린 인터뷰에서“통일을 점진적인‘과정’ 으로 보는

다. 안 전 후보는 대북 정책의“6대 전략” 에서“남북

시각” 이 중요하다며“협력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

관계 개선-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북핵문제 해결의

고 통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고 말했다. 모두 평화

병행추진” 을 첫 번째 원칙으로 제안했다. 여기서“병

공존이 아니라 정치적 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상정하

행추진” 은“상호 연계하지 않고”진행하겠다는 뜻으

고는 있지만,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네트워크 자체

로, 비핵화 프로세스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아도 남

도 통일로 본다는 점에서 단순한 흡수통일론을 넘어

북 관계를 악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서고 있다. 이 낮은 수준의 이해가 유연한 네트워크

따라서“서해 평화정착” 이나“남북경협 활성화”공

로서의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구상으로 이어질 때쯤

약은 북의 일방적 도발이 일어나도 지켜질 가능성이

갈등이 평화와 번영으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을지

있었다. 문 후보처럼‘퍼주기’ 나‘지나친 유화정책’

도 모른다.

이라는 비판을 살 가능성이 있는 속에서 과연 공약대 로“대북정책의 국민적 합의 제도화와 초당적 협력” 을 이끌어낼지는 불투명했다.‘햇볕’ 에 대한 새누리

무엇을 해야 할까?

당과 여론의 반대를 무마시키면서도 동시에 남북 긴 장을 완화하는 과제를‘햇볕 10년’ 의 역사는 해내지

대선 국면에서 대외정책이 전부일 수는 없다. 가령

못했다.

복지 문제가 가장 절실할 유권자까지 대외정책을 기

《로동신문》 은 지난 8월 6일“한 여론조사에서는 문

준으로 투표해야 한다는 생각은 허위의식이다. 그렇

재인이 다음기‘대통령’ 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로 지

다고 한반도의 삶을 전반적으로 규정하는 국제 관계

목되였다” 거나“ ‘안철수돌풍’ 이 되살아나 박근혜를

의 힘을 감안하지 않고 투표한다면 그것은 소국 의식

곤경에 몰아넣고있다” 고 보도해 야권 후보 선호를 간

의 소산일 것이다. 다른 이유에서 특정 후보를 선택

접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남북 관계만으로는 남북

하더라도, 국제정치적 현실에 과제가 산적해 있음을

관계가 풀리지 않는다. 두 사람의 대북 정책은 이제

상기한다면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어떤

적이 아니라 우방과 지지자까지 움직일 방안을 포괄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한

해야 한다.

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던가. 인민이 인민의 삶이 어 떠한지 알고자 한다면 그 자신이 군주가 되어봐야 한 다고.

네트워크적 인식의 등장? 후보들이 초보적이지만 네트워크와 다자 외교에 관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심을 표명하는 태도는 희망적이다. 특히‘네트워크로

intransigere@gmail.com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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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in

북방한계선, 혹은 합의의 한계선 대로 그어놓은‘북방한계선’ 은 아무러한 국제법적근

국제사회에서 정당화라는 것

거도 없고 정전협정에 전면배치되는 유령선” 이라고 북방한계선은 재판관이 없는 국제사회에서 내 몫을 무엇으로 정당화하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다. 그 무 엇은 합의인가, 관습인가, 아니면 폭력인가?

주장했다. 그러나 이 선은 1973년까지만 해도 북한의 별다른 이의 없이 사실상 합의된 해상분계선처럼 굳어져 내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서는

려왔다. 북한은 1973년 10월부터 북방한계선을 문제

군사분계선이 논의됐을 뿐 해상분계선은 유엔군과 북

삼으며 의도적으로 이 지역에서 긴장을 조성하기 시

한 측 입장이 상이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다만 정

작했다. 같은 해 북한은 황해도-경기도의 도경계선을

전협정에서는“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북쪽과 서

연장한 선의 이북 지역은 자신들의 관할 수역이라고

쪽에 있는 모든 섬 중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주장했으나, 한국 정부와 유엔군은 이 주장을 받아들

연평도 및 우도의 도서군들을 국제련합군 총사령관

이지 않았다. 또, 1984년 한국에서 수해가 났을 때도

의 군사통제하에 남겨 두는 것” 을 명시하고“한국서

북한은 북방한계선에서 구호 물품을 인계했는데, 이

해안에 있어서 상기 경계선 이남에 있는 모든 섬들은

는 북방한계선을 사실상 인정한 증거로 해석된다.

국제 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 둔다” 고 규정했다.

남북한 합의의‘동상이몽’해석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은 직후인 8월 30일 남북이 해상에서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이 이상

이렇게 관습적으로만 확인돼 오던 북방한계선의 정

북으로 넘어가지 말라’ 는 의미로 북방한계선을 설정

당성은 1991년 합의되어 이듬해 효력을 발휘하기 시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이조차 역사적 증거가

작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문서상으로 인정된다. 남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설령 클라크 총사령관의

북기본합의서에서는“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

지시가 있었다고 해도, 정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논의

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

한 내용은 아니므로 엄밀히 말해 국제법적 정당성도

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

부족했다. 북한에서는 이‘일방성’ 을 들어 북방한계

역으로 한다”고 규정해 북방한계선의 실효성을 인

선의 무효성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10월 20일에도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은 1999년에도‘조

북한 외무성 군축 및 평화연구소 대변인은“조선정전

선 서해 해상분계선’ 을 일방 선포하는가 하면 1999,

협정의 당사자인 우리와의 협의도 없이 미국이 제멋

2002, 2009년에 북방한계선에서 세 차례의 서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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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동아일보

수역 설정의 기준으로 북방한계선을 채택한다면 북 방한계선은‘객관적 실체’ 로 인정받게 된다. 다만 문재인 후보는 북한이 말하는 북방한계선의

‘불법무법성’주장에 어떻게 대응하려는 것일까? 회 담을 추진한 인물로서 여기에 대비할 의무를 피할 수 는 없다.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한 북 방한계선을 군대만으로도, 남북 합의만으로도 평화롭 게 지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11월 5 일 남북 교류를 추진하면서도“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온 북방한계선에 대한 어떠한 도발도 용납 전을 일으켰다. 2010년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

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한 박근혜 후보도 같은 의무를

건 역시 북방한계선을 둘러싸고 생긴 비극이었다.

지는 셈이다.

우선 남북 합의를 깨는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을 문 제삼을 수 있다. 북한 외무성 군축 및 평화연구소 대

국내에서 일어난‘4차 서해교전’

변인은 10월 20일“최근 남조선의 정계,학계,사회계 에서도‘북방한계선’ 은 북과 남이 합의한 해상경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난‘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선이 아니고 정전협정에도 없는 비법선으로서 분쟁

정치 공세가 북방한계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

의 씨앗으로 되기때문에 1992년 북남합의서에도 앞

았다는 점이다.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대북 정책을

으로 계속 협의해나가는것으로 명시되였다고 언급한

둘러싼 정책 대결 수준은 남북 간 대결 수준 이상으

바 있다” 고 말했다.“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로 후퇴했다. 가을 내내 우려되던 4차 서해교전은 남

구역” 을 불가침경계선으로 두자고 한 규정이 아니라

북 사이에서가 아니라 여야 사이에서 벌어졌다. 새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군사적 신뢰조성과 군축을

누리당은 북방한계선을 둘러싸고 정치 공세를 제기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추진한다” 는 규정을 강

하면서, 대북 정책의 실효성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

조하는‘동상이몽’ 식 해석이다.

통령과 문재인 후보 측의 사상을 검증하는 팩트 공방

또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은 9월 29일“력

에 주력했다. 노 전 대통령의‘북방한계선 포기’발

사적인 10.4선언에 명기된 조선서해에서의 공동어

언이 있었는지도 불명확한 데다, 정치 공세로‘포기’

로와 평화수역설정문제는 철두철미‘북방한계선’자

발언이 결국 공개되더라도 이를 명분 삼아 국제사회

체의 불법무법성을 전제로 한 북남합의조치의 하나”

에서 득을 보게 되는 것은 결국 북한 측이다. 대통령

라며“누구든 진정으로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바라

의 대화 중 발언은 남북 간 합의에 비해 위상이 떨어

지 않고 평화를 원한다면 불법무법의 강도적인 유령

지는데도 이를 굳이 대화록에서 찾아내 공공연히 발

선인‘북방한계선’ 고수를 위해 헤덤비는 망동을 부

표한다면 불필요하게 세계의 이목을 끌기 쉽다. 게다

리지 말아야 한다” 고 일방적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가 한국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을 포기한다고 말했다

10.4선언의 서해평화협력지대 조항은 북방한계선이

고 공식 확인되면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주장이 더 정

북한 측에 불편하게 그어져 있어 우발적 충돌의 소지

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새누리당에서 일으킨 북방한

가 있음을 감안해 인근에서 경제협력을 이루자는 취

계선 논란은 국익보다는 표심을 얻기 위한 대내 공작

지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회고록《성공과 좌절》 에

의 일환이었고, 이 근시안적 공작으로는 안보를 위협

서“NLL 문제와 관계없이 협력하여 일정한 평화지대

하는 세력이 국제적으로 득을 볼 것이었다.

를 만들면, 크게 싸우지 않고 분쟁의 소지를 예방” 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 북방한계선이 불법적이라고 말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남북이 합의해 서해공동어로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intransigere@gmail.com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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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협력과 원조 요청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제4차 당대표자회의 (2012. 4.11.) 제12기 제5차 최고인민회의 (2012. 4. 13.) 김일성 출생 100주년 연설 (2012. 4. 15.) 소극적으로 비핵화 희망

중화인민공화국

신 형 대 국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 제18차 전국인민대표회의 (2012. 11. 8.~11. 14.) “화평발전”과“핵심이익”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딜레마?

격상

경제 교류 증대와 영토 갈등 잠재

미리보는 2013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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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 적대시 정책 철회 요구

국제적 합의 준수 요구

미합중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선 (2012. 11. 6)

관 계 ?

“미국의 태평양 세기”

한미 포괄적 가치동맹

재조정? 강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무소속 안철수 후보

한미 동맹 강화와 대북 정책 공조 필요

단일화 “신뢰외교와 새로운 한반도”

“한반도 평화구상”

“평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 건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2012. 12. 19.)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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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의 /창

선거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역사비평사, 2008)

흔히 정치판은 진흙구렁이라고들 한다. 정치란 온

람은 많지 않았다.

갖 기회주의자들이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침을 튀겨 가며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과정이라는 대중의 인

그러나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총선은 신군부에

식이 반영된 까닭이다. 이런 시각에 의하면 선거 역

게 있어 결정적인 패배였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신

시 몇 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민당은 29퍼센트의 득표율을 보여 여당 민정당에 불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의 선거는 늘 온갖 부정이 난무

과 6% 차이로 따라붙었고, 서울의 경우 오히려 신민

했고, 후보자들은 항상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

당의 득표율이 15% 정도 더 높았다. 민심이 확인되

으며, 당선 후에는 공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경

고 나자 다음 수순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야당은 헌

우도 많았다. 혼란과 변화를 거쳐 오면서 우리 사회

법 개정운동에 적극적으로 덤벼들었고, 학생운동도

는 점차 선거 자체에 대한 신뢰를 점차 잃어가는 듯

더욱 활발해졌으며 자연스럽게 6월 민주항쟁으로 가

보인다. 17대 대선 투표율(63%)과 18대 총선 투표율

는 기틀이 닦였다. 2.12 총선은 변화의 흐름에 대중

(46%)이 드러내는 현실은 적나라하다. 과연 선거는

이 동조한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이정표이면서 동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한 수단일까.

에 변화 자체의 원동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과거의 한 장면을 되짚어보자. 때는 1983년 12월,

권위적인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저자 서중석은 선

신군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그러나

거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상식이 될

온갖 스캔들, 레이건 미 대통령의 방한, 그리고 한껏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대한민국의 선거 역사를

쌓인 대중의 불만으로 인해 신군부도 곧 한 발 물러

조목조목 살피고 있는 이 책에 따르면 선거는 종종

나 유화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숨통이 조

독재의 장식물 이상의 역할을 해내었고, 기회가 찾아

금 트이자마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올 때마다 대중은 선거를 통해 천의를 표명했다. 선

동안 억눌려있던 야당과 학생 세력이었다. 민주화의

거는 분명 가공할 폭발력을 지녔다. 그리고 그 기폭

바람이 전국을 휩쓸었다. 재야인사들에 의해‘신민

스위치를 쥐고 있는 건 헌정사 60년의 우여곡절을 겪

당’ 이 창당되고, 학생들의 목소리도 높아질 대로 높

은 우리들이다.

아졌다. 그래도 독재는 독재인지라 여전히 관권·금 권 동원력은 신군부가 훨씬 높았고, 선거제도 역시 여당에 유리했다. 판세가 뒤집어질 것을 확신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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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희 (고려대 국문) manhee870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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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퀴즈 1. 기독교의 십일조처럼 이슬람에도‘이것’이라 불리는 종교세가 있습니 다. 총 자산의 2.5%를 일 년에 한 번 국가에 납부하는‘이것’은 주로 사회 복지 사업에 쓰입니다. 종종 테러집단의 활동자금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냐 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이것’은 무엇일까요? 2. 현재 소말리아는 북부의 소말릴란드, 남부의 소말리아, 그리고 중부의 ‘이곳’으로 나뉘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1998년 독립을 선언했지 만 아직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지금까지 수많은 소말리아 해적 들을 배출한‘이곳’은 어디일까요? 3.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고 긴장감이 높아져가던 1963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에 고립된 사람들을 두고 열정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연 설의 끝머리에서 그는‘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Ich bin ein Berliner)’를 소 리 높여 외쳤는데, 소문에 의하면 연설을 듣던 독일 사람들이 킥킥거렸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4. 안동 소주는 사실‘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그 기술을 전수받아 처음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이들’은 안동과 제주에 기지를 세웠는데, ‘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증류주를 공수해오기가 까다로워 아예 이 두 곳에 서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루 내내 말안장 위에서 쌓인 피로를 술로 풀었다고 전해지는‘이들’은 누구일까요? 5.‘이 사람’은 미국의 공화당원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명입니 다. 1981년 집권하여 복지를 축소하고 강력한 긴축재정을 실시해 자신의 이름을 딴 경제 신조어까지 만들었던‘이 사람’은 대외 정책 분야에서도 ‘강한 미국’,‘적극적인 미국’을 주창했습니다. 공화당 내에서‘소련을 붕 괴시킨 장본인’이라고 추앙받는‘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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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의 /창 세계인의 한마디

“나는 젤리 도넛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 시민을 안심시키는 영웅 케네디

1963년 6월 26일 베를린 장벽의 건설로 유럽에 위 기감이 고조되던 당시, 서베를린의 라트하우스 쇠네

베를린은 공산진영 아래의 동독 안에 위치하고 있

베르크에서 훌륭한 연설가로 알려진 미국의 케네디

었기 때문에 베를린 서쪽의 서독 시민들은 동독 지

대통령이 연설했다. 그는 소련이 베를린을 위협하고

역 안에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베를린 장

있는 것을 비판하며, 베를린이 자유 진영의 수호지라

벽에 배치된 동독의 무장 병력에 의한 최초의 사상자

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선언했다.

가 나오자 베를린에 사는 서독 시민들의 불안은 날로 커져갔다. 베를린 장벽이 건설될 당시 미국의 대통령

“저는 젤리도넛 입니다!”

은 케네디였다. 그는 자유진영을 수호하는 국가의 대 통령으로서, 불안에 빠진 서독 시민들을 독려하고자

날로 늘어갔던 서독사람들의 불안

영웅처럼 당당하고 엄숙하게 그들 앞에 서기로 한다.

1989년 소련 붕괴 이후 사라진 독일의 베를린 장벽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의 라트하우스 쇠네베르

은 1961년 동독 정부에 의해 건설이 되었을 당시부터

크에서 케네디는 서독 시민들의 자부심을 드높여 주

냉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나치의 지배 아래 2차

고 자신과 서독 시민들 사이에 유대감을 보여주고자

대전을 겪은 후 안정을 찾을 틈도 없이, 독일은 미국

연설 무대 위에서 외친다.“Ich bin ein Berliner!”

으로 대표되는 자유진영과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진영

아마도 그는“나는 베를린의 시민입니다”(I am a

에 의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는 위기 상황에 직면

citizen of Berlin)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게 되었다. 케네디, 무슨 말이야?

수도인 베를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동서 진 영을 가르는 경계가 생기기 시작하자, 베를린을 통해

사실“Ich bin ein Berliner” 라는 표현은‘나는 젤

자유진영인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동독의 시민이

리도넛입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케네디가 의도

날로 늘어갔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서독의 스

했던 대로‘베를린의 시민’혹은‘베를린 출신’ 임으

파이를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베를린에 장벽을

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독일어 부정관사‘ein’ 이 빠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 주위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병

“Ich bin Berliner” 라고 말해야 한다.‘berliner’ 라는

력을 배치하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근처의 건물들

단어에 부정관사가 붙게 되면 중부 유럽에서 흔히 먹

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는 젤리 도넛을 일컫는 말이 된다. ‘ein Berliner’ 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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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

사실 우리가 알고 있던 도넛, 비스마르크 케네디 대통령이 언급한‘베를리너(Berliner)’ 는바 로 우리에게 흔히‘비스마르크’ 라고 알려져 있는 도 넛과 같은 것이다. 독일의 한 일화에 따르면 1756년 베를린 출신의 한 제빵사가 전쟁 중에 오븐 없이 도 넛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튀기는 방법을 고안해냈고, 사람들은 그렇게 만든 도넛을 그의 출신지 이름을 따 서‘베를리너’ 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이후 이 명칭 은 속에 잼이나 커스터드를 넣은 도넛을 일컫는 말로 의미가 축소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 출신 이민 자이 이를 독일의 수상인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따라

‘비스마르크’ 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이제는 한국 ‘어느 한 명의 베를린의 시민’ 이라는 비유적인 표현

의 동네 마트에서 비스마르크 도넛을 만나면 서독 시

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는 굳이 틀린 표현이라고 볼 수

민을 독려하는데 열중하여 틀린 말인지도 모르고 자

는 없다. 만약 그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신이 젤리 도넛임을 밝혀버린 케네디 대통령을 떠올

말할 때 부정관사‘ein’ 에 강세가 붙지 않도록 약하

려 보면 어떨까? 우리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서양인들

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서독 시민

에게도 서양 언어의 관사 개념은 쉽지 않은 일인 것

을 앞에 둔 연설 동영상에서‘이히 빈 아인(ein) 베를

같으니 약간은 안도하면서 먹을 수도 있겠다.

리너’ 라고 말하는 두 번의 경우 모두 분명하게‘ein’ 을 발음하고 있다.‘Ich bin ein Berliner’ 는 사실 최

관대한 서독 시민?

종 연설문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이 작

느닷없는 케네디 대통령의 젤리도넛 선언에도 불구

성한 세 번째 초안까지는‘Ich bin ein Berliner’ 가

하고 당시 서독의 시민들은 그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들어가 있지만 케네디의 연설 작성 전문가와 통역가

보냈다. 당시 서독의 시민들이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

에 의해 최종 연설문에서는 삭제된 것이다. 혹자는

에 뒤돌아 웃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우리가 지금 인터

케네디가 연설 중에 흥분한 나머지 연설문에도 없는

넷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1963년 베를린

내용을 즉흥적으로 넣어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도 얘

연설 동영상 속 서독 시민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말을

기한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최종 연설문에 손

다 마치기도 전에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다.

글씨로 다시 그 표현을 삽입했다. 올바른 발음을 위 해 독일어를 영어로 발음 할 수 있도록 메모를 적어

이진주 (이화여대 불문)

놓기도 했었다.

9781399@naver.com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civis Romanus sum.”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Ich bin ein Berliner.” …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Ich bin ein Berliner!”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나는 로마 시민입니다(Civis romanus sum)” 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일 것입니다. …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 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

세계인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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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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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일관계외교전 46 국제사법재판소 어떤 곳일까? 54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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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VS 다케시마

한일 관계 외교전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1965년 한·일 협정 이래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 된

고향”

이후부터, 독도는 언제나 한일 양국 간의 뜨거운 감

이 노래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다. 바로 우리 노

자였다. 한국은 언제나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방향

래“독도는 우리 땅” 이다. 이 노래의 제목대로 독도

으로 대응을 했다. 이에 일본은 다케시마의 날 제정,

는 우리 땅이다. 그런데 지금 이 독도를 빼앗길 수도

방위백서, 교과서에서의 왜곡된 표기 등으로 점점 더

있는 위기에 처했다. 노래만 열심히 부른다고 문제가

분쟁의 불을 지폈다. 그리고 지난 8월 이명박 대통령

해결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영토 중 특히

의 방문으로 인해 일본에서도 더욱 강하게 대응하기

독도에 이런 노래가 만들어진 그 근본적인 이유를 다

시작했다.

시 떠올려보아야 할 때이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는 크

지난 8월 10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깜짝' 독도

게 세 가지가 있다. 17세기 중반 독도에 대한 실효적

방문을 했다. 한국 헌정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독도

지배를 확립했다는 것,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 오

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동안의 의도적인 침

키섬으로 정식 편입된 것,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

묵 전략을 깬 이 방문은 바다 건너 일본에도 당연히

도가 한국 영토의 범주에서 제외된 것 등이다.

큰 충격을 주었다. ⓒ울릉군 홈페이지

일본이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해 왔다? 일본은 17세기 중반 돗토리번 어부들이 죽도와 송 도를(각각 당시 울릉도와 독도의 일본식 명칭) 70여 년 간 왕래함으로써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 는 실효적 지배 주장을 한다. 그러나 1696년 1월 일 본의 돗토리번은 독도는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실히 하였으며, 이에 당시 에도 막부는 울릉도 도 해 금지령을 내렸다. 여기에 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도해 금지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독도는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1870년,1877년 등의 일본 공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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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바로 우리 노래“독도는 우리 땅”이다. 이 노래의 제목 대로 독도는 우리 땅이다. 그런데 지금 이 독도를 빼앗길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노래만 열심히 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의 수 많은 영토 중 특히 독도에 이런 노래가 만들어진 그 근본적인 이유를 다시 떠올려보아야 할 때이다.

는‘17세기 말에 독도는 조선령이 됐다’ 고 확인하고

주하고 어업에 종사한 것은 관계서류에 의하여 밝혀지며,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유효하지 못하다.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여 이를 일 본 소속으로 하고 시마네현 소속 은기도사의 소관으로 함 이 무리 없는 건이라 사고하여 내무대신 의안 그대로 각

일제의 제국주의적 욕심에서 시작된 비극

료회의 결정이 성립되었음을 인정한다.”

일본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본의 이러한 독도 강제 편입은 그 근거가 허술하

1905년도의 문서이다. 1905년도의‘사기행각’ 이모

기 짝이 없다. 양국은 이미 1889년 조일양국통어(通

두를 속여 결국 1951년과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漁)규칙 제정을 했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연해에서

에서 비롯된 논란을 낳게 된 것이다.

조업을 하는 일본 어선들은 조선정부에 세금을 내야

일본은 1905년 독도를 무주지로 규정하고 시마네현

했다. 당시 부산영사관 기록에는 울릉도에서 일본으

오키섬으로 정식 편입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1905

로 물건을 수출하는 일본인들은 울릉도감에서 수출세

년 1월 28일자 일본 각료회의의 내용이다.

를 냈다고 나타나 있다. 즉 본도(울릉도)에서 독도로 간 후에 전복 등을 채취하여 울릉도로‘귀항’ 했다는

“별지 내무대신 제안의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심사

사실은 일본이 이미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한 바,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섬에

인정한 것이다. 즉 무주지 선점논리는 성립할 수 없

서 서북으로 85리에 있는 이 무인도는 타국이 이를 점유

는 것이다.

했다고 인정할 형적(形迹)이 없고 지난 1903년 일본인 나

또한 각료회의 당시 일본 내무성 내에서도 이 섬은

카이란 자가 어업용 막사를 만들고, 인부를 데리고 가 엽

대한제국령 우산도라는 의견을 냈었고, 당시 일본의

구를 갖추어서 해려(海驢)잡이에 착수하고, 이번에 영토

수산업자였던 나카이 요사부로 역시 이 섬을 대한제

편입 및 임대를 출원한 바, 이때에 소속 및 섬 이름을 확

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고기잡이 청

정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 섬을 타케시마(竹島)라고 이름

원서를 내려고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해

하고 이제부터는 시마네현 소속 은기도사의 소관으로 하

군성과 외무성이 러일전쟁 수행의 명분으로‘무주지’

려고 하는 데 있다.”

라고 우겨서 이 섬을 결국 일본에 강제 편입하였다. 1905년의 이 회의로 일본이 독도를 불법 편입시킨 사

“이를 심사하니 1903년 이래 나카이란 자가 그 섬에 이

실은 고이즈미 총리 이후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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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독도경비대와 등대가 있는 동도

을 주장할 때 첫째 근거로 들었던‘17세기 중엽 독도

였다. 조선을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해 준다는

영유권 확립’주장과도 모순이다. 만약 일본이 17세

것이 아닌, 그저 그 전까지 중국의 천하질서 아래 속

기부터 독도에 영유권을 확립했다면 1905년에‘무주

해있던 제후국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게 해준 것뿐이

지’ 란 명분을 붙여 재차 자국영토로 편입할 필요가

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 이후 일본이 재

없기 때문이다.

차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 킨 것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독립이 결코 우리가 바란 그 독립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비를 죽인 후

108년 전 상처를 전화위복으로 - 1904년의

에도 일본은 완전히 조선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지

한일의정서와 독도

못했다. 을미사변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 아의 영향 아래에 들어갔고, 1년 후에 돌아와서는 바

마지막으로 1904년의 한일의정서는 일본의 이 주장 을 무력화하는 가장 좋은 근거이다. 한일의정서를 이

로 대한제국을 설립하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실 리를 취하는 정책을 폈다.

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기의 국제정세를 살펴보

이에 일본은 10년 전 갑오개혁을 위해 경복궁을 불

아야 한다. 1905년의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 점거했던 것처럼 1904년 1월에 또 불법으로 궁을

그 전의 국제정세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점령하고 황제와 대신들을 억류했다. 또한 그 후에는

청일전쟁 직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1895

그 동안‘절치부심’ 하며 준비해왔던 러시아와의 전쟁

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에는“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2월 8일에 개시했고, 그러한 와중에 2월 23일 한일의

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독립은 빛 좋은 개살구

정서가 체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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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한일의정서의 체결 배경을 살펴보자. 이 조약

“가쓰라 백작의 소견에 의하면, 한국은 러일전쟁의 직접

은 처음부터 매우 부당한 배경 속에서 체결되었다. 당

원인이기 때문에, 그 전쟁의 논리적 결말로서 한반도 문제

시 러시아와 일본이 이미 긴박한 전운 속에 있음을 인

에 대한 완전한 해결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라 합니다.”

식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 하여, 양국 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먼저 행

“만일 전쟁 후에도 한국을 내버려두면, 한국은 과거의 습

동하였다.

관대로 뚜렷한 대책이 없이 다른 세력과 협정이나 조약을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의 한만(韓滿) 문제가 결국 해결되지 않자 결국 양국은 그해 2월 6일 국교를 단절

맺어서 전쟁 이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국제적 문제를 소생 시킬 것이 분명하다고 (가쓰라는)얘기합니다.”

하고 2월 8일 여순항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 인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시작 다음 날인 2월 9일 일

“그의 개인적인 의견에 의하면, 일본군의 한국 종주권을

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그 날 한양까지 진격했고, 2

학립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동의 없이는 외국과의

월 10일에는 러시아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라

게 단 3일 만에 한반도가 두 강대국의 전장지로 변하

고 하며...”

게 되자 당시 대한제국 정부로서는 도저히 국외중립을 견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압 박 아래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것이다. 다음은 한일의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아예 일본의 일부 로 편입하려는 일본의 속뜻이 보이는 기록이다.

정서의 조약 중 일부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이런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체결 제1조 한·일 양제국은 영원한 친교를 보호, 유지하고

된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일본의 한반도 토지 이용을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해군이 한

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반도의 서쪽 뤼순과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해 있

들을 것.

었으므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의 땅을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사용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러일 전쟁의 결정 적인 순간이었던 쓰시마 해전을 위해 일본 해군이 발 진한 곳은 조선령 진해였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PD 저널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그리 고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전략 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 할 수 있을 것.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의 왕실과 국토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제 1조에 나타나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 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최종 승리한 직후 미국과 체 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일본의 진짜 의도가 전부 드러나 있다. 다음은 당시 두 사람의 밀담록 중 일부 이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특파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과 함께 경성에 있는 일본공사관에서 기념촬영을 가졌다.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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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이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강제 편

고 말았다. 2차 대전 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차

입한 독도를 현재까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

초안에서는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가 한국 영

본의 행동은 카이로 선언에서 합의된 사항에 직접적

토라고 명시되어있었다.

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다음은 카이로 선언 중 일부 “일본은 한국(한반도)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리앙쿠르

이다.

락스(독도, 다케시마)를 포함하여 한국 연안의 모든 보다 “또한 일본국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by violence

작은 섬에 대한 권리 및 권원을 포기한다."

and greed) 약탈한 다른 일절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그러나 1952년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영

(expelled) 것이다.”

토" 부분에 나오는 핵심 조항을 살펴보면 독도는 한국령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은 일본이‘폭력과 탐욕에

도서 목록에서 제외되어있다.

의하여’차지한 땅을 모두 원래 소유하고 있던 국가 에 돌려주는 것에 합의하였다. 카이로 선언의 표현을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제주도, 거문도, 울릉

빌리자면, 한일의정서야 말로 폭력을 통해 탐욕을 채

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관한 모든 권리와 권원과 청구권을

우려는 당시 일본을 위한 일방적인 조약이었다. 그러

포기한다.”

므로 1905년의 독도 강제 편입은 1904년 한일 의정 서에 의거해 빼앗긴 것이었다. 카이로 선언에 의거하

이것을 근거로 일본은 독도가 자국의 영토라 주장

면 원칙적으로 전(戰) 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

하면서, 동시에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독도를 영유

도가 한국 땅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한 증거가 있는지를 묻는다. 한국 측은 이 조약에서 명시되지 않은 3,000 개의 섬 중 하나가 독도라고 주 장하고 있으나, 아직 해결되지 못했다.

47년 후,‘사실’ 이 된‘사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위에 인용된 샌프란시스코 평 그런데 이 각료회의가 엉뚱한 곳에‘근거’ 로 쓰이

화조약의 문안은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중앙포토

동도 접안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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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1차부터 5차의 초안에는 독도의 이름이 한국

거문도, 제주도, 울릉도와 달리, 당시 일본은 독도

령 도서 목록에 있었다. 이것이 빠지게 된 것이 1949

에 관해서만은 억압적인 내용의 1905년 1월의 각

년 12월 29일자 제6차 초안부터다. 당시 일본에 있던

료회의 결정문을 공식문서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미국의 일본 전문가 윌리엄 시볼트의 의견에서 비롯

다. 그런데 그 문서가 위에서 인용한 러스크의 서한

되었다.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던 그는 1949년 11월

‘1905년 문서’ 라는 표현으로 일본 측에 유리한 근거

14일과 19일에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였던 버터워스

로 쓰이게 된 것이다.

에게 전보와 공식문서를 보내 독도문제의 재고를 요 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6차와 7차의 초안에서는 빠지게 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한 논의가 한창일 당시 한 국은 제6차, 7차 초안에 반발하여 적극적의로 항의한

그러나 그 이후 한국뿐만 아니라, 이것이 후에 영토

결과 영국이 작성한 제8차 초안에는 독도를 다시 한

분쟁을 야기할 것이라는 영국과 뉴질랜드의 반발로

국령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8차 초안이

제8차 초안에는 다시 한국령으로 속하였다가 다시 9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일본의 1905년

차, 10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아예 조약에서 빠져버렸

각료회의 결정문을 반박할 만한 증거를 끝내 찾지 못

다. 제10차 초안에 대한 한국 측의 반대 청원이 있었

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두 나라의 근거를 객관

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종안이 확정되기

적으로 비교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수혜국이라

직전 1951년 8월 10일자 딘 러스크가 주미 한국대사

할지라도 조약의 내용을 한국에게만 유리하게 할 수

관에 보낸 서신에는 미국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국과 뉴질랜드의 의 견은 한국을 더 존중하는 방향이었고, 그 결과 영미

“독도섬에 관련하여... 우리의 정보에 따르면, 정상적인

양국이 공동 초안한 제9차, 10차 초안의 내용은 이전

형태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이 바위 형성물이 한국의

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작성되었다. 조약문에 일본

일부로 취급된 적은 전혀 없으며, 대략 1905년으로부터

의 영역이 명시되는 대신,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역

지금까지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지청 관할 하에 있었습니

만 명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에 이양

다. 한국이 그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적은 없는 것으로

해야 할 그 도서 목록에서 독도의 이름은 없어진 것

보입니다(appear).”

이 지금까지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핵심 이유이다.

향후 대응? 총대보다 사료로 그 동안 한국은 독도에 대하여 실효적 지배를 강화 하는 형태로 정책의 방향을 정해왔고, 이번 역시 마 찬가지이다. 언론에 매번 등장하는 실효적 지배란 정 확히 무슨 뜻일까? 실효적 지배란 특정 정권이 특정 영토를 실제로 통치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효적 지배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거나 수비대를 강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할 필요는 없다. 일본이 독도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게 곤란한 한, 이 런 대응은 독도를 분쟁지역화 할 우려가 커진다. 우 독도를 분쟁 지역(contested islands)으로 보도한 "The Telegraph"의 기사

리가 역사적으로 독도를 실효적 지배 해왔음을 증명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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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주장하

배가 판결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은 변하지 않았

는 이유는, 그들이 이양해야 할 도서 목록에 독도가

다. 2005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서로 영유권

없기 때문이다. 독도가 한국 땅이 아니라면 일본 땅

을 주장한 시파단·리기탄 섬 분쟁의 판결 역시 꾸준

이라는 단순한 논리이다.

한 입법, 사법, 행정권을 행사해 온 말레이시아의 승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활동은 독

리로 끝났다.

도에 대해 잘 모르는 제 3국가들에게 영향력을 끼쳐

우리가 특히 본받아야 하는 판례는 영국과 프랑스

그 들로 하여금 왼쪽의 사진처럼 독도를 분쟁지역으

의 망키에·에크르오 제도 분쟁이다. 프랑스는 이곳

로 인식하게 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텔레그라프는

이 지리적으로 자국 영토와 가깝다는 점만을 믿은 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당시 보도하면서 독도

실효적 지배 입증을 소홀히 했다. 이에 결국 실효적

를‘일본의 섬’ 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후 수정

지배 증거를 많이 확보한 영국에게 밀려 판결에서 패

되었으나 사진에서와 같이 한국령이 아닌 분쟁 지역

하였다.

을 뜻하는 'contested islands'로 표현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판결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 각하는 것은 어느 측이 증거자료를 더 많이 제출했 느냐이다.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관한 자료 및 문 서, 군대나 경찰 파견 기록 및 여러 가지 정부의 권

독도 문제란 없다

위 행사 기록 등을 통해 실효적 지배를 해왔음을 많 독도는 분쟁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향후 국제사법재

이 증명하는 쪽이 판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원래부

판소에 갈 일은 없다. 그러나 독도는 예전부터 우리

터‘우리 땅’ 이라는‘믿음’아래 실효적 지배 사실을

땅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우리 땅이라는 생각은 매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판결에서 불리하다. 말레

우 순진한 생각이다. 향후 이 독도 문제가 어떠한 방

이시아와 싱가포르의 페드라, 브랑카 섬의 분쟁 역시

향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

이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말레이시아는 이 섬이 자국

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를 해야 한다. 즉, 국제사법

의 고유 영토라는 점을 강조한 반면 싱가포르는 등대

재판소에서 독도 문제가 논의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및 군사 통신 시설을 설치했다는 점을 부각하였고 결

두어, 완벽하게 대비는 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국 싱가포르의 승리로 판결은 끝났다.

를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 정부가 독도에 지속적

진짜 독도를 대한민국 땅으로 소유하려면 역사를

인 행정권과 사법권을 꾸준히 행사해왔음을 입증하는

통해 승리하는 수밖에 없다. 노래를 부른다고 통일이

자료들을 많이 모아야 한다.

오지 않았듯, 노래를 부른다고 일본이 잠잠해지지는

국제법에 근거한 영토 분쟁의 판결에 있어 가장 중

않는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약

요한 것은 분쟁 당사국들 중 어떤 국가가 실효적 지

문을 작성하였던 주요 인물들이 간과한 점이나 논리

배권을 행사했느냐이다. 국제적으로 여러 판례가 있

적 오류를 전부 지적하고, 당시의 상황을 전부 고려

었다. 대표적인 것이 1933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사

한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해야 한다. 또한 한국이 독

이의 동부 그린란드 문제이다. 현 국제사법재판소의

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해왔음을 확고하게 해주는 역사

전신인 당시 상설국제사법재판소는 주권 행사의 의

적 증거를 더욱 확보해야 한다. 사료는 죽지 않는다.

사와 의지를 강조했다. 이에 1721년부터 200년간 그

사료가 불변의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린란드의 각종 산업권을 관할했던 점을 주권 행사의

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사료는 반드시 관련된 여

근거로 인정하여 덴마크의 승리로 끝났다. 또한 미국

러 가지 사료와 함께 존재한다. 오히려 잘 변하지 않

과 네덜란드 사이의 팔머스섬 분쟁에서도 동인도 회

는 것은 정치 현실이다. 독도에 대한 변함없는 일본

사를 통해 지속적인 실효 지배를 했음을 인정받은 네

의 도전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재발견이 필요

덜란드가 판결에서 승리했다. 상설국제사법재판소가

해진다. 이제 이 작업을 해야 할 때이다. 유명 연예인

현재의 국제사법 재판소로 바뀐 이후에도 실효적 지

의 독도 홍보, 대통령의 방문 등을 통해 우리는 전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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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독도경비대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민의 독도에 대한 사랑을 상기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제는 조상들을 지원군으로 삼아 반격해야 한다. 조약 과 문서 몇 장이 비록 얇은 종이라 할지라도, 독도를 진정 한국 땅으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도 문제의 본질은 주권회복이다. 과거 일제 강점기기 시 절 겪었던 아픈 역사를 극복하느냐의 문제와 독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때의 상처를 회복하 는 차원에서도 독도문제는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는, 우리가 독도에 대해 알아야 한다. 독도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가야 독도 문제는 없어질 것이다.

김푸름누리 (서강대 정치외교) nurikim91@naver.com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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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법재판소, 어떤 곳일까? 요즘 일본이 우리땅 독도를 놓고 ICJ에 제소하겠다며 시끄럽게 굴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는 ICJ에 독도 문제를 회부할 이유가 손톱만큼 도 없지만, 대체 ICJ가 어떤 곳이길래 일본이 저렇게 생떼를 부리는 걸까? 한 번 ICJ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IJC 공식 홈페이지

ICJ와 재판관들 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는 1946년 유 엔 산하 사법 기구로서 창설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 에 위치해 있으며, 15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 다. 15명의 재판관은 원칙적으로 모두 각기 다른 나 라의 사람이어야 한다. 재판관의 임기는 9년이고 연 임할 수 있다. 재판관은 3년에 한번 5명씩 선거에 의 해 교체되는데, 유엔총회와 안보리가 각각 따로 투표 를 진행해 총회와 안보리 모두에서 절대다수표를 얻 은 재판관 후보자가 재판관으로 당선된다. 재판관들 중 현재 일본인, 중국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 재판소장은 슬로바키아인이 역임하고 있다. 재판소 장의 임기는 3년이며 재선될 수 있다.

ICJ 일본인 재판관 오와다 히사시

재판이 이루어지려면 최소 9명 이상의 재판관이 출 석해야 하며 출석한 재판관 과반수의 결정에 의해 판

려면 당사국들이 그 사안에 대해 재판소가 관할하는

결이 내려진다. 재판에 출석하는 재판관의 국적으로

것에 대해 동의 해야 한다. 즉 재판소가 모든 당사국

인해 발생할 형평성 문제에 대비한 규정도 있다. 그

의 동의 없이는 사안에 대해서 심리하고, 판결을 내

규정에 따르면, 만에 하나 우리나라가 ICJ행에 동의

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당사국이 원치

해서 독도 문제가 재판에 회부된다면 재판소 내에 일

않는데도 재판소가 특정 사안에 대해서 관할하게 되

본인 재판관이 1인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게도 해당

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분쟁 관련 당사국들

재판에 출석할 임시 재판관을 선정할 수 있다.

이 사전에 ICJ의 강제관할권을 인정한 국가들일 때 발생하는 경우다. 다시 말해 어떤 분쟁에 두 개의 국 가가 관련돼있고 두 국가 모두 사전에 ICJ의 강제관

강제관할권

할권을 인정한 국가들이라면, 어느 한 쪽이 원하지 기본적으로 어떠한 분쟁에 대해서 재판이 이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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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않더라도 한 국가의 일방적인 제소에 의해서 ICJ에서

Prism


ⓒICJ공식 홈페이지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1 년 유엔에 가입할 때 ICJ의 강제관할권을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일방적인 제소만으로는 독도 문제가 ICJ의 관할로 넘어가지 않는다.

재판, 그리고 판결 ICJ는 기본적으로 국가 간 분쟁만 관할한다. 따라 서 기업이나 개인, 국제기구 등은 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가부동수인 경우에는

ICJ의 공식문양

재판소장이 결정투표권을 가지게 된다. 사안에 대해 판결이 내려진다면 당사국은 상소할 수 없다. 한 번 의 재판으로 최종적인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다. 다

해서 ICJ는 싱가포르의 손을 들어주었다. 해당 섬에

만, 판결이 나온 이후에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대해서 등대의 운영이나 주민의 활동 등에 관한 법률

결정적인 증거가 될 만한 사실을 새로이 찾아 냈을 경

을 제정하고 시행했다는 점, 군사시설을 공개적으로

우에는 재심을 요청할 수 있다.

설치한 점, 싱가포르의 이런 일련의 행정·입법 조치

판결이 내려졌을 때 그 판결은 유엔 헌장에 의거 해 구속력을 지닌다. 만약 어떤 국가가 판결에 따르

에 대해 말레이시아의 항의가 없거나 상당히 늦게 이 루어졌다는 점 등이 주효했다.

지 않는다면 상대 국가가 유엔 안보리에 제소할 수 있 고, 안보리는 해당 국가에 대해 권고하거나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독도 문제와 ICJ ICJ가 독도 문제를 관할하게 된다면 현실적으로 우

ICJ에 회부됐던 영토분쟁의 사례

리 나라는 불리하다. ICJ에 일본인이 정식 재판관으 로 자리잡고 있으며, 일본이 ICJ운영비의 상당 부분

그렇다면 ICJ가 영토분쟁을 해결한 사례에는 어 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2005년에 판결이 난 리기탄

을 부담하고 있어 일본이 ICJ에 대해 갖는 영향력이 우리나라의 영향력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섬·시파탄 섬 분쟁이 있다. 영유권 분쟁은 1979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정부는 ICJ로 독

말레이시아가 정부가 발행한 지도에 리가탄 섬과 시

도 문제를 들고 갈 아무런 이유도, 의무도 없다. 우리

파탄 섬이 자국 영토로 표기된 것을 인도네시아가 문

나라에게는 영토 분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

제 삼으면서 시작되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오다 결국

라 대선후보들의 공약에 영토문제와 관련된 사항이

2002년 ICJ의 판결에 의해 해소되었고, 두 섬은 말레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본의 입장에서 봤을

이시아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때 판결에 결정적인

때나 독도가 분쟁의 대상이지, 우리나라의 입장에선

영향을 미친 요인은 두 섬에 대해 말레이시아가 취했

독도는 분쟁 대상이 아니다. 백 번 양보해서 분쟁 대

던 입법·행정 조치 등이었다.

상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우리나라에겐 이 문제를 ICJ

또 하나의 사례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사이에서

의 관할로 넘겨야 할 의무가 없다.

발생한 페드라 브랑카 섬 분쟁이다. 이 역시 마찬가 지로 말레이시아 정부가 지도에 해당 섬을 자국 영토 로 표시하면서부터 분쟁이 촉발되었다. 이 사건에 대

이근호 (연세대 사회과학계열) newroot2@hanmail.net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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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의 /창 지갑에서 꺼낸 근대인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

화폐에 실린 인물은 그 나라가 지향하는 미래와 그 방향을 알게 한다. 이 코너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화폐에 실린 인물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 은 수백 년 동안 우리와 매우 복잡한 관계를 이어왔

미 이 두 사람은 어떠한 업적을 남겼으며, 그것이 일 본인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다. 한 때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일 제 강점기라는 그 억압의 시기 동안 열도는 말 그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개화기에 계몽사상가,

로 한반도의 원수였다. 제국주의라는 그‘영광스러운

교육가, 및 저술가로 폭넓게 활동했다. 조선 개화기

폭력’ 의 이름 아래에서, 하나의 인물은 영웅과 원수

의 사상가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등의 스승

두 가지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

이자 한국 개화파에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일

이 바로 일본의 화폐에 실렸던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

본에서는‘근대화의 아버지’ 로 칭송 받지만, 한국과

토 히로부미이다. 이 두 사람은 2012년 현재까지도

중국에서는‘탈아입구론’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일본이 세계에서 강대국의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첫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갑

발판을 닦은 인물들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까지

신정변 이후인 1885년 3월 16일자 일본의《시사신

활동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토 히로부

보》 의 사설을 통해 일본의 서구문명화와‘탈아’ (脫

후쿠자와 유키치(1835 ~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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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이토 히로부미 (1841 ~ 1909)

亞)를 부르짖으며,“중국과 조선을 접수해야 한다” 고

다수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주장하였고, 그해 8월 13일자에“조선 인민을 위해서

그는 일본 제국의 정치가이다. 어렸을 적 런던에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

영어 공부와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도 했다.

넓힌 그는, 본래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 이론자였으나 유학을 하며 서구의 압도적인 힘을 직

그는 개인과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문

접 보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메이지

명의 도입이 급선무라고 하며, 영국의 입헌정체의 실

유신 이후에 이와쿠라 사절단을 거쳐 정부의 요직을

현을 주장하였다. 그는 민권, 인권보다 국권, 국법을

두루 맡았으며, 또한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

우선하였다. 또한《서양사정》 과《문명론의 개략》 등

기도 하였다. 제1대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의 저서를 발표하여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이 중화사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지냈으나 1909년 10월 26일 하

상, 유교정신에서 탈피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

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여 사망했다.

는 데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였다. 한일 병합과 관련해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 2차 대전 후 일본은 지폐에 인쇄될 인물을‘민주주

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핵심 인물이며, 일본 국

의에 공헌한 일본인’ 로 정했기 때문에, 자유 민권운

민의 시각에는 일본의 근대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동을 반대했던 그가 지폐에 실려서는 안 된다는 의견

중요한 근대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이 높이 평가 받아

이토 히로부미는 등장하는 1963년부터 1984년 까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은행권 1만 엔 권에 쓰

지 21년 동안 1천 엔 권에 등장하였으나, 남북한의

였다. 이후 화폐가 한번 교체된 2004년에도 역시 1만

강력한 반발로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엔 권에 초상화가 쓰였는데, 그래서‘유키치’ 라는 말 은 1만 엔 권의 대명사로 쓰인다.

김푸름누리 (서강대 정치외교) nurikim91@naver.com

다음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함께 일본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이다. 한국 역 사에선 그리 반갑지 않은 인물이지만, 일본에서는 대

지갑에서 꺼낸 근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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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비전인가

5·16, 자주와 자립의 정치 비전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1962);『국가와 혁명과 나』(1963)

박정희 시대 18년은 험악했다. 험악한 시대의 역사

른 생존 경쟁, 그리고 후진 사회 국가의 개혁 의욕 등

관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가난이

은 마치 역사의 생필품처럼 혁명을 불러들였다.”물

지겨운 식민지 청년이었으며, 기회의 땅에서 출세하

론 동시에 많은 사과가 떨어졌다고 해서 꼭 그 사과

려고 분투한 만주 군인이었고, 이 모두를 이룩하고자

가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박정희에게 5·16

내선일체를 내면화한 황국신민이었다.

은“민족 사회의 개혁을 이룩” 하기 위한“비상수단”

5·16 쿠데타는 1960년대의 정치 행위 가운데 가

으로서 국제 사회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근대화 혁명

장 눈에 띄게 비정상적이었지만 배후의 생각까지 그

의 일부였다. 1961년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일본을

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박정희 세계관에 살벌한

방문해 말했다.“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

정체성이 중층적으로 쌓여 있는 것처럼 조선에 대한

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인데, 그때

애증은 식민지 시대에 보편적이었다. 지금도 박정희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

의 가치관에 동조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시

박정희는 근대 혁명 중에서도“후진 극복의 자각(自

대는 여전히 비정상적인 정체성의 혼재가 정상화된

覺) 혁명” 으로서 신해혁명, 메이지유신, 터키 혁명,

시대다.

이집트 혁명을 든다. 이 혁명은 권력자의 사적 안위

박정희가 바라본 세계를 복원하는 것은 쿠데타 당

가 아니라“한 국가, 한 민족 사회의 발전을 위한 혁

시 정황을 다시 고찰하는 일뿐 아니라, 박정희의 계

명”이라고 한다. 신해혁명으로“중국의 국부(國父)

승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키메라 같은 인식과 감각의

손일선” 은“중국 대륙에 새 태양” 으로 솟았다. 메이

기원이 어디까지 소급되는지를 판단하는 작업이기도

지 유신은“천황 절대 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 이

하다.

라는 사상적 기저를 두고“밖에서 밀려오는 외국의 사상을 일본화하는 데 성공하고” “외세 침입을 방어” 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두‘혁명’ 은 타율적이고 사 대주의적이라고 박정희가 묘사한 조선사의 몰락과 대

세계는 반란으로 진통을 겪었다

조를 이룬다. 군부 쿠데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과처럼 보인

박정희는 근동의 모범적‘혁명’의 사례로는 터키

다. 그런데 20세기에 사과는 전세계 각지에서 우수수

혁명과 이집트 혁명을 들고 있는데, 모두 군인 장

떨어졌다.“과학의 발달이 뒷받침하는 국제 연관성과

교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쿠데타로서 서방에 대항

완전히 개방된 자유 평등의 사조, 인구의 팽창에 따

해 국가와 민족을 자주적으로 일으킨 성격이 강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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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다. 몰락한 조선의 역사를 부흥하기 위한 반란으로서

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어른거린다.‘사대교린’ 의자

5·16은 이 두 개의 장교단 쿠데타를 계승했다고 자

율적 외교를‘사대주의’ 라는 타율적 외교로 왜곡되게

임한다.

이해하는 태도는 일제시대에 습득한 식민사관 때문이

다만 박정희는 중남미에서 일어난 혁명만큼은“민

다. 민족이 나약해져 국제정치적 비극을 맞은 원인을

주주의, 공화 체제란 허울 좋은 무대에서 전근대적인

전통적 상무정신의 붕괴와 유교 전통의 우세에서 찾

권력 쟁탈에 혈안” 이 되어“대지주와 군인[이] 서로

는 모습에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도 보인다.

공모하여 권력을 방위하고 점령하는”과정이라고 말

박정희에 따르면 외세가“활과 창 대신에 총을 가

한다. 중남미 혁명은“혁명의 명예를 크게 상처 주는

지고 있는데, 우리들은 이 한반도라는 구석진 모퉁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5·16을 중남미의 쿠데

에서 세계가 바뀌는 것을 모르고 맨 나중까지 상투만

타와 비교하려는 정치학의 논의들에 대해서 5·16의

틀고 온돌방에 들어앉아” 서“외부의 세력에는 너무나

지지세력은 대답해야 할 것이다.

눈이 어두웠고,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도 몸을 사리는 근성” 을 가졌다. 19세기 서세동점 속에서 조선은 몰 락했다. 주체정신이 부족한 조선의 외교는 해방 이후에도

1961년,“자주성을 옹호하자”

여전했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부가 미국 자본에 의존 박정희에게 한국사는 사대주의와 분열로 점철된 굴

했으나 원조도 소비재에 치중했으며, 재건에 본격적

종과 이기성의 역사였다.“사대주의적 대외 정책” 은

으로 착수하지 못한 민족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

“조선시대의 그릇된 유산” 이다. 조선은“겨레의 현실

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4·19 혁명으로 수립된 민주

이나 전통 속에서 스스로”가치 판단을 내리지 못하

당 정권은 친일과 친미라는 외세 의존적인 모습을 보

고 중국의 행위 규준을 모방하려 들었다.“고려 이후

였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고 지나치게 유교 등 외국

박정희는 주체정신, 자주외교, 자주경제를 이야기

에서 문화를 들여오는 데만 급급” 했던 탓이다. 그의

했다. 그러면서 그는 역설적으로 자주와 자립을 외

글에는 반도적 타율성과 사대주의적 인습을 운운하

친 동시대의 김일성을 닮아갔다. 그렇지만 김일성처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인터넷기념관

꿈인가 비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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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영토에서 외국군대를 쫓아내는 식의‘주체’ 와‘자

평화선, 어로 협정” 과“재산청구권” , 즉“일본인들이

주’ 는 꿈도 꾸지 못했다. 박정희의‘자주’ 는 동맹과

제멋대로 앗아간 그 재산을 돌려달라는”요구에 대해

원조에 대한 의존을 배제하지 못했다. 그는 미국도

서도“우리가 청구하는 최소한의 조건마저도 회피” 하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싫은 소리를 마다하지

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않았다. 그 빚을 갚으려거든 한반도 방위가 자유 진

얄궂게도 이러한‘자주성’ 이 후일 한일회담 정국에

영의 방위에도 중요함을 알고 한국의 요청에 미국이

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1964년 6·3 시위 세력은 회

충분히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이승만

담의‘매국적’ 이고‘친일적’ 인 성격을 규탄했다. 회

정부와 장면 정부의 대미 종속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

담은‘애국적’ 이고‘자주적’ 인 대일관을 피력한 인

이려는 듯, 미국이 한국에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해

물의 작품이었다.

줄 경우“이왕에 줄 바에야 우리의 뜻에 맞도록” “달 콤한 사랑보다는 한 장의 벽돌” 에 해당하는 실질적 원조를“과감하고도 대폭적” 으로 해달라고 말하고 있

서구 자유민주주의는 시기상조?

다. 기시 노부스케가 그랬듯 박정희는 미국을 증오하 는 마음이 가슴 깊이 박혀 있었지만, 이를 드러내기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도 5·16은 자유민주주의를

까지는 카터의 냉담한 바람을 기다려야만 했다.

한국에 무리하게 도입해서 나타난‘병폐’ 를‘시정’

박정희는 일본에 대해서도“완전한 자유세계의 일

하는 지점으로 주장된다.“민족적 자립성이나 민족

원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당면한 내외 정세에 한

적 주체성이 이룩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

국에 협조만 한다면, 불유쾌한 과거지사인 역사의 상

나 사상의‘기성복’ 만을 입으려는 경향” 에서“ ‘구호

처는 재론하지 않겠다” 면서도“해방 이후 단 한 마디

물자’ 식의 민주주의 수입” 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박

도 그러한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사과가 없었다는 것

정희는 말한다.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무조건적 수용

은 유감” 이라고 지적했다.“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

역시 사대주의라는 논리다.“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본질적인 조건과 바탕이 없이 서양식 ⓒe-영상역사관

의 민주주의의 본을 따른다고 해서 상투를 꽂고 있던 우리네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조선은 사색당쟁 때문에 자유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토양이 갖춰지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는 전통적 지배 형태로서“카리스마적인 1인 정치” 이자“독재” 였고, 장면 정부는“제도화되지 못한 개인 중심의 정당, 이 를 테면 끼리끼리의 당” 이었기에“민주 정치를 실패 로 돌아가게 했다.”그에게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할 토양이 아니었다. 그의 해답은“민주주의의 한국화”였다. 박정희는

“우리 사회와 정치 형편에 알맞은 민주주의” 로서“행 정적 민주주의” 를 제시하며,“과거의 부패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다스려 나가는 힘을 길러 올바른 사회를 이룩” 하려면“임시적인 정 책으로서 행정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없다고 한다. 따라서“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부 면에 있어서 지난날에 나라 살림살이를 맡았던 정치 권력의 조직적인 부정과 부패” 를 척결하기 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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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감하고도 과단성 있는 일대 수술” 이 필요하다. 수술

는 엿볼 수 있다. 물론 지난 18년이 영웅적인 시대였

의 결과는 참혹한 독재의 18년 세월이었다.

는지는 이 주장과 별개의 문제다.

민족성을 개조하라, 지도자를 따르라

5·16이 남긴 21세기의 과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성의 개조와 위

5·16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이다. 1961년 군사 쿠

대한 지도자의 출현은 불가피하다. 이것이 박정희가

데타 정신은 계승되어야 할 것으로서가 아니라 계승

제시한 또 하나의 생각이었다.

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 곁에 있다.

박정희는 전후 서독 경제 부흥을 예찬하면서 그 요

박정희는 역사와 경제, 정치, 특히 국제정치에 꽤

인으로 가장 처음“민족의 일치단결” 을 지적한다. 그

관심이 많은 군인이었다. 박정희는 조선 민족-만주

에 따르면‘라인 강의 기적’ 은“개인주의 사회가 창

군인-제국 신민이라는 삼중의 정체성 밑에서 자주성

조한 기적이 아니고, 전체 민족이 조국의 한 목표를

을 옹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며, 민족을 일체

향하여 자발적으로 혼연일치(渾然一致)되어 이룩한,

화하는 20세기 후발국가형 근대화를 생각했다. 이 시

말하자면 민족 역량이 총 집약 되어 이룩한 것” 이다.

각은 일제 시대를 살아 지나온 동시대인과 일부 공유

그는 서독의 부흥은“국민성” 과“민족성의 우수성”

가능했다. 후진성은 열등한 민족성에서 비롯했으며,

에 기인했으며 5·16 군사정변의 목적 역시 겨레의

망국의 비극을 극복하려면 분열과 혼란의 민주주의가

단합과 주체적 실천의 민족성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아니라 쿠데타로 불사하는 강한 지도자의 영도와 산

고 봤다.

업화 계획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1960년대의 꽤 많은

박정희는 5·16 주체 세력이 그러한 영웅적 지도자

유권자들도 공감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3년 대선

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민주주의의

에서 윤보선을 16만 표 차이로 이겼지만 1967년에는

한국화” 라는 당면 과제를 위해서도“농민 대중을 깨

그를 116만 표 차이로 이겼다.

우치고 길러 내며 새로운 지식인이나 혁신적인 인텔 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적인 지도 세력을 길러야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는 5·16의

할 것” 이라면서“한국의 근대화를 도맡을 사람, 다시

비전이란 무엇인가? 만주와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식

말하면 한국의 민주 혁명을 도맡을 주인공을 찾아서

민지 백성이 만들어낸 이 중층적 비전의 현재적 의미

길러내야 할 것” 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근본적인

는 무엇인가? 5·16은 시대가 요구하는 미래상을 어

경제 개혁이나 사회 혁명” 을 이룰 영웅이 필요하다는

떤 역사관으로 재정의 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것이다. 성장의 환상을 견지하면서 복지를 화두로 올

박정희는“썩은 정신과 나라 살림을 바로잡을 수 있

려놓은 시대이므로 이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박정희

는 힘 있고도 새로운 사회의 어떤 힘이 살아 있다고

의 가장 가까운 후계자는 언젠가, 민생 과제가 많은

하면, 이와 같이 뒤떨어진 나라의 부패와 부정을 바

데“계속 5·16을 가지고 역사논쟁을 하느냐” 며 피

로잡고 공산 세력을 막아낼 수 있는 세력은 그 나라

로감을 표시한 바 있다. 우리가 민생 과제를 진지하

의 군인이며 군의 장교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 말

게 실천하려는 과정에 있다면 분명 5·16은 계속 논

하면서 5·16 주체 세력이야말로 근대화를 주도해야

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논쟁은 아마 혁명만큼이나

할 적임자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경직된 구조

불가피할 것이다.

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이고 혁신적인 내부 행 위자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더해 국가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영웅’ 의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등장을 염원했던 대한제국 시기 담론의 한 끝을 우리

intransigere@gmail.com

꿈인가 비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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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기근, 전쟁의 나라, 소말리아 ‘아프리카의 뿔’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얼마 전 제미니호의 한국인 선원 4명이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지 500일이 지나도록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는 사실이 <시사IN>, <추적60분> 등의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왜 소말리아 해적인가’. 2011년 4월 한국 해 군이 삼호쥬얼리호 구출을 위해 아덴 만에서 여명 작전을 펼쳤을 때에도, 지금도, 이 질문에 대답은커녕 의문 을 제기하는 매체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질문은 국제 사회가 소말리아 해적을 어떻게 퇴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실패 국가’소말리아에 대한 해결책과도 연관되어 있다.

번성했던 해상 상업 도시,

계속되었다. 1969년에는 시아드 바레의 군부 쿠데타

제국주의와 냉전의 희생양이 되다

가 일어났고 그들은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 사회주의 이념을 실행했다기보다는 소련에 군사적으

소말리아 지역은 예전에는 상업으로 꽤 번성한 곳

로 의존할 뿐이었다. 1977년 바레 정권은 에티오피

이었다. 고대 페니키아 시대부터 이 지역은 아덴 만

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 때 그간 우방이

과 인도양 바다를 낀 지리적 이점 덕분에 무역 및 교

었던 소련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면서 소말리아는 미

역의 중계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이

국에 의존하게 된다. 미국 역시 냉전 구도 하에서 중

곳에도 어김없이 제국주의의 손길이 뻗친다. 1896년

동, 동아프리카 지역에서의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다로드 부족 출신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이 데르비시

위해 소말리아를 중요한 기지로 삼는다. 이후 미국과

라는 나라를 세워 이 지역을 식민지화 하려는 영국,

이탈리아 등 서방 국가들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군사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등에 대항하지만, 1920년 영

적 지원을 받지만, 바레 군부 정권은 자신들의 배를

국의 폭격에 괴멸한다. 1941년에 영국이 이탈리아령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 국가 발전을 위한 제

소말리아까지 모두 차지하여 북부는 보호령으로 두

대로 된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고, 남부는 신탁통치를 한다.

결국 1991년 바레 정권이 붕괴하고 내전이 발발한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만 정치적 혼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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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다. 이후 군벌들 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면서 지금

Prism


ⓒ『해적국가: 소말리아 어부들은 어떻게 해적이 되었나』

ⓒThe perspec0tivist

는 중부 푼틀란드가 독립을 선언했다. 이들을 제외한 지역인 소말리아 남부에서는 2006년부터 이슬람 근 본주의 무장조직인‘알 샤바브’ 가 활동 중으로, 전쟁 과 혼란이 가장 극심한 상태이다. 남부 소말리아에서 는 2004년 세계 여러 나라 및 UN의 지원 아래 과도 연방 정부가 구성되고 셰이크 샤리프 아흐메드가 대 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과도 정부는 수도 모가디슈를 통제할 힘조차 없었다. 소말릴란드와 푼틀란드는 남 부에 비해 안정된 편이지만 씨족들 간 대립과 부패는 여전히 심각하고, 보통 우리가 말하는‘소말리아 해 적들’ 은 대체로 푼틀란드 출신이다. 2012년 9월, 소말리아는 과도 정부를 대신해 연방 의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다. 유니세 프 등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회 활동가 하산 셰이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소말리아 지역은 국토의 모양때문에‘아 프리카의 뿔’이라 불린다.

크 모하무드가 무능하고 부패했던 전 대통령을 누르 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현재 우간다를 중 심으로 한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과 에티오피아,

까지도 소말리아에는 혼란이 계속 되고 있다. 특히

케냐에서 파견된 군대들의 도움으로 소말리아 정부군

냉전 시대 소련과 미국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은 한 때 수도 모가디슈까지 수중에 넣었던 알 샤바

이 지역의 문제에 개입했던 것은 내전이 격렬해진 한

브 세력을 퇴치 중이다. 9월말, 연합 군대는 알 샤바

가지 원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해 관계에 따라 특

브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키스마유를 공격하여 알 샤

정 부족 혹은 정부를 지원하기도 한 데다 그 결과 무

바브를 이 지역에서 축출함으로써 그들에게 큰 타격

기 유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전이

을 입혔으나, 이들의 반정부 활동이 완전히 종식되지

심각해지자 1992년 유엔은 소말리아에 대한 무기 금

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 조치를 내렸지만, 이 조치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중동, 아시아,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아덴 만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19세기

소말리아 해적, 해안경비대에서 본격적인 비즈니스로

이전까지 소말리아 지역은 그런대로 괜찮은 발전 상 황을 보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과 그 이후의 혼

이러한 중앙 정치의 혼란을 배경으로, 소말리아 앞

란, 군부 독재, 냉전 등을 거치면서 소말리아는 세계

바다로 세계 각국의 트롤선들이 몰려와 불법으로 어

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 실패 국가의 전형

업활동을 했고 그 결과 소말리아 해안의 어획량은 심

이 되었다.

각하게 줄어들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내전이 시작 된 이후, 소말리아 해안은 유럽 기업들에 의해 유독 성 폐기물 투기 장소로 이용되었다. 유럽에서는 1톤

실패국가 소말리아의 현재

에 250달러 정도인 폐기물 처리 비용이 소말리아에 서는 2.5달러인데다, 우라늄 방사성 폐기물이나 납,

현재 소말리아는 사실상 세 구역으로 나눠진 상태

카드뮴, 수은 같은 중금속 등 무엇이든 버릴 수 있기

이다. 아직 국제 사회의 정식 승인은 전혀 받지 못했

때문이다. 이 모든 불법적인 활동들이 가능했던 것은

지만, 1991년에는 북부의 소말릴란드가, 1998년에

소말리아의 무정부 상태 때문이었지만, 이로 인한 피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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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

해는 고스란히 어부들의 몫이었다. 분노한 소말리아 어민들은 직접 총을 들고 침략자들로부터 자신들의 바다를 지키고자 나섰다. 이것이‘소말리아 해적’ 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소말리아 해적들이‘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 한 어부들’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 이다. 이제 해적들은 자금을 지원 받으며 조직적으로 활동하는‘중무장 범죄조직’ 이 되었다. 바다의 오합 지졸 수준이었던 이들이 단기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말리아 내, 외부의 어떤 세력들의 영 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해적들 뒤에는 이들을 조정하는 자본가와 납치 활동을 묵인하는 정

소말리아의 새 대통령 하산 셰이크 모하무드

부나 부족 지도자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외세의 착취 에 대한 피해의식,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일확천금을

있는 해적 본부를 파괴하는 등 적극적으로 해적 소탕

꿈꿀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잃을 게 없는’경제적

작전을 펼쳤는데, 최근 들어 이러한 노력이 효과를

파탄 상황 등은 소말리아 사람들이 해적활동에 직접

본 것이다.

나서거나, 돕거나, 묵인하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다행히 해적들의 활동은 감소하고 있다. 국제해사국(IMB)가 10월 22일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되어버린 소말리아

면, 2012년 1월부터 9월 말까지 발생한 소말리아 해 적의 공격 횟수는 70건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 199건

그러나 경비와 예방 활동이 철저해지면서 소말리아

이 발생한 것에 비해 크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아덴

연안과 아덴 만에서의 해적 활동은 줄었지만 해적 활

만은 수에즈 운하의 입구이며 이곳을 지나는 항로는

동 자체는 더욱 흉포화되고, 지역 차원에서는 더욱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로들 중 시간과 비용 면에서

확장되고 있다. 이제는 육지에서 납치를 시도하기도

가장 효율적인 최단거리로 매년 약 3만여척의 선박들

하고, 인도네시아 부근 말라카 해협까지 활동 범위를

이 이곳을 지나가게 된다. 따라서 민간 업체 차원에

넓힐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려되

서는 물론 각국의 군사적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해적 활동을 하는 것에 그치

2012년 11월 현재 한국 해군 포함 18개국 43척의 해

지 않고, 소말리아와 인근 지역의 여러 무장 세력들

군 함정이 아덴 만에 파견되어 있다. 이들은 육지에

과 결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유엔 무기 금수 조 치 감시단은 해적들이 알 샤바브와 연계되어 있다는 ⓒ유럽연합해군(European Union Naval Force)

사실을 파악했으며, 이러한 테러 집단들은 전 세계적 인 연결망을 가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커가는 이 불 온한 조직망이 소말리아를 세계적 테러 집단의‘기지 화’하려고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사례를 떠오르게 한다. 아프 가니스탄 역시 19세기 제국주의 시기에는 영국과 러 시아의 완충지로 전락했고, 이후 냉전 시기에는 미소 의 세력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냉전체제 붕 괴 후 미-소의 전쟁은 끝났지만, 현재의 소말리아처 럼 군벌 내전에 발발했고 1996년, 이슬람 무장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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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 호주 ABC Radio AM

인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한다.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다. 탈레반 정권은 9.11 테러의 배후 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했 고, 이것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으로 이어진 다. 탈레반과의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아프 가니스탄은 여전히 폐허다. 소말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는 몇 가지 공통점 이 있다. 지리적 요건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그에 따른 정치, 사회의 혼란, 냉전 시대 외세의 부적 절한 개입, 이후 격렬한 내전, 테러 단체 혹은 해적. 결국 이 혼란의 원인에는 제국주의와 냉전의 책임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정 부분 있다. 외부의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 라, 추후 내부에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한

쟁과 테러, 기근으로 주민들이 지금까지 감내한 고

고려 없이 개입을 한 결과라는 것이다. 강대국이 약소

통만도 이미 너무나 컸다. 해적, 테러 등 세계 각국

국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하면 그 땅에 어떤 문제가 생

이 입는 직접적인 피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무엇

기는지,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보다도, 국제 사회는 그들을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

알고 있지 않은가. 제국주의가 표면적으로 사라진 지

는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아프가

벌써 1세기가 넘었고, 냉전 체제가 무너진 지 이제 20

니스탄이 그랬듯 소말리아의 혼란은 단순히 소말리

년이 넘어가지만 그 영향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아

아 부족 엘리트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 다툼 때

있다.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소말리아는 아마 그 중

문만은 아니며, 그 혼란을 야기한 이들은 분명히 어

가장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사례일 것이다.

느 정도의 짐을 떠맡아야만 한다. 그러나 당연히 제 국주의, 냉전 시대처럼 내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개입은 지양해야만 한다. 소말리아의 역사는

아덴 만의 평화, 국제 사회가 함께 이뤄내야 할 과제

물론 현지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되도록이면 그들 이 스스로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된 정치 기반을 꾸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국제 사회가 소말리아에 대

나갈 수 있도록 긴 시간을 내다 보고 자립을 도와야

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외세의 개입이 문제

한다. 그것이 소말리아 해적 문제를, 알 샤바브의 테

였다면 더 이상 개입을 멈추는 것이 답일까? 하지만

러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것이다.

이미 소말리아는 스스로 혼란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상황이 된 지 오래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필 요한 문제이겠지만, 시간을 믿고 내버려 두기에는 전

이인재 (이화여대 국문) gilraen@naver.com

해적국가: 소말리아 어부들은 어떻게 해적이 되었는가 (미지북스, 2011) 피터 아이흐스테드 지음, 강혜정 옮김 아프리카의 여러 문제를 심층 보도 해온 베테랑 기자 피터 아이흐스테드가 쓴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르포르타쥬. 저자는 전 세계의 골칫거리인 소말리아 해적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동아프리카 전역을 누볐다. 이 책은 해적의 실태는 물론 소말리아의 참혹한 내전, 무정부 상태와 이를 둘러싼 생생한 소리를 담고 있다.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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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오일머니를 한반도로 자산의 거래를 수반한다. 대표적인 이슬람금융인 수

이슬람 금융이란?

쿠크를 예로 들어보자. 수쿠크는 이슬람식 채권으로,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는 이자를 수취하는 행위를

자금을 원하는 기업이나 정부가 발행하게 된다. 채무

금지한다. 또한 투자자와 사업가가 손실과 수익을 공

자는 돈을 빌림과 동시에 자신의 실물자산을 채권자

동으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투자자와 사업가

의 소유로 넘긴다. 그 뒤 채무자는 그 실물자산에 대

를 딱 잘라 양분하기 보다는 둘을 공동 운명체로 묶

한 임대료, 혹은 그 실물자산을 사용해 벌어들인 수익

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슬림들이 샤리아를 따르면서

의 배당금의 명목으로 채권자에게 일정한 돈을 정기

도 금융거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슬

적으로 지불한다. 원금 상환은 채무자가 다시 실물자

람금융을 통해서다.

산을 매입하면서 그 값을 치르는 형식으로 행해진다. 이때 실물자산의 소유권은 서류상으로만 채권자와 채

이슬람금융은 샤리아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거래되

무자 사이를 오가는 것이고, 실물자산의 소유권이 채

는 금융상품들이다. 전통적인 금융상품들을 샤리아에

권자에게 있는 동안(채무자가 돈을 빌린 기간 동안)

맞도록 변형한 형태이다. 샤리아가 이자를 금지하기

채무자가 지불하는 임대료가 이자를 대신한다. 일반

때문에, 이슬람금융은 기본적으로 서비스 혹은 실물

예금에 대한 이자도 특별한 방법으로 지급된다. 금리

수쿠크 거래 구조 자금

실물자산 소유권

채권투자자 (채권자)

실물자산 소유권

채권발행자 (채무자)

채권발행자 (채무자)

실물자산 사용료 채권 발행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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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투자자 (채권자)

원금 원금 상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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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른 이자를 지불하는 대신, 이슬람은행은 자산을

이 최근 글로벌 회계법인 언스트앤영은 현재 3000억

이용해 직접 사업에 개입하거나, 기업활동에 투자해

달러 정도인 수쿠크의 수요가 5년 후에는 3배로 증가

얻는 이익을 예금자에게 나눠준다. 이는 샤리아가 실

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물거래나 생산활동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사업자와 투 자자가 나눠 갖는 것은 허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슬람 금융이 도입된다면 모든 무슬림들이 이슬람금융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 다. 이슬람권에서도 전통적인 금융이 사용되고 있으 며 현재까지는 전통적인 금융의 규모가 이슬람금융

이처럼 성장 잠재력이 상당한 이슬람금융을 도입한 다면 우리나라가 얻게 될 이득은 무엇일까?

을 압도한다. 하지만 다수의 무슬림들이 금융을 이용

첫째로, 기업과 금융기관의 자금 조달 경로가 확보

하면서도 샤리아를 위반하지 않는 이슬람금융을 선호

된다. 특히 석유를 기반으로 한 중동 국가들의 풍부한

하게 됨에 따라 이슬람금융은 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자본을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이다. 이슬람금

있으며, 이제는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이슬람은행을

융을 통해 국내에 중동의 자본이 유입되고 투자가 활

보유하고있고, 600개 이상의 금융기관이 이슬람금융

성화되면 경기가 활성화되고 결국 경제 성장에 도움

을 취급하고 있다.

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동 지역에 사업진 출을 할 때도 이슬람금융을 활용하면 이슬람 국가들

이슬람금융권 총 자산의 규모는 1조 2천억 달러 정

의 인허가 과정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도로 현재 전 세계 금융시장 규모에 1%에 불과하다.

둘째, 금융시장의 안정성이 제고된다. 현재 우리나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국제 유가가 크게 상승해 중동

라에 투자된 자본 중 대부분은 미국, 영국, 홍콩, 독

에 오일머니가 상당히 축적되었고, 무슬림 인구가 전

일 등 일부 선진 국가들의 자본이다. 주로 서방 국가

세계 인구의 1/4에 달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성장 잠

들의 자본의 비중이 큰데, 이런 경우 이들 국가들에

재력이 상당히 크다. 더욱이 이슬람 국가들이 대규모

공통적으로 경제 위기가 발생할 경우 자본이 급격히

정부사업에서 적극적으로 이슬람금융을 활용하길 원

빠져나가고, 자본 유입이 줄어들어 국내 경제에 커다

하고, 외국 기업들이 사업참여를 할 때도 이슬람 금

란 타격을 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과 금융기

융 상품을 구매해 활용할 것을 적극 권장한다. 더욱

관의 자금원이 다양할수록 국내외 경제에 위기가 발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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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두바이 증권거래소의 모습

생할 때에 입는 피해가 적다. 이슬람금융처럼 규모가

유로존 위기의 영향으로 이슬람금융상품의 도입이 잠

크고 성장 가능성이 큰 자본이 흐를 수 있는 경로가

깐 주춤하고 있지만 향후 프랑스도 이슬람금융이 도

만들어진다면 이는 장래에 발생할 경제 위기에 대한

입될 것은 분명하다.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로 이슬

완충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람금융 도입을 위한 기초적인 제도 정비가 완료된 상 태이다.

이처럼 이슬람금융은 전망이 밝고 도입 시 예상되 는 장점이 많다. 세계 각국들은 이슬람 금융을 위한

2009년의 이슬람금융 도입 시도와 실패

제도 정비에 힘쓰고 있다. 미국의 경우 90년대 후반 에 금융당국이 몇 가지 이슬람 금융상품에 대한 공식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슬람금융, 특히 수쿠크 도입

적인 제도와 기준을 제시했으며, 대규모 이슬람금융

을 위해 법 개정을 시도했다. 수쿠크를 성공적으로

의 도입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지만 소수

도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금 부과 문제가 해

의 이슬람 은행들이 자산 규모는 작지만 영업을 하

결되어야 한다. 수쿠크는 이자를 지급하는 대신 실물

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00년대 들어 적극적으로 이

자산 거래를 통한 차익, 혹은 실물자산에 대한 사용

슬람 금융을 위한 법과 제도 정비를 시작해 현재는

료가 지급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과세 과정에서 문제

유럽에서 이슬람 금융 활용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가 생긴다. 비록 서류상으로만 이루어지지만, 채권

2005년에 제도 정비를 끝냈으며 2007년에는 수쿠크

자와 채무자가 실물 자산을 서로 양도하는 행위가 수

를 정식 채권으로 인정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반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중으로 세금이 부과된다.

2000년대 후반 이슬람금융위원회를 설치하고, 2010

결과적으로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이 비싸지게 되는

년 이슬람 금융에 대한 세무처리지침을 발표하였다.

데, 그렇게 되면 수쿠크는 다른 일반 채권에 비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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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력이 떨어져 발행이 힘들다.

해 우리나라에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앞서 말한 이 슬람금융의 성장 잠재력과 도입 시 예상되는 효과를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2009년 기획재정

고려해볼 때, 이 같은 우려로 이슬람금융 도입이 지

부는 이슬람 금융, 특히 수쿠크 도입을 위해 조세특

체되고 있는 것은 상당한 시간적, 비용적 손실이 아

례제한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일부 국

닐 수 없다. 이슬람 금융의 성공적인 도입을 위해서

회의원과 종교계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하였다. 수쿠

우선 필요한 것은 전문인력의 양성이다. 우리나라에

크를 위한 법률안 개정이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이

는 이슬람 금융관련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며, 또 이슬람 종교세인 자카트(Zakat)가 테러자금으

전문인력이 많아야 이슬람금융에 대한 인식이 제고될

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수 있고, 여러 가지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 또한

자카트(Zakat)는 무슬림들에게 일 년에 한 번 부과

이슬람 금융은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고, 특히 종

되는 일종의 특별세다. 무슬림들은 총 자산의 2.5%

교적인 지식과 법적인 지식까지 필요로 한다. 따라서

를 자카트 명목으로 국가에 내야 하며 이는 사회복지

도입 이후 안정적인 운용을 위해서도 전문인력이 필

사업 등에 사용된다.

수적이다.

‘수쿠크’ 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고,‘이슬 람’ 금융을 위해 법을 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금융위기가 우리나라에 큰 충격을 주고 금융시장

특정 종교와 금융상품에 특혜를 주는 것으로 생각될

불황이 장기화되는 이유는 자금의 흐름이 원활하지

수도 있다. 이슬람 금융의 탄생이 비록 종교적인 이

않기 때문이다.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경로가 다양

유에서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슬람금융은 이미

하면 어느 한 쪽에서 자금흐름이 막혀도 대처하기가

국제금융시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고 이슬람금융이라

용이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다양한 자금원을 확보할

는 용어 자체도‘특정 종교의 금융상품’ 이라기보단

필요가 있다. 풍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장차 크게

‘국제금융상품 중 한 종류’ 를 칭하는 말로 인식되고

성장할 이슬람금융은 훌륭한 자금원이 될 것이다. 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이슬람 금융에 세제혜택을

정권 초기 기획재정부의 주도로 이슬람 금융 TF팀이

부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정 종교에 특혜를 주는 것

꾸려지는 등 이슬람 금융 활용을 위해 민·관이 협력

이라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을 안고 있다.

하여 노력하는 모습이 고무적이었으나, 조세특례제 한법 개정 시도 실패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나 진전이

또 다른 반대논리는 이슬람 금융기관이 우리나라에 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자카트를 내고, 그 자카트가 테

없는 상황이다. 다시 한 번 2009년의 불씨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러자금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하지 만 이 주장도 기우에 가깝다. 모든 무슬림들은 경제생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이슬람

활을 통해 발생한 수익의 일부를 자카트의 명목으로

금융》 과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국가에 납부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돈이 자카트로

《이슬람금융의 현황과 활용 방안》 을 참고해서 작성

납부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했음을 밝힌다.

무슬림과의 교역을 중단해야 한다. 또한 자카트는 국 가가 거두는 세금이고, 정부기관이 투명하게 관리하 기 때문에 테러자금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극히 낮다.

성공적인 도입을 위한 길 이근호 (연세대 사회과학계열)

이렇듯 이슬람 금융은 잘못된 정보와 지식으로 인

newroot2@hanmail.net

국제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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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의 /창 스크린의 국제정치

고담시의 일그러진 계급 혁명 〈배트맨 비긴즈〉(2005), 〈다크 나이트〉(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배트맨의 마지막은 정치적이었다.

무슨 압제가 그렇게 심각했길래 감옥을 공격했을

영화의 여러 장면은 마치 긴 19세기(1789~1917)

까? 당시 프랑스 삼부회에서는 국왕의 자의적인 통치

의 격동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영화가 19세기의

를 견제하기 위해‘국민의회’ 를 만들어 헌법을 제정

격동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21세기

하려고 했다. 이를 국왕이 탄압하려 하자 프랑스 시

의 관점에서 19세기가 굴절되고 있는 것일까?

민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권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바스티유 감옥 공격으로 보여줬다. 감옥 자체가 큰 힘은 없었지만 당시 시민의 눈에 바스티유는 절대주

감옥 습격, 21세기판 프랑스 혁명?

의 왕정을 지키는 기구로 보였기에 습격 사건은 상징 적인 의미가 컸다. 여기서 폭력은 정치의 일부였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과거 는 프랑스 혁명이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역시 이

하지만 베인이 블랙게이트 교도소를 공격하는 장면

영화를 만들며 프랑스 혁명기의 파리와 런던을 다룬

은 관객이 공감하기 어렵게 그려진다. 우선 여기에

찰스 디킨스의 소설《두 도시 이야기》 를 참고했다고

수감된 흉악범이 한둘이 아닐 뿐 아니며, 베인은 이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인용’ 의 의미를 제대로 파

들을 혁명세력으로 흡수해 나간다. 프랑스 혁명이 정

악하기 위해서는 영화와 역사가 비슷하다고 단순히

치를 작동시키기 위해 폭력을 동원했다면, 베인은 공

지적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꼼꼼하게 맥락을 비교

포를 작동시키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고 있다. 프랑스

해 보면서 이‘인용’ 이 주는 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

혁명의 처음 목적은 헌법 만들기였지만, 베인은 고담

을 것이다.

시에 겁을 주고 도시를 파괴하는 것 외에 어떤 목적 도 없다. 잘못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

베인은 프랑스 혁명세력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모방하듯 블랙게이트 교도소를 공격해 수감된 범죄자

다면 폭력은 혁명의 수단이 되지만, 이 신념이 없다 면 폭력은 심판의 수단이 된다.

들을 풀어주었다. 두 감옥 습격의 명분은 부당한 압

습격 명분도 1789년과는 다르다. 베인이 블랙게이

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트가‘압제의 상징’ 이라는 증거라고 꺼내든 것은 고

감옥에 수감된 이들 가운데 양심수는 없었으며, 죄수

든 경찰청장의‘자백 편지’ 였다. 고담시의회와 시장

만 7명 있었다고 한다.

은 조직 범죄와 싸우다 희생된 하비 덴트를 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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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Prism


배트맨의 마지막은 정치적이었다.영화의 여러 장면은 마치 긴 19세기(1789~1917)의 격동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영화가 19세기의 격동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21세기의 관점에서 19세기가 굴절되고 있는 것일까?

의미에서 흉악범을 가석방시키지 않는 등 조직 범죄

고담시에 찾아온 사회주의 혁명?

를 엄벌하는‘덴트법’ 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베인은 고든의 편지를 읽으며 덴트 역시 끔찍한 살인자였고

베인과 부하들이 반대파를 감시하고 제거하는 모습

범죄와 싸운 영웅이 아니었다고 거짓말을 밝히며 감

에서도 과격화돼 가는 프랑스 혁명이 떠오른다. 온건

옥을 공격한다.

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1792년

법을 만들며 댄 핑계가 거짓이었다고 법이 실현하

이후가 되면 과격화된‘민중 혁명’ 으로 발전해 나간

려는 정의까지도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고든의

다. 이 과정에서 공안위원회가 설치돼 공공의 이익을

거짓말이 하나의 작은 잘못이라면 교도소 죄수들의

명분으로 한 공포 정치가 펼쳐지는가 하면, 혁명의

그 많은 범죄는 여러 개의 커다란 잘못에 해당된다.

적대 세력을 제거하는 혁명재판소가 열리기도 했다.

이 당연한 사실 때문에 관객은 베인의 대의에 동조하

로베스피에르는 민중 혁명의 지도자로서 공동체 전체

기는커녕 놀란의‘21세기 프랑스 혁명’ 이 주체 세력

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개인이나 집단의 뜻과 다른 방

이 명분도 논리도 빈약한 우스꽝스러운 폭도에 불과

향의 정치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자유의 전제’ 를

하다고 느끼게 된다.

실시하기도 했다. 베인 역시 혁명을 진행하면서 부자나 경찰 등 공권

근대사에서 감옥은 보이지 않게 권력을 행사하면서

력을 행사하는 세력, 그리고 반대 세력을 처벌하는

감시와 규율을 동원해 근대적 주체를 만들어나가는

혁명재판을 열고 여기에서‘추방’ 과‘죽음’가운데

흥미로운 소재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권력이 인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독재를 진행한다.

간을 가두고 감시할 권리가 있는지, 그럴 권리가 있

그렇다고 베인을 로베스피에르와 단순히 동일시하는

다고 하는 논리의 배후에는 다른 어떤 논리가 숨어

잘못은 저지르지 말자. 베인의 공포 조성 행위에는

있는지, 우리 사회의 다른 부분도 감옥의 원리로 조

공포 그 자체 외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러나 로베

직돼 있지는 않은지 하는 것이 모두 이와 관련해 진

스피에르는 공포의 독재자라는 오명을 썼을 망정, 자

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소재다.

유롭고 평등한‘덕의 공화국’ 을 만들려는 인권의 투

하지만〈다크 나이트 라이즈〉 에는 그런 것이 없다.

사였고 민주주의자였다. 프랑스 혁명이 과격화되면서

베인과 혁명 세력은 혁명을 위한 진지한 정치 철학이

끔찍한 유혈사태로 번져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전혀 없는 우스운 깡패들에 불과하다.

은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국민 경제를 안정적으로

스크린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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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운영하는 목표를 지키고 달성하려는 과정에서 일어

구체적 청사진도 없이 정신병자들과 결탁해 자선 사

난 비극이었지 정치 자체의 부정은 아니었다.

업가들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런 반동분자를 몸소 처

부자를 미워하고 재산을 마음대로 공유하라는 베인

벌하기 위해서는 경찰력도 신뢰할 수 없으니 아예 계

의 혁명 역시 프랑스 혁명 급진파의 이상이나 이후에

급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재벌 회장이 나서야 한

전개된 여러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 사항을 떠올리게

다. 강력한 조직범죄 응징이 입법화되거나 공권력이

한다. 하지만 베인은 사회주의적인 이상을 공유하는

제대로 작동하면 그제야 재벌 회장은 배트맨 활동을

듯하면서도 실제로 19세기에 그런 이상을 가졌던 이

그만둘 준비가 돼 있다.―이것이‘배트맨 3부작’ 의

들 가운데 그 누구의 지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저에 깔려 있는 도시 문제 전개의 핵심이다.

대안 없는 폭력, 법치를 지키는 폭력

폭력만 인용된 19세기, 정치가 거세된 21세기

사실 엄연히 존재하는 고담시의 계급 갈등을 이렇

해적에게 시달리는 일이 없는 미국 영화감독이 약

게 대안 없는 폭력으로 그리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

탈과 살인을 일삼는 해적을 영웅으로 묘사해도 아무

니다.〈배트맨 비긴즈〉 에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들이

문제가 없다.‘플라잉 더치맨’ (항해하는 네덜란드인)

아무리 선심을 써서 복지 사업을 진행해도 이해하지

이라는 전설적인 배를 스크린 위에 부활시켜 아예 해

못하고 오히려 자선 사업가를 길에서 쏴 죽이는 범죄

적들이 영국 함대를 격파하는 영화를 만들어도 아무

자일 뿐이다.〈다크 나이트〉 에서 조커를 지지하는 세

문제가 없다.〈캐리비안의 해적〉이야기다.

력 중에는 정신병자들이 있었는데,〈다크 나이트 라 이즈〉 에서 베인은 아예 자신의 지지 세력 안에 가난

마찬가지로 영화감독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피억

한 사람과 정신병자와 흉악범을 하나의 무리로 합쳐

압자들이 계급 문제를 우스꽝스럽고 파괴적인 폭동

버렸다.‘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몸소 싸우

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그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겠다’ 는 모범적인 도덕성 덕분에 브루스 웨인은 배트

다. 미국에서는 유럽이나 러시아, 제3세계처럼 사회

맨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주의적인 열망이 혁명 수준으로 강렬하게 표출된 적

가난한 사람들은 배은망덕해서 계급 갈등을 해결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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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국제시사저널

도 없었기 때문이다.


명, 즉 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이념 자체가 붕 괴되는 혁명을 인용하면서 끝나는 듯 보인다. 세계 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할 것 없이 1970년대에 이미 대위기를 겪었고, 1990년대가 되자 양 진영 중 한쪽은 아예 무너져 내렸다. 몇몇 보수적 지식인이 성급하게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역사의 종언’ 이니‘이념의 종언’ 이니 하는 말을 꺼 내기가 무섭게,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역시 우리에게 많은 기회뿐 아니라 커다란 파국의 소지를 가져다준 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진영 역시 20세기 말 에는 경제 위기로 인한 불안과 긴장으로 인해 같은 노동계급이라도 임금수준이나 일자리의 안정성에 따 른 분화가 진행됐고, 혁명 전통이나 국민국가에 대한 로베스피에르(1758~1794)

애정, 기성 정치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20세기 말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계급

하지만 더 큰 틀에서〈다크 나이트 라이즈〉 를 본다 면, 오늘날 우리가 정치나 운동에 대한 기대가 상당

적 정체성의 약화나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 역시 비 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히 감소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전개가 어 려워진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베인이 주식거래

1970년대에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사회주

소를 습격한다든지, 월스트리트에서“해산하지 않으

의 이데올로기의 붕괴,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은 결

면 발포하겠다” 고 경고하는 범죄자들과 시위대처럼

국 인류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모색하기 어려운 불

대오를 지은 경찰들이 마지막으로 싸우는 장면은 21

확실한 시대를 열어 젖혔다. 얼마 전 작고한 역사학

세기 초반 정치의 한계와 대안의 부재를 드러낸다는

자 에릭 홉스봄이 20세기사를 저술한『극단의 시대』

점에서 상징적이다.‘월스트리트 점령’집회가 보여

에서 잘 지적했듯이,“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

주는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자본주의에 대한 명확

는지를 모른다.”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새로

한 대안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반항의 일면을 제시하

운 기반 위에 세워야 한다. 유트레히트 조약을 맺은

는 데 그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21세기의 스크

1713년, 빈 회의가 열렸던 1815년, 러시아 혁명이

린에 19세기의 폭력은 인용되고 있지만 정치나 혁명

일어난 1917년은 모두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새

은 인용되지 못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프

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연도로 기억된다. 2012년 현

랑스 혁명 세력은 자신들이 돌아온 로마라고 생각하

재는 세계금융위기에서 비롯된 불안의 시대면서도,

며 고대를 인용했다. 하지만 2000년대의 영화는 19

20세기 말이 빚어낸 불안의 연속을 새로운 질서로 변

세기를 인용하면서도 더 이상 자신이 돌아온 19세기

모시킬 전환적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낡은 시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의 질서와 같은“그러한 기반 위에서 세 번째 천년 기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 고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의 결과는 암흑뿐이다.”

베인의 실패한 혁명은 마치 1789년을 인용하는 것

최정훈 (서울대 자유전공)

처럼 시작했지만 끝내는 이렇게 1989~1991년의 혁

intransige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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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갤럭 시 익 스 프 레 스 의 미 국 투어 이야기

우리는 우리 음악을 들려주러 간다! 지난 11월 1일부터 사흘간 홍대 앞에서‘MU:CON SEOUL 2012 (이하 뮤콘)’라는 이름의 국제 음악 마켓이 열렸다. 한국 음악의 세계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 는 취지로 개최된 뮤콘에는 홍대 기반 인디 레이블뿐만 아니라 SM, JYP, YG 등의 아 이돌 기획사, 해외 뮤지션들과 관계자들도 다수 참여했다. 뮤콘의 열기가 뜨거웠던 11월 2일 금요일 저녁, <프리즘>은 3인조 펑크 록 밴드 갤 럭시 익스프레스를 만났다. 홍대 인디 씬의 슈퍼스타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2011년 북미 투어 프로젝트 서울소닉에 참여한 뒤, 2012년 3월에는 독자적으로 미국 투어 를 다녀왔다. 이 이야기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반드시 크게 들을 것 2: Wild Days>이 11월 말 개봉한다. 영화 개봉과 함께 2년 6개월만에 3집 앨범도 발매될 예 정이다. 뮤콘 쇼케이스 무대 전, 서교동 연습실에서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이주현 (베 이스/보컬), 박종현(기타/보컬), 김희권(드럼)을 만나 해외 공연과 미국 투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곧 <반드시 크게 들을 것2: Wild Days>가 개봉한다. 벌써 영화도 두 번째고, 미국 투어도 두 번째다. 처음에 어떻게 가게 됐나? 희권: 맨 처음 외국에 공연하러 간 게 일본이었는데, 그 때는 무 작정 아는 사람들만 믿고 갔다. 두 번째 일본 갈 때에는 투어 제 안을 받아서 보름 정도를 공연만 하다 왔었고. 프랑스, 홍콩, 대 만은 그 쪽에서 먼저 섭외가 들어와서 갔다. 농담으로 이러다 미 국도 가겠는데? 했는데,‘서울소닉’ 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정말로 가게 되었다. 주현: 그 프로그램이 취지가 참 좋았다. 밴드들이 일단 가서 미 국의 분위기 자체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 LA에서는 록시 시 어터(Roxy Theater)라고 짐 모리슨 같은 전설적인 사람들이 거 쳐간 곳에서도 공연했는데, 그런 게 정말 신기하고 재미 있었다. 근데 이게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나 다 갈 수 있고, 실제로 YB 등의 밴드도 이미 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종현: 가기 전에는 걱정도, 준비할 것도 많다고 생각하고 떠나기 가 쉽지 않다. 전에 우리도 준비하다 포기했었는데, 서울소닉 통 해서 다녀와 보니까 그냥 일단 가서 했으면 됐는데 그걸 몰랐구 나 싶더라. 다른 밴드들에게‘일단 무조건 가라!’ 라고 까지 하는 건 아니지만, 다녀와 보니까 일단 가고 싶어서 가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용기가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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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전에 다녔던 나라들과 미국이랑 특별히 다른 점이 있었나? 종현: 미국에서는 SXSW(South by South West, 매년 3월

마음이고 우리가 즐기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다.

미국 텍사스에서 열리는 문화, 테크 행사)라는 큰 페스티 벌에서 공연을 했다. 흔히 하는 락 페스티벌과 다르게 우

미국에 가서 야심이 생기지는 않았나.

리 같은 밴드들은 물론이고 음악 산업에 종사하는 관계자

희권: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잘 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들이 모이고 일반 관객보다 그들이 우선인 페스티벌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좋은 경치도 많이 보러 다니고 하니까,

주현: 일종의 쇼케이스 페스티벌이다. 일본, 캐나다 할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이 많고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는

것 없이 전 세계에서 다 모이고, <New York Times>나

데, 왜 그렇게 뭔가 정답이 있다는 듯이 답답하게 해왔나

<Rolling Stone> 같은 유명한 저널의 기자들, 업계 관계자

싶었다.

들이 와서 여러 나라 음악 씬이 요즘 어떻게 흘러가나 보

종현: 처음에 갔을 땐‘이야 다 죽여버려!!’하는 게 있긴

고 기사도 쓰고, 잘 하는 팀들은 따로 컨택을 하기도 한다.

했다. 근데 오히려 그러니까 과장하고, 연출하게 되고. 그

희권: 그래서 거기서 공연할

래서 그냥 우리 하는 대로 하

때는 누가 올 지 모른다. 한

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번은 레즈비언 바에서 공연을

러면서 우리끼리 연주하는 것

하는데, 관객이 많지 않았는

그 자체에 푹 빠지게 되고, 공

데 라디오 생방송 제안을 받

연하는 게 정말 재미있어졌다.

았다. 라디오 방송 PD가 다

쇼나 퍼포먼스 하는 재미도 있

른 밴드 취재하러 왔다가 우

지만, 사실 그 안에서 제일 중

리 공연을 보고 섭외를 한 거

요한 건 우리 음악이구나 하는

였다.

생각을 많이 했다. 공연은 국 내에서도 많이 하지만 미국에

그렇게 공연 하는 것 자체만으

는 우리를 아는 사람도 없고

로도 당연히 얻는 게 많겠지만

어떤 때는 보는 사람이 멤버들

보통 사람들이 미국 진출, 투어

밖에 없기도 하니까. 음악에

하면 또 기대하는 부분이 있지

대해 좀 더 진지한 태도를 갖

않나. 예를 들어 수익이라든지,

게 되었다.

이름이 알려진다든지.

주현: 음악에 그 정도로 빠져

종현: 우리도 아직 어떤 과

서 연주한 적이 있었나 하는

정에 있다. 중요한 건 한번에

생각이 들 만큼 몰입했었다.

는 절대 안 된다는 거다. 우

퍼포먼스 같은 것도 중요하지

리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니

만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우리

위부터 차례로 김희권, 이주현, 박종현

까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관

음악을 들려주는 것 그 자체가

계를 만들어 가는 거다. 지금 거기서 앨범을 내도 좋아하

중요하다는 것, 또 그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느

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보다는 계속 가서 이름

꼈다.

도 알리고 팬도 한 명씩 생기고 해서 뭔가 쌓였을 때 앨범

종현: 이런 면에서는 밴드가 투어 가는 건 정말 당연한 일

을 내면 더 좋지 않겠나. 지금은 아직 그런 과정에 있다는

인데, 이걸로 주목 받는 것도 참 그렇다.

거다. 싸이처럼 한 번에 대박 나면 좋지만, 대부분은 그러

한국과 미국의 공연장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기 힘들지 않나. 만약 앨범을 만들어서 성공적으로 진출

종현: 미국에는 보통 동네마다 클럽이 바랑 같이 있다. 클

하는 것만 목표로 잡고 하면, 그게 안됐을 땐 상실감이 클

럽 안에 바가 같이 있어서, 사람들이 평소에 일 끝나고 맥

거다. 하지만 우린 애초에 하면 하고, 말면 말아라 하는

주 한 잔 하면서 음악 들으러 오는 거다. 홍대에는 오늘

세계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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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에 대한 배려나 대우 차원에서는 외국과 한국이 어떤 차이가 있나. 주현: 파리에서 공연할 때, 무대 올라가서 튜닝을 하려니 까 엔지니어가 와서는 이건 내 일이니까 너는 공연을 위 한 네 컨디션만 신경 쓰라면서, 튜닝 다 해주고 무대에서 도 팔 들고 서 있으니까 악기도 씌워줬다. (웃음) 뮤지션 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공연을 잘 하는 거고, 다른 일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는 관념이 확실한 것 같다. 한국도 많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렌탈한 악기나 장비 망 가진다고 자기 음 내기 위한 세팅도 못하게 했었다. 요즘 에는 훨씬 많이 배려해준다. 이제 인디씬도 형성된 지 15 년이 넘어가다 보니 뮤지션도 관계자들도 다같이 노하우 가 생겼다. 그런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먼저 시작한 외국 에 많이 나가서 보고 경험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 음악 시장, 크게는 문화 예술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정부의 이 밴드 공연 보러 가야지, 하면서 오는 사람들이 많을텐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원을 받는

데 여기는 그냥 누구 오는지 그런 거 상관 없이 와서 보는

입장에서 정부 정책을 보면 어떤가.

거다. 그래선지 확실히 미국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종현: 결국 음악 산업이 잘 된다는 게, 좋은 음악이 많이

얘기하는 느낌이 강했다.

나오고 잘 팔리고 그런 거니까, 정부 차원에서는 그냥 음

주현: 한국은 딱 쇼만 하고 끝나는 곳이 대부분이다. 일본

악인들이 음악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도 그렇고. 그런데 미국은 이야기할 수 있는 라운지가 있

투어 경비 정도 대주는 것만 해도 고맙고, 훨씬 일이 수

어서, 연극처럼 우르르 입장해서 보고 나가고 하는 게 아

월해진다. 아, 파리에 갔을 때 본 건데, 정부차원에서 아

니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듣고 얘기하는 게 좋았다. 페

치형 다리 밑 공간을 활용해서 작업실을 만들고 그걸 아

스티벌 같은 경우에도 큰 공연장 뒤 쪽에 바를 설치해둬

티스트들에게 싸게 대여를 해주더라. 서울에도 알고 보면

서 그냥‘큰 동네 클럽’같은 분위기다. 한국이나 일본에

활용할 만한 곳이 있으니까 하면 참 좋겠다. 우리는 뭘 하

비해서 확실히 좀 더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즐기는 느낌

면 일단 부시고 시작하니까 (웃음) 그러지 말고 있는 거 개

이었다.

조해서 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홍대 공연장이나 한국 락 페스티벌이 외국과 비교

내년에 미국 투어 또 가게 되면 이제 세 번째다. 내년에는 좀

해서 좀 더 시스템적으로 개선해야 될 부분은 무엇이 있다고

더 좋은 환경에서 공연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나.

생각하나.

종현: 그랬으면 좋겠다. 일본은 페스티벌 내에서 JAPAN

주현: 사실 우리 나라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락에 대해 관

NIGHT이라는 행사를 벌써 거의 10년째 해오고 있다. 한

심 있는 사람이 아직 많지는 않다. 다양한 밴드도 있고 페

국 밴드들은 가기 시작한지는 이제 3년 정도 되었는데, 한

스티벌도 많고 <탑밴드> 같은 프로그램도 있지만 일반 사

국 밴드들 모아 놓고 KOREA NIGHT라는 이름만 안 붙었

람들은 잘 모른다. 그런데도 이렇게 불타오르는 경우는

지 그런 행사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도 많이 오고,

다른 어디 가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우리 나라는 일단

대단한 것 같다. 내년에도 아마 잘 될 것 같다.

아직 락의 부흥기가 온 적이 없다. 앞으로 가능성은 많다 고 생각한다.

맨 처음에, 음악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어땠나. 그 때 모습과

희권: 뜨겁긴 제일 뜨겁고, 또 일단 닥치면 제일 잘 논다.

지금을 생각해보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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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종현: 20대를 돌이켜보면 그 땐 되게 무기력했다. 뭘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일은 하기 싫고. 근데 음악을 하고 싶다 는 마음은 제일 밑바닥에 항상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밴 드 하고, 앨범도 내고, 공연도 하고 그러다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도 가고.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해야 지 한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의 제일 밑 바닥에 있는 걸 따 라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 주현: 우리는 취미가 음악이고, 그래서 취미만 하다가 이 렇게 된 사람들이다. 결국 재미 있고 즐길 수 있는 걸 하 다가 여기까지 온 거다. 희권: 나는 클래식 타악을 전공했었다. 근데 내가 기껏 열 심히 연습했는데 앞에 지휘자가 하라는대로 심벌즈 한번 댕- 치고 끝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포기 했다. 누구 한테 끌려 다니는 건 별로 안 맞았다. 그러던 차에 이 친 구(종현)를 만나서 밴드를 시작 했다. 지금이랑 그 때랑 비교해보면 좀 달라지긴 했다. 미국 다녀오면서 확실히 여 유도 생기고 즐기게 됐다. 주현: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우리가 음악을 하면서 돈도 벌고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여기서 다 불이 나서 쫄딱 망해도 잃을게 없다. 그냥 원점이다. 근본적으로는 변한 게 별로 없다.

인터뷰를 마친 뒤, 기자들은 뮤콘 쇼케이스가 한창 진행 중 인 상상마당 라이브홀로 향했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갤럭 시 익스프레스를 한번 더 만날 수 있었다. 과연 이들의 공연 에‘탈진 로큰롤’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 했다. 베이스와 기타를 멘 두 사람은 단 1초도 가만히 있지 않고 온 몸으로 연주했고, 드러머 김희권은 정말로 드럼을 박살내겠다는 듯 이 두들겼다. 이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어디론가 긴 여행을 떠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해 주었다. 그 폭발적인 에너지 를 직접 경험하며, 비로소‘하고 싶은 걸 해왔을 뿐이다’ 라 는 그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인재 (이화여대 국문) gilraen@naver.com

사진촬영 | 박연서 기자

갤럭시 익스프레이스의 뮤콘 쇼케이스 공연 장면. 갤럭시 익스프레스 는 파워풀한 음악 뿐만 아니라 화끈한 무대 매너로도 유명하다. 베이 시스트 이주현의 어깨 위에 기타리스트 박종현이 올라가 연주하는 ' 목마 타기'는 그들의 가장 유명한 퍼포먼스.

세계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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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장면 1. 지난 8월 중순, 충무로의 한 아파트 내 세미나실. 둘러 앉은 사람들 사이엔 대화와 웃음이 끊 이지 않지만 묘한 어색함이 감돈다. 오늘로 이 모임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그녀 L,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일단 오긴 왔지만, 의심 반 망설임 반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3시간이 흘러, 회의가 끝나고 세미나실 문을 열고 나오며 그녀는 눈을 반짝인다. 잘 왔다는 확신이 든다. 장면 2. 10월 초 늦은 밤, 신촌 어느 술집. 여전한, 그러나 더 크고 격해진 웃음소리 사이로 대화 대 신 술잔이 끊임없이 부딪힌다. 캐주얼만 고집하는 L는 웬일로 멀끔한 차림이다. 잠시 웃음 이 멎고, 오늘 낮 여러 회사에 찾아갔던 이야기를 꺼내는 팀원의 얼굴에는 여태껏 본 적 없 는 좌절감이 스친다. 정장 치마 입고 학교와 업체를 오갔던 L 역시 희망과는 달랐던 현실에 한숨이 나왔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 사람이라도 더 긍정적이어야 함께 헤쳐나가지 않을까 싶어 대범한 척을 한다.“괜찮아, 어떻게든 될 거야.” 장면 3. 11월, 서울 모 대학의 중앙도서관 컴퓨터실. 새벽 4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지만 아직 과 제는 시작도 못했다. 메신저로 원고를 독촉하던 편집장은 자러 가겠다며 벌써 2시간 전에 로그아웃. 왜 원고는 고쳐도 고쳐도 끝나질 않는가 생각하며 일단 편집 후기부터 쓴다. 마 지막으로 따뜻한 침대 속으로 들어가 본 게 대체 언제였지. 하지만 후기를 쓰고 있으니, 드 디어 창간호가 나오는구나 싶다. 창간 준비를 시작 한 게 고작 두 달 반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프리즘》 일로 스트레스 받을 때에는, 365일 마를 날이 없던 식욕이 뚝 떨어져 밥 한 숟갈을 겨우 넘기는 날도 있었 다. 처음엔 일요일을, 그 다음엔 주말을 통째로, 그리고 지금은 인생을 통째로 이 곳에 헌납했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피부 트러블, 어깨 통증, 두통 등. 사실은 그것 외에도 아주 많다. 소말리아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그녀 L은 기사를 쓰며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은 땅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비극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적은 인원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느라 안 해본 일이 없어 이젠 누가 무슨 일을 시켜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두 달 전에 처음 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진 팀원들은, 이러다 흩어지면 애인한테 차였을 때보다 더 슬플 것 같다. (하지만 L은 애인이 없다) 벽에 부딪힐 때마다 좌절감도 많이 느꼈지만, 우리의 꿈은 여전히 크다. 물론 한번에 성취할 수 있을 거라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 멤버들도 말하지 않았나.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하 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우리도 지금 이 설렘을 잊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치 열하게 고민하고자 한다.

막무가내로 시작한《프리즘》 , 이 시작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 봐 주신 친구들과 가족, 그리고 모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인재 (L)


《프리즘》은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힘을 합쳐 만드는, 대학생을 위한 국제시사 저널입니다.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공부하던 학생들이, 현 시대의 다양한 국제정치적 이슈들 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더 실천적으로 논의해보자는 다짐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세계사적 이슈와 이념이 한반도에 도달하면 왜곡과 굴절을 거쳐 새롭고 고유한 의미를 지니 게 됩니다. 그러한 정치적 사태들은,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여러 스펙트럼으로, 서로 다르 게 이해되기도 합니다.“프리즘”이라는 이름은‘굴절과 스펙트럼의 국제 정치’라는 뜻을 담 고자, 무색으로 보이는 태양빛을 굴절하고 쪼개는‘프리즘’에서 착안했습니다.

《프리즘》은 한반도의 국제정치를 탐구하고, 국제 정치 이슈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을 소개하고 논의하려 합니다. 더불어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역사와 현안에 관해 독자 들과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자고 제안하는 창구가 되고자 합니다. 국제 시사에 대한 기존의 다 양한 시각을 소개하는 동시에 대학생의 젊고 실용적인 대안을 모색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학생 독자 대중과의 넓은 만남과, 현실적 고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 겠습니다.

빛의 숨겨진 단면을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국제 시사를 공부하려는 학생 독자들을 위한 《프리즘》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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